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환상의 그림갈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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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재와 환상의 그림갈 4권 灰 と 幻 想 のグリムガル LEVEL.4 주몬지 아오 지음 하쿠이 에리 일러스트 측근 오크는 모두 죽인 듯 시호루는 안도한 건지 울고 있고, 유메가 안아주며 "괜찮아, 괜찮 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다. "일어설 수 있겠어?" 메리가 물었다. 응. 아니. 무리. 하루히로는 순간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메리가 다정하게 대해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만뒀다. "어떻게, 설수 있을 것 같아." 하루히로는 몸을 일으켰다. " 아니, 나보다 " 어째서 우두커니 서 있는 거지? 다들 팔짝팔짝 뛰거나, 말싸움하거나, 동료인 신관에게서 치료를 받거나, 왠지 떠들썩한데 그 저 서 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검을 들지 않았다. 두 팔은 축 늘어져 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용케도 서있네. 그런 상태로. 투구도 찌그러진 것뿐만이 아니라 비뚤어져 있고. 여기저기에서 피가 흘러 나와 뚝뚝 떨어지고 있다. 갑자기, 천천히 쓰러졌다. 뭔가에 기대어 서있던 무거운 물건이 갑자기 지지대를 잃고 쓰러졌다. 그런 방식이었다. 메리가 숨을 들이켰다. " 모구조?" 이름을 부르자, 모구조는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가슴을 눌렀다. 한숨이 나왔다. 깜짝 놀랐다. 한순간, 상당히 애가 탔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 이 일어난 것 아닌지 해서. 그럴 리가 없는데. "놀라게 하지 말라니까, 모구조." "미안, 미안." 모구조는, 아하하하고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엄청 난 출혈이다. 피투성이라서 표정 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뭐, 어떻게든 괜찮은 것 같다. "다행이다."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정말로, 다행이다." 진짜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었고. 그렇게 된다면, 큰일이다. 너무나 큰일이야. 있을 수 없지만. 없다니까.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지. "다행이다." 울 것 같다고나 할까, 이미 울고 있다. 손이 젖었다. 얼굴을 가린 두 손이. 그 정도로 안도한 것이다. 엄청나게 안도했다. 잘됐다. 잘 됐어. 솔직히 솔직히 말이야, 이제 틀렸구나 싶었다

8 고. 왠지 그런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꿈을 도대체 언제 꿨냐고 하겠지만. 뭐랄까, 예지몽 같은? 어젯밤에 그런 꿈을 꿨는지도. 실패한 꿈. 이 상하지. 그런 꿈을 꾸다니. 이상해. 아무튼 다행이다. 모구조는 피투성이지만, 잘됐다.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행이다아."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가. 두 손을 치운다. 어둡다. 캄캄하다. 방. 의용병 숙사의 방이다. 잠들었던 건가? 졸고 있었다. 그렇다면.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다.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몸을 일으켰다. 이 방에는 2층 침대가 두 개 있다. 저쪽 침대는, 위층에 란타. 란타는 있다. 가볍게 코를 골고 있다. 그리 고, 아래층에는 없다. 아무도. 비어 있다. 없다. 모구조가 없다. 이제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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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현실의 겨디기 힘든 이 무게 사람이 죽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새삼 그렇게 실감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다니, 결국 하루히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렬 가능성은 물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동료 중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생각했을 터이 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워했었다. 그래도 하루히로가 예상했던 죽음이나 상실은 현실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찾아오고, 정신이 들고 보니 아픔만이 남아 있던 마나토 때와는 상당히 양상이 달랐다. 유해를 오르타나까지 운반하고, 시외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출입구가 없는 열리지 않 는 탑이 서 있는 언덕의 묘지에 매장했다. 그때쯤의 기억은 애매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묘하게 무덤덤했다. 분명 렌지네가 거들어준 덕 분도 있어서 막힘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이겠지. 단, 그때부터가 힘들었다. 하루히로의 동료는, 친구는 죽었다. 불에 타서 뼈와 재가 되고, 그 언덕에서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영원의 잠에 빠졌다. 하루히로네는 모구조를 잃었다. 모구조는 이제 없는데 모구조가 존재했던 흔적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예를들면, 장비. 흠집투성이인 판금 갑옷과 찌그러진 투구, 그리고 죽음의 반점에게서 얻은 더 초퍼(식칼검)는 모구조와 함께 태워버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태워버렸으면 하고 바랐지만 금속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다. 남겨두려고 해도 놓아둘 장소가 없다. "우선 맡겨둔다거나." 시호루의 제안에 이견은 없었다. 이견은 고사하고 요로즈 위탁 상회에 가보니 대단한 일이 판 명되었다. "확실히 당점에서는 돈 이외의 물품을 맡아둘 수도 있다." 빨간색과 하얀색 바탕에 금색을 곁들인 화려한 옷을 입고 금테 외눈 안경을 낀 소녀, 4대째 요로즈는 금으로 된 파이프를 카운터에 톡 두드렸다. "수수료는 돈일 경우엔 예탁금의 100분의 1, 물품의 경우엔 감정 평가액의 50분의 1이다. 사 실 감정할 필요도 없이 그 투구와 갑주에는 값어치가 없어." "어 아째서?" "설명해야 하나? 무례한 놈." 요로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하루히로를 무례한 놈이라고 부른다. 너무한다. "그 투구와 갑주는 쓸모가 없어. 비용을 들여 수리해도 쓸수있게 될지 어떨지. 기껏해야 대장 간에라도 가서 고철로 팔아넘기는 게 고작이지." "어이, 야! 말조심해!" 카운터를 뛰어 넘어가려던 란타를 하루히로는 일단 말렸다. 그러나 마음은 란타와 같았다. 고철. 고철이 뭐야? 고철이. 동료의, 모구조의 갑옷이라고. 유 품이란 말이다. 고철은 너무하잖아.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까불지 마.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요로즈는 눈 을 가늘게 뜨고 가날픈 어깨를 으쓱거렸다.

11 "동료의 유품이지? 요로즈 상회에는 온갖 정보가 다 모이니까 알아. 사정은 이해하지만, 당점 에는 이 4대째 요로즈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규정이 있다. 어떠한 이유가 있든 규정에 어긋난 취급은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당장은 무가치한 물품을 맡을 수는 없어. 창고 공간도 유한한 자원이니까. 가치는 없어도 처 분할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라면 너희가 직접 소중하게 보관해야지." 한마디도 항변할 수 없다. 그렇게 소중하다면 본인들이 어떻게 하면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정말 맞는 말이므로 요로즈를 책망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그럼 검은?" 시호루가 묻자 요로즈는 끄덕였다. "그건 물론 맡을 수 있다. 단, 그것은 그 죽음의 반점의 소유물이지? 싸지는 않아." 전문 점장에게서 감정을 받아보니 실제로 엄청난 가격이 붙었다. 놀랍게도 25골드. 위탁 수수 료는 50분의 1이니까 50실버가 된다. 지불할 수 없는 금액은 아니지만 망설여지는 금액이다. "지금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 아닌가?" 유메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는 뒤로 미룰수록 더 처치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 에 최종적으로는 맡기는 수밖에 없을것 같긴 하다. 하지만, 굳이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뒤라도 괜찮다. 꼭 해야 할 일은 그 밖에도 있다. 요로즈가 가르쳐주었다. "참고로 노파심에서 묻는 건데, 고인의 자산은 어떻게 할래?" "계산?" "당점에서는 고인의 돈을 맡아두고 있다. 본인 이외의 사람이 인출할 수는 없지만 본인이 사 망한 경우엔 소정의 절차를 밟으면 그게 가능해지는 거다." "어 그런 거야?" "구체적으로는, 의용병단 사무소를 통해 변경백이 발행한 사망 증명서와 대리인 증명서를 받 아오면 당점이 그것을 확인한 후에 대리인에게 고인의 자산을 반환하게 된다." "사무소" "증명서." "참고로 현시점에서는 고인의 자산의 내용을 밝히는 일도 단장으로서는 할 수가 없어." 모구조는 얼마나 맡겼던 걸까? 돈이 생기면 갑옷을 샀었고 식비도 꽤 들었으니까 저금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무성의한 것 같다. 마나토 때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처리를 해주지 못했다. 이번엔 제대로 해주고 싶 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루히로뿐일까? 요로즈 위탁상회에 간 다음 날, 하루히로는 혼자서 의용병단 사무소를 방문했다. 란타는 침대 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고, 유메와 시호루에게도 말을 꺼내봤으나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았 다. 메리는 애초에 묵는 곳이 다르다. 혼자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무소 소장인 브리 씨, 즉 브리트니에게 수속에 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자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나, 자기. 마침 잘 왔어. 상금이야, 상금. 뭐더라, 그거, 뭐 였지? 분배를 결정하는 회의 때도 안 갔었다면서?

12 살짝 난처했던 모양이야. 그 렌지와 카지코가. 하긴, 그럴 경황이 없었겠지만, 자기들 입장에 서는. 하지만 그런 때도 약게 굴지 않으면 손해 보거든 " "상금 이라니. 무슨?" 오더(병단 지령) 보수는 작전 종료 후에 오르타나에 돌아와서 받았다. 얇은 구리제 수표인 변 경군용 수표 군표 형태로 잔금 80실버를 5인분. "아. 혹시나 키퍼 조란 젯슈와 주술사 아바엘의?" "맞아. 그거." 브리 씨는 새까만 입술을 날름 할더니 윙크를 했다. 그건 하지 말아줬으면. 하루히로는 생각 했다. 이럴 때 장난치지 말아줘. "조란 젯슈가 100골드고 아바엘이 50골드. 합하면 150골드. 들 은 바에 의하면, 특히 아바엘 은 자기네 파티가 거의 단독으로 해치웠다던데." "아 뭐, 그러 네요.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은 느낌도 드네요." "그렇긴 해도, 그런 경우는 대개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통상적이 거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 시 다투게 되잖아?"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뭐니? 큰 공을 세운 건데. 기쁘지 않은 거야?" "기쁘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물론,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뭐랄까. 웃을 수밖에 없 다? 그것도 아니다. 그것도 모르냐? 바보잖아. 그런 비슷한. 죽고 싶냐? 그런 비슷한. 하루히로는 고 개를 숙이고 주먹을 꼭 쥐었다. " 기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겠지." 브리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히로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브리 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 는지는 모른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자기네는 상금을 받을 권리가 있고, 배분한 몫은 내가 맡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카 지코의 말을 빌자면 렌지가 억지로 쥐여준 모양이긴 하지만, 60골드야." "60?!" 과연 그 사실에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부 악몽이었다면 얼마나 좋을 지. "60골드라면 금화 60개?" "그래. 은화로 환산하면 6,000개지. 여섯 명 이 아니라, 다섯 명이서 나누면 한 사람당 12골 드가 되네." "12." 브리 씨가 여섯 명을 다섯 명으로 정정한 부분은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소 실감이 나 지 않을 정도의 큰돈이다. 하지만, 기쁘지 않다. 조금도 기쁘거나 하지 않았다. "받을 수 있는 건 받아두겠습니다만." "다만?" "아뇨 받겠습니다. 고맙게. 돈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으니까. 있으면 있는 만큼 덜 곤 란하고. 아, 하지만 그전에."

13 "사망증명서와 대리인 증명서 말이지?" "네." "시간이 좀 걸려." "그렇습니까?" "관공서의 일이니까. 열흘은 각오해. 빨라도 7일 정도일까? 6일 이내에 발행되는 일은 우선 없어. 뭐야? 냉큼 정리해버리고 싶다는 얼굴이네." "솔직히 그런 마음은 있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혈육이라면 직접 천망루에 가서 서류에 서명하면 되지만 의용병은 가족이 아니니까. 결혼했다면 다르겠지만." "결혼 " 이 또한 현실감이 없는 단어였으나, 이제 모구조는 결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루히로는 그 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할 수 없다. 죽었으니까. 거짓말 같다. 이 손으로 움직이지 않는 모구조를 안고 화장터 까지 데려갔고 태운 뒤의 뼈와 재를 직접 봤는데도, 아직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다. "안 했었지? 그는 아직. 결혼은." " 안 했습니다." "독신 의용병의 경우엔 천애고아나 마찬가지니까, 이 의용병단 사무소가 신원을 보증하게 되 어 있는 거야. 자기네 파티 전원의 서명이 필요해." "네? 저뿐만이 아니라?" "그래. 파티 전원. 게다가 내 앞에서 서명해야 해.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어." "그렇다면." "다시 와." 맥없이 사무소를 나온 하루히로는 막막했다. 란타와 유메, 시호루는 괜찮다. 하지만 메리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딱히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매일 아침 당 연한 것처럼 북문 앞에서 집합 했었다. 모구조가 죽은 뒤에 내일은 어떻게 할까?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 니 그렇다. 당일은 매장이니 뭐니 해서 정신없었고, 메리는 유메와 시호루의 방에서 묵었다. 다음날 점심때쯤이었나? 숙사에서 마주쳤을 때, 모구조의 유품을 어떻게 할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요로즈 위탁상회에 갔었고 그날은 저녁 무렵에 해산했고 역시 다음 날의 화제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메리. 어떻게 하고 있을까? 유메와 시호루는 메리가 사는 임대 숙소를 알지도 모른다. 물어보 는 수밖에 없나? 차라리 유메와 시호루더러 가보라고 하는 게 좋을까? 이럴 때는 여자들끼리 가는 편이.어느 쪽이든 어떻게든 연락을 해서 만나야 한다. 하루히로는 60골드의 군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섯 명이서 나눠야 한다. 다섯 명이라. 다 섯 명. 한 사람, 모자라다. 다섯 명이서 나눈다? 군표는 나늘 수 없다. 환금을 해야 한다. 분명히 요로즈 위탁상회에서 환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요로즈 상회에 가기 전에 사무소를 먼저 갔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수속에 관한 건 요로즈 가 가르쳐 줘서 알았으니까 그건 무리지. "아." 숙사로 돌아오는 길을 천천히 걷고 있노라니 모든 것이 전부 다 짜증이 났다.

14 "귀찮아." 멈춰버리고 싶다.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고 싶다. 계속 몸을 웅크리고 있고 싶다. 문득 초코가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지독한 놈이 라고 하루히로는 생각한다. 진 짜로 지독하다. 너무 지독해서, 왠지 이제 웃음이 나와버린다. 초코도 죽어버렸지. 초코네 파티는 전멸 했다. 초코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대로 매장해줬을까? 원래가 변 경군이 주체였던 작전이니 전사자의 유해를 방치하는 일은 없겠지 만. 매장. 매장이라. 불에 타고, 뼈와 재만 남고, 그런 언덕에 묻히고,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건가? 별로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단, 제대로 화장하지 않으면 노라이프 킹의 저주로 좀비가 되어버린다. 초코가 좀비가 되 다니 섬뜩하다. 그건 싫다. 절대로, 안 된다. 죽어버 린 자는 남겨진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어 떻게 해줘야 한다. 나는 제대로 한 것일까? 잘하고 있는 걸까? 어떨까? 모구조. 좀 더 뭔가 없어? 이렇게 해줬 으면 한다거나, 저렇게 해달라거나. 반대로, 이런 건 싫다거나. 잘못된 일을 하진 않았을까? 물어봐도 대답은 없다. 모구조는 이제 없는 것이다. 초코도 없다. 죽었다. 거짓말 같지만, 죽어버렸다. 거짓이 아니다. 정말이다. "하지 말걸 그랬어." 오더. 수락하는 게 아니었다. 초코네도 그렇다. 짐이 너무 무거웠다. "누구야? 말꺼낸 거." 란타다. 그 녀석. "하지만 결정한 것은, 나야." 하루히로가 찬성하지 않았으면 오더를 수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 가 아니다. 수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리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초코로부터 그녀의 파티가 오더를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었다면 하루히로 는 참가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겠지.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초코를 말렸어야 했다. 위험하다고. 무모하다. 가면 안 돼. 파티 동료가 도저히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파티에서 빠 져나오면 돼. 그렇게 설득했어야 한다. 하루히로는 반대쪽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란타가 아무리 떠들어대든 알게 뭐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너무 위험하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러나, 하루히로는 리스크는 그리 크지 않다고 가늠하고, 찬성 한 것이다. 알고 있다. 결과론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전부 잘못이었 다고 생각해버린다. 자기를, 누군가를 탓하고 싶다. 소용없는데도. 무슨 일을 해도 모구조는 돌아오지 않는데. 하루히로는 하^을 우러러보았다. 지금, 몇 시지? 오후 3시쯤인가? 유난히 하늘이 맑다. 난감 하네. 하늘이 맑아, 모구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그거 말고는, 어떻게도." 장난하냐? 싶을 정도로, 엄청 나게 깨끗한 하늘이야. 하루히로는 오른손으로 얼굴 윗부분을 가렸다. 눈이 시리다.

15 2흐믈흐믈 유메는 흐물흐물거리고 있다. 흐물흐물이 뭐지? 유메 본인도 잘 모르지만, 아무튼 흐물흐물하 고 있으니 흐물흐물하고 있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흐물흐물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귀찮다. 그래서 유메는 의용병 숙사의 2층 침대 아 래층에 누워있다. 가끔씩 몸을 뒤척인다. 그래도, 아무튼 흐물흐물하고 있기 때문에 몸을 한 번 뒤척이는 것도 힘들다. 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소변을 참고 있다. 화장실에 가는 게 좋겠다. 그보다, 가야만 한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흐물흐물하고 있 기 때문에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유메" 라고, 시호루가 말을 걸었다.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흐물흐물하고 있어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들다. 결국 유메는 "응?" 이라고만 말했다. "배 안 고파?" "응." 글쎄? 생각해본다. 전혀 안 고픈 건 아닌 것 같다. 뭔가 먹으려 하면 그런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다. 뭐, 안 먹으면 안 먹는 대로도 괜찮은 가? 그런 느낌이다. "안 먹으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은데." "유메?" "듣고 있어?" 안 되겠네. 흐물흐물하면서도 유메는 생각하고 있다. 제대로 대 답을 해야 한다. 알고는 있지 만 도저히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장난하려는 게 아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몸뿐만이 아니다. 마음도 흐물흐물하고 있 다. "적당히 좀 해." 툭 던지듯이, 상당히 작은 목소리로 시호루가 말했다. 정말로 작 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유메 에게 던지려는 말이었는지, 그게 아닌 건지 잘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시호루는 짜증을 냈다. 화난 말투였다. 시호루가 그런 말투를 쓰는 건 처음이 다. 적어도 유메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메는 몸을 돌려 옆 침대에 앉아 있는 시호루를 보았다. 시호루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나 할까, 축처져 있다. "미안." 유메가 사과하자 시호루는 고개를 흔드는 것처럼 도리질을 했다. "나야말로 미안해." "시호루가 사과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시호루는 잘못 없걸랑." "그렇지 않아."

16 "잘못 없어." "그렇게는 생각할수 없어." "그런가?" "앞으로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유메는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딱 정지해버린다. 그래도 생각한다. 유메로서는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말을 찾으려고 한다. "있잖아, 시호루." "응". "유메 말이야, 이런 거, 고역이야. 뭐랄까 괴롭다거나, 힘들다거나, 그런 거 아주 싫어하는 걸. 다들 그렇겠지." "그래." "있잖아, 예를 들어서 말인데, 무지하게 비가 쏟아진다고 쳐." "응." "엄청 비가 내려서, 바깥을 걸어 다닐 수가 없다면, 집에 있으려고 하잖아. 왜냐하면 비는, 그 쳐 줬으면하고 바라도 그쳐주지 않으니까." "응." "누구한테 부탁하면 좋을지 모르잖아. 그래서, 이런 건, 이제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 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응 있잖아,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쩔 수가 없다 고 할까, 그런 의미걸랑. 이거 다 거짓말이지? 싶은데, 이렇게 될 줄은 유메는 조금도 생각하 지 못했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런 일, 생겨도 이상할 것 없는데. 알고 있었을 텐데." 처음이 아닌 것이다. 두 번째다. 그런데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동료를 잃는다는 걸. 모구조가 죽어 버리다니. "바보네, 유메." 유메는 엎드렸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서, 너무나 무겁다. "유메 무지 바보야. 유메가 너무 바보라서 이렇게 되어버렸나봐." 시호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왠지 졸리다. 하지만 분명 잠들 수는 없겠지. 유메는 천장을 향해 드러누우려고 했다. 아까보 다 몸이 흐물흐물하고 무겁다.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한동안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3.언리미티드 "이봐요, 주인장! 소르조 한 그릇 추가!" 란타는 면과 국물을 입 밖으로 튀기면서 왼손 검지를 치켜들고 외쳤다.

17 남구 장인 거리 옆에 있는 노점촌에, 오르타나에서도 이곳에서 밖에 맛볼수 없는 소르조라는 면류를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 소르조는 푹 곤 고기를 넣은 짭짤한 국물에 밀가루 등으로 반죽해서 가늘게 썬 노란 면이 들 어 있는 요리다. 엄청나게 맛있냐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그렇다고는 대답하기 힘들다. 아마도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겠지. 특히 처음 한입은. 하지만 계속 먹다 보면 맛있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한동안 지나면 또 먹고 싶어진다. 몇 번 씩 먹다보면 완전히 매료된다. 열흘에 한 번, 아니, 5일에 한 번, 아니, 아니, 가능하면 사흘에 한 번은 먹고 싶어진다. 란타 앞에는 다소 큰 그릇이 잔뜩 쌓여 있다. 그 수는 일곱. 란타는 여덟 그릇째의 소르조를 해치우려고 한다. 잠시 후 방금 전에 주문했던 아홉 그릇째가 나오겠지. 갓 만든 소르조는 뜨겁다. 무진장 뜨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후 후 불어서 식힐 틈도 아까운 듯 란타는 그냥 입에 쏟아 붓는다. 입천장을 데어 얼얼하다. 솔직히 맛같은 건 잘 모르겠다. 배도 부르다. 빵빵하게 부풀어 임산 부처럼 되었다. 먹는건 거의 고통일 뿐이지만 란타는 멈추지 않는다. 여덟 그릇째는 이 한입 으로 끝이다. " 푸하아앗! 다 먹었다!" 동시에 아홉 그릇째가 나왔다. 대량의 김을 된 순간, 현기증이 났다. 닭뼈국물과 돼지 지방과 양파며 당근이 혼연일체가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가, 지금의 란타에게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만 초래할 뿐이다. "형씨, 괜찮아?" 가게 주인이 란타의 얼굴을 살핀다. 란타는 끄덕이고 손으로 얼굴을 닦는다. 땀이며 콧물이며 국물로 범벅이 되었다. 차마 봐줄 수 없는 얼굴이겠지. 그렇게 생각한다. 그따위걸 신경쓰게 생겼냐? " 으싸!" 란타는 아흡그릇째에 착수했다. 면을 흡입할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역류해서,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 토할 거야. 절대로 토하지 않는다. 토할쏘냐. 먹는 거다. 먹고, 먹고, 또 먹을 거다. 다 먹어치운다. 언젠가는 하자. 가게. 동료의 아니, 파트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녀석. 진짜로 진짜로, 그때까지 본적 없을 정도로 엄청 좋은 표정이었거든. 하지만 나, 소르조가 아니라 라면 가게로 하고 싶어. 돈을 모으고, 연구하고, 이거다 싶은 맛 이 나는 라면이 완성되면, 차리자, 가게. "그래." 대답해봤자 파트너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먹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아무튼 먹는 거다. 파트너가 좋아했던 소르조를 후룩후룩 후룩후룩 먹는다. 먹을수 있을 만큼 먹는 거다. 먹을 수 없어도 먹어준다.

18 배가 잔뜩 불러도, 먹고 싶지 않아도 오로지 먹어라. 먹어라. 먹으라면 먹어. 왜냐하면 말이야. 왜냐하면. 왜냐하면. "너는 이에 모머그니까!" 그렇지? 파트너. 아무리 먹고 싶어도, 너는 이제 먹을 수 없으니까. 파트너 대신에 이란타 님이 먹어준다. 그런 일을 해봤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알 게 뭐야. 의미 따위 몰라. 어떻든 상관없어. 단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란타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지않 을 수가 없는 것이다. "꾸에에엑! 주인장! 한 그릇 더!" "하, 하지만, 형씨." "됐으니까 빨리 내와!" "아, 알았어." "아홉 그릇째!" 앞으로 한입이면 아홉 그릇째가 끝난다. 란타는 스스로를 가속시켰다. 자기로서는 스피드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면이 줄어들지 않는다. 손이 멈춘다. 토해 버리고 싶은 검은 충동이 엄습한다. 숨을 쉴수가 없다. 질식해버릴 것 같다. 문득 깨달았다. 주변이 술렁이고 있다. 둘러보니, 장인이며 의용병이며 온갖 사람들이 란타를 먼발치에서 에워싸고 있다. 뭐야? 이쪽을 힐끔힐끔 보면서. 뭐 어쨌다고? "어이, 저 녀석, 다음이 열 그릇째야?" "우와 진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보통 이게 가능해?," "나는 무리야." "대단해." "그보다, 위험한 거 아니야?" "하지만, 이제 슬슬 힘든 것같은데." "그렇지." "그야 그렇지. 열 그릇은 좀. 힘들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열 그릇은. 힘들다고." "과 연 힘들지." "열 그릇은." "흠." 란타는 코웃음 쳤다. 이물감이 느껴진다. 콧구멍에 뭔가 걸려 있나? 손가락을 쑤셔 박아 꺼내 봤더니 소르조 면이었다. 버릴까 하다가, 파트너라면 그러지는 않겠지. 란타는 자기 콧구멍에서 발굴한 면 조각을 입에 던져 넣었다. "어이, 잘 봐라, 너희들. 열 그릇 따위는 말이야, 나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도 아무것도 아니 야. 여유라고. 이 정도쯤." 가자. 기합을 다시 넣고, 란타는 아홉 그릇째를 단숨에 다 먹어치웠다. 열 그릇째가 온다. 현기증이 났지만, 별일 아니다. "으랴아아아아아!" 란타는 일어서서 그릇에 입을 대고 엄청나게 뜨거운 면을 국물과 함께 배 속으로 마구마구 흘 려보냈다. 구경꾼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 환성에 고무되었다고나 할까, 부추겨져 란타는 불과 수십 초 만에 열 그릇째를 해치웠다. 면이며 건더기뿐만 아니라 국물까지 다 마셨다. "어떠냐? 으랴앗! 주인장, 다음, 다음!"

19 "알았어!" "우오오오오!" "해냈다!" "엄청난데, 저 녀석! "황당해!" "좀 더 먹어봐!" "갈수 있는 데까지 가 봐!" "먹어라!" "해내라!" "당연하지!" 란타는 가운멧손가락을 세웠다. "나는 란타! 이나 님의 이름을 불러봐!" "란타!" "란타!" "좋다, 란타!" "란타!" "란타!" "주인장, 빨리 줘!" "예입! 한 그릇 나왔습니다!" "우왓핫핫핫핫! 열한 그릇째다!" 란타는 웃으면서 열한 그릇째의 소르조에 덤벼들었다. 한순간,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 지? 라고 생각했으나, 왜건 뭐건 그런거 없다. 먹어라. 먹는 거다. 보고 있나? 파트너. 이런 일밖에 못 하지만. "푸홋!" 란타는 갑자기 사레들리고 말았다. 코에서 면이 팟 튀어나와 구경꾼들이 폭소한다. 화가 폭 발할 것 같았지만, 란타는 반대로 크게 웃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먹을 수 있을까? 한계까지, 쓰러져버릴 때까지 먹어주겠다. 가게, 언젠가 차릴 거니까. 파트너가 바란 대로, 소르조가 아니라, 라면 가게로 한다. 가게 이 름은 이미 정했다. 라면숍 란타&모구조, 살짝 고쳐서, 모구조&란타다. 4. 최악의 조건 이제 그만하는 게 좋지 않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누구한테? 아마도 옆에 있는 남자다. 정체는 모른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눈을 부릅뜨고 잘 보았다. 지독하게 흐릿하다. 뭐지? 이 남자는. 왜 옆자리 에 앉아 있는 건가? 영문을 모르겠다. "당신 누구?" "응? 누구냐니." "왜, 거기에 있어?" "아니, 왜긴, 같이 왔잖아. 이 가게에." "누구와?" "당신과. 메리." "왜?" "그러니까 과음했다니까." "누가?" "그야, 당신이지." "그래?" 메리는 숨을 내쉬고 컵을 들었다. 들이켜려고 했으나 텅 비었다. 가게? 여기는 가게인가?

20 무슨 가게지? 둘러본다. 아, 보아하니 술을 마시는 가게인 모양이다. 카운터 자리만 있는 비좁은 낯선, 모르는 가게 다. 카운터 너머에 있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컵 을 내밀고 한 잔 더 라고 주문하려고 했더 니 옆에 앉은 남자가 손목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하라니까." "내버려둬." "내버려둘 수 없지. 당신, 얼마나 마셨는지 알아?" "몰라.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야." 옆의 남자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태도였다. 왜 이런 낯선 남자한테서 짜증나는 눈길을 받아 야 하는 거지? 열 받는다. "그럼 됐어." 메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휘청거려서 옆의 남자가 부축해주었으나 그 손을 뿌리쳤다. "만지지 마!" "넘어질 뻔했잖아." "괜찮잖아? 넘어지는 게 뭐가 나빠?" "괜찮지는 않지." "강요하지 마." "뭘 말이야?" "당신 생각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가 아니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다 상관없어. 정말로 어떻든 상관 없다. 메리는 가게를 나갔다. 정신이 들어보니 어딘가에 있었다. 어둡다. 길이다. "어라?" 석장이 없다. 깜빡 잊고 두고 나온 건가? 어디에? 짐작도 안 간다. "어이, 괜찮아?" 누구지? 아까 그 남자인가? 왜 있는 거지? 왜 쫓아오는 거지? "뭐야?" 물어보자 남자는 "엉?!" 이라며 언성을 높인다. "2차까지 내게 만들어놓고 뭐냐니, 적반하장이네." "내게만들어? 무슨 말이야?" "술값 말이야. 당신, 돈 안 냈잖아. 전부 내가 계산했어, 메리."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그야 당신한테서 들었으니까." "내가? 계산을." 잘은 모르지만 그런 걸 꼬치꼬치 따지는 걸 듣고 싶지는 않다. 메리는 돈을 꺼내려고 했다. 가진 돈을 전부 다 주면 남자도 납득 하겠지. 하지만 손이 버벅댄다. 손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서 있을 수가 없다. 쓰러질 뻔해서 남자에게 안기는 꼴이 되었다. "그게 아니야, 메리. 나는 돈을 내라고 하는 게 아니야."

21 "놔." "싫어." "놓으라고." 메리는 남자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밀어낼 수가 없다. 남자는 두 팔로 메리의 몸을 꽉 조인다. 얼굴이 다가온다. 메리는 남자의 턱에 손을 대고 밀어냈다. "했잖아!" "닥쳐, 망할 년! 여기까지 와서 놓을 수는 없지! 그쪽도 그럴 생각이었잖아!" "뭐?! 그럴 생각이라니?!" "속이 답답해서 나와 놀아보려고 했었던 거지?! 안다고, 그 정도는!" "놀아?" 이 남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의미 불명이다. 놀아? 그럴 기분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걸까? 갑자기 가슴이 쑥 차가워졌다. "나 당신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어?" "영?! 뭐긴, 이름하고, 그리고 뭐, 딱히 이야기라고 할 정도는."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런 남자에게 뭔가를 털어놨었다면 최악이다. 술주정 이라고는 해도 그 렇다. 메리는 취했다. 그것도 보통 취한 게 아니다. 상당히, 꽤나, 엉망진창으로 취했다. 위험하다. 이 상태에 이 상황. 틀림없이 위험하다. 도망쳐야 한다. "에잇!" 메리는 힘껏 남자에게 박치기를 날렸다. 남자는 "컥" 하고 주춤 거렸으나 메리를 놓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랬겠다! 너 이 녀석, 이제 용서해주지 않겠다아!" "앗 " 몸이 들렸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메리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팔 힘 을 풀지 않는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남자는 메리를 어딘가로 옮기려고 하는 것 같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려고 했다. 큰 소리로 외치려고 했더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메리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손을 물었다. 남자는"웃!"하고 신음하더니 메리를 내동댕이쳤다. 메리는 허리를 땅에 부딪치고, 뒤통수를 어딘 가에 부딪쳤다. "아파." 눈앞이 빙빙 돈다. 도망쳐야 해. 기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팔을 붙잡고 골목으로 끌고 가더 니 억지로 눕혔다. 올라타더니 또다시 입을 막는다. 당하는 건가? 이런 장소에서, 이런 놈에게. 싫다. 농담이 아니야. 메리는 무릎으로 남자의 다리 사이에 킥을 날렸다. "에잇!" "아웃 제, 젠장! 이 녀석!" 맞았다. 얼굴을, 주먹으로. 한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정신이 들어보니 신관복이 벗겨지려고 했다.

22 틀렸는지도 몰라. 메리는 생각했다. 이건 벌인지도 몰라. 왜냐하면, 죽게 해버렸다. 또 동료를 죽게 했다. 신관인데. 동료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데도. 할 수 없었다. 메리는 최선을 다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수를 했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실수를. 프로텍션(빛의 수호).초급에서 벗어나 중급에 들어선 신관에게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신체능력과 저항력,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광마법. 특히 전투 중에 프로텍션이 소진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아주 작은 차이가 생사를 가른다. 전투 장소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효과가 지속되는 약 30분이 지 나 면 곧바로 프로텍션을 다시 건다. 신관이라면 반드시 명심해둬야 한다.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 그만 체념해!" 남자가 야비한 웃음소리를 내며 신관복을 잡아당겼다. 이음새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설마 처음은 아니겠지? 당신도 즐기는 편이 좋을 거야!" "아니, 즐길 수야 없지." 불쑥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어서 저질남이 돌아보았다. "어?" "미안하지만 나는 봐주는 거 없다?" "이건." "으라아!" 저질남이 엎어졌다. 메리는 밑에 깔렸으나 새로 등장한 남자가 곧바로 저질남을 옆으로 밀어 내 치워준다. "어?" 뭐가 어째서 어떻게 된 건가? 아무래도 도움을 받은 모양인데, 어째서? 누가? "괜찮아? 일어설 수 있어요?" 그렇게 묻더니 메리가 잠자코 있자 저질남에게서 구해준 그 남자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 였다. "뭐랄까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옷은 괜찮습니까?" 유난히 퉁명스러운 말투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주었다. 그것은 틀림없다. 이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뭐, 당했겠지. 메리는 몸을 일으키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신관복 소매가 뜯어졌다. 더러워지기 도 했겠지만 그 이외는 문제없는 것 같다. "미안합니다. 고마워요." "응. 아. 괜찮다면, 뭐 상관없는데." 골목은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목소리 일까? 왠지 들 은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체격. 남자는 상당히 키가 크다. 메리는 이 남자를 알고 있는

23 걸까? "저기." 남자는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말 안 할게. 이 일은. 아무에게도. 그러는 편이 좋겠지, 역시." 이 남자도 아마 메리를 알고 있다. 그런 말투다. "당신은?" "나? 아아. 나는 쿠자크라고 하는데. 이름을 말해도." 확실히 쿠자크라는 이름은 아는 사람 중에는 없다. 메리가 일어서자 쿠자크는 더욱 뒤로 물러 섰다. 메리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필 하는 걸까? 메리는 저질남을 내려다보았다. 쿠자크에게 맞았는지, 발로 차였는지 정신을 잃은 것 같다. 한 발이나 두 발쯤 걷어차줘도 좋겠지만, 관뒀다. 골목에서 나왔다. 쿠자크가 좀 떨어진 곳에 있다. 달빛 덕분에 아까보다는 얼굴이 보였다. 그 제야 알았다. " 데드 헤드에서 같은 녹람대였던." "아. 혹시 기억해?" "하지만." "죽을 뻔했지만." 쿠자크는 고개를 숙였다. " 죽지 않았어. 누군가가 치료해줘서, 정신이 들어보니 나 혼자 남은. 그런 상황." "그렇구나." "저기." "뭐?" "미안. 좀 더 일찍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실은, 봤어. 당신이 나가는 것. 가게에서. 왠지 마음에 걸려서, 쫓아와봤는데. 그랬더니." " 지독했었지? 나." "이니야. 별로. 그렇지는. 나도 마셨으니까." "쿠자크 군." 메리는 고개를 숙였다. "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마워요." 쿠자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간신히 "네 " 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안녕." 메리는 고개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쿠자크 옆을 지나쳤다. 당연 하지만 취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구역질이 났다. 얼마나 마신 건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과음했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다니, 태어나서 처음한 경험이다. 영문을 모르는 사이에 엉망진창으로 당해버리는게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조금은 속이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퍼붓 듯이 술을 들이킨건지 도 모른다. 저런 쓰레기 같은 남자가 옆에 와도 내쫓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쿠자크는 방해를 한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해주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저질남에게 당했었다 면.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든다. 기분 나쁘다.

24 남을 만지는 것도, 누가 날 만지는 것도 원래부터 고역이다. 꽤 많이 만지게 했다. 몸을 더듬 었다. 최악이다. 모든게 다 최악이다. 참기 힘든 구역질이 엄습해 메리는 발을 멈췄다. 토하고 싶다. 하지만 토한 적은 없다. 토할 수가 없다. 쪼그리고 앉았다. 괴롭다. 죽고 싶다. 죽어버리고 싶다. 실제로 죽어버린 사람도 있는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씩이나 동료를 죽게 만든 무능한 신관이, 죽고 싶다, 죽어버리고 싶다니. 그런 생각을 하다니. "최악인 건, 나야." 5. 이 고락써니 한밤중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지금 몇 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여기에 있다. 오르타나 북구 화원 거리. 왜 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지 하루히로는 모르지만, 어쩌면 옛날에 화단이나 그와 유사한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장에서부터 뻗어 있는 화원 거리와 뒷골목 양옆에는 여관이 죽 늘어서 있다. 거리 입구 부 근에는 임시 체류자용이라는 취지의 숙소가 위용을 자랑한다. 그 일대를 빠져나가면 고만고만 한 보통 여관들. 고만고만한 여관을 지나 남루한 숙소가 모여 있는 부근, 말하자면 변두리다. 하루히로 일행은 화원 거리에서부터 뒷골목으로 들어가서 바로 멈췄다. 뭐 그런대로 보통의, 나쁘지 않은 숙소 앞에 있다. 처음엔 서 있었으나 지금은 숙소 외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하루히로는. 일행은 아직 서 있다. 서로 입을 다물고 있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건 언제였더라? 꽤나 오래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히로도, 일행도, 자기 쪽에서 먼저 나불거리 며 수다를 떠는 편이 아니다. 말수가 적다고나 할까, 수동적이라고나 할까. 등을 구부리고, 한쪽 무릎을 안고, 그러니까 라고, 하루히로는 생각한다. 별로 잘 맞지 않는 거지, 아마도. 하루히로도, 상대방도 밀지도, 당기지도 않아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화가 시작되지 않는다. 어색하다. 뭐든 좋으니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어주면 나도 애써 응할 텐데. 분명, 일행도 그렇 게 생각하고 있겠지. 왜 계속 아무 말 안 해? 뭔가 말해봐. 그런 식으로. 좋았어. 알았다. 할게. 해줄게. 해주겠어. "저 그러니까 시호루?" "어 응?"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 "그래." "응" 끝나버리고 말았다.

25 기력을 쥐어짜서 시도한 대화가, 순식간에. 뭐야? 그게. 그건 아니지. 좀 더 노력하자고. 커뮤니케이션 말이 야, 커뮤니케이션. 중요한 거 지, 역시. 무엇보다, 왜 시호루와 둘이서 있는 걸까? 아니, 이유라고나 할까, 경위는 명확하다. 수속인 지, 배분 몫인지 그건으로 메리와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란타는 믿을 수 없게도 과식을 해서 움직일 수 없다고 하고, 유메는 뭔지 모르지만 "흐물흐물 이라서 안돼" 라고 한다. 그래서 컨디션에 문제가 없고 메리가 지내는 곳을 아는 시호루와 함께 숙사를 나왔다. 메리는 분명히 여성 손님 전용의 임대 숙소를 빌렸다고 들어서 하루히로 혼자서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 점에서는 시호루가 따라와줘서 다행이다. 어디까지나 그점뿐이다. 별로 시호루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둘이서 행동하는 상대로서는 꽤나 거북하다. 조합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루히로와 시호루는 맞지 않는다. 그런 뜻이다. 즉, 궁합이 나쁘다. 시호루도 하루히로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겠지. 하루히로도 궁합이 나빠, 그러니까 어쩔 수 없 어,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시호루쪽에서도 조금 더 다가와줘도 좋을 텐데. 이곳에 와보니 메리는 없고, 셰리의 주점에도 가보고, 거기에도 없고 여기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시호루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루히로가 뭔가 물어보면 한두 마디로 대답한다. 그것뿐이다. 괜찮은 거야? 이런 거. "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나쁜 인상을준 것일까? 단,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나" 라고 시호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히로는 시호루를 올려다보았다. 시호루는 자기 어깨를 감싸 안고 살짝 떨고 있었다. "나 있잖아. 이런 말, 하면 너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꽤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 않다니?"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다른 사람들만큼 충격을 받지 않았다 고나 할까." "그 래?" "너무하지? 너무한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해도. 어느 쪽인가 하면 모구조군이 죽어버린 일 보다 모구조 군이 죽어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 그런 나 자신이 쇼크라서, 낙담하고 있 어. 난 정말 못된 인간이구나 하고." "그렇 지는." 않아, 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모구조가 죽었는데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고? 말도 안돼. 왜냐하면, 동료다. 말 그대로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모구조는 소중한, 너무나 소중한 동료고, 파티의 축이었다. 왜 충격이 아니라는 거야? 하지만 시호루 본인도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가슴이 찢어질 정 도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될 정도의 슬픔을, 상실감을 맛봐도 당연 한데, 그러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렇구나. 마나토 때문이다. 이것은 하루히로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분명 마나토건이 있었으니까. 시호루는 아마도 마나토를 사랑했을 거다. 너무나 좋아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던 마나토가 죽 었다. 시호루는 누구보다도 괴로웠을 것이다.

26 물론, 모구조가 죽어 시호루도 타격을 입었겠지만, 그때만큼은 아니다. 고통에는 익숙해진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익숙해 져버린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살아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니까. 이런 일의 반복이니까. 그때마다 휘청거리고 재기할 수 없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 현재 현실적으로, 하루히로는 이제 모구조를 잃은 직후처럼 망연자실하고 있지는 않다. 좀처 럼 잘되지는 않지만 앞을 바라보려고 한다. 모두가 앞을 보고 나아가길 바라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모구조도 마음 편히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죽은 동료를 이 용해서 살아갈 힘으로 바꾸려고까지 한다. 하루히로는 살아가려고 한다. 비겁하고 교활하고 꿋꿋하게, 살고 싶어한다. 시호루도 그런 것이겠지. 마나토의 죽음이 시호루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 강해졌기 때문에 시 호루는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시호루는, 너무한 게 아니야. 못된 인간 같은 게 아니야. 시호루 가 함께 와줘서 다행이야. 시호루가 있어줘서.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시호루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깨가 아직 바들바 들 떨리고 있다. 눈물을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시호루는 코를 한번 홀쩍이더니, "하루히로 군이 있어서 다행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뭐 응. 없는 편이 낫다는 것보다는." 하루히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왠지 굉장히 부끄럽다. 멋쩍어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솔직히 밥을 먹어도, 물을 마셔도, 푹 자도 모구조에게 사과하고 싶어진다. 사과해봤 자 별 도리가 없지만. 언젠가는 가슴을 따끔따끔 찌르는 이 아픔도 흐릿해지고 사라져 버리겠지. 고통에는 익숙해진다. 살고 싶어서, 살기 위해서 익숙해지니까, 살아갈 수 있다. "메리가 늦네. 어디 간거지?" "결국 나, 메리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글쎄." "그렇지. 하지만 나는 남자고. 친해지라고 해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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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동성이라고 해서 꼭 친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그런 거야?" "나 성격이 이러니까. 유메처럼 밝았다면 달랐겠지만." "음. 밝으면 다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유메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은 들지만. 상대가 란타 같은 녀석만 아니라면." "란타군은 예외인지도." "그 녀석 얼간이야. 진짜로. 뭐냐고. 과식을 하다니. 영문을 모르겠어." "소르조를 먹은 거 아닐까?" "응?" "아마 짐작이지만 모구조 군 몫까지, 먹으려고 했던걸까 하고 " "아." 하루히로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런가. 그거였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에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란타 나름대로의 애 도였다는 건가? 하루히로는 아주 약간 웃었다. 가슴속이, 삐걱거린다. "역시 시호루는 못된 인간이 아니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건, 대단한 거야." 시호루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메리는 " 이라고 목소리를 쥐어짜듯 이 말했다. "누구보다도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신관이니까." 하루히로는 끄덕였다. 그 정도의 일은 하루히로도 일단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야 두 번째고. 메리는 한 번 동료를, 동료들을 잃었었다. 그래서 자책감에 휩싸여 메리는 옛날의 메리가 아 니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하루히로네와 팀을 짜게 되어 이제야 가끔씩 웃는 얼굴을 보여 주게는 되었다. 그러자마자 라고 말해도 되겠지. 또다시 동료를 잃었다. 게다가 메리는 신관이다. 상처를 치료하는 광마법 사용자로, 파티의 생명선인 것이다. 사정을 불문하고 그것은 동료의 목숨에 책임을 지는 입장 이라는 말이다. 전부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주제넘은 말인지도 모르나 하루히로가 지금 제일 걱정하는 것은 메리다.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입 밖에 내고 보니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발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을 때는 엄청나 게 안도했다. "메리." " 어째서?" 메리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발길을 돌렸다. " 어? 잠깐만, 메리, 도망치지?!" "하, 하루히로 군. 쫓아가야지!" "앗, 응!" 메리의 발이 빠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나 할까, 메리의 발걸 음은 상당히 위태로워서 달 린다기보다는 고꾸라질 것처럼 간신히 전진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붙잡자 곧바로 손을 뿌리치기는 했으나 메리는 이제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메리는 하루히로에게서 등을 돌리고 무너지는 것처럼 주 저앉아버렸다.

29 " 뭐? 무슨 용건?" "용건 은 있긴 한데. 그보다 메리. 술 마셨어?" "안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내버려둬. 나를." "내버려둘 수 없어." 시호루는 그렇게 말하더니 메리 옆에 쪼그 리고 앉았다. "그럴 수는 없어." "어째서?" "마음에 걸리니까. 메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어." "보이고 싶지 않았어. 이런 모습. 왜 여기 있는 거야?" "우리는 메리를, 만나러 왔어."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아." "우리는 그렇지 않아."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혀는 제대로 돌아가지만 메리는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그야 보이고 싶지 않겠지. 당연하다. 하루히로도 이런 메리는 보고 싶지 않다. 보지 않는 편이 좋았는지도 몰라. 하지만 보고 말았 다. 이제 와서 안 본 걸로 칠 수는 없다. "메리." " 뭐야?" "아침 8시에 북문 앞. 좀 무리일 것 같네. 그 상태로는." 하루히로는 기다려보았다. 메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간다고도, 안 간다고 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다. 시호루가 메리 뒤를 따라가려고 했다. 하루히로는 시호루를 말리고 메리의 뒷모습을 향해 말 했다. "우리는, 끝나지 않았어. 멈춰서도 괜찮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메리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6.뒤뚝거리면서 다음 날 아침이랄까, 그날 아침은 시각 종 한 번 울릴 때까지, 즉,1시까지 기다려봤으나 메리 는 북문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두 시간을 기다렸지만 메리는 오지 않았다. 란타가 메리의 숙소로 돌격해야 한 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고 하루히로와 시호루가 강하게 반대했다. 유메는 아직 흐물흐물이 었지만 다소는 나아졌다. 그리고 3일째. 8시의 종이 울리기 시작하기 전에 하루히로 일행은 북문 앞에 도착했다. "오."

30 란타가 목소리를 냈다. "흡." 시호루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유메는 "우냥" 이라고 말했다. 하루히로는 아주 살짝 웃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직 웃을때마다 가슴이 묵직하게 아프다. 신관복을 입은 여자 한 명이 손에 든 쇼트 스태프에 몸을 기대는 것처럼 북문 앞 구석 쪽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가락 개수라도 세는 것 같았다.그녀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주 작아 보인다. "메리." 하루히로가 부르자 메리는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았다.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으나, 어 쩌면 끄덕이려고 한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그렇다. 어느 쪽이든 좋다. 메리는 왔다. 강요하지는 않았다. 애원한 것도 아니다. 메리는 자 기 의사로 와주었다. 하루히로 일행은 메리 곁으로 갔다. 시호루가 먼저 메리에게 다 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 며시 손을 잡았다. 메리는 거부하지 않았다. 유메는 갑자기 메리를 와락 껴안았다. "꺅?!" 메리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하긴 하루히로도 깜짝 놀랐으니 그야 놀라겠지. "미안해, 메리." 유메는 메리를 꼭 껴안고는 사람을 따르는 고양이처럼 그 뺨이며 목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진짜, 미안." "어 뭐, 뭐가?" "혼자 있게 해서 미안. 유메는 시호루가 있어주었는데. 메리는 혼자였잖아. 이럴 때에. 미안해. 이제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용서해줘. 유메가 메리 곁에 있을 거니까." "나 는." 메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그저 당황스러워하는 것 뿐인가보다 라고 하루히로는 생각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메리의 얼굴이 엄청난 속도로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이젠 귀까지 빨개졌다. 메리는 이를 악 물었다. 참는것 같다. 애써 참는다. 혹시나 울어버릴 것 같아서? "나 는 " "괜찮아. 메리가 뭐라고 말해도. 유메는 결정했당께. 메리를 이제 혼자 두지 않기로. 유메, 이 제부터 메리랑 같은 숙소에서 지낼 거야. 그러기로 정했걸랑. 시호루도 함께." 하루히로는 시호루를 보았다. "그랬어?" "어쩌다 보니?" 시호루는 쓴웃음과 당혹감의 중간 정도에 위치할 듯한, 그야말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를 어젯밤에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어. 막연하게." "막연하게라고." "칫."

31 란타가 엄지로 코를 문질렀다. "그렇게 된 거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나도 메리와 같은 숙소에 방을 빌릴까." "그건 무리." 메리는 돌변해서 차가운 눈길로 란타를 향했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기본적으로 남자 금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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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뭐, 뒷이?! 그, 그걸 어떻게 좀! 그보다, 기본적으로라는 건 예외가 있다는 뜻이지?! 나는 존재 자체부터가 특별하니까 예외 취급해야지, 당연히!" "예외는 어린아이뿐. 부모자식 간이라면 괜찮다는 거야." "좋았어! 그럼 나는 오늘부터 메리, 네 아이가 되어주지! 친자식이라면 좀 그러니까, 양자야, 양자! 어때? 이걸로 문제없지?!" "문제투성이인데." "시끄러워, 하루히롯! 너 따위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따라서 메리. 오늘부터 너는 우리 엄마 다! 잘 부탁해, 엄마!" 메리는 유메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한숨을 쉬었다. "도로 가버릴까?" "안 돼!" 유메는 메리를 껴안은 두팔에 힘을 주었다. "메리, 가지마! 바보 란타가 하는 말은 손톱만큼도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란타는 어차피 멍 청이 맹추 맹꽁맹꽁이니까!" "누가 멍청이야? 절벽 주제에!" "절벽이라고 하지마!" "사실 절벽이니까 어쩔 수 없지!" "란타는 유메보다도 훠얼씬 더 절벽이잖아요" "나는 남자라고! 원래부터 가슴 크기로는 승부할 수가 없다고!" "그럼 뭐의 크기로 승부하는 거야?!" "엉?! 그야." 란타는 자기 다리 사이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하루히로를 힐끔 보았다. "그렇지?" "그렇지? 라고 나한테 물어봤자." "우엥?" 유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메리는 유메의 품안에서 답답한 듯 몸을 꼼지락거렸다. "가버리지 않을 테니까 우선, 좀 놔줬으면." "우냥?! 답답했어?! 미안해. 유메, 꽤 힘세니까. 팔 같은 데 요즘 울퉁불퉁해져서 조만간 식스 팩 생길지도 모른다고 시호루와 이야기했거든. 그랬더니 말이지, 시호루가, 가슴 근육이 발달 하면 가슴도 커질지도 모른대." "유 유메. 그런 이야기는 안 해도 되니까." "앵? 왜?" "남자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거야?" "핫." 란타는 코웃음 쳤다." 델리커시가 없다고, 유메. 너는!" "텔레파시 같은 건 유메뿐만 아니라 란타도 못 쓰잖아!" "그걸 누가 써? 멍청아! 그보다, 텔레파시가 아니라 델리커시다, 섬세함!" 정말이지, 떠들썩하다고나 할까, 뭐라고 할까. 하루히로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뭐, 그래도 란

34 타와 유메 덕분에 제법 분위기가 편해졌다. 하루히로는 먼저 메리에게 사무적 인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수속을 위해 다 함께 의용병단 사 무소에 가기로 정했다. 그리고 60골드의 군표를 요로즈 위탁상회에서 환금해서 똑같이 나눠야 한다. 더 초퍼(식칼검)도 맡기는 편이 좋겠지. "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그 문제인데." 하루히로는 가급적 가벼운 말투로 하려고 유의했다. 안 그래도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무거워 서 모두가 짓눌려버릴 것 같다. 더 이상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나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는데. 우선 다무로에 가보는 건 어떨까 해." "우오." 유메는 콧김을 내뿜는다. "고블이 사냥 말이지?" "햇." 란타는 얼굴을 찡그리고 팔짱을 꼈다. "지금의 우리 상대 로서는 좀 부족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가 부족한 게." "응? 무슨 말 했어? 시호루."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마. 바보한테 듣는 약은 없으 니까." "어아 지금 그 말은 똑똑하게 들렸는데?" "다무로." 메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원래 고블린 슬레이어잖아." 하루히로는 농담처럼 말해봤으나 메리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갑자기는 무리다. 시간이 걸린다. 한 걸음, 한 걸음씩이야. 초조해봤자 소용없어. "최근 사이린 광산에 다녔으니까 코볼트에 익숙해졌지만, 거기는 결국 3층 부근까지는 내려가 야 하잖아. 역시 리스크가 있다고 봐. 다음으로 구시가는 일시 경계태세였다가 이제 해제된 느낌이라고 하고, 거의 구석구석 잘 알고있어. 장소를 확실하게 골라서 무리 하지만 않으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여전히 사고방식이 소극적이로군, 하루히로. 너는 말이야." 란타는 어깻짓을 했다. "뭐, 괜찮지 않아? 우선적인 아이디어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란타군이 불평을 하지 않다니."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호루.원래 나는 시시비비의 남자라고. 좋은 건 좋다! 안되는 건 안된다! 하고 싶은 말은 한다! 하고 싶은 일은 한다! 말하자면,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 이거 다!" "네, 네." "하루히롯! 개칭 파레피루롯! 흘려 넘기려고 하지 마!" "차라리 너 자체를 어딘가로 흘려버리고 싶을 정도인데."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해봐! 해보라고! 이 나를 홀려버릴 수 있다면 홀려버려 보라고, 젠장!" "아니, 됐다. 귀찮으니까." "바보." 란타는 몸을 일직선으로 곳곳이 세워 펄쩍 뛰었다. 기묘한 동작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려고 했

35 던 건지도 모르나, 당연하지만 아무도 키득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란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반복했다. "바봉. 바봉. 바봉." 몇 번을 해도 반응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흥이 식을 뿐인 데도, 용케도 좌절하지 않는 구나. 란타는 바봉 점프에 이상한 표정까지 추가하기 시작했다. "휴." 유메가 완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메리는 왠지 이제 측은한 눈길로 란타를 본다. 시호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분 나빠." "바봉. 바봉. 바봉. 바봉. 바봉." 란타는 기쁜 것 같다. 기분 나빠하는 반응에 기뻐하다니, 마조히스트인가? 어쨌든 오늘의 시 호루는 란타에게 딴지를 잘 건다. 시호루 나름대로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지도 모르 겠다. 하루히로는 란타를 무시하고 유메, 시호루, 메리를 둘러보았다. "달리 의견 같은 게 있다면." "유메는 오케이." "나도 그걸로 좋다고 생각해." "나도." 메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살짝 숨을 내쉬었다. " 그걸로 좋아." 전과 똑같이는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들은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잃어버렸다. 모구조 대신 은 없다. 아무데도 없다. 있을 리가 없다.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 사이에 뚫린, 커다란, 너무나 커다란 구멍을 뭔가로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건가? 지금의 하루히로는 모른다.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도 괜찮지는 않을 것이다. 모른다면 구 하고, 찾고 발견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히로는 끄덕였다. "가자." 7.메달릴 수 없는 과거의 영광 찾는 거다. 어떻게 해서든 발견하는 거다. 이 상황에서 현재의 우리들로도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방식을. 처음부터 잘될 거라는 생각은 물론 손톱만큼도 없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웃! 란타! 떨어지지 말라니까!" 하루히로는 스와트(파리채)로 고블린 A의 공격을 피하면서 전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고블린 A는 가죽 투구와 체인 메일과 다소 짧은 검과 작은 방패로 무장했으나, 오크처럼 몸집 이 크고 일격 일격이 무거운 것은 아니다. 1대1이라도 그리 힘겹지는 않지만, 문제는 란타다.

36 "별로 떨어져 있지 않잖아!" 란타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그저스트(배출계)!"로 급 후퇴했다. 고블린B가 빨려 들어가듯이 란타를 쫓는다. 란타는 곧바로 롱소드로 찔렀다. "으럇! 어보이드(기피 찌르기)!" 그러나 다소 체격이 좋고 중무장한 고블린B는 종이 한장 차이로 란타의 롱소드를 피했다. 피 했다기보다, 롱소드는 갑옷의 목과 어깨 중간쯤을 휙 스쳤는데, 그 정도로는 별반 타격을 주 지 못한다. 고블린 B는 겁먹지 않고 거리를 좁힌다. 란타는 고블린 표의 검에 롱소드를 맞부딪치고는, "리젝트(분노의 떨치기)!" 곧바로 떨쳐내서 물러서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번쩍! 끝낸다! 해이트리드(증오 베기)으으!" 힘껏 내딛으며 쏟아낸 혼신의 공격은 고블린 B의 왼쪽 어깨에 정확히 명중은 했다. 그러나 부 족하다. 갑옷이다. 란타의 롱소드는 갑옷을 찌그러뜨릴 뿐, 찢지는 못했다. "억지스럽다니까!" 하루히로가 고블린 A의 검을 받아넘기면서 질책하자 란타는 "시끄러워!" 라고 소리치고는 고 블린 B에게 연속 공격을 퍼부었다. "으랴으랴으랴으랴아! 으랴으랴으랴으랴으랴으랴앗!" 고블린 B는 주춤거렸지만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힘으로 밀어붙 이는 건 무리라니까. 알고 있는 거냐? 란타. "너는." 모구조가 아니니까. 하루히로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도로 삼켰다. 그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란타는 란타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파티의 방패역을 떠맡으려고 제일 먼저 적 한 복판으로 돌진했었다. 단, 란타는 원래 모구조처럼 듬직하게 버티고 서서 적과 맞싸우는 타입이 아니다. 애초에 암 흑기사의 전투 방식의 요점은, 기동력을 살려 상대를 농락하고 현혹시키는 데에 있다. 계속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란타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란타는 다르다. 방패역이 아니다. 하루히로네 팀은 근본적으로 전술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그 새로운 전술이란? "옷." 하루히로는 고블린 A의 검을 스와트하려고 하다가 손이 미끄러졌다. 고블린 A가 파고들어온 다. 위험햇. "에잇!" 메리. 메리가 튀어나왔다. 쇼트 스태프를 고블린 A를 향해 찌른다. 고블린 A는 방패로 메리의 쇼트 스태프를 막아내고 펄쩍 뛰어 물러섰다. "딴생각?!" "미, 미안, 메리!" "집중해!" 네 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하면서 하루히로는 고블린 A를 공격했다. 뭐, 정확히 말하면 공격하 는 척이다. 고블린 A가 반격으로 돌아서면 곧바로 스와트로 바꾼다.

37 어떻게든 스와트에서 어레스트 (결박)로 연결시켜 고블린 A를 무력화시키고 싶지만 아무래도 성공할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블린과 오크를 죽여 경사롭게도 동정을 졸업 했는데도 고블린 한 마리를 정면에서 당당히는 쓰러뜨릴 수 없는 건가? 너무 약하잖아. 알고는 있지만. 내가 약하다는 건. "옴 렐 엑트 네문 다슈!" 시호루가 마법을 사용했다. 새도 본드다. 그림자 엘리멘탈이 날아가 지면에 고착한다. 유메와 맞싸우던 고블린 C의 오른발이 그것을 밟았다. 잘한다, 시호루. 고블린 C는 당황해서 왼발로 버티고 서서 오른발을 빼려고 했으나, 그림자 엘리멘탈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후냐아!" 유메가 고블린 C에게 덤벼들어 잡초 베기와 사선 십자의 콤보 기술을 퍼부었다. 손도끼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고블린 C도 체인 메일을 입었기 때문에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헌팅 나이프로 어깨와 팔, 몸을 힘껏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이다. 고블린 C는 마 구잡이로 손도끼를 휘둘렀다. 그야말로 발악인데, 유메는 후퇴했다. 가죽 옷만 입은 유메는 공격을 당하면 위험하다. "유메!" 부른 것만으로도 유메는 하루히로 쪽을 흘낏 보고 이해해준 모양이다. 유메가 이쪽으로 온다. 하루히로는 고블린 A의 검을 스와트 하자마자 달려갔다. 고블린 A는 하루히로를 따라오려고 했으나, 유메가 넘겨받아 막아주었다. 고블린 C는. 아직 새도 본드에 오른발이 묶여 있다. 하루히로를 보고 방향을 바꾸려고 했으 나, 늦었다. 그보다 한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니까 이동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방향 전환도 쉽지 않다. 그런 상대라면 당연히 등을 노리는 것도 간단하다. 하루히로는 고블린 C의 뒤로 돌아 달라붙었다. 몸을 결박하고 곧바로 대거로 고블린 C의 목 을 단숨에 베어낸다. 점프로 떨어지자 고블린 C는 무릎이 풀썩 꺾인다. 오른쪽 발이 바닥에 붙어 있어서 쓰러지려고 해도 쓰러질 수가 없는 것이다. " 으싸! 이제 한 마리!" 유메가 고블린 A, 란타는 고블린 묘악 싸우고 있다. 하루히로는 어느 쪽의 등을 노려도 된다. A나 B나. 고블린 묘는 좋아보이는 갑옷으로 무장해서 성가실 것 같으니 우선 고블린 A를 처 치할까. 달려가려고 했는데 퍽 하는 묵직한 충격이 왼쪽 옆구리에 느껴졌다. 예를 들면, 발로 차인 것 같은. "우 앗?" 그쪽을 보니 왼쪽 옆구리에 화살이 박혀 있다. 뭐야? 이거. "왜 어디에서?!" 아픔보다 놀라움 쪽이 컸다. 적어도 현시점 에서는. 하루히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향을 봐서 저기인가? 왼쪽의 약간 뒤쪽. 80퍼센트쯤 붕괴 한 울타리가 있다. 인간이라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나 고블린이라면. "증원군이 있어!" "하루, 치료를!" 메리가 달려오려고 했다. "안 돼!" 하루히로는 고개를 젓고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메리는 시호루를!"

38 메리가 하루히로를 광마법으로 치료하는 사이에 적은 시호루를 쏠지도 모른다. 혹은 메리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건 위험하다. "큭!" 뛰니까 역시 옆구리가 제법 왔다.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참을 수 있는 범위다. 사실 하루히로가 혼자가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메리에게서 치료를 받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적이라면 반드시 그 틈을 노릴 테니까. 고블린은 인간보다 체격이 작지만 결코 바보는 아니다. 하루히로는 전속력으로 울타리 뒤쪽으로 돌아갔다. 아연했다. " 없어?!" 그러자 오른쪽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엎드려서 피했으나 간발의 차이였다. 작은 활을든 고블린 D가 7?8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파편 더미에서 몸을 반 정도 내밀고 있 다. 고블린 D는 하루히로가 달려올 것을 예상하고 여기에서 저곳으로 이동한 것이겠지. 정말로, 진짜, 바보는 아니다. "이제 놓치지 않을 거지만!" 고블린 D는 활에 화살을 메기려고 했다. 그래도 이 거리라면 화살을 쏠 타이밍뿐만이 아니라 어디를 노릴지도 안다. 설령 날아오더라도 피할 수 있다. 그래야 했는데. 현기증이 났다. 심장이 이상하다. 격렬하게 발을 구르기라도 하는 것 같은 고동이 들린다. 엄청난 고동이다. 고블린 D가 화살을 쐈다. 하루히로는 물론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좀.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화살이 왼쪽 가슴, 어깨 근처에 박혀 하루히로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왓. 두 발이나 맞았어. "독화살이다!" 하루히로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외쳤다. 고블린 D가 활을 버리고 단검을 뽑아 덤벼든다. 어쩌 지? 스와트? 무리인가. 도저히 무리다. 고블린 고는 하루히로를 밀쳐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탔다. 단검을 하루히로의 안면에 쑤셔 박 으려고 한다. 떨어뜨린 건지 어떻게 된 건지 하루히로는 대거를 들고 있지 않았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팔을, 손을, 고블린 D의 단검이 푹푹 찌른다. 하루히로는 필사적이다. 뭘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을 터인데도, 아뿔싸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오는게 아니었나? 유메에게 맡기는 편이 좋았을지도. 하지만 거기까지는 머리가 돌아가 지 않았고. 결과론인지도 모르고. 결과. 이것이 결과인가? 어이없네. 실수를 저지르면 이렇게 되는 건가? 하지만 고블린에게 당 하다니. 아니, 아니, 아니. 아직 당했다고 정해진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래.맞아. 고블린 D가 또 단검을 휘두른다. 하루히로는 고블린 D 의 단검을 오른팔 의 뼈로 튕겨냈다. 살을 떼어주고 뼈를 베는 게 아니라, 살을 떼어주고 뼈로 막은 것이다. "옴 렐 엑트 벨 다슈!" 어라. 마법? 시호루? 시호루다. 시호루는 고블린 D에게 지팡이를 들이대고 지근거리에서 새도 비트를 쏘았다. 우옹. 그런 특징적인 소리가 들리고, 그 직후에 고블린 D는 고꾸라졌다. 검은 해초 같은 그림자 엘리맨탈이 고블린 D의 바로 옆면에 명중한 것이다. 하루히로를 구해준 것 은 시호루뿐만이 아니었다. "하앗!" 메리가 쇼트 스태프로 고블린 D를 구타했다.

39 고블린 D는 날아갔으나, 곧바로 일어섰다. 도망친다. 자기 활도 잊지 않고 주워서 도망간다. 시호루가 고블린 D의 등에 지팡이를 향했다. "옴 렐 엑트 벨 다슈!" 다시 한 발, 새도 비트. 그러나 고블린 D는 그늘로 폴짝 뛰어 들어가 그림자 엘리멘탈을 피했 다.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디무로 구시가에는 건물이나 울타리의 잔해가 여기저기에 있다. 이 근방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왜 이곳을 사냥 장소로 선택했을까? 그것부터가 실패였 던 것 아닐까? "후 하. 후우 후우." 지독한 호흡. 누구? 나야? 하루히로 자신이다. 하루히로는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하늘이 보 인다. 그리고 메리의 얼굴. 화살이 뽑힌다. 아아 아파. "우선해독을 할 테니까!" 하루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았을까? 죽지 않으면 좋으련만. 마치 남 일처럼 그런 생 각을 했다. "빛이여, 루미아리스의 가호 아래에 퓨리파이(정화의 빛)!" 해독. 독을 없앤다는 건가? 없어질까? 지금 그걸로 독이. 잘 모르겠다. 란타나 유메는 괜찮은 가? 도망친 고블린 D는? "하루! 정신 똑바로 차려!: 빛이여, 루미아리스의 가호 아래에 큐어 (치유)!" 정신. 정신을. 차려. 똑바로. 응. 알았어. 알았다고. 메리. 그렇지. 볼썽사납지만. 무지하게 꼴 불견이지만. 죽을 수는 없다. 죽지 않아. 죽으면, 끝이다. 나뿐만이 아니야. 동료가. 모두가. 점점 편해졌다. 마법이란, 대단해. "그쪽은 어때?!" 라고 란타가 어딘가에서 외쳤다. "없어!" 유메가 멀리서 대답했다. 뭘, 하는 거지? 두 사람은. 하루히로를 치료하고 있는 메리 옆에 시호루가 있었다. 시호루와 눈이 마주쳤다. "시호루 적은?" "도망친 건 한 마리뿐. 아직은." "그렇구나." 나머지는 처치한 건가? 란타와 유메, 시호루가 애써주었구나. 하루히로는 눈을 감고 웃었다. "뭘 하는 거지? 나."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시호루도, 메리도 무반응 이라서 더욱 부끄러웠다. 보아하니 치료가 끝난 것 같아서 하루히로는 눈을 뜨고 일어났다. 메리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고 했는데 란타가 뛰어왔다. "이 부아보 녀석이! 왜 뒈지려고 하는 거야! 고블린 따위한테 당하지 말라고! 얼마나 얼간이 인 거야, 너는! 똥보다도 못한 코딱지 녀석!" " 되받아쳐줄 말도 없네." 그렇게까지 욕할 건 없잖아. 아니, 그래도 이번만큼은 욕을 먹어도 어쩔 수가 없나? 저질러버렸다 는 느낌이다. 게다가, 어떻게 하될이면 여기에서 저지를까? 하필 오늘 이때에 저질러버리다니. 우리 파티의 재출발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날이었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이곳

40 을 선택한 것이다. 다무로 구시가. 과거에 고블린 슬레이어 칭호를 얻은 토지. 반은 놀림삼아 라고나 할까, 90퍼센트의 야유와 10퍼센트의 어이없음에서 나온 칭호이긴 했으나, 그렇게 불릴 정도로 하루히로 일행은 다무로 구시가에만 열심히 다녔다. 어쩌면 하루히로 네 가 너무나 고블린을 많이 죽인 탓인지도 모른다. 고블린들의 경비가 삼엄해져서 사이린 광산으로 사냥터를 옮겼었는데, 이곳은 잘 아는 내 집 마당 같은 곳이다. 모구조라는 기둥, 아니, 큰 중심 기둥을 잃은 이 파티라도 어떻게든 되겠 지. 방심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없었는지도 모르고. 솔직히 하루히로는 모르겠다. 냉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도망쳤어, 고블이가. 어떻게 하면 좋아?!" 유메가 멀리서 외치자 란타가 눈을 까뒤집는다. "이제 내버려둬! 어디로 가버렸겠지! 돌아오지 않아, 분명!" "그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 "엉?! 무슨 말 했어? 시호루?!" "안이한 생각 아닐까라고 말했는데 못 들었어?" "무슨 뜻이야? 내가 생각이 얕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요컨대 그런 건지도." "제법 도전적인데. 나한테 대들었으면 나름대로의 각오는 되어 있는 거겠지?" " 협박하는것 같은 말 하지마." "협박 같은 것 안 했어. 네가 건방진 소리를 하니까 좀 열 받은 것뿐이다." " 변명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왜 내가 변명을 해야 하는 건데? 까불지 마. 아무리 마음이 넓은 나라도 한도라는 게 있으니 까. 작작 좀." "야아아아아앗!" 유메가 달려와서 란타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아얏! 너 이 녀석, 유메!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짓거리라니! 그렇게 영문 모를 소리 하지 마!" "영문 모르겠는 건 너야! 철저하게 너라고!" "시끄러워, 멍청아!" 유메는 시호루를 부둥켜안았다. "지금 시호루를 괴롭혔잖아! 란타 주제에 뭐 하는 거야? 릭이뻔다! 바보!" "괴, 괴롭히지 않았어! 의견 교환을 한 것뿐이잖아!" "어디가?" 라고 시호루가 중얼거렸다. 란타는 시호루를 노려보고는 칫 하고 혀를 찼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면 분명하게 말하라고! 열 받아, 그런 것!" 메리가 입을 열려다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왼쪽 손목을 힐끔 본다. 거기에는 빛나는 육망성이 떠올라 있다. 프로텍션 효과가 이어지고 있는 증거다. 그러고 보니 메리는 걸핏하면 빛나는 육망성을 확인하는 것 같다. 그보다 무기가 쇼트 스태프 다. 전에 사용했던 석장은 어떻게 된 거지? 아니,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 하지만 뭘 해야 되는 거더라? 머릿속이 멍하다. 독

41 이 남아 있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부상도 메리가 치료해줬는데도. "저기." 하루히로는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빡였다. "뭐지? 그러니까 내가 실수한 건 사과할 테니까. 지금은, 우선 그렇지. 아까 그 고블린, 내가 당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 움직임을 하는 녀석은 아마 지 금까지 본 적 없고. 뭐 랄까 아 그렇지, 응, 그래.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할지도. 또 화살 로 공격당할지도 모르고. 동료를 데리고 오거나 할지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니까." 란타는 씁쓸한 표정으로 턱을 올렸다. "그렇다면 냉큼 일어서." "괜찮아?" 메리가 손을 잡아주었다. "응." 하루히로는 일어섰다. 서 있지 못할 정도는 아니나 역시 몸이 이상하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 가지 않고 엄청나게 나른하다. "끙?" 유메는 허리를 굽혀 하루히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어라앗?! 하루 군, 엄청 안색이 나빠." 시호루도 하루히로를 쳐다보고는 눈썹을 찡그린다. "정말." "상당히 출혈이 심했으니까." 메리는 하루히로를 부축해준다. "상처는 마법으로 덮었지만 흘러나간 피까지 되돌아오는 건 아니야. 오늘은 이만." "어이, 어이, 어이, 어이, 어어이." 고블린들의 사체를 뒤지려던 란타가 파란 힘줄을 세우며 얼굴 전체를 찡그렸다." 설마 오르 타나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겠지? 아직 전혀 벌이를 못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면 적자잖아, 적자!" "돈은 잔뜩 있잖아!" "닥쳐, 유메! 돈은 말이다, 아무리 있어도 금방 없어지는 거라고!" " 낭비를 하니까 그렇지." "시호루우우우. 큰 가슴을 낭비하는 네 녀석이 할 말이 아니야. 주무른다, 이 녀석!" "웃!" 시호루는 자기 가슴을 두팔로 감추려는 것처럼 눌렀다. "저질." "핫하하핫. 그래봤자 난 아무렇지도 않아!" "란타, 너." 하루히로는 한숨을 쉬었다. 왠지 머리가 아프다. 모든 것이 짜증나고 정말로 진심으로 돌아가 고 싶었으나, 그래도 괜찮은 걸까? 괜찮지 않은 것 같은. "미안. 우선 좀 쉬게 해줘. 어딘가, 여기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면 조금은 나아 질 것 같아. 어떻게 할지는 그 후에 정하지 않을래?" "괜찮아. 그걸로. 하지만." 란타는 하루히로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것만큼은 말해둔다, 하루히로. 방금 건 전부 네 잘못이야. 똑똑히 자각해. 모자라지만 그래 도 너는 리더니까."

42 8.변함없는 이세계 결국 그 뒤에 고블린을 네 마리 죽여 사체를 뒤졌지만, 역시 하루히로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서 좀 일찍 오르타나로 귀환했다. 어차피 사무소에 가서 수속을 하거나 해야 하고라고 유메와 시호루가 위로해주었지만, 하루히 로는 아쉬웠다. 자기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풀이 죽어 있어봤자 소용없다. 실패를 없었던 일로 칠 수는 없지만, 다행히 목숨 은 건졌으니 반성 재료로서 앞으로 도움이 되게 할 수는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한다. 그래서 용건을 마치고 나서 다함께 셰리의 주점으로 갔는데, 반 성회는 초장부터 순탄치 않았 다. 란타가 투덜댔다. " 그러니까 처음에 말했지? 나는 내 방식으로 하겠다고. 무엇 보다 방패역에 맞지 않으니 내 스타일의 방패로 할 수밖에 없잖아? 방패역이라는 건 제일 앞에 나서는 거니까 뒤는 안 보이니까 너희 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른다 고. 그렇다는건, 너희가 나에게 맞추는 게 맞는 거잖아? 나, 뭐 잘못 말한 거 있어? 엉? 없지? 결국 하루히로 이 바보 녀석이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나한테 잔소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야. 나한테 지시하지 마. 나한테 맞춰서 주위를 움직 이라고." " 네 말도 이해는 하는데." "이해한다면 그대로 해! 이상! 이걸로 끝이지?" "끝일 리가 없잖아!" 유메는 반쯤 일어서서 테이블을 두 손으로 두드렸다. "모두 란타에게 맞추라니, 얼간이 아니야?!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럴 수 없다면 그만둬! 그만둬버려!" "그만두든 말든 란타가 정할 일이 아니잖아!" "파티의 전술에 맞출 수 없다고 투덜대는 녀석은 전력 외라는 통보를 받아도 당연한 거잖아!" "유메가 아니라 란타가 나가!" "내가 없어지면 곤란한 건 너희야! 지금은 이 내가 파티의 핵이니까!" " 그 전제부터 이상하다고 보는데." "오오? 그렇게 나왔다, 시호루우우. 얌전한 척하더니 지금까지 숨겨진 큰 가슴 뒤편에 날카로 운 이빨을 숨기고 있던 마수 놈." " 이빨 같은 거 안 숨겼고 난 살찐 것뿐이고." "그렇다면 보여줘봐. 내가 확실하게 판정해주지." " 보여줄 리가 없잖아." "쳇. 째째하게 굴고 있네. 재미없는 녀석. 아 재미없어." " 란타 군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안다고. 그런 건. 그 정도의 말로 내가 상처 입기라도 할것 같아? 내 심장은 강철제거든? 꿈 쩍도 안한다. 아무튼 앞으로의 전술은 나. 내가 중심.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알겠어? 그 보다, 알아먹어. 다들 나를 연구해. 나를 숙지하고 내 색깔에 물들어. 그럼 모든 것이 다 잘된 다고." " 그걸로 잘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43 "유메도 시호루에게 찬성! 메리는?" "어 아, 나는." "메리도 란타 따위에게 맞추고 싶지는 않지? 그야 란타인걸." "그건." "흥." 란타는 볼을 관 채로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버렸다. "뭐든 맘대로 지껄여. 하지만 말이야. 나도 내 멋대로 하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 너희 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걸로 상관없지만 그렇다면 대안을 내봐, 대안을. 뭔가 있다면 말해보라고. 하루히로, 넌 어때?" "대안." 하루히로는 바보처럼 중얼거리더니 도자기 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컵안의 미드는 거의 줄지 않았다. "뭐. 그래. 대안 이랄까 란타에게 방패역을 시키려면 어느 정도 우리가 맞추는 수밖에 없 다는 건, 사실이라고 하면 사실이고. 물론 란타에게도 좀 더 방패답게 행동하라고나 할까, 그 점은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보는데. 그냥 이대로 가는건 상당히 힘든 느낌 도 들고." "분명치가 않네, 어이!" 란타는 새끼손가락으로 코딱지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리더라니, 한심해서 말도 안 나온다, 진짜로. 낮에도 심했었고." "그건 내가 잘못했다니까. 사과했잖아." "오호. 적반하장입니까? 파루피롱. 이게 그 유명한 적반하장이라는 것이로군요? 이 와중에 적 반하장으로 나오다니. 반성하지 않은거지? 너." " 하고 있다니까." "글쎄. 과연 그럴지. 도저히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그 태도는." "그만해!" 유메는볼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명치에 피를 보내는 짓을 하면 안 되잖아! 다른 사람 기분도 좀 생각해!" "멍청아! 그런 의미라면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 이거지!" "우옹?" "무엇보다, 어떻게 명치에 피를 보내냐고? 불가능하잖아!" "가,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해보면!" "그럼 해봐! 지금 당장 해봐! 여기에서 해봐! 된다면 내가 엎드려 절을 할 테니까! 전라로 춤 추면서 절할 테니까, 빨리 해봐!" "끄으으으으 응." 유메는 김이 나올 정도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대안 이 라. 그래도 그렇다면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 동료 전원의 역할을 확 실하게 정하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한다, 이렇게 되면 이렇게 한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정 해둬야 한다. 모구조가 있었을 때는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히로네는 마나토를 잃었고, 메리가 들어왔고, 거기에서부터 실전을 통해 모두가 조금씩 쌓아온 것이다. 누가 뭘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기억한다. 몸에 밴 것이다. 그 대부분이 지금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모구조는 그저 방패역이 아니었다. 모구조는 적의 주의를 끌고, 공격을 막아내면서 적에게 쐐

44 기를 박고,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가 있었다. 모구조는 최대의 방패이며, 동시에 최강의 공격 수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공수의 핵이었다. 방어력도, 공격력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구조가 제일이었다. 파티의 누구도 모구조에게는 견줄 수 없다. 요컨대 하루히로네는 모구조의 등에 업혀 있던 상태였다. 모구조가 할일은 너무나 많았고, 그 책임감은 무거웠다. 모구조는 약한 소리를 하는 일도, 불평 한 마디 흘리는 일도 없이 전부 도맡아주었다. 그리고 성장했다. "모구조는." 하루히로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동료들은 모두 숨을 멈췄다. "정말로 대단했어. 그래도. 모구조는 원래 대단해서, 그래서 순조롭게 강해진 건 아니라고 생 각해. 아니, 물론 소질은 있었겠지만, 분명 그것뿐만이 아니야. 무섭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언 제나 누구보다 앞에 있고, 위험한 적을 상대하고. 하지만 모구조는 도망치지 않았고. 아마 우 리를 위해서. 그러는 동안에 모구조는 강해진 거야. 나는 모구조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거 야." 알아챘어야 했다. 좀더 일찍. 꼭 알아챘어야 했다. 란타의 말이 맞다. 이러면서 리더라니,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하다. "모구조의 부담을 줄여줬어야 했어. 그러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을 거야. 이미 늦 었지만. 모구조가 혼자서 들어주었던 무거운 짐을 앞으로는 모두가 분담해서 운반해야 해. 우 리는 한사람 한사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늘려가야만 해. 지금의 힘으로는 전혀 부족하다 고 생각해." " 나는." 시호루는 한 번 입술을 깨물고 나서 끄덕였다. 위력 있는 마법을, 하나라도 좋으니 배워야 한 다고." "흠." 유메는 몸을 굽혀 테이블에 턱을 댔다. "유메는 있지. 어렵지만 역시 유메도 공격력이 문제인가? 늑대개도 갖고 싶지만." 란타는 "핫" 하고 내뱉고는 팔짱을 낀다. 그런 말을 해봤자. 인간이란 건 못 하는 건 못하는 거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다고. 전사계로 갈아탈 수도 없고. 한 번 스컬헬에게 충성을 맹세해버리면 죽을 때까지 암흑기사로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갈아탄다고." 하루히로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유메에게 힐끔 눈길을 준다. "우엥? 유메가 왜?" "아니." 유메는 의외로 힘이 세다. 팔씨름을 하면 상대가 남자라도 꽤 좋은 승부를 할 것 같다. 배짱 도 있다. 사냥꾼인데도 활보다 헌팅 나이프를 휘둘러 적과 맞서 싸우는 경우가 많을 정도다. 차라리 사냥 꾼 길드를 나와 전사가 되어준다면 안 될 까? 유메는 사냥꾼 에 집착하고 있 고 늑대개를 키우려는 목표도 있다. 강제로 파티의 입장만을 강요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고, 모구조의 전투를 봐온 입장에서

45 그것을 여자에게 시키는 것은 좀. 좀 이랄까, 상당히. 무섭 겠지. 안 된다. 이 방법은 아니야. 무엇보다, 누군가가 전사가 되어 방패역을 맡는다면 시호루는 분 명히 전사에 맞지 않고, 메리는 신관으로 있어주지 않으면 곤란하고, 란타는 다른 직업으로 갈아탈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 하루히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만약을 위해 일단 상상해 보았다. 자기가 무거운 갑옷 을 입고 더 초퍼를 휘두르는 모습을.?엄청 약할 것 같아. 적어도 하루히로는 그렇게 기운이라고는 없는 얼간이 전사에게 방패역을 맡길 마음은 들지 않 는다. 얼간이. 초코. 죽어버렸지. 아니야, 잊어버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우리 일에 집중해 야지. 결국 방패역이다. 제대로 된 방패가 없으면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다. 파티에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패역과 치료자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방패역과 치료자만 확실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된다. 현 상황에서 방패역을 맡긴다면, 원래 모구조 다음으로 중장비였던 란타가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시원찮아도 경험을 쌓는 동안에 모양새가 갖춰진다면 그래도 되겠지. 하지만, 어떨까? 가능할까? 마나토 때는 새로운 치료자를 맞아들였었다. 메리를. 그것밖에 없는 건가? 하루히로도 당연히 그 선택을 고려해야 한다. 머리 한구석에는 있다. 단,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루히로는 란타의, 유메의, 시호루의, 그리고 메리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은 네명이 다 제각 각이었으나 모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아마도 모두 많건 적건 그것에 관해서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꺼내지 않는다. 아 무도. "저기, 나." 메리가 오른손을 살며시 들었다. "말해도 돼? 모두 에게 말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루히로는 란타, 유메, 시호루와 시선을 교환했다. 뭐지? 가슴 이 답답해졌다. 안 좋은 예감 이 든 것이다. 메리는 신관이고 모구 조가 죽은 일로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고 혹시나 빠지겠 다고 말하는 건? "어, 해봐." 목소리도 떨리고 만다. "물론 괜찮지. 뭔데?"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메리의 아름답다는 말 외엔 달리 형용할길 없는 얼굴이 얼어붙어 있다. 입술만 움직여서 낮게 말을 자아낸다. "그때 프로텍션 효과가 떨어졌었어. 다시 걸어둬야 했는데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 그런 격렬한 전투에서는 특히 아주 조금의 차이가 생사를 갈라. 프로텍션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두었다면

46 모구조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죽지 않았을 거야. 모구조는 내 탓에 죽은 거야. 내가 모구조를 죽게 만들었어." "그건 아니잖아?!" 란타가 테이블을 쳤다. " 그건 아니잖아! 네 탓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보다 말이야, 너 혼자만의 탓이 아니야! 나도 그 녀석은 내 파트너였는데, 나는 그 녀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지 못했어! 내가 약했던 거야!" "아니지 않아." 메리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프로텍션을 떨어지게 만든 것은 초보적인,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치졸한 실수고 모구조는 그 때문에 죽은 거야. 나는 예전에 동료를 세 명이나 죽게 했어. 이 제 두 번 다시 죽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도 또 저질러버렸어. 나에겐 신관 자격이 없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메리." 유메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런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자격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유메는, 그게 아니라." "나는 이해해." 시호루는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힘주어 깍지 꼈다. "메리의 마음. 이렇게 말하면 뻔뻔한지도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생각하니까. 여기에 있 어도 되는 걸까 하고. 모두의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하고. 여기 있을 자격이 나에게 있는 걸까?" "없 어." 란타는 햇 하고 웃어 보였다. "있을 리가 없지. 자격 같은 게. 애초에 우리는 떨거지들 모임이잖아. 뭘 할 자격도 처음부터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알 게 뭐야. 상관없어. 그런 거 없어도 하는 거야. 오늘 까지 해왔잖아." "란타 말이 맞아." 하루히로는 메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메리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어 눈을 마주쳐 주지 않는다. 멀다. 그런 생각을 한다. 메리는 여기에 있는데도, 너무나 멀다. "자격 같은 거 없고, 필요 없어. 메리는 우리 동료야. 그걸로 충분해." "고마워." 메리의 입가가 약간 풀어졌다.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희미하다. 그래도 메리는 미소 지 으려고 해준 것이다. " 그래도, 시간이 필요해. 다무로에 가보고 알았어. 지금까지의 나로서는 모두와 함께 나아갈 수 없어. 무서운걸.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자신이 없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어도 좋아. 열흘이라도 아니, 7일이라도 좋으니까 나에게 시간을 좀 줘." "괜찮지." 란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짚고 어펫짓을 했다. "나도 새로운 스킬을 배우고 싶으니까. 뭐, 열흘이나 있으면 상당히 파워업 할 수 있겠지. 그 래서 최강 란타가 폭발 탄생 하는 거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네가 등장할 장면 자체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고. 후히힛."

47 "유메도 스승님한테 스킬 배울까? 돈도 있으니." "나는 그림자 마법 이외의 마법에 도전해볼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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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알았어." 하루히로는 눈을 감았다. 시간.시간이다. 아무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때도 종종걸음으로 계속 나갈 수 있을 정 도로 우리는 강하지 않다. 눈을 떴다. 보이는 풍경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잔혹할 정도로. 이 변함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조금씩이라도 변해가야만 한다. "열흘 후 아침 8시에 북문 앞에서 만나자." 9.천사의 강림 자기 영역이 아니면 당혹스럽다고 한다. 바로 그거다. 화원 거리 근처에 마라이카라고 불리는 가게가 있다. 간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라이카 씨가 관리하는 요릿집이라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마라이카의 손님은 90퍼센트랄까, 대부분의 경우 100퍼센트 여성이다. 남성 손님 사절이라고 내건 것은 아니지만, 여성 손님들뿐 이라서 남성은 들어가기가 껄끄러운 것이겠지. 반대로 여성에게 있어서는 발을 들이기 쉽고 마음이 편하다. 이런 가게는 많지 않다고나 할 까, 시호루는 여 기 말고는 이런 가게를 몰랐고 요리도 맛있고 가격도 적당해서 여자들끼리 식사를 할 때는 마라이카가 첫 번째 후보로 꼽힌다. 따라서 빈번하게 외식을 하는 여성 대개는 의용병이나 접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의 많은 수가 마라이카를 이용하기 때문에 언제나 붐빈다. 오늘은 혼잡한 시간대를 피해서 좀 일찌감치 왔기 때문에 자리가 있었다. 그래도 큰 테이블 구석 쪽에 유메와 둘이서 끼어서 앉는 것처럼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 와 반정도까지 먹은 이 시점에서 벌써 대부분의 자리가 다찼다. "그래서, 어때? 시호루는." "응. 4일에 걸쳐 마법을 하나 배웠는데 역시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아. 지금까지 나는 그림자 마법밖에 사용한 적이 없어서." "다슈 매직 말이지." "마법에는 마스터리 (통제법)라는 게 있는데." "우앵? 맛타리?" "어, 그게 아니라 마, 스, 터, 리." "아, 마수털이구나. 마수걸이인가? 그게 뭐야?" "마법사의, 마법의 힘의 원천은 엘리멘탈이라는 마법 생물인데, 종류가 네 가지 있어서." 시호루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한다. "아르브, 카논, 팔츠, 다슈인데." "암푸랑 마롱이랑 파크랑 다슈? 음, 음 어렵네." " 아무튼, 엘리멘탈은 네 종류가 있고, 그것들에 관한 지식과 그것을 잘 다루기 위한 기술

50 전반, 그리고 경험에서 오는 실감까지 포함해서 마스터리라고 불러. 엘리멘탈마다 다른 특 징이 있어서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전혀 다른 점도 있으니까." "그럼 마수털이도 네 개가 있는 거야?" "그래. 예를 들면 다슈와 아르브의 마스터리는 달라. 나는 다슈 매직을 계속 사용했으니까 좀 축적된 게 있는데 다른 마법은 그렇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해야 하는 식으로." "그렇구나. 성가시네. 유메는 있지. 사냥꾼이니까 할 일은 정해 져 있어. 활과 헌팅 나이프와 그리고 수렵술. 그것밖에 없거든. 어라? 세 개나 있구나. 그래도 유메, 수렵술은 전혀 몰라." " 늑대개를 키우는 건 수렵술이야?" "응. 그래도 있지, 이번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돈은 있지만. 키우게 된다면 강아지 때부터 키워야 하니까. 잘 돌봐주고 싶거든. 누구한테 맡기는 것도 되긴 하지만,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지금 상황이라면 강아지 옆에 항상 붙어서 돌봐주는 건 좀 어려울지도." "왠지 말이야, 유메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러면 모처럼 키우게 된다 해도 불쌍하잖아." "생물을 키우는 건 간단하지가 않지." "맞아. 각오? 그런 게 필요한 건지도. 그렇지만 늑대개는 제대로 훈련시키면 절대로 주인을 배 신하지 않는대. 목숨을 걸고 주인을 지켜준대." "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우엥? 시호루는 늑대개보다도 사람을 키우고 싶어?" "어 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시호루는 나무로 된 포크로 얼마 남지 않은 접시의 내용물을 휘 저었다. 유메는 그쪽 방면에 인연이 없다고나 할까,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아 가끔씩 대화가 어긋난다. 유메를 보고 있노 라면 내가 이상한 걸까 하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타 입인지 아닌지로 이성을 구분해버리는 것이다. 시 호루는 그런 자신이 좀 싫어졌다. 유메처럼 담백한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자를 좋아해봤자 괴로워질 뿐이다.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다. "있잖아, 당신들."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놀랐다. 시호루는 목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아는 사이 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면식은 있는 얼 굴 이라기보다 차림이었다. 꽤 체격이 좋은 여성으로 하얀 깃털 스톨을 목에 두르고 머리에 두른 반다나에도 역시 하얀 깃털 장식이 달려 있다. "나, 키쿠노라고 하는데 모르나? 하긴 인사도 하지 않았었으니. 그렇지만 나는 알아, 당신들. 데드 헤드에서 같이 싸웠었잖아." "아아!" 유메가 키쿠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와루이도 앵겔스 사람이다!" " 와일드 엔젤스(황야천사대)야. 그리고 사람한테 삿대질은 하지마. 실례야." "오효효. 미, 미안. 유메, 앞으로 조심할게." "그래줘. 나는 너그럽지만 거친 녀석들도 많으니까. 뭐, 어찌 되었건. 카지코!" 키쿠노는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를 부르려고 하는 건가? 누구긴 누구겠어? "우우옷."

51 유메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시호루는 온몸이 굳어버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키가 큰 여자를 계속 응시하는 것 밖에는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자리, 비켜줄래? 미안하지만." 키쿠노가 시호루와 유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성 손님을 세 명 정도 쫓아냈다. 빈자리에 키쿠노, 그리고 키가 큰 무시무시한 미인이 앉았다. 무시무시한 미인. 정말로 카지코는 무시무시하다. 엄청난 미인이고, 게다가 무섭다. 이렇게 마 주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한다. 솔직히 시호루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도 도망칠 수 없 다. 도망친다거나 했다가는 단칼에 베이고 말 것 같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멍 하고 있는 유 메조차도 남의 집에서 빌려온 고양이처럼 얌전했다. "오랜만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가?" 카지코가 미소 짓자 심장 에 차가운 칼날을 들이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와일드 엔젤스의 리더를 맡고 있는 카지코다. 시호루와 유메라고 했나?" 시호루는 마리오네트처 럼 말없이 끄덕끄덕. "오요?" 유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유메네 이름을 알아?" "마음에 걸리는 여자에 관해서는 조사하고 있다." 카지코는 조금 무시무시한 말을 태연히 했다. "그 전사, 남자치고는 근성이 있었다. 유감이었어." 시호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지? 신기하다. 동료들처럼 슬퍼할 수가 없고 울 수조차 없 었던 나인데, 지금 카지코가 모구조를 칭찬하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쁘고, 자랑 스럽고, 안타깝다. 나는 무엇과도 바끌 수 없는, 너무나 훌륭한 동료를 잃은 것이구나 하고, 그제야 실감했다. " 모구조는 강했으니까." 유메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한다." 카지코는 한순간 옆 눈으로 어딘가 먼 곳을 보았다. "너희는 아직 경험이 적어. 거의 신참이나 마찬가지다. 성장가능성은 컸어. 그 전사는 순조롭 게 성장해가면 이름을 날렸을지도 몰라. 적어도 너희와 동기인 그 요란한 남자와 어깨를 나란 히 할 정도는 되었겠지." " 그, 렌지 군과." 시호루는 이를 악물었다. 카지코는 아마도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닐거다. 그 정도는 왠지 알 수 있다. 이름난 클랜인 와일드 엔젤스를 이끄는 인물의 솔직한 평가다. 신용할 수 있다. 모구 조는 강했다.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더욱, 훨씬. "뭐, 흔히 있는 일이야." 카지코는 살짝 어깻짓을 했다. "소질 있는 자가 꽃도 피워보기 전에 죽는 건 드문 일이 아니야. 오히려 재능 있는 녀석 일수 록 일찍 죽기도 하는 거다. 약하고 겁이 많은 자는 화살 앞에 서려고 하지 않아.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 나도 그랬었다." 키쿠노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다. " 카지코는 아니잖아." "아니. 너희는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어. 확실히 지금의 나는 평범하진 않지. 소우마나 케무리

52 에게는 이기지 못하겠지만 레드 데빌 닷키, 타이만 '맥스', '시노하라' 정도에게라면 지지는 않겠지. 그래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갓 의용병이 되었을 때에는 비참했다. 보는 바와 같이 외모는 괜찮으니까 나를 지켜주려는 바보 같은 남자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들을 이용 해서 나는 살아남은 거다. 정말 구역질이 나.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나는 바보고 천박하 고 저질에 쓰레기 같은 남자들을 디딤돌로 삼가 조금씩 강해졌다. 물론 자질이 없었다고는 말 하지 않겠다. 있었겠지. 단, 그런 것은 누구에게나 있어. 뭔가 하나는. 제일 중요한 건 죽지 않는 거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모든 것을 밑거름 삼아 자기 능력을 펼치는 거다. 시호루. 유메." " 네, 넷." "웅냐?" "너희는 그 전사를 잃었다. 그는 너희 파티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파티의 전력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반은 줄었을 테지. 이대로 가면 살아남을 수 없어." 시호루는 침을 삼키려고 했으나 입안이 말라서 넘길 만한 침은 한 방울도 없었다. 옆을 보니 유메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 끝을 내린 채 꼭 다물고 있다. "너희는 소질이 있어." 카지코는 아주 조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조란 젯슈는 강적이었다. 오크는 만만치 않은 종족이지만, 분명히 말해서 개개인이 그토록 강 한 오크는 좀처럼 없어. 그걸 1대 1로 싸울 수 있는 건 분명 소우마나 케무리 정도겠지. 커리 어를 봐도 너희는 전멸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았다. 대단한 거야. 단, 안타깝 게도 너희 파티는 이제 틀렸어. 그 전사 없이는 도저히 싸울 수 없다. 머지않아 또 누군가가 죽는다. 한 명이 죽으면 두 명, 세 명. 대개 그런 거야. 만약 그 전사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너희 파티는 금후 주목받는 입장이 되었겠지. 이미 평판이 난 동기 파티와 함께 언젠가 황금 세대라 불리게까지 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사라졌다. 언제까지고 그 파티에 매달려 있으면, 시호루, 유메. 너희를 기다리는 것은 무참한 죽음이다." " 파티에서 나오라고?" 시호루가 목소리를 떨며 묻자 카지코는 곧바로 "그렇다" 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일드 엔젤스에 들어와.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좋다. 마 법사와 사냥꾼이라면 내일부터라도 들어갈 수 있는 파티가 있어." "우리 클랜은 전원이 여자야." 키쿠노는 묘하게 붙임성 있는 웃음을 보였다. "한심한 남자 따위는 한 명도 없어. 아무도 당신들을 이용하지 않아. 우리는 결속력이 강하고, 절차탁마( 切 睫 系 磨 )하며 살아남고, 인생을 즐긴다. 남자는 금기지만. 그런 놈들은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문제도 없어. 그보다 말이야. 없는 편이 좋아, 남자 같은 건. 아무리 꾸며봤자 놈들 은 껍데기 하나 벗겨보면 똑같으니까. 우리를 더러운 성욕의 배출구로 삼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 "키쿠노. 너무 흥분했다." "아, 미안, 카지코. 나도 모르게 그만." "남자가 금기라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클랜 안으로 끌어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사생활 에서 뭘 하든 상관없어. 단, 동료에게 상처 입힌 자는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도망쳐도, 숨어도 반드시 찾아내서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면 그 사실 은 알 테니 우리(와일드 엔젤스) 여자들한테 장난삼아 손을 대는 녀석은 일단 없어. 그래도 다

53 가오는 남자가 있다면, 그 녀석은 진심이라는 뜻이다. 그런 남자까지 반죽음을 만들거나 하진 않으니 안심해도 돼." "과연 그럴지 "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눈을 보고 분명히 해, 키쿠노." "아, 아무것도 아니야." 죽음, 무참한 죽음. 이대로는 죽는다. 시호루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마나토 군. 모구조 군. 떠올라버렸다. 두 사람의 죽은 얼굴이. 우리도 그런 식으로? 아니야, 꼭 그렇다고 정해진 건 아니야. 카지코는 시호루와 유메를 와일드 엔젤스에 영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과장 되게 말 하는 것 아닐까?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실제로 파티의 전력은 반감했다. 시호루가 새로운 마법을 배우고 유메와 다른 사람들 이 다른 스킬을 익힌다고 해도 그걸 로 모구조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까? 모구조는 없이, 예를 들면 데드헤드감시보루 공략전 같은 격렬한 전투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시호루는 대개 파티 제일 뒤쪽에서 전체를 둘러보고 있으니까 이것은 단언할 수 있다. 무리다. 앞에 모구조가, 그 커다란 뒷모습이 없는 풍경은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텅 빈 모 양새다. 마법사인 시호루는 호구다운 호구를 착용하지 않는데, 모구조가 없으면 맨몸으로 전장에 서있 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이 약해지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다들 무리라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가시밭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와일드 엔젤스에 들어가면, 시호루와 유메는 그런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시호루는 눈을 뜨고 유메의 표정을 살폈다. 유메는 분명 이 자리에서 거절하겠지. 미안, 모처 럼 권해줬는데 라고 말하면서. 그럼 시호루도 덩달아 같은 결론을 내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유메는. 유메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문어처럼 입을 내밀고 있 었다. 생각하고 있다. 망설이는 것이다. 유메조차도, 망설인다. "저." 시호루는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도대체 누구한테 사과하는건지 시호루는 알 수가 없었다. "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10,남겨진 자와 남은 자와 "난감하네." 하루히로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몸의 방향을 트는 것만으로도 몸 여기저기에서 견디 기 힘든 통증이 일었다. "죽을지도." 중얼거리고, 아니, 아니, 아니. 부정한다. 그렇게 가볍게 써선 안 되지. 그런 표현. 하지만 정 말로 아프다.

54 "악마야, 바르바라 선생님. 알고 있었지만." 어설트( 强 襲, 강습)라는 스킬이 있다. 도적의 싸움 살법 중 하나다. 꽤 강력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어떤 스킬인가 하면, 요컨대 이판사판 공격이다. 반격당할 것을 각오하고 상대에게 연타를 날린다. 방어와 회피는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오로지 공격하 고 공격하고 또 공격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는 것 은 아니다. 효율이 좋은 무기를 사용해 공격과 공격 사이를 가급적 벌어지게 하지 않는다. 방어와 회피를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 대신에 끊임없이 계속 공격함으로써 역습당할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다. 그래도 반격당한다면 그땐 어쩔 도리가 없다. 공격을 달게 받는 수밖에 없다. 죽기 전에 죽여 라. 명확한 스킬이다. 하루히로는 의용병 숙사의 벌써 어두워진 방의 2층 침대에 피로 하고 아픈 몸을 눕히고 있는 데, 옆에는 새로 산 신품의 양질 대거 와 삽(sap)이라는 난타용 무기가 놓여 있다. 삽은 30센티미터 정도로, 끝이 무겁고 탄력 있는 소재로 된 짧은 막대기다. 전체에 가죽 끈이 감겨 있고 끈은 손잡이 쪽에 고리로 되어 있다. 새로운 대거도, 삽도 어설트를 배우면서 장만했다. 즉, 하루히로는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 법으로서 어설트 습득과 듀얼 윌드(양손 자세)를 선택한 것이다. 하루히로는 물론 양손잡이가 아니다. 오른손잡이다. 왼손으로 무기를 다루는 것은 간단하지가 않다. 더욱이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다른 무기를 동시에 사용하게 되면 더욱 어려워진다. 바르바라 선생님은 아무튼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해주셨다.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무기를 쥔 채로 잠들 정도로 하라고. 하루히로는 대거와 삽을 손에 들었다. 과연 하루 종일 무기를 들고 있을 수는 없지만 틈만 나 면 이렇게 만진다. 6일 동안에 걸친 어설트를 배우기 위한 훈련은 다른 때처럼 가혹했다. 처음 이틀간은 바르바 라 선생님의 어설트를 흠씬 맞고, 다음 이틀간은 어설트의 형태를 거의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익히고, 마지막 이틀은 바르바 라 선생님과 종일 맞대결을 하고, 결국 하루 히로의 어설트는 한 번도 바르바라 선생님을 때리지 못했고 하루히로는 바르바라 선생님의 목검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맞았다. 몇 번이나 기절해서 바르바라 선생님이 부른 신관에게서 치료받았다. 그래서 일단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나았다. 그런데 도 몸 전체가 아프다. 그리고 무겁다. 나른하다고 말할 정도가 아니다. "란타, 안오네." 시호루와 유메도 숙사에는 없다. 각각 마법과 스킬을 배우러 갔다. 란타도 그런 건가? 이러니 저러니 핑계를 대며 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으나,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루히로도 내일 다른 스킬을 익히고자 또다시 도적 길드에 갈 예정인데, 이런 몸 상태로 괜 찮을까? 자신이 없다. "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몸은 엄청나게 피로했지만 배는 고팠다. 자기 전에 뭔가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하루히로는 큰마음 먹고 일어나 대거를 칼집에 넣고 삽을 벨트에 찼다. 침대에서 내려와 곧바로 대거와 삽을 잽싸게 뽑아 겨눠본다. " 늦어." 이거 갖고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대거와 삽을 넣었다가 뽑는다. 몇 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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