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트랜스라틴 10 호 (2009 년 11 월 ) 노래로살아있는시인, 마리오베네데티 이성형 내그대를사랑함은내사랑, 공모자, 그리고모든것이기때문이네. 거리에서어깨걸면우린둘이상이네. 이만큼축복받은시인이있을까? 40명이넘는저명한가수들이오래전부터그의시를노래로만들어불렀다. 노벨상을받은파블로네루다도그만큼대중의사랑을받지는못했으리라. < 그대를사랑해 >(Te quiero) 는이제이베로아메리카사람들이즐겨부르는애창곡이되었다. 아르헨티나의디바, 나차게바라 (Nacha Guevara) 가불러유행되었고, 고혹적인목소리를지닌페루계멕시코가수타니아리베르타드 (Tania Libertad) 도이를히트곡으로만들었다. 사랑가라고한다면쿠바가수파블로밀라네스 (Pablo Milaneś) 의 < 세월 >(Los años) 과이노래가최고의자리를놓고경쟁을하지않을까생각된다. 2009년 5월 17일라틴아메리카세계는큰슬픔에빠졌다. 우루과이가낳은위대한시인이자작가인마리오베네데티 (Mario Benedetti, 1920~2009) 가 88세를일기로사망했다는비보를접한것이다. 우루과이정부는바로국장을선포했고, 스페인어권언론들은제각기시인을추모하는특집을실었다. 80여권의시집, 소설, 극본등을남겼던그는 단편과소설을쓴적이있는시인 으로기억해주길바랬다. 웹진트랜스라틴 http://translatin.snu.ac 서울대학교라틴아메리카연구소 (SNUILAS)
노래로살아있는시인, 마리오베네데티 41 시인베네데티는나에게우연히다가왔다. 1987년어느때인가멕시코서점에서나차게바라의노래테이프를하나구했던것이다. 1975년에멕시코실황공연을테이프로만든것이었다. 그대를사랑해 는폴엘뤼아르의시 우리는둘이서 와비슷한분
42 트랜스라틴 10 호 (2009 년 11 월 ) 위기를자아냈고, 사무실의시 에실린 월급, 나는비서랍니다, 신입사원을위한발라드 는사무실의애환이담긴, 유머가넘치는시들이었다. 왜웃나요? 는라틴아메리카의현실과권력을정면으로비판하고있었다. 그의시어는쉬운일상적언어이지만늘촌철살인의재치를담고있었다. 나차의목소리도매력적이었다. 바로베네데티의시선집도하나구했고, 테이프가닳아늘어질때까지듣고또들었다. 1998년에타니아리베르타드도베네데티를주제로음반을내었다. < 인생이란이괄호 >(La vida ese pareńtesis) 가그것이다. 이음반을손에넣고얼마나좋아했는지모르겠다. 시인은인생을관조하는노인의시선으로향수, 어린이, 마을, 소녀들을노래한다. 타니아의섬세하면서도열정적인목소리는시인의목소리와합쳐서하나가된다. 깊은감동의물결이가슴에밀려온다. 가톨릭사회의이중성을비판하는하이쿠풍의시구절 파팜하베무스 를 2) 장중한미사곡형식의반주에다담아낸다. 교황청의콘돔금지를에둘러비판한것이다. 콘도나라스콘데나스 / 콘데나로스콘도네스 ( 죄는사하지만 / 콘돔은금한다 ). 바로크적언어유희의걸작이다. Tutor de los perdones 죄를용서하는사감 distribuidor de penas 고통의배분자 condona las condenas 죄는사하지만 condena los condones 콘돔은금한다 우루과이를대표하는가수이자그의정치적동지였던다니엘 비글리에티 (Daniel Viglietti) 도오래전에음반을남겼고, 카탈루 2) Papam habemus 는 우리들의교황이탄생했다 는뜻으로새교황을선출했을때사용하는말이다.
노래로살아있는시인, 마리오베네데티 43 냐출신의음악인호안마누엘세라트 (Joan Manuel Serrat) 도 < 남쪽도있다 >(El sur tambień existe) 란음반으로대시인의시를노래로만들었다. 오랫동안죽음을기다렸는지, 유언장에해당하는하이쿠풍의시에도유머가물씬묻어있다. 날묻을때 / 제발잊지말게나 / 내볼펜을. 시인은볼펜과함께묻혔지만, 그의시는노래로, 음반으로, 유튜브 (YouTube) 로전세계를유랑한다. 시인마리오베네데티는 1920년 9월 14일에우루과이의타쿠아렘보주의파소델로스토로스에서태어났다. 출생신고서에등록된이름은 Mario Orlando Hamlet Hardy Brenno Benedetti 였다. 당시이탈리아이민들의황당한풍습은이름을길게짓는것이었다. 그의삼촌하나는태어날때통치를하던모든군주의이름을몽땅넣은이름을가지고있었다고한인터뷰에서말했다. 그가최초로벌인투쟁은이름네개를서류에서제거하는것이었다. 약사인부친의약방이파산하자가족은모두몬테비데오로이사를했다. 어린시절부터그는늘경제적궁핍속에서살았다. 가족은시근교에있는빈민가의양철지붕아래살았다. 초등학교는독일계학교를다녔는데, 그래서그는독일어를모국어다음으로친근하게생각한다. 그가쓴최초의시도독일어시였다. 초등학생이썼다고도저히믿을수없었던선생은마리오의아버지가쓴보증서를보고서야아이의시재를이해하게되었다고한다. 엄격한독일계학교의훈육탓인지그는규율, 정확성, 엄격함의습관이몸에배었다고말했다. 먹고살기위해서는일자리를찾아야했다. 중학생정도의나이인 14세에그는윌스미스사의자동차부품판매상을시작하면서, 청소년시절부터온갖직업의세계를섭렵했다. 노점상, 출판사타자수, 직업군인, 사무직원, 번역가, 부동산관리인, 신문
44 트랜스라틴 10 호 (2009 년 11 월 ) 기자, 교수등이그가거친일자리였다. 이런이력때문에그는일찌감치하층사회를이해하게되었고정치화되었으며, 이들의일상언어를자연스럽게시나수필로담아낼수있었다. 18세가되던 1938년, 돈을벌려고부에노스아이레스로간그는산마르틴광장의벤치에서글쓰기에헌신하겠다고다짐한다. 하지만문인으로서출발은그렇게행복하지못했다. 처음에자비로출판한두권의시집은한권도팔지못했다. 1956년에나온일곱번째시집인 사무실의시 가조그만성공을이루었을뿐이었다. 1945년부터몬테비데오의대표적인주간지 마르차 의기자로활동하면서그는시, 평론, 단편을활발하게발표한다. 1974년군정이이잡지를폐간조치할때까지 마르차 는그의주된활동무대였다. 혁명이후쿠바를여행하면서그는정치의식에큰충격을느꼈다. 카스트로와의만남은 1968년에쿠바의문화기관카사델라스아메리카스 (Casa de las Ameŕicas) 에문학연구소를개설하였고, 1971년까지소장으로봉직하였다. 조국에돌아온그는당시카스트로주의세력이었던투파마로스민족해방전선 (LNT) 과함께 3월26일독립운동 이란정치조직을결성하고본격적인정치활동을시작한다 ( 이조직은 2005년이후집권여당연합인확대전선 Frente Amplio의일부이다 ). 하지만정치적양극화는곧쿠데타와군정의수립으로귀결된다. 그는 1973년 6월봉직하던라레푸블리카대학의인문대이스파노아메리카문학과장자리를버리고, 오랜망명의길에나선다. 유랑의길은험했고기약도없었다. 처음에는부에노스아이레스로갔다. 그곳에서는극우단체인 AAA( 트리플A) 가 48시간이내에출국할것 을요구하며생명을위협했다. 그래서페루로갔다. 하지만리마에서는구금을당한채추방을당했다. 국가테러
노래로살아있는시인, 마리오베네데티 45 리즘은라틴아메리카전역의홍역처럼번져나갔다. 겨우 1976년에가서야쿠바가그에게손을벌렸다. 베네데티는 1년뒤에망명의종착지로스페인을택했고, 그곳에서 1983년까지지냈다. 결국 10년을외국에서부인도없이지낸것이다. 망명시절에더러행복한순간도있었다. 1974년에그의소설 휴전 (La tregua) 이세르히오레난감독의손을통해영화로만들어졌고, 칸영화제에서최고의외국영화부문에추천되기도했다. 그의정치노선이나신념은완고하다는소리를들을정도로일관성을유지했다. 그것은그가타고난낙관주의자이기때문에가능했다. 내가신봉하는대의가패배했다고해도나는다시일어난다. 대의를위해싸우는덕분에나는편히잠을잘수있다. 이데올로기적신념에관한한패배했다고생각하지않는다. 그신념을위해계속싸울것이다. 성공을하지못하더라도좋다! 그의발은대지에굳건히닿아있지만, 유토피아를향한시선은여전히강렬하다. 나는항상말했다. 세상이낸세명의위대한유토피아주의자는예수, 프로이트그리고마르크스라고. 그들덕분에인간성은긍정적인방향으로진화했다. 그들의유토피아가 10% 정도진척되었다고해도, 그 10% 로인해인간성은조금씩개선되어간다. 나는교정이불가능한낙관주의자이다. 그의시에는늘사람들의풋풋한냄새가난다. 내시의많은것은보통사람이되는것의산물이다. 민중에가까이다가가는것은항상나의최고덕목이었다. 내인생에서최고라고생각하는것은내가쓴글이이서민, 민중, 두발로서있는사람들의가슴을뭉클하게만드는것이다. 이성형 - 서울대학교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