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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논문 2005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국가인권위원회

2 Contents 목차 우수상 1/ 1 2/ 59 3/165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정유진 오사카대학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 국제인권법 중심의 한국 양심적 병역거부 논의에 대한 고찰 오시진 고려대학교 법학과 4학년 중국 내 탈북여성에 대한 인신매매와 강제송환 이해정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북한학 협동과정(석 박사 통합과정) 가 작 1/213 2/297 3/337 4/393 여성인권의 실현과 법적 규제 홍성수 영국 런던정경대(LSE) 대학원 박사과정 이주노동자들의 언어인권에 대한 생태론적 고찰 박휴용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대학원 박사과정 이주노동자협약 가입을 위한 정책 제언 박미경 한양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과정 해외 입양인의 인권 보호 박희정 건국대학교 법학과 3학년

3 우수작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정유진 오사카대학 대학원 문학 연구과 석사과정

4 차 례 요 약 5 1. 시작하는 말 7 2. 몸 글 8 1) 개인이 겪는 문제 로서의 국가안보 8 2) 국가안보와 개인의 안전 13 3) 평화를 지키자? 18 4) 타자들의 인권 23 4)-1 배려 로서의 인권의 한계 23 4)-2 기지촌과 인권 문제 27 4)-3 양심적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31 4)-4 모병제 논의의 문제점 맺음 말 41 1) 피해자 / 가해자 와 거리 두기 41 2) 고통을 말한다는 것, 듣는다는 것 45 3) 평화를 만든다는 것 46 4) 생명을 해치지 않을 권리 50

5 요 약 인권, 생각할수록 어려운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 곳곳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이 죽고 피범벅이 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가는 일상에서 인권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 의 존재에 대해 말하기도 어려운데, 그 존 재의 권리 를 논한다는 것은 철학적/윤리적/역사적/사회적/문화적/정치적 맥락과 더불어 생 각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나는 사람의 권리가 만들어져가는 유동 적인의 과제라 할 때, 살상 집단 없는 세상에서 살 권리, 살상 집단 의 구성원 혹은 그 공범자가 되지 않을 권리(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을 권리) 역시 행복추구권, 생명권의 일환으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 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더 이상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 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성찰에서 비롯되었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다.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은 테러 근절, 테러와의 전쟁 을 떠들어대지만, 우리는 그 말에 숨어있는 테러리즘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이겨내겠다는 메커니즘은 그 주체가 누구이든 백전백패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테러(전쟁)의 과정 에서 죽음을 원하지 않는 수많이 이들이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세계무역센터 등이 파괴되어 3천 여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 테러의 결과였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인 테러리즘은 전쟁용 무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살상 훈련을 지속하는 것, 그 자체 일 것이다.

6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정 유 진* 1) 1. 시작하는말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서 내려 1번 버스를 타고 20분 남짓 지나면, 의정부 교 도소와 미군기지가 잇달아 모습을 드러낸다. 캠프 스탠리 다음 정류장이 의정부시 고산동 116번지, 기지촌 뺏뻘 이다. 정식 행정 구역은 고산동이지만,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는 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보통 뺏벌 이라 불린다. 미용실, 세탁 소, 양품점, 식당, 기념품 가게, 국제 결혼 중계 사무소, 사진관, 교회, 미군 전용 클럽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지 모퉁이의 작은 마을. 그곳에 가면 박인순씨 를 만날 수 있다. 그는 기지촌 여성들의 쉼터인 두레방의 오랜 회원이자 다큐멘터 리 영화 나와 부엉이 의 주인공이며, 매주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림 그리기 프로그 램에 참여하는 마음 여린 학생이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를 사람들은 인순 언니, 혹은 인순이 아줌마라 부른다. 그의 초창기 그림 중 배고픈 새 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빼빼 마른 새 두 마리가 서로를 의지한 채 마주 보는 그림. 배고픈 새. 검은 색으로만 그려진 그림 에는 지독한 굶주림과 외로움, 그의 삶의 고통이 천형( 天 刑 )처럼 배어 있다. 그 그 림을 접하기 전까지, 나는 새가 배고플 거라는 상상을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힘없이 축 늘어진 부리와 날개, 가녀린 다리의 새는, 지금까지 내 마음속 한 구석을 헤집어 놓는다. 지난 1993년 10월에 발족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는 미군 주둔의 문제를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운영위원, 오키나와대학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7

7 국제 관계나 정치, 안보의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문제로 제기하 고자 노력해왔다. 국가 안보라는 상상된 신념 속에 묵인되어온 외국군 주둔의 문 제를 국제 질서 혹은 국민 국가 간 경계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의 삶의 가능성, 일상의 정치 문제로서 제기하고 고민해왔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미군의 존재를 아메리카/양키 의 군대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이 글은 미 국 에서 군대 로 방점을 이동시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군대와 관계 맺게 된 개인의 문제를 응시하는 작업이다. 국가와 국민, 군대와 인권, 국민 내부의 타 자( 他 者 )를 둘러싼 각 영역들 사이의 가치는 서로 경합하고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 서는 어떠한 가치가 어떠한 명분으로 우선시되고 있는가? 본 논문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 국가 안보와 개인의 안전, 2) 군 사주의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 3) 개인의 행복과 인권을 최대한 실현하는 가치로 서의 평화 문제를 고통의 문제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모색하는 작은 시도이다. 또 한, 이 글은 장기간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과정에서 주변화, 도구화 되어 왔던 피 해자 인권 문제에 관한 소고( 小 考 )이자, 배고픈 새 들의 삶과 죽음, 그들의 욕망 과 고통과 연대해왔던 NGO 활동가들의 현재 진행형인 고민의 일부이기도 하다. 2. 몸 글 1) 개인이 겪는 문제 로서의 국가안보 세계 총생산의 22%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과 18%를 점하고 있는 일본과의 동 맹 관계를 군사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일미 안보 체제 이다. 세계적 으로 양국의 경제권을 유지시키는 것이 일미의 군사 동맹, 안보 체제의 본질 일 것이다. 만약 안보 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번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라면, 일본 번영의 그늘에 무엇이 있는가. 오키나와 군사기지가 오키나와 민 중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 기지의 목표가 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곳의 누 구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 아라사키 모리테루( 新 崎 盛 暉 ) 1)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8 굵직한' 미군 범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민 단체들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 (SOFA) 개정과 미국 대통령의 사과, 정부 차원의 대처 방안 등을 요구하고, 언론 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거나 재편집한다. 기지촌 여성 운동 단체인 두레방 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활동했던 나는 위의 주장이 지극히 당연한 것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니 나 또한 그렇게 주장하곤 했으면서도, 언제나 허기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항상 그런 식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또 마무리(?)되는 사회 분위기에 저항감을 느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미군 범죄 피해자가 겪는 일상의 고통, 삶과 죽음의 문제가 그들의 언어로 전달되 지 못한 채, 종속적인 한미 관계와 불평등한 SOFA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로 수단화/단순화 되는 것, 한미 동맹이라는 허울 아래 사람의 목소리가 지워 져 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가슴 한 구석에 늘 응어리처럼 남아있다. 미군 범죄, 기지 환경 문제 등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10월 윤금이씨 살해 사건 이후라는 사실, 그리고 위의 일련의 과정이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이들의 열정과 헌신의 결과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왜 언제나 피해자가 생겨야만 미군 주둔 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 게 되는 것일까? 이 같은 불편한 마음은 20대 대부분의 시간을 인권운동단체 에 서 보냈던 나 자신, 나의 활동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나 라는 활동가 개인의 역량 문제임과 동시에 미군 주둔과 관련한 운동 층이 두 텁지 못한 한국 사회운동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윤금이씨 사망 사건 이후, 1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이 문제에 관한 담론 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미국 대통령이 사과하고 한미 SOFA가 개정되고, 미군이 철수하면 된다는 식의 단순화된 도식이 사람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무디게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한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현실의 엄중함을 강조하는 국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외국 군대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개인 들의 입장에서, 미군 주둔과 관련하여 말해지지 못하는 것 은 무엇일까? 의식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일상에 포진되어있는 군사주의 문제가 외국군에 대 1) 아라사키 모리테루( 新 崎 盛 暉 ) 沖 縄 の 基 地 はなぜあるのか, 敎 えられなかった 戰 爭 沖 縄 編 (1998, 映 像 文 化 協 會 )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9

9 한 분노, 미 제국주의 비판으로만 축소되어 표출됨으로서, 현재 한국 사회에 내재 한 다양한 종류의 폭력, 폭력이라 이름 붙여지지도 못한 영역의 문제가 은폐되는 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인다. 이런 식의 변화 없음 이 폭력을 예감 2) 할 수 있는 언어를 미처 찾아내기도 전에 그 가능성마저 제한시키는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는 피해자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기지가 일상적으로 존재함에 따라 발생하는 폭력과 그 폭력에 의해 변모된 사회는 외국 군대'가 없어지면 된다는 식으로 간 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상처 입은 삶과 죽음으로 웅 변하고 있었다. 작년 6월, 한미 양국은 공무 수행 중인 주한미군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의 피 해액이 400만원 이하일 경우, 빠르면 4주일 이내에 배상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공 무상손해배상상호협력방안합의서 에 서명했다. 3) 1992년 이후 기지 인근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지의 존재는 범죄나 훈련사고, 환경오염, 기지촌 성매매 등의 문제를 양산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위험성을 알고 있으면서 군대에 의존한 안보문제에 대해서는 어째서 상상력이 발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한 비공무중에 일어난 사건은 국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저 못된 미군 과 운이 나쁜 한국인 사이의 문제란 말인가? 나라를 지켜주는 외국 군인이기 때문 에 직무 수행 중의 과실은 국가가 개입하지만, 비공무 중에 발생한 문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공무와 비공무의 경계는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구분은 합당한 것일까? 공무와 비공무를 구분하는 권력과 피해자의 상처는 어 떠한 연관성을 가지는가? 공무'라고 명명되어, 국가 권력이 행사된다는 것은 무엇 을 함의하는가? 군대와 관련한 범죄와 사고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지에서 유출된 기름으로 절어가는 논과 밭, 폭격 훈련으로 망가지는 산과 바다 의 입장에서 공무와 비공무, 두 경우의 피해는 어떻게,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한 2) 예감 이라는 표현은, 폭력은 예방하거나 추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에서 감지하면 서 저항해야만 하는 과제라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문제의식을 빌린 것이다. 그의 책 전장의 기 억 (2002, 이산), 暴 力 の 豫 感 (2002, 岩 波 書 店 )을 참조. 3) 동아일보, 2004년 6월 12일자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10 미SOFA는 공무라 함은 합중국 군대의 구성원 및 군속이 공무 집행기간 중에 행 한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자가 집행하고 있는 공 무의 기능으로서 행하여질 것이 요구되는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라고 애 매하게 규정하고 있어 그 적용이 매우 모호한 실정이다. 4) 국가 기관인 군대가 발 생시키는 문제를 비공무 라는 이름으로 마치 군인 개인의 문제인 양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직무 유기가 아닐까? 이에 대해 오키나와의 미군인 군속으로 인한 4) 미8군 영안실에서 부책임자로 근무하던 군무원 맥팔랜드 알버트 엘은 , 군무원 해리스 킴 에게 시체방부처리용 포르말린 용액 470병(1병당 475ml)을 병마개를 열어 한 병씩 영안실 씽크대 에 쏟아버리도록 지시하였다 서울지검 외사부는 맥팔랜드를 수질환경보전법위반으 로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하였으나, 서울지방법원은 약식기소된 맥팔랜드를 직권으 로 정식재판에 회부하였다. 재판에 회부된지 무려 2년 9개월 여 만인 지난 서울중앙 지방법원은 피고인 맥팔랜드에게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법원은 1)피고인은 방부처리 전 문가이고, 방류된 포르말린 용액병에는 그 독성과 경고문구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어 그 해악성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직원의 강력한 반대를 무릎쓰고 포르말린 용액의 방류를 강요하 였던 점 2)피고인이 씽크대를 통해버린 시체방부처리용 포르말린 용액의 양도 적지 아니하여 피 고인의 죄질이 가볍지 아니한 점 3)피고인이 변호인 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재판진행 상황 등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소송서류의 송달이나 법정 출석에 전혀 응하지 아니한 점 등을 양형이유로 밝히면서 피고인의 행위는 고의적인 범죄행위로 공무집행에서 실질적으로 이탈 한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포르말린 용액병에는 치명적인 독극물로 암 유발물질이니 하수구 로 흘려보내지 말라 라는 경고문구가 적혀있었다) 미군당국은 공무증명서를 발급하면 서 이 사건이 한미양국 간의 민감한 현안임을 고려하여 미군당국은 공무증명서를 발행하지 아니 하였고, 피고인도 개인적으로 신속한 문제해결을 위해 벌금을 납부하겠다고 하고 검사의 권유에 따라 피고인이 자진하여 벌금을 예납하여 약식절차를 통한 이 사건의 종결을 도모하였으나, 대한 민국 법원이 사건을 공판절차에 회부하였으므로 (미군 측의) 제1차적 재판권을 주장하기 위한 공 무증명서를 발행한다 고 밝혔다. 미군 측의 입장은 피고인이 벌금형을 받는다면 대한민국에 1차 적 재판권이 있음을 인정, 그 결과를 수용하지만 정식 재판이나 그 이상의 형을 받는다면 그 결 과를 수용하지 않고 미군 측의 1차 재판권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피고인은 변호인을 통하여 1 심 판결에 대해 항소하였고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는 그에 대하여 출국정지 신청을 해 놓은 상태 다, 그러나 미군 측은 한국 사법부가 신병인도를 요구해도 거기에 응할 계획이 전혀없 다 고 밝혔다. 맥팔랜드는 현재 미8군 영안실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미군무원의 독극물 방류사건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고유경, 한국 사법주권을 조롱하는 미군당국을 규탄한다, 평화의 불씨 56호,( , 주한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좌세준, 판례평석 맥팔랜드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 의 1심 판결에 나타난 한미SOFA 규정상의 형사재판권 및 공무증명서 발급의 효력,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민주사회를 위한 변 호사모임)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11

11 사건 피해자 모임 대표인 에비하라 다이스케( 海 老 原 大 祐 ) 5) 씨는 공무와 비공무라 는 구별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안보를 명분으로 일본이 기지를 제공한 결과, 미국 군대가 직무(공무)로서 주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으키는 모든 사건, 사고, 불법 행위 등은 제도적, 구조적인 문제로서 일미 양국이 당연히 책임을 져 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에 의존한 안보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 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는 시스 템이다. 왜냐하면 안보 체제는 모든 사람 에서 배제된 타자의 희생을 담보로 해야 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가 주둔하는 이상 범죄와 각종 사고, 환경오염 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피해자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국가와 민 족의 안보라는 미사여구에 가려져 끊임없이 배제되는 타자의 영역을 어떻게 정치 화할 것인가이며, 누군가 피해자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안전 보장 의 위험성과 부정의를 어떻게 정치의 문제로 끌어낼 것인가이다. 안보 체제 내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사람은 누구이며 안전을 위협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군대는 정말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가? 사전에는 안전 ( 安 全 ) 1. 위험하지 않음, 위험이 없음, 또는 그러한 상태 2. 아무 탈이 없음. 예) 교통안전, 안보 ( 安 保 ) 안전보장. 예) 안전보장 태세 확립 이라고 나와 있다. 6) 아직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지 못해 '안전, 안보'라는 기존 용어를 그대로 쓸 수 밖에 없지만, 이 글을 통해 다시 생각하고 싶었던 안전(안보)이란, 사전적 의미 대 로 선험적,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완결된 상태 가 아니다. 나는 안보라는 개 념을 국제 질서 혹은 국민 국가 간 경계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의 삶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가치로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복잡성, 5) 에비하라 다이스케( 海 老 原 大 祐 )씨는 1996년 2월, 재일미군에 의한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다.(사 건은 비공무 로 처리되었다). 당시 에비하라씨 가족은 효고현에 살고 있었고 그의 아들은 대학 입시를 위해 오키나와현에 유학 중이었다. 그의 아들은 대학입학 시험을 마친 후 결과를 기다리 던 중 사고를 당하였다. 에비하라씨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미군인 군속으로 인한 사건 피해 자 모임 을 결성하였고 (가칭)한일공동피해자 모임 을 조직하기 위해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하는 등 미군범죄 피해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6) 인터넷 네이버 국어사전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12 다성성( 多 聲 性 )을 인정한다면, 안전 혹은 안보의 개념은 늘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과정상의 문제로, 완결되지 않는, 아니 도저히 완결될 수는 없는 불안정한 개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되물어야만 한다. 남성 동성애자에게 군대 는 안전한가? 여군의 근무 환경은 안전한가? 신체 이동이 부자유스런 이들에게 서 울은, 청계천은 안전한가?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 이라크, 코소보 등 전 세계의 미 군 기지는 안전한가? 도청 카메라로 중무장한 런던은 안전한가? 평화로운가? 안전 이란, 평화란 누구의 입장에서 누가 '안전하고 평화롭다'는 말인가? 2) 국가안보와 개인의 안전 미군 주둔과 국가 보안법은 그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안보를 지켜온 두 기둥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제7조)를 지금 없애면 안보 버팀목 흔들... 7) 위 글은 시민들이 일상에서 안보에 대해 그다지 큰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은, 주한 미군과 국가보안법이 건재하기 때문이므로 보안법의 핵심인, 제 7조 이 적단체 구성 가입, 찬양 고무,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등의 조항을 당분간 존속시 켜야 함을 주장하는 신문 칼럼의 일부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는 상호 합의에 의해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며(grant) 미합 중국은 이를 수락한다(accept) 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조약 어디에도 미군의 주 둔 목적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군 작전 지휘권 마저 이양 한 상태에서 주둔 목적조차 불분명한 외국 군대와 특정한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범죄 자가 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안보를 지켜온 두 기둥이라는 논리는, 모든 가치의 근거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개인이 아니라 사람의 모임인 국가를 삶의 주체로 전제하는 것이다. 때문에 국가 안보를 유지하 기 위한 과정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은 그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라는 수식어 가 의미하듯, 부차적으로 취급되어도 무방한, 하찮은 것으로 전락한다. 나는 국가 7) 중앙일보 2004년 7월 8일자.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13

13 안보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에 해 당되어 평생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문제점 들에도 불구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사람은 누구냐고. 칼럼의 필자는 안보의 두 기 둥에 의해 어떤 안전을 보장받고 있느냐고. 40년간 미군 기지 내에서 일해 왔던 노동자들의 집단 석면 중독(1992, 필리핀 수빅만), 미군에게 해머로 머리를 맞아 숨진 여인(1995, 일본 오키나와), 중앙선을 넘은 미군 장갑차에 치어 정신지체 1급 장애 판정을 받은 운전사(2001, 경기도 포 천),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미군 부대 측 고압선에 감전되어 사지를 잘라내는 고통 을 겪다가 결국 목숨을 잃은 노동자와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족 8) (2002, 경 기도 파주시), 반세기가 넘도록 미군의 폭격 훈련에 시달렸던 매향리 주민, 미군의 헬리콥터 훈련 소음으로 고혈압, 심장질환, 불면증 등에 시달리는 춘천 시민, 미군 유류저장고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인한 지하수 오염으로 식수난을 겪는 의정부 시민(2003)...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학문 연구, 예술 활동, 일상의 언어생활 등에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말에 대해 조심 하고, 끊임없이 의식을 검열해 야만 하는 수량 계측이 불가능한 정신적 피해와 억압적 상황들... 수십 년씩 감옥 에 갇혀 심신의 가능성을 제한받았던 사람들. 이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상처... 인간의 생명보다, 가능성 보다 더 중요한 안보는 무엇 을 위한,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안보인가? 이 질문은 이라크 무장 세력에 의해 목 숨을 잃은 아들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반전운동에 나선 미국 여성 시한씨가 부시 대통령에게 되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국가의 안전을 위해 그들 을 전쟁 8) 당시 공사장 지붕 위를 통과하고 있던 22,900V의 고압선은 피복조차 씌워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공사 관계자들은 공사 시작 전부터 수차례 미군 측에 고압선의 철거 혹은 이전을 요구했지만 묵 살당하기만 했다. 이 사건으로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과 더불어 캠프 하우즈 부 대장 등 미군 책임자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고소했지만 결국 불기소 처리되고 말았다. 국 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2003년 11월 말 재판부의 화해 권고를 수용하여 소송을 제 기한지 2년여 만에 총 5천6백여만원의 배상금을 수령했다. 이는 피해자의 과실 70%에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에 지불해야 할 금액을 공제한 것으로, 가처분 받은 치료비 2천만원을 공제하면 실 수령액은 총 3천6백만원에 불과하다. - 고유경, SOFA 분쟁사례( ), 미군범죄 현황과 과제 (2004, 주한미군범죄근 절운동본부)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14 에 내보내고, 폭력 속에 가두어도 괜찮다고 결정하고, 승인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과 한국의 정치인과 군인, 그들인가? 우리인가? 아니면 나인가? 분단 상황이라 해도 통일이나 국가안보 등이 개개인의 인권과 평화를 보장하는 가치인 양 사용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인권은 사람의 권리 이며, 민족이나 국 가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모임, 조직은 사람이 아니다. 민족과 국가의 안전 이 라는 통념이 곧 개인의 안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통일 역시 평화와 동일한 의 미는 아니다. (조직의 안전이 개인의 안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학교와 회사, 노동조합 등 집단 내 성폭력 사건을 통해 이미 체험하지 않았는가?) 국가는 한 사 람,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개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지만 안보 체제는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삼는다. 매향리, 오 키나와, 비에케스 등 기지 인근 지역 주민들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기는커녕 수십 년간 생명권을 침해받으며 상실감과 분노,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 은 버려진 국민 이었다. 9) 2001년 4월, 미 공군 국제 폭격장 소음 피해 소송 1심 재판에서 승소한 매향리의 한 주민은 판결 이후 매향리 사람들이 이제야 대한민 국 국민으로 인정받은 것 같다 고 말한 바 있다. 10) 오늘은 정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입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에 밀려 사람대접도 못 받은 우리가 드디어 대 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1) 지난 8월 12일,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 폐쇄 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갖은 전만규 미 공군 매향리 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 위원회' 위원장 역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들의 증언대로 이등 국민 의 목숨을 볼모로 국가안보의 신화는 살찌워져 왔 으며 지금도 여전히 성업( 盛 業 ) 중이다. 기지의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단당한 가운데, 군대에 의존한 안전보장을 지극히 당연하게 느끼는 의식이 양성 9)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전만규씨는 2004년 3월 12일, 미 전투기 훈련 폭음으로인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의 승소 확정판결을 받은 후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비호아래 미군들의 무법천지였던 매향리, 짐승처럼 무참히 짓밟혀왔던 매향리 주민들 이 비로소 인간임을 확인받았다 고 소감을 피력하였다. 10) 고유경, 군밀집지역과 지역현안, 경기북부지역 성매매 근절을 위한 인식개선 워크샵 자료 집, (2004, 두레방) 11) 오마이뉴스,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15

15 되어 왔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폭력이 더 이상 폭력으로 인 지되지 않는 상태, 악순환의 반복된 결과로서 지각 능력의 마비를 뜻하기 때문이 다. 비판 능력을 상실한 개인의 국가(집단)에 대한 퇴행적 의존성은, 대의를 앞세 운 국가의 명령을 아무 저항 없이 수행하고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게 된다. 개인 으로서 자기애는 고민과 자각을 통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지만, 자기애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복종이라는 형태로 드러낼 때, 그것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지역 주의, 가족주의 등 타인을 해칠 수 있는 에너지로 기능한다. 오키나와를 짓밟을수록 일본 사회의 황폐화는 깊어간다는 아라사키 모리테루( 新 崎 盛 暉 )의 지적은 단지 일본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군사력에 의존한 국 가안보는 타자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부메랑이다. 부메랑은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공천자 중 총 쏴본 적 없는 후보 114명 이라는 온 라인 기사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한, 한국 사회의 군사화된 의식 세계를 적 나라하게 드러낸 표현이었다. 총을 쏜다 는 행위는 살상을 뜻하는데 마치 총을 쏘 아 본 것이 도덕적 정상 규범인 것처럼 전제하는 표현은, 생명과 고통에 대한 무 감성과 예의 없음 그리고 병역 의무 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경계 를 정당화한다. 군대에서의 폭력을 피지배자의 사회화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 회, 폭력적인 훈육이 국가 질서 의 골자가 되어있는 사회의 예비역 집단은 여성이 나 아동, 종족적 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해 노골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서 군대에 빼앗긴 세월과 건강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한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와 군사주의는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인권과 평화, 안보와 국익을 핑계 삼은 전쟁(살상 행위)은 남성 권력 정치의 결정 체이다. 전쟁에 대한 모든 지원과 준비는 안보 논리를 끊임없이 합리화, 조직화하 면서 타자의 희생을 주변화, 비가시화 시킨다. 안전 사고 희생자를 포함하여 1년에 약 600여 명씩 타살되거나 자살하는 한국 군대, 전장 사상자를 제외하고 1년에 2000여명이 군대에서 사망하는 러시아. 12) 전 12) 한겨레 신문, 2003년 7월 21일자. 동 신문은 1995년 9월 26일, 1980년에서 1995년까지 15년 5개 월간 총 8,951명이 군대에서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연평균 577명에 달하는 수치다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16 시가 아닌 상태에서 이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군대는 개인의 행복과 안 전을 지켜주는가? 군사력의 증강과 개인의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무기가 모자라서 테러가 발생 하거나, 사람들이 불안과 소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기를 만들기 위한 자원 분배 과정에서 사람이 소외되기 때문에 군비의 증대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 과 영혼을 앗아간다. 일본 아오모리현에 사는 고등학생 미조에 히로아키( 溝 江 洋 明 )는 핵도 군대도, 이상한 정부도, 타살도 자살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자 고 호소한다. 13) 군대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자기가 사는 마을에 군사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땅값이 떨어져서인가? 군사 시설이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왜 땅값이 떨어지는가? 사설 경비업체의 보안 시스템이 작동되는 동네는 집값이 비싸지 않은가? 청정도시 파괴하는 기무사는 자폭하라 ( ). 경기도 과천에 군사시설이 이전되는 것을 반대하는 어느 시민단체의 주장은 무엇 을 의미하는가? 이들의 주장대로 기무사가 청정 도시, 과천을 파괴한다면 기무사 는 누구를 위해 무슨 역할을 하는 조직인가? 국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 인가? 지역 주민들이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좀 더 솔직하고 예민해져야 한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 미 해병대에 의한 소녀 강간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키나와 여성들은 소녀 한 사람의 안전도 지키지 못하는 안전보장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위대를 포함, 군대를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안전 보장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항구적으로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평시 와 유사시를 불문하고, 공생보다는 종속을, 평등보다는 지배의 가치를 사회 전체 에 요구하므로 개개인의 행복한 삶과는 완전히 상극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 한 사회에서 개인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고 소통할 수 있느냐에 의해 행복 지수 14) 가 결정된다고 할 때, 적의 존재에 대한 일상적 강조, 집단 정체성에 대한 13) 미조에 히로아키( 溝 江 洋 明 ), 평화 란 사랑하는 것, 평화의 불씨 56호,(2004. 주한미군범 죄근절운동본부) 14) 최근 국제 사회학자 단체가 실시한 65개국 국민들에 대한 세계 가치 조사 에 따르면, 세계에서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17

17 주입 등 군사주의를 강화시키는 요소들은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 등과는 배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키나와 여성운동가 마타요시 쿄오코( 又 吉 京 子 )는 더 이상 싸우는 것을 배우지 않겠다며 세상에는 나쁜 군대도 좋은 군대도 없다는 것을, 군 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전쟁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15) 3) 평화를 지키자? 전쟁은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게 바로 주전론자( 主 戰 論 者 )들이 항상 자신들은 현실주의자이고, 평 화주의자들은 머리만 복잡한 이상주의자들이라고 빗대는 이유인 것 같다. 이 상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의 변화의 잠재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인간 본성 가 운데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바로 본능 으로부터의 자유와 가변성이다. 즉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이며, 현실주의자들이 야말로 그 궤도를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M. 스코트 펙 16) 평화( 平 和 ), 일본어로는 '헤이와'( 平 和 ), 중국어로는 흐어핑 ( 和 平 ), 베트남어로는 ' 호아빙'( 和 平 )이다. 선인들은 평화를 사람들의 입에 밥이 골고루 나누어지는 것이 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이해( 利 害 ) 관계에 관한 가치의 경합( 競 合 )'이라고 해석 한다. 특정인의 부의 축적과 자원의 독점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각자의 이해와 논리를 앞세워 교집합 즉, 교차점을 찾기 위해 토론하는 과정 말이다. 평화에 관한 담론 중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 평화를 지키자 는 말이다. 평화를 지키자는 말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군사주의를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나이지리아 사람들이었다. 이 행복도 조사에서 2~5위는 멕시코, 베네수엘 라, 엘살바도르, 푸에르토리코 순이었다. 영국의 행복의 정치학 연구자 데이비드 할펀은 사회적 신뢰, 타인과의 잠재적 관계 등이 삶의 기쁨을 느끼는 데 주요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지구촌 최고의 국가들. ( 뉴스위크 한국판). 15) 마타요시 쿄오코( 又 吉 京 子 ), 더 이상 싸우는 것을 배우지 않겠다 (1999, 미간행) 16) M. 스코트 펙, 거짓의 사람들,(1997, 두란노)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18 작동시키는 강력한 기제이다. 세상 어딘가에,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적 이 있으므로 그들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지켜야만 한다는, 이 말은 언제든 아전인 수 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 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현실에선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정의를 위해 힘을 달라, 정의는 힘이다, 힘이 정의이다, 국익을 중시하는 장기적인 군사 비젼이 필요하다, 결국 국가의 존재 기반은 힘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법이지만 이 법은 힘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남 성 정치권력의 현실 평화주의.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힘의 균형이 란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의 행사라는 점이다. 이 말은 서로의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화나 나눔보다는 결국 물리력, 무력이 인간사회에서 중요하다는 의 식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맑은 공기를 원한다면 공들여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 하는 것처럼, 평화를 원하 면 평화를 준비해야지 왜 전쟁 채비에 열을 올리는가? 이권의 독점을 위해 타인의 나무와 목숨을 마구 베어내는 자멸적 행위는, 흔히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평화를 위한 전쟁. 정의와 인권을 위한 전쟁. 이런 주장은 늘 주체의 위치가 모 호하다. 누구를 위해서 누가, 무엇을 위해 무엇이 동원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강조하는 대로 이러한 전쟁은 끝이 없는 전쟁(infinite war for peace and justice), 아니, 끝내고 싶지 않은 전쟁이다. 미국이 말하는 이라크의 평화 재건은 전쟁이었고, 이라크 전쟁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경제 문제였다. 평화 를 지키자=전쟁을 하자=국익(군수 자본의 이득)을 챙기자는 등식은 폭력에 의한 지배, 군사력에 의존한 국가 안보를 강화시키는 전형적 논리이며, 전쟁의 다른 이 름은 경제라는 말을 확인시킨다. 이 논리는 한미일 군사 동맹 이라는 허구 속에 서도 강화, 확산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을 근거로, 미군이 한국을 지켜주기 위해 주둔한다고 하는데, 진정한 상호 방위 가 되려면 한국군도 미국 곳곳에 주둔 해야하지 않을까? 일방적으로 총부리를 들이대며 위협하고 있으면서, 이미 불평등 과 부정의를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 마치 상호 존중되고 있는 것처럼 양국 관계는 미화되어 왔다. 무력에 의존한 국가 관계 중심으로 논의되는 정치는 군대의 주둔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19

19 과 그로 인한 인권 침해를 늘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식의 체념과 묵인을 강 요해왔다. 하찮은 여자 하나 죽은 것 가지고 한미 우호 관계에 금이 가서는 안 된다 17) 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또 그 말이 저항감 없이 수용되는 사회 분위 기는 그러한 체념과 묵인이 반복된 결과이다. 혈맹( 血 盟 )이란 말이 있다. 사전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나눌 정도의 굳은 맹 세 라고 나와 있는데, 내 생각에 그 말은 누군가의 피를 보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물론 자기의 희생을 뜻하는 것는 아니다), 즉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을 해칠 수도 있다, 살인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맹세 이다. 그렇 다면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국의 고도성장이 베트남에서 젊 은이들이 흘린 피 의 대가라는 말은 일면 사실이지만,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베트남 인민이 한국인으로 인해 흘린 피 그리고 미국 용병으로서 한국인이 흘린 피 였다. 죽음을 담보로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였던 것이 다. 평화를 지키자 혹은 평화 재건'이라는 말은, 이미 어딘가에 평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없는' 평화를 있다'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평화 를 깨뜨리는 자, 방해하는 자에 대한 경계와 그들은 언제든지 응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폭력이 숨어있다. 박노자는 국민 국가 내부의 타자 만들기를 설명하면 서, 자신이 국민 이라는 말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노동자가 파업을 시도를 할 때 마다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국민들은 불안해한다 라는 식의 기사였다고 한 다. 노동자도 국민인데 불안해하는 국민 과 노동자 는 서로 다른 국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평온한 세상을 이질적인 불순분자 들이 균열 내려 한다 는 식의 논리는 여성, 동성애자 등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할 때, 전체 운동을 분열 시킨다는 논리로도 이용된다. 대개 평화로운 가정을 깨뜨린다고 비난받는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탈출하는 아내 혹은 그들을 돕는 여성운동가들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견디고 조심하면서(?) 살면 되 는데라는 식의 논리가 작동한다. 평화로운 가정과 여성의 인권은 양립할 수 있는 17) 1992년 10월, 미군에게 살해당한 윤금이 씨 사건 직후, 동두천시 공무원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20 가? 18) 황혼 이혼 을 요구하는 여성에게 재판부가 백년 해로 를 권고하는 것은 무 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적 소수자가 더욱 많이 참아주고 용서 하기를 강요하는 사 회는 그들의 호소(고통의 언어)를 불편해한다. 타자의 요구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이 나의 이해( 利 害 )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지 지역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연 령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 모든 이데올로기에서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점을 잘 몰라서가 아니라, 모순에 접근하면 할수록 그것은 결국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허물어뜨리는, 내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편안한 질서들에 금이 갈 수 밖 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것을 남에게 내어 주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을 수용하기가 힘든 것이다. 신채호의 말대로, 시비( 是 非 )는 이해 ( 利 害 )의 별명( 別 名 ) 일 뿐이다. 평화롭지 않은 세상을 평화롭다고 우기는 것은 정 체성에 따른 위계,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시(무지)와 서열 매기기 그리고 기득권에 대한 의심없음에서 비롯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 나동혁은 모든 사람들과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병역 거부를 했을 때처럼 수많은 장벽을 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19) 타자 앞에서 나의 자유를 심문 할 수 있는 정직함, 저항의 과제를 타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나의 일상에서 고민하 는 치열함,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지키자 라는 말은 '적'의 존재를 전제한다. 따라서, 평화를 지키자는 말은, 곧 적 을 무찌르자는 말이다. 타자(적)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지배 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념이므로 가변적이고 유동적이지만, 국민 국가 체제 하에서는 반드 시 존재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회적 타자는 권력 집단이 그어 놓은 테두리 안 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물론, 타자 스스로 구획 지워진 테두리를 거부할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구성원의 자격 은 전적으로 권력을 휘두 르는 자가 선택하는 문제이므로, 타자의 지위는 언제나 불안정하며 때로는 대립적 18)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정희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2001, 또 하나의 문화) 19) 나동혁, 나와 부엉이 를 보고 - 여성과 병역거부자는 모두 군사주의와 대면하고 있다, 다 큐멘터리 나와 부엉이 자료집, (2003, 두레방)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21

21 혹은 사물화 된 존재로 위치 지워진다. 국가 안보에도 안테나가 필요합니다', '111, 여러분의 신고를 기다리고 있습니 다'라는 국가정보원의 지하철 광고( )는 국가가 간첩 혹은 좌익 사범 20) 이라 는 타자를 미끼로 내부적 타자 만들기에 개인을 동원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타인 에 대한 감시와 의심, 자기 검열을 통해 개인은 국가와 공범이 되는 위험에 노출 된다. 계절마다 구호를 바꿔가며, 사람들의 일상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 작은 포 스터의 목적은, 국민 의 신고를 통해 빨갱이 를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독점한 국가가 자신의 통제권을 이용하여 시민의 감수성을 마비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타자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개인의 충성심 을 최대한 고양시켜 생각하지 않는(사유능력없는)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를 완성시키 는 것. 포스터는, 공범자를 확보하려는 국가의 전략과 (타자가 희생되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안전하게 보장받기를 기대하는 개인의 욕망을 일치시켜 절묘한 권력 효 과를 발휘한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뭉쳐야만 한다. 단결은 타자를 배제하고 권위를 강요하 는 것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국론 분열을 걱정하는 사회 에서 소외되는 개인, 고 통 받는 개인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권혁범은 국민 이라는 표현 자체가 국가의 일 부로서의 강제성, 국가가 부과하는 정체성과 의무를 정당화하면서 사회 속의 개인 을 조직화된 집단의 부속물로 동원하고, 국가와 긴장 관계를 갖는 사회의 시민 의 식, 독립적인 개체 의식을 억압하고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또한 국민 속에는 이 미 국가라는 선험적 실체가 규정하는 집단 동질성 주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개인들의 복잡한 개별적 차이는 주변화, 비가시화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 한다, 21) 집단 응집에 대한 열망은 단일한 정체성의 강조로 이어지고, 그 과정을 통하여 상상의 공동체'는 강화된다.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 20) 포스터에는 좌익사범 최고 3천만원 이라고 쓰여있다. 급진적. 과격적인 당파 라는 사전적 의미 의 좌익( 左 翼 ) 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까? 누구의 입장에서 무엇이 급진적이고 과격한 것인가? 21) 국민국가와 개인성에 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권혁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2004, 삼인)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22 어딘가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적 에 대하여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민 주화운동에 기여했던 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사용했던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타는 적개심으로, (무엇 무엇을) 하자 라는 구호는 끊임없이 집단 내부의 단결을 강조 했다. 그러나 이는 누가 내부의 적격한 성원으로 선별되는지, 선별을 결정하는 주 체는 누구인지, 단일한 정체성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 지 않는 언설이었다. 4) 타자들의 인권 4)-1 배려 로서의 인권의 한계 인권은 공적인 인간 관계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인 인간 관계란, 생산 과 분배를 비롯한 모든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 한 공적 관계는 대부분 이해( 利 害 ) 관계이다. 사회생활의 기본 틀이 이해관계로 얽 혀 있음을 경시하거나 간과하면,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기가 어려워진 다. 22) 나는 장애인 편의 시설, 노약자 장애인 보호석 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어 떤 잔인함을 느낀다. 남녀 구분도 없는 장애인 화장실이 그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라니,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장애인용 시설이나 노약자 우선석은 장애인의 편 의 를 위해 비장애인의 배려 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으로서 마땅 히 누려야 할 권리이다. 권리는 보호되기 보다는 보장되어야 한다. 보호는 시혜자 와 수혜자의 권력 관계 즉, 시혜자의 권력 행위 중심으로 해석되기 쉽지만, 보장 은 결여 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에 더욱 근접해 있다. 신체장애인, 노인, 아동, 여 성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파트너이다. 동행의 파트너라는 의미에서, 14년간 척추 종양으로 몸이 차츰 마비되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엮은 인류학자, 로버트 머피의 신체 장애인은 일반인 과 무관해 보이는 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상황 일반의 은유(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는 지적은 의미 깊다. 23) 서로 22) 양명수,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연대, (1998, 제주 4.3 제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자 료집)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23

23 대하는 상대( 相 對 )란 어떤 의미인가? 상대란 주체 대 주체의 관계를 말한다. 인권 은 결국 위하는 문제지만 먼저 대하는 문제인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가 누구를 위하기 이전에 모두가 같은 값을 가진 주체라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인권은 배려 라는 말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소중한 말이 지만, 배려 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문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해( 利 害 ) 관계는 갈등을 야기하는 관계이므로 배려 의 도리를 강조하기 보다는 갈등을 공 정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제도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 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가 완결되어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시점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배려라는 말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권이 배려 라 는 말은 오역( 誤 譯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배려 라는 말이 상호의 동등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면, 소위 마이너리티 라고 간주되는 사람은 주류 에 대해 어떤 배려 를 해야 옳은가? 소수는 다수를 위해 배려해야 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예를 들 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즉 신체장애인, 노인, 아동, 임신한 여성 등은 신체 건강한 남성 들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해야 하는가? 아침 통근 시간대의 초만 원 지하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노인, 임신한 여성 등이 차량에 오르면 대부 분의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거나, 휠체어 자리 확 보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는 배려 가 불편한 것이다. 심지어 재수 없다, 하필이면 왜 지금이냐, 출퇴근 시간 지나서 한적할 때 이용하지 라고 말하기도 한다. 출퇴근과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동 자체를 불쾌해한다. 타인의 이동권(생존권, 삶의 욕망)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권리 행사의 주체가 자기인 것 처럼 그들의 일정을 조정하려 들고 그들이 하는 일을 하찮게 규정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고, 동등한 권력을 가졌을 때, 비로소 인권은 배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배려로서 인권이란 말은 성숙하고 아름다운 말 이지만, 인권의 값이 제 각기 다르게 매겨지는 차별적 사회에서 그 말은 자칫 소 23) Robert F. Murphy, The Body Silent (1992. 新 宿 書 房 )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24 수자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왜소화시키거나 때로는 그들의 목소리를 제한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권리를 거꾸로 말하면 이권( 利 權 ) 이 되는데, 이권의 다 툼을 양심이나 배려에 호소하는 것은 한계적 일 수 밖에 없다. 장애인 편의 시 설, 노약자 보호석 이라는 표현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평화 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를 활동가들과 토론하던 도중, 평화의 문제가 중요한 건 알지만 여성이면서(여성으로서?) 평화주의자 라는 소리는 정말 듣기 싫 다, 차라리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나왔다. 24) 여성 평화주의 자라는 말에 대한 저항감은 여성=평화(인내, 뒷수습), 남성=공격(진취, 지도력)으로 간주되는 이분법 속에서 채색된 평화의 수동적인 이미지가 여성에게 입혀지고, 그 과정을 통해 성별 분업이 강화되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 평화주의자 라는 호칭이 여성의 활동과 사고의 반경을 더욱 제한시 키는 억압의 언어로 작용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성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서,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평화 역시 성 중립적인 언어가 아니다. 2003년 여중생 추모 집회에서 열창되었던 Fucking USA 는 남성들에게는 해방 감 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성인 나에게는 공포와 분노 그 자체였다. Fuck 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누구를 Fuck 할 수 있는가? Fucking USA 는 아무 죄도 없는 순결한 한국 여성 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발동되는 한국인 남성의 미국 여성 에 대한 폭력의 승인이며 동시에 집회에 참석한 한국 여성도 그들의 통제의 대상 임을 확인시키는 권력 행위였다. 이 때 남성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와 여성의 대한 폭력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남성과 동등한 민족 주체로서가 아니라 전체 속 의 일부 혹은 기표로서 간주되는 종속적 지위의 여성에 대한 폭력은 한반도 평 화, 미 제국주의 타도 라는 거대한 그물 속에 쉽게 갇혀버린다. 우리 내부의 차 이는 가상의 적 앞에서 내부의 힘을 가진 이들의 입장으로, 그들의 힘에 의해 봉 합되어 버리는 것이다. 식민지 남성과 식민 지배자는 식민지 여성을 억압하는 동 지적 관계를 이룬다.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반미 민족주의적 사명감 속에서 식민지 여성은 이중, 삼중의 억압을 받는다. 여중생의 이름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친근하 24)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한국여성평화네트워크. ( 서울)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25

25 게 ( 미선이, 효순이 ), 꽃다운, 어여쁜 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채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 사건과 관련한 운동에서, 남성 권력은 순결한 여성'을 보호해 야하는 당당한 민족의 주인공으로 거듭 태어나 가부장적 특권을 공고히 하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를 재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개별적 인간, 주체로서가 아니라 남성성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재현된다. 인권은 이미 정해져 있는 정형화된 사실 이라기보다는 정의에 기초한 믿음이 자 지향이기 때문에 언제나 꿈틀거리는 불안정한 유동적 가치일 수밖에 없다. 평 등이 실현되는 것을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전쟁이 아닌 상태 를 평화라 고 명명하고, 개개인의 인권이나 안전과는 상반되는 군사력에 의존한 국가 안보를 강조하고 있다. 평화나 인권은 고정되어 있는 지켜야 할 무엇이 아니라 지금부터 너와 내가 머리 싸매고 탐구해야 할,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갈등과 혼란/소통과 연대가 없는 진공 상태, 비둘기를 연상시키는 사회적 무기력 상태에서 인권은 만 들어지지 않는다. 경합하는 가치로서 정립될 수 밖에 없는 과정적 개념이기 때문 에 늘 논쟁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남성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고난일 수 있다. 여성에게 평화란 자기 삶의 통제력을 갖는 것인데 가부장적 남성 권력, 폭력과 무기사용에 기초한 지배 체제는 자기 삶의 통제력 뿐 만 아니라 모든 사 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려 들기 때문이다. 부권주의에 기반한 군 사주의는 모든 권력 중에서도 가장 부정한 것이다. 중무장한 군대가 사람 을 지켜준다는 착각이 만연한 사회, 사람을 죽고 죽이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사회, 전장과 일상이고 일상이 전장이 되어버린 사회. 첨단 전투기급의 초음속 항공기 자급으로 인해 자주 국방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 25) 하 게 됨을 자랑스러워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보살피는 가치, 배려 를 강조하는 것 보 다는 따지고 짚고 되묻는 것이 일상적으로 가능한 사회, 즉 인간의 이기심 혹은 이해 관계에서의 갈등을 억제하고 구속할 수 있는 제도 확립에 역점을 두는 것이 인권 실현을 위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인간성에 호소하는 개인의 배려 중 심의 논의가 아니라 법과 제도로 보장되는 사회적 배려에 더욱 예민한 관심을 기 25) 오마이뉴스. 2005년 8월 29일자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26 울여야 한다. 물론 제도의 확립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4)-2 기지촌과 인권 문제 기지촌 지식인' 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이 자기 모멸적 인 조합어는 지난 100여년동안 본국'에서 기지'를 통해 흘러나온 선진 문물'을 재빨리 챙기는데 눈독을 들여왔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자화상 이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지만 한국인의 정신과 생활은 기지촌 주변을 여전히 어슬렁거리고 있다. 26)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화 캠페인 을 감독하던 한 행정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청화대 측은 미군 병사들이 한국에 주둔하는 동안 기지촌 주변 에서 보게 되는 것이 늘 깡통문화 이기 때문에,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이란 나라는 민족 문화도 자존심도 없는, 하나같이 가난해서 도둑질 이나 하고 비굴하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 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27) 여자가 동두천에 산다'고 말하면, 외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 본다"며, 이 때문에 딸을 가진 사람들은 위장 전출'을 많이 하고 있다. 28) 혐오감과 분노, 비하와 멸시, 자괴감, 불결하고 천하다는 생각 등 기지촌에 대한 한국인의 상념은 간단하지 않다. 외국 군인과 그들을 상대로 성을 파는 한국 여성 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주로 기지촌 바깥사람에 의해 구축된다. 기지촌 사람들은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 지는 사람 이다. 그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타자화 하는 바깥사람 이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민족주 의, 국가주의, 군사주의 등이 뒤얽힌 이 바깥사람 들의 시선이야말로, 한국 사회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키워드가 아닐까? 국가 안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필수적 존재로 간주되는 주한미군.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과 기지 인근 마을에 대 한 상념은 왜 이렇게 복잡한가? 26) 한겨레 신문, 2004년 4월 3일자. 27) 캐서린 H. S 문, 한 미 관계에 있어서 기지촌 여성의 몸과 젠더화된 국가, 위험한 여 성,(2001,삼인) 28) 한겨레 신문, 2004년 6월 9일자.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27

27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개별적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 문화, 그리고 민족을 대변하는 하나의 기표로서 작용한다. 기지촌은 자기 들의 여자를 외국 군대에 내주었다는 부정하고 싶은 사실, 한국 남성의 거세된 남 성성을 확인시켜주는 현장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이미지로 기억된다. 때문에 기 지촌은 한국인에게 군대의 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서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와해시킨, 오염된 그 무엇으로 각인되어 있다. 한국 군이 주둔하는 마을은 기지촌 으로 의미화되지 않는다. 기지촌 은 외국 군대와의 관계에서만 작동하는, 숨기고 싶은 아이콘이다. 정조 에 대한 유교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 자기 몸에 대한 항상적 인 검열과 감시를 요구한다. 여자가 기지촌에 살면 이상하게 본다 는 말은 성폭력 을 당할 위험이 높은 적색 지대 29) 에서 여성이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는 뜻 이 아니라, 한국 여성이 한국 남성보다 물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더욱 남성적인 미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민족의 단일성을 해칠 수 있는 위협적 존재임을 뜻한 다. 한국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믿었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미군과 관계를 맺 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독자성을 갖게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 다. 또한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기지촌은 성폭력 당할 확률이 높은 위험한 곳 이라는 인식은 한국을 지켜주기 위해 미군이 주둔 한다 는 말이 얼마나 허구 29) 전라북도 군산시 미성동에 소재한 아메리칸 타운 주식회사. 일명 실버타운이라 불리는 이곳은 박 정희 정부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50%를 지원하고, 개인이 50%를 투자하여 설립되었다. 사장, 상무, 전무 등 회사체계를 갖춘 군대창녀주식회사. 미군에게 성을 파는 한국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곳은 정문 앞에 경비가 지켜 서 있고 하나의 큰 성( 城 )과 같이 높은 담 속에 갇힌 마을이다. 타운 안에는 닭장집 같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방마다 방번호가 매겨져 있 다. 이 곳에 있는 술집들은 다른 기지촌의 미군전용 술집과 마찬가지로 면세혜택을 받고 있다. 당시 관청의 도면에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던 아메리칸 타운은 미군과 동거하거나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의 숙소가 있는 특별구역 을 칭한다. 현재까지 주식회사 형태로 남아있는 군산 아메리카 타운은 국가가 여성의 성을 안보라는 미명 하에 어떻게 이용하고 통제했는지 보여주는 일례이다. 정부는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 을 제정하였지만, 1962년 6월에는 보사부, 법무부, 내무부 등 3부가 합동으로 전국에 104개소의 특정 윤락지역, 관광특구라는 이름으로 성매매 지 역을 설치하는 등 일반인 거주지역으로부터 적색지대 를 격리시키는 이중 정책을 폈다. 기지촌 성매매와 관련된 더욱 자세한 논의는, 안일순, 위대한 군대, 위대한 아버지, (1995,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자료집) 두레방, 기지촌 혼혈인 인권실태조사, (2003,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 사업보고서)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28 적인 것인가를, 군대에 의존한 국가의 안보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스 스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군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의 복부를 향해 연탄을 집어 던질 수 있었던 폭력 30), 여중생 추모 집회에서 열창되었던 Fucking USA, 내 딸이 저렇게 미군과 사귄다면 차라리 할복 자살 하겠다 는 31) 말은, 모두 각각 매우 복잡한 맥락 속에서 사용된 표현이지만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 점을 안고 있다. 선망과 분노의 대상인 미군에게 성을 팔아 민족의 순결함을 더럽 히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과 남성성을 거세당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두려움의 극단적 표출인 것이다. 응징의 타겟이 만악의 근원 인 미군이 아니라 미국에 합세 했다고 간주되는 가장 약한 타자인 여성('양색시' 혹은 젠더화 된 여성적 정체성) 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여성 혐오(misogyny)를 전제로 작동되는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드러낸다. 기지촌 외국인 전용 술집 앞에 내걸린 "내국인 출입금지, 여종 업원 구함" 간판과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 는 대한민국 헌법 제39조 제 1항은 여성을 국가의 적격한 구성원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남성 국가의 성차 별적 의지의 표명이다. 러시아, 필리핀 여성 등으로 붐비는 최근 기지촌 성매매 현장은 기억에서 지우 고 싶은 섬, 비존재 영역으로서의 기지촌에 대한 책임 회피를 더욱 용이하게 만 든다. 가난에 떠밀려 혹은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의 성산업에 유입되는 여성들, 월경( 越 境 )하는 여성들. 32) 기지촌 여성운동 단체 두레 방 의 유영님 대표는 한국이 국제화되는 인신매매 시장에서 송출국이자 경유국이 며, 귀착국임을 지적한다. 그는 기지촌으로 유입된 외국인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를 책임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유일한 대안으로 불가피하게 한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낙인찍을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용기를 낸 그리고 모험을 택한 여성들로 인식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함을 주장한다. 30) 1999년 8월 5일, 뉴욕에서 열렸던 이중문화 가정목회 전국연합회 제10회 수련회 에 참석한 미군 과 결혼한 한국 여성과의 인터뷰 중에서. 31) 졸고, 평화를 만든다는 것, 제주인권학술회의 2000 자료집 (2000, 한국인권재단) 32) 유영님,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 근절을 위하여, 경기북부지역 성매매 근절을 위한 인식 개선 워크샵 자료집, (2004, 두레방)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29

29 세계화라는 전쟁 속에 가속화되고 있는 여성의 빈곤화. 이를 증명하는 현재의 기지촌, 성매매의 세계화 현실은 국가 안보 라는 모호한 목표(상상?)를 충족시키 는 데에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해 동원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폭력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묵인되는지 보여준다. 쿠츠미 카나코( 久 津 美 香 奈 子 )는 한국 기 지촌의 필리핀 여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미군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한국의 가 부장제에 의한 차별 의식에 의해서도 초래되고 있다고 말한다. 33) 순결하지도 않 은, 가난한 외국인 여성. 이중적 성윤리를 내세우는 가부장제의 시선은 힘없는 외 국인 여성들을 억압하는 차별의 잣대로 재등장하고 있다. 34) 미군 기지가 일상적 으로 존재함에 따라 발생하는 폭력과 그 폭력에 의해 변모된 사회의 모순을 파악 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작동에 어떠한 일상적 질서가 관련되어 왔는지 살피는 것 이 중요하다. 성차별주의는 그것이 모든 억압의 근본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 니라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지배의 관례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벨 훅스(bell hooks)의 지적은 일상에서 소위 자연스럽다고 용인되는 행위에 대한 문 제의식을 강조한다. 군대는 속성 상 그것 자체로는 독립성, 완결성을 찾기 어려운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조직이다. 타자의 존재를 생존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타자에 의탁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그 타자를 억압하는 한계성 때문이다. 훈련과정에서의 사고, 범 죄와 환경오염 등은 군대가 존재하는 한 늘 예정되어있는 사건들이다. 35) 누군가는 안보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승인하는 것, 군사기지는 필요하지만 내 집 옆에는 안 되고 평범한 우리들 이 사는 세상과는 격리된 그들 이 사는 곳 은 괜찮다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차별적 체념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와 함 께 기지 언저리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군대의 폭력 을 내셔널리즘으로 분절화해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폭력이 성차별주의 33) 쿠츠미 카나코( 久 津 美 香 奈 子 ), 韓 國 におけるフィリピン 人 女 性, 2003, 大 阪 外 國 語 大 學 言 語 社 會 學 會 誌 Vol. 9 34) 졸고, 민족 의 이름으로 순결해진 딸들?, 당대비평 11호 (2000, 삼인) 35) '미군장갑차에 스러진 여중생' 즉 순결한 희생자라는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 이기순, 신차금, 이정 숙, 서정만 등 무명의 아니 "양공주"로 불린 이들의 죽음은 가부장적 국가 권력으로부터 보호받 을 가치가 없는 '혐의있는 무가치한 죽음' 으로서 유기되고 방치되어 왔다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30 와 인종주의에 의해 구성된 일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응시해야 한다. 36) 4)-3 양심적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2004년 7월 16일, 양심적 병역 거부는 유죄 라는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자 조선 일보는 아래와 같은 만평을 실었다. 37) 개인적 얘기지만, 평소 남편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그가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국가의 부름 에 저항했던 것을 은근히 자랑으 로 삼았던 나는 이 만평을 본 순간 당황스러웠다. 만평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36) 도미야마 이치로( 富 山 一 郞 ), レイシズムとレイプ, インパクション95 号 (1996) 37) 조선일보, 2004년 7월 16일자.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31

31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가 유죄로 확정된 것과 세 가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만평은 병역 거부가 권리로 인정되면, 합법적 기피 방법이 생겼으므로, 굳이 원하지 않는 문신을 할 필요가 없고, 병역 브로커에게 뒷돈을 대지 않아도 되고, 해외에 나가 아이를 낳을 이유 도 없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병역 기피 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권을 주장하는 운동을 비웃 고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와 병역 기피는 어떻게 다른가? 오태양 과 유승준 이 라는 극과 극의 이미지, 평화와 인권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청년 과 신성한 병역 의무를 저버리고 미국 국적을 택한 파렴치한 이라는 이분법. 무엇을 기준으로, 이 두 가지 영역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획 정리할 수 있는가?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 군대 가야 남자(어른)된다 는 한국 사회에서, 결국 사람이란 정상적 신체의 성인 남자 이다. 군 미필자 인 여성, 장애인, 혼혈인 등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성들이 일터에서 흔하게 경험하는 것 중의 한 가지 는, 여성을 빤히 바라보면서 여기 아무도 없어요? 혹은 직원 좀 불러주세요 라 는 말이다) 군대 경험 이라는 권력과 군 미필자 에 대한 차별, 그 문화적/사회적 간극을 간단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병역 기피 냐 양심적 병역 거부 냐 라는 구분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병역 기피 라는 말이 이미 국민의 기본 의무라는 신성함 앞에서 주눅 들어있는, 비겁한, 부정한 등 온갖 떳떳치 못함을 뜻하는 수식어들이 뒤범벅되어 있는 오염된 언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공적인 영역 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사적 영역 에서 상황은 달라진다. 기피자를 향한 비 난은 그에 대한 선망의 정도와 비례하며, 병역 문제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군사주의와 인권 문제에 관한 논쟁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한 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만평을 접했을 때 당황함과 함께 순간적으로 치밀었던 나의 분노는 병역 기피자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판단의 기저에는 양심 적 병역 거부와 군대 기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차별 의식이 자 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만평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화가 났던 것은, 오염된 언어를 비판하면서도 그 언어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는 나 자신과 직면했기 때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32 문인지도 모른다. 숨기고 싶었던 것과의 예기치 못한 맞닥뜨림이 참을 수 없는 불 쾌함으로 드러났던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어서, 강한 남자를 요구하는 군대 문화가 싫어서, 상사의 구타나 훈련 사고가 두려워서, 폐쇄된 집단생활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현 재 하고 있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싶어서, 가족을 부양해야하기 때문에, 성폭력의 공포 때문에 등등의 사유로 군대를 피하는 것을 낙오자, 부적응자, 이기주의자의 핑계거리로만 폄하할 수 있을까? 종교적 양심과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는 보편 적 인권 문제이고 군대 기피자의 그것은 무조건 비난받아 마땅한 소수 일탈자의 문제인가? 누구에 의해, 어떠한 잣대에 의해 이 두 가지는 구분되는가? 한국사회 에서 병역문제가 철저히 계급화 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 구분에 대한 고민은 전혀 다른 영역의 독립된 문제이다. 2001년 12월, 종교적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를 선언 한 오태양씨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어쩌면 근본적으로 군대에 대한 거부감과 공 포라는 측면에서 같을 수도 있겠다 고 말하면서, 병역 거부자는 그 거부감을 정 면으로 응시해서 사회 문제로 풀어내려는 사람이고, 병역 기피자는 그 공포를 편 법을 동원해 피해가려는 사람들 이라고 덧붙였다. 38) 국가의 사법제도에 의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가 자신의 신념을 바꾸도록 강압되어서는 안 된다 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결의 39) 등 양심적 병역 거부권은 이 미 인권 담론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획득한, 상대적으로 안전한 언설이다. 인권문 제에 대한 고민의 정도가 국제 기준보다 뒤떨어져 있는 한국 현실과 분단 상황 등에서 기인하는 운동의 어려움이나 복잡함, 병역 거부를 선언한 당사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이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운동 내에서조차 보편성이 라는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병역 기피 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큰 일이 닥쳤을 때 이건 정말 큰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할 수 없는 사 람이 있습니다. 특히 조직이 아닌 개인이라는 약한 입장이 되면 때로는 큰 일이 38) 김기중, 신윤동욱, 한홍구 좌담, 양심적 병역 거부 의 자유는 있는가, 당대비평 19 호,(2002, 삼인) 39) 200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58차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와 관련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최 정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유엔 인권위원회에 가다, 당대비평 19호,(2002, 삼인)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33

33 났다고 저항하는 것보다 침묵에 더욱 익숙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항하는 것보 다 익숙해지는 편이 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현실입니다. 이것을 이 해하지 못하는 혁신 운동은 운동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40) 오키나와 평화운동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냐는 인터뷰 질문에 대한 여성운동가 아자토 에이코( 安 里 英 子 ) 씨의 답변을 중심으로 나는 위의 문제를 접근하고 싶다. 양심 종교의 자유는 국방의 의무보다 우월한 권리가 아니다 라는 대법원의 다 수 의견과 이를 환영하는 학계, 종교계, 보수 단체, 언론 41) 등의 반응은 개인의 존엄과 인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수준과 현재 사회적 가치의 척도가 무엇인 지를 확인시켜준 일례였다. 확실히 군사주의는 전쟁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전쟁 시기보다 더 강력하게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제도, 관례, 가치의 시스템과 타협하고 있다. 42) 여기서 자세히 다루기에 는 다소 무리지만, 9.11 이후 대다수 미국 시민들이 국가주의에 너무나 쉽게 매몰 될 수 있었던 것, 부시 대통령이 주장하는 테러와의 전쟁 에 이성을 잃고 찬동할 수 있었던 것, 애국주의를 앞세운 혐오 범죄(hate crime)와 슬픔의 상품화, 성조기 의 이미지를 활용한 물품의 범람 등은 미국 사회가 어느 정도로 군사화 되어 있 는지 보여준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 그 무엇이 아니 라 일상적 군사 문화에 끊임없이 가치와 정당성을 부여해 온 미국 정부의 시민 관리 능력의 결과로서 초래된 것이었다. 군대 가야 정신 차린다, 조직의 쓴 맛을 보아야 한다는 등의 폭언이 난무하고, 갖가지 병영체험 프로그램이나 어머니, 여자친구, 여동생, 여성 연예인 등이 동원 되어 군인을 위무 하는 TV 방송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연출되는 한국 현실에서 병역을 거부하거나, 개인의 가치를 국가보다 우위에 놓는 것을 상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40) 졸고, 오키나와에는 왜 양키 고 홈 구호가 없을까?, 당대비평 14호,(2001, 삼인) 41) 하급심에서 유죄, 무죄로 엇갈렸던 혼선을 바로잡았다 (동아일보), 분단상황 개인보다 국가존 립 분명히 (조선일보), 하급심 널뛰기 판결에 마침표 (한국일보) 등의 머릿기사와 사설을 통해 대부분의 신문들은 대법원 판결에 동의를 표하였다. ( ) 42) 구웬 커크(Gwyn Kirk), 군사주의, 군사화, 젠더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여성운동, 다큐 멘터리 나와 부엉이 자료집, (2003, 두레방)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34 나는 병역은 국민의 가장 기본적 의무라는 선언적 전제를 앞세우기 이전에, 반 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유승 준을 부러워하면서 욕하는 이중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왜 그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군대를 결사적으로 피하려고 하는지, 병역이 그토록 신성한 것이라면 어째서 신의 아들 이니 어둠의 자식들 이라는 자조적인 말들이 생겨났는지, 결국 총알받이(이 얼마나 폭력적인 언어인가!) 로 동원되는 사 람들은 누구인지, 기본적 의무에서 조차 배제당한 여성과 장애인 등은 한국 사회 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남자만 병역의 의무를 담당함으로써 개인의 인권, 행복 추구권을 침해받고 박탈당하는 일까지 발 생한다. 진정한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서도 남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 최 선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여고생의 헌법 소원은 국가와 구체적 개인(남성 과 여성)이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43) 국민 과 비국민 을 가르는 경계에서, 결정적 권력을 행사하는 병역 문제와의 대면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누구를 위해서 군대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 은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와 차별과 연동되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4)-4 모병제 논의의 문제점 1964년 안팎,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군해야 될 시점에서 오히려 군사력을 현저히 증강시키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 판단을 내리게 된 까닭을 생각하지 않 는 게으름 과 나르시시즘 이라고 분석했던 정신과 의사 M. 스코트 펙은 군대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면 모병제가 아니라 징병제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44) 왜냐하면 우리가 전쟁을 통해 누군가를 꼭 죽여야만 한다면, 떳떳하게 우리 자신을 개입시켜 그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는 특정 계급을 전문 고용 살상자로 선발하는 모병제는 전체 구 성원에게 영향(아픔)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책임 회피와 감각의 마비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제도라는 것이다. 반면, 징병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족을 43) 연합뉴스, 2005년 9월 4일. 44) M. 스코트 펙, 거짓의 사람들,(1997, 두란노)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35

35 군대에 보내야 하므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전쟁 상황의 고통으로부터 절연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징병제에 따르는 고통은 전쟁을 억제 하는데 쓰이는 보험 료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직업군인 혹은 모병제로 군대에 들어간 사람들은 특진 과 포상금, 휴가 등 각종 혜택의 유혹과 정체성의 사회적 확인 때문에 전쟁을 원 하게 되는 경향성을 갖게 되므로, 그나마 징병제가 군대의 공격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징병 된 다수의 사람들의 군대는 모병제에 근거하 여 집결한 군대보다는 다양한 성향을 갖게 되므로 그 다성성이 전쟁을 억제하는 데 유효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것은 사람의 목숨을 해칠 준비를 하는 군대라는 사회제도를 선택한 국민에게 각각의 책임을 묻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는 징병제에 서 더 나아가 남녀 모두가 참가하는 청년 복무 의무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군대 라는 조직을 최대한 탈전문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이 동원 시스템의 핵심내용은 전시에만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고, 평시에는 슬럼가 정비나 직업 훈련 교육 등 사 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업을 실행하는 것이다. 전시에만 군의 가치가 강조되는 것 이 아니라 평시에도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존중된다면, 그들 역시 전쟁을 그 토록 원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양심적 병역 거부권, 대체 복무제 마저 인정되지 않는 한국 현실과는 고민의 방향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고, 코스타 리카 45) 처럼 군대 없는 사회, 군사력의 전면적 해체를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 의 얘기지만 고통의 문제를 통해서 군대의 폭력성을 성찰하는 그의 시각은 분명 시사 하는 바가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한국에서 조금씩 제기되고 있는 고민 의 하나가 모병제 논의인 것 같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 소개된 칼럼을 조금 길 지만 인용하고자 한다....징병 제도의 피해자는 제대 군인만이 아니다. 운 좋게 징집을 면한 사내들도 평생토록 무언가 가슴을 펴지 못하고 산다. 평생토록 은근한 질시와 폄하를 의식 45) 국방예산이 제로인 나라, 코스타리카는 1949년 군대를 폐지하였다. 군비 전체를 의료와 교육에 투자하여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2004년 9월, 코스타리카는 자국을 이라크전 동맹 국 명단에서 삭제하라고 미국에 요구한 바 있다. 이는 "코스타리카 헌법은 유엔의 동의를 얻지 못한 군사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 지지는 위헌이다"라는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근 거한 것이었다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36 하면서 살아야 하는 심리적 부담도 결코 가볍지 않다 기념일을 며칠 앞두 고 전방 부대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은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신참 사병이 아군 전우와 상관을 상대로 무작위 총격 테러를 가하는 일은, 실로 전례가 드문 일이다. 군의 기강해이, 열악한 생활 여건, 신세대 사병의 의식 변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지휘관의 문책으로 끝날 일이 아 니다. 이제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과연 언제 까지 현재의 징병 제도를 고집할 것인가? 의무복무제의 최대 취약점은 바깥 세상 으 로부터의 단절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롭고 고통스런 일을 면한 사 람에 대해서는 선망을 넘어 적개심까지 품게 된다. 국민의 일부만이 고통을 당하 는 제도는 국민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나라에서는 지원 모병제를 택하고 있다. 부자 나라들만이 아니다. 중국과 북한도 모병 제도를 시행한다. 그뿐인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네팔도 모병제이 다. 물론 모병제는 돈이 든다. 그러나 알고 자원한 사람에게는 책임 의식이 있다.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모두에게 강요하면서 국방의 의무 라는 차가운 공적 언어로 눌러버리는 제도는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명예와 자부심에 더하여 인생 설계에 현실적인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징병제냐 모병제냐, 선택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과연 어느 쪽이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 나을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은 아닐까? 46) 이 칼럼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 러나 알고 자원한 사람에게는 책임 의식이 있다 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 면, 누가, 무엇을 알고 지원한 사람 이 되는가라는 물음이다. 끝을 모르고 치닫고 있는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빈민과 세계의 기민( 棄 民 )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또 한 네팔 등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고용된 군사청부회사(Private Military Companies) 의 직원 2만 여명이 이라크에 파견되어있다. 47) 회사 직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지 만 그들이 행하는 일은 군대의 업무이다.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네팔은 이라크 에 자국의 군인을 파견하지 않았지만, 군사청부회사 직원으로서 네팔청년들은 이 46) 한겨레신문, 2005년7월4일자. 47) 모토야마 요시히코( 本 山 美 彦 ), 暴 力 民 營 化 の 時 代, 世 界 (2005.7)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37

37 라크에서 근무 하고 있다. 2002년 봄, 부시 정권이 통과시킨 법안 중 하나가 낙오 학생 제로 법안(No Child Left Behind Act)' 이다. 이 법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미국 내 고 등학교는 군인 모집기관에 학생의 개인 정보를 전달할 것. 거부할 경우에는 주( 州 ) 로부터의 조성금이 중단된다. 조성금만으로 운영되는, 경영난을 겪고 있는 학교 입장에서는 선택할 다른 방도가 없게 되고, 학생 개인의 정보는 순식간에 군대로 넘어가게 된다. 입학 당시의 성적, 부모의 직업과 연 수입, 살고 있는 장소, 시민 권 여부, 학생의 휴대전화 번호 등등... 민간 기업에서 7주간에 걸친 영업 연수 를 받은 미군 모집자는 학생 개인의 정보를 손에 넣고, 가난한 지역의 학생들 설득 에 나선다. 이른 바 미군으로 쓸 만한 사람 사냥 작업이다. 이라크 전쟁을 시작 하던 해에 군대가 모집한 신병의 수는 21만 2천명. 군인 모집기관은 대학 교육비 용, 건강보험, 직업훈련 등을 미끼로 가난한 젊은이들을 꾀어드린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은 미국 시민권이 없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3만 7천명의 비시민을 입대시키는 데 성공했다. 위 칼럼 필자의 지적대로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 을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들, 내몰릴 대로 내몰린 사람들이 떠맡 게 되는 것이 구조화되고 있다. 군대를 독점해 왔던 국가가 군사청부회사를 지원 하고 전투원을 양성하고 있는 상황, 폭력의 민영화가 촉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결 국 손에 피 묻히는 일 을 자처 하게 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자국에서 고난 받던 사람들, 업신여김을 당해왔던 사람들, 학대받던 사람들이 타국민을 살 육하는 현장으로 내쳐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병역 비리와 병역의 계급화, 군대 내의 범죄와 다발하는 사고 등 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해 결의 열쇠를 찾는가에 있다. 현행 징병제가 문제가 많으니까 돈이 들더라도, 국방 의무를 알고 자원한 사람 에게 전담시키자는 식의 모병제 논의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 군대 자체가 안고 있는 모순 즉, 모든 사람의 안전 을 지킬 수 없 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군대 문제, 그 사회적 부담을 어느 특정 집단에 떠넘기려는 차별의식이 숨어있다 년 광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실제 그 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의 명령으로 시민을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38 살해한 어느 병사는 정신 이상으로 국립치료감호소에 갇혀있다. 쿠데타로 점철되 어온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볼 때,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특정 집단을 도구적 인간으로 만들어선 안 된 다. 특정 집단을 범죄자 집단, 스코트 펙의 표현을 빌린다면 전문 살상 집단 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모병제는 그 자체로도 지극히 문제적인 제도이지만, 더욱 문제 적인 것은 제도를 구상하는 단계에 이미 인권 차별적 관점이 전제되어있다는 사 실, 타자 만들기의 폭력이 노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지닌 영혼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연민 을 앗아가는 제도를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짐 지우려 하는 가?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일 이라는 말은 마치 직업 선택의 자유가 누구에게나 보 장된 것처럼, 혹은 기회 균등 이 보장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유발시킨다. 성매매 산업 종사자들도 그 일을 알고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왜 이들을 성매매 피해자 라고 하는가? 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중에서는 실제로 일본 회사의 구 인 광고를 보고, 혹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 으로 일본행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 다. 이때의 자발은 사회적 영향이 배제된 진공 상태 의 순수한 자발 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973년 베트남 전쟁 패전과 더불어 미국에서 징병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 시 국방성의 고민은 군대를 전부 지원병제로 바꾸었을 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군대를 점령하게 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두려워했던 미 정부가 발견해 낸 것이 여자 군인을 채용하는 것이었다는 가설이 있다. 1972년, 미국헌법남녀평등수 정조항(Equal Rights Amendment)이 제정된 것도, 여군을 채용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된다. 48) 생산과 분배를 비롯한 모든 사회 생활에서 생기는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 관계의 규범으로서의 인권을 생각할 때, 위의 사례를 진정 평등권이 실현되 는, 인권이 성숙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90년 걸프 전쟁 때, 4만 명의 여 군이 참전했다. 그것은 당시 현역 군인의 12%였는데 주목한 만한 일은, 여성 하사 관의 47%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48) 와카쿠와 미도리( 若 桑 みどり), 戰 爭 とジェンダー,( 大 月 書 店, 2005)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39

39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은 법이다. 이러한 현실을 서로가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데서 인권 문제는 발전하고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 두가 하기 싫어하는 그 일 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까? 나는 왜 모두가 그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일이 왜 하기 싫은 일 인지, 진지하게 자문하는 것 이 군대 문제를 고민하는데 작지만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지타 쇼오조오( 藤 田 省 三 )는 일본인의 집단주의를 상호 관계체로서의 집단, 즉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을 지나치게 사랑함으로 써 자기애를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근본적인 자기기만이 있다고 지 적한다. 49)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만을 기초로 한 모든 행위는 결국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사자와 타인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사람의 행위에는 정신적인 동기가 없는 행위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면서 행한 헌신과 복종은 반드 시 그 대가를 원하게 되어 있고, 그것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분노는 폭력적인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M. 스코트 펙이 지적한 대로 직업 군인들이 전쟁을 원하게 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자신은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데 그 투철한 정체성에 걸맞는 물질적/심리적 보상, 특히 자신들의 경험을 의미 있게 규정해 줄 사회적 언어가 부재할 때 소외감과 허위의식은 개인을 분열시키고, 그 개인과 더불어 사는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평안과 행복을 앗아가는 방향으로 분출 된다. 걸프전, 이라크전을 치루고 본국에 돌아간 미군들이 겪는 정신적 공황, 암과 의 투병, 아내 구타를 비롯한 가정 폭력, 사회 부적응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 쟁은 단지 참전했던 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전쟁이란 자기 배를 살찌우려는 대통령과 군수산업체, 건설회 사가 일으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고 지탱시키는 건 그 패거 리들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국민들의 무지 이다. 50) 이라크전에 참전했다가 평화 헌법 51) 이 있는 나라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어 일본에 잠시 머물렀던 어느 미군의 49) 후지타 쇼오조오( 藤 田 省 三 ), 현대일본의 정신, 전체주의의 시대경험,(1998, 창작과비평사) 50) 쯔쯔미 미카( 堤 未 果 ), イラクの 戰 場 に 送 られる 若 者 たち, 世 界 (2005.5) 51) 일본헌법 제9조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40 말은, 전쟁을 준비하고 대기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군대 제도를 어떤 시 각으로 바라 보아야하는지 되묻게 한다. 타인을 죽이거나 죽이는 것을 연습하는 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고 고백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 에 어떤 메아리로 남아 있는가? 52) 다수 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수의 차별과 희 생을 당연시 하는 발상은 그것이 어떤 제도이든 간에 다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 직하지 않다. 누군가를 짓밟고 내가 해방될 수는 없는 일이다. 3. 맺음말 1) 피해자 / 가해자 와 거리 두기 살해당한 자들을 희생자로, 살해한 자들을 가해자로 묘사해 버리면 안 된다. 살해당했거나 살해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을 희생자라는 말로 일 괄해 버리는 행위는, 가해자로서 주체화된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살해 당할 위험성, 그리고 피해자로서 주체화된 사람들이 가진 저항의 가능성을 동시에 봉인해 버린다. 도미야마 이치로 53) 피해자의 주체성을 희생'이라는 영역에 고정시켜 절대시하거나 피해자를 선인 ( 善 人 ) 으로 미화하는 행위는, 오히려 그의 고통을 소멸시킬 가능성이 높다. 태극 기 휘날리며 반미 구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은 개인의 슬픔을 억누르는 권력으 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범죄를 피해자의 고통 이 아니라 민족이 당한 모멸 혹은 수치 의 문제로 접근하는 민족주의의 두터운 장벽 앞에서 개인의 고통 은 초라해지고 무력해진다. 집단의 권력이 제 멋대로의 정체성(희생자성)을 피해자 제1항 일본국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 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제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 외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을 인정하지 않는다. 52) 조선일보 2003년 1월 27일자. 53) 도미야마 이치로( 富 山 一 郞 ), 對 抗 と 溯 行, 思 想 (1996, 8. No.866)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41

41 에게 부여하고 또 그것과 민족의 정체성을 동일시 할 때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 하고 그의 고통은 팩키지 된 상품이 된다. 양현아는 총체적 인간성 말살의 범죄인 위안부 문제가 성애화 된 민족의 문제, 민족주의화된 성의 문제로 축소되어 있음 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재현이 생존자 여성들을 주변화 시키고 그들에게서 일 생에 걸친 수치와 침묵 그리고 고통이라는 짐을 덜어 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54) 존 중받지 못하는 감정, 공감되지 못하는 아픔은 피해자의 주체성을 억압한다. 나는 개인의 슬픔을 소화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결여는 피 해자의 가능성에 대한 빈약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주의와 보살핌 그리고 공감을 위해서는 거리 가 필요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이 적당한 거리에 대한 겸허한 이해와 존중에서 비롯된다. 미군범죄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혹은 우리 민족 이 피해자라는 식의 뭉뚱그린 사고는 민족적 공분를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피해자를 소외시키 고 사회운동을 타인을 향한 질문(항의와 각성 촉구)으로만 머물게 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우리 민족이 선한 피해자이면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되는 측 은 전부 악한 가해자인가? 민족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은 어떻게 자리 매김 되며, 민족의 테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와 소통할 수 있는가? 우리 민 족 을 피해자라고 간주하는 사고는 비판적 통찰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 한시킨다. 자기 상대화를 잊은 채 양키 에 대한 단죄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스스로를 고발자 로 한정지우며, 피식민자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다 는 맹목적 확신, 성찰 없음으로 이어지기 쉽다. 55) 사회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분할되어 있지 않다. 폭력이 두 세계 사이에 서만 단조롭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를 선과 악으로 단순 이원화하고, 피해 주체를 선인, 순결한 희생자 로 위치지우는 태도는 권력과 역사의 복잡성을 파 악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된다. 순결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다중적 주체들의 피해 54) 양현아, 한국인 군 위안부 를 기억한다는 것, 위험한 여성,(2001, 삼인) 55) 내면화된 억압에 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가노 마사나오( 鹿 野 政 直 ) 일본의 근대사상 (2003, 한울아카데미)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42 는 어떻게 위치지워 지는가? 미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천한 양공주 에서 순결한 민족의 딸 로 변신 당한 피해자는 사회 운동의 이중성, 정체 성과 고통의 위계, 차별의 문제를 날카롭게 질타한다. 여중생 둘이 죽었어요. 그건 안쓰러운 일이예요. 그런데 (데모하는 사람들 보면) 부모를 빼고 다른 사람들은 여중생을 모르는 사람들 아니예요? 다만, 한국이란 그 자체가 그 사람들을 모이게 한 거 아니에요? 잘못됐기 때문에... 그런데 아가씨들이 (술집에서) 깡패나 판사, 검사들한테 갈기갈기 찢겨 갖고 식물인간이 되는, 왜 그렇게 죽은 거는 한국인이라고 (데모) 못해요? 그 사람 들은 한국인 아니에요? 왜 그러는지 아세요? 그 아가씨들은 인간도 아니니 까. 상종을 안 하는 거예요" - 기지촌 여성 의 증언 - 56) 미군 기지가 철수된다고 해서 이 여성들에 대한 학대와 착취가 사라지지는 않 을 것이다. 착취의 근원은 바로 철저한 계급 질서의 형성, 여성을 사회적, 도덕적 천민으로 간주하는 사회 규범, 그리고 여성과 소외 계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정치 체계와 문화이기 때문이다. 57) 한국정부가 여성의 성을 미군들의 휴식 (위안)과 오락(Rest and Recreation)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국가를 위해 여성의 자아를 희생하는 것을 기대하고 정당화해 온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하던 라이터에는 평화의 이름 아래 죽이는 것도, 처녀를 강간하는 것도 병사의 특권이자 임무이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 군대의 여성에 대한 조직적 성적 수탈은 전의( 戰 意 ) 고양수단, 보장행위, 불만, 욕망, 분노와 공포의 하수구로 기능하여 폭력의 합법화라는 군대의 메카니 즘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위안이나 휴식 등의 용어는 정치적 권 력 행위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신체의 요구라는 생물학의 주제로 교묘하게 이동시 켜, 가해 남성의 책임을 비가시화하고 피해 여성의 고통을 주변화 한다. 고려시대 56) 이소희, 기지촌 여성과 미군범죄 에서 재인용, 다큐멘터리 나와 부엉이 자료집, (2003, 두레방) 57) 캐서린 H. S 문, 한 미 관계에 있어서 기지촌 여성의 몸과 젠더화된 국가, 위험한 여 성,(2001,삼인)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43

43 환향녀( 還 鄕 女 ) 에 대한 인식은 현재의 일상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문동환은 우리 민족의 힘이 모자라 미군기지 주변에 매춘여성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그러한 불가항력 구조 속에서 누군가가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 대신 그 일을 해준 여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고 지적한다. 58) 나는 매매춘이 필요악 이라는 입장엔 반대하지만 이 말은 어쩔 수 없는 피해자 라면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 희생에 따르는 고통, 고통을 감당하는 데 요구되 는 노동과 비용은 나누어지지 않고 고통 받는 여성에게 고스란히 뒤집어씌우는 부정의. 자신들의 고단했던 경험을 도덕적 죄의식 으로 밖에 언어화할 수 없어, 더욱 고통에 시달렸던 여성들, 부권주의는 이들의 흔적 조차 역사에서 지우려한다. 저항하는 자가 피해자 를 자처하고 고발자의 지위만을 고집할 때, 지배받는 민 족 주체 내의 다양한 정체성의 차별, 이해( 利 害 ) 관계 등 내부의 문제는 초점이 흐 려진다.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미군 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범죄를 당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우리가 모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이며, 사람의 모임인 국가나 민족은 피해자가 아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민족의 자주와 통일, 세계 평화를 위 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하는 이의 입장일 뿐 살붙이를 잃은 사람의 마음하고는 다른 것이다. 고통 받는 이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도취적) 동일시가 가능하 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필연적으로 피해자의 언어를 독점하게 되고 결국 그의 언어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부차화 시키는 기능을 한다. 특히 권력을 많이 가진 집단이 사회적 소수자에게 취하는 동일시는 피해자의 언어를 소멸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 관계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이다. 그 거리 는 인권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평등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일체화하는 것 은 평등이 아니다. 거리를 무시하고 동일시하려는 행위는 결국 기득권의 집착 혹 은 재구축에 지나지 않는다. 58) 문동환, 이중문화 가정목회 전국연합회 제10회 수련회 (뉴욕) 주제 강연, 세계 평화를 위해 일 하는 여성들 중에서. (1999년 8월 5일)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44 2) 고통을 말한다는 것, 듣는다는 것 언제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중요한 건, 경의를 가지고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줄 존재. 지금은(고문과 강간의 체험을), 나 자신의 몸에 서 일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두고 말할 수가 있어요. 다른 피해자와 의 만남도 저에게 큰 계기가 되었어요. 여기까지 오는 데에 20년이 넘게 걸 렸습니다. 정말이지 가혹한 시간이었습니다. 59)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정책실장인 이소희씨는 솔직히 하면 할 수록 이 일 자체가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매번 끔찍한 미군범죄 현장을 보는 것도 고통이려 니와 무엇보다 피해자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이,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 낀다는 것이, 그 만큼 내가 진심으로 아파할 때 가능하기에 힘든 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60) 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미군범죄 피해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타자와 연대를 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지독한 통증 과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감, 불쑥불쑥 빠져드는 무력감과 패배감의 수렁... 견디기 힘든 이러한 감정은 고통을 목격한 사람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피해자가 토해낸 고통을 어떻게 그의 입장에서 재현할 것인 가? 타자의 기억을 증언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을 옮겨 안는 것인데, 그것은 과 연 가능한 일인가? 법과 제도, 사회적/문화적/정치적으로 결코 유리하지 않은 입장 에 있는 그들이 당한 사건 을 제 3자가, 그것도 전혀 다른 공간의 사람들에게 전 한다는 것은? 이 힘겨운 일을 자처한 사람들의 곤혹스런 체험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타자의 고통 은 묘한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남의 일이면서도 이미 내가 개입 되어 버린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되어 사람을 움직인 다. 타자의 고통을 증언해야만 하는 벼랑에서 부딪히는 두려움과 막막함, 포기하 고 싶은 욕망은 증언자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빚쟁이이자 그의 영혼을 지켜주는 59) 사카가미 카오리( 坂 上 香 ), ' 被 害 者 'の 聲 を 聽 くということ, 現 代 思 想 (2004.3) - 과테말라 내전에서 비밀경찰에게 유괴되어 장기간 고문과 강간을 겪고 살아남은 요란다씨의 증언, 동경에서 개최된 '분쟁하의 군대 성폭력 피해자 공청회'에서. 60) 이소희, 평화의 불씨 57호,(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45

45 반딧불이다. 대신해서 말하는' 권력은 피해 당사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억과 망 각의 영역을 결정한다. 따라서 재현하는 이가 겪는 고통은 그의 위치 설정, 그 위 험한 권력 행위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런 감정일 지도 모른다. 슬픔과 아픔, 한숨과 눈물, 분노와 두려움, 정열과 욕망, 우월감과 열등감, 수치 심과 피해의식, 자괴감과 배타심 등 피해자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골짜기를 해매이게 된다. 그 감정들은 단지 가 해자 에게만 치우쳐 있지 않으며 그의 고통을 접하는 개인과 집단에게도 향해져 있다. 따라서 고통이 소통되고 공유되는 환경에 따라 피해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달라진다.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재해석되기도 하지만, 오염되거나 망각되기 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치유로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 련되기도 하지만 더 깊은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증언, 문제 해결 에 나선 남성의 언어 가 폭력적인 것은 피해자의 육체적 고통과 도덕적 모욕감을 소외시키고 대상화하 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평생 말하지 못하는 것, 기억의 흔적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을 구경꾼들은 쉽게 떠들어댄다. 자신의 경험과 지배 언어의 불일치 라는 분열적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전달해야하는 타자, 언어를 찾지 못한 혼돈 속 의 피해자와 자신의 증언(목격담) 을 절대시하는 남성 권력 사이에서 공감적 정의 ( 正 義 )에 기반한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새로운 관계란, 고통 받는 피해자와 연대를 꾀하는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가능성, 즉 피 해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 혹은 그와 함께 고통을 초래하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꾀하는 일, 피해자의 정신적, 육체적 가능성을 지원하는 일, 피해자의 언어 찾기 등을 말한다. 따라서 고통을 말하고 듣는 행위는 일방적으로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 나누면서 개입하는 실천인 것이다. 3) 평화를 만든다는 것 사람은 타자와 만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픔 을 주는 타자라는 존재와 만나는 것으로 또는 타자가 나에게 주는 아픔 년도 인권논문 수상집

46 을 통해서 나 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아픈 데가 가장 나 를 느끼는 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통 을 안 느끼는 사람에게 고통 을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남의 아픔 을 느껴 안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타인에게 나의 고통 을 말하는 표현력, 또 타인의 아픔 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 쿄우 노부코( 姜 信 子 ) 61) 폭력은 고통을 수반한다. 소위 말하는 문제의 해결 이란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 인, 중층적인 사회 권력 관계의 성격 때문에 무수한 저항과 다양한 가치와의 다툼 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체의 차이 와 살아있는 것의 개별성 을 수용하는 담론 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희망적인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의 완전 해결 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제의 해결이란 무엇인가? 누구의 입장에서 해결 이란 말은 완료형이 되는가? 우리는 종종 문제의 해결=법제화 라는 착각 때문에 피해자의 감정을 간과한다. 물론 피해자도 문제의 해결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들이 더욱 갈망하는 건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이해이다. 2004년 7월 23일, 국가기관에 의해 처음으로 의문사로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10억 원의 배상금 수령을 권고받은 고 최종길 교수 유족들은 법원에 이의신청을 제기 하면서, 가해자인 국가는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소멸 시효가 지났다며 책임을 회 피하고 있다. 화해 이전에 화해를 위한 사죄와 이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져야 한 다 고 밝혔다. 명예회복 조처나 소멸시효 문제점에 대한 판단 없이 배상액만 결 정한 법원의 화해권고를 거절한 것이다. 62) 피해자들은 법적 구제에 자신의 고통을 모두 걸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 한 박해를 사실로 인정하라는 소송을 중시하지만 그것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 을 욕망한다. 공포와 굴욕의 고통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과 존엄성에 대한 복원, 정의 혹은 진실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피해를 당한 사건보다 그 사건의 처리 과정이 인간의 삶에 더욱 큰 영향 61) 쿠아에 히로유키( 桑 江 博 幸 ), 오키나와인과 아이덴티티 에서 재인용. (2000, 미간행) 62) 한겨레 신문, 2004년 7월 24일자. 경합하는 가치로서의 국가안보 와 개인의 안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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