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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 박 태 균*1) 머리말 Ⅰ. 韓國民主黨의 조직구조와 그 특징 Ⅱ.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주류세력과 그 특징 1. 일제하 기독교 조직, 동아일보 관계 자들 2. 정치노선과 활동 Ⅲ. 해방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1. 일제하 비주류세력의 활동과 그 특징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 Ⅳ.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와 성격변화 1.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 2. 한국민주당의 성격변화 맺음말 머리말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수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출현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일본제국주 의가 물러간 후 독립된 조선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자 다양한 성향을 가진 정치단체 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이 유일한 정권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상황 속에 서 이들은 離合集散을 거듭하였다. 이들 정치단체들이 정치권력의 공백상태에서 갑자기 돌출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일 제 식민지 시기에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세력들이 각각의 정치노선에 기초하여 정치집단 을 형성했다. 일제시대 항일운동이 자치운동에서부터 공산주의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1)* 한신대학교 講師.

2 國史館論叢 第58輯 이념과 형태로 표출되었던 만큼 해방 직후에 조직된 정치단체들 역시 공산주의에서부터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이 모두 현재까지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계 열, 또는 사회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었던 朝鮮共產黨(이하 조공 으로 약칭)과 朝鮮人民 黨(이하 인민당 으로 약칭)은 1946년 南朝鮮勞動黨으로 합당, 개편되었고, 1949년에는 다 시 南과 北의 勞動黨이 합당하여 朝鮮勞動黨이 조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여러 차 례의 정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38선 이남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세력들은 대부분 당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또한 당시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정치단체였던 重慶 臨時政府 중심의 韓國 獨立黨(이하 한독당 으로 약칭)과 金奎植 중심의 民族自主聯盟의 핵심적인 인사들은 대 부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납북되거나 월북하였다. 비록 양 단체의 중간, 하위 간부들이 남한에서 계속 활동하였지만, 이들 역시 容共分子 라는 汚名을 덮어쓰고 결국 더 이상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38선 이남만을 국한해서 볼 때 현재까지 그 정치적인 명맥을 확실히 잇고 있는 정당 은 韓國民主黨(이하 한민당 으로 약칭)이 유일하다. 한민당은 1949년 民主國民黨(이하 민 국당 으로 약칭), 1955년 民主黨으로 확대 개편 하는 등 1950년대 이후 離合集散을 거듭 했지만, 현재의 民主黨에 이르기까지 소위 한국의 正統野黨 으로써 중요한 정치적인 역 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한민당에 대한 연구는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에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비록 많은 인물들이 明滅해 갔고, 해방 직후의 정치노 선과 활동을 현재와 그대로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야당 스스로 한민당으로부터의 계속 성을 주장1)하고 있는 만큼 한민당에 대한 연구는 현재의 민주당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 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민당에 대한 연구는 해방 직후의 시기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심지연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듯이2) 한민당은 해방 직후의 시기-1945년부터 1948년까지-에 유일한 권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미군정의 여 당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의 제반 정책에 매우 충실하게 협조했고, 1947년 이후 에는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미국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또한 미군정기의 상황 과 한반도 분단의 이념적, 구조적 틀을 분석할 때에도 한민당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 한 의미를 가진다. 1) 이기택,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1987). 2) 현재까지 한민당에 대한 연구성과는 심지연의 연구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 들이 한민당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연구성과보다는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 속에서 한민당을 규정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심지연의 한국민주당 연구Ⅰ (풀 빛, 1982)나 한국민주당연구 Ⅱ-한국현대정당론 (창작과 비평사, 1984)은 선구적인 연구업적일 뿐만 아니라 거의 유일한 연구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당에 대한 연구는 심지연에 대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 는 형편이다.3) 해방정국에서 한민당이 가지는 중요한 정치적인 위치 때문에 미군정기 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성과에서 한민당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 들 연구성과는 당시 언론4)에서 한민당에 대해 지적하고 있었던 친일파 정당, 보수적 정당, 미군정의 여당 등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한민당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외면 하였다.5) 이에 반해 심지연의 연구는 한민당에 대한 많은 부분을 밝혔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업 적으로서 의의 뿐만 아니라 한민당에 대한 유일한 객관적, 총체적 연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정치사회학적인 접근 방법에 치중함으로써 한민당의 정치노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정치노선과 활동과의 연결이 미흡했다. 또한 전체적으로 볼 때 해방정국에서 한민당의 변화를 간과함으로써 1948년 이후 한민당의 성격변화에 대한 근본원인에 접근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한민당 관계자들의 사회적인 배경을 대체로 학연(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 에 유학한 인물들의 인맥), 사회적인 활동 영역(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에 관계된 인사 들), 집안 배경(지주, 자본가 출신)의 공통점을 통해 분석하였다.6) 이러한 연구는 한민당 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개인적인 배경을 추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지만, 이들 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연결을 갖고 함께 정치활동을 추진했는가를 규명할 수 없었다. 본고에서는 한민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구성원들의 일제시대 경력과 활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민당 정치노선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아울러 1946년 중반까지 별다 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한민당 내부에서 1946년 가을 발생한 대규모의 탈당사태를 통 해 1945년 9월 16일 결성된 한민당 내부에 참여했던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성이 어떻게 표출되는가에 대해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1946년 이후 한민당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고, 또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한민당이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 적인 상황을 규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본고에서는 한민당 내부의 구성원을 主流 勢力 과 非主流 勢力 3) 심지연은 한민당의 정치노선과 활동, 그리고 미군정의 관계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우선 한국민주당 연구Ⅰ 을 통해 朝鮮人民共和國 打倒, 臨時政府 奉待, 反託運動 등이 모두 반공 운동의 한 방편 이었음을 밝혔다(pp , 66 참조). 또한 한민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사들 의 사회적인 배경과 한민당을 주도했던 장덕수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민당 정치노선을 규명했다 ( 한국현대정당론 참조). 4) 김종범 김동운,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조선정치연구사, 1945) p. 66 참조. 5) 최근 1945년 이후의 정치상황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성과인 서중석의 해방 후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건설운동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0)와 도진순의 년 우익의 동향과 민족통일정부 수립운동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3)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해방 직후의 정치적 인 상황을 객관적, 총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이 논문들 에서도 한민당에 대한 부분은 구체적인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6)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참조

4 國史館論叢 第58輯 으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주류는 1948년 단독정부 수립까지 한민당을 고수 한 인물들이 고, 비주류는 1946년 중후반 한민당에서 탈당한 세력들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결과론적인 분류이지만, 한민당에 참여한 다양한 정치세력을 묶기 위한 적절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Ⅰ. 韓國民主黨의 조직구조와 그 특징 한국민주당은 미군이 상륙한 직후인 1945년 9월 16일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기념회관 에서 결성되었다. 한민당은 하나의 조직적인 구심이나 사상, 또는 정치노선을 가지고 조 직된 정당이 아니라 여러 세력이 모여 형성된 정당이었다. 당시 한민당을 구성했던 주요 세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국민당-張德秀, 許政, 白南薰, 尹致暎, 尹潽善 조선민족당-元世勳 金炳魯, 白寬洙, 趙炳玉, 咸尙勳, 金若水, 李仁 국민대회준비회7)-宋鎭禹, 金性洙, 徐相日, 金俊淵, 張澤相, 薛義植 한민당은 대의원으로 300명을 선출하고 당의 영수로서 李承晚, 金九, 李始榮, 文昌範, 徐載弼, 權東鎭, 吳世昌 등 7인을 추대했다. 그리고 9월 21일에는 당무를 맡아 볼 총무로 서 9명을 선출하였는데, 9명을 전국 각도의 대표 형식으로 선임하였다. 출신도별로 보면 송진우(전라남도), 백관수(전라북도), 허정(경상남도), 서상일(경상북도), 조병옥(충청도), 김도연(경기도), 김동원(평안도), 원세훈(함경도), 백남훈(황해도) 등이었다. 출신 당 파별 로 보면 국민대회준비회 측의 송진우, 서상일, 김동원, 한국국민당 측의 허정, 김도연, 백 남훈, 조선민족당 측의 백관수, 조병옥, 원세훈 등으로 한민당 결성에 참여한 각 파벌에 골고루 안배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당 영수를 뽑기는 했지만, 이승만, 김구, 이시영, 서재필 등이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 7) 1945년 9월 7일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설립되었다. 위원장에 송진우, 부위원장에 서상일과 원세훈이 취임하였다.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연합국에 대해 사의를 표한다고 결의한 이 준비회 는 한민 당이 창당된 후에도 그대로 존속했는데, 이는 해외망명 동지들이 환국한 다음에 완전독립의 총협 의체로 재편성하여 활용할 심산 에서였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p. 320). 이 준비회 는 후일 미군환영대회(1945년 10월 20일),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1945년 12월 19일) 등을 주관하 여 한민당의 존재를 내외에 과시하는 역할을 했으나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결렬과 송진우의 피살 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5 태였고 나머지 인사들은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수석총무 로 선임되었던 송진우는 실질적인 당의 책임자였다. 9월 22일에는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11개 부서장과 중앙감찰위원 30명을 선출하 였다. 11개 부서는 당무부, 외무부, 조직부, 재무부, 선전부, 정보부, 노동부, 문교부, 후생 부, 조사부, 연락부 등이었으며, 후에 지방부, 청년부, 훈련부 등 3개 부서가 추가되었다. 한민당의 지방지부 조직은 쉽지 않았다. 당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을 위한 사 회적인 목소리가 높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친일파 정당 8)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한민당이 각지역에 광범위한 지부를 만들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는 해방 직후부터 인 민위원회가 결성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9) 게다가 한민당을 적극적 으로 후원하고 있었던 미군정이 아직까지 전국적으로 행정권과 물리력을 장악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민당으로서는 당 지부를 설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민당이 지방지 부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이 지방행정을 어느 정도 장악하기 시작한 1945년 말 에 이르러서였다.10) 그나마 가장 먼저 도당을 결성한 곳은 전라남도 지역이었다. 전라남도 지역은 한반도 에서 가장 광활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소작인들이 많았고 농지소유구조의 불균형이 극 심했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지주에 반대하는 소작쟁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11) 반면에 이러한 현상은 거대한 농지를 소유한 거대 지주들이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보수적인 풍토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한민당 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12) 1945년 11월 초 광주에서 한민당 지부가 결성되었으며,13) 이후 金良秀(순천), 서민호(별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에 8) 박태균, 년 미군정의 정치세력 재편계획과 남한정치구도의 변화 ( 한국사연구 74, 1991) p. 124참조. 이 점에 대해서는 미군정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Manuscript m Office of the Chief of the Millitary History, Washington D. C. 국내영인본 ; 주한미군사, 돌베개, 1988) : 이기하, 한국정당발달사 (의회정치사, 1961) p ) 청주 지구당의 경우 1946년 6월 7일 청주시내 직물소매상 조합 회의실에서 결성되었는데, 참석인 원은 10여 명 정도였다. 그나마 한민당의 지지기반이 미약해서 건국동맹(인민위원회의 오자로 보 임 : 필자)과 통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난 후 지구당 결성을 위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홍원 길, 淸谷회고록, 대전제일문화사, 1978, p. 127). 10) 미군정 역시 자신들의 도움없이 한민당이 지방지부를 만들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였다 (Political Trends # 미군정 주간보고서 부록, 한림대학교 刊). 11) 김점숙, 1930년대 전남지방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연구 ( 한국사연구 74, 1991) pp 참조. 12) 김창진은 전라남도 지역에서의 한민당의 결성이 매우 늦은 것이었다고 분석했지만, 이것은 다른 지방과 비교하지 않고 단지 중앙과의 단순비교를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8 15 직후 광주 지방에 서의 정치투쟁의 전개에 관한 한 연구,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석사논문, 1986, pp 참조). 13) 김시중(건준 부위원장), 고광표(건준 재무부장), 장병준(신간회 목포지부장), 김용환, 서우석, 양병 일, 조재규, 장병조, 홍종휘 등이 중심이 되었다.

6 國史館論叢 第58輯 지부를 설치하였다. 1945년 12월에 이르러 부산시당14)과 서울지부가 결성되었지만,15) 한민당은 각 지방에 당세를 확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위원회가 활동하면서 남 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가 눈 앞에 닥쳐오자 한민당으로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 서 1946년 5월 27일 한민당은 당의 간부들로 지방유세대를 조직하여 남한 각지에 파견 하였다. 이는 지방지부를 만들기 위한 공식적인 첫 작업이었다.16) 이후 미군정 지방 행정기구의 완성과 더불어 한민당의 도당지부의 결성이 본격화되었 다. 이후 1946년 6월 16일 경남도당, 동년 7월 31일 충북도당,17) 동년 10월 15일 전북도 당,18) 동년 11월 2일 경북도당19) 등이 결성되었다. 1946년 말에는 53개의 당지부가 결성되었고, 결성 중에 있는 지부가 27개였으며, 창당 시 5만명이라고 신고한20) 당원수는 23만명으로 증가되었다.21) 그러나 당시 대체적인 분 위기는 한민당에 가입해 주는 것만 해도 당지도부로서는 고마워했던 22) 분위기였기 때 문에 실제당원 수보다는 훨씬 과장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한민당의 초기 조직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선 구심점을 가 질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이나 임정을 봉대하지 않고서 한민당은 당 자체로서 정 치활동의 명분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한민당은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가 경제력을 가진 친척이 전혀 없다는 점 23)에 유의, 이승만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매달 15만원씩 정치자 금을 지원하는 등24) 적극 후원했고 한민당의 총재로서 취임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4) 부산시당은 1945년 12월 5일 1,362명의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위원장에 宋銓度, 부위 원장에 趙東炫이 선임되었고 13개 부서, 11개 지부를 두었다. 그러나 경남도당은 1946년 6월 16일 에 가서야 결성되었다. 수석총무에 金喆壽, 총무에 조동현 등이 선임되었다(장원정, 경상남도 우익세력에 관한 고찰, 이화여대 사학과 석사논문, 1993, pp 참조). 15) 이기하, 앞의 책 p ) 동아일보 1946년 5월 27일자. 17) 당 수석총무에 李熙俊, 총무에 崔崙, 南相翊, 韓慶洙, 金東煥 등이 선임되었다. 18) 도지부장에 柳直養, 총무부장에 印昌燮 등이 선임되었다. 19)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p. 222, 년 11월 중순 한민당의 핵심 간부였던 서상일과 최윤동이 중앙 미군정청의 특사로 파견되어 미군정의 지방 고문을 선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아울러 한민당 지부의 결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영남일보 1945년 11월 19일 20일 자). 그러한 한민당의 대구지부가 결성된 것은 1946년 6월 9일에 가서야 이루어졌다(수석총무에 白南採, 총무에 장인화, 李原璣, 白南圭, 鄭宗閏, 이재영, 엄성문). 11월 2일의 경북지부 결성식에 서는 도위원장에 朴海克, 부위원장에 이재영, 林永學, 사무국장에 郭泰珍 등이 선임되었다. 20) The Democratic Party of Korea, Party Registration, 1945년 9월 27일, 미출간원고 ;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p. 25에서 재인용. 21) 조선통신사, 朝鮮年鑑 (1947년 판) p. 57;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p. 58에서 재인용. 22)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p. 59 에서 재인용. 23)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p ) 동아일보 1982년 5월 4일자 ; 심지연, 앞의 책 p. 52에서 재인용

7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개인적인 야심에만 몰두, 한민당의 총재 취임요청을 거절했다. 한민당은 중경의 임시정부(이하 임정 으로 약칭)에 대해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창당과정에서 임정봉대를 당론으로 정했던 한민당은 임정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환국지 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00만원을 만들어 이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하도록 임정에 전 달했다.25) 임정으로서는 친일파들의 정당이라고 비난받고 있었던 한민당으로부터의 후원 은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임정 절대지지를 내걸고 임정을 이용하려는 국내정 당의 들러리가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26) 따라서 한민당은 당 활동의 구심점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한민당 자체가 뚜렷한 이념과 기반을 가지고 결성된 정당이라기 보다는 조선공산당을 축으로 하여 결성되었던 조선인 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다양한 정파의 연합에 의해 결성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를 영입하지 않고서는 구심점을 만들 수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한민당에 모였던 인사들은 급진적인 계급투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만 일치할 뿐 일제시 대의 정치활동 경험에서도 일정정도의 편차를 가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수석총무를 중심으로 하여 一絲不亂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중요한 정치과정에서 커다란 견해차 이가 노정되었다. 이 점이 당시 한민당 조직구조의 두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당은 집단지도체 제에서 출발하여 1946년 초 단일지도제로 바뀌었지만,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지 배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1945년 12월 30일 수석 총무였던 송진우가 암살되자 김성수가 새롭게 수석총무로 선출되었다. 그는 한민당의 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었지 만,27)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집단지도체제는 한민당 구성원의 다양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즉, 개인적 출 신배경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의 활동 경험 또한 다양한 것이었다. 한민당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정당에 묶여 있을 따름이었지, 하나의 사상이나 정치노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25)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평화당, 1976) p ) 임정으로서는 이 점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이성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당시 임시정 부가 오랜 해외에서의 활동 때문에 국내에 전혀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민당 은 미군정이 자신들 외에 어떠한 단체도 정부로서 인정하지 않고 직접통치를 실시하자, 군정 당국이 인정치 않는데 군정 하에 있어서 정부행세를 하는 임정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라고 하 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노선을 스스로 철회하였다. 27)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p. 58.

8 國史館論叢 第58輯 Ⅱ.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주류세력과 그 특징 1. 일제하 기독교 조직, 동아일보 관계자들 한민당 구성원을 보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특징이 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들 의 대부분이 외국유학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유학 당시 당해국에 있었던 교포 들의 조직이나 유학생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연의 한국현대정당론 의 부록으로 있는 한민당 관계자 인명록 을 통해 구 성원들의 유학상황을 추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강기문, 고희동, 구자옥, 김관호, 김도태, 김도원, 김동환, 김상규, 김상돈, 김상 순, 김상억, 김성복, 김성수, 김양하, 김약수, 김윤식, 김재학, 김종선, 김준연, 나 용균, 민영길, 민중식, 박용희, 박해극, 백남규, 백남훈, 서상국, 설의식, 소완규, 손진태, 송석하, 송진우, 송필만, 옥선진, 유억겸, 윤실현, 이갑수, 이상돈, 이 운, 이정래, 이훈구, 장배근, 장병만, 장용하, 전진한, 정광호, 정균식, 정현모, 조 동근, 조헌영, 주기용, 진흥기, 최두선, 최태영, 최태욱, 하상용, 한엄회, 함대훈, 현상윤, 홍성하 미국 김도연, 김준옥, 박찬현, 백낙준, 서연호, 신현모, 윤창석, 윤치영, 이기붕, 임영 신, 장덕수, 조병옥, 한보용, 현정명 중국 백남기, 백남채, 장흥염, 조영규, 최윤동, 이극로 독일 안호상, 이극로, 김준연 영국 장택상 프랑스 김법린 소련 문시환 그러나 이들이 같은 나라에 유학을 했다는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 를 들면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인물은 김법린 밖에 없었지만, 1920년대 초 留法韓人會에 서 허정, 장택상, 이관용, 조소앙, 윤해, 고창일 등이 활동했으며,28) 이 중 한민당에 참여 한 高昌ー과 張澤相, 허정은 이때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유학시절의 친분관계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는 일본과 미국이다. 먼저 일본 28) 허정, 4 19과정과 나 ( 현대사 주역들이 말하는 정치증언, 동아일보사, 1986) p. 97.

9 의 경우 1900년대부터 조선의 학생들이 일본에 유학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 학생들 간 의 친목단체에서부터 항일단체, 그리고 사회주의 써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가 형성 되었다. 1900년대에 일본 유학을 통해 조선인 학생들을 선도했던 것은 이광수, 최남선 등이었다.29) 우선 이들은 1910년대에 들어와 대학별로 인맥을 형성하였다.30) 明 治 大 學 조만식, 김병로, 현준호, 조소앙, 정노식, 이 인 早稻田大學 최남선, 송진우, 김성수, 신익희, 안재홍, 현상윤, 최두선, 양원모, 金喆 壽,장덕수, 장택상 慶 應 大 學 김도연, 김연수 東京帝國大學 朴容喜, 김준연, 유억겸, 김우영, 俞萬兼, 남궁영 이들 중 김병로, 이인, 송진우, 김성수, 현상윤, 최두선, 양원모, 金喆壽, 장덕수, 김도 연, 박용희, 김준연, 유억겸, 장택상 등은 초기부터 한민당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인물 들이었다. 이들이 보다 적극적인 연계를 가지는 것은 東京에 留學生 學友會 가 조직되면 서였다. 1910년대 중반이 되면서 학생들 간의 친목단체가 출신지역별로 조직되기 시작했고,31) 후에 한민당에 관계했던 백남훈, 김양수,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는 친목단체 간사장으로 일했다.32) 또한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로 學之光 이 발간되었는 데, 여기에는 김병로, 신익희, 이광수, 최두선, 장덕수, 현상윤, 최승만, 백관수 등이 관계 했다.33) 이러한 활동이 1910년대 말에 이르러 유학생 학우회로 통합, 발전하였고 그 지 도위원으로 김성수, 송진우, 신익희, 장덕수 등이 활동하였다.34) 대체로 한민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나이 많은 인사들이 일본에서의 유학시절부 터 하나의 학맥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소장 인사들이 일본 유학 이후 후 술할 미국유학을 통해 또 하나의 학맥을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송진우, 김성수 등 노장 인사들은 일본에서의 유학과 친목회 활동을 통해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인맥을 형성했다. 29) 임영택 강영주, 벽초 홍명희, 임거정의 재조명 (사계절, 1988) 참조. 홍명희와 문일평은이광수 나 최남선보다 일찍 귀국하였다. 30) 김진배, 가인 김병로 (가인기념회, 1983) p. 30 : 金俊淵, 정계야화 후편(홍우출판사, 1966) p. 66 : 장병혜, 상록의 자유혼 (현대인쇄문화사, 1973) p ) 유학생들의 친목단체는 처음에 지역별로 형성되었다. 1910년대 초에 동경에 있었던 유학생 단체 로는 湖南茶話會, 落東親睦會, 鐵北親睦會, 浪西親睦會, 海西親睦會, 三漢俱樂部, 嶺南俱樂部 등이 었다(최승만, 나의 회고록, 인하대 출판부, 1985, p. 185). 32) 백남훈, 나의 일생 (신현실사, 1968) p. 116 : 김진배, 앞의 책 p ) 백남훈, 위의 책 p. 117, ) 김도연, 제2공화국과 민주당 구파 ( 현대사 주역들이 말하는 정치증언, 동아일보사, 1986 p. 164.

10 國史館論叢 第58輯 1918년 귀국한 송진우, 김성수를 제외한 在日유학생들은 1919년 3 1운동의 배경이 되었 던 2 8독립선언 사건에 대부분 연루되었고,35) 귀국 이후 김성수가 자본을 출자한 東亞日 報와 중앙학교, 보성전문, 경성방직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36) 한편, 在美 유학생들은 재일유학생들보다 더 강하게 정치적 성향을 띠었다. 미국 유학 생들의 학맥은 주로 뉴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37) 1910년대를 전후하여 이승만, 김규 식 등이 미국에서 유학의 기반을 닦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주로 당시 미국에서의 재미교포들의 조직과 연결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장 많이 눈에 띠는 것이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 출신들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장덕수, 윤홍섭, 김양수, 조병옥, 이금증, 최순주, 장이욱 등이 콜럼비아 대학에서 수학 했는데, 이들은 당시 재미교포 사회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승만 중심의 同 志會,38) 안창호 중심의 國民會 39)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40) 그러나 양 단체는 3 1절 기념행사까지도 서로 따로 할 정도로 반목이 매우 심하였다. 따라서 유학생들도 자연 히 양 단체로 나뉘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뉴욕에 있었던 백관수, 김도연, 유억 겸 은 흥사단 계열의 국민회에서 활동했던 반면 허정, 李哲源 등은 동지회에서 활동 하였다.41) 대부분의 학생들은 동지회 보다는 국민회에서 활동하였고 안창호와의 직접적인 만남 을 통해 흥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지만, 양 단체의 반목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35) 한민당 주류 중 백관수, 장덕수, 김도연, 김철수 등이 2 8선언에 참여하였다( 영달아닌 봉사로 일 관-金喆壽 내가 겪은 20세기 참조). 36) 인촌기념회, 앞의 책 p. 111,164,184,356,360 참조 37) 이 외에도 미국의 많은 대학에 조선인 학생들이 있었다. 윤치영(프린스턴 대학), 임영신(남가주 대학), 박마리아(피바디 대학), 갈홍기(시카고 대학), 백낙준(예일대학), 김활란 김규호 유형기(이상 웨즐리언 대학) 등이 1920년대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다니고 있 었던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청년사, 1994 : 김도연, 앞의 글 p. 174 참조). 38) 박용만의 초청으로 이승만은 일본 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하와이로 도피할 수 있었지만, 하와이에 서 박용만과 함께 활동하던 인사들의 일부를 규합하여 오히려 자신 중심의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 였다. 결국 1915년 이승만은 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후 박용만, 안창호와 대립된 활동을 전개했 다(송건호, 애국자냐 독선자냐-이승만 독립운동의 성좌 10인, 신구문화사, 1984, p. 212 : 방선주, 박용만 평전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889, pp 참조). 39) 1903년 9월 3일 안창호는 미국에서 친목단체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共立협회가 되었고(로 스앤젤레스), 그후 다시 國民會(1909.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발전하였다(지명관, 민족 계몽의 길잡이-안창호 독립운동의 성좌 10인, 신구문화사, 1984, pp ). 40)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강우출판사, 1967) p 이승만 계열의 인사들이 주로 사업을 하거 나 노동하는 사람이었다면, 안창호 계열의 인사들은 주로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한다(같은 책 pp ). 41) 김도연, 위의 책 p 백관수의 경우 국민회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유학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丁卯會, 용제 백낙준박사 소전-學誨記略, 1952, p. 9).

11 활동도 전개했다. 1926년 김도연, 장덕수, 김양수, 윤홍섭, 최순주, 윤치영 등이 이승만을 절대적으로 추종하고 있었던 허정과 결합하여 3 1 신문 을 발간하기도 했지만, 양 단 체 간의 반목을 줄일 수는 없었다.42) 이상과 같이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통해 인맥을 형성한 인사들은 국내에 귀국 한 이후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특히 김성수가 중심이 된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 계통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공통된 정치노선과 활동경 험을 가질 수 있는 보다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종교와 관련된 단체에서의 활동이었다. 즉, 1920년대 이후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이 同友會 와 興業俱樂部 를 결성하였는데, 유학 후 귀국한 인사들이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동우회 는 興士團의 국내지부로서 민족성 개조와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단체 였다. 동우회는 安昌浩의 명망과 李光洙의 지도력 하에 서북지방 출신의 지식인, 종교인, 자산가 계층을 망라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운동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43) 동우회는 1922년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조만식 주도의 물산장려 운동에 참여했 던 金東元과 金性業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同友俱樂部 와 동년 서울에서 이광수가 중 심이 되어 金鍾悳, 金允經 등이 함께 만든 修養同盟會 가 연합하여 만든 修養同友會 의 소장 인사들이 조직한 단체였다.44) 특히 수양동우회가 동우회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주도 적인 역할을 했던 인사들은 조병옥, 이용설과 같은 유학 후 귀국한 인사들이었다.45) 동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종덕(토지개간 사업, 연백), 김윤경(배화여고보 교사, 광주), 조병옥(연희전문 교수, 천안), 김동원(평양고무공업 取締役, 평양), 김성업(동아일 보 평양지국장, 대동), 김병연(조선일보 평양지국장, 평양), 吳鳳彬(서화골동상, 영변), 金 善亮(토지개간 사업, 안악), 李英學(석유판매상, 선천), 李容卨46)(의사, 희천), 李大偉(종교 인, 용천), 吳禎洙(숭실전문 교수, 강서), 韓昇寅(협성실업학교 교사, 선천), 신윤국(토지개 간사업, 연백), 吳翊殷(지물도매상, 선천) 등47)은 한민당에 결성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 여한 인사들이었다. 한편 동우회와 대립적인 활동을 벌인 흥업구락부 라는 단체도 있었다. 美洲에서 안창 42) 김도연, 위의 책 pp ) 김상태, 년대 동우회, 흥업구락부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논문, 1991) pp ) 흥사단 50년사 (대성문화사, 1964) p. 54(김상태, 위의 논문 pp. 9 11에서 재인용). 45) 조병옥, 이용설 등은 미국 유학시 안창호와 상면하였고, 이미 안창호의 국민회 일을 도왔던 경험 이 있었다(張利郁, 나의 회고록, 샘터, 1975, p : 선교에 헌신한 석학 내가 겪 은 20세기, 경향신문사, 1974 참조). 46) 이용설은 YMCA학생회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지 않 았다. 그의 이후 활동에 보다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북경에서의 안창호와의 만남이었다( 外 科醫인 獨立鬪士 내가 겪은 20세기, 경향신문사, 1974 참조). 47) 이상은 김상태, 앞의 논문(pp )과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그리고 外務省アジア局 監 修, 현대조선인명사전 (世界ジャ-ナル社, 1962) 등을 참조하였다. 괄호 안의 첫번째 항목은 일 제시대의 직업이고 두번째 항목은 출신지역이다.

12 國史館論叢 第58輯 호의 국민회와 이승만의 동지회가 서로 반목을 보였듯이, 이 단체는 이승만의 동지회와 연계를 맺으면서 동우회에 대응하여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YMCA를 중심으로 한 기독 교계의 주요인사들이 참여, 실력 양성을 추구한 주요 정치세력이었다.48) 이 단체의 핵심 적인 성원이었던 申興雨와 許政은 이승만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신흥우의 부친은 이 승만의 서당 스승이었고 집안 간에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49) 허정은 전술한 바와 같이 뉴욕의 동지회에서 이승만을 충실하게 보필했던 인물이었다. 장로교 계통 중심의 동우회와 달리 감리교 YMCA중심50)이었던 흥업구락부에는 洪鍾 肅(남감리교 목사, 개성), 具滋玉(중앙 YMCA총무, 서울), 命億兼(연희전문 부학감, 서울), 金永燮(감리교 목사, 강화), 玄東完(중앙 YMCA간사, 서울), 金俊淵(조선일보 논설위원, 영암), 李寬究(조선일보 기자, 서울), 曺政煥(연희전문 교수, 여천), 李春昊(연희전문 교수, 개성), 崔鉉培(연희전문 교수, 울산), 崔斗善(중앙고보 교장, 서울) 등이 한민당에 참여하 였다.51) 그러나 이 중 김준연을 제외하고는 동우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비하여 적극적 으로 한민당에 참여한 인물들은 거의 없다.52) 물론 한민당 구성원 가운데 이 두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던 핵심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1910년대에 일본에 유학했던 사람들로 주로 동아일보나 보성전문학교 등 김성수가 주도하는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김성수, 김용무, 박창희, 백관수, 서상일, 송진우, 장덕수, 함상훈, 고재욱, 김 양수, 설의식, 이상돈, 보성전문학교의 교수 손진태, 안호상, 옥선진, 유진오, 윤택중, 장덕수, 홍성하, 현상윤 경성방직 관계자 閔泰一, 閔丙壽, 朴容喜, 尹相殷, 崔承萬 물론 이들 외에도 교육계53)나 언론계54)출신의 인사들이 많았지만 주로 위에서 언급한 48) 김상태, 위의 논문 p ) 전택부, 인간 신흥우 (대한기독교서회, 1971) p ) YMCA 에 관계했던 다른 한민당 관계자는 崔承萬이다. 그는 동경 유학시 동경 YMCA를 중심으 로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최승만 외에 白南薰, 具滋玉, 玄相允 등이 활동했다(최승만, 나의 회고 록, 인하대학 출판부, 1985 참조). 51) 이 외에 吳華英(남감리교 목사, 평산), 洪承國(연희전문 교수), 金潤秀(경성상회 사장, 서울), 崔楠 (동아부인상회 사장, 서울) 등이 한민당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지만(심지연, 앞의 책), 이들은 한 민당 자체에 참여했다기 보다는 한민당이 주도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에 참여했을 따름이었다. 52) 김상태는 그의 논문에서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차이에 대하여 동우회는 서북지역 출신과 평민층 출신이 중심인 반면에 흥업구락부는 기호지역, 귀족, 관료층, 중인층 중심이었고, 학력에 있어서도 전자가 서북지역의 5대 私學(대성, 오산, 숭실, 신성, 양실) 출신으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의 영향을 받은 반면 후자는 기호지역 私學(배재, 한영서원, YMCA 학교, 협성신학교) 출신으로 이 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고 구분했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전자가 장로교 중심이었던 데 반하여 후자는 감리교 계통이 강했다고 분석했다(김상태, 앞의 논문 p. 35). 53) 김도태 서울여자상업고등 교장, 김양하 旭의학전문 교수, 백낙준연희전문 교수, 서봉훈 양정중

13 유학 후 기독교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한 인사들과 김성수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일보와 보성전문의 지식인들이 한민당 결성의 주축세력이 되었다. 2. 정치노선과 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자 곧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1943년 직후 건국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던 呂運亨55)과 신간회 해소 이후 지방 에 은거해 있던 安在鴻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朴憲永을 중심으 로 하는 조공이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기독교 단체나 동아일보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사들은 해방 직후의 정치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이들은 정치조직을 결성하기보다는 이전 부터 함께 활동했던 인사들의 서울소재 집이나 사무실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 앞으 로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미국에 유학하면서 국민회 계열에서 활동했던 백관수의 집에는 신간회 서울지부의 가장 연소했던 박명환, 광주에서 올라온 정광호 등 소장인사들이, 청 진동 이인 변호사 사무실에는조병옥, 원세훈, 박찬희, 서상훈, 홍명희와 가까운 朴儀陽, 조헌영 등 신간회 계통인사들, 윤보선의 집에는 허정, 장덕수, 홍성하, 윤치영, 백남훈 등 유학갔다 온 인물들이 모여들었다.56) 이들이 이렇게 해방 직후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던 것은 1935년 이후 일본의 적 극적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들 인사들이 협조했기 때문이었다.57) 물론 이러한 협조가 그들 자신의 의사였다기보다는 일본총독부의 회유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들이 친일단체 에 참여했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치노선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 연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술 한 이들의 일제시대 활동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들의 정치노선의 형성은 본장 1절에서 학 교장, 이갑수 경성여자의학전문 교장, 이세정 진명여고 교장, 이영준 旭의학전문 교장, 이헌 구 보성중학 교장, 이훈구 숭실전문 교수, 임영신 중앙여전 교장, 장용하 배재중학 교장, 최태 영 경신학교 교장 54) 조선일보 김광렬, 김교영, 김상흡, 김정규, 신태익, 오윤선, 이훈구, 이홍직, 한보용, 함대훈, 이원 혁, 김무삼 중앙경제신문 이성희, 인민해방보 노백용, 경제신문 김상만, 기독교신문 장시화, 대구시보 장인환, 청주국민일보 김창기(충북도당 선전부장), 이겸우(충북도당 조사부장) 55) 정병준, 조선건국동맹의 조직과 활동 ( 한국사연구 80, 1993) 참조. 56) 송남헌, 시베리아의 투사 원세훈 (천산산맥, 1990) pp ) 이들의 친일단체 참여현황에 대해서는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의 pp. l 에 나온 친일단체 현황과 각 단체에 참여한 인사들의 인명을 참조. 한민당 인사들 가운데 친일 단체에 참여한 구체적인 인사들의 인명은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pp 참조.

14 國史館論叢 第58輯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 계열의 단체였던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노선과 활동에서 찾 아야 한다. 먼저 동우회의 경우 이광수가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광수는 1921년 11월에 집필하고 1922년 5월에 발표한 민족개조론 을 통해 조선민족의 부속 적 성격인 虛僞와 懶怠, 非社會性 등이 조선민족을 쇠퇴에 빠지게 했다고 전제한 후, 德 禮 智 등 三育의 수련과 富의 추적, 사회봉사심의 함양을 통해 민족성을 개조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務實カ行이라고 할 수 있다.58) 보다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위해 수양동우회에서 동우회로의 개편이 있었지만, 동우회 의 노선과 활동 또한 이광수의 務實力行 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59) 동우회의 사상적 본령은 약법 3조에 나와 있는 德性, 體力, 知能 각 방면에서 具全한 인격을 배 양 한다는 것이었다.60) 이는 표면적으로는 민족의 실력 양성을 통해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자는 것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핵심은 先民族改造 後獨立 의 논리로써 사실상 독립 을 유보하면서 민족운동을 관념적 차원으로 전락시킨 개량주의적 논리일 따름이었다.61) 또한 궁극적으로 이러한 노선은 민족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추구하는 근대화 지상론 에 이르는 것이었다. 동우회의 노선 중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조선민족운동의 첫째 이론으로 인텔리겐차의 결성 을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족운동의 원동력은 일반대중이 아니요, 인텔리겐차 층에서 나온다. 일본, 독일은 물 론이요 공산주의운동도 원동력은 인텔리겐차 층이었다. 노동자, 농민을 조직하고 훈련하 여 그들에게 자주력을 주는 자는 인텔리겐차이다. 조선의 민족운동도 과거에 그러하였 지만 현재에도 인텔리겐차 층이 민족운동을 담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운동자 될 자 격자를, 한 이론과 정신으로 결성하자는 것이 수양동우회운동의 근거이다.62) 결국 민족 전체의 힘보다는 일부 선진적인 사람들에 의한 노선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 들은 당시 조선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을 무지와 비도덕적이고 봉건적 사고에 빠져 있는 愚昧한 사람들 로 파악한 것이었으며, 이를 일부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문명개화, 서구적 근대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흥업구락부의 노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흥업구락부의 母體가 되는 동지회 58) 이광수, 민족개조론 ( 개벽 23호, 1922) pp ) 김상태, 앞의 논문 pp. l ) 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同友會の眞相 ( 思想彙報 12, ). 61) 박찬승, 일제하 실력양성운동론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1990) p. 153 참조. 62) 이광수, 朝鮮民族運動의 三大基礎事業 ( 東光 30호, ; 김상태, 앞의 논문 p. 41 재 인용).

15 의 주된 운동방침은 자급자족을 통한 경제적 독립의 추구와 그를 위한 민족의 대동단결 이었다.63) 실제 흥업구락부의 운동방침에서도 민족관념의 보급 과 교양사업학교 또는 문화단체의 민족계몽 강연회 등 개최에 진력할 것 등이 강조되었다.64) 결국 이들의 노선과 활동은 1910년대 말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개조론 적인 세계관, 문화주의 사조와 연관된 것이었으며, 사회진화론, 니이체의 강력주의, 힘 만능주의 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65) 또한 당시 총독부의 산업정책과도 연관되어 민족자본의 성 장을 기도하면서 사실상의 자본주의 문명의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66) 물론 이들이 항일운동에 전혀 참여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흥업구락부에 참여했던 김준연과 유억겸, 박동완, 동우회의 핵심성원이었던 조병옥 등은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1940년대에는 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실력양성론은 결 국 일본제국주의의 大東亞共榮圈 정책에 포섭되면서 대부분의 인사들이 친일단체에 참 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67)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도 이러한 노선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동아일보 계 열의 인사들은 년 천도교 신파의 崔麟, 동우회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국민 회의 안창호 등과 연결하여 자치운동을 전개했고,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1932년경 까지 총독부측과 연결을 가지면서 자치운동을 계속했다. 또한 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동 우회 계열의 인사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68) 이 자치운동은 3 1운동 직후의 문화운동 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문화운동의 골자는 일본제국주의의 소위 문화통치 시기를 적절히 활용한다는 것으로 주로 교육운동과 민 족자본의 형성과 강화라는 측면을 통해 나타났다. 즉, 이 두가지 운동은 1920년대초 신 교육보급을 위한 民立大學 設立運動 과 物產獎勵運動 으로 연결되었다.69) 그러나 이러한 실력양성론 역시 실력양성 이라는 대전제를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의 타협도 가능할 수 있다는 논리적인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근대화 지상론과 일맥상통하는 것 이었다. 일본제국주의 역시 실력양성운동 을 방관했던 것은 그것을 체제내적인 운동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70) 동아일보는 이러한 실력양성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끄 63) 同志會及興業俱樂部の眞相 ( 思想彙報 16, ) p. 78 참조. 64) 조선의 치안상황 p. 321; 김상태, 앞의 논문 p. 17 에서 재인용. 65) 박찬승, 앞의 책 pp 참조. 66) 위의 책 pp 참조. 67) 국민회 계열의 동우회 인사들이 한민당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은 1945년 이승만이 한민당의 영수자리를 거부한 점,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이 한 민당과 결별함으로써 한민당이 야당의 위치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68) 이에 대해서는 박찬승, 앞의 책 pp 참조. 69) 진덕규,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에 관한 고찰-물산장려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중심으로 ( 민족주의론 1, 창작과 비평사, 1982) 참조. 70) 박찬승, 앞의 책 pp 참조.

16 國史館論叢 第58輯 는 핵심적인 언론이었다. 해방 직후 한민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동우회, 흥업구락부 등 기독교 계열의 단체와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들의 실력양성론이나 문명개화, 근대화 론 등이 그대로 정치노선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한민당의 정치노선 중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은 미군정과의 협조노선과 지주,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토지개혁이나 중요 산업국유화 등의 주요한 경제개혁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전자의 측면에서 보면 민족문제보다는 근대화의 문제를 보다 중요시해야 한다는 입장 에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자본주의국가와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보다 발전된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지상목표였던 것이다. 결국 많은 수의 한민당 관 계자들이 미군정의 조직 내부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우선 미군정에서 1945년 10월 초에 설치했던 고문회의의 위원들은 대부분 한민당의 당적을 가지고 있었다. 송진우, 전용순, 김동원, 김성수, 김용무, 강병순, 이용설 등 전체 9명 중 7명이 한민당원이었다.71) 이들은 군정청의 각 부문에 한민당 관계자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많은 역할을 하였다.72) 둘째로 근대자본주의 국가로의 발돋움이라는 정치노선은 곧 당시 자본가와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이 실제적으로 한민당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일제시대에 동우회나 흥업구락부, 그리고 동아일보 관계자들 중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아일보의 김성수가 경영했던 경성방직에 관계되었던 국태일, 박용희, 민병수, 이희승, 최두선, 최승만, 김용완, 평양 고무공업사 사장( 년대)이었던 김동원,73) 일제시대 말기 朝鮮興業株式會社에 참여했던 金良洙, 申允局, 徐珉濠, 김도연, 최순주, 이인, 장현 식, 이훈구, 이기붕 등74)이 모두 한민당에 참여하였다. 김성수의 경우75) 출신지인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기도에도 일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 출신이었다. 해방 이후 한민당에는 많은 자본가들이 모여들었다. 71) 박태균, 8 15직후 미군정의 관리충원과 친일파 ( 역사와 현실 10호, 1994) p ) 물론 이러한 한민당 인사들의 등용은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과 맞물리는 것이었다. 정치정세 중 가장 고무적인 유일한 요소는 연로하고도 보다 교육 받은 한국인들 가운데 수백명의 보수주의자 들이 서울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일제에 협력하였지만 그러한 오명은 결국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비록 다수는 아니지만 가장 큰 단일 그룹으로 임정의 환국을 지지 하고 있습니다 ( 재한국정치고문(베닝호프)이 국무장관에게, 45년 9월 15일 ; 김국태 역, 해 방 3년과 미국 1, 돌베개, 1985, p. 56). 73)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청년사, 1994) p ) 이들은 지주급의 부유한 사람들로 토지개발사업, 벌채사업, 광산업 등의 사업을 전개했다(김도연, 앞의 글 p. 182 :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강우출판사, 1967, pp : 남북교류 주장 한 반독재 투사 내가 겪은 20세기 참조). 75) 김용섭, 한말 일제하의 지주제, 사례 4: 古阜 金氏家의 地主經營과 資本轉換 ( 한국사연구 19, 1977) pp

17 - 103 조선경제협의회76) 김승식(부회장), 김성호(상무이사), 민규식(상무이사), 이중희(이사), 이동제(이사), 최두선(평의원) 강기문 대한건설공업 사장 구연창 동방식산 상무 김용상 경북영화협회 대표 김원규 남선무역주식회사 사장 김재학 성동구 중앙시장 이사 김태희 대구 신흥공업 중역 민대식 조선신탁 취체역 민중식 남선상사 사장 박노익 대구 동아자동차 사장 서상호 경남은행 전무 오이상 부산 장유공장 사장 이현재 경기도 상공경제회 이사 이 활 동양燐寸 취체역 이희준 청주 주조회사사장 임성호 북삼화학공사 이사장 임종섭 조선피혁 사장 장진섭 대동고무 사장 장현중_동아산업 사장 전용순 경기도 상공경제회 이사 정진희 조선전업 소장 최순주 조선은행 이사 최태욱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회장 하상용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부회장 따라서 토지개혁이나 중요산업 국유화에 대해 한민당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좌우합작위원회의 토지개혁을 위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 다.77) 또한 1947년 미군정이 적산을 현금 일시지불 원칙에 의해 불하한다는 결정을 내자 각계에서 많은 자본을 가진 사업가 혹은 간상배 이외에는 도저히 (적산을 : 필자 주) 살 수 없는 것 78)이라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민당은 악성인플레 방지, 훼손유실방 지, 다수인의 소유권 향유 등 견지에서 찬성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79) 결국 이러한 한민 당의 구성원과 정책이 한민당에 대한 친일파 정당, 지주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대변 하는 정당 이라는 여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아울러 이들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제시대 기독교 운동과 실력양성 운동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과 서로 반목하는 관계였다.80) 이러한 감정은 76) 해방후 산업 경제의 급속한 재건을 목표로 산업계 중요기관의 대표가 모여 조직( 서울신문 1946년 3월 19일자). 77) 동아일보 1946년 10월 9일 자. 78) 조선통신사, 조선연감 (1948년판) p ) 동아일보 1947년 7월 26일자. 80) 일제시대 민족운동 진영과 사회주의운동 진영 사이의 반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물산장려운 동을 둘러싼 양 진영의 반목이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6일부터 29일 연재된 羅公民(필 명)의 사회문제와 물산장려-주종건 군 기타 제씨에 대답하기 위하여 라는 글을 보면 실력양성운 동을 전개한 인사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잘 나타난다. 사회주의 자들 역시 실력 양성운동론을 주장한 사람들에 대해 자본가 의 이익만을 위한 운동으로 비판하 였다. 한편, 실력양성운동 에 대한 비판은 적극적인 민족주의운동을 주장하는 민족운동 진영 측 에 의해서도 비판되었다(진덕규, 앞의 논문 p. 157 참조). 기독교 계열과의 반목은 이준식, 일 제침략기 기독교 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 운동 ( 역사와 현실 10호, 역사비평사,

18 國史館論叢 第58輯 신간회의 해소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일방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해방 직전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의 핵심으로 反共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이들 의 反共적인 정치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 한민당의 주류세력은 이승만과 함께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Ⅲ.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1. 일제하 비주류세력의 활동과 그 특징 한민당에 참여했던 인사들 중 기독교 계열의 조직이나 동아일보와 구체적인 연관을 맺지 않고 있었던 인사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원세훈과 김병로, 이인, 김약 수 등이다. 이들이 개별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하나로 묶어 언급할 수 는 없지만, 1948년에 간행된 친일파 군상 이란 책을 보면 한민당원 중 김병로, 김준 연, 이인, 김약수 등에 대해 艱亂과 隱忍 속에서 潔白히 8 15를 마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1) 이들은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제의 식민지 정 책에 협조하지도 않았다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에서도 전 기 제씨(김병로, 원세훈, 김약수, 이인, 백관수 ; 필자주)와 홍성하, 서정희82) 등은 결코 부르주아지 지지자도 아니며 부르주아적 반동운동자가 아님은 물론이다 83)라고 하여 이 들과 여타 구성원과는 차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원세훈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84) 1906년 大同법률전문학교 입학 여기에서 이동휘, 이상설, 안창호 등과 친교. 1993) 참조. 81) 민족정경문화연구소, 친일파 군상-예상등장인물 (삼성문화사, 1948) pp ) 徐廷禧는 1921년 광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장, 1923년 전라노농연맹 집행위원장,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 등을 역임했고 1926년에는 제1차 공산당 사건에 김약수와 함께 연루되어 체포되 었다. 1929년에는 신간회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에서는 서정희에 대해 씨의 경력, 성격, 위인으로 보아서 조선 혁명운동사상에 영원히 이즐수 업는 제1인적 실천 운동가란 찬사를 드리기에 주저치 아니한다 라고 평가하였다. 서정희는 당시 나와 김약수가 이 당에 잇는 이상 친일파, 반역자, 부르조아 등은 존재 할 곳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한다(위의 책 p. 187). 83) 김종범 김동운, 위의 책 p ) 김재명, 시베리아의 투사 원세훈(상) ( 정경문화 1986년 7월호) pp

19 년 예비검속으로 3개월 가량 투옥. 1911년 3월 독립단 사건으로 체포, 5개월간 투옥. 출옥 직후 동만주로 망명(간도지방 의 母鹿溝). 여기에서 母鹿의숙을세움. 1914년 일본영사관의 체포령으로 길림, 천진, 북경 등을 옮겨다니다가 靑島에 정착. 이 후 북만주의 穆稜縣으로 이주(이때 막무림, 나풍류, 안태훈, 안공근 등과 함께 활동). 1915년 5월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이갑과 함께 러시아령 니콜리스크로 이주. 동년 10월 대동학교 건립에 참여. 1917년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전로한족총회) 결성(문창범, 이동휘, 김립, 윤해, 고창일 등 참여). 원세훈은 상임위원 겸 재무부장. 1919년 2월 전로한족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개칭(회장 문창범. 윤해, 고창일을 파리강 화회의에 파견). 원세훈은 부의장 겸 재무부장. 4월 상해임시정부에 참여. 임정 조직 직후 블라디보스톡으로 감. 그러나 상해 임정의 약속 파기로 대한국민의회를 다시 재조직. 1920년 흑룡주에서 대한국민의회의 의장대리로 취임. 1921년 김창숙, 박은식, 안병찬, 최동오 등과 국민대표자회의 소집을 위해 노력. 동년 5월 김규식, 안창호, 여운형, 최동오, 김만겸과 함께 국민대표회 기성회 20인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임됨.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로 참여.85) 동년 6월 국민대표회의 무산 1924년 국민위원회 소집. 1925년 김규식, 신숙, 강구우, 김세준 등과 함께 일소비밀협정으로 소련으로부터 추방 당함. 동년 3월 북경대학 노문학과에 입학, 導報 발간에 참여. 1926년 김규식과 유일독립당 운동. 1927년 김운, 박관해, 이상일 등과 함께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북경 주재 일본영사관에 인도됨. 동년 7월 신의주 재판소에서 2년의 징역형 선고. 1930년 1월 말 만기를 채우고 석방. 1931년 시사주간지 中央時報 의 주간으로 일함. 조선문필가협회 초대회장 역임. 조 선교육 협회에 참여. 1940년 몇차례 해외로의 망명이 실패하고 경기도 평택군으로 내려가 북경대학 동창인 李祖憲의 농장에서 지냄. 원세훈의 경우 일제시대 경력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주로 해외에서 항일투 쟁을 전개했다는 점과 정치사상과 관계없이 다양한 인사들과 접촉을 통해 항일운동을 85) 당시 창조파에는 문창범, 윤해, 원세훈, 신숙, 박건병, 박용만, 이민창, 노무령, 김규식 등이 있었 고, 개조파는 안창호, 이탁, 선우혁, 유진호, 김철, 김갑, 배천택, 김정하, 현정건, 왕삼덕, 여운형 등이 참여했다.

20 國史館論叢 第58輯 전개하고자 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1927년 일본경찰에 체포된 이후 1945년 해방이 되기 까지 국내에 계속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정책에 협조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경력 속에서 그가 한민당에 참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점을 두 가지 찾을 수 있다.86) 첫째로 일제시대의 활동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 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는 1921년 노령의 자유시에서 일어났던 자유시 사변을 가 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두 단체가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중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에게 많 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87) 그리고 1925년에는 일소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김규식, 신숙 등 과 함께 당시까지 항일운동의 기지로 삼고 있었던 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이 때문 에 그는 공산주의 운동이나 사상에 대해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로 1930년대 후반 이후 접촉했던 인사들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일본제국주의의 적극적인 황국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자 원세훈은 적극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숨어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서울에 있던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은 몇몇 사람들의 집이나 사무 실에 모여 울분을 토로하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1940년대 초반 김병로와 이 인의 합동법률사무소에는 김병로, 이인, 송진우 등과 함께 원세훈이 자주 얼굴을 보였 다고 한다.88) 이러한 서로 간의 관계가 원세훈의 한민당 참여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세훈은 기독교 계열이나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과는 다른 정치적 활동경험 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특히 임시정부의 외교노선 중심의 활동에 반대하여 1923년의 국민대표대회에 창조파 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동우회나 흥업구락부의 실력 양성론이 독립운동상의 외교노선 을 중심으로 했던 세력들이 그 실패를 경험하면서 도 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동아일보 계열의 자치운동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추진되었다 는 사실을 감안한다면,89) 외교노선 에 반대했던 창조파 에 참여한 원세훈의 노선과는 기 본적으로 대별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세훈의 활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한 노선과 활동경험을 86) 전로한족총회 때부터 함께 일했던 고창일도 한민당에 함께 참여하였다. 87) 일명 흑하 사변으로 1921년 6월 28일, 노령의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 에 주둔 중인 항일부대인 사할린의용대 를 러시아적군 제 29연대와 한인 보병 자유대대(이하 자 유대대) 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 르꾸츠크 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던 자유대대와 상해파 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던 사할린 의용대 간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88) 송남헌, 시베리아의 투사-원세훈 (천산산맥, 1990) p 년대 초반에 원세훈은 이인과 함께 인천 부두노동자들과의 연결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군수물자가 나가고 있었던 인천부두 를 폭파할 계획도 세웠지만 실패하였다고 한다(이인, 해방전후 편편록 신동아 1980년 3 월호). 89) 박찬승, 앞의 책 pp 참조

21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제시대에 朝鮮民族革命黨에 참여했고,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위원회의 대표로 활약하는 金奎植과 가까운 관계를 유 지하면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된다. 또한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했던 이동휘 계열 의 인물들이나 여운형, 신숙, 이청천 등과 함께 활동했던 경험도 주목된다.90) 한민당에 참여했던 비주류 계열의 인사들 중 또 주목되는 사람은 김병로와 이인이다. 이들은 모두 변호사로 일제시대에 항일투쟁을 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초반 변호사가 되었고, 해 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던 허헌과 함께 조선변호사회 를 실질적으로 이끌었 다.91) 이들은 1925년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6년의 6 10만세운동, 1929년의 원산총 파업 사건과 광주학생사건, 1930년 간도공산당 사건과 단천농민운동 사건 등을 변호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변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변호사 개업 후 과거 20여 년간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물론하고 사상관계의 대사건의 변호에 김병로씨와 함께 無一不關的으로 전 조선각지를 따라다녓든 것은 世人共知의 사 실이며 더욱이, 김 양씨 취급 사상변호사건의 대부분이 무료사건이란 점으로 더욱 유명 하며 씨의 위인은 이 점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92) 이들은 1930년대에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김병로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변호를 통해 항일운동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였고, 이인은 1942 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극로, 김도연, 안재홍, 서민호 등과 함께 구속되었는데, 이 중 해방이 되기까지 감옥에 있었던 몇 안되는 인사 중 하나였다.93) 이들의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일제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과 정치노선과 사상에 관계없이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에 대한 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흥업구락부의 김준연, 동우회의 조병옥, 구미유학 시 국민회에서 활동했던 유억겸, 백관수 등과 함께 신간회에 참여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90) 이때의 심정에 대해 원세훈은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내가 그(김규식)와 더불어 일에 상관되기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제창하고 함께 북경, 천진 등지에 다녀서 상해로 돌아간 것과 그 후 3년의 시일을 경하여 회의를 마치고 1924년에 상해에서 모국 기선으로 블라디보스톡에 前 往하였다가 익년에 돌아온 것과 그 후 상해에서 독립당 조직에 관하여 협의하던 것 등이다.(중략) 1925년의 신년회를 이 늙은이(文昌範)의 사저(니콜리스크)에서 열고 밤이 다하도록 김규식, 이청 천, 윤해, 신숙 등 제씨와 함께 통음하고 狂歌도 하며 落淚도 하던 것이 昨日과 如한데 어언 8년 의 성상이다 ( 비판 1932년 1월호, pp ). 91) 1923년 김병로는 허헌, 김태영, 이승우, 김용무 등과 형사변호 공동연구회 를 조직하여 함께 활동 하였고, 1925년에는 허헌이, 1926년에는 김병로가, 1935년에는 이인이 조선변호사 협회장을 역임 했다. 92) 김동운 김종범, 앞의 책 pp ) 이상 김진배, 가인 김병로 :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학출판부, 1974): 外務省アジア局 監修, 앞의 책 참조.

22 國史館論叢 第58輯 김병로의 경우에는 1921년 김약수, 이극로 등과 함께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였던 북풍회 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 한민당에 참여했던 비주류 계열의 인사들 중 주목되는 또 다른 인사는 김약수와 이극 로이다. 김약수는 1920년대 초반에 朝鮮勞動共濟會, 黑濤會, 北星會, 北風會, 朝鮮勞農總 同盟에 참여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를 주도하였고, 1925년에는 제1차 조선공 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6년 4개월 간 복역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고, 1910년대 말에는 김원봉, 이여성 등의 민족주의자와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복역 중 전향하였지만, 항일 운동은 포기하지 않았고 1930년대에는 잡지 大衆 을 발간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고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에의 가입을 거부하다가 구금되기도 하였다.94) 이극로는 1920년대에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고, 베를린대학을 졸업 한 후 귀국하여 조선어학회의 주간으로써 조선어사전 출간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2년에 는 이인, 김약수 등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95)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서 김준연과 함께 修學했다. 이상에서 언급한 원세훈, 김병로, 이인, 김약수, 이극로 등은 하나의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96) 첫째로 정치노 선이나 사상에 관계하지 않고 민족 중심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 주의적인 조직이나 민족개량주의적인 활동에 치중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반면 양 계열의 인사들과 모두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세훈의 유일독립당 운동, 김병로 이인의 신간회 운동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 계열과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모두 주도한 단체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것은 일제시대 내내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와 기독교 계열의 조직, 동아일보 계열이 서로 분열 되어 활동을 전개했고, 이것이 해방 이후 분열의 큰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97) 이들의 정치활동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일제시대 말기까지 일본총독부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37년 이후 일본 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나가면서 기독교 계열의 조직이나 동아일보 계열 의 인사들은 대부분 친일단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주의운동에 있어서 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전향공작이 적극화되면서 많은 수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전향성명을 발표하고 친일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 94) 김동운 김종범, 앞의 책 pp ) 外務省アジア局 監修, 앞의 책 참조 : 이극로, 苦鬪四十年 (을유문화사, 1947) 참조. 96)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에서는 1945년 7월 원세훈, 김약수, 서세충이 8월 29일을 기하여 모종의 항일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다가 이것이 실패했다고 기술하였다. 따라서 원세훈과 김약수가 해방 이후 함께 활동한 것은 해방 직전 함께 활동했던 인연에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97) 서중석, 앞의 책 참조

23 극적인 항일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친일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셋째로 이들이 한민당에 참여하게 된 것이 정치노선이나 활동에서의 공통성 때문이 아니라 해방 직전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서로 간의 교분 때문이라는 점이다. 전술한 바 와 같이 이들은 이인의 사무실, 창동의 은신처 등에서 송진우, 원세훈 등과 상호간의 교류가 있었고 원서동의 송진우 집을 중심으로 해서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이 모여 들었다.98)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세력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주의 좌파세력들과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대부분 친일의 경 력을 가지고 있었던 한민당의 기독교 계열이나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은 적극적인 정 치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반면에 일제시대 말기에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총독부에 협 력하지도 않았던 세력들은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협력했던 인사들에 비해 발빠른 행 보를 보였다. 이 중 원세훈이 가장 먼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해방 다음 날 은거 하고 있었던 평택에서 상경하여 韓學洙99)의 집에 기거하면서 8월 18일 고려민주당을 창 당하였다. 그리고 위원장에 원세훈, 총무에 李柄憲,100) 玄東完, 재정부에 劉興山, 한학수, 섭외부에 박명환, 조직부에 李敏弘 등이 참여하였다.101) 고려민주당은 강령으로 사회민주주의 정권 수립, 진보적 경제정책의 수립 등을 내 걸었고 당 정책으로 민주공화정치의 실시와 의회제도 확립, 의무교육 실시, 진보적 농공 병행과 상업 개량 확립 등을 규정했다.102) 상당히 사회주의적이면서도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적인 질서를 인정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노선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 한 노선은 해방을 전후하여 발표된 중경 임시정부의 강령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을 가지 고 있다.103) 98) 송남헌, 앞의 책 p 한편 창동에서는 김병로, 이인, 원세훈, 홍명희 등이 교류하였다(위의 책 p. 121). 99) 한독당, 사회당의 당사로 쓰인 종로 한청빌딩의 소유주로 한일합방에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의 손자다. 당시 그는 서울여상의 이사장으로 있었다. 100) 3 1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外務省アジア局 監修, 앞의 책 참조). 101) 현재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이 일제시대부터 원세훈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연관을 맺으면서 활동 한 인물인지 밝힐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이 원세훈의 한민당 탈당시 함께 탈 당했고, 이병헌의 경우에는 제헌국회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02) 이상 김재명, 원세훈의 해방정국 시말기(하) ( 정경문화 1986년 8월호) pp 참조.

24 國史館論叢 第58輯 원세훈이 자신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당 결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김병로와 이 인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으로 약칭)와의 합작을 꾀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김병로와 이인 등은 건준에 참여한 안재홍과 손을 맞잡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사회주 의자들의 목소리가 큰 건준에 우익 인사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한 민족을 대표하는 이 름 그대로의 강력한 조직으로 건준을 개조해 나가자는 게 김병로나 이인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의 건준 참여 제의를 거절한 송진우의 행동과는 다른 정치활동이 었다. 이들은 안재홍을 비롯한 건준 간부진들과 수차례 회합 끝에 각계 인사 4백 8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 유지자대회의 소집을 꾀하였다.104) 이러한 활동은 해방 이전부터 허헌을 비롯한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항일투쟁이라 는 틀속에서 접촉했던 김병로와 이인의 활동경력에 기인한다. 비록 이러한 노력이 건준 의 좌경화,105) 미군의 진주와 한민당의 결성 등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해방 직후의 상황 에서 처음으로 사상을 초월한 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고려 한다면 일정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원세훈과 김병로, 이인 등의 노력이 9월 16일 한민당이 결성되면서 당 내로 흡수되었 던 반면 이극로는 또다른 활동을 모색했다. 한민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이극로 는 한민당이 기독교 계열의 조직과 동아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되자 당 내부에 서의 활동을 거의 중지하였다. 1945년 9월, 10월에 이르러 미국이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인공과 한민당 간의 반목이 점점 심화되어가자 그는 정당간의 통일된 행동을 모색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106) 이극로는 미군의 진주가 알려진 직후인 1945년 9월 2일 政治運動者後援會 를 결성했 다.107) 그는 이 단체를 통해 당장의 정치활동보다는 이미 결성된 정치단체의 통일된 활 동과 올바른 정치가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다.108) 그가 한민당에 일시적이 나마 참여했던 것은 김준연과 베를린 대학 동창이었던 점, 일제시대 조선어학회 활동 당 시 김약수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던 사실이 큰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109) 103) 송남헌, 해방 3년사 1(4치. 1984) pp 참조. 104) 김재명, 원세훈의 해방정국 시말기(하) ( 정경문화 1986년 8월호) p ) 서울대 인문대학 현대사연구회, 해방정국과 민족통일전선 (세계, 1988) 참조. 한민당의 김약수 역시 건준에의 참여제의를 받았지만 건준, 인공의 좌경화로 참여치 않았다. 106)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심해지자 이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다. 各政黨首腦墾談 會 ( ), 各政黨行動統一委員會 ( ), 政治運動者後援會, 統一政黨結成準備會 朝鮮統 一協贊會 등의 정치세력의 연합과 통일을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정병준, 년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논문, 1992, pp. 7 8 참조). 107) 매일신보 1945년 9월 4일자. 위원장 이극로 외에 이경석, 박승규, 김희정, 한하연, 이수영, 김 성춘, 김영은, 배성룡, 김동현, 이종환, 김광찬, 조병연, 유을준 등이 참여했다. 108)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이극로, 苦鬪四十年, 을유문화사, 1947) p. 86. 이 단체는 1947년 초 건민회로 발전되었고, 이후 이극로는 제3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5 그러나 한민당에 잠시 참여하였을 뿐 그 자신이 정치에 뜻을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 인다. 동년 9월 24일에는 全非政治團體代表大會 를 주도하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각 당 통일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점진적 활동 을 한다는 것이었다.110) 이들은 곧 조선인민위원 회와 한국민주당을 방문하여 정치적인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111) 이극로를 중심 으로 하는 이러한 활동은 10월 14일 정당통일위원회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민당 내에서의 활동이 커다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당 자체의 주류를 이 루고 있었던 기독교 계열과 동아일보 계열이 당의 노선과 활동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에 비주류들의 흐름이 당내에서 지지를 받기는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김병로, 이인, 이 극로 등은 당에서 곧 이탈하였다.112) 반면에 원세훈은 당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점차 넓혀갔다. 우선 그의 정치적 위상의 강 화는 송진우가 암살된 직후에 표출되었다. 원세훈은 송진우 암살 직후 당의 임시 수석총 무로 내정되었다. 선거를 통해 수석총무로 김성수가 뽑히기는 했지만, 당내에서도 친일 경력이 있던 김성수보다는 친일경력이 없었던 원세훈이 당의 얼굴이 되어주기를 기대하 였다. 그러나 당의 재정권을 쥐고 있었던 김성수가 결국 당권을 장악하였다.113) 물론 원 세훈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비주류 인사들이 당권을 장악할 정도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들의 노선이 당 내부에서 광범한 지지를 못 받았지만, 개인적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114)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또 한번 표출하였던 시기는 모스크바3상협정 이 발표된 직후였다. 1945년 12월말 모스크바 3상협정 결정서가 발표되자 귀국한 임시정부를 중심 으로 한민당은 반탁운동에 가담하였다. 반면에 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조공과 인민당이 모스크바3상협정 에 대한 지지노선을 선언하자 반탁운동 진영과 삼상협정 지지진영 사 이에 격렬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때 한반도에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에 외국의 군대가 진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 족내부의 대립을 막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고, 이것이 1946년 1월 초 주요한 정치세력 들이 모여 정치행동의 통일을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표출되었다. 여기에 한민당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것은 원세훈과 김병로였다.115) 109) 이극로, 위의 책 p. 36, 77 참조. 110) 매일신보 1945년 9월 26일자. 111) 이 모임에는 이극로 외에 김종상, 백남운, 임화, 최장민, 이경석, 서신원, 정순갑, 배성룡, 임천규 등이 참여하였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26일자). 112) 이인은 법관으로서의 활동을 위해 이미 1945년에 탈당했다(김종범 김동운, 앞의 책 p. 67). 113) 미군정 주간보고서 부록 Political Trends # 년 1월 12일. 114) 1945년에 발간된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에서는 김병로, 원세훈, 김약수, 이인 등을 한민당의 주도적인 인물로 분석했다. 115) 4당 회합에는 한민당에서 원세훈, 김병로, 조선인민당에서 이여성, 김세용, 김오성, 조선공산당에 서 박헌영, 이주하, 홍남표, 국민당에서 안재홍, 백홍균, 이승복, 옵저버로 인공의 이강국, 임정의

26 國史館論叢 第58輯 이 회합에서 모스크바3상회의의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 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는 공동성명을 채택하였고, 이것이 소위 4당 코뮤니케 였다. 또한 신탁통치에 대해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 하도록 한다고 합의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분 열과 반목을 더해가던 정치세력 사이에 연합전선을 구성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의 형성을 위한 정치세력 간의 협의는 신한민족당이 참여하면서 1월 일 과 14일 계속되었다.116)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월 7일 한민당 수석총무로 김성수가 당선되면서 당내 분위기 가 더욱 보수적으로 선회하였다는 점,117) 임시정부 측의 강력한 반탁입장에 의한 4당, 5 당회합에 대한 반대118) 등으로 실패하였고, 임정이 조직한 비상정치회의에 한민당, 국민 당 등이 참여하면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119) 물론 원세훈도 탁치안은 누가 먼저 했든지 자주독립과는 배치 라는 글을 통해 소련 에서 제안하였는지 미국에서 제안하였는지 발상의 진원은 차일로 미루고 우선 탁치만을 먼저 반대하는 것이 곧 우리 3천만의 민족적 결심 이라고 발표120)하면서 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세력, 해외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하 지 않으면서 활동했던 원세훈과 김병로의 입장에서 4당회합과 5당회합의 전망은 밝은 것이었다. 반면에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반공의 입장을 강화해 나갔던 한민당의 주류적 인 입장 속에서 이러한 흐름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46년 중반 이후 미군정이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에의 참여로 이어졌다. Ⅳ.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와 성격변화 1.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 Ⅰ장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민당은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운영되지 않았다. 다 양한 노선과 활동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수나 당대표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등이 참여하였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7일자). 116) 조선일보 1946년 1월 11일자 : 서울신문 1946년 1월 15일자. 117) 조선일보 1946년 1월 8일 1월 9일자. 118) 동아일보 1946년 1월 10일자 : 조선일보 1946년 1월 14일자. 119) 4당 코뮤니케에 대한 한민당의 입장은 조선일보 1946년 1월 14일자에 있는 김성수의 성명을 참조. 120) 동아일보 1946년 1월 29일 1월 31일자.

27 가 없었고 다수의 총무와 그 총무들을 대표하는 수석총무의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러한 체제는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결렬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가 시작되면서 당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좌우합작위 원회는 모스크바 3상협정에 대한 지지의 정치노선을 표방하였던 정치세력의 연합체인 民主主義民族戰線(이하 민전 으로 약칭)과 반탁노선을 표방했던 정치세력의 연합체인 大 韓國民代表民主議院(이하 민주의원 으로 약칭)과 非常國民會議121)의 대표들이 5명씩 참 여하여 추진되었다.122) 이 때 민주의원의 대표로 참여한 다섯명 가운데 한민당의 원세훈 이 참여하고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원세훈은 일제시대 러시아, 중국, 그리고 국내에서의 활동을 통해 민족주의 세력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과도 광범위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경력 가운데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김규식과의 관계였다. 그는 1923년의 국민대표 회의에서 김규식과 함께 창조파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김규식과 함께 유일독립당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좌우합작운동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123) 이 운동은 1920년대 초반 국민대표회의 직후 분열되어 있던 항일운동 세력의 통일을 도 모해 보고자 한 것으로 사회주의 세력에서부터 민족주의 세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항일 세력을 하나로 묶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세훈과 김규식의 활동은 1946년의 좌우합 작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세훈은 상해와 국내에서 좌우합작위원회에 민전의 대표로 참여 하였던 여운형, 김원봉, 허헌과 교류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위원회에서의 활동이 매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시작되자 원세훈은 몇 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 회합에 참여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124)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좌우합작이 당시 조선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다른 사람도 이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3차 회 합이 있은 후에도 원세훈은 또 한차례의 성명을 통해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125) 121) 임시정부는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1945년 12월 특별정치위원회를 구성하였 고, 이 단체는 다음해 1월 비상정치회의로, 2월 비상국민회의로 발전하였다. 임시정부 세 력들은 자신들을 정부로 규정하면서 이 단체를 국회의 위상을 가지는 단체로 발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들로 민주의원을 구성하여 이승만의 정치적인 역할과 지위를 높이려고 하였지만, 임시정부 측은 비상국민회의를 고수하였다. 따라서 양자 간 의 위상을 둘러싼 대립이 나타나기도 하였다(이상 박태균, 년 미군정의 정치세력 재 편계획과 남한정치구도의 변화 2장 2절 참조). 122) 좌우합작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에 대해서는 정병준, 앞의 논문을 참조. 123)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p. 105 大韓民國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 篇) 日本外務省陸海軍省文書(第二號) (1976) pp 참조. 이 운동에는 당시 상해에서 활 동하고 있었던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124) 동아일보 1946년 5월 29일자.

28 國史館論叢 第58輯 이러한 원세훈의 입장에 대해 비주류의 한사람이었던 김약수 역시 절대적인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즉, 당시 한민당의 조직부장이었던 김약수는 합작은 지상명령 126) 이라고 하면서 합작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인공 타도를 중심적인 정치노선으로 하였던 한민당의 주류측의 입장 에서 인공의 핵심적인 세력이었던 조공이나 인민당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 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군정에 협조하고 있었던 한민당은 공개적으로 좌우합작 위원회를 비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좌우합작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였던 원세훈이나 원 세훈의 입장을 지지했던 김약수의 노선에 대해 당내에서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할 수 는 없었다. 그러나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면서127) 한민당 내부에서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입장 대립이 공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우익 8원칙128)을 통해 좌우합작위원회에 서의 입장을 밝힌 바 있었던 한민당은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절대적인 반대의 뜻을 표 명하였다. 우익 8원칙은 신탁문제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 친일파 처리문제의 유보, 제반 개혁에 대한 불명확한 규정을 골자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29) 3상회의의 결정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 무상분배 를 핵심으로 하는 토지개혁,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리, 정치범 석방 등을 주장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한민당은 찬성할 수 없었다. 특히, 한민당은 7원칙 중 토지개혁문제130)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방식을 주장한 한민당은 유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131) 곧이어 원세훈은 탈당성명을 발표하였다.132) (1) 7일에 발표된 좌우합작 7원칙 중에서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의 결의에 의하 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명백한 문구에 대하여 회의적 태도를 취함은 125) 조선일보 1946년 6월 19일자. 126) 서울신문 1946년 7월 14일자. 127) 좌우합작 7원칙은 독립시보 1946년 10월 7일자 참조, 128) 독립신보 1946년 7월 28일자. 129) 정병준, 앞의 논문 p ) 토지개혁에 관한 제3항목은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 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직접 처리하며,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여 사 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으로 규정된 부분이었다. 131) 동아일보 1946년 10월 9일자. 132) 동아일보 1946년 10월 19일자.

29 - 115 이해키 곤란하다. (2) 토지의 체감매상과 무상분여 등에 대하여 국가재정의 부담이 과중할까 우려함은 애국적 견지에서 그럴 듯도 하다. (3) 입법기관에서 토지문제를 신중히 토의할 것이지만 조선에서 사유재산제를 채용할 것은 확정적인 즉, 모든 소작인에게 응분의 토지를 분여하고 소유권을 부여하고 일반적 세제에 의하여 징세한다면 그 무엇이 과중 부담일 것이며 기만될 것인가? 이러한 원세훈의 탈당성명에 대해 한민당은 무상분배는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앞세 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133) 물론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하면서도 좌우합작을 지지한다는 과거의 합작태도로 일관 한다는 배치된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134)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군정을 의식 한 것이었지 한민당 주류세력의 진정한 입장은 아니었다. 이 문제로 인해 한민당 내부에서 비주류 계열, 특히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지하고 있었 던 세력들의 대거 탈당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135) 먼저 원세훈과 함께 고려민주당 인사들이 탈당하였다. 즉, 원세훈의 뒤를 이어 중앙상무감찰위원인 韓興周, 중앙상무위원 宋南憲, 청년부장 朴明煥, 李健雄, 朱光成 등을 위시하여 49명이 탈당하였다.136) 또한 그 동안 한민당과 같은 노선을 추구해 오던 고려청년당이 한민당의 산술적이며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공조체제를 무너뜨려 버렸다.137) 뒤를 이어 한 민당 중앙위원 16명과 중견당원 270여 명도 탈당, 원세훈과 보조를 같이 했다. 10월 말에 이르면서 탈당사태는 극에 달하였다. 10월 21일 김약수, 김병로, 金炳魯 계 열의 李順鐸 등 중앙위원 12명과 평당원 40여 명, 11월 22일 중앙위원 강인택 등 20여 명, 11월 28일 중앙위원 박용희, 김병수, 신현창 외 17명, 12월 5일 중앙당무집행위원 김 상규 외 중앙집행위원 4명과 당원 82명, 12월 17일 중앙집행위원 박원식, 중앙상무감찰 위원 조경서 외 평당원 56명이 탈당하였다.138) 이상과 같은 일련의 탈당사태를 일자별로 133) 위의 신문 1946년 10월 12일자. 134) 위의 신문 1946년 10월 15일자. 135) 물론 이전에도 대규모 탈당사태가 있었다. 한민당 내부에서의 탈당 사태는 먼저 1946년 8월 7일 에 나타났다. 약 127명의 간부와 당원들이 당의 현재의 태도는 黨是와 相異하다 는 이유로 성명 을 발표하고 탈당하여 독립노농당(柳林)에 입당하였다(이기하, 한국정당발달사 p. 128). 이때 탈당한 대표적인 인사는 집행위원이었던 한성민이었다. 그는 특히 김성수에 대한 많은 불만을 토로하였으며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미군정 일일 보고서 3권, 1946년 9월 23일 336호). 136) 조선일보 1946년 10월 11일자 : 이기하, 위의 책 p ) 이기하, 위의 책 p. 65. 고려청년당은 일제시대 중앙중학교 출신들로 결성된 정치조직으로 한민 당의 청년조직으로서 활동하였다(송남헌, 해방 3년사 1, pp ). 고려청년당 창당시 추대고문을 보면 대부분 한민당 인사들이었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13일자). 138) 김약수의 탈당과 관련하여 이기하는 그 배경이 입법의원의 선거와 개원을 둘러싼 문제- 입법의

30 國史館論叢 第58輯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8월 5일 전한민당원 127명 독립노농당에 입당( 동아일보 1946년 8월 5일자). 10월 8일 원세훈, 한흥주, 이매응, 이건웅, 주광성 10월 9일 박명환, 공남헌, 현동완, 장공일, 이병헌, 최동식, 유흥산, 한학수, 이민흥, 정 학용, 박태선, 한동수, 이상은, 이수억, 이정수, 한필수( 조선일보 1946년 10월 9일자). 10월 10일 이순탁(김병로 계) 탈당( 조선일보 1946년 10월 10일자). 10월 11일 김용국 등 17명 탈당( 서울신문 1946년 10월 11일자). 10월 21일 당무부장 김약수를 비롯하여 중앙위원 12명과 평당원 40여 명 탈당( 조선 일보 1946년 10월 21일자). 11월 28일 중앙위원 최양옥, 박용희, 김병수, 신현창 외 당원 17명 탈당. 12월 5일 중앙상무집행위원 김상규외 중앙집행위원 4명과 대의원 1명, 당원 82명 탈 당( 서울신문 1946년 12월 5일자). 12월 17일 박원식 등 58명 탈당( 서울신문 1946년 12월 17일자).139) 한편 탈당한 인사들은 대부분 김약수, 원세훈이 주축이 되었던 민중동맹 에 참여하였 다. 1946년 10월 29일 김약수, 고창일, 서세충, 이순탁, 나승규, 남상학, 김상덕, 송남헌, 이용범, 김문, 임의탁, 최남주, 최동식, 한학수, 장자일, 박문희, 이강수 등 31명은 을지로 2가 乙酉회관에서 민중동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민중동맹의 결성대회는 1946년 12월 22일 천도교 강당에서 대의원 8백여 명과 김규식, 원세훈, 김병로140) 등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그리고 총재에 김규식을 임명하였다. 대체로 한민당에서 탈당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민중동맹은 김병로 계열의 재정후원으 로 활동하였다. 결성 직후 나승규와 김약수의 대립파쟁으로 김규식이 총재에서 사퇴하는 등 파란을 겪었지만, 민중동맹은 1947년 소위 제3전선 인 民主主義獨立戰線 을 주도하면 서 좌우합작위원회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소위 中間派 의 핵을 이루었다.141) 원 서울시 선거결과의 무효선언을 계기로 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미온적 태도 (이기하, 앞의 책 p. 129)를 취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지만, 김약수, 김병로 등의 탈당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좌우합작문제와의 관련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입법의원과 관련되어 탈당 한 인사들은 1946년 12월 5일에 탈당한 세력들이다. 139) 1948년 한민당은 또 한번의 탈당사태를 맞이하였다. 1948년 8월 2일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했던 윤치영이 탈당하였고( 서울신문 1948년 8월 2일자), 다음날 정현모 등 9명의 국회의원이 한 민당에서 탈당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3일자). 이 탈당사태는 단독정부 수립 직후 이승 만 계열과 한민당 세력 간의 세력 다툼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140) 김병로는 한민당에서 탈당하였지만, 8 15직후 김병로 계열로 분류되었던 인물 중 이순탁만이 행 동을 같이 했을 뿐 나용균, 백관수 등은 탈당하지 않았다. 141) 이상 송남헌, 해방 3년사 2(까치, 1985) pp 참조.

31 한국민주당의 성격변화 한민당은 원세훈 계열과 김약수 계열, 김병로 계열이 탈당하자 당내의 진통을 극복 한다는 명목142)으로 기구개혁을 단행하여 집단지도제를 폐지하고 단일지도제로 당헌을 개정, 김성수를 당위원장, 백남훈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전의 총무제를 위 원장제로 하는 동시에 후생, 문교, 지방 등 3 부를 폐지하고 기획, 정치부를 신설하여 12 부로 개편하였다.143) 또한 중앙당무집행위원과 중앙집행위원을 재선출하였다.144) 중앙당무집행위원 백관수, 김동원, 서상일, 허정, 김도연, 이운, 김약수, 홍성하, 장덕 수, 박찬희, 유진희, 조헌영, 함상훈, 신윤국, 양원모, 안동원, 최윤 동, 나용균, 정광호, 조면구, 김준연, 이영준, 윤보선, 이갑수, 송필 만, 고백남, 김산, 김상규, 최두선 보선된 중앙집행위원 강윤철, 김원섭, 유홍, 박원식, 서상일, 오침환, 이기령, 김송연, 추종순, 정원모, 소병곤, 김승태, 윤항로, 원복범, 국태일, 김준연, 이 영준, 장현식, 최두선, 박완, 조용구, 이인경, 김승용, 서상문, 고의동, 김낙영, 양효손, 장연송, 김원식, 김승문 이제 한민당에 남은 세력들은 주류로 분류했던 세력들만 남게 되었다.145) 이들의 공통 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시대 기독교 계열의 조직에 참여했다는 점과 동아일보를 비 롯한 김성수가 장악하고 있는 사업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1946년 10월부터 12 월 사이에 탈당한 비주류 계열의 인사들에 비해 보다 보수적이고 반공적인 입장을 고수 하는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한민당은 이전보다 一絲不亂한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비주류 계 열이 탈당함에 따라 정치노선과 활동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며, 이것이 김성수를 중심으로 단일지도체제를 성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장덕수가 당내에서 보 다 전면에 등장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후 권력 장악을 위한 현실적인 행보를 걸었다.146) 142) 이경남, 설산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p ) 이기하, 앞의 책 p ) 이상 서울신문 1946년 10월 13일자 : 조선일보 1046년 10월 19일자 참조. 145) 한민당은 1947년 다시 한차례의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3일자). 그러 나 이때의 조직개편은 한민당 구성원이 축소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한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니 지 않았다. 또한 1947년 말에 단행된 한민당의 부서개편은 곧 다가올 선거대책을 마련하기 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19일자 : 조선일보 1947년 10월 14일 15일자 참조). 146) 장덕수의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심지연, 설산 장덕수의 정치이념 ( 한국현대정당론 ) : 이경

32 國史館論叢 第58輯 조직 개편 이후 한민당은 입법의원에서 반탁 결의안 제출, 친일파 처단을 위한 법령제 정에의 반대,147) 보선법 제정148) 등에 전당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고, 제2차 미소공위에의 참가 결정,149) 조선문제의 유엔 이관 직후 선거대책 마련 등의 중요한 문제에 전당적으 로 대처할 수 있었다. 이제 한민당은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150)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한민당에서의 탈당사태와 조직개편은 한민당의 당세를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당 내의 노선과 활동을 중앙집중화 시킬 수 는 있었지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탈당함으로써 한민당에 대해 친일파 정당이라는 여 론이 더욱 가중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민당은 이제 거대한 보수정 당이라기 보다는 김성수와 장덕수를 축으로 하는 私組織 으로 축소개편된 것이었다. 이러한 축소개편으로 인한 보수적 성격 강화가 한민당에 가져다 준 결과는 엄청난 것 이었다. 먼저 1948년의 단독선거에서 한민당은 당시 유일하게 정당의 형태를 띠고 참여 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200석 중 15%에도 미치지 못하는 29명이 당선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는 당시 한민당에 대한 여론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의 분열은 지방의 한민당 조직에도 일정정도의 타격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Ⅰ장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한민당의 지방조직은 매우 취약한 상황이었다. 그 러한 상황에서 당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비주류계열의 인사들이 탈당 하였고, 여기에 평당원들이 상당수 동조했다는 사실은 지방조직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이 었다. 따라서 5 10선거 패배의 또다른 원인은 바로 지방조직의 약화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민당은 행정부 내에서 뚜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 다. 한민당 주류들은 대체로 동우회 계열의 인사들이었던 데 반해 이승만의 측근들은 미 주의 동지회, 국내의 흥업구락부에 참여했던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한민당 세력 을 신뢰할 수 없었고, 결국 내각 구성에서 한민당을 외면하고 말았다. 국회 내 의석이 20%도 되지 않았던 한민당은 이승만의 이러한 태도에 반발할 힘을 가질 수 없었다. 따 라서 한민당은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의 대통령 추대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단독정부 수 립 직후 바로 野黨 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6년 중, 후반에 일어난 탈당사태는 한편으로는 당 내부의 중앙 집중력을 강화 여당 자체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역할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을 矮小化함으로 써 당의 규모와 성격을 축소하였다. 그나마 한민당에 대해 기대하고 있던 대중들의 기대 는 이제 허물어진 것이었고, 그 결과는 5 10선거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당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민당은 확대개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대 남, 앞의 책 참조. 147) 동아일보 1947년 3월 7일 5월 1일자. 148) 동아일보 1947년 4월 18일 6월 10일 7월 12일 8월 29일자. 149) 동아일보 1947년 6월 10일자 : 경향신문 1947년 6월 18일자. 150) 동아일보 1947년 3월 28일 6월 20일 9월 12일 1948년 2월 6일자.

33 국회에서 이승만과의 대립, 소장파의원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당의 운신이 萎縮되자 한민 당은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해체하고 民主國民黨을 결성하였다. 민주국민당으로의 확대개편에는 大韓國民會의 申翼熙 세력과 大同靑年團의 池青天 세력이 참여하였다. 그 리고 당위원장에 신익희를 임명하는 등 기존의 한민당 세력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 었다.151) 반면에 한민당에서 탈당한 세력들은 한민당에 반대하는 정치노선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원세훈, 김약수, 이극로 등 第三戰線 에 참여했던 세력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 대하고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이인의 경우에는 이승만을 지지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대한국민당의 최 고위원에 취임하여 오히려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대한국민당은 민주국민당 의 내각제 개헌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국민당으로의 개편으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없었던 한민당의 주류세력들은 결 국 1955년에 이르러 원내자유당 이탈세력, 흥사단 세력, 카톨릭 세력, 조선민주당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여 민주당으로 확대개편할 수밖에 없었다.152) 맺음말 한민당은 인공에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추대한다는 정치적인 명분을 가지고 창당되었 지만, 하나의 정치노선이나 사상을 가지고 조직된 정당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결집되어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민당이 一絲不亂한 지도체제를 가질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내에 참여한 세력들의 일제시대의 정 치적인 활동경험이나 정치노선이 큰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하에서 기독교 조직, 김성수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했던 한민당 내부의 주류세력들 은 실력양성론 에 근거하여 해방 이후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근대화 지상주의, 반공사 상 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이러한 정치노선에 근거하여 미군정과의 협조노선, 인공에 대한 반대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반면에 비주류세력들은 하나의 정치노선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제시 대에 일본제국주의에 협조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세력에서부터 민족주의 세력에 이르기 까지 민족운동의 통합을 위해 활동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 직후 151) 이상 이기하, 앞의 책 pp 참조. 152) 이기하, 앞의 책 pp

34 國史館論叢 第58輯 한민당과 인공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이러한 분란을 막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고, 모스크 바3상협정 발표 이후 반탁세력과 3상협정 지지세력간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자 4당, 5당 코뮤니케,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여 정치세력 간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양 세력 간의 이러한 활동이 하나의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당 내부 에서의 분열이 더욱 가중되어 1946년 10월의 좌우합작 7원칙을 계기로 하여 비주류세력 들은 한민당에서 탈당하여, 대체로 第三戰線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비주류세력이 탈 당하게 되자 한민당은 당내 결속을 강화하고 일원적인 당운영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당 을 矮小化함으로써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따라서 1948년 단독정부 선거에서의 패배, 1949년 민주국민당으로의 확대개편, 1955년 민주당으로의 확대 개편 등은 바로 이상과 같은 한민당의 성격변화로 인한 필연적인 결 과였다. 스스로는 자신들이 正統 保守 野黨 임을 주장하지만, 이들이 독재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야당으로서의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된 이후였다. 그나 마 당내의 파벌로 인하여 민주당은 계속 당내 분열을 거듭하였다. 한민당의 주류세력은 민주당 내부에서 舊派를 형성하여 최근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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