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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부 총 설 중부 지역의 3 1운동과 지역별 전개 상황 Ⅰ. 머리말 Ⅱ. 3 1운동의 의미 Ⅲ. 중부 지역 3 1운동의 전개 Ⅳ. 판결문을 통해 본 3 1운동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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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총 설 중부 지역의 3 1운동과 지역별 전개 상황 김진호 * Ⅰ. 머리말 3 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일찍이 없었던 주권 침탈과 식민지 직접 통치 체제 하의 억압과 탄압 속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복하려는 민족적 독립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세계사 적인 흐름인 제국주의시대에 일제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강탈하고 무소불위의 조선 총독부를 통하여 한민족을 지배하였고, 이에 한민족은 거국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개항 이후 침략의 야욕으로 경제적 침탈을 시도하며 청 일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갖은 수단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침해도 심하여 갔다. 특히 동학농민운동 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은 그들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어 청 일전쟁에서 승기 를 잡은 일제는 내정 간섭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한편, 국제 사회에서는 제국주 의 국가 간에 대립하면서 타협을 통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 보장을 받아냈다. 그 결과 일제는 한민족의 민족운동을 철저히 무력으로 진압하고 국가 통치권을 무력화시키고 마침내 주권을 강탈하였다. 일제는 헌병무단통치를 통한 식민지 직접 지배 체제를 구축하여 한민족을 억압하고 탄압 하였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도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전개되었지 만 일제의 잔혹한 진압으로 고초를 겪으며 고난을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암울한 10년간의 헌병들의 무단 통치 아래에서 민족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한 염원을 버리지 않았던 한민족 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내 외적으로 자주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을 위한 힘찬 발걸음 내딛었다. 따라서 3 1운동은 전 민족적이고 거족적인 독립 운동이고, 그 방법으로는 대한독 립만세를 고창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충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충남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 충남대 강사 역임,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0, 국내3 1운동Ⅱ, 공저), 경북독립운동사Ⅲ (3 1운동, 공저), 충남지방 3 1운동 연구 등 관련 논문 다수. 11

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3 1운동은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영역으로 일찍부터 다루어졌다. 3 1운동 직후 중국 상 해에서 박은식( 朴 殷 植 )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 (1920)와 김병조( 金 秉 祚 )의 한국독립운동사략( 韓 國 獨 立 運 動 史 略 ) (1921)은 대표적인 자료집이면서 선구적 연구물 이다. 3 1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일보사의 3 1운동 50주년기념논집( 三 一 運 動 50 周 年 記 念 論 集 ) 은 연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70년대 관련 자료집의 발간은 3 1운동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 연구의 전성기를 이루었 다. 특히 1980년대 독립기념관의 설립과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설치에 따라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1987) 발간은 3 1운동의 전반적 연구와 각 지방에 대한 사례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 였다. 각 지방의 3 1운동 연구는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는 사례 연구가 집 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정부에서도 국가기록원을 중심으로 3 1운동 관련 자료를 정리 하고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여 왔다. 특히 최근에 인터넷을 통한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중 나라기록포털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 에서 원본 보기 과 번역본 보기 는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금년도에는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3 1운동Ⅰ) 을 편찬하게 되었다. 본서는 총설, 판결문 번역문, 원문으로 구성되었다. 총설은 서울 경기 강원 충청남북도의 3 1운동에 한하여 서술하였다. 5개 지방의 3 1운동을 전체적으로 개관하는데 한계점이 있어 각 지방 의 주요 3 1운동을 판결문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각 지방의 각지에서 전개된 3 1운동 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과 지역별로 나열식 사건 기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독립만세운동 실상을 서술하여 3 1운동 전개의 실제 모습들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하였다. 12

5 총 설 Ⅱ. 3 1운동의 의미 3 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하에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3 1운동은 민족운동으로 민족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첫째, 3 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최대 민족운동이었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 전개된 민 족운동 가운데 3 1운동은 지역적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동 시기에 전개된 민족 운동이고, 참여 인원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민족운동이며,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5,000명, 피검자 47,000명 이상의 인적 피해를 입은 민족운동이 었다. 따라서 3 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었다. 둘째, 3 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분기점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민족운 동이 이념적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던 의병의 무장투쟁론과 애국계몽가들의 실력양성론이 1910년대부터 상호 보완적으로 통합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역량과 저변을 확대시켰다. 그러 한 민족운동이 3 1운동으로 통합되었고 이어 새로운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종전의 단 체나 개인별 민족독립운동이 전 국민과 전 민족의 구성원이 민족독립운동에 참여자가 된 것 이 3 1운동이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이 3 1운동으로 수렴만 된 것이 아니라 3 1운동 이후 다양한 형태의 민족독립운동 발산에 기폭제이자 민족운동의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셋째, 3 1운동을 계기로 개개인이 국가과 민족의 구성원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주체자가 되었다. 3 1운동이 전 국민과 전 민족의 참여로 전개되었던 만큼 남녀노소는 물 론이고 다양한 계층과 직업인이 참여하였다. 3 1운동이 확산되면서 누구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누구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는 개개인이 국가와 민족의 한 구성 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당히 국가와 민족에 책임을 자각하는 주체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3 1운동을 통하여 한민족 개개인이 바로 우리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넷째, 3 1운동은 최초의 공화정부가 생겼고, 각 공화정부를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운동 이후 정치체제는 종전의 군주제와 같은 정부 형태가 아니 라 공화정체를 근간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한성 상해 연해주 등지에 만들어졌다. 이를 통 합하여 상해에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3

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다섯째, 3 1운동은 1920년대 국내에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기반이 되었다. 3 1운 동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등과 같은 다양한 계층별 사 회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3 1운동을 통하여 다양한 계층이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경험 이 그 바탕이 되었고, 누구나 역사의 주체자임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여섯째, 3 1운동은 1920년대 국외의 독립군 무장 투쟁을 강화시켰다. 만주와 연해주 일 대에 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이들 지역 이주민뿐만 아니라 국내 인사들도 독립군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성과는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로 나타났다. 일곱째, 3 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게 하였다. 3 1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표출하여 국 제사회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 자체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덟째, 3 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변화를 가져왔다. 1910년대 헌병무단통치로 일 관한 일제는 3 1운동으로 식민 통치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들은 아무리 억압적 무단통 치를 하여도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문화정치라 는 간교한 허울로 민족독립운동을 회유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 분열을 조장하였다. 다음으로 3 1운동은 중국의 5 4운동의 발발, 인도의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인도지나반 도 필리핀 아랍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3 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로 첫째 전승국 일제의 지배 하에서 전개되어 세계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자극 제가 되었다. 둘째, 3 1운동은 비폭력적 독립혁명을 지향한 점에서 세계혁명사에 하나의 신 기원을 이룩하였다. 14

7 총 설 Ⅲ. 중부 지역 3 1운동의 전개 1. 서울 1) 3 1운동 발의와 준비 1 천도교측 발의 : 1919년 1월 하순 손병희( 孫 秉 熙 ) 집에서 최린( 崔 麟 ) 권동진( 權 東 鎭 ) 오세창( 吳 世 昌 ) 등이 독립운동 협의가 있었다. 그 내용은 일제로부터 독립국 건설을 위한 동 지 규합, 조선민족대표자 손병희 등 명의의 조선 독립 선언과 전국 배포, 독립만세운동으로 독립 열망 표현, 일제 정부 귀중 양의원 조선총독부 및 강화회의 열국위원에게 조선 독립 의견 제출,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청원서 제출 등이었다. 그 계획과 실행은 최린이 담당 하였다. 최린은 2월 상순 중앙학교장 송진우( 宋 鎭 禹 ) 교사 현상윤( 玄 相 允 ) 최남선( 崔 南 善 ) 과 회합하였다. 2~3일 후 이들은 박영효( 朴 泳 孝 ) 윤용구( 尹 用 求 ) 김윤식( 金 允 植 ) 등 한말 요직자, 기독교도 천도교 주요 인사를 조선민족대표자로 독립을 선언하고, 그 명의로 독립 선언서 의견서 청원서를 작성하며, 문서의 기초는 최남선, 인물 교섭은 최린 최남선 송 진우, 기독교측 교섭은 최남선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2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 : 최남선은 장로교 이승훈( 李 昇 薰 )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는 2 월 7일 오산학교 경영 관계로 이승훈의 상경을 현상윤에게 의뢰하자, 현상윤은 정노식 집으 로 김도태를 찾아가 부탁하고, 김도태는 다음날 출발하여 2월 9일 정주에서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 朴 賢 煥 )을 만났고, 박현환은 선천에 있는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하여 김성수( 金 性 洙 ) 별채에서 송진우를 만나 기독교측 참가와 동지 규합을 부탁받고, 즉시 선천으로 갔다. 그는 2월 12일경 양전백( 梁 甸 伯 ) 집에서 양전백 이명룡( 李 明 龍 ) 유여 대( 劉 如 大 ) 김병조( 金 秉 祚 ) 등에게 독립운동계획을 알려 유여대 김병조는 이승훈에게 일 임하고, 양전백 이명룡은 함께 상경하기로 하였다. 또 14일에는 평양 기홀병원에서 길선주 ( 吉 善 宙 ) 신홍식( 申 洪 植 ) 등과 만나 경성으로 가기로 하였다. 2월 17일에 재차 상경하여 김 승희( 金 昇 熙 ) 집에서 한 두 번 만난 송진우의 태도와 최남선을 만나지 못하여 의혹을 갖기도 하였다. 2월 20일 밤 박희도( 朴 熙 道 ) 집에서 남감리파 오화영( 吳 華 英 ) 정춘수( 鄭 春 洙 ), 북 15

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감리파 오기선( 吳 基 善 ) 신홍식( 申 洪 植 ) 등과 기독교 동지 규합과 일제 정부에 독립청원서 제출에 합의하고, 원산의 동지 규합은 정춘수가 맡기로 하였다. 같은 날 함태영 집에서 함태 영( 咸 台 永 ) 이갑성( 李 甲 成 ) 안세환( 安 世 桓 ) 오상근( 吳 尙 根 ) 현순( 玄 楯 ) 등과 회합하였으 나 결의는 없었다. 2월 21일 이승훈은 최남선과 처음 만나 최린 집에서 전날 협의사항을 전 달하였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이므로 종교의 종류를 불문하고 합동함이 가하다 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을 요구하였다. 이승훈은 동지와 협의 후 여부 를 전달하기로 하고, 독립운동비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날 밤 이갑성 방에서 이갑성 박희 도 오기선 오화영 신홍식 함태영 김세환 안세환 현순 등이 철야로 협의하여 합동 문제는 천도교측 방법을 확인 후 결정하되 이승훈 함태영에게 일임하고, 독립청원서 제출 동지 모집과 서명 날인을 위해 이갑성을 경상도로 김세환을 충청도로 파견하고, 파리강화회 의 형세 탐문과 보도 및 유럽에 문서 발송을 위해 현순을 상해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현 순은 2월 23일 상해로 출발하였다. 한편 최린이 독립운동비 5,000원 요청을 손병희에게 전달하자, 손병희는 대도주 박인 호( 朴 寅 浩 ) 금융관장 노헌용( 盧 憲 容 )에게 지출을 명하였다. 2월 22일 최린은 독립운동비 5,000원을 받은 즉시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어 이승훈은 함태영과 최린 집에서 천도교 측 독립운동 방법을 타진하였다. 최린은 독립청원서 제출만으로 불충분하며 독립선언을 하 지 않을 것 같으면 합동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승훈 함태영은 오기선 박희도 안세환과 숙의하여 천도교측 주장을 수용하고, 2월 24일 이승훈 함태영이 최린에게 전달 하였다. 이로써 3 1운동에서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이 2월 24일에 성립되었다. 3 독립선언 준비와 민족대표 선정 : 최린 이승훈 함태영이 협의하여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선언,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배부하고 독립만 세 고창, 지방에서 독립선언 일시와 선언서 배부는 경성의 예를 따를 것, 선언서 기타 서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 선언서 배부는 천도교 기독교측, 일제 정부 귀중 양의원 서면 제 출은 천도교측, 미국 대통령과 열국 강화위원 서면 제출은 기독교측이 담당하고, 민족 대표 자는 천도교측 기독교측 각각 십수 명, 불교도도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최남선은 2월 상순경부터 최린과 자주 회합을 가졌다. 그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는 독립선언서, 일제정부 조선총독부 귀중 양의원 의견서, 미국 16

9 총 설 대통령 청원서,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위원 의견서 초안을 최린에게 제출하고, 최린이 2월 26 일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에게 보여 동의를 얻어 3 1운동 문서들이 최종 완성되었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이 협의한 다음 2월 25~27일에 임예환( 林 禮 煥 ) 나 인협( 羅 仁 協 ) 홍기조( 洪 基 兆 ) 박준승( 朴 準 承 ) 양한묵( 梁 漢 黙 ) 권병덕( 權 秉 悳 ) 나용환 ( 羅 龍 煥 ) 김완규( 金 完 圭 ) 이종훈( 李 鍾 勳 ) 홍병기( 洪 秉 箕 ) 10명과 이종일의 권유로 오세창 ( 吳 世 昌 )이 대표자로 선정되어 최린을 포함한 15명을 확정하였다. 최린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박준승 양한묵 11명은 2월 27일 김상 규( 金 相 奎 ) 집에서 선언서 관련 서류의 별도 지면에 날인하고, 손병희는 타인을 시켜 날인하 였다. 기독교측은 2월 26일 한강 인도교에서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최성모( 崔 聖 模 ) 이필주( 李 弼 柱 ) 8명을 선정하고, 일제에 서류 제출을 위해 안세환 을 동경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2월 27일 이필주 집에서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함태영 김창준( 金 昌 俊 ) 신석구( 申 錫 九 ) 박동완( 朴 東 完 ) 10명이 회합하 였다. 함태영이 독립 서류 초안을 회람시키고, 연명 인사로 참석자 중 함태영을 제외한 9명 과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김창준 이필주 정춘수 7명 합계 16명을 대표로 확 정하고 함태영은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 가족 보호 임무를 맡기로 하여 제외하였다. 그날 밤 함태영은 9명과 이승훈이 받은 유여대 이명룡 김병조 양전백 길선주 신홍식 인장 을 갖고 최린 집에서 별지에 날인하였다. 불교측은 한용운이 2월 24~27일 최린에게 독립운 동계획을 듣고 서류 초안을 보고 찬성하여 2월 27일 백상규의 찬성을 얻은 후 2명을 지면에 날인하였다. 최남선은 신문관 직공을 시켜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짜서 최린 집에 가져다 놓았다. 2월 27 일 이종일은 보성사 감독 김홍규( 金 弘 奎 )에게 활자판을 가져다 인쇄하게 하였다. 김홍규는 신영구( 申 永 求 )를 시켜 오후 5~11시 무렵까지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이종일에게 교부하였다.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는 양전백 길선주 이명룡 김병조 정춘수 나인협 호기 조 양한묵 백상규 9명을 제외한 대표자와 함태영이 참가하였다. 이 회합에서 3월 1일 학 생 집합을 듣고 분요( 紛 擾 )를 염려하여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하고, 3 월 1일 이갑성이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독립선언 장소에서 일동이 포박될 것을 17

1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약속하였다. 4 학생 참여 : 박희도 이갑성은 독립운동에 학생을 규합하여 실행을 맡기로 하고 동정 을 살폈다. 박희도는 1월 27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金 元 璧 )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 ( 康 基 德 )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韓 偉 健 ) 김형기( 金 炯 璣 ) 경성공업전문학교 주종의( 朱 鍾 宜 ) 경성전수학교 이공후( 李 公 厚 )를 관수동 대관원에 초청하고, 주익( 朱 翼 ) 윤화정( 尹 和 鼎 )도 참석시켰다. 그는 독립의 기회가 왔으니 논의를 계속하여 결속할 필요가 있고, 독립 운동에 힘쓸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운동을 할 좋은 시기인가 아닌가에 대해 협의가 있었다. 2월 초 신문에서 민족자결주의 제창으로 비록 약소국도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며 일본 유 학생의 활동 개시를 알고 이에 국내 학생도 활동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뜻있는 학생 간에 서로 교류가 있었다. 강기덕 한위건 김원벽은 모임을 여러 번 갖고 각자가 중등 정도 학생 대표 자를 선정하여 결속시켰다. 김원벽은 경신학교 강우열( 康 禹 烈 ) 강창준( 姜 昌 俊 )과 경성고등 보통학교 박쾌인( 朴 快 仁 ) 등을 설득하였다. 강기덕은 서북친목회 회원임을 활용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규합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김백평( 金 栢 枰 ) 박노영( 朴 老 英 ), 중앙학교 장기욱 ( 張 基 郁 ), 선린상업학교 이규송( 李 奎 宋 ), 보성고등보통학교 장채극( 張 彩 極 ) 전옥결( 全 玉 玦 ) 등을 박희용( 朴 熙 容 ) 집으로 소집하였다. 우리 조선도 국제연맹에서 주창되는 민족자결주의 에 따라 독립할 수 있을 것이며, 지식 계급자 사이에 그 기획이 진행 중이다 지금부터 각각 자기 학교 학생에게 대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이에 대비함이 긴요한다 고 설명하였다. 그 리고 동창들에게 개인적 또는 집회 방법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독립운동에 분기하여 참 가시키도록 하였다. 이갑성은 2월 12일과 14일에 음악회를 빌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 자택에 김원벽 한위건 김형기 윤자영( 尹 滋 瑛 ) 김문진( 金 文 珍 ) 배동석( 裵 東 奭 ) 등 을 초청하여 해외독립운동 정세와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등을 알렸다. 강기덕은 2월 16일 종로청년회관에서 박희도에게 천도교 예수교도 공동으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조선인의 독립 희망을 각국에 발표할 독립운동계획을 들었다. 그는 이를 2월 17일 한창환에게 전하고, 한창환은 한위건을 강기덕에게 소개하였다. 이로써 전문학교 학생의 본격적 3 1운동 참여 논의가 시작되었다. 박희도가 천도교측과 독립운동을 진행시키며 강기덕 김원벽 등과 회합하여 그 진행 사항 18

11 총 설 을 수시로 알려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강기덕 등은 전문학교의 대표 인물을 조직화하는 것 이 초미의 급선무라 생각하고 각자 지기( 知 己 )나 그 중개로 경성전수학교 전성득( 全 性 得 )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한위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문진 이용설( 李 容 卨 ),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金 大 羽 ),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 한창환, 연희전문 학교 김원벽 등을 대표자로 2월 20일 승동예배당에서 제1회 간부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에 서 전성득 김형기 김문진 김대우 강기덕 김원벽은 대표로 책임을 지고, 이용설 한위 건 윤자영 한창환은 학교 대표자가 체포될 경우 뒷일을 처리하며, 동창생 규합을 담당하 기로 하였다. 이후 김원벽 이용설 김문진 김대우 김형기 한위건 주익 등은 학생들도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원벽은 2월 23일 박희도에게 손병희 등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한 구역인 경성에서 2개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학생단의 선언서 발표를 중지하라 는 말을 듣고 강기덕 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승동예배당에서 한위건 김형기 김대우 김성득 김문진 김원벽 등과 만나 한위건의 제안으로 천도교도 예수교도의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행동할 것과 학 교 대표로 학생들의 참가 권유를 지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3월 초순 독립선언과 만세운 동 결정이 학생측에 통고되었다. 각 대표자 및 한위건 한창환 윤자영 등은 2월 25일 이필 주 집에 모여 3월 1일 전문학교 및 중등 정도 학생이 모두 정각에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독 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상황에 따라 계속 각 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일대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튿날 다시 이필주 집에서 김문진 이용설 윤자영 김탁원( 金 鐸 遠 ) 최경하 ( 崔 景 河 ) 나창헌( 羅 昌 憲 ) 박윤하( 朴 潤 夏 ) 김영조( 金 榮 洮 ) 등 학생들은 제2회 독립운동에 분발하여 학생을 규합하고 참가할 것, 제1 2회 독립운동에 관헌에 체포되지 않은 자는 뜻을 굽히지 말고 더욱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최후 목적을 완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2월 27일에도 정동예배당에서 김원벽 강기덕 한위건 등이 모였다. 강기덕은 2월 28일 오후 2시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이갑성에게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 원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시내에 중등 정도 학생들이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김문진에게 의뢰하여 두었으니 선언서 배포를 지원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이를 한위건에게 전 하여 중등 정도 학생을 모이도록 하였다. 밤에 김문진이 이갑성에게 선언서 1,500매를 받아 승동예배당으로 가져왔다. 승동예배당에 전문학교 대표자 김문진 김형기 한창환 이용설 19

1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외 2, 3명과 중등 정도 학생 김백평 장채극 전옥결 이규송 장기욱 전동환( 全 東 煥 ) 이용재( 李 龍 在 ) 등 십수 명이 모였다. 강기덕이 3월 1일 오후 2시 조선독립선언을 하고 선언 서를 발표하며 만세운동을 할 것이니 각자는 학생을 결속하여 참가함과 독립선언서를 학교 중심으로 배포하라고 전하였다. 이어 김문진이 각 배포 장소를 지정하여 학생 12~3명에게 독립선언서 100~300매를 교부하였다. 그리고 김원벽 강기덕 한위건은 3월 1일 이어 3월 5일 학생단에서 제2회 독립운동을 할 것을 대략적으로 결정하였다 2) 독립선언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민족대표자 33인 가운데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에 모였다. 이갑성은 사람을 시켜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케 하 고, 이종일은 독립선언서를 볼 수 있게 탁상에 약 100매를 놓았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은 생 략하고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경하합니다. 더 한층 독 립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는 인사말을 하고 일동은 일어나 만세를 삼창하였다. 식탁에 앉으려고 할 때 일경들이 들어와 민족대표들을 체포하였다. 3) 3월 1일 독립만세 3월 1일 정오 이후 학생들을 비롯하여 수만 군중이 파고다공원에 집결하였다. 오후 2시 30 분경 파고다공원 육각당에서 경신학교 정재용( 鄭 在 鎔 )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조선의 독 립국임을 선언한다고 하자, 군중은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또는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일제정부 및 세계 각국에 조선인은 모두 독립 자유민이다. 조선은 한 독립국이 될 것을 요망 한다 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만세 군중들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군중들은 종로 1정목 전차 교차점에서 나뉘어졌다. 한 갈래는 남대문 역 전 의주통 정동 미국영사관 이화학당 대한문 광화문 조선보병대 서대문정 프랑 스영사관 서소문정 장곡천정을 지나 본정 2정목 부근에 이르러 경찰관 제지로 대부분은 해산하였다. 다른 갈래는 무교정 대한문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미국영사관에 갔 다가 다시 대한문 앞에 이르렀다. 다시 한 군중들은 광화문 조선보병대 서대문정 프랑스 영사관 서소문정 장곡천정을 거쳐 본정으로 들어갔다. 다른 군중들은 무교정 종로통 20

13 총 설 창덕궁 앞에 이르렀다가 안국동 광화문 프랑스영사관 서소문정 서대문정 영성문 등 을 지나 대한문 장곡천정으로부터 본정으로 돌아와 해산하거나, 다시 영락 명치정으로 향 하고 혹은 남대문통 동대문으로 향하여 이동하였다. 동쪽으로 이동한 군중은 창덕궁 안국동 광화문 서대문정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러 일 부는 서소문정, 일부는 미국영사관 또는 영성문 대한문 장곡천정을 거쳐 본정으로 들어가 일부는 경찰관의 제지로 해산하고, 일부는 종로통 동아연초회사 동대문으로 이동하였다 가 해질 녘에 해산하였다. 4) 독립선언서 배포 1 천도교 : 천도교측은 이종일이 2월 28일 배부하여 인종익이 전주 청주, 안상덕이 강원 도 함경도, 이경섭이 황해도, 이관이 경성시내, 김홍렬이 평안도 등에 배포하였다. 인종익 ( 印 宗 益 )은 2,000매를 받아 전주교구실에서 1,700매를 김진옥( 金 振 玉 )에게 교부하였다. 그 는 3월 2일 청주교구실에서 300매를 교부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286매를 압수당하였다. 김진옥은 2월 28일에 약 200매를 임실교구장 한영태( 韓 永 泰 )에게 교부하여 3월 2일에 배부 하도록 하였다. 나머지는 민영진( 閔 泳 鎭 ) 조성덕( 趙 聖 德 ) 김성문( 金 成 文 ) 등이 3월 1~2일 밤까지 전주 읍내에 배포하였다. 안상덕( 安 商 德 )은 2,000매를 받아 2월 28일에 평강천도교구장 이태윤( 李 泰 潤 ) 등에게 약 700매를 배포하고, 이태윤 등이 채장숙( 蔡 章 淑 ) 김천일( 金 千 鎰 ) 등에게 김화 금성 회 양 철원 평강 등에 배포하게 하였다. 이어 3월 1일에는 영흥교구장에게 약 1,300매를 교 부하였다. 이경섭( 李 景 燮 )은 약 1,000매를 받아 3월 1일 서흥교구실에서 박동주( 朴 東 周 )에게 약 750 매를 교부하여 해주 사리원에 배포하고, 나머지는 수안교구장 안봉하( 安 鳳 河 ) 등에게 약 250매를 교부하여 절반은 수안에 절반은 곡산에 배포를 홍석정에게 의뢰하였다. 이관( 李 瓘 )은 2월 28일에 이종일에게 배포를 의뢰받고 3월 1일에 52매를 받아 3월 1일~10 일 국장에 온 지인들에게 각 1매씩 배포하였다. 김홍렬( 金 洪 烈 )은 약 3,000매를 평안도에 배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이종일 은 1,500매를 이갑성 김성국을 거쳐 강기덕에게 교부하였다. 21

1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2 기독교 : 기독교측에서는 이갑성 김창준 함태영 박희도 중심으로 배포하였다. 김성 국은 2월 28일 이갑성에게 약 100매를 받아 승동예배당에서 강기덕에게 교부하였다. 김진호 ( 金 鎭 浩 )는 2월 28일 이필주의 요청을 받고 3월 1일 오후 2시경 러시아 미국 프랑스영사 관에 보낼 독립선언서 봉투를 오흥순( 吳 興 順 ) 등 학생에게 교부하였다. 오흥순은 러시아영사 관으로 가서 통역을 통해 봉투를 사환에게 전달하였다. 김동혁( 金 東 赫 )은 오후 1시경 김진호 집에서 임창준( 林 昌 俊 )에게 6매를 받아 오후 2시경 남대문 5~6호 민가에 배포하였다. 함태영( 咸 泰 英 )은 2월 28일 이종일에게 1,200~1,300매를 받아 절반 정도를 평양기독교회 사환에게 교부하였고, 나머지는 김창준 집으로 보냈다. 김창준은 2월 28일 약 900매를 이종 일 함태영에게 받아 300매를 이계창( 李 桂 昌 ), 600매를 이갑성에게 교부하였다. 이계창은 오전 9시 반경 중앙예배당에서 선천 목사 백시찬( 白 時 瓚 )에게 전달 의뢰와 여비 20원을 받 아 오전 10시 반경 출발하여 밤에 선천 신성학교 김지웅( 金 志 雄 )에게 전하였다. 김지웅은 양 전백 집 뒤 길가에서 백시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3월 1일 오후 1시 결행한다 고 말하 였다. 그는 3월 1일 학생에게 독립선언서 취지를 알리고 기 1개씩을 들고 시내에서 선두에 조선독립단( 朝 鮮 獨 立 團 ) 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의주에서는 3월 1일 오후 2시 30분 서교회당 공지에 7~800명이 모여 찬미가를 부르고 김병농( 金 炳 穠 )의 기도 중 선천에 서 독립선언서 약 200매가 도착하여 유여대가 낭독한 후 강용상( 康 龍 祥 ) 등이 군중에게 배 포하였다. 이갑성은 김창준에게 받은 600매 가운데 2월 28일 4, 5매를 이용설( 李 容 卨 ), 3월 1일 400 매를 이굉상( 李 宏 祥 )에게 교부하였다. 이굉상은 3월 1일 오전 8시경 출발하여 대구 이만집 ( 李 萬 集 )에게 200매를 교부하여 김태련( 金 泰 練 )이 3월 8일 서문 밖 시장에서 배포하였다. 밤 에 마산 임학찬( 任 學 瓚 ) 집에서 200매를 교부하였다. 김용환( 金 容 煥 )은 3월 2일 배포를 맡겠 다는 뜻을 말하고 이형재( 金 炯 宰 )를 임학찬 집으로 보냈다. 이형재에게 30매를 받은 김용환 은 3월 3일 무학산 국장 요배식의 군중에게 20매를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김병수( 金 炳 洙 )는 2월 28일 이갑성에게 200매를 군산 박연세( 朴 連 世 淵 世 )에게 전달 의 뢰를 받았다. 그는 3월 1일 박연세에게 200매를 전달하여 박연세 이두열 등은 3월 2~3일 에, 양기철( 梁 基 哲 ) 고준상( 高 俊 相 ) 등은 3월 5일에 군산에 배포하였다. 오화영( 吳 華 英 )은 2월 28일 김창준에게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받아 동생 오은영( 吳 殷 英 ) 22

15 총 설 을 시켜 개성 강조원( 姜 助 遠 )에게 보냈다. 강조원이 3월 1일 아침 신공량에게 부탁하였으나 배포자 물색이 어렵다며 반환하여 북부예배당 지하실에 감추었다. 신공량은 정오경 권애라 ( 權 愛 羅 )에게 배포자가 없어 곤란하다고 알렸다. 이를 권애라에게 들은 어윤희( 魚 允 姬 )가 그 선언서 배포의 임무를 맡겠다 고 하였다. 이에 신공량은 지하실에서 6~70매를 꺼내어 권애 라를 통해 어윤희에게 교부하고, 어윤희는 북본정과 남대문사이에 통행인에게 배포하였다. 또 오화영은 박희도 집에서 독립선언서 약 2~300매를 받아 곽명리( 郭 明 理 )에게 원산에 전달을 부탁하였다. 정춘수는 2월 28일 밤 곽명리가 가져 온 독립선언서를 보고 곽명리 이 가순에게 배부를 촉구하였다. 이가순은 3월 1일 원산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 하였다. 윤원삼은 2월 27일 평양 숭현여학교에서 정일선( 丁 一 善 ) 도인권( 都 寅 權 ) 박인관( 朴 仁 寬 ) 등과 회합하고, 2월 28일 정경필( 鄭 京 弼 )에게 독립선언서 200매를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 천수백 명이 숭덕학교 운동장에 모여 김선두( 金 善 斗 )가 독립운동발표식을 한다 선포하 고, 정일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강규찬( 姜 奎 燦 )이 연설을 하고, 윤원삼은 선언서를 배 포하였다. 3 불교 : 한용운( 韓 龍 雲 )은 2월 28일 이종일에게 3,000매를 받아 자택에서 오후 8시경 중 앙학교 오택언( 吳 澤 彦 ) 정병헌( 鄭 秉 憲 ) 등 수명에게 전달하였다. 오택언은 기숙사생 40여 명에게 1매씩 배포하고,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행진하라는 뜻을 전하고, 3월 1일 밤 수명과 선언서 100매를 청진동 기타 민가에 배포하였 다. 4 학생 : 2월 28일 밤 승동예배당에서 중등 정도의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다. 중앙학교 장기욱 선린상업학교 이규송 조선약학교 전동환 이세룡이 약 70매, 김백평이 약 200매를 받았다. 장기욱은 3월 1일 이춘학( 李 春 鶴 )에게 교부하고, 이규송은 파고다공원 에서 남정채 박인옥 김철환을 만나 남정채에게 약 20매를 봉래정, 박인옥에게 약간을 동 막, 김철환에게 약 60매를 남대문 안과 동막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김철환은 오후 2시쯤 마 포에서 쌀가게 이발소 및 통행인 등에게 배포하였다. 나머지는 이규송 자신이 조선상업은 행 부근에 배포하였다. 5 일본과 중국 : 임규는 최남선의 권유로 독립선언서 등 초안을 보고 조선독립의견서를 23

1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제국정부 귀중 양의원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는 2월 26일 최남선에게 언문체 의견서 및 독립선언서 초안을 받아 의견서는 가다가나를 혼용한 일문( 日 文 )으로 번역하고 독립선언서 는 일문으로 주를 달았다. 2월 27일에 33명 기명날인한 지면 3매를 받아 오후 8시 출발하여 3월 1일에 도쿄 상마애장( 相 馬 愛 藏 ) 집에 투숙하였다. 3월 3일 번역 의견서와 주를 달은 선 언서 각 3통을 정서하여 통고문 으로 의견서와 연명자 기명날인한 지면을 첨부하여 내각 귀중 양의원에 우송하였다. 안세환은 이승훈 등을 만나 기독교측 대표자로 선정되어 2월 27일 오전 8시에 출발하여 3월 1일 도쿄 용명관에 투숙하였다. 3월 4일에 경시청 총감에게 조선독립 이유를 누차 진 술하였다. 김지환은 2월 22~24일 무렵에 오화영 이승훈의 권유로 강화회의 열국위원 의견서 미 국 대통령 청원서 초안과 독립선언서를 안뚱현 목사 김병농을 통해 상하이 현순에게 우송하 는 것을 맡았다. 2월 28일에 서류를 함태영에게 받아 3월 1일에 신의주를 거쳐 안뚱현에 갔 으나 김병농이 의주에 있어 아들 김태규( 金 泰 圭 )에게 교부하였다. 5) 3 1운동 전개 1 3월 초순 : 3월 2일 고희준이 3월 1일에 이어 오전 11시에 약 50명 군중과 종각 부근에 서, 김영진( 金 永 鎭 )도 보신각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에서 종로에 걸쳐 학생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 간부들은 제2회 독립운동을 3월 5일로 결정하였다. 한위건 강기덕 김원벽 등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및 기타 학교 대표자를 3월 4일 오전에 배재고등 보통학교 기숙사로 불러 명 3월 5일 오전 9시에 남대문 역전을 집합지로 학생 주도의 독립 만세운동을 하고, 강기덕 김원벽이 지휘를 담당하니 각자는 각 학교 학생 또는 잘 아는 사 람을 규합하여 참가하라 는 뜻을 전하였다. 밤에는 한위건 강기덕 한창환 장기욱 전옥 결 등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에서 결속을 다졌다. 3월 5일 오전 8시 전후 남대 문 역전에 수만의 군중이 모였다. 강기덕 김원벽이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기 를 휘날리 며 달려와 제2회 시위운동을 선포하고, 이들의 지휘에 따라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 며 남대문으로 향하였다. 일부 인사는 독립운동자 표시로 적포( 赤 布 )를 다수 살포하며 이를 24

17 총 설 흔들었다. 일경들이 군중들을 제지하고 강기덕 김원벽 등 다수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일경 을 피한 군중들은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 무교정을 지나 보신각 앞에서 합류하여 독립만세 를 고창하였다. 또 유생들이 청량리 반우식( 返 虞 式 )에 상소를 올리려 시도하였다. 유준근( 柳 濬 根 ) 송주헌( 宋 柱 憲 ) 백관형( 白 觀 亨 ) 등 14명이 3월 2일 수창동 모 여관에서 지금 독립선 언이 일조에 진동하고 이미 패연히 이를 막을 자 없다 따라서 대위( 大 位 )를 복구하여 일국 에 호령하며 각국에 통고하라 는 상서를 작성하였다. 3월 5일 반우식( 返 虞 式 )에서 송주헌이 상소를 올리려 하고, 어대선이 독립 연설을 할 때 고종의 연( 輦 )이 통과하므로 군중과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정호석( 鄭 浩 錫 )은 오전 9시 반경 왼손 무명지를 깨물어 태극장( 太 極 章 )을 그 려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는 동막 흥영학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박성철( 朴 性 哲 ) 오정엽( 吳 貞 燁 )에게 참가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학생 수십 명과 공덕리까지 만세 행진을 하였다. 김경준( 金 敬 俊 )은 이왕직 양악대 악수로 삼청동 및 팔판동 주민들은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조선은 장차 독립하려고 하고 있다. 모름지기 노력 분투하지 않 으면 안된다 고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3월 26~7일에도 김재완( 金 在 完 )과 삼청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2 3월 하순 :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검거 작전으로 3월 중순에는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 지 못하였다. 3월 12일 김백원( 金 百 源 ) 문일평( 文 一 平 ) 차상진( 車 相 晋 ) 문성호( 文 成 鎬 ) 조형균( 趙 衡 均 ) 김극선( 金 極 善 ) 백관형 등 유생들이 서린동 영흥관에서 회합하고 조선13 도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동포 2천만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요구한다 는 애원서 를 만들었다. 차상진 문성호가 이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고, 김백겸 문일평 김극선 조형균 백관형은 보신각에서 모여 문일평이 낭독하여 독립 의지 를 표출하였다. 3월 하순에 다시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0일 김상직( 金 相 稷 )이 오후 5시경 이백룡( 李 白 龍 ) 집에서 양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제국 만세! 이 사직은 이전에는 조선총독부 경영이었으나 금년부터는 대한민국의 소유로 돌아왔다. 대황제폐하 만세! 국민 이 씀 이라 쓰고 밤에 사직단문 앞 기둥 높이에 부착하였다. 3월 22일에는 김공우( 金 公 瑀 )가 3월 21일 정지현( 鄭 志 鉉 )에게 명 22일 봉래정 공지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된다 고 들었다. 그는 이틀간 중림 화천정 노동자를 모아 수백 명과 의주 25

1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통에서 아현고개로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 엄창근( 嚴 昌 根 )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신형균( 申 衡 均 )이 프랑스영사관 등에서 조선 독립을 꾀함은 바로 이때이다. 각자는 이를 위 하여 몸과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라 연설을 하고, 염수완( 廉 壽 完 )은 가게를 닫으라! 빨리 만세를 부르라! 하여 문을 닫고 만세를 불렀고 설규성( 薛 奎 成 ) 김공로( 金 公 璐 ) 신화순( 申 化 順 ) 박효석( 朴 孝 錫 )도 동참하였다. 조덕인( 趙 德 仁 )은 죽첨정에서, 안흥성( 安 興 成 ) 변장 성( 邊 長 城 ) 김덕봉( 金 德 奉 ) 등은 금화산 꼭대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3일에는 종로통 일대를 중심으로 5~60, 100명, 2~300명씩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종로 3정목 5정목 동대문통 재교 동묘 동대문 돈화문통 나무시 장 숭정보통학교 연건동 숭이동 수은동 훈련원 광희정 석교 안암동 안암천 부근에 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10~30명씩 군중들은 전차를 공격하였다. 종로통 재 교에서 이규민( 李 圭 敏 ), 종로 1정목에서 유성옥( 柳 成 玉 ), 수표교 입구에서 백창길( 白 昌 吉 ) 신명국( 申 明 國 ), 종로 3정목에서 이천봉( 李 千 奉 ), 광화문과 종로 사이에서 김사철( 金 四 哲 ) 원병준( 元 炳 埈 ) 김복동( 金 福 同 ), 공업전습소 입구에서 정필모( 鄭 必 謨 ) 등이 군중과 전차에 투석하였다. 그 결과 제 호의 유리창 덧문 등이 파손되었 고 10여대 전차가 정차되었다. 3월 24일에는 김수근( 金 壽 根 ) 안중식( 安 重 植 ) 박지양( 朴 至 陽 ) 허진( 許 榛 ) 등이 돈화문 통 및 그 부근 도로에서 수십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5일에는 양주흡( 梁 周 洽 )이 경복궁 부근에서 모인 약 25명과 중학동에서, 조장록( 趙 長 錄 )이 3월 25~6일 수십 명과 팔판 삼청동에서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시내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전차를 공격하였다. 서계동 노상에서 임 춘식( 林 春 植 ), 중림동 공지에서 박효석( 朴 孝 錫 ), 광화문통 기념비 부근에서 김교승( 金 敎 承 ), 명월관에서 김규정( 金 奎 正 ) 정만성( 鄭 萬 成 ), 누하동 신명학교 마당에서 박순장( 朴 淳 璋 ) 김진영( 金 鎭 永 ), 적선동에서 박흥준( 朴 興 俊 ), 종교파출소 부근에서 장석영( 張 錫 永 ), 안국동 에서 박학준( 朴 韓 俊 ), 무교정에서 박진갑( 朴 辰 甲 ), 서대문 1정목 부근에서 김동익( 金 東 益 ) 송병철( 宋 秉 喆 ) 등이 5~100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학준은 30명 가량과 만세를 부르고 양준식( 梁 俊 植 ) 집에서 순사보에게 만세를 부르는 자를 체포하는 순사보 헌병 보조원 집은 불 태워 버린다 고 소리치고, 일본인이나 관리에게 음식을 파는 양준식과 26

19 총 설 다퉜다. 박진갑은 30명 가량과 동대문행 전차에 돌을 던졌다. 유인수( 兪 仁 洙 仁 承 ) 이한 준( 李 漢 準 ) 김찬희( 金 瓚 熙 ) 이종엽( 李 鍾 燁 )은 서대문 1정목 부근에서 300여명 군중과 2집 단으로 나뉘어 만세를 부르며 전차에 투석하여 4~5대를 정지시키고 유리창을 부쉈다. 유인 수는 광화문통에서 5~60명과 만세를 부르고 2~30명에게 돌을 던져라, 던져라 며 전차에 투석하였다. 또 광화문통파출소 부근에서 전차에서 부인이 떨어져도 차장이 운행하자, 군중 들은 격렬히 투석하고 기마순사 말을 맞췄다. 이한준도 운전수를 괘씸하게 여겨 30명 가량과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김찬희는 7~80명과 만세를 부르고 2~30명쯤과 전차에 투석하였다. 이종엽은 당주동 입구에서 하수구에 빠져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박귀돌( 朴 貴 乭 )은 오후 8 시 반경 약 50명을 이끌고 종교파출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투석하였다. 그가 순사 보 박재봉( 朴 在 鳳 )에게 밖에 나와 만세를 부르라. 만약 부르지 않으면 죽인다 고 하였다. 3월 27일에도 시내 여러 곳에서 야간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우명철( 禹 命 哲 )은 오 후 7시 30분 약 50명과 동양협회 신축장 뒤쪽 언덕, 김종옥( 金 鍾 玉 )은 광화문 경찰관 연습 소, 박계갑( 朴 桂 甲 )은 태극기를 흔들며 등불을 들고 이효선( 李 孝 善 ) 김은호( 金 殷 鎬 ) 등 약 100명과 재동파출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창덕( 劉 昌 德 )은 오후 9시 30분 광화 문에서 약 10명과 서대문에서 종로행 전차에 투석하였다. 윤희용( 尹 喜 用 ) 김윤식( 金 允 植 ) 은 공업전문학교 앞길에서 학교가 조선총독부 건물로 보기가 징그러워 자갈을 투석하여 유 리를 깨뜨렸다. 이봉하( 李 鳳 夏 )는 종로 네거리에서 혼자 국장을 슬퍼하며 나라 독립을 위해 울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범룡( 朴 範 龍 ) 최도학( 崔 道 學 )은 관훈동에서 소림( 小 林 ) 이 전선에 달린 태극기를 떼려는 순사에게 장대를 빌려 준 것을 분개하여 소림 집에 투석하 여 유리창 전등 식기류 등을 파손시켰다. 3월 30일에는 박홍기( 朴 泓 基 )가 종로 장사동 입구에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만세를 권유하였다. 3 3월 이후 : 4월 1일에는 강봉석( 姜 鳳 錫 )이 오후 2시경 황금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박창룡( 朴 昌 龍 )은 낙타산( 駱 駝 山 ) 산길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23일에는 3월 1일, 3월 5일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인 국민대회가 있었다. 한남수( 韓 南 洙 ) 김사국( 金 思 國 ) 홍면희( 洪 冕 禧 ) 이규갑( 李 奎 甲 ) 등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각계 독 립운동자로 가정부를 수립하여 계통적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3월 중순 이후 대표자를 선정 27

2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인천부 각국(만국)공원에서 가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안상덕은 천 도교, 박용희( 朴 容 熙 ) 장붕( 張 鵬 ) 이규갑은 예수교, 김규( 金 奎 )는 유생, 이종욱( 李 鍾 郁 )은 불교 대표자로 하며, 한남수 홍면희는 대회 주선을 맡았다. 수일 후 김규 한남수 김사국 등이 국민대회개최취지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4월 3일 안상덕 소개로 상해의 홍진의( 洪 鎭 儀 )가 참여하고, 이후 이규갑 김규가 윤이병( 尹 履 炳 ) 이용규( 李 容 珪 ), 이헌교가 이성수( 李 成 修 ) 최전구( 崔 銓 九 )에게 권유하고, 김사국은 전협( 全 協 ) 이동욱( 李 東 旭 ) 현석칠( 玄 錫 七 ) 등과 접촉하였다. 한남수는 상해와 연락을 위해 4월 8일 출발하며 후사를 이규갑 등에게 일임하였다. 이동욱( 李 東 郁 )은 조선13도대표자 명의로 각 지방 대표자를 규합하여 본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더욱 더 독립운동에 노력할 것 이라는 국민대회취지서 와 파리강 화회의 출석 위원을 선정하고 약법( 約 法 )을 제정하는 선포문 을 만들고, 현석칠이 목판으로 약 6,000매를 인쇄하였다. 김유인 김사국 등은 서린동 봉춘관에서 조선13도대표자 집회, 학생시위운동, 노동자 3,000명의 독립만세 고창, 자동차로 시내 인쇄물 배포 등을 결정하였 다. 4월 19일에는 안성덕 현석칠이 천도교 예수교 대표로 각각 600원을 제공하고 민강( 民 橿 )이 출납을 맡았다. 이튿날 안상덕의 500원은 민강을 통해 밤에 김유인에게 교부되었다. 이춘균( 李 春 均 )은 4월 17~18일경 조선은 독립국이므로 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적국 인 일본에게 납세하지 말라. 그 재판 및 경찰과 행정의 명령을 받지 말라! 의 임시정부선포 문 임시정부령 제1호 제2호 2종 약 100매를 받아 장채극에게 의뢰하고, 장채극 김유 인은 배포에 부족함을 느껴 윤좌진에게 부탁하여 4월 20~22일 김종석 나종하( 羅 鍾 河 ) 전옥결과 김태정( 金 泰 鼎 ) 집에서 2종을 1매로 약 1,500매를 인쇄하였다. 4월 22일 김유인은 장채극에게 4월 23일 국민대회 개최, 자동차 3대로 국민대회 공화만세( 共 和 萬 歲 ) 각 2기 씩을 들고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을 출발하여 유인물을 배부하며 정오에 종로 보신각 앞에 집합, 노동자 3,000인을 보신각에 배치하여 지휘자 3명에게 국민대회 등 기를 게양하고 정 오에 독립만세 고창, 봉춘관에서 조선13도대표자의 조선가정부 선언, 봉춘관 앞에 국민대회 간판 게시 등을 알리고, 활동 비용 200원을 교부하였다. 이에 장채극 등은 활동자 주선을 최 상덕에게 의뢰하였다. 최상덕은 50원을 받아 박수봉( 朴 壽 奉 ) 이만봉( 李 萬 奉 ) 등을 자동차 탑승자 지휘자 만세 수창자, 유태응( 劉 泰 應 )을 노동자 지휘자, 전철백( 全 徹 伯 ) 주병봉 ( 朱 炳 鳳 )을 간판 게시자로 의뢰하였다. 장채극은 밤에 방덕환( 方 德 煥 ) 방에서 선포문 국민 28

21 총 설 대회취지서를 인수하고, 김사국과 함께 이경문( 李 景 文 ) 방에서 인쇄물 약 4,000매, 간판 1개 를 꺼내 숙소 신용식 집에 가지고 갔다. 그는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호 제2호 등 3매철을 전옥결 이철 강우열( 康 禹 烈 ) 등 4명에게 배부하게 하였다. 장채극은 백포( 白 布 ) 를 사서 자동차 탑승자 지휘자용 9기를 만들고, 전옥결은 국민대회 공화만세 기와 국민 대회 간판을 제작하였다. 4월 23일 장채극 김유인은 숙소에서 유태응 박수봉 등에게 5원 씩과 공화만세 조선독립 1기씩을 교부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탑승자 이만봉 35원 기타 2명 30원씩과 인쇄물철 약 10매씩 깃발 2기씩을 교부하였다. 강우열은 동대문 김병 호( 金 炳 鎬 )는 서대문 유기원( 柳 基 元 )은 창덕궁 김홍식( 鴻 弘 植 )은 시내에서 배포할 인쇄물 350부씩을 교부하였다. 정오에 유태응 박수봉 등 3명은 보신각에서 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를 부르고, 이만봉 등 3명은 서대문 동대문 남대문에서 기를 흔들며 인쇄물을 배포하고, 김병호 등도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장채극 전옥결은 인력거를 타고 봉춘관에 간판을 들고 가서 전백철 주병봉에게 게시하게 하였다. 이관우( 李 寬 宇 )는 4월 23일 국민대회 개최를 듣 고 4월 22일 밤 윤화병( 尹 華 炳 ) 윤정식( 尹 正 植 ) 등에게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23일 정오 경 종로에서도 국민대회 기를 들고 학생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5월 31일에는 윤여옥( 尹 餘 玉 ) 차대유( 車 大 輶 ) 등이 연해주 대한국노인단( 大 韓 國 老 人 團 ) 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5월 31일 경성에 도착하여 오전 11시경 보신각 앞에서 각자 태극 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6) 유인물 배포 1 유인물 : 조선독립신문은 이종인이 2월 28일 독립선언 전말, 독립사상 고취, 독립만세 운동 권유 등을 내용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작성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협의하여 3월 1일 오전 10시경 윤익선( 尹 益 善 )의 동의로 김홍규가 보성사에서 약 10,000매를 인쇄하였다. 각성호회보( 覺 醒 號 回 報 ) 는 양재순( 梁 在 順 ) 김호준( 金 鎬 俊 )이 3월 8~11일까지 4일간 김 호준 집에서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분기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라 는 내용으로 제1~4호 까지 매일 밤 각호 약 80매씩을 만들어 양재순이 광희정에 배포하였다. 제1호에 2천만 동포 여! 이제야 깊은 밤의 꿈 속에서 깨어났다 활발 용감한 우리 3천리 강산 2천만 동포여! 태 극기를 손에 들고 활동하라!, 제2호에 제1호와 같은 취지, 제3호에 천하에 두려워 할 것이 29

2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어디 있겠느냐! 제군은 적수무지( 赤 手 無 智 )함을 염려하지 말라! 분발하라! 분발은 사는 길 이다, 제4호에 우리 동포 형제여! 자신과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누구냐! 각자 분발하라. 건국 4252년 을 게재하였다. 동포여 일어서라! 는 박노영( 朴 老 英 )이 3월 6일 김세룡( 金 世 龍 )과 격문을 발행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격렬히 하자는 협의하였다. 3월 7일 전준희( 全 俊 禧 )는 한위건 원고를 김세룡 방 에서 박노영 등에게 교부하였다. 3월 1일 우리들 선배 33명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 는데 동포여! 오늘날은 평화적 정도가 오는 시대이다. 민족적 자결이 일어나는 시대이다, 동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 는 조선독립단 명의로 3월 7일 밤중부터 8일 오전 1시까지 약 800매를 인쇄하였다. 경고 조선국민학생단발동 비법행동 은 이병주 주도로 제작되었다. 그는 3월 4일 최 강윤( 崔 康 潤 ) 등과 경고 약 400매를 인쇄하여 최강윤이 수송 송현동 약 20매, 김종현( 金 宗 鉉 )이 중학동 약 100매, 채순병( 蔡 順 秉 )이 소격동에 약간을 배포하였다. 이어 3월 5일 독 립만세를 부른 후 이필주 집에서 5일 오전 9시 남대문 정거장에서 수만의 남녀 학생이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성내 남녀 소 중등학교 학생은 조선독립의 희생이 되었다. 조선독립 만세! 건국 4252년 3월 일. 조선학생대표 의 조선국민학생단발동, 국민의 항상 지녀야 할 독립사상과 천연의 조국 정신을 가진 남녀 학생을 체포하는 자는 누군가? 우리들도 천부의 양심에서 스스로 울어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선량한 학생에게 폭행을 가하는 관리를 하늘 이 어찌 벌하지 않느냐?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 의 비법행동 원고 2매로 이묘묵( 李 卯 默 ) 과 수백 매를 인쇄하였다. 이병주는 정동에서, 이묘묵은 시내에 배포하였다. 경고문 은 강일영( 姜 日 永 ) 등이 3월 27~8일경 우리들은 이때를 틈타 상해 재류동포와 책응하여 시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를 약 100매 인쇄하고, 이튿날 강일영은 황금정, 김용희( 金 用 熙 )는 내자동, 김영식( 金 英 植 )은 시내에 배포하였다. 반도의 목탁 은 장용하( 張 龍 河 ) 이춘봉( 李 春 鳳 ) 서정기( 徐 廷 基 ) 등이 발행하였다. 이들 은 4월 1일 제1호 약 100매와 4월 12일 제2호 약 100매를 만들었다. 이춘봉 염형우( 廉 亨 雨 ) 등 6명이 4월 13일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 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이래로 조선 민 족은 일본인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당하고 있다 는 1부 8매씩 20부, 이춘봉 염형우 등 5명이 4월 22일 제3호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다. 조선인은 이의 독립을 힘쓰지 않으면 30

23 총 설 안된다 는 100매 4월 25일 특별호 내부무 장관이 조선에 있는 서양인 7명을 초청하여 시 국에 관한 의견을 질문하였는데, 그 서양인들이 조선인에게 동정하는 답변을 하였다 는 약 70매를 인쇄하였다. 경고 와 자유민보 는 최석인( 崔 碩 寅 ) 백광필( 白 光 弼 ) 유연화( 柳 淵 和 )가 3월 하순부터 4 월 중순까지 인쇄 배포하였다. 이들은 3월 5일 남대문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최석인 백광 필은 3월 하순경 조선국민자유단( 朝 鮮 國 民 自 由 團 ) 의 근래 조선인 유지자 사이에서 조선인 에게 출판 언론의 자유를 주고 조선에 대하여 식민지의 이름을 삭제하고 대의사를 제국의 회에서 선출하게 하며 헌병제도를 폐지할 것 을 요구하여 우리는 최후의 1인에 이르기까지 분투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협의하였다. 최석인이 경고 를 집필하여 최석인 백광 필은 약 300매를 인쇄하였다. 다시 자유민보( 自 由 民 保 ) 를 협의하고 유연화가 논설, 최석인 이 기타 기사를 담당하여 4월 1일부터 중순까지 소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등의 자유민보 제1~제5호까지 각호 약 1,000매씩을 인쇄하여 직접 또는 의 뢰하여 광화 동대문 부근에 투입하였다. 전경석( 全 景 錫 )도 자유민보 제5호 인쇄를 도왔다.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 朝 鮮 民 國 臨 時 政 府 布 告 文 ) 도령부령 제1호 도령부령 제2호 는 4월 7일에 박이근( 朴 理 根 ) 권희목 허익환 박형건( 朴 泂 鍵 )이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박 이근은 2월 20일경 독립운동을 들었으나 독자적인 실행을 추진하였다. 대련의 이정( 李 晸 )과 허익환을 통한 천도교와의 교섭도 여의치 않았다. 4월 7일 밤 허익환이 조선국민대회 자 유당 연합회의 결과 손병희를 조선 정도령으로 선출하고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을 의 정하였음을 선언한다 는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에 의하 여 각부 경( 卿 ) 및 부관을 임명하였음을 포고한다 는 도령부령 제1호 파리만국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할 의원을 지정할 것을 포고한다 는 도령부령 제2호 원고, 백지 1,600매, 등사 판을 박이근 집으로 가져왔다. 밤에 합철하여 400통을 인쇄 배포하였다. 국민신보( 國 民 新 報 ) 국치기념( 國 恥 記 念 ) 은 이일선( 李 日 宣 )이 4월 중순부터 8월 하순경 까지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그는 독립사상 전파에 인쇄물 출판 반포가 상책으로 생각하고 집과 근무처에서 국민신보( 國 民 新 報 ) 제1~26호 국치기념( 國 恥 記 念 ) 특별호로 조선은 중국과 함께 동양 문명의 연원이다 지금 인류는 자유 평등이어서 강약의 구별없이 다 같이 낙을 누릴 때가 왔다. 조국을 광복하고 국치를 말끔히 씻어라 라는 내용으로 1회 약 300여매 31

2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씩 인쇄하고 대개 낮에 종로통 동대문 등지에 배포하였다. 이외에 김윤식( 金 允 植 )이 청원서를 작성하여 일제측 일본 신문사 국내 신문사 및 일 부 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는 3월 20일 이번 소요는 도저히 설유로써 돌이킬 수는 없으 며 위력으로써도 복종시킬 바가 아니므로 천심에 따라 일본은 모름지기 조선 독립을 인정하 지 않으면 안된다 는 청원서를 만들었다. 이어 3월 22일 이용직( 李 容 稙 )에게 보이고, 3월 25 일 김기수( 金 麒 壽 )가 2통을 정서하여 김윤식 이용직 날인을 받고, 김유문( 金 裕 問 ) 김기수 는 등본을 만들었다. 밤에 김윤식은 이계태( 李 啓 泰 )에게 내각총리대신앞 봉서 1통과 조일( 朝 日 ) 시사( 時 事 ) 보지( 報 知 ) 대판매일( 每 日 )신문사 등본 4통을 교부하여 일본에서 우송할 것과 동경에서 사본을 다른 신문사에도 송부를 부탁하며 여비 200원을 주었다. 이건태는 3 월 26일 부산에서 경부 이홍순( 李 弘 淳 )을 만나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3월 27일 5통을 일본으 로 발송하였다. 김유문은 3월 25 26일 24통을 복사하여 3월 25~28일에 모씨 1매, 김유정 ( 金 裕 定 ) 2매, 이흥규( 李 興 珪 ) 1매, 김진하( 金 鎭 夏 ) 2매, 김진한( 金 鎭 漢 ) 2매, 기타 6~7명에 게 1매씩을 교부하였다. 김기수도 복사본을 서정순( 徐 貞 淳 ) 이철상( 李 哲 相 )에게 1매씩을 교 부하고, 3월 27일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에 위탁서와 함께 우송하였다. 이용직은 김기수 의 복사본 2통을 받아 3월 25일 이충규( 李 忠 珪 )에게 사본 약 30통을 작성케 하고, 3월 29일 대판( 大 阪 ) 모신문 기자에게 교부하였다. 2 유인물 배포 : 조선독립신문 은 임준식 김상규를 통해 학생 등이 파고다공원 등에 배포하였다. 장채극 전옥결 이철은 약 200매를 이인식 등 십수 명에게 전달하여 송현 간 안국 인사동에 배포하였다. 이들은 3월 2일 독립신문 제2호 독립가 수백 매를 보 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을 통해 배포하였다. 3월 5일 전옥결이 한위건에게 제3호 약 80매를 받 아 강창준 등이 배부하였다. 이어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독립신문 제17~23호까지 매 일 격일 4~5일에 약 200매를 인쇄하고 김춘남( 金 春 南 )이 배포하였다. 이어 조민언( 趙 敏 彦 ) 원고로 장채극 김홍식 등이 4월 10~17 8일까지 제24~27호 수백 매씩을 인쇄하고 학 생들이 배포하였다. 또 임승옥은 조선독립신문 제2호는 서적조합 사무실, 제5 6호는 유 병륜 집에서 인쇄를 도왔다. 김동혁은 3월 2 5일 허신( 許 信 )에게 조선독립신문 제2호 10 매 제3호 7~8매를 받아 낙원동에 배포하였다. 한경익( 韓 景 翊 )은 3월 1~6일까지 이지익( 李 枝 翼 )에게 조선독립신문 제1호 약 300매 제2호 약 100매, 국민회보 약 100매, 3월 20일 32

25 총 설 경 최석관( 崔 碩 寬 )에게 자유민보 경고문 6~70매, 5월 1일 유기선( 柳 基 先 )에게 혁신공 보( 革 新 公 報 ) 70매를 받아 배포하였다. 오흥순은 3월 3일 배재학당 기숙사 뒤에서 국민회 보 20매를 받아 파고다공원 북동쪽 길가에서 배포하였다. 최윤창( 崔 潤 昌 )은 3월 5일 이동 규( 李 東 奎 )와 국민회보 50여 통을 김봉철( 金 奉 哲 ) 등에게 배포하였다. 최중경( 崔 中 庚 )은 3 월 7일 김준희( 金 俊 禧 )에게 경고문 50여 매를 받아 정민영( 鄭 敏 英 )에게 교부하고, 정민영 은 청년동맹회( 靑 年 同 盟 會 )의 조선독립선언취지 문서 약 33통 우리 동포여! 약 20통을 시 내에 배포하였다. 고희준은 3월 8일 밤 임창준에게 독립선언서 10매와 상인도 매호 폐점 하고 이에 참가하라 라는 시민대회 10매를 받아 3월 9일 봉익동과 종로통 사이에서 배포하 였다. 박노영 등은 동포여 일어서라! 800매 중 3월 8일 약 250매를 견지 인사동에, 250 매를 모씨에게, 100매를 최사렬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김학봉( 金 學 鳳 )은 3월 10일 김도리 ( 金 道 吏 )에게 경고문 40매 조선독립신문 5매를 교부받아 경고문 5매를 김창순( 金 昌 順 ) 에게, 8매를 서인필( 徐 仁 弼 )에게, 나머지는 장교 황금정에서 배포하였다. 서인필은 경고 문 8매 중 2매를 관철동 이근호 집 장교정에 배포하고, 김창순은 5매 중 1매를 모씨에게 배 포하였다. 김진성( 金 振 聲 ) 권철( 權 鐵 ) 요영국( 姚 永 國 )은 3월 10~25일 경까지 3~4회 걸 쳐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백 수십 매를 공흥문에게 받아 배부하였다. 요영국은 3월 일경 4회에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을 받아 김진성 권철에게 배포 를 의뢰하였다. 요영국도 3월 10일경 조선독립신문 십수매, 3월 20 25일 2회 반도의 목 탁 십수 매를 배포하였다. 김진성은 조선독립신문 을 3월 10일 10매 13일 15매 20일 24 매, 권철은 3월 10~25일경까지 4회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을 매회 20~45매를 운 니동에 배부하였다. 손공린( 孫 公 璘 )은 3월 14일 중앙학교 이남두( 李 南 斗 )에게 독립신문 약 60매를 교부받아 적선 체부동에 배포 교부하였다. 이태형( 李 台 炯 )은 3월 16일 조병덕( 趙 秉 德 )과 산보 중 대한문에서 모씨에게 아! 동포의 관리 및 형사에게 고함 30매를 받아 숙소에 서 양규섭( 梁 奎 涉 )과 함께 읽고 부근 모 전당포에 10매, 양규섭은 낙원 부근에 3매를 교부하 고 나머지는 소각하였다. 김공우은 3월 17일 정지현에게 노동회보 를 의뢰받고, 배희두( 裵 熙 斗 )와 함께 3월 20일경 노동회보 11매를 화천정에서 배포하였다. 허정묵( 許 丁 默 ) 김상 우( 金 相 禹 ) 최덕종( 崔 悳 鍾 )은 3월 20일경부터 4월 상순까지 두 번 최하현( 崔 夏 鉉 )에게 반 도목탁 을 의뢰받고, 허정묵은 3월 12매와 4월 상순 10매 합계 22매 김상우는 15매를 안국 33

2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동, 최덕종은 30매를 운니동에서 배포하였다. 김창진( 金 昌 珍 )은 자유민보 제1~5호까지 약 100매씩을 최한석( 崔 漢 錫 )에게 교부하여 동대문에 배포하였다. 최진순( 崔 瑨 淳 )은 4월 2~3 일 김기선( 金 箕 鮮 )에게 받아 둔 경고문 반도의 목탁 조선독립신문 등을 이동석( 李 東 錫 ) 등에게 교부하였다. 김기영( 金 基 英 )도 반도의 목탁 을 4월 10~14일 사이에 송현동 기 타 주민에게 배포하였다. 허익환이 4월 7일 밤에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 도령부령 제 1호 도령부령 제2호 을 합철한 400통을 배포하였고, 4월 9일에는 남미창정에 조선민국 임시정부포고문 도령부령 제1호 가 배포되었다. 서대순( 徐 大 順 )은 4월부터 10월까지 배 운성( 裵 雲 成 ) 김해룡( 金 海 龍 )의 자유민보( 自 由 民 報 ) 약 2,000매, 혁신공보( 革 新 公 報 ) 약 3,000매를 학교 소사실에서 인쇄하였다. 2. 경기도 1) 개성군 개성에서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어윤희( 魚 允 姬 )에 의해 배포되었다. 그녀는 2월 26일경 독 립선언서 배포를 부탁받고 3월 1일 신관빈( 申 寬 彬 )에게 협조를 부탁한 후 오후 2시경 독립선 언서 2,000매를 받아 만월 북본 동본정에 배포하였다. 개성에서는 3월 3일 4일 양일간 학생들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3일 에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남대문부터 읍내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참여 군중이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오후 6시경 약 50명 학생이 일장기를 찢고, 9시 30분 무렵에 남본정파출소에서 약 1,000명이 만세를 불렀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우편배달부를 폭행하였다. 강부성( 姜 富 成 ) 신동윤( 申 東 潤 ) 등이 읍내를 활보하며 헌병대 경찰서 등에서 만세를 부르고 일장기를 파기하며 일본인을 구타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에 도 오후 2시 무렵에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4학년이 주도한 약 100명 학생을 중심으로 약 500명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북본정에서 병교 식산은행 고려교 남대문 부근까지 여러 곳에서 독립 연설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4

27 총 설 2) 인천부 3월 6일 이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교직원과 경찰서는 전화로 동 태를 조사 훈계하는 등 협조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3학년 김명진( 金 明 辰 )은 통신 체계를 방해하고자 3월 8일 오후 9시경 학교에서 박철준( 朴 喆 俊 )에게 망을 보게 하고 2층 전화선을 절단하고 사무실 수화기를 파손하였다. 내리에서는 4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김삼수( 金 三 壽 ) 임갑득( 林 甲 得 ) 등 주도로 독립 운동으로 폐점( 閉 店 )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천에서는 3월 30~31일 일부 상점이 폐점하였으 나 일경의 설유로 개점하였다. 이들은 폐점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4월 1일에 인천 의 체면상 점포를 닫지 않으면 최후 수단을 취하겠다 는 협박문 18통을 오후 8시 이후 주명 서( 朱 明 瑞 ) 이복현( 李 福 鉉 ) 등을 통해 15개 점포에 투입하였다. 이튿날에도 계속 개점하자,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 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다 는 경고 20통을 장지 섭( 張 智 燮 ) 등의 점포에 투입하였다. 이어 4월 3일에는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 을 취할 것이다 는 최후통첩을 배포하려다가 체포당했다. 3) 양주군 미금에서는 3월 13~14일 양일간 이승익( 李 昇 翼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3일에 주민에게 총독 고유( 告 諭 )를 읽어주고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이튿날 오후 1시 무렵에 이승익 정기섭( 丁 基 燮 ) 등은 평내리 밖 주막에서 주민과 독 립만세를 부르고 면내를 순회하였다. 금곡리로 가는 도중에 헌병 비전임길( 飛 田 林 吉 )의 해산 명령에 주민들은 2천만 동포가 조선 독립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느 냐?, 특히 이석준( 李 錫 俊 )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느냐? 며 독립만세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와부에서는 3월 14일 이정성( 李 正 成 ) 등이 협의하고 이튿날 이른 아침 송촌리와 부근 주민 들 1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조안리와 부 근 주민들이 합류하여 덕소리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백석에서는 3월 27일 김대현( 金 大 鉉 ) 등이 연곡리 주민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안 종태( 安 鍾 泰 鍾 台 )가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고 연설을 하고 이튿날 약

2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명이 오산리 대들벌과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구리에서는 3월 28일 이강덕( 李 康 德 ) 심점봉( 沈 點 奉 )이 오후 5시경 아천리 주민 수십 명 과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토평 교내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연호 하였다. 3월 29일에도 아차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우고 주민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진접에서는 3월 29일 봉선사에서 이순재( 李 淳 載 )의 발의로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 명의의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문서 약 200매를 만들었다. 강완수( 姜 完 洙 ) 등 4명은 오후 9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5시경까지 진벌 중촌리 등 4개 마을에 배포하였다. 밤에는 이재일( 李 載 日 )이 부평리의 이민 일동이 광릉천 강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라 는 통문 1통을 주민들에게 보이고, 3월 31일 양삼돌( 梁 三 乭 ) 등 주민 100여명과 광릉천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둔에서는 3월 29일 조염호( 趙 念 鎬 )가 자일리 주민 약 30명과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별내에서는 3월 하순 유해정( 柳 海 正 )이 고산리 집에서 한국을 강탈한 나머지 태황제 폐하 를 독살까지 하였으니 자기도 한 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원한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 는 봉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글 중에 이태왕 전하(고종)를 태황제폐하( 太 皇 帝 陛 下 ) 라 칭하는 등 민족 자존의 정신을 표출하였다. 4) 가평군 북면에서는 3월 15~16일 양일간에 정흥교( 鄭 興 敎 興 龍 ) 정성교( 鄭 聖 敎 ) 장기영( 張 基 榮 )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상순에 음력 2월 14일 아침 9시 가평에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밀통( 密 通 ) 을 이윤석( 李 胤 錫 )이 2통, 정흥교가 1통씩 작성하였다. 이윤석은 목동 소법 화악리에 1통씩을 교부하고 이곡리에 직접 말로 전하 고, 정흥교는 정성교 이영헌( 李 英 憲 ) 등에게 권유하였다. 면민들은 성황당을 거쳐 면사무 소에 800명쯤 집합하였다. 군중들은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되는 것 (정재명),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될 것 (정흥교 홍종선), 조선이 이제부터 독립한다 (장호 리( 張 浩 利 ))고 인식하였다. 이윤석 정흥교 주도로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로 향하 였다. 군수와 헌병 소장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독립만세를 정당한 일로 생각하였다. 정흥교 의 신호에 따라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청 면사무소 헌병분견소 우편소 금 36

29 총 설 융조합 보통학교 천도교구실 등을 순회하였다. 분견소 헌병들은 해산 명령을 내리고 이 윤석 정흥교 등 십수 명을 구금하였다. 이어 3월 16일에는 구금 인사 탈출을 위한 독립운 동이 있었다. 정성교가 동생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동지들의 활약으로 성황당 과 목동리에 약 200명이 모였다. 장기영 정성교 인솔로 군중들은 헌병분견소로 이동하다 가 당고개에서 경성에서 파견된 헌병들과 충돌하였다. 군중들은 헌병의 멱살을 쥐며 죽일 테면 죽이라!, 오히려 죽여 달라! 고 덤벼들었고, 돌을 던지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 에 헌병들은 공포를 발포하여 제지하였으나 군중들은 오히려 총기 탈취를 위해 격투를 벌 였다. 이에 주춤하던 헌병들은 지원 보병이 도착하자, 주도 인사를 체포하며 만세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5) 강화군 부내에서는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시장에서 10,0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이었다. 유봉진( 劉 鳳 鎭 )은 3월 8일경 이 진형( 李 鎭 亨 ) 집에서 황유부( 黃 有 富 ) 황도문( 黃 道 文 ) 등과 동지 규합과 역할 분담을 협의하 였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결속을 강화하며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등을 지역민에게 배포 하였고, 황일남( 黃 日 男 ) 황윤실( 黃 允 實 ) 등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독립운동을 준비하였 다. 3월 18일 주도 인사들이 각기 태극기를 가지고 삼삼오오 시장으로 모였다. 오후 2시경 신문리 시장 쪽에서 조대신( 趙 垈 信 )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시작하니 군중들은 중앙 돌다리 부근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조금 늦게 백마를 타고 시장에 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왕래하고, 종루의 종을 쳐서 분 위기를 고조시켰다. 독립만세가 한층 고조되자, 순사와 순사보 8명이 유봉진 유희철 조대 신 등을 체포하고 군중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순사보를 찌르고 구타하여 유 봉진을 탈출시키고, 태극기를 탈취하려는 순사보의 따귀를 갈기는 등 일경들의 진압에 항거 하였다. 이어 군청에서 유봉진이 약 2시간 반쯤 독립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은 군수 이봉종 ( 李 鳳 鍾 )에게 만세를 부르라, 부르지 않으면 밤이 밝아도 가지 않겠다, 만약 불응하면 군 청 청사를 파괴하겠다 며 독려하여 결국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사환의 급보를 받은 순사 순사보 십 수 명이 군청에 출동하여 군중을 제지하였다. 또 유봉진이 향 37

3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교에서 강화경찰서에 검속된 유희철 조대신 등의 석방을 요구하자 고 제의하여 5시경 약 5~6,000명이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이어 계속된 구금자 석방 요구와 항의는 일경과 다툼으 로 이어졌다. 유봉진이 석방 교섭을 한 결과 약 2시간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서 장에게 만세를 부르라 요구하여 서장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삼산에서는 이안득( 李 安 得 )이 4월 7일 오후 8시경 석모리 당산 꼭대기에 올라 주민 십수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6) 연천군 백학에서는 3월 21일 조우식( 趙 愚 植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가 두일리 장날 오 후 6시경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이낙주( 李 洛 周 ) 등이 호응하여 만세를 합창하므로 군중들 이 모였다. 그는 면장 윤규영( 尹 圭 榮 )의 만세 고창을 제안하였다. 이에 정현수( 鄭 賢 秀 )가 면 장을 찾아왔고, 이낙주( 李 洛 周 )도 면장 손을 잡고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 하라! 고 강요하고, 조우식 홍순겸( 洪 淳 謙 ) 등도 같이 만세를 부르라! 며 구타하므로 면장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정현수가 시장 부근 집 대문을 돌로 두들겨 참가를 권유하고, 박영학( 朴 永 鶴 ) 등이 참가하지 않으면 살해 또는 방화한다 고 소리치고, 이어 구금룡( 具 今 龍 )이 소방용 경종( 警 鐘 )을 쳐서 150~160명이 모였다. 이들이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정기만( 鄭 基 萬 )에게 만세 를 부르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는 불응하였다. 이에 조우식 정현수 등이 투석하여 유리창 1 장, 방문 1개 등을 파손하였다. 헌병들의 제지에도 약 200명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연호하였 다. 10시경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미산 마전리로 향하여 이튿날 오전 3~4 시경 마전리 문묘(향교)에서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백천 기( 白 天 基 )도 밤에 통구리 주민 약 60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마전리 헌병주재소 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중면에서는 3월 31일 나용기( 羅 龍 基 )가 이홍식( 李 洪 植 )을 불러 명 4월 1일 오전 7시경 세 야골에 집합하라 는 격문 6통을 만들어 한씨동( 韓 氏 童 )이 횡산 중사리, 나성돈( 羅 聖 敦 )이 삼관리, 나개동( 羅 開 童 )이 합수리 등 2개리 구장에게 배부하였다. 오전 7시경 삼관리에 모인 면민 약 400명은 나용기가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를 향하여 만세 행진을 하던 중 헌병의 제지를 받았다. 38

31 총 설 7) 김포군 양촌에서는 3월 19일에 누산리 박충서( 朴 忠 緖 )가 박승각( 朴 勝 珏 ) 등과 격문 경고문 십수 통을 작성하여 오인환( 吳 仁 煥 ) 정억만( 鄭 億 萬 ) 등과 면내에 배포하였다. 이어 3월 23일에 는 양곡시장에서 군중 수백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월곶에서는 3월 22일, 28~29일과 4월 9일에 각기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22일에 는 성태영( 成 泰 永 )이 박용희( 朴 容 羲 )와 결의하고 군하리 장날 군중에게 공자묘(향교)로 모이 라고 권유하였다. 향교에 200명이 모이자, 성태영 백일환( 白 日 煥 )은 마을을 순회하며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300명 군중이 면사무소로 갔다. 성태영이 면서기 조원석( 趙 元 錫 ) 등 4명에게 만세를 선창하라 요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백인환은 약 400명 군중 과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성태영이 독립 연설을 할 때 순사 산전중양( 山 田 重 洋 )이 제지하자, 백일환은 순사의 따귀를 때리고 호신용 총을 빼앗으려고 밀어 넘어뜨리고 수명이 십수회 난 타하는 등 폭행을 가하였다. 또 당신은 조선인이니 독립만세를 외쳐라 는 군중들의 요구에 불응한 순사보 이성창( 李 聖 昌 )을 끌고나가 넘어뜨리고 발길질 등을 하였다. 박용희 등은 재 차 면사무소에서 면서기에게 한국 국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3창하라 고 요구하였다. 조 원석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어 면서기 3명도 차례로 만세 3창을 하였 다. 이병린( 李 炳 麟 )도 박용희의 권유를 받고 약 200명을 이끌고 통진보통학교 면사무소 주재소 등에서 만세 행진을 하였다. 그는 순사보 이성은( 李 聖 恩 )에게 독립만세를 요구하였 다. 최우석( 崔 禹 錫 )도 고정리 주민 300명과 군하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8 일에는 조남윤( 趙 南 潤 ) 당인표( 唐 寅 杓 ) 등이 명 29일 오전 11시에 전 통진 읍내에 집합하 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문서 7통을 면내에 배포하였다. 또 정인교( 鄭 仁 敎 ) 등은 주민 수십 명과 함반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어 3월 29일 오전 11시경 400여명을 지휘하여 공자 묘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정오경 갈산리에 모인 수백 명도 오후 2시경 공 자묘 보통학교 면사무소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9일에는 임용우( 林 容 雨 )가 명덕학교 운동회 개최를 기회로 참관자 이재관( 李 載 寬 ) 차경창( 車 敬 昌 )과 협의하여 학생 주민 수십 명과 진리 해안에서 만세를 외쳤다. 대곶에서는 3월 22일 정인섭( 丁 寅 燮 )이 독립만세 라 쓴 태극기를 만들고, 이튿날 오후 4시 경 시장에서 300여명 속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주재소 면사무소로 이동하 39

3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다가 시장 입구에서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고촌에서는 3월 24일 김정국( 金 正 國 ) 윤재영( 尹 在 英 )은 50여명과 신곡리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는 김정의( 金 正 義 ) 김남산( 金 南 山 ) 이흥돌( 李 興 乭 )이 태극기 2기를 교대로 들고 주민 약 50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8) 고양군 한지에서는 3월 9일과 23일에 독립만세운동과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정철근( 鄭 鐵 根 )이 3월 9일에 춘천으로 귀향하던 중 왕십리 보통학교 앞에서 약 100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3월 22일에는 이두현( 李 斗 鉉 ) 등이 서빙고리에서 태극기 3기를 만들고, 이때 이민 ( 里 民 )은 반드시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라 는 경고 를 게시판에 붙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동 서빙고리의 각 상점은 문을 닫고 음 2월 27일을 기하여 마을 주민 전부가 조선독립만 세를 높이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는 유지가 일동에게 를 권중섭( 權 重 燮 )에게 보내는 등 독립 만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월 23일에는 홍광옥( 洪 光 玉 ) 등이 왕십리 산에서 주민들과 독 립만세를 외쳤다. 용강에서는 3월 9일 이영준( 李 永 俊 )이 중동학교 앞에서 조선인 헌병 보조원 및 순사보는 각자 그 직장을 사직하고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쓰라 는 경고문 약 30매를 받아 합동 부 근 민가에 투입하고, 또 헌병 보조원 이용석( 李 用 奭 )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라면 이 때에 독 립운동에 참가하라 며 교부하였다. 독도에서는 3월 12일과 26일에 손흥복( 孫 興 福 ) 김완수( 金 完 守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이 있었다. 3월 12일에 손흥복 등이 농학교 뒤에서 간이농학교 보통학교 학생들과 결의하 여 하교 후 학생 약 30명과 보통학교 우편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 밤 에는 김완수가 수천명을 이끌고, 신원룡( 申 元 龍 ) 최자근동( 崔 者 斤 同 )이 선두에 서서 동독도 리 수개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의 발포로 군중들이 이탈하자, 김완수는 피하 지 말라! 피하지 말라! 고 외쳤다. 숭인에서는 3월 23일 김철배( 金 哲 培 ) 임수학( 林 壽 學 ) 이경혁( 李 慶 赫 )이 용두리에서 군 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0

33 총 설 9) 시흥군 서이에서는 3월 27일 이영래( 李 永 來 )가 일동리 백기화( 白 基 和 ) 집에서 이종교( 李 鍾 敎 ) 등 에게 다른 동리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 하며 설유하였다. 이들은 오후 8시경 마을 서쪽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서면에서는 3월 27일 밤 이정석( 李 貞 石 )이 만세를 불러 다음날 노온사 경찰주재소 순사보 최우창( 崔 禹 昌 ) 금택성웅( 金 澤 成 雄 )에게 구금되었다. 이종원( 李 宗 遠 )은 저녁 때 최호천( 崔 浩 天 )에게 아들 이정석의 탈환을 부탁하였다. 최호천은 그러면 오늘 밤 이민들을 모아서 주 재소로 몰려가 찾아 줄터이니 안심하라. 당신도 동행하자 며 부친을 안심시켰다. 이순만( 李 順 萬 )의 탈환 계획을 듣고 온 윤의병( 尹 宜 炳 )은 20명을 이끌고 소하리 내대촌 주막리로 갔 다. 오후 7시경 최호천과 약 50명이 면사무소 아래에 모이자, 이종운이 아들의 석방을 호소 하였다. 최호천 윤의병은 인원이 부족하니 내가리대리 주민도 규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들은 가리대리 어구에서 만세를 외치고, 이정석의 탈환을 소리쳤다. 최호천은 주민에게 일경의 무력 발포가 있으면 대항하라고 알리고, 윤의병과 함께 주민들에게 돌과 막대기를 준 비시켜 11시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이 주재소를 포위하고 불태워라! 순사와 순사보를 죽이라 고 외쳤지만 순사 적송( 赤 松 ) 순사보 최우창 금택 등은 등불을 끄고 없는 듯이 가 장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2개 집단으로 나뉘어 순사보를 찾았으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였 다. 약 200명은 다시 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게시판 숙직실 뒷벽 문짝 등을 파 괴하였다. 그러자 적송순사가 나와 용무를 묻자, 최호천이 우리들은 이정석을 탈환하러 왔 다. 이정석을 내어 달라 고 하였다. 순사는 명 29일 본서에 들어가니 그때 이정석의 신병 취 하를 출원하겠다 고 하였다. 이에 최호천 윤의병은 오늘 저녁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일 밤 다시 습격하기 위해 몰려 와서 불태워 버리고 죽이는 행동을 하여도 괜찮겠는가? 하 고, 이종원은 말로 약속하여서는 효과가 없으니 계약서를 쓰라 고 요구하였다. 순사는 관 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는가?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틀림없으니 속히 해산하라 고 하였다. 최 호천은 계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하며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보통학교 뒤에 서도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수암에서는 3월 30일 격문을 통해 모인 18개 마을 면민들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윤병소( 尹 秉 昭 )가 이봉구( 李 鳳 求 )에게 3월 29일 화정리에 명 30일 수암리 비립 41

3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동에 모이라 는 격문이 돌았다고 듣고, 그날 밤에는 동생에게 능곡리 부친 집에도 통문이 왔 다고 들었다. 홍순칠( 洪 淳 七 )은 3월 30일 임학신( 林 學 信 )에게 통지를 받고 국유지 소작인들 에게 격문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이때 만세를 부르 는 것이 득책이다 고 권고하였다. 유익수( 柳 益 秀 ) 윤동욱( 尹 東 旭 ) 김병권( 金 秉 權 ) 등은 성 포 능곡 화정리 주민들과 격문 권유로 비림동으로 갔다. 성포리 구장이 군중 지휘를 유익 수에게 부탁하였다. 유익수는 도살장에서 홍순칠이 만든 기를 받았고, 홍순칠은 인원을 조 사하고 만세를 부르는 이유와 읍내로 가자고 연설하였다. 그때 순사가 해산을 명령하며 읍 내로 갈 경우 발포하겠다 고 협박하여 해산 여부로 의견 대립이 있었다. 결국 유익수가 선두 에서 읍내쪽으로 향하여 모두 뒤를 따랐다. 윤동욱이 선두에서 이끌고, 유익수가 태극기를 흔들며 지휘하여 읍내로 갔다. 윤병소는 와리에서 읍내로 가고, 홍순칠은 허치선( 許 致 善 ) 집 에 모인 30명을 이끌고 수암 남쪽 밭에 이르렀다. 면내 18개 마을 2,000명은 주재소 서쪽 밭 에서 큰 깃발들을 받들고 각자 작은 기를 가지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유익수 윤병소 윤동욱 등이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경들이 해산 을 명령하였으나 홍순칠 김병권( 金 秉 權 ) 등 군중들은 수암주재소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리 자! 고 외치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공자묘 앞으로 행진을 하였다. 윤동욱은 보통 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 任 健 鎬 )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 권유하였다. 일경 들은 해산이 곤란해지자, 발포 위협을 가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봉문( 李 奉 文 )은 2~3명 과 음주하다가 수암리 구장의 불참에 오후 10시경 집으로 찾아가 따지기도 하였다. 과천에서는 이복래( 李 復 來 )가 각자 관솔불을 가지고 남태령에 와서 같이 만세를 부르라 는 격문을 돌리고 태극기 15기를 만들었다. 그는 3월 30일 오후 8시경 남태령에서 50여명에 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관솔불을 든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에서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보통학교를 순회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군자에서는 4월 4일 5일 양일간 독립만세운동과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4월 4일 강은식 ( 姜 殷 植 )이 거모리 면사무소 주재소에서 수백명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김천복( 金 千 福 )는 죽율리 주민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거모리 면사무소 부 근에 집합하라, 만약 불응하는 때는 후환이 있을 것이라 며 약 30명과 거모리로 향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주민은 흩어졌으나 김천복과 2~3명은 거모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42

35 총 설 튿날에는 권희( 權 憘 )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 하려 한다 각 이민은 구 한국기 1개씩을 휴대하고서 와서 모이라 는 비밀통고 를 각 마을 에 회람시켰다. 장곡리에서 장수산( 張 壽 山 )이 구장 이종영( 李 鍾 榮 ) 집 앞에 놓아 주민 회람을 시켰고, 이종진( 李 鍾 振 )은 오후 3시경 통고를 발견하여 이종형( 李 鍾 亨 ) 이덕증( 李 德 增 )을 거쳐 오후 6시경 월곶리 구장에게 보냈다. 10) 부천군 계양에서는 3월 24일 심혁성( 沈 爀 誠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오후 2시 장기리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약 600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 권유하고 함께 만 세를 고창하였다. 부내주재소 순사 이궁희삼차( 二 宮 喜 三 次 ) 순사부장 화뢰훈( 花 瀨 勳 ) 순 사 2명이 심혁성 정태용( 鄭 台 鎔 )을 면사무소로 인치하고 해산을 명령하여 일부 군중들은 흩어졌으나 약 300명쯤은 계속 심혁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5시경 일경들이 심혁성을 주 재소로 옮길 때 군중들은 심혁성을 반환하라 며 순사들을 강박하며 시장 5~60간( 間 ) 지점 에서 막아 세웠다. 이어 순사들을 붙잡고서 머리와 기타 신체를 주먹으로 치고 찌르며 폭행 을 가하였다. 10여분간 다툼으로 포승줄이 풀려 심혁성은 벗어났으나 계속되는 충돌로 이은 선( 李 殷 先 )이 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고 윤해영( 尹 海 榮 )은 머리 등에 부상을 입었다. 사 태 악화를 염려한 일경들은 5시 30분경 철수하였다. 이은선의 조카 이금산( 李 今 山 )이 면장 안병혁( 安 炳 赫 )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 하고, 아내도 피살된 원인을 확인하러 부내주재소 로 가자 고 주장하였다. 이담( 李 墰 泰 鉉 泰 連 )은 해진 후 6촌 이은선이 피살된 사실을 듣 고 면사무소로 갔다. 면장이 귀가하려 하자, 이담이 쫓아가서 구장에게 통지하여 이민들을 모아 주재소로 가서 피살된 원인을 확인하여 달라 고 압박하였다. 이에 면장은 면서기 이경 응( 李 敬 應 ) 임대규( 林 大 圭 )를 데리고 이담과 송희진 집에 가서 이담의 말대로 이경응이 죽 은 사람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자는 오후 12시까지 면사무소에 집합하라 는 초안으로 만들었 다. 초안을 쓴 이경응은 모친의 근심을 핑계로 집에 갔다. 면장과 임대규는 6~7매 통문을 만 들어 구장들에게 회부하였다. 12시경 약 200명이 면사무소에 집합하였다. 이경응이 오지 않 자, 이담 면장 등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담이 이경응의 집을 부수자고 제안하고 면장의 동행을 요구하여 100명이 집으로 가서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철저히 파괴 43

3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하고 가재 도구도 밭에서 불태웠다. 이후 군중들은 면사무소로 갔다. 이담이 면장에게 이 은선의 죽은 원인을 확인하러 주재소에 가 달라 고 하자, 이경희( 李 敬 凞 )가 명일은 순사도 올 것이니, 면사무소 게시판에 우리들이 모인 것은 이은선의 죽은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것 이다 는 뜻을 써 붙여 두고, 명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모이자 고 하여 일동은 찬성하고 해산 하였다. 용유에서는 3월 28일 조명원( 趙 明 元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23 4 일경 조종서( 趙 鍾 瑞 )를 만나고 이어 최봉학( 崔 奉 學 ) 문무현( 文 武 鉉 )을 남북리로 불러 밤에 혈성단( 血 誠 團 ) 명의로 3월 28일 거사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에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 조종서 문무현 최명교( 崔 明 敎 ) 라 쓰고,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 는 격문 80여통과 신서( 信 書 ) 1통을 남북 거잠 을왕 덕교리에 배 부하였다.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이 모였고, 을왕리 주민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합 세하였다. 이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면민들도 연호하였다. 대부에서는 3월 31일 김윤규( 金 允 圭 ) 등이 오후 11시경 태극기를 만들고, 다음날 오전 3시 경 집 밖으로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동리( 東 里 ) 주민 십수명이 주막에서 태극기 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남동에서도 3월 31일 송성용( 宋 聖 用 )이 김춘근( 金 春 根 ) 등과 4월 1일 남동면 질천시장에 주민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통지서 수매를 구장들에게 배부하였다. 11) 양평군 고읍에서는 2월 13일경 최대현( 崔 大 鉉 )이 고종 제사비 기부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는 강( 姜 )모에게 글을 부탁하고, 양자 최윤식( 崔 允 植 )은 십 수매를 만들어 2월 하순 경 11개 면장에게 배부하였다. 이어 3월 27일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3월 31일에는 통지를 받고 오후 11시경 면사무소 부근에 나가 3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 도 오전 4시경 도곡리 면사무소 헌병주재소에서 2,0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3일에는 윤기영( 尹 璣 榮 ) 등과 주도하여 창리에서 강상 강하 양서 고읍 4개 면민 약 4,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읍내 독립만세 여부를 논 의할 때, 최대현은 경성 사람이 양평에서 오늘 아침 피살된 모양인데, 그 사람은 국가를 위 44

37 총 설 해 순절한 것 이라 주장하고, 또한 양자가 사망하였는데도 군중이 머뭇거리므로 고읍 면사 무소에서 양근 읍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고 호소하였다. 군중들은 옹암리와 용암리의 언 덕까지 만세 행진을 하였다. 청운에서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신재원( 申 在 元 ) 정경시( 鄭 慶 時 )가 시장 길에서 김종학 ( 金 鍾 學 ) 민주혁( 閔 周 爀 )에게 권유하여 4명은 여물리 다리 아래에서 조선독립기 3기를 만 들었다. 이들은 오후 3시 40분경 김종학 민주혁이 조선독립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 이르러 150여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헌병 상등병 좌좌목정길 ( 佐 佐 木 政 吉 ) 등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 인사를 체포하였다. 갈산에서는 3월 24일 양근리시장에서 약 1,000명이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였다. 이 신규( 李 藎 珪 )는 독립선언서 수십매와 대한독립회( 大 韓 獨 立 會 )의 격문 수십매를 가지고 3월 23일 경성을 출발하여 다음날 양근리에 도착하였다. 그가 시장 큰 길에서 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연설하고 선언서와 격 문 수십매를 배포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였다. 오후 2시경부터 약 400명이 헌병분견소 면사무소 군청 박희영( 朴 熙 英 ) 집을 다니며 공격 파괴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청에서는 유리창 국세 및 제세금부징수 정리부 등이 파손되었다. 2 시 40분경 시장에서 이진규 곽영준이 헌병분견소에 인치되자, 군중들은 체포자를 내 놓으 라! 고 외치며 사무실 등을 파괴하였다. 김경성( 金 慶 星 )은 3시경 3~40명과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찬제( 金 讚 濟 )에게 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고, 군중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고 강박하였다. 이용준( 李 容 俊 )은 면장과 면서기를 밖으로 끌어내고, 이용준 김경성이 면장을 폭행하고 군중도 가세하여 약 30분간 옥신각신하였다. 군중들은 사무실 창문 유리를 부쉈 다. 군중들은 다시 양근리시장에서 만세를 불렀고, 한봉철( 韓 奉 喆 ) 등은 우편소 유리를 부수 고, 김석봉( 金 石 鳳 ) 등은 박희영 집에서 군수와 면장이 잠복하였을 것이다 며 방을 뒤지기 도 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시장이 열리지 못하였다. 강상에서는 3월 29일 신석영( 辛 錫 永 )이 교평리 주민 약 100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 다. 갈산 양근리 장( 場 )이 정지되어 한강 건너편 교평리 도선장에 주민들이 모였다. 그는 조 선이 이미 독립하였다 며 도선장에 세워 둔 태극기를 뽑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군중도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5

3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용문에서는 3월 30일 광탄리 신순근( 辛 淳 根 )이 한국독립기를 흔들며 주민과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조영호( 趙 瑛 鎬 )는 독립은 천운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본인은 모 두 본적지에 귀국하라 는 일본인 퇴각을 주장하였다. 양서에서는 4월 2일 여운긍( 呂 運 兢 ) 여광현( 呂 光 鉉 )이 정오쯤 면사무소에서 1,000여명 군중 속에 들어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경성 학생과 주민들이 3일에도 독립만 세를 결의하고 고읍 창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12) 수원군 수원의 대표적 독립운동으로 3월 28일 송산에서, 4월 3일 장안 우정면에서 순사를 응징 하였다. 송산에서는 먼저 3월 26일 오후 5시경 홍면( 洪 土 冕 冕 玉 )이 사강리 면사무소 부근에 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왕광연( 王 光 演 國 臣 ) 등 수십 명도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어 홍면 왕광연 등은 3월 28일 오후 2시경 면사무 소 뒷산 및 부근에서 홍관후( 洪 寬 厚 在 範 ) 문상익( 文 相 翊 ) 등 1,000여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순사부장 야구광삼( 野 口 廣 三 )이 홍면 등 3명을 체포하고, 홍면 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의 등에 명중시켰다. 홍면은 격노하며 군중에게 자기를 쏜 순사를 쳐 죽이라 고 외쳤다. 김용준( 金 容 俊 用 俊 ) 민용운( 閔 龍 雲 ) 문상익 왕광연 등도 계속 순사를 응징하라 고 또는 쳐 죽이라 고 주장하였다. 순사부장은 일시 피 난을 위해 오후 3시경 자전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순사부장이 주재소에서 동쪽 약 60간( 間 ) 떨어진 지점까지 도주하였다. 그러자 왕광연 홍관후 홍준옥( 洪 埈 玉 ) 김명제( 金 命 濟 明 濟 道 鉉 ) 등이 돌을 던져 순사부장을 자전거에서 떨어뜨리고 돌 몽둥이 등으로 난타하여 사망시켰다. 장안 우정에서는 4월 3일 장안 우정 면민들이 각 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를 파괴하고 순 사를 응징하는 독립운동이 있었다. 먼저 4월 2일 밤 장안 우정 면내 각처 산에서 횃불을 올 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차병혁( 車 炳 赫 ) 차병한( 車 炳 漢 ) 등은 장안 우정 면사무소 및 화수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의하고, 이튿날 오전 장안 면민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 소로 집합하라고 통지하였다. 우선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현묵( 金 賢 默 )에게 면사무를 중 지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차희식( 車 喜 植 鳳 習 ) 장소진( 張 韶 鎭 鳳 46

39 총 설 來 ) 김흥식( 金 興 植 德 致 ) 장제덕( 張 濟 德 順 明 順 命 )은 장안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통 지를 받고 우정 면민들에게 통지하여 약 200여명이 다수가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사무소 로 갔다. 차병혁 차병한은 면장에게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칠 것 을 권 유하였다. 면장은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함에는 결사로써 일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격려하였다.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몽둥이 돌로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서류 집기들 을 파기하여 불태웠고 유리문 바람벽 등을 파괴하였다. 이후 차병한 등은 쌍봉산에 올라 독 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3시경 1,000여명 군중은 우정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군중들은 면사 무소를 공격하여 유리문 창 바람벽 등을 파괴하였고, 정순영은 힘껏 만세! 오늘이 밥 먹 는 마지막이다 고 외치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 차병한의 지휘로 군중들은 한각리를 거쳐 5시경 화수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하고, 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차인범( 車 仁 範 ) 등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차병한 김흥식 장소진 등이 투석하고, 이영쇠( 李 永 釗 ) 등은 일 본 기와집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주재소에서 순사 천단풍태랑( 川 端 豊 太 郞 )은 총을 쏘며 나 와 도망쳤다. 차희식 장소진 이영쇠 등이 추적하여 몽둥이로 구타하고 돌로 처서 뇌진탕 과 두개골 출혈로 사망시켰다. 성호에서는 3월 29일 오산 장날 김경도( 金 敬 道 ) 정규환( 鄭 奎 煥 ) 공칠보( 孔 七 甫 ) 등이 오 후 5시경 우시장에서 300여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이어 면사무소 주재소 부 근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순사 대목희시( 大 木 喜 市 ) 등이 시장에서 해산을 강요하였으 나 군중들은 불응하였다. 대목순사가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유진홍( 兪 鎭 弘 ) 등이 반항하 였다. 이어 순사는 유진홍 안낙순( 安 樂 淳 樂 順 ) 등 6 7명을 인치하였다. 6시경 군중들은 인치된 자를 석방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 고 맞섰다. 대 목순사가 인수할 대표자를 내라 하여 김경도 이성구( 李 成 九 ) 등이 대표자가 되어 해산을 조건으로 구금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성구 이규선 ( 李 圭 璇 ) 김용준( 金 用 俊 ) 등은 경찰도 이와 같은데 유독 면장 유진렬( 劉 鎭 烈 )만 반대한다 며 500여명과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유진홍이 면서기 심원직( 沈 遠 稷 )에게 면장의 소재를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자, 군중들은 돌을 던져 사무실 창유리 창문 등을 부수어 파괴하 였다. 곧 대목순사가 철도원호대와 급히 면사무소로 출동하고, 면장 집으로 가는 군중들을 제지하였다. 그러자 7~800명의 군중들은 재차 주재소에 투석하고, 우편소를 공격하여 유리 47

4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창 63장과 기타 기물 십수 점을 파괴하고 또 부근 일본인 상점과 주택에도 돌이나 몽둥이로 공격하여 유리창 판자문 등을 파손시켰다. 반월에서는 3월 31일 유익수( 柳 益 秀 )가 시장에서 면서기를 만나 어제 시흥 수암리 독립만 세를 이야기하자, 면서기는 군중 지휘를 부탁하였다. 그는 5~600명에게 폭행 협박을 말도 록 주의하고 군중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13) 파주군 와석에서는 3월 10일에 임명애( 林 明 愛 )가 교하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 100여명에게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5일에는 김수덕( 金 守 德 ) 등이 염규호( 廉 圭 浩 ) 원고로 오는 28일 이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는 유인물 60매를 만들고, 김창실이 구당 당하리에 배부 하였다. 광탄에서는 3월 27일 조무쇠( 曺 茂 釗 ) 등이 발랑리 주민 수백명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외치 고, 이튿날에는 면민 1,000여명과 면사무소에서 봉일천 시장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14) 광주군 동부에서는 3월 20일 26일 마을 구장들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0일 에 망월리 구장 김교영( 金 敎 永 )이 타인의 권유를 받아 주민 9명과 면사무소 앞에서 오후 1시 경부터 4시경까지 3시간 동안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김홍렬( 金 弘 烈 )이 오후 10시경 풍산리 주민 약 20명과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다음날 오전 3시경까지 조선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다. 교산리 구장 이대헌( 李 大 憲 )은 면사무소 길가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주 민에게 만세를 부르러 모이라 고 전달하였다. 다음날 오전 2시경 십수 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앞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약 1시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오전 3시경 하산하여 3시 30분 경 면사무소에서 약 30분 가량 만세를 연호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리고 11시경 30여명과 다시 면사무소에 가서 오후 2시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즉 그는 12시간 동안 교 산리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중대에서는 3월 21일 장덕균( 張 德 均 ) 김준현( 金 俊 賢 )이 선언서 20매와 조선독립신문 30매를 인쇄하였다. 장덕균은 3월 25일 정석호( 鄭 錫 浩 )에게 유인물 2매, 건너편 한강에서 48

41 총 설 미상자에게 독립신문 1매를 교부하였다. 3월 25일에는 이시종( 李 時 鍾 )이 저녁 때 이윤종 ( 李 胤 鍾 )에게 조선은 독립해야만 한다 는 12개 항목이 기재된 조선독립신문 을 빌려 읽었 다. 그는 다음날 오후 3시부터 6시경까지 천중선( 千 重 善 仲 善 ) 등 송파리 주민 3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7시경 대왕 수서리로 가서 주민 약 2~30명 선두에서 만세 를 외치며 마을을 순회하였다. 또한 100여명을 이끌고 대왕면사무소에서 약 20분간 독립만 세를 외치고 남포 등불을 켜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독립신문 일부를 읽고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 등이 필요없게 될 것이라 고 주장하였다. 서부에서는 3월 27일 구희서( 具 羲 書 )가 감일리 주민 약 40명과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 세를 고창하고,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돌마에서는 3월 28일 한백봉( 韓 白 鳳 )이 율리 주민 약 50명과 인근 주민들이 합세한 수백 명과 오후 8시경부터 이튿날 저녁때까지 면내를 순회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포에서는 3월 28일 고산 문형 양벌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제신( 鄭 濟 莘 )은 오전 1시경 고산리에서 약 40명과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11시경 약 1,000명과 면사무소 군청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인택( 金 仁 澤 ) 임무경( 林 武 京 ) 은 오전 1시 문형리에서 약 30명과 부근 산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약 30분간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오후 2시 군청 앞에서 약 1,000명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안리 일대를 순회하였 다. 유면영( 柳 冕 永 )은 오전 9시경 양벌리에서 약 600명에게 금후 조선이 독립하면 이런 경 사는 또 없을 것이니, 일동은 만세를 부르라, 이번에 독립을 할 터이니, 이 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이라 고 연설을 하였다. 이어 군청에 가면 만일 헌병과 보조원이 군중에게 발포하더 라도 반드시 일심동체가 되어 그런 자는 체포하자 며 군청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실촌에서는 4월 6일 이선리 구장 오수식( 吳 壽 軾 )이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경까지 약 50여 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만선리 주민 약 200여명도 합세하였다. 15) 장단군 장도에서는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각 마을 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수봉( 李 壽 奉 ) 등이 3월 25일부터 3일 동안 반룡산에서, 이택신( 李 澤 新 )이 3월 28 29일경 49

4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약 30여명과 태학산에서, 이윤성( 李 潤 成 )이 3월 30일 약 10명과 신촌동 동산에서 횃불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병성( 李 炳 星 )은 3월 29일부터 주민과 반룡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약 1시간 정도씩 3일 밤을 불렀다. 그는 3월 30일 면사무소 앞에 집합하라 는 통문 을 각 마을에 배포하고, 이튿날 태극기를 게시판에 게시하고 약 20명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갔다. 정오경 면사무소에 약 200명이 모였고, 이병성 등은 태극기를 문기둥에 세우고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면장 윤좌영( 尹 佐 榮 )에게 면사무를 보지 말라 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면장에게 국기(일장기)를 내 놓으라 하여 소사에게 건네 받았다. 일장기를 태 우라는 요구를 면장이 거절하자, 지금부터 이병성은 대일본 국기를 불태워 버린다 말하고 부근 밭에서 태웠다. 우정시( 禹 楨 時 ) 우정화( 禹 楨 和 )는 3월 29일 밤 항동리에서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도덕암산 시라위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이튿날 밤에도 주민 약 70명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고덕리 면사무소에서, 오후 11시경에는 주민 약 150명과 면장 윤좌영 집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4월 2일 오전 10시부터 정오 무 렵까지 구시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주민들과 고랑포시장에 가는 약 100명과 조선독립만 세를 고창하였다. 진남에서는 3월 26일 이창영( 李 昶 永 ) 등이 오후 10시 동장리 성화학교 뒤에서 주민 100 여명과 대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그의 제의로 면사무소로 갔다. 이창영 강규수( 姜 奎 秀 ) 는 면장은 나오라, 면사무소를 쳐부숴라! 고 외치고, 군중들은 투석하여 유리 21장를 깨 뜨렸다. 진서에서는 3월 29일 이봉철( 李 奉 哲 )이 오후 11시경 100여명과 면사무소에서 한국독립만 세를 외쳤다. 면장 송원섭( 宋 遠 燮 )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이봉철 등은 한국독립만세 를 부르며 일장기 2기를 면민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대남에서는 4월 1일 함정원( 咸 貞 元 ) 이재삼( 李 在 三 )이 이날 밤 동면 각자는 작은 태극기 1기, 5명마다 횃불 1개, 각동마다 대형 태극기 1기를 가지고 대남면 위천리 용산동에 집합하 라 는 통지 수통을 동장들에게 보내 주민 회람을 시키고 밤에 약 100명과 면사무소 명성학 교 앞마당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3일에도 오후 1시경 약 1,000명과 용산동에서 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상도에서는 4월 9일 공세영( 孔 世 榮 )이 경성결사단( 京 城 決 死 團 ) 파견원으로 이헌영( 李 憲 50

43 총 설 永 )에게 경성에는 매일 독립운동을 하고 관헌에게 인치되어도 겨우 1일쯤 검속처분으로 석방되니,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하라 고 권유하였다. 16) 용인군 기흥 읍삼에서는 3월 20일 김구식( 金 九 植 )이 오전 10시경 하갈리 강가에서 수십 명과 조 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오후 2시경 읍삼 구읍내에서 약 30여명에게 만세를 권유하였다. 원삼에서는 3월 21일에 황경준( 黃 敬 俊 ) 등이 좌항 사암 맹리 주민 수백 명과 면사무소 에서 오전 3~6시 무렵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포곡에서는 3월 28일 정규복( 丁 奎 復 )이 수백명과 둔전 수여 유방리로 가서 만세를 고창 하였다. 오전 7시경 모현 초지리 인사의 권유를 받은 권종목( 權 鍾 穆 )은 삼계리 주민을 이끌 고 금어리를 지나 둔전리로 갔다. 홍종욱( 洪 鍾 煜 ) 홍종엽( 洪 鍾 熀 )은 금어리 주민 200여명 을 인솔하고 대대리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군중들은 금어리에서 출발하여 면내를 순회하 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지에서는 3월 29일 이덕균( 李 德 均 )이 오전 8시경 각 집에 1명씩 나와 동천리 방면으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라 고 주민에게 알렸다. 그는 9시경 고기리 주민 약 100여명을 이 끌고 안종각( 安 鍾 珏 )이 만든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동천리로 향하였다. 동천리에서 약 300여명이 합류하여 면내를 순회하고, 11시 30분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어 그 는 읍삼 마북리까지 가서 오후 2시경까지 만세를 외쳤다. 내사에서도 같은 날 한영규( 韓 榮 圭 ) 김운식( 金 云 植 )이 남곡리 주민 100여명과 한영규가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양지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17) 포천군 신북에서는 3월 29일 조종연( 趙 鍾 淵 ) 조훈식( 趙 薰 植 )이 만세교리에서 이튿날 30일 아 침 포천군 신북면사무소 앞에 집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터이니 이민들을 선동하여 이에 참가하라 는 통문 십수 통을 삼성당 고일 심곡 외일리 구장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조훈 식은 구장 2명, 최학돌( 崔 學 乭 )은 4통을 삼성당리 서상련, 조계식( 趙 啓 植 )은 2통을 중면 양 문 거사리 구장에게 배부하였다. 거사리 유중식( 兪 中 植 )은 통문을 받아 거사 양문리에 회 51

4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람시켰다. 이튿날 통문에 따라 1,0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조계식 등은 면내 일대를 순회하였다. 영북에서는 4월 3일 밤 안응건( 安 應 乾 )이 태극기 25기와 독립만세를 부르니 모이지 않으 면 방화한다 는 협박문 을 만들었다. 다음날 밤 태극기를 자일리 각 집에 게양하고, 협박문 을 마을 게시판에 게시하여 만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8) 안성군 읍내에서는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1주일 동안 동 서 장기리를 중심으로 읍내 일원 에서 집중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 서순옥( 徐 順 玉 )이 동리( 東 里 ) 주민 약 20명과 산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3월 29일에는 진공필( 陳 公 弼 )이 장 기리에서 수십 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0일에는 김진수( 金 鎭 洙 )가 장기리, 이경수( 李 敬 洙 )가 동 서 장기리 등에서 약 5~600명과 순회하며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이성옥( 李 成 玉 )은 밤에 홀로 석정리 산꼭대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서리로 가서 조선독립만세 를 외쳤다. 이때 수백 명이 모여 안성경찰서 군청에서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31 일에도 이성옥은 수백 명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택승( 李 宅 承 )에게 자동차로 수비대를 운 반함은 조선민족 독립운동에 방해하는 것이다. 영업을 중지하라. 만약 이에 불응하면 집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겠다 고 압박하고, 중국인 잡화상 왕수산( 王 壽 山 )에게 가게를 닫도록 하 였다. 이외 김재룡( 金 在 龍 ) 김정현( 金 正 鉉 ) 등도 읍내에서 주민과 만세를 부르고 마을을 순 회하였다. 4월 1일에는 서순옥 김진수 이경수 등이 읍내 동 서 장기리 등 일원에서 태 극기를 흔들고 마을을 순회하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이성옥은 서리 노상에서 수 비대가 도착하였다고 조선민족 독립운동을 중지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분기하여 이 운동에 참가하여 진력하라! 고 연설을 하였다. 4월 2일에는 김성문( 金 成 文 )이 장기리시장에서 주민 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죽에서는 4월 1일 2일 양일간 죽산리를 중심으로 여러 인사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4월 1일 양재옥( 梁 在 玉 ) 안재헌( 安 在 憲 )이 죽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약 50명과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기훈( 李 起 薰 ) 이응식( 李 應 植 ) 등이 두현리 도로 부역을 하던 수백 명 과 죽산리 주재소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2일에는 죽산시장 주재 52

45 총 설 소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재옥 등이 전날에 이어 학생 전부를 이끌고 시장으로 나갔 다. 최창혁( 崔 昌 赫 ) 김용규( 金 容 珪 )가 학생에게 만세를 권유하고, 윤규희( 尹 奎 熙 )가 태극기 를 배부하고, 이인영( 李 寅 永 )이 조선 독립 목적을 수행하려면 영구히 일본과 동화하여서는 안된다 는 고문( 告 文 )을 배포하고 여덟번이나 연설을 하였다. 학생과 이기훈 이응식 등 면 민 1,000여명은 태극기를 흔들며 싸전 및 시장 일대와 주재소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 다. 한편 문재홍( 文 在 弘 )은 오전 10시경 일본인 삼시차( 森 市 次 ) 가게에서 보통학교 학생에게 일본 상품을 구입하지 말도록 타이르고, 군중들 앞에서 독립하면 일본 화폐는 필요없다 며 10전짜리를 찢어 버렸으며, 해질 녘에 시장과 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밤 에 유춘삼( 柳 春 三 ) 등이 장원리 주민들을, 조문삼( 趙 文 三 ) 등이 매산 용설 장릉리 주민들 을 이끌고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원곡에서는 4월 1일 원곡 양성 면민들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보다 앞서 3월 28일 내가천리 이시순( 李 時 順 )이 독립만세를 발의하고, 3월 28일 29일 양일간 최 승지( 崔 承 知 ) 남용희( 南 用 熙 )가 지문리 주민들과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3 월 29일 30일 31일 3일 동안 원곡의 각 동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31일 해산 때 홍창섭( 洪 昌 燮 ) 이유석( 李 裕 奭 )이 주민에게 명일도 모이라 고 하였다. 4월 1일 독립운 동은 원곡 양성 면민의 합동으로 양성주재소를 공격하고 이어 우편소 일본인 잡화상과 대 금업자 집 원곡면과 양성면사무소 공격으로 전개되었다. 원곡 칠곡리에서는 아침에 주민들 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최은식 이유석 홍창섭 이순익( 李 順 益 ) 이근수( 李 根 洙 ) 조경숙( 趙 敬 淑 ) 남현서( 南 玄 西 ) 등의 권유와 활동으로 오후 8시 면사무소에 내가천 외가 천 칠곡 주백 월곡 및 승판리 주민 1,000명이 모였다. 군중들은 면사무소 앞과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면장을 끌어내어 이를 선두에 세우고 양성으로 가자 고 하였다. 이유 석 등이 면장 남길우( 南 吉 祐 )에게 태극기를 들리고 선두에 세워 양성 동항리(구양성읍내)로 출발하여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원곡과 양성면 경계의 고개 에 이르자, 이유석은 먼저 이렇게 많은 군중이 집합하였음은 천운이다. 제군은 양성경찰관 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고 하고 이어 최 은식 홍창섭 이근수 이덕순( 李 德 順 ) 이희룡( 李 熙 龍 時 殷 )도 차례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 양 53

4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성면 면내의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라 등 연설을 하였다. 이에 군중들 은 돌, 몽둥이 등을 가지고 양성으로 갔다. 한편 양성의 덕봉 산정 추곡 도곡리 주민들 은 각 마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거나 마을 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양성으로 갔다. 2~300명 면민들은 9시경 읍내에 모여 9시 반경 주재소와 보통학교로 가서 조선독립만세 를 고창하고 9시 50분경 마을로 귀가할 때 원곡 면민들이 읍내로 들어와 합류하였다. 양 면 민들은 오후 10시경 주재소 앞마당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순사의 해산 명령에 군중들 은 격렬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남현서가 주재소를 쳐부숴라, 이덕순 홍창섭 이유석 등 이 방화하라, 이양섭( 李 陽 燮 明 汝 ) 홍근배( 洪 根 培 )가 주재소에 불을 놓아 불태우면 어 떤가?, 조경수( 趙 敬 洙 ) 정문명( 鄭 文 明 ) 등이 방화하자 고 소리쳤다. 군중들은 투석하고 사무실에 불을 놓고 석유를 뿌리려 집기류 서류 등을 파기하였다. 또 솔잎으로 불을 피워 주재소에 불을 놓았다. 주재소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군중들은 이희룡 최은식 이덕 순 등의 주도로 우편소로 이동하여 투석하고 유리창 등 시설물 서류 가재 도구들을 파손 시키고 밖으로 던져 불태우고, 금고를 도끼 등으로 파괴하고 전주 3개를 넘어뜨려 소각하였 다. 이유만은 일장기를 소각하였다. 이어 박용업 이성률 등 2,500여명이 잡화 매약상 외 리여수( 外 里 與 水 ) 집에 오후 11시경 도착하여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상점에 투석하고 상품을 파손하고 밖에서 모닥불에 태웠다. 또 홍경운 등은 2,000여명을 이끌고 대금업자 융수지( 隆 秀 知 ) 집에 가서 돌을 던지고 벽 장지문을 부수고 가재를 파기하거나 소각하였다. 이후 송 우필 등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로 가서 다음날 오전 4시경까지 만세를 부르고 투석하여 시설 물 건물을 파괴하고 사무 도구 서류 등을 소각하였다. 일부 군중들은 양성면사무소에 투 석하고 서류 물품을 파기하거나 밭에서 태우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죽에서는 4월 2일 곽대용( 郭 大 鎔 ) 석동성( 石 東 聲 ) 오순경( 吳 順 景 ) 등 주도로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곽대용은 오전 1시경 장암리 주민 200여명과 주천주재소에서 조선독 립만세를 외쳤다. 석동성 이수봉( 李 壽 奉 )은 주천리 주민 100여명과 주재소 면사무소 앞에 서 김완석( 金 完 錫 )이 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순경도 밤에 200명과 독립 만세 함성을 외치며 유영창( 柳 永 昌 ) 등과 투석하여 면사무소 주재소에 각각 유리문 5장과 3장를 파손시켰다. 54

47 총 설 19) 이천군 신둔에서는 3월 31일 김영익( 金 永 益 )이 내일 아침 식사 후 조선독립시위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집합하라 는 통문 2통을 회람하고, 4월 1일 수하리 주민 약 5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서기창( 徐 基 彰 )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모가에서는 4월 2일 권중효( 權 重 孝 ) 등이 서동리 남상찬( 南 相 贊 ) 등 수명에게 조선민족독 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지 않으니 후환의 염려가 있다 고 말하고 150명과 응봉산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20) 진위군 병남에서는 3월 10일 밤 이도상( 李 道 相 )이 동생 이덕상( 李 德 相 )에게 명일이 평택 장날이 므로 그 곳에 가서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을 제창하여 만세를 외칠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곧 체포될 것이므로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여 달라 고 하였다. 그는 이튿날 오후 5시경 평택 역전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에게 만세를 호소하였다. 이 에 군중과 학생들이 모자를 벗어 흔들며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북면에서는 3월 31일 박성백( 朴 成 伯 ) 등이 오후 4~6시경 봉남리 주민 약 400명과 태극기 30기를 흔들며 면사무소 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면내를 순회하였다. 4월 1일 에는 정경순( 鄭 庚 淳 ) 등이 저녁 식사 후 짚신을 삼다가 정경순의 제안으로 은산리 산에서 독 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약 30명이 올라와 함께 만세를 부르자, 마을에서도 독립만세를 연호 하였다. 또한 최선유( 崔 善 有 )도 주민들과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청북에서는 4월 1일 밤 안육만( 安 六 萬 ) 김원근( 金 元 根 )이 백봉리에서 이 동리에서는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빨리 나와서 부르라! 고 설득하여 최만화( 崔 晩 華 ) 등 수십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성에서는 김용성( 金 容 成 ) 등이 4월 3일 밤 학현리 봉오산에서 짚불을 놓고 주민 12~3명 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21) 여주군 주내에서는 조병하( 趙 炳 夏 )가 독립만세 권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26 7일경 홍문 55

4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리 심승훈( 沈 承 薰 )에게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칠 터이므로 이에 참가하라, 4월 3일에 는 창리에서 보통학교 학생 한백웅( 韓 伯 熊 ) 한돈우( 韓 敦 愚 )에게 제군은 학생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힘쓰라! 격려를 하였다. 대신에서는 4월 3일 황재옥( 黃 在 玉 )이 개군 대신면 소식을 듣고 윤촌리 주민 4~50명과 밭에 불을 놓고 만세를 선창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북내에서도 같은 날 신륵사 승려 김용식( 金 用 植 仁 瓚 )이 권중순( 權 重 純 ) 등에게 만세를 권유하고, 천송리에서 수십 명이 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다. 이어 200여명을 이끌고 한강 맞은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군중들도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 다. 또 이원기( 李 元 基 ) 이원문( 李 元 文 ) 등은 경성인들이 여주인을 개 돼지로 취급하는 것 에 분개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여주인의 면목을 세우고자 하였다. 4월 1일 조경호( 趙 經 鎬 )가 군중 모집을 위한 경고문 발행을 제의하자, 이원기가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4월 5일 읍내 장 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그 곳의 다락문 앞으로 집합하라 는 경고문을 만들 었다. 조경호 이원문은 42매를 작성하여 원필희( 元 弼 喜 ) 심상의( 沈 相 儀 ) 등이 배포하기로 하였다. 4월 2일에는 강영조 등이 일장기를 개조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4월 3일에는 김학수 ( 金 學 洙 )가 이원기 원필희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한편 현암리 주민 5~60명이 오금리로 와서 최영무( 崔 永 武 ) 등에게 어제 북내면장 조석영( 曺 錫 永 )이 인치되었다 고 전하여 석방을 위해 현암 오금리 주민들이 면사무소에 모였다. 그때 면장의 귀환이 허락되었다 고 귀가 자도 있었으나, 일부 인사들은 남아 음주를 하였다. 최석기( 崔 石 基 ) 등이 독립만세를 제의하 여 장암 외룡 덕산리 등을 돌아 공북학교에 주민들이 모일 때까지 설득하였다. 독립운동 을 준비하던 이원기 원필기( 元 弼 基 ) 등도 최영무의 권유로 동참하였다. 당우리 공북학교에 약 800명이 모이자, 면장 조석영은 해산을 요구했지만 최영무는 만세를 주장하였다. 군중들 은 최영무가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에서 인솔하고, 이원기 김학수 원필희 강두영 등 십수 명이 한사람도 도피하여 숨지 않도록 감시 하며 읍내를 향하여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 56

49 총 설 3. 강원도 1) 철원군 철원에 독립선언서는 최병훈( 崔 炳 勳 )이 3월 1일 평강 교구실에서 이태윤( 李 泰 潤 )에게 200 매를 받아 철원교구실로 가져와 도착하였다. 그가 이석구( 李 錫 九 )에게 독립선언 취지를 설 명하였다. 이들은 3월 2일 예배를 보러 온 김현구( 金 炫 九 ) 이순철( 李 淳 喆 ) 이성구( 李 成 九 ) 서순봉( 徐 淳 鳳 ) 김명식( 金 明 植 ) 한홍준( 韓 弘 俊 ) 등 교도들에게 독립선언의 뜻을 전 달하고 수매 내지 수십 매를 주어 군내에 배포하였다. 또 이정구( 李 鼎 九 )는 이성구에게, 정 동해( 鄭 東 海 )은 한홍준에게 교부받고, 김현일( 金 顯 一 )는 안상덕에게 평강역에서 받아 군내 에 배포하였다. 철원에서는 3월 10일 11일 양일간에 걸쳐 이배근( 李 培 根 ) 곽진근( 郭 鎭 根 ), 3월 27일에 최치달( 崔 致 達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8일 이배근이 중리로 찾아 온 박용 철( 朴 容 喆 ) 이규정( 李 圭 貞 ) 등 3명에게 그대들이 만세를 부르는 운동을 시작하면 자기도 행동을 함께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이다 라고 격려하였다. 3월 10일 먼저 임응렴( 林 應 簾 ) 이규정( 李 圭 貞 ) 등 학생들은 헌병분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귀교하던 중 중리 주 민들과 만나 합세하였다. 이배근 이규정 송의선( 宋 義 宣 ) 곽진근 등 학생과 주민 약 200 명과 헌병분대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유치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어 엄재형( 嚴 載 亨 )이 군청으로 군중을 이끌어 오후 5시경 3~400명이 뜰안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배근 윤상식( 尹 相 植 )이 사무실로 들어가 만세를 부르고, 윤상식은 깃대에 기(태극 기)를 달아 타인에게 들리고 군수를 찾으러 나갔다. 군중은 면장 아들인 이학수에게 면장의 대리로 태극기를 흔들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군중들은 군수가 와서 만세를 부 르지 않는 한 이 곳을 떠나지 않겠다 고 소리쳤다. 군수 오태환는 이배근 엄재형 주의에 따 라 이치선( 李 致 善 ) 윤태항( 尹 泰 恒 ) 집으로 피난했다가 군중들이 계속 찾으므로 이배근 엄 재형 등이 교대로 동포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라 고 연설할 때 군수가 도착하였다. 이어 군 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군중들도 화창하였다. 그리고 월하리 박의병 집이 기생들로 소란 하다는 소리를 들은 송의선 곽진근 박창근은 군중을 이끌고 박의병 집으로 갔다. 송의선 은 한 사람이 들어가면 충분하다 며 집안으로 들어가 박의병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박의병 57

5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이 앞서 집에 와 있던 헌병 군조에게 의사를 타진하자, 헌병 군조는 좌우간 나가보는 것이 좋겠다 고 하여 밖으로 나왔다. 박의병이 나오자, 곽진근 박창근 윤상식 등은 만세를 부 르게 하고 욕을 하며 옆구리를 찌르는 등 폭행을 가하고 마을 다리까지 끌고 갔다. 이때 곽진 근은 부인들 사이가 좋으므로 이 집에 이완용( 李 完 用 )을 숨겨두고 있음이 틀림없으므로 그 를 문밖으로 내놓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고 박의병을 압박하였다. 이어 3월 11일에는 곽진 근 이배근 송의선 등 약 700명이 철원역 부근에서 윤상식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 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기차가 도착 때마다 기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7일에는 최치달이 읍내 장날 이병준( 李 炳 準 )을 만나 오늘 장날을 이용해서 만세를 부르려 고 한다 말하고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이병준도 군중과 독립만세를 연 호하였다. 갈마에서는 3월 11일 신성규( 申 聖 奎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3월 11일 문혜리 김칠룡( 金 七 龍 ) 집에서 한 인사로부터 철원 읍내에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어째 서 이 마을에서는 부르지 않느냐? 고 권유를 받고 만세를 부르기로 상의하였다. 이들은 주민 을 면내 각 마을에 보내 1집에서 1인씩 면사무소 앞으로 모여 독립만세를 부를 것 을 권유하 고, 신성규도 배성백( 裵 聖 伯 )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11시경 8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한국독 립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임낙호( 任 洛 鎬 ) 윤호병( 尹 浩 炳 )가 군중들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였고, 주도 인사 4명은 현장에서 헌병에게 체 포를 당하였다. 내문에서는 이주봉( 李 周 鵬 ) 박용득( 朴 龍 得 ) 최재청( 崔 在 靑 ) 등 5명은 4월 7일 저녁 때 독검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설득하고, 동장 윤선삼( 尹 先 三 )도 강기준( 姜 祺 俊 )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한다 는 통지를 보냈다. 이에 이튿날 윤태병( 尹 泰 炳 ) 강기준( 姜 祺 俊 ) 등 이 다수 주민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2) 김화군 김화에 독립선언서는 채장숙( 蔡 章 淑 ) 안상덕( 安 相 德 )에 의해 전달되었다. 안상덕 등 5명 이 3월 2일 아침 암정리 천도교구실 신동민( 申 東 敏 ) 집에 와서 채장숙은 조선이 지금 독립 국으로 되므로 그 선언서를 가지고 왔다, 안상덕은 우리 천도교도만으로는 이 일을 성취치 58

51 총 설 못하므로 이 선언서를 조선 전도에 배부하여 독립을 계획하려는 소이이다 라며 신동민에게 30매를 주었다. 신동민이 교부하여 박윤식( 朴 允 實 )이 5매를 암정리 수개소, 윤규우( 尹 圭 祐 ) 가 5~6매를 근북면 백덕리에 붙였다. 기오에서는 3월 28일 29일 양일간 고태흥( 高 泰 興 ) 김연태( 金 演 台 ) 등 주도로 창도리시 장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태흥이 3월 28일 낮 김상묵( 金 相 默 ) 집에서 연명부를 정시영( 鄭 始 永 )에게 보이고 독립만세를 제안하였다. 고태흥 정시영 조재성( 趙 載 成 ) 오운산( 吳 雲 山 ) 등 20명이 기재된 연명부를 정시영이 받아 유만학( 劉 萬 學 )에게 주었다. 밤에는 김청민( 金 淸 敏 ) 황중문( 黃 仲 文 ) 등이 6~700명을 이끌고 창도리시장에서 독립만 세를 불렀다. 처음에는 김연태가 혼자서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위해 모 두 기꺼이 만세를 부르지 않아서는 안된다, 나오지 않는 자는 이 마을에서 축출하든지 집 을 태워버리겠다 고 하였다. 또 김청민 황중문 이순흥( 李 順 興 ) 이대섭( 李 大 燮 ) 김현기 ( 金 顯 基 ) 등에게 만세를 권유하였다. 이어 2~30명도 집집마다 나와 만세를 부르라 며 외치 고 문을 부수거나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군중들은 주재소 서쪽 다리를 건너 자갈밭에서 돌 을 주어 헌병주재소 유리창 4개를 파손시키고, 이어 우편소 유리창도 깨뜨리고, 잡화상 원전 정추( 原 田 政 木 追 )와 면장 이준재( 李 俊 宰 ) 집 대문을 발로 차는 등 오후 12시까지 독립운동 을 전개하였다. 이어 이튿날에도 오전 8시,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헌병의 해산 명령에 군 중은 하려거든 해 보라 며 김연태 정시영 등 주도로 계속 만세를 불렀지만 헌병의 발포로 일단 해산하였다. 9시경부터 김연태가 마을을 다니며 만세를 부르러 꼭 나오라 고 부탁하였 다. 11시경 유만학 정시영 등 군중은 헌병대 앞마당에서 만세를 부르고 읍내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다니며 만세를 외쳤다. 정오경에 분대장이 만세를 불러서는 안된다, 저녁때는 보조 원이 만세를 부르면 총을 쏘아 죽이겠다 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정오경 김연태가 도로에서 오늘밤 만세를 부르지 않는 자는 구타하라, 출장자는 기록하고 날인해 두라 라 외쳤다. 황 중문 정시영 등의 발의로 유만학 오유근( 吳 留 根 ) 등을 황중문이 기록하였다. 또 김청민은 옥양목 3척을 둘로 찢어 태극기를 그려 김상옥( 金 相 玉 )에게 주고, 김현기에게도 기를 주었 다. 오후 5시경 이순흥은 김연태에게 태극기 1기를 받아 집 앞에 세웠다. 김연태는 국기를 들 고 오늘 밤도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집이든지 무엇이든지 부숴버리겠다, 황중문 정시영 등도 나오라! 나오라! 고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밤에 김연태 고태흥 유만학 등의 주도로 59

5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3~400명이 주재소 우편소에 투석하여 주재소 유리 3매를 깨뜨렸다. 특히 이 독립운동에 서 노동자와 어린아이들도 참가하여 투석을 하였다. 3) 횡성군 횡성에 독립선언서는 3월 14일 대교구장 최종하( 崔 宗 河 )가 영영포리 신재근( 申 在 根 ) 집에 서 김인향( 金 麟 鄕 )에게 12매를 교부하여 도착하였다. 김인향은 3월 20일경 상안흥리 집에서 이인영( 李 麟 榮 )에게 3매를 교부 배포토록 하였다. 횡성에서는 3월 27일 4월 1일 신재근( 申 在 根 ) 정해경( 鄭 海 璟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재근 장도훈( 張 道 勳 )이 3월 10일 영영포리에서 회합을 갖고 신재근이 태극 기 독립선언서 구입 자금 3원을 장도훈에게 지급하였다. 장도훈은 3월 11 12일경 상경하 여 태극기 1기 태극기(한지) 20기 독립선언서 40매를 사서 3월 26일 귀가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오전 11시경 시장 입구에서 윤태환( 尹 泰 煥 )에게 태극기를 교부하며 오늘 신시장 쪽에서 독립운동을 하므로 너도 함께 만세를 부르자 고 권유하였으나 윤태환이 반응하지 않 았다. 재차 권유에도 말이 없자, 너는 청년인데 그다지도 정신이 없고 썩어서 어떻게 할 것 이냐? 국민된 의무심으로 크게 찬성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고 독려하였다. 또 윤태환이 받은 것이 태극기임을 알고 이러한 것을 하면 헌병에게 체포된다 고 말하자, 신재근은 정신이 빠졌다. 의무심이 없다 고 참가를 재촉하였다. 윤태환은 그렇다면 해보자! 며 오전 12시경 신도로쪽으로 갔다. 때마침 신재근 장도훈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윤태환도 태극기 를 휘두르며 기수가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이들은 안경춘( 安 敬 春 ) 강만형( 姜 萬 馨 ) 등 300여명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주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1일에는 정해 경 김성서( 金 聖 西 )가 오후 5시경 읍내시장에서 정해경의 선창으로 전성수( 全 聖 洙 ) 조상렬 ( 趙 常 烈 ) 등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둔내에서는 4월 5일 이기순( 李 奇 順 )이 자포곡리 천관여( 千 官 汝 ) 집에서 주민에게 학생들 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마을로 올 것이니, 그때에 여러분은 학생들과 조선독립만세 를 고창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서원에서는 4월 12일 송병창( 宋 秉 昌 ) 유정근( 柳 定 根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 다. 분일리 송병창 집에 있던 송병기( 宋 秉 箕 ) 등이 송병창의 독립만세 주장에 오후 9시경 약 60

53 총 설 50명 주민을 모아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한편 김옥봉( 金 玉 鳳 ) 집에서 유정 근 이두연( 李 斗 淵 ) 이종우( 李 鍾 禹 ) 등이 있다가 만세 소리를 듣고 유정근의 제의로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두 만세 주민들은 곧 합류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상 열( 李 相 悅 )은 송병창 등이 집 앞까지 와서 독립만세를 불러도 불참하다가 주민들이 대문을 파괴하므로 하는 수 없이 둘째 아들을 보내어 조항까지 군중을 따라 가도록 하였다. 이 독립 운동은 분일리 점산 수동 상촌 조항 등 각 동리를 순회하면서 전개되었다. 4) 화천군 화천에 독립선언서는 3월 3일 안상호( 安 商 浩 )가 하남에 배포하라며 최기호( 崔 己 浩 )에게 88매를 배부하여 도착하였다. 최기호는 구장 김준모( 金 俊 模 ) 등과 논미 교구실에서 김연건 ( 金 然 健 ) 등 수명에게 28매를 교부하고, 김연건 등은 밤에 원천리 등 각 곳에 첨부하였다. 노 병하( 盧 炳 夏 )가 김준모 집으로 30매를 가져왔고, 그 중 1매를 김희인( 金 熙 仁 )이 부친인 김창 의( 金 昌 義 )에게 전하였다. 화천에서는 3월 23일 김창의 주도로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희인은 독립 선언서 첨부로 헌병분견소에서 훈계를 받고, 3월 20일 안종화( 安 鍾 和 )가 동지 규합에 곤란 을 겪고 사정이 좋지 않다 는 사실을 한인종( 韓 仁 鍾 )에게 듣고 부친에게 전달하였다. 김창 의 이은규( 李 殷 奎 ) 등은 3월 21일 이은규 집에서 다음 23일은 화천읍 장날이므로 동 시장 에 참집한 군중을 선동하여 크게 소동 을 결의하였다. 이달룡( 李 達 龍 )은 조선독립만세 깃발 과 화천면 민단 대표자 김창의 이은규 김성모( 金 星 模 ) 깃발을 제작하였다. 박성록( 朴 成 綠 ) 등이 하남 논미리와 상서 구운리 등에 독립만세 취지를 전달하고, 김창의는 3월 22일 논 미리 도로 인부들에게 권유하였다. 3월 23일 아침 헌병 상등병 조판무리( 早 坂 茂 利 )와 보조 원 등이 김창의에게 불온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 며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우리는 독립 운동의 주창자이다 헌병의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 고 응대하고 보조원에게 너는 선인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 행동에 가입할 것이다 라 말하였다. 이어 주민 12명이 헌병과 보조원을 둘러싸며 압박하였다. 김창의는 아들에게 주민을 모으게 하여 김한식( 金 漢 植 ) 김한수( 金 寒 洙 ) 등 5~60명이 집합하였다. 그는 서로 천도교도이므로 우리들도 만세를 부르지 않아서 는 안된다 며 조선독립만세 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러자 약 20명 가량이 조 61

5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박성록이 깃발을 받아 앞세우고 이은규가 지휘하여 읍내로 조선이 독립되었으니 만세를 부르러 가자 며 동지화동으로 이동하였다. 김용구( 金 容 九 )도 면민단대표자 깃발을 앞세우고 김한식과 독립만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김창의는 출발할 때 김한식에게 이 깃발을 경찰관이 보기만 해도 빼앗으려고 할 터이니 빼앗기지 않도록 하 라 고 지시하였다. 신읍리 주민들은 한정종( 韓 丁 鍾 )이 이끈 상서 호동리 주민들과 직동의 수 차 소옥 부근에서 합세하였고, 이들은 상리 다리에서 안종화가 이끈 노동리 주민들과 합류하 였다. 군중이 동지화동에 이르렀을 때 헌병오장 야상미희남( 野 上 美 喜 南 )과 상등병 조판무리 ( 早 坂 茂 利 ) 등이 해산을 강요하고 깃발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창의 한정종 등 주도 인사들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항거하였다. 헌병들은 후방에서 감시하며 해산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김창의 이은규 박성록 등은 해산자에게 참여를 독려하였다. 헌병들은 지원 헌병과 보병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동남동 남단 고개 밑에서 군중을 막았다. 야상오장 지원병 북촌( 北 村 ) 오장 등 헌병 율림( 栗 林 ) 중위 등 보병들이 주도 인사 체포를 시도하였다. 김용 구는 깃대로 야상오장을 때리는 등 헌병과 육박전을 벌이고, 박성록은 헌병 가슴을 구타하고 북촌( 北 村 )오장을 차서 길위에서 논 가운데로 떨어지게 하고 조판 상등병과 몸이 엉키어 밭 가운데로 밀려 넘어졌다. 김창의 등 10여명이 약 30분 동안 항거하였다. 김창의 이은규 박성록 강석대( 姜 石 大 ) 등이 체포을 당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3월 23일 김창의의 권유를 받은 길호순( 吉 浩 順 )이 3월 29일 화천 장날 독립만세를 결 심하였다. 그는 3월 28일 박장록( 朴 章 祿 )의 찬성을 얻고, 박장록은 김중배( 金 仲 培 ) 집에서 김응선( 金 應 善 ) 등 수명에게 권유하고 김중배에게 주민 규합을 의뢰하였다. 김중배는 이장 강진희( 姜 陳 希 )에게 부탁하였다. 5) 원주군 부론에서는 3월 27일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요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범우 ( 韓 範 愚 ) 한돈우( 韓 敦 愚 ) 김성수( 金 性 秀 ) 등이 오후 4시 30분경 노림리 길가에 있을 때 군 수 오유영( 吳 唯 泳 )이 사택으로 퇴근하였다. 김성수가 조선독립만세 깃발을 흔들고 노림서 당 학생 6명 농민 2명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수 뒤를 따랐다. 이들은 군수에게 철 원군수는 민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너는 어째서 부르지 않느냐? 함께 조선독립 62

55 총 설 만세를 부르자 요구하였다. 이때 헌병 상등병 유촌상길( 有 村 常 吉 )이 출동하여 군수에게 상 황을 파악하고 한범우를 체포하였다. 또 4월 9일 표광천( 表 光 天 ) 지천복( 池 千 福 )이 천리 주 민 수십 명과 산수동 응봉산 마루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김복기( 金 福 基 ) 정완용( 鄭 完 用 )의 선창으로 4월 11일 이재관( 李 在 琯 ) 이은교( 李 殷 敎 ) 등 소곡리 주민 수십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소초에서는 4월 3일 신현철( 申 鉉 喆 ) 신현세( 申 賢 世 ) 등이 평장리 주민들을 규합하여 4월 4일 수백명과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귀래에서는 4월 7일 8일 양일간 밤에 김현수( 金 顯 洙 ) 김현홍( 金 顯 洪 )이 귀래리 주민 수 백명과 마을 언덕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건등 지정 흥경에서는 4월 8일 독립만세와 권유 활동이 활발하였다. 건등에서는 밤늦 게 김현구( 金 顯 九 ) 유인수( 柳 寅 秀 )가 궁촌리 뒷산에서 김원기( 金 元 起 ) 등 5~60명 주민과 조 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구장 이희원( 李 熙 元 )이 제지하자, 주민들은 구장도 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였다. 김현구는 김종성( 金 鍾 聲 )에게 네가 오늘 밤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좋 지 못할 것이다. 또 이곳 구장도 구장이다. 그는 이 마을의 구장이 아니라 관청의 구장이다 라 말하고 광목으로 태극기를 만들게 하였다. 또한 최재희( 崔 在 熙 )도 밤에 궁촌동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여 북촌에서도 불렀다 며 주민들을 모아 오후 10시경 20여명과 서 석동 밭 가운데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리고 곽한선( 郭 漢 璇 )도 밤에 반계리 주민에 게 다른 마을을 본받도록 권유하여 수십 명과 마을 서북쪽 언덕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지정에서도 유준열( 柳 俊 烈 ) 박종형( 朴 鍾 瀅 ) 이근돌( 李 斤 乭 )이 오후 10시경 박종 명 집 앞에서 가곡리 주민 6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흥경에서는 원성규( 元 成 圭 ) 이재 손( 李 在 孫 ) 윤산악( 尹 山 岳 )이 원현복( 元 顯 福 ) 집에서 서당교사 김수익( 金 壽 翼 )에게 독립만 세 고창 취지의 격문을 부탁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돌려 읽도록 권유 활동을 하였다. 흥업에서는 4월 9일 이현순( 李 賢 淳 ) 홍대성( 洪 大 成 )이 흥업리에서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홍학성( 洪 學 成 )에게 주민을 모이게 하였다. 40여명은 면사무소 뒤쪽 언덕에서 조선독립만세 를 고창하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주민들은 면사무원은 도망하지 않았느냐?, 면장은 나오라 고 외쳤다. 면장 서정우( 徐 廷 禹 )가 사무실을 나와 해산하라 고 설유하자, 주민들은 오히려 면장에게 만세를 부르라 요구하고, 분위기에 압도된 면장은 결국 독립만세를 불렀다. 63

5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6) 홍천군 홍천에서는 4월 1일 차봉철( 車 奉 哲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서울 3 1운 동을 목격하고 보고 귀향하여 서상우( 徐 相 佑 )와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이어 이홍근( 李 洪 根 ) 임준홍( 林 準 弘 ) 발의로 11명이 10일 전부터 2회 회합을 갖고 4월 1일 독립만세를 결의 하였다. 3월 30일 차봉철 등이 노동근( 盧 東 根 ) 집에서 오창섭( 吳 昌 燮 )에게 4월 1일 읍내 독 립만세운동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참가하도록 마을 주민들에게 그 뜻을 권유해 달라 고 부탁하였다. 오창섭은 김원봉( 金 源 鳳 )과 성동리 전원봉( 全 元 鳳 ) 집에서 각 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신흥균( 申 興 均 )에게 부탁하고, 신흥균 김원봉은 각 집을 방문하여 전달하였다. 3월 31일에도 다시 노동근 집에 가서 기동리 주민들에게 전달을 부탁하였다. 또한 같은 날 김수완( 金 壽 完 ) 차봉환( 車 鳳 煥 ) 등 9명을 신장대리 고익진( 高 翼 振 ) 집 앞 도로에 모이게 하 여 4월 1일 도로 수축 인부로 집합하는 주민들을 참가시키기로 합의하였다. 4월 1일 오후 1 시경 차봉철이 태극기를 휴대하고 서상우 김기현( 金 基 鉉 )과 신장대리시장으로 가서 김옥인 ( 金 玉 仁 ) 등 약 200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창섭 김영옥( 金 永 玉 )이 태극 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어 군청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7) 춘천군 춘천에서는 독립만세 권유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면에서는 윤도순( 尹 道 淳 )이 독립 만세를 결심하고 면리를 순회하였다. 그는 3월 10일 만천리, 13일 가연리, 14일 신남 송암리 등에서 수 명에게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사북에서는 3월 31일 이교관( 李 敎 寬 )이 오탄리 최기환( 崔 基 桓 ) 집에서 김공모( 金 公 模 ) 등과 회합하여 4월 1일 석양 때 독립만세를 외 칠 것을 결의하였다. 그는 윤복균( 尹 復 均 ) 윤철쇠( 尹 鐵 釗 )에게 권유하고, 김공모는 독립운 동 가입을 권고하는 회장( 回 章 )을 각 호( 戶 )에 회부하고 한의봉( 韓 意 鳳 ) 등이 회람하였다. 8) 평강군 평강에 독립선언서는 2월 28일 안상덕이 동변리 천도교구실에 이태윤에게 독립선언서 600매를 전달하여 도착하였다. 이태윤은 3월 1일 이면하( 李 冕 河 ) 전창석( 全 昌 錫 ) 김찬호 ( 金 瓚 鎬 )와 배부를 결정하고, 김정찬( 金 正 燦 )도 찬성하였다. 이어 권병식( 權 炳 植 ) 최일룡 64

57 총 설 ( 崔 一 龍 ) 전용섭( 全 容 燮 ) 등에게 평강 김화에 배포를 부탁하였다. 전창석은 33매, 권병식 은 2매, 전용섭은 1매를 받아 3월 2~3일 각 마을에 배포하였다. 김봉진( 金 奉 津 )도 3월 1일 1 매를 받아 3월 2일 이달근( 李 達 根 )에게 주민이 볼 수 있는 길가에 게시하라고 하였다. 그러 나 3월 1일 선언서가 도착하였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독립만세운동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고삽에서는 3월 18일 김찬호( 金 瓚 鎬 )가 중평리 성화실에서 김화춘( 金 華 春 ) 신상은( 申 相 殷 ) 등 교도 12명에게 인내천( 人 乃 天 ) 을 주제로 우리 조선은 일본의 압박을 받아 왔으나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고 조선인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라 설교하여 독립 의식을 고조시켰다. 평강에서는 4월 7일 권대완( 權 大 完 ) 권의준( 權 義 俊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 다. 4월 4일 권대완 이예모( 李 禮 模 )가 정산리 개천가 바위 동굴에서 협의하고 태극기 2기 를 만들었다. 이들은 4월 6일 주민들에게 내일 7일 새벽에 반드시 읍내로 모이라 고 사발 통문을 발송하였다. 4월 7일 권대완 권의준이 나매리 주민 약 400명과 읍내로 갔다. 오전 5시 30분 권대완 권의준이 태극기 2기를 흔들며 면민을 이끌고 서변리에서 동구리까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군청 면사무소로 이동하며 1시간 동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9) 통천군 통천에 독립선언서는 평강과 회양을 거쳐 신태윤( 申 泰 潤 )에게 전달되어 도착하였다. 평강 교구장 이태윤이 김천일( 金 千 鎰 )에게 120매를 회양 상송관리 유한영( 劉 漢 永 )에게 전달을 부 탁하여 아들인 유인경( 柳 寅 景 )에게 배부하여 도착하였다. 유인경은 3월 3일 초일리 영낙교 부근에서 박병운( 朴 炳 云 )에게 32매를 회양군에 배포를 부탁하고, 나머지 3매는 다리 부근에 부착하였다. 박병운은 신태윤에게 32매를 통천군에 배부를 부탁하고, 신태윤은 다시 벽양 대림리 임병준( 任 秉 準 )에게 30매 배포를 부탁하고 2매를 부근 게시판에 첨부하였다. 임병준 은 송산리 공면술( 孔 冕 述 )에게 30매를 통천 군내 각처에 배포하게 하였다. 임남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받은 지 1개월의 지난 4월 2일 3일 양일간 최상린( 崔 祥 麟 ) 주 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2월 말경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으나 독립 만세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3월 하순경 김두만( 金 斗 滿 ) 안겸식( 安 兼 植 ) 우낙영( 禹 洛 65

5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榮 )을 장전리 집으로 불러 선언서와 같은 문서를 인쇄 반포하여 선언서 취지를 관철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3월 22일 면사무소 부근에서 선언서 전반부를 반지 91매로 만들고, 3월 31일 박성준( 朴 成 俊 )과 태극기 250기를 제작하였다. 4월 1일 최상린 등이 예수교도 십수 명 집을 방문하여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2일 최상린 등 5명이 유시국( 劉 時 國 ) 등 예수교도 약 20명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앞 다리까지 행진하였다. 이튿날에는 최상린 등 4명이 유시국 등 약 백 수십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일경들은 독립선언서 90매, 태극기 107기를 압수하였다. 10) 이천군 이천에서는 독립선언서 배부와 독립만세 권유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우선 독립선언 서 배부로 3월 2일 이광선( 李 光 善 )이 이춘호( 李 春 浩 )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안상덕에게 받 은 15매를 탑리 교구실에서 김순필( 金 舜 弼 ) 등 교도에게 설명하고 배포를 부탁하고, 김순필 은 2매를 이천면내에 배포하였다. 이춘호도 3월 3일 장선경( 張 善 慶 )에게 15매를 받아 교구 실에서 십수 명을 우리 조선 독립을 우리 천도교 60년래의 소망이었었는데 독립을 부르짖 어 일치 협력해서 그 목적 관철에 노력하자 고 설득하고 김형구( 金 瀅 九 ) 이경선( 李 京 善 )에 게 15매를 군내 각처에 배포하게 하였다. 권유 활동으로 이춘호가 독립선언서 배부 때 장두 경( 張 斗 京 ) 김병률( 金 炳 律 )을 설득하였다. 이어 장두경은 판교 군지리 이흥선( 李 興 善 ) 집에 서, 김병률은 박필주( 朴 弼 周 )에게 독립선언과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은 천도교 60년래의 염 원이었던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시킬 시기가 도래한 만큼 크게 분투 노력하자 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김병주( 金 炳 柱 )는 3월 3일 서울에서 박인호에게 독립선언을 듣고 찬성하여 3월 10일 교구실에서 헌병 보조원 김유기( 金 有 基 ) 김인관( 金 仁 寬 )에게 헌병 보조원의 직을 사 면하고 이 운동에 참가한다면 독립이 되는 날에는 반드시 높은 직위에 앉게 될 것은 의심 없 으므로 여기에 참가 협력하라 고 회유하였다. 이어 이튿날에도 김인선( 金 仁 善 )에게 독립운 동은 멀지 않아서 성공할 것인데 우리 천도교도와 함께 이 운동에 참가 협력하여 독립만세 를 외치자, 당일은 이 운동의 자금이 부족하므로 이를 제공하라 고 하였다. 4월 초에는 더 욱 활발해져 이광선이 4월 5일 추목리 박천언( 朴 千 彦 ) 집에서 박천언 외 수명에게, 박필주가 4월 7일 교구실에서 변성주( 卞 聖 周 )와 4월 15일 남대리 집에서 박필곤( 朴 弼 坤 ) 외 수명에게, 66

59 총 설 김순필이 4월 8일 교구실에서 판교 명덕리 김창하( 金 昌 河 )에게 독립운동의 중심은 천도교 도 등인데 금 10원 이상을 제공하여 크게 이 독립운동의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고 권 고하였다. 특히 김병주와 김순필은 독립운동 자금까지 요청을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으로 4 월 6일 8일 양일간에 실행되었다. 박재곤( 朴 在 坤 ) 이원모( 李 元 模 )가 탑리 장날 독립만세 를 협의하고 4월 5일 박재곤 집에서 태극기 2기를 만들었다. 이들이 4월 6일 오후 4시경 시 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하였 다. 같은 날 정용규( 鄭 龍 奎 ) 김연옥( 金 淵 玉 ) 손은국( 孫 銀 國 )이 용포 창전리 마을 제사에 모인 100여명에게 독립만세를 제안하였다. 주민들의 동의로 정용규 등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비석리를 지나 탑리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응규( 朴 應 奎 ) 박송규( 朴 宋 奎 )는 4월 7일 남순리 박필주 집에서 협의하고, 4월 8일 아침 이형모( 李 亨 模 )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마을을 다니며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하려고 하니 뜻을 같이 하 는 자는 집합하라 고 권유하여 약 50명이 모였다. 이계원( 李 桂 元 )도 오전 9시경에 박응규가 보낸 인사람의 권유를 받고 참가하였다. 박응규가 태극기를 흔들며 주민들과 저녁 무렵에 읍 내로 행진하여 2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서면에서는 3월 13일 김득필( 金 得 弼 )이 축동리 박창식( 朴 昌 植 ) 집에 가서 우리 마을은 어 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고, 또 독립하면 만세를 부 른 자가 양반이 되는 데 반해서 부르지 않는 자는 처벌을 받는다, 이어 전정순( 全 貞 淳 ) 김 충렬( 金 忠 烈 ) 집에서도 먼저 구장이 마을 주민에 솔선하여 만세를 불러야 한다 고 요구하였 다. 전정순 집에서는 노동국( 魯 東 國 ) 박동근( 朴 東 根 ) 등에게도 권유하였다. 낙양에서는 4월 4일 5일 양일간 김병하( 金 炳 河 ) 이여종( 李 呂 鍾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병하가 4월 4일 내낙리 김응제( 金 應 濟 )를 찾아가 김이순( 金 利 淳 ) 이여종( 李 呂 鍾 ) 등과 독립만세를 협의하고 태극기 2기를 만들어 이두영( 李 斗 榮 ) 김혁근( 金 赫 根 )에게 교부하였다. 이두영 김혁근은 오후 3시경 문석리시장 군중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병하 이여종 등은 오후 10시경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 고 이동 중에도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여종은 박총영( 朴 叢 英 ) 집에 가서 지하리에 서 만세를 부르는데 만일 응하지 않으면 돌로 때리겠다 고 하였다. 오후 11시경 약 20명이 지상리에 이르러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주민들을 깨웠다. 김병하가 4월 5일 오전 2시경 김명 67

6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기( 金 命 基 )에게 권유했으나 불참을 표시하여 다투었다. 김명기가 김병하에게 네놈은 강도 라 고 하자, 김병하는 막대기로 김명기의 코 입술 등 얼굴에 부상을 입혔다. 오전 3시경 약 100명이 모여 지하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판교에서는 4월 7일 8일 양일간 이만권( 李 萬 權 )이 독립만세 권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는 4월 7일 명덕리 고재룡( 高 在 龍 ) 집에서 조건봉( 趙 健 鳳 ) 등에게 동일 문암리시장에서 만 세를 부르기로 되어 있으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라 고 권유하였다. 이튿날에도 용천리 김태 림( 金 泰 琳 ) 집에서 부자에게 당촌( 當 村 )에서도 만세를 외치기로 되어 있으므로 일동 참집하 도록 마을 주민들에게 전해 달라 며 부탁하였으나 김태림이 싫어하는 말을 하므로 너는 조 선인이면서 어째서 그러한 말을 하느냐? 고 책망하였다. 또 김수명( 金 受 明 )에게 주민 규합 을, 김병수( 金 秉 洙 )에게는 가르치는 학생들을 전부 문암리시장에 모이도록 부탁하였다. 또 4 월 10일에는 이병준( 李 炳 準 ) 한인백( 韓 寅 伯 )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이병준 이 한인백에게 천도교도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부탁하였다. 이에 한인백은 관현리 강도윤 ( 姜 道 允 ) 마운래( 馬 雲 來 ) 한인보( 韓 寅 輔 ) 박규응( 朴 奎 應 ) 등을 방문하였다. 이후 그는 5 월 경 강도윤 한인보 마운래에게 성미( 聖 米 )의 반기분 명목으로 5원씩, 또 구인된 천도교 도 차입 비용으로 한인보 마운래에게 2원씩을 받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안협에서는 4월 10일 23일 박용의( 朴 容 義 ) 장강환( 張 康 煥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4월 9일 오후 9시경 박용의 장강환이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김응순( 金 應 順 )과 동장 송원흥( 宋 元 興 )을 찾아가 명 10일 이천군 안협리 읍내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려고 한다. 너는 동장 입장으로서 모두 참가하도록 주민들에게 통지하여 달라, 만약에 응하지 않는 자는 집에는 방화, 또는 타살하거나 동네로부터 축출한다 혹은 만세를 부른 뒤에 짐승 이 상의 취급을 한다 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송원흥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마을을 다니며 설득하여 약 7~80명이 집합하였다. 박용의 장강환 등은 헌병 의 동정이 통지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헌병이 만세를 부르는 자는 타살한다 고 말을 타고 온 다는 통지가 전해져 주민들이 피신하였다. 그러나 박용의 장강환은 거성리시장에서 2~30 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23일에도 권유에 주민들이 참가하지 않자, 이들은 사견동 헌병주재소에서 박용의가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68

61 총 설 11) 양양군 양양에서는 4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 읍내를 중심으로 다른 주도 세력들이 독립만세운 동을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는 거마리 최인식( 崔 寅 植 ) 이종태( 李 鍾 台 ) 주도로 읍내시장에 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3일 최인식 김규용( 金 奎 容 ) 등 4명이 4월 4일 읍내 장 날 독립만세와 태극기 제작을 합의하였다. 김재귀( 金 在 龜 )는 옥양목과 백지를 김필선에게 교 부하고, 김필선( 金 弼 善 )은 면사무소에서 대한국독립만세 양양군 문자 태극 모양 등을 인쇄한 200매를 휴대하고 김재귀 김규용과 최인식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이교정( 李 敎 貞 ) 집에서 옥양목에 태극기, 백지에 국기를 그렸고 이때 김계호( 金 啓 鎬 ) 등 2명도 참여하였다. 태극기 제작 중에 군수 이동혁( 李 東 赫 )이 와서 인쇄기 태극기 국기 등을 일부 빼앗고 독립 만세를 제지하였다. 이들은 장소를 옮겨 거마리 이종태 집에서 일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 종태가 옥양목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에 서고 최인식 등이 뒤따르고 시장가는 주민들에게 만 세를 권유하며 종이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오전 11시경 먼저 최인식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 하고 김재귀 등이 화창하여 50여명과 시장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5일 에는 최한두( 崔 漢 斗 )가 오전 9시경 주촌리 주민 약 40명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 내시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우암리 김진열( 金 振 烈 )도 약 30여명을 이끌고 읍내로 왔다. 이들 은 합세하여 읍내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6일에는 김종택( 金 鍾 澤 )이 상왕 도리 주민 약 20여명을 이끌고 태극기에 조선독립의 기 라 쓴 2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향하 였으나 남대천 다리에서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이들은 다리 옆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때 연창리에 도천 면민들이 모였다는 것을 듣고 연창리로 가서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7일에는 박규병( 朴 奎 秉 )이 4월 초 동생이 독립선언서 소지로 구속된 것을 계기 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찰서로 가서 석방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그는 4월 6일 원일전리 가 마( 釜 ) 제조장에서 약 40명에게 찬성을 얻고 다음날 아침 장동 이현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또 밤에 집에서 박용규( 朴 容 圭 )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7일 아침 100여명은 이현에서 박규병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향하였다. 임천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박규병 등 3명은 양양경찰서로 가던 중 용천리에서 일경에게 독립 운동자 구속의 부당성을 따졌다. 봉현에서는 4월 5일 6일 양일간 이능렬( 李 能 烈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69

6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는 4월 4일 밤 중도문리 이종국( 李 鍾 國 ) 집에서 태극기 2기를 제작하고 주민에게 물류시장 에서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이튿날 정오경 물류시장에서 그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 립만세를 선창하자, 수백 명 군중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약 20정 거리의 대포주재소 부 근에서도 만세를 고창하였다. 또 군중들에게 명 6일은 양양 읍내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또 구속 인사를 석방하도록 요구할 터이니 일동도 와서 참가하라 고 연설하였다. 그리하여 4월 6일 오후 1시 수백 명과 읍내시장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2) 양구군 양구에서는 4월 3일 정승원( 鄭 昇 源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최우명( 崔 遇 明 ) 김병하( 金 炳 夏 )와 3월 30일 교구실에서 4월 5일 독립운동을 협의하였지만 일제 탄압 과 독립만세 인사 체포를 듣고 4월 2일로 앞당겼다. 이어 그는 최기호( 崔 寄 浩 ) 박의순( 朴 義 淳 ) 등 4명에게, 최영구( 崔 榮 九 )는 교도들에게 권유하였다. 폭설로 연기하여 4월 3일 김명옥 ( 金 明 玉 ) 김창헌( 金 昌 憲 ) 등은 용호 함춘 팔랑 동수 용연 대동리 교도 십수명과 최영 구( 崔 榮 九 )가 만든 깃발을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죽곡리를 거쳐 군청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13) 회양군 회양에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평강교구장 이태윤에게 120매를 받은 김천일( 金 千 鎰 )이 밤 새 걸어서 새벽에 상송관리 유한영( 柳 漢 永 )에게 1부를 통천이나 고성에, 나머지를 읍내 송환 순( 宋 煥 淳 ) 집으로 배달을 부탁하여 도착하였다. 하북에서는 4월 14일 16일 양일간 이봉삼( 李 逢 三 ) 신영규( 申 永 奎 ) 등 주도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14일 밤 이봉삼 이봉구( 李 鳳 九 ) 이흥규( 李 興 圭 )는 선암리에서 주 민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신영규는 4월 12일 초일리로 찾아 온 송찬용( 宋 贊 用 ) 송 두용( 宋 斗 用 ) 형제에게 독립만세를 권고하였다. 이들은 김일호( 金 日 浩 ) 집에서 신영규의 문 안으로 오는 15일 회양군 읍내 공자묘 앞으로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도록 이민( 里 民 )은 이 민을 선동하되 만일 여기 응치 않으면 집에 방화한다 는 조선독립만세 통고문 20여통을 봉 투에 넣어 이민 각위( 各 位 )라 쓰고 임수성( 林 秀 成 )에게 배부를 부탁하였다. 임수성은 4월 14 70

63 총 설 일 마산리 이완조( 李 完 祖 ) 등 이장들에게 배포하였다. 송찬용은 4월 15일 후일리 주민에게 명일 읍내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라 고 설득하였다. 이들은 4월 16일 오전 10시경 주민 약 2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14) 간성군 신북의 김동원( 金 東 元 )이 3월 초 고성읍내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입수하였다. 그는 3월 13 일 밤 집에서 고성재판 50매를 만들어 다음날 고성읍에서 지경리까지 게시판에 붙이거나 길가에 살포하여 독립운동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5) 영월군 수주에서는 독립운동 인사 가운데 최고령자인 78세의 천선재( 千 善 在 )가 활발한 독립만세 권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동참을 결심하고 4월 8일 수주 법흥리 최춘일( 崔 春 日 ), 9일 남변 신일리 최성오( 崔 成 五 ), 10일에 수주 무릉리 현성준( 玄 聖 俊 )에게 전국 각지 에서 애국지사가 죽을 힘을 다하여 활동하는데 그런데 우리 지방에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은 실로 유감되는 일이다. 한국 국민된 자, 애국심을 분발하여 오 는 주천리 장날 아침에 이 시장에서 나를 위시해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려고 하 니 이에 참가하라 고 독려하였다. 양변에서는 4월 21일 박광훈( 朴 光 勳 ) 주도로 군수 일행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독립 만세연명부 에 서명 날인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4월 20일 오전 9시경 이병익( 李 炳 翼 ) 이용헌( 李 容 獻 ) 박재호( 朴 在 鎬 ) 박수영( 朴 受 永 ) 등을 불러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우리들도 구한국 신민으로서 만세를 외칠만한 의무가 있다 고 발의하고 군수 석명선( 石 明 瑄 )이 수행원과 면내 방문을 계기로 독립만세를 계획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함께 부른다 는 승낙서에 박수경( 朴 受 景 ) 등 15여명의 서명 날인을 받고 주 민들에게도 찬성을 얻었다. 이들은 4월 21일 오전 11시경 약 3~40명과 금마리에서 주천리 로 이동하는 군수와 군서기 구장 면서기 일행을 쫓아갔다. 이병익 이용헌 박수영 등이 일행을 조상근( 趙 相 根 ) 집 노상에서 막았다. 이병익이 종이 태극기를 군수 손에 쥐어 주고, 박광훈이 군수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며, 박광훈 등 5~6명이 3~4척 몽둥 71

6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이를 가지고 일행을 에워싸고 독립만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군수 일행은 조선독립만세를 수회 고창하고, 주민들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이병익이 독립만세연명부 에 서명 날인 을 요구하자, 군수도 서명을 하고 엄지 손가락으로 날인을 하였다. 16) 평창군 대화에서는 3월 16일 최상달( 崔 相 達 )이 이인영( 李 麟 榮 )에게 조선은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선언서 2매를 받았다. 그는 3월 23일 정선 화암리 손호국( 孫 好 國 ) 집에서 석곡리 최돈상( 崔 墩 尙 )에게 선언서 1매를 교부하고, 또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평창에서는 3월 21일 손상봉( 孫 相 鳳 ) 등 5명이 유영묵( 劉 永 默 ) 집에서 4월 4일 대화리와 5일 읍내 장날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손상봉은 최태제( 崔 泰 悌 ) 오정천( 吳 正 天 ) 에게 권유하고, 4월 3일 이종하( 李 鍾 河 )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4. 충청북도 1) 청주군 청주에서는 3월 2일 독립선언서 배부가 시도되고 2차에 걸쳐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인종 익은 이종일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3월 1일 전주에 전달하고 대전을 거쳐 3월 2일 청주 천 도교구실에 도착하였으나 미행하던 일경에게 체포를 당하고 독립선언서 286매를 압수당했 다. 이는 3 1운동과 관련된 충북 최초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어 3월 9일 신횡호( 申 鑅 浩 )는 수원에서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함 (경고문)을 가지고 농업학교 기숙사에 도착하여 오 석영( 吳 錫 永 ) 등에게 보여 주고, 청주에서도 서울에 못지않게 열성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고 제안하였다. 이에 오석영 이수천( 李 壽 千 ) 등 5명이 찬성하여 경고문 배포를 결의하고, 김현구( 金 顯 九 ) 집에서 임창수( 林 昌 洙 ) 등 4명이 추가로 참여하여 300여장을 인 쇄하였다. 4월 1일에는 송재옥( 宋 在 玉 ) 신광균( 申 光 均 )은 송재인( 宋 在 寅 ) 집에서 금일 시 장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기를 희망한다 는 유인물 약 200매를 만들어 다음날 읍내 각처에 배포하였다. 72

65 총 설 강내에서는 3월 23 24일 26일 3일간 대성리 대성산에서 조동식( 趙 東 植 ) 주도로 횃불독 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긴급한 상황을 봉화로 알리는 봉화 고변( 烽 火 告 變 )의 예를 따라 산꼭대기에 횃불( 焚 火 )을 올려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만세운 동의 기세가 발양( 發 揚 )될 것 으로 인식하고 대성리 주민들과 대성산에서 횃불( 篝 火 )을 놓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또 그는 3월 25일 조치원의 김재형에게 경고문 1봉( 封 ) 약 45매를 받아 일부는 남겨두고, 나머지는 허영대( 許 永 大 )에게 주어 화정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미원에서는 3월 30일 31일 4월 7일 신경구( 申 敬 求 ) 오교선( 吳 敎 善 ) 이성태( 李 聖 泰 聖 台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과 친일적 인사 질책이 있었다. 3월 30일 신경구는 오후 2시 경 미원리 장터에서 이용실( 李 容 實 )을 만나 담뱃대에 신봉휴( 申 鳳 休 )가 만든 태극기를 메어 들고 시장으로 나갔다. 이들은 네거리에서 20여명에게 만세를 권유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 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였다. 헌병군조 식전이지조( 植 田 利 之 助 ) 등 8명이 제 지하며 해산시켰으나 군중들은 더욱 격렬히 독립만세를 불렀고 군중도 100여명으로 늘어났 다. 헌병들은 해산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신경구를 주재소에 구금하였다. 이용실 윤인보( 尹 仁 甫 ) 등 7명이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이용실 이수란( 李 水 蘭 ) 등 12명의 주도로 주재소를 파괴하라 며 돌을 던져 각종 시설들을 파괴하였다. 또 주재 소장과 주재소원을 살해하라 며 주재소장을 구타하고 헌병들과 격투하며, 보조원에게도 신 경구를 석방 인도하라 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따라서 헌병들은 다만 주도 인사나 활동적 인 사들을 주시하며 청주의 지원 병력을 기다렸다. 보병 7명이 출동하자, 헌병들의 무차별 사 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유리창 3장 정문 기둥 1개 표찰 1개 판 자 울타리 12척 등을 파손되고, 돌이 사무실내 50개 등 구내에 572개나 있을 정도로 주재소 에 맹공을 가하였다. 또 같은 날 오교선( 吳 敎 善 ) 박우래( 朴 雨 來 雨 東 )가 밤에 성태리 이상 옥( 李 相 玉 ) 집에서 내일 미원리로 와서 모두 만세를 부르기를 희망한다 는 유인물 3통을 작 성하고, 이상옥 등 3명에게 낭성 미원 면내 마을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오교선은 이튿날 미 원리에서 면민들과 다음날 오전 1시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4월 7일에는 이 성태( 李 聖 泰 聖 台 )가 오후 2시경 운교리 박재진( 朴 在 鎭 ) 집에서 구장 이규하( 李 圭 夏 )가 조 선독립시위운동을 하지 않겠다 는 서약서를 헌병주재소장에게 제출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이규하에게 너희들은 무슨 이유로 조선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서약 73

6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서를 미원 헌병주재소장에게 차출( 差 出 )하였는가?, 너희들은 조선독립을 방해하는 자들이 다 라고 힐책하며 친일적 인사를 비난하였다. 북일에서는 4월 1일 2일 양일간 한봉수( 韓 鳳 洙 ) 변영봉( 卞 榮 鳳 聖 西 ) 등 주도로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1일 밤 한봉수가 임봉수( 林 鳳 洙 ) 이태우( 李 太 雨 )와 옛시장터에 서 세교리 주민 여러 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도 그는 정오경 옛시장터로 나갔다. 마침 식목 행사로 옛시장을 통과하는 내수보통학교 학생 약 85명과 인솔교사 엄익 래( 嚴 翼 來 ) 이건간( 李 建 簡 )에게 만세를 권유하여 주민 학생 교사가 함께 독립만세를 고 창하였다. 또 우산리 변영봉( 卞 榮 鳳 聖 西 ) 신석범( 申 錫 範 ) 송태현( 宋 台 鉉 應 三 ) 등이 뒷 산에서 주민 수십 명이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저곡리 박제우( 朴 齊 宇 )는 4 월 2일 청주시장에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이라는 통고문 1통을 받아 덕암리 김학 술( 金 學 述 )에게 교부하여 주민들에게 전달하였다. 북이에서는 4월 1일 김호상( 金 浩 相 )이 같은 면서기 김정환( 金 貞 煥 ) 이시우( 李 始 雨 )와 사 환 장성이( 張 星 伊 )을 설득하여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여 오후 8시경 신대리 앞산에 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2) 진천군 진천에 독립선언서는 3월 9일 김교환( 金 敎 煥 ) 최봉길( 崔 鳳 吉 )에 의해 전달되었다. 김교 환은 서울에서 3월 7~8일경 선언서와 경고문 1통씩을 입수하여 3월 9일 최봉길에게 보이며 우리 교주의 발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할 기운을 만났다. 이를 숙독한 다음에 진천의 교도들 에게 반포하라 고 부탁하였다. 최봉길은 다시 최원순( 崔 元 順 )을 통하여 진천의 김동한( 金 東 漢 )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백곡에서는 4월 2일 오성문( 吳 聖 文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4월 1일 대 문리에 통지하고, 갈원리 주민을 설득하였다. 4월 2일에는 도촌( 濤 村 ) 양백 성대 용덕리 주민들이 참가하고, 공명삼( 孔 明 三 )의 권유를 받은 이종하( 李 鍾 夏 )는 성대리 주민 약 20명을 설득하여 면민 1,000여명이 석현리로 모였다. 오성문 공명삼 이종하 등의 주도로 면민들 은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밤을 새워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승에서도 같은 날 윤병한( 尹 炳 漢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4월 1일 하 74

67 총 설 오 5시경 오은영( 吳 殷 泳 ) 조창림( 趙 昌 林 ) 등과 협의하였다. 이튿날 오후 회죽리 면유림의 식수 작업 주민들에게 술대접을 하며 독립만세를 제안하고, 자신이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독 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정운화( 鄭 雲 和 ) 남계홍( 南 啓 弘 ) 등 주민 500여명이 호응하여 마을을 활보하고, 신축 중인 헌병주재소로 가서 시설과 공사장을 망가뜨렸다. 면사무소에서는 면서 기에게 너희도 같은 조선 사람이다. 함께 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고, 돌 곡괭이 막대기 등으로 유리창 장지문 등을 파손시키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또 윤병한은 오후 8시경 면직원에게 인쇄 도구를 요구하였다. 이튿날 장날에도 계속 만세를 부 르기 위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만세를 외쳐라 는 광신사( 廣 信 社 )의 경고문을 김동 화( 金 東 華 )에게 쓰게 하고 소사 박수문( 朴 壽 文 )을 시켜 약 20매를 인쇄하여 밤에 장터 일대 벽에 부착하였다. 3) 괴산군 괴산에서는 3월 19일 24일 양일간 홍명희( 洪 命 熹 ) 홍성희( 洪 性 熹 ) 형제 주도로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8일 홍명희 윤명구( 尹 命 求 ) 등이 홍명희 집에서 3월 19일 장날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만들기로 하였다. 홍명희가 선언서를 작성하여 이재성( 李 載 誠 )에게 주 고, 이재성은 홍용식( 洪 用 植 )과 3월 18일 19일 양일간 300매를 등사하였다. 이들은 3월 19 일 장날 동부 서부리에서 군중에게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대한독립만 세를 고창하였다. 3월 24일에는 홍성희( 洪 性 熹 ) 구창회( 具 昌 會 )가 오후 6시경 7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홍성희가 체포되자, 김인수( 金 仁 洙 )는 모자를 흔들어 만세를 부르 도록 군중을 독려하고, 민광식( 閔 光 植 )은 수진교에서 귀가자에게 우리 동포가 경찰서에 체 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모두 장터로 돌아가 독 립만세를 부르자 고 호소하고, 권담( 權 澹 )도 인사교에서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하 였다. 이때 군중은 2,000여명이나 되었다. 청안에서는 3월 30일 이태갑( 李 泰 甲 ) 장성원( 張 聖 源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이들은 읍내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 마을에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로 하였다. 김수백( 金 壽 伯 壽 福 ) 등은 오후 3시 반경 시장에서 3,000여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이 유웅렬( 劉 雄 烈 ) 등 7명을 주재소로 연행하자, 군중들 75

6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은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를 석방하라 며 고함을 치고 주재소에 투석 공격을 하였다. 이어 이홍균( 李 弘 均 ) 김종규( 金 鍾 奎 ) 등이 끌려가자, 김명진( 金 明 鎭 ) 안낙여( 安 落 女 落 三 ) 등 은 어째서 죄 없는 조선인을 너희가 체포하는가? 즉각 석방하라 며 계속 주재소를 공격하였 다. 향전( 香 田 ) 등 일경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다수가 체포되어 군중들은 점차 해산하 였다. 그러나 장성원 함재원( 咸 在 元 ) 박순옥( 朴 順 玉 明 來 ) 등 약 200여명은 우체국을 공 격하여 각종 기구 시설을 파괴하고 우편물을 탈취하였다. 장연에서는 4월 1일 2일 4일 김의현( 金 義 玄 ) 조규학( 曺 圭 鶴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김의현 김의대( 金 義 大 ) 박영래( 朴 泳 來 )는 국장 봉도단으로 서울 3 1운동 을 직접 목격하고 귀가하였다. 4월 1일 밤 김의대는 오가리 주민 약 100여명을 이끌고 면사 무소를 공격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는 일제 탄압을 예상하고 다시 면사무소를 공격 하기로 하고, 김의현 집으로 주민 30여명을 불러 4월 2일 밤 면사무소 공격을 주장하였다. 또 김의현의 말을 기록한 4월 2일 밤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예정이다. 만일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그 마을을 파괴하겠다 는 통문을 추점 광진 방곡 조곡리 등 에 회람시켰다. 통문에 따라 4월 2일 밤 면민 300여명이 모였고, 황만모( 黃 萬 模 士 仲 )는 송 덕리 허금돌( 許 今 乭 ) 등 4명을 참가시켰다. 면민들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의 건 물과 각종 기구 집기 장부들을 파손시키고, 특히 민적부 9권을 빼고 일체 서류는 모두 찢 어버렸다. 이어 면장 사택도 공격하여 객실 문창을 부수었다. 그리고 조규학( 曺 圭 鶴 ) 홍윤 식( 洪 倫 植 )이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조규학이 4월 2일 집에서 태극기 7기를 만들었다. 이들 은 4월 4일 밤 주민 30여명과 태성리 뒷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청천에서는 4월 1일 장날 이성태가 청천리 장터에서 약 2~30명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불 러 독립운동을 하여야 한다 고 연설을 하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활보하여 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읍내 보병들이 주도자를 체포하자, 군중들은 수차례 집결 하여 구출을 시도하다가 오후 10시경 해산하였다. 같은 날 소수에서는 유해륜( 柳 海 崙 ) 경권 중( 慶 權 重 ) 송능식( 宋 能 植 ) 등이 면민들과 면장 김승환( 金 昇 煥 ) 집과 경찰주재소에서 독립 만세를 합의하였다. 이튿날 유해륜 경권중은 오후 4시경 약 200여명과 면장 집과 주재소에 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송능식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을 이끌었다. 연풍에서는 3월 28일 오후 6시 주진리 박봉석( 朴 奉 石 ) 조세기( 趙 世 基 )가 보통학교 앞에 76

69 총 설 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칠성에서는 4월 3일 밤 쌍곡리 김동억( 金 東 億 )이 길가에서 괴산 시장에서 귀가하는 주민 약 15명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4) 음성군 소이에서는 3월 19일 4월 1일 김을경( 金 乙 卿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9일 오전 11시경 이중곤( 李 重 坤 ) 등 5명과 읍내리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들과 독립 만세를 부르며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들은 4월 1일에도 한내( 漢 川 寒 川 ) 시장에서 200여명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김춘흥( 金 春 興 順 吉 ) 이상근 ( 李 相 根 相 益 )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이어 면사무소에서 면 장 민동식( 閔 東 植 )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인 즉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 며 독립만세를 선창시키고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은 김을경 이중곤을 음성경찰서로 압송하려다 가 군중의 강력한 석방 요구에 주재소에 인계하였다. 1,000여명 군중들은 계속 석방을 요구 하였다. 권재학은 어째서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는가? 당장 석방하라 며 장지문 등을 파손 하였다. 추성렬( 秋 成 烈 ) 이교필( 李 敎 駜 )은 누구도 돌아가지 말고 김을경과 이중곤 구출에 진력하자 며 귀가 군중들을 제지하였다. 음성에서는 3월 27일 밤 김영익( 金 榮 翼 榮 韋 )이 초선리 서당인 정기선( 鄭 騏 善 ) 집에서 학 생 정민영( 鄭 玟 永 ) 등 4명에게 지금 조선 내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여 독립운동의 수 단으로 대한국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다. 우리 일동도 내일 음성 읍내시장에 나아가 대한국독 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장에 나온 군중에게도 선동하여 동일한 행동을 하게 하자 고 권유하였 다. 이들은 3월 28일 오후 2시경 김영익이 싸전에서 학생들에게 대한국독립만세 를 부르게 하고 수백 명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활보하였다. 삼성에서는 4월 2일 밤 이성용( 李 性 用 )이 선정리 주민 수십 명과 뒷산에서 대한독립만세 를 고창하였다. 이어 주민 약 80명은 천평리 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이 해산을 명령하자, 이성용은 막대기로 하야중차랑( 河 野 重 次 郞 ) 순사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하 고 군중들도 항거하며 다음날 오전 2시경까지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같은 날 대소에서는 임경순( 任 暻 淳 林 景 淳 ) 등이 밤에 오류리 등 면민 수백 명과 오산리 면사무소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임백규( 林 白 圭 ) 김달년( 金 達 年 )이 유리창을 깨뜨리고, 김동식( 金 東 植 )이 의 77

7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자를 부수는 등 건물 일부 기물 서류 장부 등을 파기하였다. 또한 오류리 송인식( 宋 寅 植 ) 등 6명이 수십 명과 뒷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송인식 박병철 이용학은 주민들과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감곡에서는 4월 3일 밤 송석봉( 宋 錫 奉 ) 홍종훈( 洪 鍾 勳 )이 문촌리 주민 수십 명과 응봉산 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이튿날에도 송석봉은 양묘장의 감독자인 면서기 이상석 ( 李 相 錫 )에게 너는 면관리이므로 네가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면 우리 면의 마을 주민들도 모 두 화창할 것이니 출역 인부와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라 고 요구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맹동에서는 4월 3일 강혜수( 姜 蕙 秀 ) 등 4명이 마산리 주민들과 와우형산에서, 김화서( 金 化 西 ) 등 3명은 쌍정리 주민들과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원남에서는 4월 5일 이교설( 李 敎 卨 ) 등 3명이 보천리 시장에서 약 200여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5) 충주군 충주에서는 3월 말경부터 김종부( 金 鍾 富 ) 장양헌( 張 良 憲 ) 오언영( 吳 彦 泳 彦 榮 ) 최명 희( 崔 明 熺 ) 등 4명이 야소교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최명희는 3월 27일 엄용 복( 嚴 龍 福 ) 집에서 장날 만세를 권유하고, 28일에는 장양헌과 김종태( 金 鍾 台 ) 집에 가서 독 립운동에 참여를 부탁하였다. 4월 8일경 4명은 권태은( 權 泰 殷 ) 집에서 여교사 김연순( 金 漣 順 然 順 )에게 여학생 참여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김종부는 창칼로 왼팔을 찔러 피로 태극기 를 그리고, 독립을 고취하는 장양헌의 말을 태극기에 적었다. 또한 경고문 독립가 각각 1통 씩 작성하고 태극기 수십 기를 만들었다. 피로 그린 태극기를 오언영에게 전달받은 김연순은 소극적 자세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경에게 사전 탐지되어 주도 인사 4명이 체포를 당하여 독립운동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신니에서는 3월 31일 은경옥( 殷 慶 玉 段 慶 玉 ) 등 5명이 이희갑( 李 喜 甲 ) 집에서 4월 1일 용 원 장날에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드는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은경옥 이희갑 이 강렴 손승억( 孫 承 億 )은 독립운동대표자로 선언서 7통을 만들고, 윤주영 윤무영( 尹 務 榮 ) 이강호( 李 康 滈 ) 김은배( 金 殷 倍 ) 등과 태극기 9기를 제작하였다. 용명서당 은경옥은 서당 학 생들을 참여시키려 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이들이 4월 1일 용원시장에 78

71 총 설 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약 500명 군중도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6) 제천군 제천에서는 4월 13일부터 준비하고 4월 17일에 이범우( 李 範 雨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장용근( 張 用 根 )은 4월 13일 읍내리 박재수( 朴 在 壽 ) 집에서 이선동( 李 先 童 相 麟 ) 등에게 권유하고, 하소리 냇가( 川 原 )로 구호달( 具 浩 達 ) 등 10명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 때 군중에게 줄 태극기를 만들게 하였다. 이들은 하소리 옹바위 밑에서 물감과 창호지로 태 극기 1,200기를 만들었으나 일경에 탐지되어 주도 인사가 체포되고 태극기도 압수당하였다. 이범우( 李 範 雨 )는 군 잠업계 조수로 국장 참례 때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하였다. 그는 4월 13일 봉양면 삼거리에서 권종필( 權 鍾 弼 )에게 독립만세를 제의하였다. 이들은 4월 17일 제천 시장 주점에서 원세덕( 元 世 德 )이 이기하( 李 起 夏 )를 이범우에게 소개하여 함께 시국담을 나누 고, 장용근 등의 구금에 공분하였다. 이어 이기하가 전필현( 全 弼 鉉 )을 소개하여 이범우 권 종필 이기하 전필현은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오후 6시경 시장에서 1,000여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송학에서는 4월 18일 최종률( 崔 鍾 律 )이 포천리 면사무소 앞뜰에 주민들을 모이게 하여 70 여명에게 독립만세를 주장하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7) 보은군 내북에서는 4월 8일 밤에 구열조( 具 悅 祖 ) 윤정훈( 尹 鼎 勳 ) 이용기( 李 龍 基 )가 서지 산성 리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구열조는 서지리 성산에서 김성복( 金 聖 福 ) 등 십여 명 과 산꼭대기에 올라 2시간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관모산에서도 주민들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불렀다. 윤정훈은 윤홍훈( 尹 洪 勳 ) 등 9명과 마을 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용기는 산성리 마을 서쪽 뒤편의 구릉 위에서 약 20명과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탄 부에서는 4월 11일 이창선( 李 昌 善 )이 이인하( 李 寅 夏 ) 김용섭( 金 用 燮 ) 이준영( 李 準 永 )과 구 인리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오후 8시경 김용섭이 꽹과리를 치며 주민을 모았고, 이인 하 이준영이 수십 명을 모았다. 이들은 구인리에서 길상리로 가서 뒷산에서 대한독립만세 79

7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를 고창하였다. 수한에서는 4월 12일 최용문( 崔 容 門 ) 안만순( 安 萬 淳 ) 송항빈( 宋 恒 彬 )이 독 립만세를 약속하고 묘서리 주민들에게 권유하여 오후 8시경 농암산에 60여명이 모였다. 최 용문이 독립 연설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주민들도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8) 옥천군 이원에서는 충북지방의 대표적인 3 1운동이 3월 27일에 육창주( 陸 昌 柱 ) 허상기( 許 相 基 ) 등 주도로 전개되었다. 육창주 허상구( 許 相 球 ) 육창문( 陸 昌 文 )은 고종 국장 참례 때 서울 3 1운동을 목격하고 파리강화회의 소식도 들어 독립운동 토론까지 하였다. 허상구는 10일 후 귀가하여 부친 허훈( 許 訓 )과 형 허상기에게 서울 3 1운동 상황과 국내외 정세 등을 이야 기하여 독립운동에 찬성을 얻었다. 육창주는 3월 13일경 귀가하여 허상기와 독립운동을 협 의하였다. 3월 14 5일경 육창문 사랑채에서 육창문 육창주 허상구 허상기 허훈 등이 모여 3월 27일 이원시장 장날에 시장에서 만세를 고창하고 행진하자. 이를 따르지 않는 자 는 강제로 참가시키자 고 합의하였다. 또한 당일에는 태극기 3기를 만들어 육창주 허상 기 김용이( 金 龍 伊 )가 시장에서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기 로 한다. 만약 헌병이 출동한다면 모두는 헌병주재소로 이동한다. 또한 구금자가 발생하면 무리가 가더라도 구금자를 탈환한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헌병대에서 해산하지 않는 다 는 결의를 다졌다. 그는 우리는 독립이 된다 는 생각을 갖고 계속 주민 참가를 설득하였 다. 그리고 3월 26일 오후 8시경에 자택에서 광목으로 태극기 3기를 만들었다. 3월 27일 육 창주 허상기는 주막에서 만난 김용이 등 8명과 함께 시장으로 갔다. 오후 1시경 육창주 허 상기가 100여명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허상구 허상옥 ( 許 相 玉 ) 허찬( 許 贊 ) 등이 시장을 활보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과 보조원이 해산을 종 용하였으나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불렀다. 분대장 상등병 안본이작( 岸 本 理 作 ) 등이 육창주 허상기를 주재소로 연행하고, 주재소에 보관한다면서 태극기를 빼앗아 갔다. 김용이 허상 구 허량( 許 樑 ) 이면호( 李 冕 鎬 ) 등은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어 김용이 허량이 구금되자, 군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헌병들 의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시 퇴각하였다. 오후 3시경 이일만( 李 一 萬 )이 동생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헌병들에게 항의하였다. 이때 옥천에서 출동한 헌병분대장이 독립만세를 80

73 총 설 제지하자, 군중들은 격분하여 다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000여명 군중들은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막대기 등으로 주재소를 파괴하며 헌병들을 구타하였다. 김수원( 金 壽 遠 ) 조기 시( 曺 奇 矢 ) 등이 헌병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주재소를 공격하여 육창주 허상기 김용이 허 량 등은 유치장을 탈출하였다. 탈출 인사와 허상구 공재익( 孔 在 翊 ) 등이 주도하여 계속 헌 병과 보조원들을 공격하고 유리창 벽 판자 울타리( 板 摒 ) 등 시설물들을 파손시켰다. 군중 들은 오후 5시 반경에도 헌병을 향해 나무 막대기나 돌을 던지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군 중들이 헌병 승마( 乘 馬 )를 참나무 몽둥이로 후려갈겼을 때, 헌병이 다시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헌병 10명을 부상시키고, 주재소 현관 정면의 벽 판자 울타 리 정문 보안등 등 시설물이 파괴되었다. 한편 육사원( 陸 士 源 )은 3월 27일 이원시장에서 독 립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이를 안 허간( 許 諫 )은 3월 28일 해질 무렵 허훈, 허유( 許 言 由 )와 육사 원을 찾아가 어찌하여 우리와 함께 만세를 부르지 않았는가?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고 따져 물었다. 육사원의 구차한 변병에 허간은 너 같은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 며 장작으로 그를 구타하여 졸도를 시켜고 37곳에 타박상을 입히는 응징을 하였다. 청산에서는 4월 2일 고한주( 高 漢 周 ) 등 9명이 오후 9시경 시장에서 약 1,200여명과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소재지를 활보하며 다음날 오전 1시경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군서에서는 4월 8일에 김순구( 金 舜 九 )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청주 강내 의 횃불만세운동을 타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김교윤( 金 敎 潤 )이 하동리 주민을 박내현( 朴 來 賢 ) 집 부근 우물가에 집합시켰다. 이들은 오후 8~9시경 우물가에 모인 주민 약 5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남쪽 서화산 마고촌 안산 위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9) 영동군 양산에서 3월 30일과 4월 3일에 이채연( 李 彩 然 ) 이헌주( 李 憲 周 ) 양봉식( 梁 鳳 植 ) 등 주 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 李 興 然 ) 이성주( 李 聖 周 )가 3월 29 일에 유곡리(갓골리) 큰 길가에 대한독립만세 를 새겨 목판을 세워 놓은 것이 일경에게 발견 되었다. 일경들은 이들을 학산 서산경찰주재소로 압송하였다. 저녁 때 약 300명이 주재소로 가서 구금 학생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석방되지 않자, 군중들은 투석을 하며 주재소를 공격하 81

7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였다. 이어 3월 30일에는 이채연 이헌주 등이 서산경찰주재소에 구금된 학생 구출을 위해 독립운동을 폈다. 이헌주 이관연( 李 觀 然 ) 이기주( 李 箕 周 ) 등은 영동과 무주간의 도로 공 사에 동원된 양산 면민들과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오후 2시경에 서산주 재소에서 이채연은 면민 200여명에게 손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이헌주 이관 연 이기주 등 10명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군중들이 주재소를 공격하여 이흥연 이성주 를 탈출시키고, 돌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실내에 들어가 전화기 등을 파손하였다. 이어 일경 들에게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4월 3일에는 양봉식( 梁 鳳 植 ) 등이 서 산리시장 면사무소 주재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2~3일 전부터 면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권유하여 4월 3일 오후 3시경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이 동하였다. 면장 여규원( 呂 圭 圓 )이 면사무소 앞에서 온 이유를 묻자, 양봉식 등이 면장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려고 왔다 고 대답하였다. 이에 면장이 2~3회 독립만세를 부르자, 면민들 은 일단 떠났다. 이어 오후 4~6시경 서산리시장에서 5~60명이 양봉식 이기영( 李 璣 榮 基 永 武 敬 ) 정해용( 鄭 海 容 元 日 ) 등 주도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7시경 군 중 일부가 다시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면장은 면서기 이철주( 李 喆 周 )와 사태 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3 4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서북방 쪽에서 면사무소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갔다. 이어 약 3~40분 후 사환이 아암리 방면에서 다수 군중이 만세를 위해 면사 무소를 습격하러 오고 있다 는 급보를 전하자, 면장 면서기는 급히 뒷편 버드나무 아래 흙 더미로 몸을 숨겼다. 오후 8시경 양봉식 이기영 전만표( 全 萬 杓 明 國 ) 이건양( 李 建 陽 ) 등 300여명이 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양봉식이 판문( 板 門 ) 행랑 아래에서 상묘( 桑 苗 ) 배부 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어 상묘를 처분하자 는 소리가 나왔고, 군중들도 공감하여 박수 를 쳤다. 면민들은 상묘 약 28,000본 전부를 뽑아 흩뜨리고 면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렸다. 양 봉식 전만표 등은 상묘를 이렇게 흩뜨려 놓으면 내일 다시 주워 모아서 마을 주민에게 배 부할 것이다, 상묘를 소각하지 않으면 면민들은 대금을 지불하게 되고 또는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게 되니 제일로 소각해 버리자 고 주장하였다. 김용하( 金 用 夏 ) 전재득( 全 在 得 金 在 得 ) 등도 주도적인 활동하였다. 군중들도 다시 함성을 내며 흩어져 있는 상묘를 면사무소 앞 도로로 가져다 약 27,000본을 소각하였다. 이어 양봉식 등은 주재소로 이동하여 오후 11시 경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82

75 총 설 매곡에서는 4월 2일부터 6일까지 매곡 황금(추풍령)면 일대에서 안준( 安 準 ) 신상희( 申 相 熙 ) 김용선( 金 容 善 ) 안광득( 安 光 得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준 신상 희 김용선 등은 4월 2일 노천 옥천리에서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전 11시경 밤나 무 양묘장 작업에 동원된 면민 약 100명이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과 직원에게 독립만세를 먼 저 부르게 하고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안준 신상희 김용선 등 8명은 4월 3일 4 일 면내를 순회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3일 밤에 약 100명이 노천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거류 일본인에게도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4일 오전 11시경 약 800명이 태극기를 앞 세우고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는 연일 계속되는 독립운동에 추풍령헌병분견소 헌병을 출동시켜 안광덕( 安 光 得 ) 임봉춘( 林 奉 春 燦 圭 ) 남도학( 南 道 學 ) 을 체포 압송하였다. 이에 면민 약 150명은 추풍령까지 헌병들을 뒤쫓았으나 구출하지 못했 다. 그러나 오후 11시 30분경 숙소에 불을 놓아 다음날 오전 0시 30분에 진화되었으나 숙소 는 전소시켰다. 이어 4월 6일에는 안준 신상희 김용선 등이 독립기 를 앞세우고 약 300명 과 구금 인사 구출을 위해 출발하였다. 이들은 오전 11시경 추풍령에 도착하여 구출을 시도 하였으나 헌병들의 강력한 제지를 받았고 주도 인사들도 체포되었다. 양산에서는 4월 3일 박중옥( 朴 中 玉 ) 김용문( 金 用 文 )이 오후 2시경 200여명과 면사무소 부근에서 조선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경찰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순사보 김영환( 金 令 煥 )을 구타하는 등 일제 세력을 응징하였다. 5. 충청남도 1) 대전군 인동에서는 3월 27일 4월 1일 김창규( 金 昌 奎 ) 김직원( 金 直 源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김창규는 김정철( 金 正 哲 )에게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 등 약 300매를 받아 보관하였다. 그는 3월 27일 김현태( 金 顯 泰 ) 집에서 김완수( 金 完 洙 ) 등 7명과 만나 독립만세를 합의하고 오후 3시경 인동시장으로 나아갔다. 김창규는 군중들에게 이때 유독 대전만이 빠지고 있음은 큰 치욕이 아니냐 고 연설을 하고, 김완수 등은 태극기를 배부 83

7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하고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 을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참여를 이끌었 다. 4월 1일에는 김직원 박종병( 朴 宗 秉 )이 조선이 독립된다 는 신념을 갖고 인동시장에서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은 약 400여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흔 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에 군중들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유성에서는 3월 16일 이권수( 李 權 秀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이 독 립되어 각처에서 만세를 부른다 는 말을 듣고 이상수( 李 祥 秀 )와 3월 16일 시장에서 독립만세 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들은 3월 15일 태극기 대형 1기와 소형 17기를 만들고 주민들에게 조 선이 독립하였다 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지족리에 게양하였다. 3월 16일 오후 1시 유성시장에 서 이정석( 李 貞 石 ) 등에게 대한민국은 독립을 하게 되니 독립만세를 외치자 며 호소하였 다. 이상수가 태극기를 주며 이권수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약 200여명이 합세하였다. 2) 천안군 입장에서는 3월 20일과 28일에 민국석( 閔 國 錫 ) 안시봉( 安 時 鳳 ) 박창신( 朴 昌 信 ) 등 주도 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민국석 한이순( 韓 二 順 ) 황금순( 黃 錦 順 )은 광명학교 학생 으로 3월 17일에 학생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고 학교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또한 안 시봉은 직산 금광 광부로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0일 오전 10시경 민국석 등 학 생 약 80명이 양대리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안시봉도 대형 태 극기를 흔들며 참여하였다. 이어 학생과 김병렬( 金 秉 烈 ) 김채준( 金 採 準 ) 조쌍동( 曺 雙 童 ) 등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입장시장으로 가서 6~700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한편 광 명학교 교사 강기형( 康 琦 衡 )도 학생과 주민들을 따라 시장으로 가서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 를 부르고 입장시장에서도 만세를 고창하였다. 박창신은 3월 25일 안은( 安 銀 ) 한근수( 韓 根 守 ) 등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박창신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다음 날 교대시간에 독립만세를 권유하여 갱부들과 입장시장에 가기로 하였다. 3월 28일 아침 6 시 30분경 광구에 도착하여 교대 광부들에게 권유하여 광부들이 광구 앞에서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고 입장시장으로 갔다. 약 200여명은 양대리 헌병주재소 헌병과 천안 철도원호대 보 병을 만나 제지를 받았다. 군경들의 체포에 군중들은 7시 반경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군 중들은 헌병과 무기 탈취 및 격투를 벌이고, 전화선 등 기물을 파손하였다. 84

77 총 설 천안에서는 3월 29일에 이문현( 李 文 鉉 ) 허병( 許 炳 )이 오후 2시경 시장 군중 속에서 두 손 을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인시봉( 印 時 鳳 )도 만세를 권유하며 시장을 활보하였다. 최 오득( 崔 五 得 )은 3~40명에게 대한국독립만세 를 부르자, 군중들도 만세를 외쳤다. 병천에서는 3 1운동사에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 4월 1일 유관순( 柳 寬 順 ) 등 주도로 전 개되었다. 이 독립운동은 홍일선( 洪 鎰 善 ) 김교선( 金 敎 善 ) 인사들과 조인원( 趙 仁 元 ) 유관 순 인사들이 각자 준비하여 아우내장터에서 있었다. 홍일선 김교선은 병천 장날 독립만세 를 합의하고, 3월 29일 한동규( 韓 東 圭 ) 이순구( 李 旬 求 ) 이백하( 李 栢 夏 )에게 권유하였다. 한편 조인원 등은 유관순이 3월 13일 귀향하며 준비하였다. 유관순이 부친 유중권( 柳 重 權 ) 숙부 유중무( 柳 重 武 ) 조인원 등에게 서울 3 1운동을 설명하여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결정하였다. 또 시장의 천안쪽은 조병호( 趙 炳 鎬 ), 수신면은 조만형( 趙 萬 衡 ), 충북 진 천은 박봉래( 朴 鳳 來 )가 맡아 권유하고,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 자정 병 천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진천 고개마루에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 홍 일선 김교선 등이 시장 입구에서 장터로 오는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고, 귀가하는 주민들에게는 되돌아가 참여하도록 하였다. 오후 1시경 대한독립 의 큰 깃발을 세우고 태극 기를 들고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를 선창하였다. 유중 권 유중무 조병호 등도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자,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때 홍일선 김교선 등이 가세하고, 백정운( 白 正 云 )은 김상훈( 金 相 勳 )이 준 태극기 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5~600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시장에서 약 50보 정도 떨어진 헌병주재소 소산( 小 山 )소장 등 5명은 만 세 소리를 듣고 출동하였다. 헌병의 강력한 해산 요구에 군중들은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불응하였다. 이에 헌병들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헌병이 조준할 때, 유관순은 충 돌을 방지하고 군중을 보호하려고 헌병에게 달려들었다. 헌병의 발포로 군중들이 흩어지자, 헌병들은 사격을 일시 중단하였다. 이어 부상자 응급조치를 한 약 40여명은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격렬히 항의하였다. 김교선 한동규 등이 시장에서 약 100여명을 이끌 고 주재소로 갔다. 김교선은 사무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한동 규는 보조원에게 태극기를 다시 빼앗아 흔들며 이백하와 앞장서 소장에게 사망자 조치를 요 구하며 우리도 함께 죽여 달라 고 윽박질렀다. 이어 이백하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고, 이 85

7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순구는 쇠스랑으로 유치장 벽을 부수고, 김상철( 金 相 喆 )도 유치장 벽을 수차 걷어찼다. 유중 권이 총검에 찔려 빈사 상태에 빠지자,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 다. 이후 군중이 주재소로 계속 이동하여 약 3,000여명에 이르렀다. 헌병 5명은 유리창이 깨 지는 등 주재소가 파괴되자, 사무실 입구 왼쪽에서 병렬로 집합하여 경계를 하였다. 군중들 은 헌병들의 탄약함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 고 외치며 소장을 끌어내려고 할 때 권총 몇 발이 발사되었다. 헌병의 두번째 총격에 일부는 피신하고, 일부는 주재소의 다른 쪽으로 이동하였다. 군중이 일시 피신하자, 헌병들은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 밖으로 내던졌다. 이에 격노한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헌병 목을 졸라매려 하고, 형의 시신을 사무실로 옮기 려고 하였다. 보조원 맹성호( 孟 星 鎬 )가 제지하자, 유중무는 너는 보조원을 몇 십년 하겠느 냐? 며 윽박질렀다. 유관순은 시장에서 주재소로 가서야 부친의 죽음을 알고 제 나라를 되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 軍 器 )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며 주재소 장을 잡고 항의하였다. 김용이( 金 用 伊 )는 헌병에게 투석하고 총기를 빼앗으려고 하고, 보조 원 정수영( 鄭 壽 永 )에게 조선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며 호통 을 쳤다. 정수영이 부상자에게 더운 물을 주라 며 주전자를 주자, 이 따위 물을 마실 수 있 느냐? 며 정수영 가슴에 던졌다. 조인원은 좌흉부를 맞고 총검에 왼팔이 찔렸으나 순국자 시 신을 사무실 안으로 운구하고 상의를 벗고 주재소장과 헌병 총을 낚아채려고 하였다. 조병호 도 상등병 진상부( 溱 相 部 )를 구타하였다. 일제는 천안 철도엄호대장 갑( 甲 )대위 이하 6명을 자동차로 급파하여 오후 4시경 병천에 도착하였다. 헌병과 보병들이 실탄 14발을 발사하여 군중들을 제압하였으나 일부는 시장 주변에서, 일부는 주재소를 공격할 태세로 동태를 주시 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19명이 순국하고 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4명이 체포당하였다. 3) 공주군 신상(유구)에서는 3월 14일에 황병주( 黃 秉 周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매 일신보 를 통해 손병희( 孫 秉 熙 )가 체포된 사실을 알고 독립만세를 결심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경 장날 시장에서 30여명에게 모자를 벗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군중들 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우( 牛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고산전우위문( 高 山 傳 右 衛 門 )순 사 일행이 수차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군중들은 오히려 약 500여명으로 늘었다. 고산순사는 86

79 총 설 순사보 박용진( 朴 龍 珍 )에게 황병주를 연행하게 하였다. 이에 이승현( 李 升 鉉 聖 鉉 )은 약 100 여명에게 어찌하여 너희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황병주를 구출하려 주재소로 가자 고 독려하였다. 한편 황연성( 黃 璉 性 )은 하재옥 집 앞에서 박준빈( 朴 準 斌 ) 등과 독립만세를 부 르고 있었다. 정희준( 鄭 熙 準 )은 군중에게 너희도 조선인이 아닌가?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만세를 부르자! 며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승현 황연성이 군중을 이끌고 주재 소로 갔다. 황연성 박준빈은 고산순사에게 어째서 황병주를 석방치 않는가? 즉시 석방하 라! 며 가슴을 내려쳤다. 현우석( 玄 宇 錫 )은 문 문등을 부수고, 이정춘( 李 正 春 )은 창문 유 리창을 파괴하고, 김상규( 金 相 圭 相 敎 )도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공주에서는 3월 17일과 4월 1일에 김희봉( 金 喜 鳳 ) 김수철( 金 洙 喆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황병주 등 20여명이 공주경찰서로 압송되자, 김희봉은 황병주를 이어 독 립만세를 결심하였다. 그는 3월 17일 오후 5시 공주시장에서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 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이에 약 1,000여명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한편 박장래( 朴 璋 來 )는 2월 28일 상경하여 3월 8일까지 서울 3 1운동을 목격하고 조선독립가 를 배워 공 주로 내려왔다. 그는 3월 10일에 김수철( 金 洙 喆 ) 방에서 안기수( 安 期 壽 ) 신의득( 申 義 得 )에 게 독립운동 상황을 말하고 공주 학생들은 무슨 까닭에 독립시위운동을 하지 있지 않느냐? 묻자, 공주에는 영명학교 생도 10여명뿐이라 시위운동을 할 수 없다 고 답하였다. 박장래 는 공주에는 농업학교도 있고 보통학교도 있지 않느냐? 고 반문하며 경성에서는 여학생 까지 나서서 독립시위를 하는 판에 공주에서는 남자다운 의기와 용기가 없는 자들이 많다 며 독려하고, 독립가를 주어 안기수는 그림 엽서에, 신의득은 시계 수리 보관증에 기록하였 다. 이어 현석칠 안창호( 安 昌 鎬 ) 김사현( 金 士 賢 ) 등은 3월 24일 오후 9시경 영명학교 교실 에서 회합하였다. 오익표( 吳 翼 杓 )가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하므로 공주에서도 하자고 설득하 자, 참석자들은 동의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현석칠은 전체 지휘, 김관회( 金 寬 會 )는 독립선 언서 인쇄 반포와 영명학교 보통학교 남학생, 현언동( 玄 彦 東 )은 공주농업학교 학생, 이규 상( 李 圭 尙 )은 영명여학교 보통여학교 학생, 오익표는 외부 지방민, 안성호( 安 聖 鎬 )는 지방 민 참가를 권유하고, 4월 1일 오후 공주시장에서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김관회는 3월 25 일 김수철을 만나 영명학교 학생의 참가 동의를 얻은 후 독립선언서 1,000매 인쇄를 의뢰하 며 10원을 지급하였다. 김수철은 귀향 중인 유준석( 柳 俊 錫 ) 노명우( 盧 明 愚 ) 강연( 姜 沇 ) 87

8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윤봉균( 尹 鳳 均 ) 등에게 통보하고, 29일에는 졸업생 이규남에게 태극기 제작을 의뢰하고, 30 일에는 자택에서 통보 학생들에게 김관회의 뜻을 전하여 동의를 얻고, 양재순( 梁 載 淳 )에게 도 찬동을 얻었다. 그리고 31일에는 오후 3시경 통보 학생 등과 기숙사에 모였다. 이들은 윤 봉균이 국장 때 구해 온 독립선언서로 신성우( 申 誠 雨 )가 등사하고, 유준석이 절반을 접어 1,000매를 만들었다. 이규상은 박루이사( 朴 婁 以 士 )에게 공립보통여학교 학생의 참여 승낙을 얻었다. 박루이사는 3월 27~28일경 영명여학교 여교사 이원용( 李 元 鎔 )을 만나 여학생과 그 가족의 참여 권유하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현언동도 3월 30일 농업학교 교사 이성구( 李 晟 求 ) 집에서 학생 참여를 권유했으나 거부당하였다. 4월 1일에 김수철 노명우 윤봉균은 이규남 에게 태극기 1개씩을 받아 휴대하고, 노명우 유준석 강연 양재순은 독립선언서 100매씩 을 가지고 시장으로 나가 오후 2시 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를 외쳤다. 김현경( 金 賢 敬 )도 이 규남에게 태극기를 받아 영명여학교 학생과 시장에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군중 들은 오후 6시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안에서도 같은 날 이기한( 李 綺 漢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기한 이병억 ( 李 秉 億 )은 석송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호소하였다. 이기한이 모두 나를 따르라 며 선두에 서자, 이동안( 李 東 案 東 葉 ) 등 2~30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광정리로 향하고, 조금 후 조정관( 趙 正 觀 )도 태극기를 들고 따랐다. 내송리에서 12시경 모범림 식수 작업을 마친 운궁 리 최범성( 崔 範 聲 ) 윤원식( 尹 元 植 ) 등이 합세하였다. 광정리에서 군중들 가운데 3~4명이 먼저 쇠스랑 곡괭이 삽 등으로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기한도 주재소를 파괴하자!, 왜 구경만 하느냐? 빨리 부수라! 며 태극기 깃대로 문등을 깨뜨렸다. 윤원석 이월성( 李 月 星 ) 등은 게시판 유리창 등 시설물과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3시에 상황을 접수한 공주경찰 서는 순사 목원신차랑( 木 原 新 次 郞 ) 황산일이( 黃 山 逸 二 ) 순사보 이근남( 李 近 南 ) 헌병군조 중성미길( 中 聖 美 吉 ) 이하 병졸 5명을 광정리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오후 4시 40분경 석송리 주막 김원일( 金 元 日 ) 집에 이르렀다. 이때 석송리로 돌아와 휴식하던 14~5명이 자동차를 막 고 손을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부근 주민이 호응하여 4~50명으로 늘어났다. 하차한 목원순사가 이동안의 왼손을 결박하고 오른손마저 잡으려 할 때, 노규현( 盧 奎 鉉 ) 장기현( 張 基 鉉 ) 등은 그가 무슨 죄가 있어 잡아 가려는가? 며 순사를 떠밀고, 김정쇠( 金 正 釗 ) 문백룡( 文 白 龍 )은 순사 어깨를 밀쳐 포박을 저지하여 이동안은 풀려났다. 군경의 대열 88

81 총 설 이 흐트러지자, 군중들은 격투를 벌렸다. 이어 군경들이 서광순( 徐 匡 淳 ) 정재철( 鄭 在 喆 )을 체포하자, 군중들은 다시 구출을 시도하였다. 김정쇠 전정길( 全 鼎 吉 )은 목원순사에게 덤벼 체포를 방해하고, 문백룡 장기현 등은 순사를 물어 뜯었다. 이동안은 이근남에게 너는 이 근남이 아니냐? 너도 조선사람인데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며 주먹으로 구타하고, 중성 헌병군조 칼을 탈취하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이에 중성군조 등이 발포하여 이상림( 李 相 霖 )이 순국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당하였다. 4) 연기군 전의에서는 3월 13일에 이수욱( 李 秀 旭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2월 26 일 상경하여 서울 3 1운동을 목격하고 3월 6일 신정리로 귀가하였다. 바로 추경춘( 秋 敬 春 ) 과 협의하고, 다음날 밤 박성교( 朴 聖 敎 ) 집에서 추득천( 秋 得 天 ) 윤자벽( 尹 滋 璧 ) 등과 3월 13 일 읍내 장날 독립만세를 합의하였다. 3월 8일에는 김병옥( 金 炳 玉 ) 집에서 정원필( 鄭 元 弼 ) 등과 결의하고 태극기 약 150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3월 13일 오전 9시경 갈정리고개에서 시장가는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와 타인에게 참가 권유를 부탁하였다. 또 태극기를 주며 품속 에 숨겨다가 연설을 할 때 일제히 꺼내 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하자고 당부하였다. 12시 40분경 시장에서 이수욱이 약 150여명에게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주창하였다. 사전에 약속한 추경춘 윤상원( 尹 相 元 ) 등과 시장에서 참여한 이수양( 李 秀 陽 ) 등은 윤자벽 윤자명( 尹 滋 明 )에게 받은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이수욱을 선두로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활보하였다. 조치원읍에서는 연기청년회의 활동 속에 3월 30일에 홍일섭( 洪 日 燮 ) 주도로 독립만세운 동을 전개하였다. 연기청년회 김재형( 金 在 衡 ) 등은 고종 국장 참례 때 서울 3 1운동을 목격 하고 귀향하여 독립만세를 준비하던 중 3월 23일부터 연기와 청주의 횃불만세운동에 힘입 어 홍일섭을 추대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3월 30일 아침에 시장 길목에 서 지역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탁하였다. 오후 2시 홍일섭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합창하였다. 연기청년회원들은 시장을 다니며 독립만 세를 유도하였다. 한편 김재형은 3월 1일 경성기독교회관 앞에서 박동완( 朴 東 完 )에게 경고문 500매를 받아 귀향하여 숨겨두었다. 그는 3월 25일에 김재석( 金 在 錫 )에게 약 350매를 교부 89

8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하여 청주 문의 이원면과 보은읍 등지에 배포하게 하였다.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봉투에 넣어 청주 강내면 조동식 등에게 보냈다. 남면 동면 전동 서면에서는 3월 하순에 중부지방의 대표적 독립만세운동의 한 형태인 횃불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남면에서는 3월 23일부터 시작하여 3월 31일 과 4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31일에 임헌상( 林 憲 祥 )이 오후 8시경 방축리 주민 약 30명과 황우산에서, 박원칠( 朴 元 七 )이 같은 시간에 보통리 주민 약 10명과 마을 뒷산에 서, 김봉식( 金 鳳 植 ) 등 4명은 이덕민( 李 德 敏 ) 집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임덕화( 林 德 化 )를 앞 세워 양화리 주민 100여명과 아울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1일에는 임희 수( 林 喜 洙 ) 등 3명이 오후 9시경 송담리 주민 약 30명과 서운산에서, 유시풍( 柳 時 豊 )이 야간 에 갈운리 주민 약 150명과 황우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면( 東 面 )에서는 3월 28일 연기 군수가 면사무소에서 회유 연설을 하는데, 장홍진( 張 弘 鎭 ) 장기민( 張 基 民 ) 등이 한국 민족으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며 반박하였다. 이어 귀가하여 송룡리 주민 10명과 마을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전동에서는 3월 29일 권혁기 ( 權 赫 基 )가 청송리 주민 약 20명이 내동산에서, 서면에서는 3월 30일 유진광( 兪 鎭 廣 )이 다른 마을에 호응하여 기룡리 주민과 뒷산에서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금남에서는 4월 2일에 임헌규( 林 憲 奎 ) 등이 대평리시장 장날 수백 명의 군중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행진을 하였다. 5) 아산군 신창에서는 4월 2일에 이덕균( 李 德 均 ) 박진화( 朴 秦 和 )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덕균 등 주도인사 15명은 오후 8시경 읍내 주민 약 200명과 학성산에 올라 횃불 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덕균이 관청을 쳐부수자고 제안하고 박진화와 함께 군중들 을 이끌고 하산하였다. 먼저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정윤홍 등이 투석하여 문 2개를 파괴하고, 헌병주재소에서 문등 유리에 투석하여 깨뜨리고, 신창 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하였다. 교장 종방교( 宗 方 喬 )의 제지로 시비가 벌어져 박진화가 투석을 시작으로 유리창 272 장 문 4개를 파괴하였다. 특히 강달성( 姜 達 成 雲 敎 )은 학성산에서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 소 헌병주재소 보통학교에서 투석 공격을 주도하였다. 90

83 총 설 선장에서는 4월 4일 정수길( 鄭 壽 吉 ) 등 4명이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군덕리시장에서 약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경 막대기를 휘두르며 헌병주재소 건물 창문을 파 괴하였다. 특히 김천봉( 金 千 鳳 )이 선두에서 주도하였다. 6) 홍성군 광천에서는 3월 8일과 18일에 이명종( 李 鳴 鍾 ) 주도로 유인물을 통한 독립 의식의 고취가 있었다. 그는 3월 6일에 박원식( 朴 源 植 ) 집에서 박세화( 朴 世 和 )에게 서울 3 1운동 상황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보고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3월 8일 선언서를 참고로 그 내용 을 양지 2장에 적어 시장과 옹암리 2개소 벽에 부착하였다. 일경들이 제거하자, 이들은 선언 서를 등사하여 가정에 배부하고 광천시장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후 최응모 ( 崔 應 模 ) 오인섭( 吳 仁 燮 ) 성배호( 成 培 鎬 ) 등이 참여하였다. 3월 16일 박원식이 스승 서승 태( 徐 承 台 )에게 선언서를 보이고 편의하고 간략한 내용으로 작성을 부탁하였다. 이틀 후 서 승태는 박원식 오인섭에게 문구를 가제( 加 除 )하여 필기하게 하였다. 이어 박원식 이명종 등 오인섭 집에서 박원식이 필기한 원고를 참고로 각자 복사지로 약 510매를 만들어 밤에 이 명종 성배호 오인섭 등이 광천 옹암리에 배포하였다. 금마에서는 4월 1일에 민영갑( 閔 永 甲 )이 이재만( 李 載 萬 )과 가산리 연극 공연장인 이원교 ( 李 元 交 ) 집에 모이는 군중과 독립만세를 부르기를 하고, 이어 최중삼( 崔 仲 三 八 龍 ) 등이 참 여하였다. 조한원( 趙 漢 元 )은 오후 8시경 연극 공연 중에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관중 수십 명 이 독립만세를 따라서 고창하였다. 장곡에서는 4월 4일과 7일에 윤형중( 尹 衡 重 ) 형제 김동하( 金 東 河 東 化 ) 주도로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윤낙중( 尹 樂 重 己 順 )은 경신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만세를 부르고, 윤익중( 尹 益 重 世 重 )은 독립선언서 100여매를 가지고 함께 3월 20일에 귀향하였다. 이들 은 윤의석( 尹 宜 錫 )과 독립만세를 준비하고, 4월 4일에 윤만수( 尹 萬 洙 ) 최기석( 崔 奇 石 ) 등 화계 광성 신풍리 주민 100여명과 매봉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어 4월 7일에는 김동하( 金 東 河 東 化 )가 김동완( 金 東 完 ) 등 화계리 주민들과 앞산에 모여 독 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오후 8시 광성 가송리 등 주민 300여명과 면사무소 뒷산 응봉산에 올라 한상철( 韓 相 喆 )의 일제 만행 규탄 연설과 독립선언문 취지 설 91

8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명을 들은 후 북을 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면사무소에서 이문재( 李 文 載 ) 등 군 중들은 돌 곤봉 등으로 시설물 각종 기물 문서들을 파손하였다. 구항에서는 4월 7일에 이길성( 李 吉 性 )이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만들고 독립만세를 결심하 였다. 그는 황문수( 黃 文 秀 ) 등 8명과 월산 남쪽에 올라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세우고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의 총격으로 일단 하산하였다가 이길성 황문수 이유홍 등 은 다시 월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7) 청양군 정산에서는 4월 5일에 홍범섭( 洪 梵 燮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독립만세 운동이 확산될 때 상경하여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백곡리로 귀가하였다. 그는 임 의재( 任 毅 宰 ) 등 4명과 선언서를 읽고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4월 5일 정산 장날 오후 3시경 군중에게 태극기를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100여명과 시장 일 대를 활보하였다. 이날 권흥규( 權 興 圭 )가 순국하여 이튿날까지 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화성에서는 4월 5~6일과 8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불렀고 독립만세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응 징하였다. 박공삼( 朴 公 三 ) 조남희( 趙 南 熙 )는 4월 8일에 산정리 주민 20여명과 정자동에서 태극기 2기를 세우고 큰 종을 울리며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이튿날에도 오전 10 시 면사무소 공사장 인부 20여명에게 조선은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증축 공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며 공사장을 파괴하였다. 강학남( 姜 學 南 )은 4월 8일 오후 10시경 구장 이병규 ( 李 炳 圭 )에게 화성면 농암 산정리에서는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열렬하게 대한독립만세 를 고창하고 있는데, 왜 우리 마을에서는 독립운동을 안 하는가? 나와 너하고 대한독립만세 를 주창하자 고 권유하였다. 김학성( 金 學 成 )이 너 혼자 불러라 하고, 이병규도 그런 짓 하 지 말라 고 하였다. 이에 강학남은 양인을 구타하고 옷을 찢었다. 비봉에서는 4월 8일 밤에 유남식( 劉 南 植 )이 유천식( 兪 天 植 )과 강정리 주민 수십 명과 뒷산 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튿날에는 김현규( 金 顯 奎 )가 이상유( 李 象 裕 ) 집에 주민을 모아 수명과 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같은 날 장평에서 김사길( 金 士 吉 )이 오후 8시경 낙지리 동남쪽 약 400m지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박용만( 朴 容 萬 ) 등에게 만세를 권유하였다. 92

85 총 설 8) 논산군 논산에 독립선언서는 민영순( 閔 泳 淳 )이 3월 2일 오후 6시경 독립선언서 약 40매 2묶음을 논산교구실에서 김태호( 金 泰 昊 ) 등에게 전달하여 도착하였다. 이는 충남지방에 도착한 최초 의 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3월 2일 부여와 3월 3일 논산 읍내에 배부 및 배포되었다. 강경읍에서는 3월 10일 20일 27일 엄창섭( 嚴 昌 燮 ) 송재기( 宋 在 紀 ) 문상희( 文 商 羲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엄창섭은 3월 5일 군산영명학교 강금옥( 姜 金 玉 )에게 독 립운동을 권유받고 3월 6 7일경 부여 세도 창영학교에서 고상준( 高 相 俊 ) 추병갑( 秋 炳 甲 )과 강경읍 장날 군민 군중 청년들에게 태극기를 주며 독립운동을 하기로 협의하였다. 그는 3 월 8일 강경읍에서 용지 60매 염분 30전 어치를 구입하여 학교에서 고상준 추병갑과 태극 기를 제작하였다. 이어 김종갑( 金 鍾 甲 ) 추성배( 秋 聖 培 )도 불러 10일 아침까지 태극기 200기 를 만들었다. 서삼종( 徐 三 鍾 )은 엄창섭의 부탁으로 태극기를 가마니에 넣어 강경 옥녀봉으로 운반하였다. 엄창섭 등은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호소하여 정기섭( 鄭 沂 燮 ) 한규섭( 韓 圭 燮 ) 등 의 찬성을 얻었다. 이들은 오후 3시경 옥녀봉에서 엄창섭 등이 배부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함께 조선독립만세 를 연호하였다. 이어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 웃시장으로 내려 와 만세를 권유하여 군중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한국독립만세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거주지 본정통을 경유하여 시장과 읍내 각처를 행진하였다. 3월 20일에는 송 재기 이근석( 李 根 奭 ) 이봉세( 李 鳳 世 ) 이근국( 李 根 國 ) 등이 태극기 360기를 휴대하고 옥녀 봉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은 웃시장으로 내려와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서정 방향으로 행진을 하였다. 그리고 문상희는 3월 26~27일 일본인이 조 선인을 대우함에 있어 비리무도( 非 理 無 道 )하니 차제에 조선을 독립시키는 운동을 일으키자 라는 경고문 약 100매와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위하여 상가를 폐쇄토록 하자 라는 철전문제 ( 撤 廛 問 題 ) 수십 통을 만들었다. 그는 3월 27일 밤 읍내 각 집에 배포하고, 이성삼( 李 成 三 ) 집 에서 성석진( 成 錫 鎭 )에게 경고문 약 10여통을 주어 북정에 배포를 부탁하였다. 두마에서는 4월 1일 오후 6시경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배영직( 裵 榮 直 )은 체포 하려는 고야( 高 野 )순사를 손과 주먹으로 때리고, 이어 금자( 金 子 )순사의 머리와 음낭을 가격 하고, 군중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수창자가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주창하는데 일동도 화( 和 ) 하여 만세를 고창하라 외쳤다. 93

8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9) 부여군 부여에 독립선언서는 논산의 김태호가 3월 2일 오후 9시경 부여교구실에 전달하여 도착하 였다. 그는 김종석( 金 鍾 錫 ) 등에게 선언서 배포를 설명하고, 김종석 황우열( 黃 宇 烈 ) 등 3명 에게 건넸다. 이들은 협의를 거쳐 조원상( 趙 元 祥 ) 김덕빈( 金 德 彬 ) 등과 규암 임천 은산 석성면 및 읍내 각처에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임천에서는 3월 6일 아침 박용화( 朴 容 和 )가 집 에서 박성요( 朴 性 堯 ) 등 7명과 협의한 후 오전 7시경 읍내에 가서 군중들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교리 면사무소 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박용화 최용철 등 천도 교도 10여명은 헌병대 임천출장소로 가서 독립 승인을 요구하였다. 이는 3 1운동 때 일제기 관에 독립 승인을 요구한 최초의 사례이다. 10) 서천군 화양에서는 3월 초순에 조남명( 趙 南 明 )이 화양 기산면을 순회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준비 하였다. 그는 3월 4일 유재경( 劉 載 璟 )에게 독립선언서를 구해 보고, 3월 6일에 구동리 이근 호( 李 根 浩 ) 집에서 이근호 한백희( 韓 伯 凞 ) 최경진( 崔 敬 鎭 )에게 선언서를 보이고 학생들 은 국사( 國 事 )를 위하여 지금 군산경찰서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자 고 하고, 3월 7일에는 이경욱( 李 敬 旭 ) 집에서 이경욱 정희석( 鄭 凞 錫 )에게 독립만세를 제의하였다. 또한 3월 8일에 서천으로 압송 도중에도 서천면 섬산리의 시장 군중들에게 독 립만세를 외쳤다. 마장에서는 3월 29일에 송기면( 宋 箕 勉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3월 23~27일에 태극기 200기를 제작하고, 3월 28일에 유성렬( 劉 性 烈 ) 이근호( 李 根 浩 ) 임학 규( 林 學 圭 )를 만나 내일 장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3월 29일 오후 1시경 신장리시장에서 송기면 유성열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송여직( 宋 汝 直 ) 등이 독립 연설을 하고, 군중들은 독 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이한규( 李 翰 圭 ) 등 순사보는 송기면 유성열을 구인하고 송여직 등도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근호 나상준( 羅 相 俊 )이 군중과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출장소로 이동하였다. 일경들이 이들도 구인하자, 2,000여명 군중들은 구금 인사 탈출을 위 해 출장소를 공격하였다. 고시상( 高 時 相 ) 양재흥( 梁 在 興 ) 등이 선두에서 창문 유리창을 부 수고, 이승달( 李 承 達 )이 구금 인사 탈출까지 해산하지 말도록 독려하고, 정일창( 鄭 日 彰 )도 94

87 총 설 파괴를 주도하여 송기면 등 6명이 탈출하였다. 노형래( 盧 亨 來 ) 등은 태극기 제작 운반 및 출장소 파괴에 적극 가담하였다. 11) 예산군 고덕에서는 4월 3일에 장문환( 張 文 煥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은 대천 (한천)시장 장날로 약 1,000여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경이 7명을 연행하며 발포하 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장문환( 張 文 煥 )은 약 14~5명을 이끌고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 앞으로 운구하고 사무실에 들어가 헌병오장 지촌송태랑( 志 村 松 太 郞 )에게 왜 백성을 죽였는 가? 이를 소생시키지 못하면 우리들도 모두 죽여라 며 항의하고 지촌오장의 가슴을 구타하 였다. 같은 날 신양에서는 성원수( 成 元 修 允 京 )가 오후 8시 연리 주민 수십 명과 뒷산에 올 라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5월 8일에 헌병보조원 박동진( 朴 東 鎭 )이 체포하러 왔 다. 그가 집을 탈출하자, 박동진이 따라와 상의를 잡아서 격투가 벌어졌다. 그는 박동진을 논에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안면과 복부에 상처를 입혔다. 예산에서는 4월 4일에 박대영( 朴 大 永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4월 4일 오후 2시경 시장에서 2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박대영 최문오( 崔 文 吾 ) 가 약 50여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불렀고, 2,000여명 군중이 헌병분대로 만세 행진을 하였 다. 헌병 상등병 증목추수( 曾 木 秋 秀 )는 수차 해산을 종용하다가 박대영을 체포하자, 최문오 가 헌병에게 두 주먹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박대영도 헌병의 곤봉 양끝을 잡고 몸에 깎지 를 끼고 바싹조여 꼼작 못하게 하였다. 결국 헌병은 주먹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대흥에서는 4월 4일에 정인하( 鄭 寅 夏 )가 대율리 주민 수십 명과 마을 동쪽 산에서, 대술에서 는 4월 5일에 민제식( 閔 濟 植 )이 산정리 주민 30여명과 마을 산에서 횃불독립만세를 불렀다. 12) 당진군 당진에서는 4월 4일에 대호지면과 전의면에 걸쳐 송재만( 宋 在 萬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송재만 이인정( 李 寅 正 ) 남성우( 南 成 祐 ) 등은 사전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4 월 4일 장날에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대호지시장에서 한운석( 韓 雲 石 ) 등이 애국가 수백 매 를 군중에 배부하고, 송재만 이인정 남계원( 南 桂 元 ) 등의 독립만세 선창으로 약 400명의 95

8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군중이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행진하고 이어 면사무소에서 계속 만세를 불렀다. 800여명이 천의로 이동하여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일경들과 치열한 격투를 벌렸고, 이어 1,000여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3) 서산군 읍내에서는 3월 24일에 김관용( 金 寬 龍 )이 오후 7시경 이계성( 李 啓 聖 )에게 권유받고 해미 보통학교 졸업생 고별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오늘 밤 고별연회가 끝난 후에 모두 면사무소 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자 고 졸업생 이봉이( 李 鳳 伊 ) 등 3명과 재학생 장 기남( 張 基 南 ) 등 3명에게 제안하였다. 이들은 밤 11시경 유세근( 柳 世 根 ) 김연원( 金 然 源 ) 등 수십 명과 함께 면사무소와 읍내 우( 牛 )시장에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운산에서는 4월 5일 에 오인탁( 吳 仁 鐸 )이 오후 7시경 고산리에서 한오복( 韓 五 福 ) 등 수명과 뒷산에서, 이봉하( 李 奉 夏 ) 등 3명이 황군성( 黃 君 成 ) 등 용현리 주민 50여 명과 보현산에서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연에서는 4월 8일에 김옥제( 金 玉 濟 )가 밤에 이종옥( 李 鍾 玉 ) 집에서 남명숙( 南 明 淑 ) 등 수명에게 권유하여 갈현리 성왕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음암에서도 같은 날 채돈문( 蔡 敦 默 致 雲 )이 오후 10시경 이성삼( 李 聖 三 ) 등 율목리 주민 약 15명과 토성산에서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4) 보령군 보령에서는 3월 10일경부터 4월 10경까지 1개월간에 걸쳐 김사구( 金 思 九 ) 강영국( 姜 永 國 )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준비 활동이 있었다. 김사구는 3월 10일경 강영국에게 군내에 독 립운동이 없는 것은 고을의 수치라 말하고 동의를 얻고, 꽃놀이를 구실로 동지를 얻고자 노 력하였다. 그는 3월 17일에 김재두( 金 在 斗 ) 한기석( 韓 基 錫 ) 이병철( 李 秉 喆 ), 25일에 박재 건( 朴 齊 乾 ), 27일에 임경진( 林 庚 鎭 ), 30일에 고광춘( 高 光 春 )을 방문하여 꽃놀이 잔치 참석을 권유하고 수첩에 서명 날인까지 받았다. 4월 10일에 신태중( 申 泰 重 ) 집에 김사구 강영국 이병철 고광춘 박제건 임경진 6명이 모여 식사 후 김사구 강영국은 보령 군내에서는 이러한 운동에 착수하는 자가 없으니 우리가 주모자가 되어 궐기하자. 우선 보령리 진두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쳐 독립운동을 일으킨 다음에 청죽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96

89 총 설 면직원들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자 고 말하였다. 그러나 박제건 고광춘 등이 자리에서 일 어나고 이어 강영국도 계획 중지를 요구하여 1개월 동안 진행되어 온 독립만세운동은 실행 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97

9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Ⅳ. 판결문을 통해 본 3 1운동 상해에서 발간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와 김병조( 金 秉 祚 )의 한국독립운동사략 이 3 1운동 관한 우리의 최초 기록들이다. 이들 저술은 해외에서 출판된 만큼 3 1운동의 실상을 파악하여 기록함에는 일정한 한계점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3 1운동 직후에 우리 측이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 측의 3 1운동에 관한 기록은 조 선총독부와 조선주차군사령부 및 조선헌병대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군( 軍 ) 관계 보고 자료는 긴박한 전개된 3 1운동 상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지만 구체적 실상이 기록 되어 있지 않아 3 1운동 전개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판결문은 일제 경찰과 헌병들의 잔혹한 조사를 거쳐 검사의 기소를 통하여 정식 공판이 열 리고 비록 조선총독부 소속이지만 재판관의 판결을 기록한 문서이다. 당시 재판소는 지방법 원지청,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이 있어 피고의 공소 제기로 고등법원까지 3심을 거칠 수가 있었다. 확정 판결일은 대부분은 판결일 다음날로 기재가 되어 있다. 이는 독립운동가 들이 판결 후 1일 내외에 공소 포기와 제기 의사를 표시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궐석 판결 일 경우는 판결이 송달을 받거나 또는 판결 집행으로 형이 언도되었음을 안 날로부터 3일내 에 고장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남은 판결문들은 재판소 소속의 서기들이 판결문을 쓰고 재판관들이 자신의 성명을 기록한 형태로 있다. 예외적으로 판결문 중에는 사 본을 작성한 일자와 서기의 성명이 기재된 것도 있다. 판결문은 뒤에 제시된 원본과 같이 판결( 判 決 ), 주문( 主 文 ), 이유( 理 由 ) 크게 3부분으로 구 성되어 있다. 판결은 피고인의 인적 사항과 범죄 혐의 및 재판 관여 검사를 기록하고, 주문 은 피고인의 형량과 압수품 처리를 명시하고, 이유는 피고인의 구체적 활동과 범죄에 대한 법률 검토를 기록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로 끝을 맺고, 마지막에 판결 일자와 재판소 소 속 및 판사와 서기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판결문을 통하여 3 1운동을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인적 사항을 통하여 3 1운동을 전개한 인사를 파악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의 본적, 주소, 직업, 성명(이명), 연령(생년월일) 등이 기재되어 있어 우선 어떤 인사가 독립운동을 98

91 총 설 하였는가를 파악할 수 있고, 직업과 연령을 파악하여 독립운동 참여자의 직업과 계층 및 연 령층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있다. 둘째, 독립운동가에 적용된 범죄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대부분이 보안법 위반 사 건이지만 독립만세 권유 과정에 협박 사건, 일제의 응징에 상해 살인 사건, 유인물 제작 배 포에 출판법 위반 사건, 일제 기관의 파괴 공격에 방화사건,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에 소요 사 건 등으로 기소하여 재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이를 통해 이유 에 나타난 구체적 독립만세 운동에 일제가 어떠한 법률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는가를 검토할 수 있다. 셋째, 독립운동가의 형량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독립운동가가 일제의 사법적 탄 압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알 수 있고,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사법 적 판단을 알 수 있다. 넷째, 재판과정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할 자료로써 압수한 증거물들이 어떠한 것들이 있고, 또한 증거물들을 일제 재판부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다섯째, 이유 를 통하여 우선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 독립운동 활동상을 파악할 수 있다. 즉 3 1운동의 구체적 전개 실상을 알 수 있는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일제 헌병과 경찰 및 군병력들이 독립만 세운동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고 탄압하였는가도 알 수가 있다. 여섯째, 이유 를 통하여 검사의 피고 사건에 대한 판사의 법률 적용 검토가 기재되어 있어 법적용에 관한 사항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일제의 사법적 판단에 대한 적정성과 공정 성을 검토할 수 있다. 일곱째, 판결 일자를 통하여 해당 재판소에서 처리한 재판 건수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일제가 처리한 모든 판결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는 문제점이 있으나 이를 통하여 일 제 재판소가 얼마만큼의 사건을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갖고 처리하였는가를 가름할 수 있다. 그리하여 3 1운동에 대한 재판이 얼마나 정상적인 검토와 판단을 거쳐 시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여덟째, 조선총독부 소속의 검사와 판사들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이들 검사와 판사 에 분석과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이 관여한 재판의 건수와 판결 형량 등을 분석하여 3 1운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사법적 탄압에 대한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99

9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한 사례로 충북 영동 매곡의 4월 2일부터 6일까지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공주지방법 원대전지청의 판결 형량이 1년 4월, 1년 3월, 1년 2월, 1년으로 판결된 것은 법률적인 검토뿐 만 아니라 판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판결문의 결과는 검찰청을 거쳐 본적지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에 통보되어 범죄인 명부 또는 수형자명부 에 기록되어 현존하여 있다. 이상과 같이 판결문을 통하여 3 1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한 인사들을 파악할 수 있고, 독립운동가들이 어떻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즉 판결문을 통하여 3 1운동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일제측의 기록이지만 3 1운동 연구와 3 1운동사에 중요한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 100

93 총 설 Ⅴ. 맺음말 3 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직접무단통치하에서 국가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 복하려는 민족독립운동이었다. 국내외의 정세 변화와 국내 분위기에서 고종의 국장은 3 1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뇌관 역할을 하였다. 천도교계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이 독 립운동계획을 1월 하순경부터 논의하며 3 1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실행을 맡은 최린이 최 남선과 접촉하고 이어 기독교 장로교 이승훈이 가세하면서 종교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추 진되었다. 2월 11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첫 만남이 이 루어졌고, 여기서 독립운동에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 규합이 결정되었다. 이승훈은 선천과 평양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2월 17일 재상경하여 2월 20일부터 감리교 계통 인사와 접촉하며 기독교계의 동지 규합을 확대하여 나갔다. 2월 21일 이승훈은 최남선과 처음으로 만나 최린 의 집에 갔을 때 최린은 이승훈에게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이승훈은 독립운동비 5,000원을 요구하여 2월 22일 손병희의 지시로 최린을 통하여 수령하였다. 독 립운동비를 수령한 이승훈이 함태영과 함께 최린를 찾아갔을 때 최린은 독립청원서 제출이 아닌 독립선언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후 두 종교계의 독립운동계획은 최린 이승훈 함태 영 3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기독교계가 숙의를 거쳐 2월 24일 이승훈 함태영이 최린에 게 천도교측의 주장을 수용한다는 통보를 함으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이 성립되었다. 한 편 박희도 이갑성은 강기덕 김원벽 등을 통하여 학생 세력을 규합하여 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에 합류시켰다. 민족대표자 선정으로 천도교 측은 2월 25~27일 경성에 모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15명을 선정하고, 기독교 측은 2월 26일에 한강 인도교 위에서 대략 선정하고 2월 27일 이필주 집 에서 독립 서류 초안을 보고 16명을 선정하였다. 불교계는 한용운이 2월 24~27일에 최린의 독립운동계획을 듣고서 박용성의 찬성을 얻어 2명이 대표자가 되었다. 이들 대표자들은 2월 27일에 최린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및 기타 서류의 별지에 서명 날인하였다. 최남선은 2월 10일경 선언서 기초를 끝내고 15일경 최린에게 교부하였고, 기타 독립 관련 서류는 2월 25일에 최린에게 교부하여 기독교 측에 열람시키고 2월 26일에는 손병희 등에게 열람하여 최종 확정되었다. 그는 신문관에서 활자판을 짜서 최린 집으로 전달하고, 이종일 101

9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은 2월 27일 김홍규에게 활자판을 가져다가 인쇄를 지시하였다. 김홍규는 신영구를 시켜 보 성사에서 오후 5시부터 11시경까지 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여 이종일에게 교부하였 다. 이 독립선언서는 2월 28일에 이종일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에게 전달되어 전국에 배부 되고, 학생들을 통하여 3월 1일에 서울 시내에 배포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자들은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학생과 일반 시민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민족대표자들은 일경에 체포되었 으나, 학생과 일반 시민은 파고다 공원을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해가 질 무렵까지 서울 시내를 활보하였다. 또한 지방에서도 3월 1일에 평양, 진남포, 의주, 원산, 선천, 안주 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 1운동은 사전에 종교계 계통을 연락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초기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 되었고, 독립선언서가 전달되거나 고종 국장을 참례한 인사들이 서울의 3 1운동을 목격하 고 귀향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은 초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중순 이후에는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3월 25일 이후 10일간 전국 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비폭력적인 대한독립만세 만을 외치는 방법에서 일제의 치안기관인 경찰주재소와 헌병주재소,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와 군청, 교육기관인 학교 시설 에 대한 폭력적 공격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경찰 헌병은 물론이고 친일적인 말단 행정관 리인 면장과 면서기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졌으며, 일본인들의 퇴거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적 진압과 사법적 탄압 및 행정적 회유와 압박으로 인하여 4월 10일 이후에 약화 되었다. 또한 일제의 헌병과 보조원 및 6개 대대의 증파는 3 1운동이 급속히 약화시키는 요 인의 하나였다. 3 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각 지방별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고 그에 따라 독 립만세운동에 있어 지역적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서울의 3 1운동은 3월 1일 독립선언과 수만 명의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5일 학생 중심 의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이후 일제의 탄압과 무력 시위로 독립만세운동은 주춤하였 다. 그러나 3월 하순에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2일의 노동자대회를 계 기로 3월 23일과 26~27일에 종로를 중심으로 시내 각처에 소규모 단위의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3월 23일 26일에는 전차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4월 중에는 4 102

95 총 설 월 23일의 국민대회를 제외하고는 활발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각종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자극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경기도의 3 1운동은 서울과 인접하여 있음에도 개성을 제외하고는 3월 초순에 거의 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되지 않았다. 3월 중순에도 고양 양주 파주 강화 김포 진위 등 일부 지역에서만 독립만세 권유 활동이나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3월 하순에 이 르러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어 모든 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경기도에서는 인구 분포 상 대규모 인사들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이 많이 전개되었고, 특히 3월 18일 강화 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참가 인원이 10,000명에 달하였다. 또한 격렬하게 전개된 독립 만세운동으로 수원 송산과 장안 우정, 안성 원곡 양성의 독립만세운동은 일경들을 응징한 대표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구장 등의 독립만세 권유 활동이 활발하였고, 면장과 면 직원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강원도의 3 1운동은 천도교 측에 의해 3월 1일부터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음에도 타 지 역과 달리 독립만세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또한 지역적 특성으로 외부와의 접촉과 영 향이 적은 관계로 철원 이천 평강 등을 제외하고는 3월 중 하순까지는 거의 독립만세운 동이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3월 말경부터 4월 초순까지는 각 군 지역에서 활발히 독립만 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군수를 포함한 면장과 면 직원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한 사례 가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려는 노력과 활동이 이천의 김병주 김순필과 판교 의 이병준 한인백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이 초기에는 철원지역이 활 발하였으나 도내에서 가장 활발하고 늦게까지 전개된 지역은 이천지역이었다. 충청도의 3 1운동은 3월 중순까지 2~4개 지역에서 거의 매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다 가 3월 27일부터 2~5개 지역으로 증가하면서 3월 31일부터 급속히 증가하였다. 주도 인사 도 유학자 종교인 학생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고 또한 계층 간에 연합하여 추진된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례가 많았고, 주도 인사가 연속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거나 같은 지역이나 장소에서 전개되는 사례가 많았다. 특 히 독립만세를 가장 많이 부른 곳이 마을의 산이었다. 이는 충청도의 가장 대표적인 독립만 세운동 형태인 횃불독립만세운동이 3월 23일부터 충북 청주와 충남 연기에서 시작하여 충청 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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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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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4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활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전도한 인원수를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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