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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사 刊行趣旨 오늘 우리의 韓國史 연구는 지난날 民族史 탐구에 몸 바쳐 온 先人의 精神과 業績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分野에 걸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한 韓國史에 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더 높아 가고 있읍니다. 이에 우리는 韓國史 硏究成果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할 단계에 이 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韓國의 歷史와 文化를 모든 사람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硏究成 果를 현재의 수준에서 일단 총정리, 검토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 方向을 제시하기 위하여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 다. 國史編纂委員會가 있읍니다. 한국사 를 편찬 간행하는 취지가 여기에 한국사 를 편찬함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 웠습니다. 첫째, 民族의 歷史와 文化의 성장 발달을 바탕으로 한 韓國史를 편찬한다. 둘째, 民族主體性에 입각하여 내재적 발전을 부각시키는 韓國史 를 편찬한다. 세째, 모든 硏究成果를 종합하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韓國史를 편찬한다. 한국사 가 간행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에 새로운 길잡이가 되 고 또 널리 韓國史를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6 槪 要 槪 要 1 後三國이라는 국내 정권의 분열기를 거처 王建에 의하여 세워진 통일국가 高麗王朝는 그 초기의 문물은 新羅의 그것을 거의 그대 로 이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당시에 있어서 新羅政敎의 기본같이 되어 있었던 佛敎面에 서 본다면, 적어도 大覺國師의 天台宗 開立으로 五敎九山이었던 종래의 宗派가 五敎兩宗이라는 새 명사로 바뀌어질 때까지는 高麗 의 佛敎도 대체로 新羅佛敎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다 하여도 과 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太祖가 그의 開國大業을 佛法의 加護에 의한 것으로 확신하 고 開京에 七層塔, 平壤에 九層塔을 세워 三國의 통일을 빌었던 것 은 新羅가 皇龍寺에 九層塔을 세워 三國統一을 이룩한 것을 본떴 던 것이다. 또 開京의 法王寺 등 十伽藍을 비롯하여 五冠山의 大興 寺 등 여러 사찰을 세웠던 것이, 佛力으로 三國을 통일한 보답으로 세운 것이며, 이들이 국가통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王建이 최후로 세운 開泰寺의 親製願文에서 뚜렷이 밝혀 진 바 있다. 속세적인 권력을 떠나 오로지 佛法의 진리만을 추구하려 는 경향이 뚜렷하였던 中國의 남부 지역에서 발전하였던 귀족적인 불교와는 달리 王權에 의한 뒷받침을 받아 국가권력과 밀착하여 그 그늘 밑에서 敎勢를 뻗쳤던 新羅佛敎의 특징은 高麗에도 그대 로 이어졌던 것이다. 雙冀의 건의에 따라 科擧에 의한 人材 등용으로 국가체제의 정 - 1 -

7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비와 중앙집권체제를 굳힌 것으로 유명한 光宗代에 이미 이 科擧 制에 준하여 승려의 진급을 규제하는 僧科制가 이루어진 흔적을 原州 居頓寺 圓空國師碑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또 佛敎가 단순히 민중을 교화하는 신앙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政 敎와 뗄 수 없는 관련성을 지녔던 것을 엿볼 수 있다. 高麗佛敎의 이와같은 움직임을 崔承老의 이른바 時務 二十八 條 에도 그 폐단이 極論되었던 것이나, 佛敎가 太祖 이래 국가 권력 과 밀착되어 王室에서 豪族, 서민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신앙의 대상 이 되어 성장을 거듭하여 太祖의 제 5子가 出家하여 證道國師가 되 었던 것을 비롯하여 3인의 王子가 있으면 그 중에 1인은 僧이 되고 兩班家에 3인의 남자가 있으면 1인은 入山修道하는 것이 풍속화 되 어 있던 당시에 있어서는 아무 설득력도 가지지는 못하였다. 王子와 양반층의 잦았던 出家로 불교가 貴族化되어 가는 高麗初 期의 일반풍조에 따라 文宗의 王子로서 승려가 된 3인 가운데서 華嚴宗에서 出家하여 天台宗을 세운 제 4子 煦 즉 大覺國師의 출 현은 비단 高麗佛敎의 황금기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실로 韓國佛 敎史의 흐름을 전환시킨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大覺國師가 宋에서 修學하고 귀국하여 一宗派로서 세우게 된 天 台宗이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것은 新羅時代부터였던 것이며, 高 麗 光宗時의 諦觀은 揚子江 南의 吳越國에 건너가 天台敎儀를 著 述하고 당시 中國에서는 斷絶의 危機에 놓여 있었던 이 일파의 敎 學을 蘇生시켜 中國佛敎史에서도 特書大筆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 다. 우리나라 天台宗의 창시자를 大覺國師로 보는 것은 그 이전까 지는 아직 한 宗派로서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 리 佛敎의 힘으로 되살아난 宋의 天台宗을 그가 다시 받아 一宗으 로서 定立시킨 까닭이다

8 槪 要 天台宗이 高麗에 정착하기 전까지의 五敎 九山에서 禪敎인 九派 즉 九山은 曹溪宗으로 부르게 되고 大覺國師에 의하여 새로 高麗 에 정착된 禪宗인 天台宗과 兩宗이 되어 이에 비로소 五敎 兩宗으 覺國師 후 華嚴慈恩中道甫山始興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지 로 되었으며 敎宗에 있어서도 圓融 法相 法性 戒律 涅槃이 大 는 변동을 가져왔었다. 특히 그가 敎禪의 일치를 역설하고 먼저 국가가 있고 뒤에 종교 가 있다는 견지를 주장하고 사상적인 독단을 배격하는 會三歸 一 의 주장은 곧 國家統和의 민족적 이념에 합치되는 것이며 元 曉 思想의 완성이라고 하겠다. 한편 그는 널리 佛書를 宋 遼 日本 등으로부터 구입하였다. 4천 7백여권을 수집하여 敎藏의 總目錄을 작성한 것이 新編諸宗敎藏總 錄 이다. 이 것은 文宗 27년(1073)에서 宣宗 7년(1090)에 이르기 까지 25년 간의 典籍蒐集의 결정이었으며, 그속에 포함된 遼의 道 宗 覺苑 志福 守瑧 法悟 非濁 希麟 등 12學僧의 都合 29部 190卷의 저술이 이 목록을 학술면에서 영원히 빛내고 있다. 이와같이 高麗佛敎는 大覺國師의 활약으로 그 내용이 풍부하게 되고 사상면의 진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보다도 국가이익 이 앞서야 한다는 新羅 이래의 佛敎傳統은 더 심화되어 八關會 燃燈會를 비롯하여 역대왕의 매년 6월 15일에 여는 菩薩戒道場과 왕의 生日에 전국적으로 열리게 되는 祝壽齋, 先王이나 太后의 忌 日에 그 명복을 비는 諱辰道場, 그리고 經行 仁王般若道場 飯 僧 藏經道場 등 왕실 및 거국적인 佛敎行事가 성행하였다. 高麗時代의 佛敎行事에서 가장 화려 하였던 八關會는 太祖訓要에 민속신앙으로 설명되어 있고 徐兢의 高麗圖經 에는 高句麗의 東 盟과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설명되어 있어 한국의 고유 신앙인 巫覡 - 3 -

9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敎가 佛敎 仙風을 흡수한 것 같이 믿어지고 있으나, 이미 新羅의 眞 興王 32년 7월(571)에 戰死者의 慰靈祭로서 八關筵會를 外寺에서 가졌다는 기사 등에서 미루어 보아, 종래 巫覡敎의 의식에 따랐던 전 사자의 위령제를 佛敎行事에 따르는 행사로 승화하였던 것이며 즉 佛說八關會齋經 에 따르는 八戒를 지키며 佛敎行事化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위로는 왕실과 통치층의 절대적인 신앙이 되었고 아래로는 농민 및 일반의 뜨거운 종교 정열을 만족시켜주는 한편 그 종교적 행사까 지도 거의 국가적인 것으로 되어 肥大할대로 비대해진 佛敎의 巨體를 유지하고 國民敎化의 효과를 거두어 나가는데는 이를 뒷받침하는 막 대한 경제적 뒷받침이 뒷따라야 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新羅時代부터 물려받은 적지않은 寺有財產에 다시 高麗에 들어서도 왕실과 귀족의 寄進과, 국가와 귀족으로부터의 여러 가 지 수탈을 寺院에 주어진 특권의 힘으로 막아 보려는 농민의 농토 擬裝寄進, 타인 토지의 兼併 등으로 그 所有地를 확대하여 갔던 것 이다. 이와같이 확대된 이른바 寺院田은 免税의 특전이 주어져 있 어 그 확대는 국가 재정면에서 보아 손실이 아닐 수 없었으나 寺 院만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를 경작하기 위한 노비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이 국가에서 주어진 특권을 최고도로 이용하여 광대한 寺院田에서 얻어지는 收獲은 다시 長生庫 佛寶 등의 高利貸資本 을 형성하여 그 放債取息은 더욱 寺院의 재산을 축적케 하였을 뿐 아니라, 양주, 목축, 상업 등에도 투자되어 그 富力은 늘어가기만 하였던 것이다. 高麗의 寺院이 빈민의 구제, 서민층의 의료사업과 찬란한 遺產 을 남길 수 있었던 문화활동의 원천은 바로 이와 같은 그 富力에 - 4 -

10 槪 要 있었을 뿐 아니라, 국가수호의 제일선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 도 그 경제적 富를 지키기 위한 필요에서 조직된 僧兵의 출현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女眞의 정벌에 출동되었던 降魔軍을 비롯 하여 蒙古의 침입때에 處仁城 忠州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金允侯의 武力 배경이 또 僧兵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僧侶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王師와 國師를 비롯 하여 敎宗의 최고 法階인 僧統이나 禪宗의 大禪師의 정치적 배경 은 寺院의 富와 국가의 僧侶 우대에 따라 컸을 뿐 아니라 僧兵들 도 貴族間의 세력분쟁에 자주 동원되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와같은 高麗佛敎가 우리의 文化史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 사에 남긴 최고의 유산은 지금 그 經板이 海印寺에 보존되어 있는 高麗大藏經을 들 수 있다. 中國大藏經의 東傳은 이미 新羅末의 普 耀禪師가 南越에서 搬來한 바 있었고 또 장기에 걸친 契丹의 침입 을 겪고 佛力에 의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일념에서 顯宗 으로부터 德宗 靖宗을 거쳐 文宗에 이르러 이루어진 이른바 舊板 高麗大藏經이 있었다. 이 舊板高麗大藏經이 불행히도 高宗 19년(1232)에 있었던 蒙古 의 제 2 차 침입때에 奉安地인 大丘 符仁寺에서 불에 타 없어진 것은 佛力에 의하여 국가와 社稷을 수호하려던 高麗에 있어서는 외적과의 항전에 求心力을 상실한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믿어졌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무자비한 행동으로 당시의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蒙古의 침입이 되풀이되던 高宗 24년(1237)에 大藏都監을 세워 동 38년 (1251)까지 16년에 걸쳐 한 자마다 外敵擊退를 염원하며 정성들여 새긴 이 高麗大藏經은 총 6,529卷이 모두 守其大師 등 30 여인의 엄 - 5 -

11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격한 校讎를 거쳐 漢字大藏經 중 매우 정확할 뿐 아니라 契丹藏經까 지 대조하였다는 점에서 學的 價値 또한 매우 높은 것이다. 希麟의 續一切經音義 (10卷)같이 高麗大藏經을 통하여서만 엿볼 수 있는 契丹佛敎의 업적이 남게된 것도 高麗大藏經이 지금 그 조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된 契丹藏經까지도 대조하여 雕造하였던 까닭이다 단순한 종교의 문제가 아니고 佛力을 빌어 문화 민족의 긍지와 국토의 수호를 위한 정신적 支柱로서 大藏經을 雕造한 高麗의 人 心은 忠烈王 20년(1294) 7월에 高麗 珍島人으로서 蒙古에 사로잡 혀가 그곳에서 喇嘛가 된 吃折思八八哈思를 통한 喇嘛敎傳敎의 요 청도 물리칠 底力을 보였던 것이다. 2 太祖때부터 開京과 西京에 학교가 있었지만 成宗에 이르러 비로 소 종합대학에 겨눌 수 있는 國子監이 세워졌다. 國子監은 國子 學 太學 四門學 律學 書學 算學의 京師六學이라고 불려지는 전문분야로 나누어져 있었다. 禮春秋와 孝經論語를 주로 하고 時務策算學을 아울러 교육 國子監 大學 四門學은 모두 儒敎의 根本經典인 易 詩 書 하였던 것이나, 그 입학자격이 國子學에는 文武官 三品 이상의 子 弟, 大學에는 五品 이상, 그리고 四門學에는 七品 이상의 子弟에 따라 허용되었던 것이며 律 書 算學의 실무자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에는 八品 이하 및 庶人이 입학되었다. 高麗初부터 이와같이 儒敎의 교육기관의 大擴充을 보게 된 것은, 光宗때부터 실시한 官吏登用의 國家考試制度에서 그 科目이 詩 賦 頌 策 등의 文藝로서 應試케 하는 製述業과 儒敎의 經典으로 응시케 하는 明經科로 되어 있는 바와 같이, 漢學과 儒敎의 소양이 - 6 -

12 槪 要 있어야 하였던 것이니, 中國的인 文治主義로의 전환에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조처였다. 律學 書學 算學 등이 八品 이하의 子弟 및 庶人의 입학이 허용된 것은 이와같은 實務를 주로 하는 전문 분야는 이 國家考試인 科擧에서 製述 明經보다 격이 낮은 雜業 으로 불 리워져, 실무보다도 文雅的 生活을 통하며 국민의 스승으로서의 理 想的인 官吏像이 요망되던 中國的인 思考를 받아들였던 까닭이었 다. 高麗의 科擧制度가 家門보다도 才能 중심의 官吏體系를 세우려 는 것에 그 의도가 있었던 것 같으나 그 底意에는 이와 같은 官吏 임명권을 중앙에서 맡아 地方豪族을 통제하며 王權을 정점으로 하 는 강력한 中央集權體制의 수립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교 육인 鄕學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으나 제도면에서의 큰 개 선 확장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國子監을 중심으로 일어난 儒敎중심의 官學은 그 후 잦았던 契 丹의 침 입 등으로 設備의 확장이 게을리 되었을 뿐 아니라, 敎官 인 官學者의 무성의와 실력의 부족 등으로 경영이 침체되어 있었 던데 비하여 새롭게 高麗시대의 儒學에 생명을 불어넣게 된 것이 私學의 開設과 그 융성이었다. 즉 高麗시대의 私學은 文宗時에 이르러 정계의 원로이며 학계의 지도자로 명성이 높던 崔冲이 늙어 官에서 물러난 후 그 여생을 후진교육에 바치려고 私塾을 열게 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向學心 뿐 아니라 특히 科擧를 거쳐 官界에 진출하려는 야심 많 은 청년학도들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그는 學班을 樂聖齋 大中 齋 등 九齋로 나누었던 까닭에 九齋學堂의 稱을 얻게 되었고 또 이 學堂을 당시의 사람들은 侍中 崔公徒라고 하였다 한다. 崔冲이 죽은 뒤는 九齋學堂은 그의 諡號에 따라 文憲公徒라고 불리우게 - 7 -

13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되었다. 文宗時에는 崔冲의 학당 설립을 본떠 私塾을 세우는 자가 많이 나타났다. 당시의 유력한 私立學堂으로서는 崔冲의 文憲公徒 외 에도 弘文公徒 匡憲公徒 南山徒 西園徒 등 11所가 있어 文憲 公徒와 합쳐 12公徒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12公徒는 어떤 뚜렷 한 학문적인 특색이 있어서의 分立이 아니고 科擧準備課程으로 서의 기능이 많았던 까닭에 高麗盛期는 學閥性을 띠면서 발전하 였다. 官學은 그 후 睿宗 4년(1109)에 이르러 왕의 官學振興策에 따라 등 詩書春秋禮記 등 儒經을 전공하는 儒學齋와 武學을 전공하 麗澤齋(周易전공) 待聘齋(尙書) 經德齋 求仁齋 服膺齋 養正齋 는 武學齋 등 7齋를 두었고 동왕 14년에는 그 재정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학생의 厚生財團 같은 養賢庫를 설치하고 설비도 확장 하였을 뿐 아니라, 宮內에 淸讌閣과 寶文閣 같은 학문연구소를 두어 도서수집과 經文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睿宗의 뒤를 이은 仁宗도 睿 宗의 뜻을 이어 京師六學과 鄕學의 제도를 세워 高麗의 官學機關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金仁存 金富軾 尹彥頣 鄭知常 등은 모두 이 관학기관을 통하여 배출한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儒學이 왕실의 진흥책에도 불구하고 哲學的인 깊 이를 가지는 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齊家治國의 正道로서 왕을 중심으로 한 통치계층의 道德的인 수양과 中國的인 敎養習得 을 추구하는데 그친 느낌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그 부진의 이유 를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다. 주로 科擧준비를 위한 詞章 訓詁에 치우쳐 철학적 깊이가 부족 하였던 경향이 보였던 高麗中期까지의 옛 탈을 벗고 儒學이 인생과 宇宙의 근원의 形而上學的인 해명을 시도하는 학문적 경지에 들어 - 8 -

14 槪 要 가, 儒學에 새 활력소를 불어 넣게 된 것은 高麗末期에 들어온 朱 子學이었다. 元을 통하여 安裕에 이어 白頣正 등에 의하여 高麗에 들어온 朱 子學은 그 哲學的 깊이가 學的 흥미를 이끄는데 충분하였을 뿐 아 니라 君臣의 義를 강조하고 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그 정치적 도덕 은 獨裁君主權의 고정을 위하여 정부에서도 그 장려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白頣正의 제자 李齊賢을 비롯하여 李崇仁 李穡 鄭夢 周 吉再 鄭道傳 權近 등은 모두 당시에 있어서는 新學風인 朱 子學의 土着化를 위하여 힘쓴 빛나는 학자들이었다. 中國的인 家族倫理를 가다듬어 大成한 朱子學의 전래로 佛敎의 倫理觀이나 社會觀 및 儀式은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 이며, 李齊賢 李穡 權近 등이 비록 佛敎 자체는 공격하지 않아 도 寺院의 弊害와 僧侶의 비행을 비난한 데 이어 鄭道傳 등의 佛 敎 排斥은 唐末의 新國主義의 儒學者 韓愈나 李德元의 排佛論을 능가하는 느낌이 있었다. 高麗末期까지 주로 왕실 및 귀족층에서 성행된 親族婚의 폐지라든가 家禮에 의하여 家廟를 세우고 喪葬祭 禮에 이르기까지 朱子家禮에 적혀있는 儒敎의 儀式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朱子學의 전래로 일어난 우리 생활상의 변화는 오늘 날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는 것이다. 3 佛敎 및 儒敎의 전개와 더불어 高麗時代의 사회상과 정치를 이 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風水圖讖說의 성행을 들 수 있는데는 누구 도 疑議가 없을 것이다. 高麗時代를 휩쓸었던 風水圖讖에서 먼저 風水說을 살펴보면 都 邑 宮宅 陵墓에 알맞은 땅을 점치는 地相學을 말하는 것이며 風 - 9 -

15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水地理說이라고 말 할 때의 地理도 역시 바로 地相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山河襟帶 山水同抱 등의 山河의 조 건이 갖추어져야 하였을 뿐 아니라, 風氣密集 같은 山河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원동력으로서 氣 의 작용이 또 중요시 되 었다. 山河襟帶 山水同抱 같은 地勢의 관찰은 中國에서는 漢 그 중요한 조건으로는 代 이래 전하여 내려온 소박한 人文地理學의 지식이 많이 포함되 어 있었으며 墓地의 선택같은 것은 儒敎의 根本德目인 孝 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발달하여 왔던 것이며, 唐과의 문화교류가 잦아지는 新羅의 말기로부터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확 실하다. 그리고 道詵이 우리나라의 風水地理說의 宗祖로 거의 신앙적 대 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가 羅末의 정 치적 혼란기에 新羅의 종말과 開京에서의 王建에 의한 새 王朝의 수립을 예언하였던 것은 高麗王朝에게 革命에 대한 자신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예언을 한 그를 신비화하는 것이 그 革命을 합리화하고 또 왕실을 求心力으로 하여 民心을 수습하는데 유익하 였기 때문이다. 道詵이 왕실에 의하여 신비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 은 시대의 下行에 따라 그에 대한 왕실의 尊崇이 더 두터워지고 신비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될 것이다. 시대적으로 보아 1세기나 다른 唐僧 一行으로부터 그가 이 秘術 을 배웠다는 것도 그를 神秘化하기 위한 조작이었던 것이나, 그의 스승으로 一行을 들고 있는 것에서 이 地理風水說의 原型을 어느 정도까지 엿볼 수 있다. 즉 大衍曆을 제작하여 中國科學史上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업적 을 남긴 一行의 地理說은 唐書 天文志에서 찾아보면 그가 생존하던

16 槪 要 지방을 用武의 地, 黃河 중하류 지역을 用文의 地 그리고 揚 子江유역을 貨殖의 地 로 그 지역적인 특성을 나누어 설명하고 唐 玄宗 당시의 中國을 크게 3부로 나누어 四川 甘肅 陕西 山西 있다. 中國 전역의 지방적 특성을 巨視的 각도에서 설명하여 보았던 것이나 그가 이 地理說에 설득력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全天을 12 로 나누고 地上의 12州와 맞추어 나눠진 天上의 구획에서 일어난 별들의 움직임에 따라 이에 해당하는 州國의 吉凶을 미리 점치는 이 른바 十二分野說을 빌어 그의 설을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玄宗 당시의 대체적인 형세는 一行의 지적과 거의 일 치된 것으로 보아 그의 설이 비록 十二分野說을 이끌어 설명하였다고 하 여 결코 당시의 현실에 어긋나는 허황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道詵의 風水地理說의 원천으로 되어 있는 一行의 地理說을 살펴보면 道詵의 說도 당시에 현실을 巨視的인 視點에서 설명하였 던 소박한 人文地理學이었던 것이며 결코 허황한 浮說이었던 것으 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통일 이전의 小新羅國으로서는 貨殖 用武 用 文 을 兼備한 慶州와 그 門戶 蔚山이 전국적인 중심이 될 수 있 었던 것이나 통일 이후의 韓半島 전역을 놓고 본다면, 구석진 이 지역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알맞는 어떤 대응책 같은 것도 없이 썩 어 들어가는 新羅王室에 비하면 西海를 통하여 中國대륙으로부터 韓半島 전역에 끊임없는 영양분을 받아들이고 또 전국의 物货集散 및 國家守備에 편리한 開城地方을 근거로 해상을 지배하고 있던 新興勢力인 王建의 존재는 어느모로 보나 희망에 차 있었던 것으 로 보여졌던 것이다. 道詵의 예언은 이와같은 新羅末의 정세를 巨視的으로 판단한 것 이며 이것이 高麗王室의 지나친 신비화에 따라 큰 영향을 미치게

17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되었던 것이나, 이 風水地理說이 다시 中國 및 韓國 古代에 큰 영 향을 미치고 있었던 圖讖說과 결합되어 변질을 일으킨 후에 있어서 는 그 영향은 더 커졌던 것이다. 즉 하느님이 가리킨 瑞異 같은 것 으로서 장래 닥쳐올 吉凶禍福을 예언 또는 약속하는 神秘的이며 迷 信的인 圖讖說은 儒敎經典에 나오는 이른바 河圖 와 洛書 라 든가 또 經書에 대한 각종 正體不明의 緯書에 보이는 미신적인 占 驗들은 風水地理說보다 더 神秘的인 것이었던 까닭이었다. 이 風水地理說은 太祖가 그의 十訓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寺利 創建에 있어서의 그의 見解라든가, 끝까지 반항하던 後百濟의 故 地를 背逆處로 규정한 것 등에서 그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이나, 특히 西京에 대한 風水地理의 설명은 그 후 高麗王朝 오백년을 통 하여 정치 군사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며 시대의 下行에 따 라 南京, 즉 지금의 서울 一圓에 대한 風水地理說이 자주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漢江이 지닌 人文地理面에서의 가치가 점 차 중요성을 띠게 된 반영일 것이다. 4 新羅時代에는 漢字의 뜻과 音을 빌어 표현된 鄕歌가 있었는데 이 餘脈은 均如의 普賢十願歌 11首에서 보이는 예와 같이 高麗 초 기까지는 아직 이어져 남아 있었다. 그러나 科擧制가 확립되어 官吏登用의 國家考試에 詩 賦 頌 策 등 文藝로서 應試케 하는 製述業이 두어져 이에 급제하는 자가 가장 영예로 여겨지게 되는 文治主義의 시대가 되어서부터는 漢文 學이 자연 문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文臣들이 王命으로 매달 詩를 지어 바치는 文臣月課法이 라든가 修學 도상의 학생들이 시간 을 정하고 詩를 지어 그 文才를 겨루는 刻燭賦詩 같은 것의 盛行은

18 槪 要 科擧를 통하여 중앙에 흡수된 高級官吏나 그 子弟들의 漢文學 趣味 를 자극하였던 것이며 그 이해는 또 당시에 있어서는 貴族社會의 필 수적인 교양으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高麗 초기부터 주로 詩歌에 뚜렷이 나타난 경향이었던 것이나 대체로 武人執權時代부터 눈에 띠게 된 說話文學 같은 것도 高麗時代의 文學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高麗時代의 說話文學의 선구로서는 文宗때의 朴寅亮이 지은 殊 異傳 을 들 수 있으나 그 후 武人政權時代에는 스스로 山村에 물러 破閑集 이나 崔氏의 門客으로 서 우대받던 李奎報의 白雲小說, 崔滋의 補閑集 이 그 대표 적인 작품들이며, 神話傳說逸話詩話 등을 소재로 한 이 說話 文學은 그 뒤 다시 李齊賢의 櫟翁稗說 을 낳게 하였다. 한편 漢詩에만 쓸려 있던 詩歌도 武人政權時代에 만들어진 翰 林別曲 을 비롯하여 安軸의 關東別曲 등 漢文을 사용하면서도 가 竹林七賢을 자처하던 李仁老의 고유의 전통을 살리려는 새로운 형식의 士大夫들의 貴族文學詩歌 인 景幾體歌와 靑山別曲 西京別曲 雙花店 가시리 動動 井邑 詞 등 민중의 俗歌인 長歌의 盛行을 보이게 되었다. 長歌중에는 儒敎的인 倫理觀에서 본다면 도덕에 어긋나는 것도 보이나 민중의 감정을 잘 나타낸 것들이 적지 않아 貴族 詩歌에 비하여 생기가 돌고 共鳴感을 느끼게 하고 있다. 高麗時代의 美術은 佛敎의 黃金期였던 이 시대에서 당연히 발달 을 누릴 수 있는 佛敎美術과 귀족층의 활발한 漢文化 섭취에 따르 는 中國的인 귀족취미에서 영향받아 발달한 工藝品 陶磁器 書法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佛敎美術에서는 建築物로서 榮州 浮石寺의 無量壽殿이 高麗 시대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유물이나, 이밖에도 高麗말기의 것으로

19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浮石寺의 祖師堂, 德山 修德寺의 本堂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한편 忠州 淨土寺의 實相塔을 비롯하여 開豊 敬天寺 十層塔, 開 豊 玄化寺 七層塔, 五臺山 月精寺 九層塔 등의 그 양식이 판이한 여러 유물들이 남아 있고, 또 佛像에 있어서도 光宗때에 만들어진 65尺의 거대한 論山 灌燭寺의 彌勒佛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남 아있다. 이와 같은 유물 중에는 榮州 浮石寺의 阿彌陀塑像과 같은 걸작도 없지 않으나 佛像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高麗의 佛敎 美術 이 新羅나 百濟의 그것에 비하면 그 수법이나 창조력에 있어 뚜렷 이 뒤지고 있는 것은 禪宗의 성행에 따르는 造型美術에 대한 정열 의 減退가 아닌가 추측된다. 貴族趣味를 대표하는 미술품에는 燭臺 文房具 茶具 鏡鑑 같 은 공예품이 있으나 가장 그 취미를 韓國的인 정서로 표현한 것으 로 高麗靑磁를 손꼽아야 하겠다. 즉 景德鎭을 비롯하여 고도로 발달한 宋의 陶磁기술에 영향받았 던 것이나, 그 器形과 彩色 및 文樣에 있어서는 우리의 체질에서 우러난 섬세한 美的 감각으로 표현하여 창작적인 가치를 발휘한 이 高麗靑磁를 통하여 우리는 高麗時代의 미술의 극치를 찾아볼 수 있 다. 貴族趣味뿐 아니라 佛敎美術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발달 한 高麗의 繪畫에는 隱逸圖 遊宴契會圖 四君子圖 등이 알려지고 있으나 현존하는 것으로서 國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恭愍王의 天山大獵圖의 斷幅, 浮石寺 祖師堂의 四天王 및 菩薩의 壁畫, 榮州 紹修書院의 安珦像再模本과 倭寇들이 훔쳐가 日本의 각 寺刹에 흩 어져 있는 몇점을 통하여 겨우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專 門畫家 외에 鄭叙 李仁老 安置民을 비롯한 文人 名士들의 蘭竹 松石 등 趣味畫의 유행이 차차 퍼진 것도 貴族文化의 한단면을 보

20 槪 要 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書에 있어서는 高麗初에는 歐陽詢體를 말하는 率更體가 성 행하였던 것이나 肅宗代부터는 그 반동으로 金生으로의 復歸가 되 어 다시 王羲之가 개척한 晋體를 따르게 되었던 것이며, 洪灌 釋 坦然 같은 大家의 출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釋 機俊의 斷俗寺 大鑑國師碑, 崔詵의 龍壽開創碑 芬皇寺 和諍國師碑, 柳公權의 瑞 鳳寺 玄悟國師碑, 金孝印의 寶鏡寺 圓眞國師碑, 金恂의 桐華寺 弘 眞國師碑, 金元發의 法住寺 慈淨國尊碑, 韓脩의 神勒寺 普濟禪師 碑, 權鑄의 神勒寺 大藏閣記 등이 그 著例이다. 麗末에는 이 밖에 元代의 대표적 書家 趙孟頫의 영향을 받아 그 書法인 蜀體도 들어와 李齊賢이 능하였고, 李嵒의 文殊寺 藏經碑 (1327)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작품인 것이다. 高麗時代의 音樂은 太祖에서 毅宗까지를 前期로 그리고 明宗에 서 恭讓王까지를 後期로 구분하며 설명할 수 있다. 高麗前期는 鄕 樂 또는 俗樂으로 불려지는 본토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新 羅를 통하여 소화된 舊儀 또는 渤海遣民의 來投로 전하여진 唐樂 도 있었다. 그러나 宋에서 大樂修正運動이 있어 大晟樂이 성립되 자 新樂을 받아들여 朝廷과 廟社에서 시 행하여 이에 高麗에 있어 서 雅樂이 정비되었다. 따라서 高麗의 후기에 속하는 시기에는 俗樂 唐樂 雅樂이 竝 行되고 있었으나 安國伎 高昌伎 天竺伎 등 中央亞細亞 및 印度 의 伎樂雜戲가 毅宗時부터 法駕衛杖에 隨行하게 된 것은 音樂史 연구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하겠다. 특히 高麗末에 들어온 蒙古 音樂兀良哈樂 등의 이름으로 高麗音樂에 흡수되었으며 囉叺太 樂과 蒙古를 통하여 들어온 喇嘛樂 回回樂은 史書에 胡樂 蒙古 平簫의 도입도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21 高麗貴族社會의 文化 한편 民俗의 변천은 대부분이 古代의 것이 原形 또는 佛敎 道 敎에 영향을 받아 다소 변형된 것이 계승되었던 것이다. 高麗時代 에 특히 눈에 띠는 것은 馬上에서 공을 치며 목표물에 넣어 그 실 력을 겨루는 남성적인 경기와 處容舞와 儺禮같은 놀이가 성행한 사실이다. 處容舞로서 疫鬼를 물리치는 儀式的 行事는 점차 娛樂的 遊戲로 그 성격이 바뀌어졌던 것이나 애초부터 宗敎的 約束을 버리고 純 誤樂的으로 分化發展하여 민중의 劇的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 山臺 戲라는 것이며 儺禮라고도 불렀던 新假面戲인 것이다. 儺禮都監은 이 계통의 모든 遊戲를 맡아보는 기관을 가리킨 것이다. 牧隱 山臺新戲, 前所未見也 라고 하여 그것이 高麗末期에 새 集 에 로 일어난 民俗的 雜戲인 것이나 그 假面과 동작은 喇嘛敎에서의 跳神儀式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를 이끈다. 李龍範

22 Ⅰ. 佛敎의 發達 1. 大藏經의 雕板 2. 天台宗의 成立 3. 佛敎行事의 盛行 4. 寺院經濟의 發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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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 大藏經의 雕版 1. 大藏經의 雕版 (1) 高麗初雕藏經 1) 開寶版藏經의 傳來 經典이 韓國에 처음 전래되기는 불교의 전래와 같은 해일 것이 다. 그후 이어서 여러 차례에 걸쳐 佛經이 전래되었던 것이니, 三 國遺事나 三國史記에는 그러한 기사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즉 三國遺事 卷 3에 의하면 貞觀 17년 求法僧 慈藏律師가 三藏 4백여 함을 가지고 唐으로부터 新羅로 귀국하였었다. 바로 善德王 12년 (643)의 일이었던 것이다. 또 普耀가 吳越로부터 大藏經을 싣고 돌아 왔다. 이 밖에 天竺僧이 우리 나라에 傳法과 동시에 경전을 가지고 온 일도 있었던 것이다. 대개 우리 나라에는 그 전법 당초부터 직접 으로나 간접으로나 西域과의 교통이 빈번하여 530년경 에는 百濟의 謙益이 中印度 常伽那大律寺에 유학한 지 5 년만에 梵語로 된 阿昆 曇藏과 五部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것을 국내 28명의 승 들과 더불어 번역하되 律部 72권으로 하였다. 620년에는 新羅僧 安弘이 北天竺 烏筤國의 승려 毗摩羅眞諦와 農伽陀를 동반하여 돌 아와 旃擅香火星光妙女經을 譯述한 바가 있었다. 다시 高麗로 넘 어와서는 太祖 21년(938) 摩揭陀國의 室哩嚩日囉가 와서 羯摩壇 經을 전한 일이 있었다. 太祖 11년(928)에는 洪慶이 역시 大藏經 을 싣고 禮成江에 도착하였으므로 太祖는 이를 손수 맞이하고서 帝釋院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무릇 佛法을 일정한 규준 아래 集 成해 놓은 佛敎聖典을 大藏經이라 한다. 大藏經을 뜻하는 梵語 Tripitaka 는 3개의 광우리라는 말이다. 대장경은 經 律 論 등

25 Ⅰ. 佛敎의 發達 佛陀의 가르침이 광범하게 담겨져 있는 큰 그릇이라는 말이다. 중 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수많은 經典이 번역되었는데, 東晋의 道安( )이 漢代이래의 각종 경전의 총목록을 작성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목록이 작성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編次나 체제에 있어서 보다 짜임새 있는 것은 唐 開元 18년(730) 智昇이 총 5,048 권을 계통적으로 분류하되 480함으로 묶고 그 차례를 千字文에 따라 天函(No.1)으로부터 英函(No. 480) 까지 매겨놓은 開元釋敎錄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天函에서 奈 函(No.60)에 이르는 앞의 60함에는 大般若波羅蜜多經 600권이 수 록되었다. 이어서 唐 貞元 16년(800)에는 圓照가 다시 앞서 開元釋 敎目錄 가운데서 수록되지 않았던 259권의 불전을 추가한 貞元釋敎 目錄을 또 만들어 開元釋敎錄을 보충하였던 것이다. 중국에서 大藏 經이 본격적으로 인쇄 간행된 것은 宋대에 와서의 일이다. 宋朝 불교 문화의 정화로서 또한 漢譯大藏經의 모체로서 후세 높 이 받들어져 있는 開寶版大藏經 일명 蜀版藏經은 이 開元釋敎錄에 수록된 5048 권 480함의 佛典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雕造한 대 장경으로서 宋 太祖 開寶 4년(971)에 착수하여 다음 宋 太宗 太平 興國 8년(983)에 그 완성을 보게 될 때까지 전후 12년을 소비했 던 것이다. 그후 宋 眞宗 咸平年間( )에는 貞元釋敎錄에 수록된 경전이 宋朝 때 새로 漢譯된 경전과 더불어 雕造되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한 후 그 양으로나 질로나 처음으로 획 기적인 經典의 전래는 高麗 成宗 10년(991)에 韓彥恭이 宋으로 부터 귀국하여 올 때 함께 가지고 온 開寶版大藏經이다. 顯宗 13 년(1022)에는 또 韓祚가 宋으로부터 533권의 佛典을 가지고 왔으 니, 이것은 開寶版藏經을 보완한 것이다

26 1. 大藏經의 雕版 2) 玄化寺 建立과 그 莊嚴 顯宗 13년(1022)이라 하면, 즉위 당초서부터 있어 왔던 契丹의 침 입이 일단 가시게 되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언제 또 再侵이 있을는지 예기치 못할 때였다. 또 不義의 씨를 낳았다는 죄 명으로 일찌기 세상을 떠나야 하였었던 자기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顯宗이 국력을 기울여 玄化寺라는 국가적 대사원을 세운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바로 이 玄化寺가 창건된 반년 후 제 3차로 침입해온 契丹軍은 姜邯瓚에 의해 패배당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和約이 맺어지기도 했었다. 王位繼承쟁탈의 무대에서 어려서부터 희생되다시피 고배를 마시기만 했어야 했던, 그리고 뿐만 아니라 즉위 후에도 끊임없는 契丹軍의 침입으로 계속 시달려야 했던 孤 兒 顯宗에 있어서 玄化寺의 건립과 契丹軍의 격퇴 그리고 先考와 先妣에 대한 명복은 서로 떼어 놓을 수가 없는 하나의 이념이었던 것이다. 顯宗은 다시 나아가서 20여년 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바가 있어온 開寶版大藏經을 그 모체로 하여 우리도 大蔵經을 간행함으로 써 대외적으로 文化尺度를 자랑하는 한편 그 대장경이 하나하나 이 루어져 가는대로 玄化寺에 봉안하여 玄化寺를 더욱 장엄하게 하려고 했다. 玄化寺가 창건되자 곧 이어서 그곳에 般若經寶를 두고 大般若 經 華嚴經 金光明經 法華經 등을 차례차례 만들어 갔다. 말하자 면 대장경 간행회를 두었던 것이니, 그 간행회의 이름을 般若, 經寶 라 한 그 까닭은 바로 開元釋敎錄의 첫번째 보이는 경전이 바로 大 般若經이었으므로 이것으로 전체의 명칭을 대표한 것이라 하겠다. 실로 玄化寺 낙성과 대장경 봉안은 佛力에 의해서 대외적으로는 외 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과 또 자주적인 문화국으로

27 Ⅰ. 佛敎의 發達 서의 긍지를 표시하려는데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안으로 佛 의 위력에 그 뒷받침을 둔 정치체제와 왕권강화 확립의 성공을 뜻하 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高麗에서 처음 顯宗 10년(1019) 경부터 시작된 大藏經雕造는 꾸준히 계속되어 宣宗 4년(1087)에 가 서 그 끝을 맺었으니, 이를 가리켜 高麗初雕藏經이라 일컫는다. 총 6 천권에 이르는 이 高麗初雕藏經 즉 高麗舊藏經의 경판은 그후 大邱 의 符仁寺에 옮겨졌다가 마침내 高宗 19년(1232) 蒙古의 兵火로 高 麗續藏經과 함께 불에 타서 없어져 버렸다. (2) 高麗續藏經 1) 義天의 續蔵經刊行과 典籍整理 高麗續藏經은大覺國師 義天( )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는 經 律 論 등 三藏에 대한 註釋書나 硏究書 즉 다시말해서 章疏들만을 하나로 모아 간행한 것이니, 續藏經의 간행은 실로 불 교 문화권에 있어서 義天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던 것이다. 高麗初雕藏經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文宗 27년(1073)서 부터 義天은 宣宗 7년(1090)에 이르는 25년간에 걸쳐 국내는 물 론 宋 遼 등 멀리 외국에까지 최대한으로 章疏를 수집하는데 힘 을 기울였다. 經 律 論 三藏은 이미 정리되고 開板까지 되었으 나 章疏는 아직 하나로 묶어 정리되어 간행되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차 흩어져 없어질 우려도 없지를 않아 이를 널리 수집하 고 간행하여 후세에 오래 남기고자 한 것이 義天의 생각이었다. 그가 入宋求法한 목적의 하나도 바로 기실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 다. 宣宗 7년 그가 작성한 新編諸宗敎藏總錄은 일명 義天錄이라고 도 일컫는데, 이것은 바로 그가 수집한 章疏의 총목록이다. 3권으

28 1. 大藏經의 雕版 로 편찬된 이 목록에는 그 상권에 華嚴經 涅槃經 法華經 楞伽 經 維摩經 金光明經 般若經 등 여러 經에 대한 章疏 561종 2,586권이, 그리고 중권에는 梵網經 四分律 十誦律에 관한 戒律 의 章疏 142종 467권이, 그리고 또 하권에는 大乘起信論 釋摩訶 衍論 成唯識論 瑜伽師地論 因明論 등 論에 대한 章疏 307종 1,687권이 수록되어 있다. 이 新編諸宗敎藏總錄 가운데 수록된 총 1,010종 4,740권의 書目은 자연 거의 다 宋僧을 중심으로 한 중국 의 저술 142종 4백여권과 또 鮮演覺苑非濁法悟志延 등 12 승의 찬술이지만, 元曉 太賢 義湘 義寂 憬興 法位 등 신라승 명의 契丹僧의 저술 39종 190권이 아울러 들어 있는 것이다. 이같 은 일은 이 義天의 목록을 더욱 빛나게 하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 다. 오늘날 義天의 목록이 귀중한 것으로 되어 있는 그 까닭은 편 파성이 추호도 없이 널리 고르게 章疏가 수집되어 정확하게 수록 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만 해도 아직 남아 전해오던 新羅 僧이나 契丹僧의 주석서를 그 서목이나마 이에 의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義天은 이어서 興王寺에 敎藏都監을 두고 이 목록에 담 아놓은 章疏를 하나하나 간행하였다. 續藏經이 간행된 후 이것이 국내 방방곡곡에 보급되었음은 물론이고 멀리 宋과 遼 및 日本에 까지 전하여져 실로 동양문화사상의 정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모든 典籍이 우리 나라에는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하여 오지 않 았음은 義天 당시로부터 약 130년 후인 高宗 19년(1232) 몽고군 의 침략으로 江華島로 遷都할 때 兵火에 興王寺가 불타고 4천 권 이 넘는 板木도 아울러 전부 잿더미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부가 朝鮮時代 世祖 전반기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어 이것을 모체로 하 여 중수 간행한 일이 있었으므로 이것에 의해서 그 편모나마 엿보 게 됨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順天 松廣寺에 소장

29 Ⅰ. 佛敎의 發達 되고 있는 唐僧 法寶의 찬술인 大般涅槃經疏와 또 唐僧 慧淨이 찬 술한 妙法蓮華經纘述 그리고 契丹僧 思孝의 撰述인 妙法蓮華經觀 世音菩薩普門品三玄圆賛科文은 다같이 그 간행장소가 興王寺로 되 어 있고 또 그 간행년도도 大安이라든가 또는 壽昌이라든가 당시 사용되던 契丹의 연호로 되어 있어서 그 체제가 얼핏 보아서 義天 당시의 續藏經 원본 그것인 듯하지만, 자세히 조사하게 되면 원본 을 가지고 중간한 것임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原刊記는 없 으나 世祖 때 刊經都監에서 간행된 다음 章疏 등은 모두 다 義天 의 續藏經을 모체로 하여 중간한 것이다. 瑜伽師地論疏 35권 (唐 智周 찬술) 華嚴論 10권 (唐 李通玄 술) 起信論疏筆削記 3권 (宋 子濬 술) 四分律鈔詳集記 6권 (契丹僧 澄淵 술) 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義釋演密鈔 7권 (契丹 覺苑 찬술) 이와 같이 續藏經 원본을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日本 東大寺 에 소장되어 오는 唐 華嚴僧 澄觀의 華嚴經隨疏演義鈔 40권은 宣 宗 11년(1094)에 간행된 그 원본 그대로이니 內外 무쌍의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같은 日本의 名古屋 眞福寺에 소장되어 오는 契丹僧 志福의 釋摩訶衍論通玄鈔 4권은 그것이 義天에 의해 간행 된 肅宗 4년 그 6년 후인, 肅宗 10년(1105) 에 日本으로 전해진 것이다. 대개 義天이 天台宗을 연 것은 사상적 통일을 꾀하고 국가적 안 녕을 보전하려는 데 있었지만 章疏를 수집한 것은 학술 전반에 걸 쳐서 문화적인 가치를 나타내고자 함에서였다. 불교는 동양문화를 구성하는 골격이니 그 聖典인 章疏가 없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그가 수집하여 분류하여 놓은 章疏를 그의 목록

30 1. 大藏經의 雕版 에 의해서 다시 자상하게 보이면 다음과 같다. 目錄 上 華嚴經疏 177부 1,247권 涅槃經疏 30부 107권 大日經疏 4부 28권 法華經疏 61부 236권 楞伽經疏 11부 46권 圓覺經疏 18부 94권 維摩經疏 19부 141권 金光明經疏 25부 84권 仁王經疏 12부 48권 般若經疏 56부 116권 觀無量壽經疏 15부 20권 阿彌陀經疏 19부 23권 彌勒上生經疏 9부 22권 彌勒下生經疏 5부 6권 藥師經疏 7부 11권 四十二章疏 4부 5권 盂蘭盆經疏 15부 20권 其 74부 332권 561부 2,586권 梵網經疏 25부 49권 瓔珞經疏 1부 3권 遺敎經疏 9부 12권 地持經疏 1부 10권 계 他 目錄 中

31 Ⅰ. 佛敎의 發達 四分律疏 58부 306권 十誦律疏 48부 87권 142부 467권 大乘起信論疏 34부 87권 釋摩訶衍論疏 6부 28권 成唯識論疏 29부 266권 百法論疏 14부 69권 因明論疏 27부 98권 2부 2권 19부 230권 攝大乘論疏 9부 55권 中邊論疏 3부 5권 中觀論疏 5부 16권 大昆婆娑論疏 8부 40권 19부 92권 肇論疏 9부 23권 摩訶止觀疏 6부 39권 四敎儀 6부 10권 111부 627권 307부 1,687권 계 目錄 下 正理門論疏 瑜伽論疏 俱舍論疏 其 계 他 이와 같은 大部數의 서적은 國師의 절대적인 노력으로 25년이 라는 장구한 세월을 두고 찾아 모은 것이니, 중국인의 찬술이 많이 있으나, 앞서 말한대로 至寶的인 것은 新羅人의 저서가 있다는 사 실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거의 오늘날 전하지 아니하여 서명만 볼 수 있으나 이것만 하여도 학계에 남긴 義天의 공은 여간 큰 것

32 1. 大藏經의 雕版 이 아니라 하겠다. 그의 목록인 新編諸宗敎藏總錄 가운데서 新羅 또는 高麗 때의 찬술을 다시 자상히 보이면 대개 다음과 같다. 元 曉 44부 76권 (華嚴經疏 등) 義 湘 4부 4권 (華嚴經法界圖 등) 大 賢 41부 84권 (梵網經古迹記 등) 憬 興 11부 85권 (無量壽經連義述文贊 등) 圓 測 6부 35권 (解深蜜經疏 등) 緣 起 4부 44권 (大華嚴經開定決疑 등) 義 寂 8부 10권 (法華經論記 등) 遁 倫 8부 43권 (瑜伽論記 등) 慈 藏 2부 2권 (四分律羯磨私記 등) 勝 莊 1부 3권 (梵網經述記 등) 可 歸 1부 1권 (大華嚴經義綱) 順 璟 1부 1권 (法華經料簡) 圓 勝 3부 4권 (四分律木叉記 등) 端 目 1부 2권 (梵網經記) 智 通 1부 2권 (華嚴經要義問答) 明 皛 1부 1권 (海印三昧論) 義 融 1부 1권 (華嚴經釋名章) 崔致遠 2부 2권 (賢首傳 등) 諦 觀 1부 1권 (四敎儀) 道 身 1부 1권 (大華嚴經一乘問答) 이상과 같이 저자 20명 142부 402권 나머지의 방대한 新羅人 들의 찬술을 모았는데, 高麗 초기에 있어서도 여러 책이 있었을 것 이지만 적지않게 누락되었을 것이 짐작된다. 예컨대 歸法寺의 均 如法師 같은 이는 巨匠으로서 그에게는 五十要問答記 4권과 探玄

33 Ⅰ. 佛敎의 發達 記釋 28권 및 釋敎分記圓通釋 7권 등을 비롯한 총 11部 67권의 저서가 있었지만, 단 1권도 義天은 그의 목록에 이것을 수록하지 를 아니하였다. 아마 후세에까지 남기어 둘 만한 가치있는 것이 못 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華嚴과 禪과의 일치를 부르짖 은 義天은 均如의 華嚴哲學에 대하여 별로 매력을 가지고 있지를 아니하였던 것 같다. 대장경의 편찬과 그 간행은 佛敎文化圈에 있어서 최대의 사업으 로서 佛敎文化의 高低를 비판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고, 그 내용과 형식은 민족의 모든 정신을 기울여 바친 것이라 하여도 과 언은 아닐 것이다. 義天이 그의 목록 가운데서 그 序文에 말한 바 와 같이 三藏은 그것이 갖추어 졌으나 이에 반하여 章疏는 아직 수 집 간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들이 散秩될 우려가 많기 때문에 이에 분발하여 古今 疏鈔를 수집하고 편성하여 正藏에 계속하여 간행하고 영구히 남기어 놓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興王 寺에 敎藏都監이라는 관서를 설치하고 義天이 수집한 4천 여권의 章疏를 義天 감독아래 간행한 것이 바로 高麗續藏經이다. 그런데 義天이 이 續藏經을 만들기 시작한 때와 또 그것을 종결한 때는 정 확히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간행의 진첩 과정도 자상히 알 수는 없다. 다시 敎藏都監의 조직 또는 그 규모에 대해서도 이를 밝히기 매우 어려움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약간의 原刊本 과 중수 또는 복각본 등이 얼마간 남아오고 있으므로 여기에 의해 서 雕板은 遼의 大安과 壽昌년간( )에 이루어진 것을 대체로 알 수 있음이 학자간의 공통된 견해이다. 즉 新編諸宗敎 藏總錄이 만들어진 宣宗 7년(1090)은 遼의 大安 6년이 되고, 현 존한 것으로 판명된 續藏 刊記의 제일 오랜 것은 法藏和尙傳의 大 安 八年임으로 대체로 大安 7년 즉 宣宗 8년부터는 續藏經 刊行

34 1. 大藏經의 雕版 에 착수하였으리라고 짐작이 가는 것이다. 이때가 義天의 나이 37 세 때였으니 肅宗 6년(1101)에 47세로 별세할 때까지 약 10년간 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것이 된다. 아마 죽음과 더불어 續藏經雕造 도 완결은 하지 못했으리라 보아진다. 한정된 現存의 刊記에 의할 것 같으면 法藏和尙傳의 大安 八年(1092)으로부터 大般涅槃經의 壽昌 五年(1099)까지 8년간 볼 수 있으나 대체로 大安 7년부터 그후 10년간 계속하여 거의 다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다 전하여 오지를 않고 현재 전하여 오는 것은 겨우 다음 10여부의 殘卷뿐이다. 唐大薦寺故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 崔致遠 1권 大安八年壬申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大乘阿毗達磨雜集論疏 玄範 16권 重修本 大安九年癸酉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澄觀 40권 大安十年甲戌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金剛般若經略疏 智儼 1권 大安十年甲戌歲 大興王寺奉宣雕造 講華嚴經興王寺大師賜紫臣 德詵校勘 貞元新釋華嚴經疏 澄觀 10권 壽昌元年乙亥歳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妙法蓮華經纘述 慧淨 10권 壽昌元年乙亥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大方廣佛華嚴經談玄決擇 鮮演 6권 高麗國大興王寺 壽昌 2年丙子歲奉宣雕造 地持論義記 慧遠 10권 壽昌三年丁丑歳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35 Ⅰ. 佛敎의 發達 金剛般若經疏開玄鈔 公哲 6권 壽昌四年戊寅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將士郞尚衣直長同正臣 王鼎書 大般涅槃經疏 法寶 15권 海東沙門 義天 校勘 壽昌五年己卯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將士郞司宰同正臣 蔡髦書 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圆賛科文 思孝 1권 壽昌五年己卯歳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釋摩訶衍論賛玄疏 法悟 5권 日本 高野山重修版 卷 5 壽昌五年己卯歲 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續藏經은 義天 자신에 의해서 興王寺에서 雕造된 것 외에 金山 寺에서 慧德王師 韶顯이 章疏를 開板한 일이 있었다. 주로 唯識관 계가 개판되었는데, 이것은 義天의 興王寺에서의 장경 간행을 도운 것이라 하겠다. 金山寺에 있는 慧德王師塔碑에보면, 韶顯은 金山寺 남쪽에 한 院宇를 세워 廣敎院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經板을 雕造 하되 慈恩窺基의 찬술인 法華玄賛 唯識述記 등 32부 353권의 章 疏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韶顯은 그 후 開京 가까이 玄化寺로 옮겼 는데 여기에서도 계속 金山寺 廣敎院을 중심으로 章疏를 開板하였 던 것임은 宣宗 6년(1809)에 간행한 阿彌陀經通賛疏에 의해서 도 알 수 있다. 義天의 목록 가운데 위의 唯識관계 찬술이 있는 것으 로 미루어 韶顯이 특히 唯識관계를 맡아 開板했을 것임은 거의 확 실한 것이다. 續藏經은 대개 秘書省의 南宮禮 魯榮 등과 寫經院의 柳候樹 王鼎 蔣髦 李彪 등이 필서했으며, 校勘은 義天을 위시하여 興王

36 1. 大藏經의 雕版 의 滋顯融觀 등이 맡았었다. 寺의 則瑜 德詵 尙源 등과 玄化寺의 會凡 覺樞 그리고 佛日寺 이 원간본을 모체로 하여 중수된 것이 많다. 原刊記가 없어 原本 의 雕造年代는 이를 알 수가 없지만 분명히 續藏經이 그 모체가 됨 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어온다. 이들 은 대개 朝鮮시대 世祖 때 刊經都監에서 再修 개판된 것들이다. 大般涅槃經義記圓旨鈔 空 14권 金光明經文句 智顗 圓覺經大疏釋義鈔 宗密 13권 圓覺經大疏鈔科 宗密 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演密鈔 覺苑 10권 四分律冊繁補闕行事鈔詳集記 澄淵 14권 起信論疏筆削記 子璿 6권 因明入正理論疏鈔 雲儼 8권 華嚴經行願品疏 澄觀 10권 華嚴旨歸 法藏 華嚴經行願品疏 澄觀 10권 瑜師地論義演 淸素 40권 2권 3권 1권 續藏經이 간행됨으로부터는 이것을 국내에 弘布 함은 물론 章疏 수집의 관계상 宋 遼 및 日本에도 기증하였을 것이 명백하다. 2) 契丹藏經의 전래 義天의 續藏經 간행에 있어서 契丹 불교의 영향은 매우 컸다. 高 麗와 契丹 양국간의 무역이 정치적인 제약으로 지극히 기형적인 형 태로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문화의 교류는 양국의 문 화사상에 독특하고도 찬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契丹에서도

37 Ⅰ. 佛敎의 發達 開寶版장경에 자극을 받아 興宗의 발원으로 시작된 契丹大藏經이 다음 道宗 때에는 완성됨에 따라 널리 유포되었다. 579函으로 이 룩된 이 契丹大藏經은 그 函號의 배열에 있어서 開元釋敎目錄에 의거한 開寶藏經과는 달리 石晋(後晋)의 可洪이 纂한 新集藏經 音 義隨函錄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宋의 불교와는 전혀 그 계통을 달 리하는 中國 北地의 불교에 기초를 두면서 정확하고 건실한 학풍 을 쌓아올린 契丹學僧들이 고심을 기울여 만들었던 이 契丹大蔵經 에는 고맙게도 중국에서는 일찍 散秩되어버린 釋摩訶衍論과 一切 經音義 등이 수록되어 있다. 一切經音義는 唐僧 慧琳이 엮은 것인 바 開元釋敎錄에 수록된 佛書를 총망라한 字典이다. 그리하여 이 契丹大藏經이 완성되어지자 곧 文宗 17년(1063)에는 이것이 高麗 에 전래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高麗에 전래되었던 契丹의 佛書 가운 데에는 契丹學僧들의 저서가 많았던 것이니, 非濁의 首楞嚴經玄賛科 와 希麟의 續一切經音義 그리고 일반 자전으로서도 널리 애용되던, 朝鮮 시대에도 간행되어 우리 나라 문화에 하나의 이채를 띠었던 行 均의 龍龕手鏡 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다. 이같은 契丹僧의 찬술 가운데서 義天은 39종 190권 이상을 골라서 續藏經의 일부로 간 행한 것이다. 이리하여 契丹僧 志福의 釋摩訶衍論通玄鈔가 직접 高麗로부터 日本으로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遼에 대한 서적 수출 을 엄금하고 있었던 宋에 契丹僧 鮮演의 저술인 華嚴經談玄決擇 이 高麗로부터 도입되어가기도 했다. 또 契丹大藏經 가운데 釋摩 訶衍論이 義天에 의해서 宋으로 역전되어가기도 했었으니 이같은 일 등은 당시 불교문화 내지 문헌의 교류사상에 있어서 차지하는 高麗의 위치를 알기에 남음이 있게 하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慧琳이 엮은 一切經音義의 속편으로서 契丹僧 希麟이 貞元釋敎目 錄에 의하여 엮은 績一切經音義 10권은 義天의 新編諸宗敎蔵總錄

38 1. 大藏經의 雕版 에 수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高宗 때 江華岛에서 있은 高麗 再雕藏經에도 입장되어 契丹佛敎가 남긴 찬란한 업적의 하나로 평 가를 받고 있는 터이다. 이리하여 본시 契丹人의 章疏는 量도 적을 뿐만 아니라. 그 보존도 극히 불완전하였으나 義天의 목록에 많이 수록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있어서 그의 명맥을 알게 됨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契丹學僧의 纂述로서는 대개 다음과 같 은 것이 소개되었던 것이다. 道宗 華嚴經隨品讚 10권 覺苑 毘盧神變經科 5권 同 大科 同 義釋演密鈔 志福 釋摩訶衍論通玄鈔 1권 10권 4권 同 通玄科 3권 同 大科 1권 守瑧 釋摩訶衍論通賛疏 10권 同 通賛科 3권 同 大科 1권 法悟 釋摩訶衍論賛玄疏 5권 同 賛玄科 3권 同 大科 1권 澄淵 四分律鈔詳集記 14권 同 科 1권 常眞 俱舍論頌䟽鈔 8권 非濁 首楞嚴經玄贊科 3권 隨願往生集 詮明 法華經會古通今鈔 20권 10권

39 Ⅰ. 佛敎의 發達 同 科 4권 同 大科 1권 金剛般若經宣演科 2권 同 演會古通今鈔 6권 同 消經鈔 2권 彌勒上生經古通今鈔 4권 唯識論詳鏡幽微新鈔 17권 同 應新鈔科文 4권 詮曉 續開元釋敎錄 3권 希麟 續一切經音義 10권 志延 般若心經科 四分律尼戒略釋科 1권 1권 이와 같이 12學僧에 의해서 이루어진 저서 39부 190권을 契丹 으로부터 얻는 한편 大藏經 全帙도 아울러 契丹으로부터 수입하였 다. 이제 契丹藏이 高麗로 들어오게 된 그 경위를 좀 더 살펴 볼 것이다. 契丹藏이 처음으로 高麗에 전하기는 文宗 때의 일이거니 와 高麗史 世家의 기록과 遼史 高麗傳의 기사간에는 약간의 차이 를 보이고 있음이 눈에 띈다. 즉 전자 高麗史 世家에는 文宗 17년 (1063) 3월 丙午기사 가운데 契丹이 大藏經을 보내 왔음으로 文 宗이 친히 의의를 갖추고 서쪽 교외에까지 행차하여 이를 맞이하 였다고 되어 있음으로 이에 따라 文宗 17년 3월에 수입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자 遼史 高麗傳이 전하는 바에 의한다면, 淸寧 8 년에 高麗로부터 사신이 왔으므로 이 편에 12월에 불경 한 질을 주었다고 한다. 契丹의 淸寧 8년은 바로 高麗 文宗 16년인 즉, 이 두 기록에 의하건대 연말에 받은 契丹大藏經이 그 이듬해 즉 文宗 17년 봄에 고려에 도착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40 1. 大藏經의 雕版 遼史의 道宗本紀에는 이같은 사실에 대한 명문을 궐하고 있다. 淸 寧 8년(1062)으로부터 9년후인 咸雍 8년 12월에 高麗에 불경을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 경우 이에 대응되는 기사는 같은 高麗傳 이나 또는 高麗史의 文宗世家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遼史의 本紀 와 高麗傳과의 기사는 서로 대응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咸雍 8년 12월의 일은 앞서 淸寧 8년의 일이어야 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 아 닐 수 없다. 宋에서 간행된 大藏經에 대하여 契丹藏經이 지니고 있 는 그 특수한 학술적 가치는 高麗의 守其 등이 편찬한 大藏校正別 錄에 의해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遼史에 관계 기사가 없다해 서 이를 가볍게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契丹藏經 가운데 가장 가 치 있는 것으로 주목되는 것은 道宗의 大康 3년 (1077) 燕京 圓福 寺의 僧 覺苑이 道宗의 명에 의해서 一行禪師의 大日經 義釋에 주 석을 달되 10권으로 만든 演密鈔와 中京 報恩寺僧 法悟가 또 道宗 의 勅命에 의해서 龍樹가 찬한 釋摩訶衍論을 해석한 5권으로 된 賛玄疏이다. 전자 大日經義釋疏 卷 1의 序에는 興宗때에 널리 經 典에 대한 章疏를 찾아모아 道宗 때에 이르러 이를 開板하게 이르 렀던 그 경위가 적혀져 있다. 한편, 후자에는 역시 序言 가운데에 道宗 때 釋摩訶衍論을 藏經 속에 입장시킨 그 유래가 적혀 있다. 이와같이 興宗 때( )서부터 道宗의 淸寧연간 ( )에 걸쳐서 널리 經典을 찾아 이를 얻게 됨에 따라 雕 造하여 유통시킨 사실은 이미 藏經의 개판이 이때 있어 온 것임 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聖宗 때( )에는 아직 이같은 계 획이 서있었다는 징조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게되면, 契丹에 있어서의 大藏經의 雕造는 興宗이 이를 시작하여 24년간이라는 그 재위시에 그 대부분이 완성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高麗 顯宗 때에 契丹大藏經이 고려에 수입되지를 아니한 것

41 Ⅰ. 佛敎의 發達 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淸寧 9년(1063)에 고려가 契丹 으로부터 얻었던 藏經은 바로 淸寧 8년에 간행되던 釋摩訶衍論을 위시한 大日經義釋 등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이 契丹藏의 총 수는 어떠하였을 것인가. 이를 알게 하여주는 것이 金石萃 編에 실 려있는 暘台山淸水院創造蔵經記에 보이는 기사다. 이는 燕京 天王 寺僧 志延이 찬한 것으로 咸雍 4년(1068)에 된 것이다. 이에 의하 면, 鄧從貴라는 신자가 咸雍 4년에 錢 30만을 희사하여 僧舍를 중 수하는 한편, 또 錢 50만을 추렴해서 대장경을 인출하니 모두 579 질이 되었다고 한다. 開元釋敎錄의 질수 480에 대해 99질이 더 많 은 셈이다. 遼末의 金石文인 涿州雲居寺續秘藏石經塔記 가운데 수 록된 경권의 천자문 번호가 開元釋敎錄에 있는 그것과 같지 아니하 고 五代 때의 石晋의 僧 可洪이 찬한 新集藏經音義隨函錄과 같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한 것으로, 이에 의해서 契丹藏經의 순서는 모두 가 다 可洪의 隨函錄에 의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위 의 開元錄과 隨函錄에 수록되지 아니한 경권으로서 石經塔記에 摩 訶衍論과 大乘本生心地觀經 및 理趣經이 각각 그 천자번호를 寧 壁 杜로 하고 있다. 즉 杜자는 천자문에서 그 순서가 481번이요, 壁자는 487번째이고 寧자는 568번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契丹藏經 은 寧자의 다음인 晋자에 걸치는 것인바 현재 전해오는 高麗版再雕 藏經보다 70질이 적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권 수로 본다면 약 6천권에 해당하게 된다. 燕京 圓福寺僧 覺苑이 道宗의 太康 3년(1077) 찬술한 大日經義 釋演密鈔 序에 보면, 興宗代에 大藏經雕造가 발원되어 覺苑 등 여러 학승을 집합시켜 校勘을 완수하여 전부를 다 雕板하였던 사실과 또 그 校勘 중에 찾아얻은 大日經義釋을 興宗의 다음인 道宗의 淸 寧 5년(1059)에 이르러 칙명으로써 인행 유통케 한 사실을 알 수

42 1. 大藏經의 雕版 있다. 乾統 8년(1108)에 耶律劭이 찬술한 興中府安德州刱建靈岩 寺碑銘에는 重和 22년에 大藏經 한질을 대중들이 구입하였다고 있 지만, 여기 重和연호가 重熙와 잘못인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가 있 지 않을까 한다. 契丹 성시에 中京道의 興中府 즉 오늘날의 朝陽 管內에 宋藏 또는 高麗藏이 수입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契丹藏이 重熙 22년(1054) 이전에 일달 完成되어 이 에 따라 그것이 구입되어 靈岩寺에 봉안되었다고 생각된다. 重熙 22년까지에는 契丹藏이 일단 그 雕板을 완료한 것으로 보아 무방 할 것이다. 한편 淸寧 9년 (1063) 眞延이 찬한 非濁禪師實行記에 의하면 淸寧연간초에 非濁이 찬술한 往生集을 道宗이 희찬하여 입 장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道宗이 非濁을 특히 대우한 것은 그가 興宗이래로 丹藏의 雕造에 참여하여 공이 많았던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丹藏은 일단 興宗 때에 왕성을 보고, 그후 새로이 찾 아얻은 것으로 아직 입장되지를 아니한 경전과 그밖에 契丹찬술의 章疏가 道宗때의 淸寧년간 초에 보충된 것이다. 그리하여 淸寧 9 년에는 이미 丹藏이 高麗에 보내지고 있으매 淸寧 8년 즉 高麗 文 宗 16년 경에는 道宗 때의 丹藏 보충도 또한 대체로 그 완성을 보 았을 것이라 보아진다. 覺苑과 非濁 외에 또 丹藏의 교장에 참렬한 승로서 法均을 지적 할 수 있겠다. 明河가 찬술한 補續高僧傳 卷 17에 실린 法均의 전기를 보건대, 그가 道宗 때의 교장에 참석한 것을 알 수 있다. 契丹藏의 완성에는 契丹經錄의 편찬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義天이 宋의 飛山戒珠의 飛山別傳義에 적어놓은 발문 가운데, 銓 曉 등이 칙명을 받들고서 經錄을 다시 책정하되 그것을 重修貞元 續錄이라 불렀던 사실이 적혀있다. 義天의 목록 권 3에 續開元釋 敎錄 3권이 실려있는 그것이 바로 詮曉의 것이어서 그도 또한 丹

43 Ⅰ. 佛敎의 發達 藏의 교장에 참열했던 것이다. 丹藏의 교장에 참열하였다는 그 명 문은 없어도 필시 이에 관여했을 것으로 분명히 여겨지는 승으로 서 思孝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覺華島의 海雲寺에 머무르 며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었는데, 興宗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그 후 重熙 17년(1049)에 그 섬을 떠나 縉雲山에서 살았다. 도시, 契丹藏이 어떠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것인지를 알 수 없음 은 불행하게도 그 단편조차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간접적으로 여러 자료를 가지고 추측할 도리 밖에 없다. 우선, 丹藏의 질수에 대하여는 앞서 말한 바있는 燕京 天王寺 의 志延이 찬한 淸水院藏經記는 여기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좋은 자 료인즉, 丹藏이 579질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하여준다. 또 重熙 淸寧년간에 세워져, 그곳에 丹藏을 안치하였던 西京 大同府 大華嚴寺의 薄伽敎藏은 遼代 말기에 金군의 병화로 大華嚴寺가 대 부분 불타 없어졌을 때에도 재화를 모면하였던 것인데, 그 大華嚴 寺를 金代에 와서 중수한 省學이 金世宗 大定 2년(1162)에 세운 重修薄伽藏經記에도 丹藏이 579질로 되어 있다는 글을 묵과할 수 는 없다. 이같은 579질 가운데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開元釋敎錄에 소수된 480질이 담아졌을 것임은 두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밖에 聖宗 統和 5년(987)에 希麟이 續開元釋敎錄에 들어 있는 25질의 佛典의 音義를 풀이한 續一切經音義를 저술한 것으로 보아도 續開元釋敎錄에 담겨진 25 질도 또한 入藏되고 있었을 것임은 틀림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 음 編次의 문제로서는 천자문의 그 순서 번호가 골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天慶 8년(1118) 志才가 찬술한 琢州雲居寺石經塔記에는 通利大師가 石刻한 石經 전부에 대해서 그 경명과 권수 및 질호가 명기되어 있거니와 그 질호와 경명이 그대로 開元錄에 있는 것과

44 1. 大藏經의 雕版 서로 맞지를 않고 달리 石晋의 隨函錄의 것과 부합하고 있음은 주 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대개 通利大師가 石經을 刻造할 적에 이미 완성된 丹藏을 그 저본으로 하였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을 것 이니, 丹藏의 편질도 또한 隨函錄의 질호에 따랐을 것이다. 더우 기 理趣經(杜, No.481), 心地觀經(壁, No.487), 摩訶衍論(寧, No.568) 등 3개의 불전은 다같이 續秘藏石經記에는 보이나, 隨函 錄과 開元釋敎錄에는 아니 보인다. 續開元釋敎錄에 의하여 開元釋 敎錄에 수록되지 아니한 佛典의 音義를 풀이 한 續一切經音義를 본다면, 그 제 1권에 理趣經을, 제 4권에 心地觀經을, 그리고 摩訶 衍論은 다른 권에 각각 수록되어 있거니와 杜자와 壁자는 각기 천 자문 번호의 No.481과 No.487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開元釋敎錄 소수의 480질 다음에 곧이어 續開元釋敎錄 소수의 25帙의 불전이 수록되었다는 것이 된다. 끝으로 제 506질에 해당하는 冠자로부 터 제579질의 假자이 이르는 74질 가운데 어떤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제 568질의 寧자에 釋摩訶衍論이 수록되었던 것이 알 려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契丹藏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완성을 보았던 고려 初雕藏 經이 宋藏 즉 蜀板의 단순한 복각에 불과했음에 비해서 契丹藏이 거기에 수록한 불전의 내용과 편질의 형식에 있어서 宋藏이나 高 麗藏과는 매우 달리 하고 있었다는 일은 불교불헌학 내지 대장경 조조사상에 있어 일대 이채라 할 것이다. 이는 북지에 전래된 계통 이 다른 불교를 전승하였다는 사실과 朔北의 고유한 강건한 기상 이 신흥의 契丹의 투지와 합쳐져 견실한 학풍을 이루었었다는 사 실 그리고 漢族의 문화에 대항하여 契丹 특유한 佛敎文化를 세우 려는 열의가 契丹의 지도층에 가득 충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義天의 續藏經 간행정신과 高麗藏經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45 Ⅰ. 佛敎의 發達 는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은 契丹의 學僧들의 내력과 그 교학의 경향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聖宗의 統和 5년(987) 希麟에 의해 이룩된 續一切經音義와 統和 15년 行均에 의해 편술된 龍龕手鏡 과는 서로 아무런 연락이 없이 따로이 된 것같이 보인다. 사실 續 一切經音義는 燕京서 편찬되었으며 한편 龍龕手鏡이 統和 10년에 착수하여 5년후에 완성할 때까지 시종 西京道 蔚州의 五臺山 金 河寺에서 편찬되어 서로 저작의 장소를 달리하고 또 연구의 중심 이 된 총람이 달랐던 것이다. 興宗대에 들어서 思考 非濁 詮明 覺苑등의 學匠이 배출했다. 이 가운데 思考는 金의 王寂이 찬한 遼東行部志에 그의 전기가 자상하거니와 博學이며 저술도 많았다. 각 宗에 대한 학식이 많았고 律에도 매우 깊은 바가 있었다. 義天 錄에는 華嚴 涅槃 八大菩薩曼陀羅 등 여러 경에 주석을 붙인 思 孝의 書目이 들어있다. 非濁은 淸寧 9년(1063) 眞延이 찬한 非濁 禪師實行記에 그의 전기가 자상하다. 그에게 隨願往生集 20권의 찬술이 있었음은 그가 往生淨土思想에 전심하고 있었던 것을 말 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詮明에 대해서는 義天錄에 11부가 실려 있지만 法相宗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그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兜率往生을 희구하고 있었다. 覺苑은 興宗의 교장에 참열한 학승 이었다. 그의 大 日經義釋演密鈔는 太康 3년(1077) 道宗의 명에 의 해서 찬술하였던 것이다. 覺苑이 이를 저술함에 있어서는 華嚴宗 澄觀의 설에 의해서 해석하였다. 天台의 사상에 친근한 바가 있었 던 一行의 해석을 華嚴宗의 설에 의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상한 일이라 하겠으나 그만큼 華嚴 天台 密敎와의 상호 불가 분한 관점에 섰던 契丹敎學의 일단을 보게 된다. 道宗이 스스로 華嚴과 密敎를 깊이 신봉하고 있었음은 大乘起信論을 密敎的 바 탕에서 논설한 釋摩訶衍論에 대해 관심을 필연적으로 갖게 했다

46 1. 大藏經의 雕版 그래서 淸寧 8년(1062)에는 이 釋摩訶衍論의 입장을 보았다. 道宗 은 나아가서 당시 저명한 학승들에게 이 論에 대한 주석을 시켰으 니, 志福과 法悟 및 守臻이 각각 通玄鈔 賛玄䟽 通賛䟽를 찬하였 던 것이다. 옛부터 釋摩訶衍論은 그 眞爲의 논이 분분하여 中國본 토에서조차 그 장소도 불과 聖法과 法敏의 둘만의 것이 있어오는데 契丹에서 이처럼 이 論에 대한 주소의 3부작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契丹佛敎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생각 되어야 할 것은 戒律에 대한 존신이다. 思考와 非濁이 다같이 興宗 대의 戒師였지만 이 밖에도 志智 法均 澄淵 志延 등의 戒師가 있었으니, 그가운데 澄淵은 四分律删繁補闕行事鈔評集記를 찬술했 다. 이는 道宣의 찬술인 四分律冊繁補闕行事鈔에 대한 주석이다. 志延에는 四分律尼戒略釋科가 있었다. 이 같은 찬술의 경향에 의 해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계률에 대한 契丹학습의 태도 및 契 丹사회의 상하를 통털어 계률이 받들어졌다는 사실이다. 契丹의 불교사상이 다만 大乘佛敎의 철리를 운운하는데 치우치지를 아니 하고 계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契丹불 도들의 禪에 대한 태도도 독특한 바가 있었다. 覺苑은 그의 大日 經義釋演密鈔 벽두의 서 가운데서 一行禪師에 대해 말하되 선에는 南宗과 北宗이 있는즉 一行은 北宗의 禪僧이었으며, 南宗을 北宗 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北宗의 계승자 普寂 은 長安과 洛陽에서 그 禪風을 떨치었다고 하였다. 특히 道宗이 詮曉로 하여금 續開元釋敎錄 3권을 편찬시킴에 있어서 南宗 慧能 의 것인 六祖壇經이나 또는 智炬의 寶林傳의 僞妄을 논파해서 이 를 태워버리기까지 하였던 일은 江南 禪宗에 대한 契丹佛敎의 태도 를 가장 날카롭게 보인 것이라 하겠다. 禪에 대한 자기의 견지에 서 스스로 道宗의 처사에 공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 義天은 宋

47 Ⅰ. 佛敎의 發達 僧 戒珠의 飛山別傳義 발문 가운데서 道宗의 분서에 대해 언급하 였었는데 이에 의하면 南宗禪의 정통파에 의해서 받들어진 六祖壇 經과 寶林傳을 태워서까지해서 날카로와진 道宗의 이론투쟁이 宗 密의 荷澤禪을 긍정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宗密의 禪은 이미 洛 陽에 그 교세를 뻗치어 만만한 투지로써 北宗禪과 맞선 慧能의 제 자 荷澤神會의 선풍을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契丹의 교학 이 宗密과 친근했던 것과 그 귀추를 같이 하는 것이다. 宗密이 華 嚴과 禪과의 합일을 주장한 점과 契丹불교의 한 흐름과는 서로 공 통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南宗禪이라 할지라도 荷澤神會의 흐름을 이어받은 宗密이 禪家의 28祖說에 대하여 정통파와 그 견 해를 달리하여 寶林傳의 소전을 채택아니한 점을 본다면, 寶林傳 을 태우면서도 禪源諸詮集都序를 인쇄 반포한 道宗의 이론투쟁이 뚜렷한 윤곽을 나타낸다. 大覺國師外集 권 8에 실려있는 大遼御史中丞耶律思齊書三首를 보면 耶律思齊가 鮮演의 장소를 義天에게 보낸 사실을 알 수 있다. 義天은 宋과 遼에 高麗의 전적을 보내어 이에 보답했던 것이다. 여 기에 국제적인 文化戰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文集 권 8 에도 上大遼皇帝曉公章疏表가 있으니 이것 역시 元曉의 저술을 義 天이 遼 道宗에게 보낸 것을 알려준다. (3) 高麗再雕藏經 1) 初雕藏經의 焚失 高宗 19년(1232)에 初雕藏經과 續藏經의 판목이 蒙古軍의 침입 으로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게되자 그 4년후인 高宗 24년(1237) 大藏都監과 分司大藏都監을 각각 江華와 晋州에 두고서 大藏經을

48 1. 大藏經의 雕版 다시 雕造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에 李奎報가 지은 大藏刻板君 臣祈告文에도 밝혀져 있듯이 大藏經의 再雕는 佛力에 의해서 침략 군을 격퇴하려는 高麗人의 절실한 염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 하여 무자비한 蒙古 침략군에 국토가 유린된 민족적 수난을 극복 하고 평화의 비원을 오직 佛에의 믿음에 걸어 온갖 정성을 쏟아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高宗 38년(1251)에 그 완성을 보게 되자 江華府 西門 밖에 대장경 판당을 지어 그곳에 경판을 봉안하였다. 지금 海印寺에 있는 高麗大藏經은 바로 이 再雕藏經 인 것이다. 이 경판이 언제 江華로부터 海印寺로 옮겨졌는지는 자 상치 않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가 있는 것은 朝鮮時代 초 기의 太祖 7년(1398) 江華에서 서울의 支天寺로 옮겨졌으며, 또 定宗 1년(1399)에는 高麗再雕藏經이 그곳 海印寺에서 인경되었다 는 사실이다. 正藏 즉 高麗初雕藏經과 또 續藏이 계속되어 이루어진 그 후 高 宗 때에 이르기까지 약 130년간 高麗의 대장경에 대해서는 그 道 場이 궁중에서 열리었다는 기사가 高麗史 睿宗 仁宗 毅宗 明宗 등의 世家에 이따금 보이는 것 외에는 별로 관계되는 것이 없다. 藏經道場은 義天의 圓宗文類에도 있듯이 매년 春秋에 각각 한 번씩 궁중의 會慶殿에서 法師 1백명을 초빙해서 열리는 정기적인 행사 였다. 顯宗 때의 대장경의 판본, 즉 顯宗 12년서부터 宣宗 4년까지 66년간에 걸쳐 그 완성을 본 경판이 蒙古의 군병에 불타 없어진 것 은 高宗 19년 壬辰의 일이다. 이보다 수년후, 李奎報가 찬한 大藏 刻板君臣告文에 符仁寺에 소장되어온 大藏經板本이라함은 바로 이 初雕藏經을 말한 것이어서 당시 경판은 符仁寺에 있었던 것이다. 蒙古는 太宗 定宗 憲宗의 3대에 걸쳐 약 30년간 高麗에 출병하 였는데, 그 제 1회의 침범이 太宗 3년(1231)의 일이었으니 이해

49 Ⅰ. 佛敎의 發達 가 바로 高宗 18년이었다. 그 해 8월에 撒禮塔은 鴨綠江을 넘어 淸川江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국도 開京에까지 닥 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서쪽으로 돌아간 것은 이듬해 壬辰 년 1월의 일이었다. 이해 가을 撒禮塔은 재차 太宗의 명으로 開 京까지 밀고 내려오고 이어서 남진하여 水州 지금의 水原지방까 지 내려갔으나 마침 處仁部曲의 성 공방전에서 대전한 金允侯라 는 승에 의해 사살됨에 제 2회의 침범은 이로 말미암아 좌절되었 다. 그렇다면 高麗史 高宗世宗에 顯宗 때의 판본이 壬辰 때 몽고 병에 의해 불탔다고 한 그 蒙古兵은 바로 撒禮塔의 제 2회의 침입 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符仁寺의 위 치를 한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慶尙南道 大邱市 동북쪽 八公山에 桐華寺가 있다. 符仁寺는 이 桐華寺의 말사로, 神宗때에 符仁寺의 승들이 桐華寺의 승들과 합세하여 永州를 공격한 일이 있기도 한 사찰이어서 桐華寺와는 그 지리적 거리에서도 서로 가 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鄭道傳의 送華嚴宗師友雲詩序에 볼 것 같으면, 당시 公山의 符仁寺는 거찰이었다고 한다. 高宗 때 불 에 탔으므로 그 건물이 없었을 것인데 그후 符仁寺는 크게 중건된 듯하다. 2) 藏經再雕와 海印寺藏經 再雕藏經雕造의 기관으로서는 李奎報의 祈告文에 句當官司가 있으며 高麗史의 高宗世家에는 都監이라고 하였으나 각성된 경판 에는 으례 大藏都監 또는 分司大藏都監이라는 기관의 명칭이 있으 므로 이 大藏都監이 정식 명칭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大藏都監 외 에 이와 아울러 分司大藏都監이 있어서 本司 외에 따로 분사가 아 울러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分司都監이 江華가 아닌 다른

50 1. 大藏經의 雕版 곳, 다시 구체적으로 말해서 晋州관내에 있었음을 李奎報의 문집 을 통해서 알게 된다. 즉, 그의 손자였던 李益培가 조부 李奎報의 문집인 李相國集에 붙인 발문에서 말하기를 이제 分司都監에서 이 文集을 간행하게 됨은 그간 分司都監에서의 장경 雕造가 일단 끝났기 때문인데, 교열은 河東郡의 監務로 있는 자기 자신이 맡았 다고 한다. 같은 分司都監에서 雕造된 宗鏡錄의 끝에는 分司南海 大藏都監이라는 말이 보이고 있어, 이런 것을 함께 고려하여 본다 면, 分司의 소재지는 晋州牧 관내 南海縣였던 것 같다. 都監의 본 사가 江華에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에 分司가 설치된 데에는 晋陽公이었던 崔怡 부자가 晋陽 즉 晋州 부근에 자리잡고 南海에서 경판의 목재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 것 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더우기 崔怡와 그의 아들 崔沆은 당시 집권자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신앙이 또한 돈독한 바가 있 었다. 사실 再雕藏經은 이들 崔氏의 집권하에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再雕藏經은 그 板木의 각 경끝마다 그것을 雕造했던 해가 적히 어져 있으니 예컨대 丁酉 戊戌 己亥 庚子 辛丑 壬寅 癸 卯 甲辰 乙巳 丙午 丁未 등 간지가 있다. 이것은 이 再雕藏經 이 高宗 때의 것임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高麗再雕藏經 속칭 高麗大藏經은 1915년의 경판 조사 때 약간의 분실이 있었기 때문 에 당대의 명필 金敦熙의 글씨로 새로이 刻板하여 보충한 일이 있 기는 하였으나 고려 高宗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식됨이 없이 고스란히 81,137장의 경판이 전부 온전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再雕藏經에 입장된 佛書는 총 1,511종 6,805권이다. 宋代에 전후 5회에 걸쳐 雕造된 대장경 가운데서 현재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은 5,740권으로 된 思溪版藏經과 6,362권인 磧砂版藏經 뿐이다. 그러

51 Ⅰ. 佛敎의 發達 므로 高麗大藏經은 元版 장경의 하나인 弘法奢版 7182권 다음으 로가는 방대한 불전의 전집이 되는 셈이다. 이 방대한 장경을 639 함으로 나누고 그 함호의 배열을 천자문에 의했으니 天函(No.1)으로 부터 洞函(No.639)에 이르고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좀 더 자상하 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天函(No.1)에서 英函(No.480)까지에는 開 元釋藏錄에 수록된 불전이다. 杜函(No.481)에서 穀函(No.510)까지 는 宋대에 새로이 한역된 불전이 수록되었다. 이어서 振函(No. 511) 에서 侈函 (No.515)까지는 契丹本인 新集藏經隨函錄을 담았으며, 富 函(No.516)에서 輕函(No.520)까지에는 宋太宗이 친히 찬술한 蓮華 心輪 廻文偈頌 등 御製가 실려졌다. 策函(No.521)에서 丁函(No. 560)까지는 貞元釋敎錄 가운데 佛典이 실렸으며, 俊函(No.561)에서 密函(No.563)까지의 세 함에는 高麗再雕大藏經校正別錄을 담았는 데, 그 校正別錄은 이 再雕藏經을 만드는데 있어서 宋本과 丹本 그리고 國內에 전해오는 高麗本을 서로 교합해서 정확을 기했던 그 과정을 일일이 적어놓은 일은 바 校合表라 할 것이다. 勿函 (No.564)에서 寔函(No.567)에는 大般涅槃經이 실렸고, 寧函(No. 568)에서 楚函(No.570)에는 佛名經을 실렸다. 更函(No.571)한 函은 高麗再雕大藏目錄이니 이때 간행 雕造한 大藏經의 目錄인 것이다. 覇函(No.572)에서 何函(No.585)까지 14 함에는 法苑珠林 을 실렸있며, 遵函(No.586)에서 塞函(No.628)까지는 宋대에 새로 한역된 경전이 실렸다. 雞函(No.629)에는 續一切經音義가 실려졌으 며, 끝으로 田函(No.630)에서 洞函(No.639)까지의 10함에는 一切 經音義가 실려졌다. 僧 守其가 편찬한 高麗國新雕大藏經校正別錄 30권이 경판 가운 데 들어있다함은 위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그 守其에 대해서는 바 로 그 高麗 高宗 때의 유학자였던 崔滋에 補閑集이 있어서 그 권

52 1. 大藏經의 雕版 하에 守其에 대한 논설이 있으니, 즉 守其는 開泰寺승이었으며 매 우 학식이 넓고 깊었던 모양이었고 그때 五敎都僧統이라는 승관직 에 있었다. 이렇게 守其의 손을 거쳐 高宗 23년(1236)에 都監이 설치되고 이어서 그 다음해인 高宗 24년부터 34년까지 전후 11년 에 걸쳐 再雕藏經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高宗 35년에는 大 藏目錄을 雕刻하고 다시 3년후인 高宗 38년에 이 再雕藏經의 모든 일을 마쳤던 것이다. 그 都監의 장소는 물론 江華에 本司가 있었으 며, 이와 아울러 따로히 分司가 남쪽 晋陽땅에 있었던 것임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 分司가 한 곳에만 있지는 아니 하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 시 말해서, 晋州와 南海 두 곳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배제하기 도 어렵다. 江華에서 再雕藏經을 雕造함에 있어서는 그 순서에 반드시 千 字文의 函號 그 순서대로는 하지 않았으며, 전후 좌우로부터 동시 에 착수하여 갔다. 이것은 함호와 그 판의 주조 간년을 서로 맞대 어 비교하면 곧 알게 되는 일이다. 다음은 그 하나의 예를 보인 것이다. 芥(No.63) 薑(No.64) 醎(No.66) 淡(No.68) 己亥(高宗 26년) 潜(No.70) 傷(No.160) 女(No.161) 庚子(高宗 27년) 遐(No.121) 養(No.156) 辛丑(高宗 28년) 體(No.124) 慕(No.162) 良(No.166) 莫(No. 戊戌(高宗 25년) 175) 樹(No.132) 絲(No.195) 染(No.196) 讚 壬寅(高宗 29년) (No.198) 羔(No.199) 維(No.202) 樹(No.132) 敢(No.158) 染(No.196) 寶 癸卯(高宗 30년) (No.236) 臨(No.257) 不(No.275)

53 Ⅰ. 佛敎의 發達 詩(No.197) 登(No.307) 攝(No.309) 從(No. 甲辰(高宗 31년) 311) 樂(No.321) 訓(No.340) 兄(No.435) 情 (No.467) 馳(No.605) 漢(No.604) 首(No.116) 宗(No.416) 友(No.442) 疑(No. 乙巳(高宗 32년) 463) 佐(No.533) 阿(No.535) 奄(No.537) 丁(No. 丙午(高宗 33년) 560) 愛(No.558) 俊(No.561) 丁未(高宗 34년) 그리고 經板에는 대개 그 구석에 한 사람 내지 10여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아마 그 경전의 발원자명일 것이다. 국가의 경 영 아래 이루어진 큰 佛事이기는 하였으나, 이 불사에 인연을 맺기 위하여 재화를 시납 보시를 받은 듯하다. 각 함의 경판 구석에 새 겨놓은 이름을 그 일부이나마 본다면 다음과 같다. 迪義可勤金瑩存名石光義知孝習文 寶富令 등 董(No.64) 令琚權平仲宣敏求大節甘英仁光信 光明端大節益柔 등 醎(No.66) 含祿松茂成呂弘進 등 淡(No.68) 中叙冲叙瓦和敦素孝大子龍文雅智 暉韓援 潜(No.70) 金得貂公甫 樹(No.132) 弘裕弘有明升光著義天仁光 敢(No.158) 大應 攝(No.309) 生弼南甫李衣上如炎大法基崔呂 大意惠由惠暉成大景癸惠心有林 之失善才山一亥柱孝兼富令己守 芥(No.63)

54 1. 大藏經의 雕版 從(No.311) 梁比甘大性一吠灯義天仁幹公弼里 知敦素永才孝生 疑(No.463) 禮金惟戊孝生呂夫守連炎大大能惠 己成犬陳儀金夫洪冲文就吉祥吉 尚正因 洪禮 義昌 成美 全寶 비록 施財者들의 일부에 지나지를 않으나 위의 명단을 보건대 富令 敦素 仁光 成大 義天 등 5명은 다같이 각각 두函에 관계 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 다른 이보다도 그 시재가 훨씬 많았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樹函과 從函에 각각 보이는 義天에 관한 문제다. 肅宗 6년(1101)에 별세한 大覺國師 義天이 再雕 당시에 이에 관여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여기 義天은 다른 사람으로서 同名異人인가 혹은 그렇지 아니하면 初雕版을 복각하 여 한자나 한획도 이를 증감하지않고 그대로 한 것인가의 그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海印寺 대장경판의 전래에 대해서는 고래로 그 설이 분분하다. 海印寺에는 여러 고문서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 가운데 경판과 관계가 있는 것에 海印寺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라는 것이 있다. 이에 의하면 新羅 때 李居仁이 大中연간 壬戌年 가을에 세 눈을 가진 개를 애무한 그 공덕으로써 명부에서 소생하여 나왔는데 마 침 공주가 병에 걸려 난치로 있었으므로 왕에게 시주를 받아 巨濟 島에서 대장경을 만들고 그것을 海印寺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 緣起說話는 물론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唐 大中년간이라하면, 宣 宗 때이어서 新羅의 文聖王 9년(847)서부터 말년인 18년을 지나 이어서 憲安王 3년(859)까지의 전후 13년간인 즉, 이 大中년간에 壬戌 년은 없다. 뿐만 아니라 經板이 高麗 때임은 말할 것도 없는

55 Ⅰ. 佛敎의 發達 데, 이것이 新羅 때의 것이라 함은 실로 허무맹랑한 말이다. 朝鮮 時代 英祖 때에 세운 海印寺事蹟碑에는 高麗 文宗 때에 만든 大藏 經이 있는데 이것 역시 맹랑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마 寺 蹟碑에 高麗 文宗 때의 것이라고 있는 것은 처음 顯宗 때의 것과 혼돈한 것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李居仁의 開板연기는 海印 寺의 창건연기와 결부하여 생각해 볼 만한 것에 지나지 않다. 海 印寺의 대장경판은 처음부터 그 곳에 있어온 것은 아니다. 대장경 판이 高麗 말기서부터 朝鮮 초기까지 국왕 또는 개인에 의해서 두 번이나 인출한 사실이 있었음은 朝鮮王朝實錄에 의해 알 수 있다. 太宗 10년(1410)에 京畿 豊海 忠淸 등 서해면의 3도 관찰사에 게 각각 도내에서 생산되는 印經紙를 267묶음을 慶尚道로 보내게 하고 海印寺에서 인경하되 이 일에 종사하는 승려 200명에게 응 분의 보수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太宗 10년에는 분명히 海印寺에 대장경이 운반되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禑王 7년에 李 穡은 죽은 부친의 뜻에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고서 神勒寺에 그 大 藏閣을 세워 봉안한 일이 있었다. 그 神勒寺大藏閣記를 李崇仁이 지었지만, 李崇仁의 陶隱集을 보면 詩稿部에 睡庵長老印藏經于海 印寺戲呈이라고 한 시제가 있다. 이것은 海印寺에서 대장경을 인 경하였다는 말이니, 아마 神勒寺의 대장경은 海印寺에서 인출하였 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高麗말기 禑王 7년에는 江華에서 海印寺로 옮겨졌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海印寺에는 이른 바 고려대장경 즉 江華에서 주조한 再雕藏經과는 달리 高麗 말기에 그 海印寺에서 각판한 寺刊版도 있기 때문에 神勒寺 大藏閣에 봉 안된 그 大藏經이 반드시 正藏이라는 말이 없지 아니하는 한, 再 雕藏經과 연관시킬 수는 없다. 여기에 朝鮮王朝實錄 太祖實錄 7년 5월 丙辰의 기사에 그 가치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56 1. 大藏經의 雕版 江華島에 있어온 再雕藏經이 朝鮮時代 초기에 海印寺로 옮겨 왔다 는 말이 된다. 實錄에 보면, 太祖가 龍山江으로 손수 행차하여 江 華 禪源寺로부터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것을 지켜 보았으며 이어서 그 다음날에는 비가 오는 가운데 2천명의 군사로 하여금 支天寺로 옮기되 五敎兩宗의 승려들이 頌經하였다고 한다. 支天寺는 漢陽 西大門밖에 위치한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江華島에서 떠난 그 시일과 또 支天寺에서 海印寺로 옮겨간 시일은 아직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자료가 바로 海印寺 잡판 가운데 있는 釋華嚴敎 分記圓通鈔의 윤곽 밖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여기에 江華島로부 터 丁丑年에 운반해 왔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즉 釋華嚴敎分記圓 通鈔의 마멸이 많으므로 首座 冲玄이 道元과 더불어 乙酉年 즉 太 宗 5년(1405)에 새로 주조해서 正藏에 끼었는데 그 正藏은 모두 다 9년전인 丁丑年 즉 太祖 6년(1397)에 江華島에서 운반해 나왔 다는 것이니, 再雕藏經이 海印寺로 옮겨진 것은 그 9년간 사이의 일이 되는 것이라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3) 大藏校正別錄 高麗再雕藏經은 守其에 의해서 정확한 교합을 거친 것이다. 입장 하는데 있어 函을 배열하는데도 각별한 배려가 있었다. 貞元釋敎目 錄에 소수된 불전을 策函(No.521)서부터 丁函(No.560)에 까지 입 장시키는데 있어 佛名經은 따로 寧函(No.568) 晋函(No.569) 楚 函(No.570) 등 3함에 입장하고 그대신 契丹本인 大宗地玄文論과 釋摩訶衍論을 각각 回函(No.554)과 漢函 (No.555)에 입장시켰다. 守其는 高麗本과 開寶版의 宋本 그리고 契丹大藏經의 契丹本 등 셋을 서로 면밀히 대교함으로써 잘못된 곳을 바로 잡아 놓았던 것 이다. 그러므로 高麗再雕藏經 가운데 天函(No.1)으로부터 英函

57 Ⅰ. 佛敎의 發達 (No.480)에 이르는 앞의 부분은 그 체제가 初雕藏經이나 開實版藏 經과 같으면서도 내용은 달리 새롭게 잘 다듬어진 것이다. 守其가 그 얼마나 정확히 교합을 보았던 것인가는 星函(No.464)에 입장된 集古今佛道論衡 4권의 경우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唐 道 宣이 찬한 이 集古今佛道論衡은 後漢 明帝 때부터 唐 高宗 때에 이 르기 까지의 불교정책과 도교정책에 대하여 논평한 것으로 高麗本 과 宋本 그리고 契丹本 등 셋이 서로 다르게 그 체제가 전해 왔던 것이다. 즉 高麗本과 宋本은 다같이 唐 高宗 때의 7개 사항이 제 3 권에 실려 있고 唐太宗 때의 10개 사항과 道士 郭行眞의 捨道 歸佛 文은 함께 8장으로 되어있는 제 4권에 실려 있음에 대해 契丹本은 이와 달리 唐 太宗 때의 10개 사항이 제 3권에 실렸으며 高宗 때의 7개 사항과 捨道歸佛文은 34장으로된 제 4권에 실려 있는 것이다. 郭行眞이 捨道歸佛文을 발표한 것이 唐 高宗 때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순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 集古今佛道論衡의 서술방식 으로 보아 高麗本과 宋本이 다같이 앞뒤가 바뀌어진 것이 분명하 다. 그래서 守其는 高麗本과 宋本을 契丹本에 의해서 바로 잡고 아 울러 탈락된 부분도 이를 보완하여 놓았던 것이다. 더우기 松函 (No.270)의 雜阿含經의 경우 같은 것은 아예 高麗本과 宋本을 전 면적으로 버리고 契丹本 그대로 채택하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守其가 契丹本을 위주로 하였던 까닭은 契丹本大藏經이 지니고 있는 그 내용의 우수성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契丹大藏經 은 高麗再雕藏經에 있어서 큰 구실을 했던 것이다. 守其가 여러 경 마다 면밀히 교합한 그 과정을 자상히 적어놓은 高麗再雕大藏校 正 別綠 30권은 다른 불전과 함께 이 再雕藏經에 입장되어 오늘날 高 麗 初雕藏經과 再雕藏經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동시에 지금은 없어 진 契丹大藏經의 윤곽도 어느 정도나마 짐작케 하여 주고 있다. 海

58 1. 大藏經의 雕版 印寺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高麗大藏經이 현존하는 여러 漢譯 대장 경 중에서도 가장 학술상 우수한 것으로 공인되고 있는 것은 그 교 합에 있어서 정확한 契丹大藏經을 중심으로 했었다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각판에 있어서 또한 오자나 탈락이 없는 철저한 교정이 있 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작 없어졌거나 혹은 아직 널리 퍼지지를 아 니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新集藏經音義隨函錄 大宗地玄文論 摩訶 衍論 一切經音義 續一切經音義 등이 契丹本에 의해서 高麗再雕 藏經에 입장됨으로써 그후 불교문화권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일도 이 고려대장경의 가치를 더 한층 높이는 것이 되고 있다. 契丹大藏經 이 없어진 오늘날, 그 契丹大藏經의 가치가 高麗藏經에 의해서 재 인식되고 있는 것은 高麗와 契丹 두 나라 사이에 전개된 장기간의 세 속적인 이해관계 가운데서도 이를 초월하여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종교적 접촉의 아름다운 열매라 하겠다. 守其에 의해 교합을 거친 것 가운데 服函(No.86)에서 楚函(No. 570)에 이르는 사이에 약 60부에 걸쳐, 그 본문의 착란을 바로 잡 고 또는 중첩을 없애고 궐탈을 보충하고 다시 經名 譯者名 卷數 의 이동 등을 밝혀놓았다. 이제 그 교합의 실례를 더 예를 들면서 보건대 伐函(No.99) 般舟三昧經은 宋本을 버리고 高麗本 즉 東本 과 契丹本 즉 北本에 의해서 바로 잡았다. 鳳函(No.130)의 正法華 經은 애당초 宋本이 본래 없어서 高麗本과 契丹本에 의했다. 作 聖 建의 세 函(No.207, 208, 209)의 大智度論도 또한 宋本이 애 당초 없었기 때문에 高麗本과 契丹本에 의했다. 力函(No.252)의 轉識論, 廉函(No.379)의 大毗婆沙論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宋本이 없었다. 이와같이 契丹藏經이 高麗再雕藏經에 끼친 그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도시 契丹大藏經이 高麗에 전래되기는 道宗의 淸寧 9년

59 Ⅰ. 佛敎의 發達 즉 文宗 17년(1063)의 일이지만, 그후 전후 5회에 걸쳐 또 契丹 藏經의 전래가 있었으니, 文宗 26년 肅宗 4년 동 5년 睿宗 2 년 동 17년이 바로 그것이다. 義天은 契丹藏의 이해자였거니와 그는 契丹藏 그 자체보다 章疏에 관심이 더 컸다. 契丹藏이 宋藏 과 더불어 韓國에서 오래 전승되어진 것은 그만큼 契丹藏에 대한 이해자가 많았던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再雕藏經의 교 열에 입했던 守其가 또한 契丹藏에 대한 훌륭한 이해자였다. 策함 에서 密函에 이르는 사이에는 續貞元釋敎錄에 수록된 43질이 실 려졌거니와 그 43질은 질수 만은 그대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상 당히 손이 가고 있다. 예컨대 孰函의 佛說木槵經은 竟函에 있는 木槵子經 1권과 중복되는 것이므로 삭제되었다. 廻函과 漢函의 佛 名經 18권은 寧 晋 楚函(No.568, 569, 570)에 있는 30권본과 같 은 내용의 것이므로 이를 버리고 대신 廻函과 漢函에 각각 契丹 소전의 釋摩訶衍論 10권과 大宗地玄文本論 20권을 수록하였다. 俊 叉 密函의 一切經源品次錄 30권은 校正別錄 30권과 대치하 였다. 따라서 佛說木槵經 佛名經 18권, 一切經源品次錄 30권의 3부는 다같이 契丹의 학승 希麟이 續開元釋敎錄에 의해서 저술한 續一切經音義 가운데 실려지지 아니한 것으로, 初雕藏經에 수록된 것을 契丹本과의 교합으로 빼놓아 그 질 수는 같으나 契丹藏 특유 의 불전과 대치시켜 놓은 것이라 하겠다. 守其가 校正別錄에 교합 의 시종을 기록하여 놓은 것은 續貞元釋敎錄에 수록된 43질과 開 元釋敎錄에 수록된 480질, 즉 天函(No.1)에서 英函(No.480)에 이 르는 사이의 것이다. 그 밖에 있어서는 宋代에 새로 역경된 것이 다른 것과 서로 대교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 隨函錄과 契丹의 불전은 이와 대교할 만한 宋本과 高麗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契丹本에 의해서 宋本이나 또는 高麗本을 보완한 것에는 우

60 1. 大藏經의 雕版 선 彌勒下生成佛經을 들 수가 있겠다. 養函에 입장된 이 經은 宋本 이 전혀 없었으므로 契丹本에 의했던 것이다. 鞠函의 月燈三昧經, 知函의 東方最勝燈王如來經, 詩函의 蘇悉地羯羅經, 命函의 法界無 差別論, 容函의 受歲經, 若函의 舍衛國王十夢經이 다같이 契丹本으 로써 宋本과 高麗本을 보완한 것이다. 다시 나아가서 전적으로 契 丹本만을 취한 경우로는 若函에 수록된 四未曾有經 1권이다. 校正 別錄 권 18을 보건대 高麗本이나 宋本도 다같이 契丹本의 경우와 같이 이 四未曾有經의 역자를 西晋의 竺法護로 하고는 있으나 그 內容이 다르다고 하면서 예리하게 교열하여 놓았으니, 宋本과 高 麗本은 시종 造塔의 공덕만이 설되어지고 끝에가서 未曾有法에 언급을 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넷으로 나누지를 아니했다. 이 에 대해 契丹本에는 輪轉聖王의 四未曾有法이 阿難의 四未曾有法 과 아울러 설법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守其는 契丹本을 취했 던 것이니 그 정확한 교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松函 의 雜阿含經 4권, 止函의 佛說頻毗婆羅詣佛供養經 本事經 彌沙 塞五分戒本 摩訶僧祗比丘尼本, 傳函의 四分比丘尼羯磨 1권이 모 두 다 契丹本에 의한 것이다. 이들 14부의 契丹本 불전은 앞서 말 한 新集藏經音義隨函錄, 一切經音義, 續一切經音義, 釋摩評衍論, 大宗地玄文本論 등의 契丹本과 아울러 高麗再雕藏經의 내용적 가 치를 최고도로 크게 하여주어 丹本의 우수성을 새삼 느끼게 하여 준다. 또한 契丹本에 의해서 宋本과 高麗本本의 착란과 결루를 부 분적으로 보정한 것에 11부가 있으니, 이는 契丹佛敎의 깊이가 어 느 방면으로 행하여 파들어 가고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薄函의 中阿含經 卷 11과 卷 15, 不函의 雜阿含經, 澄函의 起世經, 取函의 起世因本經, 攝函의 十誦 律, 樂函의 根本說一切有部苾芻尼毗奈耶, 子函의 阿毘曇八犍度論,

61 Ⅰ. 佛敎의 發達 弗函의 集異門足論과 大毗婆沙論, 그리고 佐函의 一字頂輪王經 등 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착란과 결루를 보정하기 위해 서 契丹本을 취하지 않았던 경우로는 극히 적어 服函의 須摩提經, 必函의 須眞天子經, 觀函의 菩薩本緣經, 竟函의 護淨經, 驚函의 雜 寶藏經 등 5부의 경우 뿐이었다. 契丹 대장경은 내내 宋나라 日本으로는 전래되지를 아니 하였으 나 비교적 오랫동안 韓國에는 전하여 내려 왔었다. 契丹藏을 가리 키어 잘 되었다고 감탄하면서 그 파손을 걱정하여 이를 보수한 宓 菴이 죽었던 해는 高麗 忠烈王 18년(1292)의 일이었으므로 契丹 本이 처음으로 高麗에 전래하였었던 文宗 17년에서부터 229년이 경과되어온 것이었다. 고려승 宓菴의 손에 의해서 보수를 보게 된 契丹 장경은 거찰 松廣寺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明의 隆慶 4년(1570) 그 松廣寺에서 그리 멀지 않은 無等山 安心寺에서 開 板되었던 藥師經에는 장경의 함호 또는 질호라 여겨지는 鞠자가 새 겨져 있다. 그 鞠자는 바로 新集藏經音義隨函錄의 질호인 鞠자 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 鞠函에 藥師經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과 그 리고 이 隨函錄이 契丹大藏經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등을 고려한 다면, 安心寺에서 개판된 藥師經은 바로 契丹藏經을 대본으로해서 개판되었던 것임을 알게 한다. 이는 隆慶 4년의 일이니 곧 朝鮮 중 기 宣祖 3년(1570) 때의 일이었던 것이다. 고려 장경이나 開元錄 에 있어서 藥師經은 다같이 恭函에 수록되어 있다. 契丹大藏經은 宓菴의 보수 후에 오랫동안 여전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적어도 그 1부가 중간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완벽 무비한 高麗再雕藏經 과 더불어 契丹藏經이 또한 아울러 전해내려 갔었다는 것에서 우 리는 새 삼 교학적으로 본 한국 불교의 견실성과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62 1. 大藏經의 雕版 4) 海印寺藏 補板 補板이라 함은 大藏經目錄 끝에 宗鏡錄 이하 15부의 경판을 가 리킨다. 그 15부에는 祖堂集 金剛三昧經論 禪門拈頌 證道歌事 法界圖記大藏一覽十句章圓通鈔釋華嚴敎分記圓通鈔 三實章圓通記禮念彌陀道場懺法華嚴經探玄記 등이 들어 있다. 實 이들은 비록 高麗再雕藏經에 정식으로 입장은 되지 아니하였으나 모두다 주옥같이 귀한 것들이다. 특히 高麗 高宗 32년 (1245)에 이룩된 祖堂集 20권은 唐 靜修禪師가 엮은 것인데, 寶林傳의 완본 이 전하여 오지를 않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傳燈에 관한 사적중에 서 완본으로는 오직 이것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보아 좋을 것이 다. 祖堂集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 海印寺의 보판 에 의한다. 宗鏡錄 1백권을 祿 移 富 車 駕 肥 輕 策 切 茂의 10개 함속에, 그리고 證道歌事實은 庭函에, 金剛三昧經 論은 綿函에, 祖堂集에는 職函과 遠函에 배정하고, 이하 10여부를 각기 배열하여 놓았다. 이 大藏目錄의 끝에 7행으로 된 刊記가 있 고, 서체로 보든지 또는 그 괘선이 있는 것등으로 미루어보아 하 여간 대장목록을 조판한 후에 편입한 것은 역역한 것이다. 우선 그 刊記에 보면, 乙丑歲에 海冥壯雄이 인경할 때 宗鏡錄 등 15부 231권은 대장목록에 없고 또 판두에 천자문의 문자가 없어서 인 경자가 곤란하므로 천자문의 번호를 판두에 累版하여 놓았다. 그 리고보면, 宗鏡錄이하 15부를 정리하고 또 목록에 올리어 대장경 의 보유로 한 것도 응당 이와 동시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럴 것 같 으면 壯雄이 인쇄한 그 乙丑세란 과연 어느 해 였을가가 문제가 아니 될 수 없다. 잡판 가운데에는 印製大藏經跋文이라는 것이 있 거니와 이것은 壯雄과 南冥이 대장경 2건을 발원하여 인성하고

63 Ⅰ. 佛敎의 發達 五臺와 雲嶽에 각각 안치한 그 전말을 적어놓은 것이지만, 바로 여 기에 同治 4년 乙丑이라는 시일이 적혀 있는 것이니 이것에 관심 을 아니 가질 수 없다. 同治 4년 乙丑은 곧 高宗 2년(1865)이다. 여기 발문에 보이는 壯雄과 南冥은 바로 보관목록에 나오는 壯雄 과 南冥 등 2인하고 별개의 사람이 정녕 아닐진데 그 목록간기에 乙丑세라 있음은 同治 4년을 가리킬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 다. 따라서 補板목록의 성립은 高宗 2년 때의 일이 되는 것이며, 이때 인경과 더불어 편입되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宗鏡錄 이하 보판목록의 편성연대는 알 수가 있으나 그 보판의 주조 연대 와 장소를 또한 밝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는데, 다행히 경 끝마다 대부분에 分司大藏都監에서 조조하였음이 명각되어 있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海印寺 자체에서 개판한 것도 더러 있다. 이제 그 간년과 체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ㄱ. 宗鏡錄 100권 (祿侈富車駕肥輕策功茂函) 宋 延壽찬. 丙午歲分司大藏都監開板이라고 권 에 각각 있으며, 이밖에 권 6과 권 25 등은 丁未歲에 역시 分司都監에서, 51권에서 100권에 이르는 총 50권은 戊申세에 개 판하였다. 단 권 27은 丁未세 개판하였으나 다른 것처럼 分司都監 에서가 아니라 分司南海都監에서 개판된 것으로 되어 있다. 分司 大藏都監과 分司南海大藏都監이 서로 다른 것인지 또는 같은 것인 지 이에 대해서는 학자간에 양론이 없지를 아니하나 어떻든 晋州 牧 관내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와같은 경판 끝의 간기를 통해서 宗 鏡錄은 高麗 高宗 33년(1246)丙午세로 부터 35년 戊申세까지 그 사이에 分司都監에서 개판되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경관의 체제 가 再離藏經의 그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각 권마다 앞과 뒤의 제 목 아래에 祿자에서 茂자에 이르는 천자문의 순서 함호가 적혀 있

64 1. 大藏經의 雕版 다. 宗鏡錄은 宋 延壽가 찬한 것으로, 경론과 제가의 말을 이끌어 가지고 敎와 禪과의 2門의 요지를 밝힌 것이다. 全編을 標宗 問 答 引證의 3편으로 구성했다. 제 1권 전반부를 제 1편 標宗으로 하고, 나머지 후반부에서 부터 권 93까지는 제 2편 問答篇으로 하고 그뒤 권 94부터 끝의 권 100까지를 제 3편 引證篇에 배당 하였다. ㄴ. 證道歌事實 3권 (庭函) 제3권에 발문이 있어서 高宗 35년(1248) 戊申세에 嶺南의 按 察副使 全光宰가 晋陽公 崔怡의 수복과 蒙古兵의 격퇴를 기원하기 위하여 分司大藏都監에서 개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全光宰는 李 奎報의 文集간행에 있어서도 참여한 사람이다. 證道歌는 본시 唐 玄覺이 찬한 것으로, 禪宗의 묘리를 운문형식으로 한 것이다. 그는 曹溪에 이르러 惠能을 찾아 인가를 받은 후로는 龍興寺로 돌아가 南宗禪의 頓敎를 널리 펼쳤다. ㄷ. 金剛三昧經論 3권 (庭函) 元曉가 찬한 것인데, 추가목록에 2권이라 하였음은 3권의 잘못 이다. 上卷이 42장, 中卷이 57장, 下卷이 60장이다. 下卷 끝에는 宋高僧傳 권 4에 있는 元曉傳 2매를 첨부하여 놓았다. 그리고 識 語가 8행이나 되는데, 그 내용에는 高宗 31년(1244)甲辰에 優婆 塞 鄭晏이 개판한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金剛三昧經은 그 經文을 序分 正宗分 流通分의 셋으로 나누되 正宗分은 다시 여섯 부문 으로 나누어 설하였다. 이 正宗分에서 一心의 근원은 오직 청정하 여 중감이 또한 없는 것이라 논설하였다. ㄹ. 法界圖記叢隨錄 4권 (庭函) 찬자는 미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 義湘의 華嚴一乘法界 圖 1권을 풀이한 것이다

65 Ⅰ. 佛敎의 發達 ㅁ. 祖堂集 20권 (曠遠函) 文僜의 찬술로 목록에는 적혀져 있다. 그 서문에는 招慶寺에 靜 筠이라는 선사가 있어서 고금에 걸친 여러 곳의 법요를 모아 엮어 1권으로 이 祖堂集을 편하였다고 있다. 권 1의 끝에 간기가 있어 서 이 祖堂集이 乙巳年 즉 高宗 32년(1245) 分司大藏都監에서 개 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祖堂集에는 전권을 통해서 建자에 획 이 없어 빠진 것이 있는 것은 아마 틀림없이 高宗 太祖 王建의 諱 를 피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만에 의해서도 충분히 이것이 高麗때 개판된 것임을 알게 한다. 판식은 역시 正藏인 再雕 장경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똑 같다. 祖堂集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주는 귀중한 傳燈의 기록이다. 여 기에는 28祖가 설되어 있다. 제 祖師의 송 38首 가운데 南嶽懷讓 과 石頭敎遷에 따른 2首가 祖堂集에는 떨어져 없는 것이다. 그러 나 모두 淨修禪師 省僜이 지은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약 시 淨修선사의 것이로되 敦煌의 寫卷에 실리지 않고, 祖堂集에 실 려 있는 것으로 德山宣鑒(권 5) 洞山良介(권 6) 玄沙師備(권 10) 長慶慧棱(권 10) 道吾圓智(권 14) 그리고 南泉普願(권 16) 이상의 6수가 있다. 설령 祖堂集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사권에 붙여진 慧 觀의 서문에서 本頌의 작자가 淨修禪師이었으리라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서문에 있는 말을 추려보건대, 千佛僜 禪師에게 간청해서 이만한 송찬을 얻었다는 것이며, 당시의 선가 들의 필법으로 미루어 千佛은 곧 그 주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 고 따라서 僜禪師가 곧 省僜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거늘 大正藏經 의 校印者는 이것을 證禪師로 誤讀하였으니 이 祖堂集의 작자를 오리무중에 몰아 넣고 말았던 것이다. 응당 수정이 있어야 할 문 제다. 祖堂集에 실린 42 首의 송찬 가운데 그 36 수가 이미 여러

66 1. 大藏經의 雕版 祖師들의 송에 나와 있고, 慧觀의 권유가 그것을 낳게한 기연이 되 어 준 것이었다면 정녕 그것은 祖堂集의 애초 成立의 경위를 규명 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러 한 과거의 통념이 祖堂集으로 해서, 그것도 오래 빛을 못보다가 再 雕藏經에 따른 補板에 의해서 깨뜨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祖堂集 에 적혀진 西天 28祖說도 알고 보면 여러 조사들의 계송에서 출반 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미상불 大迦葉으로 부터 菩提達摩에 이 르기까지 전법의 계보에 관한 제가의 설은 唐 일대를 통해서 난맥 상태를 벗어나지를 못했다. 神會의 8대설이 있는가 하면 馬祖계의 惟寬의 51대설이 있고, 또 28대설을 헤아리는 것도 있다. 요컨대 靜修禪師는 그가 祖堂集에 서문을 집필한 保大 10년 (952)에 앞 서기 무릇 30년이 가까운 전날, 일찌기 은사 保福院의 從展으로부 터 하직하던 때부터 이같은 傳燈에 관한 사적을 엮는데 필요한 준 비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으되 38수는 그러한 편력 도중 千佛院 인가하는 사원에서의 소산였을 것이며, 만년에 招慶院에 자리잡은 뒤로 그것을 靜과 筠 등 두 젊은 선승에게 맡겨서 편찬와 완성을 보게 한 것이라 하겠다. ㅂ. 華嚴經探玄記 20권 (農務函) 이것은 法藏이 찬술한 것으로 60권華嚴經을 華嚴學的 견지에서 풀이한 것이다. 따라서 華嚴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여간 귀중한 것이 아니다. 모두 10장으로 구성하였는데 경문에 따라 해석한 부 분은 제10장이며, 제1장에서 제9장까지는 화엄의 이론을 항목별로 나누어 논설한 것이다. 판식은 祖堂集과 마찬가지로 正蔵과 같다. 이것도 乙巳年에 分司大藏都監에서 개판되었다

67 Ⅰ. 佛敎의 發達 (4) 寺板本의 刊行 蒙古의 침입시에 그 피난 국도 江華에서 방대한 대장성 간행이 이루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崔怡와 崔沆의 집권자를 중심으로 하여 국난을 불력에 의해서 격퇴하려고 국가적인 규모아래 추진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었겠지만 그보다도 생각하여야 할 것 은 당시 高麗社會의 상하를 통하여 불교에 대한 신앙이 돈독하였 던 사실 그것이다. 高麗 正藏이 불교의 경전일 뿐만아니라 그것이 고도의 교리적인 바탕에서 엄격한 교열을 통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은 그만큼 불교에 대한 관심의 척도가 아 니 될 수 없었겠으나, 과연 대중들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깊은 관련 을 맺어주는 것이었는지는 자못 의심이 간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 적인 비호와 추진아래 이루어진 정장의 간행과 나란히 각 사찰에 서 수 많은 불전이 간행되었던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高麗 간경사는 국가적인 의미에서나 또는 일반 대중들의 신앙에 있어서나 高麗文化史에 하나의 커다란 금자탑을 세운 것이 아닐 수 없다. 父母恩重經 目蓮經 盂蘭盆經 등 갖가지 爲經이 각 사찰에서 法施와 財施아래 간행된 것도 바로 이같은 서민들의 신앙을 그대로 반영하여 준 것이다. 일련의 이 위경들은 일상생활 의 불교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忠肅王 때에 法華靈驗傳이 水原 萬義寺에서 승 妙慧의 손에 의해서 간행되었던 일이 라든가 또는 같은 시기에 海印寺의 승 體元이 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 別行疏를 찬술한 것 등은 다같이 당시 觀音信仰을 고취하고 성행 시키는데 큰 구실을 한 것이다. 이같은 불교의 국가적인 의의와 일반 대중들의 신앙으로서의 불교의 의의는 그대로 朝鮮時代로

68 1. 大藏經의 雕版 계승되어 유교주의를 지향하려는 유신들의 배불 억불정책에도 불 구하고 수많은 불전과 영험전이 간행되었던 것이다. (5) 高麗大藏經의 流布 高麗 大藏經의 학적 가치를 높이는 것은 거기에 수록된 불전의 수효뿐만 아니라 이 고려 대장경의 주조가 蒙古의 침입을 격퇴하 려는 민족적인 염원을 걸고 국력을 기울여 한자 한자 그 정성을 다 한 것인 만큼 가장 오자가 없는 대장경이라는데서도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세기 초에 日本의 전 불교계가 동원되다 싶이 하여 만들어 그 수록된 내용의 풍부함을 자랑하는 大正新修 大藏經이 이 高麗大藏經을 그 母本으로 하고 있으나 오자가 많아 학계에 적지않은 불만을 사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高麗大藏經의 경판은 朝鮮 시대 초기에 日本이 수차에 걸쳐서 그 양도를 청구하여 왔었다. 왜구의 소탕과 그 왜구에게 납치당한 남녀노소의 쇄환을 미끼로 昌王 1년(1389)부터 中宗 4년(1509) 에 이르기 까지 전후 83회 에 걸쳐 우리 나라에 장경을 청구하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간 印經된 장경 63부가 日本으로 전해졌 고 世宗 때에는 경판 자체를 하사하려고까지 하였던 일이 있기조 차 하였었다. 그러나 崇儒抑佛로 일관된 당시에도 이 요구만은 결 국 완곡히 거절하여 다행히도 국내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경판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한번 모두를 다 印行하려면 거기에 소요되는 인력과 물적 동원이 적지않으므 로 국가의 힘이 없이는 좀체로 인행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 다. 따라서 억불책이 추진되던 朝鮮時代 5백년 간에는 거의 인행

69 Ⅰ. 佛敎의 發達 이 없었다. 고작해서 世宗 世祖 등 초기에 약간 있었을 뿐이었다. 高麗 때에는 인행이 여러 번 있었으니 李穡이 亡父 李穀의 뜻을 이어받아 禑王 7년(1381)에 인출하고 그것을 神勒寺에 새로 세운 藏經閣에 봉안한 일은 그 한 예라 하겠다. 그때 인출한 것이 海印 寺에 봉안하였던 것임은 陶隱集 卷 3에 보이는 바와 같이 睡庵長 老가 海印寺에서 장경을 인출했을 때에 지은 2수의 절귀에 의해서 도 알 수 있을 것이다. 海印寺 高麗大藏經 인출로서 특기할 만한 것에는 이밖에 또 日 帝時代인 1915년 당시 조선총독였던 寺內正毅가 그의 보리사인 京都 泉涌寺에 봉납코자 인경한 그것이다. 그것은 그후 東京帝大 도서관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에 있은 대지진 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 또 하나 인출된 다른 대장경은 여러 경로를 밟아 지금은 서 울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후 1935년에 이르러서는 전 滿洲國 康德皇帝를 위하여 朝鮮總督府에서 한 질을 인출하여 선물로 보낸 일이 있었거니와 滿洲國 붕괴와 더불어 그 행방이 오 늘날에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한 질 1166책으로 완성된 인경 에 는 총 1만 5천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던 것인데, 황색으로 염색 된 인경지가 사용되었다. 한편, 이때 현 東國大學校의 전신이었던 中央佛專에 비치코자 한 부가 아울러 인출되었다. 우리 민족 정신사와 학술사에 있어서 또 세계 인쇄사 특히 목판 인쇄사에 있어서 우리 문화 유산의 큰 주류를 이루어 왔던 高麗大 藏經은 세계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어서, 1986년 英國의 동양학자 재임스 랙그(James Legge)가 法顯의 佛國記를 영역했을 때 사 용한 그 텍스트는 바로 이 고려 대장경본였던 것이다. 東國大學校 에서는 1957년 高麗大藏經을 보존하고 또 이를 보급하기 위한 목 적으로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기로 하여 현재 45권 계획 중 30권까

70 1. 大藏經의 雕版 지를 이미 간행하여 오고 있다. 1) 國內에서의 流布 續藏經이 간행되자 그것이 매우 빠른 속도로 또 널리 유포되었 을 것이지만, 이를 알만한 구체적인 문헌은 그리 많은 편이 못된 다. 覆刊으로서 가장 오랜 것으로는 松廣寺에 전해 오는 金光明經 文句 일것이다. 그 간기에 의해서 元貞 2년(1296, 忠烈王 22년) 濟州 妙蓮社에서 安立에 의해 복각된 것임을 알게 한다. 이 重修本 에는 비록 원간기가 없기는 하지만 義天 당시의 속장을 복각한 것 임이 분명하다. 다음 朝鮮時代에 들어와서는 天順年間( ) 즉 世祖 때 刊經都監에 의하여 중수와 복각이 여러 번 있었 으니, 그 가운데 비록 원간기는 없어도 따라서 그 원본의 구체적인 정확한 주조 연대는 알 수 없어도, 속장경이 그 모본이 됨직한 것 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가 있다. 大般涅槃經義記圓旨鈔 空 14권 圓覺經大疏釋義鈔 宗密 13권 圓覺經大疏鈔科 宗密 3권 首楞嚴經義疏注 子璿 20권 阿彌陀經通賛疏 窺基 3권 大毗盧遮那成佛經義釋 覺苑 10권 大方廣佛華嚴經合論 李通玄 120권 四分律冊繁補闕行事鈔 澄淵 14권 俱舍論頌疏鈔 常眞 8권 瑜伽師地論義演 淸素 40권 起信論疏筆削記 子璿 6권 華嚴旨歸 法藏 1권

71 Ⅰ. 佛敎의 發達 華嚴經內章門雜孔目 智儼 4권 華嚴經行願品疏 澄觀 10권 이밖에 원간기가 없는 복각본은 엄밀히 말해서 그것이 원간본에 의거한 것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新編諸宗敎藏 總錄에 그 서목이 있는 것으로 보면 이것들을 복각본이라 보아도 틀림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같은 특수한 疏鈔는 자 주 주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전하여 오는 복각 본에는 원간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대개는 복각할 당 시의 간기만이 있다. 이제 이러한 복각본으로서 刊經都監에서 天 順 연간에 이룩된 것 가운데 그 일부를 열거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다. 四分律冊繁補闕行事鈔詳集記 卷 1 天順七年, 刊經都監奉敎於尚州牧雕造 俱舍論頌疏鈔 常眞 卷 8 天順六年, 刊經都監奉敎於尙州牧雕造 大方廣佛華嚴經合論 李通玄 卷 10 天順六年, 刊經都監奉敎於全州府雕造 大方廣佛華嚴經合論 李通玄 卷 40 天順六年, 刊經都監奉敎於全州府雕造 大方廣佛華嚴經合論 李通玄 卷 40 天順六年, 刊經都監奉敎於羅州牧雕造 瑜伽論疏 卷 35 天順六年, 刊經都監奉敎於安東府雕造 起信論筆削記 卷 3 天順六年, 刊經都監奉敎於全州府雕造 이와같이 天順 6년 7년 5년의 3년에 걸쳐 刊經都監에 의하여

72 1. 大藏經의 雕版 全羅道 全州府와 羅州牧 그리고 慶尚道 安東府와 尚州牧 등지에서 주조된 것을 알 수 있다. 2) 琉球에의 贈送 世祖 7년에는 琉球國 사신 普須古 등이 귀국할 때 대장경 1부의 하사가 있었음을 世祖實錄 7년 4월 庚子 기사에 의해서 확인할 수 가 있을 것이다. 3) 宋에의 贈送 義天과 친교가 있었던 杭州의 淨源과 그 杭州의 慧因院를 비롯하 여 그 밖에 義天과 친교가 있었던 우인들에게 속장이 증송되어 宋에 도 속장이 전파되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 속장은 중국에서도 전사되고 또는 복각되었다. 특히 淨源의 법계에 속하는 圓證大師 義 和는 圓覺經大疏義鈔 華嚴旨歸 法藏和尙傳 華嚴雜孔目 圓覺經 大疏鈔科 貞元華嚴經疏 金剛般若經略疏 등 高麗의 간본을 원본으 로 삼아 복각한 일까지 있었다. 이 가운데 法藏和尙傅에는 大安 8년 (1092) 興王寺에서 敎藏都監에 의해 주소된 사실을 밝힌 원간기가 그대로 들어 있으며, 金剛般若經略疏에는 壽昌 1년 (1095)의 원간 기가 있다. 4) 日本에의 流布 日本에 續藏이 유포된 것이 壽昌과 大安연간 이후의 일 일것임 은 두 말할 것도 없지만, 대개 朝鮮 왕조 건국과 더불어 日本과의 국교가 다시 열리게 됨에 따라 대장경을 자주 日本은 청구하여 왔 었다. 世宗 때의 문신인 姜硕德이 붙인 華嚴經跋을 볼 것 같으면 義天

73 Ⅰ. 佛敎의 發達 에 의해서 주조된 華嚴經演義鈔의 경파 자체가 일본으로 전파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즉 東文選 권 103에 있는 아래와 같은 말이 곧 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동방의 淸凉大師 澄觀의 華嚴經隨疏演義鈔 경판은 高麗 때 大覺國師가 宋으로 유학하였을 적에 얻어 온 것이지만 지금은 日本으로 넘어가 있다. 이에 信浩라는 선사가 드디어 演義鈔를 개 판할 뜻을 세웠다 이리하여 信浩는 齊靖公 申敎昌에게 그 뜻을 밝히자 申敎昌은 스스로 발원하여 財施를 하고 그의 아들과 함께 이 佛事를 완수시 켰던 것이다. 그 경판은 廣州 靑龍山 淸溪寺에다가 새로 세워진 판 당에 안치되었다. 宣宗 4 년 3월 宋의 무역상인 徐戩 등이 新註華 嚴經板을 진상한 일이 있었거니와 그 新註華嚴經 즉 澄觀이 찬술한 華嚴經隨疏演義鈔의 그 경판에는 宋의 연호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 므로 朝鮮 초기 世宗 5년(1423) 11월 왕이 일본의 사신 圭籌 梵 齡 등에게 준 註華嚴經板이 徐戩 등이 진상했던 그것이었다고 하면 宋의 연호가 있을 것이지만, 相國寺에 안치된 그것이 그후 화재로 없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과연 宋板인지 또는 義天의 續藏經바로 그 경판인지 갑자기 이를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한편, 東大寺에 전해 오는 演義鈔에는 그 권마다 다같이 각각 간기로서 大安 10년 壽 昌 2년 壽昌 3년 등 契丹의 연호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宋 板과는 달리 속장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직접 高麗나 朝鮮 시대에 전파된 속장본이거나 또는 日本으로 건너간 義天의 속장경판에서 인경했거나 그 어느 하나의 것일 것이다. 현재 日本 新瀉縣 直江津市에 安國町이 있는데, 이곳에 일찌기 安國寺가 있었기 때문이다. 安國寺는 足利幕府가 인심의 안정과 불교의 흥륭 및 불의 가호와 축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足利幕府의

74 1. 大藏經의 雕版 권위를 보이기 위해서 전국에 걸쳐 66개 처에 각 1개의 사원을 새 로 세우되 그 사원의 이름을 安國寺로 한 것이다. 直江津市 安國町 에 있었던 이른바 越後安國寺도 그 66 개의 安國寺 가운데 하나였 지만, 越後安國寺에서도 朝鮮에 대장경을 청구하여 이를 얻은 바 가 있었으니, 成宗 18년 4월 足利義政은 승 等堅을 朝鮮에 보내어 越後安國寺를 위하여 7천권의 대장경을 청구하였다. 이에 앞서 成 宗 10년 5월에는 大內政弘이 승 端興을 보내어 長州安國寺의 재건 을 위하여 대장경을 청구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越後安國寺에 준 대장경이 高麗 때 인경한 것이었으리 라고 믿어지는 그 까닭은 새로 인경한 것이 아니라 전부터 있어오 는 것을 주어모아 한 질로 만들었었다는 기사때문이다. 等堅이 귀 국한 成宗 18년 7월보다 1 개월 후인 8월에 귀국한 大內政弘의 사 승 鐵牛가 때를 같이하여 대장경을 청구했을 때 그에게 정부에서 高麗 때 인경한 대장경이 두 질 국내에 있다고 말한 것도 아울러 고려되기 때문이다.1) 安啓賢 1) 이 글은 池內宏 高麗朝の大藏經, 滿鮮史硏究 中世篇 2 (1937) 岡本 敬二 高麗大藏經板の刻成, 歷史學硏究 特集號 (1953) 大屋德城 高麗 續藏雕造攷 (1937) 內藤簡輔 高麗の大覺國師に關する硏究, 朝鮮史硏 究 (1961) 池內 宏 新 たに發 見せら れた涅 槃經の 疏, 滿鮮 史硏究 中世 篇 2 (1937) 趙明基 大覺國師의 天台思想과 續藏의 業績, 白性郁博士 記念佛敎學論文集 (1959) 金庠基 大覺國師 義天에 대하여, 국사상의 제문제 3 (1959) 神尾弌春 契丹佛敎文化史考 pp (1937) 등을 參照하였음

75 Ⅰ. 佛敎의 發達 2. 天台宗의 成立 (1) 光宗代의 佛敎統合運動과 天台學의 硏究 新羅下代 禪宗의 성립은 華嚴宗 중심의 종교의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고, 나아가서는 지금까지의 전불교의 한계와 모순에 대하여 반성하고 극복하는 思想體系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神宗은 각 개인의 知性의 세련이 佛法을 깨닫는 要諦라고 주장하 며, 이른바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을 표방하여 불교의 전 역사와 전통에 대하여 반성하는 정신적 기준을 내세운 것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당시의 불교계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 면서 敎宗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禪宗 성립의 사회적 배경에 있어서 禪宗 各派의 승려들이나 그 後援者들이 대부분 지방의 豪 族들이었던 점에서 禪敎의 대립은 五頭品이나 四頭品의 대우밖에 받지 못하였던 지방의 호족들과 新羅의 중앙귀족인 眞骨과의 대립 항쟁이라는 사회현상의 한 반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新羅 하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佛敎界의 분열 대립은 後三國時代가 되면 서 政治勢力의 분열과도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더욱 복잡하게 되었 다. 각 佛敎敎團이 가지는 정치적 성격은 敎와 禪의 대립만이 아 니라 敎宗 안의 각파간의 대립, 禪宗 각파간의 相抗 등의 思想的 인 분립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 예를 들면 三 國統一과 때를 같이하여 義湘에 의하여 성립된 이후 통일된 敎團 勢力으르 지속되어 오던 華嚴宗도 後三國時代에 들어오면서 분열 되어 海印寺의 華嚴宗 敎團 내에서 後百濟의 甄萱과 연결된 觀恵 公派를 南岳派라 하고, 高麗 太祖 王建과 연결된 希郞公派를 北岳

76 2. 天台宗의 成立 派라 하여 대립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華嚴宗團의 분열 대립은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도 그대로 계속되어 제4대 光宗 때에 이르러 北岳派의 法孫인 均如가 나오면서 北岳派의 입장에 서의 통합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佛敎敎團의 분열현상은 敎宗계통의 宗團에서보다도 禪宗의 宗團 에서 더욱 심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禪宗에서는 일정한 所 依經典이 없는 대신 師資相承 이라 하여 面授를 통한 法統의 계승을 중시함으로써 같은 禪宗 안에서도 각파의 분파성이 보다 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新羅 하대부터 高麗초에 걸쳐 각지에 분 산되어 성립된 禪宗 각파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되었으 며, 이들 수많은 각파는 각 지방의 豪族勢力들과 연결되어 독립된 敎團勢力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王建은 後三國의 통일 전 쟁 중에 지방의 호족들의 통합 정책과 상응하여 이들 禪宗 각파와 도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후 後三國의 통일을 이룩한 다음에는 국가에서 禪宗 각파의 분열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九山派로 정리하여 공인하여 주었던 것 인데, 별다른 사상적인 차이가 없으면서 九山派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분파성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 러나 華嚴宗을 중심으로 한 敎宗 안의 분립이나, 禪宗 안의 상호 간의 相抗 같은 것은 그 사상적 차이에서 오는 대립성이 강한 것 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敎 宗이나 禪宗 자체내의 분열 대립은 사실상 敎禪 대립이라는 양대 주류의 대립에서 파생되어 일어났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敎 禪대립의 극복은 羅末 麗初에 있어서의 사회적 전환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불교를 중심으로 한 全思想界 의 분열, 政治勢力의 분열을 해결하는 방안이었고, 나아가 이 思

77 Ⅰ. 佛敎의 發達 想分裂을 해결할 수 있는 哲學體係의 성립이야말로 新羅와는 다 른 高麗문화의 기반을 확립하는 思想的 基盤을 마련하는 것이었 다. 高麗 제 4대 光宗代에 와서 天台學의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시 사상계의 懸案이었던 敎 禪의 대립을 극 복하려는 사상 체계를 얻고자 한 노력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국에서 天台思想에 대한 이해는 일찌기 中國에서의 天台思想 의 설립초인 三國時代부터 있어 왔으며, 高麗에 와서는 太祖 18년 에 중국 天台山의 북쪽에 있는 四明山의 天台沙門 子麟이 高麗와 後百濟에 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後三國의 통일을 눈앞에 둔 高麗 太祖에게 行軍福田 四大法師 중의 한 사람인 能兢 등이 上書한 것 에 의하면 智者大師의 一心三觀을 가지고 隋初의 會三歸一說과 대 비하여 논의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天台思想 자체가 敎宗인 華嚴 宗과 禪宗과의 절충적인 성격을 지니었던 까닭으로 華嚴宗이 발달 한 新羅에서 敎禪의 대립이 격화되기 전까지는 이를 크게 중시하 지 않게 되었고, 하대에 와서의 혼란한 사회 상태는 이러한 사상 분열의 극복을 인식하는 주체적인 세력도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었 다. 그리하여 高麗에 들어와 王權의 안정과 강화가 일단 이루어지 는 제 4대 光宗代에 와서 급진적인 政治改革에 상응하는 사상적 통일이 긴급한 현실문제로서 제기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光宗의 敎禪合作政策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때에 中國 天台宗의 13代 敎祖 가 된 義通과 天台宗의 基本敎理書인 天台四敎儀를 저술한 諦觀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었다.1) 일찌기 中國에서 吳越王이 唐 玄覺의 天台止觀의 입장에서 禪宗 의 禪을 해석한 禪宗永嘉集을 읽다가 同除四住 라는 술어가 나 와 그 의미를 法眼宗의 天台德韶에게 물었던 바 德韶는 天台宗의 韓國古代社會硏究 1) 金哲俊 高麗初의 天台學 硏究, 東西文化 제 2 집(1967) 所載

78 2. 天台宗의 成立 義寂에게 물으라 하여 天台宗의 제12대조인 義寂을 부르게 되었 다. 義寂은 이 말은 智者大師의 法華經玄義에 나오는 것이나 敎籍 이 모두 산일하여 잘 알 수 없으니 해외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하 여 高麗에 사신을 보내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光宗은 12년(961) 에 諦觀으로 하여금 敎籍을 가지고 吳越에 가게 하였다. 이때 光宗 은 華嚴骨目이나 五百門 같은 것은 國外 流出을 금하면서 그 밖에 가지고 가는 天台敎籍도 中國의 승려와 問難하여 답하지 못하면 다시 빼앗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中國에 간 諦觀은 義寂門下에 가서 10여년을 머물러 있다가 그곳에서 입적하 였다. 그 동안에 諦觀은 天台四敎儀를 저술하였으니 이 天台四敎 儀는 天台宗의 基本敎理書로서 오늘날까지 中國 日本에서 天台宗 入門의 교과서로써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다.2) 다음 義通( )은 俗名이 尹惟遠으로서 諦觀보다는 일찌 기 吳越에 건너가(947) 처음 天台德韶가 거주하던 雲居寺에 있다 가 뒤에 中國 天台宗의 제 12조인 螺溪義寂에게로 가서 그 門下에 서 수학하다가 드디어 中國 天台宗의 제 13대 교조가 되었다. 그런 데 그의 天台學은 義寂의 영향만이 아니고 본국에서 와서 함께 義 寂의 門下에 있던 諦觀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는가 한다. 義通은 뒤에 귀국하고자 하다가 忠懿王의 아들인 錢惟治의 만류로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968년 漕使 顧承微의 舍宅을 희사받아 이를 傳敎院이라 하였다. 이 傳敎院은 뒤에 宋의 조정으로부터 寶雲이라 는 사액을 받게 되어 그로 말미암아 그를 寶雲尊者라고 칭하게 되 었다. 義通의 저서로서는 觀無量壽經疏記 光明玄賛釋 등이 있었으 나 모두 산일되어 오늘날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四 明知禮가 저술한 金光明經文句記와 金光明經玄義拾遺記에서 그 저 2) 金哲俊 前揭論文

79 Ⅰ. 佛敎의 發達 술이 義通이 講한 것을 筆錄하였다가 다시 수정한 것임을 밝히고 있 어, 義通은 學僧으로서도 상당한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四明知禮와 天竺慈雲 등의 學的活動의 토대를 닦아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義 通은 그 문하에 제 14대 四明知禮와 天竺慈雲을 길러내면서 제 6대 荆溪湛然 이후 180여 년간 쇠퇴해 가던 中國 天台宗을 부흥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釋宗曉가 찬술한 實雲振祖集에 수록된 吳越國王 錢俶의 寶雲通公法師眞賛이나 淳熙年間에 會稽君王 文惠公 史浩가 지은 寶雲通公師賛에서 四明知禮와 天竺慈雲을 길러낸 寶雲尊者 義通은 天台宗의 中興之祖라고 할 수 있다고 하여 中國天台宗의 相承系譜 慧文 慧思 ① 知顗 ② 灌頂 ③ 知威 ④ 慧威 ⑤ 玄朗 ⑥ 湛然 ⑦ 道遂 ⑧ 廣脩 ⑨ 物外 ⑩ 元琇 ⑪ 淸竦 ⑫ 義寂 ⑬ 義通 ⑭ 知禮(이하 생략) 龍樹 諦觀 慈雲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외국인으로서 敎祖로 삼은 일이 거의 없는 中國 불교계에서 義通이 天台宗의 13대 교조가 되 었다는 것은 그의 역량과 활동이 대단히 컸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諦觀과 義通으로 하여금 高麗 天台學을 수출하여 中國 天 台宗의 復興基盤을 마련하여 주었던 당시 高麗 불교계의 수준은 中國 불교의 수입 단계를 지나 상호 영향을 줄 수 있는 단계로 발 전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3) 뒷날 大覺國師 義 天의 天台宗은 바로 이 諦觀과 義通이 중흥시킨 것을 재수입한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편 당시 中國의 불교계에서는 禪宗 방면에서도 스스로 그 流 弊를 통론하면서 禪宗의 입장에서 敎宗을 흡수하는 思想體系를 수 립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光宗은 이러한 새 경향 3) 金哲埈 前揭論文

80 2. 天台宗의 成立 의 禪宗의 수입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니 이것은 諦觀과 義通에 의 하여 敎宗의 입장에서 禪宗을 흡수하려는 사상체계로서의 天台思 想이 체계화되고 정비되는 과정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며 불가 분의 表裏關係를 이루는 것이었다. 法眼宗의 개조인 淸凉文益이 天台僧 子麟이 高麗에 오던 해인 太祖 18년에 金陵의 報恩禪院에서 크게 禪道를 擧唱하면서 宗門十 規論 1卷을 저술하여 당시 禪宗의 流弊를 통론하면서 敎 禪의 長 短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文益의 法眼宗을 중심한 禪宗의 系譜

81 Ⅰ. 佛敎의 發達 제자에 高麗의 승려인 道峯慧炬와 靈鑒 등이 있었으므로 그의 사상은 高麗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그 중에도 道峯慧炬는 뒤에 귀국하여 光宗의 知遇를 받아 光宗 19년 (968) 새로 僧階를 마련할 때에 제 1대 國師가 되었으며, 그리고 道峯院에 주석하여 敎化를 크게 떨쳐 당시 高麗에 있어서 3대 禪院의 하나로까지 지 칭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다음 道寒慧炬와 같이 文益의 문하에 있었던 天台德韶는 禪僧이 면서 다른 한편으로 天台智者大師를 사모하여 그의 念佛信仰을 계 승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며, 다시 그 德韶의 문하에서 永明延壽가 나 오면서 法眼宗은 敎勢를 크게 떨치게 되었다. 永明延壽는 宋代 禪宗 의 대표적 저서인 宗鏡錄 100卷을 저술하여 華嚴宗 法相宗 天台 宗 등 諸敎學의 長短을 절충하여 이 것을 禪宗의 입장에서 체계화하 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儒 佛 道 3敎를 일원적으로 이해하는 기준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며, 또한 그는 萬善回歸集을 저술하여 禪과 念佛의 융합을 도모하기도 하여 天台宗이나 律宗에 영향을 주 었으므로 白蓮社念佛의 제6조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敎禪一 致의 사상체계를 얻고자 노력하던 光宗은 이 延壽의 著書를 읽고 크게 감명하여 사신을 보내어 延壽에게 제자의 예를 취하고 또 고 려승을 보내어 그 문하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光宗의 후 원으로 中國에 가서 延壽의 心印을 받은 고려승이 智宗 등 36인에 이르렀다.4) 智宗은 원래 新羅하대에 성립된 禪宗 九山派 중의 하 나인 曦陽山派의 제 4대 宗主 逈超의 嗣法弟子로서 光宗 10년, 光 宗의 후원으로 吳越에 가게 되었다. 그는 吳越에서 먼저 永明寺의 延壽에게 가서 心印을 전수받고 이어 光宗 12년 天台宗의 본거인 國淸寺에 가서 淨光에게 大定慧論과 天台敎學을 배웠다. 이리하여 4) 金哲埈 前揭論文

82 2. 天台宗의 成立 智宗은 天台敎學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모양으로 光 宗 19년에는 歲抄僧統知內道場功德事 賛寧5)과 天台縣宰 任埴 등 의 청으로 傳敎院에서 大定慧論과 法華經을 강론하기도 하였던 것 이다. 智宗은 그후 光宗 말년경에 귀국하였는데 그의 居頓寺圓空國 師勝妙塔碑文에 의하면 光宗이 그를 보기를 鳩摩羅什과 迦葉摩騰 이 中國에 올 때의 환영보다도 더 하였다는 것을 보아 그에 대한 光宗의 우대와 또한 그 기대가 어떠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智宗은 顯宗 9년 입적할 때까지 王師가 되고, 또 당시 禪宗의 중심사찰인 廣明寺의 주지가 되는 등의 활동을 보이고 있으나 光宗 의 薨去로 인하여 敎禪合作의 사상체계로서의 法眼宗이나 天台學 에는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 같다. 한편 光宗의 法眼宗에 대한 후원은 智宗 등의 승려를 中國에 보내 어 유학시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光宗 22년(971) 光宗 이 元和殿에서 大藏經을 開讀할 때에 내린 詔書에 의하면 당시의 국내 사원 가운데 특별히 3개의 사원만을 지적하여 변동하지 말고 그 문하 제자들만이 상속 지적하여 대대로 끊이지 말게 할 것을 法 規로 삼게 하였는데, 이때에 지정된 사원이 바로 道峯院 曦陽 院 高達院이었다.6) 이중 앞에서 말한 慧炬가 주지하였던 道峯院 과, 兢讓 逈超에 이어 智宗을 배출한 曦陽院은 모두 法眼宗 계통 의 寺院이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것이며, 그 밖에 高達院도 鳳林山派의 사찰로서 그 3대 宗主인 璨幽가 주지하였던 곳인데, 이 璨幽는 法眼宗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다. 元宗 大師惠 眞塔碑文에 의하면 璨幽는 일찌기 鳳林山派의 제2대 審希에 嗣法 5) 賛寧은 원래 激海人으로서 宋에 귀화한 사람이다. 그는 律宗계통의 승려였으며 宋高僧傳의 著者이기도 하다. 6) 金廷彥 撰 慧目山高達禪院元宗大師惠眞塔碑文의 陰記 참조. 朝鮮金石總覽 上 p

83 Ⅰ. 佛敎의 發達 한 후 中國에 가서 石頭希遷 계통의 投子大同에게 수업하기도 하였 으며, 귀국 후에는 太祖부터 光宗 때까지 4대 왕실의 돈독한 歸依 를 받아 그가 주지하던 高達院을 당시 전국 제일의 禪刹로 만들었 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光宗의 法眼宗 수입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居頓寺圓空國師勝杪塔碑文에 의하면 智宗 등을 永明延壽에게 보낼 때에 智宗의 꿈에 나타나 中國에 갈 것을 권하였고, 또 中國 에서 귀국할 때에도 다시 꿈에 나타나 귀국을 권유한 사람이 璨幽 였다는 것을 보아7) 추측할 수 있다. 이로 보아 璨幽가 입적한 것은 智宗 등이 中國에 가기 바로 전해인 光宗 9년(958)이었으나 그전 부터 璨幽는 光宗의 法眼宗 수입을 추진하는 일에 적지 않은 역할 을 하였던 것 같다. 光宗은 華嚴宗의 均如를 후원하여 華嚴宗團을 통합하려고 하는 한편, 수많은 禪僧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후원하여 주고 있었 으며, 僧科制度의 마련에 있어서도 敎宗選과 禪宗選을 구분하고 또 僧階制度도 大德부터 三重大師까지는 敎宗과 禪宗이 같았으나 그 이상의 僧階는 敎禪을 구분하여 禪宗이면 禪師 大禪師, 敎宗이면 首座 僧統으로 나누었던 것 등을 보아 光宗은 敎宗과 禪宗을 크게 구분하여 양립시키는 敎團政策을 취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王 師 國師制度에 있어서도 光宗 19년(968) 禪宗 계통의 法眼宗僧 慧炬를 國師, 敎宗 계통의 華嚴宗僧 坦文을 王師로 봉하게 되었 던 것 같다. 이로 보아 光宗은 五敎九山의 佛敎宗團을 敎 禪으로 구 분, 양립시켜 敎宗은 敎宗대로 禪宗은 禪宗대로 발달시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光宗은 敎禪의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 던 新羅佛敎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天台學과 法眼宗을 통하여 그 다음의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 7) 崔冲 撰 賢溪山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文, 朝鮮金石總覽 上 pp

84 2. 天台宗의 成立 다. 天合宗과 法眼宗은 그 기본입장은 비록 敎宗과 禪宗이라는 차 이는 있었지만은 다 같이 敎禪의 대립을 절충하는 사상체계였던 것이며, 실제로 智宗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양자의 思想運動은 상호 보완하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光宗 이후 天台學의 연구는 大覺國師 義天의 대두까지 100여년간이나 중단되었고, 法眼宗은 다시는 대두하지 못하고 끊어지고 말았으나, 光宗의 적극적인 후 원을 받아 활약하였던 天台學의 諦觀 義通, 法眼宗의 慧炬 智宗 등8)의 업적은 우리 나라의 초기 中世思想의 체계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天台思想의 理解體系를 수립하게 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뒷날 大覺國師 義天이 나와 天台宗을 다시 수립 할 때에 그 전통 적인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었다. 義天 때에 와서 天台宗의 諦 觀이나 義通이 다시 중시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法眼宗의 智宗 도 天台宗 계통의 승려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義 天은 智宗에 대한 祭祀에 그 祭文을 직접 짓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義天은 宋나라에 갔을 때 雲門宗의 圓照宗本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이 圓 照宗本은 종파는 비록 다르지만은 法眼宗의 延壽가 15년 이상이나 주지하였던 永明院(후에 壽寧禪院으로 고침)에 계승 住持한 사람 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法眼宗의 智宗에 대한 義天의 관심과 무관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2) 顯宗代 이후의 華嚴宗 法相宗의 대두와 佛敎界의 矛盾 光宗代에 이미 天台宗 思想의 理解體系가 성립되었던 것이나 光 8) 高麗 高宗 32年에 찬술된 白蓮社의 圆妙國師中眞塔碑에 의하면 義天 이전의 天台宗의 수입자로서 新羅의 玄光에 이어 義通 諦觀 智宗과 함께 德善을 들 고 있으나 그의 傅記는 불명이다

85 Ⅰ. 佛敎의 發達 宗의 사후, 그의 과격하고도 급진적인 改革政治에 대한 反撥政治 로써 나온 景宗代 政治의 반동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紛亂 때문에 그때에 天台宗은 하나의 宗派로서 성립되지 못하고 말았 다. 다시 말하면 景宗이 즉위하자 光宗정치에 대한 반발로 光宗때 에 주체적인 구실을 하던 세력들을 도태해 버릴 때에 불교계에 있 어서도 光宗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敎禪合作의 새로운 思想 體系의 수립을 모색하고 있던 인물들이 도태당하고 그에 따라 天 台學이나 法眼宗도 억압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吳越에 가 있던 義通이나 諦觀도 귀국할 수 없었으며9) 法眼宗에 있어서 도 智宗이 귀국하였으나 光宗 사후에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 며 慧炬와 智宗 이외에는 그 이름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말았던 것 이다. 그 뒤 成宗의 정치는 행정 조직의 정비에 치중하는 면에서 急進(光宗때의 경향) 세력과 反動(景宗때의 경향) 세력의 대립경 향을 현실적인 타협에서 해소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보수 적 경향의 정치가 대두되던 시기에 있어서는 불교계에 있어서도 敎 禪 대립의 극복이라는 사상적 활동도 둔화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리하여 成宗을 전후한 시기의 불교계에서는 지금까지 禪宗 勢力에 눌렸던 敎宗 계통의 전통적인 華嚴宗이 高麗의 지배세력과 밀착되면 서 다시 점차 대두함으로서 禪宗에 대한 劣勢를 벗어나 敎禪 兩立 狀態를 이루게 되었다. 그 다음 對契丹戰을 겪고 난 顯 宗 文宗代가 되면서 평화적 기운의 고조와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華 嚴宗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어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또 같은 敎宗 계통의 法相宗이 새로 대두하여 이제는 禪宗勢力을 압도 하고 敎宗 계통의 華嚴宗과 法相宗이 양립하는 상태를 이루게 되었 다. 이에 따라 大藏經의 간행과 같은 佛敎經典의 정리가 시행되는 등 9) 金哲埈 前揭論文

86 2. 天台宗의 成立 의 王室佛敎 貴族佛敎로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나 그에 비례하 여 保守的인 경향이 더욱 짙어가고 있었다. 당시 華嚴宗의 대표적 인 승려로서 앞서서는 光宗代의 歸法寺의 均如와 普願寺의 坦文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浮石寺의 決凝과 靈通寺의 爛圓이 있었으니, 이 爛圓의 문하에서 大覺國師 義天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의 華嚴宗 寺刹로서는 光宗 이후의 중심 사찰인 歸法寺와 文宗 이 후의 중심 사찰인 興王寺를 비롯하여 興敎寺 弘護寺 佛日寺 眞 奉先寺靈通寺龜山寺崇善寺妙智寺松川寺歸信 寺洪圓寺浮石寺海印寺華嚴寺普願寺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 觀寺 었다. 다음에 法相宗의 대표적인 승려로서는 玄化寺의 尙之, 法泉 寺의 海麟, 金山寺의 韶顯, 漆長寺의 鼎賢, 崇敎寺의 玄湛 등이 있 었으며, 이 가운데 韶顯의 문하에서 義天의 同母弟인 道生僧統窺 가 나와서 義天과 대립되는 입장에 있었던 것 같으나 후에 政治的 인 투쟁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 法相宗의 대표적 사찰로 서는 顯宗이 그 부모의 願刹로서 세워 그후 이 法相宗의 중심 道 場이 된 玄化寺를 비롯하여 崇敎寺 光敎寺 三川寺 金山寺 法 住寺 海安寺 法泉寺 水多寺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華嚴宗이 나 法相宗은 法性宗과 法相宗이라는 敎理面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차이가 있어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었지만은 양자 모두 中央集 權體制의 안전한 운영만을 위주하여 기성 집단세력의 안전만을 도 모하는 왕실이나 外戚勢力 및 그와 연결된 文臣貴族 등의 지배 세 력과만 지나치게 밀착됨으로 말미암아 일반 民衆佛敎와의 유리도 가 점점 심하여지면서 여러가지의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왕실 이나 귀족들은 각기 願利이라는 명목의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그 자신의 소생들을 출가시켜 직접 그 寺院 勢力 과 연결을 맺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華嚴宗의 爛圓은

87 Ⅰ. 佛敎의 發達 仁州(慶源) 李氏系譜

88 2. 天台宗의 成立 顯宗代부터 德宗 靖宗 文宗에 걸쳐 외척세력으로서 크게 세력 을 떨쳤던 安山金氏로 顯宗의 妃 元成王后 元惠王后 元平王后 와 남매간이었으며, 그 밖에 華嚴宗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대 표적인 貴族은 海川崔氏의 崔冲과 그 子孫, 坡平 尹氏의 尹瓘, 平 山朴氏의 朴寅亮 등이었다. 다음에 法相宗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대표적인 귀족은 仁州李氏와 水州崔氏였다. 그 중 仁州李氏에서 는 金山寺의 韶顯을 비롯하여 玄化寺의 世良과 義莊 등이 있었 고, 韶顯의 先師인 法泉寺의 海麟도 仁州李氏의 外孫이어서 이 仁州李氏 일파에서 玄化寺를 중심으로 한 法相宗의 세력을 장악 하고 있었다. 法相宗의 宗團 내에서 이러한 仁州李氏 勢力과 대 립하고 있던 것은 水州崔氏와 淸州金氏였다. 水州崔氏에서는 顯 宗代 玄化寺를 창건 할 때에 別監使로서 그 창건의 총책임을 맡 았던 崔士威가 있었고 그 자손에도 玄化寺의 尚之와 法泉寺의 觀 奥가 있었다. 그리고 淸州金氏에서는 英念-順英-德謙으로 이어 지는 玄化寺의 일파가 있어 仁州李氏의 李資謙의 아들인 義莊과 대립하여 德謙 같은 경우는 李資謙의 세력이 몰락한 다음에 비로 소 玄化寺에 돌아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당시 불교가 華嚴宗이나 法相宗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그 敎團勢力이 각 貴族勢力과 연결됨에 따라 일어난 모순으로 지 적할 수 있는 것은 우선 敎理面에서 관념화되고 보수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활발한 思想的 활동이 둔화되는 대신 으로 佛敎儀式 등의 형식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한편 社會經濟的인 면에서는 靖宗代의 四子出家之法이나 文宗代 의 三子出家之法의 시행은 더욱 僧侶數의 증가를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왕실이나 귀족들의 願利이라는 명목의 수많은 寺院建立은 그 들의 財產 위장이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어서 국가의 租税나 力

89 Ⅰ. 佛敎의 發達 役의 대상이 되는 公田이나 役丁의 감소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런 데 이러한 佛敎敎團의 社會經濟的인 모순에 대하여서는 일찍부터 인식을 가져 이미 成宗代에 崔承老의 비판이 있었으며, 그 뒤에도 顯宗 8년(1017)에는 집을 버려 사찰로 만드는 것과 婦女가 尼僧 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 4년 뒤에는 다시 사원에서의 酿 酒를 금하였으며, 그 다음 文宗 10년 (1056)에는 僧侶를 沙汰시킨 일 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기로 내려오면서 寺刹數의 증가와 아울러 그 모 순도 더욱 커졌던 것은 물론이었다. 한편 王室이나 귀족들과 연결된 각 사원이나 그 敎團勢力은 자 연 그들의 政治勢力과도 직결되게 마련이어서 각 교단세력간의 알력 은 貴族들의 政治的인 싸움을 더욱 복잡하게 하였으며, 반대로 왕 실이나 귀족들의 정치적인 싸움은 또 敎團勢力간의 알력을 가중 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敎團 사이의 대립으로서 가장 대표 적인 것은 華嚴宗의 본거인 興王寺의 敎團勢力과 法相宗의 본거인 玄化寺의 敎團勢力의 대립이었다. 원래 華嚴宗과 法相宗은 같은 敎 宗에 속하나 이 兩宗은 敎理面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 다. 즉 敎宗을 크게 둘로 나누면 法性宗과 法相宗으로 나뉘어지는 데, 法性宗은 일체의 宇宙萬有는 동일의 法性에서 생겼으며, 일체 衆生은 모두 成佛할 성품이 있다고 하는 宗旨로써 華嚴宗을 비롯하 여 三論宗 天台宗이 이에 속하며, 法相宗은 宇宙萬有의 本體보다는 현상을 5位 75法 5位 100法 등으로 세밀히 분류 설명하며, 중 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5性이 각각 다르다고 하여 영구 히 成佛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宗旨로써 俱舍宗 法相 宗이 이에 속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당시의 華嚴宗과 法相宗에서

90 2. 天台宗의 成立 모두 新羅時代의 元曉佛敎의 전통을 내세우고 있었으나10) 文宗 宣宗代에 걸쳐 華嚴宗의 僧統으로 義天이 있었던 데 비하여 法相 宗의 僧統에는 韶顯이 각기 兩敎團勢力의 대표자로서 거의 동시에 興王寺와 玄化寺를 중심 무대로 하여 활동하면서 대립되어 있었 다. 續藏經의 간행 사실만 보아도 義天이 자신이 주지하는 興王寺 에 敎藏都監을 설치하고 華嚴宗의 元曉 義湘 및 賢首法藏 淸凉 澄觀 圭峯宗密 등의 章疏를 중심으로 간행할 뿐만 아니라 따로 華嚴宗 관계의 것만을 모아 圓宗文類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비하여 韶顯도 자신이 주지하던 金山寺에 廣敎院을 설치하고 주로 慈恩窺 基 撰述의 法華玄賛 唯識述記 등의 法相宗 관계의 章疏들을 간행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11)그런데 이 兩敎團勢力의 대립을 더욱 심 각하게 한 것은 정치세력과의 연결이었다. 法相宗의 후원 세력은 주로 外戚인 仁州李氏 세력이었던 데 비하여 華嚴宗의 후원세력은 왕실 및 仁州李氏 세력과 대립된 귀족이었다. 그리하여 義天은 당 시 불교계의 모순을 華嚴宗 및 天台宗의 입장에서 개혁하려 하다 가 宣宗 말년경, 당시에 득세하던 仁州李氏 세력에 밀려나 海印寺 에 퇴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가 다시 興王寺로 돌아올 수 있 었던 것은 그의 후원 세력인 肅宗이 仁州李氏세력인 李資義 일당 을 축출하고 王位에 오른 다음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肅宗代에 그 세력이 일시 후퇴되었던 仁州李氏 세력은 睿宗代가 되면서 다시 득세하게 되자 法相宗의 세력도 다시 대두 하여 睿宗 즉위년 12월에 玄化寺僧 德昌이 王師가 되었으며, 그 10) 高麗 당시 華嚴宗에서 義湘과 함께 元曉를 한국 華嚴宗의 始祖로 내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法相宗에서도 韶顯의 塔碑인 金山寺慈德王師眞應塔碑에 의하면 法相宗의 歷史를 말하여 曁乎晓法師導之于前 賢大統踵之於後 라고 하여 元曉를 그 始祖로 추앙하고 있었다. 11)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文. (朝鮮金石總覽 上 p

91 Ⅰ. 佛敎의 發達 뒤 마침내 李資謙이 반대세력을 몰아내어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 의 친족들을 요직에 布列할 때에 그와 아울러 자신의 아들 義莊을 首座로 삼아 法相宗團의 세력을 장악하게 하였다. 睿宗 7년 8월에 義天의 同母弟로서 法相宗의 승려가 되었던 道生僧統 窺가 巨濟 縣으로 유배되고, 같은 法相宗 승려인 崇敎寺의 資尙이 유배되는 중도에서 誅殺된 것도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法相宗의 승려로서 義莊의 핍박을 받아 한때 三角山의 香林寺에 은거하였 던 金德謙의 墓誌銘에 의하면 李資謙의 아들인 義莊이 玄化寺에 거하면서 권력에 의지하여 諸老師有德者를 겁박하여 門弟로 삼았 다는 것을 보아 당시 불교계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12) 그 뒤 이 義莊은 李資謙이 궁궐을 침입할 때에 廣化寺의 僧侶 3백 여인을 거느리고 宮城밖에서 응원하였으며, 마침내 李資謙이 패하 자 그는 金州山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文宗에서부터 仁 宗까지 7대 약 7,80여년간 왕실과 重叠의 婚姻關係를 맺고 있었 을 뿐만 아니라 法相宗의 寺院勢力과도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던 仁州李氏 세력 내에서도 당시 基層社會와 유리되어 공허 한 분위기에 빠진 貴族文化와 政治權力과 결탁하여 타락한 중앙 의 불교계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하고 반성하는 기운이 앞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즉 李子淵의 제 4자인 顗는 左散騎常 侍 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는데 일찌기 春州道監倉使 때에 淸平 山(春川)에 普賢院(후에 文殊院으로 개명)을 창건하였으며 그의 아들 李資玄은 參禪을 좋아하여 일찌기 관직을 버리고 그 아버지 가 창건한 文殊院에 거하여 淸平居士라 자호하고 修道生活로 餘 生을 보냈던 것이다. 특히 李資玄은 淸平山에 은거하면서 다시 漢 江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끝까지 그대로 지켰다든가, 佛敎 12) 李蘭暎 韓國金石文追補 p

92 2. 天台宗의 成立 가운데에도 貴族과 밀착된 華嚴宗이나 法相宗을 버리고 禪宗을 택 하여 오직 參禪과 看經만으로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은 開京 중심의 貴族文化와 귀족 중심의 종교의 모순에 대한 심각한 반성에서 나왔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13) 한편 敎宗 계통의 華嚴宗과 法相宗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당시의 불교계에 있어서 禪宗은 禪宗대로 華嚴宗과 法相宗에 반발 하면서 강인하게 존속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禪宗은 華嚴宗 과 法相宗 중심의 불교계의 모순에 대하여 반성하고 비판하는 입 장에 있었다. 그러나 禪宗은 그것대로 모순에 차 있어서 오히려 불 교계의 모순을 더욱 심각하게 하고 있었다. 원래 禪宗은 그것이 성 립되는 新羅下代에 있어서는 중앙의 眞骨貴族에 사회적 기반을 가 지고 있었던 華嚴宗 중심의 敎宗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하는 새로 운 思想體系로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더우기 禪宗을 받아 들인 사회적 신분이 주로 당시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 고 있던 지방의 豪族들이었던 점에서 그것은 바로 敎宗 중심의 古 代的 思惟方式을 부정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古 代社會의 잔존세 력인 新羅가 망하고 高麗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 진 다음에는 이제 한 단계 전진하여 호족 자체의 고대적 본질에서 나온 분열을 극복하고 그것을 통합한 기반 위에서의 새로운 문화 의 건설이 요구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禪宗도 그 자체의 분파적인 경향을 지향하고, 나아가 敎宗에 대하여 단순히 반발만 하는 단계 를 넘어 그것을 흡수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思想體系로의 진전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 에 따라 대두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法眼宗이었으나 天台學과 마찬 가지로 光宗이 사망한 후 그의 급진적인 改革政治가 후퇴함과 아 ) 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朝鮮金石總覽 上 pp

93 Ⅰ. 佛敎의 發達 울러 사상적인 면에서의 통합운동도 둔화됨에 따라 法眼宗의 수 입도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우기 顯宗 이후에는 禪宗은 華 嚴宗이나 法相宗에 눌려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이들 敎宗 에 반발하는 폐쇄성과 그 분파성만이 더욱 강화되어 왔던 것이었 다. 다시 말하자면 高麗중기에 와서도 禪宗은 新羅시대 敎宗에 반 발하면서 대두되던 그 당시의 豪族佛敎的인 본질을 극복하지 못 하고 오히려 그 자체가 九山派로 나뉘어 대립한다는 분파성만이 의연히 계속되었고 나아가 敎宗과의 대립만이 더욱 심화되어 갔 던 것이었다. 義天이 당시의 敎宗보다도 禪宗에 대하여 보다 신랄 하게 비판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 자신이 華嚴宗의 승려였기 때문만이 아니고 禪宗의 이러한 모순에 대한 철저한 의식 때문이 었다고 본다. 결국 義天은 이상과 같은 華嚴宗이나 法相宗을 중심으로 한 敎 宗은 敎宗대로, 그리고 그에 반발하는 禪宗은 禪宗대로 모순에 차 있으며, 나아가 禪敎의 분열 대립만이 첨예화되어 가는 당시 불교 계의 모순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末法時代라 선언하고14) 드디 어 敎理面에서나 敎團 양면에서 일대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 이다. 14) 義天은 그의 大覺國師文集 곳곳에서 義天 당시의 文化界와 佛敎界에 대하여 비판하고 末法時代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大覺國師文集 卷5 請入宋求法表 大覺國師文集 卷11 見大宋淨源法師致語 大覺國師文集 卷15 般若道場琉 大覺國師文集 卷16 祭景德國師文二首 大覺國師文集 卷16 示新參學徒緇秀 大覺國師文集 卷16 示新參學徒智雄 ① ② ③ ④ ⑤ ⑥

94 2. 天台宗의 成立 (3) 大覺國師 義天의 佛敎改革運動과 天台宗의 創立 1) 義天의 佛敎改革運動과 敎觀并修 義天은 文宗의 제 4王子로서 11세 때에 出家하여 景德國師 爛 圓의 문하에서 처음 수업하기 시작한 곳이 華嚴宗의 靈通寺이었으 며 義天의 사후 그의 遺骨을 安置한 곳도 이 靈通寺의 東山이었다. 그리고 義天은 일찌기 中國 華嚴宗의 제 3祖인 淸凉澄觀의 글을 보고 그 다음부터 慧解가 日進하였다는 것을 보아 그가 靈通寺에 처음 공부한 것이 華嚴經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23세 때 제 일 먼저 강론하기 시작한 經典도 貞元新譯의 華嚴經과 그 疏였다. 그 뒤 義天이 宋에서 귀국한 이래 계속 주지하였던 興王寺는 金字 華嚴經을 봉안한 高麗 華嚴宗의 본거이었으며, 그리고 海印寺에 퇴거하기 직전 한때 주지하였던 洪圓寺도 賢首法藏 淸凉澄觀 등 華嚴祖師의 九祖堂이 있는 華嚴宗의 사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義 天이 宋에 갔을 때에 만나게 된 50 여인의 中國 승려15) 중에도 가 장 오래 접촉하고 영향을 받은 사람은 華嚴宗의 晋水淨源이었다. 義天이 淨源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미 渡宋前이었으며 義 天이 宋에 갔을 때에는 義天을 위하여 慧因院이라는 절에서 華嚴 을 특별히 강하여 주었고 그 講이 끝난 다음에는 傳法의 표징으로 義天에게 手爐와 拂子를 주었다. 이로 인하여 淨源은 義天을 華嚴 15) 義天이 宋에서 만났거나 관계를 맺었던 승려를 들면 華嚴宗의 승려로서는 浄源을 비롯하여 有誠 希仲 善聰 慧淸 智生 道亭 道璘 淨因 希俊 등이며, 다음 天台宗의 승려로서는 從諫을 비롯하여 惟勤 元淨 可久 등이며, 그 다음 律宗의 승려로서는 擇其 冲羽, 禪宗의 승려로서는 宗本 了元 懷璉 慧圓, 法相宗(唯識學) 의 승려로서는 慧琳 善淵, 그리고 梵學에는 天吉祥. 紹德 등이 있었으며 기타 所屬宗派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도 仁岳 契嵩 辯眞 希湛 法隣 守長 希辯 利涉 行端 守明 洪圆 宗喜 등을 들 수 있다

95 Ⅰ. 佛敎의 發達 僧統이라고 불렀으며, 사실 13才 때에 義天이 받은 祐世僧統은 華 嚴宗의 僧階였던 것이다. 義天의 佛敎에 대한 이해의 폭은 金富 軾이 찬술한 靈通寺의 大覺國師塔碑文에 의하면 華嚴宗뿐만 아니 라 漸頓大小乘의 經律論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 었고, 그 밖에 佛敎 이외의 儒學이나 老莊思想까지도 섭렵하였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 대단히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義天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중심이 된 것은 華嚴宗이었으며 그 자신도 華嚴宗 승려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義天은 刊行 豫定目錄인 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함에 있어서 卷 1의 제일 앞 海東傳華嚴大敎沙 에 華嚴經을 배당하였으며 그 序文에 자신을 門 이라고 자서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가 편찬한 新集圓宗文類 의 圓宗은 바로 華嚴宗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의 序文에 의하면 華 嚴宗의 理論은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더우기 근세에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종(華嚴宗)의 무리들이 근본을 버리고 枝末을 좇아 억설이 분분하므로 祖師의 玄 旨가 막히어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이 10중 7,8이나 된 것을 개탄하 여 廣文을 간추려 분류하여 要覽으로 만들었다 16)고 한 것을 보아 華嚴宗의 입장에서 華嚴宗의 여러가지의 異說을 종합 정리하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義天이 華嚴宗의 敎理를 먼저 정리하려고 하였던 것은 華嚴經의 강론에 있어서도 東晋 때에 번역된 60卷 本, 唐 則天武后 때에 번역된 80卷本 및 貞元 즉 唐 德宗 때에 번역된 40卷 등의 모두 180卷을 해석한 古人相承의 여러가지의 說이 있었으나 이것을 모두 쓰지 않고 오직 澄觀의 淸凉疏만에 의 거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義天은 宣宗의 願刹 로서 華嚴宗의 사찰이었던 洪圓寺에 九祖堂을 설치하고 그때까지 16) 大覺國師文集 卷 1 新集圓宗文類序 참조

96 2. 天台宗의 成立 통일되지 않았던 華嚴宗의 祖譜를 새로 정하여 馬鳴 龍樹 天親 佛陁 光統 帝心 雲華 賢首 淸凉 등을 九祖로 하였다는 것도 義天의 華嚴宗의 敎理와 宗團의 통합에 대한 노력의 일단을 말하 는 것이다. 義天이 華嚴思想 가운데 가장 중요시한 것은 法界緣起論이었고 또한 그것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三觀五敎였다. 義天 이 新參의 學徒 緇秀에 보이는 글에 의하면 다함 없는 佛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法界의 法門이다. 진실로 그 法은 중생에게 있어서는 만가지 迷惑이 되고 보살에 있어서는 만가지 行이 되며, 如來에 있어서는 만가지 德이 된다. 그러므로 毗盧遮那로 하여금 그것을 얻게 하면 그것을 果分이라 하고, 普賢이 그것을 얻으면 그것을 因分이라 한다. 衆生들은 날 마다 쓰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法界의 道가 적은 것이 다. 구태여 그것을 말해 보면 대강 세 가지가 될 것이다. 만일 깨달아 그것을 버리면 본래 하나도 없는 것이어서 차거나 이지 러짐이 저기에 있는 것이요, 나에게 있어서는 無爲이니 이른바 情見이 부서지고 法界가 뚜렷이 나타나면 모든 衆生이 成佛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17) 라고 하여 華嚴思想의 法界緣起를 간명하게 설명하고 이어 그것을 窮究하려면 먼저 三觀五敎로써 入道의 眼目으로 할 것을 권하고 있 다. 義天이 말한 三觀五敎는 華嚴宗에 있어서의 實踐遂行과 이론적 인 敎理組織을 말하는 것이다. 즉 三觀은 法界三觀의 약어로 華嚴寺 에서 法界의 眞理를 證得하기 위하여 닦는 三重의 觀界 즉 眞空觀 (모든 法은 實性이 없어 有와 空의 두가지 집착을 떠난 眞空인 줄로 관함), 理事無礙觀(차별있는 事法과 평등한 理法은 분명하게 존재하 17)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97 Ⅰ. 佛敎의 發達 면서도 서로 융합하는 것임을 관함), 周遍含容觀(宇宙間의 온갖 물건 이 서로서로 일체를 함용하는 것으로 관함)을 말하는 것이며, 五敎는 華嚴宗의 佛敎敎判論으로서 小乘敎(阿含經) 大乘始敎(解深密經) 終敎(楞伽經 勝蔓經) 頓敎(維摩經) 圓敎(華嚴經)를 말하는 것이 어서 결국 三觀五敎는 學問과 實踐 즉 敎觀을 兼修하라는 것이다. 그 런 데 義天이 보기에는 당시 高麗 華嚴宗은 末法闘爭의 시기를 당하여 矛盾이 격화되어 그 道 자체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義 天은 모순에 찬 高麗의 華嚴宗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내가 항상 한탄하는 것은 海東의 先代 여러 스님들의 남긴 기록 은 그 學問이 精妙하거나 넓지 못한 데다가 억설이 더욱 많아서 몽매한 後生들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한 책도 없기 때문에, 聖 敎를 밝은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구 구히 남의 보배만 세고 있는 것이니 세상에서 말하는 均如 梵 雲 眞派 靈潤 등 여러 사람들의 책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 말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이 없어 祖道를 어지럽게 하므 로 後生을 미혹시키는 것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18) 이 곳에서 義天이 均如 등의 著述을 비판하는 이유로써 들고 있 聖敎를 밝은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하고 일 생 동안 구구히 남의 보화만 세고 있다 는 말은 觀 즉 實踐 遂行 는 바 과는 유리됨으로써 經論에만 집착하여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여진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19) 이리하여 義天은 均如 이래의 高 麗 華嚴宗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敎觀을 并修하여야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18)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19) 大覺國師文集 卷 17 偶作 이라는 詩에는 圓經本是出離緣 末學區區未勉論 依傍求名深有誡 可憐終日 不知愆 이라고 하여 자신이 宗으로 하는 華嚴宗 자체 의 矛盾에 대하여 통탄한 나머지 그것을 詩로서 읊기도 하였다

98 2. 天台宗의 成立 가만히 생각하면 聖人이 敎를 편 목적은 行을 일으키는데 있 는 것이므로 다만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실은 몸으로 행동 하게 하려는 것이니 어찌 한쪽에만 매달려 있는 박처럼 실용이 없어서 되겠는가 20) 라 하고, 이어 晋州淨源과 淸凉澄觀의 말을 인용하여 敎觀并修를 내세우고 있었다. 즉 淨源의 말은 觀을 배우지 않고 經만 배우면 비록 五周의 因果를 들었더라 도 三重의 性德은 통하지 못하며, 經은 배우지 않고 觀만 배우 면 비록 三重의 性德을 깨쳤으나 五周의 因果는 분별하지 못한 다. 그러므로 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經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21) 라 하는 것이며, 또한 澄觀의 말은 마음을 비춰 보지 않고 헛되이 性靈을 저버린다 22) 는 것인데, 義天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결론적으로 華嚴을 받으면 서 觀門을 공부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講主라 하여도 나는 믿지 않는다고 못박아 말하고 있었다. 義天은 이와 같은 實踐을 떠나 觀念化된 당시 華嚴宗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敎觀并修를 내세우려고 할 때에 자연 모순이 격화된 高麗 華嚴宗이 아닌 그 이전의 新羅 華嚴宗의 傳統을 재인 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義天은 新羅의 元曉와 義湘 을 추모하고 그들의 思想을 祖述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義天 의 이와 같은 新羅 華嚴宗의 傳統에 대한 재인식은 결코 新羅時代 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復古가 아니라 義天 당시의 모순을 극복하 20)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21)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22) 大覺國師文集 卷 16 示新參學徒緇秀

99 Ⅰ. 佛敎의 發達 여 그것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思想的 活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義天 자신의 불교에 대한 비관 기준이 설정될 수 있었던 것은 佛敎 전반에 걸친 元曉 義湘의 理解體系가 가지는 思想能力이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고, 나아가 그것 은 그 다음에 변천하는 사회에 있어서도 새로운 文化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나 올 수 있었던 것이다. 義天은 新集圓宗文類序에서 우리 海東에서는 浮石尊者(義湘)가 그 法을 구한 뒤로부터는 圓頓敎가 다른 여러 宗의 우두머리로서 4백여 년을 지냈다 23) 고 하여, 義湘 이후에 華嚴宗이 韓國 佛敎의 주류적인 위치에 있어 왔던 것을 말하며 韓國華嚴宗의 始祖로서의 義湘의 업적을 찬양하 였으며, 華嚴寺의 創建者인 緣起의 影에 禮拜하면서 지은 詩에서도 圓敎宗風滿海東 24)이라고 하여 新羅 華嚴宗의 전통을 높이 평 가하고 있었다. 특히 義天의 元曉에 대한 崇拜의 念은 대단하여 元 曉와 인연이 깊은 芬皇寺에 찾아가 元曉의 像前에 茶菓의 祭奠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때에 義天 자신이 지은 祭文에 의하면 그는 元 曉를 海東敎主 元曉菩薩 또는 海東菩薩 聖師라는 최고의 존칭을 쓰고 나아가 義天이 어릴 때부터 佛乘을 사모하여 先哲들의 사이 를 歷觀하였으나 聖師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고도 하였다.25) 義天 은 일찌기 金剛經을 元曉의 海東疏에 의하여 講하고 나서 元曉의 업적이야말로 깊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찬탄하면서 지금까지 외로이 어둠속에 헤매다가 이제야 비로소 琥拍이 티끌을 끌어올리고 자석이 철편을 끌어당기듯이 참으로 心服할 수 있는 23) 大覺國師文集 卷 1 新集圓宗文類序 24) 大覺國師文集 卷 17 25) 大覺國師文集 卷 16 祭芬皇寺曉聖文

100 2. 天台宗의 成立 분을 만나게 되었다고26) 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元曉의 思 想에 공감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義天은 元曉의 나 머지 여러 論著들을 읽고 나서는 元曉의 위대한 업적을 옛날 天 竺의 馬鳴이나 龍樹의 그것에 대등할 만한 것이라고도27) 하였으 니 이것은 元曉의 업적은 韓國의 佛敎史上에서만 위대한 것이 아 니라 東洋의 國際的인 佛敎史上에서도 위대한 것임을 인식한데서 나온 것이었다.28) 이리하여 義天은 그의 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著書 17部 60卷을 비롯하여 모든 高麗의 華嚴宗 관계 著書들은 그릇된 글이 말을 이루지 못하고 文義가 通變함이 없어 祖道를 荒 蕪케 하며 後生을 미혹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일체 제외하여 수록하 지 않으면서 元曉 등의 章疏는 극력으로 구하여 編入하려고 하였다. 義天은 이 新編諸宗敎藏總錄이 만들어진 다음에 그 목록에 따라 간행하였는데 그는 그 가운데 元曉의 章疏를 비롯한 신라인의 저 서들을 宋이나 遼 및 日本에도 보내줌으로써 안으로 元曉思想을 중 심으로 한 新羅佛敎의 전통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국제적 으로 그것을 선양하여 高麗佛敎의 국제적인 위치를 높이었다. 그 예 를 들면 義天은 宋의 華嚴僧 淨源에게는29) 元曉를 비롯하여 憬 興 太賢의 章疏, 禪僧 元照宗本에게는 元曉의 楞伽經疏 8卷, 浄源 의 제자 善聰에게는 자신의 唯識單科 및 기타, 辯眞에게는 敎藏摠 錄 2册과 唯識單科 3册 등을 보내주고 있었으며, 遼의 天佑帝에 게는 元曉의 章疏 등을 보내주고 있었다. 기타 日本에도 일찍부터 新編諸宗敎藏總錄이 전하여져서 義天錄이라는 이름으로 珍重視되 26) 大覺國師文集 卷 20 依海東疏講金剛經慶而有作 27) 大覺國師文集 卷 20 讀海東敎迹 28) 義天이 入寂하기 2개월전인 肅宗 6年 8月에 元曉에게 和靜國師, 義湘에게 圆敎國師 贈諡가 있었는데 이것은 義天의 奏議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29) 大覺國師文集 卷 11 上淨源法師書 第二

101 Ⅰ. 佛敎의 發達 어 왔으며, 義天도 寄日本國諸師求集敎藏疏 30)가 있는 것으로 보아 章疏의 交流關係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義天은 華嚴宗 관계 章疏의 정리와 講論, 門徒의 養成, 宗 譜의 統一 및 敎觀并修의 주장 등을 통하여 華嚴思想의 統一과 그 宗團의 정비에 주력하였으나 그의 佛敎改革運動은 자신의 宗派인 華嚴宗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華嚴宗의 통일에 주력하였 을 뿐만 아니라 그 華嚴宗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종파를 하나로 會通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華嚴宗의 승려로서의 義 天은 결코 華嚴宗을 다른 종파에 대립하는 것으로써 고집한 것이 아니라 각 종파를 종합 정리함으로써 그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一佛乘의 思想體系로 회통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義天은 華嚴宗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종파를 회통시키고자 할 때에 먼저 주의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 華嚴宗과 아 울러 가장 강력한 종파의 하나였던 法相宗이었다. 義天은 일찌기 法相宗의 根本道場인 玄化寺에서 祐翔에게 唯識論을 배운 적이 있 었으며, 그후 宋에 갔을 때에는 東京 顯聖寺의 慧琳과 唯識論에 관 한 問答이 있었고 또 그 밖에도 善淵 등을 만나고 있었던 것을 보 아 唯識學에 대하여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아가 그에 대한 造詣도 상당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義天은 宋에서 귀국 한 후에 興王寺에 住持하면서 華嚴宗을 중심한 불교계의 개혁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다시 唯識學에 관심을 갖고 그 것을 재검토하게 되었던 것은 宣宗 11년(1094) 法相宗 측의 공격 을 받아 海印寺에 은퇴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法相宗은 仁州 李氏와 연결되어 義天의 華嚴宗과 대립되어 있었는데 宣宗의 사망 과 어린 獻宗의 즉위를 계기로 하여 李資義를 중심으로 한 仁州李 30) 大覺國師文集 卷 14 寄日本國諸師求集敎藏疏

102 2. 天台宗의 成立 氏 세력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法相宗의 세력도 크게 떨치게 되었 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法相宗 측에 밀려난 義天으로서는 그 唯 識學을 재검토하여 볼 필요성은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義天이 이 때 저술한 책이 刊定成唯識論單科 3卷인데 그 序에서 그 저술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起信論과 唯識論의 두 가지 論章은 性宗과 相宗의 樞要이어서 學人으로서는 마땅히 마음을 다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起信論 은 일찌기 약간 익힌 바 있지만은 唯識論에 있어서는 아직 功力 을 다 들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번거로운 말에 빠져 그의 要義를 모를까 걱정하였다. 이에 本記를 연구하고 舊科를 참작 하여 간추리고 정리해서 3卷으로 만들었다 31) 이어 義天은 賢首法藏의 五敎와 慈恩窺基, 圓測 및 淸凉澄觀 등 의 말을 인용하여 華嚴宗의 입장에서 法相宗을 會通할 수 있는 것 임을 말하였다. 특히 義天은 性과 相의 관계는 하늘의 해와 달과 같고, 周易의 乾과 坤이 같으므로 그 두 가지를 겸해 공부하여야 비로소 통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한 淸凉澄觀의 말을 인 용하고 이어 兩宗을 겸학할 것을 華嚴宗의 五敎 敎制論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俱舍論을 배우지 않고는 小乘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데 唯識을 배우지 않고서 어찌 始敎의 宗을 알 수 있으며, 起信 論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終頓의 이치를 밝힐 수 있겠는가? 그 리고 華嚴을 배우지 않고는 圓融의 法門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 이다. 진실로 얕음으로써는 깊음에 이르지 못하나 깊음은 반드 시 얕음을 겸하는 것이니, 그것은 理數의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 로 經偈에 이르기를 池河의 물을 마실 힘도 없으면서 어찌 大海 31) 大覺國師文集 卷 1 刊定成唯識論單科序

103 Ⅰ. 佛敎의 發達 를 삼킬 수 있으며 聲聞 緣覺의 二乘法도 배우지 않고 어떻게 菩薩의 大乘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은 믿을 만한 것이다. 二乘도 배워야 하겠거늘 하물며 大乘이겠는가 32) 그런데 이와 같은 性相의 兼學을 주장한 것은 敎宗내의 性相의 대 립이 義天 당시로서는 禪敎의 대립에 못지않은 심각한 면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性相의 대립을 性宗의 입장에서 會通하 려고 하였던 것은 義天 자신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이미 元曉가 내 세웠던 것을 祖述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元曉는 高麗 시대에 와서 華嚴宗이나 天台宗의 始祖로서만이 아니고 法相宗의 始祖로 서도 추앙되고 있었던 것이다. 義天은 元曉의 思想의 위대함을 재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 義天은 戒律이나 涅槃經도 강론하고 있었고,33) 또한 浄 土思想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 는 戒律은 華嚴宗의 것이었으며 涅槃經의 강론도 澄觀의 說에 의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華嚴宗의 입장에서 敎宗의 각파를 회통시 키려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34) 義天은 이와 같은 佛敎思想의 統一運動에 가장 이상적인 경전으 로써 圓覺經과 圭峯宗密의 疏를 들고 있었다. 그가 圓覺經을 宗密 의 疏에 의하여 講하면서 한 말에 의하면 그 疏는 權敎를 꺾고 小 乘을 억누르며 頓敎를 세우고 圓敎를 펼치기 위한 것이라 하여 극 찬하면서 이어 法相宗 法性宗 등의 모든 종파와 모든 경전의 이 치가 망라되어 있다는 것을 일일이 열거하며 말하고 있었다.35) 그리고 義天은 그러한 理想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으로서는 말 32) 大覺國師文集 卷 1 刊定成唯識論單科序 33) 大覺國師文集 卷 18 講南山律抄 大覺國師文集 卷 20 庚辰 六月 四日 國淸寺講徹天台妙玄之後言志示徒 34) 大屋德城 高麗績藏雕造攷 pp (1937) 京都 35) 大覺國師文集 卷 3 講圓覺經辭第二

104 2. 天台宗의 成立 할 것도 없이 元曉를 들고 있었다. 義天이 芬皇寺에 가서 元曉의 像前에 올린 祭文에 의하면 오직 우리 海東菩薩은 性相을 융통히 밝히고 고금을 세밀히 감싸면서 百家들의 다투는 실마리를 화합시켰으니 一代의 지극 히 공정한 論이었거늘, 하물며 헤아릴 수 없는 신통과 생각하기 어려운 妙用이었겠읍니까 36) 라 하고 있으며, 또 元照宗本에게 元曉의 楞伽經疏를 기증하면서 보낸 書信에서도 曉公은 隋의 말엽에 태어나서 唐初에 敎化를 펴시면서 百處에 形을 나타내고 六方에 滅을 고하였으며 모든 경 전마다 다 疏를 지었고 論은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37)고 하였던 것을 보아 元曉의 思想에 얼마나 공감을 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義天 당시 高麗佛敎의 모순을 극복하는 思 想體系로서의 그 傳統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 것을 알 수 있다. 義天의 華嚴宗 입장에서의 敎宗 각파의 思想을 综合折衷하려는 노력은 일단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義天은 華嚴宗 관계의 글 을 모은 圓宗文類에서 자신의 僧階를 興王寺住持傳賢首敎觀兼講天 台敎觀南山律鈔因明論等觀普應圓明福國慈濟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 이라고 하여 華嚴을 비롯한 天台 律 因明論 등의 兼學을 말하고 있 으며, 실제 그의 강론도 華嚴經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宗派의 經典 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澄儼이 仁宗 即位初에 五 敎都僧統 이라는 僧階를 받았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었다. 五敎都僧統 의 五敎가 구체적으로 무슨 宗 派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澄儼은 義天의 직계 제자 로서 華嚴宗 계통의 승려이었고 또 五敎都僧統이라는 것도 敎宗 계통 36) 大覺國師文集 卷 16 祭芬皇寺曉聖文 37) 大覺國師文集 卷 11 答宋元炤律師書

105 Ⅰ. 佛敎의 發達 의 僧階였던 점에서 禪宗의 僧階를 받았던 禪宗이나 天台宗은 제외된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5敎는 義天 당시에 존재했던 6宗 가운데 禪宗 九山派를 제외한 華嚴宗 法相宗 法性宗 戒律宗 涅 槃宗 등의 五敎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義天이 宋에 갔을 때에 시종 陪行하여 안내를 맡았던 主客員外郞 楊傑이 義天을 평하여 華嚴宗 法相宗 禪宗 律宗 天台宗 등 五宗을 兼通한 위대 한 聖者라고 하였던 것의 五宗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38) 그뒤 武臣執權期에 와서 大藏經을 간행할 때에 校正의 총책임을 高麗國新造大藏校正別錄 3卷을 남긴 華嚴宗의 僧侶인 守其 도 五敎都僧統 이라는 僧階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아 義天에 의 맡아 하여 이루어진 敎宗의 통합이라는 전통은 高麗 후기까지도 그대로 계속되었던 것이며 五敎 가운데에, 華嚴宗이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 었던 것을 알 수 있다.39) 2) 禪宗의 批判 統合과 天台宗의 成立 華嚴宗 僧侶로서의 義天이 당시 佛敎統合에 있어서 보다 곤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같은 敎宗 계통의 宗派보다도 그 敎宗 전체와 대립하고 있던 禪宗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義天의 華嚴思想을 말 할 때에 그가 자신의 弟子들에게 華嚴의 三觀五敎를 들어 敎觀을 并修할 것을 권하고 있었던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敎宗과 대 립하고 있던 禪宗은 보다 심각한 문제로 의식되지 않을 수 없었으 38) 義天이 交遊한 宋僧 가운데 守長이 있었는데 그가 義天에게 보내온 詩(大覺國 師文集 卷 10)에 의하면 圓融妙證三重觀 次第精硏五敎宗 七祖繼傳今晋水 五 時仍習舊天台 라 하여 義天의 華嚴宗을 중심으로 한 五敎의 兼學을 칭찬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華嚴과 天台를 나란히 들고 있다. 39) 五敎都僧統이라는 僧階에 都자가 붙고 있었던 것은 추측컨대 원대 五敎의 敎 宗 각파에는 각기 최고의 僧階로서 僧統이 주어지고 있어서 五敎의 대표자 로서의 僧階는 각 종파의 대표자인 僧統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都僧統이라는 僧階가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106 2. 天台宗의 成立 니 義天은 다른 어느 종파보다도 당시의 敎를 떠난 禪에 대하여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義天은 福唐의 飛山默子 戒珠 가 禪宗에서 내세우고 있던 敎外別傳의 心法을 斥破하기 위하여 찬술한 別傳心法議j라는 책을 얻어 그가 편찬한 圓宗文類 卷 21 에 수록하면서 붙인 跋文에서 옛날의 古禪과 그 당시에 유행하는 今禪곽는 근본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 에 의하면 옛날의 禪이란 것은 敎에 의거하여 禪을 익히는 習禪이 었는데, 당시의 禪이란 것은 敎를 떠나서 禪을 說하는 說禪이 되고 말았다. 이 說禪者는 그 명목에 집착하여 그 實을 잃고 있는데 대 해서 習禪者는 그 事由를 따짐으로 인하여 그 뜻을 얻고 있는 것 이니 오늘의 矯詐의 弊를 구하고 古聖의 醇精한 道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고 하며 戒珠의 瓣論은 지극히 옳은 것이라고 공감을 표시 하였다.40) 한편 遼의 道宗이 詔書로 내려 義學沙門 詮曉 (一名 詮 明) 등으로 하여금 經錄을 再定하여 續開元釋敎錄 3卷을 편수케 할 때에 慧能의 六祖壇經과 禪宗에 있어서의 傳燈錄의 시초라고 할 智炬의 寶林傳을 모두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 여 義天은 그 爲妄을 제거하였다고 하여 은근히 공감을 표시하고 이어 근래 中國에서 유행하고 있는 禪宗의 章句는 많이 異端과 관 련을 맺고 있다고 분명하게 당시의 禪宗을 지적하여 비판을 가하 고 있었다.41) 40) 義天은 일찌기 王旨로써 天吉祥三蔵과 戒珠의 眞容을 각 1軸을 받고 詩로 謝한 일이 있었다. 그 詩가 大覺國師文集 卷20에 실려 있는데 이로써도 義天이 얼마나 戒珠에 공감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외 詩는 다음과 같다. 形貌由來豈異人 丹靑元是重精神 王家寄到山門意 護法因緣在此長(中略) 金口遺之滿大千 道消彌遠罕扶願 飛山默子何爲者 弘護功高四海傳 41) 朴鍾鴻博士가 그의 韓國思想史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義天의 禪宗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知訥의 그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즉 知訥이 가장 중요 시한 경전은 六祖壇經이었던 것이니 義天의 敎觀并修와 知訥의 定慧雙修는 서 로 통하는 유사점이 있으면서도 敎와 禪의 어느 것이 출발점이 되는가에 따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07 Ⅰ. 佛敎의 發達 義天은 또 宋의 淨源의 제자 善聰에게서 6回의 書信을 받은 것 이 大覺國師外集에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서신에서 善聰은 천 하의 數十家나 되는 禪이 邪는 많고 正은 적어 大敎(華嚴)를 홍통 함에 있어서 실로 사람을 얻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慧 淸의 背禪弘敎之詩라는 것을 베껴 보내면서, 또한 貴知요 경사스러 운 기쁨이라고 하였다.42) 慧淸은 善聰과는 同門으로 원래는 華嚴 僧이었으나 한때 무슨 사건으로 盧山에 숨어 參禪하면서 經典을 보 지 않다가 다시 회심하여 華嚴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는데 善聰의 서 신을 통하여 그 소식을 들은 義天은 그에게 보낸 詩에서 삼가하여 가벼이 敎外別傳을 말하지 말라 43)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 여 義天은 韓國을 비롯하여 널리 宋 遼 등에서 수천의 章疏를 구 하여 續藏의 간행 예정 목록인 新編諸宗敎藏總錄 3卷을 편성할 때 에 당시 유행되던 禪宗의 撰述은 거의 그것을 채록하지 않고 있었 다. 즉 채록된 것은 楞伽經部에 疏 3卷(明禪師述), 金剛般若經部에 夾頌 1卷(傳大士頌) 및 卷 第 3의 마지막에 輔敎篇 3卷(契嵩述) 뿐이고, 앞서 말한 六祖壇經이나 寶林傳 등은 모두 제외되었으며, 더우기 義天이 상당히 높이 평가하였던 華嚴宗의 승려인 圭峯宗密 의 저서 중에도 諸宗의 禪言을 모은 禪源諸詮集 같은 것은 제외되 었다. 이로써 義天은 당시의 敎를 떠나 敎外別傳만을 내세우는 禪 宗에 대하여 상당히 비관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는 결코 禪을 무시하였다거나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불 교계의 敎를 떠난 禪의 偏執을 경계하여 敎觀并修의 필요성을 역설 하기 위한 것이었다. 金富軾이 찬술한 靈通寺의 大覺國師碑에 의하면 義天은 根本之 學을 하는데 힘썼으며, 또 일찌기 말하기를 42) 大覺國師外集 卷 6 善聰書 43) 大覺國師文集 卷 禪家에서 이른바 講

108 2. 天台宗의 成立 論 같은 방편에 의거하지 않고 以心傳心한다는 것은 上上根智의 사람의 일이다. 下士의 변변치 못한 위인이 口耳之學으로써 한 法 을 認得하고서는 스스로 다되었다고 하여 經 律 論의 三藏이나 釋迦 일대의 敎說을 그 經文의 성질과 형식에 따라 구분한 十二分 敎를 가리켜 蒭狗다. 糟柏이다. 더 볼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함은 또 한 그릇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 楞伽經이나 大乘起信論 등의 經論의 공부를 권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義天는, 刊定成唯識論單科 序에 의하면, 근세의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頓悟하였 다 하여 權小를 蔑視하지만 性相을 談論하다가 왕왕 사람들의 웃 음거리가 되는 것은 兼學을 하지 못한 잘못 때문이라 하여 널리 배울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한편 義天은 이러한 敎觀并修를 주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자신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앞에 인용한 바 있는 金 富軾 찬술의 大覺國師碑에 의하면 義天의 末年의 생활은 觀心과 持經으로써 보냈었다는 것을 보아 자기 兄인 法相宗의 승려인 玄 湛을 따라 義天을 실제 만나보기도 하였던 金富軾으로서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義天의 이러한 觀心과 持經의 생활은 그가 애써 祖述하려고 하였던 元曉가 敎學의 연구와 參禪修行을 아울러 실천 하고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고 본다. 義天이 敎觀并修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든 것은 唐의 圭条宗密 이었다. 義天이 圭峯宗密의 略疏에 의거하여 圓覺經을 講論하면서 한 말에 의하면 法에는 말이나 形像이 없지만 또 말이나 형상을 떠난 것도 아 니다. 말이나 형상을 떠나면 의혹에 빠질 것이요, 말이나 형상에 집착하면 진실을 모를 것이다. 다만 세상에는 완전한 재능이 없 고 사람은 전부가 아름답기는 어렵기 때문에 敎理를 배우는 사람

109 Ⅰ. 佛敎의 發達 들은 마음을 버리고 밖에서 구하는 이가 많고 禪宗을 익히는 사람 은 밖의 緣境을 잊고 안으로만 밝히기를 좋아하니 그것은 다 치우 친 고집이며 二邊에 머문 것으로서 마치 있지도 않은 토끼뿔의 길 고 짧음을 다투고 空花의 짙고 옅음을 싸우는 것과 같다 44) 고 하여, 敎禪對立의 모순을 지적하고 敎禪이 內外 相補하여 兼全 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義天은 그리고 이어 敎觀并修의 주창자로서 圭峯宗密을 극찬하고 있는 바 그 圭峯宗密은 원래는 禪宗 계통에 속하였으나 후에 禪을 버리고 華嚴으로 개종하여 중 국 華嚴宗의 제 5祖로 추앙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華嚴宗으 로 개종한 이후에도 禪에 관해서도 계속 유의하여 禪宗의 승려들 이 서로 비난하는 것을 보고 禪源諸詮集과 같은 諸宗의 禪言을 집 록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華嚴宗의 입장에서 禪宗을 융회시키려 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즉 宗密은 敎宗을 密意依 性說相敎 密意破相顯性敎 顯示眞心即性敎 등 3단계로 나누고 禪宗도 역시 息忘修心宗 泯絕無寄宗 直顯心性宗 등 3단계로 나누 어 각 단계를 대비시켜 서로 회통시키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원 래 敎禪의 一致說은 그의 스승인 淸凉澄觀에서부터 주장되어 온 것 이나 澄觀은 禪을 깎아내려 華嚴宗에 포섭하려 하였던 데 비하여 宗密은 그와 반대로 禪을 선양하여 華嚴宗과 會通시키려고 한 점 에서 宗密이 보다 적극적인 敎禪一致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 다. 義天은 이러한 宗密의 敎觀并修思想에 크게 공감을 받았던 모 양으로 그의 文集 여러 곳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그 한 예를 든다면 義天이 廣明寺의 大禪師 日公이 늙어 雲峯으로 退去할 때에 보낸 送別詩에서 九山의 癡禪이 是非만을 다툰다고 하여 당시의 禪宗이 九山派로 나뉘어 서로 다투고 있던 것을 비판 44) 大覺國師文集 卷 3 講圆覺經發辭 第三

110 2. 天台宗의 成立 하면서 禪僧인 日公(이름은 불명)이 오래 전부터 圓覺經에 유의하 고 있던 것을 들어 圭峯宗密의 뜻을 계승한 것을 알겠다고 찬양하 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義天의 華嚴宗을 중심으로 여타 諸宗의 兼學을 통하여 깨 달은 종합적인 佛敎觀에 의하면 당시 高麗의 敎禪闘爭과 같은 것은 전연 偏執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진실의 佛敎 徒로서는 마땅히 敎와 禪을 并修하여야만이 비로소 修行의 正路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敎를 닦고 觀을 폐하고 觀에 치우쳐 敎를 버 리는 것은 모두 偏執에서 나온 것이다. 義天은 바로 이러한 佛敎觀 에 입각하여 당시 敎宗의 승려들은 많이 敎에 偏重하여 內觀을 닦 지 않고, 반면에 禪僧들은 다만 觀心에만 전념하여 緣起의 眞理를 敎埋에 의하여 공부하지 않는 것을 모두 경계하여 敎觀을 并修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華嚴宗의 三觀五敎로써는 華嚴宗내의 모순을 극복하고 나아가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같은 敎宗의 여러 派를 종합하여 절 충할 수 있는 思想的 基盤의 마련에는 어느 정도 그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었으나, 敎宗과 대립되어 있던 禪宗까지도 포섭하여 불교 를 쇄신하고 나아가 全佛敎界의 思想을 통일하기에는 그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이리하여 義天은 마침내 새로운 종파로서 天台 宗을 새로 개창하기에 이른 것이다. 天台宗은 華嚴宗과 같이 敎宗에 속한 종파였지만은 敎宗으로서 는 가장 진전된 思想體系를 가지는 것인 동시에 그것이 과거의 불 교를 정리하고 敎 禪대립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므로 해서 天台宗의 성립은 저절로 과거의 불교에 대한 비판기준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天台宗은 본래 三論宗부터 발달된 宗旨로써 華嚴宗에 비하여 한층 實體論的 방면을 중시하여 天台宗

111 Ⅰ. 佛敎의 發達 의 창시자인 智者大師도 法華玄義와 아울러 摩詞止觀을 저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修禪은 天台宗에 있어서 처음부터 불가결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며, 敎觀并修는 바로 天台宗에 있어서의 가장 중 요한 일면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華嚴宗에 있어서도 法界三觀이라고 하여 參禪修行을 그 宗旨 속에 포함하고 있으나 天 台宗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살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니 敎觀이라는 말 자체가 원래 天台宗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義天은 天台宗의 이 러한 성격에 일찍부터 착안하여 그에 대한 疑問을 가지고 宋에 가서 從諫을 만나 天台敎義가 당시 高麗佛敎의 敎 禪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思想體系로서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귀국하여 마침내 그 開創에 착수했던 것이다. 義天에 의한 天台宗 開創은 단 순히 새로운 宗派의 개창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당시의 高麗 佛敎의 矛盾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과 元曉時代 佛敎의 전통에 대한 再認識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肅宗 2년(1097), 마침내 天台宗의 根本道場으로서 國淸寺가 落成되고 義天이 住持가 되어 天台學을 강론함으로써 韓國 天台宗은 확립된 것인데 그 開講에 앞 서 義天은 다음과 같이 그 감회를 말하고 있었다. 즉 그는 먼저 韓 國 天台宗에 있어서의 新羅의 元曉와 高麗初의 諦觀의 업적을 말하 고 이어 그 뒤 일시 중단되었던 天台宗을 다시 부흥시킴에 있어서 그 후원자였던 仁睿太后와 肅宗의 공로를 찬양하고 끝으로 素志 달 성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國淸과 天竺에 敎觀을 이어받고, 佛隴과 孤山에서 塔廟에 예 배하며, 성심으로 맹세한 바를 목숨을 다해 등불을 전하였으니 평생의 본래 소원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도다 45) 崔柄憲 45) 大覺國師文集 卷 3 新創國淸寺啓講辭

112 3. 佛敎行事의 盛行 3. 佛敎行事의 盛行 (1) 恒例的인 佛敎行事 高麗 시대에 佛敎가 더욱 융성하게 된 데에는 그 철학적 사상체 계에 있어서 전보다 더 정리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 있어 서도 더 깊어진 것이 있었기 때문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 오히려 위로는 왕실과 귀족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 까지 다같이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의 행복과 번영을 좌우 하는 현세 이익의 종교로서 불교를 더욱 더 절실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재액을 없애기 위해 푸닥거리를 하며만 복을 기원하는 인간의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갈망을 高麗人들은 불교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불교는 현실생활과의 접촉면에서 더 사회적인 중요성을 나타내었다. 太祖 이래로 국가나 왕실의 융성과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국 가가 주재하는 각종의 많은 불교행사가 수 없이 베풀어졌으며, 각 개인에 있어서도 복을 빌기 위한 갖가지 불교행사가 잦았다. 1) 祝壽道場 국왕의 생신날을 맞이하여 만수무강을 비는 法會로서 수일간에 걸치는 祝壽道場이 일찍부터 성대히 열리었다. 이때에는 중앙의 관원은 물론, 전국으로부터 상경한 지방의 관원들도 하례가 있게 되는 것이 예였으므로 국가적인 성대한 행사였다. 제 11대 文宗 때에는 그 탄생일인 12월 1일을 成平節로 제정하 고 이 날을 경축하였다. 乾德殿에서 하례식이 있은 후 宣政殿에서 잔치가 베풀어지는 한편, 이 날로부터 7일 간에 걸쳐 外帝釋院에

113 Ⅰ. 佛敎의 發達 서 祝壽道場이 또 열리었으며, 지방에서도 東京(慶州) 西京(平 壤) 安東都護府(安東) 安西都護府(海州) 廣州牧 羅州牧 全 州牧 등 각 지에서 법회가 그곳 사원에서 열리어 국왕의 만수무강 을 기원하였다. 高麗가 망한 그 전년인 恭讓王 3년(1391) 2월에도 祝壽道場 때 왕이 檜巖寺로 행차하여 1천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하였는데 풍류를 아뢰는 가운데 왕이 손수 향로를 받들고 각 승방을 돌면서 승려들에게 일일이 음식을 대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행한 또 妃와 世子를 비롯하여 모두들 함께 철야하면서 예불이 있은 그 다음날에는 왕이 또 승들에게 1천 2백 필에 이르는 布를 각각 희 사하기까지 하였다. 이어서 문무 백관들의 하례를 절 문 앞에서 받은 그 행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성대한 것이었다.1) 이에 앞서 恭愍王 때에도 매년 5월에 祝壽道場이 열리어 이때 성대하게 飯僧이 또 있었으니, 17년(1368)에 王輪寺에서 3천명 의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일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미 국운이 기울어진 말기에조차 그 의식절차가 성대하였으니 초 기나 중기에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잃은 제 8대 顯宗의 경우처럼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항상 그 슬픔을 간직하 면서 애도하는 마음에 백관들의 하례를 일체 없애게 하고 해마다 6월에 간소하게 祝壽道場을 여는데 그친 일도 없지는 아니하였다. 2) 忌辰道場과 盂蘭盆齋 高麗 왕실에서는 매년 父王과 母后의 忌日을 당하여 그 명복을 비는 忌辰道場(諱辰道場)이 成宗 때부터 있었다. 일찌기 唐 太宗 이 그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매년 忌月에 소를 잡는 것을 금 1) 高麗史 卷 46 恭讓王 3年 2月 己未

114 3. 佛敎行事의 盛行 하게 하고 아울러 전국 각 사원에서 5일간에 걸쳐 불공을 올린 일 을 成宗이 본딴 것이다. 이리하여 成宗 때에는 父君 戴宗과 母后 宣義王后의 忌日을 맞 이하여 각각 5일과 3일간의 불공이 사원에서 베풀어지는 한편, 그 들 忌月에는 또 1개월 동안 도살을 금하였다. 成宗의 뒤를 이은 제 7대 穆宗 때에도 父王 景宗을 위한 講辰道場이 5일간에 걸쳐 서 열렸을 뿐만 아니라 惠宗 定宗 光宗 戴宗의 諱辰道場이 각 각 1일씩 또 있었다. 특히 太祖는 왕조의 개창자인 만큼 이에 대 한 추모에서 이미 成宗 때부터 매년 6월에는 太祖를 위한 諱辰道 場도 아울러 있어 왔으니, 제 9대 德宗과 제 10대 靖宗도 6월에 太祖의 諱辰道場을 각각 奉恩寺와 開國寺에서 열었던 것이다. 奉 恩寺는 光宗이 太祖의 願堂으로서 세웠던 사원이었으므로 그 奉 恩寺에서 太祖의 諱辰道場이 열렸다는 일은 매우 의의깊은 것이 라 아니 할 수 없다. 德宗은 父君 顯宗을 위한 忌辰道場을 매년 5월에 玄化寺에서 열었는데, 德宗과 같은 형제였던 文宗도 또한 忌月인 5월에 玄化 寺에서 諱辰道場을 열어 顯宗의 명복을 기원하였다. 玄化寺는 앞 서 顯宗이 왕권의 확립과 문화의 전통을 널리 내외로 과시하는 한 편,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실한 마음에서 국력을 기울여 세 웠던 사원이었던 만큼 顯宗에 있어서 玄化寺는 여간 인연이 깊은 사원이 아니었다. 바로 그 玄化寺에서 父君 顯宗을 위한 諱辰道場 을 열었던 德宗과 文宗은 각별한 심회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肅宗이 7월에 父君 文宗의 諱辰道場을 興王寺에서 열었으며 9월 에는 母后 仁睿太后의 諱辰道場을 國淸寺에서 열었지만, 그 興王 寺와 國淸寺가 또한 각각 文宗과 仁睿太后의 원찰이었던 것이다. 그후 睿宗이 매년 10월에 肅宗을 위한 忌辰道場을 열었으며 仁

115 Ⅰ. 佛敎의 發達 宗이 또한 4월에 睿宗의 諱辰道場을 여는 등, 諱辰道場은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祝壽道場 때처럼 諱辰道場 때에도 飯僧이 아울 러 베풀어지기도 하였으니, 高宗 12년(1225) 8월에 있은 康宗의 諱辰道場 때 2백 명의 승들을 대궐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일 은 그 한 예라 하겠다. 한편 전왕이 돌아간 忌日 그날을 맞이하여 열리게 되는 諱辰道 場 외에 睿宗 1년(1106)과 4년에는 다같이 7월 15일에 중을 대궐 로 초청하여 目蓮經을 외고 盂蘭盆齋를 올리어 肅宗의 명복을 빌었 는데, 이같이 7월 15일에는 부모를 비롯한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盂蘭盆齋도 때때로 高麗 왕실 내에서 있었던 모양이다.2) 3) 佛誕日 行事 佛誕日인 4월 8일을 맞이하여 이 날을 경축하는 일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드는 신도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毅宗 때( ) 白善淵이라는 內侍가 4월 8일에 觀世音 菩薩의 畫像을 40폭 만들어 모시는 한편, 밤에 수많은 등을 달고 밝히어 佛德을 찬양한 일이 있었으며, 또 蒙古의 침입으로 정부가 江華로 피난하고 있었던 무렵인 高宗 32년(1245) 당시의 집권자 였던 崔怡가 佛誕日을 경축하기 위하여 휘황찬란하게 등불을 밝 히며 풍악과 춤을 비롯한 갖가지 놀이를 베풀었을 때 성안의 남녀 노소들 이 밀물처럼 모여들어 밤새워 즐겼던 일은 그 한 예다. 일찍부터 4월 8일 행사로서는 전국 사원마다 초저녁부터 밤새 2) 㿻蘭盆(Ullambana)은 거꾸로 매달린다는 뜻이다. 目蓮經과 盂蘭盆經에 의하면, 효도가 지극한 目蓮은 그의 모친이 무슨 인연인지 모르나 죽은 후에 餓鬼道에 빠지어 그곳에서 거꾸로 매달리게 되어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견디기 어려워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7월 15일 백중날에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불공을 올리고 널리 중들을 대접하는 한편 모든 餓鬼들에까지도 베푼 그 공덕으로 마침 내 그의 모친을 구제할 수 있었다 한다

116 3. 佛敎行事의 盛行 도록 대낮처럼 수많은 등을 밝혀 찬불예배를 하였음은 물론, 집집 마다 또한 등을 달고 경축하였다. 이 날에는 또 특히 대중들의 즐 거운 놀이가 널리 베풀어지기도 하였으므로, 초파일 즉 4월 8일은 민족적인 명절의 하나와 다름이 없었다. 매년 초파일이 다가오면 거의 한 달 전부터 여러 어린이들이 초파일 행사의 비용을 모으기 위하여 종이를 오려서 매단 장대를 제각기 어깨에 메고 떼를 지어 큰 소리로 외치면서 두루 거리를 누비며 돌아다니매 초파일 분위 기는 날로 익어갔으니, 어린이들의 이 풍습을 呼旗라 하였다. 말기의 恭愍王 때부터는 초파일 燃燈이 비단 대중적인 민간의 연중행사로 그치지 않고 궁중에서도 공적으로 등불을 밝히게 되었 다. 그 恭愍王 13년(1264) 궁중에서 4 8燃燈이 있었을 때에는 어린이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이어 민간에서 성행하여 오는 呼旗 놀 이를 궁중 뜰에서 연출케 하기도 하였다.3) 다음 15년(1266)에도 4월 초파일 燃燈 때 呼旗 놀이가 연출되어 어린이들에게 각각 하 사품 을 내려준 일은 그후 呼旗의 풍습을 4 8 행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민족적인 행사로 더욱 굳히게 하는 것이 되었다. 4) 菩薩戒道場 高麗 왕실에서는 6월 15일, 궁중에서 菩薩戒道場을 열었으니 이 때 國師와 王師를 비롯한 고승 대덕들이 주재하는 가운데 국왕 이 菩薩戒를 받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4) 菩薩戒는 다름아닌 大乘의 보살 즉, 승려나 속인을 가릴 것 없 이 불도 수행에 뜻을 두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같이 지 켜야 할 戒律을 말한다. 菩薩戒 가운데서도 十重戒와 十善戒는 그 3) 高麗史 卷 40 恭愍王 13年 4月 辛丑 4) 二宮啓任 高麗朝の恒例法會, 朝鮮學報 15 輯(1960)

117 Ⅰ. 佛敎의 發達 대표적인 것이다. 梵網經에 설하여 놓은 十重戒는 가장 근본적인 菩薩戒로서5) 만약에 이것을 어기게 되면 波羅夷罪(Parajika)를 구성하여 佛門으로부터 파문되고 추방당하게 된다. 한편 十善戒는 智度論에서 설하는 菩薩戒인데 이 계도 또한 몸가짐과 말씨와 마 음씨를 올바르게 할 것을 규제하여 놓은 것이다.6) 이같은 菩薩戒 를 국왕이 받는다는 것은 국왕이 보살의 자격을 새로 얻거나 또는 보살의 자격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菩薩戒道 場은 대대로 역대의 국왕이 그 스스로 佛弟子임을 다짐하고 널리 선언하는 의식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菩薩戒道場이 어째서 6월 15일에 열리게 되어 있었는지 그 까닭을 알아낼 만한 기록이 유감스럽게도 전혀 전해 오지를 않 는다. 대개 일찍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6월 15일을 流頭라 하여 모 두들 제각기 동쪽 냇물에 들어가서 머리와 몸을 씻고 더러움을 떨 어 깨끗한 마음으로 잔치하며 즐기는 풍습이 있었는데,7) 아마 이 같은 뜻있는 날을 택해서 마음과 몸가짐을 깨끗이 바르게 가다듬 을 것을 다짐하는 菩薩戒道場을 열기로 정하였는지도 모른다. 5) 殺戒(살생을 하지 않는다) 盜戒(남의 것을 아니 훔친다) 婬戒(음란한 행실 을 아니 한다) 妄語戒(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酷酒戒(술을 팔지 않는다) 說 四衆過戒(대중들의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는다) 自讚毁他戒(자기 자신을 높이 거나 남을 헐뜯지 않는다) 慳惜加毁戒(물심 양면으로 인색한 일이 없도록 한 다) 瞋心不受悔戒(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왈칵 성을 내지 않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謗三寶戒(삼보를 비방하지 않는다) 등을 十重戒 라 한다. 6) 不殺生(살생을 하지 않는다)不偷盜 (남의 것을 훔치지 아니한다)不邪淫 (부부 이외의 다른 남녀와 서로 음탕한 짓을 하지 않는다)不妄語(거짓말을 아니 한다)不兩舌(양쪽에 다니며 이간질하여 싸움을 붙이는 일을 하지 않는 다)不惡口(남의 흉을 들춰내어 말하거나 욕을 퍼부어 대는 일이 없도록 한 다)不綺語(교묘하게 꾸며 대는 간사한 말을 아니 한다)不貪欲(탐내는 마음 을 없앤다)不瞋恚(왈칵 성내는 마음을 버린다)不愚癡(어리석고 못난 마음 을 버리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등을 十善戒라 한다. 7) 高麗史 卷 20 明宗 15年 6月 丙寅崔南善 朝鮮常識問答, 三星文化文庫 16 (1972)

118 3. 佛敎行事의 盛行 靖宗 때에는 菩薩戒道場이 재위 13년 동안 오직 그 10년(1044) 6월에 1회 있었을 뿐이었으나, 文宗 때에는 재위 37년간에 도합 5회가 열렸으며, 睿宗 때에는 재위 18년간에 도합 7회 있었다. 또 仁宗 때에도 재위 25년간에 도합 16회에 걸쳐 왕이 보살계를 받았 었으니 즉위년(1122)을 위시하여 6(1128) 년(1145)의 각 6월에 있었다. 菩薩 戒道場은 6월 15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때로는 앞당겨 宣宗 9년(1092)의 경우처럼 하루 당겨서 6월 14일에 열기도 했으 며, 또는 明宗 2년(1172)의 경우처럼 훨씬 늦추어 6월 25일에 열렸 던 일도 있었다. 한편 獻宗 1년(1095) 6월 15일에는 왕이 궁중에서 木叉戒를 받 았는데,8) 고려 시대를 통해서 왕이 6월 15일에 木叉戒를 받았던 일 은 이때 한번 있었을 뿐이다. 木叉라 함은 波羅提木叉(Prātimoksa) 의 약칭으로 계율의 조목을 일컫는 말이지만, 보살계인 十重戒를 일 명 十重波羅提木叉라고도 부른다. 그러므로 獻宗이 6월 15일에 木 叉戒를 받았다는 그 의식은 필경 항례적인 6월 15일의 菩薩戒道場 과 별개의 것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5) 藏經道場 顯宗은 玄化寺를 창건하고 일찌기 세상을 떠난 부모 安宗 郁과 獻貞王后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玄化寺를 더욱 크게 빛내려고 大 藏經을 만들어 그곳에 모시어 놓기로 하였다. 왕통의 확립과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을 내외로 널리 과시하려는 데에도 그 목적을 아 울러 두고 있었던 이 대장경의 간행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그후 文宗 때( ) 대체로 완성을 보았다. 8) 高麗史 卷 11 獻宗 1年 6月 己卯

119 Ⅰ. 佛敎의 發達 그간 대장경 간행에 착수한 지 약 10년이 경과되던 顯宗 20년 (1029) 4 월에는 궁중에서 藏經道場이 처음으로 열리어 미완성 이나마 그때까지 이루어져 온 대장경의 일부를 공양하는 한편, 그 대장경을 읽되 경전마다 그 앞과 끝부분의 대여섯 줄만 읽고 나머 지는 그냥 눈을 스치거나 또는 경전마다 한 대목을 골라 읽는데 그치었다. 이로부터 다시 10여 년 후인 靖宗 7년(1041)부터는 이 藏經道場이 연중행사로 되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열렸으니, 봄에 는 6일간에 걸쳐 대개 2월이나 3월에 열렸으며 가을에는 하루 더 많이 7일간에 걸쳐 9월이나 10월에 있었다.9) 藏經道場 때에는 그 의식의 절차에 따라 대장경을 공양하는 한 편 그 대장경을 부분적이나마 읽어갔음은 물론이었지만 이와 더 불어 많은 중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飯僧도 행해져 毅宗 10년(1156) 10월 宣慶殿에서 7일간에 걸쳐 열렸던 가을의 藏經 道場에서는 5백명을 飯僧하였던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靖宗 7년 부터 시작되었던 봄과 가을의 藏經道場은 날로 성대히 열리어, 忠 宣王 3년(1311)부터는 행사의 일수를 늘려 봄과 가을에 다같이 10일씩 열리게 되었다.10) 이는 蒙古의 침입으로 江華로 피난하고 있었던 高宗 때 국난을 극복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대장경을 새로이 이룩하여 놓은 후 大藏經의 국가적인 의의가 더욱 절실하 게 커져 왔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봄과 가을에 항례적으로 열리게 되는 藏經道場 외에 때때로 大藏會가 열리어 大藏經을 받들어 공양하였는데, 肅宗 7년 (1102) 9월 神護寺에서 大藏會가 있었을 때에는 대궐서부터 神 護寺 정문에 이르는 노변에 수만개의 등을 나란히 달아놓고 밤을 9) 高麗史 卷 6 靖宗 7年 4月 癸巳 10) 高麗史 卷 34 忠宣王 3年 3月 癸卯

120 3. 佛敎行事의 盛行 낮처럼 밝혔다. 한편 州 府 郡 縣 등 전국의 각 지방에서도 비록 그 규모는 중앙에 비하여 손색은 있었으나, 일찍부터 각 지방마다 매년 輪經 會가 성대히 열리어 불경을 공양하였다. 그 輪經會가 끝나면 이어 서 갖가지 놀이와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지방의 관원들이 그 놀이 와 잔치를 미끼로 하여 금품을 부당하게 과중히 모아 거두었기 때 문에 민폐가 여간 크지를 아니 하였으므로 마침내 文宗 1년 (1047)에는 전국 각 지방에 시달하여 앞으로는 輪經會가 끝난 뒤 에 있었던 놀이와 잔치를 일체 없애도록 하였다. 6) 經 行 鳩摩羅什(Kumārajiva, )이 번역한 仁王般若波羅蜜經 과 不空(Amoghavajra, )이 번역한 仁王護國般若波羅蜜 多經을 다같이 약하여 仁王般若經 또는 仁王經이라 부른다. 仁王 經에서는 그 밑바닥에 국왕이 나라를 지키고 잡귀들을 쫓고 뜻대 로 성사시키며 국토를 수호하려면 般若波羅蜜을 완성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입장이 깔려 있다. 仁王經에서는 또 질병 과 화재와 가뭄과 그 밖에 천재지변으로 인한 갖가지 고통에 빠지 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외적의 침범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흩어지거나 파괴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經을 하루에 두 번 씩 외어야 할 것을 설하고 있다. 이같은 仁王般若經을 높이 받들었던 고려 왕조에서는 국민의 복 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靖宗 12년(1046) 처음으로 經行이라는 행사를 가졌었다. 이때 대궐에서 왕을 대신하여 侍中 崔齊顏이 仁 王經을 공양한 후, 대중들이 세 패로 나뉘어 시내를 돌았는데 패마 다 각기 仁王經을 모셔 놓은 가마를 메고 앞장을 섰다. 여러 가지

121 Ⅰ. 佛敎의 發達 고운 색깔로 칠한 가마를 앞세우고 뒤에는 승복을 갖춘 승려들이 걸어가면서 仁王經을 외고, 다시 관복을 입은 국가의 관원들이 또 한 그 뒤를 따라가는 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11) 이후 經行은 줄곧 국가적인 연중행사로 되어져 仁王經의 국가적 의의는 한 층 높아갔다. 더우기 宣宗 2년(1085) 2월 宋의 제도에 따라 왕의 행 차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仁王般若經을 앞세워 받들게까지 하게 한 일은 이 經이 지니는 국가적 의의를 더욱 높이는 것이 되었다. 원래 經行은 큰 법회가 있을 때 법사를 중심으로 하여 경문을 외면서 부처의 주위를 우측으로부터 여러 번을 계속하여 도는 것 인데,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던 고려의 왕실 내지 사회에서는 이 것을 밖으로까지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經行은 연중행 사로서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수시로 국가에서 큰 법회가 있거 나 왕실에서 큰 일이 있을 때, 또는 재난이 있을 때에는 대개 經 行도 행하여 졌으며, 후에는 지방에까지 이 經行의 佛事는 파급 되었다. 국가가 주재하는 經行과는 달리 민간에서도 널리 이 經行의 佛 事가 때때로 있었음은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가뭄이 심하였던 睿宗 1년(1106) 6월 開京의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經行 불사를 한 것은 그 한 예라 하겠지만, 이때 때마침 갈망하던 비가 내렸으 므로 왕이 여간 기뻐하지를 아니하여 시민들에게 하사품을 내리 고 계속 거리를 돌면서 仁王經을 외도록 권하며 북돋아주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7) 無遮大會 太祖 23년(940) 정부에서 新興寺를 다시 손대어 고치고 그곳 11) 高超史 卷 6 靖宗 12年 3月 辛丑

122 3. 佛敎行事의 盛行 에 새로이 功臣堂을 세울 때 벽에 功臣들의 화상을 그려서 모시고 1일간 無遮大會를 열었다. 高宗 3년(1216) 10월에도 彌勒寺의 功臣堂이 중수되어 이때에도 無遮大會가 성대히 열리었다. 新興寺 와 彌勒寺에서의 無遮大會는 그후 그 규모에 기복이 없지는 아니 하였을 것이지만 대체로 국가적인 연중행사로 되어갔다. 승려나 속인을 구별하지 않고, 또 남녀를 가리지 않을 뿐만 아 니라 귀천의 차별없이 다같이 평등하게 널리 대중을 대상으로 하 여 잔치를 베풀며 또는 물품을 나누어 주는 법회가 바로 無遮大會 다. 이때에는 불경을 강의 하거나 또는 불교의 이치에 대하여 각 각 의견을 말하며 서로 배우는 절차도 대개 있게 마련이다.12) 光宗이 때때로 歸法寺에서 크게 無遮大會를 열어 잔치를 베풀 며 물품을 나누어 주고,13) 또는 毅宗이 19년(1165) 1월에 역시 시주가 되어 궁중에서 無遮大會를 열었던 일은 다같이 불교의 布 施 정신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지만, 널리 민심을 수람하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국왕 또는 국가가 시주가 되어 新 興寺와 彌勒寺의 각 功臣堂에서 연중행사로서 無遮大會가 열렸다 는 것은 功臣들의 명복을 비는 한편 국민을 국가에의 봉사와 결부 시킴으로써 널리 민심을 거두어 잡았다는 데에 그 구실은 큰 것이 라 하겠다.14) 8) 談禪法會 비교적 초기서부터 3년에 한 번씩 普濟寺에서 談禪法會가 국가 의 주재하에 열리었다. 그것은 禪에 대한 이치를 서로 공부하는 12) 5年에 한 번씩 열리는 無遮大會를 般遮于瑟會(pancavārsika)라 하는데 大唐西 域記 卷 5에는 國王이 시주가 되어 5年에 한 번씩 無遮大會가 열렸던 것을 전하고 있다. 13) 高麗史 卷 93 列傳 6 崔承老 22 輯(1961) 14) 二宮啓任 高麗朝の齋會について, 朝鮮學報

123 Ⅰ. 佛敎의 發達 한편 參禪도 아울러 실천함으로써 禪風을 크게 떨치려는 데 그 주 된 목적을 두고 있었다. 毅宗 9년(1155)에 普濟寺에서 열렸던 普 濟國談禪齋는 바로 전부터 정기적으로 열리어 왔었던 談禪法會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談禪法會는 이것을 개최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3년을 기 다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普濟寺에서만 유 독 개최되어야 할 것도 아니매 李奎報가 書房을 출입하던 때에는 西普通寺와 廣明寺에서도 열리게 되었다. 매년 4월 22일부터 7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88일간에 걸쳐서 성대히 열렸던 西普通寺의 談禪法會는 이를 普濟寺의 경우와 구별하여 別例談禪法會라 일컬 었다.15) 국가가 주재한 談禪法會로서는 이 밖에 昌福寺와 大安寺 에서도 있었다. 熙宗 7년(1211)에 중창된 昌福寺에서는 매년 28 일 간에 걸쳐 열리었는데 그곳에서는 普照國師 知訥이 매양 받들 던 六祖壇經과 大慧語錄을 주로 중심으로 하여 禪의 이치를 서로 토론하였으니 이러한 경향은 다른 곳에서의 談禪法會에서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국가가 주재한 談禪法會 외에도 따로 須彌山 廣照寺와 迦智山 寶林寺 등 九山禪門의 각 本山을 위시하여 迦智山 龍潭寺의 경우 처럼 末寺에 이르기까지 각 사원의 주재 아래 열린 談禪法會가 또 있어서 이를 叢林이 라 하였다. 이같은 談禪法會가 忠烈王 4년(1278)부터 그후 3년간 중지된 일이 있었다. 韋得儒와 盧進義가 高麗에 와 있었던 洪茶丘에게 談 禪法會는 법회라는 미명 아래 기실은 元을 저주하기 위한 불온한 집회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어 元으로부터 금지를 당하였기 때 문이었다. 사실 高宗과 元宗 때 談禪法會가 더욱 성황을 이루었는 15) 東國李相國集 卷 39 西普通寺別例談禪文

124 3. 佛敎行事의 盛行 데,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만복을 아울러 기원하는 것을 그 목적 과 취지의 하나로 하여왔었던 談禪法會가 蒙古의 침입을 당하여 몽고군의 격퇴와 국기의 안태를 보다 절실하게 기원하였음은 당 연한 일이었다. 중지되었던 談禪法會가 그후 다시 열리게 되기는 하였으나, 자연 고려로서는 元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 어서 忠肅王 1년(1314)에는 일삼아 사신을 元에 보내어 談禪法 會에 오해가 없도록 당부하기까지 하였다.16) 9) 仁王百高座道場 高麗의 불교 연중행사로서 그 비중이 큰 것의 하나로 仁王百高 座道場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仁王百高座道場은 仁王護國般若波 羅蜜多經 즉 仁王般若經을 외어 읽으며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법회이다. 仁王般若經 가운데 護國品에서는 갖가지 재난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국왕이 이 經을 하루에 두 번씩 외어야 할 것을 설하고 있다. 특히 이 經을 강경할 때에는 반드시 佛像과 菩 薩像 및 羅漢像을 각각 1백분씩 모시는 한편 1백명의 法師를 청 하여 강경하도록 하되 그 1백명의 법사들이 각각 높이 師子座에 자리잡고 講經할 때에는 그 師子座 앞에 1백 개의 등불을 밝히고 1백가지 향을 또 태우고 1백가지 색깔의 꽃을 뿌려 三寶를 공양 하여야 한다는 그 의식의 절차도 아울러 설하여 놓았다. 고려에서는 仁王百高座道場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찍부터 열리 었다. 高麗人의 눈에 비친 仁王般若經의 교훈과 이 仁王般若經에 대 한 고마움이 고려인에게는 각별한 것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顯宗 11년(1023) 5월 왕은 궁중에 1백개의 師子座를 갖추고 1 백 명의 법사를 청해서 仁王般若經을 외는 仁王百高座道場을 열 16)安啓賢 麗元關係에서 본 高麗佛敎, 海圓黄義敦先生古稀記念史學論叢 (1959)

125 Ⅰ. 佛敎의 發達 었다.17) 그후 顯宗은 18년(1027) 10월에도 仁王般若經을 외어 읽는 의식을 가졌었으니, 契丹의 침입이라는 고역을 치른 당시에 있어서 이같은 仁王百高座道場에 대한 관심은 여간 크지를 아니 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仁王百高座道場은 점차로 격년제로 10 월에 3일간에 걸쳐 열리게 되는 정기적인 행사가 되어, 이때 도합 3만 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공양하는 飯僧 불사를 아울러 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대궐에서 1만명을, 전국 지방의 사찰에서 2만명을 宗 년의 각 10월에 있었던 것 대접하였다. 宣宗 2 4 6년, 睿宗 년, 仁 은 그 예라 하겠다. 그 터나 때로는 간혹 文宗 2년(1048)과 4년 의 경우처럼 한 달 앞당겨 9월에 열기도 하였으며, 또는 한 달 늦 추어 仁宗 21년에는 11월에 열기도 하였다.18) 毅宗 때에도 그 초기에는 격년제로 열리어 그 1년(1147)과 3년 (1149) 및 5년(1151)의 각 10월에 있었으나, 11년 10월에 열린 후로는 종전과 달리 1년을 늦추어 3년마다 열리게 되어 14년과 17 년 및 20년의 각 10월에 仁王百高座道場이 열렸다. 이에 따라 다음 明宗 때에도 그 1년(1171) 10월에 이어서 4년 10월에 열리었는 데19) 어떤 까닭인지 알 수 없으나 다음 3년 후인 7년 10월에는 열 리지 않고 그 이듬해 8년 10월에 열리었다. 그러나 그후로는 다시 3 년제를 지켜 년의 각 10월에 열리었다.20) 蒙古의 침범으로 江華로 천도하고 있었던 高宗과 元宗 때에도 3년제의 仁王百高座道場은 계속 준수되어 국난을 극복하려는 고 려인의 신심은 다시 한번 심화되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仁王般 17) 高麗史 卷 4 顯宗 11年 5月 辛亥 18) 高麗史 卷 17 仁宗 21年 11月 乙卯 19) 高麗史 卷 19 明宗 1年 10月 甲辰 4年 10月 丙子 20) 二宮啓任 朝鮮に於ける仁王會の開設, 朝鮮學報 第 14輯 (1959)

126 3. 佛敎行事의 盛行 若經에서 설하는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드는데 있어서 깊 고 낮은 차이는 물론 있었겠으나 蒙古의 침입을 당하여 국토가 유 린되었던 고려인에게는 仁王般若經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였으리 라고 믿는다. 그러나 경황없이 황망하게 천도하였던 것인만큼, 전 에 사용하여 왔었던 1백 개의 師子座를 비롯하여 의식 때 사용하 여야 할 그 밖의 여러 의구를 함께 가지고 오지를 못하였으므로 자연 그 仁王百高座道場이 제대로의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음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元宗 5년(1264) 7월 金俊의 노력으로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을 102부 찍어내는 한편, 師子 座를 비롯한 여러 의구도 새로이 마련하게 됨으로써 이후 仁王百 高座道場은 그 의식의 절차와 규모를 다시 제대로 갖추기에 이르 렀다.21) 10) 八 關 會 太祖 王建은 新羅의 고풍을 이어 받은 泰封國의 연중행사를 그 대로 계승하여 그가 건국한 그해(918) 11월 궁중 儀鳳樓에서 八 關會를 열었는데, 그후에도 계속 매년 11월마다 이것을 열었다. 더우기 太祖가 그 말년에 十訓要를 제정하여 장차 그의 뒤를 이어 갈 후손들에게 내내 명심하도록 가르쳐 놓은 조항 가운데서 八關 會를 매년 반드시 개최할 것을 당부한 일은22) 그후 八關會가 고 려의 국가적인 성대한 연중행사로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成宗 6년(987)부터는 崔承老의 건의에 따라 八關會 행사가 너 무나 번거롭고 요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고금이 또한 지 출된다는 이유로 22년간 계속 중지된 일이 있었으나,23) 顯宗 1년 21) 高麗史 卷 26 元宗 5年 7月 己亥 22) 高麗史 卷 2 太祖 26年 4月

127 Ⅰ. 佛敎의 發達 (1010) 11월에는 崔沆의 의견을 좇아 다시금 八關會가 열리게 되어,24) 고려가 망할 때까지 그 후 행사의 규모에 약간의 기복은 면할 수 없었지만 대체로 八關會는 연중행사로서 매년 11월 15일 에 성대히 행해졌으니 이를 仲冬八關會라 하였다. 11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간은 공휴일로 되어 있었는데25), 八關會는 開京의 궁중에서 뿐만 아니라 꼭 1개월 앞서서 10월 15일에는 지방의 西 京에서도 열리어 이때 왕을 대신하여 조정에서 내려간 관원이 그 행사를 집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開京에서의 八關會는 매년 11월 15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 였다. 그러나 文宗 5년(1051)에는 그날이 月食이 있게 되는 날이 므로 앞당겨 11월 13일에 개최하였으며, 또 恭愍王 7년(1358)에 는 그날이 冬至날이기 때문에 역시 앞당겨 11월 13일에 열기도 하 였다. 또 宣宗 즉위년(1083)에는 그해 11월에 바로 왕실에 초상 이 있었으므로 12월로 연기한 일도 있었다. 이 같이 11월 15일을 변경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변칙이었던 것이어서 明宗 14년(1184) 禮官이 11월은 왕태후 任씨의 忌日이 끼어 있는 달이라 하여 11월 을 피할 것을 왕께 아뢰었으나 文克謙의 의견대로 11월을 지켰던 것이다. 靖宗 즉위년(1034) 11월에 있은 八關會 때 왕은 法王寺로 가서 예불하였으며, 이어서 다음날에는 궁중에서 대회가 열리었는데 이 때 각 지방의 장관들이 글월을 올려 賀禮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宋나라 상인 외에도 북쪽 東女眞과 西女眞 그리고 남쪽 耽羅(濟州 島)로부터 사절단이 와서 각기 축하의 선물을 왕께 바치었다.26) 23) 高麗史 卷 3 成宗 6年 10月 24) 高麗史 卷 4 顯宗 1年 11月 庚寅 25) 高麗史 卷 84 志 38 刑法 1 官吏給暇 26) 高麗史 卷 6 靖宗 即位年 11月 庚子

128 3. 佛敎行事의 盛行 그리하여 그 후로는 八關會 때 으례 왕이 法王寺로 가서 예불하 는 것이 통례가 되었고, 또 외국 상인들은 이 仲冬八關會를 기회 로 하여 각각 물화를 싣고 와서 크게 무역을 하였다. 八關會는 본시 속인이 1일간이나마 엄숙히 八關齋戒를 지키기 위하여 열게되는 법회이다.27) 그러나 高麗에서 열린 仲冬八關會 는 격식 그대로의 八關會 의식에 그치지 않고 보다 널리 天神 山 神 川神 龍神 등 여러 土俗神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겸하고 있 었다는 데 그 의의가 컸다. 국가를 위하여 전사한 장병들의 명복 을 비는 의미에서 地神과 水神을 즐겁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28) 가을의 추수를 天神에게 감사하기도 하였으니, 八關會는 다름아닌 종합적인 宗敎行事였으며 文化祭였던 것이다. 무릇 宗敎行事에는 으례 歌舞가 수반되는 것이 통례지만, 특히 毅宗 22년(1168)에는 新羅 이래의 고풍이 날로 사라져 가는 것 을 염려하였던 왕의 유시에 따라 국가 전속의 聖歌隊 내지 聖劇 團으로서 4명을 한 조로 하는 四仙樂部를 편성하여 이후 매년 八 關會의 대회 때마다 新羅의 고풍대로 격식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하게 하였다. 이 일은 전통적인 新羅 花郞의 노래와 춤이 더욱 宗 敎儀式의 일부로서 八關會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 다.29) 이리하여 八關會 때에는 대회가 열리는 밤에 궁중의 넓은 광장 중앙에 커다란 등을 하나 밝혀 놓고 그 사방에 다시 많은 등을 벌 27) 不殺生(살생을 하지 않는다) 不偷盜(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不淫妷(남 녀간의 육체관계를 일체 끊는다) 不妄語(거짓말을 아니 한다) 不飮酒(술을 마시지 않는다) 不坐高大床(높고 큰 자리에 앉지 않는다) 不著香華(몸에 향 수를 뿌리거나 꽃을 달아 치장을 아니 한다) 不非時食(오정이 지나면 식사를 아니 한다) 등을 八關齋戒 또는 八戒라 한다. 28)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下 p. 291 (1918) 29) 崔南善 朝鮮常識問答續編 p.192, 三星文化文庫 17 (1972)

129 Ⅰ. 佛敎의 發達 여 놓아 찬란히 하고, 술과 다과를 베풀어 음악과 춤이 진행되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이 함께 즐기고 부처와 天地神明을 즐겁게 하 여 나라의 태평과 왕실의 안태를 빌었다. 文宗 27년(1073) 11월 에 있는 八關會의 대회에서는 敎坊 소속의 楚英이 총지휘하여 처 음으로 抛毬樂과 九張機別伎가 연출되어 大會를 더욱 흥겹게 하 여 주었다.30) 11) 燃 燈 會 太祖가 그 말년에 十訓要를 제정하여 장차 그의 뒤를 이어갈 후 손에게 내내 명심하도록 가르친 조항 가운데서 八關會와 나란히 燃燈會도 매년 반드시 개최할 것을 당부한 일은31) 그후 燃燈會가 八關會와 나란히 高麗의 국가적인 연중행사로 크게 행하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成宗 6년(987)부터는 崔承老의 건의에 따라 八關 會가 폐지되었을 때 燃燈會도 함께 그 행사가 너무나 번거롭고 요 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고금이 지출된다는 이유로 22년 간 계속 중지된 일이 있었으나,32) 顯宗이 즉위하자 다시 열리게 되어 그 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국가적인 행사로서 성대히 행하여 졌다. 燃燈會는 처음 1월 15일에 열렸으므로 이를 上元燃燈이라 하였 다. 成宗 때에는 이것이 폐지되었다가 顯宗 1년(1010) 閏 2月 23 년 만에 燃燈會가 다시 열렸는데, 이해 11월 契丹의 대거 침입으 로 부득이 난을 피하여 開京을 떠난 顯宗은 그 이듬해 1월 羅州까 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도중 2월 15일에는 淸州의 별궁에 30) 安啓賢 八關會攷, 東國史學 4輯 (1956) 二宮啓任 高麗の八關會について, 朝 鮮學報 9 輯 (1956) 31) 高麗史 卷 2 太祖 26年 4月 32) 二宮啓任 高麗朝の上元燃燈, 朝鮮學報 12輯 (1958)

130 3. 佛敎行事의 盛行 서 燃燈會를 열었다.33) 이리하여 顯宗 때부터 仁宗 말년에 이르 기까지 130년간 변함없이 2월 15일에 燃燈會가 열리게 되니 이 를 二月燃燈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仁宗의 뒤를 이은 毅宗은 부 왕 仁宗의 忌日이 바로 2월에 있으므로 2월을 피하여 1월 15일로 바꾸었다. 그 후 明宗 2년(1172)에는 同知樞密院事 崔忠烈의 건 의에 따라 顯宗 때부터 仁宗 말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지켜 내 려 온 2월 15일로 되돌아갔으나34) 그 이듬해 부터는 다시 1월 15일에 열리었다. 다시 熙宗 5년(1209)에는 부왕 神宗의 忌日이 끼어있는 1월을 피하여 또다시 2월 15일에 열리어 그 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대개는 2월 15일을 준수하였다. 이처럼 燃 燈會는 1월 15일의 上元日 또는 2월 15일에 열렸는데, 다같이 1 월 15일이나 2월 15일은 공휴일로 되어 있었다.35) 燃燈會는 1월 15일이나 2월 15일에 열리는 것이 원칙으로 되 어 있었으나 혹 2월 15일이 바로 寒食과 겹치게 될 때에는 文宗 2년(1048) 2월에 있은 燃燈會의 경우처럼 늦추어 2월 16일에 열 기도 하였으며 또는 文宗 32년이나 元宗 9년(1268) 때처럼 앞당 겨 2월 12일에 열기도 하였다. 다시 明宗 14년(1184)에는 1월 15일에 열려야할 燃燈會가 3개월이나 늦추어져 4월 15일에 열렸 으니 그것은 바로 전년 明宗 13년 11월에 王太后 任씨가 별세하 여 국사가 다난하였기 때문이었다. 본시 燃燈이라 하면 부처를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이니, 등을 달 고 밝게 불을 켜 놓음으로써 번뇌와 무지로 가득히 찬 어두운 세 계를 밝게 비추어주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어 칭송하는 것이다. 특 히 한번에 2천개의 등을 달고 5일간에 거쳐 훤히 밝히며 불덕을 33) 高麗史 卷 4 顯宗 2年 2月 己未 34) 高麗史 卷 100 列傳 13 崔忠烈 35) 高麗史 卷 84 志 38 刑法 1 官吏給暇

131 Ⅰ. 佛敎의 發達 기리는 법회를 萬燈會라 하여 高麗에서도 忠肅王이 즉위하던 그 해(1313) 10월에 延慶宮에서 개최한 일이 있었다. 매년 1월 15 일이나 2월 15일에 열기로 되어 있었던 燃燈會도 부처의 공덕을 기리며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등을 밝히는 의식이었으나, 이에 그 치지 않고 보다 더 넓은 종합적인 文化祭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은 八關會의 경우와 거의 같았다. 燃燈會 때에는 여러 곳의 사찰마다 많은 등을 밝히었다.36) 燃 燈會도 八關會 때처럼 小會日과 大會日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小 會日 다음날 밤에는 대궐에서 대회가 열리었다. 대궐안에 많은 등 롱을 벌여놓고 밝히어 찬란히 하고 술과 다과를 베풀어 음악과 춤 과 연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이 함께 즐기는 한편 부처 와 天地神明을 아울러 즐겁게 하고 국가의 태평과 왕실의 안태를 기원하였으니 그 의식의 진행이 八關會 때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 도로 다름이 별로 없었다. 文宗 27년(1073)에 있은 燃燈會에서는 敎坊 소속의 眞卿 등 13명이 새로 전래된 踏沙行歌舞를 대회 때 처음으로 공개하여 대회의 흥을 더욱 돋구었다. 이때 또 같은 敎 坊의 楚英이 지휘하는 가운데 55명이 한 조가 되어 王母隊歌舞를 연출하니 혹은 君王萬歲 혹은 天下太平이라는 글자 모양을 만들 며 춤을 추었다.37) 靖宗 4년(1038) 2월 燃燈會 때 왕이 奉恩寺로 가서 예불하고 그 곳에 모셔 있는 太祖의 사당에 참배한 그 후로는 역대의 왕들 이 다 같이 大會日 전날의 小會日 저녁에 으례 奉恩寺로 가서 太 祖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이 중요한 행사의 하나로 수반되었다.38) 奉恩寺는 일찍이 光宗 2년(951)에 太祖의 願堂으로서 세워진 사 36) 高麗圖經 卷 17 祠宇 37) 高麗史 卷 71 志 25 樂 2 用俗樂節度 38) 高麗史 卷 6 靖宗 4年 2月 癸未

132 3. 佛敎行事의 盛行 원이었다. 이리하여 부처에 대한 공양이라는 燃燈會의 본래적인 성격은 건국자 太祖에 대한 배례라는 국가적이며 정치적인 의의 를 아울러 지니는 것이 되고 있었다. 蒙古의 침입으로 정부가 江華로 피난하자 곧 이어서 高宗 21년 (1234)에는 車倜의 집을 사원으로 만들어 奉恩寺로 이름하고 燃 燈會를 종전과 같은 격식으로 의식의 절차를 갖추었음은 이 燃燈 會를 八關會와 함께 얼마나 중히 여기었던가를 알게 하여 주는 것 이다. 안팎으로 국사가 다난하였던 元宗 14년(1273) 2월 燃燈會 의 모든 행사가 중지되었어도 奉恩寺 行香만은 이행되었으며 그 奉恩寺에만은 등을 달고 밝히었다. 이에 앞서 元宗 12년 2월에는 때마침 楮市橋 부근의 민가 3백 호가 불이 나서 그 수습에 경황이 없었으므로 燃燈會의 모든 행사가 중지되었었는데, 이 때에도 奉 恩寺行香만은 있었을 정도였다.39) 이러한 정기적인 연중행사로서의 燃燈會 외에도 수시로 대소 규 모의 燃燈會가 열리었다. 文宗 21년(1067) 1월에는 興王寺의 낙 성을 기념하기 위한 燃燈會가 열리어 대궐의 뜰에서 興王寺의 문 에 이르는 먼 길에 등을 즐비하게 5일간이나 달아놓고 밤마다 불 을 밝히니 전례 없는 장관을 이루었다. 또 6년 후인 文宗 27년 2 월에도 15일에 정기적인 燃燈會를 마치고 다시 23일에는 또 重光 殿에서 크게 燃燈會를 열었으니 이때 시내에 3만 개의 등을 훤히 밝혀 佛德을 기리었다. 睿宗 10년(1115) 2월 18일과 그 이듬해 11년 2월 20일에 열렸던 燃燈도 정기적인 燃燈會와는 별개로 특 별히 개최한 燃燈會의 한 예라 하겠다.40) 39) 高麗史 卷 27 元宗 12후 2月 戊申 40) 安啓賢 燃燈會攷, 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1959)

133 Ⅰ. 佛敎의 發達 (2) 飯僧과 羅漢齋 및 水陸會 佛敎行事에는 정기적으로 열리었던 것 외에도 갖가지 행사가 수시로 있었다. 왕권의 확립을 위한 일련의 시책을 과감하게 시행 하여 갔던 제 4대 光宗만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귀의가 돈독한 바 가 있어서 혹은 毗盧遮那懺侮法을 열기도 했으며, 혹은 많은 중들 을 궁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공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歸法寺에 서 無遮會와 水陸會를 열기도 하였다. 또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를 다량으로 사들여 지정된 못이나 늪에 풀어 놓아주는 放生佛事도 하였으며, 매월 齋日을 맞이하여서는41) 중들에게 布施하는 것도 잊지를 아니하였다. 다시 나아가서는 중앙이나 지방의 여러 길목 에서 대중들에게 양식과 柴炭을 널리 나누어 주기까지도 하였으 매 후 일, 成宗 때 儒敎主義 입장에 서 있었던 崔承老는 光宗의 이같은 佛事에 비난을 퍼붓고 국가의 재정에 낭비를 가져온 것이 라고 혹평을 하였을 정도였다.42) 그 후에도 행사의 규모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으나 거의 역대의 국왕은 수시로 飯僧과 羅漢齋 및 水陸會 등 각종의 불교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1) 飯 僧 스님을 공경하며 받들어 모시는 뜻에서 식사를 베푸는 행사를 가리키어 飯僧이라 한다.43) 高麗 때에는 이 飯僧佛事가 뒤를 잇다시피 수시로 성대히 있었 41) 일반 信者들이 八關齋戒를 지키며 언행을 삼가고 마음을 바로잡아 선행을 닦는 일정한 날을 齋日이라 하여, 매월 일올 六齋日이라 부르고 다시 六齋日에 일을 더하여 十齋日이라고도 한다. 42) 高麗史 卷 93 列傳 6 崔承老 43) 李載昌 麗代飯僧考, 佛敎學報 1輯 (1963)

134 3. 佛敎行事의 盛行 으니 顯宗 9년(1018) 5월에 왕이 10만명을 飯僧한 것이라든지44) 毅宗 11년(1157) 1월에 왕이 拯世僧統 玄曦 등 2백명을 궁으로 초대하여 飯僧한 일이 있었음은45) 그 한 예다. 文宗 때부터는 국 왕이 사원으로 행차하여 그곳에서 飯僧佛事를 열기도 하였는데, 肅宗 3년(1098)에는 興王寺에서 3천명의 중들을 공양하기도 하였 다.46) 국왕이 施主가 되어 혹은 궁중에서 혹은 사원에서 수시로 베풀 어진 飯僧佛事는 순전히 飯僧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열리지는 아니하였다. 사원의 낙성과 불상의 조성을 기념 축하하는 慶讚法 會를 비롯하여 諱辰道場 祝壽道場 仁王百高座道場 藏經道場 등 각종의 法會가 있을 때에는 그 의식의 절차로서 대개 飯僧이 아울러 있었던 것이다. 高宗 12년(1225) 8월에 왕이 康宗의 명복 을 비는 諱辰道場을 열었을 때에는 2백명의 승들을 공양했으며, 恭愍王 5년(1356) 5월에 있은 왕의 탄생일에는 普愚를 비롯한 108명의 승들을 飯僧하였다. 특히 국가의 태평을 기원하는 뜻에서 2년 또는 3년마다 10월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仁王百高座道場 때에는 반드시 3일간에 걸쳐 3만명의 승들을 공양하는 것으로 되 어 있었으니 이는 高麗佛敎의 국가적 성격을 단적으로 말하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忠宣王 1년(1309) 9월에는 왕이 1만명에 이르는 중들을 공양 하고 이어서 母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旻天寺를 창건하였는데, 忠宣王 3년(1311) 旻天寺에서 3천명의 중들을 공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忠肅王에게 물려 준 후인 忠肅王 즉위년(1313) 9 월에도 5백명의 중들에게 또 식사를 공양하였다. 다시 그해 10월 44) 高麗史 卷 4 顯宗 9年 5月 戊寅 45) 高麗史 卷 18 毅宗 11年 1月 庚辰 46) 高麗史 卷 11 肅宗 3年 4月 丁酉

135 Ⅰ. 佛敎의 發達 에는 5일간에 걸쳐 매일 延慶宮에서 2천명씩 飯僧하였으니 이를 불러 萬僧會라 하였다. 이때 上王이 萬僧會를 위해 銀瓶 1백개를 희사한 외에도 손수 향로를 받들면서 禪宗僧 冲坦과 敎宗僧 孝楨 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각각 白金 1근씩 보시하니 이 불사에 소요 된 비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47) 2) 羅 漢 齋 十六羅漢48) 또는 五百羅漢을49) 공양하며 찬탄하는 法會를 널 리 羅漢齋라 부르지만 때로는 그 공양의 대상에 따라 각각 나누어 十六羅漢齋 또는 五百羅漢齋라고도 한다. 高麗 중기에는 국왕이 普濟寺로 행차하여 그곳에서 五百羅漢齋 를 올리는 일이 비교적 많았다. 五百羅漢齋가 文宗 7년(1053) 9 월에는 神光寺에서, 肅宗 7년(1102) 10월에는 神護寺에서, 또 忠 烈王 8년(1282) 9월에는 吉祥寺에서 열린 일도 있기는 하였으나 대개는 普濟寺에서 열리었다. 肅宗 4년 (1099) 4월과 6년 4월, 毅宗 5년(1151) 7월과 7년 3월, 明宗 6년(1176) 4월과 8년 3월 등은 다같이 普濟寺에서 열린 그 예이지만 毅宗 5년 7월에 있은 五百羅漢齋에서는 비오기를 아울러 기원하였었다.50) 또 神宗 6년 2월에 있은 五百羅漢齋에서는 당시 국내를 시끄럽게 하고 있었던 지방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기도를 아울러 그 목적으로 하 47) 二宮啓任 高麗朝の齋會について, 朝鮮學報 21 22輯(1961) 48) 일찌기 印度 古代때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무르면서 佛法을 수호할 것을 서로 다짐한 바가 있었던 跋陀羅(Bhadra) 阿氏多(Ajita) 迦諾迦伐蹉(Kanakavatsa) 등, 10명의 聖賢들을 가리키어 十六羅漢이라 부른다. 49) 부처가 이 세상을 떠났던 그해 王舍城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佛典 의 편찬이 처음으로 있게 될 때 그 자리에 모였던 大迦葉(Mahākāshyapa) 등 5백 명의 불교도를 五百羅漢이라 한다. 또는 카니시카王(Kanishka) 때인 2세기 초에 네번째로 佛典의 편찬이 있었을 때 모였던 世友(Vasumitra) 覺天(Buddhadeva) 등 5백명의 불교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50) 高麗史 卷 17 毅宗 5年 7月 甲辰

136 3. 佛敎行事의 盛行 였던 것이니,51) 五百羅漢齋는 五百羅漢을 공양하는 뜻에서만 열 리지는 아니하였던 것 같다. 한편 五百羅漢齋와는 별개로 왕이 수 시로 王輪寺에서 올렸던 羅漢齋가 또 있었다. 그러나 이 羅漢齋가 十六羅漢만을 공양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五百羅漢도 아울러 공양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3) 水 陸 會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가 위하여 佛法을 강설할 뿐만 아니라 음식도 베푸는 의식을 水陸會 또는 水陸齋라 한다. 水陸會는 일찌기 光宗 때에도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가 있었는 데, 宣宗 때 太史局事로 있었던 崔士謙이 水陸齋의 의식절차를 적 어놓은 水陸儀文을 宋으로부터 얻어 가지고 돌아온 것을 계기로 왕명에 의해 普齊寺 경내에 水陸堂을 새로 세우게 된 일은52) 水陸 齋를 더욱 크게 격식에 맞도록 하는 것이 되었다. 후에 一然의 제 자인 混丘( )가 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한 일이 또한 水陸 齋를 널리 성하게 하는 것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3) 各種의 道場 高麗 때에는 또 이밖에 수시로 여러 종류의 道場이 열리었다. 道場이라 함은 佛道를 닦기 위한 장소로 설정한 일정한 구역 또는 나아가서 그곳에서 진행되는 法會를 가리킨다. 따라서 법당내에서 진행되는 법회는 물론, 법당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곳에서 진행되 는 법회도 道場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고도로 神秘主 51) 高麗史 卷 21 神宗 6年 2月 壬戌 52) 高麗史 卷 10 宜宗 7年 1月 壬辰

137 Ⅰ. 佛敎의 發達 義化된 宗敎儀式 즉 密敎의 儀式을 道場이라고 부른다. 고도로 발 달된 신비주의는 철학적 思惟의 극치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장 원시적인 呪術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질병을 낫게 하며, 가뭄과 그밖의 재난이 없도록 하고 또 壽命長壽하며 번영을 이룩하고 또 는 도둑과 외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呪術을 조직적으로 儀 式化한 것이 바로 道場이므로 道場은 토속신앙과 융합될 바탕이 지극히 짙은 것이다. 이리하여 道場의 설치는 佛法의 전수라는 본 래의 의미를 떠나 영험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高麗 때 열린 수많은 道場은 거의 이같은 密敎의 의식이었다. 1) 慶讚道場 사원이 새로 낙성되거나 중수되었을 때, 또는 불상을 새로 만들 어 모시거나 寫經을 마치었을 때 이를 기념 축하하는 법회를 널리 慶讚道場이라 한다. 肅宗 2년 2월 國淸寺가 낙성되었을 때 그 축 하로 慶讚道場이 있었음은53) 그 한 예다. 2) 法華道場 妙法蓮華經을 외우며 懺悔하는 의식을 法華道場 또는 法華懺法 이라 한다. 宣宗 9년(1092) 6월 仁睿太后가 見佛寺에서 法華禮懺 을 닦았으며,54) 明宗 10년(1180)에는 왕이 崇敎寺에서 法華會를 연 일이 있었다. 忠肅王 2년(1315)에 國淸寺 金堂이 중수되어 이 를 경찬하는 법회가 있었을 때에도 法華禮懺이 있었다. 法華의 신 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남에 따라 자연 일반 대중에 이르 기까지 파급되어 開京에서만도 여러 곳에 法華結社가 이루어졌으 니 蓮華院과 寶岩社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開京의 남쪽 주민들이 53) 高麗史 卷 11 肅宗 2年 2月 戊寅 54) 高麗史 卷 10 宣宗 9年 6月 壬申

138 3. 佛敎行事의 盛行 모인 蓮華院에서는 六齋日마다 法華經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토 론하며 매월 15일에는 다같이 밤을 새워가면서 極樂往生을 염불 하였다. 寶岩社에서도 이와 같았는데 여기에는 주로 퇴직한 전 관 리들이 모였었다.55) 3) 消災道場 消災一切閃電障難隨求如意陀羅尼經이거나 또는 大威德金輪佛頂 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 등을 외면서 질병과 天災地變을 없애고 복을 비는 의식이 바로 消災道場이다. 高麗 때 열린 道場 가운데 그 횟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 이 消災道場이었다. 仁宗 21 년(1143) 6월, 大觀殿에서 5일간에 걸쳐 消災道場이 있었는데 이 것은 왕비 任씨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56) 明宗 9년(1179) 9 월 光岩寺에서 있은 消災道場은 天災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4) 佛頂道場 佛頂尊勝陀羅尼經을 외면서 재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의식이 佛 頂道場이다. 睿宗 때만해도 2년(1107) 3월, 4년 10월, 9년 4월, 15년 8월, 17년 7월에 각각 있었는데, 17년 7월 會慶殿에서 열리 었던 佛頂道場은 당시 開京 주변의 산에 송충이가 들끓어 나무가 거의 모두들 죽어갔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5) 龍王道場 大雲輪請雨經과 龍王雲雨經 등을 외면서 가뭄때 비 오기를 기원 하는 의식이다. 睿宗 때만 하더라도 1년(1106) 6월에는 法雲寺에 서, 2년 5월에는 興國寺에서, 7년 5월과 16년 5월에도 각각 興國 55) 法華靈驗傳 卷下 蓮華院之談若說, 朝鮮佛書刋行會本 (1931) 56) 高麗史 卷 17 仁宗 21年 6月 戊子

139 Ⅰ. 佛敎의 發達 寺에서 龍王道場이 있었다. 다시 그해 睿宗 16년(1121) 윤 5월에 는 王師 德緣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비 오기를 빌기까지 하였다.57) 明宗 3년(1173) 4월에도 왕을 비롯하여 고관대작들이 普濟寺에서 비 오기를 기원하였는데, 그해 1월부터 내내 비가 오지를 않아 냇 물과 우물이 말라붙고 전염병이 만연하며 굶주린 자가 속출했을 뿐 만 아니라 사람의 고기를 팔고 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58) 6) 金光明經道場 비 오기를 기원했던 道場으로는 金光明經 또는 金光明最勝王經 을 외던 金光明經道場이 또 있었다. 金光明經은 그 안에 四天王護 國品이 있어 이 때문에 護國經典으로 높이 받들어져 오는 것이지 만, 비 오기를 빌기 위하여 일찍부터 이 金光明經을 외는 일이 있 어 왔다. 文宗 2년 8월, 宣宗 즉위년 10월, 靖宗 7년 5월 등은 그 예라 하겠지만, 특히 宣宗 2년 5월에 있은 金光明經道場 때에는 7 일 간에 걸쳐 乾德殿에서 열린 바가 있었다.59) 7) 金剛經道場 壽命長壽와 비 오기를 빌기 위하여 또는 병을 고치거나 외적을 막기 위한 의미에서 金剛般若經을 외는 의식을 金剛經道場이라 한 다. 文宗 6년(1052) 6월, 宣宗 4년 4월, 肅宗 1년 5월에 궁중에서 열리었던 金剛經道場은 다같이 비오기를 빌기 위한 것이었다. 8) 般若經道場 肅宗 7년(1102) 6월에 송충이의 해를 막기 위하여 2천명의 중 57) 高麗史 卷 14 睿宗 16年 閏 5月 丁卯 58) 高麗史 卷 19 明宗 3年 4月 丙子 59) 高麗史 卷 10 宣宗 2年 5月 甲寅

140 3. 佛敎行事의 盛行 들이 네 패로 나누어 般若經을 읽으면서 開京 주변의 산을 두루 돌았으며,60) 睿宗 1년(1106)에는 王師 德昌을 초빙하여 會慶殿에 서 般若經을 외며 비 오기를 기원하였다. 전염병을 막기 위한 기원 으로서도 般若經을 읽은 般若道場이 열리었으니, 睿宗 4년 4월과 15년 8월에 각각 있은 것은 그 예라 하겠다. 9) 華嚴道場 華嚴經을 외며 강독하고 普賢菩薩이 세운 十大願을61) 마음에 되새기어 참회하는 한편,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또는 재난을 없애기 위하여 기원하는 법회를 華嚴道場이라 한다. 文宗 즉위년 (1046) 8월과 仁宗 6년(1128) 3월에도 華嚴道場이 열리었으나, 文宗 37년(1083) 7월 興國寺에서 5일간에 걸쳐 열리었던 華嚴道 場에서는 날씨가 고르기를 기원했으며,62) 肅宗 7년(1102) 4월에 는 송충이의 해를 막기 위하여 華嚴經을 외는 의식이 있었다.63) 10) 灌頂道場 灌頂經과 그 다라니를 외며 재난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식이 灌頂道場이니, 康宗 1년(1212) 1월과 元宗 10년(1269) 12월에 각각 열린 일이 있었다. 肅宗 6년(1101) 4월에도 60) 高麗史 卷 54 志 8 五行 2 61) 禮敬諸佛(항상 모든 부처에게 예배한다) 稱讚如來(항상 모든 부처의 덕을 칭탄한다) 廣修供養(항상 널리 모든 부처를 공양한다) 懺悔業障(항상 억겁 의 죄를 참회하여 씻도록 한다) 隨喜功德(항상 타인의 선행을 고맙고 기쁘게 여긴다) 請轉法輪(항상 모든 부처에게 배울 것을 청한다) 請佛住世(열반에 드시는 부처에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주시기를 항상 청한다) 常 隨佛學 (항상 毘盧舍那佛을 따라 그 가르침을 배운다) 恒順衆生(모든 중생에 게 차별없이 고루 자비를 베푼다) 普皆廻向(모두가 다 같이 부처의 경지에 들 도록 한다) 등의 열가지 願을 普賢의 十大願아라 한다. 62) 高麗史 卷 9 文宗 37年 7月 癸丑 63) 高麗史 卷 54 志 8 五行

141 Ⅰ. 佛敎의 發達 송충이의 해를 없애려고 首押山에서 灌頂道場을 열어 기원한 바 가 있었다.64) 11) 帝釋道場 국내에 변란이 있거나 또는 외적의 침범이 있을 때 帝釋天을 모 시는 帝釋道場이 때때로 열렸으니, 그것은 帝釋天이 다름아닌 불 교의 守護神이며 戰闘神이기 때문이다. 明宗 3년(1173) 1월, 6년 5월, 7년 2월, 8년 1월, 11년 2월 등 明宗 때에 비교적 많이 열렸 는데, 高宗 3년(1216) 1월과 10년 1월에도 있었다. 12) 神衆道場 神衆道場은 불법의 수호신인 神將들을 한곳에 모시고 각 종의 재액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肅宗 6년 4월에는 송 충이의 해를 없애기 위하여 首押山에서 神衆道場을 개최한 일도 있었는데, 高宗 36년(1249)부터는 그 명칭도 天兵神衆道場과 華 嚴神衆道場 등으로 세분화되면서 더욱 빈번히 열리게 되었다. 13) 藥師道場 藥師佛을 모시거나 또는 藥師經을 읽으며 각종의 재액을 없애어 그 소원대로 성취되기를 비는 법회나 의식을 藥師道場이라 한다. 특히 藥師經에는 이 경을 받들어 모시고 정성껏 읽으면 국내의 병 란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설하여 놓았기 때문에, 完顏女眞 과의 교전이 전개되던 睿宗 초기에 승리를 비는 藥師道場이 여러 번 있었다. 14) 文豆婁道場 文豆婁道場은 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의 가르침에 따라 五方 64) 高麗史 卷 54 志 8 五行

142 3. 佛敎行事의 盛行 神을 모시고 주문을 외면서 각 종의 재액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 식이다. 그 재액 가운데서도 특히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태 를 빌기 위하여 이 文豆婁道場이 때때로 열리었던 것이다. 東北面에서 完顔女眞과의 대결이 있었던 睿宗 3년(1108) 7월 에는 북쪽 국경 가까운 鎭靜寺에서 文豆婁道場을 열었으며,65) 또 그 이듬해 4월에도 西京의 興福寺 永明寺 金剛寺 長剛寺 등 4 개 사원에서 文豆婁道場이 있었다. 高宗 4년에도 있었는데, 앞서 文宗 28년(1074) 7월 東京의 四天王寺에서 27일간에 걸쳐 文豆 婁道場이 열리었다는 것은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라 하겠다. 왜 냐하면 일찌기 統一新羅 초기에 明朗法師가 처음으로 文豆婁道場 을 열어 唐軍의 내침을 미리 막아낼 수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세 워진 사원이 四天王寺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四天王寺는 통일신 라 이래로 호국의 이념을 구현시킨 사원으로서 높이 받들어져 온 것이다. 天神을 말하는 것이니 持國天廣目天增長天多聞天이 바로 그 본시 四天王이라 하면 국토의 동 서 남 북을 각각 수호하는 들이다. 이 四天王을 모시고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四天王道場 이 또한 열리어, 睿宗 3년 7월에는 東北面의 毗沙門寺에서, 高宗 4 년 12월에는 궁중에서 있었다. 15) 仁王道場 仁王百高座道場과는 별개로 또 仁王道場이 있어서 仁王經 내지 그 다라니를 외며 각 종의 재액을 없애고 만복을 빌며 도둑과 외 적으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하여 기원을 하였다. 이 仁王道場 때에 도 대개는 文豆婁道場 때처럼 壇을 만들고 동 서 남 북 중앙 65) 高麗史 卷12 睿宗 3年 7月 丙子

143 Ⅰ. 佛敎의 發達 의 5방에 각각 보살을 모시었다.66) 毅宗 4년 10월과 明宗 9년 7 월에 있은 仁王道場에서는 천재지변이 없기를 빌기 위하여 열었 던 것이다. 한편 高宗 15년 6월에 있은 仁王道場은 오랑캐 즉 蒙 古軍의 격퇴를 빌기 위하여 개최된 것이었는데,67) 그후 高宗 36 년 8월, 38년 6월, 39년 3월, 40년 4월 등에 있었던 것도 蒙古軍 을 격퇴하기 위하여 열리었을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16) 閻滿德迦威怒王神呪道場 五大明王의 하나인 閻滿德迦威怒王 즉 大威德明王(Yamāntaka) 을 모시고 병란을 진압시키며 또 재액을 없애어 만복을 비는 의식 을 閻滿德迦威怒王神呪道場이라 하여,68) 高宗 22년 11월에 병란 을 없애기 위하여 이를 연 바가 있었다. 17) 無能勝道場 無能勝大明王陀羅尼經을 외는 의식이 無能勝道場인데, 高宗 때 에는 4년(1217) 1월과 4월 및 10월에 열린 바가 있었다. 또 14년 (1227) 9월에도 있었는데 이때에는 특히 승리를 기원하였다. 18) 摩利支天道場 摩利支經을 외며 각종의 재난이 없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 摩利 支天道場이다. 본시 摩利支天(Marici)은 얼굴이 셋이며 팔이 넷인 천신으로서 항상 재난을 없애어 만복을 준다. 또 승리의 신으로서 군인의 수호신이기도 한 것이다. 高麗에서는 文宗 20년 9월, 肅宗 66) 良賁( )이 찬술한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陀羅尼念誦儀軌에 의하면 동 서 남 북 중앙에 각각 金剛手菩薩 金剛利菩薩 金剛寶菩薩 金剛藥 叉菩薩 金剛般若蜜多菩薩을 모시도록 되어 있다. 67) 高麗史 卷22 高宗 15年 6月 壬戌 68) 무서운 면상을 하면서 악마를 항복시키는 神將을 明王(Vidyarāja)이라 하거니 와 大威德明王은 항상 흰 소를 타고 있음이 그 특징이다

144 3. 佛敎行事의 盛行 6년 4월, 明宗 3년 2월과 6년 4월, 熙宗 5년 10월과 6년 4월에 있 었는데, 다같이 妙通寺에서 열리었음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 던 것 같다. 19) 阿吒波拘神道場 仁宗 8년 9월에 弘慶院에서 阿吒波拘神道場을 열었는데, 阿吒 波拘神(Atavaka)은 얼굴이 넷이며 팔이 여덟인 천신이어서 항상 칼과 수레를 지니며 국토를 수호하며 衆生을 옹호한다. 20) 孔雀明王道場 孔雀明王經 내지 그 다라니를 외며 모든 나쁜 병과 또 모든 공포 로부터 떠나게 하고 아울러 壽命의 長壽를 비는 의식이 孔雀明王道 場이다. 睿宗 5년 4월 文德殿에서 개최된 일이 있었는데 이 孔雀明 王道場은 다른 道場에 비해서 그리 빈번히 열리지는 않았다. (4) 其他 行事 1) 三長月의 施行 일반 信者들이 1월과 5월 및 9월에 선행을 닦는 행사를 三長月 이라 한다. 庶民經典의 하나인 提謂經에 三長月이 설되어 있어서 불교의 생활화에 큰 구실을 하여 온 것이다. 成宗 6년 八關會와 燃燈會가 폐지되었으나 그 대신 다음해 成宗 7년(998)에 1 5 9월을 佛式에 따라 三長月로 정하여 널리 도살을 금하는 영을 내 린일은69) 도리어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 어진다. 69) 高麗史 卷 3 成宗 7年 12月

145 Ⅰ. 佛敎의 發達 2) 八聖堂의 建立 仁宗 9년 8월 妙淸의 건의에 따라 궁중에 八聖堂을 짓고 八聖을 모시 어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였다. 八聖이라 함은 전국 명 산 가운데 여덟 산들의 山神을 가리키는 것이니, 白頭山의 山神 太 白仙人과 開京 松岳의 山神 震山居士 등을 말하는데, 太白仙人은 그 本體를 文殊師利菩薩이 라 하였으니 불교신앙과 토속신앙의 習 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같이 神祗信仰과 佛 菩薩의 숭배사상 과의 거리를 근접시키는 노력은 불교사상을 더욱 토착화 내지 서민 화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지만 高麗 중기에는 이같은 神佛混合思想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萬佛香徒에 의해서 행해진 여 러가지 행사도 이같은 神佛 혼합에서 이루어진 불교 행사였다. 3) 十王堂의 建立과 地藏經 刊行 地藏菩薩은 인간이 산다는 그 자체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한편, 양식을 충족하게 마련하여 줄 뿐만 아니라 질병으로부터 구제하여 주는 자비로운 보살이다. 다시 나아가서 道敎의 十王思想과 결부 하여 지옥에 있는 모든 衆生이 구제될 때까지 교화에 힘을 써서 극락에 왕생토록 한다. 肅宗 7년, 興福寺 경내에 十王堂이 새로 세 워졌을 때 왕이 왕비와 더불어 그 낙성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이 같은 十王堂의 건립은 高宗 33년(1246) 崔怡의 외삼촌이었던 鄭晏이 閻羅王預修生七往生淨土經 일명 地藏十王經을 간행한 일과 더불어 地藏 신앙을 성히 일으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高麗 때에는 十王 가운데 제 7왕인 閻羅王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중생을 地藏菩薩의 자비로써 극락에 왕생케 하라는 법회 가 때때로 있었던 것이다

146 3. 佛敎行事의 盛行 4) 延生經道場 延命菩薩의 공덕을 설하여 놓은 延命地藏經을 외며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을 延生經道場이라 하여 康宗 1년 1월에 3일간에 걸 쳐 궁중에서 열린 바가 있었다. 이 延生地藏經도 기실은 佛敎 사상 과 道敎 사상이 서로 혼합한 것이다. 5) 寫 經 인쇄술이 발달되어 經典을 비교적 손쉽게 얻어지게 된 후에도 寫經하는 일은 큰 공덕을 짓는 것으로 여기어 高麗 때에도 수 없 이 寫經佛事가 행해졌다. 寫經은 죽은 이의 명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의 현세와 죽음 후의 福을 기원하는 뜻에서 행해 졌던 것이다. 국가의 발전을 빌기 위하여서도 寫經이 이루어졌음 은 물론이다. 일찌기 寫經院이 설치되어 金字寫經과 銀字寫經도 행해졌는데, 明宗 11 년에는 그 寫經院에 있는 다량의 金과 銀을 탐내어 불량 배들이 방화하여 그 틈을 타서 훔치려고 하기까지 한 일이 있었 다. 忠烈王 6년에는 廉承益이 자기 집을 金字大藏寫經所로 만들었 음은 寫經佛事를 더욱 성하게 하는 길이 되었다. 高麗의 寫經은그 필체로 보거나 또는 寫經하는 그 종이의 질로 보거나 우수한 것이 었기 때문에 忠烈王 때에는 때때로 元나라로부터 요구가 있어 많 은 寫經僧들이 元으로 가서 寫經을 하였었으니 忠烈王 16년 惠永 이 1백명의 寫經僧을 거느리고 가서 元에서 華嚴經의 金字寫經을 만든 것은 그 한 예라 하겠다. 忠烈王 1년과 10년에 각각 三重大 師 安諦가 寫經한 不空羂索神變眞言經과 顯識論이 현재 전하여오 고 있거니와 이 銀字寫經은 당시 국왕이 발원하여 오랜 시일을 거

147 Ⅰ. 佛敎의 發達 쳐 그 완성을 보았던 銀字大藏經의 일부인 것인만큼 지극히 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70) 6) 慈惠事業 불교의 자비정신에 입각하여 국가에서는 때때로 세궁민과 나그 네들에게 음식과 의약품 등을 널리 나누어주는 행사가 또 있었다. 文宗 18년 3월서부터 5월에 걸쳐 3개월간 開國寺에서 이를 행한 일이 있었으며, 또 肅宗 6년에도 4월서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3 개월간 나그네에게 普通院에서 양식을 베푼 일이 있었음은 그 한 예다. 또 文宗 25년 12월에는 玄德宮의 쌀을 5백 석이나 방출하 여 西普通院에서 또 세궁민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아마 高麗 때 普通院은 두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恭愍王 3년에도 演福寺에 賑 濟色을 설치하고 정부미 5백 석으로 죽을 만들어 굶주린 자들에 게 널리 베풀었으며, 7년 후인 10년(1361) 2월에도 普濟寺에 賑 濟場을 두어 양식을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71) 7) 特 赦 令 각종의 佛事가 있었을 때 이와 더불어 왕왕 特赦令을 내리어 죄 인들을 많이 풀었음은 불교의 자비와 관용정신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으니, 文宗 16년 8월 興王寺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의 일은 그 한 예다. 이밖에 肅宗 4년 10월 왕이 三角山 僧伽窟에서 돌아올 때 藥師院에서 特赦令을 내린 일이 있었으며, 또 元宗 14 년 4월에는 날씨가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消災道場을 여는 한편 적수를 풀어놓기도 한 일이 있었다. 安啓賢 70) 高麗寫經展觀目錄, 東國大學校刊(1962) 71) 安啓賢 麗代의 護國信仰과 慈惠事業, 東國 (1958)

148 4. 寺院經濟의 發達 4. 寺院經濟의 發達 (1) 寺院經濟 發達의 背景 高麗時代의 寺院과 豪僧은 사실상의 領主 또는 大地主인 동시에 귀족적 신분으로 발전하여 寺領 내에 많은 노비를 소유 사역하였 고 각종 상업에도 관여하여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며, 한편으로 高利貸를 통하여 富를 더욱 축적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 한 경제적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이제 우리는 高麗시대의 사원경 제가 그와 같이 발달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 社會的 背景 高麗社會는 정치사상 귀족정치의 시대라고도 불리운다. 統一新 羅 말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서 각지에서 봉기한 군웅들은 비 록 王建에 의한 통일 후, 표면상 高麗朝에 귀순은 하였다손 치더 라도 그들의 세력은 은연중 상당한 것이어서 그들에 대한 어떠한 특별한 대책이 없이는 高麗朝가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의 안정은 도저히 바랄 수가 없었다. 여기에 그들에 대한 융화책으로 취해진 것이 外官制度이었다.1) 그러나 外官制度만으로는 그들의 세력확대를 방지할 수도 없었 고 따라서 확고한 사회의 안정은 기대할 수도 없었으므로 무엇보 다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절실히 요청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는 말할 것도 없이 농업이 주요 생산업이었고 모든 권력의 기초는 토지의 점유에 있었으므로 토지제도야말로 중앙집권체제 1) 高麗史 列傳 6 崔承老傳

149 Ⅰ. 佛敎의 發達 의 기반이 될 수가 있었고 또한 地方豪族들의 세력 확대를 방지하 고 온 국민을 국가권력하에 완전히 예속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景宗 원년(976) 公田制度를 확립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그 당위 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公田制를 비롯한 모든 문물제도가 틀이 잡히고 사회 의 제질서가 정돈된 成宗代( )부터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통제로 말미암아 지 방호족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그 발호도 억압되었다. 그러나 중엽에 접어들면서 국가권력이 약해져서 그 통제력을 잃자 그들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며 公田을 廣占하고 백 성들을 멋대로 휘어잡기에 이르렀다.2) 특히 毅宗( ) 이후의 武臣擅斷으로부터는 상하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호족들은 전지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그로 인한 사회전체의 혼란상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었던 것이다. 거 기에 雪上加霜으로 高麗시대는 契丹 蒙古 倭 등 외적의 侵寇에 시종된 시대로써 이러한 內憂와 外患은 高麗 후기의 사회 질서를 더욱 문란하게 하였던 것이다. 景宗 원년에 제정을 본 公田制度는 그 후 수차의 부분적인 수정 이 가해졌었으나 그 원칙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일관되었다. 高麗 의 田制는 원칙적으로 私有를 인정하지 않고 전국의 토지는 모두 국가에 의해 관리들에게는 官等에 따라 分給되고 농민들에게는 丁田이라 하여 균등하게 분배되 었었다. 그러나 왕족이나 공신 또 는 호족들과 같은 귀족들에게는 功陰田이 지급되고 그 세습이 인 정되어 실질적으로는 토지 사유의 싹이 텄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토지 제도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내우외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 떻게 되었는가는 不問可知일 것이다. 즉 각 귀족들은 功陰田을 빙 2) 高麗史 志 29 選擧 3 事審官 忠肅王 5年 4月

150 4. 寺院經濟의 發達 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토전을 兼併 또는 奪占 하였으니 그 결과 그들 귀족의 田地는 산천으로 표를 삼을 정도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자연히 국가의 세입이 감축되 는 결과를 초래케 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일반 농민들에 대한 가렴 주구는 날이 가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혹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배경이 사원으로 하여금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한 커다란 계기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 급하겠지만 대략 귀족들이 사원에 토지를 施納하였던 것은 위와 같은 사회적 배경이 그를 가능케 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토지 시납 은 일면 後述하는 사상적 또는 신앙적인 배경의 素地도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佛敎가 高麗王朝의 지나칠 정도의 비호와 국민들의 절대적인 숭앙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 자신의 세력을 유지, 확대 하기 위하여 토지를 寺院에 시납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高麗 중엽 이후의 시대적인 추세도 있었던 것이다. 일반 국민들의 토지 寄進은 대략 두 가지의 형태가 있었는데 신 앙적인 원인의 경우는 이를 施納이라 하고, 농민들이 귀족과 권세 가들로부터의 가렴주구를 피하기 위하여 면세를 받을 수 있는 사 원에 토지를 기진하고 사원의 토전을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화함 으로써 심한 곤경에서 벗어나려던 경우에 있어서의 토지 기진은 이를 시납과 구별하여 投託이라 부르고자 하는 바, 이러한 농민들 의 투탁에 의한 사원의 토지 확대의 소지는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 회적 배경에서 연유되었던 것이다. 또한 말엽에 이르면 사원이 적 극적으로 토지를 兼併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도 위와 같은 사회적 인 실정에 오염된 결과라 할 수 있다

151 Ⅰ. 佛敎의 發達 2) 思想的 背景 우리나라의 佛敎史에 있어서 흔히 高麗時代를 황금시대로 잡고 있다. 高麗의 불교가 이러한 표현을 들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은 新羅佛敎를 계승하여 국초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았었고 高僧硕德이 속출하여 敎學의 발전은 물론 불교를 대중화하여 상 하에 신봉되었다는 등의 諸原因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 한 것은 불교가 국가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았다는 데에 있다고 하 겠다. 불교가 高麗朝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은 데 대하여는 이를 여러 갈래로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 촛점은 어디까지나 사상적인 방면 에 두어야 할 줄 안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이란 곧 護國思想을 말 하는 바, 高麗朝와 佛敎는 호국사상을 매개로 하여 굳게 결합할 수 가 있었으니 이제 그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風水地理思想에 입각한 裨補寺塔說이니 이는 王建太祖 26년에 제정된 10訓要에 뚜렷이 명시되어 있다. 즉 제 2조에서 모든 寺院은 다 道詵이 山水의 順逆을 推占해서 창건한 것이 다. 道詵은 말하기를 내가 占定한 외로 함부로 절을 지으면 곧 地德을 損薄하여 나라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라 하였다. 짐 이 생각컨대 후세의 국왕이 나 공후후비 및 조신들이 각각 願 堂이라 하여 자꾸 절을 지을 것을 크게 우려하는 바이다. 新羅 末에 다투어 절을 지어 지덕을 衰損케 하여 결국 망하고 말았으 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까보냐 3) 라 하여 太祖는 사원 건립에 있어서 道詵의 山水秘錄에 의한 山川 3) 高麗史 世家 2 太祖 26年 4月

152 4. 寺院經濟의 發達 裨補說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또한 新羅의 예를 들어 이를 강 력히 다짐하고 있다. 裨補寺塔說이란 統一新羅 말엽 이후 우리 나라 사상계의 이면을 석권한 風水地理思想의 일부로서 특히 道詵大師가 이를 강력히 주 장하였던 것인데,4) 太祖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高麗社稷의 안정 과 영원한 발전을 위한 정신적 사상적인 기초로 삼았고, 다시 訓 要에서 강력히 환기시켜 후세에 遺囑한 것이다. 이러한 太祖의 의 사는 역대 왕이나 신하들에 의하여 제대로 계승 준수되지는 못하 고 사원의 濫造가 끊이지 않았으나 高麗末에 이르기까지 사원 건 립이 있을 때마다 이 문제가 제기되어 큰 영향을 끼쳤었다. 둘째는, 佛敎 그 자체의 護國的인 사상이니 이는 전자보다도 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麗末鮮初의 儒臣들이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이유로써 불교가 세상을 피하여 산 속에 숨어 버리는 敎 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불교의 일면만을 본 것이지 불교 전체를 올 바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는 현실 세계를 순화하여 불국토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 에게는 이러한 불국토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 국태민안하 여 국민들이 잘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호국의 미덕이 강 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法華經 仁王經 金光明經 등이 鎭護 國家의 3부경 으로 빛을 내는 것이며, 百座仁王會 등 각종 法會 가 성행했던 것도 이러한 데에 연유하는 것이다. 高麗 불교의 특 징이 法會儀式의 佛敎 라고 불릴 만큼 각종 법회가 잦았던 것 은 이러한 호국적인 목적에서였다. 또 한가지는 불교에서는 布施와 佛事의 공덕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데 高麗에 있어서는 승려나 사원에 보시하고 불사를 개설함 4) 白雲山內院寺事迹 朝鮮寺刹史料 上卷 p

153 Ⅰ. 佛敎의 發達 으로써 희구하는 바 공덕을 어떤 개인이나 또는 사사로운 곳으로 돌리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안녕 발전으로 돌렸었다. 국왕이나 후비 귀족 등이 사원에 토지나 재화를 무수히 시납하였던 것도 이러한 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고, 睿宗초에 女眞이 처들어 왔을 때에, 近臣에게 명하여 기름과 향과 弓劍을 서울의 사원에 시납하여 기도케 하고, (3년 4월 己酉) 文德殿에서 藥師經을 강하여 적병이 물러남을 빌었고, (3년 5월 辛亥) 普濟寺에 행차하여 향을 올리고 적병이 물러남을 빌었고, (3년 6월 壬辰) 四天王道場을 毗沙門寺에 설치하여 변방의 적군을 물리치기를 빌었고, (3년 7월 丙子) 文德殿에서 藥師經을 講하여 적병이 물러가기를 빌었고, (3년 8월 戊子) 宰樞와 6尙書 이상에게 각각 쌀 2석씩을 내게 하여 神衆院에 서 제를 설치하고 승리를 기도하였고, (4년 4월 甲申) 친히 奉恩彌勒 두 절에 제를 설하고 승리를 기도하였고, (4년 4월 壬辰) 女眞이 국경을 侵寇하였기에 法王寺에 행차하여 향을 올렸으 며, (4년 5월 壬子) 文德殿에 藥師道場을 설치하였다.(4년 5월 丙辰) 5) 이와 같이 빈번하게 불사를 일으켰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음 미하고 납득할 수가 있다. 또한 외국과의 전쟁 관계 이외에도 국 민 생활에 직결되는 것은 모두 넓은 의미의 호국 개념에 넣을 수 5) 高麗史 世家 睿宗 3年 4月 己酉-4年 5月 丙辰

154 4. 寺院經濟의 發達 있는데 高麗史 에서 자주 보이는 禱雨나 禳災祈福 등의 불사 도 이러한 점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裨補寺塔說과 불교 자체의 護國思想의 두 가지가 高麗時代에 있어서 불교와 국가와 밀접하게 결합시켜 줌으로써 국 가재정과 사원경제와를 긴밀하게 연결시켰으며 高麗朝로 하여금 불교를 극력 보호케 하였던 것이니, 고려의 불교나 사회의 제분야 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호국사상적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高麗의 사원이 토지를 늘리고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護國思想的인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 로, 후술하는 사원 소유 토지의 확대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 지하였던 역대 왕들의 田地 노비 등의 시납은 바로 이러한 사상 적인 소지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대 왕들이 사 원에 전지를 수없이 賜給했던 것은 호국사상에 의한 왕실 조정과 불교 사원과의 직선적인 연결의 필연적인 결과이었던 것이다. 3) 信仰的 背景 이 신앙적인 배경은 전술한 사상적인 배경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으나 호국적인 개념을 떠나서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에 의해 사 원에 토지를 시납한 사례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술한 호국적 인 개념도 실은 신앙적인 바탕 위에서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것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 중 가장 늦게 佛敎를 공인한 新羅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이미 국민의 8, 9 할에 이르는 불교 신도를 확보할 정도로 넓게 전파되었는데, 이러한 신라 불교를 그대로 계승한 高麗 역시 전대 에 못지 않게 불교가 대중화되었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의 한 예 로써 出家爲僧의 제한과 度牒制度의 실시를 들 수 있다. 즉 文宗

155 Ⅰ. 佛敎의 發達 때에 아들을 셋 둔 자가 그중 한 아들에 한해서만 출가하여 승려 가 됨을 허락토록 제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거니와, 그것이 더욱 제한을 받게 된 것은 도첩제도의 실시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이러 한 出家爲僧 의 제한과 도첩제도의 실시는 두 가지 면으로 고 찰할 수 있는데 그 첫째는 경제적으로 볼 때 비생산면에 처해 있 는 승려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국가 전체의 생산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므로 나날이 증가하는 승려의 수에 제한을 가하지 않 을 수 없었고, 둘째로는 高麗 후반기의 혼탁한 시기에 있어서 鄕 驛吏나 公私奴婢들이 가렴주구를 피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 을 금하기 위해 제한을 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승려가 되려는 것 을 국가에서 제한을 하게끔 된 그 이면에는 그만큼 불교의 눈부신 전파상을 가리켜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高麗의 불교가 이와 같이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절대권을 가진 왕실의 적극적인 비호도 그 원인이 됨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보다도 新羅 이래 불교는 국민들의 생활 속에 파고 들어 일반 국민들의 절대적인 숭앙을 받아 그것이 저변이 되 어 있었다는 것이 더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뒤에서 살펴볼 것이 지만 주로 일반 국민들이 사원에 田地나 기타 財貨를 시납하였던 것은 이러한 신앙적인 바탕에서 이해가 될 것인 바,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전술한 사상적인 바탕 위에서의 시납의 경우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으니, 전자가 사원에 토지를 시납함으로써 호국적인 공덕을 희구하고 있는 데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토지 시납은 반드시 어떤 공덕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설사 어떤 공덕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호국적인 개념에서 떠난 자기 들 선조의 追慕라든가 또는 冥福을 비는 따위의 신앙적인 공덕인 것이었다

156 4. 寺院經濟의 發達 (2) 寺院田의 擴大 1) 寄 進 ㄱ. 施 納 高麗의 사원이 전지를 확대하는 과정 중 施納이라는 형태가 가 장 근본이 되며 그 비중 또한 가장 크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호국사상을 매개로 한 불교와 국 가와의 결합에 의한 결과라고 하겠다. 高麗朝가 사원에 바랐던 것 은 승려들이 佛法에 정진하여 국운의 융창과 국왕 권속의 수복강령 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있었고 또 神과 같은 것도 국운의 융창을 위하는 것이고 勝軍護國의 법이라6) 믿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극력 불법을 外護하여 이에 충분한 土田과 노비 등을 賜給하여 승려들로 하여금 하등 의식에 구애됨이 없이 도를 닦고 기도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가 高麗史 를 펼쳐 볼 때 왕이나 국가에서 사원에 토전을 시납한 예가 수없이 많 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이나 국가에서 사원에 토전을 시납하는 데 있어 특징적 인 몇 가지 예를 통해 그 사정의 일단을 살펴보자면, 첫째로, 顯宗 11년 왕은 安西道의 屯田 1,240 結을 玄化寺에 시납한 일이 있었다.7) 둔전이라함은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의 군 량을 충당하는 중요한 食田인데, 그것을 일개 사원에 시납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으로서는 좀체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그러한 처사에 대하여 兩省에서 재삼 논박을 하였음 6) 眞覺國師 禪門拈頌序 7) 高麗史 世家 4 顯宗 11年 8月 丙戌

157 Ⅰ. 佛敎의 發達 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대로 시행케 하였다. 이 경우에는 顯宗과 玄化寺와의 특수한 관계도 있지마는 어떻든 寺院田의 존재와 그 에 대한 인식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로, 文宗은 先王이 국가를 복되게 하는 뜻으로 大雲寺를 지 었는데 그때 시납해 준 전지가 기름지지 않아 소출이 적기 때문에 기름진 전지 100頃을 덧붙여 주도록 하였다.8) 이런 것을 보면 사 원의 토전은 명목 여하에 따라 왕이나 국가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시납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째로, 文宗 때 戶部가 제맘대로 興王寺의 전지를 萬齡殿으로 돌렸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시골로 쫓겨난 일이 있었다.9) 네째로 文宗 때 景昌院에 소속되었던 田柴와 노비 등을 興王寺 에 이속시킨 바가 있었는데, 각 宮院에 내려줄 전지와 노비가 부 족하여 그것을 다시 景昌院으로 되돌려 줌이 가하다고 中書門下 省이 상주하였을 때 文宗은 田柴만은 三寶에 시납한 것을 도로 떼 어오기가 곤란하니 새로 공전으로 원수에 의하여 景昌院에 내려 주라고 하였다.10) 결국 일단 사원에 시납된 전지는 좀체로 돌려 질 수가 없었다. 이상 살펴본 몇 가지 예에서 우리는 사원전이 차 지하는 사회적인 비중이 어느 宮院田과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公田制度하에 있어서는 모든 토지는 극유이고 국가로부터 분급 되었던 것이므로 왕이나 국가로부터의 시납에 의한 寺院의 土地 擴大는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동시에 또한 그 규모로 보나 그 성격으로 보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 왕이나 국가로부터의 시납과 병행하여 순수한 신앙심의 8) 高麗史 世家 8 文宗 18年 4月 庚午 9) 高麗史 世家 9 文宗 34年 3月 壬申 10) 高麗史 世家 8 文宗 13年 7月 己卯

158 4. 寺院經濟의 發達 발로에 의한 일반국민들의 토지 시납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러나 일반 국민들의 전지 시납은 중엽 이후 사회의 기강이 무너진 혼란시기에 접어들어 공전제도란 허울 뿐이고 실제로는 토지를 사유하기 시작한 때부터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高麗史 에서는 일반 국민들이 사원에 토전을 시납한 구체적인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高麗末의 여러 문인들의 문집이나 사찰 사료 등에서 그러한 예를 찾을 수가 있고 또 高麗史에서는 恭讓王 3년 科田法 을 시행할 때 사원에도 다시 전지를 급여한 후 일반 국민으로 하 여금 사사로이 사원에 전지 시납을 금하는 영을 내린 것11)에서 간접적으로 나마 這間의 사정을 엿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 면 과거에 그러한 사례가 없었거나 또는 그러한 사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없다거나 또는 그로 인하여 사원 의 전지 확대가 괄목할 만한 것이 못되었더라면 일반 국민들의 사 사로운 전지 시납을 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ㄴ. 投 託 지금까지 살핀 것은 왕과 일반인의 施納에 의한 토전의 寄進이 었는데 사원에 토지를 기진하는 또 하나의 행위로 投託이라는 것 이 있다. 이 투탁은 사원에 토지를 기진한다는 점에서는 시납과 다를 바가 없지만 엄밀히 분석해 보면 시납 (특히 일반국민이 그 주체가 된 경우의 시납)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시납은 신앙심의 발로에 의한 일반인의 자발적인 전지의 納寺인데, 그 이 면에는 功德이라는 來世的, 정신적인 代償이 내포될 수도 있는 것 임에 반하여, 투탁이라는 것은 일반 국민의 자발적인 전지의 納寺 이긴 하나 신앙심의 개재 여부는 인식 외에 두어야 하고 그 이면 에는 경제적 혜택이라는 현실적 물질적인 대상이 반드시 내포되 11) 高麗史 志 32 食貨 1 田稅 祿科田

159 Ⅰ. 佛敎의 發達 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양자간의 차이는 신앙적인가 아닌가 에 근본적 차이를 두고 있으며, 그 행위에 있어서 일견 자발적이 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듯 하나 시납은 의욕적인 것이고 투탁은 불 가피한 것이며 그 대상에 있어서는 정반대인데에 양자간의 派生 的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대비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 투탁이라는 기진 행위는 앞서 사회적인 배경에서 그 가능성을 시사한 바가 있듯이 어디까 지나 사회의 제질서 문란으로 인한 결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우외환에 기인된 사회 질서의 문란은 농민들에 대한 가렴주구 를 초래케 했고, 농민들은 그러한 苛敛誅求를 피하기 위하여 그 도피처로서 사원을 택하였던 것으로, 그들은 자기의 田地가 면세 되며 또한 가렴주구의 손이 뻗치지 않는 사원에 투탁하고 그것을 다시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화하였던 것이다. 사원 소유 토지를 경작하는 일반농민의 소작인화는 자발적인 경우와 비자발적인 경우의 두 유형이 있었을 것이다. 즉 투탁으로 인한 소작인화는 자발적인 경우이겠고, 후술하는 兼併으로 인한 소작인화는 비자발적인 경우이겠는데, 어느 경우이든 간에 그들로 써는 경제적으로 생의 영위를 위하여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본다. 2) 兼 併 旣述한 施納과 投託이라는 형태로서의 기진은 모두 사원이 수 동적 소극적인 처지에 놓여지는 전지 확대의 과정이었으나 여기 서 말하고자 하는 兼併은 사원이 능동적 적극적으로 전지의 확 대를 꾀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고려시대 사원의 토지 겸병은 買 入과 奪占의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60 4. 寺院經濟의 發達 ㄱ. 買 入 매입이라 하면 어떠한 재화와 교환하여 전지를 확대시키는 것 을 말한다. 우리는 高麗時代에 있어서 사원이 매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田地를 확대하였던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후 술하는 바와 같이 당시의 사원은 奪占이라는 방법으로도 전지를 확대하였으므로 당시의 사원이 전지를 매입할 만한 재화를 소유 하고 있었다고만 한다면 매입이라는 방법으로도 족히 토지를 겸 병했다고 단정하여도 잘못이 없을 줄로 안다. 더우기 唐나라의 예 로 보아도 이러한 단정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즉 高麗의 田制가 唐의 그것을 모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러한 唐나라에 있 어서 사원이 전지를 확대하는 과정 중 寺院 자신의 구매 라는 과정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므로12) 高麗에 있어서도 사원이 전 지를 구입할 만한 능력만 있었다고 한다면 매입에 의한 사원전의 확대는 明若觀火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高麗시대 사원의 전지 매입에 대한 능력 유무 를 생각해 보자면, 우선 전지 매입의 능력 유무는 곧 부의 축적 여하에 달려 있으므로, 당시 사원의 부의 축적을 살펴보아야 하 겠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왕이나 일반 국민들의 施納과 投託 등 의 토지 寄進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사원이 광대한 토지의 소유 자가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로부터의 田租 受納의 양이 적지 않다는 것 도 쉽게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이미 顯宗代에 국가에서 금지하였 던 술을 빚다가 발각되어 벌을 받게 된 승려들이 있음을 본다.13) 12) 鞠淸源 唐代經濟史(六花謙哉 岡本平一 共譯) 1942 p ) 高麗史 世家 5 顯宗 18年 6月 癸未

161 Ⅰ. 佛敎의 發達 이것은 곧 寺院田의 田租 수납에서 잉여 곡물이 있었다는 것을 가 리켜 주는 동시에 승려들은 이러한 잉여 농산물을 이용하여 수익 성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이다. 이에 대 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어떻든 이러한 종류의 사업에서 사원은 부를 더욱 축적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원은 질이 나쁜 紙布 등을 강제로 빈민들에게 주어 이익 을 취하는 등14) 각종 상업에도 종사하여 이익을 거두기도 하였 다. 또 당시의 승려들은 서울이나 시중에 파고 들어 錢財 등의 勸 善 化主에도 적극적이었으니, 忠宣王 忠肅王 대에 이러한 勸化 僧의 市井 출입을 엄금하고 있는 데에서15) 그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다. 高麗時代의 사원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는데, 다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사원은 이런 것을 기본으로 하여 高利貸 사업을 전개하였으니 당시 사원의 富의 축 적에 대하여는 자세한 통계를 찾을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엄청났 으리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한편 高麗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각종 道場과 法席 등의 佛事가 개설되었는데 그럴 때의 제 비용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왕실이나 조정에서 부담하였지 사원 자체의 부담 은 아니었다. 따라서 사원이 축적한 부는 각종 불사 경영의 비용 으로 충당되지 않고 대부분 전지 매입으로 직접 투입될 수가 있었 던 것이다. 이와 같이 高麗時代의 사원은 전지를 매입할 만한 부를 축적하 고 있었는데, 후술하는 奪占이라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타인 소 14) 高麗史 志 39 刑法 2 禁令 (忠肅王 3年 3月) 15) 高麗史 志 39 刑法 2 禁令 (忠宣王 4年 9月 및 忠肅王 後 8年 5月)

162 4. 寺院經濟의 發達 유의 전지를 빼앗아 가면서까지 토지를 확대하였던 고려시대의 사원이었기에 정당한 방법인 매입의 경우도 필연코 있었다고 단 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ㄴ. 奪 占 탈점이라는 것은 매입과 함께 사원의 적극적인 토지 겸병의 형 태인데 매입과 탈점이 다른 점은 정당성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본 다. 즉 매입은 전지를 획득하는 대가로서의 반대급부가 존재하지 만, 탈점은 그러한 반대급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점에 의 한 사원의 전지 확대는 획득의 과정에 있어서 정당성 내지는 합법 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탈점이 고려 사회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사회 적 배경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세속이 혼미하여진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원 스스로가 막대한 토 지와 부의 소유자가 되어 그결과 그러한 부나 재화의 소유에 집착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데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보는 바이 니, 그것은 사원이 완전히 俗化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高麗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탈점은 우선 주인이 없는 閑田 을 점유코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閑田 이나 새로 개간하는 전지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賜牌를 하였었는 데, 차차 賜牌를 빙자하여 閑田이 아닌 주인이 엄연히 있는 전지 까지도 점취하기에 이르렀다.16) 뿐만 아니라 양반의 전지마저도 사패를 빙자하여 빼앗았다고 하니17) 그 횡포는 실로 대단하였다 고 짐작된다. 당시 閑田의 점취는 용이하였다고 보지만 주인이 있는 땅이나 16) 高麗史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忠烈王 11年 3月 17) 高麗史 志 38 刑法 1 職制 忠宣王 即位 下敎文

163 Ⅰ. 佛敎의 發達 양반의 전지는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패를 빙자하게 되었지만, 비록 사패를 빙자한다손치더라도 당시의 사원 이 왕이나 국가로부터의 적극적인 비호와 거대한 물질적인 토대 위에 있지 않았다면 주인 있는 땅이나 양반의 땅을 탈점하기는 불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3) 寺院奴婢의 身分關係 1) 寺院奴婢의 增加 사원이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늘리 는 것과 병행하여 사원 노비의 수도 차차 증가하게 되었다. 사원 노비의 증가는 왕이나 왕실로부터의 賜給과 귀족 또는 권세가에 의한 시납 그리고 영세민의 投屬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첫째로, 왕이나 왕실로부터의 사급은 高麗 全時期를 통해 그 예 를 많이 볼 수가 있으니 太祖 때에 西京의 大小兩院 두 절에 왕이 총애하였던 두 尼僧에게 田과 民을 賜與해 준 것을18) 비롯하여 景宗 때 忠南 海美郡의 普願寺에 佛奴 50인, 田 1,000頃을 사급해 준 것이라든가,19) 顯宗 때 開城 玄化寺에 노비 100인, 田 頃 을 사급해 준 것,20) 文宗 때 景昌院 소속 노비를 興王寺에 이속한 것,21) 그리고 恭愍王 때 雲岩寺에 노비 46인, 田 2,240結을 사급 해 준 것22) 등은 그러한 예라고 하겠다. 그런데 왕이나 왕실에 의 해 노비가 사급되는 경우 그러한 노비는 公奴婢였을 것은 말할 것 高麗史 列傳 1 后妃 1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朝鮮金石總覽 上 66 開城玄化寺碑 朝鮮金石總覽 上 73 高麗史 世家 8 文宗 12年 7月 己卯 22) 高麗史 列傳 2 后妃 2 18) 19) 20) 21)

164 4. 寺院經濟의 發達 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는 公奴婢의 寺院奴婢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공노비의 사원노비화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호국사상에 의한 국가 또는 왕실과 불교와의 결합이 그 배경 이 되고 있음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둘째로, 귀족이나 권세가들에 의한 노비의 시납은 그들이 소유 하고 있던 私奴婢를 사원에 시납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 노비의 사원 노비화는 귀족이나 권세가들이 사원에 토지를 시납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이든가 아니면 자기 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려고 한 데서 이 루어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귀족이나 권세가들에 의한 私奴婢의 시납에 대해서는 그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예를 문헌에서 찾아보 기가 어렵지만, 恭讓王 3년 (1391) 門下府郞舍의 상소 중에 그것 의 폐해를 논한 바가 있고23) 또 그 이듬해에 자기 노비를 권세가 나 사원 神祠에 投贈하는 것을 엄금한 것24)을 보면 그러한 사례 가 적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가리켜 주고 있는 것이다. 세째로, 영세민의 投屬에 의한 사원노비의 증가는 高麗 사회가 중엽 이후 사회 제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귀족이나 권세가 또는 지 방 관헌들의 가렴주구가 심하여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때에 投託이라는 형태로 사원에 자 기 전지와 함께 도피한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高麗말에 이르러 농 민의 곤궁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사원에 투탁할 전지마저 갖지 못한 데다가 어쩌다 천재지변이라도 생기는 경우에는 도저히 살길 이 막연하여 처자와 자기 자신을 귀족이나 권세가 또는 사원에 노 비로 투신하는 자가 많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도 문헌에 23) 高麗史 志 39 刑法 2 奴婢 24) 高麗史 志 39 刑法 2 奴婢

165 Ⅰ. 佛敎의 發達 서 그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실례는 찾을 수 없지만, 恭愍王 10년 5 월 都僉議使司가 한 말25) 또는 鄭道傳이 三峰集 卷 7 朝鮮經國大 典 上 版籍에서 논한 것을 보면 이러한 양민의 노비화는 그 수가 엄청났던 것 같다. 천재지변 등을 당하여 생활이 궁핍해지고 생계 를 유지해갈 방도가 없을 때에 자기의 처자나 또는 자기 자신을 권 세가나 부호에게 팔아 그들의 노비가 되는 것은 新羅시대에도 왕왕 볼 수 있었던 일이었으나, 高麗시대에 와서는 그들이 투신하는 대 상에서 사원이 새로 늘었으며 한편 사원은 이러한 양민의 사원 노 비화를 통해서도 사원노비의 증가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의 사원노비는 공노비 사노비 그리고 양 민의 사원노비화에 의해서 증가되었다. 이리하여 고려 후기의 사 원은 명실공히 대지주가 되었는데 그러면 과연 그 수는 얼마나 되 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는 고려시대에 있어서 사원노비의 총 수 라든가 사원별 사원노비의 수를 알 수 있는 자료를 구해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첫째로 왕이나 왕실에서 노비를 賜給해 줄 때에 귀 족이나 고관들에게 사급시에는 기록상 가장 많았던 것이 20명이 었는데 비해 사원에 사급해준 경우에는 앞에서 그 예를 든 바와 같이 50명, 100명 또는 46명씩이나 되었다는 점, 둘째로 朝鮮 成 宗朝의 成俔이 高麗 때 사원은 모두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많 은 것은 천, 백에 이르며, 승려들의 호화롭고 부귀함은 고관들보 다도 더 하다 26)고 한 점, 그리고 세째로 朝鮮 초기의 寺社改革 때 太宗 5년 11월과 太宗 6년 3월 전국 각 사원의 屬田과 노비수 를 제한하고27) 동 4월에 사원에서 제거된 노비가 軍器監에 이속 된 口數가 4,000구, 內資 內贍 兩寺에 각 2,000구, 禮賓寺와 福 25) 高麗史 世家 39 恭愍王 10年 5月 甲戌 26) 成俔 慵齋叢話 卷 2 27) 太宗實錄 卷 11 太宗 6年 3月 丁巳

166 4. 寺院經濟의 發達 興庫에 각 300구, 도합 8,600구에 달하고28) 있는 것 등을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고려시대 사원노비의 수가 어느 정도이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본다. 2) 寺院奴婢의 身分關係 우리 나라에서 사원노비가 발생한 것은 新羅 때부터였다. 三國 遺事에 의하면 法興王이 절을 세우고 宮戚을 시납하여 寺隷로 삼 았다고29)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사원노비의 효 시라고 하겠다. 一然은 다시 그 기사에 주를 붙이고는 첫째로 그렇기 때문에 寺隷는 一然 당시까지도 왕손이라 칭한 다 하였고 둘째로 뒤에 太宗王 때에 이르러 재상 金良圖가 불법을 믿는 나 머지 花寶 蓮寶 두 딸을 法興王이 세운 이 절에 들여 보내 寺婢 로 삼았다 하였으며 세째로 뒤에 逆臣인 毛尺의 일족을 이 절의 寺隷로 삼았고 네째로 金良圖와 毛尺 二族의 후손들이 一然 당시까지도 그대 로 사원노비로 내려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초까지는 사원노비의 구성유형은 왕손이나 귀족들의 후예라는 상층부류이었다고 할 수 가 있다. 따라서 그들의 신분관계는 일반 공 사노비에 비하면 훨 씬 우월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新羅 시대에 어떤 절의 승려 가 寺奴에게 일인당 하루 저녁밥으로 밤 두 알을 주었다고 해서 그 노비가 관에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던 것을 보면30) 그들 사 28) 太宗實錄 卷 11 太宗 6年 4月 29) 三國遺事 卷 3 原宗興法 厭髑滅身 30) 三國遺事 卷 4 元曉不羈

167 Ⅰ. 佛敎의 發達 원 노비의 신분은 말만 노비였지 실제로는 양민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원노비의 신분이 일반노비에 비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월했던 것은 초기의 구성 부류가 왕손이나 귀족들의 일 족이었다는 특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사원노비를 부 리는 승려들은 그들 스스로가 平等 無常의 교리를 받들고 수행하 는 처지에 있는지라 의식적 또는 관습적으로 사원노비를 우대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겠고, 또한 그러한 불교사상이 사회적 으로 동화되고, 불교사상으로 동화된 사회관념이 다시 반사되어 사원 노비의 신분관계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원노비의 구성 부류의 특수성과 신분관계의 우월성도 高麗 시대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으니,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이나 왕실로부터의 사급에 의한 공노비의 사 원노비화와 귀족이나 권세가들의 시납에 의한 사노비의 사원노비 화 그리고 영세민의 투속에 의한 양민의 사원노비화 등으로 사원 노비는 구성 유형에 있어서 어떤 특수성이라는 것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노비와의 신분상의 어떤 우월성도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으니 결국 고려시대에 있어서 사원노비의 증가는 일 반노비의 사원노비에로의 전화를 초래하게 하였고 이것은 다시 일 반노비와 사원노비의 신분상의 격차를 없애주었다고 하겠다. 그러 나 일반노비와 사원노비간의 신분 관계의 평형은 일반노비의 신분 관계가 상승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원노비의 신분이 일 반노비의 신분으로 저락했음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삼스레 일반노비의 사원노비화에 대해 앞에 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시 우리 인류사 회에서 노비가 발생하게 된 것은 노비가 가정을 유지 운영해 나

168 4. 寺院經濟의 發達 가는데에 필요불가결하였기 때문에, 또는 왕실이나 관아에서 그러 한 존재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어디 까지나 優勝劣敗의 결과로, 또는 죄인에게 벌을 과하는 하나의 방 편으로 그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유를 박탈하기 위하여 발생되었 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노비가 발생한 결과 사람들이 노비의 사역을 통해 느낀 바, 안일 또는 편리함이 노비에 대한 인 간의 욕구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틀림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치로 사원 노비도 처음에는 사원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었었다. 그러던 것이 사원의 규모가 커가고 따라서 사원내의 잡무를 맡아볼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 에 의하여 왕손이나 귀족들의 자손이 자발적으로 사원노비로 들 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원이 전지를 자꾸 늘려 점차로 대토지의 소유자가 되자 차차 사원노비의 수요도 증가하게 되어 이제는 왕손이나 귀족과 같은 제한된 그리고 특수한 공급원으로 서는 도저히 그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일반노비의 사원노비에로의 전화로 사원노비가 증가하게 된 것은 이러한 점에서 그 내막을 풀이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원노비가 사원 내에서 어떤 일을 담당하였으며 어떤 역무에 종사하였는가 하는 것은 여기에서 자명해지리라 믿는다. 白 바느질주방의 일酿酒, 수공업 노동토목 노동기타 잡역 등으로 분류하였고 日人 학자 龜田敬二는 사원 내의 잡역직물생산금박제조도기제 조염분의 일 등으로 나누었지만 이러한 것들 보다 더 중요 南雲은 사원노비가 담당하였던 일을 31) 32) 하고 근본적인 것은 사원소유 토지의 경작이었던 것이다. 寺院領의 31) 白南雲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卷 p ) 龜田敬二 高麗の 奴婢に 就いて 下, 靑丘學叢 28號

169 Ⅰ. 佛敎의 發達 경작이 사원노비의 가장 중요한 役務이었던 것은 앞에서 왕이나 왕 실이 사원에 노비를 사급해 준 몇 가지 예를 든 바가 있는데, 이 때 반드시 전토와 함께 노비를 사급해 준 것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는 바이니, 승려들로 하여금 제 잡역을 여의고 편안하게 살면서 佛道 修行에 정진하여 국가에 이롭게 하게 하기 위하여 田莊을 주고 노 비를 충당시켰다고 하는 崔洪胤의 말이야말로33) 가장 적절한 표현 이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사원노비는 이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사원에 있어 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한때 義湘 大師에게, 왕이 그를 흠모하고 존경하여 그가 거처하는 浮石寺에 田莊과 노비를 주었을 때 불법은 평등하여 상하가 다 균등하고 귀 천이 없는데 무슨 莊田이 필요하며 어찌 노비를 두어야 하겠는가 고 거절한34) 것과 비교해 보면 너무도 隔世之感이 있으며, 더우기 高麗末에 와서 土田의 所出物과 노비의 사역을 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승려가 자기 자신의 富를 위해서 쓰게 되고35) 宗派간에 토 지와 노비를 놓고 소송까지 제기한 일36)마저 생기게 되었으니 이 것은 高麗佛敎의 부패요 타락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4) 寺院의 收益性 事業 앞에서 우리는 高麗의 사원이 소유토지를 확대하여 대토지의 소유자가 되었고 거기에 많은 노비마저 소유하게 되었음을 살폈 다. 토지와 노비는 모두 부의 원천이며 척도이었기에 당시의 사원 33) 崔洪胤 勸誡諸寺院三剛司存敎書 東文選 卷 23 34)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上 p ) 高麗史 列傳 24 趙仁沃 36) 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法會衆日記 陽村集 卷

170 4. 寺院經濟의 發達 은 경제적으로도 손색없는 귀족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원은 이 에 만족치 않고 다시 각종 收益性 사업에도 손을 뻗혀 더욱 부를 축적하였으니 이제 그 일단의 모습을 살펴 보기로 한다. 우선 승려들의 수익성 사업으로는 술 마늘 기와 직물 등의 제조 생산을 들 수 있다. 특히 酿酒에 대해서는 이미 顯宗 원년 (1010)에 승니의 양주를 금한다는 영이 내려지고 있으므로37) 高 麗 초기부터의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러한 禁令도 별로 효 과가 없었던 것은 동왕 12년 6월 다시 사원의 양주를 금한 것,38) 그리고 仁宗 9년(1131) 6월에 내외의 사원승도들이 술과 마늘 등을 팔고 있다39)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 은 사원 내에서의 양주는 고려말로 내려올수록 심해졌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은데, 이런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 은 사원 소유 토지로부터의 잉여곡물이 있었기 때문임은 말할 것 도 없다. 승려들의 기와제조는 사원의 堂宇 보수의 필요성에서 승려 중 기와를 굽는 기술을 습득한 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단순 한 자기 사원의 燔瓦工事의 역을 넘어서서 琉璃瓦라는 품질이 뛰 어난 기와를 만들어 판매까지 하였었다.40) 직물 생산은 기록에 의하면 주로 尼僧 들이 寺婢를 데리고 담당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제품은 시중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뛰 어나 세인의 이목을 끌기에 족했다고 한다.41) 이런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 예컨대 彌陀寺와 같은 여승사원은 직물제조로 업을 高麗史 高麗史 高麗史 李能和 41) 高麗史 37) 38) 39) 40) 志 35 刑法 2 禁令 志 35 刑法 2 禁令 志 35 刑法 2 禁令 朝鮮佛敎通史 下 p. 472 列傳 2 后妃

171 Ⅰ. 佛敎의 發達 삼기에42) 이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사원은 소유 鹽盆으로부터의 소금 생산, 농지로부터 의 마늘, 기름과 꿀, 그리고 기타 잉여 농산물 등을 상품화하여 시 장에 방출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당시 승려들의 상 행위는 단순히 상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정에서 속인들과 어울려 혹은 취흥에 잠기기도 하고 혹은 길 가는 사람들과 다투기 도 하는 등 그 폐해가 적지 않았으므로43) 고려조는 승려들의 상 행위를 금지하였던 것이나44) 사회질서가 문란해지자 승려들의 상 행위는 더욱 성하여졌던 것이다. 사실 어떤 폐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출가수행자로서 상행위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 본분을 망각한 것일 뿐더러 더우기 술을 사원 내에서 빚고 승려된 자가 그것을 내다 판다고 하는 것은 言語道斷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 다. 왜냐하면 술을 만들지 말라, 팔지 말라,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은 在家의 신도들에게도 금하고 있는 원초적인 계율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高麗의 사원은 대토지소유 이외에도 여러가지 수익성 사업에 관여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인 것은 틀림없 다. 그리하여 사원경제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지만 이와 같 은 사원경제의 발달은 反佛敎的인 성격을 지녔고 한편으로 社會 正義의 구현에 역행되는 것이었기에, 불교가 극성하던 고려 말기 에 斥佛論의 대두를 초래하게 되었고 朝鮮王朝 때의 수난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42)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下, 花紋苧布尼婢構成 43) 高麗史節要 卷 4 文宗 10年 9月 44) 高麗史 志 35 刑法 2 禁令

172 4. 寺院經濟의 發達 (5) 寺院의 高利貸 高麗의 寺院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방법으로 錢穀 을 대여해 주고 그 이자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금융업을 들 수 있 다. 불교사원의 금융업은 印度에서 대승불교의 발달과 함께 일어나 中國에 들어와서 크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를 無盡 이라고 하였다. 무진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錢穀을 본으로 하여 그것을 대여해 주고 거기서 이자를 얻는 경제 행위임에는 틀림없 으나 그 수입은 반드시 佛前供養과 伽藍 補修, 그리고 사회의 병 자와 빈곤한 사람들의 구제사업에 쓰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 라고 할 수 있겠다. 中國佛敎史에서 중국 사원의 사회 구제사업, 사회복지사업이 활발했던 것은 이와 같은 경제적인 배경을 가지 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 불교의 無盡業이란 단순한 殖利行爲가 아니라 三寶와 사회를 위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파악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사원의 무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 사원의 寶 를 들 수 있다. 寶는 일정한 목적에 의한 경비 마련책으로서 영속 적으로 이식을 취하기 위하여 그 본으로 특별히 설정한 기본재단 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개 고려시대의 寺院 寶를 보면 그 일정한 목적이란 佛事와 社會福祉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무진과 본질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 사원의 보는 이러한 명분 하에 상당히 활발하게 펼쳐졌음을 본다. 그러나 고려 중엽 이후부 터 그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오로지 이윤 추구만을 위한 高利贷 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원의 금융업인 보는 한편으로 사원경제의

173 Ⅰ. 佛敎의 發達 발전적 조건이 된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사원이 부패하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보의 기본재산은 施納된 전곡이 주가 되어 있는데45) 고려에서 寺院寶가 처음 등장한 것은 定宗 때의 일로서 定宗은 곡식 7만석 을 여러 대사원에 시납하고 각각 佛名經寶와 廣學寶를 설치하여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 자들에게 기여하게 하였다.46) 그후 八關 寶 金鍾寶 般若經寶 등의 佛事 목표의 보와 濟危寶 같은 사회 구제 사업을 위한 보 등 수많은 보가 사원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成宗 때 崔承老가 당시의 여러가지 폐단을 논한 것 가운데 佛寶錢穀에 있어서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매년 長利를 취 득함으로써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한 것을47) 보면 사원의 식 리행위는 일찍부터 폐단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고려조는 公私間을 막론하고 대차관계에 있어서의 취식율을 일정하게 정해 놓았으 나48) 실제로 그 취식율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중엽 이후 사회가 혼란해지자 그 도는 매우 심했던 모양으로 혹은 임의 로 취식하거나 혹은 고리를 과하여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주고 사 원은 그들로부터 원성을 듣게 되었으니, 예컨대 恭愍王 원년 (1352)에, 사원에서 부과하는 이율은 높고 임의적이어서 빈민들은 그것에 견디다 못해 자녀를 일정기간 사원에 들여보내 노동력으로 보상케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 돌려보내지 않는다 하여 監察司의 按廉使로 하여금 엄하게 다스리라는 영을 내린 것을49) 보면 그 사 高麗史節要 卷 1 太祖 13年 11月 高麗史 世家 2 靖宗 元年 高麗史節要 卷 2 成宗 元年 6月 高麗史 志 33 食货 2 借貸 49) 高麗史 志 33 食貨 2 借貸 恭愍王 元年 2月 45) 46) 47) 48)

174 4. 寺院經濟의 發達 정을 짐작할 만하다고 하겠다. 어떻든 사원은 이러한 방법으로도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이 와 같은 고리의 취식행위는 보가 갖는 당초의 숭고한 의도와는 너 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려시대의 사 원은 佛事의 원활한 유지 운영과 사회 복지사업을 위함 주동적인 역할을 보를 통해 담당하였던 것이지 결코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 로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우외환에 의한 사회 질서의 문란에 휩쓸리어 당초의 이상은 차차 찾아볼 길이 없게 되고 사원 은 폭리만을 일삼는 고리대의 본거지로 화해 버리고 말았으니 이 역시 세속의 혼미에 감염되어 본분을 잊어버리고 부의 축적만을 추구하게 된 고려 사원의 일단면이라고 하겠다. (6) 諸 佛事의 費用 이제까지 우리는 高麗의 사원이 대토지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여러 수익성 사업과 고리대업에까지 관여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내용을 살폈는데 끝으로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高麗 전시대를 통하여 수없이 많이 거행되었던 각종 佛事50)의 비용을 누가 부담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용을 만약 사원측에서 부담하였다면 사원이 축적한 부의 태반이 그리로 지출 되어 실제적으로 사원의 부는 겉으로만 실하고 속은 허한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불사의 비용은 왕실이나 조정의 부담이었었 다. 八關會니 燃燈會니 하는 거국적인 행사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 지만 거의 대부분의 法會 儀式 등의 불사는 護國 安民과 밀접한 50) 高麗史에 보이는 각종 儀式 法會 등의 佛事는 약 1,300건에 달하며 그 종류는 약 60종이나 된다

175 Ⅰ. 佛敎의 發達 관계가 있었으므로 해서 전부 국가기관의 부담이었으니 예컨대 新興倉의 粟을 서울의 여러 절에 베풀어 齋를 설하고 복을 빌 게 하다 이와같이 5界 5道의 鎭兵法席의 비용이 모두 백성들에게서 51) 나왔으니 이는 부처를 속이고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므로 어찌 복이 있을까보냐. 이에 中使를 보내어 內庫의 銀瓶 300구를 내어서 慶尚道에 200구, 全羅道에 60구, 忠淸道에 40구를 나 누어 주게 하다 52) 왕은 資贍司의 은 100근을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飯僧케 하다 53) 등등의 기사는 이런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나 조정측에서 본다면 그러한 각종 불사 의 비용을 국고에서 부담한다는 것은 국고의 고갈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국가 재정을 우려 하여 이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나올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하지 만 太祖이래 國敎로서의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를 비 방하는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이런 것을 신랄하 게 입에 담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말엽에 이르러 차차 斥佛論이 강하게 대두되면서부터 불교로 인한 과도한 경비지출을 비판하는 소리가 드높아지게 되었으니, 恭讓王 3년(1391) 成均博 士 金貂가 상서한 가운데 禪僧들을 떠받드는 데 錢穀이 너무 많이 虛耗되고 있다 54) 는 말이나 동년 동월 鄭道傳의 상소문 중에 신이 듣건대 三司의 회계에 佛神을 위해 쓴 비용이 많다 하오니 51) 高麗史 世家 10 宣宗 6年 正月 乙亥 52) 高麗史 世家 22 高宗 10年 9月 戊申 53) 高麗史 世家 33 忠宣王 2年 11月 丁亥 54) 高麗史 世家 46 恭讓王 3年 5月

176 4. 寺院經濟의 發達 국가의 재산을 헛되게 씀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읍니까 55) 라고 한 것 등은 바로 이런 것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떻든 제 불사의 비용을 국가기관에서 부담하였다는 것은 사 원 측으로 볼 때에는 그 이상의 다행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 게 하여 사원은 순조롭게 부를 축적할 수가 있었고 나아가 축적된 부를 다시 상업자본 또는 고리대 자본으로 회전시켜 부를 더욱 증 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李載昌 55) 高麗史 列傳 32 鄭道傳 恭讓王 3年 5月 上疏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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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Ⅱ. 儒敎의 發達 1. 國子監과 私學 2. 儒學의 性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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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 國子監과 私學 1. 國子監과 私學 (1) 國子監의 成立 1) 創置沿革 高麗時代의 敎育機關으로 중앙에는 國立學校인 國子監(國學)과 東西學堂(뒤의 五部學堂) 등이 있고, 私立으로 崔冲 이후의 文憲 公徒를 비롯한 十二徒가 있었다. 지방에는 처음 學院 學校(西京 學校는 뒤에 分司國子監이 됨)가 마련되었다가 中期에 12牧 및 諸州郡縣에 鄕學이 갖추어졌으며 또 私設의 書堂이 각지에 있어 서 아동 중심의 교육이 행해졌다. 이 중에서 國子監이 가장 대표적인 국가적 敎育機關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年代는 다소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 우선 高麗 史에 보이는 設置記事는 世家에는 나오지 않고 選擧志에만 언급 이 있는 것이다. 즉 成宗 11년(992) 12월 丙寅의 敎에, 王者가 (下略) 天下를 敎化함에는 學校를 먼저 세워야 한다 云云 1) 이라고 하여 왕의 뜻을 밝힌 말만 있고, 選擧志 學校條에 같은 11 년 12월 敎로서, 有司는 勝地를 가려서 널리 書齋와 學舍를 세우고 田庄을 주 어 學粮에 충당할 것이며 또 國子監을 創建하라 2) 하여 처음으로 國子監을 세웠다는 언급이 있다. 이러한 史科로써 보면 高麗史의 초기 7代 부분이 매우 疎略한 것을 감안한다 하더 1) 高麗史 卷3 世家 成宗 11年 12月丙寅 2)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181 Ⅱ. 儒敎의 發達 라도 最高의 國立大學의 역사적 發足치고는 너무나 附隨的인 기 록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 이것은 상대적으로 國子監 이 당시에 時間的 歷史性보다 空間的인 확대 정비에 置重되었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보여진다. 사실 高麗의 교육기관은 건국초에 이미 新羅 이래의 제도를 계 승한 國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國學은 成宗 때에 이르러 文物制度를 대폭적으로 정비하는 가운데 唐制 본래의 모습대로 改編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경위를 살펴보면, 첫째로 高麗에 최초로 학교가 설치되 었다는 기사는 太祖 13년(930) 12월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즉, (太祖가) 西京에 나가 처음으로 學校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西京에 아직 學(공부할 곳)이 없으므로 王은 秀才 廷鶚에게 命 하여 (西京에) 머물러 書學博士가 되게하고 따로 學院을 創立하 여 (西京의) 6部의 生徒를 모아 敎授하게 하였다. 뒤에 王이 (廷鶚의) 學을 일으킨 성과를 듣고 비단을 내려 이를 권장하는 동시에 醫와 卜의 두 科를 두게 하고 또 곡식 100석을 내려 學寶를 삼게 하였다 4) 라고 하여 첫 단계로 學院이 창립되었다가 차차 기초가 잡히면서 학교가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 학원은 그뒤 光宗때까지 3) 高麗史節要에도 下敎 立國子監 給田莊 (卷2 成宗 11年 12月條)이라고만 간 단하게 씌어 있어 같은 節要의 太祖 13年 西京學校 創置記事와 대조가 된다. 4) 이 記事는 종래 그 解釋이 구구한 바, 이곳에서 일일이 따질 겨를이 없지만 다음 各書에 보이는 여러 見解나 뜻밖의 誤謬는 너무나 많이 퍼져 있는 점에 비추어서도 조만간 是正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小田省吾 朝鮮敎育略史, 朝鮮史 講座 分類史(1934) 李萬珪 朝鮮敎育史 上 乙酉文化社(1947) 韓基彦 韓國敎 育史. 博英社(1963) 金貞玉 高麗時代敎育制度에 對한 一考察. 梨花女大70周年 紀念論文集(1956) 河炫綱 高麗西京의 行政構造, 韓國史硏究 5, (1970) 金光 洙 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 韓國史研究 7(1972) 成樂薰 韓國儒學史, 韓國文 化史大系 p. 376 (1970) Ⅵ

182 1. 國子監과 私學 사이에 淸州에도 있었던 史實을 아울러 생각할 때 各要地에 널리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5) 따라서 학원을 키워 학교를 설립한 전후관계를 생각하면 수도인 開京에도 관리양성기관으로서의 官學 이 세워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둘째로는 학교 설립에 관하여 위의 太祖 13년부터 成宗 11년 國子監 創置에 이르기까지 60여년간 이렇다할 기사가 없다. 그러 나 그사이 廷鶚의 書學博士 외에도 각종 文獻에 崔亮 등의 攻文博 士, 柳邦憲의 國子注簿 四門博士 그리고 宋承演의 大學助敎 國 子博士 등 수많은 學官記錄이 있는 것을 보면 그 官名의 母體가 되는 國學의 實在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우기 그것은 이 미 三國 이래 전통적으로 있어온 太學 國學 등 通稱的 존재로서 만이 아니라 國子學 太學 四門學 등의 구분도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세째로는, 成宗 때만을 보더라도 왕이 그 初年6)의 詔書에서 여러 州郡縣에 詔를 내려 子弟를 뽑아 서울에서 業을 익히게 하 라 하여 지방의 자제를 선발하여 京都에서 학업을 닦도록 하였 7) 으며, 成宗 6년(987) 8월에는 지방인 楊州 등 12牧에 經學博士, 醫學博士 각각 1명씩을 파견하여 지방의 子弟敎育에 힘쓰게 하였 다.8) 그리고 동왕 8년(989) 4월 敎令에서는 空係名於國學 云云이라 하여 國學에 이름만 둔 학자는 많았지만 科擧에 응시하 는 자는 적다는 사실이 明示되어있으니9) 여기에 宋承演이 이때 國子博士가 된 것을 합쳐 생각하면 그 당시 중앙에 國學이 있었다 5) 金光洙 上揭論文 참조 6) 東史綱目에는 成宗 元年으로 잡았으나 李基白씨는 成宗 2년(983)으로 보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p. 85 (1974) 참조) 7)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8) 高麗史 卷3 世家 成宗 6年 秋 8月 9) 上揭書 成宗 8年 4月 壬戌

183 Ⅱ. 儒敎의 發達 는 확증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몇가지 점으로 보아 國子監이 처음으로 설치되었 다는 成宗 11년 12월 이전에 이미 중앙인 開京에 高次的인 儒學 大學으로서의 國學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國學을 개편하여 새로 발족한 데서 又創國子監 이라고 곁들여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 것으로도 생각된다. 한편 成宗 2년(983)에 博土 任老成이 宋으로부터 大廟堂圖 社稷堂圖를 비롯하여 文宣王廟圖 祭器圖 72賢賛記를 가져왔으 며10) 거기에 따라 왕 8년(989)에는 大廟를 짓기 시작하고 10년 에는 社稷壇을 설립하였다. 또 왕 9년에는 孝子 節婦의 旌閭를 행 하고 西京에 分司를 두는 동시에 修書院도 개설하였다. 이어 왕 11년 정월의 敎書에서는, 학문을 쌓지 않으면 善을 알 수 없으며 賢人을 임용치 않으면 功을 이룰 수 없으니 京都에도 序庠을 열어 儒術을 敦崇하고 지 방에도 學校를 설치하여 生徒를 勸課케 하여 文藝를 경쟁하는 장소를 열고 經書를 연구하는 業을 넓게 하라 11) 했으나 오히려 포부를 가진 뛰어난 선비를 얻지 못했다는 아쉬움 을 남긴 것을 아울러 종합하면 이무렵 成宗은 崔承老의 上疏를 하 나 하나 실천에 옮기면서 모범적인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오다가 왕 11년에 大廟의 落成 후 본격적인 國子監의 創置를 보게 되었 던 것이다. 그 후 國子監은 高麗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官學나름의 인재양 성에 큰 구실을 하였으나 文宗 이후 私學의 융성과 전후하여 부진 하게 되었다. 한때 睿宗 仁宗年間을 중심으로 國學에 七齋가 설 10) 上揭書 成宗 2年 5月 甲子 11) 高麗史節要 卷2 成宗 11年 正月

184 1. 國子監과 私學 치되는 등 다시 떨친적도 있었지만 元 간섭하에서는 다른 官制改革 과 더불어 國子監의 명칭마저도 자주 변경되기에 이르렀다. 즉 忠烈 王 원년(1275)에는 國學이라 改稱 되었고 동왕 24년(1298)에는 忠宣王이 官制를 개혁하면서 成均監 이라 고쳤다가 忠烈王 말년 (1308) 忠宣王이 再即位하여 다시 成均館이라 하였다. 恭愍王 5년 (1356) 排元政策이 시행되면서 文宗 때의 官制로 복구시키는 가운 데 成均館도 國子監으로 復稱된 일은 있었지만 동왕 11년(1362)에 다시 成均館으로 改稱되어 朝鮮王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12) 2) 文 廟 國子監에는 學舍를 짓고 田庄을 주는 동시에 孔子의 祠堂인 文 廟(文宣王廟)를 갖추었다. 文廟는 宣聖殿(忠烈王 후 大成殿)을 중 심으로 좌우에 東西의 兩廡가 있었으며 學舍로 講堂인 敦化堂(뒤 에 明倫堂)과 諸生의 寄宿舍인 齋舍가 있었고13) 또 중기 이후에 는 生徒의 供饋를 맡는 養賢庫가 마련되었다. 高麗史 卷62 禮志 文宣王廟條에 의하면 당시 文廟의 宣聖殿에는 北壁正位에 文宣王(孔子)을 享祀하고 顏回(顏子)를 配享하였으며, 東壁에는 閔損(子騫) 冉耕(伯牛) 冉雍(仲弓) 宰予(宰我) 曾參 (曾子) 등을, 西壁에는 端木賜(子貢) 冉求(子有) 仲由(子路) 言偃(子游) 卜商(子夏) 孟軻(孟子) 등을, 南壁에는 우리나라 사 람으로 崔致遠 薛聰을 아울러 配享하였다. 그리고 東廡와 西廡에 는 61弟子와 21賢을 從祀하였는데 이러한 享祀 내지 從祀는 成宗 년간에서 肅宗때까지 사이에 정해졌다. 즉 成宗 2년(983) 5월에 大廟圖를 비롯하여 文宣王廟圖 72賢賛記등을 宋에서 가져온 것과 12) 高麗史 卷30 志 百官1 13) 高麗圖經 卷16 官府 國子監條 참조

185 Ⅱ. 儒敎의 發達 더불어 宣宗 8년 (1091) 9월의 禮部奏에 國學壁上圖畵 72賢의 位 次를 宋 國子監의 讚記目次대로 하자고 한 것을 보면14) 이 무렵에 72賢이 從祀된 듯하다. 이어 肅宗 6년(1101) 4월에는 國子監이 文 宣王廟의 左右廊에 61弟子와 21賢의 晝像을 새로 그려 넣고 釋奠 에 종사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고 하였으니 東西廡의 종사는 肅宗때에 이르러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15) 한편 이 從祀人物中에 新羅人인 崔致遠과 薛聰이 宣聖殿內에 配享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文昌侯 崔致遠은 顯宗 11년 (1020)에 文廟從祀의 恩典을 입었으며, 薛聰은 그 2년후인 顯宗 13년(1022)에 弘儒侯라 追封되어 역시 文廟에 종사되었다.16) 뒤 에 東國人의 追加가 있게 되지만 東西廡아닌 本殿에 配享된 것은 당시 自主意識이 강했던 한 표징이라고 하겠다.17) 이 從祀는 高麗 후기로 내려오면서 元代의 영향을 받아 일부 변동 이 있었다. 즉 忠烈王 29년(1303)에 그간 戰火로 頹廢된 泮宮을 복 子思孟子) 10哲(閔損冉耕冉雍宰予端木賜冉求仲由 言偃卜商顓孫師 子張 )의 像과 祭器를 구입해 옴으로써 개혁 구하면서 國學學正 金文鼎이 元에 가서 文宣王과 4聖(顏子 曾子 이 되고18) 그 이듬해 6월에는 大成殿이 新築 落成되어 면목이 새로 와졌다.19) 그리하여 忠肅王 6년(1319)에는 당대의 名儒 安珦을 東 廡 제 2위에 從祀하고 다른 여러 配位도 달라지게 되었다.20) 이듬해 9월에는 왕과 宰樞가 비용을 내어서 文宣王의 像을 塑造하여 安置하 14) 東史綱目 第7 下. 高麗古都徵 卷6 太學考 참조 15) 閔丙河 高麗時代 成均館의 成立과 發展, 大東文化硏究 第 6, 7 輯 p. 7 (1970) 16) 高麗史 卷5 世家 顯宗 11年 8月 丁亥條 및 同 13年 正月甲午條 17) 閔丙河 前揭論文 참조 18) 高麗史 卷32 世家 忠烈王 5 19) 高麗史 卷74 志 學校條 20) 高麗史 卷105 列傳 安珦條

186 1. 國子監과 私學 였는데21) 이무렵 孔子의 諡號도 唐式의 文宣王에서 元式의 大成 至聖文宣王 으로 追尊되어 한층 권위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宣聖 殿이란 殿號도 大成殿으로 바뀐 듯싶다. 이상과 같은 文廟의 제도는 중앙에 있는 國子監뿐이 아니고 지 방의 鄕學에도 그대로 갖추어졌으며 행사도 마찬가지로 하였으니 중앙과는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편 文廟의 祭祀인 釋奠은 仲春(2월)과 仲秋(8월)의 上丁日로 1년에 2회 거 행되었는데22) 이때에는 國王도 參禮하는것이 원칙이었다. 또 매 월 1일과 15일에는 朔望祭를 행함으로써 敎化의 상징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23) 3) 職制와 編成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高麗 초기에도 國學의 職制를 엿볼 수 있는 學部나 學官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法制的으로 明示된 것 은 成宗 때에 이르러 國子監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國子 四門博士四門助敎 등이 學 大學 四門學의 學部 구분과 거기에 國子司業 國子博士 國 子助敎와 大學博士 大學助敎 그리고 각각 두어진 것이다.24)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品秩 등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國子監의 職制는 文宗 때에 이르러 일단 완성된 것으로 보고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 그전후의 변천을 감안 하여 종합일람표를 만들면 별면과 같다.25) 그런데 여기서 國子監의 최고책임자는 睿宗때까지 提擧 이하 判 21) 高麗史 卷34 世家 忠肅王 7年 9月條 22) 高麗史 卷62 禮志 古禮中祀 文宣王廟條 23) 上揭書에 恭愍王 (中略) 二十二年 三月 始命復行朔望祭 自十年南選以後廢 而不行 今復擧之 라 함 24) 高麗史 卷30 志 百官1 25) 각 왕대별 일람표는 편의상 생략하였다

187 Ⅱ. 儒敎의 發達

188 1. 國子監과 私學

189 Ⅱ. 儒敎의 發達

190 1. 國子監과 私學 事가 다 兼職이었으므로 사실상 祭酒가 되었다. 그러다가 동왕 11 년(1116) 兼官이었던 判事를 大司成으로 고쳐 從三品官으로 定職 하고 祭酒를 正四品으로 降等함에 따라 副責任者가 생기게 되었 다.26) 이것은 睿宗代에 그만큼 國學振興이 꾀해짐으로써 상대적 으로 격이 높아진 결과였다. 이어 忠烈王 원년(1275)에 國子監을 國學으로 改稱하면서 祭酒 를 典酒라 하고 司業을 司藝라 하였다가 忠烈王 24년에 忠宣王이 일시 즉위하였을 때 成均監으로의 개칭과 더불어 大司成을 正三 品으로 陞格하고 다시 典酒를 祭酒로, 司藝를 司業으로 복구하되 校名에 따라 成均博士로 하고 새로 明經博士와 明經學諭를 두었 다. 이것이 忠宣王 초년의 개혁의 일단이거니와 大司成의 陞格은 왕의 새로운 의욕의 표시라고도 하겠다. 그 후 忠烈王 34년에 忠 宣王이 다시 즉위하면서 成均館으로 개편하고 그 官吏의 정원을 冊定하여 大司成을 없앴다가 뒤에 다시 복구하는 등 변동이 반복 되었다. 이어 恭愍王 5년(1356) 排元政策에서 제도가 개편되면서 다시 國子監으로 復稱되자 大司成 이하 律學助敎의 學官도 예전 대로 바뀌고 동왕 11년 다시 成均館으로 復稱된 다음 동왕 18년 에는 祭酒를 大司成이라 하였다.27) 그런데 이른바 京師 六學 중 5學은 成宗 전후 이래 唐宋式으로 마련되어 온 것이지만 律學은 文宗때도 그대로 刑曹에 隷屬되어 있던 것을 보면28)이 律學이 國 子監에 편입된 것은 자세한 기록이 없어 분명히 알 수 없지만 仁 宗 때 學式의 詳定과 더불어 京師 六學의 성립을 보게 된 듯하다. 또 恭愍王 5년(1356)에 國子監으로 復稱하면서 明經博士와 明經 26) 高麗史 券76 百官志 睿宗 11年條 27) 同上 成均館條 28) 同上 刑曹條에 文宗定 又別置律學博士一人從八品 助敎二人 從九品 이 라 함

191 Ⅱ. 儒敎의 發達 學諭를 증설한 것은 이미 忠烈王 24년에 忠宣王이 일시 즉위하면 서 설치했던 일이 있는 것이지만 性理學의 전래로 말미암은 새로 운 儒術의 振作에 基因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恭讓王 원년(1389) 에 十學敎授官을 설치하여29) 기술교육이 모두 여기에 移屬되게 되었으니 成均館은 이로부터 儒學만을 교육하는 기관이 되었으며 그만큼 전문화된 것이었다. 한편, 國子監의 學部나 敎科課程의 편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 지만,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學部 편성도 儒學學部와 技術 學部의 두개로 대별되는 것 뿐, 文宗 때에도 이른바 京師六學이 확립되지 못한 형편이었으므로 專攻上의 구분보다는 오히려 入學 資格의 신분적 구분에 뜻이 더 있었던 것 같다. 國子監의 행정적 인 직제가 대개 文宗 때에는 이미 갖추어진 반면, 敎科課程 등 내 용적인 學式의 詳式은 훨씬 뒤로 쳐져서 私學의 융성 후에야 마련 된 것도 역시 같은 정치적인 성격이 앞선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國子監은 睿宗 仁宗時代를 기다려서 다음 단계의 발전 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적인 편성에 관해서는 아래로 미루고 修業年限에 대하여 잠깐 살피고 넘어갈까 한다. 國子監의 수업연한은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이것은 科擧의 及第 條件에 修學年數가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 여 科擧에 합격 할 때까지 修學은 계속되었던 모양으로 文宗 17년 8월의 判令에서는 儒生 9년, 律生 6년의 한계선이 마련되기도 하 였다.30) 뒷날 學式의 詳定과 더불어 各科(經)의 履修年限이 규정되었지 만 論語 孝經의 공통 필수 1년 외에는 각 코오스에 따라 6년-8 29) 高麗史節要 卷34 恭讓王 1 30)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192 1. 國子監과 私學 년의 履修課目이 마련되어 있어서 역시 일정한 연한규정이 있을 수 없었다.31) 科擧科目에 製述業은 별문제로 하고 明經業 또는 三禮業 三傳業32)과 같이 각기 전문과목의 수업이 저마다 달라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技術學 部에 있어 律學 외에는 알 수 없지만, 書學 算學은 일반적인 兼 修 科目이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2) 私學의 隆盛 1) 崔冲과 九齋學堂 上述한 바와 같이 틀이 짜여진듯 보인 國學도 벌써 文宗년간부 터 國子監諸生 近多廢業 33)의 부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 文宗년간( )은 高麗時代 중에서도 가장 文運이 극성하 던 시기였다. 당시는 統三 후 110여년, 안으로 國基가 튼튼해지고 밖으로 契丹과의 干戈가 걷히어 遼 宋과의 親交도 회복되고 태평한 세월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文宗도 역대왕과 다름없이 崇佛策에 힘씀은 물론, 특히 佛事를 크게 일으켜 2,800間의 巨刹 興王寺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崇儒에는 역시 소홀하였 으니 단적인 예로 이른바 謁聖行事인 國子監 행차는 오직 한번 뿐 이었고 그것도 절에 갔다 오는 길에 들르는 소극적인 것이었다34) 31) 同上條 諸學生課業 孝經 論語 共限一年 尙書 公羊 穀梁傳 各限二年半, 周易 毛诗 周禮 儀禮 各二年, 禮記 左傳 各三年 이라 하고 이어 皆先讀 孝經 論語 次讀諸經 并算習時務策 이라 한다음 有暇 兼須習書日一紙 并讀 國語 說文 字林 三倉 爾雅 라 하였다. 그리고 이 대목 앞에서 諸生 每 授一經 必令終講 未終講者 不得改業 이라 하였으니 個個人에 따라 伸縮性이 많음을 짐작 할수 있다 32) 三禮業 三傳業은 仁宗이후에는 없어졌다. 아래 註(75)도 참조 33)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34) 高麗史節要 卷5 文宗 15年 6月癸丑條

193 Ⅱ. 儒敎의 發達 그럼에도 불구하고 補閑集의 自序35)에도 등장하는 濟濟比肩의 文 士 중 9인이 文宗代에 知貢擧로 활약한 文臣이며36) 또 崔冲 父子 를 비롯하여 도합 5명 이상이 私學의 창립 육성자라는 큰 비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文宗년간이 그만큼 실력있는 文士가 필요한 守成期요, 더욱 그런 일꾼이 많이 양성되고 배출되어야 할 새단계 의 貴族社會로 굳혀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成宗 후반이 후 잇달은 변란 중에 崔承老 등으로 대표되는 崇文 세력은 후퇴하고 李知白 등의 尚武 세력이 득세할 수 밖에 없어 儒敎와 교육은 자연 頹勢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豪族의 貴族化가 진전되고 蔭叙制가 마련되는 등 高麗貴族 社會는 점차 무르익어 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崇文으로의 방향 전환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에 따라 새 역군을 기르고 뽑기 위한 儒敎的 교육의 강화 등 새로운 대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崔冲은 在朝期間에 이 새로운 시대적 요청을 크게 느껴왔던 것 으로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致仕 후(1055) 바로 교육에 종 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무렵 특히 先儒에 대한 追尊配享이나 書籍出版이 활발 文宗 때 이르러 문물이 粲然 大備했다 하고 文士가 濟濟比肩했다 고 칭찬한 것은 다 같은 한 사실도 아울러 생각하면 崔滋가 배경 조건등의 시대적 상황아래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35) 補閑集序가운데 光宗 顯德五年(958) 始關春闈 擧賢良文學之士 玄鶴來儀時 則王融 趙翼(翌) 徐熙 金策 才之雄者也 越景 顯數代間 李夢游 柳邦憲 以文顯 鄭倍傑 高凝 以詞賦進 崔文憲公冲命世興儒 吾道大行 至於文廟時 聲明 文物 粲然大備 當時冢宰崔文和公惟善 以王佐之才 著述精妙 平章事李靖恭 崔 奭 參政文正 李靈幹(靈又作令) 鄭惟產 學土金行瓊 盧旦濟濟比肩 文王 以寧 라 보임 36) 朴性鳳 高麗時代의 儒學發達과 私學十二徒 論文의 文宗代 知貢擧 일람표(史 叢 2 p. 38) 참조

194 1. 國子監과 私學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상황에 대처하여 朝廷보다 野에서 일어난 私學이 앞장서서 큰 寄與를 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 다. 高麗末 李齊賢이 그의 益齋亂藁에서 崔冲의 교육업적에 대하 文物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盛했다 고 하고 徐居正이 東 國通鑑에서 이로부터 뛰어난 文士가 많이 나오고 中國에게도 詩書의 나라로 일컬어져 지금에 이른 것은 다 冲의 덕택이라 여 37) 38) 고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면 崔滋가 이른바 命世興儒 라고 격찬한 崔冲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黃海道 海州 胎生으로 生年은 史傳에 명시된 바가 없으나 그들의 族譜의 成宗 5년(986)설보다는 高麗史에 文宗 7 년 冲이 滿七旬으로 退仕를 乞함 이라는 기사를 기준삼아 成宗 3년(984)에 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는 穆宗 8년(1005) 弱冠 20으로 崔沆 知貢擧下에 壯元及第한 다음 70에 이르기까지 顯 德 靖 文宗의 4朝에 걸쳐 文武將相으로 出入하 면서 國事에 힘을 다 하였다.39) 그 동안 혹은 國史修撰官으로서 七代 實錄 顯宗實錄 등을 편찬하였으며, 혹은 門下侍中 때 재래 의 律令에 상세한 校正을 가하고 아울러 書 算 2業의 書도 考正 하는 등 문화면의 寄與도 많이 하였다. 그후 文宗 9년(1055) 나 이 72세가 되어서야 致仕하여 退老케 되었는데 그는 이후 文宗 22년(1068) 85歲로 棄世할 때까지 10여년간을 後進 敎導에 專心 하였다. 이 짧은 餘生을 바친 그의 교육사업은 실로 평생의 富貴 榮華보다 훨씬 빛나고 뜻 깊은 결과가 되었다. 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안팎 사정을 통찰하고 貴族社會에 걸맞는 새시대의 官吏 養成을 위하여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 37) 益齋亂藁 卷 9上 38) 東國通鑑 卷17 文宗 22年 按說 39) 朴性鳳 海東孔子 崔冲小考, 史叢 1 (1955)

195 Ⅱ. 儒敎의 發達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좋은 교육을 얻지 못하여 방황 하고 있던 靑衿白布(應擧할 선비)들은 一世의 名士인 崔冲의 이 와같은 私塾開設을 듣자 기회를 놓칠세라 너도 나도 모여들어 高 麗史에 이른바 學徒坌集 填溢街巷 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校舍를 松岳山下 紫霞洞에 마련하고 學堂을 九齋로 나누 어 가르치니40) 齋名은 樂聖 大中 誠明 敬業 造道 率性 進 德 大和 待聘이라 하였다. 이들 九齋의 學徒는 당시에 곧 유명 한 존재가 되어 侍中崔公徒라 불리고 그의 卒後에는 諡號를 따라 文憲公徒라 일컬어졌다. 이제 九齋學堂에 관하여 그 大綱을 살펴보자. 먼저 九齋에서 가르 授以 九經三史 라 한 것으로 미루어 周易尚書毛詩禮記周禮儀 禮春秋左氏傳同公羊傳同穀梁傳의 九經과 史記漢書後漢書 치던 교과서와 그 교육내용을 보면 高麗史 選擧志 私學條에 의 三史를 중심으로 교수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여기에 겸하여 詩賦 詞章의 學 즉 문학을 공부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수내용은 同 무릇 應擧子弟는 반드시 먼저 徒中에 속하여 공부하였 다 고 하고 (卒)後에도 赴擧者는 역시 다 九齋籍中에 이름을 걸 었다 라고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시대의 풍조가 史列傳에 41) 儒學을 오로지 문장을 위한 한 수단으로 알고 일반적으로는 科擧를 통해서만 인재를 登用한 당시의 제도에 영향되어 九齋學徒들은 대 부분이 科擧준비를 위하여 모인 까닭에 冲도 時宜를 좇아서 經學과 40) 尹南漢씨는 洪良浩의 九齋記 등을 援用하여 九齋學堂의 遺墟가 海州에도 있 었을 것으로 보아서 그 設立時期는 보다 소급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亞細 亞學術硏究會 韓國民族思想史大系 p.264)고 하였으나 首陽世稿 등 에 보이는 九齋에 관한 碑記나 銘文 중 海州九齋부분은 그의 舊基요 文憲書院터 라는 점을 고려할 때 後代의 美化가 많이 加해진듯하여 수긍하기 어렵다. 무엇보 다 開城出仕前家塾이 있을 수 있는지도 문제려니와 9齋分設은 더욱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41) 高麗史 卷95 崔冲傅

196 1. 國子監과 私學 더불어 이 科擧에 필요한 記誦詞章의 학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종의 科擧準備學校 내지 관리양성소의 구실을 하게 된 것 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강습소에만 그친 것은 결코 아니었으 니 앞서 언급한 李齊賢이 위로는 公卿嫡庶로부터 아래로는 州縣 擧者에 이르기까지 다 九齋籍中에 이름을 걸고 聖人之道를 익혔다 云云 42)이라 한 것을 보아도 그 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교 수방법 같은 것을 보면 더욱 그 眞義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 다. 즉 매년 暑月이 되면 歸法寺(開城 炭峴門外) 등의 僧房을 빌려 夏課(特別講會)를 열었는데 徒中 及第한 자 중 아직 官에 취임치 아 니한 우수한 선비를 골라서 講師로 삼아 生徒를 敎導케 하였다. 그 리하여 간혹 先進 文官朝臣이 찾아들면 諸生과 더불어 刻燭賦 詩 하는 即興詩賦會를 열고 그 성적을 발표하여 차례로 불러 앉히 며 小酌을 베푸는데 進退의 節과 長幼의 序가 분명하여 종일토록 서 로 酬唱하는 품이 자못 질서정연하고 儀式을 갖춘지라 보는 사람이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하는 것이다. 더욱 일찌기 耳溪 洪良浩가 그의 紫霞洞九齋遺墟碑文 (耳溪 集 卷30)에서 설명한 바도 있지만 그 九齋의 齋名을 통하여 보면 그 進學의 순서가 뚜렸함을 알 수 있으며 그 가운데 誠明 率性 등 中庸 에서 딴 것으로서 이미 中庸 의 書에 주의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中庸 이란 말할 것도 없이 大 學 과 한가지 본래 禮記 중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程子가 과 같은 명칭은 비로소 특히 表章하여 四書중의 하나를 이룬 것이어니와 冲은 程 子보다 47,8년 앞서 나서 벌써 道學의 中樞가 되는 이 中庸書 중 의 말로써 齋名을 짓고 학문을 가르친 것이다. 42) 益齋亂藁 卷9 上

197 Ⅱ. 儒敎의 發達 2) 私學十二徒의 成立 崔冲의 이와 같은 조직적이며 含蓄 있는 교육사업은 당시 儒學 界에 거대한 반응을 일으켰다. 學徒가 모여들어 성황을 이룰 뿐 아니라 당대 名儒들이 이 冲의 徒를 모방하여 서로 서로 私塾을 세워 開京에 만도 그 수가 11에 이르렀던 것이다 私學十二徒 의 號稱과 설립자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文憲公徒 侍中 崔冲 ② 弘文公徒(一云 熊川徒) 侍中 鄭倍傑 ③ 匡憲公徒 參政 盧旦 ④ 南山徒 祭酒 金尙賓 ⑤ 西園徒 僕射 金無滞 ⑥ 文忠公徒 侍郎 殷鼎 ⑦ 良愼公徒 平章 金義珍 이제 (一云 郞中 朴明保) ⑧ 貞敬公徒 平章 黃瑩 ⑨ 忠平公徒 (未詳) 柳監 ⑩ 貞憲公徒 侍中 文正 ⑪ 徐侍郞徒 侍郞 徐硕 ⑫ 龜山徙 (設立者未詳) 그러면 十二徒에 대한 고찰을 위하여 먼저 그 설립자들의 경력 을 조사해 보자. 그런데 高麗史 列傳에는 崔冲傳 말고는 文正의 專傳만이 있을 뿐이므로 나머지 열 사람은 世家와 選擧志 및 列傳 에 散見되는 零細한 기록을 종합하여 겨우 그 片貌를 짐작할 수밖 에 없는데, 그나마도 설립자 미상까지 포함하여 사람의 事績은 아직 전연 알 길이 없다 ⑨柳監 ⑪徐硕 세

198 1. 國子監과 私學 ① 崔冲은 위에서 언급했으므로 우선 두고 ② 鄭倍傑은 顯宗 8년(1017) 禮部侍郞 郭元知貢擧下에 乙科로 登第하여 文宗 원년(1047)에는 中樞院副使로서 知貢擧가 되어 金 鼎新 등 進士를 뽑았다. 그 후는 알려져 있지 아니하나 文宗 34년 (1080)에 弘文廣學推誠賛化功臣의 號와 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 下侍中上柱國光儒侯를 追封한 것을 보면 아들 文과의 관계를 참 작하여 文宗 15년(1061) 전후에 죽은 듯하다.43) 그리고 高麗史 父倍傑 以儒術相文宗 卒云云 의 기사가 있는 것 을 보면 倍傑은 靖文間에 名望 學識이 높던 文臣으로 崔冲 다음 鄭文傳에 에 가장 먼저 立徒한 듯하다. ③ 盧旦은 文宗 19년(1065)에 侍御史, 동 29년 翰林學士, 34 년 禮部尙書로 知貢擧가 되어 進士를 뽑았다. 宣宗 2년(1085) 에 다시 中樞院使로써 知貢擧를 역임하고 동 3년 尙書左僕射參 知政事로 陞進한 후 致仕, 8년(1091)에 卒하니 諡號를 匡獻이 라 하였다. ④ 金尚賓은 靖宗 7년(1041) 왕의 鎬京(平壤)行次에 右拾遺로 서 扈從한 기록이 있고 그 후 文宗 3년(1019)에 右副承宣으로서 國子監試의 試官이 되어 韓復 등 39인을 取하였다는 기사가 選擧 志에 보일뿐 어느때 國子祭酒가 되었는지도 전연 알 수 없다. ⑤ 金無滞는 靖宗 원년(1035) 崔冲知貢擧下 에 及第한 사람 이요. ⑥ 殷鼎은 文宗 25년(1071) 秘書少監右副承宣이 되었다는 것 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43) 高麗史 鄭文傳에 의하면 文은 倍傑의 遺腹子로 15,6세가 되어 文宗당시 國子 監試에 응하고 宣宗이 아직 國原公으로 있을 때 (文宗 32년 전후) 登第하여 그府 의 錄事가 되었다는 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199 Ⅱ. 儒敎의 發達 ⑦ 金義珍은 文宗 원년(1017)에 殿中侍御史가 되고 동 19년에 는 參知政事로서 知貢擧가 되어 進士를 取하다가 盧旦으로 말미 암아 設科를 罷하게 되고 文宗이 恩例로써 약간명을 뽑아 올렸다 하며 22년 判尙書兵部事가 되고 平章事로 陞進後 致仕, 24년 (1070)에 卒하였다. ⑧ 黃瑩에 관하여는 15代 肅宗 즉위초에 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 가 되고 2년(1097) 參知政事로 知貢擧를 지냈으며 4년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陞進한 것이 史傳에 있을뿐 그 후는 알 수 없 는데 前記 選擧志에 平章 黃瑩 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未 久(肅宗年間)에 죽은 듯하며 補閑集 序에 文宗년대의 文臣을 열 濟濟比肩 文王以寧 이라 한 다음 厥後 의 文班에 黃瑩鄭文金緣(仁存) 등으로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 것을 아울 거하고 러 생각하면 十二徒 설립자 중에서 가장 후배에 속한 것 같다. 그리고 ⑩ 文正은 그의 專傳이 있고 世家에도 官歷이 많이 전 해지고 있어 文宗 때 文武兩面으로 功이 많았던 儒臣임을 알 수 있다. 즉 文宗初에 登第하여 參知政事兼西京留守使 등을 역임하 면서 32년에는 知貢擧가 되어 進士를 뽑고 이어 中書侍郞平章事 로 陞進하였으며 34년에 東女眞의 叛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厚賞 과 功臣號 및 長淵縣 開國伯에 封함을 받고 宣宗 10년(1093)에 守 太尉門下侍中 致仕로서 卒하였다.(諡貞獻) 그는 文宗에게 興王寺 土木의 役事 등을 罷하여 民弊를 없에도록 上奏하기도 하고 儒 術을 숭상하여 시급히 선비를 登用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여 유명 하다. 이상 사실이 不明한 세 사람을 제하고는 崔冲까지 합하여 十二 徒 설립자의 履歷을 아는 데까지 살폈거니와 이를 종합하면 그들 은 모두가 文宗 전후의 문관들로서 學識 名望이 다 높으며 崇文揚

200 1. 國子監과 私學 儒에 특히 힘쓰고 대체로 知貢擧(座主)를 역임하면서 인재(門生) 를 뽑은 바있는 당대 실력자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보면 十二徒의 성립 연대는 자연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바 黃瑩의 良敬公徒가 文宗代를 조금 벗어났으리라고 생각되는 외에는 대체로 文宗 中末年에 설립된 것으로 推斷할 수 있다. 3) 私學-徒의 特性 그러면 이렇게 하여 성립된 私學-徒의 일반적 특성은 어떤 것 인가. 上述한 바와 같이 崔冲은 徒 를 최초로 창설하여 많은 영향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崔冲의 徒는 또 가장 권위를 자랑하 고 가장 성황을 이루면서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高麗史 同人傳 東方學校의 興盛은 冲에서 비롯하여 당시에 海東孔子라 불렀다 라고 하였다. 은 冲徒가 가장 盛했다 라고 明示하고 이어서 따라서 崔冲의 立徒는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始源을 말하는 것이 며 그것은 私塾 學校의 蔚興과 함께 子子孫孫에게 계승 발전됨으 로써 획기적인 업적이 되었다. 冲의 子孫이 文行으로 宰輔에 오른 사람이 수십 인 이라 하고 이어서 冲의 子 惟善惟吉, 孫 思齊, 曾孫 瀹 등 연 高麗史 列傳은 달아 후손의 史傳을 싣고 있는데 이를 종합하면 그들 자손이 거의 科擧에 及第하고 官界에 나아가 官職을 세습하듯 이어 나가면서 繼 世儒宗으로서 儒學의 宣揚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들 은 政界 學界의 중심 座主로서 출세한 過去 門生의 후원아래 父祖 의 遺業인 門徒敎誨를 더욱 빛나게 이룩하여 連綿한 발전을 본 듯 하다. 高麗史에는 이 까닭으로 自後로 赴擧者는 역시 다 九齋籍 中에 이름을 걸었다 는 기록이 남게 된 것으로 보이거니와 더욱 뚜 렷한 것은 文憲公徒에 관한 기록이 冲의 卒後 300여년이 지난 麗

201 Ⅱ. 儒敎의 發達 末에 이르기까지 줄곧 金石文을 비롯한 여러 文獻에 散見되는 것 으로 알 수 있다. 그 중 두드러진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44) 먼저 文憲公徒에 관한 것으로, 明宗 때의 監察御史 李勝章은 父業을 잇기 위하여 嶺南(星 州)에서 文憲公徒 率性齋에 留學하고 毅宗 22년(1167)(高麗史로는 21년)國子試官 金敦中門下에 제 2위로 進士에 뽑혔다 하였고, (朝 鮮金石總覽 上 p. 418) 李奎報는 明宗 11년(1181) 그가 14歲 때 文憲公徒 誠明齋 에 들어가 每夏課에서 연방 壯元하였다 하였으며, (東國李相國集 年譜, 참고로 그는 明宗 19년에 國子監試에 進士로 뽑히고 翌 20년 에 登第하였다) 禹吉生(麗末 禹玄寶의 父, 忠惠王때 사람)의 送洪進士敏求 란 詩에는 崔公當日秉斯文 捷第連科起一門 十二徒名傳後世 半千年 慶洽諸孫 云云한 것이 있는데 洪進士는 文憲公의 外裔로서 그 徒중에 隷名한 자라 하였다. (東文選 卷15 및 赤城君實記 卷3) 다음 九齋 기타 十二徒 전반에 관한 것으로, 東國輿地勝覽을 보면 江華島 燕尾亭 註記에 高宗 31년 (1244) 侍郞 李宗胃가 王命으로 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 夏課를 行하고 55인을 가려 뽑았다 하였고, (卷12 華樓亭條) 世家 忠烈王 11년(1285)條에는 왕이 龜山寺에 행차하여 九 齋夏課를 보고 격려했다 하였다. 李穡은 韓淸城(脩) 등과 함께 九齋에 놀러가 安心精舍(安心 寺)에서 刻燭賦詩하되 十二徒稱曰九齋 國中童冠集山崖 賦詩刻燭 才何疾 勸學與文意甚住 云云한 것이 있으며, (牧隱詩藁 卷24) 韓脩의 柳巷詩集에도 앞의 詩에 和答하는 陪牧隱先生見九 44) 이하 부분은 註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다루었다

202 1. 國子監과 私學 齋諸生刻燭詩 가 실려 있다. 李存吾는 나이 10여살에 十二徒에 들어가 공부하여 恭愍 王 9년 (1360)에 登第한 다음 鄭夢周 등과 친하고 講論에 虛日이 없었다 하였으며, (高麗史 卷12 李存吾 傳) 이 밖에 恭愍王이 十二徒 九齋에 布米를 내리고 누차 行幸 親 試 등을 行한 기록이 散見된다.45) 이것들로 보면 麗末 당시에는 九齋가 곧 十二徒의 대명사처럼 되고 매우 큰 구실을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高麗史 選擧志 序頭의 學校有國子 大學 四門 又有九齋 學堂 의 九齋를 池內宏은 국가의 또 하나의 官立學校처럼 보았 으나 이것이 私學(十二徒)을 指稱한 것임은 위의 牧隱의 詩로 미 루어 보아도 분명하다 할 것이다.46) 이렇듯 崔冲에 비롯한 徒는 넓고 길게 오랫동안 高麗社會에 다 대한 작용을 하였던 것이며 他徒 역시 기록의 미비로 많이는 알 수 없으나 恭讓王 3년(1391) 停廢될 때까지는 冲徒와 대략 같은 경로를 밟아 나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컨대 高麗史 熙宗世家에 王元年(1205) 弘文公徒로서 及第한 林得侯란 자가 自己徒의 宣聖 堂孔子廟를 將軍 金俊에게 私賣하였으므로 徒의 諸生이 이를 崔忠獻 에게 吿訴하여 得侯를 囚獄시키고 白銀 十斤을 追徵케 하였다 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수십년 후에도 弘文公徒가 역시 云謂 45) 高麗史 卷39 43世家 恭愍王 6년 7년 15년 17년條 및 選擧志私學條 46) 池內宏 朝鮮の文化(滿鮮史硏究近世篇所收 東京) 閔丙河씨도 國學의 四 書五經齋가 곧 九齋라 하여 (大東文化硏究 6 7輯 前揭 論文) 비슷한 見解를 나타 냈으나 위에 보인 李穡의 詩나 恭愍王 世家의 여러 기록 등으로 보아 私學(十二 徒)을 指稱한 것이 분명하다 할것이다. 安鼎福이 東史綱目 第14 下에서 按麗世 太學外 私學有十二徒 亦有官以管領 據此可知也 라고 註記한 것을 참고할 필요 가 있다

203 Ⅱ. 儒敎의 發達 되고 있음을 본다. 이상으로 私學-徒의 발전을 대충 더듬었는데 이제 그 徒의 성 격을 抽出한다면, 첫째 그것은 국가사회에서 설립한 것이 아니고 한 개인이 또한 종래에도 많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산만한 개 인교수 글방이 아니라 조직적이며 계획성 있는 學塾이었다는 것 이 눈에 띄며, 다음은 많은 師弟가 儒學의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 로 한데 엉키어 가르치고 배우며 오랜 세월을 두고 전통적으로 維 持繼承되어 나갔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 하나의 學閥로서의 私學 徒의 성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徒 란 원래 結社 團體의 뜻으로 옛날부터 그러한 조직 이 많이 있었던 것이지만 특히 新羅時代의 유명한 花郞徒와는 관 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찌기 申采浩가 지적한 바와 같이 崔公徒 盧公徒等은 花郞의 原郞徒 永郞徒等을 倣한 것이며, 學校의 靑衿錄은 花郞의 風流黃卷을 倣한 것 임에 틀림없는 47) 것이다. 즉 花郞徒가 花郞을 중심으로 幾十 幾百(或 幾千)의 郞徒로써 조 직되고 그 집단은 花郞의 이름을 冠하여 某某의 徒 라 칭하였으 며 花郞의 徒에 들어가는 것을 이름을 風流黃卷에 예속시킨다 48) 는 것과 私學의 徒는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49) 그렇다면 花郞徒 가 中國式 官學敎育機關과는 다른 독특한 교육적인 효능을 발휘하 여 그들 사이에 道義的 訓育이 잘 행해지고 공동생활을 통하여 우 정관계가 생김으로써 소위 형제관계가 성립하여 서로 合心戮力, 平 47) 申采浩 朝鮮史硏究草(1946) pp ) 三國遺事 卷2 竹旨郎條 49) 李能和씨는 花郞徒의 徒籍者名籍 黃卷赤軸 이 高麗儒徒의 齋籍隷名錄으 로, 다시 朝鮮時代 儒林團體의 靑衿錄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高麗 崔冲, 靑丘 學叢 참조)

204 1. 國子監과 私學 戰時를 막론하고 위대한 성과를 올렸던50) 그대로 高麗의 儒徒도 이 전통적인 先例를 슬기롭게 활용하여 그들의 學堂에서 공동으로 학문을 연마할 뿐아니라 師弟가 서로서로 道義로 굳게 결속되어 官學과는 따로 독특한 조직체로서 世人에게 Popula 한 존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宣聖堂(孔子廟)을 받들고 그들의 學舍를 굳게 수호해 나 가고 있음을 보면 더욱 그런 짐작을 강하게 하거니와 사실 高麗의 私學 徒가 여러 백년을 두고 官學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連 綿 繼承되어 나갔던 것은 적어도 그 일면에 花郞徒와 같은 정신적 유대가 그들 사이에 작용되어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私學 은 新羅時代에도 朝鮮時代에도 발달했던 것이며 高麗時代에도 많 이 존재하였을 것이지만 오직 12의 徒 라는 이름으로 그중에도 특히 徒 가 史傳에 기록되어 내려온 것은 그들이 朝鮮時代의 書院과 더불어 시대적 조건을 가장 잘 반영한 특별한 조직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拔群하여 성황을 이룬 崔冲徒는 앞에서 소개 한 바와 같이 그만큼 철저하고 적절한 교육이 행해졌음을 볼 때 그 동안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高麗一代를 통하여 內憂外患이 빈발한 탓으로 국가적인 문화활동이 약한 위에 특히 佛敎의 絕大한 세력에 밀린 듯 官學이 不振하였을 때 꾸준한 전통적인 존재로서 이를 대신하고 또는 鞭 韃하여 高麗의 교육을 많이 주도한 것은 바로 私學의 徒였으며 또 한 羅末麗初의 정치적인 혼란 때문에 儒者文人이 흔히 山間에 隱 身하게 됨으로써, 山間寺刹이 하나의 전통적인 학문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던 것을, 僧侶로부터 世俗에 還元시킨 것도 다름 아 50) 三品彰英 新羅花郞の硏究 第2章 花郞의 本質と 其機能 참조

205 Ⅱ. 儒敎의 發達 닌 여러 徒 의 공헌인 듯하다. 다만 徒 가 開京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것도 유명한 것이 12에 불과하였으므로 특정된 범위내의 이야기이고 그나마 武人執權후로는 더욱 심하게 피신을 여지없이 당하여 일시적인 결과로 밖에 되지 못한 큰 제약은 별 도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上述한 바와 같이 文宗년간에 私學十二徒가 성립되고 또한 대성황을 이룬 원인은 무엇일까. 근원적으로는 高麗의 集權體制가 이 무렵 완성기에 접어든 시 대적 조건을 들 수 있다. 成宗 때까지 대충 틀이 짜인 초기의 체 제는 契丹 난리를 치루는 가운데 외형적인 제도만이 아니라 특히 담당관료 세력의 새로운 정비가 촉진되었다. 成宗 후기 이후 豪族出身 貴族이 득세하기 시작하였지만51) 戰後 에 대내 대외적으로 文治時代가 到來하면서부터 더욱 官僚的 貴族 社會가 무르익어 당대의 京畿一帶 科擧出身 실력자들이 상대적으 로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기반을 확고하게 굳히기 위하여 개인적인 出世와 더불어 崔冲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혼인 등 門閥形成만이 아니라 학교설립 등을 통한 學閥貴族으로의 성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안팎으로 맞아들어가 각별한 성황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첫째 조건은 國學 즉 官學의 부진을 들 수 있다. 앞서 文宗이 崇儒에 대해서는 별로 성의가 없었다고 지적하였지만 이것은 당대 國子監의 실정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文宗 17년(1063)의 制에 國子監諸生으로 근래 학업을 폐한 자가 많은 것은 책임이 學 官에 있다. 이제부터 크게 힘써 年末에 성적을 따져 去留를 정 하되 儒生으로 在監 9년, 律生으로 6년이 되어도 荒昧無成한 51) 李基白 前揭論文.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1974)

206 1. 國子監과 私學 자는 다 내쫓도록 하라 52) 고 한 것을 보면 文運이 융성한 文宗년간에 들어와서도 물심양면 의 獎學基礎가 서 있지 아니하여 國子監의 學官은 혹은 열성이 없 고 혹은 실력과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맡게 된 결과 학생들로 하여 금 공부할 의욕을 상실케 하고 따라서 학업에 태만하여 불충실을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둘째는 科擧의 置重 때문이라고 하겠다. 旣述한 바와 같이 당대 풍조가 科擧를 위주로 하고 儒學은 그 수단으로 배워졌던 만 큼 공허한 官學보다는 실제 효과적인 私學을 택하여 실력을 양성 하려 하였던 것이고 더욱 崔冲 등 私學의 설립자가 대부분 科擧出 身者로서 당시의 권위 있는 지도자였으며 몇번씩 知貢擧로서 실 제로 인재를 뽑아온 經歷者였기 때문에 자연 應擧者들이 私學에 집중하여 科擧場을 독점하게 되고 官界進出이 활발하게 된 결과 서로 因果하여 私學은 대성황을 이룬 반면 官學은 더욱 유명무실 하게 된 것이다. 세째로는 鄕學의 不備라 할 것이다. 成宗 6년 전국 12牧에 經 學博士를 파견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그것은 몇몇 要地에 국 한된 것이고 그나마 地方豪族子弟의 選上에 주목적이 있었기 때 문에 文宗 이후 크게 앙양된 向學熱을 채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달라져서 文敎에 致力하는 기운이 濃熟하였지만 이때 아직 鄕學은 완비되어 있지 못하였으므로 衣冠子弟들은 형 편이 가능한대로 권위 있는 先覺名儒의 私塾에 진학하여 자기의 출세를 위한 공부에 힘쓰려 하였던 것이다. 李齊賢이 말한 아래 로는 州縣擧子들이 다 九齋籍中에 이름을 걸었다 고 한 지적은 위의 사실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52)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207 Ⅱ. 儒敎의 發達 요컨데 崔冲과 같은 先覺들이 上記한 여건에 호응하여 私學을 이 룩함으로써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당대에 그치지 않 고 그 후도 오랫동안 융성을 계속한 것은 역시 시대적인 요청과 더 불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十二徒私學의 그만큼의 특성 때문이었다. (3) 國學의 發展과 私學의 變遷 1) 國學七齋와 官學振興 文宗代의 文運은 아들 손자대에도 계승되어 君臣이 함께 학문을 즐기는 가운데 仁宗시대에는 李齊賢의 이르는 바 名臣 賢士가 朝廷 에 줄을 이어 後世 莫及의 盛況이었다.53) 佛敎의 義天, 儒學의 尹 瓘父子 金富軾 3兄弟 등이 다 이 무렵의 대표적 존재였지만, 이러 한 상황 속에 國學이 확장되고 養賢庫가 마련되는 등 일련의 官學 振興策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11세기말 宣宗이래 國學의 수리와 文 廟의 쇄신이 있었고 肅宗 때 國子監에 書籍舖가 설치되며 秘藏文籍 의 印出 등이 행해지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때 사정은 아직도 國學 폐쇄의 奏請까지 들고 나오는 형편이었다.54) 그리하여 睿宗 때에 도 처음에는 置學養賢 을 하려 하였으나 士類가 좋아한 것과 는 달리 大臣이 한 사람도 따르지 아니하여 행해지지 못하였다.55) 그러나 睿宗의 好學은 士類의 호응 속에 반대를 물리치고 마침 53) 李齊賢 櫟翁稗說 後集 1 54)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에 肅宗 七年 閏六月 宰相 邵台輔等奏 國學養士 糜费不貲 實爲民弊 且中朝之法 難以行於我國 請罷之 不報 라 있다. 참고로 邵 는 肅宗擁立功臣인바 高麗史節要의 史論(卷43)에서 꼬집힘을 당한 것과 같이 君臣이 낮은 次元이어서 벌인 主張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私學의 作用이 그만큼 컸던 때문이라 할 것이다. 55) 同上 學校條에 睿宗 二年. 制曰 置學德賢 三代以降致治之本也 而有司議論 未定 宜速疾施行 睿宗 方嚮文學 遂下此制 士類莫不欣然 大臣無一人奉承 時議惜 之 라고 있으며 그후 王 11年까지도 이러한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208 1. 國子監과 私學 내 國舉에 七齋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56) 여기에는 女眞戰爭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당시 尹瓘의 別武班을 주축으로 하는 主戰派 가 전쟁을 일단 승리로 이끌었으나, 大臣들(主和派)의 책동이 주 효하여 九城이 환부될 수 밖에 없었던 미묘한 안팎 사태 아래 왕 4년(1109) 7월 실현을 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文武兩 學齋의 출현은 더욱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七齋란 7종의 專門講座로서 ① 麗澤齋(周易講座) ③ 經德齋(毛詩講座) ⑤ 服膺齋(戴禮講座) ⑦ 講藝齋(武學講座) ② 待聘齋(尙書講座) ④ 求仁齋(周禮講座) ⑥ 養正齋(春秋講座) 를 일컫는 것인데 제1齋에서 6齋까지를 儒學齋, 제7齋를 武學齋 라 통칭하였다. 이 文武兩學중 특히 武學齋의 설치는 肅宗이래의 北界의 두려움에 대처하는 것으로, 父王의 女眞征討의 誓疏를 깊 이 간직하고 있던 睿宗은 당시 尹瓘등의 성과가 無爲로 돌아간 마 당에 將材養成의 필요를 더욱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睿宗 은 이러한 名分을 활용하여 國學을 신축 이전하고 확장시키면서 반대 세력을 누르고 王權의 강화도 이룩해 나갔다. 여기에 왕 5년 9월에는 새로 科擧 볼 사람을 國子監에 3년 소속시키는 조치를 하기도 하고, 9년 2월의 國學 新建 請願을 찬양하는 듯 그 8월에 친히 國學에 나가 謁聖과 講說에 百官 및 生員도 참여케 하였다. 나아가 女眞이 稱帝建國한 이듬해 즉 왕 11년(1116)에는 西京에 행차하였을 때 文武兩學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여전히 異論을 56) 同上 學校條에 國學置七齋 中略-試取大學崔敏庸等七十人 武學韓自純等 八人分處之 라고 하였다. 尹南漢氏는 七齋名이 九齋名에 비하여 心性學보다는 經學的이라 하였다.(韓國民族思想史大系 2 古代篇 (1973) p. 269)

209 Ⅱ. 儒敎의 發達 고집하던 有司에게 속히 시행할 것을 명하기에 이르렀다.57) 그 후 金國이 형제의 約을 맺고자 무례한 使書를 보내오고(1117), 이어 稱臣까지 요구할 기세를 보여 對金 감정이 매우 악화되고 있던 14 년(1119) 秋 7월에 마침내 學舍를 넓게 짓고 학생을 새로 받아 들 였다. 이때 儒學齋의 학생 수를 60인으로 하고 武學生을 17인으로 증원한 것은 급박한 정세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거니와 특히 養賢庫를 비로소 세워 獎學財團의 확보를 기하고 近臣을 시켜 사무 를 맡게 하는 동시에 名儒(寶文閣)로써 學官博士를 삼아 經義를 강 론케 하였으니 교육사업에 갖은 정성을 다한 셈이었다.58) 한편, 武學齋는 그 학생 수가 儒學齋의 몇 분의 1에 불과하고 武科도 睿宗 15년 한번 밖에 시행 안된59) 미미한 것이었지만 다 음 仁宗 때 가서는 그 11년(1133)에 文武學의 불화 초래 등 몇 가지 악영향이 있다는 이유로 정파되고 말았다.60)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衆論을 國學충실에 집중시킴으로써 勸學 과 더불어 集權강화에도 巨步를 내킨 것이었다. 그러기에 金守雌 는 仁宗의 幸學記에서 睿宗은 剛明自斷하여 衆論을 누르고 校舍를 새로 지어 교육 에 힘썼으므로 四方多士가 쏠려들었다 61) 라고 찬양하였으며 이 보다 앞서 仁宗 원년(1123) 高麗에 왔다간 徐 兢은 高麗圖經에서 國子監이 學徒滋多 하여 새로 禮賢坊(滿月臺 東 57) 同上 學校條 및 高麗史節要 卷8 睿宗 2 58) 同上 59) 이것은 記錄의 不備인듯도 하나 이후에도 恭愍王 元년 (1352)에 李穡이 武科 설행을 奏請한 일이 있었을 뿐 실시되지 못하였고, 그 20년에는 武學을 널리 中央과 地方에 설치한 일이 있는데 南倭北狄의 침해에 대비한 것일 것이다. 그후 恭讓王 2年(1390)에는 武科를 시험하여 武人을 뽑은 일이 있었다. 60) 前揭書 學校條 (仁宗) 十一年 正月 判武學齋生 赴擧者少 故策論 雖不合格 隨分選取 得第甚易 諸學生爭屬武學(下略) 이라 한 바와 같이 本末이 전도되고 武學이 漸盛하면서 文學人과 角立不和가 생겼다고 하였다. 61) 東文選 卷64 仁宗 7년에 지음

210 1. 國子監과 私學 쪽)에 이사 하였다고 기록하였다.62) 여기 養賢庫와 새 學舍 그리 고 名學官을 갖춤으로써 國學은 면목이 일신되었고 睿宗의 14년 간에 걸치는 官學振興策은 일단 성취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學舍의 규모가 어떠한 것인지는 위의 註記에 나 타난 바와 같이 명확을 결하고 있지만 養賢庫 또한 어느 정도의 것인지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간단한 職制가 百官志 한 칸에 分 註로 나와 있는 것 뿐이다.63) 따라서 그 재정형편은 짐작하기 어 렵지만 멀리는 成宗 이래의 田庄이 얼마간 있는 위에 仁宗 8년 (1130) 御史臺가 養士經费의 太多를 들어 國子生의 減縮을 주장 한 것과 또 高宗 30년(1243)에 崔怡가 國學을 修葺하고 쌀 300 斛을 納하는 한편64) 養賢庫의 官員을 늘려서 둘은 田地(庫屬田) 가 있는 현장에 나가 勸農輸稅를 맡고, 둘은 在庫監收케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65) 武人亂 이전과 江都時代에는 그런대로 원 활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學官의 확보는 睿宗이 일찍부터 통감하 고 노력해온 바로서 유명한 淸讌閣과 寶文閣의 설치로 말미암아 文運이 일어나고 學者가 많이 배출되게 되었던 것이다.66) 淸讌閣이란 古今의 서적을 간직한 도서관이요, 寶文閣은 그 옆 에 두어진 學士들의 會講休息所였다. 兩閣은 宋의 제도를 본따서 62) 高觀圖經 卷16 官府 國子監條 그런데 여기에도 國子監舊在南會賓門內 前有 大門 榜曰 國子監 中建宣聖殿 兩廡闢齋舍 以處諸生舊制極隘 今移在禮賢坊 以學 徒滋多 所以侈其制耳 라고만 간략하게 나와 있어 얼마나 크게 넓혔는지는 알 수 없다. 63) 高麗史 卷77 百官志 諸司都監各色 養賢庫條에 睿宗十四年 置判官 丙科權務 云云이라고 있고 同卷 83 兵志 看守軍條에 養賢庫散職將相二 라고만 보인다. 64) 高麗史節要 卷16 高宗 30年 6月條 및 高麗史 崔忠獻傳 怡條 65) 高麗史 卷77 百官志 前出養賢庫條에 高宗三十年 加設四員 分二員遣庫屬田 地所在 使勸農輸稅 令二員在庫監收 歲終 國子監考勤慢升黜 이라 하였다. 66) 뒷날의 集賢殿 奎章閣도 대개 비슷하였지만(崔承熙 集賢殿硏究 歷史學報 金龍德 奎章閣考, 中大論文集 참조) 經筵 書筵이 계속되어 經史討論이 활발하고 書籍간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四方學士 가 쏠려들어 名儒가 學官으로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211 Ⅱ. 儒敎의 發達 宮中에 설치한 것인데 당시 硕學들과 詩 書 易 禮記 中庸 老子 등을 연구 강론하였다.67) 睿宗은 원래 詩賦를 좋아하고 遊 宴을 즐겼으나 왕 11년(1116) 4월 大同江놀이때 崔瀹(崔冲의 玄 孫)의 諫함을 듣고68) 促求되었음인 듯, 동년 8월에 淸讌閣을 개 설하고 洪灌 등을 學士로 삼으며 다시 11월에 寶文閣을 두어 金 富佾을 侍制로 삼고 당대 명유를 망라하여 참여케 하였던 것이다. 2) 學式의 詳定 睿宗의 아들 仁宗은 父王을 이어 더욱 官學의 진흥에 힘썼으니 그 結晶이 學式의 詳定이었다. 이로써 高麗 국초이래의 체제의 정 비는 문화면에까지 일단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京師六學의 制를 먼저 高麗史 選擧志에 의하여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學校名 (ⅰ) 國子學 (ⅱ) 大學 (ⅲ) 四門學 (ⅳ) 律學 (ⅴ) 書學 (ⅵ) 算學 ② 入學者身分 (ⅰ) 國子學 文武官 三品 이상의 子孫 및 勳官 二品帶縣公 이상 並 京官 四品 帶三品 이상 勳封者의 子 ⅰⅰ ( ) 大學 文武官 五品 이상의 子孫, 正從三品 曾孫 및 勳官 三品 이상 有封者의 子 ⅰⅰⅰ ( ) 四門學 勳官三品 이상 無封, 四品有封 및 文武官七品 이 상의 子 但 以上 3學은 雜路, 工 商 樂 名 等 賤事者, 大小功親 犯嫁者, 惡逆을 범한 歸鄕者, 賤鄕部曲人 등의 자손 및 私罪를 67) 東文選 卷64 金緣淸讌閣記 참조 68) 補閑集 上 (高麗史 崔瀹傳에도)에 帝王當好經術 日與儒雅 討論經史 諮諏政 理 化民成俗之無暇 安有事童子之雕虫 數與輕薄詞臣 吟風嘯月 以喪天衷之淳正 耶 라 하였다

212 1. 國子監과 私學 범한 者는 入學을 不許한다.69) ⅵ ( ) 律學 書學 算學 八品 이상의 子70) 및 庶人 그리고 七品이 상의 子로 情願하는 者는 들어준다. ③ 定員 國子學 大學 四門學은 각 3百人,71) 在學中은 年齒로 次序를 정한다. 律學 書學 算學은 未詳. ④ 官學 國子學大學四門學에 각기 博士助敎를 둔다. 반 드시 經學에 優長하고 景行修謹하며 師範이 될 만한 者를 擇하여 1經式 나누어 諸生에 게 敎授시키고 1經을 가르치면 그때마다 반 드시 講을 마치게 하며 講을 마치지 못한 者는 業(다음 經)을 고치 지 못하게 하고 年終에 講授한 것의 多少를 계산하여 博士, 助敎의 等第를 考課하는 기준을 삼아 이를 임명한다. ⑤ 敎科目 周易尚書周禮(儀禮)禮記毛詩春秋左氏傳同 公羊傳同穀梁傳을 各一經으로 하고 孝經과 論語는 必修科目으 律 書 算學에는 博士만 둔다. 로 하며 律學은 律令, 書學은 八書, 算學은 算術을 가르친다. ⑥ 在學年限 孝經과 論語를 합하여 1년, 尚書公羊傳穀梁傳 을 각 2년반, 周易毛詩周禮儀禮를 각 2년, 禮記 左傳을 각 3 년으로 한다. (계 8년반) ⑦ 學習法 먼저 孝經論語를 읽고, 다음에 諸經을 읽으며 아 69) 이밖에 神宗 6년(1203) 7월의 參政車若松의 아들의 경우를 보면 妾所生의 子에게도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 같다(高麗史 卷101 車若松傳) 70) 여기 八品이상 者라 함은 八品이하 者라야 옳다. 八品이상의 子와 庶人이 입학한다 한 것은 庶人도 입학할 수 있으면서 九品의 子弟가 제외되는 모순이 생겨 事理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71) 閔丙河씨는 儒學學部인 國子學 大學 四門學의 정원은 중엽까지 6, 70명 정도 로 유지해 오다가 말엽에 들면서 100명의 정원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 여 仁宗 8년(1027) 7월의 國子生上書 속에 나타나는 國學生徒 不過二百 云 도 武學과 技術學部의 人員을 총합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技術學部의 定員은 律學 40人 內外, 算學 15人 內外, 書學 15人 內外로 推定하였다. (大東化硏究 6, 7輯 1970 pp ) 아래 註 (80) 참조

213 Ⅱ. 儒敎의 發達 울러 算數와 時務策을 익히고 틈 있는대로 매일 글씨 한 장을 쓰 이며 中國의 國語(春秋時代 八國의 事跡을 쓴 册. 一云 春秋外傳) 說 文(說文 解字) 字林(字書의 일종) 三倉(字書의 일종, 倉頡篇, 訓纂 篇, 滂喜篇, 合稱 三倉) 爾雅(十三經 중의 하나, 中國最古의 字書)를 兼하여 읽게 한다. ⑧ 律書算學은 다 國子學에서 익힌다. 다음 지방 각 州縣에 설립된 鄕學의 學式을 보면 자세한 것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入學身分이 律 書 算學과 같이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 入學身分이 儒學部는 그 안에서도 세분되고 技 術學部와 鄕學도 그것이 가장 뚜렷하게 정해진 것은 封建階層的 身分制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거니와 그래도 庶人에게까지 開放된 것은 骨品制를 벗어난 그 만큼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鄕學의 創設시기는 選擧志 學校條에 의거하여72) 仁宗 5 년(1127)으로 잡고 있지만 지방 요지의 學院이나 학교의 존재는 일찍부터 확인되는 터이므로 이때 전국적으로 일원적인 설립운영 이 꾀해짐으로써 鄕校의 2대 요소인 明倫堂과 文廟의 기능이 온 전하게 발휘되기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73) 이리하여 睿宗의 國學충실에 이어 仁宗이 學式과 함께 地方郡 縣에까지 鄕學을 널리 보급완비케 하였으므로 金守雌는 前揭 幸 學記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京師에서부터 外方에까지 퍼졌다 고 하였다. 그러나 鄕學은 毅宗 말년 이후 시들 수 밖에 없었고, 國學이 부흥된 다음에도 李穀의 金海府鄕校水軒記에 보이는 바와 72)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에 (仁宗) 五年 三月 詔諸州立學以廣敎道) 73) 註(4)이하에서 본 바와 같이 西京 淸州등에 學院과 學校가 國初이래 있었고 成宗 穆宗 睿宗등 各王의 制令에 外置學校. 文師差遣등 語句가 자주 나와, 仁宗 때 일시에 수백의 학교가 처음으로 새로이 設置되었다기 보다는 이때까지 地方 學校가 점차 두어져 왔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朴性鳳 前揭論文 史叢2 pp 참조)

214 1. 國子監과 私學 같이 쇠퇴의 극에 다달았다.74) 이것은 朝鮮時代에도 鄕校가 文廟 기능 밖에 발휘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 官僚制의 작용이 큰 때문이며 이것은 동시에 十二徒 등 私學의 존재환경이 여전한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한편 學式의 전반에 관하여 입학자의 신분, 定員問題 및 재학년 한 등은 이미 대강 살핀바 있으므로 끝으로 學式 내용의 骨子가 되는 敎科目의 편성에 대하여 몇가지를 따지고 넘어가자. 먼저 學式에는 儒學學部의 本敎科인 各經으로서 周易 이하 8經 을 들고 있는데 소위 9經 중 儀禮가 빠진 것은 撰者의 誤脫임이 분명하며, 仁宗 때까지 科擧의 독립 業(種目)으로 있던 三禮 三 傳의 6科目75)이 詩 書 易의 現今 三經과 더불어 중요시된 것은 唐이래의 전통을 본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唐制를 참작한 것으로 儀禮)小 經(尙書公羊傳穀梁傳) 중 몇 과목을 자유 선택하여 專攻케 하되 旁經(論語孝經)은 先行 必修토록 하였다. 보이는 大經(禮記 左氏傳) 中經(周易 毛詩 周禮 76) 이처럼 공통필수과목으로 論語와 孝經을 課한 것은 儒敎의 기 본 교양을 익힘으로써 지도자적 倫理觀을 심고자 함이요, 그 다음 에 諸經을 읽게 한 것은 전공을 통하여 깊이 줏대를 세우자는 것 이었다. 아울러 算術과 時務策 그리고 習字를 課한 것은 官員으로 서의 실무 실습을 하는 것이며 字典類를 많이 接하게 한 것은 문 자의 원리를 확실하게 익혀 틀림이 없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74) 歷文見諸郡朝學頹壞 生徒惰業 往往皆是(東文選 卷70) 75) 三禮란 禮記 (禮의 根本과 學說) 周禮(周代官制) 儀禮(周代 士人階級의 冠 婚喪祭등 社會的 儀式)의 셋을 말하며. 三傳이란 孔子가 지었다는 春秋의 三家풀 이로서 史實중심의 左氏傳과 理念중심인 公羊傳(最古傳統) 穀梁傳을 일컫는다. 76) 大經 中經 小經 旁經의 구분은 卷帙의 量을 감안한 편의상의 分類였다. (周易은 唐에서는 小經이었음) 그때문인지 高麗史 選擧志의 學式에는 年限의 長短만 구별되어 있으나 그 밖에 同(科擧) 科目條 등 여러 곳에서서 大小經의 明示가 있다

215 Ⅱ. 儒敎의 發達 다음 技術學部의 敎科는 學式에 이미 보인 바와 같이 書學은 八 書(古文 大篆 小篆 隷書 八分 楷書 行書 草書), 算學은 算術을 다 國子學에서 익힌다고 되어 있는데 같은 仁宗 때 詳定된 科擧要 目에77) 의하여 좀더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즉 明 書業은 說文五經 字樣眞書行書篆書印文을 각각 시험과 法業은 律 令을, 明算業은 九章 綴術 三開 謝家를, 그리고 明 목으로 한 것을 보면, 이에 상응한 교과가 기술학부에서 교육되었 으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여하튼 仁宗시대의 이상과 같은 學制정비는 經筵 講學의 활발 한 개최, 册府元龜의 校勘이나 三國史記의 편찬 등으로 이어지는 출판사업과 더불어 文風振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徐兢이 감탄한 바와 같이 臨川閣의 藏書는 수만권에 이르고 淸讌閣도 經 77) 參考로 仁宗 14부(1136)에 制定된 科擧要目을 高麗史 選擧志에 의하여 綜合 하면 다음과 같다. (閔丙河 前揭論文 p. 27참조) 種 試驗의 場 科目 目 初 場 中 場 終 製 述 業 經 義 詩 賦 明 經 業 周易 또는 尙書 毛 詩 明 法 業 律 說文五經字樣 眞書行書篆書印文 素問經甲乙經 本草經明堂經 (脈經針經難經灸經一初中場通試) 劉涓子方瘡 直 論 脈 經 明堂經針 經本草經 明 算 業 九 明 書 業 醫 業 呪 噤 業 地 理 業 令 章 新 集 地理 書 連 卷 大 小經講讀 律令講讀 綴術 三 開 謝 家 劉 氏 書 經緯令地理經胎藏經謌決蕭氏書-初中場通試) 眞書奏狀喫算何論孝經曲禮 (地理決經 何 論 業 場

216 1. 國子監과 私學 史子集의 책이 가득하며 國子監은 새집에서 師弟가 짜임새 있게 공부 잘하였고 여염집거리에도 經館書社가 두세집 건너 바라보고 있어 백성의 자제들도 떼지어 스승에게 글 공부를 하게 되었다.78) 그러나 안으로 國學生의 明經業은 얼마후 浸衰하여 특별히 敎導 官을 두어 勸學해야만 하였고,79) 곧 이어 御史臺가 國學養士 200 명을 줄이자고80) 한 것을 보면 傳來의 反新進勢力이 여전히 완 강하게 작용한 듯하며 그것은 동시에 十二徒와도 큰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왕은 더욱더 國學의 보호에 힘써 御 史臺의 奏請을 물리칠 뿐아니라 그 11년에 十二徒의 監試에 응할 자격을 제한하는 반면 國學諸生에게는 잇달아 특권을 인정하는 조 치를 취하였다. 즉 國學의 四季私試로 分數를 通考하여 科場에 直赴할 수 있게 하고, (왕13년) 다시 그들의 行藝分數가 14分 이 상이면 第 1,2의 試場을 省略하여 바로 第 3場에 나가도록 하며, 13分 이하 4分 이상일 때는 第 2場인 詩賦場81)에 나가게 하는 破格의 특권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왕 14년) 이상과 같은 특권조치는 國學 충실과 더불어 私學抑制에 뜻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睿宗 이래의 上述한 振興策이 결국 集權的 官 僚制의 신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國學은 피동적이나 마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지고, 私學 十二徒는 혹은 종래와는 달리 國學보다 한등 낮게 監試를 거쳐야 하게 되었고82) 혹은 상호간에 78) 高麗圖經 卷 40 79) 高麗史 卷74 同上 學校條 仁宗 8年 6月條 80) 同上 7月條, 여기서 國學定員 各 3백人은 合 3백人인 듯 하며 實上은 2백人程 度을 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朝鮮時代에는 아주 定員이 2백人으로 되었으니 짐작할 만하다. 81) 여기 科試의 三場制는 仁宗 17年의 再改定 전 즉 穆宗 7年 3月에 改定된 法에 의거한 것이며. 成績의 分數는 適格이 最高 3分이고 最下가 1分으로 매기 는 것이었다. 82) 朴性鳳 前揭論文 十二徒의 敎育課程上 位置 참조(史叢 2 pp )

217 Ⅱ. 儒敎의 發達 轉屬하는 무리가 나와 移屬者가 자격의 제한을 받게 되는 등 명확 하게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다. 더우기 왕 17년부터 國子監試가 정 기적으로 시행되고 諸徒儒生이 國子監知會使의 재교육을 받으며, 諸徒의 열심한 敎導者가 國子監 學官의 有闕時에 먼저 채용되게 된 것을 보면 十二徒는 점차 國學에 포섭되어 간 듯하다. 그러나 國學의 융성이나 私學의 동요가 근본적인 토대로부터의 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國學은 얼마 안가서 다시 침체되고 私學은 여전 히 지속되어 나가면서 武人의 亂을 겪게 되었다. 3) 麗末의 國學과 私學 十二徒 武人亂과 蒙古 난리 중에 침체한 文運은 忠烈王 이후 元과 밀착 된 관계를 가지면서 크게 변하였다. 그 첫 개시는 왕 6년(1280) 經史를 중시하는 敎令과 함께83) 1經 1史에 능통한 正郞 崔雍 등 7인을 經史敎授로 삼은 데서 시작되었다. 이어 趙簡 등 9인을 친 히 시험보여 殿試門生으로 뽑아 內侍에 속하게 하였다. 다시 왕 30년(1304)에는 종래 狹隘했던 國學의 大成殿을 신축하였다. 이것은 儒風의 振作에 큰 자극이 되었으니 落成日에 왕의 謁聖 行次를 맞아 贊成事 安珦은 興學養賢을 위하여 贍學錢을 설치하 자고 지금 養賢庫가 殫竭하여 養士할 것이 없으니 六品이상은 각각 銀 1斤을 내고 七品이하는 布를 差等 있게 내어 養賢庫의 財 團을 만들자 84)는 주장은 僉議府 密直司의 兩府에 받아들여지고 왕도 內庫의 錢穀을 내어 도왔다. 그동안 養賢庫가 본래의 구실을 못함으로써 학교가 日衰하여 安晌 자신이 개탄한 詩에85) 83) 高麗史 卷29 世家 忠烈王 6年 3月辛酉條, 正郞 崔雍은 高麗史節要에서는 崔雄 으로 되어 있다. 84) 高麗史 卷105 列傳 安珦條 85) 晦軒實記 卷之一

218 1. 國子監과 私學 香燈 곳곳마다 부처를 빌고 북 통소 집집마다 귀신 굿들인데, 오직 數間 夫子廟는 봄(가을)풀만 뜰에 가득 인적이 없네 라고 한 바와 같이 쓸쓸했던 國學은 여기에 다시 再興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珦은 따로 餘貲를 가지고 博士 金文鼎에게 江南 (元)에 가서 先聖 및 70子의 像과 祭器 樂器 六經 諸子 史를 사오게 하며 密直副使致仕李㦃, 典法判書李瑱을 천거하여 經史敎 授都監使를 삼았다.86) 이와 같이 文廟가 신축되고 贍學錢이 설치되며 새로운 學官(經 史敎授都監使)이 두어져서 國學이 충실하게 되자 공부하려는 선 비들이 雲集하여 國學의 학생은 물론 十二徒의 諸生도 經書를 비 껴들고 受業에 참가하여 그 수가 수백에 달하였다. 그뒤 忠宣王은 즉위하자 먼저 國學을 成均館 이라 고치고 養賢庫에 銀 50斤을 下賜하여 財源을 늘리는 동시에 藝文館으로 하여금 郡縣의 재주 있는 자를 모아 職牒을 주어 訓導에 임명하였 다87) 또 忠肅王은 成均館의 勉學의 한 방책으로 奠謁에 불참하는 학생에게 白金 1斤씩을 징수하여 養賢庫에 充用하는 비상수단도 강구하였다.88) 또 새로 막대한 서적을 수입하여 成均館에서 考閱 케 하였는데 이 때 寶鈔를 주고 南京에서 사들인 經籍만도 1만 8 백권이나 되었다 한다.89) 이러는 가운데 安珦에서 비롯된 儒學振 興은 그의 朱子崇拜 내지 최초 매개가 작용하여 이 무렵 元으로부 터 程朱學이 비로소 전래되기에 이르렀다. 程朱學의 전입시기나 주창자는 명확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었 86) 이 都監의 설치에 관하여 百官志의 忠烈王 22年은 그 30年의 착오라고 보는 이도 있으나(池內宏 前揭 朝鮮の文化 ) 논거가 명확치 않다. 87)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88) 高麗史節要 卷24 忠肅王 元年 正月條 89) 同上 6日條

219 Ⅱ. 儒敎의 發達 지만90) 櫟翁稗說이나 高麗史 列傳은 다 같이 白頣正이 元에서 들 여와 李齊賢 朴忠佐에 전하였다 하였고 그것은 忠肅王 원년 (1314)이라고 하였다91) 하여간 이로부터 麗末의 어려운 속에서도 새로운 儒學을 전공하 는 成均館의 新進官學徒들이 시대의 각광을 받으면서 크게 등장하 였다. 그리하여 恭愍王 초년에는 倭寇와 紅賊의 침입 중에도 학교 의 수리가 행해지고, 왕 12년 5월에는 南으로 播遷까지 한중에 成 均館 十二徒에서 鄕校에 이르기까지 혹 學田이 強豪에 兼併됨이 있으면 바로잡아 贍學用으로 돌리게 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동 16년(1329) 5월에는 外患으로 잿더미가 된 國學을 重營하고자 중앙과 지방의 儒官으로 하여금 品級에 따라 布를 내게 해서 그 비용에 충당케 하고 生員을 100명으로 증원하여 비로소 五經四書 齋를 分設하였다.92) 이에 李穡을 비롯해서 金九容 鄭夢周 朴尙 衷 朴宜中 李崇仁 등 일대 名儒들이 學官으로 나오게 됨에 따라 國學의 권위는 크게 떨치게 되었다. 특히 李穡은 大司成으로사 學 式을 更定하고 매일 明倫堂에 앉아 學官들과 分經 授業을 하고 論 難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가 모여 들어 程朱性理學이 비로소 일어났던 것이다. 그후 禑王 때 權臣들에게 빼앗긴 養賢庫 90) 今西龍 高麗史硏究 및 武內義雄 儒敎の精神 참조 91) 李齊賢 櫟翁稗說 前集 2, 高麗史 列傳 白頣正條(尹文學士遺藁 朱子學の簿來 とその影響に就いて pp 참조. 92)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에 (恭愍王) 十六年 成均祭酒林樸 上言請改造成均 舘 命重營國子于崇文館舊址 增置生員 常養一百 始分五經四書齋 라고 있는 바, 이 五經四書齋를 곧 9經에 의한 9齋의 制度 (閔丙河 前揭論文, 大東文化硏 究 第 6 7輯 p.20)라고 斷定하는 見解도 있으나 註46에서 밝힌 것처럼 私學의 九齋와 混同시켜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末期에 와서도 忠肅王 4年에 九齋朔試가 있었고 恭愍王 15年 6月辛酉에 修九齋 라 한것이 보이며 무엇보다 李穡이 十 二徒曰九齋 (前註)라고 했을 뿐더러 大中小經의 9經 에는 四書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220 1. 國子監과 私學 의 田地93)를 보충하기 위하여 豊儲倉의 쌀을 給하기도 하고 恭讓 王 때에는 특수 교육분야의 진흥을 위하여 十學敎授官을 두고94) 또 京都 五部를 비롯 지방 各道牧府에 儒學敎授官을 파견하여 교 육 진흥에 노력하였으나 이 사업은 이미 高麗王朝로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한편 麗末의 十二徒의 형편을 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忠烈王때 安珦이 크게 國學을 충실히 하자 十二徒의 諸生도 여기에 나가 수 업하였고, 忠肅王 때에는 九齋朔試로써 國子監試에 대용한 일이 있 어 이때까지만 해도 十二徒와 國子監은 同格의 과정을 밟고 있었 다. 그런데 恭愍王 이후로는 국가의 보호아래 學舍가 修葺되고(원 년) 夏課試驗이 부활되며(6년) 또한 朔試가 시행되어(7년) 勉學의 장려를 보게 되자 이 사이에 사정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恭愍王 원년에 李穡이 올린 上疏文은 그런 변화를 촉구한 것이었다. 즉 밖으로 鄕校와 안으로 東西 學堂에서 그 재주를 따져서 十二 徒에 올리고 十二徒를 통틀어 시험보여 成均館에 올리자 고 하 95) 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十二徒는 國學의 예비과정이 되고 만 것이 다. 그러므로 李穡의 上疏는 十二徒 私學의 약화와 國學의 진전을 기회삼아 國學을 十二徒 私學보다 한층 높은 課程으로 끌어 올리고 國學을 거치지 않으면 科擧에 응하지 못 하도록 國學의 완전하고도 93) 高麗史 卷122 列傳 李得芬條에 다음과 같은 例가 있다. 又奪養賢庫田使不得 養士 多歛人財 奪士田(中略) 先是 睦仁吉 奪養賢庫田 在延安府者 百餘結仁老 死. 得芬又奪之 94) 恭讓王 元年에 十學이 설치 됨으로써 禮學만 成均館에 남고 樂學은 典儀寺, 兵學은 軍候所, 律學은 典法(司), 字學은 典校寺, 醫學은 典醫寺, 風水陰陽 等學 은 書雲觀. 史學은 司譯院으로 分屬되었는데, 版圖寺로 옮겨졌을 算學이 百官志 記錄에는 빠져 있다. 이에 따라 成均館은 技術學部를 완전히 떼낸 禮學 중심의 純 儒學大學이 되었다.(高麗史 百官志 諸司都監各色 十學條 및 閔丙河前揭論文 p. 30 참조) 95) 高麗史 卷74 選擧志 學校條 및 卷115 列傳 李穡條

221 Ⅱ. 儒敎의 發達 철저한 진흥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었다.96)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十二徒가 당시에도 중요한 교육기관으로서 國學이 무시 못할 존재 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恭讓王 3년(1391)에 十二徒를 완전히 停廢시키고야 만것 등을 종합하면 十二徒의 지위는 어디까 지나 하나의 독자적인 최고 학부였던 것이다. 즉 사립대학으로서 관립대학인 國學과 대비하여 전기 仁宗 년간까지는 단연 우세한 입 장에 있었고, 그 이후도 관학 우대에 수반하여 格下되었다고는 하 나 그보다 한등 낮은 예비기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끝으로 十二徒의 영향 意義를 마무리 하면 私學 十二 徒는 중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武人執權時代 이후에도 李奎報 鄭 云敬의 경우와 같이 많은 선비들이 역시 모여들어 공부한 것을 볼 때 私學은 親元이후 新儒學을 받아들여 크게 文運의 진전을 가져오 는 素地를 닦아 주었고, 그 뒤에도 國學과 더불어 高麗말기의 儒 學 발달에 크게 작용하고 나아가 朝鮮時代의 儒學全盛에 많은 영 향을 끼친 것이라 하겠다. 더욱 후기의 座主門生制에 의한 집단적 얽힘은 十二徒 私學과 연관을 가지고 學閥貴族을 형성하는 가운 데97) 성황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후세의 私塾발달을 조장하여 저 유명한 書院 성립의 淵源을 지어주었고 또한 夏課, 詩赋會 를 갖는 것은 뒷날 오래 오래 본받은 바 되었다. 다만 이와같이 기초가 서고 작용한 바 많으며 영향한 바 큰 私 學 十二徒는 西歐中世의 大學 성립의 경우와 같이 국가를 超然하 96) 安珦 이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國學의 優位는 확실치 못하여 李穡의 위 上疏 文에도 登仕者不必及第 及第者不必由國學 이라고 보이는 형편이었다. 97) 許興植씨는 高麗後期에 科擧制에서 형성된 座主門生의 門閥社會가 형성되었 다(高麗時代 科擧制度의 檢討, 韓國史硏究 10, 1975, p.30)고 하였는데 崔沖의 경우는 처음 門閥로서가 아니고 私學으로 有名해진 점을 고려할 때 座主門生 自體는 역시 學閥的인 것으로 보아 門閥貴族(내지 門閥社會)인 것보다 學閥貴族 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門閥化한 것은 이미 婚姻, 王權 결탁 등 學閥과 다른 次元의 얽힘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22 2. 儒學의 性格 여 독특한 계급을 형성하며 자라나고 있던 市民社會의 배경 아래 르네쌍스 의 先驅가 되어 連綿히 금일에 이르고 있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여, 결국 국가관리양성을 위주로 하고 그것도 당시의 특수계급을 배경으로한 封建體制內의 산물에 불과하였으므로 강 력한 외국문화의 세력에 휩쓸린 바 되고 封建體制의 再改編에 따 른 王朝交替 앞에서는 모두가 無로 돌아갈 밖에 없어 금일에 별존 재와 영향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朴性鳳 2. 儒學의 性格 (1) 高麗儒學의 成立背景 1) 後三國의 思想動向 高麗儒學은 高麗王朝의 성립과정에서와 같이 국제적으로는 唐 宋의 儒學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고 民族的으로는 羅末 後三國의 傳統文化와 儒敎的 思想動向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는 高麗 王朝의 성립과 대응된 것이었다. 따라서 高麗儒學의 성립 배경은 첫째 羅末 後三國의 국내외적 사회변동과 이에 대응된 사상동향, 둘째 이를 배경으로 했을 太祖 王建의 儒敎意識과 그의 推戴功臣들 의 先王的이며 王道的인 儒敎的 革命論, 세째 高麗王朝의 文治的 指向性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의 국내외적 사회변동은 대외적으로 볼 때에는 唐末 五代 社會가 貴族社會에서 官僚社會로 移行하는 過渡期로서 藩鎭體制를 중심한 武人社會였다는 것과 唐의 世界帝國이 瓦解됨에 따라서 遼 西夏 등 北方民族의 遊牧帝國이 성립함으로써 서로 覇權을 다

223 Ⅱ. 儒敎의 發達 투는 국제적 혼란과 경쟁의 시대였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국내적 으로는 骨品制的 新羅王國의 貴族體制가 해체되는 한편 豪族勢力 이 성장하고 後三國의 分立과 항쟁이 전개되던 것이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轉換期的 사회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羅末 後三國의 사 상동향을 들 수 있는 것이다.1) 羅末 後三國의 思想動向은 反新羅的 知性의 성장이었고 이것 은 王建과 그의 推戴勢力이 儒敎的 革命論을 통하여 高麗王朝의 창건에 연결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동향이란 羅末 思想界의 分化現象을 통하여 漸熟되었다고 할 수 있다. 王京인 慶 州 중심의 敎宗佛敎가 分化하여 天台 華嚴의 兩宗敎團으로 分化 된 끝에 華嚴宗에서는 南 北岳派가 太祖政權과 甄萱政權에 각기 연결된 것이나 天台宗에서는 會三歸一論이 다시 소생하여 後三國 을 통일하는 이념적 준비를 한 것이나, 羅末에 密敎가 유행한 끝 에 陀羅尼經이 王權을 비판한 것이나, 敎宗에 대신하여 禪風이 유 행하면서 지방세력화하는 한편 風水圖讖說이 유행함으로써 王朝 交替를 정신적으로 決定視한 것 등을 들 수 있다.2) 한편 이러한 羅末의 사상동향에 대응되는 儒敎思想의 변화는 王道主義的인 儒敎的 革命論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우선 災異 圖讖思想과도 複合된 隱逸思想으로도 표현되었고 이어 그 가운데서 新時代를 준비하는 儒敎的 革命論이 일어났으며 그 행 동화로 表象化되었다고 할 수 있다.3) 1) 羅末 麗初의 轉換期的 把握이 전제된 思想史的 論考로서는, 金金哲埈 韓國古代 社會의 性格과 羅末 麗初의 轉換期에 對하여와 韓國古代政治의 性格과 中世政 治思想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究 (1974)에 收錄 및 李基白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政治理念, 大東文化硏究 6.7合輯號 所收(1972) 등이 있다. 2) 이상의 事例는 尹南漢 轉換期의 思想動向, 韓國民族思想史大系 2, 古代篇 4章 民族思想의 推移 第1節 pp 참조 3) 上揭書 4章 1節 2項 復古的 政治思想條 pp 참조

224 2. 儒學의 性格 儒敎的 知性은 이미 統一新羅社會에서도 성장하였으나 唐帝國 의 瓦解와 사회혼란에 따른 唐留學生의 귀국자가 激增함으로써 더욱 量產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反新羅的 知性化는 唐의 國 際文化에서 수련되었을 높은 眼目과 수준을 전제로 할 때 博通經 史하고 能屬文하는 그들의 才能에도 불구하고 新羅社會에서 크게 登庸되지 못한 身品的 制約과 羅末의 弊政에 따른 解體現象을 看 取한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이들은 唐末의 黃巢의 亂이나 地方叛亂을 목격했을 것인만큼 羅末의 叛亂政權의 收奪相이나 그 장래성에 대하여도 懷疑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反新羅的이 며 동시에 反叛亂集團的인 知識人이 되었을 것은 당연하였고4) 이 러한 社會相에 대한 비판력이야말로 儒敎的 교양에서 닦아진 合 理的 思惟였던 것이다. 따라서 王權批判이나 현실비판 및 여기서 導出되었을 政治的 指向은 儒敎的 王道論이었고 仁政論에 집약되었으며 이를 실현하 는 길은 王朝交替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先王的인 革命論의 自覺이었던 것이다. 太祖의 推戴功臣들이 弓裔의 暴政을 天地가 不容하고 神人이 共怒할 일 로 斷定한 것이나 昏君을 폐하고 明君을 세우는 것은 天下의 大義 라고 하여 王建에게 湯武 의 일을 행하라 고 했던 放伐的 革命論이야말로 이러한 思想動 向을 집약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 이러한 革命論은 天命思想에 바탕한 王道主義였으므로 王建의 推戴功臣들은 또한 敬順王의 投降을 용납하라고 奏請하여 하늘에 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王이 없다 고 하였고 甄萱의 사위 朴 4) 後三國의 地方政權에 참여했던 儒士로서는 甄萱政權에 참여한 崔承祐나 弓裔 政權에 참여한 崔凝을 代表的으로 들 수 있으나 이 밖의 儒士들도 대개 山寺 自 然에서 隱遁生活을 했던 바, 이들은 地方政權도 批判의 對象으로 하였을 것이다. 5) 以上의 引用은 高麗史 卷1 太祖世家에 依함

225 Ⅱ. 儒敎의 發達 英規가 太祖에게 투항함에 있어서도 貞女는 二夫를 섬기지 않 고 忠臣은 二主를 섬기지 않는다 고 하였던 바 이들의 意識에서 는 이미 後三國의 分立을 용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君權에의 歸一과 통일을 喝望하고 君臣의 名分을 밝히려던 意識이 뚜렷하 였다.6) 이야말로 三代를 理想으로 하는 先王的 王道論에 근거한 復古的 政治思想이었고 王朝交替를 정당화하고 행동화하는 精神 的 바탕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儒敎主義는, 이미 崔凝이 王建에게 陰陽浮屠에 유의하는 必修文德할 것 을 諫한 것이나, 王建自身이 定亂 居安後에는 移風易俗할 것 을 다짐한 것이나, 後百濟의 투항을 받고서 政誡 와 誡百寮書 를 中外에 頒布하면서 臣子가 되는 者는 禮節에 밝아야 한다 고 강조했던 것 등에서도 잘 표현 것을 반대하고 7) 되고 있는 것이다.8) 따라서 儒敎主義나 儒敎的 革命論은 後三國 時代에는 이미 일반화된 時代思潮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서 反新羅的 知性인 崔彥撝나 崔光胤, 反弓裔的인 朴儒 尹逢 崔 凝 및 反甄萱的이었을 崔知夢 등은 經史에 博通하고 能屬文하는 儒士로서 骨品制的 身分制나 지방정권의 폭정과 虐民을 비판한 끝에 드디어는 高麗王朝의 창건에 참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高麗儒學의 성립은 이러한 羅末 後三國의 反新羅的 사상동향 과 儒敎的 王道思想의 時代思潮化 및 先王主義的 革命論의 일반 화에 뒷받침되어서 가능하였고 그러한 儒敎主義의 시대사조화에 뒷받침되면서 형성되었을 太祖自身의 儒敎的 意識構造를 전제로 한 儒敎的 文治主義의 指向에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高麗史 卷2, 太祖世家 19年條 및 卷92, 列傳5 朴英規傅 참조 7) 崔滋 補閑集 上 참조 8) 高麗史 卷2, 太祖世家 19年條

226 2. 儒學의 性格 2) 太祖의 儒敎意識 儒敎的 革命論이 羅末 後三國의 時代思潮였다면 이를 배경으 로 했던 王建의 儒敎的 文治의 指向은 그의 儒敎意識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설명될 것이다. 그가 佛力護持를 信奉했고 風水圖讖說 에 의지했다고 하더라도 訓要十條 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佛 敎信仰이나 風水圖讖說에 대한 신앙은 전통적 문화기반으로서였 다는 한계성을 지닌 것이었고 그 本旨가 오히려 儒敎的 文治를 지 향한 것이었다면 이는 그의 儒敎的 의식이나 시책에서도 일관된 것이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王建의 儒敎的 교양이나 그런 의식은 그가 對中交通路의 하나였 고 경제적으로도 선진지역이었을 禮成江口에 인접했던 松岳출신의 豪族이었다는 出自부터가 어느 지역 못지않게 쉽게 유교적 교양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9) 이러한 배경하에서 성장한 그였던만큼 弓裔 정권하에서는 누구보다도 민심을 收攬할 수 있는 정치역량을 발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前述한 바, 이미 崔凝이 그에게 亂時를 陰陽浮屠에 의지하 여 天下를 얻었다는 것은 일찌기 듣지 못하였다 고 충고한 것이나 이를 수긍하여 陰陽浮屠에 의지함은 姑息策일 뿐이라 하고서 定 당하여도 修文함으로써 인심을 얻으라 하고 亂居安을 기다려서 風俗을 옮기고 敎化를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 이라 고 다짐했던 것도 그의 儒敎意識이 전제된 것이었다.10) 太祖의 儒敎意識은 그의 軍事活動이 掠奪性을 止揚하고 민심을 收攬하는 데 主眼케 했으며 그러므로써 弓裔정권하에서도 그 暴政 9) 禮成江口의 經濟的 文化的 先進性과 對宋交通上의 位置는 金庠基 高麗時代史 p.5, 東國文化社刊 (1961) 및 李丙廉 韓國史 中世篇, pp 乙酉文化社刊 (1961) 참조 10) 前揭 補閑集 上 참조

227 Ⅱ. 儒敎의 發達 을 비판하는 세력을 自己麾下에 集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 가 阿志泰의 讚言을 가림으로써 被讚者를 救解한 데서도 짐작이 되 며11) 그의 革命過程의 언동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洪儒 등이 그를 찾아가서 弓裔의 폭정을 비판하면서 전술한 바 桀紂의 惡도 이에 더할 것이 없으니 昏君을 폐하고 明君을 세우는 것은 天 殷周의 일을 行하라 고 하였을 때 太 祖가 忠義를 自許하고 作色하여 이르기를 어찌 二心을 가지겠는 下의 大義라 고 하면서 가. 人臣으로서 君主를 伐하는 것을 革命이라고 이르는 것인데 감히 湯 武의 일을 하겠는가 라고 한 것은12) 표면적으로는 반대한 주 장인 것같지만 실은 모두 先王的 革命論을 내세운 것이었고, 除暴과 忠義라는 儒敎的 의식구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의 정치의식에 있어서도 弓裔下에서의 군사활동에서 보였 던 寬恕策에서 儒敎的인 仁政意識을 볼 수 있거니와 百濟投降後에 입성하자 우리 赤子를 犯하지 말라 고 한 바, 赤子라는 對民觀부 터가 仁政觀의 표현이었다.13) 이는 곧 儒敎的 禮敎主義로 연결된 것 政誡 1卷과 誡百寮書 8篇을 스스로 지어 中外에 頒布하면서 臣子는 禮節에 밝아야 한 다 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儒敎主義는 그가 후술하는 바, 北蕃人은 人面獸心이라 고 단정한 것이나 契丹의 使者를 海島로 이었던 만큼 文武百官의 朝賀를 받고서 14) 流配하고 그들이 가져온 馬匹을 餓死케 한 바, 華夷論的 文化觀으로 도 표현되었다.15) 따라서 그는 즉위하자 唐의 제도에 따른 分官設職 와 誡百寮書 는 뒤에 高麗歷代王이 常讀한 貞觀政要 와 더불 에 착수하였고 後梁에 尹質을 使行시키기도 하였거니와16) 政誡 11) 高麗史 卷1 太祖世家 癸酉條 12) 이상 所引은 上揭 太祖世家 및 卷92 列傳 5 洪儒傳 참조 13) 高麗史 卷2 太祖世家2 19年條 14) 高麗史 卷2 太祖世家2 19年條 15) 上揭 太祖世家2. 14年 壬辰條와 25年 壬寅條 16) 前揭 太祖世家 即位年 6月 辛酉條 分官設職記事와 6年條의 遺使記事 참조

228 2. 儒學의 性格 어 그의 儒敎的 政治意識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仁宗代에도 百官에 게 筆寫 收藏케 하여 자손을 訓戒토록 한 것을 생각한다면17) 高麗 의 文治主義의 淵源은 벌써 여기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太祖 一代의 施政은 그의 儒敎的意識에 입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即位詔에서부터 자주 移風易俗 利俗安民 導俗訓 民 惟新改轍 등을 다짐하였고 伐柯의 則을 깊이 거울삼는다고도 하였기 때문이다.18) 따라서 그의 儒敎主義는 표방 이상으로 자신 의 儒敎意識을 表象化한 것이었고 이를 시책으로 행동화하였다고 할 것이다. 3) 太祖의 儒敎的 施策과 儒臣 太祖가 儒敎主義를 集權的 국가체제의 理念으로 삼고 이를 시책 화한 것은 즉위하자 곧 設官分職하는 詔書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 任能의 道는 利俗安民에 있다 고 하고 選賢이 急務임 을 천명한 것이나 隱士 朴儒의 來見을 받자 冠帶를 내리고 致理의 道 가 求賢에 있다 고 하였으며 崔凝이 隱士 尹逢을 추천하자 이를 廣 가 評侍郞에 임명했던 것은 모두 그의 儒敎的 지향을 알린 것이며, 崔 凝에게 약속한 바 移風易俗을 실천에 옮긴 것이기도 하였다.19) 이런 시책은 崔凝을 비롯한 그의 儒臣들의 獻策에 의했을 것이며 그의 儒臣包攝은 전기 崔凝이 王建을 救解함에 앞서서 阿志泰에게 被讚된 者를 王建이 救解했을 때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아 辕門의 將校 宗勳 賢志 儒雅의 무리가 風靡하여 景從하지 않음이 없었다 고 한 것으로도 그 포섭 진다. 이 때의 狀況은 麗史에서도 17) 高麗史 卷16 仁宗世家 9年 5月 丙午條. 麗王이 貞觀政要를 常讀한 첫 記事는 高麗史 卷2 光宗世家 元年 庚戌條에 보인다. 18) 高麗史 卷1 太祖世家 即位年의 記事 참조 19) 高麗史 卷1 太祖世家 元年 6月辛酉條와 癸亥條 및 同 卷92 列傳5, 王儒傳 참조. 朴儒는 賜姓으로 王儒가 되었다

229 Ⅱ. 儒敎의 發達 도가 예상되는 것이다.20) 따라서 弓裔가 太祖를 謀反으로 媾陷하자 即坐의 기지로 그를 위기에서 冒免케 했던 崔凝의 태도에서나,21) 王昌瑾의 鏡文을 解讀하고서도 弓裔에게 거짓 해명했던 宋舍弘 白 卓 許原과 같은 文人의 언동22)에서도 王建이 이미 儒士 文人들에 게 聲望을 지녔던 바를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전술한 바 儒敎的 革命論에 의하여 湯 武의 放伐的 革命을 전개하여 이를 성 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儒敎施策은 우선 求賢的 施策에서 표현되었고 이는 開國初의 設官分職에 있어서도 예측할 수 있다. 아직 後三國의 鼎立 과 군사적 통일과업이 미완된 상황 때문에서도 그의 一級推戴功臣이 中央官署에서는 除外되었을 것이라는 점이 감안되더라도 이 設官分 職記事에서는 賢能을 주로 했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23) 그 는 첫째로 廣評侍中 內奉令 등의 행정의 長을 임명함에 있어서 洪儒 모두 品性이 端方하고 處事가 平允하며 創業初의 從事者로서 佐命한 勳功者였다 고 하였 고, 둘째로 廣評侍郞內奉卿 이하의 次官級의 임명에 있어서는 모두 事務에 夙達하되 淸謹을 稱할만 하고 奉公함에 怠慢이 없으 며 決斷이 敏活하여 衆心이 久愜한 者들이었다 고 하였으며 세 째로 廣評郞中內奉監 등의 실무진을 임명하였는데 品性端方이니 이하의 一等功臣이 아닌 인물에 授職하고서 24) 25) 淸謹奉公이니 衆心久愜이니 하는 등의 인물평으로 미루어 보면 이 들이 武臣이기보다는 文臣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상의 高 20) 高麗史 太祖世家 1 癸酉條 21) 高麗史 太祖世家 1 甲戌年條 22) 高麗史 太祖世家 1 貞明 4年 3月條 前揭 李丙燾 韓國史 中世篇 pp 이는 太祖系 人物에 依해서 造作되었더라도 災異, 讖緯思想과 複合된 儒敎的 革命論을 표현한 다른 한 側面이었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23) 高麗史 太祖世家1 元年 6月 辛酉條에는 設官分職 任能之道 斯存利俗安民이라 고 하였고 金行濤의 廣平侍中 任命을 비롯한 中央官署의 各級補任을 발표하였다. 24) 高麗史 太祖世家1 辛酉條의 詔書에 依함 25) 高麗史 太祖世家1 辛酉條의 詔書에 依함

230 2. 儒學의 性格 麗史 叙述에서도 이를 總括하여 開國初에는 賢才를 妙簡하여 庶 務를 諧行케 하였다 고 한만큼 이는 弓裔下에서의 文臣이 광범하 게 포섭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26) 그의 官員任命은 계속되 고 있거니와 국초의 관원임명이 일단락되자 곧 내린 詔書에서도 導俗訓民을 자세히 하고 號令은 반드시 삼가해야 한다 것이나 前主가 百姓을 草芥와 같이 하였다 고 斷罪한 것 27)고 한 28)도 그 가 백성의 救恤을 강조한 것과 더불어 儒敎的 시책의 일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歸附者를 厚待하고 謀反者를 엄히 처단하 는 한편 官員이나 部將의 統御에서도 禮敎的 질서를 강조하였는데 尚州賊帥의 來附를 받을 때에 備迎席上에서 爭列한 者가 있자 이들 을 모두 徙邊함으로써 죄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敎는 德의 本임 을 천명했던 고서 것29)은 讓은 禮의 宗이며 전술한 바, 後百濟를 통일하 臣子는 禮節에 밝아야한다 고 闡明한 것과 더불어 그의 儒 敎的 施策이 禮敎秩序의 定立에서부터 착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太祖의 禮敎的 시책은 또한 교육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책으로서는 13년 12월에 西京에 幸次하여 학교를 幸西京 創置學校 命秀才廷鶚爲書學博士 別創學院 聚六部生徒敎授 라고 한 創置한 것을 우선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麗史 選擧志에 것으로 보아 西京의 학교는 동시에 따로 書學博士制와 學院을 설치 한 것으로 보아지며30) 同記事에는 倉穀百石을 내려서 學寶를 만들 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이는 모두 統三 이전에 學校制가 시작되고 綵 이상의 引用은 上揭 詔書에 依함 高麗史 卷1 太祖世家 元年 6月 戊辰條 同上 七月 辛亥條 이는 前日에 尹瑄의 來歸가 있은 뒤에 下認된 것으로 보인다. 高麗史 太祖世家 1, 9年 甲午條 徙邊被罪者는 廣評郞中 柳問律과 直省官 朱瑄 劼이었다. 30) 高麗史 卷26 選擧志 2 學校 太祖 13年條. 麗代의 學校制創設은 13年 記事를 西京에만 限定한 記事로 볼 수 없는 것은 開京이 西京보다 優先하여 설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6) 27) 28) 29)

231 Ⅱ. 儒敎의 發達 帛 下賜나 學寶 등의 興學施策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아진다.31) 그리고 太祖의 儒敎施策은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즉위 후에 곧 吳越 의 文士인 酉彥規와 朴巖 등의 來投나 梁 唐 晋과의 遣使通好 및 三 省 六部制를 비롯한 中國의 人物과 제도를 수용하는 등 對中友好에 서 표시된32) 반면 契丹에 대한 경계는 철저하여 14년에 西京에 幸 次할 때에는 所過州鎭城外의 築館을 명하면서 下詔하되 北蕃人은 人面獸心이므로 배고프면 오고 배부르면 떠나며 利를 보면 廉恥도 잃는다. 이제 비록 服事하더라도 向背가 無常할 것이니 所過州鎭에 서는 城밖에 築館하여 이를 待하라 한 것33)이나 契丹의 使者를 海 島에 流配하고 馬匹을 餓死케 한 것 등으로 보아 그는 華夷를 峻別하 는 儒敎的 文化觀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34) 이로 보면 太祖의 儒敎的 用賢良 重儒道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太祖의 이러한 儒敎主義施策을 주도한 것은 그의 儒士文人 등 시책은 麗史의 評처럼 의 官僚였을 것이며 이들 儒臣은 崔凝과 같이 이미 弓裔下에서 포 섭된 反弓裔的 인물이나 崔彥撝와 같은 反新羅的 儒士 및 反甄萱 系의 崔知夢 등이었고 이 밖에도 酋彥規나 朴巖과 같은 歸化文士 들이었으나 太祖朝에 한정하여 본다면 오히려 그 중에서도 弓裔 정권하에서 그 暴政을 비판한 끝에 太祖에 歸服했거나 山谷間에 隱居했다가 즉위후에 귀속한 바, 弓裔系 내지는 舊高句麗地方出身 儒士들이 보다 주도적이었을 것으로 보아진다.35) 弓裔계의 儒士로 31) 同上記事 참조 32) 酋彥規는 太祖 2年 9月에, 朴巖은 6年 6月에 來歸했고 同月에 尹質을 後梁에 遣使했으며(太祖世家) 三省六部는 高麗史 卷76. 百官志 1에는 2年條에 立三 省六尚書九寺六衛 略倣唐制 라고 하였다. 33) 高麗史 太祖世家 2, 14年 記事에 있음. 北蕃人을 禽獸視한 것은 訓要 에도 나타나 있고 崔冲의 言論에서도 볼 수 있으며, 麗代에는 一贯된 文化觀이기도 하였다. 34) 高麗史 太祖世家 2, 25年 冬11月條. 이런 華夷觀은 麗 宋代에 共通된 文化觀 이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35) 太祖代의 儒臣中에서는 慶州系보다 弓裔系가 中心이었으리라는 것은 太祖世 家에도 慶州系 儒士의 活動記錄이 별로 없고 崔彥撝 崔光胤 및 崔承老의 경우 도 主로 光宗-成宗間에서 活動한 바가 많은 것으로도 짐작이 될 것이다

232 2. 儒學의 性格 서는 崔凝이 이미 太祖의 위기를 구해준 바 있었고 그가 陰陽浮屠 에 의지하는 잘못과 文德을 닦으라는 것을 獻策하였으며 그의 추 천으로 廣評侍郞이 된 尹逢도 弓裔의 虐政을 비판한 끝에 隱居하 였다가 拔擢되었으며 朴儒도 弓裔정권하에서는 隱居했다가 太祖 즉위 후에 來見하여 더불어 求賢策을 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崔凝은 弓裔정권하에서 大相이던 崔祐達의 아들이며 生長 하자 通五經 善屬文하여 弓裔下에서 文柄을 잡았던 만큼 弓裔系의 대표적 儒士였으며 太祖 즉위후에도 계속 元鳳省事 廣評郞中을 거 쳐 太祖 15년에 內奉卿으로 卒去하였는데 太祖는 그를 學富才高 하고 治體를 兼識하여 憂國奉公함은 옛 名臣도 더하지 못할 것이 다 라고 높이 평가했던만큼36) 국초의 設官分職詔에 品性端方 處 事平允 咸從創業之始 俱罄佐命之勳者 라고 했던 類에 해당될 만한 인물이었다. 顯宗代에 그를 太祖廟에 配享했던 것과 더불어 생각한 다면 弓裔系 儒士가 주도했을 太祖代의 儒敎勢力의 실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尹逢이 崔凝의 十年長으로서 그의 추 천으로 廣評侍郞이 된 것이나 朴儒가 太祖를 來見하자 太祖는 冠帶 를 내리고 더불어 致理 求賢을 논하였고 그에게 王姓을 賜한 것으 로 보면 역시 弓裔系 儒士의 비중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37) 그도 經史에 통하였고 弓裔에 仕宦했다가 그 亂政을 보고 山谷問에 隱 居했던 反弓裔的인 인물이었음은 물론이었다. 이와같이 弓裔系 儒 士의 적극적인 協賛에 비하여 慶州系 儒士인 崔彥撝는 일찍 唐에 유학하여 禮部侍郞 薛廷珪 밑에서 급제하였고 귀국하여 新羅의 執 事省侍郞 瑞書院學士 등을 역임하였던 바, 그의 학력이나 관력의 현란함과 더불어 太祖 즉위후에는 挈家來歸하여 太子師傅와 文翰 36) 高麗史 卷92 列傅 5 崔凝傳 37) 高麗史 卷92 列傳 5 王儒傅

233 Ⅱ. 儒敎의 發達 의 임을 맡았고 官은 平章事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獻策한 바는 별로 나타나있지 않고 다만 宮院額號가 그의 所撰이며 一時貴遊가 모두 그를 섬겼다는 聲望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38) 이는 崔知夢 이 역시 博涉經史하고 天文卜筮에까지 정통하여 太祖에게 召命되 었고 즉위후에는 侍禁中하고 備顧問했다는 것 이상으로는 활동기 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은 오히려 惠宗 景宗년간에 두 드러졌고 景宗廟에 配享된 것으로 보아서도 太祖代에서는 큰 활동 이 없었던 것 같다.39) 이러한 점에서 太祖의 儒臣은 弓裔系 그 중 에서도 反弓裔的인 儒士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儒敎 意識과 一代의 儒敎的 시책 및 儒臣包攝 등 그의 文治的 指向을 요약한 것은 그가 終生에 임박하여 大匡 朴述熙에게 親授했다는 訓要十條 였다고 할 것이다. 40) 4) 訓要十條의 儒敎的 意味 太祖의 訓要十條 는 그의 정치가 儒敎的 文治主義와 高麗儒學 의 기본방향을 成型하였다는 데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 다.41) 이 訓要 는 보기에 따라서는 佛敎護持風水信仰燃燈 八關會의 遵行 등 佛敎信仰이나 전통적 사상 및 전래하는 禮俗을 강조하였고 儒敎思想이나 儒敎的禮敎에는 언급이 적은 것 같으면 서도 그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면 그의 정책의 기본방향은 오히려 위의 宗敎的 信仰이나 傳統的 禮俗은 건국에 필요한 현실적 기반으 로서였고 정치적 사회적 지향으로서나 사상적 기반으로서는 儒敎 38) 高麗史 卷92 列傳 5 崔彥撝傳 39) 高麗史 卷92 列傅 5 崔知夢傳 40) 高麗史 太祖世家 2 26年條 41) 訓要十條에 對한 信憑性은 前揭 金庠基 李丙燾의 著書에도 公認되고 있으나 그 內容에 對하여는 너무 佛敎 風水的인데 置重해서 보고 있다. 金庠基 前揭書 p.46에도 太祖는 思想的으로 佛敎의 尊崇과 風水地理說의 酷信이 어떠하였음 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이라고 하였다

234 2. 儒學의 性格 主義를 指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太祖는 豪族聯合의 형태에서 현재하는 여러 세력을 그의 統一國家 안에 포섭했던 것과 같이 현 존하는 佛敎信仰이나 傳來하는 信仰과 禮俗을 기반으로 함으로써 王權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므로 宗敎는 護國과 護家의 기 반으로써 승인된 것이었고 集權國家가 요구하는 왕권의 절대화나 그 이념정립을 위한 지표로서는 儒敎的 文治主義를 설정한 것이 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太祖는 訓要 의 첫머리에서 堯舜의 禪讓과 漢 高 祖의 創業을 들어 後繼者들의 放縱이나 綱紀의 敗亂을 걱정한 것 부터가 儒敎的 착상에서 나온 것이었다.42) 그는 佛敎의 護持를 闡明하되 후세의 姦臣들이 寺社를 다투어 차지할 것을 금지했고, (1條) 道詵의 風水說과 地德說을 강조하되 願堂과 寺社의 增減을 금하였으며, (2條) 燃燈과 八關會를 遵行하라고 하면서도 후세의 奸臣이 加減치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6條) 따라서 그에게서는 佛 敎信仰이나 전통적인 禮俗 같은 前代的 생활질서는 왕권을 안정 시키는 현실적 조건이나 기반은 되었지만 왕권과의 대립적 존재 로서는 용인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太祖의 정치적 이상이나 앞으로의 기반은 오히려 儒敎的인 文治 에 있었으므로 王位의 계승은 骨品制가 아닌 嫡子相續을 상례로 삼았고 堯 舜의 테두리 안에서만 兄弟相續을 용인하였으며,(3條) 君主와 百姓의 관계는 農本과 税賦의 輕薄을 전제로 한 民力의 休 息을 목표한 王道的인 仁政을 표방하게 하였던 것이다.(7條) 뿐만 아니라 관료는 封邑制가 아닌 祿捧制를 遵守케 함으로써,(9條) 儒 敎的 集權化와 官僚制를 목표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42) 이하 諸條의 論旨는 前揭 民族思想의 推移 4節 (1) 太祖訓要의 文治的 意味 pp 에 依함

235 Ⅱ. 儒敎의 發達 이러한 儒敎的 정책방향은 唐의 문물과 禮樂의 수용을 당연시 하는 한편 契丹의 衣冠制度를 禽獸와 같이 보아 이를 금한 위에서 殊方異土에 따른 특수성을 고려한 主體的인 取擇을 훈시하였던 것이다. (4條) 이는 農本的이며 華夷를 준별하는 그의 儒敎的 文 化觀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五代社會의 국제적 대결상황에서는 自存을 위하여 현실적 조건을 重視한 것이 었고 그만큼 그의 主體 意識의 표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43) 따라서 太祖는 이러한 儒敎主義를 끝에서 다시 총괄하여 經史 옛것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라 고 하였으 며 周公이 成王에게 進戒했다는 書經의 無逸篇을 圖揭하고 出入 하며 觀省하라 고까지 당부하였던 것이다.(10條) 이와 같이 訓要十條 는 현실적 조건으로서의 傳統 즉 宗敎와 국 를 널리 읽고 44) 가적 지향으로서의 儒敎 즉 文治와 禮敎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며 이를 위하여 儒敎經典 특히 古文經學에 근거한 王道思想을 集權國家의 정 치적 이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訓要十條 의 지향하는 바는 嫡子相續을 원칙으로 하 는 家父長主義, 輕税薄賦로 표현된 仁政의 標謗, 祿捧制에서 제시 된 官僚主義, 唐文物의 受容과 契丹문화의 배척에서 나타난 華夷論 的 문화의식, 古文經書의 勸讀에서 예상되는 王道主義와 儒敎的 鑑 戒主義 등 통틀어 儒敎的 文治主義의 지향이 담겨져 있지 않은 조 항이 거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로서의 佛敎的 信仰과 理想으 로서의 儒敎的 倫理가 병존함으로써 儒 佛並立的 二律性이 전제 된 高麗前期 儒學의 기본방향이 成型된 것이었으며 儒敎的 指向 자 43) 以上의 諸條目은 그의 儒敎的 施策이나 後續하는 麗代의 儒化政策과도 大體 로 一致되는 것이다. 44) 無逸篇은 古文尙書(書經) 周書의 篇名이며 周公旦의 所作으로서 傳에는 成 王 即政 恐其逸豫 故以所戒名篇 이라고 하였으며 儒敎的 王道論의 典據일뿐더 러 麗代를 통하여 가강 강조된 經書의 篇名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236 2. 儒學의 性格 체는 그의 일대의 시책이나 이에 先行된 創業過程에서 자각된 儒敎 意識이나 政治意識을 재확인한 것에 不外하였다고 할 수 것이다. (2) 高麗前期 儒學의 成立 高麗儒學의 原型을 文治主義와 古文經學 및 禮敎主義에서 찾고 訓要十條 에서 볼 수 있다면 이런 의미에 서의 高麗 儒學의 성립은 그 制度化와 儒佛並立的 理念定立에 그 集約處를 太祖의 서 볼 수 있으며 이는 光宗에서 본격화하였고 成宗代에서 일단 성 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光宗의 儒敎意識과 科擧制 高麗前期의 集權化와 儒敎意識을 한층 밀착시킨 것은 光宗 9년 부터 실시되는 科擧制였다고 할 수 있다. 科擧制는 奴婢按檢法의 실시와 더불어 국초의 功臣貴族勢力을 배제하면서 高麗的인 官僚 制를 추진하려던 정책의 一環이었으나45) 한편 儒學史的 측면에서 보면 麗史 選擧志에서, 科擧로써 選士한 것을 들어 自此로 文風 이 始興이라 고 한 바와 같이 文風 즉 儒敎的 文風이 일어난 중요 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文風이 儒敎的 文風이었 음은 이 科擧制가 詩賦頌을 중요한 과목으로 한 때문이었고 그런 文風이 儒敎的 文治였음은 時務策 뿐만아니라 明經科도 설치되었 기 때문이며 醫 卜科 등까지도 설치되었던만큼 이 文風은 곧 포괄 적 이며 전반적인 儒風이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46) 45) 科擧制와 高麗의 中央集權化는 金龍德 高麗光宗朝의 科擧制度問題, 中央大論 文集 4輯 (1959) 및 前揭 李基白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의 儒敎的 政治里念 참조 46) 高麗史 卷73 表27 選擧志 1에 光宗用雙冀言 以科擧選士 自此文風始興 大抵 具法頗用唐制 라 하였고 同 志 科目 1에는 九年五月 始設科擧 試以詩賦頌 及 時務策 取進士 兼取明經發卜等業 이라고 하였다

237 Ⅱ. 儒敎의 發達 이러한 科擧制 실시는 비록 외국인인 後周의 歸化人 雙冀의 獻 議에 의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단은 光宗 자신의 儒敎的 意識이 전 제되어야 했고 다음으로는 이를 받아들여서 추진하는 국내의 儒 學的 지식수준이나 儒士들의 호응이 전제되어야 했다고 보아지는 만큼 그 실질적 주도인물은 다름아닌 光宗과 光宗代에서 穆宗代 까지 거의 독점하다시피 知貢擧를 역임했던 王融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儒敎意識이나 지식 및 指向性은 충분히 고려되어 야 할 것이다.47) 光宗은 太祖 8년에 출생한만큼 이때는 이미 太祖의 文治方向이 뚜렷하였고 太祖宮廷에는 많은 儒士 文人이 포섭되었을 뿐만 아 니라 慶州系 儒臣이자 국제적 文運과 儒敎知識에 높은 眼目을 가졌 던 崔彥撝가 太子師傅로 있었던만큼 儒敎敎養을 쌓기에는 충분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리라는 상황48)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그가 즉위 했을 때 大風災가 있자 攘災術을 諮問 받은 司天監이 莫如 修德 이라고 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司天監49) 이나 光宗이 다 같이 이미 古代的 宗敎意識의 불합리성을 인정한 위에서 儒敎主義의 합리성을 재확인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때부터 唐 太宗의 政績을 기록한 帝王學의 寶傳이라 고할 貞觀政要 를 常讀했다는 것도 儒敎的 政術을 모범으로 하 려던 그의 文治的 指向性을 말하는 것이었다.50) 光宗은 즉위 2년 47) 科擧制推進에 있어서의 雙冀와 王融의 比重에 對한 評價는 李基白 高麗貴族 社會의 形成, 한국사 4 국사편찬위간행(1974) p. 167 註(35)에 論及이 있다. 48) 高麗史 卷2 光宗世家에는 그의 生長에 대한 說明이 別로 없지만 光宗初에 廣 評侍郞 徐逢, 大相 王融, 廣評侍郞 荀質 등은 前代부터 登庸된 儒臣으로 보이며 이들 중 王, 荀은 後周에도 使行한만큼 光宗의 儒敎主義와도 有關했을 것이다. 49) 司天監의 奏言은 麗史 光宗 元年 春正月條 記事이며 위 人物과는 같은 系列의 人物이었을 것이다. 50) 唐 吳兢 撰 貞觀政要 40篇은 唐太宗과 群臣間의 政治論議를 類輯한 政書로서 中 日의 歷代王室에서 帝王學의 텍스트로 삼았던 것이다. 高麗王室에서도 例 外가 아니었고 仁宗代에는 金仁存이 貞觀政要注 까지 저술하고 있다,

238 2. 儒學의 性格 에는 後周의 年號를 썼고 3년부터는 使行과 方物을 後周에 보내서 友好關係를 맺었으며 科擧制 실시 3년전인 6년에는 大相 王融과 荀質을 각기 後周에 使行시켰고 翌年에 그 回使로 來使한 薛文遇 일행에 수행하여온 것이 바로 雙冀였던 것이다.51) 또한 동년에는 百官의 衣冠을 華制로 바꾸었고 科擧制 실시 다음 해에는 越王孝經新義 皇靈孝經 孝經雌雄圖 등 經 別序孝 書를 後周에 보내어 高麗文運의 성황을 과시하면서 儒敎主義政策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麗史의 撰者가 光宗의 儒敎主義는 重儒雅 夙夜孜孜 庶幾 治平 이라고 했듯이 그의 儒化意欲은 강렬한 것이었고 그 制度的 장치가 바로 科擧制였던 것이다.52) 科擧制 실시가 光宗과 그 文臣의 儒敎意識과 集權化의 理念定 立 및 新官位 배출을 목적한 것이었거니와 이것이 高麗儒學上에 끼친 기능은 간과할 수 없을만큼 큰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 은 成宗代까지의 科擧制가 배출한 儒敎文臣을 보아서도 알 수 있 는 것이다. 高麗前期 儒敎의 성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서 科擧制 에 관한 기록과 급제자를 들 수 있겠거니와 이를 검토함으로써 그 성격의 일단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科擧制 특히 及第者에 대한 기록은 麗史 選擧志에 상술하였거 니와 이 에 의하여 科擧制가 실시된 光宗 9년부터 시작하여 그 儒 敎文化의 完成期라고 볼 수 있는 仁宗代까지를 대체로 다음과 같 이 分期別로 나누어서 보면 그 진상은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51) 雙冀는 高麗史 卷93, 列傳 6, 雙冀傅에는 仕後周爲武勝軍節度巡官將仕郞試 大理評事 라고 하였고 光宗에 寵用되어 科擧制를 獻策한 바를 敍述하고 있으 며 李基白 前揭 한국사 4의 科擧制度의 實施와 雙冀條 pp 에도 상론되 었다. 그러나 雙冀는 3回에 걸친 知質擧下에서 進土 16人을 배출하였는데 王融 은 光宗代 4回에 11人이 있고 全體的으로는 11回에 49人이나 배출하였으므로 영향력에 있어서는 훨씬 큰 것이다. 尹南漢. 前揭書 光宗의 文治와 科擧制 참조 52) 高麗史 卷2 光宗世家 10年條에 秋遣使如周 進別序考經一卷 이라고 하였다

239 Ⅱ. 儒敎의 發達 高麗前期 科擧及第者一覽53) 위 표에서 보면 高麗前期에 배출된 科擧及第者는 모두 2,835명인 데 그 중 進士출신이 1,857 명이며 同進士 536인을 합하면 2,393 명이나 되므로 進士出身은 전체의 3분의 2가 넘는 수가 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高麗前期의 科擧制는 詩賦文詞가 主가 되 었던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시대별로 본다면 進士 科는 穆宗代까지 130명이던 것이 顯 文 肅宗代에는 658인, 睿 53) 이 표는 麗史 選擧志에 依하여 集計한 것이며 편의상 발전의 分期를 보고자 한 것이다. 한편 王代는 과거실시年이며 괄호 안의 數字는 同進士科出身者를 표시한 것이고 우편 수자는 [ 안을 합산한 것이다

240 2. 儒學의 性格 仁 毅宗代에는 1,169인으로 늘었고 총수로도 이 기간에는 각기 336인이 1,234인, 이어 1,265인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定礎期인 穆宗代까지의 進士 同進士를 合한 것이 158임에 比하여 발전기 인 顯 文宗代와 완성기인 仁 毅宗代가 同進士科까지 합산하면 1,112인과 1,223인으로 되어 비슷한 수자가 되고 이는 總數에서 도 1,234 대 1,256 인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及第者의 科別 구성을 보면 進士科와 明經科 및 雜業 출 신의 비가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현격하므로 이는 詩賦 중심의 貴 族文化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進士科와 明經科는 光 穆宗間에는 137(28)대 97의 比인데 대하여 顯 肅宗 間에는 658(454)대 150이며 睿 毅宗代는 1,169(54)대 32밖에 안되 는 것이다. 이는 처음에는 經學을 존중하던 것이 점차 詩賦를 존 중하는 文風으로 전화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경 향은 儒敎的 文風이 爛熟했던 睿 毅宗間에서는 철저하리만큼 그 비가 현저한 差異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그 時代相과도 대응되는 것이다. 한편 醫 卜 法 書 算 등 雜業出身을 明經科와 비하 여 보면 초기에는 이던 것이 중기에는 로 雜科가 半數밖에 안되고 말기에는 32 10으로 아예 3 1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은 技術文化를 천시하는 貴族文化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 는 것이며 時代가 내려올수록 文風의 盛況과는 反比例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에 光宗의 科擧制實施는 위와 같이 詩赋를 軸으로, 明 經 雜科가 그 시대나름으로는 균형을 취하면서 성황을 이룬 儒敎 的 官僚輩出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뒤에 는 지나치게 文風爲主가 되었고 그만큼 貴族的 逸樂風으로 귀결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科擧制를 통하여 알 수 있는

241 Ⅱ. 儒敎의 發達 것은 知貢擧가 된 인물들이 당대의 명성 있는 儒學者였을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외국인인 雙冀를 제외하고라도 王融을 필두로 趙昱 는 光成宗代의 儒敎主義政策의 추진자로 보아서 무난할 것이다. 崔承老 李夢遊 白思柔 崔暹 柳李憲 등 成宗代까지 의 知貢擧 2) 成宗代 儒敎의 制度的 定立 高麗前期의 儒學이 제도적으로 정립된 것은 成宗의 治世에서였 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成宗 자신의 유교적 교양이나 好文政策 및 제도적 定立에서뿐만 아니라 高麗前期社會의 정치적 사회적 체 제화도 이 무렵에서 일단 高麗的인 것으로 정립되었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54) 정치적으로는 국초의 開國功臣이나 武將出身官僚들이 이미 光宗에 의한 集權化政策의 강행으로 陶汰되었을 뿐만 아니라 儒敎的 敎養으로 다져진 科擧出身의 新官僚層이 형성되어 新 舊 官僚의 교체가 진행되었고55) 사회적으로도 豪族的 社會體制가 豪 族聯合的 형태의 高麗王朝의 국가체제에서 점차 집권적 관료체제 로 변했듯이 가족 중심의 族的 체제변화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변화 를 반영하듯이 儒敎的 禮敎秩序가 정립되었고 그 이념화가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儒敎的 制度定立은 우선 成宗 자신이 孔子와 周公의 風 을 일으키고 唐虞의 政治를 成就코자 한다 는 理想主義에서 京官 五品 이상자에게 求言詔를 내림으로써 그 理念化作業에 착수한데서 출발되고, 있는 것이다.56) 이러한 儒敎主義的 文治方向은 成宗이 그 54) 成宗代를 麗初儒學의 成立期로 보는 것은 前揭 金金哲埈 李基白兩氏의 論考가 共通되지만 前者는 中世知性으로서, 後者는 貴族文化로서 보는 것 같다. 55) 이는 國初의 儒臣이 崔承老(成宗 8年卒), 崔知夢(成宗 6年卒), 崔光胤(成宗 11年)이 연이어 卒歿한 대신. 成宗代부터는 金審言 崔暹 徐熙 李陽 등이 科 出者로써 官僚界의 새로운 指導層으로 등장한데서도 新 舊交替를 말할 수 있다. 56) 高麗史 권3 成宗世家 元年 夏 6月 甲申條

242 2. 儒學의 性格 전년인 즉위년에 벌써 八關會를 不經且煩擾하다고 해서 폐지57) 함으로써 전래하는 禮俗의 비판을 先行했던 데서도 예견되며 이는 그의 儒敎主義的 指向이 뒤에 慕華的이라고 비판된 것과 더불어 생 각할 때 그의 儒化意欲의 強度를 추측케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여간 成宗은 즉위 2년에는 圜丘에 祈穀하고 籍田에 親耕함으 로써 祈穀籍田의 禮를 시작하였으며 崔承老를 門下侍郞 이어 平章 事로 임명한 다음 곧 十二牧을 설치하였던 바, 그 詔書에도 効虞 延周神八百年 이니 했듯이 儒敎的 이념에 바 탕한 制度整備에 나섰으며 동년에는 王者로서의 仁恩撫養을 과시 書之十二牧 이니 하는 大赦令까지 내렸던 것이다.58) 成宗의 儒敎的 制度定立은 太廟制나 大成殿의 준비로 보이는 바 任老成이 宋에서 太廟堂圖 社稷堂圖 文宣王廟圖 祭器圖 및 七 十二賢賛記 등을 齋來 獻納케 한 것이나(2년) 李夢遊로하여금 中 外奏狀과 行移公文을 詳定케 한 것이나(6년) 社稷과 五廟 및 太廟 를 始設한 것 (10년) 등으로도 그 구체상을 예상할 수 있다.59) 그 러나 儒學의 성장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成宗의 유교적 제도화는 첫째로 12牧에 經學博士를 둔 것을 들 수 있고 둘째로는 修書院을 둔 것이며 세째로는 學舍를 두어 학교를 일으킨 것이었고 네째로는 孝子 順孫을 표창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첫째의 經學博士를 12牧 에 差遺한 것은 州縣子弟를 詣京修學케 한 학교진흥책의 보완으로 서 通經閱籍한 儒臣을 12牧에 差遣하였던 것이며60)(6년) 둘째의 修書院은 西京에 설치(9년)하여 諸生에게 史籍을 抄寫 收藏케 한 57) 上揭 成宗世家 即位年 冬 11月條 58) 이상은 高麗史 成宗世家 2年條 참조. 大赦는 同 3月 22日條 59) 以上의 事實은 모두 前揭 成宗世家 해당年條 참조 60) 高麗史 成宗世家 6年 3月條에 依함. 同條에는 今選通經閱籍之儒溫古知新之 이라고 輩於十二牧 各差遣 經學博士一員 醫學博士一員 勤行善誘好敎諸生 하였다

243 Ⅱ. 儒敎의 發達 것이지만 이에 앞서서 착수된 바, 亡篇闕典된 典籍의 修補策의 일 환이었다.61) 이는 당년에도 沈隱士의 二萬餘卷, 張司空의 30車의 書籍 등 四部의 典籍을 抄寫하여 西京府藏에 비치케 하여 학자의 便宜에 호응케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62) 세째의 學舍를 널리 운 영했다는 것도 학교제를 보완한 것인데 名勝地에다 학사를 설치하 고 田庄을 量給하여 獎學한 것이었다(11 년)63) 넷째의 孝子順係을 표창한 것은 六道에 遺使하여 老弱者의 飢離와 鰥寡의 窮乏者를 娠 恤하는 敎書를 내리고 아울러 孝子 順孫 義夫 節婦를 旌表 免 役 授官 賜穀 등에 의하여 표창한 바, 이들은 것이 모두 그의 儒 敎的 施策의 一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64) 이러한 儒敎的 施策은 그때마다 그 취지를 담은 詔 敎書를 내 린 바가 麗史에도 상세하지만 이는 集權化에서 요구되는 忠이나 가 족제적 사회구조 성립에 대응된 孝를 축으로 한 倫理的 질서의 확 립을 목표한 것인 동시에 모두 周 孔의 風과 經典에 典據를 두고 실시된 儒化政策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成宗의 文治나 儒化政策은 儒敎的 理念定立과 平行된 것이었다. 3) 成宗의 儒敎理念의 定立 成宗代의 儒敎理念의 定立作業은 前述한대로 즉위초에 내린 바, 時政得失에 대한 封事를 올리라는 求言詔였다고 할 것이다. 이에 응하여 高麗前期의 文治方向이나 儒敎理念을 제출한 것은 崔承老 의 時務 28條였거니와65) 그의 時務書는 光宗의 政績을 비판하고 61) 高麗史 成宗世家 9年 12月條 62) 同上條에는 典籍蒐集에 이어 習兄友弟恭之懿 라고 하였다. 63) 同上 11年 12月 丙寅敎 64) 同上 9年 秋9月 丙子 敎 靑衿無閱市之勞 鄒魯之遺風識父慈子孝之常 65) 金 (金+哲)埈 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에 對하여, (前揭 韓國古代社會硏究 所收)

244 2. 儒學의 性格 太祖의 政績을 기준으로 한 儒敎主義의 강조였고 여기서 강조된 것 佛敎를 修身의 本으로 儒敎를 理 國의 源 으로 내세웠던 것이었으므로 여기서는 儒佛를 병립시키 은 儒 佛並立的인 전제하에서 되 그 기능적 분화를 전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66) 또한 여기서 및 佛敎酷信, 布施와 佛事의 濫行 등이 비판되었고 圖讖鬼神懷 는 光宗의 對中質易 中國人登用 華風受容 奴婢按檢法 舊臣沫殺 災 등의 고대적 습속이 비판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新官僚層에 의 한 집권화와 고대적 신앙이나 예속을 비판하는 한편 太祖의 祖訓과 政績을 기준한 儒敎的 합리주의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新羅服制의 遵守나 奴婢制의 허용과 같은 新羅的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그의 儒敎意識의 한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67). 이 점에 서 그가 鄕豪를 制裁할 外官의 설치를 주장한 것도 투철한 것은 아 니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金審言의 封事68)는 書經의 無逸 篇과 誡百察書를 모범으로 할 것을 上言하고서 이어 正六邪文과 說苑 의 六 漢刺史六條察政文 을 들어 監察制의 設置를 주장한 것은 그가 吏道와 臣術의 확립 및 그 이념화에 主眼함으로써 官僚 制의 기능면과 鄕豪의 억제에 주안한 집권화를 목표한만큼 新官僚 層의 儒敎意識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儒敎의 理念化作業으로 看做되는 封事로서 李陽의 封事를 들 수가 있다.69) 3條에 걸친 그의 封事는 첫째로 立春前에 出土 牛以示農事之早晚하라 는 바, 禮記月令의 遵守를 말한 것이고 둘째 로는 身耕籍田으로 重農의 意를 밝히라 는 것인 바 周禮內宰職 66) 高麗儒學의 儒 佛並立的 理念定立은 成宗代에 구체화되었지만 麗朝에서는 麗初부터 麗末까지 事實上 거의 一貫된 基本方向이었다고 볼 것이다. 67) 尹南漢 成宗의 文治와 그 理念化, 前揭 民族思想의 推移 pp 참조 68) 上揭書 참조 69) 高麗史 卷 3 成宗世家 7年 春 2月 壬子條 左補闕兼知起居注인 李陽의 封事도 崔承老나 金審言의 경우와 같이 成宗의 求言詔에 應한 것으로 보아진다

245 Ⅱ. 儒敎의 發達 條에 의한 祈穀 籍田制를 강조한 것이며 세째로는 犠牲用牝과 伐木을 禁하여 行春의 令을 布行하라 는 것이었다. 즉 農事에서의 月令遵守와 祈穀籍田制에 의한 重農策과 禁傷陽和의 德을 다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成宗은 곧 兩京百司 12牧에 下敎하되 그 뜻을 委勉하여 無犯케 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儒敎的 重農主義를 천명한 것이었으므로 이제 先聖의 典謨를 忠孝 뿐만아니라 農本的 經濟生活의 體制定立에까지 擴大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70) 끝으로 成宗의 儒敎的 이념화는 聖人의 典謨 즉 經書 존중의 기 반을 확립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麗史의 成宗世家에서 특히 눈 등 經書의 인용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전기 封事에서 說苑書經 無逸篇禮典周禮 等書의 援用이 많아진 것이나 經學博士를 12 牧에 차견할 때의 敎書에도 君臣父子가 모두 愛敬의 風을 알고 에 띠는 것은 成宗代에는 詔 敎가 많아졌을 뿐더러 周 孔 禮典 禮樂詩書가 經綸의 業을 創할 만하며 人倫軌範과 王道紀綱이 일어 남을 볼 수 있다 고 한 것 등은 成宗의 儒敎主義가 지닌 尊經的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麗末의 李齊賢도 手札詞旨가 懇測하여 移風易俗을 責務로 했다 고 한 것은 成宗의 儒敎主義가 그만큼 懇 切한 것이었음을 말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71) (3) 高麗前期 儒學의 發達 1) 崔冲과 九齋學堂의 儒風 高麗前期의 儒學은 太祖에서 成宗代에 이르는 成型期에 성취된 70) 李陽의 封事는 李基白氏도 前揭 한국사 4 pp.207-8에서 擧論하였으나 보 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닌 重農性이며 이를 儒敎的 典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상 所引은 모두 高麗史 卷3 成宗世家 7年 2月 壬子條에 依함. 71) 高麗史 卷 3 成宗世家 李齊賢賛條

246 2. 儒學의 性格 儒敎的 文治主義의 기반 위에서 對契丹戰爭의 체험을 통한 自意識 의 성장과 北宋代의 儒敎文運의 부흥에 자극되면서, 對契丹戰이 종결된 顯宗말부터 文宗代에 걸쳐서 한층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 다. 즉 顯宗 19년 (1029)에서 文宗末년(1082)에 이르는 시기는 澶 淵의 盟(1004)으로 宋 遼和約이 성립되어 국제적 화평기운이 시작 되었을 뿐만아니라 宋에서는 仁宗代의 儒敎文運과 范冲淹 歐陽修 등에 의한 儒敎復興策이 추진되던 때였고 宋學의 定礎者들인 周敦 頣( ) 張載( ) 邵雍( ) 程顥( ) 및 程頣 ( ) 등 이른바 濂洛關學이 일어나던 때였던 것이다.72) 한편 高麗社會도 豪族聯合의 형태에서 儒敎的 文治主義에 의하 여 추진된 집권화정책으로 成宗代에서부터는 국초의 開國功臣이나 後三國시대부터의 儒土출신관료들을 대신하여 科擧制로 登庸된 신 관료층 儒臣의 교체가 진전되었고 이들 新官僚儒臣들은 국초부터 길러진 儒敎意識 뿐만 아니 라 현실적인 麗 宋우호관계와 儒敎부흥 기운을 배경으로 하면서 高麗社會의 진전이 요구하는 합리주의와 문치적 질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끝에 儒敎復興策을 적극화시켰다 고 할 수 있다.73) 이러한 유교부흥책은 첫째로 儒敎文運의 부흥을 통한 자의식의 표현으로서 東國道統을 수립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며 이것은 對 契丹戰과도 평행되는 주체의식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顯宗 11 년에 崔致遠을 聖廟에 從祀하였고 동 13년에는 薛聰을 종사하였 으며 이어 崔致遠을 文昌侯로, 薛聰을 弘儒侯로 追封하였던 사실 72) 이 時期는 大體로 北宋의 仁宗( )-神宗( )代에 해당하며 이들 濂洛關學으로 일컫는 道學派外에 蘇洵 司馬光 王安石 등의 一連의 儒學派가 活躍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이 時期의 儒敎文運은 黃公偉 宋明淸理學體系論史, pp 幼獅書店 (1971) 참조 73) 李基白氏는 成宗代의 新舊儒臣의 交替를 科擧制와 관련하여 詳論하였다. 高 麗貴族社會의 形成, 成宗代의 政治的 皮配勢力條 한국사 4 pp 所收 국사편찬위원회 (1974) 참조

247 Ⅱ. 儒敎의 發達 이다.74) 이는 顯宗초에 燃燈 八關會를 회복하였고 4년에는 崔沆 과 金審言에게 國史를 편수케 하였던 것이나 전기한 바 崔致遠을 文昌侯로 追封했던 것과 같은 해에 李龔을 監修國史로 임명한 조 치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이75) 전통적 禮俗의 복구작업이나 國史 編修作業과 더불어 儒學上에서는 東國道統을 수립하려던 것이며 이는 自意識의 成長과도 상관성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 崔凝徐弼崔知夢崔承老崔亮 리고 顯宗 18년 4월에는 太祖 穆宗간의 공신 21명을 역대왕의 廟庭에 配享했던 바, 이중 徐熙 李夢遊 등의 儒臣이 配享되었던 것도 그만큼 이들 儒臣이 차지하는 高麗王朝에서의 권력 비중이나 高麗儒學과 왕조와의 밀 도를 표시하는 것이며 儒敎的 統緒와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76) 둘째로는 顯 文宗간에서 적극화된 經書의 수집 조판 및 보급의 추진이 었다고 할 수 있다. 高麗王朝의 蒐書熱과 文籍所藏의 풍부함 은 이미 光宗時에 別序孝經 等書가 後周로 輸出됐던 것이나 成 宗代의 修書院 설치 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77) 그러나 顯宗代 이후 의 典籍事業은 麗 宋문화교류의 활기를 배경으로 했던만큼 經書뿐 만 아니라 宋代典籍의 유입이 그 특징이었다. 顯宗 19년 8월에 宋의 江南人 李文通의 獻書(597卷)이후 宣 肅宗代에는 文苑英華 册府 元龜 太平御覽 등이 齎來된 것을 例證으로 들 수 있거니와78) 이는 儒敎復興의 문헌적 定礎作業의 일환이기도 했던 만큼 靖宗代에는 74) 前揭 高麗史 卷4 顯宗世家 11年 8月 丁亥條 및 同 13年 1月條 75) 이상은 前揭 顯宗世家에 依함. 76) 이들 7名의 儒臣中 崔承老이하 4名이 科擧制出身이었고 7名은 麗初의 儒學者 를 代表하는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77) 光宗代의 書籍輸出은 光宗世家, 修書院은 成宗世家 해당조 참조 78) 李文通 獻書는 前揭 顯宗世家 19年 8月 丁亥條 참조. 宣宗 肅宗代의 書籍輸 入을 비롯한 宋代典籍의 流入은 金庠基 高麗時代史, pp 宋商來航表 참조

248 2. 儒學의 性格 禮記와 毛詩가 雕板되었고79) 文宗 12 13년에는 黄帝八十一難 등 이미 經史의 典籍을 雕板하는 한계를 넘은 儒敎文 經 川玉集 傷寒論 本草括要 등의 醫書와 三禮圖 隋書등이 雕 板되는80) 化 전반에 걸친 典籍事業과 그 보완작업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肅宗代에는 書籍舖가 설치운영81)됨으로써 雕板作業은 더욱 활기를 띄었고 그러므로써 高麗圖經 의 撰者로 하여금 高 麗에 典籍이 풍부함과 文運이 성황이었음을 찬탄케 하였던 것 이다. 세째로 顯宗 이후에는 儒敎文運을 담당할 官僚社會에서 新 舊 世代의 교체가 완료되었고 科擧出身인 새 지식층이 高麗의 官界를 주도하면서 儒道復興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이다. 成宗代에는 전후하 여 慶州系 儒臣이 卒歿하였고 顕宗代 이후에는 崔冲을 求心點으로 한 非慶州系의 새 儒臣들이 開京과 近畿諸邑에 布列하였으며82) 이 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하였고 崔冲 尹瓘 李子淵 등은 서로 姻戚 關係로 얽혀 있었듯이 점차 官人貴族化하여 門閥을 이룰만큼 성장 하였기 때문이다.83) 그리고 이들 儒臣들의 儒敎復興運動이 바로 崔文憲公徒 이하의 私學十二徒의 활동이었던 것이다.84) 특히 私學十二徒의 중심인물인 崔冲의 위치와 十二徒의 비중은 高麗史의 崔冲傳에도 世稱十二徒 冲徒爲最盛 東方學校之興 蓋由冲 79) 高麗史 卷6 靖宗世家 12年 4月 己酉條 秘書省에서 禮記正義 70本 毛詩正義 40本을 新刊하여 文臣에게 下賜했다. 80) 高麗史 卷 8 文宗肚家 2 12年 9月 己巳條 참조 13年 4月 庚辰條 81) 高麗史 卷 11 肅宗世家 6年 3月 壬申炫 李丙燾 前揭書, pp 에서는 書籍舖의 設置를 官學의 權威恢復과 書籍普及路及의 一石二鳥의 計라고 하였다. 82) 李基白 前揭書 pp 에서는 成宗-顯宗代의 政治的 支配勢力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83) 李子淵一家를 中心한 系譜關係는 藤田亮作 李子淵とその家系, 靑丘學叢 13 15號 및 徐首生 高麗朝 漢文學의 硏究 双明齋家의 文閥과 生平條 pp 참조 84) 崔冲과 私學十二徒에 대하여는 朴晴湖 高麗時代의 儒學의 發達과 私學十二徒 의 功績, 史叢 2집 (1957) 참조

249 Ⅱ. 儒敎의 發達 始 時謂海東孔子 라고 한 것이나85) 그가 靖宗廟에 配享되고 그 자손은 文行으로써 宰輔가 된 자가 수 10인이었다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다.86) 또한 同 列傅의 표현대로 그는 累代儒宗이며 三韓 耆德으로서, 穆宗 8년에 甲科第一로 등과한 이래 顯 靖宗 및 文 宗一代에 仕宦하여 官은 門下侍中에 이르고 九齋學堂을 열어 학 도를 敎誨함으로써 私學十二徒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崔冲의 儒敎意識이나 文治的 방향은 그가 麗朝官位로서 출발하 고 있는만큼 成宗代에서 이룩된 儒敎主義的 기반 위에 서 있었다 고 할 수 있다.87) 그것은 冲이 德宗初에 說苑 의 六正六邪文과 漢刺史六條令 을 內外諸司에 書揭하도록 上奏한 것으로 88) 보아 서도 그가 成宗代의 金審言의 封事나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崔承老의 時務書가 書經 無逸篇 의 정 신을 강조했던 데 비하여 金審言이 監察制의 강화를 주장함으로써 豪族의 억압과 관료제의 기능화를 그만큼 강하게 의도했던 것을 계 승한 것이었다89). 따라서 崔冲도 金審言과 같이 高麗朝가 科擧制 에 의하여 배출한 新官僚層의 계보에 속해 있었다고 볼 것이다.90) 다음은 그의 儒敎的 문화관이 철저한 華夷觀에 입각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그가 靖宗代에 都兵馬使로 있을 때에는 犯境한 女眞 酋長의 放還을 上奏하면서 夷狄은 人面獸心이니 刑法으로 應懲 할 수도 없고 仁義로 敎化할 수도 없으며 忿怨과 供費만 많을 것 이니 放還하자 고 하였기 때문이다.91) 85) 高麗史 卷95 列傳 崔冲傳, 崔冲의 年譜는 崔有海撰 崔子 全, 首陽 世穚所收 pp. 2-4 참조 86) 高麗史 卷 95 列傳 崔冲傳 참조 87) 崔冲은 成宗 5年에 탄생하였고 成宗代의 儒臣 崔沆의 知貢擧下에서 進士가 되었다. 88) 前掲 崔子 全 所收 年譜 癸酉條 참조. 89) 尹南漢 前揭書 成宗의 文治와 그 理念化 pp 참조 90) 前揭 崔冲傳 및 前揭 崔子 全 所收 年譜 참조

250 2. 儒學의 性格 이와 같이 夷狄을 化外視했던 그의 華夷論은 유교적 문화의식 의 전형일 뿐더러 이미 契丹의 문물을 禽獸視했던 太祖 王建의 문 화관과도 일치되는 것이었으며 崔冲도 그러한 유교적 문화의식을 표현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92) 세째로 이러한 儒敎的 文化觀은 그의 儒敎主義나 儒學思想을 家世에 長物이 없고 오직 傳 하여 寶藏으로 삼는 것은 文章을 錦綺로 삼고 德行은 珪璋이라 표현한 것인만큼 이는 그의 遺詩에 고 한 바, 儒敎的 文翰과 德行을 寶藏으로 삼던 그의 儒敎一遵의 指向性인 것이다.93) 네째로 그러한 文翰과 德行의 典據가 九經三史를 九齋學堂에서 교 수한 바, 儒敎經典이나 正史의 존중이었으며 그 실천적 과제는 九齋 學堂에서 敎誨不倦하던 교육활동을 통하여 실현코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崔冲의 儒學思想과 그 실천은 九齋學堂의 활동에 집약 되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전 해지지 않는 現在로서는 단편적이며 외형적인 자료나 堂名을 통 하여 類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九齋學堂94)은 樂聖 大 中 誠明 敬業 造道 率性 進德 大和 待聘 등의 學齋를 두 어 이를 進學階梯로 삼았고 每夏에는 歸法寺에서 夏課를 가졌으 며 敎科는 九經三史를 교수하는 한편 때로 刻燭賦詩하여 次第를 榜示하되 進退有儀하고 長幼有序하며 竟日酬唱하면서 儒敎的 行 儀와 儒化意欲을 보였던 것이었다.95) 91) 前揭 崔冲傳 및 前揭 崔子 全 所收 年譜 참조 92) 이러한 華夷觀은 契丹 女眞 蒙古 등 北方民族과 對決했던 高麗王朝와 宋王 朝에서는 全時代에 거의 共通된 儒敎的 民族觀이었고 文化觀이었던 것이다. 93) 上揭 崔子全所收 補閑集 94) 九齊學堂에 대하여는 洪良浩의 九齋記. 紫霞洞 九齋遺墟碑銘遺墟碑記 등이 있고 堂名에 대하여는 逐條로 解義한 九齊衍義並大小序등이 있으며 모두 上揭 崔子全에 수록되었다. 95) 前揭 高麗史 권 95 崔冲傳 참조

251 Ⅱ. 儒敎의 發達 이러한 崔冲의 九齋學堂이 지닌 제도적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私學을 先導한 것이었으므로 東方學校의 발흥을 선도한 그 의 공은 후인으로 하여금 海東孔子로까지 호칭케 된 것이었다. 그 러나 주목되는 것은 그의 학당은 立朝 64년에 걸친 그의 仕宦이 나 그의 門下에서 金無滞 이하 尙書位에 이른 많은 관료를 배출하 여 尙書榜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高麗관료의 공급원이 되었다는 사실인 것이다.96) 崔冲이 高麗官僚社會와 밀착되었던 것은 그가 역임했던 관직이나 지위뿐만 아니라 顯 文宗간에서 仕宦한 그의 師友나 門人 가운데 知 齊顏(侍中)黃周亮(侍中)金良鑑(守太尉)崔惟善(門下侍中)吳 學麟(翰林學士)文正(侍郞)崔奭(平章事)鄭文(尙書)李周佐(判 御史)尹瓘(侍中)吳延寵(太尉)朴寅亮(藏秒府監)金行瓊(翰林 學士)崔惟吉(尙書)崔思諒(參知政事)崔思諏(侍中)李子淵(門 下侍中)李資仁(右丞)李䫨(平章事) 등 일대의 문인儒士名宦이 망라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睿仁宗代에 활약한 崔文憲公徒로 들 수 있는 金仁存(侍中)尹彥頣(政堂文學)柳仁著(參知政事)崔 允儀 (平章事)金富佾(門下平章事)李之氐(參知政事) 등을 보아서 도 九齋學堂의 교육성과가 睿仁宗代의 高麗官界나 학계에서 차지하 名한 인물로 姜邯賛(侍中) 王可道(侍郞祭酒) 皇甫俞義(侍郞) 崔 고 있던 비중을 알 수 있는 것이다.97) 그러나 또한 주목되는 것은 그의 말년인 順宗 원년의 登科者에 는 達官이 없었고 李資玄이나 郭輿 등은 棄官하여 處士가 되었으 96) 前揭 崔子全 遺事 참조. 尹南漢 前揭書 私學十二徒의 敎育精神 pp 참조 97) 前偈 崔子全 師友成就人. 門人. 文憲公徒條 참조. 특히 文人條에는 이밖에도 崔思齊 李從现 崔德成 李象廷 崔有孚 李資玄 등이 있고 文憲公徒條에는 金黃元以下 麗末의 程朱學者를 망라한 118名을 列記하고 있는 바, 文憲公徒가 事實上 高麗儒學의 中樞였음을 과시하고 있다

252 2. 儒學의 性格 므로 處士科라 일컬었다는 바 高麗官僚制와의 遠心化 경향도 없 지 않았다는 사실이다.98) 위 兩人은 爲學과 文名이 所稱되는 인 물이면서도 李資玄의 경우는 釋 道에 潛心하여 性命에 몰두했던 인물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그의 학교가 지닌 사상적 성격의 또 다른 一端을 표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崔冲이나 九齋學堂이 지닌 思想性이나 儒學的 성격은 첫째 그가 九經二史를 교수했다는 바 經 史 중심의 교육이었고 刻燭賦 詩에서와 같이 文翰風을 兼有한 것이었거니와 그의 儒學이 九經三 史를 중심하고 翰墨風을 겸한 것이었더라도 그 經學은 隋唐의 訓 話的인 것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宋代的 義理 心性的 思惟를 내 포한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高麗前期 儒學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高麗儒學이 이미 崔冲代에서 宋代儒學과 평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訓詁 義疏的 儒 學이 思瓣化할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보아지기 때문이 다. 宋學은 原始儒道를 鼓吹하던 韓愈 李翶 이래의 斯文意識을 배경으로 하였고 宋一代에서 義理 心性의 學으로 체계화함으르써 높은 사상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萌芽를 그에게서도 기대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히 高麗儒學의 높은 수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99) 이러한 心性學的 성격은 九齋學堂의 名義부터가 入道의 耍語이자 程朱가 提挈하는 綱維에 부합된다는 논리에서도 그러했던 것이다.100) 그에게서 東國的 道學의 연원을 기대하는 耳 濂洛諸賢에 앞서서 聖學을 함으로써 東方人이 비로 소 儒道의 重함을 알았다 고 한 평가는 이런 관점에서 말한 것 溪 洪良浩가 98) 尹南漢 前揭書 p.267 참조 99) 崔冲의 儒學 水準이 宋學 특히 程朱에 先行되었음은 李丙燾 前揭 韓國史 中世 篇 p.231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崔有海撰 九齋名堂書洪良浩撰 九齋記 참조 100) 前揭 崔子 全 所收

253 Ⅱ. 儒敎의 發達 이었다고 할 것이다.101) 한편 그의 齋名은 儒敎的 作聖의 功과 經書의 要諦를 빌어 進學 의 階梯로 삼았던 바,102) 그 첫 계제인 樂聖은 聖人의 道를 樂習하 는 것이며 다음 階梯인 大中은 書經 洪範簿의 大中의 道나 易의 大 中而上下應之한다는 大中인 것이며 이 大中의 道는 誠明에서 서야 하는 것이므로 誠明齋를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樂聖 大中 大學 에 비기면 三綱에도 해당되는 것이며 九齋學堂의 교육 理念이 이미 誠意正心에 주안하는 心性學的 지표를 중요시 誠明은 하였고 그만큼 原儒의 정신을 고취한 것이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敬業 이하의 六齋는 위의 기본목표를 실천하는 要目의 集 約處였다고 보여진다. 敬業은 禮記에 三年視敬業樂群 한다고 한 바, 藝業長者는 敬而親之한다고 한 것이나(疏) 專心致志함으로써 事 其業하는 것(朱子)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造道는 中庸에서 이 르는 바, 率性을 道라 하는 바의 그 道를 深造自得하는 것이다. 率性 은 또한 中庸에서 天命을 性이라 하고 率性을 道라 하며 修道를 敎라고 하는 바 의 率性이므로 天性을 따라서 느끼는 바를 행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 역시 宋儒가 心性을 위주하는 修學方 君子進德修業 이라고 한 바, 品德을 쌓는 것이며 大和는 易에 各正性命하고 保合大和 하는 것 인데 中庸에서도 中和를 이루면 天地가 자리잡고 萬物이 化育된 다 고 한 바의 宋儒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끝으로 待聘은 孔 子家語 儒行解에 席上之珍以待聘 이라고 하였고 聘은 迎師의 禮 法을 강조한 것이었다. 進德은 易에 인 까닭에 師道를 강조한 것이었다. 이는 韓愈의 師說이 道統을 강조 한 것이나 이를 介한 接人의 禮를 主眼한 것이므로 儒에서 修己한 101) 洪良浩 耳溪集 卷30 紫霞洞九齋遺墟時銘 102) 이들 齋名에 대하여는 前揭 首陽世稿所收九齋衍義 pp.49-57에 詳論되었다

254 2. 儒學의 性格 다음에 治人하는 기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齋名의 연원을 찾아보면 그것은 첫째 經學 중심이되 이미 四書에 主眼處가 집약된 듯한 것이었고 둘째 德性의 涵養에 主眼하되 心性 性命論的 심화에 착안하고 있으며, 세째로는 진퇴 에는 儀가 있다고 했듯이 禮敎秩序가 존중되던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주목되는 것은 義理 心性學的 傾斜가 宋儒 형성에서와 같 이 原始儒道와 道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지 므로 이는 宋學과도 평행 되었을 高麗儒學의 높은 수준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상은 宋에 使行한 高麗儒臣이 宋儒와 접촉하였거나 宋 의 학풍에 接目했을 麗 宋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양국의 儒風의 평행성은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103) 2) 官學의 尊經的 儒風 高麗儒學에 일관된 尊經的 儒風은 官學에서는 한층 구체적인 것이었다. 經學은 원래 新羅의 國學이나 羅末의 讀書三品科에서도 論語 孝經을 비롯하여 詩 書 易 禮 春秋 등의 儒敎經典이 科目으로 課해졌던만큼 高麗儒學에 先行되어, 이미 儒學의 주내용 이었고 儒敎的 禮敎의 典據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高麗의 尊 經的 기풍도 기왕에 수용된 儒敎的 전통이나 유학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高麗의 尊經的 儒風의 직접적인 연원은 太祖가 訓要十 書經 無逸篇을 宮中官衙에 圖揭觀省하라고 했듯이 經書의 勸讀을 遺訓한데서 찾을 수 있다. 書經 無逸篇은 書經 條 에서 周書의 篇名이며 成王이 即政할 때 그 逸豫를 걱정하여 進戒했다는 103) 麗 宋儒學의 평행성은 使行외에도 宋의 賓貢科合格者나 國學留學生을 통한 文化交流에서도 가능했을 것이어니와 尹瓘의 경우는 程朱學者인 伊川과 易을 論 했고 詩를 唱酬한 바, 이는 肅宗代에 벌서 宋代道學과 연결되었을 可能性을 예상케 하는 것이다. 前揭 崔子 全師友間成就人條와 坡平尹氏繹史輯覽 卷8 참조

255 Ⅱ. 儒敎의 發達 周公의 所作이며 古文經學에 속한 것이었다. 따라서 太祖의 文治主義 가 의거했던 經典이나 尊經的 氣風도 古文經學이었고, 이것이 唐代에 완성된 訓話的 經學이었음은 高麗前期에 雕板된 經書가 禮記正 毛詩正義 등이었던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高麗의 經學이 漢唐의 經學을 兼有했던 것은 光 義 104) 宗 때에서 後周에 보냈다는 經書에는 후세에 僞書로 단정된 別序 孝經 越王孝經新義 皇靈孝經 및 孝經雌雄圖 등이 있었던 것이 며 이는 後周에서 이미 희귀화된 前代的 經書를 高麗社會에서 溫 存하고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05) 하여간 太祖의 文治主義에 연원하는 尊經的 기풍은 그가 書 無逸篇의 勸讀을 遺訓한 뒤에도 成宗代에는 崔承老나 金審 經 言이 上言한 封事에서도 계승되었고 崔冲도 圖揭觀省할 것이 진 언되었다. 그리고 이는 睿 仁宗代의 經學講論에서도 자주 講論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書經을 비롯한 經學 중심의 儒學 은 高麗 前期社會에서는 일관된 것이었다. 訓話를 중심했던 經學的 儒風은 高麗前期의 科擧制에서도 일관 된 敎科였고 學校敎科에서도 그 일관성은 계속되었던 것이다.106) 이는 우선 成宗代에서 經學博士를 十二牧에 두어 교육을 담당하 였고 國學의 敎科에서도 經學이 중심이었으며 崔冲의 九齋學堂에 104) 唐儒學의 集大成인 孔頴達奉命撰의 五經正義 (223巻)에 所收된 毛詩正 義는 毛傳 鄭箋 孔 王德韶疏이고 禮記正義는 鄭注 孔 李奢等疏이므로 이들은 모두 古文經學의 注疏를 大成한 것이었다. 105) 高麗社會가 中國에서는 散佚되거나 稀貴化된 典籍의 供給源이 되었을 가능 성은 宣宗 8年 6月에 李資義가 傳한 바, 宋의 哲宗이 轉寫를 耍請한 書目에서도 볼 수 있다. 前揭 李丙燾 韓國史 中世篇 p.397. 註1 目錄 참조 106) 高麗史 志 27 選擧志 1 科目에는 經學을 明經科에서 試驗했거니와 顯宗 15年 12月條에는 明經則試五經各一机라 하였고 宣宗 1年 11月條는 三禮三傅業의 不 可停廢를 말하였으며 그 內容도 詳定하였다가 仁宗代에는 더욱 詳定되었다. 그 리고 學校條에서도 이와 平行하여 五經 九經 十一經등이 敎授되었다가 恭愍 王 16年에는 五經四書齋를 請置하였고 恭讓王 元年에는 四書五經을 常讀케 하 였음을 말하고 있다

256 2. 儒學의 性格 서도 九經三史를 교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九經三史의 교과내 용은 이미 羅末의 讀書三品科의 과목에서도 九經三史에 능통한 자는 超擢한다 고 하였던만큼 前代 이래의 교과내용이었거니와 교과내용으로서 經學敎育이 조직화된 것은 官學七齋가 經學 중심 으로 짜여졌던 데서 볼 수 있다. 한편 官學인 國學 七齋의 儒學齋에서는 論語와 孝經을 1年限으 여 25년을 課하였고 周易毛詩周禮儀禮를 中經으로 하여 로 한 기 초과정을 둔 위에 尚書 公羊傳 穀梁傳을 小經으로하 2년을 과하였으며 大經인 禮記와 左傳에는 3년을 과했던 바, 이러 한 교과는 첫째로는 古文經學을 주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訓詁 爲主였던 것은 兼修科目 가운데에 說文 字林 三倉 爾雅 등 文 字學에 관한 과목이 많았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107) 한편 이들 교과운영은 學舍나 學齋조직을 통하여 진행되었던 것 이다. 이는 成宗代에서도 벌써 試行되었고 文宗代에는 崔文憲公徒 의 九齋學堂에서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崔文憲公徒를 본받 은 소위 私學十二徒에서도 계승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는만큼 이 儒 學齋108)의 學齋制는 麗代를 통한 교과운영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109) 그러나 睿宗代에서는 國學은 七齋로 조직 화 되었고 그 중 六齋가 儒學齋였으며 그 齋名은 待聘 麗譯 經 德 求仁 服膺 및 養正 등이었던 데에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과목별의 專修編制였음은 물론이었다.110) 그 107) 尹南漢 前揭書 4章 4節 2項 4 官學의 發達과 그 精神 p.270, 京師六學과 鄕學表 참조 108) 上揭書 p. 269 註47 儒學齋一覽 참조 109) 麗末에서도 成均館에 五經四書齋를 請置한 것도 이런 學齋制와 관련된 것으 로 보인다. 高麗史 卷28 選擧志 2 學校條 110) 儒學齋의 六齋中 待聘은 尙書, 麗澤은 周易, 經德은 毛詩, 求仁은 周禮, 服膺 은 禮記. 養正은 春秋의 專習處이므로 이는 모두 古文經學이 主였다

257 Ⅱ. 儒敎의 發達 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崔冲의 九齋學堂에서와 같이 그것이 지닌 儒學史的 의미인 것이다. 그 齋名부터가 儒敎經典에서 出典한 만 큼 첫째로는 高麗國學이 보다 經學 중심으로 編成되었다는 사실이 다. 물론 私學에서도 九經 三史를 교수했다고 했듯이 經學 중심 의 敎科 編制는 高麗一代의 공통된 것이었더라도 睿 仁宗代의 國 學이 지닌 尊經的 지향에는 私學과는 다른 보다 투철한 官僚性을 담은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齋名의 첫째인 麗澤은 周易을 專講하는 곳이지만 그 뜻은 朋友 가 相資하여 講學과 修德에 힘쓰는 것이다. 이는 易 兌卦에도 君 子는 朋友로써 講書한다는 말이 있듯이 易講을 통하여 朋友相資 하는 것을 교학의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그 정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書經이며 이의 專習 處를 待聘齋라고 했음은 이미 九齋學堂에서도 있던 齋名이었다. 다만 九齋에서는 마지막 階梯였던 것이 여기서는 初期에 위치하 고 있을 뿐이다. 이는 師道를 介하여 接人의 儀를 읽히는 것이었 고 詩經을 專講하는 經德齋는 書經에 經德秉哲이라 하였고 蔡傳 에 其 德을 經으로 삼고 不變함은 處己하는 所以라고 말한 바와 같이 불변하는 常德을 닦아서 處己하는 것이며 이를 詩를 통하여 期待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周禮를 專習하는 求仁齋는 論語 述而篇에도 求仁得仁 又何然 이라고도 있듯이 儒敎의 일 관정신인 仁을 周禮와 같은 禮儀典章에서 강조한 것으로 보이며 그만큼 禮制를 仁에서 찾던 정신을 보면 經學의 心性學的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春秋를 專習하는 곳을 養正齋라고 한 것 은 春秋를 가지고 正道를 기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는 易頣卦에도 養正則吉也라 하였고 蒙以養正이라고도 한 바와

258 2. 儒學의 性格 같이 養正 蒙養을 春秋에서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歷史事蹟을 통 한 蒙養에 主眼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끝으로 戴禮를 專講하는 服膺齋는 中庸에 得一善則拳拳服膺而不失矣 이라고 했듯이 禮 를 실천적 과제로 인식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官學인 儒學 6齋는 첫째로는 經學 중심이며 訓話的 인 儒風이지만 一經 중심의 분과적 학풍이 정립된 것이었고 둘째로 는 一經 중심 의 분과적 講論으로 내용적 深化를 가져 왔다는 사실 이다. 金仁存의 論語新義나 尹彥頣의 易解 등도 高麗유학이 宋代 儒學에 견줄만한 수준을 지니게 된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111) 셋 째로는 禮儀 典章의 實踐的 面과 心性的 修養의 面이 강조되고 있 는 바, 이러한 深化나 수준은 곧 宋代의 義理 心性學과도 관련되 었을 心性學的인 심화가 진전되고 儒敎의 正統性이 강조된 것이었 다고 할 것이다. 儒敎的 정통론은 睿宗 9년에 國子諸生에게 老 莊學의 학습을 금했던 조치와도 평행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네째로는 私學과 관련하여 볼 때 私學敎育이 9經 3史 중심인데 비하여 國學에서는 11經을 課하고 있는 바, 그만큼 尊經的 지향과 經學的 통제성이 예상되는 것이며 동시에 私學의 文翰風에 비하여 時務策이 강조되듯이 관료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官學의 尊經的 학풍은 高麗王朝가 추진했던 바, 광범한 典籍의 수집이나 校讎 雕板 등에 있어서도 經書가 主였 던 데서 알 수 있다. 이미 高麗前期의 文治主義가 尊經氣風 위에 서 있었고 학교의 교과나 科擧의 과목이 經書 중심인 이상 이들의 需要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經書의 수서, 조판, 보급이 요청되는 111) 이 兩著는 宋學의 中心處로서 前者는 四書에 對한 關心에서, 後者는 易學이 宋學의 本體論의 典據였던 점에서 주목되었을 것이며 口義 新義 義 解등은 宋儒의 著述에 자주 보이는 書名이지만 이들 論著가 모두 現存하지 않으므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259 Ⅱ. 儒敎의 發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典籍사업은 修書院 書籍舖 秘書省 印書閣 淸燕閣 寶文閣 臨川閣 등의 설치와 운영에서도 그 성황 이 예상되거니와 靖宗代부터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經書나 經學的 지식의 보급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 다. 靖宗代에 禮記 70本, 毛詩 40本을 雕板하여 印書閣에 1本을 두 고 나머지를 文臣에게 分賜한 것이나, 文宗代에 西京留守의 청으로 明經諸業과 擧人所業의 서적을 印行한 것이나, 仁宗代에는 孝經과 論語를 閭巷의 稚童에게까지 分賜한 것을 보면 高麗圖經 의 撰 閭巷에는 經舍書社가 三兩相望하여 未婚子弟는 모이면 스승 을 좇아서 經을 배운다 고 叙述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 다. 따라서 睿仁宗代에는 이미 經學書籍이나 지식이 학자문 者가 112) 인들에게 일반화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儒風을 전제로 하여 볼 때 高麗儒風의 실태를 집약하여 표현한 것은 睿 仁宗代에 성황을 이룬 經學講論과 經學的 著述의 출현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經學講論을 중심한 儒風은 말할 것도 없이 睿 仁宗의 方響文學하는 儒敎主義政策이나 國學 의 진흥책 및 淸燕閣을 중심한 儒 文風과 평행되는 것이었다. 그 러나 이러한 방향을 제시하고 추진한 것은 이미 성장한 儒學者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던 것은 崔瀹 이 睿宗에게 帝王은 마땅이 經術을 좋아하여 날로 優雅하고 經史를 討論하여 政理를 취 하며 化民成俗함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 고 하였고 또한 蕩한 詞臣들과 어찌 輕 吟風弄月이나 함으로써 天衷의 淳正을 잃겠는 가 라고 한 바, 詞章과 文翰風을 비판하고 尊經的 儒風을 강조한 112) 徐兢 高麗圖經 卷19 民庶條 참조 한편 增補文獻備考 肅宗 7年條에도 自先 秦以後 晋唐隋梁之書 皆有之 不知其家 幾千集 이라고 하였고 圖經 儒學條에도 臨川閣藏至數 萬卷임을 말하고 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所藏狀을 통하여 儒敎知識이 普及되었을 結果였다고 할 것이다

260 2. 儒學의 性格 것으로도 알 수 있다.113) 이러한 尊經的 儒風이 老莊學의 이단성을 비판하고 佛事의 낭비를 반대한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114) 3) 經學講論파 古文復興 위와 같은 尊經的 儒風은 經學講論과 文翰風 특히 그 중에서도 古文復興의 방향에서 그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의 經學講論의 성황은 睿 仁宗代에서였거니와 睿宗초의 文德殿의 강 론에서는 왕의 임석하에서 尹瓘의 書經 無逸篇 講論과 吳延寵의 禮記 강론이 있었고115) 淸燕閣의 강론116)에서도 왕의 임석하에 朝夕으로 經學을 강론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夜半에서야 罷하 는 성황을 보였던 것이다. 이는 睿宗의 好文 崇儒의 의욕과 儒敎的 문인관료의 호응을 전제로 하였을 것이며 睿 仁宗代에 자주 보이 는 宮中 殿閣에서의 講學기록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淸燕閣記 와 金守雌 의 幸學記 라고 할 수 있다. 淸燕閣記 에서는 날마다 老師 宿 儒와 더불어 先王의 道를 토론 부연한다 고 하였고 三綱五常의 敎 와 性命道德의 理가 四履에 넘쳐흐른다 고도 하였으며 幸學記 에는 金富轍이 太學에서 書經을 강론하던 모습을 전하여 大司成 金 이런 實像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金緣의 117) 118) 113) 前偈 高麗史 95卷 崔冲傳 附 崔瀹傳. 및 前揭 補閑集 上 참조 114) 老蔣의 禁治는 高麗史 仁宗世家 9年 3月 甲子條에 禁諸生治老莊之學이라 한 것은 仁宗의 崇儒政策이나 8年 7月의 國學諸生이 養士의 財政問題를 上疏한 것과도 아울러 생각하면 이는 崇儒의 歸結인 正統論의 강조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아진다. 115) 高麗史 睿宗世家 元年 12月條. 이 講論에서는 崔弘嗣 등 儒臣 21人이 聽講하 였고 王은 이들에게 酒饌을 내리고 尹瓘 吳延寵에게는 衣帶를 下賜하였다. 116) 高麗史 睿宗世家 11年 11-12月條. 여기서의 講論例로는 朴景仁의 尙書二典, 禮記의 中庸 投壶篇. 池昌洽의 投壺儀 圖의 撰進, 高先柔의 書經 大禹謨 皐 陶謨 益稷三篇, 胡宗旦의 書經 無逸篇의 講論등이 있었다. 講論者로서는 이 外에도 權適 趙奭 金端 金緣등을 들 수 있다. 117) 徐居正 東文選 卷64 所收. 金緣은 金仁存이며 論語新義 海東秘記의 著者이 고 古文運動의 先軀者이기도 하였다. 高麗史 卷96 列傳 9 金仁存傳 참조 118) 前揭 東文選 卷 64 所收.. 高麗史 卷98 列傳 11 金守雌傳 참조

261 Ⅱ. 儒敎의 發達 富轍이 앞자리에 나아가서 無逸篇의 口義를 講하자, 主上은 經을 起居注 尹彥頣에게 命하여 뜻을 묻게 하였으며 다시 諸生들에게 앞에 나와서 듣게 하였는데 서로 詰問케 하니 司成의 應答하는 것은 江河를 트는 것 같았다 듣고 兩府 百官과 諸生이 聽講하니 고 하였는데 이러한 강론은 崇文殿의 강론에서와 같이 金富軾의 周 易 강론에 대하여 尹彥頭가 問難함으로써 응답에 땀을 홀리게 했다 는 바, 문인관료간에 있었을 대립상을 露呈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이다.119) 하여간 이러한 經學講論이 왕실의 권장과 儒化意圖를 집약한 文 治的 성격과 官人貴族의 經學지식의 축적 및 門閥과도 연결된 관인 귀족적 儒風을 표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었다. 뿐만아니라 이런 儒 風이 高麗儒學에 생기를 주고 이론적 심화를 가져왔을 것이며 이는 易解 나 金仁存의 論語新義 나 崔允儀의 古今詳定禮 및 金富軾의 三國史記 등 經史의 書籍이 저술 이 무렵에 尹彥頣의 된 데서도 입증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經 學講論이 지닌 儒學史的 성격인 것이다. 그것은 仁宗代儒學이 이미 漢唐의 儒學에서 宋代儒學으로 轉移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德의 理가 四履에 넘친다 거나 性命道 論語新義 가 저술된다거나 이를 통하여 原始儒道의 정신이 모색되는 것은 金富軾의 史學에서와 같 이 모두 宋代儒學의 復古性이나 性命 義理를 존중하던 것과 상통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宋代儒學과 평행되는 儒學史的 의미는 당연히 문학에 있어서도 六朝의 騈儷文과 唐詩를 중심한 귀족적 文風을 누리는 가운데 점차 唐宋 八大家의 文이나 특히 韓愈 등의 古文風이 일어 나고 晚唐의 新體詩나 宋代의 詞風이 일어났던 바, 文體改革의 방 119) 高麗史 仁宗世家 11年 5月條와 高麗史 列傳 9 尹瓘傳 참조

262 2. 儒學의 性格 향에서도 新時代性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120) 이는 經學講論과 병행되었던 詩賦會나 文風에서도 볼 수 있는 바, 仁宗代에는 매년 3월과 5월에 왕이 麒麟閣에 나가서 經學講論과 詩賦會를 가졌던 데서도 구체상을 볼 수 있다. 鄭知常이 無逸篇을 강론할 때의 경 우에는 西京의 儒臣 25인이 초치되어 강론과 詩賦會를 겸행한 것 이나121) 崇文殿의 강론에서 太學博士 郭東珣 등 18인에게 詩賦를 읊게 한 것은122) 이들이 우선 尊經과 翰墨의 풍을 함께 누렸던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文風에 있어서는 그 주류가 국초의 儒臣들에 의하여 정초 된 文選風인 四六騈儷體였고123) 이 위에다 점차 晚唐의 今體詩風을 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崔冲이 활약하던 文宗代부터는 점 차 변하기 시작하였고 睿 仁宗代에는 점차 唐宋 八大家의 古文體 가 존중되어 宋代文風과도 견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金富軾형제 에 이르러서는 高麗의 古文體로서 정립되었다고 할 것이다.124) 金 淸燕閣記 는 이러한 문체 개혁기에서의 전환기적 문 체로 일컬으거니와 春仁宗代에는 金富軾형제, 崔冲의 자손들, 尹 瓘부자들이 經學과 文學에서 활약하였고 古文辭에서는 金黃元郭 緣의 전기 輿가 활약하였으며125) 金富軾과 鄭知常이 벌린 詩作에서의 爭名은 그들의 정치적 대립과도 관련되면서 官人貴族들의 파벌성이나 逸樂 風 조차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經學講論이나 文風은 확실히 尹南漢 前揭書 p 高麗前期 文風의 變化 참조 前揭 高麗史 仁宗世家 5年 3月條 前掲 高麗史 仁宗世家 10年 3月條 梁 昭明太子 蕭通 撰인 文選 의 文體는 宗 四六騈儷文을 宗으로 한 것이다. 124) 韓愈 柳宗元 歐陽修 蘇軾등의 唐宋八大文은 儒敎復興氣風과도 平行되는 古文風을 代表하는 것이며 이들이 대개 宋學의 先軀였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25) 崔滋 補閑集 序에 列擧된 文人은 光宗-穆宗代에서 王融 趙翼 徐熙 金 策, 顯宗-文宗代에서 崔冲 外에 李夢遊 柳邦憲(이상 文) 鄭倍傑 高凝(이상 詩) 등인데 이들이 대개 儒 文을 兼했음은 아직도 그 未分化 내지는 翰墨風流를 벗어나지 못 했던 貴族性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0) 121) 122) 123)

263 Ⅱ. 儒敎의 發達 睿 仁宗代에서는 儒敎文化로서 일반화되었고 이를 향락했던 것이 며 그 逸樂的 방향이 毅宗代에서 극에 달한 끝에 武人의 반발을 가 져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宋代의 儒敎부흥방향에서 性 命 道德化하였고 古文風이 존중되던 것은 그만큼 高麗 前期 儒風 이 지닌 宋儒學과의 평행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4) 歷史叙述과 歷史意識의 成長 高麗儒學이나 高麗文風의 성장을 집약하여 표현한 것은 高麗人 의 歷史叙述이며 이를 통하여 표현된 歷史意識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126) 高麗時代의 역사서술은 儒敎的인 역사서술체를 정립 한 위에서 발전한 것이므로 編年體인 實錄撰述에서 비롯되어 紀 傳體인 正史體로 완결된 것이었다. 그리고 修史의 체제로 본다면, 唐 宋의 修史體制인 官撰的 修史형태를 취했던 것은 高麗王朝와 평행된 시대가 국제적으로는 이미 私撰的 형태를 벗어나서 官撰 的 史風이 정립된 때였다는 것과 더불어 高麗王朝의 集權的 성격 및 高麗의 文運을 국제적 수준으로 高揚시키려던 王朝的 文治主 義의 지향성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상으로는 국초에 벌써 史舘인 春秋舘이 설치되어 監 修國史 修國史 同修國史 등의 史官制度가 마련되었으므로 歷代實 錄이 編撰되었을 것이지만127) 實錄撰修가 구체화되는 것은 契丹族 의 침략으로 秘書閣書庫가 灰燼됨을 계기로 한 것이었다. 顯宗 4년 에 崔沆 周佇 金審言 및 黃周亮 등에서 구체화되는 歷代實錄撰 修128)는 같은 顯宗代에 된 朴寅亮의 古今錄 (l0卷)이나 睿宗代 126) 尹南漢 前揭書 pp 歷史叙述과 歷史意識 참조 127) 高麗史 卷76 百官志 1 春秋舘條 國初에는 史舘이라 하였고 史官은 兼官이 었다. 128) 高麗史 顯宗世家 4年 9月條 및 高麗史 卷95 黄周亮傅 참조

264 2. 儒學의 性格 編年通載續編 과 더불어 高麗前期의 역사서술을 에 된 洪濯의 대표하는 것이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으므로 金富軾이 참조했을 舊三國史記 와 더불어 그 구체적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修史記錄을 통하여 高麗社會의 集權化나 文治的 방향이 王 朝的 정치권력과 修史事業을 일체화시키며 역사서술을 추진하였음 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高麗前期의 역사서술이나 그 내용 및 이를 통한 역사의 식은 현존하는 最古의 史書인 金富軾의 三國史記 밖에 없는 것이다. 仁宗代에 편찬된 官撰的 紀傳體의 正史인 三國史記에 대 하여는 후세에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이면서도 그것이 현존하는 最古의 正史體이며 高麗中期의 史風을 대표한 데서 그 역사적 가 치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129) 三國史記 의 성격은 첫째로 그의 修史동기에서 찾아볼수 있 다. 그는 進三國史表에서 오늘의 學士大夫는 五經諸子의 書나 秦漢歷代의 史記에는 통달하여 詳說하는 이가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茫然하여 그 始末을 모르니 심히 嘆息할 만한 일이라 130)고 하여 당시의 지식층이 自國의 歷史에 疏略했 던 비주체성을 개탄하였고 이어 당시의 中國經書와 漢唐史書가 詳 內略外하며 우리의 古記가 또한 事迹이 闕亡한 바를 말하여 歷史 知識의 대외적 偏向性과 자국의 역사지식의 缺亡狀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현실이 곧 君后의 善惡이나 臣子의 忠邪나 邦業의 안위와 인민의 理亂을 모두 못 나타냄으로써 鑑戒 129) 三國史記나 撰者 金富軾에 對하여는 丹齋 申采浩의 朝鮮史硏究草에 言及이 있고 이 밖에 高柄翊씨의 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叙述. 東亞交涉史硏究 (1972) 所收. 金金哲埈氏의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에 대하여, 韓國古 代史硏究所收. 등이 있는데 뒤의 두 論考는 相反된 評價를 내리고 있다. 130) 金富軾 三國史記 卷首 所收 進三國史表

265 Ⅱ. 儒敎의 發達 를 줄 수 없음 을 지적하였던 것이다.131) 즉 그는 역사지식의 偏 向性과 史迹의 缺亡 및 역사의식(鑑戒的 歷史意識)의 缺欠을 인식한 끝에 三國史記를 撰進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宜役三長之才 克 成一家之史 胎之萬世 炳若日星 이라고 까지 自負하였던 것이다.132) 이로써 그가 三國史記 를 통하여 儒敎的 歷史意識을 가지고 儒敎 的 歷史叙述의 체제를 빌어 高麗社會에다 自國의 歷史를 재구성 하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둘째로는 그가 中國의 正史體를 모범으로 하되 中國史에 대응되는 三國史를 재구상하여 本紀를 세우고 三國의 本紀를 並立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三國史記에서 本紀를 세운 것은 中國史와 의 대등성을 표현한 것일 뿐더러 그것이 儒敎的 修史體例나 正名과 正統을 생명으로 하는 유교적인 修史精神에 비추어 볼 때 本紀와 世 家 및 列傳으로 구분되는 正史의 체재를 취했다는 것은 宋 金對立 이란 국제정세나 撰者의 自意識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高麗史 가 本紀를 못세우고 世 家를 둔 것을 생각하면 이해될 수 있을 뿐더러 이런 점에서 三國 史記 의 本紀는 그 撰者나 서술된 시대가 儒敎史觀에 입각하고 있 것이었다. 그것은 朝鮮朝에서 된 을수록 그 주체적 의도는 더욱 큰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133) 세째로는 儒敎的 歷史觀이 先王主義와 德治主義에 바탕한 鑑戒的 인 것이었고 論賛에서는 자주 春秋 의 大義와 資治通鑑 이나 春秋論 이 援用되었으며 國家觀에서도 新羅의 三寶說을 비판하여 孟子의 土地人民社稷의 三寶說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歐陽修의 다.134) 이는 그가 전통적이며 신앙적이던 新羅의 古代史觀에 대신하 131) 上掲 進三國史表 132) 上掲 進三國史表 133) 前掲 高柄颂 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敍述 에서는 三國史記에서 本紀 를 세운 것을 가지고 東國通鑑이나 高麗史의 경우와 비교함으로써 그에 대한 事大史觀을 재비판하고 있다. 134) 三國史記 新羅本紀 참조

266 2. 儒學의 性格 여 儒敎史觀의 합리성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가 書는 秦에서 焚燼되고 道는 漢에서 雜되고 虛說은 晋宋에서 盛하고 聲律 판한 것이나 宋代 儒學을 宋에 이르러서 다시 斯文이 떨치니 百 年의 禮樂이 다시 회복되었다 고 한 바와 같이 宋代儒學이 古 文은 隋唐에서 불어났다 고 한 바와 같이 儒敎的 道統의 단절을 비 135) 代性을 비판하며 道統을 밝혔던 斯文意識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136) 이는 그의 역사관이 지닌 反古代性이며 그 위에서 자각된 현실의식 이었고 이를 토대로 하여 자국의 古代史를 재건하려던 것이었으며 宋學과의 平行性을 말하는 것이었다고도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三國史記가 후세에 비판되고 있는 바, 첫 째로 그의 儒敎史觀이 지닌 事大性의 문제는 그것이 仁宗代의 儒 敎的 文運이나 시대적 문화감각이었을지언정 進三國史表에서와 같이 그 자신은 儒敎史觀에 입각한 自國史를 재구성 하는 데에 主 眼이 있던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高麗史 에서와 같은 世 家가 아닌 本紀를 세웠던 것이다. 또한 그 事大性의 논거로서 舊三國史記 를 비롯한 전통적 사료 나 東明王說話 같은 전통적 역사사실을 歪曲 내지는 湮滅했다는 비 난은 史科의 취택이 본래 史家 고유의 권한에 속한다는 修史原理上 에서 뿐만 아니라 儒敎的 合理主義로 볼 때에도 說話的이거나 宗敎 的인 古代的 事迹이 비판됐던 것은 당연한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기 三國史記 와 대칭되어 주체성이 평가되고 古代史 料가 保全되었다는 三國遺事 와 대비하는 경우에도 正史로서의 三國史記 와 說話的인 遺事에 불과한 三國遺事 의 본질적 차이 도한 것이었다. 가 전제된 위에서의 대비가 바람직한 것이다. 그가 생존했던 仁宗代 135) 이상은 前揭 進三國史表에서 引用 136) 宋學은 孟子歿而斯道亡矣라는 道統의 斷絕意識과 孔孟의 原始儒道를 宋儒 와 연결시켰던 儒敎復興意識에서 出發되고 있다

267 Ⅱ. 儒敎의 發達 에는 李資謙의 亂이나 妙淸의 亂을 체험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논 거의 태반이 迷信的이며 종교적인 전통적 思惟에 바탕했던만큼 이를 討平했던 金富軾에 있어서는 이러한 古代的 체질의 극복이야말로 그 의 修史動機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며 그만큼 그에게는 儒敎史觀의 강행이 필요한 것으로 자각되었을 것이다. 또한 史料湮滅의 책임은 그의 監修國史로서의 직권의 한계나 官撰的 修史가 지닌 한정된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는 오히려 가능 한 史料涉獵을 하였으며 인멸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儒敎史觀이 나 儒敎的 合理性에 비추어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取捨한 史料가 오늘 날에도 지닐 수 있는 信憑性의 與否는 오히려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三國史記 나 金富軾의 歷史意識은 적어도 仁宗 代의 儒風이나 文風이 바탕하고 있는 바, 高麗中期社會가 겪고 있던 왕권의 위협과 전통적 사유가 파생한 안정에의 파괴성이란 현실성 을 인식한 위에서 생성된 것이며 국제적으로 볼 때에는 宋 金대립 에서 오는 華夷意識의 高潮나 宋代의 斯文意識이 불러일으킨 바, 宋文化와의 연계성을 자각한 위에서의 自文化의 高揚을 위한 자국 역사의 재구성을 의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러한 국제감각이나 儒敎的 文化意識 및 高麗中期社會가 지향하던 文治的인 시대성을 생각할 때 그의 역사는 이런 시대적 통념을 修 史를 통하여 반영한 것이었다. 역사는 항상 改撰되어야 한다는 상 대성을 생각한다면 그를 責하는 史料湮滅이나 보전은 그의 책임밖 의 일이며 오히려 그를 탓하는 후세의 史評이 더욱 문제되는 것이 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그의 修史는 欠缺이 있다고 하더라도 儒 敎史觀에 입각한 민족사의 재구성이나 儒敎的 民族史觀의 정립이라 는 점에서는 그나름대로의 成就點이 있는 것이다 三國史記 는 高

268 2. 儒學의 性格 麗中期, 특히 睿 仁宗代의 시대감각이나 문화지향을 잘 반영한 것 이었고 그러한 노력의 성과였음에는 틀림이 없다고 할 것이다. (4) 高麗前期 儒學의 性格137) 太祖 王建에서 文治的인 儒敎主義가 成型되어 光宗의 제도화, 및 成宗代의 禮敎的 질서화 및 그 이념화에 의하여 高麗儒學으로 서 성립되었던 高麗前期의 儒學은 文宗代의 私學의 발흥과 睿 仁宗代의 官學復興과 經學講論 및 文風의 발달을 통하여 儒敎文 化로서 일단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高麗前期 儒學은 국내적으로는 豪族聯合의 형태에서 성립된 集權的 官僚體制나 家 族制에 바탕한 高麗社會의 진전이나 합리적 의식의 성장에 대응 된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唐末 五代에서 宋에 걸친 국제적 정세 변동이나 宋代社會 특히 그 集權的 官僚制와 心性學的 宋學형성 기와도 평행 되면서 진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高麗前期의 儒學이 지닌 역사적 성격은 첫째로 사상적 이율성이 지속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太祖訓要에서 현실 로서의 佛 道 및 전통적 종교와 이상으로서의 儒敎的 文治의 지 향을 보았고 이는 光宗의 科擧制실시에서는 雙冀와 王融을 중심으 로 했던 儒臣의 두계통을 중심으로 한 위에서 集權化를 도모한 것 이나 成宗代의 崔承老의 時務策에 나타난 儒 佛並立論이나 大覺 國師의 三敎同歸論에서와 같이 모두 전통적 현실과 문치적 이념, 종교적 신앙과 예교적 질서등에서 나타난 二律的 構造性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華夷論的 문화의식과 전통적 복고의식의 137) 이에 관한 要旨와 事例는 尹南漢 前揭書 高麗 前期思想의 二律性 pp 및 儒敎主義의 文化的 機能 pp 참조

269 Ⅱ. 儒敎의 發達 대립이나 儒 佛의 並立 내지는 合一的 方向 등이 모두 이율적 구 조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儒 佛兩敎의 이율성의 공존은 중기 이투에 오면 점차 비판되어 대립성을 露呈 시킨 끝에 麗末에는 程朱的 儒學體制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高麗儒學이 지닌 특성은 文治的 지향과 官僚的 성격 이었던 것이다. 역시 太祖의 儒臣들을 중심한 文治의 指向과 光宗 의 集權策의 일환인 科擧制 및 이와 표리가 된 儒化政策이나 成宗 代에는 慶州系 儒臣과 교체되기 시작했을 새로운 儒臣官僚들에 의하여 儒敎的 王道政治와 禮敎秩序를 정립한 데서 고려유학의 관료성은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고 이는 文宗代의 崔冲의 私學이 나 睿 仁宗代의 官學復興과 經學講論의 성황에서도 볼 수 있었 다. 더우기 왕실과 문인관료 및 儒敎文化의 보급이 일체화된 데서 는 高麗前期 儒學은 처음부터 高麗王朝의 집권화에 대응된 관료 성을 떠나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세째로 이러한 官僚性은 이들 文人官僚가 곧 儒臣이었고 그 이 념적 기반이 古文經學이었다고 할 수 있다. 書經의 勸讀에서 출발 한 高麗儒學의 尊經復古性은 五經 九經 三史 등 經史교육에 중 점을 두었던 것이나 經學講論의 성황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는 麗 末에는 四書五經的 程朱學으로 귀결되었거니와 어느 경우이든 고 려 儒學의 일관된 중심은 古文經學이었고 程朱學의 受容前에는 그 訓話的 학풍이 主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네째로는 이러한 尊經的 儒風은 唐 宋間의 儒風변화를 전제로 할 때 義理 心性化의 방향도 예상되는 바, 여기서는 고려 유학이 宋代儒學과도 평행되는 일면을 볼 수 있는 동시에 唐儒學 이나 문인귀족의 翰墨風이 발달한 것은 訓話學風의 무사상성 곧 貴族風이 그 만큼 지속된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前期儒學의

270 2. 儒學의 性格 德行尊重과 心性化傾向은 崔冲의 九齋學堂이나 睿 仁宗代의 儒風 에서 感知되는 바, 이는 新時代的 面을 보이는 것 이면서도 이와 평행되던 文風의 활기에서는 귀족사회의 翰墨風이 향락되던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런 가운데 宋學과도 관련된 唐宋八大家의 古文風이 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貴族的 翰墨風流는 毅宗代의 享樂風 에서 절정에 달하여 武人亂을 유발하였거니와 여기서 고려유학은 그 古代性을 해소하는 전기가 되었으며 崔冲 이래의 心性化 경향은 오히려 후속하는 程朱學의 수용조건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끝으로 高麗前期 儒學이 지닌 文化意識과 文化的 機能의 재평 가 문제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高麗前期의 儒敎主義의 첫 기능은 첫째로 高麗王朝 의 集權體制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고 高麗社會 의 윤리적 질서의식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忠 孝와 같 은 儒敎意識에 바탕한 先王的 王道主義와 文治主義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역대왕의 佛敎信仰이나 風水 陰陽 圖讖思想의 유 행 등으로 항상 전통적 禮俗이나 종교의식 때문에 兩者間의 갈등 을 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둘째로는 高麗儒學이 이들 前代的 종교나 미신적 風 水 圖讖說을 비판하면서 儒敎的 합리주의를 세운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光宗이 古代的 禳災方法을 대신하여 修德을 강조한 것이 나 文宗代의 李顗가 風水 圖讖說의 虛誕性을 지적한 것이나 妙 淸亂에서의 前代的 風水圖讖說에 근거한 西京遷都論이나 三十六 國朝貢說 등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교적 합리주의의 발 현이었고 유교문화가 지닌 肯定的 機能이었다고 할 것이다. 세째로 이런 儒敎主義的 文化觀이 지닌 主體意識의 성장이었다. 이는 華夷를 구별하는 문화의식이 對遼 金 蒙의 抗爭意識으로 연결된 것이었고 이것은 忠君愛國하는 고려인의 주체의식이 되었

271 Ⅱ. 儒敎의 發達 으며 李資謙의 亂을 수습한 것도 그들의 儒敎的 忠義觀이요 君臣 의 名分論이었던 것이다. 네째로는 儒敎主義가 지닌 慕華事大的 기능의 재평가 문제이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麗宋의 정치 경제 문화적 동질성에 바탕한 것이며 이런 기반위에서 전개된 바, 先進文化에의 동화 내지는 지 향성이고 儒敎的 天下意識下에서의 주체성의 자각이었다고 할 것 이다. 그런 만큼 華夷論에서와 같이 오히려 민족적 주체적 기능이 발휘될 수 있었고 金富軾에서와 같이 自國歷史의 재구성을 자각 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표현 될 수 있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현실적 추이에 대응하면서 前代的 思惟를 극복할 수 있었 고 古代的 宗敎意識에서 벗어나서 보다 合理的인 倫理的 秩序意 識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이념 화하고 체계화하여 家族制的 倫理를 國民的 倫理秩序을 체계화하 고 그러므로써 逸樂的 貴族文化나 寺院經濟에 바탕한 佛敎文化의 堕落相을 극복한 것이 麗末의 程朱學의 수용이었고 麗朝의 交替 였던 것이다. 따라서 儒敎 내지는 儒學은 그것이 派生하는 慕華事 大性에 先行되어서 그 倫理的 秩序意識과 價値觀이 前代的 宗敎 的秩序나 意識을 극복하면서 新時代로 전진시킨데서 먼저 그 機 能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高麗儒學의 歷史的 機能과 位置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尹南漢

272 Ⅲ. 風水地理說 1. 風水地理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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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1. 風水地理說 1. 風水地理說 (1) 新羅末의 形勢와 道詵說 가뭄과 홍수 또는 天體에서 일어나는 까닭 모를 변화를, 하늘이 인간세계에 내리신 노여움을 미리 알리는 것으로 믿었던 고대인 의 思惟나 또는 이 사유를 倫理的 가치로까지 승화시킨 儒敎的인 인식에서 본다면, 統一新羅의 말기는 확실히 風水地理說 같은 신 비하고 미신적인 잡설이 나돌기에 알맞은 시대였다. 즉 三國遺事에 보이는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戶 라는 新羅 전성 기의 서울 金城의 戶數는 誤記 또는 과장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이른바 三十五金入宅 으로 표현되는 金城의 대표적 권력층을 비롯한 新羅중앙귀족의 영화도 憲德王부터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뒤덮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 까닭이다. 三國史記 卷 10 新羅本紀 憲德王 8년(816) 춘정월조에 西邊州郡 이 크게 굶주려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다 는 불안한 기사를 비롯하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려 바다를 건너 唐의 淅東지방까지 먹 을 것을 찾아 171인이 떠났다든지, 또 자손을 팔아서 목숨을 이었 고,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는 등의 비참한 三國史記 여 新羅本紀에 보이는 기사들은, 퇴색의 길을 밟는 新羅王國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憲康王시대의 新羅 서 民屋이 서로 이어져 노래와 악기소리가 끊이지 않고 초가 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밥짓는 데도 숯을 쓰고 장작을 쓰지 않 았다 는 태평성세 같은 겉모습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나 이와 같은 울이 현상은 왕조가 누렸던 황금기의 여세를 빌린 외관상의 번영이며, 한

275 Ⅲ. 風水地理說 낱 떨어지는 햇빛의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惠恭王부터 비롯한 귀족의 발호, 당쟁의 풍습과 왕위 쟁탈 을 중심으로 음모 반역 골육상잔의 난은 新羅社會의 구성을 뒷 받침하던 骨品貴族制의 동요였던 것이나 憲德王때부터 주로 百濟 의 옛땅에서 일어난 경제불안은 대중의 이해와 직결되고 있었다는 데서 그 수습이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예로 金憲昌이 憲德王 14년에 일으킨 이른바 長安國의 난이 라든지 憲昌의 아들 梵文이 동왕 17년에 일으킨 모반 같은 것은 그것이 정치 권력투쟁이었기에 간단히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이나, 張寶皐의 文聖王 옹립 같은 것은 그의 미천한 신분으로 보아 엄격 한 骨品貴族制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 니, 西南海岸을 기반으로 한 신흥의 해상 상업자본을 무기로 하였 다는 점에서 그 수습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로 수도권내에 기반을 두고 있는 骨品貴族 制의 붕괴와 귀족계층만이 독점하던 정치권력이 점차 대중과 밀 접한 이해관계를 지닌 지방실력자에게 분산되어가는 뚜렷한 예인 것이며, 일반국민의 경제적인 파탄은 이제 제왕과 이를 둘러싼 귀 족의 신분적인 권위로써는 막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던 것을 보 여 주고 있었다. 新羅말기의 이와 같은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태평 성세를 누렸던 것으로 알려졌던 憲康王 다음대인 定康王의 즉위 직 國西가 한발지고 또 흉년이 었다 는 기사에 이어 眞聖王 3년(889)에는 국내의 州와 郡이 후부터였다. 즉 定康王 즉위년 8월의 貢賦를 바치지 않아 府庫가 虛竭하여 國用이 궁핍하여 왕이 사람을 보내어 독촉하니 도적이 들끓었다 는 三國史記의 기사에 이르러 서는 다시 그 옛날의 전성기를 되찾을 길이 없어져가는 新羅末의

276 1. 風水地理說 서글픈 모습이 뚜렷히 나타나는 것이다. 眞聖王 때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된 동란은 군웅이 서로 그 세력 을 겨루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으로 들어가 後三國의 출현을 보게 되었던 것이나 극심하였던 韓半島내의 정치혼란에서 뚜렷이 나타 나게 된 것이 바로 新羅末의 승려 道詵을 宗祖로 한 것으로 전하 여져 금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이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 는 風水地理說이다.1) (2) 風水地理說과 道詵 여기서 설명의 편의상 먼저 風水地理說의 본질을 대략 살펴보 면, 都邑 宮宅 陵墓에 알맞은 땅을 점치는 地相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람의 형모와 골격을 보아 그 사람의 성격 과 길흉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山水의 형세를 살펴서 그 신비적인 설명을 붙여 인간에 미치는 길흉과 화복을 설명하는 것이다. 山河襟帶 山水同抱 등의 山河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였을 뿐 아니라 風氣密集 같은 산하가 인간 생활에 영향 미치는 원동력으로서 陰陽五行에서의 氣 의 작용을 들고 있다. 음양의 氣 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원리로서 하늘과 風水地理說에서 중요 조건은 땅 사이에 고루 있어 여러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나 그 생성한 음양의 氣 는 항상 땅속을 흘러 지상에서 여러가지 변화를 일으 킨다는 것이다. 원래 山河襟帶 山水同抱 같은 地勢의 관찰은 옛부터 정치 군사의 중추인 도읍 선정이나 군사적인 구축물에 적당한 지리조건을 1) 이상의 敍述은 李龍範 참조 處容說謎의 一考察, 震檀學報 第32號 pp

277 Ⅲ. 風水地理說 가려내는 소박한 人文地理學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으며 漢 高祖 의 長安 奠都나 또 元帝 때에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던 翼奉의 의견 같은 것에서는 신비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魏晋南北朝시대에 들어서부터 郭璞이 저술하였다는 錦弗經을 비롯하여 그 방면의 권위자로서 梁의 術僧 寶誌 術士 陶弘景이 그 이론의 전개에 앞장서 일층 신비화되고 마침내 隋의 蘇吉의 宅經 (8卷) 葬經(6卷)이 저술되었던 것으로 소박한 인문지리학이 극 도의 정치혼란과 世態의 불안에 따라 陰陽五行의 形而上學的인 이론과 이 밖에 천문 방위 등의 신비한 사유방식이 첨부되어 風 水地理說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風水地理說이 儒敎가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던 中國사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 던 것은 유교윤리의 중요한 德目인 孝 祭祀 와 밀착되어 발달하였던 까닭이다. 新羅에 風水地理說이 전래된 것은 元聖王이 이미 火葬과 陵墓에 관한 遺命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는 慶州 崇福寺의 비문으로 보아 통 일 이후 唐과의 문화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들어오게 되었던 것으로 믿어지며, 결코 道詵에 의하여 비로소 전래된 것은 아닌 것이다. 道詵이 우리 나라 風水地理說의 宗祖로 거의 신앙의 대상으로 까지 존숭되었던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俗性 金氏, 新羅 興德王 2년(827)에 全羅道 靈巖에서 출생하여 20세 에 桐裏山祖師 惠徹의 가르침을 받았고 全羅道 曦陽縣 白雞 山 玉龍寺에서 72세로 사망하였다는 道詵의 명성은, 그것이 결코 그만이 지니고 있었던 심오한 불교학의 업적이라든지 또는 남달리 뛰어난 덕행이나 세속을 벗어난 행동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新羅의 종말과 開京에서의 王建에 의한 易姓革命을 예언하였기에

278 1. 風水地理說 高麗王朝를 통하여 두터운 추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일국의 흥망과 새시대의 전개를 예언하여 그것이 적중하였을 때에는 으례 그 예언자는 신비화되어 그 행적은 후세의 附會假作 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道詵의 경우에 있어서는 高麗 太祖가 朴述 希를 통하여 남겼다는 이른바 十訓要 의 제 2항에 여러 寺院 은 모두 道詵의 山水의 順逆을 推占하고 세운 것이다. 道詵이 말 하기를 내가 점쳐 정한 것이 아닌 곳에 멋대로 더 세우면 즉 地德 을 깎아내어 祚業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朕이 크게 걱정 하는 것은 후세의 國公侯 后妃 朝臣이 제각기 願堂을 칭하고 혹은 더 세우는 것이다. 新羅末에 다투어 浮屠를 만들이 地德을 衰損시켜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그 제 5항에 風水地理說로서 西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시 제 8항에서는 車峴 이남의 公州江外의 인물 기용 을 山形地勢로써 삼가도록 하였다. 이렇게 王建은 그가 바라던 정 치의도를 道詵의 설과 또 道詵의 설을 원천으로 하였던 風水地理 說로써 합리화하였던 까닭에 그 附會假作은 정치변화에 따라 얼 마든지 이루어질 가능성이 짙은 것이었다. 이제 후세에서 人爲的으로 신비화되어 그의 참 모습조차 가리워 진 느낌이 많은 道詵의 風水地理說의 그 본의를 되살리기 위하여 먼저 그에 관한 수많은 문헌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만을 간추려 본 다면, 이른바 太祖의 十訓要 를 비롯하여 高麗 仁宗이 道詵에게 玉 龍寺 先覺國師의 諡를 加封할 때의 敎書 및 官誥, 毅宗( ) 때에 이루어진 金寬毅의 編年通錄, 毅宗 4년 왕명으로 崔惟淸 이 찬문한 全羅道 曦陽縣 白雞山 玉龍寺의 先覺國師碑 등의 高麗 時代에 이루어진 것뿐 아니라 다시 釋王寺所傳 道詵傳 道岬 寺所傳 一行禪師傳鉢錄 등 朝鮮王朝時代의 것도 헤아릴 수 없을

279 Ⅲ. 風水地理說 만큼 많다. 따라서 여기서 道詵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에서 비교적 신빙성 있는 것을 골라 그 說의 참뜻을 찾아볼 수밖에 없으니 우선 위에 나열한 여러 자료에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仁宗의 敎書에 顯廟는 禪師로서 追崇하였고 肅祖는 王師의 貴號를 加하였으 며 이제(즉 仁宗)는 玉龍寺 先覺國師告身一通으로 臨하였다 고 하는 바와 같이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禪師에서 王師로 다시 仁宗에 이르러 國師의 諡를 받아 그 존숭이 더 깊어가는 것에서 風水地理說에 대한 高麗時代의 기호와 그 체계의 전개에 대한 일 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그 존숭이 두터워진 道詵을 통 하여 高麗時代의 風水地理說도 또 이에 비례하여 잡다한 요소가 첨부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후세의 잡다한 신비적 요소가 첨부되어 모두 道詵의 風水地理說 로서 附會假作된 것에서 그의 참뜻을 찾아내는데 비교적 믿을 수 있는 것으로, 그가 음양술에 능할 뿐 아니라 大地를 남음없이 정 밀히 관찰하고 혁명이 일어나는 때를 알았고 반드시 天命을 받드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라 하여 드디어 先祖의 王氏의 室을 가리켜 天 命을 받드는 聖人이 출생할 것이라 하고, 한 卷의 書를 아직 출생 하지 않았던 君子에게 미리 바쳐 혁명이 이루어지는 때에 대비하였 다 는 뜻의 仁宗의 官誥文과 金寬毅의 編年通錄을 들 수 있다. 仁宗의 官誥에는 道詵이 음양에 밝았으나 그의 風水地理說은 전 국을 고루 살펴 지세면에서 왕국의 흥망을 예언하였다는 것뿐이며 그리 신비적인 요소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나, 編年通錄에 는 唐에서 一行의 地理法을 얻어 귀국하여 白頭山 鵠嶺의 지형을 살피고 松嶽南에 새 집을 지으려는 世祖(王建의 父)에게 王建의 탄

280 1. 風水地理說 생과 새 왕조의 건국을 예언하였다는 것으로 되어 道詵의 風水地理 說을 唐僧 一行과 관련짓고 있다. 仁宗의 官誥나 編年通錄에 보이는 韓國風水地理說의 宗祖로 되 어 있는 道詵의 행적은 高麗王朝로 보아 고승의 예언을 빌어 혁명 을 합리화하는 이점이 있었고 다시 왕실 자체의 남다른 존엄성마 저 첨가시키는 소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기에 그를 師僧으로 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나 문제는 道詵의 풍수지리설의 원류 를 一行에 두었다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編年通錄뿐 아니라 龍飛御天歌(第16章), 東國興地勝覽(全羅道 靈巖條) 등 후세의 官撰書에 道詵의 풍수지리설의 모형을 교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 一行은 中國佛敎에서 密敎의 개척자로 널리 알 려져 있을 뿐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공적은 영원히 남을 만한 것이 있는 玄宗 때의 승려였다. 즉 계산에 있어서는 西洋보다 앞섰던 당시까지의 中國數學과 엄밀한 천체관측의 성과를 토대로 한 여러 천문학설을 망라하여 전통적인 中國天文曆學의 모형을 대성한 그의 大衍曆부터가 전문 가조차 좀체로 풀기 어려운 과학분야인 것이다. 이와 같이 中國科學史에서 제일급에 속하는 一行이 뜻하지 않 게 우리에게 신비적인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은 唐書 天文 志에 보이는 그의 地理說과 이 지리설을 모형으로 하였다는 道詵 이 후세에 너무도 신비화되 었던 까닭이다. 唐書 天文志에 보이는 그의 지리설이라고 하는 것은 唐 玄宗 당 用武의 地, 黃河 중하류지역을 用文의 地, 그리고 揚子江 유역을 貨殖의 地 로 밝히고 있다. 시의 中國을 3부로 크게 나누어 四川 甘肅 陕西 山西 지방을 이와 같은 각지역에 따르는 특수성 설명은 唐의 무력면의 기둥

281 Ⅲ. 風水地理說 이었던 府兵制가 가장 발달한 곳이 一行이 用武의 地 로 지적 한 陕西 山西 지방일 뿐 아니라 南北朝시대 이래 楊子江 유역의 산업개발은 玄宗시대를 전후하여 唐제국의 경제중심지가 이곳으 貨殖의 地 로 표현하기에 어울리는 지역이었다. 또 黄河 중하류가 用文의 地 로 설명된 것은 中國 고대문화 로 옮겨져 가 黃河 유역을 온상지로 하여 배양되었던 문화전통에 비추어 보 아도 一行이 지적한 中國의 지역적인 특수성은 玄宗 당시의 실정 을 巨視的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唐書 文苑傳에 柳沖의 士族階級維持說에서 당시의 中國을 4부로 크게 나누어 그 습관과 기질의 특징을 설명 한 것을 보아도 中國전역을 巨視的인 각도에서 설명하여 보려는 경향이 唐代부터 나타난 새로운 경향임을 알 수 있으나 一行의 이 지리설이 당시 일반에게 설득력을 가져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은 全天을 12로 나누고 지상의 12州와 맞추어 나눠진 天上의 구획에서 일어난 별들의 變異에 따라 이에 해당하는 州國 의 길흉을 미리 점치는 이른바 12分野說로서 합리화되어 있는 까 닭이었다. 따라서 道詵의 風水地理說이 唐僧 一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 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一行의 엄밀한 天文曆法의 지식이 아니고 중국천문학의 지식을 빌어 설명한 인문지리학 또는 地政學의 싹 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道詵의 풍수지리설이 仁宗의 官誥나, 金寬毅의 編年通錄에 그 신비적인 자취가 자상히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高麗史 世系에 인 용되어 있는 閔漬의 編年 에도 王建의 청에 따라 출전하여 陣 地를 두어 天時의 법을 이용할 것을 알렸던 것으로 되어 있고 玉龍 寺 先覺國師碑에는 (道詵)師가 전한 바의 음양설 몇 편이 세상에

282 1. 風水地理說 많이 나돌아 있으나 후세에 지리를 말하는 자는 모두 그를 원천으 로 하고 있다 는 것으로 보아 道詵의 풍수지리설은 12分野說로써 합리화시킨 一行의 설을 밟아 이것이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의 모형 이 되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나 나머지 의문은 一行과 道詵의 교류 관계이다. 즉 編年通錄을 비롯하여 그뒤의 대부분의 기록이 모두 一行의 풍수지리설을 道詵이 직접 배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一行은 唐 玄 宗 때의 사람으로서 道詵보다 약 100년이나 앞의 승려이다. 따라 서 道詵이 一行의 風水地理說을 직접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道詵과 一行을 관련시킬 수 있는 길은 오로지 道詵의 스승 인 惠徹이 唐에 건너가 당시 그곳에서 성행되던 一行의 설을 얻어 돌아온 것을 道詵이 다시 그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간접적인 관계 밖에는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風水地理說은 엄밀히 말하면 道詵이 宗祖 가 될 수는 없고 이 이론을 실험에 옮겨 때에 맞추어서 高麗王室 의 개국자 일족에게 예언하여 두터운 존숭을 받았다는 것에 지나 지 않는다. 이제 道詵의 풍수지리설의 원천이었다고 하는 一行의 지리설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고 다시 新羅末 高麗初의 韓半島 형세를 살펴 보면 몇 가지의 흥미있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新羅末期인 憲德王 이후 급격히 나타난 지방민의 굶주림과 반 란, 도적무리의 난동, 국고의 고갈 같은 불안한 현상은 그 이유가 결코 骨品貴族制의 동요 같은 사회의 진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인 면에서 풀이될 수 있었다. 즉 統一 전의 新羅가 능히 高句麗 百濟와 겨누어 그 세력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은 慶州와 蔚 山 盈德 등의 鐵생산과 이 풍부한 철을 사용한 무기 및 농구의

283 Ⅲ. 風水地理說 개량으로 군사력의 증강과 병행한 농업생산의 급속한 증가에 있 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한편 智證王에서 眞平王에 걸쳐 이룩한 水陸交通의 개선은 新 羅王國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었던 慶州 및 蔚山과 각 지방을 연결 하는 동맥선의 정비라고 볼 수 있어 慶州 蔚山 일대를 심장부로 하던 新羅의 정치 경제체제가 통일 이전의 小新羅國에 있어서는 과히 흔들릴 우려는 없었다. 통일 이전의 小新羅國의 慶州 蔚山 일대를 一行의 표현을 빈다면 用文 用武 貨殖이 겹친 지역이었 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통일 후의 大新羅國에 있어서는 언제까지나 慶州 蔚山 중심의 정치 경제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는 일이다. 韓半島의 東南部를 통치하는 小王國이 아니고 옛 百濟의 전영 토와 高句麗영토에서 大同江 이남의 전역을 차지하여 영토나 인 구에 있어서 거의 韓半島 전역을 망라한 大王國으로서 新羅는 이 에 대응하는 행정과 정치면의 큰 전환이 마련되었어야 하였다. 이러한 점은 神文王代에 小五京을 두어 六徒眞骨을 분산 거주 케 하는 등의 姑息的인 시책이 있었던 것을 보면 新羅의 위정자들 도 변모하여 가는 新羅경제의 추세와 행정면의 개혁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을 인식 못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나, 慶州 至上의 폐쇄적 사회를 대담히 청산할 결단력이 없었던 新羅귀족에게 해결의 근 본책을 바랄 수는 없었다. 통일 후의 大新羅王國이 그 행정력이 미치는 전영토를 도마 위에 놓아 새로운 통치체제를 세우지 못하였던 반면, 慶州의 급속도적인 팽창과 唐文物의 전래는 이 首都의 巨體를 유지하기 위한 많은 영양 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며, 蔚山을 門戶로 한 생산적인 慶州는 사치 성 물자의 막대한 소비도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른바 三十五

284 1. 風水地理說 金入宅 을 비롯한 慶州귀족의 영화는 慶州 蔚山 일대가 지녔던 貨殖 用武 의 地로서의 특성을 점차 상실케 하였을 뿐 아니라 佛敎의 독신으로 佛像梵鐘 등에 소비되는 黃銅金 그 옛날의 鐵의 양도 적지 않아 日本金의 수입 같은 불건전한 현상이 보이게 되었다. 통일 이후의 이와 같은 新羅 서울 慶州의 기형적인 팽창과 왕실 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의 낭비를 부담하여야 하는 지방민의 고통 은 극심한 것이었던 것이며 지방민의 굶주림, 도적무리의 횡행, 집단적 반란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新羅末에 이르러서는 그 경 제의 받침기둥이었던 까닭에, 팽창하는 慶州에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하여야 하였던 蔚山에서 朴允雄 같은 豪族이 재빨리 왕실을 정점으로 한 慶州貴族에 반기를 들었던 것에서도 風水地理說의 용어를 빈다면 地氣 는 이미 慶州 중심의 新羅에서 다른 곳으 로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에 비하면 開城지방을 중심으로 이미 先祖때부터 西海의 해 상 무역을 개척하며 착실한 성장과정을 밟고 있었던 高麗王室인 王氏의 생리는 확실히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즉 開城지방은 해상으로 楊子江하류 및 山東半島를 통하여 中 國 대륙의 충분한 문물을 흡수하는 데 알맞을 뿐 아니라 陸路로 湖南과 嶺南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으로 鐵原을 거처 東北으로 咸鏡, 東南으로는 江原과 嶺南 그리고 西北으로는 平壤과 이어져 서 韓半島 전역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어울리는 이른바 地 氣 가 감도는 지역이었다. 이와같은 新羅末의 형세를 살펴보면 누구나 新羅王朝의 멸망과 高麗王朝의 혁명을 예언할 수 있는 것이었다. 一行의 風水地理說 을 배웠다는 道詵의 風水地理說이라고 하는 것은 날카롭고 巨視

285 Ⅲ. 風水地理說 的인 시대파악자로서의 그가 그의 견해를 12分野說 같은 점성적 인 中國의 천문학설로서 설득력을 가지게 하였던 것을 高麗 太祖 가 그의 혁명과 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선용하였을 뿐이었 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이 겨우 全羅道의 玉龍寺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뿐 아 니라 앞에서도 말한 바 顯宗이 禪師로 追崇할 때까지도 일반의 승 려에 비하여 남다른 대우를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에서도 高麗初에 있어서는 아직 그의 風水地理說이 당시 사회에서 큰 비 중을 차지하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道詵과 그의 風水地理說이 후세로 내려올수록 신비 성을 띠고 더 깊이 일반 생활에까지 파고들어가게 된 것은 圖讖思 想과 결부되어 불안한 世態롤 극복하는 秘術로 믿어지게 되었던 까닭이다. (3) 風水地理說의 變質 인문지리 또는 地政學的인 해석을 점성적인 천문학이라든지 陰 陽五行思想 같은 形而上學的인 것으로 합리화한 풍수지리설에 큰 변질을 가져 오게한 圖讖思想이 韓國 및 中國에 있어서 정치, 사 회의 대전환기에 끼친 바 영향은 실로 컸었다. 원래 圖讖이라고 하는 것은 圖 와 讖 의 連稱語이며 신의 말씀, 하느님의 가르침, 瑞異 같은 것으로서 장래 닥쳐올 吉凶禍福 을 예언 또는 약속하는 신비적이며 미신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圖는 儒敎의 經典에 자주 나오는 河圖와 같은 것이며 즉 八卦로 서 이는 건국신화시대인 伏義시대에 河水에서 龍馬가 나와 그 등 에 그려진 紋을 본받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 河圖에 대하

286 1. 風水地理說 여 역시 신화시대의 군주 禹시대에 洛水에서 神龜가 나와 그 등껍 데기에 排列된 數類에 의하여 이루어진 洛書가 전하여 있다. 이 河圖와 洛書는 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을 이룩하고, 鳳 凰 麒麟 등과 더불어 龍과 龜를 신비한 靈驗을 가진 생물로 믿어 오던 고대중국사회에서 만들어진 전설에 지나지 않은 것이나, 宋 의 儒學者들에 의하여 이 전설은 더 敷衍되어 易의 繋辭에 天地數로 구성된 55點의 奇偶黑白圖를 河圖의 형으로 憶斷하여 八卦를 이에 관련시키고 (위 그림 참조) 또 하늘의 중심에 자리잡아 우 주를 지배한다는 太一星을 비롯 한 九宮(星)을 풀이하는 術에서 유래된 45點의 黑白圖를 洛書의 紋이라고 하는 동시에 (옆 그림 참조) 여기에 洪範九畴를 관계짓 는 등의 여러 설이 나와 그 신비 성이 더 증대되었을 뿐 아니라 儒敎의 영향력으로 聖人王者가 나 타날 때에는 이러한 예고나 祥徵이 나타난다는 신앙이 거의 윤리 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던 느낌조차 보이는 것이었다. 畫가 실물을 그대로 옮기는 것과는 달라서 圖는 그것이 추상적인 함 축성으로 그 특징 條理 요령만을 표시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 여금 해석의 자유를 남겨 놓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문자나 부호 로 옮길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는 까닭에 이를 빌어 미래에 일어 날 사실의 숨겨진 徵候 前兆 信號 暗示로서의 의의를 가지기

287 Ⅲ. 風水地理說 에 알맞은 것이었다. 한편 讖 은 中國에서는 서기전 2세기에 지은 司馬遷의 史記 趙 世家에도 秦讖이라는 것이 보이는 바와 같이, 일찍부터 神託 또는 하늘의 啓示를 알리는 글귀로서 믿어져 讖言 讖書 讖記 讖錄 등의 이름으로 위에는 정치변혁에서 아래로는 일반의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이 미쳐 내려왔다. 讖 은 흔히 圖 와 구별없이 쓰이는 경우가 많아 圖讖 이 라는 連用語를 쓰는 것이나, 구태어 그 차이점을 가려 낸다면 圖 의 본뜻이 符瑞標徵으로서의 뜻이 많음에 대하여 讖 에는 그보 이 다도 占驗, 예언의 뜻이 더 많으며 또 讖의 전달방식은 文學뿐 아니 라 口述로써 발표할 수 있지만 圖 는 문자나 기타의 함축성 있는 표식의 記寫가 필요하였던 것뿐이다. 한편 中國의 漢帝國이 유교를 政敎의 근본이념으로 삼아 그 제 도화에 따라 秦始皇의 무자비한 언론통일정책의 강행으로 사라졌 던 儒敎 經典이 다시 복원되는 작업이 활발하게 되면서부터는 孔 子의 손에서 이루어졌던 儒敎경전의 裏面에 숨어 있는 참뜻을 밝 힌다는 緯書 의 성행을 보게 되어 易緯書緯禮緯孝經緯 春秋緯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緯書는 과거에 관한 附會的인 전 설이 많은 것이나 圖讖 및 기타의 災異說에 의거하여 유교경전을 附會文飾한 까닭에 숙명적인 미신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緯 는 圖 나 讖 과 밀착되어 圖緯 讖緯 또 는 緯圖 緯讖 이라는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하게 되었던 것이며 緯書 중 에는 星緯候緯같이 천체의 이변현상이나 또 災異에 관한 따라서 것까지 나타나 신비적이며 그 미신적 요소는 더 精彩를 띠게 되었다. 前漢末의 높은 유교적인 교양으로 민심을 얻었던 王莽이 前漢을 찬탈하는 데 있어 이 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王莾

288 1. 風水地理說 이 세운 新 을 쓰러뜨리는 데 있어서 前漢의 황족인 劉秀는 또 劉氏 부흥의 결심을 당시 일반에 성행하던 讖記와 특히 李通 등이 보여준 圖讖에서 그 용기를 얻었던 사실 등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 와 정치사상과 혁명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발전하여 왔었 다. 中國과 같이 군주를 하늘의 뜻을 대신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天 子로 인식하고 하늘의 뜻에 거스르거나 또는 올바르지 못한 군주 는 그 책임을 느껴 그 자리를 덕있는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보는 곳에서는 사회나 경제혼란기에는 이와 같은 圖讖說이 으례 나오게 되는 것이며, 그 형식도 시대가 내려옴에 따 라 승려 道士 등에 의하여 더 교묘하고 복잡한 형식의 것이 보이 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圖讖이 언제 어떤 경위로 韓半岛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三國時代의 高句麗가 일찌기 南朝 梁의 승려도참 誌公符 라는 讖記를 남긴 寶誌에게 緜帽를 보 냈다는 것으로 보면 寶誌가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 文咨安藏 가로서 이른바 安原의 치세는 이미 圖讖思想에 영향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더 뚜렷한 것은 高句麗말기의 圖讖說 성행이었다. 즉 三國遺事(卷 3) 寶藏養老條에 보이는 道士 등이 讖을 만들어 平壤城을 龍堰堵 혹은 千年寶藏堵라고 찬미하는데, 南河龍을 呪殺 하였다는 신비한 귀절로써 더 권위를 가지게 하였을 뿐 아니라 道 士가 圖讖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高句麗의 이 와 같은 圖讖說의 성행은 唐에까지 알려져 唐書 高(句)麗傳에 보이 900년에 채 미치지 못하여 八十大將이 나 타나 이(高句麗)를 없앨 것이다 라는 것을 이끌어 (高句麗王室인) 는 이른바 高麗秘記에 高氏가 나라를 세운 漢代부터 지금 900년이 되며 (高句麗戰의 총사 령관인) 李勣은 ( 十八將軍 의 十八의 字順을 바꾸어) 그 나이가 八十

289 Ⅲ. 風水地理說 이었다 라고 한 것에서 中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흥망에 즈음하여 圖讖이 성행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한편 百濟와 新羅에 있어서는 통일전에 圖讖說이 전래한 자취 는 뚜렷치 않으나, 百濟에 있어서는 義慈王 20년에 거북등에 百濟 는 달의 둘레와 같고 新羅는 달이 새로 살아나는 것과 같다 는 글귀 가 있어 巫에게 물어 보았더니 달의 둘레와 같다는 것은 이미 滿 한 것이며 차(滿)면 즉 깎이게 된다. 달이 새로 살아난다는 것은 아직 둘레까지 차지 않았으니 차지 않은 것은 점점 차게 된다 고 하며 百濟의 멸망과 新羅의 통일을 예언하였다는 三國史記 百濟 義慈王紀의 기사가 믿을 수 있다면 이미 통일전에 百濟에도 讖說 이 전래된 것이 확실하나 믿기 어려운 기사이다. 그러나 新羅말에 唐나라 상인 王昌瑾이 생김새가 怪偉하고 한 居士로부터 얻은 古鏡에 새겨져 있었다 수염과 머리칼이 흰 는 147字의 讖記는2)또 新羅의 종말과 高麗王朝의 건국을 당시 성행하였던 讖說을 빌어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 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圖讖說은 三國時代에 이미 高句麗에 들어온 자취가 보였으나 統一新羅未에는 성행하여 風水地理說과 서로 혼합의 형 세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소박한 인문지리 또는 地政學 및 전쟁에 있어서의 효과적인 지 세 이용을 점성적 천문학이나 음양설로써 합리화하였던 風水地理 說은 圖讖說이 성행됨에 따라 그 신비적인 해석과 숙명론적인 예 고의 방식을 끌어서 설 득력을 더하게 되었다. 高麗初期에는 아직 풍수지리설이 圖讖說과 결합된 자취가 뚜렷 하지 않으나 道詵을 禪師로 追崇한 데 이어 顯宗에서 王師의 貴號 2) 高麗史 卷 1 世家太祖

290 1. 風水地理說 를 가하게 되는 肅宗 무렵부터 그 결합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4) 高麗初期의 風水圖讖說 高麗 太祖 王建이 그의 易姓革命을 당시 아직 全羅道의 이름없 는 승려였던 道詵의 風水地理說과 정체모를 唐나라 상인 王昌瑾 이 얻었다는 옛 거울의 讖文으로 합리화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風水說이나 讖文이 정치적으로 이용 될 수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당시의 민심이 이러한 황당하고 미신 적인 잡설에 쉽게 휩쓸릴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風水圖讖說 그 자체는 믿지 않고 순전히 정 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고만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정치적 목 적에 이용된 경 향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며 이와 같은 사례 는 앞서 설명한 王建의 이른바 十訓要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太祖의 遺敎로서 高麗王朝 500년의 政敎의 기본이념이 되어 야 할 十訓要의 제 2항에서 여러 寺院은 道詵이 山水의 順逆을 推占하여 지은 것이라 고 道詵을 風水說의 권위자로 추켜올리고 곧 新羅末의 예를 들어, 그 멸망의 원인이 다투어 浮屠를 만들어 地氣를 손상시킨 데 있으니 그렇지 않도록 하라는 요지의 遺敎부 터가 정치적 색채가 풍기는 것이었다. 新羅가 佛敎를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하여 국가에 대한 신념 을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높였던 것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深奧한 그 교리의 학습은 통치의식의 강 화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한 수준 높은 사고력을 배양하여 문화 전반에 꽃을 피게 하였으며, 윤리도덕에 있어서 가장 큰 德目으로

291 Ⅲ. 風水地理說 강조하는 자비심은 또 국민의 성품을 寬厚케 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또 현존하는 유물만 하더라도 惠恭王 7년에 마련된 그 우미 장 대함이 그 어느 나라에서도 겨눌 수 없는 奉德寺鐘을 비롯하여 그 예술의 우수함이 세계적 걸작으로 손꼽히는 石窟庵과 佛國寺의 石物 같은 문화재를 남겨 우리에게 민족의 긍지를 다시 한번 되새 겨 주는 문화재를 남기게 한 것도 新羅의 佛敎였다. 이와 같이 佛敎에서 얻는 소득이 컸던 것이나, 이 소득을 위하 여 이를 뒷받침하는 국민의 부담도 또 그 얻는 것에 비하여 엄청 난 것이 있었다. 新羅 말기의 국민이 큰 경제적인 곤궁에 빠진 것은 慶州의 중앙 귀족의 무궤도한 사치와 더불어 寺院의 濫設과 그 비대에 있었던 것이며, 국민이 외치는 굶주림의 호소와 流散 및 流民의 盜賊化와 반역에 있었던 것은 이미 王建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高麗 太祖로서는 그 통치에 있어서 佛敎의 이로운 점은 남겨두 어야 하겠으나 그 해독만은 제거하여야 하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 경이었을 것이며, 자기의 이와 같은 이상을 자손에까지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시 믿어지고 있던 風水地理說로써 그 뜻을 남기 는 것이 설득력이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제 2항에 이어 十訓要의 제 5항에 보이는 王建 스스로가 三韓 山川의 陰佑로서 後三國 통일의 큰 사업을 이룩한 것임을 밝히며 水勢가 거칠지 않고 順하며 우리나라 地脈의 根本이어 서 王統이 萬代까지 이어 나갈 곳이니 마땅히 1년의 四仲에는 西京이 왕이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現 平壞의 중요성을 극구 역설한 것 도 또 당시의 高麗정세와 맞추어 설명하여야 하겠다. 王氏의 터전을 잡았던 新羅時代의 松嶽郡 즉 開京은 그 위치가

292 1. 風水地理說 韓半島를 호령 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또 서해안을 통하여 중국대륙과 교류하는 데 편리하였을 뿐 아니라, 전후 좌우 로 산과 언덕으로 겹겹이 싸여 屏風같이 둘러쳐 그 山勢는 右에서 돌아 左方보다 右方이 높으며 여러 물줄기도 하나로 모여서 東南 方으로 흘러 멀리 東北에서 흘러오는 外水(臨津江)를 맞아들여 風水家의 이른바 藏風得水 內氣不洩 또는 外藏八風 內秘 上氣 의 이론이나 風水說上의 여러 조건에 들어맞는 지역이었다. 崔滋가 三都賦에서 開京의 지리를 風水學的으로 신비하게 간추 려 설명하고 있으며, 일찌기 高麗 仁宗 때에 찾아온 宋使 徐兢의 高麗圖經에도 開京의 風水를 극찬하였을 뿐 아니라3) 그 風水地理 에서의 평가는 朝鮮王朝말의 李重焕의 擇里志에 이르기까지4) 높 이 찬양되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風水地理에서 보아 開京의 결점은 역시 그 생김새가 넓 게 터지지 못하고 또 그 물의 흐름이 너무 빨라서 風水說에서 말 하는 이른바 水德이 調順 치 못한 까닭에 흠을 잡는 의견도 있 었던 것이다. 弓裔가 처음에 松嶽을 首都로 정하였다가 讖緯를 믿 어 이를 버리고 斧壤(鐵圓)으로 되돌아갔다는 것도 松岳이 지닌 이와 같은 風水地理上의 결점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開京의 이와 같은 不順調한 水德을 진압하고 그 전체의 地德을 裨補하기 위해서는 水德이 불순한 곳에 寺塔을 세워 신비한 佛力 을 비는 이른바 寺院稗補說이 王建 이후부터 성행되고 있었으나 그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는 東과 南은 大同江에 臨하고 北은 牡丹 乙密 의 兩峯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이것을 主山으로 하여 좌우로 3) 徐兢 高麗圖經 卷 3 成邑 形勢條 4) 李重換 擇里志 都邑隱居條

293 Ⅲ. 風水地理說 支脈을 뻗치고 있는 西京은 枕山帶水 의 명승지이며 乙密牡丹 의 後脈이 北으로 順川 价川을 지나 멀리 狼林山脈(白頭大幹)에 뿌 과 하류에서는 載寧江을 합쳐 맑고 느리게 흘러 十訓要 에 보이 리박고 狼林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大同江은 成川 三登 善通의 3江 는 표현 그대로 風水地理의 여러 조건에 어긋난 점이 없는 곳이다. 西京제도를 두어 처음부터 西京을 중시한 王建의 西京찬양이 風水說만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古朝鮮에서 高句麗말 까지의 정치 중심지이며 西北面의 군사 거점으로서의 그 위치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擇里志에 지적된 바 그 남북에 뻗쳐 있는 기름진 평야와 水理 등 인문지리면에서 본 平壤의 가치는 이미 王建도 충분히 인식하 고 있었을 뿐 아니라 淸川江을 경계로 하며 마주 겨루고 있는 滿 洲지방에서 흥망하는 여 러 민족을 물리치고 옛 高句麗 모습을 다 시 찾으려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였던 王建에게는 자손에까지도 西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風水地理說을 빌어서라도 그 뜻을 남길 만한 일이었다. 끝으로 高麗 太祖가 그의 정치감정을 風水說을 빌어 표현한 예 는 十訓要 제 8항에서 錦江 이남의 湖西 湖南地方은 그 山形 地 勢가 開京에서 보아 모두 등을 지고 달리고 있으니 그곳 사람을 기용하여 더불어 國事를 같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지역감정을 遺 敎로서 남긴 것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산수가 錦江이 風水家들이 가장 꺼리는 反弓水 의 물 줄기를 이루어 松京(開城)과 지금의 서울에 대하여 背逆하고 있다 는 것은 李瀷도 지적한 바 있으며,5) 따라서 그 유역의 지세도 자연 히 그와 같이 되어 있으나 이것은 錦江 이남에 한한 것이 아니고 5) 李瀷 星湖僿說 卷 1 天地篇 下

294 1. 風水地理說 嶺東의 산수도 역시 開京에서 본다면 西南 南 東南으로 흘러 背 逆하고 있다. 이러한 嶺南의 山川 形勢에 대해서는 이미 高麗시대에도 인식 하고 있어 湖南의 蟾津江 龍津江과 더불어 洛東江을 南方의 三 大背流로 하고 있음에도 湖西 湖南의 산수형세만을 들어 그 지 역 인물의 기용을 경계한 것은 後三國을 통일한 군주로서 이해하 기 어려운 점이다. 이것은 그 통일 과정에서 끝까지 반항하여 그 를 괴롭힌 데 대한 좋지 못한 감정과 경계심의 표현을 風水地理說 을 교묘히 이용하여 표현하였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와같이 王建은 스스로가 風水地理를 즐겨 믿었던 것이나, 정 치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보는 경우에는 서슴치않고 그 신비성에 따르는 설득력을 교묘히 이용하였던 것이다. 高麗 太祖의 十訓要 에서 西京에 대한 風水地理의 설명만은 그 후 高麗王朝 500년을 통하여 매우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며 이미 定宗 4년에 圖讖說에 따라 西京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나 뜻 을 이루지 못한 일 등은 그러한 영향을 이어받으려는 뚜렷한 예인 것이다. 王朝初 왕실의 기반이 불안정하여 王規의 亂 같은 것이 일어났고 다시 契丹에서 오는 위협에 대처하기 바쁜 定宗 때였던 만큼 開京의 地力이 사라졌고 水德이 不順한 것으로 믿어져, 風水 說에서 이와 같은 결함이 없다는 西京으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도 나올 만한 시기의 일이었다. 한편 高麗 초기의 風水圖讖說이 다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것은 契丹의 침입이 거듭되던 成宗과 顯宗시대에서 그 뚜렷한 예 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新羅의 멸망후, 1州에 지나지 않게 된 慶州를 成宗 6년(987) 에 東京으로 승격시키고, 그 14년에는 留守使를 두어 거의 西京과

295 Ⅲ. 風水地理說 같은 官制를 두었다가 顯宗 5년(1015)에 安東都護府로 고치더니 동 21년에는 다시 東京留守로 승격시키는 등의 東京의 승격이 그 예인 것이다. 慶州는 수려한 主山이 길게 이어진 長遠하고 雄博한 後山의 來 脈이 뚜렷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국면을 이루는 좌우의 맥산(靑龍 白虎)에 局內를 環抱한다든지 기타의 여러 조건들이 風水地理家들 이 이상으로 하는 吉地가 되지는 못할 뿐 아니라 開京에서의 거리 가 또 국왕이 巡住하는 데 적당치 않은 원거리였는데도 이를 東京 으로 승격시킨 것은 銳方이라는 術士가 바친 三韓會土記 의 高 麗에 三京이 있다 는 글귀에 따랐다는 것이다.6) 정체를 알 수 없는 術士가 바쳤다는 三韓會土記 의 내용은 알 려지지 않고 있으나 銳方의 신분으로 보아 일종의 讖記 또는 秘記 에 속하는 것임은 틀림없으며, 이러한 讖記에 보이는 글귀를 믿어 東京의 승격을 단행한 데서도 風水圖讖이 高麗初에 미친 영향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顯宗이 그 나라의 큰 일은 術數를 전문으로 하였던 內史侍郞 普 祚 圖讖에 따라서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韓祚 등으로 하여금 宋에서 陰陽二宅書를 들어오게 하는 등 열렬한 風水圖讖의 신봉자였다는 까닭도 있었을 것이나, 銳方의 三韓會土記 그 자체가 契丹의 침입과 후방에 있어서의 옛 新羅 巨族들의 향방 같은 것을 의식하고 만들어졌다고 하면 여기서도 그 風水圖讖은 또 정치적 현실과 전연 관계 없었던 것으로는 보 이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록 太祖의 十訓要 에 그의 風水 地理說이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그 후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道 詵이 顯宗에게 禪師의 追崇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高麗 風水地理 6) 李丙燾 高麗時代의 硏究 pp

296 1. 風水地理說 說의 진전이라는 면에서 주목할 일이라고 하겠다. (5) 高麗中期의 地理圖讖說 高麗는 成宗 顯宗兩代에 있어서 여러 차례에 걸친 契丹의 침 입을 받았으나 오히려 영토는 西北으로 鴨綠江口까지 넓혀지고 東北으로는 女眞에 대하여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西로는 宋과의 교통으로 禮成江口의 碧瀾渡는 외국상선의 출입이 잦았던 文宗에서 睿宗에 이르기까지의 약 80년간은 문화에 있어 서도 黃金期를 자랑하는 시기였다. 이 文臣貴族의 전성기는 仁宗 때부터 동요를 일으켜 李資謙의 亂에 이어 毅宗 때부터 보이게 된 武臣의 전권시대가 되어 국내의 정세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으 나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진전과정에서 보아 公田制의 붕괴와 佃 戶를 경작자로 하는 대지주의 발생 및 公田制와 밀접한 관계를 가 지고 제 도화된 府兵制가 무너지고 閑良 같은 在地武士團의 발생, 노예신분의 변화 등 착실한 진전의 길을 밟아 이 형세는 대체로 蒙古의 간섭을 받게 되는 元宗초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문신귀족 전성기에 들어서 성행하게 된 風水圖讖은 女眞族 金 帝國과의 대항에서 다시 국토수호라는 국민의 悲願과 얽혀서 복 잡한 사건을 일으켰고, 이어서 무신집권이라는 일찌기 겪지 못하 였던 정치적 혼돈과 격심한 신분의 변동에서 일어나는 불안기에 는 또 이 風水圖讖이 횡행하는 사태를 불러일으킨 느낌이 있었다. 1) 文宗의 地理圖讖信仰 먼저 文臣貴族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文宗에서 睿宗까지의 약 80년간에 있어서의 風水地理說을 살펴보면 제 6대 成宗과 같

297 Ⅲ. 風水地理說 이 太祖가 남긴 王業을 지켜 高麗文化의 황금기를 이룩하는 터전 을 굳힌 文宗의 치세는 시종 이른바 地理旺盛 이라는 地氣의 변화로 국력이 영향받는다는 風水圖讖說에서의 대응책에 사로잡 혀 있었다. 즉 文宗 10년(1056)에 城南 德水縣 (開豊郡 進鳳面)에 興王寺를 지은 것은 영특한 佛力을 빌고자 한 것으로 보이나 왕의 地理圖讖說 이 잘 나타난 것으로서는 禮成江邊 餅岳의 長源亭을 비롯하여 南京 의 설치 및 그 離宮, 西京畿 설치와 左右宮의 창건 등은 모두 地氣 의 변화에 대응하여 국가의 터전을 굳힌다는 이른바 延基思想에서 인 것이었다. 먼저 長源亭의 창건을 살펴보면 道詵의 이른바 松岳明堂記 라 는 秘記에 太祖의 전국통일의 해인 丙申(太祖 19년, 936)으로부터 2回甲 즉 120년이 되는 丙申(文宗 10년, 1056)에 離宮을 西江(禮 成江邊)에 지으면 국가의 터전이 굳어지리라는 延基說에 맞추어 지 은 것이었다. 王命에 따라 그 기지를 선택한 金宗允 등의 견해는 이 餅嶽이 松岳明堂記에 적혀있는 바 君子御馬明堂之地 였던 것 이 밝혀져 여기에 국가의 터전을 굳히는 것을 빈다는 뜻의 長源亭을 짓고 왕의 巡駐가 잦았다. 동왕 23년 5월의 巡幸 때에는 亭子 아래 못 가운데서 祥瑞의 무늬 있는 돌을 얻었다 하여 文臣에 명하여 축 하하는 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는 것에서도, 과연 道詵이 지었는지 도 뚜렷치 않은 松岳明堂記 같은 것에 대한 왕의 신앙은 이미 이 성을 넘어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地理圖讖說에 따라 長源亭을 지은 文宗이 동왕 21년경에 이르 러 南京을 두게 된 것도 또 이 風水地理說에 영향받은 바 컸던 것 으로 보인다. 文宗이 두게 된 南京, 즉 지금의 서울 부근을 중심으로 한 楊州

298 1. 風水地理說 또는 漢陽의 지형은 北은 높은 三角山을 등지고, 앞으로는 漢江의 大水를 두어,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육로로 鳥嶺만 넘으면 다시 洛東江 상류에 이어져 嶺南으로 빠지고, 西로는 江華島로 나와 서 해안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을 거쳐 湖南을 장악할 수 있을 뿐 아 니라 또 그 위치가 거의 韓半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육로가 四通八達하는 곳이다. 漢江의 兩岳에 펼쳐 있는 기름진 넓은 평야 는 수륙의 교통 조건과 더불어 또 인문생활에 있어서 韓半島 내에 서는 으뜸가는 조건을 갖추어 주고 있다. 三國鼎立시대에 있어서 이 漢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三國의 피나는 싸움이 끈덕지게 되풀이되었던 것은 바로 이 지역이 지닌 韓半島의 심장부로서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며 風水地理說이 없더 라도 開京이나 西京에 준하는 행정기구를 둘 만한 일이었다. 文宗의 南京 설치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 기록이 따로 남아 있지 않으나 肅宗代에 金謂磾가 道詵記 道詵踏山歌 三角 神誌秘詞 등을 들어 風水地理의 견지에서 南京 山明堂記 및 建都를 역설하였던 것만 보더라도7) 水風地理說의 영향이 적지 않 는 것으로 믿어진다. 文宗은 南京의 建置뿐 아니라 穆宗이 鎬京으로 이름을 고쳤던 지금의 平壤을 다시 西京으로 고치는 동시에 중앙의 本京畿에 겨 루어 西京畿 四道를 두었던 것은 西京을 중시하였던 까닭이며 그 로부터 19년만인 文宗 35년(1081)에 左宮과 右宮의 兩宮을 새로 세운 것은 高麗史(卷 96) 吳延寵傳에 보면 또 地理圖讖說에 헛 되이 재력을 낭비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미 文宗 6년 (1052)에 術士출신으로 보이는 梁元虎를 비롯하 여 韓爲行 등으로 하여금 遁甲曆 十精曆 七曜曆 太一曆 見行曆 7) 高麗史 卷 122 方伎 金謂磾傅

299 Ⅲ. 風水地理說 등 그 이름으로 보아도 과학과는 관계가 희박한 미신적인 역서를 만들어 來歲의 灾祥을 몰아내게 하였던 文宗의 一代는 문화의 황금기일 뿐 아니라 또 이와 같이 風水圖讖說이 활개를 펴는 시기 였던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文宗의 치세가 이와 같이 風水圖讖說에 따라서 국책이 세워지 는 일이 많았던 것이나, 이와같은 예는 肅宗과 睿宗의 치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2) 肅宗과 地理圖讖說 먼저 肅宗의 地理圖讖說에 대한 신앙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조 류뿐이 아니고 또 다른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즉 流血의 세력 다툼에서 漢山侯 畇을 왕위에 세우려던 당시의 대권세가 李資義 일당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없애고 아직 나이 어 리고 몸과 마음이 극히 허약하여 이름뿐의 왕인 조카 獻宗의 왕위 를 빼앗아 즉위하였던 것이나, 이 肅宗의 즉위초에 때아닌 서리와 우박 등이 開京 부근에 내려 민심을 어수선하게 하였던 것이다. 상식을 뒤집고 일어난 이와 같은 天災에 대하여 中書省에서는 讖緯書 같은 것을 끌어 이 천재가 政變과 살륙으로 희생된 원통한 기운이 응결한 것이라는 의견을 올려 그 대응책을 세우려 하였던 것이나, 이 대응책으로서 그해 가을 당시의 음양가 관료 金謂磾가 地理圖讖에 의거하여 주장한 南京建都議가 있었던 것이다. 즉 三角山의 南쪽 木覓山(南山) 北쪽의 평지에 南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金謂磾의 南京建都議 요지는 그 첫째로 道詵 記 를 인용하였다. 高麗에는 三京이 있어 松岳(開京)을 中京으로 삼고 木覓山(지금의 서울)을 南京, 平壤을 西京으로 하여 겨울 4 개월은 中京에, 그리고 나머지 계절은 각 4개월씩을 南京과 西京

300 1. 風水地理說 에 왕이 巡幸하여 머무르면 해외 36국이 스스로 찾아와 朝貢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太祖 건국 후 160여 년에는 木覓壤에 도읍하 리라 예언한 것을 들어서 지금이야말로 이를 단행할 시기인 것이 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해외 36국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의 국가의 수가 아니고 八卦의 斷線 連線을 합친 수가 모두 36으로 되어 있는 것을 빌 어 쓴 표현이었다. 다음으로는 道詵踏山歌에 보인다는 松都의 地氣衰旺說을 빌어, 松岳에서 일단 三韓을 호령한다 하더라도 그 땅의 根脈과 地脈이 모두 가늘고 약하므로 겨우 100년을 지나면 폐지하여야 할 것이 니, 그때에는 漢江을 건너지 말고 그 北쪽에서 明堂이 되는 곳을 정하면 장차 四海로부터 朝貢이 오고 국가가 태평할 것이며 江을 건너 帝京을 세우면 그 반대의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새째로는 三角山 明堂記 라는 風水圖讖을 빌어, 北에 三 角山을 등지고 南을 바라보는 仙境이며 거기서 花脈(山脈)은 세겹 네겹으로 갈려나와 산이 산을 등지고 明堂(서울)을 지키고 있으며 (明堂을 섬기는 것과 같은 앞 山인) 朝山은 다섯겹 여섯겹을 이루 고 傍系 直系의 姑山 등 여러 산은 모두 솟아나서 이것을 둘러싸 고 內水口 外水口에는 각각 충실히 주인을 지키는 세개의 犬山이 있고, 좌우의 靑龍(左山) 白虎(右山)는 세력이 비슷하니 전체의 세력 균형이 잡혀 있으며, 내외의 人物 寶貨가 이곳으로 모여들 어 국왕을 돕고, 壬子年中에 이 땅을 개척하며, 丁巳年間에는 훌륭 한 아들을 낳을 것이고, 또 三角山에 의지하여 서울을 마련하면 제 9년에는 四海에서 모두 朝貢을 바칠 것이라는, 風水地理에서는 이 이상 없는 예언을 들어 三角山 明堂地를 훌륭한 임금의 땅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301 Ⅲ. 風水地理說 끝으로 金謂磾는 神誌秘詞에서 三京을 저울에 겨루어 扶疏 즉 開京을 저울대로 하고 五德岳(지금의 서울)을 저울의 추(錘)에, 그리고 百牙岡(平壤)을 저울의 증판(皿)으로 삼아 그 균형에서 국가의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국가의 불행이 닥쳐오리라는 뜻의 말이 있는 것을 이끌어서 지금 의 서울지방이 五德岳인 것으로 지적하고 三角山 南의 木覓山의 북쪽 평지에 南京을 세워 巡幸하는 것이 국가 社稷을 위하여 크게 도움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미 文宗 때에 설치하였던 南京은 그 후에 별다른 吉驗이 없어 이를 이유로 다시 격을 내려 楊州로 개칭하였던 것이나 이 金謂磾 의 건의 3-4 년 후인 肅宗 4년(1104) 9월에 왕명으로 南京 건설 이 실행에 옮겨졌다. 즉 5-6월에 있었던 가뭄과 6월의 큰 우박 같은 천체상의 이상 한 현상을 치르게 된 동왕은 王妃 王子 群臣 및 승려들을 이끌 고 三角山의 僧伽窟을 거쳐 楊州에 들러 도읍할 땅을 몸소 살피 고, 6년 9월에는 尹瓘 및 相地官인 崔思諏 등을 揚州에 보내어 다 시 세워질 南京의 후보지를 선택케 하였던 바 이들은 東大門 道 峰山 龍山 등까지도 고루 답사하였던 것이다. 그 보고에는 面嶽 南쪽인 지금의 서울 四大門 안의 지리가 古書 主幹 中心의 大脈 위에 北으 로 앉고 南으로 향하는(壬座丙向) 도시의 건설을 奏請하였다. 에 보이는 風水說에 맞는다고 하여 肅宗의 南京 경영은 이와같은 경과를 거쳐 6년 겨울에 착공하 여 9년 5월에 궁궐의 낙성을 보게 되었던 바 그 테두리는 東은 大 峰(駱山), 양편은 岐峰(鞍山), 北은 北岳, 南은 新龍山의 南쪽 끝 에 이르는 규모 큰 것이었다. 肅宗代의 風水圖讖이 성행하였던 것은 대체로 위의 설명과 같

302 1. 風水地理說 은 것이었으나, 우리 나라의 風水地理史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前 述한 바와 같이 風水地理에 있어서의 道詵의 권위가 두드러지게 상승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文宗 때부터 알려진 道詵의 三角山 외에 새로이 金謂磾가 南京 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明堂記 데 있어서 논거로 하였던 당시 道詵踏山歌 같은 정체 모를 風水地 理說이 나돌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風水地理家로서의 지위가 그 충실한 독신자인 肅宗때 부터 더 눈에 띄게 된 것은, 당시 仁宗의 先覺國師로서 道詵을 追 崇하는 敎書에 肅祖가 王師의 貴號를 가하였었다 는 것에서도 또 엿볼 수 있을 것이다. 3) 睿宗代의 地理圖讖 風水地理說의 개척자로 존숭되는 道詵을 王師로 追崇한 肅宗에 뒤이어, 숙명론적인 風水地理說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던 것은 睿 宗이었다. 睿宗代의 風水圖讖에서 주목되는 것은, 官撰의 風水地理書인 海 東秘錄이 李載 朴昇中 등에 의하여 만들어져 그 정본은 御府에, 그리고 副本은 中書省 司天臺 太史局에 나누어 주었던 것과 龍堰 宮의 창건을 들 수 있다. 海東秘錄의 내용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陰陽 地理 圖 讖 秘錄을 정부의 손에서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와같은 성격의 서적이 국가의 사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그 시대상 을 알 수 있거니와, 한편 西京 龍堰에 새 궁전을 세우게 된 것도 太史局의 術士들의 讖說에 따른 것이었다. 즉 高麗史(卷 96) 吳延寵傳에 보이는 설명에 따르면, 睿宗 원년 (1106) 3월에 海東秘錄의 편찬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太史令 陰

303 Ⅲ. 風水地理說 德全 등의 術士들이, 開京은 도읍하여 2백년이 되어 地德이 줄어 졌으니 基業을 연장시키려면 마땅히 西京의 龍堰 옛터로 자리를 골라 새 궁전을 지어 따로 王이 巡幸하여야 한다고 睿宗을 설득한 데서 그 신축계획이 이루어졌었다. 동년 9월 왕은 內人 鄭克恭, 司天少監 崔資賢, 太史令 陰德全, 注簿同正 金謂磾 등을 보내어 龍堰 옛터에 집 지을 곳을 고르게 하고 관계관들을 소집하여 새 궁전 착공에 관한 회의를 열게 하였 던 바, 吳延寵만은 肅宗이 경영한 南京의 役事가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아 국민의 괴로움과 재정형편이 풀리지 않은 이때에, 새 궁전을 착공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아도 地理圖讖說 에 사로잡혀 헛되이 여러 공사를 벌이는데서 오는 폐단이 엿보이 는 것이었다. 吳延寵의 반대의견으로 그 건축이 일단 보류되었던 龍堰의 새 궁궐 착공은 다시 다음해인 睿宗 2년 9월에 平章事 崔弘嗣가 앞 날의 太史官이 내세운 이유를 들어 그 건조를 촉구하여 다시 거론 되었다. 이번에도 吳延寵은 그들이 중히 여기는 이른바 吉驗이라 는 것이 믿기 어렵다고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崔弘嗣의 말을 좇아 착공을 결정하고 말았다. 마침 滿洲 東流 松花江에 흘러들어가는 아로추카流域에서 일어 나 東南으로 세력을 뻗쳐 咸興平野에서 高麗와 피나는 싸움을 벌 이던 女眞族 完顏部와의 대결을 앞에 놓고 이와같은 새 궁궐의 착 공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으나, 오히려 西京의 신비한 지력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려는 地理圖讖說에서의 신념이 착공 결심을 굳힌 자취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공사는 착공한지 근 10년이나 걸려 동왕 11년에 낙성을 보 게 되어 4월에는 睿宗이 그곳에 가서 長樂宮 九梯宮을 두루 거

304 1. 風水地理說 치고 龍德宮에 옮겨서 다음날에는 乾元殿에서 여러 신하의 朝賀 를 받고 이른바 維新敎書를 내리었다. 睿宗의 西京 치중은 龍堰宮의 창건에 그치지 않고 다시 西京의 分司제도를 강화 확립하려고 하여 西京의 學士院을 고쳐서 分司國 子監으로 만들고 刻漏院을 分司太史局으로 하는 것과 같이 西京의 여러 기구를 개칭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文武兩班의 조직과 직무에 있어서도 分司제도를 철저히 하여 開京을 방불케 하는 것이 있었다. 膚宗은 西京뿐 아니라 道詵說을 빌어서 南京에 도읍을 옮기도 록 건의한 術士 殷元中의 의견을 들어서 南京을 중히 여겨 전후 4 회에 걸쳐 그곳에 들린 바도 있었다. 4) 妙清一黨의 西京遷都 劃策 地理圖讖說에서 그 초기부터 西京이 高麗王朝의 관민에 작용한 관념적인 비중이 매우 컸었던 것은 앞에서 되풀이 설명하였으나 내외의 긴박한 정치적 현실을 타개하고 대담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스스로의 의도를 風水圖讖을 교묘히 이용하여 큰 혼란을 일 으켰던 것은 仁宗代에 있었던 妙淸 一黨의 西京천도 획책이었다. 즉 한때는 아직 어린 仁宗의 왕위까지도 위협하였던 李資謙의 무궤도한 행동과, 처음 李資謙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가 왕의 내명 을 받아 資謙의 세력을 무찌르고 그 세력이 중앙정부에서 위협적 인 존재가 되었던 拓俊京의 행동, 이른바 李 拓의 變은 당시 開 京 귀족의 부패를 노출한 것이었다. 이 혼란에 못지않은 문제는 女眞族 金帝國에 대한 대외 자세의 확립이었다. 睿宗 12년(1117)에 형제의 관계를 맺고 스스가 兄이 될 것을 강 요하여 高麗 廷臣들을 격분케 한 金은 仁宗 3년(1125)에 들어서 君 臣의 관계를 강요하니 오만불손한 그 태도는 高麗사람들로 하여금

305 Ⅲ. 風水地理說 차마 치욕감을 참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었으나, 어린 왕을 섬기면서 부패한 귀족층이 나라살림을 꾸려가던 당시의 정세로서는 이에 대 항할 만한 자신이 서지 않아 그 오만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仁宗 5년초에는 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 같은 十八子 즉 李氏가 왕이 된다는 이상한 讖說을 믿어 날뛰던 李資謙을 쫓아내 고, 妙淸 白壽翰 등의 說을 믿고 왕이 西京까지 가서 이른바 維 新政敎 15조항을 선포하였으나 내외에서 받은 高麗王朝의 상처는 이와같은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혁신의도의 발표만으로써 아물어 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李 拓의 變으로 거의 잿더미가 되었던 王宮을 둘러싸고 자각 없고 기력없는 귀족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開京에서는 도저히 혁 신정치의 효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을 깨달았던 승려 출신인 妙淸과 이를 추종하는 白壽翰 등이 西京에의 천도를 주장한 논거가 바로 道詵을 宗祖로 하는 風水圖讖이 었다는 점에서 당시 이 사상이 지 닌 비중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들이 내세운 西京遷都의 주장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拓俊京의 세력도 제거된 仁宗 6년에 妙淸이 西京 林原驛地의 地理 를 살피니 陰陽家의 이른바 大花勢이므로 여기에 궁궐을 세우면 천 하를 다스릴 수 있으며 金國도 스스로 항복하고 三十六國이 모두 굴복할 것이라고 王에게 상주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 보이는 大花 勢는 陰陽家에서 山과 水가 모여 합쳐져 吉格을 이룬다는 이른바 명당의 지세를 뜻하는 것이며 花穴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李 拓의 變으로 祖宗 이래 영화를 누려 이어오던 松岳기슭 옛 궁궐이 거의 불타 참담한 광경에, 새삼 開京에서 일어난 피투성이 의 정변들이 되새겨지기만 하던 仁宗은 道詵의 이름을 빈 이른바

306 1. 風水地理說 太一玉帳步法 을 습득하였다고 自稱하는 妙淸 등의 신비한 上 言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왕 6년 8월에 왕이 西京으로 가서 林原驛地에 궁궐신축의 명당자리 를 잡게 하고 11월에 공사 에 착수하여 다음해 2월에 공사를 끝마치게 되 어 이름을 大花宮 이라 하였다. 이와같은 거대한 공사가 겨울철에 강행되었던 까닭 에 이에 사역한 국민의 고통은 매우 컸었다. 이 大花宮은 동왕 9 년에는 또 林原宮城을 쌓고 八聖堂이란 종교의식의 장소를 궁성 안에 일으키고 鄭知常 같은 문인이 八聖의 거룩한 德을 찬양하는 祭文까지 지었던 것이다. 이 이후에 있어서 仁宗의 西京 滞在가 잦아졌고 건전한 상식으 로는 믿어지지 않는 여러가지의 해괴한 술책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나, 이러한 움직임에서도 국사상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稱帝建元 과 金國征伐 의 문제가 西京派를 중심으로 당시 의 時論에 크게 작용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즉 金이 자기 힘에 겨운 漢民族의 영토와 국민의 통치를 위한 과도적인 방법으로 세운 漢民族 劉豫의 齊國과 힘을 합쳐 金을 협 공하려고 꾀한 것이 金國征伐 문제이며 金의 年號를 쓰지 않 고 독자적인 연호와 왕을 皇帝로 부르자는 주체의식의 강조가 稱帝建元 의 문제인 것이다. 地理圖讖說을 들어 西京遷都를 주장하는 妙淸의 무리들이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내세운 것은 仁宗 7년 2월부터였으나 地理圖讖 으로서 이 주장을 노골적으로 내세운 것은 仁宗 10년에 있었던 왕의 西幸때였다. 妙淸의 무리들이 뜨거운 기름을 넣은 큰 떡을 비밀히 大同江 속 에 집어 넣었다가 기름이 점차 수면에 떠올라 五色이 빛나게 되자 西京의 유지 및 鄭知常들로 하여금 大同江에 瑞氣가 있다 하고 五

307 Ⅲ. 風水地理說 色은 神龍의 침이라고 왕에게 알리게 하여, 끈덕지게 되풀이 하던 金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터무니없는 장난을 시도하였다. 妙淸 일파가 꾀한 이와같은 계략은 그 자리에 서 허위였던 것이 탄로되었으나, 왕의 신임이 여전하였을 뿐 아니 라 그 주장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당시의 高麗에게 받아들여져 있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金이 그들의 통치기술상 세운 과도기적인 괴뢰정권 齊 國과 힘을 합쳐 강력한 金國과 싸우려는 것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어리석은 꿈인 것이었으나, 稱帝建元 은 儒臣 尹彥頣(尹灌의 子)도 주장한 바와 같이 전연 실현되지 않을 성질의 것은 아니었 다. 특히 신분의 평등과 민족적 편견의 배제를 도덕시하는 불교 출신인 妙淸으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던 것이며 인문생활의 길잡 이로 아직 불교의 영향력이 컸던 당시의 민심에서는 이 주장이 지 지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서유지의 국제관계 확립과 국내의 여러가지 현실에 맞추어 국가 社稷의 안태를 꾀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려던 金富 軾 등의 儒臣측에서 보아서는 현실면에서는 구체적인 승산없이 이상론에 들떠 그 목적을 위하여 地理圖讖說로서 합리화하려던 妙淸일파의 책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것으로만 보여져, 이에 국론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당시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妙淸 일파가 大同江에서 꾸몄던 웃지 못할 속임수가 탄로되어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아 그해에 있었던 上京(開京)궁궐 재건의 기 초 착공식에 참여한 妙淸과 白壽翰 등은 이번에는 上京의 地氣가 끊어져(李 拓의 變등으로)불탔다고 주장하여 왕으로 하여금 西京 에 3개월이나 머물게 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王의 御衣를 大花宮 에 두게 하였던 것이며. 이 밖에 전후 6-7회나 王을 西京에 내왕

308 1. 風水地理說 케 하고 上京궁궐의 재건공사의 정지를 청하는 등 西京 천도를 위 한 끈덕진 암약을 되풀이하였다. 妙淸 일당의 西京천도는 그 음모획책이 가열됨에 따라 반대파의 결속도 또 굳어져 鄭沆의 반대상소에 이어 任亢敳 李仲 文公 裕 林完 등은 그것이 허무맹랑한 주장인 것을 지적하여 주방과 극 형을 상주하는 등 高麗政界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싸였던 것이다. 地理圖讖說로서 西京천도를 합리화하려는 妙淸의 주장은 이와 같이 국론을 크게 분렬시켰으나 仁宗 12년(1134)에 왕이 또 妙 淸의 말을 좇아 장래에 닥쳐올 災異를 西京으로 가서 피하려 하매 妙淸 배척파의 거두 金富軾이 왕에게 글을 올려 그것을 말리고 다 시 諫官으로 더불어 글로써 極諫하게 되자 물끓듯한 조정안의 여 론에 왕도 西京에 가는 것을 중지하고 文宗 때에 세워진 西江변의 長源亭에 일시 머무는데 그쳤다. 이와같이 仁宗의 태도변화는, 妙淸 일파에서 보아 이미 끈덕지 게 벌여오던 그 西京천도의 꿈이 깨어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 다. 다음해인 仁宗 13년에 西京의 令司侍郞 趙匡, 同兵部尙書 柳旵 등과 반란을 일으켜 나라이름을 大爲 연호를 天開 로 한 이 른바 妙淸의 亂을 일으키게 된 것은 地理圖讖을 내세워 주장한 妙 淸일당의 그 획책의 좌절에서 일어난 돌발적 반란이었다. 그 軍을 天遣忠義라 칭하고 宰相 樞密兩府에서 州郡守까지 모 두 西人 일색으로 조직되어 開京을 겨누었던 妙淸의 大爲는 王朝 까지도 혁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었으나, 白壽翰 鄭知 常 金安 등 開京에 있던 그 일당에게도 미처 알리지 않은채 일으 킨 성급한 거사였던 것이다. 성급하게 서둘렀던 妙淸의 亂을 진압하는데 있어 그 반대파의 거두 金富軾이 이끄는 五軍으로 편성된 官軍이 거의 고립되어 외

309 Ⅲ. 風水地理說 부로부터의 원조도 없는 西京공략에 만 1년이나 걸려 仁宗 14년 (1137) 2월에 겨우 함락시켰다는 것은 관군의 약체도 문제이나 반면 地理圖讖說과 西北人의 지방의식을 행동의 신념으로 삼고 버틴 그 일파의 굳은 결의도 또 장렬한 것이 있었다고 하겠다. 5) 武臣相剋期의 地理圖讖 開京의 地氣가 쇠약하여져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 여 반란을 일으킨 妙淸의 난이 수습되었으나 마치 이들의 예언이 적중이나 하듯이 그뒤도 高麗의 왕실과 국내의 정세에는 불안이 되풀이되기만 하였다. 이제 이와같은 風水圖讖을 떠나 잠시 高麗史의 흐름을 되새겨 보면, 산업경제의 근본인 토지제도만 보더라도 高麗史의 李資謙傳 사람의 田土를 강제로 빼앗고 종들을 시켜 車馬를 노략하 고 라는 바와 같이 唐의 均田制의 영향을 받은 토지를 國有로 에 하고서의 授田이 무너지고 소작농을 耕作者로 하는 大地主의 발 생을 보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公田制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兵農一致를 이상으로 하는 府兵制도 또 무너져 閑良 같은 지역적인 武士團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 仁宗에서 毅宗대에 걸 쳐 뚜렷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어지는 이와같은 大轉換期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진통은 開京의 王室과 이를 둘러싼 안일과 보수적인 貴族 의 힘만으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며, 이러한 모순이 地理圖 讖說을 빌어 표현되어 왔던 것이다. 불행히도 仁宗을 이어 제 18대 왕으로 즉위한 毅宗에게 이와같 은 난국을 타개할 박력이나 견식이 없었다. 일찌기 父王으로부터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정되어 太子를 폐하자는 의견

310 1. 風水地理說 까지 일으킨 毅宗이 그 무능뿐 아니라, 귀족사회의 안일과 사치 輕薄의 풍조를 드러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또 高麗王 室로서는 지극히 불운한 일이었다. 鄭襲明의 구호로 겨우 즉위할 수 있었던 毅宗은 그를 즉위케 한 은인을 분노 자살케한 후부터는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놀이 에 밤낮을 가리 지 않았으며 부패한 文臣들과 擊毬 遊宴 詩 歌 音樂의 風流생활에 젖어 막대한 國費가 이에 소모되었다. 毅宗의 失政은 이뿐이 아니었다. 佛神 卜筮 圖讖의 독신자로 서 祈祝 相地造宮 離京巡駐의 비용도 막대하였거니 卜者 榮儀의 허황된 延基說을 믿 어 동왕 11년(1157)에는 王弟 翼陽侯 晧(후의 明宗)의 저택을 빼앗아 翼闕로 삼고 또 白州鬼山半月岡(黃海道 延 白郡 兎尾山 南端)에 離宮을 지으면 7년 이내에 北虜(金)롤 삼킬 수 있을 것이라는 太史監侯 劉元度의 讖說을 믿어 이곳에 重興闕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잦은 長源亭의 移御와 南京 西京의 巡駐도 모두 風水圖讖說을 굳게 믿는 데서 온 國庫 낭비였던 것이다. 이미 睿宗 이래 모욕을 받아오던 女眞에 대한 보복의 방법을 重 興闕의 건립 같은 延基裨補說로서 해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이었던 것이나 더 어리석은 것은, 女眞族 金의 위협을 받고 있던 당시에 있어서도, 文官만을 중히 여기고 너무도 武臣을 천시하였 던 사실이었다. 시대의 추이도 모르고 왕의 총애에 경박하기 짝없는 행동으로 武臣들을 격분케 한 사건들이 쌓여 毅宗 24년(1170) 9월에 왕이 普賢院(지금 長瑞)에 들렀던 것을 기회로 李義方 李高 등과 더 불어 將軍 鄭仲夫가 일으킨 武人의 亂이 高麗王朝에 미친 영향은 일찌기 없었던 일이었다. 이른바 庚寅의 亂이라고 하는 이 武人의 亂으로 무능하고 國事

311 Ⅲ. 風水地理說 에 성의 없던 毅宗이 廢位逐出되고 王弟 翼陽侯 晧가 明宗으로 迎 立되었으나 高麗社會는 이 革命으로 오히려 더 어두운 그림자만 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文官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은 武官의 무식과 갈수록 심하여지는 포학하고 독재적인 통치는 여러 곳에 서 이에 반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그때마다 많은 인명이 죽어지고 執權武臣間의 시기와 세력다툼은 李高 李義方의 피살에 이어 鄭 仲夫 부자의 횡포와 독재도 慶大升에 의하여 제거되었으나 慶大 升의 死後는 慶州에서 毅宗을 弑害한 李義旼이 國事를 제멋대로 하다가 明宗 26년(1196)에는 崔忠獻형제에게 피살되는 등 그 무 상한 武臣의 浮沈盛衰는 걷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國政은 武臣출신 집권자의 私兵으로 지켜지는 重房에서 움직여 져 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국민의 生死與奪이 重房의 私 兵을 배경으로 하는 武臣의 손에 이루어지는 이 시기는 우리 國史 上에서 유례 드문 어두운 시대였던 것이며, 公州賊民 亡伊의 난, 伽倻山(지금 瑞山)을 거점으로 한 孫淸의 난과 西京의 趙位寵과 그 餘類가 일으킨 반란 등은 모두 高麗의 통치의식이 동요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제 明宗 一代를 살펴보면 이와같이 시종 혼란불안에 쌓여 있 었으나 이에도 왕실에서 그 대비책으로 논의되어 실천에 옮겨진 것으로,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고작 延基 裨補의 시설이었다. 즉 明宗 4년(1174) 5월에 왕명으로 左蘇白岳山 右蘇白馬山 北 蘇箕達山의 三筒所에 巡駐하여 국가의 基業을 연장하려는 이른바 延基宮闕을 세웠던 것이다. 이 三蘇宮闕은 左蘇白岳山이 長瑞의 白 鶴山, 右蘇白馬山이 開豊郡 大聖面에 있는 山名이고, 北蘇箕達山은 黃海道 新溪郡 村面에 있는 것으로 比定되고 있으며, 開京주변의 祭 典에 오른 三山으로서 風水地理的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골라 궁실

312 1. 風水地理說 을 세워 그곳의 地德을 빌어 國業을 연장시켜 보려는 것이었다.8) 蘇 가 山 岳 峰 嶺 을 뜻하는 소리 솔 수리 술 솟 의 頭音이며 高 位首位神聖의 뜻과 통하고 그 기원은 韓時代의 蘇塗, 新羅百 三蘇制의 語義와 그 역사적 起源에 대하여는 濟의 三山의 制에서 나온 것으로서, 高麗의 三蘇는 國都의 鎭山이며 守護神山인 松嶽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三鎭山인 것이며 三宗制의 退縮으로도 알려지고 있다.9) 蘇 는 소리 솔 등의 頭音일 뿐 아니라 그 자의 본뜻 이 되살아난다 는 것으로, 사라져가는 開京의 地氣를 되살린다 그러나 는 字義를 통한 祈願의 심리가 많이 작용되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 여진다. 이 三蘇가 이른바 道詵秘記 에 따라 세워졌다는 것에서 또 道 誅의 風水地理說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 뚜렷이 나타나 있 으나 이 道詵秘記를 믿어도 武臣의 집권으로 일어난 정국의 소용 돌이는 가라앉지 않았다. 李氏가 王이 된다는 소위 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 의 讖說을 믿어 그 고향인 慶州 부근의 賊과도 꺼리낌 없이 내통하였던 것으로 전하여지던 李義旼 부자를 숙청하고 새로 실권을 잡게 된 崔忠獻에 의하여 李義旼의 권세 그늘 밑에서 겨우 허수아비 구실의 왕위만 지키던 明宗이 폐위되고 새로 神宗이 옹 립되었다. 崔忠獻 형제에 옹립된 神宗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지킬 만한 실 권을 행사할 것은 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며, 文武百官은 모두 崔忠獻의 신하라고 하여도 좋을 정도로 변칙적인 통치형태 가 나타났던 것이다. 8) 李丙燾 前揭書 pp ) 李丙燾 前揭書 pp

313 Ⅲ. 風水地理說 이 神宗이 즉위하자 실권자 崔忠獻은 三省 六部 및 樞密官을 뜻 하는 宰樞와 그의 幕府인 重房의 文武諸臣 陰陽專門家를 모아 놓고 국내 山川의 裨補와 延基에 관하여 논의한 결과 드디어 神宗 원년(1198) 정월에 山川裨補都監이란 임시관청을 두게 되었다. 이미 明宗 26년 5월에 崔忠獻이 아우 崔忠粹와 더불어 왕에게 올 린 여러가지 時弊와 정책에 관한 封事에 보이는 바 후세 文武群臣 과 無賴한 僧侶들이 山川의 吉凶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佛寺를 지 어 願堂을 삼기 때문에 法力의 重壓으로 도리어 地脈을 손상케 하 여 災變이 자주 일어나니 전문가들로 하여금 검토케 하여 바로잡 아야 한다는 그의 持論을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 山川裨補都監의 업무는 風水地理說에서 보아서 결함이 있는 것 으로 믿어지는 곳에 城이라든가 堤防을 쌓고 또 地脈을 손상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寺塔이나 築堤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이를 파 괴하는, 즉 국토의 개조에 있었던 것이나 그 사업내용에 대하여는 뚜렷이 전하여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武臣들이 이와같은 地理圖讖說에 남다른 정열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막중한 정치권력을 누리게 된 崔氏一門의 불안과 신경과민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6) 蒙古侵入과 地理圖讖說 神宗 이후의 高麗는 崔氏의 幕府인 重房 안에서 전국의 政敎가 다루어져 熙宗이 폐위 당하고 康宗이 迎立되었으나 불과 2년에 죽은 뒤를 이어 즉위한 高宗에 이르러 이번에는 국외로부터 거센 바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熙宗 2년(1206)에 內外蒙古를 통일하고 大汗에 즉위한 成 吉思汗이 金을 치게 되자 그 여파는 즉시 高麗에도 미치게 되었던

314 1. 風水地理說 것이나 특히 蒙古에 쫓기게 된 契丹人의 西北諸縣의 침입 약탈은 그 후의 高麗王朝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이 契丹人들은 高宗 4년(1217)에 다시 南進하여 開京을 치고 東으로 옮겨 東州(鐵原) 原州 등지를 유린하여 金就礪의 군도 크 게 패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형세에 있어서, 이때야말로 松都氣衰 의 說과 왕궁을 옮겨 延基를 꾀하려는 術이 활개칠 시기인 것이다. 즉 高宗 4년 4월에 高宗이 崔忠獻이 마련한 竹坂宮으로 옮기게 松山의 王氣가 곧 끊어지니 別宮으로 옮겨 서 이를 막아야한다 는 말에 따랐던 것이며, 다시 12월에는 된 것은 바로 術士의 10) 術士 李知識의 말을 받아들여 契丹兵을 몰아내는 祈禳으로 乾元 寺를 헐어 없애고 成宗의 神御를 開國寺로 옮겼으며 또 그의 말에 따라 白岳에 새로 宮闕을 일으켰다. 白岳은 三蘇의 하나인 左蘇白 岳으로서 지금의 長湍 白鶴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裨補나 祈禳으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5년에 이르러는 金의 遼東宣撫使였다가 金末의 혼란을 틈타 豆滿江 하류로 빠져 나와 東眞國을 세운 蒲鮮萬奴를 길잡이로 하 여 蒙古와 女眞의 東眞國이 高麗를 구원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東 北面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까닭이다. 高麗을 구원하여 江東城을 함락시킨 蒙將 哈眞이 고이 물러가면서도 東眞人 40여명을 義州 에 남겨 高麗語를 배우게 하고 내가 다시 오는 날을 기다리라 고 한 것은 의미 깊은 이상한 여운을 남긴 것이었다. 哈眞이 남긴 다시 찾아오리라는 불행한 예언은 드디어 高宗 18 년(1231) 에는 蒙古의 제 1차 침입에 이어 再三의 무자비한 침입 이라는 國史上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던 비극으로 사태를 몰고 갔 던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10) 高麗史 高宗世家 4年 夏 4月 己酉條

315 Ⅲ. 風水地理說 敵의 날카로운 공격을 겪고난 뒤 다시 들이닥칠 참화를 예상하 고 首都를 江華로 옮긴 것은 高宗 19년 6월이었다. 蒙古의 亂을 겪고 수도를 小島인 江華에 옮기는 국가존망의 중 대시기를 맞이한 당시에 있어서 地理圖讖의 延基說이 다시 고개 를 들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에 있어서의 風水圖讖家의 延基說과 그것이 실행된 자 취를 살펴보면 먼저 동왕 21년 7월에 內侍 李百全을 보내어 御衣 를 南京 假闕에 奉安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南京 假闕의 御衣 奉 安은 扶蘇山이 나누어져 左蘇가 되어 阿思達이라고 하는 것이 며 이것은 옛 楊州의 땅이니 만약 여기에 宮闕을 지어 계시게 되 면 國祚가 800년은 더 延長할 수 있을 것이 라 는 승려의 讖言 을 믿은 王命에 따른 것이었다.11) 그 다음해인 22년 2월에는 太 祖의 神位를 南京 新闕로 옮긴 것으로 보면 승려의 참언을 그대로 믿고 南京에 새로 궁궐까지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이로부터 南京 新闕과 開京의 康安殿에 번갈아 御衣 奉安의 의식이 되풀이되었 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와같은 地理圖讖에서의 新闕 造營과 御衣의 奉安이나 이밖의 神力 法力을 빌려는 天兵神衆道場 仁王道場 같은 여러 가지 祈禳의 術로서 그후 일어난 再三 再四의 蒙古침입이 수습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한편으로는 元에 사신을 보내어 和戰의 교섭을 하던 高宗 42년, 1년간에 蒙古軍에게 잡혀 끌려간 남녀가 무려 206,800여명이며 살해된 것은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이 거쳐 간 州郡은 모두 잿더미로 되었던 참담한 형편이었다. 구태어 江都 내에서의 祈讓에 효험이 있었다고 우긴다면 權臣 11) 高麗史 高宗 世家 21年 秋 7月條

316 1. 風水地理說 崔瑀가 高宗 36년(1249)에 죽고 그를 이은 崔沆이 민심을 잃더 니 崔誼에 이르러 金俊 등에 의하여 被誅되어 이에 4대 60여년간 의 崔氏政權이 무너지고 정치권력이 왕으로 되돌아와 비로소 元 과의 和戰도 왕의 뜻대로 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무자비한 蒙古의 말발굽에 거의 전국토가 짓밟힌 高麗는 말할 것 도 없었으나 南宋과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면서도 江都에서 버티고 있는 高麗와의 싸움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蒙古측의 초조감 도 또 숨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蒙古측이 내놓은 국왕의 出 陸과 太子의 入朝라는 화평 조건이 이루어져 高宗 46년(1259) 4월 에 太子가 元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나, 이 무렵에 있어서도 延基 裨補로써 國難을 극복하여 보려는 高麗王室의 悲願은 사라지지 않 았다. 즉 太子가 元으로 떠나는 2개월 전인 高宗 46년 2월에 江都 摩 利山 南에 離宮을 새로 짓게 한 것이 완공되고 또 동년 4월에는 다시 江都 三郞城과 神泥洞의 두 곳에 假闕을 짓도록 명한 것이 그 예인 것이다. 摩利山南의 新宮은 校書郞 景瑜가 延基說을 들어 奏請한 것이고 三郞城 및 神泥洞의 假闕은 당시 郞將으로 風水를 업으로 하던 白勝賢의 주장에 따랐던 것이나, 高宗이 假闕造營을 下命한 2개월 후인 46년 6월에 병으로 승하하게 되어 곧 이루어 지지 않고 元宗 5년(1264) 5월경에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摩利山 南의 離宮은 現 江華郡 下道面 興旺里에 그리고 三郞城 假闕은 現 傳燈寺 구내 史庫址 後園에, 神泥洞 假闕은 江華郡 仙源面 智山里 에서 그 宮基 또는 遺址를 찾아볼 수 있다 한다.12) 元宗시대의 地理圖讖 酷信은 三郞城과 神泥洞 假闕의 조영에만 12) 李丙燾 前揭書 pp

317 Ⅲ. 風水地理說 그치지 않았다. 그 심한 예가 元宗은 다시 圖讖에 周나라를 세운 姬姓의 후손이 다시 일어난다고 하니 周의 전성시대를 이룩한 康 王의 이름을 釗로 고치는 것이 좋다는 勝賢의 말을 믿어 그대로 하였다가 百濟 近肖古王과 싸워 流矢에 맞아 횡사한 高句麗 故國 原王의 諱와 같다고 하여 도로 옛 諱로 고쳤 다는 웃지 못할 사건 에서도 讖說에 무척 신경을 썼던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13) 勝賢의 이 讖說에 元宗이 이와같이 현혹되었던 것은, 일찌기 高 麗 太祖의 혁명달성하는 것을 예언한 것으로 唐裔 王昌瑾으로부 터 얻게 되어 널리 알려졌다는 古鏡文 중에 이 한 龍(즉 太祖) 의 子는 三四(12대)이고 대를 물려받아 六甲子(360년)까지 미친 龍孫十二盡 의 讖說에 자극 받았던 바 컸었다. 그것 은 마침 元宗이 血統上으로 太祖의 11대이고 또 開國 후 340 다 는 즉 350년이 되어 古讖(鏡文)이 가리키는 그 왕조의 존속 王代數 및 年數에 가까와졌던 것으로 믿어졌던 까닭이었다. 이 龍孫十二盡 의 讖說은 실로 元宗 一代의 朝野를 괴롭혀 끝내는 동왕 11년(1270)에 이르러는 江都에서 일어난 三別抄軍의 사기를 돋우어 저항의 폭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즉 江華島 내에서 貴族 官吏 및 기타의 士庶와 더불어 三別抄에 억류되었던 術士 安邦悅이 奉光寺의 太祖眞影에서 점쳐 그들과 행 高麗의 王孫은 12대에서 끊어지니 南으로 가서 帝京을 세우라 는 옛 讖言을 들어 그 讖言 동을 같이할 것을 결심하고 仲孫에게 대로 될 것이라고 우겨 謀主가 된 바 있었다. 邦悅의 이 讖言은 이 미 肅宗 때에 金謂磾가 이끌었던 이른바 道詵踏山歌에 漢江北쪽 에 帝京을 정하면 萬代를 누릴 것이고 그것을 건너 帝京을 만들면 13) 李丙燾 前揭書 pp

318 1. 風水地理說 漢江을 가운데 두고 1국이 두개로 갈라지리라 는 왕실을 위한 경 고를 뒤집어서 우겨댄 讖言에 지나지 않았다. 건전한 상식만 가지 고 있었더라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이와같은 터무니없는 讖言도 나라의 운명을 뒤집어 보려는 큰 擧事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이들 에게는 하늘이 내리신 신비한 말씀으로 믿어졌다는 것에서 그 시 대상과 인간이 지닌 심리적인 약점을 찾아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6) 高麗末期의 地理圖讖說 蒙古의 정치지배를 받게 된 元宗초부터 恭愍王의 즉위에 이르 기까지 7대왕의 약 1세기 동안의 독립성 잃은 高麗社會는 제도와 법속도 또 극심 한 혼잡을 가져오고 高麗의 형편으로는 받아들이 기 힘겨웠던 蒙古측의 여러가지 徵求로 국력도 위축을 면할 수 없 었다. 그러나 왕실만은 강력한 蒙古의 내정간섭에 항거라도 하지 않 는 한에 있어서는 그 세력을 등에 업고 小康狀態를 누릴 수 있었 던 것도 사실이었다. 忠烈王 때에도 吳允孚 같은 天文圖讖의 大家가 있어 여러가지 의 上言이 없었던 바는 아니나 忠烈王에서 忠定王까지의 6대 약 80년간에는 전일과 같은 秘記 圖讖에서의 延基宮의 경영과 巡住 遷部의 의견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국민의 고통과는 달리 왕실만은 蒙古 세력의 그늘 밑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高麗王室이 누렸던 이와같은 변칙적인 소강상태가 금이 가게 된 것은 元末에 있어서의 中國대륙의 정치혼란과 東쪽에서의 倭 寇의 발호를 겪게 된 恭愍王초부터였다

319 Ⅲ. 風水地理說 즉 中國 江南地方에서 朱元璋이 蒙古帝國에 반항하는 군을 일으 키게 되자 그 다음해인 恭愍王 5년(1356)에는 곧 蒙古人의 帝國 인 元의 연호와 제도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韓半岛 내에 두었던 元의 영토와 거점을 모두 빼앗아 거두고 鴨綠江 밖까지 뻗쳐 나갈 태세를 갖추는 동시에 국도를 漢陽으로 옮기려 하였던 것이다. 이 極東정세의 동요 및 遷都문제와 더불어 다시 고개를 들게 되 는 것은 秘記 圖讖의 설이었던 것이다. 즉 恭愍王 5년 6월에는 天 文 曆數 등을 맡아보는 書雲觀事 陳永緖에게 南京(漢陽)에 가서 땅을 살피도록 명하여 인심을 자못 자극하여 혼란을 일으켰던 것 道詵記 의 계통을 밟았던 普 愚의 漢陽에 도읍하면 36國이 來朝할 것이라 는 讖說에 현혹 이나, 그 다음해에도 다시 이른바 되어 李齊賢에게 漢陽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던 바14) 있었다. 이 漢陽遷都의 계획은 仁宗 때에 妙淸이 일으킨 西京遷都계획의 예를 들어 그것이 養兵 養民에 미치게 되는 좋지못한 사태를 걱정 하며 극력 반대한 開城 尹致仕 尹澤의 上言도 있었고 또 太祖廟에 서의 卦가 좋지 못하기에 이 決行을 중지하고 다시 高麗 三蘇 중의 하나인 左蘇로 되어 역대왕실이 중요시하던 지금의 長湍 白鶴山기 슭을 친히 살펴 新京 조영에 착수하여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 이다. 忠定王 때부터 거의 매년 倭寇의 침입을 받아 恭愍王 6년(1357) 에 이르러는 開京에 가까운 昇天府와 喬洞이 그들 손에 불태워 약 탈되고 이어 全羅道와 楊廣道가 자주 약탈되어 해상운송로가 끊기 는 등의 소동 속에서 이와같은 白岳新宮의 경영과 그 移御는 좋은 곳의 旺氣를 얻어 災를 피하고 나라의 명맥을 지속시키려는 道詵秘 記 類와 같은 說에 避凶趣吉 의 悲願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14) 高麗史 卷 122 文伎 金謂磾傳

320 1. 風水地理說 그러나 해상에서의 倭寇뿐 아니라 元에 반항하여 북부 中國 直 隷에서 일어난 韓山童의 아들 韓林兒의 遼東 방면으로의 轉侵에 이 어 韓半島 북부로의 침입은 당시 사람들에게 紅巾賊 흑은 紅賊으로 불리워져 白岳新宮의 造營 전후에 걸쳐 자못 민심을 소란케 하더 니, 恭愍王 10년 10월에는 紅賊 10여만이 또 다시 韓半島 西北으 로부터 침입하여 忌嶺(慈悲嶺)의 柵을 깨뜨리고 이를 피한 王駕가 利川에 이르던 날 開京도 그들손에 함락되어 무참히 焚掠되었다. 이 紅賊의 亂을 피하여 왕이 福州에 이르러 겨우 조직적인 반격 태세를 세워 이들에게 섬멸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나 이에 이 어 元의 納哈出의 東北部 入寇 및 近臣 金鏞이 일으킨 興王寺 行 宮의 침입과 元 順帝의 皇后가 된 奇女의 책동으로 일어난 崔儒 같은 附元謀略輩들의 高麗 西北部 침입 등, 거듭되는 內憂外患은 왕의 발랄한 통치의식으로도 高麗王朝의 앞길은 어둡기만 하였던 것이다. 遍照 즉 辛旽 같은 산간의 승려가 왕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 고 일약 왕국의 政敎를 손아귀에 넣어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高麗王朝가 내외로 겪게 된 이와같은 다난한 시기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틈을 타서였던 것이다. 貴族 富豪계급을 누르고 下賤계급의 貧과 賤에서의 해방을 위 한 辛旽의 혁신적이고 대담한 여러 시책은 확실히 다시 평가되어 야 할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녔던 능력의 한계성 은폐 와 또 野心 私慾의 충족을 위하여는 당시 다시 고개를 들게 된 浮 屠 陰陽의 설을 이용하여 이를 합리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당시 항간에서 유포된 恭愍王 13년(甲辰) 및 14년(乙巳)에 聖人이 나타난다는 뜻의 辰巳聖人出 이라는 讖說에서 자기 스 스로를 성인에 겨누어 미신적인 陰陽拘忌의 설과 佛事法會를 왕에

321 Ⅲ. 風水地理說 게 권하여 국가재정에 적지않은 손실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나 辛吨의 陰陽圖讖 이용에서 가장 그 속셈이 드러났던 것은 遷部移 御의 책동이었다. 그의 세력이 거의 국민의 生死與奪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恭 愍王 16년에 이르러 소위 道詵秘記의 松都氣衰說을 이끌어 천도 를 권하여 平壤을 相宅케 한 일이 있었으나 왕이 亡妃 魯國大長公 主의 影殿工役에만 큰 관심을 가져 이 천도의 권고는 묵살되고 말 았다. 그러나 그의 끈덕진 책동은 그 후도 그치지 않아 동왕 18년에 는 平壤뿐 아니라 忠州를 그 후보지로 권하기도 하고 三蘇의 巡駐 를 권하여 그 연도의 국민에게 적지 않은 폐를 끼친 바도 있었다. 恭愍王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천도에 辛旽이 열띤 권고 를 되풀이하였던 것은, 옛부터의 家門을 자랑하는 四族의식과 新 進 儒者들의 기반인 開京에서는 일약 고귀한 지위를 누리게된 그 에게 그 지위를 유지하기에는 불안한 것으로 보였던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한편 이 와같은 辛旽의 독재와 야욕을 제거하려는 吳仁澤 등이 또 道詵秘記의 친다 15)는 非僧非俗의 人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국가를 망 讖言을 이끌고 있는 것에서, 당시에 있어서의 道詵說 이 미치고 있는 뿌리 깊고 폭넓은 영향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恭愍王 20년에 辛旽이 伏誅된 데 이어 동왕 23년(1374)에는 왕이 試害되어 겨우 10세였던 禑王이 즉위하여 忠肅王妃였던 太 后洪氏가 섭정하게 되어서부터 천도문제는 더 빈번히 제기되었다. 禑王 때의 천도문제는 倭寇 및 明나라의 복잡한 외교문제와도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천문기상의 괴상한 현상 혹은 15) 高麗史 卷 132 辛旽傳 獐入

322 1. 風水地理說 城 같은 당시의 秘記에서는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풀이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 심리적인 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왕의 원년(1375)에 일어난 천도의 제기는 崔瑩 등이 이를 가로 막았던 것이나, 그 후도 이 천도의 제기는 잇따라 일어나 동왕 3 년 7월에는 崇敬府 陳永世로 하여금 지금의 漣川을 相宅케 하였 더니 중앙 및 사방의 산천이 모두 역으로 달린다는 五逆亡地 인 까닭에 천도 후보지로서는 알맞지 않다고 하여, 다음 4년 정월 에는 다시 恭愍王이 경영하던 白岳新京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년 1월에는 이미 倭寇의 침범에 불안할 뿐 아니라 松 岳에 도읍한 지 오래되어 地氣가 쇠하였으니 道詵書에 따라 천도 할 곳을 찾아보라는 왕명을 받았던 바 있었던 洪仲宣 權仲和 등 이 韓山君 李穡 등과 회의하고 閔仲理가 道詵密記에 실린 바에 따 라 北蘇 箕達山이 적합하다는 上言을 하게 되어 北蘇造成都監까 지 두게 되었던 것이나, 그 위치가 너무 산간 깊숙한 곳이어서 漕 舶이 통하지 않아 중지되었다. 그러나 천도에 대한 禑王의 집념은 北蘇의 중단으로 사라진 것 이 아니고 역시 明宗 때에 延基宮을 두었던 바 있었던 左蘇 白岳 山에 천도하려고 左蘇造成都監을 두게 되었으나 다음 5년 정월에 倭寇 및 年荒과 민폐를 들어 그 공사를 반대한 諫官의 상언이 있 어 동년 2월에는 左蘇의 공사도 중지되었다. 北蘇에 이어 左蘇도 또 그 조성이 중지되었던 것이나, 禑王 5년 11월에 이르러는 이미 공사가 중지된 左蘇의 위치가, 道詵이 가리 킨 곳은 白岳이 아니고 지금의 楊州郡 檜泉面 檜岩이라는 書雲觀 의 異論이 일어나 이곳으로 천도 후보지로 삼아 시찰케 하더니, 동왕 7년 8월부터 漢陽으로의 천도 의견이 굳어졌다. 즉 동왕 7년 8월의 書雲觀의 漢陽遷都 건의에 이어 다음 8년

323 Ⅲ. 風水地理說 월에는 다시 判書雲觀事 張補之 등이, 자주 보이는 불길한 현상이 일어나니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漢陽으로 천도할 것을 상언하여 恭 愍王의 천도계획에는 반대하였던 崔瑩조차 동의하였던 것이나, 이 번에는 외적에게 약세를 보이는 불리와 역시 年饑로 백성에 미치는 영향을 들어 반대하는 李仁任의 의견에 눌려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년 8월에 이르러 太白星이 白晝에 나타나는 등의 天 文의 괴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漢陽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여 諫官 의 반대에도 왕은 듣지 않았으며, 9월에는 다시 白州守 洪順이 南京(漢陽)의 鎭山인 三角山은 그 형세가 五行 중의 火體의 산 인 까닭에 木性(東方)의 國으로서는 여기에 도읍하는 것은 마땅 치 않다 는 陰陽地理的인 견지에서의 반대를 뿌리치고 禑王은 漢陽으로 行幸하였다. 이 遷都를 따라가는 高官 巨族들과 그 從者 들이 떼지어져 국민의 田宅을 빼앗는 큰 혼란이 둬 따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천도는, 宗廟 社稷 및 百官을 비롯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추기관은 여전히 開京에 남겨논 채 왕과 그 측근만 이 움직인, 災 異를 피하기 위한 假遷都 같은 것이었으나 여기에 서도 入文地理面에서의 몇 가지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원래 風水地理상의 擇地觀念이 인문생활에 적합한 경제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를 고르는데에서 이를 합리화하고 설득력 을 갖게 하는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붙이게 되었던 까닭에 인문생 활에 적합하지 않으면 비록 吉地로서의 전통과 설명이 붙는다 하 더라도 거기에 수도를 둘 수 없다는 것은 禑王 4년 11월에 있었 던 北蘇 箕達山의 천도 계획 중지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風水地理의 중요 조건인 山河襟帶 山水回抱 가 모두 軍 事地理學 또는 경제 교통과 밀집한 관련을 지닌 것이며 이러한 견 지에서 보아 漢江 유역의 기름지고 넓은 평야가 그 변두리를 누비

324 1. 風水地理說 고 흘러 바다로 빠지고 木覓(南山)과 三角山이 마주 솟아 있는 그 기상 등은 韓半岛에서 으뜸가는 수도 후보지였던 것은 더 말할 것 도 없다. 北蘇遷都論이 폐지된 데 이어 禑王 5년 2월에는 다시 새로 遷 都地로 하였던 左蘇遷都 계획마저 중지되더니 동년 11월에 이르 러 돌연히 道詵의 이른바 左蘇의 위치에 대한 이설이 나오고 이어 漢陽遷都論이 일어나 실천에 옮겨지게 된 것은 이미 開京의 구귀 족의 세력을 바탕으로 한 王氏의 실력으로 전국을 다스리는 것이, 당시의 내외 정세에 비추어 飽和點에 도달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 후 禑王은 13년에 漢陽의 山城 축조에 관한 耆老의 회의가 있은 후 14년에는 적극적으로 현재의 北漢山城 축조에 열을 올리 게 된 것은 당시 元을 쓰러뜨리고 中國 대륙에 다시 漢民族 帝國을 이룩한 明에 대비하였던 것이나 동년 3월에 있었던 遼東進攻을 목 적으로 한 저돌적인 군사행동과 이어 돌발한 李成桂의 威化島回軍 및 그의 쿠데타로 禑王은 폐위되었고 민간에서는 木子得國 의 된다 는 李氏가 王이 童謠를 전국민이 부르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禑王이 몰려난 뒤 왕위에 오른 것은 昌王이었던 것이나, 李成桂 등이 이번에는 禑王 昌王은 王氏가 아니고 辛旽의 혈통이라는 분명치 않은 단정 을 내세워 즉위 2년 11월에 폐위하고 神宗의 7 대손인 定昌府院君 瑶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高麗의 末 王인 恭譲王이다. 새로 迎立된 恭讓王은 그 성품이 우유부단하였을 뿐 아니라 그 도 또 佛敎와 陰陽風水에 지나친 관심을 가졌던 군주였던 것이다. 동왕 2년(1390) 7월에 이르러 書雲觀으로부터 道詵密記에 地理

325 Ⅲ. 風水地理說 旺盛의 설이 있으니 漢陽으로 옮겨 松都의 地德을 壽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上書가 있게 되어 國末의 혼란기에 다시 천도 문제를 둘러싼 의견의 대립마저 보게 되었다. 즉 朴宜中이 讖緯術數로써 국가를 지키려는 어리석음과 그것이 미치는 민폐를 들어 천도에 반대견해를 표명하였던 것이나, 왕은 그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나 陰陽의 설이 모두가 거짓은 아니라는 부분적인 진리를 고집하여 맞섰던 것이며, 朴宜中과 거의 같은 이 유로 천도를 반대한 바 있었던 李室의 견해에는 그 정체가 뚜렷하 지 않은 이른바 秘錄을 들어 松都는 君臣을 폐하는 좋지 못한 곳 이라고 천도를 고집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恭讓王의 讖緯秘錄에 대한 신념과 이 신념에서의 遷 都慾에 대하여는 다시 中國의 故事를 이끌어 국가의 튼튼한 기반 은 善政으로 다져지는 것이며 천도에 따르는 여러가지의 민폐를 들어 반대의견을 표명한 尹會宗의 上疏 같은 것이 있었고 특히 判 密直司事 姜淮伯은 국가의 운명을 孟子의 역사철학인 一治一 亂 을 들어 자연의 이치이며 地氣衰旺說이 高麗 4백 년을 통하 여 들어맞지 않은 것을 역설하고 仁政을 베풀어 민폐를 없애는 것 만이 국운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新進官僚층의 이와 같은 儒敎的인 治世觀과 역사의식은 麗末에 들어온 程朱學에 깊이 영향받고 있었던 것이며 거룩한 佛力의 그 늘 아래서 국가의 운명을 빌어 보려는 시대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 어 이에 따라 地理 讖緯 같은 것도 점차 그 권위가 상실되어 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시대의 흐름이 이와같이 바뀌어져 가고 있는 것도 돌보지 않고 왕은 2년(1390) 9월에 判三司事 安宗源 門上評理 尹虎로 하여금 松京에 留守케 하고 松岳의 地德을 休하고 變異를 피하기

326 1. 風水地理說 위하여 일시적인 遷幸을 감행하였던 것이나 이 遷幸 후는 오히려 祥스럽지 않은 사건이 잇따라 일어날 뿐이었다. 이에 刑曹判書 安瑗은 다시 術士들이 주장하는 地理圖讖의 허 황한 점을, 당시 일어난 상스럽지 못한 여러 사례를 들어 舊都 遷 幸의 청원을 上書하기에 이르러 동왕 3년 2월에는 천도의 목적으 로 南京을 출발하여 楊州 檜岩寺에 들러 크게 佛事를 벌이고 開京 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開京으로 되돌아와도 변이는 여전히 계속되어 왕은 당시 왕실 의 신앙이 두터웠던 演福寺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나, 成均館 大 司成 金子粹 政堂文學 鄭道傳 등 儒敎를 政敎의 기본이념으로 하는 신진 관료들의 일치된 반대의견에 왕의 권위로써도 演福寺 塔의 수리마저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그해 6월에는 前 典醫副正 金琠 같은 이가 高麗太祖가 산수의 逆順을 보고 地脈의 續斷을 살펴 創寺造佛한 故事를 되새 기면서 佛敎의 진흥을 역설하여 成均館 生員 朴礎로 하여금 극단 적인 反佛論을 일으키게 하는 등, 佛敎의 옹호와 반대론이 전개되 는 이 무렵에 또 李穡 禹玄寶를 중심으로 한 舊臣 世族의 일파와 李成桂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파와의 알력은 麗末의 비극적인 종말을 일층 촉진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은 대립은 恭讓王 4년 4월에 이르러 李成桂를 지지하여 혁명을 주장하던 신흥세력이 舊臣 世族의 尊王派 지도자 鄭夢周 을 살해하게 되어 5백년의 사직은 이제 그 최후의 숨소리를 거두 게 되는 시간만을 바라보는 순간에 이르렀던 것이다. 李龍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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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Ⅳ. 藝 術 1. 文 學 2. 美 術 3. 音 樂 4. 民 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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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1. 文 1. 文 學 學 (1) 漢文學의 旺盛 高麗는 新羅의 문화를 그대로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거니와, 麗 代에 들어서며 漢文學은 크게 왕성하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 을 것이다. 첫째 太祖의 右文政策을 들 수가 있다. 太祖는 건국하자 곧 西 京과 開京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지만, 그 는 文을 獎勵 崇尚하고 武는 그 다음으로 치는 이른바 右文政策을 펴나갔던 것이니, 이에 나라의 나아갈 방향이 武보다는 文으로치 닫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제 4대 光宗 때의 科擧制의 실시를 들 수 있다. 高麗史 選擧志에 의하면, 光宗은 그 9년(958) 5월 後周人 雙冀의 獻議에 따라 처음으로 科擧試를 실시하여 詩 賦 颂 및 時務策으로 進士 를 뽑았으며, 겸하여 明經 醫卜 등도 뽑았다고 했다. 이어 11년에 및 時務策을 시험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면 주로 詩 賦頌 및 時務策이 그 주요시험 과목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는 다만 詩 賦 頌을 시험하였으며, 15년에는 다시 詩 賦 頌 이 科擧制에 있어 비록 일반 常民에게는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하 더라도 이로 인해서 사회 상류 계층에 있어서는 漢文學이 널리 보 급되고 이에 힘써야 할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째로 제 6대 成宗 때의 여러 가지 시책을 지적할 수 있다. 成 宗은 그의 즉위년(983)에 각 州郡에 詔書를 내려 子弟를 뽑아 서

331 Ⅳ. 藝 術 울에 올려보내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그 6년(987)에는 12牧에 經學博士 醫學博士 각 한 사람씩을 두어 敎學과 醫療의 일을 맡 게 하였었다. 이어 9년에는 西京에 修書院을 설치하여 諸生에게 명하여 史籍을 抄書케 하여 漢文學 교육의 뒷바침이 되도록 마련 하였다. 11년에는 成宗은 최초의 국립대학이라고 할 國子監을 창 설하고는 有司에게 명하여 땅을 가려 書齋와 學舍를 짓게하고, 한 편 田庄을 주어 學粮에 충당토록 하여, 이에 우수한 靑年子弟들을 본격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은 國子生 중에 서 뛰어난 사람을 뽑아 宋나라 서울에 유학시켜 학업을 더욱 연마 케 하였으니, 그들 중에는 그곳 賓貢科에 급제하여 秘書郞의 직을 제수 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國子監의 제도 뿐 아니라, 成宗은 다시 月課法을 실시하 였다. 이는 중앙 관리는 물론 지방 관리에 이르기까지 매월 詩 3 편, 賦 1편을 지어 올리게 하는 제도였으니, 이 또한 漢文學 장려 에 큰 구실을 한 사실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요소들은 모두가 그 궁극에 있어 漢文學 장려 와 그 왕성을 초래케 한 이유로 지적할 만한 일들이거니와, 國子 監과 같은 官學이 기강의 해이와 빈번한 外族의 침입으로 쇠퇴의 기미를 보이자, 학문은 다시 私學의 힘으로 계속 추진되어 나갔 다. 崔冲의 文憲公徒를 비롯한 소위 高麗 十二公徒가 바로 그것이 니, 漢文學 교육은 이 私學에 크게 힘입게 되는 것이다. 崔冲은 海州 사람으로 일찌기 穆宗 때에 登科한 뒤, 顯 德 靖 3대에 걸쳐 벼슬을 살았고, 文宗 때에는 守太師, 中書令에까지 올 랐던 사람이다. 海東孔子라 불리운 그는 정치에도 많은 업적을 남 겼지만 致仕한 뒤에는 교육에 힘을 기울여 후진 양성에 정성을 다 하여 諸生이 문에 넘쳤다고 한다. 그는 모인 子弟들을 樂聖 大

332 1. 文 學 中 誠明 敬業 造道 率性 進德 大和 待聘의 아홉 齋, 소위 九齋에 나누어 교육을 시켰으며, 학과는 대개 經學 史學 文學으 로서 科擧에 응하려는 士類의 子弟들은 대부분이 九齋에 적을 두 고 공부하였다고 한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歸法寺의 僧房을 빌어 夏課를 실시하였는데, 무리 중에서 급제하여 학문은 뛰어났으되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가려 敎導로 삼고 九經三史를 가르쳤다고도 한다.1) 여기에 학풍은 다시 크게 일어나니, 유명한 儒臣들이 다투어 이를 본받아 소위 高麗 十二公徒가 나타 나게 되 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私學은 崔冲으로부터 크게 떨치기 시작하였지마는 한때 쇠퇴의 기미를 보였던 官學 즉 國子監도 睿宗 때부터는 다시 발전의 길을 찾게 된다. 왕은 그의 4년(1109)에 國子監에 七齋를 두어 각각 전문 강좌를 열게 하고 학생을 뽑아 이에 나누어 있게 하였다. 七齋란 周易의 專講處인 麗澤齋, 尙書의 待聘齋, 詩經의 經德齋, 周禮의 求仁齋, 戴禮의 服膺齋, 春秋의 養正齋, 武學의 講 藝齋 등을 말하는 것이거니와, 여기 麗澤齋로부터 養正齋까지는 이른바 儒學齋이고, 講藝齋는 武學齋라고 하였다. 國子監에 武學 을 둔 사실은 매우 주목할 일인데, 이는 당시 女眞 經略에 힘을 기울이던 때인 만큼 우수한 將才를 양성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 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은 다시 國學에 육영 재단으로 養賢庫를 두어 學舍를 짓고 名儒를 뽑아 學官을 삼아 經議를 강론하여 학생 을 교도케 하였었다. 睿宗 다음의 仁宗도 매우 학문을 좋아하는 왕으로서 그는 學式(學制)을 詳定하여 서울에 六學, 즉 國子學 大學 四門學 律學 書學 算學을 세워 國子監의 내용을 확충 정비하였고, 諸州에 명하여 학교를 세워 敎道를 넓혔다. 뿐만 아 1) 高麗史 列傳 卷 8 崔沖條

333 Ⅳ. 藝 術 니라 동왕 9년(1131)에는 諸生으로 하여금 老子 莊子의 學을 다스림을 금하였는데, 이는 儒學의 純粹性을 保持코자 하는 데에 서 나온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역대 제왕들의 한결같은 꾸준한 교육 장려 정책에 힘입어, 國學은 國學대로, 그리고 다시 崔冲같은 이에 따른 私學은 私學대로 각각 그 발전의 길을 더듬어, 여기 麗代의 漢文學은 羅代 에 비해 엄청날 정도의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漢文學의 발전은 많은 문인 학자들을 배출케 하였음도 또한 사실이거니와, 麗代에 있어서는 특히 蘇東坡를 매우 숭상하 였던 것 같으니, 麗代의 崇蘇熱은 남다른 바 있어, 金富軾같은 이 는 자기 이름에 蘇軾와 軾字를 따다가 富軾이라 이름지었으니 이 로 미루어 보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외래 문화에 대한 心醉는 그만큼 고유문화에 대한 疏遠 을 초래한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여기 文學 부문에 있어서는 점 차 그러한 경향이 짙어가는 듯하다. 그러면 이와 같이 漢文學이 왕성하던 高麗 前期에 있어 문학일 반에 있어서는 어떠한 양상을 보였던 것인가? (2) 鄕歌 및 그 殘影 鄕歌는 원래 新羅時代의 民族意識의 소산의 하나로 볼 수도 있 는 것이다. 新羅가 中國의 문화를 도입하였고 또 그 문학의 영향 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新羅는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렬했던만 큼 中國의 문화 내지 문학만으로는 만족치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로 民族文學으로서의 鄕歌를 형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高句麗 百濟 新羅의 三國이 鼎立하여 거의 비슷한 여건에 있었

334 1. 文 學 는데도 불구하고 高句麗 百濟의 경우에는 鄕歌文學의 형태를 현 존하는 史料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유독 新羅에서만 이 鄕歌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 또 鄕歌가 성립한 시기가 민족의식이 가장 왕성했던 新羅統一期였음을 보아, 이 鄕歌文學은 그러한 민족의식 의 소산이며, 民族文學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러한 鄕歌文學이 麗代에 들어와서는 점차 그 그림자가 희미 해져 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高麗라 하여 그 민족이 바뀐 바는 아니지만, 앞에 말한 바와 같이 中國文化에 心醉하다 보니, 비록 문화는 발달하였고 빛나기는 하였으나 自國文化는 그 外來文化에 몰리어 그 모습이 점차 희미해져 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 기 외래문화에 도취되어 民族意識이 다소나마 흐릿해지자, 민족의 식의 소산인 鄕歌가 역시 희미해짐은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하여 麗代에 들어오면 鄕歌文學은 어느덧 前代에 비해 그 모습이 엷어져 갔다고 하겠는데, 그러나 그 초기에 있어 우리는 均 如大師의 普賢十願歌 11수를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靈鷲山 大慈恩玄化寺碑陰記에 의하면 제 7대 顯宗은 그의 어머니를 위해 玄化寺를 창건하고는 친히 國風體를 짓고 또 群臣들이 慶讚하는 詞腦歌 11수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불행히 이것은 오늘날 볼 수 가 없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麗代의 鄕歌로 확실한 것은 均如大師의 普賢十願歌 一稱 願王歌 뿐이라고 해야 하겠다. 均如傳은 근래 海印寺 藏板으로부터 그 刊板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인데 그 原名은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으 로 되어 있으며, 前進士 赫連挺이 지은 것이다. 이는 물론 佛敎學 방면의 귀중한 史料도 되겠지만 한편 11수의 鄕歌를 포함하고 있

335 Ⅳ. 藝 術 어 鄕歌文學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해야 할 것이다. 均如는 俗姓이 邊氏, 黃州 사람이었다. 그는 新羅 神德王 6년 (917) 黃州北 荆岳 南麓에서 태어났다. 그 때 母夫人 占命은 나이 이미 60인 때였다. 처음 태어나자 그는 용모가 너무나도 추하여 부모는 이를 싫어하여 그를 거리에다 내다 버렸다. 그러자 두 마 리의 까마귀가 날아와 날개를 펴 아이를 덮으니, 길 지나던 사람 들이 그 奇異함을 보고 그의 집을 찾아 자세히 그 이야기를 하였 다. 부모는 후회가 되고 한스럽기도 하였으나, 거두어 기를 수 밖 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장 속에 넣어 두고 젖을 먹였으며, 수개 월 후에야 남에게 보였다고 한다. 그는 襁褓에 있으면서도 圓滿偈 를 잘 읽었으며, 무릇 아버지가 입으로 가르치는 바를 열에 하나 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일찌기 고아가 되어 15세에는 출가하였는데, 특히 華嚴의 奧義를 깊이 찾아들어갔으며, 新羅末 이래의 兩分된 海印寺 華嚴 宗의 두 파를 화합하는 데에 많은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高麗 光宗의 귀의가 깊어 왕은 그를 위하여 松都에 歸法寺를 創建하여 살도록까지 하였으며, 秩이 兩重大師에 이르렀었다. 華 嚴의 敎學에 조예가 깊은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으니. 무릇 10여 권, 세상에서는 이를 불러 圓通記 또는 圓通抄라고 불렀다. 그 목 록을 들어 보면, 搜玄方軌記 10卷, 孔目章記 8卷, 五十要問答記 4 卷, 探玄記釋 28卷, 敎分記釋 10卷(傳에는 7卷으로 되어 있다), 旨歸章記 2卷, 三寶章記 2卷, 法界圖記 2卷, 十句章記 1卷, 入法界 品抄記 1卷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學德이 높아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敬重을 받던 均如大師는 光宗 24년(973)에 入寂하고 만다. 그의 鄕歌는 그의 傳記인 均如傳에 수록되어 있는데, 同傳에 의

336 1. 文 學 師之外學이 尤閑於詞腦하니 依普賢十種願王하여 著歌一 十一章하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鄕歌에 대하여 평소 상당 하면, 2) 한 소양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만하다. 한편 그는 스스로 그 에 序하여 말하기를, 무릇 詞腦란 것은 世人 戯樂의 具이다. 願王이란 것은 菩薩 修行의 要樞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려면) 淺近한 데로부터 深 遠한 데에 이르러야 하겠는데, 世道에 憑藉하지 않고는 劣根의 유 래를 끌 수 없으며, 陋言에 붙이지 않고는 普因의 길을 나타낼 수 없어서, 이제 알기 쉬운 近事에 依託하여 도리어 難思한 遠宗에다 가 맞추고자 25大願의 文에 의해서 11首의 荒歌를 짓는다 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는 佛敎의 교리를 쉽게 일반에게 이해시키고자 普賢十種願王에 의하여 이 願王歌를 알기 쉬운 詞 腦歌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들 노래의 제목을 보면 맨 끝의 總結無盡歌를 빼고는 모 두가 위 에 말 한대로 普賢菩薩의 十大發願을 그대로 제목으로 하여 각각 그 끝에 歌字를 붙여 놓았으니, 그 제목을 들어 보면, 禮敬諸佛歌 稱讚如來歌 廣修供養歌 懺悔業障歌 隨喜功德歌 請轉法輪歌 請佛住世歌 常隨佛學歌 恒順衆生歌 普皆廻向歌 總結無盡歌 들이다. 이 願王歌 11 수는 그 당시 널리 사람들에게 퍼져서 사람들이 저마다 愛誦하여 往往 이를 墻壁에 써 붙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 다. 그리고 沙平郡의 那必及干이 3년을 앓아 누워 의약으로도 어 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均如가 찾아가 그의 괴로워함을 불쌍히 여 2) 均如傳 第7 歌行化世分者條

337 Ⅳ. 藝 術 겨 입으로 이 願王歌를 가르쳐 주고 늘 외우도록 권하였다. 그랬 더니 어느날 공중에서 소리가 있으며 말하기를, 너는 大聖의 노 래의 힘을 입어 아픔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더니, 이로부터 효과 가 있었다고도 한다. 이로 보면 이 願王歌는 당시 治病의 呪言으로도 사용되어 어떠 한 병도 이 願王歌를 口誦하면 낫는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는 모두 均如大師의 法力과 德望의 소치라고 하겠지만, 한편 이 願王歌는 均如傳 第 8 譯歌現德分에 의하면 均如와 같은 때의 사 람이던 翰林學士內議承旨知制誥 淸河 崔行歸에 의해서 漢譯 되었 었다. 그는 均如大師를 鑽仰하기 오래었는데, 이 鄕歌가 지어지자 바로 漢詩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譯歌가 나오자 宋人들 은 다투어 베껴 中國으로 가져가니, 宋朝의 君臣은 이를 보고서 이 詞腦歌主는 참으로 一佛이 出世한 것이라고 떠들었다고 한다. 이어 同傳에는 다음과 같은 逸傳까지 수록해 있다. 즉 譯歌를 보 고 一佛이 出世하였다고 야단한 宋朝에서는 드디어 사신을 보내 師에게 禮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師의 용모가 이상하여 世人이 敬 信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麗朝의 君臣은 宋使가 師를 그 용모로 인해 輕視할까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만나 보기를 허락하지 않았 다. 宋使는 이러한 뜻을 눈치채고, 潜服하고는 師가 거처하는 歸 法寺 안 總持院에 가서 가만히 뵙기를 청하였다. 師도 三衣를 整 齊하고 바야흐로 맞으려 하였으나, 朝廷 君臣들의 염려함을 생각 하고 그만 숨어버리고 말았다. 사신들은 이 말을 듣고 어디가 佛을 보리오 하고 울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의 鄕歌 작품은 국내외를 통해 유명하였거니와 예 로 한 두 수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338 1. 文 禮敬諸佛歌 心未筆留 慕呂白乎隱佛體前衣 拜內乎隱身萬隱 法界毛叱所只至去良 塵塵馬洛佛體叱刹亦 刹刹每如邀里白乎隱 法界滿賜隱佛體 九世盡良禮爲白齊 歎曰, 身語意業無疲厭 此良夫作沙毛叱等耶 (漢譯歌) 以心爲筆畵空王 瞻拜唯應遍十方 一一塵塵諸佛國 重重刹刹衆尊堂 見聞自覺多生遠 禮敬寧辭浩劫長 身體語言兼意業 總無疲厭此爲常 (한글譯歌)3) 부드루 그리 부텨 前에 젛누온 모 法界 록 니르가라 ㅅ 塵塵마락 부텨 刹이 刹刹마다 뫼시리 法界 샨 부텨 九世 다아 禮 져 아으 身語意業旡疲厭 이에 브즐 다라 稱讚如來歌 今日部伊冬衣 南無佛也白孫舌良衣 無盡辯才叱海等 一念惡中湧出去良 塵塵虛物叱邀呂白乎隱 功德叱身乙對爲白惡只 際于萬隱德海肹 間王冬留讚伊白制 隔句 必只一毛叱德置 毛等盡良白乎隱乃兮 (漢譯歌) 遍於佛界罄丹衷 一唱南無讚梵雄 3) 梁柱東 古歌硏究(1942)에 의한다. 이하 같다 學

339 Ⅳ. 藝 術 辯海庶生三寸抄 言泉希涌兩唇中 稱讚覺帝塵沙化 頌詠醫王刹土風 縱未談窮一毛德 此心直待盡虛空 (한글譯歌) 오 주비 南無佛여 손 혀아 ㅅ 바 一念악 솟나가라 塵塵虛物ㅅ 뫼시리 功德人身을 對 디 無盡辯才 업는 德바 西王 루 기리 져 ㅅ 아으 비록 一毛 德두 몯 다아 뇌 이상은 願王歌의 제 1, 제 2의 작품을 보인 것이거니와, 麗代의 鄕歌로는 위에서 말한 均如大師의 유명한 願王歌 만이 남아 전할 뿐, 여타의 것은 오늘날 볼 길이 없다. 顯宗 때의 國風體와 群臣이 지었다는 詞腦歌를 鄕歌라고 치더라도 이제는 볼 수도 없거니와 또한 그 이후에 鄕歌의 소식은 끊어지고 만다. 앞에서 말하기를 鄕歌는 羅代의 민족정신과 더불어 민족문학으 로 성립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이와 같은 鄕歌文學의 쇠퇴 는 곧 민족정신의 쇠퇴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 이는 반드 시 그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줄 안다. 그것은 시대가 바뀌 고 또 형성된 문화의 질이 바뀌고 보면 이에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詩歌를 낳게 되는 것이고, 동시에 낡은 것은 무엇인가 어 느 성격을 후대에 남기며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麗代가 외래문화 에 心醉했고 이에 따라 漢文學이 고도로 성장하고 보면, 이제는 漢文 그 자체만 가지고도 능히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며, 동시에 羅代와는 변질된 문화를 형성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리고 보면 어느덧 궁색한 表記法이라고 할 吏讀式 표기법은 우

340 1. 文 學 세한 漢文學에 눌려, 아무래도 그 그림자가 희미해져가게 됨은 자 연의 추세라고 해야 할 듯하다. 여기에 鄕歌文學은 麗代에 들어 오면서 족히 麗代를 대표할 만한 詩歌文學으로서의 힘을 상실해 갔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랜 세월의 역사를 지닌 이 鄕歌가 麗代 에 들어와 곧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다. 무엇인가 流動 변화를 일 으키며 사라져갔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우리는 그러한 鄕歌의 흔 적 내지 殘影을 다소는 더듬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均如大師의 死後 백 수십 년이 지나 睿宗 때에 와서 悼二將歌라는 短歌가 國文學史上에 나타난다. 高麗史에 의하면 왕은 西京에서 八關會를 열고 雜戱를 관람하였는데, 그때 국초 功臣인 金樂 申崇謙 두 장군의 偶像을 보고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보 인다.4) 한편 平山 申氏 高麗太師壯節公遺事에 따르면, 高麗 太祖 가 大丘 午山 梧桐藪에서 甄萱을 맞아 크게 싸울 때, 전세는 불리 해지고 사태가 위급하자 太祖와 모습이 酷似한 申崇謙將軍이 太祖 를 대신하여 御車를 타고 나와 元甫 金樂과 함께 力戰하다 전사 한 사실을 적고, 한편 그후 太祖가 八關會를 열고 群臣과 더불어 즐길 때 전사한 공신이 자리에 없음을 생각하여, 有司에 명하여 結 草하여 申 金 두 장군의 우상을 만들어 班上에 앉히고 酒食을 내 리니 술이 곧 다 말라 버렸으며, 우상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일어나 춤을 추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樂庭에 排置함을 상례로 삼았는데, 그 후 睿宗 15년(1120) 秋에 왕은 西都를 돌아 보았 다. 그리고 八關會를 排設하였는데 假像 둘이 있으니, 비녀를 끼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笏을 잡고 있으며, 金으로 얽어 있었는 데, 말을 타고 踊躍하며 뜰을 두루 돌았다. 왕이 이상히 여겨 4) 高麗史 卷 14 睿宗 15年 冬 10月 辛巳條

341 Ⅳ. 藝 術 좌우에게 물으니, 이 곧 申崇謙 金樂이라 말하며 그 本末을 여쭈 니, 왕은 悄然히 감탄하여 2臣의 후손을 물어 보며, 御題 四韻과 端歌 二章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同 遺事에는 御題 四韻과 端歌 二章이 실려 있는데, 여기 端歌가 바로 앞에서 말한 悼二將 歌이다. 이 悼二將歌는 吏讀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곧 鄕歌 그것과 형식이 같지는 않다. 물론 鄕歌라고 하면 어떤 특수 형태 의 詩歌에 대한 명칭은 아니고 吏讀文字에 의하여 표기된 노래를 일괄하여 부르는 명칭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니, 그렇다면 이 悼二 將歌도 鄕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鄕 歌라고 부르는 노래는 新羅를 중심으로 한, 시대적으로 보아 麗初 의 均如作인 願王歌 정도까지를 포함시키는 것이 라고 한다면, 이 노래를 鄕歌라고 부르기는 좀 어려울 듯도 하다. 그러나 表記法에 중점을 두고 말한다면 이 노래는 鄕歌 바로 그것은 아니더라도 鄕 歌의 계통을 이은 鄕歌의 殘影이라고는 할 수 있을 듯하다. 睿宗은 정치면에 있어서는 그리 큰 공적을 남겼다고 할 수는 없 을지 모르나, 개인적으로는 크게 華風을 흠모하며 문학을 숭상하 고 禮樂으로써 풍속을 교정하겠다는 생각에서 宋으로부터 大晟樂 등을 수입하는 등 문화상에 적지 않은 노력을 하였었다. 왕은 또 詩歌 방면에도 상당한 소양이 있어 스스로 宋詞를 지었을 뿐 아니 라, 伐谷鳥 短歌 2首를 짓기도 하였다 한다. 이 노래는 신하들이 時政의 得失을 바로 말해 주지 않음을 풍자한 것이라고 하는데, 金富軾의 譯詩에 佳人猶唱舊歌詞 布穀飛來櫪樹稀 還似霓裳羽衣曲 開元遺老淚沾衣 라고 한 것이 남아 있을 뿐, 그 원작은 전하지 않고 있다. 이 伐谷

342 1. 文 學 鳥 短歌 2首가 곧 悼二將歌 바로 그것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 거니와, 이제 悼二將歌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悼二將歌 (한글詩歌)5) 主乙完乎白乎 니믈 오 오 心闘際天乙及昆 하 밋곤 魂是去賜矣中 넉시 가샤 三烏賜敎職麻又欲 사 샨 벼슬마 져 望彌阿里刺 라며 아리라 及彼可二功臣良 그 두 功臣여 久乃 直隱 오라나 고 跡烏隱現乎賜丁 자최 나토샨뎌 이 노래는 그 表記法으로 미루어 鄕歌의 殘影이라 보고자 한다 함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그러면 鄕歌는 이 悼二將歌에서 그 마 지막 빛을 발하고 완전히 文學史上에서 사라졌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같지는 않다. 수백 년을 전승해 내려온 전통이 그리 쉽게 사라지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鄕歌의 최후 의 잔영이라 할 노래 하나를 더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毅宗 때 鄭叙가 지은 鄭瓜亭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高麗史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해설이 있다.6) 鄭瓜亭은 內侍郞中 鄭叙가 지은 것이다. 叙는 瓜亭이라 號하였 는데, 外戚에 연관되어 仁宗의 총애를 받았으나, 毅宗이 즉위하게 되자 그의 고향인 東萊로 放歸하게 되었다. 王이 말하기를 오늘날 가게 됨은 朝議에 몰리어 그리 된 것이나 머지 않아 마땅히 다시 5) 梁柱東 麗謠笔注(1947)에 의한다. 6) 高麗史 卷 71 樂志

343 Ⅳ. 藝 術 부르리라 하였다. 叙는 東萊에 있어 날이 오래 되었으나 召命이 이르지 않자, 이에 琴을 타며 이를 노래하니, 그 가사가 극히 凄惋 하였다. 李齊賢이 이를 詩로 옮겼으니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 이 해설에 의하면 鄭叙는 仁宗朝의 寵臣이었음을 알겠고, 毅宗 이 즉위하자 곧 東萊로 放歸되었음과 그가 이 노래를 짓게 된 동 기를 알 수가 있다. 麗謠 중 한글로 記寫되어 있는 유일의 작자 분명의 노래이거니와 樂學軌範에 그 가사가 수록되어 있으니, 내님 물 그리 와 우니다니 山졉동새 난 이슷 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殘月曉星이 아 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물도 千萬 업소이다 힛마러신뎌 읏브뎌 아으 니미 나 마 니 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와 같다. 작자 鄭叙의 사람됨은 자세치 않으나, 東國通鑑 권 24, 毅宗 5년(1151) 5월조에 性輕薄, 有才藝라는 말이 있음을 보면 대 개 風流 才藝에 능란한 사람이었음은 짐작이 간다. 이 노래는 후 세에 널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데, 특히 후세에 와서는 忠臣 戀主之詞 라 하여 宮廷에서는 이를 典樂으로 삼아 樂工 取才에

344 1. 文 學 있어 필수 과목으로 삼았으며, 일반 士大夫 사이에 있어서도 이를 학습하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위의 가사 인용을 보더라도 짐작이 가듯이 그 형식이 10句體로 되어 있다. 원래 鄕歌 10句體는 前 8句, 後 2句 로 나뉘는 이른바 分節體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前大節에 있어서 대체로 뜻의 일단락을 짓고, 이어 後小節에서 다시 앞을 받아 총 괄적으로, 또는 결론적으로 뜻의 간곡을 보이며 끝을 맺고 있는 것인데, 여기 鄭瓜亭이 반드시 鄕歌의 10句體 그것대로 分節이 분 명하지는 않지만, 거의 鄕歌의 그것과 흡사한 형식을 취해 있다고 볼 만도 하다. 한편 10句體의 분절에 있어서도 전후 兩節의 관계 는 그것이 緊密해지면 긴밀해질수록 그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後 節은 자칫하면 前節에 흡수되어버리는 그러한 경향이 농후하다고 보겠는데, 여기 鄭瓜亭은 바야흐로 그러한 단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郷歌의 발전 단계로 보아 거의 최종적인 단계라 고도 할 수 있겠는데, 鄭瓜亭은 鄕歌의 그러한 최종적 모습을 보 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 이 鄭瓜亭은 鄕歌 文學의 殘影으로 보아 둠이 좋을 것 같다. 毅宗 때 鄭仲夫의 亂은 麗朝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질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 난을 계기로 新羅 이 래의 舊貴族 계급은 거의 완전히 역사 무대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도 하겠는데, 이 鄭瓜亭은 바로 그 구귀족 계열의 마지막 을 장식한 鄕歌文學의 잔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에 있어 난후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질되자, 이제는 다시는 鄕歌 계통의 그림자는 볼 수가 없고, 새로운 형태의 詩歌文學이 따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은 곧 高麗 후반기에 새로이 나타난

345 Ⅳ. 藝 術 景幾體歌 또는 俗謠(長歌)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리하여 高麗 前半期에 있어서는 鄕歌系列로는 均如傳의 願王 歌를 비롯하여 그 鄕歌文學의 亞流 내지 殘影이 詩歌文學史上에 보이고 있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3) 說話文學 花郞世紀 의 출현은 新羅시대 說話文學의 발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花郞世紀는 書名 그대로 累代에 걸친 花郞들의 傳記를 集成한 것일 것이니, 그리고 보면 거기에는 필시 花郞들의 美談, 逸話 등등이 많았을 것으로, 분명 說話文學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說話文學이란 것은 說話 그 자체보다도 採錄이 문 제인데, 그 설화가 어떠한 내용이든 간에 채록이 되어서 비로소 문학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三國史 記나 三國遺事도 단순한 歷史書라기 보다는 說話文學上으로도 매 우 중요한 자료라고 아니 할 수 없는데, 花郞世紀도 그와 같은 가 치를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高 僧傳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모두가 전하지 않는 일이 可惜할 따름 이다. 그런데 이런 說話의 採錄이라는 사업이 麗朝에 들어 오면서 본 격적으로 이루어져 간 것 같다. 三國史記나 三國遺事는 차치해 놓 고, 그보다 앞서 殊異傳이라는 책이 나왔던 것이다. 이 책은 文宗 朝에 登第했던 朴寅亮(?-1096)의 編著다. 그러나 이 책은 아깝 게도 오늘날 佚書가 되어 逸文 若干篇이 여기 저기에 散在해 있을 뿐 原書는 없다. 이제 그 逸文의 제목을 모아 보면(괄호안은 수록

346 1. 文 學 한 册名임), 圓光法師傳(海東高僧傅, 三國遺事) 阿道傳(海東高僧傳) 脫解(三國史節要 卷 2) 花王(三國史節要 卷 8) 延烏郞 細烏女(筆宛雜記 卷 2) 寶開(太平通載 卷 20) 崔致遠(太平通載 卷 68) 首挿石枏(大東韻府群玉 卷 8) 竹筒美女(大東韻府群玉 卷 9) 老翁化狗(大東韻府群玉 卷 12) 仙女紅袋(大東韻府群玉 卷 15) 虎願(大東韻府群玉 卷 15) 心大繞塔(大東韻府群玉 卷 20) 과 같은데, 이들을 살펴 보면 殊異傳이 說話文學集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殊異傳은 朴寅亮이 채록한 설화문학집이고, 그 리고 보면 朴寅,亮은 說話文學者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 만 오늘날 전하는 逸文이 원문 그대로 또 완전히 전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왜냐 하면 海東高僧傳의 圆 光法師傳과 阿道傳은 三國遺事의 그것의 일부분이며, 또 大東韻府 群玉에 실려 있는 仙女紅袋는 太平通載에 수록된 崔致遠을 抄錄 한 정도이니, 어느 것이 그 眞文인가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崔致遠과 仙女紅袋는 같은 이야기인데 이것이 다 殊異傳에 나왔을 리는 없고, 아마도 후세에 인용하던 사람들이 어떤 이는 그 전부를, 어떤이는 그 일부를 抄錄하여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

347 Ⅳ. 藝 術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고 보면 여기 남아 있는 逸文들은 원문 그 대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 太平通載에 수록된 崔致遠 은 다소 특이한 점 이 있어 이에 대하여는 특별히 언급을 하여야 하겠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崔致遠의 字는 孤雲인데, 나이 12세 때 唐나라에 유학하였다. 乾符 甲午年 學士 裴瓚이 掌試할 때, 一擧에 魁科에 올랐다. 그 리하여 漂水縣尉에 除授되었는데, 어느날 縣 南界에 있는 招賢 館에서 놀았다. 그 館 앞에는 낡은 무덤이 있었는데 雙女墳이라 고 불리었으며, 古今 名賢의 유람하는 곳이었다. 致遠은 그 곳 石門에 詩를 썼으니, 그 詩는 誰家二女此遺墳 寂寂泉扃幾怨春 形容空留溪畔月 姓名難問塚頭塵 芳情儻許通幽夢 永夜何妨慰旅人 孤舘若逢雲雨會 與君繼賦洛川神 이었다. 館에 돌아오니 달은 밝고 바람은 맑게 불어왔다. 지팡 이를 짚으며 서서이 걷노라니, 갑짜기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아리따운 모습이었으며, 손에는 붉은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孤 雲 앞에 나타나 말하기를 八娘子, 九娘子께서 秀才에게 말씀 을 傳합니다. 아침에는 특별히 걸음을 옮겨 주셨고 겸하여 아름 다운 詩를 내리시니 각각 酬答함이 있어 삼가 바치도록 하십니 다 라는 것이었다. 公은 놀라 돌아 보며, 다시 무슨 姓의 娘子 인가 물으니, 아침나절 石門에 題詩한 곳이 두 낭자의 있는 곳 이라고 한다. 公은 이에 깨닫고 그 첫 주머니를 보니 그것은 八 娘子가 秀才에게 바치는 글이었다. 그 글에 하였으되, 幽魂離恨寄孤墳 桃臉柳眉猶帶春

348 1. 文 學 鶴駕難尋三島路 鳳釵空墮九泉塵 當時在世長羞客 今日含嬌未識人 深愧詩詞知妾意 一回延首一傷神 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둘째 주머니를 보니 이는 九娘子의 글인 데, 그 글에는 往來誰顧路傍墳 鸞鏡駕衾盡惹塵 一死一生天上命 花開花落世間春 每希秦女能抛俗 不學任姬愛媚人 欲薦襄王雲雨夢 千思萬憶損精神 이라고 하여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쓰기를, 姓名을 감춤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孤魂이 俗人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 다. 바야흐로 마음 허하시겠읍니까 속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잠간 뵘을 라고 하였다. 公은 그 아름다운 詩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온 여자의 이름을 물으니 翠襟이라고 하였다. 公은 기뻐하며 그에게 희롱하고자 하니, 翠襟은 노하며, 秀 才는 마땅히 回書를 쓰실 일이지 헛되이 사람에게 累를 끼치려 고 하십니까 하는 것이었다. 致遠은 이에 회답의 시를 써서 翠襟에게 맡기었다. 그 시는 偶把狂詞題古墳 豈期仙女問風塵 翠襟猶帶瓊花艷 紅袖應含玉樹春 偏隱姓名寄俗客 巧故文字惱詩人 斷腸唯願陪歡笑 祝禱千靈與萬神 이었고, 이어 그 끝에 이어 쓰기를 靑鳥無端報事由 暫時相憶淚雙流 今宵若不逢仙質 判却殘生入地求 라고 하였었다. 翠襟은 그 시를 가지고, 바람처럼 빨리 가버렸

349 Ⅳ. 藝 術 다. 致遠은 홀로 서서 오래 기다렸다. 갑자기 향기가 나더니 한 참만에 2녀가 같이 나타났다. 바로 한 쌍의 明玉이며, 두 송이 蓮이었다. 致遠은 놀랍고도 기뻐, 마치 꿈속만 같았다. 이 瑞에 인사를 하고 2녀의 살던 곳과 姓氏를 물었다. 그 중 紫裙을 두 른 여인이 눈물을 홀리며 말하기를, 저와 동생은 漂水縣 楚城 鄕에 사는 張氏의 두 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縣吏는 아니 하시 고 오직 鄕豪로만 지내셨는데, 富는 銅山과 같았으며, 奢侈는 金谷과 같았읍니다. 제 나이가 18세 되고, 동생의 나이가 16세 때, 부모는 출가시킴을 의논해서, 저는 鹽商에게로 정하고, 동 생은 茶商에게로 許婚을 하셨읍니다. 저희들 姉妹는 이 일이 마 음에 차지 않아 鬱結한 마음 펴볼 길이 없어 그만 일찍 죽게 된 것이오니, 바라옵건데 仁賢께서는 더 의심하지 마십시오 라고 玉音이 昭然하시니 어찌 의심함이 있겠 읍니까 하고는 이어 물어 보기를 무덤에 의지하신 지가 오래고 하는 것이었다. 致遠은 또 이곳 館에서 멀지 않으니, 만약 英雄과 서로 만남이 있을진 데, 아름다운 이야기를 말하시지요 하니, 紅袖를 입은 여인이 말하기를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鄙夫였으며, 이제 다행히 秀才 를 만났으니, 氣는 鼇山과 같이 빼어나 가히 玄玄의 理를 이야기 할 만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에 致遠은 술을 내어와 권하며 모두가 시를 지으니 淸絕함이 세상의 귀절이 아니었다. 한편 翠 襟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니 그 淸雅함이 세상에 다시 없는 듯하 였다. 드디어 致遠은 2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한다. 2녀도 기꺼이 응했던 것이다. 어느덧 달은 서산에 지고 닭 울음 소리 가 들려 왔다. 2녀는 모두 놀라 일어나며, 公에게 이별을 고하 였다. 그리고 각각 시를 지어 드리는 것이었다. 致遠은 그들의 시를 보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다. 2녀는 致遠에게 말

350 1. 文 學 다른 날 혹 이곳을 다시 지나시게 되거든 거치른 무 덤을 다듬어 거두어 주십시오 하며, 말을 마치자 곧 사라지고 하기를, 말았다. 이튿날 아침 致遠은 다시 무덤가를 찾아 감탄해 마지 않으며, 長歌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후 致遠은 新羅로 돌아 왔으나, 벼슬길에서 물러나 山林 江 海에 僧을 찾기도 하고, 또 小齋를 짓고, 石臺를 찾아 문서를 耽玩하고 風月을 읊으며 그 사이에 소요하다가 최후에는 伽耶 山 海印寺에 숨고 말았다 이상이 崔致遠 의 대략의 줄거리이거니와, 이에 대하여 趙潤 濟는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7) 이것은 崔致遠의 傳記는 아니다. 崔致遠을 모델로한 하나의 문학이다. 그러면 작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것이 殊異傳에 수록 된 설화라 하지만 餘他의 巷間에 돌아다니는 說話와는 근본적 (중략) 첫째 全部가 詩로 되다시피 으로 그 성질이 다르다. 되어 詩 總數 十五首나 되고, 더우기 最後의 長歌란 것은 六十 三句의 長篇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到底히 口傳의 說話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必是 어떤 文士가 戯作한 것이라 밖에 생각되 (중략) 이것 지 않는데, 그러면 그 作者는 果然 누구일까. 을 採錄한 朴寅亮 自身이 지은 것이 아닐까. 朴寅亮으로 말하면 當代의 大文學者로서 可히 崔致遠 以後 첫 손가락을 꼽을 만한 문학자니까 그로서 이만한 作品을 쓴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 을 일이고, (중략) 朴寅亮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朴寅亮에 못지 않는 다른 文士로서도 이 作品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이 崔致遠 은 口傳하여 오던 옛 이야기가 아니고 어 느 特殊한 作者에 依하여 創作되었을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7) 趙潤濟 韓國文學史 (1963) pp

351 Ⅳ. 藝 術 (중략) 이것이 事實 高麗 때의 創作品이라고 한다면 說 話 文學의 進步는 이미 대단한 것이다. 崔致遠 은 이미 完全 한 하나의 傳奇體 小說인데, 後代의 金鰲新話에 比하여 別로 遜 色이 없고, 이것은 또 前代 調信夢生의 傳統을 받아 發達한 文 學일 것이니, 可히 高麗 說話文學의 健全한 發展을 엿볼 수 있 다. 同時에 高麗文學은 中國文學의 影響을 充分히 받아 벌써 많 은 우리의 說話文學을 世界로 向해 開放하여, 어느덧 說話로부 터 脫皮하여 傳奇體 小說에 迫頭하여 가고 있다 하겠다 위의 평에서도 볼 수 있듯이 崔致遠 은 단순한 說話로 보기에 는 너무나 문학적으로 세련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趙潤濟의 말대로 그 작자가 朴寅亮인지 아닌지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에 상당한 素養이 있는 어느 문인의 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야말로 후대의 金時習의 金鰲新話에 비하여 별다른 遜色이 없을 정도이다. 이로보아 이 작품은 이미 傅奇體 소설에 迫頭한 작품이 고, 이와 같이 볼진대 麗代의 說話文學은 中國文學의 영향을 받아 가면서 그야말로 매우 건전한 발전을 해 갔다고 할 것이니, 이 崔致遠 은 그러한 자취를 보여 주는 의미에서 크게 주목할 작품 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상과 같이 볼진데 작품 崔致遠 을 비롯한 여러 설화를 한 데 수록 편집한 殊異傳은 확실히 麗代 說話文學의 발전을 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羅代 이래의 설화문학은 이 시기에도 꾸준히 발전 의 길을 거듭하였으며, 朝鮮에 이르러는 드디어 小說文學으로 발전 해 가는 터전을 마련해 갔다고 해야 하겠다. 여기 附言해 둘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殊異傳의 분명한 編者 에 관한 일이다. 殊異傅은 三國遺事에서는 古本殊異傅, 그리고 太 平通載 大東韻府群玉筆苑雜記海東文獻總目錄 增補文獻備

352 1. 文 學 考 등의 책에서는 新羅殊異傅, 다시 海東高僧傅에서는 殊異傳 등 으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古文獻에 나타나 있고, 또 그 編者에 대 해서도 太平通載 大東韻府群玉 등에서는 崔致遠說로, 海東高僧 傳에서는 朴寅亮說로 하여, 두 설이 있다. 그러나 殊異傅에 대하 여 古木殊異傳이니 新羅殊異傅이니 하는 것은 殊異傳에 대한 異 稱이라 볼 것이며, 殊異傳은 殊異傳 그대로 하나라고 보고싶으며, 한편 그 편자에 대해서도 두 설이 있으나 殊異傳 안에 崔致遠 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崔致遠 자신이 자기의 편저에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을 넣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고 보면, 역시 편자는 麗代의 朴寅亮으로 보아둠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殊異傳은 朴寅亮編인 麗代의 說話文學集이라고 보겠다. 이에 참고로 崔致遠 외의 몇몇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寶 開 寶開는 隅金坊에 사는 여인이었다. 아들은 長春이라 하였는 데, 장사 차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지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 었다. 寶開는 敏藏寺 觀音 앞에 나아가 7일 기도를 드렸더니 아 들 長春이 와서 어머니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놀랍고 기뻐서 소리내어 울었다. 절 사람들이 그 온 바를 물으니 長春 은 말하기를, 바닷 가운데에서 黑風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함 께 갔던 사람들은 모두 溺死를 하였읍니다. 저는 판자쪽을 타고 흘러 吳 땅에 이르렀읍니다. 吳人은 저를 잡아 노예로 삼고 밭 을 갈게 하였읍니다. 갑자기 한 스님이 오시더니, 너의 나라를 생각하는가 하시는 것이었읍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저에게는 老母가 계셔 그립기 그지없읍니다라고 하였읍니다. 스님은 만약 네가 너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면 나를 따라 가자고 하며, 말을 마치자 함께 갔읍니다. 한 깊은 개울이 있었는데 스님은 저의

353 Ⅳ. 藝 術 손을 잡아 일으키셨읍니다. 어두컴컴하기가 꼭 꿈속 같았는데 갑자기 新羅말이 들려오고 또 哭聲이 들렸읍니다. 살펴보니 저 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았고 사실이 아닌 것만 같았읍니 다 절의 승려들은 이 일을 모두 나라에 말씀 올렸고, 나라는 靈驗함을 尊崇하여 財貨 田地를 菩薩 계신 곳에 바쳤다. 天寶 4 년 乙酉 4월 8일 申時에 吳를 떠나 戌時에 敏藏寺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觀音菩薩이 영험이 많음을 나타낸 佛敎的 說話라 고 하겠다. 首挿石枏 新羅의 崔伉은 字를 石南이라 하였는데, 愛妾이 있었으나 부 모가 이를 금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數月이 되자 伉은 드 디어 暴死하고 만다. 여드레가 지나서, 한밤중에 伉은 妾의 집 으로 갔었다. 妾은 그의 죽음을 몰랐었다. 그리하여 기뻐마지 않으며 그를 맞아들였다. 伉은 목에 梅花나무가지를 꽂고 있었 다. 그는 이를 나누어 妾에게 주며, 부모께서 그대와의 동거를 허락하셨기에 왔노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妾과 함께 그의 집에 돌아왔다. 伉은 담을 넘어 들어갔다. 밤은 바야흐로 밝아오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집사람이 나와서 妾이 왔음을 보고는 그 온 까닭을 물었다. 妾은 지난밤의 이야기를 갖추어 말하니, 집안 사람은 伉은 이미 죽은 지 8일이나 되며, 오늘 葬 事를 지내려 하는데 무슨 그러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 였다. 妾은 郞君이 저와 더불어 매화나무 가지를 나누어 꽂았사 온즉 이로써 가히 證驗으로 할 수 있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棺을 열고 보니 주검 목에 梅花가 꽂혀 있으며, 옷은 이슬에 젖 었으며, 발에는 신을 신고 있었다. 妾은 그가 죽었음을 알고 통

354 1. 文 學 곡하며 함께 죽으려 하였다. 그러자 伉은 되살아나 30년을 해 로하고 생을 마쳤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든가, 또 죽었던 사람 이 다시 소생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다분히 傳奇的인 이야기지 만, 한편 두 남녀의 지극한 사랑이면 능히 그러한 불가능도 가능 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어, 비록 이야기는 新羅 時代로 되어 있으나 麗代人의 지극했던 생활감정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竹筒美女 金庾信이 西州로부터 서울로 돌아오고 있을 때, 길에 이상한 客이 있어 庾信보다 앞에서 가는데 머리 위에는 비상한 기운이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 쉬게 되자, 庾信도 또한 쉬면서 잠자는 체하였다. 客은 길가는 사람이 끊김을 살피자 품안을 뒤지더니 竹筒을 꺼내어 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두 미녀가 죽통으로부터 나와 함께 앉아 이야기하더니 다시 竹筒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 는 죽통을 품에 넣고 떠나는 것이었다. 庾信이 뒤따라가 물으니 그의 말은 매우 溫雅하였다. 함께 서울로 들어와 庾信은 그 객 을 데리고 南山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하였 다. 두 미녀도 또한 나와 자리에 참석을 했다. 객이 말하기를, 저는 西海에 있으며, 東海에서 아내를 얻어 아내와 함께 부모께 문안드리러 돌아가는 길이 올시다라고 하더니, 이어 풍운이 일 어 어두워지더니 홀연 보이지 않고 말았다 이 역시 傅奇的인 이야기다. 西海에 있다함은 龍임을 뜻한다고 보겠는데, 원래 龍은 靈物이라고 보았던 동양적 사고방식을 그대 로 나타내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 竹筒美女와 꼭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中國에는 이야

355 Ⅳ. 藝 術 기의 구성 양식이 이와 매우 흡사한 이야기가 있다. 비교의 참고 를 얻고자 이에 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梁의 吳均이 편찬한 續齊諧記 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東晋 때, 陽羡(江蘇省)에 사는 許彥이 綏安山 속을 걷고 있을 때 17,8세 되는 한 書生을 만났다. 그 사람은 길가에 누워 있었 는데, 다리가 아프니 彥이 등에 지고 있는 거위 (鵝鳥)가 든 광 주리 안에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彥은 농담이라고 생각하였는 데, 서생은 어느 새 광주리 속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리는 별로 커진 것도 아니고, 서생도 별로 작아진 것도 아 니었다. 분명히 두 마리의 거위와 나란히 앉아 있는데, 거위들 도 놀라는 빛이 없었다. 彥은 광주리를 지고 걷기 시작하였는데 무거워진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한참 걷다가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니, 서생은 광주리로부터 나와서 변변치 않은 요리를 드리고 싶은데 라고 말한다, 彥은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서생은 입으로부터 구리로 된 쟁반과 조그만 상자 를 하나 배앝아 내었다. 조그만 상자 속에는 여러 가지 요리가 들 어 있었으며, 山海의 珍味가 가득히 차 있었다. 접시나 작은 그릇 은 모두가 구리로 만든 것이었고, 요리의 향기나 맛의 좋다는 것 은 세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번인가 盞을 주고 받고 하던 중, 서생이 말을 꺼냈다. 아까부터 한 여인을 데리고 있어서 그럼니다마는 잠깐 여기 에 부르고 싶은데요 彥이,

356 1. 文 學 알았읍니다 라고 대답하니, 서생은 또 입으로부터 한 아가씨를 배앝아 내었 다. 나이는 15,6세 옷도 아름다웠고 얼굴 모습도 세상에 비할 자 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아가씨도 그 좌석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서생은 흠뻑 취해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아가 씨는 彥에게, 이 사람과 부부의 緣을 맺고는 있읍니다만, 실은 따로 좋아하 는 사람이 있어요. 아까부터 몰래 남자를 데리고 오고 있읍니다 마는, 이 사람이 잠들어 버렸으니 잠깐 부르기로 하겠읍니다.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네 彥이 알았읍니다 라고 대답하니, 아가씨는 입으로부터 한 남자를 배앝아 내었다. 나이는 23, 4세로 역시 똑똑하게 생긴 美靑年이었다. 그리하여 彥 과 인사하고 있을 때, 먼저 서생이 돌아 누으면서 눈을 뜰 듯 했 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비단 병풍을 배앝아 내고, 서생은 아가씨 를 그 안에 이끌고 들어가 함께 잠들고 말았다. 그러자 그 두번째 남자가 또 말을 꺼냈다. 저 여인은 情은 두텁습니다마는 아무래도 흠뻑 반해질 수는 없읍니다. 아까부터 한 여인을 몰래 데리고 있어서 잠깐 만나 보려고 합니다. 제발 말씀하시지를 말아 주십시오 彥이, 알았읍니다 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또 입으로부터 한 아가씨를 배앝아 내었 다. 나이는 20세 가량 되었다. 세 사람이 술을 마시며 오랫동안 노닥거리고 있을 무렵, 서생

357 Ⅳ. 藝 術 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남자는, 두 사람은 벌써 눈을 떴구나 라고 하며, 자기가 배앝아 낸 아가씨를 도로 입 속에 거두고 말 았다. 그러자 한참 있다가 서생에게 갔었던 아가씨가 나왔다. 彥에게, 저 사람이 일어날 것 같아요 라고 말하고는 먼저의 그 남자를 다시 삼켜 버리고는 혼자서 彥과 마주 앉았다. 그런 후 서생이 나와서는 彥에게, 잠깐 자려던 것이 그만 길어지고 말았읍니다. 혼자 뿐이셔서 매우 심심하셨겠읍니다. 이제 해도 벌써 저물었고 하니, 이것으 로 작별하십시다 라고 하더니, 이도 또한 그 아가씨나 銅器 등을 모조리 입 안으로 삼켜 버리고, 직경이 두 자나 넘는 큰 구리 쟁반을 남겨 彥에게 선물하면서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읍니다만, 이것을 기념으로 드리죠 그 후 大元年間에 彥은 蘭臺令史가 되었는데, 그 쟁반을 侍中인 張散에게 선물하였다. 散이 그 銘을 보니 漢나라 永平 3년에 만들 어진 것이었다 이상은 前記한 바와 같이 中國의 續齊諧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서 우리의 竹筒美女와 꼭 같은 이야기는 아니나, 그 구성 양식에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竹筒美女는 竹筒서에 미녀가 나온다는 방 식이나, 續齊諧記의 것은 입에서 미녀 또는 미남이 나온다는 그러 한 방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것은 단 한 번 나오면 그것으로 끝이 지만, 中國의 이야기는 역시 中國답게, 하나가 나오고는 그 하나 에서 다시 다른 하나가 나오고, 그 다른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가

358 1. 文 學 나온다는 식으로 2중, 3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끝내는 하나로 다 귀착되지만, 그 하나의 구조가 복합적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 續齊諧記 의 그것과 그 구성이 같 이야기는 그 구성의 힌트를 續齊諧 여 竹筒美女의 이야기가 곧 지는 않지만, 竹筒美女의 記 에서 받아 왔는지도 모르겠고, 만약 받아 왔다고 한다면 복잡 한 복합성으로부터 단순한 단일성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하게 된다. 虎 願 新羅 풍속으로는 해마다 2월달 초여드레부터 보름날까지 서울 에 사는 士女들이 興輪寺 塔을 다투어 돌며 福을 빌었다. 元聖 王 때, 金現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밤이 깊어 홀로 탑을 돌며 쉬 지를 않았는데, 마침 한 여인이 따라 돌고 있었다. 現은 드디어 그 여인과 통하고 따라갔다. 여인이 말하기를 저는 내일 거리 에 들어가 사람을 해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왕은 반드시 높은 벼슬로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을 것입니다. 郎君은 겁내지 마 시고 나를 北林 속으로 모십시오. 저는 기다리고 있겠읍니다. 다만 저를 위해 자금을 마련하셔 좋은 일로 갚아 주시면 (즉 절 을 세워 주시면의 뜻) 이 곧 낭군의 은혜가 아니겠읍니까 라는 것 이었다. 둘은 서로 울며 헤어졌다. 다음날 과연 猛虎가 城 안에 들어오니 아무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었다. 왕은 令을 내려, 능 히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는 二級 벼슬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現 은 詣闕하여, 小臣이 능히 하겠다 고 말씀 올렸다. 現이 短兵을 거느리고 北林 속으로 가니, 호랑이는 변하여 娘子가 되어 웃으 어제의 정이 두터웠던 일을 낭군께서는 소홀히 생각치 마 십시오 하더니, 現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 찌르고 쓰 면서, 러지고 마니 그것은 곧 호랑이었다. 現은 높은 벼슬에 올랐다

359 Ⅳ. 藝 術 그는 西川 가에 절을 세워 虎願寺라고 이름하였다. 三國遺事에서는 虎女의 죽어야하는 이유와 함께 좀더 실감이 나도록 기록되어 있는데,8) 인간과 동물의 세계가 서로 내왕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역시 傳奇的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心火燒塔 志鬼는 新羅 活里의 驛人이었다. 善德王의 美麗함을 사모하여 우수와 눈물로 세월을 보내, 모습은 매우 초췌해 졌다. 왕이 절 에 行幸하여 行香하게 되었는데, 志鬼의 일을 듣고 이를 불렀 다. 志鬼는 절 塔 아래에 가서 御駕의 이르름을 기다렸다. 그 러자 갑자기 곤하게 잠들고 말았다. 왕은 팔찌를 빼어 그의 가 슴에 놓아 주고 還宮하였다. 후에 잠을 깬 志鬼는 悶絕하기 한 참 동안, 마음의 불이 터져 나와 그 탑을 싸고 도니, 곧 변하여 火鬼가 된 것이다. 왕은 術士에게 명하여 呪詞를 짓게 하였으 니, 즉 志鬼心中火 燒身變火神 流移滄海外 不見不相親 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풍속이 이 詞를 門壁에 써 붙 여 화재를 진압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화재를 막는 풍습의 하나를 보여 준다고도 하겠지 만, 한편 일개 驛人의 터무니 없는, 그러나 순수하고 아무 죄없는 戀慕의 정을 그린 이야기로서, 善德女王의 미모와 함께 소박한 古 代人의 감정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延烏郎細烏女 南海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있었으니, 남편은 延烏라 했고 8) 三國遺事 권 5 感動 제 7 金现感虎條

360 1. 文 學 아내는 細烏라 하였다. 하루는 延烏가 해초를 따려고 바닷가에 갔는데, 갑자기 漂流하여 日本國 작은 섬에 이르러 섬 주인이 되었다. 細烏가 찾아 나섰다가 또한 그 나라에 표류하여 妃가 되었다. 이 때 新羅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말았다. 日官이 말 延烏와 細烏는 해와 달의 精인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怪變이 있는 것 이라는 것이었다. 왕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오라고했다. 延烏는 나는 이곳에 이 르러 왕이 되었오 하며, 細烏가 짠 비단을 사신에게 주며,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를 지내면 될 것이오 라고 하는 것 하기를 이었다. 드디어 그 祭天한 곳을 이름하여 迎日이라 하고 縣을 두니, 이 新羅 阿達羅 4년이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 說話文學에서는 드물게 보는 日月에 관 한 이야기로써, 자연에 관한 설화가 거의 없다시피한 우리 나라 古代 說話文學에 있어 매우 주목할 만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4) 漢文學者와 그들의 漢詩 이미 序頭에서도 언급하였지만 麗代에 들어와 漢文學은 적절 한 시책과 더불어 官學 또는 私學을 통해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특히 私學의 勃興은 高麗 文運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것이고, 이에 따라 많은 漢文學者 文士들이 배출하게 되었던 것 이다. 특히 그 중에도 崔冲 一門은 완연히 한 文閥을 이루었다고 도 할 것이니, 崔冲을 비롯하여 乙科壯元 惟善은 그의 長子였으 며, 中書令 惟吉은 尙書令 惟善의 弟이고, 平章事 思齋는 惟善의 子이며, 또 文章接賓 思諏는 惟吉의 子였으니, 가히 崔氏 一門 이 文에 혁혁했음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文閥家가

361 Ⅳ. 藝 術 나올 정도로 麗代 漢文學은 前代에 비해 월등하게 왕성했다고 하 겠는데, 이에 따라 많은 學者 文士가 나타남은 당연한 일이라고 도 여겨진다. 崔滋의 補閑集의 序를 보면, 麗初부터 高宗 때까지의 高麗文學의 名人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本朝는 人文으로 化成하여 賢儁이 그 사이 에 나와 風化를 讚揚하였다. 光宗 顯德 五年에 春闈가 비로소 열려 賢良文學의 은 才의 雄者요, 景顯의 數代를 겪는 사이에 李夢游柳邦憲 은 文으로써 顯達하였고, 鄭倍傑高凝은 詞賦로써 進出하였으 士를 뽑으니 玄鶴이 나타났다. 그때의 王融 趙翼 徐熙 金策 며, 崔冲은 命世의 才로 儒學을 일으켜 吾道가 크게 行하게 되었 다. 文廟 때에 聲明의 文物이 粲然히 大備되어 當時 冢宰인 崔 惟善은 王佐의 材로써 著述이 精妙하였으며, 平章事 李靖恭 崔 깨를 겨누었으며, 그 뒤에 朴寅亮崔思齊崔思諒李䫨金良 鑑魏繼廷林元通黃瑩鄭文金緣金商祐金富軾權適 高唐愈金富轍金富佾洪瓘印份崔允儀劉羲鄭知常 蔡寶文朴浩朴春齡林宗庇芮樂同崔誠金精文淑公(崔 性淸)父子吳先生兄弟(吳世文世才를 가리킨 것인 듯)學士 李 仁老文公 俞升旦貞肅公 金仁鏡文順公 李奎報承制 李 公老翰林 金克己諫議 金君綏史官 李允甫補闕 陳 劉 冲基李百順 兩司成咸淳林椿尹于一孫得之安淳之는 奭, 叅政文正 李靈幹 鄭惟產, 學士 金行瓊 盧坦은 齊齊히 어 艹 淬 金石이 사이에 나오고 星月이 詩句에 빛나 漢의 文과 唐의 詩가 이에 盛하였다. 그러나 古今의 여러 名賢으로서 文集을 編成한 者는 다만 數十家에 그치고 이 나머지의 名章 秀句는 모두 湮沒 되어 들림(聞)이 없다 위의 序를 보면, 高麗 前期에 있어 文運이 얼마나 大成했었으며

362 1. 文 學 또 얼마나 많은 문인 학자들이 배출하였나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면 이들 중 몇 사람을 가리어 그들의 詩文學을 살펴보기로 한다. ㄱ. 崔 承 老 崔承老는 散文에 능했거니와, 또 韻文에도 능하여 藁 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禁中雜著詩 東池新竹 1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錦籜初粉節明 低臨輦路綠陰成 宸遊何必將天樂 自有金風撼玉聲 補閑集 卷上 이는 그의 應製詩의 하나였거니와, 다시 代人寄遠 을 들어 보 면, 一別征車隔歲來 幾勞登覩倚樓臺 雖然有此相思苦 不願無功便早廻 ㄴ. 崔 冲 東文選 卷 19 海東孔子로 불리운 大敎育者 崔冲은 詩律에 있어서도 硕學의 풍모를 보이고 있다. 그의 시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道味가 어린 작품이라 하겠는데, 補閑集 卷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侍中上柱國崔公은 功名富貴之極이나 雅尚은 出塵하고 詩語는 淸婉하였다. 忽 一夕에 風淸 月朗하고 松篁이 自籟하니 不覺吟 一絕에 云하되, 滿庭月色無煙燭 人座山光不速賓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公이 未當國時 丁未冬月에 萬居加祚里別第하다가 夜坐에 見林 曹諸子의 圍爐打話하고 書以示之하니 云하되,

363 Ⅳ. 藝 術 龍騰虎踞列穹豊 壯意能銷鳳炭紅 莫向晨昏爭燕蝠 好將行止付天公 ㄷ. 朴 寅 亮 朴寅亮은 이미 殊異傳의 編者로 소개하였거니와, 文宗朝에 登第 한 그는 실로 崔致遠 이후의 제일의 名家였다. 補閑集 卷上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朴叅政 寅亮이 사신으로 中國에 들어갔을 때 이르는 곳마다 모두 詩를 남겼으니, 金山寺에서 云하되, 巉巖怪石疊成山 上有蓮房水四環 塔影倒江蟠浪底 磬聲搖月落雲間 門前客掉洪波急 竹下僧棊白日閑 一奉皇華堪惜別 更留詩句約重還 行하여 越州를 지나다 樂調 중에 新聲을 奏함을 들으니, 옆의 사람이 이 公의 詩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浙江에 이르 니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났는데, 子胥廟가 강변에 있음을 보 고 시를 지어 이를 弔問하니, 가로되, 掛眼東門憤來消 碧江千古起波濤 今人不識前賢志 但聞潮頭幾尺高. 그러자 곧 바람은 개어서 배는 편히 지날 수 있었으니, 그 幽顯 을 感動시킴이 이와 같았다. 宋人이 그의 시를 모아 책을 만드 니 지금 세상에 전한다 라는 기록인데, 宋人이 그의 지은 시를 모아 小華集 이라 제하 여 간행하였음을 보아도 그의 시가 얼마나 내외에 이름 높았던 가 를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리하여 李奎報도 그의 白雲小說에서 朴 金山寺 를 崔致遠의 潤州慈和寺 와 朴仁範의 涇 州龍朔寺 와를 들어 논평하면서, 寅亮의

364 1. 文 學 우리 나라가 시로써 中國에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이 세 사 람으로부터 시작하니, 문장의 나라 빛냄이 이와 같음이 있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ㄹ. 金 黃 元 海東第一이라는 美號를 지닌 金黃元은 그의 詩律이 참으로 軼 宕하고 淸婉하여 鄭知常 이전에 있어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 長城大野 의 名句를 지었 정도였는데, 그는 일찌기 저 유명한 다. 李仁老의 破閑集 卷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西都 永明寺 南軒은 天下의 絕景인데 本興上人의 지은 바이 다. 남쪽은 大江에 臨하고, 江 밖은 曠野여서 아득하니 그 가를 볼 수가 없다. 오직 동쪽 한 끝에 멀리 산봉우리가 보일 듯 말 듯 하다. 예전 睿王이 西巡하여 群臣과 더불어 宴飮하며 唱酬하 였는데, 작품이 매우 많았으며, 金石에 새기고 絲竹에 올려 이 (중략) 學士 金黃元이 것이 樂府로 傅하지 않음이 없다. 西都를 按節하였을 때 그 위에 올라 吏에 命하여 古今 群賢의 남긴 바 書板을 모조리 메어 이를 불사르게 하고 欄干에 기대어 읊조리 었는데, 해가 기울어지게 되자 그 소리는 正히 괴로와 마치 달에 울부짖는 원숭이와 같았다. 오직 한 聯을 얻었으니,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뜻이 말라 다시는 잇지 못하고 통곡하며 내려왔다. 그 후 며 칠이지나 보태어 한 편을 이루니 지금껏 絕唱이라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昔聞宋玉悲秋氣 今日黃元哭夕陽 라고 하였다 하는데, 이상으로 보아 그가 매우 豪放했던 시인이었 음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365 Ⅳ. 藝 ㅁ. 郭 術 輿 金黃元과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시인으로 東山處士 郭輿를 아 니 들 수 없다. 그는 睿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詩 酒 琴 碁와 百家書에 통치 않음이 없는 일대의 風流詩人이었다. 高 麗史 卷97 列傳10 郭輿條에 의하면, 睿宗은 東宮에 있을 때 그를 알았으며, 즉위하여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를 불러 宮中 純福殿에 거주케 하고 선생이라 부르니, 그는 烏巾과 鶴氅으로 늘 좌우에서 모셔 조용히 談論하고 唱和하니 時人이 金門羽客이라 일렀다고 한다. 왕은 그가 오래 宮中에 있어 혹 出遊함을 생각하리라 하 여 西華門 밖에 별장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한다. (중략) 그 는 굳이 退居하고자 하니 왕은 城東 若頭山의 한 봉우리를 내리어 집을 지어 거주케 하고, 東山處士라 號하며, 그 집을 이름하여 虚靜 이라 하고 그 齋를 善志 라 하여, 친히 額을 써 내렸 다고도 한다. 東文選에 그의 東山齋應製詩 가 남아 전한다. ㅂ. 鄭 知 常 그는 樂府 에서만이 아니라, 시의 諸體에 있어 모두 그 격이 높았으며, 특히 絕句와 拗體에 능했다고 한다. 麗代 前期에 있어 朴寅亮 金黃元과 더 불어 가히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라 하겠는데, 그의 送友人 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즉 櫟翁稗說 後 集 2에 보면,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가 보이고 있으며, 다시 補閑集 卷上을 보면 아래와 같은 來蘇寺 가 있다. 古徑寂寞縈松根 天近斗牛聊可捫 浮雲流水客到寺 紅葉蒼苔僧閉門 邊山

366 1. 文 學 秋風微凉吹落日 山月漸白啼淸猿 奇哉厖眉一衲老 長年不夢人間喧 ㅅ. 金 富 軾 그는 三國史記의 撰者로도 유명하거니와, 그 형제 富佾 富轍이 모두 문명이 높아, 徐兢이 高麗圖經을 지을 적에 그의 世系와 圖 形을 그려 가지고 돌아가 上奏하니 皇帝는 특히 명하여 鑄版하여 傳케 하여 이름이 천하에 들렸다고 한다. 그는 通古今하고 善屬 文하여 睿宗實錄과 仁宗實錄을 編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記事에만 능하였을 뿐 아니라 시에도 뛰어났었는데, 당시 그의 좋 은 적수는 鄭知常이었다. 그리하여 시로써 그와 서로 上下하였는 데, 富軾은 氣로써 勝하고 知常은 才로써 勝하였다고도 한다. 그 리고 絕句에 있어서는 富軾은 도저히 知常을 따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高麗 前期에 나타난 漢文學者와 그들의 詩作品을 瞥 見하였다. 麗代가 前代에 비하여 漢文學이 크게 왕성하였다함은 이미 前述하였거니와, 그 文人 學者들의 대량 배출이나 또 그들 시 작품의 월등함으로 보아도 이는 수긍이 가는 사실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외래문화인 漢文學을 십분 섭취 소화하 여 그들 생활의 표현의 도구로서 구사했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朴寅亮 같은 이의 詩作은 中國에서도 유명했음을 볼 때, 당시 文 士들의 문학 수준이 얼마나 높았으며,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빛났 었나 함을 짐작할 만하다. 李明九

367 Ⅳ. 藝 術 2. 美 術 高麗時代의 前後期 구분의 기준을 武臣政權이 성립한 시기에 둔 다면 전기는 후기에 비하여 매우 활발한 미술활동이 있었음을 현 존하는 유물을 통하여 역력히 볼 수 있다. 統一新羅時代에 성립한 石塔의 형식에 약간의 樣式的 변화를 일으키면서 거대한 造營이 있었고 浮屠의 더욱 정교한 표면 장식의 성행, 工藝 부문에 있어서 도 靑磁의 비약적인 발전과 각종 金屬製品의 발달 등 의욕과 氣魄 에 찬 造型活動이 전개되었다. 대체로 前時代에 못지 않은 大作들 과 새로운 秀作들이 만들어졌음은 신흥의 기운에 따라 이룩된 것 이지만 표현된 결과는 의욕과 부합되지는 않았다. 이같은 양식의 변화와 표현의 차이는 시대성의 露現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時代에도 太祖 十訓要에 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 이라 있듯이 佛敎는 국민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그 들이 남긴 미술품들은 직접적인 佛敎美術品이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堂塔과 이에 부 수되는 각종의 건조물 또는 像設의 성행과 이에 부수되는 각종의 佛具들은 직접적인 불교미술품들이요, 陶磁器에서 瓦傳에 이르는 직접 佛敎와 관계가 없는 것에도 佛敎의 정신과 형식이 깊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高麗時代 美術의 하나의 특징 이 될 것이지만 高麗前期에 있어 文宗代를 중심으로 한 그 전후의 문물은 高麗時代 미술의 한 頂點을 나타내는 건실한 발전을 이루 기도 하였다. 이하 部門을 나누어 구체적으로 실태를 관찰하기로 한다

368 2. 美 術 (1) 建 築 建築에는 木造建築 石造建築의 구별이 있을 것이고, 佛敎的 건 축과 非佛敎的 건축의 구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高麗 前期의 木造建築은 남은 것이 없고 대세를 차지하는 것은 佛塔 浮屠 등 佛敎的 石造建築이며 그 외에 약간의 墳墓가 남아 있다. 목조 건축은 滿月臺 遺墟의 규모, 또는 太祖代의 王輪寺, 光宗代 의 佛日寺, 穆宗代의 崇敎寺, 顯宗代의 玄化寺, 靖宗代의 安和寺, 文宗代의 興王寺 등의 寺利이 松都를 중심으로 건립되었으며, 현 존하는 遺址로 보아 모두 대규모의 건축이었음이 推察되나 현존 하는 당시의 지상건물은 없다. 따라서 그 양식을 알 수 없으나 아 마도 浮石寺 無量壽殿이나 鳳停寺 極樂殿과 大同小異한 柱心包系 의 건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 佛 塔 佛塔은 新羅時代 이래의 方形 重層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이 러한 典型樣式에서 벗어난 특수형도 건립되었다. 즉 高麗 전기의 石塔은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후기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① 塊石을 이용한 方形 重層의 典形樣式 ② 塼塔 또는 模塼石塔 ③ 四獅子石塔 多角塔 ⑤ 寶篋印塔 이상의 형식은 대체로 前代의 형식을 계승 또는 모방한 것이고 多角塔은 宋代 塔婆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寶篋印塔은 中國 吳越

369 Ⅳ. 藝 術 王 錢弘叔이 造成한 寶篋印塔의 영향일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가 지는 세부양식은 앞으로 실례를 제시하면서 관찰하겠으나 前代의 양식을 가장 많이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이 가미된 점을 볼 수 있다. 高麗時代 石塔의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 을 들면, ① 屋蓋石 처마 밑이 轉角에서 百濟塔과 같이 反轉된다. ② 屋蓋石 받침의 層級數가 줄어든다. ③ 塔身部의 各部材가 幅에 비하여 높아져서 전체적으로 高 峻해진다. ④ 屋身 밑에 別石이 끼인다. ⑤ 屋身 밑의 別石 또는 基壇 甲石上面에 蓮花가 조각되기도 한다. 이상의 특징은 기본형을 新羅에서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변화 를 일으키고 있으나 또한 그로 인하여 전체적인 造形感覺이 달라 지고 있다. 前代의 조형이 명쾌하면서도 장중하여 안정된 비례를 보여 주는데 비해 高麗의 作이 純厚하고 高峻하여 불안정한 감을 주고 있다. 일시 松都의 靈通寺址五層石塔 또는 玄化寺址七層石塔 같은 巨塔이 經營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초기의 일이고 곧 비례 의 불안정, 형태의 왜소화 그리고 조형감각의 純化를 가져오게 되 었으니 정신과 기술 양면의 변화가 看取된다. 한편 선례를 따른 복고조의 석탑이 건립되었으니 益山 王宮里五 層石塔 無量寺五層石塔 金山寺五層石塔 등은 扶餘 定林寺址五層 石塔을 모방한 作例이다. 益山 王宮里 無量寺 金山寺는 모두 百 濟의 王都 扶餘와 至近한 거리에 있어 넓은 屋蓋石 또는 王宮里塔 과 無量寺塔이 單層基壇이라는 점, 또는 우연히도 모두 五層塔이라 는 점 등 곧 定林寺塔을 연상케 한다. 百濟 塔의 모방은 여기에 그

370 2. 美 術 치지 않고 역시 가까운 지역인 舒川郡 庇仁, 扶餘郡 長蝦里, 公州 郡 鷄龍山 등지에 高麗 후기의 作例들을 남기고 있다. 다음은 四獅子石塔이다. 四獅子塔은 羅代 所作의 華嚴寺四獅三 層石塔에서 시작되어 主吏寺址四獅石塔(咸安) 金藏庵址四獅三層 石塔(淮陽) 華嚴寺露柱 洪川希望里四獅三層石塔 등으로 그 형 식이 이어 오더니 高麗에서도 獅子頻迅寺에 나타나고 朝鮮時代의 仙巖寺華山大師塔에까지 이어져 最末期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러 나 羅代의 作例에서 보이던 위엄과 세력은 찾기 어렵다. 獅子가 佛敎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석조물에 성히 陽刻되니 雙獅子石 燈의 출현 등과 同規의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 多角塔으로는 金山寺의 六角堪 月精寺의 八角塔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9층 이상의 多層塔이다. 多角의 형식은 이미 9세기 후반의 건립으로 추정되는 到彼岸寺三層石塔의 基壇이 8각으로 된 데서 나타나서 그 출발이 이미 新羅 下代에 있음을 볼 수 있으 나, 高麗에 들어서 더욱 유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또 暗靑色 粘板岩 石材를 사용하는 일이 高麗時代에 유행한다. 韓國 石塔의 塔材는 白色의 花崗石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 을 이루었는데 유독 高麗時代에 粘板岩을 사용하고 있다. 끝으로 前代에 있었던 塼塔은 高麗時代에 와서도 축조되었으나 크게 유행을 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前期에서 일례를 남기었고, 模 塼石塔 또한 前期에 作例를 남기었으나 그 영향은 미미하지만 朝 鮮時代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작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王宮里五層石塔(寶物 44호, 全北 益山郡 王宮面) 百濟時代 석탑의 양식을 모방한 10세기 경의 석탑이다. 넓은 屋蓋石과 위로 들린 轉角 밑 單層의 基壇 또는 屋蓋石 밑의 3段

371 Ⅳ. 藝 術 받침 등 가까운 거리에 있는 百濟塔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탑 에서는 1965년 수리 때 귀중한 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 기도 하였다. ② 無量寺五層石塔(寶物 185호. 忠南 扶餘郡 外山面) 韓國 석탑의 典型樣式을 따른 석탑이지만 各部 형식에 있어서 百濟塔을 모방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單層의 基壇과 얇고 넓은 屋 蓋石 또는 屋蓋石 추녀끝의 反轉이나 三段의 받침 등 곧 百濟 양 식의 直模이며 같은 扶餘郡內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양 식 모방의 유력한 뒷받침이 될 것이 다. ③ 開心寺址五層石塔(寶物 53호, 慶北 醴來郡 醴泉邑) 二重基壇 위의 전형적 석탑이다. 下基壇에는 十二支像을, 上基 壇에는 八部衆像을 初層塔身에는 南面에 門扉形과 仁王像을 각각 조각하였다. 初層塔身 밑에는 仰蓮이 조각된 別石을 끼웠고 基壇 甲石이나 屋蓋石이 두꺼워서 중후한 감을 준다. 이 탑은 銘文에 의하여 顯宗 1년(1010)의 건립임을 알 수 있으니 양식의 변화를 파악 할 수 있는 귀중한 예이다. ④ 定山西亭里九層石塔(寶物 18호, 忠南 靑陽郡 定山面) 드물게 보는 9층의 石塔이다. 塔身은 넓고 이에 비하면 屋蓋石 은 短促하다. 二重基壇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조형은 新羅 石 塔같이 明晳하지 못하다. 下基壇에는 高麗時代 특유의 眼象이 있 고 다소의 안정감은 있으나 비례의 부조화를 보인다. ⑤ 神福寺址二層石塔(寶物 87호. 江原道 江陵市 內谷洞) 이 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方形 地臺石에 24 葉의 伏蓮을 조각 한 점과 각 층 塔身 밑에 따로 넓은 받침이 마련된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高麗時代 석탑에 나타나는 특색인데 이 탑에서는 그 특색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刻線이 분명하고 비례가 아름다운 점

372 2. 美 術 에서 高麗 초기의 작으로 추정된다. ⑥ 桃李寺石塔(寶物 470 호, 慶北 善山郡 海平面) 典型樣式에서 전혀 벗어난 형식의 탑이다. 基壇에서부터 塔身을 거쳐 相輪에 이르면서 차츰 遞減되었고 架構方式은 基壇은 方柱 를 세워서 구성하였고 塔身은 石材를 가로 쌓았다. 塔身 上面의 層段 또는 전체의 架構手法으로 보아 塼塔에서 유래한 형식으로 보이나 다른 예가 없다. ⑦ 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慶南 陕川郡 伽揶面) 高麗時代에 유행하던 暗靑色 粘板岩製의 方形石塔이다. 塔身을 모두 잃고 屋蓋石만이 중첩되었으나 원래의 층 수는 알 수 없고 基壇은 伏蓮 臺石과 仰蓮 甲石 사이에 隅柱와 面石을 끼워 구성하 였고 그 밑에 三段 花岗石 받침이 있다. 재료를 달리하는 異色塔 이며 10세기 중엽의 작으로 보인다. ⑧ 金山寺六角多層石塔(寶物 27호, 全北 金堤郡 水流面) 재료 형식이 모두 前出 願堂庵塔과 같으나 6각의 異型이다. 이 탑에는 위에 두 개의 塔身이 있을 뿐 다른 塔身과 基壇 軸部를 잃 고 있으나 高麗초기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遺例라고 하 겠다. ⑨ 月精寺八角九層石塔(國寶 48호, 江原道 平昌郡 珍富面) 韓國의 유일 例인 多角多層 석탑이다. 下層基壇 甲石에는 伏蓮 이 조각되고 初層 塔身 밑에는 別石을 끼웠으며 初層塔身에는 형 식적인 小龕形이 조각되어 있다. 相輪이 완전한 점은 귀중하며 屋 蓋石이 短促하여 전체가 高峻하여 高麗 석탑의 형식이 잘 나타나 있다. 앞에 菩薩坐像을 배치한 형식 또한 前出 神福寺塔과 함께 高麗 초기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373 Ⅳ. 藝 術 ⑩ 獅子頻迅寺址石塔(寶物 94호, 忠北 堤川郡 寒水面) 前記한 바와 같이 羅代의 四獅子塔의 형식을 따른 석탑이지만 그에 멀리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獅子는 등으로 甲石을 받치고 중심에는 昆盧舍那佛이 있으나 모두 위의 중량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屋蓋石 추녀의 큰 曲線 上基壇 甲石의 伏蓮 地臺石의 眼象 등 모두 高麗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銘文에 의하여 顯宗 13 년(1022)에 造成된 九層塔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五層까 지만 남아 있다. ⑪ 義城氷山寺址五層石塔(寶物 327호, 慶北 義城郡 氷溪洞) 義城에는 新羅統一初의 중요한 模塼石塔이 있는데 이 탑은 그 탑을 直模한 탑이다. 單層의 基壇 屋蓋石 상하의 層段 初層塔身 南面의 龕室 五層의 層級 등 동일한 형식이지만 부분적인 생략 과 전체에서 오는 무기력한 감은 시대적인 소치이겠으나 高麗初 期의 大作인 점에서 당시의 의욕을 느낄 수 있다. ⑫ 神勒寺多層塼塔(寶物 226호, 京畿 驢州郡 北內面) 이 塔은 高麗時代 塼塔으로는 유일한 예이지만 후세에 변형이 있어 원형이 아님이 유감이다. 現狀은 밑에 遞減되는 層段形 數段 의 받침이 있고 그 위에 七層을 만들었는데 屋蓋는 극히 短促하여 기이한 형태를 이루었다. 塼에는 半圓 안에 唐草를 陽刻한 紋樣이 있어 무질서하게 쌓인 것도 후세의 졸렬한 변형이나 剏築은 高麗 초기로 보인다. ⑬ 堤川長樂里七層模塼石塔(寶物 459호, 忠北 堤川郡 堤川邑) 灰黑色 粘板岩을 塼形으로 잘라서 塼塔의 형식을 따라 築造한 塔이다. 初層의 隅柱는 花崗石으로 세웠고 남북 양면에는 龕室이 개설되었다. 麗代에서는 보기드문 형식이고 대작이다. 堤川 부근 에는 또 하나의 模塼塔이 있어 이곳에서 한 때 이러한 양식이 유

374 2. 美 術 행하였던 것 같다. ⑭ 寶篋印石塔(東國大學校博物館藏) 忠南 天原郡 北面 大坪里 탑골 寺址에서 발견된 것이다. 현재는 臺石으로 보이는 佛像이 조각된 1石과 本生譚이 彫刻된 1石 塔 身 받침으로 보이는 蓮花文이 彫刻된 1石과 蓮花와 唐草가 彫刻 된 1石 그리고 四耳가 있는 相輪石 1石 등 5石이 남아 있을 뿐이 나 韓國에서는 아직 遺例가 없었던 희귀한 石塔이다. 2) 浮 屠 浮屠는 그 語源이 佛塔과 같아 공식 명칭으로는 塔으로 호칭하 고 있으나 佛塔과 구별하여 僧侶의 墓塔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浮屠의 건립은 新羅時代부터 있어 新羅 文聖王 6년(844) 건립의 廉居和尚塔을 最古 例로 삼고 新羅下代의 예가 數基 있으나 高麗 時代에 들어 더욱 성행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유행은 禪風에 의 하여 先師를 숭앙하는 뜻에서 墓塔과 塔碑의 건립이 성행한 데서 온 것이다. 先師 追仰의 뜻이 있었던 만큼 형태의 장중과 표면의 장엄이 이루어져 石造美術로서 하나의 뚜렷한 존재가 되었다. 高 麗時代에는 新羅의 형식을 계승하였지만 형태나 표면 장식에 있 어 退化의 양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으나 高麗時代 前半期의 작 품은 그런대로 건실성을 잃지 않은 秀作들이 건립되었다. 浮屠의 형식은 八角圓堂形을 주축으로 삼고 그 외에 四角堂 形 石燈形 石鍾形과 특수형이 있고 후기에 내려가 方形重層의 佛塔形도 만들게 되었다. 八角圓堂形은 地臺石 위에 下臺, 中臺, 上臺로 基壇을 구성하고 그 위에 塔身과 屋蓋石이 얹히며 정상에 相輪을 첨가한 형식인데 상하 모두 八角으로 되어 있다. 地臺石은 가장 넓고 下臺보다 上

375 Ⅳ. 藝 術 臺는 작은데, 사이에 끼는 中臺는 폭이 좁아져서 변화를 주고 있 다. 塔身에 비해 屋蓋石은 넓어서 안정된 장중함을 나타내고 있 다. 표면에는 각종의 佛敎像을 조각하였는데 下臺에는 伏蓮을 上 臺에는 仰蓮을 조각함이 通式이며 목조건축의 細部樣式 즉 난간, 석가래, 공포, 기와 또는 막새까지 細刻하는 수도 있다. 四角堂形式은 기본형식이 八角圓堂形을 따르고 있으나 평면이 상하 四角으로 된 형식이고 作例로서는 一基가 전 할 뿐이다. 역 시 전면에 裝飾紋樣이 滿彫되어 어느 浮屠보다도 가장 화려한 작 풍을 보여주고 있다. 石燈形도 단 一基가 전하는데 基壇部의 中臺가 石塔의 竿石 같 이 길어져서 전체의 형태가 마치 石燈 같이 보이는 작품이다. 石鍾形은 광대한 基壇 중앙에 梵鐘形의 塔身을 安置한 戒壇과 비슷한 형식이고 塔身의 모양이 종과 같은 데서 유래한 명칭이 다. 이러한 형식은 高麗 중엽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高麗時代의 作例로서 數基가 전하고 있으나 오히려 朝鮮時代 이후 부터는 이 형식이 대세를 차지하여 약식화된 石鐘 형식의 浮屠가 성행하게 된다. 특수형은 八角圓堂形 이외의 형식을 모두 여기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특히 여기서 지적하는 예는 塔身이 球形으로 된 일례가 있 다. 이러한 형태의 유래는 알 수가 없지만 이 형식은 후세에 영향 을 미친 듯하다. 高麗後期의 浮屠에서 塔身의 배가 현저하게 불러 진 예가 있고, 朝鮮朝의 報恩 福泉庵 浮屠, 楊州 檜巖寺 浮屠 등의 塔身이 거의 球形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형태나 표면 조각에서 주목되는 예를 몇 基 열거하기로 한다. ① 傳菩堤寺大鏡大師塔(寶物 351호,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藏) 이 浮屠의 공식명칭은 石造浮屠 라고만 하였으나 大鏡大師

376 2. 美 術 浮屠로 추정되고 있다.1) 좋은 비례를 보여주는 당당한 작품이고 표면 彫飾도 높은 격조를 보여 주고 있다. 屋蓋石 밑에는 飛天像 이 조각되고 落水面에는 기왓골을 模刻하였으며 탑신을 비롯한 각부의 彫鏤는 착실한 수법을 잃지 않고 있다. 이 浮屠를 大鏡大 師塔으르 추정함에 따라 건립 연대 또한 同塔碑의 건립인 太祖 22년(939)에서 머지 않은 때로 추정된다. ② 興法寺眞空大師塔(寶物 365호, 서울 景福宮) 이 浮屠는 興法寺址에서 移置한 것으로 전하여 왔으나 그 진부 에 관하여 최근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浮屠에는 石棺이 달 려 있어 또한 주목되고 있다. 浮屠는 형태와 彫飾이 모두 美麗한 작품으로 仰蓮과 伏蓮 그리고 中臺의 雲龍 등은 優麗한 수법을 보 이고 있으며 특히 中臺에 雲龍을 彫刻한 것은 高麗時代 浮屠의 특 색이다. 屋蓋石에는 석가래와 기왓골이 표현되고 처마에는 막새기 와가 模刻되었으며 轉角마다 큰 귀꽃이 솟아 있다. 眞空大師는 太 祖 23년(940)에 入寂하였으므로 이때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건 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③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寶物 171호. 慶北 聞慶郡 加恩面) 이 塔의 형식은 같은 절에 있는 羅末의 智證大師塔을 모방하고 있다. 中臺石의 彫刻, 塔身 받침의 난간형 등은 양자 동일한 양식 이지만 생략과 무기력이 나타나 있고 下臺 上面의 中臺石 받침에 는 雲文이 크게 나타나 高麗의 특색이 뚜렷해졌을 뿐 아니라 표현 자체도 섬약해지고 있다. 전체의 형태는 高峻하여졌음은 麗代 石 塔의 造形을 따르고 있다. 靜眞大師는 光宗 7년(956)에 入寂하였 고 동 16년(965)에 塔碑를 세웠으므로 塔의 건립도 그 즈음에 있 었을 것이다. 1) 金和英 梨大藏石造浮屠에 관하여. 金成植博士回甲紀念論業(1968)

377 Ⅳ. 藝 術 ④ 鷰谷寺東浮屠(國寶 53호, 全南 求禮郡 土旨面) 鷰谷寺에는 三基의 浮屠가 있는데 이 東浮屠와 인접한 北浮層는 거의 동일하다고 할 만큼 유사한 작품이다. 밑에서부터 雲龍, 獅 子 八部衆像 仰蓮 가릉빙가 등이 滿彫된 基壇과 門扉 香爐 四天王像이 조각된 塔身 二重椽木 기왓골과 이면에 雲紋이 彫刻 된 屋蓋石, 4身區의 가릉빙가와 蓮花가 彫刻된 寶輪이 있는 相輪 등 화려함을 다하고 있다. 高麗時代 浮屠 중에서도 屈指의 美塔이 다. 다만 이 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힐 수 없음은 유감이다. ⑤ 高達寺址浮屠(國寶 4호, 京畿 驪州郡 北內面) 高麗時代의 특색이 뚜렷히 나타난 걸작의 塔이다. 下臺의 伏蓮, 上臺의 仰蓮은 簡明直截한 수법이며 下臺 側面에는 麗代 특색의 眼象이 있다. 中臺에는 雲龍을 나타내었으며 前面은 龜趺의 前面 과 같은 형식이 되어 麗代 浮屠 中臺石의 하나의 특징이 되었다. 더우기 상하에는 八角의 테를 돌렸는데 龍頭 위의 雲文이 테 밖에 까지 나가 있어 자유분방한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塔身에는 門 扉形과 四天王像이 있고 특히 창살을 模刻하였음은 보기드문 형 식이다. 屋蓋石은 넓고 轉角마다 귀꽃이 크게 솟아 있다. 주인공 은 알 수 없으나 麗代 초기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⑥ 甲寺浮屠 (寶物 257호, 忠南 公州郡 鷄龍面) 이 浮屠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幅에 비하여 높이가 높아져서 매우 高峻해 보인다. 특히 塔身은 立像을 조각하기 위함인지 이례 적으로 높아졌으며 屋蓋石 또한 落水面의 傾斜가 급하다. 그러나 표면 彫飾은 착실하고 基壇部의 조각은 웅려하다. 上段에는 뭉게 뭉게 피어나는 구름과 龍으로 八角을 이루었고 下段에는 각면에 獅子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蓮葉을 새겼는데 모두 입체적인 표현 이다. 형태 구성에서 위축감이 있으나 조각은 우수하다

378 2. 美 術 ⑦ 石造浮屠 (寶物 135호, 慶北大學校博物館藏) 이 浮屠는 高達寺址 浮屠와 유사한 형태이지만 下臺石이 方形 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八角을 기본으로 하던 羅代의 石燈이 麗代 에 들어 四角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類라고 할 것이다. 中臺石의 雲龍의 조각에서 역시 高麗時代 특징을 볼 수 있고 蓮瓣의 조각이 나 안정감 있는 외형으로 高麗 초기의 秀作이라고 하겠다. ⑧ 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國寶 102호, 서울 景福宮) 이 塔은 조각이 섬세 美麗한 異型에 속하는 塔이다. 石質 또한 특수하여 文理가 한 층 격조를 높혀 주고 있다. 넓은 八角 地臺石 위에 놓인 下臺에는 複瓣 伏蓮이 있고 그 위 약간 배가 부른 中臺 각면에는 麗代 특유의 眼象으로 윤곽을 잡고 그 속에 雲龍文이 섬 세한 수법으로 조각되었다. 上臺에는 花紋이 장식된 單瓣 仰蓮이 있고 그 위에 縱으로 十字形과 橫으로 一線을 돌리고 교차점에는 花形을 배치한 球形의 塔身이 있다. 塔身 위에는 圓形 短柱를 세 워 屋蓋石을 받치고 있는데 屋蓋에는 轉角마다 귀꽃이 있고 裏面 에는 飛天이 있다. 相輪은 아깝게 상실되었으나 형태의 균형과 彫 鏤의 미려함이 잘 조화된 10세기 초두의 걸작이다. 塔碑에 의하면 弘法國師의 入寂은 顯宗 8년(1017)이라고 한다. ⑨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國寶 101호, 서울 景福宮) 高麗時代 浮屠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작품이다. 平面 方形이고 외형이 매우 안정된 위풍 당당한 傑作이다. 地臺石 四隅에는 獸足 과 같은 것이 地面까지 다아서 완고해 보인다. 基壇에는 眼象 雲 文 蓮花 草文 寶塔 神仙 등을, 塔身에는 門扉形 페르시아풍 의 영창을, 屋蓋石에는 佛 菩薩 鳳凰 등이 全面에 滿鏤되어 장 엄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智光國師의 入寂이 文宗 21년(1067)이 므로 이것으로 건립 시기를 推察할 수 있을 것이다

379 Ⅳ. 藝 術 ⑩ 佛國寺舍利塔(寶物 61호, 慶州 佛國寺) 이 浮屠는 石燈의 형식을 따른 異型 浮屠이다. 地臺石에는 麗代 의 특징이 나타난 眼象이 있고, 上臺와 下臺에는 單瓣의 仰蓮과 伏蓮이 있고 上臺 蓮瓣에는 花形이 있다. 中臺石은 雲文이 깊게 파진 긴 長鼓形이다. 이로 인하여 基壇은 높아졌고 그 위의 塔身 또한 배가 부른데 4면에 火窓을 연상케 하는 龕形이 있고 그 안에 佛 菩薩 1軀씩을 조각하였다. 무질서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대체 로 평면 八角을 지키고 있는 麗初의 佳作이다. ⑪ 金山寺石鐘(寶物 26호, 全北 金堤郡 水流面) 높고 넓은 基壇 上面 중앙에 臺石을 따로 마련하고 鐘形의 塔身 을 올려 놓았다. 臺石 四隅에는 獸面이 있고 塔身 밑에는 伏蓮을 돌렸다. 塔身 下部에는 鐘의 형식을 따라 口緣帶가 있으며 위에는 相輪이 있는데 밑에서 부터 九龍石 仰蓮石 覆鉢 寶珠의 순으 로 되었다. 장엄을 다하였고 鐘形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에서 堅 實한 作風을 보이고 있다. 12세기의 작으로 推定된다. 3) 墳 墓 墳墓는 美術分野에서 거론할 만한 대상이 없으나 다만 晋州 平居 洞에 소재한 羅州丁氏의 분묘들이 주목된다.2) 이들 분묘는 모두 前 面과 左右面에 板石으로 方形 護石을 쌓고 面石에 銘文을 새기고 있 다. 護石은 地臺石을 깔고 板石을 세운 다음 甲石을 덮은 形式이다. 銘文 中에 元豊二年 이 있어 文宗 33년(1079)의 築造임을 알 수 있다. 비록 후기의 예이지만 서울 貞陵附近의 李之蘭墓(1402년 死) 文益漸墓 (慶南 山淸郡 新安面 所在, 1398년 死) 崔瑩墓 (京 畿 高陽郡 碧蹄面. 1388년死) 등이 모두 이러한 형식이다. 2) 金元龍 晋州平居洞紀年高麗古墳群, 美術資料 9 國立博物館 (1964)

380 2. 美 術 (2) 石 造 物 韓國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良質의 花岗石은 자연 石造美術의 발달을 촉진하여 石塔, 石佛 외에도 각종의 石造 造物을 남기었으 니 石燈 碑石 幢竿支柱 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예이다. 이들은 三國時代 이래 高麗時代까지 계속 성황을 이루었고 碑石 과 石燈은 성격을 달리하면서 朝鮮時代까지도 게속되었다. 이러한 石造美術品은 建築部門이나 彫刻部門에서 다루기가 적 합하지 않고 각각 상당히 많은 作品을 남기고 있으므로 따로 石造 物이라는 대목을 설정하기로 하였다. 1) 石 燈 石燈은 彌勒寺址의 예에서와 같이 三國時代에 이미 조성되었고 統一新羅時代에는 각종의 새로운 착상이 가미되어 많은 작품을 남 기었다. 三國時代 이래의 형태는 地臺石 下臺石 竿石 上臺石 火舍石 蓋石 相輪으로 구성 되었으며, 地臺石과 相輪을 제외하고 는 모두 平面八角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高麗時代가 되면서 부터 八角 이외에 平面 四角으로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四角일 때에는 前時代의 식을 따라 四角石塊의 각면에 火窓을 내 는 수도 있으나 四隅에 기둥을 세워 사방에 크게 火窓을 냈음을 뜻하도록 만든 예도 있다. 이러한 형식은 하나의 略式으로도 볼 수 있으니 前代의 火舍石에서는 火窓에 별도의 시설을 가했던 흔 적이 있어 광선은 이용하되 바람을 막아 실용에 적합하도록 배려 가 있었던 듯하나 四隅柱만이 있는 예는 그러한 배려를 한 흔적이 전혀 없어 과연 實用하였는지 조차도 의심이 가는 형태이다. 다음의 竿石에 있어서도 前代의 기본형태인 八角竿柱를 쓰기도

381 Ⅳ. 藝 術 하였지만 圓柱 鼓腹形 雙獅子 등 변형이 나타난다. 前代의 作例 에 鼓腹形 雙獅子의 竿柱는 있었으나 圓柱는 없었다. 따라서 앞 의 두 경우는 전대 作例의 모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麗代의 작품으로 주목되는 예는 다음과 같다. ① 無量寺石燈(寶物 233호, 忠南 扶餘郡 外山面) 平面 八角의 前代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일부에서 이미 그 양식 에서 벗어나려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下臺의 伏蓮, 八角竿柱는 前代의 양식이 나 仰蓮은 麗代 石塔의 屋蓋같이 좁고 높아졌고 火 舍石은 八角이지만 火窓이 뚫린 면이 넓어졌으며 蓋石은 처마가 轉角에서 들려 있다. 아마도 高麗 초기에 羅代의 형식을 따르면서 새로운 양식이 약간 가미된 작품으로 보인다. ② 羅州西門里石燈(寶物 364호. 서울 景福宮) 前代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下臺竿石上臺는 위축되었고 이에 비해 火舍石 특히 蓋石은 매우 커서 균형이 좋지 않다. 蓋石 위에는 다시 작은 寶蓋가 있는데 빈약한 하부에 비해 더욱 무거운 감이 있으며 각부의 조각도 중후해졌다. 竿柱에는 銘文이 刻字되 었는데 그 중 大安九年癸酉七月 日謹記 라 있어 宣宗 10년 (1093)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③ 灌燭寺石燈(寶物 232호, 忠南 論山郡 恩津面) 완전히 高麗의 양식이 된 石燈이다. 상하 臺石은 四角이고 方形 隅柱를 세워서 火舍를 만들었고 蓋石은 방형인데 轉角 밑은 들리 고 그 위에는 귀꽃이 있다. 다시 그 위에는 또한 방형 隅柱를 세 우고 蓋石과 같은 형식의 寶蓋가 있어 상부가 매우 무거워 보인다. 竿石은 圓柱形이고 上下端과 중앙에 굵은 隆起 橫帶가 있는 점은 특이한 형식이나 鼓腹形의 변화인 듯하다. 이 石燈의 조성은 이 寺院의 건립 연대로 보아 光宗 19년(968)경으로 추정 된다

382 2. 美 術 ④ 玄化寺址石燈(國立中央博物館) 開城 부근의 玄化寺址에 있던 石燈이다. 평면 四角이 되었고 竿 柱는 羅代의 鼓腹形을 따랐고 火舍石의 四隅柱 역시 鼓腹形이다. 臺石 蓋石 모두 중후한 감이 있으나 아직 명랑한 작풍을 잃지 않 았다. 相輪 또한 거의 완존하며 정상의 火焰 寶珠의 형식은 麗代 의 특색이다. 이 石燈은 玄化寺 창건 연대를 참고하여 11세기 초 의 造成으로 보인다. ⑤ 沃溝鉢山里石燈(寶物 234호, 全北 沃溝郡 開井面) 매우 이례적인 石燈이다. 먼저 竿石은 圓柱形인데 표면에 雲龍 文을 陽刻한 특이한 형식을 취하였고 上臺石은 無量寺石燈과 같 이 좁고 두꺼운 위에 긴 仰蓮을 조각하였다. 火舍石은 偏八角形이 고 좁은 면에는 四天王像을, 넓은 면에는 長楕圓形의 특이한 火窓 을 뚫었다. 八角 원칙의 여운이 남아 있으나 이미 그 원칙에서 벗 어났고 조각에서 섬약한 일면을 보여 주고 있어 10세기 麗初의 작품으로 보인다. ⑥ 高達寺址雙獅子石燈(寶物 282호, 서울 景福宮) 蓋石 이상을 잃었으나 麗代의 작품으로는 매우 귀한 예이다. 이 형식이 羅代의 雙獅子石燈樣式에서 유래한 것이겠지만 羅代의 것 이 마주 서서 앞발로 받치고 있음에 비해 이것은 앉아서 등으로 받치고 있는 점이 다르다. 雙獅子 사이의 雲文은 이미 高麗의 특 징이 나타나 있고 蓮瓣 荷葉의 양식 도 중후하다. 2) 碑 石 碑石은 羅代 이래의 형식인 碑身에 龜趺와 螭首를 갖추는 것을 격식으로 삼았다. 龜趺의 형식은 등에 龜甲이 있고 짧은 四足이 있음으로써 龜形을 표현하였으나 龜首는 新羅統一初에 있었던 사

383 Ⅳ. 藝 術 실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龍形 내지는 怪獸形이 되었다. 머리는 목 을 앞으로 내밀면서 수직으로 들어서 前面을 향하고 입은 벌려서 寶珠를 물었으며 鬼面과 같이 코와 두 눈이 크게 표현되었다. 등 에는 장식이 많은 높은 碑座를 지고 있다. 螭首는 전면에 방형 題 額을 두고 그 좌우와 背面에 雲龍을 陽刻하였고 頂上에는 寶珠를 얹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각의 우열은 있겠으나 韓國 碑石의 전형적인 양식이라고 하겠으며 麗代에는 螭首를 생략하는 羅代에 없었던 형 식이 나타난다. 즉 碑身 상부에 蓋石을 덮지 않은 형식이다. 이때 碑身 상부는 수평으로 되며 연대 下降을 따라 兩隅角을 쳐서 圭形 을 만드는 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高麗前期末부터는 龍을 조각 한 螭首가 아닌 屋蓋形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高麗後期를 거쳐 朝 鮮時代에는 복고조의 碑石을 제외하면 이 형식이 일색이 된다. 또한 碑石은 碑身에 立碑 년 월 일이 明記되어 있으므로 비교적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어 양식 변천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중요한 碑石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菩提寺大鏡大師塔碑(寶物 361호, 서울 景福宮) 原住置는 京畿道 楊平郡 龍門面 菩提寺址다. 龜趺碑身螭首 의 三部가 完存하다. 거북은 머리를 들고 큰 눈으로 전면을 응시 하고 있다. 목에는 비늘이 있고 등에는 큰 龜甲을 지고 있다. 龜甲 에는 全面에 龜甲文을 陰刻線으로 나타내되 周緣에는 衣褶과 같 은 紋樣帶를 돌렸고 중앙에는 간략한雲文위에 碑座가 있다. 螭首 에는 前面의 題額을 중심으로 雲龍이 조각되었는데 입체감이 나 는 대담한 刀法이다. 建碑는 太祖 22년(939)이므로 麗代 초기의 우수작임을 알겠다

384 2. 美 術 ② 眞空大師塔碑 (寶物 463호, 江原 原城郡 地正面) 일찌기 도괴되어 碑身은 서울로 옮기고 龜趺와 螭首만 현지에 남아 있다. 通式을 따르고 있으나 조각은 일층 雄偉하다. 龜甲文 안에는 따로 花文이 조각되었고 螭首의 조각도 섬세하면서 힘이 넘쳐 흐르고 있다. 大師의 入寂이 太祖 23년(940)이므로 이것으 로 연대를 추정 할 수 있을 것이며 아직도 착실한 수법을 잃지 않 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③ 太安寺廣慈大師塔碑(寶物 275호, 全南 谷城郡 竹谷面) 碑身은 크게 파손되었고 螭首도 약간의 손상을 입고 있다. 通式 을 따르고 있으나 龜趺에서 龜甲文은 6각형의 연속이지만 따로 菱形을 4개 龜甲文이 합쳐지는 중심에 배치하는 異例를 나타내었 고 碑座 측면에는 섬세하게 雲文이 조각되었다. 螭首도 題額 위에 가릉빙가를 배치하는 새로운 양식이 나타났고 정상에는 3개의 火 焰寶珠를 배치하여 羅代 이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建碑는 光宗 1년(950)으로 추정되고 있다. ④ 鳳巖寺靜眞大師圆悟塔碑(寶物 172호, 慶北 聞慶郡 加恩面) 長身의 碑身을 갖춘 麗初의 당당한 碑石이다. 龜趺는 通式을 따 르고 있으나 龜首가 위축된 감이 있고 龜甲文은 2중 隆起線으로 표시하고 가운데 蓮瓣이 하나씩 있다. 碑座는 크고 높은데 측면에 高麗 특유의 眼象이 조각되었다. 螭首에는 題額을 중심으로 雲龍 이 있는데 四隅에서 龍頭가 솟아 오르고 정상에는 火焰寶珠 3개 가 있다. 立碑는 入寂한 해인 光宗 7년 (956)이다. ⑤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寶物 6호, 京畿 驢州郡 北內面) 일찌기 도괴되어 碑身은 따로 보관하고 龜趺와 螭首만 현지에 전한다. 龜趺는 3.21m 2.97m의 보기드문 거작이며 조각 또한 雄揮하다. 螭首 또한 長 2.33m 高 1.09m의 대작이며 雲龍의 조각

385 Ⅳ. 藝 術 은 대담한 수법이 麗代 龜趺나 螭首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彫師 의 자신에 넘치는 작품을 통하여 國初의 의욕을 느낄 수 있고 그 意慾發顯에 성공한 작품이다. 大師의 入寂은 光宗 9년(958)이나 立碑는 동왕 26년(975)이다. ⑥ 鷰谷寺玄覺禪師塔碑(寶物 152호, 全南 求禮郡 土旨面) 碑身을 잃고 龜趺와 螭首만이 남아 있다. 몸에 비해 머리가 약 간 크고 龜趺에 비해 螭首가 작은 편이나 彫法은 착실하다. 龜甲 文 안에는 花形이 있고 碑座 측면에는 地線에서 花形이 솟은 큰 眼象이 있어 麗代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碑는 舊拓 碑文에 의하여 景宗 4년(979)의 立碑임을 알 수 있다. ⑦ 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寶物 78호, 江原 原城郡 富論面) 약간 형식화의 징조가 보이나 웅대한 비석의 하나이다. 龜趺는 通式이나 龜甲 周緣에 花形이 있고 龜甲文 안에는 卍字와 蓮花가 있어 장식성이 많아졌다. 碑座 측면에는 麗代 특색의 眼象이 있다. 螭首는 아래에 縱線帶를 돌리고 그 위에 雲龍을 조각하였는데 刻 線이 약간 약해지고 있다. 10세기의 작품에 비해 11세기에 들어서 면 형식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立碑는 顯宗 16년(1025)이다. ⑧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國寶 59호, 江原 原城郡 富論面) 龜趺의 龜甲 밑에는 雲文을 조각하고 龜甲 周緣에는 縱線帶와 連珠文을 돌렸다. 龜甲에는 格子文 속에 龜甲을 배치하고 그 안에 다시 王字를 새겼다. 碑身에는 周緣에 實相唐草文帶를, 양측면에 는 雙龍을 각각 조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紋樣이 細刻된 螭首는 추녀가 위로 들려서 屋蓋形式으로서의 轉移過程이 나타나고 있다.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나 시대의 下降을 따라 새로운 형식이 뚜렷 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立碑는 宣宗 2년 (1085)이다

386 2. 美 術 ⑨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寶物 24호, 全北 金堤郡 水流面) 龜趺는 높이가 낮고 頭部가 위축되었으며 그 위에 특히 碑身이 넓어 거북이 碑身에 눌려 있는 듯한 감을 준다. 龜甲 밑은 비늘로 채워졌고 波狀을 이루는 龜甲 周緣에는 連珠를 돌렸으며 龜甲文 안에는 花形이 장식되었다. 碑座는 連花로 장식하였으나 매우 얕 다. 螭首는 逸失되었고 碑身 주변에는 唐草文이 조각되었다. 立碑 는 睿宗 6년(1111) 王師 入寂 후 15년이다. ⑩ 僊鳳寺大覺國師碑(寶物 251호, 慶北 漆谷郡 北三面) 高麗時代 碑石에서는 보기 드문 일반형식을 떠난 碑石이다. 龜 趺가 아니 方形 石造의 碑趺를 썼고 표면 장식도 약식이다. 螭首 대신 屋蓋形으로 蓋石을 덮었으나 정상이 隆起되었음은 螭首 형 식의 잔재일 것이다. 立碑는 仁宗 10년(1132)이니 이때는 벌써 이러한 退化形式이 나타나고 있다. 3) 幢竿支柱 幢竿支柱는 幢竿을 支撑하기 위한 花崗石製의 두 개의 支柱를 말한다. 寺域 前方에 건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幢竿의 건 립은 三國時代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統一期의 支柱는 상 당수가 전하고 있다. 兩柱 표면에는 간단한 장식이 있고 정상 外 側에는 곡선으로 굴곡을 나게 하는 것이 通例이며 내면과 정상 內 側에는 상대하게 貫孔과 杆溝를 파서 幢竿을 固定하도록 되어 있 다. 때로는 정교한 작품도 있으나 대체로는 거의 自然石柱에 가까 운 것도 있다. 또 매우 드물게 幢竿까지 完存하는 예가 있으나 그 러한 예는 新羅統一期 이래 4, 5예에 불과하다. ① 龍頭寺址鐵幢竿(國寶 41호, 忠北 淸州市) 花崗石製의 兩支柱 사이에 20개의 鐵製 圓筒을 쌓은 鐵幢竿이

387 Ⅳ. 藝 術 完存한 매우 귀중한 예이다. 支柱에는 간단한 표면 장식이 있고 幢竿에는 銘文이 陽鑄되었다. 銘文에는 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 月二十九日鑄成 이라 있어 건립 연대가 光宗 13년(962)임을 알 수 있다. ② 潭陽邑內里石幢竿(寶物 505호. 全南 潭陽郡) 이 幢竿은 朝鮮 憲宗 5년(1839)에 重建하였다는 碑石이 있어 현재의 형태가 창건 당시의 원형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창건은 아마도 麗代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石造의 幢竿은 八角柱 三石 을 연결한 위에 圓筒形을 연결한 幢竿이 있고 정상에는 鐵製 環이 있으며 幢竿을 받치는 蓮花 圓座가 兩支柱 사이에 따로 마련되었 다. 비록 現狀이 原形이 아니라도 매우 귀중한 遺例라고 하겠다. ③ 春川槿花洞幢竿支柱(寶物 76호. 江原 春川市) 幢竿이 없어졌고 圓座가 남아 있는 支柱인데 이러한 형태가 가 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태이다. 兩支柱에는 거의 표면장식이 없 고 정상 外側은 곡선을 이루었으며 內側에 상대해서 杆溝가 있다. 밑에는 仰蓮이 조각된 圓座가 마련되었으나 圓座마져 亡失된 예 가 많다. (3) 彫 刻 高麗時代의 조각작품으로는 佛像彫刻과 약간의 墳墓 護石의 조 각이 남아 있고 河回의 假面이 이에 포함 될 것이다. 그러나 墳墓 의 護石으로는 전기의 作例로서 볼 만한 것이 없고 河回 假面은 후기에 포함시켰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佛像이 중심이 될 것이다. 新羅末의 혼란했던 사회는 高麗의 건국으로 말미암아 다시 안 정을 찾을 수 있었고 신흥의 기운으로 澎湃하였다. 太祖는 건국의

388 2. 美 術 대업이 佛力에 있었음을 깊이 믿어서 寺院建立과 佛像造成은 다 시 활기를 띠게 되었으니3) 國初에 國都 안에 十寺를 세운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4) 한편 太祖는 風水의 說을 깊이 믿어 사원 건 립에 있어서는 地德의 衰損을 엄히 경계하여 道詵이 남긴 것으로 전하는 風水地理說에 따라 절 자리를 잡도록 하였고 그 이외의 곳 에는 사원 건립을 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는 대소 의 사찰 건립이 성황을 보게 되었으니 太祖는 寺院의 濫立을 경계 하기에 이를 정도였다.5) 또 한 편으로는 거대한 石像의 조성을 보게 되었으니 巨石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는 大岩壁을 향하여 磨 崖의 石佛을 조각하기도 하였음은 羅末의 침체에서 一轉하여 다 시금 거대한 石塔을 조성함과 같이 새로이 일어난 신흥의 기운의 소치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흥의 기운은 의욕과 용기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였지만 반드시 정 신과 기술이 이에 따 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國初에 있었던 활기에 비해 표현이 따르지 못한 원인 의 하나가 禪宗의 유행에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禪宗 은 羅末부터 일어 나 九門의 禪山이 開創되었으나 큰 발전을 보지 못하다가 麗代에들면서 부터 융성하여지기 시작했다. 禪派의 풍을 3) 高麗史 世家 卷 2 太祖 26年條의 訓要十條 其一에는 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 이라 있다. 4) 高麗史 世家 卷 1 太祖 2年 3月條에 創法王王輪等十寺于都內 라 있다. 5) 太祖 訓要十條 其2에는 諸寺院皆道說推占 山水順送 而開創道詵云 吾所占定外妄加创逝 則損薄地德 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 各稱願堂或增創造 則大可憂也 新羅之 末 兢造浮屠 衰损地德 以底於仁 可不戒哉 라 있고 其五에도 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이라 있다

389 Ⅳ. 藝 術 따라 先師의 墓塔을 건립하는 일은 羅末 9세기 중엽부터 있어 9 세기 후반기에 건립된 羅代 浮屠가 數基 전하여 오지만 麗代에 들 어 더욱 성황을 이룬 점은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太祖는 僧 利嚴을 청하여 師資의 禮를 다하고 급기야 海州에 廣照寺를 일 으키게 하니 이가 九門山의 하나가 된 사실은 禪風이 왕실과 밀착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禪宗 융성의 기반이 뿌리 깊었음을 알 수 있다.6) 이와 같은 禪風의 振作은 不立文字 의 宗旨에 따라 禮 拜對象인 堂塔과 像設에 대한 의욕을 잃고 표현 기술이 저하되었 음은 自明한 일이다. 이러한 원인들은 高麗時代의 佛敎彫刻을 前時代의 理想主義的 인 표현에서 現世求福을 위주로 하는 現實主義的인 造型으로 바꾸 어 놓게 하였다. 新羅時代의 佛像이 표현된 외형을 통하여 內在한 佛性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超現世的 作風이 있으나 高麗의 佛像 은 표현된 외형에서 인체구성이 불균형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喜怒哀樂이 나타나는 현세적인 작풍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작 풍은 또한 麗代佛像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고, 國初에 일시 의욕 적인 거작이 만들어졌으나 곧 대작은 자취를 감추고 형태의 축소 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高麗 전기는 의욕을 잃지 않고 羅代의 造像樣式이 계승되어 비교적 착실한 彫像이 조성되던 시기이다. 한편 造像의 재료면에 있어서는, 羅代에는 石佛과 金銅佛이 크 게 유행하였고 9세기경부터 鐵佛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麗代 6) 利嚴의 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가 海州 廣照寺에 남아 있으며 그 碑文에는 다음 과 같은 句節이 있다. 以明年二月中特遣前侍中權說太相朴守文迎入 那內院虔請住持無何逈餝藥 官高 敷蓮座侍以師資之禮恭被鑽仰之意 여기서 明年二月 이라 함은 大師가 天祐 8年(911)부터 914年까지 金海의 佛寺에 있었으므로 그 翌年 即 915年이 된다. 또 長興三年下敎於開京西北海州之陽遽擇靈峯爲構精舍寺名廣照請以居之 라 하였다. 長興三年은 太祖 15年(932)이다

390 2. 美 術 에 들어서도 여전히 石佛과 金銅佛이 주류를 이루었고 여기에 前 代에 이어 鐵佛이 크게 유행 하였다. 이에 더하여 塑佛 木佛 夾 紵漆佛 등이 만들어졌으나 銅佛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 중 塑 佛이나 夾紵漆佛은 宋朝에서 유행하던 先師의 상을 조성하는 유 풍과 수법이 영향한 바 크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塑佛 木佛 夾 紵漆佛의 수는 극히 드물고 高麗前期를 대표하는 佛像은 石佛과 鐵 佛이 대부분이다. 이하 중요한 예를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萬福寺址石造如來立像(寶物 43호, 全北 南原郡 南原邑) 佛身의 衣紋이나 光背 紋樣이 약간 素朴한 감이 있으나 羅代 이 래의 인체 구성의 수법을 계승하고 있다. 顏面은 溫雅하고 兩脚의 衣紋은 羅代의 유풍이다. 光背의 草花文은 이례적이며 火焰文은 鈍重하고 그 위의 化佛은 위축되었다. 兩手와 光背의 상부가 절단 되었고 下部는 매몰되어 원상을 알 수 없게 되었음은 유감이나 文 宗 ( ) 所創이라고 하는 소속사원 창건 당시의 작품으 로 보인다. ② 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寶物 218호, 忠南 論山郡 恩津面) 머리 위에 높은 방형의 2중 冠을 쓴 높이 18m의 大石像이다. 麗初의 氣魄을 짐작할 수 있으나 형식은 기괴해 보인다. 인체의 비 례가 불안하며 顏面 처리는 麗代의 공통된 형식이다. 頭上의 寶蓋 또한 麗代에 유행하던 형식이다. 10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 된다. ③ 開泰寺址石佛立像(寶物 219호, 忠南 論山郡 連山面) 開泰寺는 太祖 19년(936)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이 石佛이 寺 院 건립과 동시에 조성된 것이라면 지방 佛師에 의한 졸작이라고 하겠다. 인체의 표현 특히 手足은 피가 통하지 않는 石塊와 같다

391 Ⅳ. 藝 術 衣紋 조각에 있어서도 극히 형식적이어서 寺院과 같은 시기에 만 든 것이라고 보기 어려우나 사원 건립 연대가 분명하므로 例示하여 둔다. ④ 禮山挿橋石造菩薩立像(寶物 508호, 忠南 禮山郡 揷橋面) 높이 5m 여의 대작이나 인체의 표현이 발랄하지 못하다. 하체 는 매우 길고 왼손 또한 긴 편이다. 안면은 麗代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로 입이 기괴해졌고 눈은 감고 사색에 잠긴 듯하다. 衣紋線은 刻明하나 간략하고 頭上의 6각 蓋石은 麗代의 遺風이다 10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⑤ 雲門寺石造如來坐像 (寶物 317호, 慶北 淸道郡 雲門面) 光背와 臺座를 갖추고 羅代의 형식을 보여주는 秀作이다. 臺座 는 6각에 伏蓮과 仰蓮이 있으며 佛身은 매우 단아한 조형을 보여 주고 있다. 通肩에 두 손은 降魔印이다. 光背는 舟形이고 頭身 兩 光이 따로 마련되었으며 周緣은 火焰으로 차 있다. 各部의 균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新羅 이래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그 조 성이 10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⑥ 寒松寺石造菩薩坐像(國寶 124호 國立中央博物館, 原在 江陵 市 寒松寺) 白大理石製의 傑品의 하나이다. 목거리, 팔찌 등 장신구를 갖추 었으며 한 손은 내리고 한 손을 들어서 모두 人指만을 펴고 있다. 안면에는 큰 白毫孔이 있고 작은 입은 미소를 짓고 있으며 頭上에 는 높은 冠이 있다. 전신이 살쪄 있어 宋代 佛像을 연상케 한다. 10세기경의 조성으로 보이며 이 무렵 江陵지방에서 이러한 형식 이 유행한 듯하다. ⑦ 神福寺址石佛坐像(寶物 84호, 江原 江陵市 內谷洞) 月精寺八角九層石塔 앞에 있는 石造菩薩像과 거의 동형의 상이

392 2. 美 術 다. 한 무릎은 끓고 한 무릎은 세워서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 은 상이다. 안면은 눈을 감고 작은 입에 미소를 띠었으며 높은 冠 위에는 후세에 올려 놓은 石燈蓋石 같은 것이 있다. 풍만한 인체, 투박한 衣紋 등 寒松寺 石像과 同規의 작품이다. ⑧ 廣州校里磨崖藥師如來坐像(京畿 廣州郡 東部面) 큼직하게 仰蓮이 있는 臺座 위에 端坐한 상으로 왼 손으로 藥壶 를 잡고 오른 손은 들었으며 法衣는 右肩偏袒이다. 배후에는 同心 圆으로 頭光 身光을 그리고 그 外周에 간략한 火焰文이 있다. 단 아한 안면 또는 가는 허리 등이 羅代의 형식을 따르고 있음이 역 연하다. 이 상 옆에는 太平二年丁丑七月 九日 운운의 陰刻銘이 있어 景宗 2년(977)의 작으로 추정되고 있다.7) ⑨ 大興寺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寶物 48호, 全南 海南郡 三山 面) 大蓮花座 위에 結跏趺하고 降魔印을 한 坐像이다. 法衣는 通 肩이고 衣紋은 평행선으로 표현하는 퇴화된 형식이다. 頭上에는 큰 肉髻가 있고 입술은 두꺼우며 눈꼬리는 치켜 올라가면서 길게 옆으로 연장되어 麗代의 특징이 여실하다. 배후에는 線刻으로 頭 光과 身光을 그리고 그 밖으로 火焰文이 있으며 四躯의 飛天을 첨 가하였다. 퇴화의 기색이 농후하여 11세기에 들어서의 작품으로 보인다. ⑩ 安東泥川洞石佛像(寶物 115호, 慶北 安東市) 몸은 암석에 조각하고 頭部는 別石으로 암석 위에 올려 놓은 石 像이다. 높이 12m 여의 대작이지만 몸은 두 손 만이 平板같이 陽刻 되었고 衣紋은 모두 陰刻線으로 표현하는 안일한 수법을 취하였다. 안면은 灌燭寺 石像같이 입술이 두껍고 눈꼬리가 길어서 기괴하나 윤곽은 정돈된 편이다. 정신적으로 해이된 풍조가 나타나 있다. 7) 李弘植 京畿道廣州郡東部面校理磨崖佛銘, 考古美術 1卷 2號 (1960) 참조

393 Ⅳ. 藝 術 ⑪ 坡州龍尾里石佛立像(寶物 93호, 京畿 坡州郡 廣灘面) 安東의 石像과 같이 頭部를 別石으로 올려 놓은 二躯의 석상이 다. 몸은 安東 석상 보다는 약간 입체감이 있으나 거의 동식이고 頭部의 형식은 더욱 기괴해졌다. 두상에 원형과 방형의 蓋石이 있 음은 高麗의 유풍이지만 그것으로 해서 더욱 이질감을 돋구었다. 의욕과 기술이 합치되지 못한 예의 하나라고 하겠다. ⑫ 法住寺磨崖如來倚像(寶物 216호, 忠北 報恩郡 俗離面) 드물게 보는 倚像이다. 안면은 둥그나 입과 눈은 高麗佛의 형식 이며 法衣는 右肩偏袒이고 手印은 說法印이다. 衣紋은 자유롭게 곡선으로 표현하였으나 도리어 사실성을 잃었다. 하체는 매우 빈 약하여 균형이 맞지 않으며 발의 모양은 어느 佛像에서도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표현이다. 11세기경의 所作으로 추정된다. ⑬ 天原三臺里磨崖佛(寶物 407호, 忠南 天原郡 豊歲面) 높이 7m의 거작이다. 안면은 눈꼬리가 길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佛像의 相好로서는 이례이며 通肩한 衣紋은 융기되어 있으나 역 시 平板的임을 면치 못하였고 특히 하부로 갈수록 線刻으로 되어 감은 11세기도에서 최고 말기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⑭ 德周寺磨崖佛(寶物 406호, 忠北 堤川郡 寒水面) 높이 13m의 거대한 상이나 몸은 상체가 약간 암석에서 斗出되 었을 뿐 衣紋은 가는 線刻으로 표현하였고 특히 褶衣의 하단을 수 평으로 잘라버리는 도식적인 처리를 범하였다. 兩足은 좌우를 향 하여 더욱 평면적이다. 안면은 高麗 특유의 괴이한 상이어서 內在 한 佛性은 찾을 길이 없다. 12세기로 넘어가는 작품으로 보인다. ⑮ 北漢山舊基里磨崖釋迦如來坐像(寶物 215호. 서울 西大門區 舊基洞 僧伽寺) 당당한 양감이 나타나는 걸작이다. 안면 처리는 高麗의 기괴성

394 2. 美 術 이 나타나기 시작하나 착실한 기풍이 있으며 몸은 평면적임을 면 치 못하나 상체에서는 입체감을 내고 있다. 臺座의 蓮瓣은 격조를 잃지 않아 麗代 磨崖佛로서 특징을 나타내면서 성공한 작품으로 10세기경의 조성으로 보인다. ⑯ 長谷寺鐵製藥師如來坐像(國寶 58호, 忠南 靑陽郡 大峙面) 장대한 방형 석조 臺座 위에 結跏趺한 坐像이다. 相好 풍만하고 右肩偏袒의 佛體나 衣紋이 건실하여 新羅 佛像의 典型을 계승하 고 있다. 배후에는 別造된 木造 舟形 身光背가 있어 頭光과 身光 안의 蓮花唐草나 그 周緣의 火焰文 또한 우수한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10세기 전반 高麗 초기의 秀作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⑰ 春宮里鐵造釋迦如來坐像(寶物 332호, 國立中央博物館) 원래 廣州郡 東部面 下司倉里에 있던 높이 3m에 가까운 대작으 로서 원 위치에 石造 臺座가 남아 있다.8) 면상은 高麗에 가까워지 고 있으나 佛身의 구성은 新羅佛造型을 따르고 있다. 약간 도식화 되기는 하였으나 右肩偏袒한 法衣의 衣紋은 刻明하며 당당한 佛身 에서 큰 양감을 느낀다. 高麗 초기의 걸작의 하나라고 하겠다. ⑱ 鐵造如來坐像(國立中央博物館) 春宮里 鐵佛과 대등할 수 있는 높이 1m의 대작이다. 右肩偏袒 의 衣紋은 素大하나 자유로운 표현이며 佛身 또한 균형잡힌 당당 한 體躯이다. 면상은 入禪한 無碍의 상이며 高麗佛로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春宮里 佛像과 같은 10세기 후반경에 만든 것으 로 추정된다. ⑲ 寂照寺址鐵製釋迦如來坐像(國立博物館開城分館) 開豊郡 嶺南面 伴程里 廢寂照寺址에 있었던 立佛인데 지금 그 안부가 불명하다. 밑에는 眼象 仰伏蓮 雲龍으로 장식된 石造 臺 8) 이 臺座는_鄭永鎬敎授가 發掘한 바 있으나 報文은 아직 없다

395 Ⅳ. 藝 術 座가 있고 佛身은 兩手를 잃었으나 160 의 巨像이다. 肉髻는 높 고 면상은 靜寂한 가운데 미소를 띠고 있다. 右肩偏袒한 佛身은 당당하며 衣紋 또한 刻明하다. 新羅佛의 전형을 따르면서 高麗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寺址에서는 淸泰 4년의 碑銘 後記가 있는 了悟和尙의 碑片이 발견된 일이 있어 佛像 연대 추정의 참고가 되 고 있다. 淸泰 4년은 太祖 20년(937)이다. ⑳ 丹湖寺鐵佛坐像(寶物 512호, 忠北 忠州市 丹月洞) 忠州 市內의 또 하나의 鐵佛과 동일한 양식의 鐵佛이다. 몸은 肥滿되었고 通肩의 法衣 衣紋은 평행선으로 나타내어 圖式的인데 두 무릎의 수평 평행 衣紋은 다른 佛像에서 볼 수 없다. 면상은 근엄한데 입이나 눈의 처리는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 이러한 양식 이 忠州 부근에서 하나의 流派를 이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造 像年代는 12세기경으로 推定하고 있다. ㉑ 永川仙源洞鐵佛坐像(寶物 513호, 慶北 永川郡 臨皐面) 臺座 光背 兩手를 잃고 있으나 造型上 주목되는 작품이다. 역 시 비만형 이고 면상은 둥근데 작은 입은 高麗佛의 특징으로서 印 象的이다. 右肩偏袒의 衣紋은 數條의 隆起線으로 나타내어 간략한 편이다. 어깨와 무릎 폭이 넓어서 당당한 양감을 느끼게 하는 중 요한 作例라고 하겠다. 造像年代는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㉒ 金銅菩薩立像(國立中央博物館) 寶冠의 일부, 兩手. 下半身 등을 잃고 있으나 麗代 佛像의 특징 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面相은 풍만한 가운데 양미간에 큰 白毫孔이 있으며 入禪한 靜寂의 표정이나 작은 입가에 약간의 미 소를 띠고 있다. 목은 긴데 三道가 있으며 가슴 앞에 五條 瓔珞 이 걸려 있다. 두 어깨에 걸친 天衣의 표현은 둔하지만 자연스러 운 표현이다. 가는 허리는 前代의 遺風이겠으나 풍요한 佛體나

396 2. 美 術 큰 면상은 새로운 양식이라고 하겠다. 10세기경의 秀作이라고 하 겠다. ㉓ 靈塔寺金銅三尊弗(寶物 409호, 忠南 唐津郡 沔川面) 臺座를 具存한 毘盧舍那의 三尊像이다. 木尊은 근엄한 표정이고 法衣는 通肩인데 衣紋은 형식화되었고 몸은 비만형이다. 무릎이 거의 어깨 폭과 같아서 頭部가 유난히 큰 점과 아울러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脇侍菩薩 또한 인체 구성이 本尊과 같으며 따로 마련 된 臺座 밑으로 衣端이 내려오고 있다. 臺座는 도안화된 伏蓮 밑 에 高麗 특유의 眼象이 있고 八角 中石 각면에도 下臺에서와 같은 眼象이 있다. 여기서 좌우로 대칭되게 蓮莖이 뻗어 菩薩의 蓮花座 를 받치고 있다. 高麗時代의 金銅三尊像은 매우 드문데 그리한 점 에서 귀중한 作例이나 수법의 퇴화는 시대성이 나타난 결과라고 하겠다. 12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㉔ 金銅三尊佛龕(國寶 73호, 澗松美術館) 麗代의 佛龕은 數例가 전하고 있으나, 金銅佛龕으로서 대표작이 라고 할 수 있다. 이 佛龕은 須彌壇形의 基壇 위에 佛殿을 마련하 였는데 난간 기둥 공포 석가래 기왓골 雜像 鴟尾까지 木造 建築의 細部를 模刻하였고 佛殿 안에 三尊을 봉안하였다. 本尊은 須彌壇 위에 따로 마련한 仰蓮 위에 結跏趺하였는데 刻線이 雄偉 하고 배후에는 火焰光背가 달려 있다. 兩菩薩은 바닥에 섰는데 목 에는 瓔珞을 걸치고 배후에 같은 수법의 광배가 있다. 완전한 형 태로 보존되었음도 희한하거니와 三尊의 조각수법 또한 주목된다. 10세기경의 秀作이라고 하겠다. ㉕ 浮石寺塑造如來坐像(國寶 45호, 慶北 榮州郡 浮石寺) 국내 최대의 塑造佛이다. 造像의 형식은 新羅佛을 따라 佛身의 표현, 衣褶의 양식 등 新羅末의 佛像과 같으나 입술과 눈은 高麗

397 Ⅳ. 藝 術 佛이 되어 寂照寺鐵佛이나 春宮里鐵佛과 같다. 塑像으로서 이만한 大像이(높이 2.8m) 전함도 귀중하고 배후에는 唐草文과 火焰文이 細刻된 木造光背가 따로 마련 되어있다. 造像은 10세기 후반, 국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4) 書 畫 高麗時代에도 많은 書家 畫家의 기록이 있으나 지금 그 眞蹟을 대 하기 어렵고, 더우기 前期의 書蹟이나 畫蹟은 전혀 없다. 高麗史에 寶曹員吏亦同上大府陳設司綾羅店圖畫院并屬焉9) 이라 있음을 보면 직업적인 畫員이 있어 圖畫에 종사하였으리라 고 생각되며 麗代 諸王의 眞影을10) 비롯한 功臣의 圖形,11) 성행 된 寺院 건립에 따르는 壁畫의 제작12)을 비롯하여 李寧 등 많은 畫家의 이름을 볼 수 있다.13) 書 또한 약간의 金石文에서 書風을 대할 수 있을 뿐 眞蹟이 없다. 다만 지하에 매장되었던 開城 水落 洞 古墳, 長湍 法堂坊 古墳, 居昌 屯馬里 古墳, 恭愍王陵 등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그 일단을 살필 수 있고 麗末에 이르러 安晌 影 幀과 약간의 佛畫가 남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하에서 麗代의 書畫 특히 그 전기의 書風이나 9) 高麗史 志 卷 31 百官 2 外職條 10) 高趣史 列傳 133 尹紹宗傳에 景靈殴太祖皇考之別廟孝思觀太祖眞之所在 라 있고 韓在濂의 高麗古都微 五 景靈殿條에는 諸王 眞影 奉立 事實이 많이 나온다. 11) 高麗史 世家 卷 2 太祖 23年條에 是歲重修新羅寺置功臣党畫三韓功臣於東西璧 이라 있다. 12) 高腿圖陘에는 福源觀. 靖國安和寺 廣通普濟寺 等에 壁畵가 있음을 記錄하고 있다. 13) 金榮胤 書畫人名辭典. 漢陽文化社 (1959) 참조

398 2. 美 術 畫風을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書風은 羅代에 이어 歐陽詢體의 遵 勁한 書法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畫風은 羅代의 繪畫觀과 대조 하면 회화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커다란 변천을 볼 수 있 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高麗畫의 특색이다. 14) 다음에 전기에 속하는 書蹟과 畫蹟을 기록에 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15) 1) 書 蹟 ① 李桓樞(存年未詳) 廣照寺眞澈大師寶月凌空塔碑(太祖 20937建) 菩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太祖 20937建) 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太祖 22939建) ② 具足達(一名 仇足達. 存年未詳) 地藏禅院(普賢寺) 朗圓大師悟眞塔碑(太祖 23940建) 淨土寺法鏡大師慈燈搭碑(太祖 26943建) 太安寺廣慈大師塔碑(太祖時連) ③ 五龍寺法鏡大師普照慈光塔碑(惠宗 1944建) ④ 崔潤(存年未詳) 興寧寺澄晓大師寶印塔碑(惠宗 1944建) ⑤ 柳勳律(存年未詳) 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定宗 1946建) ⑥ 釋純白(存年未詳)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光宗 5954建) ⑦ 張端說(存年未詳) 鳳巖寺靜眞大師圆悟塔碑(光宗 16965建)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光宗 26975建) 14) 高裕燮 高麗畫蹟에 對하여, 韓國美術文化史論叢 通文館 (1966) p ) 書蹟은 金榮胤의 前揭書에 의하였고 畫蹟 高裕燮의 前揭書에 의하였다

399 Ⅳ. 藝 術 ⑧ 釋玄可(存年未詳) 玉龍寺道詵國師寶雲塔碑(光宗 9958建) ⑨ 金遠(存年未詳) 龍頭寺幢竿記(光宗 13962建) ⑩ 韓允(存年未詳)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景宗 3978建)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睿宗 6111建) ⑪ 張信元(存年未詳) 鷰谷寺玄覺禪師塔碑(景宗 4979建) ⑫ 洪協 智谷寺眞觀禪師碑(成宗 13994建) ⑬ 崔冲(成宗 3984-文宗 ) 歸法寺題詠石刻(顯宗朝 ) ⑭ 顯宗(成宗 顯宗 建) ⑮ 蔡忠順(靖宗 21036卒) 玄化寺創寺碑(顯宗 建) ⑯ 金巨雄(存年未詳) 居頓寺圆空國師勝妙塔碑(顯宗 建) ⑰ 白玄禮(存年未詳) 弘慶寺開創碑(顯宗 建) ⑱ 文宗(顯宗 文宗 ) 三川寺大智國師碑(文宗時 建) ⑲ 林顥(存年未詳) 浮石寺圆融國師碑 (文宗 81054建) ⑳ 安民厚(存年未詳)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宣宗 21085建)

400 2. 美 術 ㉑ 高世儞(存年未詳) 興王寺大覺國師墓誌 (肅宗 61101建) ㉒ 蔡惟誕(存年未詳)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陰記(睿宗 61111建) ㉓ 李元符(存年未詳) 般若寺元景王師碑 (睿宗 建) 安養寺七層塼塔碑 (仁宗 91131建) ㉔ 釋坦然(文宗 毅宗 ) 文殊院重修碑(仁宗 81130建) 北龍寺碑(仁宗時 ) 雲門寺圆應國師碑(仁宗 81130建) ㉕ 仁宗(睿宗 仁宗 ) 靖國安和寺四韻詩石刻 普賢寺創寺碑題額(仁宗 建) ㉖ 吳彥侯(存年未詳) 靈通寺大覺國師塔碑碑銘及篆額(仁宗 31125建) ㉗ 釋惠素(存年未詳) 靈通寺大覺國師塔碑陰記(仁宗 31125建) ㉘ 釋麟(存年未詳) 僊鳳寺大覺國師碑碑銘及篆額(仁宗 建) ㉙ 文公裕(毅宗 卒) 普賢寺創寺碑碑銘及陰記(仁宗 建) 2) 畫 蹟 高麗 전기의 畫家로서는 崔思訓(文宗朝), 鄭知常(仁宗 년 卒) 李俊異(仁宗朝), 李寧(仁宗朝)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고 그들이

401 Ⅳ. 藝 術 그렸다는 畫蹟의 기록은 더우기 적다. 그나마 기록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人物畫 文宗妃仁睿順德王后眞影 肅宗眞影 肅宗妃明懿王后眞影 新興寺功臣堂三韓功臣圖影 ②佛畫 靖國安和寺東廡祖師像, 西廡地藏像 廣通普濟寺羅漢寶殿畫廡 金仙文殊普賢羅漢五百軀畫像 興王寺壁畫(文宗 30년 崔思訓이 宋相國寺壁畫를 移模한 것) 廣敎院盧舍那 釋迦 獎基二祖及 海東六祖像 ③ 儒敎畫 國學壁上의 72賢位(宣宗 81091) 文廟左右廊의 61子, 21賢(肅宗 61101) ④ 山水畫 李寧筆 山水圖 同 禮成江圖 ⑤ 寫生圖 李寧筆 天壽院南門圖 田拱之筆 火山圖 (穆宗 ) 魏王館瑞異圖 (肅宗 41099) ⑥ 經籍圖 孝經雌雄圖(光宗 後周에 보냄) 新彫三禮圖 54板(文宗 李靖恭 撰) 爾雅圖 2卷, 3黃輔圖 1卷, 靈憲圖 1卷, 司馬 法漢圖 1卷

402 2. 美 術 (宣宗 宋에 보냄) 投壶儀圖(睿宗 ) (5) 工 藝 高麗時代의 工藝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눈부신 발전을 보였고 특히 陶磁工藝에 있어서는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발전을 보였다. 陶磁工藝의 발달은 이미 10세기말에 본격적인 磁器가 생산되더니 약 반세기를 지날 무렵부터는 高麗時代 특유의 우수한 靑磁가 생 산되기 시작하여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였고 金屬工藝에 있어서도 각종의 佛具를 비롯하여 일상용구, 장신구, 舍利莊嚴具 등 눈부신 발전이 있었고 기술면에서도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木漆工藝에 있어서도 螺細手法은 특히 유행하여 그 수법이 陶磁 工藝나 金屬工藝에 응용되는 등 독자적인 발전이 있었고 瓦塼도 前代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형태나 紋樣에 있어 새로운 방향이 나 타나고 있다. 工藝라는 용어로서 표현하는 미술작품은 多樣多種하지만 재료 면에서 볼 때 金屬 土陶 木漆 등의 구분이 있을 것이고, 용도 또 한 광범하다. 따라서 각종의 工藝作品은 항상 실용하는 것이기 때 문에 用途에 맞도록 형태가 고안되지만 외형은 매우 세련되어 높 은 예술성을 발휘하고 있다. 외형을 형성하는 선은 전대에서 볼 수 없었던 높은 격조를 보여주어 당시 藝人들의 높은 안목과 표현 기 술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수법으로서 주목되는 점은 螺細手法이니 이 수법은 재료를 달리하고 용도를 달리하면서 도 널리 응용되고 있다. 즉 木漆工藝에서 쓰던 螺細手法은 一轉하 여 金屬工藝에 있어서의 入絲手法, 陶磁工藝에 있어서의 象嵌手法

403 Ⅳ. 藝 術 으로 확대되면서 독특한 수법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 金屬工藝 梵鐘 香爐 飯子 淨瓶 工藝塔 舍利莊嚴具 등 佛敎的 遺物과 銅鏡 각종의 器皿 등 일상용구, 그리고 裝身具 등 매우 다양하다. ㄱ. 梵 鐘 梵鐘은 新羅 이래의 韓國鐘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鐘口가 넓 어지고 鐘肩에 立華裝飾이 붙고, 音筒 上端에 球形裝飾이 생기고 鐘身의 飛天 대신 佛 菩薩의 立像이 조각된다. 말하자면 장식성 이 많아지고 외형이 新羅鐘 같이 날씬하지 않고 투박해진다. 표면 彫飾의 수법도 羅代의 격식에서 벗어나는 紋樣의 배치 또는 紋樣 자체의 主題가 달라지고 刻線도 둔중해진다. 또 불상이나 석탑에 서와 같이 전기에는 비교적 대작이 만들어지나 중기 이후부터는 大鐘은 자취를 감추고 小鐘들이 鑄成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으 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① 天興寺銅鐘(國立中央博物館, 높이 1.7 m, 顯宗 1년1010) ② 正隆二年銘銅鐘(朴秉來컬렉션, 높이 22.5, 毅宗 11년1157) ③ 塔山寺銅鐘(全南 海南郡 大興寺. 높이 79, 11세기) ④ 淸寧四年銘銅鐘(國立中央博物館, 높이 83.2, 文宗 12년1058) ⑤ 龍珠寺銅鐘(京畿 華城郡 龍珠寺, 높이 1.44m, 11세기) 이 가운데서 天興寺鐘과 龍珠寺鐘은 大作에 속하는 것이고 淸 寧 四年銘鐘은 가장 잘 新羅鐘의 형식을 보여 주는 鐘이며 正隆二 年銘과 塔山寺鐘은 立華裝飾 또는 珠形裝飾이 있어 특징이 잘 나 타나 있는 예이다. ㄴ. 香 爐 香爐는 香垸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넓은 전이 달린 深垸形 身部

404 2. 美 術 와 나팔형의 받침이 있는 형식이 전형적인 형태이지만 왕왕 특이 한 형태가 있어 이채를 띠고 있다. 표면에는 梵字, 蓮花, 唐草, 雲 龍 등을 銀入絲하여 장식하는 것을 격식으로 삼아 麗代 香爐의 하 나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典型의 香爐로서는 ① 靑銅銀入絲香爐(慶南 密陽郡 表忠寺)(國寶 75호. 높이 2.5 明 宗 7년1177) 가 대표작이며 이 외에 ② 靑銅香爐(金潤, 높이 87 ) ③ 靑銅銀入絲獅子뚜껑香爐(車明浩, 높이 29.8 ) ④ 靑銅獸脚香爐(慶熙大學校博物館, 높이 14.3 ) 등이 있다. ②는 安城郡 二竹面 奉業寺址 출토라고 전하는데 전은 좁아지고 밑의 나팔형 받침은 3단으로 되었고 따로 3개의 다리가 달리고 火焰寶珠가 있는 뚜껑이 따로 마련되었다. ③은 中國의 方 鼎을 모방하였고 다리에는 獸面을, 爐身에는 饕餮文과 虺龍文을 陽刻하였다. 뚜껑에는 麗代 靑磁에서 보는 바와 같은 寶珠를 밟고 있는 獅子를 앉혀 놓았다. ④는 큼직한 3개의 獸脚으로 盤形 爐身 을 받치고 뚜껑은 凹形인데 중앙에 獅子를 圆刻해서 손잡이로 쓰 게 하였다. ㄷ. 飯 子 飯子는 金鼓라고도 부르며, 형식은 한쪽은 좁은 전이 있을 뿐 터져서 내부가 비었고 반대 면에 蓮花文 唐草文 등이 조각된다. 측면에는 걸기 위한 고리가 2개 혹은 3개 달린다. 외형은 모두 동 일하고 장식 문양에 우열의 차가 있을 뿐이다. ① 瓊嚴寺金鼓(國立中央博物節. 表經 59.5, 文宗 27년1073) ② 大定十九年銘金鼓(國立中央傅物館, 表經 41.7, 明宗 9년1179) 은 대표적 작품이다

405 Ⅳ. 藝 術 ㄹ. 其他 佛具 이 이외의 佛具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① 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瓶(國寶 92호, 國立中央傅物館, 높이 37.5, 11세기) ② 金銅大塔(湖巖컬렉션, 높이 1.55m. 11세기) ③ 松廣寺金銅搖鈴(寶物 176호, 全南 昇州郡 松廣寺, 높이 20.6, 11세기) ④ 靑銅龍頭寶幢(湖巖컬렉션. 國寶 136호, 높이 73.8, 11세기) ①은 麗代 金屬工藝品으로서는 최대의 傑作品으로 형태, 入絲手 法, 紋樣 등 실로 入神의 경지를 나타내었다. 표면의 鏕色과 銀色 과의 조화 또한 고도의 격조를 보여주고 있다. ②는 일부에 缺失 된 부분이 있는 듯하나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장엄한 대걸작이 다. 세부조각은 정치하고 각부의 균형 또한 아름답다. 많은 金屬 ③은 많은 동형 작품 가 품위 있는 예이며 ④도 처음 보는 걸작 工藝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이다. 基壇의 구성, 龍頭의 細刻 등 麗代의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舍利莊嚴具로서는 ① 益山王宮里五層石塔舍利器(國寶 123호 國立中央博物館) ② 光州西五層石塔舍利器(國立中央博物館) 의 예를 들 수 있다. ①에는 金製舍利函, 유리제 舍利瓶金製函과 그 속의 金製金剛 經板, 靑銅佛像 등이 포함되어 있다. 舍利函 표면의 蓮花와 魚子 文의 장엄, 19枚 金板에 찍어서 연결한 經板 등은 매우 드문 發見 例이며 ②의 舍利器는 殿閣形으로서 四天王, 四方佛 또는 세부 장 식문양에서 麗代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406 2. 美 術 口. 日常用具 일상용구로서는 銅鏡과 각종 器皿을 들 수 있다. 銅鏡의 형태는 圓形鏡이 가장 많고 唐式을 따른 八棱 八花形, 宋式을 따른 方 形 四棱 六棱 抹角方形 葉形 鍾形, 日式의 柄鏡 등이 있고 高麗의 특색이 발휘된 예는 없다. 형식은 중앙에 하나의 半珠形의 鈕가 있고 周緣에는 단면 半圓形의 테가 돌려있으며 공간에 문양 이 조각된다. 그 반대면은 磨硏해서 그 곳에 얼굴이 비치도록 되 神獸 등 紋, 唐鏡을 따른 瑞獸葡萄樹下彈琴寶相花 등 紋宋 鏡을 따른 동물인물산수神舟樓閣 등 문양과 이외에도 鳳 凰雲龍鶴女眞文字 등이 있고 이들 중에는 中國鏡에 찍어낸 어있다. 문양도 매우 다양하여 漢鏡을 따른 方格 日光 半圆半格 倣鏡도 적지 않다. 銅鏡 이외의 일상 용구로서는 각종 器皿이 다량으로 생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매우 주목되는 대표작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銅製銀入絲鳳凰紋盒(湖巖컬렉션, 높이 9.9, 徑 18.3 ) ② 銅製銀象嵌雲龍唐草紋盤(國立中央博物節, 높이 18.5, 上徑 77.5 ) ③ 銀製주전자와 바리(美보스턴美術館, 주전자 높이 바리 높이 17 ) ④ 銀製鍍金托盞(國立中央博物館, 높이 12.7 ) ①과 ②는 형태의 우아함도 뛰어나지만 전면에 細鏤된 銀入絲 의 문양과 수법은 高麗時代에 제작된 모든 銀入絲 작품 가운데서 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③은 동형의 靑磁가 있지만 형태의 장중함과 표면에 細刻된 문양의 화려함이 잘 조화된 걸작이며 金 屬 工藝品의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④도 靑磁에서 동형 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陽刻 陰刻의 수법을 구사한 문양은 매우

407 Ⅳ. 藝 術 호사롭다. 이 외에도 매우 다채로운 발전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나 遺品 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裝刀와 針筒을 보면 金屬手 工業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推察할 수 있다. 装刀와 針筒은 銀製이 어서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표면의 裝飾紋樣 표 현은 놀라운 바가 있다. 花文 唐草文 鳳凰文 龍文 등이 陽刻 혹은 陰刻의 수법으로 施文되면서 둥글고 긴 표면을 화려하고 균 文飛天像四神像 등을 陽刻陰刻透刻 등의 수법으로 나타 형있게 처리하고 있다. 또 冠飾 銙帶 棺飾具에도 動物文 植物 내어 우수한 효과를 내고 있다. 2) 陶磁工藝 高麗時代의 陶磁器는 土器와 磁器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土器는 釉藥이 없는 灰黑色 陶器이고 磁器는 釉藥을 입혀서 구워 낸 것으로 靑磁와 白磁가 대표적 작품이며 중기 이후부터는 天 ㄱ. 土 器 目 綠釉 黃褐釉등 雜釉가 나타난다. 土器는 그 계통을 新羅土器에서 계승하여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으나 器形이나 표면 장식에 있어서는 新羅土器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器形에 있어서는 ① 입이 작고 어깨가 屈曲 없이 흘러 내리면서 밑이 약간 좁아지는 병, ② 입이 특히 작고 넓게 벌어진 어깨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다가 바닥에서 다시 약간 넓어지는 매병, ③ 밑은 넓고 허리가 잘룩하다가 위가 다시 약간 넓어지는 瓢 形 병,

408 2. 美 術 ④ 부드러운 曲線을 그리면서 밑이 넓고 차츰 좁아지면서 목을 거쳐 입이 다시 약간 넓어지는 병, ⑤ 손잡이와 귀때가 달리고 배가 부르며 턱 없이 입이 작고 뚜껑이 있는 참외 모양의 주전자, ⑥ 입은 크고 입술은 外反되었고 입에 비해 좁은 어깨부터 약간 좁아지면서 바닥에 이르는 병, 등의 형식이 가장 많다. 이러한 器形은 新羅土器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형식이며 이러한 土器들은 주로 高麗初期에 생산되었으나 그 형태가 그대로 靑磁에 계승된 것을 보면 靑磁의 器形이 이미 土器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表面裝飾은 극히 간단하여 ① 가로 굵은 골을 내서 주전자의 경우 참외의 실감이 나게 한 것, ② 세로 가는 陰刻平行線을 여러 줄친 것, ③ 蓮花楊柳唐草樹木波狀 등의 紋樣을 陰刻한 것, ④ 어깨에 獸面 혹은 鬼面을 부착시킨 것, 등이 있으나 陰刻紋樣은 대체로 수법이 졸렬하고 象嵌靑磁 紋樣 의 기본이 이미 여기서 잡혀 있음이 뚜렷히 나타나 있다. ㄴ. 磁 器 靑磁는 微量의 鐵分이 섞인 長石釉를 발라서 還元焰에 의해서 구은 것이다. 이 때 釉藥은 第一酸化鐵이 되어 靑色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窯法은 越州窯의16)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것이나 高麗에서는 中國에서 볼 수 없는 器形이나 색조를 창안 발전시켜 그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靑磁의 발생시기에 관하여는 명확한 기록이 전무하여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으나 대체로 文宗朝로 추정하고 있다. 16) 中國 浙江省에 있던 窯

409 Ⅳ. 藝 術 ① 淳化四年銘壶(梨花女子大學校蔵)는 17) 翡色의 靑磁가 아 닌 半磁胎의 淡灰綠色인데 대해 高麗圖經에서는18) 高麗靑磁 를 극구 稱讚하고 있어 993년에서 1123년까지의 130년간의 어느 시기에 발생하였다고 생각되며 ② 中國 興安嶺에 있는 1031년에 죽은 契丹王 聖宗의 永慶 陵에서 陰刻靑磁片이 발견되었다고도 하나19) 그 實相을 알 수 없으므로 자료로서의 取擇을 보류한다면 ③ 文宗代에는 建國 이래 제도가 가장 정비되어 문물이 발 달되었고 의욕에 차 北宋과의 교류가 잦았던 시기이며 이 무 렵 宋에서는 靑磁技術이 완성되어 아름다운 靑磁가 상산되었 고 이러한 技法이 새로이 高麗에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推定은 高誕圖經이 나오는 11세기초부터 약 반세기를 거 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므로 문화발달의 대체적인 속도로 보아서도 무리한 추정은 아닌 듯하다. 翡色靑磁의 제작기법을 체득한 高麗人들은 12세기 중엽부터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 발전시켰으니 그것이 즉 획기적인 발달을 보 게 된 象嵌靑磁이다. 象嵌靑磁는 반 건조된 그릇 표면에 紋樣을 陰刻하고 초벌구이한 다음 그 안에 白土 또는 黑土를 메우고 靑磁 釉藥을 발라서 구워 내면 釉藥을 통하여 紋樣이 黑白 兩色으로 나 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中國磁器에서 볼 수 없는, 高麗에 서 창안된 기법이고 그것은 金屬器 또는 木漆器에서 볼 수 있는 入絲 또는 螺細의 수법에서 착안하여 같은 수법을 陶磁器에 응용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象嵌靑磁의 발생을 12세기 중엽으로 추정 하는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17) 淳化四年은 成宗 12年(993)이다. 18) 高麗圖經은 宋使를 따라 仁宗 1年(1123)에 高麗에 왔던 徐兢의 見聞錄이다. 19) 小山富士夫 高麗陶滋序說, 世界陶磁全集 13卷 東京(1955) p.222 下段 참조

410 2. 美 術 ① 高麗圖經에서는 純靑磁를 칭찬하면서 象嵌靑磁에 관하여 는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1123년까지는 象嵌技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② 毅宗 13년(1159)에 죽은 文公裕의 墓에서는 墓誌와 함 께 靑磁象嵌寶相唐草文 대접이 발견되었으므로 ③ 이로해서 1123년부터 1159년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보 인다. 象嵌靑磁는 13세기경까지 성하여 純靑磁 보다도 量產되었고 이 무렵부터 堆花文靑磁, 畫靑磁 등이 생산되어 麗末까지 계속되 었다. 다음에 高麗 전기를 중심으로 靑磁의 종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素文靑磁 陽刻靑磁 靑磁 純靑磁 陰刻靑磁 象嵌靑磁 透刻靑磁 畵靑磁 象形靑磁 堆花文靑磁 로 구분되는데 素文靑磁는 器表에 하등의 紋樣이 없는 것이고, 陽 刻 陰刻 透刻 등의 靑磁는 하나의 수법만을 쓰는 수도 있으나 이상의 수법을 겸용하는 수도 있다. 陽刻靑磁의 紋樣은 寶相華 芙蓉牡丹蓮花唐草牡丹唐草蹯龍雲鶴波濤柳 蘆鴛鴦饕餮瑞禽鳳 등이고 陰刻靑磁의 紋樣은 蓮花蓮花 唐草牡丹鸚鵡蟠龍菊花菊花唐草鳳 등이다. 蓮花 象形靑磁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며 徐兢이 高麗圖經에서 감탄하 듯이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다. 象形靑磁는 다시 다음과 같이 분류 된다

411 Ⅳ. 藝 術 ① 中國 古銅器의 형태를 모방한 것(尊鼎爐壶盤洗 鋺皿鉢瓶盞 등) ② 인물을 나타낸 것 (羅漢仙官童女 등) ③ 동물을 模刻한 것 (鴨龜獅子鴛鴦猿魚麒麟兎龍 등) ④ 식물을 模刻한 것 (瓢瓜竹筍拓榴竹蓮花 등) 象嵌靑磁의 紋樣으로는 蒲柳水禽雲鶴野菊이 가장 많이 사 용되던 紋樣이다. 이 紋樣들은 靑磁의 색조와 더불어 종교적인 성 격이 농후하며 단일색에서 오는 寂照美가 나타나 있다. 靜寂과 脫 世間的이며 현세를 諦念한 來世的인 高麗人의 심정이 발로된 것이 連珠魚牡丹葡萄瓢朴唐草寶相華鳳竹露七寶柳 猿童子蝶竹鳥梅竹松人物眼象雨點 등 실로 다양 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외에도 草花 柘榴 龍濤 蓮花 如意頭 하다. 畫靑磁는 素地 위에 黑色 塗料를 붓에 찍어서 그린 다음 靑磁釉 藥을 발라서 구워 낸 그릇이다. 따라서 象嵌과는 달리 선이 굵고 회화적인 점이 특색이다. 畫靑磁는 대개 靑磁의 발색이 좋지 않거 나 酸化焰에서 구어낸 것이 많음을 보면 高麗 전기부터 생산되었지 만 후기에 들어 더욱 유행한 듯하다. 紋樣으로는 雲鶴 鳥 蝶 낙 지 牡丹 寶相華 蓮花 楊柳 菊花 唐草 등을 많이 그렸다. 堆花文이라 함은 黑土 또는 白土를 器表에 점을 찍거나 선을 그 어서 紋樣을 나타내는 수법으로 施紋된 부분이 약간 도드라지는 것이 특색이다. 일설에는 이 堆花文은 象嵌手法의 선구이며 堆花 수법에서 象嵌手法으로 移行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詩文 또는 干支가 들어 있는 靑磁가 있다. 高麗時代 磁器로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白磁이다. 高麗白磁

412 2. 美 術 는 宋의 定窯 또 景德鎭窯의 영향을 받아 靑磁보다는 약간 늦어 12세기 중엽부터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高麗時代의 白 磁에는 靑白色과 卵白色의 두 계통이 있으며 素地도 얇고 堅緻한 것과 두껍고 투박한 두 流派가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보면 高麗 白磁는 오히려 12세기말 즉 高麗 후기에 더욱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白磁의 종류를 정리하면 素文白磁 陽刻白磁 純白磁 白磁 陰刻白磁 象嵌白磁 象形白磁 畵白磁 象形白磁 등으로 구분된다. 陽刻白磁 陰刻白磁 畫白磁 등에 施文되는 紋 樣 또는 象形白磁의 母型 등은 靑磁와 대동소이하다. 3) 木漆工藝 木漆工藝는 新羅에도 있어20) 古填출토품에서 그 단편이 발견되 어 그 一端을 추찰할 수 있고21) 高麗時代에도 그 뒤를 이어 상당 히 발전하였고 그 수법이 극히 정교하였음은 비록 현존 遺物이 적 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짐작되는 바 있다.22) 20) 三國史記 卷 38 志 8 職官中에 漆典 景德王改爲飾器房後復故 磨典 景德王改爲梓人房後復故 등이 있다. 21) 天馬塚에서는 鳥形漆杯, 漆高杯 等 比較的 狀態가 良好한 漆器가 發見되었다. 22) 高麗史 卷80 志 卷 77 食貨 俸條에는 諸衙門工匠別賜並以役三百日以上者給之文宗三十年定 이라 있고 그 중에 中尙署米로 支給되는 工匠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十五石 畫業 十石 小木匠 十石 磨匠 七石 雕刻匠

413 Ⅳ. 藝 術 麗代의 木漆工藝는 螺細漆器가 대표하고 있다. 이미 徐兢의 눈 에 띈 바 있어 高麗圖經에 用漆作 甚不工 而螺細之工 細密可貴23) 또는 騎兵 所乘鞍韀 極精巧 螺細爲鞍24) 라고 한 것을 보면 일반 用漆製品보다도 螺細製品이 크게 발달하였 고 可貴 또는 極精巧 라고 할 만큼 수법이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文宗代에는 遼王室에 螺細器를 보냈다는 사실은25) 또한 그 발달상을 웅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작에 있어서는 아 마도 전문기술자가 있어서 각 工程을 맡아 분업으로 이루어진 듯하 다. 高麗史에 螺細製品 제작에 종사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각종의 工匠名이 있음을 보아 그렇게 짐작되는 것이다. 麗代 螺細은 상당 한 발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耐久性이 약한 탓인지 그 現存 例 는 수십 예에 지나지 않고 現存 例에서 보면 器種은 盒類 經箱 香箱 珠営 등의 상자류와 油壶 등이 있는데 다양하지는 못하다. 紋樣에 있어서도 立菊 菊唐草 牡丹唐草蒲柳 草木水禽 등이며 대체로 밀집된 立菊文이나 菊花唐草文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밀 집된 상태로 해서 일층 화려한 효과를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麗代의 螺細手法이 동시대의 金屬工藝의 入絲手法 또는 陶磁工 六石 漆匠 中尚署에 관하여는 高麗史 卷 77 志 卷 31 百官 2 供造署條에 供造署掌御用器玩穆宗朝有中尚署(略) 忠宣王二年改供造署恭愍王五年復改中 尚署(略) 十一年復改供造署(略) 十八年復改中尚署(略) 二十一年復改供造署 라 있다. 23) 徐兢 宣和奉使 高麗圖徑 卷 23 雜俗土產條 24) 徐兢 前揭書 卷 15 車馬 騎兵馬條 25) 東國文獻備考 卷 172 交聘考補二 歷代朝聘二 睿宗 8年條에 文公元嘗使遼私贈儐者以白銅螺細器書畫屛扇奇玩自是遼人援例徵索無厭遂爲 鉅弊 이라 있다

414 2. 美 術 藝의 象嵌手法과 유관하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아 기본 수법은 동일한 것이니 당시에 유행을 본 특색 있는 수법이라고 하겠다. 끝으로 현존하는 螺鈿器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黑漆立菊螺鈿玳琩函(李王家컬렉션) ② 黑漆菊唐草螺鈿子盒(同) ③ 黑漆菊唐草螺鈿油壶(同) ④ 黑漆蒲柳草木水禽文螺鈿描金香函(同) ⑤ 立菊文螺細經箱(東京國立博物館) ⑥ 黑漆螺細玳琩裝念珠宮(月本 當麻寺) ⑦ 黑漆菊唐草螺鈿玳琩裝洲濱盒子(日本 桂春院) ⑧ 菊唐草螺鈿小箱(日本 大倉集古館) ⑨ 黑漆菊唐草文螺鈿經箱(日本 德川美術館) ⑩ 黑漆菊唐草文螺鈿經箱(암스텔담 東洋博物館) 그 중 ⑥은 뚜껑 중앙에 梵字를 놓고 連珠文帶로 三區로 구분한 다음 각 구마다 菊花를 연속시켰는데 그 수법이 매우 율동적이고 連珠文 좌우와 唐草 줄거리는 銅線을 박아서 高麗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으며, ⑨는 형태가 다를 뿐 ⑥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외국에 남아 있는 經箱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이다. 全面 에 細刻한 螺鈿의 수법은 극히 화려하다. ④의 香箱은 상태가 좋 지 않으나 뚜껑 주변의 紋樣은 前二者와 동일한 수법이고 몸과 뚜 껑 표면에는 樹木 楊柳가 있고 그 밑에 水禽이 혹은 물 위에서 놀고 혹은 고기를 잡고 있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13세기경의 작 으로 후기에 들어와서의 작품이나 이러한 수법이 前期에도 있었 음은 문헌의 기록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되는 바이고 수법도 크게 다를 바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415 Ⅳ. 藝 術 4) 瓦 塼 高麗時代 工藝로서 瓦塼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高麗時 代에도 前代에 이어 지붕에 기와를 입히고 바닥에 塼을 깔았으므 로 많은 建物址에서 瓦塼이 발견되고 있다. 먼저 기와의 종류를 보면 前時代와 같이 암막새와 수막새가 가장 많으며 용마루 좌우 에 얹는 鴟尾가 발견되는 수가 있으나 羅代에 유행을 보았던 鬼面 瓦나 橡木瓦의 발견한 例가 없음은 前代와 다른 양상이다. 鴟尾는 단편이 수 점 발견되었을 뿐이어서 원형을 알 수 없으나 단편에 남아 있는 조각수법이나 양식으로 보아 羅代의 것과 유사하였으 리라고 생각되며 추녀마루에는 朝鮮時代에서 이르는 雜像이라고 보여지는 鳥形 기와가 開城 滿月臺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26) 塼 은 壇이나 벽면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측면에 紋 樣이 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高麗時代 瓦塼의 상태가 암막새는 弧形의 長方形이 前期의 通式 이고 中期이후에는 중앙에서 밑으로 垂下되어 舌形을 이루게 된 다. 수막새는 圓形이고 塼에 方形, 長方形이 있음은 羅代와 같다. 鳳凰文고사리文牡丹文梵字文 등이 있고, 암막새에는 唐草文 紋樣은 수막새에는 蓮花文 鬼目文이 가장 많고 그 외에 鬼面文 또는 饕餮文 같이 鬼目을 좌우에 둘 배치하는 양식이 가장 많고 이 외에 牡丹文 四花文 鬼面文 鳥文 梵字文 등이 있다. 塼에 는 蓮花文 牡丹文이 대부분이다. 이들 紋樣의 표현 수법을 보면 蓮花文은 초기에는 羅代의 형식을 따라 子房周圍에 瓣端이 둥근 複瓣 또는 單瓣 내지는 菊花形의 蓮花가 표현되더니 차츰 子房에 蓮子가 없어지면서 半球形으로 도드라지고 蓮花의 瓣端이 뾰죽해 26) 朝鮮古蹟圖譜 6, 朝鮮總督府刊 p. 695 (2815圖) 참조

416 2. 美 術 진다. 암막새에서도 線으로 표현되는 唐草文 대신 면으로 표현되 는 牡丹文으로 대치되나 麗代 막새기와의 가장 특색 있는 紋樣은 鬼目文과 梵字文이다. 鬼目文은 아마도 羅代의 鬼面瓦나 中國 古 銅器의 饕餮文에서 착상하여 辟邪의 뜻으로 사용한 듯하며 梵字文 은 이 시대에 비로소 나타나 朝鮮時代까지 유행을 보았다. 끝으로 瓦當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靑磁瓦이다. 靑磁瓦 는 1966년 全南 唐津郡 大口面 沙堂里 窯址에서 상당 수가 발견 되어 주목을 끌었는데27) 그 중 많은 암막새 수막새가 섞여 있었 고 數點의 完品도 있었다. 암기와와 숫기와는 제작에 앞서 설계가 완성되었던 듯 裏面에 끼워질 위치를 각각 표시한 것이 있었고, 靑磁器의 胎土를 사용하여 高火度에 구워낸 것이어서 다른 靑磁 器와 다를 바 없으며 지붕을 덮기에는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다. 막새기와의 紋樣은 수막새는 連珠文 안에 牡丹文을, 암막새에는 唐草文을 각각 陽刻하여 麗代의 특색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毅宗 이 지은 養怡亭을 靑磁로 덮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이것이 그 기와인지도 알 수 없다.28) 秦弘燮 27) 1966年 康津에서 靑磁瓦가 發見될 때 까지는 開域 滿月臺에서 發見되었다는 암막새 破片 二片이 있었을 뿐이다. 28) 高麗史 卷 18 世家 卷 18 毅宗 11年 夏 4月 條에 毁民家五十餘區 作太平亭命太子書額 旁植名花異果 奇麗玲玩之物布列左右 亭南鏧池 其北構養怡亭 蓋以靑瓷 라 있다

417 Ⅳ. 藝 術 3. 音 (1) 前 樂 期 高麗의 音樂 歷史는 다음 같은 사실에 基하여 前期(太祖에서 毅宗 까지)와 後期(明宗에서 恭讓王까지)로 구분될 수 있다. ① 高麗를 창건한 太祖는 新羅의 故風을 답습하였는데, 그 중의 八關會는 天 靈과 五嶽名山大川龍神에게 福을 비는 新羅의 仙風이었다.1) 매년 11월에 毬庭에 輪燈을 놓고, 네 모퉁이에 香燈을 벌여놓고 50여 尺의 높은 綵棚 둘을 만들어놓고, 앞에서 百戯歌舞를 보여 주었는 데2)그 중 四仙, 즉 花郞 4 인이 霓衣를 입고 춤추는 四仙樂部가 新羅의 故事이었다.3) 그러나 毅宗 22년에 이르러서는 그 新羅의 遺風이 점점 衰殘하여 四仙部를 담당할 仙家 또는 國仙이 良家 의 子弟로 대체되어 세속화되었다.4) ② 新羅의 鄕歌형식, 특히 아으 라는 嗟辭가 붙은 嗟辭詞腦가 光宗때 (10세기 중엽) 均如大 師에 의하여 11 首가 지어졌고, 그 후 毅宗 때 겨우 鄭叙의 鄭瓜亭 에서 보일 뿐, 新羅의 故風 花郞과 함께 新羅의 嗟辭詞腦도 毅宗 ③ 睿宗作 伐谷鳥(버곡댱이 또는 뻐꾹새) 가 金富軾이 지은 聞敎坊妓 唱布穀歌 의 布穀歌 와 동일한 것 이라면, 그 唱布穀歌의 詩의 佳人猶唱舊歌詞 라는 말 같이, 仁 때 쇠퇴하였다고 하겠다. 5) 宗 때 벌써 구시대의 것으로 간주되어, 明宗 이후와 시대의 차이 를 보여준다. ④ 한편 宣和奉使 高麗圖經의 樂律條에 의하면, 笙 高麗史 卷 2 太祖 26年 4月 同上 卷 69 禮志 仲冬八關會儀條 李仁老 破閑集 卷下 高麗史 卷 18 毅宗 22年 3月 5) 大東詩選 卷 1 1) 2) 3) 4)

418 3. 音 樂 箜篌 등 외래 악기가 鄕樂에 사용되었고, 또 한편 高麗史 樂志 鄕樂 條에는 그것들이 빠진 사실은 睿宗과 그 이후의 鄕樂이 다르다는 것 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高麗의 音樂史를 毅宗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하고, 먼저 그 전기의 音樂을 俗樂 唐樂 雅樂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俗 樂 臺). 百濟樂(禪雲山無等山方等山井邑智異山), 高句麗樂(來 遠城延陽溟州)과 高麗樂으로 長湍伐谷鳥寒松亭鄭瓜亭 등 前期의 俗樂으로는 新羅樂(東京 木州 余那山 長漢城 利見 을 들 수 있다.6) 이 俗樂들은 高麗朝까지에도 樂譜로 기록되었다.7) 하지만 樂譜를 남기지 않고, 가사도 보여주지 않는다. 方等山은 비 록 朝鮮朝의 中宗 때까지도 연주되었지만, 그 樂譜를 상실하였다. 井邑은 그 내용에 있어서 다소 다를지 모르지만, 大樂後譜 卷 7에 그 樂譜를 남겼고, 그 가사도 樂學軌範 卷 5에 전해져 있다. 鄭瓜亭은 毅宗 때 東萊로 流配된 鄭叙(號는 瓜亭)에 의하여 지 어진 曲인데, 그런 명칭의 곡은 금일 남아있지 않고, 李齊賢에 의 하여 漢詩로 번역된 그 가사가 樂學軌範의 眞勺의 가사와 그 전반 에 있어서 비슷한 까닭으로, 眞勺과 동일시된다. 眞勺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前腔 내님을 그리 와 우니다 니 中腔 山졉동새 난이슷 요이 다 後腔 아니 시며거츠 르신 아으 附葉 殘月曉星이 아 시리다.(大餘音) 6) 高麗史 樂志 俗樂條 7) 高趣史 卷 71 樂志 三國俗樂條 同 卷 108 列傳 蔡洪哲條

419 Ⅳ. 藝 術 大葉 넉시 라도니믄 녀져라 아으. 二附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大餘音) 二葉 過도허물도 千萬업소 이다. (餘音) 三葉 힛마리신 뎌 四葉 웃분뎌 아으 附葉 니미나 니 시니잇가. 아소 님하도람 五葉 드르샤 괴오쇼셔. (大餘音) 上記 眞勺 11行의 歌詞 중 첫 4행이 저 李齊賢의 鄭瓜亭의 漢譯 詩에 해당한다. 그 이하 즉 大葉 이하 7行의 歌詞는 후기의 음악에 葉 에 해당한다. 그 葉이란 예를 들면, 翰林別曲의 위 試場景긔 엇더 니잇고 의 後續句 琴學士의 이하다. 葉 자주 보이는 은 本曲 뒤에 추가된 부분으로, 일종 확대형식이라 하겠다. 따라서 樂學軌範의 眞勺의 前腔 中腔 後腔 附葉까지가 李齊賢의 鄭瓜 亭의 漢譯詩에 해당하고, 그것이 鄭瓜亭의 전모라고 하겠다. 이 4句의 鄭瓜亭은 (그 제 3句 끝에 아으 란 嗟辭가 딸린 다), 저 均 如大師의 嗟辭詞腦格의 普賢歌가 10句로 되었고, 그 제 8句 끝에 嗟辭가 달린 것에 비하면, 大略 1句 대 2句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序頭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高麗前期의 鄭瓜亭은嗟 辭詞腦 계통에 속한다고 하겠다. 참고로 嗟辭 아으 에 붙여진 음악을 살펴보겠다. 眞勺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었다. 下 二 아 下 二 宮 下 一 宮 下 二 下 下 三 三 으 (眞勺에서) 上 宮 宮下 下 一 一 二 下 下 四 五 下 五 宮

420 3. 音 또 時用鄕樂譜의 横殺門에서는 樂 아으 가 다음 같이 음악에 붙여졌 다. 下 二 宮 下 二 下 三 下 三 下 下 下 下 三 四 二 三 下 四 아 下 三 下 二 下 五 으 (横殺門에서) 이 두 예로부터 아으 라는 嗟辭, 또는 病吟 2자에 붙여진 音樂은 길게 16井間譜 2行에 걸쳐 대략 下二에서 5度 아래로 차 차 내려와서, 길게 한숨쉬는 효과를 준 듯하다. 이에 비하여 別曲 등에 나오는 위 에 붙여진 음악은 짧고 (三 井間) 높아서 (宮) 쾌활한 효과를 준다. 下 一 上 宮 一 良 鏡 下 一 下 二 詩 賦 下 一 宮 위 (翰林別曲에서) 下 一 上 宮 一 마 르 上 一 宮下 宮 一 宮 는 上 上 宮 二 一 위 (西京別曲에서) 이같이 아으 와 위 에 붙여진 음악은 각각 高麗 전기와 후기의 俗樂의 특징의 一端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2) 唐 樂 高麗 이후의 唐樂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唐의 음악이 아니고, 宋 의 음악이며, 唐樂 또는 左方樂이란 말은 鄕樂 또는 右方樂의 對 稱으로 사용되었다. 宋樂은 文宗 때 많이 高麗에 들어 왔다. 文宗

421 Ⅳ. 藝 術 때 宋人으로 官에 起用된 鼎肅遷과 葉盛이 音律에 밝았고,8) 초청 을 받고 온 宋의 樂人이 宋樂을 가르쳤고,9) 睿宗 5년에는 女樂 2 인이 宋의 明州에서 귀국하였다.10) 文宗 27년(1073)에 女弟子 眞卿 등 13인이 傳授받은 踏涉行이란 歌舞가 그 해 燃燈會에 상연되었고, 동년의 八關會에서는 敎坊女弟 子 楚英 등 13인에 의한 抛毬樂과 10인에 의한 九張機가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文宗 31 년 燃燈會에서는 敎坊女弟子 楚英 등 55인에 의하여 君王萬歲 또는 天下太平이라는 4자를 형성하는 王母隊 歌舞 가 연주되었다.11) 상기 네 가지 춤에서 抛毬樂만이 高麗史 樂志에 그 춤의 절차에 관하여 기술되었고, 금일까지 전해 내려온다. 이 밖에 蓮花臺, 일명 拓枝舞가 벌써 睿宗 때 있었고,12) 獻仙桃 가 벌써 毅宗때 宴享에서 연주되었고,13) 수입 연대 미상의 壽延 長 五羊仙 등이 高麗史 樂志와 朝鮮朝 成宗때의 樂學軌範에 상 세히 기술되었다. 曲破라는 춤은 느린 㰜遍(序) 中庸템포의 入破 虛催(破) 빠 른 催袞 催拍 中袞 歇拍 煞袞(急)으로 구성된 것인데,14) 그 런 惜奴嬌가 朝鮮朝 世宗 7년에 다시 부활 시도되었고,15) 그보다 소규모의 曲破인 萬年歡과 기타 中腔(太平年) 踏歌(金殿樂)의 춤이 高麗史 樂志에 보인다. 이 여러가지 宋의 隊舞에 쓰인 여러 曲 중에서 겨우 步虛子 1 曲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文宗 30년 당시 唱詞 8) 高題史 卷 8 文宗 15年 6月丁巳 9) 宣和奉使 高麗圖經 卷 40 樂律條 10) 高麗史 卷 13 睿宗 5年 6月辛未 高麗史 卷 71 樂志 用俗樂節度條 宣和奉使 高麗圖經 卷 40 樂律條 高麗史 卷 18 毅宗 21年 4月戊寅 樂學軌範 卷 4 曲破修 15) 世宗资錄 卷 29 世宗 7年 9月 癸丑 11) 12) 13) 14)

422 3. 音 樂 를 包含한 唐舞는 方響 琵琶 笙 唐笛 中笒 篳篥 杖鼓 拍 으로 연주되었다.16) 高麗史 樂志에 실린 宋詞 43首에서 惜奴嬌 萬年歡 太平年 金殿樂(이상 4曲은 呈才舞에 사용된 것) 네 가지를 제외한 39首 는 慢과 令 두 가지로 구분된다. 慢은 대개 前段과 後段을 합해서 59자 이상이고, 1구가 16자 이내로 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 憶吹簫慢 (95字) 血洒霜羅, 淚薄艶錦, 伊方敎我成行 (14字) 漸望斷斜橋, 瞙柳曲水歸 (10字) 雲月暗, 風高露冷, 獨自纔抵孤城 (13字) 江南遠, 今夜就中, 愁損行人 (11字) 愁人, 舊香遺粉空淡淡, 餘暖隱隱殘痕 (15字) 到這裏思量, 是我応聯無情 (11字) 水更無情, 侶我催畫航一日三程 (13字) 休煩惱, 相見定約新春 (9字) 水龍吟慢 (101字) 玉皇金闕長春, 民仰高天欣載 (12字) 年年一度定佳期, 風情多感慨 (12字) 綺羅競交會, 爭折花枝兩相對 (12字) 舞袖翩翩歌聲妙, 掩粉面斜窺翠黛 (14字) 錦額門開彩架毬, 兒裳先秀神仙隊 (14字) 融香拂席霓裳動, 鏗鏘環珮 (11字) 寶座巍巍五雲密, 歡呼爭拜退 (12字) 管統衆作欲歸去, 願吾皇萬年恩愛 (14字) 16) 高麗史 卷 80 食貨志 3 大樂管絃房條

423 Ⅳ. 藝 術 慢의 詞는 憶吹箫같이 1句가 15, 14, 13, 11, 9字 이같이 불규 칙하지만, 그에 붙인 音樂은 1句가 규칙적으로 16 拍으로 된 것으 로 안다. 이와 반대로 令은 慢보다 짧아서 前段과 後段을 합해서 58字 이내이고, 대개 1句가 7字 이내로 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 慢의 曲은 현재 전해져 있지 않다. 洛陽春 (50字) 紗窓未曉 (拍) 蕙 爐 (拍) 錦帷羅幕 (拍) 昨夜裏 (拍) 繡簾閑倚 歛 眉 把花拭淚 問來處 吹輕絮 山無緖 向歸鴻 逢郞不 黃鶯語 (拍) 燒殘炷 (拍) 度春寒 (拍) 三更雨 (拍) (7字) (5字) (7字) (6字) (7字) (5字) (7字) (6字) 令의 詞에서는 불규칙적인 길이를 가진 歌詞가 규칙적으로 8拍 에 붙여진다. 더 자세히 말하면 1句 8拍이 4拍과 4拍으로 2분 되 고 그 제 4拍과 제 8拍은 규칙적으로 拍을 맞는다.17) 高麗史 樂志에 나오는 詞는, 洛陽春이 歐陽修( )作 이고 夏雲峰외 7曲이 柳永(11세기)의 작인 것으로 보아,18) 11세 기 내지 12세기에 高麗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睿宗 9년(1114)에 南宋의 徽宗이 新樂을 安稷崇便에 高麗로 보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170點의 樂器 및 曲譜 10册과 指 17) 李惠求 韓國音樂序說中 洛陽春改 18) 車柱環譯 高麗史樂志

424 3. 音 樂 訣圖 10册이다.19) 鐵方響5, 石方響5, 琵琶4, 五絃2, 雙絃4, 箏4, 箜篌4, 觱 篥20, 笛20, 箎20, 簫10, 匏笙10, 壎40, 大鼓1, 杖鼓20, 拍板2. 이 新樂이란 宋의 徽宗 崇寧 4년(1105)에 魏漢津이 徽宗의 中 指 三節을 1寸으로 삼고(以身爲度), 그 寸數로 律管의 길이를 정 하고 그 律管으로 調律된 樂器들이다. 새로 조율된 宋의 方響 笙 簫 등이 高麗에서 사용되었을 때, 재래의 音高가 큰 변화를 보았을 것이다. 어떻든 高麗의 前期에 들어온 宋樂은 唐의 音樂을 일소하고, 후 세의 소위 左方樂(소위 唐樂)을 專有하였다. 3) 雅 樂 成宗 2년(983)에 처음으로 籍田의 禮가 시작되었고, 동년에 圜 丘親祀가 있었고, 동 10년에 社稷壇이, 동 11년에 太廟가 각각 新 築되었으나,20) 音樂 사용 여부는 미상이다. 그러나 肅宗 3년 (1100) 10월 大廟祫享後 廟庭樂部工人이 下賜를 받았다는 것으 로 보아,21) 大廟祫享에 樂이 있었고, 그것도 登歌가 없는 廟庭樂 뿐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雅樂이었는지는 미상이다. 그러 나 睿宗 9년에 大廟親祫에 雅樂器가 아닌 宋의 新樂을 겸용하였 다는 사실22)은 大廟樂이 雅樂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래서 高麗朝에서 雅樂은 睿宗 11년(1116) 宋의 徽宗이 보낸 19) 高麗史 卷 70 樂志 宋新賜樂器 20) 高麗史 卷 3 成宗 2年 1月 乙亥 成宗 11年 12月 21) 高麗史 卷 11 肅宗 3年 10月甲申 22) 高麗史 卷 13 睿宗 9年 10月丁卯

425 Ⅳ. 藝 術 大晟樂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徵宗이 보낸 大晟樂23) 은 다음 같다. 登歌樂器 編鍾正聲 1(16顆), 中聲 1(12顆), 編磬正中聲 각 1, 一絃琴. 三絃琴 五絃琴 七絃琴 九絃琴 각 2, 瑟 2, 箎正中聲 각 2, 篴正中聲 각 2, 簫正中聲 각 2, 巢笙正中聲 각 2, 和笙正中聲 각 2, 壎正中聲 각 2, 搏拊 2, 柷 1, 敔 1. 軒架樂器 編鍾 9架(每架 正聲 16顆, 中聲 12顆). 編磬 (正中聲) 9架, 一絃琴 5, 三絃琴 五絃琴 각 13, 七絃琴 九絃琴 각 16, 瑟 42. 箎(中正聲 각 24), 篴中正聲 각 24, 簫中正聲 각 22. 巢 笙中正聲 각 21, 竽笙中正聲 각 15, 壎中正聲 각 14, 晋皷 1, 立鼓 2 (立鼓 鼙鼓 應鼓 포함) 柷 1, 敔 1. 絃琴 七絃琴 九絃琴 瑟 箎 篴 簫 巢笙 和笙 竽笙 壎博拊晋鼓立鼓(鼙鼓應鼓포함)柷敔 20種이고, 數量 이 大晟雅樂은 樂器別로 보면 編鍾 編磬 一絃琴 三絃琴 五 으로 보면 登歌樂器 48點, 軒架樂器 374點 합계 422點이고, 각각 280개의 編鍾 編磬의 중량만도 대단하다. 이런 대규모의 樂器의 受容은 前無後無한 일이다. 이 大晟樂은 비록 特鍾 特磬 管 籥 節鼓를 결하였으나, 8 音을 구비했고, 또 登歌 軒架의 형식을 갖춘 雅樂이다. 그 軒架의 樂懸을 圖示하면 다음 같다. 編 磬 編 鍾 編 磬 編 鍾 編 磬 23) 高麗史 卷 70 樂志 登歌樂器 軒架樂器條 編 鍾

426 3. 音 編鍾 編磬 敔 柷 歌 歌 歌 歌 歌 歌 歌 歌 歌 歌 歌 歌 瑟 瑟瑟 瑟 瑟 瑟 瑟 瑟 瑟 瑟 瑟 瑟瑟瑟 一 絃 琴 一 絃 琴 一 絃 琴 三 絃 琴 三 絃 琴 三 絃 琴 五 絃 琴 五 絃 琴 五 五 五 五 五 五 絃 絃 絃 絃 絃 絃 琴 琴 琴 琴 琴 琴 七 七 七 七 七 七 七 絃 絃 絃 絃 絃 絃 絃 琴 琴 琴 琴 琴 琴 琴 七 七 七 七 七 七 七 絃 絃 絃 絃 絃 絃 絃 琴 琴 琴 琴 琴 琴 琴 九 九 九 九 九 九 九 絃 絃 絃 絃 絃 絃 絃 琴 琴 琴 琴 琴 琴 琴 九 九 九 九 九 九 九 絃 絃 絃 絃 絃 絃 絃 琴 琴 琴 琴 琴 琴 琴 巢 巢 巢 巢 巢 巢 巢 笙 笙 笙 笙 笙 笙 笙 巢 巢 巢 巢 巢 巢 巢 笙 笙 笙 笙 笙 笙 笙 簫 簫簫 簫 簫 簫 簫 簫 簫 簫 簫 簫 簫 簫 竽 竽 竽 笙 笙 笙 竽 竽 竽 竽 竽 竽 笙 笙 笙 笙 笙 笙 三 絃 琴 編鍾 編磬 編鍾 編磬 一 絃 琴 三 絃 琴 五 五 五 絃 絃 絃 琴 琴 琴 一 絃 琴 三 絃 琴 五 絃 琴 竽 笙 竽 笙 竽 笙 一 絃 琴 三 絃 琴 三 絃 琴 三 絃 琴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塤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笛 編鍾 三 絃 琴 箎 箎 箎 箎 箎 箎 箎 箎 立 鼓 編磬 一 絃 琴 箎 箎 箎 箎 箎 箎 箎 箎 立 鼓 樂 編磬 編鍾 編磬 編鍾

427 Ⅳ. 藝 術 睿宗 11년 10월에 新製한 太廟의 九室樂章 중 太祖 第 1室의 그것은 다음 같다.24) 正聲 太定之曲 受天露符 寵綏多方 德合三無 功超百王 燕及後昆 承玆積累 於萬斯年 恪修祀事 中聲 應天開基 鴻國克昌 聖德神功 巍巍堂堂 積厚流光 子孫千億 廟兒蒸甞 永永無極 이 大晟樂과 후세의 雅樂을 비교하면, 樂章이 4字 1句 8句로 된 점에서는 양자가 같으나, 正聲과 中聲의 구별이 있는 점에서는 다르다. 睿宗 11년 10월 太廟에 大晟樂이 奏樂되었다. 太廟親享의 登歌 軒架樂은 다음 같은 순서로 연주되었다.25) 王 詣 升 還 門 位 階 次 軒 架 正安之曲 (無射宮) 迎 神 軒 架 興安之曲 黃鍾宮 三成 大呂 太簇 應鍾 各二成 祼 鬯 登 歌 順安之曲 夾鍾宮 進 酌 俎 獻 (軒架) (軒架) (親享) (登歌) (攝事) 豊安之曲 諸室之曲 (無射宮) (無射宮) (文德之舞) 諸室之曲 (夾鍾宮) (文德之舞) (登歌) 禧安之曲 (無射宮) 飮 入 盥洗 降 大 福 24) 高麗史 卷 70 樂志 太廟樂章條 25) 高麗史 卷 70 樂志 登歌軒架樂迭奏節度條 文德之舞 卷 60 禮志 太廟條

428 3. 音 文 舞 退 武 舞 進 (軒架) 崇安之曲 亜 終 獻 徹 籩 豆 送 神 (軒架) (登歌) (軒架) 武安之曲 恭安之曲 永安之曲 無射宮 夾鍾宮 黃鍾宮 樂 (武功之舞) 이 太廟 圜丘 두 祭享만이 왕의 親祀이고, 社稷 文廟는 왕의 入門 詣盥洗位 升降壇 還大次를 결하여 왕의 親祀가 아니고 有司攝事儀이며, 그 代行祭는 迎神에 四宮 대신 一宮만 쓰고, 徹 籩豆의 樂을 결하였다. 仁宗 12년에 籍田(또는 先農)에 처음으로 大晟樂을 썼는데, 그 樂은 迎神에 四宮 대신 一宮만 썼을 뿐만 아니라 登歌와 軒架에서 陰呂인 南呂宮 一調만 쓰고 姑洗宮을 쓰지 않아, 太廟 圜丘의 雅 樂에 비하여 미비하다. 毅宗 때에 佾舞가 36인에서 48인으로 증가되어 八佾舞의 형식 을 취하였다.26) 이렇게 雅樂은 대체로 睿宗때 宋에서 들어온 이 래 점점 옛모습을 잃어 갔다. 그러나 후세의 雅樂의 演奏 전통을 남겨 주었다. 4) 軒架 獨奏 拜表箋册王后册王太子王太子加元服元正冬至節 日受賀宴群臣儀鳳門宣赦에서 王의 升降座와 衆官拜에 軒架樂 迎詔 이 獨奏되었다.27) 예를들면 仁宗 6년 迎詔拜表日에 예에 의하여 음악이 연주되었다. 이렇게 왕의 출입과 衆官拜禮에 쓰이는 軒架 가 太廟에 쓸 것 외에 따로 여분의 編鍾 編磬이 없었던 점과, 또 26) 高麗史 卷 70 樂志 親詞登歌軒架條 李惠求 韓國音樂序說中 高麗大晟樂의 變遷 27) 高麗史 卷 70 樂志 軒架獨奏節度條

429 Ⅳ. 藝 術 高麗末에도 朝賀에 唐樂이 쓰인 예에 비추어, 雅樂일 수는 없고, 高麗初에 唐의 夾正樂의 音을 모방하여 지어진 皇風樂이 국왕의 大朝會와 行幸에 반드시 연주되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朝鮮朝 世 宗 때 與民樂이 만들어졌다는 설에 의하면,28) 그 軒架樂은 與民 樂 같은 鼓吹樂이라고 하겠다. 5) 伎樂 雜戱 毅宗 때 詳定된 法駕衛杖에 敎坊樂官 100인, 安國伎와 雜伎가 각 40인, 高昌伎 16인, 天竺伎 18인, 宴樂伎 40인이 隨行하였는 데,29) 이 伎樂 雜伎는 왕이 郊廟에 親祀하고 還宮할 때 路上에 서 상연되었다. 또 한편 高麗圖經 卷 40에 나오는 京市司 300여 인이 音樂과 관계를 갖고 있다. 大樂司二百六十人 王所常用 次管紋坊一百七十人 次京市司三 百餘人 亦有柘枝抛毬之藝 其百戯數百人 聞皆敏捷 特甚 大品놀음에 해당)에 거주하는 安國高昌天竺의 상인들이 추던 이 둘을 종합하면 安國伎 高昌伎 天竺伎는 京市(八坊厢 또는 自國의 伎樂, 예를 들면 柘枝舞 또는 蓮花臺舞이고, 雜伎는 민첩 한 소아들이 보여주는 百戯 또는 曲藝이고, 敎坊樂官은 女妓가 歌 謠를 獻呈하고 춤추는 敎坊樂이고, 왕의 還宮 때 노상에서 연출하 는 그런 伎樂은 樂學軌範 卷 5 敎坊歌謠에서 볼 수 있다. 끝으로 毅宗 때 平章事 崔允儀에 의하여 撰述된 古今詳定禮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禮儀詳定所가 睿宗 8년(1113)에 처음으 로 설치되었으나 그 서적이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고, 毅宗때의 古今詳定禮 50卷이 처음으로 祖宗憲章을 裒集하고 唐制를 雜採하 28) 里湖僿說 卷 4 29) 高麗史 卷 71 輿服志 儀衛 法駕衛仗條

430 3. 音 樂 여 왕의 冕服輿輅에서 부터 儀衛鹵簿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 하여 후세의 儀禮의 표준으로 되었다. 詳定古今禮는 高宗 21년 (1234)에 활자로 인쇄되어, 江華 피난 중 그 섬에 宮闕과 百司를 營造하고 儀禮를 정할 때 참고되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朝鮮朝 世 宗初30)에도 儀禮詳定에 참고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古今詳定禮가 그 후 災亂으로 禮樂이 폐하여졌을 때 그 再現의 표준이 되었고, 또 한편 새로 宋에서 들어온 詞樂(또는 敎 坊樂)과 雅樂이 후세의 唐樂과 雅樂의 기반을 이루었다. (2) 後 期 毅宗이 鄭仲夫 등에 의하여 시해된 이후로 內亂外患이 잦아서, 高麗史에 國家多難이란 말이 자주 보이고, 평화시의 儀禮와 그에 따르는 音樂이 중단되었다. 國家多難(武臣의 派爭)으로 인하여 饗 國老(또는 老人賜設儀)가 오래동안 폐지되었다가 熙宗 4년(1208) 에 부활되었다.31) 高宗 19년(1232)에 蒙古軍 침입으로 江華로 移 都 한 후 國家多故하여 乘輿가 불비하여서 왕이 혹은 乘馬하고 혹 은 肩輿를 탔다가 高宗 37년(1250)에 輦을 타서 儀物이 비로소 구비되었고,32) 江華에서 開京으로 還都한, 元宗 11년(1270)에 처 음으로 法駕를 갖추었으나, 그래도 侍從이 매우 적고, 樂官도 미비 하였다.33) 元宗 14년(1273)에는 또 國家가 多故하여(三別抄亂) 燃燈會에서 伎會(樂)가 제외되었다. 忠烈王 즉위년(1274)에 高麗 軍과 元軍이 9백여 척의 배를 타고 日本遠征한지 2년 후인 ) 世宗實錄 卷 15 世宗 4年 1月 甲子 31) 高麗史 卷 21 熙宗 4年 10月乙亥 32) 高麗史 卷 23 高宗 37年 4月乙卯 33) 高麗史 券 26 元宗 11年 9月癸亥

431 Ⅳ. 藝 術 년에 燃燈會 때 왕이 奉恩寺로 갔었을 때 거리에 士女들이 길에 가득찼고, 오늘 다시 昇平舊儀를 보는구나 하고 서로 慶賀하였 다.34) 그러나 忠烈王 6년(1280)에 또 外方多故(日本征討)로 八關 會와 元正冬至의 賀表가 제거되었고, 동 7년(1281)에는 제 2차의 日本出征이 있은 데다가, 동 16년(1290)에는 哈丹賊軍의 침입으 로 왕이 江華로 避兵하고 동 18년에 開京으로 還都하였다 년의 환도로부터 恭愍王 10년(1361) 紅巾賊의 京城침입까지 겨우 兵火가 없어 遊宴이 성하여졌고, 忠烈王 22년(1296) 5월에 香閣 에서 夜宴이 있었을 때, 왕이 壁上의 唐玄宗 夜宴圖를 보고, 좌우 에 말하기를 내가 비록 小國의 왕이지만 遊宴에서는 어찌 唐玄宗 에 못 미칠까보냐하고, 그때부터 밤낮으로 奇巧淫伎치고 없는 것 이 없었다.35) 이런 內患外憂로 인하여 儀禮가 쇠잔하고, 특히 遷都의 경우에 는 樂工이 사방으로 離散하여 그 儀禮에 쓰인 음악, 예를 들면 雅 樂 敎坊樂이 원모습을 잃고, 그 대신에 새로 民間音樂이 성해진 것이 高麗 후기의 특징을 이룬다. 1) 雅 樂 1116년에 高麗에 들어온 大晟樂이 明宗 18년(1188)경에는 벌 써 심히 缺亂하여졌다. 毅宗 때 행하던 것처럼 雅樂을 바로잡자는 太常의 주장도 본래 睿宗 때 宋徽宗이 보낸 大晟樂이 宋太祖가 제 정한 것이 아니고, 또 毅宗 15년에 高麗儒臣이 文舞武舞를 함부로 고쳤다는 구실로 上司의 결재를 못 받았다.36) 樂工들이 雅樂이 처 음 睿宗 때 행하여졌던 것처럼 하자고 願한 것도 소용 없었다. 34) 高麗史 卷 28 忠烈王 2年 2月己酉 35) 高麗史 卷 31 忠烈王 22年 5月庚午 36) 高麗史 卷 70 樂志 軒架樂獨奏節度條

432 3. 音 樂 ① 八音中에서 絲音 (琴瑟)과 土音(塤) 두 가지가 결여 된 것과, ② 祭享의 처음부 이같은 雅樂의 缺亂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터 끝까지 中國 雅樂이 일관하지 않고, 중간의 亞獻과 終獻에 土 風인 鄕樂이 雅樂에 첨가된 점, 그리고 ③ 登歌는 搏拊 같은 소리 가 작은 打樂器를 쓰기 때문에 원래 춤의 반주를 안하는 것이 분 명한데도 불구하고, 軒架의 晋鼓의 지원을 받아 文舞를 반주한다 는 것이다.37) 이 셋 중에 亞終獻의 鄕樂交奏는 朝鮮朝 世宗 초까 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답습되었다. 恭愍王 12년(1363) 福州에서 還都 후 九室神主를 太廟에 還安 하고 還安祭를 지냈을 때, 亂離 끝이라 應鼓를 틀에 매달지 않고 工人이 그것을 쳐들고 쳤고, 亞獻에서 都監官이 登歌者를 억지로 階下로 내려오게 하였어도 그것을 잘못했다고 고쳐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法式이 문란하였다.38) 게다가 紅巾賊亂으로 雅樂器 가 散失하였는데, 恭愍王 19년(1370)에 明太祖가 編鍾 16架(16 틀이 아니고, 16개의 鍾 한틀) 編磬 1 笙 簫 琴 瑟 排簫 각 1, 합계 7개의 雅樂器를 보내왔었다.39) 이 악기들은 宗廟에서 사용되었고, 그 나머지 社稷 耕籍(先農) 文廟 소용의 編鍾 編 磬은 하나도 없었고, 그 후 보급되지 않았다. 明 太祖가 보낸 雅樂器는 宋 徽宗이 보낸 大晟樂에 비하면, 一絃 琴 三絃琴 五絃琴 七絃琴 九絃琴의 다섯 가지 琴이 아니고, 七 絃의 琴 한 가지라는 점과, 正聲과 中聲의 두 가지 악기가 아니고 한 가지 뿐이란 점에서 다르다. 中正聲이 없는 것은 악기에서 뿐만 아니라, 恭愍王 12년에 新撰한 太廟樂章에서도 알 수 있다. 太祖 37) 高麗史 卷 70 樂志 軒架樂獨奏節度條 38) 高麗史 卷 61 禮志 諸陵條 39) 高麗史 卷 70 樂志 軒架樂獨奏節度條

433 Ⅳ. 藝 術 第一室의 樂章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40) 太祖 第一室 於皇太祖 景命是膺 奄有三韓 仁滂政凝 後嗣不類 時艱荐興 居歆引逸 永永其承 이같이 恭愍王朝의 太廟樂章은 8句 뿐이고, 睿宗朝의 그것처럼 正聲 8句와 中聲 8句로 되어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明太祖가 보낸 編磬의 黃鍾의 音高와 宋徽宗이 보낸 編磬의 黃鍾音은 中國 의 慣例에 의하여 달랐을 것이기 때문에, 雅樂器의 調律이 일신되 었을 것이다. 恭愍王 20년(1371)에 太常樂工이 中國에 가서 雅樂을 배웠고, 恭愍王 30년에 新撰한 太廟樂章은, 明의 제도를 따라서인지, 왕의 대신 1章 뿐)奠幣奉俎酌獻(七室之曲)왕의 飮福文舞退 武舞進에도 모두 樂章歌詞가 있고, 오직 亞終獻徹籩豆送神의 入門 詣盥洗位 升降殿 入小次의 樂章도 따로 있고, 迎神(4章 樂章이 없다.41) 恭讓王 원년(1389)에 十學中 樂學이 典儀寺에 설 치되었고,42) 恭讓王 3년(1391)에는 典樂署의 따로 雅樂署가 설 치되어43) 宗廟樂歌가 學習되어 그만큼 雅樂이 중시되었으나, 그 다음 해 高麗朝는 멸망하고 李太朝가 새로 朝鮮을 건국하였다. 2) 唐 樂 高麗史 樂志에 의하면, 方響 洞蕭 笛 (唐笛) 觱篥 琵琶 牙箏 大箏 杖鼓 敎坊鼓 拍이 唐樂을 奏하였다.44) 그런데 睿 宗 9년에 宋의 徽宗이 보내온 新樂(前期 唐樂項 참조)에 箜篌 笙 高麗史 卷 70 樂志 太廟樂章條 車柱環譯 高麗史 樂志 太廟의 樂章條 高麗史 卷 77 百官志 諸司都監各色 十學條 高麗史 卷 77 百官志 典樂署條 44) 高願史 卷 71 樂志 唐樂條 40) 41) 42) 43)

434 3. 音 樂 箏이 포함되었고, 또 高麗圖經에 의하면, 高麗(睿宗)의 소위 唐樂 의 樂器는 모두 中國制이고, 箜篌 笙이 鄕樂까지에도 사용되었는 데, 高麗史 樂志의 唐樂에는 그 箜篌와 笙이 결여되었으니, 그런 唐樂은 睿宗 이후의 것이라고 보겠다. 또 한편 高麗史 樂志 唐樂項 에 보이는 洞簫 牙箏 大箏은 宋徽宗이 보내온 新樂에는 없는 까 닭에 비교적 低音樂器인 이 세 가지는 元나라 때 새로 高麗에 들 어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같이 箜篌와 笙이 빠지고, 그 대신 洞簫 牙箏 大箏이 새로 추가된 것이 후기 唐樂의 특징이라고 하 겠다. 恭愍王 16년 1월에 公主魂殿에서 大享을 設하고, 敎坊이 新撰 樂章을 奏하였는데, 初獻의 曲은 太平年이고, 亞獻의 曲은 水龍吟, 終獻曲은 憶吹簫이었고,45) 그 新撰樂章은 亞獻의 예를 들면 다음 같다.46) 思齊承懿 肅肅其德 駿惠我王 莫匪爾極 永言在天 鳴呼不忘 我將我享 以洽百禮 永觀厥成 이 樂章은 보통 雅樂의 그것같이 8句가 아니고 9句인 점이 특 이하고, 그 原曲 水龍吟의 長短句를 樂章式으로 고친 것이다. 前 期 唐樂項의 水龍吟 歌詞와 비교하기 바란다. 이 같이 樂曲은 詞 의 原音樂이고, 가사는 詞의 樂章化인 것은 唐樂의 변모를 보여 주는 것이고, 朝鮮朝에서도 그런 변화법이 답습되었다. 3) 鄕 樂 高麗 후기에도 方等山 井邑 같은 三國時代의 음악이 전래되었 고, 毅宗 때의 鄭瓜亭이 비록 변형되었다 하더라도 후기에도 불렸 45) 高麗史 卷 71 樂志 用俗楽節度條 46) 車柱環譯 高麗史 樂志 p

435 Ⅳ. 藝 術 기 때문에, 후기의 鄕樂이 전기의 그것과 구분되기 어렵다. 또 高麗 史 樂志 俗樂項에 실려있는 高麗俗樂 29曲 중, 高麗 후기의 俗樂으 로 분명히 판단되는 曲은 불과 長生浦 叢石亭 冬栢木 翰林別 曲 三歲 蛇龍 紫霞洞의 7曲이고, 그 중에서 翰林別曲 이하 3曲 만이 大樂後譜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 밖에 李齊賢이 漢譯한 五冠 山 居士戀 處容 沙里花 長巖 濟危寶 鄭瓜亭 등 7曲은 그 당 시 노래로 불리었다는 것은 알 수 있어도, 그 연대 가사 음악은 알 수 없다. 但 處容 鄭瓜亭은 예외다. 끝으로 風入松과 夜深詞는 그 가사와 樂譜를 時用鄕樂譜에 실렸고, 朝鮮朝 成宗 때에도 실제 불렸기 때문에47) 전기보다 후기의 것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高麗 史 樂志 중에서 가사와 樂譜가 분명한 翰林別曲 雙花店 紫霞 洞 風入松 夜深詞를 후기의 俗樂으로서 살펴 보겠다. 高麗史 樂志에 실려있는 俗樂 이외에 또 통설적으로 高麗歌謠 로 알려져 있고, 大樂後譜에 실린 滿殿春 履霜曲과 時用鄕樂譜에 실려 있는 思母曲 西京別曲 鄭石歌 靑山別曲 비두로기 가시 리를 후기의 鄕樂에 追加해 보겠다. ㄱ. 別 曲 高宗 때 翰林의 諸儒가 지었다는 翰林別曲은 高麗 후기의 대표 적 俗樂의 하나다. 翰林別曲 靑山別曲 西京別曲 등은 각각 8 章 8章 13章으로 되었고, 每章이 反復되는 有節形式(strophic) 으로 되었다. 凡別曲 歌長而於譜彈法 只錄一章者 每章彈法 則例爲還入[註反 復], 如翰林別曲 凡八章 每章還用自 元淳文 止 날조차 몃 彈法 是也. 他倣此. (安瑺 琴合字譜 58장) 부니잇고 따라서 別曲은 各節의 가사를 모두 합하면, 朝鮮朝의 가사라는 47) 成俔 慵齋叢話 卷

436 3. 音 樂 것(예 春眠曲) 만큼이나 길어서, 그런 長歌라는 뜻에서 歌詞 別 曲이란 말이 붙어 다닌다. 西京別曲 첫째로 西京別曲은 끝에 餘音이 달려서 管絃伴奏를 가진 것이 분명하고, 그런 여음이 없는 靑山別曲 翰林別曲과 다 르다. 西京이 아즐가 (拍) (拍) 두어렁셩 두어 렁셩 다링디러리 餘音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위 둘째로 이 管絃伴奏의 別曲은 2拍 1句, 4句 1章으로 되었는데, 제 4句는 歌詞 1拍, 餘音 1拍으로 되었다. 換言하면 歌詞가 7拍이 라는 奇數로 되었다. 그리고 이 4句의 別曲은 音樂面에서는 완전 한 1章을 이루나, 그 歌辭面에서는 音樂 1章에서 완전히 끝나지 못하고 4章에서 意味의 終結을 짓는다. 이런 점과 또 실제 靑山別 曲 翰林別曲과의 비교는 그 세 別曲에서 西京別曲(7拍)이 제일 짧다는 것을 보여준다. 靑山別曲 翰林別曲 같이 靑山別曲은 여음을 갖지 아니하여, 전 문 음악인 보다 文人에 의하여 불려진 것 같다. 管絃伴奏 없이도 부를 수 있다는 점과 그 가사의 내용을 종합 고찰하면 靑山別曲도 翰林別曲 같이 문인에 의하여 불려진 것 같다. 西京別曲이 4句 1章임에 비하여 靑山別曲은 다음 같이 5句 1章 으로 되었다. 靑山의 살어리 라 멀위랑 래랑 먹고 살어리 살어리 라

437 Ⅳ. 藝 術 靑山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 얄라성 얄라 위의 歌詞에서 第 4句의 前半 靑山의 살어리랏다 가 他句의 전반에 비하여 현저히 길어서 주목된다. 이 靑山別曲과 같은 계열 의 敬勤曲은 다음과 같이 그 原曲보다 1句를 더 가졌다. [敬勤曲] 聖繼而 神承이 어시늘 我后 今受之 시니 王業 이 載中興이 샷다. 皇天이 眷大東 샤 (후렴) 享天福 쇼셔 萬有千歲 (世祖實錄 卷 49) 敬勤之曲에 비추어, 靑山別曲의 第 4句도 다음같이 他句의 길 이로 마추어지고, 따라서 그 5句에서 6句로 확대되어야 할 것 같 다. 靑山의 살어리 랏다 (第4句) 얄리 얄리 얄라 (第5句) 얄라성 얄라 (餘音) (第6句) 이같이 靑山別曲의 第4句 전반의 歌詞가 그에 붙여진 音樂에 비하여, 또 他句의 길이에 비하여, 유난히 길어 殊常한 점을 지적 한 이유는 靑山別曲이 原別曲이 아니고 변화형이 아닐까 생각되 기 때문이다. 翰林別曲 靑山別曲 같이 여음을 갖지 않고, 朝鮮朝 成宗 때에 도 藝文館 등 三館의 先任者와 新及弟子들이 손벽을 치며 이 別曲

438 3. 音 樂 을 불렀는데, 소리가 맞지 아니하여 哇沸之聲이었다는 실례를 가 졌다.48) 또 翰林別曲은 文人之口에서 나와 矜豪放蕩하고 君子가 부를 것이 못된다는 그런 견해도 이 別曲이 실제 많이 文人들에 의하여 불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翰林別曲은 4句 1章과 3句 1章 합계 7句 2章으로 되어 西京 別曲은 물론 靑山別曲 보다도 길다. 그런데 이 長歌는 西京別曲 두 어렁셩 과 靑山別曲의 얄리얄리 같은 의미 없는 말의 후렴 대신 景 긔 엇더하니잇고 라는 뜻이 있는 말이 있어 보통 景幾體歌라고 불린다. 앞에서 靑山別曲의 얄리얄리 가 敬 勤之曲에서 萬有千歲 享天福 쇼셔 라는 후렴으로 고쳐졌고, 西京別曲의 두어렁셩 이 靖東方曲에서 東王盛德 이란 후렴 으로 대체된 예에 비추어서, 翰林別曲의 景 긔 엇더하니잇 고 도 靑山別曲의 얄라성 얄라 같은 것에서 변한 것이라고 하 의 겠다. 翰林別曲 下 一 元 宮 宮 淳 文 宮 上 三 老 上 二 四 上 上 上 一 二 一 季 正 宮 下 上 宮 一 一 雙 韻 上 宮 下 宮 一 一 走 筆 公 言 上 上 上 一 二 一 仁 老 上 宮 一 六 上 一 陳翰 48) 成俔 慵齋叢話 卷 上 二 詩 上 (第1句) 一 宮 宮 下 一 下 二 林 宮 (第二句)

439 Ⅳ. 藝 術 宮 上 上 二 一 沖 基 對 宮 策 上 一 光鈞 下 上 宮 一 一 良 鏡 下 一 詩 下 二 賦 下 一 上 上 上 宮 一 二 一 試場 下 一 景 下 宮 二 긔 下 下 一 二 엇 ㅅ 上 上 上 宮 二 一 二 經 義 宮 위 下 三 더 下 四 下 下 三 二 나 下 三 잇 下 下 四 五 고 下 五 宮 上 宮 一 學 上 宮 下 宮 一 一 의 士 宮 上 宮 一 下 一 門 下 二 生 下 二 上 三 上 二 宮 上 宮 一 下 一 문 上 上 宮 上 一 一 二 날 조 下 四 잇 琴 上 二 玉筆 上 二 上 二 옥정 下 下 三 二 (第3句) (第4句) (葉) (第1句) 上 一 宮 下 二 下 一 宮 下 一 차 下 宮 二 몃 下 下 一 二 부 下 三 下 下 四 五 가 (第2句) 의 위 下 三 니 (第3句) 下 五 西京別曲은 4句 1章, 靑山別曲은 5句 1章인데, 翰林別曲은 前 4句 1章, 後 3句 1章으로 되어, 앞의 두 곡에 비하여 後 3句 1章 을 더 가졌다. 그런데 安瑺의 琴合字譜에서는 後 3句가 葉 이 라고 표시되었다. 이 葉이란 添加句라는 뜻으로, 葉은 다음에 언

440 3. 音 급될 것이고, 여기서는 翰林別曲의 後 3句 즉 琴學士 이하의 3 句는 원래의 別曲에 새로 추가된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西京別曲 靑山別曲 翰林別曲의 셋 중에서 樂 위 두어렁 셩 이란 후렴을 가진 西京別曲이 가장 別曲의 원형에 가깝고, 그런 景 긔 엇더하니잇고 로 고치 고 그리고 琴學士 운운의 葉 을 추가한 翰林別曲이 원형에 뜻 없는 말의 후렴을 뜻 있는 위 서 가장 발전된 別曲이라고 하겠다. ㄴ. 滿殿春眞勺思母曲 樂章歌詞中 滿殿春의 歌詞를 大樂後譜의 곡에 붙이면 대개 다 음 같이 된다. ① 어름 우희/댓닙자리 보아 (A) 님과 나와 어러 주글 만뎡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어러 주글 만뎡 情둔 오 범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餘音 ② 耿耿 孤枕上애 어느 미 오리오 西窓을 여러 니 桃花 發 두다 ③ 桃花 시름업서 笑春 風 다 笑春 (B) 風 다/餘音 ④ 넉시라도 님을 (A') 녀닛景 너기 다니 넉시라도 님을 녀닛景 너기 다니 벼기 더시니 뉘러 시니잇가 뉘러

441 Ⅳ. 藝 術 시니잇가 餘音 ⑤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듸두고 소해 자라 온다. ⑥ 소콧얼면 여홀 도 묘 니 여홀 도 됴 니 餘音 ⑦ 南山애 자리 보와 (A") 玉山 을 벼여 누어 錦繍山 니불 안해 麝香각시를 아나 누어 藥든 가 을 맛초 사이다 마초 사이다 餘音 ⑧ 아소님하 遠代平生에 여힐 (C) 모 세 餘音 滿殿春 音樂面에서 8章으로 되었고, 그 123章과 456 章은 上揭 歌詞 중 표로 표시된 부분에서만 다를 뿐, A(1)B (23), A'(4) B'(56) 형식이고, 7章은 A" 이고 8章(아소님하) (B') 는 전에 볼 수 없는 C이다.49) 世宗實錄 卷 146에 鳳凰吟 一 二 三에 계속되어 나오는 滿殿 春은 (附葉의 歌詞만 缺한 점이 다를 뿐) 鳳凰吟과 동일한 歌詞를 가졌고 山河千里國 으로 시작하는데, 鳳凰吟은 前腔附葉中葉附葉小葉 後腔附葉中葉附葉小葉 大葉附葉中葉附葉小葉 49) 張師勛 國樂論攷中 滿殿春形式考 李惠求解題 세종장헌대왕실록 권 22 p

442 3. 音 樂 의 형식으로 된 점에 비추어, 滿殿春도 그와 완전 동일하지는 않 지만(세째번 小葉의 음악이 첫째와 둘째 小葉의 음악과 다르지 만), 그런 葉 의 형식으로 된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 眞 勺 滿殿春 같이 8章으로 되었지만, 다음과 같이 葉의 형식 이 다르다. ① 前腔 내님을 그리 와 우니다 니 中腔 山접동새 난이슷 요이 다. 後腔 아니 시며 거츠 르신 아으 ② 附葉 殘月曉星이 아 시리이다 大 餘音 ③ 大葉 넉시 라도 니믄 녀져라 아으 ④ 二附 벼기더시니 뉘러시잇가 大 餘音 ⑤ 二葉 過도 허물도 千萬업소 이다 餘音 ⑥ 三葉 힛마리신 뎌 ⑦ 四葉 읏분뎌 아으 ⑧ 附葉 니미나 니 시엇가 아소 님하도람 ⑨ 五葉 드르샤 괴오쇼셔 大 餘音 위에서 밑줄 친 부분의 음악은 동일하고 附葉 即 ⑵⑷(8) 章의 음악도 동일 음악의 반복이다. 思母曲 滿殿春이나 眞勺에 비하면 짧다. 그러나 그것은 別曲 형식보다 葉의 형식에 가깝다고 보겠다. ⑴ 宮 上 二 上 二 도 上 一 上 二 호 上 二 上 二 上 三 히 上 二 어 上上 一二 上 一 신

443 Ⅳ. 藝 宮 宮 마 上 一 宮 宮 上上 一二 날 上 上 二 一 티 上 一 들 宮 下 宮 一 도 宮 宮 下 上 宮 一 一 어 下 一 下 下 二 一 섀 下 一 下 二 라 宮 宮 下 三 宮 宮 宮 宮 宮 宮 宮 上上 一二 아 바 上 上 二 一 님 上 一 도 下 二 어 下 一 宮 宮 宮 下 上 宮 一 一 마 下 一 下 宮 二 宮 上 二 위 下 一 덩 宮 下 二 더 下 三 둥 下 下 四 三 셩 下 四 下 五 下 五 上 二 어 上 一 마 宮下 宮 一 님 宮 上 二 티 下 一 괴 宮 下 二 시 下 三 리 下 下 三 四 어 下 四 下 五 라 下 一 上 宮下 一 一 下 二 宮 宮 宮 下 三 宮 宮 宮 ⑵ 術 宮 리 宮 宮 난 어 上 一 신 上宮 一 上宮 一 宮

444 3. 音 ⑶ 宮 下 三 아 下 一 소 下 下 二 一 님 下 一 下 二 하 下 二 上 二 어 上 一 마 宮下 宮 一 님 宮 上 二 티 下 一 괴 宮 下 二 시 下 三 리 下 下 四 三 어 下 四 下 五 라 宮 上 宮下 一 一 下 二 宮 宮 宮 下 三 樂 上宮 一 宮 宮 이 時用鄕樂譜의 思母曲도 西京別曲 기타 같이 第一章의 歌詞 만 보이고 第二章 이하의 歌詞는 생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그러나 그 아소님하 어마님 티 괴시리 업세라 라는 結詞의 句節에 基하여 생략된 歌詞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짧은 思母曲이 音樂面에서 3章(세개의 終止形)으로 되었고, 別曲 같이 그 전체가 반복되지도 않고, 또 그 3章 중 1章이 세번 반복되지도 않기 때문에, 滿殿春이나 眞勺 보다는 소규모이지만, 葉의 형식으로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葉이란 翰林別曲에서 처럼 本曲에 후렴 같이 부가된 것도 있고, 또는 眞勺 같이 前腔 中腔 後腔 다음에 大葉 이하 五葉까지 많은 葉이 후속되기도 하 고, 또는 鳳凰吟 같이 前腔에 中葉 小葉이 부수되기도 하여 葉은 本曲 또는 腔에 추가된 부분이라고 하겠다. ㄷ. 漢文歌詞로 代替된 鄕樂 風入松은 漢文가사를 가져서 얼핏 보기에 中國音樂 같으나, 다 음 같은 이유로 鄕樂임을 알 수 있다

445 Ⅳ. 藝 術 下 二 恩 下 一 深 宮 遐 上 一 邇 下 一 外 下 一 古 下 一 今 下 二 下 三 稀 下 一 國 下 二 下 五 躬 下 四 趨 下 四 歸 下 下 下 三 二 三 依 下 下 四 五 야 下 三 盡 宮 下 三 下 五 이것이 中國音樂 같이 되려면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下 二 恩 下 一 深 宮 上 一 邇 遐 下 一 古 下 一 今 下 二 下 三 稀 下 一 外 下 二 下 五 國 下 四 躬 下 四 盡 下 下 下 三 二 三 歸 下 下 四 五 依 宮 下 一 下 三 下 三 趨 下 五 야 鄕樂이 우리말 대신 漢文歌詞를 갖고, 中餘音 또는 大餘音을 떼 어버리고, 拍을 句의 初頭에서 句의 終尾로 끌어 내려와서 中國音 樂化한다. 이런 예는 大樂後譜의 雙花店과 그것을 漢文歌詞로 고 친 時用鄕樂譜의 雙花曲을 비교하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50) 그 뿐만 아니라, 鄕樂에다 漢文歌詞를 붙인 世宗實錄의 保太平 定大 50) 李惠求 韓國音樂序說 所收 雙花店 참조

446 4. 民 俗 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컨대 高麗後期의 鄕樂은 翰林別曲 같이 민간의 音樂에서 뜻 없는 말의 후렴을 뜻있는 말의 후렴으로 고치고 또 그것을 확대하 여 발전시킨 것, 또 滿殿春 眞勺 같이 복잡한 葉의 형식으로 짓 고 게다가 管絃의 餘音을 넣어 高度로 발전시킨 것, 그리고 風入 松 같이 鄕樂曲에다 漢語의 歌詞를 붙이고, 在來曲에 있던 餘音을 덜어내고, 拍을 勺終에 끌어내려서 中國音樂化한 것을 그 특징으 로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高麗後期의 鄕樂의 이런 변화방법은 朝 鮮 초기에도 답습되었다 李惠求 4. 民 俗 (1) 高麗의 歲時風俗 高麗는 東明神祠와 君檀祠에 官을 보내어 致祭하고1) 八關會 를 통해 高句麗의 국가적 祭禮인 隧神祭를 이어 받음으로써 高句 麗 新羅 등 前代 王朝들의 民間傳承을 계승하고 있었다. 高麗王 朝 世系에 편입된 여러 傳說이 前代의 口述傳承을 原型으로 삼아 이루어져 있는 것도 목격할 수 있다. 역대 왕들의 발언 가운데서도 羅代이래의 遺風이니까 이어감이 좋으리라는 부분을 찾아 볼 수도 있다.2) 이처럼 羅代 이래의 유풍이라 지적된 民間傳承들은 그 근원을 샤마니즘적 원리에 두고 있다. 天神과 山嶽, 海水와 龍神에 대한 1) 高麗史 世家 卷 13 睿宗 4年 4月 2) 高鹿史 世家 卷 18 毅宗 22年 3月

447 Ⅳ. 藝 術 신앙, 巫堂에 의한 神事의 수행 등이 그 一端이다. 世系에 보이는 祖靈 가운데 한 사람은 山神祠에 모셔진 산신으 로 다른 한 사람은 井祠에 모셔진 龍神이다. 高句麗는 초대 東明 王은 물론이고 적어도 瑠璃王에 관한 기록까지만에서도 그 왕권 이 샤마니즘적 神聖原理와 맺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人間 虎景이 山神으로 화하여 기리 입산함으로써 隱身하였다는 모티브는3) 그대로 檀君과 脫解의 前例를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1년에 한번씩 人間地上에 來臨하였다가 다시 입산하 여 버리고 마는 오늘날 서낭굿의 神格에 앞선 전례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곳에 韓國 民間傳承의 전통이 있다고 하겠다. 太祖는 건국을 위한 병화 속에서도 오히려 神事를 일삼았고 역 대 왕들도 高麗 말기에 儒學者들의 排巫強硬論이 대두된 때를 제 외하고는 궁중의 종교적 행사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巫俗에 의하 여 시행하고 있었다. 巫堂을 불러 비를 빌고, 山神들에 전쟁에 이 기기를 祈願하고, 아기를 빌고, 혹은 병이 낳아지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왕조 말기에 儒臣들의 압력으로 巫堂들이 京師에서 쫓겨 나고 巫神祠가 淫祠란 이름으로 폐지되고 하는 중에서도 왕들은 번번히 禁巫정책을 풀어주곤 할 정도였다. 때로는 巫女를 元나라 의 請에 의해 人力輸出을 하는 先例를 남기기도 했다. 민간에서도 衛護 즉 守護神이란 이름으 로 巫敎 的 신을 모신 神祠를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민속의 성 주 나 家神에 해당되는 신이 衛護인 듯하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거의 집집마다라 해도 좋을 만큼 古來 유러시아문화와 유대를 가지면서 길러온 家室崇拜 또는 家 神崇拜 사상의 가장 오래된 원리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3) 虎景還告平那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見日 豫以寡婦 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 與爲夫婦 共埋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虎景俱隱不見 郡人 因封虎景 爲大王 立祠祭之 (高麗史 高麗世系)

448 4. 民 俗 귀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高麗의 민간전승이 샤마니즘적 원리만을 이어받은 것은 아니다. 前代에 이미 성행하였던 佛敎와 仙敎도 흡수되어 巫 佛 仙 三敎의 병행 및 三敎의 일치라는 면모까지 보이기도 했다. 朝鮮王朝 후기에 있었던 儒 佛 仙 三敎의 통합운동의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할 것이다. 정치 문화적인 열세로 해서 받아들여진 외래적인 요소를 자기나름으로 融合統一하려던 의지가 우리 문화전통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듯하다. 다같은 통합운동이라 하지만 高麗朝의 巫 佛 仙 통합은 巫가 전통적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朝鮮王朝 후기의 통합운동 보다 더 그 빛이 돋보인다는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고 하면 지나치 게 國粹的일까. 韓半島 고유의 것으로 보여진 전통 高麗人들이 土俗이라 표현한 에다 외래적인 요소가 더하여지면서 재래와는 다른 차원의 민간 전승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이른바 歲時風俗에서도 엿볼 수 있다. 寒食百中七夕重陽 등이 月令行事로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春 燃燈冬 八關으로 일컬어질 만큼 高麗王朝의 대표적인 祭禮로 간 嘉俳(한가위) 수리 流頭 등의 羅代에 비롯된 세시풍속에 더하여 주된 月令行事는 그 자체가 지닌 샤마니즘적 전통성에다 佛敎的인 색채, 때로는 仙敎的 색채를 더하여 간 것이다. 燃燈(上元燃燈)은 佛事로서는 4월 8일의 觀燈으로 탈바꿈하고, 그 본래적인 모습이었 영등 으로 일컬어져 농촌의 을 샤마니즘적 祭儀形態는 영동 풍요제의로서 그 모습을 후대에 남기게 된 것이다. 이 燃燈의 경우 우리들은 전통과 외래요소가 일단 習合되었다 가 다시 분화되어 간 경로를 보게도 되는 것이다. 융합과 분화, 그 것은 조화와 갈등이라는 현상을 빚으면서 韓國 민간전승을 이어

449 Ⅳ. 藝 術 가는 한 법칙이 된 것이다. 그러나 수리 의 경우는 이름마저 端午로 압도당하고 일방적으로 외래문화에 服屬하고 만듯한 인상 을 주고 있기도 한 것이다. 문화전승의 다양성이라 할 것이다. 민 간전승은 결코 배타적도 아니었고 사대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歲時風俗에서 특기할 것은 설 수리 유두 연등 등 행사에 굳 이 祖靈崇拜가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氏族이 그 氏祖의 神 話를 갖고 있었던 민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조상숭 배의 전승은 이 氏祖 神話에서 비롯하여 그 모습을 儒敎가 사회의 지도적 이념으로 크게 浮刻되어 오르기 전의 우리 사회에로 連綿 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후대에 비록 朱子家禮의 범례가 조상숭배 의 祭禮的 형태를 지배하게는 되나 그것으로 곧 조상숭배가 儒敎 에 시원이 있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高麗社會에는 歲時風俗 이외에 民間 服俗 演劇 그 밖의 생활풍 속에도 외래요소는 스며들고 있었다. 契丹의 歌舞雜戯習俗이 눈에 띄었고 蒙古族의 開剃頭髮이란 머리 모습이 전하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明나라로 하여금 高麗 본래의 습속을 허락하도록 노력 한 왕이 있었고 죽음에 임하여서 외래습속을 따르지 말도록 유언 을 남긴 왕이 있었다. 燃燈의 사례에서 보듯 韓國 민간전승이 전 래되어 가는 특수한 국면을 열어 준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의 갈 등에 苦心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毅宗은 그 즉위 22년 3월에 月令에 의하여 행사하도록 敎旨를 내린 적이 있었다.4) 그때의 敎旨 가운데에는 佛法을 존중하고 羅 代 이래의 仙風을 이어가도록 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高 麗의 국가적 시책 가운데 중요한 몫을 다하던 佛敎와 함께 月令行 事가 다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明宗朝에 李光挺이 燃燈을 2 4) 高鹿史 世家 卷 18 毅宗 22年 3月

450 4. 民 俗 월에 시행하도록 상소를 올렸을 때 왕은 그것을 받아 들여 公私에 명하고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月令行事가 국가적인 관심사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毅宗의 事例가 말하는 바 月令에는 궁중행 사도 포함되어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鄕邑에서의 행사가 배제되었 을 것은 아니다. 燃燈 端午 重陽 守夜 등의 月令行事가 궁중과 鄕邑에서 동시에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高麗朝에서 民間傳承이 基層文化 내지 下層文 化로만 규정되어 이른바 上層文化와 對蹠的인 자리에 국한되어서 만 存立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궁중의 月令行事와 향읍의 그것이 전적으로 같았던 것은 아니다. 가령 燃燈에서 보듯이, 宮中儀禮로서의 燃燈은 上元燃燈 會로 호칭되어 그 세부의 절차가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다. 伎樂이 따르고 百戯가 수반되고 朝臣들의 嘉禮가 치루어졌다. 향읍의 민 간에서 시행된 燃燈이 우선 그 규모 양식에 있어 이를 따를 수 없으리란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궁중의 燃燈과 민간의 燃燈이 전 혀 별개의 것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행 날짜가 같고, 燃燈하는 행 위에 있어 같았고, 燃燈의 의의가 또한 같았던 것이다. 八關會가 高句麗의 隧神祭를 이어받았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 와 이것은 정례적으로 人間世上에 神을 迎奉하는 高句麗의 祭儀 였다. 가을의 神맞이굿이었던 것이다. 이 祭儀의 형태와 의의는 오늘날의 서낭굿을 비롯한 각 農漁村의 共同祭儀에 이어져 있다. 隧神祭는 비단 高句麗 王宮의 것만이 아니고 단위의 대소에 매일 것 없이 공동사회면 어디 없이 행하여졌을 祭儀인 것이다. 高麗王朝는 그 隧神祭의 전통을 잇는 八關會 속에서 隧神祭 자 체의 이같은 의의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 八關會는 원래 왕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행하여진 외에

451 Ⅳ. 藝 術 년에 1회씩 大祭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즉위식과 병행되었던 八關 大祭가 국가적 규모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위식으로 새 로운 왕이 되는 것과 정례적 神맞이굿이 병행된 것이다. 神을 맞듯 왕을 맞이한 것이다. 王權에 神格이 더하여지는 祭儀인 것이다. 이러할 때 八關會는 각 마을의 神맞이굿을 왕궁행사로 행사하 고 있었던 것이 된다. 高麗社會에서 民間傳承이 基層文化로서만 머물러 있지 않았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2) 高麗社會와 神話的 傳承 高麗王朝의 역사는 물론 神話時代를 벗어난 시대의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古朝鮮과 新羅 高句麗 駕洛 등 전대 왕국들이 지녔던 神話의 餘光을 지니고 있었다. 民間傳承이 基層社會의 문 화이기에 王朝와의 절연성이 예상되는 것을 뒤짚고 민간전승은 王朝 내부에까지 깊숙이 스며가서 그 자취를 오늘에까지 보여주 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시대에 살다가 죽어간 것으로 믿어지는 여러 인물들의 얘 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傳說이다. 그러나 그 전설의 역사성에다 神話的 神聖을 부여하였을 때 그 인물들은 신화적 전설 속의 인물로 昇華한다. 역사를 신화화하는 이 노력 속에서 高麗社會는 聖의 원리 그것도 민속적 聖의 원리가 世俗원리보다, 심지어 왕조의 세속 적 권위를 뒷받침한 원리보다 우세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5) 1) 王朝와 神話的 傳說 高麗世系가 인용하고 있는 金寬毅의 編年通錄에 의하면 高麗王 5) 張德順 高麗國祖神話, 韓國說話文學硏究 서울大學校 出版部(1970) pp

452 4. 民 俗 朝는 그 王系를 神聖化하기 위한 傳承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전승은 왕권을 神聖化함으로써 왕권을 절대화하고자 기도한 것이 니 高句麗 新羅 駕洛의 神話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 은 모두 神聖王權을 합리화하는 신화인 것이다. 이 사실은 高麗朝 의 神話的 傳說이 마련될 때 그 전승의 編述 담당자가 上古代 神 話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말해 주게 된다. 전승 의식이 같 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高麗朝傳承이 전대의 전승들에 밀착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兩傳承이 어울려 하나의 전 승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高 麗王朝의 神話的 傳說은 上古代 韓國神話의 전통을 잇고 있다. 編年通錄의 전승은 그 編述意識에 있어서만 전대와 하나로 맺 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 수록되어 있는 몇 개의 단위전승이 三國時代 전승들의 變異라는 점에서도 우리들은 高麗朝傳承이 전 이전승과 하나임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編年通錄은 王建의 조상들 얘기를 기록하면서 聖骨將軍 이하 寶 育 作帝建과 龍建을 거쳐 마침내 王建의 탄생에 이르기까지를 年 代記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口碑傳承들의 모티브 면으로 보아 매 우 복합적인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 血統에 있어서도 결 코 단순하지 않다. 聖骨將軍의 아내가 山神인데 비해 王建의 祖母 인 作帝健의 아내는 海神의 딸인 龍女다. 高麗王朝의 혈통이 山 水 兩神崇仰의 복합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聖骨將軍 즉 虎景은 그 出生緣源이 확실치 않다.6) 그저 막연하게 白頭山에서부터 遊歷 하여 扶蘇山 左谷에 이르러 아내를 얻었다고만 되어 있어, 보기 에 따라서는 白頭山 出身인 것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나 단언할 수는 6) 虎景의 身分과 由來에 關해서는 金寬毅 編年通錄云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高麗史 高麗世系)라고 記錄되어 있을 뿐이다

453 Ⅳ. 藝 術 없다. 다만 그가 결혼한 뒤에 다시 女山神과 맺어져 그 스스로 도 山神大王이 되고 그에게 바쳐진 祠堂까지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檀君이 길이 입산하여 山神이 된 것으로 전하여지는 전승이나 또는 사후에 山神이 된 脫解 傳承 의 자취가 있어서 聖骨將軍에 관한 전설이 이미 古代 神話와 맺어 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女山神과 맺어짐으로써 한 남성이 神格化된 예는 巫俗傳承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巫祖의 한 사람으로 일러지고 있 는 法祐和尙이 같은 과정을 밟아 신격화되고 있다. 그의 아내가 智異山女神이었던 것이다. 여성이 오히려 機先을 잡아 자신을 위 한 適格者를 만나게 되는 모티브에 있어서도 이 두 전승은 공통점 을 지니고 있다. 우리 民間信仰에서 女山神의 존재는 上古代에 비롯된 것이다. 伽倻의 正見母主가 그 가장 오래된 사례가 되겠고7) 鵄述嶺山神도 이 예에 속한다. 전국에 老姑山으로 불리는 산이 많은 것은 우리 민간전승에 존재했던 山姑 즉 산할미 崇仰의 普遍度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각지의 露積峰傳承에 보이는 산할미도 老姑山 의 老姑와 같이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聖骨將軍의 山神化 얘기는 이처럼 다각도로 山岳崇拜 내지 山 神信仰을 에워싼 민간전승의 脈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聖骨將軍은 배우자가 된 女山神과 더불어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舊妻를 잊지 않고 밤이면 꿈처럼 찾 아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生子하였으니 이름을 康忠이라 하였다 고 한다.8) 夢媾傳承이라고 부르기에 족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7) 東國輿地勝覽 卷 30 陜川 正見天王祠在海印寺中 俗傳大伽揶國王后正見 死 爲 山神 8) 虎景不忘舊妻 夜常如夢來合 生子 曰康忠 (高麗史 高麗世系)

454 4. 民 俗 神이 인간 여성과 交媾한다는 모티브는 羅州지방의 神祠와 開 城 德物山의 崔瀅祠 전승 등에 보이고 있다.9) 다시 이 모티브에 관계있는 얘기에는 死者의 靈이 살아 있는 여인과 사귀어 아이를 낳는 다른 내용의 것이 있다. 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鼻荊郞傳承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밤에 異物이 인간모습을 하고 나타나 여성 과 사귀고 그로 해서 아이를 낳게 된다는 얘기는 이른바 異物交媾 의 얘기로서 그 분포가 커서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10) 이처럼 聖骨將軍 얘기는 夢媾傳承으로서도 韓國 민간전승의 맥 속에 있는 것이다. 聖骨將軍의 얘기를 통해 編年通錄의 전승이 山岳崇仰과 맺어져 있는 일방, 이와는 대조적으로 作帝健과 龍女 얘기를 통해서는 海 (江)水崇仰과 맺어져 있다. 전자에 범이 등장하고 있음에 비해 후 자에 龍이 등장하고 있음도 서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할 것 이다. 作帝健이 王者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후에 그 父王을 찾아 떠 난다는 모티브가 이미 高句麗 瑠璃王傳承을 연상시켜 주면서 作 帝健의 전설이 韓國의 口述傳承 속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하 고 있다. 作帝健은 王健의 祖父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의 부왕으 로 알려진 唐 肅宗皇帝를 찾아나선 길에 이른바 探索主旨 民談 의 주인공답게 악마를 퇴치하고 그 공으로 海神의 딸 龍女를 아내 로 얻어 올 수 있었다. 이것은 모험끝에 악마에게 빼앗긴 공주나 귀한 여인을 되찾는 민담의 한 典型이다. 국내의 이 관계 전승으 로서는 地下大賊說話 의 이름으로 알려진 얘기가 있다. 9) 高麗史志 卷 17 禮五 雜祀條 10) 張德順 夜來者傳說, 韓國說話文學硏究 pp

455 Ⅳ. 藝 術 그러나 作帝健의 전설에 가장 가까운 얘기는 三國遺事에 보이 는 居陁知얘기다. 주인공들이 向發하는 목적지가 中國이라는 것, 海中 섬에 歸着하게 되는 동기, 악마를 화살로 퇴치하고 海神을 구원하는 것, 海神의 딸을 아내로 맞는 것 등 얘기의 여러 세부에 있어 作帝健과 居陁知 얘기는 아주 酷似하다. 이 둘은 서로 완전 히 같은 줄거리의 變異를 이루고 있다. 作帝健 얘기는 그 줄거리에 있어서 그 前代의 口述傳承과 밀착 되어 있고, 그와 동시에 韓國 口述傳承의 전통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作帝健의 아내인 龍女의 성격 또한 그렇 다. 龍女는 그의 출신이 물과 맺어져 있다는 점에서 赫居世妃인 閼英이나 朱夢의 母后인 柳花와 동일하다. 더욱 柳花도 龍女가 그 렇듯 水神의 딸이다. 閼英이 탄생의 연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閼英井이라 불려지고 있듯이, 龍女에게도 우물이 있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있었다. 하나가 開城大井이고11) 다른 하나가 廣明寺東 上房北井이다.12) 전자는 龍女가 開城 東北山麓에다 스스로 銀盂 로써 땅을 파 만든 것이고 그곳에서 取水해서 썼다고 전해지고 있 다. 이 開城大井은 高麗王朝가 祭祀를 바치던 聖域이고 후세 民俗 信仰의 대상이 된 곳이다. 이 점에서도 그것은 閼英井을 연상시켜 주기에 족하다. 다른 하나의 우물 곧 廣明寺東上房北井도 역시 龍女가 판 것이 다. 龍女는 이 우물을 통해 평소에도 故鄕인 西海로 출입하다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역시 이 우물을 통해 西海로 되 돌아 간 것이었다. 西海로 되돌아 갈 때 龍女는 黃龍으로 化身하 11) 龍女初來 即往開州東北山麓 以銀盂 掘地 取水用之 今開城大井是也 (高麗史 高麗世系) 12) 龍女嘗於松嶽新第寢室窓外 䥣井 從井中 往還西海龍宮 即廣明寺東上房并也 (高麗史 高麗世系)

456 4. 民 俗 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山岳崇仰과 맺어진 聖骨將軍이 山神祠를 갖고 있듯이 물信仰과 맺어진 龍女는 우물을 그와 인연지어진 聖域으로 가지고 있다. 聖 骨將軍 얘기와 龍女 얘기가 종합적으로 생각될 때, 編年通錄의 전 승이 韓國民間信仰의 兩大脈인 山信仰과 물信仰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高麗王朝가 그 창건기에 있어 그 들의 世系를 神聖化하기 위해 십분 의식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民俗信仰의 전통 위에 서서 王系를 신성화할 때 비로소 민중들에게 신뢰받는 왕권을 확립할 수 있으리란 것을 깨닫고 있 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編年通錄에 비친 高麗王朝 世系와 민간전승의 유대는 이 정도 에 그치지 않는다. 王健의 부친은 龍健이고 그의 어머니는 夢夫人이다. 龍健이 夢 中에 婚約하고 실제로 만난 여성이기 때문에 夢夫人이라 불려진 것이다. 꿈속에 보인 여성을 실제로 찾아 내어 결혼하게 된다는 夢中婚約의 모티브는 이미 三國史記에도 보이고 있다. 이것은 夢 中의 啓示나 兆朕에 나타난 대상을 실제로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마무리지워지는 入社式 과정의 定式을 반영하고 있다. 꿈은 민간전승에서 신비한 계시나 兆朕 노릇을 다 한다. 꿈과 관련된 민간전승을 編年通錄은 하나 더 보여주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즉 寶育과 辰義姉에게서 또 한편의 꿈 얘기가 생겨나 있다. 寶 育은 王健의 高祖요 辰義는 王健의 曾祖母나 혈통상 王健과 한핏 줄의 여인이다. 辰義는 寶育의 친 딸이다. 이 점에 高麗王朝世系 의 특색의 하나가 있다. 寶育이나 辰義의 언니 두 사람은 제각기 산봉우리에 올라서 소

457 Ⅳ. 藝 術 피를 보자 금새 온 天下가 그 소피로 흘러넘치게 된다는 같은 내 용의 꿈을 꾸게 된다. 그런데 이 꿈은 한결같이 결혼의 前兆 또는 生男의 전조로 解夢되었고 그 해몽은 현실화된 것이다. 寶育과 辰義姉가 꾼 꿈은 金庾信의 큰누이의 꿈과 그 내용이 같 고 꿈의 결과가 또한 동일하다. 꿈의 내용 및 꿈에 따르는 결과가 같은 것만이 아니라, 꿈을 꾼 것은 辰義의 언니되, 그 꿈의 결과를 차지한 것은 아우인 辰義다. 辰義가 치마를 물고 언니의 꿈을 산 것이다. 이 모티브에 있어서 도 金庾信의 두 누이의 얘기는 동일하다. 또한 辰義가 언니 대신 貴人男性과 접하게 되는 과정도 金庾信의 두 누이의 얘기와 같다. 이상과 같이 聖骨將軍 얘기를 비롯해서 辰義姉의 꿈 얘기에 이 르기까지 高麗王朝의 世系는 韓國 民間傳承의 系譜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민간전승의 脈으로 곧 왕조의 맥이 이어져 있는 것이 다. 이것은 단지 高麗王宮에 국한될 얘기는 아닐 것이다. 高麗王 朝의 世系면 일단 민간전승이 이어져 가고 있는 사회와는 동떨어 진 上層社會의 것으로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上層社會에 까지 번져 들어갈 만큼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지속성을 지니고 있 었던 것이 高麗王朝 당대의 民間傳承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疫病退治의 巫俗况術이었을 新羅의 處容舞가 왕 궁의 驅儺儀式에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王朝官吏들의 酒宴에 서도 여흥으로 이용되기도 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밖에 民謠 動動 역시 王宮儀禮에서 그 頌禱의 의의를 곁들 여 수용되어 있었다는 사례도 處容舞의 예에 준하여 해석될 수 있 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들은 민간전승이라는 社會基層의 문화 가 底邊에 머물러 있지 않고 上下層을 두루 망라하는 입체적인 포

458 4. 民 俗 괄성을 가진 것이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 점에 朝鮮王朝 社會와는 다른 高麗王朝의 한 성격이 있지 않을까 한다. 朝鮮王祖 의 世系로 간주될 龍飛御天歌와 編年通錄을 비교해 보면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 같다. 龍飛御天歌가 군데군데 神話傳說的 모티브를 보이면서도 낱낱이 中國歷代의 王朝事例들과 비교한 것 을 朝鮮王朝가 지닌 성격의 一端을 드러낸 것이라 볼 때, 高麗王 朝가 지닌 民間傳承性이 그만큼 크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2) 氏族의 神話的 傳說 高麗王朝 자체가 民間傳承을 등에 업고 자신의 王權을 신성화 하기 위한 神話的 傳說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처럼 일부 氏族들도 그 族祖를 들고 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각 氏族이 씨족대로의 신화적 전설을 가지고 있었던 최초의 사 례는 三國遺事에 보이고 있다. 즉 三國遺事 赫居世王條의 기록이 그것이다. 赫居世가 天降하기 이전에 이미 六村의 族長들이 天降하고 있음을 그 기록은 전해 주 고 있다. 그 중에서도 慶州李氏 祖上傳承이 대표적이다. 慶州李氏 처음에 瓢岩峰에 내린 것 이라고 전해진 인물 이다. 이 전승은 赫居世桓雅首露 등의 신화를 극도로 줄였을 의 始祖 謁平은 때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들 신화들에 공통한 원형이라고도 할 만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六村의 族祖 傳承이 赫居世 전승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표현한 三國遺事 의 기록은 아주 필연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建國始祖의 신화들 은 氏族神話들의 變異라는 단정도 족히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정으로 우리들은 후대에 와서 族譜가 대규모로, 또 汎民族的으 로 編述된 韓國 특유의 氏族意識의 원류를 찾을 데가 어딘가를 짐

459 Ⅳ. 藝 術 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新羅의 神話들은 氏祖傳承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인물의 탄생 유래와 함께 그가 어떤 姓氏의 시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赫居世 金閼智 脫解 등 新羅王朝의 이른바 세 王姓의 始祖傳承이 바로 그렇다. 그러면 高麗王朝에 있어서의 氏祖傳承은 어떠한가 그 일례를 河陰奉氏의 始祖傳承에서 보자. 이 시조인 奉祐는 실존인물이 다.13) 그의 탄생 전승에는 ① 벼락과 번개로 이루어진 탄생 前兆 ② 箱子 속에 담겨져서 棄兒상태로 발견되는 것 ③ 老婆에 의해 수용되고 양육되는 것 ④ 朝廷에 奉獻됨으로써 朝廷에 의해 奉氏 姓이 下賜되는 것 등의 모티브가 들어 있다. 奉祐傳承은 이 네 개의 모티브로 그 줄 거리가 엮어져 있다. 이 모티브 가운데 첫째 경우, 赫居世 전승 속에 둘째 것은 脫解 와 金閼智 전승에 그와 동일한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탄생 前 兆를 제외하고는 그 줄거리가 脫解 전승과 酷似하다. 그러면서도 그 탄생前兆에 의해 奉祐도 依然히 하늘이 내린 幼兒라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新羅의 六村氏祖와 마찬가지로 그도 天降한 氏祖 인 것이다. 奉祐 전승은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전설이면서 여전히 신화의 餘脈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高麗王朝 世系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나 奉祐나 모두 신화 시대가 사라지고 난 역사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신화의 여맥을 잇고 있는 인물들이다. 신화 속에 살아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 우리들은 다시 한번 더 高 13) 金烈圭 韓國民俗과 文學硏究 (1971) p

460 4. 民 俗 麗사회 속에 깊고 또 넓게 미쳐 있던 民間傳承의 존재를 보는 것 이다. 민간전승은 영원히 神話를 지니고 이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 이다. (3) 動動과 歲時風俗 高麗는 그 역사적 위치에 있어 그러하듯, 統一新羅 및 三國時代 민속을 이어 받는 한편 밖에서부터 들어온 종교의 영향 아래에서 前代 민속에다 高麗的인 변화를 덧붙이기도 한다. 한국 고유의 민 속이던 燃燈이 3월 8일의 燃燈行事와 겹쳐지면서 그 본래적인 의 의를 상실하고 맡게 된 것이 그 예의 하나다. 民間信仰이 불교에 다 자리를 물려준 보기라 하겠다. 唐을 거쳐 西域 지방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演戯들이 鄕樂으로 표현되는 놀이 속에 융해된 것은 이미 新羅 때의 일이나 高麗에서 雙花店 에 回回하비 가 보 인다. 이 回回를 中國史에서 말썽 많은 Huihui 로 불려진 한 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高麗歌謠 人種이라 생각한다면, 이 인종들은 民謠의 소재가 될 만큼 高麗의 민간 전승에 깊이 스며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물론 回回가 西北 方의 中國內에 살았던 인종인지 아니면 西域의 渡來人인지의 是 非는 가리지 않기로 한다. 中國과 東北아시아 및 內陸 지방 아시아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 고 변모하여 온 우리 민속의 역사성을 高麗의 歲時風俗이나 민속 이 반영해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곳에 한국 민속의 개방성이 있 는 것이다. 민속이라고 흔히 생각하듯이 국수주의적인 것도 아니 고 또 쇄국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高麗의 歲時風俗은 다행히 高麗歌謠 動動 속에 가장 많이

461 Ⅳ. 藝 術 담겨져 있다. 비록 高麗人에 의해 採錄되어서 남겨진 기록은 아니 나 고려인들에 의해 불려진 노래란 점에서 動動은 고려의 세시풍 속을 알아 볼 수 있는 제일차적인 民俗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 動動과 民俗文學 高麗俗謠로 불려지고 있는 動動은 대표적인 高麗朝 民謠다. 이 노래를 민요로 단정짓는 근거는 무엇보다 그 형식에서 찾을 수 있 다. 노래 맨 앞에 붙어 있는 序章의 한聯을 제외하고는 정월에서 12월까지 달별로 聯이 구별지워져 있다. 이른바 月令體 또는 달 거리 體의 작품이다. 이것은 후세의 民謠인 農家月令歌 등이 지 닌 형식의 선례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제를 전개해 나가도 방식이 또한 민요적이다. 예를 보자. ㅅ 나릿 므를 正月 아으 어려 녹져 논 누릿 가온 나곤 몸하 올로 셜셔 아으 動動다리 三月나며 開한 아으 滿春 욋고지여 브롤 즈을 디녀 나샷다 아으 動動다리

462 4. 民 俗 (正月 江물은 아아 얼었다 녹았다 하는데 世上 가운데 태어나신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아으 動動다리) (三月 나면 핀 아아 滿春 철쭉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태어나셨구나 아으 動動다리) 이 보기는 動動의 正月聯과 三月謠이다. 각 聯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두 줄 가운데 두 줄 마지막 한 줄과 같이 3분 할 수 있는 것이다. 첫부분은 그달의 가장 그달 다운 情景을 묘사 하고 있다. 정월과 3월은 그달이 지니는 자연의 순환에 따르는 계 절적인 특성을 묘사하고 있으나, 五月 五日에 아으 수릿날 아 藥은 즈믄 힐 長存 샬 藥이라 받 오이다 아으 動動다리 (五月 五日에 아아 수릿날 아침藥은 千年을 길이 사실 藥이라 해서 바칩니다 아으 動動다리)

463 Ⅳ. 藝 術 의 보기에서처럼 節候祭儀 이른바 歲時風俗으로 그달의 특성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가운데 부분은 이 매월의 계절적인 특성과 관련시켜 노래부르 는 사람의 情調 祈願 生活情景 등이 읊어져 있다. 마지막 부분은 이른바 후렴이다. 흔히 일러지듯이 북소리 둥 둥 의 擬聲的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앞머리의 正月聯에서 굳어진 이 3부 형식이 열 두번 되풀이되 어 動動 이라는 작품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을 圖式化하면 A B C C B¹ A¹ C B2 A2 C B12 A12 와 같아질 것이다. 이 도식은 우리 민요의 전통적 형식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하늘에는 별도 많고 캐지랑 칭칭나네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고 캐지랑 칭칭나네 라는,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민요도 이 형식을 이어받고 있음 을 알 것이다. 新羅 때의 민요에는 이 형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기록을 기준으로 하여 얘기하자면 위에서 도식화해 보인 민요형식 並行法은 高麗代에 와서 확립된 것이 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민요형식이 원칙적으로 超歷史的임을

464 4. 民 俗 고려할 때 이같은 단정을 내림에는 더 많은 고려와 고증이 필요 하다. 하지만 動動과 같은 형식의 노래 즉 靑山別曲 西京別曲 가시 리 등 일련의 민요가 高麗朝의 것으로 採錄되어 있음은 그같은 민 요형식이 비록 高麗朝에 들어서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지를 결 정적으로 단정하는 근거는 못된다 해도, 최소한 그같은 형식의 노 래가 高麗朝에 있어 매우 우세한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論據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詩歌에 관한 한 민요는 高麗朝 문학의 白眉篇이다. 따라서 詩歌文學史에 있어 民俗文學이 지배적인 시대 가 高麗朝이기도 하다. 動動이 고려의 세시풍속을 반영하면서 고려의 사회상을 비쳐주 고 있듯이, 그밖의 고려가요들은 아주 현실감 있게 고려의 역사성 을 비춰 주고 있다. 고려의 일부 민간 산문학 또한 그렇다. 西京別曲 은 賦役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 戀人들의 이별을 노래 부르고 있다. 이것은 高麗史에 실린 衆美亭 役事에 시달 리면서도 서로의 사랑을 굳건히 지켜 가고자 했던 가난한 夫婦의 슬픈 실화를 歌詞化한 듯한 작품이다. 강제 賦役이 庶民父子의 집 단 自殺을 빚어내었다는 참담한 내용의 地名 전설이 있는 것과 아 울러 생각하면 고려가요는 생생한 역사의 증언인 것이다. 역사가 민속을 낳기도 했지만 민속은 민속대로 역사를 증언하며 그것을 감시하고 채찍질해 온 것이다. 2) 歳時 風俗 動動은 민요의 대표적 형식으로서만 高麗의 民間傳承을 代言하 고 있는 것은 아니다. 動動은 曆書에 따라 치루어지는 民俗 즉, 曆書祭儀 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도 高麗의 민간전승

465 Ⅳ. 藝 術 을 代言하고 있는 것이다. 이 曆書祭儀를 종래 韓國 民俗學에서도 세시풍속이라 불렀던 것이다. 曆書祭儀는 曆書를 따라 일정 기간을 두고 주기적으로 반복된 다는 특색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 즉 시간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는 이른바 通過祭儀라는 성격도 갖추고 있다. 새로운 계절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는 한 시점이 풍요와 번영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게도 하는 데에 이 祭儀의 뜻이 있다. 설 추석 단오 수리 묵은 설 등이 이 祭儀의 대표적인 예들 이다. 우선 動動에서 언급되어 있는 曆書祭儀로는 2월 燃燈, 5월 수 릿날, 6월 流頭, 7월 百中(種), 8월 嘉俳, 9월 重陽節 등이 있다. 이 순서를 따라 高麗朝의 曆書祭儀에 언급하고 난 다음, 動動에서 빠져 있는 나머지 祭儀들을 보기로 하겠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燃燈은 정월 望日(15일) 또는 2월 망 일에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崔怡 이후에 4월 8일 의 佛誕日을 기해 시행된 것이다. 高麗에는 燃燈行事가 많았다. 燈을 켜 놓고 구경하는 觀燈은 규 모가 큰 儀禮나 집단적 놀이의 일단으로 行해졌던 것이다. 가령 肅宗 7년 9월에 왕이 神護寺로 나가 大藏會에 참여했을 때, 대궐 에서 절에 이르는 거리 양쪽에 수만의 등을 켠 것이 그 한 보기가 될 것이다. 이해에는 2월에 이미 奉恩寺에서 燃燈이 있었으므로 9 월 燃燈은 이른바 上元(또는 2월 15일)燃燈과는 별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밖에 八關會에도 역시 등을 달았었다. 왕의 行次에 도 거리에 등을 켜고 환영 또는 환송하는 뜻을 표하기도 했다. 말 하자면 儀禮의 한 과정이나 놀이의 한 절차로서 여러 경우에 등을 켠 것이라 보여진다. 그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火山이나 火

466 4. 民 俗 樹 등의 불놀이도 있었는데 이들은 연등행사에 수반되어 있기도 했다. 따라서 動動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燃燈은 2월望日의 燃燈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워낙 上元燃燈임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와 같다. 기록에 따라서는 燈夕이라고도 하고 있다. 燃燈은 高麗史 禮志 嘉禮雜儀條에 王宮의 儀禮로서 기재되어 있다. 그 부분에서 上元燃燈會儀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上元 곧 정월 15일이 정통적인 祭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궁에서 시행된 燃燈은 왕 이하 太子 및 百官諸臣이 참 여한 대규모의 의례이기에 이것으로 곧 民間傳承인 燃燈의 제 모 습으로 삼을 수는 없다. 王宮儀禮로서의 燃燈과 병행하여 國都 鄕邑간에 고루 시행된 燃燈會가 있었다. 그것은 公私에 命하여 燃燈케 했다거나, 高敝地 方에서 燃燈이 목격되었다는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불 행히 이 國都와 鄕邑에서 시행되었던 燃燈은 그 모습이 전하여져 있지 않아서 그 세부는 알 길이 없다. 오직 燃燈이 上元에 시행되 었다는 것과 또 그 의의가 上元節과 같다고 한 일부기록이 그 세 부를 짐작케 하고 작은 열쇠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 행히 오늘날에 전하여지는 영등, 영동 등의 민속이 燃燈의 원형이 며 원형적 의의를 짐작케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現傳의 민속 영동은 靈童으로 記寫되는 수도 있으나 발음에 맞 추어 漢字를 附會한 것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영동은 領南地方 일대에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다. 時日은 대개 2월 초순이다. 따라서 지역적인 曆書祭儀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그 主神은 바람을 몰고 오는 신 또는 비를 내리는 신으로 간주 되어 흔히 영동할미 라고 불려지고 있다. 영동날에는 이 할미

467 Ⅳ. 藝 術 가 비를 더불어 내려 주기를 비는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에 풍년 이 들기를 비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上元의 각종 祭儀행사나 용 왕먹이기 등과 함께 우리 농촌의 대표적인 농사 풍요제의의 하나 를 이루고 있거니와 할미 즉 老姑崇仰사상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영동은 매우 특징적이다. 하늘에서 주기적으로 하강하는 것으로 보아 하늘 할미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가 비를 맡은 딸 과 바람은 맡은 며느리를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늘 할미라 보아 크게 잘못은 없을 듯하다. 하늘의 神에 여성 그것도 老姑가 배정되어 있는 점에 우리 민간신앙의 원시형태가 있다고 하겠다. 현존되어 있는 산할미나 물할미와 더불어 우리 민간신앙이 北方 亞細亞 및 北方 유럽의 민간신앙에 대하여 가질 관련성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요컨대 현재에 전하여지는 영동 은 天神을 숭앙하는 농경 풍요제의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 神性을 나타내는 表象은 대가 지와 바가지다. 대가지는 神이 내리는 곳이고 바가지는 神이 깃드 는 곳이다. 둘을 합하면 神이 지상에 내려서 지상에 깃드는 곳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바가지가 神格의 표상인 것은 赫居世神話의 박과 관련이 있음에 주목할 만하다. 박 속에서 세상으로 나타난 天神의 관념은 영동에서 박 속에 깃드는 天神의 관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박 속에서 세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박 속에 깃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現存 傳承인 영동이 갖는 이같은 성질이 완전무결하게 高麗시 대의 燃燈을 회고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양 자간에 본질적으로 다른 乖離가 있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두 祭儀가 시행되는 날짜가 같고, 제의가 갖고 있는 이름이 같다는 사실이 그 같은 생각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468 4. 民 俗 따라서 燃燈이 天神의 下降을 맞아 그에게 年豊을 비는 풍요 제 의였던 것으로 추정하여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 시행되는 날짜가 上元이라는 것이 이 추정을 가능케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 다. 上元 즉 정월 대보름은 우리 民間傳承에서 전통적으로 농사의 풍요제의가 베풀어지는 때다. 현재에도 거의 전국 농촌에서 벌어 지는 대보름놀이가 그것이다. 달의 명절 이면서 풍요의 명절이다. 이때 서낭굿 堂굿 堂山굿 山神祭 등의 이름으로 마을의 공동 제의가 베풀어지고 수호신이 마을에 모셔진다. 계절적인 신의 再 臨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날에는 유명한 달집의 불 을 비롯 해 쥐불 등 불을 놓고 불싸움을 하기도 한다. 이 불놀이가 바로 대보름놀이의 유다른 특색이다. 이것은 불의 힘에 의한 淨化, 그 리고 그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새로운 풍요의 힘의 확보 등을 목 적 삼고 있다.14) 燃燈의 불도 이 대보름놀이 불의 의의를 갖고 있 지 않았든가 생각하거니와 불놀이가 燈과 관련되어 연등의 이름 으로 불려지게 되었던 것은 불교의 燃燈 영향을 받은 이후가 아닌 가 한다. 穆宗까지만 해도 詳故殿에서 관등을 하고 寺刹에는 가지 않았 던 것 같으나, 靖宗 때는 이미 奉恩寺에 가서 관등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이후 燃燈 때에 왕들이 奉恩寺에 가는 것은 定例로 굳 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奉恩寺行香이라 불려졌다. 그리고 太祖의 眞影에 제사드리고 香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祖上崇拜 는 비단 燃燈 때만이 아니고 端午 正初에나 추석에도 행하여져 후대 民俗의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燃燈 이외에도 動動에는 수리 즉 5월 端午와 流頭 百中(種) 14) 黄浿江 淨火와 再生, 韓國叙事文學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學術叢書 第 1輯) pp

469 Ⅳ. 藝 術 8월 한가위 9월 9일의 重陽節 등이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수리 와 流頭 한가위 重陽 등은 3월 上巳와 함께 俗節로 기록되어 있다. 수리는 三國遺事에 車衣로 표기된 新羅 이래의 歲時風俗이다. 이 수릿날에는 市井에서 군중들이 거리에 모여서 좌우 두 패로 갈 리어 石戰을 벌이기도 했다. 두 패가 서로 돌을 던지고 흑은 짧은 막대기로 치기도 하면서 승부를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便 戰 곧 兩派競逐戯다. 민간전승의 여러 양파경축희 車戰 줄다리 기 등이 그러하듯 일종의 模擬爭闘인 바 祭儀要素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다. 이 模擬爭闘는 그것을 시행하는 집단의 풍요를 증진 시키는 데에 그 기능이 있는 것이다. 朝鮮王朝의 石戰에 관한 기 록에는 그 기능이 명시되어 있다.15) 한편 朝鮮王朝時代에는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있었으나 그것을 高麗朝에 있어서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動動 속에 수릿날 아침藥 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朝鮮王朝에서 이날 益母草를 캐 어 햇볕에 말려서 藥用으로 하였다는 풍속에 유사한 것이 高麗에 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실제로 端午에 쑥잎으로 지붕을 덮는 일과 上巳 곧 3월 3일에 쑥떡을 해먹는 民俗이 高麗 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 짐작은 현실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만일 高麗朝에서도 쑥 또는 익모초 등 약초를 수릿날에 먹 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中國의 端午節의 쑥人形이나 쑥으로 만든 호랑이 또는 遼史에 쑥떡 등과 어떤 연관을 가졌느냐 하는 문제가 과제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端午에 鞦韆 (그네)을 행한 것은 지금과 같다. 또 이날에는 菖蒲술을 빚어 마 시기도 했고 擊毬를 하기도 했었다. 15) 世宗實錄 卷 81 世宗 20年 5月

470 4. 民 俗 流頭는 근세의 유두와 그 뜻이 같았다. 高麗朝 당대에 있어서도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감음으로써 不淨한 것을 물리쳤다고 전하여져 있다. 이 유두는 물에 의한 淨化祭儀다. 基督敎에서 이 르는 바 洗禮와 그 형식이나 의의가 같은 것이다. 駕洛 禊浴행사 를 효시로 하는 물에 의한 淨化祭儀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날에는 그밖에 流頭茶를 마시고 流頭 團子를 해 먹기도 했다. 百中 또는 百種으로 일컬어지는 7월 中元은 佛敎의 영향을 받 은 전형적인 세시풍속의 하나다. 朝鮮王朝에 있어서처럼 五味百菓 를 갖추어 亡魂들을 위해 제사를 베풀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날 에 망혼을 부르는 盂蘭盆會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가위는 新羅朝의 유명한 嘉俳 이래의 대표적 세시풍속이다. 그러나 高麗의 한가위가 新羅의 그것처럼 두 패로 갈린 길쌈짜기 의 便戰을 지니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이상은 動動에 보이는 高麗의 月令民俗들이다. 그러나 月令에 의한 행사를 행하도록 王命으로 내리기까지 한 高麗라 이밖에 정 월의 설날 立春 3월 上巳 寒食 七夕 冬至 歲末守夜 除夕 등의 月令行事가 있었다. 설날에는 祖禰의 廟祭를 드리고 (즉 祭禮를 행하고) 屠蘇酒를 마시고 한 것은 지금과 같다. 安軸의 正月元旦의 詩에 歲歲賣癡癡 不盡 이란 句가 있는데 이 賣癡가 우매함을 남에게 판다는 것인지 아니면 癡聾酒 곧 귀밝이 술을 마셨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고 설 무 렵 해서 十長生의 歲畫를 그려서 붙이는 것도 행하여졌던 것 같다. 立春에는 春帖子를 써붙이고 春幡子를 매달기도 했다. 전자는 문기둥에 써붙이는 詩句며 후자는 색이 있는 비단깁인데, 이것을 머리에 매거나 꽃가지에 매다는 풍속이 있었다

471 Ⅳ. 藝 術 三月上巳 곧 3월 3일(삼월 삼짓날)에는 踏靑을 하고 쑥떡을 해 먹었다. 踏靑은 부녀들이 산에 오르는 행사다. 寒食에 拜掃 즉 省墓한 것은 지금과 같다. 七夕에는 여자들이 다투어 바느질솜씨를 익히는 풍습이 있었다. 冬至에는 팥죽을 끓 여 먹고 逐鬼하였으니 지금과 같다. 除夕에 守歲(守夜) 즉 밤샘하는 풍습은 최근과 같았으나 특수 한 것에 庚申守夜가 있었다. 비단 歲末만이 아니고, 11월에도 庚 申날에 밤샘하는 것이 庚申守夜다. 道敎의 영향을 받은 행사인데 宮中에서는 이 守夜에 빙자하여 妓까지 불러들여 음란한 일이 있 어 적잖은 말썽을 빚기도 했었다. (4) 民間信仰 高麗朝의 民間信仰에서 샤마니즘은 매우 우세하였다. 王朝의 각 종 儀禮나 종교적 행사에 있어서도 巫俗行事가 公的으로 시행되 었던 만큼 일반 대중들의 신앙생활에서 巫俗이 차지했던 비중도 클 수밖에 없었다. 朝鮮王朝의 금지정책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기 층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온 巫俗임을 고려할 때 이 단정은 당연하 다 할 것이다. 高麗朝에서도 禁巫정책이나 그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鄭 夢周나 趙浚의 排巫論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趙浚은 巫祠를 淫祠 로 표현한 鄭夢周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말투로 巫俗을 비난하는 말 가운데서 國都에서부터 郡縣에 이르기까지 무릇 집이라고 있는 자는 모두 神祠를 세우고 이것을 衛護라고 하니 이때서야 家 廟 없는 처지에 부모의 靈을 어디다 모실거냐 16) 高麗史 列傳 卷 31 趙浚條 )고 한탄하고 있

472 4. 民 俗 다. 이로 보아 高麗社會에는 거의 집집마다라 과장해 말할 만큼 무속적인 神祠가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子粹도 그 排佛 斥巫의 상소에서 온 나라 안에 巫堂집을 짓고 別祈恩의 곳이 열 을 넘고, 四時 祭를 지낼뿐더러 無時로 행하는 別祭까지 이루 헤 아릴 수 없다 17)고 말하고 있다. 禁巫論이 대두한 高麗의 말기에 있어 巫俗이 이러했는데 하물 며 그전 시대에 있어서의 巫俗의 왕성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太祖는 그 건국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의 參謀에게 서 神佛을 숭상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게 되자, 우리 나라에는 山水靈奇가 방방곡곡에 퍼져 있어 백성들의 습성이 神佛을 좋아하여 그로써 福利를 얻고자 하고 있다. 아직 병화가 그치지 않는 때를 당하여 佛神의 도움과 산수의 영험을 생각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장차 국가의 이념으로 삼을 생각은 없으나 우선은 그 효능을 이용 않을 수 없다 18) 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太祖가 佛敎와 함께 샤마니즘에 기대어 그의 군사활동 과 건국과업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太祖 이후 고려왕조에서는 山 河 海 등 자연을 국가나 군사 수호신으로 숭상하고 그것들을 擬人化하여 이른바 神祗加號 즉 神의 이름을 붙이고 때로는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高宗 때 蒙 古兵이 溫水郡에서 패하자 이것을 그곳의 城隍神의 공이라 일컫고 神號를 加封한 것이나 契丹兵이 패하자 京畿道 紺兵山을 山神으로 加號한 것이 그 예들이다. 혹은 高宗이 병들었을 때 여러 神祠에 제사지낸 것도 이 예에 들 것이다. 17) 高麗史 列傳 卷 31 趙浚條 18) 高麗史 世家 卷 2 太祖 10年 12月

473 Ⅳ. 藝 術 이처럼 건국 이래 역대 왕들은 샤마니즘적 원리를 따라 적어도 王政의 일부를 수행한 데 힘입어 巫俗이 高麗 社會의 주도적 종교 가 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에서 우리들은 聖骨將軍의 虎 景祠가 山神祠임을 여기서 연상하게 된다. 高麗王朝의 始祖祠가 곧 山神祠일 때 그리고 그것이 가령 牧隱集에서 焚香再拜虎景 祠 로 표현되어 숭앙받고 있는 사회에서 샤마니즘이 차지했던 사회적 지위는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시 왕조 의 祖靈의 하나인 龍女의 開城大井이 民俗信仰의 聖地였음에도 유의하여야 할 것 같다. 高麗 건국과 이후의 高麗社會의 이념을 얘기할 때 이 부분을 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祈雨는 祈晴 祈雪 등의 祈祝의 행사나 또는 日蝕 蝗蟲 害 虎患 星怪 등을 물리치는 祓禳이나 消災行事와 함께 궁중의 중요한 儀禮의 하나였다. 이 祈雨에는 많을 때는 250명의 巫堂이 일시에 궁중으로 소집되어 참례한 적이 있는 정도였다. 그뿐 아니 라 왕 및 왕족의 治病에까지 그들은 동원되었다. 때로는 明宗이 그러했듯이 山川에 使臣을 보내어 太子 낳기를 빌기까지 했었다. 일반 민간의 예를 직접 보아도 巫俗이 高麗社會에서 얼마나 성 행되었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李奎報는 그의 李相國集의 老巫篇幷序에서 巫堂과 그 神事를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어 그 방면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거니와, 그것에 의하면 무당은 얼굴은 주름지고 머리는 이미 반 백인데 스스로 그 몸에 神이 내렸다고 한다. 몸을 솟구쳐 뛰어 머 리가 대들보에 부딪치도록 굿을 하며 帝釋神과 七星神을 그린 그 림을 모셨다고도 묘사되어 있어 무당굿을 눈앞에 보는 듯하다. 이 무당집에 남녀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언제나 만원사례의 지경이었 다 한다

474 4. 民 俗 이 李查報의 詩文 속에 등장하는 무당은 歌舞로 神事를 치루는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또 목구멍 소리로 새처럼 소 리 내되 혹은 빠르게 혹은 천천히 하며 신탁을 전하고 예언을 하 기도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최근까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무당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처럼 그 세력이 자못 등등했던 巫俗은 앞에서 말한 祈雨 행사 가 시사하듯이 佛敎와 道敎를 더불어 並存하고 있었다. 祈雨에 巫 事가 치루어지는 한편, 道敎의 術士와 佛僧들에 의한 祈雨행사도 행하여졌었기 때문이다. 巫 佛 仙이 병행하여 高麗社會의 宗敎 生活을 이룩해 나간 것이다. 그것은 八關會의 事例에서도 충분히 밝혀질 수 있다. 太祖는 그 26년에 후세가 길이 거울로 삼아야 할 이념으로서 열 항목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佛敎를 섬길 것, 風水說의 입장에서 보아 西京이 나라 전체의 地脈의 근 본이므로 그 땅을 각별히 존중할 것, 등의 항목과 함께 八關會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八關會가 天靈과 五嶽 名山 大川 龍神을 섬기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샤마니즘 의 자연숭배 원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 군데군데에서 八關會를 神祗로 삼는다고 한 뜻도 여기에 있는 것 이다. 그러면서도 八關會에 仙風이 있다고 한 기록도 보인다. 즉 毅宗은 敎旨를 내리면서 佛法을 존중하라는 뜻과 함께 新羅 이래 의 仙風도 지켜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仙風 때문에 龍天이 기뻐하고 백성과 문물이 다 편안했던 바인데 근래의 八關 會가 仙風을 잃어 가고 있으므로 兩班이나 家產이 넉넉한 자를 골 라 仙家로 삼고 八關會를 시행토록 하라고 명하고 있다.19) 이 毅 19) 遵尙仙風 昔 新羅 仙風大行 由是 龍天歡悅 民物安寧 故祖宗以來 崇尚其風 久矣 近來 兩京八關之會 日減舊格 遺風漸衰 自今 八關會 預擇兩班家產饒足者 (高麗史 世家 18 毅宗 22年 3月) 定爲仙家 依行古風

475 Ⅳ. 藝 術 宗의 敎旨 속에서 八關은 곧 仙風인 것이다. 破閑集에서 李仁老도 八關會에 참례한 양가 집안 출신의 무지개옷을 입은 네 아이를 花 郞 四仙徒의 遺風이라 말하고 있다. 花郞이 기원적으로 仙敎일 수 는 없겠으나 八關會를 仙敎와 관련지운 의도를 季仁老의 글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八關會에서 巫仙이 褶合된 자취를 볼 수 있음과 함께 동시에 그것이 지닌 佛敎와의 관련도 명백히 볼 수 있다. 八關會 때마다 정례적으로 왕들이 法王寺에 참례한 것이 그 예가 될 것 이다. 高麗圖經이나 宋史 등 中國文獻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八關會 는 高句麗의 隧神(歲神)祭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 같다. 만일 中國 쪽의 이 기록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원천적으로 샤마니즘적 원리 에서 시작된 八關會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바깥에서 들어온 佛敎 와 仙敎를 흡수하면서 巫 佛 仙의 일체화를 초래한 것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高麗圖經에 의하면 朱蒙의 母妣인 柳花를 모신 東神祠가 있었 고 왕궁에서는 官을 파견하여 이에 제사지내되 崧山神과 같은 격 식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 자체의 기록에 의하여서도 東明祠에 관을 보내어 致祭하였고 西京의 壇君祠에도 역시 제사 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前代의 神格들이 高麗朝에서도 계속 숭앙된 것으로 보아 八關會가 東盟 즉 隧神祭 전통을 이어받 을 가능성은 십분 있는 것이다. 더우기 隧神祭는 그 형태가 오늘 날에도 전하여지고 있는 서낭굿을 위시한 마을의 共同祭를 연상 시켜 주고 있다. 그 전승이 가히 超歷史的인 것임을 알 수 있다. 八關會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민간에서의 巫俗信仰에도 仙 佛과의 混融현상을 볼 수 있다. 즉 스스로 天帝釋을 자칭하는 巫

476 4. 民 俗 가 있었는가 하면 앞에서 인용한 李相國集의 巫에 관한 詩에서 보 듯 天帝釋이나 七星을 모신 巫도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巫書에서 帝釋거리 가 이른바 열두마당굿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 淵源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이다. 妙淸이 仁宗을 설득하여 세웠다는 이른바 八聖堂에 모셔진 神 格들은 가령 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殊菩薩 駒麗木覔仙人實德毗 婆尸佛 등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전반부는 샤마니즘적 원 리에서 비롯된 자연숭배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름이고, 중반은 神 仙의 이름이고, 후단이 佛名이다. 巫 佛 仙 합일의 대표적인 사 례라 하겠다. 비록 妙淸이 한 짓이라고 하기는 하나 그 基底에는 당대 사회의 信仰生活이 깔려 있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金烈圭

477 執筆者 槪要 李龍範 Ⅰ. 佛敎의 發展 安啓賢 2. 天台宗의 成立 崔柄憲 3. 佛敎行事의 盛行 安啓賢 4. 寺院經濟의 發達 李載昌 Ⅱ. 儒敎의 發達 1. 國子監의 私學 朴性鳳 2. 儒學의 性格 尹南漢 Ⅲ. 風水地理說 1. 風水地理說 李龍範 Ⅳ. 藝術 1. 文學 李明九 2. 美術 秦弘燮 3. 音樂 李惠求 4. 民俗 金烈圭 1. 大藏經의 雕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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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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