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前期의 山林制度 조선국가의 山林政策과 인민지배 김 선 경* Ⅰ. 머 리 말 Ⅱ. 조선국가의 山林川澤與民共之 의 표방 Ⅲ. 山林區分과 禁松政策 Ⅳ. 山林制度와 인민지배 1. 役制度 2. 진상, 공물제도 3. 雜稅制度 Ⅴ. 山林 私占의 진행 Ⅵ. 맺 음 말 Ⅰ. 머 리 말 조선국가는 山林制度를 정비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여말 山林川澤은 정도전 이 前王朝代에 山場水梁은 모두 호강이 점탈한 바 되어 公家가 그 利를 얻지 못하였 다 1)라고 말할 정도로 세력가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에 대해 조선국가는 건국초기부터 山林川澤의 私占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정책이념으로 山林川澤與民共 之 를 표방하였다.2) 조선국가에 山林制度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후대의 표현이지만 정약용은 山林이란 것은 나라의 貢賦가 나오는 곳이니 山林에 대한 행정을 성왕은 소중히 하였 다3) 라고 하여 山林이 국가 재정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정책 대상임을 말하였다. 한편 왕 실 등 지배층의 山林 광점이 빈번하게 문제되었던 사정으로 보아 그들에게도 山林은 중 * 待臨전문대學 講師. 1) 정도전, 朝鮮經國典 상, 賦典 山場水梁. 2) 조선전기의 山林制度 정책은 川澤의 그것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山林制度 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준비하였기 때문에 山林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으나 山林만 이 아니라 川澤에도 해당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山林川澤으로서 언급하였다. 산림천택의 용례, 구체 적 대상에 대해서는 남원우, 16세기 山林川澤 의 절수에 대한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 논문, 1988) pp. 6 13을 참고하기 바람. 3) 다산연구회, 역주목민심서 5(창작과 비평사) p. 170.
- 88 - 國史館論叢 第56輯 요시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山林은 인민의 생활과 생산활동에서 불가결한 것이었다. 당시의 생산 수준을 감안할 때 山林은 川澤과 더불어 임업, 어업, 목축업, 광 공업 등 생산분야에서 생산의 기본적 조건이었다. 농업에서도 山林은 개간 후보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조선국가의 입장에서는 山林川澤制度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재정에 필요한 山林川澤 의 산출물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산림천택제도는 국가가 山林川澤에서 노동하 는 인민으로부터 산림천택의 산출물을 확보하는 여러 제도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는 필연적으로 지배층의 산림천택을 매개로 한 인민지배를 재편하는 문제를 포함하였 다. 조선국가의 山林川澤制度의 새로운 정비는 고려말의 산림천택제도, 이를 통한 국가 와 지배층의 인민지배방식을 새롭게 재편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국가의 山林川澤制度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며 그 역사성은 어떠한가?4) 이 글의 목표는 산림천택 가운데서도 山林을 대상으로 하여, 조선전기 山林制度의 역사 적 성격을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5) 산림제도는 山林을 생산수단으로 하는 생산영역의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생산관계를 전면적으로 해명하 여야만 그 역사적 성격을 파악할 수가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본격적인 시도는 하지 못했고 다만 조선국가의 산림제도를 생산관계를 반영하고 또한 규정하는 제도로서 보려 는 관점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조선국가가 山林 산출물을 확보하고, 山林에서 노동하는 인민에 대한 지배를 위해 취 했던 제도 정책은 山林川澤與民共之 를 내세운 山林所有權의 규정에 한정되지 않았다. 조선국가의 山林에 대한 실제적인 지배는 山林所有權에 관한 규정을 바탕에 두고 인민 을 산림에서 노동하도록 강제하는 장치, 인민의 자발적인 山林 이용에 대한 대가를 수취 하는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장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역제도, 진상공물제 도, 雜税制度였다. 따라서 이들 제도는 조선국가의 산림제도를 山林을 둘러싼 생산관계 를 내포하는 것으로서 접근하고자 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 글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조선초기의 山林政策이 고려말의 山林川澤制 度의 변화, 이를 통한 인민지배방식의 변화를 기반으로 이를 재편하려는 것이었음을 밝 히고자 한다. 3장에서는 조선국가의 山林所有權규정과 山林 이용계획에 따른 山林 구분 등 외형적인 산림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4장에서는 3장의 山林制度와 결합하여 국가의 4) 중국사 연구의 경우 중국고대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국가의 권력구조가 山林藪澤 의 제도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해명한 다음 연구성과들이 나왔다. 이성규, 秦의 山林藪澤개발의 구조 ( 동양사학연구 29, 1889). 增淵龍夫, 先秦時代의 山林藪澤과 秦의 公田 ( 중국고대의 사회와 국가, 동경 : 1960). 5) 이 글은 조선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조선후기의 山林制度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 업으로서 가설적인 측면이 크다.
- 89 - 산림지배를 실현시키는 제도로서 역제도, 진상공물제도, 雜税制度를 살펴보려고 한다. 5 장은 조선국가의 산림제도가 이미 조선전기를 통해 변화되어 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그 렸다. Ⅱ. 조선국가의 山林川澤與民共之 의 표방 조선국가는 설립초기부터 山林川澤을 광점, 전단하는 자에 대한 강력한 금지조처를 취 하였다. 1397년(太祖 6)에 山場水梁을 전단하는 자는 헌사에 고발하여 죄를 주도록 하는 조처가 취해졌다.6) 이때 표방된 것이 山場水梁 ー國人民所共利者也 이며, 이는 뒤에 山 林川澤與民共之 라는 이념으로 정식화 되었다. 山林川澤을 일국의 인민이 이익을 나누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를 독점하려는 권세가의 행위를 금지해야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미 고려 말부터 山林川澤은 권세가에 의해 광범하게 독점되었다. 1325년(충숙왕 12) 2월의, 山林川澤與民共利 近來權勢之家 自占爲私擅禁樵牧 以爲民害 仰憲司禁約爲者治罪7) 라는 교서와 1356년(공민왕 5)의 賊臣之黨 擅占山澤 重收其稅 國用日乏 民生益凋 自今山林屬續工 澤梁屬司宰 弛禁 輕税8) 라는 조처가 이를 잘 말해준다. 고려말 권세가들이 山林을 광점하여 인민들이 나무를 하거나 꼴을 베지 못하게 하고 게다가 이를 이용하는 인민에게 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말에 私田改革을 주장하 는 논자들은 한결같이 권세가가 산천을 경계로 할 만큼 토지를 차지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9) 산천경계내의 농경지는 물론이고 山林川澤마저도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문구이다. 고려 말의 山林私占의 전개가 크게 문제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고 6) 太祖實錄 권11, 太祖 6년 4월 丁未(1-105하ㄱ : 국사편찬위원회 간본, 1권 p. 105하 오른쪽을 의 미함). 7) 高麗史 권85, 지39, p. 16. 8) 위의 책 권78, 지32, p. 53. 9) 위의 책 권78, 지32, p. 23, 29.
- 90 - 國史館論叢 第56輯 려말의 이러한 사정은 고려후기를 거치면서 일어났던 사회변동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 진다. 고려의 경우도 일반 인민의 생활과 생산활동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왕실 등 지배층과 국가기관도 山林 산출물이 필요했다는 점은 조선과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지배층과 국가 기관의 땔감조달을 위해서 전시과 제도를 통해 柴地를 직접 지급하였다.10) 고려는 조선 과 달리 전시과제도를 통해 개인의 山林 지배를 합법적으로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국가가, 지배층이 柴地를 매개로 해서 이와 결부된 일반 인민에 대해 부담을 강제 하기 위해 일정한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1) 전시과 의 柴地 등 특정 山林을 제외한 나머지 山林은 인민의 생활과 생산을 위해서 이용되고, 또한 주, 군이 부담하는 공물 물품의 생산을 위해서 이용되었을 것이다. 고려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貢賦制度를 통해 광범한 山林川澤의 산출물을 확보하였다. 고려국가가 공물로 징수한 山林川澤의 산출물로는 금, 은, 구리, 철, 소금 등이 중요한 세공품목으로 들어갔으며12) 새우, 조개, 어포 등의 해산물, 짐승의 가죽, 뿔,13) 땔나무, 숯14)도 공물의 종류로 자료상에 나타난다. 이러한 수취물을 국가가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의 생산수단과 생산인민에 대한 지배를 조직해야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의 貢賦制 10) 전시과의 柴地 分給에 관심을 기울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홍순권, 고려시대의 柴地에 관한 고찰 ( 진단학보 64, 1987). 이경식, 고려전기의 兩班口分田과 柴地 ( 역사교육 44, 1988). 홍순권은 柴地는 樵採地이며 이를 墾田과 대립되는 것, 즉 未墾田의 의미로 파악하여 전시과의 柴 地 分給은 본질적으로 개간을 목적으로 한 토지분급이었다고 보았다. 그는 柴地分給의 경기한정은 경기의 개발과 관련되며, 과전법에서 柴地분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고려 전 시기에 걸쳐 경기 지역의 방대한 토지개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이경식은 전시과의 柴地를 양반들의 섶, 숯, 땔감, 꼴의 조달을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운영은 柴地를 이용하는 민에게 일정량의 薪, 炭, 草를 수취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두 견해 가운데서 땔감, 재목, 草 등 山林 산출물이 일상생활이나 경제생활에서 필요한 정도를 생각한다면 柴地는 땔감 등을 조 달할 수 있는 山林을 주었다고 본 이경식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이 경기 안이 어서 도성에 근거를 둔 귀족들의 접중적인 개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11) 분급된 柴地에 대한 양반지배층의 지배 내용을 무엇이라 해야할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이경식 은 이에 대해 分給 柴地는 사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타인의 이용을 금지하는 곧 독점행위 역시 규칙상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고 전시과로 분급된 柴地의 경우 일반인민의 이용을 배제하지 않고 이들 柴地를 이용하는 인민에게 일정량의 부담을 지우는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으 로 보았다(이경식, 위의 논문 p. 259). 그러나 柴地 分給을 근거로 인민에게 섶, 꼴, 숯 등 山林 산 출물을 강제로 받아낼 수 있다면 이는 해당 柴地에 대한 권리행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권리, 지배력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는 전시과의 수조지에 대한 이해방식과 밀접 하게 관련될 것이다. 12) 高麗史 권78, 지32, p. 44, 靖宗七年正月 三司奏 諸道外官員僚所管 州府税貢 一歲 米三百硬租 四百斛 黄金一十兩 白銀二斤 布五十匹 白赤銅五十斤 鐵三百斤 鹽三百碩 絲緜四十斤 油蜜一碩 未 納者 請罷見任. 13) 박종진, 고려시대 부세제도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3) p. 92. 14) 박종진, 위의 논문 p. 63.
- 91 - 度라고 할 수 있겠다. 山林川澤의 산출물 가운데 금, 은, 철, 구리, 종이, 탄, 소금 등의 공물은 주로 所의 생산물로서 충당되었을 것이고 所의 생산물 이외의 것은 일반 군현민 의 공역으로 생산되었을 것이다.15) 이때 지방지배층이 인민을 직접 사역하여 공물을 생 산하거나 인민으로부터 수취를 담당하여 山林川澤 이용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 이다.16) 이는 일반군현이나 所와 같은 특수한 구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방지배층 은 국가권력의 말단에서 山林川澤을 대상으로 한 생산을 강제하고 수취하는데 일역을 담당함으로써 인민의 잉여노동, 잉여생산물을 차지하는데 한몫 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의 貢賦制度는 지방지배층이 山林川澤과 결부되어 있는 지방주민을 노동에 동원 하고 생산물을 수취함으로써 운영되었다. 공물 생산에 이용되는 山林川澤은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해 공물납부를 책임지는 이들 지방지배층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을 것이며 공 물생산에 방해되지 않는 한도에서 인민의 이용이 자유로이 허용되어 이념적으로 공유가 표방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고려의 山林川澤制度는 고려시대의 생산력 수준, 山林川澤의 이용방식에 대 응하는 것일 터인데 이에 대해서는 所의 연구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所는 대부분 山林川澤을 생산조건으로 하고 있어 山林川澤의 이용방식의 고려적인 특 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고려시대의 所는 금소, 은소, 동소, 철소, 絲所, 油所, 紙所, 瓦所, 炭所, 鹽所, 墨所, 藿所, 瓷器所, 魚梁所, 薑所 등의 종류가 있다.17) 所의 생산물인 금, 은, 동, 철, 자기, 기와, 탄, 먹, 종이 등의 생산은 산지 산출물인 원료와 이를 가공하 기 위한 많은 연료 즉 땔감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조달하기 용이한 자연적인 조 건이 갖추어진 지역에 所가 설치되었다.18) 곽소, 어량소, 염소 역시 특정한 자연적인 조 건이 필요하다. 이들 所는 생산을 위한 자연적인 조건과 생산민을 결합시켜 하나의 특수 한 지역으로 만들어 놓고 국가가 생산을 강제했던 조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금, 은, 구리, 철, 소금, 곽, 자기, 도기 등의 생산을 위해 所와 같은 특수조직이 필요했던 이 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생산력 수준에서는 所의 특수노동의 담당자들이 독자적인 소경 영방식으로 생산을 할 수 없었고 일반인민의 부역노동과 결합된 원료의 공급, 所내의 다 른 주민을 통한 식량 생산과 결합됨으로써 이들 물건의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19) 이는 所의 생산을 조직하는 국가권력, 지배층에 대한 종속을 가져왔을 것이 15) 박종기, 고려시대 부곡제연구 (1990) pp. 151 161. 박종진, 위의 논문 pp. 84 96. 16) 소내의 구조, 생산활동에 대해서는 박종기 위의 책 pp. 139 147 참고 바람. 17)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古跡 登神莊. 18) 박종기, 앞의 책 pp. 155 156 참고. 19) 서명희는 철소의 연구를 통해 소의 존재를 일반인민의 부역노동과 장인의 노동이 결합할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생산력 수준과 결부하여 설명하였다(서명희, 고려시대 철소에 대한 연구 한 국사연구 69, 1990).
- 92 - 國史館論叢 第56輯 다. 아마도 所民들은 所내의 농업생산을 통해서 또는 그들이 처분할 수 있는 所의 산출 물의 판매를 통해 생활을 영위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所에 부과된 특수한 노동을 강 제당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생산조건, 생산시설, 노동력의 총체적인 영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유의 주체는 지배계급이며 동시에 그들은 국가권력의 담당자로서 국가권력의 하부를 구성했다고 생각한다.20) 이와 같이 田柴科制度, 貢賦制度, 所制度 등과 결합되어 있던 고려의 山林川澤 제도가 고려후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와해되었는가? 먼저 생산력의 발전과 인민의 저항을 들 수 있다. 所와 같은 생산조직을 통해 생산되 던 물건들이 더 이상 그와 같은 조직이 없이도 생산이 가능하게 된 생산력의 발전과 특 정한 형태의 노동을 강요받던 인민의 저항이 기본적인 동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 려후기에 개별적인 생산활동이 확대되면서 고려국가는 개별 생산자를 특정 역의 부담자 로 파악하거나 생산수단 자체에 조세를 부과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干尺層의 설 정,21) 山税, 海税, 魚梁税, 염세 등의 雜税22)부과는 山林川澤을 대상으로 한 인민의 생산 활동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지배방식의 출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山林川澤을 이용하는 생산분야의 개별적 생산이 확대되어 지배층도 국가와 마찬가지 로 이들 개별 생산활동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고려국가의 山林川澤 제도와 인민지배 방 식속에서 보장되던 지배층의 이익이 고려의 제도가 무너지면서 확보되지 않게 되자 지 배층은 개별적인 이익의 확보에 나섰던 것이다. 山林川澤의 私占은 이를 위한 일차적인 조건이었다. 이들 지배층은 山林을 私占하고 나서, 이를 이용하여 생산활동을 하는 개별 생산자를 직접 노비, 처간, 음호 등의 형태로 붙들어 놓고 장악하는 방식을 통해서, 또는 부분적으로는 山林川澤에 대해 세를 받는 형태를 취하여,23) 山林 독점을 통한 경제적 이 20) 일반 군현, 향 소 부곡과 같은 특수 지역, 식읍으로 주어진 지역 등 영유 방식의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을 것이다. 소를 예를 든다면 소에는 所吏가 존재하여 이들은 소의 생산, 분배를 주관하였 을 것이다. 또한 소의 생산물이 군현의 공물로 납부되었다고 보면 군현의 향리도 소의 생산물의 분배에 참여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으로 그 지방에 근거를 둔 다른 지배층도 생산물의 분배 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21) 서명희는 고려후기에 철소가 와해되면서 대신에 철간이 설정되어 이들의 공철납부제도가 마련되 는 것으로 파악하였다(서명희, 앞의 논문 참고). 22) 박종진의 앞의 논문 p. 161에 따르면 職稅, 船稅, 海稅, 魚梁稅, 山稅, 巫匠税 등의 雜税는 1343년 (충혜왕후 4)에 충혜왕의 재정확보책과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다. 염세는 1279년(충렬왕 5) 3월에 幷點鹽戶以徵其税 하였다. 특히 어량세, 염세 등은 이들 분야에서 종래의 소의 생산 조직이 해체 되고 어느 정도 개별적인 생산활동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에 대해 세를 걷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어량, 염분은 개별적인 생산활동이 증대됨과 동시에 생산자가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생산 조건을 계속 점유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국가나 지배층이 파악하여 조세, 또는 지대를 실현시키기가 용이하였다고 생각한다. 23) 高麗史 권79, 지33, p. 18, 忠宣王即位敎曰 鹽稅自古天下公用 宮院寺社與勢要之家 皆爭據執不 納其税 國用不足 有司窮推除罷.
- 93 - 익의 실현이 가능했다. 山林을 독점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실현하였던 이들 지배층은 山 林을 이용하는 인민을 어떤 형태로던지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고려말에 지배층의 山林川澤의 私占을 부추긴 또 하나의 강력한 요인은 山林川澤의 私占은 개간을 통한 농경지 私占의 확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山林川澤을 독점 하여 울타리를 치고 인민을 끌어모으고 국가의 공적 부담에서 제외시켜 개간을 자신의 주도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인민들이 점차적으로 확대해 가는 개간지를 자기 것으로 만 들어 토지를 확대하였다.24) 그들은 전시과에 의해 지급된 柴地를 私占하고 다른 山林도 마찬가지로 장악하여 私 占柴地를 확대하였다.25) 고려말에 국가권력은 이들 지배층의 山林川澤의 독점을 제어하 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패라는 형식으로 특정 지배층의 山林 독점, 이를 통한 토지확보 를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하였다.26)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말은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이 국가가 보장해주던 전시과 제도 에 의한 전주전객제로부터 지주전호제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농경지는 물론 이고 山林에 대한 지배도 국가권력을 매개로 하지 않은 직접적인 지배층의 사적 지배의 필요성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본다. 고려말 山林川澤 광점의 폐단이 누차 지적되는 가운데 나온 과전법은 농경지를 대상 으로 한 제도였기 때문에 山林制度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27) 그러나 전시과 제도 와 비교할 때 柴地지급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국가의 山林制度의 변화를 보여 준다. 經國大典註解 는 과전법에 柴地 지급 규정이 없다는 점을 柴地私占制度의 혁파로 주석하고 있다.28) 과전법의 山林川澤 관련 조항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경기의 公 田 및 私田의 4표 안에 묵은 땅이 있으면 백성들이 땔나무를 하거나 가축을 먹이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거나 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를 금지한 자는 그 죄를 다스린 다 라고 하여 공전, 사전의 사표 안의 山林川澤에 대한 인민 이용을 금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을 뿐이다. 사표 안에 있어 무언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山林川澤도 그러한 데 다른 일반 山林川澤의 경우는 당연히 이용을 금지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 24) 박경안, 고려후기의 진전개간과 賜田 ( 학림 7, 1985) 참고. 25) 고려후기의 柴地 私占의 존재는 이경식, 앞의 논문 p. 257 참고. 26) 박경안, 앞의 논문 참고. 27) 과전법의 논의 과정에서 柴地 지급에 관한 언급은 조준 상서에 녹과전시 란 지목과 寺社田 의 지방에 있는 절은 柴地를 준다 뿐이다( 高麗史 권78, 지32, pp. 26 27). 그리고 시행된 과전 법에는 柴地 지급규정이 전혀 없었다. 조선전기에는 경기를 중심으로 상당한 땔감시장이 형성되 어 있어 경기내에 柴地를 지급하지 않아도 지배층의 땔감마련에 커다란 어려움은 없었던 상황으 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들은 과전으로 지급받은 토지의 전객농민에게 柴草 등을 수취하는 방식으 로 柴地의 산출물을 보충하고 있었다(이경식, 앞의 논문 pp. 266 267). 28) 經國大典註解 下, 刑典 私占柴草場(아세아문화사 간본, p. 315), 高麗時 各品皆有柴科 至本朝 廢之 私占者幷禁之.
- 94 - 國史館論叢 第56輯 도 좋겠다. 여말 선초의 山林川澤 문제는 농경지의 과전법과 같은 체계적인 제도를 마련하지 못 하였지만 山林川澤의 私占을 엄금함과 동시에 국가가 필요한 특수 山林의 설정, 산림천 택제도에 대응한 역제도, 진상공물제도, 雜稅制度 등을 계속 마련함으로써 정비되었다. 국가는 우선 산림천택에 대한 정책으로 산림천택의 私占을 금지하고 私占을 색출 처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정도전은 朝鮮經國典 에서 太祖代의 山林私占의 금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前朝之時 山場水梁 皆爲豪强所占奪 公家不得其利焉 殿下即位 革其弊法 收而爲公家之用 以山場屬繕工 取其材木 以充營繕 以水梁屬司宰 取其魚醯 以供內外之膳及祭祀賓客之用.29) 그러나 유력자들의 山林 독점은 사라지지 않은 듯 유력자들의 山林 독점이 계속 문제 가 되었다. 太祖代에는 達官之家, 권세가가 畿內와 지방군현에서 山林川澤을 私占하고 인민의 이 용을 가로막는 행위를 저지르는 데 대해 이들을 憲司에 고발하도록 하는 조처가 거듭 내려졌다.30) 定宗代에도 山場草枝 繕工所掌 勿令私占 하라는 山林의 私占 금지조처가 내려졌다.31) 太宗代에는 山林私占의 명목이 되고 있는 墳墓의 步數32)와 農舍, 欄園의 步數33)를 규 정하여 이를 넘는 山林광점을 엄금하도록 조처하였다. 世宗은 전국적으로 私占山水 所在官 幷推刷屬公 하도록 명령하였다.34) 또 이어서 京 畿各官人民私占草場 을 并皆屬公하도록 하였다.35) 이같은 山林私占 금지 조처는 經濟六典 속전에 실렸고36), 經國大典 에도 그대 로 이어졌다.37) 그러나 이후에도 山林의 私占은 완전히 근절되지 않고 국가에서는 거듭 29) 주 1)과 같음. 30) 太祖實錄 권8, 太祖 4년 11월 丁卯(1-86 상ㄴ) 및 권11, 太祖 6년 4월 丁未(1-105 하ㄱ). 31) 위의 책 권15, 定宗 즉위년 9월 甲申(1-137 하ㄴ). 32) 太宗實錄 권7, 太宗 4년 3월 庚午(1-694 하ㄱ). 33) 위의 책 권26, 太宗 13년 11월 丁亥(1-694 하ㄱ). 34) 世宗實錄 권19, 世宗 5년 2월 乙卯(2-524 상ㄴ). 35) 위의 책 권19, 世宗 5년 3월 壬午(2-528 하ㄴ), 戶曹啓 京畿各官人民私占草場 請依六典 幷皆屬公 已曾起耕爲田外 令各其官守令 募償役人刈取 報監司移于戶曹 除國用外 許民和賣 如有仍舊濫執 以 利一家者 以王旨不從論 命如啓施行 可耕之地 許人起耕. 이 조처는 私占草場을 속공조처하고 다른 사람의 기경을 허락하도록 하여 山林私占의 금지가 개 간정책, 개간지의 토지소유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36) 위의 책 권18, 世宗 4년 11월 癸亥(2-510 하ㄱ).
- 95 - 처벌조처를 명하고 있었다. 조선초기에 山林川澤의 私占 금지가 거듭 천명되고 법제화되었음을 살펴보았다. 山林 川澤 私占 금지, 山林川澤與民共之 라는 이념 아래 펼쳐진 조선국가의 山林川澤政策은 山林川澤 그 자체로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려의 山林川澤制度가 田柴科制度, 貢賦制度, 所制度 등 인민지배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여말의 山林川澤의 문제를 개혁하려는 입장은 단순히 호강의 산림천택 독점을 해소 금지한다는 것만이 아 니라 산림천택의 산출물에 대한 국가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일과 산림천택을 매개로 한 지배층의 인민지배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가 포함되었다. Ⅲ. 山林區分과 禁松政策 조선국가는 고려의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가운데 山林川澤의 광점을 금지시키고 인민 의 산림천택의 이용을 권세가가 지배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모든 山林이 모든 인민에 게 자유롭게 개방되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국가는 山林에 자리 잡고 있는 墳墓나 農舍, 欄園의 점유범위를 정해줌으로써 제 한적이나마 山林私占을 인정하였다. 墳墓의 경우 점유범위를 1404년(태종 4)에, 各品及庶人墳墓禁限步數 一品墓地方九十步 四面各四十五步 二品方八十步 三品方七十 步 七品至九品方三十步 庶人方五步 以上步數 竝用周尺 標內田柴火焚ー皆禁也38) 로 정하였다. 1418년(太宗 18)에는 전에 규정한 범위가 좁다하여 종실 1품은 사면 각 100보, 문무양반 1품은 사면 각 90보, 2품부터는 순차적으로 10보씩 감하여 정함으로써 전 규정의 약 2배로 확대하였다.39) 이 규정이 經國大典 에 대체로 그대로 실렸다.40) 農舍, 欄園의 점유 범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墳墓場栍 皆有定制 農舍欄園尚無定制 以致富强者廣占山野以爲柴地 使貧乏之人不得居 焉 以至達官葬事亦不得占地 相爲爭訟 官吏不之禁 乞一品農舍欄園方百步 毎品降十步 以 至于庶人 方十歩以爲定制41) 37) 經國大典 刑典. 38) 주 32)와 같음. 39) 太宗實錄 권35, 太宗 18년 5월 庚午(2-226 상ㄱ). 40) 經國大典 의 규정에는 7품 이하와 생원 진사, 유음자제는 6품과 같다고 하여 이들의 점유 범 위를 좀더 확대하였으나 庶人에 대한 규정은 빠졌다( 經國大典 禮典, 喪葬).
- 96 - 國史館論叢 第56輯 로 규정하여 墳墓의 점유 범위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범위를 허용하였다. 또 국가가 필요에 따라 인민의 이용을 제한하였던 특정한 山林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전국의 산림은 극히 일부의 私占山地와 국가가 설정한 특정 산림이 존재하였고 나머지 는 인민의 이용이 자유로운 산림이었다. 일반 山林의 경우에도 인민들의 산림 이용을 보 장한다던가, 개간되었을 경우에 소유권을 부여하는 권한을 국가가 갖는다던가 하여 산림 에 대한 포괄적인 권한을 국가가 행사하고 있었다. 본장에서는 국가가 설정한 특정 山林의 종류와 그 분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특정용도의 山林은 크게 보아 ①서울의 경관, 비보를 위한 도성내외의 禁山, 조선재목 등의 소나무 수요를 위한 禁山, ②국가의 군사훈련과 국왕의 수렵을 위한 講武場, ③국 가기관의 땔감조달을 위한 柴場, ④말을 방목하기 위한 목장 등으로 나뉘었다. 국가가 가장 먼저 인민의 산림 이용을 제한하기 시작한 곳은 도성 내외의 산이었다. 도성 내외의 산은 서울의 경관, 기맥의 보호, 하천의 사태방지 등을 위해 이용을 규제하 였다.42) 소나무의 작벌이 금지되고, 토석의 채취도 금지되고 물론 경작도 금지되었다. 이 들 산을 인민의 이용을 금한다는 의미에서 禁山이라고 불렀다.43) 禁山의 송목을 벤 자의 처벌규정도 마련하였다.44) 금산의 범위가 확대된 이후에도 都城內外松木禁伐事目 을 만 들어 이들 산을 보호하였다.45) 도성 내외의 산 다음으로 국가가 인민의 이용을 제한했던 곳은 水邊, 연해, 섬지역의 소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조선국가가 만들어지고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나자 엄청난 재목이 필요하였다. 궁성과 정부기관의 건물, 서울의 민가 건물을 조성하기 위한 목재, 兵船, 站船, 漕船 등 선박 건조를 위한 목재 수요가 매우 많았다. 특히 松木은 造家造船 所用最緊 46) 하였으니 고려말부터 그 관리의 필요가 제기되었다.47) 太宗代에 벌써 소나 무가 거의 다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여 소나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松木 可得成長之山 을 禁火禁伐 하도록 하고 수령이 이를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 41) 주 33)과 같음. 42) 정구옥, 조선시대 都城의 松政 (단국대 석사학위 논문, 1977) 참고. 43) 조선초기 禁山의 용례는 다음 자료를 참고할 것. 太宗實錄 권21, 太宗 11년 6월 戊戌(1-586 상ㄱ) 및 권33, 太宗 17년 4월 甲申(2-159 상ㄴ). 44) 世宗實錄 권18, 世宗 4년 12월 乙亥(2-518 상ㄴ). 45) 睿宗實錄 권4, 睿宗 원년 3월 庚寅(8-349 하ㄱ). 46) 世宗實錄 권19, 世宗 5년 3월 甲申 (2-528 하ㄴ). 47) 高麗史 권85, 지39, p. 8, (현종) 四年 敎曰 禮云伐一樹 不以時非孝也 史云松柏百木長也 近聞 百姓斫伐松栢 多不以時 自今除公家 所用外 違時伐松者 一切禁断.
- 97 - 다.48) 經濟六典 에도 松木禁伐法이 실리게 되었다.49) 世宗代에는 금벌을 강화하기 위 해 송목이 있는 곳은 산직을 정하여 지키고 일반민이 집을 짓는 데는 송목을 사용치 못 하게 하자 는 의견도 나왔다.50) 이들 논의에 나오는 소나무가 자랄 만한 곳은 주로 강가, 바닷가, 섬을 가리켰다. 목재 의 운반이 손쉬운 한강 주변, 바닷가 등의 목재 고갈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한강주변 은 뗏목을 만들어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였다. 연해지역 역시 造船과 재목운반이 용 이하여 수요가 많았다. 소나무는 특히 조선재목으로서 중요했기 때문에 연해 각관에 소 나무 배양, 금벌의 책임이 주어졌다.51) 국가는 재목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몇몇 지역을 경기도에 설정했다52)가 마침내는 연해 지역의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을 宜松之地 라는 명목으로 광범하게 선정하여 발표하 였다.53) 조선재목을 위해 지정한 宜松之地 는 대부분 연해 각관의 해안가, 곶, 섬에 위치 48) 太宗實錄 권13, 太宗 7년 4월 辛卯(1-389 하ㄴ). 49) 世宗實錄 권103, 世宗 26년 1월 丙子(4-538 하ㄴ). 50) 위의 책 권4, 世宗 1년 7월 辛未(2-328). 51) 위의 책 권24, 世宗 6년 4월 癸酉(2-595 상ㄱ). 52) 위의 책 권25, 世宗 6년 9월 壬午(2-621), 傳旨兵曹 京畿抱川峯所里 永平白雲山閑木洞淸溪洞 加 平蘆帖高飛洞等處 國用材木所在之地 山直差定 禁人斫伐 所在守令 無時考察. 53) 1448년(世宗 30)에 沿海 州縣의 諸島, 各串의 宜松之地를 訪問置簿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의 책 권121, 世宗 30년 8월 庚辰, 5-96 97). 경기도 남양부의 선감미, 대부, 연흥의 세섬과 거제곶, 인천군의 자연도와 용류도, 부평부의 문지 도와 보지곶, 안산군의 오질이도, 강화부의 금음북, 미법도, 말도, 정포 이북의 망산, 남건동을산, 사도, 교동현의 서방장곶, 수원부의 둑삼곶, 형두산, 홍원곶, 광덕성산, 통진현의 고리곶, 대명곶, 어모로 황해도 안악군의 영진, 대산, 풍천군의 귀림곶, 초도, 석도, 장련현의 사곶, 가을곶, 장연현의 보구 장령, 백령도, 장산곶, 해주의 둔다산, 추적곶, 황주의 모곶, 강령현의 사장곶, 등산곶, 허사포 배대 는 곳과 서령 오차포, 육사외도, 용매길곶, 가을포, 무지곶, 소강 금물여곶, 백암곶, 아랑포, 옹진현 의 서장곶 강원도 강릉부의 빈지, 울진현의 어물리, 북산과 약사산, 통천군의 소산, 마산, 총석정 충청도 면천군의 장택곶, 천곡 등처, 서산군의 파치도, 대야도, 안면곶, 광지곶, 홍주 임내의 신평 현의 명해곶, 내도, 진두, 웅도, 초도, 연륙곶, 당진현의 당진포, 북산, 탕자도, 난지도, 길성현의 용 생두산, 동산산, 해미현의 훤길곶, 승선산, 선현산, 보령현의 능성곶, 송도, 우현, 고만도, 비산현의 도둔곶, 서천군의 개야조도 함길도 안변부의 압융곶과 여도 낭성포 등처, 덕원부의 신도, 서현과 대모성, 용진현의 가퇴도, 조지포, 북봉, 영흥부의 영인사, 구리지, 백안포곶 등처, 함흥부의 보청사, 퇴조사, 동명사, 선덕사 등처, 북청부의 장진포 해정, 속후 해정, 길주의 고다포리, 해변곶, 경성부 남황가진곶, 회령부의 호음야곶, 쌍포곶, 경흥부의 두이산, 녹둔도 평안도 박천군의 덕안곶, 대장산 등처, 가산군 남미동음리, 정주의 잉박곶 등처, 수천군의 진해곶 등처, 곽산군의 금로곶, 우리곶 등처, 선천군의 검산굴곶 등처, 철산군의 서소곶, 다지도, 대곶, 용 천군의 석곶, 신지도 덕천산, 인산군의 창포곶, 의주진의 병곶 등처, 안주의 고맹산, 청천강변 등 처, 숙천부의 검음산, 영유현의 유원소산, 대선곶 등처, 함종현의 백석산, 삼화현의 오음산, 용강현 의 가을곶산, 강서현의 동부 금정량산 전라도 부안현의 외도, 구도, 화이도, 영광현의 도야도, 매음점도, 고이도, 중도, 사도곶, 창두곶,
- 98 - 國史館論叢 第56輯 하였다. 특히 안면도, 변산, 완도 등이 조선재목의 산출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宜松之地 를 정한 이후로는 이들 산들 역시 인민의 이용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禁山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54) 이들 산에 대해서는 근실한 자를 택하여 산직으로 정하여 관리토록 하고 소나무를 작벌하는 자, 이를 감독하지 못한 산직, 관리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다.55) 經國大典 에도 금산의 나무를 채벌하거나 불을 놓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실리게 되었다.56) 禁山은 인민들에게는 산림 이용을 제한하는 명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금산 이외의 산 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이용을 보장한다는 상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금산 이외에 국 가 기관이나 궁방 등에서 인민의 山林 이용을 제한하려고 할 때는 논박이 들어왔던 것 이다. 掌令朴叔達曰 臣前往江原道 見本道土地磽瘠 其民不務耕種 皆賣材爲生 今則禁之 使不 得伐木古者 山林川澤與民共之 國家旣有禁山 其外山請勿禁 上曰不然 禁山之外 豈有禁 구수산, 임치도, 함평현의 해제곶, 서발포, 아사라산, 석포곶, 김포곶, 나주의 가야산, 다리도, 비시 도, 도초도, 암태도, 안창도, 자은도, 기좌도, 팔시도, 하의도, 이시도, 송도, 영암 임내의 귀산, 갈 두산, 보길도, 두와두산, 노도, 해제곶, 강진의 월이곶, 좌곡곶, 산달도, 완도, 고시도, 선산도, 해남 현의 진산곶, 백야포, 백방산, 초도, 평도, 가아도, 장흥부의 대이매도, 우두곶, 장내곶, 순천부의 송도, 장성포곶, 삼일포곶, 경도, 금오도, 광양현와 묘도, 낙안군의 장도, 용두곶, 보성군의 초라산, 무장현의 이진곶, 옥구현의 천방산, 홍양현의 송곶, 주포곳, 우두곶, 망지곶, 황산곶, 장암곶, 박길 곶, 이로도, 협도, 정도, 주도, 경죽도, 사포곶, 가라포, 수덕산, 유주산, 소홀라곶, 말개도, 기화도, 팔전산, 천등산, 제산도, 성두곶, 진도군의 가사도, 평도, 초도, 무안현, 고철금산, 유달산, 모두곶, 흥덕현의 소요산, 임파현의 성산, 함열현의 성산 경상도 영해부의 봉송평, 오항곶, 동래현의 소과정산, 절영도, 염포 이북 삭장포곶 등처, 울산의 장생포곶, 가리곶, 남해도, 망소흘산, 장도, 고성현의 임포곶, 어리도, 초도, 오비도, 곤이도, 상박 도, 하박도, 추도, 자란도, 국정도, 신이도, 노대도, 욕지도, 두밀도, 질법길곶, 소비포, 고반계곶, 행 랑암곶, 미을가조음곶, 고가배량, 안도, 종해도, 심수도, 개도, 미륵산, 거제현의 사화곶, 거대곶, 송 용곶, 적을도, 오시항곶, 주원도, 소좌리도, 대좌리도, 송도, 송곶, 굴량곶, 사천현의 초영도, 초도, 백야도, 저도, 구랑도, 김해부의 우음도, 벌도, 수도, 가덕도, 명지도, 마도, 감물도, 진주의 부화곡 리, 곤양군의 비도리곶, 영덕현의 사동포, 남역포, 하저포, 오보포, 남해현의 고독절도, 금산, 소흘 산, 호을포, 우물포, 소가도, 양가도, 영일현의 삼사랑 등처, 창원부의 사도, 기장현의 금음말곶, 냉 정산, 양산군의 대저도. 54) 이러한 용례는 다음에서 볼 수 있다. 成宗實錄 권61, 成宗 6년 11월 癸丑(9-285 상ㄴ), 傳旨工曹曰 松木切於國用 曾於諸道定禁山 預養其材 比聞官吏奉行陵夷 斫伐殆盡 其申明禁令. 各司受敎 工曹受政, 擇宜松之地 名曰禁山. 經國大典 공전, 재식, 外方定禁山 禁伐木放火. 한편 禁山의 의미가 확대되어 인민의 山林 이용이 제한되는 산을 통칭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하였 다. 講武場等禁山, ( 成宗實錄 권24, 成宗 3년 11월 병진, 8-695 하ㄴ, 경기관찰사의 계 )과 같 이 禁山은 도성 내외의 산, 연해의 곶 섬 등 의송산은 물론이고 講武場, 명산 등 국가가 특별한 용도를 지정하거나 山林 이용을 제한하는 山林을 총칭하여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쓰였다. 55) 世祖實錄 권24, 世祖 7년 4월 丁酉(7-461 상). 56) 經國大典 공전, 재식.
- 99 乎.57) 그러나 禁山이 가장 이용하기 편리한 곳들이라는 점은 인민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금 산의 지정은 인민들에게 상당한 곤란을 가져왔다. 땔감이 많이 사용되는 염분은 바닷가, 땔감이 많은 곳에 설치되어야 하고,58) 造船 제철 제련과 도자기나 사기그릇 제조, 숯구이 등도 땔감을 조달하거나 원료를 조달하기 용이하고 생산된 물건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이들 水邊, 연해지역이 가장 좋은 입지였기 때문이다. 목재나 땔감을 해서 팔려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水邊지역에서 나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국가의 금제에 도 불구하고 禁山은 지배층이나 인민에 의해서 훼손되었다.59) 조선국가는 땔감의 소비가 많은 관서에는 직접 柴場을 할급해 주기도 하였다. 經國 大典 에 따르면 用柴諸司 於水邊 給柴場 하였고 그 가운데서 봉상시 상의원 사복시 군 기시 예빈시 내수사의 柴場은 다 같이 20리의 둘레이고, 내자시 내섬시 사재감 선공감 소 격서 전생서 사축서는 다 같이 15리의 둘레이며, 사포서는 5리의 둘레였다.60) 그러나 각 관서는 이 규정을 훨씬 넘어서 1, 2息에 이르는 柴場을 차지하였다.61) 뒤에 성균관에도 柴場이 할급되었다. 성균관 柴場의 위치는 양근 남면 연양리에서 여주, 광주에 이르는 곳으로 20리를 할급해 주었다.62) 講武場은 조선초기에 여러 곳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민의 이용에 제한을 완화 하고 나중에는 강무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폐지되기에 이른다. 講武場은 강무를 위 해 지정된 지역이다. 강무제는 주례 에 바탕을 둔 제도로서 수렵을 통해 군사를 훈련 시키는 제도이다.63) 조선건국 직후부터 국왕의 빈번한 사냥, 강무행사가 기록에 보인다. 강무는 정도전이 太祖 원년에 강무도를 지어 太祖에게 바치고 있을 만큼 비중이 큰 행 사였다.64) 57) 成宗實錄 권91, 成宗 9년 4월 戊戌(9-575 상ㄱ). 58) 世祖實錄 권6, 世祖 3년 1월 辛巳(7-171 상ㄴ), 忠淸全羅慶尙道 都巡察使朴薑 副使具致寬等 啓 其一忠淸道 安眠串 入海百有二十里 不宜人民聚居 且有松木 慮恐鹽夫雜人斫伐殆盡 請刷出居民 令泰安瑞山等邑及處置使 禁伐 從之. 59) 中宗實錄 권96, 中宗 36년 11월 癸未(18-507 하ㄴ). 60) 經國大典 공전, 柴場. 61) 中宗實錄 권98, 中宗 37년 4월 乙卯(18-567 하ㄱ). 62) 후속록 공전, 柴場, 成均官柴場 以軍器寺 柴場里數外 自楊根南面淵陽里 至驪州廣州地境 周圍 二十里 入標割給. 63) 강무제에 대해서는 박도식, 조신초기 강무제에 관한 일고찰 ( 경희사학 14, 1987) 참고. 64) 박도식, 위의 논문.
- 100 - 國史館論叢 第56輯 처음에는 講武場이 지정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그때그때 행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講 武場은 기내에 가까운 곳에 지정해야 된다는 건의65)에 따라서 경기, 강원 등지에 몇 곳 을 지정하였다. 講武場 京畿廣州楊根等處爲一所 鐵原安陜等處爲一所 江原道平康伊川等處爲一所 横城 珍寶等處爲一所 如是定所 其標內 在前居住人及已起耕田外 新到人及新墾伐木私獵等事 一 切禁断.66) 이후에도 講武場은 지정했다가 폐지했다하는 지역들이 있지만 대개 위에 나오는 경기 도 광주 양근 근처의 한 곳, 철원 안협 등처의 한 곳, 강원도 평강 이천 등처 한 곳, 횡 성 진보 등처 한 곳이 주요한 곳이었다. 강무장으로 지정되면 먼저 私獵을 금지시키고, 樵採, 벌목, 경간 등이 금지되었다. 그 러나 講武場은 대개 경기 근처의 지역이고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강무 장 지정으로 민들의 樵採나 경작에 커다란 불편을 초래하였다.67) 강무장은 상당히 일찍 그 제한조처가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강무장의 여러 곳이 혁파되고68) 남은 곳들도 민들 의 樵採는69) 물론이고 입거, 개간이 허용되는 곳이 여러 곳 생겼다.70) 나중에는 강무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짐승이 번성하여 민들을 해친다는 지적에 따라 私獵까지도 허용 하곤 하여71) 講武場 지정의 의미가 점차 사라졌다. 조선전기에는 마정은 군국의 중대사로 인식되어 전국 여러 곳에 목장을 지정하여 사복 시에서 관장하였다. 목장은 水草가 具足한 곳, 惡獸가 없는 곳, 민의 入居가 적은 곳 등이 적지로 선택되었다. 이런 곳은 해안의 곶, 섬 등이었다. 곶, 섬이 발달한 서해안, 남해안에 많은 목장이 분포되는 등 8도의 여러 곶, 섬에 목장이 분포하였다. 도성 주변은 살곶목장, 양주 녹양평의 甲士場, 광주 정금원평의 甲士場, 강화도 등지가 있었다. 충청도는 홍주 홍 양곶, 태안군 독진곶, 서산의 안면곶 등이 있었고 전라도의 경우는 다경곶, 영광군의 진하 산, 나주 압해도, 영암군 황원곳, 함평 해제곶, 진도 강진의 여러 섬, 제주도 등이 있었고, 65) 太宗實錄 권27, 太宗 14년 2월 己巳(2-8 상ㄱ), 兵曹啓講武事宜. 66) 世宗實錄 권7, 世宗 2년 2월 己未(2-374 하ㄴ). 67) 위의 책 권122, 世宗 30년 12월 壬戌(5-107 하ㄴ). 68) 위의 책 권38, 世宗 9년 10월 壬申(3-99 상ㄱ). 文宗實錄 권6, 문종 원년 3월 丙辰(6-367 상 하). 69) 成宗實錄 권134, 成宗 12년 10월 甲辰(10-260 하ㄴ). 70) 世宗實錄 권40, 世宗 10년 6월 丁丑(3-232 하) 및 中宗實錄 권4, 中宗 2년 10월 己亥 (14-200 하ㄱ). 71) 燕山君日記 권50, 燕山君 9년 9월 甲子(13-573 상ㄴ).
- 101 - 경상도는 거제도 도래현, 고성 동래 울산 등지의 곶, 석을포 등이 있었다. 이들 목장은 왕실, 권세가의 私占의 대상이 되었다. 도성 근처의 양주 녹양장 등은 일 찍이 민들의 개간, 권세가의 私占이 진행된 곳이었다. 녹양장은 본래 갑사들이 말꼴을 취하도록 한 땅으로 甲士場이라고 불렀다. 목장으로도 쓰이고72) 講武場, 열무장으로도 이용되었다.73) 그런데 녹양장이 도성에서 멀어 꼴을 먹이기도 어렵고 큰 길이 가로질러 잡인 출입을 금하기도 어려우니 이미 개간한 땅을 묵히면 군사에도 이로운 것이 없고 민들만 실업을 한다. 민들에게 그대로 경작토록 하자 74)는 논의가 일었다. 이에 대해 헌 부에서는 대신들이 빈민의 실업을 걱정하는 말을 하고 있으나 실은 지금 盜而據之者가 대부분 朝官 宗戚의 노예나 伴人이다. 양주관은 사사로이 둔전을 만들고 종척 거실 역시 저택을 지었다. 이는 믿는 바가 있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소위이다 라고 극언 하였다.75) 각도의 목마장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牛馬籍이 없어지고 말들이 소실되어 빈 목장이 많이 생겼다. 목장을 회복하기 위해 임명한 감목관이 오히려 목자를 침학하고, 어염을 징색하여 목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였다. 76) 이처럼 마정이 전쟁 이후 제대로 재건 되지 않아 많은 목장이 목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77) 이는 전쟁도 한 요인이 되었 지만 목장이 주로 설치되었던 곶, 섬에 인민이 많이 살게 되고 개발되면서 예전과 같은 목장운영이 어려워진 때문이기도 하였다. 종래 목장지였던 곳에 인민이 들어가 農舍도 짓고 소금도 굽고 고기잡이도 하게 되자 궁방, 권세가들이 이들 지역을 折受하는 등 목 장 자체가 사라져 갔다. 亂後 각도의 목마장이 많이 폐지되었다. 公家 屯田을 삼거나 혹 은 민인이 私占하여 경간을 꺼리는 바가 없다 78)라는 형편이 되었다. Ⅳ. 山林制度와 인민지배 2, 3장을 통해 살펴 본 조선국가의 山林制度를 요약하면, 조선국가는 山林川澤與民共 之 를 표방하며 山林의 공유를 기본으로 하면서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인민의 이용을 제한 72) 世宗實錄 권27, 世宗 7년 2월 己巳(2-658 하ㄴ). 73) 成宗實錄 권76, 成宗 16년 3월 戊子(10-694). 74) 中宗實錄 권22, 中宗 10년 7월 戊子(15-92 상ㄱ). 75) 위의 책 권22, 中宗 10년 7월 戊戌(15-93 하ㄴ). 76) 宣祖實錄 권59, 宣祖 28년 정월 庚寅(22-419 하ㄱ). 77) 위의 책 권65, 宣祖 28년 7월 戊子(22-535 상ㄴ). 78) 위의 책 권169, 宣祖 36년 12월 辛丑(24-554 상ㄱ).
- 102 - 國史館論叢 第56輯 하는 산림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극히 제한된 범위의 山林 私占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조선국가의 山林制度는 산림을 생산수단으로 하는 분야의 생산관계를 규정하 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국가는 山林 共有制나 특정용도의 산림의 설정만으로 산림지배를 실현할 수가 없었다. 국가가 보장하고 확보한 공유나 특정용도로 지정된 산림에 대한 실제적인 지배는 인 민을 山林에서 노동하도록 강제하고 산림 이용의 대가를 수취하는 다른 장치, 즉 역제 도, 진상공물제도, 雜税制度 등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들 제도는 山林制度를 생산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山林 이용, 山林 수취의 형태로서 반드시 살펴 보아야 한다. 1. 役 制 度 조선국가는 여러 형태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조선국가의 노동력 동원체계는 크게 나 누어 군역, 雜色役, 부역노동의 세 형태를 취하였다. 이들 노동력은 상당부분 생산적 노 동에 쓰였으므로 조선국가의 노동력 동원체계는 이들 노동력이 투하될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의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다음은 조선국가의 역제도와 역제도에 의해 동원 된 노동력이 투하될 山林川澤制度가 일정한 대응관계에 있었음을 보려고 한다. 조선국가는 군역을 징발하여 다양하게 부렸는데 그 가운데는 생산활동에 부리는 경우 가 많았다. 농업노동도 있었지만 山林川澤을 이용하는 노동이 많았다. 군역 가운데서도 수군들이 山林川澤의 이용에 많이 동원되었다. 川澤은 물론이고 山林 이용도 운반이 편리한 연해, 水邊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수군들에게 가장 힘든 일은 나무를 베어내고 이를 운반하는 일이었다.79) 수군들이 이 때문에 죽고 병드는 사태 도 벌어졌다.80) 또한 造船에 수군을 동원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수군은 貢船을 제작하 거나81) 병선의 건조, 개수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82) 수군의 작업은 대부분 공유의 山林 이나 국가가 특정 용도로 설정해 놓은 산림이었다. 造船은 대개 황해도의 장산곶이라던 지, 충청도의 안면도, 전라도의 변산 완도 등지에서 이루어졌다.83) 이들 지역은 국가가 79) 世宗實錄 권31, 世宗 8년 2월 癸巳(3-12 상ㄱ) 및 中宗實錄 권83, 中宗 32년 정월 癸卯 (18-21 상ㄴ). 80) 世宗實錄 권99, 世宗 25년 2월 丁亥(4-459 상ㄴ). 81) 위의 책 권83, 世宗 23년 7월 庚戌(4-350). 82) 中宗實錄 권99, 中宗 37년 8월 壬辰(18-609 상ㄱ). 83) 위의 책 권48, 中宗 18년 4월 乙丑(16-239 상ㄴ) 및 宣祖實錄 권97, 宣祖 31년 2월 丁丑
- 103 - 조선재목의 양성을 위해 宜松之地, 禁山으로 지정해 놓고 특히 그 관리에 힘쓰던 곳들 이었다. 수군들은 염분의 소금구이, 魚箭의 고기잡이 등 川澤의 이용에도 동원되었다. 이 들 시설 역시 공유이거나 국가가 관장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수군들 이외에도 관찰사, 병사들은 군사들을 진상물, 공물 마련 등의 명목으로 수렵 등에 동원하였다.84) 수렵은 講武場 같은 특정용도 山林이나 공유의 山林에서 행해졌다. 이와 같은 군졸의 노력동원도 노동력을 투하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 으로 국가는 이를 山林川澤의 공유제, 특정 山林 설정 등을 통해서 마련하고 있었다. 노 동을 투하할 대상을 확보하지 못하면 노력동원만으로는 생산을 할 수가 없었다. 山林 자 원의 고갈로, 近來災變疊至 而又興土木之役 軍士皆困弊矣 江原忠淸道 材木已盡輸 故國家別立貿易之事85) 와 같이 수군을 비롯한 군사들의 노력동원으로 마련했던 재목을 무역하여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사정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雜色役은 특정한 계층을 어떤 노동에 지속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설정된 역이었다.86) 잡색역의 상당수는 생산노동에 종사하였다. 장공인층, 稱干者 87)가 대표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국가에 직접 노력동원을 당하기도 하고 특정한 물품의 납부를 할당받기도 하였 다. 물품할당은 노동력의 직접 동원과는 거리가 있으나 특정 물품의 생산을 강제당하였 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이들의 일부에 대해서는 특정한 노동과 생산에 계 속 붙들어 놓기 위해 보인을 지급하거나 토지를 분급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88) (23-390 하ㄱ). 84) 成宗實錄 권40, 成宗 5년 3월 丙戌(9-93 하ㄱ) 및 권190, 成宗 17년 4월 丙子(11-117 하ㄱ). 85) 中宗實錄 권50, 中宗 19년 4월 甲子(16-304 하ㄱ). 86) 조선국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일에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군역 이외에도 특정 역의 부담층을 설정하였다. 양인의 이러한 특정 역부담을 총괄하여 유승원은 雜色役이라 부르고 있으며 (유승원, 조선초기 양인의 雜色役 진단학보 62, 1986, p. 33), 한희숙 역시 이들 역 을 雜色役이라 부르고 이러한 역부담층을 잡류층이라 규정하였다(한희숙, 조선초기의 잡류층에 대한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990). 이 글의 雜色役 의 범주도 기본적으로 이들의 견해를 따랐으나 이들 역에 천인이 差定되는 경우도 이 범주에 포함시켰다. 87) 유승원에 따르면 稱干稱尺者 는 조선초기에는 양인에 비해 차별을 받는 계층으로 존재하였다. 稱 尺者는 그 연원이 신라때까지 소급되는 존재임에 비하여 稱干者는 고려말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초기에 특정 물자를 납공하거나 특정 기관에 力役을 바치는 雜色役戶서 干 이라 불리는 자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뒤에 稱干稱尺者는 보충군의 입속대상이 됨으로써 양인으로서의 신분보장과 雜色役의 세습이라는 부담을 벗어나게 되고 干 尺 은 특수한 계층이 아니라 단순한 雜色役戶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다가 이마저도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한다(유승원, 조선초기의 신 량역천 계층 한국사론 1, 1973 참고).
- 104 - 國史館論叢 第56輯 장공인의 경우 조선국가는 장공인을 대장을 작성해 놓고 파악하여 일정 기간 부역노 동에 동원하였다.89) 장공인들은 중앙 각 아문에 직접 사역당하거나 지방관청에 사역당하 였다. 중앙아문소속의 장공인은 국가기관이나 왕실에 필요한 정교하고 상당한 기술을 요 하는 완성품의 제작을 주로 담당하고, 지방 장공인의 경우는 원료의 생산에서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담당하였다. 지방관청의 장공인의 종류는 진상 공물품의 종류와 대응한다. 진상 공물품 가운데 수 공업품으로는 각종 종이, 군기, 각종 도기, 목기, 돗자리, 각종 광물제련물 등을 들 수 있 는데 지방 장공인들도 이들 분야의 장공인이 등록되었다.90) 대부분 지방관청 소속의 장 공인은 지방의 진상, 공물물자를 생산하였고 그 밖에 지방관청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생 산 활동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이들 장공인은 수공업이 자신의 생업인 경우가 많았다.91) 그 가운데서도 수철장의 경우는 국가가 작업장의 규모에 따라 세를 받고 있을 만큼 어 느 정도의 수요를 바탕으로 전업적인 수공업자로 성장하고 있었다.92) 陶器, 甕器 등도 수요가 큰 물품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전업적인 수공업자로 성장하였던 듯하다. 수철장을 비롯한 야장들은 일반인민의 부역노동과 결합하여 금, 은, 구리, 철 등의 공 물생산을 담당하였다. 철을 예로 들면 국가는 鐵場을 두고 貢鐵을 생산하였다. 鐵場은 철의 연료 공급이나 제련을 위한 연료인 땔감 공급에 용이한 지역에 설치되었다.93) 특히 연료공급이 중요하여 시목이 많은 곳에 鐵場을 설치하였다. 鐵場에 부근 인민을 부역 노 동시킴과 함께 장인 등을 동원하여 貢鐵을 생산하였다.94) 이같은 관설 鐵場의 설치는 부 역 노동을 통한 원료의 채취,95) 땔감 조달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山林川澤의 공유를 통 한 山林川澤의 이용이 전제되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 영업에서도 땔감의 사용이나 원료 채취에서 그들은 별다른 제한없이 山林川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貢鐵생 산만이 아니라, 工匠의 진상 공물 생산노동이 일정하게 일반인민의 부역노동, 군역과 결 합하고 있었던 다른 예들을 볼 수 있다.96) 88) 한희숙, 앞의 논문 pp. 195 229 참고. 89) 經國大典 공전, 공장. 90) 위와 같음. 91) 지방 장공인은 이것만으로 생업을 삼았다기 보다는 대부분 농업을 겸업하였으며, 때로는 생업으 로서는 수공업생산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관청의 부역노동에 응할 뿐인 경우도 있었다(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私匠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1984, p. 42). 92) 유승주, 조선전기 군수철광업의 연구 ( 한국사론 7, 국사편찬위원회, 1981) pp. 336 338. 93) 철장은 당시에는 사철이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천변이나 浦口 등에 설치되었다(유승주, 위의 논문, pp. 330 331). 94) 世宗實錄 권39, 世宗 10년 1월 辛亥(3-113 상ㄴ). 95) 포구나 하천에서 沙鐵을 채취하는 데는 많은 부역노동력이 필요하였다(유승주, 앞의 논문). 96) 경상도의 진헌 용문석 및 진상석은 안동부를 도회소로 하여 직조하였는데 거기에 필요한 完草는 주변의 여러 읍에 분정하여 거두어 들였다(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1964, pp. 255 256).
- 105 - 이들은 국가에 의해 불시에 동원되어 노동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船匠과 목공이 조선 작업에 동원된 경우이다. 漕轉船 건조를 위해 일시에 대규모로 동원되어 노동하였다. 諭全羅道都觀察使李延孫 曰漕轉船ー百艘 自八月一日始造 令諸邑抄發船匠一百名 木工 二百名 差使員管押送至扶安縣邊山康津縣莞島 又令都事董役凡事ᅳ聽敬差官安哲孫之言 毋致 稽緩 幷諭忠淸京畿兩道 但匠人定額有差.97) 이와 같이 공장을 동원하는 관영수공업의 존재는 민간수공업이 국가기관이나 지배층 의 필요, 기호를 만족시킬 정도의 기술수준이 못된다는 점은 물론이고 생산규모의 측면 에서도 원료와 연료조달을 위해서는 장공인의 노동과 일반 인민부역노동을 결합할 필요 가 여전히 있었던 점, 대규모로 장공인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도 연유하였던 것 이다. 이와 같은 당시의 생산수준으로서는 장공인의 생업으로서의 민영수공업과, 이들과 일 반인민의 부역노동을 동원하는 관영수공업이, 양자의 생산조건을 확보하는 길은 山林川 澤의 공유제를 원칙으로 하고 국용의 산림천택을 부분적으로 설정하는 산림천택의 제도 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장공인 이외에도 山林川澤을 대상으로 노동하는 雜色役으로는 鹽干, 鐵所干, 吹鍊軍, 生鮮干, 生鷹干, 酥油干, 牧子, 燒木軍, 海作軍, 網牌 등 某干, 某夫, 某軍 등으로 불리는 계층이 존재하였다.98) 稱干者, 某某軍 의 이들 雜色役者는 대부분 농업이외의 생산노동이 부과되거나 그 생 산물을 바치는 부담을 졌다. 이들은 관설 작업장에 동원되어 노동하기 보다는 생산을 해 서 할당량을 납입하는 형태가 더 많은데 이 경우에도 물품을 납입하기 위해 특정노동을 강요받았다는 점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이들은 生鮮干이나 燒木軍과 같이 중앙아문에 직속된 경우와 海作軍, 鐵干, 鹽干과 같이 지방의 진상, 공물생산의 책임이 주어진 경우 로 나뉘었다. 대부분 이러한 역은 장공인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생업과 관련해서 부과되 었다. 97) 世祖實錄 권21, 世祖 6년 7월 乙亥(7-406 상ㄱ). 98) 염간은 섬이나 연해주군의 염소에서 煮鹽에 종사하여 부근의 염창에 일정량의 염을 납부할 의무 를 지고 있었다. 철소간, 취련군은 철을 생산하여 일정한 공철을 부담하였다. 生鮮干은 한강변의 사람을 택하여 사옹원에 소속시켜서 신선한 물고기를 잡아바치도록 하였다. 生鹰干은 각종의 매 를, 화유간은 戶당 1정의 화유를 진상물로서 사옹방에 납부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牧子는 축목의 역을 담당하였다. 海作軍은 연변의 각 고을에서 진상 해산물을 담당하도록 설정하였다. 燒木軍은 경기좌우도, 강원, 충청도의 水邊 각관의 사람으로 설정하여 땔나무를 책임지웠다. 網牌는 사복시 에 소속되어 수렵을 하여 생물을 진상하였다. 果園直은 관설 과원을 관리하였다. 藥夫는 진상 약 재의 재배, 채취에 종사하였다(田川孝三, 앞의 책 p. 72과 유승원, 앞의 논문, 1973, pp. 234 236 참고).
- 106 - 國史館論叢 第56輯 이들을 계속 특정한 잡색역에 묶어두고 부담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의 노동력이 존재하 는 한 생산이 가능하다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대부분 山林川澤을 노동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산림천택의 공유를 기반으로 하였다. 다음 철간의 경우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前此 鐵干 除雜役給口分田 專委練鐵 故柴木茂盛之時 易以炒鍊上納 今以口分田屬于軍 資 所居之里 柴木殆盡 專事農業以生 依平民例供雜役.99) 이는 철간을 묶어두고 공철을 납부케 하기 위해서는 철의 제련에 중요한 땔감이 존재 해야 되는데 그 지역에 땔감이 사라져 그들을 더 이상 철간으로 묶어두기 어렵게 되었 음을 말해준다. 생산조건이 사라지면 철간의 노동력을 붙잡아 놓는다 하더라도 생산을 할 수 없어 국가로서도 이 제도를 유지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稱干者는 조선초기를 거치면서 점차 사라지고 남아 있는 이들도 무슨 干이라는 천역임을 나타내는 명칭에서 벗어났다.100) 크게 보아 장공인을 비롯한 雜色役층은 조선전기를 거치면서 소상품생산자 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면서 잡색역 부담에서 벗어나 포납부자, 雜税 납부자로 변화 해 나갔다. 조선전기 국가가 농업이외의 생산 담당자들을 잡색역으로 파악하여 놓고 그들을 부역 노동에 동원하거나 생산물을 수취하는 형태로 해당분야의 노동을 강제하는 제도는 이들 생산분야의 개별 생산자를 국가가 직접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고려후기 이래의 이들 분 야의 생산상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山林川澤을 노동대상으로 삼고 있는 생산자를 잡색역으로 국가가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이러한 제도는 그들을 동원하여 노동할 생산조 건을 국가가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나 그들의 생업을 국가가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측면 에서나 산림천택의 공유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국가의 山林川澤의 정책에 대응하는 것이다. 조선국가의 노동력 동원방식의 하나로 일반인민을 부역노동에 동원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일반인민은 다양한 노동에 수시로 동원되었는데 군현단위로 때로는 군현을 넘어서 는 규모로 동원되었다. 조선국가는 인민의 부역동원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經國大典 戶典 요부에 인민의 부역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99) 世宗實錄 권50, 世宗 12년 12월 丁卯(3-275 상ㄴ). 100) 鹽干이 鹽夫, 牧子干이 牧子, 水站干이 水夫, 生鮮干이 魚夫 등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 그 예이다 (유승원, 앞의 논문, 1973, p. 157 참고).
- 107 凡田八結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若路遠六日以上 則准減翌年之役 若歲再役則須啓乃行 守令不均調發 領役官遲留過限者 依律科罪 토지 8결에 한명의 인부를 내며 일년에 부역일수 6일을 초과하지 않는다 101)는 국가 의 부역동원에 대한 규정은 특정한 역의 동원에만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 전 의 위 규정은 1471년(成宗 2) 3월 호조에 내려진 役民式에 의거한 것인데, 역민식은, 一應收税田 每八結出一夫 觀察使量功役多少 循環調發 若事鉅不得已加調發 則六結出一 夫 須啓聞乃行 其京藏氷 採金 修站館 築牧場 埋貢炭 造橋梁 刈郊草 鐵物吹鍊 牧場駈馬 禮葬造墓 爲常例調發 築城 運米 天使轎夫 新築牧場 波吾達 熖消 輸木石 築堤堰 山臺採 葛 石灰燔造 爲別例調發102) 이라 하여 역의 종류를 명시하고 있다.103) 경국대전 에 명시된 부역동원의 원칙, 부담량은 바로 역민식에 명시된 여러 역들을 징발할 때의 규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104) 즉 경국대전 의 8결 출1 부, 1년 6일동원 이라는 규정은 역민식에 명시된 역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05) 101) 8結 出1夫 를 규정하고 있는 이 조항은 경국대전 에서는 戶典 요부조에 속하였다. 그러나 續大典 에 가면 毎八結爲一夫 佃夫中擇其饒實勤幹者 定爲戶首凡其八結應納之役 使戶首收于 結內佃夫 以納 라 하여 戶典 收稅條의 규정으로 바뀌었다. 이는 조선전기로부터 후기로 넘어 가 는 사회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조선전기는 作夫가 8결 단위로 한명의 노동력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 중점이 있었던 데 반해 조선후기에는 노동력 징발, 특산물 부과 대신에 米 布, 화폐 등으로 전환되면서 收稅조직이라는 데로 중점이 옮아갔던 것이다. 작부제는 토지를 기 준으로 부과했던 여러 역이 지닌 노동력이라는 형태, 즉 노동력의 부과는 경작하고 있는 토지별 로 분할해서 부담시키기 어렵다는 수취 형태상의 특질에서 연유하며 이들 노동력 부과가 미, 포 형태의 조세로 전환되면서도 현물이 갖는 형태적인 특징 때문에 여전히 유지되다가 조세의 화 폐화가 진행되면서 도결과 같은 형태를 거치면서 소멸된 것이다(김선경, 1862년 농민항쟁의 도결혁파요구에 관한 연구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1990과 윤용출, 17, 18세기 요역제의 변동과 모립제, 1991, p. 58 참고). 인민에 대한 수취형태가 직접적인 노동력이냐, 특 수한 생산물이냐 미 포와 같은 준화폐적인 현물이냐, 화폐냐에 따라 인민지배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인 것이다. 102) 成宗實錄 권9, 成宗 2년 3 월 壬辰(8-559 하ㄴ). 103) 역민식에 열거된 역의 종류가 약간의 변동은 있지만 대전속록 戶典 요부조에 進上收納京蔵 水採貢 金埋貢 炭採貢 茶鐵物吹鍊 貢物輸京 行幸支供 築城 運米布 使臣擔陪 煮焰悄 牧場新築 堤堰新築 石灰燔造 貢船造作 倭物輸轉 等事 로 명시되어 있다. 이들 역은 復戶라 해도 부담해야 하는 역으로 규정되었다. 104) 有井智德, 李朝初期の徭役 ( 조선학보 30.31, 1964) 참고. 105) 經國大典 의 戶典 요부조의 8結 出1夫, 1년 6일 의 규정은 요역부과의 대상, 부담량을 규정한 것인데 현재로는 이의 해석에 다음 두가지 설이 있다. 두설의 차이는 8結 出1夫 의 규정이 모든 부역노동에 해당하는가, 즉 모든 부역노동의 부과기준이 토지였는가, 아닌가에 있다
- 108 - 國史館論叢 第56輯 그러면 이들 역은 기타 역106)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여기서 역민식에서 예로 들고 있 는 것들이 상당한 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대부분 군현 단위를 넘어서는 동원이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이 점은 역민식에서 역의 부과가 관찰사 인 점에서도 확인된다. 즉 역민식은 국가나 도장관이 군현을 상대로 역을 배정할 때 적 용하는 규정인 것이다. 역민식에서 들고 있는 역들은 바로 여러 군, 여러 도에서 丁夫를 징발하는 석회번조의 부역,107) 山郡의 인민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木石을 베고 운반하는 역,108) 일시적으로 많 은 노동의 동원이 필요한 築城,109) 築牧場,110) 築堤堰의 부역,111) 경기도민을 주로 부리 ① 有井智德은 요역을 크게 所耕의 徭役 과 그렇지 않은 잡역으로 나누고 있다. 所耕의 徭役 은 다시 田税의 役, 貢賦의 役, 기타의 역으로 나뉘는데 바로 역민식과 대전속록 에 명시된 역 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有井智德, 앞의 논문). 8결 출1부라는 요역부담의 기준은 이들 역에 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이외의 요역은 잡역으로서 지방관부의 필요에 따른 잡다한 역이라는 것이다. ② 윤용출은 8結 出1夫는 잡역을 포함한 모든 요역의 징발 기준이었다고 보았다(윤용출, 앞의 논문). ①의 설은 역민식에 열거된 역들이 크게 田税와 관계된 役, 貢賦와 관계된 役, 기타 역으로 나 누어 질 수 있다는 점과 다른 사료상에 나타나는 所耕田稅, 所耕貢賦 를 所耕田稅의 役 所耕 貢賦의 役 으로 해석함으로써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민식의 역을 田税의 役 貢賦의 役 등 으로 나누는 무리한 분류가 우선 문제가 된다. 田税의 役 으로 輸米布를 들고 있으나 이는 전세 부담에 수반되는 요역 부담이라기 보다는 서울에서 조세를 수납해 들이는 과정이나 조창에서 배 로 조세를 운반할 때 드는 노동력, 기타 국가의 필요에 따라 미포를 운반하는 노동력 등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貢賦의 役의 경우도 역민식에 보이는 채금, 철물취련, 염초, 석회번조, 매공탄, 채갈 등이 貢賦의 모든 역을 망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이외에도 공물 을 마련하기 위한 부역노동 동원의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田税의 役, 貢賦의 役 과 같은 중요한 역은 所耕토지에 부과하였고 나머지 그렇지 않은 잡역들은 所耕에 부과한 것이 아 니었다는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②의 설은 8結 出1夫, 1년 6일 이라는 규정이 모든 요역에 해당한다고 보기에는 인정, 호를 기준 으로 한 요역 부과, 즉 규정에 어긋난 부과가 너무 많아 이를 단지 시행상의 폐단으로 보기만은 어렵다는 점이다. 지방 군현내에서 수행되는 각종 요역의 경우 토지, 인정, 호구 등 다양한 부과 기준이 적용되었는데 이를 법외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의 논거의 하나는 요역과 요역으로 마련되는 진상공물부담의 많은 부분을 흡수한 대동법이 토지세 규정이라는 점 인데 이 점은 대동법 제정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지 처음부터 이들 요역이 토지부담이었다 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본다. 일찍부터 진상공물의 대납의 경우, 전결에서 미, 포 등으로 걷었던 점을 볼 때 점차 대납이 확대되면서 대납가를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하는 등 토지부과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은 8結 出1夫, 1년 6일의 규정이 역민식에 규정된 역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는 점은 有井智德의 설을 따랐으나 역민식에 규정된 역은 전세 의 역, 貢賦의 역 등 중요한 역이고, 역민식에 규정되지 않은 역은 잡역으로 소규모의 지방관부 의 잡다한 역이라는 데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106) 대전속록 戶典, 요부조에서 잡역으로 표현한 역을 가리킨다. 107) 太祖實錄 권8, 太祖 4년 9월 戊申(1-83 상ㄱ). 108) 宣祖實錄 권204, 宣祖 39년 10월 乙丑(25-279 상ㄴ)와 권208, 宣祖 40년 2월 甲辰(25-308 하 ㄱ). 109) 世宗實錄 권125, 世宗 31년 7월 丁亥(5-138 ㄱ) 및 中宗實錄 권47, 中宗 18년 4월 丁亥 (16-208 상ㄱ). 110) 成宗實錄 권134, 成宗 12년 10월 己未(10-267 하ㄱ).
- 109 - 는 京藏氷, 刈郊草, 禮葬造墓 등의 역,112) 도회소를 정해 놓고 인근 군현민을 동원했던 貢船,113) 貢鐵,114) 貢金,115) 煮焰焇116)의 역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역민식의 役시 山林川澤을 대상으로 한 노동이 많다. 이 경우 인민에게 이러한 대규모 의 노동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흡수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들 노동이 공 유나, 국가의 특정용도 산림천택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들 노동대상이 고갈되면 부 역동원도 불가능하였다. 역민식에 열거된 것 이외에도 부역노동으로는 군현내에서 진상,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한 노동, 군현내의 필요에 따르는 다양한 노동 등 각종 요역이 있었다. 지방군현의 수령은 기본적으로 인민에 대한 부역노동 징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117) 경국대전 의 규정을 군현의 상위 기관의 군현에 대한 부역징발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군현내 에서 행해지는 갖가지 부역노동을 규정하는 법조항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군현내에서 이루어지는 인민의 부역노동 역시 山林川澤을 대상으로 한 노동이 많았다. 진상공물을 마련하기 위한 부역노동이 그러하고 지방관청의 수요를 위한 노력동원 역시 마찬가지였 다.118) 노동대상은 마찬가지로 대부분 공유나 국가 특정용도로 설정해 놓은 산림천택이 었다. 조선국가는 군역, 雜色役, 인민의 부역노동 부과라는 세가지 방식을 통해 노동력을 징 발하였다. 조선국가의 역제도는 중앙관청, 지방관청이 광범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었으 며 수시로 임시적인 노동력을 동원하고 있다. 이들 노동력이 상당 부분 생산적 노동에 돌려지고 있었다. 국가가 따로 노동력을 동원하여 생산하는 물품은 당시의 생산 수준으 로서는 생산 기술면에서나 생산량의 면에서나 일반 인민들로부터 직접 수취하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국가는 위와 같은 역제도를 통하여 노동력을 일단 확보한 다음에는 이들 노동력을 투 하할 생산수단이 필요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山林川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이 많아 관 청은 이들 노동력을 투하할 생산조건, 생산수단으로서 山林川澤이 필요하였다. 관청 소 111) 世宗實錄 권3, 世宗 원년 2월 庚子(2-303 하ㄴ) 및 成宗實錄 권53, 成宗 6년 3월 己巳 (9-210 상ㄴ). 112) 成宗實錄 권34, 成宗 4년 9월 癸巳(9-58 하ㄴ). 113) 明宗實錄 권21, 明宗 11년 10월 丁亥(20-364 하ㄱ). 114) 유승주, 앞의 논문 참고. 115) 유승주, 조선전기의 금은광업의 연구 ( 한국사연구 27, 1979) 참고. 116) 文宗實錄 권4, 文宗 즉위년 10월 庚辰(6-300 상ㄴ). 117) 대동법의 또 하나의 측면은 요역의 준화폐화, 화폐화이며 이로 말미암아 수령의 인민에 대한 부 역노동 징발은 커다란 통제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령은 기본적으로 부역징발권을 여전히 행사했으며 봉건해체기에 봉건모순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118) 이에 대해서는 다음절의 진상, 공물에서 자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 110 - 國史館論叢 第56輯 속의 특정 山林川澤과 공유의 山林川澤은 국가가 동원한 노동력을 투하하는 대상이 되 었다. 특히 국가가 설정한 山林의 경우 이용이 가장 빈번한 곳들을 인민의 이용이나 특정지 배층의 장악을 금지하여 미리 확보해 놓고 국가권력에 의해 노동력을 동원하여 필요한 생산물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한강 水邊 근처에 중앙아문을 위한 柴場을 지정하여 아문 소속의 노비를 동원하거나, 燒木軍, 산직 등의 雜色役을 이용하고 때로는 군사력을 동원 해서 땔감을 확보하였으며, 宜松之地, 禁山 등은 조선의 재목, 궁성이나 왕실의 집을 짓 는데 필요한 재목을 조달하는 곳으로 필요에 따라 군사, 인민의 부역노동을 동원하여 재 목을 작벌, 운반하였다. 일반 山林 역시 공유지로서 인민의 부역노동 등을 통해 시탄, 燒 木, 각종재목의 채벌, 수렵 등을 하도록 강제하였다. 이처럼 조선국가의 역제도와 山林川澤制度가 결합함으로써 국가에 의한 징발된 노동 력이 생산적 노동으로 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진상, 공물제도 조선국가의 재정기반은 전세와 진상, 공물, 기타 직접적인 노동력 징발을 기반으로 하 였다. 그 가운데서 진상, 공물제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山林은 貢賦가 나는 곳이다 라는 정약용의 말처럼 대부분의 진상, 공물품은 山林川澤의 산출물, 이의 가공물 이었다. 당시의 생산수준으로서는 山林川澤이 이같은 물품의 생산에 절대적인 생산조건, 생산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진상 공물제도와 산림천택의 제도는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1392년(太祖 원년)에 공안이 작성되어 공물을 비롯한 세입이 1차적으로 확정되었 다.119) 공물의 내용은 世宗實錄 地理志에 도별로 기재하고 군현별로는 군현이 부담 하는 희귀한 것만 기술하였다. 도별로 기재된 것 가운데서 약재 종류를 빼면 공물의 종 류는 다음과 같다.120) 경기도가 50, 충청도가 89, 경상도가 81, 전라도가 112, 황해도가 119) 太祖實錄 권2, 太祖 1년 10월 庚申(1-33 상하). 120) 世宗實錄 地理志는 賦와 貢을 각기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기도의 경우, 厥賦 : 稻米(有 粳米 白米 細粳米 粘粳米 䊣米) 稷米 豆(有 大豆 小豆 菉斗) 麥(有 大麥 小麥 喬麥) 芝麻 蜂蜜 黄蠟 芝麻油 蘇子油 末醬 芥子 白苧布 正五升布 厥貢 : 木瓜 楱實 橡實 栗 등 50여 종, 약재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賦는 田賦로서 전세로 받아들이는 것을 적은 것이 다. 쌀, 豆類 이외에도 油蜜, 黄蠟, 綿布, 苧布 등 布貨雜物 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포화 잡물 은 전세조공물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통상적인 진상과 공물은 厥貢조에 기재된 것만 을 가리킨다.
- 111-84, 강원도가 91, 평안도가 44, 함길도가 26 종류였다.121) 경기도의 경우는 공물의 종류 가 적은데 이는 경기도만이 부담하는 藁草, 芻藁 즉 穀草와 生草 등 馬草와 柴炭의 부담 이 크고 경기도민은 중앙 각사의 각종 요역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122) 이것으로 각 지방의 공물의 모든 종류가 망라된 것은 아니다. 금 은 동 철 등의 광물 은 도별 종류에는 보이지 않지만 군현의 공물종류에 기재되어 있어 공물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世宗實錄 地理志에 기재된 공물을 분류해 보면 대략 ①柴, 草, 炭, 재목, ②禽獸의 포, 가죽, 털, 깃 등, ③과실류, 약재류, 산채류, ④광물, ⑤어패, 해초류, ⑥농산물, ⑦수공 업품 등이다.123) 그 가운데서도 ①~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진상, 공물의 종류는 산지와 강, 바다 등 山林川澤의 채취, 수렵물 등 천연물이 대부분이고 이를 가공한 수공업품, 약 간의 농업생산물이 들어 있었다.124) 본절에서는 山林의 산출물인 ①~④를 중심으로 살펴 보려고 한다. 도별 특징을 보이는 것은 ①의 탄, 燒木, 재목의 종류는 경기도, 황해도, 강 원도, 충청도에만 보인다는 점이다.125) 이는 시탄과 재목의 운반문제 때문이었다. 121) 이는 도별기재의 厥貢조에 기재된 것 가운데서 약재를 뺀 종류이다. 통계는 田川孝三, 앞의 책 p. 40에서 인용하였다. 122) 太宗實錄 권1, 太宗 1년 1월 甲戌(1-191 하ㄱ), 京畿王化所先 宜加存恤以安民生 今馬草柴炭 多般雜貢 倍於外方 願自今馬草柴炭量減節用 其餘雜貢 可除者及可移外方有 下議政府擬議詳定. 123) 공물의 종류가 적은 편인 경기도와, 공물의 종류가 가장 많은 전라도의 공물종류를 약재를 제외 하고 구체적으로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 목과 개암씨 상수리 밤 감 대추 느타리 싸리버섯 황각 산삼 도라지 마른멧돼지고기 토끼젓 물고기젓 숭어 민어 소금 질그릇 사기그릇 목기 버들그릇 갈소쿠리 참빗 왕골속 노화지 잡깃 갓 새 마의 짚 꼴 새기 삼노 소나무그으름 송진 주토 갈탄 향목 굴가루 명아주재 황회 지 초 단풍나무잎 영선잡목 자작나무 은행나무 피나무 뽕나무 앵도나무 장작 전라도 : 꿀 밀 범가죽 표범가죽 곰가죽 쇠가죽 말가죽 이긴녹비 이긴노루가죽 여우가죽 삵괭이 가죽 잘 물개가죽 활줄 표범꼬리 여우꼬리 족제비털 사슴 돼지 토끼 산돼지 말린사슴 말린노루 말린돼지 정향포 사슴꼬리 돼지털 쇠뿔 녹각 갖풀 힘줄 잡깃 가뢰 대모 고니 상어 말린숭어 전 복 생복 말린홍합 낙지 굴 감합 대합조개 은어 붉은 큰새우 인포 조포 오징어 옥둥어 다시마 부 레 칠 겨자 황밤 대추 곶감 연감 모과 석류 배 개암 가시연밥 유자 감자나무열매 비자 유감 동 정귤 금귤 푸른귤 산귤 마름 분곽 상곽 올멱 해모 우무 해각 황각 매산이 김감태 오해자 송이 석이 느타리 표고 새앙 고사리 지초 회회나무꽃 치자 작설차 송화 소나무 그을음 송진 목화 모 시 삼 삼노 각색종이(표잔지부터 유둔까지) 자리(별문답석부터 초석까지)대껍질방석 가는대 오 죽 화살대 바닷대 등상자 대껍질 말린죽순 자기 나무그릇 버들고리 ( 世宗實錄 地理志 번역 본 참고) 이들 공물을 크게 종류를 나누어 보면 경기도의 경우 과실류, 산채류, 禽獸의 포, 가죽, 털류, 어 패, 해초류, 수공업품, 농산품, 곡초, 생초, 재목, 시탄, 기타 등이다. 전라도의 경우 봉밀류, 禽獸 의 포, 가죽, 털류, 어패류, 해초류, 과실류, 산채류, 농산물, 수공업품 등으로 이루어졌다. 124) 공물의 종류는 용도상으로 보면 의료, 식료, 문구용품, 家具, 器具, 염료, 약재, 연료, 건축용재, 병기, 기타 공업원료 등 당시의 생활 전반에 필요한 전도의 전생산물에 걸쳐 있다(田川 孝三, 앞 의 책 p. 41). 125) 世宗實錄 地理志에 도별로 기재된 공물 종류를 비교한 것임.
- 112 - 國史館論叢 第56輯 이들 물품을 인민들로부터 어떻게 수취하였는가? 일단 대부분 1차 생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는 지역 즉 토의를 고려하여 공물의 종류가 배정되고 그 액수는 전결, 호구의 다과를 참작하여 결정되었다.126) 공물은 각 군현별로 종류, 액수가 지정되어 군현의 지 방관이 상납, 수취의 주체가 되었다. 상급 지방장관이 군현에 배정한 진상물품이나 군현 의 공물품을 군현 내부에서 어떻게 수취하는가는 각 군현에 위임되었다.127) 대부분 山林川澤의 산출물로 이루어진 진상 공물의 제도와 山林川澤 제도의 상관관계 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물품의 종류별로 조달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 물품들은 부피가 크고 수량이 많고 무게가 많이 나갔다. 따라서 운반이 큰 문제 가 되어 서울에 가까운 지역에 한정하여 받아 들였다. 시탄은 경기, 충청, 황해, 강원도 에 배정하였으며 각종 영선재목, 각종 도구를 만드는 재목도 경기, 충청, 황해, 강원도에 배정하였다.128) 희귀목의 경우는 이들 도가 아닌 지역에도 산출지에 부과하였다. 초는 곡초와 생초로 경지지역민만이 부담하였다.129) 이들 도는 常貢의 땔감, 목재만이 아니라 불시에 필요한 목재 조달을 위한 부역노동에 항상 시달렸다.130) 중앙에서 노동력을 직접 보내서 이들 물건을 조달할 때도 대개 이들 지역에 보내게 된다.131) 땔감의 수요는 엄청나서 공물만으로 다 조달되지 않고 燒木軍,132) 기인, 수참부,133) 전 운노134) 등에게도 부담시켰다. 탄의 경우는 어떻게 수취했는지 명백하지는 않지만 매공탄이 역민식에 들어 있는 것 126) 田川孝三, 앞의 책 pp. 27 35. 127) 수취나 상납의 방식은 진상과 공물이 각기 달랐다. 진상은 각도의 관찰사, 수군첨절제사, 수군도 절제사, 병마도절제사 등 전국 22 문무 장관이 수취상납의 책임을 지고 이들은 다시 관할하의 각관에 배정하여 물건을 마련하거나 제작하여 중앙에 상납하였다(田川孝三, 앞의 책 p. 93). 128) 주 122)와 같음. 129) 주 137), 138)과 같음. 130) 成宗實錄 권178, 成宗 24년 윤 5월 乙巳(12-330 하) 및 中宗實錄 권69, 中宗 25년 8월 辛酉(17-242 하ㄱ). 131) 成宗實錄 권262, 成宗 23년 2월 癸丑(12-146 하ㄴ). 132) 司水監 燒木軍은 1398년(定宗 즉위년)에 폐지되고 그 부담은 경기좌우도 주군에 분담되었다 ( 太祖實錄 권15, 定宗 즉위년 12월 辛未, 1-142 상ㄴ). 1417년(太宗 17) 祭酒造酿에 필요한 燒木 마련을 위해 典祀寺 노비로 燒木軍을 삼았다( 太宗實錄 권33, 太宗 17년 4월 庚辰, 2-155 하ㄴ). 133) 1409년(太宗 9)에 경기도 燒木貢額 193만 5천근을 감하고 이를 각도 其人 103명을 중치하여 부 담시켰다. 右道 水站夫에게도 일이 없을 때 燒木을 베어 漕轉 上納하도록 하였다( 太宗實錄 권17, 太宗 9년 4월 丁丑, 1-480 하ㄴ). 134) 世宗實錄 권24, 世宗 6년 4월 甲寅(2-592 하ㄴ), 戶曹啓 司宰監燒木 一年所支 六十三萬七千 九百四十七斤 監見在六十二萬三千四百二斤 又其人日役及轉運奴子日役共四十七萬九千十三斤 一年 所用之數 有餘 請除外方各官上納 今甲辰年貢燒木 五萬四千三百五十斤 各浦貢七十二萬斤 往年未 收二萬一千四十斤.
- 113 - 으로 보아 숯을 굽기 좋은 곳을 선정하여 주변 여러 고을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마련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營繕재목은 한 나무에 끄는 인부가 거의 2 3백명 135)에 이를 정도로 많은 노동 력이 필요하여 인민들의 부역노동을 동원하여 베어내고 운반하여 공물의 수량을 채웠다. 재목, 시탄 등은 주로 부역노동을 통해 마련되었으므로 인민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어 일찍이 대납이 성행하게 되었다.136) 草는 穀草와 生草로 京畿諸邑民田에 부과되었다. 인민들은 8결을 단위로 하여 이를 부 담하였다.137) 경기도의 여러 읍이 돌아가면서 穀草와 生草를 司僕寺 典牲署 司畜署 瓦署 東西氷庫 司圃署 등에 바쳤으며 그 부담량은 水田은 一結에 穀草四束 重四十斤, 生草一 同 七束半 重一百斤 이며, 田은 그 절반이었다.138) 경기도의 인민은 관청만이 아니라 과 전의 과전주에게도 초를 바쳤다.139) 이들 물건은 지방관이 군사나 인민을 동원하여 수렵하여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었 다.140) 지방관은 진상, 공물 마련을 빙자하여 수렵에 인민을 빈번하게 동원하는 것이 큰 폐단의 하나였다.141) 호피, 표피, 매와 같은 특별한 것을 위해서는 다른 잡역을 제외하고 除役戶,142) 山場漢 143)이란 이름으로 이를 전담하는 호를 설정하여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노루, 사슴 등이 줄어들어 脯를 마련하기 어렵게 되고 虎 를 잡아도 수령 이 차지해버리고 민에게서 거두어서 사서 바치는 등 점차 대납이 성행하게 되었다.144) 135) 成宗實錄 권219, 成宗 19년 8월 乙卯(11-369 하ㄴ). 136) 대납가는 상정가로 炭 1石은 풍년에는 米 10두, 흉년에는 7두였으며, 大不等木 1條는 풍년 30 두, 흉년 22두, 中不等木 1條는 풍년 24두 5승, 흉년 17두, 小不等木 1條는 풍년 19두, 흉년 12두 였으며, 吐木 1把는 풍년 10두, 흉년 7두였다. ( 文宗實錄 권3, 文宗 즉위년 9월 己酉, 6-280 하ㄴ). 137) 成宗實錄 권57, 成宗 6년 7월 辛亥(9-239 상ㄴ 하), 臣願自今 賦役 一依納草之制 先定ー邑 所耕田結之數 以田八結出一夫爲綱. 138) 위의 책 권4, 成宗 원년 4월 丁巳(8-485 하ㄴ). 139) 주 27)과 같음. 140) 世宗實錄 권132, 世宗 30년 10월 辛酉(5-101 하ㄱ ㄴ). 141) 文宗實錄 권5, 文宗 즉위년 12월 戊戌(6-334 상ㄱ) 및 燕山君日記 권32, 燕山君 5년 3월 丙戌(13-355 상ㄱ). 142) 1528년(中宗 23) 장령 이언적은 경상도의 응자진상의 폐단으로 응자 진상을 위한 除役戶를 정해 놓고도 응자를 못잡아 除役戶가 사서 바친다고 지적하였다( 中宗實錄 권64, 中宗 23년 윤 10 월 戊戌, 17-74 하). 143) 1562년 평안도 강계부는 익선관 표피지공을 마련하기 위해 山場漢이라 이름하여 표를 잡는 호를 설정하고 있었으나 그러고도 털이 나쁘다고 價布를 거두어 京市에서 사서 바치고 있었다( 明宗 實錄 권28, 明宗 17년 8월 甲寅, 20-625 하ㄴ). 144) 明宗實錄 권16, 明宗 9년 4월 丁酉(20-193 하ㄴ) 및 成宗實錄 권201, 成宗 18년 3월 甲 辰(11-194 하ㄱ).
- 114 - 國史館論叢 第56輯 광물은 철, 금, 은, 동, 연 등이 주된 것이었다. 철은 철물취련이 역민식에 들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료의 산출처와 시목이 충 분한 곳에 鐵場을 설치해 놓고 인근 군현의 인민을 부역노동에 동원하여 공철을 생산하 였다. 철은 沙鐵을 주 원료로 하였기 때문에 겨울철과 같은 농한기에 인민을 부역노동에 동원하여 浦, 하천변에서 사철을 채취케 하고 땔감마련을 시켜서 冶匠 등을 동원하여 재 련케 하였다. 鍊鐵을 위해 吹鍊軍 등 雜色役을 설정해 놓은 곳도 있었다. 황해도의 경우 는 도가 담당하는 貢鐵의 절반 정도를 해주, 문화, 송화의 철간이 담당하였는데 철간이 사는 마을의 땔감이 다하자 큰 폐단이 되어 이들을 군역에 충당하고 대신에 이들이 담 당하던 공철은 柴木이 풍부한 곳에 철장을 설치하여 다른 곳처럼 인민의 부역노동을 동 원하여 생산하도록 하였다. 부역노동을 동원하여 철을 생산하는 철장제 운영의 폐단이 논의되면서 철장제를 폐지하고 공철의 마련을 군현에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필연적으로 철생산이 어려운 군현의 대납을 가져오는 것으로 야철수공업의 어느 정도의 발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편 야철수공업의 발전으로 이들에게 과세하여 稅鐵을 받 아들임으로써 공철의 수요를 부분적으로 대체해 나갔다.145) 금도 역시 사금채취가 주된 것으로 인민의 부역노동에 의존하였다. 금이 산출되는 각 군현에 세공액을 정하여 수취하였다. 특히 그 부담량이 많았던 함경도의 안변, 영흥, 단 천은 다른 요역과 공물을 모두 면제하고 貢金만을 전담케 하였으나 그래도 부담이 과하 다고 호소하여 다른 부담을 다시 맡는 대신에 채금의 부역노동을 인근의 군현과 나누어 지는 것으로 바꾸었다.146) 조선국가는 과실, 楮, 漆, 箭竹의 확보를 위해서 이들 물건을 공물로 지정하고 지방 군 현에 공물을 마련하기 위한 배양처를 두도록 하였으며,147) 민간의 것까지 파악하여 진상, 공물에 충당하였다. 전죽의 경우 공처의 죽림을 둘 뿐만 아니라 私養의 전죽까지도 일일이 찾아서 치부하 여 전죽을 확보하려고 하였다.148) 과실은 산지, 그루수 등을 조사하여 대장을 만들어 파악하였다.149) 관에서 과원을 설 145) 본 논문 Ⅳ-1-2) 雜色役 참고바람. 146) 유승주, 앞의 논문(1979), p. 134. 147) 經國大典 戶典, 요부, 諸邑楮莞漆 以培養所出 納貢. 148) 世祖實錄 권16, 世祖 5년 4월 甲辰(7-329 하ㄴ 330 상ㄱ), 除民家私養箭竹外諸邑公處竹林 觀察使差人禁伐培養 諸邑貢竹毋得擅伐 必報觀察使 觀察使審經年久近 方許刈取 違者論以制書有 違律 又道內箭竹產處 一一捜訪以啓 令該司置簿.
- 115 - 치하고 과원직을 두어 진상 공물품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민가의 것인 경우는 조 세로 받아서 공물이나 관청의 수요에 충당하였다.150) 약재류는 藥圃를 설치하거나 藥夫를 두고 채집, 종약을 맡겨 진상, 공물을 마련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기타 민들에게서 수취하였다.151) 밀렵은 기본적으로 벌통을 관에서 설치하여 공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산에서 나는 버섯, 삼 등 각종 채취물의 경우는 일반 인민에게 부담시켜 수취하였다.152) 이상 山林 산출물 이외에도 진상 공물의 종류로는 기타 어패, 해초류, 수공업품, 농산 물 등이 있었다. 어패, 해초류는 관용의 어전, 어량을 설치하여 진상, 공물을 마련하거나 포작간, 해작 군 등을 설정하여 놓고 이들에게 할당량을 수취하여 마련하였다. 수공업품은 軍器, 各色紙, 각종 자리, 陶器, 磁器, 木器, 鹽, 柳器, 船舶 등이었다. 이 물 품들은 지방관청에서 장인층, 稱干者와 같은 수공업자를 동원하여 생산하거나 이들에게 할당량을 수취하여 충당하였다. 수공업자를 동원하여 생산하는 경우 관설작업장을 설치 하고 일반 인민의 부역노동을 통해 원료, 연료를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산물은 저, 마, 면화 등이었다. 농산물로 미, 두, 맥 등 주요한 것은 전세조 공물에 속하고 일반 공물로는 저, 마, 면화 등 약간의 직물의 원료를 수취하였다. 이처럼 진상 공물은 대부분 山林川澤에 크게 의존하는 생산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山林川澤을 어떻게 이용, 생산하고, 또 이를 수취하는가가 문제가 되었으며 다음 세가지 방법이 취해졌음을 알 수 있다. ① 인민에게 개별적으로 부담시키는 경우 : 이는 다시 지역 인민에게 모두 부담시키는 경우와 특정 인민에게 수취하는 경우로 나뉘었다. 지역 인민에게 모두 부담시키는 방식 은 수취하는 물건이 일단 생산조건, 수단이 그 지역에 있고 생산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져 인민에게 개별적으로 부담시켜도 수취가 가능한 경우다. 군현의 특정 인민에게 집중적으 로 부담시키는 방식은 수취하는 물건의 생산조건이 일부 지역에 편중되어 있거나 일부 인민만이 그러한 생산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들의 경우 雜色役으로서 지정된 경우가 많았다. ② 지방관청에서 생산을 관장하는 경우 : 특별한 기술이 요구되거나, 대규모 노동력이 149) 여러 고을에 옻나무, 뽕나무, 과일나무의 그루수와 닥나무밭, 왕골밭, 살대의 산지에 대해서 대 장을 작성하여 본조, 본도, 본고을에 보관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심고 가꾸고 기르게 한다. ( 經 國大典 공전, 재식). 150) 지방 수령에게 과수를 파악하도록 하고, 민가 과실의 경우는 십분지 일을 수취하도록 하였다 ( 太宗實錄 권2, 太宗 1년 7월 戊申, 1-210 하ㄱ). 151) 田川孝三, 앞의 책 pp. 65 66, 155 166. 152) 田川孝三, 앞의 책 pp. 71~79.
- 116 - 國史館論叢 第56輯 필요하여 생산자들의 개별적 생산이 어려운 경우는 지방관청에서 직접 관장하여 생산하 였다. 장인들을 동원하여 생산하거나 일반 인민을 부역노동시켜 생산하였다. 또는 장인 등 雜色役層과 일반인민의 노동력을 결합하여 생산하였다. ③ 대납하는 경우 : ①과 ②가 기본적인 공물의 생산, 수취형태였으나 이미 일찍부터 대납이 성행하였다. 世祖대 양성지는 紙芚, 油蜜, 白楮, 正鐵, 竹木, 貢布, 貢炭, 燒木, 吐 木, 不等方木, 豹皮, 船隻, 靑草에 이르기까지 민이 自納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田税는 국가의 大貢인데 간혹 대납하는 자가 있으니 대납의 해가 이에 이르렀다 라고 하고 있 다.153) 이러한 대납의 성행은 결국 진상, 공물제도를 와해시키고 대동법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대납하는 경우 그 부담을 군현민 전체가 지게 되며 전결에 부과하는 방식 을 택하게 되어154) ①과 ②의 경우 필요했던, 국가가 진상 공물 부담자들의 생산을 보장 하거나 강제하는 여러 장치들이 불필요하게 된다. ①의 경우는 어떤 형태건 간에 공물을 부담하는 사람이 직접 공물을 생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생산수단과 노동력과의 직접적인 결합이 보장되어야 한다. 생산 자의 생산수단에의 접근이 보장되거나 생산자의 생산수단과의 결합상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②의 경우는 국가가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직접 확보하여 그 결합을 강제해야 한다. 이같은 공물생산 조건의 확보는 곧바로 공물이 산출되는 山林川澤의 이용방식, 소유의 문제가 된다. ①은 공물부담자의 자유로운 산림천택의 이용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데 이는 산림천택의 이용방식에 따라 달라졌다. 첫번째는 생산을 위해 산림천택을 잠깐 씩 이용하는 경우인데, 많은 사람이 빈번하게 이용하고 생산조건을 생산자가 쪼개 가질 수 없는 경우로서 산림천택의 공유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두번째는 생산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山林川澤을 지속적으로 점유할 필요가 있는 경우이다. 이때 국가는 공유제를 통해서 생산자의 생산조건에의 접근을 보장하는 한편, 생산자에게 雜色 役을 부과하거나 생산수단에 대해 조세를 부과함으로써 점유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였 다. 대개는 당시의 생산수준으로 보아 산림천택과 같은 생산조건이 우선적이고 이것이 보장되면 생산자가 얼마간의 다른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山林川澤의 소유관계는 이들의 생산수단의 확보에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②는 군역이나 부역노동을 통해 일시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여 생산하는 경우와 雜色 役 등을 통해 노동력 자체를 생산수단에 긴박시켜 양자를 영유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 졌다. 이들 노동이 투하되는 山林川澤의 확보는 국가가 산림천택의 일정부분을 다른 이 153) 世祖實錄 권40, 世祖 12년 11월 庚午(8-46 상ㄱ). 154) 成宗實錄 권20, 成宗 3년 7월 乙巳(8-671 상ㄱ), 沿邊諸邑進上物膳軍 今盡刷爲兵 不得已以 田結出夫 獨納物膳 而採海非人人所能爲 各出其價 貿易以納.
- 117 - 용을 배제하고 확보해 놓고 여기에 노동력을 불러모아 생산하는 방식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서 필요할 때에 노동력을 동원하여 생산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국용의 특 정 용도의 山林의 설정으로, 후자는 공유제로 나타났다. ①②는 어느 방식이건 공물생산자가 공물의 생산조건에 접근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 다. 그렇지 않다면 생산조건,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만 부과되어야 하지 일반인민이나 특정 지역의 주민, 특정한 생산자에게 직접 부과할 수가 없다. 이는 山林川澤의 공유제, 또는 관에서 이용하는 특정용도의 山林川澤의 설정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의 반증으 로서 산림천택이 궁방 등에 의해 私占되자 공물생산이 불가능하다는 호소가 이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 雜 稅 制 度 조선국가는 山林川澤을 이용하여 생산하는 생산자, 생산시설에 일정한 세를 수취하였 다. 이들 생산자는 신역으로 지정되어 일정한 생산물을 국가에 납입하기도 하고 지방관 청에서 세로 받아들인 생산물을 진상, 공물로 중앙에 상납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세의 부 과는 역제도, 진상공물제도라는 국가의 산림천택의 이용, 수취방식과 동떨어진 것은 아 니다. 하지만 세의 부과를 조선국가의 산림천택의 지배, 산출물 확보의 독자적인 하나의 방식으로 설정할 수 있으며 조선전기를 경과하면서 점차 이 비중이 높아졌다. 산림천택을 이용하는 생산분야에 세를 매기는 것은 고려후기부터였다.155) 조선국가는 산림천택을 이용하는 생산분야에 세를 매기는 고려후기의 새로운 추세를 제도적으로 정 비하였다. 조선국가의 조세제도는 크게 전세와 진상, 공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선국가는 전 세, 진상, 공물 이외의 소소한 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經國大典 의 魚鹽 雜税 규정 이 대표적이다. 155) 高麗史 권78, 지32, p. 50(충렬왕 5년 3월), 幷點鹽戶 以徵其税. 위의 책 권78, 지32, p. 53(선종 5년 7월), 定雜税栗栢大木三升 中木二升 小木一升 漆木一升 麻 田一結生麻十一兩八刀 白麻五兩二目四刀. 위의 책 권78, 지32, p. 53(공민왕 5년 6월), 自今山林屬繕工 澤梁屬司宰 弛禁輕税. 위의 책 권79, 지33, p. 17(공양왕 3년 3월), 本朝農則履畝而稅 工則努於公室 商則旣無力役 又無 税錢 願 收税. 위의 책 권79, 지33, p. 18, 忠宣王即位敎曰 鹽税 自古天下公用 宮院寺社與勢要之家 皆爭據執 不 納其稅 國用不足 有司窮推除罷. 위의 책 권79, 지33, p. 22(恭譲王 3년 7월), 都堂啓 鹽鐵國課之大者 本朝鐵人皆私之 以官未立法 宜置冶官 鐵戶 一如鹽法 以資國用上從之然事竟不行.
- 118 - 國史館論叢 第56輯 魚鹽은 諸道의 魚箭과 鹽盆을 등급을 나누어 등록하여 本曹 本道 本邑에 보관하여 수 세 토록 하였다. 雜稅는 工匠의 等第와 坐賈의 公廊數를 등록하여 本曹, 工曹, 本道, 本 邑에 보관하여 收稅하고 行商은 路人을 지급하여 收税 하였다. 여기서 雜税는 공상세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염세는 雜税와는 항목이 다르지만 魚鹽船網工商等雜税 156) 와 같이 염세도 잡세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魚鹽船網工商 등 세의 특징은 어는 어전을, 염은 鹽盆을 대상으로 한 세이며 工税의 경 우도 工匠의 等第에 따라서 곧 생산의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세를 매기고 있다는 점이 다. 특히 외방의 冶匠, 즉 鍮鐵匠, 鑄鐵匠은 冶의 대수에 따라, 水鐵匠은 다시 冶의 규모까 지 따져서 세를 매겼다.157) 공장은 경기, 충청, 강원, 황해도의 수철장이 수철을 직접 바치 는 것은 제외하면 저화, 미, 포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收税상의 특징은 이들 이 기본적으로 생산시설의 유무, 규모에 따라 조세부담능력이 결정되며 생산물을 관매한 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工税의 경우 일반 工匠은 上中下에 따라 조세부담을 달리 할 뿐인데, 冶匠은 冶의 대수에 따라, 그 가운데서도 水鐵匠은 冶의 대수, 규모에 따라 세 부담을 달리하도록 규정하여 수요가 큰 생산부문에 대해서는 생산의 실제를 반영할 수 있 도록 자세한 수세 규정을 두었던 것이다. 雜稅가 목표로 하는 대상이 주로 소상품 생산자, 그 유통담당자에게 맞추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魚鹽船網工商税 등의 잡세부과 는 이들 생산분야에서 소상품생산이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雜税의 이러한 부과 원리는 노동력과 현물을 부과하는 진상, 공물제도와 일정한 차이 가 있다. 후자가 특정 물품의 생산과 일정량의 납부를 강제하는 제도의 성격이 농후한데 반해 잡세제도는 생산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 생산활동을 하고 이에 대 해서 일정한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雜税 부담자들은 무릇 工匠 은 工役日數를 제하고 수세한다 158)는 규정에서 보듯이 잡세 부담자이며 동시에 雜色役 으로서 신분적으로 얽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이들은 雜色役層으로서 보 156) 成宗實錄 권184, 성종 16년 10월 乙酉(11-59 하ㄴ), 九條曰大典內 魚箭收稅補軍資 近來或別 賜 或給貧民 强有力者 冒稱貧民 隱占爲利 故官倉所入不多 自今勿以給人 皆官收 以補穀 何如 結 箭功役甚大 不可盡令官收 依前例諸道 上等箭擇而官結 何如 十條曰 魚鹽船網工商等雜税不一 官吏 等慢不致意 有名無實 自今檢覈 年年所入多寡 其不實者 官吏論罪 何如 可. 157) 장공인은 상등이면 매달 종이돈 9장, 중등이면 6장, 하등이면 3장을 바친다. 지방의 야장쟁이들 은 놋쇠쟁이면 1로마다 봄에 규격베 1필, 가을에 쌀 10말을 바치고 참쇠쟁이면 면포 1필, 가을에 쌀 15말을 바치며 무쇠쟁이면 큰로는 봄에 면포 1필반, 가을에 쌀 6섬 8말을 바치고 보통로는 봄에 면포 1필, 가을에 쌀 6섬 2말을 바치며 작은로는 봄에 규격베 1필, 가을에 쌀 4섬 6말을 바 친다. 영안도와 평안도의 장공인은 천으로 바치는 세가 없다. 경기,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의 장 공인은 매년 큰로이면 무쇠 100근, 보통로이면 90근, 작은로이면 80근을 바쳐야 하는데 쌀이나 천으로는 받지 않는다. 장공인에 대해서는 관청일을 한 일수를 계산해서 제하고 세를 받는다. 자 리를 잡고 앉은 장사치에 대해서는 매달 종이돈 4장씩 받으며 나라의 건물에 대해서는 매 1칸마 다 봄과 가을에 각각 종이돈 20장씩 받는다 ( 經國大典 戶典, 雜稅). 158) 經國大典 戶典, 雜稅.
- 119 - 다는 잡세 부담자로서 위치지워지게 되었다. 世宗實錄 地理志는 각 지역의 염분, 어전, 도기소, 자기소 등에 대해 그 존재 여부 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생산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을 갖춘 곳에 설치되어야 한 다. 지배층은 이러한 자연적 조건을 독점함으로써 이들 분야를 장악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가 이러한 시설을 일일이 파악하였던 것은 조세를 거둘 뿐만 아니라 지배층의 山林 川澤의 독점이나 이를 통한 생산민 지배를 차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159) 산림천택을 이용하는 생산분야에서 그 생산시설에 직접 세를 매기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조선국가는 산림천택을 이용하여 생산을 하는 직접 생산자들에게 일정한 역부과와 雜 税 수취를 대가로 주변 산림천택의 자유로운 이용을 보장하고 한편으로는 생산에 필요한 만큼의 점유도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국가는 농경지 이외에도 개인 이 점유하고 있던 생산수단을 직접 파악하여 조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60) Ⅴ. 山林 私占의 진행 山林川澤與民共之 를 표방한 조선국가의 山林制度는 山林을 이용하는 일반 인민에게 만이 아니라 지배층의 산림 지배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국가는 여말에 확대되었던 지배층의 山林川澤의 私占을 강력하게 금지하였다. 그 러나 山林 私占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되풀이되는 사점금지 조처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산림사점의 존재를 반증해 준다. 조선국가는 초기부터 산림사점을 금지하기 위해 山林 점유의 명목이 되었던 墳墓,161) 農舍, 欄園 등의 점유 범위를 한정하였다.162) 그리고 經濟六典 속전에는 山場柴草는 사점치 못한다 고 못박았다.163) 墳墓다, 農舍다, 欄園 등의 명목으로 제한된 범위나마 私 占을 인정하였으나 국가는 산림을 광점하는 명목이 되는 柴場의 私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이러한 정책, 금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山林 私占은 존재하였다. 山林 159) 經國大典 에는 魚箭의 私占을 금지하였고 續大典 에는 鹽盆, 魚箭을 일일이 대장에 등재 하도록 규정하고, 이를 어기거나 세력가가 이를 차지할 때는 처벌하도록 하였다. 160) 이와 같은 雑税는 고려말부터 시작되었다. 염분세, 산세, 어전세 등 이전의 공물제도와는 다른 성격의 조세가 등장하였다. 161) 권태원, 고려시대 종산형성에 관한 고찰 (단국대 석사학위논문, 1975) 참고. 162) 太宗實錄 권26, 太宗 13년 11월 丁亥(1-694 하ㄱ). 163) 世宗實錄 권18, 世宗 4년 11월 癸亥(2-510 하ㄱ).
- 120 - 國史館論叢 第56輯 광점은 山場을 서로 차지하려는 세도가들의 다툼으로 발각되기도 하고164) 자신이 차지 하고 있는 山場을 내수사에 바치겠다는 충성에서도 드러났다.165) 世祖는 양성지에게, 宰相多廣占山澤 以爲樵蘇之地 民甚苦之 卿能一一推劾乎166) 라고 묻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世祖때까지는 뒷날 평가되기를 世祖朝에 한계미가 장 단에 柴場을 점유하였는데 世祖가 크게 견책하였다. 이에 柴場 私占을 금하는 것이 세워 졌다 라고167) 할 만큼 山林 私占을 엄금하는 단호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고 평가되었 다. 조선초기에 산림 사점이 어느 정도 제어되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부터 불법적인 점유는 물론이고 국왕에 의한 柴場 사여, 立案 등의 합법적인 형태를 동원한 私占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왕자 공주가 등에 대한 柴場의 사여는 成宗 때부터 시작되었으며168) 燕山君 때에는 커다란 정치문제가 되었다. 연산군 초년에 국왕이 대군 공주가에 柴場을 사여하는 행위 를 놓고 신하들과 국왕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신하들은 山湖를 封略함은 폐 혜가 크다,169) 柴場 주위가 몇십리이니 私家가 마음대로 60리의 땅을 갖는 것은 큰 폐 해다,170) 대군 공주 柴場을 모두 혁파함이 민생을 돕는 것이다 171)라고 지적하였다. 그 러나 柴場의 折受는 시작되었고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宣祖가 피난할 때 민들에게 폐단 을 묻자 왕자군가의 山林川澤多占 172)이라고 대답한 데서도 알 수 있을 정도다. 柴場은 經濟六典 속전에 이어서 경국대전 에 柴草場의 私占禁止 가 명문화 되 었으므로 山林 私占의 명목이 될 수 없었으나 국왕이 왕자 군 등 왕실에 折受해 줌으로 써 이들 왕실의, 柴場이란 이름의 산림 사점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山林 점유의 또 하나의 합법적 방편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개간하겠다고 立案을 받는 방법이었다. 권세가들은 개간을 빙자하여 山林, 空閑地, 陳地를 입안을 받아 개간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개간도 금지하고 이를 독점하였다.173) 164) 위와 같음. 165) 世宗實錄 권19, 世宗 5년 2월 乙卯(2-524 상ㄴ). 166) 世祖實錄 권43, 世祖 13년 9월 丙寅(8-118 상ㄴ). 167) 燕山君日記 권41, 燕山君 7년 12월 乙丑(13-458 하ㄴ). 168) 위의 책 권42, 燕山君 8년 1월 丙子(13-459 하ㄴ). 169) 위의 책 권41, 燕山君 7년 8월 丙辰(13-458 하ㄴ). 170) 위의 책 권41, 燕山君 7년 10월 丙午(13-453 하ㄴ). 171) 위의 책 권41, 燕山君 7년 12월 己巳(13-459 상ㄱ). 172) 宣祖實錄 권26, 宣祖 25년 5월 辛酉(21-484 하ㄱ). 173) 1420년(世宗 2)에 연안도호부사 정주복은 凡有可耕陳地 豪富廣占徒受立案 累年不墾雖有欲墾者 以爲已受立案之地 公然禁耕 民畏其勢不敢告爭 自今雖受立案不自開墾者 許民開墾 違者痛治 ( 世 宗實錄 권10, 世宗 2년 11월 己巳, 2-414 상ㄴ)라고 당시의 사정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