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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충칭시개황및역사 1 Ⅱ. 충칭시경제및무역현황 3 Ⅲ. 현지출장참고자료 5 ( 항공편, 생활정보, 관광명소, 충칭진출한국기업 ) Ⅳ. 비즈니스시유의사항 14 Ⅴ. 유용한중국어표현 17 Ⅵ. 충칭무역관주소및연락처 18


인천개항장역사기행

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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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 - 대표적인 예이다. 민립대학 기성회의 중앙위원으로서 그는 관서지방을 책임졌으며, 열성 적으로 강연회 등을 통해 그 취지를 전파하였다.4) 1921년 와이엠씨에이(YMCA) 총무를 맡은 이래 기독교 단체를 통하여 많은 강연을 하고, 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북돋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기독 교 청년회 하계대회에서 한 강연, 기독청년의 이상 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무엇보다 도 겨례의 뜻을 구하는 것 을 이상으로 삼으라고 강조하였다.5) 여기서 겨례의 뜻 이란 조국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단순히 기도하고 염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천적으로 활동6)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운동을 전개하는 구체 적인 방법으로서 조직을 통한 동지의 규합을 제시하여 독립운동의 전략과 전술로서도 채택될 수 있는 내용 등을 주장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청년이여 압(앞)길을 바라보라 7)라는 글을 통해서 암울한 현실이지만 좌절하지 말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그리고 나아가 민족의 이상인 독 립을 실현하려면 직업을 튼튼히 꾸려갈 것을 말하고 있다. 일제의 어두운 현실속에서 청 년들에게 청교도적이며, 현실적이고, 자산가적인 자립정신으로 희망을 줌으로써 살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그의 민족주의의 한단면이 나타나고 있다. 민족경제운동은 경제적인 반제국주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 8월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처음 시작하여 1922년 6월 20일 평양물산장려회를 조 직하였는데 이때 회장을 조만식이 맡았고, 김동원, 오윤선은 이사를 맡았다. ) 회장을 맡 은 조만식은 日貨배척의 논리를 조선물산장려의 논리로 확장하였고, 민족자본의 형성을 통한 자립적인 민족경제 건설을 위해서 중소상공업진홍운동9)을 전개하였다. 특히 민족 8 로부터 15년이 지난 1922년 11월 23일에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 3월 29일 발기총회를 열어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는데 이때 조만식은 집행위원을 맡는 등 민립대학 설립운동 에 적극 참여했다( 동아일보 1923년 4월 1일자). 4) 예를 들면 1923년 6월초에는 민립대학 기성에 대하야 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고, 같은 달 하순 에는 민립대학과 조선 이란 강연을 통해 평원 민립대학기성회 발기를 추진하였다. 이외에도 조 만식은 이 해 6월에만도 민립대학 설립과 관련하여 7번의 강연회를 가졌고, 그 다음 해에도 2차례 의 민립대학 설립을 호소하는 강연을 하였다. 이때 주로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의 부흥을 주장하였 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4일자 6 월 24일자). 5) 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 삼천리 1935년 10월호) p.102. 6) 같은 글에서 기독청년의 활동으로 경제운동과 문화운동을 제시함으로써 기독청년의 이상은 단순한 종교 적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 생활과 동시에 물질적 생활을 고려한 실천적인 내용임을 전하고 있다. 7) 조만식, 청년이여 압(앞)길을 바라보라 ( 삼천리 1936년 1월호) pp.46 49. 8) 동아일보 1922년 6월 26일자. 9)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직업학교의 창설, 금융기관의 설립을 말하기도 하고 조선에 대한 외국 상품 의 시장잠식을 경계하면서 조선인에 의한 방적산업의 진홍을 강조하는 등 전민족이 단결하여 내 나라 물건을 사서쓰는 자급자족의식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여 경제문제를 말하면서도 민

- 178 - 國史館論叢 第54輯 자본의 형성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고 정치적 차원의 민족단결을 이끌 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며 활동하였다. 민족경제운동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첫째 조합운동, 둘째 물산운동, 셋째 절제운동, 넷 째 농촌운동, 다섯째 상공운동을 제시한 바 있다.10) 그 내용을 보면 조합운동은 소비조 합 저축조합 신용조합 이용조합 등을 조직하는 것이고, 둘째 물산운동은 대소규모의 물 건을 생산하여 자급자족하는 것이고, 셋째 절제운동은 금주 단연과 소비절약운동이며, 넷째 농촌운동은 농사개량 원예 관개 목축 등이다. 마지막으로 상공운동은 특히 공업을 장려하고 소상을 보호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방법을 비롯해서 조만식이 전개한 당시의 경제운동이 이론의 운동이 아니 고 실물경제의 구체적인 규모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인 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예는 여 러곳에서 발견되는데, 크게는 민족경제를 조직화하고 대중참여에 기반하여 민족자본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만식은 경제에 대한 식견이 대단히 높았으며, 해방후 인 민공화국의 정부부서 중에서 재정부장으로 오른 사실11)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조만식 등 우익의 민족경제운동은 그 인식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물산장려운 동과 금주 단연운동에 대한 당시의 비판적 견해를 살펴 보면 그 한계를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먼저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그 핵심은, 첫째, 자본주의 생산을 설혹 긍정한다 하야도 정치의 권력을 離한 산업은 재산의 형태 로 증식하지 못한다 함이요. 둘째, 조선물산 장려운동으로 인하야 조선의 산업이 발전된다 하야도 결국은 조선인 중 자본가에게 그 이윤 전부를 약탈당하겟스니 外人의 자본가에게 약탈되는 것이나 무 산자에게 하등의 차별이 업슬 것이다. 오히려 조선의 다수인 무산민중을 노예화하는 장 본이라 함이요. 셋째, 조선물산장려는 조선의 중산계급이 유산계급을 옹호하야 무산자에게 근소한 생 계를 與하고 식산흥업한다는 명의하에 혁명의 시기를 지연케 함이다12) 로 정리 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의 비판을 통해 정치없는 경제의 허구성, 자본가 수탈의 본질적 동일성, 혁명의 지연을 지적하였다. 이후 물산장려운동 옹 족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동아일보 1930년 1월 1일자). 10) 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 삼천리 1935년 10월호) pp.101 102. 11)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자. 12) 나공민, 물산장려와 사회문제 ( 동아일보 1923년 2월 24일 3월 2일자). 사회주의자들의 물산 장려운동에 대한 반대론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그 반대론을 요약하고 있는데 사회주의자 들의 반대론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다.

- 179 - 론자들은 政治權 없는 經濟權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으며, 노-자간의 모순 못지않게 민족간의 모순도 심중하며, 자본주의 발전은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시킨다는 재반론을 펴 기도 했고, 이에 대해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력의 변화가 곧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등의 재재반론이 나오기도 했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13) 그리고, 조만식 등 우익이 주장한 금주 금연운동은 대부분의 기독교계열의 인사들이 1930년대에 공통적으로 주장하던 사항들이었는데 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고등주는, 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힘에 겨워 금주, 금연을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계층이 있고, 담배가 없어 풀잎을 말아 피우는 빈농이 있으며, 식전에 선술 한잔 마시고 술국에 밥을 말 아 조반에 대신하는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절약을 강요하며 퇴폐를 말할 것인가?14) 라고 반문하며 조만식 등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즉 조만식을 중심으로한 기독교 민 족주의 운동은 이와 같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도 지방에서는 조 만식보다 더 활발하게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만식은 신간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는 조국이 일제압박에서 해방되기까지는 전민족이 한데 뭉쳐 싸워야 한다 15)는 인식을 바탕으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발기인,16) 중앙위원,17) 평양지회장을 맡으면서 조만식은 평양지역의 민족주의 계열을 묶어내고 있 었다. 1927년 12월 20일 설립당시 간부진을 보면 조만식 회장, 한근조 부회장 등 민족진 영이 지회설립을 주도1 ) 하는 등, 신간회 조직이 중앙은 민족주의 계열이 우위를 점하고 지방은 사회주의 계열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비해, 평양지회에서는 민 족주의 계열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조만식 등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이끌어온 평양청년회와 평양기독교청년회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19) 후일 서울에서 신 간회 해소가 주류를 차지한 후에도 조만식은 해소반대 투쟁을 최후까지 벌이며 민족단 결에 대한 그의 신념을 실현해 보려고 하였다.20) 예를 들면 1932년 7월 조만식은 신간회 해소 반대파인 수양동우회 계열과 기독교 계열 인사들을 모아서 건중회 를 조직하기도 8 13) 박찬승 한국 근대정치사상사 연구 pp.277 289 및 신영우, 고당조만식의 민족주의와 정치철 학 ( 북한 1985년 2월호) p.83. 14) 고등주, 기독교의 금주 단연운동에 대하여 ( 신계단 1933년 3월호) p.19. 15) 홍성준, 고당조만식 (서울 평남민보사, 1966) p.139. 16)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자. 17) 동아일보 1929년 7월 1일자. 18) 조선일보 1927년 12월 23일자. 19) 이균영, 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1993) p.308. 20) 조만식, 漁人에 利를 줌은 大禁物 ( 삼천리 1931년 4월호) p.7.

- 180 - 國史館論叢 第54輯 했었다. 그러나 이 조직에 잡다한 인사들이 끼어드는 등 여의치 않자 조만식 이하 유력 한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함으로써 실패하였다.21) 이러한 조만식의 노력은 민족의 단결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며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신간회가 해소되고 장차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속에서 조선의 미래는 보이 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5 6년 무렵의 사회상을 보고 조만식은, 현하 우리사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혼돈의 상태이어서 대중은 나아가려 고 함에 목표가 없고 살아가려고 함에 의지가 없으며 일하려 함에 영도가 없어 그야말 로 헤매고 방황하며 애쓰고 안타까와 할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처럼 대중의 사회 생활에 있어서 아무런 조직이 없는 사회는 천하에 또다시 없을 것이다22) 라고 진단하였다. 당시의 사회를 정치적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전체 사회가 절망과 혼돈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중심기관의 조직을 구상하였다. 이 중심기 관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문자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중심기관이 수행할 일로 제시한 사 업으로 미루어 궁극적으로는 독립을 위한 저항조직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도시와 농 촌에서 대중적인 조직을 통한 사회운동을 먼저 일으키고 이에 성공하면 정치적인 독립운 동으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는 성격의 조직을 꾸려보려 했다. 즉 단순히 사회조직 몇개 더 만들자는 제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조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전 단계로서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자는 제안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신간회 해소이래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하는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지면서 민족주의 운동은 고사하고 일본에의 협력을 강요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조만식 등 우익인사들은 일본의 압 력을 피해 낙향하여 있었기23) 때문에 북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익은 1945년 8월 15일 현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일본의 항복선언을 맞이하였다. 무장투쟁과 같은 적극적인 투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 만식은 여운형이 1944년 8월 10일 조직한 건국동맹에 협력한 혼적을 남기고 있다.24) 2. 해방직후 자치조직의 결성 21) 박찬승, 한국 근대정치사상사 연구 p.354. 22) 조만식, 중심기관의 재조직 ( 신동아 1936년 1월) p.2. 23) 오영진, 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서울 중앙문화사, 1952) p.9. 24) 서중석, 한국현대 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p.107.

- 181 - 일본이 패망한 이후 북한의 정치상황은 권력의 공백상태였다. 한민족이 해방의 기쁨을 축하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권력의 공백상태에 자신들에게 닥쳐올 수도 있는 위험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8월 15일 이후의 일본인의 안전을 확보 하기 위해 그들은 일왕의 항복을 전후하여 당시 그 지역의 유력인사들과 사전 교섭을 하였다. 이 사전 교섭은 서울과 평양을 비롯하여 남북한 전역에서 시도되었는데, 특히 평양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 진영과 교섭을 시도25) 하였다. 당시 평 양에 있던 김동원, 최정묵, 김항복 세사람이 일본인 도지사와 군간부의 방문을 받고 숙 의 끝에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조만식선생과 오윤선장로 뿐이라고 결론짓고 이들에 게 행정을 이양하자고 의견을 모은 후,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양인을 모셔오려 했으나 오윤선은 평양으로 돌아왔고 조만식은 일본인 도지사의 제의를 거부하는 의미26)에서 평 양으로 즉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구 권력이 물러갔으나 일본을 대체할만한 조선인들의 권력이 부 재했고, 새로운 권력인 소련도 진주하기 전 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지속되었 다. 이와 같은 정치적 공백기에 조선인들이 국가건설 열망을 분출하면서 각종 정치조직 을 결성함으로써 북한정국은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서 북한 정국을 주도하는 상징은 조만식을 중심으로한 세력이었다. 북한지역에서 우익세력 들은 신의주, 평양, 해주 등에서 차례로 자치적인 정치조직을 결성27) 하였다.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그리고 황해도 등에서 우익이 결성한 자치조직들의 이름은 매우 다양하게 붙 였지만 조직들의 성격에 대한 인식은 공통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자치위원회를 지켜 치안을 유지하다가 중국에서 정부가 돌아오는 날 고스 란히 그것을 갖다바치면 된다2 ) 먼저 평남건준의 성격부터 규명하여 (보면) 평남건준은 물론 지방정권이 아니고 정 8 25) 이 교섭에 조만식이 응하였다는 주장과 응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할 생각은 없고, 어쨌거나 일제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을 교섭대상으로 선택 했다는 점을 중시하고자 한다. 26) 오영진, 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10, 16. 홍성준, 고당조만식 pp.172 173. 박재창, 평남건국준비위원회 결성과 고당 조만식 1945년 ( 북한 1985년 8월호) pp.45 46. 27) 그 결성과정은 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북도편 pp.205 206 북한민주통일운 동사 평안남도편 pp.201 204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편 pp.260 262, p.308(서울 북한연구소, 1990)와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등 ( 해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1989) pp.203 204 참조. 28) 함석헌,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사건 ( 씨알의 소리 1971.11, pp.34 35;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204에서 재인용).

- 182 - 國史館論叢 第54輯 당도 아니다. 중앙정권이 확립되고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즉시로 모든 권리와 사무를 무 조건으로 이양하고, 또 이양하기 위한 과도적이고, 순민간적인 애국단체에 불과하다는데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29) 건국준비위원회의 본질과 사명은 치안유지를 주안적 사명으로 하려는 것으로 무 슨 조각이나 하고 정부가 되는 것같이 해석하는 경향이 있을지 모르나 결코 그런것이 아니고 주로치안유지를 목표로 하는 기관입니다 30) 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치안유지와 같은 소극적인 범위로 제한하였고 중 앙정부가 수립되는 즉시 모든 것을 중앙정부나 중경에서 환국할 임시정부에게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익은 조직성격을 이렇게 규정하고 실제 활동을 전개함에도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였 다. 예를 들면 평남 건준의 경우 물자의 재고를 조사하거나 통계를 작성하는31) 정도의 수준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였다. 사실 무력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안을 유지 하며 현상을 유지하고, 아직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 가능성으로부터 자기를 방위하고 물자시설을 보호하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식 등의 세력은 명망가 중심의 결집체로서 해방직후의 민심의 요구와 정서에 무관심했고 소극적이었던 측면도 있었다. 평남 건준은 결성할 당시 결정한대로 정당으로 확대개편할 움직임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며 사무수행 이외에는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지식인은 공산계열을 멸시했고, 보통시민들은 공산계열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준의 소극적인 활동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32) 이러한 성격을 놓고서 김용복은 건준을 상징적인 조직에 불과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실질적인 통치기관은 아니라고 보는데 비하여33) 이완범은 행정권도 인수받지 못했고, 실 질적인 무력도 보유하지 못하였지만 자치권과 치안유지권이라는 자기방어적이고 소극적 인 권리나마 행사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정부였다34)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이 결정하는 자치조직을 전 한반도 차원에서 보 았을 때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당시 우익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인식속에서 최소한 북한만의 정권수립을 생각하지 않았다 29) 오영진, 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p.23 24. 30) 조만식, 과거의 소사는 청산하고 동포여, 건국에 돌진하자 ( 평양매일신문 1945년 8월 18일자). 31) 한근조, 고당 조만식 (태극출판사, 1975) p.376. 32)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p.27 32, 34. 33) 김용복, 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202. 34) 이완범, 북한 점령 소련군의 성격 ( 국사관논총 25) p.161.

- 184 - 國史館論叢 第54輯 해방직후 8월에서 9월사이 북한지역에서 우익이 전개한 정치활동은 활동기간이 10여 일에 불과했지만 중앙정권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사람들의 자치능력을 과시36) 한 것으로서 몇가지 특징을 간추릴 수 있다. 첫째, 그 활동은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성격 을 갖고 있었으며, 분단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 둘째, 자신의 역할을 지역차원으로 국한 하여 전개하려고 자제하였고 이러한 자제는 거꾸로 그 지역에서 대단히 높은 자율성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셋째, 좌우익의 관계에서는 갈등보다 협력의 분위기였으며 우익이 우세한 위치를 선점하였다. Ⅲ. 우익세력의 위축 소련군의 진주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분명하게 바뀌었다. 소련군의 한사람으로 평양에 들어온 메크레르 중좌에 따르면 평양은 조만식 판 37)이었으나 우익세력은 소련 군 사령부 진주 이후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의 결과 탄생한 조직은 그 이름에서부터 좌우의 세력관계를 그대로 담고 있었으니, 우익은 정치 위원회를 제안하고 좌익은 인민위원회를 제안하였기 때문에 양안을 절충하여 인민정치 위원회로 이름 붙였다.3 ) 우익세력은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에 실질적인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실속없이 웅성대다가 소련군진주 이후 정권의 알맹이는 소련과 좌익에게 빼앗기 게 되기는39) 하지만 그래도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 서 우익의 활동을 살펴봄에 있어서는 특히 이 지역에서 우익과 소련군진주와의 관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 1. 건준의 인민정치위원회로의 개편 준을 조직했던 우익들은 자신들의 조직 을 해체하고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물론 이것은 우익이 자발적이거나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소련군사령부의 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개편한 것이었다. 평남지역의 우익들은 건준을 해체하고 8월 26일 평남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건 36) 한재덕,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 p.158. 37) 메크레르의 증언,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중앙일보사, 1992) p.49. 38) 한재덕,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 p.172와 홍성준, 고당조만식 p.188. 39) 홍성준, 고당조만식 p.178.

- 185-24일에 소련군 선발대와 사령관이 진주한 이틀 후의 일이었다. 조만식은 소련사령관인 치스챠꼬프대장이 공산당의 지도 를 받으라고 지시하자 강력히 반발하여 공산당과 협력 하라는 수준으로 후퇴시키기도 했다. 소련이 조만식의 입장을 수용하고 후퇴한 이유는 당시 북한의 좌익이 너무 취약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즉 조선의 좌익세 력 중 탁월한 지도자는 남한에 있거나 아직 입국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북한지역 공산주 의자 중에서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에 견줄만한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조만식은 좌익과의 합작을 수용했는데, 그 이유는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당 시 우익은 첫째, 소련군 치하이기 때문에 공산계열을 거부한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고, 둘째,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이 필요하 다는 사실에 어느정도 공감했었기 때문에 좌익과의 합작을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 었다. 특히 건준위원 대부분은 일제시대에 민족사회주의 또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색채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공산당과 합작40)하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좌익이 취약하고 우익이 강력했던 상태에서 우익은 좌우 등수로 조직을 개편 하여 좌우의 통일전체를 형성하고 나서야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치스챠꼬프 대장은 조만식을 비롯하여 좌우익 인사와 일본인 도지사를 모아놓고, 일본군대는 일본천황의 명에 따라 항복했으므로 26일 오후 8시로서 평안남도의 일본정 부는 소멸하며,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정권이 인계된다. 방송, 통신전화, 철도, 공장, 은행 등의 각 기관은 즉각 인민정치위원회에 의해 접수된다41) 라고 하여 공식적으로 정권이양을 명령하였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건준을 재편하고 정권을 이양받았는데, 그 세력관계에 있어서 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건준이 추천한 인물 중에서 홍기주와 김광진 등 좌익계가 2명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숫적으로 좌익의 우세를 초래하였다.42)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좌익이 숫적으로 우세해 졌지만 소련이 일방적으로 좌익의 입장만을 지 지한 것은 아니었고 우익의 입장을 상당히 많이 반영시킬 수 있었다.43) 40)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p.73 74. 와다하루끼는 치스챠꼬프 대장의 발언에 관한 오영진의 서술을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영진은 당시 서울로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후에 들은 이야기를 과장한 것 같다는 것 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추측에 의존하고 있을 뿐 오영진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근거를 갖 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와다하루끼, 소련의 대북한정책 1945 1946 ( 분단 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1983) p.256. 41) 森田芳夫,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인민위원회의 결성 ( 한국사회연구 5, 한길사, 1987) p.392. 42) 한재덕,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 p.155. 43) 박재권, 해방직후의 소련의 대북한 정책 ( 해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1989) p.371.

- 187 -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만식은 9월에 입국한 김일성의 방문을 몇차례 받는 등 김일성 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시작하였고, 신탁통치문제로 제거되기 전까지는 계속 우호관계 를 유지하였다. 당시 조만식은 김일성이 민족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평북임시인민정치위원회는 8월 31일 재편50) 되었는데 27일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하고 30일 사령관이 도착한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평북임시인민정치위원회는 그동안 우익이 주도해 오던 평북자치위원회를 이름만 바꾼 것이었으며 조직개편없이 우익의 이유필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우익은 평북임시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한 직후 소련군 당국의 명령에 따라 일본측으로부터 모든 행정권을 완전히 넘겨받았는데 실제적으로 각 기관의 접수는 29일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원장에 취임한 이유필은 붉은 군 대의 일탈행위를 없애기 위해 신의주 주둔 소련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병단속을 강력 히 요청하기도 했다.51) 9월 2일에는 일체의 일제주구를 체포하였고 9월 4일에는 평북 민보 를 창간하거나 수풍발전소를 접수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11월 23일 공산당의 통치에 항거하는 신의주의 우익 학생들은 의거를 일으켰다. 용암 포사건을 직접적인 계기로 하고 그동안 누적된 소련군과 좌익에 대한 불만을 근본적인 계기로 하여 신의주 학생의거가 발생한 것이었는데 당시 학생들은 현지주둔 소련군책임 자와의 면담에서, 첫째, 소련군이 공산당만 두둔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부당하니 시정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 태극기는 올리지 못하게 하고 붉은 기만 게양하고 있는데 해방군임을 자 처하는 소련군이 그럴 수가 있는가. 셋째, 오랜독립 투쟁 끝에 환국하여 동중학교에 주 둔하고 있는 조선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고, 해방후 조직된 공산청년동맹은 무장을 더 시키고 있으니 이는 편파적인 처사가 아니냐52) 는 요지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이 사건으로 작게는 우익의 위원장 이유필과 문교부장 함 석헌이 제거됨53)으로써 평북임시인민정치위원회의 주도권을 좌익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크게는 조선민주당의 창립과정에서 보였던 조만식과 김일성의 합작, 기독교인 민족주의 자와 공산주의자와의 합작을 양측 모두 부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사건은 좌우익 관계 뿐만 아니라 좌익내부의 세력관계에도 영향을 끼쳐 김일성아 평북공산당내의 국내파인 한웅 등을 몰아내고 김일성의 직계세력을 등용하는 계기였다. 50) 그 재편 과정은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p.212 213 참조. 51)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북도편 p.247. 52) 위의 책 p.268. 53) 이유필은 사의를 표명하고 월남하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함.

- 188 - 國史館論叢 第54輯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지방당에 대한 평양 분국의 즉 중앙의 영향력은 훨씬 커 졌다. 김일성은 이때까지도 북한정치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배후에서 거중 조정하는 역 할을 자임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이익을 얻고 북조선 분국의 조직과 활동을 비판하면서 정치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김용복,54) 와다하루끼55) 그리 고 북한민주통일운동사 56)가 하고 있다. 황해도는 25일에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하였지만 우익이 비교적 강력했던 관계로 9월 2일이 되어서야 황해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57) 민족주의 계열이 인민정 치위원회의 간부구성에 있어서 우세한 비율을 차지한 후 기존의 우익 주도권을 유지하 면서 9월 2일 쓰쓰이지사로부터 도행정을 일단 넘겨 받았다. 이처럼 우익이 인민정치위 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좌익의 습격을 받아 김광엽, 김형익 등 우익 간부가 부상을 당했고, 이 사건으로 행정권은 계속 일인도지사가 보유하였다. 9일 중순 해주에서 김덕영이 황해도 인민위원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고 9월 13일 황해도 인민위원회가 행정권을 접수했으나 도인민위원회를 좌익이 장악하자 우익의 해주보안대 가 9월 16일에 도 인민위원회 본부를 습격하였다가 패퇴하였다. 이후 우익 보안대 간부 들은 월남5 )하거나 평양에서 조민당이 결성되었을 때 조민당 지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 였다. 은율의 경우59) 9월 중순 소련군의 진주 이후 군인민위원회 위원을 좌우 합작형태 로 개편하고 위원장은 우익이 맡고 보안서장은 좌익이 맡게 되었다. 이처럼 소련군이 진주한 이후 우익은 소련군의 유형 무형의 압력에 직면하였다. 이를 유 형화해보면 첫째, 우익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역일수록 소련군으로부터 더 많은 압력을 받았다. 둘째, 우익은 소련군 진주 이후에도 일본인으로부터 행정권을 곧바로 이양 받을 수 없었고, 공산당과 합작하여 좌우의 비율이 최소한 1 대 1로 된 후에야 행정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셋째, 내무행정보다는 인사문제와 보안문제에 있어서 소련군의 깊은 간여를 받았다. 넷째, 평양 도청소재지 지방도시의 순으로 세력개편을 당했다.60) 이와 같 은 경험때문에 우익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모든 권한을 행사하며 명백한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활동이 위축되었다고 믿고 있었고, 이에 비해 좌익은 북조선인의 자율성 을 강조하여 소련군의 진주 이후 대북정책 수행과정을 군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8 54)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213. 55) 와다하루끼, 조선의 대북한정책 1945 1946 pp.281 283. 56)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북도편 pp.290 291. 57)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편 p.308. 58) 森田芳夫,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인민위원회의 결성 pp.397 398. 59)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편 p.310. 60) 위의 책 p.308.

- 189-2. 조만식의 활동과 5도행정국의 관계 우익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자치조직들은 재편되었고 따라서 우익민족주의자들의 활 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였다고 해서 즉시 우익의 활 동이 소멸하지는 않았다. 우익세력이 강력했던 평안남북도, 황해도 지역은 우익이 약화 되기는 했지만 그 역량을 보존하여 활동을 지속하였기 때문에 1945년말까지도 좌익이 원하는 방식의 사회주의 개혁은 지연되었다. 좌익은 조만식을 무력화시킨 이후인 1946년 봄이 되어야 제반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소련군 진주 이후에도 우익은 각 지방의 인 민정치위원회속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며 사령부의 직접적인 지시를 유무형으로 거 부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려고 시도했다. 예로서 1945년 가을 추수 분배에서 좌익측의 의견인 소작인 전량 소유 주장을 누르고 우익측의 의견인 3.7제를 관철시킨 것을 들 수 있다.61) 특히 조만식이 10월 16일 평남인 민정치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하였던 시정대강 의 작성과정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 다. 시정대강의 작성과정에서 조만식은 좌익측의 과격한 입장을 비판하고 원래 시정대강 초안에 있던 인민공화국 지지 와 공산당의 토지정책 을 삭제한 후 완화된 입장의 시정 대강을 발표62)할 수 있었다. 모두 19개조로 되어 있는 이 대강은, 1조.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공화국 수립을 기하고 2조. 20세 이상의 남녀는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으며 3조. 인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교의 자유가 있으며 4조. 소련 및 평화를 애호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친선하며 제국주의적 재침략을 방비하며 6조. 일본 제국주의자 및 친일분자가 소유한 토지, 회사, 금융기관, 공장, 광산, 탄광, 운수, 교통, 상업 소 기타 일체의 생산기관과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하며 7조. 소작료는 3 7제로 하며 11조. 8시간 노동자와 근무자의 생활보장을 기하며 12조. 국민개로제를 철칙으로 하며 13조. 의무교육제를 실시할 것63)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주주의 공화국의 성격인데, 이 맥락에서는 61)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p.79 80. 62) 홍성준, 고당조만식 p.188. 63) 해방후 사년간 국내외 중요일자 1949년판(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7) p.578.

- 191 - 주도하는 사회주의 국가수립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소련의 개입은 줄어드는 중거들이 이 과정에서도 찾아진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우익은 북한만의 완전한 중앙권력이 조직되 는 것을 막고 어느정도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5도행정국을 조직 하기 위한 준비는 1945년 10월 8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 회의 를 소집하면서 시작되었다.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면서 위축된 우익은 5도행정국 조직 을 적극적으로 주도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는 평남북과 함남북 그리고 황해도 대 표 75명 이외에 로마넹코 소장이나 이그나치에프 대좌 등 소련군 간부도 참석67) 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제반 경제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지방인민위원회 조직원칙과 같은 정 치적인 문제도 다루었으며,6 ) 이 회의의 결과는 이후 분과회의를 조직하여 수행하였다. 그리고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역원로가 맡았던 방식을 주민들이 선출하는 방식으 로 바꾸었다.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는 그동안 지방인민정치위원회가 누렸던 독자성을 줄이고 각 급 인민위원회를 소련군 사령부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두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 회의 이후 5개도 인민위원회는 개별적으로 소련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됨으로써 그동안 우익세력이 상당히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조직기반을 침식당하는 결과를 초래했 다. 이 과정은 우익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위축시키고 좌익의 권력을 신장시키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소련군사령부는 5도 인민위원회를 묶어서 하나의 중앙정권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1945년 10월 28일 분권적인 각 지방의 행정조직을 어느 정도 통합하기 위하여 소련군의 요청으로 5도행정국을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11월 19일이 돼서야 조직구성이 완성되었는데, 산업국, 교통국, 농림국, 상업국, 체신국, 행정국, 교육국, 보건국, 사법국, 보안국이 갖추어졌 다.69) 조민당도 공산당, 독립동맹, 무소속과 함께 5도행정국에 참여함으로써 조선민주당, 공 산당과 연안파가 각 정파 연립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부국장은 소련 2세였다고 한 다. 5도행정국에 좌익이 많이 침투해 있는 상황이었지만 김일성은 5도행정국에서 공식적인 직책은 아무 것도 맡지 않은 상태로서 아직 조만식이 주도권을 잃지않은 상태였다.70) 북한의 우익은 지방인민정치위원회로 조직을 개편당하고 5도행정국에 정파연립의 형 태로 참여함으로써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일반적으로 5도행정국은 소련군의 중앙 집중화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 71)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의 첫걸음, 72) 이라고 해 8 67)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86. 68) 북한관계사료집 7, p.576. 69) 위의 책 p.582. 70) 이완범 북한점령 소련군의 성격 p.171.

- 192 - 國史館論叢 第54輯 서 중앙정권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평가와 중앙정권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후원자적인 성격을 강조73) 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각도 인민위원회가 행사하고 있다는 평 가가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달리 조만식 위원장과 오윤선 부위원장이 이끌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 원회가 주동이 되어 5도인민위원회를 소집했고, 북조선 5도행정국을 만들었다고 보면 서74) 5도행정국내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여타 위원회를 느슨하나마 지도하는 상 태75)라고 파악함으로써 우익의 주도권을 중요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5도행정국의 위원장자리는 조만식이 취임을 거절했다는 설과 조만식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오영진은 조만식 선생이 위원장직을 사양해서 공석으로 남아있었다는 기록76)을 남겼고, 서용규, 김창순, 서대숙은 조만식 선생이 위원장을 맡았다는 견해77)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조만식이 5도행정국에 대해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 만 위원장 자리에의 취임은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전국적인 통일독립정권 수립을 기대하던 우익의 본래 노선과 북한의 중앙정권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5도행정국 설치가 서로 어긋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전한반도차원의 독립국가가 수립될 것이고 이를 위해 과도적이고 임시적인 자치조직을 운용하고자 했던 조만식의 인식과 5도행정국의 설치는 정면으로 배치하기 때문이다. Ⅳ. 우익정당의 결성과 신탁통치반대 1. 조선민주당의 결성 조선민주당은 북한의 우익세력이 최초로 결성한 정당조직으로서 38선으로 구분된 북 71) HQ. HSAFIK, G-2 Weekly Summary, no. 15 (1945.12) pp.16 23. 72) 한재덕,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 p.185.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2 (돌베개, 1986) p.426. 73)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하 p.252. 74)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96 및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 194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0) p.315. 75) 한국정치연구회 북한정치론 (백산서당, 1990) p.167. 76)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89. 77)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96. 김창순, 북한십오년사 (서울 지문각, 1961) p.70, 190.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p.60.

- 194 - 國史館論叢 第54輯 해 민심수습을 한다는 것은 공산당을 통해서 민심수습을 하는 것보다 부담스러울 수 있 다. 상황이 호전되어 조민당을 통하여 민심수습에 성공한다 해도 조민당의 성가가 올라 갈 뿐이고 이런 상황은 소련군사령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흑백 함 투표도 강행했던 소련군 사령부가 민주주의를 실시한다는 명분을 위해서 굳이 우익 정당을 결성하도록 종용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조만식의 입장도 정당조직에 소극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6) 왜냐하면 그의 기 본노선을 고려해 볼 때 국토가 38선을 경계로 왕래가 두절된 상태에서 북한만의 조직밖 에는 되지 못할 정당을 원치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아직 독자적인 정당의 건설은 시기상 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조만식이 소극적이었을 가능성은 김일성이 계속 해서 정당의 결성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결국 조민당의 결성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져야 하는데, 그 가능성 중의 하나는 당시 의 현실적인 세력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조민당 결성 이후 급격한 당세확장과정을 통하 여 반증되듯이 당시 우익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소련군사령부의 입장에서는 조민당의 결성을 종용한 것이 아니라 묵인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신탁 통치문제에서 보여지게 될 조만식의 행동양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련군사령부가 종용 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치않는 정당을 조직할 만큼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즉 당시 우익의 역량은 소련군사령부가 힘으로만 제압할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광주학생의거 기념일인 11월 3일의 창당대회에서 조만식 당수 외에 최용건을 부당수로, 김책을 서기장 겸 편집부장으로 선출한 바 있는데, 이 점은 약간의 설명이 필 요하다. 당시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 대신 조민당에 입당한 인물이었다. 김일성이 조민 당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기에 그가 추천한 인물이 중요한 당직을 맡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설명되어야 하며, 그 설명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좀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김일성은 당시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로보다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 고 조만식과 협력하고 있었다. 즉 김일성은, 8 공산당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고당선생을 지지하는 대중을 조직하는 이 좋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튼튼한 정치적 안정세력이 되는 이외에 이 혼란된 시국 을 수습할 방도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정당을 만드시고 친히 당수가 되신다면 저는 부 당수가 되어 소련군정과의 절충을 담당해서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7) 것 8 8 8 6)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102 및 홍성준, 고당조만식 p.213. 7) 홍성준, 고당조만식 p.210, 219.

- 195 - 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자신이 빠지면서 대신 이 두 사람을 조만식에 게 추천한 것이었고 조만식은 이 추천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일성은 무슨 이유로 조만식 등 우익에게 정당결성을 권유하였고 마지막에 자신은 빠져버렸는가? 김일성이 정당조직을 권유한 속뜻은 분명치 않지만 조 민당 결성에서 빠진 이유는 김일성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군사령부를 배경으로 공 산당과 조선민주당을 원만히 조정하는 역할 )을 하는 것이 민족의 대의를 위해 유익하 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이유는 12월 17일로 예정 되어 있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를 맡게 되는 상 황속에서 찾는 것 9)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식이 김일성의 발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는 있다. 즉 김일 성은 조만식이 준비해준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군중대회 를 통해 평양시민들에게 인사 를 했고, 자신의 입장을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라고 누차 강조했었다는 사실 로 미루어 볼 때 최소한 이 시점까지만 해도 조만식과 김일성이 갈등보다는 협력의 여 지를 더 많이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이 조만식 에게 겸손하게 행동하면서 그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적 발언을 자주하여 서로 좋은 관계 를 갖고 있었다는 메크레르의 증언90)을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조민당의 노선은, 88 8 우리는 조선 건국의 일대 장해물인 일체의 파벌을 근절하고 정치 경제 문화 사상 생활 의 각 반부문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구축 소탕하자. 그리하여 확고한 민족적 자각과 열렬한 애국정신 밑에 분산된 각계 대중의 총의 총력을 결집 통합하야 대동단결을 요하는 동시에 목적과 취지가 같은 단체와는 우의적으로 상교하야 중앙정부의 신속한 출현을 기대한다. 우리는 대중을 본위로 한 민주주의 정체로서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자. 그러므로써 종 래의 모든 전제와 구속을 철저히 배격하는 등시에 국민 개학 개도의 철칙을 실현(하자) 91) 는 당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조민당은 한반도를 총괄하는 중앙정부의 신속한 출현 을 기대하고 있었고 대중을 본위로 한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을 활동목표로 삼고 있다. 이 점은 북풍이 불어 남조선을 휩쓸어야 한다 92)는 민주기지적인 발상을 서북5도당 대 ) 김병연, 평양지 (평양 평남민보사, 1964) pp.53 54.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10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104. 8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104. 90) 위의 책 p.98. 91)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p.246. 92)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 p.112. 88

- 196 - 國史館論叢 第54輯 통하여 제시하고, 북한 지역의 공산당을 지도하며 나아가서는 전 한반도의 좌익을 지도할 수 있는 당중앙을 북한지역에 건설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을 기지로 한 한 반도 통일을 고려하기 시작한 좌익의 노선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조민당의 강령93)을 살펴보면 첫째, 국민의 총의에 의하여 민주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기하고, 둘째, 민권을 존중하여 민생을 확보하여 민족전체의 복리증진을 힘쓰며, 셋째,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 문화에 공헌한다. 그리고 넷째, 종교 교육 노동 실업 사회 각 계 유지와 결합을 요하며, 다섯째, 반일적 민주주의 각 당파와 우호협력하야 전민족의 통일을 도모하고, 여섯째, 소련 및 민주주의 제국가와 친선을 도하야 세계 평화의 확립 을 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첫번째와 다섯번째로서, 조민당은 전민족 을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통일시킨다는 노선을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약 12항의 정책을 제시하였다.94) 첫째, 국민의 언론 출판 집 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와 선거 및 피선거권 보장과 민족반역자에 대한 5대 자유와 공 권 박탈, 둘째, 의회제도와 보통선거제의 실시, 셋째, 교육보건의 기회균등, 넷째, 문화 및 사회사업기관의 확충, 다섯째, 문화인 및 과학기술자의 육성과 우대, 여섯째, 국제무 역의 진흥과 국내상업의 발전 촉진, 일곱째, 물가와 통화를 적절히 조절하여 국민 생활 의 안정기도, 여덟째, 소작제도의 개선, 자작농 창정의 강화, 농업기술의 향상, 아홉째, 균정 간편한 세제의 확립, 열째, 노동운동의 정상적 발전 조성, 열한째, 노 사문제의 일 치점을 득하여 생산의 지장이 없기를 기함, 열두째, 실업자의 대책수립 공장법, 생명보 험, 보건보험, 최저임금제의 제정 등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정책이 몇가지 있다. 첫째, 민족반역자의 5대 자유와 공권을 박탈 한 것은 해방직후의 민족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당시 좌익도 일본통치의 일체 잔여의 철 저한 숙청 95)을 주장하여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갖고 있었다. 둘째, 소작제도의 개 선 자작농 창정의 강화, 농업기술의 향상을 주장한 점인데, 이 점은 좌익과 완전히 다 른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당시 좌익은 소작을 주는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제를 철폐하는 무상 몰수 무상분배의 정책노선96)을 걸음으로써 우익과는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셋째, 토지문제에 있어서는 좌우익이 이처럼 대조적인 입장이었지만 상공업 진홍에 있어서는 좌우익 모두 비슷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해방직후 경제복구와 건설이 시급한 과제였음 을 알려주고 있다. 회를 93)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pp.246 247. 94) 위의 책 p.247. 95) 20개조 정강, 연세대 북한현대사 연구회, 북한현대사 1 (공동체, 1989) p.362. 96) 위의 책 p.363.

- 198 - 國史館論叢 第54輯 있던 조만식이었지만 그는 모든 문제를 좌와 우라는 이념적 잣대를 갖고 경직되게 행동 하기 보다는 민족이라는 잣대를 갖고서 행동하였다. 커밍스가 조만식을 여운형에 비유하 면서, 대중적 인기는 여운형에 미치지 못했지만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여운형과 마 찬가지로 기꺼이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102) 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해방이후 조만식은 유동적인 정세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좌익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산당을 반대하거나 소련군사령부에 저항하기 보다 는 민족의 이익에 부합할 때는 좌익과도 협력하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였고 민족의 이 익에 저촉될 때는 단호히 투쟁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조만식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라는 소련군사령부의 압력하에 있 었다. 치스챠꼬프 대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안이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국제적 지도노선이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 표해 주시오103) 하면서, 조만식선생에게 신탁통치안의 성격을 설명하고 지지를 요청했지만 조만식과 조 민당은 모스크바 결정 지지노선을 채택할 수 없었다. 같은 날인 12월 30일104) 조만식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여기서 반탁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① 조선이 완전독립국가로서 자주정부가 수립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② 신탁통치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③ 우리 당으로선 국내외 정세의 추이를 깊이 살핀 뒤에 완전한 태도를 표명하기로 한다105) 는 것으로서 조만식과 조민당이 소련군사령부와 근본적인 입장차이를 표출하는 순간이 었다. 소련군사령부는 조만식을 설득하려고, 당신이 이 모스크바 결정에 찬성만 해준다면 북조선측이 절대 우세한 통일을 이룩할 수가 있을 터인데 그렇게 되면 당신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김일성을 수상(또는 군부책임 자인 민족보위상)을 시키겠다106) 102)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하 (청사, 1986) p.261. 103)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198 및 홍성준, 고당조만식, p.220. 104) 박재창은 1946년 1월 2일로 기억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195. 105)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p.275 및 홍성준, 고당조만식 p.237. 106) 한재덕,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 p.211 및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63.

- 200 - 國史館論叢 第54輯 나의 민족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충분한 토의가 있기 전엔 절대 표결에 부 칠 수 없다111) 고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 안을 결의하기로 대세가 흘러가자 이에 조만식은 이 결의와 정치적 신념을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남인민위원회 임시총회의에서 구두로 사의를 표명한 후 사임사 겸 자신의 반탁논리를 명확하게 밝혔다. 조만식은, 첫째, 신탁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모든 의사는 한국인의 자유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탁통치를 찬성만 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리 군정이라 해도 언론이나 의사표시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둘째, 무슨 구실을 붙이더라도 신탁통치라는 것은 어떤 나라가 남의 나라 정치에 대해 서 간섭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결사 반대함은 우리 나라의 국권과 이익을 고수하려는 당연한 주장이다. 지도니 후원이니 하는 통치이론은 당치도 않는 말이다. 셋째, 우리 나라의 완전독립을 진실로 원조하려는 호의라면서 신탁통치는 왜 강요하는 가? 카이로 선언이나 포츠담 선언에서도 우리 나라에 신탁통치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는 말을 듣지 못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이런 의미에서 잘못된 국제 협정이다112) 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주장 중 중요한 것은 찬, 반탁을 선택할 자유, 강대국의 간섭 반 대, 그리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불인정이었다. 소련군사령부는 1월 5일 조만식을 고 려호텔에 감금하였고113)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김일성 등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탁치문제를 계기로 조만식은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쉽게 제거되고 말아 이후부터는 좌익 일변도로 정국이 운영되고 만다.114) 그러나 최소한 이 시점까지는 조만식 등 우익민족주의자들이 소련군 정과 김일성과 가능한 한 근본적인 충돌을 피하고, 타협할 수 있는데까지 타협하면서 유 동적인 상황속에서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신탁통치 결정과 조만식 감금사건을 계기로 북한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반소반공의거 사건이 벌어졌다. 대부분 산발적으로 끝나고 소련과 공산당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 지만 나름대로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안악군 조민당의 경우115) 봉기 를 통해 북한 전역의 우익폭동을 일으키는 기폭제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당원 대부분이 검거되었다. 은율116)에서는 우익 지하조직이 반탁 삐라를 살포 111) 위의 책 p.196 및 홍성준, 고당조만식 p.241. 112)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 p.280 및 홍성준, 고당조만식 p.242. 113) 김창순 북한십오년사 pp.71 74 및 홍성준, 고당조만식 pp.240 241. 114) 이완범, 북한 점령 소련군의 성격 p.171. 115)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편 p.309.

- 201 - 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소련군정의 탄압을 받았다. 군당 간부들은 이후 월남하거나 타지역으로 피신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군당 부위원장 홍보식은 홀로 은율에 남아 공산 당과 투쟁하다가 1947년 한국독립당 관계로 체포되어 북한의 여러 형무소를 전전하다가 1949년 평북 철산광산에서 사망하였다. 평산군117)에서는 북한지역으로서는 최초의 공개 적인 반탁 시위 행사를 진행시키는 반탁운동이 일어났다. 소련군 환영 군중집회 및 신 탁통치 경위 설명회 로 위장하여 반탁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문제로 인민의 반발 이 있을 것을 예상한 소련은 적극적으로 대책을 세웠다. 예를 들면 재빨리 북한을 탈출 서울에 집결한 후 1946년 정초에 조민당의 본부 를 서울로 이전하였다고 발표하고 미군정하에서 활동을 재개한11 ) 월남 인사 이외의 북 조선 민주당간부와 민주 민족진영 인사들 중 뚜렷한 비협조자들을 거의 대부분 숙청 추 방해 버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는데, 그 결과 북한내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후견제 찬성쪽 으로 몰고가는데 성공하였다.119) 결국 조만식과 우익정당으로서의 조민당은 모스크바 결정의 지지문제로 소련군사령부 및 공산당과 대립하면서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1946년 2월 최용건은 조선민주 당 열성자협의회를 개최하여 조만식 규탄 선언문 등을 채택하고 중앙위원을 개선하였으 며 임시 당수로 강양욱을 선출하는 등 조만식 대신에 북조선 민주당을 이끌게 되었 다.120) 그 결과 조만식이 그렇게 반대했었던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북한의 제정당 사회단체의 성명서인 전조선동포들에게 격함! 에는 조선민주당이 서명하게 되 었다. 물론 당을 대표하여 당시 부당수였던 최용건이 서명한 것이다. 그리고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를 대표해서는 조만식 대신 위원장을 맡은 홍기주가 서명하였다.121) 그리고 1946년 2월 24일에는 각 도 대표 190여 명이 참석한 조선민주당 제1차 당대회에서 최용 건을 당수로 선출하였다. 이제 더 이상 조민당은 조만식이 이끌던 조민당이 아니었다. 1946년 12월 25일에 있었 던 조선민주당 제6차 중앙위원회 확대위원회에서 한 최용건의 발언 중에서 민주당 간부 는 남하하였지만 숭미적 종교인에 의한 미국 반동파와 국내반동세력이 탐정기관화 할 가능성과 과거 공산당을 반대했던 반소 반공 분자들이 민주당에 입당했다 는 말과 민주 당은 상업가, 자본가, 기술가, 지식층이 많다 122)는 말 속에서 민주당의 우익적 성향의 흔 8 116) 위의 책 p.312. 117) 위의 책 pp.209 211, p.312. 118) 김병연, 평양지 p.55. 11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p.199. 120)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241. 121) 전조선 동포들에게 격함! (성명서) 1946년 1월 29일.

- 202 - 國史館論叢 第54輯 적을 찾아 볼 수 있을 뿐 더 이상 정통우익의 이익을 결집하는 정당은 아니었다. 이처럼 해방이후 우익의 활동은 신탁통치 반대를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활동을 마감했 다. 조만식 등 우익이 목숨을 걸고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지만 실패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 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익의 반탁은 반공, 반소로 귀결하였기 때문에 소련의 노선과 공존할 수 없었다. 둘째, 조민당이 명망가 중심의 성격이 강해서 대중과의 조직적인 연 계투쟁이 부족했다. 즉 신탁통치문제와 같이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우익대중과의 조직적인 연계에 실패하였고, 좌익대중이 찬탁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함 으로써 소련의 탄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약화하였다. 당을 결성한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부조직이 급속히 확장되고 당원이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였기 때문에 조만식 이나 조민당이 반탁운동을 대중운동으로 전환했더라면 좀더 투쟁다운 투쟁을 전개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Ⅴ. 맺 음 말 지금까지 해방을 전후하여 북한지역에서 전개한 우익의 활동과 노선을 살펴보았다. 북 한 우익은 일제시대에 전개한 민족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해방이후 강한 정치적 영향력 을 행사하며 각종 자치조직을 자발적으로 조직하였고, 조만식을 정점으로 활동하였다. 아직 상하의 체계적인 위계조직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중앙정부의 수립을 기대하 며 건준을 조직하여 과도적이고 임시적인 지방정권을 유지함으로써 조선인의 자치능력 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우익의 활동은 소련군 진주 이전과 이후에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소 련군의 진주로 우익의 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당하면 서도 우익은 자신들이 완전히 무시되도록 방관하지는 않음으로써 5도행정국이 조직될 때까지는 정파연립의 형태로나마 좌익과의 공조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45년 11월에는 조민당을 결성함으로써 정당을 중심으로 급격히 결집하였고, 조만식과 김일성의 공조체제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북한의 우익세력은 해방이후 상 당한 기간동안 좌익과 공조체제를 유지했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근본적인 입장차이가 노 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월 신의주 학생의거에서 좌우연립 붕괴의 조짐이 보 이다가 신탁통치문제가 제기되자 근본적인 입장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신탁 122) 북한관계사료집 8, p.4,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