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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야할점 되어져 82)(이는 135 최초로 침구한 시기를 지정(至 으로부터도 입증된다). 원의 조정이 원나라에 왜구가 正) 18년(1358)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 83) 립 렵 이상의 점에서 모리씨의 <왜구=무장상인단>설은 성 하기 어 다고 생각한다. 2) <고려측의 무역제한 고려전제(田制)의 문란=왜구의 원인>설 케 田中健夫)씨는 13세기에 발생한 왜구의 원인을 고려측의 무역제한에서 구하고 있다. 즉 씨는 일본에서 고려로 건너간 진봉선(進奉船)은 몽고와의 절충에 힘을 다 써버려 국력이 소진된 고려로부터 거부당하여 해도(海盜)로 돌변할 가능성을 항상 지 니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무라 요오코오(田村洋幸)씨는 고려와 일본의 수입 수출품을 비교하여 12 3세기의 일본과 고려 사이에는 그 경제적 발전에 현격한 차이가 보여져 고려정부가 스스로 일본과의 교역에 제한을 가했다 라고 논하였다. 그러나, 다나카설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별고 에서 밝힌바와 같이 1206년에 고려가 대마도로부터의 진봉을 거부한 이유는, 몽고와는 관계가 없으며 대마도측이 이미 정하여 진 진봉의 예(進奉의 禮) 에 어긋나는 대응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3세기 중엽 에 들어와 진봉관계(進奉關係)가 끊어진 것은 몽고의 일본침공을 저지하는 목적에서 일 본과의 교류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고려정부가 스스로 행한 것이다. 다무라(田村)설에 대해서도 별고 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과 같이 일본상인의 내항 이 보이지 않게 되는 시기에도 송나라 상인들은 대거 내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수긍할 수 없다. 또, <경인년 이후의 왜구>가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 큰 원인으로써 다나카씨는 전제 다나카 다 오( 84) 85) 86) 87) 88) 89) 82) 타 케 田中健夫 활 倭船 至元 慶元府 습 켜 좋 활 소 慶元 목 헌 훨씬 협 狹義 킬 倭寇 海の歷史 敎育社 元史 순 順帝 至正 丁酉 삭 朔條 倭人寇蓬州 守將劉遍擊敗之 自十八年以來 倭人連寇濱海郡縣 처럼 至正 알 타 저 타 저 中世前期の麗日關係 對馬の進奉を中心に 東ジナ海世界における麗日關係 東京大學博 士學位論文 참 平戶記 延應二年四月十七日條 논 논 나카 다 오( )씨도 지원( ) 29년 (1292)에 경원부( )를 격한 일본상인 들을 의의 왜구 동 에 포함시 도 다, 고 하면서 그들이 동한 장 가 경원( ) 부 근에 한정된 점, 왜선( )의 공격 표가 오로지 원나라 관 들에 한정되어 있었던 점, 시기 적으로 <경인년의 왜구>의 이전에 발생한 점, 등의 이유에서 의( )의 왜구속에 포 함시 수 없다, 고 하였다(,, 1982, pp.56 57). 83) 원사( ) 권제46, 제( ) 본기 9, 지정( ) 23년 8월 정유( ) 조( )에,,, 이라고 보이는 것, 왜구 가 중국에 침구하게 된 것은 지정( ) 18년(1358)부터 였음을 수 있다. 84) 전게 주(57) 나카 서 p.26. 85) 전게 주(77) 무라 서 p.13. 86) ( )을 조. 87). 88) 전게 주(86) 문. 89) 전게 주(78) 문. 광

136 國史館論叢 第92輯 田制)의 문란과 그 결과 발생한 군사제도(軍制)의 이완이 장기간에 걸친 왜구의 활동이 가능케 하였다 고 하는 등, 고려사회의 피폐를 들고 있다. 그러나 전제의 문란 이나 농민들의 토지로부터의 유리(遊離) 등의 문제는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 공통된 문제 로 고려에서는 이미 12세기말 무신정권이 성립하던 무렵부터 뚜렷해지고 있으며 특히, 이 시기에만 보이는 고유의 문제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왜구발생의 원인에 대한 충 분한 설명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14세기 후반에 왜구가 발호하는 주원인은 어디까지 일본국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90) 3) <왜구=몽고의 일본침공에 대한 복수>설 야 료 靑山公亮)씨는 왜구의 원인을 소위 몽고의 일본침공의 영향, 특히 이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것이 국민들을 자각하게 한 것이요, 영광의 승리를 거둔 것이 일본인의 자존심 내지 자부심을 크게 향상시킨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말하면 복수와 경멸의 마음이요, (중략) 대마도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유리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위를 오랜 기간에 걸쳐서 감행한 이유의 대부분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왜구는 몽고군의 일본침공 보다 50년이나 이전에 이미 발생하고 있으며, 별고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왜구를 일시적이나마 억제하는 역 할마져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왜구의 구성원이었던 무사들이 국민적 자각 자 부심 만으로 고려나 원나라를 침공할 정도로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 아오 마 고오 ( 91) 92) 는 것이다. 4) 그 외의 설 壹岐)등의 큐우슈우 지역의 경제적인 빈곤 대마도나 이끼( 93) 또는 경제성장94)에 왜구 타 저 야 코 료 靑山公亮 倭寇の生起に關する一二の考察 日麗交涉史の硏究 明治大學 文學部文學硏究所 목 야 복 만 강목 東史綱目 충 봄 倭寇固城 倭自元征東之役 常欲釋憾于我 而畏元不敢動 時 元政衰弱 倭時來寇固城巨濟等處 식 호 받 김 저 新編 高麗時代史 출판 논 큐 슈 빈곤 타 받 좋 환 만 식료 족 강 편 필 米穀 저 倭寇の生起に關する一二の考察 恭愍王朝における彼我關係 90) 전게 주(57) 나카 서 p.42. 91) 아오 마 오 ( ), (, 1955), p.78. 주 해 할 것은 이러한 생각이 조선왕조의 영조대의 학자 인 안정 이 아동용의 역사교과서로 든 동사 ( ) 에도 보이는 것이다. 즉, 정 왕 경인 2년(1350) 2월조에,,,,, 라고 보이는데, 이러한 인 은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왜구가 발 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아들여지고 있다( 상기 서 울대학 부, 1985년). 92) 전게 주(27) 문. 93) 대마도나 이끼도 등의 우 우 지역의 경제적인 을 왜구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주장은, 거의 모든 왜구연구자들에 의해, 가장 당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아들여져 왔다. 은 경작 지가 없는 대마도의 자연 경에서 오는 성적인 부 을 조하는 한, 왜구발생의 원인 중의 하나로 고려가 대마도가 절대적으로 요로 하였던 미곡( )의 교역을 지하였던 점 에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호 발 의 원인을 구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경제적 137 빈곤이나 경제적 성장이란 아시아의 전 특히 134세기에 한정되지 않는 사회현상으로, 그 어느것도 왜구의 한 요인은 될 수 있으나 왜 이 시기에 왜구가 발생하였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충분한 설 근대사회에 있어서 명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구가 13세기에 발생해, 약 85년간의 공백기를 거쳐서 14세기 후반에 대규모화하는 특유의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존설 로는 왜구의 발생 및 발호의 원인을 당시의 국내정세와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서 고찰하는 관점이 그 어느 경우에도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이하, 이들 기존설에 대한 비판을 토대 로 하여 왜구의 실태에 대하여 검토하도록 하자. 것에는 이 시대 2. 왜구와 악당 떠 측 직접적인 문 헌사료는 많지 않다. 그래서 고려측의 사료에 나타나는 왜구의 행동에 대하여 주목하고 싶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약탈을 마친 다음에도 곧바로 철퇴하지 않고, 벼나 조 를 베어서 양식으로 삼고, 소와 말을 약탈하였으며, 고려의 관청을 공격하고 방화하 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러한 왜구의 행동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시 [악당]이라고 불리우고있던 존재이다. 악당의 행동 중에 특히 중심을 이루 왜구가 당시 일본에서 어 한 사회적 존재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일본 의 95) 96) 97) 98) 99) 둘 다 전게 주(77) 아오야마 저서 所收). 이러한 주장은 한국학계에서도 정설로서 받아들여 지고 있다(박용운, 高麗時代史 下, 一志社, 1986, p.625). 94) 가와이 마사하루(河合正治), 瀨戶內海의 歷史 (至文堂, 1967), p.134. 95) 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 ( 고려사 권제134, 열전제47, 신우5년 7월조), 倭留蔚州, 刈稻委 爲粮, 侵及機張 彦陽, 掃地無遺 ( 고려사절요 권제31,열전, 신우5년 7월조), 是時, 全羅 慶尙 二道爲倭寇巢穴 ( 고려사 권제137, 열전제137, 신우14년 3월 경자조). 96) 倭留蔚州, 刈稻委爲粮, 侵及機張 彦陽, 掃地無遺 ( 고려사절요 권제31, 열전, 신우5년 7 월조). 97) 高麗史 권제112, 列傳제25, 柳淑 傳에 倭又寇朗山 豊堤等縣, 實與元帥柳榮力戰射殪三十 餘人, 奪所掠牛馬二百餘還其主, 권제114, 열전제27, 崔雲海 전에 雲海日與戰, 獲牛馬財貨輒 與士 卒及住民, 권제134, 열전제47, 신우5년 10월 무진조에 小國(中略)馬有二種, 曰胡馬 者從北方來 者也, 曰鄕馬自國中之所出也, 國馬如驢, 無從而得良焉, 胡馬居百之一二, 亦中國所 知也, 近因倭寇 損傷殆盡 이라고 보인다. 98) 倭寇密城, 焚官廨, 虜掠人物 (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46, 공민왕23년 12월조), 倭寇古 阜 泰山 興德等地, 焚官廨 (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46, 신우2년 9월조), 倭焚合浦營, 倭寇全 州, 焚官廨 (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46, 신우2년 12월조). 99) 악당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① 이류이형(異類異形) ② 해적 ③ 약탈 ④ 강도 ⑤ 산적 ⑥ 큰 나무를 산위에서 굴려 떨어트리고 돌을 던지는 것 ⑦ 농성 ⑧ 배반행위 ⑨ 박 ⑩ 절도. 이 외에 악당의 행동으로, 구로타 도시오(黑田俊雄)씨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138 國史館論叢 第92輯 농토에 있는 곡식을 마음대로 베어가는 일(刈田狼藉) 과 돈이나 값 비싼 물건을 약탈하는 일(錢貨資財物奪取) 이었는데, 고려 조운선이 적재하였던 물품 이 주로 당시 화폐로 쓰여지고 있던 쌀과 포목 그리고 비단 등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운선 을 공격하는 것은 이 두가지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또 왜구들이 소 와 말을 약탈한 것도 악당의 행위와 일치한다. 그리고 악당의 행위 중에 장원에 대한 침입 은 고려에 대한 침구, 장원 연공(年 貢)의 억류 는 조운선의 약탈, 장원의 만도코로(政所)나 납소(納所) 등에 대한 방화 는 고려의 관청에 대한 공격과 방화 에, 각각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후지키 히사시(藤木久志)씨는 14세기 악당의 행동양식의 하나의 정형(定型)으로 써, 우선 만도코로(政所=장원의 행정을 맡아보는 곳)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장원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집에도 방화하고, 칼을 휘둘러 연공으로 바칠 쌀 수백석을 빼앗아 달 아났다 고 한 다음, 그 악당들이 곧바로 만도코로를 습격한 것은 (중략) 그 곳이 [장원 의 성(城)]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중략) 이처럼 성을 파괴하는 것은 상대의 영역(領域) 을 부정하는 의미가 있다 고 하였다. <경인년 왜구>에 의한 고려의 관청에 대한 공 격과 방화 는 그야말로 <14세기의 악당>에 의한 만도코로(政所)에 대한 방화 에 상당하 고 있는 것이 남의 100) 101) 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 항만이나 시장(市場)을 습격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항만 세키쇼(關所) 시장 등을 경제적 기반중의 하나로 삼고 있었던 장원영주나 가 라꾸라 막부(北條得宗家)의 지배체제로서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이는 <13세기의 왜구 >가 주로 경상도 일대의 조세가 모여드는 교통 및 행정의 중심지였던 금주(金州)를 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과 일치한다. 원응(元應) 2년(=1320년), 히고노구니(備後國) 오오타노 악당은 각지의 장원 이 에 중요한 102) 103) 억류 만 꼬 政所 소 納所 타 논밭 물 베 소 말 惡黨とその時代 日本中世封建制論 東京大學出版會 小泉宜右 惡黨について 論集日本歷史 鎌倉幕府 有精堂 藤木久志 村の城 村の合戰 朝日百科日本の歷史 歷史を讀みなおす 城と合戰 朝日新聞社 年 水路 징 목 특 족 찌막 즈 코 佐藤和彦 南北朝內亂 日本の歷史 小學館 스케 村井章介 변 소령 떨 람 확 얻 폭력 소 활 소 강 世紀の日本 岩波講座日本歷史 中世 들었다. 즉, 장원내부로 침입, 장원연공의, 장원의 도 로( ) 나 납 ( ) 등 에 대한 약탈과 방화, 인의 에서 재배하는 작 을 함부로 어내는 일, 백성들의 와 을 약탈하는일(,, 1974). 100), ( 4, 1976), p.301. 101) 후지키 히사시( ), ( 15, < >, 1993 ). 102) 도로 및 수로( )에 설치된 검문 수하기 위한 시설. 고대이래로 군사적인 적으로 제 도화되었으나, 히 남북조 내란 이후는 재원이 부 하였던 무로마 부나 장원영주들은 세끼쇼를 설치하였다. 103) 사또오 가 히 ( ), ( 11,, 1974), p.19. 또 무라 이 쇼오 ( )씨는 경제 동에 의해 본래의 지행체계로부터 어져 나간 사 들이 유통의 대가 초래하는 부를 기 위해 일으키는 적인 행동 이 악당 이라고 가정 한 다음에, 악당이 교통의 요 를 동장 로 하였음을 조하였다( 13 14 ( 8 < 2> 1994년).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139 大田庄) 구라시키(倉敷) 오노미치우라(尾道浦)에 난입하여 대선(大船) 수십 척으로 자산재물(資産財物) 을 약탈해 간, 히고노구니의 슈고(守護) 나가이 사다시게(長井 貞重)의 대관(代官) 이하 수백명의 악당들의 행동양식은, 왜구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왜구와 악당의 공통점을 염두에 두면서 왜구의 전법에 대 하여 주목해보기로 하자. 쇼오( 104) 賊步騎千餘登幸安山, 我兵四面攻之, 賊徒奔潰, 遂大破之. 2) 賊至靈山, 據險自固 (中略) 賊中狼狽登山(智異山), 臨絶涯,露刃垂槊如蝟毛,官軍不得上(中 略) 倭又寇班城縣, 登確山頂, 樹柵自保. 3) 倭自智異山逃入無等山, 樹柵圭峰寺巖石間, 三面峭絶, 唯小逕緣崖, 僅通一人, 4) 南秩擊智異山餘倭, 斬四級幷捕獲馬十六匹, 5) 時倭賊千餘人陷沃州 保寧等縣, 遂入開泰寺, 據鷄龍山, 6) 太祖令曰, 賊窮可哀,勿殺生擒之,餘賊入千佛山, 1) 105) 106) 107) 108) 109) 110) 료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가 불리해지 면 산악의 험악한 지형을 이용하여 책(柵)을 세우고 농성하는 전법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험악한 산악 지형에 의존하여 농성하면서 거목(巨木) 을 굴리고 돌을 던 지는 악당의 전법과 유사한 것이다. 즉 후지키 히사시(藤木久志)씨는 <14세기 악당>의 성에 대하여 성이라고 해도 14세기의 그것은 높은 천수각(天守閣)이나 돌로 쌓은 성벽 이 있는 근세의 성과는 전혀 다르다. (중략) 이 시대에는 해자(垓字)나 망루(望樓), 바리 케이트의 기능을 가진 나무뿌리나 줄기 나무방패 등이 설치되어 있다면, 그것을 누구나 성이라고 여겼음이 틀림없다 고 하였는데 사료2)의 臨絶涯, 露刃垂槊如蝟毛 登確 山頂, 樹柵自保 나 사료3)의 樹柵圭峰寺巖石間, 三面峭絶, 唯小逕緣崖, 僅通一人 은 그 야말로 악당의 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경인년 이후,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고려정부가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해서 진압해 야만 하였던 국내의 반란세력이라고 하면 제주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주도의 반란세력 은 왜구와는 달리 전세가 불리해져도 산악이라는 지형을 이용하는 일 없이, 넓은 평야로 고려군을 유인하여 싸우는 전술을 취하고 있다. 왜구만큼 자연지형을 교묘하게 이용 이들 사 로부터 왜구는 배를 111) 112)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元應 2年 8月日 金剛峰寺衆徒等解狀(紀伊金剛峰寺文書, 鎌倉遺文 27558호). 고려사 권제114, 열전제27, 고려사 권제114, 열전제27, 고려사 권제134, 열전제47, 고려사 권제134, 열전제47, 고려사 권제114, 열전제27, 고려사 권제116, 열전제29, 전게 주(101) 후지키 문. 논 나세 전. 우인열 전. 신우 7년 4월 기사조. 신우 7년 9월조. 문 한 전. 부 전. 달 심덕

140 國史館論叢 第92輯 하여 단시간에 성을 았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전투집단은, 당시 고려국내에는 존재하 지 않 던 것이다. 佐藤進一)씨에 의하면 남북조내란기(南北朝內亂期)에 들어 가면, 도검(刀劍)이나 갑옷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전투형태상에 있어서 변화가 보인다 고 한다. 칼신(刀身)의 곡선이 완만해지고, 창이 사용되는 것인데, 그것은 전투형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가마꾸라시대까지의 평탄한 지형에서의 기사전(騎射戰) 에서 복잡한 지형 암석 수목이라고 하는 것을 전투조건에 감안한 산악지형에서의 게릴 라식 전투, 공성전(攻城戰), 농성전(籠城戰)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러한 산악지형 을 이용한 전투로서 대표적인 것이 유명한 원홍(元弘) 3년(1333)의 사천왕사(四天王寺) 전투에서 치하야성(千早城)의 농성전에 이르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전법이었 다. 이러한 악당의 전법과 같이, 왜구도 또한 창을 이용하였다. 왜구의 소년대장인 아기 발도(阿只拔都)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이성계에 대하여 창을 무기로 하여 싸우고 있는 그런데 사토오 신이치( 113) 114) 것이다.115) 같이, 왜구와 악당은 그 실태가 서로 아주 닮은 존재였다. 단지 양 자는 다른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으므로, 이를 손쉽게 동일한 존재로 볼 수는 없다고 하 는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倭) 라고 하는 것은 고려 중국인이 일본을 멸시하여 부르는 칭호로, 왜구 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일본인 해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고려와 중국국내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고려나 중국이 일본에 보 내는 외교문서는 물론, 당시 일본측의 기록에서도 왜구 라고 하는 용어를 발견하는 것 은 불가능하며, 고려나 중국의 사료에 보이는 왜구의 특징이나 행동양식에서 그 실태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악당은 그 특징이나 행동양식의 측면에서 왜구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3세기와 14세기 후반 이후, 고려에서 왜구 라고 불리고 있던 존재의 실태가 악당 이 었음을 보여주는 문헌도, 얼마 되지 않지만 남아있는 것이다. 다음 사료를 보자. 이상에서 본 바와 7) 嘉祿三年七月二十一日, 於關白直廬, 有議定事, 左大臣以下參入, 去年對馬國惡徒等, 向高 麗國全羅州, 奪取人物, 侵陵住民事, 可報由緖之由, 牒送, 大宰少貳資賴, 不經上奏, 於高 최영 전에 翌日, 至濟州, 瑩部署諸將四面分攻, 石迭里必思 肖古禿不花觀音保等以三千餘騎拒於明月浦 (中略) 諸將屯漢拏山下, 休兵時, 我師多獲賊馬悉爲 騎兵矣, 賊魁三人來挑戰陽敗而走, 將誘致曉星 五音之野, 以騎兵踣之 라고 보인다. 113) 佐藤進一, 南北朝の動亂 ( 日本の歷史 9, 中央公論社, 1965), pp.198 200. 114) 아라이 다카시게(新井孝重) 中世惡黨の硏究 (吉川弘文館, 1990년). 115) 有一賊將, 年纔十五六, 骨貌端麗驍勇無比, 乘白馬舞槊馳突, 所向披靡莫敢當, 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中略) 遂躍馬射之 (後略) 이라고 보인다( 고려사 권제126, 열전제39 변안열 전). 112) 고려사 권제113, 열전제26,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麗國使前, 捕惡徒九十人斬首, 偸送返牒云云, 我國之恥也, 牒狀無禮云云, < 141 116) 록 嘉祿) 2년(1226) 고려의 금주를 침구한 범인들에 대하여, 다자이쇼오니(大宰少 貳) 스케요리(資賴)는 참수 라고 하는 엄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햐쿠렌쇼(百練抄) 에는 그 때의 왜구를 해적 이 아니라 악도(惡徒)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시기는 내려오지만 네지메몬죠(禰寢文書 에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사료가 있다. 가 ( 8) 京都御敎書案 當國惡黨人等, 渡高麗致狼藉由事, 嚴密可加制止, 若猶不承引者, 爲有殊沙汰, 可注申名之 狀, 依仰 執達如件, 斯波義將 永德元年八月六日, 左衛門佐御判 ( ( ) 今川貞世 了俊) 大隅國守護 117) 덕 永德) 원년(1381)의 위의 사료에 의하면 고려로 건너가서 약탈을 행한 오오스미 노구니(大隅國)의 해적을 악당인(惡黨人) 이라는 용어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악 당 이라고 하는 문자는 보이지 않으나, 다음의 타이헤이키(太平記) 의 기사도 왜구의 실 영 ( 태가 악당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 년동안, 우리나라에는 큰 난이 일어나 외국도 조금도 조용하지 않았다. 이 동란을 틈타서 산에는 산적들이 활개를 쳐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숲속을 지나갈 수가 없었으며, 해 상에는 해적들이 많아서 배를 타는 사람들은 해적들의 습격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욕심많은 떠돌이 무사들은 끼리끼리 모였다. 전국의 포구와 섬들은 대부분 도적들에 의해 빼앗겼으며 각 역에는 역장도 없고 각 검문소에는 이를 지키는 사람들도 바뀌었다. 결국, 이러한 도적들 은 수천척의 배를 갖추어서 원나라와 고려의 각 포구로 쳐들어가서, 명주(明州) 복주(福州) 의 재물을 약탈하였다. 관사(官舍) 사원을 방화하자 원나라와 고려의 백성들은 이를 막지 못하여 포구에서 가까운 지방에서는 살 수 없어서 황폐해지고 말았다(후략). 118) 활동하였던 아후레모노도모(溢物共) 라고 하는 것은 정해진 주인도 소령(所領)도 없이 전장(戰場)을 떠돌아 다니면서 난폭한 행위를 하는 무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편력하는 무사단 을 생생하게 묘사한 미네아이키(峰相記) 의 악당 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 전국의 포구와 섬들은 대부분 도적들에 의해 빼앗겼으 여기서 왜구로서 119) 百練抄 嘉祿 3年 7月 21日條. 永德元年 8月 6日 幕府管領斯波義將奉書(禰寢文書3, 禰寢氏文獻雜聚卷之一, 東京大學史料編 纂所架藏寫眞帳 p.18). 118) 太平記 高麗人來朝事 ( 日本古典文學大系 36, 岩波書店). 119)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鎌倉末期の諸矛盾 ( 講座日本史 3, <封建社會の展開> 東京大學 出版會, 1970年). 116) 117)

142 國史館論叢 第92輯 소 람 뀌 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요한 항만이나 시장을 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고 하는 악당의 모습에도 합치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검토를 통하여 13세기에서 14세기말까지 고려를 습격한 왜구가 가마꾸라 시대 중말기에서 남북조 시대에 걸쳐서 악당 이라고 불리어졌던 사회적 존재와 거의 일 치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존 연구에 있어서도 예를 들면 무라이 쇼오스케(村井章介) 씨는 사료8)의 내용에서, 그리고 왜구의 여러 획기(劃期)와 일본국내의 전란과의 사이 에 병행관계가 보이는 사실에서부터, 왜구가 일본국내의 사회상태나 정치과정과 유기적 며 각 역에는 역장도 없고 각 검문 에는 이를 지키는 사 들도 바 었다 라고 하는 것 인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20) 그러나, 그것은 왜구와 악당이 무관한 것은 아니 었다 121)라고 드 하는 무라이씨의 표현대로 반 시 악당을 왜구의 실체로까지 파악한 것은 佐伯弘次)씨는 왜구를 동시기(同時期)의 일본국내의 해적의 아니었다. 또 사에키 고오지( 직임과 관련지어서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본고의 검토를 바탕으로 한다면, 왜구는 해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당이라고 하는 보다 넓은 사회적 계층속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아미노 요시히코(網野 善彦)씨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해적이라고 하는 것은 해민(海民)을 주요한 구성원으 로 하는 무사단으로써 덴뾰오(天平) 시대에 이미 세또나이까이(瀨戶內海)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들어오면 한층 더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에 대하 여 악당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처음으로 사료상에 등장하여 가마꾸라 시대 말기부터 최대의 사회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천재(天災), 기근(饑饉), 가렴주구(苛斂誅求) 나아가 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동에 의하여 본래의 생업 거주지를 떠나야 했던 자를 포함하여 사사(사원과 신사) 등의 장원영주의 지배영역이나 권익을 무력으로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농민 수렵민 어민 상공민 악승(惡僧) 신인(神人) 장원의 장관(莊官) 이나 지두(地頭) 토호(土豪)나 유력한 묘오슈(名主)등, 폭 넓은 계층에서 나타났 다. 가마꾸라 막부 추가법(鎌倉幕府追加法)에도 해적을 위시하여 산적 요우치(夜 움 122) 123) 124) 125) 126) 스케 村井章介 建武 室町政權と東アジア 講座日本歷史 四 中世二 東京 스케 논 코 中村榮孝 꾸 외 처 야만 했 불 말 필 十 三 四世紀の東亞情勢とモンゴルの襲來 舊版 岩波講座日本歷史 中世 논 꼬 日本中世における海民の存在形態 社會經濟史學 누 겐 長沼賢海 日本の海賊 至文堂 永萬元年 月 日 占部安光書紛失狀案 櫟木文書 平安遺文 호 安元元年 月日 東 大寺衆徒解狀案 東大寺文書 平安遺文 호 120) 무라이 쇼오 ( ), ( < >, 1985), p.27. 121) 전게 주(120) 무라이 쇼오 문 p.27. 그리고, 나카무라 에이 ( )씨도 13세기 (의 왜구)의 경우, 가마 라 정권이 적방어와 동시에 대 해 던 악당 과 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은 할 요도 없다 고 하고, 13세기의 왜구의 정체가 악당 이라 하였다( ( 6 < 2> 1963년). 122) 전게 주(76)사에키 문. 123) 아미노 요시히 ( 365, 1971년) 124) 나가 마 까이( ) (, 1955년). 125) 3 21 (, 3355 ), 12 (, 3732 ). 大學出版會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討) 등이 악당 속에 포함되어 있다. 127) 왜구가 된다 128)고 야 할 것이다. 확 사에키 고오지씨는 하였으나 보다 정 하게 말하자면 143 해적이 국경을 넘었을 때 해적 이 아니라, 악당 이라고 해 층 단지 이 악당 이라고 하는 용어는 하나의 신분 계, 일정한 악행의 내용을 가리키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음 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 려를 침구한 왜구와 악당의 특징이 유사하다고 해도, 왜구를 곧 하나의 신분이나 계층과 결부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미네아이키(蜂相記) 나 타이헤이키(太平記) 에 보 이는 것과 같은 아후레모노(溢物)나 해적 산적 등과 같은 존재가 왜구 속에 많이 포함 되어 있었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사회에는 국가권력이 무력을 독 점하고 있었던 고려와는 달리, 12세기 헤이안 시대 말기 이래로, 사회내부에서부터 무력 이 요구되어지고, 가마꾸라 시대 중말기, 특히 남북조 시대의 내란기에는 모든 계층의 사 람들이 분쟁을 해결하는 데 무력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남북조 시대에 들어와서는 계기만 주어지면, 당시 악당 이라고 불리 워지고 있던 존재에 한하지 않고, 해상이동의 수단을 지니는 무장집단이라면 누구라도 일 시적인 피난처 또는 병량미를 구하기 위해 이웃나라인 고려로 침구하는 것은 충분히 가 능하였을 것이다. 특히, 남북조 당시에는 왜구를 금압하고 있던 가마꾸라 시대와는 달리, 공권력이 양분 삼분되어 다투고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이 점은 한층 더 설득력이 있을 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129) 130) 것이다. 惡黨의 意味나 關聯硏究에 대해서는 小泉宜右 補說3, 惡黨 (井上光貞 永原慶二編 日本 歷史大系 2 <中世> 山川出版社, 1985년), 海津一郞 惡黨 ( 中世の變革と德政, 吉川弘文 館, 1994년), 網野善彦 惡黨と海賊 日本中世の社會と政治 (法政大學出版局, 1995년) 을 참조.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惡黨을 倭寇와 적극적으로 관련지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 고 있다. 127) 鎌倉幕府追加法 320조( 中世法制史料集 제1권)에 國國惡黨令蜂起, 企夜討强盜山賊海賊之 由, 有其聞 이라고 보인다. 128) 전게 주(76)佐伯 논문. 129) 惡黨에 관한 기존연구는 (1)惡黨認識을 宗敎的인 惡業과의 關聯下에 파악하는 연구 (2)莊園 制再編成下의 구조적인 職의 실업자 문제로서 파악하는 연구 (3)鎌倉後期 國家權力의 檢斷 시스템의 변화로서 파악하는 연구,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전게 주(126) 海津 논문). 130)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요시에 아끼오(義江彰夫) 鎌倉中末期の社會と南北朝の內亂 ( 日本通史 1, <歷史の曙から傳統的社會の成熟へ> 山川出版社, 1986년)을 참조. 126)

144 國史館論叢 第92輯 Ⅲ. <대규모화 장기화>의 원인 1. 득종전제하(得宗專制下)의 악당의 사회적 비중 불리우던 존재와 중첩된다면 경인년 이후, 왜구가 급격히 대규모화하는 것은, 1314세기의 일본사회내부에서 차지하는 악당 의 사회적 비중이나 국내정세의 변화와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 이, 악당이 사료상에 최초로 보이는 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이지만, 막부법의 세계에서 자 주 등장하게 되는 것은 호오죠오 야스도키(北條泰時:11831242)의 시대부터이다. 그 런데, 왜구도 똑같이 그가 싯껜(執權)이었던 정응(貞應) 2년(1223)부터 시작되고 있다. 악당의 활동을 법으로 규제해야 할 정도로 활발해진 시기에, 왜구도 최초로 발생하고 있 음은 양자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악당이 가마꾸라 시대 중말기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가마꾸라 시대 중말기의 농업생산력의 증대에서 파생된 화폐경제의 침투 등, 사회전반에 걸친 경제적인 변화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악당은 당시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의해 모든 계층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나, 호오죠오 야스도키(北條泰時)의 시대에는 악당의 존재는 당시 장원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계급들에게 있어 아직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이는 별고에서 검 토한 바와 같이 <13세기의 왜구>가 아직 고려의 국가로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 도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음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고오안 년간(弘安年 間:12781287) 이후가 되면, 거꾸로 장원영주측이 스스로 막부에 악당진압을 의뢰하게 끔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오안 년간 이후, 즉 몽고의 두차례에 걸친 침입 이후에 일본사회에 있어서의 악당의 사회적인 비중에 변화가 생긴다고 하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구의 특징이 당시의 일본사회에서 악당 이라고 131) 132) 133) 134) 135) 136) 137) 網野 논 스케 村井章介 뀨 난 倭寇と朝鮮 アジアのなかの中世日本 校倉書房 小泉 논 網野 논 습 鏡 람 護 범 吾妻鏡 貞永元年 閏 月 日條 논 元寇前後の社會情勢について 歷史學硏究 참 131) 전게 주(123) 문. 132) 무라이 쇼오 ( )씨는 이 시기의 왜구를 죠오 우의 과 관련지어서 이해하고 있 다(,,, 1988, p.314). 133) 전게 주(100) 문. 134) 전게 주(123) 문. 135) 예를 들면, 1232년에 고려를 격한 카가미( ) 신사의 사 들을 체포하고자 하는 고( )에 대하여 인의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 9 17 ). 136) 전게 주(27) 문. 137) ( 231, 1959)을 조. 슈 守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145 기존의 연구에 있어서도 악당이 등장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득종전제하에 있어서의 순 만 층 더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게 하여 보다 더 빠른 시기에 표출하게 하였던 직접적인 원인은 몽고의 일본침공 에 있었다고 한다. 즉 몽고의 일본침공 이라고 하는 외침의 중압은 득종정권의 전제적인 지배를 한층 더 강화시킴으로써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격화시켜서 그 표출을 앞당겼던 것이다. 일본침공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는 악당 이라는 이름의 분쟁은 그러한 모순이 격화 됨을 보여주는 것인데, 관원(寬元) 3년(1245)에는 이미, 악당을 단속해야 할 슈고(守 護) 지두 등의 고께닌(御家人) 무사들이, 스스로 그들을 끌어 안는다고 하는 현상이 나 타나, 원응(元應) 2년(1320)에는, 빈고노구니(備後國) 슈고인 나가이 사다시게가 거느리 고 있던 악당 등을 동원하여 오오따노쇼오 구라시키 오노미치우라에 침입시키는 등, 슈고 와 지두 고께닌무사 등의 행동도 악당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미네아이키(峰相記) 에 의하면, 정중(正中) 가력(嘉曆) 무렵(132429)에는 警固守護等彼ノ權威ニ恐レ, 追 討ノ武士モ還テ憚成ス 라고 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 규모도 결합형태가 수십명의 의제적(擬制的)인 혈연관계에서 지연적인 성격을 강화 해 가 남북조 내란기에 들어가면, 전란을 이겨내기 위하여 고쿠진(國人) 잇끼 를 형성 일본사회의 내부모 에 있었지, 그것을 한 138) 139) 140) 할 정도로 성장해 간 것이었다.141) 처럼, 가마꾸라 시대 말기에 있어서 악당 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여러 가지 형태의 분쟁이, 큰 흐름이 되어서 남북조의 내란으로써 폭발하는 것인데 경인 년 이후의 왜구가 대규모화하는 기본적인 전제는 이미 가마꾸라 시대 말기에 갖추어져 이 있었던 것이다. 2. 남북조내란기( 南北朝內亂期)의 사회상황 몽고의 일본침공 이후, 더욱 더 전제화되어 간 득종정권이 사회내부의 모순을 한층 더 강화해 간 결과, 악당 이라고 불리우는 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 남북조의 내란으로 폭발한다. 따라서, 왜구가 경인년 이후 대규모의 왜구로서 나타나는 시대적인 조건은 역시 이 남북조의 내란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이하 <경인년 이후의 왜구>가 대규모화한 것과 일본의 국내정세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고찰해보자. 142) 138) 139) 140) 141) 142) 網野 논문. 網野 논문. 小泉 논문. 黑田俊雄) 惡黨とその時代 ( 日本中世封建制論 東京大學出版會, 1974年). 전게 주(137). 전게 주(137) 전게 주(100) 구로다 도시오( 峰相記

146 國史館論叢 第92輯 승려인 양유(良柔)와 더불어 일본에서 귀국한 나흥유 (羅興儒)는 일본의 승려 주좌(周佐)의 다음과 같은 서신을 가지고 왔다. 우왕 2년(1376) 10월, 일본의 惟我西海道一路九州, 亂臣割據, 不納貢賦, 且二十餘年矣, 西邊海道頑民觀釁出寇, 非我所爲, 是故朝廷遣將征討, 架入其地, 兩陣交鋒, 日以相戰, 庶機克復九州, 則誓天指日禁約海寇, 143) 西海道)의 큐우슈우 지역에 난신(남조측)이 할거하여,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 은지 이미 20년이 지나고 있다. 서쪽해도의 완민(頑民)들이 이를 틈타 고려를 침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우리들의 소행이 아니며, 조정이 부대를 큐우슈우의 깊숙한 곳까지 파견 하여 매일 전투를 하고 있으니, 큐우슈우만 평정되면 해구는 금지할 수 있을 것을 하늘과 태양에 맹세한다고 하였다. 나흥유가 지니고 온 주좌(周佐)의 서신은 우왕 3년(1373) 6월에 판전객사사(判典客寺 事)인 안길상(安吉祥)을 일본에 파견하였을 때의 서신인 다음 사료에 보다 상세하게 인 서해도( 용되고 있다. 貴國回文言稱, 此寇因我西海一路九州亂臣割據西島, 頑然作寇, 實非我所爲, 未敢卽許禁約, 144) 귀국(=일본)의 회답에 의하면 고려를 침구한 왜구는 서해일로(西海一路)의 큐우슈우 (九州)의 난신들(남조측)이 서쪽 섬에 할거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기에, 곧 바로 금지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이마가와 료오준(今川了浚)이 승려인 신홍(信 弘)을 파견하여 草竊之賊, 是逋逃輩, 不遵我令, 未易禁焉 즉, 고려를 침구하는 왜구 는 (일본에서) 도망한 집단으로 우리들(北朝側)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아직 쉽게 금지 할 수가 없다고 했다. 逋盜輩 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부터 도망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밝히 지 않고 있으나, 不遵我令 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마가와 요로준의 공격을 받고 도 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왕 3년의 5년전에 해당하는 응안(應安) 5년(1372)에 남조측의 정서장군부(征西將軍府)는 이마가와 료오준에 의해 대재부를 쫓겨 나 남조측의 군세는 치쿠고(筑後)의 고오라산(高良山) 히고(肥後)이 기쿠치(菊池) 등에 있었던 것, 게다가 우왕 3년 6월의 안길상의 서신 내용을 아울러 고찰하면, 이 逋盜輩 라고 하는 것은 남조측 의 세력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즉, 이마가와 료오준의 세력에 쫓긴 남조측의 부대는 서도(西島)=아마도 쓰시마 이끼 등의 여러섬 를 하나의 군사적인 거점으로 하여 고려를 습격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145) 143)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 46, 신우 2년 10월조. 144)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 46, 신우 3년 6월 을 조. 145)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 46, 신우 3년 8월 무오조. 묘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147 료오준이 다시 신홍을 병사 69명과 함께 고려에 파견, 왜구의 토벌을 명령하였다. 신홍의 부대는 다음달 조양포(兆陽浦)에서 왜구의 배 한척을 나포하여 전원을 베고 포로가 되어있던 부녀 20여 명을 구출한 것이었 다. 그리고 우왕 5년(1379) 5월에는 같은 북조(北朝)측의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 弘)가 박거사(朴居士)와 186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왜구토벌에 협력하도록 하였던 것이 다. 처음에는 막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하였던 고려조정도, 여러 차례에 걸친 사 자나 일본측의 병력의 파견을 통하여 일본의 사정을 이해하고 이마가와 료오준에게 금 은 주기(酒器) 인삼(人蔘) 등을 보내는 등, 북조측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이게 끔 된다. 다음 사료를 보자. 다음해인 우왕 4년(1378) 6월에는 이마가와 146) 147) 148) 149) 十三年, 地(鄭地)上書, 自請東征曰, 近中國聲言征倭, 若並我境分泊戰艦, 則非惟支待爲艱, 亦攻覘我虛實, 倭非擧國爲盜, 其叛民據對馬 一岐諸島, 近我東鄙, 入寇無時, 若聲罪大擧, 先 攻諸島, 覆其巢穴, 又移西日本, 盡刷漏賊, 使之歸順, 則倭患可以求除, 中國之兵亦無因而至 矣, 150) 知門下府使)였던 정지(鄭地)가 일본은 거국적으로 고 려를 침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민(남조측)이 대마 일기 등의 여러 섬을 근거로 하고 있 으므로, 대마 일기등의 소굴을 공격하여 그들을 (북조측)에 귀순시킨다면, 왜구도 또한 없어진다 고 건의하고 있다. 즉 그는 대마 일기의 주민이 왜구의 주체가 아니라, 대마 일기 등의 제도가 반민(남조측)의 소굴이 되어있다고 인식함과 동시에, 일본(무로마찌 막 부)에 국서를 보내어 (무로마찌 막부와 협력하여) 남조측의 왜구를 북조측에 귀순시키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지가 이 시기에 대마 일기 등에 대한 원정을 건의한 이 유는, 왜구토벌을 구실로 하여 명나라 군대가 고려를 엿보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인데, 고려정부는 자국을 침구하고 있는 왜구의 주된 세력이 남조측의 병력인 점, 그리고 왜구 의 우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남북조의 내란을 종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 우왕 13년(1387)에 지문하부사( 고 있었던 것이다. 꾸 막부에 의해)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던 13세기까지와는 달리, (남북조내란의 당사자인 남조측의) 군사력으로 이리하여 경인년 이후, 고려를 침구한 악당(왜구)는 (가마 라 써 동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146) 147) 148) 149) 150) 고려사 고려사 고려사 고려사 고려사 권제133, 열전제46, 신우 4년 6월조. 권제 133, 열전제46, 신우 4년 7월조. 권제 134, 열전제 47, 신우 5년 5월 무인조. 권제133, 열전제46, 신우 4년 10월조. 권제113, 열전제26, 정지 전.

148 國史館論叢 第92輯 떻 고려에 침구하고 있던 왜구가 구체적으로 어 게 구성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알수 없다. 왜구의 성원에 대하여는 종래 <13세기의 왜구>도 <경인년 이후의 왜구>도 그 중 심이 된 것은 대마 일기 히젠 마쯔라또오(肥前松浦黨) 등의 지역 주민이라고 생각되 어 왔다. 그러나, 사료8의 무로마찌 막부 칸레이 호오쇼(管領奉書)는 큐우슈우의 남 쪽 끝에 위치한 오오스미(大隅) 지방에서도 고려에 침구한 악당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오스미노구니(大隅國)만이 아니라 큐우슈우의 모든 구니(國)에 대하여 보내 어졌을 가능성도 생각한다면 대마 일기 히젠 마쯔라또오(肥前松浦) 등은 고려나 중국 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 지리적인 조건에서 왜구의 한 거점이라고는 해도 왜구의 출신지 가 반드시 이들 지역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이헤이키(太平記) 의 [高麗人來朝事]에는 고려 원나라에 침구한 왜구를 적선(賊船)이 이국(異國)을 침범하 는 것은 모두 시코쿠(四國) 큐우슈우(九州)의 해적들이 하는 짓으로 제도(帝都)에서는 엄한 벌을 가할 수 없다 고 해, 왜구는 대마 일기등의 북구주일대에 한정되지 않고, 큐우슈우 전역이나 시코쿠의 넓은 지역의 해적들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구에 관한 太平記 의 사료적 신빙성이 높은 것은, 이미 나카무라 에이코오(中村榮 孝)씨에 의해 입증된 바이고, 또 우선 이 기사를 부정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료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구집단은 남조와 북조의 어느 공권력에 의해서도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것도 아니 나, 그 영향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의 왜구집단은 직접 간접적으로 그러한 공권력, 특히 남조측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남조가 악당세력을 주된 군사력으로서 이용하고 있었던 사실이나, 특히 해적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유명하다. 정서장군부(征西將軍府)는 해적중(海賊衆) 이라고 불리우는 많은 수군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카네요시(懷良) 친왕 (親王)이 큐우슈우 지방에 들어올 때까지 3년 동안이나 세또나이까이의 해적인 구쯔나 151) 152) 153) 스케 차 출 최 151) 예를 들면, 무라이 쇼오 씨는 <경인년 이후의 왜구>도 그 신지가 대마도와 이끼, 그리 고 히 의 마 라가 태반을 지하였다고 하며, 그 이유로써 (1)지역경제의 자급 가능, (2) 배를 조종하는 주민들의 행동, (3)조선과 중국으로 가는 전선이라고 하는 지리적인 조 건의 3가지 기반위에 일본전역을 전란으로 었던 남북조내란이라는 자극이 가해지자 예전 에 없었던 규모의 왜구가 고려와 중국연안으로 려오기 시작하였다, 라고 언급하였다(전게 주(120) 무라이 문, p.26). 152) 나카무라 히데다카( ) (,, 1965 ). 153) 아미노 요시히 ( )씨는 와 해적과의 접한 관련을 국가에 있어서 황의 과 들, 그리고 과 바다( )에 대한 지배권 공동체의 자연적( ) 본원적 ( ) 권리를 로써 인정한 위에 성 하고 있는 황의 지배권과 은 관련이 있 는 문제이다 라고 언급하였다(전게 주(123) 문) 젠 쯔 력 휩쓸 불 몰 中村榮孝 太平記 に見える高麗人の來朝 日鮮關係史硏究 上 吉川 弘文館 年 꼬 網野善彦 南朝 밀 율령 천 산 판 강 山野河海 自然的 本源的 公私共利 립 천 깊 網野 논 논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149 忽那氏)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 세또나이까이 지역 큐우슈우 구마노(熊野)의 해적중(海賊衆)이 연합하여 남조측의 일원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정평 (正平) 2년(1347) 5월 10일에 남조측의 수군인 세또나이까이 해적중(海賊衆)이 수십 척으로 치쿠젠(筑前) 무나가타(宗像)의 오오시마(大島) 고지마(小島)를 습격한 것, 그 뒤 불과 십수일만에 휴우가노구니(日向國)의 앞바다에 출현한 것 등을 들 수 있 씨( 154) 155) 156) 157) 을 것이다. 섬에 할거하고 있던 반민(叛民) 이란, 큐우슈우나 시코쿠 등에서 모여든 남조측에 속하는 해적 악당의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우왕 6년 8월에 고려의 진포(鎭浦)에 출현한 500척의 왜구선단이라고 하는 기사도 고려사 의 단순한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수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경인년 이후의 왜구>가 <13세기의 왜구>와는 비교 이상의 사실을 고려한다면, 대마도나 일기 등의 여러 도 안될 정도로 대규모화한 배경에는 남북조 내란기의 일본사회에 있어서 왜구집단 중 쪽 큐우슈우 세또나이까이나 구마노(熊野)의 해적으로 구성된 남 조측의 수군마져도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상황이 있었다, 말할 수 있 에 그 한 의 당사자인 을 것이다. 결 론 린 이후, 수십년에 걸쳐 침구한 왜구의 계기가 되 는 <경인년 왜구>의 주체를 검토한 결과, <경인년 왜구>는 칸노오(觀應) 원년(=경인년) 2월에 아시카가 타다후유(足利直冬)가 취한 공세로 인해, 궁지에 빠진 쇼오니 요리히사 (少貳賴尙)측이 병량미를 구하기 위하여 고려를 침구한 것에 발단한다고 하는 결론에 이 르렀다. <경인년 왜구>의 발생 2년뒤에 해당하는 칸노오(觀應) 3년(1352)에 교오토(京 都)를 중심으로 하는 기나이(畿內)지방에서 막부에 의하여 [반제령]이 실시되었던 것으 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병량미의 확보는 내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며, 쇼오 약 85년간의 <왜구의 공백기>를 깨뜨 藤田 저서, p.60. 河合正治), 南朝の海賊衆動員 ( 瀨戶內海の歷史, 至文堂, 1967년), pp.129 貞和 年 月 日 一色道猷軍勢催促狀(肥前南里文書, 南北朝遺文 九州編, 2324호). 貞和 年 五カ 月27日 島津道鑑軍勢催促狀寫( 薩藩舊記 22 所收重久文書, 南北朝遺文 九州編 호 154) 전게 주(44) 155) 가와이 마사하루( 132). 156) 3 5 11 157) 3, 2328 ).

150 國史館論叢 第92輯 충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남북조 내란기에 있어서 왜구가 [병량미의 조달]을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하 고 있었다고 하는 추정은, 남조와 북조의 큐우슈우 지역쟁탈을 둘러싼 공방이 격렬하게 진행됨에 따라 왜구도 그 침구의 결렬함이 증가된다고 하는 상관관계에 의해서도 방증되 니 요리히사는 그것을 고려로 부터 는 것이다. 왜구의 발생원인및 그 실태에 관하여 기존의 연구는 <왜구=무장상인단>설, <고려의 / 무역제한 고려전제의 문란=왜구의 원인>설, <왜구=[일본침공]에 대한 복수>설, <경제적 빈곤 또는 경제성장>설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존설로는 (1)왜구가 1223 년이 되어 최초로 발생하고, 그 후 [몽고의 일본침공]의 직전까지 나타나는 이유, (2) 약 85년간의 공백기가 존재하는 이유, (3)1350년이 되어 <13세기의 왜구>와는 비교가 되지 랜 기간에 않을 정도로 대규모화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구문제는 오 축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왜구의 주체나 동기 등에 관하여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던 것은 왜구에 관한 문헌사료가, 주로 피해국인 고려나 중국측에 남아 있고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측에는 적어도 [왜구]라고 하는 문자가 보이는 문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 걸친 연구의 그러나, 원래 왜구의 [왜]라고 하는 용어자체가 고려와 중국인이 일본인을 멸시하여 때의 호칭이었기에, 당연히 일본측의 사료에서 왜 라고 하는 용어가 발견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따라서, 왜구에 상응하는 사회적 존재를 당시 일본사회속 에서 발견하는 것이 왜구의 실태에 접근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고려사 에 보이는 왜구 의 특징이나 행동양식 등으로 보아 당시의 일본사회 속에서 왜구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바로 악당이었다. 게다가 악당은 앞에서 언급한 바, 3가지의 논점도 만족시키는 존재였던 것이다. 더욱이, 왜구의 실태가 악당이었음을 보여주는 일본측의 문헌사료도 확인할 수 부를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 [악당]이라고 하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던 사실이나, 남 북조의 내란기라고 하는 시대적인 특징에서 이 [악당]을 하나의 계층이나 신분을 가리 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나, 峰相記 나 太平記 에 보이는 것과 같 은 해적 산적이나 아후레모노(溢物)와 같은 존재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왜구가 경인년부터 <13세기의 왜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대규모화하고, 빈도도 급증하게끔 된 이유로 몽고의 일본침공 더 더욱 전제화해져 간 득종정치 가 초래하게 되는 남북조의 내란 을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공권력이 왜구 를 금압의 대상으로 삼은 13세기와는 달리, 남북조 내란기의 경인년 이후, 해적 악당은 이후

庚寅年 倭寇>와 일본의 국내정세 < 151 야말로 한쪽의 공권력인 남조의 정서장군부의 군사력으로서 동원되었던 것이다. 정서장 군부의 수군역할을 하였던 해적중(海賊衆) 이라고 하는 것은 북큐우슈우는 말할 것도 없이 세또나이카이(瀨戶內海)나 구마노(熊野)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존재하던 해적들 이었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가 대규모로 또 거의 매년 발생하고 있었던 배경에는 큐우 슈우 전역과 세또나이카이 등의 넓은 지역의 악당들이 남조측의 수군으로서 동원되고 있 었다고 하는 특수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