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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目 次 발간사 책머리에/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이 나오기까지 고대사회(삼국 및 통일신라) 고대사회 개관 (강영경) 유화/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 (강영경) 소서노/고구려와 백제 창업의 주역 (박용욱) 평강공주/지혜로운 울보 공주 (강영경) 선덕여왕/삼국통일의 기반 닦은 최초의 여왕 (강영경) 진덕여왕/왕권의 위엄을 세운 여왕 (강영경) 지은/종노룻으로 눈 먼 어머니 봉양한 효녀 (강영경) 진성여왕/국가 위기 극복 위해 노력한 여왕 (이배용) 중세사회(고려) 중세사회 개관 (권순형) 신혜왕후/고려왕조의 기틀 마련한 태조비 (권순형) 염경애/고려 최고의 사랑 받는 아내 (권순형) 언양인 김씨 (이숭인의 모)/ 자녀 교육의 귀감 (권순형) 갑향인 문씨(강호문의 처)/적의칼날에 항거한 여인 (권순형) 근대사회(조선) 근세사회 개관 (이순구, 한회숙) 정희왕후/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청정한 왕후 (이배용) 소혜후/여성 교육 위한 책 내훈( 內 訓 ) 펴내 (한희숙) 신사임당/뛰어난 화가요 현모양처의 모범 (허미자) 황진이/풍류로써 자기 완성 이룬 시인 (이순구) 이항복의 모 최씨/훌륭한 자녀교육을 실천한 지혜로운 어머니 (이배용) 허난설헌/불운( 不 運 )에 몸부림 친 천재시인 (허미자) 논개/임진왜란 때 적장( 敵 將 )과 함께 순국 (한희숙)

2 이매창/거문고와 시의 명수 (허미자) 해평인 윤씨(김만중의 모)/시련 속에서 유명한 효자 길러 (이순구) 임윤지당/여중군자( 女 中 君 子 )의 칭송 받아 (박용옥) 혜경궁 홍씨/사무친 한( 恨 )을 '한중록' 으로 남겨 (이배용) 김만덕/굶주린 백성을 살린 사업가 (이순구) 이사주당/태교( 胎 敎 )의 백과사전 쓴 선각자 (박용옥) 서영수각/시문( 詩 文 )과 수학( 數 學 )에 밝아 (박용옥) 이빙허각/생활에 도움되는 실학( 實 學 )책 써내 (박용옥) 권유한당/천주교 여성교훈서 '언행실록'의 저자 (이순구) 강완숙/천주교 전도에 앞장선 순교자 (한회숙) 김삼의당/과거( 科 擧 )에 실패한 남편과 행복하게 산 문인 (이순구) 강정일당/당대( 當 代 )에 칭송 받은 문장가 (이순구) 근대사회(개화기) 근대사회 개관 (이배용) 명성황후/개화( 開 化 )의 빗장 연 여걸( 女 傑 ) (이배용) 김양현당/여학교 설립에 나선 선구적인 교육자 (박용옥) 순헌황귀비 엄비/진명 숙명 양정학교 세워 구국( 救 國 ) (한희숙) 윤희순/여성 의병( 義 兵 )노래 지어 항일투쟁 (박용옥) 박에스터/사회봉사에 몸 바친 여자 의학박사 (이배용) 부록 저자소개 참고문헌 발간사 조물주가 남성과 여성을 창조한 이래 과거 역사 속에서 여성도 남성과 분명히 함께 활동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은 아주 특이한 경우뿐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인간의 하는 일이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로 구분되고, 여성의 일은 남성의 일에 비해 중요하지 않게 또 가치없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서구에서 시작된 여성해방운동이 불을 당긴 후 여성들은 '역사 속의 여성' 을

3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잃어버린 역사 속의 여성인물을 발굴해 내기도 하고, 대다수 여성이 해 온 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남성만의 반쪽의 역사가 아닌 여성이 포함된 전체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 여성 연구의 핵심과제 중 하나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학계와 여성학계에서도 여성주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해 보는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고. 연구성과도 축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여성개발원에서도 그간 각급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여성인물을 분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의 초 중등학교 교과과정과 교과서 분석을 통해 여학생들이 모델로 삼을 만한 역사적 여성인물이 극히 부족하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관련 부서에 건의서를 보낸 바가 있습니다 금년에 나온 보고서에서도 분석 대상 교과서에 등장하는 전체 역사적 인물 가운데 여성은 2.9%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미래 역사의 주인공은 분명히 남성과 여성입니다. 남녀가 함께 세상을 이끌어 갈 때, 우리가 바라는 남녀평등사회를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본원에서는 개원 15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자라나는 우리의 2세들에게 균형있는 역사관을 갖게 하고. 특히 여학생들에게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자 우리 역사 속의 여성인물에 대한 짧은 전기 모음집을 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집필진은 각 분야 전공의 역사가 등 전문가들이며 본원의 실무진과 긴밀한 협조하에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인물의 선정에서부터 자문과 집필, 수록 사진의 선정, 그리고 윤문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은 강영경, 권순형, 박용옥, 박재희, 신영숙, 이배용, 이순구, 한희숙, 허미자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특히 한국여성사 연구의 태두이신 박용옥 교수님(성신여대)과 이배용 교수님(이화여대)은 원고 전체를 감수해 주셨고, 작가이신 박재희 선생님은 원고를 윤색해 주셨습니다. 본원은 이번 작업 결과를 금년 하반기에 데이터베이스로구축, 이미 개설된 본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에 서비스할 계획입니다. 또한 앞으로 역사적 여성인물을 계속 발굴하여 데이터베이스를 확충하고자 합니다. 끝으로 이 책이 중등학교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 널리 읽히고, 추후 교과서 개편 시 기초 자료나 학교 현장의 교수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여성개발원장 박 인 덕 책머리에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이 나오기까지 초 중등학생들의 위인전에 등장하는 여성은 과연 몇 명일까? 한국인으로 한정할 때 신사임당, 유관순, 선덕여왕, 김미리아 등 5명이 되지 않는다. 또 역사책이나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또한 남성에 비해 극히 낮은 비율로 여성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남성 혼자서 이룩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여성사( 女 性 史 )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첫 번째 관심은 여성이 역사에서 소외된 원인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밝혀내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여성의 삶을 추적, 복원하여 남녀가 함께 이룬 인류 역사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일이다. 세 번째는 미래 사회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끌어 가야 한다는 사실에서 여성들에게 여성도 역사의 주체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은 역사 속에 묻힌 여성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삶을 보여 줌으로써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균형된 역사관을 심어주고 특히 여성에게는 역할 모델을 제시하여 여성의 역사주체의식을 높이기 위해 기획, 발간된 것이다. 이 책의 발간을 위해 한국사 전공자이면서 여성사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7인의 자문위원들이 모여 수록 인물을 선정하였다. 시대적으로는 고대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여성들을 골고루 선정하기로 하였다.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 와 같은 역사서에 기술되거나 금석문이나 문집 등과 같이 기본적인 사료( 使 料 )들이 남아 있느냐. 당시 신문기사나 증언 등의 자료가 있느냐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즉 야담( 野 談 )이나 전래 이야기로만 전해오는 인물은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런 기준에 의해 이미 발간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된 여성인물 120여명의 명단을 놓고, 최종적으로 약 70명의 인물을 선정하였다. 집필자는 자문위원인 7인의 역사학자 외에 국문학자와 작가 등 2인이 추가되어 총 9명이

4 맡아하게 되었다. 서술의 방향은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먼저 역사적 고증에 바탕을 두어 서술하되 왜곡된 여성의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서술의 기본 자료인 정사( 正 史 )로 남아 있는 현존 역사서의 집필자가 남자이고, 그 시대의 시대적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였다. 삼국유사 를 제외한 많은 역사서가 유교적 사관( 史 觀 )에 입각하여 서술되었고, 특히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설립된 조선조의 역사가들은 신라의 세 여왕에 대해 "여자가 왕위에 있음은 후세에 교훈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들을 역사에서 내쫓아 왕이라 아니하고 주( 主 )라 칭한다"고까지 할 정도로 여성 차별의 역사관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술해야 했다. 다음은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지켜나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봉건적 전통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였으며, 여성으로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회와 구국( 救 國 )에 아낌없이 목숨을 던졌으며,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여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음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셋째는 시대별로 여성 삶의 변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 시대 마다 여성사 시대 개관을 싣도록 하였다. 시대는 고대사회(삼국 및 통일신라), 중세사회(고려), 근세사회(조선), 근대사회(개화기), 일제시대로 구분했다. 끝으로 가능한 전문 용어는 풀어서 중 고등학생들이 읽기 쉽게 서술하였다. 즉 역사의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다. 집필된 원고는 자문위원이기도 하고 집필자이기도 한 성신여대 박용옥 교수와 이화여대 이배용 교수 두 분이 내용을 감수하였으며, 역시 집필자이면서 작가인 박재희 선생님께서 윤문을 맡았다. 선정된 인물은 탄생연대 순으로 수록하고, 상 하권으로 분리 출판하기로 하였다. 상권은 고대사회부터 대한제국시대(개화기)까지의 여성인물을 수록하고, 일제시대 인물은 하권에 수록하기로 했다. 고대부터 개화기까지의 인물 대부분이 속한 계층은 양반 사대부 계층 이상이며, 특별한 계층으로는 기녀들이 있으며, 일반 서민은 효녀 지은 외에는 없다. 따라서 일반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사료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나, 일제시대로 내려오면서 계층의 범위가 보다 확대된다. 개화기까지 전체 35인중 왕족이나 왕가에 속한 인물이 12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서( 史 書 )가 왕의 치적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이들에 관한 서술이 다른 계층보다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일하게 여성이 최고 통치자였던 신라시대에 여왕이 3명 탄생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되며, 진성여왕의 경우는 '사련( 邪 戀 )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수렴청정을 처음으로 시작한 조선시대의 정희왕후와 개화기의 여걸 명성황후의 경우는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한 시대에 남성의 고유 영역인 정치 활동의 중심에서 맹활약했던 여성으로 기록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가문의 여성으로 학문과 시문에 능해 문집과 그림 글씨를 남긴 여성들이 또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체체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 휘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현모( 賢 母 )로서 자녀교육의 모범을 보이고, 양처( 良 妻 )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성리학자 임윤지당, 태교를 집대성한 이사주당, 권유한당, 이빙허각, 강정일당 등은 지금까지 학교교육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와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자녀교육의 모범으로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많다. 조선시대의 주변 집단인 기녀들은 풍부한 감수성과 인간적인 자유로움을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시로 남겼다. 기녀 가운데 김만덕은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상업으로 수많은 재산을 모은 데 그치지 않고, 그 재산을 주민을 위해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통해 왜구의 침입은 국가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여성에게 닥친 시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였다. 여성들은 왜구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온 몸을 던졌다. 고려말 왜구에게 잡혀가다 목숨을 던진 강호문의 처를 비롯해 적장( 敵 將 )과 함께 순국( 殉 國 )한 조선시대 기생 논개, 개화기에는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 '안사람' 의병투쟁을 일으킨 윤희순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다양한 형태로 항일독립투쟁을 한 여성들이 등장했다. 항일운동을 육영사업을 통해 실천한 여성들이 있었다. 개국과 함께 개화운동이 시작된 대한제국시기에 여성을 위한 관립학교 설립을 주장한 김양현당이 있었고. 순헌황귀비 엄비도 여성의 개화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양 백과부'로 유명했던 백선행이 막대한 재산을

5 민족교육사업에 헌납했고, 최송설당, 왕재덕, 김정혜, 차미리사 등이 학교를 설립, 여성의 개명( 開 明 )을 통한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최용신은 당시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계몽운동의 횃불이었다.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여성해방운동과 항일운동을 동시에 펼친 여성들도 있었다. 조신성, 김경희, 김마리아, 나혜석, 김활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여성계몽운동 또는 여성해방투쟁을 전개하면서 독립투사를 지원하거나 직접 항일운동에 나섰다. 항일독립투쟁에 직접적으로 나선 경우도 있다. 안경신, 남자현은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고, 유관순은 어린 학생으로서 천안의 만세시위운동을 이끌었고 끝내 감옥에 순국하였으며, 김순애도 상해 폭립운동에 직접 가담, 활동하였다. 식민지 시대 사회문제 그 중에서도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공 파업을 이끈 강주룡, 소설로 표현한 강경애가 있다. 개국이래 근대화 과정에서 전문직을 갖거나 서구 학문을 연마한 선구적인 여성들이 등 장했다.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터,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하란사, 파리로 유학간 서양화가 나혜석, 최초의 여자박사 김활란, 최초의 여자비행사 권기옥,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 최은희, 최초의 근대무용가 최승희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전통을 계승하는데 전 생애를 바친 여성도 있었다. 전재산을 헌납하여 국악학교를 설립한 박귀희, 소리꾼 이화중선, 가야금 연주가 함동정월, 승무가 한영숙이 그들이다. 특이한사실은 일제시대에 활약한 많은 여성인물들이 과부 그것도 소년과부였거나 미혼이었다는 점이다.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시절에 사업을 일구고,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여권운동을 펼치고, 계몽운동을 일상적인 결혼생활과 함께 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또 가부장(또는 남편)이 없을 때 여성 속에 잠재해 있는 남성성이 발휘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에서 서술하고 있는 여성들의 삶은 그 시대의 대중 여성의 삶이라기 보다는 특수한 계층 또는 선구적인 여성의 삶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시 대적 억압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노력으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고, 꿰뚫는 통찰력으로 가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성들의 삶을 보았다. 이들의 삶 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푯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집필진 고대사회 (삼국 및 통일신라) 고대사회 개관 인류의 모태는 여성이고, 어머니이다. 고대사회의 인류는 식량의 보급과 외부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었다. 이러한 집단의 기본적인 유대조건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맺어진 혈연관계의 씨족사회였다. 출산과 수유( 授 乳 ),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위대함은 성( 聖 )스럽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이집트의 속담에서 '신은 어디에든지 있을 수 없기 때문 어머니를 만드셨다'고 하였다. 비엔나 셍제르맹 박물관에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으로 유명하다. 풍만한 가슴과 불룩한 복부, 그리고 커다란 둔부로 표현된 이 비너스는 성스러운 어머니를 표현한 것으로서 구석기시대 이래의 여성에 대한 신비스러움과 경외심이 담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석기시대 수렵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과 함께 무리사회의 구성원이 많아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신석기시대에 와서는 인류의 최대 혁명이라고 하는 농업이 발견되었다. 이 농업의 발견도 여성에서 비롯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대지( 大 地 )의 생산력과 결부하여 대지모신( 大 地 母 神 )의 숭배는 농경과 여성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즉 생존과 직결된 안정적인 식량의 획득이 여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풍요의 신으로서, 생산과 번식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여러 종교의식에서 여성이 신( 神 )으로서, 그리고 사제( 司 祭 )로서 주역을 맡았으며. 이러한 종교관념과 여성의 긴밀한 연관성은 비교적 근대까지도 존속해 왔다. 뿐만 아니라 토기의 제작과 직포( 織 布 ) 기술의 등장도 주로 여성의 공적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토기는 식량을 저장할 뿐만 아니라 불을 사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는 용기( 容 器 )이기도 하다. 이 토기 속에서 음식물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데 과학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토기에는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농경생활에 필수적인 비를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어로( 漁 撈 )생활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생선의 가시를

6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 외에 토기에 문양을 새기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여성의 예술적인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직조( 織 造 )는 손이 기계의 역할을 한 것인데, 수공업의 시작이 여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이 수렵을 나가는 사이에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를 위하여 주거지를 지키게 되는데, 주생활에 있어서도 주로 여성이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생활의 기본이는 의 식 주가 모두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학 수공업 예술에 있어서도 고대의 생활과 사회 속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와 철기의 금속문화가 등장하면서 주로 남성이 주도하는 정복과 전쟁이 사회를 크게 변혁시켰다. 무기가 발달하고, 군사력이 중강되면서 힘에 의한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이전의 평화적이고 평등하던 공동체사회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그 범위가 좁아지게 되었으며 남성은 힘과 권력으로 계급사회를 형성하여 여성을 예속시키고 억압하게 되었다. 고조선에서는 부인의 정신( 貞 信 )을 강요하였고, 고구려와 부여에서도 부인의 질투( 嫉 妬 )를 엄중히 다스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백제에서는 만약 부인이 음란하면 남편 집의 노비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인 조치들은 지배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며, 초기에 억압적인 조치가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그 이면에는 확고했던 여성의 우월적인 지위를 찾아볼 수가 있다. 고구려의 결혼풍습인 서옥제는 여자 집에서 허락받은 이후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으로서, 자녀들이 태어나면 외가( 外 家 )의 가풍( 家 風 )과 외척( 外 戚, 어머니의 친척)들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계사회의 모처혼( 母 處 婚 )과 같은 것임을 볼 때, 고구려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여성과 어머니의 비중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구려 풍습에는 유녀( 遊 女 )가 많아서 일정한 남편이 없는 여성이 많았으며 주몽의 아들인 유리( 類 利 )를 예씨녀( 禮 氏 女 )가 키우는 것을 볼 때 어머니에게 자녀가 귀속( 歸 屬 )된 가모장적( 家 母 長 的 )인 가족구성이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도 박제상(또는 金 堤 上 )의 경우와 같이 두 성( 姓 )을 가지는 경우와, 경주 호장( 戶 長 )을 지낸 거천( 巨 川 )의 가계를 밝힐 때 어머니와 할머니의 계보만을 밝히는 경우, 또 어머니만 나타나 있고 아버지는 나타나있지 않은 출자( 出 自 ) 기록, 그리고 무녀( 巫 女 )의 모계계승 등은 가계계승에서 어머니의 비중이 중요하였던 고대사회의 관념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에 있어서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남녀의 결합은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의하면 여성이 더 주체적이었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단군신화에서는 웅녀가 잉태를 원하여 환웅과 결합하게 되었고, 고구려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우씨녀 ( 于 氏 女 )가 왕의 동생인 발기( 發 岐 )와 연우( 延 優 )를 찾아가서 연우를 산상왕( 山 上 王 )으로 세우고 그의 왕비가 되었으며,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의 집을 찾아가 그의 부인이 되었던 것을 보면, 여성이 결혼에 더욱 주체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면을 단편적으로나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는 일반적으로 중매와 부모의 허락(유화가 중매 없이 해모수와 결합하여 하백이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 있어야 하며, 근친혼( 近 親 婚 ), 동성혼( 同 姓 婚 )과 함께 축첩( 蓄 妾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도 어머니, 왕비, 딸의 비중이 여전히 높아서 고구려 왕에 대한 동모제( 同 母 第 )의 기록은 왕의 즉위에서 '같은 어머니의 동생'이라는 출신이 중시되어 어머니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신라와 가야에서 왕모( 王 母 ), 왕비( 王 妃 )에 대한 출자 기록도 여계( 女 系 )의 비중을 중시하였던 것이며,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성의 가계상속권과 더불어 재산상속권도 인정하는 사회적 관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4, 5세기 경의 신라 지배계층의 무덤인 황남대총은 표주박 형태의 부부 합장묘인데 남쪽은 무기류와 금동관이 출토된 남성의 무덤이고, 북쪽은 많은 장신구와 순금관이 출토된 여성의 무덤이었다. 남성의 무덤보다도 여성의 무덤이 외형적인 규모에 있어서도 크고 내용물인 부장품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많고 좋은 유물이 상당히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여성에 대한 관념이 남성과 비교하여 어떠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가족구성은 일반적으로 일부일처( 一 夫 一 妻 )가 원칙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주거지의 넓이로 보아 가족의 수는 대체로 5인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라의 촌락문서에 의하면 11인의 가족구성도 있지만 4인 정도의 가족이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7 고대사회에서는 곡식과 함께 옷감( 布 帛 )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여성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생산과 유통 교환에 주체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은 상속 받은 재산과 함께 사유재산을 소유하였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여성들이 사찰에 시주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경주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현재 남아있는 가장 큰 에밀레종보다도 4배나 더 컸던 황룡사의 종을 만들도록 시주한 사람은 경덕왕비였던 효정이왕 삼모부인( 孝 貞 伊 王 三 毛 夫 人 )이었다. 상원사종( 上 院 寺 鍾 )도 유휴대사( 有 休 大 舍 )의 부인인 휴도리( 休 道 里 )가 시주하였으며,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 있던 법광사( 法 光 寺 )의 석탑은 원적( 圓 寂 )이라는 여승이 세웠고 취서사( 鷲 棲 寺 )의 석탑도 언부( 彦 傅 )스님의 딸이 세웠다. 이와 같은 여성의 시주기록은 여성이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유재산 및 경제권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종교와 여성의 관계는 특히 밀접하여 여사제( 女 司 祭 )와 여신( 女 神 )에 대한 기록과 여신상( 女 神 像 ) 등의 유물이 고고학적인 발굴과 사료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자료에 의하면 한국 고대사의 서막에서 민족의 시조, 고대국가의 개국에 있어서 여성과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 ( 熊 女 B.C 24세기)가 있다. 웅녀는 한국사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 속에서도 여성 인물 신화를 찾아볼 수가 있다.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신화에 의하면, 웅녀의 전신( 前 身 )인 곰은 사람의 몸을 얻고자 하여 호랑이와 함께 신( 神 )에게 기원을 하였다. 곰이 사람이 되고자 하여 신에게 기원을 하였다는 것은 동물의 차원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발전, 승화하고자 하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웅녀가 여사제( 女 司 祭 )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웅녀는 주어진 현실에 안주( 安 住 )하기 보다 높고 큰 뜻을 세우고, 그 실현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과 시련도 견디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높은 뜻과 강한 의지를 지닌 웅녀였기에 신단수( 神 檀 樹 )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여 민족의 시조(단군)를 배태 ( 胚 胎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군이 죽어서 아사달( 阿 斯 達 )의 산신이 되어 고조선의 호국신으로 받들어졌음을 볼 때, 또 동북아시아에서 곰 숭배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웅녀에 대한 숭배와 신앙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여사제로는 웅녀 외에 신라의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였던 남해왕의 누이 아노( 阿 老 ), 탈해가 실려 온 배를 끌어올린 후 하늘에 길흉을 물었던 아진포의 촌장( 村 長 ) 아진의선( 阿 珍 義 先 ) 할머니, 고구려 대무신왕 때에 비류수 강가에서 솥을 들고 놀던 여인 등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고대사회에서 여성을 여신으로 숭배하고 제사지냈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삼국 개국 시조의 어머니는 호국신모( 護 國 神 母 )로 숭배되었는데, 고구려의 국모( 國 母 ) 유화( 柳 花 ), 백제의 국모 소서노( 召 西 奴 ), 신라의 국모 선도성모( 仙 桃 聖 母 ) 또 박혁거세와 동등하게 이성( 二 聖 )으로 추대되었던 박혁거세의 비( 妃 ) 알령부인 등이 있다. 제2대 남해왕비였던 운제성모( 雲 梯 聖 母 ),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신모, 김유신을 도와주었던 나림 ( 奈 林 )산, 혈례( 穴 禮 )산. 골화( 骨 火 )산의 세명의 호국( 護 國 ) 여산신( 女 山 神 ), 대가야의 국모 정견모주( 正 見 母 主 )등도 여신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여신상으로는 돌이나 뼈에 얼굴과 가슴, 그리고 복부가 점으로 표현된 여신상이발굴되었다. 그리고 경주 남산에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새겨진 여인상도 여신상에 속하는 것이다. 불교가 유입린 이후에는 여승관( 女 僧 官 )으로서 도유나랑( 都 維 那 郎 )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대부분 할머니, 어머니들이 비손(두 손을 마주 비비는 것)을 하는 것을 볼 때, 종교생활과 여성이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 속에서 여성은 자녀의 출산과 양육,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 衣 食 住 )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여러 측면에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고려시대까지도 여성은 가계상속권, 제사상속권, 재산상속권 등에 있어서 남성들과 큰 차별이 없었음이 기록에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관념은 조선시대 전반까지 지속되었다. 고대사회 여성인물 개관 역사 기록은 승자( 勝 者 )의 기록이다. 역사는 후대의 귀감( 龜 鑑 )으로 삼기위해 기록하였으며, 그리고 찬자( 撰 者 )의 입장과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수는 없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이후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넘어가고 여성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갔다. 여성의 질투와 시기에 대한 부여의 법속은 매우 가혹하여 투기한 부인은 모두 죽이고 시체를 남산( 南 山 )에 두어 썩게 했으며 여자의 친가( 親 家 )에서 그것을 가져가려 하면 우마( 牛 馬 : 당시의

8 소와 말은 큰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를 보내야 시체를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키고 자유를 억압하였으며 할동을 제한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기록도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 중심으로, 남성을 위한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사서 ( 史 書 )에 한줄이라도 기록이 남아 있는 여성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여성들은 기록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여성이기에 여성의 입장에서 재해석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태조왕의 어머니 고구려에서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여성으로서는 태조왕( 太 祖 王, 53~145 재위)의 어머니를 들 수 있다 전왕인 모본왕( 慕 本 王 48~52 재위)이 돌아가자 그의 아들 익( 翊 )이 태자로서 왕위에 나아가야 하는데 불초( 不 肖 )하다고 하여 국인( 國 人 )들이 7세인 태조를 세워 왕위에 나아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태조가 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눈을 떴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태조가 7세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인 태후가 수렴청정으로 섭정을 하였다. 더구나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 再 思 )가 생존해 있었는데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린 아들을 세워 어머니가 섭정하도록 한 것은 아버지 보다도 어머니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으로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공인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에는 그 어머니의 역할이 컸으며, 태조왕 즉위 초기의 정치활동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정비하며 주변의 여러 부족을 복속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정치활동은 그 어머니가 직접 주도한 것이었다. 고구려에서 태조왕의 위치는 '국조왕( 國 祖 王 )'이라고 불리운 만큼 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왕으로서 고구려가 정복국가로 비약하여 고대국가의 체제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그의 정치적인 공헌이 많았는데 이는 태후의 정치적 역량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고구려가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정복국가로 나아가는데 있어 태조왕의 어머니가 끼친 영향력은 고구려사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로도 고구려는 중국의 한족( 漢 族 )과 끊임없이 대치하면서 우리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진흥왕의 어머니와 혜공왕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섭정한 경우는 신라에서도 제24대 진흥왕(540~575재위)의 어머니와 제36대 혜공왕(765~779 재위)의 어머니가 있었다. 신라사에서 진흥왕이 차지하는 위치도 고구려 태조왕의 위치와 비견될 수 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였던 시기가 바로 진흥왕 때였다. 진흥왕은 화랑을 제도화 시키고,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당( 唐 )과의 직접통로를 뚫고, 불교를 통하여 백성들의 정신적인 구심점( 求 心 點 )을 모색하였으며, 순수비 ( 巡 狩 碑 )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진흥왕대의 비약적인 발전을 토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던 것으로 사료에 나타나 있다. 역시 진흥왕의 어머니도 신라사에서 끼친 영향력이 막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혜공왕도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만월태후( 滿 月 太 后 )가 섭정하였다. 혜공왕은 즉위하여 죄인을 크게 사면하고, 태학( 太 學 )에서 박사의 강론을 듣고, 왕 4년(768년)에는 당( 唐 )에서 왕을 책봉하면서 겸하여 왕모를 대비( 大 妃 )로 봉하였다. 이는 왕모의 역할과 정치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녀는 문치 ( 文 治 )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왕모( 王 母 )의 정치참여는 고구려와 신라 사회에서 중대한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한 것으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우씨여인 이 외에 고구려에서 주목되는 여인은 제9대 고국천왕(179~197 재위)의 비( 妃 )이자, 제10대 산상왕(197~227 재위)의 비가 된 우씨 ( 于 氏 ) 여인이다. 우씨녀는 고국천왕이 죽은사실을 발표하지 않고 왕의 동생인 발기( 發 岐 )의 집에 가서, "황이 후사( 後 嗣 )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고 하였다. 발기는 "천도( 天 道 )는 정해지는 것이고 부인이 밤에 다니는 것은 예( 禮 )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그러자 우씨녀는 다시 그 아우 연우( 延 優 )에게 가니, 연우가 의관( 衣 冠 )을 갖추고 주연( 酒 宴 )을 베풀어 주었다. 다음날 우씨녀는 거짓으로 고국천왕의 유명( 遺 命 )이라고 꾸며서 연우를 왕으로 삼아 산상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우씨녀가 산상왕후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제11대 동천왕

9 때에는 왕태후( 王 太 后 )로 책봉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그녀의 유언으로 산상왕릉의 곁에 묻혔다. 또한 산상왕이 주통촌( 酒 桶 村 )의 후녀( 後 女 )를 만나 아들을 낳자(후에 동천왕이 된다), 이를 투기 ( 妬 忌 )하여 죽이려 하였다. 우씨녀에 대한 윤리적인 평가는 접어두고, 우씨녀의 입장에서 보면 우씨녀가 자신의 뜻과 맞는 사람을 고구려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으로 세웠다. 우리나라 역사에 전례가 없는 두 왕의 왕비가 되었고, 소생( 所 生 )이 아닌 동천왕 때에도 왕태후의 위치에 있었으며, 죽은 후에도 그녀의 유언대로 산상왕의 곁에 묻혔다. 이와같이 우씨녀는 살아서도 그녀의 뜻대로 막강한 힘을 지녔으며, 죽어서도 그녀의 뜻을 이루었던 여인이었다. 우씨녀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그녀는 당시의 형사처수( 兄 死 妻 嫂 :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처로 맞이하는 제도)의 제도 아래에서 일처다부( 一 妻 多 夫 )적인 삶을 살았으며, 막강한 권력과 화려한 인생편력,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여성으로 주체적인 삶을 산 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알영과 운제부인 신라에서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여성은 다음과 같다 시조비( 始 祖 妃 )인 알영( 閼 英 )은 박혁거세와 함께 지방을 다니며 농사를 장려하고 뽕나무를 심게 하여 이성( 二 聖 )으로 숭앙받았다. 제2대 남해왕(A D. 4~ 24 재위)의 비( 妃 )인 운제( 雲 帝 )부인은 운제( 雲 帝 )부인이라고도 하는데, 경상북도 영일 지방에 있는 운제산( 雲 帝 山 )의 성모( 聖 母 )가 되어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하면 응답을 해주었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가뭄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서 운제부인의 응답에 대한 신앙은 신라인에게 대지모신으로서, 대자모신( 大 慈 母 神 )으로서 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오녀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 때 동해안 지방에 연오랑( 延 烏 郞 )과 세오녀( 細 烏 女 )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해초를 따러 바닷가에 갔는데 홀연히 한 바위가 있어 그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비상한 인물이라 하여 왕으로 세웠다. 한편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아보니 바위 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이 보여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전과 같이 세오녀를 일본에 데리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왕에게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를 세워서 귀비( 貴 妃 )로 삼았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자( 日 者 : 고대사회에서 해를 관찰하여 그 징후로 왕에게 조언을 해주는 관리)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 精 )이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괴이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 使 臣 )을 보내 두 사람을 구해오려 하자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인데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짐의 비( 妃 )가 짠 세초가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달라왕에게 아뢰니 그 말대로 제사한 후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났다. 신라에서는 그 비단을 국보( 國 寶 )로 삼아 어고( 御 庫 )에 보관하였으며 그 이름을 귀비고( 貴 妃 庫 )라고 하였다. 고대 사회에서 해와 달이 지니는 의미는 지대하다. 광명과 따뜻함과 만물을 생육( 生 育 )시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신화에서도 해와 달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사회에서나 매우 크다. 연오랑 세오녀 신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중차대한 이변이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었으며, 다시 예전처럼 해와 달이 빛을 찾은 것은 세오녀가 짜서 준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때문으로 나타나 있다. 세오녀가 비단을 짜 주었기 때문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찾았으며 또한 세오녀가 짠 비단이 신라의 국보로서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아달라왕 때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위기가 세오녀가 짜 준 비단으로 제사함으로써 모면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오녀는 신라의 해와 달의 빛을 잃게도 하고 다시 빛나게도 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던 여인으로 나타나 있다. 도화랑 신라 제25대 진지왕(576~579재위) 때에 신라의 수도 경주의 사량부에 도화랑( 桃 花 娘 )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진지왕이 그녀를 궁중에 불러서 범하려고 하였다. 도화랑이 말하기를, "여자가 지켜야할 바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은 만승( 萬 乘 : 왕)의 위엄으로도 끝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0 왕이, "죽인다면 어찌 하겠느냐?"하니, 도화랑이. "저자( 市 :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지언정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남편이 없다면 가능하겠느냐?"고 하니,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 해에 왕은 폐위되어 죽었고, 2년 후에는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얼마 후 진지왕의 혼이 나타나 도화랑과 7일 간을 머물다 가고 이로 인하여 비형랑이 태어났다. 비형랑은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 귀신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하였다. 이 때의 귀신신앙은 돌아가신 조상들을 숭배하는 것으로서, 불교를 반대하였던 전통신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신라 왕실은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진 귀신신앙을 불교의 석가모니 신앙으로 귀일( 歸 一 )시켜 백성의 신앙 및 사상을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비형랑은 진지왕과 도화랑을 부모로 하여 태어나서 낮에는 왕궁에서 살고 밤에는 사량부의 귀신들과 어울려 놀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귀신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앞장 설 수 있었다. 비형랑은 당시의 신라사회에서 불교를 보급하는데 있어 이와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비형랑의 어머니가 도화랑이었기에 이 일은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화랑의 위치가 신라의 불교 보급에 있어 중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보여준 도화랑의 의지는 왕의 위엄과 권력으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한 남편만을 섬기는 것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시 재가( 再 嫁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재가가 금지되었던 조선시대보다 혼인이 자유로웠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소부인 신라의 삼국 통일에 앞장섰던 명장( 名 將 )인 김유신의 부인은 지소부인( 智 炤 夫 人 )이었다. 그녀는 태종 무열왕의 셋째딸이며 원술랑의 어머니이다. 원술랑이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자 김유신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만나러 온 원술랑을 지소부인은 삼종지도( 三 從 之 道 :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한 후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여자의 도리)를 내세워 끝내 원술랑을 보지 않았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개인적인 모성 본능보다도 나라에 대한 충정심을 더 앞세웠던 것이다. 원술랑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위태로운 전쟁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 중 가장 열세( 劣 勢 )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아가 당( 唐 )의 야심마저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난의 시기에 지소부인과 같은 위대한 정신력을 지닌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노의 처 우노( 于 老 )는 석씨( 昔 氏 )로서 신라 석씨 왕의 후손이며 제10대 내해황(196~230 재위)의 아들이고 제16대 걸해왕(310~356재위)의 아버지이다. 조분왕(230~246재위)과 점해왕(247~261 재위) 때에 부하를 아끼는 무장( 武 將 )으로 활약하였는데 왜국( 倭 國 )의 사신이 왔을 때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으로 소금 만드는 노비를 삼고, 왕비로 불 때어 밥짓는 사람으로 삼겠다" 고 하였다. 왜왕이 듣고 노하여 군사를 내어 치니 우노가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럴 줄 알았겠는가?" 하였다.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우노를 잡아서 나무를 쌓아 불태워 죽인 후 돌아갔다. 제13대 미추왕(262~284재위) 때에 왜국의 대신( 大 臣 )이 사신으로 왔는데 우노의 아내가 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다가, 대신이 몹시 취하게 되자 장사( 壯 士 )를 시켜 마당에 끌어내려 왜국의 대신을 불태워 전( 前 )의 원한을 보복하였다. 왜인이 분하여 와서 금성( 金 城 : 신라의 왕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기에서 우노의 처가 보복한 '전의 원한'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농담으로 한 말로 죽음을 당한 남편의 원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찮은 일을 빌미로 하여 국가의 대신이 죽임을 당한 손상된 국가의 체면에 대한 원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노의 처는 남편과 국가를 위해 왜국의 사신에게 보복을 한 것이다. 이러한 우노 처의 행위는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여기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0여년 후에 제16대 신라 왕으로 즉위한 걸해왕은 우노의 아들이었다. 이와같이 우노 처의 개인적인 판단과 결단력 있는 용감한 행위로 남편과 국가의 원한을 회복할 수 있었다. 치술신모

11 제19대 눌지왕(417~458 재위)때 활약한 박제상의 처는 치술령의 신모( 神 母 ), 치술신모가 되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왕족( 王 族 ) 보해( 寶 海 )를 구해오고, 또 왜국에 볼모로 간 미해( 美 海 )를 구하러 갔다. 고구려와 왜국에 가서 신라의 왕족을 구한 박제상의 처가 신라에서 신모로 받들어져 숭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치술신모가 어떠한 의미로 받들어 졌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박제상의 대외적인 활약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산신이 호국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볼 때 치술신모는 호국신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치술신모는 제18대 실성왕의 딸이기도 하다. 실성왕은 왕위에 있을 때 눌지를 죽이려고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였으나 고구려인들이 오히려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웠다. 눌지왕 때에 활약한 박제상의 뒤에는 치술신모의 정치적 위치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설씨녀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 때에 경주에 살았던 설씨녀( 薛 氏 女 )는 비록 보잘 것 없고 단촐한 집안이었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과 행실이 의젓하여 보는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모두들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그 아버지가 나이 늙게 먼 곳에 가서 방술( 防 戌 : 교대로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병역의 의무)하게 되었는데 설씨녀는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었으므로 차마 멀리 떠나보낼 수 없었고, 또 여자의 몸이라 대신 갈 수도 없어서 한갓 극심하게 번민하기만 하였다. 이때 소년 가실( 嘉 實 )이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나 마음가짐은 곧은 남자로서 일찍부터 설씨녀를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실은 설씨녀의 아버지가 늙어서 종군하게 되어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대신 가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대가 이 노인을 대신하여 가려한다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무엇으로 갚을까 생각하는데 만일 그대가 나의 어린 딸을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아내로 삼아 그대를 받들게 하고 싶다"고하니 가실이 재배( 再 拜 )하며.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정말로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나와 혼인을 청하니 설씨녀가 말하기를, "혼인은 인간의 큰 윤리라 갑자기 이루어 질 수는 없다 내가 마음으로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하지는 않겠다. 그대가 방술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받아 성례( 成 禮 )하여도 늦지 않겠다"고 하고 거울을 가져다 절반씩 나누어 각기 한 조각씩을 가지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신표를 삼는 것이니 후일에 합하여 봅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 필을 주고 떠났다. 그리하여 설씨녀와 가실은 3년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는 일이 있어 군사들을 교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6년이 지나도 가실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설씨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설씨녀는 "전날에 아버지를 편안케 하기 위하여 억지로 가실과 약속을 하였고. 가실도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종군하여 여러 해 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경 ( 敵 境 )에 바짝 가 있어 손에서 병기 ( 兵 器 )를 놓지 않고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물릴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신의( 信 義 )를 저버리고 식언( 食 言 : 말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하는 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명령은 감히 끝까지 따르지 못하겠사오니 다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또 늙어서 딸이 장성하였으나 배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비밀히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미 날을 정하여 그 사람을 맞아들이니 설씨는 굳게 거절하고 물래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며 크게 한숨 쉬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가실이 교대되어 왔는데 형체는 마르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가실이 거울 조각을 내미니 설씨녀가 받아 가지고 소리내어 울었으며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드디어 다른 날로 약정하고 서로 만나 일생을 해로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설씨녀는 아버지를 지극하게 위하는 효녀 임과 동시에, 한번 약속한 말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의리의 여성이었다. 또한 지혜도 있어 신표로서 거울을 나누어 가졌고 그 거울로 인하여 알아볼 수 없었던 가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씨녀는 가실이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헤아릴 줄 아는 혜안( 慧 眼 )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이었다. 이러한 설씨녀는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는 한국의 모범적인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강수의 처 제29대 태종 무열왕(654~660 재위 ) 때에 대문장가( 大 文 章 家 )로 활약한 강수( 强 首 )의 처는

12 대장장이 딸로서 신분이 미천하였다. 문무왕이 강수의 공을 보답하고자 강수의 직위를 올려주고 녹봉 이외에 해마다 조( 租 ) 이백석을 더 주었다. 신문왕 때 죽어 장사( 葬 事 ) 비용을 나라에서 많이 주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사사로히 가지지 않고 모두 절(절의 이름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호국사찰이었을 것이다.)에 보내 주었다. 그 후 강수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 지방으로 내려가려 하자 대신( 大 臣 )이 이를 알고 왕께 청하여 조( 租 ) 백석을 주게 하였는데 그 아내가, "저는 미천한 사람으로 의식( 衣 食 )을 남편에 의지하고 국은( 國 恩 )을 받은 바가 많았습니다. 이제 혼자 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후한 물건을 받겠습니까" 하며, 결국 받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 갔다고 한다. 국가의 재산을 사사로히 축낼 수 없다는 여인의 충심과 높은 기개를 강수의 처는 알게 해준다. 이러한 강수의 처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도 나라의 큰 역할을 하는 남편을 위해 많은 내조를 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소나의 처 제30대 문무왕(661~680 재위) 때에 활약한 소나( 素 那 )는 홀로 아달성을 지키다가 말갈의 급습을 받아 용감히 싸우다가 적의 화살이 고슴도치 털과 같이 꽂혀 넘어져 죽었다. 집에 있던 아내에게 그 고을 사람들이 소나의 죽음을 알리며 애도하니, 아내가 곡( 哭 )을 하며 대답하기를, "내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 丈 夫 )는 마땅히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 어찌 자리에 누워 집안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죽겠는가 하였다. 평소의 말이 이러하더니 지금의 죽음이 그 뜻과 같이 되었다" 고 하였다. 소나의 처는 남편의 전사( 戰 死 )를 슬퍼하면서도 평소의 남편의 용감하고 충성했던 뜻을 널리 알리며, 남편이 죽은 슬픔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심을 앞세우고 있다. 단편적인 기록 속에서도 한국 고대의 여성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경제, 사회,종교, 문화, 가정에서 강한 의지와 신념으로 살아온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화(?~B.C.24)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朱 蒙 )의 어머니는 유화부인( 柳 花 夫 人 )으로 사료( 史 料 )에 나타난다. 이규보가 쓴 동명왕편 에 의하면, 압록강 유역의 세력가인 하백( 河 伯 )의 맏딸 유화가 해모수( 解 慕 漱 )의 왕비가 되어 햇빛을 받아 잉태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아들을 명궁사( 名 弓 士 )로 키워 주몽이 어렸을 때 파리들이 귀찮게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자, 유화가 주몽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다. 주몽은 이 화살로 물레 위의 파리를 백발 백중으로 쏘아 맞혔다. 부여 ( 扶 餘 )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는데,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주몽'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는 수렵을 중요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누구나 활쏘기를 단련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몽이 뛰어나게 활쏘기를 잘하게 된 배경에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어 그 재능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을 떠나 보내는 강한 의지의 모정( 母 情 ) 주몽은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 남쪽 땅에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주몽의 마음을 알고 어머니가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준마)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 고 하였다. 유화부인은 마굿간에 가서 긴 채찍으로 말을 때려, 여러 말이 모두 달아나는 가운데 두 길이나 되는 높은 난간을 뛰어 넘는 준마를 골라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고 안심시키며 주몽을 떠나 보냈다. 주몽은 어머니가 골라준 준마를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

13 유화부인은 소중하게 키운 아들이 위험을 안고 미지의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할 일에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러나 주몽의 의지를 알고는 아들과 생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참으며 아들이 떠나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주몽이 위험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방법으로 준마를 골라 주었다. 또한 주몽이 떠날 때 유화가 오곡( 五 穀 )의 종자를 싸주었다. 고구려를 건국하는 영웅인 주몽의 가장 두드러진 자질은 활 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유화부인이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어 그 자질( 資 質 )을 길러 준 것이다. 또한 주몽이 먼길을 떠나야 하고 위험에 처할 것을 예견하여 준마가 필요함을 알고 유화부인은 아들과의 생이별도 감수하며 지혜로운 방법으로 준마를 골라주었으며, 양식으로 삼아야 할 오곡의 종자를 줌으로써 고구려에서 신모( 神 母 )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부여와 고구려의 두 나라에서 신( 神 )으로 모셔 유화가 B. C. 24년에 동부여에서 돌아가자 그 왕 금와( 金 蛙 )가 태후( 太 后 )의 예( 禮 )로 장례를 지내고 신묘( 神 廟 )를 세웠다. 신묘를 세웠다는 것은 유화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며 그 묘 앞에서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를 계속 지 낸다는 의미이다. 고구려에서도 매년 10월의 제천행사 때 수혈( 隧 穴 )로부터 수신( 隧 神 )을 모셔와 나무로 부인상을 만들어 신좌( 神 座 )에 모셔놓고 제사지냈다. 이 제천행사 때의 수신은 유화부인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마지막 왕인 보장왕 때, 동명왕모의 소상( 塑 像 )이 3일이나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것은, 유화가 고구려에 있어 호국신( 護 國 神 )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고구려의 개국시조인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으로 하여금 신궁( 神 弓 )이 될 수 있도록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어 그 자질을 개발시키고 이끌어 주었으며, 주몽이 큰 뜻을 품고 떠나서 고구려를 세울 수 있도록 격려하여 주었다. 준마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지혜로운 방법으로 준마를 골라 주었으며, 오곡의 종자를 보내주어 고구려의 양식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화부인은 고구려에서 풍요와 호국신의 의미로 숭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부에서도 신모로 받들어져 숭배를 받았던 두 나라의 큰 어머니이셨다. 소서노(B.C. 66~B.C. 6) 고구려와 백제 창업의 주역 삼국시대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중세 고려 사회나 근세 조선조 사회에서 찾아볼 수없는 모권제적 흔적들이 사회 여러 면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있어 성차별적 경향이 없이 거의 평등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삼국에 관한 역사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2세기 중반에 저술된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와 14세기 초의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가 있으며 조선왕조 창건 이후인 4세기 말에 저술된 동국사략( 東 國 史 略 ) 과 15세기에 편찬된 동국통감( 東 國 通 鑑 ) 등이

14 있는데, 그 중 삼국유사 를 제외한 세 사서는 모두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되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창업한 조선조의 역사가들이 저술한 삼국의 역사서는 고려 중엽 역사가들이 쓴 삼국사기 와는 아주 다른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역사자체를 철저하게 유교정치 확립에 활용하였던 만큼 특히 상고사회 여성의 정치적 위치나 활동 등의 실제적 역사 사실조차도 용납할 수 없어, 역사 서술에서 그러한 역사 사실을 때로는 고의적으로 삭제하고 또 때로는 유교적 예와 명분에 어긋나는 비인륜적인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 매도하였다. 유교적 역사 안목에 의하여 저술한 위의 세 역사서 중 조선조 수성기에 편찬이 완성된 동국통감 의 경우는 여성차별적 역사관이 더욱 철저하여 역사 중심부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한 여성의 역사 사실조차도 무참히 생략해버리거나 또는 오로지 유교적 강상( 綱 常 )에 입각한 사론( 史 論 )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창업에서 소서노 ( 召 西 奴 )는 아주 중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유교적 이념에 사로잡혔던 남성 역사가들은 이 여성을 폄하하거나 또는 삭제해버리는 어리석음을 역사에 남겼다.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 창업자가 주몽( 朱 夢 ) 온조( 溫 祚 ) 그리고 박혁거세( 朴 赫 居 世 )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삼국 창업사에서 이들 창업자와 같은 비중을 갖는 중요한 여성 주역들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창업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인 소서노( 召 西 奴 )가 바로 그러한 여성이다. 주몽과 결혼 주몽이 북부여에서 망명하여 졸본부여에 당도했을 때, 졸본부여왕은 주몽의 출중함을 보고 탄복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주몽을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하게 하였고, 그들 사이에는 비류( 沸 流 )와 온조 두 아들을 두게 되었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당도했을 당시 그는 창업에 필요한 오곡(5가지 곡식)과 세 명의 동지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소서노는 젊은 과부로서 굉장한 재산가였다. 그녀의 재력이 주몽의 고구려 창업을 위한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당시의 재력이란 광역의 토지와 그 토지에서 생산에 종사하는 노예와 같은 민력( 民 力 )인 것이다. 이것이 경제적 기반이자 정치적 기반이다. 재력가인 소서노에게는 사별한 전남편 우태( 于 台 ) 때부터의 추종 세력들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소서노의 이같은 기반을 중심으로 역사의 영웅 주몽이 강한 나라 고구려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몽은 북부여에 있을 때 이미 예씨( 禮 氏 )와 결혼하였고 망명 당시 예씨부인은 임신 중에 있었다. 예씨는 아들(유류)을 낳아 혼자 힘으로 늠름하게 키웠다. 그 아들은 장성한 후 주몽이 제시한 어려운 과제를 풀어내고 아버지 동명성왕(B.C. 58~B.C. 19 재위) 앞에 나타나 원자(원자)로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2대 유리왕(B.C.19~A.D. 18재위)이며,

15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은 소서노 소생인 비류 형제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당시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해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는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업을 조성하는데 온 힘을 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제쳐놓고 대신 유류에게 나라를 넘겨주니 이제 우리들은 여기 있으면서 헛되이 울적하게 근심하고 지내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하는 것이 낫겠다." 고 말하고, 온조와 추종자들을 이끌고 미추홀로 내려왔다. 소서노 또한 원자의 극적인 출현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위를 이어 받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두 아들과 함께 미련없이 고구려를 떠나 다시 남으로 내려온 것이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서 백제를 창업하게 된다. 이때에도 어머니 소서노는 나라를 세우는데 필 요한 경제적 도움을 주었고 정신적으로 백제인의 지주가 되었다. 소서노의 죽음 온조왕 13년 3월에 소서노가 61세로 사망하였다. 그 두 달 후인 5월에 도성에서 여러 괴변들이 일어나고, 또 말갈의 침입까지 받는 등 백제는 내외로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 때 온조왕은 신하들에게 "국모가 세상을 버리는 등 정세가 편안치 못하니 서울을 옳겨야겠다." 라고 말하였다. 61세의 국모 사망을 자연적인 노환으로서의 사망으로 보지 않고 나라의 운 명문제와 연결하고 있음은 국모 소서노의 죽음이 온조왕에게는 물론 백제민 전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수난으로 여겨졌던 때문인 것이다. 상고사회에서의 모자관계는 주몽의 건국설화를 담은 동명성왕편 에 잘 나타난다. 지략과 용기가 뛰어난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을 남겨놓고 차마 흔자 떠날 수가 없었다. 아들은 눈물로 떠나기를 주저하였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주저없이 떠날 것을 강건하였다. 그리고 창업에 필요한 오곡을 챙겨주었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창황히 떠나느라 그만 맥자( 麥 子 )를 떨어뜨린 채 도망하였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몽은 멀리서 날아오는 비둘기를 보았다. 그는 저 비둘기는 내가 잊어버리고온 맥자를 보내주는 어머니의 사자( 使 者 )임을 영감처럼 알아차렸는데, 고대사회에서 어머니란 아들의 어떤 어려움도 처리해줄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처럼 상고 사회에서는, 아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단순한 혈친을 넘어선 지모신( 地 母 神 )과 같은 신앙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문의 동명성왕편 에는 부인 예씨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상고사회에서 모자( 母 子 )가 부부( 夫 婦 )보다 우선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백제는 온조왕(B.C.18~A.D.25 재위) 17년 4월에 국모묘( 國 母 廟 )를 세웠는데, 이것은 소서노를 백제의 창업주이자 지모신이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숭배한 때문이다. 평강공주(6세기) 지혜로운 울보공주 고구려 제25대 평원왕(559~589재위) 때는 중국에서는 통일왕조인 진( 晋 )이 망하고 남북조시대( 南 北 朝 時 代 )로서 여러 나라가 계속 생겼다가는 사라져가는 혼란한 시기였다.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시기로서 제25대 진흥왕(540~576 재위)에서 진지왕(576~579 재위)을 거쳐 진평왕(579~632재위)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북쪽에서는 이민족이 세력팽창을 하며 고구려를 괴롭히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쪽 영역을 침범하여 빼앗으며 팽팽하게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자청하여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어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 平 岡 公 主 )가 어렸을 때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온달,?~590)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 고 늘 이야기하였다. 공주의 나이가 16세가 되니 평원왕은 귀족인 고씨( 高 氏 )에게로 시집보내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 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 匹 夫 )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며 지존( 至 尊 )의

16 지위에 있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의 지위에 있는 자는 희언( 戱 言 )이 없다.' 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화가 나서 이르기를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진실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가 있겠느냐?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공주는 보물 팔지 수십개를 팔꿈치에 메고 궁궐을 나와 혼자 가다가 사람에게 물어 온달의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노모( 老 母 )가 있음을 보고 가까이 가서 절하고, 온달이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귀인)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좋고 손을 만지니 부드러운데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아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공주가 산 밑에 다다르니,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였다.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에 오지 말라."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모자( 母 子 )에게 자세한 것을 말하였는데, 온달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되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금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 소와 말 그리고 기물( 器 物 )들을 사서 살림을 모두 갖추었다. 말을 살 때에 공주가 온달에게 이르기를 "시장에서 파는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 國 馬 )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니 공주가 말을 잘 먹여서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강해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 山 川 神 )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온달이 빨리 달리고 잡은 짐승도 많아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그를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는 놀라기도 하고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 後 周 )의 무제( 武 帝, 561~578 재위)가 요동을 침범하니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크게 이겼다. 공( 功 )을 논할 때에 모두가 온달을 제일로 삼았다. 왕이 기쁘고 감탄하여 온달을 드디어 사위로 인정하여 예( 禮 )를 갖추고 맞이하며 높은 작위도 주었다. 그리하여 온달은 위엄과 권세를 모두 갖추었다. 온달 고구려 제일의 장수가 되어 몹시 가난하여 옷과 신발은 모두 헤진 것이었으며 먹을 것도 없어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산에서 나무 껍질을 벗겨다 먹던 온달을 위엄과 권세를 지닌 고구려의 귀족으로 만든 것은 평강공주의 능력과 뒷받침 때문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공주는 좋은 말을 고를 줄 알고 키울 줄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공주가 바보 온달을 만나게 된 것은 지존의 위치에 있는 왕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물론 사랑스러운 귀여운 딸의 울음버릇을 고치기 위해 평원왕은 가벼운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신뢰' 이다. 평강공주는 부왕( 父 王 )을 훌륭한 왕으로서 말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여 신뢰할 수 있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온달을 찾아갔으며, 그리고 결국은 온달을 위엄과 권세를 갖춘 훌륭한 장수로 만들었다. 가난하여 누추한 온달의 집에 가서

17 눈 먼 노모에게 귀한 공주의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을 하였다는 것에서도 평강공주의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모습과, 포용력과,한 번 먹은 마음에 대한 변함없는 실천력을 보여주고 있다. 온달과 그 어머니가 공주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립문 밖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또한 거부하는 모자( 母 子 )를 끝까지 설득하는 모습에서도 더욱 그녀의 훌륭한 모습은 드러난다. 그리하여 온달은 한족( 漢 族 )이 요동을 침범하였을 때 고구려의 장수로서 무공( 武 功 )을 세워 나라를 지켰으며, 590년(영양왕 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과 죽령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자 출정하였다가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온달이 활약하였던 6세기 후반의 고구려는 북쪽에서는 한족( 漢 族 )이,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여 오는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온달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장수로서 이민족( 異 民 族 )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삼국의 요지로서 서로의 각축장이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최후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온달장군의 활약 뒤에는 평강공주의 역할이 또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군의 화살 맞아 온달 사망 온달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장례를 치루는데 영구( 靈 柩 )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 棺 )을 어루만지며, "사생( 死 生 )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온달이 전장으로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 鷄 立 嶺 : 지금의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고구려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고 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죽어서도 관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평강공주가 뜻은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괜찮으니 돌아가자고 하자 그때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표현으로 보아, 온달이 실지( 失 地 ) 회복을 위해 출전하였던 배경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상황이 있었겠지만 평강공주의 위치와 역할도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처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짊어진 온달 장군의 뒤에는 평강공주의 역할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공주의 이미지는 더없이 곱고 여리고 나약하고 귀하게만 생각되는데, 평강공주가 보여준 한국 고대의 공주는 왕의 위엄과 신뢰를 갖춰주기 위하여 혼자 몸으로 궁궐을 나와 누추한 온달의 집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문 밖에서 밤을 새우고도 끝까지 설득한 강인한 의지와 두려움 없는 실천력과 변치않는 결단력을 지닌 여성이었고, 좋은 말을 선택하고 병든 말을

18 잘 치료하고 건강하게 키우는 능력도 지닌 여성이었다. 온달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내조( 內 助 )를 한 평강공주는 오늘날에도 한국의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선덕여왕 삼국통일과 기반 닦은 최초의 여왕 제 27대 선덕여왕( 善 德 女 王, 632~646 재위)은 신라의 첫 여왕이자 기록에 나타난 우리 나라의 첫 여왕이었다. 여왕의 이름은 덕만( 德 曼 )이었으며 아버지는 제 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 摩 耶 夫 人 )이었다. 신라에서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보수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가계계승에 있어서도 아들과 딸, 사위가 크게 차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미 남성이 정치의 주도권을 쥔지 오래인 사회에서 여성이 왕위에 즉위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도 특별한 경우로 인식되어 있었다. 선견지명의 특별한 능력 지녀 선덕여왕이 미리 알았다는 지기삼사( 知 機 三 事 : 기미를 미리 알은 세 가지 일)의 설화는 선덕여왕의 선견지명( 先 見 之 明 )에 대한 특별한 능력을 말하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왕의 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첫번째 예지( 豫 知 : 미리 아는 것) 능력은 다음과 같다. 덕만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진평왕 때에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신라에

19 보내왔다. 이를 보여주니 덕만이, "이 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웃으며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림에 나비가 없기 때문에 압니다. 대체로 여자가 아름다우면 남자가 따르기 마련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나비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 꽃은 아름다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니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겠습니다. " 라고 하였다. 그 꽃씨를 심으니 과연 덕만이 말한 것과 같았으니 그녀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더구나 덕만은 향기없는 꽃을 그려 보낸 당 태종의 의도는, '당나라 임금이 덕만이 배우자가 없는 것을 비웃은 것' 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로 보면 덕만은 이미 의사소통의 국제적인 감각도 지니고 있었으며, 당 태종도 덕만이 비록 배우자는 없으나 꽃 중의 꽃이라고 하는 모란꽃에 선덕여왕을 비유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예지능력 발휘는 여왕이 즉위한 5년(636년) 5월에 있었다. 선덕여왕은 개구리들이 옥문지( 玉 門 池 )에 모여있다는 말을 듣고, "개구리는 성난 눈을 한 병사들의 모습이다. 서남쪽에 옥문곡( 玉 門 谷 )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혹시 그곳에 적병이 몰래 숨어있는지 모르겠다." 하여 장군 알천( 閼 川 )과 필탄( 弼 呑 )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수색하게 하니 과연 백제장군 우소( 于 召 )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날랜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그들을 공격하여 모두 죽이고 돌아왔다. 나중에 신하들이 여왕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개구리는 성난 모습으로 병사의 모습과 같고, 옥문은 여근( 女 根 )이며, 여성은 음( 陰 )이고, 그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군사들이 서쪽에 있을 줄 알았으며, 남근( 男 根 )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쉽게 잡을 줄 알았다." 고 하였다 선덕여왕은 관상론( 觀 相 論 )과 음양이론( 陰 陽 理 論 )과 오행사상( 五 行 思 想 )을 동원하여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사실을 유추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의 예지는 많은 사상이 복합되어 논리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선덕여왕의 지혜로 적국의 공격을 미리 알아내어 쉽게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병법( 兵 法 )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 上 策 )이라고 하였는데, 여왕의 능력으로 마주 싸우지 않고 이겼으니 선덕여왕은 병법상으로도 뛰어난 현군( 賢 君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예지 능력은 죽은 후에 입증된 것이다. 여왕이 아프지도 않을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텐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 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 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으니 여왕이 "낭산( 狼 山 )의 남쪽이다." 라고 하였다. 그 날에 과연 여왕이 죽고 신하들이 여왕을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 후 10여년 후에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이 사천왕사( 四 天 王 寺 )를 여왕의 무덤 아래쪽에 세웠다. 불경( 佛 經 )에 사천왕천( 四 天 王 天 )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여왕의 영험스러운 예지를 후대의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천왕사는 신라가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가 신라를 복속시키려고 대군( 大 軍 )을 거느리고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종교적인 힘을 빌려 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명랑법사( 明 朗 法 師 )가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어 도량을 설치하면 가능하다고 하여 문무왕 19년(679년)에 세운 호국사찰이다. 지금도 경주 낭산에 가면 사천왕사의 터가 있으며 뛰어난 수법으로 만들어진 귀부와 초석들이 남아있다. 도리천과 사천왕천이 있는 경주의 낭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산인 수미산에 비견될 수 있다. 선덕여왕은 낭산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불국토 사상을 신라에 구현시킨 위치에 있다. 이와 같이 선덕여왕의 예지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외교적인 국제감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재위 중에는 적군과 마주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었으며, 죽은 후에도 경주의 낭산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아 불국토 사상( 佛 國 土 思 想 : 부처님이 계시는 나라, 또는 부처님이 교화하는

20 나라)을 신라에 뿌리 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문왕 때에 세계적인 인류의 유산으로 공인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주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호국사찰이 어디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그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다( 寬 仁 明 敏 )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 聖 祖 皇 姑 )라는 최고의 칭호를 올렸다고 한다. 여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나라 안의 고독하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인자한 정치를 베풀었다. 또한 '인평 ( 仁 平 )'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대외 적으로도 자주적인 국가임을 표명하고 너그럽고 공평한 정치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여왕은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지귀( 志 鬼 )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왕이 영묘사( 靈 廟 寺 )에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묘사 탑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여왕은 그의 가슴 위에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 탑을 태웠다고 한다. 이는 영묘사의 창건 설화와 함께 당시의 복잡한 종교정책이 얽혀진 설화이지만, 여왕의 공평한 종교정책과 함께 백성을 인자하게 사랑하여 백성들로부터 사모( 思 慕 )를 받았던 여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설화이기도 하다. 여왕이 재위한 시기는 신라의 중고시대( 中 古 時 代 : 삼국유사 에서 신라사를 세시기로 구분한 것으로서 제23대 법흥왕으로부터 제28대 진덕여왕 때까지를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중요한 시기이다. )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전쟁을 하던 시기이며, 국력을 키우기 위해 당과의 외교를 긴밀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당과의 긴밀한 외교관계 유지는 나중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볼 때, 선덕여왕의 외교정책은 신라사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에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부분이지만, 신라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 신라인들을 위하여 왕으로서 취할 수 있었던 지혜로운 방법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는 결국 신라마저 장악하려는 당의 야심을 알고 이를 물리쳤음을 볼 때 신라인들에게 자주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호국의지 담은 황룡사 9층탑 건립 한편 선덕여왕은 김유신( 金 庾 信 )의 누이와 김춘추( 金 春 秋 )가 결혼하는 것을 도와주고 인정함으로써 앞으로 삼국통일의 두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두 집안을 맺어주었다. 이로써 그들은 국가를 위해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결국 신라가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왕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실로 선덕여왕은 인재를 발탁하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여 국가의 운명을 이끌어 가도록 하였던 중요한 역할을 한 능력 있는 현명한 군주였던 것이다.

21 종교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써서 분황사( 芬 皇 寺 )와 영묘사를 이 여왕대에 이루었으며 특히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탑은 당나라에 다녀온 자장법사( 慈 藏 法 師 )의 청으로 건립한 높이 42척(약 80여m)의 대탑이다. 이를 9층으로 한 뜻은 구이( 九 夷 )를 복속시키키 위한 것인데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吳 越 ), 제4층은 탁라( 托 羅 ), 제5층은 응류( 鷹 遊 ),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단국( 丹 國 ), 제8층은 여적( 女 狄 ), 제9층은 예맥( 穢 貊 )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선덕여왕은 싸우지 않고 위엄으로 이들 아홉 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종교적인 힘으로 이 거대한 불탑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선덕여왕은 왕의 자제( 子 弟 )를 당( 唐 )에 보내어 국자감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이는 당의 선진문물을 배우려는 의도와 함께 당과의 외교가 중요한 시기에 국제적인 감각을 키우고 외교에 능숙하게 대처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양 최고( 最 古 )의 천문대인 첨성대도 선덕여왕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너그러운 내치( 內 治 )와 적극적인 외교, 종교와 과학등의 여러 방면에서 당시를 이끌었던 훌륭한 현군( 賢 君 )으로서 최고의 숭배를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은 당과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쳐 삼국통일의 외교적인 기반을 닦았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하여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진덕여왕(7세기) 왕권의 위엄을 세운 여왕 진덕여왕( 眞 德 女 王, 647~654 재위)은 신라 28대 왕이다. 27대 선덕여왕에 이어 여왕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579~632 재위)의 동생인 국반갈문왕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성품과 소질이 풍부하고 수려하였으며 키가 7척이나 되고 팔이 길었다고 한다.

22 여왕은 즉위하여 '태화( 太 和 )'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주체의식을 높였고, 정치 이념으로 신라인의 큰 화합을 도모, 국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신라인의 화합 도모, 국력신장에 주력 당( 唐 )과의 외교를 돈독히 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에 군사를 청하고, 의관( 衣 冠 )을 청하였으며, 나중에는 외교적인 필요에 의하여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진골에게는 아홀( 牙 笏 : 관직에 있는 자가 관복을 갖추었을 때 손에 지니는 상아로 만든 패)을 쥐게 하여 신분의 위계질서를 확고히 하여 관계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여왕이 조원전( 朝 元 殿 )에서 백관들로부터 하정례( 賀 正 禮 )를 받음으로써 백관들로부터 여왕의 위엄을 확고히 하였다. 왕 5년에는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하여 왕실의 기밀 사무를 총괄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당과의 외교 승패가 신라의 존망과 관련된 중요한 시기에 진덕여왕은 스스로 오언시의 '태평가( 太 平 歌 )'를 지어 그 내용을 무늬로 한 비단을 짜서 당의 태종에게 보냈는데 그 한시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대당이 왕업을 개창하니, 높고 높은 임금의 모책은 창성해 진다. 전쟁을 그치니 군사들은 안정을 얻게 되고, 문치를 숭상하니 백왕의 뒤를 잇게 되었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매 물체마다 광채를 머금었다. 깊은 인덕은 일월과 짝할만 하고, 순환하는 운수는 당우의 세로 향한다. 번기의 번덕임은 어찌 그리 혁혁하고, 쟁고의 소리는 어찌 그리 황황한가. 오랑캐로 제명을 어기는 자는,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덕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나 다 모여들며,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친다. 사시( 死 時 )는 옥촉과 같이 흐르고, 칠요( 七 曜 )는 널리 만방에 돌아 다닌다. 옥에서 제보를 내리고, 임금은 충량한 사람에게 맡기었다. 오제 삼황의 덕을 한덩어리로 하여, 우리 당나라 임금을 밝게 한다. 학문과 문학 실력 뛰어나 이러한 오언시를 여왕이 직접 짓고 또 직접 비단에 무늬로 넣어 짰다고 기록되어 있다.기록대로라면 여왕의 학문과 문학 실력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라 할 만했다. 직조 능력과

23 솜씨도 뛰어났다. 혹, 여왕이 시를 직접 짓거나 비단을 직접 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외교적인 필요성을 인식하여 여왕이라는 입장을 최대한으로 부각, 외교 활동을 벌인 지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앞서 선덕여왕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진덕여왕의 외교 활동 또한 신라사에 있어 그 역할이 적지 않은 것이었다. 지은(9세기) 종노릇으로 눈먼 어머니 봉양한 효녀 효( 孝 )는 모든 선행의 근본이라고 했다. 효녀 지은( 知 恩 )에 대한 얘기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지은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경에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는 혼란한 시기로서 중앙에서는 왕위 계승 다툼이 치열하였다.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이 날뛰는 데다 중앙의 세금은 무거웠다. 부역도 해야 하며 흉년까지 겹쳐서 백성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아버지 없이 어머니 부양 지은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32세가 되도록 시집도 가지 않고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때로는 봉양할 것이 없어 품팔이도 하고 구걸도 해야 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지은은 부잣집에 자청하여 몸을 팔아 노비가 되어 쌀 십여 석을 받았다. 하루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며칠, 어머니가 딸에게 이르기를, "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아도 맛은 전과 같지 않고 오히려 간과 마음을 에이는 것 같으니 웬일이냐?" 고 하였다. 딸이 그제서야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가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다니 내가 빨리 죽느니만 못하다." 고 하면서 소리내어 크게 우니, 딸도 울어서 그 슬픈 정경이 길 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조상숭배 사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미풍양속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중시되었다.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아서 죽은 후에 자식으로부터 제사와 숭배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지은이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시집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헌신적으로 희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머니의 육체만을 봉양할 줄 알았지 얼굴색을 살펴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효심에 감동, 왕이 상 내려 지은의 효성은 모든 백성 뿐 아니라 왕까지도 감동시켰다.

24 제 50대 정강왕(886~887)은 벼 5백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부역을 면제시켰다. 군사를 보내 그 집을 도둑으로부터 지키게 하는 한편 그 마을을 '효양방( 孝 養 坊 )'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에는 진성여왕 때라고 기록되어 있음). 왕은 당나라 왕실에도 그 아름다운 행실을 알려, 지은의 효행은 중국에까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 왕이 국가적으로 효를 장려하고, 군사들이 개인 재산을 지켜주어야 할 정도로 도둑이 많았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혼란하였으며 백성들의 삶이 그만큼 고달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은은 그러한 시대에도 어머니의 얼굴 색까지 살펴, 그 마음을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는 효성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효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효녀이다. 진성여왕(9세기) 국가위기 극복 위해 노력한 여왕 진성여왕( 眞 聖 女 王, 887~897 재위)은 50대 정강왕(886~887 재위)의 여동생으로서 신라 51대 왕이다. 신라에는 이미 통일 이전에 27대 선덕여왕과 28대 진덕여왕이 있었다. 그러니까 진성여왕은 신라의 세 번째 여왕이었다. 당시는 45대 경문왕계가 왕위를 계속 이어가는 시대로서 49대 헌강왕(875~885 재위)과 50대 정강왕은 경문왕의 아들이고,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다. 정강왕이 후사가 없어 비록 여자이지만 자질이 총명하고 골상이 장부같은 여동생을 왕으로 세운 것이다. 진성여왕은 11년 동안 재위하였다. 진성여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 역사를 정리하고자 삼대목 을 집성케 하였다. 또한 죄수를 사면하고 여러 주 군에 일년간 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 수습에 노력하여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동왕 2년, 정치의 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제까지 누적되어 온 하대사회의 모순이 마침내 전국적인 반란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어지러운 신라사회 반란의 도화선이 된 것은 지방 농민들의 조세 반항이었다. 진성여왕 3년, 지방의 주 군 현에서 공부( 貢 賦 )를 수송하여 오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세를 독촉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전국 곳곳에서 납세를 거부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 반란은 47대 헌안왕(857~860 재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나, 진성여왕에 이르러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동왕 3년에는 사벌주에서 원종, 애노 등의 세력이 상당히 강대해져서 이를 토벌하려고 출동한 정부군이 그들이 기세에 눌려 감히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으며, 5년 10월에는 북원의 양길이 궁예의 보좌를 받으며

25 북원의 동쪽 부락들과 명주 관할 10여개 군 현을 습격하였다. 또 5년에는 완산에서 견훤이 일어나 자칭 후백제라 하였고 무주의 동남군 현이 그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로 하여 지방행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팽배해지자 중앙정부는 골품제를 강력히 유지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왕실의 안정을 꾀하게 되었다. 또한 진성여왕 시기에는 육두품 출신의 지식계층이 족벌 정치에 의해 성립된 골품제의 모순을 규탄하고 정치개혁 사회개혁을 주장하다가 탄압 당하거나 배척 당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동왕 8년에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그 내총은 골품제에 의한 관리임명이 아니라 능력과 학문에 의해 등용해야 한다는 유교 정치 사상을 담은 것으로, 최치원은 상당한 정치적 경륜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시무책에는 중앙집귄 정책의 강화에 대한 견제와 지방 호족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들어 있었다. 왕은 이 시무책을 가납하고 그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곧 이어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의 시무책이 진골 귀족의 반대로 하여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중앙통치력 강화 위해 노력 흔히 진성여왕은 무능하고 음탕하고 그로 인해 신라의 멸망을 재촉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다분히 고려시대 삼국사기 를 쓴 김부식의 유교사상에 의한 여성비하적 태도가 담겨진 것이다. 미소년들을 비밀히 측근으로 불러 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는 비난이 있지만, 이것은 여왕이 화랑 세력에 의탁하여 왕권의 안정을 모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경문왕의 가계는 화랑 세력과 관계가 깊다. 경문왕이 화랑출신이었음을 비롯하여 대대로 왕권의 기반을 화랑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진성여왕의 정치적 방향에 반발을 한 측은 다름 아닌 반 경문왕계 진골 세력이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린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라고 볼 수 있다. 경문왕계의 계속적인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다른 가계의 진골 세력이 만만찮은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성여왕 시기에는 다른 왕 때보다 불교 행사가 많이 눈에 띈다. 즉 동왕 1년에는 백좌를 황룡사에 베풀과 친히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다. 2년에는 왕이 병환이 나서 고승 60명으로 기도를 올렸다. 4년에 다시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베풀었다. 이것 역시 왕실이 불교에 의지하여 위축된 왕권을 만회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진성여왕이 이룬 공적으로 무엇보다도 삼대목 의 수찬을 들 수 있다. 위홍과 승려 대구에게 명하여 향가를 모아 집대성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신라인들이 천여 년간 내려온 그들의 역사를 삼대로 구분하고 향가집을 낼 수 있었다는 점은 당시에도 시대적인 전환을 인식하고 신라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하대 통치자로서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더욱이 향가의 내용이 대부분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진성이라는 여왕의 왕명에서도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나타남은 진성여왕이 국가적인 위기의식을 불교사상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불교적 행사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구해 보려는 노력에도 모든 수습에 실패하자 자신의 부덕함을 내세워 후계자에게 양위하는 과정은 여왕이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미덕이자 동시에 한계였다고 볼 수 있겠다. 진성여왕의 왕위 계승은 골품제적인 요소로서 경문왕계를 이어가려는 과도기적 의미와 또 하나는 호국의 상징으로서 여왕을 추대하여 당시 혼란한 국가적 위기를 구하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빈번히 추진되는 불교적 행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성여왕의 정치적 성격은 당대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중세사회 (고려) 중세사회개관 고려 (918~ 1392)는 918년 태조 왕건(918~943 재위)에 의해 건국되었다. 당시 한반도는 고려와 후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리고 그들의 딸과 혼인하는 등으로 회유, 견제하였다. 이후 광종(949~975 재위)은 노비안검법( 奴 婢 按 檢 法 ), 과거제 실시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성종(982~997 재위)은 중앙집권적인 여러 정책들을 펼 수 있었다. 문종(1046~1083 재위)대에 이르러 고려는 관료제가 완성되고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기 지배층은 귀족이었다. 이들은 과거( 科 擧 )나 음서( 陰 敍 )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뒤 출신 가문을 바탕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음서와 공음전시( 功 蔭 田 柴 )

26 제도를 통해 자손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여러가지 특권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이들의 출세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인의 능력보다도 친가 외가 처가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친족망( 親 族 網 )이었다. 이에 고려의 귀족들은 왕실이나 비슷한 수준의 문벌귀족들과 겹치는 혼사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유지 확대해 나갔다. 고려시대 여성의 결혼 생활을 보면 오늘날과 다른 점이 많다. 가장 특징적인 것이 서류부가혼이라 하여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도 친정에서 계속 살다가 나중에 시집으로 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집에 들어가 살거나 남편 벼슬 때문에 분가를 했다가도 뒤에 친정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다. 또한 재산 상속면에서도 딸 아들 간에 차별없이 균분되었다. 이는 고려의 친족제가 비부계적 ( 非 父 系 的 )이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대표적인 부계친족제 ( 父 系 親 族 制 ) 사회인 중국에서는 결혼식 자체를 남편 집에서 하고 결혼 첫 날부터 시집살이를 하게 되며, 재산도 아들에게만 상속시켰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과 다른 결혼과 친족제도를 가지고 있어 '출가외인( 出 嫁 外 人 )'이라는 관념이 약할수 밖에 없었고, 아들 딸 간의 차별도 그다지 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된다거나, 호적 문서에 남녀 순이 아니라 출생 순으로 기재한다거나 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를 가지고 여자의 지위가 높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결혼이 신분상승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할 때 그 주체는 남성에 한한다. 여성은 자신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친족의 일원으로서만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시대에 여성이 받는 남자형제와 동등한 양의 상속 재산이나 사위와 외손자에게도 부여되는 특권 등은 여성의 진정한 힘이나 지위가 아닌 '결혼지참금'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집이 가난해 결혼을 못하고 승려가 된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처를 버리고 새 장가를 든 남성들의 예가 여럿 보인다. 특히 무신 집권기나 원간섭기처럼 정치적 격변이 심할 때는 처가의 죄에 연좌되지 않기 위하여, 또는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외에도 여성은 칠거지악( 七 去 之 惡 )을 범했을 때 쫓겨나는 등 이혼에 있어서도 남성에 비해 불리했으며, 간통죄를 범했을 때도 자녀안( 子 女 案 : 나쁜 행실을 기록한 문서)에 올라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남성에 비해 열악한 지위에 있었다. 고려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교와 불교를 들 수 있다. 유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이미 고대에도 삼종지도, 수절 등의 관념이 일부나마 엿보이는데, 고려에서도 상류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칙 이나 여사서 등 중국의 여성 도덕서가 읽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었고 불교는 마음을 수양하는 도구였으므로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특히 불교였다. 불교에서 이상적으로 여겼던 여성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친척들에게 이익을 베 풀고, 여공( 女 工 )에 힘쓰며 자식을 현명하게 기르는 어머니였다. 이는 유교나 기독교 등 전근대시대 다른 종교의 여성관과 특별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불가능했던 시절 가정내 존재로서의 여성에게 기대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 여성 묘지 명에 보면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위와 같은 덕목을 가진 여성들의 삶이 여럿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유교 사회와 한 가지 차이라면 상례( 喪 禮 )나 제례( 祭 禮 )등이 불교식으로 치뤄져 여성들에게도 참여의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상례나 제례가 절에서 치뤄졌으므로 행사를 실제 집행하는 사람은 승려였고 자식들은 행사 비용만 내면 되었다. 따라서 제사가 적장자( 適 長 子 )에게 독점되지 않고 딸과 아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 輪 廻 奉 祀 )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이에 대를 잇기 위해 양자( 養 子 )를 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원간섭기가 되면 고려의 가족제도나 친족제도에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 원인으로는 공녀( 貢 女 ) 징발과 주자학의 수용을 들 수 있다. 공녀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만으로도 수천 명의 여성들이 끌려갔는데, 일단 공녀가 되면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원 관리의 처첩이나 궁녀, 노비로 일생을 마쳐야 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공녀를 피하기 위하여 조혼( 早 婚 )이 성행하고 일부다처제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게 되었다. 비록 이 법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다처( 多 妻 )를 두는 것이 묵인되어 전기의 처첩제가 붕괴되었다. 한편 여원관계의 진행으로 제도와 풍습, 언어는 물론 학문면에서의 교류가 빈번해졌다.원에 갔던 관리들을 통해 주자학이 도입되고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들은

27 가묘( 家 廟 )의 설치, 친영제( 親 迎 制 )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가묘의 설치는 제사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적장자 중심으로 제사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친영제 실시 역시 혼인과 그 이후의 결혼생활이 부계친족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또 공양왕 때에는 고위 공직자 부인들의 재가를 금지하자는 상소도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여성들에게 정절이 강조되기는 했으나 재혼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이는 결국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만 한정되던 정절관념이 남편이 죽은 뒤까지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조선에 들어와 본격화되며, 여성들의 생활과 지위는 또 한차례의 격랑을 겪게되는 것이다. 신혜왕후(10세기) 고려 왕조의 기틀 마련한 태조비 태조비 신혜왕후 유씨( 神 惠 王 后 柳 氏 )는 정주 사람으로 삼중대광( 三 重 大 匡 ) 유천궁의 딸이다. 정주는 예성강변에 위치하여 한반도 서남해안은 물론 중국과의 교통이 편리하였다. 이에 신라 하대 이래 무역이 발달하였고 부를 축적한 사람도 많았다. 고려사 에 보면 유천궁이 큰 부자였고 장자( 長 者 )라 불렸다고 한다. 이는 곧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호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정주라면 송악(개성)과도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송악 지역의 토호였던 왕건의 선조들 역시 정주 지역과 무관하지 않았다. 왕건의 집안 역시 송악 지방에 살면서 서해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하여 재산과 세력을 키운 호족이었다. 호족의 딸로 태어나 왕건을 만나 왕건(고려 태조, 918~948 재위)이 유씨 부인과 처음 만난 것은 왕건의 나이 스물이 좀 지나서였다. 왕건의 인물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과 같은 얼굴에 미간이 시원스럽고 턱이 야무지며 이마가 훤했다 한다. 또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지에 가득 차 있었으며 기상과 도량이 웅대 심오하고 목소리가 웅장하여 세상을 구원할 빛이 엿보였다고 한다. 당시 왕건은 태봉의 궁예(901~918재위) 휘하의 장군으로서 여러 지역을 정복하며 용맹을 떨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늙은 버드나무 아래서 잠시 말을 쉬고 있었다. 그 때 유씨가 길 옆 시냇가에 서 있었는데, 얼굴이 매우 덕성스러웠다. 왕건은 그녀에게 누구의 딸인가를 물었고, 그녀는 이 고을 장자의 딸이라 대답했다. 왕건은 군사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가 묵기를 청하였고, 그 집에서는 왕건과 군사들에게 음식을 잘 차려 대접하였다. 그리고는 처녀로 하여금 그날 밤 왕건을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왕건은 군대를 이끌고 떠나야 했다. 견훤이 거느리는 후백제 군에 맞서 계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서해로부터 광주로 들어가 금성군( 錦 城 郡 : 나주)을 비롯한 10여 개 군현을 쳐서 점령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고, 이로써 파진찬 겸 시중( 侍 中 )이라는 태봉 최고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유씨는 왕건이 떠난 뒤 그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그녀를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와 후백제, 태봉의 세 나라로 나뉘어져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태봉의 군주 궁예는 한반도 북부의 넓은 영토와 큰 세력을 차지하게 되자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졌다. 무고한 신하와 백성들을 의심해 모반하였다는 구실로 죽이는 일이 잦았고, 눈 밖에 벗어난 처첩들에게는 간통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신라를 멸도( 滅 都 )라 부르며 원수로 여겨 신라에서 항복해오는 자들까지 모두 죽였다. 어느날 궁예는 왕건을 급히 불러 노기 띤 어조로 "경이 지난 밤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역을 음모한 것은 무슨 일인가." 물었다. 왕건은 웃으며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내가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경의 마음을 본 뒤 그 일을 설명하겠다."

28 하고는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한참 무엇인가 외는 듯했다. 이 때 장주( 掌 奏 )로 있던 최응( 崔 凝 )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붓을 짚는 척 하면서 왕건의 옆을 지나며 "굴복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라고 속삭였다. 왕건은 그제야 깨닫고 "사실은 신이 반역을 음모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 하였다. 그제야 궁예는 웃으며 "경은 정직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며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말고삐를 상으로 주었다. 그리고는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마오." 라 당부하였다. 이는 왕건이 여러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울 뿐 아니라 포용력 있는 인격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자 궁예가 그를 시기하며 의심한데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왕건은 이후 스스로 근신하며 자청해 자주 변방에 나가 궁예의 눈 앞에서 멀어지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왕건의 명망은 높아 가고, 반면 궁예는 점점 인심을 잃어갔다. 신민들을 함부로 죽일 뿐 아니라 사치가 심해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다. 여기다 기근, 전염병까지 겹치자 신민들은 더욱 그를 미워하여 마침내는 그를 왕위에서 몰아낼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신라 경명왕 2년(918)에 기병장( 騎 兵 將 )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의 집으로 와서 궁예를 폐립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왕건은 유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텃밭에 새로 익은 오이가 있는지 알아보고 따 오라 했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를 알아 차리고 나왔다가 다시 북편 창문으로 해서 가만히 휘장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 때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낯을 붉히면서 굳게 거절하였다. 이 때 유씨가

29 급히 휘장 속에서 나와 남편에게 "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손수 갑옷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그를 옹위해 나가며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달리며 "왕공( 王 公 )이 이미 의기( 義 旗 )를 들었다." 라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달려와 합세하였고, 먼저 궁문 앞에 이르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왕건을 기다리는 자도 많았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변장하고 도망치다 부양(강원도 평강)의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왕건은 그날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 天 授 )'라 하니 이 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태조는 즉위한 이듬해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고,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오대( 五 代 )의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서경 경영을 통해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과단성 있는 그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는 여전히 복잡하였다. 궁예의 옛 신하 중 불복하는 무리도 있었고, 고려를 배반하고 후백제에 가담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한 서남쪽에는 강성한 후백제가 버티고 있었고, 동쪽에는 신라가 여전히 잔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는 각지의 호족들에 게 겸손한 태도로 후히 대접하여 회유에 노력하였으며, 그들 딸들과의 결혼을 통해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29명의 부인을 맞이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친신라 반후백제 정책을 표방하여 마침내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받아 내었다. 그리고 왕실의 내분으로 분열된 후백제를 격파하여 마침내 태조 19년(936)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하였다. 유씨 부인은 이 모든 정치적 격변기에 태조와 함께 하였다. 그녀는 처음 결혼해서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남편이 거의 매일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지위가 오르고 공이 커지면서는 당시 군주였던 궁예의 시기와 의심으로 남편이 더욱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는 일도 겪었다.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태조는 전쟁터를 전전해야 했고, 호족들의 반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 호족 회유책의 일환으로 태조와 결혼한 수 많은 호족의 딸들이 저마다 '태자'를 낳아 그녀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이 시대에는 처첩( 妻 妾 )이나 적서( 嫡 庶 ) 관념이 후대와 달라 먼저 결혼했다고 처가 되고, 뒤에 결혼했다 해서 첩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처첩이 구분되며 신분이 엇비슷할 경우에는 대체로 병렬적인 지위에 있게 되는 것이 당시 왕실의 상황이었다. 태조에게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왕후와 부인의 호칭은 대체로 여자 친정쪽 호족 세력의 크기에 따라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부인보다는 왕후가 높은 지위였다고 여겨지지만 6명의 왕후 간에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건국에 내조 다해 왕후로 책봉 게다가 그녀에게는 자식도 없었다. 왕건은 모두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두었다. 충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긍달의 딸이었던 왕후 유씨는 6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았으며, 신혜왕후 유씨와 비슷한 시절에 왕건과 결혼했던 장화왕후 오씨는 왕위 계승자인 혜종을 낳았다. 자식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지위가 오씨나 유씨에 비해 낮아질 가능성도 있었고, 그녀 역시 여자로서 남편의 다른 부인들에 대해 질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창업 군주 배필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였다. 그녀는 943년(태조 16년) 후당( 後 唐 )으로부터 왕후로 책봉되었는데, 그 글을 읽어보면 그녀의 성품과 내조의 공로를 잘 알 수 있다. 남의 처가 되어 남편을 잘 섬겨 부귀를 누리게 된 사람을 그 집안의 가장 좋은 아내라고 보리라. 대의군사 특진 검교 태보 사지절 현토주 도독 상주국 고려국왕의 처하동 유씨는 내조하는 말이 정당하였고 방조한 바도 실로 많았다. 국가 대사를 좋은 계책으로 보좌하였으며 부인으로서 총애와 우대를 받아왔다. 임금을 보좌하여 충절을 이루었으며 남편을 섬기는데 유순하고 현명하였다. 이에 일반적 관례를 초월하여 특수한 명예를 주노니 더욱 근왕( 勤 王 )의 뜻을 가다듬어 나간다면 이것이 국은에 보답하는 규범이라고 할 것이다. 그대를 하동군부인( 河 東 郡 夫 人 )으로 봉하노라. 유씨는 죽은 뒤 시호를 신혜왕후라 하였으며 태조의 현릉에 합장되었다. 신라 왕녀는 물론 유수한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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