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103집(전체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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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朝 鮮 後 期 實 錄 編 纂 慣 例 의 변화 吳 恒 寧 * Ⅰ. 서 론 1. 朱 墨 史 의 前 例 Ⅱ. 實 錄 再 編 纂 의 諸 樣 相 2. 再 編 纂 의 背 景 과 餘 波 1. 宣 祖 實 錄 의 修 正 Ⅳ. 國 史 體 系 의 변동 2. 顯 宗 實 錄 의 改 修 1. 翰 林 自 薦 制 의 폐지 3. 肅 宗 實 錄 의 補 闕 正 誤 2. 實 錄 纂 修 凡 例 의 변화 4. 景 宗 實 錄 의 修 正 3. 日 省 錄 의 등장 Ⅲ. 實 錄 再 編 纂 의 背 景 Ⅴ. 결 론 Ⅰ. 서 론 중국 당 태종 때 처음 편찬되기 시작한 실록은 이후 중국사에서 뿐 아니라 우리 역사 에서도 國 史 의 지위를 가진 역사편찬물이었다. 1) 실록 발생 초기에는 황제의 재위 기간 에 편찬되기도 했으나 차츰 군왕의 재위 단위로 편찬되는 관례가 정착하였다. 이는 재위 기간이 당대사 편찬 단위로 적절했던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국사인 실록이 그 原 本 性 2) 을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 은 實 錄 史 에서, 조선시대 실록은 한 정형을 보여주었다. 3)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실록 편찬에서 이전 시기와는 다른 몇 가지 모습이 나 타났다. 본고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먼저 확연히 눈에 띄는 현상 은, 선조실록 의 수정을 시작으로 4) 이미 편찬된 실록에 대한 수정 또는 개수 사업이 몇 * 전주대학교 연구교수. 1) 鄭 求 福, 韓 國 中 世 史 學 史 (Ⅰ), 집문당, 1999, pp.96~97. 그런데 國 史 의 개념은 National History 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개념적으로 보면 National Archives 쪽이 더 정확하다고 생 각한다. 오항녕, 실록( 實 錄 ):등록( 謄 錄 )의 위계( 位 階 ), 기록학연구 3호(2001) 제1장 참고. 2) 이 원본성에 상응하는 전통적인 용어는 아마 直 書 가 아닐까 한다. 직서 의 전통적 함의와 원 본성과의 관계는 따로 논의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3) 吳 恒 寧, 實 錄 의 儀 禮 性 에 대한 연구- 慣 例 와 象 徵 性 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26, 2003.

2 - 2 - 國 史 館 論 叢 第 105 輯 차례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 모든 실록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적 어도 이전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양상이었다. 그러므로 네 차례 있었던 수정(개수) 실록의 편찬체재에 나타난 특징을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이러한 양상의 역사적 의미를 편찬의 내적, 외적 관점에서 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는 수정 이후 원본과 수정본을 동시에 보존하는 관행이 생기게 된 배경이나 태 도와 관련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수정이 끝난 이상 원본은 폐기하고 수정본을 보존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실록 편찬이라는 내적 맥락 에서 제기되는 문제로, 사학사의 한 주제일 것이다. 둘째, 실록은 당대사이기 때문에 실록 편찬은 당대의 환경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실록이 수정되는 사회적 맥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록의 수정을 당대의 어 떤 정치상황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범범하게 설명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 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은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또한 환원론이 갖는 함정 을 피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정치상황의 변화가 실록 수정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되, 각 시기별 실록 수정의 의미를 가능한대로 드러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싶은 것은 國 史 體 系 의 변화이다. 5) 실록을 정점으로 한 국사체 계 는 경종실록 의 수정이 논의되던 무렵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실록의 수정이 곧 국사체계의 변화를 초래했던 첫 번째 원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의 원인으로써 국사체 계 변화의 다른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사관제도의 성격변화를 초래하는 翰 林 自 薦 制 의 폐지와 圈 點 制 의 도입 및 實 錄 纂 修 凡 例 의 변화를 다루어, 실록을 지탱하는 記 事 와 編 纂 이라는 두 축에서 일어나는 균열을 추적해보았다. 한편, 이 무렵 등장하는 日 省 錄 은 실록을 중심으로 하는 국사체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일성록 편찬은 기존의 국사체계에 단순히 또 하나의 편찬물을 더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실록 중심의 국사체계의 질적 변화를 자양분 으로 하여 발생했고, 또 실록 중심의 국사체계를 질적으로 변화시켰던 사건이었다. 6) 4) 오항녕, 宣 祖 實 錄 修 正 攷, 한국사연구 123 (2003). 그간 선조실록 의 수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었다. 瀨 野 馬 熊, 李 朝 宣 祖 修 正 實 錄 と 顯 宗 改 修 實 錄 に 就 いて, 1932, 瀨 野 馬 熊 遺 稿, 1936에 재수록; 申 奭 鎬, 凡 例, 宣 祖 實 錄 국사편찬위원회 표점본, 1957;강대 걸, 국역선조실록해제, 1993;배동수, 宣 祖 實 錄 修 正 編 纂 의 政 治 史 的 意 味, 정정 13, 최근에는 선조실록 의궤에 대한 해제가 추가되었다. 韓 明 基, 解 題, 宣 祖 大 王 修 正 廳 儀 軌 규장각, 2000; 吳 恒 寧, 順 治 十 四 年 丁 酉 九 月 日 宣 祖 大 王 實 錄 修 正 廳 儀 軌, 藏 書 閣 所 藏 儀 軌 解 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필자는 실록을 정점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국가기록관리체계를 가리키는 말로 국사체계 라는 용 어를 시험 삼아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實 錄 - 承 政 院 日 記 ( 經 筵 日 記 )- 各 司 의 謄 錄 등으로 구성되 는 체계 이자 위계 를 일컫는다. 6) 오항녕, 조선후기 국사체계( 國 史 體 系 )의 변동에 대한 시론-실록( 實 錄 )에서 일성록( 日 省 錄 )으

3 朝 鮮 後 期 實 錄 編 纂 慣 例 의 변화 본고는 조선후기 실록편찬에 대한 연구의 출발에 불과하다. 실제로 조선후기 실록편찬 에 대한 연구는 해제 이상의 논고가 제출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 남아 있는 15 종의 實 錄 廳 儀 軌 를 통하여 가능한 조선후기 실록편찬의 실체에 도달하려고 애썼지만 본 고도 현재 연구단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Ⅱ. 實 錄 再 編 纂 의 諸 樣 相 1. 宣 祖 實 錄 의 修 正 광해군대에 편찬된 선조실록 은 인조가 즉위한 계해반정(1623) 후 곧바로 그에 대한 수정 의견이 제기되었다. 인조 원년 8월, 경연석상에서 특진관 李 睟 光 李 廷 龜 및 任 叔 英 등은 선조실록 이 賊 臣 의 손에 의하여 편찬되었으며, 애초 李 恒 福 이 총재관이 되어 제 학 申 欽 등과 찬수하다가 계축옥사(광해군 5년, 1613) 때 이들이 쫓겨나고는 이이첨 등 이 초고를 산삭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를 없앴다고 주장하였다. 7) 그런데 이미 대북 정권의 專 制 가 강화되었던 광해군 후반에 편찬된 선조실록 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경 로로 그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던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것이 반정을 계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8) 이정구 등의 발론이 있은 지 이틀 뒤, 좌의정 윤방은 선조 誌 文 의 실례를 들어 선조실록 을 수정해야할 이유를 제기하였다. 이어 선조실록 이 사실이 왜 곡된 역사[ 誣 史 ] 라는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해를 넘겨 수정논의가 계속되었다. 인조 2년, 徐 渻 이 다시 국가 경비 고갈로 사정이 어렵더라도 시급히 실록수정청을 설 치하자고 건의하여 인조의 허락을 받았지만 여전히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9) 서성의 건의 가 있은 지 며칠 안되어 이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10) 더 이상 수정 논의나 편찬사 로 역사와현실 52, ) 인조실록 권2, 인조 원년 8월 병자조;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 (규장각 14155, 장서각 ). 계해 8월 18일. 규장각 영인본 3면. 이하 수정청의궤 라 줄인다. 지난번 경연에서도 제기되었다고 한 인조의 말로 보아 이미 발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인조실록 에는 수정 청의궤 에 나오는 인조의 말이 없다. 한편, 이러한 논의의 배경이 되는 宣 祖 光 海 君 代 정치상 황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고. 구덕회, 宣 祖 代 後 半 (1594~1608) 政 治 體 制 의 재편과 政 局 의 動 向, 韓 國 史 論 20, 1988 및 한명기, 光 海 君 代 의 大 北 勢 力 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 20, ) 수정청의궤 辛 巳 2월 15일, 大 提 學 李 植 의 차자. 史 庫 之 藏 外 人 雖 不 能 徧 窺 而 前 後 實 錄 考 見 之 時 史 臣 目 見 相 傳 有 不 可 諱 者 誠 于 古 史 家 之 一 大 變 也. 9) 수정청의궤 갑자 정월 14일, 徐 渻 의 건의. 10) 인조실록 권4, 인조 2년 1월 기묘조.

4 - 4 - 國 史 館 論 叢 第 105 輯 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괄의 난이 수습되는 와중에 춘추관에서는 광해군대의 역사편찬을 제안하였고, 11) 이에 따라 광해군일기 의 편찬에 착수한 것이 선조실록 의 수정이 늦어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선조실록 의 수정은 인조 19년(1641) 2월에 올린 이식의 상소로 다시 논의가 시작되 었다. 12) 이식의 상소와 수정청의궤 에 수록된 논의를 종합하면 방법론을 둘러싼 몇 가 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편찬주체와 史 局 의 구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지만 선조실록 수정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식의 2월 상소를 계기로 숙의한 결과, 이성구와 심열이 형편을 고려하여 수정을 미 루자고 하였으나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따라 수정작업을 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최명 길의 의견은, 사마광이 자치통감 을 편찬하였듯이 이식에게 수정을 전담하게 하고 이식 의 집에 사국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13) 이에 대해 이식은 조선의 역사편찬은 私 家 에서 사사로이 논의하여 결정하는 법이 없 고, 사마광의 통감 은 지나간 시대의 역사[ 前 代 史 ] 일 뿐이므로 당대사인 실록의 수정과 는 다르다고 최명길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14) 실제로 최명길의 판단은 심각한 사 실적, 명분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최명길의 무리한 일반화와 그에 따른 오류는 다른 논거가 필요하였고, 그것은 선조실록 의 수정이 갖는 본래의 의의를 약화시키는 데 로 이어졌다. 결국 이식의 견해는 춘추관의 계에서 다시 언명되었고 인조의 승인 아래 수 정작업은 이식의 제안과 구상대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있은 이듬해에 예조참판 이식은 영의정 崔 鳴 吉, 이조판서 李 顯 英, 행 호군 李 景 曾, 대사헌 徐 景 雨, 대사간 李 厚 源 등과 함께 청으로 압송되었다가 15) 인조 21년 어느 무렵 귀국하여 선조실록 수정 책임을 다시 맡았다. 이식은 檢 閱 沈 世 鼎 과 함께 赤 裳 山 城 에 가서 선조실록 중 잘못된 곳을 기록하여 따로 實 錄 謄 抄 한 책을 만 들어 춘추관에서 편찬할 때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16) 한참 실록 수정이 진행될 인조 24년(1646) 1월에 이조판서로 있을 때의 인사 문제로 이식은 파직을 당하였고, 그를 이 11) 인조실록 권6, 인조 2년 6월 신해조, 춘추관의 계. 12) 인조실록 에는 12일로, 수정청의궤 에는 15일로 되어 있다. 아마 수정청의궤 가 상소에 따 른 후속논의를 함께 게재하면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 이때 올린 상소는 선조수정실록 에 蔡 裕 後 後 記 와 함께 부록으로 실려있다. 택당집 별집, 권4에는 辛 巳 春 請 修 史 辨 誣 箚 로 수록되어 있다. 13) 수정청의궤 辛 巳 2월 15일, 李 植 의 차자에 대한 崔 鳴 吉 의 의견. 14) 수정청의궤 辛 巳 3월 18일, 行 義 興 衛 護 軍 李 植 의 상소. 인조실록 에는 19년 4월 신해조(6 일)에 수록되어 있다. 15) 인조실록 권43, 인조 20년 10월 경술조. 16) 인조실록 권44, 인조 21년 7월 갑진조.

5 朝 鮮 後 期 實 錄 編 纂 慣 例 의 변화 어 鄭 弘 溟 이 대제학이 되었다. 그 해 7월 다시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이번에는 文 科 別 試 의 初 試 一 所 와 二 所 의 논제에 역모의 기미가 있다 하여 罷 榜 되면서 관직을 삭탈당하 고 門 外 黜 送 되었다. 17) 昭 顯 世 子 의 세자빈인 姜 嬪 의 賜 死 에 이은 정국의 경색이었다. 18) 효종 8년에야 실록찬수청이라는 명칭이 광해군일기 를 편찬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라 하여 실록수정청으로 명칭을 바꾸고, 19) 강화도의 실록을 가져다 참고문헌으로 삼아 수정 을 재개하였다. 20) 이로써 粧 黃 을 마친 실록수정본은 모두 8책이었으며, 5곳의 사고에 두 기 위하여 모두 40책을 간행하였다. 21) 선조실록 수정 작업의 자료 중, 민간의 문집 등에 산재해 있는 자료의 수집에 대해 서는 이식의 刊 餘 本 에 목록이 실려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2) 즉, 간여본 에 실려 있는 修 史 綱 領 이 바로 수정에 필요한 수집 대상자료의 목록인 것이다. 綱 領 雜 記 疏 章 碑 誌 行 狀 으로 분류된 수사강령 은 실록의 수정의 기초자료가 무엇인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효종대에 끝난 2차 선조실록 수정작업에서는 수집 대상자료가 더 확대되었 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하기가 어렵다. 23) 수정작업은 기사의 보완-사론의 수정이라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선조 초반의 경 연,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중 의병활동 등의 기사를 포함시켜, 전체 분량으로 보 면 수정본이 1/5이지만, 선조시대의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필요한 기사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편찬된 것이 선조수정실록 이라고 하겠다. 한편, 수정본에서 사론을 통해서 원본의 기사를 수정한 인물은 모두 40명이다.(사론 52 則 ) 그 중에서 원본과 수정본에서 평가의 일치를 본 인물은 洪 汝 諄 ( 小 北 )과 李 冲 두 사람인데, 둘 다 비판을 받았다. 한편 원본에서는 높이 평가했는데, 수정본에서는 비판한 17) 인조실록 권48, 인조 25년 6월 임오조, 이식의 卒 記. 18) 吳 恒 寧, 朝 鮮 孝 宗 代 政 局 의 變 動 과 그 性 格, 태동고전연구 9, pp.13~16. 강빈 옥사에 대한 여론에 대한 인조의 불만이 이식에 대한 파직으로 이어졌지만, 이미 인조의 斥 和 派 신하들 에 대한 반감은 컸다. 특히 鄭 命 壽 가 第 三 使 로 왔을 때는 이식을 勅 使 의 館 伴 에서 바꾸려고 하 여 인조가 이식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 11월 을해조. 19) 효종실록 권18, 효종 8년 정월 을묘조, 纂 修 廳 의 계. 20) 효종실록 권18, 효종 8년 정월 계해조; 승정원일기 효종 8년 2월 17일(경인) 金 堉 의 말. 21) 수정청의궤 정유 8월 28일. 22) 오항녕, 역사가 이식, 문헌과해석 20호, 택당선생별고간여 十 七.(규장각, 古 Aa-v.1-9) 이하 간여본 이라 칭한다. 간여본 을 포함한 택당집 의 판본과 목록에 대해서는, 김문식, 이식의 문집, 택당집, 위와 같은 책, 참고. 23) 수정청의궤 移 文 秩 丁 酉 9월 13일. 효종 8년(1657) 9월 13일 전라감사에게 보낸 문서에 실록을 수정할 때에 사용했던 도내 南 原 에 사는 幼 學 조경남이 낸 난중잡록 4책과 속잡록 4책을 돌려주기 위하여 내려 보내니, 關 文 이 도착하는 대로 조경남에게 돌려준 다음 보고하라 는 내용이 있는데, 선조 15년부터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 이식의 수사강령 에 있는 趙 家 野 史 와 같은 책으로 보인다.

6 - 6 - 國 史 館 論 叢 第 105 輯 인물은 李 爾 瞻 奇 自 獻 朴 弘 耈 鄭 仁 弘 李 希 得 沈 宗 道 등이다( 朴 弘 耈 는 원본에도 평 가가 상반되는 두 사론이 같이 실려 있다). 이들 大 北 일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폄하함으 로써 결국 실록 수정의 명분이 그르지 않았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인간이라면 서인이나 남인, 소북 중에서도 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없을 리 없고, 또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원본에서 보여주는 대북 정권 담당자들의 자 찬과 배타성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韓 浚 謙 같은 遺 敎 7 臣, 李 德 馨 李 顯 英 같이 당색을 떠나 重 望 을 받던 인물은 물론, 柳 成 龍 鄭 逑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 열인 成 渾 李 恒 福 尹 斗 壽 申 欽 李 廷 龜 및 신진인 金 尙 憲 등은 예외 없이 원본과 수 정본이 상이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 李 廷 龜 는 폐모론을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음 에도 외교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광해군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을 정도로 文 名 이 높았는데도 그가 詞 賦 에 식견이 없다는 납득할 수 없게 비판함으로써 원본의 평자 들은 史 評 의 공정성을 스스로 훼손하였다. 2. 顯 宗 實 錄 의 改 修 현종실록 의 개수는 庚 申 換 局 (숙종 6년. 1670년)이 있고 나서 조정에서 바로 거론되 었다. 鄭 勔 은 許 穆 의 無 君 不 道 한 발언을 상기하면서 허목과 친한 총재관 權 大 運, 당상관 閔 點 이 참여한 현종실록 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24) 현종실록 은 金 錫 冑 가 대 제학을 그만두면서 실록청 당상관에서 체직된 뒤 閔 點 과 洪 宇 遠 이 당상관으로서 주도적 으로 편찬하였다. 25) 정면의 상소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領 議 政 金 壽 恒 은 현종실록 이 소략하므로[ 疏 漏 之 患 ] 따로 실록을 만들어야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左 議 政 閔 鼎 重 은 윤휴가 지은 현종 行 狀 의 왜곡 사례를, 현종실록 편찬 당시 대제학을 사직했던 兵 曹 判 書 金 錫 冑 는 許 積 이 摠 裁 官 을 맡으면서 자신이 찬수했던 기해년(1659년. 현종 즉위년)의 2개월 및 신축년 (1661년. 현종 2년)의 몇 달 치의 기록을 마음대로 고쳤던 것이 사직의 이유였음을 들어 24) 顯 宗 大 王 實 錄 改 修 廳 儀 軌 (장서각 이하 개수청의궤 로 줄임), 庚 申 七 月 初 十 日, 判 校 鄭 勔 上 疏. 頃 年 修 史 之 時, 權 奸 擅 國, 忘 先 王 陶 甄 之 德, 懷 一 時 怨 懟 之 心, 太 史 之 筆, 臨 時 圖 竊, 與 奪 在 手, 低 昻 隨 意, 則 厚 誣 先 王 變 亂 是 非 之 狀, 不 待 智 者 而 知 之. 及 其 脫 藁 之 後, 搢 臣 之 間, 頗 有 竊 疑 而 言 者, 固 未 知 某 事 某 政, 果 失 其 信, 而 槪 以 今 日 凶 逆 輩 負 殿 下 者 觀 之, 則 其 所 云 云, 誠 不 誣 矣. 年 前 許 穆 入 侍 之 日, 敢 以 先 朝 政 亂 等 語, 肆 然 進 達 於 天 威 咫 尺 之 下, 其 無 君 不 道 之 心, 於 此 畢 露 矣. 然 則 摠 裁 之 大 運, 秉 筆 之 閔 點, 平 日 心 術 與 穆 一 般 者, 安 知 以 不 韙 之 說, 加 諸 我 先 王, 與 許 穆 之 詬 誣 也 哉?. 25) 숙종실록 권6, 숙종 3년 정월 甲 午 條. 현종실록 에는 편찬관 명단이 첨부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편찬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顯 宗 大 王 實 錄 纂 修 廳 儀 軌 (장서각 )를 참고해야 한다.

7 朝 鮮 後 期 實 錄 編 纂 慣 例 의 변화 그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동시에, 급히 편찬을 종결지으려던 나머지 政 令 의 변통 및 錢 穀 甲 兵 刑 獄 등이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며 실록 개수의 논거를 강화하였다. 26) 이에 김수항 등은 춘추관 당상관 등과 함께 현종실록 22권을 고열하고 중요한 기사 가 누락되거나 잘못 기록된 부분이 많다고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의 논의에서는, 誤 字, 冠 禮 등의 누락, 文 理 의 오류, 姓 名 과 職 名 의 착오, 本 末 이 갖추어지지 않은 점 등이 현종실록 의 미비점으로 지적되었다. 27) 이렇게 하여 현종실록 을 개수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개수 사업은 時 政 記 를 刪 節 하는 일이 없으므로 各 房 당상관과 낭청은 차출하지 않고 都 廳 만 개설하였다. 이때 참여한 인원은 <표 1>과 같다. 관례대로 실록 개수청 사목을 마련하는 것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선조수정실 록 을 편찬할 때의 凡 例 를 참고하기로 하 <표 1> 改 修 廳 職 任 관직 및 인명 였다. 한편, 실록을 수정할 때면 늘 닥치 總 裁 官 議 政 府 領 議 政 金 壽 恒 工 曹 參 判 李 端 夏 는 문제이지만, 이미 현종실록 을 편찬한 뒤 시정기를 세초하였으므로 이때도 사관 都 廳 堂 上 吏 曹 參 判 李 敏 叙 行 弘 文 館 副 提 學 金 萬 重 이 私 藏 하고 있는 초본을 수납하기로 하고 前 正 李 玄 錫 弘 文 館 典 翰 崔 錫 鼎 승정원일기도 다시 이송하여 참고하기로 議 政 府 檢 詳 尹 敬 敎 하였다. 28) 그런데 그해 10월에 仁 敬 王 后 前 持 平 洪 萬 遂 都 廳 郎 廳 弘 文 館 副 校 理 吳 道 一 가 승하하자 중단되었다가, 卒 哭 이 끝난 弘 文 館 修 撰 李 師 命 뒤 이단하의 상소를 계기로 개수 사업을 재개하였다. 29) 吏 曹 佐 郞 趙 持 謙 弘 文 館 副 修 撰 林 泳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과는 달리 이번에 는 전면 수정, 즉 개수 였으므로, 현종개수실록 은 처음 실록을 편찬할 때의 찬수범례와 같은 내용의 14조항의 찬수범례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숙종 8년(1673) 3월 26일에 洗 草 하는 것으로 현종개수실록 편찬은 마무리되었다. 30) 수정이 아닌 개수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종개수실록 의 편찬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실록 편찬이었다. 수정이 아닌 개수라고 한 것은 곧 전면 수정을 의미하였 다. 그래서 현종실록 이 22권이었던 데 비하여 현종개수실록 은 28권으로 늘어났는데, 26) 숙종실록 권9, 숙종 6년 7월 壬 寅 條. 27) 개수청의궤 庚 申 七 月 二 十 七 日. 28) 개수청의궤 庚 申 十 月 初 五 日. 29) 숙종실록 권10, 숙종 6년 11월 丙 寅 條. 30) 개수청의궤 ( 癸 亥 ) 同 月 ( 三 月 ) 十 八 日.

8 -8- 國史館論叢 第105輯 이는 선조수정실록 의 편찬과 비교해볼 때 그 취지를 반영하는 차이점이다. 앞서 살펴본 선조수정실록 도 원본과 따로 수정실록을 만드는 체재를 택하였는데, 이 는 현종개수실록 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있다. 선조수정 실록 이 월별로 기사를 보완한 데 비하여 현종개수실록 은 날짜별로 기사는 물론 사론 도 다시 작성하는 체재를 택하였다. 이것이 권질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이고, 전면 수정 이라는 의미의 개수 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였다. 3. 肅宗實錄의 補闕正誤 숙종실록 의 편찬은 처음부터 사업이 원활하지 못할 환경에서 시작하였고, 잦은 정치 상황의 변동으로 인하여 수정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숙종실록 도 관례에 따라 숙종에 대한 흉례 중 졸곡이 끝난 경종 즉위년 11월에 춘추관의 발의로 편찬이 시작되었지만, 실록청이 마련된 것은 이듬해 4월이었다.31) 그런데 신임사화 등으 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편찬은 영조대로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영조 원년에도 여 전히 숙종 원년의 기사를 수정하고 있는 형편이었고,32) 이대로 가면 30년이 걸려도 완성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33) 그리 과장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숙종실록 이 거의 완성되던 무렵 정미환국이 일어나 노론이 물러나고 소론이 등장하면서 총재관이 李光佐로 바뀌었다.34) 李膺이 환국으로 실록을 찬수하던 신하들이 배척을 받고 물러난 사태에 대해 우려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그것이 현실로 드러 난 셈이었다.35) 이어 宋寅明을 實錄廳 都廳堂上에 임명하였다. 당시 사관은 이를 두고 31)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규장각 14168) 庚子(경종 즉위년. 1720) 十一月 및 辛丑 四月 初 一日. 32)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규장각 14168) 乙巳(영조 원년. 1725) 五月 二十三日. 左議政閔鎭 遠所啓, 肅宗朝實錄極其浩汗, 而半卷尙未修正云, 事甚未安矣. 臣曾見故判書宋相琦 與今右相修正 者, 乙卯(숙종 원년. 1675)三四月間事矣. 今聞吏曹判書之言, 則乙卯年五月實錄, 今方修正云. 如 是則前頭完畢, 了無其期, 極爲可悶. 민진원의 말에 나오는 수정 은 우리가 논의하는 원본에 대한 수정본이 아니라, 원본 편찬과정에서 이루어지는 刪削 의 다른 말이다. 33)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乙巳 九月 二十五日. 記事官申魯所啓, 大臣以實錄廳事有所仰達, 臣 亦有所懷, 故敢達矣. 臣以實錄主管郎廳, 連爲出見, 則實錄事汗靑無期, 誠爲可悶. 實錄堂上本爲六 員, 而三員在外, 赴坐者只是三員, 一日撰修不過三日之實錄, 以此計之, 則一年只修三年實錄, 將修 四十六年實錄, 則當至十五六年, 然此時擧其着實撰修之日而言之, 其間除其公私事故, 不得開坐日, 則數三十年內必無成書之望. 難測者事變, 以國朝事言之, 顯廟實錄 甲寅以後群壬撰修, 故庚申以後 改修, 以古言之, 宋之哲宗元佑實錄, 蔡卞輩修正, 故高宗朝將欲改修, 而原本已無, 故無計考准矣. 陸佑蓋太后私藏邊有原本一秩, 故幸得撰修. 今此實錄若修三十年遷延, 則前頭之患, 將無所不至. 34)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丁未(영조 3년. 1727) 七月 初十日. 35) 영조실록 권12, 영조 3년 7월 丁巳條.

9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9- 숙묘실록(肅廟實錄) 편찬 사업이 거의 다 끝나 가는데 局面이 갑자기 바뀌어 편찬이 정 지되었다가 李光佐가 실록을 改修하기 위해 송인명을 該廳 堂上으로 임명하였다 고 적고 있다.36) 사관의 예상대로 송인명은 肅宗實錄 의 개수를 청하였고, 이광좌의 동의를 얻어 개수 에 착수하였다.37) 영조가 개수를 허락하면서 근래 黨議가 심해져 막중한 실록에 사사로 운 견해가 잘못 기재된 경우가 없지 않다 고 하였고, 이광좌는 丙申年(숙종 42년 ) 丁酉年과 辛巳年(숙종 27년. 1701)의 기록이 바르지 않으며, 上疏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말만 기재하였는가 하면 인물의 生卒도 누락되었거나 꾸민 것도 있다고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38) 이로 인하여 영조는 당시 편찬을 담당하던 堂上官들을 削黜하라 고 명하였다가 역사를 편찬한 일 때문에 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반대에 부딪혀 명을 정 지하기도 하였다. 수정 체재의 윤곽도 이 날 마련되었다. 전면 개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시간이 오 래 걸릴 경우 정국변동[世變]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우세하여 누락된 곳을 別錄으로 하되 이미 완성된 실록은 개수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별록은 編末에 添錄하는 방법으로 편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수정 작업은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檢閱 鄭益河는 상소를 통해, 肅宗實錄 을 수정하자는 주장은 수정 작업을 補闕이라고 한 것부터 그르다며 수정의 부당성을 7가지 로 반박하였다.39) 첫째, 숙종 재위 46년간의 實錄은 74편에 달하는데40) 병신년 정유 년 신사년의 것만을 가져다가 본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빠졌다고 하는 기사가 軍國 典禮에 관한 것이 아니고 諸臣의 疏箚 隱卒에만 국한된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8년에 걸쳐 만든 실록을 改修하자고 하면서 나중에 누가 개수하자고 하면 국가의 체면에 걸린 문제라고 하는데, 똑같은 개수인데 왜 前後의 차별이 있는가? 넷째, 처음에는 전부 개수 하기를 청했다가 이제 補闕 이 正誤 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했는데,41) 補와 正, 闕과 誤는 전혀 다른 말이므로 왜 억지로 교묘한 말을 만드는가? 다섯째, 아침에 請對하였다 가 저녁에는 또 같이 들어가 秘史의 내용을 전하며 宸聽을 恐動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섯째, 史役은 사역이고 朝著는 조저인데 조저의 번복이 史役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우 36) 영조실록 권13, 영조 3년 9월 甲寅條. 37) 영조실록 권13, 영조 3년 9월 辛未條. 38)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丁未 九月 二十六日條에 좀더 상세하다. 39) 영조실록 권13, 영조 3년 9월 辛未條. 40) 여기서 말하는 74편이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참고로, 현전하는 숙종실록 은 65권이다. 각 권말에 첨입한 보궐정오 도 따로 권수를 매겼는데, 권수는 물론 원본과 같다. 41) 사실 이 말은 영조의 말이다. 영조실록 권13, 영조 3년 9월 甲戌條. 의궤 의 기록도 동일 하다.

10 國史館論叢 第105輯 려가 없을 수 없다는 말로 혼동을 초래하는가? 일곱째, 남이 不公正하다고 말하기는 쉽 지만 자신은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등이었다. 그러면서 그 는 수정론자들에게 秘史를 누설한 벌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42) 정익하의 상소는 그가 어떤 일로 파직되었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捧入하지 않았다. 하 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매우 공감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수정본의 명칭을 무 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의였다. 尹淳은 補闕이란 뜻은 빠진 기사[缺漏]를 첨가하는 일이라며 이렇게 표현하면 고쳐야 될 부분이 있을 경우에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때 영조의 답변이 바로 앞의 정익 하가 비판한대로 補闕 에는 正誤라는 뜻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었다.43) 그러나 윤순 은 매우 원칙적으로 문제를 파고들었다. 애초 편찬 담당자들이 史筆에 私心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黨議가 갈린 상태에서 聞見이 달랐으므로 是非와 予奪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보 았다. 결국 이런 기사를 수정하여 첨부하는데 補闕 아래에 섞어 기록하는 것은 부적절하 다는 것이었다. 결국 열람의 편의를 위하여 보궐 을 卷末에 첨입하기로 하였지만, 수정실록의 명칭은 다시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좌는 사건에 대한 의견을 추가로 기재한 곳도 있다며 명칭 변경을 제의하였고, 이에 송인명은 補闕正誤 라고 부를 것을 건의하여 그리 결정되 었다.44) 수정본의 명칭을 둘러싼 논의는 조금 구차스런 느낌도 든다. 사실 숙종실록 의 총재 관을 역임했던 민진원은 자신이 편찬책임을 맡은 실록을 잘못이 많다고 수정하는 마당에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45) 가운데 수정론자들이 공론에 위축된 점도 있을 것이지만, 역시 석연치 않은 명칭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편, 따로 수정본을 만들지 않고 권말에 보궐정오를 수록한 것은 무엇보다도 실록의 印刊이 끝나기 전에 보궐 논의 가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비교 열람의 편의성은 별책보다 별첨이 낫기 때문 이다. 42) 이런 주장은, 영조실록, 권13, 영조 3년 9월 戊寅條, 承文院 正字 尹得徵 등의 상소에서도 나타난다. 이 상소로 윤득징 등은 정배당하였다. 이후,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던 注書 李壽海는 印版을 함부로 반출한 보궐 담당자들을 탄핵하였다가 강진에 유배되었다. 영조실록 권21, 영 조 5년 3월 己巳條. 43)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丁未 九月 二十四日. 上曰, 頃日筵中, 初補闕正誤之意相議, 而但 以字數之稍長, 只擧補闕二字爲名, 而正誤之意, 自在其中矣. 44) 영조실록 권15, 영조 4년 2월 戊申條. 45) 영조실록 권25, 영조 6년 3월 庚午條.

11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景宗實錄의 修正 애초 경종실록 은 영조 즉위 후 바로 편찬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아직 숙종실록 편 찬이 완료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洪致中 같은 이는 時政記 刪節 은 실록 청의 설치와 상관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논리로 경종실록 편찬을 서두르게 되었고,46) 숙종실록 편찬이 마무리되던 무렵에는 숙종실록 에 이어 바로 경종실록 편찬에 착 수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47) 그러나 앞서 살펴 본대로, 정미환국으로 거의 완성 되었던 숙종실록 에 대한 수정논의와 수정작업이 이어지면서 경종실록 은 영조 8년 (1732)에 이르러 완성되었다.48) 경종실록 은 신임사화 등 경종대의 민감한 정치변동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었으므로 일견 가장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는 조건에 처해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수정논의 가 시작된 것은 정조대에 들어와서였다. 영조대 강력한 탕평정책의 추진이 실록의 수정논 의를 잠재웠을 수도 있지만, 당대에 두 번이나 실록을 수정하는 것은 영조의 입장에서도 면목이 서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경종실록 의 수정은 신임사화의 기록을 중심으로 발의되었다. 정조 원년, 전 正郞 李師濂은 奉化縣 太白山에 포쇄하러 갔다가 史閣에서 景宗實錄 을 보았던 경험을 근거로 경종실록 의 수정을 주장하였다.49) 노론의 4大臣의 偉烈을 영원한 惡逆으로 배 척하고, 趙泰耈 崔錫恒 등 역적의 魁首는 진심으로 宗社를 바로 세웠다고 기렸다는 것이 다. 그러니 이제 영조실록 을 편찬하는 길에 경종실록 도 함께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46)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규장각 14168) 丙午(영조 2년. 1726) 四月 十七日. 右議政洪致中 所啓, 大行朝實錄蓋緣肅廟朝實錄未畢, 故未始役, 而時政記刪節亦未得設廳, 事甚未安矣. 卽今實 錄廳都廳堂上外, 其餘諸宰亦多有之, 且刪節與撰修有異, 實錄則雖待後日, 而刪節則姑先爲之, 何 如? 上曰, 刪節亦有廳名耶? 右參贊沈宅賢曰, 謂之撰修廳, 而大臣言, 出都廳堂郞及各房堂郞耳. 洪致中曰, 國恤後, 卽始時政記刪節之役, 而仍設實錄廳, 故有都廳堂上郎廳, 而只爲刪節, 則不必依 此例爲之矣. 上曰, 刪節與撰修, 有異乎? 洪致中曰, 有異矣. 以政院日記與時政記參考, 政院日記 中有可入者, 則付標, 時政記中有不可入者, 則以朱筆抹之, 俾便撰修時考閱. 此與都廳堂上事體稍 異矣. 47) 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 (규장각 14168) 丁未(영조 3년. 1727) 二月 初四日. 閔鎭遠曰, 肅 廟實錄撰修之役, 今方垂畢, 景廟實錄當次第撰修, 而諸議或以爲, 卽今堂上中撰修先畢者, 使之仍 修景廟實錄爲宜云. 或以爲, 姑待肅廟實錄校正訖工印役過半之後, 景廟實錄撰修堂上更爲啓下, 使 之始役爲宜云 上曰, 景廟實錄旣已刪節, 則未卽撰修, 實爲未安. 姑俟肅廟實錄撰修之告訖, 仍卽 始役, 而堂上更爲啓下, 可也. 48) 景宗大王實錄廳儀軌 (규장각 19357). 49) 景宗大王修正實錄儀軌 (장서각 ) 丙申(정조 즉위년. 1776) 八月 初三日. 실록에는 이 사렴이 전 佐郞 으로 되어 있다.

12 國史館論叢 第105輯 대신들과 대사간 柳戇의 동의를 얻어 정조는 수정을 결정하였다. 영조실록 과 경종실록 수정을 함께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경종실록 의 분량이 많 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실록청을 慶熙宮 備邊司에 설치하면서 都廳 堂上 에 徐命膺과 黃景源을 임명하였는데, 경종실록 은 黃景源으로 하여금 수정작업을 관장하 게 하였다.50) 경종실록 은 정조 3년(1779)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지만,51)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 다. 그때 경종실록 에서 수정할 곳은 수정이 끝났지만, 교정은 정조 5년에도 이어졌 다.52) 아마 영조실록 편찬과 작업 공정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데 실제로 두 실록은 奉安과 洗草도 같은 날짜에 거행되었다.53) 경종실록 이 이미 영조대에 인출되었으므로 수정본이 따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였 다. 숙종실록 을 제외하면 모두 원본이 인출된 뒤 수정이 이루어졌다는 공통성이 있는 데, 그럴 경우 원본과 수정본이 병존하게 마련인 것이다. 한편, 정조 3년에 宋德相은 舊 本 을 남겨둘 것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경종실록 이 15권인데 비하여 경종수정실록 은 5권으로, 체 재로 보면 선조수정실록 과 비슷하다. Ⅲ. 實錄 再編纂의 典範 1. 朱墨史의 前例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선조실록 의 수정은 조선시대에 처음 있었던 실록의 수정이었 다. 상식적으로 볼 때, 수정작업이란 원본과 수정본 사이에 어떤 변화를 발생시키기 마련 이다. 예를 들어, 수정을 하였으면 수정본만 남기고 원본을 폐기하든지, 원본에 수정을 하든지, 선조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의 경우처럼 원본과 수정본을 모두 남기든지 하는 선택이 필요하게 된다. 이식이 수정작업의 前例로 처음 언급한 것은 중국 宋나라 朱墨史 였다. 중국 宋나라 高 50) 景宗大王修正實錄儀軌 戊戌(정조 2년. 1778) 二月 十三日. 英宗大王實錄開局於慶熙宮備邊 司. 總裁官, 領議政金尙喆, 都廳堂上, 判中樞府事徐命膺 左參贊黃景源 及各房堂上會同始役. 景 宗大王實錄改修之役, 都廳 上黃景源專管修正. 51) 정조실록 권8, 정조 3년 7월 庚戌條. 宋德相의 啓. 52) 景宗大王修正實錄儀軌 辛丑(정조 5년. 1781) 六月 十七日. 53) 景宗大王修正實錄儀軌 辛丑 七月 初六日.

13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宗이 남쪽으로 파천했을 때 아직 行都도 정해지지 않았고 和戰 여부도 결정되지 않아 혼 란이 극심한데도, 元祐太后가 먼저 國史를 개수하여 宣仁后의 誣告를 가릴 것을 청하였 다.54) 그러자 고종이 곧 史官 范冲에게 명하여 이전 역사에 근거해서 개수케 하였던 초 안이 주묵사였다. 범충은 신종실록 을 수정하면서 考異 를 저술하였는데,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한 것은 붉은 글씨로 썼다. 세간에서 이를 주묵 사 라고 불렀다고 한다.55) 효종대 채유후도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資治通鑑綱目 에도 考證 集覽 集覽正誤 등이 저술되었으며, 선조실록 처럼 正邪가 바뀐 경우 주묵 사의 예에 따라 바로잡되 新舊本, 즉 선조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을 모두 보존하겠다고 말하였고,56) 그 결과는 현재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이후 실록 수정의 典範은 이 주묵사였다. 숙종대 현종실록 의 수정이 논의될 때 인조 대 이식이 선조실록 을 수정한 사실이 선례가 되었는데,57) 이때 서로 어긋난 논의가 있 었다. 金德遠은 실록을 개수한 전례가 없으며, 宋 哲宗[紹聖] 때 蔡卞 등이 청하여 개수한 神宗實錄 [裕陵實錄]은 본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趙師錫은 채변의 추한 역사 는 남송에 이르러 개수하였는데, 왜 잘못된 사례를 들어 사안을 호도하느냐고 반박하였다.58) 사실은 이러하였다. 哲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宣仁后가 섭정을 하였는데, 王安石派 54) 선인은 宣仁后로, 송나라 英宗의 부인. 성은 高氏. 哲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 다. 王安石派를 물리치고, 司馬光 등을 등용하여 元祐之治를 이루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女 人 堯舜이라고 칭찬하였다. 元祐 8년(철종 8년. 1093)에 돌아갔는데, 2년 뒤, 章惇 蔡卞 邢 恕 등이 근거 없이 헐뜯었다. 황태후와 태비가 변론하여 일이 마무리되었다. 고종 때에 이들이 장순 등의 죄를 밝히고 선인후의 집안을 기렸다( 宋史, 권242, 列傳1, 后妃上). 55) 宋史, 권435, 열전194 儒林5 范沖傳. 冲之修神宗實録也 為考異一書 眀示去取 舊文以墨書 刪去者以黄書 新修者以朱書 世號朱墨史 及修哲宗實録 别為一書 名辨誣録. 송나라 고종은 재위 ) 선조수정실록 부록, 蔡裕後의 後記 및 효종실록 권19, 효종 8년 10월 갑술조, 大提學 蔡 裕後의 말. 考證 은 徐昭文이 元나라 順帝 至正 19년(1359)에, 集覽 은 王幼學이 元나라 晉 宗 泰定 원년(1324)에, 集覽正誤 는 陳濟가 明나라 成祖 永樂 20년(1422)에 각각 저술하였 다. 이러한 저술에 대한 언급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역사 연구와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데, 따 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겠다. 57) 숙종실록 권9, 숙종 6년 7월 壬寅條. 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金壽恒曰, 頃日鄭勔疏中兩件 事, 自上答以與大臣熟講處之. 史局事嚴秘, 臣無以得詳, 而第聞其踈略太甚, 無以考信垂後. 宣廟實 錄爲昏朝羣孽所誣, 仁祖改玉, 命故判書李植修正, 未及畢纂, 至孝廟朝始得完役. 旣有先朝故事, 今 可別修一本, 與前本並藏, 而事體重大, 令春秋館堂上, 奉審實狀後, 禀定爲宜. 58) 숙종실록 권9, 숙종 6년 7월 임인조, 刑曹判書金德遠曰, 實錄改修, 前古所無. 惟宋紹聖中, 蔡卞建請改修, 此不可爲法. 知中樞趙師錫折之曰, 蔡卞等醜史, 至南宋而改修. 此即所謂朱墨史, 獨 不可爲今日證, 而乃引紹聖間不當引之事乎?.

14 國史館論叢 第105輯 를 물리치고 司馬光 등을 등용하여 元祐之治를 이루었으나 선인후가 元祐 8년(철종 8년. 1093)에 돌아가자 곧이어 章惇 蔡卞 등이 선인후를 모함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장순과 채변, 曾布 등은 신종실록 을 重修하면서 王安石의 日錄을 실어 사실을 뒤엎고자 하였던 것인데,59) 이것이 김덕원이 말한 오늘날 본받지 말아야할 개수 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묵사 는 그것이 아니라, 宋 高宗이 범충에게 명하여 신종실록 을 개수했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사석이 김덕원에게 반론을 제기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덕원이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한편, 숙종실록 을 수정할 때도 바로 이 사실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金有慶이 숙 종실록 을 수정하려는 사람들을 蔡卞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때 김유경의 논의가 흥 미롭다. 김유경은 채변 등이 舊史는 검은 먹으로 쓰고, 新史는 붉은 먹으로 썼기에 당시 에 朱墨史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채변 등은 神宗實錄 을 수정하면서 애초 神宗實 錄 을 편찬한 范祖禹와 黃庭堅을 安置시켰는데 왜 지금의 수정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 느냐고 비꼬았다.60) 김유경의 비판이 있자, 수정을 담당하고 있던 尹淳은 과거의 잘못된 수정편찬만을 거 론하여 자신들을 채변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은 송 철종[元祐] 시대의 君子에 비견하였다 며 반발하였다. 이어 宋寅明도 이로 인해 상소를 올려 혐의를 피하려 했지만, 영조는 웃 어넘기라고 비답을 내렸다.61) 이렇게 조선후기 실록 수정의 근거로, 여러 수정의 전례 중에서도 范冲의 수정 사례만 을 올바른 주묵사 의 전범으로 채택하였다.62) 또한 원본과 수정본을 동시에 남기는 관례 도 주묵사에서 연유하였는데, 이런 관례는 경종실록 의 수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59) 宋史 권18, 本紀第十八 哲宗二. 紹聖元年 戊辰, 同修國史蔡卞請重修神宗實錄 章惇提舉修神 宗國史 已酉修國史曾布請以王安石日錄載之神宗實錄. 60) 영조실록 권27, 영조 6년 9월 乙亥條. 刑曹叅判金有慶上疏, 略曰 且於史事, 尤有所凛愓訝 惑者, 昔宋哲宗時, 蔡卞以爲神宗實錄, 多有擬似不公處, 請改其史, 而舊史則以墨書之, 新史則以朱 書之, 當時謂之朱墨史. 此與今日補改者, 同爲一揆, 而當初修史諸人范祖禹黃庭堅輩, 皆被安置之 律. 頃年筵中大臣, 至以修史不公, 斥臣等, 而終不加以罪者, 抑何意也? 旣改其史, 則修史者之有 罪, 不但明有舊例, 揆諸事理, 刑政斷不可置之. 伏願聖上, 特命攸司, 亟正常典. 疏入, 敎曰, 追提 徃事, 累度申飭, 而如是殊涉未安. 還爲下送. 61) 영조실록 권27, 영조 6년 9월 丁丑條. 工曹判書尹淳上疏, 略曰, 臣得見金有慶之疏, 復提史事, 口氣猶前, 覔來前代改史中昏亂之轍, 至比於朱墨史, 驅人於蔡卞之徒, 而自居以元祐君子. 君子小 人, 自有後來公議, 固付之一哂, 而臣之無似, 猥當編摩, 犯人忌怒. 卒使先朝實錄, 受此醜目, 臣何 足言, 有辱隆委, 批曰, 當付一哂, 何足過嫌? 吏曹判書宋寅明, 又因金有慶疏, 上疏引嫌, 賜優批. 62) 실록의 수정뿐이 아니라, 승정원일기[銀臺起居注] 수정의 전범도 주묵사 였다. 영조실록 권 82, 영조 30년 7월 戊寅條. 大司憲南泰齊上書, 略曰, 日昨重臣元景夏所請對者, 本事迄無處分, 臣竊惑焉. 臣按宋史, 以范冲直史館重修神宗哲宗實錄, 一洗宣仁皇后誣, 世稱朱墨史 嗚呼! 金櫃 石室之藏, 尙請改修, 況銀臺起居注乎?.

15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그 근거 역시 범충의 주묵사였다.63) 그러면 이러한 주묵사를 모범으로 한 수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새겨보겠다. 우선,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실록편찬에 상당한 예산이 투여되었으리 라 짐작되는 만큼, 또 세초된 사료에 해당하는 자료를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았던 만큼 이 왕 편찬된 실록을 폐기하고 따로 수정본을 만든다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수정해야될 기록도 있지만, 단순한 사실에 대한 기사 등 그대로 두어도 될 기록도 상당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문은 검은 글씨, 뺄 것은 노란 글씨, 새로 삽입한 것은 붉은 글씨 하는 식의 주묵사 형식을 기계적으로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원본과 수정본을 동시에 보존 하는 방식도 기본 원리는 같았다. 주묵사 방식 수정이 갖는 또다른 의미는 역사를 남기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이 점은 수정작업의 규모 에 대한 논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을 수정할 때 이식 은 다른 관점이나 사실을 제공하는 사료를 함께 보관해두는 것도 주묵사의 교훈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는데, 한편에서는 이런 정도의 수정으로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던 듯하 다.64) 이식이 처음 선조실록 의 수정에 관심을 갖고 이런 견해를 제출한 것은 광해군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아 잠시 관직을 떠난 적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외교관료로서의 능력 때문에 줄곧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또 선조실록 편찬에 간여한 적이 있고 계해반정 이 후 그 수정의 필요성을 맨 먼저 제기했던 李廷龜를 통해서였다.65) 기사별로 검토하면서 수정해야한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辨誣錄 처럼 한권의 책을 편찬하는 방안도 기각되었 다.66) 그래서 기사별로 검토하고 수정본을 편찬하기로 한 것이며, 이에 따라 이식이 적 상산성에 내려가 수정해야될 대목을 조사한 실록등초 를 작성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조수정실록 은 주묵사의 원리가 기사별 검토 수정이라는 수정작업의 규모에 적용된 결과인데, 그 기본정신은 이후 수정 편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 시대의 典 刑을 후대에 증거로 남기는 것, 즉 원문 기사와 수정 기사를 구별함으로써 보는 사람 들 63) 정조실록 권8, 정조 3년 7월 庚戌條. 召見經筵官宋德相. 德相 又啓言, 景廟實錄, 今旣釐正, 則舊本並存, 誠甚不緊. 投諸水火爲宜. 上曰, 我朝列聖朝實錄中, 釐正本及舊本, 亦有兩存之事. 至 於宋時范祖禹所修之史, 章蔡輩又復變改, 其後范冲更釐正, 而前後兩本, 亦爲並行, 時人謂之朱墨 史. 以此觀之, 兩本俱存, 亦古例也. 64) 수정청의궤 辛巳 2월 15일, 大提學 李植의 차자. 臣又以爲收拾野言家祿 折衷筆削 附藏史庫 亦是朱墨之遺意 而難者又以不大湔洗 止於小補爲歉. 65) 수정청의궤 壬午 5월 19일, 行虎賁衛司直 李植의 상소, 臣於甲子春 親見故相臣李廷龜以某日 記出示且曰 吾欲傳寫一本 藏於史庫 臣答以不但此也 他日記亦可收藏云矣 其事雖不竟 臣之創意於 此事 則實由故相之言啓之也. 66) 수정청의궤 辛巳 2월 15일, 大提學 李植의 차자에 대한 收議. 行判中樞府事沈悅以爲 或者 曰 畧倣哲宗辨誣錄古事 成一家書藏之史庫 則事可易就 而百世之後 是非可定云 此設近之 而亦非 所以大洗誣筆之汚衊 痛雪先朝之羞辱 莫如考閱原本隨事釐正之爲當.

16 國史館論叢 第105輯 이 그 사실에 대한 객관성과 시비를 판단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식이 수정 작업을 수행 할 공적 구조 를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사실 주묵사는 고친 기사와 원래 기 사를 구분하는 편리한 방법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편의 성 을 실무 당사자의 편의성이 아니라, 역사를 수정하는 태도 라는 사회적 의미로 받아들 였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실록의 수정에 주묵사를 전범으로 채택한 의미는, 성리학적 역사인식 일반이 갖는 최종 심판은 후대 사람의 몫이라는 역사관, 곧 후대 사 람들의 눈을 현재화하는 역사관 을67) 당대사인 실록의 수정에 적용하여 자신들의 수정 작업마저도 객관화시킨 데 있다고 하겠다. 2. 再編纂의 背景과 餘波 어떤 역사상의 변화든 그 변화에는 조짐이 따른다. 그 조짐은 종종 결과론적 해석의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물의 근본적인 성격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주의를 끌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초와 실록편찬이라는 국사체계의 중심 구성요소에 나타난 조짐을 보기로 한다. 그것은 조선 후기 상례가 되다시피 했던 실록 개 수(수정) 및 이러한 실록 개수(수정)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사초 소각 논 의이다. 선조실록 의 수정으로 시작된 조선후기의 실록 개수는 인조 효종 시기를 제외하고 이후 세 차례 더 진행된다. 선조실록 의 수정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 이루어진 실록 수정이기는 하지만, 역사기록은 사실에서 사론에 이르기까지 오류를 바로잡거나 보완이 필요하므로 늘 수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그 수정 자체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한 실록의 편찬이나 수정에 대하여 연구할 때 수정작업의 원동력을 정치권력으로 환원 시키는 것도 그 해석의 편협성으로 인하여 다 아는 이야기의 반복 정도로 밖에는 사실인 식에 도움이 되질 못한다. 각각의 실록 수정이 갖는 함의는 그 수정이 이루어진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점은 원본과 수정본을 동시에 남겨두는 주묵사의 전례 를 따랐다 는 점이다. 이는 실용적인 이유 이외에도 수정 행위를 객관화시킬 근거를 남겨놓는다는 의미에서 볼 때 긍정적인 수정 원칙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숙종실록 의 補闕正誤에 이은 경종실록 의 편찬 단계에 이르면 계속된 실록 의 수정은 이제 주묵사의 理想 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아닌 정치현실에 휘둘린 결과라는 67) 吳恒寧, 性理學的 歷史觀의 성립:超越에서 現實로, 조선시대사학보 9, 1999.

17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쪽으로 사회적 인식이 바뀌게 된다. 이무렵 洗草에 대한 논의는 거듭된 수정이 어떤 결과 를 초래하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의 두 사료를 보자. 實錄廳堂上 尹淳이 아뢰기를, 연전에 尹尙白이 藝文館에 있을 때에 洗草하지 말자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 回啓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왕이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다. 영의정 이광좌는 말하기를, 史草에는 翰林의 공정한 말과 강직한 筆法이 많으니, 세초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라고 하였고, 윤순은 國初에는 세초하는 예가 없었는데, 宣祖實錄을 纂修할 때에 大北의 黨人들이 公議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비로소 세초를 創始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문에 후에 그 예에 따라 세초하였으니, 좋은 史記와 올바른 筆法을 장차 어디에서 찾겠습니 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초하는 것은 그 뜻이 있으니, 혹은 보고 들은 것이 각기 다 름으로 인하여 반드시 是非를 다투는 폐단이 있을 것이오 68) 이광좌가 翰林의 時政記를 洗草하지 말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실록을 찬수할 즈음에 만약 사사로운 뜻을 따라 그 褒貶과 是非를 임의로 操縱하여 한 조각의 文書를 만든 뒤에 時政記 의 草稿를 세초해버린다면, 참으로 옳고 그른 것을 後世에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 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세초는 근래의 사례에서 나온 것으로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고 하였다.69) 첫 번째 사료에 나오는 윤순의 말을 먼저 보자. 그의 말 중에서 國初에는 세초가 없었 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고 세초가 바로 선조실록 을 편찬한 뒤 大北 정권의 실록편찬 담당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윤순은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다. 이는 단순히 윤순의 세초에 대한 지식이 틀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어지는 영 조 4년의 논의에서도 윤순은 여전히 세초를 이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초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연산군 때 성종실록 을 편찬하기 전부터 세초가 있었다 는 기록이 발견되지만, 대체로 사초관리원칙이 정해진 뒤인 세종실록 편찬 무렵일 것으 68) 영조실록 권14, 영조 3년 11월 丁丑條. 實錄堂上尹淳奏曰, 頃年尹尙白之在翰苑也, 有勿爲洗 草之語, 而尙未回啓矣. 上詢于大臣. 領議政李光佐曰, 史草多翰林之公言直筆, 勿爲洗草似宜. 淳 曰, 國初無洗草之規. 宣廟實錄, 大北黨人, (專掌纂修, 一任其私好惡,) 慮有公議, 始創洗草, 故其 後依例洗草, 良史筆法, 將何以考信乎? 上曰, 洗草有意. (史草中一時取捨, 安能盡善?) 或因見聞 之各異, 必有爭是爭非之弊. (嘵嘵之世, 補闕之役, 至矣盡矣, 而又不洗草, 則紛挐之言, 何以鎭定 乎? 洗草宜矣.). 69) 영조실록 권15, 영조 4년 2월 戊申條. (摠栽官李光佐 實錄堂上尹淳 宋寅明等請對入侍. 上 曰, 實錄補闕, 別成一部乎, 卷卷添入乎? 光佐曰, 初欲別成一部, 而爲便於考覽, 入諸卷末, 有入一 二張者, 有入四五張者矣. 淳曰, 冊名欲名補闕矣, 撰出後更看, 則或有入已見, 追改處, 補闕之名, 未能包括, 故有此禀請矣. 寅明曰, 遺處收而書之, 是非異於事實, 則改以書之, 若曰補闕, 名實異 矣, 若名正誤, 不爲包涵. 抑合四字而爲名耶? 上曰, 然則名以補闕正誤, 可也.) 光佐請, 翰林政記, 勿令洗草. (上曰, 如此世道, 存之必有弊矣.) 光佐曰, 實錄纂修, 若循私意, 其所褒貶是非, 打成一 片之後, 時政記從以洗草, 則眞箇是非, 後世何由而知之乎? 淳曰, 洗草出於近例, 古則不然矣. (上 曰, 山野自有公論矣.).

18 國史館論叢 第105輯 로 생각된다. 그 후로 세초는 극비문서인 사초의 누설로 인한 사회문제를 우려한 예방조 치이자, 실록편찬 마지막 단계의 예식으로써 관례화되었다.70) 그러므로 우리는 윤순 정도의 학식과 경륜에도 불구하고 세초를 이렇게 이해하게 된 배경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그 배경은 계속된 실록의 수정이 아니었나 한다. 즉 수정작업 의 최대 난관은 바로 편찬 후 사초가 세초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사초를 이용할 수 없다 는 것이었으며, 계속되는 수정의 경험은 세초의 애당초 의미까지도 다시 해석되게끔 만들 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한다. 윤순의 말 중 마지막 대목이 바로 세초를 하면 좋은 史 記와 올바른 筆法 을 잃는다는 것인데, 사초를 근거로 실록을 만들면 되었지 또 사초를 보존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 전래의 상식이며 윤순의 말에 대한 영조의 답변이 그 상식이 었다. 그러면 의도했든 아니든 윤순이 사초를 남기자는 말의 결과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의 논의 결과 그것은 실록이 좋은 史記와 올바른 筆法 을 보장하지 못하므로 사초를 남기 자는 말로 귀결된다. 바로 아래 이광좌의 말이 또 다른 증거이다. 이광좌가 사관의 사초가 담고 있는 공정성과 필법을 높이 사는 뜻으로 세초에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논의의 핵심은 실록 편찬의 불공정성이며 그 불공정성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드는 세초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때의 논의가 바로 경종실록 의 수정에 대한 논의의 와중에서 있었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대로 계속된 실록 수정이 세초 논의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광좌의 주장은 영조의 반대로 좌절되고 세초는 관례대로 이 루어졌으며, 또 세초는 실록편찬 뒤에나 있는 간헐적인 사안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세초 논의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 논의의 함의는 다음에 살펴볼 영조 11년의 한 사건과 관 련하여 음미할 필요가 있다. Ⅳ. 國史體系의 변동 1. 翰林自薦制의 폐지 그것은 사초를 둘러싸고 벌어진 에피소드인데, 주지하듯이 사초는 세종 때에 이미 국 법으로 엄격히 관리토록 정하였고, 이후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 대한 경험에서 중종 2 년에는 편찬 중의 사초를 누설하는 행위도 처벌하게 함으로써 사초관리는 작성부터 세초 에 이르기까지 매우 철저히 관리되었다. 70) 오항녕, 앞의 논문, 조선시대사학보 26, 2003.

19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그런데 그 사초를 불태운 일이 영조 11년에 발생하였다.71) 무슨 이유에선지 경연에서 사초를 태울 것을 주청하였고 이를 영조가 용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 없고 또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도 상세하지 않다. 영조는 누차 자 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고 하교하였는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담당 사관들 도 사초의 소각을 방관하였다는 점이다. 영조 3년과 4년의 세초 논의가 實錄 編纂 단계의 문제라면, 史草의 소각은 記事 단계 의 문제로 사관제도라는 체계의 근저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소재 가 專任史官인 翰林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사초에 대한 것 이든, 사관에 대한 것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에 있는 이상 불이 옮겨 붙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짐의 구체적인 실례이자 전래의 사관제도를 뿌리부터 흔든 사건은 사관 자천 제의 폐지와 권점제의 시행이었다. 실록이 사관제도를 기반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면, 사 관제도의 변화는 곧 실록이 갖고 있던 사회적, 국가적 의의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예 측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사관제도의 변화, 특히 예문관 8한림에게 주어진 여건의 변 화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다. 예문관 소속 전임사관이라 할 수 있는 8명의 한림은 조선시대 양반관료제 내에서도 독 특한 인사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관료제 운영의 핵심이 人事와 職能이라고 한다면, 한림은 사초의 작성과 시정기의 보관 및 실록편찬이라는 업무를 수행할 때 외부의 간섭을 가능 한 배제하고 적극적이고 주체적, 자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인사상으로도 나름의 제도 적 보호장치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를 翰林 自薦制라고 한다. 이는 이들이 7품 이하의 품계와 관직이면서도 신임사관인 검열(정9품)을 선발할 때, 선임 검열이 다른 한림들의 동의를 얻는 것만으로 실제적인 신규임용을 마무리하는 인사 제도였다.72) 이러한 인사제도를 통하여 이들은 直筆 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몇몇 우여곡절에도 불 구하고 사초나 실록이 갖는 권위를 이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또 역으로, 자천제로 사관 을 임용해도 그 공정성에 문제가 없다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만큼 사관의 내부 인사 71) 영조실록 권40, 영조 11년 2월 甲寅條, 前檢閱李德重 前待敎鄭履儉上疏, 略曰, 臣等職名雖 削, 職責尙存, 事係史法, 不得不言. 君上之言動 時政之得失 人物之善惡, 皆得以書之, 以傳於天下 後世. 雖以人主之威尊, 不敢覽其所錄, 禁其所書, 盖欲時君之畏此簡書也. 臣等聞, 日昨筵臣請焚史 草, 而殿下許之, 左右史又復拱手立視其焚. 臣等未知筵中酬酢爲何如, 而殿下旣已下敎於諸臣, 則 其書不書, 惟在史官, 非殿下之所可命也. 噫, 古之爲史者, 有頭可斷, 筆不可斷之語, 今之諸臣, 旣 無上命, 因人言而焚之, 將啓無窮之弊. 願命兼春秋追錄, 以付臣等. 批曰, 爾等之請, 可謂擧職. 旣 無本草, 豈可追錄? 是後上亦悔之, 屢有焚草, 非予命之敎. 72) 吳恒寧, 여말선초 사관 자천제의 성립과 운영, 역사와현실 30, 1998.

20 國史館論叢 第105輯 와 직능이 淸職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이렇게 3백년 이상 이어져온 사관 자천제는 영조 17년에 이르러 변화를 맞는다. 이전 에는 사관임용이 늘 자천제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본 골격은 유지되었 다. 그런데 여기에도 몇몇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사관의 新薦 과정에서 당색에 따른 임 명 경향이 두드러지자 별겸춘추 를 임명하여 사관을 천거토록 하는 조치가 몇 차례 감지 되는 것이다.73) 원래 별겸춘추는 인조 때에 한림직이 오랜 동안 비자, 최명길의 의견에 따라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인물로 하여금 천거하게 했던 임시조처였던 것인데,74) 영조대에 오면 이 런 별겸춘추에 의한 사관천거가 매우 빈번해졌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당쟁에서 연유하기도 했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탕평을 추구했던 영조의 정국운영구도의 결과이기 는 했지만,75) 길게 보면 한림자천제로 상징되는 사관제도가 긴장감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결국 영조 17년 3월에 柳壽垣이 올린 官制序陞圖를 계기로 해서 붕당 혁파 정책의 일 환으로 한림자천제를 혁파하기에 이른다.76) 그리고 한림자천제[翰林回薦]를 대신하는 한 림회권을 시행할 목적으로 10조에 걸친 翰薦釐正節目 을 의정하였다. 그 핵심은 제1조 에 나와 있다. 첫째, 翰林의 추천은 본관에서 弘文錄의 예에 의거하여 모여서 논의하고 추천하여 圈點한 뒤에 都堂錄의 예에 의거하여 영사 감사 관각 당상이 다시 모여서 권점한다.77) 한마디로 사관의 자천권을 관료제의 위계에 따른 임명방식, 즉 당상관 이상의 판단에 따르는 인사방식을 택하겠다는 것이 이 조치의 요점이었다. 이 조치는 翰林圈點(翰林本館 圈點) 都堂圈點(翰林館閣會點) 翰林召試로 정리되어, 속대전 에 실리게 된다.78) 73) 영조실록 권13, 영조 3년 10월 丁酉條 영조실록, 권47, 영조 14년 11월 丙子條 등. 74) 인조실록 권43, 인조 20년 4월 戊申條. 75) 金成潤, 朝鮮後期 蕩平政治 硏究, 지식산업사, 1997, pp ) 영조실록 권53 영조 17년 3월 庚寅條. 上御晝講 論罷朋黨, 行蕩平之道, 左議政宋寅明曰, 柳壽垣謂翰薦當罷云, 其言是矣 先是, 柳壽垣進官制序陞圖, 其法取文官之當入承文院者, 皆考試 分等, 壯元則弘文館正字, 其次爲藝文館檢閱, 又其次爲承文院正字, 如是則名官翰薦樹黨之廢, 可 以革袪; 영조실록, 권53 17년 4월 癸丑條, 命革罷吏郞通淸之法及翰林回薦之規. 77) 영조실록 권53, 영조 17년 4월 丙辰條. 翰薦釐正節目成. 春秋館領事金在魯 監事宋寅明 趙 顯命 知事鄭錫五 同知事鄭羽良之所議定也. 節目凡十條. 一, 翰薦自本館, 依弘文錄例, 會議薦圈 後, 依都堂錄例, 領監事館閣堂上更爲會圈也. 其二, 翰林若備三員, 則當會圈, 而此是創法之初, 則 時任不過一人, 曾經之人, 依兼春秋例, 職在堂下者, 使之並參. 其或不齊, 依時任薦例, 備三員則擧 行也 史臣曰, 是時用事者, 患士大夫不付己, 欲盡收淸要之權, 援進廢錮諸族, 以廣蕩平之路. 然 未有以發, 會柳壽垣上官制序陞圖, 宋寅明 趙顯命等, 與元景夏同議, 遂力贊之, 請斷自宸衷, 於是, 直命罷郎選改史薦.

21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이후 검열 黃景源의 상소를 필두로79) 사관들의 극렬한 반대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한천이정절목 은 관철되었다. 그 결과, 한림 같은 冗官에 배치되느니 한림 선발에서 떨 어져 說書 등 出六이 쉬운 자리를 가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생기는가 하면, 권점에 참여 하는 자가 85명을 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영조가 직접 한림권점에 간여하는 등80) 청직으로서의 사관의 위상은 날로 쇠락하여 갔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대사헌 金魯鎭에 의하여 자천제를 복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 고,81) 동지춘추관사 조준에 의해 소시 폐지 건의에 이은 정조와 조준의 논쟁이 있었지 만,82) 끝내 한림 자천제는 복구되지 않았다. 영조대에는 강력한 탕평책으로 한림자천제 가 폐지된 것이라면, 정조가 右賢左戚 의 논리로 사대부정치를 표방하면서도 별도로 규 장각 抄啓文臣을 통하여 문흥을 꾀하였고, 이미 실록의 대안으로 日省錄 편찬을 진행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림자천제의 복구를 통하여 사관제도를 강화할 이유는 없었던 것 이다. 그러니 한림의 충원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형편이었다.83) 정조는 영조의 치적 중에서 均役法을 시행한 일과 함께 한림자천제의 혁파를 大政 으로 평가했던 것이다.84) 2 實錄 纂修凡例의 변화 실록 편찬이 그저 춘추 직임을 겸했다는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갈 무렵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가 실록 편찬범례의 변화이다. 먼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본다. 78) 續大典 권1, 吏典 京官職. 翰林圈點, 一依弘文錄例, 參外人員, 按榜謄出, 而時任翰林及曾經 人員, 齊會圈點, 取次點以上-若僨卷, 則大臣及館閣堂上, 更爲會圈.-, 倣宋朝館職召試例, 領 監 事, 館閣 春秋館堂上 玉堂人員, 參考科次, 取三下以上被選人, 從試等次第付職-圈中在喪罷職人 員, 追後召試, 焚香 回薦 應講等舊規, 一切革罷-. 79) 영조실록 권53 17년 4월 丁巳條. 80) 영조실록 권81, 영조 30년 6월 丙寅條. 命招大臣館閣堂上, 行翰林會圈 敎曰, 圈則雖精, 而 今成敗圈, 其令館閣會圈, 於是, 大臣及春秋館堂上會圈, 取二十二人, 上命添入宗室子李廷烈李顯 祉二人. 81) 정조실록 권2, 정조 즉위년 8월 戊申條. 82) 정조실록 권2, 정조 즉위년 10월 辛亥條. 83) 정조실록 권8, 정조 3년 12월 庚申條. 命都堂行翰圈. 敎曰, 翰林不備, 館職閣職每多苟難, 況 今翰林只有二員, 無以會圈, 適因他事, 已皆罷職, 翰圈令都堂擧行. 84) 정조실록 권29 정조 14년 2월 庚辰條. 批曰, 圈事之如許, 由於偏私舊習. 畢竟妥帖, 特在一 號令間事. 違牌諸堂, 皆已承召, 以卿之尋箚引義, 應試諸人到闕下, 尙無動靜, 卿須安心造朝. 至於 具庠事, 觀於卿箚, 益知其所不知. 卿箚中, 未知譴罷等罰, 可以整頓已頹之綱耶云者, 誠然誠然. 待 卿登筵, 當有加等處勘, 竝須諒之. 濟恭肅命, 乃設翰試. 命以擬本朝經筵官, 請於翰選改薦爲圈, 以 遏朋比傾軋之習爲箋題. 金履喬等無意製進. 上曰, 此題所重有在, 先大王五十年盛德大業, 惟在去 黨革私, 罷翰薦與均役, 同一大政也.

22 國史館論叢 第105輯 朝鮮後期 實錄 纂修凡例의 변화 英祖實錄 纂修凡例 1. 史官時政記, 注書日記, 內外兼春秋所記外, 備邊司狀啓軸, 禁府推案, 刑曹緊關可考文 書, 事變推鞫注書日記, 亦爲取來憑考備錄 2. 凡詔勅及本朝有關敎書, 考出以書 3. 名臣, 書卒, 有關者及所書疏略者, 或憑一 時公議, 或取考文集碑誌, 詳悉補書 4. 每日只書甲子 5. 凡災異, 更考觀象監抄錄一一添書, 如外方 風雨地震等, 各項災異須考其時啓聞備書 6. 臺諫所啓, 初啓盡書要緊之語, 連啓則只書 連啓書之, 而或有添入緊語則抄出 7. 臺諫所啓, 只書憲府諫院, 勿書來啓人姓名, 而初啓時則具書姓名, 有大是非處, 發論立 異人, 不可不書. 御使姓名及黜陟與弊瘼變 通等事, 亦詳書 8. 疏章緊關者, 備細載錄, 其間閑漫文字, 或 加節減無妨, 至於循例辭職疏箚, 則不必盡 書, 而或有去就是非, 事關時政者, 則亦不 可不書 대상, 내용 正祖實錄 纂修凡例 (13. 講筵, 只書處所篇名, 文義有可書者, 書之. 摛文講義盡錄 14. 賓對, 皆書而只曰於某堂引見大臣備局堂上 수집 자료 15. 入侍筵說, 有關係者, 書之 19. 審理, 皆書而判付中, 只論理於傅(?)生用律者, 載錄 20. 鞫獄囚供, 則只緊關語, 載錄) 12. 事大交鄰使行 及勅行, 皆書, 有關係文字事實, 외교 詳載 卒記 날짜 干支 1. 每日只書甲子 災害 2. 凡內外災異備書, 有年及歲饑書 臺諫(啓) 22. 臺啓, 只書憲府諫院, 勿書來啓人姓名, 而初啓 時, 具書姓名, 有大是非處, 發論立異人, 詳書 臺諫(人名) 御使 24. 御使, 黜陟弊瘼變通等事, 詳載 23. 疏啓, 疏則以略曰載要語, 啓則撮要書之, 辭職 疏章 疏有關係去就是非時政者, 書之 3. 官職差除, 內則九卿以上, 文而亞三銓 內閣三 司長官 國子長, 武而將臣, 南而臺通抄選, 外 9. 凡除拜, 閑雜冗散外, 更考兩銓文書, 詳錄 除拜 則方伯 統閫西北 閫內外 陞擢外, 非有事勿 書. 大政外勿書, 有政直曰, 以某爲某職 10. 各年登科人員, 書取某等幾人 各年登科 25. 各年登科, 書取某等幾人 4. 戶口每式年每歲末, 獻民數書之 賑貸, 摠載邑名巡數口數穀數蠲減, 只載傳敎 11. 軍兵數 及京外法制 與戶口數, 各該文書相 軍兵, 戶口 (5. 或綸音, 而有事實則詳書 考詳錄 6. 歲入歲計, 以最盛最約, 書之 7. 貢獻恩澤, 有關係者, 書之) 12. 凡無益煩冗文字, 參量刪去, 務從簡重 刪去 방법 (21. 非大營建, 勿書, 有關係處, 雖小亦書)

23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英祖實錄 纂修凡例 대상, 내용 正祖實錄 纂修凡例 8. 儀註, 初行儀外, 勿書. 舊儀中, 有新定式, 詳 載 9. 祀典之屬於沿革者, 詳書 節目之有關大典禮 及沿革者, 底一字載錄 13. 朝家吉凶諸禮, 係干憲章, 可以垂示後世 吉凶諸禮 11. (10. 動駕殿座, 雖闕內, 皆書. 祭享, 非親享勿書, 者, 文雖煩雜, 不可不備載 別祭享則書 16. 御射, 只載四十九矢, 初見處餘, 勿盡錄. 親臨 試射亦書, 而賞典只曰施賞有差 17. 各都監堂郞儀節事實, 詳載) 14. 京外黜陟, 公私是非, 必須抄其大段者以書 黜陟, 是非 18. 流配以下罪名, 非有關係者, 勿書 御書 (27. 御定諸書, 載錄書名) 이미 조선 초기에도 그러했으리라 판단되지만 실록의 찬수범례가 명확히 사료로 확인 되는 것은 인조실록 편찬에서인데, 이후 내내 14개항의 찬수범례를 통하여 실록을 편 찬하였다. 그 14개항의 찬수범례는 위의 표에서 보듯이 영조실록 편찬까지 이어졌으며, 정조실록 편찬을 계기로 27개항으로 바뀌었다.85) 그런데 찬수범례의 변화는 단순한 듯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86) 우선, 실록편찬과 같은 위상의 국가 차원의 사업에서 찬수범례를 바꾸는 일은 관례를 준수하는 시대의 여건으로 보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그 관례 이상의 의미가 있는 무엇이 없이 바뀔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실록 을 謄錄의 하나로 보든 역사서로 보든 찬수범례가 편찬물에 미치는 영향은 형식적인 것 이 아니라, 곧 그 기록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는 왜 생겼을까? 그 단서를 다음 기록에서 읽을 수 있다. 先朝의 실록을 편찬할 때도 시정기나 정원일기가 비밀이나 깊은 내막을 기록하기는 했지 만 전체와 세목[全體細目]은 일성록에 근거하여 이를 藍本으로 삼았으니, 史家의 믿을만한 기록으로 일성록만한 것이 없다.87) 일성록 찬수범례인 柳本藝의 瀛閣規例 가 작성된 것이 순조 27년(1827)이므로 위에 85) 吳恒寧, 仁祖大王實錄纂修廳儀軌해제 등, 藏書閣所藏儀軌解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pp 참고. 인조실록 찬수범례만 13개항인데, 필사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86) 吳恒寧, 조선시대 時政記 編纂의 規定과 實際, 한국사학사학보 8, ) 柳本藝, 瀛閣規例 (규장각6321), 日省錄凡例序. 是以先朝實錄撰出時, 左右史無不發秘摘 幽, 而若其全體細目, 必資日省錄, 以爲藍本. 凡史家之信筆 莫尙於是書也.

24 國史館論叢 第105輯 서 말하는 先朝의 실록 은 곧 정조실록 이 된다. 필자는 여기서 말하는 전체 체재와 세 부 기사[全體細目] 가 곧 찬수범례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며, 立綱摠例 天文類 祭享類 臨御召見類 頒賜恩典類 除拜遞解類 疏箚類 啓辭類 草記書啓別單類 狀啓類 科試 類 刑獄類 舊例書今例不書秩 各月抄上文書 雜錄 日曆凡例 등 16항의 일성록 찬수범 례 중 立綱摠例 를 제외한 나머지 찬수범례에 따라 정조실록 의 실록찬수범례로 삼았다 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후 27개항의 찬수범례는 철종실록 편찬까지 이어지며, 이 러한 현상이 곧 일성록 찬수범례가 실록의 찬수범례를 규정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생 각한다. 동시에 일성록과 실록의 위상의 다른 표현이며, 이 점은 다음 국사체계의 인식에 서도 확인된다. 3. 日省錄의 등장 앞서 사초나 한림의 직제 운영에서 그 변화의 조짐과 실제를 확인하였고, 실록의 찬수 범례에 끼친 일성록의 영향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조선후기 국사체계의 변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정조 원년에 병조판서 蔡濟恭이 공공연히 예로부터 사관의 時政記는 볼만한 것 이 없어서 承政院日記만도 못하다 이름은 史冊이지만 믿을 수가 없다 고 한 것도 이러 한 흐름에서 나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채제공은 비록 추고를 당했지만88), 사관들의 반 발이나 원칙적인 公論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림이 주체가 되어 작성하는 사초, 나아가 실 록의 위상은 저물어가는 조선왕조와 함께 서쪽 산자락에 걸려 있었다. 이에 비하여 일성록 편찬은 정조가 주도하였고, 정조가 의욕적으로 선발한 규장각 閣 臣이 사관의 역할을 하면서 이루어진 성과이다. 어찌 보면 홍문관 관원이 겸춘추였던 법 규를 생각하면 규장각 초계문신들이 사관의 임무를 띠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데 정조는 한림이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각신들에게 요구하였다. 정조 9년에 정조는 檢校待敎 尹行恁에게, 사관의 임무는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다. 임금의 과실을 적어야 한다. 그래야 책무를 다했다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역사가 잘못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죽음에 해당한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의 뒤를 따르며 그 잘못을 지켜보았다가 기록 한다 고 하였다. 그대들은 사관의 자리에 있으니 이 뜻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89) 88) 정조실록 권3, 정조 원년 5월 己丑條. 89) 弘齋全書 권174, 민족문화추진회국역본17권, 원문 p.46. 史官之職, 不特記言記動, 必書人君 過失, 然後可謂盡其責. 古人有言曰, 史不其過, 其罪殺之. 又曰從君之後, 伺君過而書之. 爾等職在 史官, 須銘念此義-檢校待敎臣尹行恁乙巳錄.

25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라고 하였다. 우선, 兼春秋라도 翰林 이외의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 직접 史官 이라고 말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정조가 각신들에게 사관의 역할을 기대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어지는 정조의 말도 한림인 사관의 책무에 다름 아닌 것이다. 결국 정 조대 이후 사관은 사실상 두 職群이 있게 되었던 셈이었다. 이들에게 맡긴 일성록 에서 붕당의 온상이라고 생각하는 한림의 사초에 기초하여 만 들어지는 실록의 대안을 찾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닐 것이다. 다시 柳本藝 의 瀛閣規例 일성록범례서 첫머리를 보자. 우리나라 國史에 둘이 있다. 춘추관에 시정기가 있고, 승정원에 일기가 있다. 좌사와 우 사의 자리이다. 시정기는 사관이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것으로 사고에 보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 일기는 매일 승정원 주서가 파일을 만들어 6방 승지의 문 서를 등록하는데 전교축이라고 부른다 그 사적의 중요하고 그렇지 않고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 기록하며 소차는 뒤에 이어 쓴다. (일성록은) 승정원일기에 비하여 내용은 줄였지만 실제 사안은 상세하고.90) 한마디로 말하면, 일성록이 사관의 사초나 시정기, 주서의 승정원일기보다 낫다는 것이 다. 여기서 그렇다고 해도 실록은 계속 편찬하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실록과 비교한다거나 실록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실록은 여전히 왕조의 권위의 또 다른 표상이며, 그렇기에 왕조가 다하는 날까지 끌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 다. 先王의 典禮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의 상대화 내지 실록의 기본자료 였던 시정기의 폄하는 결과적으로 실록의 의의를 감소시키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일성록 의 편찬은 이렇듯 실제적인 국사체계의 정점에 있는 실록의 대안만은 아니었다. 당 송 이후, 기거주 시정기 일력이 있었는데, 일정한 곳에 사관을 두어 보관하였다. 그 런데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볼 수 없었으며, 모두 후세에 역사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 었을 뿐이다. 가까이에 두고 일상적인 반성의 자료로 삼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91) 90) 柳本藝, 瀛閣規例 (규장각6321), 日省錄凡例序. 國朝史有二焉, 春秋館有時政記 承政院有日 記, 此則左右史之職也. 時政記者, 記事官蓋論時政之得失, 藏之史庫, 他人不得見焉. 日記則每日院 吏, 以繩穿集, 六房文書翌朝草裝之, 謂之傳敎軸, 入直注書以大冊, 不計其事蹟緊漫, 手自全錄, 疏 箚則連書於其末, 藏之政院矣. 奧自正廟朝, 初年有御撰日記, 曰日省錄, 己亥設內閣以後, 仍命閣 臣, 代撰成書, 而其出艸則, 入直檢書掌之. 每日收輯諸文書出艸後, 閣臣監正之. 其法, 每一事必立 綱係目. 刪繁而取要, 有絲綸批判則全錄, 而諸臣奏啓文字無不刪抄, 比諸政院日記, 文省而事詳, 實 合於記事者, 必提其要矣. 如春官之儀注, 道臣之狀啓, 還給之上疏, 金吾秋曹之囚供及殺獄案, 上言 鳴錚之啓, 事大交隣文字, 使行聞見別單, 則政院日記中所不載, 而獨載於日省錄. 必書姓名, 採其事 實, 入於挾注, 筵說則事尤秘焉. 注書所記, 閣臣親自刪折以上, 其詳且備有如此者. 91) 群書標記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日省錄六百七十五卷. 唐宋以後, 則有起居注, 有時政記, 有 日曆焉. 然其書藏之有所, 掌之有官, 非有事則不得考, 蓋所以傳信後世而已. 若乃置諸屛宁之間, 作

26 國史館論叢 第105輯 라고 하여, 일성록의 목적 자체가 현재적 필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이복원이 일 성록서 에서 밝힌 대로 옛 역사를 거울삼는 것은 오늘날을 살피는 것만 같지 못하다 는92) 언명과 통하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조선후기 사회변화의 역동성은 옛 역사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작은 일이 아니다. 당시에도 각 기관의 등록이나 승정원일기는 행정과 정책결정 등을 참고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사실, 있는 國史나 謄錄만 가지고서 도 위에서 말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93) 결국 핵 심은 영구보존할 역사기록이면서 비밀문서로써, 왕조의 멸망 이후에나 공개될 실록의 대 안이 일성록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일성록은 영구보존할 역사기록이지만 항시적인 열람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실록이 가진 닫힌 보존성 과 전혀 다르다. 특히 국왕의 열람이 가능한, 아니, 비유하자면 국왕이 주도한 실록이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대 문화적 성 취 일반을 후대에 전하고 평가를 기다림으로써 의의를 갖는,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 성리 학적 훈련과 사유를 바탕으로 지켜졌던 실록 중심 역사인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일성록의 공개가능성, 개방성은 지식계층의 증가와 민권의 신장에 따라 얼마든 지 접근 가능한 국가기록관리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가능태를 품고 있었다. 특히, 국왕의 재위기간을 단위로 편찬되던 실록에 대신하여 단순한 연대기 방식의 국가문서 등록은, 의 도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시간적 구획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 에서 왕조체제 균열의 다른 표현이었다.94) 그러나 그 가능성이 늘 긍정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관료사회의 자기정 화능력을 유지하고 긴장감을 주었던 사관제도가 한림권점을 통하여 완전히 관료제에 편 입된 상황에서 국왕의 전권에 의한 국가기록의 관리는 기록을 통한 견제와 긴장의 기능 을 유지하는 데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정조라는 탁월한 개인의 노력으로 일성록이 빛 爲燕濩之省, 則槩未之聞也. 92) 李福源, 日省錄序. 監乎古不如察乎今, 求諸人不如反諸身, 此日省錄所以作也. 93) 우리가 또 확인할 것은 실록만이 아니라 승정원일기 조차도 그 대안이 모색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바로 내각일력 이 그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방대한 양의 내각일력 은 승정원일 기 가 엄존함에도 따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그 편찬 의의에 대한 사색과 분석이 필요하다. 正 祖實錄 권11, 정조 5년 2월 丙辰條. 內閣日曆, 倣政院日記之例, 每日入直閣臣修正, 檢書官編 寫, 而筵話之事係本閣者, 入侍注書, 錄送本閣. 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성록의 체재나 일성록을 창안한 정조의 역사 학습은 역시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성록에 적용한 강목 체재는 쉽게 기사의 요체와 내용을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강목체의 실용성 때문에 채택된 것이라고 해도,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생원 진사와 함께 학습한 강목강의 는 일성록의 체재와 정조의 역사관이 그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 사한다. 弘齋全書 권 , 經史講義 綱目 참고.

27 朝鮮後期 實錄編纂 慣例의 변화 을 보고, 이후 풍부한 기록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를 엄격히 감시하고 견제할 세 력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기록이 도삭되는 등의95) 폐해를 피할 수 없었다. 정조대 淸論 士類가 분해되고, 정파간의 상호 견제구도가 무너졌으며, 국왕의 정치적 역할이 설 땅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집권세력은 몇몇 京華巨族의 연립에 의한 외척 세도 독재로 나아가고 있던 조선 말기의 현실은,96) 사관제도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실록 중심 의 국가기록관리체제에 대신할 어떠한 주체와 제도를 적어도 기존 정치체제 내에서 용인 할 수 없을 만큼 보수화되어 가고 있었다. 일성록의 긍정적 가능성은 결국 조선왕조의 멸 망 이후에나 꽃피울 씨앗이 아니었을까 한다. Ⅴ. 결 론 조선후기 실록편찬의 가장 큰 특징을 든다면 그것은 전에 없던 수정 작업이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미 편찬된 원본을 부정하고 수정본을 편찬함으로써 각기 역 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평가받으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런 문화는 조선시대의 문치주의에 그 뿌리를 둔다. 네 차례에 걸친 실록의 수정은 역사적 평가를 중시한 문화적 풍토와 정세의 변화에 기 인하였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실록은 당대사였으므로 실록 편찬에서 정치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설명만 으로 각각의 수정 작업이 갖는 의의를 포괄할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는 무엇이 역사적 진실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차례의 실록 수정은 편찬체재의 측면에서 각각의 특성이 있었다. 선조실록 의 수 정은 記事의 보완과 誣史 의 수정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래서 경연, 동서분당, 의병활 동 등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기사를 대폭 보완하였고, 인물에 대한 사론을 수정하였다. 현종실록 의 수정은 수정 작업 자체를 改修 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전면적인 재편찬 작업이었다. 완전히 새로 편찬한 결과가 현종개수실록 이었다. 또 숙종실록 의 수정은 기본적으로 선조실록 의 수정과 궤를 같이하지만, 각 권마다 권말에 보궐정오 를 첨부하 는 체재를 갖추었다. 이는 숙종실록 이 채 印刊되기 전에 수정논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체재였다. 마지막 경종실록 의 수정은 선조실록 수정의 경우와 같은 방식으 로 재편찬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수정, 개수, 보궐정오 라는 각각의 명칭은 나름대로 95) 李泰鎭 洪順敏, 日省錄 刀削의 실상과 경위, 韓國文化 ) 유봉학, 정조시대 정치론의 추이,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9.

28 國史館論叢 第105輯 이유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 재편찬의 典範은 朱墨史 였다. 宋 高宗 때 신종실록 을 수정했던 범충의 수정본 인 주묵사가 그것이었다. 다른 재편찬[改修]보다 범충의 주묵사는 역사를 바로 잡은 전례 로써 선조실록 을 수정할 때 李植이 논거로 삼은 이래 내내 수정 편찬의 모범으로 인식 되었다. 그리고 주묵사는 붉고 검은 글씨로 본래 기사와 수정 기사를 구별하여 알아보기 쉽다는 편집의 실용성에 더하여, 자신들의 수정 행위를 객관화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였 다. 주묵사의 전례는, 원본을 폐기하지 않고 수정본과 함께 보존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남기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숙종실록 을 수정할 영조 초반부터 계속된 실록의 수 정으로 인하여 실록을 정점으로 하는 국사체계 의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곧 실 록의 수정은 실록에 대한 신뢰, 구체적으로는 실록 편찬에 관계된 주체들의 신뢰에 흠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실록 편찬에서 서서히 사관인 한림의 기사, 즉 史草에 대한 불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결과, 3백년 이상 사관의 책임성과 자율성을 담보해주던 翰林自薦制가 폐지되고, 다른 관료조직과 마찬가지로 圈點制를 통하여 사관을 임명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편찬되기 시작하는 日省錄은 실록의 위상을 넘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좌로, 실록의 편찬 범례를 일성록 범례를 기준으로 정하였던 것을 들 수 있 다. 정조실록 부터 적용된 27조의 찬수범례는 일성록 범례의 차용이었다. 先代의 유산 인 실록 편찬의 관례를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일성록을 時政記나 承政院日記보다 우위에 있는 역사기록임을 주장하는 등 곳곳에서 실록 중심의 국사체계 가 균열되는 양상이 나타 났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고는 이 시기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의 서두에 불과하다. 네 차례의 실록 수정은 각각의 특성이 좀더 정치하게 밝혀져야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일 성록 과 실록을 둘러싼 국사체계 의 변동은 그 견해에 대한 이론적 실증적 뒷받침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점을 유념하는 것으로 소고를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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