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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2 한국문화 74

3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23

4 24 한국문화 74

5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25

6 26 한국문화 74

7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27

8 28 한국문화 74

9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29

10 30 한국문화 74

11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31

12 32 한국문화 74

13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33

14 34 한국문화 74

15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35

16 36 한국문화 74

17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37

18 38 한국문화 74

19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39

20 40 한국문화 74

21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41

22 42 한국문화 74

23 奎章閣소장 論語 와四書관련문헌에대한고찰 43

24 44 한국문화 74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본 논어 주석서들은 주로 일본의 유명한 유학 자들이 주석을 하거나 訓點을 붙여 일본에서 다시 간행한 책들이다. 論語徵集覽 은 오규 소라이를 사사한 다이묘 마쓰다이라 요리히로(松平頼寛, 源頼寛, 1703~1763)가20) 일본의 유명한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伊藤維 楨)의 논어 해석과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物茂卿)의 논어 해설을 함께 비 교해볼 수 있도록 나열하고 교열한 것을 觀濤閣에서 간행한 것이다. 또한 오규 소라이의 수제자이며 일본 시문학파의 대표자인 핫토리 겐교(服部元喬, 服部南 郭, 1683~1759)가21) 서문을 작성하였으므로 이 책이 소라이학파의 학술적 입장 이 반영된 논어 해설서임을 알 수 있다. 仁說三書 는 상권에 洙泗仁說, 一貫明義 와 부록 이 수록되었고 하권에 仁說要義 와 부록 이 수록되었는데, 논어 를 중심으로 경서에서 仁 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을 뽑아서 일본어로 懸吐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오오타 긴죠 (大田錦城, 1765~1825)는22) 에도 중기의 유학자로 折衷學派에 속하는데 고증학 20) 21) 22) 20) 마쓰다이라 요리히로(松平頼寛, 源頼寛 1703~1763)는 일본 에도[江戶] 시대 모리야마번 [陸奥守山藩]의 제2대 번주이다. 젊은 시절에 오규 소라이를 사사하였으며, 번주가 된 후 에도 藩校養老館을 설립하고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옻나무 50만 그루 를 심을 것을 계획한다거나 定免法을 시행하는 등 재정을 정비하고 산업을 진흥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 만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기집 大三川志 를 편찬하였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저서로 국화 재배에 관한 책인 菊経国字略解 과 전인의 논어 주석을 비교한 論語徴集覧, 発字便蒙解 와 같은 책들이 전한다. 21) 핫토리 겐교(服部元喬, 服部南郭, 1683~1759)는 江戸 중기의 유학자이며 화가, 시인이며 오규 소라이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자는 子遷, 호는 南郭이며 芙蕖館, 芙蓉館, 周雪 등 을 사용하였고 중국식으로 服南郭, 服元喬, 服子遷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스 승 荻生徂徠에게서 徂徠学(古文辞学)을 전수 받아 太宰春台와 함께 蘐園學派의 대표자 가 되었으며 특히 詩文의 학습과 창작에 큰 관심으로 가지고 安藤東野, 平野金華와 詩文 派를 발전시켰다. 그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의 획일적인 가치판단을 비판하고 인 간의 개성을 긍정하였으며, 정치나 병법보다는 일본의 和歌와 盛唐詩의 아름다움을 즐기 고 자아의 해방을 추구하였으므로 일본 문인의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22) 오오타 긴죠(大田錦城, 1765~1825)는 에도 중기의 유학자로 折衷學派에 속한다. 이름은 元貞, 자는 公幹이며 통칭 才佐라고 불렸고 호는 春草翁, 柳橋釣叟, 矢倉潜夫 등을 사용 하였다. 加賀大聖寺의 의사이며 本草学을 연구했던 大田玄覚의 아들로서 어릴 때는 의학 을 공부하였으나 곧 유학에 뜻을 두고 天明 4년(1784) 山本北山의 奚疑塾에 들어가 유학 을 배웠다. 후에 그는 에도에 사숙을 열었는데 막부의 의관인 多紀桂山의 지원을 받으며

25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45 의 영향을 받아 고증을 세밀하게 하였다. 論語經綸 은 에도 후기 절충학파에 속하는 유학자인 탄바쿠(井田澹泊,?~ 1866)가23) 지은 논어 해설서로서 周易의 卦象을 사용하여 論語 를 풀이한 책 이다. 이 책은 역시 절충학파에 속하는 유학자인 사이토 세츠도(齋藤拙堂, 齋藤 正謙, 1797~1865)가 붙인 書後 에서도 보이듯이 에도 후기의 일본 유학사상 가운데 절충학파의 입장을 반영한 논어 해설서이다. 臺灣敎科用書漢文讀本 은 일본의 臺灣 점령기에 臺灣總督府 學務課에서 출간 한 교과서용 漢文讀本이며 論孟新鈔 역시 일본 근대 시기의 한문학자인 이노 쿠찌 아츠시(猪口篤志)가 편찬하여 明治書院에서 간행한 한문 교재용 서적이다. 이 책들의 수량은 많지 않지만 18세기와 19세기 일본의 유학 사상을 단편적으 로나마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주의를 끄는 것은 이 책들에 찍힌 藏書印인 岳川 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荒浪平次郞(岳川荒浪)이라는 인물인데,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많지 찾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인으로서 대한 협회나 대한신문 등과 관련되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24) 이 사람의 장서인이 찍 힌 몇 종의 일본본이 규장각에 소장된 경위를 고찰해본다면 일제 시기 규장각에 서 소장하게 된 일본본에 대한 연구자료로서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 23) 24) 2) 四書 관련 문헌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일본본 사서류는 다음의 3종이 전한다. 명성이 나날이 높아졌고, 文化 8년(1811) 경에는 三河吉田의 藩儒를 지내기도 하였다. 文 政 5年(1822)에 고향인 金沢藩에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학풍은 청 고증 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朱彜尊의 経義考, 顧炎武의 日知録 등에 근거를 두어 매우 정 심하고 세밀하였다. 23) 이다 탄바쿠(井田澹泊,?~1866)의 이름은 均, 자는 耕夫이고 徹助로 통칭하였다. 美濃 大垣 사람으로 에도 후기의 유학자이다. 그는 히시다 기사이(菱田毅斎)에게서 주자학을 배웠으며 후에 에도의 가메다 호사이(亀田鵬斎)를 사사하여 절충학파로 돌아섰다. 家塾 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大垣藩의 儒官으로도 임직하였다. 저서로 論語經綸 등이 있다. 24) 咸苔英, 이인직 연구 노트(1): 합방 전을 중심으로 참조 (

26 46 한국문화 74 <표 10> 규장각 소장 일본본 사서류 서적 연번 서명 저자 간행처 간행년 嘉永7 1 (汪份增訂) 四書大全 汪份(淸) 輯 日本 大阪 (1854) 刊記 後序: 嘉永六年(1853) 癸丑王月安藝秋 陽學人吉村晉麗 明甫造文 寬文七年(1667) 六月吉辰二條通 松屋町武村市兵 衛刊行 印記 청구기호 비고 奎古 岳川藏書 奎古 木板本 日本 寬文7 有川望山, 奎古 木板本 2 四書序考 編者未詳 二條通松屋町 (1667) 其中書屋 武村市兵衛刊行 王步靑 四書朱子本 (淸) 日本 大阪 天保11 天保十一庚子(18 奎古 3 義匯參 王士鼇輯 敦復堂飜刻本 (1840) 40)年發兌 木板本 (淸) 編 汪份의 增訂四書大全 은 安藝 吉村晉이 훈점을 하고 千鍾房 宋榮堂에서 번각 한 판본이 일본에서 통행되고 있는데 규장각본도 吉村晉의 서문이 있는 것을 보 면 동일한 계통의 판본인 것으로 짐작된다. 四書序考 는 四書의 序文에 대해 註解를 하고 日語로 懸吐해 놓은 책으로 편자는 미상이다. 간행년도가 寬文 7年 (1667)으로 에도 시기 일본의 유학이 흥성하고 있을 때 간행된 책이라는 의의가 있다. 四書朱子本義匯參 은 청대 敦復堂本을 번각한 것이다. 清 汪份의 增訂四書大全 과 淸 王步靑의 四書朱子本義匯參 은 청대의 문인 사대부들이 즐겨 읽었던 사서류의 주석서로서 모두 주자의 집주를 기본으로 삼 고 원, 명, 청대의 명유들의 성리학설을 한데 모아서 경전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이었다. 이 두 책은 조선 문인들도 애독하였는데, 주자의 해설을 본의로 삼고 다른 학설들과 대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 이었다. 청대의 판본을 다시 중간한 일본본 사서류는 일본에서도 四書에 대한 수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과거 제도를 갖춘 적이 없었고 따라서 유학의 학습 이나 학문이 특정한 계급과 고정적으로 연결되는 일도 없었던 만큼, 일본의 근 세 유학은 자유롭게 전개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개성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보

27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47 여주었다. 그러나 江戶 후기에 주자학이 막부의 官學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 하게 되었고, 유학을 교육과 학교와 관련시킨 정책인 異學 禁止令이 내려지자 일시에 많은 이들이 유학을 배우고자 하였다.25) 일본본 사서류의 간행은 이러한 일본 유학사상의 흐름과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25) 5. 규장각 소장 중국본 四書 관련 문헌 해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본 사서류 관련 문헌 중에는 아직 해제가 되지 않은 서적들이 상당히 많다. 그 중에 비교적 성행하였고 학술적 의미도 있는 서 적들을 골라서 간략히 해제를 하였다. 현재 규장각 문헌 해제집에 들어 있지 않 은 것들을 우선으로 하였고 혹 해제가 있더라도 보충할 것이 있으면 덧붙여 해 설하였다.26)26) 1) 漱芳軒合纂四書體注 19권, 宋 朱熹 集注, 清 范翔 參訂 范翔(생졸년 미상)은 청 嘉慶과 雍正 연간에 생존했던 인물로 苕溪(지금의 浙 江省 湖州市) 출신이며 호는 紫登이고 서재명은 漱芳軒이다. 저서로 書經體注, 春秋體注, 詩經體注, 易經體注深詮, 增訂禮記體注 와 漱芳齋合纂四書體 注 19권, 兩孟人物考 1권 등이 전한다. 사서체주 는 자서 에서 국가에서 사서를 통하여 선비를 선발한지 오래되었 으므로, 사서의 주석을 읽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사서의 주석을 진실로 체득[體 註]한 사람은 거의 없다. 라고 하고, 사서의 주석을 진실로 체득할 수 있도록 하 기 위해 사서의 주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고 말하며 본서의 서명을 體 註 라고 붙인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다. 본서의 자서 에 皇清康熙歲在壬申(1692), 小春穀旦若溪後學范翔紫登氏題於 25) 辻本雅史, 2012 日本近世(江戶時代)の學術制度と昌平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사업 단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사회의 갈등과 조정 발표논문집, 15-16면. 26) 당윤희, 2007(a) 韓國現存 論語 註釋書板本硏究, 북경대 박사학위논문, 32-40면 참조.

28 48 한국문화 74 西郊之漱芳軒 라고 쓰여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강희 31년(1692)에 간행되었으 며, 이후에 學源堂藏板 銅板本, 雍正 8년(1730) 江寧 啟盛堂 銅版印本, 乾隆 38 년(1773) 三多齋 重刻本, 道光 연간 金閶書業堂 刊本 등의 다양한 판본으로 간 행되어 전해졌다.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中 3239)은 江左書林에서 간행한 石印本으로 청 吳有文이 교열을 하여 다시 간행한 것이다. 2) 三魚堂四書大全, 清 陸隴其 編 陸隴其(1630~1692)는 新埭 泖口출신으로, 원래의 이름은 世穮이고 字는 稼書 이며 시호는 淸獻이다. 清 康熙 9年(1670)에 二甲進士가 되어 嘉定知縣과 四川 道監察御史 등을 역임하였다. 康熙 30年(1691)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東洞 庭山에서 강학에 전념하였으며 후에는 東泖에 爾安書院을 건립하고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의 학문은 居敬窮理 를 위주로 하여 후대인들에게 명대 이후 유일한 程朱學統 으로 평가되었다. 육롱기는 三魚堂自序 에서 예전에 내가 읽던 오래된 四書大全 에 구두를 찍고, 중복되는 것과 모자란 것을 없애고 또 蒙引, 存疑, 淺說 중의 중요 한 것을 넣었다 라고27) 하였다. 현재 전하는 판본은 강희 37年(1698) 太倉王氏 刊本 36卷, 강희 41年(1702)과 康熙 48年(1709)에 간행된 三魚堂刊本 40卷과 강 희 연간 嘉會堂 重刻本이 전한다. 삼어당사서대전 은 중국에서 상당히 유행하 였던 판본으로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수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은 三魚堂 刊本과 嘉會堂 重刊本의 두 가지가 있는 데, 규장각 소장본은 陸隴其가 編纂하고 제자인 席永恂, 王前席 등이 參閱한 三 魚堂 刊本의 重刊本으로 짐작된다. 서명은 삼어당논어집주대전 으로(청구기호: 奎중 3276의 1) 판식은 左右雙邊, 高廣17 12cm, 有界, 8行 23字, 注雙行, 黑口, 上 下內向黑魚尾이고, 洞文之寶, 承華藏圭, 弘齋, 帝室圖書之章 등의 印記가 있다.28) 27) 28) 27) 陸隴其, 四庫存目叢書 三魚堂自序 舊本 四書大全, 予舊所讀本也. 用墨筆點定, 去其 煩復及未合者, 又采 蒙引, 存疑, 淺說 之要者, 附於其間. 萬曆以後諸家之說, 則別為一 冊, 不入於此. (經部第170冊, 齊魯書社, 660면에서 재인용) 28) 당윤희, 2007(b) 한국소장 중국본 사서대전 판본 소고 중국어문학논집 43, 385면.

29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49 3) 增訂四書大全, 淸 汪份 撰 汪份(1655~1721)은 江蘇 長洲 사람으로 字는 武曹이다. 康熙 43년(1704)에 進士가 되어 編修, 廣西鄕試副考官 등의 관직을 지냈다. 문장의 기세가 웅혼하여 陶元淳, 何焯과 함께 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徐乾學, 翁叔元과 교유하였다. 저서 로 增訂四書大全 과 唐宋八家文 이 있고 문집으로 遄喜齋集 이 전한다. 增 訂四書大全 은 四書大全 의 小註의 잘못을 상세히 비판하고 여러 가지 오류들 을 시정하였다. 自序 에 따르면 이 책은 四書大全 의 기초가 된 四書輯釋 이 본래 오류가 많으므로, 주희의 설에 근거하여 四書大全 이 따르고 있는 四 書輯釋 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여 小註에서 틀리게 인용된 글자나 주희의 설이 아닌데 주희의 학설로 인용되는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 수정을 기하였다.29) 또 책의 내용에 명내부본의 小註를 시정한 것과 함께 論語考異 1권과 孟子考異 1권을 더 첨부하여 학자들이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청대에 간행된 四書大全 가운데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강희 41년(1702) 汪份이 편찬하고 馮暠, 徐葆光이 교정을 하여 遄喜齋에서 초 간본을 간행하였는데, 이 판본은 상당히 유행하여 후대에 많은 수의 重刊本이 출현하였다. 중국에 전하는 이 책의 판본으로는 康熙 遄喜齋刻本, 康熙 長洲 倪 鼇士重刊本과 金閶五雲居刊本, 日本 嘉永 7년(1854) 千種房翻刻本 등이 있다. 한국에는 상당히 많은 수량의 增訂四書大全 이 전해지며 대부분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주로 遄喜齋刻本의 重刻本들이다. 그 외에 乾隆 45년(1780) 大 中堂 刊本과 文盛致和堂 刊本이 전한다.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규중3275)은 文盛致和堂 刊本으로 韓菼序文, 汪份自序, 御製序 외에 康熙 42년(1703)에 쓰여진 張廷樞序文 이 수록되어 있다. 판식은 左右雙邊, 半郭은 약 22 14cm, 29) 29) 汪份, 增訂四書大全 自序 (韓國國立中央圖書館所藏遄喜齋本) 夫 輯釋 之書, 其於朱 子 文集, 語類, 或合數條為一條, 而叉牙不相合, 或分一條為數條, 而散亂不可讀, 或盡削 虛字, 而至與本旨相違, 或妄刪要語而失其用意所在, 又或誤以他人之語自為朱子之言, 或強 以問者之語間入者. 蓋凡 輯釋 中號為朱子曰者類, 往往經倪氏之點竄塗改而非復作者之真 也. (중략) 愚之書以尊朱子為主, 而奉朱子之書, 以正 大全 襲用 輯釋 之謬者也. 大全辨 者以攻朱子為主而據 大全 所用 輯釋 改壞之本而妄以為朱子病者也.

30 50 한국문화 74 有界, 2단, 상단은 소주가 있고, 下段은 9行21字이다. 注雙行, 上黑魚尾이며, 표지 앞에 文盛致和堂 의 刊記가 있다.30)30) 4) 四書朱子本義匯參, 淸 王步靑 撰 王步靑(1672~1751)은 金壇 사람으로, 자는 漢階, 혹 罕皆이며, 호는 已山이다. 옹정 계묘년(1723)에 진사가 되었고 翰林院檢討를 역임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 와 維揚書院에서 강론을 맡았다. 그는 八股文에 뛰어났다고 하며, 四書本義汇參, 已山先生文集 등을 저술하였다. 四書朱子本義匯參 은 대학 3권과 부록 1권, 중용 7권과 부록 1권, 논어 20권, 맹자 14권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대개 사서장구 와 사서집주 를 종주로 내세워 이에 근거해서 여러 학자들의 시비를 판단했고 또한 주희의 사서혹문, 주자어류, 주자문집 과 원대와 명대 이후의 경전 주석서들의 講解를 두루 열람하여 조목별로 구분하고 자세하게 나누어서 수록하였다. 이 책은 發凡 에서 주자 해석의 본의를 모으고자 한다는 편찬 동 기를 밝히고 있지만 기실 시험장에서 사용되는 팔고문의 법에 근거하여 사서 해 석의 시비 득실의 문제를 정리하고 논한 내용이다.31) 이 책은 다른 異名으로는 四 書本義彙參, 四書朱子本義彙參, 四書章句本義彙參, 四書朱子本義彙考 등이 전하는데 모두 동일한 책이다. 이 책은 乾隆 10년(1745) 敦復堂 刊本 43권이 널리 통행되었다. 현재 한국에 이 책의 서로 다른 판본이 상당히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건륭 10년(1745)의 敦 復堂 刊本과 건륭 36년(1771) 善成堂 重刊本과 大文堂 重刊本, 學源堂 重刊本 등이 여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石印本으로는 光緒 10년(1884) 上海煥文書 局 刊本, 光緒 28년(1902) 上海落文書局 重刊本, 光緒 31년(1905) 上海公記書局 31) 30) 당윤희, 2007(b) 앞의 논문, 387면. 31) 사고총목제요 에서는 이 책이 과거 시험을 위한 팔고문에 맞추어 주희의 학설을 해석하 고자 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그림자만을 추구하고 진짜 형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비평하였고, 또 (왕보청은) 汪份이 산정하여 편찬한 사서대전 의 병폐는 閻若璩와 顧 炎武의 학설을 참고하여 취록하면서 혹 주희의 학설과 어긋난 것도 채택한 것이라고 여 겼는데, 그것은 漢의 경학과 宋의 義理學이 각각 원류가 있다는 것을 고찰하지 못한 것이 다 라고 비평하였다. 사고총목제요 경부 권37, 211면 참조.

31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51 重刊本과 宏文閣本 등이 한국에 전해지고 있으며, 鉛印本으로는 光緒 15년 (1889) 上海 廣百宋齋 重校本 등이 역시 한국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에 소장되어 있는 사서주자본의회참 의 판본이 적지 않은 것은 중국에서 도 이 책이 상당히 유행했으며 청대 말기에 조선으로의 유입도 적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光緖 5년(1879)에 上海 江左書 林에서 敦復堂 간본을 중간한 석인본(청구기호: 奎中 3404)으로 판식은 四周單 邊, 半葉匡郭: cm, 有界, 9行 23字이다. 또 다른 규장각 소장본은 광서 13 년(1887) 上海 同文書局에서 간행한 석인본(청구기호: 奎中 6447)이며 모두 集 玉齋 의 印記를 가지고 있다. 5) 四書朱子異同條辨, 淸 李沛霖 撰, 淸 李禎 校訂 李沛霖의 字는 岱雲이며 都梁 사람으로 행적은 상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저서로 四書朱子異同條辨 40권과32) 四書諸儒輯要 40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四書朱子異同條辨 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사서에 관한 여러 학설 중에서 朱 子의 학설과 같은 것과 다른 것들을 구별하여 조목대로 수록하고 변별한 것이 다. 그 體例를 보면, 우선 集注 나 章句 를 수록하고 그 다음으로 四書或問 과 朱子語類 를 차례로 실은 후, 그 다음에 諸家의 說을 분별하여 주자의 학설 과 같은 것은 同 자의 아래에, 주자의 학설과 다른 것은 異 자의 아래에 각 각 나누어서 수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辨 條 아래에는 李沛霖 자신의 按 說을 써서 全章의 의의를 설파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므로 주자 학설과의 異同을 비교하기에 편리하였다. 게다가 이 책에 인용된 유학자들은 四書大全 에 인용 되었던 鄭玄 등의 유학자 108명 이외에도 蔡淸 등 明 중기 이후의 학자도 82명 이나 추가되어 총 190명에 달하므로, 理學과 관련된 송, 원의 학자들은 물론 명 대, 청대의 학자들까지 대부분 망라되어 理學의 연변을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 책의 初刊本은 近譬堂本 40卷이다. 康熙 乙酉年(44년, 1705) 春二月에 禮部 32) 32) 이 책은 朱子四書異同條辨 이라는 서명으로도 통한다.

32 52 한국문화 74 尙書 李振裕가 부탁을 받아 작성해준 四書朱子異同條辨序 와 李禎이 작성한 序, 李沛霖이 작성한 四書朱子異同條辨自序 가 차례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간행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판본의 초간본과 重刊本, 후쇄본은 상당히 많이 유통 되어 현재 한국의 여러 소장처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에 소장된 판본(청구기호: 규중 3358)은 중간본 중의 하나인 藜光樓刊 本으로 초간본인 近譬堂本과 판본 형식이 거의 같다. 본문은 大學章句序 로부 터 시작하며 대학 권1의 1면에는 都梁李沛霖, 弟禎仝訂, 男學曾, 姪煌叅較 라 고 밝혀져 있다. 판식은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框 약 cm, 9行 21字, 小字 雙行, 上黑魚尾이다. 版心 위에 朱子異同條辨 이라는 서명이 있으며 版心에는 大 學, 中庸 등의 서명을 밝혔고 版心 아래에 近譬堂藏板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 다. 표지면에는 藜光樓梓行 이라는 題記가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쳐서 조선 후기의 문인들 이 서로 돌려보며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논쟁을 벌일 정도로 당시의 조선 문인 들의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만족시켰다. 이 책이 조선에 소개된 이후로 부친에 게서 물려받거나 스승에게서 혹은 친구에게서 받아서 필사한 서적들이 빠르게 문인들에게 확산되었고 문인들은 그 책이 주자의 설을 위주로 하면서 기타 학설 과의 異同을 밝히는 점을 크게 칭찬하였다.33)33) 6) 新訂四書補注備旨, 明 鄧林 撰, 明 鄧煜 編次, 淸 祈文友 重校, 淸 杜定基 增訂 鄧林(생졸년 미상)은 廣東 新會 사람으로 초명은 彝 혹은 觀善이라고 불렸으 며 자는 士齊이고 호는 退庵이다. 洪武 29년(1396)에 舉人이 되었고 貴縣教諭에 제수되었으며 吏部主事를 역임하였고 永樂大典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宣德 4년(1429)에 상부의 뜻을 거슬러 保安 지방의 수자리로 좌천되었고 사면을 받아 돌아온 후 항주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詩, 古文과 詞에 능했으며 退庵集 과 湖山遊詠錄 등을 저술하였다. 33) 당윤희, 2012 사서주자이동조변 의 조선으로의 전래와 영향에 대한 일고 중국어문학 지 40 참조.

33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53 新訂四書補注備旨 는 鄧林이 편찬한 책을 乾隆 연간에 江寧 杜定基가 6년에 걸쳐 증보하고 수정한 것이다. 이 책은 學庸備旨, 上孟備旨, 中孟備旨, 下 孟備旨, 上論備旨, 下論備旨 의 차례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한 면을 세 단으 로 나누어 상단은 杜定基가 붙인 頭注를 넣어 인물과 典故를 밝히고 중간 단은 全旨 나 章旨, 節旨 를 밝히며 하단은 集注 를 쓰고 의미를 풀이하는 講 과 시비를 가리고 보충하는 補 의 내용 등을 넣도록 하였다. 杜定基는 서문 에서 등림의 備旨 는 후학들을 계도하는 책으로서 청대까지도 널리 전해지고 학습되고 있으며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은 장, 절, 구, 자마다 의미를 밝 히면서도 주자의 뜻과 상충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책이 초학자들의 입문서로서 매우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34)34) 이 책은 초학자들의 입문서로서 큰 인기를 끌면서 목판본과 동판본, 석인본 등 수많은 판본들이 간행되었다. 한국에도 이 책의 서로 다른 판본이 적지 않게 소장되어 있는데 특히 석인본들이 많다. 한국에 소장된 것만 대략 살펴보아도 光緒 연간 掃葉山房 石印本, 光緒 연간 成文信記 석인본, 光緒 연간 廣東 馮積厚 堂 校刊本, 光緒 연간 上海 點石齋 影印本, 宣統 연간 久敬齋 刊本, 民國 연간 上海 鴻寶書局 石印本, 民國 연간 上海 天寶書局 석인본, 上海 廣益書局 석인본 등 수십 종에 이른다. 규장각 소장본은 光緖 12년(1886) 上海 點石齋 석인본(청 구기호: 奎중 6426)과 光緖 31년(1905) 掃葉山房 석인본(청구기호: 一簑古181.1 D487s)으로 점석재 석인본에는 集玉齋 와 帝室圖書之章 의 印記가 있다. 7) 酌雅齋四書增注合講, 淸 翁復 撰 翁復은 淸 太末(지금의 浙江省 龍遊縣) 출신으로 서재명은 酌雅齋이며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의 구성은 上欄과 下欄으로 나뉘어 있는데 上欄 은 翁復이 諸家의 학설을 취합하고 덜어낸 補注이고 下欄은 朱熹의 集注 로서, 누락된 諸家의 주석들을 폭넓게 수집하여 四書集注 를 보충하고자 하였다. 翁 34) 杜定基, 新訂四書補注備旨 序 (규장각소장 上海 點石齋 石印本) 前明鄧退庵先生備 旨一書, 啟迪後學, 至今海內傳習, 如布帛菽粟之無可厭斁者 緣是書逐章逐節逐句逐字, 悉 各發明其旨趣, 無不與朱子相吻合, 斯誠初學之津梁, 而亦成材之受其範圍也

34 54 한국문화 74 復은 自序 에서 四書에 대하여 或問, 語類, 精義 로부터 대략의 설을 모 았고, 아래로는 諸儒의 학설을 수록하여 함께 보면서 참고하고 증명하도록 하였 다. 이치가 순정하면서 논지가 개괄적인 것과 의리가 분명하면서 문사가 간명한 것들을 그 때마다 기록하여 함께 두었다. 라고35) 편찬 체제를 설명하였다. 그리 고 친구와 제자들이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공개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雍正 8년 (1730)에 간행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판본은 雍正 8년(1730) 酌雅齋刊本과 同治 7년(1868) 刊本, 光緒 庚 子年(1900) 浙蘭愼言堂刊本과 日本 明治 연간 文奎堂銅版本 등이 전한다. 한국 에는 규장각 외에 연세대에 石印本 6권,36) 고려대에 光緒 14년(1888) 上海 鑄記 書局刊本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중 5988)은 光緖 14년 (1888)에 上海 積山書局에서 간행된 것으로 集玉齋 의 印記가 있는 袖珍本이다. 35) 36) 8) 四書疏注攝言大全, 淸 胡裴才 撰 胡裴才는 福建 龍岡人으로 字는 蓉芝이고 諸生 출신이다. 이 책의 앞머리에 紀昀의 序와 胡裴才의 自序 가 있다. 이 책은 대강은 朱子의 集注 를 위주로 하였으며 自序에서 말한 바와 같이 或問 과 語類 로부터 취하여 諸家의 학설 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本文의 字義가 확실하지 않은 곳을 특별히 자세히 설 명하였고 集注 중에서 말이 잘 해설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문사가 순조롭게 이어지거나 고증을 하는 학설들을 모아서 참조하여 자신의 뜻으로 판단하였다. 35) 翁復, 酌雅齋四書增注合講 自序 (규장각 소장 上海 積山書局本) 復於四子之書, 自 或 問, 語類, 精義 輯略, 而下複旁參互證以諸儒之論說, 每於理醇而旨括, 義明而詞簡者, 即隨錄而彙存之 36) 연세대 소장본은 표지에 太末翁克夫先生彙閱 이라고 쓰여 있으며 표지 뒤에 九思齋珍 藏 이라는 題記가 있다. 이 책은 특히 朝鮮 谷城 丁氏가 소장했던 책으로 다음과 같은 藏 書記가 있다. 乙卯(1915)秋, 伯兄舜泰, 仲兄海泰謹受親命, 欲擇里仁, 與淵泰, 河泰, 來吉, 來聖, 來東, 偕行西北間島, 南北滿洲, 大連, 旅順, 青島, 曲阜, 孔林, 北京, 天津, 洛陽, 太原, 漢口, 武昌, 重慶, 南京, 通州, 蘇州, 杭州, 上海, 福建, 武夷山, 廣東, 香港時, 章太炎以此爲 贐 丙辰(1916)三月三吉, 不肖鳳泰拜受庭訓謹書 이를 통하여 1915년경에 정씨의 친지 들이 함께 중국을 종단하는 여행을 하면서 이 책을 얻었으며 특히 청대의 유학자 章太炎 이 전별 선물로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35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55 책을 보면 본문의 아래에 먼저 集注 를 나열하였고 句마다 세밀하게 訓釋을 붙 였으며 주석 뒤에는 講義를 두고 講義 뒤에는 다시 해설을 붙였다. 전편의 주지 를 융통하여 강의를 하고 많은 이론들을 함께 참조하여 해설하니, 그 번잡함과 간략함이 적당하다. 다만 이 책은 과거준비생들의 공부에는 도움이 되지만 성인 의 학문을 더불어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건륭 癸未(1763)에 책이 간행 되었다. 37) 이 책의 판본은 乾隆 28년(1763) 尚德堂刻本과 乾隆 28년(1763) 經 國堂 翻刻本이 전한다. 한국에는 현재 연세대 소장 寶瀚樓刊本과 吳冠山夫子 校 正本이 전하고 있으며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중 5947)은 淸 紀昀이 鑒定하 고 淸 吳冠山이 校正한 판본으로 판식은 四周單邊, cm, 有界, 九行三十 六字, 注雙行, 上黑魚尾이다. 37) 9) 四書題鏡味根合編, 淸 汪鯉翔, 淸 金澄 撰 이 책은 四書題鏡 과 四書味根錄 를 합쳐서 간행한 것이다. 四書題鏡 을 편찬한 淸 汪鯉翔은 字가 靈川이고 苕上(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餘杭區) 출신이 며 행적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自序 에서 作文은 講學을 드러 내어 표현한 것이고 講學은 作文의 근본이 되니 원류는 하나로서 통한다. (중 략) 그러므로 앞머리에 總論 20則을 두었으니 예를 들어 標題旨, 闡題理, 正題 解, 淸題界, 辨題類 등등과 같은 것이다. 라고38) 밝혀놓은 바와 같이 사서에서 나올 수 있는 과거시험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사서의 경의에 맞추어 답안을 작성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의 판본은 乾隆 9년(1744) 刻 本과 乾隆 연간의 文盛堂刊本, 淸刻本, 英德堂刊本, 道光 11년(1831) 晉施志 重 刊本, 三多齋刊印本 등이 있다.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중 6244)은 光緖 10 38) 37) 紀昀, 序 四書疏注攝言大全 (규장각소장 吳冠山夫子校正本) 大旨以朱子 集注 爲主, 自序稱自 或問, 語類, 證以諸家之說, 於本文有字義未安者, 特爲闡發, 集注 中有未訓 口氣者, 復暢其詞, 參互考訂, 而斷以己意云云 今觀其書, 本文下首列 集注, 逐句細爲訓 釋, 注後有講, 講後又有解, 講以融會全旨, 解以參彙群言, 繁簡頗爲得宜, 惟俱供舉業家之撦 撏, 未足與語發明聖學也 書刊於乾隆癸未(1763) 38) 汪鯉翔, 四書題鏡 序 自序謂作文爲講書表彰, 講書爲作文根本, 源流一貫 體認各題 理行文, 即以行文各旨法說書, (중략) 故首列總論二十則, 如標題旨, 闡題理, 正題解, 淸題 界, 辨題類等等. ( 續修四庫全書總目 四書題鏡 條에서 재인용)

36 56 한국문화 74 년(1884)에 上海 同文書局에서 간행한 石印本으로 集玉齋 의 印記가 있다. 四書味根錄 37권은 淸 金澄이 편찬한 책이다. 金澄의 號는 秋潭이며 上元 (지금의 南京) 출신으로 행적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상단과 하단 으로 나뉘어 있는데 상단은 四書典者輯要 이고 하단은 四書味根錄 으로 구성 되어 사서에 나오는 인물과 전고를 밝히고 장구의 의미를 상고한 것이다. 이 책 의 판본은 同治 5년(1866) 刊本 37권, 光緒 8년(1882) 同德堂刊本( cm), 光緒 8년(1882) 刊本, 光緒 20년(1894) 袖海山房 石印本 등과 民國 17년(1928) 鴻寶齋書局 印本 40권 등이 있다. 한국에는 고려대에 道光 22년(1843) 37권본이 소장되어 있고 규장각에 光緖 10년(1884)에 上海 同文書局에서 간행한 石印本 (奎中 5747)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集玉齋 와 帝室圖書之章 의 印記가 있다. 四書題鏡 과 四書味根錄 은 청대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의 주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으며 사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두 책을 합간한 四 書題鏡味根合編 이 간행되었다. 한국에는 두 곳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화여대에 소장된 石印本은 淳熙 己酉年(1870)의 序가 있다.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 中 6243)은 光緖 15년(1889)에 上海 鴻寶齋에서 간행한 石印本이다. 6. 규장각 소장 중국본 四書 관련 문헌의 특징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논어 와 사서 관련 문헌의 두드러진 특징은 중국본 사 서류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중의 대부분이 청대 후기의 서적들인 것과 또한 集玉齋 의 印記를 가진 책들이 많다는 것이다. 규 장각에 소장된 논어 와 사서 관련 문헌의 수장 현황 중에서 중국본 사서류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점에 대해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래에서는 조선 후기 문인들의 사서 연구 경향과 중국 청대 말기 사서류 간행의 현황을 고찰해 보고, 아울러 조선 후기 학술 및 장서기관으로서 집옥재의 역할 등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37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57 1) 조선 후기 문인들의 四書 연구 경향 규장각에 소장된 중국본 사서류 중에 앞의 해제에서 언급되었던 서적들로서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 상당히 성행하며 읽혀졌던 增訂四書集注大全, 四書朱 子異同條辨 등과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던 四書廣註 등의 내용은 일정한 공통 점이 있다. 조선의 유명한 장서가이자 目錄學家인 洪奭周(1744~1842)는 한 편지글에서 淸朝의 학술 대가들을 열거하고 당시 유행하던 四書類의 서적으로 汪份의 增訂 四書集注大全 과 李沛霖의 四書朱子異同條辨 을 꼽았다.39) 이 중에 汪份의 增 訂四書大全 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四書大全 의 小註에 나타난 여러 가지 오류들을 바로잡고자 小註에서 틀리게 인용된 글자나 주희의 설이 아닌데 주희 의 학설로 인용된 부분 등을 세세하게 수정하였고 論語考異 1권과 孟子考異 1권을 더 첨부하여 학자들이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청대에 간행된 四書大全 가운데서도 크게 유행하였던 서적이다. 李沛霖의 四書朱子異同條辨 은 조선에서 그 영향력이 상당하여 조선 왕실의 書目인 奎章總目 이나 承華樓書目 에도40) 그 서명이 수록되었으며 奎章總目 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朱子의 章句集注 를 위주로 하여 或 問 과 語類 를 章節에 따라 그 아래에 옮겨 적었고 또 宋元明淸의 諸儒들의 학 설을 나누어 주석을 달았는데, 朱子의 의견과 합치하는 것은 위에 同字를 두어 표시하였고, 朱子의 의견과 합치하지 않는 것은 위에 異字를 두어 표시하였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의견으로 조목마다 辨論을 달았으며 동생인 李禎의 학설도 역시 붙여두었다. 정밀하게 대조하여 고찰하는 방법이나 正道를 따라가는 학문 태도 등이 최근의 諸儒들 중에 비할 사람이 없다. 41) 이로부터 이 책이 주자의 39) 40) 41) 39) (朝鮮) 洪奭周, 淵泉先生文集 권16, 書[上] 答費秀才書 自陸, 顧, 汪, 王四家以外, 如李榕村光地, 王靑箱崇簡, 朱竹垞之父子, 魏叔子之兄弟, 以及乎閻伯詩之 釋地, 邵子湘之 辨音, 汪武曹 李都梁之 四書, 徐尙書 秦學士之 五禮, 僕亦甞竊窺其一斑矣 繼此以 往, 儻亦有蜚聲揚彩而僕之所不及聞乎, 至如懷奇抱異 欝欝老死於嵁巖之間而名湮沒乎無 聞者, 尤僕之所傾耳而企也 足下豈有意乎 40) 奎章總目 69면, 承華樓書目 1339면[張伯偉, 2005(a) 앞의 책 참조]. 41) 奎章總目 [張伯偉, 2005(a) 앞의 책, 69면] 以朱子 章句集注 爲主, 或問 語類 逐章

38 58 한국문화 74 학설을 중심으로 하고 제유의 학설을 비교하는데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 큰 장점 으로 꼽혔음을 볼 수 있다.42)42) 四書廣註 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영조 12년(1736) 중국에서 유입된 후 곧 戊申字와 丁酉字의 금속활자본으로 두 차례나 간행될 정도로 조선의 문인 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던 서적이다. 이 책이 인정받았던 이유는 四書章句集 註 를 위주로 하고 주자의 저서인 或問, 語類, 文集 의 순서로 주자의 여러 주석들을 망라하여 異同과 得失을 분변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四書朱子本義匯參 이나 新訂四書補注備旨 와 같이 조선 문인들의 관심 속에 중국으로부터 대량 유입되었고 또 현재 규장각에 다량 소장되어 있는 중국본 사서류 문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주자의 사서집주 를 위주로 하여 주 자의 다른 학설들을 조목별로 나누어 수록하거나 諸儒의 학설들도 함께 수록하 여 비교함으로써 是非와 異同을 가리는 데 편리하도록 한 서적들이며 또한 講章 體의 서술을 통하여 강학에 편의를 제공하는 서적들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에 유입된 중국본 사서류 중에 주자의 학설 및 諸儒의 학설을 구별하고 오류를 살피는 데 편리한 책들이 많은 현상은 18세기 조선의 경학 연 구의 흐름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조선의 경학 연구의 경향은 더욱 주자의 학설에 경도되었고 주자의 학설과 다른 유학자들의 학설과 의 異同處를 찾아내어 분석하는 연구 방법이 성행하였다.43) 조선의 문인들이 주희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18세기에는 사림을 중심으로 사서대전 의 오류에 대해서 분별하고 주희의 사서 주석에 대한 諸 家의 학설의 異同을 가리고 是非를 분별하는 것이 하나의 학풍으로 자리 잡았 다. 이와 같이 18세기 조선의 경학이 諸儒의 학설과 주자 학설의 異同을 분변하 는 추세로 경도되는 가운데 四書廣註, 四書朱子異同條辨, 增訂四書集注大全, 43) 抄附其下, 則分注宋元明淸諸儒之說, 而與朱子合者, 冠以同字; 與朱子不合者, 冠以異字 末乃以己意條辨, 而其弟禎之說亦多附焉 考核之精 門路之正, 近代諸儒鮮有倫比, 然研究 太密, 分析太繁, 支離破碎之病, 亦所不能免焉 42) 四書朱子異同條辨 이 조선 문인들에게 수용된 양상은 당윤희, 2012 四書朱子異同條辨 의 조선으로의 전래와 영향에 대한 一考 중국어문학회 40, 면 참조. 43) 전재동, 2011 正菴 李顯益의 論語 해석 연구 國學研究 18, 357면.

39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59 四書朱子本義匯參 등의 책들은 주희의 설을 위주로 서로 다른 주석들을 함께 수록하여 한눈에 제가의 설을 비교하고 정리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성리학 연구 에 매우 유용한 참고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었으며 조선의 문인들의 필요에 크 게 부합하는 책이 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청대 말기 石印本 출판의 발전 사서류의 주석서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문인들의 필요에 의해 이미 명대부 터 대량으로 출현하였다. 명대의 과거제도는 첫 번째 시험을 사서오경에서 출제 하였으며, 四書에서 세 가지 문제를 내고 五經에서 네 가지 문제를 내었다. 四書 는 주자의 集注 를 위주로 하고, 周易 은 程顥의 傳을 위주로 하고, 書經 은 蔡沈의 集傳 과 옛 주소를 위주로 하고, 詩經 은 주자의 集傳 을 위주로 하 여, 정주이학의 저작들을 학술의 기준으로 삼았다.44) 명 성조는 또한 호광 등에 게 명을 내려 四書大全 과 五經大全, 性理大全 을 편찬케 하여 정주이학을 관학으로 확정하였다. 문인들은 과거 시험의 첫 번째 場을 통과하기 위해 사서와 오경의 공부에 몰 두하였으며 명대와 청대에는 수많은 사서류 주석서들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명 대와 청대의 사서류 주석서들은 장절에 따라 의미를 辨釋하는 講章式 서적이 유 행하였고 성리학 저작들은 과거를 준비하기 위한 참고서들로 변해갔다. 그리하 여 명대와 청대의 민간 서점에는 四書五經의 장구를 해설하고, 四書文과 五經文 을 쓸 수 있도록 章法과 구조를 해설한다거나, 四書의 인물과 사건을 고증하고 해설하는 참고서들과 함께 八股文 選本, 律詩 選本들이 쏟아져 나왔다. 청대 말기까지 이러한 풍조는 계속 이어졌는데 청대 말기의 출판 시장에 서양 과학기술과 함께 도입된 石版 인쇄술이 유입되자 출판문화는 다시 크게 변하였 다. 중국의 최초의 石印本은 光緒 6년(1880)에 간행된 康熙字典 이었다. 석판 44) 44) 明史 권70, 選擧志 2 頒科擧定式, 初場試四書義三道, 經義四道, 四書 主朱子 集注, 易 主程 傳, 朱子 本義, 書 主蔡氏 傳 及古注疏, 詩 主朱子 集傳. (許總, 2000 宋 明理學與中國文學, 百花洲文藝出版社, 284면에서 재인용)

40 60 한국문화 74 인쇄로 처음 간행된 康熙字典 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모두 판매되었고 이 로부터 민간 출판업자들은 석인본의 간행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석인본 의 장점은 목판보다 2분의 1, 적게는 5분의 1까지 적은 자본이 들었으며, 작은 책으로 간행하므로 책을 간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훨씬 짧았다. 또한 필획을 그대로 찍어내는 인쇄방식으로 인해 작은 글씨라도 필획이 선명하게 찍혀 나온 다는 장점이 있었다. 석인본은 책을 작게 만들어도 글씨가 선명하여 가독성이 뛰어났으므로 또한 手帕本의 유행을 가져오게 되었다.45)45) 당시의 상해는 이미 만청 시기 출판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북경 등의 수 도보다도 왕성한 서적 출판과 판매 양상을 보였다. 당시 상해에서 명성을 떨치 던 石印 출판사들은 點石齋, 同文書局, 拜石山房 외에도 蜚英館, 鴻文書局, 積山 書局, 그리고 鴻寶齋 등 매우 많았으며, 光緒 연간에 上海 일대의 石印 출판사들 은 적어도 116家 이상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四馬路 棋盤街에 위치해 있었다. 상해의 石印 출판사들은 영리하게 경영을 하고 사업을 확장시켜서, 북 경, 남경, 사천 등 주요한 도시에 분점을 설치하였고 상해에서 인쇄된 석인본들 을 전국 각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北京, 天津, 廣州, 杭州, 武昌, 蘇州 등의 도시에 石印書局들이 분분히 설립되었으며 상해의 유명 書局들의 분 점이 설치되었다.46)46) 석인 인쇄술로 수많은 종류의 책들이 간행되었는데, 그중에 빠질 수 없는 것 이 역시 과거 수험서들이었으며, 그 중에 과거의 첫 번째 장에 치러지는 사서오 경의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사서오경류의 수험서들이 대량으로 간행되었다. 석 인 인쇄술로 값이 저렴해지고 수량이 풍부해진 수험서들은 수많은 독서문인들의 환대를 받았고 이러한 환대는 곧 구매로 이어졌다. 당시의 독서문인들은 손에 한 권씩의 석인 간행물들을 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47)47) 당시는 版權에 대한 인식이 약했던 시대였으므로 石印 출판사들은 벌떼처럼 45) 沈俊平, 2013 晚清石印舉業用書的生產與流通: 以 年的上海民營石印書局為中心 的考察 中國文化研究所學報 57, 248면. 46) 위의 논문, 면. 47) 沈俊平, 2012 清代坊刻四書舉業用書的生產活動 漢學研究 30-3, 86면.

41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61 달려들어 이러한 책들을 翻印하였다. 點石齋는 이러한 류의 서적들을 상당히 전 문적으로 출판하여, 四書味根錄, 增補三層四書味根錄, 增廣四書小題題鏡, 五 車樓五訂四書, 四書撮言, 四書古註群義彙解, 四書典制類聯音註, 四書典林, 四書典故竅, 四書圖考, 五經體註, 五經備旨 등의 서적들이 모두 점석재 에서 간행되었다.48)48) 점석재 이외에도 江左書林, 文瑞樓, 醉六堂, 千頃堂, 著易堂, 文玉山房, 三蒼書 局, 暢懷書屋, 芸緗閣 등이 모두 당시 상해에서 활발하게 출판 활동을 벌였다. 이들 출판사들을 전국에 유통망을 형성하였으므로 상해에서뿐만 아니라 북경, 남경, 양주, 광주, 섬서 등지의 대도시에 분점을 설치하여 동시에 원하는 책을 구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서목을 만들 어 독자들이 값을 지불하면 우편으로도 받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49) 그 러나 光緒 31년(1905)에 清 왕조가 과거제도를 폐지하자 과거 시험용 서적은 일 시에 모두 사라졌다. 49) 3) 集玉齋의 설치와 중국본의 대량 유입 조선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중국본 사서류의 상당수는 集玉齋 의 印記 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집옥재는 高宗이 재위 후반기에 신하들 을 접견하고 공무를 보던 곳이었다. 고종이 재위 전반기에 주된 집무처로 이용 한 곳은 경복궁 침전 옆에 있던 緝敬堂이었다. 집경당은 1890년경에 중건된 것 으로 추정되며, 나란히 건립된 咸和堂과 더불어 침전인 興福殿에 예속된 건물이 었는데, 고종은 그곳에서 신하들과 접견하기도 하고 혹은 講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에 황실체제로 전환되면서 고종은 재위 후반기 로 갈수록 집옥재와 건청궁을 주된 집무처이자 사저로 이용하였다. 어람용 도서 의 수장처 역시 기존의 경복궁 집경당으로 대표되는 침전 영역으로부터 집옥재 를 비롯하여 乾淸宮이 속한 後苑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48) 沈俊平, 2013 앞의 논문, 250면. 49) 위의 논문, 269면.

42 62 한국문화 74 고종 재위 후반기를 지나 대한제국까지 궁중의 대표적인 왕실 도서관이자 서 화 수장처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전각은 집옥재였다고 할 수 있다. 1891년 7월 고종이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를 경복궁으로 이전할 것을 명한 후, 1910년대 초 에 집옥재의 수장품이 일제통감부가 설치한 제실도서관으로 흡수되었고, 이 자 료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인계되었으므로 상당수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 있 을 수 있게 되었다.50)50) 고종은 1876년 2월 조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개화정책의 수행이 불가피해진 상 황에서 중국을 통한 서양 관련 신서적 구입에 열의를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렇게 확보된 책들에 집옥재 란 장서인이 일괄적으로 압인되고 도서 명부로 集 玉齋書目, 集玉齋書籍目錄 이 작성되었다. 집옥재 도서 중에는 서양관련 중국 도서도 있었지만 집옥재 도서의 중국본의 다수는 역시 전통적인 중국서적들이었 으며 출판연도는 1800년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51)51) 고종이 중국에서 간행된 서양 관련 서적들을 구입한 사실은 內下冊子目錄 (장 )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목록은 1884년에 작성된 것으로 약 600종의 도서가 수록되어 있으며 서양 관련 서적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이 밖 에 집옥재의 도서목록 중에 있던 上海書莊各種書籍圖帖書目 (藏 )은 고 종이 중국본 서적을 어떠한 방법으로 접하고 구입 의사를 결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천, 지, 인 3책으로 분책된 이 서목은 상 해에 있는 16개 서점의 판매도서 목록을 모은 것으로, 서목들에는 서점별로 100 여 종에서 400여 종에 이르는 서적의 목록과 가격이 적혀 있다. 그리고 각 서점 의 위치와 인사말들이 적혀 있는데 그 인사말 중 연도가 확인되는 것은 대부분 1887년, 1888년이다.52)52) 50) 황정연, 2008 高宗 年間(1863~1907) 宮中 書畵收藏의 전개와 변모양상 美術史學硏究 259, 92-98면. 51) 이태진, 1996 규장각 중국본 도서와 集玉齋圖書 민족문화논총 16, 174면. 이태진은 조 사결과에 따라 집옥재 소장 도서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규장각도서 중국본 원 소장처(장서인)별 분류에 의하면, 장서인이 찍힌 중국본은 3,444종으로 전체 6,075종의 56%를 차지한다. 이중에 단일소장으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집옥재 도서이다. 총 1924종으로 전체의 30%, 장서인이 있는 도서의 55%에 해당하는 수량이다. 이 조사 결과 는 결국 현 규장각도서 중국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집옥재 도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43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63 고종은 1873년 친정을 선포하고 경복궁으로 수장처를 옮긴 이후로 중국과 일 본 서화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고종은 열강의 침입과 개항기라는 특수 한 시대 상황 속에서 대외 개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선진 문명을 입수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고종의 이러한 대외 인식은 왕실에 전래되던 고유한 자료 위주였던 궁중 수장의 경향을 서서히 외래적인 성격으로 변모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53) 그리고 그의 서재였던 집옥재의 도서 수장을 통 하여 고종의 근대 문물의 도입에 대한 노력이 일부 가시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 살펴본 논어 와 사서류 서적은 서구의 근대적인 지식을 지향하는 서적들은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인 중국 학술 사상에 가깝다. 그러나 고종은 대 내외의 개방과 개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통 학술의 변화라도 예외 없이 중요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보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는 근대라는 세계 질서 속에 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지식과 사상들을 수집하고자 했던 고종의 근대화의 노력 속에서 이전의 전통적인 왕실 도서관의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근대의 도서관으로 변모하는 양 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53) 7. 나가는 말 이상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논어 와 사서 관련 문헌을 살펴보고 특히 중국본 사서의 수장과 그 수용 양상에 대해서 더 살펴보았다. 규장각에 소장된 한국본 논어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 이 소장되어 있지는 않다. 한국본은 重刊本으로는 論語集註 와 論語集註大全 의 두 종이 다수 소장되어 있고 조선인 언해본으로는 論語諺解 가 다량 소장되 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본 논어 와 사서 관련 문헌들을 통하여 조선 의 왕실 장서 기관으로서의 규장각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52) 위의 논문, 179면. 53) 황정연, 앞의 논문, 94면.

44 64 한국문화 74 중국본은 특히 청대 후기의 四書 관련 서적들이 대량 유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청대에 간행된 책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그 내용은 과거시험을 위해 사서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교재로서 講章體로 쓰여진 서적들이 대부분이었 다. 규장각 소장본 중국본 사서류의 종류는 한국본과 일본본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 중의 많은 서적들이 청대 말기에 간행된 石印 本이었고 그 중에는 集玉齋 나 帝室圖書之章 의 印記를 가진 서적들이 상당수 였다. 즉, 다량의 청대 후기 중국본 사서류가 조선으로 수입되어 高宗의 서재로 알려진 집옥재에 소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장 상황 은 조선 후기의 유학 사상의 변천과 청대 말기 石印 출판의 발전 상황, 그리고 집옥재를 통한 고종의 근대화 노력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일본본은 수량이 많지 않으며 일제시기에 유입되어 온 것이 많았다. 본고에서 는 규장각에 소장된 일본본 논어 관련 문헌들에 대하여 소략하게 소개하였을 뿐이지만, 일본에서 간행된 논어 및 사서 관련 문헌들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규장각에 소장된 경위 등은 조선 문인들의 일본 유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근 대 시기 일본의 유학 사상의 발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관련 문헌 중에 규장각에 소장된 중국 석인본 監本四書 과 같이 일제 시 기 일본의 한학열풍과 식민지의 교육 전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한 내용들을 더 상세하게 조사한다면 조선과 일본의 유학 사상 및 교류 등에 관한 의미 있는 연구결과들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문화 교류에 대한 연구가 나날이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에 규장각에 포함된 고서들 중 논어 와 사서관련 문헌의 현황을 점 검해보고 문헌의 간행과 유통, 소장 상황에 대해 고찰해본 시도가 규장각 소장 본 도서 연구에 일정한 참고 자료가 되길 기대한다. : 논어(論語), 사서(四書), 중국본, 한국본, 일본본, 집옥재(集玉齋), 석판인쇄 주제어 ( ), 심사시작일( ), 심사완료일( ) 투고일

45 奎章閣 소장 論語 와 四書 관련 문헌에 대한 고찰 65 <Abstract> A Study on The Analects of Confucius and The Four Books in Kyujanggak( ) of Korea 奎章閣 Dang, Yun-hui * 54) The article focuses on the documents about The Analects of Confucius and The 奎章閣) of Korea, which are classified under three heads like Four Books in Kyujanggak( the Korean editions, the Chinese editions and the Japanese editions. The Korean editions about The Analects of Confucius and The Four Books in 奎章閣) Kyujanggak( almost are the Korean re-printed editions of The collections of 論語集註大全) and The assembly of annotations about the Analects of Confucius(論語集註), excepting The Korean annotations about the Analects of Confucius(論語諺解). annotations about the Analects of Confucius( The Chinese editions almost are the documents about The Four Books, which are lithographed massively in Qing dynasty for the students to prepare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This type of the Chinese editions are imported into Chosun by Jib okjjae 集玉齋), the royal academic institute established in the period of Kojong(高宗) to catch ( up with the international thoughts. The Japanese editions are small amount and mostly impor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need to research more. 論語), The Four Books(四書), the Chinese editions, the Korean editions, the Japanese editions, Jib okjjae(集玉齋), Key Words : the Analects of Confucius( lithography *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Chinese Language and Literature, Konkuk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