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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형원 柳 馨 遠 (1622~1673) 1) 유형원 연보 年 譜 2) 유형원 생애 관련 자료

2 1. 유형원柳馨遠(1622~1673) 생애와 행적 1) 유형원 연보年譜 본관 : 문화文化, 자 : 덕부德夫, 호 : 반계磻溪 나이 / 연도 8 연보 주요 행적지 1세(1622, 광해14) * 서울 정릉동貞陵洞(정동) 출생 2세(1623, 인조1) * 아버지 흠欽+心 유몽인柳夢寅의 역옥逆獄 에 연루되어 옥사함 5세(1626, 인조4) *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서 글을 배움 6세(1627, 인조5) * 서경書經 을 읽다가 우공禹貢ㆍ기주冀州 두 낱말에 이르러서 날듯이 일 어나 춤을 추었다. 태호공이 그 이유를 묻자 두 낱말이 체體를 높이고 예例를 뽑아냄이 이와 같아 생각지도 않게 즐거움이 이에 이르렀습니 다 고 대답하였다 9세(1630, 인조8) * 주역 계사전을 읽음 10세(1631, 인조9) * 경전 이외에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모두 깨달았다. 이원진과 김세렴 두 공이 선생과 토론하다가 감탄하여 옛날에 혹 이와 같은 사람이 있었 을까? 유씨柳氏에게 그런 후손이 있도다 고 말했다 15세(1636, 인조14) *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원도 원주로 피난 16세(1637, 인조15) * 할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부안扶安을 다녀옴 18세(1639, 인조17) *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의 증손녀와 혼인 21세(1642, 인조20) * 지평현砥平縣 화곡리花谷里의 조상의 묘소 아래로 이사 * 겨울에 아들 하昰 태어남 지평현 화곡리 22세(1643, 인조21) * 여주驪州 백양동白羊洞으로 이사 * 고모부 함경감사咸鏡監司 김세렴을 함흥咸興으로 가서 뵘 * 김세렴이 평안감사로 전직되자, 함께 따라가 평안도平安道 산천까지 둘 러보고 돌아옴 여주 백양동 23세(1644, 인조22) * 조모 별세 * 고모부 김세렴 별세 * 이가우李嘉雨와 함께 산천 유람 26세(1647, 인조25) * 금천衿川 안양동安養洞 유람하고, 불사비佛師卑 뒤에 글을 씀 27세(1648, 인조26) * 영남 유람, 세상을 피해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 모친 별세 29세(1650, 효종1) * 한강 이남과 호서지방 유람. 원주 지평까지 다녀옴 30세(1651, 효종2) * 금강산 유람 * 정시廷試에 나아가다 * 조부 별세 31세(1652, 효종3) * 정음지남正音指南 저술 * 반계수록磻溪隨錄 초고 집필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정릉동(정동)

3 나이 / 연도 연보 32세(1653, 효종4) * 관악산 영주대靈珠臺 유람. 유선사遊仙辭를 짓다 * 화도사和陶辭 지음 * 전라도 부안 우반동愚磻洞(부안면 우동리)으로 이주 33세(1654, 효종5) * 진사시進士試 2등 3인으로 합격 35세(1656, 효종7)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저술 36세(1657, 효종8) * 호남지역 유람 * 청하자靑霞子 권극중權克中 방문하여 참동계參同契 에 대해 토론하고, 3 군데 정정, 한 질을 베껴서 간직함 37세(1658, 효종9) * 귀경. 왕래할 때 마다 지세와 산세 살피고, 그 길의 원근과 경계 방비 의 평탄함과 험준함을 기록 * 남쪽지방 유람, 추월산秋月山 등 구경 * 정동직鄭東稷과 편지로 이기理氣ㆍ심성心性에 관해 자세히 논함 38세(1659, 효종10) * 호남 여러 곳을 유람 40세(1661, 현종2) * 영남과 호남의 선천 유람 41세(1662, 현종3) * 서울 정릉동에 머뭄 * 중흥위략中興偉略 의 초고 집필 42세(1663, 현종4) * 과천ㆍ지평ㆍ여주ㆍ죽산竹山 여러 곳의 선영 참배 * 호남 담양 유람 43세(1664, 현종5) * 동문선東文選 편찬 44세(1665, 현종6) * 동국사강목조례東國史綱目條例 편찬 * 동사괴설東史怪說 을 짓고, 역사동국가고歷史東國可考 를 편찬 * 조정의 천거 받았으나 거부함 선생은 이전부터 민유중閔維重과 숙의戚誼가 있는 사이인데, 민씨閔氏 형 제가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려 했으나, 선생은 정색으로 아저씨들은 나를 알지 못하십니다 라 하고 거부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천거를 받았으나 선생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는 시재時宰를 알지 못하는데, 시재는 어찌 나를 알겠는가? 라고 하면서 거부하다 * 연천漣川으로 허목許穆 선생 방문하고 수일동안 머물면서 학술을 토론하 다 45세(1666, 현종7) * 허목에게 글을 올림 * 동명집東溟集 서문에 대해 사례하고, 고문古文과 고명古銘을 써주기를 청하다 46세(1667, 현종8) * 바다에 표류해온 중국사람과 문답 * 주자찬요朱子纂要 저술 *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선생의 행장을 지음 현종9) * 고종사촌 아우 김준상金儁相과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선생 묘소를 참배 * 연천의 허목 방문 * 허목에게 동명의 행장行狀 지어주기를 청함 허목과 도리道理와 고금古今의 일을 논함 허목으로부터 왕좌지재王佐之才 라는 평가 받음 47세(1668, 48세(1669,현종10) 주요 행적지 관악산 영주대 전라도 부안면 우동리 연천 * 도정절집陶靖節集 편찬 * 배상유裵尙瑜에게 학문을 논하는 답서答書를 보냄 유형원 생애와 행적 9

4 나이 / 연도 49세(1670, 10 현종11) 연보 * 반계수록磻溪隨錄 13권 저술 50세(1671,현종12) * 정동익鄭東益이 반계수록 완성여부를 물어오자 답장 *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절목 정함 51세(1672, 현종13) * 윤휴尹鑴에게 편지 보내 처신에 신중할 것을 충고함 52세(1673, 현종14) * 우반동에서 별세(묘는 용인시 외사면 석촌리 능말) 1741년(영조 17) *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상소하여 반계수록 을 읽어보기를 청함 1746년(영조 22) * 유신儒臣 홍계희洪啓禧에게 명하여 선생의 전기를 짓도록 함 1770년(영조 46) *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 찬선의 증직贈職을 내림 * 경상감영에 명하여 반계수록 을 간행토록 함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주요 행적지 용인시 외사면 석촌리 능말

5 2) 유형원 생애 관련 자료 1세(1622, 광해14) * 서울 정릉동貞陵洞(정동) 출생 (1) 星湖先生全集 권68, 傳, 磻溪柳先生傳 磻溪柳先生馨遠字德夫 文化人 右議政寬之後也 生質長大魁梧 目朗如明星 五歲通籌數 甚有記性 讀書不過數遍 終身不忘 其舅李監司元鎭 所稱太湖先生者也 博學多聞 先生從而受業 未成童 已有偉器之稱 稍長該涉百家語 益涵心爲己之學 乃喟 爾曰士志道而有不能立者 心不率氣也 君子飭躳之要四 吾未能一焉 夙興夜寐未能也 正衣冠尊瞻視未能也 事親柔色未能也 與家人敬相對未能也 四者惰於外而心荒於內 猛省必勉 不在玆乎 因箴而自警 自是日用言爲 有法守而無違 旣而倜儻慷慨 日諷誦陶元亮詩 有曠世之感 遂南歸扶安之邊山下居焉 結廬數椽 藏書萬卷 刻意覃思 至忘寢食 常以不及古人一步地爲深 恥 嘗燕居深念 天下爲己任 病世之學者不達時務 徒尙口耳 其爲言皆苟而已 故在家在邦 當事齟齬 卒歸於大言無實 而生 民受其禍 於是取先王之法 考之以因革 參之以國典 著爲一書 規模宏節目詳 驗乎人情 稽乎天理 筋脈相連 氣血流通 命之 曰隨錄 要之可行於今日也 或疑其不務大體 零瑣是擧 先生曰天下之理 非物不著 聖人之道 非事不行 古者敎明化美 自大 經大法 以至於一事之微 制度規畫 無不備悉 天下之人 日用而心熟 如運水搬柴 皆有其具 以行其事 及周之衰 王道雖廢 典章猶存 聖人居下 槩言出治之源 其於度數 無所事於曲解也 虐秦以還幷與其宏綱細目而蕩滅之 聖人之意 無復徵信 人欲 肆行 羣言亂道 遂乃耳目膠固於見聞 雖高才深智 博於古者 亦無由得其詳也 故間有識其大體而條貫未明 一欲施措 動多釁 罅 終焉格而不行也 天下之理 本末大小 未始相離 寸失其當 尺不得爲尺 星失其當 衡不得爲衡 未有目非其目而綱自爲綱 者也 及不得行也則不惟小人以爲嚆矢 其君子亦未免有疑於時之異宜 謂古道眞若不可復明於世 此豈小害也哉 吾爲此懼 究 古揆今 細大兼該 用著此道之必可行 嗚呼 徒法不能以自行 苟有有志者思而驗焉則亦必有以知此矣 至我顯廟癸丑先生歿 年五十二 所著有隨錄十三卷 理氣總論一卷 論學物理二卷 經說一卷 詩文一卷 雜著一卷 問答書一卷 續綱目疑補一卷 郡 縣制一卷 東史條例一卷 正音指南一卷 紀行日錄一卷 其所編有朱子纂要十五卷 東國文十一卷 紀效節要一卷 書說書法各 一卷 遁翁稿三卷 輿地志十三卷 其佗兵謀師法陰陽律呂星文地理醫藥卜筮籌數譯語之類 無不旁通 多所筆削 皆未及成緖云 後士林集議建院 俎豆不廢 贊曰先生之學 源於太湖 太湖授之以博 先生濟之以世務 據始要終 協義而協 如有用我 將擧以 措之 蓋國初以來 論經世之才 皆以先生稱首 성호 이익李瀷이 작성한 반계磻溪 유형원 전傳이다. 반계磻溪 유형원 선생의 자는 덕부德夫, 문화인文化人이며, 우의정을 지낸 관寬의 후손이다. 어려서 장대하고 뛰어났으며, 목이 밝은 별처럼 빛났다. 5세 때 주수籌數에 통달하였으며, 읽은 책이 몇 권 안 되었지만 모두 잊지 않고 암송하였다. 외삼 촌 이원진 선생을 따라 수업을 받았으니, 아직 어렸지만 그 사람됨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라면서 제자백가의 책을 섭렵하고, 점차 자신을 위한 학문에 몰두하였다.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가 부안의 변산 아래 은거하니 정서 만여 권을 두고 침식을 잊어가며 고인의 가르침에 침잠하였다. 평소에 선생은 시무時務에 통달하지 않고 한갓 입으로만 떠드는 것을 구차하 게 여겨 마침내 백성들에게 화가 닥치게 된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선왕의 법도를 고찰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나라의 법전을 참고하여 책한 권을 저술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반계수록 이었다. 선생은 천하의 이치는 사물이 아니면 드러날 수 없 고 성인의 도리는 일상의 일 속에서 거행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일상의 일에 익숙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주나 라의 도가 쇠퇴해져서 왕도가 비록 사라졌지만 전장은 아직 남아있으니 이것을 다스림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선생의 학문은 태호에서 비롯되었고 태호 선생은 박학으로써 가르쳤으니 선생은 세상 시무에 두루 통하였다고 할 것이다. 유형원 생애와 행적 11

6 (2) 順菴先生文集 권18, 跋, 磻溪年譜跋(乙未) 鼎福幼在湖南 從長者熟聞柳磻溪先生之爲大德君子 而時未有知 不能得其詳 旣長思之 每深愧恨 甲子歲 謁秀村公於京師 之桃楮洞 公卽先生之曾孫也 爲鼎福道先生事甚悉 至借以先生所著隨錄 歸來讀之 誠運用天理 爲萬世開太平之書也 於乎 盛哉 後數從公遊 得覩遺集及諸書 其問學之精密 志量之遠大 非後世能言之士所可及也 先生生於黨議橫流之際 遯世無悶 著書自樂 卓然爲元佑之完人 聖世之逸民 而世無敢雌黃焉 則先生之德可知也 噫 使世之好先生之書者 不徒爲目前之玩 必 也躬行心得 措之事爲之際 而惟實効是圖 則先生雖沒 而先生之道行矣 此豈可易言哉 鼎福生晩 雖有執鞭之願而不可得 今 歲偶忝官方 來舘于公之季氏前承旨薰家 時公已卒 胤子明渭守制在廬 出示公所草先生年譜 而使之脩潤 且索跋語 鼎福於 公 實有幽明知遇之感 且以託名前賢事蹟之未爲榮 不能終辭則斯覺僭耳 時上之五十二年乙未臘月中澣 後學東宮左翊贊安 鼎福敬識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반계연보 를 작성하고 붙인 발문跋文이다. 내가 어려서 호남에 있으면서 유반계柳磻溪 선생이 대덕군자大德君子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아는 것이 없어 상세한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으므로 장성한 뒤에 생각하고는 늘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겼다. 갑자년에 수촌공秀村公(柳發)을 서 울의 도저동桃楮洞에서 뵈었는데, 공은 바로 선생의 증손이다. 나를 위해서 선생의 일에 대해 무척 자상하게 이야기해 주고 선생이 저술한 수록隨錄 을 빌려주기까지 하였는데, 돌아와서 읽어보니 참으로 천리天理를 운용하여 만세를 위해 태평을 얻 어주는 책이었다. 아, 훌륭하다. 그 뒤에도 자주 공과 종유하여 유집遺集과 그 밖의 책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학문의 정밀함 과 뜻과 도량의 원대함은 후세의 말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선생은 당론黨論이 횡행하던 때에 태어나 세상을 피해 살면서 근심하지 않고 저술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여 우뚝이 원우元佑의 완인完人이 되고 성세聖世의 일민逸民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감히 더불어 시비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으니 선생의 덕을 알 만하다. 아, 세상에 선생의 글을 좋 아하는 자가 그저 눈앞의 구경거리로만 삼지 않고 반드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일에 시행하여 실제적인 효과를 도모한다면 선생은 작고했으나 선생의 도는 행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찌 쉽게 말하랴.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 서 비록 말고삐를 잡고라도 모시고 싶은 바람이 있어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금년에 우연히 벼슬을 맡아 공의 계씨季 氏인 전 승지 훈薰의 집에 와서 묵게 되었다. 이때 공은 이미 작고하고 맏아들 명위明渭가 거상居喪하고 있었는데, 공이 초한 선생의 연보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손질을 해달라하고 또 발문을 청하였다. 내가 공에 대하여 실로 유명幽明 간에 지우知遇의 감회가 있고, 또 전현前賢의 사적의 끝에 이름을 붙이게 됨을 영광으로 여겨 끝까지 사양하지 못했으니, 참람됨을 느낄 뿐이 다. 영조대왕 52년 을미 섣달 중순에 후학後學 동궁좌익찬東宮左翊贊 안정복은 삼가 기록하다. 31세(1652, 효종3) * 반계수록磻溪隨錄 초고 집필 (3) 磻溪隨錄 권1, 序, 隨錄序 道德原乎天 政制本乎地 師天而不知地 師地而不知天可乎 繫辭言繼之者善 成之者性 書言惟皇上帝 降衷于民 若此類甚多 謏聞末學 輒能言道原之自天 若夫殽地道而設王制 雖名臣碩輔瞠如也 此何以哉 天下之言功者 莫尚於禹 而禹之功本於土 天下之言治者 莫備於周 而周之治本於田 聖賢亦何心哉 順天地而已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道圓而器方 政制者 器也 方三代載籍罔缺 道與器俱載焉 及周末道器俱喪 而暴君汚吏嫉夫器益急 並與其所載者而先去之 又百餘年而載道者亦 火乎秦 然道者亙萬世不折不滅者也 雖不能行於天下國家 而其在人心者有時而明 若器則蕩然而無徵 孟子論王道 必曰井田 1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7 未嘗離道器而言之 然先王舊跡 雖孟子亦未之見也 然則秦漢以來千數百年之間 大抵天地幾乎息 而地制之壞爲尤甚 夫以程 朱之大賢 慨然有意於三代之治 而其所論著 詳於道而闕於器何也 蓋其時視孟子之時又益降矣 道之喪也日遠 故諸君子之心 汲汲皇皇於斯道 而於器則未遑焉 蓋其意以爲道明則器自復爾 觀於橫渠買田畫井之說 而諸君子之心 可推以見也 然程朱以 後 道不可謂不明 而器之蕩然者自如 道何嘗離器而獨行哉 後之君子 抱皇王之道器 補程朱之未遑者 宜其汲汲皇皇於斯器 亦何異於程朱之汲汲皇皇於斯道也 獨異夫窮以著書者幾人 達以爲天下國家者幾人 未聞有以井制爲己任者 豈眼目心膽 未 周乎天地之大 而世俗古今舟車之說 又從以奪之氣耶 磻溪柳先生隱居著書 以寓夫拯捄惻怛之志 名曰隨錄 其書以田制爲本 不畫井形而得井田之實 然後養士選賢任官制軍禮敎政法規模節目 不泥不礙 沛然皆合於天理 愚一覽其書 而已窺先生之天 德 已而得先生所著理氣人心道心四端七情說讀之 其純粹精深 非近世諸儒所可及 於是益信道器之不相離也 我國家立制雖 非井地 而寓兵於農 初未嘗不倣於三代之遺意 中經多難 兵農遂分 羣生失所 百度皆紊 有識者蚤夜隱度 終不得其便 忠智 俱窮 坐觀其蠱壞而莫之救 夫孰知一擧斯書而措之 則如禹之治水而行其所無事哉 夫孰知乾坤簡易之理 一至於此哉 斯書之 不遇 東民之無祿也 雖然先生天下士也 斯書之因時制宜 條理區處 雖爲褊邦設 而其範圍宏大 實天下萬世之書也 嗚呼 三 代以降 胡虜馮陵 至一縣則一縣破 至一州則一州破 終至於薙天下之髮 人皆疑於天道之否 而不知由於地制之壞 何其不思 之甚也 善哉井地之制也 天下無一夫而非兵 無一里而非守 無一時而非服習 而方伯連帥羅絡相望 虜雖有鐵騎百萬 安得猖 獗至此 文山請建四閫 虜聞之吐舌 况以井田和睦之兵 而明親上事長之義 以統於方伯連帥 則其於制挺撻虜也何有 天不能 長否 地不能長壞 天下萬世一有大聖作 毅然復三代之制 以設華夏之巨防 或取法於斯書 或不見斯書而相合 均之乎先生之 書行也 先生有公天下萬世之心 若以其身屈於一世 書晦於褊邦 而爲先生惜者 是淺之爲人也 先生以不知永曆皇帝存亡爲恥 遠訪福建漂海人問之 遂相對流涕 先生之眼目心膽 果何如人哉 先生七歲讀禹貢至冀州 翻然起舞 噫禹貢萬世地制之本也 冀州天下地制之綱也 方其起舞也 公亦不自知其爲何心也 隨錄一部 於是乎成矣 天之生斯人也若不偶然 而抱是書以沒 悲 夫 聖上十三年丁巳 後學福川吳光運謹序 오광운吳光運이 지은 반계수록 서문序文이다. 도덕의 근본은 하늘(유교에서의 이른바 천품)에 있고 정치제도의 기초는 땅(치산, 치수 사업과 토지제도를 의미)에 있나니 하늘 만을 본뜨고 땅을 알지 못하거나 또 땅만을 본뜨고 하늘을 알지 못한다면 될 수 없을 것이다. 계사繫辭 에서 말한 바 본래 타고난 대로 계승하면 선이며 선을 완성하면 본성으로 된다[繼之者善 成之者性] 라는 것과 서경書經 에서 말한 바 거룩한 하 느님이 본성을 백성들에게 주셨다[惟皇上帝 降衷于民] 는 말들은 경전에 많이 기재되어 있다. 글을 읽은 후세의 학자로서 누구 나 도의 근본이 하늘에서 나온다 는 것을 말하지마는 땅에서 실시하는 방안으로써 하늘의 이치 즉 도덕에 적합한 제도를 설정할 데 대하여는 아무리 고명한 선비와 재상들이라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국의 역사상에서 사업 으로는 우왕禹王을 쳐주는데 우왕의 사업은 토지를 개척ㆍ정리하는 데 있었으며, 치적으로는 주나라의 구비된 제도를 쳐주는 데 주나라의 치적은 경지를 구획하는 데 있었으니, 당시 영명한 임금들이 이와 같은 치적을 이룩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도덕과 정치제도를 하늘과 땅에 맞추어서 실행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형이상적인 것은 도道(원리)라 하고 형이하적인 것은 기器(방안)라 하여 도는 추상적인 것이나 기는 구체적인 것으로서[道 圓而器方] 즉 정치제도는 방안이다. 삼대 때에는 이 원리와 방안이 경전에 기재되어 구비되었지마는 주周나라 말기에 이르러 서는 이 원리와 방안이 함께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포악한 임금과 나쁜 관리들은 특히 이 구비된 방안을 질시하여 무엇보다 여기에 관한 기록을 없애버렸고 또 그로부터 백년인 진秦나라 때에는 경전에 기재된 그 원리까지 마저 불태워버렸 다. 그러나 이 원리[道]란 만대를 지내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서 비록 역대 국가들이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의 마 음에 남아 있으면서 때로 발전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방안은 아주 없애버려서 증빙할 만한 문헌조차 없어졌다. 그리하여 맹자孟子가 왕도王道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정전제井田制를 언급하여 잠시라도 원리와 방안을 분리한 적이 없었으나 선왕들이 실시한 사적들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나라 및 한나라 이후 천 수백 년 기간에는 하늘과 땅 즉 원칙과 방안 유형원 생애와 행적 13

8 이 거의 없어진데다가 토지의 제도가 붕괴됨이 더욱 심하였다. 저 정자 程 子, 주자 朱 子 는 송나라의 어진 인물들로서 삼대의 치적에 관심을 두면서도 왜 이론과 저작이 다만 도의 원리에 만 그치고 방안에 대하여는 서술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의 시대가 맹자 때보다 더욱 말세가 되어 도의 원리를 천명하는 데 급급하였고 방안에 대하여는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생각에는 왕도의 원리만을 천명한다면 방안이야 그에 따 라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장횡거 張 橫 渠 가 말한 바 토지를 사서 정전제를 실시하자는 학설들을 보아서도 넉넉히 그들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자, 주자 이후에도 정치의 근본 원리가 밝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 나 방안은 그전이나 그때나 의연히 찾아낼 길이 없었다. 이 원인은 정치의 근본 원리가 방안을 떠나서는 단독으로 실행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리와 방안을 구비한 후세의 선비로서 정자, 주자가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던 것을 보충하기 위 하여 이 방안을 설명하기에 급급한 것이 역시 정자 주자가 정치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는 데 급급하던 그것과 무엇이 다를 바 있으랴? 역사상에는 불우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저서로 밝힌 사람이 몇몇이나 되었으며 또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국가 사업을 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었던가? 그러나 정전제도를 실시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는 사람을 듣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다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견해가 정치의 근본 원리와 방안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였거나 또 혹은 시대가 고금으로 달라져서 여러 가지 속된 공리설에 현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직 반계 유선생은 은거하면서도 이 세상을 건지고저 이 글을 저술하여 '수록'이라 이름하였는데 전제 田 制 로써 기본을 삼아서 정 井 자의 형을 구획하지 않고도 정전제도의 알맹이를 얻을 수 있게 하였으며 또 그것이 실시된 뒤에는 선비의 양성, 어진 인재의 선발, 관리의 임명, 국방의 정비와 도덕의 교양, 정치, 법률들의 규모와 절목이 조리 있게 구비되어 훌륭하게 모 두 천리로서의 원칙에 합치되어 있다. 나는 이 글을 보고 선생의 착한 마음씨를 엿보았으며 바로 뒤에 선생의 이기 理 氣, 인심 人 心, 도심 道 心, 사단 四 端, 칠정 七 情 등의 학설을 읽었는데 그의 이론이 순수하며 정밀하고 심오하여 근세에 속된 선비들의 따 를 바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원리와 방안이 서로 이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제도는 비록 중국의 삼대의 정전제도를 쓰지 않았으나 병역 의무를 농민에게 연결시킨 것은 처음부터 삼대 의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복잡한 단계를 거쳐서 병역과 농사와의 관계가 분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여러 백성 들은 자기 직분에 고착되지 못하였으며 모든 제도도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밤낮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종내 그것을 해결할 방도를 얻지 못하였으며 충실성과 지혜를 가진 자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파괴되어 가는 것만을 보고도 구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보고 실행한다면 우왕의 치수 사업이 한번 실행된 뒤에 일이 없게 된 그것과 같은 것을 누구인가 알 것 이며 하늘과 땅의 배합된 이치가 이렇게 간단한 것을 누구인가 알 것이랴? 이 수록 이 실행되지 못한 채 그대로 있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불행이다. 그러나 선생은 세계적 학자이다. 그가 저작한 수록 이 비록 조그마한 우리나라의 실정과 시기에 알맞게 설정하여 놓았다 하지마는 그의 범위는 실로 광범하여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를 통하여 적합한 책이라 할 것이다. 한 심할 일이다. 중국은 삼대 이후로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1현을 침략하면 1현이, 1주를 침략하면 1주가 유린을 당하다가 결국 온 중국이 머리를 깎고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 하늘의 원리가 잘못되어 그렇게 된 줄로만 알고 그것이 토지제도에서 유래한 줄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천박한 인식인가? 정전제도야말로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것을 실행하면 천하의 어떤 장정이든지 군인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며 어떤 마 을이든지 방비가 조직되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며 어떤 데서나 전투 연습을 하게 되어 방백 수령의 통솔과 통제가 유기적으 로 연결되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설사 어떤 외적의 백만 정병의 침략이 있었더라도 이렇게까지 유린되게는 못하 였을 것이다. 송나라 말기에 문천상 文 天 祥 이 4개 군단을 설치하자고 건의할 때에 몽고족이 그 정보만을 듣고도 겁을 내었거 늘 하물며 정전제도에서 결속된 군인을 선발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사상으로써 교양하며 또 방백들로 하여금 통솔케 하는 데 야 매를 들어 침략자의 등을 치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1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9 하늘(도덕)이란 영구히 비색한 대로 있는 것이 아니며 땅(토지제도)이란 영구히 나쁜 대로 있을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후 세에 만일 큰 성인이 나셔서 삼대의 제도를 회복하여 중국을 건설하게 될 때에 이 수록 을 본뜨거나 혹은 이 수록 을 보 지 않고도 이와 일치하게 실행한다면 선생의 이 수록 이 실행된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선생은 이 수록 을 천하와 만대에 공포할 생각이 있었다. 이런 본의를 알지 못하고 당시 선생이 일시에 불우한 생활을 하고 또 이 수록 이 우리의 작은 나라에 묻혔다 하여 선생을 애석하게 여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선생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은 일찍이 영력황제永曆皇帝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한 것이 항시 마음에 잊히지 않아 어느 때 복건福建으로부터 표류해 온 사람을 찾아가서 비로소 알고 서로 마주잡고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이런 것을 보아 선생 의 안목과 포부가 과연 어디 있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선생이 일곱 살 되어서 서전 우공禹貢 편을 읽을 때에 기 주冀州(중국 하북 지방)를 설명하는 구절에 이르러 선뜻 일어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아아! 우공편 은 만대를 가더라도 토지제 도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며 또 기주는 천하의 토지제도에서 표본이 되는 지대였다. 그것을 보고 춤출 때에 선생 자신도 그것 이 무슨 까닭인 줄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나 이 수록 1부는 벌써 거기에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선생이 이 시대에 출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련마는 이 수록 을 그대로 두고 이 세상을 버린 것은 슬픈 일이다. 영종 13년 정 사년(1737) 후학 복천 오광운吳光運은 삼가 쓰다. 32세(1653, 효종4) * 화도사和陶辭를 짓고, 겨울 전라도 부안 우반동愚磻洞(부안면 우동리)으로 이주 (4) 磻溪雜稿 辭 和陶辭 歸去來兮 歲聿其暮胡不歸 苟自得以誠之 奚外物之爲悲 昔余之始有知兮 惟聖人爲可期 察淸濁於涇渭 俱毫釐之或 非恒兀 兀而窮年 忘朝餐與冬衣 紛事物之中 多理無間於顯微 昭著兩間 有飛有奔 敬義夾持 入德之門 退藏於密不昧者 存毋失爾 性 戒彼犧樽 討理亂乎古今 證直尋於孟顔 衆囂囂而馳騖羌 不知其所安紛 怙勢而競利 各越鄕而胡關會 欷戱余忼慨獨永歎 而冥觀惟天運之不淹 忽春秋之互還 豈稱量之靡悵 猶預而槃桓 歸去來兮 請遐擧而優游 往者 不可及兮 來者 不可求 欲度 世而長年 夫使我以心憂 將脫屣而蟬蛻 又何懷乎舊疇 僕夫告具 我車我舟 涉弱水而循閬風 仍羽人於丹丘 晞余髮兮 朝陽 濯余纓兮 淸流極八荒 而偸樂感日 遠以絶類離群 又奚之反余心於至要 俟百世以爲期 專潛究於墳典 亦服勞于耘耔 托龍門 以理 韵仰勳華以賡詩孜孜焉 不知老將至卒 吾所事夫何矣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화운함 - 세태를 한탄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을 읊은 유형원의 시이다. 돌아가자 해가 저문데 어찌 아니 돌아가랴 진실로 자득하여 성실하면 어찌 외물 때문에 슬퍼할까. 옛날 내 처음 앎이 있을 때, 오직 성인만을 기약했지 경수涇水, 위수渭水로 맑고 흐림 살피고, 조금이라도 혹시 잘못할까 두려워 늘 바둥바둥 해 보내며, 아침밥 겨울옷도 잊었지 어지러이 많고 많은 사물, 드러나건 숨어 있건 아치는 매한가지 그 사이 밝게 드러나면 나 는 것도 있고 달리는 것도 있지 경敬과 의義 붙잡는 건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네. 은밀한 곳에 물러나 숨어 있지만 어둡지 않은 것 있으니 그 본성 잃지 말고, 저 술병 경계할지어다. 리理를 구하려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지러워 증거는 곧바로 안 자 맹자에게 찾았지 뭇사람 시끌벅적 이리저리 치달아 아, 제 편안한 곳 알지 못하네. 권세 믿고 어지러이 이利를 다투는데 고향 떠난들 무슨 상관이랴 흐느끼다 탄식하다 의기가 북받쳐서 홀로 한숨 길게 쉬고 그윽하게 살펴보니 하늘의 운행만이 머무는 일 없어 봄가을 홀연히 서로 돌아온다. 머뭇머뭇 어슬렁거리며 슬퍼하랴. 돌아가자. 멀리 떠나 한가롭게 지내기를 청하자 간 것은 미칠 수 없고 오는 것은 구할 수 없으니 속세를 초월하여 오래 유형원 생애와 행적 15

10 살기만을 바랄뿐. 내게 마음 때문에 근심하는 일은 장차 벗어 내던진 신발, 매미의 허물일지니 또 옛일을 어찌 생각하리오. 사내종이 수레와 배를 갖추었음을 고하거늘 약수弱水를 건너고 낭풍閬風을 따라가니 곧 단구丹丘의 신선이로다. 머리 쬐니 아 침 햇볕이요, 갓끈 씻으니 맑은 물이로다. 이곳저곳 틈내 즐기는 일 극진히 하며, 날마다 멀리 무리에서 벗어남을 느낀다. 무리를 떠나 또 어디로 가리오, 내 마음 지극히 중요한데로 되돌려, 백세를 기다려 기약하리. 오로지 분전憤典을 깊이 공부하며 또 김매고 북돋는 일 힘써 하리라 정 절靖節에 의탁하여 운韻을 다스리고 요순을 우러러 시를 짓는다. 부지런하여 늙어 장차 죽음에 이른 것도 모른다면 내가 하 는 일 어찌 의심하리. 49세(1670, 효종11) * 반계수록磻溪隨錄 13권 저술 (5) 磻溪隨錄 書隨錄後 右凡若干條 或讀古今典籍 或因思慮所及 隨得錄之 蓋皆切於今世所急者 念自王道廢塞 萬事失紀 始焉因私爲法 終至戎狄 淪夏 至如本國則因陋未變者多 而加以積衰 卒蒙大耻 天下國家 蓋至於此矣 不變廢法 無由反治 顧弊之爲弊也 其積漸數 百千年 以謬襲謬 仍成舊規樛錯相因 有如亂絲 不究其本而祛其棼 無以救正 而在位者 旣由科目而進 唯知徇俗之爲便 草 野之士 雖或有志於自修 而於經世之用 一作施措之方 則或未之致意 是則斯世無可治之日而生民之禍 無有極矣 區區於此 深切懼焉 故嘗愚不自料 窃與同志 思所以稽古正事 少補世道者而事有緩急 不可遍擧 一事之中 緖目百方 若不擬例 無由 明其得失之際 乃敢條列 掇其曲折以自識之於心 而備其遺忘 凡事 若爲論說而已則終未能明盡 必就其條節 詳布曲折 然後 其是非得失乃形 遇有明者 當質之也 其間 有言涉典度而不以爲嫌者 此非立言於世也 乃私爲剳記以自考驗也 嗚呼 茲亦有 所不得已焉爾 或有問於余曰 士當平居所講明者道也 而至於事爲則但當識其大體而已 今子之不憚煩而拜究思於節目間 何也 曰天地之理 著於萬物 非物 理無所著 聖人之道 行於萬事 非事 道無所行 古者 敎明化行 自大經大法 以至一事之微 其制度規式 無不 備具 天下之人 日用而心熟 如運水搬柴 皆有其具 以行其事 周衰 雖王道不行 而其制度規式之在天下者 猶在也 是以 聖 賢經傳 唯論出治之原以傳於學者 而其制度之間則無所事於曲解也 亡秦以來 幷與其典章制度而蕩滅之 凡古聖人行政 布敎 之節 一無存於世者 天下耳目 膠固於後世私意之制 不復知有先王之典章 高才英智博於古者 亦無由以得其詳也 間有儒者 識其大體 謂可行之斯世 而一欲有爲焉 則施措之際 事多釁罅而終至不可行者 以其徒恃大體而條緖節目 失其所宜故也 三 代之制 皆是循天理 順人道而爲之制度者 其要使萬物無不得其所而四靈畢至 後世之制 皆是因人欲圖苟便而爲之制度者 其 要使人類至於靡爛而天地閉塞 與古正相反也 三代經制 雖槩見於傳記 而其擧行間條目 今無存者 難可得而詳之 後人心目 旣與古事 不相諳熟 故雖有志於古者 猶未免蔽隔. 自其思慮之間 已自踈脫 不能如古人之實事其事 是以 必究極典制得其 本旨 推之於事 以至條目之間 節節皆當無有欠漏 然後可底於行 天下之理 本末大小 未始相離 寸失其當則尺不得爲尺 星 失其當則衡不得爲衡 未有目非其目 而綱自爲綱者也 及其不可行也 則不唯小人肆其詆誣 而君子亦未免有疑於古今之異 宜 古道眞若不可復行於世者 此豈小害也哉? 余爲是懼 不避僭越 究古意揆今事 幷與其節目而詳焉 蓋將以推經傳之用 明此道 之必可行於世也. 嗚呼! 徒法不能以自行 徒善不足以爲政 苟有有志者 誠思以驗焉則亦必有以知此矣 旣答問者 因次其語 以爲識云 반계수록 의 발문 - 반계수록 을 완성한 뒤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지를 들어낸 유형원의 글이다. 이상에 쓴 몇 개 문제들은 고금 문헌들을 읽는 과정에서 혹은 나의 생각이 미치는 대로 그때마다 기록한 것인데 대개가 1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1 다 지금 긴급하게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생각건대 옛날의 착한 정치가 폐지된 뒤로부터 모든 사업이 궤도를 벗어나게 되어 처음에는 통치하는 자들의 마음대로 법률을 제정하여 쓰더니 결국은 만청이 중국을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우리나라까지 도 종전의 폐습을 개혁하지 못한 것이 많았는데 게다가 날이 갈수록 약하게만 되어 결국 만청으로부터 큰 치욕을 당하고 있 다. 세상 형편이 대개 이렇게 되었으니 나쁜 법을 개혁하지 않고는 옳은 정치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나쁜 제도가 나쁘게 된 것은 그 원인이 몇 천 년 전에 생기고 쌓인 것으로서 착오에 착오를 거듭하여 그대로 낡은 규정이 되었으 며 그것이 서로 엉켜서 마치 흐트러진 실과도 같게 되었다. 그 원인을 구명하여 혼란하게 된 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벼슬아치들은 일단 과거를 하여 등용된 다음에는 습속대로 따라가는 것이 무사할 줄로만 알고 있으며 시골에서 출세하지 못한 선비들은 자신의 수양에 뜻을 두는 자는 혹 있지마는 세상을 바로잡을 방도에 대하여 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된다면 세상사를 바로잡을 날이 없게 되고 백성들에게 미치는 참화는 극도에 달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자신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감히 동지들과 함께 어떻게 옛일을 상고하여 일을 바로잡으면 조금 이라도 국가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에는 선후차가 있어서 전부를 다 취급할 수 없으며 한 가지 일에는 선후차가 있어서 전부를 다 생각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에는 선후차가 있어서 전부를 다 취급할 수 없으며 한 가지 일에도 여러 가지 세목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를 들어 해명하지 않으면 그것이 실행 후에 어떠 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감히 문제별로 조목을 들고 원인과 내용들을 적어서 자신의 비망록을 만 든 것이니[모든 일에서 말만 늘어놓아서는 마침내 내용이 전적 밝혀질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조항마다 그 원인과 내용을 자세히 말해야만 그 문제의 是 非 得 失 이 나타나는 것이다] 후일 고명한 사람을 만나서 수정을 받아야 하겠다. 이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국가 제도에 언급된 바가 더러 있으니 그것을 괜찮게 아는 것은 이 수록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써 두고 자신의 참 고로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 이에도 부득이한 바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더러 묻기를 선비는 평소에 응당 성현의 도리를 연구해야 하고 사업에 있어서는 대체에 관한 것만을 알 아 둘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번잡한 것은 꺼리지 않고 그 세칙까지 연구하여 내니 무슨 까닭인가? 라고 한다. 천지의 이치 란 여러 사물에 나타나는 것이니 사물이 아니면 이치가 나타날 곳이 없으며 성현의 도 道 란 여러 사업에서 실현되는 것이니 사업이 아니면 그 도가 실현될 데가 없는 것이다. 옛날에는 교육을 잘하고 덕화가 보급되어 큰 사업으로부터 미세한 일에 이 르기까지 제도와 규정이 일일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날마다 그대로 실행하고 그것이 습성으로 되어 마치 물을 긷고 땔나무를 다루듯이 다 일정한 틀에 의하여 사업을 진행하였고 주 周 나라 말기에 비록 어진 정치가 실행되지 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그 제도와 규정들이 더러 남아 있었다. 때문에 성현들의 저서에는 옳은 정치의 원리만을 논술하여 후 세 학자들에게 전하였으며 제도에 대하여 세밀히 해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가 진 秦 나라 때부터는 옛날의 문물제도[ 典 章 制 度 ]가 흔적조차 없어졌고 옛날 성인들이 실행하였던 정치 교육에 관 한 세척들은 하나도 세상에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온 세상에서 듣고 보는 것이란 후세 사람들이 제멋대로 제정하여 놓은 제도에 국한되고 옛날 착한 임금들의 문물제도를 전혀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출중한 재능과 영특한 지혜를 가지고 옛날 지식이 해박한 자라도 옛 제도의 상세한 세칙을 알 길이 없었다. 간혹 성현의 정치 원칙을 아는 선비들 중에서는 자기 시대에 실행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었으나 일단 사행하려고 하면 일을 처리하는 행정에 허다한 빈틈이 생겨서 결 국 실행하지 못하고 마는 것은 실행을 하려는 자들이 사업의 원칙에만 자신을 가졌고 그를 실행할 데 대한 세칙들을 옳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三 代 적 제도는 모두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에 순응하게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요점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 각 자기 살길을 찾게 하고 온갖 상서가 나타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제도는 모두 이기심에 의하여 불철저하게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요점이 인류로 하여금 썩어 터져서 암흑세계로 되게 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니 옛날의 제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삼대적 제도가 대략 문헌에 대략 나타나 있지마는 그것을 실행하던 세칙들이 지금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상세히 연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이 후세 사 람들의 보고 듣는 것이 옛날 사정과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옛날 제도에 관심을 가진 자라도 간격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유형원 생애와 행적 17

12 그들의 연구하는 자체에 이미 미비한 점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들의 사업이 실제에 근거하던 그것과 같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옛 날의 문헌과 제도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그 本旨를 해득한 다음 실제 사업에 미루어 보며 세칙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서 미비한 점이 없게 한 뒤에라야 실행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세상 이치란 본말本末과 대소를 불문하고 본래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치[寸]수가 맞지 않으면 자[尺]가 자로 될 수 없고 저울눈이 틀리면 저울[衡]이 저울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물코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서 벼리[網] 자체만으로 벼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묘리를 알지 못하고 옛 제도를 실행하려 다가 실패를 하게 되면 무식한 자[小人]들이 그에 대하여 욕설을 함부로 퍼부을 뿐만 아니라 사업을 해보려는 사람[君子]도 예 와 지금의 형편이 다르므로 옛날 정치는 정말 지금 세상에 다시 실행할 수 없는 듯이 의혹을 품게 될 것이니 사업의 세칙에 대하여 경시하는 해독이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내가 이에 대하여 걱정한 나머지 외람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옛날 제도의 본 의를 연구하고 현하의 사정을 참작하여 그를 실행할 데 대한 세칙까지 상세히 말하였으니 이는 대개 성현의 경전經傳에 있는 원칙들을 적용하면 이 사업을 반드시 후세에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아아! 아무리 좋은 법을 제정하였 다 하더라도 그 법이 저절로 실행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한 사람이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만으로는 사업에 구 현시킬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 방면에 뜻을 둔 사람이 있어서 성심으로 연구하여 실험하여 본다면 반드시 내가 이렇게 세 칙까지 말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답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써서 끝에 기록하여 둔다. (6) 磻溪隨錄 권1, 序, 磻溪隨錄序 枲麻稻粱 爲生民日用服食之具 不與眾卉同其蕪沒 君子經世之文亦然 雖其書藏於山林巖宂黯漠之中 而卒乃發宣天地 照映 耳目 爲一王法 不與操觚之士無實空言 的然日亡者比也 磻溪柳處士馨遠隨錄一書 乃經濟大文字也 然斯人旣隱約以沒世 孰有能發揮之哉 近者搢紳諸公相繼聞于朝 上徵其稿覽之 大加嘉賞 命鋟梓廣布 不佞適按節嶺藩而掌其役 遂得究觀其書 制民産崇學校選人才正官制詰戎兵述禮樂 無非三代治平之規 參酌古今而無泥礙 折衷經權而無牴牾 譬之匠氏作巨室 間架 棟宇 各有位置 塗墍丹雘 咸中文質 宜其有槪淵衷 必欲見諸實用 布示當世也 昔賈生生逢漢文 所陳治安策 終漢之世 不得 施其萬一 今處士以巾篋遺文 契聖明於曠世之後 措天下萬世 已有爲之兆者何哉 易曰易從則有功 有功則可大 可大則賢人 之業事 固有屈於一時 伸於百年 爲其言易從而可至於大也 處士聞孫柳持憲薰 謂不佞有一言弁卷 不佞感斯文之不喪 幸世 道之有賴 嘉處士之潛光闡發於後 不辭而爲之言 歲庚寅首夏 通政大夫守慶尚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大丘都護 府使李瀰序 반계수록 간행에 앞서 경상도 관찰사 이미李瀰가 쓴 서문序文이다.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필수품인 삼과 곡식은 다른 잡초들처럼 묵어져서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학자의 국가, 사회에 이익 을 끼치는 저작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그의 문헌이 비록 일시 깊은 산속 암흑 중에 묻혔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발 표되어 사람의 이목에 빛나게 되고 내지는 한 국가제도의 지침이 되어, 붓대를 휘둘러 실속 없는 빈말로 한때에 반짝거리다 가 없어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반계磻溪 유처사柳處士 형원馨遠의 이 반계수록 한 책은 실로 나라와 세상을 건질 만한 위대한 저작이다. 그러나 이 분이 이미 은둔한 채 궁한 생활로 세상을 마쳤으니 누가 그의 글을 드러내어 세상에 발표할 것 인가! 근래에 와서야 여러 선비들이 계속하여 누차 조정에 아뢰었던바 국왕이 초고를 가져 오라 하여 보고 가상히 여기사 인쇄하여 광포廣布할 것을 명하셨다. 변변치 못한 내가 영남의 관찰사로 있던 중 이 사업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문헌을 연구하여 본즉 거기에는 서민 산업의 조직, 교육의 숭상, 인재의 선발, 관제의 개정, 국방의 정비, 문화의 부흥 등 모두가 옛 날 중국의 고대 태평시대의 정치 법식을 본뜬 것이며 과거와 현재의 정황을 참작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으며 원 1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3 칙과 융통성을 절충하였기 때문에 모순이 없다. 예를 들면 어떤 목수가 큰 집을 지을 때에 간살, 도리, 들보, 지붕 등이 각각 제 위치에 들어맞고 회벽칠과 단청이 모두 내용과 형식에 들어맞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헌이 국왕의 마음을 감동 시켜 오늘에 발표 실행할 수 있게끔 된 것이다. 옛날 중국의 가생賈生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리었으나 그 정책을 한나라의 말기에 이르도록 그것 의 만분의 일도 실시하지 못하였었는데 유처사의 책상 속에 싸 두었던 유고는 오래된 오늘에야 비로소 영명한 국왕의 알아 줌을 받아 천하 만민에게 혜택을 입힐 수 있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좋은 징조가 보인다. 왜 그러냐 하면 주역周易 에 이르기를 원칙에 따라 준수하면 성과가 있고 성과가 있으면 발전할 수 있는바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인물의 사 업이다 라고 하였다. 대체 일이란 한때에 비록 구부러질 수 있더라도 나중에는 펴지는 것이니 이것은 그 방책에 따라 준수한 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유처사의 드러난 자손인 유지헌柳持憲 훈熏이 나에게 한마디 서문을 부탁하였고 또 나도 성인들의 방책[斯文]이 없어지지 않은 데 감격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앞길이 열려지는 것을 다행하게 생각하며 처사의 감추어졌던 빛이 다시 휘황해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사양하지 않고 몇 마디의 말을 쓰는 바이다. 경인년 초여름 통정대부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 사, 순찰사 대구 도호부사 이미李瀰는 삼가 쓰다. (7) 磻溪隨錄, 附錄, 承旨梁得中疏 伏以云云 臣受恩三朝 圖報無階 而至於殿下每以質實許之 臣啣恩在肝 激昂感慨 每誦孟子我非堯舜之道 不敢以陳於王前 一語 永矢心惟此而已 今請披盡平日肝膈之要 以爲畢義之地 臣謹按孟子曰 離婁之明 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圓 堯舜之道 不以仁政 不能平治天下 又曰 仁政必自經界始 是知經界之於仁政 猶規矩之於方圓 此五帝三王 爲生民開物成務 之第一義也 古人大事 專在於大禹之卑宮室 而盡力乎溝洫者此也 蓋經界一正 而萬事畢擧 民有恒業之固 兵無搜括之弊 貴 賤上下 無不各得其職 是以人心底定 風俗敦厚 古之所以鞏固維持 數百千年禮樂興行者 以有此根基故也 後世經界廢而私 占無限 則萬事皆弊 一切反是 雖有願治之君 若不定經界 則民産終不可恒 賦役終不可均 戶口終不可明 軍伍終不可整 詞 訟終不可止 刑罰終不可省 賄賂終不可遏 風俗終不可厚 如此而能行政敎者 未之有也 夫如是者 其何故乎 土地天下之大本 也 大本旣擧 則百度從以無一不得其當 大本旣紊 則百度從以無一不失其當 蓋天理人事 得失利害之歸 固是天之經地之義 而不可易者也 自孔孟以下 至於程朱 歷代諸賢 未嘗不眷眷於此 隋之王通所謂田不耕授 人不里居 雖禹舜 不能理也云者 誠至論也 但其制度節文之詳 則自周迄今 無人講究 孟子之告畢戰曰 若夫潤澤之 則在君與子矣云而已 至於宋之張載 亦有 志未就而卒 世蓋以足憂之 以是惜之矣 近世有儒士柳馨遠者 乃爲之講究法制 粲然備具 始自田制 以至於設敎 選擧 任官 職官 祿制 兵制 纖微畢擧 毫髮無遺 書旣成 而名之曰隨錄 凡十三卷 臣蓋見之於臣之師臣尹拯之家 臣之亡師 甞爲臣言此 書 乃古聖遺法而修潤之 不失其本意 國家若欲行王政 則惟在擧而措之而已 蓋其人杜門獨學 不求聞知 故世無知者 而獨幸 見知於亡師耳 臣亦甞得其書 而私自紬繹 則有天理自然之公 無人爲安排之私 秩然有條而不亂 煥然有文而不厭 易曰 乾以 易知 坤以簡能 易則易知 簡則易從 信乎其易知而易從 深得乾坤易簡之理 益信亡師之言 爲不誣矣 臣伏聞其人已死 而其 子孫方在湖南之扶安 京畿之果川云 伏望殿下 特命其邑守臣 就其子孫之家 取其書來獻 以備乙覽 仍令儒臣 齊會玉堂 極 意講明 分布中外 以次施行 不勝幸甚 臣亦知必有人以古今異宜爲言者 而程子之荅或人之問曰 豈有古可行而今不可行者乎 又况此書於古今時世 亦以參酌十分停當 必無是憂矣 臣愚竊以爲此實吾東方億萬年無疆之基業 永爲我春宮邸下自貽哲命之 日 因以爲祈天永命之地 豈不休哉 豈不懿哉 臣無任區區 批荅曰 省疏 具悉爾懇 前批旣諭所尚者 爾之質實 爾有求是之意 其卽上來 以副慇懃之意 其勉者當留意 而其冊子 令道臣 卽取以上焉 반계수록 간행을 주장하는 양득중梁得中의 상소上疏이다. 전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오늘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강학講學하는 실질적 유형원 생애와 행적 19

14 인 일에 보탬이 없기 때문이며, 한번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허위虛僞에 관계된다면 풍속과 교화에 매이는 것 이니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듣건대, 경연에서 바야흐로 주자어류朱子語類 를 진강進講한다고 하 는데, 아마도 오늘날의 급선무는 아닌 듯합니다. 대체로 이 책은 바로 그의 문인門人이 사사로이 기록한 것으로 그 사람들이 터득한 고하高下에 따라서 내용에도 심천深淺이 있고, 간혹 옮겨지면서 본뜻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 이 때문에 빈천한 선비는 이것을 그냥 읽어 넘기는 데 불과하여 가끔 경계하며 계발할 따름인데, 이것이 어찌 제왕이 오로지 일삼아 강독講讀할 책이 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자가 잇달고 있는 것이 송宋나라의 안상문安上門에서 본 것 과 너무나 같습니 다. 그런데 금년에 조세租稅를 감해 준 은혜는 바로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없었던 커다란 혜택이었으므로 팔도의 생민 이 함께 기뻐하고 있지만, 오히려 구렁에 뒹구는 생명을 구제하지도 못하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이 전일에 상소 한 이른바 오늘날에 부족한 것은 강설講說이 충분하지 못한 데 있지 않고, 오직 한갓 강설만 하고 시행하지 않은 것이 병통 이 된 데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 고 하였으니, 이에서 인정이 경계에 대 해서 방원方圓에 대한 규구規矩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우大禹가 궁실宮室을 낮게 하면서 구혁溝洫을 내는 데 힘을 다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대체로 경계가 한 번 정해지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서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직업이 견고해지고, 군사들에게는 조사하 여 찾아내는 폐단이 없어짐에 따라 귀천상하가 각기 그 직업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으니, 이것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 입니다. 그러다가 후세에 경계가 폐지되고 사사로이 차지하는 것이 한계가 없게 되니, 모든 일이 다 피폐해졌습니다. 그러니 비록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임금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경계를 바로잡지 못하면 백성들의 재산은 끝내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고, 부역賦役은 끝내 균등할 수 없으며, 호구戶口는 끝내 분명할 수 없고 군오軍伍는 끝내 정돈될 수 없고, 사송詞訟은 끝내 그칠 수 없고, 형벌刑罰은 끝내 줄어들 수 없고, 뇌물은 끝내 막을 수 없고, 풍속은 끝내 돈후敦厚할 수 없을 것이니, 이와 같 이 하고서 정치와 교화를 잘 시행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수隋나라 왕통王通의 이른바 전지田地를 정전井田으로 주지 않고 사람 들을 마을에 살지 못하게 하면, 비록 순舜임금이나 우禹임금이라도 다스릴 수 없다고 한 것은 참으로 지당한 의론입니다. 다 만 그 제도와 절목節目에 대한 상세한 것은 주周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강론하고 연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송宋나라의 장재 張載도 뜻을 두기는 하였지만 성취시키지 못하고 졸卒하였습니다. 근세에 호남의 유사儒士 유형원柳馨遠은 바로 그것을 잘 강 구하였으니, 처음으로 전제田制에서부터 설교說敎, 선거選擧 및 관직官職, 병록兵祿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부분을 모두 거 론擧論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그것을 수록隨錄 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무릇 13권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것을 신의 죽은 스승 윤증尹拯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자손이 바야흐로 호남의 부안扶安과 경기의 과천果 川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그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 책을 가져다 바치게 하여 을람乙覽에 대비하 도록 하시고, 곧 중외에 나누어 반포해서 차례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답하기를, 전번의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는데, 숭상할 것은 그대의 질박하고 신실함이다. 힘써야 할 것은 의당 유념하 겠다. 그리고 그 책자는 도신으로 하여금 가져다 바치도록 하겠다 고 하였다. 52세(1673, 현종14) * 우반동에서 별세(묘소는 용인시 외사면 석촌리 능말) (8) 磻溪隨錄, 附錄, 行狀 磻溪柳先生 諱馨遠 字德夫 文化人也 始祖諱車達 家甚富 佐麗太祖出征 多出車乘 累功 爲大丞 號統合三韓功臣 自此奕 2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5 世貴顯 入我朝 有諱寬 佐世宗 爲右議政 諡文簡 號夏亭 淸德載國乘 生諱季聞 刑曺判書 修文殿提學 諡安肅 五嬗而諱湋 縣令生諱成民 正郞贈兵曺參判 生諱欽+心 擢文科 入翰苑爲檢閱 娶右參贊李志完之女 以天啓壬戌 生公 檢閱公有遠大之 望 不幸二十八而卒 公生裁二歲 能知悲哀號慕 不食肉 人異之 三四歲 凡遇日用事物 必問本末 至其極處 雖草木禽蟲 皆 不忍傷害 五歲 通筭數 旣知讀書 自立課程 雖羣兒喧豗其傍 而若不聞也 就學於伯舅李監司元鎭 姑夫金判書世濂 一讀輒 誦 七歲 讀禹貢 至冀州 翻然起舞 問之 對曰 不圖二字之尊重 至於此也 十歲 善屬文 通經傳 百家論難 出入意表 李金二 公 歎曰 此等才 古或有之耶 十三四 慨然有慕聖賢之志 專心爲己之學 於擧業 不屑爲也 丙子 避虜亂 將王父母 母夫人及 兩姑以行 王父年老 三家家屬 仗公一丁男 時年十五歲 有强盜出山谷攔道 一行懼 公挺身曰 人孰無父母 爾無震驚我父母 行裝從汝取去 盜感其言 散去 二十一歲 歎曰 士志於道 而未能立者 志爲氣惰之罪也 夙興夜寐 未能也 正衣冠尊瞻視 未 能也 事親和顔色 未能也 居室敬相對 未能也 因作四箴以自警 自是兢兢然惟其言是踐 有親癠問醫 醫素驕 及見公曰 視此 人而不盡心於命劑者 非人子也 家貧竭力 致甘旨 或不繼 戚然出涕 在京 名譽蔚然 一時名士 皆願與之交 若貴要者 求一 見不得也 讀書忘寢食 馬上常沈思 馬或從他塗不覺也 甲申 大明亡 是歲丁王母憂 戊子 丁母夫人憂 辛卯 丁王父憂 執喪 盡禮 旣免喪 和陶元亮歸去來辭 南歸于扶安縣 愚磻洞居焉 公之志 可知也 地濱海 多産魚鱉 每遇佳味 變色曰 親在 恆憂 不得此 今得此誰爲 輒涕泣不忍食 有一姊在京 恨不與同衣食 以畿庄穀歸之 公旣志學甚早 又自神州陸沈 超然遐擧 益專 精於學問 刻意覃思 夜以繼日 枕上有妙契者 夜三四起 取燭而疾書之 每日暮曰 今日又虛度矣 義理無窮 歲月有限 古之人 以何精力 所成就如彼 每日昧爽而起 盥洗衣冠 謁家廟 非甚病 雖寒暑風雨 未嘗或廢 退坐書室 坐必有常處 室在松臺下 竹林中 藏萬卷書 籤軸整齊 竹扉常掩 麋鹿晝行 公顧而樂之曰 古人云靜而後 能安能慮 旨哉言乎 又嘗謂人曰 功夫 雖貫 動靜 非靜 無以爲本 不但學者爲然 造化流行 動靜互爲其根 然其主處在靜 故曰不翕聚則不發散 又曰 物各止其所 亦主靜 之意 聖人井田之法 本地而均人 由靜制動之意也 每月夜彈琴而歌 歌用周詩 音用漢語 聲律若出金石 其襟韵飄灑 眞天下 之高士也 內外斬斬如賓 而恩義甚篤 家務細大 皆有規制 奴僕各事其事 而門庭落然 若無事者 巫瞽不入門 家人不知祈禱 隣有叢祠 人甚奔波 公毁其堂 伐其樹而弊 遂止 及門者 非僻自消 鄕黨皆化焉 其平居 濟人及物之仁 多有感動人者 時永 曆皇帝卽位於南方 或謂之亡 或謂之不亡 壬寅北使頒赦來者 至謂之擒焉 我國猶未知其虛實 公慟之 丁未 有唐船漂泊耽羅 皆福建人 華制不薙髮 公往見 操漢音 問皇朝事 中有能文者 鄭喜曾勝等流涕言 永曆皇帝 保有南方四省 今年爲永曆二十 一年云 取裝中曆書示之 果然 公悲喜作詩 性愛山水 足跡殆遍 東方名勝 所居愚磻 亦絶佳 提携冠童 上下諷詠 天下之物 無足以攖其心者 而若其慈悲一念 不以出處而有間 故其稽遺經而得先聖之意 原人情而闡天理之正 貫古今而審治亂之所由 因事物而察本末之所係 杜門著書 寓之空言者 無非出於濟世拯民開物成務之至誠 嘗曰古今此天地此人物 先王之政 無一不 可行者 君子之爲天下 非有爲而爲 自是天理合如此 又曰 古人制法 皆以道揆事 故簡易易行 後世之事 皆緣事爲法 故百道 防巧 只益紊亂耳 又曰 治天下 不公田不貢擧 皆苟而已 雖有善政 徒爲虛文 公田一行 百度擧矣 貧富自定 戶口自明 軍伍 自整 惟如此而後 敎化可行 禮樂可興 不然 大本已紊 無復可言 又曰 王政 在制民産 制民産 在正經界 自孟子時 暴君汚 吏 惡其害己 皆去其籍 及經秦火 古聖人制度節目 蕩然無一存者 聖賢經傳 只論出治之源而已 漢後數百千年 聖王之道不 行者 皆由田制之壞 而卒至於戎狄猾夏 生民塗炭 如我國奴婢漸多 良民漸縮 搜括軍丁 隣族受害 譬如亂絲 不捄其本 無以 理緖 議者每謂山溪之險 難於均田 然箕子已行之平壤矣 遂取田字形 畫爲四區 區皆百畒 畒不用箕子七十畒 而用周家百畒 之制如李靖爲地狹 故變八陣爲六花之意焉 至於敎士 選才 命官 分職 頒祿 制兵 造幣 通貨 無不次第條列 節目纖悉 而曰 天下之道 本末大小 未始相離 星失其當 則衡不得爲衡 寸失其當 則尺不得爲尺也 號其書曰隨錄 或讀古今典籍 或因思慮 所及 隨得隨錄者也 其規模廣大 條例縝密 可謂擴前賢之未發 而我東方所未有之書也 然覽公理氣總論 論學物理 經說等書 然後知隨錄之有本 而天德王道之不二也 又著正音指南 武經四書 輿地誌 郡縣之制等書 其論陰陽 律呂 兵謀 師律 星緯之 纏度 山川之形便 如指諸掌 公可謂體用博約之通儒 而其爲我國分野之說 京畿以北爲尾箕 南爲箕斗者 前公千百年 未嘗有 道此者 而公始言之 必有後世之具眼矣 國舅閔維重兄弟 於公爲從叔 欲薦行誼 公正色曰 叔非知我者也 遂不果薦 後數三 宰臣 薦公曰 潛心義理 孝友出天 公不樂曰 我不知時宰 時宰豈知我也 公魁顔廣顙 身長骨秀 聲音宏亮 美鬚髯 眼光映人 威儀動止 絶異於人 少日入塲屋 邂逅者心醉 至有棄試券而相隨者 晩來充養益甚 神定氣和 面粹背盎 望之 已知其有道者 以公稟賦之異 抱負之大 求志獨善 使東民無福 惜哉 噫 所貴乎高尚者 以其有達施之具 而能卷而懷之也 世所謂高尚者 果 유형원 생애와 행적 21

16 能盡有其具乎 有其具而不出者 鮮矣 然具有大小 小者易措 大者難施 有其具而不出者 必其具之大者也 若公之所欲爲者 惟三代以上人許之 公豈舍所學從人者耶 宜公之不出也 况後之尚論者 以其時考之 則必有起立於先生之風者矣 許眉叟嘗許 以王佐才 確論也 世又有以公比文仲子者 古今人精神力量 雖不可知 而公之惻怛純正 恐非文仲模擬雜駁之倫 至若理氣論 學等說 又文仲所無然 此則諉之 曰所生者程 朱前後可也 第公以世祿之臣 逢聖明之世 可以有爲而皎然有尊周之大義 抱隨 錄而沒 此豈可與獻策開皇者 同日道哉 公得年五十二 訃聞 遠近會哭者 數百餘人 葬于竹山湧泉里鼎排山酉坐卯向之原 配 豐山沈氏 鐵山府使贈兵曺參判閌之女也 有婦德 奉公規度 以助成公志 有一男六女 男昰 女長適鄭光疇 次適朴森 次適白 光著 昰生三男一女 男應麟 應龍 應鳳 福川後學吳光運撰 오광운吳光運이 지은 유형원의 행장行狀이다. 반계 유선생의 휘諱는 형원이요, 자는 덕부이니 문화유씨이다. 그의 시조의 휘는 거달車達인데 대단히 부유하게 살았었다. 그는 고려 태조를 도와 정벌할 때에 수레를 많이 주어 보조하였으며 또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대승 벼슬이 되었었고 통합삼 한공신統合三韓功臣 의 호를 받았는데 그로부터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높은 벼슬과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이씨 조선에 들어서 면서 관寬이란 사람이 세종을 도와 우의정 벼슬을 하였고 죽어서 시호를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호는 하정夏亭으로서 청백한 덕행이 국사[國乘]에 기재되었다. 관의 아들은 계문季聞이니 형조판서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벼슬을 하였고 죽어서 시호 를 안숙安肅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5대를 지나 현령 위湋라는 사람이 있었고 위의 아들 성민成民은 정랑 벼슬을 하였는데 병 조참판의 증직을 받았었다. 성민의 아들은 흠인데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 검열 벼슬을 하였으며 우참찬 이지 완李志完의 딸과 결혼하여 천계 임술년에 선생을 낳었다. 검열공은 장래 의 큰 전망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나이 28세에 죽었다. 그때에 선생의 나이 겨우 두 살이었으 나 아버지의 상사에 슬피 울고 고기 먹지 않는 예절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특히 여겼다. 서너 너덧 살 되어서 어 떤 보통 사물이라도 대하면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물어서 최후 원인을 캐내었고 풀, 나무, 새, 벌레라도 함부로 해치지 않 았으며 다섯 살에 산수를 알았다. 그는 글을 읽을 때부터 자신이 과정표를 세워서 공부를 하여 여러 아이들이 옆에서 떠들어 도 들은 체 하지 않았다. 진외숙인 이감사李監司 원진元鎭에게서와 고숙 김판서金判書 세렴世濂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한 번 읽 고는 그 자리에서 외우곤 하였다. 일곱 살에 서전 우공 편을 읽을 때에 기주 지방의 토품을 사정하고 세액을 정하는 대 목에 이르러서 펄쩍 일어나 춤을 추었다.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 두 글자가 이렇게까지 중하게 여겨질 것이 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 대답하였다. 열 살에 작문을 잘하였으며 유교의 경전과 백가서들을 통독하였는데 문의상 논증에 있 어서 그의 논법이 상상 이상으로 심오하였기 때문에 이감사와 김판서 두 분이 탄미하기를 이런 재주는 옛날에나 있었겠는 가? 라고 하였다. 열 서너 너덧 살 되었을 때 벌써 강개히 성현의 사상을 흠모하며 자신이 실천하는 학문에 전력할 것을 결 심하여 과거 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병자년 여진 난리에 피란을 갈 때에 조부모와 어머님 및 두 고모를 데리고 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나이 늙었으므로 세 집 가속들이 모두 선생 한 사람을 믿게 되었었다. 당시 선생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는데 강도가 산골짜기로부터 나와서 길 을 가로막은 일이 있었다. 일행이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선생은 나서서 말하기를 세상에 부모를 모시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이 행랑은 마음대로 가져가고 우리 부모를 놀라게 하지 말라! 고 하였더니 강도들이 그 말에 감동되어 그냥 흩어져 갔다. 스물 한 살 때에 선생이 탄식하기를 선비가 성인의 도에 목적을 두고도 그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목적이 감각의 저해를 받아 굳건히 나아가지 못한 탓이며, 밤들거든 자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며, 의관을 단정히 하 고 남들이 우러러보게 하는 위의를 갖추지 못한 탓이며, 부모를 섬기되 항상 얼굴빛을 펴서 받들지 못한 탓이며, 가정생활에 있어서 서로 공경으로 대하지 못한 탓이다 라 하고 이 네 가지에 대한 경계문을 지어 자신을 격려하는 신조로 삼았었다. 이 경계문을 지은 뒤로부터는 조심성 있게 행동하여 그 신조에 있는 말만을 실천하였다. 부모의 병환이 있어서 의원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의원은 본래 교만한 자였지마는 선생을 한번 본 뒤에 말하기를 2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7 이런 얌전한 사람을 보고도 그의 처방을 내는 데 있어서 마음을 써주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고 하였다. 집 이 가난하여 부모가 자실 음식물을 아무리 힘껏 구하더라도 더러 계속하지 못할 때에는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서울에 있을 때에 명망이 아주 높아서 당시의 명사들이 모두 선생과 함께 종유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이 한번 만나기를 자원해도 성공을 할 수가 없었다. 글을 읽을 때에는 잠자고 밥 먹는 것을 잊으며 말을 타고 가면서도 항상 사색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말이 다른 길로 가는 줄을 모르고 가기도 하였다. 갑신년 명나라가 망하던 그 해에 조모님의 상사를, 무자년에 어머님의 상사를, 신묘년에 조부님의 상사를 당하였는데 상 기 중의 범절을 예규대로 극진히 마쳤었다. 복제를 다 마친 다음에 도연명 陶 淵 明 의 귀거래사 歸 去 來 辭 를 노래하면서 남쪽으로 부안현 扶 安 縣 우반동 愚 磻 洞 에 가서 은거하였으니 선생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반동은 바다에 가까운 지방으로서 해산물 이 많은 곳이다. 좋은 생선을 볼 때마다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르기를 부모가 계실 때에는 항시 이것을 구하지 못하여 걱정 하였더니 지금 이것을 구한들 누구에게 드릴까? 하고 눈물을 글썽하면서 차마 그것을 먹지 못하였다. 누이 하나가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가난한 오빠와 함께 의식을 같이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경기도 농막에 있는 곡식을 보내어 원 조해 주었다. 선생이 매우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특히 여진족이 득세한 뒤로부터는 벼슬할 생각을 갖지 않고 더욱 학문에만 전력을 들여 밤에는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심각하고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잠을 자다가 어떤 연구하는 문제를 해득하면 밤에 도 서너 너덧 번씩 일어나 촛불을 켜고 바로 기록하였다. 매일 날이 저물면 혼자 말하기를 오늘도 또 한 것 없이 지났구나! 진리는 무궁하나 세월은 한도가 있는데! 옛날 사람은 어떤 정력으로 저렇게 업적을 쌓아 놓았을까? 하였다. 선생은 매일 반 드시 꼭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춘 다음에 사당 참예를 하였다. 대단한 병이 들지 않은 한 차고 덥거나 바람이 세 차고 비 오는 때라도 한 번도 궐하는 일이 없었으며 참예를 마치고는 서재로 들어오는데 앉는 데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앉 았고 함부로 앉지 않았다. 서재는 소나무 층대 밑, 참대 숲속에 있었는데 거기에 만 권 서책을 정연하게 쌓아 두었으며 대 사립문은 항상 가리워져 있었다. 조용한 거기에는 노루와 사슴이 낮에도 내려오곤 하였는데 선생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말 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조용[ 靜 ]한 후라야 안정할 수 있으며 사색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하였 고 또 사람더러 말하기를 공부란 움직이는 것과 조용한 것을 연관시켜야 하나 조용한 그것이 아니면 토대를 삼을 것이 없 으니 이것은 우리 학문하는 자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운동하는 행정에 있어서도 움직이는 것과 조용한 것이 서로 근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요점은 조용한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축적한 것이 없으면 응용하여 사용하지 못한다 는 말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물이란 저마다 자기의 처소에 머무르는데 역시 조용한 것을 주로 한다는 뜻이다. 예로 옛날의 정전법도 근본은 토지이나 사람을 고루 살게 하는 것이니 이것도 조용한 것으로써 움직이는 것에 적응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하였다. 달밤이면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 가사는 주시 周 詩 를 쓰고 발음은 중국 어음으로 하여 소리와 운조가 마치 어떤 악기에서 나오는듯하여 그 운치가 고상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서 유례가 없는 높은 선비이었다. 가정과 일반 사람 에 대한 태도가 엄숙하여 손님을 대한 듯하였으나 인정미가 심히 두터웠으며 집안일은 크나 작으나 모두 조리가 있어서 노 복도 저마다 자기가 맡은 일을 하였기 때문에 담장 안은 항상 조용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선생은 미신을 엄금하였다. 무당이나 소경이 집안에 얼씬거리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은 무엇이 기도인 줄을 몰랐고 집 이웃에 성황당이 있어서 사람들이 심히 들끓는 것을 보고 선생이 당집을 헐고 신을 위한 나무를 베어 버린 결과 미신 습속 이 중지되었으며 어떤 사람이라도 선생을 접하게 되면 고집과 완고함이 저절로 없어져서 이웃마을까지도 모두 감화되었다. 이와 같이 선생이 평시에도 사람을 옳은 길로 교양하는 것과 자기의 몸가짐이 남의 모범이 되게 하는 인덕들은 사람을 감동 시키는 일이 많았다. 당시는 명나라의 영력황제 永 曆 皇 帝 가 남방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더러는 망했다고 하고 더러는 아직 망하지 않 았다고도 하는 때이었다. 임인년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력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말을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 유형원 생애와 행적 23

18 진상을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은 심히 이를 슬퍼하였다. 정미년에 명나라 배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였는데 그들은 모 두 복건 사람들로서 명나라 의복을 입고 머리를 깎지 않았었다. 선생이 가서 그들을 만나보고 중국 어음으로써 명나라의 일 을 물었었는데 그들 중에는 글을 잘 아는 정희 鄭 喜 와 증승 曾 勝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영력황제가 남방의 네 군데 성 省 을 보유하고 있는데 금년이 영력 21년입니다 하고 행랑 속에서 역서 曆 書 를 내어 보였는데 그것이 과연 영력 연호가 분명한 역서이므로 선생은 일희일비하여 시를 지은 일이 있었다. 선생은 성질이 경치 구경을 좋아하여 그의 발길은 조선의 명승지를 거의 다 밟았으며 그가 사는 우반동도 풍경이 극히 아름다우므로 어린 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물이든지 선생의 마음을 거리끼게 할 수 없었지만 사물 에 대하여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은 그의 은둔 생활로 인하여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은 옛날의 경서를 연구하 여 성현들의 뜻을 해득하고 사람의 실정에서 자연의 바른 이치를 천명하며 예와 이제의 역사에 익숙하여 세상이 태평하고 태평하지 못하게 된 원인을 구명하고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 근본과 지엽의 관계를 분석한 뒤에 은거하여 저작에 전력하 였다. 그것이 비록 당시에 실행하지 못한 빈말로 되었지만 모두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염원과 모든 사물을 철저 하게 인식하여 응당 해야 할 일들을 서술하려는 성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예와 이제가 다 이 천지에 이 사람이 살고 있거니 옛날 선왕의 정치를 하나도 실행 못할 것이 없다. 어진 사람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억지로 어떤 일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업이 자연 천리와 합 치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옛사람은 법을 제정할 때에 모두 도리로써 일에 맞추었기 때문에 간편하고도 순 조로워서 시행하기가 쉬웠거니와 후세의 정치는 모두 일에 따라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간교한 범행을 아무리 방지하려 하여 도 더 문란해질 뿐인 것이다 하였으며 또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토지를 국유로 하지 않으며 인재를 선거제로 등용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불철저하게만 되어서 아무리 착한 정치를 한다더라도 헛된 외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토지 국유제도가 실행되면 여러 가지 사업에 두서가 있게 된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저마다 안락하게 살 것이며, 호구가 자 연 명확하게 될 것이며, 군대가 자연 정비하게 될 것이니 이리 해야만 교화도 할 수 있으며 문화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큰 기본이 문란해져서 다른 것은 말할 여지도 없게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왕도의 정치란 서민의 산업을 제정하는 데 있고 서민의 산업은 경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 있다. 그런데 맹자 때로부터 포악한 임금과 악한 관리들 이 자기들의 욕심을 부리는 데 해가 되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에 관한 문헌들을 없애버렸을 뿐만 아니라 진 秦 나라 때의 소각 으로 말미암아 옛날 성인의 제도와 세목이 아주 깨끗하게 없어져버렸으니 남았다는 성현의 경전은 다만 정치를 하는 원리를 논한 것일 뿐이다. 한나라 때로부터 수 천 년 이래 성왕 聖 王 의 정치가 실행되지 못한 것은 모두 토지제도의 파괴에 기인한 것이며 결국 오랑캐가 중국을 통치하고 생민이 도탄에 빠지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비가 점차 늘어가고 양민이 점차 줄어가며 군인을 끌어다가 충당시키고 빗이나 세액을 이웃에 물리는 일들은 비유하면 어떤 실을 헝클 어 놓은 것과 같아서 그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는 올을 정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어떤 자는 조선에 는 산악과 계곡이 많아서 경지를 고르게 분배할 수 없다고 의론을 제기하지만 기자 箕 子 는 이것을 이미 평양에서 실행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밭 전 田 자 형을 본떠서 네 구로 나누고 구마다 백 묘의 면적으로 하여 주나라 때의 백 묘씩 분배해 주 던 제도에 준하고 기자의 70묘의 면적을 따르지 않는 제도를 안출해 냈다. 이것은 이정 李 靖 이 땅이 좁은 데서는 팔진법 八 陣 法 을 변통하여 육화진 六 花 陣 을 친 진법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서 기타 선비의 교육, 인재의 선발, 관리의 임명, 관직의 분정, 녹 봉의 제정, 군대의 편제, 조폐, 통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서가 정연하고 조례와 세목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자 신이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란 근본과 말단, 큰 것과 작은 것이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눈이 맞지 않은 저울은 저울 로 될 수 없으며 치수가 틀린 자는 자로 될 수 없다 하고 이 책을 수록 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고금의 서적들을 읽다가 생각이 미치는 데 따라 해득하는 대로 수시로 기록한다는 뜻이다. 이 수록 은 규모가 광대하고 조례가 세밀하여 옛날 현인들이 천명하지 못한 것을 발전시켰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내용상 2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9 에 있어서 처음 나온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저서 이기총론 理 氣 總 論 과 학문, 물리, 경설 經 說 을 논한 것들을 본 뒤에야 수록의 근본이 어디에서 나왔으며 인간의 천품으로 타고난 본성이 왕도정치와 상호 연결되어서 두 가지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또 정음지남 正 音 指 南, 무경사서 武 經 四 書, 여지지 輿 地 誌 및 군현지 제 郡 縣 之 制 등의 책을 저작하였는데 거기에는 음양, 율려 律 呂, 병모 兵 謀, 사율 師 律, 성좌의 도수[ 星 緯 之 纏 度 ], 산천의 형편들을 논 함에 있어서 그것을 손바닥에 놓고 가리키듯이 명확하게 하였으니 선생은 굉장한 기본적 학문과 그것을 활용할 방도까지를 소유한 위대한 학자라고 할 것이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분야 分 野 문제에 있어서도 경기 이북은 미 尾 성과 기 箕 성의 분야에 속하고 경기 이남은 기성과 두 斗 성 의 분야에 속한다 하였으니 선생이 이 말을 하기 전에는 천 수백 년 이래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말한 사람이 없었던바 이것 은 반드시 뒷날 연구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부원군 민유중 閔 維 重 의 형제는 선생의 진외숙이었다. 그들이 선생의 얌전하고도 특출한 행실을 나라에 추천하려 하였는 데 선생이 얼굴빛을 바로 하여 말하기를 아저씨가 저의 뜻을 모릅니다 하였기 때문에 과연 추천하지 않았었다. 그 후 두 서너 대신들이 선생을 의리의 탐구에 잠심하며 효성과 우애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 라고 추천하였는데 선생이 불쾌하여 말 하기를 내가 대신들을 모르거니 대신들이 어찌 나를 아는지? 라고 하였다. 선생의 얼굴은 우람하게 생기고 이마가 넓으며 키는 크고 골격이 준수하며 웅장한 목소리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눈의 광 채가 사람을 비치며 위의와 몸가짐세가 보통 사람과는 판이하였다. 어려서 과거 장중에 놀러 갔었는데 거기에 과거보러 왔던 자가 마음에 감탄한 바 있어서 시험지를 버리고 따라다니는 자가 있었다. 늘그막에는 학식이 이면에 더욱 축적됨에 따라 정 신이 안정되고 사람을 대하는 기풍이 화애로워 그의 외부에 표현되는 모든 행동은 보기만 하여도 벌써 그가 큰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선생은 특이한 천품과 위대한 포부를 지니고서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뜻을 두고 벼슬을 싫어하여 우리나라 백성 으로 하여금 복이 없게 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아! 고상한 인격 소유자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세상을 건지고 많은 백성 에게 혜택을 줄 만한 포부를 가지고도 세상이 그의 실행을 불허할 때에는 능히 그 포부를 간직하여 남에게 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소위 고상한 체하는 자들이 과연 모두 그런 포부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포부를 가지 고도 자랑의 표현을 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그러나 포부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작은 포부는 실시하기가 용이하 지마는 큰 것은 어려운 것이니 포부를 가지고도 자랑의 표현을 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자기의 포부가 크기 때문인 것이다. 선생의 지향하는 바는 오직 삼대 이상 사람의 사업을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니 어찌 자기 배운 바의 자부심을 버리고 보통 사 람의 하는 대로 맹종하랴! 선생이 자랑의 표현을 하지 않은 것은 지당하다. 더군다나 선생의 포부는 당시에 실현하게 되지 못했더라도 후세의 평론자들이 당시의 실정으로써 고찰해 볼 때에 반드시 선생의 위대한 풍격에 고무되는 자가 있을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허미수 許 眉 叟 가 일찍이 선생더러 한 국가를 바로잡을 인재라고 칭허하였으니 이것은 정확한 평가이다. 세상에서는 또 선 생을 문중자 文 仲 子 에게 비하는 자도 있었다. 문중자와 선생의 정신과 역량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는 일이나 선생의 인자한 마음과 순수 정대한 사상은 아마 옛사람을 모방하여 거친 문중자의 유가 아닐 듯하며 나아가서 이 理, 기 氣 와 여러 학문들을 논하는 데 이르러는 문중자로서는 전혀 없는 일이다. 그러면 선생은 정자, 주자보다는 앞서고 뒤설만치 뛰어난 사람이라고 비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양반의 집 자손으로서 이 태평성대를 만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겠지마는 당당하게 명나라와 관계를 맺고 여진족을 반대하는 대의 大 義 사상을 갖고서 이 수록 을 세상에 내놓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이 어찌 문중자가 수문제 隋 文 帝 에게 토지 개혁 을 건의하던 그것과 같이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선생은 52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마쳤다. 선생의 부고가 있을 때에 머나 가 까운 데로부터 조문하는 자가 수백여 명이었으며 운상하여 경기도 죽산, 용천리 정배산 동향의 산지에 장사하였다. 유형원 생애와 행적 25

20 부인은 풍산심씨이니 철산부사이며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은 심강의 딸이다. 그는 여자로서의 덕행을 소유하여 선생을 규범 있게 받들어서 사업을 성취하도록 도왔으며 아들 하나와 딸 여섯을 두었었다. 아들의 이름은 하昰이다. 맏딸은 정광주鄭 光疇에게, 둘째 딸은 박삼朴森에게, 셋째 딸은 백광저白光著에게 시집가고 아들 하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 름은 응린應麟, 응룡應龍, 응봉應鳳이다. 후학 복천福川 오광운吳光運은 글을 짓다. (9) 磻溪隨錄, 附錄, 傳 柳馨遠 字德夫 文化人 文化之柳 自高麗大丞車達始 入我朝 有曰寬 相世宗 以淸白聞 諡文簡 文簡六世孫縣令湋 爲馨遠 曾王父 王父成民 贈參判 父欽+心 檢閱 母李 右參贊志完女 天啓二年壬戌 生于漢師 背有七黑子如北斗狀 二歲而孤 五 歲 通筭數 讀書 便知大義 敏而勤 一過眼 輒成誦 羣兒在傍戲聒 若不聞也 七歲 讀禹貢 至冀州 詠歎不已 至於起舞曰 此 二字 何其尊體識例也 十三四 便有意於聖賢之學 取經傳百家之書 考究其得失 稍長 歎曰 志於道而未能立者 志爲氣惰也 夙興夜寐 未能也 正衣冠尊瞻視 未能也 事親之際 和顔色 未能也 居室之間 敬相待 未能也 四者 惰于外而心荒于中 遂作 四箴以自警 操存省察 內外交養 事其母及王父母 極其誠敬 及其沒 以善居喪稱 自崇禎甲申以後 益無當世意 癸巳 遂盡室 南歸于扶安之愚磻洞 號磻溪 間一赴擧 成進士 用王父治命也 自是不復就試 杜門靜坐 專精力學 日必昧爽而起 拜謁家廟 祭祀 一遵朱文公家禮 平居 食不兼味 衣不絹紬 租稅爲隣里先 待人以誠 不問貴賤 隨分勸勉 鄕人無不悅服 嘗過津 遇船 有破溺 亟招上流船 盡力拯出 所全活者九人 見彗星 知辛亥必大饑 節食蓄穀 以賙救窮乏 親戚隣里 多賴之 讀書 必沈潛 自得 其與友人鄭東稷 論理氣四七人心道心諸說 多有發前人所未發者 爲學 以靜爲主 嘗荅友人裵尚瑜曰 功夫雖貫動靜 非 靜 無以爲本 不但學者如此 造化之理 流行不已 動靜互爲其根 然嘿而觀之 其主處 必在於靜 聖人井田之法 本地而均人 亦由靜制動之意也 於書 未嘗死守前人語 言必度之於今 而質之於古 會之於心 而參之於事 思之又思 究極精微 苟有所得 雖夜必興 明燭疾書 每日暮 輒喟然曰 今日又虛度矣 以日所爲 較食多小 不稱則不能眠 常自激仰曰 天生四民 各有其職 余藉先蔭 安坐饘粥 是天地間一蠧 只當講究先王之道 充吾爲士之分而已 於是 尋攷先聖賢本意於遺經之間 夙夜靡懈 眞積 力久 自無疑而至於有疑 自有疑而至於渙然冰釋 則古今理慾之分 事物本末之原 莫不瞭然於心目 自不覺欣然而樂 慨然而 歎 不得不筆之於書 以寓其救世惻怛之志 則所謂磻溪隨錄 是也 其書以田爲本 不畫井田之形 只求井田之實 然後敎士 選 才命官 分職 頒祿 制兵 設郡縣之法 皆可自此以推 規模節目 廣大纖悉 其言曰 天下之道 本末大小 未始相離 星失其當 則衡不得爲衡 寸失其當 則尺不得爲尺 又曰 古今此天地此人物 先王之政 無一不可行者 彼以古今異宜爲說者 妄而已 又 曰 古人制法 皆以道揆事 故本自簡昜昜行 後世之事 皆緣私爲法 故百般防巧 只益紊亂耳 又曰 治天下 不公田 不貢擧 皆 苟而已 公田一行 百度擧矣 貧富自定 戶口自明 軍伍自整 唯如此而後 敎化可行 禮樂可興 不然 大本已紊 無復可言 蓋其 平生用功在此一部 而其言皆有所本 實我東方所未有之書也 以輿地勝覽凡例踳駁 著輿地誌 嘗論本國分野曰 漢水以北 當 與燕京同爲尾箕 以南當爲箕斗 知者以爲獨得之見 至於文藝 詞章 兵謀 師律 陰陽 律呂 天文 地理 醫藥 卜筮 筭計 方譯 之類 亦皆旁通 而天下山川之險昜 道路之通塞 海外蠻夷之俗 無不周知 雖道釋異端之說 亦必深究 而別其是非 其所著 又 有理氣緫論 論學物理 經說問荅 記行日錄 續綱目疑 補東史綱目條例 正音指南 歷史東國可攷 朱子纂要 東國文鈔 紀效新 書節要 書說 書法 參同契抄 武經四書抄 地理羣書等書 藏于家 馨遠十年苫塊 已嬰奇疾 癸丑春疾革 使侍者 改整枕席 澡 洗更衣而逝 得年五十二 其逝及葬 皆有白氣亘天 見者異之 娶沈氏女 生一男六女 男昰 孫應麟 應龍 應鳳 應鵬馨遠魁顔 廣顙 白而長身 聲音宏亮 眼采照人 一見可知其爲非常人云 後生晩學 雖未及見其人 而其窮居著書 略見其一二 後世之子 雲堯夫 當自知之 若其尊周攘夷之義 根於天性 其見諸事爲者 亦略可指矣 當顯廟壬寅 北人頒赦 稱獲永曆皇帝 我國未知 虛實 馨遠歎曰 皇朝存沒 豈是細故 而漠然不知耶 丁未夏 聞福建漂海人鄭喜等 將押赴京城 馳往見之 以漢語酬酢 知皇統 未絶 取見其曆日 驗其爲永曆二十一年 不勝悲喜 相對流涕 作詩而贈之 所居濱海 常置大船四五 制極便利 畜駿馬 日可行 數百里 藏良弓美箭及鳥銃數十 以敎家僮及村氓 至今愚磻一里 多有以善砲名者 嘗裒聚水路 朝天記及漂海人所錄 以記諸 站 某處險 某處夷 歷歷如指掌 卽此數事 而可以略揣其志之所存 噫其悲夫 是未可與俗人道也 2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1 臣幼少時 在人家 得見所謂隨錄 而深喜之 求借抄寫 沈潛玩繹數年而後 略見其大意 又從其曾孫進士發 盡得其遺文而讀之 始知其爲天下士 對人輒擧 似則有信者有不信者 或謂其所著述 大而無當 迂而不切 是不過爲無用之書也 或謂治國之道 當 論大體 何必屑屑於瑣細節目之間 臣以爲不然也 唯其所論者大 宜乎俗見之以爲迂矣 而限民名田之說 旣有前賢定論 苟以 實心行之 則未見其必不可行 且此法之行 以爲不便者固多 而其便之者 視不便者尤多 則此非所拘也 至於當論大體之說 似 矣 而臣之所悶者 正在於此 何也 唐虞三代 爲治之具 必有節目之詳 而周末諸侯 惡其害己 而去之先王典籍 蕩然無存 其 爲治之大體 則幸賴孔孟程朱諸聖賢 發輝無餘 而至於節目 則有所未遑 故言治道者 擧其大體 則必稱唐虞三代 而其見諸節 目施措者 則皆是秦漢以來俗規 於是乎天下之人 皆安於此 而不復深究 如經界貢賦學校軍制之屬 使世之儒者 論說大體 則 非不燁然美矣 而若令擧行其事 則鮮不到頭茫然 畢竟行之者 不過沿襲之謬例 此由於略知大體 而不明條理之過也 苟如是 而已 則先王之道 終無可行之日 而萬世長夜矣 此馨遠之所大懼 而爲此書者也 其所條例 雖未必其悉合於唐虞三代爲治之 節目 而若於大體之外 欲求其節目之詳 則未有如此書者 今我殿下以不世出之聖 大有爲之志 誠心願治 恥言漢唐而前 後進 講之書 皆是唐虞三代爲治之法 則其於大體 殆無所憾 而若其節目條理之微密者 則竊恐聖上之不能不俯取於斯也 臣於昨年 登對時 偶及馨遠之說 自上俯詢其人本末 臣敢有所對 其後因儒臣陳達 有撰傳以進之命 臣不揆僭猥 略述文字 以附於隨錄 之末 而仍獻淺見 惟聖明之垂察焉 通政大夫 成均館大司成 知製敎臣洪啓禧 奉敎製進 홍계희洪啓禧가 지은 반계磻溪에 대한 전傳이다. 유형원柳馨遠의 자는 덕부德夫이니 문화文化 사람이다. 문화 유씨柳氏는 고려시대에 대승大丞 벼슬을 한 거달車達을 시조로 한다. 이씨 조선의 초기에 이르러 관寬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세종 때 정승이 되어 청백하다고 명성이 높았는데 죽어서 시호 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문간공의 6세손은 현령 벼슬을 한 위湋이니 이 이가 형원의 증조부이며 조부는 성민成民이니 증 직으로 참판이다. 아버지 유흠은 검열檢閱 벼슬을 하였고 어머니는 우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천계天啓 2년 임술에 선생 을 한사漢師에서 낳았는데 등에 검은 사마귀가 일곱이 있어서 북두성 모양과 같았다. 선생은 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다섯 살에 산수에 능통했으며 글을 읽으면 글의 대의를 곧잘 이해하였다. 또 민첩하고 도 근실하여 한 번 보면 바로 외웠으며 여러 아이가 옆에서 장난을 치고 떠들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곱 살에 서 전 우공 편을 읽다가 기주冀州의 토지제도를 정한 대목에 이르러서 읽고 감탄하기를 마지않더니 심지어는 일어나 춤을 추 면서 말하기를 이 두 글자가 어쩌면 그렇게도 원칙[體]을 존중하고 실례[例]를 잘 인식하였을까? 하였다. 열 서너 너덧 살 되어서 벌써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바 경經과 전傳과 고대 중국의 모든 학파들의 저서를 섭렵하고 그 내용들의 옳고 그 른 것들을 연구하여 해명하였다. 조금 성장해서는 스스로 한탄하기를 성인의 도를 배우는 데 뜻을 두고도 성공하지 못한 것 은 그 뜻이 행동으로 인하여 태만하게 된 까닭이다. 즉 밤이 되면 자고 일찍이 일어나지 못하며 의복과 갓을 바르게 하여 사 람들로 하여금 존경하도록 못하며 부모를 섬기되 언제나 즐거운 표정으로써 모시지 못하며 가정생활에 있어서 서로 존경하 여 상대하지 못하는 까닭이니 이 네 가지 행동은 외부로는 태만이 생기게 되며 내부로는 마음을 거칠게 하는 것이다 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네 가지 조문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다. 즉 이것은 마음을 바로잡아서 고수하며 반성해서 살피며 이 착한 마음을 안팎에서 번갈아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어머님과 조부모 섬기기를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써 하였으며 그들이 세상을 버린 뒤에 상주로서의 지킬 예절을 잘하였다고 칭찬을 받았다. 숭정崇禎 갑신년 중국이 망한 뒤부터 더욱 세상에 출세하려는 염두를 갖지 않고 있다가 그후 9년 만인 계사년에 그만 전 가족을 데리고 전라도 부안扶安 우반동愚磻洞에 은둔하여 호를 반계磻溪라 하였다. 그 동안에 한 번 과거를 보아 진사를 하 였는데 그것은 조부님의 명령을 준수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다시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출입도 없이 가만히 집에 앉아서 모든 정력을 학문 연구에 경주하였다. 매일 동틀 때면 반드시 일어나서 사당 참예를 하고 제사지내는 범절은 주자의 가례家禮 를 반드시 따랐다. 평시 밥을 유형원 생애와 행적 27

22 먹을 때에 맛있는 음식을 거듭하여 먹지 않으며 의복도 명주를 입지 않고 국세는 언제나 마을 사람보다 먼저 바쳤다. 사람을 성실하게 대우하여 신분의 귀천 여하를 불문하고 그의 정도에 따라 권고하고 격려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나루터를 지날 때에 배가 파선을 만났었는데 재빨리 상류의 배를 불러서 극력 구출한 결과 아홉 사람의 생 명을 온전히 구원했었다. 또 신해년에 천재가 있었는데 그는 기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미리부터 먹는 것을 절 약하여 곡식을 축적하여 궁핍한 자를 구제해 주었기 때문에 친척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그 힘을 많이 입었었다. 그가 글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해득하곤 하였는데 그의 친구 정동직 鄭 東 稷 에게 주는 편지에서 이기 理 氣, 사단 四 端, 칠정 七 情, 인심, 도심 등에 관한 여러 학설들을 논술하여 이전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천명하였다. 또 학문 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정 靜 (조용한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그가 배상유 裵 尙 瑜 에게 대답하는 글에 이르기를 "학문을 연구하는 데는 동 動 (움직이는 것)과 정 靜 을 일관해야 하나 정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학문하는 자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천지의 이치 도 언제나 유동하여 동과 정이 서로 그 근본이 된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 요점은 반드시 정에 있다. 성인의 정전법도 땅 에 근본을 두어 사람에게 분배해 주는 것인데 역시 정 靜 을 통하여 동 動 을 제정하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서적을 볼 때에는 예전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재와 비교하여 옛날의 것을 확증하며 마음에서 해득한 다음에 사실과 대조해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최후의 세밀한 것까지를 연구하였는바 만약 새 로 해명되는 것이 있을 때는 밤중이라도 반드시 일어나서 촛불을 켜고 서둘러 기록하였다. 매일 날이 저물면 탄식하기를 오늘도 시간을 헛되이 보냈구나! 라고 하여 날마다 자기가 한 사업을 먹는 것과 비교하여 정도가 맞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격려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사람이란 네 분류로 나뉘어져 저마다 자기의 직업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조상의 덕택으로 편히 앉아서 죽이라도 먹고 있으니 이는 사회의 좀과 같다. 그러므로 옛 날 위인들이 닦은 길을 심오하게 연구하여 내가 선비로 된 직분을 완성해야 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해 내려오는 경전에서 옛날 성현들의 본의를 찾아내고 또 참고하는 데 밤낮을 불구하고 굳건히 노력하였다. 연구 과정에서는 언제나 의문이 없는 데로부터 의문을 갖게 되고 또 의문을 갖는 데로부터 명확한 해명을 얻는 데까지 이르 게 된다. 이리하여 고금의 도리와 사욕의 관계와 사건의 근본적 또는 지엽적인 원칙이 자기의 생각과 보는 바에 전부 실증된 다음에는 부지중에 자신도 만족하게 여기고 또 개연히 탄식하며 그것을 책에다 써서 이 세상을 구제해 보려는 안타까운 염 원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이렇게 된 것이 즉 이 수록 이다. 이 책의 내용은 토지 문제를 기본으로 하여 정전의 모양을 그어 놓지 않고도 정전의 알맹이만을 땄다. 그 다음에 선비의 교육, 인재의 선발, 관리의 임명, 관제의 분정, 봉급의 설정, 병역의 제정, 군현을 개설하는 법들이 모 두 이 토지 문제의 해결로부터 추진하게 되어 규모와 항목들이 광범하면서도 세밀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기를 천하의 도 道 란 그 본말, 대소, 시종이 서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예컨대 눈이 제 구실을 못하 면 저울이 저울로 될 수 없으며 치수가 제 구실을 못하면 자가 자로 될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나 이제가 모두 이 천지에 이 사람, 이 물건으로서 선왕 先 王 의 정치를 하나도 실행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저 예와 이제가 다르다 고 이의를 다는 자는 망령된 말일 뿐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이 법을 제정할 때는 모두 원칙인 도리로써 사 리를 맞추었기 때문에 법 자체가 간략하면서 실행하기 쉬웠지만은 후세의 일들은 모두 사욕을 본위로 하여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여러 방법으로 혼란을 공교롭게 방지하려 하여도 더 문란하게 될 뿐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국가의 정 치를 해 나갈 때에 토지를 국유로 하지 않고 인재를 추천해서 선발하지 않으면 모두 임시적 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토 지를 국유제로 한다면 모든 기준이 다 세워진다. 예로 부유한 자와 빈한한 자가 자연 안정하게 되며 호구가 자연 명확하게 되며 군대도 자연 정비될 것이니 이렇게 된 뒤에라야 교육과 문화도 실행할 수 있고 예의와 음악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기본적인 큰 근본이 이미 문란하게 되어 다시 말할 여지도 없게 된다 하였다. 이상의 말들은 대체로 그가 일생의 정력을 이 수록 에 다 주입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또 수록 에서 한 말들은 모 2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3 두 그 근본을 규명함이 있는 것으로서 실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있는 저작이다. 그는 또 여지승람 輿 地 勝 覽 의 범례가 틀리고 복잡하다 하여 여지지 輿 地 誌 를 저작하였으며 일찍이 조선의 분야 分 野 를 논하기를 한강 이북은 응당 북경의 위치와 같아서 미 尾 성과 기 箕 성에 속하며 이남은 기성과 두 斗 성에 속해야 한다 하였는 데 그 방면의 지식을 가진 자가 그 말을 창조적인 견해라고 하였다. 기타 문예와 시부 등 저작, 군사의 전략과 규율, 음양 이 치와 음률, 천문과 지리, 의약과 복서 卜 筮, 수학과 번역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정통하였으며 천하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의 교통 여하와 외국의 오랑캐 풍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르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교, 불교와 같은 교리들도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졌다. 그의 저작으로서 또 이기총론 理 氣 總 論, 논학 論 學, 물리 物 理, 경설문답 經 說 問 答, 기행일록 記 行 日 錄, 속강목의보 續 綱 目 疑 補, 동사강목조례 東 史 綱 目 條 例, 정음지남 正 音 指 南, 역사동국가고 歷 史 東 國 可 攷, 주자찬요 朱 子 纂 要, 기요신서절요 紀 要 新 書 節 要, 서설 書 說, 서법 書 法, 참동계초 參 同 契 抄, 무경사서초 武 經 四 書 抄, 지리군서 地 理 群 書 등의 책을 저작하여 자기 집 에 간직해 두었다. 그는 10년 동안 거상 중에 있어서 벌써 이상스러운 병을 앓았었다. 계축년 봄에 병이 더 심하게 되어 모시는 자를 시켜 베개와 자리를 정리하라 하고 또 새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52세였다. 그가 서거하고 또 그를 장사할 때에 모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쳤는데 보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히 여겼었다. 심씨 沈 氏 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여섯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하 昰 이며 손자들의 이름은 응린 應 麟, 응룡 應 龍, 응봉 應 鳳, 응붕 應 鵬 이다. 그의 얼굴은 우람하게 생기고 이마가 넓고 얼굴이 희었으며 키가 크고 소리가 웅장하며 눈의 광채가 사람을 비쳐 서 한번 보아 이미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한다. 후생과 그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직접 보지 못했으나 그의 은둔하여 저작한 그의 글들을 보고서도 그가 비상한 사람이란 것을 부분적이나마 대략 알 수 있으니 그의 진 가는 후일 소옹 邵 雍 이 양웅 揚 雄 의 태현경 太 玄 經 을 알아주듯이 응당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밖에 그의 존주양이 尊 周 攘 夷 이념은 아주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사례로 나타난 것만 해도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현종 임인년에 청나라 사신이 와 서 영력황제를 잡았다고 선포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실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탄식하기를 명나라의 존망이 작은 일 이 아닌데 어찌 그리도 막연하게 모르고 있을까? 하였다. 그 후 5년 만인 정미년에 복건 사람 정희 鄭 喜 등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왔는데 그를 서울로 호송한다는 말을 듣고 서울까지 달려가서 그들을 만나보았었다. 그들과 중국말로 대화하였는데 명나라의 계통이 끊기지 않았으며 또 역서 曆 書 를 보아서 그 해가 영력 永 曆 21년이 틀림없는 것을 실증하고 서로 대하여 눈물 을 흘리며 몹시 감읍하였으며 또 시를 지어 그들에게 주었었다. 또 자기가 사는 바닷가에다 큰 배 4 5척을 준비해 두었는데 극히 편리하게 제조하였고, 좋은 말을 길렀는데 그 말은 하루 수백 리씩을 갈 수 있었으며, 좋은 활과 화살 및 조총 수십 자 루를 준비하여 자기 집 하인과 촌민들에게 사용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반동에서는 지금도 총 잘 쏘 기로 이름난 자가 많다. 그는 중국 가는 수로에 관한 기록과 표류인들의 기록들을 모아서 역참 驛 站 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어 느 지방은 험하다, 어느 지방은 평지이다 등을 똑똑히 기록하여 마치 손바닥에다 두고 보는 듯이 명확하였었다. 이상 두어 가지의 사실만을 보아서도 그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깝다! 슬프다! 이 분은 보통 사람 과 함께 논할 인물이 아니다. 제가 젊어서 어느 사람의 집에서 수록 을 얻어 보고 반가워서 그것을 빌려다가 베껴서 두고 깊이 연구한 결과 수년 후 에야 수록 의 대의를 대략 이해했습니다. 그 후에 또 그의 증손인 진사 유발 柳 發 에게서 그의 유고를 모두 얻어 열독하고 그 가 분명 천하의 큰 선비임을 알고서 사람을 대하면 이 수록 을 이야기하였더니 그것을 믿는 자도 있는 반면에 믿지 않는 자도 있었는데 더러는 형원의 저술이 거대하나 적당하지 않으며 너무 꼼꼼하여 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니 이것은 필요치 않 은 책이다 하며 더러는 국가를 다스리는 방안은 대체만을 논해야 할 것인데 어찌 그렇게도 사소한 절목까지 논할 것이 있 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형원의 논점이 크기 때문에 속된 의견들이 오활하다고 하는 것입 니다. 또 토지 소유권을 제한하자는 학설들은 옛날 현인들의 정당한 평론들이 있던 바로서 만일 진실한 마음으로 실행한다면 유형원 생애와 행적 29

24 오늘이라고 실행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며 또 이 법을 실행한다면 좋지 못하다고 하는 자가 물론 많을 것이나 그것 을 환영하는 자가 좋지 못하다고 하는 자보다 더 많을 것이니 이것에 구애될 것은 아닙니다. 혹자가 말한 바 대체를 논할 것 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바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옛날 요 堯, 순 舜 이나 삼대 三 代 의 정치를 하는 방 안으로서 반드시 상세한 세목이 있었을 것이나 주 周 나라 말기에 여러 제주들이 자기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을 싫어하여 없애버렸기 때문에 선왕의 문헌들이 말끔히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정치의 대체가 다행히 공자, 맹자, 정자, 주자 등의 여 러 성현들에 의하여 모두 천명되었지마는 세소한 세목에까지는 미처 논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의 방도를 말한 자들이 정치의 대체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요, 순과 삼대를 찬미하지마는 그것을 실행할 데 대한 세목을 설명함에 있어 서는 모두 진나라, 한나라로부터 내려온 보통적인 규례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국한되어 경 지의 경계, 공물과 부세, 학교, 병역제도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더는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소위 선비 란 자로 하여금 대체를 말하라 하면 모두 환하게 알고 있지마는 만일 그 사람에게 그 사업을 시켜 놓고 보면 처음부터 막연 하게 있지 않은 자가 적으며 나중에 실행한다는 것도 옛날의 틀린 전례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데 불과하니 이것이 대체만을 대략 알고 그것을 실행할 세목들을 알지 못한 과오에서 오는 까닭입니다. 만일 이대로 인습만을 답습한다면 선왕의 착한 방 도는 언제까지나 실행될 날이 없이 만년을 가도 암흑의 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형원의 크게 염려하는 바이며 또 이 수록 을 저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가 말한 세목들이 전부 요, 순과 삼대의 정치를 하던 세목에 합치된다고 하지는 못 하겠지마는 옛날 성현들의 말한 대체 이외에 그것을 실행할 상세한 세목을 탐구하려면 이만한 책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가장 걸출하신 성인의 품질과 원대한 지향을 간직하시고 성심으로 좋은 정치를 실시하려 하시와 한나 라, 당나라의 치적 따위는 말하는 것까지도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언제나 어전에서 강의하는 책들이 모두 요, 순과 삼대의 정치를 하던 원칙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치에 관한 대체에 대하여 그리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나 기타 세밀한 세목과 조항에 이르러서는 아마 전하께서도 이 수록 을 참고로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작년에 제가 어전에서 등대 登 對 할 때에 우연히 형원에 관한 말이 있었는데 위로부터 형원의 내력을 물으신 일이 있었습 니다. 그때에 제가 감히 대답을 올린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여러 선비들의 상소로 인하여 형원의 약전을 올리라는 명령이 있 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외람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문자를 기록하여 수록 의 끝에 붙이며 겸하여 변변치 못한 의견 을 드리오니 밝게 내려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지제교신 홍계희 洪 啓 禧 는 명령을 받들고 지어 올리다. 3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5 이익 李 瀷 (1681~1763) 1) 이익 연보 年 譜 2) 이익 생애 관련 자료

26 2. 이익李瀷(1681~1763) 생애와 행적 1) 이익李瀷 연보年譜 본관 : 여주驪州, 자 : 자신自新, 호 : 성호星湖 나이 / 연도 32 연보 1세(1681,숙종7) * 부친(李夏鎭)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출생 2세(1682,숙종8) * 부친 별세 * 선영先塋이 있는 경기도 안산安山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람 10세(1690, 숙종16) * 학문에 전념함 20세(1700, 숙종26) * 관례冠禮를 치르고, 자字는 자신子新이라고함 25세(1705, 숙종31) *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였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아 회시會試 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26세(1706,숙종32) * 둘째형 잠潛이(47세)이 노론老論을 비판하다 장살杖殺 당함 * 과거를 포기하고 셋째형 옥동玉洞 서漵와 종형從兄 소은素隱 진津의 문하 에서 학문연구에 몰두 27세(1707, 숙종33) *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삼각산 백운대에 산행 그 뒤 1720, 1721년 삼각산에 올라 여러 편의 시를 쓰고 호연지기를 기름 29세(1709, 숙종35) * 영남지역 유람, 백운동서원ㆍ도산서원 등 방문 31세(1711, 숙종37) * 윤동규尹東奎(17세)가 문하에 들어옴 33세(1713,숙종39) * 맹자질서孟子疾書 집필 시작(1718년) * 아들 맹휴孟休 출생 34세(1714, * 천마산 유람 궤사정ㆍ관음사ㆍ운흥사ㆍ대흥사ㆍ용천사, 화담서원 방문 숙종40) 35세(1715,숙종41) * 모친 별세 * 사칠신편四七新編 저술 37세(1717, 숙종43) * 명성 듣고 각 지역으로부터 학사學士들이 모여듬 40세(1720, 숙종46) * 성호사설星湖僿說 집필 시작 41세(1723, 숙종47) * 셋째형 옥동 선생 별세 옥동선생은 포천 옥동산玉洞山 아래 기거함 44세(1724, 경종4) * 신후담愼後聃이 문하에 들어옴 47세(1727, 영조3) *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51세(1731, 영조7) * 가례질서家禮疾書 저술 54세(1734, 영조10) * 신후담이 사칠신편 의 성현의 칠정聖賢之七情 문제 제기 55세(1735, 영조11) * 아들 맹휴가 성균관 진사가 됨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주요 행적지 안산 첨성리 북한산 경북 안동 천마산

27 나이 / 연도 연보 62세(1742, 영조18) * 맹휴가 정시廷試 문과에 장원 급제, 한성부漢城府 주부主簿 제수 64세(1744, 영조20) * 관악산 탐방 65세(1745, 영조21) * 맹휴가 만경萬頃현령으로 부임 66세(1746, 영조22) * 후부인 사천泗川 목씨睦氏 별세 * 안정복安鼎福이 배움을 청함 67세(1747, 영조23) * 역경질서易經疾書 저술 71세(1751, 영조27) * 아들 맹휴가 죽음 73세(1753, 영조29) * 이자수어李子粹語 저술 80세(1760, 영조36) * 성호사설星湖僿說 완성 81세(1761, 영조37) * 경기관찰사 채제공蔡濟恭 방문 82세(1762, 영조38) *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완성 83세(1763, 영조39)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이 내림 * 별세 주요 행적지 관악산 이익 생애와 행적 33

28 2) 이익 생애 관련 자료 1세(1681, 숙종7) * 10월, 부친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雲山 출생 (1) 星湖先生全集 부록 권1, 家狀, 家狀 (門人 尹東奎) 先生姓李氏 諱瀷字子新 居廣州先墓下瞻星里 故自號星湖 其先驪興人 八世祖兵曹判書贈左參贊諡敬憲公諱繼孫 以文學起 家 嘗爲北伯 有文翁之敎 北人至今建院祀以先師云 曾祖諱尙毅 議政府左贊成贈領議政諡翼獻公 當宣廟朝 以謹緩持重 有 名公卿間 祖諱志安 司憲府持平贈吏曹參判 考諱夏鎭 司憲府大司憲 在肅廟時以文章節行 力扶淸議 請留許文正穆 不容於 朝 左遷晉州牧 繼黨事起 用事者必欲致重典 攟摭無所得 竟以微事誣捏 謫雲山郡而卒 妣龍仁李氏 留守諱後山之女 贈貞 夫人 妣貞夫人安東權氏 諱大後之女 先生大憲公之季子 權夫人之所生也 先生以我肅宗八年辛酉十月十八日 生於大憲公謫 所雲山郡 其明年壬戌大憲公棄世 先生生纔二歲 淸弱多疾 權夫人甚愛重 常自囊藥餌 隨而調護 以是不許早就傅受書 然先 生自幼天資穎悟 挺拔絶人 稍長知學 不待課督 刻意自奮 羣居講學 衆或在傍喧戲 而常默坐手卷 終日不撤 權夫人嘗窺見 喜甚曰吾兒能如此 吾無憂矣 旣而文辭大進 乙酉以策發解而因錄名違規 不赴會試 丙戌仲兄罹世禍 畏約屛居 無意世事 遂 棄擧業 遊第三兄玉洞先生從兄素隱先生之門 習聞爲學之方 朝夕定省之外 危坐一室 日取聖賢書 俯讀仰思 有得必書焉 性 至孝 每順適大夫人之意 無所違拂 家用貧乏 親自營辦 不令大夫人憂 乙未遭內艱 居喪盡禮 不脫絰帶 未葬食粥 旣葬疏食 苦鹽 不使有薑桂之滋 旣服闋 臧獲什器之物 一無所留 盡籍歸宗家 生計旁落 而處之晏如 立約家中 不許稱貸求覓 惟以耕 作所穫 排日自給 委任幹奴 御之有法 幹奴亦盡力效勞 晩歲調用 亦賴此稍裕 今上丁未 朝廷聞先生名 有繕工監役之除 先 生欲一謝恩命上京 以前例無謝恩 卽日棄歸 癸未國家有慶頒錫老之典 先生時年八十三 例授僉知中樞之銜 是年冬十一月感 微疾 十二月十七日考終于寢室 襲用紙衾 去握手履 設飯含 不用平生落髮爲枕 剪爪以實棺角 皆紙包有銘 又以紙親書星湖 徵士驪州李公之柩十字 幎巾魂帛 亦以紙爲之 而幎巾染黑 棺厚二寸許 溶松脂以代㯃 遷尸奠用餘閣 殯前朝夕之饋亦不廢 及葬贈玄黃而以紙代絹 不用柩衣功翣等 綳用藁索 皆平昔所定也 門人受業及族在袒免之外者 或白布巾帶 或弔服加麻 及 葬而除 或有素帶而終期者 其明年甲申二月二十七日 葬于家北先塋壬坐之原 前睦夫人之葬也 先生蓋與門人豫度甫竁 而因 以爲日後之地 至是與睦夫人同窆 又遷前配申夫人之葬 以從三壙同穴 蓋遵遺命也 前配淸州申氏 正言必淸之女 後配泗川 睦氏 天健之女 柔順承德 一遵無違 貞靜和洽 協成內助 東奎出入先生門下數十年 未嘗聞呵責婢僕之聲 其閨儀之可則 如 此也 男正郞孟休 女適判官李克誠 皆睦氏之出也 正郞娶參判蔡彭胤之女 有一男九煥 九煥娶權世檍女 生二男二女皆幼 判 官有一女不育 先生方顔頎身 眉目炯然 英氣襲人 溫粹和樂 色笑可親則春風揚休 方毅嚴正 辭氣峻潔則烈日秋容 稟賦旣正 涵養亦至 威儀攸攝 不至大拘 寬廣自如 和易中節 伊川所謂非體之禮也 其色莊其言厲 其容舒而恭 其坐端而直 盥頮之所 無點滴之痕 飮食之際無匙箸之聲 中夜必寢 昧爽必興 盥漱冠服 謁于家廟 退坐書室 几案必整 其讀書也 淸濁高低 聲中音 韻 其見於動靜容止之間有如此者 事親極其孝敬 雖衰老之後 或言及父母 未嘗不戚然垂淚 至咽不成聲 以早失大憲公 未識 顔範爲至慟 後遭大憲公不諱之歲 欲追服 已而曰退翁之於其先君 亦如吾之所遭 然退翁莫之行 退翁吾所師也 豈敢過也 是 以不果焉 然終年哀慕 無異持衰 於兄弟子姪 恩愛備至 每傷念第二兄之無嗣 爲之立後 又於其庶出子孫 爲之收養敎育 嫁 娶成家 諸姪之早孤者 亦攜置敎養 一視己子 而疾病爲之尋醫救藥 不避晨夜風雪 姊爲鄭氏婦者早寡無子 先生爲之憫念 延 置大夫人側 待其立後而歸之 族人之昏嫁失時者 或主其昏 或助其具 饑乏必周 疾病必問 死喪必救 惟力是視 其於僮僕 撫 視惟均 嘗有服勤效忠者死 爲之哭臨 家有畜狗 亦令待斃而埋之 蓋自吾仁推以及物有如此者 家距小宗稍間 凡薦享朔節 非 甚病必躳往將事 雖風雨不廢 絫世先塋 俗節上冢 終日奠拜 未嘗怠忽 以爲絫世同塋 若以世代遠近 墓田有無 祭近而廢遠 在祖先子孫之心 均爲欠缺 鳩財置田 每以孟冬上丁 行歲一祭 又謂八世祖敬憲公 入我朝爲起家之祖 國法公子功臣之外 無 佗立宗之文 而王制註旣言雖非別子 始爵者亦然 則亦可爲庶姓立宗之證 立敬憲公之廟於宗孫之家 歲一祭焉 又謂立宗將以 合族 每歲京鄕各一會焉 以大憲公遺敎 奉叔父母之祀 定祭式 虔誠一如所生 姊有殤死 忌日不廢祀 庶母死 其外孫奉祭者 3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9 或路遠不至 亦令分饌祭之 高祖側室之墓崩壞不可識則更加封築 訪其墓田 付諸宗人 續其香火 乳母死無子 築壇屋側 爲文 以祭 因令歲一奠巵 其奉先敦宗 推遠下逮有如此者 其處家嚴而有法 閨門內外斬斬如也 雖子姓親屬 未嘗無故入內 常誦易 曰家人嗃嗃 未失也 婦子嘻嘻 失家節也 有一子晩得 極其聰穎 雖甚鍾愛 其敎之必以義方 少有差失 嚴加誚責不饒曰 人家 每患子弟有才 常失敎導 無可畏 故致壞 雖在宗黨之間 義有不可 正色嚴責 事已乃復勿咎 故莫不畏慕敬憚 子弟出入必告 少出必拜 返亦必拜 故門人受業者亦觀化如此 下至奴僕之賤 俾不得以醜言相加 亦無敢高聲喧囂 傍及里閭 正辭禁非 一邨 皆敬服敎誘 亦知尊信 此可見先生感化之一端 其奉祭接客 亦各有品節 籩豆有定數 潔而不豐 朝夕之饌 亦有定器 一以自 奉者待人 不以賓客之貴賤而異品 衣取蔽體 儉而潔 食取充腹 粗而不奢 吉凶凡百 皆出歲用 一絲不干於人 大要務在節儉 粗足歲計而已 嘗撰入儉說以嘆俗弊 又謂救荒莫過於豆 歲荒必磨豆爲粥 作半菽歌以自娛 嘗子爲南縣宰 赴任也 惟許睦夫 人就養 先生獨留鄕廬 或以月廩餘俸送餉 先生卻而不受曰凡斂民 八九分非理 以此奉親可乎 吾留吾廬 穡吾田 足以救飢免 凍 只受魚尾酒壺 與鄰族門生一會共飮 其治家奉先 敎子接賓 御衆節財有如此者 其爲學也 循先賢所定課讀 以經書爲先 繼以史記諸子百家 無所不究 其讀書也 字求其訓 句索其旨 思之又思 要以深究自得爲期 博學詳說 隨得有錄 而以孟子爲 始 名其所著曰疾書 語學者曰妙契則吾豈敢 疾其書之義則吾竊有取焉 其序孟子曰疾書者何 思起便書 蓋恐其旋忘也 不熟 則忘 忘則思不復起 是以熟之爲貴 疾書其次也 亦所以待乎熟也 聞之朱夫子曰初學必置冊子 籍記其所得所見 斯豈欺哉 其 必自七篇始者何 以世則後 以義則詳 後則近 詳則著 故曰求聖人之旨 必自孟子始也 朱夫子集註出而羣言遂定 播之海外 擧同軌一之 盛矣哉 雖然發揮諸子 林蓁海滾 未必皆中 而永樂胡廣輩起身蔑學 去取無據 使箋釋之意 或未免湮埋轉譌 則 疾書之作 胡可已也 嗚呼 朱子尊孟子也 後人尊朱子也 後人之尊朱子 殆有甚於朱子之尊孟子 賢希聖士希賢 其勢然也 賢 者智有能及之 故於孟子氣像未化處 曾不以尊之之篤而諱焉 士者困在下列 故於集註無事乎黑白 玆所謂不自信而信可信 此 雖學者之正法 其或篤信之餘 疑有未釋 露於講貫 藏於畢箚 求有以自得 斯亦不得已也 人輒繩之以訕上 繩之固若有意 峻 法刻刑 奚爲於孔子之門 傳曰事師無隱 蓋不禁其有疑難也 處下欲進而便自謂渙然者 非愚則謏 余實恥之 是以畫井建正之 類 妄爲一說 以補餘意 皆朱子所嘗置疑也 置疑所以開言路 言之不中 罪在言者 九原可作 吾夫子必將哀其求進 而不誅其 不中也 又序論語曰欲看此書 須先求此註 須先得其心 得朱子之心 夫子之心 又庶幾可推也 何謂心 朱子之爲此註 其於舊 說 苟可以因則因之 不苟新也 或前後異見則易之 不苟留也 雖門人小子 隨意發難 一曲之長 咸在采收 不苟棄也 用此知朱 子之心 與天地同恢 與古今同公 無一毫繫吝 而惟義之從也 然則當時取舍氣像可見 其在于今 尊其書而失其心 誦其書而後 其義 思量則爲妄 致疑則爲僭 發揮則爲剽 尺尺寸寸 一切卑近 勒爲禁網 愚與智無別 此豈古昔人所望於後人哉 而况論語 義最奧語最簡 聖人之言達則便止 不似庸學之有規矩 孟子之多敷衍 所以爲難解 而余之爲此書 非敢求志於箋釋之外也 如 朱門諸子之問目 擬待明師取正焉 蓋讀書解義 辨別篤志 此程朱以來爲學心法 觀於此二序 亦可見先生之於此學 傳聖賢之 心法 而繼斯學之幾絶 亦可以知先生之眷眷切切於憫俗學之含糊鶻突 因循無得 至於晦天理竆人欲也 是故於庸學三經近思 錄心經等諸書 皆以此意 各有論著 而如井田正朔考易學圖書揲蓍筭期中庸十章大旨管仲不死伯夷論等諸說 多有先賢未發之 論 至於四七理氣之辨 自退翁高峯以後 更有牛栗二公之爭 爲世大議論久矣 蓋四七名義 實與舜所謂人心道心者 同實異名 而後人不知合而爲說 故或拘於渾淪善一邊之疑 而有此歧異之議 繼以黨論之盛 各主一邊 不可復得而談 而其謂尊陶舍栗者 終不免呑吐歸於善一邊之說 先生爲之條分縷析 作新編之書以發明之 因序之曰舜有人心道心之訓 學者祖此爲頭腦 各有所 指 互明厥義 孟子主言四端 禮運主言七情 好學論述禮運 仁說述孟子 其言不翅詳盡 其義若可以炳然 而末學淺識 乃復繳 繞穿鑿 務出新奇 求明而反晦 欲精而實亂 非聖賢牖後之意有不瑩 卽使之迷之者之過耳 因謂學者曰此平易非難知者 而反 使爲難者 自我東始也 其於禮則以家禮爲上 而亦有疾書之解 因溯源而及於儀禮 旁通戴經通典等書 其序家禮疾書也曰禮者 天理之節文 天有理一而已矣 而三代之不同禮何 驗之於時月之代序 四時不同氣 故寒而裘暑而葛 不同其養也 理何嘗不同 理有所値 氣不得不異 故曰禮者時也 以時爲大 因以撙節 天亦不違 知此意者 可以言禮矣 是故於爲妻練及祖喪中父死代服 之類 博考源委 多所辨證 又慨風俗日奢 士友間貧賤旣甚 而慕效貴勢 莫可支吾 於是參酌古今之宜 撰冠昏喪祭之式 以爲 一家之禮 而要與親友共之 蓋出於孔聖與其不孫也寧固及朱夫子略浮文敷本實之遺意 而其規法節目 在喪威日錄 可考而法 也 此不詳著 又謂東方之學 莫盛於退溪李子 以其常時效法之小者言之 匙箸之無聲 盥洗之無滴 書札之自名是也 而其大則 採遺集及語錄所記言行 依近思錄次第 以爲李子粹言 又編論禮之說 以爲禮說類編 以寓尊慕而體行之 雖處畎畝之中 以爲 이익 생애와 행적 35

30 天下事 非甲爲則乙爲 嘗默究弊原 咸思救策 有藿憂錄僿說等諸編 而僿說者餘力所及 時著爲說 及其成袠 列其條例 授門 人安鼎福使之整釐 上自天地下至萬物 遠自邃古近至昭代 內自中華外至夷狄 無所不該 無所不論 蓋自有漫錄以來無此比也 安鼎福之撰東史也 如范太史之修唐鑑 一遵伊川之說 以馬韓爲正統 其佗如表章馬韓周勤麗朝趙位寵之類是也 論及樂學軌 範 亦有著述 至於東邦俚談之類切實人情者 亦皆採而解說其旨 名曰百諺解 蓋亦出於聽濯纓之遺意 餘事文章 贍而不繁 要 而不簡 遠近士人之託以不朽者 亦隨應不拒 至許眉叟 洪南坡 丁愚潭諸君子則有不待其子孫之請 而或修其年譜 或撰碣文 遺事之類 蓋出於慕賢之意也 此先生講學撰述之大槩也 如其義安則不規規於人己 理得則不切切於毁譽 勇往直前 不顧傍人 是非 多發古人言外之意 灑落通透 冰解凍釋 是則自吾東有學以來 雖謂之一人可也 此非小子阿好之言也 所論著具在 要在 善讀者可以知之矣 然東人之貴耳賤目 自黨論以來尤甚 若非讀先生論孟二序而得朱夫子集註之本心 豈能知我先生勤苦著述 之意哉 先生嘗有言曰無人啓發 終於昧而已 則其言不過如病心狂惑 譫語鄭聲 向壁獨說 而無人聽知也 可笑可哀也已 蓋亦 慮及於斯而有此歎也 然昔朱夫子與南軒書曰大抵平日說得習熟 乍聞此說 自是信不及 但虛心而微翫之 久當釋然耳 若稍作 意主張求索 便爲舊說所蔽矣 此訓亦修集註之意 若以吾先生二序所謂晦菴之心爲心 則當知我先生之得斯心而有功於斯道大 矣 後世之子雲 便朝暮遇也 莫非命也 吾何計焉 若夫先生之學則博而贍 簡而核 其處己也寬栗而樂易 其處家也嚴正而儉節 其接人也整齊而溫和 其與宗族也和厚而敦睦 其處鄕黨也無貴賤 不威而善敎 其敎人也平易易知 勿論賢愚 皆獲其益 譬如 羣飮於河 各充其量 才周萬物 識達古今 至於六經之奧義 百家之異說 硏竆搜抉 判然胷中 亦於當世之務 無所不周 如有用 我者則擧而措之矣 然抹摋世路 不得一試 而齎志以沒 雖若可恨 而天餉八耋之壽 著書明道 有繼往開來之功 則是天於先生 存厚養得多矣 於先生有何加損 先生從子秉休狀先生之行曰 先生以上智之資 兼至誠之學 凡於性分之所固有 無一理之不究 職分之所當然 無一事之不備 行可以通神明而其原出於戒懼愼獨 道可以貫天人而其基始於銖絫寸積 若語其範圍之大則地負 海涵 語其分數之密則蠶絲牛毛 語其踐履之嚴則規圓矩方 語其資性之美則玉色金聲 其心則學朱而期孔 盛矣至矣 門人愼後 聃嘗有言曰退翁以德造 先生以智造 皆可謂善形容矣 嘗聞語曰學不厭而敎不倦 發憤忘食 樂而忘憂 不知老之將至 吾先生 之於斯言也 亦可以庶幾也云爾乎 因竊念昔年先生嘗與小子論辨 有不合者 先生憮然不悅曰昔眉翁有自序 吾亦有意 蓋爲後 人不能故也 是後先生精力已不能及此 可惜也已 今景協之狀先生言行 精粗細大 悉備無蘊 不宜更架疊 而昔伊川之狀明道 畢盡其意 而猶取朱范四人之敍述 勉齋之狀晦翁 又有果齋之述 退翁之門 月川 鶴峯 文峯諸公各有所志 蓋盛德至行 以一 人之錄 恐有所漏而然也 是故愚於景協之狀 八九引用其語 而敢論述如右 同門之友各隨所自得而有所論著 俾先生一言一行 無所遺失 是所望焉 스승 사후 문인 윤동규尹東奎가 지은 가장家狀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호 선생은 얼굴이 방정하고 모습이 헌걸차며 보는 눈매가 형형하여 영기가 다른 사람을 엄습하는 듯하다. 온화하고 순수하며 화락한 안색에 머금은 미소는 봄바람처럼 친근하고 곧고 엄정한 말씨는 엄격하면서도 맑다. (중략) 그 안색은 장중 하고 그 말은 굳세며, 그 용모는 편안하며 공손하고, 앉은 모습은 단정하고 곧으며, 세수를 할 때는 한 방울의 물 흔적도 없 으며, 음식을 들 때 수저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한 밤중에 침실에 들며 반드시 새벽에 자리에서 얼어난다.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후 가묘에 나아가 배알한 후 몰러나 서실에 앉아 궤안을 정리한 후 책을 읽으니, 맑고 탁하고 높고 낮은 소리 속에 운율이 흐른다. 그 기거동작에 드러남이 이와 같다. 또한 그에 따르면 신후담愼後聃이 일찍이 성호에 대해 퇴계退溪는 덕으로 써 조예가 깊고, 성호 선생은 지혜로써 조예가 깊다 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잘 표현했다고 평가하였다. 그 뒤를 이어 이익의 학문을 좋아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논어 에서 배우는 데 싫어하지 않고 그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으며 분발하여 먹 는 것도 잊고 즐거워 걱정을 잊으며 늙음이 장차 이른 것도 알지 못한다 는 말이 바로 성호 선생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이익은 평생 독실한 자세로 학문에 전심하여 독서하고 사색하며 한 글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의심이 사라질 때 가지 천착하여 희미한 곳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몰두하면서도 피로한 빛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을 정도였으며, 경사자집經史子 集의 해박한 지식과 현실적인 실효가 있는 시무경학을 해야 한다고 하여 문명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아주 정성스러 운 마음으로 서적을 보고, 책은 사람의 뜻과 지혜를 더하게 해주는 엄한 스승으로 여겼다. 3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31 2세(1682, 숙종8) * 6월 아버지 하진夏鎭 별세 * 선영先塋이 있는 경기도 안산安山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옴 (2) 星湖先生全集 권67, 行狀, 先考司憲府大司憲府君行狀 公諱夏鎭字夏卿 其先驪州人也 考持平公諱志安 祖貳相公諱尙毅 曾祖僉正公諱友仁 高祖應敎公諱士弼 外祖宗班寧堤君諱 錫齡 公以崇禎元年 我仁祖憲文大王六年戊辰春二月十日午時 生于京第 天賦英偉 器宇明亮 自齠齔已有鉅人之度 學業日 進 性至孝 作止惟父母命 未嘗受呵責 凡非六藝之科者 並不屑爲 家庭唯諾之暇 只以讀書習字爲務 公仲父聽蟬堂以筆法譁 世 見公字畫歎曰 此兒必將以筆鳴 甲午陞上庠 乙未丁內艱 丁酉持平公又捐世 數年之間 繼失怙恃 旣服闋而感念風樹 無 意榮進 惟日講劘經旨 旁通百氏之書 公從兄太湖公名德尊一世 平生靳許可 獨於公裒然稱賞 事無大小 必咨訪焉 有一達官 豔公名 思欲出其門 要見甚力 人或勸一屈爲吹噓階 公正色曰貴賤有命 不可以人力圖 假曰有此 一作人私人 其於爲人賢不 肖何如也 顯廟三年壬寅冬 筮仕爲內侍敎官 職掌訓迪 中官隨問開導 諷誨兼至 諸中官相謂曰安得錄此戒語 爲終身服行之 方 至癸卯魁重陽科 宰臣有不說者 欲乘機阻搪 俾不得出身 天意已定 終無柰何 越三年丙午春 直赴殿試 占二甲 遂以假注 書入侍 進退中節 趙相師錫時在近列 出語曰李某出入禁闥 如舊經行 無新進態 吾未曾見也 夏五月例陞司甕院直長 六月陞 成均館典籍 丁未春三月遷司憲府監察 俄復歷典籍 遷禮曹佐郞 夏四月復遷典籍 冬十月遷兵曹佐郞 戊申秋八月拜司憲府持 平 冬十一月還拜爲兵曹郞 時上幸湯泉 鄭相致和以扈衛大將留都 出入闕中 傔從過制 公以法裁抑 鄭送人致詰 公曰大駕遠 出 國中空虛 郞官但知謹守法 鄭謝曰得體矣 俄遷持平 爲臺官金澄所誣遞職 公憫俗避讒 退居于廣州之梅山 作居不易兮辭 以見志 旣而差籌司郞 至辛亥春三月 敍爲兵曹佐郞 夏四月陞正郞兼管賑廳 監糴于外倉 官長以斗斛之餘 謂之賸米 計日責 納 公曰量旣準矣 又從而索羨 乖法罔民 決不敢從 官長蹙頞曰李郞言是是 李郞時勿強也 時歲大無 餓殍在路 公躳自廵審 所全活甚夥 復遷持平 乃疏辨澄誣狀 俄入諫院爲正言 太學爲直講爲司藝 春坊爲司書 壬子春正月受判三道海運之命 周諮 弊瘼 一切革除 旣還朝 沿海之民立石以頌 秋七月拜掌令 九月奉命按驗黃海道灾傷田政 悉以不便民者上聞 變而通之 西氓 多賴也 時澄坐贓竄在平山 公適過郡 以同朝舊好 邀見款接 澄慙赧感激 士大夫聞之者亦多公德量 癸丑夏四月 復入春坊爲 弼善 當今上在貳極 公動引經史 啓迪弘多 上每有疑義 輒付標下曰問于李弼善 其見敬重如此 俄遷文學輔德 甲寅春正月復 歷掌令 轉入弘文館拜副修撰 俄遷弼善 二月遷修撰掌令修撰 四月遷獻納修撰 五月遷校理獻納 六月遷校理 七月遷司諫執 義 八月遷司成修撰 九月遷執義副校理 十月遷副應敎應敎 十一月遷修撰 一歲中凡二十遷 是年八月顯廟禮陟 左議政金壽 恒倡垂簾之議 與諸大臣同坐政事堂 召玉堂諸員問可否 時聖嗣冲年 戚畹強大 權奸林立覬覦 炙手可熱 公乃抗言曰嗣君春 秋已長 聖明日進 公輩以顧命大臣 自可左右輔翼 大妃亦宜從中周旋 何至垂簾爲哉 未知誰執此論 而獨不見撤簾之難乎 在 今孰爲韓魏公 人皆縮頸 而公不少沮 議遂寢 完陵君崔後亮時爲庶官 造門亟賀曰不意今日復見遺直 朝廷爲有人 我國祚靈 長 終必賴之 眉叟許相穆聞之歎曰君子樹立 當於危疑之際見之 當上新服之初 卽上疏極言時政得失 其槩曰今殿下方含至慟 衰絰在身 雖不能出御經筵 而常常召對 商確古今治亂 以廣聖德 以袪壅蔽 則其與日對便殿 徒聞唯唯之言者 不啻萬萬矣 且臣曾忝玉堂 竊有所聞 蓋於不開筵之日 有書進古事之規 或經或史 凡嘉言善行之關於治亂者 抄寫數三條 以備睿覽 此則 唐臣鄭覃之遺事也 近年中廢 誠可歉歎 亦宜更命儒臣 復修古事 以爲補闕之一助 又曰節儉必須先自近始 節損御供 不能不 有望於聖明 山陵諸具 其不載典禮 不無量宜善裁之道矣 近來王子駙馬之家 各有屯田稅水 其數不貲 國家如欲富之則自有 寵賚之典 何可任其自取 人心之固結 在於守宰之愼擇 薦主連坐之法 初非不嚴 而奸贓狼藉 竟無一人之幷罪 朝廷之令甲有 定 而有司直廢而不擧 無惑乎竆民之日困而無固志也 疏上嘉納 命置諸左右 初昭顯世子早卒 孝廟以次嫡承統 及己亥禮陟 宰臣宋時烈引四種之說 以爲大行大王於王大妃爲庶子則體而不正 當服朞 於是眉叟許相等諸臣據禮爭執 以爲大行大王於王 大妃非庶也 實第二長子 當服三年 遂並得罪 顯廟末年 大悟其誤禮亂統 於是抗言諸臣復召 而任事者以罪去矣 今上纘承末 命 釐正邦禮 銳意求治 公亦在彙進之列 自以受知者深 惟思圖報 凡可以裨益國家 知無不言 務持和平 年少乖激之論 一是 調停 及時烈按律之論發 公曰卽毋論是非之如何 彼亦繫言禮 罪豈至死 時論諛於柄相 並與告廟而沮之 公曰宗廟之禮 有事 이익 생애와 행적 37

32 則告 安有正國統而不告者 後議果行 國舅淸風府院君金佑明疏言 宗室福昌君楨兄弟 當顯廟喪 媟於紅袖 朝廷請發問 府院 君一日引對 大妃自內哭而出 䦱戶而立 事出倉卒 大臣以下慌遽失措 罔知攸爲 公進曰古有見其小君之禮 慈聖如有下詢 諸 臣躳承敎旨 於義不背 上曰然 卿等勿退 大妃身出圭聲 以實府院君之言曰發問非宜 羣臣又不能對 公進曰王室至親 有此罔 赦之罪 有三尺之法在 請付有司治之 大妃怒稍霽 上亦知其冤得不死 人皆謂微公言 禍不測云 一日許相欲以明易薦公及一 二名士 公聞之謂曰大臣薦剡 固當審愼 明易之目 尤宜致意 某且不敢自信 况彼年少 能保其後乎 許相頷之 其人尋不能終 益歎公明鑑 嘗休暇沐浴 自外還 以民隱上聞 時領相許積用事 諱言年荒 公言適及 積於上前勃然怒 出詈言以折之 公進曰 臣濫廁帷幄 有懷必陳 是臣職分 今奏未半 大臣從旁狙擊 使不得開口 大臣之權重矣 積惶恐待罪 上慰而兩解之 公退又上 疏 請減逋租 仍陳各衙門屯田之弊不報 由是積銜公日甚 故政府舍人闕窠多年 典翰直提學備員有命而不應 湖堂賜暇將選而 不果 皆以時望在公故也 乙卯二月兼中學敎授 三月遷副應敎 俄又遷修撰 閏五月還拜副應敎 仍陞司導寺正 後數日銓曹擬 公諫院亞長 時承旨亦闕員 適與承旨望單並進 上先除公司諫 而命加擬承旨 卽以公名書入 特除爲同副承旨 舊例三司亞長 曾歷正三品者直擬承旨 公俄已陞正三品故也 公見忤權臣 隨事阻搪 使不得進一步 然自上在春宮時 受知已久 故不欲以中 批除拜 而曲爲之例也 累遷至左副承旨 在銀臺者殆半年 初顯廟之喪 大王大妃當服嫡孫服 吏曹判書尹鐫又引天子諸侯有斬 無齊之說 謂當服斬衰 眉叟許相亦以子無臣母之義 疏辨甚力 尹爭之不已 上難其答 公時以承旨入侍進曰 右相言是也 上曰 試爲予草批 公卽於上前草定以進 尹不復爭 九月入東銓爲參議 先是尹爲人所惎不悅公 及聞公立脚於垂簾之論 始乃歎服稱 賞 及吏曹參議闕員而有極擇之命 尹乃不拘例直擬 公道也 丙辰春遞拜工曹參議 俄遷大司諫 復歷右承旨爲弘文館副提學 還入喉司爲右承旨 復歷大司諫爲禮曹參議 秋入大學爲大司成 復歷右副承旨爲吏曹參議 時有建議築大興山城 公曰築城當 道 猶恐不濟 况僻隅無用之地 徒聚民怨者哉 丁巳春拜副提學 秋拜禮曹參議 俄遷大司諫戶曹參議左承旨 冬有使燕之命 特 陞嘉善階 初奉使朝臣有自燕回 得皇朝十六朝紀者 載本國癸亥靖社事 不啻詿謬汙衊 將擇專對之材 赴訴辨誣 以親王孫福 平君㮒充正使 當以亞卿中有才德文望者爲之副价 特以事有至難 不拘資格 惟其人是擢 上意屬公 問於相臣許積曰李某何如 積嗛之曰李某文學有餘 短于酬應 上曰文學有餘則可 遂膺是揀也 前時文官之賜緋者 例以才望管籌司 積謂公疏於吏事靳不 許 公聞之笑曰某於才諝則不能 且病未堪早起 是知余矣 旣而拜大司諫兼藝文館提學 遷戶曹參判 復歷大司諫戶兵二曹參判 越明年戊午春 拜都承旨 復歷副提學 還拜都承旨 時上適違豫 旣以平復 以侍藥提調命陞嘉義階 方上疾篤 未有儲嗣 兵曹 判書金錫胄衷甲入侍 希圖援立之功 爲許積所覺 錫胄恐爲乞憐狀 積心柔不忍發 錫胄卒無事 然托以陰雨之備 設體府禁衛 兵 積領之以分其兵權 公曰無故樹兵 禍之招也 三月始辭朝赴燕 至平壤聞燕有喪 朝廷召王孫福平君㮒還 假公上卿 銜爲進 香正使 別差副价 追及于道 公旣受命 擇武弁中有名行者爲幕僚 約曰使行自有軍門體 如或犯科 當以律從事 諸幕僚各自飭 無敢違者 旣到燕 衆胥輩或慢侮無禮 公使譯舌謂曰吾雖小國使价 爾職則不過一傳語者 安容如是 不然當申禮部 後憚不敢 復爾 一日禮部左侍郞託事來過 欲令使臣出門迎候 公曰兩國相見 自有其禮 彼且私來幹事 無與於我 無已則當用賓主之禮 侍郞又恚而歸 以外國使事係禮部 故同行皆怕生事 公但曰我所執者正 且任其所爲耳 及將還 例有饋賜銀段 乃擧以買古書 數千卷以歸 八月復命 拜刑曹參判兼藝文館提學五衛都摠府副摠管 時當讞獄 有船人敗米網坐繫 衆謂不嚴懲 後難繼 當論 死 公曰王法眚灾肆赦 旣知其冤 不可爲後弊而因殺之 竟得宥 又有氓追殺奸其妻者 將償命 公曰法有奸人妻者登時殺不論 今氓之殺奸 雖不在奸所見覺 追及在斯須之頃 不可以凡人相殺論 亦得減死 冬歷大司諫拜禮曹參判 俄遷司憲府大司憲 己 未歷兵曹參判 拜大司諫 仍兼同知義禁府事 歷漢城府右尹拜禮曹參判 夏遷大司成 冬還拜禮曹參判 庚申春 歷大司憲漢城 左尹 還拜大司諫 時領相許積柄用 其孼子堅多無狀 附麗者衆 眉叟許相穆爲士林所推重 公實左右之 世有淸論濁論之目 而 當路者日仇嫉之 會眉叟箚論積父子不法事 上怒至於譴訶迫逐 公卽上疏極言朝廷闕失 末乃曰殿下類以疑似斥逐諸臣 而卒 未能明其罪名 至於耆德之臣 亦不安於朝著 佗日國乘載之曰今日五臣以忤旨補外 明日四臣以人言竄逐 有若臣洪宇遠以耆 碩獲罪 有若臣許穆以大老不容云爾 則殿下臨御七年之間 好賢禮士之誠 擧將疑其不實 而人或有掩卷長歎者矣 嗚呼 猛虎 在山 藜藿不採 龍亡大澤 鰍鱔是舞 今忠賢盡去 國爲空虛 則殿下誰與爲治哉 疏上 上震怒特命出補晉州牧使 卽日給馬赴 任 臺臣請還收成命 宰臣某謂曰累日煩瀆未安 朝廷將請對繳還 宜姑休矣 臺啓遂停而宰相終默 蓋誤之也 公旣到任 首以作 士爲務 蠲月廩助養士需 以盡勸誨之方 時以公暇歌詩自遣 已而禍作 公亦罷歸 時錫胄居位用事 以舊憾必欲擠公 先時錫胄 議築江華墩臺 公曰墩臺之內 不過容人數百 勢分力弱 不足以捍外侮 况役非其時 厚招民怨 誠恐國家之憂不在海寇也 不聽 3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33 於是調發民兵 役且鉅 時有李有湞者詣監築將李 投叛書 勸因民怨起兵 縱之去 以書抵錫胄 錫胄又秘之不發 累日而後始告 于領相積 乃鞫 不告死 物色得有湞 有湞旣伏誅 而錫胄獨晏然 錫胄又製進告廟文 不言有湞叛書 辭意從誤禮亂統中萌出 大臣稟旨 召錫胄及公等二三朝臣 命補其闕 諸臣遂相與可否而添入數句 錫胄無崖異 錫胄先囑積 託以史事向江都 議未了 徑出 衆議猶以所改文字爲未瑩 必欲重加添刪 公曰主文者旣在外 文字之未妥 亦不害事 不當輒易 以中其計 必不可不改者 請留俟錫胄 積不從 公知其爲所賣而亦無柰何 至是錫胄之黨以擅改告文爲罪請竄 上素燭其實 久不從 錫胄乃以佗事中之 請從臺啓 上方倚任錫胄 遂允之 謫雲山郡 蓋錫胄每與公同考試 錫胄爲其客師命有秘私 屢欲擢之魁 輒爲公所覺 錫胄色赧 然 銜公日甚 遇諸朝 必以白眼 其射影之毒 未嘗一日忘于心也 至是乘機逞忿 亦太甚矣 越明年壬戌夏 遂刪節朱文公家禮 示諸子曰 此吾受于家庭者 汝等謹守之 及疾革 猶眷眷於君臣之際 無一言及家事 考終于寓舍 是年六月十四日也 享年五十 有五 秋返葬于高陽郡惠陰嶺下 己巳移窆楊州 壬申又移窆原州白雲山分池洞午坐之原 先時沈判事梓白其冤 又有臺臣某亦 言公之守正不撓 爲當時權臣許積所拘持 乃有職牒還給之命 爲相臣金壽恒所沮 後壽恒等以罪死 沈又言于上 上命復官如初 遣有司齎文賜祭以寵異之 嗚呼 死生之間 君臣之義 至此無復餘憾矣 公生有異表 額上有文曰文 目烱烱夜能辨細字 氣魄充 完 嘗視族人之病鬼祟者 鬼輒避 記性絶人 然亦不恃才而自怠 對卷必以熟深沛然爲度 故至于衰晩 猶背誦甚多 爲詩不屑爲 組織之工 下筆源源 頃刻累數篇 或問詩 應曰詩以欲解未解間爲高 蓋爲言語可造而眞賞難諭也 筆法亦絶世 人始信聽蟬堂 之爲有眼矣 性剛方嫉惡若浼 又恐傷容人之量 墜先世忠厚之德 張而或弛 故爲詼謔驩如也 然至是非之分則卓然有不可犯者 故人皆樂與之偕也 素尙儉約 身至貴顯而家無長物 穀祿之入 必分諸鄰族貧者 平居常坦蕩自怡 每曰萬事分定 吾以眉頭不 挂愁色爲心 又每持盛滿之戒 公子潛弱冠有聲譽中解額 公曰少年登科一不幸 命不就會試 人韙之 其立朝也 事上不欺 有可 必獻 引接後進 務恢公道 以植士論扶士氣爲第一義 屹然作儒林領袖 當時人莫不以文衡台鼎期之 卒乃橫罹魚網 飮恨于竆 荒 時乎命也 公自號梅山 又號六寓堂 仍又解曰寓形於天地 寓心於經史 寓趣於壺觴 寓目於卉木 寓興於詩句 寓神於書法 有六寓堂集藏於家 前配贈貞夫人李氏 系出龍仁 前朝駒城府院君諱中仁之十世孫也 祖諱士慶 官大司諫 考諱後山 官開城 留守 外祖豐山金氏諱壽賢 官判書 夫人生於戊辰十月二十六日 沒於丁未六月初十日 享年四十 始葬惠陰嶺下 壬申移祔公 塋 後配貞夫人安東權氏 高麗太師諱幸之後 曾祖諱憘 官都承旨贈右議政 祖諱義中官牧使贈參議 考諱大後 通德郞 外祖順 興安氏諱世老 成均進士 夫人生於丙戌八月十八日 沒於乙未六月二十日 享年七十 亦祔葬公塋 前夫人有三男二女 長女適 判書睦昌明 次男瀣 次女適處士曹夏疇 次男潛 次男潊 徵拜察訪不就 後夫人有二男一女 男沉 次女適士人鄭得柱 次男瀷 側室女適權䪦 睦昌明有一男一女 男重光進士 女適柳采 瀣早沒無子 以從子廣休爲後 潛抗言死國 只有側室四男一女 男甲 休 乙休 咸休 羽休 女適郭宗城 潊有一男一女 男元休進士 女適睦建中 沉有三男一女 男廣休出系 用休進士 秉休 女適洪 日休 鄭得柱早歿 繼後子舜煕進士 瀷一男一女 男孟休進士 女適李克誠 權䪦二男三女皆幼 이익이 작성한 부친 행장行狀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하진李夏鎭( )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하경夏卿, 호는 매산梅山 또는 육우당六寓堂이다. 지평 지안志安의 아들이 다. 1654년(효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1662년(현종 3)에 내시교관을 지내고, 166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가주서ㆍ사옹원직 장ㆍ전적 등을 지냈다. 그 뒤 지평ㆍ장령ㆍ도승지ㆍ대사헌에 이르렀다. 1680년(숙종 6) 대사헌 재임시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 인 견堅의 불법을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관직에서 쫓겨나자 허목을 두둔하다가 숙종의 진노를 사서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뒤 관직을 그만두었다. 김석주金錫胄와 매사에 뜻이 맞지 않아 운산에 유배되고, 다음해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시에 뛰 어난 재능이 있어 붓을 들면 몇 편의 시를 지었고, 또한 명필이었다. 1685년 복관되었다. (3) 星湖先生全集 권1, 詩, 華浦雜詠(九首) (一) 老翁打糓嫗舂糧 鷄啄遺秔狗舐糠 時有邨人來問訊 談農說圃到斜陽 (二) 籬落蕭條白日明 午鷄咿喔樹顚鳴 主人警欬囱前到 看進肴盤與酒觥 이익 생애와 행적 39

34 (三) 世人總說白鷗閒 惟白鷗閒在靜觀 誰遣鳴飛不離水 㗳焉終日坐忘還 (四) 浦口遙看雪旆翻 一羣鳧鴈盡驚喧 居民指道潮頭至 無限千兵萬馬奔 (五) 潮去留痕汐又回 乾坤一轂與同催 要看盈極還虧際 坐待東天月上來 (六) 邨屋纔容一膝寬 初來惟覺起居難 閉門自有閒心境 何處投軀不易安 (七) 無源潢潦號龍華 新汲盆中雜土沙 久久自能安習性 作羹炊飯味還奢 (八) 災莫如風歲色荒 郊原一夜徧蟲蝗 請看滯穗兼遺秉 無實容長棄不妨 (九) 新凉入室稍親燈 旅宿經旬課讀增 可喜窮邨無客問 門前時見乞糧僧 화포잡영 - 이익이 살고 있던 화포지역을 배경으로 지안 화포잡영 이란 시이다. (화포華浦는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 사동 성포동 일대로, 당시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다.) (1) 노옹은 도리깨질을 하고 노파는 양식을 찧고 닭은 남은 벼를 쪼고 개는 쌀겨를 핥아 먹는다. 때때로 마을 사람이 안부를 물으러 와서는 논농사 밭농사 얘기로 석양이 질 때에 이른다. (2) 울타리는 쓸쓸하고 흰 해는 밝은데 대낮에 나무 위에서 꼬끼오 닭 울음소리. 주인이 헛기침을 하며 창 앞에 와서는 술과 안주 갖춘 소반을 올리는구나. (3) 세상 사람들은 모두 백구가 한가롭다지만 백구의 한가함은 고요히 보는 데 있어라. 누가 백구를 울고 날며 물 못 떠나게 했는가. 멍하니 종일 앉아 만사 잊고 돌아갈 줄 모른다. (4) 포구 저 멀리 흰 깃발이 펄럭이는가 했더니 한 무리 기러기가 모두 놀라 나는구나. 주민들이 가리키며 조수가 온다고 말 하니 한없는 천군만마가 휘몰아 달려오는 듯해라. (5) 썰물 가면서 흔적 남겼다가 또 돌아오나니 건곤은 한 수레바퀴라 함께 재촉해 움직인다. 가득 차면 도로 기우는 것을 보 고자 하여 앉아서 동쪽 하늘에 달뜨는 것 기다리노라. (6) 시골집은 겨우 무릎 하나 들어갈 정도 처음 와서는 기거가 불편함만 느꼈었지 문 닫고 칩거하매 절로 마음 한가로우니 어느 곳에 몸을 둔들 편안하지 않으랴. (7) 근원 없는 도랑물 이름이 용화인데, 새로 물을 길은 항아리에 토사가 섞였어라. 오래 지나니 습성이 들어서 절로 편안해 이 물로 국 끓이고 밥 지으니 맛 외려 좋구나. (8) 재앙은 폭풍만 한 게 없어 흉년이 드니 하룻밤에 들판이 해충으로 온통 뒤덮였어라. 보시라 버려진 이삭과 버려진 볏단 을 겉모습만 좋고 결실 없으니 버려도 무방하리. (9) 신량이 방에 드니 등잔을 가까이할 만해 객지에서 열흘 넘게 지내며 서책을 더 읽는데 기쁘구나 외진 마을이라 찾아오는 사람 없고, 문전에 때로 동냥하러 온 중만 보이는 것이. 26세(1706, 숙종32) * 둘째형 잠潛(47세)이 노론老論을 비판하다 장살杖殺 당함 * 과거 포기하고 셋째형 옥동玉洞 서漵와 종형從兄 소은素隱 진津의 문하에서 수학 (4) 星湖先生全集 권1, 詩, 記夢(十首) 幷小序 歲丁亥孟春 余夢見西山 公以一絶 試余佳否 先言首二句 良久乃言下二句 余未及對而悸寤 只記結句十字 足令聽者淚下也 余以二句不可以傳 遂徧押其十字爲絶句云爾 4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35 (一) 若有人在阿 被服何炳烺 山河豈不美 天地豈不廣 (二) 春至朝陽煗 風來夕波興 翛然步西山 松栢被丘陵 (三) 鳥啼音悽惋 樓空影婆娑 春陰易欺日 林雨濕靑莎 (四) 獨鳥橫遠渚 歸鴻拂蒼昊 延佇吾將返 爲君結幽草 (五) 寒日下西陸 餘輝映脩竹 種梅不成實 種蘭時茂綠 (六) 堂中有古琴 絃絶復誰援 時有松風入 泠泠託遊魂 (七) 衆羽苦啾喧 祥鳳爲之惱 願言乘高風 一擧崐岡到 (八) 水流何悤悤 幽咽響出谷 世故固不定 欲辨已忘卻 (九) 靜夜天四垂 衆宿光相搖 夢覺何怳惚 葉聲來蕭蕭 (十) 言之旣云慽 聽之中如銷 明發一掬淚 灑向叢桂條 꿈을 기록하다 - 정해년 맹춘孟春에 내가 꿈속에서 서산西山을 만났는데, 공이 절구 한 수를 읊고 나에게 좋은지 좋 지 않은지를 물었다. 먼저 앞의 두 구句를 말하고 한참 뒤에야 뒤의 두 구를 말했는데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놀라 잠을 깼다. 단지 결구結句 열 자만을 기억할 뿐이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다. 내가 두 구절만 으로는 세상에 전해질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그 열 자를 모두 압운押韻하여 절구를 지었다. (1) 사람이 언덕에 있는 듯한데 입은 옷이 어찌나 환히 밝던지. 산하는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천지는 어찌 드넓지 않으랴. (2) 봄이 오니 아침 햇살 따스하고 바람이 부니 저녁에 물결이 인다. 자유로이 서산을 거니노라니 소나마 잣나무가 구릉을 덮었구나. (3) 새가 우는 소리는 처량한데 누각은 비었고 그림자만 한가롭네. 봄 구름이 쉽게 해를 가리니 숲에 내리는 비가 푸른 잔디 적신다. (4) 외로운 새는 먼 물가 가로지르고 돌아가는 기러기는 하늘 높이 난다. 오래 서성이다 내 이제 돌아가 그대를 위해 그윽한 풀을 엮으리. (5) 차가운 해가 서쪽에서 지니 남은 햇살이 긴 대에 비친다. 매화 심은 건 열매 맺지 못했고 난초 심은 건 한창 무성히 푸 르네. (6) 집 안에 오래된 거문고 있는데 현이 끊어졌으니 누가 다시 연주하랴. 때때로 솔바람이 불어오니 맑은 소리에 떠도는 넋 을 기탁한다. (7) 새들은 몹시 시끄럽게 울어대니 상서로운 봉황이 그 때문에 괴롭네. 원컨대 높은 바람을 타고서 일거에 곤륜산 위에 이 르기를 물 흐름이 어찌나 빠른지. (8) 그윽이 울며 산골짜기 벗어난다. 세상사는 본디 일정하지 않은 법. 분간하려니 이미 말을 잊었노라. (9) 고요한 밤하늘은 사방에 드리웠고 뭇별들의 빛은 서로 흔들리누나. 꿈에서 깨니 얼마나 황홀한지 잎새 소리 소슬하게 들 려오누나. (10) 말하면 이미 슬퍼지고 들으면 마음이 녹는 듯. 명발의 한 움큼 눈물을 계수나무 숲에다 뿌린다. 27세(1707, 숙종33) *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삼각산 백운대에 산행함 * 그 뒤 1720~21년 삼각산에 올라 여러 편의 시를 쓰고 호연지기를 기름 이익 생애와 행적 41

36 (5) 星湖先生全集 권53, 記, 遊三角山記 按國誌三角一名負兒 負兒之山 爲漢都宗 蓋自道峯走而南 至白雲峯而始特 白雲之南有萬景 東有仁壽 皆高與白雲齊 而仁 壽尤削立矗矗 人不得緣 望之最秀絶 實與右二者並峙而得三角之號者也 西落露積峯 峯之下爲中興洞 中興寺在焉 東爲鷲 峯 轉南迤爲嶺 嶺曰釋迦 自嶺以東曰漕溪 漕溪寺在焉 寺有瀑 嶺之西歧爲羅漢諸峯 與露積右麓 結襘於中興洞口 此古北 漢城之址也 嶺之直南爲普賢諸峯 駸駸而列仁王山 此國朝萬世鞏基 今不敢盡記 普賢之西爲文殊菴 菴之水由蕩春臺入于漢 此其大槩也 余於丁亥仲春 將往遊 願從者一人 遂與之偕 庚子發于家 辛丑由東小門緩步而入漕溪洞 有入山詩一律 登步虛 閣 觀十一級瀑 又有觀瀑詩一律 轉入漕溪寺寄宿 有次澄上人詩軸詩一律 遲明逾釋迦嶺 望三角諸峯 入中興寺始朝飯 遇從 祖孫宗煥與之語 仍欲登白雲峯 冰雪尙未釋 路塞不可上 有望白雲臺詩一絶 循內城遺基 觀石門轉入文殊菴 有文殊菴詩一 絶 登菴之右巒眺西海 仍午餐于菴中 又陟普賢峯 俯王城 有普賢峯詩一律 亭午遵蕩春臺而下 有出山詩一律 遂由國之北門 而還 삼각산을 유람하고 남긴 감회 - 둘째형 잠潛이 죽은 다음해인 1707년 서울로 올라가서 삼각산 백운대에 오르기도 하며 울적한 심사를 달랬다. 그리고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를 바로 보며 자세히 경관을 설명하였다. 부아산은 서울의 종산宗山으로서, 대개 도봉산으로부터 (그 맥이) 남쪽으로 달려와서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 비로소 우뚝 솟았다. 백운봉 남쪽에는 만경봉萬景峯이 있고, 동쪽에는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모두 그 높이가 백운봉과 비슷하다. 그 중 인 수봉이 더욱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아 있어서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하며, 바라다보면 가장 빼어난 절경이다. 실로 다른 두 산 봉우리와 나란히 대치하고 있어서 삼각三角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노적봉露積峯이며, 노적봉 아래가 중흥동中興洞이다. 중흥동에는 중흥사中興寺가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취봉鷲峯이며, 그 줄기가 남쪽으로 돌아서 가다가 고개를 이루는데, 이 고개가 곧 석가령釋迦領이다. 이 석가령 동쪽을 조계漕溪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조계사曹溪寺가 있다. 절 경내에 폭포가 있다. 석가령의 서쪽 줄기는 나한봉羅漢 峯의 여러 산봉우리이고, 이 산봉우리들이 노적봉의 오른쪽 산록과 더불어 중흥동의 골짜기 입구에서 띠가 매이고 옷깃이 합 쳐지듯 서로 만난다. 이곳이 바로 옛 북한산성의 터이다. 석가령에서 곧장 남쪽은 보현봉普賢峯의 여러 산봉우리가 되고, 그 맥이 점점이 뻗어 나가며 열지어 인왕산仁王山이 되니, 이 일대가 바로 우리나라 조종의 만세토록 공고한 터전이다. 지금 감 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보현봉의 서쪽 줄기는 문수암文殊菴 산봉이 되고, 문수암의 물은 탕춘대蕩春臺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니 이것이 그 대강이다. 나는 정해년(丁亥年; 1707) 중춘仲春에 북한산을 유람하러 가고자 하였는데, 따라가기를 원하는 한 사람 있어 마침내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 17일 경자일庚子日에 집에서 출발하여 18일 신축일辛丑日에 동소문東小門을 경유하여 느린 걸음으로 조계동 曹溪洞에 들어갔다. 입산入山에 대한 율시律詩 한 수를 지었다. 보허각步虛閣에 올라가 11층 폭포를 구경하고 또 관폭觀瀑에 대 한 율시를 한 수 지었다. 길을 바꾸어 조계사曹溪寺에 들어가 기숙하였는데, 징澄이란 승려의 시축詩軸에 있는 시에 차운次韻 하여 율시를 한 수 지었다. 새벽 여명이 밝을 무렵에 석가령을 넘어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를 조망하여 본 후, 중흥사에 들어가 비로소 아침밥을 먹 었다. 우연히 종조손從祖孫 종환宗煥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 백운봉에 올라가려고 하였는데 아직 얼음이 녹지 않 아 길이 막혀 올라가 보지 못했다. 백운대를 바라보면서 절구시를 한 수 지었다. 내성內城의 남은 터를 따라가며 석문石門을 구경하고, 길을 바꾸어 문수암에 들어갔다. 여기서 문수암에 대한 절구시를 한 수 지었다. 문수암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올라 가 서해西海를 조망하여 바라보고, 이어 문수암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보현봉에 올라가 왕성王城을 굽어본 후 보현봉에 대한 율시를 한 수 지었다. 정오에 탕춘대를 따라 내려와 출산出山에 대한 율시를 한 수 지었다. 마침내 국도國都의 북문北門을 경 유하여 돌아왔다. 4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37 29세(1709, 숙종35) * 가을 영남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나 10월 그믐 순흥부에 도착 * 문성공 안향 선생을 모신 백운동 서원을 방문하고, 도산서원에 이름 (6) 星湖先生全集 권53, 記, 謁陶山書院記 余自淸凉轉訪陶山 申澤卿實與同之 半日行過溫溪 路左遙指書院 問于人則曰老先生先大夫贊成公 與從父承旨兄觀察三人 俎豆處也 嶺之人尊奉先生之極 其於所生所師 亦皆推而向慕之如此 况先生遺塵播馥之地 人之瞻仰而起敬之 當如何也 復 由小嶺先過愛日堂 乃李聾巖所居 極縹緲妙絶也 旋馬左趨 始抵陶山 陶山者先生別業 而所常起居地也 距溪上五里許 溪上 者先生本第所在 是所謂退溪也 在直東上流 碍一麓 不與陶通望 先生常由山後策杖還往云 蓋山與水逶迤盤回 而臨溪開一 洞壑 山爲靈芝之支 而水發源於黃池者也 又山之從淸凉來者 沿流而西 與靈芝一幹 襟合於下流 左右拱揖 卽所謂東西兩翠 屛此也 洞小而腹乍寬 可容閭 其曰宅曠而勢絶 占地位不偏者 據本記可驗 先生手刱陶山書堂尙在此 後人因建書院于堂之 後 以尊奉之也 余等下馬 端恭入外門 西有童蒙齋 與書堂對敞 童蒙者蒙儒習學之所云 復入進德門 亦有左右齋 東博約而 西弘毅也 跨中面南開講堂 扁曰典敎堂 堂之西室曰閑存齋 閑存者院中必有長任 以率諸生 而常處于此 而博約弘毅卽諸生 之所止云 余等入弘毅齋 遇居齋士人琴生命耈 略聞院中規模與地名人風之槩 仍呼院奴 開祠宇外正門 悉問拜跪節次而後敢 入 高揭尙德祠三字額也 又開南牖 余等肅謁庭下 趨而由西階 鞠躳序立於閾外 欲觀祠中制度 只左有月川趙公配食位而已 復通西牆開小門 牆外爲屋二所 一謂酒庫 一謂藏祭器處云 余等遂趨而出 至弘毅齋 齋後復有室 人指謂有司房 少焉與琴生 俱至 所謂書堂 是果先生親所作 而一木一石 人不敢移易 故短牆幽扉 細渠方塘 依然樸素遺制 而無不羹牆焉如見也 始也 肅然 若將聞謦欬之音 終也憬然扳撫而知敬 百載歸來 人於遺躅餘芬 尙有觀感而興起 况當時親炙之者乎 屋蓋三間 東軒而 西竈 中爲室 室曰翫樂齋 軒曰巖栖 合以命之曰陶山書堂 軒之東又附起一小間 與軒通爲廳 而析木作板 如今人臥牀樣 琴 生言先生當時未及有此 寒岡承遺意追成也 塘曰淨友 引微泉以注 門曰幽貞 編柴爲之 蓋象平時制也 自庭以左至山足 松檜 成藪 株皆合抱 問則曰先生手培者也 先生歿已百四十年之久 而物獨蔽芾然猶存則人之封植嘉樹 比于甘棠者不亦宜乎 及觀 于室中 西北二壁 皆有藏 藏各二層 皆貯遺器 卽璣衡具一 案檠投壺各一 花盆臺唾器各一 硯匣一 人言硯爲人所偸而今不 存 夫硯一片石耳 在此則爲無價 在人則只與佗石等 彼偸者抑何心耶 吁惜也 復有靑藜一枚杖 爲匣以藏之 無少傷缺 品亦 稀有 一寸數節如鶴膝 叩之堅鏗作聲可寶也 東爲門揭之 可與軒通 南開小囪 囪內衡架 架上有枕席等物也 琴生云此室以先 生手澤之存 陋弊而不敢修改 先生箚記筆迹井井在壁間 近有一院長某 以改繕遺宅 白于方伯 方伯亦不敢靳其需 於是得紙 厚 盡塗而剗新之 今無一字留者 於是士林集議 削院長名於籍中 至今爲譏笑嗟惋也 吁先生之一言一動 無不爲後之範則 而 慕之如祥雲瑞日 仰之如泰山北斗 今居處器用 猶有不泯者存 則人孰不愛翫而奇寶之哉 故雖微瑣細眇 莫不心識而謹書 此 除是慕古之癡癖 觀者恕之 復至于弘毅 遂與琴生共寢 院奴復進尋院錄 余等列書姓名及字鄕貫日月 亦例也 詰朝將發 步上 東麓百許步 至天淵臺 與西麓天雲臺者並峙 水洋洋流而過前 平開眼界 可通望遠邇 石面鐫刻天淵臺三字 亦月川以遺意成 者也 復從天雲臺而下 夕向榮川郡 觀龜鶴亭而返 도산서원을 배알하고 남긴 감회 - 29세인 1709년 10월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다. 성호는 이황 선생에 대한 공경심을 표시하고나서 서원과 주위 경관을 둘러보았다. 도산서원에 도착한 성호는 동몽재童蒙齋를 살펴보고, 다시 진덕문進德門을 통해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둘러보았다. 그리 고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에 오른 뒤 사우祠宇를 찾아서 퇴계선생을 위패를 배알하였다. 이어서 서원의 규모를 평가하면서 탐방 을 바치고 있다. 이익 생애와 행적 43

38 (7) 星湖先生全集 권53, 記, 訪白雲洞記 歲己丑十月晦 余至順興府 訪白雲洞 安文成書院在焉 余於文成爲外裔孫 而况其興作士氣 丕變民風 東之人至今日餘澤尙 有未泯也耶 今遺基在此 祠屋在此 則寧不感慕而肅敬 祠距府門五里許 沿竹溪而東北 行至洞中 臨水得小亭 卽所謂景濂也 有楷草兩扁額 楷是退溪老先生墨迹 而草乃黃孤山筆也 亭下隔水有巖 因築土爲壇 是老先生所命翠寒臺也 列植松盈抱者 皆先生手培 石面有刻白雲洞三字 亦先生筆 下復刻一敬字 卽周愼齋筆云 因步入院中 至齋室少憇 將趨謁祠庭 院奴以墨巾 緇衣授余使著 仍引入外門 設席階下 然後開前戶 導余立席中 恭揖平身 因小退盥手 由正門入上香 從夾門趨出 拜謁於庭 而退 其院規然也 其主壁南面正位 文成安公是也 左二位有安文貞軸周愼齋世鵬 右一位有安文敬輔 二安乃文成之姪孫云 院奴又引到講堂 開夾室奉畫像三軸挂諸壁 使余四拜庭下 旣參謁後升至堂瞻仰 其一 卽先聖之眞 而羣賢侍立 其兩障子又 文成愼齋遺像也 文成本傳曰公以貲付博士送中原 畫先聖及七十子遺像以來云云 今見在先聖眞 當是其遺也 其中從享廟庭 者 如漢晉間諸儒皆不得與 而只唐之文公與宋之羣哲元之許吳 別爲班參列焉 與今祀典不同 意者文成元時人 或元之國制然 歟 升顓孫師於十哲者 始見於明紀 而此圖亦置子張於十人之中者何也 或余陋見之未及歟 是未可知 復至齋中 記名於尋院 錄中 因索院規一冊來 乃孤山筆 復有老先生遺墨一帖 卽因院中事與方伯沈通源書也 其槩曰白雲洞書院者 前郡守周矦世鵬 所創建也 竹溪之水 發源於小白山下 流經於古順興府之中 實先正安文成公故居也 洞府幽邃 雲壑窈窕 掘地得瘞銅 貿經史 子集百千卷以藏之云云 由是觀之 此院之創始於周矦 而修科條立規制則先生之功爲多也 少焉步上光風臺 回過翠寒 歷文成 故址 至四賢井旁有碑 其陰刻有曰安氏碩與子軸 輔 輯 皆生於此云 백운동을 방문하고 남긴 감회 - 29세인 1709년 10월 그믐 순흥부順興府에 도착하여 문성공 안향安珦 선생을 모신 백 운동 서원을 방문하였다. 성호는 서원을 둘러보며 안향 선생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였다. 그믐에 이르러서도 안향 선생의 은택이 아직도 남아 없어지지 않았구나. 지금 유적이 여기에 남아 있고 사당도 여기에 있으니 어찌 감동하여 존경하고 삼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을 둘러보고, 그 곁에 있는 부석도 만져 보았다. 그리고 부석사의 벽에 쓰인 시구에 찬탄을 하기도 하였다. 한 그루 복사꽃 하마 져서 절반이라, 부처님 궁전 앞에 소복이 깔렸구려. 산승은 대빗자루를 손에 들고서, 동녘 바람 등지고 낙화를 쓸고 있네. 이어서 내가 30년 전에 보니 먹 흔 적이 갓 쓴 것 같았으나 다만 자연미가 부족했다. 이는 뒤에 와서 개칠한 듯했으며, 시 역시 좋은데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 었다. 혹 고산의 자작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욈직한 시이다 ( 성호사설星湖僿說 황고산시黃孤山詩 ) 31세(1711, 숙종37) * 윤동규尹東奎(17세)가 문하에 들어옴 (8) 星湖先生全集 권51, 序, 送尹幼章序 蓋有迹同而心異者 私意萬轍 一東一西 而以同爲異者也 有心同而迹異者 事有長短 功有疏密 而以異爲同者也 余之於幼章 是已 余生而粗略 無所檢防 日用事爲 言動服飾 一處以俗套庸鄙 可笑可駭 乃幼章則反之 觀其氣味之際 殆若風馬牛之遠 也 至其相悅則如病嗜土炭 海上之逐臭也 其故何也 異者自異而所存者同也 余新有禮編 寂寞無師 無所講資 俄而幼章又至 繙閱互參 不以爲甚背 意若有可取者存 其於紕謬 摘抉而證論之 余又渙然無所逆也 若是乎同者之不繫於異 而可以相勉而 有進也 夫言而不行 言未必得其眞 行而有得 必將有言 余徒能言者也 見之於影響 筆之於臆強 余又不自信矣 畢竟歸質乎 躳行力踐者 有以去就之 猶庶幾此書之有裨於人士則何其幸歟 幼章有弟二人 其舍迹求心 亦與幼章同其同也 其歸錄此附達 焉 4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39 윤유장을 보내고 남긴 서문 - 이익과 윤동규尹東奎 간에 어떤 사제관계를 형성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윤동규는 성호 문인들 중 가장 연장자로서 평생토록 이익을 곁에서 모셨으며, 스승을 대신하여 문도를 지도했다. 이익은 자신과 윤동규의 관계를 유심동이적이자有心同而迹異者 였다고 표현하였다. 비록 각자가 살아온 자취나 살아가는 방식은 다를 지라도 마음속으로 몸소 행동하여 힘써 실천하는 학문자세를 견지한다면 한 마음 한 뜻이라고 했다. 이에 그는 윤동규와 사 제간이라는 분수에 얽매이지 않고 공통의 학문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호참증논互叅證論하여 서로를 상면相勉할 수 있었다고 말 하였다. 양자는 사제간이라기보다는 동료학자의 입장에서 해당 주제에 대해서 토론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의견교환 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양자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보충 받고 각자의 견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33세(1713, 숙종39) * 맹자질서孟子疾書 초고 시작(1718년 완성) * 아들 맹휴孟休 태어남 (9) 星湖先生全集 권47, 序, 孟子疾書序 疾書者何 思起便書 蓋恐其旋忘也 不熟則忘 忘則思不復起 是以熟之爲貴 疾書其次也 亦所以待乎熟也 余之於七篇 用力 亦久矣 昔始讀此篇 俄而曰不書無以記也 於是隨身有筆牘 凡有見必載 適當執手咳名之慶 以孟錫嘉 用爲志喜 今歲五周矣 頗見兒執卷周旋 往往與余諭義 而余之修潤 如風庭掃葉 隨掃隨有 迄不可以斷手 棘棘其猶未熟也 苟非疾其書 殆幾乎忘之 盡矣 聞之朱夫子曰初學必置冊子 籍記其所得所見 斯豈欺哉 其必自七篇始者何 孔子沒而論語成 曾子述而大學明 子思授 而中庸傳 孟子辯而七篇作 以世則後 以義則詳 後則近 詳則著 故曰求聖人之旨 必自孟子始也 然歷考百氏之書 此篇多不 爲人所尊尙 非之有荀卿 刺之有王充 刪之有馮休 疑之有司馬光 與之辨有蘇軾 至如李泰伯之常語 鄭厚叔之折衷 譏訶詬詈 何可勝言 韓氏余氏之徒矢口扶護 若尸祝之奉宗祏 或尊大體而不及於精 或析微言而不白其實 至朱夫子集註出 而羣言遂定 播之海外 擧同軌而一之 盛矣哉 雖然發揮諸子 林蓁海滾 未必皆中 而永樂胡廣輩起身蔑學 去取無據 使箋釋之意 或未免 湮埋轉譌則疾書之作 胡可已也 嗚呼 朱子尊孟子也 後人尊朱子也 後人之尊朱子 殆有甚於朱子之尊孟子 賢希聖士希賢 其 勢然也 賢者智有能及之 故於孟子氣像未化處 曾不以尊之之篤而諱焉 士者困在下列 故於集註無事乎黑白 玆所謂不自信而 信可信 此雖學者之正法 其或篤信之餘 疑有未釋 露於講貫之際 藏於筆箚之私 求有以至於發蒙 斯亦不得已也 人輒繩之以 訕上 繩之固若有意 峻法刻刑 奚爲於孔子之門 余故曰今之學者 儒家之申商也 於是唯諾之風長 考究之習熄 駸駸然底于無 學 則今之學者之過也 傳曰事師無隱 蓋不禁其有疑難也 處下欲進而便自謂渙然者 非愚則諛 余實恥之 是以如畫井建正之 類 妄爲一說 以補餘意 皆朱子所嘗置疑也 置疑所以開言路 言之不中 罪在言者 於集註又何損 九原可作 吾夫子必將哀其 求進 而不誅其不中也 世傳孟子有逸篇 其載於荀子 則孟子三見齊王而不言 弟子問之 曰我先攻其邪心 載於揚子則孟子曰 夫有意而不至者有矣 未有無意而至者也 荀揚不應誣辭 惜乎其不盡傳也 趙邠卿言外書四篇 不能洪深 今亦不見有此 荀揚 所擧者 其或見於外書 又未可知 今並採附著焉 맹자질서 에 대한 서문 - 맹자 에 대한 이익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기록해 둔 책이다. 이익은 서문에서 공부하는 방법으로 숙독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과 기록해 두었다가 잊은 뒤에 대비하는 두 가지를 들 었으며, 성인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맹자 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권1의 양혜왕편 에서 하이 리오국何以利吾國 에 대해 설명하기를, 군자들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의리를 뒤로 미루고 이익을 앞세 우게 되면 욕망에 치우쳐 의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공자가 이익에 대하여 말을 적게 한 것이지 이익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익이란 천지간에 본래부터 있는 도인데, 비록 사람을 가르치기에 급할 뿐 결연하게 끊어서 당리當理의 도를 폐한 이익 생애와 행적 45

40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였다. (10) 星湖先生全集 권1 詩 兒子孟休九歲 敎之數朞三百註 了了解意 賦此識喜(二首) (一) 奧矣朞三百 推之數萬千 九齡能了解 來者詎徒然 (二) 氣朔無餘欠 前人意或迷 分明六觚術 一一數來齊 아들 맹휴孟休가 9세인데 기삼백朞三百의 주註를 계산하게 했더니 명료히 뜻을 알기에 이 시를 읊어 기쁨을 적는다. (1) 심오하여라 기삼백이여. 추산하면 수가 천만으로 불어나지 아홉 살에 그 뜻을 알다니. 장래에 성취가 크지 않으리오. (2) 기삭은 남고 모자람이 없건만 전인들은 혹 그 뜻을 몰랐어라. 분명한 육고의 방법은 일일이 계산하매 모두 맞구나. 35세(1715, 숙종41) * 어머니 권씨 별세 * 사칠신편四七新編 저술 (11) 星湖先生全集 권49, 序, 四七新編序 人莫不有耳目 而不辨聲色之著 是無耳目者矣 莫不有心 而不察性情之妙 是無心者矣 無耳目則命曰聾瞽 病於形也 無心則 命曰愚 病於天也 形病則害止於不辨外物 天病則無以自立 身隨而亡 人徒知聾瞽之爲患 而不知愚之最可惡者 惑矣 心者何 性之郛郭也 性有動靜 心皆主之 由動有幾 四七之名起焉 故眇忽之間 各有苗脈 充之而太和陽春 放之而焦火凝冰 苟欲禔 身飭行 舍此本何以哉 是以古之務實者 率於此用力 必究至乎源頭處 而無不純如也 玆所謂學 學莫先於治心 治心莫先於致 知 知旣至則行可以措矣 行旣成則英才可育也 後生可詔也 於是六經四子 若濂洛羣哲 若我東儒賢之書 爛爛在人目 使有志 者可得以沿流泝源也 雖然舜有人心道心之訓 學者祖此爲頭腦 各有所指 互明厥義 孟子主言四端 禮運主言七情 好學論述 禮運 仁說述孟子 其言不翅詳盡 其義若可以炳然 而末學淺識 乃復繳繞穿鑿 務立新奇 求明而反晦 欲精而實亂 至使蒙士 有望洋向若之歎 非聖賢籲後之意爲有未瑩 卽使之迷者之過耳 惟知言之君子以言會意 以意體實 分而爲二而不妨於混淪 合 而爲一而無背於條理 故朱子所謂四端理之發七情氣之發二句 爲總會之公案 而參以衆說 無罣礙之患矣 退溪先生始因秋巒 鄭靜而之說 立爲此論 及見朱夫子傳心之訣而尤信的當 爲之話頭 以敎學子 蓋神會心得 不以言而合者也 當時傑士奇高峯 之倫 猶不能言下領意 辨說盈篋 卒能反覆歸正 執經者於是乎無異辭矣 至李栗谷之出 復申此話 長篇大論 累數萬言 謂高 峯初見未始有不是 繼又黨議之起 俗情偏頗 功在斥一 人皆疑貳叫呶 不可得以談矣 予自夙歲 繙閱紬繹 不得要領 輒意倦 而止者非一二 竊嘗謂退溪雖似詳悉 或欠乎直截 則寧舍此從彼 又以有朱夫子之證援 故有所未敢焉 旣而曰義理公天下之物 古人自古人 今人自今人 何必同 乃取孟子禮運等本書 參互究極 忽若有契 體之於心 驗之於事 益見意趣 反求之退溪之書 始鑿鑿可徵 始知如海滾波之談 本非初學破的之訣 而重有信於先生之書不亶辭而已矣 余將以此往質於先覺 懼夫思起旋塞 無以爲考證之地 遂成此編 非敢與有傳後之功 只隨手箚記 如日錄之類 異日或荷天牖 差進一步 不終爲下愚之歸 則又不知 此編之不大駭於吾目中歟 因爲自戒 無或輕出手也 사칠신편 에 대한 서문 - 이익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상략) 육경과 사서 및 염락의 여러 학자들과 우리 동방 유현의 글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찬란하게 남아 있으니 만일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든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순이 인심과 도심의 가르 4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41 침을 두었으나, 학자들이 이것을 원조로 하여 두뇌로 삼음에는 각각 가리키는 바가 있어서 서로 그 뜻을 밝혀주었다. 맹자는 사단을 주로 하여 말하였고, 예기 예운 은 칠정을 주로 말하였다. 정이천의 호학론 은 예운 을 계술하였고, 주자의 인설 은 맹자를 조술하였으니, 그 말이 자세하고 극진할 분만 아니라, 그 뜻도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말단을 배워 학식이 천박한 사람들은 이에 다시 얽매여 천착함으로써 새롭고 기이한 것을 세우기에 힘썼으니, 밝음을 추구하다가 도리어 어두워 지고, 정밀하게 하려다가 사실은 어지럽게 되어, 어린 선비들로 하여금 탄식을 발하게 하였다. 이것은 성현이 후생을 깨우친 뜻이 밝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곧 후생들로 하여금 미혹되도록 한 사람들의 허물이다. 오직 말을 아는 군자만이 말로써 뜻 을 이해하고 뜻으로써 실제를 체험함으로써, 나누어 둘로 삼아도 혼륜함에 방해가 되지 않고, 합쳐서 하나로 삼아도 각각의 조리에 배치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이른바 사단은 리의 발이며 칠정은 기의 발이다 라는 두 구절은 모든 것이 모인 공안으로서, 여러 학 설을 참고해 보아도 거리끼거나 막히는 근심이 없다. 퇴계선생께서는 처음에 추만 정정이의 학설을 계기로 하여 이러한 논리 를 세운 다음 마침내 주자의 언설을 보고서는 그 설이 적확하고 마땅함을 더욱 확신하여, 그것을 화두로 삼아 배우는 이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것은 정신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얻은 것이요, 말을 쓰지 않고도 부합된 것이다. 당시의 걸출한 선비였 던 고봉 기명언의 빼어남으로도 오히려 말로써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가, 변설한 것이 상자에 가득 찰 정도가 되어서야 마침 내 돌이켜 바른 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에 경전을 살피던 사람들이 다른 말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율곡 이숙헌이 나 옴에 이르러 이 화두를 다시 꺼냄에, 긴 글과 편지들이 많아졌다. 율곡은 고봉의 처음 견해가 애초에 옳지 않음이 없었다 고 하였다. 이어서 당론이 얼어남에, 세속 물정의 치우침은 한 사람을 배척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니, 모두 의심하여 흔들리 며 시끄럽게 떠들 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일찍부터 이에 관한 글들을 읽고 풀어 보았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여, 문든 힘들고 싫증이 나 그만두려고 했던 것 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윽하게 생각하기를 퇴계는 비록 상세하고 빠짐이 없는 것 같으나 간혹 직절한 점이 없으니, 차 라리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따를까? 하였는데, 또 주자의 증거와 원호가 있으므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얼마 후 의리는 천하의 공물이다. 옛 사람은 옛사람이고, 오늘날 사람은 오늘날 사람이니, 어찌하여 반드시 같겠는가? 라는 생각 에 맹자와 예기 등을 취하여 서로 참고하여 극처를 연구해 보니 홀연히 합치되는 바가 있었다. 마음에 실행해 보고 일에 경 험해 보니 그 의미를 더욱 알 수 있었다. 이에 돌이켜 퇴계의 글에서 탐구해 보니 비로소 착착 정확하게 징험할 수 있었다. 이에 비로소 바다와 같이 흐르고 물결치는 말들은 본래 초학이 과녁을 공파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님을 알았으며, 선생의 글이 다만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거듭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장차 이것으로 선각에게 가서 질문하고자 하였으나, 생각이 일어 나자마자 곧 막혀서 고증할 바탕이 없게 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편을 이루었는 바, 감히 후세에 전하려는 공을 허여해 둘 수 없었다. 다만 일록과 같은 식으로 손을 따라 차기하였을 뿐이다. 다른 날에 혹 하늘의 깨우침을 얻어 한 걸음 이라도 더 나아가, 마침내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 편이 내 눈에도 크게 놀라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리하여 스스로 경계하노니, 혹 가벼이 손에서 벗어남이 없게 할 것이다. 41세(1723, 숙종47) * 셋째형 옥동 선생 별세 (12) 星湖先生全集 권68, 傳, 三兄玉洞先生家傳 玉洞李先生諱潊字澄之 居抱川之玉洞山下 瀷異母兄 母龍仁李氏 留守後山之女 先生生於壬寅十二月三日 幼失恃 育於後 母權夫人 出爲叔父後 當時先君子出身事顯肅二朝 凡世之極選華貫 無不踐歷 門闌方盛 先生獨不屑博士業 志于聖賢之學 이익 생애와 행적 47

42 手經勤劬 或至於遺食 婦翁鄭參判鑰家饒 每奉以美服 先生不悅 弊縕不恥 居必就幽閒 與同志遊 少有目疾 父母憂之 乃闔 眼經歲不少變 人以爲難 其學忠信爲主 步步趨趨 維周孔程朱 寧守師說而未達 不顧小道之可觀 業著書卷袠溢匧 自心身以 外 至治家治民 汎及於律歷之書 甘石岐黃之術 大小相銜 本末兼該 無不參互著明 歸宿於六經四子 爲安宅正路 性汎愛 見 人之長 忘其短 見人之惡 必傅諸善 或咎其愛過而受欺 亦不悔 惟導誨之不怠 如慈母之哺病兒 苟以是心來 必竭兩端之敎 敎初學必先小學 讀至千遍 方及佗書也 每朝曛靜默撫琴 動操援古叶今 要在適性 其亂洋洋 不知老之將至 居家務去修飾 破囱草坐 人所不堪 而自不能覺 時從山翁野老 燕語移晷 怡怡如也 後有宰相聞其名而薦達 召拜麒麟道察訪而不起 癸卯三 月十二日考終 壽六十二 諸門人集議 私諡弘道先生 余非之不聽 余又謂幼而誄長非禮也 無已則寧依程明道之例 改諡爲號 門人從之 葬於縣治虎炳山 有遺集十一卷 子進士元休 女壻睦建中 이익이 지은 셋째 형 이서李潊의 전傳이다. 이서의 자는 징지澄之, 호는 옥동玉洞 혹은 옥금산인玉琴山人, 사휘私諡를 홍도弘道라고 하였다. 그는 여주이씨 가운데 교위 공파校尉公派의 19세손으로, 부친 이하진의 다섯 아들 가운데, 전배前配 용인 이씨의 딸에게서 때어난 세 아들 중 세 번째로 서울 황화방皇華坊 소정동小貞洞에서 태어났다. 이서는 모친 이 부인이 꿈에 여덟 색 별의 서기를 보고 낳아 소자를 서瑞라고 했다. 이서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늘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이런 효성으로 인해 주변에 널리 알려졌다. 6세 어 머니를 여의고, 20세 부친 이하진이 운산에서 별세하자 중형 이잠과 함께 유배지로 찾아가 수습하고 돌아와서는 포천의 청량 포에 은거하였다. 이후 이서는 독서와 서예, 거문고와 시작詩作으로 한 평생을 보내며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았다. 44세(1724, 경종4) * 3월 신후담愼後聃이 문하에 들어옴 (13) 星湖先生全集 권64, 墓誌銘, 成均進士愼公墓誌銘 幷序 瀷晩而志學 亦凉凉焉無所補益 時有愼進士諱後聃字耳老 肯從遊 獨脫然於衆好之表 日孜孜於辛苦家計 蓋心相悅也 其先 本開封人 始祖修 高麗文宗時隨海舶來泊居昌縣 仍籍焉 官至守司徒左僕射 後閥閱繁昌 至我中廟世 國有靖國之勳 有益昌 君守勤 卽國舅也 專心所事 炳然孤節 遂遇害 事多掩諱云 至仁宗時 命復其爵 今上己未 追復溫陵位號 又以國舅追贈領議 政益昌府院君諡信度 是爲公八世祖 信度之子奉事諱弘弼 自是以家難 數世不仕 至諱得義復仕 官至判官贈參判濟昌君 生 諱熹 官縣令 生諱徽五 以孝贈司憲持平 無子取八世祖襄簡公冢子判尹承福之後龜重爲後 寔公之先考也 登第官至兵曹正郞 正郞公娶羽溪李氏參奉正觀之女 藝文提學瑞雨之孫 有賢行 屢至上聞云 正郞公受業于其庶從祖晩湖先生懋 晩湖者實爲觀 雪許先生之門人 學有淵源 一世高其行 余聞其風而悅之 爲撰晩湖先生傳 以闡幽光也 耳老生晩 不得爲其徒 私淑於家庭而 得其遺緖 母夫人孕公時 夢有黑馬騰海之兆 以壬午春二月八日生公 占夢者云壬屬黑馬屬午 壬午卽其應也 耳老自幼小 已 知讀書 或夜深睡至 取簷冰拭眸以警之 未明必索頮盤 竈婢亦宿火而候之 稍長博觀古書 探歷山水 有詩文大篇 如赤壁歌步 韻南山詩之類 往往爲長者稱歎 旣長留心不朽事 取少日所作盡燒之 包括百家 究其蘊奧 年二十二 中國子上庠 自是遂廢擧 業 專精於聖人之書 尤尙自得 不拘於舊說 必以誠意流通爲準 如理氣四七之辨 深衣古製 別爲一說 證正訛誤 家中喪祭常 行 一一據禮爲法也 公之學 其考究皆有所著 於易有象辭新篇 易通義 繫辭通義 說卦通義 卦蓍圖說 於詩書有集解 於春秋 有總按 於庸學有解有後說 於小學有箚疑 又有家禮說等書 幷雜著詩文 合百餘卷 公孝友天得 父母兩尊人具慶安寧 而祖母 李淑人壽六十 時弟妹六人婚嫁旣畢 公曰孟子謂父母俱存 兄弟無故一樂 有父母致吾之孝 有兄弟致吾之友 天下之樂 孰大 於是 乃以己未仲春丁亥 有事於廟 旣畢遵家禮獻壽之義 兄弟親戚 奉爵于李淑人獻壽 次獻于二尊人 制壽辭三章誦之 名其 宴曰一樂 聞者傳以爲盛事 公追述益昌時故事 事關國家 蓋多諱避 端敬之廢 非中廟志也 三勳跋扈 劫百僚庭請 其言不啻 4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43 兵諫之重 中廟蓋不得已而從之 國東門內 有曬裳巖 至今傳爲舊蹟 後三臣之死 有金淨 朴祥等抗疏 朝廷不能從 反罪之 其 事明載於野乘諸書 公之所裒集昭恩錄可見矣 端敬后之復位 益昌之賜諡 皆由此肇眹 則其功不可謂私室言語 吳學士光運序 其錄 以淸明在躳志氣如神贊之 爲其大義之先倡也 公之居家處事 無不留心愼旃 尹氏妹遘癘甚危 亟赴治療 旣不能得則攜 其幼女四人以歸 待其長而婚嫁 其佗妹壻貧病無依 公致與同居 甘苦與共 時有逆家人歷門庭 家人逐之 然因此遂至逮獄 公 謂家人曰無亂我牀書 時公方居憂 手持布巾布帶而入 應對直陳 上稱其質直 遂送還家 出謂人曰子曰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吾莊誦此訓 今之免也 不罔故也 出獄門 巾帶猶在手不失 辛巳冬病革 閱平生所撰著諸書 然後命藏之曰 吾於經傳 見得到處 不可與不知者道 其百世竢聖人而不惑 亦或有之也 以是年十一月二十四日卒于正寢 壽六十 將屬纊 口號得正而 斃君子曰終數句而已 遺命薄葬 葬于某郡某坐之原 嘗有示兒孫文云河濱老人 自五六歲讀書 至六十病且死 記平生讀書之數 以示幼孫 冀汝之克嗣遺業 余讀中庸最多 萬遍之後 不復計 大學五千餘讀 書易數千讀 詩論孟千讀 小學百讀 禮記左傳五 十讀 三傳半之 外此程朱書及道德南華之類不盡記云 配同福吳氏 生一男一女 男 女適東萊鄭光星 又有側室二男二女 男㒥 次幼 二女長適趙參逵 次幼 公辱與我遊三十餘年 不見一日劬學不勤 每過之 必訪國中鳴世遺傳文字 借帶來歸 或坐席上得 新意 必三回反復 竆究到底然後已也 余私心謂如此爲學 何所不得 銘曰 自師道之廢 士之爲學 惟在讀書 讀過萬遍 地則有 餘 死而後已 君子人歟 이익이 지은 신후담愼後聃의 묘지명墓誌銘이다. 신후담( )의 본관은 거창居昌, 자 이로耳老, 호 하빈河濱 또는 돈와遯窩이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 사가 되었으나 그뒤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1724년 1월에 이익李瀷을 처음 찾아뵙고 그 뒤부터 변함없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처음 이익을 만나본 그는 이익의 실학적인 학풍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 가 뒷날 실학자로 성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익을 만나본 자리에서 서학西學, 곧 천주학에 관한 미지의 학문세 계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곧 서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하여 열심히 연구하였다. 이리하여 이해에 천주교 를 철저히 비판한 서학변西學辨 을 지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 그는 건강이 나빠져 잠시 책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되도 록 삼갔다. 반면 일상생활의 실천윤리에 힘을 쓰는 계기로 삼고 소학 에 관심을 가지게 된 뒤 소학차의小學箚疑 를 저술하 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회복되자 1728년(영조 4)부터 다시 활발한 연구와 저술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이익을 찾아 가거나 편지를 통하여 의심나는 분야를 확인하였고, 새로운 지식도 얻으면서 주로 중용 과 역경 의 연구에 힘썼다. 1734년 에는 그동안 연구해온 주역 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붙인 주역상신편周易象新編 7권을 완성하였고, 1742년에는 중용해中 庸解 를 저술하였다. 그는 중용 을 연구해온 결과 장절章節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벼슬 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와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51세(1731, 영조7) * 가례질서家禮疾書 저술 (14) 星湖先生全集 권49, 序, 家禮疾書序 蓋聞禮者 天理之節文 天有理一而已矣 而三代之不同禮何也 驗之於時月之代序 四時不同氣 故寒而裘暑而葛 不同其養也 理何嘗不同 理有所値 養不得不異 故曰禮者時也 以時爲大 因以撙節 天亦不違 知此意者 可以言禮矣 天下之不治久矣 制 禮無人 國異風家異俗 靡靡乎莫之儀則 故守古者刻舟而求劒也 循今者撫籥而疑日也 朱子有憂之 爲之家禮 而擧天下從之 便是一王之法也 其間雖或有說之未究 時之異宜 聖人不作 誰得以折衷 除十分可變之外 只得依行耳 今有制筳者 兩相比裁 立一爲則 雖百千之多 卒無參差之憂 或立則不定 遞轉較斷 則一傳爲二 二傳爲三 雖離朱之察 秒忽之間 不覺漸遠 是以家 이익 생애와 행적 49

44 禮者 制筳之立則也 則之所在 其不齊者寡矣 何以明之 家有遠祖 定爲禮式 衆子孫莫敢不從 分爲二宗 或不無少損益者 凡 爲二宗之子孫 又莫敢不從 二分爲四 又復如是 損益之中 又加損益 歸考原初 或至風馬牛也 若使損之益之 必上勘原初 豈 有漸訛之失哉 此只以一家近事言 又非所以一同邦俗 傳世悠久也 苟求如此 非朱子家禮不可 凡諸行事 輒相去準 其有不合 不憚速改 庶幾免大過矣 人之恒言曰喪祭從先祖 變動者妄也 此大不然 此句卽滕之父兄 抑守謬誤 以防人子之終喪 當時幸 有聖智 已決公案 今人猶據以爲口實 何哉 比如健訟者兩造見屈 尙占爲己有也 且夫其所引者志也 凡志之見孟子書者二 一 是枉尺直尋也 如謂志不可不從 枉尺直尋 亦將無害乎此 何待辨說而明也 雖然此書實有未盡勘定 非極意繙閱 有未可詳者 從來諸儒蓋草草耳 余於是翫心原委 區別異同 十數年而稍備 遂合爲此書 가례질서 에 대한 서문 - 가례家禮 에 대한 이익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기록해 둔 책이다. 이익李瀷이 가례家禮 에 관한 여러 학설을 종합, 분석하고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새로운 해석을 가한 책이다. 일명 성호가례질서星湖家禮疾書 라고도 한다. 이 책은 권두에 저자 자신이 1731년(영조 7)에 쓴 자서自序가 있는 점으로 보아 그의 생전에 필사筆寫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두의 자서에서는 이 책의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예禮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 하는 것이니 시의時宜에 맞도록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권1의 도설인 가례도家禮圖 에 관한 설명에서는, 그것이 본문과 다른 부분이 많고, 1213년에 반시거潘時擧가 지은 지識가 부록된 것으로 보아 가례 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주희朱熹의 소작이 아닐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통례 의 사당군자장영궁실절祠堂君子將營宮室節 은 사당의 구조에 관해 설명하면서 신분의 귀천에 따라 그 규모가 다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치제전절致祭田節 에서는 사당에 배속할 제전祭田의 면적에 관해, 제사는 생활 정도에 따라 지내야 하므로 농민의 경우 배위당配位當 위토位土의 면적을 자기가 소유한 전토田土의 20분의 1 범위 내에서 정할 것을 말하고 있다. 상례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개 종래의 제설諸說에 대해 비판적ㆍ실증적 태도를 취하였다. 저자가 예를 역 사적인 관점에서 고찰해 현실에 맞는 새로운 모형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의 실학사상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54세(1734, 영조10) * 신후담이 사칠신편 의 성현의 칠정聖賢之七情 문제 제기 (15) 星湖先生全集 권23, 書, 答愼耳老(甲寅) 別吾耳老久矣 不但情思之未休 時對卷棘棘多滯 無所求正 於是益懷博雅之資輔 玆承惠牘 旣以學履增重 爲伏慰 尤有感於 開示許多 有以發此蒙耳 第聞中間有同堂喪威 亦以驚歎 何德門罹慽之此疊耶 瀷素患足寒之疾 尙爾未瘳 旣訪之醫門 例有 命劑 又未免緣貧不辦 柰柰何何 楊縣往復札 世儒常談固如此 此事只合與相知之深 私自講質 苟或不爾 非獨無所裨助 徒 速謗責 不可不審 俄有客來傳 此翁指吾輩相從 謂擯斥先賢 其言亦可懼 或者此類之有以觸發耶 四七之論 鄙稿中已詳言 今曰聖賢之喜怒卽理發何也 喜怒均也 若謂此爲非氣發則七情終非專屬諸氣發耳 七情之說 本出禮運 所謂天下一家中國一 身云云 可以深思而得也 聖人以天下之身爲己之身 故外物之感 便同觸己之形氣 而發此喜怒 其實與己之喜怒無異也 豈可 以此反疑於理發耶 四亦有善惡 七亦有善惡 善惡雖殊 其理氣之發則不可易 更乞商量 繫辭章圖 大槩皆好 姑留此錄 待更 加細玩而有以反覆之也 新編之書 時或把閱 自是精神淺短 不能領會 瀷亦比讀上經 不免有箚記 佗日必將仰質 如有一二可 採 合以成書 庶幾纖末有助 如公書之說話太多處 宜亦刊落就簡 方是無憾耳 上食之說 雜著中已有之 或未之考及耶 古者 奠設於殯宮 饋設於下室 儀禮只著殯宮事 所以爲略也 禮所謂始死餘閣 亦恐不可廢 連奠三盞 恐非禮意 如朔朢俗節 是吉 禮之事 未殯宜廢 况生忌之非禮耶 蓋疾病遷於正寢 則餘閣以下當設於正寢正堂 而如下室之饋 恐當如生時之禮 維朝維夕 寧有一廢耶 此瀷本來所見如此 如三日不食之類 卽生者之事 恐不可推及也 5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45 신이노에게 답하다 -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둘러싼 이익과 신후담의 논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익은 성현의 칠정七情도 보통 사람의 칠정처럼 기발氣發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성현의 칠정 즉 공희노 公喜怒는 기발이 아니고 이발理發이라고 반박하였다. 성현이 기뻐하고 노하는 것은 공변되기 때문에 보통사람의 희노와는 달 라 기발이 아니고 사단과 다름없이 이발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 이익은 기발이 아니라고 한다면 칠정은 끝내 여러 기 발에 전속專屬되지 않는다고 부정하였다. 칠정이 형기形氣를 따라 발동하는 것은 성현이나 보통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 각이었다. 그러나 신후담은 이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741년 이익은 신후담의 이발론 을 수용하여 사칠신편 중발重跋을 저술하였다. 67세(1747, 영조23) * 역경질서易經疾書 저술 (16) 星湖先生全集 권49, 序, 易經疾書序 易之難看久矣 伏羲設卦而象猶未昭 文王周公繫之辭而義猶未察 孔子又加之翼 執卷者尙曰賾賾乎有餘蘊在 何其不可以易 明也 夫羲畫秘矣 文彖周象則簡矣 至孔子之作傳 要後人痛快覰破 然不但彖象之未契 卽並與孔傳而難讀 與前迷猶在 後惑 益繁 此豈憂患後世之功 爲有未到哉 抑歲歷千億 物情隨異 言語迥別 故詳乎古者未必不疑於今也 聖人古人也 所欲傳者心 也 心寓乎書 書付乎人 人之非古 聖人亦無柰何也 及至伊川程子之解 自謂七分有得 得者著之 不得置之 其義固不禁三二 分未透 而因朱先生所駁正亦多 則殆若幽與闡之 幾乎相半歟 本義之言 後出愈精 然箋釋之際 尙或曰此可疑而彼難通也 然 則今人以每下之智思 求有見於先哲之所擔閣者 妄也 亦可哀也 今或字字異訓 句句殊旨 艱難以說得 雖似曲成道理 是則先 斷其義 援文而符之 安知古人之意之所在 必如此而無疑乎 比如重譯輶軒 歸宣中國之方言 通者傳焉 否者已焉 斯可矣 苟 使未透而強說 雖十分當乎 邦人之心 畢竟非中國意旨也 故曰不知爲不知是知也 如本義者 必依文立解 沿其言而發其義 可 竆而竆之 柅則便止 非竆之爲姱 止之爲難 玆爲讀易之正法 余之學也 一遵舊訓 不厭蒙蔽之太多 或有一斑之窺 亦不憚並 錄 其意蓋曰言未必是 亦未必非 則惟待有目者去就之 庶幾厥旨之或發 此又如九逵在前 人迷所向 得則達 失便入阬 而爲 人利害之極則必將益聚人謀 甲乙互辨 雖挈甁洒削之賤 進而該聽 然後方已也 不應斷之謂吾在爾且休矣 彼歧衢而不詢者 不憂千里之謬者也 未知達識 果以爲何如也 역경질서 에 대한 서문 - 주역 에 대한 이익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기록해 둔 책이다. 이익은 먼저 주역 의 성립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였고, 64괘를 역경 의 배치순서에 따라 차례로 설명하였는데, 364 효爻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근거로 삼아 그 괘가 가지고 있는 진의를 파악하도록 한 것이다. 권1ㆍ2는 건乾에서 이離까지 30 괘, 권3ㆍ4는 함咸에서 미제未濟까지 34괘, 권5ㆍ6은 계사繫辭ㆍ설괘說卦ㆍ서괘序卦ㆍ잡괘雜卦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한, 주역 에 대하여 역易이란 삼대三代 때의 통명通名으로, 하夏ㆍ상商의 역은 경전에서 상고할 길이 없어 알 수가 없지만 주례周禮 에 의하면, 태복太卜이 삼역三易을 맡았다고 하는데 삼역이란 연산역連山易 귀장역歸藏易 주역 을 말하는 것이며, 삼역 모두가 8괘와 64효의 설이 있다 고 하였다. 건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하늘[天]은 정체의 이름이요 건은 덕을 표시하는 자字이며, 초상初上은 위치요 구륙九六은 물物 이다. 초상이라 말하고 일륙一六이라 하지 않은 것은 그 본말本末을 표시한 것이며, 먼저 초상을 말하고 뒤에 구륙을 말한 것 은 위는 중하고 물은 경하기 때문이다 라고 선유들이 언급하지 않은 곳을 해명하고 있다. 이익 생애와 행적 51

46 73세(1753, 영조29) * 이자수어李子粹語 저술 (17) 星湖先生全集 권50, 序, 李子粹語序 周衰典禮在魯 聖人歸而述之 統緖有傳 歷千五百有餘年 而紫陽子朱子生 大明先王之道 薄海內外 莫不尊親 是周禮之復行 也 東方乃殷太師肇基之邦 遺風未泯 尙白畫疆 往往足徵 不比坤乾之一端 則一區仁賢之俗 莫非殷之遺民也 歷二千有餘年 而退溪子李子生 步趨六經 以紫陽爲依歸 實因殷之質用周之文 彬彬大成也 今天下貿貿 禮樂掃地 猶我邦保守先王衣冠之 舊 或者天意歟 今幸而生此域中者 豈不欲言退溪言行退溪行 有以扶持一脈斯文哉 瀷生也後 不得爲其徒 徒能讀其書而悅 之 竊自以不克該識其遺訓爲大羞吝 輒採其要而錄之 名以道東編 爾來四十有餘年 未及刊正 吾友安百順鼎福欲更加添刪 一遵紫陽之近思定例 與朋友共之 是吾望也 然瀷精魂剝盡 自無力可以及此 遂託百順與尹幼章東奎反覆商量而共圖之 書成 易其目曰李子粹語云爾 이자수어 에 대한 서문 - 이익이 이황李滉과 그의 문인들의 글 중에서 인격수양에 긴요한 글을 초록하고, 안정복 등이 유문별類門別로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이익이 평소 이황의 문집 및 삼경석의三經釋義 사서석의四書釋義 계몽전의啓蒙傳疑 이학통록理學通 錄 등을 읽다가 인격 수양에 긴요한 구절에 방점을 찍어 표시한 뒤에, 그것을 초록하여 40여 년 동안 늘 가까이 두고 보아 온 것이다. 제자인 안정복安鼎福ㆍ윤동규尹東奎 등과 상의하여 첨산添刪을 가하고 유문별로 편집하였다. 그 뒤 이황의 문인들이 저술한 연보, 이덕홍李德弘이 지은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과 언행총록言行總錄 언행습유言行拾遺 언행실기言行實紀 언행록言行錄 언행통술言行通述 행략行略 등에서도 뽑아 종류별로 덧붙여 편집한 것이다. 주희朱熹와 그의 문인들의 기록인 근사록近思錄 의 예를 따르고 있다. 이 책은 처음에 동쪽 땅의 도道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도동록道東錄 이라 하다가 1753년(영조 29) 완성하면서 이자 수어 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자 란 이황에 대한 존칭이고 수어 란 순수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80세(1760, 영조36) * 성호사설星湖僿說 완성 (18) 星湖先生全集 권50, 序, 星湖僿說序 星湖僿說者 星湖翁之戲筆也 翁之作是說也何意 直無意 無意奚其有此哉 翁乃優閒者也 讀書之暇 應世循俗 或得之傳記 得之子集 得之詩家 得之傳聞 得之詼諧 或可笑可喜 可以存閱 隨手亂錄 不覺其至於多積 始也爲其挑忘錄之卷 旣又爲之 目列於端 目又不可以徧閱 乃分門類入 遂成卷袠 又不可無名 名之以僿說勢也 非意之也 翁竆經二十年 凡見解聖賢遺意 各有成說 又喜著書 其寓物酬人 序記論說 別有采輯 如僿說者不堪載之向之數者則其爲無用之宂言定矣 鄙諺云我食屬厭 棄將可惜 此僿說所以起也 夫三代更尙 至文而止 文之末造 小人瑣細 自周以降 文之不反淳久矣 下民之德 宜乎其弊甚 吾 輩小人 與世同流 動覺多言 於此書可見 然糞壤草芥至賤物也 或輸之田壠 養成嘉穀 取之廚竈 資爲美饌 此書者善觀者采 之 亦安知不有百無一收也哉 성호사설 에 대한 서문 - 이익李瀷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박학의 학풍을 잘 반영한 저술이다. 5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47 이 책은 이익이 40년 동안의 학문연구에 있어서 터득한 학문적 성과를 천문문天地門ㆍ만물문萬物門ㆍ인사문人事門ㆍ경사문 經史門ㆍ시문문詩文門의 다섯으로 분류한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천문ㆍ지리 에서부터 금수ㆍ초목 에 이르 기까지 30책의 백과전서적 저술이다. 사설 이란 가늘고 작은 논설 이라고 겸양해 붙인 서명이지만 공부하면서 느낀 점과 탐 구한 생각을 짧고 깊게 적어서 모은 이익의 학문적 정수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익 생존시에 제자 안정복은 이를 재분류 정 리하여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백과전서적이지만 현실문제에서 이익의 사상이 분명하게 표현되었으니, 지구는 둥글고 달보다 크고 해보다 작다, 서양의 기술이 매우 정교하다, 단군ㆍ기자 조선이 요서지방에까지 미쳤다, 과거제도에 국사시험을 넣자, 학문에서 현실 구제책이 문 학보다 중하다, 유교 외에 다른 사상도 인정해야 한다. 하층민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주목된다. 이 책은 서양 의 새로운 지식을 적극 수용하고, 사물과 현실의 인식이 개방적이며 진취적이다. 또 학문을 현실에 입각하여 비판적 태도로 해야 하며 우리 국토와 인민과 역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펴야 한다는 등 자아의식이 뚜렷하다. 유형원을 계승ㆍ발전시킨 실학의 대표적 저술로서 이후의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 모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성호사설 의 내용을 현실개혁안 중심으로 적용, 정리한 것이 곽우록 이다. 83세(1763, 영조39)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승자陞資의 은전 받음 * 12월 타계 (19) 與猶堂全書 제1집, 詩文集 권1, 過剡村李先生舊宅時省安山丘墓 道脈晚始東 薛聰啓其先 傳流逮圃牧 忠義濟孤偏 退翁發閩奧 千載得宗傳 六經無異訓 百家共推賢 淑氣聚潼關 昭文耀剡川 指趣近鄒阜 箋釋接融玄 蒙蔀豁一線 扃鑰抽深堅 至意愚莫測 運動微且淵 [星湖先生生於碧潼郡] 정약용丁若鏞이 이익의 고택과 묘소를 둘러보고 지은 시이다. 도맥이 후대에야 동국에 전해 설총이 그 시초를 열어놓았고 그 맥이 포은 목은 몸에 미치어 높디높은 충의를 이루었다네. 퇴옹은 주자 진수 드러내시어 천년 뒤에 그 도통 이어 받으니 육경은 다른 뜻이 있지를 않아 백가들이 다 함께 받들었다네. 맑은 기운 마침내 동관에 모여 밝은 문장 섬천에 환히 빛나니 주된 뜻은 공맹에 가깝게 되고, 주석은 공융 정현 뒤를 이었네. 몽매한 나 한 줄기 빛이 보이어 깊이 잠긴 자물통 열고 싶어도 짐작을 못할레라 지극한 뜻을 그 운용 오묘하고 또한 깊다네 [星湖先生은 碧潼郡에서 태어났다]. 이익 생애와 행적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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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안정복 安 鼎 福 (1712~1791) 1) 안정복 연보 年 譜 2) 안정복 생애 관련 자료

50 3. 안정복安鼎福(1712~1791) 생애와 행적 1) 안정복 연보年譜 본관 : 광주廣州. 자 : 백순百順, 호 : 순암順庵ㆍ한산병은漢山病隱ㆍ우이자虞夷子ㆍ상헌橡軒 나이 / 연도 1세(1712, 숙종38) 연보 * 부친 안극安極 모친 전주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 제천현提川縣 유원楡院(현재 제천시 대랑동 느릅원 마을, 주요 행적지 조부 安瑞羽가 가족을 이끌 고 유원의 친척 집에 가서 우거하고 있었음) 56 4세(1715, 숙종41) * 모친 따라 귀경, 서울의 건천동乾川洞 외가에 머무름 6세(1717, 숙종43) * 모친 따라 전라도 영광靈光 월산月山에 감 영광에 외가의 농장農莊이 있었는데, 외조모가 내려가는 길에 모친과 함께 따라감 9세(1720, 숙종46) * 모친을 따라 귀경.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에 머뭄 14세(1725, 영조1) * 조부가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부임하자 따라감 15세(1726, 영조2) * 조부가 해임되어 전라도 무주茂朱로 따라감 18세(1729, 영조5) * 성순成純의 딸과 혼인 21세(1732, 영조8) * 아들 경증景曾 출생 24세(1735, 영조11) * 조부 별세 26세(1737, 영조13) * 부친과 함께 무주에서 광주廣州 덕곡德谷으로 이사옴 * 성리대전性理大全 과 심경心經 등 독서 * 치통도治統圖 와 도통도道統圖 저술 29세(1740, 영조16) * 하학지남下學指南 과 정전설井田說 저술 35세(1746, 영조22) * 안산安山 성촌星村으로 이익李瀷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심 36세(1747, 영조23) * 윤동규尹東奎와 편지로 서경書經 에 대해 토론함 * 성호 선생을 뵙고 편지도 올림 37세(1748, 영조24) * 성호선생 찾아뵘. 홍범연의洪範衍義 를 초草함 38세(1749, 영조25) * 성호와 편지로 학문 토론 *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장사랑將仕郞 만녕전萬寧展 참봉 제수되어 부임 39세(1750, 영조26) * 종사랑從仕郞,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제수됨 40세(1751, 영조27) * * * * 41세(1752, 영조28) * 통훈대부 정릉직장靖陵直長으로 승진함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로 승진되어 입경 봉렬대부ㆍ봉정대부ㆍ중훈대부ㆍ중직대부에 제수 성호 선생에게 편지 올림( 周易 에 대해 문의) 이병휴李秉休와 서신으로 학문 토론 제천시 대랑동 느릅원 마을 광주 덕곡 안산 성촌

51 나이 / 연도 연보 주요 행적지 영조29) *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 * 부친 모시고 용산에 우거 * 광주지廣州志 저술. 이자수어李子粹語 엮음 * 성호선생에게 편지를 올림(綱目의 筆法에 대해 논함) 43세(1754, 영조30) * * * * * 44세(1755, 영조31) * 조부의 지문誌文을 성호 선생에게 요청 * 윤동규와 서신으로 학문 토론 45세(1756, 영조32) * 광주부廣州府 경안면慶安面 이리동약二里洞約을 만듦 46세(1757, 영조33) * 임관정요臨官政要 희현록希賢錄 저술 * 성호 선생에게 여러차례 편지 올림(喪祭, 西學 등 논함) * 성호 선생이 순암기順菴記 를 지어 보내 줌 47세(1758, 영조34) * 장녀를 권일신權日身에게 시집보냄 * 성호 선생에게 여러 번 편지를 올림 * 병휴와 편지로 경학經學을 논함 * 교증가례校證家禮 를 짓고 서문을 붙임 48세(1759, 영조35) * 동사강목東史綱目 저술 시작 * 윤동규와 편지로 학문 토론( 詩經 에 대해 논함) * 이익에게 여러 차례 편지 올림(音韻과 曆法, 易에 대해 논함) 49세(1760, 영조36) * 권철신權哲身과 편지로 학문을 토론 50세(1761, 영조37) 52세(1762, 영조38) * 성호 선생의 부탁으로 성호사설유편星湖僿說類編 엮음 53세(1763, 영조39) * 백선시百選詩 사감史鑑 저술 * 성호 선생 별세 54세(1764, 영조40) * 윤동규와 편지로 복제服制를 논함 55세(1765, 영조41) * 무명오현찬無名五賢贊 저술 *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56세(1766, 영조42) * 도정절찬陶靖節贊 저술 * 육잠六箴 저술 * 권철신權哲身과 양명陽明ㆍ심학心學에 대해 서신 왕래 57세(1767, 영조43) * 윤동규와 이병휴 등과 편지로 이기설理氣說 토론 58세(1768, 영조44) * 윤동규와 여러 차례 편지함( 大學 등을 논함) * 권철신과도 편지로 학문관을 토론 42세(1753, 사헌부 감찰監察로 자리 옮김 부친을 모시고 중부동 외가로 이주 부친 별세, 8월에 덕곡 선영에 모심 부친 행장 짓고, 성호 선생에게 지문誌文 요청 부친상을 계기로 사헌부 감찰에서 물러남 * 광주 덕곡에 서재書齋인 이택재麗澤齋 세움(5월 이후로 후학들에게 小學 을 강 의함) 이택재 안정복 생애와 행적 57

52 나이 / 연도 59세(1769, 영조45) * 이기양李基讓과 서신 내왕( 中庸 에 대해 논함) * 성호예식서星湖禮式序 지음 * 이병휴와 편지 왕래(中國中表婚의 잘못과 家禮 등에 대한 논의) * 윤동규와 편지로 학문 토론(家禮에 대해 논함) 60세(1770, 영조46) * 모친 이씨의 행장 지음 * 이상정李象靖과 서신 내왕(四七說을 논함) * 윤동규(가례에 대해 논함), 권철신(사칠설을 논함) 등과 서신 내왕 61세(1771, 영조47) * 윤동규에게 답함(周易 및 高麗廟制에 대해 논의) 62세(1772, 영조48) * 권철신과 서신으로 경학 토론 *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으로 서연書筵에 참여 이후 8차례 서연 참여하여 동궁에게 심경心經 등 강론 63세(1773, 영조49) * 대신들이 추천한 계방桂坊(世子翊衛司) 구임인久任人에 뽑힘 * 윤동규 별세 * 익위사翊衛司 위솔衛率 제수 64세(1774, 영조50) * 입경入京(山林洞 成頴의 집에 우거함) 왕에게 숙배肅拜함 * 다시 왕세손의 사부가 됨 * 왕세손의 사부로서 네 차례 서연書筵에 참여 * 동궁東宮과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강론함 65세(1775, 영조51) * 부인 성씨가 작고함. *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저술 * 반계유선생연보磻溪柳先生年譜 를 수정함 66세(1776, 영조52) * 목천현감木川縣監. 이병휴 별세 68세(1779, 정조3) * 대록지大鹿志 (木川邑誌) 저술 70세(1781, 정조5) * 가례집해家禮集解 저술 * 동사강목 을 내입內入하라는 교지가 내림 72세(1783, 정조7) *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 장릉령長陵令, 헌릉령獻陵令 76세(1787, 정조9) *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완성 78세(1789, 정조13) *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79세(1790, 정조14) *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80세(1791, 정조15) * 광주 덕곡에서 별세 1800년(정조24) 58 연보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 열조통기列朝通記 완성 주요 행적지 묘소

53 2) 안정복 생애 관련 자료 1세(1712, 숙종38) * 제천현提川縣 유원楡院에서 부친 안극安極 모친 전주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 * 이해 여름 조부 서우瑞羽가 가족을 이끌고 유원의 친척 집에 가서 우거함 (1) 順菴集年譜 肅宗大王三十八年壬辰 淸康煕五十一年 十二月二十五日甲戌 戌時先生生于堤川[湖西左道縣名] 縣之楡院寓第 祖考參議 公僦居京城靑坡里 是歲三月 母夫人李氏夢赤氣自天而降 遍繞寢處 遂有娠 十月參議公率家眷 移寓堤川楡院戚人尹訓甲家 當生之曉 又夢有豹赤斑奇文 抱於懷中驚覺 是日戌時生 숙종대왕肅宗大王 38년 임진(1712) 청나라 강희康熙 51년이다. 12월 25일 갑술일 술시戌時에 선생은 제천현堤川縣(湖西左道의 縣 이름이다)의 유원楡院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다. 할아버지 참의공이 경성京城의 청파리靑坡里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이해 3월에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가 붉은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침상 주위를 감싸는 꿈을 꾸고는 드디어 임신하였다. 10월에 참의공이 가속을 거느리고 제천의 유원에 있는 친척 윤훈갑尹訓 甲의 집으로 이사가 살았다. 공을 낳던 날 새벽에 또 붉은 반점이 있는 표범을 가슴에 품는 꿈을 꾸고는 놀라 깨어났는데, 이날 술시에 공을 낳았다. 15세(1726, 영조2) * 조부가 해임되어 전라도 무주茂朱에 복거卜居함에 따라감 (2) 順菴集年譜 二年丙午 先生十五歲 參議公遞歸 卜居于茂朱 湖南左道邑名 邑底 先生隨焉 四年戊申 先生十七歲 是歲三月 湖西賊李麟佐等陷淸州 至四月二十二日 先生在茂朱寓舍 望見東天有黑氣慘憺中 有赤氣橫亘 喜曰 此天文書 所謂戰氣而主勝客之兆也 他人未之信 二日後聞賊將李熊報等 戰于安陰茂朱之界草峴之東 戰敗被擒 先生之言果驗 人皆歎 服 영종대왕英宗大王 2년 병오(1726), 선생의 나이 15세. 참의공이 체차되어 돌아와 무주茂朱 호남 좌도의 고을 이름이다. 고을 아래에다 집을 지음에 선생이 따라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년 무신(1728), 선생의 나이 17세. 이해 3월에 호서湖西의 역적逆賊 이인좌李麟佐 등이 청주淸州를 함락하였다. 4월 22일에 이르러서 선생이 무주의 집에 있으면서 동쪽 하늘에 검은 기운이 자욱하게 끼어 있는 속으로 붉은 기운이 쭉 뻗어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는, 기뻐하면서 말 안정복 생애와 행적 59

54 하기를, 이것은 천문서天文書에서 이른 바의 전기戰氣인데, 주군主軍이 객군客軍을 이기는 조짐이다 라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 들이 믿지 않았다. 이틀 뒤에 적장賊將 이웅보李熊報 등이 안음安陰과 무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초현草峴의 동쪽에서 싸우다 패하여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들림에 선생의 말이 참말임이 증명되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3) 順菴先生文集 권1, 詩 溪北新舍 歲丙午 余隨王父 自蔚山任所返 寓于湖南之朱溪 乙卯 王考捐世 丙辰春 返葬于廣州慶安之德谷先塋 其年冬 余先移于 此 丁巳春 擧家皆移 甲子 始營室于王考墓右巽坐地 甲戌夏 遭先考喪 積歲憂患之餘 避寓京鄕舊宅 毁壞不堪居 是秋 移 占于思簡公墓左寅坐地 地窄居下 溪北有一基 居高向陽 外朝明朗 專據一壑之勝 每欲移居 貧病不果 乙酉春 兒子始伐木 爲材 與洞少年之能鄙事者 躳自執役 秋而入居 余喜而欲有所賦 疾病遷就 至于今日 獨卧空齋 意到漫吟以示之 溪北風烟一壑專 經營卅載夢魂牽 緣吾計拙空籌度 喜汝謀深奠棟椽 丘木森羅看護易 先塋密邇展省便 傍人錯比平泉宅 秪 願雲仍百代傳 시내 북쪽의 새 집[溪北新舍] 병오년에 조부를 따라 울산蔚山 임소에서 호남의 주계朱溪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 후 을묘년에 조부께서 세상을 떠 나시어 이듬해인 병진년 봄에 광주廣州 경안慶安의 덕곡德谷 선산에 반장하였다. 그 해 겨울에 내가 먼저 이곳으로 옮겨 오고 정사년 봄에 온 식구가 다 옮겨 왔다. 갑자년에 조부 묘소 바른편 손좌巽坐의 땅에 처음으로 집을 지었다. 그 후 갑술년 여름 선고先考의 상을 당하고 여러 해 우환 끝에 경향京鄕 각지를 돌며 우거寓居하다 보니 옛 집은 살 수 없을 정도로 헐고 무너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 가을 사간공思簡公 묘소 왼편의 인좌寅坐의 땅에 옮겨지었지만 터가 좁고 지대가 낮았다. 시내 북쪽에 터가 하나 있었는데 지대도 높고 양지바른데다 바깥 경관도 훤하여 한 골짝의 승경勝景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리로 옮 기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으나 가난과 병 때문에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을유년 봄에 자식놈이 처음으로 목재를 마련하여 마을에 사는 나이 젊고 잔손질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를 한 끝에 그 해 가을 들어가 살게 되었다. 내가 기쁜 마음에 시 를 읊어 보고 싶었으나 병 때문에 지금껏 미루어 오다가 홀로 텅 빈 서재에 누워 있노라니 문득 생각이 나기에 이렇게 읊어 내 뜻을 나타내 보았다. 시내 북쪽 풍경을 한 골짝이 다 차지하니 집 지을 계획 삼십 년에 꿈길에도 잊지 않았지. 나로서는 뾰족한 수 없어 그저 생각만 오락가락. 네가 계획 잘 짜서 집을 세우니 기쁘구나. 나무들이 빽빽이 둘러쳐 보호하기도 쉽고, 선영이 가까와서 성묘 길도 편하다네. 남들은 속 모르고 평천에다 비유하지만 내 소원은 자손 백대 전해가는 것뿐. 26세(1737, 영조13) * 그동안 유학경전뿐 아니라 천문ㆍ의약ㆍ점술 및 병법ㆍ불교ㆍ도교ㆍ패관소설 등 무엇이든 읽 었던 박학의 도서를 지양하고 성리대전性理大全 과 심경心經 을 읽으며, 치통도治統圖 와 도 통도道統圖 저술 (4) 順菴集年譜 十三年丁巳 先生二十六歲 春 讀性理大全 先生自幼少時 意謂士生斯世 不可以一藝成名 其於經史詩禮之外 陰陽星曆醫藥卜筮 以至於孫吳佛老之 書 稗乘小說之類 自有書契以來文獻之可徵者 無不博觀 自十五六歲 已稱其該洽 至是始留意於性理之學而歎曰 始焉耻一 物之不知 終焉不知身心之貴 則所謂睫在眼前人不見也 遂潛心玩究 手鈔而口誦 6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55 五月 讀心經 有感吟二絶 其一曰 句句須要不放心 西山逈得考亭心 平居細討危微法 遇事方能驗此心 作治統道統二圖 治統圖 以歷代帝王成圖者也 上自上古 下至皇明 以及乎淸 有正統焉 有變統焉 有無統焉 皆寓褒貶與奪之義 爲上下圖 道 統圖 以歷代聖賢成圖者也 首揭周子易圖 以明道之所本 繼之以羲農黃帝堯舜孔孟 以至於濂洛羣賢 元明諸儒 皆分其正統 旁統 亦爲上下圖 皆有凡例書于圖之上面 영종대왕英宗大王 13년 정사(1737), 선생의 나이 26세 봄에 성리대전性理大全 을 읽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지 재예才藝로 이름을 이루어서 는 안 된다 고 여겼다. 이에 경사經史와 시례詩禮 이외에 음양陰陽, 성력星曆, 의약醫藥, 복서卜筮 등의 서책 및 손자孫子ㆍ오자吳 子의 병서兵書, 불가佛家ㆍ도가道家의 서책, 패승稗乘이나 소설小說의 유에 이르기까지, 글자가 만들어진 이래의 문헌文獻으로서 구해 볼 수 있는 것이면 두루 다 보았다. 이에 15, 6세부터 이미 박학博學하다고 칭해졌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처음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끝내는 몸과 마음의 귀함을 몰랐으니, 이것은 이른바 눈썹이 눈앞에 바짝 있는데도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 하면서, 드디 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궁구하면서,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외웠다. 5월에 심경心經 을 읽다 심경 을 읽다가 느낌이 있어서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다음과 같다. 구절마다 모름지기 방심하지 말지니, 서산은 저 멀리 고정의 맘 얻었어라. 평상시에 심법心法을 자세하게 궁구하면 일 당하여 바야흐로 이 마음을 징험하리. 치통도治統圖와 도통도道統圖 두 도圖를 만들다. 치통도는 역대 제왕들의 계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위로는 상고上古 시대부터 아래로는 황명皇明에서 청淸나라에 이 르기까지를 그렸으며, 정통正統도 있고 변통變統도 있고 무통無統도 있는데, 모두 포폄褒貶과 여탈與奪의 의리를 붙여 상도上圖 와 하도下圖로 만들었다. 도통도는 역대 성현聖賢들의 계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첫머리에 주자周子(周濂溪를 말함)의 역도易 圖를 내어 걸어 도의 근본을 밝혔고, 계속해서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과 염락濂洛의 여 러 현인들 및 원元나라와 명나라의 제유諸儒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정통正統과 방통旁統으로 나눈 다음, 역시 상도와 하도로 만 들었다. 모두 범례凡例가 있어서 그림의 윗면에다가 써놓았다. 29세(1740, 영조16) * 하학지남下學指南 과 정전설井田說 저술 (5) 順菴集年譜 十六年庚申 先生二十九歲 撰下學指南 先生以爲古來學者之患 多在於務遠忽近 乃於身心日用所當行之道 分排十二時 又列定條目 附以古聖賢嘉言 善行 屬於下學者 名之曰下學指南 以爲平生取用之資 作井田說 以周禮爲主 參以孟子公羊傳何休註 班志及朱子說以成之 右二條月日無考 似在是年春夏間 十月 女子子生 戊寅 適權日身 안정복 생애와 행적 61

56 영종대왕英宗大王 16년 경신(1740), 선생의 나이 29세. 하학지남下學指南 을 찬하다. 선생은 옛날부터 학자들의 근심은 대부분 먼 것을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는 데 있었다 고 여겼다. 이에 몸과 마음 및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12시時에다 분배分排하고, 또 조목條目을 정하여 배열하고, 옛 성현들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 가운데 하학下學에 속하는 것들을 붙인 다음, 하학지남 이라 이름하여 평소에 취 용取用하는 자료로 삼았다. 정전설井田說을 짓다. 주례周禮 를 위주로 하였으며, 여기에 맹자孟子,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의 하휴何休의 주註, 반 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의 식화지食貨志, 그리고 주자朱子의 학설 등을 참고하여 지었다. 이상의 두 조항은 지은 날짜를 상고 할 수가 없는데, 이해 봄과 여름 사이에 지은 것 같다. 10월에 딸을 낳다. 무인년(1758)에 권일신權日身에게 시집갔다. (6) 順菴先生文集 권19, 題後, 題下學指南 庚申 學者 知行之緫名 而其所學 學聖人也 聖人生知安行 而爲人倫之至 學聖人之道 不過求聖人之知與行 而不出於日用彛倫 之外也 舜明於庶物 察於人倫 言其明知庶物之理而尤致察於人倫也 大學論格致之義 亦曰知所先後 卽近道矣 知雖多般 而 所當先者 實不出於日用彛倫之外 孟子亦曰 堯舜之知 而不遍物 急先務也 其謂先務 指何事也 子曰 下學而上達 下者卑近 之稱也 卑近易知者 非日用彛倫而何 用工於此 積累不已 備盡多少辛苦境界然後 心體爲一 無艱難扞格之患 而庶幾覩快活 灑然之境 上達卽在此也 故所謂學者 只是下學而已 聖人言行 具於論語一書 其言皆是下學卑近處易知易行之事 而無甚高 難行之事矣 後世論學 必曰心學曰理學 心理二字 是無形影無摸捉 都是懸空說話也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又曰 言 忠信行篤敬 果能於此下工 斯須不舍 積習之久 淸明在躬 志氣如神 心不待操而存 理不待究而明 自能至於上達之境矣 後 世學者 却以下學爲卑淺而不屑焉 常區區於天人性命理氣四七之說 夷考其行 多無可稱 而唯以不知上達爲羞吝 終身爲學 而德性終不立 才器終不成 依然是未曾爲學者貌樣 果何益哉 是不知下學之工而然也 하학지남 뒤에 쓰다[題下學指南] 경신년(1740) 배움이란 앎과 행함을 총괄한 이름이요, 그 배우는 바는 성인聖人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편안 히 행하여 인륜人倫의 지극함이 되었는데, 성인의 도를 배운다는 것은 성인의 아는 바와 행하는 바를 구하는 것에 불과한 것 으로서, 이는 날로 행하는 떳떳한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순舜임금은 서물庶物에 밝으며 인륜에 살폈다 하니, 그것은 여러 사물의 이치를 밝게 알고 특히 인륜에 대해 깊이 살폈다는 말이다. 대학大學 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을 논하면서, 먼 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곧 도道에 가깝다 하였으니, 알아야 할 것이 비록 많지만 의당 먼저 알아야 할 바는 실제로 날 로 행하는 떳떳한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맹자도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지혜로도 모든 것에 두루 미치지 못함은 먼 저 해야 할 일을 급히 여겼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그 먼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아래에서 배워 위로 통한다[下學上達] 하였는데, 아래란 비근卑近한 것을 말한다. 비근하여 알기 쉬운 것이 날로 행하는 떳떳한 인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에 힘을 쏟아서 끊임없이 쌓아 나가 많은 괴로움을 두루 겪고난 뒤에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어렵게 여기거나 거부할 염려가 없어서 쾌활하고 시원한 경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니, 상달上達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이른바 배움이란 다만 하학下學일 뿐인 것이다. 성인의 언행이 논어 한 책에 갖추어져 있는데, 그 말은 모두 하학의 비근한 것으로서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일이며, 차원이 매우 높거나 행하기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런데 후세에는 학문을 논하는 때에 반드시 심학心學 이니 이학理學 이니 하는데, 심心과 이理 두 자는 형태나 그림자가 없어서 더듬거나 잡을 수 없는 것이니 모두가 공중에 매달린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평소 거처할 때에 공손히 하고, 일에 임하여 공경히 하며, 남과 사귈 때는 충성을 다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말은 충신忠信하게 하고, 행실은 독경篤敬하게 하 6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57 라 하였으니, 과연 여기에 힘을 쏟아 잠시도 놓지 않고 오랫동안 익혀 나간다면 청명淸明이 몸에 있어서 지기志氣가 신통하 여 마음을 잡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고 이치를 연구하려 하지 않아도 밝아져서 저절로 상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다. 후세의 학자는 하학을 비천卑淺하다 하여 탐탁히 여기지 않고 항상 천인 성명天人性命과 이기 사칠理氣四七의 말에만 얽매 이며, 가만히 그 행실을 따져 보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면서도 상달을 모르는 것만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학문을 해도 덕성德性이 끝내 성립되지 못하고 재기才器가 끝내 성취되지 못하여 여전히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의 모양을 하 고 있으니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는 하학의 공부를 몰라서 그런 것이다. (7) 順菴先生文集 권19, 說, 井田說 周公相成王 損益二代之制 修井地之法 建國於土中雒邑而治天下 井地立而後 經界可正也 封建可設也 田有常制也 民有 恒産也 學校以興也 軍制以立也 其經理規模 廣大周密 雖生千世聖遠言湮之後 方冊具存 可考而知矣 其制建步立畒 正其經界 六尺爲步 半步曰跬 凡人二足並擧爲一步 其長六尺 步百爲畝 濶一步 長一百步 畒百爲夫 濶一百 步 長一百步 夫三爲屋 濶三百步 長一百步 屋三爲井 濶三百步 長三百步 井方一里 積九百畒 爲九夫所治之地 孟子所謂 方里而井 井九百畒者是也 井十爲通 濶十井 長一井 通十爲成 濶十井 長十井 成方十里 積百井 成十爲終 濶百井 長十井 終十爲同 濶百井 長百井 同方百里 積萬井 同十爲封 濶千井 長百井 封十爲畿 濶千井 長千井 圻方千里 積百同 百同之 地 爲井百萬 爲夫九百萬 爲畒九萬萬 詩云邦畿千里 維民所止者是也 此經界之正也 卽畿之中而置王國 四面各至五百里爲限 分爲五節 百里曰郊 郊地四同 三十六萬夫之地 五十里內爲近郊 百里內爲遠郊 六 鄕之民居焉 二百里曰州 亦曰甸地 甸地十二同 六遂之民居焉 三百里曰野 亦曰稍地 稍地二十同 天子之大夫 各受二十五 里之采地 在內謂之家邑 四百里曰縣 縣地二十八同 天子之卿 各受五十里之采地 在內謂之小都 五百里曰都 亦曰畺地 畺 地三十六同 甸地之外謂之野 六遂公邑所在 必家邑小都大都 皆謂之都鄙 外此而有九服五等之爵 此封建之設也 天子畿內 凡百同九百萬夫之地 山陵林麓川澤溝瀆城郭宮室凃巷 三分去一 爲六百萬夫之地 民之受田 不易上田一夫百畒 一易中田一夫二百畒 再易下田一夫三百畝 通率二而當一 則人受二夫之地 定受田三百萬家也 六鄕之餘地 爲廛里 邑居在 都城者 場圃 樹果苽之屬 宅田 致仕者之家所受田 士田 圭田也 孟子曰 自卿以下 必有圭田五十畒 賈田 在市賈人其家所 受田 官田 庶人在官若府史胥徒其家所受田 賞田 賞賜之田 牛田 養公家牛者家所受田 牧田 牧者家所受田 九等之人所任 通受一夫之地 六遂之餘地 又爲廛里至牧田九等之人所受 以爲公邑也 自此至于畿畺采地外 皆有餘地 天子使大夫治之 以 爲公邑 春秋之有公邑大夫者以此也 此田制之有常也 分田之法 民年二十受田 一夫上父母下妻子 以五口至八口爲率 辨地之上中下 授之以百畒二百畒三百畒之田 使肥饒不得獨 樂 磽确不得獨苦 種穀必辨五種 以備灾害 田中不得有樹 以妨五糓 力耕數耘收穫 如冦盜之至 墻下樹之以桑 疆畔種之以 菜 鷄豚狗彘之畜 亦無失其時 則五十者可以衣帛矣 七十者可以食肉矣 年至六十 有子則傳其田於子 無子則歸其田于官 衆 男之若弟及次子爲餘夫 餘夫年十六 則受田二十五畒 四分一夫之田 俟其壯而有室然後 更受一夫之田 士工商之以事入在官 者 其家所受田 五口乃當農夫一人 盖井田之制 以鄕遂采地之法而經之 以餘地公邑之制而緯之 千里之內數百萬家之人 無 不受田之民矣 自此以推之 至于九服之外而莫不然矣 此民産之有恒也 然而鄕遂都鄙之制 有不同者焉 夫間有遂 廣二尺 深二尺 遂上有徑 容牛馬 十夫 二鄰之田 有溝 廣四尺深四尺 溝上有畛 容大車 百夫 一酇之田 有洫 廣八尺 深八尺 洫上有凃 容乘車一軌 千夫有澮 廣二尋 深二仞 澮上有道 容二軌 萬夫 四縣 之地 有川 川上有路 容三軌 萬夫之地 盖三十三里一百步 一同萬井九萬夫之地 分爲井字 每一間爲萬夫所治之田 里數三 十三里一百步 其間爲川爲路者一 爲澮爲道者九 爲洫爲凃者百 爲溝爲畛者千 爲遂爲徑者萬 此鄕遂之制也 九夫爲一井 井方一里 井間有溝 長廣同鄕遂制 下同 四井爲邑 方二里 四邑爲丘 方四里十六井 邑丘之屬 相連比以出田稅 溝洫爲除水害 四丘爲甸 六十四井 甸方八里 旁加一里爲一成 成間有洫 其地百井 爲九百夫而方十里 成中容一甸方八里六 十四井 五百七十六夫出田稅 緣一里三十六井 三百二十四夫治洫 四甸 卽四成之地 爲縣 方二十里 四縣爲都 方四十里 一 안정복 생애와 행적 63

58 千六百井 四都方八十里 六千四百井 旁加十里爲一同 同間有澮 其地萬井 爲九萬夫而方百里 同中容四都六十四成 八十里 四千九十六井 三萬六千八百六十四夫出田稅 二千三百四井 二萬七百三十六夫治洫 緣邊十里三千六百井 三萬二千四百夫 治澮 百里之間 爲澮者一 爲洫者百 爲溝者萬 此都鄙之制也 盖井田之法 成於一井而備於一同矣 通利田間之水 一畒之間 廣尺深尺曰畎 一夫之間廣二尺曰遂 一井之間廣四尺曰溝 一成之間廣八尺深八尺曰洫 一同之間廣二尋深二仞曰澮 詩云南 東其畒 或南其畝 或東其畒 順地而趨水也 以南圖之則遂從溝橫 洫從澮橫 東畒反是 以小而注大 以高而臨深 無壅遏之患 矣 且徑而通畛 畛而通凃 凃而通道 道而通路 無蹊田之害矣 大抵鄕遂 用夏之貢法 稅夫而無公田 使什自賦一 都鄙用殷之助法 不稅而制公田 收公田所入 公田之制 每一井八家共之 一夫一婦各受私田百畒 又取中央公田各十畒 通爲八百八十畒 公田中所餘二十畒 以爲廬舍 八家所分 各得二畒半 以爲治 田時所居地 八家之人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而死徙無出鄕矣 田制旣均 民産旣定然後 賦稅之政起焉 人有賦而田有稅 賦口率出泉也 稅公田什一及工商衡虞之入也 賦共車馬甲兵士徒之役 充實府庫賜予之用 稅給郊社宗廟百 神之祀 天子奉養百官祿食庶事之費 無急征無橫斂 而民安堵矣 且有司稼之官 觀年之上下而出斂法 司徒之職 視年之凶荒 而行賑政 官有補助之令 里有賙救之義 故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 仰足以事父母 俯足以育妻子 養生喪死 無憾矣 又視 其惰農而施罰焉 宅不毛者 不樹桑麻 有里布 罰以一里二十五家之泉 田不耕者出屋粟 罰以一屋三家之稅粟 不畜者祭無牲 不耕者祭無盛 不樹者無椁 不蠶者不帛 不績者不衰 皆所以耻不勉也 民受五畒之宅 二畒半在野者爲廬 二畒半在邑者爲里 春令民畢出於野 其詩曰 同我婦子 饁彼南畝 田畯至喜 冬則畢入於邑 其詩曰 嗟我婦子 曰爲改歲 入此室處 春秋出民閭胥 平朝坐於左塾 比長坐於右塾 畢出然後歸 夕亦如之 入者必持薪樵 輕 重相分 班白不提挈冬民旣入 婦人同巷相從 夜績女功 一月得四十五日 必相從者 所以省費燎火 同巧拙而合習俗也 男女有 不得其所者 相與歌詠 以言其情 每歲孟春 羣居者將散 行人振木鐸徇于路 採詩獻之 太師比其音律 以聞於天子 故王者不 窺牗戶而知天下 此先王制土處民之大畧也 於是而無曠土無游民 食節事時 民咸安其居 樂事勸功 尊君親上 而學校可興矣 家有塾 一閭之所居 黨有庠 州有序國有學 民年八歲入小學 學六甲四方五行書計之事 始知室家長幼之節 十五入大學 學先王禮樂而知朝廷君臣之禮 其有秀異者 移于 鄕學 鄕學之秀異者 移于國學 至年四十 命之爵 中間自有二十五年學 此人材之所以盛 而國有以寧之美矣 因鄕遂之制而制六軍焉 郊內置六鄕之民 五家爲比 五比爲閭 二十五家 四閭爲族 百家 五族爲黨 五百家 五黨爲州 二千五 百家 五州爲鄕 一鄕爲萬二千五百家 六鄕凡七萬五千家 郊外置六遂之民 五家爲鄰 五鄰爲里 二十五家 四里爲酇 百家 五 酇爲鄙 五百家 五鄙爲縣 二千五百家 五縣爲遂 一遂爲萬二千五百家 六遂凡七萬五千家 天子六軍之制 盖出於此矣 五人 爲伍 比鄰之所出也 五伍爲兩 二十五人 閭里之所出也 四兩爲卒 百人 族酇之所出也 五卒爲旅 五百人 黨鄙之所出也 五 旅爲師 二千五百人 州縣之所出也 五師爲軍 一軍爲萬二千五百人 鄕遂之所出也 六軍凡七萬五千人 凡起徒役 無過家一人 天子之國 郊內有六鄕之六軍 郊外有六遂之六軍 鄕爲正而遂爲副 郊甸之內 已有軍十五萬人矣 大國有三軍 則三鄕三遂之 所出也 費誓所謂三郊三遂是也 次國二軍則二鄕二遂之所出也 小國一軍則一鄕一遂之所出也 此皆先王因農事而定軍令者也 欲其恩足相恤 義足相救 服容相別 音聲相識 而無乖離之患矣 因井田而制軍賦焉 四井爲邑 四邑爲丘 丘十六井 戎馬一匹 牛三頭 四丘爲甸 甸六十四井 戎馬四匹 牛十二頭 兵車一乘 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干戈備具 卿大夫采地之大者 一同方百里 提封萬井 除山川阬塹城池邑居園囿街路三千六百井 定 出賦六千四百井 戎馬四百匹 兵車百乘 是謂百乘之家 諸侯之大者 十同爲封 封方三百一十六里 提封十萬井 定出賦六萬四 千井 戎馬四千匹 兵車千乘 是謂千乘之家 天子圻方千里 提封百萬井 定出賦六十四萬井 戎馬四萬匹 兵車萬乘 戎馬車徒 干戈素具 春振旅以蒐 夏茇舍以苗 秋治兵以獮 冬大閱而狩 於農隙以講事焉 五國爲屬 屬有長 十國有連 連有帥 三十國爲 卒 卒有正 二百一十國爲州 州有牧 連師比年簡車 卒正三年簡徒 州牧五年大簡輿徒 此先王爲國立武足兵之大略也 정전설井田說 경신년 주례周禮 를 종주로 삼고 아울러 맹자, 공양전公羊傳 하휴何休의 주註,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및 주자朱子의 설說 6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59 을 취하여 만들었다[경신년]. 주공 周 公 이 성왕 成 王 을 도와 하 夏 ㆍ상 商 이대 二 代 의 제도를 손익 損 益 하여 정지 井 地 의 법을 닦고 중앙이 되는 낙양에 나라를 세워 천하를 다스렸는데, 정지가 확립된 뒤에야 경계 經 界 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봉건 封 建 을 설치할 수 있었으며, 전지 田 地 에 는 떳떳한 법제가 있게 되고, 백성은 떳떳한 재산이 있게 되었으며, 학교를 설립할 수 있게 되고, 군제 軍 制 를 확립할 수 있었 던 것이다. 비록 성인이 멀어지고 성인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은 천세의 뒤에 태어났더라도 그 광대하고 주밀한 다스림의 규 모를 방책 方 冊 이 남아 있으므로 참고하여 알 수가 있다. (중략) 기전 畿 甸 의 가운데에 왕도 王 都 를 두고 사방으로 각기 500리를 한계로 해서 다섯 등급으로 나눈다. 100리까지를 교 郊 라고 하는데, 교의 땅은 4동 同 으로서 36만 부의 땅으로 50리 안은 근교요, 100리 안은 원교임 6향 鄕 의 백성이 산다. 200리까 지는 주 州 라고 하거나 전 甸 이라고 하는데, 전의 땅은 12동이요 6수 遂 의 백성이 산다. 300리까지는 야 野 라고 하거나 초지 稍 地 라 고 하는데, 초지는 20동으로, 천자의 대부가 각기 25리의 채지 采 地 를 받은 것이 이 안에 있어 가읍 家 邑 이라고 한다. 400리까지 는 현 縣 이라고 하는데, 현의 땅은 28동으로서 천자의 경 卿 이 각기 50리의 채지를 받은 것이 이 안에 있어 소도 小 都 라고 한다. 500리까지를 도 都 라고 하거나 강지 畺 地 라고 하는데, 강지는 36동이 된다. 전지 甸 地 의 밖을 야 野 라고 하고, 6수는 공읍 公 邑 이 있 는 곳이며, 가읍 家 邑, 소도 小 都 ㆍ대도 大 都 를 모두 도비 都 鄙 라고 한다. 여기를 벗어나서 구복 九 服 ( 後 服 ㆍ 甸 服 ㆍ 男 服 ㆍ 采 服 ㆍ 衛 服 ㆍ 蠻 服 ㆍ 夷 服 ㆍ 鎭 服 ㆍ 藩 服 )과 오등 五 等 ( 公 ㆍ 候 ㆍ 伯 ㆍ 子 ㆍ 男 )의 작위 爵 位 가 있다. 이것이 봉건 封 建 을 설치한 것이다. (중략) 전지를 나누는 법은, 백성이 20세가 되면 논을 받는데, 1부는 부모와 처자를 합하여 5구 口 에서 8구까지로 기준을 삼고, 땅의 상ㆍ중ㆍ하를 구분하여 100묘, 200묘, 300묘를 주어 비옥한 전지를 차지한 사람이 홀로 즐기고 척박한 전지를 차 지한 사람이 홀로 고생하지 않게 한다. 곡식을 심을 때는 반드시 오곡을 분별하여 재해에 대비하게 하고, 전지 가운데에 나 무를 심어 오곡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며, 힘써 갈고 자주 김매며 수확할 때는 마치 구도 寇 盜 가 오는 듯이 서두르게 한다. 담 장 아래에는 뽕나무를 심고, 두둑에는 채소를 심으며, 닭ㆍ개ㆍ돼지 같은 짐승도 때를 놓치지 않게 한다. 이렇게 하면 50세 된 자는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70세 된 자는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60세가 되면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그 전지를 자 식에게 전하고 자식이 없으면 그 전지를 관 官 에 반환한다. 동생이나 차남 次 男 과 같은 뭇 남자는 여부 餘 夫 가 되는데 여부는 16 세가 되면 전지 25묘를 받고 1부 논의 4분의 1의 전지임,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후에 다시 1부의 전지를 받는다. 사 士 ㆍ공 工 ㆍ상 商 으로 일을 맡아 관아에 들어가 있는 자는 그 집에서 받는 전지가 다섯 식구일 경우에 농부 1인과 같다. 대개 정전 井 田 의 제도는 향수 鄕 遂 와 채지 采 地 의 법으로 씨줄을 삼고 여지 공읍 餘 地 公 邑 의 제도로써 날줄을 삼아 천 리의 안 수백 만가에 전 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없게 된다. 이로부터 미루어 구복의 밖에까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민산 民 産 에 떳떳함이 있는 것이다. (중략) 대저 향수 鄕 遂 에서는 하 夏 나라 때의 공법 貢 法 을 써서 부 夫 에게 세를 받고 공전 公 田 이 없어서 스스로 10분의 1을 바 치게 하고, 도비 都 鄙 에서는 은 殷 나라의 조법 助 法 을 써서 세를 받지 않고 공전 公 田 을 제정하여 공전의 수입만을 거둔다. 공전의 제도는 매 1정 井 을 8가가 함께하여 1부 夫 1부 婦 가 각기 사전 私 田 100묘를 받고 또 중앙에 있는 공전 公 田 을 각기 10묘씩을 받 으니, 합해서 880묘가 된다. 공전 중의 나머지 20묘에 여사 廬 舍 를 짓게 되니, 8가에서 나누어 받은 바가 각기 2묘 반씩이 된 다. 이로써 농사지을 때에 사는 곳으로 삼는다. 8가의 사람들이 출입을 할 때에 서로 벗이 되고 도둑을 지킬 때에 서로 돕고 병들었을 때에 서로 구호하며 죽거나 이사를 하더라도 향 鄕 을 벗어남이 없게 한다. 전제 田 制 가 이미 고르게 되고 민산 民 産 이 이미 정해진 뒤에 부세 賦 稅 의 정사가 일어나게 된다. 사람에게 부 賦 가 있고 전지에 세 稅 가 있으니, 부는 인구의 비율로 돈을 내는 것이요, 세는 공전 公 田 에서 10분의 1로 받는 것과 공상 工 商 (기술자와 장사치)과 형우 衡 虞 (산림이나 못을 맡은 사람)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부 賦 라 함은 거마 車 馬 ㆍ갑병 甲 兵 ㆍ사도 士 徒 의 역 役 과 부고 府 庫 를 채워 공로가 있는 자에게 하사하는 용도에 공급함을 말하고, 세 稅 란 교사 郊 社 ㆍ종묘 宗 廟 ㆍ 백신 百 神 의 제사와 천자의 봉양, 백관의 녹식 祿 食, 모든 일의 비용을 지급하는 것이다. 너무 급하게 취하지도 않고 함부로 거 두어들이지도 않아야만 백성들이 안도 安 堵 하게 될 것이다. 또 사가 司 稼 의 관원이 있어서 그해 농사의 작황을 보아 염법 斂 法 을 안정복 생애와 행적 65

60 내고, 사도 司 徒 의 직책이 있어서 해의 흉황 凶 荒 을 보아 진휼의 정책을 시행하여 관에서는 보조해 주는 정령 政 令 이 있고 마을 에서는 서로 도와주고 구해주는 도의가 있다. 그러므로 풍년이 든 해에는 종신토록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사망을 면하여, 위 로 족히 부모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족히 처자를 기를 수 있어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 데 유감이 없는 것이다. 또 그중에 농사에 게으른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 벌을 시행하니, 집에 나무를 심지 않은 자는 뽕나무나 삼을 심지 않 은 자 이포 里 布 를 내게 하고 벌로 1리 25가의 천화 泉 貨 를 내게 함, 논을 갈지 않은 자는 옥속 屋 粟 을 내게 하며 벌로 1옥 3가 의 세속 稅 粟 을 내게 함, 짐승을 기르지 않은 자는 제사에 희생 犧 牲 이 없고, 논을 갈지 않은 자는 제사에 자성 粢 盛 이 없고, 나 무를 심지 않은 자는 관곽 棺 槨 이 없고, 누에를 치지 않은 자는 명주옷을 입지 못하고, 삼을 삼지 않은 자는 최복 衰 服 을 입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모두가 노력하지 않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백성은 5묘 畝 의 집터를 받는데, 2묘 반은 야 野 에 있어서 여 廬 가 되고 2묘 반은 읍 邑 에 있어서 리 里 가 된다. 봄철이면 백 성들이 모두 들로 나가게 되니, 그 시 詩 에, 우리 부자 婦 子 와 더불어 저 남묘 南 畝 에 들밥을 내어가면 전준 田 畯 이 이르러 기뻐 하도다 하였다. 겨울에는 모두 읍으로 들어갔으니, 그 시에, 아, 우리 부자 婦 子 야 해가 바뀌려 하니 이 집으로 들어가 지낼 지어다 하였다. 봄가을에 백성이 나갈 때에 여서 閭 胥 가 이른 아침에 좌숙 左 塾 에 앉고 비장 比 長 이 우숙 右 塾 에 앉아 있다가 모 두 나간 뒤에 돌아가고, 저녁에도 그렇게 한다.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나무를 들고 오는데, 가볍거나 무겁거나 서로 나누어 들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손에 들고 다니지 않게 한다. 겨울이 되어 백성이 이미 들어간 뒤에는 부인들이 같은 골목 의 사람들끼리 모여 밤에 삼을 삼는데, 여자의 일은 1개월에 45치의 일을 하게 된다. 반드시 서로 함께 하는 것은 불을 켜는 비용을 덜고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함께 하게 함으로써 습속을 합치시킨 것이다. 남녀가 제 살 곳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서로 더불어 노래하고 읊조리며 심정을 말하도록 하고, 해마다 초봄이 되어 무리지어 살던 사람들이 흩어지려 할 때에 행인 行 人 이 목탁을 흔들며 도로를 돌며 시 詩 를 채집해서 태사 太 師 (악관)에게 바치면 음률에 맞추어 천자에게 들려준 다. 그러므로 왕자는 문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왕 先 王 이 토지를 마련하여 백성들을 살게 한 대략이다. (중략) 정전 井 田 을 기준하여 군부 軍 賦 를 제정하는데, 4정 井 이 읍 邑 이 되고 4읍이 구 丘 가 되니 구는 16정으로, 군마 軍 馬 1필, 소 3두가 나온다. 4구가 전 甸 이 되니 전은 64정이므로, 군마 4필, 소 12두, 병거 兵 車 1승 乘, 갑사 甲 士 3인, 보졸 步 卒 72인에 방패 와 창이 갖추어진다. 경 卿 과 대부 大 夫 로서 채지 采 地 가 큰 자는 1동 同 으로 봉해지니 사방 100리로 모두 1만 정이 된다. 그 중에 서 산천ㆍ갱참 阬 塹 ㆍ성지 城 池 ㆍ읍거 邑 居 ㆍ원유 園 囿 ㆍ가로 街 路 등으로 3600정을 제외하면 정해진 출부 出 賦 의 면적은 6400정이 된 다. 여기에서 융마 戎 馬 400필과 병거 兵 車 100승이 나오니, 이것을 일러 백승지가 百 乘 之 家 라고 하는 것이다. 제후 諸 候 로서 채지 가 큰 자는 10동 同 으로 봉강 封 疆 을 삼으니, 봉강이 사방 316리로 모두 10만 정이며, 부세를 내는 전지는 6만 4000정이다. 여기 에서 군마 4000필이 나오고 병거 兵 車 가 1000승이 나오니, 이것을 일러 천승지가 千 乘 之 家 라고 하는 것이다. 천자의 기내 圻 內 는 사방 1000리니 모두 100만 정으로, 부세를 내는 전지가 64만 정이다. 여기에서 군마 4만 필과 병거가 1만 승이 나오며 융마 戎 馬 ㆍ거도 車 徒 ㆍ간과 干 戈 가 본디 갖추어진다. 봄에는 군사들을 정돈하여 봄 사냥을 하고 여름에는 노숙하며 여름 사냥을 하고 가을에는 무기를 정비하여 가을 사냥을 하고 겨울에는 크게 사열을 하고 농한기에 겨울 사냥을 하여 무예를 강습한다. 5국 國 이 속 屬 이 되고 속에는 장 長 이 있으며, 10국에 연 連 이 있고 연에는 수 帥 가 있다. 30국이 졸 卒 이 되는데 졸에는 정 正 이 있고, 210국이 주 州 가 되는데 주에는 목 牧 이 있다. 연수 連 帥 는 해마다 병거를 살펴보고, 졸정 卒 正 은 3년마다 도 徒 를 검열하고, 주목 州 牧 은 5년마다 수레와 도 徒 를 대대적으로 검열한다. 이것이 선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무 武 를 세우고 군사를 족하게 한 대략이다. 6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61 35세(1746, 영조22) * 경기도 안산安山 성촌星村에 살던 이익李瀷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심 (8) 順菴集年譜 二十二年丙寅 先生三十五歲 十月 往謁星湖李先生 李先生諱瀷 李先生在安山 圻內郡名 星村 先生慕其德義 往拜而師事之 영종대왕英宗大王 22년 병인(1746), 선생의 나이 35세. 10월에 성호星湖 이선생李先生(이름은 瀷)에게 가서 배알하다. 성호 선생이 안산安山(畿內의 郡 이름이다)의 성촌星村에 있었 는데, 선생이 덕과 의를 흠모하여 가서 배알하고는 스승으로 섬긴 것이다. (9) 順菴先生文集 권16, 雜著, 函丈錄 余幼而落鄕 中嬰疾病 因以失學 摳衣星湖之願多矣 年二十六 始自茂朱來寓廣州慶安面之德谷楸下 貧弊疾憂 恒無寧歲 丙寅十月十七日 始往謁 一宿而歸 丁卯九月二十日 又往謁一宿辭退 戊辰十二月十四日 又往謁留一日 十六日辭歸 前後函 丈承受 凡四日矣 是後辛未歲七月 往候病患 時値宗廟大享 差祭官 翌日徑歸 癸酉三月 自牙山來 將往謁 至振威酒店 僕 夫病甚 時凶染塞路 症情可疑 亦徑還 自後在京司 曹務煩重 甲戌 遭艱下鄕 因爲病廢之人 杜門十年 竟未遂朝夕承誨之計 而先生易簀矣 撫念平昔荷愛之深 恩義兼重 樑摧之感 歲久益切 搜舊篋 得四日日錄 別記于此 以寓微忱云 丙寅十月十六日 自家發行 十七日午後至占剡 踰一小麓 麓盡而有一茅舍 庭畔有一隷見客來 來拜于前 余問知爲先生宅 遂 下馬 使之通告 卽命入 外舍三間 前一間爲土廳 後二間爲房 制甚朴陋 此先生仲氏玉洞所命以六楹齋者也 遂入室進拜 先 生起答甚恭 擧眼見之 長過中人 美鬚髯 眼光射人 頭戴唐巾 而皁帛雙脚 垂後幾尺餘 唐巾上 疊戴布巾 盖去五月 遭室內 喪也 先生問前日相見否 余對以未能 遂告姓名 先生聞之良久 因論我家事曰 幼時嘗謁于安典簿丈 於尊爲何屬 余對以爲曾 王考 嘗經此職 先生又云吾渭陽 與尊四寸大父進士丈 爲友婿 卽第四位桃洞大父 是以習知尊家事 各居異鄕 聲聞莫憑 生 死存沒 全然不相知 吾儕窮弊星散 大抵皆然 因爲之嗟歎 又問余以茂朱寓居事 余畧告本末 時房中有一童子 年可十五六 而容色閑雅可愛 展小學書而看 余意其爲先生之孫 問之果然 兒名如達 辛亥生 萬頃之子也 萬頃名孟休 字醇叟 癸巳生 時 以萬頃縣令 遭內艱在服中 故不在座 先生因問尊之此來緣何 余鞠躬以對云 年幾四十 學未知方 伏聞先生講道之所不遠 向 善誠薄 十年懷仰 今始來謁 先生嘿然 但看言笑樂易 絶無收斂之態 而擧止中度 一見可知爲先生長者矣 余仍問先儒多以大 學格致章本存 而朱子補亡 未必其然 是否 曰 余不知其然也 第本末別爲一章之義 有未可知也 晦齋論 亦不知十分穩當 而 近有一士人 指愼進士後聃 又爲之說 而未知其果得當否也 盖格致章之有無 姑不卞 而但因今文讀之 亦自有餘 何必別爲之 說乎 又曰 君知挈矩之意乎 曰深意所在 實所未曉 先生曰 挈矩當釋曰挈 矩 道 不當曰矩 挈 道 因呼如達 抽大學書而指之曰 所謂平天下云云 上老老上長長 皆是章句所謂上行下效 而上恤孤則民不倍者 不曰上幼幼而民興慈者何哉 慈愛之心 雖至愚之民皆有之 不待敎而知之矣 無父曰孤 必也上恤人之孤 則民心興於忠厚 不 倍故舊矣 此與禮記坊記之民不偝同義 俄而夕食告具 婢子先進床于余前 余少俯身而退 以示不敢之意 復進床于先生前 先 生擧匙而勸飯 余擧匙 先生祭飯 余不祭飯 先生先飯 余遂飯 飯未滿一器 饌則白蝦醢小許 置白砂楪中 一楪置蘿葍葅 又有 土瓠羹 饌味皆醎 可見其節約之意 床器皆潔精矣 進水亦先余 退床亦然 皆用賓主之禮 先生笑曰 余家貧饌薄 故或不合于 客口 或有持其行饌而食者 前此聞鄭某人來食 入其行饌而食之云 傷哉之歎 盖如是矣 然士當以貧爲度 咬菜做百事之語 其 意甚好 日用切緊 莫過於飮食 當於切緊處 先下克己之工 積習旣久 安之若性矣 余請吊于萬頃 先生命如達前導 至喪次行 吊如儀 弔時喪人叩頭受之 前弔愼耳老 其禮如是 今亦然矣 余出復陪坐 因問曰 朱子九拜說 稽顙之稽字 義是稽留之義 無 叩字義 前吊愼進士 今吊喪人 皆行扣首之禮 然則禮註非耶 先生曰 是當從禮註 今俗稽音堦 當爲嵇矣 喪人出來侍坐 俄而 안정복 생애와 행적 67

62 明燈 喪人昏定 行拜而退 先生又曰 大學首章章句 止於是而不遷 是指至善也 不遷 卽止字意 然則止字又帶不遷意 語意重 疊 當從大全 作至 今本作止 至字之誤也 又其下盖必有盡夫天理云云 君知之乎 此言至於至善而不遷之人 則必其心能盡天 理而無人欲之私也 遂引誠意章下小註朱子說必有云云以證之 且曰 盡天理 指至於是也 無人欲 指不遷也 盖人雖有善 而有 欲則遷 不能持久也 又曰 物格而知至之義 君知之乎 余對曰未也 其有深意也歟 先生曰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至國 治而後天下平 其意皆有上一截功夫然後 又有下一截進脩之工 而獨物格而知至云者 物格則知自然至而無進修之工 與下七 句 絶不相同 是未可知也 又曰 權陽村是讀書之人 而作大學圖 無所發明 因曰 我亦有圖 君試觀之 遂出大學疾書 示其圖 又曰 聖學十圖若敬齋 夙夜 小學圖皆未安 獨心學圖頗好 先生又曰 中庸大義 君知之乎 余起而對曰 中庸是性理之原 余何 敢知 先生曰 首章卽中庸篇題 自仲尼曰君子中庸 止索隱章 皆孔子言 而章章有中庸意 是當作孔子中庸 費隱以下 是布叙 至極高明而道中庸 又言中庸字 是爲回題 仲尼上律天時以下 是孔子之行 其上皆孔子之言也 余曰 鬼神章 是但言祭祀 而 繼父母順矣之下 推本而言之 至于鬼神之德耶 曰 此見正好 又曰 正文下音切 皆非朱子所定 何以知其然也 中庸曰 人皆曰 余知 註知作去聲 以章句觀則當作如字 此文句吐人皆曰予知 當連下文讀 不當曰人皆曰予知 讀也 因論孟子 出疾書 論春王正月及井地辨以示之 笑曰 此駁朱子一大妄論 卽欲爲朱子忠臣之意也 恐朱子見之 不大非斥也 又曰 讀庸學 節節有 疑 今人讀書無疑 故學不進 人之爲學 不過此二書 故稍自好者 皆汨沒於此 而竟無所得 可哀也已 時夜稍深 先生謂如達曰 汝可退寢 盖以房狹故也 如達承命拜退 挾其小衾而入 先生曰 假我若干年歲 使之讀易讀詩 庶有所得 因論詩云 風雨如晦 鷄鳴不已 玩味此句 其人必有深憂 自鷄鳴前 已不寐而爲此說也 若當衰亂之際 思克亂之才也 又曰 相鼠有皮 人而無儀 是 譏見人不正其衣冠者而作也 相鼠有齒 人而無止 齒字義有止字有謹言之戒 此譏人不擇言者而發 註釋止字擧止似未然 此止 字當作如字義讀可也 又相鼠有體 人而無禮 體卽四肢皆俱之謂 雖以鼠之微物 尙俱四體而皆有所用 人而無禮乎 此譏人之 無禮而作也 凡讀詩 當細玩諷誦其意之所在 則庶測古人性情之所在矣 又曰 子曰詩三百 一言而蔽之 曰思無邪 今觀朱子集 傳 則淫亂之詩多 朱子雖云惡者可以懲創之 而以鄭衛淫奔之詩弦歌之 而使蕩子情女聞之 曰爾勿爲淫想也 此不成說矣 集 傳所謂淫奔之詩 未必皆淫奔之詩也 又曰 詩三百篇註 朱子曰 詩三百十一篇 然而除笙詩五魯頌六 則恰爲三百篇矣 且小雅 以後 皆以什爲篇 而朱子改正 或爲十一十二 未可知也 又曰 陰陽配合生成 皆出於河圖 仍作圖以示之 又曰 洪範出於河圖 何以知其然也 一二三四 自坎宮左旋順布至巽 六七八九 自乾宮逆布至离是九疇 洛書之數 二居艮八居 坤者何也 余讀至二五事 有肅乂哲謀聖 至八庶徵 又有肅乂哲謀聖 是天人相感之意也 故二八易位 以著天人相與之義 始知 陰陽配合生成 皆出於河圖也 又曰 說卦之說 小註盡之 皆未暢 獨性理會通說卦說甚好 第其合者 才三分之二 序卦之所以序 終不可知 周易折中蕭漢中 說最近 亦有一二不合者矣 尹氏美村集 有序卦說 自云皆合 而實無一合者 可笑 異日君見此書 亦當知之矣 余因鞠躳請敎 曰 今世學術蔑裂 黨議橫流 一邊雖謂淵源有自 而其學惟繳繞於訓詁小註之間 其所誦習 不過庸學心近而已 而多爲利祿所 誘 一邊窮弊不暇 無意於此事 學之所以不講 道之所以不明 實由於此 願聞爲學之要 先生曰 此皆兩邊人之弊 不當以此斷 定立論也 今世豈無豪傑之士 但余未及見耳 一邊之主張世道 自成義理 以爲鉗勒之手段 誠可畏也 學惟在于遜志 遜志學習 之久 義理自熟 心平氣和 其要都在于自己身上 不關他人 雖以繳繞訓詁爲非 若欲泝流求源 無諸儒見成說話 何以求得其是 非乎 然學實不在于此耳 且彼以利祿 我以其實 彼以窮弊不學 我以子路原思事自勵 是所謂善惡皆師 不可指摘彼短 徒致嘵 嘵也 余更請曰 然則奈何 曰橫渠敎人 必先以禮 禮有所據 而日用之切 莫過於是 故孔子曰 立於禮 朱子小學書 卽橫渠之 意也 必先於小學中 爛熟體行 涵養有素 德性自固 此最是作人根基 向前一路 皆自此克拓耳 然學貴自得 必也眞知此事之 貴而自得于心 然後無勉強矯僞之習 而日趨眞正之域 胡安定頭容直三字 不過據古訓而戒之 而徐仲車能推而至于心亦要直 自此不敢有邪心 此非自得之實乎 先生因曰 余多見先輩矣 未有快然自得 有見識者 昔見李固城丈 畏菴栻敬叔 丈曰 儒者 言靜言敬 靜者未必敬而敬者能靜 然心志昏弱者 多偏於靜而有害 此氣質之病 惟在變化之耳 靜實學者之大工 靜然後能讀 書能窮理 此言大有見 又曰 綱目未必皆朱子之筆 又曰 元魏胡太后弑其君某 此母殺子也 凡下殺上曰弑 則似不當書弑 又 曰 書楊雄則死 而李林甫之流 却書卒何也 余對曰 母后殺嗣君 書弑之義 綱目凡例註 已言之 且婦人夫死從子之道而然耶 莽是簒賊 雄爲其臣故死 李林甫之去官 已有貶意 似當止書卒 先生曰 吾未知其然也 余問啓蒙 答曰 本圖書外 原卦畫明 蓍策 多可疑 考變占則退溪已言其非矣 余又問揲蓍法 答曰 揲蓍法 朱子解外 余有薄見 或可備一說矣 先生因解筭囊 計出 6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63 五十籌 手自布蓍曰 朱子以過揲爲陰陽策數 此似艱深難解矣 今當分而爲二以象兩 掛一以象三 揲之以四 以象四時 而直置 揲數 依正文布之 則合之得老少策數 未知如何也 又曰 四營而成卦 本義以爲六畫卦 此又不然 是當爲三畫卦也 以下文知 之矣 下文云八卦而小成 若六畫卦 則當曰六十四卦 何以曰八卦也 引而伸之者 卽引三畫卦而伸之爲六畫卦也 若引繩而伸 長之也 觸類而長之者 謂八卦旣成 而引而伸之 而爲六畫卦八矣 上三爻下三爻 周旋配合 則爲六十四卦矣 又曰 易詩最難 讀 聖人之意 詩人之志 何以能盡得 程子易傳 自謂七分書 其自許亦大矣 詩集傳 朱子自作大旨 未知本意 果皆如是也 故 曰 易不可爲典要 又曰 詩斷章取義 厥有旨哉 要在善讀者當自知之 易中多言九五六二爲正應 然如九五陽剛之君 得九二陽 剛之臣 然後爲相得 故中孚九二曰 鳴鶴在陰 其子和之 陰指二也 子指初也 易多以初爻爲子 又曰 我有好爵 我九五自我也 中孚而後如此 他卦未必是 又曰 六五九二 爲君弱臣強 九五六二 爲君強臣弱 非正應也 又曰 官爵宜不可亢 故升卦不言爵 而至困卦 多言赤祓朱祓 當以爲戒也 又曰 人之所以爲人 只欲保守此心而已 是以聖賢所言 惟此心而已 學者所明 惟此心 而已 眞西山之心經 可謂有功於心學 而但以經書年代次第而編之 此不必然矣 當取聖賢論心文字 以心學門路次第編定 不 必拘於年代也 余甞倣而爲之 今失其本矣 又曰 諸學無所難 而惟經學最難 經學有文字 猶可憑依 至若事務 則本無形體 最 爲難知也 夜分後 先生脫布巾 只着唐巾 余問雙脚垂後之義 與俗制不同何也 先生笑曰 此四脚巾之遺制也 古者巾以方幅爲 之 二方二小帶 二方二大帶 盖之于頭上 以二小帶環䯻而紐之 二大帶垂於後 名四脚巾 不獨爲奔喪之制也 今之唐巾 前同 心結 小帶環紐 又繞結于當腦處 皆四脚巾之遺意 而余則大其帶而垂之耳 又曰 古人頭上元服有三 巾也冕也弁也 丘濬博學 人也 不識儀禮有巾 以爲古人無巾 讀書之難如是矣 又曰 死者之掩 卽巾類也 但無垂帶 今之笠 亦弁之制 傳訛失之矣 殷 冠曰冔 太師東來 其冠冔 漸漸失制而爲笠 笠古高句麗所稱折風巾也 中國人今猶以東人笠子爲折風巾 巾名盖久矣 李白詩 風花折風巾 盖今喪人方笠 爲四葉合附成之 似花瓣 故云風花 方笠及今笠 本以一制而分爲二也 余又問道袍之義 答曰 此 古大裘之制 吾有所著說矣 古人不必以毛衣爲裘 至唐猶然 因誦李白五雲裘詩十餘句曰 此何嘗言毛所成乎 又曰 道袍是大 裘遺制 賤者不可服 不若深衣之爲上下通用也 幅巾非古 出於東漢 將士平居服之 以爲高致 然是似是胃 鍪裏疊戴者也 朱 子之着 恐因司馬公 而誠未可知也 又曰 雖斂死者唐巾道袍 亦可矣 俄而鷄數鳴矣 先生遂就寢 命之卧 才一宿而已昧爽矣 先生復起曰 平生興居之節 以人定後昧爽時爲定矣 未幾 喪人及如達次第來拜謁 退而侍坐 先生復論昨日絜矩之義曰 矩 絜 意 終不成說 今以刀割物 當曰刀割 不當曰割刀 以杖擊物 當曰杖擊 不當曰擊杖 今若釋以矩 絜 則 當曰矩絜 不當曰絜矩 是以知其爲絜 矩 也 先生曰 士當致知爲學 歸重于實行 然而淳謹之人 止務踐履 循塗 守轍而已 故見處終不灑然 士當以知識爲主 又曰 世人皆謂程朱以後 經書文義大明 無復餘蘊 只當遵之而已 此說大槩然矣 猶有未安 聖賢之所求於後人者 欲以講明此義理 其意豈謂之無復餘蘊而不使後人言之耶 此非程朱之本意也 余對曰 敢禀此 亦有兩般 若行成德立 知解卓越者 誠如所敎 若新學後生知識未定 而專以知解爲主 求過于前輩 則必有好新務奇之習 有輕 視前輩之患 然則謹守䂓矩之論 實是立法之大經 未審如何 先生曰 誠然 余曰 敢問他人或有聞風而來見者乎 曰西人學問 專以謹守䂓矩四字 爲涉世無病敗之斷案 故知識終甚鹵莽 爲可恨也 世途危險 余是畏約人也 何敢有一毫求知之心 而西人 或多來見 自是傷弓之鳥 常恐有何機關在中也 雖盡我之所見 彼之信否 何可知也 若謂之聞風許與而來見云 則全未全未 余 鞠躬復請曰 先生所論 宏深博大 斗筲小才 無以領略 今當辭退矣 願聞敎 曰先習靜坐 請讀何書 先生笑曰 此答誠難 可讀 大學 小學不必讀 又曰 今世禮學漸亡 西人則止于沙溪 嶺人則止于退溪 君若爲禮學 則先讀三禮 以求其源 又曰 親舊間 不見有進學者 家兒孟休禮學頗有據 渠亦有所著 舍侄秉休學問明透 少輩無有過之者 可歎人才之無多也 又曰 有尹東奎者 居仁川 見解明悟 不易得之人也 古之尹子六經之文 如誦己言 今此人不惟誦之 能解其義 但貧窮飢欲死 可歎 俄而朝食告 具 食畢 少坐告退 先生曰 吾多費妄談 中有可採者 君試思之 及起 先生復曰 君年富力強 當務知識 知識明然後 行路坦然 無碍 余拜 先生起而答之 遂退歸 함장록 - 성호 이익을 찾아뵙고 나눈 대화내용을 정리한 자료이다. 내가 어려서 낙향한 이후로 중간에 병이 드는 바람에 학문의 기회를 놓쳤는데, 성호 선생星湖先生을 찾아뵙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나이 26살에 비로소 무주茂朱에서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德谷의 선산先山 아래에 와서 살게 안정복 생애와 행적 69

64 되었으나, 가난과 질병으로 언제나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병인년(1746, 영조 22) 10월 17일에 처음으로 찾아가서 뵙고 하룻밤을 잔 다음 돌아왔고, 정묘년 9월 20일에 또 찾아가서 뵙고 하룻밤을 잔 다음에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으며, 무진년 12 월 14일에 또 찾아가서 뵙고 하루를 묵은 뒤 16일에 작별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으니, 그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모 두 4일이다. 그 뒤 신미년 7월에 찾아가 병문안을 드렸으나, 마침 종묘의 대향 大 享 에 제관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이튿날 바로 돌아 오고 말았다. 계유년 3월에 아산 牙 山 에서 돌아올 때에 찾아뵙고자 하여 진위 振 威 의 주점 酒 店 까지 갔으나, 복부 僕 夫 가 병이 심 하게 났는데 그때 나쁜 전염병이 연로 沿 路 에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증세가 의심스러워서 역시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로는 서울의 관사 官 司 에 있는 관계로 공무가 번중 煩 重 하였으며, 갑술년(1754, 영조 30)에 친상 親 喪 을 당해 시골에 내려 와서는 그만 병폐 病 廢 한 사람이 되어 10년간을 두문불출하였다. 그리하여 끝내 조석으로 가르침을 받으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평소에 받은 깊은 사랑을 생각하면 은혜와 의리가 모두 크고, 동량 棟 樑 이 꺾 인 듯한 감회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기만 하다. 그래서 옛 상자를 뒤적여 4일간의 일록 日 錄 을 찾아서 여기에 따로 기 록함으로써 작은 정성을 부치는 바이다. 병인년 10월 16일에 집에서 떠나 17일 오후에 점염 占 剡 에 이르렀다. 작은 산기슭을 하나 넘자 그 산기슭이 끝나는 곳에 모사 茅 舍 가 한 채 있었는데, 마당에 있던 하인 하나가 찾아온 손님을 보고 앞에 와서 절을 하였다. 내가 물어보아 선생의 댁 이라는 것을 알고 드디어 말에서 내려서 알리게 했더니 즉시 들라고 하셨다. 외사 外 舍 는 3칸으로, 앞의 한 칸은 토청 土 廳 이고 뒤의 두 칸은 방으로 만들었으나 규모가 매우 소박하고 누추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중씨 仲 氏 옥동공 玉 洞 公 이 육영재 六 楹 齋 라고 명명한 것이다. 마침내 방에 들어가서 선생께 절을 올리니 일어나서 답례하기를 매우 공손히 하셨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 통 사람보다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눈빛이 사람을 쏘아보았다. 머리에 당건 唐 巾 을 썼는데 검은 명주로 된 두 끈이 뒤로 2, 3자 남짓 늘어져 있었으며, 당건 위에는 포건 布 巾 을 겹쳐 썼으니, 대개 지난 5월에 실내 室 內 의 상을 당했던 것이다. 선생이 전에 만난 적이 있었냐고 묻기에 내가 없었다고 대답하고 드디어 성명을 고하였다. 선생이 듣고 한참 있다가 우 리집의 일에 대해서 논하시기를, 어릴 때 일찍이 안 전부 安 典 簿 어른을 뵌 적이 있는데, 그대에게는 어떻게 되는가? 하므로, 내가 증조부께서 일찍이 그 벼슬을 지내셨다고 대답하였다. 선생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의 외숙 外 叔 이 그대의 4촌 대부 大 父 인 진사 어른과 동서간이라네. 곧 제 4위 位 인 도동대부 桃 洞 大 父 이다. 그래서 그대 집안을 잘 아는데, 각기 다른 고을에 살다 보니 소식을 듣지 못하여 생사와 존몰 存 沒 을 전연 서로 모르고 지냈지 뭔가. 우리가 가난하고 피폐하여 뿔뿔이 흩어진 것이 대개 다 그렇다네 하고, 인하여 탄식하셨다. 또 나에게 무주 茂 朱 에 우거 寓 居 하는 일을 묻기에 그 경위를 대강 말씀드렸다. 이 때 방 안에서 나이는 15, 6세가량 되어 보이고 한아 閑 雅 한 얼굴의 사랑스러운 동자 童 子 하나가 소학 小 學 을 펴 놓고 읽고 있 었는데, 아마도 선생의 손자인 듯하여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명은 여달 如 達 이고 신해생 辛 亥 生 으로 만경 萬 頃 의 아들이다. 만경은 이름이 맹휴 孟 休 이고 자는 순수 醇 叟 이며 계사생 癸 巳 生 인데, 이때에 만경 현령을 지내다가 내간상 內 艱 喪 (모친상)을 당해서 복중 服 中 에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선생이 인하여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를 물었으므로 내가 허리를 굽히고 대답 하기를, 나이가 거의 40이 되었으나 아직도 학문의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도 道 를 강론하시는 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선 善 을 지향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10년 동안 우러러 사모하다가 이제서야 찾아와 뵙습니다 하였는데, 선 생께서는 거기에 대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나 즐겁고 편안하게 말씀하고 웃으시어 전혀 단속하는 태도가 없고, 거지 擧 止 가 법도에 맞는 것을 보고는 첫눈에 선생 장자 先 生 長 者 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어서 묻기를, 선유 先 儒 들이 대부분 대학 大 學 의 격치장 格 致 章 은 본래 있던 것으로서 주자 朱 子 가 보망 補 亡 하였다는 주장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습니 까? 하니, 말하기를, 나는 그런지를 모르겠다. 다만 본말 本 末 을 따로 한 장으로 만든 뜻은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회재 晦 齋 가 논한 것도 십분 온당한지를 모르겠지만, 근래에 어떤 사인 士 人 진사 신후담 愼 後 聃 을 가리킨다. 이 말한 설은 과연 타당성을 얻 었는지 모르겠다. 대개 격치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우선 따지지 말고, 다만 현재의 문장을 가지고 읽으면 그 또한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굳이 별도로 설을 만들어 내겠는가 하였다. 7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65 (중략) 조금 있다가 저녁상이 들어오는데 계집종이 내 앞에 밥상을 먼저 올렸다. 나는 약간 몸을 굽히고 물러나서 감히 먼저 받을 수 없다는 뜻을 표하니, 다시 선생 앞에 상을 올렸다. 선생이 수저를 들고는 식사를 권하므로 나도 수저를 들었다. 선생은 제반 祭 飯 하였고 나는 제반하지 않았다. 선생이 먼저 진지를 들기 시작한 후에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밥은 그릇에 차 지 않았으며, 반찬은 새우젓이 흰 사기접시에 조금 담겨 있고, 나박김치가 한 접시였으며, 또 토호갱 土 瓠 羹 반찬이 있었는데, 맛이 모두 짰다. 이것을 통해 그 절약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또 상과 그릇들이 모두 깨끗하였다. 물도 나에게 먼저 올리고 상 을 물리는 것도 역시 그랬으니, 모두 손님과 주인의 예 禮 로 한 것이다.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집이 가난해서 반찬이 초라하기 때문에 손님의 입맛에 맞지 않다 보니 더러는 자신이 가지고 온 반찬을 먹는 사람도 있다네. 하였다. 전에, 정모 鄭 某 라는 사람이 와서 식사를 할 때 자기가 가지고 온 반찬을 들여와서 먹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마음 아파하는 탄식이 대개 이러하였다. 그러나 선비라면 응당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법도를 삼아야 할 것이다. 나물을 씹는다면 모든 일을 할 수 있 다. 는 말은 그 뜻이 매우 좋다. 일상생활 중에서 먹는 일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으니, 가장 긴요한 일에서 먼저 자신의 사욕 을 이기는 공부를 해나가서 오랫동안 습관이 쌓인다면 마치 본성과 같이 편안해질 것이다. (중략) 선생이 또 말하기를, 대학 大 學 의 수장 首 章 에 대해 장구 章 句 에서 지어시이불천 止 於 是 而 不 遷 이라고 했는데, 시 是 는 지선 至 善 을 가리키며 불천 不 遷 은 즉 지 止 자의 뜻이다. 그렇다면 지 止 자 또한 불천 不 遷 의 뜻을 내포하여 뜻이 중복된다. 그러니 응당 대전 大 全 에 따라서 지 至 로 해야 할 것이다. 금본 今 本 에 지 止 로 된 것은 지 至 자의 착오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개필유진부천리 蓋 必 有 盡 夫 天 理 운운한 뜻을 그대는 아는가. 이 말은 지선 至 善 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 사람은 필연코 그 마음이 천리를 다할 수 있어서 사사로운 인욕 人 欲 이 없다 는 말이다 하고, 마침내 성의장 誠 意 章 아래 소주 小 註 의 주자 설인 필유 必 有 운운한 것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진천리 盡 天 理 는 지어시 至 於 是 를 가리키는 것이며, 무인욕 無 人 欲 은 불 천 不 遷 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개 사람에게 선이 있더라도 인욕이 있으면 옮겨가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 하기를, 사물의 이치가 이르면 앎이 지극해진다[ 物 格 而 知 至 ] 는 말의 뜻을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알지 못 합니다. 거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루어지고 마음이 바루어 진 뒤에 몸이 닦아지는 것으로부터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편안해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뜻은 모두 윗 단계의 공부 를 한 다음에 다음 단계의 공부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사물의 이치가 이르면 앎이 지극해진다 는 것만 은 사물의 이치가 이르면 앎이 저절로 지극해진다고 하여 단계를 높여 수행하는 공부가 없는바, 그 아래의 일곱 구절과는 전 연 같지 않으니, 이것이 알 수 없는 점이다 하고, (중략) 또 말하기를, 중용 과 대학 을 읽으면 구절마다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글을 읽으면서도 의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학문이 진전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다소나마 스스로를 중히 여기는 자는 모두 이 책에 골몰하지만 끝내 얻는 바가 없으니, 애 석할 뿐이다 하였다. (중략) 내가 인하여 국궁하고 가르침을 청하기를, 지금 세상은 학술 學 術 이 지리멸렬하고 당론 黨 論 이 들끓고 있습니다. 한 쪽 편은 비록 연원이 있다고 하나 그 학문이 단지 훈고 訓 誥 와 소주 小 註 에만 얽매이고 송습 誦 習 하는 바가 중용 대학 심경 心 經 근사록 近 思 錄 에 불과하여 대부분 이록 利 祿 에 이끌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한쪽 편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겨를이 없어서 이 일에 대하여 뜻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문이 강명 講 明 되지 못하고 도리가 밝혀지지 않는 것이 실로 여 기 원인이 있으니, 원컨대 학문하는 요지를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양쪽 사람들의 폐단이다. 그 러나 이것만으로 단정하여 입론 立 論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세상이라고 어찌 호걸의 선비가 없겠는가. 다만 내가 아직 보지 못 했을 뿐이다. 한 쪽에서 세도 世 道 를 주장하여 스스로 의리를 만들어서 상대방을 얽어넣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두려 운 일이다. 학문이란 다만 뜻을 겸허히 가지는 데 달린 것이다. 뜻을 겸허히 가지다 보면 오랫동안 학습하는 동안, 의리가 저 절로 성숙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화평하여질 것이다. 그 요지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으로서 남과는 상 관이 없다. 비록 훈고에 매달리는 것이 옳지 않기는 하지만, 만약 학문의 근원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여러 선유 先 儒 들이 터득 하여 이루어놓은 말씀들이 없이 어떻게 그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학문이 실제로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닐 뿐이 안정복 생애와 행적 71

66 다. 또 저들은 이록利祿을 쫓아가더라도 나는 그 실상만을 추구하며, 저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배우지 않더라도 나는 자로子 路나 원사原思처럼 배움에 열중하여 스스로 노력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선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남의 단점을 지 적하여 시비만 따져서는 안 된다 하므로, 내가 다시 청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말하기를, 횡거橫渠가 남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먼저 예禮로써 하였다. 예는 근거할 바가 있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의 절실함이 이보다 더한 것 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예禮에서 선다[立於禮] 한 것이다. 주자朱子의 소학小學 은 곧 횡거의 뜻이다. 반드시 먼저 소 학 에 힘써서 완전히 익혀 체득하여 행한다면 함양涵養에 바탕이 있고 덕성이 저절로 확고해 질 것이니, 이것이 사람을 만드 는 가장 중요한 근기根基인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모두 이로부터 극복하여 확충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학문 이란 자득自得하는 일이 귀한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 일이 귀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아서 스스로 마음에 터득해야만 억 지로 하거나 가식적으로 하는 버릇이 없어져서 날로 진정한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호안정胡安定의 머리의 자세를 바르게 하라[頭容直] 는 세 글자는 옛 훈계에 의거해서 경계한 것에 불과한데, 서중거徐仲車 가 능히 이를 미루어서 마음까지도 바르게 하고자 하여 이로부터 감히 사악한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이것이 스스로 터득한 실체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선배들을 많이 보았지만 시원스럽게 자득自得하여 견식이 있는 자 는 없었다. 전에 이고성李固城 어른(畏菴 李栻인데 자는 敬叔)을 뵈었더니 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정靜을 말하고 경敬을 말하는데, 정하는 자가 반드시 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하는 자는 능히 정한다. 그러나 심지心志가 혼매하고 나약한 자는 흔 히 정에 치우쳐서 해로움이 있다. 이것은 기질의 병으로서 변화시키는 데 달렸을 뿐이다. 정靜은 실로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 의 중대한 공부로서, 정한 뒤라야 능히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은 크게 뛰어난 점이 있다. 하고, (중략) 또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 경서經書의 문의文義가 크게 밝혀져서 더 이상 미진한 것이 없으므로 단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는데, 이 말이 대체로 그렇기는 하지만, 온당하지 않은 점 도 있다. 성현이 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로써 의리를 강명講明하게 하려는 것인데, 그 뜻이 어찌 더 이상 미진함이 없다고 여겨 후인으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정주程朱의 본뜻이 아니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감히 말 씀드립니다만, 이 또한 두 가지 구별이 있겠습니다. 만약에 도덕과 행실이 확고히 서고 지식과 이해가 탁월한 자는 참으로 말씀한 바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배우는 후생들이 지식이 정해지지도 않아서 전적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전배前輩들을 능가하려 한다면 필연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에 힘쓰는 버릇이 생기고 전배들을 경시하는 병 통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정해진 법도에 맞는 이론을 잘 지키는 것이 진실로 법도를 세우는 대경大經일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참으로 그렇다 하였다. (중략) 36세(1747, 영조23) * 윤동규尹東奎와 편지로 서경書經 에 대해 토론함 * 성호 선생을 뵙고 편지도 올림 (10) 順菴集年譜 二十三年丁卯 先生三十六歲 春 與邵南尹公書 論書經泰誓義 尹公名東奎 與先生同門 操履篤實 爲世所稱 先生與之往復書牘 論學講道 交誼甚密焉 九月 往謁星湖先生 上星湖先生書 有冠禮問目答書 有曰別紙再三諦看 考校精詳 今世之禮數有託云 十二月 上星湖先生書 論卦變之說 又請一言之敎 爲終身體行之資 答書有曰今見來書 大非俗學撈摸之比 此果吾黨之有 其人 而恰慰餘生之望 又云有志之士 必先從主靜持敬上用力 方是脩行立命之基云 7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67 영종대왕英宗大王 23년 정묘(1747), 선생의 나이 36세. 봄에 소남邵南 윤공尹公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경書經 태서泰誓의 뜻을 논하다. 윤공의 이름은 동규東奎로, 선생과 동 문同門이며, 지조와 행실이 독실하다고 세상에서 칭해졌다. 선생이 그와 더불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문을 논하고 도를 강 마하였는데,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9월에 성호 선생에게 가서 배알하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관례冠禮에 대한 문목問目에 대해 성호 선생이 답한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별지別紙에 쓰인 것을 재삼 자세히 보니 상고하고 교정한 것이 정밀하고도 상세하여 오늘날 세상의 예수禮數를 맡길 곳이 있겠다 고 하였다. 12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괘변卦變의 설에 대해 논하고, 또 한마디 가르침을 내려줌으로써 종신토록 체득 하여 행하는 바탕으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답서에 이르기를, 지금 보내 온 편지를 보니 속학俗學들이 맹목적으로 더듬어 찾는 데 비할 바가 전혀 아닌바, 이는 과연 우리 당黨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의 여생의 바람에 몹시 위로 된다 고 하고, 또 이르기를, 뜻이 있는 선비는 반드시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 흔들리지 않게 하고 공경스런 마음가짐을 견지 하는 데에서부터 공부하여야만 하니, 이것이 행실을 닦고 본성本性을 보전하는 기반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11)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李先生書 先生諱瀷[丁卯] 兩度造謁 出於積歲尊慕之誠 非敢謂此陋質可以承敎矣 月前邵南便 忽伏承手書 仰審初寒動止萬安 馳慰遙深 第蒙不鄙 仰質疑禮 逐件指敎 賜諭勤厚 有不敢承當者 悚惶退縮之餘 得以見與進不保往之盛心 而自幸不見棄於並世之大人君子 則 顧此下品之質 或有從善之望矣 感頌無已 信後月改 冬候不適 伏問靜養氣候一向康寧否 仰德之懷 靡日而弛 鼎福拜違以後 忽已數月 親癠身恙 殆無寧日 加以荒年 窘束殊甚 無展卷之暇 目看天賦之衷 日就顚倒 而莫之知救 良自悼歎 鼎福幼而失 學 長迷厥方 不知目前大路明白坦蕩 自易尋覓 而浪自奔忙于百歧千逕之間 若夫歷代諸史世務經綸之書 至如兵謀數術陰陽 駁雜之類 靡不欲究 而本原不厚 立心太躁 竟無所得 而年踰三十 默自循省 愧咎交積 思欲就正於當世之君子 幸若憐而敎 之 則雖不移之質 庶有善反之機矣 然而家貧身病 徒步從師之計 終違素誠 所願不過守定冊子 爲鄕里之一小儒耳 由前而言 則立志虛遠 終無所當 由後而言 則志氣摧落 甘趣卑下 一人之身而兼過不及之病 如此而不爲小人之歸者 幾希矣 元來氣質 輕踈愚妄 故變化之難 至於如此 乞從此猥蒙不棄 頻加箴砭 指示正路 則何幸如之 古人有以不遠復三字 爲三字符 又論誠 自不妄語始 皆終身受用 爲世大儒 此雖不敢倫比於今日 而區區請益之意 願得一言之敎 欲爲沒身體行之地 受病之由 已陳 於上 明示對症之藥 千萬伏望 冬前切欲造拜 而屢圖欵段不得 又當專伻仰復 而僮指無可使者 玆因邵便轉達 不敏之罪 無 所逃也 禮書浩穰 卒難硏究 每以爲憂 前日賜書中所着禮說下惠之諭 伏感伏幸 易理深奧 有非後生所能強探者 而卦變之說 終有難通處 畧記所疑別紙仰呈 下示幸甚 義當無隱 故辭涉僭猥而不知止 主臣主臣 餘伏祝若序增福 以慰瞻仰 不宣 성호 이 선생께 올림[上星湖李先生書](선생의 휘는 瀷이다. 정묘년) 두 차례나 뵈려고 갔던 것은 해를 두고 존경하고 사모해오던 정성으로 그랬던 것이지 이 비루한 물건이 감히 무엇인 가 배울 수 있다 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달포 전에 소남邵南을 통해 보내주신 서한을 받고 이어 초겨울에 건강이 매 우 좋으심을 알게 되어 너무나 위안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질문 올렸던 의례疑禮에 관해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가르쳐 주시고 또 감히 감당 못할 은근하고 후덕하신 말씀까지 있어 황송하고 몹시 불안한 한편 상대의 과거야 어 찌되었든 현재의 마음만을 받아 주시는 그 훌륭함을 읽을 수 있었고 또 저 자신 다행히도 한 세상을 살고 있는 대인군자에 게 버림을 받지 않아 이러한 하품下品의 자질로서도 앞으로 선한 쪽으로 인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어 감격하고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안정복 생애와 행적 73

68 그 후로 달이 바뀌어 겨울 기후가 사람 몸에 맞지않은데, 정양 중의 기후氣侯는 한결같이 강녕하신지요? 덕을 사모하는 마음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답니다. 정복鼎福은 선생님 곁에서 물러온 이후 어느새 몇 달이 지났으나 그 동안 어버이 병환 아니면 제 몸이 아파 편한 날이라곤 거의 없었는데다 흉년까지 겹쳐서 군속이 너무 심해 책을 펴볼 짬이라고는 없었기 때문 에 이 마음이 날이 갈수록 잘못된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알면서도 손을 쓸 길이 없이 그저 슬퍼하고 한탄만 하고 있답니다. 정복이 어려서 배울 기회를 놓쳤고 자라서도 방향을 몰라 스스로도 찾기 쉬운 눈앞의 탄탄대로가 있는 것을 모르고 허랑하 게 백 갈래 천 갈래 길 속에서 바쁘게 헤매면서 역대 사책史冊을 비롯하여 세상을 경륜하는 글에서부터 심지어는 병모兵謀ㆍ 수술數術ㆍ음양陰陽 등등 온갖 종류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다 캐보려고 욕심을 부렸지만 원래 뿌리가 든든하지 못한 데다 마음까지 너무 조급하여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나이만 서른이 넘었습니다. 스스로 가만히 과거를 살펴봄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겹쳐 지금이라도 당세의 군자를 찾아 그 동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다행히 안타깝게 여기 시고 가르쳐 주시면 비록 아주 어리석은 바탕이지만 그래도 다시 좋은 길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고 몸은 병들어 스승 찾아 길을 누비려던 평소의 계획은 끝내 이루기가 어렵게 되었고, 기껏 바라는 것이라곤 그저 책자나 지키고 앉아서 한 시골의 일개 소유小儒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앞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의지가 확고하지 못하고 허망한 꿈만 꾸다가 끝내 하나도 맞는 데가 없었던 것이고, 뒤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뜻과 기개가 이미 꺾 여 하급 인간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것이니, 한 사람이 이 같은 과불급過不及의 두 병을 함께 갖고 있으면서야 결국 소 인이 안 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질이 원래 경솔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이를 변화시키기가 이다지도 어려우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라도 그저 버리지만 마시고 자주 따끔한 교훈을 내리시어 바른 길을 가도록 해 주시면 이보다 다행히 어디 있겠습 니까. 옛 분이 불원복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삼자부三字符로 삼은 이가 있었고, 또 성誠을 하자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일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도 하여 그것을 한평생 교훈으로 삼아 세상의 대유大儒가 된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인古人의 경우 를 오늘 저의 처지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가르침을 바라는 구구한 저의 뜻은 한 마디 말씀이나마 받아서 종 신토록 실행에 옮길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 병통의 원인에 관하여는 위에다 이미 개진한 바 있으니, 그 증세에 맞는 약을 일러 주시기를 천만 번 바라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꼭 한번 가 뵈려고 누차 조랑말을 마련해 보려 했으나 뜻대로 안 되었고 또 일부러 사람을 보내 답서 를 올려야 했지만 그 역시 시킬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야 소남 편에 글월을 올리고 보니 불민한 죄 피할 길 이 없습니다. 예서禮書는 범위가 넓고 분량도 많아 금방 연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늘 걱정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날 주신 서한에서, 저술하신 예설禮說 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이 계시어 너무 감격하고 너무도 다행스러웠답니다. 그리고 역 易 은 이치가 심오하여 후생이 억지로 캔다고 하여 될 일이 아니거니와, 그 중에서도 괘변卦變의 설은 끝내 알기 어려운 곳 이 있기에 의심나는 대목을 대략 별지別紙에 적어 올리오니 가르쳐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의리상 당연히 숨김이 없 어야 하는 사이여서 참람하고 외람된 말을 마구 하였으니, 황공하고 황공하옵니다. 계절 따라 더 많은 축복을 받으시어 사모 하는 이들 마음에 위안을 주시기를 엎드려 빌면서 이만 줄이옵니다. 37세(1748, 영조24) * 성호선생 찾아뵘. 홍범연의洪範衍義 초草함 (12)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 戊辰 前上一書 雖甚狂謬 實出衷赤 不欲爲掩惡之小人 而自盡其固陋矣 伏蒙元日賜書 大度包容 不以罪而敎之 指示本原 勉 勵益篤 眞若有可敎者然 莊誦感佩 不知所諭 竊恐資淺而質下 氣輕而志弱 一時從善之念雖切 悠久剛制之德不足 自欺之過 7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69 又能欺于先生長者之前 則罪固不容誅矣 惶悚之餘 反而思之 若或因此不失其良心而稍去太甚 使此生之前 知善之當爲與惡 之當去 不終爲醉生夢死之歸 則是先生之賜也 何幸何幸 邵二泉語 誠覺有病 試以自己受病處言之 內而本地不固 故恐有始 勤終怠之慮而務爲自恕之態 外而畏人非笑 故常思同流合汚之計而求免世俗之譏 半上落下 終至於內外俱亡 盖由於假道學 之言誤之也 今承下諭 益切敬仰 主靜居敬 自初學至成德 不過惟此二者而已 顧念庸下 實有不敢當於學問之工程 以是悚懔 恐負今日提敎之恩耳 성호 선생께 올림[上星湖先生書](무진년) 전번에 한 차례 올렸던 서한이 내용은 비록 거칠고 잘못되었어도 사실은 제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악을 숨기는 소인은 되고 싶지 않아서 제 스스로 그 고루함을 다 말씀 올렸던 것인데, 정월 초하룻날 보내주신 서한을 받아보니 넓은 도량으로 감싸시어 탓하지 않으시고 본원本原을 제시하여 더욱 도탑게 면려해 주시어 마치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사 람인 것처럼 대해 주셨기에, 목소리를 가다듬어 읽어 봄에 감격스럽기만 하여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염려 스러운 것은 자질이 원래 하품이고 지기가 경망 유약하여 선한 쪽으로 가보려는 생각이 일시적으로는 비록 절실했다가도 지 속적이고 강인한 덕이 부족해서, 결국 자신을 속이고 또 선생 장자까지 속이게 되었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너무 황송한 나머지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이를 계기로 이 양심을 잃지 않고 매우 심한 잘못이나마 고쳐 나가 이 생이 다하기 전에 선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악은 당연히 버려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결국 취생몽사로 끝나버리지 나 않게 된다면, 그 모두는 선생님의 덕택일 터이니, 그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소이천邵二泉의 말은 말씀하신 대로 흠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자신이 병통을 지니게 된 대목을 들어 말하자면 안으로 는 바탕이 굳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지런했다가도 끝에 가서 해태해질 염려가 있어 되도록이면 자기에게 관용을 베푸 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고, 밖으로는 남이 비웃을까 무서워서 유속流俗을 따라 행위를 함께 하며 세상 사람들 비난이나 면 해볼까 늘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절반쯤 올라갔다가는 도로 떨어져 끝에 가서는 안팎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으 니, 도학道學의 말을 빌어써서 그르친 데 그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가르쳐 주신 내용을 받고 보니 앙모의 정이 더욱 간절합니다. 주정主靜과 거경居敬이 둘은 처음 학문하는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덕德을 이룬 사람에 이르기까지 더할 나위 없이 긴요한 공부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돌아보건대 너무 용렬하여 이러한 학문의 공정을 실로 감당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때 문에 송구하오니, 오늘 가르침을 내려 주신 은덕을 저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38세(1749, 영조25) * 성호와 편지로 학문 토론.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장사랑將仕郞 만녕전萬寧展 참봉에 제수되어 12월에 부임함 (13) 順菴集年譜 二十五年己巳 先生三十八歲 正月 承星湖先生書 李先生以先生初有方術之名 世人妄相傳道 故疑或眞有是事 貽書戒之 且有改名之敎 先生答書曰 鞱 晦一節 謹當服膺 而改名事 終欠平正道理 名雖改而此身則猶夫人也 此當盡其在我者而自守之耳 未敢承命云 李先生答書 曰 前書云云 只是愛莫助之 妄有商量 要處以微服之意 今當以公言爲正 處心行事 用此爲率 何憂不至於光明耶 三月 入童蒙敎官末擬 時先生令聞日彰 政官有是擬 五月 除厚陵參奉不赴 擬敎官時 以經學懸註 而政官或慮先生之不仕 又以勳嫡懸註時參判公在世 先生嫌其失序不赴 其 上星湖先生書 有云曩日蒙師 擬以經學 今者寢郞 註以門蔭 經學則無其實 門蔭則失其序 二者皆不可冐出 或言呈于天曹 안정복 생애와 행적 75

70 明其失次不仕之由 而此却有嫌 不過欲滿限自止之耳 然而無妄之福 非喜伊懼 日後復爾 則不知將何以處之也 十一月 除將仕郞 萬寧殿參奉 出謝恩命 十二月 赴任 영종대왕英宗大王 25년 기사(1749), 선생의 나이 38세. 1월에 성호 선생의 편지를 받다. 성호 선생이 처음에 선생이 방술方術을 잘한다는 이름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이를 서로 전하므로, 혹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의심하여 편지를 보내 경계한 것이며, 또 이름을 고치라는 가르침이 있 었다. 선생이 보낸 답서에 말하기를, 재능을 감춘 채 숨어서 지내라는 한 구절에 대해서는 삼가 마땅히 분부대로 명심하겠 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끝내 평정平正한 도리道理에 있어서 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을 비록 고친 다고 하더라도 이 몸은 여전히 그 사람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저에게 있는 본성을 다 발휘하여 스스로 잘 지키 기만 하면 그만인 것으로, 감히 명대로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였는데, 성호 선생의 답서에 이르기를, 앞서 보낸 편지에 서 운운한 것은 단지 사랑하면서도 도와주지 못하겠기에 망령되이 헤아려 본 것으로, 그대의 재주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었 다. 지금 그대의 말이 옳으니,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것으로 표준을 삼는다면 광명한 영역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3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마지막 의망擬望에 들다. 이때 선생에 대한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퍼져 나갔으므로 이러한 정관政官의 의망이 있게 된 것이다. 5월에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동몽교관의 의망에 들었을 때 경학經學으로 현주懸註하였는데, 정관이 혹 선생이 부임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훈신勳臣의 자손이라고 현주하였다. 이때 참판공이 살아 있었으므로 선생은 차서를 잃는 것을 혐의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동몽교관으로 의망하면서는 경학으로 현주하여 의망하고, 참봉으로 제수하면서는 문음門蔭으로 현주하여 의망하였는데, 경학이 뛰어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고, 문음의 경우에는 차서를 잃는 것이어서, 두 직책에 모두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혹 자는 이조吏曹에 글을 올려서 차서를 잃어 부임하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혐의스러운 바,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서 스스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뜻밖에 오는 복은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인바, 훗날에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장차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11월에 장사랑將仕郞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됨에 나아가서 은명恩命에 사은하다. 12월에 부임하다. (14)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己巳] 潦暑比酷 伏問道體起居萬安 令胤病情若何 伏慕不任區區 鼎福疾憂叢裏 工夫專廢 從前冀無大過者 惟其日對古典 以爲 禁惡之法文 今歲將半 而不讀一卷書 此心將何所湊泊 實理將何以見得 惟自悶憐 小學聞命以來 常置案上 而昨非甚多 愧 懼交深 一命之除 誠出慮外 除目初來 不知以何懸注 後聞前日蒙師 擬以經學 今者寢郞 注以門蔭 經學則無其實 門蔭則失 3其序 二者皆不可冐出 或言呈于天曹 明其失次不仕之由 而此却有嫌 不過欲滿限自止之耳 然而无妄之福 非喜伊懼 日後 復爾 則不知何以處之也 尹丈書中 先生諭以經學擬注 則審愼其出處云 故敢幷告之 餘不宣 성호 선생께 올림[기사년] 장마에 무더위가 요즈음 극성인데 도체道體 기거가 만안萬安하시며 아드님 병세는 또 어떠한지요? 사모하는 구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정복鼎福은 질병 우환 속에 싸여 공부라곤 전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전에 큰 허물이나 없어야겠다는 7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71 바램으로 날마다 고전古典 대하는 것을 유일한 금악禁惡의 법문法文으로 삼아왔는데, 금년에는 한 해가 절반이 거의 가도록 책이라곤 한 권도 읽지 못했으니 이 마음이 정착할 곳이 어디이겠으며 실리實理를 무슨 방법으로 깨닫겠습니까. 저 스스로 민망하고 가엾을 뿐이랍니다. 소학小學 은 말씀을 듣고부터 늘 책상 위에 두고는 있습니다만 지난 시절 잘못이 매우 많아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하답니다. 제가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관직에 제수된 것은 참으로 뜻밖이라 제목除目이 처음 왔을 때 무슨 까닭으로 이렇듯 성은을 입게 되었는지 몰랐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전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된 것은 경학經學으로 물망에 올랐고 지금 참봉參奉 에 제수된 것은 문음門蔭으로 물망에 올랐다고 합니다. 경학으로 말하자면 그럴 만한 실상이 없고, 문음으로 말한다면 서차序 次가 틀렸기에 전후 두 차례의 제수에 모두 무작정 나갈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조[天曹]에 소지를 올려 서차가 틀렸기 때문에 출사하지 않는다는 사유를 밝히라고 하지만, 이 역시 도리어 혐의스러운 일이기에, 기한이 차면 스스 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오는 복은 기쁜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인 것인데, 뒤에 이 런 일이 또 있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장尹丈의 서찰을 보니 선생님께서, 경학으로 물망에 올랐고 보면, 출처거취를 신중히 살펴서 해야 한다 고 하셨다기에, 감히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이만 줄이옵니다. 40세(1751, 영조27) * * * *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로 승진되어 입경 봉렬대부奉列大夫ㆍ봉정대부奉正大夫ㆍ중훈대부中訓大夫ㆍ중직대부中直大夫에 제수 성호 선생에게 편지 올림( 周易 에 대해 문의) 이병휴李秉休와 서신으로 학문 토론 (15) 順菴集年譜 二十六年庚午 先生三十九歲 八月 授從仕郞 以下郞堦月日多未詳 十月 授朝奉大夫 作雜卦說 明年辛未 又著後說 二十七年辛未 先生四十歲 二月 例陞朝散大夫義盈庫奉事 入京謝恩 先生雖在微末庶僚 務盡其道 一以廉謹自持 翌年遷祠官 民人立去思碑于義盈 司門外 星湖先生聞之有書云 義盈司門 去思有碑 京衙卑官 古今無此 其盡力仕學可見 乘田委吏聖迹可徵 亦願吾友益推以 大之 勿以身微自沮 行不行命也 於我何與焉 授奉列大夫 上星湖先生書 質問家禮疑晦處 四月 授奉正大夫 五月 授中訓大夫 上星湖先生書 論卦爻辭義及讀易之法 閏五月 授中直大夫 七月 往謁星湖先生 聞患候之報 往侯焉 答貞山李景協書 李公名秉休 李公以公喜怒理發之說 與邵南互相爭辨 至是貽書問于先生 先生答書略曰 夫天所命爲性 性有二 從天命之正而來者 謂之本然之性 從禀受之差而言者 謂之氣質之性 性之動爲情 情亦有二 從性本所發者 謂之四端 從形氣所發者 謂之七情 心統性情 而其發亦有二焉 原於性命之正者道心也 原於形氣之私者人心也 緫而言之 四端也道心 안정복 생애와 행적 77

72 也 其原出於天命之本性而無不善 不以聖狂而有間 此所謂理一也 七情也人心也 其本出於氣質之性而或善或惡 有賢愚之不 同 此所謂分殊也 推理一分殊之義 則理發氣發在其中矣 今老兄就四七大公案外 剔出聖人之公喜怒 謂之理發 則愚昧之見 有迷而難悟者 若以喜怒之得正者 謂之理發 則其將以四端之不得其正者 謂之氣發乎 聖人之喜怒發而自中者也 君子之喜怒 發而求中者也 衆人之喜怒發而失中者也 雖有中不中之不同 而其發於形氣則無異 其爲氣之發 無疑矣 至於四端 則不論賢 愚 隨感而發 不待私意之校計 而油然直出乎仁義禮智所具之本性 此所謂理之發也 尹丈擴充之語 誠爲的當 理則固可擴而 充之 氣則不可擴而充之 惻隱羞惡是發於理者 故擴而充之 則至于仁之盡義之至之境矣 若喜怒則雖有賢愚之不同 而終是發 於氣者也 將擴而充之 則弊將如何 영종대왕英宗大王 27년 신미(1751), 선생의 나이 40세. 2월에 전례에 따라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에 승진됨에 서울로 들어와서 사은하다. 선생은 비록 미관말 직에 있을지라도 도를 다하기에 힘쓰면서 한결같이 청렴함과 부지런함으로써 스스로를 견지하였다. 이에 다음해에 정릉직장 靖陵直長으로 옮겨가자, 백성들이 의영사義盈司의 문 밖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성호 선생이 이 사실을 듣고서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의영사 문 밖에 거사비가 섰다 하는데, 경아문京衙門의 낮은 관원에 대해서 이렇게 한 적이 고금에 없는 바, 여 기에서 학문을 하거나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 온 힘을 다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승전乘田과 위리委吏에서도 성인의 자 취를 징험할 수가 있는 바 그대는 더욱더 그것을 미루어 나가서 훌륭하게 하기를 바란다. 관직이 낮다고 해서 스스로 좌절하 지 말 것이니,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은 운명에 달린 것으로, 자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제수되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가례家禮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였다. 4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다. 5월에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제수되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주역 에 나오는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의 뜻 및 주역 을 읽는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윤5월에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제수되다. 7월에 성호 선생에게 가서 배알하다. 병환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문안드린 것이다. 정산貞山 이경협李景協의 편지에 답하다. 이공李公의 이름은 병휴秉休이다. 이공이, 공정한 희노喜怒는 이발理發이라는 설 을 가지고 소남 윤동규와 더불어 서로 쟁변爭辨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선생에게 물은 것이다. 선생이 답한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무릇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는데, 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천명天命의 올바른 쪽에서 온 것을 일 러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하고,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품성 쪽을 가리켜서 말할 때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이 움직인 것이 정情이 되는데, 이 정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성을 근본으로 하여 발한 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하고, 형기形氣를 원천으로 하여 발한 것을 칠정七情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솔하고 있는데, 발한 것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올바른 성명性命에 근원하여 발한 것은 도심道 心이고, 사사로운 형기에 근원하여 발한 것은 인심人心입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말하면, 사단이니 도심이니 하는 것은 그 근 원이 천명의 본성에서 발하였으므로, 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성인聖人이나 광인狂人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이치는 하나이다 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칠정이니 인심이니 하는 것은 원래 기질지성에서 발하였으므로, 혹 선하기도 하고 혹 악하기도 하여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에 따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현상은 다르다 는 것입니다. 이치는 하 나이지만 현상은 다르다는 뜻을 미루어 나가면 이발理發 이니 기발氣發 이니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노형께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는 큰 공안公案 외에 성인의 공정한 희노喜怒를 떼어 내어서 그것을 일러 이발理發 이 라고 하셨는데, 저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혼미하여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희노가 바름을 얻은 것을 일러 이발 이라고 한다면, 사단이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일러 기발 이라고 할 것입니까. 성인의 희노는 발함에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 7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73 이고, 군자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맞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 일반 사람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이 비록 절도에 맞고 안 맞고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이 형기形氣에서 발하는 것임에는 차이가 없으니, 그것이 기氣가 발 한 것 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단의 경우는 어진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느낌에 따라 발하여, 사사로운 뜻으로 헤아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에서 바로 나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理가 발한 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윤장尹丈(尹東奎를 말함)께서 말한 확충擴充이란 말은 참으로 꼭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理는 확 충할 수 있는 것이지만, 기氣는 확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이理에서 발한 것이기 때 문에 확충하면 인仁을 다하고 의義를 지극히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희노의 경우는 비록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 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끝내 기氣에서 발한 것이니, 이것을 만약 확충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41세(1752, 영조28) * 통훈대부通訓大夫 정릉직장靖陵直長으로 승진함 (16) 順菴集年譜 二十八年壬申 先生四十一歲 正月 以孝賢嬪葬時差備官 往孝章世子墓所 二月 例陞通訓大夫靖陵直長 撰李醇叟遺事 李公名孟休 星湖先生之子 不幸早世 先生慟惜之 爲撰其遺事 五月 上星湖先生書 以孟子七篇中疑義 條列禀質 영종대왕英宗大王 28년 임신(1752), 선생의 나이 41세. 1월에 효현빈孝賢嬪을 장사지낼 때의 차비관差備官으로서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묘소墓所에 가다. 2월에 전례에 따라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고 정릉직장靖陵直長에 제수되다. 이순수李醇叟의 유사遺事를 찬하다. 이공의 이름은 맹휴孟休로, 성호 선생의 아들이다.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선 생이 애석하게 여겨 그의 유사를 찬한 것이다. 5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맹자 7편 가운데 의심스러운 뜻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하여 질문하였다. 42세(1753, 영조29) * 6품으로 승진하여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제수 * 부친을 모시고 서울 용산에 우거함 * 광주지廣州志 저술. 이자수어李子粹語 엮음 *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림(綱目의 筆法에 대해 논함) (17) 順菴集年譜 二十九年癸酉 先生四十二歲 四月 往牙山 葬聘母于稷山 안정복 생애와 행적 79

74 夏 撰廣州志 書凡二卷 有自撰序文 六月 答貞山書 論家人命卦之義 書畧曰 俯敎家人命卦之義 欽仰獨得之見 第此蒙陋 不能超脫於古人已定之論 故未免有 疑於兄敎 夫六十四卦卦名 以反對推之 其自相爲用也明矣 觀於損益否泰晉明夷剝復之類 可以知之 然則睽爲二女不同志之 卦 而家人爲二女同志之卦 果如尊兄所論 愚謂不必如此說 伏羲名卦之時 必觀其象有如此之義 故隨而名之 竊觀家人卦 內 文明而外巽順 猶人之家政和矣 火炎上而風下行 猶人之家事合矣 二五得位而相應 猶人之家道正矣 諸卦中惟此卦果有家人 之象 而其他則終不如此卦之切近明著者 故名之曰家人 而文王之辭 孔子之傳 皆是一串貫來矣 尊兄列擧二五得位相應之卦 以爲此莫非男女正位之卦云 則此等諸卦 其性情體才 果皆如家人卦之襯切者乎 以二女同居而其志同 爲名卦之義 則諸卦之 此類多矣 何獨於上風下火之卦 而名之曰家人乎哉 所引詩經家人之義 亦有疑焉 之子于歸 宜其家人 之子指女子也 家人統 言一家之上下尊卑而言也 宜其家人 謂女子之仰事俯育 莫不得宜 大學所謂宜其家人而後 可以敎國人者 尤明白矣 指此爲 妻妾之證則無乃不可乎 十月 例陞六品 爲歸厚署別提 奉參判公寓龍山 時參判公患黃疸 爲醫治計 住于妹壻吳錫信家 編次李子粹語 星湖先生所撰 退溪言行所裒集者也 初名道東錄 屬先生及邵南尹公刪定之 先生與尹公往復商論 改定編次 名之曰李子粹語 書成後李先生有書曰 粹語賴君得成完編 此亦如久病人多少劑治 畢竟按脉診症 歸功於神指也 今焉訖一大 事 麗澤之益 非是之謂歟云 仍屬先生撰序文 十二月 上星湖先生書 論綱目筆法之可疑者 영종대왕英宗大王 29년 계유(1753), 선생의 나이 42세. 4월에 아산牙山으로 가서 장모를 직산稷山에 장사지내다. 여름에 광주지廣州志 를 찬하다. 책은 총 2권이며, 스스로 찬한 서문序文이 있다. 6월에 정산貞山의 편지에 답하다. 가인괘家人卦에 괘의 이름을 붙인 뜻을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가인괘의 괘 이름을 붙인 뜻에 관하여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형의 독특한 견해에 대해 참으로 흠앙하는 바입니다만, 어리석은 저로서는 옛 사람들이 단정해 놓은 의논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형의 말씀에 대해 의문이 있음을 면치 못하 겠습니다. 무릇 육십사괘六十四卦의 괘 이름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써 미루어보면 서로 간에 쓰임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합 니다. 이것은 손괘損卦ㆍ익괘益卦, 비괘否卦ㆍ태괘泰卦, 진괘晉卦ㆍ명이괘明夷卦, 박괘剝卦ㆍ복괘復卦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렇다면 규괘睽卦는 두 여인의 의향이 같지 않은 괘상卦象이고, 가인괘는 두 여인의 의향이 같은 괘상임은 과연 형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꼭 그와 같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복희씨伏羲氏가 괘를 명명할 때에는 그 괘 상에 이와 같은 뜻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그에 따라서 명명한 것입니다. 가령 가인괘를 보면, 내괘內卦는 문명文明의 기상이고 외괘外卦는 손순巽順의 기상이어서 마치 사람의 가정이 화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은 치솟고 바람은 아래로 불어 마치 사람의 집안 일이 화합하는 것 같으며,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제 자 리를 지키면서 서로 응하고 있어 마치 사람의 집안 법도가 올바른 것 같습니다. 다른 여러 괘들 가운데서 오직 이 괘만이 가 인家人의 기상이 있으며, 다른 괘들은 아무래도 이 괘처럼 딱 들어맞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괘를 가인이 라고 명명한 것이며, 문왕文王의 사辭나 공자孔子의 전傳도 모두 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존형께서 이효와 오효 가 제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 응하고 있는 괘들을 열거하면서, 이것들은 모두 남녀男女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괘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런 여러 괘들이 그 성정性情과 체재體才가 과연 모두 가인괘처럼 절실하게 부합한다는 것입니까? 두 여 인이 같은 집에 살면서 의향도 같다는 것을 가지고 괘를 명명한 의미로 삼으신다면, 다른 괘도 이와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위는 바람[風]이고 아래는 불[火]인 이 괘만을 가인이라고 명명하였단 말입니까. 그리고 인용하신 시경 詩經 의 가인家人의 뜻도 역시 의문이 있습니다. 지자가 시집감이여, 그 가인들을 좋게 만들겠네[之子于歸 宜其家人] 라고 한 곳 에서의 지자 는 시집가는 여자를 말한 것이고, 가인 은 그 집안사람들을 상하존비를 통틀어서 말한 것이며, 그 가인들을 좋 8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75 게 만들겠다 고 한 것은 그 여인이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등의 일을 다 알뜰하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 학大學 에 이른바 자기 가인을 좋게 한 다음에야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 고 한 것을 보면 더욱더 명백합니다. 그러 니 이것을 가지고 처첩妻妾이라는 증거로 삼는다면 불가不可하지 않겠습니까. 10월에 전례에 따라 6품으로 승진되고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가 되다. 참판공을 모시고 용산龍山에 우거하다. 이때 참판공이 황달黃疸을 앓아 이를 치료할 계획으로 매서妹壻인 오석신吳錫信 의 집에서 산 것이다. 이자수어李子粹語 를 편집하다. 성호 선생이 찬한 것으로, 퇴계退溪의 언행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의 책 이름은 도동록道東錄 이었는데, 성호 선생이 선생과 소남 윤동규에게 산정冊定하도록 부탁하자, 선생이 윤동규와 서로 오가면서 상 의하여 편차編次를 개정한 다음 이자수어 라고 이름을 붙였다. 책이 다 만들어진 뒤 성호 선생이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이자수어 가 그대들의 힘을 입어 완성되었으니, 이 역시 오래도록 병을 앓는 사람이 약재를 써서 얼마간 치료하였으나, 결 국에는 맥을 짚고 병을 진찰하는 것은 신의神醫의 손가락이라 하여 거기에 공功을 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큰 일을 하나 마쳤으니, 이택麗澤의 유익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라 하고는, 이어 선생에게 부탁해서 서문 을 짓게 하였다. 12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강목綱目 의 필법筆法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논하였다. 43세(1754, 영조30) * * * * 사헌부 감찰監察로 자리를 옮김 4월 부친을 모시고 중부동 외가로 옮김 6월 부친상을 당하여 8월에 덕곡 선영에 장사지냄 12월 부친의 행장을 짓고, 성호선생에게 지문誌文을 청함 부친상을 계기로 사헌부 감찰에서 물러남 (18) 順菴集年譜 三十年甲戌 先生四十三歲 二月 遷司憲府監察 四月 奉參判公 移寓于中部洞外宅 六月丙寅 丁參判公憂 哀毁踰節 素有嘔血之症 至是添谻 仍成終身之疾 八月甲戌 葬參判公于德谷先塋 十二月 撰參判公行狀 請誌文于星湖先生 영종대왕英宗大王 30년 갑술(1754), 선생의 나이 43세. 2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기다. 4월에 참판공을 모시고서 중부동中部洞에 있는 외가로 옮겨 가서 살다. 6월 병인일에 참판공의 상喪을 당하다. 절도에 지나치게 슬퍼한 탓에 평소에 앓고 있던, 피를 토하는 증세가 이때에 이르러서 더 도져 종신토록 앓는 고질병이 되었다. 8월 갑술일에 참판공을 덕곡德谷의 선영에 장사지내다. 12월에 참판공의 행장行狀을 찬하고, 성호 선생에게 지문誌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다. 안정복 생애와 행적 81

76 (19)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甲戌] 綱目與凡例相違者多 而自唐以下尤甚 書人薨卒 自有其例 書爵書卒而註其諡曰某 盖不可以死後之稱 加于未卒之前也 朱子常言左傳 獨陳桓公一處稱謚 此亦可見 而文貞公宋璟 武穆王李光弼 忠武王郭子儀之類 分明是未及修正者 而後儒論 之曰 書謚爲褒崇之意 此皆出於隨處解義 非得朱子本意者也 故侍生常以爲欲讀綱目 當依凡例 與凡例相違者 逐綱而註之 似不失其本旨也 尹丈亦言如此 伏未知如何 歷代奸凶及馮道之類 固當爲死例 反以書卒 誠爲可疑 丘瓊山世史正綱 筆削頓 異 至若王安石 以變法亂天下 字說乖聖經 遂書死 此等筆法 果如何耶 蕭琮事 竊嘗疑之 未及仰質 今幸下示 受敎多矣 上 書叛下書死 則朱子之罪琮明矣 推此義而言之 則是育我之德 反重於生我之恩 而沮臣子興復舊物之志矣 求之義理 必不如 是 而特筆若此 劉友益 尹起莘輩 從以罪琮 不遺餘力 誠未可知也 然則改叛書奔 則奔爲有故之辭 似或可矣 前日在江華時 見林經歷象鼎 頗有史學 有所編輯 立綱之時 多有所問 至武庚事 林云當書誅 與管蔡同筆 侍生以爲在管蔡則當書誅 在武 庚則當書殺 武庚不識天命之罪 固有之矣 至於以殷遺孫 欲復舊物 則武庚實無罪矣 先儒云周之所謂頑民 卽殷之忠臣 此不 當書誅 林然之 遂以殺武庚誅管蔡立綱 此事心嘗疑之 今幷奉禀 弑是下殺上之辭也 子於母后稱臣 則母之於子 不可以在下 例論之也 誠如下敎 然而馮太后 胡太后皆書弑 此似不拘於下殺上之義 夫君一而已 婦人有從子之義 雖爲母后 以坤道推之 終是地道也妻道也臣道也 上承宗廟 下臨兆庶 尊無二上 而太后酖之 於此言殺 不得書弑之義 似無所疑 伏乞更賜指敎 若 以弑爲不可 則實無代此而爲說者 嘗觀晉書 凡中國之人 爲胡羯所殺者 皆曰某爲某所害 然則以害代弑 或可耶 不然則曰太 后進毒於魏主 魏主殂云 而弑害等字 不當下耶 下書中楊國忠 是李輔國也 輔國殺皇后張氏 張氏固有罪矣 而輔國豈敢殺耶 此殺字恐誤 至若盜殺李輔國者 似是特筆 無可疑者 輔國有罪 代宗不能明正其罪 而行盜賊之事以殺之 書盜殺 所以病代宗 也 無關於輔國 伏未知如何 성호 선생께 올림[갑술년] 강목綱目 이 범례와 틀린 곳이 많은데, 당唐부터 그 이하는 더욱 심합니다. 사람의 훙薨과 졸卒을 쓰는 것이 각기 범 례가 있는데, 관작을 쓰고 졸을 쓰고 그리고 그 시호[諡] 밑에다 아무라고 주석을 단다면 그것은 그의 죽은 뒤의 호칭을 죽기 이전에다 붙인 것으로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자朱子도, 좌전左傳 에서 진 환공陳桓公 한 곳에만 시호를 썼다 라고 늘 말했으니, 이를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정공文貞公 송경宋璟, 무목왕武穆王 이광필李光弼, 충무왕忠武王 곽자의郭子儀 등 이렇게 쓴 것들은 분명히 미처 수정하지 못한 것들인데 후세 유자들은 논하기를 시호를 쓴 것은 포숭褒崇의 뜻이다 라고 하니 이는 경우에 따라 적당하게 뜻을 해석한 말들이지 주자의 본의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생은 항상 주장 하기를, 강목 을 읽으려면 의당 범례에 의거하여, 범례와 서로 어긋난 것은 강綱을 따라 주석을 해야 그 근본 취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윤장 역시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대 간흉奸凶들 및 풍도馮道와 같은 무리들은 당연히 사死로 써야 할 것인데 도리어 졸卒이라고 썼으니, 그 역시 의심스 러운 일입니다. 구경산丘瓊山의 세사정강世史正綱은 필삭筆削의 법이 아주 판이합니다. 왕안석王安石 같이 변법變法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만들고 자설字說 로 성현의 경전을 괴란시킨 사람까지도 사死라고 썼으니 이러한 필법筆法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소종蕭琮의 일에 관해서는 늘 의심은 있었으나 미처 여쭈어 보질 못했는데 지금 다행히 가르침을 내려 주시어 얻은 바가 많았습니다. 위에는 반叛이라고 쓰고 아래는 사死라 쓴 것을 보면 주자는 소종을 죄인으로 본 것이 분명합니다. 이 러한 뜻을 미루어 말한다면 이는 나를 길러 준 덕이 나를 낳아준 은혜보다 도리어 중한 꼴이 되어 옛날의 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신자臣子들 의지를 꺾어 버리게 되니, 의리로 보아 틀림없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필特筆했고, 유우익 劉友益ㆍ윤기신尹起莘 무리들은 따라서 조금도 가차없이 소종을 죄인으로 몰았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반 叛을 분奔으로 고쳐 쓰면 분은 무슨 연고가 있어서라는 말이 되니 혹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일 강화江華에 있을 때 경력經歷 임상정林象鼎을 만났는데 사학史學에 꽤 조예가 있고 자기가 펴낸 책도 있고 하여 강綱 을 정할 때 많은 자문을 구했었습니다. 무경武庚 사건을 두고 그는, 관숙管叔ㆍ채숙蔡叔과 똑같이 주誅로 써야 옳다고 했습니 8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77 다. 이에 시생이 주장하기를, 관숙ㆍ채숙은 당연히 주誅로 써야 하고, 무경의 경우는 살殺이라고 써야 옳다. 왜냐하면 무경에 게도 천명天命을 모르고 어긴 죄는 물론 있으나 그러나 그가 은殷의 유손遺孫으로서 자기의 옛것을 되찾으려고 한 그 점에 있 어서는 무경은 사실 죄가 없는 것이다. 선유先儒들도, 주周에서 완민頑民이라고 하는 이들이 은殷에서 보면 충신忠臣이라고 했 다. 따라서 여기는 주誅로 쓰는 것이 옳지 않다 했더니 임상정 역시 그렇겠다고 하여 드디어 살무경殺武庚ㆍ주관채誅管蔡로 강 을 정하기는 했으나 그 일로 늘 마음에 걸려 지금 아울러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시弑는 물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인 경우를 말합니다. 자식이 모후母后에 대해 신臣이라고 칭하고 보면 그 어머니는 아들에 있어 아랫사람의 예로 논할 수 없다 고 하신 하교는 사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풍태후馮太后ㆍ호태후胡太后에 대 해 모두 시弑로 썼으니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인 예와는 하등 상관없이 쓴 것 같습니다. 임금은 한 사람뿐이고 부인婦 人은 아들을 따르는 의리가 있으니, 아무리 모후라 하더라도 곤도坤道로 미루어 볼 때 별 수 없이 땅이요 아내요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 종묘宗廟를 이어 받고 아래로 억조 백성을 대하는, 높기가 둘이 없는 존재인데 태후가 그를 독살했다면 여기 서는 죽였다[殺]고 쓸 수 없으니, 시해했다[弑]고 쓰는 의리가 의심할 바 없을 듯합니다. 다시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시해했다고 쓰는 것이 불가하다면 실로 이를 대신할 말이 없습니다. 언젠가 진서晉書 를 보았더니 중국 사람으로서 오 랑캐들에게 죽음을 당한 자에 대해 모두, 아무가 아무에게 해害를 당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시弑 대신 해害로 쓰는 것은 어 쩌면 가능할는지요? 그렇지 않다면, 태후가 위주魏主에게 독약을 올려 위주가 죽었다 라고 쓰고 시弑나 해害 등의 글자는 쓰 지 말아야 할런지요? 하서下書 중에, 양국충楊國忠이 바로 이보국李輔國이라고 하셨는데, 보국은 황후 장씨張氏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장씨가 물 론 죄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보국이 어떻게 감히 죽일[殺] 수 있겠습니까. 이곳의 살殺도 아마 잘못 쓴 글자인 듯합니다. 이 보국을 도살盜殺했다라고 쓴 것은 특필로서 의심할 나위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종代宗이 그의 죄를 명명백백하게 바로잡지 못하고 도적이 하는 짓을 하여 그를 죽였으니, 도살했다고 쓴 것은 대종을 흠잡은 것이지 보국과는 무관한 것인가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4세(1755, 영조31) * 조부의 지문誌文을 성호 선생에게 청함 * 예서禮書를 읽음 * 윤동규와 서신으로 학문 토론 (20) 順菴集年譜 三十一年乙亥 先生四十四歲 二月 請參議公誌文于星湖先生 五月 讀禮書 以家禮爲主 而先自喪禮始 考以三禮 參以通典及先儒諸說 與邵南尹公書 論喪制變除之次及葛絰之制 六月 答邵南尹公書 論學者騖遠忽近之弊 書畧曰 大學曰止於至善 繼之曰知止而后有定 知至善之所止而后 志有所定向 矣 其下又曰知所先後 卽近道矣 孟子曰 堯舜之知而不遍物 急先務也 兩先字對勘 學者知此則豈有騖遠之習 而程朱以後諸 儒之辭說甚多 而論其篤行則反有愧於漢唐之君子 至于今而益甚 往往臨小利害 便失常度 此楊文公 蘇長公之論 見笑於朱 子者也 我朝先輩有自警篇理學 古文眞寶文章之語 其所尙卑矣 而樹立成就 非後人所及 由此益知此道之難明也 盖游走於 章句物理之上 反忽於身心日用之間 故不知不覺之中 未免有踰節之患 其於執事所謂眞實體當四字 未暇及焉 何歎如之 常 以此自警 而病無以自振 今何幸奉聞先獲之言 안정복 생애와 행적 83

78 영종대왕英宗大王 31년 을해(1755), 선생의 나이 44세. 2월에 성호 선생에게 참의공의 지문誌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다. 5월에 예서禮書를 읽다. 가례家禮 를 위주로 하여 읽었는데, 먼저 상례喪禮부터 시작하였으며, 삼례三禮를 상고하고 통전通典 및 선유先儒들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였다.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상제喪制의 변제變除의 차례와 갈질葛絰의 제도에 관해 논하였다. 6월에 소남 윤동규의 편지에 답하다. 학자들이 먼 데 있는 것은 힘쓰면서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소홀히 하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대학 에 이르기를, 지선至善에 그치라 하고, 뒤이어 이르기를, 그칠 곳을 알아 야만 정定함이 있다 고 하였는데, 이는 그칠 곳이 지선임을 안 뒤에야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고 하였으며, 맹자孟子 에는 이르기를, 요순堯舜 의 지혜로도 모든 사물을 두루 살피지 않았던 것은 먼저 힘쓸 일부터 하는 것이 급하였기 때문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 두 곳 의 먼저[先] 라는 글자를 서로 맞추어서 대조해 보아서 학자가 이에 대해 안다면 어찌 먼 곳으로만 달려 나가려고 하는 습성 이 생기겠습니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로 여러 유학자들이 한 말이 아주 많지만, 독실하게 행한 점을 따져보면 한漢나라 나 당唐나라 시절의 군자들에 비해서 도리어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여 혹 사소한 이해관계로 상도常度를 잃기까지 하는바, 이 때문에 양문공楊文公이나 소장공蘇長公의 논論이 주자에게 비웃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본조 本朝에 와서는 선배들 가운데에 이학理學으로는 자경편自警編 이고, 문장文章으로는 고문진보古文眞寶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 을 정도로 취향이 높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립樹立한 것과 성취한 점에 있어서는 후세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바가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도道를 밝힌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더더욱 알 수 있습니다. 장구章句와 사리事理 상에서 만 왔다갔다 하면서 도리어 심신心身과 일상日常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도에 지나 친 걱정이 있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집사執事가 말씀하신 이른바 진실체당眞實體當 네 글자에는 미쳐 갈 겨를 이 없게 되니, 그 얼마나 탄식할 일입니까. 저 자신도 늘 이것으로 경책을 하면서도 스스로 분발할 수 없음을 병통으로 여기 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먼저 터득하신 말씀을 해 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21)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乙亥] 窮廬病伏 萬念都灰 而每奉先生手札 若抱拱璧 心路乍開 雖墜此瞢騰界中 而一脉向善之心 猶存而然耶 正月念後 伏奉 立春日下書 今月望後 又奉正月念八日下書 書問荐加 軫念死生 兼示藥方 伏切哀感 因伏審氣候康寧 不任哀慰之至 先人 閫內言行 實有不忍沒者 但幽潛未顯 名不登於史策 若無記實文字垂示來裔 此固後承之至痛 竊念小子之於先生 情無所隱 有懷必達 故不敢自外 前有所陳禀者 而悚仄以俟 伏見下書 有督還家狀之敎 疾病垂死之中 感歎愈切 玆敢再拜封納 固知 此事有礙於靜攝中 而事蹟甚少 文字必簡 不顧邊幅之小嫌 欲以副幽明附驥之至願也 且一紙是王考墓文 而桐湖朴掌令所著 也 先考在世 常欲摳衣門下 仰煩誌文 而荏苒歲月 不得遂意 疾病之際 常以此爲恨 並以仰呈 以俟進退之命 若憐其至願 賜以一言之重 則在不肖繼述之意 亦將有辭矣 身抱孱疾 不能躬詣 遞人轉上 自訟罪咎 無所逃焉 伏乞恕諒焉 前日下書 有 欲知疾書中指摘之諭 今世人大抵嘵嘵好譏謗 豈能知書中意而如是耶 糓山筆塵 昔年從景命所得見 盖中國意思 不草草如是 又觀綱鑑史斷 有曰于文定者 意其爲于愼行 今以得見其史論爲敎 有疾如此 不敢奉請而受敎也 성호 선생께 올림[을해년] 궁한 초막에 병들어 엎드려 있으니 모든 생각이 전부 싸늘한 재가 되고 말았으나 그래도 언제나 선생의 수찰手札만 받으면 마치 더 없는 보배 구슬을 안은 기분으로 마음이 언뜻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어두운 세계 속에 떨어져 있긴 해도 한 가닥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 남아 있어 그런 것일까요? 8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79 정월 스무날 후에 입춘일立春日 보내주신 서한을 받고, 이달 보름 후에 또 정월 스무여드렛날 주신 하서를 받았으니, 이 렇게 자주 서신을 보내 사생死生을 깊이 염려해 주시고 아울러 약방藥方까지 알려 주시니 상중喪中의 슬픔 가운데 감격이 절 실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기후가 강녕하심도 알게 되어 슬픈 가운데도 위안이 되었답니다. 선인先人께서 집안에서 하신 언행 言行은 실로 차마 민멸泯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다만 평범하게 묻혀 지낼 뿐 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사책史 策에 오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후생들에게 보여줄 만한 사실을 기록한 문자文字가 만약 없다면 그는 자손의 도리로서 지극히 통탄할 일인 것입니다. 한편 이 소자가 선생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감 히 스스로 안 되리라는 판단을 하지 않고 전에 그렇게 여쭙고 나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서에 가장 家狀을 빨리 보내라는 말씀이 계셨으니, 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처지에서도 감격과 탄식이 더욱 절실했습니다. 이에 감히 두 번 절하고 가장을 봉해 올리오니, 이 일이 조용히 조섭하는데 방해가 되긴 하지만 사적이 매우 적어 글이 필시 간략하겠기에 문장이나 꾸민다는 소소한 혐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 유명幽明 간의 지극한 소원을 들어 주려 하신 줄 잘 압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저희 조부의 묘문墓文으로 장령掌令 박동호朴桐湖가 쓴 것입니다. 선고先考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선생의 문하에 가셔서 지문誌文을 부탁하고 싶어하시다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에, 병석에 누워 계 시면서도 늘 이것을 한으로 여기셨습니다. 이번에 함께 올려 진퇴進退의 명을 기다리오니, 만약 그 지극한 소원을 가엾이 여 기시고 귀중한 한 말씀을 주신다면 계술繼述에 뜻을 둔 이 불초가 앞으로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몸에 병이 있어 직접 나아 가 뵙지 못하고 이렇게 사람을 시켜 서찰을 올리게 되었으니, 스스로 자책함에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길 엎드려 빕니다. 전일의 하서에서 질서疾書에 대해 지적한 부분을 알고 싶다고 하신 말씀이 계셨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란 대저 시끄럽 게 남을 헐뜯기나 좋아하지, 어찌 책 내용이나 제대로 알고 그런 말들을 하겠습니까. 곡산필주穀山筆麈는 몇 해 전에 경명景命 을 통하여 볼 수 있었는데, 중국 사람의 의사意思가 이토록 초초草草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강감사단綱鑑史斷을 보 면 우문정于文定이라는 이가 있는데 아마 그가 우신행于愼行인 듯합니다. 지금 그 사론史論을 보았다는 말씀이 계셨는데, 이렇 게 병든 몸이 찾아뵈올 수 없어 감히 청을 드리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45세(1756, 영조32) * 광주부廣州府 경안면慶安面 이리동약二里洞約을 만듦 (22) 順菴集年譜 三十二年丙子 先生四十五歲 八月服闋 冬 立洞約 有洞約一卷 會洞人頒示 自撰其序文 畧曰 余讀周禮 知聖王治天下之大法也 聖人爲政 務擧大綱 何䂓規乎比 閭族黨之間而不憚煩耶 夫不振不作 不導不行 民之情 而振作導行之術 須從民目擊處起 必有興感而易行者 故自其近者小 者始而擧天下 同一敎也 不如是 無以遂生養 無以同風俗 無以行政令 雖聖王不能施其敎矣 降而漢唐宋明 若三老里正保長 坊長之法 猶其制也 然而上無道揆 下無法守 人私其身 士異其論 治雖暫隆 而俄而汚焉 此民俗之所以不及古而百世無善治 也 是以窮而在下之君子 或推其修齊之餘 及於鄕里 以淑諸人 而無僭上議禮之嫌 若藍田呂氏之鄕約是已 我東先輩之居是 官也 居是鄕也 皆不疑而行之 若一蠧之於安陰 退溪之於禮安 栗谷之於石潭是已 然則今日吾洞之立約 亦非僭 而固上之人 所欲興行者矣 噫 吾洞數十年來 風斁俗敗 便作互鄕之難言 而猾任頑校 又憑城社而恣橫 如之何民不窮而俗不渝也 外侮之 來 固無可奈 而禮義根於人心之固有 若因其固有者而修明之則可矣 夫作法導人 先順民心 民心之不順 恒由於害政 今洞中 爲民害者 梳櫛而除之 使民心有所歸依然後 敎亦可行 孟子論王政 制民産居學校之先 良以此也 遂革弊政敦敎化 申禁令明 안정복 생애와 행적 85

80 勸懲 遵此而行 其亦有補我聖上化理之一端矣 영종대왕英宗大王 32년 병자(1756), 선생의 나이 45세. 8월에 복제服制를 마치다. 겨울에 동약洞約을 세우다. 동약 1권이 있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반포하였다. 그 서문을 스스로 지었는데, 서문 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주례周禮 를 읽어 보고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린 대법大法을 알았다. 성인은 정치를 함에 있 어서 큰 강령綱領만을 들려고 힘썼다. 그러니 어찌 비比, 여閭, 족族, 당黨의 일을 낱낱이 챙기면서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하 겠는가. 무릇 진작시키지 않으면 일어나지 아니하고, 인도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 것이 민정民情이다. 그런데 진작시켜 일어나게 하고 인도하여 행하게 하는 방도는 모름지기 백성들이 눈으로 보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만 감동하여 행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깝고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서 온 천하가 하나의 가르침에 동화되게 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생양生 養을 이룰 수가 없고, 풍속風俗을 같게 할 수도 없고, 정령政令을 행할 수도 없어서, 아무리 성왕聖王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르 침을 베풀 수가 없는 것이다. 한漢, 당唐, 송宋, 명明으로 내려오면서 있었던 삼로三老, 이정里正, 보장保長, 방장坊長 등의 법 역 시 그 제도였다. 그러나 위에서는 도리로써 모범을 보임이 없고 아래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아, 사람마다 제 몸만 생각하고 선비들은 제각각 의논을 다르게 하였다. 이에 다스림이 비록 잠깐 동안 융성하였다 하더라도 곧바로 더럽혀지고 말았던 것이 다. 이 점이 바로 백성들의 풍속이 옛날만 못하여 백대百代토록 좋은 다스림이 없게 된 이유이다. 이 때문에 영달하지 못하여 아래에 처해 있는 군자가 간혹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여력을 미루어서 향리鄕里에 미쳐 가 사람들을 착하게 인도하더라도, 주 제넘게 윗사람의 흉내를 낸다거나 아랫사람으로서 예법禮法을 논한다는 혐의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선배로서 수령직을 맡았거나 고을에서 지낸 분들도 모두 의심 없이 이를 행하였는바, 예를 들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예안禮安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석담石潭에서 행한 것 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동에서 입약立約하는 것 또한 참람된 일이 아니요, 실로 선배들이 널리 시행하고자 하였던 바인 것이다. 아, 우리 마을이 수십 년 이래로 풍속이 퇴폐해져 문득 호향互鄕과 같은 나쁜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다 또 교활한 아전과 완악한 군교軍校들이 나라의 권력을 등지고 횡포를 부렸는바, 그와 같은데 어떻게 백성들이 곤궁해지지 않고 풍속이 야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모욕이야 참으로 어쩔 수 없다 손치더라도, 예의禮義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디 있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마음속에 본디 가지고 있는 바를 인하여 이를 갈고 닦으면 될 것이 다. 무릇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인도함에 있어서는 먼저 민심이 따르게 해야 하는 법인데, 민심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언제나 폐해를 낳는 정사政事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지금 마을 안의 일들 가운데에서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말끔하게 제거하여 민심이 돌아가 의지할 바가 있게 한 다음에야 가르침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왕정王政을 논하면서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는 것을 학교를 일으키는 것보다 먼저 말한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이에 드디어 폐정弊政을 고치고 교화敎化를 도 타이 하며, 금령禁令을 거듭 신칙하고 권징勸懲을 분명하게 밝혔는바, 이것을 그대로 지켜 시행한다면 우리 성상의 교화敎化에 도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이다. (23)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別紙[丙子] 恒以疾憂 奔避累年 舊舍頹廢 無以庇身 令舍季家督手執斧斤 躳自築室 而邀洞中少年之能鄙事者助役 不旬而成 其制象 菴字形 菴之爲字 艹以茅盖也 一橫梁也 人環椽也 電中立一柱而成四間也 二柱則六間 三柱則八間 其用尤廣 東北峽民 皆 爲此屋 自述梁文 有曰三柱高標 前後敞八間之屋 一梁上覆 左右環百餘之椽 其制可以想知矣 前面二間 爲室以居 名曰順 8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81 菴 盖取其字而名之 竊謂天下之事 惟順理而已 中一間爲堂 爲應事之所 茅茨土堂 耕樵布糲 誦詩讀書 莫非其分 故名曰分 宜 又隔一間爲室 名以湛肅 祭祀時齋所也 後面拓三間 爲藏弆器物之所 東北一間 奉安家廟焉 門下所居深山之中環一洞 方數弓餘 山名靈長 在漢山西南三十里而近 三田浦南四十里而贏 累世丘墓在焉 耕稼樵牧 不與人相干 足不出洞外 于今三 載 雖居憂疾病之使然 而性亦簡拙而然矣 鼎福忝在及門之列 已踰十年矣 前後賜書誘敎 精粗巨細 畢露無餘 惟此可以終身 行之有餘 更何敢煩溷於靜攝之中 而竊願一得堂記菴銘 爲沒齒誦念之資 伏乞俯念 不任悚仄之至 성호 선생께 올리는 별지[병자년] 항상 질병 우환 속에서 여러 해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옛날에 살던 집이 퇴락하여 몸 의지할 곳이 없기에 막내 아 우와 자식놈을 시켜 손수 연장을 들고 집을 지어보라고 했더니 자질구레한 일 잘하는 마을 소년들을 불러 조역을 시켜 열흘 이 채 못되어 낙성을 보았습니다. 집 모양새는 암菴 자 모양을 땄습니다. 암菴 이란 글자를 보면 초艹 는 띠풀로 지붕을 덮은 것이고, 일一 은 가로지른 대들보이고, 인人 은 둘러 친 서까래들이고, 그 아래는 기둥 하나를 가운데 세워 4칸을 만든 것인 데, 기둥이 둘이면 6칸이 되고, 셋이면 8칸이 되어 용도가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동북 산골 백성들이 모두 이렇게 집을 짓습 니다. 제 스스로 상량문上梁文을 쓰기를, 세 기둥이 높이 세워지니, 앞뒤로 8칸 집이 열려 있고, 대들보 하나가 위를 덮음에 좌우로 백여 개의 서까래가 둘러 있네. 하였으니, 그 제도를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면 두 칸은 방을 만들어 거처하면서 이름을 순암順菴이라고 했으니, 제 자字에서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천하의 모든 일이 순리順理만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가운데 한 칸은 마루로 꾸며 일 보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띠로 이은 지붕, 흙집에서 밭 갈고 나무하고 베옷 입고 현미밥 먹고 시 외우고 책 읽는 그 모두가 다 본분의 일이기에 이름하여 분의分 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칸을 막아 방으로 꾸미고 담숙湛肅이라고 이름했는데, 제사 때 재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 뒤로 세 칸을 늘려서 기물을 저장하는 곳으로 쓰고 동북쪽 한 칸에는 가묘家廟를 봉안하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깊은 산속으로서 한 마을이래야 둘레가 몇 궁弓 남짓 밖에 안 됩니다. 산 이름은 영장靈長으로 한 산漢山 서남쪽으로는 30리里가 가깝고, 삼전포三田浦 남쪽으로는 40리가 좀 넘는 지점에 있는데, 이곳에 여러 대의 선영이 있 습니다. 남의 간섭 받지 않고 농사짓고 나무하고 목축할 수 있으므로 동구 밖을 나가지 않은 지가 지금으로 삼 년이 되었습 니다. 그것은 상중喪中에 있고 또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성이 간졸簡拙한 탓도 있습니다. 정복이 욕되게 문하생의 서열에 끼인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전후로 서찰을 내려 이끌고 가르쳐 주심에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셨으니, 이것만으로도 평생을 두고 행하여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조섭중에 계시는 선생님께 무엇을 감히 번거롭 게 청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당기堂記와 암명菴銘을 받아 죽을 때까지 외우고 생각할 자료로 삼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 이오니, 굽어 생각해 주시길 엎드려 빕니다. 너무도 송구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46세(1757, 영조33) * 임관정요臨官政要 희현록希賢錄 저술 * 성호 선생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올림(喪祭, 西學 등을 논함) * 7월 성호 선생이 순암기順菴記 를 지어 보내 줌 (24) 順菴集年譜 三十三年丁丑 先生四十六歲 正月元日 改定祭禮 告于先廟 先生以爲祭祀之禮 祠廟爲重 原野爲輕 正朝寒食端午秋夕上墓 卽東方舊俗而禮無所據 今 人反致隆於此而廢廟中之享 輕重失序 深乖禮意 乃考禮經採國俗 錯擧四時 分薦祠墓 冬至陽生 夏至陰生之日 而薦于祠堂 안정복 생애와 행적 87

82 寒食草生 秋夕物成之時 而奠掃墳墓 因元朝奠獻 告由先廟 希賢錄成 自乙亥冬始草 上卷則爲三聖傳 卽伊尹 伯夷 柳下惠 中卷則爲兩賢傳 卽諸葛武侯 陶靖節 下卷則爲希顔錄 卽 顔子 周濂溪 程明道 撰輯其出處言行 合而名之曰希賢錄 仍題一絶于二賢傳云 龍岡日月迷春睡 栗里風烟入短吟 膝上無絃 梁甫曲 千秋遙託兩人心 又題希賢錄云 淵明放曠終非道 諸葛功名謾瘁神 陋巷閉門無箇事 程花周草一般春 三月丁巳 大王大妃昇遐 上星湖先生書 論臣民服制 書畧曰 國母服 禮不曰爲小君 而曰爲君之母妻期 則是本無服 從君 而降也 若庶民則雖在率土之內 而從君之義 有推不得者 故無服 五禮儀 內喪庶人十三日而除 卒哭前禁用紅紫 則國制亦有 等級矣 今無貴無賤 悉從終喪白素之制 遵何禮耶 或中間有所變改而不能知耶 先生前銜 雖與流外一般 而與古庶人在官者 有異 則其勢必同于命士之列 雖無肅謝之例 又以疾不供仕之故 而欲自處以庶人之義 則或太過矣 我東士族之名 自成一俗 與古異 是以儀註亦云 生徒白衣笠以從喪制 與庶民區而別之 則只當從此例而已 此外恐無可論 期後諸臣除服 而主上猶持 重服 則貴近之臣 似不可以吉彩進見矣 君喪謂之方喪 則與父相比而制之也 下敎所引縞冠玄武子姓之服 證諭明白 恐不可 以衰服升縷之少異而致疑也 未知國朝前例之如何 而近觀麗史 明宗當太后之喪 卒哭後謂羣臣曰 朕尙帶皁 而卿等獨帶紅耶 云 則以帶紅從吉 爲未安也 况今禮敎休明之時乎 愚意則貴近之臣 以淺淡服烏帽角帶之制從事 恐爲得宜 未審如何 上星湖先生書 論喪祭式 書略曰 家禮奉四世之䂓 爲擧天下大同之禮 故大夫祭三世 雖見古禮 雖載國典 東方之士不遵此 而遵彼者 盖以家禮爲重也 到此猝難變通 而至若祭物一節 則朱子於家禮曰 貧則稱家之有無 於語類曰 隨家豐約 如一飯一 羹 可盡其誠 知此意則品味之多寡 不必一如家禮之式 而籩豆加减之數 要不失其義而已 易在萃則用大牲吉 當損則二簋用 享 朱子之意 亦本於此矣 今人或富厚貴顯 飮食若流 而反薄於奉先 或貧窶無賴 不能備籩豆之數 亦公然不祭 二者均爲不 是矣 凶年祀以下牲 國君猶然 况士庶乎 後世祭祀繁重 有忌祭有墓祭有節日之薦 古人只有時享 而國語 士庶人舍時 則亦 只歲一祭而已 士之一籩一豆 大夫之二籩二豆 其視後人 無已太簡 盖不如是 不能保守百畒之田矣 中國土地膏沃 物産豊饒 而制節謹度 猶且如是 况東土地瘠物薄 最號貧國 且拙於理生 而其可濫用乎 妄窃以爲祭祀之禮 當觀其家之貧富 歲之豐歉 一年經用之饒乏而爲之節度 定以三品 家苟富也 歲苟豊也 當如家禮六籩六豆之數而不得過焉 否則籩豆或四或二 而鼎俎餠 麵之屬 隨而裁减 又其下則一籩一豆 亦無不可 又不及此 無以爲禮 雖糲飯菜羹 當祭之無闕 盖李先生有書論喪祭禮 多有 商定 故有是書 七月 星湖先生製送順菴記 先生搆一小屋 請記于李先生曰 築室之制 象菴字形 菴之爲字 廿以茅盖也 一橫梁也 人環椽 也 電中立一柱而成四間也 二柱則六間 三柱則八間 其用尤廣 前面二間爲室以居 名曰順菴 盖取其字而名之 竊謂天下之事 惟順理而已 中一間爲堂 爲應事之所 茅茨土堂 耕樵布糲 誦詩讀書 莫非其分 故名曰分宜堂 又隔一門爲室 名以湛肅 祭祀 時齋所也 後面拓三間 爲藏弆器物之所 東北一間 奉安家廟焉 窃願得堂記菴銘 爲沒齒誦念之資云 李先生製菴記以送 上星湖先生書 論西洋學術之非 書畧曰 近觀西洋書 其說雖精覈 而終是異端之學也 吾儒之所以修己養性 行善去惡者 是 不過爲所當爲 而無一毫徼福於身後之意 西學則其所以脩身者 專爲天臺之審判 此與吾儒大相不同矣 天主實義曰 天主怒輅 齊拂兒 變爲魔鬼 降置地獄 自是天地間 始有魔鬼 始有地獄 按此等言語 决是異端 天主若爲輅齊拂兒 設地獄 則地獄還是 天主私獄 且此前人之造惡者 不受地獄之苦 天主之賞罰 更於何處施之耶 又畸人篇云 額勒卧畧 代人受地獄之苦 按天主之 賞罰 不以其人之善惡 而或以私囑 有所輕重 則其於審判 可謂得乎 若然 不必做善 諂事天主一私人可矣 又辨學遺牘者 卽 蓮池和尙與利瑪竇論學書也 其辨論精覈 往往操戈入室 恨不與馬鳴達摩諸人 對壘樹幟以相辨爭也 臨官政要成 自戊午歲始草 初名治縣譜 至是更加增刪 改名政要 有自撰序文 略曰 天德王道本一體 修己治人無二致 學 優而仕 仕優而學 出處不同 其道則同也 眞西山嘗輯經傳論政文字 爲政經一書 非學外有政也 其體雖同 而措之事爲之間 施用有異 故不得不殊而別之 此與心經相爲表裏者也 余少時爲是書 雖有出位之嫌 而亦有爲爲之者也 在亂藳中 未嘗出而 示人 然而相識中或有爲政而請敎者 亦必以是投之 盖附古人贈言之意也 余未試者也 撫鑰疑日 其用或錯 閉戶爲屨 大體斯 存 昔傅琰爲治縣譜 子孫相傳 不以示人 世以吏績著稱南史 余心鄙之曰 是欲獨擅能名也 誠使世人學我之爲 則人之政 我 之政也 楚弓得失 何必用心於其間哉 書凡三篇 曰政語 聖賢之訓也 曰政蹟 已行之效也 曰時措 瞽說之酌時而斟之者也 風 俗有彼此之別 人心有古今之殊 世道有汚隆之異 法制有治亂之分 變通之宜 存乎其人 8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83 영종대왕 英 宗 大 王 33년 정축(1757), 선생의 나이 46세. 1월 초하룻날에 제사 지내는 예법 禮 法 을 개정하고 선묘 先 廟 에 고하다. 선생은 제사지내는 예법에 있어서 사묘 祠 廟 를 중 하게 여기고 산소를 가벼이 여겼다. 정조 正 朝, 한식 寒 食, 단오 端 午, 추석 秋 夕 에 산소에 성묘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옛 풍속 이기는 하나, 이는 예서 禮 書 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도리어 산소에 성묘하는 것에 대해서는 융성하게 하면서 묘 廟 안에서 향사 享 祀 하는 것은 폐하니, 경중이 뒤바뀌어서 예를 제정한 뜻에 크게 어그러지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 예경 禮 經 을 상고하고 나라의 풍속을 채집한 다음, 사시 四 時 를 번갈아 들어 사 祠 와 묘 墓 의 제사로 나누었는데, 양 陽 기운이 생 겨나는 동지 冬 至 와 음 陰 기운이 생겨나는 하지 夏 至 에는 사당 祠 堂 에 제물 祭 物 을 올리고, 풀이 자라나는 한식과 곡식이 익는 추 석에는 분묘 墳 墓 에 전 奠 을 올리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정월 초하루에 전을 올림을 인하여 선묘 先 廟 에 고유 告 由 하였다. 희현록 希 賢 錄 을 완성하다. 을해년 겨울부터 초고 草 稿 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상권 上 卷 은 삼성전 三 聖 傳 으로 이윤 伊 尹, 백이 伯 夷, 유하혜 柳 下 惠 에 대한 전이고, 중권은 양현전 兩 賢 傳 으로 제갈무후 諸 葛 武 侯 ( 諸 葛 亮 을 말함)와 도정절 陶 靖 節 ( 陶 潛 을 말함) 에 대한 기록이고, 하권은 희안록 希 顔 錄 으로 안자 顔 子, 주염계 周 濂 溪, 정명도 程 明 道 에 대한 기록으로, 그들의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말과 행실을 모아 편찬한 다음 이들을 한데 모아 희현록 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이현전 二 賢 傳 에 시 한 수를 제 題 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용강의 해와 달은 봄 졸음에 아득하고. 율리의 바람 안개 시 속으로 들어오네. 무릎 위엔 무현금, 읊는 건 양보음. 뒤에 두 분 맘에 내 마음 붙이노라 고 하였고, 또 희현록 에 제하기를, 도연명의 활달함은 옳은 길 아니었고, 제갈량의 공명 추구 정신만 피곤했지. 누항 사는 즐거움 무슨 일이 또 있을까. 정씨 꽃도 주씨 풀도 봄이 기는 매한가지 라 하였다. 3월 정사일에 대왕대비 大 王 大 妃 께서 승하하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서 신민 臣 民 들의 복제 服 制 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임금 어머니[ 國 母 ]의 복제에 대해 예문 禮 文 에는 소군을 위하여[ 爲 小 君 ] 라고 하지 않고, 임금의 어머니를 위하여[ 爲 君 之 母 ] 라고 했습니다. 처 妻 는 기년복 朞 年 服 인즉, 본디 복이 없는 것인데, 임금을 따라서 강복 降 服 한 것입니 다. 서민의 경우에는 비록 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을 따르는 의리를 어떻게 따져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이 없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례의 五 禮 儀 에 내상 內 喪 의 경우 서민은 13일 만에 상복을 벗고, 졸곡 卒 哭 전에는 홍색이나 자색의 옷을 입는 것을 금한다 고 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의 제도에도 역시 그러한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다 상을 마칠 때까지 소복 素 服 을 입는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이는 어느 예를 따른 것입니까? 혹시 중간에 변경한 것이 있는 데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생님께서는 전 직함이 비록 위계 位 階 가 없는 소관 小 官 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서인 庶 人 으로서 관직에 있었던 옛날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니, 형세상 명사 命 士 의 반열에 같이 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사은숙배한 일은 없었다 하더라 도, 또 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서인의 의리로 자처하려고 하신다면, 이는 혹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사족 士 族 이라는 명색은 나름대로 하나의 풍속을 형성하고 있어 옛날의 사 士 와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주 儀 註 에도 역시 이르기를, 생도 生 徒 는 백의 白 衣 와 백립 白 笠 으로 상제 喪 制 를 따른다 고 하여 서인과는 구별해 놓았습 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예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뿐, 이 이외에 다른 길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기년 期 年 뒤에 여러 신하 들은 모두 복을 벗지만 주상께서는 여전히 중복 重 服 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관 高 官 이나 시신 侍 臣 은 색깔 있는 길복 吉 服 을 입고 문안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임금에 대한 상을 일러 방상 方 喪 이라고 하니, 이는 아버지 상과 서로 비교해서 제정한 것입 니다. 이에 대해서는 보내 주신 편지에서 인용하신 흰 갓에 검정 갓끈은 자성 子 姓 의 복이다 고 한 대목이 명백한 증거가 되 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복 衰 服 의 베올이 다소 가늘고 굵은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의심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국조 國 朝 의 전 례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근래에 고려사 高 麗 史 를 보았더니, 명종 明 宗 이 태후 太 后 의 상을 당하여 졸곡이 지난 뒤 신 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아직 검정 띠를 띠고 있는데 경들은 분홍색 띠를 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 분홍색 띠를 띠어 길 함을 나타내는 것을 온당치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같이 예교 禮 敎 가 아주 밝은 시대에 그럴 수 있겠습니 안정복 생애와 행적 89

84 까. 제 생각으로는 고관과 시신들은 천담복 淺 淡 服 에 오모 烏 帽, 각대 角 帶 차림으로 직무를 보는 것이 아마도 옳을 듯한데, 어떤 지 모르겠습니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상제 喪 祭 의 격식 格 式 에 관하여 논하였는데,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가례 家 禮 에서 는 4대 四 代 를 봉사 奉 祀 하는 규정을 온 천하의 공통의 예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부 大 夫 는 3대만을 봉사하는 것이 고례 古 禮 에 나와 있고 국전 國 典 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저것을 따르니, 이는 가례 를 더 중 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갑작스럽게 그 제도를 바꾸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제물 祭 物 에 대한 한 조목에 있어서만은 주자 朱 子 도 가례 에서 가난하면 집안의 형편에 맞추어 하라 고 하였고, 어류 語 類 에도 집안 형편에 따라서 하면 되니, 밥 한 그릇 국 한 사 발로도 정성을 다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뜻을 안다면 음식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가례 에서 말한 법식과 똑 같이 하지 않더라도, 제물의 가짓수를 적당히 가감하여 그 뜻만 잃지 않게 하면 될 것입니다. 역경 易 經 의 췌괘 萃 卦 에는 대 생 大 牲 을 쓰는 것이 길하다 고 하였고, 손괘 損 卦 에서는 제기 祭 器 둘이면 된다 고 하였는바, 주자의 뜻도 역시 여기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부유하고 현달한 자들은 혹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마구 쓰면서도 조상을 받드는 일에는 박 하게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혹 제물을 숫자대로 다 차릴 수가 없으면 아예 제사를 모시지도 않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다 옳지 않은 일입니다. 흉년이 들 경우 제사를 지내면서 하생 下 牲 을 쓰는 것은 나라의 임금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습 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 士 나 서인 庶 人 의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후세에 와서는 제사가 많아져서 기제 忌 祭 가 있고, 묘제 墓 祭 가 있고, 명절날에 지내는 제사도 있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들 은 시향 時 享 만 지내었는바, 국어 國 語 를 보면, 사와 서인은 시향 말고는 한 해에 제사를 기제 한 번만 모실 뿐이었으며, 제물 祭 物 도 사는 변 籩 하나에 두 豆 하나이고, 대부는 변 둘에 두가 둘이었으니, 후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지나치게 간소한 것 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대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는 백묘 百 畝 의 전지 田 地 를 지켜 갈 수 없어서였습니다. 중국은 토질 이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한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절제하고 삼갔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나라는 땅도 좁고 산물도 빈약하 여 아주 가난한 나라인데다가 또 생계 수단마저도 보잘 것이 없는 처지인데, 이와 같이 함부로 써서야 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제사를 모시는 예는 마땅히 집이 가난한지 부유한지,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한 해의 경비가 많은 지 적은지를 잘 살펴서 그에 따라 절제하여 3품 品 으로 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집이 부자이고 농사도 풍년이면 가례 에서 말한대로 변과 두를 각각 6개씩 놓되 이를 지나쳐서는 안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변과 두를 각각 4개씩 또 는 2개씩 놓되 정조 鼎 俎 와 병면 餠 麵 따위의 것은 경우에 따라 적당히 줄이며, 그 이하의 경우에는 변과 두를 각각 하나씩만 차려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만도 못하여 예를 차릴 수 없으면 비록 현미밥에 나물국만 놓더라도 제사를 빠뜨 리지만 않게 하면 될 것입니다 고 하였다. 이는 대개 성호 선생이 편지에서 상제 喪 祭 의 예에 대해 논하면서 얼마간 상정 商 定 한 것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편지한 것이다. 7월에 성호 선생이 순암기 順 菴 記 를 지어 보내다. 선생이 작은 집 하나를 짓고는 성호 선생에게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 하면서 말하기를, 집을 지은 모양새는 암 菴 자의 모양을 본따 지었습니다. 암 菴 이란 글자를 보면, 초 艸 는 띠풀로 지붕을 덮은 것이고, 일 一 은 가로지른 대들보이고, 인 人 은 빙 둘러 올려놓은 서까래이고, 그 아래는 기둥 하나를 가운데 세워 방 네 칸을 만든 것인데, 기둥이 둘이면 여섯 칸이 되고, 기둥이 셋이면 여덟 칸이 되어 용도가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전면에 있는 두 칸을 방으로 만들어 거처하면서 순암 順 菴 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대개 글자를 취해 이름 붙인 것으로, 천하의 모 든 일은 순리일 뿐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한 칸은 마루로 꾸며 일을 보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띠로 이은 지붕에 흙으로 만든 당 堂 속에 살면서 밭 갈고, 나무하고, 베옷 입고, 거친 밥 먹고, 시 외우고, 책 읽고 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모두 다 제 본분의 일이기에 이름을 분의당 分 宜 堂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칸을 막아 방으로 꾸미고는 담숙실 湛 肅 室 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제사 지 낼 때 재계 齋 戒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뒷 편으로 세 칸을 늘려서 기물 器 物 을 저장하는 곳으로 만들고, 동북쪽의 한 칸은 가묘 9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85 家 廟 를 봉안하였습니다. 삼가 당기 堂 記 와 암명 菴 銘 을 받아 죽을 때까지 외우면서 생각할 자료로 삼고자 합니다 고 하였는데, 성호 선생이 암기 菴 記 를 지어서 보내 주었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서양 西 洋 학술 學 術 의 그름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근래에 서양의 책을 보았더니, 그 말은 정밀하고 확실하였으나, 역시 이단 異 端 의 학문이었습니다. 우리 유자 儒 者 들이 몸을 닦고 성품 을 기르며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불과할 뿐으로, 털끝만큼도 죽은 뒤에 복을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해 서양의 학문은 자기 몸을 닦는 목적이 오로지 천대 天 臺 의 심판을 받는 데 대비하기 위한 것으 로, 이것이 바로 우리 유학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천주실의 天 主 實 義 에서 말하기를, 천주가 노제불아 輅 齊 拂 兒 에게 화 를 내어 그를 마귀로 변신시켜 지옥으로 보냈는데, 그 뒤로 천지 사이에 처음으로 마귀가 생겼고 처음으로 지옥이 생겼다.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들로 볼 때 결단코 이는 이단의 학문입니다. 천주가 만약 노제불아 때문에 지옥을 만들었다면, 그 지옥 은 천주 天 主 의 개인 감옥에 불과한 것이고, 또 그 이전에 악한 짓을 한 자들은 지옥의 고초를 받지 않은 셈이 되니, 천주의 상과 벌을 어디에다 썼단 말입니까. 또 기인편 畸 人 篇 에는 말하기를, 액륵와략 額 勒 臥 略 이 남을 대신해서 지옥의 고초를 받았 다 고 하였는데, 천주의 상과 벌이 그 사람 본인의 선과 악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혹 사사로운 청탁으로 경중이 정 해진다면, 그것이 올바른 심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선한 일을 할 필요 없이 천주 한 개인에게만 잘 아첨하 여 섬기면 될 것입니다. 또 변학유독 辨 學 遺 牘 이란 것이 있는데, 바로 연지화상 蓮 池 和 尙 이 이마두 利 瑪 竇 와 학문을 토론한 글로 서, 변론이 정밀하고 확실하여 왕왕 상대의 논지를 여지없이 간파하여 굴복시켰습니다. 그로 하여금 마명 馬 鳴 이나 달마 達 摩 와 같은 사람들과 맞서서 각각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쟁변해 보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임관정요 臨 官 政 要 를 완성하다. 무오년(1738, 영조 13)부터 초고 草 稿 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의 책 이름은 치현 보 治 縣 譜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다시 첨가하고 삭제한 다음 임관정요 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스스로 찬한 서문 序 文 이 있 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천덕 天 德 과 왕도 王 道 는 본디 한 몸이고 수기 修 己 와 치인 治 人 은 두 가지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면서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하고, 벼슬을 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배우는 것이니,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같지 않으나 그 도는 같은 것 이다. 진서산 眞 西 山 이 일찍이 경전 經 典 가운데서 정사에 대해 논한 내용을 편집하여 정경 政 經 이라는 책 하나를 만들었으니, 학문의 밖에 정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사와 학문이 체 體 는 비록 같지만, 일에 응용하다 보면 시행됨이 다르 기 때문에 부득불 구별한 것으로, 이것은 심경 心 經 과 표리가 되는 책이다. 내가 젊었을 적에 이 책을 지었는데, 비록 나 자 신의 분수에 벗어나는 외람된 짓을 하였다는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만든 것이다. 그 동안에는 난고 亂 藁 속에 처박아 둔 채 일찍이 이를 꺼내어서 남에게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 가운데 혹 정사를 하게 되어 나에게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책을 내어 보여 주었는바, 이는 대개 옛 사람이 벼슬길에 나아 가는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 준 뜻을 따른 것이다. 나는 벼슬자리에 있어 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탓에 피리를 만지면서 하늘의 해로 여기는 듯하여 그 쓰임이 혹 잘못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신발을 만들어도 대체적인 신발의 모양새는 갖추는 법이다. 옛날에 부염 傅 琰 이 치현보 治 縣 譜 를 만들었는데, 자손들끼리만 서로 전해 보면서 남에게는 보여 주지 않아, 집안 대대로 관리로서 치적 을 이루어 남사 南 史 에 드러나게 칭해졌다. 나는 내심 이것을 비루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것은 혼자서만 잘 한다는 명예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행한 일을 배워서 하게 한다면, 남의 정사가 곧 나의 정사일 것이 니, 초궁 楚 弓 의 득실 得 失 에 어찌 마음을 쓰겠는가 라고 하였다. 책은 모두 3편으로, 그 가운데 정어 政 語 는 성인의 교훈을 적은 것이고, 정적 政 蹟 은 이미 시행한 효과를 적은 것이고, 시조 時 措 는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시의 時 宜 를 참작하여 적은 것이다. 풍속 風 俗 은 피차의 구별이 있고 인심 人 心 은 고금의 차이가 있으며, 세도 世 道 는 성쇠의 다름이 있고 법제 法 制 는 치란의 나뉨이 있는 법이나, 이를 적절히 변통하여 쓰는 것은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안정복 생애와 행적 91

86 47세(1758, 영조34) * 장녀, 권일신權日身에게 시집보냄 * 성호 선생에게 여러 번 편지를 올림 * 이병휴와 편지로 경학經學을 논함 * 교증가례校證家禮 를 짓고 서문을 붙임 (25) 順菴集年譜 三十四年戊寅 先生四十七歲 正月 上星湖先生書 論婦女首餙 三月 上星湖先生書 論鬼神之理 十月 與貞山書 論讀易讀詩之法 十二月 作校證家禮附贅序 卽先生宗人五休子所撰 영종대왕英宗大王 34년 무인(1758), 선생의 나이 47세. 1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부녀자들의 수식首飾에 대해 논하였다. 3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귀신鬼神의 이치에 대해 논하였다. 10월에 정산貞山에게 편지를 보내다. 역경易經 과 시경詩經 을 읽는 법에 대해 논하였다. 11월에 교증가례부췌校證家禮附贅 의 서문序文을 짓다. 바로 선생의 종인宗人인 오휴자五休子 안신安㺬이 찬한 책이다. (26)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戊寅] 自叙文 平生慕二人 三代以後有宋以前 若無此二人 千餘年間 幾乎寥寥矣 非曰爲第一等人而學固止於此耳 盖甲戌冬間 病且垂盡 欲於未死之前 收拾先狀 又於自己心事 亦有遺意 倩筆呼草 聊以爲戱 其中絶不道儒家語者 盖俗人稍讀濂洛書十 餘卷 則晏然高自標致 以程朱自處 然而夷考其行 全不相掩 故以是爲嫌 欲脫其套耳 非不知吾家大門庭 有戰兢臨履 眞正 好道理也 後來自想 亦不能滿意 繼編希顔錄 附以濂溪明道二先生 敢爲一絶曰 淵明放曠終非道 諸葛功名謾瘁神 陋巷閉門 無箇事 程花周草一般春 然而夾雜之心 自不掩于文字之間 以致函丈之疑訝 益增愧恨 激仰二字 謹聞命矣 倭書有和漢名數 爲名者二卷 卽我肅廟庚午年 貝原篤信之所著也 轉借于奉使人家 卽爲推去 故不得納上 伏歎 倭初都太和州 故盖以和爲國 號 猶淸人之指建州爲滿也 其歷世篇云上世有天神七代 地神五代 盖謂君爲神也 至狹野爲人皇始祖 卽所謂神武天皇也 以 其書考之 則其立距我肅廟庚午 爲一百十四世 二千三百四十年 證以中國史 則當周襄王之二年辛未矣 一姓相傳 至今不已 是中國聖王之所不能者 誠爲異事 而封建之法能行焉 且其器械之精妙 制度之一定 則不可以蠻夷忽之也 若文之以禮樂 則 誠海中之樂土也 關白之興 始於源賴朝 當宋淳煕間 以鎌倉將軍 鎌倉關東地名 逐用事大臣平淸盛 廢殺安德天皇 遂擅國政 鎌倉將軍歷十世一百四十九年 又有足利尊氏者代之 卽元文宗至順間也 又歷十三世二百三十一年 而信長代興 秀吉代信長 家康代秀吉 其國亦有忠義之士 常憤東武 武藏州 關白所居 之雄剛 西京 山城州 倭皇所居 之微弱 欲有所爲 而但六十六 州太守家眷 皆爲關白質子 故不敢發 前有山闇齋及其門人淺見齋者 議論以許魯齋仕元爲非 今有淺見門人姓若名新鏡者 字 仲淵號脩齋 好學善談論 自比於岳飛 方孝孺 恒有興復西京之志 然則果奇士也 關白稱征夷大將軍 所謂夷 似指蝦蛦也 其 國甚大 恐其強盛難制 故有此稱號 而關白之常居關東 亦豈非彈壓蝦蛦而然歟 蝦蛦地近我北道 後漢書 鮮卑檀石槐擊倭國 獲千餘家 使之捕魚助糧 則其去女眞地不遠矣 倭國雖云在海中無外侮 然而天下之事變無窮 蠻夷之盛衰無常 女眞中更有如 檀石槐者出 而蝦蛦亦復煽動 則其國亦難保矣 別紙 9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87 今婦人首餙 爲一大政令 未審若何而可乎 考古禮 不過副也編也次也笄纚也而已 若以髢爲胡元之陋俗 則恐有誤 詩云不屑 髢也 左傳 髡己氏妻髮爲髢 莊子禿而施髢云 則中國古時用髢 禮經外傳記所論 亦難掩矣 中國史東夷傳謂百濟女辮髮垂後 嫁則分爲兩道 盤於頭上 新羅傳 婦人辮髮繞頭 此盖今俗也 史亦云新羅服素 句麗百濟皆服白云 則白亦我東舊俗 而說者謂 今人尙白 是太師遺風 亦或然也 然則韓爲朝鮮遺民 則雙紒繞首之制 安知非箕王舊俗耶 家禮笄條有冠 且宋史 王雱携婦人 冠云 則中國宋時盖有冠 而以禮男子冠婦人笄對說之語觀之 則冠亦非禮矣 通考高麗傳 婦人鬐䯻垂右肩 餘髮被下 約以絳 羅賁之簪云者 今未知何制 董越朝鮮賦 女鬢掩耳 首戴白圈壓眉 富貴者面蔽黑繒 戴一匡 如大帽簷 今無其制 則亦不可知 矣 今俗簇頭里 倣古何制耶 麗時元公主來後變胡服 宮人服色 亦必元俗 簇頭里爲今宮人所着 則後來雖復衣冠舊制 而宮中 則因舊不變 至聖朝猶然 然則簇頭里亦元制也 忠宣王時 元太后賜淑妃姑姑 姑姑婦人冠名 此亦何物耶 趙重峯東還封事 論 婦人首餙 有䯻鈠子之文 其制束髮于頂 覆以絹 今亦不知爲何物也 家禮笄禮 婦人雙紒 與男子同其制 亦不可知 或如我俗 男女編髮雖同 而以服別之 束髮雙紒 男女無異耶 以禮言之 男女纚笄皆同者 抑何耶 若以緫束髮 則無俗稱䪿門縱紋矣 嘗 觀唐畫美人圖 頂有䯻 而䪿上縱紋直至半頂 則亦必雙紒故也 雜記曲鬈注所謂如鬌䯻者 爲今何制耶 古者章服制度 盡其華 美 而婦人纚笄 以今思之 徒增醜惡 未審不失纚笄之義 而欲使制度華美 則如何而可乎 성호 선생께 올림[무인년] 자서문自敍文에, 한 평생 두 사람을 흠모한다 고 한 것은 삼대三代 이후 송宋나라 이전까지 만약 그 두 사람이 없었더 라면 1천여 년 동안 너무 쓸쓸했을 것이라는 뜻이지 그들이 제일등第一等의 사람으로서 학문이 필경 이 정도에서 그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갑술년 겨울에 병으로 거의 목숨이 다하게 되어 죽기 전에 선친의 가장家狀이라도 수습하고 싶었고, 또 자신 의 마음에 있는 일도 남겨두고 싶은 생각에서 남을 시켜 쓰라고 하고 입으로 불러 초록하게 하였던 것이니, 그저 희롱삼아 한 일일 뿐입니다. 그 내용에 유가儒家의 말은 일절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요즘 시속 사람들이 염락서濂洛書 10여 권만 읽 으면 거침없이 자기를 높이 내세워 정주程朱로 자처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전혀 말과는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 점이 혐의로워 그러한 구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일 뿐이지 우리 쪽 유가의 큰 문정門庭에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 가를 가는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는 진정한 도리가 있음을 몰라서는 아니었습니다. 뒤에 스스로 생각해 보니 이 역시 뜻에 차지 않아 희안록希顔錄 을 이어서 편집하면서 염계濂溪ㆍ명도明道 두 선생을 뒤에다 붙이고, 감히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읊었습니다. 도연명은 방광하여 옳은 길이 아니었고, 제갈량의 공명은 한갓 정신만 피곤했지. 누항에서 사는 즐거움 무 슨 일이 또 있을까. 정씨 꽃도 주씨 풀도 봄이기는 일반이라네. 그러나 그 문자 사이에는 은연중에 다소의 협잡심이 드러나 있어 함장函丈의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더욱더 부끄럽고 유감스럽습니다. 그리고 격앙激仰 두 글자에 관해 하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왜서倭書에 이름이 화한명수和漢名數 인 책 두 권이 있는데, 바로 우리 숙종 경오년에 패원독신貝原篤信이 쓴 책입니다. 제가 사신 갔다가 온 이의 집에서 잠시 빌려 보았는데 금방 찾아가 버렸기 때문에 올려 드릴 수가 없어 한탄스럽습니다. 왜 인들이 맨 처음 도읍을 태화주太和州에다 정했기 때문에 화和를 자기들 국호로 정한 것이니, 마치 청인淸人들이 건주建州를 가 리켜 만주[滿]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역세편歷世篇 을 보면, 오랜 옛날에 천신天神 7대代와 지신地神 5대가 있었다 고 했으니, 이는 임금을 일러 신神이라고 한 것이고, 협야狹野에 와서 인황시조人皇始祖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이른바 신무천황神武天皇입니다. 그들의 기록으로 상고해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이 우리 숙종 경오년을 정점으로 1백 14세世 2340 년이나 되며 중국 역사와 맞추어 보면 주周의 양왕襄王 2년 신미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한 성씨가 지금까지 계속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중국의 성왕聖王들로서도 못했던 일인데 그 참 이상한 일입니다. 또 봉건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그 밖의 기계의 정묘함이라든지 제도가 일정한 점 등은 그냥 오랑캐로 소홀히 대할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만약 예악禮樂만 더 가미 해 놓는다면 참으로 바닷속 낙원이라 할 것입니다. 관백關白 제도는 원뢰源賴 때 시작된 것으로 송宋의 순희淳熙 연간에 해당합니다. 그때 겸창장군鎌倉將軍 겸창은 관동의 지 안정복 생애와 행적 93

88 명임 이 당시 용사하던 대신 大 臣 평청성 平 淸 盛 을 내쫓고 안덕천황 安 德 天 皇 을 폐위시켜 죽이고서는 드디어 국정을 제맘대로 장 악했습니다. 겸창장군이 10세 世 를 대물림하면서 149년 동안 국정을 요리했고, 그 후에도 또 족리존씨 足 利 尊 氏 라는 자가 그를 대신했는데, 바로 원 元 의 문종 文 宗 지순 至 順 연간이었습니다. 그가 13세에 231년을 대물림한 후 신장 信 長 이 그를 대신해 일어 나고 수길 秀 吉 이 신장을 대신하고, 가강 家 康 이 수길을 대신해 각각 관백이 되었습니다. 그들 나라에도 충의 忠 義 의 선비가 있어, 동무 東 武 무장주 武 臧 州 인데 관백이 있는 곳임 는 강성하고 서경 西 京 산성주 山 城 州 인데 왜황 倭 皇 이 있는 곳임 은 미약한 것을 늘 분하게 여겨 무엇인가 일을 꾸며 보려고 해도 66개 주 州 의 태수 太 守 권속들이 모두 아들을 관백에게 볼모로 보내 놓고 있 어 감히 거사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산암재 山 闇 齋 가 있었고, 그의 문인으로 천견재 淺 見 齋 라는 자가 또 있었 는데, 허노재 許 魯 齋 ( 許 衡 을 존칭하여 노재 선생이라 하였음)가 원나라에 벼슬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견의 문인으로 성이 약 若 이고 이름은 신경 新 鏡 이라고 하는 자가 있는데, 자는 중연 仲 淵, 호는 수재 脩 齋 로 학문을 좋아하고 담론을 잘하여 자 기 자신을 악비 岳 飛 와 방효유 方 孝 孺 에다 비기면서 서경을 흥복시킬 뜻을 늘 두고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과연 기사 奇 士 라 하겠 습니다. 관백을 정이대장군 征 夷 大 將 軍 이라고 한다는데, 그들이 말하는 이 夷 는 하이 蝦 蛦 를 지칭한 것 같습니다. 그 나라가 매우 커 서 강성해지면 제압하기 어려울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칭호를 둔 것이고, 관백이 언제나 관동 關 東 에 있는 것 역시 하이 를 탄압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이는 우리 북도 北 道 와도 가까운 위치에 있는데, 후한서 後 漢 書 에 보면 선비족[ 鮮 卑 ] 단석괴 檀 石 槐 가 왜국을 쳐서 1천여 가구를 노획하고 그들을 시켜 고기잡고 식량을 돕도록 했다고 한 것을 보면 여진 女 眞 과의 거리도 멀지 않은 모양입니다. 왜국이 비록 바다 속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범은 없다고 하지만 천하의 사변 事 變 은 끝이 없는 것이고, 오랑캐들의 성쇠도 무상한 것이어서 여진족에서 다시 단석괴 같은 자가 나타나 하이가 다시 선동하면 그 나라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별지 - 지금 부인들의 수식 首 飾 이 하나의 큰 정령 政 令 이 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고례 古 禮 를 상고해보면 부 副, 편 編 과 차 次 와 계사 筓 纚 가 있을 뿐인데, 만약 다리[ 髢 ]를 원나라 오랑캐의 더러운 풍속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잘못일 듯합 니다. 시경 에도, 다리 드릴 것이 없다 고 했고, 좌전 에도, 기씨 己 氏 의 아내 머리털을 깎아 다리를 만들었다 고 했으며, 장자 莊 子 에도 대머리여서 다리를 썼다 고 했으니 그렇다면 중국이 옛날부터 다리를 썼던 것은 예경 禮 經 외의 다른 전기 傳 記 에 나와 있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중국 역사의 동이전 東 夷 傳 에도 이르기를, 백제 百 濟 여인들은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우 고 다니다가 출가하면 그 머리를 둘로 갈라 머리 위에다 또아리를 튼다 하였고, 신라전 新 羅 傳 에는 부인들이 머리를 땋아 두 상에다 두른다 고 하였는데 그게 일반적으로 지금 풍속 아니겠습니까. 역사에도, 신라 新 羅 에서는 소복을 입었고, 고구려ㆍ백 제도 다 흰 옷을 입었다 고 했으니 그렇다면 흰 옷을 입은 것은 역시 우리나라 전래의 풍속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이들은 지금 사람들이 흰 옷을 숭상하는 것은 태사 太 師 의 유풍이다 라 하는데 그도 혹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 韓 이 조선 유민 遺 民 인 이상 쌍상투를 틀어 머리에 두르는 제도가 기왕 箕 王 때부터 유래한 풍속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 가례 家 禮 의 계 筓 조항에 보면 거기에 관 冠 이 있고, 또 송사 宋 史 에도, 왕방 王 雱 이 부인의 관을 가졌다고 한 것을 보 면 중국 송나라 때 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문에, 남자는 관 冠, 부인은 계 筓, 이렇게 상대적으로 말한 뜻으로 보면 관 은 역시 예가 아닌 것입니다. 통고 通 考 의 고려전 高 麗 傳 에, 부인은 기계 鬐 髻 를 바른 편 어깨에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털은 풀 어 내린 채 붉은 색 비단으로 묶고 비녀로 장식을 한다 고 했으나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제도이고, 또 동월 董 越 의 조선부 朝 鮮 賦 에는, 여인들은 귀밑머리로 귀를 덮고 머리에는 백권 白 圈 을 쓰되 눈썹이 눌릴 정도로 쓰며 부귀한 집들은 검정 비단으 로 얼굴을 가리고 큰 모자처럼 생긴 광 匡 을 쓴다 고 했으나 그 역시 지금은 없는 제도여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쓰는 족두리 簇 頭 里 는 옛날 어느 때 제도를 본뜬 것입니까? 고려 시대에 원나라 공주가 온 후로 호복 胡 服 으 로 바뀌었으므로 궁인 宮 人 들 복색 역시 틀림없이 원나라 풍속을 따랐을 것인데, 지금도 궁인들은 족두리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 후 의관을 다시 옛 제도대로 복원했다고 해도 궁중에서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고 성조 聖 朝 에 와서도 마찬가 지인데, 그렇다면 그 족두리 역시 원제 元 制 가 아니겠습니까. 충선왕 忠 宣 王 때 원 태후 元 太 后 가 숙비 淑 妃 에게 고고 姑 姑 를 하사했 9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89 는데 고고는 부인들 관의 이름이라고 하니 그것은 어떻게 생긴 물건입니까? 조중봉趙重峯의 동환봉사東還封事에 부인들 머리 장식을 논하면서 적계역자髻鈠子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제도가 정수리에다 머리를 묶고 비단으로 덮는다는 것이지만 지금으 로서는 그 역시 어떻게 된 물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례 의 계례筓禮에는, 부인도 쌍상투를 하여 그 제도가 남자의 그 것과 같다 고 했는데 그 역시 알 수 없으나 어쩌면 우리나라 풍속처럼 남녀가 머리 땋은 것은 같고 의복으로 남녀를 구별하 는 것과 같이, 머리를 묶어 쌍상투를 트는 것은 남녀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까? 예문에서 말한, 남녀의 사계纚筓가 같다는 것 은 또 무엇입니까? 만약 머리를 통째로 묶는다면 시속에서 말하는 신문종문䪿門縱紋 가리마 이라는 것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당나라 미인도美人圖를 보면 정수리에 상투가 있고, 정수리 위로 세로줄이 곧바로 정수리 절반쯤까지 나 있는데, 그것 은 틀림없이 쌍상투를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잡기雜記의 곡권曲鬈 주석에 이른바, 기계鬐髻같다고 한 것은 지금으로 치면 어 떤 제도입니까? 옛날 장복章服 제도가 아주 화사하고 아름다웠으면서도 부인들 사계纚筓는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추악하게만 보일 뿐인데, 그 사계의 뜻은 그대로 살려 두고 제도만 더 좀 화사하고 아름답게 꾸미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48세(1759, 영조35) * 동사강목東史綱目 저술 * 윤동규와 편지로 학문토론( 詩經 에 대해 논함) * 이익에게 여러 차례 편지 올림(音韻과 曆法, 易에 대해 논함) (27) 順菴集年譜 三十五年己卯 先生四十八歲 東史綱目成 先生嘗嘆東人之專昧東事 自丙子歲始草 閱四年而書成 上自箕子元年 下至麗末 立綱立目 書凡十八卷 又有 考異地理考二卷 合二十卷 自撰序文 略曰 東方史亦備矣 紀傳則有金文烈 鄭文成之三國高麗史 編年則徐四佳 崔錦南奉敎 撰通鑑 因是而兪氏提綱 林氏會綱作焉 抄節則有權氏史畧 吳氏撰要等書 彬彬然盛矣 然而三國史踈略而爽實 高麗史繁冗 而寡要 通鑑義例多舛 提綱 會綱 筆法或乖 至於因謬襲誤 以訛傳訛 諸書等爾 某讀之慨然 遂有刊正之意 博取東史及中史 之及于東事者 一遵紫陽成法 彙成一帙 以爲私室巾衍之藏 資其考閱而已 非敢以撰述自居也 至若訛謬之甚者 別爲附錄二 卷 系之于下 正月 上星湖先生書 論易先後天之義 二月 與邵南尹公書 論詩經義 十一月 上星湖先生書 論列國音韻 古今曆法 영종대왕英宗大王 35년 기묘(1759), 선생의 나이 48세. 동사강목東史綱目 을 완성하다. 선생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사실에 대해서는 깜깜한 것을 탄식하여 병자년부터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4년에 걸쳐서 책을 완성하였다. 위로는 기자箕子 원년元年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강綱과 목目을 세워 기술하였는데, 모두 18권이며, 또 고이考異와 지리고地理考 두 권의 책이 있어서, 이를 합하여 총 20권이다. 스스로 찬한 서문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역사서도 두루 갖추어져 있으니, 기전체紀傳體로는 문열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와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 가 있고, 편년체編年體로는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금남錦南 최보崔溥가 교지 敎旨를 받들어 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 이 있으며, 이를 인하여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 과 임상덕林象德의 여사회강麗史 會綱 이 지어졌고, 초절抄節한 것으로는 권근權近이 지은 동국사략東國史略 과 오운吳澐이 지은 동사찬요東史撰要 등의 책이 안정복 생애와 행적 95

90 있는바, 찬란하고도 성대하다. 그러나 삼국사기 는 소략하여서 사실과 어긋나고, 고려사 는 번잡하여 요긴함이 적고, 동국통감 은 의례義例가 많이 어그러졌고, 여사제강 과 여사회강 은 필법筆法이 간혹 어그러졌으니,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오류를 범하고 와전된 것을 그대로 와전한 것은 모든 책이 비슷하다. 내가 이를 읽어 보고는 개탄하면서 드디어 고쳐서 바로잡을 뜻을 품게 되었다. 이 에 우리나라의 역사 및 중국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나라의 사실을 언급한 것을 널리 취한 다음, 일체를 자양紫陽 주 부자朱夫 子가 만들어 놓은 역사서의 체재를 따라 모두 모아서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방 안에 보관해 두고서 고 열考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일 뿐, 감히 찬술撰述로 자처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심하게 오류를 범하고 와전된 것에 대해 서는 따로 부록附錄 2권을 만들어 책 끝에 붙였다. 정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역경 의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뜻을 논하였다. 2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시경 의 뜻을 논하였다. 11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열국列國의 음운音韻과 고금古今의 역법曆法에 대해 논하였다. (28) 順菴先生文集 권2, 書, 答上星湖先生書[己卯] 科擧之害 唐宋以後 言其弊者不一 朱子以廢三十年科擧 當恢復中原之語爲是 然則人才之汨溺 莫此若也 孝廉賢良之科 其名雖好 揭此名而試士 則似爲不可 自好之士 亦豈欲冐此名而媒進耶 終不若鄕擧里選之得其制 而龐統所謂拔十得五者 惟此爲近似矣 科法 於程子學制 朱子私議中 酌量而行之 則似亦有可行者 而後世皆不以此爲言者何哉 성호 선생께 답함[기묘년] 과거科擧 폐단에 대해 당ㆍ송唐宋 이후로 지적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주자朱子는, 30년만 과거를 없애면 중국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한 말을 옳은 말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인재가 침몰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효 렴과孝廉科니 현량과賢良科니 그 이름이야 좋지만 그 이름을 내걸고 선비들 시험을 보인다는 것은 불가한 일 같습니다. 조금 이라도 염치를 아는 선비라면 누가 이러한 이름을 무릅쓰고 거기에 나가려고 꾀하겠습니까. 뭐니뭐니해도 향거이선鄕擧里選 그게 그래도 제일 나은 제도 같고, 방통龐統이 말했던, 10명 선발에 5명 채용이라는 그것이 근사할 것 같습니다. 과거법은 정 자의 학제學制와 주자의 사의私議에서 각각 적당히 재량해서 실시하면 그 제도도 시행할 만할 터인데 후세에 와서 그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49세(1760, 영조36) * 권철신權哲身과 편지로 학문을 토론 (29) 順菴集年譜 三十六年庚辰 先生四十九歲 十二月 答權哲身書 有雅頌疑問 故先生逐條答之 其書略曰 聖賢言語 皆平易明白 不可探曲以求 自致纏繞于疑亂之中矣 退溪李子曰 讀書不必深求異意 當於本文上求見在之義 此語的當簡易 試入思議也 經文固有兩般義 後人解釋時 必量度而 取其最近者 今君讀書 有與傳義不同者 試就其不同處 劑量輕重 諷詠詳玩 則自有可別之道矣 我之私意 橫在肚裏 却以先 儒之說 求合於己 是甚不可 若然則我去自做一般文 何必苦苦讀古書乎 9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91 영종대왕英宗大王 36년 경진(1760), 선생의 나이 49세. 12월에 권철신權哲身의 편지에 답하다. 아송雅頌 가운데서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물어왔으므로 선생이 조목별로 답하 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성현들의 말씀은 모두가 평이하고 명백하므로 굳이 굽은 길로 찾아들어가서 스스로 의문 속에 자신을 얽어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퇴계退溪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독서를 함에 있어서는 굳이 색다른 뜻을 캐려 고 하지 말고, 그 본문本文을 놓고 그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만 찾으라 고 하였다. 그 말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이치에 꼭 들 어맞는 말이니, 한 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문經文은 두 가지 뜻이 있게 마련이니, 후세 사람들로서는 해석할 때 반드시 잘 헤아려 보아서 나와 가장 가까운 쪽을 취해야 하는 것이네. 지금 그대도 독서를 할 때 전의傳義와 틀린 곳이 있으면 그 틀린 부분에 대해서 경중을 헤아려서 읊조리고 자세히 음미해 보면 저절로 구별되는 바가 있을 것이네. 자신의 사사로운 뜻 을 마음속에 걸어 두고서 도리어 선유先儒들의 말을 자기 뜻에다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네. 만약 그렇 게 하려면 차라리 자기류自己流의 글을 따로 짓는 것이 낫지, 어찌 괴롭게 고서古書를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50세(1761, 영조37) * 광주 덕곡에 서재書齋인 이택재麗澤齋를 세움 * 5월 이후로 후학들에게 소학小學 을 강의함 (30) 順菴集年譜 三十七年辛巳 先生五十歲 四月 建書齋 與鄕里從學後進 議建書齋于德谷洞中 名之曰麗澤齋 自五月以後 逐月相會講小學 三十八年壬午 先生五十一歲 十一月 編次僿說類編 星湖先生所撰 屬先生刪正分類 書凡十二卷 영종대왕英宗大王 37년 신사(1761), 선생의 나이 50세. 4월에 서재書齋를 건립하다. 향리鄕里에 사는 학문하는 후배들과 함께 의논하여 덕곡동德谷洞 안에 서재를 세우고는 이택재麗澤齋 라고 이름 붙인 다음, 5월 이후부터 매달 서로 모여서 소학小學 을 강독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8년 임오(1762), 선생의 나이 51세. 11월에 사설유편僿說類編 의 편차編次를 정하다. 성호 선생이 찬한 것이다. 성호 선생이 선생에게 산정刪正하고 분류해 주기를 부탁하였는데, 총 12권이다. (31)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辛巳] 僿說目錄類編納上 若依此書出 則可爲全書 而但其中儘多有禀裁者 亦或有未及照管者 鮮于浹丁卯變 以箕子殿參奉降賊 金荷潭爲監司 論罪汰黜 見于破寂錄中 此當時實事也 先生或未及知而推許至此耶 此條刪之無疑 六卷女多男少條 當引周 禮職方 而却引漢志 此類頗多矣 還敎幸甚 此事旣不得面禀 則當與元陽商論 而亦不可得奈何 論語正名章子路之意 盖謂聵 旣得罪於父 而輒承王父命而爲君 則國其國也 且君位已定 勢有難處 故其言如此 此子路見未到處也 而集註謂非今日之急 안정복 생애와 행적 97

92 務也 語甚歇後 而子路之意 却不說出何也 想當日事勢 雖有十分難處 而實未有難處者 夫子正名之語 欲使輒迎父立之也 假使靈公廢聵囚之 靈卒而輒立 其將因其囚而不出乎 必出而奉立然後 可以盡人子之責矣 以君臣言 則社稷重而君爲輕 事 權在手 集註胡氏之論 未爲不可 以父子言 則父子之倫 重於社稷 輒豈敢托以社稷之重而拒其父乎 孟子竊負遵海之語 實得 天理之正矣 朱子答范伯崇之語 出於胡氏傳而甚有疑焉 敢此仰禀 因此而轉思之 國家難處之事 莫過於帝王人倫之變 試以 本朝事言之 太宗廢讓寧 成廟廢尹妃 皆令羣臣庭請 世子小君 后有母道 此豈臣子之所可請 當日羣臣 多有後世所謂名卿者 而皆承順無違何也 亦念人臣事君事小君之道 微有不同 事君則其義無隱 庭爭陳章 明白直截爲當 而小君則位在潛龍 義當 內存䂓戒而外致掩護 雖有過失 勿使宣露 使人心有所係屬可也 若其失德流布 使四海離畔 將若之何 성호 선생께 올림[신사년] 사설僿說 의 목록을 분류별로 엮어서 올리오니 만약 이 책대로 출간한다면 전서全書가 될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 중에는 여쭈어 보고 손을 댈 곳이 참으로 많고 또 미처 살피지 못하신 대목들도 혹 있습니다. 예컨대 선우협鮮于浹은 정묘년 호란胡亂 때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으로 있으면서 적에게 항복한 자이고, 김하담金荷潭(時讓)은 감사監司가 되었다가 죄를 받고 쫓겨난 자로서 파적록破寂錄에 나와 있으니, 이는 당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혹 미처 모르시고 이렇게까 지 높이 평가하셨습니까? 이 조항은 의심할 나위 없이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6권의 여다남소女多男少 조항에는 주례 周禮 의 직방씨[職方]를 인용해야 하는데, 한지漢志를 인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종류들이 꽤 많으니, 다시 하교를 주셨으면 좋겠 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접 여쭐 수 없으니, 당연히 원양元陽과 상의해서 해야 할 것이나 이 또한 여의치 않으니 어찌하겠 습니까? 논어 정명장正名章의 자로子路의 뜻은 대체로, 외聵는 이미 자기 아버지에게 죄를 얻은 입장이고, 첩輒은 자기 할아버 지 명을 받아 임금이 되었은즉 나라는 이미 그의 나라이다 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임금의 자리가 이미 정해져서 어찌할 도리 가 없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니, 이 점이 바로 자로의 식견이 부족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집주集註에는 그것이 오 늘의 급무急務가 아니었다고 하여 말이 매우 헐후하며 자로의 뜻은 도리어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그 당시 사세를 상상해 보면, 십분 난처한 점이 있었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난처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부자가 정명正名을 말씀 하신 것은 첩으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를 맞아 들여 왕위에 앉히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령 영공靈公이 외를 폐위시켜 옥에 가두어 두었다고 했을 때 영공이 죽고 첩이 왕위에 오르면 외를 출옥시키지 않고 갇힌 그대로 두겠습니까? 아버지를 출옥시 켜 왕위에 올려 모셔야지만 남의 자식된 도리를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군신君臣 입장으로 말한다면 사직社稷이 중하고 임금은 가벼우므로 사권事權이 내 손에 있었을 때는 집주集註의 호씨胡氏 주장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父子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부자의 윤리가 사직보다도 더 중한데, 첩이 어찌 감히 사직이 중하다는 핑계로 자기 아버지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몰래 업고 바다 따라 도망간다 고 한 맹자孟子 말씀이 사 실 정당한 천리天理인 것입니다.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답한 말도 호씨胡氏에게서 나온 것으로 너무 의아스럽기에 감히 이 렇게 여쭈어 봅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생각해 볼 때 국가의 난처한 일로 제왕 사이의 인륜人倫 변괴보다 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조本朝 에 있었던 일로만 말하더라도 태종太宗이 양녕讓寧을 폐위시키고, 성종成宗이 윤비尹妃를 폐위시켰는데, 그때마다 뭇 신하들을 시켜 정청庭請을 하게 했습니다. 왕세자는 소군小君이고 왕후는 어머니 격인데, 그 일을 신하요 자식이 어떻게 청할 것입니까. 그런데 그때 신하들 중에는 후세에 이른바 명경名卿이라고 일컫는 이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모두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따르 기만 했던 것은 왜 그랬을까요? 또 생각해 보면 신하가 임금 섬기는 도와 소군 섬기는 도는 조금 다릅니다. 임금은 숨김없이 섬기는 것이 의리이므로 정쟁庭爭과 상소에 있어 명백하고 직절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군에 있어서 는 그 지위가 잠룡潛龍이므로 당연히 안으로는 규계規戒하되 겉으로는 엄호하는 것이 의리이니, 비록 약간의 과실이 있을지라 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여 인심이 그에게로 쏠리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만약 그의 실덕을 사방에 유포하여 세상 9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93 이 그를 등지게 만든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52세(1762, 영조38) * 성호 선생의 부탁으로 성호사설유편星湖僿說類編 엮음 * 백선시百選詩 사감史鑑 저술 * 12월 성호 선생의 부음訃音을 받음 (32) 順菴集年譜 三十九年癸未 先生五十二歲 三月 百選詩成 歷代詩各體 皆選百首 名之曰百選詩 書凡七卷 有自撰序文 史鑑成 自上古至綱目以上節刪成之 名之曰 史鑑 書凡八卷 十二月 哭星湖先生訃 服心喪 記其問學之語 有凾丈錄 영종대왕英宗大王 39년 계미(1763), 선생의 나이 52세. 3월에 백선시百選詩 를 완성하다. 역대의 시를 각 문체별로 모두 1백수를 모아 백선시 라고 이름하였는데, 책은 총 7권이다. 스스로 지은 서문이 있다. 사감史鑑 을 완성하다. 상고 시대부터 강목綱目 이전까지를 산삭刪削하여 만들어서 사 감 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책은 총 8권이다. 12월에 성호 선생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심상복心喪服을 입었다. 선생에게 학문에 대해 물은 말을 기록한 함장록函丈 錄 이 있다. (33) 順菴先生文集 권2, 書, 上星湖先生書[壬午] 近觀小學書 三十而娶 終涉可疑 以女子十五笄之義推之 笄是許嫁之儀 謂自十五至二十 無非可嫁之時 非謂十五許嫁 方 至二十而後嫁也 男子有在色之戒 與女子異 到二十歲後 氣充精旺 可以冠而娶也 所謂有室者 猶今所謂治家 二十雖冠而娶 而工夫未及熟 且於世事 有未可以自信者 至三十而後 工夫成而志有所立 事務亦精熟 可以治家事矣 有室 謂整頓家室而治 其事 古者父子異宮 宮卽有室之謂也 伏未知如此看如何 僿說目錄之因舊不刪者 盖有不敢而然 下敎之勤摯 至于再三 則敢 不奉承 而但以所見之迷昧爲懼 書寫之役 姑未及擧焉 樂府讀之 不勝喜幸 但東史斷爛無傳 而此外可惜者亦多 若成己甕山 城將 弩士之類是已 伏乞更編此等人 以爲不朽之圖也 小子素不能文 况於詩學乎 然而偶然信筆著編中所漏者數首伏呈 下 覽後卽付丙 而此等題目 更爲泚筆 使幽光滯蹟 得以闡揚 則何幸何幸 성호 선생께 올림[임오년] 소학小學 에, 나이 30에 장가든다 는 대목을 요즘 보고 아무래도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여자 나이 15세이면 비녀 [筓]를 꽂는다 는 뜻으로 미루어 볼 때 비녀를 꽂는 것은 시집가는 것을 이미 허락한 의식으로서 15세에서 20세까지 어느 때 고 시집갈 수 있다는 것이지 허락은 15세에 하고 20이 되어야만 시집간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는 색色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여자와는 다르지만 나이 20 이상이 되면 기운과 정력이 왕성하여 관례를 치르고 장가가도 될 만하지 않습니까. 그 런데 이른바, 실室을 둔다고 한 것이 마치 지금의 치가治家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20이 되어 비록 관례를 올리고 장가든다 고 하더라도 아직은 공부가 미흡하고 또 세상일에도 자신이 없기 때문에 30 정도 되어야지만 공부도 성숙되고 의지도 확고 안정복 생애와 행적 99

94 하여 모든 사무에도 익어 비로소 치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을 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집안을 정돈하고 집안일을 살 핀다는 것이며, 옛날에는 부자父子가 집[宮]을 달리 썼으니, 집이 바로 실입니다. 이상과 같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설 의 목록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은 감히 그럴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인데, 두번 세번 계속 하교하시니 감히 그 뜻을 받들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다만 소견이 아직 어두워 그것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서사書寫하는 일은 아직 미처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악부樂府는 읽어 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간 중간 끊겨 제대로 전해 지지 못한데다가 애석하게 된 것 또한 많습니다. 즉 성기成己ㆍ옹산성장甕山城將ㆍ궁노사弓弩士 같은 따위가 그것인데, 이러한 인물들의 사적을 다시 엮어내어 영원히 전해질 수 있게 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소자가 원래 문文을 못하는데 더구나 시 학詩學이겠습니까. 그러나 우연히 붓 가는 대로 편집에서 누락된 사적들을 읊어본 몇 수가 있기에 올리오니 보신 다음 즉시 불태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목들에 대해 다시 붓을 적시어 그 숨겨진 빛과 업적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게 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53세(1763, 영조39) * 윤동규와 편지로 복제服制를 논함 (34) 順菴集年譜 四十年甲申 先生五十三歲 十二月 與邵南尹公書 論師服 書畧曰 師服一節 檀弓置諸三年之科 則捨此更無他求 自程張兩先生有情有厚薄之說 而至 于我東栗谷 定以朞九月五月三月之禮 故世多從之 此於事勢 似爲周便 而以生三事一之義推之 則節量尊服 終涉不安矣 程 門服制無考 而劉立之云繫官朔郵 不得與於行服之列云 則其制服明矣 朱子祭延平文 築室三年 莫遂初志云 則雖未遂築室 之願 而三年之意則恐亦不廢矣 但師弟之間 旣非同室之人 故饋奠哭泣 雖不能一如家人 其追慕慟隕之情 不可暫忘 或絰或 素帶 以寓其心 不赴會不聽樂 以示不可自同平人之意 似無悖於古而不愧於心矣 退門諸人 月川素帶朞年 三年不赴會不聽 樂 此率以古禮 則未知其如何 而實有愜於鄙意者 故敢欲依而行之 영종대왕英宗大王 40년 갑신(1764), 선생의 나이 53세. 12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스승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스승의 복제 한 조항에 대해서는 예기 단궁檀弓에서 삼년상의 조항에 포함시켰으니, 이 이외에는 달리 찾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 데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두 선생으로부터 정情의 두터움과 박함에 따라 다르게 할 수 있다는 설이 나왔으며, 우리나라에 이르 러서는 율곡 이이가 기년복朞年服, 구월복九月服, 오월복五月服, 삼월복三月服으로 구별해서 예를 정했으므로, 이를 그대로 따르 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사세로 보아서는 편리한 듯해도 군君, 사師, 부父를 똑같이 섬기는 의리 로 미루어 볼 때는 존자尊者의 복을 적당히 재량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정자 문하의 복제는 상고할 길 이 없으나, 유입지劉立之가 북방 변경의 관직에 매여 있어서 복 입는 대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 고 한 것을 보면, 복제가 있었 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주자가 지은 연평 선생延平先生의 제문祭文에 묘소 곁에 집을 짓고 3년을 나려 했던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 한 것을 보면, 여막을 짓고 3년을 나려 했던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삼년상을 모시는 뜻만은 아마도 변 함이 없었던 듯합니다. 다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이미 한 식구가 아니기 때문에 전奠을 올리고 곡哭하는 것을 자기 집 식구 와 똑같이 하지는 못하겠지만, 슬픈 마음과 추모의 정은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혹 질대絰帶나 소대素帶를 띠 어 그것으로 마음을 표하면서 모임에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음으로써, 일반 사람들과는 같을 수 없다는 뜻을 보여 주는 10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95 것이 옛날 법에도 어긋나지 않고, 마음에도 부끄럽지 않을 듯합니다. 퇴계의 문인들 가운데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1년 동안 소대를 띠었고 3년 동안 모임에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옛날의 예에 맞추어 보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 나, 실로 저의 마음에는 맞는 점이 있기에, 감히 그대로 따를까 합니다. (35) 順菴先生文集 권3, 書, 與邵南尹丈書[甲申] 師服一節 竊念檀弓置諸三年之科 則舍此更無他求 自程張兩先生有情有厚薄之說 而至于我東栗谷 定以朞九月五月三月 之禮 故世多從之 此於事勢 似爲周便 而以生三事一之義推之 則節量尊服 終涉不安矣 程門服制無考 而劉立之云繫官朔陲 不得與於行服之列云 則其制服明矣 朱子祭延平文 築室三年 莫遂初志云 則事故多端 雖未遂築室之願 而三年之意則恐亦 不廢矣 但師弟之間 旣非同室之人 故饋奠哭泣 雖未能一如家人 其追慕痛隕之情 不敢暫忘 或絰或素帶 以寓其心 不赴會 不聽樂 以示不可自同平人之意 似無悖於古而不媿於心矣 退門諸人 月川素帶朞年 三年不赴會不聽樂 此卛以古禮 則未知 其如何 而實有愜於鄙意者 故敢欲依而行之 旣蒙俯問 故玆以細告 更乞下敎 四七說 先生之盡力辨破者 末梢復入于高峯之 套 則此不可以無辨 愼進士原書及丈席所敎 與尊丈問難書 幷協友論難文字 皆節其要語 下示伏幸 소남 윤장에게 보냄[갑신년] 스승의 복服을 단궁檀弓에서 3년으로 정하고 있으므로 그 외에 달리 찾을 것이 없겠으나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두 선생 이, 정情의 후박厚薄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말을 한 후로 우리나라에 와서는 율곡栗谷이 각각 기朞ㆍ구월九月ㆍ오월五月ㆍ삼월 三月로 구별해서 예禮를 정했고 또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세로 보아서는 편리한 듯해도 생 삼사일生三事一의 뜻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는 존자의 복을 적당히 재량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아무래도 미안한 일 아니겠습니 까. 정문程門의 복제服制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유입지劉立之가 북방 변지의 관직에 매여 복 입는 대열에 참여할 수가 없었 다 고 한 것을 보면 복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주자朱子가 연평延平 선생의 제문祭文에서 묘소 곁에 집을 짓고 3년을 나 려고 했던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일이 많아 집을 짓고 3년을 나려던 뜻을 풀지 못했던 것 이나, 삼년상을 모시는 뜻만은 아마 변함없이 지녔던 듯합니다. 다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이미 한 식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 기 집 식구와 똑같이 전奠을 올리고 곡하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슬픈 마음과 추모의 정은 잠시도 잊을 수 없을 것입 니다. 따라서 혹 질대絰帶나 소대素帶를 띠고 그것으로 마음 표시를 하면서 모임에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음으로써 평인 平人과는 같을 수 없다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옛날 법에도 어긋날 것이 없고 마음에 부끄러울 것도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퇴계退溪 문인들 중에서는 조월천趙月川이 1년 동안 소대를 띠고, 3년 동안 모임에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았는데, 그 것을 옛날 예에다 맞추어 보면 어떤 차이가 있을는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제 마음에는 맞는 점이 있기에 감히 그대로 할까 하는 참이었습니다. 이제 기왕 이렇게 물어 오셨기 때문에 세세히 말씀 올리오니, 다시 하교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칠설四七說 은 선생께서 힘을 다해 변석했던 것이 끝에 가서 도로 고봉高峯의 투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그 문제는 다시 변석이 없어서 는 안되겠습니다. 신 진사愼進士의 원서原書와 장석丈席이 말씀하신 것, 그리고 존장의 문난서問難書 및 친구 경협景協의 논난문 자論難文字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절취하여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54세(1764, 영조40) * 무명오현찬無名五賢贊 저술 * 7월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음 * 8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안정복 생애와 행적 101

96 (36) 順菴集年譜 四十一年乙酉 先生五十四歲 四月 作無名五賢贊 五賢 卽魯兩生 齊虞人 魯儒 塞上翁 七月 除濟用監主簿 以病不赴 重修洞約 八月 遷義禁府都事不赴 是月患大腫 左臂受針傷風 疾症危劇 破腫後 子景曾吮其膿血 至十月 始得差安 영종대왕英宗大王 41년 을유(1765), 선생의 나이 54세. 4월에 이름이 없는 다섯 현인賢人에 대한 찬贊을 짓다. 다섯 현인은 바로 노魯나라의 양생兩生, 제齊나라의 우인虞人, 노나라의 유자儒者, 새상옹塞上翁이다. 7월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다. 동약洞約을 중수重修하다. 8월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겨졌으나, 부임하지 않다. 이달에 심하게 종기를 앓다. 왼쪽 팔뚝에 침을 맞느라 풍風이 들었는데, 증세가 아주 심하였다. 종기를 짼 뒤 아들 안 경증安景曾이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으며,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도가 있었다. 55세(1765, 영조41) * 도정절찬陶靖節贊 저술. 육잠六箴 지어 스스로 경계함 * 권철신權哲身과 양명陽明ㆍ심학心學에 대해 서신 왕래 (37) 順菴集年譜 四十二年丙戌 先生五十五歲 作陶靖節贊 月日無記 疑在是年春夏 六月 作六箴以自警 其序曰 古人之成德做事者 皆藉於剛明沉重之德 而余性質昏慵躁淺 故用功不專 到老無成 而况今病 廢自棄 踰十數年乎 內自一心之微 外至視聽言動 皆失其官 惕然感悟 爲箴以自警 其箴曰 爾體雖寂 爾用多感 靜而存之 如水之淡 動而察之 惟幾之審 易昏易亂 恒若懔懔 斷絶嗜慾 掃除客念 推究不置 如酷吏按驗 不留一物 若密箒掃塵 悠久 功深 反我天眞 石心 見善必明 見惡如瞽 不正之色 令人心蠱 收爾視無外騖 右目 聞善必聦 聞惡如聾 淫佚之聲 斲我天 衷 斂爾聽神內充 右耳 坐必端拱 立必恭持 勿妄指以駭瞻 勿輕弄以失儀 右手 規行矩止 疾徐合宜 欲其重以致敬 恐其動 而多危 右足 言以宣心 吉凶善惡斯見 食以養體 壽夭死生所托 是以聖人 愼言語節飮食 右口 十月 答權哲身書 論陽明致知之說 書略曰 向日君深以陽明致知之說爲當 陽明所以得罪先儒者 以其入頭工夫錯誤故也 朱子以物訓理 而陽明非之曰 理不可別在物上 吾心卽理也 心之所動 莫非良知也 不可分心與理爲二 遂譏朱子以告子義外 之學 此豈非太郞當者乎 心之官則思 思主知 朱子釋致知格物 以心之知 格物之理 盖心有知之理 故能窮物理 則吾心所知 之理 與散在物上之理 合而爲一 何必直訓心爲理 又以心之所知爲良知 夫人之氣質不同 聖人之心 則固皆出於良知之本然 而衆人之心 則爲氣所乘 流於偏塞 其心之知 多出於人欲 陽明此說 認人欲爲天理 其流之弊 可勝言哉 10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97 영종대왕英宗大王 42년 병술(1766), 선생의 나이 55세. 도정절찬陶靖節贊을 짓다. 날짜를 적은 기록이 없는데, 아마도 이해 봄과 여름 사이에 지은 듯하다. 6월에 육잠六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책하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옛 사람들 가운데 덕을 이루고 업적을 남긴 사람들 은 모두 강명하고 묵직한 덕에 의지하였는데, 나는 성품이 어둡고 게으르며 조급하고 얕기 때문에 전일하게 공부하지 못한 탓에, 나이가 많아지도록 성취한 것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병으로 인해 스스로 포기한 지 10여 년이 넘은데 이겠는가. 안으 로는 한 마음의 은미함으로부터 밖으로는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하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척연히 깨닫고는 잠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책하는 바이다 고 하였으며, 그 잠은 다음과 같다. 너의 체는 고요하지만 너의 용은 느낌이 많나니 고요하면 보존하여 물처럼 담담하게 하고, 동하면 살피게 되니 조심하 라. 어둡기 쉽고 어지럽기 쉬우니 언제나 조심하여 기욕을 단절하고, 잡념을 없애라. 추구하여 마지않기를 혹리가 조사하듯 하고, 무엇 하나 남기지 않기를 빗자루로 먼지를 쓸 듯이 하라. 오래 하여 공부가 깊어지면 나의 본모습 되찾으리라. 이상은 심잠心箴이다. 선을 보기를 반드시 밝게 하고, 악을 보기를 소경처럼 하라. 바르지 못한 빛깔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법. 너의 눈을 거두어들여 밖으로 치닫게 하지 마라. 이상은 목잠目箴이다. 선을 들을 땐 반드시 귀 기울이고, 악을 들을 땐 귀머 거리가 돼라. 음탕한 소리는 나의 천성을 해치나니 너의 귀를 단속하여서 정신이 안에서 충만케 하라. 이상은 이잠耳箴이다.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손 모으고 서면 반드시 공손함을 유지하라. 망녕되이 가리켜서 보는 사람 놀라게 말고, 함부로 놀려 위의를 잃지 마라. 위는 수잠手箴이다. 법도에 맞추어 가고 멈추며, 빠르고 더디기를 적절히 하라. 무겁게 하려면 공경을 다하 고, 움직일 땐 위험 많음 두려워하라. 이상은 족잠足箴이다. 말로써 마음을 드러내니 길흉과 선악이 여기에서 드러나며 음식 으로 몸을 기르니 수요와 사생이 달려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했나니 이상은 구잠口箴이다. 10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왕양명王陽明의 치지설致知說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 번에 그대가 왕양명의 치지설이 아주 옳다고 하였는데, 왕양명이 선유先儒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바로 처음 공부할 때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이네. 주자朱子가 물物을 이理로 해석하자, 왕양명이 틀렸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理가 물物 위에 별도로 있을 수가 없고 내 마음이 바로 이理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양지良知이니, 심心과 이理를 둘로 나누어서 는 안 된다 고 하면서, 드디어 주자의 학설에 대해, 의義를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 고자告子와 같다고 비난하였으니, 이 어찌 전혀 맞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의 기능은 생각[思]이고, 생각은 지각[知]을 주관하네. 주자가 치지격물致知格物 을 해석하면서 마음의 지각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마음에는 앎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수 있은즉, 내 마음이 알고 있는 이치와 각 사물에 산재해 있는 이치가 합해져 하나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하필 마음이 바로 이치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마음이 아는 것을 양지良知라고 하는데, 무릇 사람마다 기질 이 같지 않은바, 성인의 마음은 다 양지의 본연本然에서 나오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기질에 편승되어 한쪽으로 치 우치게 흐르는 바, 마음의 앎이 대부분 인욕人欲에서 나오게 되네. 왕양명의 이 말은 인욕을 천리天理로 여긴 것이니, 그 말류 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56세(1766, 영조42) * 윤동규ㆍ이병휴 등과 편지로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함 (38) 順菴集年譜 四十三年丁亥 先生五十六歲 正月 與邵南尹公書 書畧曰 某性本愚魯 其於性命之奧 初不硏究 只就先儒已定之說 依俙識得而已 是以無自得之效 而 안정복 생애와 행적 103

98 至於四七 從幼先入之見 以退陶爲正 及觀師門新編而信從尤篤 不知有微妙之意 更有加於此者矣 昔在義盈直中 景協貽書 以聖人之公喜怒 謂之理發 其言纚纚數百言 其時無書可檢 草草答之 大意以爲喜怒之字義貌像 終是出於氣 似無聖愚之分 云云 其後更無所答 鄙亦依舊膠守 不復致疑 後來聞之 其端盖出於愼進士 名後聃 而先生從之 執事爭執不得云 同門有此 等議論 而不得聞知 至于今日 甚矣其蒙陋也 玆貢愚見 以祈裁擇 夫性動爲情 情本善而不節 則熾而惡矣 聖人之公七情 亦 直從性動爲情 最初本善處而來 則與四端無異 謂之理發 無不可矣 雖平人之情 其出於性命 則亦似不異矣 如是看則立說易 而無艱曲難曉處矣 然而退陶李子以聖人之喜怒 謂氣之順理而發 此語平正 無可改評 而所可疑者 高峯後說 雖云爛漫同歸 而其中有云七情雖屬於氣 而理在其中 其發而中節者 乃天命之性 豈可謂之氣發 以斥李子氣順理之語 而李子之不復卞者何 也 心統性情中圖 包四端于七情之內曰 就善惡幾 言善一邊 又答李平叔書 又是一樣 今據文集 則高峯後說是丙寅年 聖學 圖在戊辰年 與李平叔書 在己巳年 然則晩定之論 亦從高峯而然否 孟子於四端言心 而又曰乃若其情 禮運言情 而樂記又以 喜怒言心 此可見心統情之妙矣 人心道心四端七情名異實同之義 果如執事之論矣 執事又曰 四端擴充 而節情之功 在其中 矣 喜怒之中節 擴充之功 自在相資 聖人之喜怒 自然中節 謂之理發可也 執事今亦爛漫同歸 則此理之當然 不須更疑 而愚 昧終有未釋然者 孟子所謂四端 指出善情 以明仁義禮智之情 又以其涉乎形氣者而言 則其情多端 有以四言者 中庸曰 喜怒 哀樂 有以五言者 大戴禮曰 喜怒欲懼哀 洪範傳曰 喜樂欲怒哀 有以六言者 左傳子大叔曰 民有好惡喜怒哀樂 生於六氣 樂記曰 哀樂喜怒敬愛心 莊子曰 惡欲喜怒哀樂 有以七言者 禮運曰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程子好學論曰 喜怒 哀樂愛惡欲 內經曰 喜怒憂思悲驚恐 其他字義 有可以情言者 不一而足 盖旣有此形氣 則由其好惡善惡之際 而觸感而動 者 亦無數矣 雖聖人之從心所欲不踰矩 其諸情之各循氣而發 則與衆人一般矣 左傳以六情出於六氣 六氣者氣也 今以六氣 之順序不亂者 謂之理發可乎 醫書 七情各有所屬之贓 治法亦循其臟而用藥焉 雖聖人之七情 其在于形氣中則信矣 從此形 氣而出則謂之氣發可矣 李子氣順理之語 不其然乎 何必曰理發而後可乎 以常人言之 其喜怒不是無端而發 必有可喜可怒之 事而發 若其可喜可怒 則是喜怒之當然者也 當然之喜怒 皆可謂之理發 則初出時發于理 而到失中不節而後 謂之氣發乎 與貞山書 論理氣說 與與邵南書同意 始草列朝通紀 裒輯國朝故事及文集野乘諸書 編年而成之 書凡二十五卷 八月丙寅 丁母夫人憂 十月丁卯 葬李夫人 遷參判公墓 合窆于先塋之西 舊壙有水患故遷奉焉 영종대왕英宗大王 43년 정해(1767), 선생의 나이 56세. 1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저는 성격이 원래 어리석고 거칠어서 성명性命 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는 애당초 연구하지 않고, 단지 선유들이 이미 정해 놓은 학설에 입각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터득한 실효라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칠설四七說에 이르러서는, 어려서부터 선입견이 있어 퇴계 退溪의 학설만을 옳은 것으로 여겨왔으며, 사문師門의 사칠신편四七新編 을 보고 나서는 더욱 이를 믿고 따라 오묘한 뜻이 이 보다 더한 것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옛날에 의영고義盈庫에 재직하고 있을 적에 이경협이 보내온 편지에, 성인聖人의 공정 한 희로喜怒를 일러 이발理發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이 길게 이어져 백 마디에 달했습니다. 그때는 참고할 만한 서적 도 없고 해서 대충 답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대체로 희로라는 글자의 뜻이나 생긴 모양으로 보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氣에 서 나온 것으로, 거기에는 성인聖人과 우인愚人의 차별이 없는 것 같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그에 대한 답이 다시 없었고, 저 역시도 전의 소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뿐, 다시 의심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그 발단은 신 진사 愼進士(이름은 後聃이다)에게서 나온 것으로, 선생도 그 설을 따랐으므로 집사執事께서 쟁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동문들 사이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오늘까지 왔으니, 그 얼마나 무디고 멍청합니까. 이에 어리석은 소견을 개진하여 재택裁擇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대체로 성性이 동하면 정情이 되는데, 정은 원래 선한 것이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너무 치성해서 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공정한 칠정七情도 역시 바로 성이 동하여 정이 된 것으로, 최초에는 본래 선한 곳에서 나왔으니 사단四端과 다를 것 10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99 이 없는바, 그것을 일러 이발 理 發 이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비록 보통 사람의 정 情 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성명 性 命 에서 나온 것이라면 역시 다를 바가 없을 듯합니다. 이와 같이 보면 말하기가 쉬워서 이해하기 어려울 곳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퇴계 退 溪 이자 李 子 는 성인의 희로 喜 怒 는 기 氣 가 이 理 에 순응하여 발로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공평정대해서 고 치고 평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고봉 高 峯 기대승 奇 大 升 의 후설 後 說 이 비록 퇴계의 견해에 대부 분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칠정이 비록 기 氣 에 속한 것이기는 해도 이 理 가 그 속에 있으니, 발함에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하늘이 명한 성 性 인데, 이를 어떻게 기발 氣 發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 하여, 기 氣 가 이 理 에 순응한다고 한 퇴계의 말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퇴계가 이에 대해 변석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심통성정중도 心 統 性 情 中 圖 에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시켜 놓고는 말하기를,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 한쪽만 말한 것이다 고 했고, 이평숙 李 平 叔 에게 답한 편지에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답하였습니다. 지금 문집 文 集 에 의거하면 고봉의 후설은 병인년 에 지었고, 성학도 聖 學 圖 는 무진년에 만들었고, 이평숙에게 보낸 편지는 기사년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늘그막의 정론 定 論 이 역시 고봉의 설을 따라 그러한 것입니까? 맹자 孟 子 는 사단에서 심 心 을 말하고는 또 그 정에 있어서는[ 乃 若 其 情 ] 이라고 하였고, 예운 禮 運 에서는 정 情 을 말하였으며, 악기 樂 記 에서는 희로 喜 怒 로써 심 心 을 말하였으니, 심 心 이 정 情 을 통솔하고 있는 묘리를 알 만합니다. 인심 人 心 과 도심 道 心, 사단과 칠정이 이름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는 것은 과연 집사 執 事 의 주장과 같습니다. 집사께 서 또 말하기를, 사단을 확충해 나가면 칠정을 절제하는 길이 그 가운데 있고, 희로를 절도에 맞게 하면 그것이 자연 확충에 도움을 주는 길이다. 성인의 희로는 자연히 절도에 맞으니 이발 理 發 이라고 해도 된다 고 하였는바, 집사께서도 지금 그 견해 를 대부분 따르고 계시는데, 그것은 이치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다시 의심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우매한 저로서는 끝 내 석연치 않은 데가 있습니다. 맹자가 말한 사단은 정 情 의 선한 쪽을 지적해서 인의예지 仁 義 禮 智 의 정을 밝힌 것이고, 또 형 기 形 氣 와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면 그 정 情 이라는 것이 여러 갈래여서, 넷으로 말한 데가 있고, 중용 中 庸 에는 희로애락 喜 怒 哀 樂 이라고 하였다. 다섯으로 말한 데가 있고, 대대례 大 戴 禮 에는 희로욕구애 喜 怒 欲 懼 哀 라 하였고, 홍범전 洪 範 傳 에는 희락욕노애 喜 樂 欲 怒 哀 라 하였다. 여섯으로 말한 데가 있고, 좌전 左 傳 에는, 자태숙 子 太 叔 이, 백성들에게는 호오희로애락 好 惡 喜 怒 哀 樂 이 있는데, 그것은 육기 六 氣 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고 하였고, 악기 樂 記 에는 애락희로경애 哀 樂 喜 怒 敬 愛 의 마음이라 했고, 장자 莊 子 에는 오욕희로애 락 惡 欲 喜 怒 哀 樂 이라고 하였다. 일곱으로 말한 데가 있으며, 예운 禮 運 에는 무엇을 인정 人 情 이라고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 喜 怒 哀 懼 愛 惡 欲 이다 라고 하였고, 정자 程 子 의 호학론 好 學 論 에서는 희로애락애오욕 喜 怒 哀 樂 愛 惡 欲 이라 했으며, 내경 內 經 에는 희로우사 비경공 喜 怒 憂 思 悲 驚 恐 이라 하였다. 그 밖에 글자의 뜻으로 볼 때 정 情 에 포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개 이미 이런 형기 形 氣 가 있으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즈음에 느낌에 따라 동하는 것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성인 은 비록 자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여러 감정이 각각 기 氣 를 따라서 발하는 면에 있어서는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법입니다. 좌전 에 육정 六 情 이 육기 六 氣 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그 육기란 바로 기 氣 입니다. 지금 그 육기가 순서를 따라서 어지럽지 않은 것을 일러 이발 理 發 이라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의서 醫 書 에도 칠정 七 情 에 각각 소속된 장기 臟 器 가 있으며, 치료법도 그에 따라 맞는 약을 쓰고 있습니다. 비록 성인의 칠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형 기에 속해 있는 것은 분명한바, 이 형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기발 氣 發 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퇴계가 말한 기 氣 가 이 理 에 순응한다는 말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이발이라고 해야만 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을 가지고 말한다면 희로의 감정이 까닭없이 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쁘거나 성낼 만한 일이 있어 발하는 법입니다. 만약 기쁘거나 성낼 만한 일이어서 희로가 발하였다면, 그 희로는 당연한 희로입니다. 당연한 희로를 모두 이발 理 發 이라고 한다면, 처음 나올 때 는 이 理 에서 나왔다가 중간에 희로가 중도를 잃은 이후에는 기발이라고 이른단 말입니까? 정산에게 편지를 보내다. 이기설 理 氣 說 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소남 邵 南 에게 보낸 편지와 내용이 같았다. 열조통기 列 朝 通 紀 를 초 草 하기 시작하다. 국조 國 朝 의 고사 故 事 및 문집 文 集 이나 야승 野 乘 등 여러 책에서 뽑아 편년체 編 年 體 로 만들었는데, 책은 총 25권이었다. 안정복 생애와 행적 105

100 8월 병인일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다. 10월 정묘일에 이부인李夫人을 장사지내고, 참판공의 묘소를 천장遷葬하여 선영先塋의 서쪽에다 합장하다. 옛 산소의 광壙에 수환水患이 있어서 천장한 것이다. 57세(1767, 영조43) * 윤동규와 여러 차례 편지함( 大學 등을 논함) * 권철신과도 편지로 학문관을 토론함 (39) 順菴集年譜 四十四年戊子 先生五十七歲 五月 與邵南尹公書 論殤不立后之義 十一月 與邵南尹公書 論大學聽訟章 十二月 與權哲身書 書畧曰 愚嘗觀公之讀書 每欲自主議論而必求其深高 故讀一書得一理 未及加沈潛縝密之功 而先自 主張 必欲求合於己意 若或於此不能亟回頭疾旋踵 則膠滯之久 自用勝而欠遜志虛受之義 未必不爲心術之害而有妨於進德 修業之大功矣 公每謂大學古本自好 不必改定 又謂格致章自存 不必補亡 又謂聽訟章似無着落 此非公自得之見 先儒已爛 漫言之矣 愚意則常謂讀章句爛熟 其於朱子本意 一句一字 皆有下落然後 始觀諸說 觀其議論而已 今無積累專精之工 而客 見新議 橫在肚間 率爾曰此是而彼非 其於進學之工 有何益 而公所謂義理頭腦 似不在此等處矣 영종대왕英宗大王 44년 무자(1768), 선생의 나이 57세. 5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상殤에는 입후立後하지 않는 뜻에 대해 논하였다. 11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대학大學 청송장聽訟章에 대하여 논하였다. 12월에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일찍이 공이 독서하는 것을 보니, 언제나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반드시 깊고 높은 것만 추구하려 하더군. 그러므로 책을 한 권 읽고 이치 하나를 터득하는 데 있어서도 침착하고 면밀한 공부를 더할 겨를도 없이 먼저 자기 주장부터 내세워 꼭 자신의 뜻에만 맞추려고 하고 있는데, 만약 여기서 빨리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돌려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오랜 집착 끝에 자신의 의견만 옳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 공손한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적어질 것이네. 이것은 결국 마음을 쓰는 데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진덕수업進德修 業하는 큰 공부에도 방해가 될 것이네. 공은 매번 대학 은 고본古本이 좋으니 개정할 필요가 없다 고 하고, 또 격치장格致 章이 그대로 있으니 보망장補亡章은 필요 없다 고 하고, 또 청송장聽訟章은 귀결처가 없는 듯하다 고 하는데, 이것은 공이 스스 로 터득한 견해가 아니라, 선유先儒들이 이미 하고 또 한 진부한 말이네. 나는 늘 장구章句를 익숙하게 읽어 글구 하나 글자 하나에서도 주자가 의도한 근본 뜻에 대해 모두 낙착을 보고 난 뒤, 비로소 다른 학설을 보고 그들의 의논을 보면 된다. 고 생각하였네. 지금 오랜 기간을 두고 쌓아올린 공부도 없이 새롭고 낯선 견해가 가슴속에 떠오르면 경솔하게 이것이 옳고 저 것은 그르다. 고 하는데, 그것이 진학공부進學工夫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공이 말한 의리의 요지 라는 것은 이러한 곳에 있 지는 않을 듯하네. 10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01 58세(1768, 영조44) * 이기양李基讓과 서신 내왕( 中庸 에 대해 논함) * 성호예식서星湖禮式序 지음 * 이병휴와 편지 왕래(中國中表婚의 잘못과 家禮 등에 대한 논의) * 윤동규와 편지로 학문 토론(家禮에 대해 논함) (40) 順菴集年譜 四十五年己丑 先生五十八歲 三月 答李基讓書 李說以中庸喜怒哀樂未發之中 謂之思慮之已發 而其所謂未發者 只是喜怒哀樂之未發而已 敷演而爲之 說 質于先生 先生逐條辨其非 且其答書畧曰 中庸首章未發之義 此所創聞 不敢仰對 凡章句訓詁間小小疑晦處 此亦有一二 致疑者 而至若此等處 爲義理大頭腦 此爲錯解 將無所不錯矣 程朱是後來聖人 此而不從 將誰從乎 若此不已 其流之弊 將 流于小人之無忌憚 以左右高明之見 何以念不及此 而出此千萬意不到之語耶 如公言而見之 有何益 依舊說而讀之 有何害 焉 公又與旣明書 謂敬易流于禪 格致易流于口耳 此皆指兩門末弊而言 公如知其弊 則當用力於程子之敬 主一無適而不偏 於靜 致功於朱子之格致 車輪鳥翼 交修並進 不落一偏 斯已至矣 何必以門下之不善學者 致疑于不當疑者耶 堯舜之揖遜 湯武之征伐 爲奸雄藉口之資 其以此而疑彼可乎 答貞山書 書略曰 前日愚嘗承聞吾先生語矣 聖王之治天下 首開言路 明道講學 是何等大事 而杜閉後生之言議耶 是以學 貴自得 不必惉滯前人言議 愚起而對曰 下敎誠然 但恐專以自得先立主意 則未免私意橫生 流弊不少 若後生少年 窮格未到 志慮未定 畧有所見 卽自執己意曰 古人之所不知者 此習漸長 則徒益其輕浮躁淺之氣 而無益於進德之業 先生笑而答曰 此 語誠是 故愚意每爲少年有才氣 徒言說者 矯其弊而已 誠於自得處有眞的之見者 何敢一例麾斥 然此豈易者哉 是以與其強 究別意 不若守先儒之訓而不失之耳 盖貞山有書 言不可以異於先儒之言 而一例麾斥云 故有是書 五月 撰星湖禮式序 貞山所編輯要 先生序文 故先生撰之 八月 與貞山書 論中國中表婚之非 與邵南尹公書 論家禮非晩來定書 영종대왕英宗大王 45년 기축(1769), 선생의 나이 58세. 3월에 이기양李基讓의 편지에 답하다. 이기양의 설에, 중용 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이 발하지 않은 중中을 사려가 이 미 발한 것이라고 하면서, 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를 부연하여 설로 만들어서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이에 선생이 드디어 조목조목 그 설의 그름을 변석하였는데, 그 답서는 대 략 다음과 같다. 중용 의 첫머리 장에 나오는 발하지 않았다[未發] 는 뜻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말인바, 감히 무어라고 대답하지 못하 겠습니다. 무릇 장구章句와 훈고訓詁하는 사이에 약간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두는 자가 한두 명은 있었습 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의리의 큰 요체가 되는바, 이곳을 어긋나게 해석하면 장차 어긋나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는 후세의 성인인데, 이 분들을 따르지 않고 장차 그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계속 그렇게 한다면 그 말 류의 폐단이 장차 아무런 꺼림이 없는 소인으로 될 것입니다. 고명하신 견해를 가진 당신께서 어찌 이 점을 생각지 않으시고 천만 뜻밖에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런 말을 하신단 말입니까. 공의 말과 같이 본다고 해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으며, 예전의 설대로 읽는다 해서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공은 또 기명旣明(기명은 權哲身의 字임)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경敬은 선 禪 쪽으로 흘러들기가 쉽고, 격치格致는 말하고 듣는 데로 흘러들기가 쉽다 고 하시었는데, 이는 모두 정자와 주자 두 문하의 말폐末弊를 지적해서 말한 것입니다. 공께서 그러한 폐단을 아신다면 마땅히 정자의 경敬에 힘을 쏟아 마음을 집중해서 잡념 을 버리되 고요한 데 치우치지 않게 하고, 주자의 격치에 공을 쏟아 수레바퀴나 새의 양 날개처럼 함께 닦아 나란히 나아가 안정복 생애와 행적 107

102 게 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빠져들지 않으면, 여기에서 지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문하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가지고 의심해서는 안 되는 부분에 의심을 한단 말입니까. 요순堯舜이 어진 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과 탕무湯武가 흉포한 자 를 정벌한 것이, 후세에는 간웅奸雄들이 임금 자리를 빼앗는 핑계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의심해서 야 되겠습니까. 정산貞山의 편지에 답하다.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제가 우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는데, 그 때 말씀하시기를, 성인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먼저 언로言路부터 열었다. 도를 밝히고 학문을 강론하는 일이 얼마만큼이 나 중요한 일인데, 후생들의 말문을 막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학문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꼭 선배들의 말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 하시었습니다. 이에 제가 일어나서 답하기를,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염려스러 운 것은 오로지 스스로 터득한 것을 가지고 먼저 자신의 주장부터 내세우게 될 경우, 사사로운 뜻이 마구 생겨나서 그 폐단 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나이 젊은 후생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의지와 사려도 확고하지 못한 처 지에서, 약간의 소견이 있을 경우 곧바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면서, 옛 분들도 몰랐던 것이라고 말하는 습성이 점차 자라난 다면, 경박하고 부화浮華한 기상만 더해 줄 뿐, 덕을 쌓아가는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께서 웃으 시면서, 그 말도 옳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은 항상 재기才氣가 있어 말만 앞세우는 나이 젊은 사람들을 위해 그 폐단을 바로잡아 주자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스스로 터득하여서 확실한 자신의 견해가 있는 자에 대해서야 어찌 감히 똑같이 몰아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터득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별다른 뜻을 억지로 궁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선유先儒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면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는데, 이 는 대개 정산이 보낸 편지에 선유들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를 배척해 몰아치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였으므로 이렇 게 답한 것이다. 5월에 성호예식星湖禮式 의 서문을 찬하다. 정산이 편집한 책인데, 선생에게 서문을 지어 주기를 요구하였으므로 선 생이 찬한 것이다. 8월에 정산에게 편지를 보내다. 내외종內外從 간에도 결혼結婚하는 중국中國의 풍습이 그른 것임을 논하였다.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가례家禮 가 주자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을 적은 책이 아님을 논하였다. 59세(1769, 영조45) * 모친 이씨의 행장 지음 * 이상정李象靖과 서신 내왕(四七說을 논함) * 윤동규(가례에 대해 논함), 권철신(사칠설을 논함) 등과 서신 내왕 (41) 順菴集年譜 四十六年庚寅 先生五十九歲 四月 撰先夫人行狀 五月 與大山李景文書 李公名象靖 論四七說 閏五月 與邵南尹公書 論古人學問之工末學之弊 又論家禮非晩來定書 八月 答權哲身書 論四七說 書畧曰 尊信退陶 歸宿師門 不敢有異議者 是素所自許 而來書云士興 李基讓字 見與士凝 韓鼎運字 書 謂鄙說於歧貳之中 又有歧貳 其所謂歧貳者 似指龍湖 邵南 公喜怒同歸七情之說 其所謂又有歧貳者 指鄙說 之何句而言耶 請略言其所以然 朱子曰 人心道心 旣以形氣性命之發得名 而合而言之 則言人心而道心亦在其中 李子曰 情 之有四端七情之分 猶性之有本然氣禀之異 又曰 四端是道心 七情是人心 若其細分 則四七之與本性氣禀人道之別 實有不 10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03 同者 李子豈不知此 而槩言其大體 故其言如是 愚祖此而爲之說曰 性一也而有本性氣禀之異 心一也而有人心道心之別 情 一也而有四端七情之分 渾淪言時 只當曰性曰心曰情而已 四七之發 雖有理氣之殊 而各自對立 然均是情也 單言情時 四七 固皆不在於情圈中耶 及其所發之不同然後 實有二路之分開 而不可以相通矣 貞山公喜怒理發之說 與禮運七情 逈然不同 此義日前與公言之 公其忘之而有此云云耶 영종대왕英宗大王 46년 경인(1770), 선생의 나이 59세. 4월에 선부인先夫人의 행장行狀을 찬하다. 5월에 대산大山 이경문李景文에게 편지를 보내다. 이공의 이름은 상정象靖이다. 사칠설四七說에 대해 논하였다. 윤5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옛 사람들의 학문의 정교함과 말학末學의 폐단에 대해 논하고, 또 가례 가 주자 만년의 정론을 적은 책이 아님을 논하였다. 8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사칠설四七說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퇴계를 존경하고 신뢰하여 사문師門에 귀의하여 감히 다른 의논을 펴지 않는 것으로 평소 나 자신을 인정해 왔네. 그런데 보내온 편지에 이르 기를, 사흥士興(李基讓의 字)이 사응士凝(韓鼎運의 자)에게 보낸 나의 편지를 보고 나의 말이 두 갈래 길속에 또 두 갈래가 있다 고 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른바 두 갈래라고 하는 것이 아마도 용호공龍湖公(소남 윤동규를 말한다)의 희로喜怒도 똑같이 칠정에 속한다 고 하는 설을 가리키는 듯하네. 그러나 그 속에 두 갈래 길이 또 있다 고 한 것은, 나의 말 가운데 어느 구절을 가리 켜서 말한 것인가? 이제 그렇게 된 시말을 말해 주겠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이미 형기形氣와 성명性 命의 발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인데, 이것을 합하여 말하면 인심을 말할 때 도심도 그 속에 있는 것이다 고 하였고, 퇴계 이자 李子는 말하기를, 정情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性에 본연本然과 기품氣稟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다 라고 하였네. 그러나 만약 세분한다면 사단과 칠정은 본연과 기품의 구별이나 인심과 도심의 구별과는 실로 같지 않은 점이 있네. 이 자李子가 어찌 이를 몰랐겠는가. 그러나 그 대체적인 것을 개괄적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네. 나는 퇴계의 이 말을 정론正論으로 삼아서 말하기를, 성性은 하나이나 본연과 기품의 차이가 있고, 심心은 하나이나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 으며, 정情은 하나이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다 고 하였던 것이네. 이를 뒤섞어서 말할 때는 다만 성性이다, 심心이다, 정情 이다 하면 그뿐이네. 사단과 칠정이 발함에 비록 이理와 기氣의 차이가 있어서 각각 대립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똑같 이 정情이네. 그러니 단순히 정만을 말할 적에는 사단과 칠정 모두가 정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발함이 같지 않은 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네. 정산貞山이 공정한 희로는 이발理發이 다 라고 한 설은, 예운禮運에 있는 칠정과는 전혀 다르네. 그 뜻에 관해서는 일전에 공과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공이 그것을 잊고 이렇게 운운한 것은 아닌가? (42) 順菴先生文集 권3, 書, 與邵南尹丈書[庚寅] 甞觀退溪集與人書 有逐日課數三學者 自無餘力 可以讀書 不能記得 大意如此 之語 此庚午歲先生年七十時也 先生嘗以 疾病自處 而其誨人之勤 自治之篤 如是其至 自顧陋劣 慨恨而已 先生喪後 幸而尊丈巋然爲後進之瞻仰 長川強毅篤實 老 而不衰 誠可欽歎 此道可謂有托 後生輩亦不無其人 以愚所見 但忠信老成 任擔負之望者 未知其必然矣 仄聞近來出入門屛 者多 沈士潤夙有所聞 其他更有何人耶 工夫之知行交修 人皆知之 但眞知實難 實行不易 此終無以成德矣 孟子以後千五百 年 此學寥寥者 兩漢之際 士務篤行而知解分數不足 是以多陷溺于異端而不自拔 幸有兩程出而有格致之學 朱子申明之 於 是窮理之學滿天下 而異端不能容 然而其弊多流於口耳之學 或多爲鳥言倡禮之歸 南冥之譏退溪 在當時未必然 而在今日實 藥石 爲學必知其弊之所存而救正之 則自修敎人 無異道矣 但實然用力而無虛矯之習 誠難矣 師門年譜 是必有之文字 長川 안정복 생애와 행적 109

104 元陽似能爲之 早歲受業 未有先於尊丈 故頃歲一再禀告 而尊丈之意不然 切欲更禀 而亦似強聒而止 今承示敎 誠幸誠幸 年譜豈皆登朝有施措而後爲之耶 著書明道 是何等事業 亦必有年歲之可紀 且與師友論學 必多可採者 節刪錄之 在所不已 此書得成 則文集雖未及刊布 大體斯已得矣 豈不好哉 若已下手 伏乞俯示 家禮晩成之諭 前日承敎 不能領會 以陳北溪李 果齋楊信齋黃子耕語告之 又告以爲家禮若是晩成定禮 則朱子之喪 當從家禮無疑 而曰儀禮曰書儀而不能一定何也 且家禮 以長房奉祀爲言 而語類沈僴戊午以後所聞及胡伯量李堯卿之問 皆以長房爲不是 此皆晩論也 豈不與家禮相戾乎 先生諸書 所稱祭儀 安知非爲此乎 語北溪以被人竊失云 亦與諸門人僧寺所亡之語相符 似無可疑 而尊丈以單擧祭儀字 不言冠婚等禮 爲疑 果齋亦有言矣 其言曰 成喪祭禮 推之於冠婚 然則冠婚等禮 後來所續者耳 三家禮範 不言旣失之已久 故省文而不必 煩說矣 但尊丈所敎勉齋所撰行狀 後多損益之語 誠甚可疑 然此或語病耳 彼黃李楊 皆及門高弟 朱敬之亦是家子弟 而有所 云云 則豈可以勉齋矇矓之一語 致疑許多人有明白可言者乎 試取丘儀初卷而入覽如何 近來旣明讀書 或有獨到之見 可喜 其論古不披髮 以喪大記之去髦 檀弓武叔小斂 投冠括髮之語 證之以爲平人之笄纚 死者之髺䯻 喪人之括髮 其義一也 此言 似然 未審如何 握手用二經 無明文 雖有左右手之文 而未見爲用二之證 而鄭註以後皆用二 丘氏儀節及我國五禮儀皆然矣 國朝中葉 多用一 因以成俗 未知何人創行 而奇高峯辨其非是 退溪從之 今則定而用二矣 旣明亦云當用一絇之相結 擥之相 聯 其義同 此本金沙說 此言亦如何 소남 윤장에게 보냄[경인년] 언젠가 퇴계집退溪集 에 어느 사람에게 보낸 서한을 보았더니 거기에, 날마다 학자 몇 사람 일과를 시키느라 나 자 신은 독서할 만한 여력이 없다네 기억은 잘 나지 않으나 대체로 이러한 뜻이었음 이라 한 말을 보았는데 그 때가 선생의 나 이 70 시절인 경오년이었습니다. 선생께서 늘 병인病人으로 자처했으면서도 그렇게 남 가르치기에 성근하시고 자신을 다스리 는 데도 그렇게 독실했음을 볼 때 비루하고 졸렬한 이 사람으로서는 그저 개탄할 따름입니다. 선생께서 가신 후 다행히도 존장께서 우뚝한 존재로 후진들의 첨앙瞻仰의 대상이 되고 있고, 꿋꿋하고 독실한 장천長川이 늙어서도 쇠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흠탄할 일입니다. 실로 이 도道를 의탁할 곳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후배들 역시 전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 어리석은 자가 보기에는 충신忠信하고 노성한 인물로 모든 이의 촉망의 대상이 될 만한 이 가 꼭 있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전해 듣기에 근래 문병門屛을 출입하는 이가 많다는데, 심사윤沈士潤은 일찍부터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밖에 또 누가 있습니까? 공부에 지행知行이 함께 따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참으로 알 기가 사실은 어렵고 그대로 실천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니, 끝내 성덕成德할 수가 없는 것이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맹자 이 후 1천 5백 년이 지나도록 이 학문이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양한兩漢 시대에는 선비들이 실천면에 는 힘을 써왔지만 이치를 해득하는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에 많이 이단異端으로 빠져 들어가 스스로 뛰쳐나오지를 못했던 것 입니다. 다행히도 두 정씨程氏가 나타나 격치格致의 학문을 강조하고 주자가 뒤를 이어 거듭 밝혀 놓았기 때문에 궁리窮理의 학풍이 천하에 가득하고 이단은 발을 붙일 곳이 없었으나 그 폐단이 결국은 구이지학口耳之學 쪽으로 많이 흘러 허다히 실속 없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남명南冥이 퇴계를 비난했던 것만 해도 그 때로서는 꼭 그럴 것이 없었겠지만 오늘에 와서는 사실 약석藥石이 되고 있듯 이 학문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이 하거나 남을 가르치거나 간에 폐단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 그것을 바로잡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허풍이 전혀 없이 실지로 노력하는 그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문師門의 연보年譜는 꼭 있어야 할 문자文字입니다. 장천長川과 원양元陽이 능히 해내겠지만 일찍 수업한 분으로는 존장 이 제일 먼저이기 때문에 지난해에 한두 번 여쭈어 보았으나 존장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시기에 다시 또 여쭐까 하다가 억지 로 떠들기만 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는데, 지금 하교를 받고 보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연보를 왜 꼭 조정에서 무슨 일 이라도 한 사람이라야만 만드는 것이랍니까. 저서를 남기고 도道를 밝히는 일이 그 얼마나 큰 사업입니까. 이 역시 연세年歲 를 기록해야 할 것이요, 사우간에 학문을 강론한 것 중에는 반드시 채록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을 터이니 이를 추려서 절록 11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05 節錄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책만 만들어지면 문집은 비록 미처 간행 배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체大體는 이미 얻어진 셈이니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미 착수하셨으면 좀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례 가 주자의 만년에 완성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전일 듣고서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진북계陳北溪ㆍ이과재李 果齋ㆍ양신재楊信齋ㆍ황자경黃子耕 등이 한 말들을 말씀드렸고, 또 가례 가 만약 만년에 완성을 본 정례定禮라고 한다면 주자 의 상사 때 당연히 가례대로 했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일정하지 못하게, 의례儀禮 를 말하고 서의書儀 를 말했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또 가례 에는 장방長房이 제사모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류 에 심한沈僩이 무오년 이후에 들었다 는 것이나 호백량胡伯量과 이요경李堯卿의 물음에 대한 답에서도 다 장방에게로 옮겨 제사 모시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했으니, 이것이 모두 만년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어찌 가례 와 그리도 서로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선생께서 여기 저기 쓰신 제의 祭議 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책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북계에게 남에게 도둑맞아 잃어버렸다 고 한 말이 절에서 잃어 버렸다 고 한 여러 문인들이 한 말과 서로 딱 들어맞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존장께서는, 왜 제의祭儀라 고만 하고 관혼冠婚 등의 예들은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것을 의심하시지만 그에 대하여는 과재도 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말 하기를,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만들고, 이를 미루어 관례ㆍ혼례를 정한 것이다 했는데, 그렇다면 관례ㆍ혼례 등은 뒤에 와 서 붙여 넣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예범三家禮範 에 이 책을 잃은 지가 오래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번거롭게 말 할 필요가 없어 생략해 버렸던 것입니다. 다만 존장께서 말씀하신, 황면재黃勉齋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뒤에 많이 보태고 뺐다 고 한 말은 참으로 의심이 갑니다. 그러나 이는 혹시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황黃ㆍ이李ㆍ양楊은 다 직접 문하에서 배운 고명한 제자들이고, 주경지朱 敬之도 집안 자제인데, 그들이 그렇게 말한 이상 분명치 않은 황면재 말 한 마디를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의 명백한 말을 의 심할 수야 있겠습니까. 구의丘儀(丘濬)이 쓴 가례의절家禮儀節 첫째 권을 한번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근래 기명旣明이 독서를 많이 하여 홀로 자득自得한 견처見處가 혹 있으니 기쁜 일입니다. 그가 옛날에는 머리를 풀어 헤치지 않았다 고 하면서 그 증거로 상대기喪大記의 모髦를 떼버린다 고 한 대목과 단궁檀弓의 무숙武叔이 소렴小斂을 마치 고는 관을 벗어 버리고 머리털을 묶었다 고 한 대목을 들어 보통 사람이 비녀를 꽂고 치포관을 쓴 것이나, 죽은 이 머리털을 틀어 쪽을 짓는 것이나, 상인喪人이 머리를 쌈으로 묶는 것이나 다 같은 뜻이라고 하니, 그 말이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어떻 습니까? 악수握手를 둘로 쓴다고 한 기록이 예경 에는 없습니다. 왼손, 바른손이라는 기록은 있지만 그것이 꼭 둘로 써야 한 다는 증거로는 볼 수 없는데 정현鄭玄의 주석 이후로 다 둘로 써 왔고, 구씨의절丘氏儀節 과 우리나라 오례의五禮儀 에도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엽까지는 하나로 쓴 이가 많아 누가 처음 그렇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하나의 풍속으로 되었다가 기고봉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밝히고 퇴계가 그의 주장을 따른 후로 지금은 정식으로 둘로 쓰고 있습니 다. 그런데 기명은 그것도 하나로 써야 맞다고 하면서 신의 끈을 서로 매는 것이나, 묶음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나 그 뜻이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김사계金沙溪의 말인데 이 말은 어떻습니까? 60세(1770, 영조46) * 윤동에게 답함(周易 및 高麗廟制에 대해 논의) (43) 順菴集年譜 四十七年辛卯 先生六十歲 三月 答邵南尹公書 邵南有書問易本義之可疑 麗史及綱目高麗廟制之疑晦處 先生辨釋而答之 안정복 생애와 행적 111

106 영종대왕英宗大王 47년 신묘(1771), 선생의 나이 60세. 3월에 소남 윤동규의 편지에 답하다. 소남이 편지를 보내어서 역경易經 본의本義 가운데 의심스러운 부분과 고려사 高麗史 및 강목綱目 가운데 고려高麗 묘제廟制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물어왔으므로 선생이 변석辨釋하여 답한 것이다. 61세(1771, 영조47) * * * * 권철신과 서신으로 경학 토론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으로 서연書筵에 참여 이후 여덟 차례의 서연에 참여하여 동궁에게 심경心經 등을 강론함 병을 이유로 물러나 8월에 집으로 돌아옴 (44) 順菴集年譜 四十八年壬辰 先生六十一歲 正月 答權哲身書 論九疇 書畧曰 來書以九疇之取法於洛書爲可疑 至云自一至九之數 是童幼之所知 何待天錫而後知之 又云河洛出於緯書 戴九履一之數 有不足信 歐陽公嘗以河洛爲怪妄之書 不意公又有不信之語 若是怪妄不信之書 則何以曰 河出圖洛出書 聖人則之云耶 伏羲則河圖而畫八卦 易傳可考 其曰天一至地十云者 與今所傳河圖 沕合不忒 此果爲怪妄而 不信乎 大禹則洛書而布九疇 雖不經見 而大戴禮明堂篇 有二九四七五三六一八之語 且其自一至十 非泛然列數之也 天開 子而一者數之始也 故一數起於北 參天兩地而倚數 故三其一而三居東 三其三而九居南 三其九而七居西 三其七而一又反于 北 此陽數順而居于四正方 二居西南 兩其二而四居東南 兩其四而八居東北 兩其八而六居西北 兩其六而二又反于西南 此 陰數逆而居于四隅方 此豈非位序起數自然之象乎 履一戴九 一九合而爲十 左三右七 三七合而爲十 二八四六 皆相對而爲 十 洛書雖數至於九 而十數包在其中 則亦爲五十五而與河圖合 且縱橫數之 皆成十五 皆是法象之自然 其可謂以人爲之 而 指爲怪妄不信之書乎 伏羲仰觀俯察 大禹治水成功之際 將欲畫卦布疇 爲開物成務之業 而圖書呈瑞 其位數有可據而明之者 也 故因寓其位數而則之耳 河洛爲數之宗 而讖緯之書 專主術數 故引而用之 亦不異矣 以緯書之所引而指以爲不信 舍易傳 分明之語者何也 五月 除翊衛司翊贊 入京謝恩 壬戌 入參書筵 是時書筵講心經 當日所講 自子絶四 止 固如此也 賓客蔡濟恭奏曰 桂坊 博學多聞 可備顧問 東宮令奏文義 遂奏曰 上章絶四 是聖人事 下章四勿 是學者事 聖人本無此四者 故漢書以毋作無 其義 儘然 盖凡人有意而不察 至於必 必而不察 至於固我 是皆門人之所不免也 門人以四者觀夫子 驗其有無 是所謂以小人之心 度君子之心者也 以此四者觀夫子 而夫子原無此四者 天理渾然 私欲凈盡 從心所欲 泛應曲當 有何四者之可言乎 其云絶者 言其私意本來絶去 無一毫之存在也 顔子下聖人一等 不能無渣滓之略未化者 須加勿字工夫然後 可以成德 此聖賢之分 眞 氏編序之意 亦可見矣 東宮仍擧程子曰敬卽禮 止 始則須絶四 令先生言 先生對曰 曲禮曰無不敬 禮本以敬爲主 故曰敬卽 禮也 敬以直內 則私欲退聽 無己可克 學者若用工於克己 必自誠意始 意誠則自無下三者之累矣 故曰始則須絶四 東宮曰 下文熊氏誠意之說非矣 先生對曰 誠意之意 兼善惡而言 毋意之意 只主惡一邊而言 此所以異也 用工之必自誠意始 上自帝 王之尊 下至匹夫之賤 初無不同 而下章視聽言動 卽其目之大者 必於此念念不忘 着意省察 無少間斷然後 私慾漸消而天理 漸復矣 又因賓客之以文辭進戒 先生奏曰 盖帝王之學 固不以文辭爲貴 必用力於帝王之文章 易曰觀乎人文 以化成天下 禮 樂刑政 無非文章之具也 邸下若留心於此等文章 豈不爲臣民之福哉 六月乙丑 參書筵 講自或問顔淵 止 一以貫之 東宮令先生陳文義 先生奏曰 此章爲克己復禮章 夫心學不過理欲之分 精 一執中 克己復禮 一串貫來 惟此之心 人欲長得一分 則天理减得一分 人欲克了一分 則天理復了一分 復字有恢復舊物之意 心中自有五常四端本有之德 但爲物欲所蔽 喪其本有之德 及其克除己私 則本有之德復見 猶鏡體本自光明 爲塵垢所蔽 失 其光明之體 而若磨拭得精 則光明之體復見耳 又論勿字之義曰 五事貌言視聽思 卽五行之水火木金土也 而思之屬土 人之 11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07 思慮 無所不及 如土之流行於四行之間也 此章視聽言動 與五事之目相合 但無土之可言 勿字禁止之義 通行四者 猶思之於 四事 東宮曰 文義好矣 東宮又言仁道之大 先生曰 古人製字 皆有意義 此象形會義 六書之所以作也 嘗觀字書 有云仁字之 二字 卽象上天下地 傍邊人字象人 言仁道貫三才故云 賓客曰 偶然如是 豈其然乎 先生曰 若逐字爲說 實有穿鑿之患 無異 於王安石之字說 大抵多有如此者 程子有中心爲忠如心爲恕之訓 朱子亦有心生爲性之語 且如思之爲字 田下有心 盖耕田之 法 或縱或橫 人之思慮 若田之耕矣 製字之義 似不汎然 東宮曰 平日欲求顔子所樂之樂而終未有得 若謂之樂道 則歇後無 着手處矣 先生曰 道字果濶大 古人已云道之浩浩 何處下手 然中庸曰 顔子得一善則眷眷服膺而不失之 若能爲善而用工不 已 無少間斷 至於萬善咸聚 日用云爲 無非從天理流出 則此豈非可樂乎 講罷 東宮命先生曰 書籍之在于玉堂講院者 可以 取觀矣 盖異數也 己巳 參書筵 講自中庸天命之性 止 不可以有加矣 先生奏曰 中庸首章 是萬世道學之原 而帝王治天下之大法 不出於是 矣 以首節性道敎言之 則率性一句 爲緊要最切處 推本而言之 則爲天命之性 惟天之命 於穆不已 而物受而爲性者也 推而 下之 散在事物 則爲脩道之敎 以其大者言之 禮樂刑政之屬是也 以其小者言之 乘馬服牛之制 無非敎也 以率性之道言之 性是體道是用 道體浩浩 無處下手 恐人迷不知爲學之工而務於虛遠 故必先剔出至近處言之 乃繼以戒懼之義 先立本源 是 存養之事也 徒存養而已 則無以應事接物而恐溺於一偏 故次言愼獨之義 以驗其幾 是省察之事也 旣存養以立其本 又省察 以審其幾然後 善則擴充之 惡則克治之 而其功莫切於性情 故繼言中和 而和者中節之稱也 不中節則不和而爲不善 如此則 須加克治 凡工夫不過存養省察克治三者 存而省 省而克 克而又存 循環不已 無一息之間斷 是所謂率性之道也 末節言其功 效 與上克己章 一串貫來 克己復禮 卽上三者工夫 其所謂天下歸仁 與此位育同義 東宮曰 文義好矣 先生曰 古人云非知之 難 行之難 試以目前事言之 書筵召對 逐日爲之 君德成就 實在於是 但逐日講學而止 則體行似有不及之慮 伏未知日用云 爲之間 照察體驗之工何如也 東宮曰 體行實難 仍問先生世派 先生畧陳世德以對 庚午 參書筵 講自或問喜怒哀樂之前 止 玆不盡錄 東宮問未發已發下工之道 先生奏曰 聖人之心 天理渾然 靈明自存 泛 應曲當 若衆人之心 則有昏動二者之病 非冥然昏昧 則必逐物而動 無湛然淸淨隨事省察之工 無未發已發之可言 此所以止 於衆人而已 孟子曰 勿忘勿助長 勿忘則無昏昧之時 勿助長則無逐物之患 其要卽敬也 其靜也 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 不聞 禮云如執玉 如執盈 洞洞屬屬 詩云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此其行敬節度 然而或過於用心 則有以心操心之患 故先儒曰 非着意 非不着意 平平存在 畧畧收拾 此最切要之語 邸下試於平居燕閑之際 應事接物之時 須下存養省察之工 初雖生澁 久久熟習 自然路脉漸明 此非他人所可指的成言處 大義旣明後 要在自得也 東宮曰 平平存在 略略收拾之說 何 謂也 對曰 心之爲物 活動流注 若一意執捉 則便是以心操心 是兩箇心也 只益躁擾 不成存養之工 必也輕輕下手 久久積習 要以勿忘勿助長爲意 先儒所謂久當見之之語 似指此等處也 丁丑 參書筵 講自潛雖伏矣 止 章末 先生以愼獨文義對 而必於幽獨得肆之地 每加戒懼之工 幽暗之中細微之事 雖謂之 人莫得以知之 而以古事驗之 驪姬半夜之泣 貴妃七夕之盟 傳之後世 其可畏有如此者 己卯 參書筵 講自又曰胸中 止 至者而言也 先生奏曰 古人云非知之艱 行之惟艱 劉安世旣聞不妄語之訓 然後念念不忘 至于七年而不已 則古人工夫之刻苦而不爲虛僞 可知矣 徐節孝積亦聞胡安定頭容直之戒 仍念不須頭容直 心亦要直 自此不 敢有邪心 其一變至道 轉換之機 間不容髮 而沛然不禦 此所謂非天下之大勇 不能如是矣 後儒之因循汨溺 不能成就者 多 在於爲之不勇 朱子少時 嘗爲一書 名困學恐聞 取子路未之能行 惟恐有聞之語也 其實心爲學如此 然後可以大成 庚辰 參書筵 講自蘭溪范氏 止 自行之也 先生對曰 流注想 儒家所謂浮念客慮 凡一切慾心所發 可以猛省克去 而惟浮念 客慮 乍有乍無 乍去乍來 紛紜難除 此最煞費工夫處 敬勝百邪 閑邪存誠 若知誠敬二字用工之道 則可無此患矣 又承問對 人有殺心以下四句曰 心者一身之主宰 天君泰然 百體從令 心一動焉 則形於外者 自有難掩者如此 甲申 參書筵 講自所謂脩身 止 不亂之謂 先生以誠意章爲省察工夫 正心章爲操存工夫以對 又以有心無心二義及勿忘勿 助 心有偏係之病爲對 乙酉 參書筵 講自閱機事 止 這箇心 先生對以誠實無僞 則可以除機心而應萬事 一涉機心 便墜詐僞坑中 聖人之所大惡 也 又論己心爲嚴師 引兢兢業業一日萬幾之說以對 七月 呈病遞 안정복 생애와 행적 113

108 八月 歸家 영종대왕英宗大王 48년 임진(1772), 선생의 나이 61세. 1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구주九疇를 논했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보내온 편지에 홍범구주洪範九疇 가 낙서洛書에서 법을 취하였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고 하면서, 심지어는 1에서 9까지의 수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수인데, 어 찌 하늘에서 내려준 뒤에야 알았겠는가 하고, 또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위서緯書에서 나온 것으로, 대구이일戴九履一의 수는 믿을 것이 못 된다 고 하였는데, 구양수歐陽脩가 일찍이 하도와 낙서를 일러 괴상하고 망측한 글이라고 하였다더니, 뜻밖에 지 금 공이 또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였네. 만약 이것이 그렇게 괴상하고 망측하여 믿지 못할 글이었다면, 어째서 하수河水에 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자 성인聖人이 그것을 본뜬 것이다 고 하였겠는가. 복희씨伏羲氏가 하도를 본떠 팔 괘八卦를 그렸다는 것은 역전易傳 을 보면 알 수 있는바, 거기에 천일天一부터 지십地十까지 라고 한 것은 지금 전해지고 있 는 하도와 조금도 틀림없이 딱 들어맞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괴상하고 망측하여 믿지 못할 것이란 말인가. 대우大禹가 낙서를 본떠 홍범구주를 만들었다는 말은 비록 경전經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대대례大戴禮 명당편明堂篇 에 이二, 구九, 사四, 칠七, 오五, 삼三, 육六, 일一, 팔八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네. 그리고 또 1에서 10까지의 숫자 배열도 그 냥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것이 아니네. 하늘은 자子에서 열렸고 1은 숫자의 시작이기 때문에 1의 수를 자방子方인 북北에서부 터 세는 것이고, 하늘은 3으로, 땅은 2로 곱하여 수를 맞추는 것이네. 그러므로 1을 3으로 곱하여 3이 동東에 위치하고, 3을 3 으로 곱하여 9가 남南에 위치하고, 9를 3으로 곱하여 27의 7이 서西에 위치하고, 7을 3으로 곱하여 21의 1이 다시 북北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렇게 양陽의 수는 순리적으로 셈하여 정사방正四方에 위치하게 되네. 그리고 2의 수는 서남쪽에 위치하는데, 2를 2로 곱하여 4가 동남쪽에 위치하고, 4를 2로 곱하여 8이 동북쪽에 위치하고, 8을 2로 곱하여 16의 6이 서북쪽에 위치하 고, 6을 2로 곱하여 12의 2가 다시 서남쪽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렇게 음陰의 수는 역으로 셈하여 네 귀퉁이에 위치하게 되네. 이것이 어찌 수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또 대구이일戴九履一로 1과 9가 합하여 10이 되고, 좌 삼우칠左三右七로 3과 7이 합하여 10이 되며, 2와 8, 4와 6도 모두 서로 짝이 되어서 10이 되네. 이렇게 낙서는 그 수가 비록 9에서 끝나지만, 10의 수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네. 그런즉 그 합이 역시 55가 되어 하도의 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네. 그리고 또 가로로 세거나 세로로 세거나 모두 15가 되네. 이와 같은 모든 자연의 법상法象을 사람이 만든 것이라 하면서 괴상하고 망측하여 믿지 못할 글이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복희씨가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의 이치를 살폈고, 대우大禹는 치수治水의 공 사가 마무리될 즈음에 장차 괘卦를 그리고 주疇를 펼쳐서, 만물萬物의 뜻을 개통하고 천하의 사업을 성취하려고 하였네. 그러 던 차에 하도와 낙서가 나타나 상서祥瑞를 고했는데, 그 자리와 수가 분명히 근거가 될 만하였었네. 그러므로 이를 인하여 그 자리에 수를 붙여서 본떴던 것일 뿐이네. 하도와 낙서는 수의 조종祖宗이고, 참위서讖緯書는 전적으로 술수術數만을 주장한 책 이네. 그러므로 이것을 인용하여 쓴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네. 그런데 위서緯書에서 인용하였다고 해서 믿지 못하겠 다고 하면서 역전易傳의 분명한 말들을 모두 버리는 것은 어째서인가? 5월에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에 제수됨에 서울로 들어가 사은謝恩하다. 임술일에 서연書筵에 들어가 참여하다. 이 때 서 연에서 심경心經 을 강講하였는데, 이날 강한 것은 자절사子絶四 에서부터 고여차야固如此也 까지였다. 빈객賓客 채제공蔡濟恭 이 아뢰기를, 계방桂坊이 박학博學하고 들은 것이 많으니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합니다 하니, 동궁東宮이 선생으로 하여금 글 뜻을 아뢰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드디어 아뢰기를, 윗장의 절사絶四 는 성인聖人의 일이고, 아랫장의 사물四勿 은 배우는 자의 일입니다. 성인은 본디 이 네 가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서漢書 에서는 무毋 자를 무無 자로 썼는바, 그 뜻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대개 보통 사람은 사사로운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 살피지 못하여 기필期必하게 되고, 기필하면서 살피 지 못하여 집착하고 아집我執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孔子의 문인들이 모두 면하지 못하였던 바입니다. 문인들이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공자를 관찰하여 공자에게 그런 것이 있나 없나를 징험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11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09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부자 夫 子 를 관찰하였지만 부자께서는 원래부터 이 네 가지가 없었습니다. 천리 天 理 가 혼연하여 사욕 私 欲 이 전혀 없었으므로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두루 곡진하고 합당하였으니, 이 네 가지를 말할 만한 여지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절 絶 이라는 것은 그 사사로운 마음을 본래부터 끊어 없애어 털끝만큼도 남 겨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안자 顔 子 는 성인인 공자보다 한 등급이 낮기 때문에 아직 순화되지 못한 찌꺼기가 다소 남아 있 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물 勿 자의 공부를 한 다음에야 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과 현인이 나누어지는 것으로, 진덕수 眞 德 秀 가 순서에 따라서 편찬한 뜻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어 정자왈 경즉례 程 子 曰 敬 卽 禮 부터 시즉수절사 始 則 須 絶 四 까지를 들어서 선생에게 말하게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곡례 曲 禮 에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無 不 敬 ] 고 하였습니다. 예 禮 는 본디 경 敬 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경이 곧 예이다[ 敬 即 禮 ] 고 한 것입니다. 경을 통해서 안에 있는 마음을 바르게 하면 사욕 私 欲 이 물러가서 마음의 명령을 듣게 되므로 이미 극복해야 할 사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만약 자기 극복에 공력을 들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뜻을 성실하게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될 것입 니다. 뜻이 성실해지면 그 다음의 세 가지 걱정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네 가지를 끊어서 없애야 한다 고 한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아래에 있는 웅씨 熊 氏 의 성의 誠 意 에 관한 설은 옳지 않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성의 誠 意 의 의 意 는 선 善 과 악 惡 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고, 무의 毋 意 의 의 意 는 악 한쪽만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으로,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공력을 들일 때 반드시 성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위로는 존귀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필부에 이르기 까지 애당초 차이가 없습니다. 아랫장의 시 視, 청 聽, 언 言, 동 動 은 곧 그 실천 요목 가운데서 큰 것으로, 반드시 이에 대해서 항상 유념하여 잊지 않고 뜻을 붙여 성찰해서 잠시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사로운 욕심이 점차 사라지고 천리 天 理 가 점차 회복되는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빈객 채제공이 문사 文 辭 에 관해서 진계 進 戒 한 것을 인하여 선 생이 아뢰기를, 대개 제왕 帝 王 의 학문은 실로 문사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제왕의 문장 文 章 에 힘쓰는 법입니다. 역 경 에 이르기를, 인문 人 文 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 化 成 한다 고 하였습니다. 예악 禮 樂 과 형정 刑 政 이 모두 문장의 도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하 邸 下 께서 만약 이와 같은 문장에 마음을 두신다면 어찌 신민들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고 하였다. 6월 을축일에 서연 書 筵 에 참가하다. 혹문안연 或 問 顔 淵 부터 일이관지 一 以 貫 之 까지 강 講 하였다. 동궁이 선생으로 하여금 글 뜻을 진달하게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장은 극기복례장 克 己 復 禮 章 입니다. 대개 심학 心 學 이란 천리 天 理 와 인욕 人 欲 을 분 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일집중 精 一 執 中 과 극기복례는 모두 한 꿰미에 꿰어진 것입니다. 이 마음에 인욕이 한 푼 자라면 천리가 한 푼 줄어들고, 인욕이 한 푼 극복되면 천리가 한 푼 회복되는 것입니다. 복 復 자에는 옛것을 회복한다는 뜻이 있습 니다. 마음속에는 본디 오상 五 常 과 사단 四 端 의 본질적인 덕이 있으나, 다만 물욕 物 欲 에 가려져서 그 본질적인 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이를 제거하면 그 본질적인 덕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광명한 거울의 본체가 때가 묻어서 그 광명의 본체를 잃어버렸다가 잘 닦아주면 다시 광명한 본체가 다시 나타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였 다. 또 물 勿 자의 뜻에 대해 아뢰기를, 오사 五 事 의 모 貌, 언 言, 시 視, 청 聽, 사 思 는 곧 오행 五 行 의 수 水, 화 火, 목 木, 금 金, 토 土 입 니다. 사 思 를 토 土 에 귀속시킨 것은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이 마치 토가 나머지 사행 四 行 의 사이를 유행 流 行 하 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말한 시, 청, 언, 동은 오사 五 事 의 항목과 부합되지만, 다만 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 다. 물 勿 자는 금지 禁 止 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의 뜻이 시, 청, 언, 동 네 가지에 두루 유행하는 것은 사 思 가 모, 언, 시, 청의 사사 四 事 에 대해 그러는 것과 같습니다 고 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글 뜻이 좋다 하고, 동궁이 또 인도 仁 道 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글자를 만든 데는 모두 뜻이 있으니, 이것이 상형 象 形 이나 회의 會 意 등 육서 六 書 가 만들어진 까닭입니다. 일찍이 자서 字 書 를 보니, 인 仁 자의 二 는 곧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을 본뜬 것이며, 방변의 亻 은 사람을 본뜬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도 仁 道 가 삼재 三 才 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니, 빈객이 말하기를, 우연히 그런 것이지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만약 글자만을 좇아서 설명한다면 실로 천착 穿 鑿 의 폐단이 생기게 되어 왕안석 王 安 石 의 자설 字 說 과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그러한 것들이 많습니다. 정자 程 子 는 중심 中 心 이 충 忠 이고, 여심 如 心 이 서 恕 이다 라고 새긴 일이 있고, 안정복 생애와 행적 115

110 주자 朱 子 도 심생 心 生 이 성 性 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사 思 라는 글자는 전 田 아래에 심 心 이 있는데, 대개 밭을 가는 방법이 가로로 갈기도 하고 세로로 갈기도 하는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밭을 가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글자를 만든 뜻이 범연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평소에 안자 顔 子 가 즐거워한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여도 끝내 터득하 지 못하였다. 만약 그저 도 道 를 즐긴다고만 말하면 너무 느슨해서 착수할 곳이 없을 것이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도 道 라는 글자는 과연 방대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도 이미 도의 넓고 넓음이여, 어디에다 손댈 것인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용 中 庸 에 이르기를, 안자 顔 子 는 한 가지 착함을 얻으면 이를 정성스럽게 가슴속에 간직하여 잃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만약 선 을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중단됨이 없게 함으로써 모든 선이 다 모여드는 데 이르게 되어 일상생활에 있어 서의 말과 행동이 모두 천리 天 理 로부터 나오게 된다면, 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강이 파하고 동궁이 선생에 게 명하기를, 옥당 玉 堂 과 강원 講 院 에 있는 서적들을 가져가 보아도 좋다 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은수 恩 數 였다. 기사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중용천명지성 中 庸 天 命 之 性 에서부터 불가이유가의 不 可 以 有 加 矣 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 를, 중용 의 첫머리 장 章 은 만세 도학 道 學 의 근원으로서, 제왕 帝 王 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 大 法 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머리 구절의 성 性, 도 道, 교 敎 를 가지고 말하면, 본성을 따른다[ 率 性 ] 는 한 구절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한 곳입니 다. 근본을 미루어서 말한다면 하늘이 명한 성[ 天 命 之 性 ] 이 되니, 하늘의 명이 심원하여 그침이 없음에 만물이 이를 받아서 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미루어 내려와서 사물에 분산하여 있으면 도를 품절해 놓은 교[ 脩 道 之 敎 ] 가 되니, 그 큰 것으 로는 예 禮, 악 樂, 형 刑, 정 政 따위가 그것이고, 그 작은 것으로는 말을 타고 소를 부리는 여러 가지 제도와 법식이 모두 교 敎 입 니다. 성을 따르는 도[ 率 性 之 道 ] 로써 말하면, 성은 본체이고 도는 작용입니다. 그런데 도의 본체는 넓고도 방대하여 손댈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혹하여 학문을 하는 방법을 모르고서 공허하고 고원한 데만 힘쓸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지극히 가까운 곳을 드러내어 말하고 계구 戒 懼 의 뜻으로 뒤를 이음으로써 먼저 본원을 세웠으니, 이것은 존양 存 養 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저 존양만 한다면 사물을 접응하는 방법을 모르므로 한쪽에만 빠져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신독 愼 獨 의 뜻을 말하여 그 기미를 증험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성찰 省 察 에 관한 일입니다. 이미 존 양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또 성찰하여 그 기미를 살핀 다음에라야 선 善 을 확충하고 악 惡 을 극복하여 다스리게 되는데, 그 공 부로는 성정 性 情 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중화 中 和 를 말하였습니다. 화 和 란 절도 節 度 에 맞는 것을 일 컫는 말입니다. 절도에 맞지 않으면 불화 不 和 하여 불선 不 善 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에는 반드시 극치 克 治 하여야만 합니다. 공부 란 존양 存 養 과 성찰 省 察 과 극치 克 治 세 가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존양하여 성찰하고, 성찰하여 극치하며, 극치하여 다시 존양 하기를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잠시도 쉼 없이 하는 것이 이른바 성을 따르는 도 인 것입니다. 끝 구절에서는 그 공효에 대해 말하였는데, 위의 극기장 克 己 章 과 한 꿰미에 꿴 것입니다. 극기복례 克 己 復 禮 란 곧 위의 세 가지 공부로서, 이른바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온다 는 것은 이곳에서 말한 위육 位 育 과 같은 뜻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글 뜻이 좋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목전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서연 書 筵 과 소대 召 對 를 날마다 여는 것은 실로 임금의 덕을 성취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강학 講 學 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체득하여 실행하는 부분에는 미치지 못할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행동하는 즈음에 성찰하고 체험하는 공부가 과연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체득하 여 행하기가 실로 어렵다. 하고, 이어 선생의 세계 世 系 에 대해 묻자, 선생이 대충 세덕 世 德 을 열거하여 답하였다. 경오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혹문희로애락지전 或 問 喜 怒 哀 樂 之 前 부터 자불진록 玆 不 盡 錄 까지 강하였다. 동궁이 미발 未 發 과 이발 已 發 에 대하여 공부하는 방법을 묻자, 선생이 아뢰기를, 성인의 마음은 천리가 혼연하여 영명 靈 明 한 본성이 저절로 보존 되므로 널리 수응 酬 應 함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인 衆 人 의 마음은 혼매함과 동요됨의 두 가지 병폐가 있어 서 아득히 혼매 昏 昧 하지 않으면 반드시 상대를 따라 동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맑고 청정한 채로 일에 따라 성찰하는 공부 가 없고, 미발이라거나 이발이라고 말할 만한 그 무엇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인으로 그치는 이유입니다. 맹자가 이르기 를,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 하였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혼매한 때가 없을 것이고, 조장하지 않으면 동요되 11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11 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그 요지는 곧 경 敬 입니다. 고요한 때에 남이 보지 않아도 조심하여 경계하고 남이 듣지 않아도 두려 워해야 하니, 예기 에서 말한 귀중한 보배나 가득찬 그릇을 손에 받든 듯 공경하고 조심한다 는 것과 시경 에서 말한 두 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 앞에 선듯, 살얼음을 밟듯이 한다 는 것이 경 敬 을 실천하는 절도 節 度 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지나 치게 마음을 쓰다 보면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조이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유 先 儒 가 말하기를, 뜻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뜻을 붙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평범하게 보존하며 간략하게 수습한다 고 하였는바, 이것이 가장 절실하고도 요 긴한 말입니다. 저하께서도 한번 평소에 한가하실 때나 사물을 접하실 때 반드시 존양과 성찰의 공부를 하여 보소서. 처음에 는 비록 생경하고 어렵더라도 오래도록 익히다 보면 저절로 맥락이 밝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남이 지적하여 가르쳐 줄 수 있 는 것이 아니며, 대의 大 義 가 밝아진 뒤 스스로 터득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평범하게 보존하며 간략하게 수습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마음이란 활동하고 흘러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일 한 가지 뜻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곧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옥죄는 것으로서 두 개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욱더 절박하게 얽혀들어 존양의 공부를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아주 가볍게 착수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익혀나가 되,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요체입니다. 선유들이 오래되면 당연히 보게 될 것이다. 고 말한 것이 아마도 이것을 가리킨 듯합니다 하였다. 정축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잠수복의 潛 雖 伏 矣 부터 이 장 章 의 끝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신독 愼 獨 의 글 뜻에 대하여 대 답하기를, 으슥한 곳에 혼자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우에 반드시 조심하여 경계하는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으 슥하고 어두운 곳에서 하는 미세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여기지만, 옛 역사를 통해 징험해 보면, 여희 驪 姬 의 한 밤중의 울음과 양귀비 楊 貴 妃 의 칠석 七 夕 의 맹세가 후세에 전해졌는바, 그 두려워할 만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기묘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우왈흉중 又 曰 胸 中 부터 지자이언야 至 者 而 言 也 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고 하였습니다. 유안세 劉 安 世 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은 뒤 이를 잊지 않고 항상 마음에 새겨서 7년이 되도록 그것을 지켰으니, 옛 사람이 공부를 함에 있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노력하면서 거짓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소학 小 學 을 보면 절효공 節 孝 公 서적 徐 積 이 또한 머리를 반듯이 하라 는 호안정 胡 安 定 의 경계를 듣고는 머리만 반듯이 할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바르게 하여야겠 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감히 사특한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한 번 변화하여 도 道 에 이르는 기틀이 털끝만큼의 틈도 용납 하지 아니하여 그 크나큰 기상을 막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하의 큰 용기가 아니고는 이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후세의 유자 儒 者 들이 인순 因 循 하고 골몰하여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용감하게 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주 자가 젊었을 때 책을 한 권 만들고는 그 이름을 곤학공문 困 學 恐 聞 이라고 하였는데, 그 책의 이름은 자로 子 路 는 들은 말을 미처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새로운 가르침을 듣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는 말에서 취한 것입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학문하기를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크게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였다. 경진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난계범씨 蘭 溪 范 氏 부터 자행지야 自 行 之 也 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유주상 流 注 想 이란 말은 유가 儒 家 에서 말하는 부념 浮 念 과 객려 客 慮 입니다. 무릇 일체의 욕심에서 발하는 것은 깊은 성찰을 통해서 극복하여 제거될 수 있지만, 이 부념과 객려는 금방 있다가 금방 없어지고 금방 갔다가 금방 다시 오기 때문에 분란스러워 제거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곳입니다. 경 敬 은 온갖 사특함을 이기는 것인바, 사특함을 막아서 성 誠 을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성과 경 두 글자에 대하여 공부하는 도리를 안다면 이런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고 하였다. 또 인유살심 人 有 殺 心 이하의 네 구절에 대한 물음을 받고 대답하기를, 마음[ 心 ]이란 것은 한 몸을 주재 主 宰 하는 것으로, 마음이 태연하면 백체 百 體 가 그 명령에 따릅니다. 마음이 한 번 동할 경우 그것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우기가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고 하였다. 갑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소위수신 所 謂 修 身 부터 불란지위 不 亂 之 謂 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성의장 誠 意 章 은 성찰 省 察 의 공부 工 夫 이고 정심장 正 心 章 은 조존 操 存 의 공부라는 내용으로 대답하였으며, 또 유심 有 心 과 무심 無 心 의 두 가지 뜻, 잊지도 말고 안정복 생애와 행적 117

112 [勿忘]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勿助]는 것, 마음이 치우치거나 얽매이는 병통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을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열기사閱機事 부터 저개심這箇心 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성실하여 거짓이 없으 면 기심機心을 제거하여 만사에 수응酬應할 수 있으나, 한번 기심에 관계되면 곧장 거짓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는바, 이것 은 성인이 크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자신의 마음이 엄한 스승이다[己心爲嚴師] 라고 한 부분을 논하면서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라. 하루에도 만 가지의 기틀이 생긴다 는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7월에 병으로 인해 체차되다. 8월에 집으로 돌아가다. 62세(1772, 영조48) * 대신들이 추천한 계방桂坊(世子翊衛司) 구임인久任人에 뽑힘 * 윤동규의 부음 받음 * 익위사翊衛司 위솔衛率에 제수 (45) 順菴集年譜 四十九年癸巳 先生六十二歲 夏 大臣薦桂坊久任人 先生被選 八月 哭邵南尹公訃 有祭文 十二月 除翊衛司衛率 영종대왕英宗大王 49년 계사(1773), 선생의 나이 62세. 여름에 대신大臣이 계방桂坊에서 오랫동안 사진仕進시킬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선생이 뽑히다. 8월에 소남 윤동규의 부음訃音에 곡하다. 제문祭文을 지은 것이 있다. 12월에 익위사 위수翊衛司衛率에 제수되다. 63세(1773, 영조49) * 입경入京(山林洞 成頴의 집에 우거함)하여 왕에게 숙배肅拜함. 다시 왕세손의 사부가 됨 * 왕세손의 사부로서 네 차례 서연書筵에 참여 * 동궁東宮과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강론함 (46) 順菴集年譜 五十年甲午 先生六十三歲 正月入京 寓山林洞成掌令穎家 庚午 出肅 壬申 參書筵 是時書筵 講聖學輯要收斂容止章 先生奏曰 收斂容止之本 在於敬 敬通貫動靜 若徒收斂其外而內無敬以持 之 則無異於漢成帝臨朝儼然而止於昏淫而已 若能以敬爲主 則動容周旋 莫不有則 行時足容自重 視時目容自端 九容莫不 循理矣 若失其敬 而介然之頃 有所忘忽 則行必顚蹶 視必遊邪 言語之除 亦急迫而不安定矣 東宮因問年前何其急歸乎 先 生對曰 臣有奇疾 不能從宦 已自下燭矣 其時日熱不堪 呈病而歸 便訣之懷 自不能已 不意今者又有除命 病情依舊 實難出 11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13 肅 聞睿學日將 不勝延頸之忱 將欲復瞻淸光 強疾以來 實不能久留從仕矣 東宮曰 卽今日漸和暖 不似昔年隆熱之時 頻頻 入番似好 因慰籍甚厚 先生入直後 敬彬輩布在春桂坊 皆言近來書筵悤悤 不知緣何而如此 先生曰 聖壽漸高 左右奉養 事務多端 此固然矣 有 何可憂 大抵此輩言語多糢糊 使人疑慮 先生心竊痛之 是日將退 奏曰 桂坊職是侍衛 不敢猥越陳奏 而旣許登筵 則微忱所 在 不可不白 臣入直時聞僚貟之言 則皆以近來書筵之悤遽 頗有疑菀之語 今者果然 臣未知邸下有何忙事而然耶 或與監膳 侍坐之時 相値而然耶 東宮低聲答曰 聖壽日高 自然多忙事而然矣 先生曰 帝王之行 莫大於孝 及其至也 至於視於無形 聽 於無聲 以今日事言之 書筵雖重 猶是第二件事 東宮頗有嘉納之意 先生出謂諸人曰 書筵之悤遽 果如我言 豈有可憂 而亦 豈非臣民之幸耶 甲戌 參書筵 講收斂言語章 先生奏曰 孔子此言 卽繫辭中孚二爻之辭也 易曰 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縻之 孚者信也 二爻與五爻相應 孚信相感如此 東宮曰 予未讀易 故不知易 二五相應云者何也 先生敷奏內外卦相應之義 因奏曰 孔子作傳 亦取象而言 非徒然但言言行也 這內卦爲兌 兌悅也 人悅則有言 且兌有口象故爲言 且二爻動則爲震 震動也 行 屬動 故孔子以人之切近 莫過於言行 卽象取義以明之 言行之不可不愼盖如此 而爲人君者 尤當警惕 不可使一言有所失措 一行有所虧欠 一或有誤 俄頃之間 四方知之 其幾果可畏也 古人又言 言堂滿堂 言室滿室 言滿天下無口過 行滿天下無身 過 謹言脩身之至 工夫能到此界分 則豈不樂哉 行雖多般 而古人以爲孝者百行之源 又曰孝悌之德 通於神明 人主誠能先盡 其孝 官闈之間 洞洞屬屬 和氣瀜洩 洋溢于外 則可以通神明而動天地矣 東宮論抑章曰 衛武公年老而工夫不懈 豈不賢哉 先生曰 此篇首章言抑抑威儀 維德之隅 言治其外也 中言溫溫恭人 維德之基 言治其內也 人之工夫 無過於制外養內而已 故文勢句法亦同 此二句實一篇之綱領也 夫恭之德大矣 非徒外面恭謹而已 惟其內心實恭然後 可爲德之基矣 周易謙卦 惟 吉無凶 堯舜孔子之德 皆稱恭字 其效至於篤恭而天下平 乙亥 參書筵 講收斂其身章 先生釋傲不可長節曰 傲之爲凶德大矣 是以居四者之先 自秦以下 君道日尊 臣道日卑 上下 之情意隔阻 而爲人君者 每有自聖之病 皆傲德也 東宮動容有嘉納之意 時有語類懸吐事 先生奏曰 懸吐一節甚難 且語類是 當時俗語過半 實難通解 臣意則不如不懸 因其文勢而讀之 沉潛玩索 則庶有所得 若強爲懸吐 則反使意味淺短矣 東宮曰 一帙之書 而半懸半不懸 爲斑駁故也 先生所懸者 易禮各二卷 東宮問先生所撰東史綱目 可以得見否 先生以草本不足進覽 之意仰對 四月甲申 參書筵 講理氣章 講畢 東宮問于先生曰 退溪 栗谷理氣說各不同 君從何說 先生對曰 臣老耄昏劣 性理源頭 不敢論列 而但栗谷自得之見雖好 而退溪之說 本於朱子語類輔廣所記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輔氏是朱門高弟 必不誤錄 退溪說 有來歷源委 故臣嘗從退溪說 在直時有偶吟四絶 其一曰 踈慵端合卧巖扉 四月長安客欲歸 這裏去留難定意 銅龍樹色望依依 七月歸家 先生嘗與李說書商駿書 畧曰 痛深風樹 所重無所 不欲復出世路 而桂坊宿趼 誠切延頸 且聞近來睿學日將 思 欲復瞻淸光 少殫微忱 扶疾冐出 不意癃廢踈訥之物 萬不及于平人 而屢蒙睿眷 褒奬不已 實非塵芒小臣所可堪承者 自欺欺 人 終至於上欺儲君 悚惶無地 而每許以博洽 博學博文 雖非聖門所棄 而但記古事考古例 一掌故吏足矣 此實無益於君子遠 大之業 况帝王之學乎 今來十次登筵 不過沿文畧奏而已 至於所謂聖賢之實工 帝王之大業 可以爲經遠之圖者 則不惟才分 駑下 無所知識 亦不敢出位冒陳 徒緘默而退 自顧慙歎 今則病情益谻 而寄寓無所 數月之內 四遷其居 踽踽棲屑 百端生受 勢當卽歸 而有不忍便訣 日後將欲一次持被 因决歸計耳 歸家後 又與書論帝王之學及成就睿學之道 영종대왕英宗大王 50년 갑오(1774), 선생의 나이 63세. 1월에 서울로 들어가다. 산림동山林洞에 있는 장령掌令 성영成穎의 집에서 살았다. 경오일에 나아가서 숙배肅拜하다. 임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이 때 서연에서 성학집요聖學輯要 의 수렴용지장收斂容止章을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안정복 생애와 행적 119

114 용지 容 止 를 수렴하는 근본은 경 敬 에 있는데, 경은 동 動 과 정 靜 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만일 외형만 수렴하고 내면을 경으로 지 켜가지 않는다면 한 성제 漢 成 帝 가 조회 朝 會 에 임할 때는 근엄하였으나 혼음 昏 淫 하게 되고 만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 뿐 입니다. 만일 경으로 주장을 삼는다면 모든 움직임에 다 법도가 있어서, 다닐 때는 걸음걸이가 저절로 중후해지고 볼 때는 시선이 저절로 단정해지는 등 모든 행동이 다 도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 경을 놓아버려서 잠시라도 잊어버리거나 소홀함이 있게 할 경우 걸어갈 때는 반드시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바라볼 때는 시선이 반드시 경박하고 사특할 것이며, 말할 때에는 조급하고 박절하여 안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고 하였다. 동궁이 이를 인하여 묻기를, 연전에는 어찌해서 그리 급하게 돌아갔는가?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에게 이상한 병 이 있어서 벼슬에 종사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 때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갔었는데, 헤어진 데 대한 서운한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또다시 제수하는 명이 내려졌는데, 병세가 여전하여서 실로 나와서 숙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하 邸 下 의 학문이 날로 진보한다는 말을 듣고 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서 다시 한 번 맑고 훤한 모습을 우러러 뵙고자 하여 병을 무릅쓰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러 나 실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벼슬에 종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지금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고 있 어서 지난번의 무덥던 때와는 다르니, 자주 입번 入 番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면서, 매우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선생이 입직 入 直 한 뒤에 안경빈 安 敬 彬 의 무리가 춘방 春 坊 과 계방 桂 坊 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근래 에 서연을 총총히 끝내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성수 聖 壽 가 점차 높아가니 좌우에서 봉양하 는 일과 처리해야 할 사무가 많을 것인바, 이는 실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고 하였다. 대개 이들 무리는 말하는 것이 모호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므로, 선생이 이를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었 다. 이날 물러나올 즈음에 선생이 아뢰기를, 계방의 직책은 시위 侍 衛 하는 것이므로 감히 직분을 뛰어넘어 주제넘게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서연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시었으니, 저의 변변치 못한 생각을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입 직할 때 동료 관원들의 말을 들으니, 모두들 근래 서연을 총총히 끝낸다고 하면서 자못 의아해하는 말을 하였는데, 오늘 보 니 과연 사실입니다. 신은 저하께서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감선 監 膳 을 하거나 시좌 侍 坐 를 하는 시간과 상치되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하니, 동궁이 나직한 목소리로 답하기를, 성수가 날로 높아감에 자연 바쁜 일이 많 아서 그런 것이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제왕 帝 王 이 행할 도리 가운데 효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효를 지극하게 하면 형체가 없는 데에서도 보고 소리가 없는 데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서연 이 비록 중한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두 번째 가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고 하니, 동궁이 자못 가상하게 여기면서 받아들이는 뜻이 있었다. 선생이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서연을 총총히 끝내는 이유는 내가 말한 대로이다. 그러 니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으며, 이 역시 어찌 신민들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갑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수렴언어장 收 斂 言 語 章 을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공자 孔 子 의 이 말은 주역 周 易 계사전 繫 辭 傳 에서 중부괘 中 孚 卦 의 이효 二 爻 를 해석한 말입니다. 역경 에 이르기를,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으니 내 너와 함께 하리라[ 鳴 鶴 在 陰 其 子 和 之 我 有 好 爵 吾 與 爾 縻 之 ] 고 하였습니다. 부 孚 는 믿음입니다. 이 효 二 爻 와 오효 五 爻 가 상응하여 서로를 신뢰하여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내가 아직 주역 을 읽지 않아서 주역을 잘 모른다. 이효와 오효가 상응한다 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자, 선생이 내괘 內 卦 와 외괘 外 卦 가 상응하 는 뜻에 대하여 부연 설명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공자가 전 傳 을 지으면서도 그 상 象 을 취해 말하였는바, 한갓 언행 言 行 에 대 해서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괘의 내괘는 태 兌 인데, 태는 기쁨을 뜻합니다. 사람이 기쁘면 말을 합니다. 또 태 兌 란 글자에 는 구 口 의 상 象 이 있으므로 말[ 言 ]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효가 움직이면 진 震 이 되는데, 진은 움직임[ 動 ]입니다. 행동은 움직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사람에게 절실한 것으로 언행 言 行 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상 象 에서 뜻을 취하 여 밝힌 것입니다. 언행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임금으로 있는 자는 더욱 조심하고 두려 워해서 한 마디 말도 실수함이 없고 한 가지 행동도 잘못됨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 잠 12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15 깐 사이에 사방 사람들이 다 알게 되니, 그 기틀이 과연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옛 사람이 또 말하기를, 대청에서 말을 하 면 대청에 가득하고 방에서 말을 하면 방에 가득하다 고 하였으며, 말이 천하에 가득하여도 입의 잘못이 없고 행동이 천하에 가득하여도 몸의 잘못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말을 삼가는 것은 수신 修 身 의 지극함이니, 공부가 능히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 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행실에는 비록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옛 사람은 효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고 하였습 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효제 孝 悌 의 덕은 신명 神 明 에 통한다 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참으로 먼저 그 효의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궁중 宮 中 이 모두 공경하고 삼가서 화기 和 氣 가 충만해져 바깥으로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명에 통하고 천지 天 地 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고 하였다. 동궁이 억장 抑 章 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르기를, 위 무공 衛 武 公 이 나이가 들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찌 어 질지 않겠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 편의 첫머리 장 章 에서 빈틈없는 위의 威 儀 는 덕 德 의 방정함이다 고 한 것은 그 바깥 을 다스린 것을 말한 것이고, 중간에 따사롭고 공손한 분은 오로지 덕의 바탕이네 라고 한 것은 그 안을 다스린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공부란 밖을 제어하고 안을 배양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 문세 文 勢 와 구법 句 法 이 역시 이와 같은바, 이 두 구절은 실로 이 시의 강령 綱 領 입니다. 공손한 덕은 실로 큰 것이니, 외면만을 공손하게 하고 삼갈 뿐만 아니라, 그 안 의 마음도 진실로 공손한 다음에야 덕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역 의 겸괘 謙 卦 는 모두 길하고 흉 凶 이 없으며, 요순 堯 舜 과 공자 孔 子 의 덕도 모두 공 恭 한 글자를 칭하였으니, 그 공효가 독공 篤 恭 을 통하여 천하가 평안해지게 하는 데 이른 것 입니다 고 하였다. 을해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수렴기신장 收 斂 其 身 章 을 강하였다. 선생이 오불가장 傲 不 可 長 구절을 해석하여 아뢰기를, 오 만[ 傲 ]은 대단히 큰 흉덕 凶 德 입니다. 그 때문에 네 가지 가운데 맨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진 秦 나라 이후로 임금의 도 道 는 날 로 높아지고 신하의 도는 날로 낮아진 탓에 상하 간의 정의 情 意 가 막혀 버렸습니다. 이에 임금으로 있는 자가 매번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병통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오만한 데에서 나온 흉덕입니다 고 하니, 동궁이 자세를 바로잡으면 서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는 뜻이 있었다. 이때 어류 語 類 에 토 吐 를 다는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아뢰기를, 토를 다는 한 가지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어류 는 당시의 속어 俗 語 가 태반이어서 실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 로는 차라리 토를 달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 문세 文 勢 를 따라 읽으면서 깊이 생각하여 완미하고 탐구하다가 보면 터 득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억지로 토를 달 경우 도리어 그 의미가 얕고 짧게 될 듯합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한 질의 책에 반은 토를 달고 반은 달지 않아서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토를 달기로 한 것은 주역 周 易 과 예기 禮 記 두 권이다. 동궁이, 선생이 찬한 동사강목 東 史 綱 目 을 얻어 볼 수 없는가를 물으니, 선생은 초고본 草 稿 本 이라서 볼 것이 못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다. 4월 갑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이기장 理 氣 章 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동궁이 선생에게 묻기를, 퇴계와 율곡의 이기 설 理 氣 說 이 각자 다른데, 그대는 누구의 설을 따르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늙고 어리석어서 성리 性 理 의 근원에 대해 감히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스스로 터득한 율곡의 견해가 좋기는 하지만, 퇴계의 설은 주자의 어류 가운 데 보광 輔 廣 이 기록한 사단 四 端 은 이 理 가 발한 것이고, 칠정 七 情 은 기 氣 가 발한 것이다 고 한 데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보광은 주자 문하의 고제 高 弟 이니, 반드시 잘못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퇴계의 설은 그 내력과 연원이 있으므로 신은 일찍이 퇴계의 설을 따랐습니다 고 하였다. 입직 入 直 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읊은 절구 絶 句 4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다음과 같다. 게을러서 산골 집에 누웠어야 알맞음에 사월 들어 서울의 객 돌아만 가고 싶네. 떠날까 머물까 뜻 정하기 어려운데 동룡문의 나무는 휘늘어져 있구나 7월에 집으로 돌아오다. 선생이 일찍이 설서 說 書 이상준 李 商 駿 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는 애통함이 심하고 의지할 부모님이 돌아가셨기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계 방 桂 坊 의 자리에 다시 나아간 것은 참으로 저하를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여서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근래에 저하의 학문이 일취 안정복 생애와 행적 121

116 월장한다기에 다시금 맑으신 그 모습을 우러러 뵈어서 저의 하찮은 정성이나마 다하려고 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외람스레 나 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늙어 병들고 어눌하여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못한데도 여러 차례 돌보아 주시면서 칭 찬하기를 마지 않으셨는 바, 실로 시골구석의 소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다 가 끝내는 위로 세자를 속이게 되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매번 박학博學하다고 하시었습니다. 박학博學과 박문博 文이 비록 성문聖門에서 버린 바는 아니지만, 단지 고사古事를 기억하고 고례古例를 상고하는 것일 뿐이라면 장고掌故를 맡은 관 리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할 것입니다. 이는 실로 군자君子의 원대한 사업에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학문 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올라와서 열 번 서연에 나아갔는데, 글을 인해서 대충 주달하는 데 불과하였을 뿐, 이른바 성현聖賢의 실제 공부나 제왕의 큰 사업과 같은 원대함을 도모할 수 있는 데에 이르러서는, 재주가 노둔하여 아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역시 직분을 벗어나서 외람되이 진달할 수 없었던 탓에, 입만 다물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 으니, 저 자신을 돌아봄에 부끄러워 탄식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병세가 더욱 도진데다 머무를 곳도 마땅치 않아서 몇 달 사이 에 네 번이나 거처를 옮겼습니다. 외롭게 지내면서 갖가지로 고초를 겪고 있는바, 형세상 즉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도 차마 쉽사리 훌쩍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훗날 장차 한 차례 입직을 한 뒤에 즉시 돌아갈 계획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또 편지를 보내 제왕帝王의 학문 및 예학睿學을 성취시킬 방도에 관해 논하였다. 64세(1774, 영조50) * 부인 성씨가 작고함 *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저술 * 반계유선생연보磻溪柳先生年譜 수정 (47) 順菴集年譜 五十一年乙未 先生六十四歲 正月 夫人成氏卒 秋 朱子語類節要成 先生以爲語類是切於學者之書 而語意重疊 篇帙浩汗 有難考閱 乃刪煩撮要 書凡八卷 名之曰語類節 要 十月 復除翊衛司翊贊 不赴 閏十月 除懷仁縣監 出肅旋遞 道伯啓請前官仍任故卽遞 卽日以特敎復除翊衛司翊贊 謝恩 寓藥峴柳承旨薰家 是時上候未寧 廚院直宿 例不開講 故雖累次入直而一未登筵 十一月 自上有備忘記 十一月十三日備忘記 因李宜哲所奏 問大臣取讀桂坊座目 其中金履安故贊善子 此人予己思焉 安鼎福 李謙鎭領相稱焉 金履安入直 故予方召見 以此下敎 正書入于世孫宮 令冲子見此 於書筵召對 必也商確學問 此亦爲東宮一助也 今者桂坊銓 曹果擇 此後亦令另擇云云 十四日 時原任大臣引見入侍 時領相韓翼謩達曰 春桂坊官員 不可不極擇矣 上曰 所奏誠然 桂 坊何如人耶 對曰 翊贊安鼎福經學有餘 且聞其爲人極恬雅云矣 上曰 誰家族耶 曰未能詳知矣 十二月癸丑 東宮代理聽政 受百官朝參于景賢堂 入參侍衛 丁卯 呈病歸家 撰磻溪柳先生年譜 先生名馨遠 仁祖朝人 영종대왕英宗大王 51년 을미(1775), 선생의 나이 64세. 1월에 부인 성씨成氏가 졸하다. 12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17 가을에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를 완성하다. 선생은 어류 가 학자에게 있어서 긴요한 책인데도 말뜻이 중첩되고 권질이 아주 많아서 고열考閱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여겼다. 이에 번잡한 것을 잘라내고 요점만을 추렸는데, 책은 총 8 권이며, 이름을 어류절요語類節要 라고 하였다. 10월에 다시 익위사 익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윤10월에 회인 현감懷仁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나가서 사은숙배하고 바로 체차되다. 도백道伯이 전임관을 그대로 잉임仍 任시킬 것을 계청하였으므로 바로 체차된 것이다. 그날 특별 전교로 인해 다시 익위사 익찬에 제수됨에 사은謝恩하다. 약현藥峴에 있는 승지 유훈柳薰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상의 체후體候가 편치 않아서 주원廚院에 직숙直宿하였는데, 전례에 의거해 개강開講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여러 차례 입직하였으나 한 번도 서연에 나아가지 못했다. 11월에 상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다. 11월 13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의철李宜哲이 아뢴 바에 의거해 대신에게 물어서 계방桂坊의 좌목座目을 가져다 보니, 그 가운데 김이안金履安은 고故 찬선贊善 김원행金元行의 아들로, 이 사람에 대해서 는 내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며, 안정복安鼎福, 이겸진李謙鎭에 대해서는 영상이 칭찬하였다. 김이안이 입직하고 있으므로 내 가 막 불러서 보았다. 이 하교를 정서한 다음 세손궁世孫宮에 들여서 어린 아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고서 서연을 열어 소대召 對할 때 반드시 학문을 토론하도록 하라. 이 역시 동궁을 위하여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의 계방은 이조에서 과연 잘 가려 뽑았다. 이 뒤로도 역시 각별하게 가려 뽑도록 하라 고 하였다. 14일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인견引見하여 입시할 때 영상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춘방과 계방의 관원은 극히 잘 가려 뽑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옳다. 계방은 어떤 사람인가? 고 하자, 대답하 기를, 익찬 안정복인데 경학經學에 뛰어나고, 또 듣건대 그의 사람됨이 아주 단정하다고 합니다 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 느 집안 사람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고 하였다. 12월 계축일에 동궁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면서 경현당景賢堂에서 백관들의 조참朝參을 받음에 시위侍衛로 들어가서 참 여하다. 정묘일에 병으로 인해 정사呈辭하고 집으로 돌아오다. 반계磻溪 유선생柳先生의 연보年譜를 찬하다. 선생의 이름은 형원馨遠으로, 인조仁祖 때의 사람이다. 65세(1775, 영조51) * 목천현감木川縣監. 이병휴의 부음 받음 (48) 順菴集年譜 五十二年丙申 先生六十五歲 見歲初東宮令旨 喜吟一絶云 天運昭回析木津 日輪扶擁御王春 新政渙發民皆聳 白首歡心有 老臣 正月 以在外遞 三月 英宗大王昇遐 設哭班於村前 與家人宗族賓客村民會哭 逐日行朝哭至成服 因山時出居族人外舍數日 因行望哭 八月 哭貞山訃 九月 除木川縣監 入京謝恩 寓孝橋權生家 十月赴任 下車初 先諭民人以敦敎化正名分之意 以大明高皇帝所定六條 孝順父母 尊敬長上 和睦鄰里 敎訓子孫 各安生 理 無作非爲 條列曉諭 使每月朔 上下民人聚會讀約 如有不順父母 兄弟不和 鄰里不睦 凌犯長上 酗酒作亂 偸窃奸細 犯 此六科則嚴禁痛治之意 亦爲曉諭 使民有所勸懲 自後逐月申飭 俾有成效 안정복 생애와 행적 123

118 十二月 自官藏氷 本邑舊䂓 每當藏氷之際 必動一邑之民 時當隆冬 動經累日 爲弊多端 是冬自官家雇邑底民丁 厚饋酒 食而伐之 一日而畢 民皆感頌 後論報監司 仍罷之 영종대왕英宗大王 52년 병신(1776), 선생의 나이 65세. 새해 초 동궁의 영지令旨를 보고 기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돌고 돌아 정월이 다시 옴에 밝은 해 떠오르니 계절은 초봄이네. 새 정책 선포함에 백성들 고무되니 흰 머리의 늙은 신하 마음이 흐뭇하네 1월에 외방에 있다는 이유로 체차되다. 3월에 영종대왕英宗大王이 승하하다. 시골 마을 앞에 곡하는 자리를 설치하고 가인家人, 종족宗族, 빈객賓客, 촌민村民들 과 함께 모여 곡하였다. 날마다 아침에 모여 곡하면서 성복成服할 때까지 하였으며, 인산因山 때에는 족인族人의 외사外舍로 나가 며칠 동안 거처하였으며, 인하여 망곡望哭하였다. 8월에 정산의 부음訃音을 듣고 곡하다. 9월에 목천현감木川縣監에 제수됨에 서울로 들어와 사은하다. 효교孝橋에 있는 권씨의 집에서 머물렀다. 10월에 부임하다. 고을로 내려간 처음에 먼저 백성들에게 교화敎化를 돈독히 하고 명분名分을 바로잡겠다는 뜻으로 유 시諭示하였다. 그러면서 대명大明의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제정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며, 웃어른을 존경하고, 마을 사람들 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들을 가르치고, 각자의 생업에 안정하고, 비위非爲를 저지르지 말라 는 내용의 훈민육조訓民六條를 가 지고 조목별로 나열하여 효유曉諭한 다음, 매월 초하룻날 상하의 백성들이 모여서 약조約條를 읽게 하였다. 그리고 혹 부모에 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거나, 이웃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거나, 웃어른을 범하여 능멸하 거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간사한 짓을 하는 등의 여섯 조목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 렬히 다스려서 엄금하겠다는 뜻도 역시 효유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권장되고 징계되는 바가 있게 하였으며, 그 뒤로 달마다 신칙申飭해서 실제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였다. 12월에 고을에서 얼음을 저장하다. 본 고을의 옛 규례에 매번 얼음을 저장할 즈음에는 반드시 온 고을의 백성들을 동 원하였는데, 시절이 마침 엄동설한을 당하여 걸핏하면 여러 날 동안을 부역하는 탓에 갖가지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 해 겨울 에 관가에서 고을의 민정民丁들을 고용해서 술과 밥을 후하게 먹여 주면서 얼음을 떠서 저장하게 하니, 하루만에 일이 끝남 에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면서 칭송하였다. 그 뒤에 이를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이어 혁파하였다. 66~67세(1777~1778, 정조1~2) * 방역소를 설치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다 (49) 順菴集年譜 正宗大王元年丁酉 先生六十六歲 正月 設防役之所 本邑初無雇馬之設 新舊官交遞之際 每從民結收納 爲民痼弊 先生欲捄其弊 適當式年帳籍之時 使吏屬 分寫籍卷 得書寫租百餘石 又別般措辦 得米三百餘斗 作錢數百金 分給各洞 逐年殖利 自官不問其出入 爲交遞時刷馬 各 種進上民賻 一切烟戶之役 皆從此辦出 詳定節目 使之永久無廢 又作洞會儀 使之春秋相會讀約而遵行之 禁民立木碑 先生 到官未數月 而惠澤所及 民皆感頌 木碑遍於境內 先生適往營衙歸路 命使拔取 百里之內 片木所造者 幾滿一馱 其一碑書 面曰 官自伐氷 政淸如氷 官自書籍 政可載籍 先生見而笑曰 一政一令之間 有小惠澤則立碑而頌之 若又有一毫差失 則必 12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19 將削而踣之 且頌德立碑 有玩弄官長之意 决非美習 以此意曉諭而禁絶之 論報童蒙李仁甲孝行于監司 本邑人李仁甲十八歲 有卓行 因士林呈書論報 請登聞 遍諭邑中勸農 條列規例 其一曰今當耕耘之時 無論男女 皆在田畒 男女之分 自古甚嚴 雖 在耘田之時 女在一邊 男在一邊 俾勿混雜 以致戱謔不敬之事 三月 遭子景曾喪 正宗大王二年戊戌 先生六十七歲 二月 受由還家 二月還家之時 已有决歸之意 而在家數朔之內 七度呈辭狀于監司 而監司終不許遞 故不得已有是行 七月 還官 八月 遣人祭黃朽淺墓 朽淺名宗海 墓在本邑 先生爲文以祭之 其文畧曰 某幼時於家塾書廚 讀先生之集 知先生之學 慕 嚮之夙矣 匪意濫膺朝命 來玆土 此實先生杖屨之鄕 而衣冠之藏 亦在于此 噫 山川依舊 人士猶昔 而恨無有如先生者出而 繼修先生之業 故士趨失正 人心日訛 某身爲邑宰 宜有轉移之權 而德薄才劣 年老志弊 徒切感古傷今之歎而已 十月 呈辭狀于監司 不許 十二月 蠲俸减今年結錢之半 정종대왕正宗大王 원년 정유(1777), 선생의 나이 66세. 1월에 방역소防役所를 설치하다. 본 고을에는 당초에 고마雇馬를 설치하는 규정이 없어서 신임 수령과 전임 수령이 교 대할 즈음에 매번 민결民結에서 수납收納하는 탓에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선생이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 다. 그런데 마침 호적戶籍 정리를 하는 식년式年을 당하였으므로, 아전의 무리들로 하여금 호적을 나누어서 베끼게 하여 서사 조書寫租 1백여 석을 얻고, 또 별도로 조처해서 쌀 3백여 말[斗]을 얻어서, 이를 돈으로 바꾸어 수백 금을 마련하였다. 그런 다 음 이를 각 동洞에 나누어 주어 해마다 이자를 받아들여 불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관가에서는 그 돈의 용처에 대해서 관여하 지 않으면서, 관원이 교체할 때의 쇄마가刷馬價와 각종 진상進上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금 등 일체의 백성들의 부역을 모두 이 것으로 판출辦出하게 하였는데,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폐기하지 말고 영구히 준행하게 하였다. 또 동회의 洞會儀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봄가을로 서로 모여 약조約條를 읽으면서 이를 준행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목비木碑를 세우는 것을 금하다. 선생이 고을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니,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면서 칭송하여 온 경내에 목비木碑가 세워졌다. 선생이 마침 관아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를 보고 는 사람들을 시켜서 그 목비를 뽑아 버리게 하였는데, 1백 리 안에 나무 조각을 깎아 만든 비가 거의 한 바리나 되었다. 어 떤 비에 쓰기를, 관가에서 스스로 얼음을 뜨니 정사의 맑기가 얼음과 같고, 관가에서 스스로 호적을 쓰니 정사를 역사책에 기록할 만하도다 라고 하였는데, 선생이 이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정사를 펴고 한 가지 명령을 냄에 있어 서 조금이라도 혜택이 있으면 비를 세워 칭송하니,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깎아 내고 쪼개 버 릴 것이다. 그리고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는 것은 관장官長을 가지고 노는 뜻이 있는 것으로, 결단코 아름다운 풍습이 아니 다 하고는, 이런 내용으로 효유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동몽童蒙 이인갑李仁甲의 효행孝行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다. 본 고을 사람 이인갑은 나이가 18세로 탁월한 행실이 있 었으므로, 사림士林에서 상서上書를 올림을 인하여 감사에게 보고해서 조정에 아뢰어 주기를 청한 것이다. 고을 안에 농사를 권장하는 뜻을 두루 유시하다. 규례規例를 조목별로 나열하였는데, 그 한 조목은 다음과 같다. 지금 농사지을 철을 당하여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데, 남녀의 구별은 예로부터 아주 엄한 법이다. 그러 니 아무리 들에서 일을 할 때일지라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따로 일하여, 한 곳에 뒤섞여 일하면서 희롱하고 불경不敬스러운 짓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3월에 아들 안경증安景曾의 상을 당하다. 안정복 생애와 행적 125

120 정종대왕正宗大王 2년 무술(1778), 선생의 나이 67세. 2월에 말미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다. 2월에 집으로 돌아갈 때 이미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결정하 였다. 이에 집에 있는 몇 달 사이에 일곱 차례나 감사에게 사장辭狀을 올렸으나, 감사가 끝내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 므로 부득이해서 고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7월에 고을로 돌아가다. 8월에 사람을 보내 황후천黃朽淺의 묘墓에 제사 지내다. 후천의 이름은 황종해黃宗海이며, 묘는 본 고을에 있다. 선생이 글을 지어 제사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가 어렸을 적에 가숙家塾의 책 상자 속에서 선생의 문집文集을 꺼 내어 읽고는 선생의 학문을 알게 되어 일찍부터 사모하고 공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외람되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이 고을에 부임하였는데, 이곳은 실로 선생께서 사셨던 곳이며, 장례를 지낸 곳도 역시 이곳입니다. 아, 산천은 옛날 그대로이고 인사人士 또한 예전과 같건만, 선생 같은 이가 다시 나와서 선생의 업業을 이어 닦는 사람이 없는 탓에, 선비들은 나아갈 방 향을 잃고 인심人心은 날로 그르게 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제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니 못된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덕은 부족하고 재주는 형편없으며 나이는 늙고 뜻은 꺾인 탓에, 한갓 지난날을 느꺼워하고 오늘날의 시속을 탄식만 할 뿐입니다. 10월에 감사에게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12월에 봉급을 줄여서 금년치의 결전結錢을 반으로 감하다. 68~69세(1779~1780, 정조3~4) * 대록지大鹿志 (木川邑誌) 저술 (50) 順菴集年譜 正宗大王三年己亥 先生六十八歲 二月 蠲俸賑邑中饑民 自二月至四月 所賑者幾二千餘人 撰大麓志 大麓木邑別號 先生以爲邑不可以無志 遂撰之 勸行鄕 約于民間 其下帖略曰 窃以爲政不法三代 皆苟而已 三代之民 非民自善 以其敎法明而勸導有術也 聖化已邈 民風日渝 遊 浪成習 奸猾爲羣 思所以整齊之 莫若行約束之政 此呂氏鄕約之所以作 而朱夫子增損適宜 爲後世必可行之良法也 然而古 人曰 治大國若烹小鮮 必也漸馴而擾之 使民樂趨 無卒遽生澁之患而後可矣 前日所頒洞會儀 簡易易行 以此漸摩團結 民心 稍定然後 始以呂氏本條 參酌興行 豈不美哉 無約束 不可以修檢 無賞罰 不可以飭勵 要在僉君子量宜行之而已 噫 民心雖 漓 而齊變可至於魯 世道雖降 而殷禮足徵於宋 則鄕約之行 實爲今日之急務矣 今聞東面有興行之洞 各面各洞 次次效習 排日興行 則禮俗之行 不日而成 其有補於我聖上化理之助 爲如何哉 更有一言可以仰復于僉君子者 朱夫子嘗言鄕約曰 因 前輩所以敎人善俗者而知自脩之目 此言尤當服膺也 窃願僉尊之體念也 古人每里設壇種樹 每春秋仲月上戊 戶收錢 爲飮食 之費 以祀社神 因行鄕飮禮及鄕射禮 其法具存於杜氏通典 此實必行無疑者云 復設司馬所 司馬所 卽邑中士子肄業之所也 自國初刱設而中廢 故乃自官助其財力 又立條約諭諸生 復設之 四月 棄官歸 六月 三呈辭狀于監司而始得遞 後辛丑 邑民立去思碑于邑東伏龜亭 正宗大王四年庚子 先生六十九歲 四月 行鄕射禮 洞中諸生好禮者 來請行射禮 先生參酌古今 作鄕射笏記以行之 12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21 정종대왕正宗大王 3년 기해(1779), 선생의 나이 68세. 2월에 봉급을 줄여서 고을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다. 2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진휼한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대록지大麓志 를 찬하다. 대록大麓은 목천木川 고을의 별칭이다. 선생이 고을에 지志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드디 어 찬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시행하게 하다. 이때 내린 첩문帖文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정치를 함 에 있어서 삼대三代 시대를 본받지 않는다면 구차스러울 뿐이다. 삼대의 백성이라고 하여 저절로 착해졌던 것이 아니고, 가르 치는 방법이 분명하고 권면하여 인도하는 데 방도가 있었기 때문에 착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의 교화敎化가 이미 아득해 짐에 백성들의 풍속이 날로 각박해져서 놀며 떠도는 것이 습속이 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이를 다잡 으려 한다면 약법約法을 정해 단속하는 정치를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다. 이것이 바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이 만들어 진 까닭인데, 주자朱子가 이를 적절히 손질하여 후세에 반드시 시행해야 할 좋은 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 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끓이듯 살살 다루어야 하는바, 반드시 점차적으로 길들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 이 나아가게 함으로써 갑작스럽게 서둘러서 거부감을 일으키는 걱정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전일에 반포한 동회의洞 會儀는 간단하고 쉬워서 쉽사리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통해서 차츰 단결하여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 비로소 여씨향약의 본 조항을 참작하여 일으켜 행하도록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약법을 정해 단속하지 않으면 가다듬고 검 속할 수 없으며, 상과 벌을 내리지 않으면 경계시키고 격려할 수 없으니, 요체는 여러 군자들이 적절히 헤아려서 시행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아, 민심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더라도 제齊나라가 변하면 노魯나라에 이를 수 있고, 세도世道가 아무 리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은殷나라의 예禮를 송宋나라에서 징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향약을 시행하는 것은 실로 오늘 날에 있어서 시급한 일이다. 지금 듣건대, 동면東面중에는 이를 일으켜 시행하는 동이 있다고 한다. 각 면과 각 동에서 이를 본받아서 점차적으로 일으켜 시행한다면, 예속禮俗의 시행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이 우리 성상의 치화 治化에 도움이 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다시 여러 군자들에게 한 마디 해줄 만한 말이 있다. 주자가 일찍이 향약에 대 하여 말하기를, 선배들이 사람들을 가르쳐서 풍속을 착하게 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수양할 덕목德目을 알게 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더욱더 가슴속에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 그러니 여러 군자들은 부디 깊이 유념하기 바란다. 옛 사람들이 마을마다 단壇을 쌓고 큰 나무를 심고는 매년 봄가을의 중월仲月의 첫 번째 무일戊日에 집집마다 돈을 거두어서 음식을 마련할 경비를 준비해서 사신社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였는데, 그 법이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에 갖추어져 있다. 이것은 실로 의심할 여지없이 반드시 시행하여야 할 일이다. 사마소司馬所를 다시 설치하다. 사마소는 바로 고을 안의 선비들이 학업을 닦는 곳으로, 국초에 창설되었다가 중도에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관에서 재력財力를 도우고 또 조약條約을 세워 여러 유생들에게 유시하여 다시 설치한 것이다. 4월에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다. 6월에 감사에게 세 번 사장辭狀을 올려서 비로소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 뒤 신 축년(1781)에 고을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읍의 동쪽에 있는 복귀정伏龜亭에 세웠다. 정종대왕正宗大王 4년 경자(1780), 선생의 나이 69세. 4월에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다. 동중洞中의 여러 유생들 가운데 예를 좋아하는 자들이 찾아와서 향사례를 행할 것을 청 하자, 선생이 고금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향사홀기鄕射笏記를 만들어서 행하였다. 70~71세(1779~1780, 정조5~6) * 가례집해家禮集解 저술 * 동사강목 을 내입內入하라는 교지가 내림 안정복 생애와 행적 127

122 (51) 順菴集年譜 正宗大王五年辛丑 先生七十歲 四月 家禮集解成 先生嘗患世之學者於家禮 杜撰文義 全昧禮宜 乃逐句註釋 間附先儒之說 名之曰家禮集解 自乙亥始草 未及脩正 至是與門人黃德壹考校而整寫之 六月 自上有東史內入之敎 因鄭承宣志儉納上焉 十二月 除敦寧府主簿 不赴 以敦寧代盡呈遞 正宗大王六年壬寅 先生七十一歲 八月 答權哲身書 書畧曰 自古禮有因革 非苟爲異 以其俗尙之漸變而然也 故曰君子行禮 不苟變俗 苟其大體存焉 則儀 節之稍變從俗勢也 今公以家禮之侑食在三獻之後 讀祝在初獻 大失聖人之本意爲言 愚以爲不然 古禮有尸 故未迎尸前 設 神席陳饌 讀祝以享神 旣迎尸後三獻 皆有侑食告飽之節 後世無尸 則其勢不得不讀祝於初獻之後 開元禮已然 無享尸之節 則其勢不得不侑食於三獻之後矣 公以是爲非 則其欲讀祝於降神之後 三獻皆侑 如享尸之節耶 古禮甚繁 家禮省而從簡 不 必以是爲非矣 灌焫之僭 溫公已言 而代以焚香酹酒 朱子亦曰 灌獻爇蕭 乃天子諸侯禮 丘氏曰 後世焚香祭神 雖非古禮 通 用已久 鬼神亦安之矣 按開元禮 大夫士以下祭禮 皆有熱爐炭蕭稷膟膋之文 則自唐已許用之 固無妨 且焚香酹酒 卽求神於 陰陽之義 其義精微 丘氏神亦安矣之說是矣 公之好古之意 誠爲欽歎 而第未知其能擺脫唐宋以後程朱子所行之禮而獨行之 否 此等禮 王者作 定爲一王之禮而後可也 然愚之意則細瑣節目 不足卹也 정종대왕正宗大王 5년 신축(1781), 선생의 나이 70세. 4월에 가례집해家禮集解 를 완성하다. 선생은 일찍이 세상의 학자들이 가례 에 대해서 글 뜻을 두찬杜撰하고 예禮의 마땅함을 전혀 모르는 것을 걱정스럽게 여겼다. 이에 구절에 따라 주석註釋을 달고 간간이 선유先儒들의 학설을 덧붙이고는 가례집해 라고 이름한 것이다. 을해년(1755, 영조 31)부터 초고草稿를 작성하기 시작하여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때 에 이르러서 문인인 황덕일黃德壹과 함께 교열하고 교정한 다음 정서하여 베낀 것이다. 6월에 상께서 동사강목東史綱目 을 안으로 들이라는 하교를 내리다. 승선承宣 정지검鄭志儉을 통해서 상에게 올렸다. 12월에 돈령부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돈령敦寧의 대代가 다하였다는 이유로 정장呈狀하여 체차된 것이다. 정종대왕正宗大王 6년 임인(1782), 선생의 나이 71세. 8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예禮는 시대에 따라서 변혁되어 왔는데, 이는 굳이 달리하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숭상하는 것이 점차 달라져서 그에 따라 변혁된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예를 행함에 있어서는 굳이 시속時俗과 다르게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고 하였으니, 예의 원칙만 그대로 서 있으면 사소한 형식쯤은 시속을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지금 공이 가례 의 유식侑食이 삼헌三獻 뒤에 있고 축 문祝文을 초헌初獻 때 읽게 한 것 은 크게 성인의 본뜻을 잃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고례古禮에 는 시동씨[尸]가 있었기 때문에 시동씨를 맞기 전에 귀신의 자리를 만들고 제물祭物을 차려 귀신이 흠향하도록 축문을 읽었으 며, 그 뒤 시동씨를 맞아 삼헌을 하면서 그 때마다 유식과 고포告飽하는 절차가 있었네. 그렇지만 후세에는 시동씨가 없으니 형편상 부득이해서 초헌 뒤에 축문을 읽어야 하고 개원례開元禮가 이미 그렇다. 시동씨를 대접하는 절차가 없으니 형편상 삼 헌 뒤에 유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런데 공은 이것을 가지고 틀렸다고 하니, 그렇다면 공은 강신降神 뒤에 축문을 읽고 시동씨를 대접하듯이 삼헌을 한 잔 올릴 적마다 유식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인가? 고례古禮가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가례 에 서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생략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꼭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리고 강신降神 술을 붓고 쑥 12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23 을 태우는 것이 참람한 짓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이미 말하여 분향하고 술 붓는 것으로 대신하였고, 주자 도 강신 술을 붓고 쑥을 태우는 것은 천자나 제후가 쓰는 예이다 고 하였으며, 구씨丘氏는 이르기를, 후세에 신을 제사하면 서 분향하는 것이 비록 고례古禮는 아니지만, 통용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귀신도 편안하게 여길 것이다 하였네. 살펴보건대 개원례開元禮를 보면 사대부 이하의 제례祭禮에는 모두 화로에 숯불을 피워 쑥, 기장, 쇠기름을 태운다는 기록이 있은즉, 이를 보면 당唐나라 때부터 이미 써도 무방하다고 허락하였던 듯하네. 그리고 분향하고 술 붓고 하는 것은 바로 귀신을 음陰과 양 陽에서 구하는 뜻이 있어 그 의리가 정미하네. 그러니 구씨의 귀신도 편안하게 여길 것이다 고 한 설이 옳네. 공의 고례를 좋 아하는 뜻에 대해서는 참으로 흠앙하는 바이나, 다만 당송唐宋 이후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행하였던 예까지 모두 무시해 버리고 공이 독단적으로 예를 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네. 이러한 예는 왕자王者가 나타나서 한 시대의 예를 다시 제 정한 다음에라야 가할 것이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세세한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굳이 따질 것이 없다고 여겨지네. 72~73세(1783~1784, 정조7~8) *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 장릉령長陵令, 헌릉령獻陵令 (52) 順菴集年譜 正宗大王七年癸卯 先生七十二歲 七月 復除敦寧主簿 八月 以特敎長陵令相換 謝恩 傳曰 向來點下於此窠 旋卽呈遞 意謂病故之適然 昨聞承宣言 以無敦寧之故 今雖復叨 亦 在應遞之科 此人自桂坊時 已知該洽 且有編摩之冊子 盖欲一番召見 敦寧主簿安鼎福 他司閑窠相換 又以特敎獻陵令相換 謝恩 以長陵路遠 特敎相換 謝恩 命留待入侍 時上將謁元陵 齋宿便殿矣 有一年少文官出來前導而入 至御前 上笑諭曰 間 濶八九年矣 䫉相勝於前日在桂坊時 先生起伏曰 邦慶實宗社民人之福 不勝慰賀之忱 而臣之老耄 較前愈加 且有奇疾 不堪 供職 是爲惶悶 上曰 今番其能供職乎 陵所穩便 家又不遠 實合於老人 先生曰 前後異數重疊 臣何敢以老病辭 且冊子內下 不可以携歸私室 故將直入齋所 較正以納而歸 少頃 上曰 獻陵令先退 先生遂出 盖上意以先生之老病 難於久對而使之先出 也 文官從後而出 前導如初 及外門而止 此盖異數也 入直齋所 校正東史綱目 先生所撰 命完營傳謄 而以其多有誤字 命先 生校正 至九月始畢 還爲內入 十一月呈辭狀于禮曹 至十二月 三度呈旬 禮曹啓請改差 自上有調理察任之敎 正宗大王八年甲辰 先生七十三歲 二月 入桂坊薦 自上有敎二品以上各薦二人 先生入判書李在協 參判吳大益薦中 五月 呈辭狀于禮曹 禮曹啓請改差 以特敎京司相換 爲儀賓都事 七月 除世子翊衛司翊贊 上御景慕宮 下冊封之令 因令差出春桂坊 先生亦被恩除 謝恩 卽呈辭狀于禮曹 不許 命孫喆重書遺戒送終錄 先生自甲戌丁憂以後 嘔血之症 每多危篤之時 己卯歲 命子景曾書遺戒 丙戌患大腫時 又有遺戒 至是又以年過七耋 有朝暮之慮 乃依二年所敎 更加增刪 以簡約爲主 八月甲申 參冊禮習儀 是日 上御重煕堂 諸臣賜饌畢 春桂坊各以職姓名進謁而退 上獨於先生慰諭之 先生對曰 老病實不 自堪 而今番邦慶 何敢言病 上笑曰 君不衰矣 恩諭鄭重 先生不勝感激 退以不衰二字扁其軒 九月 呈病遞歸 眉泉院儒等 來請任院貳 春院儒來請不許 至是始許之 안정복 생애와 행적 129

124 정종대왕 正 宗 大 王 7년 계묘(1783), 선생의 나이 72세. 7월에 다시 돈녕부 주부에 제수되다. 8월에 특별 전교를 내려 장릉영 長 陵 令 과 서로 바꿈에 사은하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이 자리에 낙점하였을 때 곧바로 정장 呈 狀 하여 체차되었던 것은 신병이 있어서 그러하였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제 승선 承 宣 의 말을 들으니, 돈녕 敦 寧 의 자격이 없어서였다고 하는바, 지금 비록 다시 그 자리에 제수하더라도 역시 응당 체차되어야 하는 데 속할 것이 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계방 桂 坊 에 있을 적부터 잘 알고 있으며, 또 서책을 편찬한 것도 있으니, 한 번 불러 보고 싶다. 돈녕부 주부 안정복을 다른 관사의 한가한 자리와 서로 바꾸라. 또 특별 전교를 내려 헌릉영 獻 陵 令 과 서로 바꿈에 사은하다. 장릉은 거리가 멀어서 특별히 전교를 내려 바꾸게 한 것 이다. 사은을 하니 머물러 기다리고 있다가 입시 入 侍 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상이 장차 원릉 元 陵 에 알현하고자 편전 便 殿 에서 재숙 齋 宿 하고 있었는데, 어떤 한 나이 어린 문관 文 官 이 나와 앞에서 인도하여 들어갔다. 어전 御 前 에 이르자, 상이 웃으면서 하 유하기를, 그 동안 만나보지 못한 지 8, 9년이 되는데 얼굴이 전에 계방에 있을 때보다 더 좋아졌다 하니, 선생이 일어났다 엎드려 아뢰기를, 국가의 경사는 실로 종사 宗 社 와 백성들의 복인바, 축하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의 늙음 은 전에 비해 더욱 심한데다 또 이상한 병마저 있어서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는바, 이 때문에 황공스럽고 걱정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능히 직임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 능소 陵 所 의 일은 편하고 또 집에서도 멀지 않으니, 노인이 있기에는 참으로 합당한 자리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앞뒤로 특별한 은혜를 거듭 내리시니, 신이 어찌 감히 늙고 병들었 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에서 내린 책자는 개인집으로 가져갈 수 없으므로 장차 곧장 재소 齋 所 로 가지 고 들어가서 교정 較 正 한 다음 안으로 들이고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헌릉 영은 먼저 물러가라 하니, 선생이 드디어 나왔는데, 이는 대개 상의 뜻은 선생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오랫동안 대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겨 선 생으로 하여금 먼저 나가게 한 것이다. 문관이 뒤따라 나와 앞에서 인도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서 외문 外 門 까지 인도하였는 데, 이는 대개 특별한 은혜이다. 재소에 입직하면서 동사강목 을 교정하다. 선생이 찬한 책으로, 전주 全 州 감영 監 營 에 명하여 등사해서 전하게 하였는 데, 오자 誤 字 가 많이 있었으므로 선생에게 명해 교정하게 한 것이다. 9월에 이르러서야 작업을 마쳐서 도로 안으로 들였다. 11월에 예조에 사장 辭 狀 을 올리다. 12월에 이르러서 삼도 정순 三 度 呈 旬 하니, 예조에서 개차 改 差 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상 께서 병을 조리 하면서 직임을 살피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종대왕 正 宗 大 王 8년 갑진(1784), 선생의 나이 73세. 2월에 계방 桂 坊 의 천거에 뽑히다. 상께서 2품관 이상에게 각각 2명씩을 천거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선생은 판서 이재협 李 在 協 과 참판 오대익 吳 大 益 의 천장 薦 狀 안에 들었다. 5월에 예조에 사장을 올리니, 예조에서 개차하기를 계청하였는데, 특별 전교를 내려 서울에 있는 관사와 서로 바꾸게 함에 의빈부 도사가 되다. 7월에 세자익위사 익찬에 제수되다. 상이 경모궁 景 慕 宮 에 임어하여 책봉 冊 封 하라는 명을 내리고, 인하여 춘방 春 坊 과 계 방 桂 坊 의 관원을 차출하게 하였는데, 선생 역시 은혜로운 제수를 받았다. 사은한 뒤 곧바로 예조에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손철중 孫 喆 重 에게 명하여 유계 遺 戒 와 송종록 送 終 錄 을 쓰게 하다. 선생은 갑술년(1754)에 상을 당한 이후로 피를 토하는 증세가 있어서 위독할 때가 많았다. 기묘년(1759)에 아들 안경증에게 명해 유계를 쓰게 하였으며, 병술년(1766)에 심하게 종기 를 앓을 때에도 유계를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또 나이가 칠순이 넘어 언제 죽을지 몰라 걱정되었으므로 기묘년과 병술년 에 말씀하신 데 의거하여 이를 다시 수정하게 한 것인데, 간략하게 장사 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13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25 8월 갑신일에 책례冊禮의 습의習儀에 참가하다. 이날 상이 중희당重熙堂에 임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하사하였 다. 이를 마치고 춘방과 계방의 관원들이 각각 자신의 직책과 성명을 진달하고 물러나왔는데, 상이 유독 선생에 대해서는 위 로하면서 유시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늙어 병든 몸이라 실로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이번의 국가 경사에 대해서는 어찌 감 히 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쇠하지 않았다[不衰] 하면서 정중하게 유시하였다. 이에 선생은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물러 나온 다음 불쇠不衰 두 글자로써 헌軒의 이름을 삼았다. 9월에 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차됨에 시골로 돌아가다. 미천서원眉泉書院의 유생들이 서원의 부원장을 맡아 달라고 청하다. 봄에 서원의 유생들이 와서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허락한 것이다. 74~75세(1785~1786, 정조9~10) *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완성 (53) 順菴集年譜 正宗大王九年乙巳 先生七十四歲 二月 撰邵南尹公行狀 三月 作天學考 天學問答 天主之學 出自西洋 流入中國 已多年矣 而其書又自中國至于我東 年少後進 多入其中 先生憂 之 叙其來歷之所自而作天學考 辨其學術之非正 而作天學問答以示之 凡累千言 其與人書畧曰 西士之言 雖張皇辨博 而都是釋氏之粗迹 反不及於禪家精微之論 寧從達摩 慧能識心見性之言 豈可爲西 士晝夜祈懇 無異巫祝之擧乎 爲此而果免地獄 志士必不爲也 况爲吾儒之學者乎 是爲聖門之怪魅 儒林之蟊賊 亟黜之可也 夫道家之尊老君 釋氏之尊釋迦 西士之尊耶蘇 其義一也 西士之學後出 而欲高於二氏 托言於無上之天主 使諸家莫敢誰何 挾天子令諸侯之意 其爲計亦巧矣 余略觀其書 瘡疣百出 書中言論妄誕 詆斥聖賢之意 不一而足 以爲皆不識眞道之所在 何 如是無忌憚也 爲吾儒者 不能明辨而痛斥之 乃反斂袵而束手焉 未知有何實然的知之理而然乎 盖其人固多異類 聦明才辯 技藝法術 非中國之所及者 故人多屈伏於此 幷與其學而信之云 豈其然哉 其學之荒誕靈怪 實與二氏無異 今之儒者斥二氏 爲異端 而反以此爲眞學 人心之惑溺 一至於此 此正世道汚隆 士學邪正之一大機也 噫 天下之生久矣 氣化嬗運 醇漓樸散 治日少而亂日多 君子道消 小人道長 正學泯而邪學張 世愈降而漸趨於下 豈不可悶 西士耶蘇之名 卽捄世之義 而所尊者天 主 勸善懲惡而有天堂地獄之說 與二氏同 其誦言誘導者 天主也天堂也地獄也 大義只此而已 余依其說而解之曰 彼曰有天 主 吾亦曰有天主 天主卽上帝也 詩書之言上帝 聖人之言天 明有其文 則豈無其實而假托以言耶 彼曰有天堂 吾亦曰有天堂 詩云文王陟降 在帝左右 又曰三后在天 書曰多先哲王在天 旣有上帝 則豈無上帝所居之位乎 彼曰有地獄 吾乃曰地獄之刑 異於聖王制刑之義 甚可疑也 聖王之刑 制之於未然 何如其仁也 地獄之刑 生時任人爲惡 死後追論靈魂 不幾於罔民乎 今 見其書 所謂地獄之刑 殆非人世可比 豈以上帝至仁之心 何如是慘毒乎 且言人之靈魂 終古不散 受善惡之報 若如其說 則 寅生以後 人類至多 地獄天堂 雖云閒曠 何處容其靈魂乎 以人道推之 自古及今 人皆長生不死 則人數至繁 其能容於此世 乎 嘗見佛書 一鉢上容六十萬菩薩 其果如是耶 是其說之妄也 然姑因其說而不斥之 曰旣有賞善之天堂 則亦有罰惡之地獄 其或然矣 然天堂地獄 誰能見之乎 至若傳記之所存 氓俗之所傳 終歸荒誕 闕之可也 晉書 王坦之與僧竺法師 爲名理之交 嘗疑天堂地獄之說 約以先死者來報 一日竺師來見曰 我已歸化 地獄之說不然 而但當勤脩道德 以躋上昇耳 此亦以地獄爲 無也 然而此不足說也 其有無 不必多辨 但聖人不語怪力亂神 怪是希有之事 神是無形之物 指希有無形而語之不已 則其弊 何所至底耶 是以聖人不語也 以吾儒事上帝之道言之 上帝降衷之性 天命之性 皆禀於天而自有者也 詩曰 上帝臨汝 無貳爾 心 曰對越上帝 曰畏天命 無非吾儒戒懼謹獨 主敬涵養之工 尊事上帝之道 豈過於是 而不待西士而更明也 所可痛者 西士 以上帝爲私主 而謂中國人不知也 必也一日五拜天 七日一齋素 晝夜祈懇 求免罪過而後 可爲事天之實事 此何異於佛家懺 안정복 생애와 행적 131

126 悔之擧乎 吾儒之學 光明正大 如天地之高濶 日月之照耀 無一毫隱曲怳惚難見之事 何不爲此 而反以彼爲眞道之所在耶 其 學曰此世現世也 現世之禍福暫耳 豈若爲後世天堂地獄之禍福 萬世之受苦樂乎 愚於此亦有言曰 天主之造此三界 有上中下 之分 上界有上界之事 中下界各有其事 所謂上界下界之事 非人之所可測量者也 以中界人事言之 爲人之道 不過修己治人 而已 脩己治人之事 俱在方策 若依而行之 則自有可行之道 所謂西學捄世之術 豈過於是哉 名雖救世 其實專爲一己之私 無異道佛之敎也 其所謂救世 與聖人明德新民之功 公私大小之別 爲如何哉 其流之弊 又將指無爲有 指虛爲實 擧一世而歸 幻妄之域 人心煽動 後世所謂蓮社彌勒之徒 必將接跡而起 爲妖賊之嚆矢而亂未有已 作俑之罪 其必有歸矣 吾人旣生此現 世 則當從現世之事 求經訓之所敎而行之而已 天堂地獄 何關於我哉 設有人爲一網打盡之計 而受敗身汚名之辱 則到此之 時 天主其能救之乎 窃恐天堂之樂 未及享而世禍來逼矣 可不愼哉 可不懼哉 作有感詩一律 其詩曰 道術派分各自逃 西來 一學又橫豪 風吹亂葉紛紛去 月照孤株孑孑高 丹竈烟消無可奈 白鬚力盡但嚎咷 不如且進杯中物 爲聖爲狂任爾曺 六月 作爲學箴二首 揭于壁 其箴曰 爲學之工 窮經居敬 經通萬理 敬貫動靜 夙夜孜孜 惟德之秉 須臾莫忽v隨事警省 又曰 爲學之工 惟敬惟勤 勝怠警惰 惕厲朝曛 一或不省v聖狂斯分 老更篤信 事我天君 詩經名物考成 於詩經所載鳥獸草木名物 之中v正其差謬 辨其疑晦以成之 十二月 書六箴于小屛 又作座右銘 以備觀省 六箴則先生丙戌歲所作 其座右銘云 日欲曉矣 爾寢斯覺 朝暾東明 上帝下 矚 惟此一心 易以失中 庶幾惕厲 無椓天衷[右朝] 日已午矣 爾應多歧 事有義利 心有公私 操心處事 必審其幾 如或差忽 過將誰歸[右晝] 日之夕矣 爾事向歇 處心應物 能不有忽 如有差失 悚然省念 若其無違 益加收斂[右暮] 日將昏矣 爾心漸 怠 不欺暗室 古人所貴 敬貫動靜 誠則能一 貞則復元 又有明日[右夜] 正宗大王十年丙午 先生七十五歲 五月 建齋舍于德谷洞中 先生十二代以下先壠 皆在德谷 先生爲置祭田 酌定祭式 已祧之位則定以十月朔朝 未祧之位則 定以春秋兩節 展掃塋壠後 設位行祀于齋中 以及於諸壠無后之神 皆有祝文 平時則爲後進講學之所 故亦名麗澤齋 因定月 講之規 作德社學約 聞王世子喪 設位行禮 十七日成服 二十八日除服 有服制私議 閏月 與蔡樊菴書 蔡公名濟恭 樊菴對儕友 數稱先生斥天學 老而益壯 又言吾撰其不衰軒記 備言吾道不衰之意 而恐爲少 輩所指目云 先生與之書 畧曰 前歲嶺儒黃君泰煕傳斥天學老益壯之敎 今春洪上舍錫疇又傳軒記 推去之諭不衰二字 台監何 以聞知耶 此果出於聖上之寵褒 獨於老臣有慰問之諭 褒以二字 及退而同僚齊賀 書扁額而送之 歸後思之 顧此衰癃殘質 更 無餘地 聖諭如此 終非實事 旋念有可言者 故妄有拙句曰 自歎筋力逐年衰 天語丁寧諭不衰 不是臣身能不衰 要令志氣不隨 衰 今之所自勵者 唯在志氣 而志氣亦衰 奈何 幸乞次示 以生蓽門之光色也 近來吾黨小子才氣自許者 多歸新學 靡然從之 寧不寒心 不忍目覩其陷溺之狀 畧施規箴 出於赤心 反以禍心言之 至有不敢絶而敢絶者 勇則勇矣 亦一世變 當此黨議橫流 之時 安知無傍伺而下石者乎 其勢必亡而後已 今則任之 而硯匣書磨兜堅三字 以自警耳 聞台監以記中有斥天學之語 恐爲 少輩之指目云 果然否 非吾二人斥之 有誰爲之耶 風霜震剝之餘 恐又生一敵而然歟 大無是也 大無是也 七月 作東銘圖 因門人丁志永講心經 讀到東銘 先生作圖以示之 因揭之于壁 九月 撰已麓黃公行狀 黃公名汝耈 仁祖丙子亂 黃公倡義江都 城陷 闔門同殉 贈持平 母沈氏妻許氏及二姊並㫌閭 世稱 一門五節 정종대왕正宗大王 9년 을사(1785), 선생의 나이 74세. 2월에 소남 윤동규의 행장行狀을 찬하다. 3월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짓다. 천주학天主學이 서양西洋에서 나와 중국으로 흘러든 지가 이미 여러 해 가 되었으며, 또 그에 관한 서적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로 전해짐에 나이 어린 후배들이 그 속으로 많이 빠져드니, 선생이 이를 걱정스럽게 여겼다. 이에 천주학의 내력을 서술하여 천학고를 짓고, 천주학의 시비是非를 변석하여 천학문답을 지어 보 13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27 여 주었는데, 모두 몇 천 마디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양 사람들이 제아무리 장황하게 말하여도, 이는 모두가 석씨 釋 氏 가 밟고 지나간 조잡한 발자취로서, 논리의 정미함에 있어서는 도리어 석씨 쪽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네. 그러니 차라리 달마 達 摩 나 혜능 慧 能 의 식심 識 心 이니 견성 見 性 이니 하는 말 을 따를지언정, 어찌 밤낮없이 간절히 기도하기를 무당이나 다름없이 하는 서양 사람들이 하는 짓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그 렇게 해서 과연 지옥 地 獄 가는 것을 면한다고 하더라도 뜻이 있는 선비는 하지 않을 것이네. 그런데 더구나 우리 유학 儒 學 을 하는 사람들이겠는가. 이는 성문 聖 門 의 도깨비요 유림 儒 林 의 해충들로서 하루 속히 쫓아내야 할 것이네. 무릇 도가 道 家 에서 노 군 老 君 을 존경하는 것이나, 석씨들이 석가 釋 迦 를 존경하는 것이나, 서양 사람들이 예수[ 耶 蘇 ]를 존경하는 것이나, 그 뜻은 다 한 가지이네. 서양 사람들의 학문이 뒤에 나왔으면서도 도가나 석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무상 無 上 의 천주 天 主 를 내세 웠네. 그리하여 제가 諸 家 들로 하여금 아무 소리 못 하게 하면서 천자 天 子 를 끼고 제후 諸 侯 를 호령하듯이 하고 있으니, 그 계책 이 역시 교묘하기도 하네. 내가 그들의 책을 대충 보았더니 흠집투성이라서 책 안에 있는 말들이 망령스럽고 허탄스러워 성 현을 헐뜯은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참된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꺼림이 없단 말인가. 그런데도 우리 유자들이 이를 분명하게 변석하여 배척하지 못하고, 도리어 옷깃을 여 민 채 손을 묶고 앉아 있으니, 모르겠거니와 거기에 무슨 확실하고 분명한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대개 서양 사람들은 실로 이류 異 類 가 많아서 총명과 재변, 기예와 법술에 있어서 중국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거기에 굴 복되어 그들의 학문까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들의 학설이 황당무계하고 괴상망측하기로는 실 로 저 노씨와 석씨 이가 二 家 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네. 그런데 지금의 유자들은 노씨와 석씨는 이단 異 端 으로 배척하면서도 도 리어 이쪽은 참된 학문이라고 하고 있네.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되어 빠져드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바로 세 도 世 道 의 부침 浮 沈 과 학문의 사정 邪 正 이 나뉘어지는 하나의 큰 전기라고 하겠네. 아, 이 세상에 인류가 살아온 지 이미 오래이 네. 그런데 기화 氣 化 의 운행에 따라 풍속이 각박해지고 인심이 야박해져서, 태평한 날은 적고 혼란한 날은 많으며, 군자의 도 는 소멸하고 소인의 도가 자라며, 정학 正 學 은 꺼져 가고 사설 邪 說 이 판을 치네. 그리하여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못 된 데로만 내려가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서양의 예수[ 耶 蘇 ]란 이름은 바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인데, 높이 떠받드는 것은 천주이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함에 있어서 천당과 지옥의 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저 노씨나 석씨와 같네. 그들이 사람들을 꾀어내기 위해 하는 말은 기껏해야 천주, 천당, 지옥으로, 큰 뜻은 단지 이것일 뿐이네. 이제 내가 그들의 말에 따 라 해명해 보겠네. 저들이 천주가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도 천주가 있네. 천주는 상제 上 帝 를 말하는 것일진대, 시경, 서경 에서 상제를 말하였네. 성인 聖 人 이 하늘을 말한 것은 분명한 문 文 이 있으니, 어찌 실제로 없는 것을 가상해서 말한 것이겠는 가. 그들이 천당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에게도 천당이 있네. 시경 에 이르기를, 문왕이 오르내리며 상제 곁에 계신다네[ 文 王 陟 降 在 帝 左 右 ] 라고 하였고, 또 삼후가 하늘에 계시는도 다[ 三 后 在 天 ] 라고 하였으며, 서경 에도 이르기를, 많은 선대의 어진 임금들이 하늘에 계신다[ 多 先 哲 王 在 天 ] 라고 하였네. 이미 상제가 계신 바에야 어찌 상제가 사는 곳이 없겠는가. 또 저들이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지옥의 형벌이 성왕 聖 王 이 형벌을 만든 뜻과는 달라 몹시 의심이 가네. 성왕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형벌을 두었으니, 그 얼마나 인자한가. 그런데 저 지옥의 형벌이란 것은, 살았을 때는 무슨 짓을 하든지 내버려 두었다가 죽은 뒤에야 그 영혼에게 죄를 소급해서 따지니, 이는 백성들을 죄망 罪 網 으로 그물질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지금 그들의 책을 보건대, 이른바 지옥의 형벌이란 것이 자못 인간 세상의 형벌과는 비교가 안 되네. 지극히 인자하여야 할 상제의 마음이 어쩌면 그리도 참혹하고 모질단 말인가. 그들은 또 사람들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면서 선악을 행한 데 따른 보복을 받는다. 고 하는데,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이래로 그 수가 아주 많은데, 지옥과 천당이 제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 영혼들을 어디에 수용할 것인 가. 인간 세상을 두고 미루어 말하더라도,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사람들의 숫자가 아주 많을 것인데, 이 세상에 다 수용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불가의 서적을 보니 바리[ 鉢 ] 하나 위에 보살 60만을 수용한다 고 하 안정복 생애와 행적 133

128 였는데, 그것이 과연 이와 같다는 것인가. 이것은 물론 망녕된 말이네. 그러나 굳이 배척할 것 없이 그들의 말에 따라 말해 보겠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는 천당이 있으면 역시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지옥도 있다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네. 그 러나 천당과 지옥을 그 누가 보았는가. 전기 傳 記 에 남아 있다거나 민속 民 俗 에 전해지는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이는 결국 황당무계한 말이니 논외로 쳐야 할 것이네. 진서 晉 書 에 보면 왕탄지 王 坦 之 가 승려 축법사 竺 法 師 와 학문을 가지고 사귀는 친구로 지냈는데, 일찍이 천당과 지 옥에 대한 의심이 있었네. 이에 먼저 죽은 자가 와서 알려 주기로 서로 약속하였는데, 하루는 축법사가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이미 죽었다. 지옥에 관한 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 다만 부지런히 도덕을 닦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네. 그렇다면 이는 지옥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네. 지옥이 있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많 은 말이 필요 없고 단지 성인은 괴력난신 怪 力 亂 神 을 말하지 않는다 고 한 말만 있으면 되네. 괴 怪 란 드물게 있는 일을 말하고, 신 神 이란 무형의 물체를 말한 것으로, 드물게 있는 일이나 무형의 물체에 대해 계속 말하게 되면 그 폐단이 장차 어디에 이 르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이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네. 우리 유자 儒 者 들이 상제를 섬기는 도리로써 말하면, 상제가 내려주신 성품과 하늘이 명하신 성품은 모두 하늘에서 품부 받은 것으로서, 나에게 고유한 것이네. 시경 에 이르기를, 상제 가 네 곁에 계시니 네 마음에 의심을 두지 말라[ 上 帝 臨 汝 無 貳 爾 心 ] 하였고, 또 상제를 대한 듯이 하라[ 對 越 上 帝 ] 고 하였고, 또 천명을 두려워하라[ 畏 天 命 ] 고 하였는바, 이 모두가 우리 유자들의 계구 戒 懼, 근독 謹 獨, 주경 主 敬, 함양 涵 養 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 네. 상제를 높이 받드는 도가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이는 서양 사람들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명한 일이네. 가 슴 아픈 일은 서양 사람들이 상제를 자기들의 사주 私 主 로 생각하면서 중국 사람들은 상제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네. 그들은 반 드시 하루에 다섯 번 하늘에 예배하고 7일에 한 번 재소 齋 素 하고, 밤낮으로 기도하여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하늘을 섬기는 실제적인 일이 되니, 이는 불가 佛 家 에서 참회 懺 悔 하는 일과 다를 것이 뭐가 있는가. 우리 유가 의 학문은 광명정대하기가 마치 높고 넓은 천지 天 地 와 같고, 천지를 비추는 해나 달과 같아서 털끝만큼도 가리워져 있거나 보 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이 전혀 없네. 그런데 어찌하여 이 길을 버려두고 도리어 참된 길이 저쪽에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들의 학설에 말하기를, 이 세상은 현세인데, 현세의 화복 禍 福 은 잠시일 뿐이다. 어찌 만세 萬 世 를 두고 고락 苦 樂 을 받는 후세 後 世 의 천당과 지옥의 화복에 비하겠는가 라고 하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네. 천주가 이 세상에 상계 上 界, 중 계 中 界, 하계 下 界 의 삼계 三 界 를 만들어 상계에는 상계대로의 일이 있고, 중계와 하계에도 각각 일이 따로 있네. 이른바 상계와 하계의 일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중계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로 말하면, 인간 노릇을 하는 길은 수기 修 己 와 치인 治 人 그것뿐이고, 수기와 치인하는 일은 모두 책에 있네. 만약 그에 의지하여 행한다면 자연 행할 만한 도리가 있을 것이네. 그러니 이른바 서학에서 말하는 세상을 구제한다는 술법이 어찌 이것보다 낫겠는가. 그들은 명분은 비록 세상을 구 원한다고 하지만, 속 내용은 오로지 개인의 사욕을 위한 것으로, 도교나 불교와 다를 것이 없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을 구원 한다는 것은 성인의 명덕 明 德 이나 신민 新 民 의 일과는 공사 公 私, 대소 大 小 의 차이가 과연 어떠한가. 그 말류의 폐단은 장차 없 는 것을 있다고 하고 허한 것을 실하다고 속여 온 세상을 환망 幻 妄 의 영역으로 몰아넣고 말아 인심을 선동할 것이네. 그리하 여 후세에는 이른바 연사 蓮 社 같은 무리들이나 미륵불 彌 勒 佛 을 사랑하는 자들이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요적 妖 賊 의 효 시 嚆 矢 가 되어 난리가 그칠 날이 없게 될 것인바, 못된 짓을 창안한 죄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네. 우리가 이미 이 현세에 태 어났으면 당연히 현세의 일을 하면서 경전에서 가르친 대로 따라 행하면 그만이네. 천당과 지옥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 는가. 설령 어떤 사람이 이들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워서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경우, 그때 가서 천주가 능히 구 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천당의 즐거움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이 세상의 화가 먼저 이를 것이네. 그러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감시 有 感 詩 한 수를 짓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학술의 파 나눠짐에 각각 따로 가는데 서양서 온 한 학파가 기세 또 부리누나. 낙엽 위에 바람 불면 뿔뿔이 흩날리고, 나무에 달 비치면 우뚝하게 더 높다네. 약단지에 불 꺼지니 어찌할 도리 있나. 늙어 힘 다했으니 울면서 소리칠 뿐 차라리 다 관두고 술 마심만 못하거니 성인 되건 광인 되건 그들에게 내맡긴 채. 13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29 6월에 위학잠 爲 學 箴 두 수를 지어 벽에 걸다. 그 잠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하는 공부는 경전 연구와 경에 거하는 것. 경전은 모든 이치 달통하고, 공경은 동정을 꿰뚫는도다. 아침저녁 부지런히 힘써 오직 덕을 잡으며 잠시라도 소홀히 말아 일 에 따라 살피라. 또 다음과 같다. 학문을 하는 공부는 오직 공경과 부지런함이니 게으름과 나태함 이기고 깨쳐서 아침저녁 으로 가다듬으라. 한 번이라도 살피지 못하면 성인과 광인이 여기에서 나뉘나니 늙어서는 더욱더 돈독히 믿어 나의 천군을 섬길지어다. 시경명물고 詩 經 名 物 考 를 완성하다. 시경 에 실려 있는 조수 鳥 獸, 초목 草 木, 물품 物 品 의 이름 가운데 착오가 난 것을 바로잡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변석하여 완성하였다. 12월에 육잠 六 箴 을 작은 병풍에 쓰고, 또 좌우명 座 右 銘 을 지어서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다. 육잠은 선생이 병술년 (1766)에 지은 것이다.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 날이 밝으려 하면 네가 잠에서 깨어난다. 아침 해가 동녘을 비추고 상제가 위 에서 내려다본다. 오직 이 한 마음은 중도를 잃기 쉽나니 바라건대 조심하여 본연의 양심을 잃지 말라. 이상은 조명 朝 銘 이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으니 너는 응당 일이 많으리라. 일에는 의리가 있고 마음에는 공사가 있나니 조심해서 처사하되 반드시 기미를 살피라. 혹시라도 차질이 생기면 허물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나. 이상은 주명 晝 銘 이다. 해가 이미 저물어가니 너의 일도 그치리라. 마음가짐과 남 대함에 소홀함은 없었는가. 혹시라도 잘못하였으면 두려워하 고 반성하며 어긋남이 없었다면 더욱더 수렴하라. 이상은 모명 暮 銘 이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네 맘 점점 게을러지리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않음을 옛 사람이 귀하게 여겼나니 공경은 동정을 관통하는 것이라. 성실하면 전일하게 되고 곧으면 본원을 회복하여 다시 내일이 있는 법이다. 이상은 야명 夜 銘 이다. 정종대왕 正 宗 大 王 10년 병오(1786), 선생의 나이 75세. 5월에 덕곡동 德 谷 洞 안에 재사 齋 舍 를 세우다. 선생의 12대조 이하의 선롱 先 壟 이 모두 덕곡에 있었다. 선생이 제전 祭 田 을 두고 제식 祭 式 을 정하였는데, 조위 祧 位 에는 10월 초하룻날 아침에, 봉사위 奉 祀 位 는 봄에는 한식 寒 食 에, 가을에는 추석 秋 夕 에 제 사를 지내되, 묘역 墓 域 을 청소한 뒤 신위 神 位 를 설치하고 재 齋 안에서 제사 지냈으며, 후사 後 嗣 가 없는 신위까지도 모두 축문 祝 文 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이곳을 후배들이 강학 講 學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므로 역시 이름을 이택재 麗 澤 齋 라고 하였으며, 이 를 인해서 월강 月 講 에 대한 규정을 정하였다. 덕사 德 社 의 학약 學 約 을 만들다. 왕세자의 상 喪 을 듣고 위 位 를 설치하고서 예를 행하다. 17일에 성복 成 服 하고서 28일에 제복 除 服 하였는데, 복제 服 制 에 대 한 사의 私 議 가 있다. 윤달에 채번암 蔡 樊 菴 에게 편지를 보내다. 채공의 이름은 제공 濟 恭 이다. 채 번암이 여러 친구들에게 선생이 천주학을 배 척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고 자주 칭찬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찬한 불쇠헌기 不 衰 軒 記 에서 오도 吾 道 가 쇠해지지 않았다는 뜻을 갖추어 말하였으니, 아마도 연소배들의 지목을 받을까 염려스럽다 고 하였는데, 선생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해에 영남 嶺 南 의 유생 황태희 黃 泰 熙 가 와서 천주학을 배척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장하더라 고 하신 말씀을 전하 고, 금년 봄에는 상사 上 舍 홍석주 洪 錫 疇 가 와서 또 불쇠헌기를 찾아가라 고 하신 말씀을 전하였는데, 불쇠 不 衰 두 글자에 대 하여 대감께서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것은 과연 성상께서 총애하고 포장 褒 奬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날 유독 이 늙은 신하에 대해서만 위로해 주시면서 불쇠 두 글자를 내려 포장하시었습니다. 이에 물러나옴에 미쳐서는 동료들이 모두 축하하였고 편액 扁 額 에 써서 보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돌아온 뒤에 생각하니, 이 늙고 병든 약한 몸이 다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성상께서 이렇게 유시하시었으니, 이는 실상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 말할 만한 것이 있기에 망 녕되이 졸렬한 시구를 하나 읊었는데, 그 시에, 갈수록 근력 쇠해 나 자신은 한탄인데 성상께선 쇠하지 않았다고 하시네. 신 의 몸이 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기마저 나이 따라 쇠하지 말라는 게지. 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저 자신을 가다듬는 것 안정복 생애와 행적 135

130 은 오직 지기志氣에 있는데, 지기 역시 쇠해지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의 시를 차운하시어 저의 초라한 문이 빛나게 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근래에 와서 평소에 재기才氣를 자부하던 우리쪽 나이 어린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 쪽으로 많이 쏠려 너도나도 그 쪽으로 휩쓸리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쪽으로 빠져드는 꼴을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하겠기에 대충 경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는데도 도리어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에서 그랬다고들 하면서, 심지어는 저와는 절교하지 못할 사이인데도 절교하는 자까지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용감하기는 용감합니다만, 이 역시 세상 변고의 하나인바, 지금처럼 당의黨議가 횡행하는 때를 당하여 곁에서 엿보고 있다가 돌을 던지는 자가 없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 형세가 반드시 망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일을 되는 대로 내맡긴 채 벼룻집에 말을 삼가 라는 뜻으로 마두견磨兜堅 세 글자를 새겨두고서 저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듣건대 대감께서 지은 불쇠헌기不衰軒記 가 운데 천주학을 배척한 말이 있어서 연소배들의 지목을 받을까 염려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우리 두 사람이 천주 학을 배척하지 않으면 그 누가 배척하겠습니까. 풍상을 모질게 겪은 나머지 또 하나의 적이 생길까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까?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7월에 동명도東銘圖를 만들다. 문인門人 정지영丁志永에게 심경 을 강하다가 동명東銘 부분을 읽음을 인하여 선생이 그 림을 그려서 보여 주고는, 이어 벽에 걸어 두었다. 9월에 파록巴麓 황공黃公의 행장을 찬하다. 황공의 이름은 여구汝耉이다. 인조조仁祖朝 병자년(1636, 인조 14)의 난리에 황 공이 강도江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성이 함락되자 온 가족이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심씨沈氏 와 부인 허씨許氏 및 두 여동생이 모두 정려旌閭되니, 세상에서는 한 집안의 다섯 절의節義 라고 칭하였다. 77세(1787, 정조9) * 성호사설 을 비난한 서조수의 견해에 반박함 (54) 順菴集年譜 正宗大王十二年戊申 先生七十七歲 六月 答黃生德壹書 時有徐祖修者作反僿說 多有毁星湖先生之語 德壹書告于先生 先生答書略曰 示諭多少 出於尊師衛 道之盛意 何等欽賞 然而彗日之虹 障天之霧 何損於明且大乎 孔北海曰 今之少年喜謗前輩 此等惡習 從古已然 論語雜記 聖人言行 至爲精約 而使饒舌者言之 必不無妄加雌黃處矣 某人之誚毁 專在於僿說云 執此說而斷人之平生 厚加誣辱則妄 矣 先生以明睿之姿 加勤篤之工 所尊者孔孟程朱 所斥者異端襍學 經義多發未發之義 異學必摘其眞贓而無所逃 某人斥之 以西學云 不覺一笑 余於天學考已辨之 玆不復言 정종대왕正宗大王 12년 무신(1788), 선생의 나이 77세. 6월에 황덕일黃德壹의 편지에 답하였다. 이때 서조수徐祖修란 자가 반사설反僿說을 지어 성호 선생의 설을 많이 헐뜯으 니, 황덕일이 선생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선생이 답한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보내 준 편지에서 말한 것은 스승을 높이고 우리 도를 지키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에 몹시 흠앙하면서 읽었네. 그러나 해를 가리는 무지개나 하늘을 가리는 안개가 있다한들 해의 밝음과 하늘의 큼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공북해孔北海 (孔融을 말함)가 말하기를, 지금의 나이 어린 자들은 선배들을 비방하기를 좋아한다 고 하였는데, 이러한 나쁜 습관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네. 논어 와 잡기雜記에 나오는 성인의 언행言行은 지극히 정밀하고도 간략한데, 말 잘하는 자로 하여금 그에 대해 말하게 하면 반드시 함부로 뜯어고치는 곳이 없지 않을 것이네. 아무개가 헐뜯는 것이 오로지 사설僿說에 있다고 하는데, 이 13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31 설 하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평생을 단정하면서 함부로 욕하고 헐뜯는다면, 이는 망녕된 것이네. 선생님께서는 밝고 뛰어 난 자품을 타고나신데다 부지런하고 독실한 공부를 더하셨으며, 높인 바는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이고 배척한 것은 이단異端 과 잡학雜學이었네. 그리하여 경전經典의 뜻에 있어서는 미처 발현하지 못하였던 뜻을 많이 발현하였으며, 이단의 학문에 대 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속셈을 지적하여 드러내 도망칠 수 없게 하였네. 그런데 아무개가 이를 서학西學이라고 배척하였다 하 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천학고天學考에서 이미 변석하였으므로 다시 말하지 않겠네. 78세(1789, 정조13) *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55) 順菴集年譜 正宗大王十三年己酉 先生七十八歲 正月 陞通政大夫 以筮仕四十年加資 四月 貽書眉泉院儒 辭院貳 且勸行講學之規 書德社學約 末增高梁溪與揭陽諸友書以遺之 八月 除僉知中樞府事 謝恩 時國有遷園之禮 主上方在憂服中 故無異奔問之行也 九月 撰雲溪鄭公行狀 鄭公名雷卿 仁祖朝 瀋陽死事 정종대왕正宗大王 13년 기유(1789), 선생의 나이 78세. 1월에 통정대부로 승진하다. 벼슬살이한 지 40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가자加資된 것이다. 4월에 미천서원眉泉書院의 유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부원장직을 사임하고, 또 강학講學에 대한 규정을 권장하여 행하게 하다. 덕곡사德谷社의 학약學約을 썼는데, 끝에 고양계高梁溪가 게양揭陽의 여러 벗들에게 보낸 편지를 덧붙여 써서 보냈다. 8월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됨에 사은하다. 이때 나라에 천원遷園하는 예가 있었는데, 주상께서 복제服制중에 있었으므 로 분문奔問하러 가는 차림과 다름이 없었다. 9월에 운계雲溪 정공鄭公의 행장을 찬하다. 정공의 이름은 뇌경雷卿으로, 인조조仁祖朝에 심양瀋陽에서 나라의 일로 순절 하였다. 79세(1790, 영조14) *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56) 順菴集年譜 正宗大王十四年庚戌 先生七十九歲 春 改修族譜 六月 陞嘉善大夫 以元子誕生 耆老加資 七月 除同知中樞府事 襲封廣成君 追恩三代 以先生六代祖錄宣廟朝扈聖勳故有襲封 以日熱 命除謝恩 八月 祭告家廟 以有追恩故也 九月朔 焚黃 안정복 생애와 행적 137

132 十月 鄕里齊會 致慶設酌 以先生陞資封爵 洞中諸生持酒饌及絃歌來獻賀 先生曰 吾何敢自有 邦慶以來 京外士民 多張 樂同慶 而吾洞不行矣 今因此爲邦家致慶則可矣 遂與諸生北向四拜後宴樂 先生卽於席上 口唫七絶一首 七律二首 其一曰 八十老臣尙不衰 不衰天語揭門楣 笙歌豈是窮儒事 聊與諸君祝聖釐 諸生以次和進 知舊搢紳之間 聞而和之者亦多 一時傳 爲盛事 정종대왕正宗大王 14년 경술(1790), 선생의 나이 79세. 봄에 족보族譜를 개수改修하다.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다. 원자元子의 탄생으로 인해 기로耆老들에게 가자加資한 것이다. 7월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광성군廣成君을 습봉襲封하였으며, 은혜를 미루어서 삼대三代가 추증되다. 선생의 6대 조께서 선묘조宣廟朝의 호성공신扈聖功臣에 훈봉勳封되었으므로 이를 습봉한 것인데, 날씨가 무덥다는 이유로 사은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8월에 제사를 지내어 가묘家廟에 고하다. 은혜를 미루어 추증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9월 초하루에 분황焚黃하다. 10월에 향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축하함에 잔치를 베풀다. 선생이 자급이 승진되고 습봉을 받았으므로 동중洞中의 여러 유생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풍악을 갖추어서 축하한 것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이런 축하를 받을 수 있겠는가. 나라에 경사가 있은 이후로 경외京外의 사민士民들이 풍악을 울리면서 함께 경하하고 있는데, 우리 동에서는 그 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이를 인하여 나라의 경사에 대해 축하하는 것이 옳다 하고는, 드디어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잔치를 베풀었다. 선생이 즉석에서 7언 절구 한 수와 7언 율시 두 수를 읊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팔십 먹은 노신이 아직 쇠하지 않아 불쇠라고 하신 말씀 편액에 써 걸었다네. 풍악이야 그 어찌 궁한 선비 일이랴만 제군들 과 성상의 복 빌기 위해서라오.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차례대로 화답하여 올렸다. 친구들과 사대부들 사이에 이 사실을 듣고 화답한 자가 많아 한때의 성대한 일로 전하여졌다. 80세(1791, 정조15) * 광주 덕곡에서 별세 (57) 順菴集年譜 正宗大王十五年辛亥 先生八十歲 正月 挽艮翁李公 李公名獻慶 挽詩曰 一朝倐忽仙驂遠 不死踽凉淚眼辛 異敎喧豗今漸熾 正論闢廓更誰人 寥寥獨我成瘖 嘿 濟濟羣賢說道眞 豈意三韓君子國 居然化作竺西民 盖李公曾有斥西學文故云 二月 撰百弗菴崔公墓誌銘 崔公名興遠 崔公嶺南人也 居大丘 與李大山交善 正宗甲辰 與先生同被桂坊薦 有聲氣之感 三月 撰亡子景曾墓誌銘 作竹林權公㫌忠閣記 權公名山海 端宗遜位時 權公投閣自殞 至是復爵旌閭 先生爲之記 六月 辛未 有患候之漸 暑熱膈滯之症 七月 癸巳午時 考終于寢室 膈滯轉成下墜之症 易簀前二日 命傍人取敬義牌來 語音澁訥 未詳何敎 累問後始知而取來 則命揭于壁上 良久視之 盖自數年來 造一木牌 刻敬義直方四字 恒揭于座右 時在外舍廳壁 故有取來之敎 時暴雨連日 慮祠宇之滲漏 累勅家人奉審 至易簀前日猶然 易簀之際 精神不亂 而無一言及家事 旣殯之日 有彩虹環繞屋 上 人皆異之 丙申訃聞 命使該邑別爲致賻 傳曰 舊日胄筵 熟知其人 顧問多藉稽古 年來每欲召見 聞其衰病日甚云故未果 13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33 今聞卒逝 殊用嗟惜 令該邑例給致賻外 別爲題給事 令廟堂行會 九月丙子 葬于德谷先塋局內亥坐之原 與夫人成氏合窆 정종대왕正宗大王 15년 신해(1791), 선생의 나이 80세. 1월에 간옹艮翁 이공李公의 만사挽詞를 짓다. 이공의 이름은 헌경獻慶이다. 만시挽詩에, 하루아침 갑자기 신선 되어 떠 남에 죽지 못한 외로운 신세 눈물이 절로 나네. 이교의 떠들어 댐 점점 치성해지는데 물리칠 정론을 누가 다시 펼치리오. 외 로운 나는 홀로 벙어리가 되었는데 많고 많은 현자들은 참된 도라 말을 하네. 생각이나 했겠는가 삼한의 군자국이 어느 사이 천축국과 서양으로 변할 줄을 하였는데, 대개 이공이 일찍이 서학을 배척하는 글을 지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월에 백불암百佛菴 최공崔公의 묘지명墓誌銘을 찬하다. 최공의 이름은 흥원興遠이다. 최공은 영남嶺南 사람이다. 대구大 丘에 살았는데, 이대산李大山과 친하게 지내었다. 정종正宗 갑진년(1784)에 선생과 같이 계방桂坊에 천거되었으므로 동기간과 같 은 정이 있었다. 3월에 망자亡子 안경증의 묘지명을 찬하다. 죽림竹林 권공權公의 정충각기旌忠閣記를 짓다. 권공의 이름은 산해山海이다.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때 권공 이 각閣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관작을 회복시키고 정려하였으므로 선생이 기문을 지은 것이다. 6월 신미일에 병환이 날 조짐이 있다. 더위로 인해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었다. 7월 계사일 오시午時에 침실에서 돌아가시다.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곁 에 있는 사람에게 경의패敬義牌를 가져 오라고 명하였는데, 말을 더듬거려서 무슨 말씀인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이에 여러 차례 되물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알고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자 벽에 걸도록 명하고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대개 몇 년 전부 터 목패木牌 하나를 만들어서 경의직방敬義直方 네 글자를 새긴 다음 항상 자리의 오른쪽에 걸어 두었는데, 이때 이것이 바 깥채의 대청 벽에 걸려 있었으므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때 폭우가 연일 내리자 사우祠宇에 비가 샐까 염려 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으며,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도 그렇게 하였다. 돌아가실 즈음에 정신이 어지럽지 않았으나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빈殯을 하는 날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집 위를 빙 둘러 감싸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병신일에 부음을 상께 아뢰자, 해당 고을에 명하여 별치부別致賻를 내리게 하였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서연 에 있을 적에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았다. 고문顧問을 함에 있어서 옛 사실을 상고하는 데 많은 힘을 입었기에 근래에는 매번 불러들여 만나 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병이 날로 심해진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지금 그가 졸서卒逝하였다 는 소식을 들으니 몹시 애석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당 고을로 하여금 전례대로 별치부를 내리는 이외에, 각별히 물품을 지급 해 주는 일을 묘당에서 공문을 보내 알리라. 9월 병자일에 덕곡德谷에 있는 선영先塋의 국내局內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부인 성씨成氏와 합장하였다. (58) 順菴集行狀[黃德吉] 先生諱鼎福 字百順 姓安氏 廣州人 始祖邦傑 仕高麗 胙封於廣 子孫因籍焉 入我朝 左參贊省 選廉吏 謚思簡 歷三世至 戶曹判書潤德 以副元帥討三浦倭克之 諡翼憲 又三世敦寧都正滉 德興大院君女壻也 策扈聖勳 贈刑曹判書廣陽君 二世至 縣監諱時聖 於先生爲高祖 曾祖諱信行 氷庫別檢 贈司僕寺正 祖諱瑞羽 文學氣節 見重淸議 甞枳於黨流 斥不用 識者比之 元祐完人 官至蔚山府使 贈禮曹參議 考諱極 贈戶曹參判廣平君 以行誼稱於士類 妣贈貞夫人李氏 益齡之女 孝寧大君補之 後 以肅廟壬辰十二月二十五日 先生生 生有異質 幼而秀穎 始讀小學書 曉文義 不煩課敎 自是日記千百言 一過卽成誦 十 三歲 見朞三百註 演其數 造來歲曆 少長嘗謂士不可以一藝成名 遍覽經史 旁及百家之流 靡不究其旨 廣之德谷 谷幽而林 안정복 생애와 행적 139

134 邃 山水縈廻 隱者可以盤旋 且先代松楸地也 先生遂卜居搆小屋 其制象菴字 扁曰順菴 盖取天下之事惟順理而已 乃棄擧子 業 專意古人之學 英廟己巳 朝廷聞先生名 薦除厚陵參奉 不赴 復除萬寧殿參奉 始出謝 辛未 陞義盈庫奉事 貢人立去思碑 于司門 世稱京衙古未有也 例陞靖陵直長 歸厚署別提 司憲府監察 甲戌 丁參判公憂 服旣闋 家居幾二十年 造養益深 著述 漸富 囂囂然自適也 其後荐除濟用監主簿 義禁府都事 皆以病辭 壬辰 除翊衛司翊贊 始出謝 時正廟在儲位 睿學高明 進講 僚官 莫有副聖意者 賓客蔡濟恭進曰 桂坊博學士 請備顧問 命講心經 先生奏曰 中庸首章 萬世道學之源 帝王治天下之大 法也 率性一句 尤爲要切 戒懼以立其本 存養之事也 愼獨以審其幾 省察之事也 擴充其天理 遏絶其人欲 則莫先於性情 故 繼言中和 中和者 性情之德也 發不中節 則不和而爲不善 故須加克治之功 凡工夫不過存養省察克治三者而已 存而省 省而 克 克而又存 循環不已 無一息之間斷 是謂率性之道也 東宮爲之稱賞 先生復進曰 古人云非知之艱 行之惟艱 書筵召對 輪 日爲䂓 君德寔由是成就 然惟講學而止 則恐未及體行 顧日用云爲之間 照察體驗之如何耳 東宮曰 體行爲尤難 先生因奏曰 帝王之學 固不以文辭爲貴 易曰 觀乎人文 以化成天下 禮樂刑政 無非治平之文也 邸下若留心於帝王之文章 寔臣民之福矣 是歲秋 謝病歸 癸巳冬 除衛率 翌年春 入參書筵 講聖學輯要 至傲不可長節 先生奏曰 傲之爲凶德大矣 是以居四者之先 自秦以下 君道日尊 臣道日卑 上下之情意隔阻 而爲人君者 每有自聖之病 皆傲德也 東宮動容嘉納之 東宮問曰 退溪 栗谷 理氣說 互有不同 何者爲是 先生對曰 栗谷乃自得之見 若退溪本於朱子 有源委 臣從退溪說 東宮待先生 禮異諸臣 先生知 無不言 言無不盡 從容婉曲 因講起義 東宮每虛己以諮之 秋辭歸 乙未 復除翊贊 十二月 東宮代理聽政 受百官朝參 先生 入參侍衛 因病辭歸 丙申 除木川縣監 及上官 敦敎化正紀綱釐宿弊 先以大明太祖皇帝訓民六條 孝順父母 尊敬長上 和睦 鄰里 敎訓子孫 各安生理 無作非爲 爲約式 令吏民每月朔會讀約 或有不卛者 必以刑齊之 諭民勸農 令耕耘者男女分左右 勿使混襍 或言其難行 先生曰 行而成習 則俗自美矣 遂復司馬所 致邑士肄業 設防役所 蠲編戶侵役 皆輸廩俸定條式 至今 傳爲邑䂓 己亥 棄官歸 百姓追思之 有遺愛碑 正廟辛丑 除敦寧主簿 命改獻陵令 先是先生撰東史綱目 上命謄進一本 令先 生校証於直齋 藏內閣 甲辰秋 冊封世子 命廷臣薦桂坊 除翊贊 謝恩後謝病歸 己酉 命筮仕四十年加資 例陞通政 除僉中樞 庚戌 以邦慶例陞秩 除同中樞 襲封廣成君 辛亥七月癸巳 易簀于正寢 享年八十 喪禮用送終錄所定遺命也 訃聞 傳曰 舊日 胄筵 顧問多藉稽古 今聞卒逝 殊用嗟惜 特命別爲致賻 九月丙子 葬于德谷負亥之原 今上元年 特贈左參贊 時西學黨旣誅 臺臣奏先生嘗排邪說 以正學術之謬 有是命 先生天姿溫粹 神彩精明 充養以道 德器渾成 動止端雅 辭氣和婉 自然之中 若 有成法 自少奮然有求道之志 嘗見性理大全書 探索紬繹 多識以蓄之 至忘其寢食焉 聞星湖李先生私淑退陶李子之學 講道 於畿甸 遂往師之 李先生一見知其大器 卽告以所聞聖門親切之旨 李先生嘗裒輯李子言行 未及修潤 令先生更爲增刪之 乃 定以近思錄例 名之曰粹語 以爲爲學之的 盖見師門傳道之微意云 當時文學之士 咸萃李先生門下 篤實如邵南尹公 精詳如 貞山李公 志同道合 常以講論切偲爲事 至或識見少異 亦爲反覆論辨 以一其歸 蔚然有乾淳遺風 先生爲學 先涵養其本源 尤致謹於省察之幾 慥慥乎學問思辨 兢兢乎視聽言動 朴實地頭 平平做去 至其精義造約 洞觀昭曠之原 則大而天地陰陽之 運 細而飛潛動植之彙 遠而古今治亂人事之變 近而性情之微 日用動靜語默之著 凡宇宙內事物所以然之理 所當然之則 萬 殊而一本者 該攝洞貫 無不得以折衷焉 先生於書無所不讀 專工在朱子大全語類諸書 而尤深於節要 平生受用 靡不自是書 中發揮 嘗言學者讀朱書 苟能得其門而入 則天德王道全體大用 犂然畢具於其中矣 又揀語類全編中切於學問者爲八冊 名曰 語類節要 又謂是篇爲朱門之論語 庶可與書節要 相爲表裏 先生尤用力於日用工程 著心口耳目手足六箴 朝晝暮夜四銘 銘 諸障壁 又刻敬直義方四字 符揭座右 及病革 命侍者索置寢側 其平日可知也 居家事親 盡誠敬 敎子弟 卛以禮 弟妹旣分居 每稱其有無 爲經理之 親戚鄰比 或有窮匱者 必隨力賙恤之 生事素薄 常務爲節儉 數頃石田 歲入頗約 而供祀禮賓 不至窘 乏者 量入爲出也 十世先塋 在靈長山之南 先生始營置祭田 建廳事于壠下 春秋將事於廳 十月上日 合祀於祧位 又設奠于 旁壠無嗣之神 祀訖 燕毛於廳前 遂爲定儀 接人必有方 少長各以其宜 鄕鄰皆敬慕之 一覿其儀範 油然有敬服之心 始結德 社洞約 遵呂藍田古事 建麗澤齋 聚村學子 設學約 講小學 歲行鄕射鄕飮儀 纔數年 鄕俗化之 嘗於出處 處之惟以義 義之 所安 雖小官有所不屑曰 世之以學名者 必以不應除命爲高致 辭一官而增一秩 外似恬退 內實躁進 吾竊耻之 雖抱關擊柝 惟當盡其職而已 及居官 不爲苟容 輒奉身亟退 凡仕於朝 內則兩朝桂坊 外則一麾湖邑 其他歷任閑曹散官而止 固不可以展 布所蘊 則道其難行矣 至晩年 超然遠引 若無意於當世 然憂國一念 常睠睠然 不以用舍異也 近世學術漸衰 爲士者近則溺 於訓詁 入耳而出口 遠則流於新奇 反道而倍經 旣皆不足以眞實踐履 能造吾儒之域 至其愈下 則一曰文章之學 二曰功利之 14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35 學 旣未有推其言之未始不本於理 理之未始不該於事 而去道益遠矣 又繼而異端者作 先生常以斯世斯道之責爲己任 論學則 躬行心得爲宗旨 循塗守轍爲法門 論事則辨義利於毫釐之差 判心跡於天壤之隔 若異端之亂眞 則亦爲拔本塞源 必反經而後 已 盖其憂之也深 慮之也遠 其所雅言 必曰孔門敎人 具於論語一書 於下學實有依據 雖以子貢之明敏 性與天道 不可得以 聞也 今之學者不屑於下學實地 徒役心於性命理氣之說 夷考其言行 未曾有爲學底貌樣 與倡家之誦禮何異哉 李先生嘗謂先 生曰 學貴自得 不必惉滯前人言議 先生起而對曰 後生少年 窮格未到 志慮未定 而畧有所見 便自執己意曰 古人之所未知 者 此習漸長 徒益其輕浮躁淺之氣 無益於進德之業 李先生聞之喜曰 可爲新進輩對症之劑 李先生著四七新編 發明李子理 發氣發之論 謂四端是道心 七情是人心 深得朱子傳心之訣 後人不知其義 至有歧貳之弊 其後遯窩愼公後聃以爲氣隨之氣屬 心 氣發之氣屬形 氣公理上七情 莫非道心 李先生作新編 重跋以識之 邵南辨之甚力 李先生乃抹去重跋 貞山復主愼說 質 諸先生 先生曰 若以喜怒之得其正者 謂之理發 則其將以四端之不得其正者 謂之氣發耶 聖人之喜怒發而自中 君子之喜怒 發而求中 衆人之喜怒發而失中 雖有中不中之不同 而其發於形氣則無異矣 嘗有一種議論 主張明季王學之說 謂敬易流於禪 格致易失於口耳 先生倡言排之曰 用力於程子之敬 主一無適而不偏於靜 致功於朱子之格致 交修進德而不流於記誦 斯已至 矣 何必以門下之不善學者 致疑於不當疑也 是時後進有立異於程朱說者 先生必戒之曰 程朱是後來聖人 若於斯歧異 其流 之弊 將入於無忌憚矣 每對學者 輒以君子小人儒爲戒曰 爲己曰君子 爲人曰小人 一有爲人底心 則所尙者論篤而色厲 所事 者佞己而訐人 要其歸則不越乎干名媒利之私 若不能明着眼牢着脚 打過此一蹊 則跬步之蹉 不爲大姦慝者幾希 昔許遯翁已 深言其弊爾 其論科學之弊 則曰成周鄕擧里選之制變 而進士之試行 士皆不顧實行 專尙文詞 投牒自衒 求售有司 所得卛皆 鴻都樂賈之流 竟使士習虛僞 人材汨喪 萬古如長夜 其論俗學之害 則曰天下之義理本於一 而後世隨時各異 枉尺直尋 行險 僥倖 此所謂胡廣之中庸 非聖門眞正義理 今則天學之害 甚於老佛 俗學之害 甚於天學矣 先是西洋書 自燕肆闖入東方 大 有害正之漸 先生著天學考 天學問答 究源委証是非 闢之廓如也 于時從學者 往往有叛去 人心益壞 謗議朋起 先生距之愈 嚴 而爲能其愛惡 辨之益明 而不至於矯激 其言曰 道家尊老君 佛氏尊釋迦 西士尊耶蘇 其義一也 西學後出 欲高於二氏 托言於無上之天主 使諸家莫敢誰何 其意巧矣 吾儒言上帝降衷 天命之性 皆禀於天者也 曰上帝臨汝 曰對越上帝 曰畏天命 無非戒愼謹獨之工而尊事上帝之道也 彼以上帝爲私主 晝夜祈懇 求免罪過 何異於佛家之懺悔乎 聖人不語怪神 若語之不已 其流之弊 將擧一世歸幻妄之域 人心煽動 後世所謂蓮社彌勒之徒 必將接跡而起 作俑之罪 必有所歸 况此黨議分裂 彼此伺 釁 設有人爲網打之計 則竊恐天堂之樂遠 而世禍來逼矣 先生歿甫數月 邦禁作異言者誅 其後邪獄繼起 其徒次第就戮 於是 人始服其先知 先生之門 遠近從游者 迭來問業 先生必循序誘掖 色笑可親 隨其材器淺深 充然各有得 要以喫緊爲人 可以 入於道義之門 門人黃德壹請業 先生曰 欲學朱子 先學退溪 因授以粹語曰 孔孟之言 如王朝之法令 程朱之言 如嚴師之勅 厲 退溪之言 如慈父之訓戒 其感發於人者 是書爲尤切 吾有所受矣 辛亥春 德吉從家兄自中江 歷拜於先生 先生方看大學 展在案上 因指示曰 劈初頭明明德 是開卷第一義 從前儘有見未透 近日每繙閱一遍 輒有會心處 然匪言語所能喩者 須是自 家默會而體認之 昔程子每言仲尼顔子樂處 亦引而不發 盖以此也 時先生年旣耄矣 信道彌篤 不倦不厭 不知年數之不足 苟 非後世之堯夫 其孰能知之 若其著述 下學指南 平生用功門路也 內範 行諸閨梱者也 希賢錄 尙友千古者也 家禮集解 禮學 之基址也 東史綱目 寓之筆削 紫陽之遺法也 至於詩名物攷 洪範演義 襍卦說 小學講義 史鑑 列朝通紀 臨官政要 廣州誌 木州誌及文集若干卷 其論述者 根柢義理 經經緯史 紆餘溫潤 曲暢而旁通 皆可爲後學則也 嗚呼 我東邦古被仁賢之化 蔚 爲文獻之域 羅麗以來 文學經術之士 往往可述 若論其淵源之正 體用之全 主張斯文之任 章章較著者盖鮮矣 惟吾退溪夫子 遠紹考亭之統 星湖先生直接退溪之緖 道學之傳 有自來矣 先生切磋琢磨 旣承於星湖 楷糢準繩 惟在於退溪 若溯其源頭 則所願學朱子也 至於衛正道闢邪說 明先聖之法而道之 使斯世之人 不迷於夷狄禽獸之域者 其誰之功歟 昔陽明之說行 而 退溪始闢其亂賊 泰西之書出 而星湖首斥其幻妄 繼繼傳述 至先生而益明 其揆一也 退溪之道 待先生而傳 星湖之學 得先 生而著 先生盛德大業 可謂集羣儒之成矣 貞夫人昌寧成氏 學生純之女 事舅姑奉祀享供賓客 未嘗違夫子意 先生薦桂坊 夫 人曰 吾家儒素 不識軒冕之榮 不如服田力穡 以救朝晡之資而已 先先生十四年而卒 合窆先生墓 生一男二女 男景曾進士 有文行 人稱先生有子 不幸早卒 女適權日身 景曾二男四女 男喆重進士 弼重 女南泳 李基誠 權佲 韓致健 喆重有五女 朴 殷會 李庭泰 李圭采 餘幼 弼重有三男一女 幷幼 權日身有三男 相學 相命 相問 一女幼 先生棄後學 已十閱歲 未有記其 言行 喆重謂德吉承學久 使之屬筆 德吉於先生 三世通家 先生與先君子爲道義交 德吉亦從家兄後 幸及門下 蒙被敎育 殆 안정복 생애와 행적 141

136 二十年 愚陋益甚 識淺辭拙 不足以任其責矣 累辭不獲 且義有不敢辭 昔者竊聞之 不知所向 孰知其爲功 不知所至 孰知其 名言 世之智足以知君子者寡焉 故蒲左丞名卿也 誌而失之陋 呂居仁賢士也 傳而違於近 了翁不識幷世顔子 幸而責沈文 至 今說其美事 况下此一等人 固不得入其門 則何足與議於富美哉 先生嘗與德吉書云 平日所講聞者 無可告語 盖歎其莫我知 也 于今典刑旣邈 微言莫聞 則懼夫先生之心學不明於世 後之說者 愈遠而愈失眞也 德吉自惟不敏 非敢謂善形容有道者也 於吾身親所見聞者 乃敢掇拾叙次之 惟務其記實 將以俟它日知德立言之君子有所據而裁焉 門人檜山黃德吉謹狀 문인 황덕길이 지은 행장 선생의 휘諱는 정복鼎福이고, 자字는 백순百順이다. 성은 안씨安氏로 광주인廣州人이다. 시조 안방걸安邦傑이 고려에 벼슬 하여 광주廣州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광주를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안성安省이 있어 염리廉吏에 선발되었는데, 시호諡號는 사간공思簡公이다. 그 뒤 3대를 거쳐 호조 판서를 지낸 안윤덕安潤 德이 있는데, 부원수副元帥로서 삼포三浦의 왜노倭奴를 토벌하여 이겼으며, 시호는 익헌공翼憲公이다. 다시 3대를 거쳐 돈녕 도 정敦寧都正을 지낸 안황安滉이 있는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위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봉冊封되었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 광양군廣陽君에 추증되었다. 2대를 지나 현감을 지낸 안시성安時聖이 있는데,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빙고별검氷庫別檢을 지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문학文學과 기 절氣節로 청의淸議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일찍이 당류黨流에 가로 막혀서 배척당해 쓰이지 못하였는데, 식자들이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에 비하였으며, 관직이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이르렀고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안극安極은 호조참판 광평군廣平 君에 추증되었으며, 행의行誼로 사류士類들에게 칭찬받았다. 어머니 증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이익령李益齡의 딸로 효령대군 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숙묘肅廟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25일에 선생이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영특하였 다. 처음에 소학小學 을 읽어서 글 뜻을 깨우쳤는데,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매일 천백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한 번만 스쳐 읽으면 그 즉시 암송하였다. 13세 때 기삼백朞三百 의 주註를 보고는 그 수리數理를 추연하여 다음해의 달력을 만 들었다. 조금 장성하여서는 일찍이 선비가 한 가지 재예才藝로 이름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 고 하면서, 경사經史를 두루 열람 한 다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유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광주廣州의 덕곡德谷은 골짜기가 깊고 숲 이 우거졌으며 산수山水가 감돌아 흘러 은자隱者가 노닐 만한 곳인데다가, 또한 선대의 선영이 있는 곳이었다. 이에 선생이 드디어 그 곳에다가 자리잡은 다음 작은 집을 암菴 자 모양으로 짓고는 순암順菴 이라고 편액을 내걸었는데, 이는 대개 천하 의 일이 오직 순리일 뿐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는 과거 공부를 집어치우고 오로지 고인古人들의 학문에만 뜻을 두 었다. 영묘英廟 기사년(1749, 영조 25)에 조정에서 선생의 이름을 듣고는 천거하여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하자, 비로소 나아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신미년(1751, 영조 27)에 의영고봉사義盈 庫奉事로 승진하였다. 이에 공인貢人들이 의영고 관사의 문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우니, 세간에서 경아문京衙門에서는 예전에 없 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전례에 의거해 정릉직장靖陵直長으로 승진하였다가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 다. 갑술년(1754, 영조 30)에 참판공參判公의 상喪을 당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 집에 있은 것이 거의 20년이었다. 이에 공부가 더 욱 깊어졌고 저술이 점점 많아졌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 뒤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금부사義禁府都事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임진년(1772, 영조 48)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에 제수되자, 비로소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이 때 정묘正廟께서 저위儲位에 있었는데,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진강進講하는 여러 관료들이 성의聖意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빈객賓客으로 있던 채제공 蔡濟恭이 나아가서 진달드리기를, 계방桂坊(익위사의 별칭)은 박학博學한 선비이니,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심경心 經 을 강講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중용 의 첫머리 장章은 만세 도학道學의 근원으로서, 제왕帝王이 천하를 다스리 14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37 는 대법 大 法 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본성을 따른다[ 率 性 ] 는 한 구절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한 곳입니다. 계구 戒 懼 함으로써 그 근본을 세우는 것은 존양 存 養 하는 일이고, 신독 愼 獨 함으로써 그 기미를 살피는 것은 성찰 省 察 하는 일입니다. 천리 天 理 를 확충하여 인욕 人 欲 을 막을 경우에는 성정 性 情 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중화 中 和 를 말하였는데, 중화란 성정 性 情 의 덕 德 입니다. 성정이 발 發 하여서 중도 中 道 에 맞지 않으면 불화 不 和 하게 되어서 불선 不 善 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극치 克 治 의 공부를 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릇 공부란 것은 존양 存 養, 성찰 省 察, 극치 克 治 이 세 가지일 뿐입니다. 존양하여 성찰하고, 성찰하여 극치하며, 극치하여서 또 존양하여, 순환하기를 그치지 않아 한 순 간이라도 중단됨이 없게 한다면, 이것을 일러 솔성지도 率 性 之 道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동궁 東 宮 이 칭찬하였다. 선생이 또 다시 나아가서 진달드리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서 연 書 筵 과 소대 召 對 를 날마다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으니, 군덕 君 德 이 실로 이를 말미암아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강 학만 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아마도 체행 體 行 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할 듯합니다. 다만 일상생활을 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즈 음에 살피면서 체험하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렸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체행하기가 더욱 어렵다 하자, 선생이 이어서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은 문사 文 辭 를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역 周 易 에 이르기를, 인문 人 文 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 化 成 하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예악 禮 樂 과 형정 刑 政 이 모두 천하를 치평 治 平 케 하는 인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하 邸 下 께서 만약 제왕의 문장 文 章 에 마음을 두신다면, 이것은 실로 신민 臣 民 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 가을에 병으로 인해 사 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사년(1773, 영조 49) 겨울에 위수 衛 率 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봄에 서연에 들어가 참여하여 성학집요 聖 學 輯 要 를 강독하였 다. 오만한 마음가짐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된다 고 한 구절에 이르러서 선생이 아뢰기를, 오만한 마음가짐은 흉덕 凶 德 가 운데에서도 큰 것으로, 이 때문에 네 가지 가운데서 맨 먼저 말한 것입니다. 진 秦 나라 이후로 군도 君 道 는 날로 높아지고 신도 臣 道 는 날로 낮아져서, 상하간에 정의 情 意 가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금된 있는 자들이 매번 자신만이 최고라는 병통을 가 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모두 오만한 덕인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가납 嘉 納 하였다. 동궁이 묻기를, 퇴계 退 溪 이황 李 滉 과 율곡 栗 谷 이이 李 珥 의 이기설 理 氣 說 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여 아뢰 기를, 율곡의 설은 바로 스스로 터득한 견해이고, 퇴계의 설과 같은 경우에는 주자 朱 子 의 학설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근원이 있는 학설입니다. 신은 퇴계의 학설 쪽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선생을 모시면서는 예우하는 것이 다른 신하들과는 달랐다. 이에 선생은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말을 함에 있어서는 곡진하게 다하였다. 그리고 조용하고 완곡하게 말하면서 강론을 인하여 의리 義 理 를 깨우쳐주니, 동궁은 매번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선생에게 물었다. 이 해 가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을미년(1775, 영조 51)에 다시 익찬 翊 贊 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동궁이 대리청정 代 理 聽 政 하게 되어 백관 百 官 들의 조참 朝 參 을 받을 때 선생은 들어가서 시위 侍 衛 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인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병신년에 목천 현감 木 川 縣 監 에 제수되었다. 관직에 임함에 미쳐서는 교화 敎 化 를 돈독히 하고, 기강 紀 綱 을 바로잡으며, 묵은 폐단을 바르게 고 쳤다. 먼저 대명 大 明 의 태조황제 太 祖 皇 帝 가 만든, 부모에게 효순 孝 順 하고, 웃어른을 존경하고, 마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들을 가르치고, 각자의 생업에 안정하고, 비위 非 爲 를 저지르지 말라 는 내용의 훈민육조 訓 民 六 條 를 약법 約 法 으로 정한 다 음, 아전과 백성들로 하여금 매월 초하룻날 모여서 이를 읽게 하였으며, 혹 이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형 벌을 내려 제재하였다. 백성들을 깨우쳐서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면서는 밭 갈고 김매는 자들로 하여금 남녀가 좌우로 나뉘어 서 일하여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시행하여 서 습관이 되면 풍속이 저절로 아름답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사마소 司 馬 所 를 복원하여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게 하였으며, 방역소 防 役 所 를 설치하여 편호 編 戶 들의 부역을 견감하고 모두 늠봉 廩 俸 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례를 정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것이 전해져서 읍규 邑 規 로 되었다. 기해년(1779, 정조 3)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유애비 遺 愛 碑 를 세웠다. 안정복 생애와 행적 143

138 정묘 正 廟 신축년(1781, 정조 5)에 돈녕주부 敦 寧 主 簿 에 제수되었는데, 상이 헌릉령 獻 陵 令 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선생이 동사강목 東 史 綱 目 을 찬 撰 하였는데, 상이 한 본을 등사해서 올리도록 명하고는 선생으로 하여금 직재 直 齋 에서 교정하 여 내각 內 閣 에 보관하게 하였다. 갑진년(1784, 정조 8) 가을에 세자 世 子 를 책봉하고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해서 계방 桂 坊 의 관 원을 천거하게 함에 익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사은 謝 恩 한 뒤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유년(1789, 정 조 13)에 벼슬살이한 지 40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가자 加 資 하도록 명함에 전례에 따라 통정대부 通 政 大 夫 로 올라가 첨지중추부사 에 제수되었다. 그 다음해인 경술년에 나라의 경사로 인해 전례에 따라 직질 職 秩 이 올라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광 성군 廣 成 君 을 습봉 襲 封 하였다. 신해년(1791, 정조 15) 7월 계사일에 정침 正 寢 에서 졸하니, 향년이 80세였다. 상례 喪 禮 는 송종록 送 終 錄 에서 정한 바를 따랐는 데, 이는 유명 遺 命 이었다. 부음을 아뢰자, 상이 전교하기를, 지난날 서연 書 筵 에서 고문 顧 問 을 할 적에 예전의 고사를 상고함에 있어서 많은 힘을 빌었었는데, 지금 졸하였다고 들으니 몹시 애석하다 하고는, 특별히 명하여 부의 賻 儀 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 해 9월 병자일에 덕곡 德 谷 의 해좌 亥 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금상 원년에 특별히 좌참찬을 추증하였다. 이때 서학 西 學 의 무 리들이 이미 주살되었는데, 대신 臺 臣 이, 선생이 일찍이 사설 邪 說 을 배격하여 학술 學 術 이 글러지는 것을 바로잡았다고 아뢰어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천부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정신과 풍채가 깨끗하고 밝았다. 마음을 기르고 채우기를 도 道 로써 하여 덕기 德 器 가 혼후하게 이루어졌으며,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말투가 부드러워서 자연스러운 가운데 마치 저절로 법도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분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성리대전 性 理 大 全 을 보고는 깊 이 탐색하고 세밀히 완미하면서 많은 이치를 알아 축적하였는데, 밥 먹고 잠자는 것을 잊기까지 하였다. 성호 선생 星 湖 先 生 이익 李 瀷 이 퇴도 退 陶 이자 李 子 의 학문을 사숙 私 淑 하여 기전 畿 甸 에서 강론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드디 어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겼다. 성호 선생은 한 번 보고 단번에 큰 그릇임을 알고 즉시 성문 聖 門 에서 친히 들은 간절한 뜻을 가지고 말해 주었다. 성호 선생이 일찍이 이자 李 子 의 언행 言 行 을 모아 놓고는 미처 수정을 하여 다듬지 못하였는데, 선생으로 하여금 다시 덧붙이고 잘라내게 하였다. 이에 선생이 근사록 近 思 錄 의 규례에 의거하여 찬정 撰 定 해서 이자수어 李 子 粹 語 라고 이름 붙이고는 학문하는 목적으로 삼았는바, 대개 사문 師 門 에서 도를 전한 은미한 뜻을 나타내었다고 하겠다. 당시에 문학 文 學 을 하는 선비들이 모두 성호 선생의 문하에 모여 있었는데, 독실 篤 實 하기로는 소남 邵 南 윤동규 尹 東 奎 와 같은 사람이 있었고, 정밀하고 상세하기로는 정산 貞 山 이병휴 李 秉 休 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공은 이들과 뜻이 같고 도가 맞아, 항상 강론하면서 서 로 권면하기를 일삼았다. 혹 견해에 서로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또한 반복해서 논변 論 辨 하여 하나로 귀결되게 함에, 울연 蔚 然 히 건순 乾 淳 의 유풍 遺 風 이 있었다. 선생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먼저 본원 本 源 을 함양하였으며, 특히 성찰 省 察 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리하여 학문 學 問 과 사변 思 辨 에 있어서 독실하게 하고 시청 視 聽 과 언동 言 動 에 있어서 부지런히 하면서, 순박하고 진실한 바탕 위에서 순서 있 게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다. 정밀한 의리와 요약된 경지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고 광대한 근원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런즉 크 게는 천지와 음양의 운행을, 세밀하게는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의 모든 사물을, 멀리는 고금의 치란 治 亂 과 인사 人 事 의 변천 을, 가까이로는 성정 性 情 의 은미함과 일상생활의 동정 動 靜 과 어묵 語 默 등에 이르기까지,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의 소이연 所 以 然 의 이치와 소당연 所 當 然 의 법칙이 만 갈래이면서도 근본은 하나인 것을 두루 보고 하나로 관통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은 책이란 책은 읽지 않는 책이 없었으나, 전공한 것은 주자대전 朱 子 大 全 과 주자어류 朱 子 語 類 등의 책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절요 節 要 에 조예가 깊어, 평생토록 수용 受 用 한 것이 이 책 안에서 나와 발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 찍이 말하기를, 학자가 주서 朱 書 를 읽어서 참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천덕 天 德 과 왕도 王 道 의 전체 全 體 와 대용 大 用 이 활연히 그 안에 다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주자어류 의 전편 全 編 중에서 학문을 하는 데에 절실한 것을 뽑 아 모아서 8책으로 만들고는 어류절요 語 類 節 要 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이 책은 주자 문하의 논어 論 語 로, 주서절요 와 더불어 표리 表 裏 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선생은 특히 일상생활을 하는 중의 행사에 힘을 기울였는 바, 심잠 心 箴, 구잠 口 箴, 이잠 耳 箴, 목잠 目 箴, 수잠 手 箴, 족잠 足 箴 의 육잠 六 箴 과 조명 朝 銘, 주명 晝 銘, 모명 暮 銘, 야명 夜 銘 의 사명 四 銘 을 14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39 지어 벽에 새겨 놓았다. 그리고 또 경직의방 敬 直 義 方 이란 네 글자를 새겨 자리의 오른쪽에 붙여 놓았다. 선생이 병이 심해짐 에 미쳐서는 모시고 있던 자로 하여금 그것을 찾아다가 침상 곁에 놓아두게 하였으니, 평소에 어떻게 하였는지를 알 수 있 다. 집안에서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자제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로써 이끌었다. 동생들이 이미 분가 分 家 하였는데도 매번 있고 없는 것을 물어서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었으며, 친척과 인근 마을 사람들 가운데 혹시라도 곤궁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었다. 생활이 검소하고 소박하였으며, 항상 절검 節 儉 하기를 힘썼다. 몇 마 지기 되는 돌밭에서 나는 소출이 적었으나, 제사 지내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궁핍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수입을 따져서 지출하였기 때문이다. 10대의 선영이 영장산 靈 長 山 의 남쪽에 있는데, 선생이 처음으로 제전 祭 田 을 마련해 두고 선영 아 래에 청사 廳 事 를 건립하여 봄가을로 청 廳 에서 제사 지냈고, 10월 상일 上 日 에 조위 祧 位 에 합사 合 祀 하였다. 또 선영 곁에 있는 후 손이 없는 신위 神 位 에 대해서도 전 奠 을 베풀었으며, 제사가 끝난 뒤에는 청 앞에서 나이 순서에 따라 앉아 음복하였는데, 드 디어 이것을 정식 의례로 삼았다. 다른 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규범이 있어서 젊은 사람과 어른에 따라서 각각 마땅 하게 하였다. 이에 향리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면서 흠모하였으며, 한 번이라도 선생의 예의범절을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경복 敬 服 하는 마음을 가졌다. 처음으로 덕사 德 社 의 동약 洞 約 을 결성하여 남전여씨 藍 田 呂 氏 의 고사 古 事 를 준행하였고, 이택재 麗 澤 齋 를 건립하여 시골의 학 생들을 모은 다음 학약 學 約 을 만들어 소학 小 學 을 강 講 하였으며, 해마다 향사례 鄕 射 禮 와 향음례 鄕 飮 禮 를 행하였다. 이에 겨우 몇 년이 지나자 향리의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였다.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오로지 의 義 에 입각하여 처 신하였는바, 의에 있어서 편안한 바에는 아무리 소관 말직이라 하더라도 개의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학자라고 이 름하는 자들은 반드시 제수하는 명에 응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고상하다고 하면서 한 관직을 사양하여 한 직질 職 秩 이 올라가 는데, 이는 겉으로는 염퇴 恬 退 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빨리 진출하려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아 무리 하찮고 낮은 관직이라 하더라도 오직 직분을 다할 뿐이다 하였다. 관직에 거함에 미쳐서는 구차스럽게 용납되려고 하지 않아 문득 몸을 거두어 속히 물러났다. 조정에 벼슬한 것은 내직 內 職 으로는 양대 조정의 계방직 桂 坊 職 이고, 외임으로는 호서 湖 西 의 고을 수령을 한 차례 지내었으며, 그 나머지 관직은 한가한 관서의 산직 散 職 을 역임하는 데 그쳤다. 이에 참으로 평소에 배운 바를 다 써먹을 수 없었으니, 도는 행해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멀리 떠나려는 생각을 가져 마치 이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라를 걱 정하는 우국의 일념 一 念 만은 항상 마음속에 간절하였는바, 등용되고 등용되지 못함에 따라 달리 마음먹지 않았다. 근세에 들 어와 학술이 점차 쇠미해진 탓에, 선비들이 가까이로는 훈고학 訓 詁 學 에 빠져들어 귀로 듣고 입으로만 말하고, 멀리로는 새롭 고 기이한 데로 흘러들어가 도 道 와 경 經 을 어겼다. 그리하여 진실되게 실천하여 우리 유도 儒 道 의 영역으로 나아가기에는 이미 모두가 부족하였다. 더욱 아래로 내려옴에 이르러서는 하나는 문장학 文 章 學 이라 하고 하나는 공리학 功 利 學 이라 하였는데, 이들 학문은 이미, 말은 애당초부터 이치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는 애당초부터 일에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이치를 추구 推 究 하지 않은 탓에 도 道 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그런데다 또 계속해서 이단 異 端 의 학문이 일어났다. 선생은 항상 이러한 세상에 유도를 지켜나가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 이에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는 몸소 실행 하고 마음속에 얻는 것을 종지 宗 旨 로 삼고 선유들의 학설을 따르면서 지키는 것을 법문 法 門 으로 삼았으며, 일을 논함에 있어 서는 털끝만한 차이 속에서 의리 義 利 를 판별하고 천양지차의 간격 속에서 심적 心 跡 을 판별하였다. 이단의 학설이 진리를 어지 럽힐 경우에는 역시 발본색원하여 반드시 바른 도리로 돌려놓은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이는 대개 걱정하는 것이 깊고 염려하 는 것이 멀었던 것이다. 평상시에 말하면서는 반드시 이르기를, 공자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도리는 논어 한 책에 갖 추어져 있어서 하학 下 學 의 공부를 하는 데 실로 의지할 바가 있다. 비록 명민하였던 자공 子 貢 으로서도 성 性 과 천도 天 道 에 대해 서는 공자로부터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하학의 실지 공부를 하찮게 여기면서 한갓 성명 性 命 과 이기 理 氣 의 설 說 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언행을 가만히 살펴보면 학문하는 자의 모양새가 아니니, 이는 갈보들 이 예 禮 에 대해 떠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성호 선생이 일찍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학문은 스스로 터득하는 안정복 생애와 행적 145

140 것이 중요한 것이니, 꼭 선배들의 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자, 선생이 일어나서 답하기를, 나이 젊은 후생이 궁리 窮 理 와 격물 格 物 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의지와 사려도 확고하지 못한 처지에서, 약간의 소견이 있다 해서 곧바로 자기주장만을 고집 하면서, 옛 사람들도 몰랐던 것이다 고 말하는데, 이러한 습성이 점차 자라난다면 이는 경박하고 부화 浮 華 한 기상만 더해 줄 뿐, 덕을 쌓아가는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성호 선생이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신진배 新 進 輩 들의 병통을 치료하는 약이 될 만한 말이다 하였다.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 四 七 新 編 을 지어 퇴계 退 溪 이자 李 子 의 이발기발론 理 發 氣 發 論 을 드러내어 밝히면서 사단 四 端 은 도심 道 心 이고 칠정 七 情 은 인심 人 心 이라고 하여 주자가 마음으로 전한 요결 要 訣 을 얻었는데, 후인들이 그 뜻을 모르고서 이론을 제 기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 뒤에 둔와 遯 窩 신후담 愼 後 聃 공이 말하기를, 기가 따른다[ 氣 隨 ] 는 곳에서의 기는 마음에 속하고, 기가 발한다[ 氣 發 ] 는 곳에서의 기는 형기 形 氣 에 속한다. 공정한 이 理 에서 나오는 칠정은 도심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는데, 성 호 선생이 사칠신편 의 중발 重 跋 을 지어 이를 기록하였다. 이에 소남 윤동규가 온 힘을 다해 이를 변석 辨 釋 하자, 성호 선생 이 다시 중발을 삭제하였다. 그 뒤에 정산 이병휴가 다시 신후담의 설을 주장하면서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만약 희노 喜 怒 가 바름을 얻은 것을 일러 이발 理 發 이라고 한다면, 사단이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일러 기발 氣 發 이라고 할 것 입니까. 성인 聖 人 의 희노는 발함에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이고, 군자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맞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 일반 사람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안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맞고 안 맞고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이 형기 形 氣 에서 발하 는 것임은 차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일종의 어떤 의론 議 論 이 명나라 말기의 왕양명 王 陽 明 의 학설을 주장하면서 경 敬 은 선 禪 쪽으로 흘러들기가 쉽고 격치 格 致 는 구이지학 口 耳 之 學 으로 빠져들기가 쉽다 고 하였는데, 선생이 창언 倡 言 하여 배격하기를, 정자 程 子 의 경 敬 에 힘을 쏟 아 마음을 집중해서 잡념을 버리되 고요한 데 치우치지 않게 하고, 주자 朱 子 의 격치 格 致 에 공을 쏟아 함께 닦아 덕에 나아가 서 입으로만 외우는 데로 흘러들지 않게 하면, 여기에서 지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문하 門 下 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가지고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의심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때 후배들 가운데서 정자와 주자의 학설에 이 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은 반드시 그들을 경계시키면서 말하기를, 정자와 주자는 후세의 성인이다. 만약 이 분들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나간다면,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아무런 꺼림이 없는 소인 小 人 으로 될 것이다 하였다. 매번 학자들 을 대할 적마다 문득 군자유 君 子 儒 와 소인유 小 人 儒 를 가지고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은 군자이 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소인이다. 한 번이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을 가진다면, 숭상하는 것은 언 론의 독실함과 외모의 장엄함일 것이며, 일삼는 것은 자신에게 아첨하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일 터이니, 마침내는 명 예를 구하고 이익을 꾀하는 사사로움에서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니 만약 밝게 보고 굳건하게 서서 이 한 길을 지나쳐 버리지 못하면 반걸음의 차이에서 아주 간특한 자로 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옛날에 이미 허둔옹 許 遯 翁 이 그 폐단에 대해서 깊이 말하였다 하였다. 또 과거 科 擧 의 폐단에 대해서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성주 成 周 의 향거이선제 鄕 擧 里 選 制 가 변하여 진사시 進 士 試 의 제도가 시행되면서 선비들이 모두 실제의 행실을 돌아보지 않은 채 오로지 문사 文 詞 만을 숭상하 였다. 그리하여 글을 보내어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면서 유사 有 司 에게 자신을 써 주기를 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얻은 사람은 대부분 홍도 鴻 都 에서 자신을 팔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어서, 마침내 사습 士 習 이 거짓스럽게 되고 인재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오래도록 인물다운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하였다. 또 속학 俗 學 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천하의 의리는 하나에 근본하는데, 후세에는 시대를 따라서 각각 다 르게 되었다. 이에 한 자[ 尺 ]를 구부려서 여덟 자를 펴고 특이한 짓을 하면서 요행수를 구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호광 胡 廣 의 중용 中 庸 으로, 성문 聖 門 의 참되고 바른 의리가 아니다. 지금 천주학의 폐해는 노씨 老 氏 나 불씨 佛 氏 보다도 더 심하고, 속 학의 폐해는 천주학보다도 더 심하다 하였다. 이에 앞서서 서양의 서적이 연경 燕 京 으로부터 우리나라로 마구 들어와 정도 正 道 를 해칠 조짐이 크게 있었다. 이에 선생은 천학고 天 學 考 와 천학문답 天 學 問 答 을 지어 본말 本 末 을 궁구하고 시비 是 非 를 판별하 여 분명하게 이를 막았다. 이에 선생을 따라 배우던 자들이 왕왕 선생을 등지고 떠나가서 인심이 더욱더 무너지고 비방이 여 14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41 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선생은 더욱더 엄하게 이들을 물리쳤는데, 미워하는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 더 밝게 변석하였으나, 지나치게 과격하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도가 道 家 에서 노군 老 君 을 존경하 는 것이나, 석씨들이 석가 釋 迦 를 존경하는 것이나, 서양 사람들이 예수[ 耶 蘇 ]를 존경하는 것이나, 그 뜻은 다 한 가지이다. 서 학 西 學 은 뒤에 나왔으면서도 도가나 석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무상 無 上 의 천주 天 主 를 내세워 제가 諸 家 들로 하여금 아무 소리도 못하게 하니, 그 계책이 교묘하다. 우리 유가 儒 家 에서 말하기로는, 상제 上 帝 가 내려주신 성품과 하늘이 명 하신 성품은 모두 하늘에서 품부받은 것이다. 시경 에 상제가 네 곁에 계시니[ 上 帝 臨 汝 ] 라고 하였고, 또 상제를 대한 듯이 하라[ 對 越 上 帝 ] 고 하였고, 또 천명을 두려워하라[ 畏 天 命 ] 고 하였는바, 이 모두는 계구 戒 懼 와 근독 謹 獨 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고, 상제를 높이 떠받드는 도가 아닌 것이 없다. 서양 사람들이 상제를 자기들의 사주 私 主 로 생각하여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지은 죄를 용서받기를 구하는데, 이것은 불가 佛 家 에서 참회 懺 悔 하는 일과 뭐가 다른가. 유가의 성인 聖 人 은 괴이한 일과 귀신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바,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경우 그 말 류의 폐단은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환망 幻 妄 의 영역으로 몰아넣으면서 인심을 선동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에는 이른바 연 사 蓮 社 와 같은 무리들이나 미륵불 彌 勒 佛 을 사칭하는 자들이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으로, 못된 짓을 창안한 죄를 반드 시 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당의 黨 議 가 분열되어서 피차간에 서로 틈을 엿보고 있으니,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상대편 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울 경우, 아마도 천당의 즐거움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이 세상의 화가 먼저 이를까 염려된다 하였다. 그 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몇 달이 채 못 되어 금지령이 제정되고 이언 異 言 을 하는 자들이 처단되었으며, 그 뒤에 사옥 邪 獄 이 계속해서 일어나 천주학을 하는 무리들이 차례차례 형장으로 나아가니, 이때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의 선견지 명에 탄복하였다. 선생의 문하에는 원근에서 종유하는 자들이 번갈아 와서 학문에 대해 물으면서 수업하였는데, 선생은 반드시 순서에 따 라서 인도하여 도와주고 부드러운 얼굴로 대하면서, 재기 材 器 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각자 얻는 바가 있게 하였는데, 긴절하게 사람을 위해 주어 도의 道 義 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문인 門 人 황덕일 黃 德 壹 이 수업하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퇴계 退 溪 를 배우라 하면서, 인하여 이자수어 李 子 粹 語 를 가르쳐 주면서 말하기를, 공자ㆍ맹 자의 말은 국가의 법령 法 令 과 같고, 정자ㆍ주자의 말은 엄한 스승의 훈계와 같고, 퇴계의 말은 인자한 아버지의 훈계와 같다. 그러니 사람들을 감발 感 發 시키는 것은 이 책이 더욱 절실한바, 나는 받은 바가 있다 하였다. 신해년 봄에 나 황덕길이 가형 家 兄 을 따라서 중강 中 江 에서 와서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선생이 막 대학 을 보고 있던 참이어서 책상 위에 대학 이 펼쳐져 있었다. 인하여 대학 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첫머리의 명명덕 明 明 德 이 바로 책을 펴는 첫째 의리이다. 종전에는 이 부분 에 대해서 확연하게 알지 못한 점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매번 한 차례 볼 적마다 문득 마음으로 이해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언어로 능히 깨우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자기 자신이 묵묵히 이해하여 체인 體 認 해야 한다. 옛날에 정자가 매번 중니 仲 尼 와 안자 顔 子 가 즐겼던 점에 대해 말하면서도 역시 말하기만 하면서 틔어 주지 않았던 것은 대개 이 때 문이었다 하였다. 당시에 선생은 나이가 이미 늙었는데도 도를 믿음이 더욱 독실하여 공부하고 가르치는 데 싫증을 내지 않 으면서 햇수가 부족한 것도 몰랐으니, 참으로 후세의 요부 堯 夫 ( 邵 雍 의 자)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선생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선생의 저술 가운데 하학지남 下 學 指 南 은 선생이 평생토록 공부하는 문로 門 路 였고, 내범 內 範 은 규중에서 행한 것이었 고, 희현록 希 賢 錄 은 천고의 옛 사람들과 벗한 것이었고, 가례집해 家 禮 集 解 는 예학 禮 學 의 기반이었고, 동사강목 東 史 綱 目 은 필삭 筆 削 의 뜻을 붙인 자양 紫 陽 주부자 朱 夫 子 의 유법 遺 法 이었다. 시명물고 詩 名 物 攷, 홍범연의 洪 範 演 義, 잡괘설 雜 卦 說, 소학 강의 小 學 講 義, 사감 史 鑑, 열조통기 列 朝 通 紀, 임관정요 臨 官 政 要, 광주지 廣 州 志, 목주지 木 州 誌 및 몇 권의 문집 文 集 에 이 르러서는 논술 論 述 한 것이 의리 義 理 에 뿌리를 박고 경사 經 史 를 경위 經 緯 로 삼았는바, 여유롭고 매끈하여 자세하면서도 널리 통 하여 모두가 후학 後 學 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아,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어진이의 교화를 입어 울연히 문헌 文 獻 의 나라가 되 었다. 신라와 고려시대 이래로 문학과 경술 經 術 에 있어서 왕왕 칭할 만한 자가 있었으나, 연원 淵 源 의 바름과 체용 體 用 의 온전 함을 논해 볼 것 같으면 유학의 책임을 맡아 밝게 드러낸 자는 대개 드물다. 오직 우리 퇴계 부자 退 溪 夫 子 만이 저 멀리 고정 안정복 생애와 행적 147

142 考 亭 ( 朱 子 의 호임)의 계통을 이어받았고, 성호 선생만이 직접 퇴계의 학맥에 접해 있어서 도학 道 學 의 전함에 근원이 있다. 선생 은 절차탁마함에 있어서 이미 성호 선생을 이었고, 모범으로 삼아 따름이 오직 퇴계에게 있었으니,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면 원하였던 바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정도 正 道 를 보위하고 사설 邪 說 을 물리치면서 선성 先 聖 의 법을 밝혀 인도하여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이적 夷 狄 이나 금수 의 지경으로 빠져들지 않게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예전에 양명학 陽 明 學 의 학설이 행해짐에 퇴계가 그 난적 亂 賊 을 물 리쳤고, 태서 泰 西 의 서적이 들어옴에 성호 선생이 먼저 그 요망함을 배척하였는데, 그 전통이 계속 전해져서 선생에게 이르러 더욱 밝아졌으니, 그 도 道 는 하나인 것이다. 퇴계의 도는 선생을 기다려서 전해지고 성호의 학문은 선생을 얻어서 드러났으 니, 선생의 성대한 덕과 큰 업적은 여러 유자 儒 者 들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인 貞 夫 人 창녕성씨 昌 寧 成 氏 는 학생 學 生 성순 成 純 의 딸이다. 시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일 찍이 남편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선생이 계방 桂 坊 에 천거되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리 집은 선비 집안이라 관직의 영광스러 움을 모르니, 힘써 농사지어서 아침저녁 끼니나 마련하면 그만입니다 하였다. 선생보다 14년 먼저 죽었는데, 선생의 묘와 합 장하였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안경증 安 景 曾 은 진사 進 士 로 문행 文 行 이 있어서 사람들이 선생에게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 고 칭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딸은 권일신 權 日 身 에게 시집갔다. 안경증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 안철중 安 喆 重 과 안필중 安 弼 重 이고, 딸은 남영 南 泳, 이기성 李 基 誠, 권명, 한치건 韓 致 健 에게 시집갔다. 안철중은 5녀를 두었는데, 박은회 朴 殷 會, 이정태 李 庭 泰, 이규채 李 圭 采 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안필중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권일신은 3남을 두었는데, 권상학 權 相 學, 권상명 權 相 命, 권상문 權 相 問 이며, 1녀는 어리다. 선생이 후학 後 學 들을 버리고 떠나신 지 이미 10년이 되 었는데, 아직 선생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없었다. 안철중은 나 황덕길이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기간이 오래라고 여겨 나로 하여금 선생의 행장을 짓게 하였다. 나 황덕길 은 선생에 대해서 3대토록 통가 通 家 의 친교가 있었는바, 나의 선친과는 도의 道 義 로 서로 사귀었다. 나 역시 가형 家 兄 을 따라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기를 20년 동안이나 하였는데, 몹시 어리석은 탓에 식견은 얕고 언사는 졸렬하여 그 책 임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며, 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 다. 예전에 삼가 듣건대, 지향 指 向 할 바를 모르면 누가 그것이 공 功 이 되는 줄을 알겠으며, 이를 바를 알지 못하면 누가 그것 이 명언 名 言 이라는 것을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는 군자임을 알아보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적은 법이다. 그러므로 포 좌승 蒲 左 丞 은 명경 名 卿 이었는데도 지문 誌 文 을 지으면서 누추하게 하는 잘못을 범하였고, 여거인 呂 居 仁 은 현사 賢 士 였는데도 전 傳 을 지으면서 비근한 일을 어긋나게 서술하였다. 그러나 위료옹 魏 了 翁 은 그 당시 안자와 나란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 하였으나 다행히도 책심문 責 沈 文 을 지어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더구나 이런 사람들보다 한 등급 아 래인 사람은 참으로 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인즉, 어찌 문장을 짓는 것에 대해서 더불어 논할 수가 있겠는가. 선생께서 일찍이 나 황덕길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평소에 강론하거나 들은 것을 고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는 데, 이는 대개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모습이 이미 아득해져서 은미한 말 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선생의 심학 心 學 이 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후세의 설자 說 者 들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참모습을 잃게 되었다. 나 황덕길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불민 不 敏 한바, 감히 도학 道 學 을 지닌 선생을 잘 형용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에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감히 이것저것 주워 모아서 차례대로 서술하였다. 그러면서 오직 사실을 기록 하도록 힘써서 장차 후일에 덕을 알아 입언 立 言 하는 군자가 이를 근거삼아 재단하기를 기다린다. 문인 회산 檜 山 황덕길 黃 德 吉 은 삼가 행장을 짓는다. 14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43 홍대용 洪 大 容 (1731~1783) 1) 홍대용 연보 年 譜 2) 홍대용 생애 관련 자료

144 4. 홍대용洪大容(1731~1783) 생애와 행적 1) 홍대용 연보年譜 본관 : 남양南陽. 자 : 덕보德保, 호 : 홍지弘之ㆍ담헌湛軒 나이 / 연도 1세(1731, 연보 영조7) *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 출생 11세(1741, 영조17) * 평안도 용강군 삼화부사三和府使에 부임한 조부 용조龍祚를 따라서 관서 關西 지방으로 여행 * 조부 별세, 충남 전의全義 당곡堂谷에 장사 12세(1742, 영조18) * 석실서원石室書院으로 당고모부인 김원행金元行을 찾아가 그 문하에 들어 감 14세(1744, 영조20) * 부친 홍력洪櫟 사마시司馬試 합격 15세(1745, 영조21) * 부친이 문경현감聞慶縣監 제수. 이후 영천군수榮川郡守,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임관 17세(1747, 영조23) * 이홍중李弘重의 딸 한산韓山 이씨와 혼인 21세(1751, 영조27) * 부친의 근무지인 영읍榮邑을 여행함 이곳에서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노소분당老少分黨에 의문을 보임( 渼上記 주요 행적지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 석실서원 聞 ) 세(1753, 영조29) * 석실서원에서 주세붕周世鵬의 후손 주도이周道以를 만나 사귐 * 증주도이서문贈周道以序文 을 지음 * 숙부 홍억洪檍이 문과에 장원급제 24세(1754, 영조30) * 소학小學 명륜明倫 장 강론 * 능엄경楞嚴經 원각경圓覺經 등의 불경 탐독 25세(1755, 영조31) * 박지원朴趾源과 교유 26세(1756, 영조32) * 석실서원에서 황윤석黃胤錫과 교유 29세(1759, 영조35) * 나주羅州 동복同福 물염정勿染亭에 기거하던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혼천 의渾天儀ㆍ자명종自鳴鐘 제작 착수 30세(1760, 영조36) * 나주아문에서 나경적과 자명종自鳴鐘 등 기계 제작 착수 * 기계제작을 위한 편지를 왕래함. 31세(1761, 영조37) * 혼천의 완성됐으나, 다시 작게 만듦 32세(1762, 영조38) * * * * 33세(1763, 영조39) * 고향인 충청도 천원군 수촌壽村에 머뭄 34세(1764, 영조40) * 12월 13일 아들 원薳 출생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혼천의 2대와 자명종 완성 충청도 천원군 장명長命 설치하고 농수각籠水閣 이라고 함 나경적 별세. 제나석당문祭羅石塘文 지어 조문함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재임齋任을 맡음 물염정 농수각 화양서원

145 나이 / 연도 연보 * 서장관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서 자제군관으로서 청나라로 떠남(11월 주요 행적지 출 35세(1765, 영조41) 36세(1766, 영조42) * 3개월 동안 북경北京에 머물면서 청나라의 학자인 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 筠ㆍ육비陸飛 등과 교유 * 4차례 천주당 방문 영조43) * 해동시선海東詩選 4책 완성, 반정균에게 보냄 * 김종후金鍾厚와 연행과 청인교우에 대해 논쟁을 벌임 * 이덕무ㆍ박제가 등 사가四家, 정철조鄭喆祚와 교유 * 부친 별세. 과거 단념 38세(1768, 영조44) * 묘막살이를 하면 후학지도하고, 이를 정리한 독서부결讀書符訣 을 만들 고 이를 엄성의 아들 엄앙嚴昻과 삼하三河의 선비 매헌梅軒에게 보냄 * 항주의 반정균이 보내준 아버지의 만사輓詞를 묘비에 새김 * 항주 엄성嚴誠의 죽음을 전해 듣고, 상중에도 조문弔文을 보내고 조상弔 喪함 40세(1770, 영조46) * 서림西林 이송李淞과 함께 금강산 유람 42세(1772, 영조48) * 박지원과 집중적인 교유( 過庭錄 ) * 김원행ㆍ황윤석 등과 염영서廉永瑞가 만든 자명종을 보러 흥양興陽으로 감 * 스승 김원행 별세, 제문 지음 43세(1773, 영조49) * 삼하三河의 선비 손용주孫蓉州와 한시 교류 * 의산문답毉山問答 주해수용籌解需用 저술 영조50) * 이송李淞과 함께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로 유람 *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의 제수 소식을 들었으나 사양 *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에 선임되어 17개월간 왕세손(正祖)을 가르 침 * 존현각尊賢閣에서 주서절요朱書節要 강론 45세(1775, 영조51) * 성학집요聖學輯要, 주서절요 를 시강함 왕세손으로부터 학문의 정중正中함을 인정받음 담헌의 연행에 대해 문의함 46세(1776, 영조52) * 정조 즉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승격됨 47세(1777, 정조1) * 태인현감泰仁縣監 제수 외직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전반에 대해 체험 호남 공관으로 이덕무李德懋를 여러 차례 부름 48세(1778, 정조2) * 손용주에게 연행하는 이덕무와 박제가 소개 손용주를 통해 엄성의 유상遺像과 유고遺稿 전해 받음 49세(1779, 정조3) * 현감직을 사직하고 낙향 결심 50세(1780, 정조4) *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전임 * 엄성의 형 구봉九峯에게 선禪 공부와 관련한 서신 왕래 * 손용주에게 연행사절을 따라가는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냄 53세(1783, 정조7) * 어머니 병환을 핑계로 영천군수 사직, 귀향 * 중풍으로 상반신 마비 별세 37세(1767, 44세(1774, 발, 12월 27일 도착) 창덕궁(존현각) 태인현감 영천군수 충남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홍대용 생애와 행적 151

146 2) 홍대용 생애 관련 자료 1세(1731, 영조7) *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 출생 (1) 湛軒書 附錄, 墓誌銘, 洪德保墓誌銘(朴趾源) 德保沒 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 曰孫有義號蓉洲 曩歲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留書具 道德保作官南土 且留土物數事 寄意而歸 蓉洲發書 當知吾德保友也 乃屬客赴之曰 乾隆癸卯月日 朝鮮朴趾源 頓首白蓉洲 足下 敝邦前任榮川郡守南陽洪湛軒諱大容字德保 以本年十月廿三日酉時 不起 平昔無恙 忽風喎噤瘖 須臾至此 得年五十 三 孤子薳哭擗 未可手書自赴 且大江以南 便信無階 並祈替此轉赴吳中 使天下知己 得其亡日 幽明之間 足以不恨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畫尺牘諸詩文共十卷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嗟乎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 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論地球而不言地轉 德保嘗論地一轉爲一日 其說渺微玄奧 顧未及著書 然其晩歲益自信地轉無疑 世之慕德保者 見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鼓琴瑟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 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嘗隨其叔父書狀之行 遇陸飛 嚴誠 潘庭筠於琉璃廠 三人者 俱家錢塘 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 然咸推服德保爲大儒 所與筆談累萬言 皆辨析經 旨 天人性命 古今出處大義 宏肆儁傑 樂不可勝 及將訣去 相視泣下曰 一別千古矣 泉下相逢 誓無愧色 與誠尤相契可則微 諷君子 顯晦隨時 誠大悟决意南歸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 具香幣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 祥也 會祭者 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名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子昂 名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轉 傳九年始至 集中有誠手畫德保小影 誠之在閩病篤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胸間而逝 遂以墨殉于柩中 吳下盛傳爲異事 爭撰述詩文 有朱文藻者寄書言狀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考諱櫟 牧使 祖諱龍祚 大司諫 曾祖諱潚 參判 母淸風金氏 郡守枋之女 德保以英宗辛亥生 得蔭除繕工監監 役 尋移敦寧府參奉 改授世孫翊衛司侍直 叙陞司憲府監察 轉宗親府典簿 出爲泰仁縣監 陞榮川郡守數年 以母老辭歸 配韓 山李弘重女 生一男三女 婿曰趙宇喆 閔致謙 兪春柱 以其年十二月八日 葬于淸州某坐之原 박지원朴趾源이 작성한 홍대용의 묘지명이다. 덕보德保가 별세한 지 3일이 되던 날 손님 중에서 연사年使(해마다 가는 冬至使를 말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이가 있 는데,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통과하게 된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가 있는데, 성명은 손유의孫有義로 호號는 용주蓉洲이다. 지 난해 내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던 길에 용주를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편지를 써 놓게 되어서 거기에 덕보가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까지를 갖추 말하고 또 가져간 토산물 몇 가지를 놓아두어 정의를 표하고 돌아왔었다. 용 주가 그 편지를 펴 보면 응당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을 알았을 것이리라. 그래서 손님 가는 편에 그에게 부고하기를, 건륭乾 隆 계묘년(1783, 정조 7) 모월 모일에, 조선 사람 박지원朴趾源은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용주蓉洲 족하足下에게 아룁니다. 내 나 라 전직 영천군수榮川郡守 홍담헌洪湛軒, 이름은 대용大容, 자字는 덕보德保가 금년 10월 23일 유시酉時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 소에 아무 탈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말을 못하더니, 얼마 뒤에 곧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요, 아들 원 薳은 통곡중이라 정신이 혼미하와 손수 글을 올려 부고를 하지 못하고 또 양자강揚子江 이남은 인편의 계제가 없었습니다. 부 디 비옵건대, 이를 대신하시어 오중吳中에 부고하여,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의 별세한 날을 알게 하여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 한됨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하여, 손님을 보내고 나서, 손수 항주杭州 사람들의 서화書畫와 편지, 그리고 시문詩文 등을 점검하니 모두 10권이었다. 이것을 빈소殯所 곁에 진설해 놓고 구柩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노니, 아! 슬프다. 덕보는 통달 하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미하며, 더욱 율력律曆에 장기가 있어 혼의渾儀 같은 여러 기구 15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47 를 만들었으며, 사려 思 慮 가 깊고 골독 汨 篤 (한 가지의 일에 정신을 씀)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 機 智 가 있었도다. 서양 사람이 처 음 지구 地 球 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 학설이 묘미하고 현오 玄 奧 하였다. 다만 저서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그 만년에 있어서는 더욱 지구가 돈다는 것에 대해 자신을 가졌으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세상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찍이 스스로 과거할 것을 그만두고 명리 名 利 에 뜻을 끊고서 한가히 앉아 명향 名 香 을 태우고 거문고와 비파를 두드리면서 나는 장차 아무 욕심없 이 고요히 자희 自 喜 의 태도로 마음을 세속 밖에 놀게 하겠노라 하는 것만 보았지, 특히 덕보는 서물 庶 物 을 종합 정리하여 체 계있게 분석하였으므로, 방부 邦 賦 를 맡고 절역 絶 域 에 사신갈 만하며, 통어 統 禦 의 기략 奇 略 이 있었다는 것은 모른다. 그런데, 그 는 홀로 혁혁 赫 赫 하게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했던 까닭에 겨우 몇 군의 원을 지내면서 부서 簿 書 를 조심하고 기 회 期 會 에 앞서 일을 잘 처리함으로써, 하부 관리들은 할 일이 없고 백성들은 잘 순화되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언젠가 그 는 그 숙부가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중국에 갈 때 따라가 유리창 琉 璃 廠 에서 육비 陸 飛 ㆍ엄성 嚴 誠 ㆍ반정균 潘 庭 筠 등을 만났다. 세 사 람은 다 집이 전당 錢 塘 에 있는데 그들은 모두 문장ㆍ예술의 선비였으며, 그들이 교유 交 遊 한 이들도 모두 해내 海 內 (중국 전토를 가리킴)의 저명한 인사였다. 그러나 모두들 덕보를 대유 大 儒 라 하여 추복 推 服 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필담한 수만 언 言 은 모두 경지 經 旨 ㆍ천인성명 天 人 性 命 ㆍ고금출처대의 古 今 出 處 大 義 에 대한 변석 辨 析 이었는데 굉사 宏 肆 하고 준걸 儁 傑 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었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할 때, 서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황천 黃 泉 에서 서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생시에 학문에 더욱 면려하기를 맹세하자 하였다. 덕보 는 엄성과 특히 뜻이 맞 았으니 그에게 풍간 諷 諫 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을 때를 따라 해야 한다 고 하였을 때, 엄성은 크게 깨달아 이에 뜻을 결단하였다. 그후 남쪽으로 돌아간 뒤 몇 해 만에 민 閩 이란 땅에서 객사를 하였는데 반정균은 덕보에게 부고를 하 였다. 덕보는 이에 애사 哀 辭 (제문)를 짓고 향폐 香 幣 를 갖추어 용주에게 부치니, 이것이 전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이 대상 大 祥 이었다. 대상에 모인 사람들은 서호 西 湖 의 여러 군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르기를 명감 冥 感 의 이른 바다 고 하였다. 엄성의 형 엄과 嚴 果 가 분향 치전 致 奠 하고 애사를 읽어 초헌 初 獻 을 하였다. 엄성의 아들 앙 昻 은 덕보 를 백부라 고 써서 그 아버지의 철교유집 鐵 橋 遺 集 을 부쳐 왔는데, 전전 轉 轉 하여 9년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 린 덕보의 작은 영정 影 幀 이 있었다. 엄성은 민 閩 에서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오하 吳 下 의 사람들은 유별난 일이라 하여 성하게 전하 며, 이것을 두고 다투어 가며 서로 시문으로 찬술하였으니, 이에 대한 사실은 주문조 朱 文 藻 란 사람이 편지를 하여 그 형상을 말해 주었다. 아! 슬프다. 그가 생존하였을 때 낙락 落 落 한 것이 마치 왕고 往 古 의 기적 奇 蹟 과 같았으니, 그래서 지극한 성품의 좋은 벗이 있어 그의 이름을 반드시 널리 전하려고 함이라. 비단 그 이름이 강남 江 南 에만 두루 전해질 뿐만이 아닐 것이니, 내가 묘지 墓 誌 를 하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썩지 않을 것이다. 고 考 (돌아간 아버지)는 휘 諱 가 역 櫟 인데 목사 牧 使 요, 조고 祖 考 는 휘가 용조 龍 祚 인데 대사간 大 司 諫 이요, 증조고 曾 祖 考 는 휘가 숙 潚 인데 참판 叅 判 이다. 그리고 모 母 는 청풍김씨 淸 風 金 氏 군수 방 枋 의 딸이다. 덕보는 영종 英 宗 신해년(1731, 영조 7)에 나서 벼슬은 음직 蔭 職 으로 선공감 감역 繕 工 監 監 役 에 제수되고 이어서 돈녕부 참봉 敦 寧 府 叅 奉 으로 옮겼으며, 세손 익위사 시직 世 孫 翊 衛 司 侍 直 에 고쳐 제수되었고, 그 다음엔 사헌부 감찰 司 憲 府 監 察 에 승진되었다가 나중에는 종친부 전부 宗 親 府 典 簿 에 전직되었다. 외직 外 職 으 로는 태인현감 泰 仁 縣 監 이 되었다가 영천 군수 榮 川 郡 守 에 승진하여 수년 만에 어머니의 늙으심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왔 다. 부인은 한산 韓 山 이홍중 李 弘 重 의 딸이요, 자녀로는 1남 3녀를 낳았으니, 사위는 조우철 趙 宇 喆 ㆍ민치겸 閔 致 謙 ㆍ유춘주 兪 春 柱 이 다. 그해 12월 8일 청주 淸 州 아무 좌향의 둔덕에 장사하다. 홍대용 생애와 행적 153

148 12세(1742, 영조18) * 석실서원石室書院으로 당고모부인 김원행金元行을 찾아가 그 문하에 들어감 십수세十數歲 때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어 장구章句ㆍ우유迂儒의 학문을 아니 하기로 맹세하고 군국경제軍國經濟의 학學을 겸하여 사모하였으며 과거는 여러 번 보아도 합격이 되지 않았다 ( 與汶軒書, 외집 권1) (2) 湛軒書 外集 권1, 杭傳尺牘, 與汶軒書 去十月 具一札寄三店 已關照否 卽此歲寒 起居如何 臨汾想是仙庄 果已尋松菊 不復爲僑寓計耶 貧者雖曰士之常 亦人 生之至不幸耳 許魯齋敎學者先務治生 深有意見 雖躬稼服賈之中 苟爲先義而後利 何往而非學也 長貧賤說仁義而竟不能康 濟身家 君子不如是也 惟志於富厚則不可耳 泃河一面 奄已九年矣 每奉手札 忠愛懇眷 有透金石 容實感服 銘在心肺 惟萬 里各天 再會無期 每一念之 方寸欝激 直欲奮飛而不可得爾 容自十數歲 有志於古學 誓不爲章句迂儒 而兼慕軍國經濟之業 累擧不中 三十七歲 奄罹荼毒 三年之後 精神消落 志慮摧剝 望絶名途 廢棄擧業 將欲洗心守靜 不復遊心世網 惟其半生 期會卒未融釋 雖杜門琴書 時政不騰口不除目不剽耳 自他人觀之 非不澹且寂也 夷考其中 或不禁愁憤薰心 以此其發之詩 句 强作關談之套語 未掩勃谿之眞情 乃蒙尊兄慧眼一照 獲出眞贓 敎戒至此 頂門一針 五內感刻 閣內胎候 更有餘望 卜姓 之計 已有定筭否 吾兄年近五十矣 早晩漆丁 雖有繼體之幸 亦有敎養之撓而產業之幹蠱 疾痛之嘗藥 畢竟無所依賴 東方有 諺曰 植松望蔭 人壽幾何 摠不如早取昆從之子 聊寄漆下之歡 均是父祖遺體 螟蛉類我 亦係天屬 亦復何恨 况向後有男 不 害爲一擧而兩得 盛意如何 唐虞之際 以聖人試聖人 不過觀刑于二女 信乎女子之難養而妻妾之難御也 老夫女妻 恩愛一偏 未必不爲亂家之本 必使卑不踰尊 賤不凌貴 新不間舊 然後上下有辨而家道立矣 然亦不可以他求 以道忘慾 正吾身而已矣 區區警省之語 爲尊兄一誦焉 弊廬八詠 得尊兄一語 已屬奇事 承文垣諸公 多許聯唱 聞來欣踴 益感吾兄曲賜闡揚 遙獲我 心 澹園郭公近况佳否 愛而不見 相思彌襟 曾請小像 勿令落莫 其書畫手蹟 多賜幾幅 得與諸友分作寶藏 浙杭書緘 或有回 音否 弟昨冬一病 半年進退 近纔差安 家居無事 棲心經卷而已 我輩萬里相思 一年一便 苦其稀闊 其間有去而無來 亦已屢 矣 豈尊居之於三河 亦未能頻有便信否 一便無書 終歲紆欝 故人知愛 寧不相念 惟此一事 萬祈垂諒 不宣 眞侵通韵 於古 有之否 侵覃鹽咸通韵 眞元寒刪先通韻 而來詩中有幽居不全貧 又長嘯撫瑤琴 或是誤落耶 東國別有諺字 有其音而無其義 字不滿二百 而子母相切 萬音備焉 婦人及庶民不識字者 幷用諺字 直以土話爲文 凡簡札簿書 契券明暢 或勝眞文 雖欠典 雅 其易曉而適用 未必不爲人文之一助 凡經書字音 皆有諺釋 故字之在經者 一國無異音 累世無變聲 등문헌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략) 용容은 10여 세 때부터 뜻을 고학古學에 두어 장구章句의 말절만을 닦는 우활迂闊한 유자는 되지 않겠다고 맹서 하였고, 겸하여 군국軍國의 경제사업에 마음을 두어, 여러 번 과거에 응하였으나 합격되지 못하였으며, 37세 때에 문득 친상 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난 뒤로는 정신이 떨어지고 뜻이 꺾여, 공명의 길에서 희망을 끊고 과거를 포기해 버리고 나서 장 차 마음을 깨끗이 씻어 고요히 지키어, 다시는 세상일에 마음을 돌리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반평생 동안의 기약했 던 일이 마침내 완전히 녹아 없어지지 못하여 비록 문을 처닫고 거문고와 서화를 희롱하며, 시정時政을 입에 올리지 않고 눈 에 두지도 않고 귀로 엿듣지도 않지만 타인으로 볼 때는 담박澹泊하고 고요한 것 같으면서도 그 속을 찾아보면 혹 수심과 분 개가 마음을 태워서 이것이 시구詩句로 발표될 때에 참여 간섭하는 말투가 강하게 되고, 화를 내며 반항하는 진정을 가릴 수 없이 됩니다. 이에 존형의 명철하신 눈으로 한 번 비춰 진짜 잘못된 것을 찾아내어 훈계하여 주심이 여기에 이르니, 이것은 정히 정문頂門에 일침一針을 놓은 것이라, 깊이 감동하여 오장에 새겨둡니다. 합부인의 생산이 아직도 여망이 있을 터인데, 소 실을 얻을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습니까? 형의 연세 50이 가까웠으니, 조만간 슬하膝下에 뒤 이을 자식을 둔다 하여도 이를 교양하는 어려움이 있고, 또 가산을 맡아보고 몸 아플 때 약시중 해주는 일 등은 필경 의뢰할 데가 없이 될 것이니, 동방 속 담의 이른바 소나무를 심어 정자를 만들기 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오래 삽니까? 일찍이 형제의 아들을 키워 15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49 서 슬하의 낙을 거기에 붙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다 같이 한 부조父祖의 혈통이니, 양자를 삼아 나를 닮게 하는 것도 천리 의 자연한 일이니 또 무엇이 한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 뒤로 남자를 둔다 하여도 일거양득이 되는 일이니 존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우唐虞 때는 성인으로서 성인을 시험하였는데 두 딸을 주어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보았을 뿐이니 참 으로 여자란 기르기 어려운 것이요, 처첩妻妾이란 어거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늙은 남편과 젊은 첩과의 사이는 은애恩愛가 한 번 편벽되면 그것이 집안을 어지럽히는 근본이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낮은 것으로 하여금 존귀한 것을 넘지 못하게 하고, 천한 것으로 하여금 귀한 것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며, 새로운 것으로 하여금 옛것을 이간離間하지 못하게 하여야 상하의 분변이 있게 되어 가도家道가 바로잡힐 것입니다. (하략) 21세(1751, 영조27) * 부친의 근무지인 영읍榮邑을 여행함 이곳에서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노소분당老少分黨에 의문을 보임( 渼上記聞 ) (3) 湛軒書 內集 권1, 記聞, 渼上記聞 余於辛未在嶺邑 偶得尹拯文稿 喜其文詞暢通 辭氣婉順 早晩耽看 頗入其說 意謂尤翁眞箇可疑 尹拯容有可恕 又略聞辛 壬事 且意彼固逆矣 此亦不能無罪 左思右想 愈覺疑晦 其年夏 來拜江上 卽以奉禀焉 先生曰 試言其所疑者何事 余仍歷陳 之 以爲尤翁於美村墓文 旣知其爲鐫黨 則何不如栗谷之於金大成 旣不得辭 則褒揚不及而譏嘲顯加 終引玄石 决是有意 而 乃以瀧崗阡表等說 費辭分踈 心口相違 殊涉苟且 山嶽彊弱之說 簸弄笑侮 人子之心 安得晏然 傷人兩尊之語 只誘以問諸 水濱 而滄洲之欵於美村 考證鑿鑿 言之虛實 有未可知 屠門依市 宣旣有斥 庚午憲職 拯亦進疏 中毒蹇騰 語近驅脅 草廬 禮說 旣已點考 從而斥之 前後矛盾 無恠其怒 驪狗醜辱 疾之已甚 春秋大義 繼之無實 此尤翁之可疑也 權金同焚 栗谷入 山 語勢之當然 不爲傷勇之說 則權金之節 無誣可辨 若論初年之事 則栗谷之失 人所共知 或謂訾毁節士 或謂誣辱先正 皆 是只見不是而不盡人言者也 城西之奠 旣非惡逆 舊義猶存 則倉卒未拒 豈至大故 父師雖一 輕重自別 旣難兩全 就捨可知 此拯之容有可恕者也 至於辛壬事 交通紅袖 狼藉行貨 欲將何爲 此辛壬之可疑者也 先生聽畢 時適侵夜 未及明燈 但聞劃 然長噓 所把扇子張而復捲 拂拂風生 余甚悚然 恨其語太徑直 必將重得罪 默俟良久 忽厲聲曰 君以入山之說 謂非誣賢 則 誠迷惑無可奈何矣 尤翁之事 設或過中 只是朱子所謂太陽症發者也 若如君說 則雖無狀惡小人 不是過也 更有何說 且子過 矣 王考丈平生信服尤翁 至疏請廟庭之配 雖以辛壬事言之 同被斥逐 遯于荒裔 幾陷不測 雖輕重之有間 死生之不同 而氣 味相通 榮辱相關 君於家庭之間 尙不能篤信世德 乃如是妄生疑惑 此决非吾智力之所及 言語之所辨 君其任爲之 余驚愧汗 出 慚無以對 良久乃黽勉而進曰 無大疑者無大覺 與其蓄疑而含糊 何如審問而求辨 與其面從而苟合 無寧盡言而同歸乎 先 生乃下氣徐言曰 吾亦知君志在思問 心實無他 吾視君於士友中實不易得 眷愛非比他人 烏可遽以是疑之乎 君試濯去舊見 平心思之 先其大體而後其小節 以至卒瀾漫而歸一 則旣往之疑 何足爲過乎 問 今日國事如有用我 何者爲先 先生憑几久之曰 昔人問時事於金寒暄 寒暄答曰 吾方未免於小學童子 安知時事 今吾輩又 不及於寒暄遠矣 國事何可論也 辛未夏 自石室往拜 先生坐秋水軒 時宿雨新晴 江水大漲 壁上新題觀漲四言詩十六句 末言靜言今世 孰有此襟 維以爲歌 以宣我心 顧余微笑曰 君試看此氣像 誰能當之 對曰 雖孟子何以過此 曰 君言固是 然何必上及孟子 德雖不及大賢 而襟懷 灑落 無許多委曲墻辟 亦自好氣像 可以與此 今世亦豈無當此者乎 仍曰 人生斯世 得如此師友亦自不易 미상기문渼上記聞 의 한 부분으로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노소분당老少分黨에 의문을 보인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나는 신미년에 영읍嶺邑에서 우연히 윤증尹拯의 문고文稿를 얻었다. 그 문사文詞가 창통暢通하고 사기辭氣가 완순婉順함 홍대용 생애와 행적 155

150 을 좋아하여 조석으로 탐간耽看하여 자못 그 설에 빠져 들어가서 생각하기를, 우옹尤翁은 참으로 의심스럽고 윤증尹拯이 혹 용서容恕할 수 있지 않았는가? 하였으며, 또 대략 신임辛壬의 일은 듣고 또 생각하기를, 저쪽이 역逆임은 사실이나 이쪽도 또 한 죄가 없지 않다. 하여 좌사우상左思右想하며 더욱 의회疑晦를 느꼈다. 그해 여름에 강상江上에 내배來拜하고 곧 봉품奉稟하 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그 의심된 바가 무슨 일임을 말해 보라 함으로, 나는 역진歷陳하기를 이렇게 하였다. 우옹尤翁이 미 촌 묘문美村墓文에 있어서 이미 그 휴당鑴黨임을 알았으면 어째서 율곡栗谷의 김대성金大成에 대해서와 같이 못했으며 기왕 사 양을 못하니 포양褒揚이 미치지 않고 기조譏嘲를 현가顯加하되 마침내는 현석玄石을 인용하였으니 결코 뜻이 있었을 것인데 이에 용강천표瀧岡阡表 등 설로써 비사費辭하고 분소分踈하여 마음과 말이 서로 어기니 자못 구차한 것이 되었고, 산악강약山嶽 彊弱의 설로 파롱簸弄하고 소모笑侮하니 인자人子의 마음에 어찌 안연晏然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양존兩尊을 상하는 말은 다만 수빈水濱에 물음으로 꾀이고 창주滄洲가 미촌美村에 관款함이 고증이 착착鑿鑿하여 말의 허실을 알 수 없고, 도문屠門의 의시依市는 선宣이 이미 척斥함이 있고, 경오庚午의 헌직憲職에 증拯도 또한 진소進疏하였는데 중독中毒하여 건등蹇騰이라 하니 말이 구협驅脅에 가깝고 초려草盧의 예설禮說은 이미 점고點考한 바인데 따라 배척하여 전후가 모순되니 그 노함이 무괴無恠합 니다. 여구驪狗란 추욕醜辱은 미워함이 너무 심하고 춘추春秋 대의大義는 이어진 실實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옹尤翁의 의심스러 운 것입니다. 권ㆍ금權金의 동분同焚과 율곡栗谷의 입산入山은 어세語勢의 당연함이요, 용勇을 상傷하는 말이 아니니, 권ㆍ금의 절節은 무誣를 변辨할 것이 없음인데, 혹은 초년의 일을 논하면 율곡栗谷의 실失은 사람이 다 아는 바이다. 만일 절사節士를 자훼訾毁 한다 이르고, 혹은 선정先正을 무욕誣辱했다 하니, 모두 다만 옳지 못함만 보고 사람의 말을 다 알아주지 못한 것입니다. 성서 城西의 전奠은 악역惡逆이 아니고 구의舊義가 아직도 있으니 창졸간倉卒間에 거절 못한 것이 어찌 대고大故에 이르겠습니까? 부사父師가 비록 한 가지나 경중은 스스로 구별되는데 이미 양전兩全하기 어려우니 취사就捨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은 증拯의 혹 용서할 수 있는 점입니다. 신임사辛壬事에 이르러는 홍수紅袖를 교통交通하여 낭자狼藉히 행화行貨하였으니 장 차 어찌 하자는 것이었던가요? 이것은 신임사의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선생이 다 듣고, 때마침 어두운 밤이라 미처 등燈이 밝혀지지 못했는데, 다만 획연劃然히 긴 한숨만 들리고 잡은 부채는 폈다 거뒀다 하며 바람을 부쳐 날린다. 내가 심히 송연悚然하여 말이 너무 경직徑直했던 것이 한스러웠으며 반드시 중하게 죄 를 얻을까 두려웠다. 묵묵히 기다린지 한참 되니, 곧 노기를 띤 목소리로 이르기를, 군이 입산入山의 설說로써 무현誣賢이 아 니라고 하면 진실로 미혹迷惑하여 어찌할 수 없다. 우옹의 일은 설혹 중中에 지나치더라도 다만 주자朱子의 이른바 태양증太 陽症이 발한 것일 뿐이다. 만일 군의 설과 같다면 무상無狀한 악소인惡小人이라도 여기서 지나지 못하니 다시 무슨 말이 있겠 는가? 또 그대는 과하다. 왕고장王考丈이 평생에 우옹을 신복信服하여 묘정廟庭의 배향配享을 소청疏請하기까지 이르렀는데, 비 록 신임辛壬의 일로써 말한다 해도 같이 척축斥逐을 입어 황예荒裔에 돈遯하여 거의 불측不測에 빠졌으니, 비록 경중輕重이 차 差가 있고 사생이 같지 않더라도 기미氣味가 서로 통하고 영욕榮辱이 서로 관계되는데, 군君이 가정家庭의 사이에서도 오히려 세덕世德을 독신篤信치 못하고 이같이 망령되이 의혹을 내니, 이는 결코 나의 지력智力의 미칠 바 아니요, 언어로서 변辨할 바 아니다. 군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나는 경괴驚愧하여 땀이 나서 부끄러워 대할 수 없었다. 양구良久에 나는 힘써 나아가 말씀을 드리기를, 큰 의심이 없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습니다. 의심을 품고 함호含糊하기보다 자세히 묻고 분변分辨을 구함이 나으며 낯으로 좇고 구합苟合하기 보다 차라리 말을 다하고 함께 돌아감이 낫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에 기氣를 낮추고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나도 군의 뜻이 사문思問에 있고 마음은 실로 다름이 없음을 안다. 내가 군을 사우士友중에서 실로 얻기 쉽지 못한 사람으로 보고 권애眷愛가 타인에 비할 바가 아닌데 어찌 문득 이로써 의심하겠는가? 군은 시험하여 구견舊見을 탁거濯去하고 평심平心으로 생각하여 그 대체大體를 먼저하고 그 소절小節을 뒤로 하여 마침내 난만瀾漫하여 귀일歸一함에 이르면 기왕旣徃의 의심이 무슨 허물될 것이 있겠는가? 하셨다. 15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51 23세(1753, 영조29) * 석실서원에서 주세붕周世鵬의 후손 주도이周道以를 만나 사귐 * 증주도이서문贈周道以序文 을 지음 * 숙부 홍억洪檍이 문과에 장원함 (4) 湛軒書 內集 권3, 序, 贈周道以序 嶺之南 素稱東國之關閩 晦 陶唱之於前而寒 旅繼之於後 濂洛之際 於斯爲盛 不幸顒 弘變之於前而希 麟亂之於後 戕賢 毒正之論 詬天罵日之徒 接踵而作 環七十二州陷而爲夷狄禽獸之域者 盖百有餘歲矣 當是之時 有周君道以者擧于㓒原 退 陶之友愼齋公之後也 年未及卅歲 身不滿七尺 慨然有志於述乃祖之事而繼晦陶之業 鄕里排之而其執愈固 親戚笑之而其志 益篤 輕千里而從師于驪江之上 往來于京中諸賢者之家 諸賢家見之者 亦莫不奇其志而嘉其誠焉 旅遊四年 飯糗齕匏 不足 則粥衣而繼之 身且多病 祈寒暑雨 備嘗艱辛而不以爲悔 嗚呼 若道以者 其孟氏所謂豪傑之士者歟 余聞其名而恨未之見 歲 癸酉仲冬 始遇于石室院中 面白而眸瞭 氣淸而言簡 一見可知其爲恬靜寡欲若士矣 與之處旬月有餘 雖宿疾間作而咿唔之聲 不輟於曉夜 其求道之篤 進學之勇 求之今世 盖寡儔焉 如余懶惰者 每睡思朦朧 聞其讀書之聲 輒瞿然驚醒也 君之賜我多 矣 君不以余爲無狀 欲處之以相觀之列 余何敢當 雖然 余亦非全然無意者 其志與道 固未嘗不同 則規以失責以善 余不欲 終辭而亦不能無望於君矣 今余將自院歸于京城 君則將以明春轉向驪江 因踰嶺而南歸 後期邈然 仁者贈言之事 雖未敢焉 兒女惜別之態 余豈爲哉 且以吾之所以自勉者 告之可乎 堯舜之德 理而已而吾與子有其理矣 堯舜之能 心而已而吾與子有 其心矣 爲之則堯舜 不爲則桀紂 此非吾與子之所共勉者乎 堯舜之所以聖 事事當其理而已 桀紂之所以愚 事事不當其理而 已 患不能求爾 何患其不至也 古之學者 纔知一事 便行一事 一摑一掌血 一捧一條痕 今之學者 開口便說性善 恒言必稱程 朱 而高者汩於訓詁 下者陷於名利 嗚呼 孰不知聖人之可好而世無其人 孰不知下流之可惡而衆皆歸之 無他 不行之過也 人 能行其所知 何古人之不可及哉 讀精一便去精一 讀敬義便去敬義 吾與子行之一字 時君讀心經故云 주도이에게 보낸 글이다. 영남嶺南은 본디 동국東國의 관민關閩이라 일컫는다. 회재晦齋와 퇴도退陶가 앞서 인도하고,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이 뒤에 잇달았으니, 염락濂洛의 시절이 이때에 융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우옹金宇顒과 정인홍鄭仁弘이 앞서 변고를 일으 키고 정희량鄭希亮과 이인좌李麟佐가 뒤에 난리를 일으켰으니, 어진 이와 정직한 자를 모해하는 의론과 하늘을 욕하고 해를 꾸짖는 무리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러므로 빙 둘러있는 72주州가 이적ㆍ금수의 지경에 빠져버린 지 아마 백 년이 넘으리라. 이때를 당해서 주군周君 도이道以란 사람이 칠원漆原에서 생장하였는데, 퇴도退陶의 친구였던 신재공愼齋公의 후손으로서 나이 는 30이 채 못되고 체구는 7척尺이 차지 않았으나 몹시 슬퍼하는 모습으로 그 조상의 일을 기술[述]하고 회재와 퇴도의 업業 을 계승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향리鄕里가 배격했으나 그는 마음이 더욱 굳었고, 친척이 비웃었으나 그는 뜻이 더욱 돈독했 던 것이다. 천리 길을 가볍게 여기고 여강驪江 위에서 스승을 따랐고, 서울 안의 모든 현자賢者의 집에 왕래하였다. 그를 본 모든 현자들은 또한 그의 뜻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4년 동안 나그네 생활 로 쌀가루를 먹고 박나물을 씹었으나 그래도 부족해서 의복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 몸 또한 병이 많았으나 추위와 더위에 온 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아! 도이 같은 이는 맹씨孟氏가 이른바 호걸의 선비[豪傑之士] 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듣고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더니, 계유년癸酉年 동짓달에 석실 원중石室院中에서 처음 만났었다. 그는 얼굴이 희고 눈동자가 분명하며 기질이 맑고 말씨가 적었다. 한 번 보아도 그가 조용하고 욕심이 적은 선비인 줄을 알 수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함께 거처했는데, 비록 묵은 병이 간혹 발작되었으나 글 읽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그치지 않았 으니, 도道를 구하는 돈독한 마음과 배움에 나아가는 용맹은 지금 세상에 구하여, 아마 상대될 짝이 적을 것이리라. 나처럼 게으른 자도 매양 자고 싶은 생각이 나고 정신이 흐려질 때에 그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경계하고 깨닫게 되었으니, 홍대용 생애와 행적 157

152 그대는 나에게 도움된 것이 많았다. 그대는 나를 보잘 것 없이 여기지 않고 상종할 만한 자로 대하고자 하였으나, 나는 감히 당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 러나 나도 또한 전혀 뜻이 없는 자는 아니다. 그 뜻과 도가 진실로 같지 않음이 없어서 잘못을 간하고 착함을 권한다면 나도 끝내 사양하고 싶지 않고, 또한 그대에게도 희망이 없을 수 없다. 지금 나는 장차 서원書院에서 경성京城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대도 장차 내년 봄이면 다시 여강驪江으로 향하여 그 길로 재[嶺]를 넘어 남쪽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뒷 기약이 막연하 다. 어진 자의 증언贈言하는 일은 비록 감히 할 수 없으나 아녀자兒女子의 석별惜別하는 태도야 내가 어찌 하겠는가? 장차 우 리가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을 가지고 일러줌이 마땅할 것이다. 요순堯舜의 덕은 이치뿐이니, 나와 자네도 그 이치가 있고 요순의 능함은 마음뿐이니, 나와 자네도 그 마음이 있다. 그러 므로 하면 요ㆍ순이 되고 아니하면 걸ㆍ주桀紂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자네로서 함께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요ㆍ순의 성인聖人이 된 까닭은 일마다 그 이치에 알맞게 했기 때문이고, 걸ㆍ주의 하우下愚가 된 까닭은 일마다 그 이치에 알맞게 못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구하지 않음을 걱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하겠는가? 옛날 학자들은 격우 한 가지의 일을 알면 즉시 그 일을 행하되, 마치 한번 뺨을 치면, 한 손바닥에 피가 맺히고, 한번 몽둥이로 때리면, 한 가닥에 흔적이 생기듯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입만 열면 곧 성선性善(人性)은 원래 착하다를 말하고 말만 하면 반드시 정ㆍ주程朱를 일컬으나 재 주가 높은 자는 훈고訓詁에 빠지고, 지혜가 낮은 자는 명예와 이욕에 떨어지고 있다. 아아! 성인이 좋은 줄을 뉜들 모르랴마 는 세상에는 그에 알맞는 사람이 없고, 하류下流가 나쁜 줄을 뉜들 모르랴마는 뭇 사람은 모두 그에로 돌아가도다. 이는 다름 아니라 행하지 않은 탓이다. 사람이 능히 그 아는 바를 행한다면 어찌 옛 사람에게 미칠 수 없겠는가? 정일精一(정미하고 전일 함)을 읽으면 정일로 가야하고 경의敬義(공경하고 의로움)를 읽으면 경의로 하는 것이니, 나는 자네에게 행(行하라는 뜻) 이란 한 글자를 주는 바이다. 이때에 그대가 심경心經 을 읽는 까닭에 이런 말을 한다. 25세(1755, 영조31) * 박지원朴趾源과 교유 (5) 湛軒書 外集 권1, 序, 會友錄序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與天無極而名山巨嶽根盤其中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其爲地也亦已狹矣 非古之 所謂楊墨老佛而議論之家四焉 非古之所謂士農工商而名分之家四焉 是惟所賢者不同耳 議論之互激而異於秦越 是惟所處者 有差耳 名分之較畫而嚴於華夷 嫌於形跡則相聞而不相知 拘於等威則相交而不敢友 其里閈同也 族類同也 言語衣冠其與我 異者幾希矣 旣不相知 相與爲婚姻乎 不敢友焉 相與爲謀道乎 是數家者 漠然數百年之間秦越華夷焉 比屋連墻而居矣 其俗 又何其隘也 洪君德保嘗一朝踔一騎 從使者而至中國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於是間步旅 邸 歡然如舊 極論天人性命之源 朱陸道術之辨 進退消長之機 出處榮辱之分 考據證定 靡不契合 而其相與規告箴導之言 皆出於至誠惻怛 始許以知己 終結爲兄弟 其相慕悅也如嗜欲 其相無負也若詛盟 其義有足以感泣人者 嗟乎 吾東之去吳幾 萬里矣 洪君之於三士也 不可以復見矣 然而向也居其國則同其里閈而不相知 今也交之於萬里之遠 向也居其國則同其族類 而不相交 今也友之於不可復見之人 向也居其國則言語衣冠之與同而不相友也 迺今猝然相許於殊音異服之俗者 何也 洪君 愀然爲間曰 吾非敢謂域中之無其人而不可與相友也 誠局於地而拘於俗 不能無鬱然於心矣 吾豈不知中國之非古之諸夏也 其人之非先王之法服也 雖然 其人所處之地 豈非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所履之土乎 其人所交之士 豈非齊魯燕趙吳楚閩蜀 博見遠遊之士乎 其人所讀之書 豈非三代以來四海萬國極博之載籍乎 制度雖變而道義不殊 則所謂非古之諸夏者 亦豈無爲 之民而不爲之臣者乎 然則彼三人者之視吾 亦豈無華夷之別而形跡等威之嫌乎 然而破去繁文 滌除苛節 披情露眞 吐瀝肝膽 15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53 其規模之廣大 夫豈規規齷齪於聲名勢利之道者乎 迺出其所與三士譚者 彙爲三卷以示余曰 子其序之 余旣讀畢而歎曰 達矣 哉 洪君之爲友也 吾乃今得友之道矣 觀其所友 觀其所爲友 亦觀其所不友 吾之所以友也 燕巖朴趾源序 회우록 에 대한 서문 - 홍대용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삼한三韓 삼십육도三十六都의 땅을 둘러보건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임하여 하늘과 맞닿아 끝이 없고, 이름난 산과 거 대한 산악이 그 가운데 뿌리박아 서리고 있는데, 들은 백리 되는 데가 드물고 읍邑은 천호되는 데가 없으니 그 땅덩이가 또 한 너무나 좁다 하겠다. 옛날의 이른바 양ㆍ묵ㆍ노ㆍ불楊墨老佛도 아니면서 의론의 파벌이 넷이나 되고 옛적의 이른바 사ㆍ농 ㆍ공ㆍ상士農工商도 아니면서 명분名分의 주장이 넷이나 되니, 이것은 오직 낳게 여기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요, 오직 처한 바가 다른 까닭이다. 의론이 서로 충돌되어 진ㆍ월秦越의 사이보다도 더하고 명분이 너무 그어져 화ㆍ리華夷의 구별보다도 엄 격하다. 형적이 혐의쩍으면 서로 들으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등위等威(신분, 위세)에 구애되면 서로 상대하면서도 감히 벗하지 못한다. 사는 마을이 같고 종족이 같아 언어와 의관이 나와 다른 것이 거의 없건마는, 이미 서로 모르는 체하고 지내니 같이 혼인할 수 있으며, 감히 벗하지 못하고 지내니 같이 도道를 의론할 수 있겠는가! 이 몇 갈래 가家들이 막연하게 수백 년 동안 을 진ㆍ월과 같고 화ㆍ리와 같이 대립된 상태로 집을 나란히 하고 담장을 연대어 살고 있으니, 그 습속이 또한 어찌 그리도 좁은 것일까! 홍군洪君 덕보德保가 일찍이 어느 날 한 필의 말로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 시가市街사이에서 방황하며 서민 속에서 맴돌 고 있던 중 항주杭州의 유학하는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남 보지 않는 틈에 여관으로 찾아가니, 옛친구와 같이 반기면서, 천명ㆍ인성의 근원[天人性命之源],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의 학술의 구분, 진퇴進退ㆍ소장消長의 기미, 출처出處ㆍ영욕 榮辱의 분수 같은 것을 더할 수 없이 토론하였는데, 고거考據와 증정證定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 서로서로 충고하 고 선도하여 주는 말이, 모두 지성至誠과 측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기知己의 벗으로 사귀다가 마침내는 형 제가 되기로 결의하여,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기를 기욕嗜欲과 같이 하고, 서로 저버리지 않기를 굳은 맹서와 같이하여, 그 의 리가 사람들을 감읍感泣시켰다. 아아! 우리나라와 오吳의 거리가 몇 만 리이니 홍군이 세 선비를 다시 만나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일 본국에 살 때에는 한마을 살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았지마는 지금은 먼 만 리 밖에서 사귀고, 전일 본국에 살 때에는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대하지 않았지마는 지금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사귀며 전일 본국에 살 때는 언어와 의관이 같으면서도 같이 사귀지 않았지마는 지금은 별안간 서로 말이 다르고 의복이 다른 세상 사람과 마음을 허락한 것은 어찌된 것일까? 홍군이 서글프게 한참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감히 국내에 그럴 사람이 없어서 서로 사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지역에 국한되고 습속에 구애되어 마음속에 답답한 생각이 없을 수 없지, 내가 어찌 오늘의 중국이 옛날의 저하諸夏(中 華의 諸侯國)가 아니고 그 사람의 옷이 선왕들의 법복法服이 아닌 것을 모르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여도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땅덩이가 어찌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가 밟던 땅이 아니며, 그 사람의 사귀는 선비가 어찌 제齊ㆍ노魯ㆍ연燕ㆍ조趙ㆍ오吳ㆍ초楚ㆍ민閩ㆍ촉蜀의 널리 보고 멀리 놀던 선비가 아니며, 그 사람의 읽는 글이 어찌 삼대三代 이래 사방 여러 나라에 한없이 펼쳐간 서적이 아닐 수 있는가? 제도는 비록 변경되었어도 도의는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니, 이 른바 옛적의 저하諸夏가 아니라는 것이, 또한 어찌 그 백성 노릇을 하면서도 그 신하 노릇은 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는가? 그 렇다면 저 세 사람들을 우리와 비교할 때 또한 어찌 화ㆍ리華夷의 구별이 없고, 형적이나 등위에 관한 혐의가 없을 것인가? 그런데 번다한 형식을 타파하여 까다로운 절차를 씻어 버리고 진정을 피력하고 간담肝膽을 토로했으니, 그 규모의 광대함이 어찌 소문이나 명예, 세력이나 이익의 길에 매어달려 조불조불하게 악착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유이겠는가? 하면서, 세 선비와 더불어 필담筆談한 것을 분류하여 3권卷으로 만든 것을 꺼내어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자네가 서문을 써주오 하 였다. 나는 다 읽고 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홍군은 벗 사귀는 도리를 통달하였도다! 내 이제야 벗 사귀는 도리를 알게 되 었도다. 그 벗 삼는 바도 보았고 그 벗되는 바도 보았으며, 또한 그 내가 벗하는 바를 그는 벗하지 않음도 보았도다. 연암燕 홍대용 생애와 행적 159

154 巖 박지원朴趾源은 서序한다. 29~30세(1759~1760, 영조35~36) * 나주羅州 동복同福 물염정勿染亭에 기거하던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혼천의渾天儀ㆍ자 명종自鳴鐘 제작 착수 기계제작을 위한 편지를 왕래함 (6) 湛軒書 外集 권3, 杭傳尺牘, 乾凈衕筆談(續) 二十七日 作書送德裕 其與篠飮書曰 昨緣客撓 未得安承淸誨 歸來茹恨 如有所失 夜來旅候萬安 行期已完决以初一 晦 日當進別 如無大故 幸俾暫接尊儀 兩日之奉 終作千古之別 歸後懷想典型 黯然在心而已 夫復何言 不備 其與力闇書曰 愚兄某頓首上力闇賢弟足下 力闇之才之高學之邃 乃吾之老師也 力闇特以我一歲之長 乃欲相處以兄 余累 辭而不敢當 則力闇反慚憫如不自容 盖其愛之深 故欲其親之至也 亦豈忍終辭乎 從此而力闇吾弟也 吾弟其勉之 恢德量勤 問學 無有作僞以飾浮藻 無放細行累大德 錫爾兄以光我 我其受之 永有辭於後人 不宣 其與蘭公書曰 書以代話 暢懷極矣 分手之懷 愈切愈難 甚矣 人情之無厭也 廿九 計將暫往永別 而分張之苦 將何以割斷 耶 不宣 昨日臨歸酬酢 蘭公始亦云然 而及其約定則蘭公不與焉 且蘭公終多客氣 未必如力闇之出於中心 故但於力闇稱兄焉 伻回 嚴潘出外 只有篠飮書 書曰 日昨本望促膝 作永日靜話 以暢離緖 而忽坐忽起 客至續續 悶絶悶絶 二公去後 益復惘惘 然 燭寫籠水閣記 欝勃之氣未平 遂致潦草 今先呈上湛軒 弟一見傾欹之態耳 金公詩軸 拜謝 先祖得此 爲不朽矣 感刻五內 如 何可言 當子孫永寶 闇秋二人 此時因望客未歸 不敢稽使 來札當留示 廿九日能來 倘無俗客 尙得暢叙 否則仍作零星斷膓 之語 亦終勝於不見也 其籠水閣記曰 虞書在璇璣玉衡 以齊七政 不言程工何人 後世言天之家 類工於制作 漢書稱平子機術特妙是也 顧中星之 候 唐虞迄周 已移午未 唐一行始定歲次 更益精密 我朝曆法 邁越前古 梯航萬國 博微算學 恒致自外洋 是則天道星志 固 有專家 不得囿之域中也 東國洪處士湛軒 於書無所不究 旁及藝術 妙析微塵 其國有羅景績者隱居同福 邃於測候 門人安處 仁 深究師傅 巧思無匹 二人者皆奇士也 湛軒皆訪致之 相與虛衷商確 損益舊制 遴材選工 三閱寒暑 爲渾儀一器 並所得西 洋候鐘 藏於其居之籠水閣 朝夕以爲觀玩 盖兩未必合 求之甚勤而爲之如此 其專且久也 夫羅與安 不得湛軒 無以發其奇 湛軒不得兩生 無以成巨制 而余非因湛軒隨貢之便 得以訂交客旅 且不知世有湛軒其人 又何由知羅安 是則天地固無奇而不 彰 而不朽之業 其傳必遠 不特兩生之於湛軒 可以慶此生之遭而余於三人者 均無憾也 抑余更有說焉 道妙於無形 凡著象於 空虛者 皆其質 而運之者氣 儀妙於法 天動於中者機 而運之者水 水之在天地也 盈則溢 淺則膠 直之則易盡 曲之則紆緩 而激焉則躍 防焉則止 皆非水之性也 儀之受水也 流而不息 注而不渴 順其自然 以任其機之內斡而無所矯楺隔閡於其間 則 與天地準 此器之所以通於道也 余不習算學 不敢譚天 湛軒講性命之學久 其玩心高明 必有不泥於器數之末者 今且別去 曠 隔異域 他日望風相憶 當有以勖我云 二十八日 送伻書曰 昨承陸兄手覆 仰慰殊切 第以未見鐵秋兩書爲悵恨 夜來僉客候萬安 行期此迫 懷事惝怳 殊不覺歸鄕 之可樂 良苦良苦 二幅簡覽可悉也 草堂詩 始擬露拙 臨行多撓心 終未成焉 可謂拙而又拙也 不宣 閣記 極是完好 且筆法 尤妙 坐令蓬蓽生輝 孤陋之幸 如何盡言 與鐵橋書曰 甚矣 鐵橋子之好學也 聞一善言如嗜欲 然余將東歸 與二君別 各以言贈之 此卽與秋言也 鐵橋子以其言頗切 直 請余更書一幅 將以兼取之焉 其可謂如嗜欲也已 雖然 此陳談也 夫人皆能言之 病不能行耳 好之而不能行之 惡在其好 之也 是以好之而能行之 其好之也益切 好之也益切 則其行之也益力 如是則天下之言善言者 皆將輕千里而至矣 其勉之哉 伻回 篠飮答書曰 飛啓 日昨從自南客 覓得金陵扇五握俱畫就 並係以詩 草草塗抹 不計工拙 今幷呈送 望分致之 我輩此 16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55 番相遇奇 固不待言 但相見之奇 又不若未見者之相望相思爲更奇 而於湛軒養虛 居然一以我爲弟 一以我爲兄 以此生此世 生生死死 不可再見之人 作此冥杳荒忽之綢繆 豈非痴絶 顧從來勢交利合多能 不顧非笑 成一時之膠漆而馳遂聲名 亦往往 千里投贈 互相要結 張一時之虛談 今我輩以曠然兩隔 彼此無求 無勢無利 不聲不名 或見或不見 幷爲一膓 乍喜乍悲 不可 言說 而養虛湛軒 又時以學問相勖 養虛之論驕字 湛軒之講事功心術之分 語語不朽 尤足千古 今且別去 以此言愁 離索之 感 定當十倍尋常矣 嗟乎 顧使車就道 只隔一日 不無整頓行囊諸須料理 而我輩來客日夥 絡繹不絶 同志者見之 方驚其奇 或亦欲與聞高論 而不知者必以我等爲騖遠忽近 多生疑謗 千別萬別 終須一別 不得不學彼氏之法痛下棒喝 以金剛慧劒 割 斷情膓 竟不必再過小寓 存此無窮之憾 作無窮之思可也 作書至此 盛使疊至 手書紛沓 爲記爲詩 但覺異光滿室 不能柝言 其妙 惟有頂禮贊歎而已 萬里知心 不敢言疲 第昨夜詩畫扇 則不止三鼓 今早又有客擾 實不能不困矣 前荷三大人札及今諸 札 俱不及分報 想念其勞 不責其慢也 紙短情長 萬千不盡 臨紙黯然之至 其金陵扇五把 分送于三大人及余與平仲也 其與余東扇 有題詩曰 參商萬古摠悠悠 欲語先看制淚流 此去著書應不朽 莫 敎容易寫離愁 其金陵扇畫數叢竹 題詩曰 得雨益斐然 着雪更淸絶 到老不改柯 中虛見高節 力闇答書曰 俗氛如蝟 刻無寧晷 苦不可言 此時正在寫書道別 而盛使適至 得仰瑤華 感荷感荷 使返怱遽 書旣未完 而帖 畫亦有二幅未竟 尙容續繳明晨 更望盛使一來 以悉種種耳 餘語具陸兄札 不贅 蘭公答書曰 日來起居極勝 念念 册頁亂塗 辱命殊甚 此刻叢雜 不暇詳答 容另札奉白 不具 僕人言人客甚擾 艱辛受答而來 蘭公册頁亦不來 吾輩明日將往相別矣 及見篠飮書 其勢然矣 盖試期不遠 事務甚煩 吾輩 來往 彼此皆甚不便 惟篠飮年最長 且性豪快 故能斷以義 兩人則盖不忍發此言也 二十九日 慮差晩則有客擾 又明將發行也 故是日開門差早 日未出 送僕人使之受書 兼請一僕同來 爲付謝之計 僕人過午 不來 乃先作書以待 與篠飮書曰 弟明發東歸 從此而不復見老兄之面矣 雖然 已獲老兄之心矣 豈不愈於終身見面而不獲心 者耶 含笑登車 無所恨矣 承諭不必更來 弟等實有此意 迷於情根 知進而不知退 足見老兄勇於斷事 尤不勝欽歎 萬萬書何 能盡 只願老兄過日益寡 德日益尊 無泥于小道 無役于科宦 以幸吾道 以慰遠懷 統希默會 昨惠兩便面詩畫 不啻百朋 且咏 竹一節 益見諷誨之意 敢不時省而自勉焉 其與力闇書曰 某啓 從此別矣 書信不可以復通矣 如之何勿悲 今日始擬趍別 昨承陸老兄書 乃其厚之至悲之切而斷于處 事也 奈何奈何 朝爲弟兄 暮爲途人 市井輕薄兒事也 此吾所甚懼焉 一別終相忘焉 有言而不見用 乃相處以途人也 請與賢 弟交勉焉 有一事欲面告 今已無及矣 玆略仰布 竊瞷賢弟之德器 長於容受而或短於含忍 好善固無已而疾惡或已甚 見人之 不善 若不能物各付物者然 幸須內省 有則改之 無則加勉也 萬萬惟祝德日新享百福 其與蘭公書曰 蘭公足下 天生我輩 分置之八千里外 今幸因緣湊巧 數十日之間 樂亦極矣 今將歸矣 亦復何恨 惟蘭公自 愛 如不相忘 幸勿思我面而思我言也 如有取也 是何異於朝暮遇也 且有一策 人惟夢魂無遠近無嫌疑 惟托此而時會于枕邊 亦可矣 不宣 書成而伻回 力闇書曰 弟誠再拜啓湛軒長足兄下 昨以事他出 手書遠賁 未及裁答 歉仄之至 蒙許以兄事而以弟畜我 古風 高義 更見今日 甚幸甚幸 訓辭深厚 所以期我者至遠且大 敢不敬佩 誠自幼失學 六七歲入鄕塾 嬉戱不異凡兒 稍長始知讀 書 然一意於科擧之業 又自恃天資差不頑鈍 繙閱群書 有同漁獵 以是根柢浮薄 至今思之 未嘗不自傷也 二十餘歲 漸識義 理 好觀濂洛關閩之書 始有志于聖賢之道 然獨學無偶 孤陋寡聞 出門倀倀 頗乏同志 加以志嚮不堅 嗜欲難遏 操存舍亡 乍 明乍昧 猶幸質非下愚 時能悔悟自克 未至汩沒性靈 然亦悠悠忽忽 迄無所就 廿九歲 大病半載 困阨之中 頗有所得 故瀕死 者再 而此心烱烱 覺得粗有把握 病後自造二句 書于臥室云存心總似聞雷日 處境常思斷氣時 又大書懲忿窒慾矯輕警惰八字 於齋居 以自警惕 誠之用心 盖略有異乎世俗之士之爲者 今恒自點撿 亦無大惡 惟口過每不自覺 故時時將口容止三字 提在 心頭 又生平過徇人情 優柔寡斷 此心受病處不少 誠交遊亦不乏矣 求其能講明切究于此種學問以相輔有成者 盖寥寥焉 今 倖竊科名 來遊京師 得與足下定交 實見足下之學不但可以爲益友 而且可以爲名師 愛之重之 心悅而誠服之 則是非科名之 足喜而籍以得交足下之爲大喜也 足下每嫌誠稱許過情 然誠非悠悠泛泛之子比也 但知足下爲益于區區者不少耳 誠威儀輕率 而足下之方嚴 實堪矜式也 誠言辭躁妄而足下之愼默 實堪師法也 又承懿訓稠疊 勉以好之必當行之 斯爲無負 此種氣誼 求 홍대용 생애와 행적 161

156 之儕輩 豈易得耶 且誠實知足下非漫爲空言者 卽使足下漫爲空言 而字字如荒年之糓 於誠身心 有終身受用之處 且凡人貴 遠忽近 使此言出于所習見之人 猶不敢以陳言棄之 而此言實出於萬里外終身不可再見之人 其爲寶貴愛重 又當如何 夫以寶 貴愛重之故而俾此言得以常目在之 則吾之身心 固已益矣 吾益于身心而所以受仁人之賜者 非淺尠矣 此實誠畢生之大幸也 誠之所欲言于足下者 雖累萬言不能盡 昨使至時 此書纔有數行 後亦未曾續寫 俗事紛至沓來 難以擺脫 睡時已五更矣 此刻 使至 倉卒書完 略盡區區 至於臨分惜別之語 我輩方以聖賢豪傑相期 無煩屑屑 他日各有所成就 雖遠在萬里之外 固不啻朝 暮接膝也 否則卽終日羣聚 何爲乎 然此亦傷心人 聊以解嘲之語 不必多云 別緖萬千 惟知己默鑒而已 臨風草草不備 統希 照亮 湛軒長兄足下愚弟嚴誠 頓拜 蘭公書曰 竟永別耶 竟不得再唔耶 蒼蒼者天 何其忍若是耶 此生已休 况他生耶 肝膓何以欲斷未斷耶 豈我輩之交猶未深 而永別之苦猶未慘耶 足下曾諭云 異時各有所成 皆無負知人之明 雖永無見期 不恨也 然則交之深別之苦 以視期之切望之 至有重輕也 使他日敗德喪行 深負良友 縱他日相對 亦復何顔 使他日砥行立名 無愧古人 縱再生不遇 亦復何恨 天涯之人 將破涕爲笑 而又何必沾沾於交之深別之苦耶 雖然 交誠深也 別誠苦也 肝膓今日不斷 明日必斷也 卽今明以後 竟永不斷 亦偶幸耳 而可斷之道 仍在也 嗚呼復何言哉 鴨江水急 千萬珍重 不具 兩畫帖皆付來 一則蘭公書 畫中有兩幅 篠飮之筆也 一帖皆力闇之作也 僕人言篠飮强音笑若常 力闇蘭公作書畢 坐椅上 相對傷感 渠亦看來 不覺淚下云 歸路聞僕人言 嘗往乾凈洞 其僕人輩出示一帖 帖中畫吾輩像皆酷肖 乍見可知其爲誰某 渠 問其故則僕人輩答云 兩老爺作此 爲歸後賭思之資云 건전동 필담 가운데 농수각 관련 내용이다. (상략) 그 농수각기籠水閣記에, 우서虞書에 선기옥형璇璣玉衡 을 살피어 칠정七政(日月과 五星)을 고루한다 고만 말하고 만 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후세에 천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를 제작하기를 정교精巧하게 하였으니, 한서漢 書에 평자平子의 기술機術이 특히 묘하다 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다만 중성中星의 위치가 당우 때로부터 주周나라에 이르는 동안에 이미 오미방午未方으로 이동하였으니 당唐나라의 중 일행一行이 비로소 세차歲次(歲星의 위차)를 정하므로 다시 더욱 정 밀하여졌다. 아조我朝의 역법曆法은 전고前古보다 월등하게 발달되었다. 멀리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 널리 산학算學을 참증하 니, 항상 외양外洋(서양)으로부터 도입하였다. 이것은 천도天道와 성지星志가 본래부터 전문가가 있어 우리 지역 안에만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다. 동국의 홍처사洪處士 담헌湛軒은 궁구하지 않은 글이 없으며, 예술藝術(曆法ㆍ算數ㆍ樂ㆍ書 등)의 미세한 데까 지 정묘하게 분석하였다. 그 나라에 나경적羅景績이라는 사람이 있어 동복同福에 은거하여 측후測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인 인 안처인安處仁은 깊이 스승의 학문을 연구하여 정교精巧한 고안이 무쌍하였으니, 두 사람은 다 기이한 선비이다. 담헌이 모 두 방문하고 초청하여 서로 더불어 마음을 터놓고 자세히 의논하여, 구제舊制를 덜 것은 덜고 보탤 것은 보태며, 자재를 가리 고 공인工人을 뽑아 3년이 걸려서 혼의渾儀를 만들었고, 아울러 서양의 후종候鍾을 구해서 농수각에 장치하여 조석으로 관람 하며 완미하였으니, 대개 이 둘은 반드시 맞지 않는 것이나, 열심히 구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다. 대개 나씨와 안씨는 담헌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 기재를 발휘할 수 없었으며, 담헌은 두 사람을 얻지 못했으면 그 거대한 그릇을 제작하여 이룰 수 없었 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담헌이 공사貢使의 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객관에서 친교를 맺을 수 있지 않았다면 또한 세상에 담헌이란 사람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 어떻게 나羅와 안安을 알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천지의 이치가 본래 기특한 것을 창달彰達하지 않음이 없고 불멸不滅의 대업을 반드시 멀리 전하는 것을 뜻한다. 한갓 두 사람이 이 생애에서 담 헌을 만나게 되어 경사스러울 뿐 아니라 나도 세 분에게 대하여 다 같이 유한됨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으 니, 도道는 무형無形한 데서 신묘하여 무릇 공허한 속에 형상을 나타낸 것은 모두 그 질質이요, 운전하는 것은 기氣이며, 의儀 는 하늘을 법 받는데서 신묘하여 중中에서 동하는 기틀[機]이요 운전하는 것은 물이다. 물이 천지에 있어서 가득 차면 넘치고 얕으면 교착膠著하고, 곧게 하면 다하기 쉽고 구부리면 돌아서 더디며, 격동[激]하면 솟아 뛰고 막으면 그치니, 이것은 모두 물의 성[水之性]은 아니다. 혼의渾儀의 받는 물은 흘러서 쉬지 않고 부어넣어 다하지 않으니, 그 자연함을 따라 기機의 안에서 16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57 절로 돌게 맡겨 두고, 그 사이에서 조작을 가하거나 막아놓는 것이 없으면, 천지로 더불어 비기나니, 이것이 그 기器가 도道 에 통하는 소이所以이다. 나는 산수학을 익히지 않았으니 감히 천도를 말하지 못하겠거니와, 담헌은 오랫동안 성명性命의 학 문을 강구하였으니, 그 완심玩心의 고명高明함이 반드시 기수器數의 말단[末]에 매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작 별하여 멀고 먼 이역異域으로 떠나가니 후일에 바람을 향하여 서로 추억하면서 나를 격려하여 줌이 있기를 바란다. 하였다. 32세(1762, 영조38) * 혼천의 2대와 자명종 완성, 충청도 천원군 장명長命에 설치하고 농수각籠水閣 이라고 함 * 나경적 별세. 제나석당문祭羅石塘文 을 지어 조문함 *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재임齋任을 맡음 (7) 湛軒書附錄, 愛吾廬題詠, 籠水閣記[陸飛] 乾隆丙戌 東國貢使至 有洪處士湛軒者 隨與俱來 余時計偕入都 遇於旅次 其人貌恭而色和 類有道者 與之言 無與譯 因 以筆談 其言皆程朱理奧 余竦然敬之 旣而言其國有羅生景績 老而隱居同福 邃於測候 其門人安處仁深究師傳 多巧思 湛軒 皆訪致之 與之虛衷 損益舊制 閱三寒暑 爲渾儀一器 幷所得西洋候鍾 藏於其居之籠水閣 朝夕以爲觀玩 請余記之 余於是 知湛軒機術之妙 又平子之流也 余不習算學 亦不敢譚天 雖然有說焉 道妙於無形 凡著象於空虛者皆其質而運之者氣 儀妙 於法天 動於中者機而運之者水 水之在天地也 盈則溢 淺則膠 直之則易盡 曲之則紆 激之則躍 而防焉則止 皆非水之性也 儀之受水也 流而不息 順其自然 以任其機之內 斡而無所矯揉 隔閡於其間則與天地準 然水渴則止 至於機牙互激 若嘿而成 之者 然則技也 益進於道矣 湛軒講性命之學久 其玩心高明 有不泥於器數之末者 今且別去 曠隔一方 他日望風相憶 其所 得之淺深 或可得而聞也 遂書以爲記 육비가 지은 농수각기이다. 건륭乾隆(淸 高宗의 연호) 병술년(1766, 영조 42)에 조선의 공사貢使가 왔을 때 홍 처사 담헌洪處士湛軒이 이들을 따라 함께 왔었다. 나도 이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북경北京에 들어 왔는데, 여숙旅宿에서 홍 처사를 만났다. 사람이 태도가 공손하고 안 색이 온화하여 마치 도道있는 이로 보였다. 같이 더불어 말을 하매, 담헌은 통역하는 이를 관여시킴이 없이 필담筆談으로 하 는데 그 말은 모두 정ㆍ주程朱(程子와 朱子)의 이理로서 심히 오묘하였으니 나는 두렵게 여겨 존경을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담헌 은 또 말하기를, 내 나라에 나경적羅景績이라는 이가 있어서, 노경에 동복同福(전라도 和順)에 은거하여 측후測候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고, 그 문인 안처인安處仁은 스승이 만든 것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이에 관한 교묘한 생각들이 많았으므로 담헌은 이 들을 찾아보고 함께 구제舊制를 수정하여 3년이 걸려서 혼천의渾天儀 한 대를 만들어 이미 얻어 두었던 서양의 후종候鐘과 함 께 내가 살고 있는 집안의 농수각籠水閣이란 곳에 보존해 두고 아침저녁으로 관찰 연구한다. 청컨대 나를 위해 기문을 좀 써 다오 하거늘 나는 여기에서 담헌이 기술機術의 묘가 있고 또 평자平子의 대가大家임을 알았다. 나는 산학算學에 익숙하지 못하 기에 감히 천문天文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說이 있으니, 도道는 미묘하여 형체가 없고 대개 형상이 공허 한 것에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질質인데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기氣이다. 혼천의는 미묘하게 천도天道를 본받은 것이니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기機인데,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물이다. 천지에 있는 물은 가득 차면 넘치고 얕으면 굳어 말라 버리고 곧게 하면 쉽게 흐르고 굽게 하면 천천히 흐르고 탁 치면 뛰고 막으면 그치니, 이것은 다 물의 성질이 아니다. 혼천 의에 작용을 주는 물이 쉬지 않고 흘러 자연에 순하도록 그 기機가 안에서 도는 대로 맡겨 두어 그 사이에 손질을 한다든가 막는 일이 없으면 천지의 운행을 그대로 본받지만, 물이 마르면 중지한다. 그리고 기機의 톱니바퀴는 서로 맞닿아 소리 없이 잘 돌아가게 되니 이런 것이 곧 기술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더욱 도道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담헌은 성명의 학을 강구함 홍대용 생애와 행적 163

158 이 오래여서 그 마음에 가지고 노는 것이 고명하여 기수器數같은 이런 말단적인 기예技藝에 구애되지 아니한다. 지금 서로 헤 어지면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 훗날 멀리서 그리워하며 서로 기억이나 하기 위해 그 얻는 바가 깊던 얕던 다소나마 귀에 들 려줌이 있어야 하므로 드디어 붓을 들어 기문을 하노라. (8) 湛軒書附錄, 愛吾廬題詠, 籠水閣記[金履安] 余少讀虞書璣衡之文 則心悅之 嘗採註家言 縛竹爲器 轉之旋旋如紡車 賤陋可笑 然遇朋友可語 輒出而辨質焉 洪君弘之 其一人耳 一日弘之從湖南來曰 吾今行得奇士 曰羅景績 年七十餘 談此制甚悉 已約與共成矣 余喜而亟勸之 盖三閱年而器 成 則閣以藏之 曰籠水云 余嘗登籠水之閣 爲之正冠肅容而後 得一覩焉 其制因渾天之舊 而參用西洋之說 爲儀者二 爲環 者十 爲軸者二 爲盤若機者皆一 爲丸者二 爲輪若鐘者若干 其圍可坐一人 其機牙自擊 日夜轉而不息 大略如斯 其詳靡得 以記焉 余惟古者聖人 創神智而設此器 于以察天運之順逆 徵人事之得失 其爲用重矣 而其法象之奧妙 與河洛圖書 相爲出 入 則儒者宜盡心焉 世顧忽焉而不講 何也 豈以稽諸形者已詳 而闡乎道者爲微歟 亦歷代沿襲 非盡出於古也 卽無論乎此 而一擧目之頃 天之運也 地之載也 與夫日月五星疾徐贏縮之度 晝夜晦朔寒暑陰陽之變 大放乎六合 而遠極乎窮宙 靡不森 然以具 躍然以動 以效於几席之前 斯已快矣 嗚呼 孰謂人巧至此 而余得以與聞終始 以觀其成 又豈非數歟 顧余有感於此 自開闢以來 帝王之所禪代 英雄之所割據 謀臣談士勇將之所馳騁 公卿貴戚勢利氣欿之所爭奪 事業文章百家之所流名 皆在 此中耳 今束而寘之數楹之屋 但聞鍾聲以時錚錚然 其何如也 况士生偏邦 欲以營爲於世 其有得失 又爲之勃然以欣戚 可不 爲大哀乎 弘之蚤以文學名 一日謝公車 退居田間 彈琴讀書以自娛 吾知其不偶然也 김이안이 지은 농수각기이다. 내가 젊어서 우서虞書(書經의 편명)를 읽을 때 선기옥형璿璣玉衡의 글을 마음에 몹시 기뻐했다. 일찍이 여러 주석註釋의 말들을 모아 대나무를 읽어서 기器를 만들어 보았다. 굴리니 빙빙 도는데 마치 물레[紡車] 같았고 졸품이어서 웃음거리가 되 었다. 그러나 친구로서 말할 만한 이를 만나면 내어놓고 변질辨質을 하였는데, 홍군 홍지弘之 한 사람뿐이었다. 하루는 홍지군이 호남湖南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내가 이번 걸음에 기사奇士를 얻었는데 이름은 나경적羅景績이요 나이 70여 세로 이 기器 제작에 대하여 말을 나누니, 매우 깊이 알고 있기에 함께 힘을 합쳐 완성하기를 약속하였다 고 하였다. 나 는 기뻐서 이것을 재촉하여 권유하였더니, 3년 만에 기器를 완성하여 각閣을 지어 이것을 보존해 놓고 이름을 농수각籠水閣이 라 하였다. 나는 일찍이 농수각에 올라서 의관을 바루고 엄숙한 태도로써 한 번 보았다. 그 제조된 것을 보니 혼천의의 구제 舊制를 토대로, 서양西洋의 설을 참용參用한 것인데, 의儀가 둘이요, 환環이 열이요, 축軸이 둘이요, 반盤과 기機가 각각 하나요, 환丸이 둘이요, 윤輪과 종이 약간이요, 그 둘레에는 사람이 하나 앉을 만하고, 그 기機의 톱니바퀴는 저절로 쳐서 주야를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대략 그 모양은 이와 같은데, 그 상세한 것은 알기 어려워 다 기록할 수 없다. 나는 생각건대, 옛날에 성인이 신지神智를 창출創出하여 이 기器를 만들어 천운天運의 순역順逆을 관찰하고 인사人事의 득실을 징험하였으니, 그 쓰임이 심히 중하였음을 알겠다. 그리고 그 법상法象의 오묘한 것은 하도ㆍ낙서河圖洛書와 서로 통하니 이것은 유자儒者들이 마땅히 마음을 다해 연구해 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세상에서 소홀히 여기고 강명講明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니, 형상을 상고함에는 이미 상세하나 도道를 천명함에는 미묘하기 때문인가! 역시 역대로 연습沿襲해 온 것이다. 옛 그대로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언급을 그만두기로 하고 우선 한 번 눈을 돌려 잠깐 보기로 한다. 하늘의 운행과 땅의 실음[載]과 일월 오성日月五星의 빠름과 느림, 참[贏]과 쭈그러듦[縮]의 도수, 그리고 주야晝夜ㆍ회삭晦朔ㆍ한서寒暑ㆍ음양陰陽 등의 변화가 크게는 육합六合에 펼치고 멀리 는 우주에 다해서 삼연森然히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약연躍然히 움직이지 아니함이 없는데, 이것이 눈앞의 궤석几席에 징 험하게 되니 정말 쾌하도다! 아! 누가 사람의 기교奇巧가 여기에까지 이르리라고 말하였겠는가! 그러나 나는 시종 참여하여 이 16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59 것을 듣고 그 완성을 보았으니, 이 또한 어찌 수數가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나는 여기에 감동됨이 있나니, 천지개벽 이래로 제 왕들이 선대禪代한 것과 영웅들이 할거割據한 것과 모신謀臣ㆍ담사談士ㆍ용장勇將들이 치빙馳騁한 것과 공경 귀척公卿貴戚들이 세 리勢利를 위해 불꽃 튀기던 쟁탈과 사업가와 문장가들이 세상에 이름을 낸 그러한 것들이, 다 이 혼천의 속에 있을 뿐이다. 지 금 묶어서 이것을 몇 개의 기둥으로 된 옥내에 놓아두어 다만 쟁쟁錚錚하면서 시간 알리는 종소리만을 들을 뿐이니, 어떻게 하 겠는가! 하물며 선비가 좁은 나라에 태어나서 세상을 영위營爲함에 그 득실得失을 가지고 발연勃然히 기뻐했다가 발연히 슬퍼했 다가 하는 것이 크게 슬프지 아니하리오! 홍지는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하루는 벼슬을 사양하고 전원田園에 물러 가 은거하여 거문고나 타고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즐겼으니, 나는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겠노라. 35~36세(1765~1766, 영조41~42) * 11월 서장관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자제군관으로서 청나라로 떠나, 12월 27일 도착 * 3개월 동안 북경北京에 머물면서 청나라의 학자인 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ㆍ육비陸飛 등과 교유. 4차례 천주당 방문 (9) 湛軒書 外集 권9, 燕記, 觀象臺 觀象臺 在城東南隅 欽天監所司儀器測候之地 天象臺 劉松齡嘗云 皇上禁地 人不敢近 諸譯亦云年前東人厚賂監官 登眺 而歸 其後事發 革職 由是 禁人益嚴云 盖聞登城 旣有死律 觀象臺因城而築之 可窺中禁 上有儀器 多係御製 且是國家重 器 宜不可妄許人入也 三月東歸 迆路至臺下 時朝日初上 遙瞻十數儀器 環列于石欄中 奇形異制 光怪射日 直欲奮飛而不 可得 臺上有一人 憑欄下視 余駐馬仰語 俯首致恭 冀許一見 其人搖首 仍舒掌畫頸以示之曰 上不得 盖罪當死云 臺下有公 廨 門墻深嚴 盖欽天監分司也 余下馬揖門者請入 門者曰 司禁地 人不得入 但今早朝官人不來 可暫進 不可久留 余謝辭而 入見 廨舍之西 有數尺平臺 方數十步 東有渾天儀及渾象 西有簡儀 皆靑銅 其一規之大 可五六把 四圍護以石欄 簡儀之制 繁甚 倉卒不可悉 渾儀是宋制 載在書經集傳者 明正統中所製 雖廢而不用 其雙環水準直距諸法 猶有可考 北有銅櫃 盖用 以激水 而機輪散失 不可考 臺上諸器 皆康煕以來所製 其六儀 一天體儀 二赤道儀 三黃道儀 四地平經儀 五地平緯儀 六 紀限儀 皆出於西法東來之後 比郭守敬舊制 逈益精密 近又以六儀之繁 更製一儀 以兼六用 而器物益繁 終不及六儀各用之 爲便簡云 門者促出 卒卒而去 연행 당시 관상대를 돌아본 소감을 정리한 글이다. 관상대는 성 동남 모퉁이에 있다. 흠천감欽天監의 관할 아래 있으며, 의기儀器들로 천체를 관찰하는 곳이다. 관상대는 유송령劉松齡이 일찍이 말하기를, 황상의 금지구역으로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다 했고, 통역들 역시, 연전에 우리나라 사람 이 감관監官에게 뇌물을 주고 올라가 구경을 하고 왔는데, 그 뒤 일이 발각이 나서 파면을 당한 일이 있어 그 뒤로 사람을 금하는 것이 더욱 엄해졌다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에 오르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이 있다 하였는데, 관상대는 성을 의지하고 있어 중금中禁(임금이 계시는 곳)을 엿볼 수가 있고 또 위에 있는 의기儀器들이 대부분 임금이 만든 것으로 국가의 귀 중한 그릇들이므로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3월 귀국할 때 길을 돌아 대 밑으로 갔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데 멀리 10여 개의 의기가 돌난간 안으로 주욱 벌여져 있는 걸 바라보니 이상한 모양과 제도들이 기이한 빛들을 반 사하고 있었다. 곧장 훌쩍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다. 대 위에서 한 사람이 난간을 의지하고 굽어보기에 나는 말을 세워 쳐다보며 이야기를 걸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 다음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손바닥을 펴서 목 을 그어 보이며, 올라올 수 없다. 죄가 사형이다 했다. 대 아래 공청이 있었는데 문이며 담이 몹시 깊고 높다. 흠천감의 분 사分司인 듯싶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문지기를 보고 읍을 하며 들어가기를 청했다. 그의 말이, 사司는 금지구역이라 들어올 홍대용 생애와 행적 165

160 수 없지만, 다만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 상관이 오지 않았으니 잠시 들어오되 오래는 있을 수 없다 했다. 나는 고맙다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청사 서쪽으로 두어 자 높이 평대平臺가 있었는데 사방이 각각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동쪽으로 혼천의渾天儀 와 혼상渾象이 있고, 서쪽으로 간의簡儀가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크기가 대여섯 뼘쯤 되고 둘레로 돌난간 을 세워 두었다. 간의의 제작은 매우 복잡해서 창졸간에 제대로 다 살펴볼 수가 없었고, 혼의만은 송나라 제도로서 서경집전 書經集傳에 실려 있는 그대로였다. 명나라 정통正統 연간에 만든 것으로 비록 버려두고 쓰지는 않지만, 쌍고리와 수평[水準]ㆍ 수직ㆍ직선거리[直距] 등 여러 가지 방법만은 대조해 볼 수 있었다. 북쪽에 구리궤[銅櫃]가 있는데 기계 돌리는 물을 담아 두 는 것인 듯싶지만, 산실散失되어 잘 알 수가 없었다. 대 위에 있는 모든 기계들은 다 강희 이후에 만든 것들로 육의六儀가 있 었는데, 천체의天體儀ㆍ적도의赤道儀ㆍ황도의黃道儀ㆍ지평경의地平經儀ㆍ지평위의地平緯儀ㆍ기한의紀限儀 등이었다. 모두 서양법이 동으로 건너온 뒤에 생긴 것으로, 곽수경郭守敬의 구제에 비해 훨씬 정밀하게 되어 있다. 최근 육의의 번거로움을 피해 새로 하나로서 여섯 가지를 겸해 쓸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기계가 너무 복잡해서 역시 육의를 각각 쓰는 것만큼 간편하질 못하다 고 한다. 문지기가 빨리 나가라고 하는 통에 정신없이 나와 버렸다. (10) 湛軒書 外集 권9, 燕記, 天象臺 城內 有欽天 觀象 觀星 天象臺凡四處 而皆有儀器 故遊觀者 或往焉 正月二十四日 由蒙古舘 過北玉河橋 循宮墻而北 百餘步 折而東出大路 又北行里許 復折而東百餘步 道南見屋甍恠奇 可知其爲西制也 守者王姓連山驛人 自言朝鮮人累主 于其家 是以見朝鮮人 如故人云 歡迎無難色 亦不索面皮 入堂 其器物之奢 遜於西堂 而壁畫之神巧過之 北壁亦有一畫像 毛髮森森如生人 前有兩人立侍 始入門望見 半壁設彩龕 安三塑像 心異之 以爲塑像之妙 非佛家所及 及至其下而摸之 則 非龕非塑 乃壁畫 眞畫妖也 又有一像 頭戴如東坡笠 目瞑而立 傍有櫃貯冠 高幾梁玄黃參半 衣是紅緞 以金絲織紋 而云是 臨朝時着也 堂有自鳴鐘樓 與西堂之制大同 樓下有日晷石一雙 西出門 有數丈之臺 曰觀星臺 上建三屋 中屋藏各種儀器 門鎖不可開 穴窓而窺之 略見渾儀遠鏡等諸器而不可詳也 屋霤之南 通穴至簷 廣數寸 掩以銅瓦如其長 每夜測候 啓而窺中 星云 臺下庭廣十數畝 築甎爲柱 長丈餘 上有十字通穴 遍庭無慮百數 盖春夏上施竹木 爲葡萄架 柱傍往往聚土如墳者 葡 萄之收藏也 庭東有屋數間 中有井 井上設轆轤 傍施橫齒木牙輪 平轉如磨 壁有柳罐數十 王姓言春夏汲水 以漑葡萄 機輪 一轉 數十灑子鱗次上水 人不勞而水遍於溝坎 滿庭 每夏熱 濃翠厚蔭 如張重帟珠帳 秋熟虆虆萬顆 實爲都下勝賞 釀酒有 西法 香烈絶異 其護養之勤 專爲釀酒用云 연행 당시 천상대를 돌아본 소감을 정리한 글이다. 성 안에 흠천欽天ㆍ관상觀象ㆍ관성觀星ㆍ천상天象 등 관측대가 네 곳이 있는데, 대마다 의기儀器들이 있어 구경꾼들이 더러 찾아가곤 한다. 1월 24일 몽고관蒙古館에서 북옥하교北玉河橋를 지나 대궐 담을 따라 북쪽으로 백여 보를 가서 동으로 꺾 어 큰 길로 나왔다. 거기서 또 북쪽으로 1리쯤 가서 다시 꺾어 동으로 백여 보를 오니 길 남쪽으로 이상한 기와지붕이 보이 는데, 기괴함이 서양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지키는 사람은 왕王씨 성을 가진 연산역인連山驛人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 자기 집에 항상 주인을 정하므로 조선 사람을 보면 고향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 했다.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 이 반겨 맞아 주었다. 그렇다고 무슨 생색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물의 사치스런 점은 서당西堂만 못했 으나 벽화의 신기하고 교묘함은 보다 훌륭했다. 북쪽 벽에도 화상畫像 한 폭이 있었는데, 삼삼森森한 머리털이 꼭 산 사람 같 았다. 앞에 두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처음 문에서 들어오며 바라볼 때는 벽 중간에 채색 감실[龕]을 만들어 세 소상을 모 셔둔 것으로 알았다. 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소상의 기교는 불가佛家에서 미치지 못하겠다 했는데, 막상 가까이 와서 만져 보 니 감실도 아니고 소상도 아닌 벽화였다. 참으로 화요畫妖였다. 또 하나의 초상이 있는데, 머리엔 동파립東坡笠 같은 것을 쓰 고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옆에 갓을 넣어둔 궤가 있는데, 높이가 거의 들보에 이르렀고 검은 색 누른색이 반반이었다. 옷은 16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61 붉은 비단에 금실로 무늬를 짠 것이라 하는데 조회 때 입는다고 했다. 안에 자명종루自鳴鐘樓가 있는데 서당西堂에 있는 것과 비슷했다. 누 아래로 해시계[日晷石] 한 쌍이 있었다. 서쪽으로 문을 나오면 두어 길 되는 대가 있다. 이것이 관성대觀星臺이다. 대 위로 집이 셋 있는데, 복판집에 여러 가지 의기들이 들어 있고 쇠가 채워져 열 수 없었다. 창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혼의渾儀와 망원경望遠鏡 등 여러 기계들이 보이긴 하는데 똑똑하지가 않았다. 물받이[屋霤] 남쪽으로 두어 치 넓이의 구멍이 처마까지 통해져 있고, 그 위를 구리기와로 그 길이 만큼 덮어 두었는데, 매일 밤 측후를 할 때면 그걸 열고 북극성[中星]을 본다 한다. 대 아래 수십 묘畝 넓이의 마당에는 벽돌 로 쌓은 기둥이 한 길 남짓한데 맨 위로 십자형으로 구멍이 뚫려 있다. 마당에 널려 있는 것이 무려 백 개나 되었는데, 봄ㆍ 여름으로 대나무를 걸쳐 두고 포도덩굴을 올린 것이다. 기둥 옆으로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둔 것은 포도를 묻어둔 것 이라 하였다. 동쪽 편에 집이 두어 칸 서 있고,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위로 녹로轆轤(두레박틀)를 세우고 옆으로 횡치목橫齒木을 붙여 톱니바퀴가 맷돌처럼 반듯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고 벽에는 버드나무 통이 수십 개 달려 있었다. 왕씨 말이, 봄여름으로 물을 길어 포도에 주는데, 기계가 한번 돌기 시작하면 수십 개의 물박이 비눌을 달아 차례로 물을 담아 올리기 때문에, 힘 하나 안 들이고 물을 뜰에 가득히 흘려 마당에 차게 하므로 여름 더울 때는 새파랗게 짙은 그늘이 겹겹으로 구슬장막을 친 것 같 고, 가을 익을 때면 1만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실로 도회지의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고 했다. 또 술을 빚는 데도 서양 식이 따로 있어 냄새와 독하기가 말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애써 가꾸는 것도 다 술을 빚는 데 쓰기 위해서라 한다. (11) 湛軒書 外集 권9, 燕記, 琉璃廠 琉璃廠者 琉璃瓦甎之廠 凡靑黃雜彩瓦甎 皆光潤如琉璃 故御用諸色瓦甎 皆以琉璃稱焉 凡工役之廨 謂之廠 廠在正陽門 外西南五里而近 廠夾道而爲市舖 東西設閭門 扁曰琉璃廠 盖因以爲市號云 市中多書籍碑版鼎彜古蕫 凡器玩雜物爲商者 多南州秀才應第求官者 故遊其市者 往往有名士 盖一市長可五里 雖其樓欄之豪侈 不及他市 珍恠奇巧 充溢羅積 位置古雅 遵道徐步 如入波斯寶市 只見其瓌然爛然而已 終日行不能鑑賞一物也 書肆有七 三壁周設懸架爲十數層 牙籤整秩 每套有 標紙 量一肆之書 已不下數萬卷 仰面良久 不能遍省其標號 而眼已眩昏矣 其鑑舖始入門 無不驚疑失色者 其有提紐者 周 懸于壁 有臺架者 陳于壁下 大者數三尺 小者四五寸 入其中若有千百分身 從壁牖而窺望 怳怳惚惚 良久不能定也 盖此夾 道諸舖 不知其幾千百廛 其貨物工費 不知其幾巨萬財 而求諸民生養生送死之不可闕者 無一焉 只是奇伎淫巧奢華喪志之具 而已 奇物滋多 士風日蕩 中國所以不振 可嘅也已 연행 당시 유리창을 방문하고 적은 글이다. 유리창은 유리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다. 모든 푸르고 누른 잡색 기와며 벽돌들이 유리처럼 번쩍거리므로, 나 라에서 쓰는 각색 기와나 벽돌들은 모두 유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고, 대범 공역工役하는 집을 창廠이라 부른다. 창은 정양 문 밖 서남 5리 지점에 있는데, 창에 가까운 길 좌우는 시장점포로 되어 있다. 동서로 여문閭門을 세우고 유리창이란 편액을 붙여 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시장이름으로 되어 버렸다 한다. 시중에는 서적과 비판碑版, 정이鼎彜(솔과 彛, 이는 중국 종묘의 제기로 공신의 사적을 銘記하는 것임)ㆍ골동품 등 모든 기완 잡물 器玩雜物들이 많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를 보고 벼슬을 얻어 하기 위해 온 남방의 수재들이 많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는 가끔 명사들이 끼어 있다. 시장의 전체 길이는 5리쯤 된다. 비록 누각과 난간의 호화나 사치는 다른 시장 만 못하지만, 보배스럽고 괴상하고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들이 넘쳐흐르게 벌여 쌓여 있고, 시장의 위치 또한 고아古雅하였다. 길을 따라 서서히 걸어가면 마치 페르샤[波斯]의 보물 시장에 들어간 것처럼 그저 황홀하고 찬란하기만 해서 종일 다녀야 물 건 하나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홍대용 생애와 행적 167

162 책가게는 일곱이 있다. 3면 벽으로 돌아가며 수십 층의 시렁을 달아매고 상하로 부서별 표시를 해서 질서정연하게 진열 을 해 두었는데 각 권마다 표지가 붙어 있다. 한 점포 안의 책만도 수만 권이나 되어 고개를 들고 한참 있으면 책 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진다. 거울 가게[鑑舖]를 처음 들어서면 누구나 어리둥절해진다. 끈을 달아 벽 위로 주욱 걸어둔 것도 있고, 대가 붙어 있어 벽 밑으로 진열된 것도 있는데, 그것은 몇 자가 넘고 작은 것도 네댓 치는 된다. 그 안에 썩 들어서면 마치 천백 개로 나눈 내 몸이 벽 창문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아 너무도 황홀해서 한동안 어리둥절하게 된다. 이 길을 끼고 좌우로 있는 점포만도 수천 수백에 달하고 그 물건 만드는데 소요된 비용도 몇 만의 거액인지 알 수 없는데, 기실 일반 백성들의 양생養生 송사送死에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이상한 재주에 음탕하고 사치스런 물건들로 사람의 뜻을 해치는 것뿐이다. 이상한 물건들이 날로 불어나며 선비들의 기풍이 점점 흐려져 가니, 중국이 발전 못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슬픈 일이다. 42세(1772, 영조48) * 박지원과 집중적인 교유( 過庭錄 ) * 2월 김원행ㆍ황윤석 등과 염영서廉永瑞가 만든 자명종을 보러 흥양興陽으로 감 * 스승 김원행 별세. 제미호김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 지어 조상함 (12) 湛軒書 內集 권4, 祭文, 祭渼湖金先生文 嗚呼小子 事先生三十年 粗識進學門逕 素性跅弛 不能謹守塗轍 倀倀焉四十而無聞 撫躬悲悼 何辭而復我尊靈 嗚呼 先 生之學 淵源乎家庭 祖述乎巴門 玉壺淸透 巨嶽停峙 優優大哉 小子何敢贊焉 惟先生至慈良而有不可犯之色 至純厚而有不 可折之勇 古人所謂望之儼然 卽之也溫 吾見其人矣 先生之於道 其卓乎有立矣而每誦晦翁夫子祝融峯詩 以爲從古無衰颯底 聖賢 盖世儒委曲之學 記聞之術 無足以當先生意 是則海東三百年元氣之會 天挺人豪 其在先生歟 嗚呼 小子不量 妄意高 遠 得先生爲師 眞是千載一遇 顧拘牽世故 積違門墻 未能卒其業 豈非命耶 竊嘗聞問學在實心 施爲在實事 以實心做實事 過可寡而業可成 從今以往 努力桑楡 隨分躋攀 庶報恩育之萬一 亦願尊靈陰啓其衷 俾分寸有成 卒免爲門下之棄物 則此可 以歸復於他日矣 嗚呼悲哉 小子頃罹先禍 神思震剝 文不盡意 略布悲苦 伏惟尊靈俯鑑微衷 홍대용이 지은 김원행金元行의 제문이다. 아아, 소자小子가 선생님을 30년간 섬겨 진학進學의 문로門路는 대강 알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타고난 성품이 게을러서 능히 옛 법을 지키지 못하고 외로이 나이 40이 되도록 얻어들어 안 것이 없어서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기만 합니다. 무슨 말로 공의 존령尊靈께 갚아드릴 말이 있겠습니까? 아아, 선생님의 학문은 가정에서 근원하여 파문巴門을 높였는데, 옥으로 만 든 병과 같이 깨끗하고 큰 묏부리가 우뚝 서듯 하였으니 넉넉하고 큰 모습이야 소자가 어찌 말로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 지만 오직 선생님은 지극히 자애스러웠으나 감히 범할 수 없는 기색氣色이 있었고, 지극히 순후純厚하였으나 감히 꺾을 수 없 는 용기가 있었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스럽고 나아가 대해보면 온화하다 는 말을 선생님에게서 처음 보 았습니다. 선생님의 도가 우뚝히 탁월하였으나 늘 회옹부자晦翁夫子(주자를 이름)의 축융봉祝融峯 시를 외면서 말씀 하시기를, 옛 날부터 성현치고 쇠약한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대개 세속 선비의 비뚤어진 학문과 실용 없는 학술로는 선생님의 의견을 당 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이것은 해동海東 3백 년 원기元氣가 모여 하늘이 인호人豪를 빼냄이 바로 선생님에게 있었던 것일진 저. 아아, 소자는 자량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고원高遠한 데 뜻을 두고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참으로 이는 천재일우千載 一遇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얽매여서 오랜 동안 문하에 나가지 못하여 배움을 마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 16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63 겠습니까? 일찍이 묻고 배우는 것 진실한 마음에 있고 하는 것은 실용적인 일에 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실용적인 일을 하면 허 물이 적고 업을 성취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노력하여 분수에 따라 진보시킨다면 가르쳐 주신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원컨대 존령尊靈께서는 지하에서라도 저의 마음을 열어 주어 조금이라도 성취시켜 주 심으로써 끝내 문하에서의 버림을 면할 수 있게 하신다면 이를 죽은 뒤에라도 갚아드리겠습니다. 아아! 슬프다. 소자는 근간 에 선인先人 상喪을 당해서 정신이 없고 생각도 어지럽습니다. 글로 뜻을 다하지 못하여 대강 슬픈 마음을 펴니 존령께서는 굽어 이 조그마한 정성을 살피소서. 43세(1773, 영조49) * 삼하三河의 선비 손용주孫蓉州와 한시 교류 * 의산문답毉山問答 주해수용籌解需用 저술 (13) 湛軒書 內集 권4, 補遺, 毉山問答 子虛子隱居讀書三十年 竆天地之化 究性命之微 極五行之根 達三敎之蘊 經緯人道 會通物理 鉤深測奧 洞悉源委 然後 出而語人 聞者莫不笑之 虛子曰 小知不可與語大 陋俗不可與語道也 乃西入燕都 遊談于搢紳 居邸舍六十日 卒無所遇 於 是虛子喟然歎曰 周公之衰耶 哲人之萎耶 吾道之非耶 束裝而歸 乃登毉巫閭之山 南臨滄海 北望大漠 泫然流涕曰 老聃入 于胡 仲尼浮于海 烏可已乎 烏可已乎 遂有遯世之志 行數十里 有石門當道 題曰實居之門 虛子曰 毉巫閭處夷夏之交 東北 之名嶽也 必有逸士居焉 吾必往叩之 遂入門 有巨人獨坐于橧巢之上 形容詭異 斫木而書之曰實翁之居 虛子曰 我號以虛 將以稽天下之實 彼號以實 將以破天下之虛 虛虛實實 竗道之眞 吾將聞其說 虛子膝行而前 向風而拜 拱手而立于右 巨人 俛首視 㗳然若無見也 虛子擧手而言曰 君子之與人 固若是其倨乎 巨人乃言曰 爾是東海虛子也歟 虛子曰 然 夫子何以知 之 無乃有術乎 巨人乃據膝張目曰 爾果虛子也 余有何術哉 見爾服聽爾音 吾知其爲東海也 觀爾禮 飾讓以僞恭 專以虛與 人 是以知爾爲虛子也 余有何術哉 虛子曰 恭者德之基也 恭莫大於敬賢 俄者吾見夫子以爲賢者也 膝行而前 向風而拜 拱 手而立於右 今夫子以爲飾讓而僞恭 何也 巨人曰 來 吾試問爾 爾以余爲誰也 虛子曰 吾知其爲賢者而已 吾烏知夫子之爲 誰也 巨人曰 然 雖然 爾旣不知我之爲誰 則又烏知我之爲賢者乎 虛子曰 吾見夫子 土木之形 笙鏞之音 遯世獨立 不迷於 大麓 吾以是知夫子之爲賢者也 巨人曰 甚矣 爾之爲虛也 爾獨不見夫石門之題斫木之書乎 爾由門而入 見木之書 吾之名 爾所已知而反謂不知 吾之賢 爾所不知而反謂之知 甚矣 爾之爲虛也 且吾語子 生民之惑有三 食色之惑 喪其家 利權之惑 危其國 道術之惑 亂天下 爾無乃有道術之惑者乎 (중략) 實翁曰 天之所生 地之所養 凡有血氣 均是人也 出類拔華 制治 一方 均是君王也 重門深濠 謹守封疆 均是邦國也 章甫委貌 文身雕題 均是習俗也 自天視之 豈有內外之分哉 是以各親其 人 各尊其君 各守其國 各安其俗 華夷一也 夫天地變而人物繁 人物繁而物我形 物我形而內外分 臟腑之於肢節 一身之內 外也 四體之於妻子 一室之內外也 兄弟之於宗黨 一門之內外也 鄰里之於四境 一國之內外也 同軌之於化外 天地之內外也 夫非其有而取之謂之盜 非其罪而殺之謂之賊 四夷侵疆 中國謂之寇 中國瀆武 四夷謂之賊 相寇相賊 其義一也 孔子周人也 王室日卑 諸侯衰弱 吳楚滑夏 寇賊無厭 春秋者周書也 內外之嚴 不亦宜乎 雖然 使孔子浮于海 居九夷 用夏變夷 興周道 於域外 則內外之分 尊攘之義 自當有域外春秋 此孔子之所以爲聖人也 의산문답毉山問答 은 홍대용의 학문관과 자연관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저술이다.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毉巫閭山을 배경으로 조선의 유학자 허자虛子와 의무려산에 숨어 살면서 자연의 운 행원리를 터득한 실옹實翁 간의 대화형식을 빌려 연구자 담헌의 기본자세인 공정한 마음가짐과 지구설, 지구자전설 및 우주 홍대용 생애와 행적 169

164 무한론을 전개했다. 지구설과 자전설은 이미 서양에서 해명된 바가 있었지만, 우주무한론은 역시 그의 창발적 주장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홍대용의 상대주의적 입장의 자연사상과 과학자적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저술이다. (14) 湛軒書 外集 권4, 籌解需用, 籌解需用序 孔子嘗爲委吏矣 曰會計當而已矣 當會計者 舍筭數奚以哉 史氏言孔門諸子之盛 以身通六藝稱之 古人之務實用也如此 孔氏之所以敎者 其可知已 筭法祖於九章 歷代演之 其術亦多矣 病其各自爲書 詳略不一 往往逞奇索隱 殆有近於迷藏之戱 者 齋居無事 謹采其宜於今而適於用者 間附己意 錄爲一册 其斛斗段匹之率 幷以時法通之 庶得其實用而當於會計也 且習 是法者 其潛心攝慮 足以養性 探賾鉤深 足以益智 此其功豈異於琴瑟簡編哉 嗚呼 天有萬化而不外乎陰陽 易有萬變而不外 乎剛柔 筭有萬術而不外乎乘除 陰陽正位而不亂 剛柔迭用而成章 正位法乎天 迭用則乎易者 其乘除之術乎 若由是而引而 伸之 觀小道而悟大德者 存乎其人 주해수용籌解需用 은 홍대용이 지은 수학책이다. 상권 내편 총례에서는 구구팔십일九九八十一, 팔구칠십이八九七十二 등 구구九九 수가 실려 있어 곱하기에 쓰이고, 또 일 귀불수귀一歸不須歸ㆍ봉일진일십逢一進一十ㆍ이일첨작오二一添作五ㆍ삼일삼십일三一三十一 등의 구귀가九歸歌가 적혀 있어서 나눗 셈에 이용된다. 또 각 단위 사이의 관계와 비례상수 및 면적ㆍ체적에 관한 공식들이 실려 있다. 총례 다음에는 산법算法을 분 류하여 적었는데, 가감승제ㆍ다원일차연립방정식多元一次聯立方程式ㆍ삼각법 등의 계산수단을 썼다. 또, 다음에 열거한 각 산법, 예컨대 상제법ㆍ귀제법 등의 항목에는 예제例題가 주어져 있고, 그 예제의 풀이가 적혀 있어서 처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산법통종算法統宗 등과 같은 고대수학책보다는 간소한 편이고, 숫자는 한문자로 표 현하고, 아라비아숫자나 로마숫자는 쓰지 않았다. 특히 내편 목록에 있는 기윤해朞閏解를 비롯하여 곳곳에 역曆에 관계되는 계산 예제가 많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해수용 의 외편 목록에 이어 의기儀器와 악률樂律에 관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의기에 관하여는 홍대용이 북경의 관상대에서 얻은 지식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주해수용 의 말미에 실은 것으로서, 이는 서양문물의 유입을 의미하는 동시에 북학파 실학자로서의 면목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44~45세(1774~1775, 영조50~51) * 봄 이송李淞과 함께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로 여행함. 이곳에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의 제수 소식을 들었으나 사양함 * 12월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에 선임되어 17개월간 왕세손(正祖)을 가르침 * 존현각尊賢閣에서 주서절요朱書節要 를 강론 * 성학집요聖學輯要, 주서절요 를 시강함. 왕세손으로부터 학문의 정중正中함을 인 정받음. 담헌의 연행에 대해 문의함 (15) 湛軒書 內集 권2, 日記, 桂坊日記 甲午十二月初一日 以侍直謝恩後 入直夜對 輔德韓鼎裕 司書申在善 侍直洪 入尊賢閣 講朱書節要第三卷 東宮讀前受音 陸丞相書 輔德讀與劉共父書 東宮又讀新受音訖 令曰陳文義 韓曰此二程文集事 別無可陳 但某不敢憚改云者 見朱子學問 大處 如禹之不自滿假 湯之從諫如流 聖人之心 自如是也 令曰 桂坊言之 臣曰 春坊達辭甚好 所謂學問之道無他 知不善則 17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65 速改以從善而已者也 令曰 桂坊卽月前新除洪侍直乎 學業聞甚篤實 韓曰 臣未知其他 但知其優於經學 且非應擧之儒矣 令 曰 作日形氣之私云云 文義更思之 如何 韓曰 臣出而更看 睿敎甚當 令曰 桂坊是經學之人 必有所見 上番試以昨日酬酢問 之 上番曰 中庸序中形氣之私之私 與下人慾之私之私 兩私字同乎異乎 臣對曰 臣讀之年久 倉卒未能記 但兩私字 一串貫 來 或不必異看乎 令曰 見無册子 顧安能盡記也 非謂我見之眞正無差 所見適然 故偶有酬酢矣 盖形氣之私之私 如飢而欲 食 寒而欲衣 人不然而我獨然之意 若人欲之私之私 是流於慾之私 非謂人心之不可無者也 且二者雜於方寸之二者 與精則 察夫二者之二者 亦似不同 如何 韓曰 使桂坊出而考思 後筵仰陳爲好 臣曰 當更爲考思 後對如有下問 當仰陳 令曰 中庸 率性之謂道 此率字何意 臣對曰 此率字極難言 泛看則似涉入工夫 但前輩皆不云然 令曰 此率字 實不當以功夫言也 如云 遵大路兮 只是依性而行 是謂道云爾 臣對曰 臣所聞於先輩者 亦如睿敎所謂依性而行也 (下略) 계방일기 - 세손익위사시직에 선임되어 왕세손(정조)와 나눈 문답을 소개한 글이다. 시직侍直으로 사은謝恩한 후에 입직入直했다가 야대夜對하였다. 보덕輔德 한정유韓鼎裕와 사서司書 신재선申在善과 시직侍 直 홍洪(대용)이 존현각尊賢閣에 들어가 주서절요朱書節要 제3권을 강론하였다. 동궁東宮은 전날 배운 육승상서陸丞相書 를 읽고, 보덕은 유공보劉共父에게 준 편지 를 읽었다. 동궁은 또 새로 배운 것을 다 읽고 문의文義를 아뢰라고 명하였다. 한韓이 아뢰기를, 이것은 이정二程 문집에 대한 일이었는데, 별로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某]가 허물 고침은 꺼려하지 않 는다 라는 말에 주자朱子의 학문學問이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禹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탕湯이 남의 간하는 말 을 잘 받아들였던 것처럼, 성인聖人의 마음은 본래 이렇습니다 고 하였다. 동궁이, 계방桂坊이 말하오 하기에, 내가, 춘방春坊 의 아뢴 말이 매우 좋습니다. 소위 학문이란 별다른 방법이 없고 착하지 않음을 알면 빨리 고쳐서 착함에 따를 뿐이라는 것 입니다 하니, 동궁이, 계방은 곧 월전에 새로 제수除授된 홍 시직侍直인가? 학업學業에 매우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였 다. 한韓이, 그의 다른 점은 알 수 없으나, 다만 경학經學에 넉넉하며, 또 과거科擧에만 대응對應하는 선비는 아닌 줄로 아옵 니다 고 하니, 동궁이, 어제 강론한,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문의文義를 다시 생각해 보니, 어떻던가? 하였다. 한韓이, 신臣이 물러나가 다시 보았는데, 예교睿敎(동궁의 말)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고 하였다. 동궁이, 계방은 경학經學하는 사람이라 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오. 상번上番이 시험 아 어제 수작한 것을 가지고 물어 보오 하니, 상번이, 중용中庸 서문序文 가운데,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사私와 그 밑에 인욕지사人慾之私라는 사私가 있는데, 두 사私자의 뜻이 같은가 다른가 하기에, 내가, 신은 이 글을 읽은 지 오래되어 갑자기 기억할 수 없으나, 다만 두 사私자의 뜻은, 한 이치를 말한 것인 바, 달리 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동궁이, 지금 여기에 중용中庸 이 없으니, 어찌 능히 다 기억할 수 있으리오. 내 의견의 시비是 非 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침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우연히 말한 것이오. 대개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사私자의 뜻은 주리 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것처럼, 남은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그러한 것이며, 인욕지사人慾之私라는 사私자의 뜻은, 곧 욕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사로운 생각인 바, 사람의 마음[人心]에 없을 수 없는 것 을 뜻함이 아닐 것이오, 또 이자二者는 마음 속에 섞여 있다 라는 이자二者와 정밀함은 이 이자二者를 살핀다 라는 이자二者와는 역시 뜻이 같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 하시오 하였다. 한韓이 계방을 시켜, 물러가 상고하고 생각한 뒤에 아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기에, 나도, 다시 상고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니, 이 다음에 만일 하문下問하신다면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니, 동궁이, 중용中庸 에 솔성지 위도率性之謂道 라는 이 솔率자는 무슨 뜻이오 하였다. 내가, 이 솔率자는 말로 나타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대체로 보아, 공 부工夫에 들어가는 길인 듯하나, 선배先輩들은 모두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 솔率자는 사실 공부라고 말해 서는 아니되오. 큰 길을 따른다 는 것처럼 곧 성性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곧 도道라고 한다 고 했을 뿐이오 신이 선배에게 들은 바도 또한 예교睿敎와 같이 성性에 따라 행한다 고 했습니다 하였다. (하략) 홍대용 생애와 행적 171

166 49세(1779, 정조3) * 현감직을 사임하고 낙향할 것을 결심 (16) 湛軒書 外集 권1, 杭傳尺牘, 與鄧汶軒書 本年三月末 因貢使廻 得尊兄手札出於正月 捧讀欣聳 不啻朝暮遇也 况審舊症漸除 諸務隨心 卜姓叶吉 旅饋有主 不勝 驚喜 且枯楊生梯 易有明徵 老夫女妻 何患無子 八龍九雛 爲之祈祝 弟於七月初 蒙恩授泰仁縣監 縣在王京南六百里 地方 四十里 戶不過八千 但素號衝繁 簿牒鞅掌 赴任數月 鬚髮益白 顧半生琴書 偸占便宜 乃誤落塵網 自貽伊戚 視足下安閑去 住 天脫羈馽 眞是隔仙凡 惟親年日高 得此專城之養 古人奉檄之喜 儘非誣傳也 弊廬八景 旣得諸公高詠 至一二十篇之多 則何不隨便卽示 致此耽閣 紆鬱之極 不能無憾也 早晩寄來 謹當卽付剞劂 印納一本 更得佳筆繕寫爲望 別紙奉質 條答勒 摯 開破聾瞽 進益不鮮 麗澤講討 友朋厚義 來敎一味頌美 便非交誼 正合鄙見 敢不拜嘉 澹園苗而不秀 名園勝賞 文藝淸 緣 奄成泡幻 殊爲悼歎 且弟等雖未見其面 誦其詩慕其人 遙結情根 遽聞愕報 令人氣短 九原何可作也 函寄拜悉而中古以 來 書愈多而學愈下 疲於記覽 捨本趍末 誤盡天下英才 今奉盛論 甚愜鄙意 且欲誅馮道以文字之罪 則持論高遠 逈非俗儒 所及 汶軒曰 古人書字以刀 載字以竹 至今猶有靑史之語 靑者 竹之色也 故文字簡而理眞 自秦人蒙恬作筆 漢人蔡倫作紙 記字易而文字稍繁 然猶手書筆抄 抄一字只得一字也 迨五代 馮道制以雕字 棗梨木板 一印萬張 人免手書之勞 世少筆記之 學 書籍漸多 汗牛充棟 而好奇之士摽竊隻字片語 板刻印書 逢人䝮售 甚至稗官外史閭謠外語 無不刊出 浮詞愈多 正經反 掩 始則糠多米少 久恐有糠而絶米 豈非木板作之俑哉 愚嘗謂馮道不惟無臣道 又實萬世文字之罪人也 因吾兄木板土板之詢 而及之 此論如何 등문헌鄧汶軒에게 보낸 편지로서, 태인현감 재직 당시를 정리한 글이다. (상략) 제는 7월 초에 왕의 은명恩命을 입어, 태인현감泰仁縣監에 부임되었습니다. 현은 수도의 남쪽으로 6백 리쯤 떨어 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역은 사방이 40리요, 호수戶數는 8천 호에 불과하나 본래부터 번화한 곳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서류 정리에 골몰하여 부임한 지 수월 만에 수염과 머리털이 더욱 희어졌습니다. 다만 반평생 동안을 금서琴書를 즐기며 편 하게 지냈는데, 이제 잘못하여 진세塵世의 그물에 떨어져 스스로 근심 속에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비교하면, 족하는 떠 나거나 머무르기를 편안히 하고 한가히 하여, 하늘이 얽어맨 굴레를 벗겨 준 격이니, 나와는 신선과 속인의 상거입니다. 다만 어버이의 연세가 날로 높아지시는데, 이 한 성城을 맡은 현감이 되어, 봉양을 해드리게 되니, 옛사람의 고을 원 되는 기쁨[捧 檄之喜] 이 진정 근거 없이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저의 집의 팔경八景은 이미 제공의 고아高雅한 시를 얻은 것이 10 20편이나 된다고 하면서 어찌 인편에 따라 곧 보여 주지 않고 이렇게 지체만 합니까? 우울하고 답답하여 원망함이 없지 않습니다. 불 원간에 보내 주시면 즉시 판각에 붙여 한 권을 드릴 터이니, 다시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구해서 베껴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별지로 질문 드린 것을 진지하게 조목별로 답하여 주시니, 우매한 것을 깨치어 진취함에 도움됨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 붕우간에 서로서로 도와 강론하고 토의하는 후의厚義입니다. 한결 같이 칭송하여, 찬미만 해서는 서로 사귀는 의리가 아니라 고 하신 말씀은 정히 나의 소견과 같습니다. 좋은 말씀에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담원澹園은 피어나다가 결실을 보지 못하였 습니다. 이름난 동산의 훌륭한 완상과 문장ㆍ재예才藝의 맑은 인연이 문득 물거품의 허망함을 이루었으니, 자못 애석하고 탄 식스럽습니다. 또 제弟 등이 비록 상면하여 보지 못하였지만 그 시를 외고 그 사람을 사모하여 멀리 마음속으로 깊은 정을 맺었건만 갑자기 놀라운 흉보를 들으니 실로 마음에 안되었습니다. 구원九原(저승)은 어찌해서 생겼을까요? 부쳐 주신 서찰은 감사히 보았습니다. 중고中古 이래로 글이 많아질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기억하고 관람하기에 피로하며,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아 천하의 영재英才를 그르친다 고 한즉, 이제 족하의 의논을 보니, 매우 나의 뜻에 잘 맞습니다. 또 풍도馮道를, 문자 文字의 죄를 가지고 베려 한 것은 그 지론持論이 고원高遠하여, 속유俗儒로서는 도저히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략) 17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67 50세(1780, 정조4) * 1월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전임됨 * 엄성의 형 구봉九峯에게 선禪 공부와 관련한 서신 왕래 * 봄 손용주에게 연행사절을 따라가는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냄 (17) 湛軒書 外集 권1, 杭傳尺牘, 與孫蓉洲書 大容再拜啓 頃因李白石 接奉己亥正月曁庚子正月兩札 代承太孺人乃於戊戌十月奄爾棄世 人生壽命 終雖有限 孝子深愛 心實無窮 伏惟尊兄早歲失怙 窮居偏養 未遂捧檄之喜 遽遭終天之哀 苫次號擗之痛 想來抑塞 日月不居 大祥將届 孝思罔 極 何以堪勝 惟節哀自保 無戚在天之靈 千萬爲禱 郝公高誼 令人感歎 幸爲弟叱名請安 其諱號年甲志業世閥 略示其槩 俾 以傳颺於遐土 亦係彰善報德之一端也 弟於歲首 自泰仁縣 陞遷榮川郡守 地在慶尙道竹嶺之南 邑小俸薄 差可養閑 但係弊 局 民吏凋殘 撫摩釐革 猶不免勞瘁 終不如家食之休逸 奈何 九峯係是擧人 明春計偕 想應入都 其文雅高妙 自非俗儒同城 或圖一面 在足下亦不害爲一段佳會也 秋身居近密 畏葸固然 來敎各行其是云云及引孔聖云云 高明爽快 大義卓爾 讀之令 人胸次灑然 天下一家 四海兄弟 義有可據 跡無可嫌 同心之交 麗澤之樂 其可以徒然而舍之乎 惟人之多言 亦可畏也 謹密 之敎 甚善甚善 梅軒宦遊未歸 終作戴星之行 爲之傷痛 向後當另札相唁也 筆墨紙扇 幷拜佳貺 燕巖朴友趾源 文章品望 弟 之畏友 落拓不遇 氣宇軒豁 吾輩交情 久已備諳 歆艶愛慕 尤在尊兄 今以布衣 隨其族兄上使公 擔閣家累 疋馬西行 貽書 告別 行色不俗 足下一見 可知其爲人不徒文詞之絶藝而已也 去烱菴書已附便 渠當另有書也 官守在外 職事倥倊 遙聞使行 促發 急伻附札 不暇詳言 都在默會 不宣 손용주孫蓉洲에게 보낸 편지로, 영천군수 재임 당시 소감을 적은 글이다. (상략) 제는 연초에 태인현泰仁縣으로부터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영전되었는데, 경상도慶尙道 죽령竹嶺의 남쪽에 위치한 군 으로 읍邑이 작고 봉록이 적어, 먼저보다 다소 한가할 수는 있으나 다만 폐단이 많은 곳이 되어 백성과 아전[吏]들이 지쳐서, 따뜻하게 어루만져 보호하느라고 해도 곤궁함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침내 관록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편안히 쉬는 이 만 못할 것 같으니, 어찌하리까? 구봉九峰은 연경회시에 응시할 사람이니, 내년 봄이면 두 분이 다 함께 연경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 글이 맑고 고묘高妙하여 속유俗儒의 것은 아니니, 한 성내에 있으면서 혹 한번 만나보신다면, 족하로서도 하나의 아름다운 회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추루[秋]는 몸이 근밀近密한 곳에 있으므로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은 본디 당연하나 말씀해 주신 각각 그 옳은 것을 행한 다 한 것 및 공성孔聖을 인용하여 한 것은 고명ㆍ상쾌하고 대의大義가 탁연卓然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시원하게 합니다. 천하는 한 집안이요, 사해四海는 다 형제입니다. 의리에 의거할 만한 것이 있고 자취에 혐의할 만한 것이 없는 이상, 동심同心의 사귐과 학우學友간의 즐거움을 부질없이 버려서 되겠습니까? 다만 남들의 말이 많은 것도 또한 두려운 일이니, 근신하고 비밀히 해야 한다는 말씀은 대단히 좋습니다. 매헌梅軒은 벼슬자리로 멀리 돌아다녀 귀향하지 않더니, 마침 내 급사急使의 행차까지 하게 되었으니, 슬픕니다. 이 뒤에 별도의 서찰로 위문해야 하겠습니다. 붓ㆍ먹ㆍ종이ㆍ부채 등 혜사 품은 다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연암燕巖 박우朴友 지원趾源은 그 문장의 품위品位와 인망이 제의 존경하는 처지입니다. 역경에 빠지고 알아줌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높고 맑으며 활달합니다. 그는 우리들의 교제하는 정의를 오래부 터 이미 잘 알고 있으며, 경애하고 흠모하는 정이 더욱 존형尊兄에게 있습니다. 이제 한미한 선비의 몸으로 상사上使인 그 족 형族兄을 따라 집안일을 버려두고 한 필 말로 서행西行길을 떠난다고 글로 작별을 고하였는데, 그 행색行色이 속되지 않으니, 족하가 한 번 보시면 그 사람됨이 한갓 시문詩文ㆍ사장詞章의 뛰어난 재능만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형암烱菴에게 가는 글 은 이미 편에 부쳤으니, 그로부터 편지가 있을 것입니다. 벼슬이 외직外職에 있어서, 직무가 너무 바쁜 중에 멀리 사신의 행 차함을 듣고 급히 급사急使를 보내어 서신을 부치므로, 자세히 말할 겨를이 없으니, 모든 것을 양해하여 주소서. 다 아뢰지 홍대용 생애와 행적 173

168 못합니다. 53세(1783, 174 정조7)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 어머니 병환을 핑계로 영천군수 사직, 귀향 *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 마비 별세. 묘소는 충남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박지원과 반정균의 묘지명 전함

169 박지원 朴 趾 源 (1737~1805) 1) 박지원 연보 年 譜 2) 박지원 생애 관련 자료

170 5. 박지원朴趾源(1737~1805) 생애와 행적 1) 박지원 연보年譜 본관 : 반남潘南. 자 : 미중美仲ㆍ중미仲美, 호 : 연암燕巖ㆍ연상煙湘ㆍ열상외사洌上外史 나이 / 연도 1세(1737, 영조13) * 계산동桂山洞으로 이사 16세(1752, 영조28) *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 *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21세(1757, 영조33)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저술 23세(1759, 영조35) * 모친 별세 24세(1760, 영조36) * 조부 별세 28세(1764, 영조34) * 양반전兩班傳 과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 저술 29세(1765, 영조35) * 유언호兪彦鎬ㆍ신광온申光蘊 등과 금강산 유람 30세(1766, 영조36) * 홍대용洪大容과 교유 31세(1767, 영조37) * 부친 별세 * 백련봉白蓮峯 삼청동三淸洞 이장오李章吾의 별장으로 이사 32세(1768, 영조38) *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 * 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ㆍ유득공柳得恭ㆍ유금柳琴 등 교유 34세(1770, 영조46) * 감시監試 양장兩場에서 1등, 회시會試 응시 하지 않음 35세(1771, 영조47) * 과거에 낙방한 뒤 학문에 전념 * 백동수白東修와 연암협燕巖峽 답사 * 이덕무와 황주ㆍ평양 유람 36세(1772, 영조48) * 가족 처가에 보내고 전의감동典醫監洞(낙원동)에 우거 41세(1777, 정조1) *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학문에 전념 42세(1778, 정조2) * 이덕무ㆍ박제가 연행에 앞서 박지원 만나 북학에 대해 논의함 정조4) *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李在誠 집(平谿)에 우거 * 진하사겸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로 떠남. 8월 북경 도착 * 귀국 후(10월) 열하일기 집필 시작 * 둘째 아들 종채 출생 * 허생전, 호질 저술 47세(1783, 정조7) * 열하일기熱河日記 저술 * 종제從弟인 박완원朴緩源의 계산동(재동)의 집을 빌어 이사 * 삼포三浦 세심정洗心亭에 우거 50세(1786, 정조10) *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51세(1787, 정조11) * 부인 이씨 별세 * 백씨伯氏 희원喜源 별세 44세(1780, 176 연보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주요 행적지 반송방 야동 백탑

171 나이 / 연도 연보 52세(1788, 정조12) * 서울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아현동 부근) 출생 53세(1789, 정조13) *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54세(1790, 정조14) * 제릉령齊陵令 55세(1791, 정조15) *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安義縣監 부임(~1796) * 해인사 유람 56세(1792, 정조16) * 임자壬子 흉년에 농민구휼 60세(1796, 정조20) * 군함軍啣으로 체부遞付, 계산초당桂山草堂 건축 61세(1797, 정조21) * 면천군수沔川郡守 62세(1798, 정조22) * 과농소초課農小抄 저술 63세(1799, 정조23) *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건축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올림 64세(1800, 정조24) * 양양부사襄陽府使, 귀경 69세(1805, 순조5) * 서울 가회방嘉會坊 재동齋洞에서 별세 주요 행적지 안의 해인사 계산초당 면천 건곤일초정 박지원 생애와 행적 177

172 2) 박지원 생애 관련 자료 19세(1755, 영조31) * 이양천 별세하자 제영목당이공문祭榮木堂李公文 을 지음 (1)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祭文, 祭榮木堂李公文 維歲次乙亥十一月庚午朔一日庚午 潘南朴趾源 謹具酒果之奠 哭訣于弘文舘校理李公靈筵曰 余年二八 入贅賢門 弟兄湛 樂 和氣氤氳 外舅謂我 余季好文 仕宦雖疎 文學甚勤 來舍甥舘 余季汝師 公之愛我 視舅亦冞 授我詩書 嚴課無私 陪公周 旋 四年于玆 文與世降 公起其衰 文劈韓骨 詩斲杜肌 小子不佞 才魯性癡 荷公誘掖 庶幾愚移 余方有進 公奄棄世 茫茫歧 路 我尙疇詣 讀古一傳 已多觝滯 數行才下 群疑交蔽 廢書太息 繼以悲涕 我疑何質 我惰孰勵 念玆益悲 實爲我地 去夏潦 暑 公疾始祟 玉巖淸泉 公于濯纓 浴沂新服 此日旣成 顧謂小子 盍觀於水 盈科而進 有爲若是 逝水其忙 言猶在耳 而今思 之 警誨止此 天生我公 年命何屯 苫席無孤 萱堂有親 昧昧者理 難質鬼神 無年無嗣 昔人所愍 孰主張是 其亦不仁 早擢魁 科 家甚淸貧 歷敭華要 養未專城 金馬玉堂 於公非榮 曩進一疏 遂竄南荒 余病未別 來拜高堂 壁掛輿圖 指示泫然 逖矣遷 人 鬱繆山川 某水某山 何時度越 不忍生離 况此死別 昔公謫去 奉慰有說 今公此行 忍作何言 余懷抑塞 不覺聲呑 維廣之 陽 卽公眞宅 啓殯隔宵 含哀告訣 文辭雖拙 腑肺攸出 奠物雖薄 情禮所設 尊靈不昧 庶歆玆酌 尙饗 16세때 스승 이양천李亮天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유세차維歲次 을해(1755) 11월 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에 반남潘南 박지원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제물을 갖추어, 홍문관 교 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내 나이 열여섯에 덕망 높은 집안에 장가드니, 형제분이 우애로워 화기가 애애 했네. 장인께서 이르시되 내 아우 글 좋아하여 벼슬에는 비록 소홀해도 문학에는 몹시 부지런하니 생관에 와 머물거라. 내 아우가 너의 스승이니라. 나에 대한 공의 사랑 장인보다 더 깊어서 내게 경서經書 가르칠 제 엄한 일과 사정없었네. 공 모시 고 따라다닌 지 이제 어언 사 년일세. 세상 따라 문학도 쇠퇴해지매 공이 다시 일으켜 세웠나니, 산문은 한유의 골수를 취했 고 시는 두보의 속살을 얻었네. 재주 없는 이 소자는 어리석고 노둔한데, 공의 유도에 힘입어서 우공이산愚公移山 바랐더니 내 한창 진취하려는데 공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갈림길 하많은데 어느 분을 찾아가야 하리. 옛 전傳 한 편 읽자 해도 막히는 곳 너무 많아 두어 줄만 읽어 내려가면 뭇 의심이 앞을 가려 책을 덮고 장탄식 슬픈 눈물 뒤따르네. 의심나면 뉘게 묻고 게 으르면 뉘 잡아주리. 생각할수록 슬픈 것은 실은 제 처지가 슬퍼서네. 지난 여름 장마와 무더위에 공의 병이 처음 생겼네. 아 름다운 암벽 맑은 샘에서 공은 갓끈을 씻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제 입을 새 옷. 그날에 다 지어졌는데 이 소자 돌아보며 이 르시길 어찌 물에서 보지 않느냐.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니 뜻 이루는 것도 이 같은 법, 흘러가는 냇물처럼 바빠야 한다. 그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 이제 와서 생각하니 공의 마지막 가르침이셨네. 하늘이 우리 공을 낳으시고 어찌 수명은 짧게 주 셨는고 거적 자리엔 상주喪主 없고 북당北堂에는 모친 계시네. 모를 것이 이치라서 신에게도 묻지 못해 후사 없고 단명한 건 옛사람도 슬퍼한 일. 누가 이를 주장했나, 그도 또한 잔인하이. 장원 급제 일렀으나 집은 몹시 청빈했고, 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고을 수령되어 부모 봉양 못 했네. 금마옥당도 공에겐 영화가 아니었어라. 전에 상소 한번 올렸다가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가고 마셨지 나는 병으로 송별을 못 해 고당에 와 절 드리니 벽에 지도 걸어놓고 가리키며 눈물지으셨네. 아스랗다 귀 양 가시는 분 산과 물이 얼기설기 아무 물 아무 산을 어느 제 다 거칠꼬. 생이별도 못 참거든 사별이야 오죽하리 전에 공이 귀양 가실 젠 위로드릴 말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공이 이렇게 가실 제는 차마 무슨 말을 하오리. 이내 가슴 답답하여 저도 몰 래 울음 삼키네. 광주廣州라 그 남쪽이 바로 공의 안식처일레. 밤 지나면 계빈이라 슬픈 영결 고하오니 문장 비록 졸렬해도 가슴속에서 우러나왔고 제물 비록 박하지만 정례로써 올린 거니 밝으신 영령이시여 이 술 한 잔 받으소서. 상향. 17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73 20세(1756, 영조32) *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함 *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서 허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음 * 이 무렵 마장전馬駔傳 과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저술 (2) 燕巖集 권8, 放璚閣外傳, 穢德先生傳 蟬橘子有友曰穢德先生 在宗本塔東 日負里中糞 以爲業 里中皆稱嚴行首 行首者 役夫老者之稱也 嚴其姓也 子牧問乎蟬 橘子曰 昔者 吾聞友於夫子曰 不室而妻 匪氣之弟 友如此其重也 世之名士大夫 願從足下遊於下風者多矣 夫子無所取焉 夫嚴行首者 里中之賤人役夫 下流之處而恥辱之行也 夫子亟稱其德曰先生 若將納交而請友焉 弟子甚羞之 請辭於門 蟬橘 子笑曰 居 吾語若友 里諺有之曰 醫無自藥 巫不己舞 人皆有己所自善而人不知愍然 若求聞過 徒譽則近諂而無味 專短則 近訐而非情 於是泛濫乎其所未善 逍遙而不中 雖大責不怒 不當其所忌也 偶然及其所自善 比物而射其覆 中心感之 若爬癢 焉 爬癢有道 拊背無近腋 摩膺毋侵項 成說於空而美自歸 躍然曰知如是而友可乎 子牧掩耳卻走曰 此夫子敎我以市井之事 傔僕之役耳 蟬橘子曰 然則子之所羞者 果在此而不在彼也 夫市交以利 面交以諂 故雖有至懽 三求則無不踈 雖有宿怨 三 與則無不親 故以利則難繼 以諂則不久 夫大交不面 盛友不親 但交之以心 而友之以德 是爲道義之交 上友千古而不爲遙 相居萬里而不爲疎 彼嚴行首者 未甞求知於吾 吾常欲譽之而不厭也 其飯也頓頓 其行也伈伈 其睡也昏昏 其笑也訶訶 其居 也若愚 築土覆藁而圭其竇 入則蝦脊 眠則狗喙 朝日煕煕然起 荷畚入里中除溷 歲九月天雨霜 十月薄氷 圊人餘乾 皁馬通 閑牛下 塒落鷄 狗鵝矢 笠豨苓 左盤龍 翫月砂 白丁香 取之如珠玉 不傷於廉 獨專其利 而不害於義 貪多而務得 人不謂其 不讓 唾掌揮鍬 磬腰傴傴 若禽鳥之啄也 雖文章之觀 非其志也 雖鍾皷之樂 不顧也 夫富貴者 人之所同願也 非慕而可得 故不羡也 譽之而不加榮 毁之而不加辱 枉十里蘿蔔 箭串菁 石郊茄蓏水瓠胡瓠 延禧宮苦椒蒜韭葱薤 靑坡水芹 利泰仁土卵 田用上上 皆取嚴氏糞 膏沃衍饒 歲致錢六千 朝而一盂飯 意氣充充然 及日之夕 又一盂矣 人勸之肉則辭曰 下咽則蔬肉同 飽矣 奚以味爲 勸之衣則辭曰 衣廣袖不閑於體 衣新不能負塗矣 歲元日朝 始笠帶衣屨 遍拜其隣里 還乃衣故衣 復荷畚入 里中 如嚴行首者 豈非所謂穢其德而大隱於世者耶 傳曰 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夫素也者定也 詩云夙夜在公 寔 命不同 命也者分也 夫天生萬民 各有定分 命之素矣 何怨之有 食蝦醢 思鷄子 衣葛羨衣紵 天下從此大亂 黔首地奮 田畝 荒矣 陳勝 吳廣 項籍之徒 其志豈安於鋤耰者耶 易曰 負且乘致寇 至其此之謂也 故苟非其義 雖萬鍾之祿 有不潔者耳 不 力而致財 雖埒富素對 有臭其名矣 故人之大往飮珠飯玉 明其潔也 夫嚴行首負糞擔溷以自食 可謂至不潔矣 然而其所以取 食者至馨香 其處身也至鄙汚 而其守義也至抗高 推其志也 雖萬鍾可知也 繇是觀之 潔者有不潔 而穢者不穢耳 故吾於口體 之養 有至不堪者 未甞不思其不如我者 至於嚴行首無不堪矣 苟其心無穿窬之志 未甞不思嚴行首 推以大之 可以至聖人矣 故夫士也窮居 達於面目恥也 旣得志也 施於四體恥也 其視嚴行首 有不忸怩者幾希矣 故吾於嚴行首師之云乎 豈敢友之云 乎 故吾於嚴行首 不敢名之 而號曰穢德先生 예덕선생전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자로 이름난 선귤자蟬橘子와 인분人糞을 나르는 엄행수嚴行首 사이에는 친교가 있었다.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긴 제자 가 하루는 그 까닭을 스승에게 물었다. 선귤자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벗을 이利로써 사귀면 오래 가지 못한다. 마음과 덕으 로써 사귀는 것이 도의지교道義之交인데, 엄행수는 천한 일을 싫어하지 않고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는 훌륭한 태도가 가히 군자지도君子之道인즉, 그를 예덕 선생이라 높인다. 고 하였다. 연암의 초기 작품으로, 양반들의 허욕과 위선을 비판한 풍자소 설이다. 박지원 생애와 행적 179

174 21세(1757, 영조33)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저술 (3) 燕巖集 권8, 放璚閣外傳, 自序 友居倫季 匪厥疎卑 如土於行 寄王四時 親義別叙 非信奚爲 常若不常 友廼正之 所以居後 廼殿統斯 三狂相友 遯世流 離 論厥讒諂 若見鬚眉 於是述馬駔 士累口腹 百行餒缺 鼎食鼎烹 不誡饕餮 嚴自食糞 迹穢口潔 於是述穢德先生 閔翁蝗 人 學道猶龍 託諷滑稽 翫世不恭 書壁自憤 可警惰慵 於是述閔翁 士廼天爵 士心爲志 其志如何 弗謀勢利 達不離士 窮不 失士 不飭名節 徒貨門地 酤鬻世德 商賈何異 於是述兩班 弘基大隱 迺隱於遊 淸濁無失 不忮不求 於是述金神仙 廣文窮 丐 聲聞過情 非好名者 猶不免刑 矧復盜竊 要假以爭 於是述廣文 孌彼虞裳 力古文章 禮失求野 亨短流長 於是述虞裳 世 降衰季 崇飾虗僞 詩發含珠 愿賊亂紫 逕捷終南 從古以醜 於是述易學大盜 入孝出悌 未學謂學 斯言雖過 可警僞德 明宣 不讀三年善學 農夫耕野 賓妻相揖 目不知書 可謂眞學 於是述鳳山學者 방경각외전 에 들어 있는 자신의 글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륜 끝에 벗이 놓인 것은 보다 덜 중시해서가 아니라 마치 오행 중의 흙이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 친親과 의義와 별別과 서序에 신信 아니면 어찌하리.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이 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네. 세 광인이 서로 벗하며 세상 피해 떠돌면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그들의 얼굴이 비 치어 보이는 듯하네. 이에 마장전馬駔傳을 짓는다. 선비들이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그 탐욕 고치지 못하 거늘 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하는 일은 더러울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을 짓는다. 민옹은 사람을 누리같이 여겼고 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풍자와 골계로써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선비란 바로 천작이요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 그 뜻은 어떠한가.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이름 절개 닦지 않고 가문家門 지체地體 기화 삼아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장사치와 뭐 가 다르랴. 이에 양반전兩班傳을 짓는다. 홍기는 대은이라 노니는 데 숨었다오.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 았네.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광문은 궁한 거지로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이름나기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형벌을 면치 못하였거든 더구나 이름 을 도적질하여 가짜로써 명성을 다툰 경우리요. 이에 광문전廣文傳을 짓는다. 아름다운 저 우상은 옛 문장에 힘을 썼네. 서울에서 사라진 예禮를 시골에서 구한다더니 생애는 짧아도 그 이름 영원하 리. 이에 우상전虞裳傳을 짓는다. 세상이 말세로 떨어져 허위만을 숭상하고 꾸미니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는 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은자인 체 하며 빠른 출세를 노리는 짓을 예로부터 추하게 여겼느니. 이에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을 짓는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하면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 하리니 이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거짓 군자를 경계할 만하네. 공명선公明宣은 글 읽지 않았어도 삼 년을 잘 배웠으며, 농부가 밭을 갈며, 아내를 손님같이 서로 공경하니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참된 배움이라 이를 만하네. 이에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을 짓는다. 18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75 28세(1764, 영조34) * 효종이 북벌 때 쓰라고 송시열에게 하사했다는 초구를 구경하고 초구기貂裘記 를 썼다 * 양반전 과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 지음 (4)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貂裘記 宣文王歸自瀋質 慨然有復讐之志 葢未甞一日而忘在瀋也 是時明亡十餘年矣 淸旣得志於天下 臣妾萬邦 而天下之士大夫 皆已薙髮左袵 立其朝而事其君者 亦旣有之 則天下不復有明室矣 然而獨王之志 未甞不存明室也 王旣承大統 首聘尤菴宋 先生 待之以賓師之禮 謀所以復大明之讐 雪先生之恥 蓋將學焉而後臣之也 先生朝夕告王以誠意正心之學 王旣樂聞其言 而巖穴之士 皆出而列於王朝矣 一日先生直禁中 世子跪授王手書 先生趨侍于朝 王屛左右 出貂裘以賜曰 燕薊早寒 可以禦 風雪 於是先生遂許王以驅馳 蓋將生聚十年 然後奮大義於天下 雖君臣同死行間 不怨也 旣而王薨 巖穴之士 稍稍自引而去 先生旣退居葩谷 而每獨入深山 拊膺呼天 未甞不泣貂裘也 賊臣多陰害之者 爲飛語以風淸 淸人盛兵臨界上 先生內旣數絀 於賊臣 而外爲淸人所持 然與學者必講春秋之義 以明先王之志 其失志於先王者 多怨先生 數置之死 先生流離海上 痛大義 之未伸也 宗國之將危也 每追念先王 未甞不抱裘而泣也 罪人皆伏其辜 先生旣還 而先王之遺老 已無在者 則不復言復雪之 事 而漠然四十年之間 皮幣之使 歲走燕薊之郊矣 及議禮起 賊臣復執國命 以爲先生不滿於先王 貶宗而降服 卒置之死 國 中遂諱言貂裘事矣 門人以先生遺命 立祠葩谷 祀明顯皇帝及烈皇帝 明陵時築壇苑中 並祀二帝 存葩谷之祠 以識先生之義 也 今上三十二年 以先生從祠孔子 而先生之子孫奉其遺像及貂裘進於上 上作贊而賜之 三月十九日 烈皇帝殉社之日也 崇 禎紀元後爲三甲申 上率群臣 親祀大報壇 於是里中之父兄 至宋氏城西之寓舍 拜先生之像 出貂裘 陳之於中堂 相與歎息流 涕 咸屬某曰 曲阜之後 世寶其遺履 鼎湖之群臣 泣其墜弓 則况是裘也 先王之賜而先生之所受歟 况乎其是年而是日歟 某 不敢辭 乃拜手稽首 係之以詩曰 維我先王 亦維有君 大明天子 我君之君 先王有臣 時烈英甫 忠于天子 如忠其主 先王有仇 維彼建州 豈獨我私 大邦之讎 王欲報之 大老與謀 王曰懋哉 賜汝貂裘 秋毫啣霜 紫塞騰光 大功未集 王遽陟方 大老其寒 抱裘而泣 其淚滿地 化而爲碧 匪裘不溫 未服是矣 先王之命 命弊是矣 今夕何辰 甲其三申 明之遺民 先王聖人 초구기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문왕宣文王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와서는 개연히 복수할 뜻을 품었으니, 하루라도 심양에 있던 날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이때 명明나라가 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청淸나라가 이미 천하에서 뜻을 이루어 세계만방을 예 속시킴에 따라, 중국 천하의 사대부들이 모두 이미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그 조정에 나아가 그 임금을 섬기는 자 들 역시 이미 있었으니, 천하에 다시 명나라 왕실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선문왕의 뜻만은 언제나 명나라의 왕실을 보 존하는 것이었다. 선문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 맨 먼저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宋時烈)을 초빙하여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 우하고, 위대한 명나라 大明 의 원수를 갚고 선왕先王의 치욕을 씻을 방법을 도모했으니, 이는 먼저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대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아뢰었는데, 왕이 그 말을 즐겨 들음으로써 산중에 은 거하던 선비들이 모두 나와서 왕의 조정에 줄을 잇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무릎을 꿇고서 왕이 손수 쓴 편지를 직접 건네주므로, 선생은 달려 나아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초구貂裘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연계燕薊에는 추위가 일찍 오니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왕에게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 개 앞으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한 뒤에 대의大義를 천하에 떨쳐, 비록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군중軍中에서 죽 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승하하고 나자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도 차차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떠나갔다. 선생은 이미 물러 박지원 생애와 행적 181

176 나 파곡葩谷에 살고 있었는데, 늘 혼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가슴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초구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 이 없었다. 적신賊臣들 중에 음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 유언비어를 만들어 청나라에 넌지시 알리니, 청나라 사람들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안으로는 이미 적신들에게 자주 배척을 당하고 밖으로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았지만, 배우는 사람들과 더불어 반드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여 선왕先王(孝宗)의 뜻을 밝히니, 선왕에게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이 선생을 많이 원 망하여 선생을 여러 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생은 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춘추대의를 펴지 못하고 종주국宗主國(명나라)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원통히 여기고, 매양 선왕을 추모하며 초구를 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침내 죄인들이 다 처벌을 받고 선생은 돌아오게 되었으나, 선왕의 유신遺臣들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다시는 원수를 갚고 치 욕을 씻는 일을 말하지 않고, 아득한 40년 세월 동안 조공朝貢하는 사신이 해마다 연계燕薊의 교외를 달려가게 되었다. 급기야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적신들이 다시 정권을 쥐자, 선생이 선왕에게 불만을 품어 종통宗統을 폄하시키고 복服을 낮 추었다고 하여 끝내 죽음에 몰아넣고 말았으니, 국내에서는 마침내 초구에 대한 일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다. 문인들이 선생 의 유명遺命에 따라 파곡葩谷에 사우祠宇를 세워 명나라 현황제顯皇帝(神宗)와 열황제烈皇帝(毅宗)를 제사하였다. 숙종肅宗 때 금 원禁苑에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두 분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면서도, 파곡의 사우를 보존하여 선생의 의리를 잊지 않게 하였다. 지금 임금[今上 英祖] 32년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되어 선생의 자손이 선생의 유상遺像과 초구를 받들어 임금 께 올리니, 임금께서 찬贊을 지어 내렸다. 3월 19일은 열황제가 사직을 위해 순절殉節하신 날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신년(1764, 영조 40)에 임금께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대보단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즈음하여 마을 안의 부형들이 성城 서쪽에 있는 송씨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의 초상에 절하고 초구를 꺼내어 대 청 가운데에 펼쳐 놓고 서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모두 나에게 부탁하기를, 곡부曲阜의 공자 후손들은 공자가 신던 신발을 보배로 여겼고, 정호鼎湖의 신하들은 떨어진 황제黃帝의 활을 안고 울었다네. 더구나 이 초구는 선왕께서 하사하 시고 선생께서 받으신 것이 아닌가. 더더구나 열황제가 순절하신 때가 바로 이해요 이날이 아닌가!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하 지 못하고 마침내 공손히 손 모아 큰절하며 수락하였다. (5) 燕巖集 권8, 放璚閣外傳, 兩班傳 兩班者 士族之尊稱也 旌善之郡 有一兩班 賢而好讀書 每郡守新至 必親造其廬而禮之 然家貧 歲食郡糶 積歲至千石 觀 察使巡行郡邑 閱糶糴 大怒曰 何物兩班 乃乏軍興 命囚其兩班 郡守意哀其兩班貧 無以爲償 不忍囚之 亦無可柰何 兩班日 夜泣 計不知所出 其妻罵曰 生平子好讀書 無益縣官糴 咄兩班 兩班不直一錢 其里之富人 私相議曰 兩班雖貧 常尊榮 我 雖富 常卑賤 不敢騎馬 見兩班則跼蹜屛營 匍匐拜庭 曳鼻膝行 我常如此 其僇辱也 今兩班貧不能償糴 方大窘 其勢誠不能 保其兩班 我且買而有之 遂踵門而請償其糴 兩班大喜許諾 於是富人立輸其糴於官 郡守大驚異之 自往勞其兩班 且問償糴 狀 兩班氈笠 衣短衣 伏塗謁稱小人 不敢仰視 郡守大驚 下扶曰 足下何自貶辱若是 兩班益恐懼頓首俯伏曰 惶悚小人 非敢 自辱 已自鬻其兩班 以償糴 里之富人 乃兩班也 小人復安敢冒其舊號而自尊乎 郡守歎曰 君子哉富人也 兩班哉富人也 富 而不吝 義也 急人之難 仁也 惡卑而慕尊 智也 此眞兩班 雖然 私自交易而不立券 訟之端也 我與汝 約郡人而證之 立券而 信之 郡守當自署之 於是郡守歸府 悉召郡中之士族及農工商賈 悉至于庭 富人坐鄕所之右 兩班立於公兄之下 乃爲立券曰 乾隆十年九月日 右明文段 厂+串賣兩班爲償官糓 其直千斛 維厥兩班 名謂多端 讀書曰士 從政爲大夫 有德爲君子 武階 列西 文秩叙東 是爲兩班 任爾所從 絶棄鄙事 希古尙志 五更常起 點硫燃脂 目視鼻端 會踵支尻 東萊博議 誦如氷瓢 忍饑 耐寒 口不說貧 叩齒彈腦 細嗽嚥津 袖刷毳冠 拂塵生波 盥無擦拳 漱口無過 長聲喚婢 緩步曳履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 如荏 一行百字 手毋執錢 不問米價 暑毋跣襪 飯毋徒髻 食毋先羹 歠毋流聲 下箸毋舂 毋餌生葱 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 忿毋搏妻 怒毋踢器 毋拳敺兒女 毋詈死奴僕 叱牛馬 毋辱鬻主 病毋招巫 祭不齋僧 爐不煑手 語不齒唾 毋屠牛 毋賭錢 凡 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城主 旌善郡守押 座首別監證署 於是通引搨印錯落 聲中嚴皷 斗縱參橫 戶長讀旣畢 18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77 富人悵然久之曰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 太乾沒 願改爲可利 於是乃更作券曰 維天生民 其民維四 四民 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矣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决文科 小成進士 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備具 維錢之槖 進士 三十 乃筮初仕 猶爲名蔭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 室珥冶妓 庭糓鳴鶴 窮士居鄕 猶能武斷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 慢我 灰灌汝鼻 暈髻汰鬢 無敢怨咨 富人中其券而吐舌曰 已之已之 孟浪哉 將使我爲盜耶 掉頭而去 終身不復言兩班之事 양반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강원도 정선旌善 땅에 한 가난한 양반이 있었는데, 그는 현명하고 정직하며 책 읽기를 즐기고 손님 접대를 잘하 며 신임 군수에게 인사 잘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생산능력이 없으므로, 관가에서 쌀을 빌려 먹으며 살아가는 처지였는데, 그 환자還子가 어느덧 1,000여 석이나 되어 갚을 길이 없자 마침내 관찰사의 투옥 명령이 내렸다. 군수가 난처하여 망설일 때 이웃에 살던 지체 낮은 부자가 그 빚을 대신 갚아주고 양반의 신분을 샀다. 한숨 돌린 군수가 증인이 되어 양반문서를 만들 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양반으로서 지켜야 될 온갖 형식적인 행동절차와 권리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부자는 그것을 보니 겉 치레일 뿐, 구속이 많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며, 그 월권越權이 도둑과 다를 바 없으므로 양반되기를 포기하고 달아난 후 다시 는 양반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몰락하는 양반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을 주제로 하여 상민계급에 대한 양반들의 착 취와 상민들의 양반에 대한 선망을 나타낸 작품이다. (6) 燕巖集 권8, 放璚閣外傳, 廣文者傳 廣文者 丐者也 甞行乞鍾樓市道中 群丐兒 推文作牌頭 使守窠 一日天寒雨雪 群兒相與出丐 一兒病不從 旣而兒寒專纍 欷聲甚悲 文甚憐之 身行丐得食 將食病兒 兒業已死 群兒返乃疑文殺之 相與搏逐文 文夜匍匐入里中舍 驚舍中犬 舍主得 文縛之 文呼曰 吾避仇 非敢爲盜 如翁不信 朝日辨於市 辭甚樸 舍主心知廣文非盜賊 曉縱之 文辭謝請弊席而去 舍主終已 恠之 踵其後 望見群丐兒曳一尸 至水標橋 投尸橋下 文匿橋中 裹以弊席 潛負去 埋之西郊之墦間 且哭且語 於是舍主執詰 文 文於是盡告其前所爲及昨所以狀 舍主心義文 與文歸家 予文衣 厚遇文 竟薦文藥肆富人作傭 保久之 富人出門 數數顧 還復入室 視其扃 出門而去 意殊怏怏 旣還大驚熟視文 欲有所言 色變而止 文實不知 日默默亦不敢辭去 旣數日 富人妻兄 子持錢還富人曰 向者吾要貸於叔 會叔不在 自入室取去 恐叔不知也 於是富人大慚廣文 謝文曰 吾小人也 以傷長者之意 吾將無以見若矣 於是遍譽所知諸君及他富人大商賈 廣文義人 而又過贊廣文諸宗室賓客及公卿門下左右 公卿門下左右及宗 室賓客 皆作話套 以供寢數月間 士大夫盡聞廣文如古人 當是時 漢陽中皆稱廣文 前所厚遇舍主之賢能知人 而益多藥肆富 人長者也 時殖錢者 大較典當首飾璣翠衣件器什宮室田僮奴之簿書 參伍本幣以得當 然文爲人保債不問 當一諾千金 文爲人 貌極醜 言語不能動人 口大幷容兩拳 善曼碩戱 爲鐵拐舞 三韓兒相訾傲 稱爾兄達文 達文又其名也 文行遇鬪者 文亦解衣 與鬪啞啞 俯劃地若辨曲直狀 一市皆笑 鬪者亦笑 皆解去 文年四十餘 尙編髮 人勸之妻則曰 夫美色 衆所嗜也 然非男所獨 也 唯女亦然也 故吾陋而不能自爲容也 人勸之家則辭曰 吾無父母兄弟妻子 何以家爲 且吾朝而歌呼入市 中 暮而宿富貴家 門下 漢陽戶八萬爾 吾逐日而易其處 不能盡吾之年壽矣 漢陽名妓窈窕都雅 然非廣文聲之 不能直一錢 初羽林兒各殿別監 駙馬都尉傔從垂袂過雲心 心名姬也 堂上置酒皷瑟 屬雲心舞 心故遲不肯舞也 文夜往彷徨堂下 遂入座 自坐上坐 文雖弊衣 袴 擧止無前 意自得也 眦膿而眵 陽醉噎 羊髮北髻 一座愕然 瞬文欲敺之 文益前坐 拊膝度曲 鼻吟高低 心卽起更衣 爲文 釖舞 一座盡歡 更結友而去 광문자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문으로 된 일종의 풍자소설로, 조선 후기의 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작품이다. 광문廣文은 청계천변에 움막을 짓고 사는 거지의 우두머리로, 어느 날 동료들이 모두 걸식을 나간 사이에 병들어 누워 있는 거지아이를 혼자서 간호하다가 그 아이가 죽어버리자 동료들의 오해를 사게 되어 거기서 도망친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 거지들이 버린 아이의 시체를 몰래 박지원 생애와 행적 183

178 거두어 산에다 묻어 준다. 이것을 목격한 어떤 부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그를 어느 약종상藥種商에 소개한다. 점원이 된 그는 그 곳에서 정직함과 허욕이 없는 원만한 인간성으로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게 된다. 나이가 차서 결혼할 때가 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추한 몰골을 생각하고 아예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장안에서도 가장 이름난 운심이란 기생 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방에 있던 귀인들이 그의 남루한 복장과 추한 얼굴에 낯을 찡그리고 상대하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의젓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운심이 그의 높은 인격에 감동하여 흔연히 자리에 서 일어나 그를 위해 춤을 추었다. 이 소설은 비천한 거지인 광문의 순진성과 거짓 없는 인격을 그려 양반이나 서민이나 인 간은 똑같다는 것을 강조하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던 당시의 양반사회를 은근히 풍자한 작품이다. 29세(1765, 영조35) * 유언호兪彦鎬ㆍ신광온申光蘊 등과 금강산 유람 *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 지음 * 김신선전金神仙傳 저술 (7) 燕巖集 권4, 映帶亭雜咏, 叢石亭觀日出 行旅夜半相叫譍 遠鷄其鳴鳴未應 遠鷄先鳴是何處 只在意中微如蠅 邨裏一犬吠仍靜 靜極寒生心兢兢 是時有聲若耳鳴 纔欲審聽簷鷄仍 此去叢石只十里 正臨滄溟觀日昇 天水澒洞無兆眹 洪濤打岸霹靂興 常疑黑風倒海來 連根拔山萬石崩 無 怪鯨鯤鬪出陸 不虞海運値摶鵬 但愁此夜久未曙 從今混沌誰復徵 無乃玄冥劇用武 九幽早閉虞淵氷 恐是乾軸旋斡久 遂傾 西北隳環絙 三足之烏太迅飛 誰呪一足繫之繩 海若衣帶玄滴滴 水妃鬢鬟寒凌凌 巨魚放蕩行如馬 紅鬢翠鬣何鬅鬙 天造草 昧誰參看 大叫發狂欲點燈 欃槍擁彗火垂角 禿樹啼鶹尤可憎 斯須水面若小癤 誤觸龍爪毒可疼 其色漸大通萬里 波上邃暈 如雉膺 天地茫茫始有界 以朱劃一爲二層 梅澁新惺大染局 千純濕色縠與綾 作炭誰伐珊瑚樹 繼以扶桑益熾蒸 炎帝呵噓口 應喎 祝融揮扇疲右肱 鰕鬚最長最易爇 蠣房逾固逾自 寸雲片霧盡東輳 呈祥獻瑞各效能 紫宸未朝方委裘 陳扆設黼仍虛凭 纖月猶賓太白前 頗能爭長辥與滕 赤氣漸淡方五色 遠處波頭先自澄 海上百怪皆遁藏 獨留羲和將驂乘 圓來六萬四千年 今 朝改規或四楞 萬丈海深誰汲引 始信天有階可陞 鄧林秋實丹一顆 東公綵毬蹙半登 夸父殿來喘不定 六龍前道頗誇矜 天際 黯慘忽顰蹙 努力推轂氣欲增 圓未如輪長如瓮 出沒若聞聲砯砯 萬物咸覩如昨日 有誰雙擎一躍騰 금강산 총석정에서 일출을 보고 난 소감을 정리한 글이다. 길손들 한밤중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먼 닭이 울었는가 아직 울지 않을 텐데. 먼저 우는 먼 닭은 그게 바로 어드메냐. 의중에만 있는 거라 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마을 속의 개 한 마리 짖다 도로 고요하니 고요 극해 찬기 일어 마음이 으시으 시. 이때 마침 소리 있어 두 귀가 울리는 듯, 자세히 듣자니 집닭 울음 뒤따르네. 예서 가면 총석정이 십 리밖에 되잖으니 동 해에 곧바로 다다르면 해돋이를 보겠구먼. 하늘과 맞닿은 물만 넘실넘실 해 뜰 조짐 전혀 없고, 거센 파도 언덕 치니 벼락이 일어나네. 노상 의심쩍은 건 폭풍이 바다를 뒤집어엎고, 뿌리째 산을 뽑아 뭇 바위 무너질까. 고래 곤어 다투다가 뭍으로 나올 법도 하이. 뜻밖에 회오리 바람 일어 나래 치는 붕새를 만날지도.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밤이 오래도록 아니 새어 이제부터 혼 돈을 뉘 다시 징벌할지. 아마도 겨울 신이 제 힘을 과시하여 구유九幽를 일찍 닫고 우연虞淵을 얼게 하지 않았나. 아마도 하늘 축이 오래도록 돌고 돌다 서북으로 기울어져 묶은 줄이 끊어진 게지. 세 발 달린 까마귀 날기로는 천하제일인데. 누가 주술 부 려 발 하나를 노끈으로 매어 놓았나. 해야海若의 옷과 띠엔 물방울이 뚝뚝 듣고, 수비水妃의 쪽 찐 머린 추위 서려 싸늘하네. 큰 고기 활개 치며 준마같이 내달리니 붉고 푸른 지느러미 어찌 그리 터부룩한고 개벽 이전 어둔 누리 본 사람이 누구더냐. 참다못해 외쳐 대며 등이라도 켜려 드네. 혜성이 꼬리를 끌고 화성火星이 광망光芒을 뻗치네. 낙엽 진 나무의 부엉이 울음 더욱 18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79 더 밉상일레. 조금 뒤에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 용의 발톱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 그 빛이 점점 커져 만리를 비추누 나. 물결 위에 번진 빛 꿩의 가슴 비슷하이 아득아득 이 천지에 한계 처음 생겼으니 붉은 붓 한 번 그어 두 층이 되었구려. 매 삽이라 신성이라 염색집이 하도 커서 몇 천 필 색을 들여 온갖 비단 으리으리. 산호나무 누가 베어 참숯을 만들었나 부상나무 뒤이으니 더욱더 이글이글, 염제는 불을 불어 입이 응당 비틀리고, 축융은 부채 휘둘러 바른팔이 지쳤구려. 새우 수염 가장 길 어 그슬리기 제일 쉽고, 굴껍질은 굳을수록 더욱더 절로 익네. 한 치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다 쓸려 가서 온갖 상서 바치려고 제 힘을 다하누나 자신궁紫宸宮엔 조회 전에 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병풍만 펼쳐 논 채 용상은 비어 있네. 초승달은 샛별 앞에 오히려 밀려나서 먼저 예를 행하겠다고 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붉은 기운 차츰 묽어 오색으로 나뉘더니 먼 물결 머 리부터 절로 먼저 맑아지네.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디론지 숨어 버리고, 희화만이 홀로 남아 수레 장차 타려 하네. 육만이라 사 천 년을 둥글둥글 내려왔으니 오늘 아침 동그라미 고쳐 어쩌면 네모가 될라. 만길의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을까 이제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 등림에 가을 열매 한 덩이가 붉었고, 동공이 채색 공을 차서 반만 올렸구려. 과보는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고 육룡은 앞서 끌며 교만스레 자랑하네. 하늘가 어둑해져 갑자기 눈살 찌푸리듯 하늘가 어두 워지다가 어영차 해 수레 미니 기운이 솟아난 듯 바퀴처럼 둥글잖고 독처럼 길쭉한데 뜰락 말락 하니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듯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는데.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놨노. (8) 燕巖集 권8, 放璚閣外傳, 金神仙傳 金神仙名弘基 年十六娶妻 一歡而生子 遂不復近 辟糓面壁坐 坐數歲 身忽輕 遍遊國內名山 常行數百里 方視日早晏 五 歲一易屨 遇險則步益捷 甞曰 褰而涉 方而越 故遲我行也 不食故人不厭其來客 冬不絮 夏不扇 遂以神仙名 余甞有幽憂之 疾 盖聞神仙方技 或有奇效 益欲得之 使尹生申生陰求之 訪漢陽中 十日不得 尹生言甞聞弘基家西學洞 今非也 乃其從昆 弟家 寓其妻子 問其子 言父一歲中率四三來 父友在體府洞 其人好酒而善歌 金奉事云 樓閣洞金僉知好碁 後家李萬戶好琴 三淸洞李萬戶好客 美垣洞徐哨官 毛橋張僉使 司僕川邊池丞 俱好客而喜飮 里門內趙奉事 亦父友也 家蒔名花 桂洞劉判官 有奇書古釖 父常遊居其間 君欲見 訪此數家 遂行歷問之 皆不在 暮至一家 主人琴 有二客皆靜默 頭白而不冠 於是自意得 金弘基 立久之 曲終而進曰 敢問誰爲金丈人 主人捨琴而對曰 座無姓金者 子奚問曰 小子齋戒而後 敢來求也 願老人無諱 主人笑曰 子訪金弘基耶 不來耳 敢問來何時 曰 是居無常主 遊無定方 來不預期 去不留約 一日中或再三過 不來則亦閱歲 聞金多在倉洞會賢之坊 且董關梨峴銅峴慈壽橋社洞壯洞大陵小陵之間 甞往來遊居 然皆不知其主名 獨倉洞吾知之 子往問 焉 遂行訪其家問焉 對曰 是不來者甞數月 吾聞長暢橋林同知喜飮酒 日與金角 今在林否也 遂訪其家 林同知八十餘 頗重 聽曰 咄夜劇飮 朝日餘醉 入江陵 於是悵然久之 問曰 金有異歟 曰 一凡人 特未甞飯 狀貌何如 曰 身長七尺餘 癯而髯 瞳 子碧 耳長而黃 能飮幾何 曰 飮一杯醉 然一斗醉不加 甞醉臥塗 吏得之 拘七日不醒 乃釋去 言談何如 曰 衆人言輒坐睡 談已輒笑不止 持身何如 曰 靜若參禪 拙如守寡 余甞疑尹生求不力 然申生亦訪數十家 皆不得 其言亦然 或曰 弘基年百餘 所與遊皆老人 或曰 不然 弘基年十九娶 卽有男 今其子纔弱冠 弘基年計今可五十餘 或言金神仙 採藥智異山 隳崖不返 今 已數十年 或言巖穴窅冥 有物熒熒 或曰 此老人眼光也 山谷中 時聞長欠聲 今弘基惟善飮酒 非有術 獨假其名而行云 然余 又使童子福往求之 終不可得 歲癸未也 明年秋 余東遊海上 夕日登斷髮嶺 望見金剛山 其峯萬二千云 其色白 入山 山多楓 方丹赤杻梗柟豫章 皆霜黃 杉檜益碧 又多冬靑樹 山中諸奇木 皆葉黃紅 顧而樂之 問轝僧 山中有異僧 得道術可與遊乎 曰 無有 聞船菴有辟糓者 或言嶺南士人 然不可知 船菴道險 無至者 余夜坐長安寺 問諸僧衆 俱對如初言 辟糓者 滿百日當去 今幾九十餘日 余喜甚 意者其仙人乎 卽夜立欲往 朝日坐眞珠潭下 候同遊眄睞久之 皆失期 不至 又觀察使巡行郡邑 遂入 山 流連諸寺間 守令皆來會 供張廚傳 每出遊 從僧百餘 船菴道絶峻險 不可獨至 甞自往來靈源白塔之間 而意悒悒 旣而天 久雨 留山中六日 乃得至船菴 在須彌峯下 從內圓通行二十餘里 大石削立千仞 路絶 輒攀鐵索 懸空而行 旣至 庭空無禽鳥 啼 榻上小銅佛 唯二屨在 余悵然徘徊 立而望之 遂題名巖壁下 歎息而去 常有雲氣風瑟然 或曰 仙者山人也 又曰 入山爲 仙也 又僊者 僊僊然輕擧之意也 辟糓者 未必仙也 其鬱鬱不得志者也 박지원 생애와 행적 185

180 김신선전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신선의 속명 홍기弘基로 16세에 장가들어 단 한번 아내를 가까이 해서 아들을 낳았으며 화식火食을 끊고 벽을 향해 정좌한지 두어 해 만에 별안간 몸이 가벼워졌으며 그 뒤 각지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하루에 수백 리를 걸었으나 5년 만 에 한번 신을 갈아 신었고 험한 곳에 다다르면 더욱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밥을 먹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 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 속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남들은 그런 그를 신선이라 불렀다. 키는 7척이 넘 었으며, 여윈 얼굴에 수염이 길었고 눈동자는 푸르며 귀는 길고 누른빛이 났다. 술은 한 잔에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시고도 더 취하지는 않았고 남이 이야기하면 앉아서 졸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빙긋이 웃으며, 조용하기는 참선하는 것 같고, 졸拙하 기는 수절과부와 같았다. 어떤 이는 김홍기의 나이가 백여 살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쉰 남짓 되었다고도 하며 지리산에 약 을 캐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지가 수십 년이라고도 하고 어두운 바위 구멍 속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 무렵 박지원은 마침 마음에 우울병이 있었는데 김신선의 방기方技가 기이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 보고자 윤생과 신생을 시켜 몰래 탐문해 보았으나 열흘이 지나도 찾지 못하였다. 윤생은 김홍기가 서학동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 그는 사촌집에 처자를 남겨둔 채 떠나고 없었다. 그 아들에게서 홍기가 술, 노래, 바둑, 거문고, 꽃, 책, 고검 古劒따위를 좋아하는 사람들 집에서 놀고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았으나 아무데도 없었으며 창동을 거쳐 임동지의 집 에까지 찾아갔으나 아침에 강릉을 떠나갔다는 말만 듣는다. 다시 복福을 시켜서 찾아보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 박지원이 관동으로 유람 가는 길에 단발령을 넘으면서 남여를 메고 가는 어떤 스님으로부터 "선암에서 벽곡하는 사람이 있 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또한 그 날 밤 장안사에 승려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여러 날을 지체하여 선암에 올 랐을 때에는 탑 위에 동불銅佛과 신발 두 짝이 있을 뿐이었다. 31세(1767, 영조37) * 부친상 * 백련봉白蓮峯 아래 삼청동三淸洞 이장오李章吾의 별장으로 이사 *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저술 (9) 燕巖集 권8, 放璚閣外傳, 虞裳傳 日本關白新立 於是廣儲蓄 繕宮館 理舟檝 刮屬國諸島奇材釖客 詭技淫巧書畵文學之士 聚之都邑 練肄完具數年 然後乃 敢請使於我 若待命策之爲者 朝廷極選文臣三品以下 備三价以送之 其幕佐賓客 皆宏辭博識 自天文地理算數卜筮醫相武力 之士 以至吹竹彈絲謔浪戱笑歌呼飮酒博奕騎射以一藝名國者 悉從行 而最重詞章書畵 得朝鮮一字 不齎糧而適千里 其所居 舘 皆翠銅甍 除嵌文石 而楹檻朱漆 帷帳飾以火齊 靺鞨瑟瑟 食皆金銀鍍侈靡 瑰麗千里 往往設爲奇巧 庖丁驛夫 據牀而坐 垂足於枇子桶 使花衫蠻章洗之 其陽浮慕尊如此 而象譯持虎豹 貂鼠 人蔘諸禁物 潛貨璣珠 寶刀 駔儈機利 殉財賄如騖 倭 外謬爲恭敬 不復衣冠慕之 虞裳以漢語通官隨行 獨以文章 大鳴日本中 其名釋貴人 皆稱雲我先生 國士無雙也 大坂以東僧 如妓 寺刹如傳舍 責詩文如博進 繡牋花軸 堆床塡案 而類爲難題强韻以窮之 虞裳每倉卒口占 如誦宿搆 步押平妥 從容席 散 無罷色 無軟詞 其海覽篇曰 坤輿內萬國 碁置而星列 于越之魋結 笁乾之祝髮 齊魯之縫腋 胡貊之氈 或文明魚雅 或兜 離侏佅 群分而類聚 遍土皆是物 日本之爲邦 波壑所蕩潏 其藪則搏木 其次則賓日 女紅則文繡 土宜則橙橘 魚之恠章擧 木 之奇蘇鐵 其鎭山芳甸 句陳配厥秩 南北春秋異 東西晝夜別 中央類覆敦 嵌空龍漢雪 蔽牛之鉅材 抵鵲之美質 與丹砂金錫 皆往往山出 大坂大都會 環寶海藏竭 奇香爇龍涎 寶石堆雅骨 牙象口中脫 角犀頭上截 波斯胡目眩 浙江市色奪 寰海地中 海 中涵萬象活 鱟背帆幔張 鰌尾旌旗綴 堆壘蠣粘房 屭贔龜次窟 忽變珊瑚海 煜耀陰火烈 忽變紺碧海 霞雲衆色設 忽變水 銀海 星宿萬顆撒 忽變大染局 綾羅爛千匹 忽變大鎔鑄 五金光逬發 龍子劈天飛 千霆萬電戛 髮鱓馬甲柱 秘恠恣怳愡 其民 18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81 裸而冠 外螫中則蝎 遇事則麋沸 謀人則鼠黠 苟利則蜮射 小拂則豕突 婦女事戱謔 童子設機括 背先而淫鬼 嗜殺而佞佛 書 未離鳥鳦 詩未離鴂舌 牝牡類麀鹿 友朋同魚鱉 言語之鳥嚶 象譯亦未悉 草木之瓌奇 羅含焚其帙 百泉之源滙 酈生瓮底蠛 水族之弗若 思及閟圖說 刀釖之款識 貞白續再筆 地毬之同異 海島之甲乙 西泰利瑪竇 線織而刃割 鄙夫陳此詩 辭俚意甚 實 善鄰有大謨 覊縻和勿失 如虞裳者 豈非所謂華國之譽耶 神宗萬曆壬辰 倭秀吉潛師襲我 躪我三都 劓辱我髦倪 躑躅冬 柏植於三韓 我昭敬大王避兵灣上 奏聞天子 天子大驚 提天下之兵東援之 大將軍李如松 提督陳璘 麻貴 劉綎 楊元 有古名 將之風 御史楊鎬 萬世德 邢玠才兼文武 略驚鬼神 其兵皆秦鳳陜浙雲登貴萊驍騎射士 大將軍家僮千人 幽薊釖客 然卒與倭 平 僅能驅之出境而已 數百年之間 使者冠盖 數至江戶 然謹體貌 嚴使事 其風謠人物險塞强弱之勢 卒不得其一毫 徒手來 去 虞裳力不能勝柔毫 然吮精嘬華 使水國萬里之都 木枯川渴 雖謂之筆拔山河可也 虞裳名湘藻 甞自題其畵象曰 供奉白 鄴侯泌 合鐵拐 爲滄起 古詩人 古仙人 古山人 皆姓李 李其姓也 滄起又其號也 夫士伸於知己 屈於不知己 鵁鶄鸂禽之微 者也 然猶自愛其羽毛 暎水而立 翔而後集 人之有文章 豈羽毛之美而已哉 昔慶卿夜論釰 盖聶怒而目之 及高漸離擊筑 荊 軻和而歌 已而相泣 旁若無人者 夫樂亦極矣 復從而泣之 何也 中心激而哀之無從也 雖問諸其人者 亦將不自知其何心矣 人之以文章相高下 豈區區釖士之一技哉 虞裳其不遇者耶 何其言之多悲也 鷄戴勝高似幘 牛垂胡大如袋 家常物百不奇 大 驚恠槖駝背 未甞不自異也 及其疾病且死 悉焚其藁曰 誰復知者 其志豈不悲耶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管仲之器小哉 子貢 曰 賜何器也 子曰 汝瑚璉也 盖美而小之也 故德譬則器也 才譬則物也 詩云 瑟彼玉瓚 黃流在中 易曰 鼎折足覆公餗 有德 而無才 則德爲虛器 有才而無德 則才無所貯 其器淺者易溢 人參天地 是爲三才 故鬼神者才也 天地其大器歟 彼潔潔者福 無所寓 善得情狀者 人不附 文章者天下之至寶也 發精蘊於玄樞 探幽隱於無形 漏洩陰陽 神鬼嗔怨矣 木有才 人思伐之 貝 有才 人思奪之 故才之爲字 內撇而不外颺也 虞裳一譯官 居國中 聲譽不出里閭 衣冠不識面目 一朝名震耀海外萬里之國 身傾側鯤鯨龍鼉之家 手沐日月 氣薄虹蜃 故曰 慢藏誨盜 魚不可脫於淵 利器不可以示人 可不戒哉 過勝本海作詩曰 蠻奴 赤足貌魀 鴨色袍背繪星月 花衫蠻女走出門 頭梳未竟髽其髮 小兒號嗄乳母乳 母手拍背鳴嗚咽 須臾擂鼓官人來 萬目圍繞 如活佛 蠻官膜拜獻厥琛 珊瑚大貝擎盤出 眞如啞者設賓主 眉睫能言筆有舌 蠻府亦耀林園趣 栟櫚靑橘配庭實 病痔舟中臥 念梅南老師言 乃作詩曰 宣尼之道麻尼敎 經世出世日而月 西士甞至五印度 過去現在無箇佛 儒家有此俾販徒 弄筆舌神吾 說 披毛戴角墜地犴 當受生日欺人律 毒焰亦及震旦東 精藍大衍都鄙列 睢盱島衆怵禍福 炷香施米無時缺 譬如人子戕人子 入養父母必不說 六經中天揚文明 此邦之人眼如漆 暘谷昧谷無二理 順之則聖背檮杌 吾師詔吾詔介衆 以詩爲金口木舌 詩 皆可傳也 及旣還過所次皆已梓印云 余與虞裳 生不相識 然虞裳數使示其詩曰 獨此子庶能知吾 余戱謂其人曰 此吳儂細唾 瑣瑣不足珍也 虞裳怒曰 傖夫氣人 久之歎曰 吾其久於世哉 因泣數行下 余亦聞而悲之 旣而虞裳死 年二十七 其家人夢見 仙子醉騎蒼鯨 黑雲下垂 虞裳披髮而隨之 良久虞裳死 或曰 虞裳仙去 嗟呼 余甞內獨愛其才 然獨挫之以爲虞裳 年少俛就 道 可著書垂世也 乃今思之 虞裳必以余爲不足喜也 有輓之者 歌曰 五色非常鳥 偶集屋之脊 衆人爭來看 驚起忽無跡 其二 曰 無故得千金 其家必有災 矧此稀世寶 焉能久假哉 其三曰 渺然一匹夫 死覺人數减 豈非關世道 人多如雨點 又歌曰 其 人膽如瓠 其人眼如月 其人腕有鬼 其人筆有舌 又曰 他人以子傳 虞裳不以子 血氣有時盡 聲名無窮已 余旣不見虞裳每恨 之 且旣焚其文章無留者 世益無知者 乃發篋中舊藏 得其前所示纔數篇 於是悉著之 以爲之傳虞裳 虞裳有弟 亦能 缺 우상전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상虞裳 이언진李彦瑱이라는 사람은 일찍이 일본 사신의 일원으로 수행하여 탁월한 문장으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고, 운아雲我 선생이란 칭호까지 받은 박학다재한 위인이었으나, 불우한 시대를 만나 울적한 일생을 보내다가 죽을 때는 그의 저 서까지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조정의 인재등용의 실책을 비난하는 동시에 자기만족에 도취하여 핍박한 생활을 한 양 반 학자들을 풍자하였다. 박지원 생애와 행적 187

182 32세(1768, 영조38) *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 * 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ㆍ유득공柳得恭ㆍ유금柳琴 등과 교유 (10) 燕巖集 권10, 別集, 罨畫溪蒐逸, 醉踏雲從橋記 孟秋十三日夜 朴聖彥與李聖緯 弟聖欽 元若虛 呂生 鄭生 童子見龍 歷携李懋官至 時徐參判元德先至在座 聖彥盤足橫 肱坐 數視夜 口言辭去 然故久坐 左右視莫肯先起者 元德亦殊無去意 則聖彥遂引諸君俱去 久之童子還言 客已當去 諸君 散步街上 待子爲酒 元德笑曰 非秦者逐 遂起相携 步出街上 聖彥罵曰 月明 長者臨門 不置酒爲懽 獨留貴人語奈何 令長 者久露立 余謝不敏 聖彥囊出五十錢沽酒 少醉 因出雲從衢 步月鍾閣下 時夜鼓已下三更四點 月益明 人影長皆十丈 自顧 凜然可怖 街上群狗亂嘷 有獒東來 白色而瘦 衆環而撫之 喜搖其尾 俛首久立 甞聞獒出蒙古 大如馬 桀悍難制 入中國者 特其小者 易馴 出東方者 尤其小者 而比國犬絶大 見恠不吠 然一怒則狺狺示威 俗號胡白 其絶小者 俗號友友 種出雲南 皆嗜胾 雖甚飢 不食不潔 嗾能曉人意 項繫赫蹄書 雖遠必傳 或不逢主人 必啣主家物而還 以爲信云 歲常隨使者至國 然率 多餓死 常獨行不得意 懋官醉而字之曰 豪伯 須臾失其所在 懋官悵然東向立 字呼豪伯 如知舊者三 衆皆大笑 鬨街群狗 亂 走益吠 遂歷叩玄玄 益飮大醉 踏雲從橋 倚闌干語曩時 上元夜蓮玉舞此橋上 飮茗白石家 惠風戱曳鵝頸數匝 分付如僕隷狀 以爲笑樂 今已六年 惠風南遊錦江 蓮玉西出關西 俱能無恙否 又至水標橋 列坐橋上 月方西隨正紅 星光益搖搖圓大 當面 欲滴露重 衣笠盡濕 白雲東起橫曳 冉冉北去 城東蒼翠益重 蛙聲如明府昏聵 亂民聚訟 蟬聲如黌堂嚴課 及日講誦 鷄聲如 一士矯矯 以諍論爲己任 술에 취해 이덕무 등과 운종교 난간에 기대어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쓴 글이다.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李喜明), 원약허元若虛(元有鎭), 여생呂生, 정 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작별 인사하고 가 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 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 으면서, 진秦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 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 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 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 [獒]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싸고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 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 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 엄을 과시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 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 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 18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83 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 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 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연柳蓮이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 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 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소임으로 삼는 것 같 았다. 33세(1769, 영조39) *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작성 (11) 燕巖集 권7, 鍾北小選, 綠天館集序 倣古爲文 如鏡之照形 可謂似也歟 曰左右相反 惡得而似也 如水之寫形 可謂似也歟 曰本末倒見 惡得而似也 如影之隨 形 可謂似也歟 曰午陽則侏儒僬僥 斜日則龍伯防風 惡得而似也 如畵之描形 可謂似也歟 曰行者不動 語者無聲 惡得而似 也 曰然則終不可得而似歟 曰夫何求乎似也 求似者非眞也 天下之所謂相同者 必稱酷肖 難辨者亦曰逼眞 夫語眞語肖之際 假與異在其中矣 故天下有難解而可學 絶異而相似者 鞮象寄譯 可以通意 篆籒隷楷 皆能成文 何則 所異者形 所同者心故 耳 繇是觀之 心似者志意也 形似者皮毛也 李氏子洛瑞年十六 從不佞學有年矣 心靈夙開 慧識如珠 嘗携其綠天之稿 質于 不佞曰 嗟乎 余之爲文纔數歲矣 其犯人之怒多矣 片言稍新 隻字涉奇 則輒問古有是否 否則怫然于色曰 安敢乃爾 噫 於古 有之 我何更爲 願夫子有以定之也 不佞攢手加額 三拜以跪曰 此言甚正 可興絶學 蒼頡造字 倣於何古 顔淵好學 獨無著書 苟使好古者 思蒼頡造字之時 著顔子未發之旨 文始正矣 吾子年少耳 逢人之怒 敬而謝之曰 不能博學 未攷於古矣 問猶不 止 怒猶未解 嘵嘵然答曰 殷誥周雅 三代之時文 丞相右軍 秦晉之俗筆 이서구의 녹천관집 에 대한 서문이다. 옛글을 모방하여 글을 짓기를 마치 거울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 고 하겠는가?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반대 로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 고 하겠는가? 뿌리와 가지가 거꾸로 보 이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한다면 비슷하다 고 하겠는가? 한낮이 되면 난쟁이[侏 儒僬僥]가 되고 석양이 들면 키다리[龍伯防風]가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림이 형체를 묘사하듯이 한다면 비슷하다 고 하겠는가? 걸어가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소리가 없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옛글과 끝내 박지원 생애와 행적 189

184 비슷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 구태여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 는 셈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酷肖] 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逼眞] 라고 일컫는다. 무릇 진眞 이라 말하거나 초肖 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가假 와 이異 의 뜻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을 통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한자漢字의 자체字體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 만 내심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 은 내면의 의도라 할 것이요 외형이 비슷한 것[形似] 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 이씨의 자제인 낙서洛瑞(李書九)는 나이가 16세로 나를 따라 글을 배운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심령心靈이 일찍 트이고 혜식慧識이 구슬과 같았다. 일찍이 녹천관집綠天館集 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질문하기를, 아, 제가 글을 지은 지가 겨우 몇 해밖에 되지 않았으나 남들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라도 조금 새롭다던가 한 글자라도 기이한 것이 나오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옛글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 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 고 대답하면 발끈 화를 내며 어찌 감히 그런 글을 짓느냐! 고 나무랍니다. 아, 옛글에 이런 것이 있었다면 제가 어찌 다시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판정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모아 이마에 얹고 세 번 절한 다음 꿇어앉아 말하였다. 네 말이 매우 올바르구 나. 가히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만하다.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것에서 모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안연顔 淵이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가 없었다. 만약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를 생각하고, 안연이 표 현하지 못한 취지를 저술한다면 글이 비로소 올바르게 될 것이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남들에게 노여움을 받으면 공경 한 태도로 널리 배우지 못하여 옛글을 상고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사과하거라. 그래도 힐문이 그치지 않고 노여움이 풀 리지 않거든, 조심스런 태도로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당시에 유행하던 문장이요, 승상丞相 이사李 斯와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에서 유행하던 속필俗筆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하거라 하였다. 34세(1770, 영조46) * 감시監試 양장兩場에서 1등, 회시會試에는 응시 하지 않음 * 북한산 대은암을 본 뒤 대은암창수시서大隱菴唱酬詩序 작성 (12)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序, 大隱菴唱酬詩序 戊寅十二月十四日 與國之誼之元禮 夜登白岳之東麓 列坐大隱岩下 澗冰溜漏 蹲蹲累積 冰底幽泉 琮琤蕭瑟 月嚴雪玄 境靜神夷 相視笑諧 樂而和詩 已而歎曰 此昔南袞士華之遺址 而朴誾仲說 一國之名士也 仲說之飮酒 必於大隱之巖 而其 賦詩也 未甞不與士華相屬也 當是時也 文章交遊之盛 可謂極一代之選 流而數百年之間 前人之勝迹 皆已湮滅而不可知 則 而况於袞者乎 今其頹垣廢址之間 慨然而爲之躊躇者 悲盛衰之有時 而知善惡之不可磨也 今元禮寓居於此 歌嬉傾倒 殆將 軒輊仲說 而澗流松風 尙有餘韻 嗚呼 當二子之遊於此也 其意氣之盛 顧何如哉 劇飮大醉 兩相吐露 握手歔欷 氣可以崩山 岳 辯可以决河漢 尙論千古 顧何甞不嚴於君子小人之辨哉 然而仲說諫死於燕山之朝 而其爲詩也不爲不多 然尙恨其少 至 今讀其詩 凜凜乎想有以立也 袞啓禍北門 斬艾正類 而袞之將死 悉焚其藁曰 使藁傳者 孰肯觀之哉 由是觀之 文章奇遊 信 一餘事爾 何與於其人之賢不肖 而在君子則來者慕其迹 後世尙恨其傳之不多也 而在小人則猶且自削之不暇也 而况於他人 乎 詩凡幾篇 仲美序 19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85 북한산 대은암에 오른 감회를 쓴 시이다. 무인년 섣달 열나흗날 국지國之(李耈永), 의지誼之(李舒永), 원례元禮(韓文洪)와 함께 밤에 백악白岳(北岳山) 동쪽 기슭에 올 라 대은암大隱巖 아래 줄지어 앉았노라니, 시냇물 언 것이 똑똑 떨어져 새어나오면서 층층이 얼어서 쌓여 있고, 얼음 밑의 그 윽한 샘에서는 옥이 부딪듯 맑은 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달은 몹시 차고 눈은 가무스름하여, 지경은 고요하고 정신은 차분 하였다. 서로 바라보며 웃고, 농담하면서 즐겁게 시를 주고받다가, 이윽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옛날 남곤 사화南 袞士華가 살던 곳이다. 박은 중열朴誾仲說은 온 나라에 이름난 선비였는데 중열이 술을 마시려면 반드시 이 대은암으로 왔으 며, 그가 시를 지을 적에는 사화와 더불어 짓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에 문장과 교유가 융성하여, 관리로 선발된 그 시 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망라하였다고 할 만했으나, 수백 년이 지나는 사이에 앞사람들의 명승고적은 모두 이미 묻히고 사라져 서 알 수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더군다나 남곤 같은 자에 있어서랴. 지금 그 무너진 담장과 황폐해진 집터 사이에서 감개 하여 서성대는 것은, 성쇠盛衰가 때가 있음을 슬피 여김과 동시에 선악善惡은 민멸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원례가 이곳에 잠시 거처하여 시를 노래하며 즐겁게 놀면서 흉금을 털어놓는 것이 거의 장차 중열과 맞먹을 정도인 데 다, 시냇물과 솔바람에는 상기도 여운이 남아 있다. 아아, 그 두 사람이 여기에서 노닐 적에 그들의 의기意氣의 융성함이 또한 어떠했겠는가. 실컷 마시고 한껏 취하여 둘이 서로 속내를 다 털어놓고는 손을 맞잡고 길게 한숨지을 적에, 그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듯하고 그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 (양자강의 지류)의 둑이 터진 듯하였을 것이니, 또한 천고千古의 인물들을 논평할 적에도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중열은 연산군의 조정에서 간諫하다 죽었는데, 그의 시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적 다고 한스럽게 여기게 된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어보면 늠름하여 확고히 설 수 있었음을 상상케 한다. 남곤은 북문北門의 화 禍를 열어 바른 사람들을 참살하였는데, 남곤이 바야흐로 죽을 적에 자신의 글을 다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후세에 전한다 하더라도 누가 보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문장과 특별한 교유도 진실로 하나의 여사餘事일 따름이니,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군자인 경우에는 뒷사람이 그 자취를 사모하고 후세에까지도 그 전하는 시가 많지 않음 을 한스러워하며, 소인인 경우에는 오히려 자기 손으로 글을 없애 버리기에 바빴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랴. 창수 한 시는 대략 몇 편이다. 중미仲美(연암)가 서문을 썼다. 35세(1771, 영조47) * 큰누님 별세.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작성 * 이덕무, 백동수白東修 등과 송도, 평양 거쳐 천마산ㆍ묘향산ㆍ속리산ㆍ가야산, 단양 등 명승지 를 두루 유람했고, 황해도 금천 연암골燕巖峽을 보고 몹시 좋아함 (13)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答洪德保書[第四] 弟之營一邱一壑 今已九年之久 水宿風餐 徒握兩拳 心勞才拙 何所成就 纔有石田數頃 茅屋三間 而其懸崖束峽 草樹蒙 茂 初無逕路 旣入洞門 則山脚皆藏 忽換面勢 崗平麓嫩 土白沙明 夷衍開曠 向南結局 其結局至小而徜徉遊息之所 能備其 中 前左蒼壁削立 如開畵障 石罅谽谺自成广厂 燕巢其中 是爲燕巖 堂前百餘武有平臺 臺皆層巖矗成 而溪彎其下 是爲釣 臺 泝溪白石盤陀 如施繩削 或爲平湖 或爲澄潭 遊魚極多 每西陽映帶 影澈石上 是爲罨畵溪 而山廻水複 四絶村閭 出大 路七八里 始聞鷄犬 自去秋 所以保聚鄰戶者 不過三四 皆鶉衣鬼面 啁啾魀 專事埋炭 不治農業 無異溪獠洞蠻 虎豹之爲鄰 鼪鼯之與友 其險阻孤絶如此 而心旣樂此 無與爲易 已葬嫂屋後 爲不可遷移之地 茅茨松簷 冬溫夏凉 粟麥可以卒歲 蔬蕨 甚肥 一采盈筐 或雪天 缺 舊聞此書共八頁 今於篋衍搜得四頁 猶未完 박지원 생애와 행적 191

186 홍덕보에게 보낸 답장 - 연암에 거처하면 살던 소감을 적어 보낸 편지이다.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 고 밥 지어 먹으며,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간은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 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 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의 형국形局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 전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틈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 가 그 속에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제비 바위)이라는 거지요.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臺가 있 는데, 대는 모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감아 도니 이것을 조대釣臺(낚시터)라 하지요. 시내 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가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며,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고기들이 몹시 많지요. 매양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리는데 이를 엄화계罨畫 溪라 하지요.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두절되니 한길을 나가 7, 8리를 거닐어야만 비로소 개 짖는 소 리와 닭 울음소리를 듣게 된답니다. 지난 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해진 옷에 귀신 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 절지절하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 삼고 족 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 띠 지붕 소나무 처마로 된 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고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왕성하게 자라 한번 캤다 하면 대바구니에 가득 찹니다. 더러는 눈 오는 날 이하 원문 빠짐 이 편지가 모 두 여덟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으나, 지금 상자를 뒤져 겨우 네 편을 얻었는데 그나마도 완전하지 못하다. 36세(1772, 영조48) * 가족을 광릉 석마향石馬鄕(성남시 분당 일대)에 보내고 전의감동典醫監洞(낙원동)에 혼자 거처하면서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여러 벗들과 더욱 친하게 사귐 *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저술 * 영대정잉묵映帶亭刷墨 을 펴고, 서문 작성 * 초정집楚亭集 서문 작성 (14) 燕巖集 권1, 煙湘閣選本, 序, 楚亭集序 爲文章如之何 論者曰 必法古 世遂有儗摹倣像而不之耻者 是王莽之周官 足以制禮樂 陽貨之貌類 可爲萬世師耳 法古寧 可爲也 然則刱新可乎 世遂有恠誕淫僻而不知懼者 是三丈之木 賢於關石 而延年之聲 可登淸廟矣 刱新寧可爲也 夫然則如 之何其可也 吾將奈何無其已乎 噫 法古者 病泥跡 刱新者 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刱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古之 人有善讀書者 公明宣是已 古之人有善爲文者 淮陰侯是已 何者 公明宣學於曾子 三年不讀書 曾子問之 對曰 宣見夫子之 居庭 見夫子之應賓客 見夫子之居朝廷也 學而未能 宣安敢不學而處夫子之門乎 背水置陣 不見於法 諸將之不服固也 乃淮 陰侯則曰此在兵法 顧諸君不察 兵法不曰置之死地而後生乎 故不學以爲善學 魯男子之獨居也 增竈述於减竈 虞升卿之知變 也 由是觀之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博旨意各殊 故飛潛走躍 或未著名 山川草木 必有秘靈 朽壤 19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87 蒸芝 腐草化螢 禮有訟 樂有議 書不盡言 圖不盡意 仁者見之謂之仁 智者見之謂之智 故俟百世聖人而不惑者 前聖志也 舜 禹復起 不易吾言者 後賢述也 禹 稷 顔回其揆一也 隘與不恭 君子不由也 朴氏子齊雲年二十三 能文章 號曰楚亭 從余學 有年矣 其爲文慕先秦 兩漢之作 而不泥於跡 然陳言之務祛則或失于無稽 立論之過高則或近乎不經 此有明諸家於法古刱新 互相訾謷而俱不得其正 同之並墮于季世之瑣屑 無裨乎翼道而徒歸于病俗而傷化也 吾是之懼焉 與其刱新而巧也 無寧法古 而陋也 吾今讀其楚亭集 而並論公明宣 魯男子之篤學 以見夫淮陰 虞詡之出奇 無不學古之法而善變者也 夜與楚亭言如此 遂書其卷首而勉之 論文正經曉人處 如銅環上銀星 可以暗摹而知尺寸 文有兩扇 一爲斷崖 一爲長江 有明諸家相訾謷 莫可 歸一 斯可謂片言折獄 박제가의 초정집 서문이다.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옛것을 본받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 에는 옛것을 흉내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왕망王莽의 주관周官 으로 족히 예악 을 제정할 수 있고, 양화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 해서 만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 를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창신刱新(새롭게 창조함) 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세 발[丈] 되는 장대가 국가 재정에 중요한 도량형기度量衡器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신성新聲을 종묘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창신 을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 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아! 소위 법고 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 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 거리이다. 진실로 법고 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 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이가 있었으니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요,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이가 있었으니 회음후淮陰侯가 바로 그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공명선이 증자曾子에게 배울 때 3년 동안이나 글을 읽지 않기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제 가 선생님께서 집에 계실 때나 손님을 응접하실 때나 조정에 계실 때를 보면서 그 처신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 문하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물을 등 지고 진陣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니, 여러 장수들이 불복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회음후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나와 있는데,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뿐이다. 병법에 그러지 않았던가? 죽을 땅에 놓 인 뒤라야 살아난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배우지는 아니하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혼자 살던 노魯 나라의 남자요, 아궁이를 늘려 아궁이를 줄인 계략을 이어 받은 것은 변통할 줄 안 우승경虞升卿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 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 드시 신비스러운 영물靈物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예에 대해 서도 시비가 분분하고 악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어진 이는 도를 보고 인仁 이라고 이르고 슬기로운 이는 도를 보고 지智 라 이른다. 그러므로 백세百世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 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앞선 성인의 뜻이요, 순 임금과 우 임금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 한 것은 뒷 현인이 그 뜻을 계승한 말씀이다. 우 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가 그 법도는 한 가지요, 편협함[隘]과 공손치 못함 [不恭]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 법이다.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이 나이 스물셋으로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는데, 나를 따라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 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때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없애려고 노력하다 보면 혹 근거 없는 표현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내세운 주장이 너무 고원하다 보면 혹 상도常道에 박지원 생애와 행적 193

188 서 자칫 벗어나기도 한다. 이래서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 와 창신 에 대하여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모두 정도를 얻지 못한 채 다 같이 말세의 자질구레한 폐단에 떨어져, 도를 옹호하는 데는 보탬이 없이 한갓 풍속만 병들게 하고 교화를 해치 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 창신 을 한답시고 재주 부릴진댄 차라리 법고 를 하 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지금 초정집 을 읽고서 공명선과 노 나라 남자의 독실한 배움을 아울러 논하고, 회음후와 우후虞詡의 기이한 발상이 다 옛것을 배워서 잘 변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밤에 초정楚亭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침내 그 책머리에 써서 권면하는 바이다. 문장을 논한 정도正道라 하겠다. 사람을 깨우치는 대목이 마치 구리 고리 위에 은빛 별 표시 가 있어 안 보고 더듬어도 치수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글에는 두 짝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끊어진 벼랑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긴 강물이 되었다.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하나로 의견이 합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고 한 말은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고 이를 만하다. 41세(1772, 정조1) * 장인 이보천 별세, 제외구처사유안재이공문祭外舅處士遺安齋李公文 작성 (15)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祭外舅處士遺安齋李公文 維歲丁酉六月二十三日丁巳 外甥潘南朴趾源 謹以淸酌 哭訣于外舅遺安齋李公之靈曰 嗚呼 小子年十六 入先生之門 于 今二十六年矣 雖愚鹵顓蒙未能學先生之道 亦自以爲不至阿好以羞先生爾 今於先生卽遠之日 可無一言以攄其無窮之哀乎 嗚呼 以士沒身 世俗所恥 彼以卑賤 惡能識士 所謂士者 尙志得己 柳介莘囂 不過如是 由是觀之 沒身以士 亦云難矣 嗚呼 先生 存沒不違士也 六十四年 善讀書者 積久光輝 溫乎發雅 樂飢若飽 守節如寡 孤不離群 貞不詭物 發言破鵠 制事截鐵 氷壺秋月 外內洞澈 陋世酸儒 恥士一節 夙刊客浮 晩韜英豪 視眞履坦 心降氣調 所性之外 不著一毫 墨則斯浣 稂豈不薅 曲肱飮水 繫馬千駟 旣無加損 士之一字 命有所定 時有所値 能辨此者 始識公志 嗚呼 梁木之哀 江漢之思 奠斝一慟 萬事 已而 眉宇之寄 獨有庭芝 歡戚造次 庶共挈携 不忘偲怡 以報受知 嗚呼 昔日小婿 今亦白頭 從今未死 庶寡悔尤 維德之愛 願言冥酬 肝膈之寫 靈或知不 嗚呼哀哉 尙饗 장인 이보천에 대한 제문이다. 정유년(1777) 6월 23일 정사丁巳일에 사위 반남 박지원은 삼가 술을 올려 장인 유안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아아, 이 소자 나이 열여섯에 선생의 가문에 사위로 들어와서 지금 26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우매하 여 선생의 도를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선생을 부끄럽게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제 선생이 멀리 떠나시는 날에 한마디 말로써 무궁한 슬픔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선비로서 일생 마치는 걸 세상 사람들은 수치로 알지만 이를 비천하다 여기는 저들이 어찌 선비를 알 수 있으랴. 이른바 선비란 건 상지하고 득기하나니 유하柳下의 절개와 유신有莘의 자득自得도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 이로써 보자하면 선비로 일생 마치기도 역시 어렵다 하리. 아아 선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선비 본분 안 어겼네. 예순이라 네 해 동안 글을 진정 잘 읽으시어. 오랫동안 쌓인 빛이 온아溫雅하게 드러났지 배부른 듯이 굶주림을 즐기셨고 과부처럼 절개 지키셨네. 고 고해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꼿꼿해도 남을 책하지 않으셨네. 발언은 정곡을 찌르고 일 처리는 똑부러지게 하셨지. 빙호추월 처럼 안팎 모두 툭 틔었지 천박한 세상의 썩은 유자儒者들은 변함없는 선비 절개 부끄러워하는데 객기는 진작 다 없애셨고 만년에는 호걸 기상 감추셨네. 진실만을 바라보고 탄탄대로 걸으시어 심기가 차분히 가라앉으셨지 타고난 천성 외엔 털끝 하 나 아니 붙여 먹 묻으면 씻어 버리고 논의 잡초 어찌 아니 뽑으리 팔을 베고 물 마시건 좋은 말 사천 필을 매어 놓건 덜고 19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89 보탬 있지 않네. 사士라는 한 글자엔 운명이란 정해진 것 때도 만나야 하는 법. 이를 분별할 줄 아는 이만 공의 뜻을 알게 되리. 아아 대들보 부러진 슬픔에다 강한 같은 그리움으로 잔을 올리며 통곡하노니 만사가 끝났도다. 공의 모습 빼닮은 아 들 한 분 두셨으니 즐겁거나 슬프거나 잠깐 사이라도 바라건대 함께 손잡고 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알아주신 은혜 보 답 잊지 않으리. 아아 예전의 어린 사위 이젠 저도 백발이 되었다오. 이제부터 죽기 전까지 허물 적기 바라오니 은덕과 사랑 으로 음조陰助하여 주소서. 간장에서 쏟는 눈물 영령께서 아실는지. 아아 슬프외다. 상향. 43세(1779, 정조3) * 답홍덕보서答洪德保書 3통을 보내 연암골 생활과 이덕무, 박제가,유득공의 규장각 검서로 발 탁된 일 축하 (16)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答洪德保書[第三] 炯楚輩遷喬 可謂奇矣 盛世抱珍 自無遺捐 從此得霑微祿 足以不死 安可責人如枯蟬抱木 竅蚓飮泉而已哉 第其東還以來 心目益高 百無可意 眉眼之間 時露鋒穎奇遊一段 已於乾淨錄中 耳染目擩 實如足踏 不須更事探討 非爲更無奇事 聊以抑 之 故不語蘆溝以西事 諸君輩頗亦怪之 不無鬱陶之意 想不喩此意也 惠風之道見天子 眞是壯觀 黃屋左纛 千乘萬騎 燀爀 如雷霆鬼神 而親駐馬按轡 手招東人 令平立仰視 其鼻脊隆起 直揷天庭 眼尾甚長 橫拂鬢間 鬍髯若林 楞骨如岳云 吾答曰 此始皇帝副本也 惠風曰 何以知之 曰吾已識之於三才圖會帝王像中矣 三人者皆大笑 對我不復自詑其奇觀 炯也得香祖筆 燕巖山居四字以贈 故已刻揭山齋 而其眞本奉納 合附古杭帖中 以爲傳久之地 如何 其印首章 爲暑月亦霜氣 名字章及尾識 稱德園 未知其字與號也 三人見啣 巧湊一團 其平生遊居也同 志趣也同 故自中猜怨頗多 而近者尤甚云 無足恠者 雖無猜 疾 自當戒謹 而况處卑而塗榮 職近而事艱 尤當息交誡飮 專精校閱 而浮華者日噪其側 欲避無門云 勢似然矣 已以一書 報 知此意 而炯也自爾細心 能自防愼 楚也太銳自用 則安能知之 吾今枯落鄕廬 山以外事 不惟不聞 亦所不問 無關他事 第其 平生愛惜者存 與吾兄頗同 故臨書自然及之 未知其間有甞往復 而諸君日記已成 有所示否 홍대용에게 편지를 보내 연암골 생활과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로 발탁된 일 축하하는 글이다. 형암炯菴(이덕무)ㆍ초정楚亭(박제가) 등이 관직에 발탁된 것은 가히 특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평성대에 진기한 재주 를 지니고 있으니 자연히 버림받는 일이 없겠지요. 이제부터 하찮은 녹이나마 얻게 되어 굶어 죽지는 않을 터입니다. 어찌 사람에게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거나 구멍 속의 지렁이가 지하수만 마시듯이 살라고 요구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귀국한 이래로 안목이 더욱 높아져서 한 가지도 뜻에 맞는 것이 없으며, 표정에까지 간혹 재기才氣를 드러내곤 합니다. 중국인과의 특이한 교유에 대해서는 이미 건정록乾淨錄을 통해서 귀에 젖고 눈이 익어 실로 제 자신이 답사한 것과 다름없으니, 다시 야단스럽게 탐문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기이한 일이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잠시 억눌러 두고 일부러 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이를 자못 괴이히 여겨 답답한 생 각이 없지 않은 모양이니, 아마 나의 이런 의중을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혜풍惠風(유득공)이 길에서 천자를 본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답디다. 왼쪽에 천자기天子旗를 세우고 누런 비단덮개를 씌운 수레에다 수천 대의 수레와 수만 명의 기병이 뒤따르는 광경은 마치 벼락이 치는 듯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듯 으리번쩍 하 더랍니다. 그런데 천자가 친히 말을 멈추고 고삐를 당긴 채, 손짓하여 우리 조선 사람을 불러 대등하게 서서 우러러보도록 했다는군요. 그의 콧날은 우뚝 솟아 두 눈썹 사이까지 쭉 뻗었고, 눈꼬리는 몹시 길어 귀밑머리 부분까지 옆으로 뻗쳤으며, 턱수염은 덤불 같고 광대뼈는 불끈 튀어나왔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대꾸하기를, 이는 바로 진 시황秦始皇의 복사판일세 했지요. 혜풍이 묻기를, 어찌 그런 줄 아십니까? 하기 박지원 생애와 행적 195

190 에, 내가 이미 삼재도회三才圖會 의 제왕상帝王像을 보고 알았네. 했더니, 형암ㆍ초정ㆍ혜풍 이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으며 내 앞에서 다시는 남달리 중국의 장관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더군요. 형암이 향조香祖가 쓴 연암산거燕巖山居 넉 자를 얻어 와서 주기에, 이미 새겨 산중의 서재에 걸고 그 진본은 형에게 드리니, 고항첩古杭帖에 함께 붙여 넣어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그 수인首印(서화의 앞 부분에 찍는 도장)은 무더운 여름철에도 서리 내린 듯 서늘하다[暑月亦霜氣] 고 하였고, 낙관落款 및 말미에 덕원德園 이라 칭했는데 그것이 그의 자인지 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 사람의 현재 직함이 모두 검서로 공교롭게도 한데 뭉치게 된 데다가, 그들이 평소 함께 지내며 교유하고 지취志趣 도 같기 때문에, 저절로 시기와 원망을 당하는 일이 자못 많았는데 요새 와서는 더욱 심하다 합니다. 이는 괴이하게 여길 것 이 못 됩니다. 비록 시기와 질투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야 할 텐데, 하물며 신분은 낮으면서 벼슬길은 영화 롭고 직책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은 어려우니, 더욱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도 조심하면서 오로지 서적의 교열에만 전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허황된 영화를 좇는 자들이 날로 그 곁에서 법석을 떨어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없다 하 니, 형세가 그럴 듯도 합니다. 이미 서한으로 이러한 나의 뜻을 알려주긴 하였는데, 형암은 물론 세심한지라 스스로 조심할 터이지만, 초정은 너무도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니 어찌 능히 그 뜻을 알겠습니까. 나는 지금 시골 오두막집에 영락零落해 있으니, 산 밖의 일은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일에 상관 할 바 없으나, 다만 평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는 형과 사뭇 같기 때문에 편지를 쓰면서 자연히 언급하게 된 것입니 다. 그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으며, 그 친구들이 중국 다녀온 일기를 이미 완성하여 보여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44세(1780, 정조4) * 홍국영 실각후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李在誠 집(平谿)에 우거 * 진하사겸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로 떠남 8월 북경 도착, 10월 귀국 * 10월 귀국뒤 열하일기 집필 시작 * 둘째 아들 종채 출생 * 허생전, 호질 저술 (17) 燕巖集 別集 권14, 熱河日記, 山莊雜記, 夜出古北口記 自燕京至熱河也 道昌平則西北出居庸關 道密雲則東北出古北口 自古北口循長城 東至山海關七百里 西至居庸關二百八 十里 中居庸山海而爲長城險要之地 莫如古北口 蒙古之出入常爲其咽喉 則設重關以制其阨塞焉 羅壁識遺曰 燕北百里外 有居庸關 關東二百里外 有虎北口 虎北口 卽古北口也 自唐始名古北口 中原人語長城外 皆稱口外 口外皆唐時奚王牙帳 按金史 國言稱留斡嶺 乃古北口也 葢環長城稱口者 以百計 緣山爲城而其絶壑深磵 呿呀陷 水所衝穿則不能城而設亭鄣 皇 明洪武時 立守禦千戶所 關五重 余循霧靈山 舟渡廣硎河 夜出古北口 時夜已三更 出重關 立馬長城下 測其高可十餘丈 出 筆硯噀酒磨墨 撫城而題之曰 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夜三更 朝鮮朴趾源過此 乃大笑曰 乃吾書生爾 頭白一得出長城外 耶 昔蒙將軍自言吾起臨洮 屬之遼東 城塹萬餘里 此其中不能無絶地脈 今視其塹山塡谷 信矣哉 噫 此古百戰之地也 後唐 莊宗之取劉守光也 別將劉光濬克古北口 契丹太宗之取山南也 先下古北口 女眞滅遼 希尹大破遼兵 卽此地也 其取燕京也 蒲莧敗宋兵 卽此地也 元文宗之立也 唐其勢屯兵於此 撒敦追上都兵於此 禿堅帖木兒之入也 元太子出奔此關趨興松 明嘉 靖時 俺答犯京師 其出入皆由此關 其城下乃飛騰戰伐之塲 而今四海不用兵矣 猶見其四山圍合 萬壑陰森 時月上弦矣 垂嶺 欲墜 其光淬削 如刀發硎 少焉月益下嶺 猶露雙尖 忽變火赤 如兩炬出山 北斗半揷關中 而蟲聲四起 長風肅然 林谷俱鳴 其獸嶂鬼巘 如列戟摠干而立 河瀉兩山間鬪狠 如鐵駟金鼓也 天外有鶴鳴五六聲 淸戛如笛聲長 或曰 此天鵞也 我東之士 生老病死 不離疆域 近世先輩唯金稼齋 吾友洪湛軒 踏中原一隅之地 戰國時七國 燕其一也 禹貢九州 冀乃一也 以天下視 19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91 之 可謂一隅之地 而自元皇明至今淸 爲一統天子之都 如古之長安洛陽 蘇子由中國之士也 猶自幸其至京師 仰觀天子宮闕 之壯與倉廩府庫城池苑囿之富且大而後 知天下之巨麗 况如我東之士 一得巨麗之觀 其所自幸 當如何哉 今余此行 尤有自 幸者 出長城至漠北 先輩之所未甞有也 然而深夜追程 瞽行夢過 其山川之形勝 關防之雄奇 未得以周覽 時微月斜照 關內 兩崖 百丈壁立 路出其中 余自幼時 膽薄性怯 或晝入空室 夜遇昏燈 未甞不髮動脈跳 今年四十四 其畏性如幼時也 今中夜 獨立於萬里長城之下 月落河鳴 風凄燐飛 所遇諸境 無非可驚可愕 可奇可詭 而忽無畏心 奇興勃勃 公山草兵 北平虎石 不 動于中 是尤所自幸者也 所可恨者 筆纖墨焦 不能大書如椽 且未及題詩爲長城故事也 及東還之日 里中爭以壺酒相勞 且問 熱河行程 爲出此記 聚首一讀 競拍案叫奇 연행과정에서 밤에 고북구를 지나면서 지은 글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에 이르는 데는 창평昌平으로 돌면 서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게 되고, 밀운密雲을 거 치면 동북으로 고북구古北口로 나오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長城으로 돌아 동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 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는 2백 80리로서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요險要로서는 고북구만한 곳이 없다. 몽 고가 출입하는 데는 항상 그 인후가 되는데 겹으로 된 관문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나벽羅壁의 지유識遺에 말하기 를, 연경 북쪽 8백 리 밖에는 거용관이 있고, 관의 동쪽 2백 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데, 호북구가 곧 고북구이다 하 였다. 당唐의 시초부터 이름을 고북구라 해서 중원 사람들은 장성 밖을 모두 구외口外라고 부르는데, 구외는 모두 당의 시절 해왕奚王(오랑캐의 추장)의 근거지로 되어 있었다. 금사金史 를 상고해 보면, 그 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 곧 고북구이다 했 으니, 대개 장성을 둘러서 구口라고 일컫는 데가 백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산을 의지해서 성을 쌓았는데, 끊어진 구렁 과 깊은 시내는 입을 벌린 듯이 구멍이 뚫린 듯이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어지면 성을 쌓을 수 없어 정장亭鄣을 만들었다. 황 명皇明 홍무洪武 시절에 수어守禦 천호千戶를 두어 오중관五重關을 지키게 했다.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돌아 배로 광형하廣硎河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가는데, 때는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중관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길이나 되었다. 필연筆硯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 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되,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朴趾源이 이곳을 지나다 하고는, 이 내 크게 웃으면서, 나는 서생書生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옛적에 몽 장군蒙將軍(蒙恬)은 스 스로 말하기를, 내가 임조臨洮로부터 일어나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는데, 그 중에는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제 그가 보니 그가 산을 헤치고 골짜기를 메운 것이 사실이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유수광劉守光을 잡자 별장別將 유광준劉光濬은 고북구에서 이겼고, 거란의 태종太宗이 산 남쪽을 취할 적에 먼저 고북구로 내려 왔다는 데가 곧 이곳이요, 여진女眞이 요遼를 멸망시킬 때 희윤希尹(여진의 장수)이 요의 군사를 크게 파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요, 또 연경을 취할 때 포현蒲莧(여진의 장수)이 송의 군사를 패한 곳도 여기요, 원 문종元文宗이 즉위하자 당기세唐其勢(여진의 장수)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했고, 산돈撒敦(여진의 장수)이 상도上都 군사를 추격한 것도 여기였다.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쳐들어 올 때 원의 태자는 이 관으로 도망하여 흥송興松으로 달아났고, 명의 가정嘉靖 연간에는 암답俺答(미상)이 경사京師를 침범할 때도 그 출입이 모두 이 관을 경유했다. 그 성 아래는 모두 날고 뛰고 치고 베 던 싸움터로서 지금은 사해가 군사를 쓰지 않지만 오히려 사방에 산이 둘러싸이고 만학萬壑이 음삼陰森하였다. 때마침 달이 상현上弦이라 고개에 걸려 떨어지려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 세운 칼날 같았다. 조금 있다가 달이 더욱 고개 너머로 기울어지자 오히려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어 졸지에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 개가 산 위에 나오는 것 같았다. 북두 北斗는 반 남아 관 안에 꽂혀졌는데, 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은 숙연肅然한데,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그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 놓은 것 같고, 큰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하늘 밖에 학이 우는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리는데, 맑고 긴 것이 피 리소리 같아 혹은 이것을 거위소리라 했다. 박지원 생애와 행적 197

192 (18) 燕巖集 別集 권14, 熱河日記, 山莊雜記, 一夜九渡河記 河出兩山間 觸石鬪狠 其驚濤駭浪 憤瀾怒波 哀湍怨瀨 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 萬架 戰鼓萬坐 未足諭其崩塌潰壓之聲 沙上巨石 屹然離立 河堤柳樹 窅冥鴻濛 如水祗河神 爭出驕人 而左右蛟螭 試其挐 攫也 或曰 此古戰塲 故河鳴然也 此非爲其然也 河聲在聽之如何爾 余家山中 門前有大溪 每夏月急雨一過 溪水暴漲 常聞 車騎砲鼓之聲 遂爲耳祟焉 余甞閉戶而臥 比類而聽之 深松發籟 此聽雅也 裂山崩崖 此聽奮也 群蛙爭吹 此聽驕也 萬筑迭 響 此聽怒也 飛霆急雷 此聽驚也 茶沸文武 此聽趣也 琴諧宮羽 此聽哀也 紙牕風鳴 此聽疑也 皆聽不得其正 特胷中所意 設而耳爲之聲焉爾 今吾夜中一河九渡 河出塞外 穿長城會楡河潮河 黃花鎭川諸水 經密雲城下 爲白河 余昨舟渡白河 乃此 下流 余未入遼時 方盛夏 行烈陽中而忽有大河當前 赤濤山立 不見涯涘 葢千里外暴雨也 渡水之際 人皆仰首視天 余意諸 人者仰首默禱于天 久乃知渡水者 視水洄駛洶蕩 身若逆溯 目若沿流 輒致眩轉墮溺 其仰首者非禱天也 乃避水不見爾 亦奚 暇默祈其須臾之命也哉 其危如此而不聞河聲 皆曰遼野平廣 故水不怒鳴 此非知河也 遼河未甞不鳴 特未夜渡爾 晝能視水 故目專於危 方惴惴焉 反憂其有目 復安有所聽乎 今吾夜中渡河 目不視危則危專於聽 而耳方惴惴焉 不勝其憂 吾乃今知夫 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今吾控夫 足爲馬所踐 則載之後車 遂縱鞚浮河 攣膝聚足於 鞍上 一墜則河也 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於是心判一墜 吾耳中遂無河聲 凡九渡無虞 如坐臥起居於几 席之上 昔禹渡河 黃龍負舟至危也 然而死生之辨 先明於心 則龍與蝘蜓 不足大小於前也 聲與色外物也 外物常爲累於耳目 令人失其視聽之正如此 而况人生涉世 其險且危 有甚於河 而視與聽 輒爲之病乎 吾且歸吾之山中 復聽前溪而驗之 且以警 巧於濟身而自信其聰明者 연행과정에서 하룻 밤만에 구도하를 지나면서 지은 글이다. 하수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나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 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螭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 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 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宮과 우羽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 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 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와 조하潮河ㆍ황화黃花ㆍ진천鎭川 등 모든 물과 합쳐 밀운성 밑을 거쳐 백하白河가 되었다. 나는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바 야흐로 한 여름이라, 뜨거운 볕 밑을 가노라니 홀연 큰 강이 앞에 당하는데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대개 천리 밖에서 폭우暴雨가 온 것이다.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 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黙禱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 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 19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93 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 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 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 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 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禹는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니 지극히 위험했으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밝고 보 니,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크거나 작거나가 족히 관계될 바 없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 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 면서 이것을 증험해 보고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19) 燕巖集 別集 권15, 熱河日記, 盎葉記, 利瑪竇塚 出阜成門 行數里 道左列石柱四五十 上架葡萄方爛熟 有石牌樓三間 左右對蹲石獅 內有高閣 問守者 乃知爲利瑪竇塚 而諸西士東西繼葬者 總爲七十餘塚 塚域築墻 正方如碁局幾三里 其內皆西士塚也 皇明萬曆庚戌 賜利瑪竇葬地 塚高數丈 甎築墳 形如甗瓦 四出遠簷 望如未敷大菌 塚後甎築六稜高屋 如銕鍾 三面爲虹門 中空無物 樹碣爲表曰 耶蘇會士利公之 墓 左旁小記曰 利先生諱瑪竇 西泰大西洋意大里亞國人 自幼眞修 明萬曆辛巳航海 首入中華衍敎 萬曆庚子來都 萬曆庚戌 卒 在世五十九年 在會四十二年 右旁又以西洋字刻之 碑左右樹華表 陽起雲龍 碑前又有甎屋 上平如臺 列樹雲龍石柱爲象 設 有享閣 閣前又有石牌樓石獅子 湯若望紀恩碑 연행시 마테오 리치의 묘소를 방문하고 지은 글이다. 부성문阜成門을 나와서 몇 리를 가니 길 왼편으로는 돌기둥 4ㆍ50개를 쭉 늘여 세우고, 위에는 포도 시렁을 만들어 포 도가 한창 익었었다. 돌로 만든 패루牌樓 세 칸이 있고, 좌우에는 돌로 깎은 사자獅子가 마주 쭈그리고 앉았다. 그 안에는 높 은 전각이 있는데 수직군에게 물어서 비로소 이마두利瑪竇의 무덤인 줄을 알았다. 모든 서양西洋 선교사宣敎師들의 무덤으로서 동서 양쪽에 계장繼葬한 것이 모두 70여 분이나 되었다. 무덤 둘레는 네모로 담장을 쌓아 바둑판처럼 되었는데, 거의 3리나 되니, 그 안은 모두 서양 선교사들의 무덤이었다. 명明의 만력 경술년(1610)에 황제는 이마두의 장지를 하사하였는데, 무덤의 높이는 두어 길이나 되고 벽돌로 쌓았다. 무덤 꼴은 시루같이 생겼는데 기왓장이 사방으로 처마 끝까지 멀리 나왔다. 바라보 면 마치 다 피지 못한 커다란 버섯처럼 생겼다. 무덤 뒤에는 벽돌로 높다랗게 싼 육모 난 집이 섰는데, 마치 철종 같아 보였 다. 삼면으로는 홍예문을 내었고,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빗돌을 세워 글을 새기기를 야소회사이공지묘耶蘇會士利公之墓 라 하였고, 왼편 옆에는 잔 글씨로, 이 선생利先生의 휘諱는 마두다. 서태西泰 대서양大西洋 이태리아국[意太利亞國]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참다운 수양을 하였다. 명의 만력 신사년(1581 년)에 배를 타고 중화中華에 들어와 교를 널리 펴고 만력 경자년에 북경에 와서 만력 경술년(1610)에 죽으니 세상을 누린 지가 박지원 생애와 행적 199

194 쉰다섯 해에 교회에 있는 지는 마흔 두 해이다 라고 하였고, 오른쪽에는 또 서양 글자로 새겼다. 빗돌 좌우에는 아름답게 조 각한 돌기둥을 세우고, 양각陽刻으로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겼다. 빗돌 앞에는 또 벽돌집이 있는데, 지붕은 평평하여 돈대와 같았다.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긴 돌기둥을 쭉 늘여 세워 석물로 삼았다. 제사 받드는 집이 있고, 그 앞에는 또 돌로 만든 패 루와 돌사자가 있으니, 이는 탕약망湯若望의 기념비紀念碑이다. 45세(1781, 정조5) * 영천군수 홍대용 열하일기 저술에 물질적 도움 줌 * 북학의北學議 서문 작성 * 정철조를 위해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 작성 (20) 燕巖集 권10, 罨畫溪蒐逸, 祭鄭石癡文 生石癡 可會哭可會吊 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忘爾汝 歐吐頭痛 胃翻眩暈 幾死乃已 今石癡 眞死矣 石癡死而環尸而哭者 乃石癡妻妾昆弟子姓 親嫟固不乏 會哭者握手相慰曰 德門不幸 哲人云胡至此 其昆弟子姓拜 起 頓首對曰 私門凶禍 其朋朋友友相與歎息言 斯人者固不易得之人 而固不乏會吊者 與石癡有怨者 痛罵石癡病死 石癡死 而罵者之怨已報 罪罰無以加乎死 世固有夢幻此世 遊戱人間 聞石癡死 固將大笑 以爲歸眞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 石癡 眞死 耳郭已爛 眼珠已朽 眞乃不聞不覩 酌酒酹之 眞乃不飮不醉 平日所與石癡飮徒 眞乃罷去不顧 固將罷去不顧 則相與 會酌一大盃 爲文而讀之曰 缺 정철조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살아 있는 석치石癡라면 함께 모여서 곡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조문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욕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웃을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마실 수도 있어 서로 벌거벗은 몸으로 치고받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위가 뒤집어지고 어찔어찔하여 거의 죽게 되어서야 그 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참말로 죽었구나! 석치가 죽자 그 시신을 빙 둘러싸고 곡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석치의 처첩과 형 제 자손 친척들이니, 함께 모여서 곡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적지 않다. 또한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덕문德門(남의 집안을 높 여 부르는 말)이 불행하여 철인哲人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면, 그 형제와 자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제 집안이 흉한 화를 만났습니다 하고, 그 붕우들마다 서로 더불어 탄식하며, 이 사람은 확실히 얻기 쉽지 않 은 사람이었다 하니, 함께 모여서 조문하는 사람들도 진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와 원한이 있는 자들은 석치더러 염병 걸려 뒈지라고 심하게 욕을 했지만, 석치가 죽었으니 욕하던 자들의 원 한도 이미 갚아진 셈이다. 죄벌로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 세상을 꿈으로 여기고 인 간 세상에서 유희遊戲하는 자가 있을 터이니,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진실로 한바탕 웃어젖히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갔 다 여겨서,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고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갓끈이 끊어질 것이다. 석치가 참말로 죽었 으니 귓바퀴가 이미 뭉그러지고 눈망울이 이미 썩어서,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며, 젯술을 따라서 땅에 부으니 참으로 마시지도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평소에 석치와 서로 어울리던 술꾼들도 참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파하고 떠날 것 이며, 진실로 장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하고 가서는 자기네들끼리 서로 모여 크게 한잔할 것이다. 제문을 지어서 읽어 가 로되 -이하는 판독할 수 없음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95 (21) 燕巖集 권7, 鍾北小選, 北學議序 學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可也 僮僕多識我一字姑學 汝恥己之不若人而不問勝己 則是終身自錮於固陋無術 之地也 舜自耕稼陶漁 以至爲帝 無非取諸人 孔子曰 吾少也賤 多能鄙事 亦耕稼陶漁之類是也 雖以舜孔子之聖且藝 卽物 而刱巧 臨事而製器 日猶不足 而智有所窮 故舜與孔子之爲聖 不過好問於人 而善學之者也 吾東之士 得偏氣於一隅之土 足不蹈凾夏之地 目未見中州之人 生老病死 不離疆域 則鶴長烏黑 各守其天 蛙井蚡田 獨信其地 謂禮寧野 認陋爲儉 所謂 四民 僅存名目 而至於利用厚生之具 日趨困窮 此無他 不知學問之過也 如將學問 舍中國而何 然其言曰 今之主中國者 夷 狄也 恥學焉 幷與中國之故常而鄙夷之 彼誠薙髮左袵 然其所據之地 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凾夏乎 其生乎此土之中者 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遺黎乎 苟使法良而制美 則固將進夷狄而師之 况其規模之廣大 心法之精微 制作之宏遠 文章之煥 爀 猶存三代以來漢唐宋明固有之故常哉 以我較彼固無寸長 而獨以一撮之結 自賢於天下曰 今之中國 非古之中國也 其山 川則罪之以腥羶 其人民則辱之以犬羊 其言語則誣之以侏離 幷與其中國固有之良法美制而攘斥之 則亦將何所倣而行之耶 余自燕還 在先爲示其北學議內外二編 盖在先先余入燕者也 自農蚕畜牧城郭宮室舟車 以至瓦簟筆尺之制 莫不目數而心較 目有所未至 則必問焉 心有所未諦 則必學焉 試一開卷 與余日錄 無所齟齬 如出一手 此固所以樂而示余 而余之所欣然讀 之三日而不厭者也 噫 此豈徒吾二人者得之於目擊而後然哉 固嘗硏究於雨屋雪簷之下 抵掌於酒爛燈灺之際 而乃一驗之於 目爾 要之不可以語人 人固不信矣 不信則固將怒我 怒之性 由偏氣 不信之端 在罪山川 박제가의 북학의 서문이다.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 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순舜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帝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 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 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 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 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疆域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 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 禮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四民(士ㆍ農ㆍ工ㆍ商)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 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 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 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 이 진실로 변발辮髮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三代 이래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유민遺民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 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心法의 정미精 微함과 제작制作의 굉원宏遠함과 문장文章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고유한 옛 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 박지원 생애와 행적 201

196 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 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朴齊家)이 그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農蠶, 목축牧畜, 성곽城郭, 궁실宮室, 주거舟車로부터 기와, 대자리, 붓, 자[尺]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 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日錄( 熱河日記 )과 더불 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 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47세(1783, 정조7) * 열하일기熱河日記 저술 열하일기 첫편 도강록渡江錄 의 머리말 작성 * 종제從弟인 박완원朴緩源의 계산동(재동)의 집을 빌어 이사 * 삼포三浦 세심정洗心亭에 우거 *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작성 (22) 燕巖集 권2, 煙湘閣選本, 洪德保墓誌銘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留書俱 道德保作官南土 且留土物數事 寄意而歸 蓉洲發書 當知吾德保友也 乃屬客赴之曰 乾隆癸卯月日 朝鮮朴趾源頓首白蓉洲 足下 敝邦前任榮川郡守南陽洪湛軒諱大容字德保 以本年十月廿三日酉時不起 平昔無恙 忽風喎噤瘖 須臾至此 得年五十三 孤子薳 哭擗未可手書自赴 且大江以南 便信無階 並祈替此轉赴吳中 使天下知己 得其亡日 幽明之間 足以不恨 旣送客 手 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嗟乎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 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德保甞論地一轉爲一日 其說渺微玄奧 顧未及著書 然其晩歲益自信地轉無疑 世 之慕德保者 見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 香皷琴瑟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 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甞隨其叔父書狀之行 遇陸飛 嚴誠 潘庭筠於琉璃廠 三人者俱家錢塘 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 然咸推服德保爲大儒 所與筆談累萬言 皆辨析經 旨 天人性命 古今出處大義 宏肆儁傑 樂不可勝 及將訣去 相視泣下曰 一別千古矣 泉下相逢 誓無愧色 與誠尤相契可 則 微諷君子顯晦隨時 誠大悟 决意南歸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 大祥也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名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子昂 名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轉傳九年始至 集中有誠手畵德保小影 誠之在閩 病篤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胷間而逝 遂以墨殉于柩中 吳下盛傳爲異 事 爭撰述詩文 有朱文藻者 寄書言狀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 其墓 以不朽德保也 考諱櫟牧使 祖諱龍祚大司諫 曾祖諱潚參判 母淸風金氏 郡守枋之女 德保以英宗辛亥生 得蔭除繕工監 監役 尋移敦寧府參奉 改授世孫翊衛司侍直 叙陞司憲府監察 轉宗親府典簿 出爲泰仁縣監 陞榮川郡守 數年以母老辭歸 配 韓山李弘重女 生一男三女 婿曰趙宇喆 閔致謙 兪春柱 以其年十二月八日 葬于淸州某坐之原 銘曰 銘佚原稿 首尾八百餘 20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97 言 以友朋起結 一字不及孝友慈敬居家行誼 然其人篤於倫懿 言外可見 홍대용의 묘지명이다. 덕보德保(洪大容)가 죽은 지 3일 후에 문객門客 중에 연사年使(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행길 은 응당 삼하三河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이 있는데 호를 용주蓉洲라 하였다. 몇 년 전에 내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지방으로 원이 되어 나간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덕보가 보낸 토산물 두어 종류를 남기어 성의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용주가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 면 응당 내가 덕보의 벗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문객에게 부탁하여 다음과 같이 부고를 전하게 했다. 건륭乾隆 계묘년(1783) 모월 모일 조선 사람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용주 족하足下에게 사룁니다. 폐방敝邦(우리나라) 전임 영천군수榮川郡守 남양南陽 홍담헌洪湛軒 휘 대용大容 자 덕보가 올해 10월 23일 유시酉時에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입이 비틀리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하다 잠깐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 은 53세입니다. (중략) 아! 덕보는 통명通明하고 민첩하고 겸손하고 단아하며, 식견이 깊고 견해가 정밀하였다. 특히 음률과 역법曆法에 뛰어났 으니, 그가 만든 혼의渾儀 제기諸器는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끝에 새롭게 기지機智를 짜낸 것이었다. 처음에 서양인들은 땅이 구형球形임을 설명하면서도 땅이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덕보는 일찍이 논하기를 땅이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 하였다. 그 설이 미묘하고 심오하였으나, 다만 미처 그에 대해 저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는 땅이 돈다는 것을 더욱 자 신하여 의심이 없었다. 세간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폐하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 한가히 들어앉아 이름난 향을 피우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것을 보고서, 그가 장차 담담히 스스로 즐기며 속세에서 벗어나는 데 오로지 뜻을 두려 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덕보가 만물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호히 처리하여, 나라의 재정을 맡길 만도 하고 먼 외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도 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기발한 책략을 지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유독 남들에게 혁혁하게 과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어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문서를 신중히 처리하고 정령政令을 기한 내에 집행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아전들은 설치지 않고 백성들은 절로 따르게 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일찍이 그의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수행하여, 육비陸飛와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다 같이 전당錢塘에 거주하며, 모두 문장과 예술의 선비여서 그들이 교유하는 사람들도 중국 내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덕보를 추앙하여 대유大儒로 여겼다. 이들과 더불어 필담한 것이 누만언累萬言으로, 유교 경전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분석하였는데, 굉장하고 뛰어나서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작별하는 마당에 다다르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 끄러움이 없게 살기를 맹세합시다. 하였다. (중략) 그후 두어 해 만에 그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자 반정균이 편지를 써서 덕보에게 부고하였다. 덕보는 애사哀辭를 짓고 예 물로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쳐 마침내 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달된 그날 저녁이 바로 대상大祥(2주기 제사) 날이었 다. 제사에 모인 이들은 서호西湖 주위 여러 고을 사람들이었는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혼령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일렀다. 엄성의 형 과果가 예물로 보낸 향을 사르고 그 애사를 읽은 뒤 초헌初獻을 하였다. 아들 앙昻은 편지를 보 내 덕보를 백부伯父라 칭하면서 그의 아버지 철교鐵橋(엄성의 호)의 유집遺集을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비로소 받아보게 되었다. 그 문집 속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화가 있었다. 엄성이 민중에 있을 때 병이 위독하였는데도 덕보 가 증정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었다. 마침내 그 먹을 관에 함께 넣었다. 오하吳下 사람들은 이 사 실을 널리 알리면서 특이한 일로 여기어 다투어서 시와 산문을 지었는데, 주문조朱文藻라는 이가 편지를 부쳐 와 그 상황을 이야기했다. 박지원 생애와 행적 203

198 아! 그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비범하기가 마치 옛날의 특이한 사적 같았다. 벗으로서 지성至性(선량한 천성)을 지닌 이라면 반드시 그 일을 널리 전파하여 비단 이름이 양자강 남쪽 지방에 두루 알려질 뿐만이 아닐 터이니, 구태여 내가 그의 묘지墓誌를 짓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을 불후不朽하게 할 것이다. (하략) 51세(1787, 정조11) * 부인 이씨 별세 * 백씨伯氏 희원喜源 별세.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 * 연암억선형燕岩憶先兄 지음 (23) 燕巖集 권4, 映帶亭雜咏, 燕岩憶先兄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형님을 기리며 지은 시이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 메서 본단 말고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54세(1790, 정조14) * 삼종형 박명원 별세, 삼종형금성위증시충희공묘지명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 작성 * 사복시주부로 전보되었으나, 사퇴하였다 * 사헌부감찰로 전보되었으나, 사퇴하였다 * 제릉령齊陵令 * 재거齋居 작성 (24)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三從兄綏祿大夫錦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謚忠僖公墓誌銘 上之十四年庚戌三月二十五日乙巳 錦城尉朴公考終于濟生洞賜第之正寢 訃聞 輟朝 亟降旨以隱之 股肱肺腑之臣 得一字 以爲死生之榮者 乃三百餘言 柩賜長生殿秘器之副葬 用一等之禮 凡賵襚饋奠之物 皆出自內府 有司者各執其事 方奔走待 門下 家人陳遺意 丐免禮葬 上勉兪之 俾成其志 卽令戶曹代輸錢三十萬 米一百石 綿葛之布千有四百餘疋 旣斂 遣承旨致 吊 命公卿大臣咸赴吊 旣成服 遣承旨宣御製文以祭之 匪躬盡節之臣 得一字以代旂常之庸者 又三百餘言 乃命道臣曰 都尉 之葬有期矣 予將親撰其麗牲之碑 以賁其神道 汝其伐穹石以待 乃命詞臣曰 賢都尉厥易名有常典 汝其狀厥德 以告太常 於 是太常氏 采其特書公始終之槪者 曰密贊翊護 曰建議遷園 政府舘閣之臣僉議曰 公甞效節於外廷之所不能 畢忠於擧國之所 不敢 功在社稷 宜與謚忠僖 上可其議 謹按謚法 慮國忘家曰忠 小心恭愼曰僖 嗚呼 公其得之矣 公諱明源 字晦甫 我朴系 出新羅 始祖得氏于羅州之潘南 麗季有諱尙衷 我朝贈謚文正 是生平度公諱訔 相我太宗 五傳至文康公諱紹 世稱冶川先生 宣廟名臣曰忠翼公諱東亮 勳封錦溪君 子文貞公諱瀰 尙穆陵貞安翁主 國朝文章大家 必數錦陽尉 寔公之五世祖也 高祖僉 正公諱世橋 贈吏曹判書錦興君 曾祖郡守公諱泰斗 贈左贊成錦恩君 祖參奉公諱弼夏 贈左贊成錦寧君 以忠翼世嫡 俱襲勳 封 考禮曹參判諱師正 贈領議政 妣貞敬夫人咸平李氏 學生宅相之女 公以英宗大王元年乙巳十月二十一日生 十四 尙英宗 第三女和平翁主 初授順義大夫 積階至綏祿 兼帶都摠管提調 奉常典醫繕工司宰長興濟用諸寺監 屢寫金寶玉冊 輒蒙錫馬恩 20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199 奉使三赴燕 特旨授都監堂上者三 而最著勞績於孝昌墓 公美風儀 姿性端吉誠莊 出入禁闥五十餘年 視不踰履 聽無移屬 口 絶朝議 跡斷廷紳 寵遇冠絶諸貴 而夙夜祗畏 至老靡懈 別賜田民輒辭曰 臣蒙恩 早入禁臠 不憂貧也 特賚有舊器玩 不敢自 留 初賜宅梨峴宮 上䟽力辭 和平主卒 英考屢臨視喪 公陳章力止乘輿 不得則猶攀駕固爭 家居寂若無人 非迎醫 莫接新面 時人爲之語曰 誰獲心寧 掘金莫饒 舌屈寸鐵 故從子宗德 秉銓數十年 世無敢干公者 持身恒若衣新曰 以物相與尙吹塵 况 以身獻君乎 甞語趾源曰 駙馬何官 對曰 秩高而非具瞻之職 祿厚而無素餐之責者歟 公笑曰 甞賜車命之乘 乘自南城至湖亭 而止十數年 復詢所乘 惶恐未及對 有從旁替奏曰 是無車 遽命造給 又自東門出止郊墅 問何爲不乘 曰 此命德之器 安得與 宰相並驅 他日又謂曰 儀賓何人 對曰 入承起居 出扈警蹕 葢貴近人歟 公愀然曰 雨露霜雪 莫非造化 若復瞻天望雲 妄占 雨暘 皆人臣死罪 况貴近人乎 公之心以爲蹠聯王室者 當靖其聲臭 勿爲世覘 與其有令聞 無寧國人莫省有某都尉也 故雖步 趨嚬笑必愼 幾微惟從國是 毋參己意 公聽並觀 不欲先衆 曲謹細廉 未敢後人 其恭謙愼默 皆類此 早承殊遇于莊獻世子 常 默審艱虞 公曁貴主 外內協贊 竭誠調護 而事在宮闈 莫有知者 主旣早世 公之耿耿孤忠 獨記在聖衷 而不忍詳宣 屢致意于 侑主之文 於是始知公有翊輔大功 有微問公者 公默然良久曰 感泣天恩 及公備陳舊園四害 上叶天心 下洽輿情 爰奉吉兆 永鞏邦基 則公之爲先世子未卒之忠 庶幾畢願于斯役矣 方是時 聖上視爲恩人 國中信若蓍龜 而公之疾病浸㞃 幾絶粒食將 數歲 然猶能相地董工 每一聞命 必迅往遄反 罔恤顚仆 其憂勤王事 至死方休者 葢亦天性所然也 趾源甞從公出疆 阻雨遼 河 一日公自出視水 遂趣鞭直渡 衆錯愕隨之 旣渡河 公招衆慰之曰 今日事誠危矣 仗王靈者 理無溺死 設溺死 職耳 自是 衆莫敢復言 水盛不可渡者 又疾行 趣熱河 其料事應變 動合機宜 律己御衆 儼若行陳 不特啣命 一事有足觀 公其明識勁操 可以正色廊廟 而旣局邦制 則實惟一世之所共惜 而屢形臨朝之歎也 上甞輦過公第 嘉公所寢處蕭然若素士 御書賜扁曰晩葆 亭 又賜詩以寵之 及顯隆園禮成 遣承旨宣賜田奴婢 加賜白金廐馬 凡賜批 必史官臨宣 皆殊禮也 疾甚 太醫賫藥 晝夜診護 掖庭使者問疾 日屬於道 上欲輦路歷臨 先使史官往視之 公已不能言 莫可以拖紳矣 上悵䀌而還 旣數日 公竟不起 壽六十 六 以五月十六日 合窆于貴主墓 貴主以英宗三年丁未四月二十七日生 戊辰六月二十四日卽世 享年二十二 有先王御撰孝友 錄 公有小像兩本 先王俱以忠孝小心贊之 公取兄子相喆爲嗣 文科府尹 取安東金簡行女 早歿 側室四男三女 宗善 宗顯 宗 蹇 宗璉 女張僎 徐瑾修 李建永 相喆系宗德第二子紭壽 進士參奉早歿 子齊一 今承重 特命待服闋 加補敦寧參奉 女李羲 先 洪正圭 文孝世子喪時 上察公綜練 自攢殯 至建廟 事多委公 公則已積瘁成疾 而猶不覺寒暑之在軆也 靜居深念 忽忽若 癡 有時忘言 自然流涕 自是不復聽絲竹 斷後房之娛 絶亭榭之遊 雖杯酌小讌 不設於家 葢有隱痛在心也 臨終 執從子宗岳 手曰 我受恩三朝 涓埃未報 是不瞑也 欲艸遺䟽而不能 呼無一言及私者 如公者 可謂國之藎臣 而其得謚忠僖不亦宜哉 銘 曰 獻獻錦城 作配和平 功在王室 匹徽共貞 公於古人 將誰與京 缺 一作翼翼錦城 天家作甥 功在王室 匹徽共貞 天作隨山 缺 박지원이 지은 삼종형 박명원의 묘지명이다. (상략) 공의 휘諱는 명원明源이요 자는 회보晦甫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는데, 시조가 나주羅州의 반남潘 南에서 성姓을 얻었다. 고려 말에 휘 상충尙衷이 있어 우리 왕조에서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이분이 평도공平度公 휘 은訔을 낳으니, 우리 태종을 보좌하는 정승이 되었다. 그로부터 5대를 전해 내려와, 문강공文康公 휘 소紹는 세상 사람들이 야 천冶川 선생이라 일컬었으며, 선조宣祖 때의 명신인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은 공훈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문 정공文貞公 휘 미瀰는 선조의 따님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우리 왕조의 문장 대가로 반드시 금양위錦陽尉를 손꼽 으니, 바로 공의 5세조이다. 고조는 첨정공僉正公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군수공郡守公 은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고, 조부 참봉공參奉公은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 으니, 충익공의 적손嫡孫인 때문에 모두 훈봉을 이어받은 것이다. 부친은 예조 참판 휘 사정師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모 친은 정경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학생 택상宅相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대왕 원년인 을사년(1725) 10월 21일에 태어났으며, 14세에 영조의 셋째 따님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었 다. 처음에는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제수되고, 품계가 쌓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봉상 박지원 생애와 행적 205

200 시奉常寺ㆍ전의감典醫監ㆍ선공감繕工監ㆍ사재시司宰寺ㆍ장흥고長興庫ㆍ제용감濟用監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누차 금보金寶와 옥책玉冊 의 글씨를 써서 그때마다 상으로 말[馬]을 하사받았고, 사명을 받들고 세 번이나 북경에 갔으며, 임금의 특지特旨로 도감都監 의 당상堂上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인데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공적이 있었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천성이 단정하고 선량하며 성실하고 정중하였다. 50여 년이나 대궐을 출입하였으나, 보는 것은 발 길 미치는 곳을 넘지 않았고 들은 것은 가족들에게도 말을 옮기지 않았으며, 조정의 논의는 입 밖에 낸 적이 없고 조정 벼슬 아치들의 집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임금의 총애와 예우가 여러 귀척貴戚(임금의 인척)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늙을 때까지 해이해지지 않았다. 임금이 특별히 예외로 전장田庄과 노비를 하사하면, 문득 사양 하며, 신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부마로 선택되었으니, 가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완상玩賞할 만한 옛 기물器物을 특별히 하사해도, 감히 스스로 지니지 않았다. 처음에 저택으로 이현궁梨峴宮을 하사했으나, 상소하여 기어이 사양 하였다. 화평옹주가 돌아가매 영조가 누차 거둥하여 상사를 살피니, 공은 상소를 올려 기어이 임금의 행차를 중지토록 하였 으며,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 어가御駕를 부여잡고 완강히 간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한적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았으며, 의 원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면 새 얼굴을 대할 길이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때문에 말하기를, 누가 그의 마음을 사랴? 차 라리 금을 캐는 게 낫지. 그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촌철寸鐵도 안 통한다 했다. 그러므로 조카 종덕宗德이 10여 년 동안 이조와 병조의 판서직을 맡았으나, 세상에 감히 공에게 인사 청탁을 하는 자가 없었다. 몸가짐을 항상 새 옷을 입은 듯 이 하면서, 물건을 남에게 줄 때도 오히려 먼지를 터는 법인데, 하물며 몸을 임금에게 바침에 있어서랴 했다. (중략) 지원趾源이 일찍이 공을 따라 국경을 나갔다가 요하遼河에서 비로 길이 막혔는데, 하루는 공이 스스로 나가 물을 살펴보고는 드디어 급히 채찍질하여 곧장 건너므로, 사람들이 허둥지둥 놀라서 뒤를 따랐다. 강을 건너고 난 뒤 공이 사람들 을 불러 위로하기를, 오늘 일은 진실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조의 위덕威德에 힘입은 자는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고, 설사 빠져 죽는다 해도 이것은 자기의 직분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아무도 감히 다시는 물이 넘실대어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또 길을 다급히 재촉하여 열하熱河로 갈 적에도 일을 요량하고 임기응변하는 것이 매번 시의적절하였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대중을 통제함에 있어서는 엄격함이 마치 행진行陣하는 것과도 같았다. 비단 사신으로서 왕명을 받든 이 한 가지 일만이 공에게서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밝은 식견과 굳센 지조는 조정에 나아가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 할 만한데도, 이미 나라의 제도에 제한되어 어찌할 수 없는 일인즉, 실로 한 세상이 모두 다 애석히 여기는 바이며, 임금께서 도 조정에 임어臨御하실 적에 누차 탄식으로 그런 뜻을 드러내셨다. (하략) 56세(1792, 정조16) * 1월 안의현 도착 * 임자壬子 흉년에 농민구휼 * 답순사논현풍현살옥원범오록서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답순사론밀양금귀삼의옥서答巡使論密陽金貴三疑獄書 답순사론함양장수원의옥서答巡使論咸陽張水元疑獄書 답순사논밀양의옥서答巡使論密陽疑獄書 답순사논함양옥서答巡使論咸陽獄書 등 작성 * 하삼종질종악배상인론사노서賀三從姪宗岳拜相因論寺奴書 작성 * 하금우상리소서賀金右相履素書 작성 (25) 燕巖集 권2, 煙湘閣選本, 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人於要害之處 雖一拳一踢 立便致命 旣有法文所論 則今此金福連之致死兪福才 其腦後也咽喉也兩胯諸處 傷損之痕 極 20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01 其狼藉 分寸之地 幾至數尺 觀於屍帳 無容更議 第其正犯執定 初檢以朔孫歸重 覆檢以福連論斷 觀於看證之前後異辭 不 無俯仰左右之意 福連卽朔孫之父也 朔孫乃福連之子也 雖是死囚 亦有倫理 父子相讓 果是何物 獄體輕重 猶屬餘事 方其 致命之鬪 拳踢交加 則雖在鄰里 固將被髮而救之 爲其子者 雖曰腹痛就煖 寧有閉戶之理乎 事之曲直 鬪之緣起 不須問人 必當忿不顧身 張拳突出 盡力挾打 以救危禍 乃其常理 怒拳之下 雖登場致斃 自縛首官 請爲凶身之不暇焉 有父子爭死 而 若是其雍容乎 鄕曲愚氓 妄生俱全之計 有此依違之供 原情定罪 邂逅殺人之罪小 而勉强納招之罪大 果如切鄰所證 則戰陣 無勇 尙稱非孝 况是不反兵之鬪乎 覆檢之易其元犯 大關風敎 朔孫首實之前 此獄不正 別爲按査 更卞首從 實合審愼之道 可謂片言折獄 현풍현 살인사건의 범인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사람이 급소를 맞으면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 는 것은 이미 법률 조문에서 논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김복련金福連이 유복재兪福才를 치사致死한 사건은, 그 뇌후腦後, 인후咽喉, 양과兩胯 등 여러 곳에 다친 흔 적이 극히 낭자하여, 상처의 치수를 재어서 합쳐 보면 거의 두어 자에 이르니 시장屍帳(검시 기록)을 살펴보건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확정에 있어, 초검初檢에서는 삭손朔孫에게 무게를 두었으나, 복검覆檢에서는 복련으로 논단하였으니, 간증看證이 앞뒤로 진술을 달리한 점을 보면 임기응변으로 잘못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복련은 곧 삭손의 아비요, 삭손은 바로 복련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살인죄수라 할지라도 윤리는 있는 법인데 부자간에 그 죄를 서로 떠 넘기다니 과연 어떤 인간들입니까? 판정 자체의 경중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주먹과 발길이 마구 오가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당연히 머리를 풀어뜨린 채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릴 터인데, 그 자식된 자 가 아무리 배가 아파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 고 말하지만 어찌 방문을 굳게 닫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의 곡직曲直 과 싸우게 된 연유를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김에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나가서 제 힘껏 협공하 여 아비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성난 주먹 아래 비록 당장 상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제 몸을 스스로 묶고 관청에 자수하여 살인범이 되기를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겠거늘, 어찌 부자가 죽음을 다투는 마당에 이같이 느긋하게 있 었겠습니까?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망녕되이 부자가 함께 살아날 꾀를 내어 이같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진술한 것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판정할진대 우발적인 살인의 죄는 작고, 꾸며서 둘러댄 죄는 크다 하겠습니다. 과연 가까운 이웃이 증 언한 바와 같다면,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고 일컬었거늘 하물며 불반병不反兵의 원수와 만 나 싸움에 있어서겠습니까. 복검에서 원범元犯(주범)이 뒤바뀐 것은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삭손이 사실을 자백 하기 전에는 이 옥사가 바로될 수 없습니다. 각별히 조사해서 다시 주범과 종범을 가려내야만 실로 옥사를 신중히 다루는 도 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가히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 하겠다. 57세(1793, 정조17) *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 씀 * 형암 행장炯菴行狀 씀 * 답순사론진정서答巡使論賑政書, 답단성현감리후론진정서答丹城縣監李侯論賑政書, 답대구판관리 후론진정서答大邱判官李侯論賑政書 씀 *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씀 * 안의현현사사곽후기安義縣縣司祀郭侯記, 충신증대사헌리공술원정려음기忠臣贈大司憲李公述原旌閭陰 記 씀 * 열녀함양박씨전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 씀 박지원 생애와 행적 207

202 (26) 燕巖集 권3, 孔雀舘文稿, 炯菴行狀 我定宗恭靖大王第十五男茂林君謚昭夷公諱善生 十世而有諱廷衡 監察贈戶曹參判 生諱尙馠 生諱必益 江界府使 生諱聖 浩 是炯菴之考也 妣潘南朴氏 兎山縣監諱師濂女 錦平尉謚孝靖公諱弼成孫也 炯菴諱德懋 字懋官 炯菴其號也 以英宗辛酉 生 生而有異質 性度端嚴 三歲時 有鄰娼遺一文錢 卽投于地曰 穢穢 錢誤落鞋上 以巾拭其鞋 甫六七歲 能屬文 嗜書籍 家 人甞失所在 向夕於廳壁後積草間得之 蓋耽觀塗壁之古書 不知日之暮也 稍長 篤志力學 坐臥起居 有恒處 不失尺寸 群居 終日 莊而不矜 和而不狎 家甚貧 破屋數間 䟽糲不繼 處之晏然 人不見其憂色 凡世間貨利聲色玩好技戱之物 一切不入於 心 爲文章 必求古人旨趣 不爲蹈襲虛僞之辭 一字一句 皆切近情理 摸寫眞境 每篇可讀 曲盡其妙 與同志數人 講討之外 不肯以所著詩文示人 不妄交遊 亦未甞識一宦達人 以是年踰弱冠 名不出里巷 得一書 必且看且抄 看書殆踰數萬卷 抄書亦 幾數百卷 雖行路時 必以書卷貯袖中 至齎筆硯而隨之 店次舟行 亦未甞掩卷 若得奇語異聞 輒記之 著書善於攷據辨證 甞 於鳥獸草木名物度數經濟方略金石碑板 以至國朝典章外國風土 莫不細究焉 少以親命爲功令文 工於詩 當世之以科詩鳴者 自以爲不及 間甞赴擧而不樂也 卒未有遇而不慍 乙酉 丁內憂 三年不解絰帶 晨夕哀號 隣人爲之掩耳 若非上墓 雖宗子之 家 未甞往焉 戊戌 隨使价入燕都 觀山川風物 多與一時名儒談辯唱酬 杭州人潘庭筠見之歎曰 眼光燁然 是異人也 己亥 拜 外閣檢書官 是聖上御極三年也 時上念文風之寢衰 人才之沉淪 思所以振作而拔擢之 倣英陵故事 建奎章閣 置閣僚 又移置 校書舘于丹鳳門外 爲奎章外閣 詢于閣臣 以布素中有文識者充 外閣官肇錫曰 檢書懋官爲首選也 上命諸檢書入侍 賦奎章 閣八景近軆八篇 而居魁 翌日 復命賦登瀛洲二十韻 而又居魁 並賞賜有次 於是焉未遇於人者 始受知於君上也 辛丑正月 爰命以外閣官 移作內閣官 懋官之爲奎章閣檢書官 蓋始此 三月 陞司導寺主簿 自是每以本官兼帶檢書之職 是年十二月 拜 沙斤道察訪 沙斤驛有年久公債 每歲取殖爲公費 日撻殘民 民不聊生 擧報上官革罷 郵民至今賴焉 癸卯十一月 入拜廣興倉 主簿 甲辰二月 移司饔院主簿 六月 拜積城縣監 在積城十考 皆居最 甞語人曰 廉則威生 公則惠及人 或語以俸薄 輒色變 曰 吾以一介書生 昵近耿光 官至縣宰 上供老親 下育妻孥 榮已極矣 只頌君恩 豈敢言貧 縣之南 有靑鶴洞 古松白石 幽邃 可愛 舊有亭盡圮 更搆數間 扁以又醉翁亭 自製兩輪小車 暇日獨往逍遙而返 己酉六月秩滿 內移瓦署別提 庚戌七月 移司 導寺主簿 辛亥二月 移尙衣院主簿 三月 移掌苑署別提 五月 移司饔院主簿 懋官自少安於貧窶 或日晩而不具食 或冬寒而 不燃堗 及其供仕也 自奉甚略 居處衣服 無異未仕時 亦不以饑寒二字出諸口 而氣質素羸弱如婦孺 年垂衰而自不覺其受傷 者久矣 冬月寒甚 支一木板於壁 寢其上 已而疾作 病中坐臥言語猶自如也 及臨終 更整衣冠 奄然而逝 是癸丑正月二十五 日也 得年僅五十三 以二月葬于廣州樂生面板橋酉坐之原 甞有著書十二種曰嬰處稿 卽少時所著詩文 自言持身謹行 當如嬰 兒處子 因以名稿曰靑莊舘稿 靑莊卽鵁鶄之別名 在江湖間 不營求 唯食過前之魚 故一名信天翁 其自號者 有以也 曰耳目 口心書 卽耳所聞目所覩口所言心所思 曰士小節 援昔賢遺訓 以備箴警 紀今人近事 以資觀感 曰淸脾錄 載古今人詩話 曰 紀年兒覽 起自上古至于明淸 及春秋小國而詳於華夷之別 曰蜻蜓國志 記日本世系地圖風俗言語物產 曰盎葉記 卽古今攷據 辨證之語 曰寒竹堂涉筆 嶠南郵丞時 記聞見 曰禮記臆釋 禮記難字疑義 曰宋史補傳 卽奉敎編校御定宋史筌也 補撰遺民列 傳及高麗遼金蒙古傳 曰磊磊落落書 繙閱群書 編輯明末遺民 未及刪定也 每有文獻編摩之役 懋官輒與焉 如國朝寶鑑 羹墻 錄 文苑黼黻 大典通編之類也 又嘗承命編進韻書 名曰奎章全韻 字畫皆用六書 註釋參以諸家 韻書叶韻通韻 無不詳備 竣 其事而沒焉 甲寅冬 命鋟梓 仍命其弟功懋及子光葵 同爲校正 董其事 旣祥而禫 上敎曰 今日因韻書印役事 思之故檢書官 李某之才識 尙今不忘 其子聞已闋服 特差檢書官 又賜錢五百緡 以爲遺稿剞劂之資 仍命閣臣及抄啓文臣之時帶將任外任藩 任雄府者 俾各隨力助之 至親訓將敬懋 亦一體助給爲敎 是日命光葵入侍 恩敎鄭重 宗族親朋 相顧而賀曰 懋官平日守身勤 業 勞於編摩之役 及其身後 至尊思其才念其貧 迺有錄孤鐫稿之命 恩榮所曁 非獨深感九泉 亦將興起一世 曷不盛哉 娶隋 城白氏 同知師宏女 贈戶曹判書行平安兵使謚忠莊時耈曾孫 生一男二女 男卽光葵 女適全州柳烍 光山金思黃 光葵子女幼 嗚呼 懋官行義敦篤 足以模範一世 才識透悟 足以精究萬物 其爲學篤於內修 屛絶外誘 本軆澄澈 其用纖悉 顔氏之四勿曾 氏之三省 皆勉焉用力者也 其爲文 博采百氏 自成一家 匠心獨詣 不師陳腐 奇峭而不離於眞切 樸實而不墮於庸凡 使千百 載下 一讀而宛然如目擊也 若其該洽今古 辨析名物 雖謂之曠前絶後可也 自在韋布 亦嘗惓惓於生民之困悴 才俊之沉沒 慨 然有志於經濟 其議論記述 尤致意於典章制度 以救民濟物爲要 然則其憂國憂民之意 未甞須臾忘也 固宜擧而試之 將無所 20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03 不可 而唯其厭流俗之淊淊 樂本地之恢恢 守志信命 澹然無欲 蓬蓽蕭條 貧賤是甘 足不到 缺 名不聞貴要 不知而有不慍之 實 獨立而有無懼之想 幾乎坎坷終老 湮滅不稱 唯我聖后闡右文之化 廣蒐才之路 懋官窮閻一布衣 日登文陛 上已知其所蘊 趨走於深嚴之地 供奉於編摩之役 世所未知而上獨知之 人未之奇而上獨奇之 其跡則一踈賤 而其任則掌奎璧 其官則一流品 而其事則備顧問 前後奬諭之勤 錫賚之渥 殆貴臣之所罕得 懋官之遇亦盛矣 若夫仕路崚嶒 官止一縣 天不假年 未能展布於 當世 齎志而沒則是命也 非時之不遇也 然及其沒也 上有恩言 旣以爲才識不可忘 又以內家錢 鋟遺稿而壽其傳 以其官 官 其子 終始哀榮至矣 歷數古人 能得此於君上者幾人矣 於是乎懋官可以無慽矣 內閣諸臣方奉敎編其遺集 以某知懋官之本末 托爲之狀云 이덕무의 행장이다. 우리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의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시호諡號 소이공昭夷公은 휘가 선생善生이다. 그로부터 10 세를 내려와, 휘 정형廷衡은 감찰로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휘 상함尙馠을 낳았다. 상함공이 휘 필익必益을 낳으니 강계 부사江界府使요, 부사공이 휘 성호聖浩를 낳으니 이분이 형암의 선친이다. 모친은 반남박씨潘南朴氏로 토산현감兎山縣監 휘 사렴 師濂의 따님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인 휘 필성弼成의 손녀이다. 형암은 휘가 덕무德懋요 자는 무관懋官이니, 형암은 그의 호이다. 영종英宗 신유년(1741, 영조 17)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였다. 세 살 때 이웃에 사는 창기娼妓가 엽전 한 푼을 가지라고 주자, 즉시 더 러워. 더러워 하며 땅에 던졌고, 그 돈이 빗나가서 신고 있는 신 위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을 닦았다. 겨우 6, 7세밖에 되지 않아서는 능히 글을 지었고 책 보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집안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 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 이었다. 차츰 장성하자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앉거나 눕거나 거동하는 것이 일정한 법도가 있어 한자 한 치도 빗나 가지 않았다. 종일토록 여럿이 있을 적에도 정중하되 뻐기지 않고, 잘 어울리되 허물없이 굴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의 허물어진 가옥에 거친 음식도 건너뛰는 때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여, 남들은 그가 근심하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릇 세간의 재화와 이익, 가무와 여색, 애완물, 잡기雜技 따위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략) 을유년(1765, 영조 4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슬피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비록 종자宗子의 집이라도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면서 산천과 풍물을 관광하였으며,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담 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항주杭州 사람 반정균潘庭筠이 그를 만나보고 탄복하며, 눈빛이 번쩍번쩍하니 이야 말로 비범한 사람이다 하였다. 기해년(1779)에 외각外閣(校書館)의 검서관檢書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성상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임금 께서는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人材가 묻혀 버림을 염려하여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발탁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 릉英陵의 옛일을 모방하여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으며, 교서관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 의 외각을 삼았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 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 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무관이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 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 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무관이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영주에 오 르다[登瀛州] 라는 제목으로 20운韻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 두 번 모두 임금께서 상을 내리되 차등 있게 내 리셨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신축년(1781) 정월에 외각의 관직을 옮겨서 내각內閣(규장각)의 관직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니, 무관이 규장각 검서관이 된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 3월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승진되었는데, 이로부터는 매양 본래의 관직에 검서의 관직을 겸임하 박지원 생애와 행적 209

204 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사근도 찰방 沙 斤 道 察 訪 으로 제수되었는데, 사근역 沙 斤 驛 에는 해묵은 공채 公 債 가 있어 매년 그 이자를 받아 공비 公 費 로 삼는 관계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을 날마다 들볶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상관 上 官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는데, 이 덕분에 역민 驛 民 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계묘년(1783) 11월에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 廣 興 倉 主 簿 에 제수되고, 갑진년(1784) 2월엔 사옹원 주부 司 饔 院 主 簿 로 옮겼 다. 6월에는 적성현감 積 城 縣 監 에 제수되었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적성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치게 된다 하였고, 남들이 간혹 녹봉 이 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문득 정색을 하고, 내가 한낱 서생 書 生 으로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덕분 에,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고 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다만 임금님의 은혜를 찬 송할 뿐이지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고을 남쪽에 청학동 靑 鶴 洞 이 있었는데 고송 古 松 과 백석 白 石 이 그윽하 여 사랑스러웠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으나 다 허물어졌으므로 다시 두어 칸을 얽고 우취옹정 又 醉 翁 亭 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두 바퀴 달린 작은 수레를 손수 만들어 여가 있을 때면 홀로 그곳에 가서 유유자적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기유년(1789)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인 와서별제 瓦 署 別 提 로 옮기고, 경술년(1790) 7월에 사도시 주부로 옮기고, 신해년 (1791) 2월에 상의원 주부 尙 衣 院 主 簿 로 옮기고, 3월에 장원서 별제 掌 苑 署 別 提 로 옮기고, 5월에 사옹원 주부로 옮겼다. (중략) 일찍이 저서 12종이 있었다. 영처고 嬰 處 稿 는 바로 젊은 시절에 지은 시와 산문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신하는 것과 행동을 조심하기를 어린아이나 처녀처럼 해야 한다 했는데, 그래서 원고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청장관고 靑 莊 館 稿 의 청장 은 바로 해오라기의 별명인데,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뒤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 먹기 때문에 신천옹 信 天 翁 이라고도 부른다. 무관이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은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이목구심서 耳 目 口 心 書 는 곧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과 입으로 말한 것과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사 소절 士 小 節 은 옛날의 어진 이들이 남긴 교훈을 인용하여 훈계의 말씀으로 삼고, 지금 사람들의 요새 일들을 기록하여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한 것이다. 청비록 淸 脾 錄 은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시화 詩 話 를 실은 것이요, 기년아람 紀 年 兒 覽 은 상고 부터 시작하여 명 明 ㆍ청 淸 및 춘추시대의 소국 小 國 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중화 中 華 와 이적 夷 狄 을 명확히 구 별하였다. 청정국지 蜻 蜓 國 志 는 일본의 세계 世 系 ㆍ지도ㆍ풍속ㆍ언어ㆍ물산을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 盎 葉 記 는 곧 옛날부터 지 금까지의 일에 대해 고증하고 변증한 말들을 모은 것이다. 한죽당섭필 寒 竹 堂 涉 筆 은 경상도에서 역승 驛 丞 (찰방)으로 재직할 때 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기억 禮 記 臆 은 예기 의 어려운 글자나 의심나는 뜻에 대해 풀이한 것이다. 송사보전 宋 史 補 傳 은 곧 하교를 받들어 어정송사전 御 定 宋 史 筌 을 편집ㆍ교열한 것으로서, 유민열전 遺 民 列 傳 과 고려열전 高 麗 列 傳 ㆍ요열전 遼 列 傳 ㆍ금열전 金 列 傳 ㆍ몽고열전 蒙 古 列 傳 을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뇌뢰낙락서 磊 磊 落 落 書 는 많은 서적들을 열람하면서 명나라 말의 유민 遺 民 들의 행적을 편집한 것인데, 미처 원고를 정리하지 못하였다. 매번 문헌을 편찬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무관이 참여하였으니, 국조보감 國 朝 寶 鑑 갱장록 羹 墻 錄 문원보불 文 苑 黼 黻 대전통편 大 典 通 編 같은 종류가 그것이다. 또 일찍이 어명을 받들어 운서 韻 書 를 편찬하여 진상하였으니, 이름을 규장 전운 奎 章 全 韻 이라 하였다. 자획 字 畫 은 모두 육서 六 書 를 쓰고, 주석은 제가 諸 家 의 운서를 참고하여 협운 叶 韻 과 통운 通 韻 까지 자 상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관은 이 일을 마치고 죽었다. 갑인년(1794) 겨울에 임금은 책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 아우 공무 功 懋 와 아들 광규 光 葵 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고 그 일 을 감독하게 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담제 禫 祭 를 지내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오늘 운서를 인쇄하는 일로 인하여 생각하건 대, 작고한 검서관 이 아무의 재주와 학식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들이 이미 탈상했다고 아뢰니, 그를 검서관에 특별히 임명하라 하고, 또 돈 500냥을 하사하시어 유고를 출간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규장각의 각신과 초계문 신 抄 啓 文 臣 으로서 현재 장임 將 任 (대장이나 장수), 지방 관직, 관찰사, 큰 고을 수령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각자 능력껏 출간 비 용을 돕도록 하고, 가까운 친척인 훈련대장 이경무 李 敬 懋 에게도 일체가 되어 출간 비용을 대는 것을 돕도록 하교하였다. 이날 21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05 임금께서 광규에게 입시토록 명하였으며, 은혜로운 하교가 정중하였다. 일족과 친구들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하기를, 무관이 평소에 제 몸을 깨끗이 지키고 학업에 부지런하며 편찬하는 일로 수고가 많았는데, 죽은 뒤에 지존至尊께서 그 재주를 생각 하고 그 가난을 염려하여 마침내 그의 아들을 등용하고 유고를 출판하라는 명을 내리셨구나! 이렇게 큰 은혜와 영광이 내린 것은 구천九泉에 간 망인을 깊이 감격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분발하게 할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 랴! 하였다. 무관은 수성 백씨隋城白氏(수성은 水原)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따님이요, 증贈 호조 판서 행 평안 병 사行 平安兵使로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인 시구時耈의 증손녀이다.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광규요, 두 딸은 전주全州 유 선柳烍과 광산光山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광규의 자녀는 아직 어리다. (하략) 58세(1794, 정조18) * 함양군학사루기咸陽郡學士樓記, 함양군흥학재기咸陽郡興學齋記 씀 * 장남 종의가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려 하자 만류함 (27) 燕巖集 권1, 煙湘閣選本, 咸陽郡學士樓記 咸陽郡治東距百武 臨城而樓凡幾楹 歲久荒頹 榱桷摧朽 丹雘昧䵝 上之十九年甲寅 郡守尹矦光碩 慨然捐廩 大興修治 悉復樓之舊觀 仍其古號曰學士 屬不佞爲文而記之 咸陽 新羅時爲天嶺郡 文昌矦崔致遠字孤雲 甞爲守天嶺而置樓者 葢已 千年矣 天嶺民懷矦遺惠 至今號其樓曰學士者 稱其所履而志之也 初孤雲年十二 隨商舶入唐 僖宗乾符甲午 裴瓚榜及第 仕 爲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 淮南都統高騈奏爲從事 爲騈草檄召諸道兵討黃巢 巢得檄驚墜牀下 孤雲名遂震海內 唐書藝文 志 有孤雲所著桂苑筆耕四卷 及光啓元年乙巳 充詔使東還 所謂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者是也 國 史孤雲棄官入伽倻山 一朝遺冠屨林中 不知所終 世遂以孤雲得道爲神仙 此非知孤雲也 孤雲甞上十事諫其主 主不能用 伽 倻之於天嶺 不百里而近 則其超然遐擧者 豈非在郡時耶 嗟乎 孤雲立身天子之朝 而唐室方亂 斂跡父母之邦 而羅朝將訖 環顧天下 身無係著 如天末閒雲 倦住孤征 卷舒無心 則孤雲所以自命其字 而當時軒冕之榮 已屬腐鼠弊屣矣 乃後之人 猶 戀其學士之啣 不幾乎病孤雲而累斯樓哉 然而郡人之慕孤雲者 不曰崔矦 而必號學士 不曰孤雲 而必稱其官 不頌于石而惟 樓是名焉 不信其遺蛻林澤之間 而彷佛相遌于是樓之中 若夫月隱高桐 八牕玲瓏 則依然學士之步曲欄也 風動脩竹 一鶴寥 廓 則怳然學士之咏高秋也 樓之所以名學士 其所由來者遠矣夫 안의현감으로 재직시 함안의 학사루 완공을 기념하여 지은 글이다. 함양군咸陽郡의 관청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백 걸음쯤 떨어져 성벽 가에 몇 칸짜리 누각이 하나 있는데, 세월이 오래됨 에 따라 퇴락되어 서까래가 삭아 부러지고 단청은 새까맣게 되었다. 지금 임금 19년 갑인년(1794)에 군수인 윤광석尹光碩이 개 연히 녹봉을 털어서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일으켜 누각의 옛 모습을 모조리 복구하고 옛 이름을 그대로 써서 학사루學士樓 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부탁하여 글월을 엮어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함양은 신라 시대에 천령군天嶺郡으로 불렸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은 자가 고운孤雲으로 일찍이 천령의 수령이 되어 이 누각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미 천 년이 지 난 것이다. 천령의 백성들은 문창후가 끼친 은혜를 생각하여 지금도 그 누각을 학사루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그가 이곳을 거쳐 갔음을 들어서 기념한 것이다. 처음 고운의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가서 희종僖宗 건부乾符 갑오년 (874)에 배찬裴瓚의 방榜에 급제하고 벼슬이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올랐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회남도통淮 南都統 고변高騈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자, 고변을 위해 제도諸道의 군사를 소집하여 황소黃巢를 토벌하 자는 격문을 지으니, 황소가 그 격문을 보고 놀라서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고운의 이름이 마침내 중국을 뒤흔 박지원 생애와 행적 211

206 들었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고운의 저술로 계원필경桂苑筆耕 4권이 있다고 되어 있다. 광계光啓 원년 을사년(885)에 당 나라에서 보내는 조사詔使의 일원이 되어 본국에 돌아왔으니, 이른바 무협중봉巫峽重峰의 나이에 포의布衣로 중국에 들어 갔다가 은하열수銀河列宿의 나이에 금의錦衣로 동국에 돌아왔다 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국사國史에 의하면 고 운이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갔다가 하루아침에 관冠과 신을 숲 속에 벗어 버리고 훌쩍 떠나, 어디 가서 생을 마 쳤는지 알지 못한다 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고운이 도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이는 고운을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고운이 일찍이 열 가지 일을 상주하여 임금에게 간諫하였으나 임금이 능히 쓰지를 못했다. 가야산에서 천령군 까지는 백 리가 못 되는 거리인즉, 그가 초연히 멀리 떠났다는 것은 어찌 이 고을에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 슬프다! 고운이 천자의 조정에서 입신하였으나 당 나라가 그때 한창 어지러웠고, 이를 피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왔으나 신라 왕조가 장차 수명이 다해 가려 하였다. 그리하여 천하를 둘러보아도 몸을 붙일 데가 없는 것이 마치 하늘 끝에 한가한 구름이 게을리 머무르고 외로이 흘러가서 무심히 걷히락펴지락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스스로 자字를 외로운 구름이란 뜻의 고운孤雲 이라 지은 것이며, 당시 벼슬살이의 부귀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썩은 쥐나 헌신짝처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런데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학사라는 직함에 연연하고 있으니, 아마도 고운을 욕보이고 이 누각에 누를 끼치는 것이 되지 않 겠는가. 그러나 고운을 사모하는 고을 사람들은 그를 사후의 호칭인 최 문창후崔文昌侯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생전의 호칭인 학 사學士라 불렀으며, 관직을 떠났을 때의 이름인 고운이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그의 관직을 불렀으며, 송덕비를 세우지 아니하 고 오직 누각에다 이름을 붙였다. 이는 그가 산택山澤의 사이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관과 신을 남기고 사라져 신선이 되었 다는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 누각 안에서 서로 만날 듯이 여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높은 오동나무에 달이 어른거리고 사방 으로 트인 창문에 달빛이 영롱하면 마치 학사가 굽은 난간에서 거닐고 있는 듯이 여겼으며,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한 마리 의 학이 공중에 날면 흡사 학사가 하늘 드높은 가을을 시로 읊는 듯이 여겨 왔으니, 누각의 이름을 학사루學士樓라 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겠도다. 62세(1798, 정조22) * 면천군에 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벌하지 않고 방면함 (28) 燕巖集 권2, 煙湘閣選本, 上巡使書 頃以本郡泛川面居民金必軍所納冊子之報營 大致慍怒於兵營 至有移罪刑吏之擧 不安甚矣 金漢本以邪學中一人 去年冬 間 空室在逃 今年九月中 其本戶統內居民 有以金漢之還接舊居爲告 而姑且緩之 稍俟其安頓 然後使督糴 倉卒招之 而不 以牌子 亦不使官差者 意實在於若知不知之中 有意無意之間 渠果大生疑懼 卽爲來現 而袖納冊子並呈所志 以爲首實免罪 之資 渠本蚩蠢無識之漢 冊子有無本所不慮 而渠旣自納 則不必追究旣往 沮其方新之心 故以場日燒火之意 題其所志 而頗 示慰勉 卽爲退送矣 其後兵營下吏 歷過吏廳 詳問境內邪學有無 羣吏爲言 前之學習者 自然消息 皆作平民 而其中金必軍 者 最是難化 日前又自納冊 則今此境內 更無可疑 閫吏微露所以偵探列邑之意 因爲轉向他處 其本事委折又如此而已 初意 則擬於場市焚燒 而伊日値雨 衆民不集 更念此等事 未可自擅 所以亶報巡營者此也 且列邑之於兵營 非軍務則本無相關 豈 料兵營之忽地來索乎 以頃日送上巡營之意 論報矣 謂以不關由兵營 遽聞巡營 大示憾意 更爲秘關 捉囚金漢於郡獄 窮覈其 從前藏冊之由 必以兵營所捉 强要捧招 此何擧措也 未知兵營遣誰執捉乎 如或暗地搜得 則何不直爲持去 有此追索之擧乎 曾聞此漢輩積年梗化 凡於繡衣之行 巡部之路 屢經追捕 棍之刑之 移囚之而不服 前後守土者 充定徒隷之役 並其妻孥而係 絏之 或多發校卒 不時圍搜 至探其甕盎 振攄箱簏 曾莫能獲其片紙 其深藏不露 推此可知 非渠自納 何緣轉在官庭乎 化民 成俗之方 雖勤示其至誠無僞 常患孚感之未深 今乃反是 欲爲立迹於厲禁 先自損威於愚民 其於事面 果何如哉 使此漢果能 21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07 覺迷革心 納冊歸化 則國家不過得一平民 如其未也 殪殄滅之 無俾易種於玆邑 此在古不過刑政之一事 如得其情 則所謂哀 矜而勿喜之而已 今欲禁民之爲邪 而先示不誠 惡乎其可乎 所謂詗吏 不過以傳聞之說 依俙歸告 而自是吏胥下流之本色 則 實嫌於碌碌卞暴 而畧擧本末於囚供之報矣 畢竟所以處置者 要不出當初所志之題辭 而一不中意 至於替治下吏 抑何意也 下官雖甚老殘罷劣 亦安可抱羞忍恥 晏然於職次乎 辭狀書呈 幸伏望亟賜黜罷 以安私分焉 兵營報牒 並爲錄上 一覽則當悉 其事狀矣 순찰사에게 올림 - 면천군수 재직시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벌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지난번에 본군 범천면泛川面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바친 책자를 영문營門에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써 병영兵營이 노발대발하여 심지어 그 죄를 형리刑吏에게 전가한 일까지 있었으니 너무도 불안스럽습니다. 김가는 본시 천주교도의 한 사 람으로 지난겨울 동안에 집을 비우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금년 9월 중에 그자의 호戶가 속한 오가통五家統 내의 주민 중에서 김가가 도로 제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고발했으므로, 우선 늦춰 주어 그가 안착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색갈이를 독촉하는 창졸倉卒을 시켜 부르면서 패자牌子도 쓰지 않고 관차官差도 시키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실로 알 듯 모를 듯 긴가민가하는 사 이에 처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과연 크게 의구심을 내어 즉시 와서 현신現身하고, 소매 속에 든 책자를 바치며 아울러 소지所志까지 올 려, 자수하여 죄를 면하는 거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자는 본시 어리석고 무식한 자라 책자가 있건 없건 본시 염려할 것 이 없으며, 더구나 제가 이미 자진해서 바친 이상 기왕지사를 추궁하여 바야흐로 고쳐먹으려는 마음을 저해할 필요가 없었습 니다. 그러므로 장날을 골라 공개리에 불에 태워 버리라는 뜻으로 그 소지에 제사題辭하고는, 자못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이고서 즉시 물러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병영의 하리下吏가 지나는 길에 본군 이청吏廳을 들러 경내에 천주교도가 있는 지 없는지 자세히 물었으므로, 여러 아전들이 말하기를, 전날 천주교를 배우고 익히던 자들이 저절로 사라져 모두 평민이 되었는데, 그중에 김필군이란 자가 가장 교화하기 어려웠으나 일전에 또 그 책자를 자진하여 바쳤으니, 이제는 이 고을 안에 다시 의심할 만한 일이 없소 하자, 병영의 하리는 여러 고을을 정탐하러 나왔다는 뜻을 슬쩍 비치면서 바로 다른 곳으로 향 해 갔으니, 본 사건의 우여곡절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당초 생각에는 장날을 기하여 불태워 버리게 할 작정이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려 백성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바 이런 일은 혼자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순영巡營(감영)에 보고를 올린 것은 이 때문이었 습니다. 게다가 여러 고을은 병영과는 군사 업무가 아니면 본래 상관이 없는데, 어찌 병영에서 졸지에 와 그 책자를 찾을 줄 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지난날 순영으로 올려 보냈다는 뜻으로 논보論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영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바로 순영으로 보고했다고 하면서 크게 유감의 뜻을 나타냈을 뿐더러, 다시 비밀 관 문關文을 만들어 김가를 고을 옥에 잡아 가두고 그가 종전에 책자를 감추었던 이유를 캐고 들며, 반드시 병영에서 잡은 것으 로 강요하여 조서를 꾸미게 했으니, 이게 무슨 거조입니까? 도대체 병영이 누구를 보내서 잡았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몰래 수색해 냈다면 어찌 바로 붙잡아 가지 않고 이렇게 추후에 와서 찾아가는 일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듣자니, 이자들은 여러 해를 두고 타일러도 듣지 아니하며, 무릇 암행어사가 출도할 때나 감사가 순시할 때에 누 차 잡아다가 곤장과 형장刑杖을 치고 옥으로 옮겨 가두곤 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후 수령들이 그놈들을 도례徒 隸(官下人)의 천역에 충당하고 그 처자식까지 잡아다가 구속하곤 했으며, 혹은 교졸校卒들을 많이 풀어 불시에 집을 에워싸고 수색하여 심지어는 항아리 속까지 다 뒤지고 상자까지 다 털었어도 일찍이 종이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깊 이깊이 감춰둔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데, 제가 자진해서 바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관청의 뜰에 그 물건이 굴러와 있겠 습니까? 백성을 감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방법이란 아무리 그 지극한 정성과 거짓 없음을 힘써 보여 준다 해도, 그들을 깊 이 믿음으로 감동시키지 못할까 늘 걱정인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이와는 정반대로, 사납게 금단禁斷시킴으로써 공적 박지원 생애와 행적 213

208 을 세우고자 하여, 먼저 스스로 어리석은 백성에게 위신을 손상당한다면 그 사리와 체면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자가 과연 미혹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 책자를 바치고 양민으로 돌아온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이 고을에서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옛날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 고 할 따름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천주교도가 되는 것을 금단하려고 하면서, 먼저 불성실을 내보인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이른 바 형리詗吏란 놈이 전해들은 말을 가지고 돌아가 애매모호하게 고한 것인데, 이런 짓은 으레 서리胥吏와 같은 하류들의 본색 입니다. 그래서 자질구레하게 해명하고 드러내는 것을 실로 피하고자 하여, 죄수의 진술을 보고할 때 대략 본말을 거론했던 것입니다. 필경에 조치한 것은 당초 소지所志의 제사題辭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한 번 뜻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대신 하리下吏를 잡아다 다스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하관下官(연암 자신을 가리킴)이 아무리 늙고 용렬하지만 어찌 이런 수치를 참 아 가며 편안히 직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직서를 써서 올리오니 바라건대 빨리 파직을 시켜 제 분수에 안주하 게 하여 주십시오. 병영에 올린 보첩報牒(보고서)을 아울러 기록해 올리오니, 한 번 훑어보시면 당연히 그 일의 전모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63세(1799, 정조23) *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건축 * 과농소초課農小抄 저술,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올림 (29) 燕巖集 권16, 課農小抄卷首, 進課農小抄文 己未三月二十五日 行沔川郡守臣朴趾源 伏地頓首謹奏 爲本年正月初七日 本道觀察使關到節 祗受有旨內 今人雖不及古 人 如曰不知農 何以做農官 今欲叩其所存於明農 修述先朝已試之故事 令諸道觀察使各都留守 先陳經綸 仍飭守土者 亦陳 意見 此先試以言之意 考核其實 當在有秋之後 同日口傳下敎內 歲前綸音頒示之後 分憂守土之列 無一人應旨 不誠孰甚焉 文蔭守令 以經綸冊子 勿拘一卷二卷三卷 毋敢一人或闕者 臣誠惶恐隕越 不知所以對揚也 臣家世淸貧 素無田園 生長輦轂 之下 目不辨菽麥 臣祖食亞卿祿 而臣幼時掬其紅腐 種於庭中 以待其方包也 稍長 徵逐儒士 未甞與野人佃客相接 及中歲 落拓 始有志歸農 求所謂農家者流而鈔錄之 然實無田可歸 特硏田而筆耕已矣 往往郊野 見其耕耘之法 多不與古書合 或爲 之曉說趙過 賈勰之遺方 未甞不爲村傭里老所笑以爲甚迂也 幸從蔭路出宰百里 辭陛之日 莊誦七事 農桑二字 乃其首務也 逮至莅任以來 未甞不躬涉原野 警策昏惰而終是口耳之學 不相應孚 習俗之安 未易矯改 不過因循 姑且略施勸課而已 書中 之事 尙未有一二試者 以此叨職數年 民事首務 未見其爲頓盛也 守土分憂之義 豈亶然哉 臣以此夙宵憂恐 誠知尸素無所逃 罪 乃者 聖上深惟務農重本之道 先施敷奏明試之政 如臣魯莽 顧何足以仰塞明旨哉 維玆手抄數篇 舊出於學稼學圃之志 而 小人哉樊須 固所自鄙於其心 然臣旣別無經綸之素講於平日者 則亦安敢倉卒臆對 以重其不誠之誅也哉 義在無隱 誠不獲已 遂敢略綴按說 繕寫呈進 臣無任愧恐屛營之至 과농소초 를 올리면서 쓴 글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편찬한 농서로서, 1798년(정조 22) 11월 정조는 농업상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전국에 농정을 권하고 농서를 구하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이에 당시 면천沔川(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군수였던 박지원이 1799년 3월 이 책을 올렸다. 그러나 이는 국왕의 윤음이 있은 뒤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련해두었던 초고를 기 반으로 그의 생각을 정리하고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를 첨가해 올린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여러 농서 중 체계가 가장 완벽하 21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09 다고 평가되었다. 농업 생산력을 늘리는 방법으로 분양법糞壤法의 개선과 수리법水利法의 개량을 들었다. 특히, 수리 조항을 설정한 것은 우리나라 농서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토지소유 문제 또한 이 농서에서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그리고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고, 전래의 정전제井田制의 이념을 이어받아 한전제限田制를 주장 하였다. 이는 정전제와 같이 토지를 균등 분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 소유에 있어서 한도를 정해 토지 점유를 막으면, 토 지는 상속ㆍ매매 등의 방법으로 자연히 균분된다는 이론이다. 69세(1805, 순조5) * 서울 가회방嘉會坊 재동齋洞에서 별세 박지원 생애와 행적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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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박제가 朴 齊 家 (1750~1805) 1) 박제가 연보 年 譜 2) 박제가 생애 관련 자료

212 6. 박제가朴齊家(1750~1805) 생애와 행적 1) 박제가 연보年譜 본관 : 밀양密陽. 자 : 차수次修ㆍ재선在先ㆍ수기修其, 호 : 초정楚亭ㆍ정유貞蕤ㆍ위항도인葦杭道人 나이 / 연도 218 연보 1세(1750, 영조26) *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평朴坪과 전주全州 이씨李氏의 둘째아들로 서울 출생 11세(1760, 영조36) * 부친 별세, 어머니 전주 이씨 밑에서 가난하게 삶 16세(1765, 영조41) * 이덕무李德懋와 교유 17세(1766, 영조42) * 이관상李觀祥(충무공 이순신 5대손)의 서녀庶女와 혼인 * 백탑白塔에서 이덕무ㆍ유득공柳得恭 등과 교류 19세(1768, 영조44) * 박지원朴趾源과 교유함 이후 1779년까지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학문적 사 상적 기초를 마련 20세(1769, 영조45) * 처남 이몽직李夢直과 묘향산妙香山을 유람. 검무기劍舞記 저술 22세(1771, 영조47) * 장남 박장임朴長稔 출생 * 남한산성을 돌아봄 24세(1773, 영조49) * 모친 별세 27세(1776, 정조1) * 이덕무ㆍ유득공ㆍ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사가시집四家詩集인 한객건 연집韓客巾衍集 으로 명성을 청나라에까지 알림 29세(1778, 정조2) *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배려로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감 * 청나라 학자 이조원李調元ㆍ반정균潘庭筠 등과 교유 * 귀국후 통진通津에서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篇 탈고脫稿, 2~3년뒤 외 편外篇 완성 30세(1779, 정조3) * 이덕무ㆍ유득공ㆍ서이수와 함께 규장각奎章閣 초대 검서관檢書官 임명 * 1786년까지 7년동안 외각外閣 검서와 내각內閣검서로 재직함 34세(1783, 정조7) * 유득공과 함께 왕명으로 자휼전칙字恤典則 편찬 37세(1786, 정조10) * 병오소회丙午所懷 올림. 검사관 사직 41세(1790, 정조14) *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을 수행하여 청나라에 감 * 군기시정軍器寺正 43세(1792, 정조16) * 부여현감夫餘縣監 44세(1793, 정조17) *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자송문自訟文 씀 45세(1794, 정조18) *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 급제 46세(1795, 정조19) * 영평현감永平縣監 49세(1798, 정조22) *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 올림 52세(1801, 순조1) * 유득공과 함께 세 번째로 청나라에 감 * 임시발任時發의 흉서凶書사건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으로 유배 56세(1805, 순조5) *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로 돌아와 별세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주요 행적지 통진 영평 경기도 광주

213 2) 박제가 생애 관련 자료 1세(1750, 11세(1760, 영조26) 영조36) *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평朴坪과 전주全州 이씨李氏의 둘째아들로 서울 출생 * 부친 별세, 홀어머니 전주 이씨 밑에서 가난하게 삶 (1) 貞蕤閣文集 권3, 傳, 小傳 朝鮮之三百八十四秊 鴨水之東千有餘里 其生也 出新羅而祖密陽 其系也 取大學之旨而名焉 托離騷之歌而號焉 其爲人 也 犀額刀眉綠瞳而白耳 擇孤高而愈親 望繁華而愈疎 故寡合而常貧 幼而學文章之言 長而好經濟之術 數月不歸家 時人莫 知也 方其玩心高明 遺落世務 錯綜名理 沈潛幽渺 與百世而唯諾 越萬里而翺翔 覩雲烟之異態 聆百鳥之新音 與夫山川日 月星辰之遠 草木蟲魚霜露之微 所以日變化而莫知然者 森然契于胷中 言語不能悉其情 口舌不足喩其味 自以爲獨得 百人 莫知其樂也 嗟乎 形留而往者神也 骨朽而存者心也 知其言者 庶幾其人於生死姓名之外矣 贊曰 竹帛紀而丹靑摸 日月滔滔 其人遠矣 而况遺精華於自然 拾陳言之所同 惡在其不朽也 夫傳者傳也 雖未可謂極其詣而盡其品乎 而猶宛然知爲一人 而 匪千萬人 然後其必有天涯曠世而往 人人而遇我者乎 박제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전기傳記 형식의 자료이다. 그 됨됨이를 보면 이마는 물소 같고 눈썹은 칼날 같다. 눈동자는 푸르고 귀는 하얗다. 뜻이 높고 고상한 사람을 골라 더욱 친하게 지내고, 돈 많고 화려한 사람을 보면 일부러 멀어진다. 그러한 까닭에 마음에 맞는 친구가 적어 항상 가난하다. (2) 貞蕤閣文集 권1, 序, 閱幼時所書孟子叙 曬書之夕 有自五歲至十歲吾遊戱之篋 凡禿筆敗墨埋珠落羽燈之飾錐之柄瓠舟杻馬之屬 與案齊 往往瓦礫出蠧魚中 皆此 手之所摩弄也 非愴非歡 忽如舊人 訝今日之長成 悟昔日之變歷 卷如掌者什餘 大學孟子詩離騷秦漢文選杜詩唐詩孔氏譜石 洲五律自批 皆散不完 孟子分爲四 亦亡其一 因思幼時好書 口常啣筆 畫沙於廁 書空於坐 嘗夏日書粉牌 匍匐裸而登之 膝 與臍 汗爲之墨 橫臨亂摹 不擇屛簇 丙子移屋靑橋 靑橋之壁已無白矣 先君月賜以紙 日日削紙爲卷 卷袤二指 幷帙而可以 吹也 每一編成 輒爲鄰兒請 或攫而去 是以所讀之書 必再三抄焉 已而年長以尺 冊大以寸 九歲而爲此編 是時小於此者葢 盈斗 余年十一歲庚辰 先君歿 後搬居于墨洞 又移于筆厓 又僦于墨 再入筆 五六年之間 流落殆盡 吾之幼 不可得而再考也 則此編可貴也 刊其誤理其粧 廼續書其失曰此亦吾之故也 故者毋失其故可矣 惜乎 幅短刀嚙字根 是日母出籠中碧紗半臂如 幅者曰 汝三歲衣也 吾指此卷而曰將無同 有客戲云掛角之辰 好輕李密之牛 余應之曰焚書之日 差勝伏生之口 어린시절 맹자 를 읽고 난 뒤 쓴 글이다. 햇볕에 책을 말리던 날 저녁,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상자가 나왔다. (중략) 손바닥만 한 책 도 열권 남짓 되었는데, 대학, 맹자, 시경, 이소, 진한문선, 두시, 당시, 공씨보, 석주오율 등은 직접 비점 을 찍은 것들이다. 모두 흩어져서 완전하지는 못했다, 맹자 같은 것은 네 책으로 나누었는데 그나마 그 중 하나는 없어졌 다. 인하여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책을 좋아해서 입에는 항상 붓을 물고 있었고, 측간에서는 모래에 그림을 그렸으 며, 앉기만 하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 한번은 여름날 분패에 글씨를 쓴다고 벌거벗은 채로 기어서 그 위에 올라앉았다. 무릎 과 배곱으로 흘러내린 땀방울을 먹물 삼아 이리저리 병풍이고 족자고 가리지 않고 임서하며 베껴썼다. (중략) 내가 열한 살되 던 경진년(1760)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묵동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필동으로 옮겼고, 또 묵동에 세를 들었다가 다 박제가 생애와 행적 219

214 시금 필동으로 들어갔다. 5,6년 사이에 다 흩어져 없어져서 나의 유년 시절을 다시는 살펴볼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 이 책들 이 소중한 것이다. 잘못 쓴 것을 고쳐 가며 새로 단장했고, 없어진 것들을 이어 적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또한 나의 옛 모습이구나. 옛것은 예스러움을 잃지 말아야 옳거늘, 애석하게도 폭이 좁다 보니 글자 뿌리를 잘라먹고 말았구나 (하략) 17세(1766, 영조42) * 이관상李觀祥(충무공 이순신 5대손)의 서녀庶女와 혼인 * 백탑白塔 부근에 사는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 등과 교류 (3) 貞蕤閣集 5집, 詩, 讀雅亭小牘 靑莊現世如飛鳥 閃鑠無痕碧天杳 誰從空裏記形聲 落羽婆娑證不了 忽然撒手落懸厓 橘皮蟬殼同消摩 雲今過眼說不得 若問古雲如君何 黃金可鑄絲可繡 兩個蚊蟁經宇宙 二十一史彈詞聲 泠泠不暇絃指鳴 沿邊赤楊已吐絮 細鱗紅魚淸水泝 豆 滿江頭春暮時 不似流觴曲水處 박제가는 탑골을 중심으로 당시의 문사文士들과 교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즉 탑골의 연암처소를 중심으로 이덕무 와 이서구, 서상수, 유련, 유득공이 모여 살고 있었으므로 박제가는 이덕무를 통해 이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맺게 된다. 빙 둘러 있는 성 한가운데에 백탑이 있다. 멀리서 삐죽 솟은 것을 보면 마치 설죽의 새순이 나온 듯하다. 여기가 바 로 원각사의 옛터이다. 지난 무자년(1768)과 기축년(1769)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이었다.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으뜸이란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의 북쪽으로 가서 찾아뵈었다. 선생께서는 내가 왔단 말을 들으시더니 옷을 걸치며 나와 맞이하시는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손을 잡아 주셨다. (중략) 나는 지나친 환대에 놀라고 기뻐하며 천고의 성대한 일로 여겨 글을 지어 화답하였다. 서로에게 경도된 모습과 마음을 알아주던 느낌이 대개 이와 같았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집이 북쪽으로 마주 보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은 그 서편에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 떨어진 곳은 서상수의 서루였고, 거기서 다시 꺾어져 북동쪽으로 가면 유금과 유득공이 사는 집이었다. 나는 한번 갔다 하면 돌아오 는 것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연거푸 머물곤 했다. 시문이나 척독을 썼다 하면 권질을 이루었고, 술과 음식을 찾아다니 며 밤으로 낮을 잇곤 했다. (중략) 복소리가 삼경을 알리기에 마침내 여러 벗의 집을 차례로 거쳐 백탑을 한 바퀴 돌아 나왔 다. 당시에 호사가들은 이 일을 왕양명 선생이 철주관 도인을 방문했던 일에 비기곤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6, 7년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지내면서 가난과 질병이 날마다 찾아들어, 이따금 서로 만나 비록 모두 별 탈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는 해도, 풍류는 지난날만 못하고 낯빛도 예전 같지 않다. 그제야 비로소 벗과 노니는 데도 진실로 성쇠가 있소, 피차간에 각기 한때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중략) 벗 이희경이 박지원과 이덕무 등 여러 분과 나의 시문 및 척독 약간을 모아 책으로 만들 었다. 나는 백탑청연집 이란 제목을 붙이고 이와 같이 서문을 지어, 당시에 우리들의 노님이 성대하였음을 보인다. 덧붙여 내 평생의 일 한두 가지를 말한다. (4) 貞蕤閣集, 序, 貞蕤閣集序[李德懋] 歲甲申 予過白永叔誠明坊第 見其楣揭韌齋二字 字皆怒磔活摩鹿脛大也 永叔詑曰此予同閈故朴承旨之子十五歲童子之爲 也 予瞠然却顧 嘆未曾見 然知有書而不知有詩也 越二年冬 金子愼貽予詩二幅曰此爲永叔之楣之書之童子之詩也 詩與書角 而顧媚焉 然知有詩而不知其䫉與心之何如也 時予居母喪 不得躬往從之 每遇白金二子 輒問訊其䫉與心之何如也 旣久之 䫉與耳熟 心與想融 於䫉幾得十之七八 於心幾得十之四五 越明年春 予更過永叔 溪出南山 渙渙而流逝于門外 童子出門 22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15 嶷嶷而步 遵溪而北 白裌綠帶 于于如也 頟穹然而目凝然而色敷婾而奇男子也 予心知其爲朴氏子也 目送於道 童子亦若心 會 熟視迺過 予心以爲是子必踵予於白氏之室 少焉童子果至 持槑花詩爲贄 予詗之以神氣 試之以言譚 叩之以志節 照之以 性靈 驩然相契 樂不可堪 後童子過予 貽詩五百言 有古君子結交之風焉 今年童子冠 字在先 在先每對人不能言 對予能言 予亦聽人言不能解 聽在先言能解 在先對予 雖不欲言 其可得已 有時乎破屋風雨 蕭然相對 百帙橫縱 放燈中閒 盡情談吐 靡有攸隱 天地之往復 死生之乘除 古今之興敗 出處之得失 以至溪山友朋之樂 書畫詩文之致 激之則相悲 按之則相悅 已 而寂然無言 相視以笑 蓋不知其何故也 雖然在先之才藝 可能也 在先之寡欲 不可能也 故其詩澹泊瀟洒 克肖其人 往年旣 屬予評選楚亭詩集 今又再屬評選 予評選已 覆全副而笑曰是何評 歬褒而後刺也 在先曰是可以攷㕛誼也 在先閱評選而笑曰 是何詩 前媚而後峭也 予曰是可以見詩道也 予不云乎 代各有詩 人各有詩 詩不可相襲 相襲贋詩也 在先蓋嘗悟之云 嗟在 先 在先之一十九年 知夫在先心者凡幾人矣 戊子秋日 完山李德懋楙官譔 1768년 이덕무가 완산에서 지은 정유각집 서문이다. 갑신년(1764)에 내가 성명방에 있는 백영숙의 집에 들렀다가, 문설주에 걸어둔 인재 라는 두 글자를 보았다. 글자가 모 두 성난 듯한 파임을 활기 있게 써서 사슴 정강이만 한 크기였다. 영숙이 장랑하여 말했다. 이것은 나와 한 마을에 사는 고 박 승지의 아들, 열다섯 살 난 동자가 쓴 것일세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시금 돌아보며 여태 만나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 였다. 하지만 그 글씨만 알았고 시까지 짓는 줄은 몰랐다. 2년 뒤 겨울에 김자신이 내게 시 두 폭을 주며 말했다. 이것은 백 영숙 집의 문설주 글씨를 썼던 동자의 시라네 시와 글씨가 엇비슷하였으므로 돌아보며 어여쁘게 여겼다. 하지만 시가 있는 줄만 알았고, 그 모습이나 마음 씀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했다. (중략) 내가 신기를 살펴보고, 말을 시험해 보며, 지절을 점검하고, 성령을 비춰 보고는 기쁘게 마음이 맞아 즐거움을 건 댈 수 없었다. 나중에 동자가 내개 들러 시 5백 언을 주었는데, 옛날 군자들의 사귐 풀이가 있었다. 재선은 나와 마주하기만 하면 비록 말하지 않으려해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때때로 비바람 들이치는 부서진 집에서 쓸쓸히 서로 마주하여, 백 질이 나 되는 책을 어지러이 늘어놓고, 그 중간에 등불을 밝혀 두고 마음을 쏟아 이야기를 털어 놓아 감추는 바가 전혀 없었다. 천지의 왕복과 사생의 성쇠, 고금의 흥망과 출처의 득실에서부터 산수간 붕우의 즐거움과 서화와 시문의 운치에 이르기까지, 격동되면 슬퍼했고 누그러지면 기뻐하다가, 이윽고 조용히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웃기도 하였으니, 대개 그 연유를 알지 못 하겠다. 재선의 재예는 비록 따라할 수 있다 해도 재선의 욕심 적은 것은 따라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달게 그 시는 담박하고도 시원스러운, 능히 그 사람과 꼭 닮았다. 지난해 이미 내게 초정시집 을 평선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제 또 다시 평선을 부탁 하였다. 내가 평선하고 전부 덮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놈의 평이 앞에서는 칭찬해 놓고 나중에는 비판했을까? 재선이 말 했다. 이것으로 우의를 살필 수 있겠습니다 재선이 평선을 살펴보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시가 먼젓번에는 어여쁘 다 해 놓고 나중에는 깎아 말했는지요? 내가 말했다. 이것으로 시의 도를 볼 수가 있다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어서 시는 서로 답습할 수가 없다고. 서로 답습한 것은 가짜 시라네. 자네도 진작에 이를 깨달았다고 했었지. 아! 재선이여. 재선이 19년을 사는 동안, 재선의 마음을 안자는 무릇 몇이나 될까. 무자년(1768) 가을, 완 산 이덕무 무관이 짓다. 박제가 생애와 행적 221

216 18세(1768, 영조44) * 박지원朴趾源과 교유(~1779) (5) 燕巖集 권1, 煙湘閣選本, 序, 楚亭集序 爲文章如之何 論者曰 必法古 世遂有儗摹倣像而不之耻者 是王莽之周官 足以制禮樂 陽貨之貌類 可爲萬世師耳 法古寧 可爲也 然則刱新可乎 世遂有恠誕淫僻而不知懼者 是三丈之木 賢於關石 而延年之聲 可登淸廟矣 刱新寧可爲也 夫然則如 之何其可也 吾將奈何無其已乎 噫 法古者 病泥跡 刱新者 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刱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古之 人有善讀書者 公明宣是已 古之人有善爲文者 淮陰侯是已 何者 公明宣學於曾子 三年不讀書 曾子問之 對曰 宣見夫子之 居庭 見夫子之應賓客 見夫子之居朝廷也 學而未能 宣安敢不學而處夫子之門乎 背水置陣 不見於法 諸將之不服固也 乃淮 陰侯則曰此在兵法 顧諸君不察 兵法不曰置之死地而後生乎 故不學以爲善學 魯男子之獨居也 增竈述於减竈 虞升卿之知變 也 由是觀之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博旨意各殊 故飛潛走躍 或未著名 山川草木 必有秘靈 朽壤 蒸芝 腐草化螢 禮有訟 樂有議 書不盡言 圖不盡意 仁者見之謂之仁 智者見之謂之智 故俟百世聖人而不惑者 前聖志也 舜 禹復起 不易吾言者 後賢述也 禹 稷 顔回其揆一也 隘與不恭 君子不由也 朴氏子齊雲年二十三 能文章 號曰楚亭 從余學 有年矣 其爲文慕先秦 兩漢之作 而不泥於跡 然陳言之務祛則或失于無稽 立論之過高則或近乎不經 此有明諸家於法古刱新 互相訾謷而俱不得其正 同之並墮于季世之瑣屑 無裨乎翼道而徒歸于病俗而傷化也 吾是之懼焉 與其刱新而巧也 無寧法古 而陋也 吾今讀其楚亭集 而並論公明宣 魯男子之篤學 以見夫淮陰 虞詡之出奇 無不學古之法而善變者也 夜與楚亭言如此 遂書其卷首而勉之 論文正經曉人處 如銅環上銀星 可以暗摹而知尺寸 文有兩扇 一爲斷崖 一爲長江 有明諸家相訾謷 莫可 歸一 斯可謂片言折獄 박지원이 지은 초정집 서문으로, 박제가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옛것을 본받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 에는 옛것을 흉내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왕망王莽의 주관周官 으로 족히 예악 을 제정할 수 있고, 양화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 해서 만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 를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창신刱新(새롭게 창조함) 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세 발[丈] 되는 장대가 국가 재정에 중요한 도량형기度量衡器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신성新聲을 종묘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창신 을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 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아! 소위 법고 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 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 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 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이가 있었으니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요,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이가 있었으니 회음후淮陰 侯가 바로 그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공명선이 증자曾子에게 배울 때 3년 동안이나 글을 읽지 않기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 더니, 제가 선생님께서 집에 계실 때나 손님을 응접하실 때나 조정에 계실 때를 보면서 그 처신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 문하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니, 여러 장수들이 불복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회음 후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나와 있는데,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뿐이다. 병법에 그러지 않았던가? 죽을 땅에 놓인 뒤라야 살아난다 고. 그러므로 무턱대고 배우지는 아니하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혼자 살던 노 魯나라의 남자요, 아궁이를 늘려 아궁이를 줄인 계략을 이어 받은 것은 변통할 줄 안 우승경虞升卿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보 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 22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17 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 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물靈物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 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예에 대해서도 시비가 분분하고 악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 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어진 이는 도를 보고 인仁 이라고 이르고 슬기로운 이는 도를 보고 지智 라 이른다. 그러므로 백세百世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앞선 성인의 뜻이요, 순 임금과 우 임금이 다시 태어 난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 한 것은 뒷 현인이 그 뜻을 계승한 말씀이다. 우 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가 그 법도는 한 가지요, 편협함[隘]과 공손치 못함[不恭]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 법이다.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이 나이 스물셋으로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는데, 나를 따라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 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때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없애려고 노력하다 보면 혹 근거 없는 표현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내세운 주장이 너무 고원하다 보면 혹 상도常道에 서 자칫 벗어나기도 한다. 이래서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 와 창신 에 대하여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모두 정도를 얻지 못한 채 다 같이 말세의 자질구레한 폐단에 떨어져, 도를 옹호하는 데는 보탬이 없이 한갓 풍속만 병들게 하고 교화를 해치 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 창신 을 한답시고 재주 부릴진댄 차라리 법고 를 하 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지금 초정집 을 읽고서 공명선과 노나라 남자의 독실한 배움을 아울러 논하고, 회음후와 우후虞詡의 기이한 발상이 다 옛것을 배워서 잘 변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밤에 초정楚亭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침내 그 책머리에 써서 권면하는 바이다. 문장을 논한 정도正道라 하겠다. 사람을 깨우치는 대목이 마치 구리 고리 위에 은빛 별 표시 가 있어 안 보고 더듬어도 치수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글에는 두 짝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끊어진 벼랑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긴 강물이 되었다.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하나로 의견이 합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고 한 말 은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고 이를 만하다. (6) 貞蕤閣文集 권1, 序, 白塔淸緣集序 環城而墖爲中焉 遠望嶙峋 若雪竹之逬筍者 圓覺寺之遺址也 往歲戊子己丑之間 余年十八九 聞朴美仲先生文章超詣有當 世之聲 遂往尋之于墖之北 先生聞余至 披衣出迎 握手如舊 遂盡出其所爲文而讀之 於是親淅米炊飯于茶罐 盛以甆 庋之玉 案 稱觴以壽余 余驚喜過望 以爲千古之晟事 爲文以酬之 其傾倒之狀 知己之感 盖如此 當是時也 炯菴之扉對其北 洛書之 廊峙其卥 數十武而爲徐氏書樓 又折而北東 爲二柳之居也 余乃一往忘返 留連旬月 詩文尺牘 動輒成帙 酒食徵逐 夜以繼 日 嘗娶婦之夕 取舅家騘馬 解鞍而騎之 獨從一奴出 時月色滿道 從梨峴宮歬鞭馬西馳 至鐵橋酒家飮 皷三下 遂盡歷諸朋 家 繞墖而出 當時好事者比之陽明先生訪鐵柱觀道人事 至今六七年之間 落落離居 貧病日侵 有時相逢 雖各幸其無恙 而風 流减於疇昔 容光非復曩時 則始知朋遊固有晟衰 而彼此各自一時也 中原人以友朋爲性命 故王漁洋先生有修耦長月夜科跣 見過之作 邵子湘集中追記當時隣居之勝事 以寓離合之思 每覽此卷 有異世同心之感 相與歎息者久之 友人李君十三合書燕 巖 烔菴諸公及余詩文尺牘若干卷 余爲題之曰白墖淸緣集而序之如此 以見吾輩之遊 盛於當日 而且以自擧平生之一二云云 백탑청연집 에 대한 서문 - 박지원과 박제가의 교유 양상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박제가가 박지원을 처음 만난 것은 1768년 18세 되던 해이다. 그는 자신보다 13년이나 손위인 박지원이 이처럼 환대 해주고, 그와 시문을 주고받은 데 대해 즐거워하며 지기를 얻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또한 연암을 만나기 전부터 탑골을 중심으로 당시의 문사文士들과 교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즉 탑골의 연암처소를 중심으로 이덕무와 이서구, 서상수, 유련, 유 득공이 모여 살고 있었으므로 박제가는 이덕무를 통해 이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맺게 된다. 박제가 생애와 행적 223

218 (7) 貞蕤閣 初集, 詩, 同湛軒 燕嵓 炯庵 登僧伽寺 炯庵先歸 約以歸路會普通亭 而歷北漢遊曹溪 再合觀軒 炯庵 宿 紀行之什 太古以來開北漢 穹林鉅石相雄長 燕嵓先生飛雲履 湛軒夫子靑藜杖 高秋正値長者遊 我不辭家聞卽往 蕩春㙜畔水逶迆 僧伽寺末斜陽朗 樵路參差隱前侶 隔林唯諾空山響 縱橫崩石夾如陛 麗王馳道依稀想 西南水陸俱分披 快哉始登庵前望 木 覓山尖出半眉 可憐城邑人煙漲 煌煌大星懸東方 木葉飛入潮音唱 郞當鈴護磨崖佛 憔悴楓依秀台像 逢僧問路且止宿 明日 褰衣踰疊嶂 是時朝陽白欲漬 霜深澗谷多悽愴 浮嵐不重皴勢微 古松相疊瀉痕漾 昌陵店屋隱樹中 此閒一曲猶堪賞 崎嶇暗 門入山城 圓覺岧嶤隣扶旺 數里身入樹中行 雨點踈踈葉聲仰 到寺雨大不得前 數牛之鳴宿已兩 露積峰頂若倒甕 山映樓圍 可載象 信是奇偉心所服 水石楓林恣跌宕 東門戌削瞰東郊 地氛初霽天晴曠 泓渟蕭瑟不可言 遠雁流哀菊初放 羣山聚似襞 積皺 大道橫如匹帛颺 曹溪瀑名擅百年 距玆無多遂轉向 不從前入還倒尋 峻岅之下難於上 危石蹲蹲被全壑 聞道霖時水頗 壯 覽極神疲旋出洞 黑崖過盡纔白壤 屨頭栗殼遍步武 禾間草蟲跳尋丈 普通亭子今何如 主人有約曾三訪 粉墻周遭水聲深 古槐離立庭陰敞 於焉邂逅若合契 握手非意還惝怳 炯庵山人聯騎出 鬅頭小奚携新釀 落落離家三四日 忽然圓聚皆無恙 洞 簫南榮怨秋音 松明北院催夜餉 沈吟却憶前度年 絮話各叙來時狀 惟將眞率破拘束 大笑呵呵仍抵掌 誰令此夜久不朽 願將 文字傳吾黨 莫待悠悠事過後 繁華寂寞俱怊悵 我作此詩已隔晨 不如眞境終難忘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등 북학파와의 교유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시이다. 총 76구의 장편 시로서 이들과 함께 북 한산 승가사에 올랐던 일을 시로 표현하였다. 태고적 이래로 북한산이 열렸으니 울창한 숲, 큰 바위 모두가 웅장하다. 연암 선생 그름 신발 날듯이 오르시고 담헌 선생 청려장을 짚고서 따르시네. 좋은 가을 때마침 어르신들 너니내니 집에 말도 하지 않고 듣자마다 떠났지. 탕춘대 옆으로 는 물결이 구불구불 승가사 꼭대기엔 저녁별이 명랑하다. 들쭉날쭉 숲길은 앞선 벗을 숨기고 숲 저편 대답 소리 빈산에 울리 누나. 무너진 둘 이리저리 계단처럼 끼고 가니 여왕이 달리던 길 어렴풋이 생각난다. 서남쪽엔 물과 뭍이 함께 나뉘어 열려 있어 통쾌해라 암자 올라 앞쪽을 바라보네. 목멱산 꼭대기엔 반달이 솟아오르고 어여뻐라 성읍엔 밥 짓는 연기 자욱하다. 반 짝반짝 큰 별이 동방에 걸렸는데 나뭇잎이 날아들고 물결 소리 노래하네. 쟁글대는 풍경 소리 마애불을 지키고 파리한 단풍 나무 수태상에 기댔구나. 스님 만나 길 묻고는 머물러 하루 묵고 이튿날 옷을 걷고 층층 뫼를 넘었지, 이때에 아침 해는 하 얗게 젖어들어 서리 깊은 골짜기엔 찬 기운 가득하다. 뜬 이내 무겁잖아 산 주름 희미한데 고송도 포개어져 파도 흔적 비슷 하다. 창릉의 주막집은 나무 사이 숨어 있고 이 사이의 한 굽이는 더욱 불만하여라. 가파른 바위 문 산성으로 들어가니 원각 암 높이 솟아 부오아사에 이웃했네. (중략) 형암산인 나란히 말 타고 길 나서니 더벅머리 어린 종이 새 술을 가져온다. 슬쓸 히 집 떠난 지 사나흘이 지났건만 문득 둘러 모이니 모두들 건강하다. (중략) 내가 지은 이 시도 새날이 밝고 나면 진경만은 못해도 잊기는 어려우리. (8) 貞蕤閣 初集, 詩, 寄燕巖 落魄時時號酒狂 人間何處耦耕堂 少年却抱乘桴志 豊歲還求辟糓方 寧以經綸爲市井 莫將科擧認文章 白頭屢被兒童笑 閥閱如今媿孟光 박지원을 그리며 지은 글이다. 낙백하여 때때로 주광으로 불리니 인간 세상 어느 곳에 우경당이 있는가. 젊서는 도리어 뗏목 탈 뜻 품었더니 중년에 도리어 벽곡방을 구하네. 차라리 경륜 품고 시정에 지낼망정 과거 보아 문장으로 인정받진 마옵소서. 흰머리에 남루한 옷 아 이들도 비웃지만 벌열로 이 같음이 맹광에게 부끄럽다. 22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19 (9) 貞蕤閣初集, 詩, 登白雲㙜絶頂[三首] 三峰初日射微頳 千仞都將一劈成 鳥獸俱含鍾聲響 雲霞常現石金精 人方履頂吾看趾 仰似懸疣俯眩睛 高處茫茫惟遠勢 縈靑繚白指端橫 地水俱纖競是涯 圓蒼所覆界如絲 浮生不翅微於粟 坐念山枯石爛時 有石超畿甸 遐哉眺幅圓 荒思民奠日 皴是水疏痕 遠樹形因淡 深崖底欲昬 飢僧時獨望 烟處飯應存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지은 시이다. 백운대 꼭대기에 올라 위로는 바로 하늘과 맞닿은 듯한 봉우리의 험준함을 묘사하고 아래로는 시인이 올라온 아득히 먼 산길을 그리고 있다. 삼각산에 막 뜬 해 불그스레함을 쏘았고, 천길 낭떠러지는 모두 한 칼로 베어 만든 듯하네. 짐승들 도 모두 종소리 풍경소기를 머금고, 구름 놀은 언제나 석금의 순수한 보여준다. 남들은 이제 정상에 오르고, 난 그 발꿈치를 보고, 올려다보면 혹 달린 듯, 굽어보면 아찔하네. 높다란 곳 망망하고 다만 아득한 형세 푸른 빛 흰빛은 가리키는 손 끝에 놓였네. 22세(1771, 영조47) * 남한산성을 돌아봄 (10) 貞蕤閣初集, 詩, 南漢同石坡 南漢題詩二士同 秋懷更與酒襟通 楓杉老大淸陰後 煙雨消沈百濟中 一線天含池水白 半規日射寺門紅 何人解得旁行字 石語秋深綠瓦宮 聖佛圓灮笠影同 哦然一笑性靈通 高天杖策諸天外 落日行吟積葉中 女堞寒山連古翠 僧營列幟閃殷紅 可 憐褞祚祠前栢 猶自靑靑向舊宮 남한산성에서 석파 김용행金龍行와 함께 남한산성을 돌아본 소감을 정리한 글이다. (11) 貞蕤閣初集, 詩, 東林寺歸路 從僧覔酒信軍持 酣醉無聊必有詩 小竇流泉鳴甚慧 橫槎孤鳥坐如癡 白雲舒卷長隨我 紅葉徘徊欲戀誰 正是夕陽無伴侶 寒山萬皺立移時 남한산성에 소재한 동림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은 글이다. (12) 貞蕤閣初集, 詩, 法華庵 浮圖縹緲梵王宮 簷馬丁當積翠中 貝葉千散花雨 茶聲一沸悟松風 敀禽入遠無多點 落日盈空摠是紅 坐久不知雲繞䣛 半 根苔石數株楓 남한산성 벌봉 암문 밖에 있었던 법화암을 방문하고 지은 글이다. 불탑은 아득해라 부처의 집일지니 처마 끝 풍경 소리 푸른 숲서 울리누나. 천 권의 패엽경은 꽃비 되어 흩어지고, 찻 박제가 생애와 행적 225

220 물이 한 번 끓자 솔바람 소리 나네. 새들 멀리 돌아가서 몇 점 아니 남아있고, 지는 해만 허공 가득 세상 모두 붉어라. 앉은 지 오래거니 구름이 무릎 덮고, 반쯤 묻힌 이끼 바위 몇 그루 단풍나무. 27세(1776, 정조1) * 이덕무ㆍ유득공ㆍ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사가시집四家詩集인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으로 명성 을 청나라에까지 알림 (13) 靑莊舘全書 권19, 雅亭遺稿[十一], 書[五], 李雨邨 調元 去年冬 友人柳彈素 齎韓客巾衍集 入燕京也 不佞輩日屈指待其歸來 不知遇何狀名士 以評以序 心焉懸懸 無以爲喩 彈 素之歸 自詑遇天下名士 仍出巾衍集 使不佞輩讀之 果然朱墨煌煌 大加嘉奬 序文評語 爾雅鄭重 眞海內之奇緣 而終古之 勝事也 顧此下土小生 何以得此於大君子 相顧錯愕 如出天外 心不自定 不佞輩四人 好古讀書 時有著述而不入時眼 性嗜 鞱晦 名不出里閭 晨夕過從 聊以相晤而已 柳泠菴頎然玉貌 溫雅成性 澹然無累 劬心墳素 落筆可傳 長於詩學 朴楚亭短小 勁稜 大有忼慨 才情蓬勃 草隷驚座 志慕中原 奇氣橫絶 李素簡澹自牧 持心孤絶 貫穿經史 辨覈同異 明於六書 文辭敏妙 此皆不佞之畏友 而愛之敬之 自幸其生並一世者也 이덕무가 청나라 학자 이조원李調元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건연집 에 대한 중국의 반응과 박제가를 포함한 사가四 家에 대한 평가가 소개된 부분이다. 지난해 겨울 벗 유탄소柳彈素가 우리나라 사람의 건연집巾衍集 을 싸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저희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어떤 명사들을 만나서 평어評語나 서문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여 마음의 설레임을 무어 라 표현할 수 없던 차에 탄소가 돌아와서 천하의 명사를 만났다고 자랑하고는, 곧 건연집 을 꺼내서 저희들로 하여금 읽게 했는데, 과연 붉은 글씨가 반짝반짝 빛나 크게 흠탄하였고, 서문과 평어가 올바르고 정중하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기이한 인 연이며 만고의 훌륭한 일입니다. 비루한 땅에서 태어난 이 소생小生이 어떻게 해서 대군자에게 이런 것을 얻었을까 하고, 서 로 바라보며 놀라 마치 하늘 밖으로 나간 듯한 기분이어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저희들 네 사람은 옛것을 사모하 고 글을 읽으며 때로는 저술을 하지만 당시 사람의 눈에 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천성이 은둔을 즐기므로 마을 밖까지도 이름 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조석으로 서로 찾아다니며 공부할 뿐입니다. 유영암柳泠菴은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욕심이 없이 담백하며 분색墳索을 연구하는데 노력하 며, 붓을 대기만 하면 모두가 전할 만한 절품이요, 특히 시에 능합니다. 박초정朴楚亭은 키가 단소하나 매우 강직하고 강개한 마음을 가졌으며, 재주와 사상이 풍부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가 출중하며, 중국을 충심으로 사모하고, 비범한 기상이 특출 합니다. 이소완李素玩은 간략하고 담박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정직하고 결백하게 마음을 가지며,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정론 正論과 이론異論을 밝게 분별하며, 육서六書에 밝고 문사文辭가 절묘합니다. 이들은 다 저의 외우畏友이므로 항시 사랑하고 공 경할 뿐만 아니라, 한 세상에 살게 됨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29세(1778, 226 정조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배려로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감 * 청나라 학자 이조원李調元ㆍ반정균潘庭筠 등과 교유 * 귀국한 뒤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篇 탈고, 2~3년뒤 외편外篇 완성

221 (14) 貞蕤閣集, 序, 貞蕤閣集序[李調元] 日月星辰 天文也而餙乎旂裳 昆虫鳥獸 地産也而上乎彜鼎 徐方之土于候社 夏翟之羽于旌旄 登龍于章 升玉于藻 百工婦 人 雕礱染練 以供宗廟祭祀之文何者 甘受和白受采也 詩文之道亦然 今之嗤六朝者 率曰綺曰靡 夫所惡乎綺靡者 爲其淫色 鼃聲 柔而鮮振也 若啓朝華披夕秀樹丰骨于選言之路 亦何害乎其綺靡乎 司馬之文如天 以其神全也 班固之文如地 以其氣 厚也 朴楚亭東國之麗于文者也 其人短小勁稜 才情蓬勃 上探騷選 旁采百家 故其爲文詞 有如粲如星灮如貝氣如蛟宮之水 焉 有如黯如屯雲如久陰如枯腐如熬燥之色焉 有如春陽如華川者焉 逶逶迤迤 有如海運震怒動蕩 怪異百出者焉 豈非天下之 奇文哉 然而自振者無力終 知者甚稀 萬里之外 以求序于余 豈所謂獲助于古而不獲助于今乎 夫古之爲文詞者 欲使天下 聞 之而必行 觀之而必蹈 散之茫洋以爲道 演之浸淫以及物 不爲之發微而闡幽 後之學者從何行之而蹈之哉 此余之所以不能已 於文也 故爲之弁其首 羅江李調元雨邨書 이조원이 쓴 정유각집 서문으로, 박제가와의 교유관계를 엿볼 수 있다. (상략) 초정 박제가는 동국에서 문장으로 빼어난 자다. 그 사람은 키가 작고 왜소하지만 굳세고 날카로우며, 재치있는 생각이 풍부하다. 위로 이소 와 문선 을 탐구하고, 곁으로 백가의 정수를 모았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에는 찬란하기가 별 빛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고, 용궁의 물과 같은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둡기가 마치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고, 날이 오래도록 흐린 것 같으며, 말라서 썩은 것 같고, 불에 타거나 그슬린 빛깔 같은 것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봄볕 같고, 꽃이 피어 있는 시내가 끝없이 구불구불 흐르는 모양 같은 것도 있다. 산더미 같은 성난 파도가 일어나 온갖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듯한 것도 있다. 그러니 어찌 천하의 기이한 문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홀로 떨쳐 일어난 자는 힘이 없으니, 마침 내 알아주는 자가 몹시 드물어 만 리 밖에서 나에게 서문을 구했다. 어찌 이른바 옛날에서는 도움을 얻고, 정작 지금에서는 도움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문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들으면 행하고, 보면 실천하 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득하게 흩어 놓고 도라 하고, 음탕한 일을 부연하여 사물에 미치게 하며, 은미한 것을 펴서 감춰 진 의미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뒷날 배우는 자들이 어디를 좇아 행하고 실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문장을 그만둘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그 책머리에 얹는다. 나강 사람 우촌 이조원이 쓴다. (15) 貞蕤閣文集 권1, 序, 北學議自序 余嘗慕崔孤雲 趙重峯之爲人 慨然有異世執鞭之願 孤雲爲唐進士 東還本國 思有以革新羅之俗而進乎中國 遭時不競 隱 居伽倻山 不知所終 重峯以質正官入燕 其東還封事 勤勤懇懇 因彼而悟己 見善而思齊 無非用夏變夷之苦心 鴨水以東千有 餘年之間 有以區區一隅 欲一變而至中國者 惟此兩人而已 今年夏 有陳奏之使 余與靑莊李君從焉 得以縱觀乎燕薊之野 周 旋于吳蜀之士 留連數月 益聞其所不聞 歎其古俗之猶存 而前人之不余欺也 輒隨其俗之可以行於本國 便於日用者 筆之於 書 並附其爲之之利與不爲之弊而爲說也 取孟子陳良之語 命之曰北學議 其言細而易忽 繁而難行也 雖然先王之敎民也 非 必家傳而戶諭之也 作一臼而天下之粒無殼者矣 作一屨而天下之足無跣者矣 作一舟車而天下之物無險阻不通者矣 其㳒又何 其簡且易也 夫利用厚生 一有不脩 則上侵於正德 故子曰旣庶矣而敎之 管仲曰衣食足而知禮節 今民生日困 財用日窮 士大 夫其將袖手而不之救歟 抑因循故常 宴安而莫之知歟 朱子之論學曰如此是病 不如此是藥 苟明乎其病 則藥隨手而至 故於 今日受弊之原 尤拳拳焉 雖其言之不必行於今 而要其心之不誣於後 是亦孤雲重峯之志也 今上二年歲次戊戌秋九月小晦雨 中 葦杭道人朴齊家 次修書于通津田舍 북학의 에 대한 자신의 지은 서문으로서, 이용후생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일찍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인간됨을 그리워하여 세대는 다르지만 그분들이 타는 말고삐를 잡고 싶은 박제가 생애와 행적 227

222 소원을 항상 품고 있었다. 고운은 당나라에서 진사가 된 뒤 동쪽 고국으로 돌아와 신라의 풍속을 개혁하여 중국의 수준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생각을 지녔다. 그러나 만난 때가 좋지 못해 가야산에 숨어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중 봉은 질정관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그의 동환봉사 는 정성스럽고 간절하기가 중국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고 중국의 좋은 점 을 보고 그 수준과 나란히 하려는 것이어서 중화의 문물로 우리의 습속을 변화시키려는 고심 아닌 것이 없었다. 압록강 동쪽 으로 1천여 년간 지내오면서 잗단 한 모퉁이 나라를 일변시켜 중국에 이르게 하고자 했던 사람은 오직 이 두 사람뿐이다. 금 년 여름에 진주사행이 있어 나는 청장관 이덕무와 함께 따라갔다. 연경과 계주의 들판을 마음껏 구경하고 옛 오 땅과 촉 땅 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다. 몇 달을 머물면서 들은 적 없는 것들을 들었으며, 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옛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음에 탄복하였다. 저들의 풍속 중에서 우리나라에 시행할 수 있는 일용에 편리한 것들은 그때마다 글로 적어 아울러 그것을 시행할 때의 이로움과 시행하지 않을 때의 폐단을 덧붙여 설을 만들었다. 맹자 에서 진량이 했던 말을 취해 책 제목을 북학의 라 하였 다. 책의 말들 가운데 자잘한 것은 소홀히 여기기 쉽고 번잡한 것은 시행하기 어렵다. 하지만 옛 선왕께서 백성들을 가르칠 때 집집마다 전해 주고 깨우친 것은 아니다. 절구를 한번 만들자 천하에는 껍질 있는 고식을 먹는 사람이 없어졌고, 신발을 한번 만드니 천하에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없어졌으며, 배와 수레를 한번 만들자 천하의 물건들이 아무리 험난해도 유통되 지 않는 곳이 없어졌다. 그 법도가 얼마나 쉽고 또 간단한가!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닦이지 못하면 위로 정적을 해친다. 따라서 공자께서 공자께서는 백성의 수가 많아진 다음 에는 가르쳐야 한다 고 말씀하셨고, 관중은 의식이 풍족해진 다음에 예절을 알게 된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백성의 삶은 날로 곤궁해지고, 쓸 재물은 나날이 고갈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이 팔짱만 끼고서 구제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아 니면 과거의 관습에 안주하여 편안히 누리면서 모른 체해야 하겠는가? 주자는 배움을 논하여 말하였다. 이같이 하여 병이 된다면 이같이 하지 않으면 약이 될 것이다. 진실로 그 병을 잘 안 다면 약은 저절로 오게 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폐해의 근원에 대해 더욱 세심하게 논의하였다. 비록 그 말이 지금 꼭 시 행되지는 않더라도 그 마음만은 그 마음만은 뒷날에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고운과 중봉 두 선생의 뜻이다. 금상 2년 무술년 가을 9월 그믐 전날 비 내릴 때, 위항도인 박제가는 통진의 농가에서 쓴다. (16) 燕巖集 권70, 別集, 鍾北小選, 北學議序 學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可也 僮僕多識我一字姑學 汝恥己之不若人而不問勝己 則是終身自錮於固陋無術 之地也 舜自耕稼陶漁 以至爲帝 無非取諸人 孔子曰 吾少也賤 多能鄙事 亦耕稼陶漁之類是也 雖以舜孔子之聖且藝 卽物 而刱巧 臨事而製器 日猶不足 而智有所窮 故舜與孔子之爲聖 不過好問於人 而善學之者也 吾東之士 得偏氣於一隅之土 足不蹈凾夏之地 目未見中州之人 生老病死 不離疆域 則鶴長烏黑 各守其天 蛙井蚡田 獨信其地 謂禮寧野 認陋爲儉 所謂 四民 僅存名目 而至於利用厚生之具 日趨困窮 此無他 不知學問之過也 如將學問 舍中國而何 然其言曰 今之主中國者 夷 狄也 恥學焉 幷與中國之故常而鄙夷之 彼誠薙髮左袵 然其所據之地 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凾夏乎 其生乎此土之中者 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遺黎乎 苟使法良而制美 則固將進夷狄而師之 况其規模之廣大 心法之精微 制作之宏遠 文章之煥 爀 猶存三代以來漢唐宋明固有之故常哉 以我較彼固無寸長 而獨以一撮之結 自賢於天下曰 今之中國 非古之中國也 其山 川則罪之以腥羶 其人民則辱之以犬羊 其言語則誣之以侏離 幷與其中國固有之良法美制而攘斥之 則亦將何所倣而行之耶 余自燕還 在先爲示其北學議內外二編 盖在先先余入燕者也 自農蚕畜牧城郭宮室舟車 以至瓦簟筆尺之制 莫不目數而心較 目有所未至 則必問焉 心有所未諦 則必學焉 試一開卷 與余日錄 無所齟齬 如出一手 此固所以樂而示余 而余之所欣然讀 之三日而不厭者也 噫 此豈徒吾二人者得之於目擊而後然哉 固嘗硏究於雨屋雪簷之下 抵掌於酒爛燈灺之際 而乃一驗之於 目爾 要之不可以語人 人固不信矣 不信則固將怒我 怒之性 由偏氣 不信之端 在罪山川 22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23 박지원이 쓴 북학의 서문으로 북학파의 지향과 사상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다.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 僮 僕 이라 하더 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순 舜 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 帝 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 孔 子 가 말하기를, 나는 젊 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 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 疆 域 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 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 禮 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 四 民 ( 士 ㆍ 農 ㆍ 工 ㆍ 商 )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 利 用 厚 生 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 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 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 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 이 진실로 변발 辮 髮 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 三 代 이래 한 漢, 당 唐, 송 宋, 명 明 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유민 遺 民 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 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 心 法 의 정미 精 微 함과 제작 制 作 의 굉원 宏 遠 함과 문장 文 章 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고유한 옛 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 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 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 在 先 ( 朴 齊 家 )이 그가 지은 북학의 北 學 議 내편 內 編 과 외편 外 編 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 農 蠶, 목축 牧 畜, 성곽 城 郭, 궁실 宮 室, 주거 舟 車 로부터 기와, 대자리, 붓, 자[ 尺 ]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 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 日 錄 ( 熱 河 日 記 )과 더불 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 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박제가 생애와 행적 229

224 (17) 貞蕤閣初集, 詩, 登百祥樓 斜陽不到處 一望朔雲知 樓影悲丁卯 江聲想乙支 艸回新堰色 樹老古城枝 已道西州遠 西州更路岐 평양의 백상루에서 지은 시이다. 화자는 누대에 올라 그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평양 부근이 다. 백상루에 올라 눈앞으로 흐르는 청천강을 바라보며 을지문덕과, 정묘호란 때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사실을 떠올린다. 저 물어가는 햇빛 닿지 않는 곳 한번 바라보니 북쪽 구름인줄 알겠네. 누대 그림자는 정묘호란 때의 것 아니어도, 강물소리 들 으며 을지문덕 생각하네. 풀은 새 방둑에 제 빛깔로 돌아오고 나무는 옛 성에 제 가지로 늙었구나. 이미 서주가 멀다고 말했 으나 서주는 다시금 갈림길이네. (18) 貞蕤閣 3集, 詩, 連山關 急峽無非雪 危橋一半仌 虎皮前代驛 羊角異鄕燈 地屬朱蒙舊 文猶渤海徵 京東思考古 䢜詑著書增 요동대로의 요충지이며 관문인 연산관에서 읊은 시다. 지금 박제가는 긴 여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겨울을 맞게 된 그는 우리의 역사 를 되새겨 본다. 험한 산골짜기마다 눈 쌓이지 않은 곳 없고, 위태로운 다리는 반쯤 얼어붙었네. 호피는 옛날의 역이름이요. 양각은 타향의 등불일세. 땅은 주몽의 옛터에 속해 있고, 글은 발해의 증거로 남아 있네. 경동에서 본 역사책들 생각해 보니, 돌아오며 저서가 많아진 것 자랑할 만해. (19) 貞蕤閣 3集, 詩, 夷齊廟 瀟灑殷人廟 微茫遠樹層 路應隨馬得 名共展禽稱 餓死又何怨 歸來聞作興 只憐偕隱日 同氣是良朋 백이 숙제의 사당을 둘러보고 쓴 시다. 이들의 의절은 두고두고 기려져야 할 일임을 전한다. 맑고 깨끗한 은나라 사람 사당엔 어슴푸레 나무만 멀리 둘려 있네. 갈 길은 마땅히 말 따라서 터득했고 이름은 유하 혜와 나란히 칭해질만해 굶어 죽은 들 또 무엇이 한스러우리오. 돌아와서 낸 소문이 사람들을 흥기시키는데 다만 슬픔 건 함 께 해를 피해 숨은 게 형제의 몸으로서 참 짝이 된 것. (20) 貞蕤閣 3集, 詩, 右北平 孤竹祠邊立馬遅 永平城外水漣漪 風沙不辨盧龍塞 艸樹猶傳射虎碑 廣袖長衫前度客 澹雲微雨舊題詩 如今旅鬂凋雙綠 不似當年脫穎時 북평北平에 위치한 고죽군의 사당에서 쓴 시다. 고죽의 사당가에 말 세우고 지체하니 영평성 저 밖엔 잔물결 일어나네. 모래바람 때문에 노룡변방 잘 보이지 않고 잡 초와 나무만 사호비射虎碑에 남아 있네. 넓은 소매 긴 적삼으로 강 건너던 나그네 엷은 구름 가랑비 란 옛 시제만 생각나 이 23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25 젠 검던 귀밑머리 쇠었으니 그 당시 재주가 뛰어났던 때완 같지 않네. (21) 貞蕤閣 3集, 詩, 瀋陽襍絶 耶里河邊烏㹀呼 瀋陽城外白浮圖 夜來風雨黃泥滑 愁殺行人十里湖 十里河 土人訛稱十里湖 此站最多泥潦 凄風闌雨最 高峰 靑石悲歌說孝宗 太息紹興都冷了 卽今冠盖日相逢 四庫新書搨聚珍 閣成文溯應文津 祝公恰共翁公住 不識行人是故 人 翁侍郞方綱爲校正文溯閣四庫書 今夏來瀋陽 芷塘祝公德麟同來 計其日子 正度瀋時也 明駝卧處喇嘛僧 玉壐卥來異敎 興 寺裡雲松平似剪 靑山一髮見昭陵 吾家瓠老早蜚英 京輔曾馳趙尹名 三入瀋陽勞更茂 浮言枉著鄭䨓卿 澤堂贈大瓠詩 有 京輔子能追趙尹 侍臣吾已謝終徐之句 公時畿伯也 西門車馬漲黃塵 市井繁華隔世新 何處寒烟埋碧血 此間無地弔三臣 曾 明羅李難明案 復證三臣致命辰 我愛新書如好色 時人還笑入燕頻 羅德憲李廓見全韻詩 余於戊戌見之 洪翼漢三學士死節事 見開國方略中 심양의 풍물을 읊은 시이다. 서문에 가득채운 마차와 전혀 새로운 세계와도 같은 시정의 번화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박제가는 병자호란의 굴 욕적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세 학사를 떠올린다. 30세(1779, 정조3) * 이덕무ㆍ유득공ㆍ서이수와 함께 규장각奎章閣 초대 검서관檢書官에 임명 * 1786년까지 7년동안 외각外閣 검서와 내각內閣 검서로 재직 (22) 貞蕤閣 2集, 詩, 奎章閣八景應令 扃鐍森嚴護百神 羽陵秋色杳難津 流丹百尺藏經閣 飛白千年望氣人 希世精英留翰墨 彌天禮樂浹絲綸 灮華日月渾如昨 翼子謀長聖慕新 [奉謨雲漢] 淡淡卥風太液秋 踈星碧樹隱芳洲 池灮的歷荷千柄 夜色微茫月一鉤 天語每從香裡近 侍臣多向鏡中游 淸閒尙自勤三接 書 畫船開講席幽 [書香荷月] 初開延閣榮名儒 拭目人文闢海隅 艸埜誰呈三禮賦 近臣方進百官圖 槐花落後頒功令 棫樸吟時正士趨 太史頻占雲五色 罘 罳紅日盪天衢 [奎章試士] 雲幕高臨畫鵠平 手柔弓燥喜天晴 勝多數見分曹飮 地近常爲襄尺行 草際靑山連皷響 風中飛鳥㥘絃聲 桓桓决拾皆君子 道 是無爭却有爭 [拂雲觀德] 極目千門疊素濤 宮筵一樹獨淸高 良宵政憶修唐史 逸韻何須怨楚騷 靑被卥垣知夢冷 絳紗東閣畏風饕 幾番仙醞隨花信 恩 浹詞臣呵凍毫 [皆有梅雪] 虞絃物態入淸彈 玉宇蕭辰騁遠看 禁苑寒花新露白 畫家秋樹夕陽丹 全身冷豔欺春信 本色淸高倚歲闌 最愛迢迢華省夜 明 震細月引盤桓 [弄熏楓菊] 九九寒消瑞日紅 逍遙步輦出離宮 半灣碧沼桃花水 一路朱欄柳絮風 呦鹿歌成香國外 釣魚詩在酒帆中 宸心豈是空遊玩 已 見仁言漢詔同 [喜雨韶灮] 秋來物色故依然 一笠紅亭看水田 農丈星高靑瑣側 豳風圖近紫宸邊 民憂不以豊年緩 穡事偏爲聖主憐 久仰先王崇大本 五 推儀注費窮沿 [觀豊秋事] 박제가 생애와 행적 231

226 왕명을 받아 규장강의 8경을 읊은 시이다. 봉모당의 운한문. 삼엄하게 문 단속해 온갖 신을 지키는 곳 우릉의 가을빛은 찾기가 어려워라. 단청 꾸민 백 척의 장 격강이 솟아 있고 천 년의 비백체는 사람을 압도한다. 세상 드문 영재들이 한묵을 남기었고 하늘 가득 예악이 사륜을 적시누 나. 빛나는 해와 달은 흡사 어제 일만 같아 자손들 길이 이어 성왕 사모 새로워라. (중략) 규장각에서 선비를 시험함. 규장각 처음 열어 명유를 선발하니 해동에 인문 열림 눈 씻고 보는구나. 초야서야 그 누가 삼례부를 올리리오. 근신들은 바야흐로 백관도를 진상하네. 홰나무 꽃 떨어진 뒤 반령이 반포되고 어진 인재 읊을 적에. 바른 선비 뒤따른다. 태사는 빈번하게 오색 구름 점을 치고 처마 끝 붉은 해는 하늘 길을 씻는도다. 불운정에서의 활쏘기. 구름 장막 높이 솟아 과녁과 나란한데 유연한 팔 마른 활로 날 갬을 기뻐하네. 많이 이겨 무리 나눠 술 마심 자주 보고 가까워도 언제나 한 자 뒤서 활을 쏘네. 풀밭 옆 푸른 산엔 북소리가 연이었고 바람에 날던 새들 시위 소리에 움츠린다. 야무지게 결습한 이 모두 다 군자러니 다툼 없는 군 자가 다툰다고 말들 하네. (하략) 37세(1786, 정조10) * 병오소회丙午所懷 올림 (23) 貞蕤閣文集 권3, 傳, 丙午正月二十二日朝參時 典設署別提朴齊家所懷 臣於本月十七日 伏奉備局知委 上自卿宰 下至侍衛軍兵百執事之臣 各盡所蘊 無敢不言者 臣窃惟國家刱業垂統四百年 治化隆煕 媲美三古 聖上臨御十載 百度修明 凡有可議之事 聖上必先行之 實無言之可進 非有忌諱畏避而使之不言也 雖然 聖不自聖 遇灾益勤 蒭蕘是詢 臣請不避狂之罪 而畧陳其一二 當今國之大弊 曰貧何以捄貧 曰通中國而已矣 今朝廷馳一介 之使 咨於中國之禮部曰 貿遷有無 天下之通義也 日本琉球安南西洋之屬 皆得交市於閩浙交廣之間 願得以水路通商賈 比 諸外國焉 彼必朝請而夕許之矣 於是招誘荒唐船以爲鄕導 荒唐船者皆廣寧覺化島之民 犯法潛出 常以四月來採防風 八月歸 也 旣不能禁 則因以爲市 厚賂而結之不難也 又募沿海諸島習水之民 以官領之 齎粟文以往 使登萊之船泊於長淵 金復海葢 之物交於宣川 江浙泉漳之貨集于恩津礪山之間 則嶺之綿湖之苧 西北之絲麻 可化爲綾羅織罽 而竹箭白硾狼尾昆布鰒魚之 産 可以爲金銀犀兕兵甲藥餌之用矣 舟楫車輿宮室器什之利可學矣 天下之圖書可致 而拘儒俗士偏塞固滯纖瑣之見 可不攻 而自破矣 議者必曰我國自爲聲敎 雖黽勉奉正朔 非其志也 多文字制度之觸犯 固不可去而洩漏 來而窺覘也 臣竊以爲過矣 昔勾踐之棲於會稽也 其日夜與國人謀者 無非吳也 可謂急矣 然而計之不洩者 以謀國者得人故耳 且臣聞之 成大事不避小 嫌 狐疑顧瞻 何事可辦 今欲斲萬金之璞 以求工於鄰國 則曰恐其謀己也 其可乎 臣聞中國欽天監 造歷西人等 皆明於幾何 精通利用厚生之方 國家誠能授之以觀象一監之費 聘其人而處之 使國中子弟 學其天文躔次 鍾律儀器之度數 農桑醫藥 旱 澇燥濕之宜 與夫造瓴甓 築宮室 城郭 橋梁 掘坑銅 取卝玉 燔燒琉璃 設守禦火礟 灌漑水法 行車裝船 伐木運石 轉重致遠 之工 不數年 蔚然爲經世適用之材矣 議者必曰 漢明迎佛而爲千古之累 夫歐羅巴者 距中國九萬里 崇奉天主異敎 爲類殊別 且通海外諸蠻 其心不可測也 臣料其徒數十人 居一廛 必不能爲亂 且其人 皆絶婚䆠 屏嗜欲 以遠遊布敎爲心 雖其爲敎 篤 信堂獄 與佛無間 然厚生之具 則又佛之所無也 取其十而禁其一 計之得者也 但恐待之失宜 招之不來耳 夫游食者 國之大 蠧也 游食之日滋 士族之日繁也 此其爲徒 殆遍國中 非一條科宦所盡覊縻也 必有所以處之之術 然後浮言不作 國㳒可行 臣請凡水陸交通販貿之事 悉許士族入籍 或資裝以假之 設廛以居之 顯擢以勸之 使之日趨於利 以漸殺其游食之勢 開其樂 業之心 而消其豪強之權 此又轉移之一助也 臣聞明者不自欺 智者不自弊 夫人才渺然而不思所以培之 財用日竭而不思所以 通之 曰世降而民貧 此國之自欺也 位愈高而視事愈簡 居官委下屬 出疆委衆胥 左擁而右扶曰軆貌不可屑越也 此士大夫之 自欺也 桎梏於疑義之林 消磨於騈儷之途 束天下之書而不足觀也 此功令之自欺也 父不呼父者有之 兄不呼兄者有之 同堂 之親而相奴者有之 黃髮鮐背而席於童丱之下者有之矣 祖行父行而不拜 則其孫與侄誚長者有之矣 猶沾沾然驕天下而夷之 23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27 自以爲禮義也中華也 此習俗之自欺也 夫士大夫 國之所造也 然而國法不行於士大夫 非自弊乎 科擧者 所以取人也 取人由 科而壞則非自弊乎 書院而俎豆者 所以崇儒也 而逋丁禁釀依焉 非自弊乎 國家誠能推四欺三弊之說 而觸類而伸之 剔瘼而 牖迷 則治國之事過半矣 方今國用吏胥之見而士爲倡優之行 男襲婦人之俗而未之有改也 夫俗人多於賢人則俗勝 吏胥多於 官長則吏勝 故曰國用吏胥之見也 立身之初 墨面而跳舞者 非倡優乎 蒙古之服 儼治中饋而莫之覺悟者 非婦人之俗乎 此三 者未必爲時務之急者也 雖然以類相附 以見風氣之不振 誠願收奇偉斥之士 以滌吏胥之氣 革倡優之風 易之以揖讓 棄婦人 之俗 被之以禮服 亦足爲振作之一事也 夫善治國家者 淸其本不治其末 故事省而功博 今之議者 莫不曰奢日甚 以臣視之 非知本者也 夫他國固以奢而亡 吾邦必以儉而衰 何則 不服文繡而國無織錦之機則女紅廢矣 不尙聲樂而五音六律不叶矣 乘 虧漏之船 騎不浴之馬 食窳器之食 處塵土之室 而工匠畜牧陶冶之事絶矣 以至農荒而失其法 商薄而失其業 四民俱困 不能 相濟 彼貧人者雖日撻而求其奢也 將不可得矣 今殿庭行禮之地 布其棲苴 東西闕守門之衛士 衣木綿帶藁索而立 臣實耻之 不此之計 而乃反毁閭巷之高門 捉市井之鞋衫 憂馬卒之耳衣 不亦末乎 奉寫御製之寫字官等敎六書 一月可以少錯書矣 不 此之爲 而又別正其字畫 彼誤書者終身莫之覺 而臣亦不勝其釐正矣 以此推之 國中可省之事多矣 東二樓之初建也 地部雇 人日三百錢人三十 濫竽者或擇陰而眠焉 計士告之十番則郞官削其半而後着押曰尾閭可防 是察於五張之紙 而遽失九千之錢 也 以此推之 國中財用之源 可得而議矣 政院之號令也 二三十隸聯臂蹋足而呼之 聲振數里 以爲不如是 不足以威百司也 騎曹郞執鞭而禁人聲 以此推之 國中㳒令之相矛盾 可指而數之矣 夫通國之事 何可盡言 固有小可以喩大者 誠願殿下恢察 邇之聦 省事以漸節財 無小通政㳒之矛盾者 則淸其本而功博者在是矣 今臣所言 皆世之所大駭也 雖然行之十年 一國之田 租可减 百官之俸祿可增 茅茨席門 可以爲朱樓彩閣 徒行病涉者 可以爲輕車怒馬 向之干和者可以致祥 向之自欺自弊者 可 以渙然而氷釋矣 夫然後重修景福之闕 建慶會之樓 還政府六曹之舊䂓 與國中之士大夫 作徵招角招之樂 暫勞而永逸 用昭 我先王之典章 貽我元良億萬年無疆之基 豈不休哉 夫難逢者聖主 可惜者良時 今天下東自日本 西極藏地 南起爪哇 北際容 爾喀 兵塵不動幾二百年 此往牒之所無也 不以此時僇力而自修 它邦有警 與有憂焉 臣恐執事之臣不遑於崇餙太平也 今殿 下抱經緯顥噩之文 負制禮作樂之才 有奮發乾剛之志 將何功之不立 何求而不獲 乃反中朝發歎 治不徯志 咨且畏約 欲發未 發 十年之久乎 將因俗爲治 彌縫牽補 自安於小康耶 漢申公之言曰爲治者不在多言 顧力行何如耳 夫行之則近日公車之章 無非格言 不行則雖今日盈庭之言 愈出而愈新 不幾於文具之尤甚者耶 臣久廢讀書 心術茅塞 條目脫漏 倉卒莫對 倘殿下諒 其愚忠 俾終其說 特賜一日休沐之暇 給繕寫十人 謹當傾竭肺腑而畢陳之 言涉瀆冒 是恐是懼 臣死罪謹言 答曰觀此諸條所 陳 爾之識趣 亦可見矣 1786년 조회에 참석했을 때 자신의 생각을 국왕에게 올린 내용이다. (상략) 현재 국가의 큰 폐단은 가난인데,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는 없 습니다. 이제 조정에서 한 사람의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의 예부에 자문을 다음과 같이 보내십시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 역하는 것이 천하의 통용되는 법입니다. 일본과 유구, 안남과 서양 등이 모두 중국의 민, 절강, 교주, 광주에서 교역하고 있습 니다. 바라건대, 여러 나라처럼 뱃길을 이용하여 통상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들은 반드시 아침에 요청하면 저녁에는 허가를 내줄 것입니다. 그 때 황당선을 불러들여 길잡이로 삼으십시오. (중략) 신이 등기에, 중국의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법에 정통하다 합니다. 국가에서 관상감 한 부서를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머물게 하고, 나라의 인재들로 하여금 천 문과 천체의 운행, 악기나 천문 관측 기구의 제도, 농잠, 의약, 기후의 이치 및 벽돌을 만들어 궁궐과 성곽과 다리를 짓는 방 법, 구리나 옥을 채굴하고 유리를 구워 내는 방법, 화포를 설치하는 법, 관개하는 법, 수레를 통행시키고 배를 건조하는 방법, 나무를 베고 바위를 운반하는 법, 무거운 것을 멀리 옮기는 기술을 배우게 하십시오. 그러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라를 다스 리는 데 알맞게 쓸 인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중략) 저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것은 사족이 날로 번성하기 때 문입니다. 사족의 무리들이 나라에 두루 깔려 있어 한 가닥 벼슬로는 그들을 모두 잡아매지를 못합니다. 반드시 그들을 처리 박제가 생애와 행적 233

228 하는 방법을 마련해야만 뜬소문이 일어나지 않고, 국법이 시행될 수 있습니다. 신이 청컨대,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장사하 고 교역하는 모든 일에 사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혹은 장사 밑천을 빌려 주기도 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장사하게 하고, 수완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장사를 권장하십시오. 그리하여 날로 이익을 좇아 놀고먹는 세력을 점차 줄 여 가고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열어 제멋대로 하는 권세를 없애십시오. 이것이 지금의 사태를 옮겨가는데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략) 44세(1793, 정조17) *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자송문自訟文을 씀 (24) 貞蕤閣文集 권1, 頌, 比屋希音頌 幷引 臣於去年十一月初十日 伏奉儒臣李東稷疏批一通頒下者 天章爛然 宸評鄭重 臣以下邑小吏 蒙此異數 且惶且感 措躬無 地 又於本年正月初三日 伏奉內閣關文 依諸文臣自訟詩文之例 特命臣撰進詩筆者 惟我聖上 以文風之不古 屢發中朝之歎 而如臣斗筲之才 亦垂葑菲之採 循循善誘 示我周行 有若引而進之 可與有爲者然 臣雖頑愚 寧不策勵自奮 圖惟厥終乎 臣 於弱冠 微有志尙 與一二朋友 倡古文於寂寞之濱 其鄰之夫未嘗過而問焉 及其虛名誤擢 白衣登朝 則又以寫書校書爲職 亦 未嘗聞其有能言之目也 忽於近歲 猥受特眷 或專編書之任 或廁應製之班 往往與藝苑諸臣 後先標名 則儼然據當世文人之 一席矣 臣固萬萬不敢當 而若其所自幸則有之 彼七十子之徒 得聖人而師之 終身學之不厭 臣以薄技 躬逢盛際 十餘年來 不失門路者 校正御製之力居多 至於批旨中歷擧臣名於著作之列 而有曰登壇執耳 復明大一統之權者 予以爲己任 是則以臣 爲足備數於王會之遠夷 庭實之下陳矣 夫布衣者流 崛起詞垣 樹赤幟於一方 以號令天下 而薦紳先生靡然從之 何况聖人處 南面之尊 手握文衡 親建皷角 揮斥風雲 動盪日月 奮之以干羽 格之以簫韶 則萬方荒服 其有不稽顙稱臣 虔奉正朔者乎 易 曰觀乎人文 以化成天下 孔子曰郁郁乎文者 豈詞章之文乎哉 臣觀數十䄵來 號爲能文者 皆功令之雄耳 並與詞章而未之聞 焉 臣以畏約之深 不敢昌言指斥 而若其力排流俗 皭然不滓者 臣之所自負 而亦欲藉手以事君者也 臣嘗語人曰今之學者 亦 何事乎韓柳歐蘓之文 卽日取邸報中絲綸 伏而讀之可也 臣之所鑽仰而從事者如此 雖不敢竊附於奔走疏附之末 而亦自謂不 畔於道矣 世之悠悠之談 或有訾謷臣文爲明世之習者 此不過從時代起見耳 夫詞人之文有時代 志士之文無時代 臣固不敢以 詞人自命 而乃若其志則有之 經之爲十三 緯之爲廿三 錯綜擬議 元元本本 務歸實用者 臣之所願學也 雖未能至 心嚮往之 矣 至於區別體裁 宗盛唐而稱八家 自以爲能者 實有所未遑焉 過此以往 勦說纖人之詞 篤信戲子之本 此又臣之所大耻也 夫今之人 實無有見臣半藳者 何從而議臣 豈以向者一二應製之作 爲不合歟 此皆乙覽之所經 而寶墨昭回 重於九鼎大呂者 也 然則以此而論臣 不幾近於魯酒薄而邯鄲圍者歟 臣謹按前日批旨 若曰臣等慕千里不同之俗 鮮有超然聳拔 非渠罪也者 聖人推恕之論也 今日筵敎 若曰可無訟愆之詞者 春秋責備之旨也 有以哉 聖人之言 引而不發 有若曲爲臣解者 臣方銜恩佩 榮 罔敢失墜 而伏讀閣關敷衍之辭 曰改過自新 夫過有二焉 學之未至 固臣之過也 性之不同 非臣之過也 譬之飮食 以位而 言則黍稷居先 羹胾居後 以味而言則資醎於鹽 取酸於梅 進芥之辣 擢茗之苦 今以不醎不酸不辣不苦 罪其塩梅芥茗則固矣 必若責其爲鹽爲梅爲芥與茗者曰爾曷不類黍稷 而謂羹胾者曰爾曷不居前云爾 則所冒者失實 而天下之味廢矣 故樝棃橘柚之 包 蘋蘩薀藻之羞 齒革羽毛之俎 莫不適用者 期於口也 故曰善無常師 批旨所謂翔潛不拂其性 鑿枘各適其器者 大矣哉 聖 人之論文也 夫離騷變風 天下之至文也 周室而不遷則黍離爲二南之音 三閭而不放則楚國繼賡載之聲 非正則一身 原有哀腔 周京百姓 先帶歎詞也 此聖上之所以眷眷於作成之幾 而以祈天永命 爲文治之本者也 夫文章之道 不可一槩論也 要其傳之 久者 必其學之深者也 是以君子貴讀書也 此臣等之所日慥慥而勿替也 夫臣謹取聖語 爲比屋希音頌一篇 再拜稽首而陳之 其詩曰 日出之方 終古文明 油油禾黍 肇我正聲 帝眷靑邱 皇矣惟辟 重光奕葉 百祿之錫 王頫下民 孰笑孰顰 旣絲旣穀 莫 不爾均 王在治忽 聽于爾音 民有心聲 時謂之風 其風有愆 惟民之疾 王咨于民 予捄汝失 有穆明堂 聖人攸居 俾也可忘 陶 復厥初 山龍絺繡 聖人攸御 豈曰無衣 懷此大布 文之滅質 亦孔之殆 彼聲靡靡 曷不知悔 惟古有樂 厥名爲瑟 一倡三和 朱 23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29 絃疏越 遞鐘斂巧 比竹慚繁 其世已遠 其曲猶存 如樸未雕 若酒之玄 薄可使敦 忮可使平 愔愔伊籟 維德之則 王曰樂哉 建 我皇極 有跛斯走 有斯明 如夢旣寤 如醉獲醒 懽忻舞蹈 盈耳洋洋 可以育德 可以致祥 若時雨過 其興也勃 有不信者 底汝 于罰 自南自北 自西自東 孰謂澆漓 而不玄同 其民壽考 其日舒長 服黜其華 繪屛其章 家擊簣桴 戶稱瓦樽 太平萬歲 以獻 吾君 국왕 정조의 요구에 따라 쓴 자송문으로서, 자신이 패사소품의 문체에만 경도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상략) 신은 약관의 나이에 미약하나 지향하는 바가 있어 한두 명의 벗과 더불어 적막한 땅에서 고문을 창도하였습니 다만, 이웃의 사내조차 들러 물어 본 적이 없습니다. 헛된 이름으로 잘못 발탁되어 백의로 조정에 들어가서는 또 책을 베껴 쓰고 교정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았으나, 또한 일찍이 언변이 능하다는 평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근세에 이르러 홀연 외람되 이 특별한 사랑을 받아 책을 엮는 책임을 전담하거나 임금의 명에 따라 글을 짓는 반열에 서서 이따금 예원의 여러 신하와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름을 드러내고 보니, 엄염히 당세의 문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세상에 한가로이 떠도는 이야기에 간혹 신의 글이 명나라의 습속을 배웠다고 헐뜯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시대성 만으로 견해를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대저 사인의 글에는 시대가 있지만 지사의 글에는 시대가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사인 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뜻을 둔 바는 있습니다. 13경으로 날줄을 삼고 23사로 씨줄을 삼아 서로 얽어 헤아려 여기에 바탕 을 두고 실용에 돌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신이 배우고자 하는 바입니다. 비록 아직 능히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은 진작 거 기에가 있었습니다. 체재를 구별하여 성당을 으뜸으로 삼고 8대가를 일컬으며 스스로 훌륭한 문장가라 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겨를이 없습니다. 더구나 잗단 재주를 파는 섬인의 문장을 표절하거나 소설이나 연극 대본 따위를 독실히 믿는 것은 신이 크게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신의 반 토막 원고조차 본 적이 없으면서, 무엇으로 신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하략) 49세(1798, 정조22) *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 올림 (25) 貞蕤閣 2集, 文, 應旨進北學議疏 伏以臣伏奉去年十二月勸農政求農書綸音頒下者 臣與邑之父老人士 攢手捧讀 以次傳示 其有不知書者 爲之解釋其意義 相與歡喜讚頌 不自知其手之舞之足之蹈之也 而繼又咨嗟太息 無一知半解素所蓄積 懼不足以仰塞明命也 雖然臣伏以思之 萬事萬物 莫不有精義存焉 何况天降嘉穀 粒我烝民者 其事甚重 其理至賾 豈可一付之於人役下愚之輩 而坐受其鹵莾之報 而已哉 葢亦待其人而後行焉 今我聖上慕大禹之盡力 法周公之明農 以使斯民不飢不寒 爲王政第一義 時萬時億 並受其福 卽次第事耳 臣濫叨見職 居然三載 治不效於百里 憂或先於天下 每見峽氓燒菑斫薪 十指皆禿 而其衣則十年之敗絮也 其屋 則傴僂而後可入 烟煤不墍 其食則破盌之飯 不鹽之菜也 木匕在厨 瓦罐在竈 問其故則鐵鍋鍮匕 數爲里正奪取 已納糴矣 問其徭役則非人奴卽軍保 納錢二百五六十 國家經費之所從出者也 於是乎慼焉心動 有嫠不恤緯之歎 以爲由今之道 不變今 之俗 不可一朝居也 非特一縣爲然也 列邑皆然 通國皆然 此聖上之所以慨然奮發 思一更張 屈策求助 若是其勤且摯也 臣 聞治國如牧馬 去其害馬者而已 今欲務農 必先去其害農者而後 其他可得而言矣 一曰汰儒 計今大比之歲 大小科場赴闈者 殆過十萬 非特十萬 此輩之父子兄弟 雖有不赴擧 亦皆不事農者也 非特不農 皆能役使農民者也 等民也 而至於役使則強弱 之埶已成 疆弱之埶成則農日益輕而科日益重 稍欲自好者 悉趨乎科 則不得不農者 下愚而已 人役而已 於是驅其妻女 從事 于野 飼牛擧趾 半屬中閨 銍刈舂碓 畢責巾幗 則荒邨小邑 砧聲絶小 而擧國之衣 不能蔽體矣 學士大夫 視以爲常 有若自 古已然者 謹案唐詩人有女耕田行 葢嘆亂離之後也 今也昇平百年 而婦女耕田 誠不可使聞於隣國 此豈可但以害農言哉 其 박제가 생애와 행적 235

230 實賊農之甚者 此輩之恰過半國 百年于玆矣 今不汰其日重者 而徒責其日輕者 曰盍肅爾力云爾 則雖使廟堂日發千關 縣官 日飭萬言 盃水車薪 勞亦無補矣 二曰行車 故相臣金堉平生苦心 惟車錢兩策 而行錢之初 議論多歧 幾罷僅行 臣從高祖臣 守眞 實主其事 今若行車則十年之內 民之好之 不啻如錢 所謂可使由之 不可使知之 可與樂成 不可與慮始者也 葢農譬則 水穀也 車譬則血脈也 血脈不通則人無肥澤之理 醫書導引 有藥名河車者卽此義 此皆非農而益農 有國之先務也 至於我國 無用之儒 古無而今有 有用之車 古有而今無 利害之相反 至於此極 民之憔悴 固無足恠矣 議者必曰風俗不可卒變 只就今 之農而消息之云爾 則不須多言 試可乃已 先貿遼陽農器各種 開鐵冶于京師 照式打造 遠州産鐵處 遣屬分造 以收其利 以 頒其制 試農之地 不拘多少 只就京師近處 少則百畒 多可百頃 作爲屯田 以知農者一人領之 如古搜粟都尉 別選農徒數十 人 厚其稍廩 一聽其指 時秋旣穫 較其得失 一年二年 見其必效 然後分遣其徒於諸道 以一傳十 以十傳百 不出十年 風俗 可易 但設始之初 亦畧費財 數年之內 足償其費而功亦遠及 則費不須論矣 臣嘗推先正臣李珥豫養十萬兵之遺意 欲蓄三十 萬斛米粟于京師 以實根本 其畧亦惟曰改船而益漕也 行車而陸運也 屯田而訓農也 葢京城民戶四五萬 百官軍兵之祿料 悉 仰三南 海運十餘萬石 除私藏自食者外 必須二十萬人數月之食 然後緩急可恃 我國裝船疎淺 率多臭載 必學中國海舶之制 然後益漕沿海之粟 以達于漢水 益漕之不足 又必陸運 陸運不可責之人肩馬背 則非行車不可 車旣通矣 私穀不可悉輸 故須 寘屯田 屯田旣設 試以古方 則事半而功倍 三十萬之數 不期致而自致矣 昔宋人有心太平菴之號 明人有將就園之記 皆擬辭 也 彼皆在下而不得於志 故以之擬之於辭耳 今我殿下 光臨九五 撫御煕洽 匡之直之 高下在心 豈但擬之言語而止哉 臣農 官也 其所爲言 皆從經理稼穡上起論 至於講武修文敎化禮樂之事 不敢攙及 但願縣民安居樂業 溝洫合軌 屋廬齊整 䫉言潔 信 器服堅完 樹木蕃膴 六蓄孶長 男女不惰 各執其事 工商湊集 盜賊屛退 橋梁傳舍 以及圊溷 莫不修治 釣游弋獵 有船有 車 童穉不瘥 耋艾歌詠 此皆敦本力農之效 家給人足以後事也 而中和位育 槩不出此矣 一縣如此 通國如此 草偃郵傳 其應 如響 臣朝而見此 夕死無憾矣 臣少遊燕京 喜談中國事 國之人士 以爲今之中國 非古之中國也 相與非笑之已甚 今此進言 不出於向所非笑中一二 則又復妄發之譏 固所自取 而舍此亦無以爲說矣 葑菲之菜 寔荷濫觴 芻蕘之私 不敢自隱 謹錄所爲 論說箚記凡二十七目四十有九條 命之曰北學議 瀆冒崇嚴 庸備裁擇 才非杜牧 無罪言之可稱 學慚王通 豈獻策之敢擬 臣無 任皇恐屛營之至 謹昧死以聞 왕명에 따라 북학의 를 지어 올린 글이다. (상략) 지금 농업에 힘쓰시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농사에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한 이휴에야 다른 일들을 말할 수가 있 습니다. 첫 번째는 선비를 도태시키는 것입니다. 헤아려 보건대, 올해 대비과의 해에 크고 작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러 오는 자가 거의 10만 명을 넘습니다. 단지 10만 명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리의 부자와 형제들은 비록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아도 역시 모두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농업에 종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 농민들을 머슴으로 부리는 자 들입니다. (중략) 이것이 어찌 선비들이 다만 농사에 해가 된다고 말할 정도에 그치는 일이겠습니까. 그 실제는 농업을 죽이 는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나라 인구의 절반이 넘은 지가 1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 날로 늘어만 가는 선비들 을 도태시키지 않고 도리어 날로 가벼이 대접받는 백성들을 어이해 너희들은 힘을 다 쏟지 않느냐 고 꾸짖는다면, 비록 조정 에서 날마다 천 개의 공문을 띄우고 현의 관리들이 날마다 만 마디 말로 신칙한다 해도 한 바가지 물로 수레 가득한 장작더 미의 불을 끄는 격인지라 아무리 애를 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수레를 통행시키는 일입니다. 옛날 영의 정이었던 김육은 평생의 고심이 오직 수레와 화폐, 두 가지 시책에 있었습니다. (중략) 지금 만약 수레를 통행시킨다면 10년 안에 백성들이 수레를 좋아하는 정도가 화폐를 좋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 을 것입니다. (중략)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요,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사람이 살 지고 윤기가 흐를 이치가 없습니다. (중략) 신은 젊어서 연경에 노닐고는 중국의 일을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비 들이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서로 모여 비난하고 비웃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지금 제가 바 친 말씀은 이전부터 이들이 비난하고 비웃는 것 중의 한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또다시 망발을 한다면 비난을 참 23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31 으로 스스로 불러들이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고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의 의견이라도 채택하시겠다는 참으로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고 보니 미천한 사견이나마 감히 숨기지 못했습니다. 삼가 논설과 차기 를 기록하여 27개 항목에 49개 조목을 얻고는 북학의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숭고하고 엄숙한 분을 모독하였사오니 살펴 가려 쓰시길 바라옵니다. 신은 두목의 재주가 없으니 죄언 같은 글도 쓰지 못했고, 배움은 왕통에 부끄러우니 어찌 감히 그들에 비견될 만한 책략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두렵고 황송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52세(1801, 순조1) * 유득공과 함께 세 번째로 청나라에 감 * 임시발任時發의 흉서凶書사건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으로 유배 (26) 貞蕤閣 5集, 詩, 愁州客詞[七十九首] 六月不咸頂大澤始解 東脈隱日本 西砂包渤澥 北極出地高 四十六度強 亥坐巳向國 穆翼度桓鄕 方城方數里 中有三層樓 胡山遮落日 何處望神州 不有謫來人 詩賦寧地出 而我慚蒙求 不學功令術 從人借策牀 雅軋如柔櫓 手持牛尾拂 自媿王夷 甫 覊愁非鵩賦 詩案尙烏臺 獸聲哨馬急 知道撥軍來 韓家貽杏子 蘡薁出涪溪 旅况無多子 煙桮易一難 土壁少糊紙 矮簷無 搭棚 畏途麾不去 切反是蒼蠅 爲屋必四榮 屋中竈對廐 愛從竈上眠 不厭廐中臭 淨刷畦中糞 刈盡屋畔樹 院落恐妨陰 蔬根 慮受汙 有碓而無臼 精鑿籭代箕 哺兒磕榛子 與郞縫狗皮 雙手撈泔底 糝之雞立竿 㸐火代膏燭 績麻到夜闌 績麻難具陳 事 縷功六七 生憎布商妻 䄵䄵數月別 麖皮作貼裏 篋笥傳高層 近日多南販 綿花方代興 蔥葵不下種 經歲自能生 况菸成大葉 坐令槱薪輕 黃雀而丹頂 交交東海來 爲爾報豊稔 籠囮何見猜 我有楚王癖 求瓜必細腰 園翁喜黃老 蒙養期松喬 戶糴十斛 米 上戶加倍之 上戶耕不足 無田復奚爲 足凍姑撤尿 須臾必倍寒 今䄵糴不了 明年知大難 曰糴亦無痕 曰糶亦無影 賦民一 桶水 官自棺官井 粟麋襍菜根 廑免花生眼 擧網得紅鱮 輸官不自饌 催租未發聲 見面心先駭 布直姑低昂 一任官門買 捕呈 一大魚 官給三升麥 三嶺多春泥 往來頭盡白 完爾海倉糴 輸我城中鹽 但飛一押字 官亦不傷廉 貧民養一牛 甕算何所無 一 爲里正奪 剝皮懸官厨 有地無人處 是我衣食碗 不知眞土門 自棄還自限 政亦不可膠 禁亦不可弛 三䄵不渡江 人畜皆凍死 長轂脫雙耳 道狹妨並驅 不敎知去處 但見軌全濡 女曰讀書勤 士曰織布細 文工喫官司 布細能發解 簑笠不覆肩 愛逐長江 水 不農復不商 去作魚蠻子 山海隔王春 人物甘自棄 但願官稍廉 與民不爭利 官貪實大耐 官明多遭擯 阿誰書殿最 論勢不 論人 喝打齊心棍 棍響震庭宇 血肉異折薪 請官勿遽怒 嘒彼鐵漏子 夏楚如吐麵 大哉欽恤書 先朝有成憲 驅馬四百蹏 船布 一千匹 此地無鑄錢 十倉傳祕訣 槌碎金剛山 一峰成一石 配石石生兒 姓趙名是翟 意氣誇時望 威行十四社 戎服出郊迎 通 官不下馬 䟽河作水田 比屋可秔稌 大國卻無禁 營門獨不許 邊士與邊姬 貴賤何殊絶 邊士憎打臀 邊姬愛如膝 忙追膃肭勢 乾碾八郞蟲 敎儂眠不得 夜卧非老翁 涪溪多宦家 藏書稱第一 書目且何如 通史有全袠 偶見村童書 忽傳圓嶠脈 問爾何從 師 曾是富寧謫 藥草行滿地 離離復誰采 但把三稜鍼 庸醫刺氣海 民家一祥祭 有往輒傾城 餉賓誠已熯 孺慕只常聲 京城稻 米飯 味淡膓易枵 炊栗愼毋塊 黃豆期半焦 終䄵一罷齋 巷獵分麞腿 異哉南方人 不嘔石花醢 黃紙寫㛰書 綿布贄一匹 但願 郞洗足 儂不嫌舊襪 塗牕蟬翼紙 鋪室龍須席 前期作餦餭 迎壻在今夕 士女齊上冢 佳節惟端陽 角牴懸官賞 鞦韆繫道傍 䄵 豊無早霜 宰牛作秋夕 比屋皆庖丁 何煩楊水尺 膠糊揀黃粟 刷布助顔色 細沙飽饑豕 瞞秤滿洲客 城樓聚博徒 四望風流利 古麴猶傳脈 喧聒非佯醉 行營建亥月 元帥自防秋 下官但唯唯 三斛月三牛 碧繖何官長 翩翩近卻非 武科經二式 猶著唱名 衣 一種僧風惡 形髡室有妻 生女不他適 只是嫁闍黎 山有如人獸 其名無乃㺑 大桮耽火飮 投菸或報葠 慶源西北望 日晴山 市遊 埜氣亦靈活 玲瓏如唇樓 六地饒菡萏 時有采珠來 要看一明月 卻取万蠯開 傳疑皇帝冢 惻愴宋徽欽 恨不置守衛 聊慰 千古心 袴褶何翩翩 官令茂山去 廉價得貂皮 知爾發身處 假玉靑指環 飄颻紫繫 門闌頗奕奕 嫁與親騎衛 吹空酸蔣皮 含齒 박제가 생애와 행적 237

232 作鼃黽 爪染女兒花 不敎人細省 歡言柳汀樂 作色語呢喃 不見捉漁子 了不施袴衫 白粟精復精 炊成一鍋飯 祈禱南山拗 䄵 䄵事如願 可憐髫齔歲 男女俱上頭 跣行將臺畔 鬭草作巫謳 趙生淪落人 白首伴詩娥 織布細無比 能和同谷歌 穩城出名姬 新聲遏雲好 風流蘇子瞻 坐惜鶯鶯老 無絲廑有竹 巫鼓才人笛 猶傳獅子舞 笑聲時啞啞 故人寄一扇 千里意如何 報以江珧 殼 天寒當小鍋 硏石綠於歙 嗟無妙手鐫 女兒天下白 恨不施朱鉛 柳公[焵]寔名宦 五十䄵閒稀 淡食如僧舍 去來一綌衣 李 令[日運]嚴鄕約 空爲後人笑 江南罵蘇威 寧能誦五敎 髯矦[義駿]眞士夫 不怕營門語 抄書滿數籠 策馬空囊去 大雪失孤村 鏵鍫僅覔牖 問汝居何處 畸田不逐畒 糴法本什一 今䄵胡十五 前冬大急時 什伯寧足數 易中知糴道 剛柔自立本 石奮徒虛 名 不食又何笨 鄕任有腴瘠 腴窠偏多遞 視官果如家 公糓變私債 國糓名十一 其實斛二斗 官令雖十五 中滋十八九 良吏無 他才 先絶阿堵想 文官責尤別 六州兼敎養 수주객사 - 박제가가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시로서 백성들의 곤궁한 삶과 관리의 횡포와 착취를 그렸다. 6월에야 불함산 정상에서는 큰 못의 얼음이 비로소 녹네. 동쪽 지맥 일본으로 감춰져 있고 서편 사막 발해를 감사고 있네. 북극성 하늘 높이 소아 있으니 사십육도 바로 위에 자리했다네. 해좌의 사향 자리 나라이면서 목조 익조 도조 환조 고 향이라네. (중략) 귀양 온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서 시부가 어이 나오랴. 그러나 난 몽구 에 부끄러우니 공령문의 기술 을 못 배웠구나. (중략) 집마다 열섬 쌀을 거둬들이니 부잣집은 그 배를 거둔다 하네. 부잣집 밭 갈기도 넉넉잖으니 밭 없는 사람은 또 어찌할거나. 발이 얼어 시리다고 오줌 눈다면 잠시 뒤엔 반드시 더 추워지리. 금년의 환곡도 다 못 갚았으니 다음 해 큰 어려움 닥치겠구나. 적이라 하는 것도 흔적이 없고 조라 하는 것도 그림자 없네. 백성들의 한 통 물로 거둬들여서 관 아의 우물에만 채워 넣누나. 좁쌀죽에 나물 뿌리 섞어 넣어서 어지럼증 가가스로 면할 수 있네. 그물 던져 붉은 연어 건져 얻어도 관가로 보내느라 먹질 못하네. 세금 독촉 말도 아직 꺼내기 전에 얼굴 보면 마음부터 먼저 놀라네. 삼베 값이 올랐다 내렸다 하니 관가에서 사는 대로 내맡길밖에. (중략) 산과 바다 서울 멀리 떨어졌으니 사람들 자포자기 달게 여긴다. 바라는 건 관리 좀 더 청렴해져서 백성들과 이익 다툼 않는 거라네. 탐관오리 내직에 충당이 되고 어진 관리 배척을 흔히 당하지. 수령들 업적 성적 누가 매기나 권세 보고 사람됨은 따지지 않네. 마음모아 소리치며 곤장 때리니 곤장 소리 관아 뜰에 진동하누나. 피와 살은 장작 패는 것과 달라서 관리에게 처해 봐도 성만 내누나. 정확히 떨어지는 저 철루자여 매질은 국수를 뽑아내듯이. 흠휼하는 저 책은 위대하구나. 선 왕께서 만드신 법 남아 있으니. (중략) 환자는 본디 열에 하나이지만 올해는 어찌하여 다섯이던가. 몹시도 다급했던 지난겨울 은 열 배 백 배 어이 족히 따졌겠는가. (중략) 향임엔 좋은 자리 따로 있으니 좋은 자린 유난히 자주 갈리네. 관청 일을 제 집처럼 생각하여서 공곡을 사채로 바꾸어 놓네. 제시 비율 명목상 열에 하나나 사실은 한 섬에다 두 말 매기네. 관에서 열에 다섯 정해 두어도 중간에 엳아홉까지 불기도 하지. 좋은 관리 단 재주 필요치 않고 돈 욕심 앞서서 끊어야 하리. 문관의 책 임이야 더욱 특별해 여섯 고울 아울러 길러야 하네. 56세(1805, 238 순조5)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 4월,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로 돌아와 세상을 떠남. 묘는 경기도 광주

233 김정희 金 正 喜 (1786~1856) 1) 김정희 연보 年 譜 2) 김정희 생애 관련 자료

234 7. 김정희金正喜(1786~1856) 생애와 행적 1) 김정희 연보年譜 본관 : 경주. 자 : 원춘元春, 호 : 추사秋史ㆍ완당阮堂ㆍ예당禮堂ㆍ시암詩庵ㆍ노과老果ㆍ농장인農丈人ㆍ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나이 / 연도 240 연보 1세(1786, 정조10) * 김노경金魯敬과 기계杞溪 유씨兪氏 사이에서 출생 충청남도 예산군 신안면 용궁리 15세(1800, 정조24) * 한산韓山 이씨 이의민李義民의 딸(1805년 별세)과 혼인 16세(1801, 순조1) * 모친 별세 * 박제가朴齊家의 문하에서 수학 23세(1808, 순조8) * 예안禮安 이씨 이병현李秉鉉의 딸과 혼인 24세(1809, 순조9) * 생원시生員試 합격. 부친 호조참판 임명 * 부친 따라 청나라로 출발, 12월 도착 25세(1810, 순조10) * 북경에서 청나라 고증학자 완원阮元ㆍ옹방강翁方綱ㆍ조강曹江 등과 교유 30세(1811, 순조11) * 정학연丁學淵의 소개로 초의草衣선사 만남 31세(1816,순조16) * 진흥왕眞興王 순수비巡狩碑를 발견하고 고증 *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성 32세(1817, 순조17) * 길상실吉祥室의 편액을 씀 33세(1818, 순조18) * 해인사 중건 상량문 씀 34세(1819, 순조19) * 문과 급제 36세(1821, 순조21) * 예문관 검열 38세(1823, 순조23) * 규장각 대교 41세(1826, 순조26) * 충청우도 암행어사 42세(1827, 순조27) * 부교리, 예조참의 44세(1829, 순조29) * 규장각 검교대교檢校待敎 겸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 45세(1830, 순조30) * 동부승지 * 부친 윤상도尹商度 사건에 연루, 고금도古今島에 유배 51세(1836, 헌종2) *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병조참판 54세(1839, 헌종5) * 형조참판 55세(1840, 헌종6) * 동지부사 *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 귀양 59세(1844, 헌종10) *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歲寒圖 그려줌 64세(1849, 헌종15) * 옥적산방玉笛山房에서 계첩고禊帖考 저술 66세(1851, 철종2) * 진종조천예론眞宗祧遷禮論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67세(1852, 철종3) *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저술 70세(1855, 철종6) * 과지초당瓜地草堂 세움.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지음 71세(1856, 철종7) * 과천果川에 머물다 세상 떠남 묘 예산군 싱암면 용궁리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주요 행적지 추사 생가 화암사華巖寺 북한산 비봉 해인사 제주도 과지초당

235 2) 김정희 생애 관련 자료 1세(1786, 정조10) * 김노경金魯敬과 기계杞溪 유씨兪氏 사이에서 출생. 충청남도 예산군 신안면 용궁리 (1) 阮堂先生全集 卷首, 阮堂金公小傳 (閔奎鎬) 金公正喜 字元春 號阮堂 又號秋史 慶州人也 母兪夫人懷娠二十四月而生 寔正宗丙午也 性孝友 博極羣書 純祖己卯 中 生員試 己巳擢第 拜說書 檢閱 奎章閣待制 按廉湖西 有直指風 除弼善 檢詳 陞大司成 止兵曹參判 七世祖諱弘郁 孝宗甲 午 以海西觀察使 抗疏言姜獄事 忤旨逮獄死 遂爲名臣 厥後大官赫赫 門甚盛 父判書諱魯敬 毅然有氣度 遭禍竄斥于島 公 慟不欲生 夜必泣祝天不寐 寒暑不易裘葛 判書公四載始宥還 衣亦四載始改 先是判書公使于燕 公隨而入 時年二十四 阮閣 老元 翁鴻臚方綱 皆當世鴻儒 大名震海內 位且顯 不輕與人接 一見公莫逆也 辨論經義 旗皷當不肯相下 是以阮元撰經解 海內諸大家莫之見 而特先寄公抄本也 憲宗庚子獄起 詞連公 緹騎蒼皇 爲公憂者咸汹懼 公擧止如他日 對吏辨析中窽 峻整 明白之氣 可以薄日星而貫之金石 雖娟嫉公者 捃摭無所執 卒不免投謫于濟 濟古耽羅也 瀛海在其間 甚鉅又多風 人涉恒計 旬月 公方涉也 大風濤中作霹靂 死生俄忽 舟中人皆喪魄抱號 篙師亦股栗不敢前 公凝然坐柁頭 有詩高詠 聲與風濤相上下 因擧手指某所曰 篙師力挽柁向此 舟乃疾 朝發夕至濟 濟之人大驚以謂飛渡也 居謫舍 遠近負笈者如市 纔數月 人文大開 彬彬有京國風 耽羅開荒自公始 哲宗辛亥 權相國敦仁以禮論見斥 斥者謂公實與之 遷北靑 時公年六十六 二弟亦老白首矣 握公手慟哭不能言 戚黨故吏 目瞳瞳啜泣悲號 哭聲撼墻屋 公正色顧仲季曰 庸人不足論 讀書如君輩者亦若是乎 且談笑且 慰 手整書簏 井井如也 丙辰卒 壽七十一 公甚淸軟 氣宇安和 與人言 藹然各得歡 及夫義理之際 議論如雷霆劒戟 人皆不 寒而栗 甫弱冠 貫徹百家之書 宏深弘博 淵乎若河海之不可量也 專心用工 在十三經 尤邃於易 金石圖書詩文篆隷之學 無 有不窮其源 尤以書法聞天下 甞著實事求是說曰 學問之道 旣以堯舜周孔爲歸 則不必分漢宋之界朱 陸 薛 王之門戶 但平 心靜氣 篤學力行 盖公之經學 惟以合聖人之旨爲本 象胥甞賫時憲曆來 公暫閱恠之曰 中氣其錯序乎 雲觀請辨正欽天監 燕 人覺之 公之於天象地理 亦有深造焉 未甞對人言及此 不喜著述 少日所纂言者焚之再 今流傳于世 不過爲尋常往復之書 而 道義之正 心術之明 經禮之發揮 可見公大畧也 嗚呼 公十年于南 又二年于北 天風海濤 瘴嵐蟲蛇惡物 崎嶇險阻 霜雪肅殺 之地 可謂出萬死得生 而能充然無憂慽 享其壽考 非卓然有得乎學 惡能夫如是也 其不能展布 百姓被其澤 命也夫 公方沉 緜 仲氏亦病淹 公扶將朝夕 其所診苦歇 疾旣革 猶問仲氏試藥乎不 仲氏名命喜字性元 賢而有德 博洽多著述 翼考常以經 史文旨之深奧 掌故之疑難咨詢公 公隨類對無隱 間有應旨文字 往往藉仲氏云 戊辰仲秋 門人閔奎鎬 謹述 문인 민규호가 지은 김정희 소전이다. 김공 정희金公正喜의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이며, 또 다른 호는 추사秋史인데 경주인慶州人이다. 모친 유부인 兪夫人이 임신한 지 24개월이 되어 공을 낳았으니, 그때가 바로 정종正宗 병오년(1786, 정조 10)이었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많은 책을 널리 읽고 나서 순조 기사년(1809, 순조 9) 생원시에 합격하고, 기묘년(1819, 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ㆍ검열檢閱ㆍ규장각 대제奎章閣待制를 역임하고, 호서 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로 나가서는 암행어사의 풍도가 있었다. 그 후 필선弼善ㆍ검상檢詳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고 벼슬이 병조참판에 그쳤다. 공의 7세조 휘 홍욱弘郁은 효종 갑오년(1654, 효종 5)에 황해도 관찰사로 상소를 올려 강빈姜嬪의 옥사獄事를 말했다가 효종의 뜻에 거슬려 체포되어 옥사함으로써 마침내 명신名臣이 되었고, 그 후로는 고관대작이 혁혁하여 가문이 매우 창성하였다. 부친 판서 휘 노경魯敬은 의연하게 도량이 있었 는데 화를 만나 먼 섬[島]에 유배되자, 공은 슬퍼서 살고 싶지 않았고, 밤이면 반드시 잠도 자지 않고 울면서 하늘에 기도하 였으며, 추우나 더우나 옷도 갈아입지 않다가 판서공이 4년만에 풀려 돌아오자 공 또한 4년 만에 비로소 옷을 갈아입었다. 이에 앞서 판서공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갈 적에 공도 따라 들어갔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24세였다. 당시 각로閣老인 완원阮 김정희 생애와 행적 241

236 元 과 홍려 鴻 臚 인 옹방강 翁 方 綱 은 모두 당세의 대유 大 儒 로서 큰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고 지위도 현달하여 선뜻 남들을 접견 하지 않은 터였으나, 그들이 공을 한번 보고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경의 經 義 를 변론하면서 그들과 승부를 맞겨루 어 조금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완원이 경해 經 解 를 찬술하였으나 중국의 여러 대가 大 家 들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는 데, 이 때문에 특별히 공에게 먼저 초본 抄 本 을 부쳐주었던 것이다. 헌종 경자년(1840, 헌종 6)에 옥사가 일어나 말이 공에게 관련되어 의금부의 군졸들이 황급하게 움직이자, 공을 위해 걱정 하는 이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었다. 그러나 공은 행동거지가 평소와 똑같았고, 법관을 대해서는 요점을 잘 지적하여 변석하 니, 그 준엄하고 명백한 기상이 일성 日 星 을 능가하고 금석 金 石 을 꿰뚫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 라도 중요한 단서는 잡아내지 못했으나, 끝내 제주 濟 州 에 유배되는 것은 면치 못하였다. 제주는 옛 탐라 耽 羅 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거리가 매우 멀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사람들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10일에서 1개월 정도가 소요되곤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삶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라,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서 호곡하였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타 두 柁 頭 에 꼼짝 않고 앉아서 소리를 높여 시를 읊으니,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오르내렸다. 공은 인하여 손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사공은 힘껏 키[ 柁 ]를 끌어당겨 이곳으로 향하라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항해 航 海 가 빨라져서 마침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제주에 당도하니, 제주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날아서 건너온 것이다. 고 하였다. 공이 적 사 謫 舍 에 들어간 뒤에는 원근에서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겨우 두어 달 동안에 인문 人 文 이 크게 열리어 찬란하게 서울의 기풍이 있게 되었으니,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철종 신해년(1851, 철종 2)에 상국 相 國 권돈인 權 敦 仁 이 예론 禮 論 으로 배척을 받았는데, 배척하는 자가 공이 실제로 그 예론 에 참예했다고 하여 공을 북청 北 靑 에 유배시켰다. 이때 공의 나이는 66세였고 두 아우 또한 늙어 백발이었다. 두 아우는 공의 손을 잡고 말도 못한 채 통곡만 하였고, 친척이나 옛 부하 관리들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슬피 부르짖어 우니, 통곡 소리가 장 옥 墻 屋 을 진동하였다. 그러자 공이 정색을 하고 두 아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못난 사람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자네들같이 글을 읽은 사람들도 이러한단 말인가 하고는, 얘기하며 웃고 또 위로하면서 손수 책 상자를 정연하게 정돈하였다. 병오년에 공이 별세하니 수가 71세였다. 공은 매우 청신하고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 義 理 의 관계에 미쳐서는 의론이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ㆍ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 공은 겨우 약관의 나이에 백가 百 家 의 서적을 관철하여 학식이 대단히 깊고 넓어서 그것이 마치 헤아릴 수 없는 하해 河 海 와 같았다. 특히 전심하 여 공부한 것이 십삼경 十 三 經 이었고, 그 중에서도 주역 周 易 에 더욱 조예가 깊었으며, 금석 金 石 ㆍ도서 圖 書 ㆍ시문 詩 文 ㆍ전례 篆 隷 등의 학문에 대해서도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더욱이 서법 書 法 으로는 천하에 명성을 드날렸다. 일찍이 실사구시설 實 事 求 是 說 을 저술하여 이르기를 학문하는 도리는 이미 요순 堯 舜 과 주공 周 公 ㆍ공자 孔 子 를 귀의처 歸 依 處 로 삼았으니, 굳이 한 漢 ㆍ송 宋 의 한계나 주 朱 ㆍ육 陸 과 설 薛 ㆍ왕 王 의 문호를 나눌 필요가 없고, 다만 심기 心 氣 를 침착하게 갖고 서 독실히 배우고 힘써 실천할 뿐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경학 經 學 은 오직 성인의 지취에 맞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 았던 것이다. 역관 譯 官 이 일찍이 시헌력 時 憲 曆 을 가지고 오자, 공이 잠깐 열람해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중기 中 氣 의 차례가 잘못되었구나 하였는데, 운관 雲 觀 이 청 淸 나라 흠천감 欽 天 監 에 이를 변정 辨 正 해 주기를 요청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그제야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었다. 그러니 공은 천상 天 象 ㆍ지리 地 理 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남을 대해 서 여기에 언급한 적은 없었다. 공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젊은 시절에 엮어놓은 것들은 두 차례에 걸쳐 다 불태워 버렸고, 현재 세상에 전하는 것은 평범하게 왕복했던 서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도의 道 義 의 바름과 심술 心 術 의 밝음과 경례 經 禮 의 발휘 發 揮 에 있어 공 의 대략을 알 수가 있다. 아, 공이 남쪽에서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고 또 북쪽에서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할 적에 거센 바람, 거친 파도와 장기 24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37 瘴氣와 충사蟲蛇의 악물이 득실대거나 기구하고 험난하며 눈ㆍ서리가 무섭게 차가운 곳에서 지냈으니, 참으로 구사일생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전혀 근심 걱정이 없이 잘 넘기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으니, 학문에 남달리 얻은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함에 따라 백성들 또한 그 은택을 입지 못하게 된 것은 운명일 뿐이다. 공이 오랫동안 투병하던 때에 중씨仲氏 또한 병중에 있었으므로 공이 그를 조석으로 부호해 주고 병이 더한가 덜한가를 살폈으며, 공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도 오히려 중씨가 약을 쓰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곤 하였다. 중씨의 이름은 명희命喜이고 자는 성원性元인데 어질고 덕이 있었으며 박식하여 저술한 것도 많았다. 익종翼宗이 항상 경사經史의 심오한 문의文義나 전고 典故의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들을 공에게 자문하면 공이 유類에 따라 숨김없이 대답하였고, 간혹 응지應旨의 문자文字를 지을 경우에는 이따금 중씨의 손을 의뢰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진년 중추仲秋에 문인 민규호閔奎鎬는 삼가 기술하다. 24세(1809, 순조9) * 생원시生員試 합격 * 부친 호조참판 임명 * 10월 동지겸사은사부사冬至兼謝恩使副使인 부친을 따라 청나라로 출발, 12월 도착 25세(1810, 순조10) * 북경 40여일 머물며 청나라 고증학자 완원阮元ㆍ옹방강翁方綱ㆍ조강曹江 등과 교유 (2) 阮堂先生全集 권9, 詩, 我入京 與諸公相交 未曾以詩訂契 臨歸不禁悵觸 漫筆口號 我生九夷眞可鄙 多媿結交中原士 樓前紅日夢裏明 蘇齋門下瓣香呈 後五百年唯是日 閱千萬人見先生 用聯語 芸臺宛是 畵中覩 余曾藏芸臺小照 經籍之海金石府 土華不蝕貞觀銅 腰間小碑千年古 芸臺佩銅鑄貞觀碑 化度始自螴蜳齋 心葊號 攀 覃緣阮並作梯 君是碧海掣鯨手 我有靈心通點犀 埜雲墨妙天下聞 句竹圖曾海外見 况復古人如明月 却從先生指端現 野雲 善摹古人眞像 多贈我 翁家兄弟聯雙璧 一生難遣愛錢癖 蓄古錢屢巨萬 靈芝有本醴有源 爾雅迭宕高一格 最憐劉伶作酒頌 三山 徐邈聊復時一中 夢竹 名家子弟曹玉水 秋水爲神玉爲髓 覃門高足劇淸眞 落筆長歌句有神 介亭 却憶當初相逢日 但 知有逢不有別 我今旋踵卽萬里 地角天涯在一室 生憎化兒弄狡獪 人每喜圓輒示缺 烟雲過眼雪留爪 中有一段不磨滅 龍腦 須引孔雀尾 琵琶相應蕤賓鐵 黯然銷魂別而已 鴨綠江水盃中渴 북경에 들어가서 제공들과 서로 사귀기는 했으나 시로써 계합을 다진 적은 없었다. 귀국할 무렵에 섭섭한 회포를 금할 길 없어 만필로 구호하다. 내 구이에 났으니 비루할 수밖에 없소. 중원의 선비들과 사귐 맺기 부끄럽네. 누 앞의 붉은 해는 꿈속에 밝았어라. 소 재선생 문하에 판향을 바쳤다오. 오백 년을 뒤져서 다만 이날에야 천만 사람 다 거치어 선생을 뵈옵다니 운대는 완연하다 그 림 속에 보던 얼굴. 경적의 바다라면 금석의 부고로세. 토화도 정관 시대 구리를 못 삭히니, 허리에 찬 작은 비는 천년이 예 롭구나. 화도비를 만난 것은 진돈재 심암心葊의 호서 처음이라. 반담 연완 아울러 사다리가 되었다네. 그대 바로 한바다 고래 끄는 솜씨라면 내 지닌 신령한 마음 점서에 통한달까. 주 야운의 묵묘는 천하에 이름 높아 구죽도는 일찍이 해외에서 보았거 든 더구나 옛사람은 밝은 달과 같은지라. 선생의 손가락을 따라서 나타나네. 옹씨집 아우 언니 쌍벽이 어울리니 일생에 고 전벽古錢癖을 버리기 어렵구나. 영지는 뿌리 있고 예천은 근원 있어 질탕한 풍류는 한 격이 높고말고 주송 지은 유령을 누구 보다 사랑하고, 삼산三山 이따금 한 번씩 맞는다는 서막마저. 이름난 집 자제로 조옥수를 쳐다보면 가을물은 정신되고 옥은 뼈가 되었다오. 담계 문하 고제高弟로서 더함 없는 청진이라 붓대 아래 긴 노래는 글귀마다 신붙었네. 개정介亭 돌이켜 생각 하니 맨 처음 만난 날엔 만난 것만 반겼을 뿐 이별은 몰랐는데 내 지금 발치 돌리면 바로 곧 만 리라. 땅 모퉁이 하늘가가 김정희 생애와 행적 243

238 한 방에 있군그래 조물주의 농락이 너무도 교활하니 인간이란 둥글면은 이즈러짐 따라붙네. 눈을 거친 연운에도 눈에 남긴 발톱에도 그 가운데 삭지 않는 일단이 있고말고 용뇌는 모름지기 공작꼬리 끌어오고, 비파는 유빈의 철과 서로 응한다네. 가 물가물 혼 녹이긴 이별일 따름이라. 압록강물 술을 빚어 술잔으로 말려보세. 30세(1815, 순조15) * 정학연丁學淵의 소개로 초의草衣선사 만남 (3) 阮堂先生全集 권5, 書牘, 與草衣 一宿山中 若可以超諸有入三昧 第夢中妄說 多爲師輩見恠 能無山嘲林誚否 卽枉梵椷 可續未了之緣 且欣且頌 海師一味 淸旺 結成情根 不可斷除也 俗人塵事 依舊相仍 無足爲累於梵聽也 珠串玆以奉呈 而原爲四十二顆 以應四十二章之數 二 則見壞 可恨奈何 평생의 벗이었던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산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니 마치 제유諸有를 벗어나 삼매三昧의 경지로 들어선 것 같았소. 다만 꿈속의 잠꼬대가 많 이도 사의 무리에게 괴이한 꼴을 보였으니 행여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지람하는 일이나 없었는지요. 바로 곧 범함梵椷을 받 아보니 자못 못 마친 인연을 다시 잇는 듯하여 기쁨과 칭송이 어울리는구려. 해사海師는 한결같이 맑고도 왕성한지요. 정근情 根이 얽히고 맺히어 끊어 없애지도 아니 되외다. 속인은 따분한 일들이 여전히 덮치고 덮치니 족히 범청梵聽에 누를 끼칠 게 없고말고요. 주관珠串(염주)은 이 편에 보내는데 원래는 마흔두 알로서 사십이장四十二章의 수에 응한 것이었으나 둘은 깨어져 없어졌으니 한스럽지만 어쩌겠소. (4) 阮堂先生全集 권5, 書牘, 與草衣(其三十六) 僧來得草緘 又得茶包 此中泉味 是冠岳一脉之流出者 未知於頭輪甲乙何如 亦有功德之三四 亟試來茶 泉佳茶佳 是一段 喜懽緣 是茶之使而非書之使 茶甚於書耶 且審近日 連住一爐香 有甚勝緣 何不破除藤葛 一筇遠飛 共此茶緣也 且於近日 頗於禪悅 有蔗境之妙 無與共此妙諦 甚思師之一與掀眉 未知以遂此願耶 略有拙書寄副 收入也 雨前葉揀取幾 缺 耶 何時 續寄 鎭此茶饞也 日以企懸 不宣 向薰許一紙 幸轉付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중이 와서 초의의 서한을 전하고 또 다포도 전해주었네. 이곳의 샘맛은 바로 관악산冠岳山 한 맥에서 흘러나온 것인데 두륜산頭輪山에 비하면 갑을甲乙이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공덕功德의 삼사三四는 있겠기에 빨리 보내온 차를 시험해 보니 샘맛도 좋고 차맛도 좋아서 바로 한 조각 희환의 인연이었네. 이는 차가 그렇게 만든 것이요 편지로 그런 것은 아니니 그렇다면 차가 편지보다 낫단 말인가? 더구나 근일에는 일로향 실一爐香室에 죽 머물러 있다니 무슨 좋은 인연이 있는 거요. 왜 갈등을 부숴버리고 한 막대를 멀리 날려 나와 이 차의 인연 을 같이 아니하는 거요. 또한 근자에 자못 선열禪悅에 대하여 자경蔗境의 묘가 있는데 더불어 이 묘체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몹시도 사와 한 번 눈썹을 펴고 토론하고 싶은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약간의 졸서가 있어서 부쳐 보내니 거두어들이기 24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39 바라오. 비오기 전의 잎은 얼마나 가려 놓았는지. 어느 때나 부쳐 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 날로 바라며 불 선. 향훈에게 가는 한 장의 편지는 행여 전달해 주기 바라네. 31세(1816, 순조16) * 진흥왕眞興王 순수비巡狩碑를 발견하고 고증.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성 (5) 阮堂先生全集 권1, 攷, 眞興二碑攷 右新羅眞興王巡狩碑 在咸鏡道咸興府北一百一十里黃草嶺下 碑今亡失 余得拓本只二段 合而觀之 爲十二行 其長廣不可 得 今以拓本觀之 外爲欄格 而下段第二行朕字 第三行應字下 卽接以格應字 與第五行下相對 上段則亡缺 現存最高者 第 五行未字也 今上自未字 下至于 以漢建初尺度之 長四尺四寸五分也 廣則第一行有格 第十二行下段外亦有格 以建初尺 爲 廣一尺八寸 而格外長廣及厚 俱不可得也 碑凡十二行 則以格可定其下段之字 極亦以格可定 但上段亡失 其極幾字不可定 今以最高第五行爲準 序之於後 第一行二十字全 最上八字 比第五行 缺四字 最下也字 與第五行之第二十四字相對 下仍有空 然此行旣爲題首 則也字是其 極 非有缺也 第二行字全者二十八 不全者一 合二十九字 最上世字 比第五行 缺二字 下極朕字 與第五行同極 第三行字全 者二十七 不全者一 刓者二 合三十字 最上紹字 比第五行 缺一字 下極應字 與第五行同極 第四行字全者二十六 不全者一 刓者三 合三十字 最上四字 比第行 缺一字 下極化字 與第五行同極 第五行字全者二十七 不全者一 刓者三 合三十一字 最上未字 此碑中最高者也 下極字 與第四行化字同極 第六行字全者一十九 刓者八 空格一 合二十八字 最上字 比第五行 缺二字 最下字 比第五行 缺一字 第七行字全者一十八 不全者二 刓者一 空格二 合二十三字 最上字 比第五行 缺七字 最 下字 比第五行 缺一字 第八行字全者一十九 不全者二 合二十一字 最上字 比第五行 缺八字 最下字 比第五行 缺二字 第 九行字全者一十六 不全者三 合一十九字 最上字 比第五行 缺九字 最下字 比第五行 缺二字 第十行字全者一十四 不全者 二 合一十六字 最上字 比第五行 缺一十三字 最下字 比第五行 缺二字 第十一行一十三字全 最上典字 比第五行 缺一十 五字 最下舍字 比第五行 缺三字 第十二行一十二字全 最上喙字 比第五行 缺一十六字 最下尹字 比第五行 缺三字 已上 凡十二行 字全者二百三十九 不全者一十三 刓者一十七 空格者三 總二百七十二字 碑之上段旣亡 則其圭首與篆額 未可詳 知 然北漢之碑 與此碑同時而不爲圭首 此碑似與北漢碑同例矣 碑文云八月廿一日癸未 又云歲次戊子秋八月 按新羅眞興王 二十九年歲在戊子 卽其改元大昌之年也 當高句麗平原王十年 百濟威德王十五年 在中國爲陳廢帝伯宗光大二年 北齊後主 緯天統四年 後周武帝邕天和三年 後梁世宗巋天保七年也 (중략) 正喜案黃草嶺 在咸興府北一百一十里 嶺下有院 古今記者或作草坊 或作草方 或作草黃 或作黃草 其實一也 近世兪文翼公 拓基 家所藏金石錄 卽詮次碑目者 云 三水草坊院 眞興王巡狩碑 葢以三水郡有草坪院 或稱草坊 故今人或欲求之於三水 非其實也 且此碑第二行下極有朕字 第三行最上有紹字 而上段旣缺 紹字上之有幾字 今不可知 而備考云朕紹太祖之基 以 紹字直承朕字謬矣 以王位作王統亦謬 海東集古錄云 碑十二行 行三十五字 全碑爲四百二十字 而滅泐不可辨 可辨者僅二百七十八字 出文獻備考 正喜案十二行 行三十五字 則全碑無空格然後爲四百二十字也 然以今拓本現存者觀之 已於第一行下 有空格七字 第六行有空格一字 第七 行有空格二字 則不可爲四百二十字 其說踈矣 且拓本字全者二百三十九 不全者一十三 而今云可辨者僅二百七十八字 又云 行三十五字 皆未知何據 此時所見 不出於今之拓本 而以意臆之 懸空爲說也 (중략) 右新羅眞興王巡狩碑 在今京都北二十里北漢山僧伽寺傍碑峯之上 長六尺二寸三分 廣三尺厚七寸 鑿巖爲跗 上加方簷 今其 簷脫落在下 無篆額無陰記 凡十二行而字模糊 每行幾字不可辨 下則第六行賞字 第八行沙字爲字極 上則現存第一行眞字爲 最高 而其上莫辨 全碑可辨者爲七十字 而相與較對 則自第一行最高眞字 準第八行下極沙字 爲二十一字也 其可辨者 第一 行十二字 第二行三字 第三行四字 第四行三字 第五行七字 第六行四字 第七行三字 第八行十一字 第九行十一字 第十行 김정희 생애와 행적 245

240 八字 第十一行四字 第十二行 模糊不得一字也 北漢山者 漢武帝之疆域也 後爲高句麗所有 至眞興王時 屬於新羅 據三國史本紀 眞興王十六年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八年 置北漢山州 則眞興之新得也 又二十九年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南川州者 今之利川府也 至眞平王二十五年 高句 麗侵北漢山城 二十六年 廢南川州 還置北漢山州 以此觀之 北漢山者 新羅句麗之界也 此碑卽所以定界也 碑滅年月 不知 立於何年 然眞興本紀 南川置州 與比列置州同年 而黃草碑在比列廢州之年 則此碑似當同在南川置州之時 然此碑有南川軍 主字 則必在南川置州之後也 且眞興在位爲三十七年 則其立不出於二十九年 至三十七年之間也 且此碑第一行太王字 第五 行忠信精誠字 第七行道人字 皆與黃草碑仝 又夫智者卽黃草碑之大阿干比知夫知也 智與知同也 及干未智 亦黃草碑之所有 也 則二碑其同時歟 (중략)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嘉慶丙子秋 余與金君敬淵游僧伽寺 仍觀此碑 碑面苔厚 若無字然 以手捫之 似 有字形 不止漫缺之痕也 且其時日簿苔面 映而視之 苔隨字入 折波漫撇 依俙得之 試以紙拓出也 體與黃草碑酷相似 第一 行眞興之眞字稍漫 而婁拓視之 其爲眞字無疑也 遂定爲眞興古碑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其翌年丁丑夏 又與趙君寅永同上 審定六十八字而歸 其後又得二字 合 爲七十字 碑之左側 刻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又以隷字刻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 十八字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글로서, 실사구시 학풍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 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지금 탁본을 가지고 보건대, 밖은 난격欄格으로 되어 있어 하단下段 제2행의 짐朕 자와 제3행의 응應 자 밑은 바로 난격과 접接하였고, 응應 자는 제5행 맨 밑의 口와 서로 마주하였으며, 상단上段은 망결亡缺되었다. 현존한 글자로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제5행의 미未 자이다. 그리고 지금 위로 미未 자에서부터 아래로 口에 이르기까지를 한漢나라 건초척建初尺으로 재본 결과 길이가 4척 4촌 5푼이다. 넓이로 말하면, 제1행에 난격이 있고 제12행의 하단 밖에도 난격이 있 어 이를 건초척으로 재본 결과 넓이가 1척 8촌이다. 그러나 난격 밖의 길이와 넓이 및 두께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 비문이 모두 12행임은 난격으로 정할 수 있고 그 하단 글자의 끝도 또한 난격으로 정할 수 있으나, 다만 상단은 망실되어 그 끝까지가 몇 자인지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가장 높이 위치한 제5행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서술하는 바이다. 제1행은 20자가 완전하다. 가장 위에 위치한 팔八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넉 자가 모자란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야也 자는 제5행의 제24자에 해당한 구口 자와 서로 마주하였고 아래는 그대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줄은 기왕 제수題首이고 보면 이 야也 자가 바로 그 끝이요, 망결된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 다. - 모두 29자임 - 가장 위의 세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짐朕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3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두 자이다. - 모두 30자임 - 가장 위의 소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응應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4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 모두 30자임 - 가장 위의 사四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화化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5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 모두 31자임 - 가장 위의 미未 자는 이 비문 가운데서 가장 높이 위치한 글자이다. 아래 맨 끝의 구口자는 제4행의 화化 자 와 끝이 같다. 제6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깎인 것이 여덟 자이며 빈칸이 하나이다. - 모두 28자임 -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구口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7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8자이고 불완전 24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41 한 것이 두 자이며 깎인 것이 한 자이고 빈 칸이 둘이다. - 모두 23자임 - 가장 위의 氺 자가 제5행에 비하면 일곱 자가 모자 라고 맨 아래 冫 + 七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8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 모두 21자임 -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여덟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9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석 자이다. - 모두 19자임 - 가장 위의 阝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아홉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0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4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 모두 16자임 - 가장 위의 乀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3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 다. 제11행은 13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전 典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5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사 舍 자는 제5행에 비하 면 석 자가 모자란다. 제12행은 12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훼 喙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6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윤 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자가 모자란다. 이상 모두 12행에서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이며 깎인 것이 17자이고 빈칸이 셋으로 총 2백 72자이다. 비석의 상단이 이미 망실되었으니 그 규수 圭 首 와 전액 篆 額 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북한산 北 漢 山 의 비 또한 이 비 와 동시에 세워진 것인데 규수를 만들지 않았으니, 이 비도 북한산의 비와 같은 예일 듯하다. 비문 碑 文 에 이르기를 8월 21일 계미 癸 未 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차 歲 次 무자 戊 子 추팔월 秋 八 月 이라 하였으니, 상고하건대 신라 진흥왕 29년이 무자년으로 그 해가 바로 대창 大 昌 으로 개원 改 元 한 해이다. 이 해가 고구려 高 句 麗 평원왕 平 原 王 10년, 백제 百 濟 위덕왕 威 德 王 15년에 해당하 고, 중국에서는 진 폐제 陳 廢 帝 백종 伯 宗 의 광대 光 大 2년, 북제 후주 北 齊 後 主 위 緯 의 천통 天 統 4년, 후주 무제 後 周 武 帝 옹 邕 의 천화 天 和 3년, 후량 세종 後 梁 世 宗 귀 巋 의 천보 天 保 7년에 해당한다. (중략) 정희 正 喜 는 상고하건대, 황초령 黃 草 嶺 이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1백 10리쯤에 있고 그 영 嶺 밑에는 원 院 이 있는데, 고금 에 걸쳐 이를 기록하는 이들이 혹은 초방 草 坊 으로, 혹은 초방 草 方 으로, 혹은 초황 草 黃 으로, 혹은 황초 黃 草 로도 기록을 해왔으나 그 실상은 한가지이다. 근세의 유 문익공 척기 兪 文 翼 公 拓 基 의 집에 소장된 금석록 金 石 錄 - 곧 비목 碑 目 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 에 의하면 삼수 초방원의 진흥왕순수비[ 三 水 草 坊 院 眞 興 王 巡 狩 碑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삼수군에 초평원 草 坪 院 이 있어 이를 혹은 초방 草 坊 이라고도 일컫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혹은 삼수에서 이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나, 이는 사 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문 제2행의 맨 밑에 짐 朕 자가 있고, 제3행의 맨 위에 소 紹 자가 있으나, 상단 上 段 이 이미 이지러져 서 소 紹 자의 위로 몇 자가 더 있었는지를 지금 알 수 없는 일인데, 문헌비고 에서는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었다[ 朕 紹 太 祖 之 基 ] 고 새기어, 소 紹 자를 곧바로 짐 朕 자에 승접시킨 것은 잘못이다. 또 왕위 王 位 를 왕통 王 統 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다. 해동 집고록 海 東 集 古 錄 에 이르기를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씩이어서 전 비문은 4백 20자인데, 이지러져서 분변할 수가 없고 분변할 만한 것은 겨우 2백 78자이다. 고 하였다. - 문헌비고 에서 나온 말이다 - 정희는 상고하건대, 12행에 행마다 35자인 경우, 전 비문에 빈칸이 하나도 없어야만 4백 20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현존 한 탁본 拓 本 을 가지고 본다면 이미 제1행의 하단에 빈칸이 일곱 자나 있고 제6행에는 빈칸이 한 자가 있으며 제7행에도 빈칸 이 두 자나 있어 4백 20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설 說 이 엉성하다. 또 탁본 가운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인데, 지금 여기에는 분변할 만한 것이 겨우 2백 78자이다 하고, 또 행마다 35자이다 고 하였으니, 모두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때에 본 것도 아마 지금의 탁본에 불과했을 터인데, 사견으로 억측하여 근거 없이 말을 한 것이 다. (중략)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경도 京 都 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 僧 伽 寺 곁의 비봉 碑 峯 위에 있다. 길이 는 6척 2촌 3푼이고 넓이는 3척이며 두께는 7촌이다. 바위를 깎아서 밑받침으로 삼았고, 위에는 방첨 方 簷 을 얹었는데 지금은 그 방첨이 밑에 떨어져 있다. 전액 篆 額 이 없고 음기 陰 記 도 없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 행마다 몇 자씩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 아래로는 제6행의 상 賞 자와 제8행 의 사 沙 자가 글자의 끝이 되었고, 위로는 현존한 제1행의 진 眞 자가 가장 높은데 그 이상은 분별할 수가 없다. 전 비문 가운 데 분별한 것이 70자인데, 이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제1행의 가장 높이 위치한 진 眞 자로부터 제8행 아래 맨 끝의 사 沙 김정희 생애와 행적 247

242 자까지를 기준하여 모두 21자이다. 그중에 분변할 만한 것은 제1행에 12자, 제2행에 3자, 제3행에 4자, 제4행에 3자, 제5행에 7자, 제6행에 4자, 제7행에 3자, 제8행에 11자, 제9행에 11자, 제10행에 8자, 제11행에 4자이고, 제12행은 모호하여 한 자도 알 아볼 수가 없다. 북한산北漢山은 한 무제漢武帝의 강역疆域이었는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소속되 었다. 삼국사 본기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획정劃定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 州를 설치했으니, 이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다. 또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는데, 남천주는 지 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 진평왕 2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략하였고, 26년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 주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니, 이 비석은 곧 경계를 정한 것이었다. 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남천주를 설치한 때가 비렬홀주比列忽州를 폐한 때와 서로 같은 해인데, 황초령의 비가 비렬홀주를 폐하던 해에 세워졌고 보면 이 비도 의당 같이 남천주를 설치하던 때에 세워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있으니, 반드시 남천주를 설치한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또 진흥왕의 재위在位 기간이 37년이고 보면, 그것이 세워진 때는 29년에서 37년에 이르기까지의 사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비문 제1행의 태왕太王이란 글자와 제5행의 충신정성忠信精誠이란 글자와 제7행의 도인道 人이란 글자는 모두가 황초령의 비문과 같다. 또 부지夫智는 곧 황초령비문의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이니, 지智는 지知 와 같은 것이다. 급간及干 미지未智 또한 황초령비문에 있는 것이니, 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인가 싶다. (중략)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청 仁宗의 연호, )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 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 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隸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6) 阮堂先生全集 권1, 說, 實事求是說 漢書河間獻王傳云實事求是 此語乃學問最要之道 若不實以事而但以空疎之術爲便 不求其是而但以先入之言爲主 其于聖 賢之道 未有不背而馳者矣 漢儒于經傳訓詁 皆有師承 備極精實 至于性道仁義等事 因爾時人人皆知 無庸深論 故不多加推 明 然偶有注釋 未甞不實事求是也 自晉人講老莊虛無之學 便于惰學空疎之人 而學術一變 至佛道大行而禪機所悟 至流于 支離 不可究詰之境 而學術又一變 此無他 與實事求是一語 盡相反而已 兩宋儒者闡明道學 于性理等事 精而言之 實發古 人所未發 惟陸王等派 又蹈空虛 引儒入釋 更甚于引釋入儒矣 竊謂學問之道 旣以堯舜禹湯文武周孔爲歸 則當以實事求是 其不可以虛論遁于非也 學者尊漢儒 精求訓詁 此誠是也 但聖賢之道 譬若甲第大宅 主者所居 恒在堂室 堂室非門逕 不能 入也 訓詁者門逕也 一生奔走于門逕之間 不求升堂入室 是廝僕矣 故爲學 必精求訓詁者 爲其不誤于堂室 非謂訓詁畢乃事 24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43 也 漢人不甚論堂室者 因彼時門逕不誤 堂室自不誤也 晉宋以後 學者務以高遠 尊孔子 以爲聖賢之道不若是之淺近也 乃厭 薄門逕而弃之 別于超妙高遠處求之 于是乎躡空騰虛 往來于堂脊之上 窓光樓影 測度于思議之間 究之奧戶屋漏 未之親見 也 又或棄故喜新 以入甲第爲不若是之淺且易 因別開門逕而爭入之 此言室中幾楹 彼辨堂上幾棟 校論不休 而不知其所說 已誤入西隣之乙第矣 甲第主者哦然笑曰 我家屋不爾爾也 夫聖賢之道 在于躬行 不尙空論 實者當求 虛者無據 若索之杳冥 之中 放乎空闊之際 是非莫辨 本意全失矣 故爲學之道 不必分漢宋之界 不必較鄭 王 程 朱之短長 不必爭朱 陸 薛 王之 門戶 但平心靜氣 博學篤行 專主實事求是一語行之可矣 실사구시의 의미를 정리한 글이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유漢儒들은 경전 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 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의거하여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진晉나라 때 사람들이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허무虛無한 학설을 강론하여 학문을 게을리하는 허술한 사람들을 편 리하게 함으로부터 학술學術이 일변一變하였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짐으로써 선기禪機의 깨닫는 바가 심지어 지리해서 추구 하여 따질 수도 없는 지경이 됨에 이르러서 학술이 또 일변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 는다. 는 한마디 말과 모두가 상반相反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양송兩宋(北宋시대와 南宋시대를 합칭한 말)의 유자儒者들은 도학道學을 천명하여 성리性理 등의 일에 대해서 정밀하게 말해 놓았으니, 이는 실로 고인古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육왕陸王 등의 학파學派가 또 실 없는 공허空虛를 밟고서 유儒를 이끌어 석釋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석을 이끌어 유로 들어간 것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그윽 이 생각하건대, 학문하는 도는 이미 요순ㆍ우탕ㆍ문무ㆍ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았으니, 의당 사실에 의거해 서 옳은 진리를 찾아야지, 헛된 말을 제기하여 그른 데에 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자들은 훈고를 정밀히 탐구한 한유漢儒들을 높이 여기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일이다. 다만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마 치 갑제 대택甲第大宅과 같으니,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는데 그 당실은 문경門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훈고는 바로 문경이 된다. 그러나 일생 동안을 문경 사이에서만 분주하면서 당堂에 올라 실室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끝내 하인下人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당실을 들어가는 데 에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히 한 나라 때 사람들이 당 실에 대하여 그리 논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문경이 그릇되지 않았고 당실도 본디 그릇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晉ㆍ송宋 이후로는 학자들이 고원高遠한 일만을 힘쓰면서 공자孔子를 높이어 성현의 도 가 이렇게 천근淺近하지 않을 것이라 고 하며, 이에 올바른 문경을 싫어하여 이를 버리고 특별히 초묘 고원超妙高遠한 곳에서 그것을 찾게 되었다. 그 래서 이에 허공을 딛고 올라가 용마루[堂脊] 위를 왕래하면서 창문의 빛과 다락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의思議의 사이에서 이를 요량하여 깊은 문호와 방구석을 연구하지만 끝내 이를 직접 보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좋아하여 갑제甲第에 들어가는 일을 가지고 갑제가 이렇게 얕고 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 고 여기어 별도로 문경을 열어서 서로 다투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쪽에서는 실중室中에 기둥이 몇 개라는 것을 말하고, 저쪽에서는 당상堂上에 용마루가 몇 개라 는 것을 변론하여 쉴새없이 서로 비교 논란하다가 자신의 설說이 이미 서린西隣의 을제乙第로 들어간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 면 갑제의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르기를, 나의 집은 그렇지 않다 고 한다. 대체로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진실한 것은 의당 강구하고 헛된 것은 의 김정희 생애와 행적 249

244 거하지 말아야지, 만일 그윽하고 어두운 속에서 이를 찾거나 텅 비고 광활한 곳에 이를 방치한다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여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漢ㆍ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굳이 정현鄭玄ㆍ 왕숙王肅과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으며, 굳이 주희朱熹ㆍ육구연陸九淵과 설선薛瑄ㆍ왕수인王守仁의 문 호를 다툴 필요가 없이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 는 한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해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33세(1818, 순조18) * 해인사 중건 상량문 씀 (7) 阮堂先生全集 권7, 上樑文,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 竊以大雲普被 火宅回凉 法月重輪 寶刹湧瑞 滅三毒而超三界 更見歡喜之天 現十德而證十門 永奠堅牢之地 赤熛閱陽九 之厄 金粟增大千之光 盖聞一大事因緣顯妙用於虛空者 法海之相續也 萬有行功德貫眞諦於塵刹者 密印之相傳也 是故未甞 顚倒減增 寧有作止任滅 七仙揚殊勝之表 六祖囑秘密之要 廣大之華嚴寶藏 玄奧之陀羅聖果 卵生胎生濕生化生之所影現 無邊無量 一佛二佛三佛四佛之所住持 正等正覺 此圓法珠之三昧 妙襍華之一宗者也 夫伽倻山海印寺 白毫示光 東方爲不 動智境 金髻留像 南國竪無上等幢 繼釋迦成道之塲 山王標秀 符大乘說經之處 地德獻祥 在昔新羅 哀莊王轉仁王寶輪 聖 穆妃握天妃金鏡 紅流渙八德之水 牛頭張廣施之林 攝神匠於忉利天宮 儼然檀旃瑞相 弘願力於極樂世界 巍乎蓮華寶臺 霧 欱霞歕 接金繩於像殿 波譎雲詭 交珠網於香城 孤雲結文字之禪 絜家遯迹 朗空說菩提之義 選塲尋師 種種光中 遙抗芬皇 火珠之塔 非非相處 對映佛國七寶之池 爰有麗代舊鑱內典大藏 包東山北山之部 該唱吒唱嚩之音 佉盧神書 玄言無盡 毗尼 秘笈 白法難窮 如如覺後之詮 的的西來之意 飾之以赤堇髹漆 承之以大廈深簷 礎液流甛 鑽紙之蜂許釀 屋危嫌汚 誦唄之 禽禁翔 神物護持 寶氣充溢 在於震旦 無此汗漫 不見藏經 那知富貴 且如殊錫侈於宸翰 恩光耀於禪林 唐宗弁聖敎之文 宋 帝留名山之墨 龍章鳳藻 旣施外護之玄功 羊乘鹿車 爰暢內賜之盛典 帝機斡而慧日朗 聖澤覃而法源澄 十方之瞻視旣尊 大 衆之皈依亦久 迺玆融風起陸 烈焰煬空 華觀鷲園 可憐焦土 天界龍窟 盡歸沉灰 法有所不通 無賴淸凉之神力 運有所適値 亦燬慈恩之金身 然而獨留庋閣之書 不泯持世之具 龍樹之口海 波瀾永安 玄奘之性門 關鍵無恙 意者譆出之警匪偶 度化之 旨孔彰 鎔嗔煉癡 爇金剛之智焰 銷邪熄惡 煽光音之慧芒 所以山狂谷狠 不侵接廊之簷 玉焚石焦 能保溢宇之帙 是將標聖 諦於現刦 宣法曜於無方 雖空如來藏碎祖師關 猶有不滅者在 出斷常坑登眞實際 豈爲無明所焚乎哉爾乃悔懺普圓災障隨豁 鳩工不憚於裹足發誓並根於信心 遂汰愆而淘尤 永築功而基福 幻華界上 板蕩之悲同齎 祗樹園中 回向之願齊奮 銖累靑鳧 紫貝 粒聚銀粟金星 善女信男 析貨而贍力 宰官居士 歸珍而裕工 于是理法基襲奮觀 回眞照於頹運 隨滅卽生 握妙圓於隳 機 由喪復顯 整頓三千淨土 嚴飾五百寶樓 慈像瞻奇 慧路仰異 初佛後佛同名 日月燈明 過因來因悉現 百千億妙 欄楯幢塔 交錯 瑪瑙車渠匝環 或以圓相或以勝相 千燈續燃於一燈 或如樹形或如華形 彼界復明於此界 神衆則妥其幢盖 闍梨則安其 甁筇 鐵瓦苔函古春 寶爐香盤舊篆 夬見正果之脫惡道 譬如瑞蓮之出火坑 如是我聞 以偈偉唱 兒郞偉拋梁東 東方阿閦鞞 須彌光妙音 金剛勝菩薩 最降伏邪魔 兒郞偉拋梁南 南方虛空住 德雲法慧佛 次復須彌燈 次復日月燈 兒郞偉拋梁西 西方無量壽 精進無畏行 及大光大明 正觀日沒處 兒郞偉拋梁北 北方雲自在 雲自在王俱 衆生蔭慈覆 無心無着故 兒郞偉拋梁下 下方名聞佛 名光復達摩 大放獅子吼 撑天竪法幢 兒郞偉拋梁上 上方金團天 香光大焰肩 無上波羅樹 襍色寶華嚴 種種諸色相 悉從此地現 此是光明海 此是般若海 此是淸淨海 此是妙法海 此是圓覺印 此是首楞印 此是金剛印 此是法華 印 願長住此界 此海而此印 25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45 중건된 해인사의 상량문으로 김정희의 불교에 대한 높은 식견을 살펴볼 수 있다. 그윽이 헤아리건대 대운 大 雲 이 널리 덮임에 화택 火 宅 이 서늘한 데로 돌아오고 법월 法 月 이 겹바퀴가 되매 보찰 寶 刹 은 상 서가 솟았도다. 삼독 三 毒 을 없애고 삼계 三 界 를 뛰어나니 다시 환희의 하늘을 보고 십덕 十 德 을 나타내고 십문 十 門 을 증명하니 길이 견뢰의 땅에 정했구려. 붉은 불똥은 양구 陽 九 의 액을 그치고 금속 金 粟 은 대천 大 千 의 빛을 더하도다. 대개 들으니 하나의 대사 大 事 의 인연이 묘용 妙 用 을 허공 虛 空 에 나타내는 것은 법해 法 海 의 서로 이음이요, 만 가지 행실의 공덕이 진체 眞 諦 를 진찰 塵 刹 에 관통하는 것은 밀인 密 印 의 서로 전함이라 하였소. 이런 고로 전도 顚 倒 나 감증 減 增 이 없었는데, 어찌 작지 作 止 와 임멸 任 滅 이 있으리까. 칠선 七 仙 은 수승 殊 勝 의 표 表 를 드날리고, 육조 六 祖 는 비밀의 요결 要 訣 을 부치도다. 광대 한 화엄 華 嚴 의 보장 寶 藏 이요 현오 玄 奧 한 타라 陀 羅 의 성과 聖 果 로서 난생 卵 生 ㆍ태생 胎 生 ㆍ습생 濕 生 ㆍ화생 化 生 의 영현 影 現 하는 바라 가도 없고 양 量 도 없으며, 일불 一 佛 ㆍ이불 二 佛 ㆍ삼불 三 佛 ㆍ사불 四 佛 의 주지 主 持 하는 바라 정등 正 等 이요 정각 正 覺 이니, 이는 원법 주 圓 法 珠 의 삼매 三 昧 요, 묘잡화 妙 襍 華 의 일종 一 宗 인 것이다. 무릇 가야산 해인사는 백호 白 毫 가 빛을 보이매 동방은 부동지 不 動 地 의 지경이 되고, 금계 金 髻 의 상 像 을 남겼으니 남국에 무상등 無 上 等 의 당 幢 을 세웠네. 석가 釋 迦 의 성도 成 道 의 장 場 을 이었으니 산왕 山 王 이 빼어남을 표하고, 대승 大 乘 의 설경 說 經 의 곳 과 부합되니 지덕 地 德 이 상서를 드리도다. 옛날 신라에 있어 애장왕 哀 莊 王 은 인왕 仁 王 의 보륜 寶 輪 을 굴리고, 성목비 聖 穆 妃 는 천비 天 妃 의 금경 金 鏡 을 쥐었으며, 홍류 紅 流 에는 팔덕 八 德 의 물이 넘실거리고, 우두 牛 頭 에는 광시 廣 施 의 숲이 우거지도다. 신장 神 匠 을 도리천궁 忉 利 天 宮 에서 관장하니 엄연 한 단전 檀 旃 의 서상 瑞 相 이요, 원력 願 力 을 극락 極 樂 의 세계에서 넓혀가니 높다란 연화 蓮 華 의 보대 寶 臺 로세. 안개가 자욱하고 노을 이 빛나니 금승 金 繩 은 상전 像 殿 에 맞대었고, 물결이 황홀하고 구름이 찬란하니 주망 珠 網 은 향성 香 城 에 어울리도다. 고운 孤 雲 ( 崔 致 遠 )은 문자의 선 禪 을 맺어 권속을 이끌고 자취를 감췄으며, 낭공 朗 空 은 보리 菩 提 의 의 義 를 설명하니 도량 道 場 을 가려 스승을 찾도다. 종종광 種 種 光 의 속에 분황 芬 皇 화주 火 珠 의 탑과 멀리 맞서고, 비비상 非 非 相 의 곳에 불국 佛 國 칠보 七 寶 의 못이 마주 비치 도다. 여기에 고려 시대 옛날 새긴 내전 內 典 의 대장 大 藏 이 있어, 동산 東 山 북산 北 山 의 부 部 을 감싸고 창타창박 唱 吒 唱 嚩 의 소리를 합했으니, 거로 佉 盧 의 신서 神 書 는 현언 玄 言 이 다함이 없고 비니 毗 尼 의 비급 祕 笈 은 백법 白 法 을 마치기 어렵도다. 여여 如 如 한 각후 覺 後 의 비결이요 적적 的 的 한 서래 西 來 의 뜻이로다. 적근 赤 菫 과 휴칠 髹 漆 로써 꾸미고 대하 大 廈 와 심첨 深 簷 으로써 바치도다. 주초 柱 礎 의 액 液 은 단물이 흐르니 찬지 鑽 紙 의 벌들이 꿀을 비지고 집 추녀[ 屋 危 ]가 더럽힐세라 범패 梵 唄 를 외는 새도 날아들지를 않네. 신물 神 物 이 감싸 유지하고 보기 寶 氣 가 차 넘치니 진단 震 旦 에 있어서는 이러한 한만 汗 漫 이 없을진대 장경을 보지 못하면 어찌 많고 귀함을 알쏜가. 더더구나 특수한 선사는 어찰 御 札 이 화사하여, 은총의 광영이 선림 禪 林 에 빛나네. 당종 唐 宗 이 지은 성교 聖 敎 의 서문 序 文 이 며 송제 宋 帝 가 남긴 명산 名 山 의 묵적 墨 跡 일레. 용장 龍 章 과 봉조 鳳 藻 는 이미 외호 外 護 의 깊은 공을 베풀었고 양승 羊 乘 과 녹거 鹿 車 는 자못 내사 內 賜 의 성전 盛 典 이 거룩하도다. 제기 帝 機 를 돌리자 혜일 慧 日 이 명랑하고 성택 聖 澤 이 거룩할싸 법원 法 源 이 맑도다. 시방 十 方 의 첨시 瞻 視 도 이미 높거니와 대중의 귀의 歸 依 도 또한 오래로다. 이해에 미쳐 누그러진 바람이 뭍에서 일자 맹렬한 불꽃이 공중을 덮어 화관 華 觀 과 취원 鷲 園 은 가련하게도 초토가 되고 천계 天 界 와 용굴 龍 窟 은 다 침회 沈 灰 로 돌아갔네. 법도 통하지 않는 데가 있으니 청량 淸 涼 의 신력을 힘입을 수 없고 운 運 도 어 쩌다 당하는 수가 있으니 또한 자은 慈 恩 의 금신 金 身 이 불타도다. 그러나 홀로 기각 庋 閣 의 책만은 남아, 세상 유지할 기구는 없어지지 않았네. 용수 龍 樹 의 구해 口 海 는 파란 波 瀾 이 길이 편안 하고 현장 玄 奘 의 성문 性 門 은 관건 關 鍵 이 탈이 없도다. 아마도 희출 譆 出 의 경보 警 報 는 우연이 아닐진대, 도화 度 化 의 조지 詔 旨 가 심히 빛나도다. 진 瞋 을 녹이고 치 癡 를 달구니 금강 金 剛 의 지염 智 焰 이 활활 타고 사 邪 를 녹이고 악을 제거하니 광음 光 音 의 혜망 慧 芒 이 펼치도다. 이 때문에 산과 골짝은 무너지고 벌어져도 행랑에 접한 처마에는 침노하지 못했고, 옥과 돌은 그슬리고 탔지만 능히 집 김정희 생애와 행적 251

246 에 넘치는 책은 보존됐으니, 이는 장차 성체聖諦를 현겁現劫에 표본하고 법요法曜를 무방無方에 선포함이라. 비록 여래如來의 장藏을 비우고, 조사祖師의 관關을 깨뜨려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어 존재하며, 단상斷常의 구덩이를 벗어나서 진실眞 實의 즈음에 올랐으니 어찌 무명無明의 불타는 바가 됐겠는가. 마침내 참회懺悔가 크게 뚜렷하고 재장災障이 따라서 걷히니 공 장工匠을 모으매 과족裹足을 꺼리지 않고 다짐을 발하니 모두 신심信心에 근본하도다. 그래서 허물을 씻고 원망을 맑히고 길이 공을 쌓아 복을 다지니 환화幻華의 경계 위에 판탕板蕩의 서러움을 함께 품고, 기수원祇樹園 안에 회향回向의 소원이 일제히 분발했네. 수銖로 쌓인 청부靑鳧와 자패紫貝요 싸라기 모여진 은속銀粟과 금성金星 이며 선녀善女와 신남信男은 물화物貨를 짜개어 힘을 보태고 재관宰官 거사居士는 진보珍寶를 돌려 일을 치르게 하도다. 이에 법기法基를 수리하고 구관舊觀을 인습하여, 진조眞照를 퇴운頹運에 돌리니 사라짐에 따라 바로 생기고, 묘원妙圓을 휴 기隳機에 감아쥐니 잃은 데서 다시 나타나도다. 삼천의 정토淨土를 정돈하고 오백의 보루寶樓를 장식하니 자상慈像은 신기를 바라보고 혜로慧路는 특이를 우러르며 초불初佛과 후불은 일월등명日月燈明과 이름을 같이 하고 과인過因과 내인來因은 모두 백천억묘百千億妙를 나타냈도다. 난순欄楯과 당탑幢塔은 어울려 섞이고 마노瑪瑙와 거거車渠는 두루 고리하여 혹은 원상圓相으로 혹은 승상勝相으로 하니 한 등燈에 이어 천 등이 켜지고, 혹은 수형樹形같고 혹은 화형華形같아 피계彼界는 다시 차계此界에 밝 도다. 신중神衆은 그 당개幢蓋를 간직하고 도리闍梨는 그 병공甁筇을 안치安置하며 철기와[鐵瓦] 이끼함[苔函]은 고춘古春이요, 보 로寶爐와 향반香盤엔 옛 전篆이로세. 정과正果의 악도를 벗어남을 쾌히 보니 비하자면 서련瑞蓮이 화갱火坑에 솟은 듯하도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기에 육위六偉의 노래에 올리노라. 어기어차 들보의 동에 떡을 던지니 동방이라 아축비와 수미의 광묘 음과 금강의 승보살이 가장 사마를 강복시키네. 어기어차 들보의 남에 떡을 던지니 남방이라 허공에 머무른 덕운의 법혜불이 로세. 다음으론 수미등이요 다음으론 일월등이로세. 어기어차 들보의 서에 떡을 던지니 서방이라 무량수는 정진한 무외의 행 이로세. 대광 대명에 미치니 해지는 곳을 바로 보았네. 어기어차 들보의 북에 떡을 던지니 북방이라 구름이 자재하여 운자재 왕과 함께로세. 중생이 자애로운 비호를 받으니 무심하여 옛것에 애착이 없네. 어기어차 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니 하방이라 명문불과 명광과 다시 또 달마가 사자후를 크게 내치며, 하늘을 떠받아 법당을 세웠네. 어기어차 들보 위에 떡을 던지니 상 방이라 금단천이 있네. 향광의 대염을 견차肩次한 무상의 바라수요 잡색의 보화엄이라. 이종 저종의 모든 색상이 다 이곳으로부터 나타나니 이는 바로 광명해光明海요, 이는 바로 반야해般若海요, 이는 바로 청 정해淸淨海요, 이는 바로 묘법해妙法海요, 이는 바로 원각인圓覺印이요, 이는 바로 수릉인首楞印이요, 이는 바로 금강인金剛印이 요, 이는 바로 법화인法華印이라, 원컨대 길이 이 경계에 머물러, 이 해海에 이 인印으로. 36세(1821, 순조21) * 예문관 검열 (8) 阮堂先生全集 권2, 疏, 辭翰林疏 伏以臣卽接家信 則臣之父病 始崇炎暑之欝冒 重添感滯之交作 形症漸谻 轉側隨人 臣聞此報 神爽飛越 方寸煎迫 仍伏 念當此大小禁直不得替直之時 援私請急 極知悚惶 而情有所迫 按抑不得 忙陳短章 徑出禁扃 伏乞聖慈俯垂諒察 亟遞臣職 以便救護 仍治臣罪 以肅朝綱 千萬幸甚 예문관 검열직을 사임하기 위해 올린 상소이다. 삼가 아뢰건대, 신이 방금 가신家信을 접한 결과 신의 아비의 병이 처음에는 무더위를 받은 데서 빌미가 되었는데 게 다가 거듭 체증까지 겹침으로써 증상이 점차로 심해져서 드러누워 몸 뒤척거리는 것조차도 남을 기다려서 한다고 합니다. 신 25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47 이 이 소식을 듣고는 혼비백산하고 가슴이 오글오글 탑니다. 인하여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 크고 작은 금직禁直에 당직을 교 체할 수 없는 이때를 당하여 개인의 사정을 끌어다가 휴가를 청하는 것은 매우 황송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심 정이 몹시 긴박하여 억누를 수가 없는지라, 바삐 짧은 소장疏章을 올리고 지레 금문禁門을 나가오니, 삼가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신을 굽어 살펴주시어 속히 신의 직임을 교체해서 병구완하는 데에 편리하게 해주시고, 이어서 신의 죄를 다스리 어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38세(1823, 순조23) * 규장각 대교 (9) 阮堂先生全集 권2, 疏, 辭奎章閣待敎疏 伏以臣於日昨 伏奉前望特點 以臣爲奎章閣待敎 繼又瀛舘華聲 一時並叨 臣誠惝怳駴懔 五情失守 不省措躬之所也 噫 國朝舘閣之選 何莫非淸峻 而必以內閣爲重 閣職又以待敎爲新進之極選 盖自設閣以來 膺是選居是職者 擧皆鴻詞博學 爾 疋彪炳 令聞峻望 標準乎朝著 儁采麗藻 領袖乎藝林 于以奉謨訓而處邇密 參論思而掌誥命 洪惟我先大王右文作人之化 權 輿於是 其責任之綦重 掄揀之愼嚴 曷甞有如臣無似苟然充位者乎 是以先大王甞於本閣題名記引 若曰典守編輯奉審之職 則 可人人能 而能稱其選與否 顧其人何如耳 夫以當日位著之盛如彼 而聖考之其難其愼 丁寧勉戒又如此 此實我殿下所當遵守 者也 臣少小失學 材又下劣 面墻五經 掛壁三史 直是四十無聞之空空一鄙夫耳 倖籍先蔭 濫竊科第 出入史局 周旋邇列 亦 已四載之久 姸媸長短 宜莫逃於淵鑑之俯燭 迺玆煌煌恩誥 忽及於不當及之人 苟使臣奔走趍役於人人能者 尙患其難能 至 於稱選與否 尤非一毫可擬 則以殿下則哲之明 奚取於臣誤恩徒歸於輕授愼簡殆同於循次 以是閣規模制置之盛 緣臣而無難 壞了 至於此極 寧不懔然寒心 且臣黍當曝史之役 行己辭朝 理卽登程 第緣臣父之病 適値節換之交 冷泄暴添 焦灼罔措 萬 無離捨之望 不得不容俟一宿 際承新命 牙牌儼臨 雖卽章皇叨謝 始則違君命不宿之義 終又致曬事愆期之失 情固出於迫隘 跡自涉於慢命 惶蹙之私 非但爲新啣之難冒而已 玆敢畢暴情實 仰瀆崇嚴 伏乞聖明並賜諒察 將臣新授職名 亟行鐫改 仍治 臣不職之罪 以肅朝綱焉 규장각 대교를 사임하고자 올린 상소이다. 삼가 신臣이 일전에 전망前望의 특점特點을 받아 규장각 대교가 되었는데, 이어서 또 영과瀛館의 화려한 명성을 일시에 아울러 차지하게 되니, 신은 참으로 당황스럽고 놀랍고도 두려워서 오정五精이 벌벌 떨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국조國朝 관각館閣의 선발은 그 얼마나 모두가 청준淸峻했습니까마는 그 중에도 반드시 내각內閣을 중히 여겼고, 각직 閣職중에도 또 대교를 신진新進의 극선極選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내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선발을 받아 이 직職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박식하고 문장을 잘하며 인품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훌륭한 명성과 높은 인망이 조정에 표준이 되고, 뛰어난 풍채와 아름다운 문장이 문단에 영수가 되어, 그러한 조건으로 모훈謨訓을 받들어 가까운 곳에 처하고 논사論思에 참 여하여 고명誥命을 관장하였습니다.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글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하신 교화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책임의 막중 함과 간선揀選의 신중하고 엄격함에 있어 어찌 신 같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구차하게 자리에 채워진 자가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대왕께서 일찍이 어제하신 본각本閣 제명기題名記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전수典守나 편집編輯이나 봉심奉審의 직 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으나, 능히 그 선발選拔에 맞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당시 조정 인물의 성대하기가 저러하였는데도 성고聖考께서 그 어렵게 여기시고 신중히 하 시어 정녕스럽게 권면하고 경계하심이 또 이러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 전하께서 의당 준수하실 바입니다. 김정희 생애와 행적 253

248 신은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하였고 재주 또한 용렬하여 오경五經에 대해서는 담장을 마주한 듯 깜깜하고, 삼사三史도 전혀 읽지 못해서 바로 이 40세가 되도록 아무런 명성이 없는 무식한 일개 비루한 사내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선음先蔭을 힘 입어 외람되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을 출입하면서 측근의 반열에 주선한 지가 또한 이미 4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신의 좋고 나쁨과 길고 짧은 것이 의당 전하의 깊은 감식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빛나는 은총의 고명誥命이 갑자기 미쳐서는 안될 사람에게 미쳤습니다. 가사 신으로 하여금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에 분주히 종사하게 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능히 해내기 어려움이 걱정되는 터이니, 선발에 맞는지 여부에 이르 러서는 더욱이 추호도 비길 만한 처지가 못됩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즉철則哲의 밝으심으로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시어, 그릇 된 은총은 한갓 벼슬을 가벼이 제수하는 데로 돌아가고, 신중히 간선하는 일은 자못 차례나 따르는 것과 같게 하심으로써 이 각閣의 규모規模와 제치制置의 성대함을 신으로 말미암아 쉽사리 무너지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두려워서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또 신이 외람되이 포사曝史의 일을 당하여 이미 조정에 하직인사를 올렸으니, 도리상 바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의 아비의 병이 마침 환절기를 만나서 설사병이 갑자기 더침으로 인연하여 마음이 졸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지경 이라, 도저히 그냥 떠나버릴 수가 없어 부득불 하룻밤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신명新命을 받았는바 아패牙牌가 엄연히 임하였는지라, 비록 즉시 장황하게 외람되이 사은한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군명君命을 재우지 않는 의리에 위배되었고 종당에는 또 서적 포쇄의 일에 시기를 놓친 과실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정리는 진실로 긴박한 데서 나왔으나 행적은 절로 군명을 지체시킨 데에 관계되는지라, 몹시 황공한 마음에 비단 새 직함만 무릅쓰기 어려울 뿐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에 감히 신의 정실精實을 다 드러내서 우러러 숭엄하신 성명께 아뢰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아울러 양찰諒察하시어 신에게 새로 제수한 직명을 속히 깎아버리시고 이어서 신의 제대로 봉직하지 못한 죄를 다스려 조정의 기강 을 엄숙하게 하소서. 51세(1836, 헌종2) *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10) 阮堂先生全集 권2, 疏, 辭大司成疏 伏以臣厚蒙聖朝至仁至渥 拔之沈淪之中 收之拂拭之列 嗚呼 臣之不暝之前 一呼一息 一飮一啄無往非慈覆之天再造之日 也 雖使臣優遊邱壑 歌詠聖澤 以沒餘齒臣之涯分自足 志願已畢矣 不自意收簪之恩 屨及於夙夜 感惶怵惕 趍走爲恭 昵瞻 觚稜 亦已多時 且伏况兩聖朝御製編印之役 是未死賤臣終事之地 依日月之末光 奉雲漢之遺墨 殫竭寸誠 庶效涓報 祗知與 聞之是幸 不恤懢猥之爲悚 顧安敢仰藉寵靈 復冀淸揚 忘有夢寐之或及榮塗名塲半跬寸程也 乃者國子新命 忽下於千萬慮想 之外 臣伏奉恩旨震駴隕越 惶汗浹衣 寔不省措躬之所 噫 是職也 卽榮塗之峻選 名塲之極望 世所稱師儒之長也 臣之無似 湔劣 最居人下 淺藝薄識 無一可稱 非徒反躬之甚明 抑亦同朝之所共知 又焉敢自逃於聖鑑之俯燭也 雖如閒曹漫仕無甚綦 重 臣實踧踖却顧之不暇 况作成人材 丕闡文風 豈臣所可責 申明庠術之制 模楷考課之法 豈臣所可任 以周官成均樂正中和 之職 仰贊我聖朝一初聲明之治 尤豈臣所可承當也哉 參前倚衡 趍膺無路 伏乞聖明深推淸秩之不可謬加 微諒之不可强拂 亟收誤恩 回授可堪之人 以嚴公器 以安私分焉 대사성을 사임하고자 올린 상소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성조聖朝의 지극한 인자함과 지극한 대우로 곤경困境 속에서 끌어내시어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254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49 열列로 거두어주신 은혜를 두터이 입었습니다. 그러니 아, 신이 눈을 감기 전까지는 숨 한 번 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밥 한 술 떠먹는 것이 모두가 인자하신 하늘이 신을 재생시켜준 날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비록 신으로 하여금 산림 속에 한가 히 지내면서 성상의 은택이나 노래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더라도 신의 분수에는 스스로 만족하여 소원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벼슬을 제수하는 은전이 조석으로 누차 이르니, 감격하고 황송하고 두려움으로 말하면 빨리 달려가는 것 이 공손함이겠거니와 대궐에서 가까이 뫼시던 것도 이미 많은 기간이었습니다. 또 더구나 두 성조聖朝의 어제御製를 편집 간 행하는 일은 바로 죽지 못한 천신賤臣의 일을 마치는 자료가 되는 것이라, 일월日月(여기서는 임금을 비유함)의 위광威光의 나머 지를 의지하여 운한雲漢의 유묵遺墨을 받들어서 작은 정성을 다하여 변변찮은 보답이나마 바치려고 하니, 다만 여기에 참여하 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있을 뿐, 외람됨이 송구스러움은 염려하지도 않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두터운 은총을 우 러러 빙자하여 다시 청현하기를 바라서 망녕되이 꿈에라도 영명榮名의 길을 반걸음이나마 가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에 성균관 대사성의 새 제명除命이 갑자기 천만 생각 밖에 내려왔는지라, 신은 삼가 은지恩旨를 받들고는 하 도 두려워 놀랍고 경황이 없어 식은땀이 옷을 흠뻑 적시는 가운데 진실로 몸둘 곳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아, 이 직임은 바로 영도榮塗의 높은 선발이요 명장名場의 더없는 인망으로서 세상에서 사유師儒의 장長 이라고 일컫는 것 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고 용렬하여 가장 남의 밑에 맴돌며, 재주와 식견 또한 천박하여 한 가지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신 같은 위인이야말로 한갓 자신을 반성해 보아서 잘 알뿐만 아니라 또한 온 조정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 또 어떻게 감히 굽어 통촉하시는 성상의 지감을 스스로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리 긴중하지 않는 한산한 부서의 별 볼일 없는 직임이라 할지라도 신은 실로 삼가고 주저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 인데, 더구나 인재人材를 양성하고 문풍文風을 크게 천양하는 일을 어찌 신이 책임질 수 있겠으며, 상술庠術의 제도를 거듭 밝 히고 고과考課의 법을 모범적으로 하는 것을 어찌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주관周官 의 성균 악정成均樂正이 중화中 和를 교도하는 직임으로 우리 성조聖朝께서 맨 처음 선포하신 치화治化를 돕는 일을 더욱 어찌 신이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불합당한 조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서 달려가 응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청요직을 잘 못 제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미천한 사람의 소신도 억지로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헤아리시고, 잘못 내려진 은명 을 속히 거두어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돌려주시어 공기公器(관직을 뜻함)를 엄중하게 하고 사분私分(개인의 분수)을 편안 하게 하소서. 55세(1840, 헌종6) * 동지부사. 윤상도尹尙度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 귀양 (11)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瀛洲禾北鎭途中 村裏兒童聚見那 逐臣面目可憎多 終然百折千磨處 南極恩光海不波 제주도 화북진에 도착했을 때 광경을 묘사한 글이다. 마을 안 아이들이 무얼 보려 모였는지. 귀양살이 면목이 하도나 가증한데, 끝끝내 백천 번을 꺾이고 갈릴 때도 임의 은혜 멀리 미쳐 바다 물결 아니 쳤네. 화북진은 당시 제주도에 배가 닿는 곳이었다. 이곳에 처음으로 당도한 그가 본 모습은 자연의 모습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기를 비웃는 사람들의 구경모습이었다. 육지에서 온 고관의 모습이 그곳 촌아이들에게는 매우 기이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김정희 생애와 행적 255

250 (12) 阮堂先生全集 권3, 書牘, 與權彝齋[五] 閏春及初夏 連有函肅 似皆邀靑覽 自入夏直到秋旬 百日阻裭 玆與家書而不得見 陸海之間截 雖非異事 不若同世幷時 仍伏問崇體送夏迎秋 神葆曼福 銓擾未卸 太耐政月 無他牽纏 潭閤匀吉 大小悉佳 區區詹祝 無日不倚斗勞勞 累狀瘴瘧三 朔 無以醫治 任其寒熱之凌虐 任冉過八十餘日 眞元漸敗無餘 食補藥補 俱非可論 肌肉盡脫 不能坐穩床玆 尻欲生瘡 如是 而安能久乎 重之蟲虺從以惱之 半尺之蜈蚣 掌大之蜘蛛 橫行枕席 簷際乳雀 日以警蛇 皆北地所未見 五月晦間 經一風雨 大劫 瓦石飛舞空際 大樹倒拔連根 海濤黑立 中作霹靂 人皆幷頭接膝 互相抱持 若不能自保者然 此中人以爲甲寅大風後 四十八年初有云 病况以外所經歷 卽又如是矣 惟是任運 與之上下推盪 磨鈍於千苦 消受於百辛 無所不閱過耳 適聞有便 敢申數字 聊以告存 存亦何爲 北望神長 此中風土人物 天荒尙未闢破 椎魯無知 卽何異於魚蠻蝦夷 其中亦有秀拔超倫之奇 其所讀不過通鑑孟子兩種書而已 雖此兩種 亦何往而礙 但何以如是責備耶 天賦無南北 特無導揚開發導師 悲悶爲爾顰歎者 政爲此地道耳 然環漢拏四百里之間 柑橙橘柚之嘉珍 人所共知者 外此奇木名卉 葱靑交翠 擧皆冬靑 皆不能知名 樵牧無禁 甚可惜 若使一筇一屐 處處採訪 必有奇觀異聞 顧此籬底生活 何以及此耶 楚南之多石少人 自昔已然 漢挐靈異磅軋之氣 鍾在草木而已耶 豈鍾於物而不鍾於人也 水仙花果 是天下大觀 江浙以南 未知如何 此中之里里村村 寸土尺地 無非此水仙 花 花品絶大 一朶多至十數花 八九萼五六萼 無不皆然 其開在正晦二初 至於三月 山野田壠之際 漫漫如白雲 浩浩如白雪 累居之門東門西 無不皆然 顧玆坎窞憔悴 何可及此 若閉眼則已 開眼則便滿眼而來 何以遮眼截住耶 土人則不知貴焉 牛馬 食齕 又從以踐踏之 又其多生於麥田之故 村丁里童 一以鋤去 鋤而猶生之故 又仇視之 物之不得其所 有如是矣 又有一種 千葉者 初開苞之時 如菊花之靑龍鬚 與京洛所見千葉大異 卽一奇品矣 秋末冬初 竊擬擇其大根者送呈 未知其時便値無腕 晩矣 屈子所云不及古人 誰與玩芳者 不幸近之 觸境感悽 尤不禁汪然也 권이재에게 보낸 편지 - 제주도 귀양 간 뒤 그곳 생활을 적어 보낸 글이다. 윤춘閏春 및 초하初夏에 연달아 서신으로 배례拜禮를 드린 것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받아 열람하셨을 듯합니다. 그런 데 입하入夏로부터 곧바로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백 일 동안을 소식이 막혀 가서家書까지 아울러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육지와 바다가 서로 격절된 것이 비록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마치 같은 시대를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인하여 삼가 묻건대, 숭체崇 體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여 신명의 보우로 많은 복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전조銓曹의 직임을 벗지 못하시어 인사 행정을 크게 담당하시면서, 별다른 거리낀 일이나 없이 합내閤內가 고루 길하시고 대소 제절이 다 편안하신지 구구하게 우러 러 축수드리며, 북두北斗를 비겨서 애써 서울을 바라보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 죄인은 3개월 동안이나 장기瘴氣로 인하여 학질瘧疾을 앓으면서도 이를 다스릴 수가 없어 한열寒熱이 침학侵虐하는 대 로 내버려두고 그럭저럭 80여 일을 경과하였더니, 원기元氣가 점차로 손상되어 남김없이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식보食補나 약보藥補는 모두 논할 것도 아니거니와, 우선 몸에 살이 온통 빠져버려서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궁둥이에 부스럼 이 생길 지경이니, 이러고도 어떻게 오래갈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벌레와 뱀까지 따라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반 자[半尺]나 되는 지네와 손바닥만한 거미들이 침석枕席을 횡행하는가 하면, 처마에서는 새끼 가진 참새가 날마다 뱀을 경계하여 지저귀 곤 하는데, 이는 모두 북쪽 육지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5월 그믐 사이에는 대단히 무서운 비바람을 한 차례 겪었습니다. 이때에 기왓장과 자갈은 공중을 날아다니고 큰 나무는 뽑혀 넘어져서 뿌리가 서로 연했으며, 바다에는 파도가 새까맣게 솟아오르고 그 가운데서는 천둥소리가 일어나는지 라,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무릎을 맞댄 채 서로 꼭 껴안아서 마치 스스로 보존하지 못할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리하여 이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갑인년에 큰 바람이 있은 이후 4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질병 이외에 도 겪는 고통이 또 이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운명에 맡기고 이것들과 더불어 위아래로 미루어 변천하여 천신만고 속에 자신을 연마하고 인내하면서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 인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감히 몇 자를 적어서 애오 라지 내가 살아있음을 고합니다. 그러나 살아있은들 또한 무엇하겠습니까. 북쪽을 바라보는 마음만 끝이 없습니다. 이곳의 풍 256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51 토風土와 인물人物은 혼돈 상태가 아직 벽파闢破되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어만魚蠻ㆍ하이蝦夷와 무엇이 다르겠 습니까. 그래도 그 가운데 또한 무리를 초월한 기재奇才가 있기는 하나, 그들이 읽은 것은 통감通鑑 맹자孟子 두 종류의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록 이 두 가지 책만 하더라도 어디에나 구애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책비責備할 수 있겠습니까. 타고난 본성은 남북이 서로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그들을 인도하여 개발시켜 줄 스승이 없으므로, 슬피 여 기고 불쌍히 여겨 이와 같이 탄식을 하는 것이 정히 이곳을 위해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라산漢拏山 주위 4백 리 사이에 널려있는 아릅답고 진기한 감柑ㆍ등橙ㆍ귤橘ㆍ유柚 등은 사람마다 다 같이 아는 바이거니와, 이 밖의 푸른빛이 어우러진 기목명훼奇木名卉들은 거개가 겨울에도 푸르른 식물植物로서 모두 이름도 알 수 없는 것들인데, 여기에 나무하고 마소 먹는 것을 금하지 않으니, 이것이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가령 나막신 신고 지팡이를 끌고서 이곳저곳을 탐방한다면 반드시 기이한 구경거리와 들을 것들이 있으련마는 이 위리안치된 생활로 어떻게 그런 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초楚나라 남쪽에 돌은 많고 사람은 적은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거니와, 한라산의 영이하고 충만한 기운 또한 초 목에 모였을 뿐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어찌 그 기운이 물物에만 모이고 사람에게는 모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수선화水仙花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 지역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곳에는 촌리村里마 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가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 八九萼, 오륙악五六萼에 이르되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문 동쪽ㆍ서쪽이 모두 그러하건만, 돌아보건대 굴속에 처박힌 초췌한 이 몸이야 어떻게 이것을 언급할 수 있겠습 니까.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떻게 해야 눈을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 니까?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우마牛馬에게 먹이고 또 따라서 짓밟아 버리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 이 난 때문에 촌리村里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한결같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호미로 파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또는 이것을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물物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또 천엽千葉 한 종류가 있는데, 처음 송이가 터져 나올 때에는 마치 국화菊花의 청룡수靑龍鬚와 같아 서울에서 본 천엽과 는 크게 달라서 곧 하나의 기품奇品입니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삼가 큰 뿌리를 골라서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마는, 그때 인 편이 늦어지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굴자屈子의 이른바, 내가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이 방 초芳草를 완상하리오 라고 한 말에 내가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접촉하는 지경마다 처량한 감회가 일어나서 더욱 눈물이 줄 줄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13) 阮堂先生全集 권7, 祭文, 下壇祭文 有渰者魂 欝而不上 昬潮曉汐 萬古沉冥 夭矯蟠屈 誰與導暢 維酒維食 昔所飽嗜 㱃以和風 餐以協氣 同囿太和 庶無祗悔 제주 화북진에 위치한 남해용왕을 모시는 해신당海神堂에 올린 제문이다. 자욱이 뭉친 저 혼이여 맺혀 맺혀 못 오르니, 저녁 조수潮水 새벽 썰물, 아득아득 몇 만년을 솟아날고 굽어 서리니 뉘 더불어 도창導暢하리. 예로부터 주식酒食이란 배불리고 즐기는 것. 화풍和風으로써 마시고, 화기和氣로써 밥을 지어 함께 태 화에 감싸이면 거의 뉘우침 없으리라. (14) 阮堂先生全集 권7, 祭文, 祭南海神文 維靑龍己酉某月某日干支 某十年垢滓 身髮未淨 尙不敢唐突神明 謹具牲醴之品 使某甲虔誠祈告于海神之廟曰 高人過海 김정희 생애와 행적 257

252 百神揚靈 海若天吳 莫不馴仁 藐玆去來 王靈寔依 昔貶魑禦 今恩環歸 於赫王靈 神且不違 祥風一帆 安瀾千里 利涉太平 在神作使 敢薦菲悃 神鑑垂只 제주 화북진에 위치한 남해용왕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높은 사람 바다를 지나니 온갖 신이 영靈을 드날리어 해약이라 천오마저 모두 다 인仁에 길들었네. 하찮은 이 몸 가 고 오매 왕령王靈을 의지한 것 옛 귀양엔 잡귀 도왔고 이제 풀려 돌아가니 빛나도다. 왕의 영은 신 또한 거역 못하리 상서 바람 조각 돛에 천리 파란波瀾 잠잠하여 탈 없이 잘 건너기는 신의 힘에 달렸다오. 감히 엷은 정성 올리오니 신이여 강감降鑑 하소서. (15)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喚風亭 喚風亭接望洋臺 俯見紅毛帆影來 眼界商量容一吸 兩丸出入掌中杯 환풍정 - 서울로의 귀향을 그리며 지은 시이다. 환풍정 올라 하니 망양대와 맞닿어라. 굽어보니 홍모의 돛 그림자 떠오누나. 안계를 상량하면 단번에 들이킬 만. 손 가운데 술잔에 해와 달은 들고 나네. 66세(1851, 철종2) *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16)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萬歲橋途中 緬憶眞興北狩年 飛騰綺麗一樓前 長橋落日堪廻首 진종조천예론眞宗祧遷禮論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떠나면서 만세교를 지날 때 자신의 심정 을 적은 시이다. 진흥왕 북수하던 그 해를 추억하니 드날리고 화려해라 한 누각 앞이로세. 긴 다리 지는 해에 고개 돌려 바라보니, 두 어 가닥 구름 연기 저기 저 가이로세. (17)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咸關嶺途中 一路壺關似此無 森沈萬木與枝梧 嶺民但爲藍輿苦 豈識營邱秋樹圖 북청으로 유배갈 때 함관령을 지나면서 지은 시이다. 외가닥 길 호관도 이 같은 데 있었던가. 우거진 일 온갖 남기 어울려 얼기설기. 영민들은 남여 메기 괴롭다 떠들기만 이영구의 추수도를 제 어찌 알 리 있나. 258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53 (18)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村中鳳仙花盛開 結成五色毬甚大 在南地亦希 紅䆉稏中屋數椽 村夫子過便欣然 平生媿乏操持力 五色花毬欲破禪 북청 유배지에서 봉선화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읊은 시이다. 붉은 벼 에운 속에 단칸 집 오막살이 지나가는 촌부자 얼굴 문득 흐뭇하네. 평생을 조지의 힘 모자라서 부끄런데, 오 색의 꽃몽우리 선을 깨뜨리련다. (19)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細算 細算來頭三十年 支離佝僂孰非然 如君壽者無量相 到此方知我可憐 북청 유배지에서 세월을 헤아리며 자신의 심경을 쓴 시이다. 오는 세월 삼십 년을 곰곰이 헤아리니 뉜들 아니 그렇겠나 축 처지고 구부러져 한없이 수명 누릴 그대와 같은 상은 이에 와야 바야흐로 나의 가련 알 거로세. (20)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獨坐示間壁諸少年 未敢低眉事少年 單丁忽作法昌禪 東房喧笑緣何劇 嬉好知應滿在前 북청 유배지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쓴 시이다. 감히 눈썹을 낮춰 소년을 섬기겠나. 홀몸으로 갑자기 법창선이 됐네 그려. 동쪽방의 말 웃음 어찌 저리 극성인고. 아 마도 기쁨 거리 눈앞에 널린 게지. (21)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鍊武堂 魚鳥風雲畵閣東 六城一路垜頭通 殘山剩水先春迹 惆悵當年尹侍中 북청 유배지에서 고려 장군 윤관尹瓘의 북진사상을 기리며 쓴 시이다. 어조라 풍운이라 화각의 동쪽에는 여섯 성의 한 길이 보루로 통하누나. 낡은 산 넘치는 물 선춘령先春嶺 끼친 자취. 당년의 윤 시중을 생각사록 슬프기만. (22) 阮堂先生全集 권9, 詩, 石砮詩[石斧石鏃 每出於靑海之土城 土人以土城爲肅愼古蹟 作此] 荊梁舊貢皆貢砮 禹時以石爲兵無 肅愼石砮盖仍禹 禹砮遂無傳中土 距末左戈處處得 未覩愕作羊告石 孔子之世亦無之 有隼帶砮人不知 此事荒渺最難證 帶砮何以飛遠爲 盖馬山南一千里 樂浪眞番互非是 山川圖記摠無徵 又沿稱之肅愼氏 大 抵石斧並石鏃 尋常得於靑海曲 斧乃似是異黼形 鏃若分明出魚服 石性銛利當金剛 石紋作作暈古綠 有三百枚或充貢 充貢 而已非作用 渤海大氏尹侍中 未聞此斧此鏃收戰功 可笑當時烏雅束 雉羽葫蘆兒戲同 此斧此鏃斷爲肅愼物 更想東夷能大弓 김정희 생애와 행적 259

254 土城舊蹟殊未定 得此孤訂猶强通 북청 유배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석노를 숙신의 유물로 판단하고 지은 글이다. 형ㆍ양의 옛 직공職貢엔 다 노砮를 바쳤으니 우의 때에 돌로 무기 만든 일이 있었던가. 숙신이라 석노는 대개 우와 연 관인데, 우의 노는 마침내 중국땅에 전함 없네. 거말이나 좌과는 예서 제서 얻었으되 악작이랑 양고석은 보지를 못했거던 공 자의 세상에도 역시 이건 없었으니 수리 노를 띠고 와도 사람들이 몰랐다네. 이 일은 황당하여 가장 믿기 어렵고야 노를 띠 고 어떻게 먼 데를 날아오리. 개마산 남쪽이라 일 천리의 지역에는 낙랑 진번 서로 아니라거니 기라거니, 산천의 도기에도 이 증빙이 다 없는데, 전설을 또 받아들여 숙신씨라 일컫누나. 대개는 돌도끼나 아울러 돌촉들을 청해 의 언덕에서 오다가다 얻는다네. 부는 바로 이와 같고 보형과는 다르지만 촉은 분명 어복에서 나온 것 같군그래. 돌 성질 금 강과 맞설 만큼 예리하고, 돌무늬 일고 일어 고록이 무리졌네. 삼백 매가 있어 혹은 직공에 채웠는데 직공에 채웠을 뿐 용 만든 건 아니었네. 발해 임금 대씨나 윤 시중을 보더라도 이 도끼 이 촉으로 전공 거둔 일 없었네. 가소롭다 그 당시 오아속 이라던가. 치우 호로 따위는 애들 장난 마찬가지. 이 도끼 이 촉이 꼭 숙신의 물이라면, 동이들은 대궁에 능하단 게 상상되 네. 토성이라 옛 자취 정해지지 못했거늘 이를 얻어 다짐하면 오히려 강통일레. 돌 스스로 말을 않고 또 관마저 안했으니 야 뢰의 산 빛깔은 속절없이 아득아득. 긴 손톱의 질서도 역시 어긋나지 않고 장평의 화살머리 옛 피가 붉었다네. 기린이라 조 천석 그보다는 썩 나으니, 베 폭 같은 강빛에 와전된 주몽일레. (23)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午睡 一枕輕安趁晩凉 眼中靈境妙圓光 誰知夢覺元無二 蝴蝶來時日正長 苽花㰚落粟風凉 住在玲瓏怳惚光 富貴神仙饒一轉 炊烟漫敎枕頭長 松風分外占恩凉 攝轉葡萄現在光 特地家鄕成尺咫 靑山一髮未曾長 북청 유배지에서 낮잠을 자면서 고향을 그리며 해배解配를 기다리는 마음을 쓴 시이다. 서늘바람 알맞고 베개자리 편안하니 안중의 영한 지경 신묘한 원광일레. 뉘라 알리 꿈과 깸이 본래 둘이 아니란 걸 범나비 날아 올 때 해조차 정히 기네. 오이 꽃 울타리에 서속 바람 산들산들 영롱하고 황홀한 그 가운데 집이 있네. 부귀라 신선이라 한 마당이 느긋한데, 밥짓는 내 부질없이 베개맡에 감도누나. 은혜로운 솔 바람 분수 밖에 서늘하여 포도 시렁 현재의 빛깔을 끼고 도네. 특별히 내 고향이 지척을 이뤘으니 청산의 한 터 럭이 과히 먼 게 아니로세. 71세(1856, 철종7) * 과천果川에 머물다 세상 떠남. (묘 예산군 상암면 용궁리) (24) 阮堂先生全集 권9, 詩, 秋日重到瓜地草堂 出門秋正好 携衲更堪憐 欵欵三峰色 依依五載前 靑苔仍屋老 赤葉漸林姸 飄泊西東久 山中鎖暮烟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5년전 방문했던 과지초당을 다시 방문하여 쓴 시이다. 문을 나니 가을이 정히 좋은데 중을 끌어 다시금 어여쁘다네. 정겨움 내보이는 삼봉의 빛은 가물가물 다섯 해 이전이 260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55 로세. 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있고 붉은 잎은 수풀에 물들어 곱네. 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 산 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있네. (25)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果寓村舍 寒女縣西擁病居 溪聲徹夜甚淸虛 羸牛劣馬橋前路 畵料蒼茫也屬渠 兩山靑綠夾晴開 村氣泥醺盡野獃 不覺平生牛後耻 城中日日販柴廻 말년에 과천에 우거하면서 지은 시이다. 한녀寒女라 고을 서쪽 병을 끼고 사노라니 밤을 새는 시내 소리 몹시도 청허하네. 다리 앞 한길가의 여윈 소랑 조랑 말은 창망한 그림 재료 저 들의 차지로군. 양쪽 산 파릇파릇 갠 날 끼고 트였는데, 마을 기운 무더워라 모두가 흐리멍텅. 우후의 부끄럼을 평생에 모르는 듯 성안 에 가 날마다 땔감 팔고 돌아오네. (26)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斗江爲酉山耘逋作 野意全收峽意來 碧琉璃碾兩山廻 窰烟一道盤空直 易識蓽門江上開 山色慘悽二水邊 黃公壚下一惘然 橫江孤鶴無消息 樓閣雲盤直上天 과지초당 시절 퇴촌退村의 권돈인權敦仁과 두릉杜陵의 정학연ㆍ정학유 등과 교유를 생각하면서 지은 시이다. 들 생각 거둬지고 협 생각 다가오니 파란 유리 깔리어라 두 산을 돌아드네. 한 가닥 가마 연기 공중 서려 곧곧한데, 알기 쉬운 쑥대문이 강을 향해 열렸거든 두 물이 감돌아라 산 빛도 참담한데, 황공의 술집 아래 옛 생각 아득구나. 강에 비 낀 외론 학이 소식 영영 끊겼으니, 누각에 구름 서려 저 하늘로 올랐구려. (27) 阮堂先生全集 권10, 詩, 題村舍壁 並序 路傍村屋 在䕽黍中 兩翁婆煕煕自得 問翁年幾何 七十 上京否 未曾入官 何食 食䕽黍 余於南北萍蓬 風雨飄搖 見翁聞 翁語 不覺窅然自失 禿柳一株屋數椽 翁婆白髮兩蕭然 未過三尺溪邊路 玉䕽西風七十年 촌사의 벽에 제하다 - 과지초당 시절 원숙한 김정희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시이다. 길가의 마을 집이 옥수수 밭 가운데 있는데 두 늙은 영감 할멈이 희희낙낙하게 지낸다. 그래서 영감 나이가 얼마냐 물었더니 일흔 살이라 한다. 서울에 올라갔었느냐 하니 일찍이 관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무얼 먹고 사는가 하고 물으니 옥수수를 먹는다 했다. 나는 남북으로 떠다니며 비바람에 휘날리던 신세라 옹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였다. 한 그루 늙은 버들 두어 서까래 집에 머리 하얀 영감 할멈 둘이 다 쓸쓸하네. 석자가 아니되는 시냇가 길 못 넘고서 옥 수수 가을 바람 칠십 년을 살았다오. 김정희 생애와 행적 261

256 (28) 阮堂先生全集 권2, 書牘, 與石坡[六] 朱戶貼鷄 金盤簇鸞 天門開詄蕩蕩 新嘏鼎來 百吉隨宜 卽伏承崇函 並貺吉語 是推以及人之盛 不勝贊誦 更伏問近日 體 中葆禧曼壽 詹膝下祝韶年 兒女靑紅 歲味之最 如今圓全 似無其二 尤何等艶羨 戚功草木殘年 儵爾七十 蓼辛荼苦 去益支 離 自顧亦醜 人必嘔之耳 荷此厚欵 陰嵌回煖 과지초당 시절 석파 이하응과의 교유관계를 보여주는 편지로 세밑에 선물을 보내준 것에 대해서 쓴 감사의 편지이 다. 주호朱戶에는 닭[鷄]을 붙이고 금반金盤에는 제비[鷰]가 모여들며, 천문天門이 열리어 하늘은 단단하고 맑은데, 새해의 복이 크게 이르러와서 온갖 일이 길吉하여 뜻대로 잘 되겠습니다. 삼가 높으신 서신을 받자옵건대 좋은 말씀까지 아울러 주 시었으니, 이는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는 훌륭하신 뜻이라, 찬송贊誦함을 이루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시 삼가 묻건 대, 근일에는 체중體中이 평안하십니까? 우러러 축수합니다. 슬하膝下의 청년靑年과 아녀兒女들의 청색ㆍ홍색의 단장이 세미歲 味의 가장 좋은 것인데, 지금 온 가족이 완전하게 다 복을 받은 것이 아마 그 둘도 없을 듯하니, 더욱 얼마나 부러운 일이겠 습니까. 척공戚功은 초목 같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어느덧 70세가 되어 맵고 쓴 고통이 갈수록 더욱 지리하기만 한데, 스 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추하게 느껴지니, 남들은 반드시 나를 보면 구역질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후한 대접을 입 으니, 그늘진 산골짜기에 따뜻함이 이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황량하고 춥고 적막한 곳의 누추한 집에 그 누가 말 한 마디나 마 전해 주겠습니까. 예서隸書가 아주 좋아서 의당 난蘭의 작품과 쌍미雙美를 이루어 지붕 머리에 무지개를 꿰는 기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다. 아직 다 갖추지 않습니다. 황공합니다. (29) 阮堂先生全集 권4, 書牘, 與吳生[慶錫] 與君纔二三見 見其指彈春風口吐芳芬 心竊異之 卽接手椷 尙不料文采詞華 又如是鬯足 朱門世家 帬屐子弟衣履淸華 巾 角塵尾 未盡皆如是 殊可歎異 亦不知其何故也 如藕船者 是一麟角瑞世 又有躡塵追影之逸足耶 然天與聰明 不在貴賤上下 南北 惟擴而充之 猛着精彩 雖到得九千九百九十九分 其一分之工極難圓 努力加餐可耳聯本寫副 不宣式 과지초당 시절 오경석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대와 더불어 겨우 두세 번 만났지만 그 손가락은 봄바람을 튕기고 그 입은 꽃다운 향기를 뱉어냄을 보고서 마음속 으로 이상히 여겼는데 곧 서찰을 받아보니 문채文采와 사화詞華가 또 이와 같이 넉넉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네. 주문세가朱 門世家의 모든 자제들이 비록 청환淸宦과 화직華職을 거쳤다 해도 건각巾角 추미麈尾가 다 이와 같지는 못하니 자못 한탄스러 운 일이며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네. 우선藕船같은 사람은 바로 하나의 기린의 뿔이 세상에 나타났다 여겼는데 그 뒤를 이어 섭진추영躡塵追影하는 일족逸足이 또 몇이나 있는지 듣고 싶네. 그러나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擴充하여 모질게 정채精彩를 쏟아나가면 비록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도달할 수 있 으나 그 나머지 일분의 공부는 원만히 이루기가 극히 어려우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되는 거라네. 연본聯本은 써보내며, 나머지 는 불선식. 262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

257 실학자 행적 자료 보고서Ⅰ 발행일 2010년 12월 27일 발 행 실학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27-1 Tel : 제 작 도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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