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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高麗後期 性理學 受容에 關한 硏究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變化를 中心으로 李 源 明* Ⅰ. 머 리 말 Ⅱ. 元 干涉期 歴史認識의 變化 1. 一然의 歷史認識 2. 李承休의 歷史認識 3. 辆目體 史害의 編真 Ⅲ. 新進士大夫의 成長 Ⅳ. 性理學의 受容 1. 性理學 受容의 初期形態 2. 李齊賢의 歷史認識 3. 李齊賢의 性理學 理解 Ⅴ. 맺 음 말 Ⅰ. 머 리 말 본고는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변화를 중심으로 高麗後期1) 性理學 受容에 관한 연구이 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후기 性理學은 高麗中期 北宋 性理學이 전래된 이래 武臣政 權期 儒 佛交涉이라는 과정을 겪고서2) 元 干涉期의 정치 경제 사회변화와 아울러 전개되 는 儒學思想이다. 그러면 이제 元 干涉期라는 政治 社會的 어려움 속에서 사상의 변화는 어떻게 이어졌 을까? 이 시기는 고통과 치욕이 점철되었던 시대였던 만큼 民族史의 측면에서는 크나큰 자기 覺省의 시대요, 成長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 간섭기( )의 80여 년간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분야에 서 의 큰 변화가 있었다. 먼저 武臣亂 이후 지배층의 성격변화로 權門世族이라는 새로 * 서울女子大學校 史學科 副敎授. 1) 종래 高麗後期는 武臣亂 이후 武臣政權期, 元 干涉期, 그리고 恭愍王 以後의 時期로 구분하여 쓰 고 있는데, 本稿에서의 元 干涉期는 주로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중반까지의 時期로 한정해서 쓰고자 한다. 2) 拙稿, 高麗中期 北宋性理學의 傳來와 性格考 ( 서울여대논문집 16, 1987) 및 高麗 武臣政 權期 儒佛 交涉의 性格 ( 五松李公範敎授停年退任紀念東洋史論叢, 知識產業社, 1993). 특히 필 자는 高麗에 수용되는 性理學을 初傳性理學 수준의 전래단계로 高麗中期의 北宋 性理學과 高麗後 期에 完成된 新儒學으로 수용된 性理學을 구분하여 보는 입장인데, 본고에서 性理學이라 할 때 後 者를 지칭하는 意味를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性理學의 수용을 단계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理解 의 深化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 128 國史館論叢 第55輯 운 지배층이 진출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3) 즉 對元關係의 전개 속에서 형성된 親元 派 勢力인 權門世族의 등장은 종래 貴族的이고 保守的인 면에서 점차 官僚化되는 경향 도 아울러 띠어 향후 官僚制的 性格의 朝鮮兩班社會로의 전개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른바 支配層의 性格變化를 가져 왔는데 이는 武臣亂 이후 能文能吏를 통한 地方鄕吏 讀 書層 출신의 新進士大夫의 성장과 아울러 주목되는 변화였다.4) 이러한 지배층의 성격변화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100년 간의 武臣政 權期를 지내면서 사회기강과 정상적인 사회 경제적인 질서가 무너졌는데 그 중 무엇보다 도 土地制度의 붕괴를 들 수 있다. 특히 權門世族들의 불법적이고 탈법적인 土地占奪은 大土地兼併을 가져와 이른바 農莊이 형성되었다.5) 大土地兼併을 의미하는 農莊은 武臣政權期를 지나 元 干涉期인 13세기 70年代 이래 크게 보편화되었다. 權門世族은 작게는 3, 40結, 크게는 2, 3千結에서 州郡에 두루 미칠 정도이거나 혹은 山川을 경계로 할 정도의 農莊을 차지하였다.6) 물론 그들은 국가에 납 3) 閔賢九, 高麗後期의 權門世族 ( 한국사 8, 1977) pp 그러나 최근 종래 고려후기 權門 世族 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분석하여 世族 으로 표현할 것을 제기하면서 新興士大夫와는 對蹠的 인 정치세력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주목되고 있다(金光哲, 高麗後期 世族層硏究, 東亞大學校出 版部, 1991, pp.46 47및 p.222). 4) 李佑成, 麗代 百姓考 ( 歷史學報 14, 1961) p.44. 그러나 李泰鎭은 高麗末 朝鮮初의 社會變 化 ( 震檀學報 55, 1983) p.2에서 武人政權 아래서 能文能吏의 文士와 新興士大夫간의 同質性 이 박약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후자의 중요한 특징인 性理學에의 접촉이나 관심을 전자에게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지배층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러나 性理 學의 性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5) 農莊에 대한 집중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연구로는 姜晋哲의 일련의 연구가 있다( 韓國 中 世 土地所有 硏究, 一潮閣, 1989). 특히 農莊의 발달 배경에는 農業生產力의 增大가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古代社會를 극복하고 中世社會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주장( 高麗後期 地代에 대하여, pp )하여 사회경제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다음의 논문들도 있다. 金容燮, 高麗時期의 量田制 ( 東方學志 16, 1975). 金泰永, 科田法 體制下의 土地生產力과 量田 ( 韓國史硏究 35, 1981). 李景植, 高麗末期의 私田問題 ( 東方學志 40, 1983). 6) 당시 農場의 규모에 관한 사료를 보면 ① 高麗史節要 권20, 忠烈王 8년 8월조, 時鷹坊怯怜口 及內竪賤口 皆受賜田 多至數百結少不下 三四十結. ② 高麗史 권30, 世家 忠烈王 15년 9월조, 王獵于西海道 時 宦官及權貴 皆受賜田 多至二三千結. ③ 高麗史 권104, 列傳 金方慶傳, 又受金符爲都元師 權傾一國 田園遍州郡. ④ 高麗史 권28, 世家 忠烈王 3년 2월조, 僉議府言 公主怯怜口及內僚 廣占良田 標以山川 등이 있다. 이처럼 蒙古支配가 본격화 되는 忠烈王朝 1270년대에 農莊이 더욱 보편화 내지 확대되고 있다(宋炳 基, 高麗時代의 農莊 韓國史硏究 3, 1969, pp.2 15 및 姜晋哲, 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大 出版部, 1980, p.326). 그러나 농장이 확대되는 시기에 대해서 일찍이 周藤吉之는 恭愍王代로 보았고 ( 麗末 鮮初に於ける農莊に就いて 靑丘學叢 17, 1934), 閔賢九는 紅巾賊亂에 뒤이은 혼란기 (1360 年代)를 들고 있다(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 歷史學報 38, 1968, pp.59 65).

3 - 129 부해야 할 租 庸 調도 포탈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수입은 宰相한테도 제대로 祿을 주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일반 농민들은 송곳을 세울 만한 땅도 갖지 못할 실정이었다.7) 여기에다 민족적인 고난도 뒤따랐다. 蒙古軍의 침입의 가장 격렬하였던 1254년(高宗 41)부터 6년에 걸쳐 계속된 제6차 침입 중 그 첫 해의 농민들의 피해 상황을 보면 다음 과 같다. 이 해에 蒙古兵에 포로가 된 것은 男女 합하여 무려 20萬 6千 8百여 명이며 살륙을 당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이 지나간 州郡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고병의 亂이 있은 이래 이때처럼 심한 피해는 없었다.8) 이른바 對內外的으로 어려움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그 어려운 상황 을 직접 목격했던 지식인들은 고민이 더했던 것이다. 즉 知識人들은 武臣執權으로 인하 여 그들의 暴壓을 당함에 연유한 민중의 분노와 蒙古의 강포한 침략 지배에 대한 慘絕 無比의 민족적 분노와 좌절을 체험하였다.9) 이러한 민중의 분노는 민중속에서 살아온 新進士人과 禪僧에의하여 代辯되곤 하였다.10) 따라서 本稿에서는 지식인들의 현실인식을 歷史認識의 變化를 통하여 살펴보며 이를 고려후기 성리학의 수용을 위한 전초적인 기 반의 조성으로 보고자 한다. Ⅱ.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變化 武臣亂 이후 民族的으로 어려웠던 蒙古干涉期를 맞이해서 歷史的 認識의 변화는 어떻 게 전개되었을까? 民族的 自主意識이 강하게 대두되었던 이 시기에 三國遺事 (1281) 와 帝王韻紀 (1287) 등의 歷史書가 편찬되고 있음은 주목된다. 특히 歷史書는 그 어 느 시기 보다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보이는데,11) 이는 당시 고려가 직면하고 있는 民 7) 高麗史 권78, 食貨志 田制, 辛禑 14년 7월 趙浚上書條, 兼併之門一開 爲宰相 而當受田 三百結 者 曾無立錐之可資 宰相而受祿 三百六十石者 尙不滿二十石. 8) 高麗史 권24, 世家24, 高宗 41년 12월, 是歲蒙兵所虜 男女無慮 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 勝計 所經州郡 皆爲灰燼 自由蒙兵之亂 未有甚於此時也. 9) 拙稿, 고려후기 무신정권과 민란의 의미 ( 서울여대 논문집 16, 서울여대, 1986). 10) 金泰永, 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 ( 慶熙史學 5, 1974) pp 및 高麗後期 士類層의 現實認識 ( 創作과 批評 44, 1977) p.329 참조. 특히 氏는 후자에서 禪 僧 一然이나 新進士人 李承休가 三國遺事 나 帝王韻紀 를 쓰게 된 動機도 이러한 연관하 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4 - 130 國史館論叢 第55輯 族的 文化的 危機意識과 民族意識의 발로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고려후기 性理學 受容과 관련하여 三國遺事 를 지은 一然과 帝 王韻紀 의 작자 李承休를 통하여 元 干涉期 歷史認識12)의 변화와 儒 佛思想의 融會에 대한 변화를 살펴 보고, 특히 本朝編年綱目 등 綱目體의 등장을 주목하고자 한다. 11) 元 干涉期의 歷史 編撰物을 시기별로 소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元 干涉期 歷史編撰 史書名 年 代 編撰者 1 三國遺事 忠烈 7年(1281) 僧一然( ) 古今錄 忠烈 10年 監修國史 元傅 2 修國事 許洪 등 ( ) 3 帝王韻紀 忠烈 13年 李承休( ) 千秋金鏡錄 忠烈 鄭可臣(? 1298) 4 世代編年節要 7 忠烈 25年 頃 閔漬( ) 5 卷 權溥( ) 등 私撰 官撰 內 容 私撰(歴史詩) 忠烈王정치에 대한 비판적 견해 千秋金鏡錄 증수. 太祖 元宗代 서술 世系圖 첨가 6 璿源錄 任翊 敎旨를 받아 編撰 本朝編年綱目 42 忠宣王의 命忠肅 閔漬( ) 綱目體 史書 文聖王에서 卷 4年(1317)完成 高宗朝 서술 7 忠穆王 2年(1346) 李齊賢 등의 增修 忠憲王 世家 忠肅 12 忠惠王 李齊賢( ) 高宗 元宗, 忠烈 忠宣王代 8 後5 주로 취급. 9 古今錄 恭愍 6年(1357) 李仁復( ) 官撰 國史 史略 恭愍 6年 李齊賢 白文寶(1303 各王代의 史贊 ) 李達衷( ) 11 本朝金鏡錄 增修 恭愍 10年 李仁復 李穡( ) 太祖에서靖宗까지서술 12) 元 干涉期에 해당하는 高麗後期의 歷史認識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의 것이 참고된다. ① 金哲埈,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 ( 韓國史硏究 9, 1973) 및 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性格 ( 韓國史硏究 9, 1973; 韓國史學史硏究, 서울大出版部, 1990). ② 金泰永, 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 ( 慶熙史學 5). ③ 河炫綱, 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 ( 韓國의 歷史認識 上, 創批, 1976). ④ 鄭求福, 高麗後期의 歷史認識과 歷史敍述 ( 韓國史論 6, 국사편찬위원회, 1981). ⑤ 金相鉉, 高麗後期의 歷史認識 ( 韓國史學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85). ⑥ 劉璟娥, 李承休의 生涯와 歷史認識 (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⑦ 閔賢九, 閔漬와 李齊賢 ( 斗溪 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產業社, 1987 및 白文寶硏究 ( 東洋學 17, 1987). ⑧ 邊東明, 鄭可臣과 閔漬의 史書編纂活動과 그 傾向 ( 歷史學報 130, 1991).

5 - 131 이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는 고려후기 朱子性理學 受容의 전초적 기반의 조성으로 이해하 기 때문이다. 1. 一然의 歷史認識 高麗後期는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운 시기의 하나였다. 국 가사회가 미증유의 대시련을 겪고 있었을 때에 國權과 民生의 수호를 위하여 진력해온 지식인이 어떠한 現實認識을 가지고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그 중에 禪僧 一然과 新進士 人 李承休의 歷史認識을 통하여 이들의 現實認識을 살펴 보고 朱子性理學 受容의 기반 조성을 보고자 한다. 三國遺事 (1281)를 지은 一然( )은 고려 武臣政權期에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 고 蒙古干涉期에도 20년 가까이 살면서 國尊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武臣政權 아래에서 고려사회의 혼란과 對蒙抗爭期( )의 고려인의 고난과 절규를 누구보 다도 많이 목도하고 경험하였던 인물로13) 경상도 章山郡(현재 慶山) 태생의 鄕吏層 출신 의 승려로서 여러 곳을 두루 다니고 강화도의 禪月社에 주석한 바 있다. 더구나 禪宗僧 으로서 知訥과 慧諶의 정신을 이어 받은 승려로서 주목된다. 海東曹溪宗의 開祖인 知訥의 法脈을 嗣하였던 사실과 慧諶과의 관계는 직접 面對하여 同志的인 共感을 토로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고 있다.14) 특히 慧諶의 詩를 三國遺 事 에서 인용하기를, 曹溪無衣子가 詩를 남겨 말하기를, 듣건데 皇龍寺의 탑이 불타던 날 한쪽이 연소되었 는데도 틈난 데가 없었다.15) 라고 하였다. 이는 수백년 傳承의 불교문화재를 賛하고 있는 사료이다. 결국 一然은 知 13) 一然의 行跡에 대해서 蔡尙植, 一然의 출현과 迦智山門의 추이 ( 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 閣, 1991) pp 에서는 一然의 父는 金彥弼로 단지 左僕射를 贈職으로 받고 母 李氏는 樂浪 郡 夫人으로 봉해진 사실 또 天因이나 天頙처럼 과거를 통해 入仕를 시도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문벌귀족이 아니라 지방의 鄕吏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4) ① 閔漬의 撰인 一然碑文에서 中統辛酉承詔赴京 住禪月寺開堂 逢(遙)嗣牧牛和尙. ② 一然의 撰인 重編曹洞五位 序에서 曾謁曹溪小融和尚(慧諶) 語及曹洞家世 和尚亦以此云 慨然流嘆者再三. 즉 ①에서 牧牛和尙의 法脈을 嗣하였다고 하였고 ②에서 慧諶과 직접 面對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金泰永, 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對하여 p.85, 주31 참조). 15) 三國遺事 권3, 塔像4, 前後所藏舍利 條, 曹溪無衣子留詩云 聞道皇龍塔日 連燒一面示無間 是也.

6 - 132 國史館論叢 第55輯 訥에서 慧諶으로 이어지는 曹溪宗과 호흡을 함께 하는 禪宗僧으로서 체질 및 이념을 지 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禪僧으로서 의식 뿐 아니라 民族的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自主意識을 갖고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는 그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채 傳存되어 온 檀君 記 를 기록하였다.16) 즉 古朝鮮을 우리 역사의 출발로 삼고 中國이 아니라 天과 직접 이 어지는 檀君을 民族의 始祖로 하는 역사 인식체계를 가졌던 것이다. 三國遺事 에 나타난 그의 歷史認識은 民族的 自主性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특징 이 있다. 즉 우리 나라 역사의 出發點을 古朝鮮에 두고 단군왕검의 建國神話를 기록함으 로써 우리 역사의 始祖를 中國이 아니라 天과 연결하는 독자성을 나타내었다. 國史의 始 作을 檀君의 古朝鮮으로 잡아 中國歴史의 시조인 堯와 同時代로 인식한 것은 종래 유교 적인 禮敎의 시초를 箕子에서 찾아 중국과 연결시키려는 태도와 다른 것이다.17) 즉 中國 歷史와 對等하고 유원한 自主性을 가졌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당시 元 支配下의 현실에 서 저항적 民族意識의 표현이라 하겠다.18) 武臣政權期와 蒙古와의 항전을 치르면서 釀成 될 수 밖에 없는 분노와 저항의 의식이 歷史傳統에 대한 民族的 意識으로 심화될 수 있 었던 것이다. 그리고 三國遺事 篇目 (王曆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 등 9 篇目)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승려로서 불교관계 기사와 역사적 神異事를 기록하고 있는 데 유 교식으로 말하면 非合理的인 사항을 정면으로 다룬 史書이기도 하다. 그러면 神異事를 다룬 一然의 뜻을 보면, 대체로 옛날 聖人이 禮樂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仁義로 敎를 베푸는 데 있어서 怪力亂 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帝王이 장차 일어나려 함에 있어서는 符命을 받고 圓 籙을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 후에야 능히 變化를 타고 大器를 잡아 大業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즉 三國의 始祖가 모두 神異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怪異하겠는가. 이 紀異가 諸篇의 처음에 실린 까닭은 그 뜻이 여기에 있다19) 16) 三國遺事 의 檀君記 기록은 檀君朝鮮의 실체를 인식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朝鮮初期의 관찬사 서인 三國史節要, 東國通鑑, 東國輿地勝觉 등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鄭求福, 三國 遺事의 史學史的 考察 三國遺事의 綜合的 檢討,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pp.20 23). 17) 申一澈은 韓國思想序說 ( 韓國의 思想家十二人, 玄岩社, 1975) pp.20 23에서 檀君神話에 나 타난 一然의 역사의식은 민족사상의 淵源이요, 그 始源으로 일찍이 높이 보았다. 18) 金泰永, 앞의 논문(1974) pp.82 83은 이러한 사정은 중국에서 唐末五代를 거쳐 宋代에도 遼 金 蒙古의 강성으로 民族的 위기시 性理學이라는 자주적인 사상과 학문이 배태되었음을 상기할때 궤 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았다. 19) 三國遺事 권1, 紀異, 敍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在所不語 然而帝 王之將興也 膺符命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中略) 然則三國之始祖皆 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7 라고 하였다. 中國古代 帝王들의 神異한 일들을 소개한 후 그런 즉 우리 三國의 始祖가 모두 神異에서 탄생한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고 반문하고 있는 데, 이는 종래 怪力亂神 을 말하지 않는데 대한 그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물론 怪力亂神을 一然이 처음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李奎報는 東明王篇 (1193)에서 天下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본래 聖人의 都邑임을 알게 하려고 神異의 事를 기록한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20) 이러한 인식은 당시 禪僧 및 新進士大夫層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인식이요, 이는 高麗中期 金富軾의 유교적인 자세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一然은 禪僧으로 뿐 아니라 儒家書와 諸子百家에도 밝았는데 그의 碑文을 보면, 修禪하는 여가에 다시 대장경을 읽고 諸家의 章疏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한편 儒書를 섭렵하고 아울러 百家書에도 관통하였다. 이에 의해 방편에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고 종횡으로 妙用을 발휘한 지 무릇 50년이나 되었다21) 라고 하였다. 佛敎信仰 이외에 儒學이나 기타 思想體系를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22) 특히 一然은 학문 및 사상의 범위가 커서 당시 대표적 禪사상인 看話禪을 적 극 수용하여 여러 갈래의 사상을 융합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重編曹洞五位 3권 (1260)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원래 중국 唐代 洞山良价( )의 洞山 五位 로 佛敎의 입장에서 佛敎의 認識方法과 周易의 이치를 종합하여 學人들의 공부의 階次를 밝힌 것이었다. 洞山五位 는 뒷날 周易의 爻卦까지 이용하였는데 宋나라 周濂 溪의 太極圖는 이러한 五位論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23) 이는 중 국에서 일어난 儒 佛의 思想的 交涉의 경험을 이 시기 高麗人들도 경험하는 것으로 高麗 末 思想的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24) 그리고 三國遺事 는 당시 일반 백성을 대변하는 史書였다. 당시 강렬한 庶民的 生 20) 李奎報, 東明王篇 序,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 亦初不能信之 意以爲鬼幻 又三復耽味漸涉其源 非幻也乃聖也 非鬼也乃神也 況國史直筆之書 豈妄傳之哉 金公富軾重撰國史頗略其事 意者公以爲國 史矯世之書 不可以大異之事 爲示於後世 而略之耶 記之欲使夫天下 知我國本聖人之都耳. 21) 閔漬, 高麗國 義興 華山 曹溪宗 麟角寺迦智山下 普覺國尊碑銘 (이하 一然碑文 이라 칭함), 又於禪悅之餘 再閱蔵經 窮究諸家章疏 旁涉儒書 兼貫百家 而隨方利物 妙用縱横 凡五十年間. 22) 一然碑文 의 陰記에서 山立(混丘)은 一然을 가리켜 和尙의 문풍이 광대하고 모두 갖추어서 가 히 그 뜻을 얻기가 어렵다(和尙門風 廣大悉備 不可得而思議也)라고 표현하고 있다. 23) 閔泳珪, 一然重編曹洞五位 重印席 ( 學林 6, 1984)와 金哲埈 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動 向 ( 韓國史學史硏究 ) pp 및 蔡尙植, 앞의 책(1991) pp 참조. 24) 특히 金哲埈은 一然의 저술인 重編曹洞五位 권3을 儒佛思想의 상호교섭에 대한 인식은 朝鮮初 性理學이나 佛敎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앞의 책, 1990, p.296)라고 중시하 면서 佛敎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 益齋나 牧隱의 사상경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보고 있다.

8 - 134 國史館論叢 第55輯 活意識으로서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25) 기본적으로 영웅이나 귀족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 지 아니하였다. 가령 武珍州의 上守吏인 安吉이 王弟요 帝相인 車得公과 직접 연결을 한 다든가, 芬皇寺의 千手觀音이 한 이름없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 먼 눈을 뜨게 하고, 敏藏 寺의 관음보살은 한 가난한 여자의 소원을 들어 萬里 밖에 표류해 간 그 아들을 데려다 준다는 기사26) 등 서민들의 生活說話를 많이 채록하였다. 이와 같이 禪僧 一然의 自主意識과 神異史觀 및 庶民意識이 儒 佛 交涉과 연결되어 高麗中期 내지는 武臣政權期의 그것과 또 다른 역사인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 이다.27) 2. 李承休의 歷史認識 一然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표적 新進士大夫의 한 사람인 李承休( )의 歷史 認識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다. 그는 蒙古干涉期에 新進士類로서 직접 정치에 뛰어 들어서 시대적 병폐를 혁파하려고 노력하였던 儒學者로서 一然과는 또 다른 立場에서의 歷史認識이 帝王韻紀 (1287)에 보이는 것이다.28) 高麗史 에는 李承休는 字가 休 休이며 京山府 嘉利縣人으로 어려서 父를 여의고 力學하여 高宗朝에 登第하였는 데 三 陟의 頭陀山 龜洞에 들어가 몸소 밭을 갈아 어머니를 奉養하여 10여 년을 살았다 29)고 하였다. 이로 보면 그는 先代를 잘 알 수 없는 地方出身이고 地主가 아닌 自營農民的인 25) 金泰永, 앞의 논문(1974) pp ) ① 三國遺事 권2, 紀異2, 文虎王 法敏條. ② 위의 책 권3, 塔像4, 芬皇寺 千手大悲 盲兒得眼條 및 敏藏寺條. 27) 金哲埈은 一然의 三國遺事 에 대하여 傳統文化에 대한 가치평가가 정당하게 되지 못한 金富軾 의 三國史記 에 비하여 三國遺事 는 그와 다른 歷史認識體系를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高 麗中期에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 韓國史學史硏究 p.267 참조). 28) 李承休의 歷史認識에 대한 연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金泰永, 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 ( 慶熙史學 5) 및 高麗後期 士 類層의 現實認識 ( 創作과 批評 44). ② 金哲埈, 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動向 ( 考古美術 合, 1976; 韓國史學史硏 究 ). ③ 劉璟娥, 李承休의 生涯와 歷史認識 (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④ 河炫綱, 李承休의 史學思想 硏究 ( 東方學志 69, 1990). ⑤ 邊東明, 李承体의 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 ( 震檀學報 70, 1990). 이상 金哲埈은 帝王韻紀 를 事大的 史書로서 三國史記 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는 반 면, 金泰永과 그 밖의 논저들은 民族의 自主性과 文化의 優位性을 강조하려는 三國遺事 와 同 軌의 史書로 대조적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동감하면서 그러한 역사인식이 朱子性 理學 수용의 전초적 분위기로서 주목하고자 한다. 29) 高麗史 권106, 李承休傳, 字休休 京山府嘉利縣人 少孤力學 高宗朝登第 入頭陀山龜洞躬耕養母 居十餘年.

9 - 135 위치로 당시 집권세력인 권문세족과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科擧에 급제한 人物이었다. 또한 그의 修學過程을 보면, 9세 (1232, 高宗 19)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熙宗의 三子 인 圓靜國師 鏡智의 方丈에서 明儒 申増로부터 周易 과 左傳 을 배웠으며 14세에 강화에 들어가서 樂聖齋 都會所에서 修業하다가 29세의 나이로 崔滋의 主試下에 及第하 였다.30) 이처럼 과거에 及第할 정도의 儒學수업 외에 佛敎와 道敎에도 두루 통하였던 것 같다. 그는 어릴 때 이미 國師의 方丈에서 놀다가 그후 말년에 이르러 時政 폐단의 是正을 주장하다가 파면되자, 鄕里로 돌아와 容安堂을 짓고 佛書를 읽으며 帝王韻紀 와 內 典錄 을 지었다.31) 또 이에 앞서 스스로 動安居士라 하였다든가 容安堂이란 별당 이름 을 붙인 것으로 보아 道敎的인 소양도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의 歷史意識이 잘 나타난 帝王韻紀 를 보면, 上卷은 中國歷代 왕조의 흥망사실을 上古에서 南宋까지 敍事詩로 읊었고 下卷은 우리 나라의 역대왕조의 흥망을 개관하였는데 東國君王開國年代 에서는 檀君의 開國부터 渤海까지 언급하였 고 本朝君王世系年代 에서는 王建 조상부터 忠烈王代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물론 13세기 후반에 高麗王朝의 歷史에 관심을 가진 자가 李承休만은 아니 었다.32) 歷史에 대한 관심과 史書의 편찬은 당시 지식인으로서 가지는 공통적인 관심이 요 知的風土였으며 당시 高麗王朝가 지니고 있는 위기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의 하 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帝王韻紀 저술 목적에 대해서 李承休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臣이 삼가 帝王韻紀 를 편수하는 것은 흐릿해진 듯한 王室의 餘德을 세상에 밝 히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세상에 시행하셔서 후세 사람을 위한 權威가 되었으면 합니다.33) 당시 高麗의 역사적 현실이 어둡고 캄캄해서 그 타개책으로 이것을 지었다는 적극적 이고 現在的 關心에서의 표현이었다. 즉 元나라에 의해 自國의 文化가 흡수되어 버리고 30) 그의 及第 사실은 高麗史 권73, 選擧2 高宗 39년 4월조 및 動安居士集 行錄 권1, 病課詩 ( 高麗名賢集 1, p.595)에서 알 수 있다 31) 高麗史 권106, 李承休傳, 別構容安堂 看佛書 著帝王韻紀 內典錄. 즉 유교적인 帝王韻紀 와 아울러 佛書 內典錄 을 저술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儒 佛 交涉의 상황이 찾아지고 있다. 특 히 그의 對佛認識은 帝王韻紀 를 올리는 글(進呈引表)에서 임금님을 피읍고 만수무강하심을 기쁘게 뵐 수 없습니다. 마음은 부처님에게 돌아가면서도, 눈은 수 없는 임금님의 글월에 돌려지 며 구중궁궐에 달려 간다 고 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32) 주11) 元 干涉期 歷史編撰 참조. 33) 帝王韻紀 進呈引表, 臣承休言臣謹編修 (中略) 墳螢燭末光期助明於日月 (中略) 伏望 付外施行 爲後勸誠.

10 - 136 國史館論叢 第55輯 말 것 같은 文化的 危機意識에서 나왔던 것이다.34) 따라서 善한 일은 法이 되겠고 惡한 일은 경계가 될 것으로 帝王韻紀 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善惡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이 春秋 였음을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즉 帝王韻紀 下卷 本朝君王世系年代 의 末尾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詰難하기를 그대가 편수한 帝王韻紀 는 모두 七言으로써 敍事하다가 本 朝에 와서는 五言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뜻이 있느냐? 답하기를 詩作은 五 言에서 시작하여 七言으로 마치는 것이다. 지금 제작한 뜻이 本朝에서 일어 났으므로 일 어난 바 처음으로써 마친 것이니 이는 대저 孔夫子가 春秋 를 수찬한 뜻인 것이다35) 라고 하였다. 勸善懲惡과 忠義를 강조하는 孔子의 春秋 를 이미 帝王韻紀 卷上 에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春秋 는 孔子가 世道人心이 거칠어져 가는 것을 개탄하 여 지은 것으로 그것을 읽고 亂臣賊子들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 하였다는 것이다. 즉 孟子 의 滕文公章에 보면, 세상이 쇠퇴하고 正道가 희미해져서 邪說과 暴行이 다시 일어났다. 신하가 그 임금을 弑하고 자식이 아비를 弑하는 일이 생겼다. 孔子가 이를 두려워 하여 春秋 를 지었 다. 孔子가 春秋 를 지으니 난신적자들이 벌벌 떨었다36) 고 하였다. 비판하는 태도가 지극히 엄정하고 大義名分論이 뚜렷한 史書이다. 이처럼 春秋 는 곧 후술한 綱目體 史書 등장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것으로 名分論에 李承休 가 그 要諦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37) 물론 高麗中期의 金富軾에게도 유교사관이 있 었지만 體系上으로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38) 다음에서 그의 기본적인 歷史認識 태도가 보인다. 그는, 34) 鄭求福, 高麗後期의 歷史認識과 歷史敍述 ( 韓國史論 6) pp ) 앞의 책, 本朝君王世系年代, 或難曰子之編修帝王韻紀 皆以七言敍事而至於本朝 則用五言者何 也 其有指乎 答且時之作始於五言 而終之以於七言者也 今夫製作之意 始起於本朝 故終之以所起始 盖夫子修春秋之志也. 36) 孟子 권6, 滕文公章句下, 世道衰微 邪說暴行有作 臣弑其君者有之 子弑其父者有之 孔子 懼作 春秋 春秋作而亂臣賊子懼 ( 四書集註(下) 朱子學大系 8권, 明德出版社, 1974, p.500). 37) 河炫綱, 李承休의 史學思想 硏究 ( 東方學志 69) pp 한편 性理學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단계인 李齊賢도 역사서술의 기준으로 春秋 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作史而不法春秋 吾夫知其可也 櫟翁稗說 後集 1). 38) 李承休의 역사인식에 대해서 金富軾과 다르다는 諸主張(① 金泰永, 앞의 논문, 1974, pp ② 劉璟娥, 앞의 논문 p.554. ③ 河炫綱, 앞의 논문, 1990, p.180)이 있는가 하면, 일찍이 金哲埈은 去浮辭 取正理 의 입장과 관련해서 帝王韻紀 는 三國史記 의 인식을 답습하여 빈곤한다고 (앞의 책 p.292)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11 - 137 삼가 國史에 의거하고 한편으로 각 本紀와 殊異傳에 실린 바를 採錄하여 堯舜이래의 紀典 諸子와 史書들을 참조하여 허튼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말을 취하여 (去浮辭 取 正理), 그 事蹟을 노래함으로써 흥망한 그 年代를 밝힌다 39) 고 하였다. 이것은 앞서 一然의 神異史觀과 달리 허튼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말을 취 하여 정리한 檀君神話에 비교적 儒者的 입장에서 잘 나타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 다.40) 또 李承休의 중국의 역사에 대한 事大的 자세는 어떠한가? 고려를 30여년 침입했 던 元나라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그의 對中國認識이 나오고 있다. 즉, 해와 달같이 성한 나라 元나라 일어나서 그 많은 백성들을 노래케 하였으니 聖德의 높고 넓음 어찌 다 이르리요 中華의 넓은 천지 모두 나부끼고 土地는 광대하며 人民은 많으니 開關한 이후에 이런 나라 처음이다41) 라고 하였다. 이는 帝王韻紀 가 華夷觀에 의해 正統을 따졌던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을 통일한 王 朝에 두었기 때문에 오는 歷史認識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42) 그러나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즉 檀君을 始祖로 하는 역사는 三國遺 事 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하면서 神異史觀과 儒敎史觀이 절충과 조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43) 이처럼 地方鄕吏 出身의 李承休는 儒敎的 입장에서 좀더 합리적 입장을 보이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去浮辭取正理하는 자세 때문에 檀君神話의 서술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종래의 神異史觀에서 보다 유교적인 歷史認識으로 나타났지만, 對中國認識과 自 國歷史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에 비하여 상대적인 한계점도 보이고 있다.44) 그러나 이 러한 歷史認識은 다음 李齊賢의 단계를 이어주는 과도기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과도기적 역할은 또한 高麗後期 朱子性理學의 수용을 가능케 하였던 지적 풍토를 담 당하였다고 생각된다. 39) 帝王韻紀 下, 東國君王 開國年代, 謹據國史 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所載 參諸堯舜已來經傳 子史 去浮辭取正理 張其事而詠之 以明興仁 年代. 40) 帝王韻紀 下, 前朝鮮紀 참조. 41) 帝王韻紀 上, 元條, 日月竝昌 大元興 山川皆執贄土地之廣 人民衆 開闢已來無有譬 ( 高麗名 賢集 권1, p.634). 42) 對中國観에서 이러한 한계는 李承休만의 한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한 원인 중의 하나가 두 차 례(1273, 1274)에 걸쳐 元使行으로 中國大陸의 大帝國 元을 직접 보면서 오는 현실인정이 컸으리 라 본다(河炫綱, 李承体의 史學思想 硏究 p.186). 곧 후술할 李齊賢의 對中國認識도 크게 다르 지 않다고 본다(本稿 Ⅲ節 참조). 43) 그러나 李奎報나 一然에 보이는 神異史觀보다 유교적 교양을 보완하여 檀君기사를 싣고 있다. 44) 그런면에서 李承休는 李奎報의 東明王篇 에 비해 덜 神異的인 면이 보이고 金富軾이나 李齊賢 의 歷史認識態度에 비해 덜 儒敎的이라고 할 수 있다(河炫綱, 앞의 논문, 1990, pp ).

12 國史館論叢 第55輯 3. 綱目體 史書의 編纂 위에서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변화를 禪僧인 一然과 新進士類인 李承休를 통하여 神 異史觀과 儒敎史觀이 서로 조화되는 역사인식의 변화를 살펴 보았는데, 이제 그러한 역 사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계승되면서 새로운 이념으로 나타나는가를 史書 編纂을 통하여 보도록 하겠다.45)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변화를 史書에서 그 특징을 찾는다면 歷史編纂이 많았다는 점 과 아울러 本朝編年綱目 (1317, 閔漬) 등 綱目體 史書의 등장을 들 수 있다.46) 특히 正統에 주안점을 두는 綱目體는 編年體의 하나로서 南宋 朱子의 資治通鑑綱目 에서 시작되었는데 道德史觀에 입각한 名分 義理로 凡例를 만들고 중요한 것은 綱으로, 附隨 的인 것은 目으로 史評을 쓰는 體裁를 말한다. 즉 事件을 綱과 目으로 구별하는 것이 특 징이라 하겠다.47) 그런데 이러한 綱目體의 歷史書 등장은 春秋筆法의 名分論에 입각한 것으로 性理學의 理解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다. 즉 역사 그 자체의 실증적 파악보다는 政治的 倫理的 성향을 띠고 褒貶 서술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바로 宋代의 史學硏究에서 義理精神을 강 조하는 경향에서 출발하였는데 史學을 經學化하여 經學을 史學의 一體로 파악하려 했 다.48) 따라서 宋에서는 經學을 道의 理로, 史學을 道의 用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史學 의 구체적 사실 연구를 통해 經學의 추상적 이론을 검증하고자 하였다.49) 일찍이 孔子가 世道人心이 거칠어져 가는 것을 개탄하여 지은 것으로 당시 그것을 읽 고서 亂臣賊子들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 하였다는 春秋 는 바로 名分論의 기준을 마 련해 준 것이라 하겠다.50) 국가로 말하면 正統性의 기준을 마련한 것으로 군주를 시해한 45) 일찍이 元 干涉期 文化를 植民地的 文化로 파악한 金哲埈은 당시 歷史敍述 및 그 時期에 대해서 批判的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金哲埈, 中世文化의 成立과 民族意識의 成長 韓國史學史硏 究 pp.84 89). 그러나 筆者는 이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주26 참조). 46) 閔漬의 本朝編年綱目 을 綱目體를 채택한 최초의 史書 로 주목한 연구로 다음의 연구가 있다. 閔賢九, 閔漬와 李齊賢 ( 斗溪 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p.349및 邊東明, 鄭可臣 과 閔漬의 史書編纂活動과 그 傾向 ( 歷史學報 130) pp ) 陳芳明, 李範鶴 역, 宋代 正統論의 形成과 그 內容 ( 中國의 歷史認識 下, 創作과 批評社, 1985) pp 및 成白曉, 資治通鑑綱目 解題(保景文化社, 影印本, 1987) pp ) 趙珖은 朝鮮後期의 歷史認識 ( 韓國史學史의 硏究, 韓國史學會 編, 乙酉文化社, 1985) pp 에서 朝鮮後期의 歷史認識의 특징으로 經史一體的 歷史認識으로부터 역사학의 독자 성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있는 점과 華夷觀 正統論이 점차 부정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지적은 綱目體 史書의 편찬의미와 한계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49) 呂謙擧, 宋代史學的 義理觀念 ( 中國史學史論文選集, 杜維連 黃進興 編, 臺北 : 華世出版社, 民國 65年, 1976) p.402, 宋代史學多强調義理精神 其用心在使 史學經學化 竝進而將經興史併爲一 體 同歸到理經學爲道之理 史學爲道之用 (中略) 爲中國史學放一特有的色彩. 50) 孟子 권6, 滕文公章句下(주 36 참조).

13 - 139 자에게는 正統을 부여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51) 이러한 일종의 道德史觀은 일찍이 北 宋 歐陽修의 正統論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나 실제로 正統論에 입각하여 體裁인 義例를 정하고 편찬된 史書는 性理學을 체계화시킨 朱子의 資治通鑑綱目 이 처음이라 하겠 다. 朱子는 본서의 序例에서 義例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매년마다 年度(干支)를 표시하고 그 年度에 따라 正統(年號)을 밝혔으며, 事件을 大書 하여 綱要를 들고 細字로 分注하여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리하여 年歲의 久近과 國統의 離合, 事辭의 詳略, 議論의 同異로 하여금 通貫하고 曉析하여 歷史의 事實을 환 히 알 수 있게 하였다.52)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독특한 凡例를 들고 있다.53) 이러한 綱目의 凡例는 조선 후기 安鼎福의 東史綱目 의 범례와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朱子性理學的 價値觀을 바 탕으로 하였기 때문이다.54) 그런데 고려후기에 本朝編年綱目 이 閔漬에 의하여 편찬되었다는 것은 王의 命에 의한 것이지만 주목되는 바이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性理學 발흥과 표리관계가 있다 고 여겨진다. 閔漬는 42권에 달하는 本朝編年綱目 을 편찬하는데, 이 책은 國祖 元德 大王(損乎述, 改名은 寶育)으로부터 高宗까지 이르는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책은 그에 앞서 閔漬가 權溥와 함께 편찬한 世代編年節要 (7권)보다 상세하고 독특한 역사 서술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昭穆의 論도 節要의 것과 달리 高麗의 전통적 昭穆을 옹호하였다.55) 더구나 本朝編年綱目 이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忠烈 王代의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鄭可臣의 千秋金鏡錄 (忠烈 13년 경)을 閔漬로 하여금 世代編年節要 (忠烈 25년 경)로 增修케 한 후, 이를 다시 忠宣王의 命에 의하여 本 朝編年綱目 (완성은 忠肅 4, 1317)으로 編纂하였던 것이다.56) 51) 朱子는 종래 魏의 曹丕에게 정통성을 둔 것이 아니라 蜀漢의 劉備에게 正統을 두었다. 여기서 正 統이란 天命과 人心이 돌아온 국가의 경우에 붙여질 수 있으며 李齊賢은 宋을 正統으로 파악하고 遼와 金을 正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鄭求福, 李齊賢의 歷史認識 震檀學報 51, 1981, p.260). 52) 資治通鑑綱目 序例, 而因年以著統 大書以提要 而分注以備言 使夫歲年之久近 國統之離合 事 辭之詳略 議論之同異 通貫晓析如指諸掌 名曰資治通鑑綱目. 53) 朱子의 資治通鑑綱目 의 凡例는 다음과 같다. 1. 統系 2. 歲世 3. 名號 4. 即位 5. 改元 6. 尊位 7. 崩葬 8. 纂賊 9. 廢徒 10. 祭祀 11. 行幸 12. 恩澤 13. 朝會 14. 封拜 15. 征伐16. 廢黜 17. 罷免 18. 人事 19. 災祥(19節 133條). 54) 韓永愚, 18세기 후반 南人 安鼎福의 思想과 東史綱目 ( 朝鮮後期史學史硏究, 一志社, 1989) pp ) 櫟翁稗說 前集1 및 鄭求福, 高麗時代의 歷史意識 ( 傳統과 思想 Ⅳ, 韓國精神文化硏究 院, 1990) p ) 千秋金鏡錄 을 世代編年節要 로 개찬한 것이 元의 압력에 의한 것(金相炫, 高麗後期의

14 - 140 國史館論叢 第55輯 그러면, 이 本朝編年綱目 을 편찬한 동기는 무엇일까. 高麗史 에 忠穆王 2년 敎 에 보면 太祖께서 開國하신 지 429年인 지금에 그 동안 典章文物과 嘉言善行이 비장되어 전해 지지 않으면 무엇으로 후세에 보이리오. 그러므로 우리 忠宣王께서 臣 閔漬에게 命하여 編年綱目을 編修케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闕漏가 많아 마땅히 纂述을 더하여 中外에 頒布할 것이다57) 고 하였다. 本朝編年綱目 을 편찬할 당시 上王이었던 忠宣王이 새로운 史書를 요구한 목적은 高麗王朝의 典章文物과 嘉言善行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고자 함이었다는 것이 다. 忠宣王은 高麗의 역사를 元에게 자랑스럽게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58) 그리고 綱目體를 편찬한 閔漬( )는 高麗後期 宰相之族이며 權門世族인 驪興 閔氏 가문의 후손으로 19세에 乙科 壯元 등제하여 官路에 나갔던 인물이다.59) 특히 세 번에 걸친 入元活動을 통하여 政治 外交家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30세 때인 1269년(元宗 10)과 1290년(忠烈 16) 및 1293년에 元에 다녀오고 있다. 그는 당시 高麗의 대표적 儒學者로서 元나라의 학자와 교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이 주목되는 바이다.60) 이처럼 忠宣王이 高麗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겨 그것을 당시 대표적인 儒學者요 權 門世家 출신인 閔漬에게 명하여 綱目體 史書로 편찬케 한 것이 本朝編年綱目 이라 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선 一然과 李承休를 통해 살필 수 있었던 새로운 歷史認識의 흐름이 그대로 이어져 官撰의 史書에까지 반영될 수 있게 되 었다는 점이다.61)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의 표출이 이 史書의 편찬 배경이 歷史認識 韓國史學史의 硏究 pp.81 82)이 아니라 高麗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산물로 보았다(邊東明, 앞의 논문 p.20). 57) 高麗史 권37, 忠穆王 2년 10월 庚申條, 敎曰 太祖開國四百二十有九年于玆其閒 典章文物嘉言 善行秘而不傳 何以示後 故我忠宣王命臣閔漬修編年綱目 尙多闕漏 宜加纂述頒布中外. 58) 종래 高麗王室의 先系가 종래 唐 肅宗과 연결되었음을 내세워 혈통의 존귀함을 강조해 왔는데 그 신빙성이 中國 학자들로부터 의문이 제기되자 閔漬는 唐 宣宗에 연결된다는 부분을 주장하여 忠 宣王이 元에서 위기를 벗어난 일들이 있었다( 高麗世系 高麗史 ). 이에 대한 전후 사정은 邊 東明, 鄭可臣과 閔漬의 史書編纂活動과 그 傾向 pp.22 23이 참조된다. 59) 閔漬의 家系에 대해서는 李齊賢의 閔漬墓誌銘 을 분석한 정치한 연구가 있다(閔賢九, 閔漬 와 李齊賢 pp ). 60) 왜냐하면 性理學의 傳來시기를 보통 安珦이 元에 다녀오는 1290년으로 잡고 있는데, 閔漬가 처음 元에 使行하는 시기가 이보다 앞섰을 뿐 아니라 그가 성리학의 발흥과 관계있는 綱目體 史書를 편찬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고려의 性理學 受容은 여러 경로와 과정들을 겪고서 수용된다는 推 定도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또 李齊賢의 櫟翁稗說 前集 2에 보면 正文이 安杜俊에게 학문을 익힌 때가 대체로 1260년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尹絲淳, 韓國儒學思想論 pp.18 19)을 생각 할 때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安珦이 元에서 받아들이는 때 보다 30년 전부터 이미 安杜俊이나 閔漬 등 일부 학자들이 性理學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한다.

15 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歷史認識이 王과 權門世家 출신의 儒學者에게까지 확산되면서 당시 로서는 進一步된 史書요, 正統論과 名分論을 중시하는 綱目體의 體裁를 빌어 歴史叙述로 구현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本朝編年綱目 이 傳存되지 않으므로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史書에는 새로운 歴史認識을 바탕으로 보다 정돈된 儒敎的 理 念과 正統論的 價値를 추구하는 입장이 담겨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綱目體 史書를 처음 편찬한 朱子에 의해 체계화된 朱子性理學을 高麗에서 受容할 수 있는 母胎 가 갖추어짐을 뜻한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元 干涉期 綱目體 史書의 등장을 가져 왔는데 이는 性理學 受容의 또 다른 기반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지방향리 자제이면서 禪僧인 一然을 통하여 自主的이고 庶民意識이 담겨 있는 神異史觀을 보았고, 李承休를 통해서는 유학자로서 一然의 神異史觀과 공통되는 요소를 지니면서도 보다 유교적인 歴史認識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았다. 그리고 閔漬의 綱目體 史書의 편찬은 역사서술의 進一步요 春秋筆法에 의거한 名分論的 史書의 등장이라는 점 에서 주목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綱目體 史書의 등장은 一然과 李承休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歴史認識 의 변화를 계승하면서 새로운 理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곧 性理學의 受容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Ⅲ. 新進士大夫의 成長 武臣政權時代에 武臣들의 필요성과 文人들의 갈망 속에서 能文能吏의 신관료들이 鄕 吏層으로부터 진출하는 경향이 나타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위치는 사회 세력으로서 그리 대단하지 못하였다. 좀 더 성장의 시간과 과정을 기다려야 하였다. 그 것은 忠烈王代 이후 諸改革案62) 속에서 駙馬國 체제하의 실권을 가졌던 權門世族과 대 항하면서 성장하여 新進士大夫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61) 本朝編年綱目 이 高麗史 등의 編纂에 자료로서 이용되었음은 尹淮의 進讐校高麗史序 東文選 권93에 의하면 鄭道傳과 鄭摠이 高麗國史 를 撰하면서 高麗王朝의 實錄과 함께 閔漬의 本朝編年綱目, 李齊賢의 史略, 李穡의 金鏡錄 등을 자료로 이용하였다고 하였 다. 그리고 高麗史 高麗世系 에는 本朝編年綱目 이 세군데나 인용되고 있다(閔賢九, 閔漬와 李齊賢 p.349, 주 69 참조). 62) 蒙古干涉期인 고려후기의 諸改革案을 시대순서로 든다면, 洪子藩의 便民十八事(忠烈王 20, 1294), 詞林院을 중심으로한 忠宣王의 改革(忠烈王 24, 1298), 忠肅王 12년의 下敎(1325), 忠穆王 원년의 李齊賢의 改革案(1344), 忠穆王 3년의 整治都監의 改革案(1347), 恭愍王 원년의 李穡의 改革案 (1351), 恭愍王 5년의 反元改革(1356) 및 同王 14년 辛旽의 改革案(1365) 등을 들 수 있다.

16 - 142 國史館論叢 第55輯 그러면 먼저 고려후기 제개혁 속에서 성장하는 能文能吏들이 어떻게 신진사대부로 세 력화 되어 가는가를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第Ⅱ節에서 元 干涉期의 대표적인 禪僧 一然 과 新進士人 李承休의 歷史認識을 통하여 현실의식을 살펴 보았는데 이제 고려후기 여 러 개혁 속에서 성장하는 新進士大夫의 성장을 통하여 性理學 受容의 한 배경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먼저 新進士大夫63)의 정치 사회적 성장에 먼저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忠宣王의 詞林 院을 중심한 개혁정치가 아닌가 한다. 忠宣王은 詞林院을 설치(1298)64) 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는데 이때 親元的인 權門世族의 제거와 地方出身의 신진세력을 등 용하여 선비의 기질인 청렴을 바탕으로 하는 士大夫政治를 구현하기 시작하였다.65) 그런 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사대부정치의 구현에 앞장섰던 詞林院 學士들의 성격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은 元의 간섭하에 집권하고 있었던 당시 친원적인 權門世族66)의 성분과 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즉 詞林院의 4學士인 朴全之 崔旵 吳漢卿 李瑱과 李承休 權永 (溥) 등이 주요 구성원인데 이들의 출신과 성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朴全之(1246?)는 竹州人으로 父 暉는 典法判書에 이르렀는데 全之 나이 약관(20 세)이 못 되어 등제하였다. 인하여 元에 머물러 中原의 名士들과 교유하였는데 古今 山川 風土를 헤아려 셋각하여 이것을 가리킴이 손바닥같이 하였다.67) ② 吳漢卿(詞)은 海州人으로 元宗初에 監試에 第一로 합격하여 東宮侍學이 되고 등 제하였다.68) ③ 李填은 慶州人으로 三韓功臣 李書의 후손이다. 등제하여 충렬왕이 詩賦로서 친 63) 여기서 新進士大夫라 함은 武民亂 이후 元 支配 속에서 전개되는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權門世族 과는 달리, 대개 鄕吏子弟이거나 미미한 가문 출신자로서 거의 科擧를 통해 入仕한 자들로서 性 理學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지녔으리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말한다. 64) 高麗史 권76, 百官志1 藝文館條, 忠烈王 二十四年 忠宣 又罷政房 使本署主選 尋改爲詞林院 委以出納之任. 65) 忠宣王의 개혁은 먼저 忠烈王 24년 정월 即位敎齊와 同 4월의 政房의 폐지 및 同 5월의 詞林院 설치를 통한 본격적인 개혁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로 李起男, 忠宣王의 改革과 詞 林院의 設置 ( 歷史學報 52, 1971)가 있어 新進士大夫의 성장에 대한 이해를 크게 돕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익주, 충선왕 즉위년(1298) 개혁정치 의 성격 ( 역사와 현실 7, 1992)와 朴鍾 進, 患宣王의 財政 改革政策과 그 性格 ( 韓國史論 9, 서울大, 1983) p.71 등에서 忠宣王代 의 개혁들이 反元的 要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反元改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어 주목된다. 66) 즉 權門世族의 성분은 고려전기의 門閥貴族이나 武臣政權時代의 집권층의 후예도 있었지만, 駙馬 國體制로 특징지우는 새로운 양상의 對元關係를 통하여 대두된 경우가 많았다(閔賢九, 高麗後 期의 權門世族 한국사 8, p.40). 67) 高麗史 권109, 朴全之傳, 朴全之 竹州人 父暉至典法判書 全之年未弱冠登第 因留元 與中原名 士遊商榷古今山川風如指諸掌. 68) 위의 책, 吳詞傳, 吳漢卿(詞) 海州人 元宗初 中監試 第一 登第.

17 - 143 히 문신을 시험하여 九人을 얻었는데 瑱이 제2에 뽑혔다.69) ④ 李承休( )는 京山府 嘉利縣人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力學하며 高 宗때 등제하였다. 忠宣王( )이 즉위하며 下書하기를 다만 文才와 吏 用이 당시에 비할 바 드물 뿐 아니라 때를 만남이 불우하여 臺閣에서 자취를 벗 어나 헛되이 岩谷에서 늙으니 내가 일찍이 이를 민망히 여겼노라.70) ⑤ 權溥( )는 초명이 永으로 충렬왕 5년 나이 18세로 등제하였는데 독서 를 즐겨 늙어도 쉬지 않았다. 일찍이 朱子의 四書集註 를 建白하여 간행하니 東方性理學이 溥로부터 시작되었다.71) ⑥ 晋州守 崔旵에 바친 綾羅가 조잡하므로 權(㫜)을 旵과 함께 파하니 재상이 말하 기를, 旵이 백성을 위하여 폐를 고치고 파면되니 누가 백성을 걱정할 자 있으리 오 라고 하였다.72)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忠宣王時 최고의 권력기관이면서 政治顧問機關인 詞林院 學士들의 공통점은 첫째로, 모두 科擧로 진출할 뿐 아니라 文名을 떨치고 있다는 점이 다. 朴全之는 元에 衣冠子弟로 入侍하면서 그곳 名土와 교유하고 있었고, 李瑱은 유명한 李齊賢의 父로서 충렬왕의 親試에서 9명 중 두번째로 합격하였다. 또한 吳漢卿은 監試에 서 제1로 뽑힌 자요, 帝王韻紀 를 지은 李承休도 역시 일찍이 書狀官을 지내 文才와 吏用이 당시에 비할 바가 드물 정도였다.73) 그리고 權㫜는 18세에 등과하여 늙어도 쉬지 않고 독서를 즐겼는데 朱子의 四書集註 를 建白하여 간행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崔旵 역시 청렴한 權㫜과 함께 일시 파직되는 것으로 보아 四學士의 성분과 대동소이한 인물 이었던 것 같다. 詞林院 學士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鄕吏 出身이면서 청렴함과 惠政을 베풀려고 노력 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74) 陽村集 에 의하면, 69) 위의 책, 李瑱傳, 李瑱 慶州人 三韓功臣 李書之後 登第 忠烈王 以詩賦親試 文臣得九人 瑱居第二. 70) 위의 책 권106, 李承体傳, 李承体 京山府嘉利縣人 小孤力學 高宗朝登第 非止文才吏用 當時罕 比 遭時不遇 脫跡 臺閣虛老岩谷 矛嘗憫之. 71) 위의 책 권107, 權㫜傳 附 溥, 權溥初名永 忠烈王五年年十八登第 嗜讀書 老不輟 嘗以朱子四書集註 建白刊行 東方性理學自溥倡. 그리고 權溥의 家門에 대한 설명으로는 閔賢九, 高麗後期 權門世 族 과 金哲埈의 益齋 李齊賢의 史學 이 있고 최근 金勳植의 연구( 高麗後期의 孝行錄 보 급 韓國史硏究 73, 1991, pp.37 42)가 있다. 특히 후자는 權溥의 孝行錄 보급은 儒敎的 가족윤 리를 생활 규범화하여 지배층의 족적 결집을 유지하려는 의미가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p.46). 72) 高麗史 권107, 權㫜傳, 晋州守 崔旵所貢綾羅 麤 與旵竝罷 宰相言(權)㫜爲民革弊而罷 孰有憂 民者 尋復其職. 여기서 崔旵은 傳이 없기 때문에 四學士의 한 사람인 權永의 父 權㫜傳에 소신 껏 晋州守를 보았던 崔旵의 기사가 찾아지기에 附記하였는데 詞林院 학사들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73) 詞林院의 四學士의 한 사람인 李承体의 歷史認識에 대하여 이미 앞 節에서 살펴 본 바 있다. 74) 李起男, 앞의 논문 pp

18 - 144 國史館論叢 第55輯 權㫜은 성품이 지극히 청렴하고 善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며(중략), 그의 子 權溥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갠 하늘처럼 맑은 마음을 지니고 공경으로 임금을, 성심으로 어버 이를 섬기었으며 동료간에 화목하고 친척에게 은혜를 베풀어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 던 인물이다75)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忠宣王時 사림원 학사들은 자기 능력에 의하여 진출한 선비의 기질을 지닌 청렴한 인물들이었다. 그리하여 王도 그들을 대할 때는 항상 左右를 물리치 고 詞林院에 나아가 朴全之 등 四學士와 정치를 꾀하였다.76) 그러므로 이들이 펼치는 정 치는 新進士大夫의 成長 과정이었다. 그러나 忠宣王의 詞林院을 중심으로 한 改革政治는 王 즉위 7개월 만에 元에 의한 忠 宣王의 강제 퇴위와 아울러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만큼 親元派 중심의 權門世 族의 반발과 元의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50여 년 후인 忠穆王 3년(1347)에 整 治都監( )이 설치77)됨으로써 새로운 개혁이 시도되었다.78) 당시 忠穆王代 ( )는 고려가 元의 정치적 영향권 안에 들어간 지 80여 년이 지난 때이라 奇型 的인 對元關係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모순이 극화되었던 시기였음은 주지의 사실 이다. 즉 外方官吏의 탐학과 征東行省의 作弊로 인한 정치면의 모순, 토지탈점으로 인한 農莊의 혁파문제 및 高利貸 노비탈취 등 사회문제 등이 바로 개혁되어야할 모순들이었 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활동하였던 王煦 安軸 田祿生 白文寶 등 이른바 整治官 38명의 공통적인 성격과 활동79)을 이해한다면 그후 간단없이 전개되는 士大夫政 治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대표적인 整治官들의 예를 高麗史 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王煦는 사람됨이 剛正하고 莊重하며 평생에 망언하지 아니하였으며 글을 조금 읽 으면 大義에 통하였고 다시 재상이 되어서는 利를 일으키고 害를 제거하는 것으 로써 마음을 먹었다.80) ② 安軸은 마음 가짐이 公正하고 집을 다스림에 근검하였다. 이르기를, 내 평생에 可 75) 權近, 陽村集 권35, 東賢史略 贊成 權㫜 및 政丞 權溥, 公性至淸 樂善好施 嘗有遁世之志. 및 未嘗一見彈劾 溫乎春風 湛乎晴空 敬以事君 誠以事親 睦於寮友 惠於族姻. 76) 高麗史 권109, 朴全之傳, 王常屏左右 幸詞林院 與全之等 謀議政理. 77) 위의 책 권77, 百官志2 諸司都監各色 整治都監條, 忠穆王三年置 判事四人 判密直 以上爲之 使九 人 副使七人 判官十二人 錄事六人 分遣諸道量田 忠定王 元年罷. 78) 閔賢九, 整治都監의 設置經緯 ( 國民大論文集 11, 1977)와 整治都監의 性格 ( 東方學 志 合, 1980). 79) 閔賢九, 整治都監의 性格 pp 에 整治官 一覽表 가 있어 이해를 크게 돕고 있다. 80) 高麗史 권110, 列傳 王煦傳, 爲人剛正莊重(中略) 平生不妄言 梢讀書通大義(中略) 再宰相以興 利除害爲心.

19 - 145 히 이렇다 할 것이 없으나 네번 士師(訟獄을 관장하는 官吏)가 되어 무릇 백성이 억울하게 노예가 된 자는 반드시 다스리어 良民으로 삼았다 고 하였다.81) ③ 田祿生은 整治官이 되어 權豪를 엄하게 다스려 그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저지되어 薦擧에 應함을 얻지 못하였다.82) ④ 白文寶( )는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정직하며 이단에 의혹되지 않고 글을 잘 지었다83) 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즉 사림원의 학자들처럼 이들 整治官들은 종래 權豪들과는 달 리 청렴하고 惠政을 베풀려고 노력한 인물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知的風土를 이해할 수 있는 門生관계 내지는 血緣관계를 가지고 있다. 王煦는 詞林院 學士인 權溥의 아들이요, 李齊賢의 妻男으로서 蔭敍로 진출하지만 忠宣王의 養子가 되어 王氏姓을 下姓받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安軸은 鄕里出身의 安碩의 아들로서 元 制科에까지 합격한 儒者로 李齊賢과 同年輩로 白文寶에게는 大先輩가 된다. 田祿生도 신진사류로 분류되는 인물이고, 白文寶는 일찍이 15세에 權溥로부터 受學하다 가, 18세에 李齊賢을 考試官으로 하여 李糓과 함께 科擧에 합격하여 20세에 白頣正의 門 下에 들어가 2년 정도 수학하였다. 그 후 그는 易學說을 지었다 하는데84) 性埋學에 대한 知見을 넓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스승인 白頣正은 權溥, 禹 倬과 더불어 安珦의 弟子로서 忠烈王 24년(1298)에 王位에 물러나 入元하는 忠宣王을 따 라가 燕京에 가서 10년간 侍從하면서 程朱全書를 많이 구해 가지고 돌아와 東方學者들 이 性理學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로 유명하다.85) 역시 공정 정직한 儒者的인 인물이었다. 整治官들은 곧이어 전개되는 恭愍王代의 改革政治와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점이 주목 된다. 즉 白文寶는 공민왕대에도 政堂文學의 宰相에도 오르는가 하면 도첩제 실시를 주 장한 유명한 排佛論者86)이기도 하다. 田祿生은 공민왕대의 臺諫職을 지낸 인물이고 李元 81) 위의 책 권109, 列傳 安煦傳, 處心公正 持家勤儉 嘗曰 吾平生 無可稱 四爲士師 凡民之屈抑爲奴者 必理而良之. 82) 위의 책 권112, 列傳 田祿生傳, 祿生嘗爲整治官 究治權豪 忤其意 以故沮之 未得應擧. 83) 위의 책 권112, 列傳 白文寶傳, 性廉潔正直 不惑異端 善屬文. 84) 高麗의 性理學 수용 및 성립은 周易 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한 것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일찍이 白文寶는 禹倬의 易學에 심오한 이해를 가졌는데 그가 卒하자 祭文을 지어 애도하였고, 權溥 白頣正을 스승으로 하고 李齊賢을 座主로하여 學問的 成長을 가져왔다. 85) 高麗史 권106, 白文節傳附 白頣正傳 및 尹瑢均, 尹文學士遺藁 (朝鮮印刷株式會社, 1933) pp 白文寶에 대한 政治家로서의 활약과 특히 周易 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이해수준에 대해서는 최근 閔賢九의 정치한 연구가 있다( 白文寶 硏究 東洋學 17, 1987). 86) 위의 책 권112, 白文寶傳, 新羅始崇佛法 民喜出家 鄕驛之吏 悉逃徭賦 士夫有一子亦皆祝髮 自今官 給度牒 始得出家 三丁不足者 幷不聽.

20 - 146 國史館論叢 第55輯 具는 그의 아들이 李崇仁이다. 그리고 李天白의 아들은 李行으로 威化島回軍 이후 田制 改革의 上書로 유명한 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整治官은 高麗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적 극적인 성격을 지닌 자들이요, 나름대로 士大夫政治를 구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整治 都監의 개혁활동이 元帝의 命에 의한 것이라 궁극적인 결과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 구체적인 추진력과 객관적인 조건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개혁은 다시 기다려야 하였다. 하지만 7, 8년 후에 있는 恭愍王代의 反元改革政治와 연결될 수 있다 는 면에서 귀중한 역사적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고려후기 본격적인 개혁정치로 恭愍王代( )의 改革政治를 들 수 있다. 특히 공민왕대의 개혁정치는 反元運動과 동시에 이루어져서 新進士大夫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分岐點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忠烈王代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신진세력이 점차 그 위치를 뚜렷이 하려는 시기에 즉위한 恭愍王은 마침 元帝 國의 衰微을 틈타 전격적 反元 自主政策을 표방하면서 奇轍 등 親元分子를 거세시키고 그동안 누적된 정치 사회적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87) 恭愍王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朴尙哀 林樸 鄭夢周 李存吾 金九容 李齊顔 鄭道傳 李崇仁 朴宜中 尹紹宗 등 신진사대부들을 重用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科擧에, 합격한 文 臣들이요,88) 恭愍王代의 많은 변혁은 그들의 성장배경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 다. 따라서 新進士大夫인 이들은 中原大陸의 변화와 국내 정세의 변동을 경험하면서 自 己認識 내지 自主意識을 더욱 심화시켰던 것이다. 또 恭愍王 16년에 成均館 重營89)으로 말미암아 性理學에 대한 연구와 토론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90) 성균관 중영이야말로 신진사대부들로 하여금 서로 유대를 굳히면서 성 리학을 政治哲學과 行動倫理로 삼아서 대외적으로는 反元 親明政策을, 대내적으로는 佛 敎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주었던 것이다.91) 87) 恭愍王의 개혁정치에 대해서는 閔賢九의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 ( 歷史學報 38 40, 1968)이 있다. 88) 이들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閔賢九의 위의 논문 p.84의 표 8 의 新勢力 成長表 가 참조된다. 그러나 이들의 對 現實認識이라든가 經濟的 背景 및 佛敎認識의 차이에 대하여는 좀더 연구되어 야 한다고 본다. 89) 高麗史 권74, 選擧志2 學校 恭愍王 16년조, 成均祭酒 林樸上言 請改造成均館 命重營國學于崇 文館舊址 令中外儒官 隨品出布 以助其費 增置生員 常養一百 始分五經四書齋. 90) 위의 책 권112, 列傳 李存吾傳, 李存吾 恭愍王 九年登第 與鄭夢周 朴尙哀 李崇仁 鄭道傳 金九 容 金齊顔 相友善講論. 91) 成均館의 重營에 대한 의미로 李成茂는 鮮初의 成均館硏究 ( 歷史學報 합, 1967) p.224에서 일찍이 공민왕의 성균관 重營을 王權 强化策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閔賢九는 辛 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 pp.72 82에서 특히 국제관계의 변화와 국내정세의 변동을 경험하 면서 당시 고려사회의 基層에 흐르고 있던 自己認識 自主意識에 철저히 하기 위하여 朱子學의 전래 및 成均館 重營을 지극히 주목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1 - 147 이상에서 元 支配下 親元的인 權門世族과 대항하면서 등장하는 新進士大夫들의 성장의 과정을 보았다. 忠宣王 忠穆王과 恭愍王代에 이루어지는 諸改革案과 그 시도는 신진사대 부 세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요, 또한 그들의 성장은 당시 知的風土를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性理學 受容의 한 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다. 더구나 그들이 추구한 社會的 理念은 종래의 불교에서 찾으려 한 것도 아니고 漢唐儒 敎에서 구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이론적 무기를 性理學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신진사대부는 武臣政權下의 能文能吏 新官人層과의 차이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데,92) 그 차이점이 바로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知的 人的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Ⅳ. 性理學의 受容 本節에서는 元 干涉期 新進士大夫의 성장이 어떻게 性理學 受容과 연결되느냐는 시각 에서 성리학 수용의 初期形態와 李齊賢의 性理學을 보고자 한다. 즉 전자의 이해는 安珦 白頣正 등을 주목하고 이어서 본격적인 성리학의 수용은 李齊賢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다. 특히 元 干涉期 마지막 시기에 當代의 學問과 思想을 이끌었던 人物인 李齊賢을 통하며 성리학의 수용을 보고자 한다. 당대의 高官으로서, 最高의 知識人으로, 그리고 歷史家로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가지고 활동하였던 그는 또 앞서 본 一然이나 李承休처럼 당대에 歷 史意識을 表出시 키는데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社會的 民族的 고뇌를 구체적인 개혁안을 가지고 제시하였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 이 시기는 新進士大夫들이 諸改革案 속에서 성 장하여 어느 정도 성리학이 수용될 수 있는 知識風土와 學界가 형성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李齊賢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성리학의 수용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性理學 受容의 初期形態 이미 武臣政權期 儒 佛 交涉과 元 干涉期 新進士大夫의 성장을 통하여 통치 지배이념 과 지배층의 성격이 변화되기에 충분하였다. 여기에 부응하는 것이 종래 宋代 儒學界와 의 交流와 高麗 儒學界 자체내 思想의 深化過程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의 변화 를 바탕으로 좀더 철학적이고 현실적응적인 儒學으로서의 성리학의 수용인 것이다. 이러 92) 性理學이라는 이념적 바탕과 당시 休閑法의 극복을 통한 農業技術의 발달에 힘입은 中小地主로서 新進士大夫는 武臣政權下 能文能吏와 수준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이해된다(李泰鎭, 高麗末 朝鮮 初의 社會變化 震檀學報 55, p.2 및 掘稿, 고려말 조선초 농업기술의 발달과 사회변화 농촌발전연구 17, 서울여자대학교, 1992, pp.40 42).

22 - 148 國史館論叢 第55輯 한 사상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이른바 朱子性理學을 전한 사람으로 安珦과 白頣正을 비롯하여 崔瀣 崔文度 禹倬 權溥 등을 들 수 있다.93) 安珦( )이 활동했던 元 干涉期 초기의 지적풍토를 보면, 당시 禦寇때문에 군 사를 동원한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어 선비들이 모두 갑옷과 투구차림으로 활과 창을 잡아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자는 열에 한둘도 안되어 六經이 실날같이 겨우 전해 질 정 도였다.94) 이럴즈음 그는 재상이 되어 교육의 진홍을 위해 瞻學錢을 설치하고 國學의 大 成殿을 신축하는 등 外的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즉 國學과 庠序를 수리하고 한 經書에 두 교수를 두어서 禁學 內侍 五軍 三軍의 7품 이하로부터 내외 生員에 이르기까지 다 따 라 익히게 하였다. 그리고 博士 金文鼎을 중국에 보내어 孔子 弟子 70子의 畵像 및 祭 器 樂器와 6經 諸子史의 서적을 구하여 오게 하였다. 한편 그의 性埋學과의 직접적 관계 는 高麗史 列傳에 보면, 晚年에는 항상 晦庵先生(朱子)의 眞影을 걸어 놓고 敬慕하여 자신의 號를 晦軒이라 하였다95) 라고 전하고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그가 朱子 性理學을 직접 전래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文集格인 晦軒實記 에 보면 朱子書를 일일이 베껴 왔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朱子에 대한 대단한 흠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武臣政 權 이후에 쇠잔한 高麗儒學을 부흥시키려는 崔滋같은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나 한다.96) 그러나 白頣正( )의 경우는 실제로 性理學을 배워 가지고 와서 이를 연구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음이 사료상으로는 잘 나타나고 있다. 列傳에 보면, 그때에 程朱學이 처음으로 中國에서 행하여졌으나 東國에는 미치지 못했었는데 頣正이 元에 머물면서 그것을 배워 가지고 돌아오니 李齊賢 朴忠佐가 제일 먼저 師受하였다97) 라고 하였다. 특히 櫟翁稗說 前集 2에 보면 白頣正이 忠宣王을 따라 元都에 10年間 93) 이러한 性理學 受容의 초기형태의 연구로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張志淵, 高麗儒敎淵源 (涯東書 館, 1922), 尹瑢均, 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いて ( 尹文學士遺藁. 그리고 근자에 이르러 서는 鄭玉子, 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 ( 震檀學報 51, 1981)와 金忠烈, 高麗 의 元代性理學 수용 ( 元代 性理學, 포은사상연구원, 1993)을 들 수 있다. 94) 櫟翁稗說 前集2, 丁亥之勤王 庚寅之禦寇 用兵幾二十年 士皆袵金革操弓戈 挟策而讀書者 十不 能一二 而先輩老儒物故且盡 六籍之傳不絕如綫. 95) 高麗史 권105, 安珦傳, 晚年 常掛晦庵先生眞 以致景慕 遂號晦軒. 96) 拙稿, 崔滋의 儒學思想과 性格 武臣政權期 儒學思想의 動向 ( 서울여대논문집 19, 1990) pp 참조. 97) 高麗史 권106, 白文節附 頣正傳, 時程朱之學 始行中國 未及東方 頣正在元 得而學之東還 李齊 賢 朴忠佐 首先師受.

23 - 149 머물면서 많은 程朱性理學의 서적을 구해 돌아 왔으며, 그의 (李齊賢) 丈人인 政丞 權溥 는 四書集註 를 얻어 간행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또한 道學이 있 음을 알게 되었다 98)고 하는 것을 보면 朱子 性理學의 전래를 白頣正부터 잡는 것이 타 당하리라 본다.99) 특히 그는 安珦이 4개월 정도( ) 머물면서 朱子을 접하 고 돌아온 것에 비하면, 10여 년간 머물면서 朱子 性埋學을 배웠고 귀국시에는 많은 서 적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初期 性埋學을 이끌었던 安珦, 白頭正이 元에 드나들 때 元의 학풍은 어떠했을 까. 이는 향후 高麗 性理學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원래 南宋( )의 朱子學을 元나라에 전파한 이는 趙復( )으로서 太宗이 南 宋을 정벌할 때 포로로 잡혔다가 元에 귀의하여 朱子學을 姚樞에게 전해 주었고 그것을 元의 官學으로 굳혀 놓은 사람이 許衡( )이었다.100) 그런데 그는 姚樞를 만나 朱子書를 얻어 본 후 今始得進學之序 라 하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실천윤리성이 강한 小學 을 神明처럼 믿고 부모처럼 공경하였다.101) 그가 國子祭酒 兼 集賢大學士로 되 었을 때 元나라의 학문과 교육은 그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高麗가 元 干涉期에 元으로부 터 朱子學을 受容함에 있어서 許衡 및 그 제자들의 학풍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 이다.102) 高麗末 元의 國子監에서 3년간 수학한 후 귀국하여 성균관 大司成을 지내면서 朱子 性理學의 敎授와 연구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李穡( )이 이르기를, 孔孟의 學을 講明하고 老莊과 佛敎를 배척하여 萬世를 깨우치는데 이른 것은 周濂溪 程明道 程伊川의 功이요, 宋이 이미 망함에 그 說이 북쪽으로 흘러 들어가 魯齋 許先生 98) 櫟翁稗說 前集2, 白彛齋(頣正) 從德陵 留都下十年 多求程朱性理之書以歸 我外舅政丞菊齋權公 得四書集註 鏤板以廣其傳 學者又知有道學矣. 99) 尹瑢均, 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いて ( 尹文學士遺藁 ) pp ) 朱子學의 元朝에의 도입에 대해서는 鄭玉子, 앞의 논문 pp 文喆永, 麗末 新興士大夫들 의 新儒學 受容과 그 특징 ( 韓國文化 3, 서울大, 1982) pp 참조. 101) 宋元學案 권83, 魯齋學案, 小學之書 吾信之如神明 敬之如父母. 이처럼 중국 元나라에서의 小學 중시의 경향은 특히 麗末鮮初에도 영향을 끼쳐 당시 儒學提調인 權近( ) 등 에 의하면 小學 은 人倫과 世道에 매우 절실한 것이므로 生徒에게 이 글을 익힌 다음이라야 다른 經書를 배우도록 하고 科擧에 나갈 수 있도록 勸學事目을 건의할 정도였다( 陽村集 권 31, 論文科書, 小學之事 切於人倫世道爲甚大(中略) 須令生徒先讀此書 然後方許他經其赴生員之 試. 102) 文喆永, 朝鮮前期 儒學思想의 歷史的 特性 ( 傳統과 思想,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pp 그리고 周采赫은 元 萬卷堂의 設置와 高麗儒者 ( 孫寶基博士停年紀念 史學論 叢, 1988, 知識產業社) pp 에서 萬卷堂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經書이 90% 이상이 宋刊 本이 아니고 元刊本이라고 하면서 이는 朱子性理學의 성격과 관련하여 중요한의 미를 갖는다고 하였다. 즉 元代의 영향이 상당하였음을 강조하였는데 필자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때 元 代를 통해서 性理學이 처음 수용되었다고 보는 바는 물론 아니다. 최근 元代性理學 (1993)이 라는 연구 총서가 나와 元代 성리학과 麗末 성리학 수용기의 성격에 관하여 이해의 폭을 넓혀주 고 있어 주목된다.

24 - 150 國史館論叢 第55輯 이 그 學을 사용하여 元 世祖를 도와 中統 至元의 정치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103) 라고 하였는데 이는 周 程 朱 로 이어지는 道統의 연장선에서 元의 許衡을 중시함을 뜻한다고 하겠다.104) 즉 小學 중시의 實踐倫理를 강조하는 학풍이 元의 思想界를 지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론적인 理氣論보다는 小學 중시의 실천 윤리면이 우선적 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당시 고려 性理學 受容은 佛敎의 폐단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해야 했던 高麗儒者의 排佛論 속에서 자연스럽게 實踐倫理面이 우선적으로 수용된 것이 특 징이라 할 수 있다.105) 좀 구체적인 예를 찾아 보면 安珦이 國子監에서 학생들에게, 聖人의 道는 日用倫理에 지나지 않으니 아들이 되어 孝道해야 되고 臣下가 되어 忠誠 해야 하며, 禮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信으로써 벗과 사귀며 자기를 닦는데는 敬으로써 하고 일을 실천하는 데는 반드시 誠으로써 할 뿐이다. 저 佛者들은 부모를 버리고 出家 하여 倫理를 이그러뜨리니 곧 夷狄의 무리이다106) 라고 하였다. 忠 孝 禮 信 敬 誠 등 實踐的 德目은 모두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 으로 朱子가 小學 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며 이러한 實踐德目에서 佛者들의 非倫理性 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성리학 수용의 初期形態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이처럼 종교적인 心性論이나 철학적인 理氣論보다는 日常生活의 實踐倫理를 강조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許衡 등 元 思想界의 동향과 軌를 같이 하면서 이제 초보적 단계이지만 점차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곧 후술하는 바와 같이 성리학이 본격적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을 정도의 역할을 하기에는 30여 년 뒤의 李齊賢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2. 李齊賢의 歷史認識 李齊賢( )은 慶州人 檢校政丞 李瑱의 아들이고 四書集註 를 얻어 간행한 유평한 權溥의 사위이다.107) 또한 朱子 性理學의 전래를 맡은 白頣正이 그의 스승이다. 그 103) 李穡, 選粹集序 ( 牧隱文藁 권9) 및 東文選 권87, 至於講明鄒魯之學 黜二氏詔萬世 周 程之功也 宋社旣屋 其說北流 魯齋許先生用其學 相世祖中統至元之治 胥此焉出. 104) 元의 許衡을 포함한 道統意識은 鄭道傳에서도 찾아지는데, 즉 자신의 학문적 師友와 연원을 許 衡 李穡 鄭夢周 李崇仁 鄭道傳으로 파악하고 있다(鄭道傳, 陶隱文集序 三峯集 권3). 105) 文喆永, 앞의 논문(1990) pp ) 安珦, 晦軒集 諭國子 諸生文, 聖人之道 不過日用倫理 爲子當孝 爲臣當忠 禮以齊家 信以 交朋 立事必誠而已 彼佛者 棄親出家 蔑倫悖義 即夷狄之類. 107) 高麗史 권110, 李齊賢傳, 李齊賢 字仲思初名之公 檢校政丞瑱之子 自幼嶷然如成人 爲文已有

25 - 151 의 주변인물들은 性理學의 受容과 관계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도 자연히 性理學에 대한 기 본적인 素養을 쌓아 이미 15세(1301)에 成均試에 壯元하고 이어서 文科에 及第할 수 있었 다. 그는 才氣 발랄하고 天禀이 준수한 학자로 그의 文名은 일찍이 朝野에 알려졌었다. 그는 표 1 에서 보듯이 28세 때 (1314) 忠宣王이 元京에서 萬卷堂을 짓고 그 곳 학 자듕과 대면할 만한 人物을 뽑을 때 元나라에 뽑혀 갔었다. 그는 그 후 7朝(忠烈 恭愍 王代)에 걸쳐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서 國事를 담당하였고 性理學의 受容과 그 전개에 표 1 李齊賢의 時期別 活動 區 分 時 期 第1期 1287(忠烈王13) (1세 14세) 1300(忠烈王25)(幼年期) 1301(忠烈王 26) 第2期 1313(忠烈王 38) (15세 27세) (科擧及第 後) 活動 및 史書著述 장인 : 權溥 父 : 李瑱 師 : 白頣正 과거급제 15세 때(1301) 知貢擧 權溥의 사위가 됨 22세 때 예문관 춘추관 出仕 23세 때 사헌부 糾正 1314(忠肅王 원년) 上王 충선왕 주도下에 元에서 萬卷堂 생활 시작(28세). 第3期 1320(忠肅王 7) 元의文人과 교류 및 학문생활(姚燧, 閻復, 趙孟頫, 張養浩, (28세 33세) (元 萬卷堂 生活 始) 蕭 (奭+斗)新, 元明善, 虞集, 洪華 등). 3번에 걸쳐 중국 대륙 여행. 34세 때 知密直事로 知貢擧역임(李穀 등 등용) 1321(忠肅王 8) 충선왕 元으로 유배됨. 충숙왕 10년 立省策動 발생. 第4期 1343(忠惠王 後 4) 충혜왕이 잡혀감. (34세 56세) (忠宣王 元 流配) 환국 후 櫟翁稗說 저술(1343). 1344(忠穆王 즉위) 어린 忠穆王 즉위시 上書 올림 어린 忠穆王 교육(論語 1351(忠定王 3) 大學 中庸)과 국내 庶政改革 주장. 第5期 (上書를 통한 改革 주장) 忠穆王 2年(1346) 本朝編年綱目 增修. (57세 64세) 忠穆王 2年(1346)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三朝實錄 편 수 1351(恭愍王 즉위년) 恭愍王 3(1353) 知貢擧로 李穡 등용. 高麗國史 편찬기 第6期 16) 획(白文寶, 李達衷 등). 金鏡錄 편찬. (65세 81세) 1367(恭愍王 (知貢擧) 소극적 反元政策 * 表 작성은 益齋集 과 鄭玉子, 麗末 朱子 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 ( 震檀學報 51) 및 金 哲埈, 韓國史學史硏究 참조. * 李齊賢의 시기별 활동으로 第1期는 科擧及第前까지로 보았고, 第2期는 及第後 및 官僚時期로, 第3期 는 忠宣王을 따라 元의 萬卷堂에 들어가 활동했던 시기를, 第4期는 忠宣王 유배시 활동하였던 시기, 第5期는 上書를 통한 개혁운동 시기, 第6期는 知貢舉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國家 존립을 위해 보냈던 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몽고의 간섭이 제일 심하여 王이 잡혀가고 거듭되는 重祚가 이루 作者氣 忠烈二十七年 年十五魁成均試 又中丙科 曰此小技耳 討論經籍益勤 淹貫精硏.

26 - 152 國史館論叢 第55輯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108) 어지는 어려운 때였다. 따라서 왕권과 왕실의 보존이 國運과 연결되었던 시기여서 生存을 위한 事大的 자세가 불가피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109) 표 2 李齊賢 史賛 內容 區 分 王位繼承에 관한 史贊 對契丹 등 對外關係史贊 君臣에 관한 史贊 各王朝 備 考 太祖, 惠宗, 定宗, 成宗, 穆宗, 文宗, 獻 高麗史 益齋亂藁 卷9下 宗, 肅宗 贊 太祖, 成宗, 顯宗, 靖宗, 文宗 贊 君王의 德政 太祖, 成宗, 顯宗, 德宗, 文宗, 順宗, 宣宗 贊 人君과 臣下관계 惠宗, 光宗, 成宗, 景宗 贊 經濟에 관한 史贊 景宗 贊 科擧에 관한 史贊 光宗 贊 佛敎에 관한 史贊 定宗, 文宗 贊 * 표 작성은 高麗史, 益齋亂藁 참조. 그러면 그의 歷史認識에 관한 것을 그의 史贊 과 上書 등을 통하여 보도록 하겠다. 먼저 太祖에서 肅宗에 이르는 15代에 걸친 歷代王의 평가인 史贊을 보면 王位繼承에 관 한 論赞 등 크게 6개 분야인데110) 이를 표로 정리하면 표 2 와 같다. 표 2 에서 보듯이 주목되는 것은 첫째,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國家秩序의 회복의식 이 크게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로 王位繼承에 관한 기사가 그 중 많이 보이 는데, 특히 創業主인 太祖에 대해서 높이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李齊賢은 太祖王建에 대해 우리 太祖의 규모와 德量으로 중국에 태어 낳었더라면 宋太祖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111)라 하였다. 이는 忠宣王이 太祖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한 내용으로 고려 왕조 108) 성리학 수용과 관련하여 최초의 朱子學徒로 安珦( )을, 실제로 朱子性理學을 받아들인 자로 白頣正을, 이를 널리 전파한 사람으로 權溥( )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性理學 導入의 단서를 열었을 뿐이고 본격적으로 이를 도입하여 新知識으로 소화 흡수하게 된 것은 益齋 李齊賢이다. 109) 李齊賢의 활동시기가 특히 對外的인 면에서 어려운 시기인지라 事大를 合理化하고 被支配를 체 념하는 듯한 歷史認識을 보이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閔賢九,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 震檀 學報 51과 鄭求福, 李齊賢의 歷史認識 震檀學報 51 참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역사인식 과 성리학의 전개에 있어서 限界性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春秋 의 大義名分論과 事大 主義的 자세가 혼재하였던 시기의 대표적 인물이라 볼 수 있다(金哲埈, 앞의 책, pp ). 110) 李齊賢의 史贊은 高麗史 高麗史節要 益齋集 에 전하는데, 高麗史 에는 肅宗赞이 빠진 14의 贊이 있고, 高麗史節要 에는 17편의 史贊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그의 歷史觀에 대한 연구가 있어 도움을 주고 있다(金哲埈, 益齋 李齊賢의 史學, 1967; 韓國史學史硏究, 1990 및 卓奉心, 李齊賢의 歷史觀 梁花史學硏究 合, 1988).

27 - 153 에 대한 自肯心과 自負心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契丹軍을 몰아낼 때 활동한 金就礪에 대한 金公行軍記 에서 국가의 德이 쇠하지 않았을 때 일어날 경우 반드시 훌륭한 신하가 나타나 구제하는 것은 社稷의 神靈이 도와 주기 때문이다 112)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王朝에 대한 애착심은 앞서 본 一然이나 李承休의 神異史觀과 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두번째, 李齊賢의 對外觀을 보면 自主的인 자세와 事大的 자세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충선왕과의 문답 속에 太祖가 後三國을 統合하기 전부터 누차 西都(평양)에 가서 北邊을 邊狩한 의도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석권하기 위함이었다 고 論하였는데 이는 前者的 자세로 보인다. 그러나 거란군이 成宗 12년(993) 제1차 침입 해 온 것에 대해서 成宗의 安北 進兵策을 찬양하면서도 蕭遜寧이 어찌 백성의 일을 돌 보지 않는다고 명분없는 군사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113)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외적 침략보다는 名分의 문제를 중시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 康兆의 죄를 묻는 다는 이유를 내세운 顯宗 元年(1010) 거란의 제2차 침입에 대해서도114) 오히려 이를 거 란 황제의 名分을 가진 征討의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李齊賢의 對外觀에 있어서 消極性과 姑息性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李齊賢의 입장은 元의 壓制 아 래에서 생존을 누렸던 자신의 처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바로 李齊賢이 가 지고 있는 限界性이기도 하다.115) 세번째, 佛敎觀에 대한 그의 贊을 定宗과 文宗贊에서 볼 수 있다. 7만석의 곡식을 하 루만에 중들에게 나누어 준 定宗에 대하여 詩經 과 周易 속의 말을 인용하면서 비난하고 있다.116) 또한 文宗代는 근검 절약을 몸소 실천하여 당시 태평시대라 일컬었던 때인데 당시 불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즉 하나의 縣을 옮길 정도의 지나친 규모와 설 비를 갖춘 사찰을 지은 것에 대해서 불교를 매우 신봉한 梁武帝에 비할 만하다고 혹평 하고 있다. 그러나 李齊賢은 근본적으로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文集에 보 면 나는 어렸을 때 선친을 따라 無畏의 門下에 드나 들었다 117)고 하면서 碑銘을 짓고 111) 高麗史 권2, 太祖2 李齊賢贊, 我太祖規模德量生於中國 當不減宋太祖. 112) 益齋亂藁 권6, 金公行軍記, 論曰 國家之德未衰而禍亂之萌或作 必有魁傑才智之臣得君委 用 弘濟時艱 盖社稷之靈 有以陰相之地. 113) 위의 책 권9, 成王 贊, 蕭遜寧爭能誣不恤民事以興無名之師. 114) 高麗史 권4, 顯宗 원년조, 契丹主謂君臣曰 高麗康兆 弑君大逆也 宜發兵問罪. 115) 閔賢九는 國史存立의 고뇌를 안고 ( 月刊中央 5月號, 1980) pp 에서 이를 對外關 係에서의 退縮的 枯息主義라 하였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李齊賢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이기도 한데, 政堂文學 겸 監察大夫를 지내고 元에서 征東省員外郎에 제수되었던 李仁復 ( )은 운명할 때 거의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당시 元나라였지만 元의 朝服을 입고 운명 했을 정도였다( 疸發背 自度不起 具衣冠 北面稽顙若辭違之狀 高麗史 권112, 李仁復傳). 116) 益齋亂藁 권9, 定宗 贊, 以七萬石穀 一日分賜諸僧 (中略) 所謂君子求福不回 敬以直內者亦 嘗聞其說耶.

28 - 154 國史館論叢 第55輯 있고, 불교의 기본 교리를 유교의 仁 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보아118) 종교로서 의 불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지 불교의 현실적 경제적인 병폐에 대하여 걱정하 였을 뿐이다.119) 다음은 上書에 보이는 李齊賢의 歷史認識을 보도록 하자. 국내정치와 국가재정의 혁신 문제에 대해서는 上書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王朝의 안정과 관련하여 忠肅王 10년 (1323) 立省策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論據로 元에 反對上書를 올렸다. ① 고려는 개국이래 400여 년이나 된 오래된 나라이며 元에 臣服하여 職貢을 닦은 지 도 100여 년이나 되었다. ② 고려가 元을 위해서 세운 공이 많다는 점(軍功과 朝勤의 禮 등 3가지). ③ 元의 歷代皇帝의 存恤의 뜻이 깊었다. ④ 고려는 千里에 불과한 소국으로서 無用之地가 10分의 7이나 되어 元에 경제적 도 움이 안된다. ⑤ 고려는 地遠 民愚하여 언어와 취향이 달라 고려에서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⑥ 이 立省策動을 倭가 들으면 우리의 일로써 경계를 삼아 스스로 得計를 삼을 것이다.120) 즉 이러한 주장은 長久한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宗廟社稷의 신념과 자주적 자긍 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이미 金公行軍記 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元이 高麗 에 立省策動할 경우 그 동안 蒙古에 40여 년간 항쟁해 온 고려 항쟁의 역사를 돌이켜 보도록 암시했던 것이다.121) 또 8세의 어린 忠穆王이 즉위(1345)하자 老大宰相으로서 上 都堂書 로 올린 그의 11條目에는 忠惠王 때의 문제점과 武臣亂 및 元 지배후의 時弊를 해결하려는 그의 기본입장이 나타나고 있다.122) 특히 국가재정과 민생문제 해결에 주력 하여 政房과 鷹房의 혁파 및 權豪들의 횡포 등으로 이중 삼중 시달리고 있는 民生들의 117) 위의 책 권6, 妙蓮寺 重興碑, 某幼從先東菴 進退於無畏之門. 118) 위의 책 권5, 金書密敎大蔵序, 臣腐儒也 其文不足 以稱旨 然以竊念 佛氏之道以慈悲喜捨爲本 慈悲仁之事也 喜捨義之事也. 119) 이러한 면들 때문에 朝鮮初期 備學者들인 高麗史 撰者들이 李齊賢에 대해서 性理의 學을 즐기지 아니하고 定力이 없고 孔孟을 空談한다든가, 心術이 不端하고 作事에 未甚合理하다 는 評을 했던 것이다( 然不樂性理之學 無定力 空談孔孟 心術不端 作事未甚合理爲識者所短 高麗 史 권110, 李齊賢傳). 120) ① 小邦始祖王氏開國以來 凡四百餘年矣 臣服聖朝歲修職貢 亦且百餘年矣. ② 供資粮助器仗 擒戮狂賊 疾如破竹. ③ 其如列聖存恤之意何. ④ 小邦地方不過千里 無用之地十分而七 (中略) 於國家用度 泰山之微塵. ⑤ 地遠民愚 言語與上國不同 趨舍與中華絕異 恐其聞此必生疑懼之心. ⑥ (倭民) 萬一而聞之 無奈以我爲戒 而自以爲得計耶( 高麗史 권110, 李齊賢傳). 121) 鄭求福, 李齊賢의 歷史意識 ( 震檀學報 51) pp ) 高麗史 권110, 李齊賢傳 참조.

29 - 155 생존권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의 改革意志는 恭愍王 때의 知貢擧로서 策問에도 보 이고 있다.123) 이처럼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國家秩序 回復意識과 소극성이 보이는 對外觀 및 불교 에 대한 그의 史贊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또 上書에 나타난 그의 개혁적인 歷史認識 은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입장을 보았다. 특히 대외적인 歷史認識面에 서는 어느 정도 事大的인 면이 보이지만 이는 어쩌면 당시대가 극복해야 하는 歷史的 한계요, 知的風土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3. 李齊賢의 性理學 理解 이제 고려후기 성리학의 수용을 李齊賢의 학문적 경향 내지 성리학 이해를 통하여 살 펴보도록 하자. 먼저 당시 학문적 경향에 대한 李齊賢의 입장은 忠宣王과의 대화 속에서 잘 찾아진다. 일찍이 忠宣王이 우리나라는 옛부터 文物이 中華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제 學者들이 모두 중(釋子)을 쫓아서 章句나 익혀 彫蟲篆刻은 번성하나 經書에 밝고 德行을 닦는 선비는 거의 없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124)라고 王이 묻자 아뢰기를, 본래 우리 나라는 文物이 中國과 버금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中略) 그런데 武臣亂 이후 학자들이 산 속에 들어가 중이 되어 講習하면서 이로부터 승려에게서 章句를 익히 는 습속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임금께서 학교를 일으키며 六藝를 높이고 五敎를 밝혀 선왕의 道를 천명한다면, 누가 감히 眞儒를 버리고 釋子를 따를 것이며 또 實學을 버리고 章句를 익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彫蟲篆刻하는 무리가 經書를 밝히고 德 行을 닦는 선비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125) 라고 하니 王이 기쁘게 납득하였다 한다. 武臣亂 이후 굴절된 학문경향을 설명하고 이제 學校를 열고 學問을 존중하니 누가 眞儒를 등지고 佛敎를 따르겠느냐고 설명하였다. 그 리고 이제 儒學도 종래 訓詁學的 儒學이 아니라 經明行修之士를 닦는 實學이 전개될 것 을 기대하였다. 즉 그는 종래 훈고학적 유학인 章句의 詩文學보다126) 유교적 經學의 공 123) 표 3 李齊賢의 策問 時期別 內容 참조. 124) 櫟翁稗說 前集1, 問臣曰 我國古稱文物侔於中華 今其學者皆從釋子 以習章句 是宜彫蟲篆刻之 徒寔繁 而經明行修之士絕少也. 125) 櫟翁稗說 前集1, 所謂文物侔中華盖非過論也 不幸毅王季年武人變起 (中略) 未免裏足遠 尋蒙 伽梨而遯窮山者以講習之 (中略) 故臣謂學者從釋子習章句 其源盖始于此 今殿下誠能廣學校謹庠序 尊六藝 明五敎 以闡先王之道 孰其背眞儒而從釋子 捨實學而習章句有哉 將見彫蟲篆刻之徒盡爲經 明行修之士矣. 126) 물론 李齊賢도 當代 문장가와 시인으로서도 第一大家라는 評을 받을 정도이지만 그의 학문의 특 징은 古文唱導에 있다는 점이다(林熒澤, 益齋의 古文倡導에 관하여 韓國古典심포지움 第

30 - 156 國史館論叢 第55輯 부와 도덕적 유학의 실천을 중시하는 經明行修之學을 더욱 중요한 학문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는 이미 성리학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이미 마련되어 개인적으로 朱子章句가 읽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127) 한편 李齊賢이 중시한 儒敎 敎科目은 어떠했을까. 왜냐하면 이는 그의 학문경향과 관 련하여 생각할 때 주목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忠穆王 즉위시 都堂에 올린 上書 속세 庶政改革의 주장과 함께 君主로서의 德을 중시하여 王이 공부해야 할 儒敎 敎科目 을 아뢰기를, 敬愼하는 宰相은 德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하고 德을 닦는 要諦는 嚮學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中略) (왕의 공부는 ) 孝經, 論語, 孟子, 大學, 中庸을 講하게 하여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의 道를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 (中略) 四書가 이미 숙독되면 六經을 次例로 講 明하여 텔奢淫佚과 聲 色 狗馬가 耳目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습관이 性品을 이루게 되면 德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당면의 莫急한 일입니다128) 라고 하였다. 즉 ① 敬愼 修德을 강조한 점 ② 大學 中庸을 포함한 四書를 강조하고129) 특히 大學의 주요 내용인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의 道를 주목한 점130) ③ 습관을 통하여 성격형성 이 이루어 진다는 그의 上書 내용은 바로 性理學 理解의 단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李齊賢의 이러한 성리학 이해는 이제 具體的이고 現實的인 改革意志로 나타날 수 있 었다. 즉 사회개혁적 의지를 가지고 기회 있을 때마다 改革을 강조하였다. 그 예를 그가 知貢擧로 있을 때 策問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131) 두 번에 걸쳐 知貢擧를 지내면서 4개 2集, 震檀學會 編, 一潮閣, 1985, pp 및 拙稿, 崔滋의 儒學思想과 性格 서울여대논 문집 19, pp 참조). 그런데 이 古文運動은 唐代 중엽 유학의 復興運動으로 시작하여 宋代 朱子學의 준비단계를 마련하였으며 종국에는 宋代 士大夫文學으로 정착하였던 文學이라고 할 때, 李齊賢의 古文唱導도 성리학의 수용과 관련하여 주목되어야 하리라 본다. 127) 櫟翁稗說 前集2에 보면 우리나라에 성리학 서적이 유포되기 전 1260년경에 이미 儒學者 安 杜俊이 朱子章句 를 神孝寺 堂頭인 正文에게 가르쳤다는 사료가 보이는데 이는 閔漬의 綱目 體 史書의 편찬과 아울러(註 60 참조) 性理學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어져 있음을 의미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金哲埈, 韓國史學史硏究, p.296: 尹絲淳, 朱子學以前의 性理學導入 問題 崔冲硏究論叢 : 文喆永, 麗末新興士大夫들의 新儒學 수용과 그 특징 韓國文化 3) 따라서 그보다 一世紀 후인 이제현 단계는 學界의 形成이 어느 정도 충분하다고 본다. 128) 高麗史 권110, 季齊賢傳, 愼之實莫如修德 修德之要莫如嚮學 (中略) 講孝敬 語 孟 大學 中庸 以習格物致知 誠意正心之道 (中略) 四書旣熟 六經以次講明 驕奢 淫佚 聲色 狗馬不使接于耳目 習 與性成德造罔覺 此當務之莫急者也. 129) 이제현 당시에는 四書集註 등 程朱子之重가 생각보다 많이 유포되어 있어 사람마다 性理의 학문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益齋亂藁 권9下, 策問, 幸際休明 天下同文 家有程朱之書 人知性 理之學 敎之之道 亦庶幾矣 ). 130) 格物治知와 修己治人에 대한 李齊賢의 이해는 그보다 6년이나 적지만 忠宣王 때 활약한 崔文度 ( )의 墓誌銘에 잘 보이고 있는데, 마치 사람의 人格으로 말하면 온화하기는 봄볕과 같고 맑기는 물과 같아서 갑자기 성내거나 기뻐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하였다( 益齋 亂藁 권7, 崔良敬公墓誌銘, 溫然如春陽 湛然如秋波 雖僕妾未嘗一見 其卒怒而遽喜也 ).

31 의 策問132)을 제시하였는데 표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3 과 같다. 표 3 李齊賢의 策問 時期別 內容 時 期 內 容 忠肅 7년 추정 ① 論語 管仲과 狐偃의 일화 (1320) 叔孫通과 鼂錯의 일화 ② 帝王의 系統 司馬遷, 司馬光의 帝紀와 紀年의 의미 國家의 운명 인식과 天命 恭愍 2년 ③ 孟子 朝宗과 法制가 400년 실시되었는데 그 존폐 (1353) 여부 經界, 井田, 什一(경제적) 商鞅의 阡陌法 權豪들의 토지지배의 문제점(奇氏문제) ④ 論語 富 敎, 政治 刑罰(德 禮) 집집마다 程朱의 책과 性理의 학문 유포 됨 倭敵 방지책 좋은 朝廷과 왕을 만나 백성을 새롭게 할 방안 * 표 작성은 益齋亂藁 권9下, 策問 분석. 典 據 高麗史 권110, 列傳 益齋亂藁 권9下 東文選 권108 즉, 李齊賢은 策問 ①, ②에서 儒敎의 四書五經과 中國의 역사를 국가의 방책을 묻고 있는데 특히 四書가 자주 인용됨은 주목되는 바이다. ③에서는 당시 가장 절박하고 긴급 하였던 租税의 기본원칙과 法制의 개혁문제 및 親元派에 대한 計策 등에 관하여 근본적 이고 철저한 개혁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어서 ④에서는 고려후기 元 干涉期의 社會矛盾 을 어떻게 改革할 것인가에 관한 방법을 묻고 있다. 이처럼 2차에 걸친 策問의 주제는 점차 고려사회의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래 詩文과 詞章을 주로 하던 儒學과는 다른 것이었다. 즉 政 治的 現實的 改革案으로서 또한 사회적 기능으로서 儒學이 필요하였던 것이니 그것이 곧 性理學이었다. 그 당시로는 그것을 虛學이 아니라 實學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性理學의 성격은 高麗末 朝鮮初에 전개되는 朱子性理學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당시로 131) 科擧에서 정책적 대안을 묻는 策問이 策 또는 時務策으로 고려후기 科擧制度上 최종단계에 실시 정 착화되는 변화는 朱子 性理學的인 학문 경향으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고려후기 性理學 受容過程에서 학자들의 기본적인 자세가 반영되고 있어 주목되어야 한다고 본다(拙稿, 高麗性理學 受容의 思想的 背景, 高大博士學位論文, 1992, pp 및 李範稷, 高麗時期의 經學 歷史敎 育 35, 1984, pp.82 88). 특히 李範稷은 李奎報, 崔瀣, 李齊賢, 李穀, 鄭道傳 등이 知貢擧로서 택한 策問을 性理學 受容過程의 한 예로 보고 있는데 동감하나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132) 知貢擧로서 李齊賢은 忠肅王 7년(1320)과 恭愍王 2년(1353)에 걸쳐 두번 과거를 주관하면서 성리 학 수용의 다음 세대를 이끌었던 李穀 李穡父子 등을 등용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32 - 158 國史館論叢 第55輯 는 哲學的이고 形而上學的인 性理學보다는 元代의 朱子學처럼 현실개혁적 정치적 성격 이 강한 성리학이 주로 수용되었다고 본다.133) 요컨대 李齊賢의 歷史認識은 당시 高麗社會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었고, 그가 정치가로서 國政에 대응하는 言行 속에는 性理學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 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形而上學的이고 哲學的인 面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經明行修 의 修養을 중시하고 實學的인 現實改革에 커다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그 자체 朱子 性理學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오랜 준비 과 정과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경험하며 마침내 朱子 性理學이 고려에 수용되었음이 李齊賢을 통해 확인된다고 하겠다. Ⅴ. 맺 음 말 이상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變化를 중심으로 高麗後期 性理學의 受容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변화를 당시 대표적인 지식인인 一然과 李承休를 통해서 살펴보고 그것이 綱目體 史書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사정을 검토하였다. 一然은 僧侶로서 李承休는 儒者로서 당대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史書를 남겼다. 一然이 神異史觀을 자연스 럽게 소화하면서 民族의 自主性과 民族性을 강조하는 자세는 고려중기의 三國史記 의 저자 金富軾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 李承休는 元 干涉下에서 정치에 관여하였기 때문 에 中國과의 관계에서는 事大的 자세를 보이지만,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檀君神話를 통 해서 긍지와 유구성을 내세우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閔漬는 本朝編年綱 目 을 편찬함으로써 그들의 새로운 歷史認識을 계승하면서 名分論과 正統論을 내세우 는 새로운 史書 編纂方式을 보이고 있어 특히 주목하였다. 즉 이 綱目體를 통해 종래와 는 다른 儒敎理念과 價値觀을 추구하였으리라 추정하였다. 이것은 元 干涉期 歷史認識의 변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意識面에서 性理學 受容의 중요한 하나의 기반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둘째, 新進士大夫의 성장을 性理學 受容의 知的風土의 형성으로서 주목하였다. 특히 133) 물론 최근 당시 수용된 성리학이 北方(元)의 朱子性理學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洪元植, 金華朱子學 元代 性理學, 1993, pp )에 동감하면서 고려후기 수용되는 性理學은 당 시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사상으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그 社會的 機能을 담당함으로써, 麗末鮮 初 性理學의 性格은 鄭道傳 등 소위 新進士大夫에 의하여 더욱 實踐的인 朱子學으로 수용되었다 고 본다.

33 高麗末 詞林院과 整治都監 및 恭愍王代 정치개혁 속에서 종래 權門世族과는 성격을 달 리하는 鄕吏 내지 讀書層出身이 대거 科擧에 급제하여 새로운 知的風土를 이루었으며, 이러한 지적풍토와 改革意志 속에서 점차 現實的이고 改革的인 性格과 價値觀으로서 性 理學이 수용되어 널리 이해될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이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셋째, 元 干涉期 性理學 受容의 受容過程에서 초기형태로 元나라를 드나들었던 安珦과 白頣正을 주목하였고 특히 당시 元에서 小學 중시의 學風의 접함은 향후 實踐德目 으로서 방향을 제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性理學 受容 過程上 가장 중요 한 역할을 한 李齊賢을 중심으로 그의 歷史認識과 활동을 살핌으로써 성리학의 수용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는 가정적으로 이미 성리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한지라 누구보다도 좋 은 여건하에서 성리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史贊에는 元나라에 대한 事大的 요소가 보이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國家存續을 위한 불가피한 事大였지 그의 뜻이 거기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上書 속에 나타난 강한 改革意志와 民生問題 에 대한 해결노력을 통하여 그의 歷史認識을 살펴 보았다. 즉 그의 上書와 策問 속에 보 이는 性理學에 대한 이해는 이제 性理學이 高麗社會에 본격적으로 受容되기에 이른 것 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려시대 性理學의 受容은 고려후기 오랜 元 干涉期라는 역사적 桎梏속에서 분노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가꾸고 발전시켰다는 면에서 단순한 支配理念의 하나로서 받 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새로운 文化受容運動的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 한 의미와 성격의 결과 性理學은 朝鮮時代에 이르러 500여 년 社會經濟的 變化와 짝하 여 그 역사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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