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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강 아시아의 경제문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을 해야 합니다. 경제활동을 통해 우 리는 일단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자원을 마련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생존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어딜 가나 경제가 사람들 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경제가 모든 문화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만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생산해서 소비하고 교환하는지는 환경과 여건에 따라 다르고, 그에 따라 삶의 방식도 다양하게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제일 먼저 경제문화를 살펴보 고자 합니다. 경제는 보통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즉 생산, 소비, 교 환입니다. 생산 영역에서 우리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화폐를 획득합니다. 소비 영역에서는 재화와 용역을 사용하고 교환 영역에서는 재화와 화폐를 교 환합니다. 먼저 생산 영역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2 1. 생산 양식 (1) 수렵채집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생산양식은 수렵채집입니다. 아득한 과거에나 존 재했을 법한 수렵채집 양식과 그 문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사실 지금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수렵채집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수렵채집 양식을 통해 경제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 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현존하는 수렵채집 사회들 을 연구해 실제 이 생산양식이 구성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밝혀주었습니다. 수 렵채집 양식의 주요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렵채집은 우리의 생산양식이 아닌 데다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 이어서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여기는 생산양식이지만 사실 주변의 지리적 환 경과 계절 변화, 그리고 동식물에 대한 복잡한 지식이 필요한 생산양식입니 다. 언제 어디에 가면 어떤 먹을 것이 있다는 정보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사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도구도 많이 필요합니다. 아주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생산하기 때문 에 수집하고, 운반하고, 가공하기 위해 알맞은 도구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 요 이상으로 생산했을 때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고 필요한 만큼 언제든지 생산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라면 사람들은 자연이 베푸는 만큼 최소 한을 생산하게 됩니다. 따라서 수렵채집 방식은 지속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잉여생산물을 축적하지 않기 때문에 재산이라 고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의 개념조차 형성되기 어려운 생산 양식인 것입니다. 수렵채집 양식은 기본적으로 넓은 지역을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노동량이 많은 생산양식이지만 기후에 따라 노동량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열대 지역에 서는 의식주 가운데 식량 생산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상대적 으로 적고, 결과적으로 에너지 소모량도 크지 않아 노동시간이 적은 상태로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반면 온대와 한대 지역에서는 의식주 모두 생산해 야만 하므로 노동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고, 따라서 에너지 소모량도 많아 노동 시간을 줄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3 수렵채집사회의 기후에 따른 성별 및 연령별 분업 기후에 따른 이러한 차이점에서 같은 수렵채집 양식이라 하더라도 문화는 분화됩니다. 노동시간이 적은 지역에서는 충분한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휴식, 놀이, 대화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위의 표가 보여주듯이 성별 과 연령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나뉠 때 열대와 한대에서 많은 차이점들이 생 겨납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서 나타납니다. 열대지 역에서는 채집만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할 정도로 자연환경이 많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반면 한대지역에서는 주로 수렵에 의존해야하기 때문에 열대지역에 서는 여성과 남성이 모두 채집활동에 집중하는 데 반해 한대지역에서는 남성 이 수렵에 집중하고 여성은 사냥한 짐승을 가공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짐 승을 가공하는 일에는 고기를 분해하고 저장하는 일과 가죽을 벗겨 의복을 짓는 일이 포함됩니다. 열대지역에서 남성은 간헐적으로 사냥에 나서고 아이 들도 채집활동을 한다는 점도 차이점입니다. 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열대 지역에서는 집짓기가 비교적 간단한 반면 한대지역에서는 비교적 튼튼하고 추위를 막아줄 집이 필요하기 때문에 집짓기에도 많은 노동이 필요합니다. 노 인들은 주로 육아를 담당하고 식수를 길어오는 일은 아이들 몫이라는 점은 열대와 한대의 공통점입니다. 이처럼 연령과 성별에 따른 분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분업에 따 른 관계의 문화입니다. 생산의 주역은 기후에 따라 성별이 달라지는 경향을

4 보이는데, 한대지역에서는 수렵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만큼 수렵을 담당하는 남성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반면 열대지역에서는 수렵에 대한 의존도가 낮기 때문에 남성이 특별히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오히려 여성이 채집을 주도하는 경우 여성이 상대적으 로 우위에 있는 경우도 가능합니다. 요컨대 생산의 주역이 주도권을 쥐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열대지역이라고 해서 항상 여성이 생산을 주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여성이 생산의 주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열대지역 의 이러한 특징은 생산양식이 농경으로 전환된 뒤에도 지속되는 경향을 보입 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농경사회 재배의 원리와 기술을 터득한 인류는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 합니다. 다음으로 원시농경사회를 거치면서 점차 농경기술이 발전하자 소위 집약농경 양식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원시농경과 집약농경 양식의 가장 큰 차 이점은 생산량입니다. 원시농경은 소비를 위한 농사를 지었던 반면 집약농경 은 잉여생산물을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한 농사를 짓게 됩니다. 집약농경사회에 서 생산량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은 더욱 부족해진 이유는 인구가 늘어 난 것도 있지만 바로 농업의 상업화였습니다. 생산량 증가에 따라 인구가 늘 어나 식량이 부족해지면 인구는 다시 줄어들지만 상업화된 농업에서는 생산 량의 일부를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집약농경사회로 전환한 후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노동량도 증 가한 것입니다. 노동시간이 늘어난 건 물론이고 전 가족이 농사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재배면적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거름을 준비해 뿌리고 관개시설 을 만들고 유지하는 등 원시농경에 비해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기 때문입 니다. 마지막 차이점으로 사유재산이 형성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앞에서 강 조했듯이 집약농경은 이익을 위해 생산양식입니다. 잉여생산물은 재산으로 전 환되었고 그에 따라 확고한 사유재산의 개념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재산을 지 키기 위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발전합니다. 특히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상속제 도가 만들어집니다. 혈통 개념과 성씨가 만들어진 것도 상속을 위한 것이었습 니다. 상속을 기반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마다 재산의 양에 점차 큰 차 이가 생기고 결국 계급이 생겨납니다. 재산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수익을 보장하는 재산은 토지입니다. 따라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과 토지를 소유하지

5 못한 사람들로 나뉘고 점차 계급으로 분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농경사회의 변화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아 시아의 일부 지역,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토지가 마을의 공동 소유로 남아있었습니다. 넓고도 비옥한 토지, 풍족한 생산량과 함께 강력한 공동체의식이 토지사유제의 필요성을 억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에서 성씨가 발달하지 않았던 점은 사유재산과 상속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지 않았 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도네시아의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대통령 이름만 보더라도 독립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까르노 Sukarno 와 이후 30여 년간 대통령을 지낸 수하르또 Suharto 는 모두 더 이상의 이름이 없습니다. 수까르노 의 딸 메가와띠 Megawati 도 처음에는 이름이 메가와띠뿐이었지만 정치인으로 아 버지 수까르노의 후광을 얻기 위해 수까르노뿌뜨리 Sukarnoputri 라는 이름을 만들 어 성씨처럼 쓰게 됩니다. 수까르노뿌뜨리는 수까르노의 자식이라는 뜻인데, 결국 이름 덕분에 훗날 대통령이 됩니다. 농경사회 중에는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대규모 농장체제도 있었고 마을 단위로 공동경작도 있었지만 대체로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는 것이 일반적입 니다. 이는 사유재산의 형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족 가운데 생산의 주역이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남성중심과 여성중 심으로 나누었을 때 약 7대3의 비율로 남성중심 가족농이 많다고 합니다. 생 산의 주역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 는데, 그렇다면 왜 주로 남성이 생산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째, 남성의 근력 가설입 니다. 땅을 개간하고 밭을 가는 데 남성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남성이 생산 의 주역이 되었다는 가설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고 경 작지를 늘리고, 넓어진 밭을 갈아야 할 때 확실히 남성의 근력이 높은 생산성 을 담보합니다. 하지만 자연환경에 따라 남성의 근력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열대지역 충적토에서 벼농사를 한다면 여성의 근력만으로도 감당하기에 충분합니다. 반면 척박한 환경에서는 일정한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 개간을 해야 하고 경작지의 면적도 커야 합니다. 이럴 경우 남성의 역할 이 커지게 됩니다. 두 번째 가설은 여성의 가공 전담설입니다. 농사에 여성이 참여할 수도 있지만 탈곡이나 탈피, 그리고 조리가 요구하는 노동량도 아주 많기 때문에 여성이 이 과정을 전담하면서 농사는 남성들의 몫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

6 나 왜 여성이 곡식의 가공을 전담해야 하는지 혹은 왜 남성은 가공에 참여 하지 않는지 이 가설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 여성이 생산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남성의 근력 가설을 그대 로 받아들이고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설이 아닐까요. 또한 기존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여성은 가공에 더 적합하다는 편견을 합리화하는 가설은 아닐 까요? 세 번째 가설은 여성의 육아 가설입니다.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데에 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여성이 육아를 담당함으로써 생산 은 남성의 몫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게 되는 이유는 기 본적으로 여성만이 수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설 또한 여성이 육아와 생산을 동시에 책임지는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뿐더 러 가공 전담설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생산의 주역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 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집약농경 사회에서 남성이 생산을 주로 담당하는 경우는 약 70%입니다. 여성이 생산을 전담하거나 남성과 함께 공동으로 생산 하는 나머지 30%의 경우에는 이 가설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칫 잘 못 해석하면 여성은 아이나 키워라 는 남성들의 편견을 강화하게 됩니다. 이상의 세 가지 가설 가운데 남성의 근력 가설을 자연환경에 따라 달리 적용한다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너그러운 자연환경에서는 왜 여성이 생산을 담당 하게 되는 것일까요? 남성의 근력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남성이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성이 생산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는 여성중심 농경체제를 살펴봅시다. 여성중심 농경사회는 인도 남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데, 이 지역에서는 여성이 생산을 주도하고 재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 다. 먼저 자연환경을 보면 땅이 넓고 비옥하며 햇빛과 물이 풍부해 농사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모내기를 하지 않고 볍씨를 뿌리기만 해도 충분한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쌀은 밀이나 다른 잡곡 과 달리 가공도 비교적 간단합니다. 밀은 겨를 벗기는 작업도 힘이 들지만 가 루로 빻아야만 먹을 수 있지만 쌀은 탈곡도 쉽고 겨를 벗기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작물입니다. 게다가 밀에 비해 쌀은 훨씬 많은 칼로리를 제공합니다. 그 러니까 이 지역에서 쌀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남성의 근력이 그다지 필수적

7 이지 않고 여성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 다 하더라도 왜 남성의 참여가 소극적이고 여성이 생산을 주도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습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모성애 가설에서 찾을 수 있습니 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미의 존재는 확실한 반면 아비 가 누군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 즉 재생산을 실현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지배한다고 봤을 때 포유류 어미들이 출 산한 자식은 자신의 유전자가 복제된 개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식을 먹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식량생산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포유류 아비들은 새로 태어난 자식이 진짜 자신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확신하거나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식을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미에 비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여성이 먼저 식량생산에 나서고 남성의 참여 없이도 식량생산이 가능한 자연환경에서 여성이 식량을 생산하면 남성 은 얻어먹는 방식으로 여성중심 농경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동남아시아 농촌에는 남자들이 없다 라는 말은 이런 상황이 조금 과장되어 표현된 것입니다. 베트남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고깔모자는 베트남어로 논 non이라 하는데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고 빗물도 막아주며 가벼운 물건을 넣 어 들 수도 있고, 심지어 급할 때에는 물을 받아 쓸 수도 있는 아주 실용적 인 모자입니다. 그런데 이 모자가 여성 전용으로 남성은 쓰지 않는다는 점으 로부터 농사일을 여성이 주로 한다는 사실을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여성중심 농경체제에서는 여성이 생산의 주역이 됨으로써 여성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따라서 여성의 지위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낮을 가능 성이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산권을 행사함으로써 여성이 가장의 역할을 하 게 될 가능성이 큰데, 제도적으로 굳어지면 모계제 사회가 되거나 최소한 공 계제 사회가 형성됩니다. 실제 모계제 혹은 공계제 사회, 그리고 부계제 사회 라 하더라도 모계적 전통이 뚜렷하게 유지되는 사회가 동남아시아 지역에 많 이 있는 것도 이러한 여성중심 농경체제에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계제 사회로 지속되지 않고 부계제 사회로 전환된 경우는 어떤 연 유에서일까요?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놓고 추론해보면 주변의 강력한 부계제 전통을 유지하는 문화, 혹은 부계제를 원칙으로 삼는 종교의 전파에 따른 것 으로 보입니다. 경제적 구조의 변화 없이도 문화는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8 실제로 여성중심 농경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베트남 메콩델타 지역의 일반적인 농업생산 현장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메콩델타 지역은 히말라야 에서 발원한 메콩강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든 충적토 지역으로 비옥하기로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천혜의 옥토입니다. 메콩강은 아홉 개의 큰 줄기로 갈라져 흐르고 또 그 강에서 셀 수 없는 작은 물길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어떤 곳이든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을 댈 수 있는 환경을 제공 합니다. 사실 이 지역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 지속되는 우기에 내리는 비로 인해 급수보다 배수가 더욱 관건입니다. 논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관리를 잘 하면 3모작이 가능합니다. 현재 이 지역 농민들의 주요 작물은 쌀입니다. 벼 농사를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볍씨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볍씨에는 3개 월 종과 4개월 종이 있는데, 시장의 쌀 수급 상황과 비료 가격 등의 변동을 예상해서 선택합니다. 파종과 수확 시기가 거의 일치해서 만들어내는 우리나 라의 농촌 풍경과 달리 메콩델타 지역을 비롯해 3모작이 가능한 동남아시아 농촌에서는 벼가 자라는 논, 벼가 다 익은 논, 추수하고 비어있는 논이 동시 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단 볍씨를 선택하고 나면 쟁기질과 써레질을 시작합니다. 이틀 간격으로 대여섯 차례 합니다. 볍씨를 뿌리는 경 우에는 미리 볍씨를 물에 이틀 정도 담가두지만 요즘 메콩델타 지역에서는 직파 농법을 거의 쓰지 않고 모내기를 합니다. 모내기는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방법입니다. 모판에서 모를 키운 뒤 최적의 간격으로 이앙해서 면적당 소출을 극대화하는 것이 모내기인데, 볍씨를 직파하는 방법에 비해 몇 배의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가족 노동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 합니다. 예전에는 품앗이로 해결했지만 농사 규모가 커지면서 요즘은 노동력 을 고용해서 해결합니다. 수확기가 되면 다시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합니 다. 요즘은 농기계를 쓰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소득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은 벼농사 외 다른 환금 작물도 많이 재배하고 있 습니다. 베트남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시장의 수요가 늘어났고 수출 시장까지 확대되면서 대규모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는 농가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 러나 공급량이 많아지면서 생산량에 비례해 소득이 늘어나지는 않지만 노동 량은 크게 늘었습니다. 과거에 볍씨를 직접 뿌리던 시절에 비해 이 지역 농민 들의 삶에는 이처럼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고도의 상업화가 낳은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생산과정을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은 크게 변하지 않은 이 지역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베트남 메콩델타 지역 농촌의 여성 아시아의 벼농사 지역에서 모두 메콩델타처럼 고도로 상업화된 집약농경 이 시행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볍씨를 직접 뿌리 는 농법을 쓰고 있으며 관개시설이 부족한 곳에서는 우기에 맞춰 1모작만 하 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상대적으로 농민들의 소득이 낮지만 그만큼 노동 량이 작아 많은 시간을 한가롭게 보냅니다. 이런 모습은 외부인들의 눈에 게 으른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는데 문화적 배경의 맥락을 무시한 전형적인 자민 족중심주의 시각입니다. 관개시설이 부족해 건기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자 본도 부족하고 시장의 수요도 적은 곳에서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무리 입니다. 볍씨를 뿌려 1모작만 하더라도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식량이 생산되는 열대지방에서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불필요한 노동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1모작을 하는 지역에서는 대체로 가난하지만 평화롭고 여유 있는 삶 의 방식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화전 방식 고산지대에는 화전이라는 독특한 방식의 농경이 있습니다. 그 과정은 위 의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무를 베는 일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많은 노동

10 량이 투입됩니다. 일정한 면적의 나무를 벤 후 불을 놓아 태운 후 간격을 두 고 다시 한 번 태웁니다. 재배면적을 결정하는 기준은 필요한 식량의 양과 투 입될 수 있는 노동의 양입니다. 다음으로 파종을 합니다. 주식으로 삼는 곡물 이 주로 파종됩니다. 그리고 작물이 성장하는 동안 자주 잡초를 제거합니다. 잡초를 제거하는 이유는 그만큼 지력이 약하기 때문에 양분을 잡초에게 뺏기 지 않기 위해서인데, 이 과정에도 노동력이 많이 소요됩니다. 곡식이 익어 수 확을 한 후에는 그 땅을 최소한 5년 정도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력 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라오스의 흐몽 Hmong 족 화전민 화전은 이처럼 산악지역을 돌아가며 밭을 일구는 방식이기 때문에 노동량 은 많지만 재배면적이 작아 생산량이 한정됩니다.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기 때 문에 인구도 쉽게 늘어나지 않고 상업화되기도 어렵습니다. 화전으로 살아가 는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에 적응해 의외로 자연과 조화를 이룹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재배면적을 늘리면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주기적으로 알맞은 생 산량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화전농경이 노동력을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특히 나무를 베는 작업은 남성의 근력을 필요로 할 것 같기에 남성이 생산을 주도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이 생산을 담당하고 경제적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사실

11 입니다. 자연환경이 너그러운 곳에서 여성이 경제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경 우가 많다는 점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자연환경이 그리 넉넉한 생산량 을 제공하지 않는 환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산지 대에 거주하는 다양한 소수종족들을 만날 수 있는 장터에 가면 고유의 의상 을 차려입은 여성들로 북적거리는데 그중에서 남성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합니 다. 이처럼 여성중심의 사회가 형성된 것은 자연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생산량 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구를 제한해야 하고, 그 방편으로 여성이 남성에 게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데 따른 결 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혼인문화 부분에서 상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장터에 모인 소수종족 여성들 (3) 목축과 어로 약 7,500년 전 인류의 유전자에 한 가지 돌연변이가 일어나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유를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젖당 분해 능 력이 생긴 것입니다. 이 변화는 동물을 길들이는 인간의 능력과 결합해 농경 이 아닌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곡물을 주식 으로 하는 농경사회와 달리 목축사회는 우유와 육류를 생산해 주식으로 합니

12 다. 요즘은 축사나 목장에서 사료를 먹여 사육하는 현대식 목축업이 우유와 육류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목축 방식은 유목입니다. 유목은 글자 그대로 이동하며 가축을 키우는 방식입니다. 일정한 지역에서 가축에게 풀을 먹인 후 신선한 풀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 목은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지속가능한 생계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유목민의 수는 현저히 감소했지만 아시아의 경우 몽골과 중앙아시아, 서아시 아의 초원지대에서는 유목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목이라는 생계방식은 정주형 농경사회와 확연히 다른 고유의 문화를 형 성합니다. 생산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가족 한 명에 평균 50마리 정도 의 가축이 있어야 생계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족의 크기에 따라 차 이는 있지만 대략 한 가족이 200마리 이상의 가축을 키워야 합니다. 이처럼 많은 가축을 몰고 초원으로 나가 풀을 먹인 후 다시 우리로 데려오는 작업은 남성이 전담하고 여성은 젖을 짜서 가공하고, 도살된 가축의 고기를 가공해서 저장하는 작업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남녀 간의 분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축 을 몰고 매일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들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에 능 숙하게 됩니다. 근거리 초원의 풀이 소진되면 유목민들은 풀을 찾아 다른 곳 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택은 이동하기에 좋은 천막 형태가 많습니 다. 몽골의 게르 Ger (몽골포)는 대표적인 유목민 주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하 30도의 추위도 견뎌낼 만큼 게르는 단열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합니 다. 몽골의 유목민 가족 몽골의 게르

13 아프가니스탄의 유목민 카자흐스탄의 유목민 유목민들은 간헐적으로 농경사회와 접촉해 교역을 합니다. 주로 동물 가 죽을 팔고 곡물 따위의 생필품을 삽니다. 과거에는 약탈을 통해 물자를 조달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주형 농경사회가 유목민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강력해지기 전에는 늘 약탈에 시달리거나 아예 조공 을 바쳐야 했습니다. 교역이든 약탈이든 과거의 유목민들은 농경사회를 이어 주는 고리 역할을 하며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 는 부분입니다. 물론 약탈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유목민들은 교 역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얻습니다. 하지만 교역을 통해 유목민들이 얻는 재화의 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늘 이동을 해야 하기에 살림살이가 지 나치게 많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목축은 농경과 달리 많은 도구 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생계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력 과 교환에 만족합니다. 따라서 유목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지속가능성이 높은 생산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목민들은 최소한의 살림살이에 만족하고 익숙하지만 소유의 개념은 확립되어 있습니다. 사실 목축은 그 속성상 사유재 산의 개념이 일찍 발달했습니다. 가축을 도둑맞거나 뺏기면 생계에 큰 타격을 받기 때문에 소유의 주체를 분명히 하는 개념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로사회는 가장 늦게 형성되었고 규모 도 크지 않습니다. 유목사회는 약간의 교역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

14 가능한 반면 어로사회는 교역을 통한 생필품 보급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잉여 생산물을 확보한 농경사회가 존재해야만 가능합니다. 게다가 과거에는 큰 바 다로 나가 생선을 대량으로 포획할 수 있는 선박을 만들 기술이 부족했고 대 량으로 포획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저장하는 시설이나 그것을 팔 수 있는 큰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규모 어로사회가 형성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로 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생계방식이라 하더라도 농경과 병행하는 경우가 일반 적이었습니다. 다만 수자원이 풍부한 강이나 호수에서는 주변의 농경사회와 교역을 하는 소규모 어로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Tonle Sap 똔레삽 호수의 수상 가옥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바닷가 어촌들 외에도 캄보디아의 똔레삽 Tonle Sap 호수와 베트남으로 이어지는 메콩 Mekong 강, 미얀마의 인레 Inle 호수와 에야워디 Irrawaddy 강 등 내륙의 물길을 따라 어로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곳도 많습니다. 수량과 흐름의 변화에 따라 물고기를 쫓아 이동해야하기 때문입니 다. 따라서 이들을 물 위의 유목민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자급 도가 낮아 교역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초원의 유목민들과 다릅니다. 생 선을 팔아 생계유지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해야 하며, 게다가 생선은 신속하게 판매되어야하기 때문에 어로사회는 늘 시장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로 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수상시장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배는 어로사회

15 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선박이나 선박으로 이동하 기에 용이한 수상 가옥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배를 타고 학 교를 다니는데, 학교도 물 위에 있습니다. 이처럼 배는 고기잡이를 위한 생산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필수품입니다. 어로사회에서 남녀분업은 비교적 뚜렷합니다. 어로는 남성이 전담하고 여 성은 가공과 판매를 맡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고기를 잡는 방법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이채롭습니다. 낚시와 그물이 주를 이루지만 그 형태나 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예컨대 스리랑카의 바닷가에서는 장대 위에 올라서서 낚시를 하 는 아주 독특한 방법이 있습니다. 비교적 깊은 곳까지 들어가 낚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선박을 이용할 수 없는 가난한 어부들이 마치 곡예사처럼 장시 간 장대에 매달려 낚시를 합니다. 중국식 그물 로 알려져 있는 기중기처럼 생긴 장치를 이용해 물가에서 그물을 내리고 올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아 시아 전역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가마우지를 이용해 고기잡이를 하는 어 부들은 평소에 가마우지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정성을 쏟습니다. 미얀 마 인레 호수에서는 아마도 가장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습니다. 인레 호수의 어부들은 다리로 노를 젓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긴 노 로 물을 세게 쳐 물고기들을 놀라게 한 다음 고깔 형태의 기다란 가두리 통 을 물속으로 재빠르게 넣어 물고기를 가둔 후 창살로 물고기를 잡아냅니다. 스리랑카 해변의 어부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중국식 그물 전통적인 어로는 비교적 지속가능성이 높은 생계방식이지만 최근에는 지 나친 상업화로 인한 지속적 남획이 자연의 균형을 깨트리며 물고기 자원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산업형 어로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속가능성을 현저히 떨 어트리고 있고 일부 어종은 멸종의 위기에 있습니다. 대안으로 등장한 양식

16 산업도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인레 호수의 어부들 미얀마 인레 호수의 어부들 2. 소비양식 생산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소비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먹어야 하고 체 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채워야 합 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소비,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비는 다시 생산으로 이어져 순환구조를 이룹니다. 그런데 인간은 최소 소비를 넘어 추가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보다 더 윤택 한 삶을 위한 소비가 추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비를 늘리려면 생산이 늘 어야 합니다. 인간은 생산을 늘리기 위해 생산물 중 일부를 축적해 생산에 재 투입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생산이 늘면 소비가 늘어나 다시 생산을 자극하 는 선순환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소비량이 줄면 생산량이 줄고, 생산량이 줄면 소비량이 줄어 악순환에 빠집니다. 결국 소비량은 생산량에 의해 제한되고 생산량은 소비량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느냐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느냐에 달려있지만 문화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할 수 있 습니다. 절제와 검약을 미덕으로 여기고 장려하는 문화가 있는가하면 소비를 장려 하고 심지어 과소비를 부추기는 문화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대체로 과소비하는 사회 혹은 사치품에 대한 소비가 많은 사회일수록

17 소득불평등의 정도가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득이 크기와 관계없이 불평등의 정도가 낮을수록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은 경향도 있습니다. 또한 소비 지출액은 같아도 소비의 대상이나 형식에서는 문화적 차이가 나타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컨대,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대형차보다 소형차를 선 호하는 경향이 강한데 소비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비슷한 가격의 옷을 살 때 어떤 사회에서는 밝은 원색이 선호되는 반면 어떤 사회에서는 무채색이 선호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향적 현상은 경제적 논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문화적 현상인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소득불평등의 정도가 낮은 사회일 수록 사치품 소비가 적을 뿐만 아니라 나눔의 문화, 기부와 복지가 발달하는 현상입니다. 소득불평등의 정도가 낮기 때문에 나눔의 문화가 발달한 것인지 나눔의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소득불평등 정도가 낮은 것인지 그 인과관계 를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두 가지 현상이 함께 상승효과를 일으키 는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반면에 소득불평등의 정도가 높은 사 회일수록 소득에 비해 과소비하는 현상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 회에서는 특히 고가의 사치품 수요가 높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 까요? (1) 베블렌 효과: 과시욕과 트로피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렌 Veblen 은 과소비, 특히 사치품 소비는 과시욕에 따 른 현대판 트로피 trophy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트로피는 경쟁에서 승리한 자 에게 수여되는 물건입니다. 칭찬과 격려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승리에 대한 증거물, 능력의 상징물입니다. 상장이나 훈장도 이런 의미에서 모두 트로피에 해당합니다. 과거에 권투경기를 하면 승리한 선수에 게 선수의 몸집과 비슷한 크기의 트로피를 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트로피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트로피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트로피는 박 제된 동물의 머리나 맹수의 가죽 등 주로 사냥꾼들의 집에서 볼 수 있는 장 식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트로피를 만들어 두는 이유는 사냥꾼으로서의 능 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낚시꾼들이 월척을 낚으면 탁본을 떠서 벽에 걸 어두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는 사냥 꾼이나 낚시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는 농부로서의 능력을 과시하 고 싶고, 기술자는 기술자로서의 능력을, 경영인은 자신의 경영능력을, 학생

18 은 학습능력을 과시하고픈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능력이 뛰어난지 겨루는 대회들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열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냥꾼의 트로피는 크고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어렵습 니다. 대안으로 동물의 뼈나 깃털로 모자나 옷을 장식하거나 목걸이를 만들어 거는 방법이 있지만 농민의 경우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농민의 능력은 잉여 생산물의 양으로 나타나는데, 잉여생산물을 갖고 다니기란 불가능합니 다. 농경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잉여생산물을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으로 바꿔 몸에 부착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이리하 여 사치품이 탄생하고 귀금속을 이용한 장신구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산업사회로 전환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트로피에 대한 수요는 더욱 증 가합니다. 산업사회는 새로운 부를 창출했고 도시화는 과시해야 할 대상의 수 를 폭발적으로 늘렸습니다. 특히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도시의 익명성은 개인의 능력을 상시적으로 과시해야 하는 상황을 낳았고 실제보다 더 능력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능력은 분야와 관계없이 대부분 물질적인 부로 환원되기 때문에 사치 품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개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기능에 가장 충실한 상품을 꼽자면 고가의 가방과 자동차를 들 수 있습니다. 멀리서 도 눈에 띈다는 점에서 가방과 자동차는 귀금속보다 능력과시 기능이 훨씬 더 뛰어납니다. 고가의 자동차나 가방은 기능이나 품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 싸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렇게 고가일 때에만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비싸면 비쌀수록 사치품의 기능 을 더욱 충실히 수행합니다.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의 사치품은 주로 유럽에서 생산되지만 이 제 품들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아시아에 있습니다. 현재 아시아 국가들은 사치품 소비량에 있어서 유럽을 크게 앞지릅니다. 특히 경제가 급속 히 성장한 신흥공업국에서 사치품 소비도 함께 급증했는데, 소득이 증가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볼 수 있지만 기존의 소비문화와 맞물려 일어난 현 상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치품 소비량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인도나 중국의 경우 많은 인구와 최근의 경제성장도 큰 몫을 했지만 전통적으로 부 국이었던 두 나라의 부유층이 이미 과시적 소비문화를 형성했다는 점도 중요 한 요인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과거에 부가 소수 에게 집중되는 사회구조를 가졌던 나라에서 과시적 소비문화가 두드러지게

19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강조해야 할 필요가 과시 적 소비문화를 낳았고 신흥 부자들이 재빨리 그러한 문화를 되살려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아시아 사람들이 사치하기 좋아한다는 단순 한 설명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고가의 사치품들이 주로 생산되는 곳이 유럽이라는 사실은 과거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유럽에서 아주 많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사치 품 제조업을 발달시킨 유럽의 귀족들은 이제 사치품으로 치장하는 행위를 저 급한 문화로 간주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과 시적 소비문화가 사회경제적 혹은 사회구조적 변화에 따라 약화될 수도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고, 과시적 소비문화가 아시아 사회에 내재된 특성 혹은 불 변의 전통이라는 주장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 자체가 본능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현상일 수도 있으며, 진화론의 성선택설이 주장하듯이 과시욕이 짝짓기를 위한 인간 의 본능이라 하더라도 그 방법이 반드시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 로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트로피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기부를 많이 한다든지 세금을 많이 내는 방식으 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 창출의 주 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2) 구별짓기 구별짓기 는 소비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유용한 개념입니다. 인 간의 내면에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데,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집단 구성원들만이 공유 하는 고유의 상징입니다. 상징의 고유성은 타 집단의 상징과 뚜렷이 구별될 때 진정한 고유성을 획득합니다. 원주민 부족들마다 고유의 의상이나 얼굴 페 인팅 방식을 갖는 것도 다른 부족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며, 최근 유행하고 있는 학과별 유니폼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소비는 현대 사회에서 구별짓기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의 구별짓기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마다 소비하 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취향이며 취향은 집단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즉 취향이란 같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비를 통해 드러나

20 는 개인의 취향은 곧 자신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며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구별시켜 줍니다. 요컨대 소비를 통해 사람들은 구별짓 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별짓기를 통해 동질적이라고 간주되는 사 람들을 묶고 이질적인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구별짓기는 이질적인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동질성을 강화시켜 줍니다. 강화된 동질성은 소속감 과 충성심을 높이고 집단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도록 돕기 때문에 그 집단을 지배하는 권력은 구별짓기를 통해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작 동합니다. 같은 취향을 만들고 나누는, 그리고 다른 취향을 가진 자들을 배제하는 현상은 거의 모든 집단에서 나타나지만 대표적 집단으로는 계급을 꼽을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의 분석에 의하면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신흥 자본가 계급 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고가의 물건을 사들이고 사치품으로 치장하며 자신 들을 다른 계급으로부터 구별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전통적인 귀족 계급은 과시적이고 물질적인 소비보다 지적이고 문화적인 소비에 치중함으로 써 자신들을 저급한 자본가 계급과 구분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전통적 귀 족 계급은 귀족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책임감이 결여된 신흥 자본가 계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임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귀족 계급은 신흥 자본가 계급만을 구별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 역에서 지속적인 구별짓기를 함으로써 하층 계급과도 명확한 경계를 그려나 갑니다. 구별짓기가 용이하고, 또 그만큼 경계가 선명한 영역으로는 예술 영역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소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예술 영역만큼 취향이 지배적 으로 작용하는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그림을 감상하고 훌륭 한 작품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훈련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무학의 벼락 부자나 금전적 여유가 없는 노동자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능력입니다. 상위 계 급의 고급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그런 취향이 공유되는 집단 내에서 성장하고 학습해야 합니다. 따라서 취향은 단순한 개인의 기호가 아니 라 구별짓기에 필요한 수단이자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짓기 수단 은 예술 영역뿐만 아니라 지식, 예절, 말투, 언어 등 일상의 모든 문화영역에 서 작동하는데, 계급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자본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문화자본이라고 부릅니다.

21 아시아의 대표적인 계급사회인 인도에서 언어가 어떻게 구별짓기에 쓰이 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끔 우리는 인도어라는 말을 접하게 되는데, 엄밀히 말해서 인도에는 인도어 가 없습니다. 언어학적 분류법에 따르면 인도에는 415개의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언어가 인도에는 없는 것입니다. 현재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정부의 공식 언어 official language 는 힌디 Hindi 어이지 만 힌디어 사용자는 전체 인구의 41%밖에 되지 않습니다. 최근 대중매체의 보급으로 힌디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크게 늘었다고는 하지만 힌 디어로는 전혀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게다가 타밀 Tamil 어 를 쓰는 남부의 타밀나두 Tamil Nadu 주 같은 곳에서는 힌디어를 안다 하더라도 결코 힌디어를 쓰는 일이 없습니다. 언어는 집단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각 언어 집단은 고유의 언어를 고수하기 위해 노 력합니다. 실제로 인도의 주들은 주마다 공용어를 따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적인 소통을 위해 인도 정부는 결국 또 하나의 공식 언어 associate official language 로 영어를 채택했습니다. 영국 식민지배의 결과로 인도에 서는 영어가 누구의 모국어도 아니지만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독립 당시에는 1%에 불과했고, 1971년에는 전체 인구의 3.9%만이 영어로 의 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이유는 전국적인 의사소통의 주체가 된 인도의 엘리트 계층은 영어로 의사소 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하층계급에서도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이 늘어 영어 가능 인구가 10%까지 늘었지만 여전히 인도인의 90%는 영어 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어는 인도에서 계급을 구별하는 기 준이며 강력한 문화자본으로서 계급간의 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음과 문법, 그 리고 문장의 수준으로 말하는 사람의 계급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계급 화되어 있습니다. 하층계급은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문장에 그들만의 고 유한 발음으로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영어로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인도화한 영어를 쓰고, 중간계급은 문법이나 발음에서 하층계급보다 좀 더 정확한 영어 를 구사합니다. 반면 지배계급은 정확하고 정중한 문장을 구사하며 발음에서 도 인도식 억양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영어의 계급화는 대물 림됩니다. 인도의 학교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뉘는데, 열악한 환경의 공립학교

22 government school, 사립학교public school, 그리고 학비가 사립학교의 최 소 50배에 달하는 고액의 사립학교convent school가 있습니다. 부모의 계급 에 따라 아이들의 학교가 나뉘고, 학교가 나뉨에 따라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도 확연히 나뉘면서 영어의 계급화는 대물림되어 고착화되는 것입니다. 京 都 이번에는 일본의 교토 로 가겠습니다. 교토는 현재 수도인 동경으로 권 력이 이동하기 전 천년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으로 전통 귀족 가문의 후예 들은 여전히 교토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공유하는 표현과 매너로 일본 내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계승하며 나머지 일본 전체로부터 자신 들을 구별짓고 있습니다. 일본 최고의 관광지인 교토를 방문한 외지인은 물론 이고 교토에 거주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이들에게 영원 한 이방인입니다. 계급은 사라졌지만 계급에 따른 문화적 구별짓기는 계속되 고 있는 것입니다. 중간계급과 하층계급 또한 자신들의 경계를 확인해주는 고유의 문화가 있 습니다. 그런데 하층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계급이동에 대한 열망이 강한 중 간계급의 경우 상위계급이 설정한 경계를 넘기 위해 상위계급의 취향을 모방 하고 수용하는 한편 상위계급의 문화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 나 이들의 모방과 수용이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상위계급은 자신들의 취 향을 바꾸고 문화자본을 확대함으로써 다시 구별짓기를 시도하게 됩니다. 경 제가 성장해 중간계급의 소득이 늘어나 과거에는 상위계급만이 구가할 수 있 었던 소비방식을 모방할 때 이 현상이 가장 활발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제품을 중간계급이 구매하면 상위계급은 수천만 원으 로 자신들의 소비수준을 올리며 중간계급이 침투해 들어온 영역을 벗어납니 다. 중간계급이 다시 쫓아가기 위해서는 과도한 지출을 감수해야 하며 결과적 으로는 경제적 부담에 포기하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로 결혼식과 같은 관혼상제를 생각해봅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라고 여겨지는 결혼식만큼은 상류계급의 결혼식만큼 화려한 결혼식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 니다. 또한 일생에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경제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지출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예산을 메우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상호부 조라는 기발한 방식을 도입했지만 끝없이 화려해지는 상류계급의 결혼식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최상위계급은 부조를 거절함 으로써 중간계급이나 심지어 상위계급조차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구별짓기 를 하고 있습니다.

23 다시 인도로 가서 결혼식을 보겠습니다. 인도의 결혼식은 화려하기로 유 명합니다. 화려한 만큼 엄청난 비용을 지출합니다. 각자의 계급수준에 맞는 화려함을 추구하지만 그 화려함은 이미 거듭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최상 위계급을 제외한 모두에게 엄청난 금전적 부담을 지웁니다. 상위계급의 경우 신부를 치장하기 위한 보석과 장신구에만 수억 원을 쓰는데, 상위계급이라고 해서 엄청난 결혼식 비용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경제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인도는 고액의 신부지참금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 들은 딸을 출산했을 때 기쁨과 걱정이 교차하고, 심지어 여아를 살해하는 부 모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개인의 능력을 뽐내고 싶은 과시욕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특별한 집단으 로 만들고 싶은 구별짓기 욕구는 이처럼 비합리적인 소비행위로 연결됩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이 주창하는 합리적 소비자 이론은 이러한 문화적 소비행태 를 전혀 반영하지 못합니다. (3) 현대사회와 소비 현대사회는 대량생산 사회이며 대량소비 사회입니다.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며, 또 그것을 소비하는 사회이며 소비해 야만 하는 사회입니다.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충분히 소비하지 못한다면 현대산업사회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비를 극대화하기 위해 현대사 회는 상품의 기호가치에 주목하게 됩니다. 기호가치란 기본적인 상품의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 외에 소비자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가치를 뜻합니다. 소비자 의 기호에는 앞서 등장했던 과시욕과 구별짓기를 포함해 이미지와 감성까지 포함됩니다. 커피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커피를 한 잔 소비할 때 만 약 사용가치만을 고려한다면 커피의 품질과 가격을 비교할 것이고, 그렇다면 값비싼 커피전문점의 커피를 소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값비싼 커 피전문점은 커피에 커피점의 분위기를 더해 판매하고 소비자들은 그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마시는 자신의 이미지를 함께 구매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의류업계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유행을 만들어내고 소비 자들은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멀쩡한 옷을 두고 새 옷을 구 매하게 됩니다. 이때 화려한 모델들이 등장해 소비자들의 환상을 자극합니다. 사실 현대사회의 광고와 마케팅은 끊임없이 소비자들의 기호를 자극하고 상 품의 기호가치를 홍보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호가치에

24 자극받은 소비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도록 유도되고 유혹당하는 것입니 다. 결국 현대사회의 소비는 단순히 필요에 의한 소비를 넘어 자신의 기호를 드러내는 지극히 문화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현대사회가 이처럼 소비를 많이 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 는 이 현상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우리가 더 이상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어버렸다 고 지적합니다. 우리에게 소비가 강요되면서 우리는 주체적으로 소비를 선택 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상품이 구매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 우리는 그 요구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그 상품이 제공하는 기호가치를 소비하고, 또한 그렇게 소 비함으로써 자신의 기호를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런 형태의 소비가 이어지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나 가게 됩니다. 요컨대 소비가 우리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업의 성장과 도시화에 따라, 그리고 거기에 더해 세계화의 영향으로 이러한 현대사회의 소비 형식은 점차 통문화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이미지, 같은 감성, 같은 유행이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세계적인 수준에서 소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호가치의 세계화 혹은 보편화라고 부 를 수도 있겠습니다. 3. 교환양식 교환 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시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장은 교환을 위 해 탄생한 공간으로서 그야말로 교환행위의 장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교환행 위가 일어나는 여러 공간과 형태 중 하나이며 그 외에도 다양한 교환 공간과 방식이 존재합니다. 교환은 교환의 결과를 기준으로 크게 균형적 교환과 비균 형적 교환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균형적 교환은 교환에 참여한 자들이 획득한 가치가 즉각적 혹은 장기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교환을 뜻하며 비균형 적 교환은 그렇지 않은 교환을 뜻합니다. 비균형적 교환이라고 해서 반드시 영합적 zero-sum 결과가 전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환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이익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이익의 크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비균형적 교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비균형적 교환부터 살펴보

25 겠습니다. (1) 비균형적 교환 비균형적 교환은 이윤을 추구하는 교환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비균형적 교환은 역시 시장교환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교환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시장교환의 원칙은 자유입니다. 참여자들은 자유 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교환에 참여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참여자 자 신에게 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자유가 부를 창출한다고 믿습니 다. 시장 참여자들은 모두 이윤을 얻기 위해 참여하므로 합리적 선택을 통해 자신에게 이윤이 발생할 때에만 교환이 성사시키며, 결과적으로 모든 참여자 들이 교환을 통해 이윤을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 이 작 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시장은 시장의 자율성과 영속성을 과장합니다. 시장교환은 비균형적 교환으로서 장기적으로 이익의 불균형이 심 화되면서 독점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독점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자유는 축 소되어 비합리적인 교환이 강제되면서 불균형은 더욱 심화됩니다. 결국 시장 은 국가와 같은 외부의 개입과 규제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가의 개입 과 규제는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참여자들의 교환을 제한함으로써 시장이 창 출할 수 있는 잠재적인 최대 이익을 제한한다는 불만을 낳습니다. 바로 신자 유주의의 주장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신성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시장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국가의 역할과 개입의 필요성에 대해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시장은 보편적이며 시장교환에 참여하는 참여자들의 합리적 속성 또한 보편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시장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역, 어떤 문화이건 이윤을 위 해 참여하며, 이윤을 얻기 위한 합리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 니다. 그러나 시장교환에서 발휘되는 합리성의 내용에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시아 여러 지 역에서 나타나는 흥정문화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흥정은 이윤을 극대화하 기 위한 판매자와 구매자의 전략이자 게임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상호 만 족할 만한 가격에 합의함으로써 최상의 교환을 성사시키는 것입니다. 일반적 으로 흥정을 할 때에는 재화의 판매 혹은 구매 적정 가격을 설정해 협상에 들어갑니다. 이때 구매와 판매에 대한 욕구의 정도, 경쟁자의 유무, 상품의

26 희소성 등이 작용해 가격이 결정되는데, 눈치와 언변 같은 개인적 역량도 개 입합니다. 결과적으로 가격은 늘 일정하지 않게 되며, 결과에 따라 불신을 야 기할 수 있고 때로는 흥정에 많은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익의 극대화라는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래 규모 가 커질수록 흥정 대신 가격의 표준화로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게 됩니다. 하 지만 전통적 시장에서 흥정은 여전히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남아있습니 다. 그런데 흥정 과정에 가격과 성능을 따지는 경제적 합리성 외에 흥정문화 에 따라 다른 요소들도 포함됩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시장에서 흥정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먼저 판매자가 상품의 기능과 장점에 대해 자세 히 설명하는데, 한 번에 하지 않고 구매자가 가격을 제시할 때마다 한가지 씩 설명합니다. 그러다 뜬금없이 상품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자신 은 식구가 많아 생활비가 많이 든다, 아이가 아프다, 요즘 불경기라 어렵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 당신은 참 인상이 좋다 등 신상에 관한 이 야기들을 하며 가격을 흥정합니다. 구매자 또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가격을 흥정합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될 때쯤 가격은 자연스럽 게 결정됩니다. 서로의 처지를 감안해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가격에 거래가 성 사되는 것입니다. 구매자의 친구가 옆에서 흥정과정을 모두 지켜본 후 같은 가격으로 그 상품을 사겠다고 하면 판매자는 다시 흥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가격은 서로의 처지에 맞게 다시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 럼 흥정의 문화적 변용은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시장교환 에는 계산적 합리성뿐만 아니라 문화적 합리성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 다. 비균형적 교환양식에는 시장교환보다 더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는 도박과 도둑질도 포함됩니다. 도둑질, 즉 훔치거나 뺏는 행위는 자발적 교환이 아니 지만 재화가 비균형적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교환양식에 포함시킬 수 있습 니다. 도둑질에는 일반적인 절도나 강도 외에도 횡령과 부정부패도 포함됩니 다. 도둑질을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용인하는 사회는 없습니다만 사회적 발 생빈도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한 사회는 제도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물질주의 팽배와 도덕적 둔감성 같은 요인 도 작용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부정부패가 도덕적 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도 철저히 준수해야 할 도덕적 원칙으 로는 여겨지지 않으며 점차 악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부정부패를 한

27 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윤리적 규제는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부정부 패는 교환양식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굳어지게 됩니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부정부패가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우려스럽지만, 부정부패가 아시아에서만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경 제구조, 정치구조, 법제도 등의 차이에 따라 많은 편차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반적인 도덕률로 잘 설명되지 않는 부패의 문화적 현상 도 있습니다. 인도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도에서는 거의 모든 업무가 느 리게 진행됩니다. 인도 고유의 시간관념이 낳은 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 는데, 업무를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 금품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제공하는 금품을 뇌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금품을 받고 업무를 처리해줄 때 뇌물을 받아서 처리해준 것이 아 니라 지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데 대한 보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도박은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은 데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교환입니 다. 흥미로운 것은 도박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통문화적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도박이 제공하는 긴장감과 재미, 그리고 낮은 확률에 의해 증폭되 는 성공의 희열을 즐기는 성향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도박의 형태는 간단한 내기에서부터 복권, 노름, 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일 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양한 형태의 도박이 성행하고, 그에 따 라 사회적 폐해도 커집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회는 도박을 금지하거나 규제 하지만 특정 형태의 도박은 허용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도박에 대 해 엄격한 편이지만 복권, 경마, 경륜과 같이 국가가 허용하거나, 심지어 직 접 운용하는 도박도 있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엇비슷한 수준에서 도 박을 규제하고 있지만 투계와 같은 전통적인 도박은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습니다. 사실 닭은 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출현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투계는 오래된 오락이자 도박인 것입니다. 투계 방식이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특단의 수단을 동원해 강력 히 금지하지 않는 한 투계는 하나의 오락문화, 도박문화로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도박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교환방식이지만 그 확률이 일반 교환에 비해 현저히 낮다면 착취는 최대 수익을 확실히 보장하는 교환방식입니다. 사 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환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교환방식으로서 글자 그대로 최대한 쥐어짜내는 방법입니다. 과거에는 여러

28 사회에서 착취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보편 적 인권 개념이 확산되어 수용되면서 노예제도와 같은 노골적인 착취는 찾아 보기 어렵지만, 일부 사회에서는 교묘한 형태로 착취에 해당하는 교환이 이루 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착취의 기준은 상대적이며 법적인 기준과 윤리적 기 준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착취의 기준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한 사회 에서 착취로 간주되는 불균형 교환이 다른 사회에서는 착취로 간주되지 않기 도 합니다. 단순한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착취에 대한 기준이 느슨 할 수밖에 없지만, 전통적인 계급구조와 계급문화도 큰 역할을 합니다. 투계 베트남의 다양한 복권 인도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인도에서 힘들고 더럽고 험한 일은 달리트 dalit, 즉 불가촉천민이 맡습니다. 예컨대, 방기 bhangi 라 불리는 달리트는 청소하는 사 람들인데, 청소는 오직 방기만이 합니다. 대도시에서는 하수구 청소도 당연히 방기의 몫인데, 하수구가 막히면 방기들은 맨몸으로 하수구 속에 잠수하다시 피 들어가 막힌 오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힘든 일을 하는 방기 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지극히 적습니다. 노동의 가치보다는 계급의 가치가 더 크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착취에 대한 기준에 있어서 법적 기준이 윤리적 기 준에 미치지 못할 때에도 착취는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법적 기준을 강 화해 착취를 막을 있지만 법적 기준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요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착취와 같은 비윤리적 교환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를 당연시하고 합리화하는 낡은 문화와 관념을 보편적 인권문화로 대체하는 과 정이 필요합니다. 소극적 문화상대주의로는 착취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것입 니다.

29 하수구 청소하는 인도의 방기 (2) 균형적 교환 이익을 추구하는 비균형적 교환과 달리 즉각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교환행위도 있습니다. 이를 균형적 교환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교환자 사이에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균형적 교환으로 간주될 수 있는 교환은 순수한 증여, 그리고 일반적 호혜와 기대성 호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순수한 증여는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증여하는 교환으 로 기부, 봉사, 헌혈 등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타주의가 발현되는 교환입니 다. 결과적으로 비균형적 교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균형적 교환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타주의를 이기주의의 변 형, 즉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인 것으로 폄하하는 견해도 있지만, 최근 진화론 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이 개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종 차원으로 확대되어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이기 심과 함께 이타심도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타심은 모든 사회에서 발현되어 나타납니다. 하지만 심리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타심의 크기는 거리에 반비례하고 이타심의 대상이 특정되는지에 대한 여부에 따라서도 달 라진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대상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타심의 크기가 줄어드는 한편, 멀리 떨어진 대상이라 하더라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할 때보다 특정인을 대상으로 할 때 이타심이 더 크게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이 에 따라 구호단체들은 구호금 기부를 호소할 때 매체를 이용해 구호 대상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며 지리적 거리를 줄이려 하고 특정한 구호 대상과

30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이타심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이타심이 발현되는 정도는 문화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베풂의 미덕을 강조하고 장려하는 문화가 있는가 하면 이기심을 조장하고 심지어 신성한 수준으로까지 격상시키는 문화도 있 습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스리랑카, 타일랜드는 상좌부 Theravada 불교 국가 들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 나라들에서는 베풂의 미덕이 장려되는 공 통점이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해탈이지만 해탈 은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상좌부 불교 신자 들은 차선책으로 윤회사상에 따라 보다 나은 다음 생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은 카르마 karma 業, 즉 우리말로 업 입니다. 보다 나은 다음 생을 보장하는 카르마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덕 punna 을 쌓아야 하고 공덕을 쌓기 위해서는 계율 sila 을 지키고 보시 dana, 즉 베풀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교리에 따라 불교문화에서는 베풂이 강조되고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런 데 보시 중에서도 으뜸은 승려에게 공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불교국 가에서 탁발승에게 예의를 다해 공양하는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목격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카르마 원리에 구속되지 않고 현세의 삶을 더욱 중시하 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풂의 미덕이 일상생활 속에서 윤 리적 덕목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도를 여행하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간혹 구걸하는 태도가 지나치 게 당당해서 마치 빌려준 돈을 받는 사람처럼 돈을 요구합니다. 구걸하는 사 積 善 람의 태도가 왜 이처럼 당당할 수 있을까요? 적선 의 기회, 즉 보시를 통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 는 사람이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도 카르마와 공 덕의 원리가 일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의 윤회사상도 본디 인도의 브라만교를 계승한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증여 문화가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가 형 성되면 간혹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빌린다는 표현과 달리 실제로는 그냥 달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권력이나 재산에 있어서 서로 비슷하거나 차이가 나게 마련입 니다.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 진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후원-수혜관계라 칭하는 인 간관계입니다. 수혜자 또한 후원자의 베풂에 대해 보답해야 하는 부담을 지지

31 만 그 시기나 방법을 미리 정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자신이 보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답해야 할 기회가 올 때에만 보답하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빌 리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를 알지 못하면 돈을 빌려준 후 돈을 갚지 않는 상 대를 불신하게 되고 관계를 단절하기 마련입니다.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기대 성 호혜가 일어났다고 보는 데 반해 후원자의 입장에서는 빌린다 는 표현으 로 인해 채권-채무의 관계로 간주하는 데 따른 결과입니다. 기대성 호혜는 교환이 발생할 때 보답의 의무가 발생하는 균형적 교환입 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선물과 부조를 들 수 있는데, 선물이나 부조의 가치가 클수록 보답에 대한 기대치도 함께 증가합니다. 이와 달리 일반적 호혜는 보 답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것입니다. 차 한 잔이나 밥 한 끼 등 일반적 호 혜에서 제공되는 가치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관계를 돈독히 하는 수단으로 기꺼이 베푸는 것입니다. 일반적 호혜는 주로 잘 알고 신뢰하는 사람들 사이 에 발생하지만 그 범위와 빈도는 문화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는 일반적 호혜가 아주 흔히 자주 발생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 습니다. 반면 사소한 금액이라 하더라도 철저히 자신의 몫은 자신이 지불하는 더치페이가 지배적인 문화에서는 일반적 호혜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 만 그런 곳에서도 선물 교환만큼은 예외입니다. 선물의 경우, 가치가 클수록 기대성 호혜가 되어 보답의 의무도 커지지만 가치가 낮을수록 보답의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 일반적 호혜가 됩니다. 이때 선물의 가치가 반드시 물질적 가 치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나 정성은 무형의 가치로 선물의 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가치가 낮을수록 일반적 호혜 가 되고 가치가 클수록 기대성 호혜가 된다고 했을 때, 그 경계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이 자연스럽게 설정되는데, 그 렇게 될 때 두 사람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일반적 호혜는 보답을 크게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 에 오해나 마찰을 야기하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보답의 의무가 발생하는 기대성 호혜에는 그 맥락이나 방법에 대한 상호이해와 상호교감이 필수적이 기 때문에 때로는 상호교감과 이해 부족으로 인해 보답의 시기와 방법을 두 고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대성 호혜가 발생하는 맥락이 문화적 으로 복잡하고 미묘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關 係 기대성 호혜의 구체적인 사례로 중국의 꽌시 를 살펴보겠습니다. 꽌시는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며 시혜가 교환되는 두 사람 사이의 호혜적 인간관계입

32 니다. 누군가와 꽌시를 맺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두 사람이 모두 신뢰하는 슈 熟 人 런 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때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 으로, 혹은 어떠한 측면에서도 두 사람을 엮어주는 공통점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슈런을 통해 연결된 후에는 두 사람 사이에 인정과 감정이 배양되어야 합니다. 인정과 감정을 키우기 위해 중국인들은 일정한 의례를 갖 춰야 하는데, 그 의례는 절묘한 예술의 경지에 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인 정과 감정을 배양하는 의례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선물입니다. 한 사 람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의례에 맞춰 선물을 합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에 는 복잡한 예절과 형식을 따라야 합니다. 선물을 받으면 그 선물은 언젠가는 혜택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의 상징이 됩니다. 선물의 금전적 가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도에 비례해 커지는 경향이 있지만, 단지 값비싼 선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꽌시가 쉽게 형성되거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꽌시 를 이루고 싶지 않을 때에는 받은 선물과 같거나 유사한 선물을 다시 선물함 으로써 자신에게 의무가 생기지 않도록 합니다. 일단 선물을 받음으로써 꽌시 가 형성되고 나면 두 사람 사이의 꽌시는 기존의 다른 꽌시와 연결되어 확장 關 係 網 됩니다. 꽌시왕, 즉 꽌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무한히 확장될 수 있습 니다. 비록 개인에 따라 꽌시왕의 크기는 다르지만 모든 중국인들은 하나의 거대한 꽌시왕 속에 편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恩 義 理 온 과 기리 로 대변되는 일본의 기대성 호혜는 시혜를 제공하는 측면보 다는 시혜에 대해 보답해야 하는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恩 인간관계의 윤리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온 에는 개인에게 제공되 親 の 는 직간접적인 모든 은혜가 포함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인 오야노온 恩 師 の 恩, 스승으로부터 받은 은혜인 시노온 은 물론이고, 과거 봉건시대에 형성 主 の 恩 皇 恩 되어 지금까지 강조되고 있는 누시노온 과 고온 등 사실 모든 사람으로 義 務 恩 人 부터 받은 은혜는 온이 됩니다. 기무 는 은혜를 베푼 모든 온진 에게 갚 아야 할 의무를 뜻합니다. 기무는 기무와 기리로 나뉘는데 기무는 아무리 갚 아도 다 갚을 수 없고 시한도 없는 의무로서 충과 효, 그리고 임무가 있습니 다. 기리는 받은 은혜와 같은 수준에서 갚으면 되고 시간적으로도 제한이 있 는 의무를 뜻합니다. 기리에는 가족에 대한 의무와 함께 친척에 대한 의무, 그리고 금전이나 호의 등 타인에게 받은 은혜에 대한 의무가 있고, 자신의 이 름에 대한 의무도 포함됩니다.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무는 명예를 지켜야 하 는 의무로서 평소 예절을 지키고, 자신의 신분에 맞게 생활하고, 자신의 감정

33 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의무까지 포함합니다. 이처럼 일본의 온과 기리 문화 는 상호교환을 바탕으로 하는 기대성 호혜에 그치지 않고 보답의 의무를 강 조함으로써 일상생활의 윤리로 확장되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기대성 호혜 교환은 보답에 대한 기대와 의무 를 수반한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교환방식이지만 그 형태와 방식, 그리고 부 가되는 의미와 기능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변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