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예 지 제 18 집 전통시대 무예 국궁 특집 2011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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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 예 지 제 18 집 전통시대 무예 국궁 특집

2 학 예 지 제 18 집 전통시대 무예 국궁 특집 2011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3 목 차 연구논문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 윤성재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25 윤훈표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53 우인수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73 김기훈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03 이재학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37 정재성 자료소개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157 이건호 부 록 2010육군박물관 연보 229 학예지 제1집~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38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49

4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윤 성 재* 목 차 1. 머리말 2. 삼국시대의 활쏘기 문화 1) 설화 속에 나타난 활쏘기 2) 유물 속에 보이는 활 3) 활쏘기의 여러 형태 3. 고려시대의 활쏘기 문화 1) 설화 속에 나타난 활쏘기 2) 유물 속에 보이는 활 3) 활쏘기의 여러 형태 4. 맺음말 1. 머리말 1) 활은 대나무나 단단한 나무 또는 쇠를 휘어서 반달 모양으로 궁체( 弓 體 )를 만들어 두 끝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시위에 메워 함께 당겼다 놓아 줄의 탄력을 받아 화살이 튀어나가는 원거 리 무기 중 하나이다. 세계적으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출현하여, 오랫동안 대표적인 원격무기 ( 遠 隔 武 器 )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 활을 쏘는 것은 전쟁 수행 중에 무기로서 활용된 것이 대다수이지만, 관리 선발기능이나, 친교의 수단, 예절 교육의 수단과 심신 수련의 한 방법으로 도 이어져왔다. 원래 고대부터 활쏘기는 덕( 德 )과 관련한 것이었다. 예기( 禮 記 ) 에 활 쏘는 것은 안으로 뜻이 바르고 밖으로 몸이 곧은 연후에 살펴보고 굳게 잡아야 (활을) 명중시킬 수 있는 것이므 로, 활 쏘는 것으로써 덕행( 德 行 )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즉, 사람의 덕을 판단할 때 활의 명중 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다. 또한 논어( 論 語 ) 에도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반드시 활쏘기 에서만은 다투게 된다. 그러나 활을 쏘려고 당에 오를 때는 서로 읍하고 사양하며 올랐다가, *숙명여대 강사

5 2 학예지 제18집 쏘고 내려와서는 술을 마시나니, 그 다투는 것이 군자다우니라.[ 君 子 無 所 爭 必 也 射 乎 揖 讓 而 升 下 而 飮 其 爭 也 君 子 ] 한 것처럼 군자의 됨됨이를 보기 위한 것이 활이며, 군자가 다툴 만한 일 은 오직 활쏘기, 그것 뿐 만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활 이라는 말 자체는 계림유사( 鷄 林 類 事 ) 에 궁은 활이다[ 弓 曰 活 ], 쏘는 것은 활 쏘아[ 射 曰 活 素 ] 라 한 것에서 활 이 우리나라 고유어이며 화살 은 활소 에서 유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 민족의 별칭이 활과 관련된 단어에서 나왔을 정도인데, 고대 우리민족의 별칭인 동이족( 東 夷 族 )의 이( 夷 )가 큰 활을 의미하는 대( 大 )와 궁( 弓 )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활은 구석기 말기부터 나타나 신석기 시대에는 크게 확산되어 한반도 어디서 나 그 흔적이 확인된다. 활의 형태는 남아있지 않지만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다량으로 남 아 있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활은 전투용 무기로 활용되었는데, 이 시기 화살촉이 신석기 시대 수렵용보다 크고 무거워 활의 강도도 높았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문헌 기록은 낙랑지역 에서 나오는 활을 단궁( 檀 弓 )이라 하였다는 것 1) 이 처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활이 크게 발전 한 것은 삼국시대였다. 이글에서는 중국 역사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헌과 발굴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활쏘기에 대한 모습을 살펴보고자한다. 이미 이것에 대한 기 록이 상당히 등장하며,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여러 종류의 활과 관련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 되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활 쏘는 무사 모습이라던가 기마수렵도를 통해서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발굴조사 성과로 나타나는 것은 적으나 문헌기록에 통 해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통해 쇠뇌가 더 널리 사용되고, 고대로 부터 이어지는 설화에 나타나는 모습, 친교수단으로서의 활쏘기 모습을 통해 삼국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전통 활 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삼국시대의 활쏘기 문화 1) 설화 속에 나타난 활쏘기 설화는 일반적으로 신화( 神 話 ), 전설( 傳 說 ), 민담( 民 譚 )의 세 갈래로 나누는데, 신화 안에서 1)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 예.

6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3 활쏘기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는 특히 건국신화에서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전해지는 많은 설화를 살펴볼 수 없어 그 가운데 문자로 정착된 설화를 중심으로 그 안에 담겨진 활쏘기 문화 를 살펴보고자 한다. 활쏘기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 건국신화이다. 고구려 건국신화는 고구 려인이 직접 남긴 광개토왕릉 비문 을 비롯하여,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등에 실려 있고 가장 자세한 것은 고려시대 이규보( 李 奎 報 )가 지은 동명왕편( 東 明 王 篇 ) 에 수록되어 있다. 2) 동 명왕편 의 고구려 건국신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의 전반 전개과정에 활 이라는 요소가 늘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몽( 朱 蒙 )이라는 이름부터 활과 연관이 있으며, 이어 그가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활이라는 매개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신화의 전개 구조를 나눠본다면 (a)출생- (b)성장-(c)창업-(d)치국-(e)승천 다섯 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 는데, 각 단계마다 활쏘기와 관련한 요소가 자주 등장하고, 특히 성장과 창업 과정에 요소가 집중되어 있다. 그러한 각각의 요소는 주몽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징표로 기능하는 것으로, 단 순히 주몽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신이( 神 異 )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1 어미가 우선 받아서 기르니 / 한 달이 되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스스로 말하되 파리가 눈을 빨아서 / 누워도 편안히 잘 수 없다 하였다 /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 그 활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잘 수가 없으니 어 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댓가지로 활과 화살 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 扶 餘 )에 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 朱 蒙 )이라고들 한다.] ( 동국이상국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2) 고구려 주몽설화가 전하는 자료는 크게 금석문(묘지명) 자료와 문헌 자료로 나눠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광개토대 왕릉 비문, 모두루 묘지명, 후자로는 우리나라 문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와 서사시 형태로 전해지는 고려시대 제왕운기 (이승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이규보)이 있다. 중국 기록으로는 논형 고험, 삼국지 위서 고구 려전,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 등이 있다. 현존하는 자료들 가운데 주몽설화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전하는 것은 동명 왕편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는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보다 앞서 편찬된 구삼국사( 舊 三 國 史 ) 를 인용하였 는데, 그 내용이 앞서 나온 어떤 문헌보다 풍부하고 신화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 사용하는 자료도 동명왕편 을 기준으로 서술하였다. 주몽신화에 나타나는 활문화에 대한 연구는 다음 논문을 참고 하였다. 이은창,1985 고구려신화의 고고학적 연구 -삼국유사의 주몽신화를 중심으로- 한국전통문화연구 1 尹 學 老, 1987 古 代 東 아시아 神 話 의 한 斷 面 ; 특히, 弓 矢 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慶 州 史 學 6, 동국대학교 鄭 京 日, 2007 高 句 麗 弓 矢 文 化 에 대한 一 考 察 - 考 古 資 料 를 中 心 으로 -, 선문대학교 석사논문 이용범, 2010 한국 활쏘기 신화의 의미와 특징 동북아 활쏘기 신화와 중화주의 신화론 비판, 동북아역사재단

7 4 학예지 제18집 2 나이가 점점 많아지매 / 재능도 날로 갖추어졌다 / 부여왕의 태자가 / 그 마음에 투기가 생겼다 / 말하기를 주몽이란 자는 / 반드시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 후환이 끝없으리라 하였다 [나이가 많아지자 재능이 다 갖추어졌다. 금와왕은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하였다. 왕의 아들과 따르는 사람 40여 인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퍽 많이 쏘아 잡았다. 왕자가 시기하 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매고 사슴을 빼앗았는데, 주몽이 나무를 뽑아 버리고 갔 다. 태자( 太 子 ) 대소( 帶 素 )가 왕에게, 주몽이란 자는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여서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1과 2는 주몽의 성장과정에서의 활쏘기의 신기( 神 技 )를 과시한 대목이다. 1에서는 어린 주몽이 파리 때문에 잘 수가 없는 시련을 겪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댓가지로 만들어 준 활과 화살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 족족 맞추었다 고 하였다. 이는 주몽의 신기에 가까운 재능을 나타낸 것이고, 그래서 부여의 풍습에 따라 주몽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을 표명하였다. 태어난지 한 달만에 활을 쏘았다는 것은 주몽은 활쏘기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3) 즉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보여준 비범한 활쏘기 능력은 그가 신이한 존재, 즉 천제의 후손임을 보여주는 징표라 할 수 있다. 주몽의 뛰어난 재능은 2의 일곱 왕자와의 사냥비결에서도 나타난다. 왕자와 시종 40명이 많은 화살을 가지고 사냥을 나가도 사슴 한 마리를 잡은 것에 그쳤으나, 주몽은 적은 화살로도 많은 짐승을 사냥하였다. 고대 수렵사회에서 활쏘기 능력은 생활에서 있어서의 필수적 능력이 었고, 또한 외적과의 전쟁에서 자기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태자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은 주몽을 견제한 것이며, 활쏘기 소질을 구비한 주 몽이 훗날에 남하하여 건국할 수 있는 여운을 남겨준 것이었다. 반면 그의 활쏘기는 그의 비범 한 능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그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자신을 위기에 빠트리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빌미는 그가 새로운 세계, 즉 고구려 건국을 위해 부여를 탈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3) 삼국사기 에서는 이 때를 일곱 살이라고 하였다.

8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5 3 남쪽으로 행하여 엄체수에 이르러 / 건너려 하여도 배가 없었다 / [건너려 하나 배는 없고 쫓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기를, 나 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과 후토( 后 土 )는 나 고자( 孤 子 )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 하고, 말을 마치고 활 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는데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렀다.] 채찍을 잡고 저 하늘을 가리키며 / 개연히 긴 탄식을 발한다 /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이 / 난을 피하여 이곳에 이르렀소 / 불쌍한 고자의 마음을 / 황천 후토가 차마 버리시리까 / 활을 잡아 하수를 치니 / 기와 자라가 머리와 꼬리를 나란히 하여 / 높직이 다리를 이루어 / 비로소 건널 수 있었다 / 조금 뒤에 쫓는 군사 이르러 / 다리에 오르니 다리가 곧 무너졌다 / [쫓아온 군사가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허물어져 이미 다리에 오른 자는 모두 빠져 죽었다.] 4 한 쌍 비둘기 보리 물고 날아 / 신모의 사자가 되어 왔다 /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 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아마도 신모( 神 母 )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 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형세 좋은 땅에 왕도 를 개설하니 / 산천이 울창하고 높고 컸다. 3과 4는 주몽이 창업과정을 서술한 내용에서 나타난 활과 관련된 요소이다. 3에서는 주몽 이 남하할 때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고 앞에 강물이 길을 막고 있을 때 곧 활로 물을 쳐[ 以 弓 擊 水 ] 고기와 자라로 하여금 다리를 이루게 하였다. 4) 이처럼 주몽에게 활쏘기와 활이 그의 신이 성을 보여주는 징표라는 점은 그가 부여를 떠나 엄체수를 건널 때 분명히 드러난다. 주몽은 활로 물을 쳐서 그 강을 건넌다. 주몽이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 를 만들었다는 것은 활이 바로 그의 정체성의 상징임을 말해준다. 또 활이 하늘의 인정을 의미 4) 활로 물을 친다[ 以 弓 擊 水 ] 는 행위는 중국 문헌인 논형( 論 衡 ) 에 북이( 北 夷 ) 탁리국( 橐 離 國 )의 시비가 낳은 주몽이 탁 리국을 도망하여 엄호수를 건널 때 처음 등장한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주몽은 부여를 건국하는 인물로 소개되었다. 그렇다고 보면 이 행위는 것으로 고구려 주몽설화보다 부여 동명설화에 등장하는 화소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9 6 학예지 제18집 하거나 국가 권력, 즉 지상권을 획득하기 위한 도강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하늘 숭배 관념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고구려 건국신화는 배후에서 그가 하는 행위의 성공을 보장하는 부계인 천계와의 관련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차이는 건국 시조의 행동 에 대한 절대적 성공을 더욱 보장하는 것으로 그의 영웅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4에서는 유화가 비둘기를 통해 보낸 오곡 종자를 활로 쏘아 받는 것으로, 역시 주몽의 신이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 경우 유화를 오곡을 관장하는 신성한 신모( 神 母 )로 본다면, 활쏘기는 신모와 주몽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처럼 매 개로써의 활쏘기는 주몽과 같이 신이한 존재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5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 대강 군신의 위차를 정하였다 / [왕이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대강 임금과 신하의 위차를 정하였다.] 애달프다 비류왕이여 / 어째서 스스로 헤 아리지 못하고 / 선인의 후예인 것만 굳이 자긍하고 / 천제의 손자 존귀함을 알지 못하였 나 / 한갓 부용국으로 삼으려 하여 / 말하는 데 삼가거나 겁내지 않네 / 그림 사슴의 배꼽 도 맞히지 못하고 / 옥가락지 깨는 것에 놀랐다 / [비류왕 송양이 나와 사냥하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이끌어 함께 앉아서, (동명)왕이, 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 는 지금 왕은 신( 神 )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칭호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하였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제의 손자라 자칭하 는 것을 듣고 마음에 의심을 품어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왕과 활쏘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린 사슴을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 玉 指 環 ]를 가져다가 1백 보 밖에 달아매 고 쏘았는데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5에서 비류왕( 沸 流 王 ) 송양( 松 讓 )과의 대결에서도 활쏘기는 주몽이 신의 자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징표로 기능한다. 특히 주몽이 뛰어난 활쏘기 능력을 통해 자신이 신의 자손, 즉 천제 의 외손임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송양은 주몽이 천제의 손자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활 쏘기 시합을 제안하는데, 송양은 그린 사슴을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가져다가 1백 보 밖에 달아매고 쏘았는데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여기에서 주몽이 송양을 굴복

10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7 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활쏘기의 재능이 다시 보인다. 이는 활쏘기가 당시 사회에 서 한 개인의 신분, 즉 정체성과 능력을 확인하는 징표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둘의 대결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고구려와 비류의 두 나라 사이의 대결이다. 두 집단 사이의 우 열을 가려 종국에는 복속시키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결국 이 활쏘기 내기는 주몽의 신성성을 확인하는 수단이면서 비류국을 복속시키는 국가적 행위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주몽 외에 그의 아들인 유리( 類 利 ) 설화에도 활쏘기의 신성함이 나타난다. 6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으니 /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 칼을 얻어 부왕의 위를 이었고 /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 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 다. 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 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 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 하였다. 유리가 울며, 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 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 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 하였다. 전 한( 前 漢 ) 홍가( 鴻 嘉 )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 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 다. 왕이 유리에게, 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 神 聖 )함이 있느냐? 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 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최종 형태에서 유리신화는 주몽의 왕위를 계승하는 자의 정통성을 부각 시키려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활쏘기가 유리가 어렸을 때 나타난 기이한 절개 라는 것은 유 리에게도 활쏘기 능력이 단순히 재능이 아니라 타고난 기질로서 아버지인 주몽과 연결되는 정 체성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11 8 학예지 제18집 고구려 건국신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신화에 빈번히 출현하는 활이나 활쏘기는 그들의 선사( 善 射 )에 대한 숭상을 나타낸다. 신화 속에는 고구려 시조의 신기 ( 神 技 )를 표현하고 있는데 주몽의 이러한 남다른 재능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 바로 활이다. 이로서 고구려 건국신화는 주몽을 영웅화,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활쏘기는 결정적 역할을 발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화에 나타난 활쏘기는 주인공의 신성성과 영웅성을 드러내기 위 한 방편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신화에 나타나는 활쏘기는 국가를 다스리 는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 활과 관련되어 전하는 것으로는 건국설화는 아니지만 영웅설화로 나타나는 거타지 ( 居 陀 知 ) 설화가 있다. 7 이 왕의 시대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 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백제의 해적이 진도( 津 島 )에서 길을 막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수 50명을 뽑아서 그를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 鵠 島 )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열흘 남짓 묵게 되었다. 공이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니, 말하기를 섬에 신령한 못이 있으니 그곳에 제사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못 위에 제전을 갖추었더니, 못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아올랐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공 에게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한 사람을 이 섬 안에 머무르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꿈에서 깨어 나 좌우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라고 하니, 여러 사람 들이 말하기를, 나무조각[ 木 簡 ] 50쪽에 우리 이름들을 써서 물에 띄워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를 뽑읍시다 라고 하니 공이 이를 따랐다. 군사 중에 거타지( 居 陀 知 )란 자가 있어 그 의 이름이 물 속에 가라앉았으므로 이에 그를 머물게 하니 순풍이 갑자기 일어나 배는 지체없이 나아갔다. 거타가 수심에 쌓여 섬에 서있었더니 갑자기 한 노인이 못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서쪽 바다의 신이오. 매번 한 중이 해가 뜰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 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르 는데 중은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취하여 다 먹어버리고 오직 우리 부부와 딸 아이 하나 가 남았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또 반드시 올 것이니 청컨대 그대가 중을 쏘아주시오 라 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 다. 노인이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사라지고 거타 는 숨어서 기다렸다. 다음날 동쪽( 扶

12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9 桑 )에서 해가 뜨자 중이 과연 와서 전과 같이 주문을 외우며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중을 맞추니 승려는 곧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 삼국유사 권2 제2 기이 진성여대왕 거타지)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시대의 인물인 거타지( 居 陀 知 )는 풍랑을 만나 섬에 머물게 된 일행 중에서 서해용왕으로부터 늙은 여우를 물리치기 위하여 낙점받은 사람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 연이라고 할 수 없으며, 거타지의 비범성은 용왕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제치함으로써 발휘된 다. 그는 용왕의 갈등을 해결해주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용왕의 딸과 결연함으로써 영웅 적인 귀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귀한 신분의 신이한 출생 및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고대 건국자들과 달리 평범한 인물이지만, 노인으로 변신한 서해( 西 海 ) 해신( 海 神 )의 곤란함을 해결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 계기는 탁월한 활 솜씨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와 백제는 이렇게 활이나 활쏘기와 관련한 인물의 건국신화가 나타나지는 않는 다. 활쏘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신화는 수렵 전통을 갖는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 져 있는데, 고구려의 경우만 뚜렷하다는 것은 신라와 그 계통을 달리한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백제나 신라에 활쏘기에 관련한 것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2) 유물 속에 보이는 활 고구려의 활과 활쏘기 문화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에서 활도 일찍부 터 발전하였는데, 특히 후한서( 後 漢 書 ) 와 삼국지( 三 國 志 ) 에 고구려는 일명 맥이다. 여기 서는 소위 맥궁이라고 하는 좋은 활이 난다.[ 句 麗 一 名 貊, 出 好 弓, 所 謂 貊 弓 是 也 ] 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실제 1933년 평양에서 발굴된 영화9년명 벽돌무덤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활에서 당시 고구려 활이 굽은 활[만궁( 彎 弓 )]이자 짧은 활[단궁( 短 弓 )]임을 추측할 수 있으며, 동명왕 릉 부근 12호분에서 수습된 척추뼈에는 관통한 화살촉이 그대로 남아 있어 활의 위력을 보여준 다. 5) 또 여러 고분벽화에는 이런 각궁을 가지고 사냥하는 장면이 수십 곳에 그려져 있는데, 앞이 편편한 도끼날 촉을 끼운 화살로도 호랑이 두개골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 닌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활이 아닌 쇠뇌도 사용했는데, 주서( 周 書 ) 6) 에 관련 기록이 있고, 5) 박재광, 2009 화염조선, 글항아리, 301쪽. 6) 주서 권49 이역열전41 고구려.

13 10 학예지 제18집 덕흥리 고분에 전실 남벽( 南 壁 ) 동측( 東 側 ) 행렬도의 앞 부분에 쇠뇌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인 물이 그려져 있으며 그 옆에 계현령이 쇠뇌를 들어 올렸다[ 薊 縣 令 捉 軒 弩 ] 는 명문이 보인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했을 때 백암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쇠뇌화살에 맞아 당나라 장수 이사마( 李 思 摩 )가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나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게 위해 중국 의 쇠뇌 제작 기술자를 매수하여 병기를 수리하려 했다는 구당서 의 기록은 고구려에서 쇠뇌 사용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7) 또 비록 후대의 기록이지만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당 태종을 양 만춘( 楊 萬 春 )이 쇠뇌로 쏘았다는 기록 8) 을 통해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쇠뇌를 사용한 사실도 알 수 있다. 백제 역시 고구려 활과 비등한 정도의 활을 보유했을 것인데, 이는 근초고왕이 각궁( 角 弓 )의 화살을 일본 사신에게 선물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단지 쇠뇌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은 찾 기 어려운데, 고구려나 신라와 크게 달랐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는 만큼 신라도 우수한 활문화가 존재하였다. 단지 신라에서는 활에 대한 실물은 찾기 어렵고 군제( 軍 制 )에 반영되어 전하는 내용이 가장 풍부하다. 즉 신라시대 사설당( 四 設 幢 )에 소속되어 쇠뇌를 쏘는 부대인 노당( 弩 幢 )과 병부( 兵 部 )에 소속된 노사지( 弩 舍 知 )나 노당( 弩 幢 ) 등의 관직, 법당주( 法 幢 主 )의 노당주( 弩 幢 主 )가 15인 소속되었고, 법당두상 ( 法 幢 頭 上 ), 법당화척( 法 幢 火 尺 )에 노당이 각각 45인씩 소속되어있고, 법당벽주( 法 幢 辟 主 )에 노당이 135인이 소속되어 있음 9) 이 보인다. 그 밖에 558년 신라 신득( 身 得 )이라는 인물이 쇠뇌 와 포를 사용하여 성 위에 설치했다는 기록 10) 이나, 노포( 弩 砲 ) 11), 차노( 車 弩 ) 12) 의 기록을 통해 성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 이동식 대형 쇠뇌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노사( 弩 師 )인 사찬( 沙 湌 ) 구진천( 仇 珍 川 )의 일화 13) 를 통해 신라 쇠뇌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위에 보이는 7) 박재광, 2009, 앞의 책, 336쪽. 8) 성호사설 권5 만물문 목노천보. 9) 삼국사기 권40 잡지9 무관. 10)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9년(558). 11)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 무열왕 8년(558) 5월 9일. 12)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30년(731) 9월. 13) (699년) 겨울에 당 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는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노사( 弩 師 )]인 사찬( 沙 湌 ) 구진천 ( 仇 珍 川 )과 함께 [당나라로] 돌아갔다. [당나라에서 그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게 명령하였는데, 화살을 쏘자 30보 쯤 나갔 다. 황제가 그에게 내가 듣기로는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를 쏘면 1천 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지금의 것은 겨우 30보 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라고 물었다. [구진천은] 재목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자( 天 子 )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였는데, 곧 대나마( 大 奈 麻 ) 복한( 福 漢 )을 보내어 나무를 바쳤다. 이에 고쳐 만들도록 명령하고는 쏘았는데, 60보에 이르렀다. 그 까닭을 묻자 신도 역시 능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14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1 노사( 弩 師 ) 구진천은 쇠뇌를 제작하는 전문 기술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신라 쇠뇌 기술이 원조 격인 중국을 능가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쇠뇌 제작기술을 밖으로 유출시키는 것은 기밀이었고, 당나라 역시 이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14) 역시 신라가 당시 상당한 수준의 쇠뇌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백제, 고구려 전쟁을 수행하여 삼국통일을 이루는 기반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 활 문화와 특이한 것은 화살집 실물이 발굴된 것이다. 화살집은 시복( 矢 腹, 矢 箙 ) 이라고 하는데 모양이 버선과 비슷하며 조선시대에는 천 또는 가죽으로 만들었다. 활통은 보통 동개( 筒 箇, 筒 介 )라고 하는데 화살집과 활을 넣는 통을 한 줄로 묶어 왼편 어깨에 매게 줄로 연결된 제구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현재 발굴된 것으로 완전한 것은 없고 금동제 보강판과 장식물만 전해진다. 15) 그런데 신라 호우총( 壺 衧 塚 )에서 출토된 칠기( 漆 器 ) 도 깨비 얼굴 화살통[ 漆 器 鬼 面 矢 箙 ]은 자료가 희귀한 신라시대 활 관련 유물로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였다. 이것은 발굴 당시에는 방상씨( 方 相 氏 ) 탈로 잘못 알려졌으나 최근 보존처리 후에 도깨비 얼굴 화살통으로 판명되어 복원되었다. 16) 3) 활쏘기의 여러 형태 활을 쏘는 것은 그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활쏘기의 기능을 수렵 제의 전쟁 수련 놀이의 5가지로 구분하면서 고려말 조선초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제의 전쟁 수련의 기능은 약화되고 대신 수렵과 놀이의 기능은 강화되었다고 하였 다. 17) 그렇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이런 기능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삼국 에 활쏘기는 신분과 시대를 가리지 않고 성행했다. 주서 백제조에는 풍속에 말타고 활쏘는 것을 좋아한다. [ 俗 重 騎 射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도 비슷했을 것이다.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천자( 天 子 )는 그가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는다고 의심하고는 무거운 벌로 써 위협하였지만 결국 자기의 재주를 모두 나타내 바치지는 못하였다.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9년) 14) 박재광, 2009, 앞의 책, 333쪽. 15) 활통의 모양변화는 활쏘기 방식의 변동과 연관있다. 고구려에서는 대체로 기원전시기부터 3세기경까지는 원통형의 화 살통을 사용하다가 4세기초경부터는 네모난 화살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전투에서 사격밀도가 높아지면서 한번에 많은 화살을 착용하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게 되는데, 종전까지 사용하던 원통형의 화살통은 비교적 긴 화살 을 넣는데 알맞고 부피가 작아서 한번에 넣을 수 있는 화살의 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네모난 화살통은 통의 높이가 낮으므로 긴 화살은 넣기 어려우나 부피가 커서 단번에 짧은 화살은 보다 많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모난 화살통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군사기술발전의 발달에 따라 변화한 장비인 것이다. 16) 국립중앙박물관, 2006 호우총 은령총-발굴 60주년 기념 심포지움 99쪽. 17) 정재민, 2001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국궁 학예지 7(국궁 문화 특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5 12 학예지 제18집 그렇지만 삼국시대에 가장 활발히 행해진 활쏘기는 수렵, 제천과 관련한 행사였다. 특히 고 구려는 기마 궁술을 실전에서 익히고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수렵대회를 주최했다. 국가로서 는 평상시 전쟁에 대한 사전준비태세를 갖추는 훈련의 장이 되는 것과 동시에 왕이 신하들과 함께 수렵을 하고 천신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 위계질서의 확립을 꾀하기도 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사냥은 삼국사기 에 보이는 것처럼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 樂 浪 ) 언덕에 모여 전렵 ( 田 獵 )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 사슴으로 하늘과 천신에 제사를 지낸다. 그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18) 는 형태로 나타난다. 백제의 경우에는 왕이 사냥을 나가는 기사는 매해 7월에서 9월 사이에 나타나지만 19) 특별한 행사가 수반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고구려나 신라의 예를 보아 전혀 없었을 것으로 생각 되지는 않는다. 신라는 수서( 隋 書 ) 신라조에 나타나듯이 8월 15일에는 잔치를 베풀어 즐기고, 관리들에게 는 활쏘기를 시켰으며, 말과 베로써 시상하였다.[ 至 八 月 十 五 日 設 樂 令 官 人 射 賞 以 馬 布 ] 고 했 다. 이 8월 15일은 신라의 가배( 嘉 俳 )와도 관련 깊은 것으로 가을 추수가 끝나고 하늘에 제사 드리는 행사가 여성에게는 베짜기 행사로, 남성에게는 활쏘기 행사로 나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활쏘기와 연관된 제천 행사가 고구려에는 3월, 백제와 신라에는 가을에 나타나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다른 것에서 나오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런 행사는 인재등용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온달이 3월 3일 고구려 평원왕 이 개최한 사냥향사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 등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기사를 중시했던 까닭은 이 두가지 능력이 전투능력과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덕흥 리 벽화고분의 마사희 장면은 가사를 통한 인재등용을 잘 보여준다. 이 마사희에서는 말을 타 4명의 무인과 평복 차림의 인물 3명이 등장하며 표적은 5개다. 그림 오른쪽에 이는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 하는 것이다 라고 있으며, 마장( 馬 場 ) 중앙 왼쪽에 사희를 기록하는 것을 주재 하는 사람[사희주기인( 射 戱 主 記 人 )] 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말탄 무인의 석정을 심사하고 기 록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20) 18)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 19)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아신왕 7년. 20) 박재광, 2009, 앞의 책, 299쪽. 단지 광경이 과거와 같은 공식적인 시험인지 사사로운 놀이 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등장인 물이 적은 것으로 봐서 공식적인 시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렵대회를 통한 인재의 선발 보다 이와 같은 방법이 좀 더 개량화 된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과 벽화에 등장할 만큼 상용화 되었다는 점 등은 마사희가 인재등용의 한 방법일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국사편찬위원회 편, 2007, 앞의 책, 42쪽)

16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3 신라에서도 778년(원성왕 4)에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를 등용하기 이전에는 말타고 활쏘는 기사( 騎 射 )를 가장 중요한 인재등용의 척도로 삼았다. 그래서 고구려의 경당( 扃 堂 )에서도 활쏘 기를 익혔으며, 21) 무인 선발에도 궁술을 기본적인 시험 과목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삼국사기 에도 기사를 군왕의 기본적 자질로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것 또한 삼국시대 기사를 중시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온달이 고구려 평원왕이 개최한 사 냥대회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등용되는 과정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사를 중시한 까닭은 그 능력이 전투 능력과 바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22) 3. 고려시대의 활쏘기 문화 1) 설화 속에 나타난 활쏘기 23) 전설에 나타난 활쏘기는 그 의미상으로 볼 때 두 가지 부류의 이야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신화처럼 활쏘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활쏘기 그 자체에 주 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4) 고려시대 설화 속에 나타나는 활쏘기는 그 중간적 위치를 잘 나타낸다.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흡사한, 신화 속의 활쏘기는 고려시대에도 나타난다. 고려사 의 고 려세계( 高 麗 世 系 ) 에는 고려를 세운 왕건( 王 建 )의 선조 6대들의 내력과 자취를 다룬 고려의 건 국신화가 실려 있다. 왕건의 6대조 호경( 虎 景 ), 5대조 강충( 康 忠 ), 4대조 보육( 寶 育 ), 3대조 진의 ( 辰 義 ), 할아버지 작제건( 作 帝 建 ), 아버지 용건( 龍 建 )을 각기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가지 이야기 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활쏘기와 관련된 부분은 호경과 작제건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21) 구당서 권199 上 열전149 上 동이 고려. 22) 국편찬위원회 편, 2007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두산동아, 42쪽 23) 고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활문화에 대한 연구는 다음 논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尹 學 老, 1987 古 代 東 아시아 神 話 의 한 斷 面 ; 특히, 弓 矢 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慶 州 史 學 6, 동국대학교 정재민, 2001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국궁 학예지 7(국궁 문화 특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이용범, 2010 한국 활쏘기 신화의 의미와 특징 동북아 활쏘기 신화와 중화주의 신화론 비판, 동북아역사재단 24) 전자는 이성계 전설에서 나타나는데, 이때 활쏘기는 풍신을 제압하는 직접적 수단이며 영웅적 행위로 나타나 그 결과 후손에게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 度 祖 )의 행위는 뛰어난 활솜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웅적 행위를 통하여 좋은 예언을 얻었다는 것이다. 반면 이성계의 활쏘기는 그가 활쏘기에 뛰어 난 궁술의 소유자임을 역설함으로 조선을 건국할만한 자질을, 즉 왕재( 王 才 )를 갖추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17 14 학예지 제18집 옛날에 호경( 虎 景 )이라는 사람이 성골장군( 聖 骨 將 軍 ) 이라고 자칭하면서 백두산으로부터 산천을 두 루 구경하다가 부소산( 扶 蘇 山 ) 왼쪽 산골에 와서 거기에서 장가를 들고 살았다. 그의 집은 부유했으나 아들이 없고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 平 那 山 )에 매를 잡으러 갔다가 마침 날이 저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바위굴 속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때 범 한 마리가 굴 앞을 막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열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범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시험삼아 각자의 관( 冠 )을 던져 보아서 그 관을 범에게 물리는 사람이 나가서 일을 당하기로 하자고 하면서 모두 자기 관을 던졌다. 범이 호경의 관을 무는지라 호경이 나가서 범과 싸우려고 하는데 범은 갑자기 없어지고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은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범이 호경의 관을 무는지라 호경이 나가서 범과 싸우려고 하는데 범은 갑자기 없어지고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은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호경이 돌아와서 평나군( 平 那 郡 )에 보고하고 다시 산으로 와서 9명의 장사를 지냈다.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중에 그 산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시 과부로 이 산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신(성골 장군)을 만나게 되어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함께 신의 정치를 하려고 하는바 우선 당신 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겠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산신과 호경은 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평나군 사람들이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는 동시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아홉 사람이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구룡산( 九 龍 山 )이라고 고쳤다. ( 고려사 고려세계 ) 호경설화는 스스로 성골장군이라면서 평나산( 平 那 山 )의 여신과 결합하여 산신이 된 호경에 대한 전설이다. 여신과 결합하게 되는 계기는 바위굴에서 살아남은 것인데 그 전제조건으로 활을 잘 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꼽을 수 없다. 그 비범한 활쏘기 능력 덕분에 호랑이의 도움 을 받아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머무른 지 한 달 만에 진의에게 태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별할 때에 자기는 당나라 귀족이라는 것을 밝히고 진의에게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만일 생남을 하거든 이것을 주라 고 하였다. 그 후 과연 생남을 하였는데 그의 이름을 작제건( 作 帝 建 )이라고 했다. 작제건은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용맹이 있었다. 나이 5 6세쯤 되었을 때 그 어머니에게 자기 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 다.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는 당나라 사람이라고 대답했는데 그 이유는 남편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었 다. 작제건은 점점 자라서 재주가 육예( 六 藝 )를 다 잘 했고 그 중에서도 글씨와 활 재주가 뛰어났다. 나이 16세 때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활과 화살을 주었더니 작제건은 크게 기뻐했다. 활을 쏘는 데 백발백중이었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궁( 神 弓 )이라고 불렀다. 작제건은 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해 상선을 타고 떠났는데 바다 복판쯤 와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배가 사흘 동안 가지 못했다. 뱃사람은 점을 친 후 함께 탄 고려인을 내려놓고 가야 하겠다고 했다. 작제건이 활과 화살

18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5 을 잡고 바다로 뛰어내렸는데 마침 밑에는 암석이 깔려 있어 그 위에 서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안개 는 흩어지고 바람이 순하여 배는 나는 듯이 가 버렸다. 조금 있더니 한 늙은이가 나타나 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서해의 용왕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매일 저녁나절쯤 되면 늙은 여우 한 마리가 듣건대 낭군이 활을 잘 쏜다고 하니 원컨대 그 궁술로 나의 피해를 덜어 주시오. 작제건은 곧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하였다. 늙은이의 말하던 때가 되니 과연 공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서북으로부터 내려오는 자가 있었다. 작제건은 그것이 정말 부처가 아닌가 의심하고 감히 쏘지 못했 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다시 와서 그것이 정말 늙은 여우임에 틀림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쏘라고 하 였다. 그제야 작제건이 활에 살을 올려 쏘았더니 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 은 과연 늙은 여우 한 마리였다. 늙은이는 크게 기뻐하면서 작제건을 맞아 궁 안으로 들어가서 감사의 말을 하였다. 그대의 힘으로 나의 근심이 이미 덜어졌으니 큰 은덕을 갚으려 하노라. 그대는 앞으로 서쪽 당나라로 들어가서 천자인 아버지를 만나려는가? 그렇지 않으면 칠보( 七 寶 )의 부( 富 )를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시려는가? 작제건이 나의 소원은 동방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 고려사 고려세계 ) 작제건 부분을 보면 작제건의 어린 시절은 고구려 유리왕과 아주 비슷하다. 아버지 없이 자 랐고, 신궁( 神 弓 )이라 할 정도로 활쏘기를 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아버 지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가 서해 용왕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활을 쏘아 제거한다. 그럼으로 서해 용왕의 딸 용녀( 龍 女 )와 결혼하고 왕궁의 도움으로 장차 왕자( 王 者 ) 가 태어날 땅에 집을 짓고 살게 된다. 즉 활쏘기를 통해 고려 태조인 왕건 탄생의 계기를 얻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활쏘기 능력은 유리보다 작제건에게 더 중요한 역할은 한다. 유리의 경우 그의 존재를 뒤바꾼 것은 아버지인 주몽과의 만남이다. 유리에게 활쏘기 능력은 아버지 주몽과 동질적 존재를 나타내는 징표로서, 활쏘기 능력 자체가 그의 존재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즉 유리에게 활쏘기 능력은 능력의 표식이기보다는 출생 계보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 작제건 의 경우는 그와 달리 출생의 표식이라기보다는 능력의 표식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작제건에 게 결정적 변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아버지와의 만남이 아니라 그 자신의 활쏘기 능력이었다. 그는 평범한 존재였지만 탁월한 활쏘기 능력을 통하여 태조 왕건의 탄생계기를, 더 나아가서는 고려 건국의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즉 출생의 계보가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의 능력이 새 나라 개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25) 25) 그 결과 작제건은 중국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지 않고 용녀와 함께 고려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제현은 김관의 의 말에는 의조가 당나라 사람인 자기 아버지가 남긴 궁시( 弓 矢 )를 얻어 가지고 바다를 건너 멀리 아버지를 만나러

19 16 학예지 제18집 또 고려 때의 일은 아니지만 활과 관련된 설화로 전해지는 것으로 제주도의 삼성신화( 三 姓 神 話 )가 있다. 26) 탐라현( 耽 羅 縣 )은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고기( 古 記 )에 이르기를 태고적에 이곳에는 사람도 생물도 없었는데 3명의 신인( 神 人 )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는바 이 현의 주산( 主 山 )인 한라산 북쪽 기슭에 모흥( 毛 興 )이라는 굴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 때의 것이라고 한다, 이는 양을나( 良 乙 那 ), 둘째는 고을나( 高 乙 那 ), 셋째는 부을나( 夫 乙 那 )라고 하였다. 이 세 사람은 먼 황무지에 사냥을 하 여 그 가죽을 입고 그 고기를 먹고 살았는데 하루는 자색 봉니( 封 泥 )로 봉인을 한 나무 상자가 물에 떠 와서 동쪽 바닷가에 와 닿은 것을 보고 곧 가서 열어 보았더니 상자 속에는 돌함과 붉은 띠에 자색 옷을 입은 사자( 使 者 )가 따라 와있었다. 돌함을 여니 그 안에서 푸른 옷을 입은 세 명의 처녀와 각종 망아지와 송아지 및 오곡 종자가 나왔다. 그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의 사신인데 우리 나라 왕이 이 세 딸을 낳고 말하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산에 하나님의 아들 3명이 내려 와서 장차 나라 를 이룩하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 고 하면서 나에게 명령하여 이 3명의 딸을 모시고 가게 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은 마땅히 이 3명으로 배필을 삼고 나라를 이룩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 자 그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3명은 나이에 따라서 세 처녀에게 장가들고 샘물 맛이 좋고 땅이 건 곳을 택하여 활을 쏘아 땅을 점치고 살았는데 양을나가 사는 곳을 첫째 서울, 고을나가 사는 곳을 둘째 서울, 부을나가 사는 곳을 셋째 서울이라고 하였으며 이 때 처음으로 오곡을 심어서 농사를 짓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서 목축을 하여 날이 갈수록 부유해 가고 인구가 늘어 갔다. ( 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탐라현) 삼성신화에서 나타난 활쏘기는 신화 속 주인공의 성격이나 능력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양씨, 고씨, 부씨의 세 시조가 오곡의 종자를 갖고 바다를 건너 온 세 여인과 살아갈 터전을 정하는 역할은 한다. 즉 삼성신화에서 활쏘기는 삶의 터전을 정해주는 예지( 豫 智 )의 기능을 하는 것이 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뜻은 대단히 간절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용왕이 그의 소원을 물었을 때는 곧 동방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의조가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변명하였다. 어쨌거나 작제 건에게 아버지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나라 숙종이나 현종과 같이 허구의 인물을 설정한 것일 수도 있다. 활쏘기 능력이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는 비범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징표의 역할을 한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성계나 그의 부모에게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천명이 제시되는 내용이나, 이성계 자신 이 왕위 되기 위해 산신의 허락을 받는다거나 어려울 때 초월적 존재로부터 원조를 받는 등의 내용이 있는데, 그와 동시에 왕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임을 말하는 내용도 있다. 그때 제시되는 중요한 능력이 활쏘기 능력이다. 이지란과의 활쏘기 시합이나 구멍난 물동이를 화살로 막았다는 이야기 들이다. 이로 미루어 활쏘기 능력이 왕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6) 탐라( 耽 羅 )의 개국신화이자 제주도의 고( 高 ) 양( 良 : 梁 ) 부( 夫 ) 삼성( 三 姓 ) 씨족의 시조신화이기도 하다. 문자로 기록 된 것은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탐라지( 耽 羅 志 ) 영주지( 瀛 洲 志 ) 등인데, 내용 자체는 대동소이 하다. 한편으 로는 무가( 巫 歌 )나 전설로도 전승되고 있다.

20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7 다. 27) 비록 신화나 전설 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승전을 기원하는 제물로 활이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28) 1108년(예종 3)에 여진과의 전투를 앞두고 유향( 油 香 )과 궁검( 弓 劒 )을 서울 내 사원( 寺 院 )에 바치고 승전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29) 또 고구려 오회분 5호묘 벽회에 그려진 문지기(수문장)에게 활을 부여한 것은 무기로서의 활의 역할을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고구려사람들이 활을 수호( 守 護 )의 신물( 神 物 )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이는 이 활이 평범한 활이 아니라 신분이나 권위를 표명하는 신물( 信 物 )로 사용된 것인가 아닌 추측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활쏘기는 신적 존재나 영웅적 존재에 한정된 특별한 신화적 의미를 갖는 활동 이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가면서 활쏘기는 주몽의 사례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이한 존재의 표식 을 나타내는 것 보다는 개인적 자질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였다. 즉 신이한 존재여서 비범한 활쏘기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활쏘기 능력을 통해 비범한 존재로 인정받 는다. 작제건과 같은 경우, 그는 자신의 활쏘기 능력을 통하여 서해 용왕과 결합하고, 그럼으로 군왕의 조상이 되는 존재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개인적 능력의 측면이 강조되면 서, 더 이상 활쏘기에서 주몽신화처럼 활쏘기 주인공의 의사를 하늘에 전달하거나 신모와 같은 신적존재와 의사소통하는 종교적 매체의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다. 활쏘기는 단지 활쏘기 주인 공의 탁월한 활쏘기 능력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건국신화 주인공의 활쏘기는 궁극적으로 건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삼국 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2) 유물 속에 보이는 활 고려시대 활과 관련된 이른 기록은 송나라 사신 서긍( 徐 兢 )이 지은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 에 27) 이와 비슷한 사례는 무속신앙에서 신의 좌정처를 정하는 무가( 巫 歌 )에 자주 등장한다. 28)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 3년(1108) 4월. 29) 무기가 주술적 기원물로 쓰인 예는 고대부터 찾아 볼 수 있는데, 대개는 칼이 사용되었다. 김유신이 천관( 天 官 )에게 신령( 神 靈 )을 청하자 3일째 밤에 허성( 虛 星 )과 각성( 角 星 )의 두 별이 칼 끝에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어 칼을 통해 신령한 힘을 얻게 되고 그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믿음이 배어있다. 또한 삼국시대 칼이 다분히 벽사적 주술적 기능이 강해서 부장품으로 쓰인 예가 있다. 예를 들자면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비실용적 목검이나, 창원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단검과 함께 출토된 부채가 무속적 무구일 가능성이 있는 것, 김해 양동리 55호분에서 출토된 단검의 칼끝자루 장식에 방울이 내장되어 칼의 의기성( 儀 器 性 )과 함께 주술성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당이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휘두르는 신칼이 무구( 巫 具 )인 사실도 주목할만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2쪽)

21 18 학예지 제18집 궁전( 弓 箭 )의 제도는 형상이 간략하여 탄궁( 彈 弓 )과 같다. 몸집의 전 길이가 5척이며, 화살은 대[ 竹 ]를 사용하지 않고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더 짧고 작다. 고 한 것 30) 으로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다만 활은 동궁( 彤 弓 ) 장엄궁( 莊 嚴 弓 ) 세궁( 細 弓 )이 쓰였다는 소략한 기록이 보 이는 것에 비해 실제 사용에서는 쇠뇌가 더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그 이유는 쇠뇌는 큰 동작 없이 좁은 공간에서 시위를 노기에 걸기만 하면 상대를 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은폐, 엄폐시킨 가운데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수성작전과 매복작전을 운용하는데 장점이 있기 때 문이었다. 특히 고려는 여진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궁군이라던가 정노군( 精 弩 軍 )을 비롯 한 특수부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31) 그런 활용성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1032년(덕종 1) 3월 에 상사봉어( 尙 舍 奉 御 ) 박원작( 朴 元 綽 )이 수질노( 繡 質 弩 )와 팔우노( 八 牛 弩 )를, 1037년(덕종 6) 에는 수질구궁노( 繡 質 九 弓 弩 )를 개발했으며, 이후에도 천균노( 千 鈞 弩 )를 개발하기도 하는 등 무기의 개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32) 또 화살의 개량도 이뤄졌다. 고려말에 이르면 새롭게 편전( 片 箭 )과 화전( 火 箭 )이 등장하여 우왕 때 지리산 일대에서 아래에서 왜적을 맞아 싸울 때 유용하게 쓰인 것 33) 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활과 관련된 부서로 궁노도감( 弓 弩 都 監 ) 34), 궁전고( 弓 箭 庫 ) 35), 내궁전고( 內 弓 箭 庫 ) 36), 습사도감( 習 射 都 監 ) 37)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원간섭기 고려시대 활쏘기 문화 와 관련되어 특이한 것은 원나라에 파견한 궁전배( 弓 箭 陪 )이다. 이 조직 자체는 고려와 관계없 는 것으로, 단지 고려에서 선발하여 원나라에 파견한 사람이었다. 고려사 에 따르면 재상의 30) 궁전( 弓 箭 )의 제도는 형상이 간략하여 탄궁( 彈 弓 )과 같다. 몸집의 전 길이가 5척이며, 화살은 대[ 竹 ]를 사용하지 않고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더 짧고 작다. 화살을 쏠 때는 시위가 충분히 당겨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온 몸을 들어 쏘아 보내니, 화살이 비록 멀리 나가기는 해도 힘은 없다. 전문 수위( 殿 門 守 衛 )와 장내 기병( 仗 內 騎 兵 ) 및 중검랑장( 中 檢 郞 將 )이 모두 호창( 虎 韔 )에 살을 끼고 있으니, 이는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3 병기 ( 兵 器 ) 궁시( 弓 矢 ) 31) 박재광, 2009, 앞의 책, 339쪽. 수질구궁노에 대해서도 그 실체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팔우노와 유사한 쇠뇌라는 의견 도 있지만, 아홉 개의 쇠뇌를 연결하여 한꺼번에 발사하는 연노( 連 弩 )라는 의견도 있다. 32) 고려사절요 권4 덕종( 德 宗 ) 원년(1032) 3월; 덕종( 德 宗 ) 원년(1032) 10월; 정종( 靖 宗 ) 6년(1040) 10월. 그가 개발한 각종 쇠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수질노와 수질구궁노에서 수질이란 줌피에 수를 놓은 것 이며, 구궁노는 쇠뇌 아홉 개를 연결하여 연속 발사가 가능한 연노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 팔우노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중국의 삼궁 팔우상자노( 三 弓 八 牛 床 子 弩 )와 유사한 무기로 보인다. 이것은 발사시 여덟 마리의 소로 시위를 당겨야 할 만큼 거대하 고 강력한 기계식 쇠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의 쇠뇌는 실물이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발굴조사에서도 노기 일부만 발굴되는 실정에서 실제 모습을 재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박재광, 2009, 앞의 책, 341~342쪽) 33) 고려사절요 권30 신우1 신우 3년(1377), 대명 홍무 10년 5월. ; 고려사 권134 열전47 우왕 7년(1381) 4월. 34) 고려사 권34 세가34 충숙왕 4년 3월. 35) 고려사 권53 志 7 오행1 화 고종 21년(1234) 9월. 36) 고려사 권77 지31 백관2 제사도감각색 내궁전고 ; 권80 지34 식화3 문종30년, 인종조 갱정. 37) 고려사 권77 지31 백관2 제사도감각색 습사도감.

22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19 아들로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 원나라에 입시( 入 侍 )하게 한 사람 38) 을 말한다. 당시 권력자인 김방경( 金 方 慶 )의 아들인 대장군( 大 將 軍 ) 김흔( 金 忻 )이 우두머리가 되고, 원관( 元 瓘, 1247~1316) 이 부( 副 )가 되었다는 기록이 첫 등장이다. 근시 낭장( 近 侍 郞 將 ) 이우( 李 瑀 ), 궁전배 장군( 弓 箭 陪 將 軍 ) 허평( 許 評 ), 궁전배 낭장( 郞 將 ) 김심( 金 深 ) 설지충( 薛 之 忠 ) 왕유소( 王 維 紹 ) 39) 가 파견 된 것이 확인되며, 1289년(충렬왕 15)에 중원후( 中 原 侯 ) 왕온( 王 昷 )이 궁전배의 소임을 띠고 원나라로 갔으며, 40) 왕소유( 王 惟 紹 )도 충렬왕 때 낭장의 벼슬을 가지고 궁전배가 되었다. 41) 애초에 선발 자체를 재상의 자제로 한정하였고 중원후( 中 原 侯 ) 왕온( 王 昷 )도 왕족이었음을 고 려해 본다면 이 자리에 선발되는 것은 무예와 신분이 모두 충분한 조건에 맞아야 할 것이다. 활로 명성을 떨친 몽골-원나라에서도 인정할만큼 고려인의 활쏘기 실력이 우수했음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3) 활쏘기의 여러 형태 삼국시대의 기록에는 선사( 善 射 ), 관사( 觀 射 ), 열사( 閱 射 ) 라는 말들이 많이 등장하여 국가가 활쏘기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방식으로 권장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고려시 대에도 그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나갔다. 고려시대에도 왕이 왕의 활쏘기 관람은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군대 사열과 유희이다. 두 가지를 구분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으나 사열은 대부분 열사( 閱 射 )라고 표기되며, 특정한 장 소가 표기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나, 궁궐 안의 동정( 東 亭 ), 동지( 東 池 ), 창화문( 昌 化 門 )이나 같 은 전각, 혹은 넓은 구정( 毬 庭 )에서 이루어지며, 교외에서는 서교( 西 郊 )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장경사( 長 慶 寺 ) 등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연회나 포상이 따르 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관사( 觀 射 ), 연사( 燕 射 )라고 하며 연회 중에 이루어지거나, 연회가 뒤따라 오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 때는 여러 가지 물품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42) 왕은 보는 것 뿐 아니라 스스로 활을 쏘기도 하였다. 43) 직접적인 기사는 공민왕의 사례 뿐이 38) 원관묘지명( 元 瓘 墓 誌 銘 ). 39) 고려사 권30 세가30 충렬왕 12년(1286) 11월; 권104 열전17 제신 김주정 부 김심. 40) 고려사 권30 세가30 충렬왕 15년(1289) 12월. 41) 고려사 권125 열전38 간신 왕유소. 42)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1년(1167) 9월에는 자주색 비단을 내려주었고, 그 후에는 안장 얹은 말이나, 비단 등을 하사한 예가 있다, 43) 고려사 권39 세가39 공민왕 10년(1361) 12월과 권41 세가41 공민왕 14년(1365) 6월 기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3 20 학예지 제18집 지만, 2대왕인 혜종( 惠 宗 ), 7대왕 목종( 穆 宗 ), 11대왕 문종( 文 宗 )은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도 틀림없이 개인적으로 활쏘기를 수련하고 즐겼을 것이다. 그에 따라 백관들이 활쏘는 경우도 잦았다. 44) 기록상 활터 이야기가 명백하게 나오는 것은 1091년(선종 8) 8월에 호부 남쪽 행랑 빈터에 사장을 만들고 각 영의 군사들과 활을 배우는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연습 하게 하자는 도병마사의 건의를 선종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연습하는 장소는 동교( 東 郊 )나 서교( 西 郊 )에 따로 마련되었다. 활쏘기에는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관리선발기능도 있었다. 1069년(문종 23) 3월에 일품( 一 品 ) 별장( 別 將 )을 비롯한 교위( 校 尉 ), 대정( 隊 正 )을 궁과( 弓 科 )로 시험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45) 무인 선발을 궁과로 하는 것은 궁술이 무인의 역할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 이다. 실제로 고려는 중앙 관리에게 궁술을 연마하도록 하였고, 각 지방에서도 매월 활과 쇠뇌 를 익히도록 하였다. 1015년(현종 6)에도 무예를 시험하여 과등을 매긴 적이 있는데 그 무예과 목도 궁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국왕들은 궁술의 연마를 중요하게 여겼고, 문무백관이 모여 활쏘기를 했을 뿐 아니라 정기적인 사열을 통해 군사들의 활쏘기를 점검하였다. 46) 민간에서도 활쏘기 문화는 성행하였다. 도박놀음[ 博 戱 ]을 하면서 전물( 錢 物 )을 건 자는 각각 장 100으로 처벌한다. 그 장소를 제공한 주인 과, 출구( 出 九 ) 하거나 사람들을 화합하여 도박을 하게 한 자도 또한 장 100으로 처벌한다. 음식 내기 를 하거나, 활쏘기로 무예를 익히는 자[ 弓 射 習 武 藝 者 ]는 비록 전물을 걸었더라도 무죄이다. ( 고려사 권85 형법2 금령) 이 조문은 당나라 법령인 당률소의( 唐 律 疏 議 ) 권26 잡률( 雜 律 ) 박희도재물( 博 戱 賭 財 物 )에 수록된 법의( 法 義 ) 및 형량을 빌려온 것이지만, 고려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였던 법률이기 때문 에 법전에 등재되었던 것이다. 음식내기를 한 경우 전물을 걸었더라도 무죄라는 것은 그 내기 도박에 건 전물을 모두 음식을 내는데 썼다면 죄를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교의 장소로 활쏘 기 행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음식을 걸로 친목과 사교의 수단으로 활쏘기를 익힌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44) 고려사 권20 세가20 명종 11년(1181) 7월 기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45) 고려사 권75 지29 선거3 전주 문종 23년(1069) 3월. 46) 국사편찬위원회 편, 2007, 앞의 책, 88쪽

24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21 이렇게 활발했던 활쏘기는 원간섭기 들어서면서 일반인이 궁시를 비롯한 무기류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면서 점차 시들어갔고, 기마( 騎 馬 )를 금지하고, 습사장을 모두 없애게 되면서 점차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비록 활은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무기였지만 국가에서 하찮게 여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간섭기라는 시대적 특수 상황도 그러한 변동에 일조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간섭기가 끝난 후에도 활의 부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제는 성리학의 등장이라는 사상적 조류와 화약무기의 발명이라는 기술적 변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4. 맺음말 우리나라에서 활쏘기의 발달은 그 기원을 멀리 선사시대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는 기록이 없고, 화살촉 정도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기록이 남아있는 삼국 시대에 들어오면 우리는 수많은 영웅 설화 속에 등장하는 선사자( 善 射 者 )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를 보면서, 그리고 신라와 백제의 궁술 장려 기사들을 읽으 면서 궁술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유행하였고 발달하였는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그런 경향은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활쏘기를 즐겼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전통은 조선말까지 계속되었고 형태를 달리하여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설화에서 활쏘기는 주인공을 문화영웅으로, 또는 건국시조로 신성성과 영웅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전설에서는 신화의 연장선상에서 주인공의 왕재, 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기도 하고, 신화의 그림자를 벗어나 선사( 善 射 )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활쏘기 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갖고 있으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것의 축소와 확장이 거듭되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활쏘기의 기능은 수렵, 제의, 전쟁을 중심으로 한 것에서 수련과 놀이기능 으로 점차 옮겨갔다. 이는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활쏘기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는 한편, 화약 무기의 발명으로 활의 현실적 필요성이 축소된 결과이다. * 투고일 : 2011년 11월 2일 *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30일

25 22 학예지 제18집 국문초록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윤 성 재 중요한 원거리 무기인 활을 쏘는 것은 전쟁 중에 무기로서 사용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관리 선발이나, 친교의 수단, 예절 교육과 심신 수련의 한 방법으로도 활용되어져왔다. 우리나라에 서 활의 기원을 선사시대로부터 찾지만 화살촉과 같은 유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후 삼국시 대 수많은 영웅 설화 속에 등장하는 선사자( 善 射 者 )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구려의 무용총 벽 화의 수렵도를 보면서, 그리고 신라와 백제의 궁술 장려 기사들을 읽으면서 궁술이 얼마나 보 편적으로 유행하였는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그런 경향은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활쏘기를 즐겼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전통은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설화에서 활쏘기는 영웅 또는 건국시조인 주인공의 신성성과 영웅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 할을 하였다. 전설에서는 신화의 연장선상에서 주인공인 왕, 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 기도 하고, 신화의 그림자를 벗어나 활을 잘 쏘는 사람[선사( 善 射 )]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활쏘기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으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것의 축소와 확장이 거듭되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활쏘기의 기능은 수렵, 제의, 전쟁을 중심으로 한 것에서 수련 과 놀이 등 문화적인 것으로 점차 옮겨갔다. 이는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활쏘기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이 대두되는 한편, 화약무기의 발명으로 활의 현실적 필요성이 축소된 결과이다. * 주제어 : 활쏘기, 활, 활쏘기의 기능, 성리학, 화약무기

26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23 ABSTRACT Yoon-Sung Jae An important long ranged weapon bow had been used a weapon during the war, as well as management selection, or a means of communion, or a etiquette training and mental training. A bow had been used form the prehistoric age but remained artifacts such as arrowheads in korea. Archery were prevalent through the story of good bow shooter( 善 射 者 ), Koguryo`s frescos, Silla and Baekje`s promotion of archery in three Kingdoms period. This trend led many people have enjoyed archery in Goryeo period. This tradition has been connected today through Joseon period. Archery was very important for reveal of a protagonist`s the divinity and the heroism in the tale. Also Archery was important for reveal of king or general`s talent and good bow shooter( 善 射 者 ) in the folk tale. Archery has many social functions, but depending on age and circumstances, has been contracted or extended. The function of archery with the changing times has been gradually shifted from hunting, religious service and the war to such as training and playing. It was in addition to the acceptance of neo-confucianism( 性 理 學 ) emerged a new awareness for archery, also reduced the necessity of bow with the invention of gunpowder weapons. * key words : Archery, bow, good bow shooter, neo-confucianism

27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25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윤 훈 표* 목 차 1. 머리말 2. 전술의 변화에 따른 관 주도 활쏘기의 강화 와 대상층의 확대 1) 전술의 변화와 중앙에서의 활쏘기 강화 2) 외방에서의 강화와 대상층의 확대 3. 예비 병력의 확보와 연변 주민의 활쏘기 권 장책 4. 표준화된 규정의 제정과 제작의 통제 1) 표준 규정의 제정과 관리의 확대 2) 제작의 통제 5. 활쏘기의 국가 의례화 1) 대사례의 실시 2) 향사례 시행 6. 맺음말 1. 머리말 1) 활 1) 은 근대 이전 시대에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한정된 지역에 국한 되지 않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2)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아주 이른 시기부터 매우 중시되었다. 드디어 조선에 이르러서도 그런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아가 전기에는 병장기 로서의 위상이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굳건해지면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 현상이 발생하였 다. 3) 그것은 곧 그 시대의 상징적 모습이 되었다.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1) 많은 종류가 있는데 손으로 쏘는 활과 석궁으로 크게 구분된다(최진희, 2000, 국궁의 과학적 분석 학예지 7, 209 쪽). 석궁은 쇠뇌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작 기술이 거의 잊혀졌다(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 기획, 2004, 95쪽). 이에 본고에서는 손으로 쏘는 활만을 다루었다. 2) 김후, 2002, 활이 바꾼 세계사, 가람기획. 3) 이 문제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최근의 연구 성과가 주목된다. 정재성, 2011, 전통시대 활쏘기 문화의 특성 소고 무예연구 5-1. 여기서는 주로 근대 이전 활쏘기의 다양한 형태와 기법을 소개하면서 문화적 특성을 언급하였다. 반면 에 본고에서는 활쏘기 문화의 특징을 제도적인 측면으로 다루었다.

28 26 학예지 제18집 그것은 활쏘기를 장려함에 있어 국가 주도, 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시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유사한 양상이 벌어진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활의 실력에 의거한 무반과 금군을 포함한 전문 군사층의 선발 제도의 확립, 관 주도 활쏘기의 강화와 대상층의 확대, 예비 병력의 확보를 위한 연변 주민의 활쏘기 권장책 실시, 활과 화살, 그 쏘기에 관한 표준화된 규정의 제정과 제작의 통제, 그러한 정책들에 기반하여 활쏘기를 일대 국가적인 행사로 승격시켰던 의식화와 의례화 등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조처들 을 국가와 관이 앞장 서서 주도했다는 점이 전기 사회의 특징이었다. 이는 당시의 처했던 상황과 관련이 깊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성립했던 조선은 안으로 정치 적 안정을 위해 군사력의 강화가 필요했다. 한편 원명의 교체라든가 지역적 분규, 여러 종족간 의 격렬한 갈등과 충돌 등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이 곧 바로 영향을 미치면서 외환 ( 外 患 )의 증대로 나타났다. 내외에 걸쳐 국방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현안으로 등장하였다. 4) 이렇듯 방위력의 증대가 안팎에 걸친 중차대한 국정 과제 가 되었으며 이것은 곧 핵심 무기였던 활에 대한 관심 고조로 이어졌다. 그 위에 전략과 전술의 변화가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투가 행해짐에 따라 전략과 전술의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그것은 곧 활에 관련된 여러 사항들에도 반영되었다. 드디어 활에 관한 문제가 전략과 전술 변화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 관으로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입장에서 국가 주도, 관 중심으로 활쏘기에 관한 여러 조처들이 이루어졌 던 배경과 그 구체적인 모습 및 전개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 입각하여 조선 전기 사회의 활쏘기 문화의 특징을 이해하려고 한다. 2. 전술의 변화에 따른 관 주도 활쏘기의 강화와 대상층의 확대 1) 전술의 변화와 중앙에서의 활쏘기 강화 국초의 유명한 재상이었던 성석린( 成 石 璘 )은 무기와 장비가 견고하고 날카로우며 진형이 정 4) 尹 薰 杓, 2000, 朝 鮮 初 期 軍 制 改 革 의 방향과 그 성과 麗 末 鮮 初 軍 制 改 革 硏 究, 혜안.

29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27 제되고 분수( 分 數 )가 밝고 호령이 엄하며, 상벌이 적당하고 양식이 풍족하며, 모책( 謀 策 )을 좋 아하여 간첩을 쓰고 시일을 오래 끌며, 여러 길로 아울러 나가서 승리를 취하는 것은 중국사람 [ 華 人 ]의 장기이고, 말이 튼튼하고 활이 강하며, 양식을 가볍게 싸 가지고 날짜를 다투어 천시 ( 天 時 )를 타고 지리( 地 利 )를 헤아려서 재빨리 돌격하여 힘껏 싸워 승리를 취하는 것은 호인( 胡 人 )의 장기이고, 견고한 것을 의지하고 험한 것을 믿어 병법( 兵 法 )에 의하지 않고 깊고 험한 곳을 택하여 산성을 쌓아 늙은이와 어린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봉화를 들어 서로 응하며 샛길로 가만히 통하여 불의에 출격하여 승리를 취하는 것은 동방( 東 方 ) 사람 의 장기라고 했다. 5) 즉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요충지에 산성을 쌓고 들을 비우며 인구 를 집중시켜 튼튼하게 지키다가 기회를 틈타 기습하는 것이 우리 측에서 즐겨 썼던 전법이었 다. 이른바 청야수성( 淸 野 守 城 )의 전술이라 하겠다. 6) 성석린은 이미 고려말에 원수로 임명되어 실제 전투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7) 그러므로 그의 언급은 단순히 이론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언급했던 동방 사람의 장기가 당시 상황의 변화로 말미암아 더 이상 큰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 웠다. 우선 해안 지방으로부터 습격하여 극심한 피해를 주었던 왜구의 방어 전술로 청야수성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장기간 연해 지역을 방치했다가 피폐해지면서 농촌 경제와 농민 생활을 극도로 궁핍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8) 이는 고려왕조를 위기로 몰아넣은 요인이 되 었다. 민생 안정을 위해서는 우선 왜구부터 완전히 격퇴해야 했다. 그것 없이 연해 지역을 복구한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활을 최대한으로 활용 해야 했다. 왜인들은 칼을 쓰는데 능숙하나 활쏘기에는 약하였다. 9) 그들의 특기인 단병접전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이 유리한 위치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활의 사용이 필수 였다. 물론 이전부터 중요하게 여겼지만 처했던 상황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차원을 달리해야 했다. 그 다른 차원을 만들어내기 위해 국가 주도하의 관을 중심으로 활에 관한 제반 조치를 베풀어야 했다. 5) 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 갑술. 6) 성석린이 언급했던 동방 사람의 장기가 모든 시대에 어느 곳에서나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살았던 여말선초 시기의 청야수성에 입각한 전략 전술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7) 고려사 권117, 열전 30, 성석린( 成 石 璘 ). 8) 尹 薰 杓, 1997, 高 麗 末 偰 長 壽 의 築 城 論 韓 國 思 想 史 學 9, 55 60쪽. 9) 성종실록 권235, 성종 20년 12월 계사; 성종실록 권236, 성종 21년 1월 무오.

30 28 학예지 제18집 또 다른 당면 과제는 야인과의 충돌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그들과의 대결은 주로 북방 지역 에서 이루어졌다. 일시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벌어졌다. 10)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즈음에 상황이 변했다. 남방 지역의 사회경제적 문제, 즉 복구 작업의 지연 에 따라 경작지 부족과 상대적인 과잉 인구의 처리 문제 등이 대두되었다. 이 심각한 과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방의 영토 개척과 개간이 긴급했다. 11)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야인과 정면충돌하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 그 이상으로 심각했던 것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미묘함이었다. 조선왕조 성립의 도화선이 되었던 위화도 회군, 그것을 야기시켰던 요동 정벌과 철령위 설치 문제 등은 여전히 잠복된 불씨로 남아 있었다. 당시로서는 명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철령위 설치 등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명의 요동 정책, 야인 대책이 변하면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 해서는 북방의 야인을 확실하게 제압하고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조선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음 을 분명하게 각인시켜야 했다. 12) 과거처럼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이제 가끔씩 기습적으로 덮쳐오는 야인들을 쫓아내거나 적당히 달랜다던가. 선별적으로 받 아들이는 것만으로는 곤란하였다. 때로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그들의 소굴을 직접 공격하며 정말로 필요하다면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서 정착시켜야 했다. 13) 정면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성석린이 언급했던 바 호인의 장기인 튼튼한 말과 강한 활을 가지 고 재빨리 돌격해 오는 것부터 저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도 그들 이상으로 강한 활과 튼 튼한 말이 필요했다. 그것 없이 호인의 일종이었던 야인과 대적해서 이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14) 활, 말, 그리고 사격술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불가피하게 종전의 장기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저들의 주특기까지 흡수하여 강한 군대로 거듭나야 했다. 그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우리의 장기인 활을 막강한 무기로 키우는 일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일차로 군의 중추였던 무반과 전문 군사층을 선발하는데 활쏘기 실력을 10) 김구진, 2010, 조선시대 女 眞 에 대한 정책 白 山 學 報 ) 李 景 植, 1992, 朝 鮮 初 期 의 北 方 開 拓 과 農 業 開 發 歷 史 敎 育 ) 김순남, 2008, 조선초기의 국방대책의 수립과 시행 - 재상급 국방전문가의 활약을 중심으로 朝 鮮 時 代 史 學 報 ) 尹 薰 杓, 2005, 朝 鮮 前 期 北 方 開 拓 과 領 土 意 識 韓 國 史 硏 究 ) 당시 야인들이 갑옷과 투구도 쓰지 않고 열도 이루지 못하고 싸우나 활을 잘 쏘기 때문에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세 종실록 권16, 세종 4년 7월 계유).

31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29 우선시했다. 무반을 선발하는 무과는 이미 태조의 즉위 교서에서 강무( 講 武 )하는 법이라는 이 름으로 채택되었다. 주관 부서였던 훈련관( 訓 鍊 觀 )에서 무경칠서( 武 經 七 書 ) 와 사어( 射 御 )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등급을 정하 여 33명을 합격시켜 병조로 보내 서용에 대비하게 하였다. 15)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실시 되지 못했고 태종 2년(1402)에 비로소 실천에 옮겼다. 16) 이것이 최초로 실시된 무과였다. 17) 고시과목에 활쏘기가 포함되었던 것은 당연했는데 주목되는 점은 과락제( 科 落 制 )가 있었다 는 사실이었다. 목전( 木 箭 )과 철전( 鐵 箭 )에서 3발 중 1발 이상이 명중되어야 다음 과목을 치를 수 있었다. 반드시 기본기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18) 더불어 한 가지 기예만 숙 달돼서는 곤란하고 골고루 익혀야 했다. 대표적으로 무과의 최종 순위를 가리는 전시( 殿 試 )의 과목을 보면, 우선 서서 쏘는 보사( 步 射 )의 경우 원후( 遠 侯 )는 240보( 步 ), 중후( 中 侯 )는 180보, 근후( 近 侯 )는 80보로 나눴다. 여기에 말을 타고 쏘는 기사( 騎 射 )도 실시하였다. 19) 그러므로 좋 은 성적으로 합격하기 위해서는 활쏘기의 각종 자세를 모두 숙달해야 했다. 20) 비록 무반은 아니었지만 선발 시험을 거쳐 입속하는 특수 병종이 전기에는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군사층으로 숙위 임무를 맡았다. 갑사를 필두로 별시위, 친군위, 파적위, 내금 위, 내시위, 겸사복 등이 있었는데 목전, 편전, 철전, 기사, 기창 등이 시험 과목이었다. 21) 여기 서 주목되는 점은 신분이나 가문의 지위 등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실력, 특히 각종 활쏘기의 점수가 탁월한 사람이 보다 상급 병종에 입속할 수 있었다. 22) 완전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어쨌 든 올라갈 수 있는 확률은 높았다. 그러나 선발 시험은 요행이 작용할 수도 있었다. 설사 실력이 뛰어나 합격되었더라도 근무 중 연습을 게을리 하면 부실해질 것은 당연했다. 이에 임용 뒤에도 의무적으로 시험 보여 성적 에 승진하거나 퇴출하는 제도도 마련되었다. 23) 이렇듯 제도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갖춰진 것 15)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 7월 정미. 16)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1월 기축. 17) 尹 薰 杓, 1987, 朝 鮮 初 期 武 科 制 度 硏 究 學 林 9, 21쪽. 18) 沈 勝 求, 1989, 朝 鮮 初 期 武 科 制 度 北 岳 史 論 1, 41쪽. 19)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1월 신미. 20) 무과에서의 활쏘기 문제에 관해서는 심승구, 2000,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학예지 7을 참조할 것. 21) 李 成 茂, 1980, 兩 班 과 軍 役 朝 鮮 初 期 兩 班 硏 究, 一 潮 閣, 쪽. 22) 비록 일시적인 조치였으나 세조 6년에 병조의 건의로 취재( 取 才 )의 절목( 節 目 )이 복잡하다며 3등으로 단순하게 나누기 도 했다. 이때 1등으로 합격한 자는 내금위로 삼고, 2등은 갑사, 3등은 별시위로 삼았다( 세조실록 권20, 세조 6년 5월 을유). 23) 내금위 등에게 실시하는 연재( 鍊 才 )가 대표적인데 이는 평소에 단련한 것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 성적에 따라 승진과

32 30 학예지 제18집 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항상 활쏘기를 최상위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별한 사항이 요구된다. 우선 궁사, 즉 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확성, 치명성, 원사 능력, 신속성,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갖추게 해야 했다. 24) 동시에 야인이나 중국의 것 보다 우수한 강궁을 사용해야 했다. 이에 나무, 뿔, 힘줄과 접착제로 된 복합재료의 활을 쓰게 했다. 이 복합궁(합성궁)은 익숙해지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25) 이런 상태에서 만약 연습을 게을리 하거나 소 홀히 하면 즉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철두철미한 관리가 필요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국왕이 직접 나섰다는 점이 전기 사회의 특징이었다. 태종 때 군사들을 금원 등에서 활쏘기 연습을 시켰던 적이 있었다. 26) 그런데 세종은 사청( 射 廳 )을 아예 서장문 ( 西 墻 門 ) 안에 짓도록 명하고 입직했던 상 대호군, 삼군진무( 三 軍 鎭 撫 )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연 습하게 했다. 27) 대간은 서장문 안, 곧 창덕궁 서액( 西 掖 )에 활 연습장을 만든다는 것은 궁궐의 엄숙한 분위기를 해치는 일이며, 장사( 將 士 )들로 하여금 궐내에서 활을 쏘게 하는 것은 옳지 못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사들이 입직 근무를 마치면 항상 교장( 敎 場 )으로 나가서 오로지 활쏘기만 익히면 될 것인데 굳이 궐내에서 할 필요가 있느냐며 정지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세종은 정전( 正 殿 )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대간의 요청을 거부하며 강행하였다. 28) 이 에 대간들은 보다 강력하게 항의했다. 좌사간 박관 등이 상소하기를,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이미 잘 다스려져 있는 조정에 당하셨고 무사한 때에 거하셨는데도 무과를 설치하여 무사를 골라 뽑고, 사청을 설치하여 활 쏘는 것을 연습하 게 하되, 숙위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출번하면 사청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고, 입번하면 궁위( 宮 闈 ) 에서 연습하게 하시나, 궁위는 진실로 그러한 장소가 아닙니다. 예( 禮 )에서 천자가 장차 제사하려면 택( 澤 )에서 활쏘기를 연습한다. 고 일렀는데, 택이라는 것은 취사( 取 士 )하는 곳이라, 이미 택에서 쏘게 하고 그 뒤에 사궁( 射 宮 )에서 쏘게 하였으니, 진실로 택이나 사궁이 아니면 천자도 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군사들이 어찌 궁위에서 활쏘기를 연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군사들이 궁성 안에서 활쏘기를 파출이 결정되었다( 韓 㳓 劤 等, 1986, 譯 註 經 國 大 典 註 釋 篇,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쪽). 연재에 활쏘기가 당연 히 포함되었다. 24) 최진희, 2000, 국궁의 과학적 분석 학예지 7, 쪽. 25) 김형국, 2006, 활을 쏘다 - 고요함의 동학( 動 學 ), 국궁, 효형출판, 41쪽. 각궁의 경우 오래 사용해온 궁사라도 바꾼 새 활을 익히자면 석 달이 걸리며, 새 화살을 익히자면 열흘이 걸린다고 한다(위의 책, 215쪽). 26) 태종실록 권19, 태종 10년 2월 갑인; 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4월 기미. 27) 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2월 갑인. 28) 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2월 기미; 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2월 계해.

33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31 연습하는 것은 천자도 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군사들이 하고 있는 것이니 어찌 옳겠습니까? 이는 이른바 해서는 안 될 일을 오히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29) 위 상소에서 대간들은 평화로운 시절인데도 궁궐에서 군사들이 활쏘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예의 법도에도 어긋나는 일로써 문제가 심각하다며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굳이 궁궐에서 하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를 무릅쓰고 궁궐에서 연습시켰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요함을 확고 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였을 것이다. 활쏘기에 대해 군대뿐만 아니라 나라의 신민 ( 臣 民 ) 전체가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변방의 경보가 그치지 않아 무사를 장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 제부터 군사를 매일 50명씩 후원에서 인견하여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시험하되 만약 말 타는 것이 빠르고 능히 5발을 쏘아 적중하는 자에게 도( 到 ) 200을 주도록 했다. 30) 이를 계기로 후원 에서 활쏘기 구경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자리 잡았다. 31) 그리고 경성 내 사장( 射 場 ) 8곳을 설치하여 출번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근처에 모여 연습하게 했음에도 궁성 안에 2개소를 설치 해서 입번 군사들에게 연습하게 했다. 32) 세종 이후의 군주들도 그대로 계승하였다. 문종은 상중( 喪 中 )이라 안 된다는 대간의 만류에 도 거의 매일같이 서현정( 序 賢 亭 )이나 경회루에 나아가 관사( 觀 射 )하며 격려했다. 33) 즉위 전부 터 국방에 관심이 많았던 세조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 달 내에 조계( 朝 啓 )하는 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 자주 후원에서 관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대간의 비판에도 상관치 않았다. 34) 경회루에 사복( 司 僕 ) 이하 시위패( 侍 衛 牌 )에 이르기까지 불러서 활을 쏘게 했다. 그 리고 매양 입번 군사들도 활쏘기를 해서 숙달되도록 하라고 명했다. 35) 심지어 어린 나이에 갑 자기 왕위에 올랐던 성종도 3년 안에는 관사가 어렵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36) 무신을 자주 접견하지 못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매월마다 관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37) 바로 3일 29) 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3월 계사. 30) 세종실록 권74, 세종 18년 8월 경진. 31) 세종실록 권74, 세종 18년 8월 갑신. 32) 세종실록 권67, 세종 17년 1월 무인. 33) 문종실록 권3, 문종 즉위년 9월 계묘; 문종실록 권3, 문종 즉위년 9월 무오. 34) 세조실록 권13, 세조 4년 8월 정축. 35) 세조실록 권16, 세조 5년 4월 계유. 36) 성종실록 권3, 성종 1년 2월 기묘.

34 32 학예지 제18집 뒤 후원에 나아가 입직 겸사복 등 100명을 불러 관사하였다. 38) 상중임에도 중단하지 않고 계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무반을 포함한 숙위 군사들을 국왕이 후원에 불러 일상적으로 활쏘기를 실시했던 것은 숙련 을 넘어서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이미 선발된 뒤에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 되었음에도 국왕이 궁궐 안에서 친히 행했던 것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국가 적인 차원에서 활쏘기의 중요성을 과시하고 동시에 출세를 위해 무엇보다 많은 노력을 투자해 야 함을 의미했다. 2) 외방에서의 강화와 대상층의 확대 궁궐에서 무반과 숙위 군사에게 활을 쏘게 하고 그에 따라 포상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항상 틀 에 박힌 일로 인식되어 타성적인 것으로 떨어져 효과가 반감될 우려가 있다. 이런 경향에서 탈피하려면 대체할 사람을 미리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여타 군사들 가운데 활쏘기 실력이 뛰어 난 자를 발탁하는 통로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활쏘기 실력 겨룸 경쟁에 더 많은 사람들을 참가시켜서 언제라도 소홀히 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우선 일반 백성으로 의무적으로 군역을 부담하는 사람들이 주로 입속했던 시위패(뒤에 정병 으로 개칭), 영진군, 수군 등도 활쏘기를 연습시켜 성적이 우수하면 갑사 등으로 승격시키거나 산관직 등을 제수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실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서 입속을 기피하는 풍조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태종 8년(1408)에 큰 고을에는 총패( 摠 牌 ) 4 5명을, 작은 고을에는 2 3명을 두고서 군액 의 다과와 거리에 따라 나누어 정하여 매년 2월, 10월 한 달 동안에 창쓰는 법과 기사( 騎 射 ) 보 사( 步 射 )하는 법을 익히게 하고서 수령을 시켜 수시로 고찰하게 했다. 39) 하지만 이는 너무 막 연한 조처였는지 구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국경 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했던 함길도의 별패와 시위진군( 侍 衛 鎭 軍 )에 대해 춘추 중월( 春 秋 仲 月 ), 즉 2월과 10월에 각각 그 장기의 능부를 병마도절제사에게 보고하고, 병마도 37) 성종실록 권4, 성종 1년 3월 신묘. 38) 성종실록 권4, 성종 1년 3월 갑오. 39) 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7월 을축.

35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33 절제사는 다시 등급을 매겨 병조에 보고하되, 그 중에서 탁월한 자는 뽑아서 시위에 충당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권면하게 하였다. 40) 이는 함길도 군사를 특별히 우대하는 조치에 불과했다. 드디어 세종 때 전국에 걸쳐 정식으로 제도화되었다. 본월 초8일 본조( 本 曹 )의 수교( 受 敎 )에 외방 각관의 시위군, 영진에 소속된 수성군( 守 城 軍 )과 한량 으로서 자원하는 자 및 기선군( 騎 船 軍 ) 중에서 갑사에 속하기를 원하는 자는 매년 봄가을에 장전( 長 箭 ), 편전( 片 箭 ), 기사( 騎 射 )에 각기 3발씩 시험하여 모두 9발 가운데 3개 종목 모두 입격한 자를 선발 하되, 8, 9발을 상등으로, 6, 7발을 중등, 4, 5발을 하등으로 삼는다. 고 했습니다. 41) 이제 의무적으로 군역을 부담했던 자라도 활쏘기 실력이 뛰어나면 갑사로 올라가는 길이 생 겼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정례화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어서 정기적으로 활쏘기를 연습시킨 뒤 그 성적을 갑사로 올라가는데 반영하는 제도를 마 련하였다. 영진군이 쏜 수를 연말에 감사와 도절제사가 고찰하여 가장 많은 자의 10분의 1을 취하여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갑사를 보충할 때 비록 삼상( 三 上 )이 차지 못하였더라도 병조에 전달해 취재해서 서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당번 시위패는 각 사장으로 나누어 연습시키되 10분 의 1을 취하여 장부에 기록한 뒤, 다음 당번 때에도 이와 같이 하여 두 번을 합산하여 많은 자는 갑사 보충 취재할 때 편전 3발의 합격한 예에 준하여 계산하게 했다. 하지만 이때 선군에 게는 도( 到 )를 주었을 뿐이었다. 42) 하지만 갑사로 승격한다는 것은 위 규정의 10분의 1 등에서 보다시피 매우 힘들었다.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실제로 상당히 좁았다. 폭넓게 개방했을 경우에 생길지도 모르는 폐단을 우려했 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좁히는 것도 곤란했다. 이에 별도로 보충하는 방도가 필요했다. 갑사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혜택이 주어질 필요가 있었다. 세조 3년(1457)부터 도절제사와 처치사가 봄가을에 재주를 시험하되, 영진군은 180보에 화 살 2개가 똑바로 통과되며 기사로 5번 쏘아서 4번 이상 맞춘 자를 1등으로 삼고, 120보에 2개 가 맞고 기사로 5번 쏘아 3번 이상 맞춘 자를 2등, 100보에 1개가 맞고 기사로 5번 쏘아 2번 이상 맞춘 자를 3등으로 삼도록 했다. 선군은 180보에 화살 2개가 똑바로 통과하고 수로( 水 路 ) 40)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1월 갑자. 41)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1월 병술. 42) 세종실록 권118, 세종 29년 12월 계유.

36 34 학예지 제18집 의 어렵고 쉬운 것을 잘 알며 노를 잘 젓고 돛대를 달고 닻을 내리기를 잘 하는 사람은 1등으로 삼고, 120보에 2개가 맞고 배를 부리는 데 익숙한 자를 2등, 100보에 1개가 맞고 배를 부리는 데 익숙한 사람을 3등으로 삼되, 그 중에서 기사까지 아울러 시험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허락 하고 그 고하를 등급별로 매겨 보고하면, 영진군에게는 산관직( 散 官 職 )을 제수하고 선군은 해 령직( 海 領 職 )을 임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활쏘기 연습과 배를 부리는 일과 배 위의 장비의 허 실은 병조의 낭관이라든가 경차관을 보내 수시로 점검해서 만약 제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논죄하여 파직하도록 했다. 43) 국가로서는 산관직이나 해령직을 제수하는 편이 갑사에 임용하는 것 보다 아무래도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44) 그러므로 적당히 보상을 해주는 선에서 처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선군(수군)은 갈수록 천역화되면서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졌다. 이에 대를 이어 역을 승계하도록 하는 이른바 세전화( 世 傳 化 )가 단행되었다. 45)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 켜 전반적으로 더욱 부실해졌다. 그 중에서 특히 함선의 공격을 담당했던 사관( 射 官 )이 약화되 면서 활쏘기에 능한 자가 매우 적어졌다. 46) 위기를 느낀 나머지 대책을 내놓았는데 대신과 직 질이 높은 고관이 일로 내려갔을 때 활쏘기를 시험하되 그 중 탁월한 자는 겸사복으로 임용하 고 그 다음인 자는 일정 기간 요역을 면제해주는 복호를 허용하며 그 다음인 자는 면포 5필을 내리고 이름과 재품( 才 品 )을 보고하게 했다. 아울러 효과를 높이려고 휘하 수군 가운데 활쏘기 에 능한 자가 많고 적음을 따라 만호( 萬 戶 )와 첨사( 僉 使 )에게도 상과 벌을 내리도록 했다. 47) 수군의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탁월한 자에게는 갑사가 아닌 내금위와 함 께 최정예 금군이었던 겸사복으로 임용한다는 것을 내걸었다. 이는 대전속록 에도 기재되어 확고한 실천 의지를 보였으나 수군의 활쏘기 시험을 위해 고관을 보낸다는 것은 실용성이 떨어 짐으로 각도의 감사와 절도사가 평소 순행할 때 시험을 실시해 기록했다가 연말에 보고해서 상주거나 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48) 막상 법으로까지 규정해 놓았으나 그대로 실행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수군의 활쏘기가 증진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43) 세조실록 권6, 세조 3년 1월 신사. 44) 윤훈표, 2006, 朝 鮮 前 期 領 職 의 除 授 實 學 思 想 硏 究 ) 李 載 龒, 1970, 朝 鮮 前 期 의 水 軍 韓 國 史 硏 究 5. 46) 성종실록 권174, 성종 16년 1월 기해; 성종실록 권236, 성종 21년 1월 무인. 47) 성종실록 권257, 성종 22년 9월 경진. 48) 성종실록 권286, 성종 25년 1월 기해.

37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35 의무 병종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활쏘기를 통해 승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세조 5년 (1459)에 새로운 진법 체계를 구축함에 있어 지형을 고려할 때 기병 못지않게 보병도 중요한데 너무 부실하다며 보강을 서둘렀다. 이에 방패( 防 牌 ), 섭육십( 攝 六 十 ), 조례( 皂 隷 ), 나장( 螺 匠 ), 소유( 所 由 ), 갈도( 喝 道 ), 장수( 杖 首 ), 별군( 別 軍 ), 도부외( 都 府 外 ), 제원( 諸 員 ), 이전( 吏 典 )으로 응당 경중에서 종사( 從 仕 )해야 하는 사람들이 원하면 입속을 허락했다. 아울러 경외의 한량인 과 외방의 정수( 定 數 ) 외의 서원( 書 員 ), 일수( 日 守 ), 의학( 醫 學 ), 율학( 律 學 ), 하번경역인( 下 番 京 役 人 ) 가운데 경중은 한성부, 외방은 양계 이외의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건장하고 용감하여 시위에 대비할 만한 사람을 모집하여 도목( 都 目 )에 기록해서 병조에 보고하게 했다. 이들에 대해 놋쇠 그릇의 물이 마를 동안에 능히 270보를 달리는 사람, 두 손에 각각 50근의 물건을 쥐고 160보를 가는 사람, 100근 되는 활을 당기는 사람, 200보에서 화살 3개를 쏘아 1개를 맞 춘 사람, 180보에서 2개를 맞춘 사람 등의 5가지 재예 중에서 2개에 합격한 사람을 뽑아서 파 적위로 임용하게 했다. 그런데 무재( 武 才 )가 있어 갑사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관( 去 官 )을 논할 것 없이 기사와 보사를 시험 보여 화살 10개를 다 맞춘 사람은 이속을 허락하며 품계에 따라 도목에 올리도록 했다. 49) 이로써 경외의 여러 국역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활쏘기를 잘하면 파적위를 거쳐 갑사가 될 수 있었다. 결코 쉽지 않고 경쟁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나 어쨌든 실력만 있으면 신역에서 벗어 나 갑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끝으로 무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던 세조 때에는 노비 중에서 활쏘기에 능한 자도 양인 신분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공사 천구( 公 私 賤 口 ) 중에서 100근의 활을 당기고 놋쇠 그릇의 물 이 마를 동안에 270보를 달리든지, 혹은 100근의 활을 당기고 200보를 보사하여 화살 3개 중에 1개를 맞힌 사람은 장용대( 壯 勇 隊 )로 뽑도록 했다. 이들은 거관한 뒤 공천은 자신은 면역하고 사천은 본래의 주인에게 대신할 자를 주고서 자신은 면역하게 했다. 50) 이어서 천인으로 강궁( 强 弓 ) 120근을 당기는 자는 만강대( 彎 强 隊 )에 소속시키고 6품에서 거 관하도록 하는데 근무 일수와 관사할 때 보사와 기사의 성적이 우수하여 사( 仕 ) 150을 채운 자는 장용대에 소속시키되 7품에서 거관하도록 했다. 해마다 맞춘 수가 가장 많은 자를 가려서 거관하여 종량( 從 良 )을 허용했다. 51) 49) 세조실록 권17, 세조 5년 9월 갑오. 50) 세조실록 권17, 세조 5년 9월 정유. 51)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4월 기해.

38 36 학예지 제18집 그러나 장용대는 세조 사후에 정책이 변경되면서 장용위로 개칭되고 양인 병종으로 바뀌었 다. 그로 인해 천인의 면천로서의 기능도 의미를 상실했다 52) 활쏘기 실력이 출중하면 의무 병종에 속했거나 각종 국역을 부담하였던 사람들도 승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공사 천인들은 면천할 수도 있었다. 좁은 길이기 때문 에 결코 개방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비록 신분이나 지위가 낮더라도 활쏘기 실력을 향상시키려 노력하게 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나아가 그것이 곧 경쟁으로 이어져 소 홀히 여기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되었다. 3. 예비 병력의 확보와 연변 주민의 활쏘기 권장책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들어와서도 병력이 충분지 않았다. 더불어 예비 병력마 저 부족했다. 이에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군역을 지지 않은 여러 인정으로 편제된 잡색군을 설치하였다. 53) 이들에게도 의무적으로 무기를 갖추게 했는데 일정 수에 대해서는 활을 준비시 켰다. 54) 하지만 각자의 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훈련에 충실하기 어려웠으며 자 연히 실전 능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별도의 보완 대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중국 당나라 때 택로절도사였던 이포진( 李 抱 眞 )이 백성들에게 활을 나눠주고 농한기 에 익히게 하며 연말에 도시( 都 試 )를 실시해서 상벌을 내렸더니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 야기가 널리 전해졌다. 55)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가 위정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드디어 북방 영토 확장에 열중했던 세종 때 연변 주민들에게 활쏘기를 연습시키고 그 성적에 따라 포상을 실시하는 방안을 실행했다. 먼저 함길도와 평안도의 연변 고을들은 야인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변을 당할 염려가 많다며 주민에게 활쏘기, 말달리기를 연습시켜 대비하게 했다. 남자 13세 이상에게 모두 활을 익히게 하고 3년에 1번씩 그 재주의 고하를 정하되, 보사와 기 사 및 기창을 시험하여 3가지에 능한 자를 1등, 2가지에 능한 자 2등, 1가지에 능한 자를 3등으 로 하고, 고을마다 각각 1등 3명, 2등 10명, 3등 30명을 뽑도록 했다. 그리고 1등에게는 토관을 52) 정다함, 2006, 조선 초기 壯 勇 隊 설치 배경과 운영 실태 韓 國 史 學 報 ) 한희숙, 1991, 조선초기의 雜 色 軍 韓 國 學 硏 究 1. 54) 세종실록 권69, 세종 17년 8월 무신; 세종실록 권69, 세종 17년 9월 기사. 55)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4월 임신.

39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37 제수하고, 2등과 3등에게는 면포와 쌀을 적당히 주도록 했으며, 향리, 역리, 공사 천인에게는 1등은 신역을 면제하고 나머지는 위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56) 이윽고 상으로 내려줄 면포를 3년마다 100필씩 수송하게 했다. 57) 그러나 얼마 뒤 병조로부터 이는 용도( 用 度 )만 허비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상을 주는 폐단이 생기며 공사천을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고 면역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활쏘기 연습에서 매 3년마다 봄가을에 등급을 매겨 3년을 통틀어 상등이 많은 사람은 관직을 주고 향리 등은 면포와 쌀을 주되, 3년에 한해 복호하며 2, 3등은 시상하지 않도록 했다. 58) 그 뒤 약간 더 정비하여 해마다 추수후( 秋 收 後 )와 추종전( 秋 種 前 )에 연습시키되 불시로 검찰하 고, 매 3년마다 1차례씩 도절제사가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본 고을의 장수와 함께 시험해서 1등 은 각각 토관과 면포 5필, 2등은 면포 3필을 주도록 했다. 59) 실시 초기에 비해 포상의 내용이 대폭적으로 후퇴했지만 주민들에게 활쏘기 연습을 시키되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포상하는 방식을 운영하는 것으로써 권장하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유사시에 주민을 예비 병력으로 활용하려는 정책에서 추진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왜구의 침입이 우려되었던 연해 지역의 주민 모두에게 대오를 지어 창 칼 활 등의 무기 가운데 원하는 것을 가지고 연습하다가 농사를 지으러 오갈 때에는 반드시 휴대하여 만약 을 대비하게 했다. 60) 이 역시 조금 뒤 좀 더 정비해서 대오 조직을 강화하고 감찰을 철저히 하도록 했다. 61) 하지면 연해 지역민에 대해서는 양계의 연변 고을 주민들과 달리 활쏘기를 연습시키고 그 성적에 따라 상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 지역의 자위 조직을 강화해서 거주민을 보호 하는 조치에 국한했던 것 같다. 그 뒤에도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정밀하게 선발하여 이름을 기 록해서 기용되기를 기다리게 하는 제도가 양계 뿐 아니라 다른 도에도 모두 시행할 만하다며 논의하기도 했다. 62)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작업들이 꾸준하게 시도되기는 했을 것이다. 56) 세종실록 권60, 세종 15년 6월 기해. 57) 세종실록 권60, 세종 15년 6월 기해. 58) 세종실록 권69, 세종 17년 8월 갑인. 59) 세종실록 권69, 세종 17년 9월 을유. 60) 세종실록 권95, 세종 24년 1월 기사. 61) 세종실록 권97, 세종 24년 8월 신묘. 62) 성종실록 권250, 성종 22년 2월 갑인.

40 38 학예지 제18집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지가 궁금하다. 세조는 즉위 전부터 활 쏘는 사람[ 控 弦 ] 백만을 길러 오랑캐[ 夷 狄 ]를 제압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63) 그의 재위 시절에 중요한 정책 입안자 가운데 하나였던 양성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대저 병사는 정예함을 귀하게 여기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인민은 무려 100만 호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 쏘는 사람이 30만 명이고 정병( 精 兵 )이 10만 명이며, 용사( 勇 士 )가 3만 명입니다. 64) 위에서 양성지가 언급했던 숫자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당시 그 정도 가 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세조의 기약이라든가 양성지가 지녔던 위상으로 미루어 보아 터무니없는 내용을 언급하 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 남짓은 되는 것으로 짐작하고서 좀 더 정비할 필요가 있음을 지 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그렇다면 100만 호에서 30만 명이 일정 정도의 수준으로 활을 쏘았다는 것인데 전체적 으로 그 비율이 높았다고 생각된다. 국가 주도, 관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활쏘기를 권장함으로 써 그만큼의 수를 기록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예비 병력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데 그 기준이 활쏘기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4. 표준화된 규정의 제정과 제작의 통제 1) 표준 규정의 제정과 관리의 확대 활쏘기 연습에서 중국과 다른 점 중의 하나는 교장( 敎 場 )에서 실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한 면에 긴 담을 쌓고 긴 담 안에는 삼면의 짧은 담을 쌓으며 그 앞을 비게 하여 열오( 閱 伍 )라고 불렀다. 열오마다 파자( 把 子 )라는 표적[ 射 的 ]을 설치했는데 거리가 120보이고 열오 좌우 거리는 각각 10보였다. 65) 조선에서도 이것의 수용 문제를 논의했는데 우리 군사는 63) 단종실록 권10, 단종 2년 1월 무오. 64) 세조실록 권40, 세조 12년 11월 경오. 65) 성종실록 권201, 성종 18년 3월 신해.

41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39 젊어서부터 교장에서 쏘는 법을 익히지 않았고 중국과 같은 평원이 없어 곤란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66) 활은 개인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병기 가운데 하나였고 쏘는 연습도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었다. 그런데 국가 주도, 관 중심으로 권장하는 경향이 거세지고 더욱이 그 실력에 따라 무반이 나 전문 군사로 임용되거나 승진, 퇴출됨에 따라 모든 면에서 공정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활 화살, 표적, 각각의 거리, 그것을 측정하는 척도 등이 전국에 걸쳐 표준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일률적으로 수치화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돼야 모두가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 이고 결과에 승복하게 된다. 일찍이 세종 때 총제를 역임했던 박초는 중앙과 외방에서 활쏘기 연습하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에 따라 도수( 度 數 )를 자로 재서[ 尺 量 ] 푯말[ 堠 ]를 쌓고 흰 칠할 것을 건의하였다. 67) 아마도 그 이전에는 연습할 때 형편에 맞게 임의로 만들어서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적에 의거한 선발 기능이 강화되고 관직 제수나 심지어 신분 상승까지 가능해지면서 상황이 변했다. 연습할 때부터 철저히 규격화된 환경에서 표준화된 수치의 것을 가지고 행해야 실제 시험에서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당시의 전개 방향으로 말미암아 일률적으로 표준화된 수치 규정이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건상 중국처럼 교장을 설치하기 어렵다면 그 대신 정밀한 측량에 의해 정해진 표적 등을 세워 연습하고 시험보아야 했다. 전국에 걸쳐 표준화된 규정이 만들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에 대한 관리 감독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했다. 담당자들이 규정에 맞게 실시하고 있는지, 고 의나 실수로 잘못, 부정, 불법 등을 저지르지 않는지를 모두 세밀하게 살펴야 했다. 그 결과 활쏘기와 관련하여 여러 방면에서 다수의 규정과 관리 감독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먼저 무과를 비롯한 각종 취재 시험, 연습 성적에 의거한 승진, 퇴출 등의 활쏘기 관련의 각종 규정들이 상세하게 정리되었다. 그 전개 추이를 가장 중요하며 미묘했던 것 가운데 하나 였던 화살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세종 7년(1425) 훈련관 등의 건의에 따라 목시( 木 矢 ) 의 길고 짧은 것을 정하였는데, 150보를 쏠 때 긴 것은 보수척( 步 數 尺 )으로 3척 8촌, 그 다음이 3척 6촌, 짧은 것이 3척 4촌으로, 240보를 쏠 때 긴 것이 3척 5촌, 그 다음이 3척 4촌 3푼, 짧은 것은 3척 4촌으로 하고서 상기한 목시 중 짧은 것은 사용을 금하였다. 68) 66) 성종실록 권201, 성종 18년 3월 신해. 67) 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2월 병술. 68) 세종실록 권27, 세종 7년 2월 경술.

42 40 학예지 제18집 하지만 무예를 연마함은 적을 막기 위함인데 공적이나 사적으로 활쏘기를 연습하는데 나무 살촉[ 木 鏃 矢 ]를 숭상하므로 막상 싸움에서 쇠살촉[ 鐵 矢 ]를 쏠 수 있는 자가 적어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이에 앞으로는 경외의 취재와 평상시 연습에서 240보는 예전대 로 나무살촉을 쓰되, 다만 그 제도를 마땅히 8전( 錢 ) 무게의 화살로 고쳐 쓰고, 180보 이하는 쇠살촉을 병행하며 그에 따른 수치를 정하고 점수를 높게 주도록 규정을 고쳤다. 69) 그러나 시 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다음과 같이 개정했다.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에 의거해 아뢰기를 철전( 鐵 箭 )에 대해 단지 가볍고 무거운 것만 논하 고 처음부터 장단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취재자가 먼저 단단한 나무를 써 살대의 끝에 꽂고 그 다음에 철촉을 꽂는데 쌀이나 콩알 같이 작게 만들었음에도 철전으로 간주하여 점수를 배로 주니 입법한 본래의 뜻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이후로는 군기감에서 주척( 周 尺 )을 사용하여 철촉을 만들되 240보는 1촌 5푼, 180보는 2촌, 80보는 2촌 5푼으로 정하고서 훈련관에 보내 모든 취재와 무과를 볼 때 사용하여 요행을 막으소서.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70) 위에 의하면 말이 쇠살촉이지 실제로는 나무살촉과 다름이 없는 것이 만들어져 쓰이는 사태 가 벌어졌다. 이에 수치를 새로 정하고 군기감에서 정밀하게 제작하여 지급해서 부정 행위를 근절하도록 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다시 문제가 되었으니 화살촉의 장단을 촌, 푼의 단위로 상세하게 정하는 것은 구집( 拘 執 ), 즉 얽어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종전대로 할 것을 지시하였다. 71) 하지만 다 시 일이 생겼다. 즉 군기감에서 만든 철전이 정밀하지 못하여 말썽을 일으키자 이제 모든 시취 에 사철전( 私 鐵 箭 )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되, 그 길이와 무게는 정식( 定 式 )에 의거하도록 했 다. 72) 이로 말미암아 철전의 길이와 무게에 관한 규정이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에 수록되 지 않았다. 73) 즉 법으로 정해놓지 않았다. 이에 무사들이 다투어 멀리 쏘려고 대나무 가운데 가늘고 가벼운 것을 택하여 화살을 만들어 사용해서 진정한 실력 겨루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69) 세종실록 권94, 세종 23년 10월 정묘. 70) 단종실록 권5, 단종 1년 3월 임술. 71) 단종실록 권8, 단종 1년 10월 정미. 72) 단종실록 권12, 단종 2년 10월 기묘. 73) 성종실록 권238, 성종 21년 3월 기묘.

43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41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예할 때에는 화살의 무겁고 가벼운 것까지 재서 쏘게 했다. 74) 지금까지 화살을 통해 그 전개 과정을 대충 살펴보았듯이 표준화된 수치 규정을 만들어 관리 하고 운영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들을 재차 처리하고자 또 다른 조항을 제정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관리 감독에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관련 규정이나 조항, 정식 등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부담 거리가 늘었는데 이것이 전기 사회에서 활 쏘기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이 되었다. 2) 제작의 통제 활쏘기 관련 규정이나 정식 등이 늘어나면서 제작에 대한 간섭과 통제도 강화되었다. 더구나 주변 지역에 비해 성능 좋은 활을 갖추고자 특별히 복합 재료로 만든 복합궁(합성궁)을 주로 사용하게 했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관여 강도를 높이는 작용을 했다. 즉 활과 화살을 만드는 데 나무 이외에 뿔, 힘줄, 그리고 접착제 등이 필요했으나 당시 조선의 실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우선 뿔부터, 이는 주로 쇠뿔을 사용했는데 늘 부족했기 때문에 명나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75) 병기의 재료를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자체 조달을 꾀해야 했다. 하지만 농업이 기간 산업이었던 관계로 소와 말을 매우 소중히 여겨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76) 그러므로 민간 차원에서는 쇠뿔이나 주로 소로부터 채취되었던 힘줄 77) 등을 아무데서나 쉽게 얻기가 힘들었다. 또한 비교적 용이하게 구했을 것 으로 생각되는 나무의 경우에도 당시 지역적으로 분포하는 양상이 달라서 종류에 따라서는 채 취가 곤란한 곳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화살의 주재료였던 전죽( 箭 竹 )은 황해도와 양계 등지에 서는 초창기에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부 지방에서 채취하여 보내주기도 했다. 78) 접착제로 많이 쓰였던 어교( 魚 膠 )가 함길도에서는 희소하였던 관계로 각궁을 만들기 어려웠다. 79) 74) 성종실록 권239, 성종 21년 4월 병오. 75) 우다가와 다케히사, 2000, 조선시대 활의 제작과 궁재( 弓 材 )의 확보 학예지 7, 113쪽. 76) 자기의 소와 말을 몰래 도살한 자나 타인의 소와 말을 고의로 죽인 자는 그 당시 형법이었던 대명률 의 재살우마조( 宰 殺 牛 馬 條 )에 의거하여 장형( 杖 刑 ) 100의 처벌을 받았다(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편, 1993, 경제육전집록, 다은, 쪽). 77) 민승기, 앞의 책, 43쪽. 78) 우다가와 다케히사, 앞의 논문, 쪽. 79) 세조실록 권23, 세조 7년 2월 계미.

44 42 학예지 제18집 재료 구입부터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복합궁, 즉 우리 식의 각궁을 제작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제작 과장이 복잡했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의 솜씨 또한 크게 작용하였다. 80) 따라서 양적으로 한꺼번에 많은 양을 제조하는 일이 어려웠으며 질적으로도 차이가 상당히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활을 휴대해야 하는 자들에게도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구비하기가 힘들어 질이 떨어지거나 조금 손상이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중심적인 무기였던 활과 화살의 배치 상태가 군사들 사이에 서 들쑥날쑥한다는 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일례로 세종 때 6진 개척에 공이 컸던 김종서가 비변책을 올리면서 칼에 비해 더욱 요긴했던 각궁의 경우 함길도의 북청 이남에는 만드는 자가 드물고 단천 이북에는 조금 많았던 관계로 북청 이북의 군사들이 지닌 것에는 불량품이 많지 않았으나 홍원 이남의 군사가 가진 것은 대 개 불량품이라고 했다. 이에 함흥 영흥 길주 경성의 네 계수관에 조궁소( 造 弓 所 )를 설치하고 민 간에서 사고로 죽은 소와 말의 뿔과 힘줄을 거두어 견고하고 치밀하게 만들어 군사에게만 팔아 서 그 이익을 거두게 하고, 부러진 활을 수리하기 원하는 자도 들어주어 그 수리한 것의 다소에 따라 역시 이익을 거두어 모두 활 만드는 소용에 쓰도록 하는 것을 영구히 항식으로 삼으면 좋은 활이 많아질 것이라고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는데 미미한 수리에는 공전을 받지 않도록 했다. 81) 하지만 부실한 것은 함길도 일부 지방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다시 김종서는 하삼도는 땅이 넓고 인구가 조밀해서 군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할 것 같으나, 건장한 말은 항상 적고 갑주 는 견고하지 못하며 활과 화살도 튼튼하거나 예리하지 못하고 목궁을 가진 자가 10에 7, 8이나 되고 있으며 다른 지방도 대개 비슷한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82) 이때 김종서의 지적 가운데 목 궁이 10에 7, 8이나 된다는 것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종 때 시위 군사가 여름철 장마 때를 당해 모두 목궁을 휴대하고 있어서 불편하다며 녹각 궁( 鹿 角 弓 ) 83) 으로 바꿔 차게 하되, 갖출 수 없는 자들은 마디가 긴 편죽( 片 竹 )과 단단하고 질긴 유목( 柔 木 )으로 각궁 모양으로 만들어 칠을 해서 차게 하고, 각도의 시위패, 영진군, 선군사관, 80) 유세현, 2000, 우리나라의 궁장 시장에 대한 보고 학예지 7. 81) 세종실록 권88, 세종 22년 3월 정미. 82) 세종실록 권117, 세종 29년 7월 정사. 83) 물소뿔 대신 사슴뿔을 활의 안쪽에 대서 만든 것이다(민승기, 앞의 책, 46쪽).

45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43 양계( 兩 界 )의 정군( 正 軍 )도 점차 서서히 제조하여 휴대하게 했다. 84) 비가 오거나 습해지면 접착제인 어교가 풀어져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85) 목궁을 휴대했다 고 볼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가세가 충실했던 내금위를 제외한 갑사, 별시위, 충순위, 충의 위와 같은 병종들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자연히 그 밑의 시위패 이하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기한을 두고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되 불가능한 자는 목궁 휴대를 당분 간 허용하였다 86) 사실상 장마는 핑계일 뿐 각궁을 구비하는 것이 힘든 군사들이 많았다. 평화시에는 각궁과 목궁을 자신의 처지에 맡게 각자 휴대하게 하는 것도 상관이 없겠으나 전시라면 매우 큰 문제가 되었다. 국가가 나서야 했다. 중앙의 군기감만으로는 곤란했기 때문 에 1453년(단종 1)에 이르러 전라 경상 충청 강원도 등의 제도에 도회소( 都 會 所 )를 설정하여 매 년 일정액의 각궁, 장편전( 長 片 箭 ), 궁대( 弓 帒 ), 나도통아( 羅 韜 筒 兒 ) 등을 제작하도록 했다. 물 론 이전부터 실시했으나 간혹 지나치게 수량이 많아 민폐를 끼쳤기 때문에 새롭게 정비했 다. 87) 군비 확장에 관심이 컸던 세조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제작하는 수량을 늘리려고 했 다. 하지만 중국에서 수입하는 양을 늘리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대안을 강구해야 했다. 이에 자신이 항상 쓰는 향각궁( 鄕 角 弓 )이 매우 좋기 때문에 당각궁( 唐 角 弓 )은 필요 없다고 역설하였 다. 그리고 중앙에서 내려 보내는 것을 모방하여 제조하라고 각도에 지시하였다. 88) 한편 하삼 도 감사에게 뿔과 힘줄이 활 제조에 긴요하므로 3, 6, 9, 12월에 죽은 소와 말의 뿔과 힘줄의 숫자를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며 제주도와 연해 주현의 쇠뿔은 품질이 뛰어나므로 많 이 구해서 보내라고 명했다. 89) 이윽고 세조 12년(1466)에 군기시를 포함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주요 고을에 향각궁, 녹각궁 을 위시한 여러 병기의 제작량을 다시 정하여 공포하였다. 90) 전과 다른 점은 향각궁이라고 했 던 것과 황해 함길 평안도까지 확대하면서 그 수치를 크게 늘렸다는 사실이다. 너무 늘였던 관 계로 백성들의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자 최측근이었던 양성지조차 심각하다며 제거할 것을 건 84) 문종실록 권2, 문종 즉위년 7월 경오. 85) 민승기, 앞의 책, 44쪽. 86) 문종실록 권9, 문종 1년 8월 경오. 87) 단종실록 권6, 단종 1년 6월 갑오. 88) 세조실록 권9, 세조 3년 10월 갑인. 89) 세조실록 권20, 세조 6년 5월 기축. 90) 세조실록 권39, 세조 12년 7월 신사.

46 44 학예지 제18집 의하였다. 91) 이시애의 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의식했는지 세조는 단지 한 해만 활은 반으 로, 화살은 3분의 1로 감축하도록 했다. 92) 잠깐 동안 줄였다가 곧 바로 원상 복구하려는 것이 었다. 세조 사후에 다시 양성지가 활을 공납하는 것을 중지하고 각자 준비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 다. 93) 마침내 성종 즉위 직후에 섭정을 하던 대왕대비가 다시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신숙주가 아뢰기를, 활 하나에 거의 3, 4마리 소와 말의 힘줄이 소요되는데 지금 공납해야 하는 활[ 貢 弓 ]의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활 값이 매우 비싸 군사들이 또한 이것을 갖추기 어려우니 임시로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그것이 폐단이 있다면 비록 영구히 없애더라도 좋 을 것이니 원상( 院 相 )은 그것을 의논하여 아뢰라. 라고 하였다. 94) 신숙주의 주장이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해도 당시 활의 제조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농사짓는데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던 소와 말을 활의 제조를 위해 대량으로 희생시 킨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외방에서 공납하는 것이 크게 줄었던 것 같다. 그 뒤 군사들이 스스로 갖추도록 했다. 95) 하지만 양계 사람들은 스스로 장만할 수 없다며 이따금 들여보내서 골고루 사졸들에게 나눠주는 문제를 검토하였 다. 96) 일시적 너무 지나치게 늘렸다가 극심한 민폐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 로 생산이 증가함으로써 군사들이 보유하는 것이나 무기고에 저장하는 것 등이 증대하였을 것 이다. 자연히 활쏘기가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각궁의 특성상 제조와 관리에 따른 재정의 증액이나 민간의 부담 증가도 상당했다. 더구나 기간 산업인 농업을 진흥하기 위해 전 력을 다하는데 활의 제조를 위해 소와 말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힘들었 다. 91) 세조실록 권46, 세조 14년 6월 병오. 92) 세조실록 권46, 세조 14년 6월 경술. 93) 예종실록 권6, 예종 1년 6월 신사. 94) 성종실록 권2, 성종 1년 1월 병술. 95) 성종실록 권225, 성종 20년 2월 계묘. 96) 성종실록 권250, 성종 22년 2월 갑인.

47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활쏘기의 국가 의례화 1) 대사례의 실시 조선 전기 사회 내내 활쏘기 문화를 단지 병사들의 숙련도를 높이고 실력 있는 무반을 발탁 하여 양성하며 나아가 군사력의 증강시키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으려 했다. 일시적으로나마 평 화스러운 시절을 접하면 스스로 약화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항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활쏘기 자체를 국가적인 의식이나 의례의 수준 으로 격상시켜야 했다. 이것을 통해 위아래의 모든 사람들이 늘 경각심을 갖고서 활쏘기를 주 시하도록 했다. 조선에 들어와서 활쏘기 문화를 국가적인 의식, 의례로 만든 대표적 사례가 대사례( 大 射 禮 ) 와 향사례( 鄕 射 禮 )였다. 전자는 원래 국가의 양대사, 즉 제사( 祭 祀 )와 융병( 戎 兵 ) 가운데 하나 인 제사를 지내야 할 때에 그 참석자 선발을 위해서 시행한 의례였으며 나아가 위정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활쏘기란 쏘는 사람의 예악의 수준을 가늠하고 덕행을 살피는 기준 이었기 때문이다. 97) 후자는 전자가 중앙에서 개최하는데 반하여 외방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원래 지방 행정 담당자가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국왕에게 천거할 때 그 선택을 위해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98) 대사례, 큰 활쏘기 의식은 이미 태종 때부터 그 시행이 검토되었다. 정식 의례로 정비되었던 것은 세종 때였다. 오례의( 五 禮 儀 )를 제정하면서 군례( 軍 禮 )의 하나로 사우사단의( 射 于 射 壇 儀 ) 즉 왕이 사단에서 활 쏘는 의식과 관사우사단의( 觀 射 于 射 壇 儀 ) 왕이 활쏘기를 관람하는 의식을 제정하였다. 이때 중국 송나라의 가례( 嘉 禮 )였던 대사례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당나라의 군례에 의거해서 만들었는데, 조선의 문약성을 보강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다만 세종 때에는 의례로 서 완성되었을 뿐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았다. 99) 실천에 옮겨진 것은 성종 때였다. 동왕 5년(1474)에 사우사단의와 관사우사단의가 아닌 대사 례라는 명칭으로 국조오례의 의 군례 가운데 하나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동왕 8년(1477)에 처 음 실시되었다. 바로 한 해 전에 친정( 親 政 )을 위해 원상제( 院 相 制 )를 폐지하고 정희왕후가 수렴 97) 姜 信 曄, 2001, 朝 鮮 時 代 大 射 禮 의 施 行 과 그 運 營 - 大 射 禮 儀 軌 를 중심으로 - 朝 鮮 時 代 史 學 報 16, 1쪽. 98) 금장태, 2000, 士 林 共 同 體 와 선비 儀 禮 종교와 문화 6, 8쪽. 99) 심승구, 2009, 朝 鮮 時 代 大 射 禮 의 設 行 과 정치 사회적 의미 년(영조 19) 大 射 禮 를 중심으로 - 한국학논총 32, 쪽.

48 46 학예지 제18집 첨정을 거둔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적지 않았다. 곧 군신의 화합을 넘어 군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는 의지가 담긴 정치적 행사일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100) 성종 8년(1477)의 대사례는 큰 규모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101) 그 전경이 성종실록 에 자세 히 기록되었다.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친히 석전을 행하고 명륜당에 나아가 윤자운 양성지 김유를 독권관으로 삼 고, 정은 노공필을 대독관으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궁각을 수매하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는 표를 제목으로 유생을 시험하도록 명하였는데 응시한 자가 총1,400명이었다. 그리고 사단( 射 壇 )에 나아가서 회례를 베풀기를 정지( 正 至 ) 때의 회례의식과 같이 하고 술이 세 순배 돌자 대사례를 행하였는데, 헌가 에서 음악이 연주되니 임금이 4대의 화살[ 乘 矢 ]를 쏘아 1발을 맞히었다. 그리고 월산대군 이정과 영의 정 정창손 이하 68명이 차례로 짝을 지어 활을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을 주고 맞히지 못한 자는 벌을 주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102) 위에서 먼저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을 행하고 유생을 시험했다는 것의 의미가 각별했다.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문치의 우위를 강조했음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문치는 무비( 武 備 ), 즉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생에게 시험보이는 표의 제목도 궁각 수매, 즉 활의 주된 재료를 수입하는 것이다. 이 역시 학문의 전당에서 유학을 배워 출세하려는 자들에게 무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우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명나라에 대해 수입 허가를 요청하기 가장 어려운, 곧 핵심 병기의 주재료가 되는 것을 내려달라고 설득하는 표를 짓게 함으로써 그 실용적 능력을 시험하 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타 학문이 탁월하더라도 국방 문제에 조예가 없다면 그 자체가 약점 이 됨을 분명하게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문무가 겸비되었을 때 비로소 이상적인 상태가 이루어 짐을 부각시키려 했다. 활쏘기는 국왕이 제일 먼저하고 대군, 영의정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통수권 행사의 상징 적 의미와 함께 서열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즉 활이 통수권 행사의 상징이며 서열을 보여주는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래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중시하여 소홀히 대해서는 100) 위의 논문, 쪽. 101) 이날 행사에 관해서는 姜 信 曄, 앞의 논문, 7 8쪽에 서술되었다. 102) 성종실록 권83, 성종 8년 8월 정유.

49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47 안 되도록 했다. 보관과 관리부터 철저히 해야 했으며 쏘기 연습도 게을리 해서 안 됨을 강조 하였다. 대사례는 연산군, 중종 때에도 간간이 행해졌다. 이를 통해 활쏘기가 단지 군사 훈련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의식으로 격상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평화로운 시절이라도 절대로 나 태하게 해서는 안 됨을 밝히고자 하였다. 2) 향사례 시행 성종 8년(1477)에 대사례를 실시한 뒤에 국왕이 향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더군다나 이 예의 행함이 서민에게 통달하여 향음( 鄕 飮 )의 의식도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니 소재 지의 감사와 수령은 내 뜻을 체득하여 한가한 때에 미쳐서 때때로 거행하여 우리 태평함의 즐거움을 함께 하여 예양( 禮 讓 )의 풍도를 흥기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103) 이는 감사와 수령들에게 향사례의 실시를 권장한 것이다. 그 이유로 윗사람을 편안히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예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며 예전의 음사( 飮 射 ), 독법( 讀 法 )은 백성에게 예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 없음을 들었다. 104) 이에 따르면 활쏘기는 단지 실력을 기르기 위함이 아니라 예의를 배우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105) 당연히 연습에서 자세와 태도가 중시되었다. 그 결과는 이상적인 신민( 臣 民 )이 되 라는 것이었는데, 즉 문무를 겸비하여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향사례라는 국가의례를 통해 지방에서도 문무를 겸비하여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자들을 길 러내고자 하였다. 그 중심에 활쏘기를 위치시켜 평상시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자 했다. 6.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조선 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은 국가 주도, 관 중심으로 여러 측면에 103) 성종실록 권83, 성종 8년 8월 정유. 104) 성종실록 권100, 성종 10년 1월 기묘. 105) 이에 관해서는 금장태, 앞의 논문, 8 11쪽에 상세히 정리되었다.

50 48 학예지 제18집 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왕조의 성립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전 왕조인 고려를 붕괴 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군사력의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방 문제의 처리가 시급 했다. 이에 중심 병기였던 활과 활쏘기에 대한 관심 고조는 불가피했으며, 그것을 주도했던 것은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전술의 변화도 크게 작용했다. 종전의 청야수성으로는 더 이상 효과적 대응이 힘들었 다. 고려말 왜구 격퇴 과정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었다. 변화가 불가피했는데, 국내외 현안 처리를 위해 북방 야인과 정면 대결하게 됨으로 인해 그 강도가 더 높아졌다. 이때 가장 중요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핵심 병기인 활이 주변의 국가나 종족보다 우월해야 했다. 활 자체의 성능은 물론 그 쏘기도 탁월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국가가 적극 나서 활성화시켜야 했다. 무반과 전문 군사의 선발부터 연습의 강화와 대상층의 확대, 연변 주민의 활쏘기 권장책 실시, 각종의 표준화된 규정의 제정과 제작의 통제, 국가적인 행사로 승격 등이 시도되었다. 그 결과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서서히 약화시키는 요인들이 내부에서 파생되었다. 특히 각궁의 특성상 제조와 관리 에 따른 재정의 증액이나 민간의 부담 증가도 상당했다. 기간 산업인 농업을 진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데 활의 제조를 위해 소와 말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곤란 한 문제였다. 여기에 신분제의 변화, 숭유숭문 풍조의 확산 등도 크게 작용했다. 이런 요소들이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조선 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을 확립시켰다. * 투고일 : 2011년 11월 2일 *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9일

51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49 국문초록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윤 훈 표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은 국가 주도, 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 선왕조의 성립 문제와 관련이 깊다. 이전 왕조인 고려를 붕괴시켰다는 점으로 말미암아 처음부 터 정치적 안정을 위해 군사력의 강화가 필요했다.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에 능동 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방력의 갖춤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전략과 전술의 변화도 크게 작용했다. 종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외적을 물 리치기 힘든 상황이 초래되었다. 연해 지역에 많은 해를 끼쳤던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그 런 점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었다. 더불어 국내외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북방 야인과 정면 대 결해야 했다. 이들과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전략과 전술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핵심 병기인 활이 주변의 국가나 종족의 그것보다 우월해야 했다. 활의 성능이 뛰어나야 했다. 활 쏘기 실력도 탁월해야 했다. 마침내 국가가 적극 나서 활성화 시켜야 했다. 무반과 군사에게 연습을 강화해서 실력을 증진시켜야 했다, 대상층의 확대를 위 해 주민의 활쏘기 권장책을 실시해야 했다. 공정함을 위해 각종의 표준화된 규정을 제정했으며 규격에 맞게 대량으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통제의 강도를 높였다. 그 결과 상당한 진전을 이루 었다. 하지만 국가 재정과 민간의 부담도 크게 늘었다. 특히 기간 산업인 농업을 진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데 각궁의 제조를 위해 소와 말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힘 들었다. 여기에 신분제의 변화, 숭유숭문 풍조의 확산 등도 작용했다. 이렇듯 서서히 약화시키 는 요인들이 내부에서 파생되었다. 이런 요소들이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전기 사회 활쏘기 문화의 특징을 확립시켰다. * 주제어 : 활쏘기, 국가, 전술, 군사력, 재정

52 50 학예지 제18집 ABSTRACT Characteristics of Archery Cultur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period Yoon, Hoon-Pyo It is a fact that the characteristic of archery cultur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initiated by the nation. This is related to a problem of establishing Joseon Dynasty. Due to a fact of having collapsed Goryeo Dynasty that is the former dynasty, the reinforcement of military power was needed for political stability from the beginning. Even a change in tactics functioned at the same time. Just with the conventional tactics, it was difficult to drive the foreign enemy away any more. In the process of repulsing Japanese pirates that had much done harm to the coastal waters, such point was specifically proved. In addition, to solve the pending problems at home and abroad, there was a need of having a face-to-face confrontation with the northern barbarians. A change in tactics was inevitable given trying to fight with these people effectively. What had been most important at this time was that a bow, which is the core weapon, needed to be given priority over that of nation or race around. Performance of a bow needed to be excellent. Even the archery ability needed to be superior. Finally, the nation entered upon activating. As a result, the considerable progress was achieved. However, even the national finance and the private burden increased greatly. Factors, which were gradually weaken due to this, were derived from the inside. First of all, the growth of agriculture played an important role. And, even a change in a status system functioned greatly. Even the expansion in climate of revering Confucianism and a civil official gave much influence.

53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51 As these elements had mutual influence, the characteristics of archery cultur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established. * key words : archery, nation, tactics, military power, national finance

54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53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우 인 수** 목 차 1. 머리말 2. 부북일기 와 출신군관 3. 활쏘기 연습 4. 활쏘기 시합 5. 맺음말 1. 머리말 1) 무인에게 있어 활쏘기는 가장 기본이 되는 무예였다. 과거 시험으로부터 각종 시취에 이르기 까지 활쏘기의 능력이 무인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활쏘기는 무인에게 요구되는 재주의 정확성을 가장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또한 무거운 화살을 어느 정도 거리까지 쏠 수 있는가는 무인의 힘을 판단하는 수단으로도 유용하였다. 그런데 실제 조선조 무인들이 활쏘기 연습을 어느 정도 어떻게 하였으며, 또 평상시 활쏘기 시합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하였으며, 그 결과의 처리는 어떻게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 려져 있지 못하다. 이는 기록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 으로 남겨놓은 것이 잘 없기 때문인데, 특히 일기류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 일상에 대한 일관된 기록은 더욱 드물다. 赴 北 日 記 는 무인의 일기라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특히 부북일기 에는 무인들의 활쏘기에 대한 기록이 1년간 지속적으로 나타나있을 뿐아니라 활쏘기를 둘러싼 여러 *이 글은 필자의 논문인 부북일기 를 통해 본 17세기 출신군관의 부방생활 ( 한국사연구 96, 1997)에서 활쏘기 훈련 과 관련한 부분을 본 주제에 맞게 재구성하면서 수정 보완하고 확대한 것임을 밝혀둔다.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55 54 학예지 제18집 가지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무인들의 활쏘기와 관련하여 많은 사실들을 살필 수 있다. 필자는 십수년전 이 부북일기 를 학계에 소개하면서 활쏘기를 포함하여 출신군관들의 부방 생활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발표한 바 있는데, 주로 변방의 병영에서 군관들의 훈련 생 활과 일상적인 생활이라는 측면을 밝힌 것이었다. 1) 따라서 활쏘기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은 밝 혔으나, 일기에 나오는 활쏘기 전체를 포괄하여 구체화하지는 못한 면이 있었다. 이번 활쏘기 에 대한 기획 발표를 기회로 하여 본고에서는 특히 활쏘기와 관련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북 변지역 무인들의 활쏘기 연습과 활쏘기 시합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부북일기 와 출신군관 부북일기 는 무과에 급제한 경상도 울산의 박계숙 취문 부자가 최전방지역인 함경도 회령 에서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1년간씩 초급 장교라 할 수 있는 군관으로 복무할 때 쓴 일기이다. 박계숙의 일기는 37세이던 1605년(선조 38)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 간 함경도 會 寧 甫 乙 下 鎭 에서의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1607년(선조 40) 1월 1일까지 의 일기이다. 그리고 박취문의 일기는 28세이던 1644년(인조 22)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 남짓 함경도 會 寧 府 와 鏡 城 의 兵 營 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1646년(인 조 24) 4월 4일까지의 일기이다. 2) 박계숙[1569년(선조 2)-1646년(인조 24)]은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7년에 26세의 나이로 무 과에 급제하였으며, 10여년 후인 1605년(선조 38) 37세 때 一 當 百 壯 士 에 선발되어 함경도 지 역의 부방길에 올랐다. 일당백장사 는 남쪽 지역에서 선발되어 왔다는 의미에서 南 方 壯 士, 또 는 南 來 壯 士 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선조 16년 尼 蕩 介 의 난과 25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을 극 복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뽑은 무과 출신자가 만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는데, 그 중 하삼도지역 출신자 2,900여명을 차출하여 순차적으로 국경지역 부방에 응하도록 조처한 바 있었다. 박계숙 의 경우는 바로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후 그는 선전관, 훈련원 부정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 우인수, 1997, 부북일기 를 통해 본 17세기 출신군관의 부방생활 한국사연구 96. 2) 우인수, 1997, 앞의 논문, pp 이하 부북일기와 저자들에 대한 서술은 여기에 의거하여 약간 가감하였다.

56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55 한편 박취문[1617년(광해군 9)-1690년(숙종 16)]은 1644년(인조 22) 28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그 해 겨울 신규 무과 급제자 자격으로 함경도에 부방하였다. 신규 무과 급제자들의 군관으 로서의 북변 근무는 선조 16년 이래 모든 무과 급제자들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3) 문 무과 급 제자를 출신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군관을 출신군관이라 하였다. 그 후 그는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우후, 훈련원 부정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인동 갑산 김해 등 지의 수령도 역임하였다. 일기 원본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총 79장 1책으로 부자의 일기가 합본되어 있는 데, 박계숙의 일기가 24장, 박취문의 일기가 5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크기는 약 가로 19cm, 세로 27cm이다. 책 표지에는 赴 北 日 記 라 쓰여 있다. 일기의 한 면은 11행으로 되어 있고, 1행당 대개 21자씩 정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글씨는 또박또박한 해서체여서 쉽게 판독할 수 있다. 박계숙의 일기는 아들 취문이 새로 정서한 것이 확실하다. 물론 글씨는 취문 자신이 썼을 수도 있고, 필사자를 구해서 정서시켰을 수도 있겠다. 부북일기 는 무인의 일기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숨김없이 자세하게 서술해 놓은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변방지역 군사 업무 의 실상과 군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무신들이 남긴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 임을 감안하면 이 일기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박계숙과 취문 부자가 부방하였던 함경도 회령은 두만강 연안으로 북동으로는 종성, 서로는 무산, 남으로는 부령과 접해 있었다. 함경도 북병마절도사 본영이 있는 경성은 부령을 거쳐 남으로 약 230리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동절기에 북병사가 두만강변으로 전진 배치될 때 머무 는 행영이 북동으로 45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4) 회령에는 종 3품 도호부사가 읍성에 머물며 행정적인 책임을 맡고 있고, 예하에 종 5품의 판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회령 읍성에서 북쪽으로 21리 떨어진 곳에 高 嶺 鎭 이 있어 종 3품 병마첨절제사가 배치되어 있었고, 읍성의 서쪽으로는 25리 떨어진 두만강변에 보을하진이 있어 역시 종 3품 병마첨절제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55리 떨어진 곳에 豊 山 堡 가 있어 종 4품 병마만호가 파견되어 있었다. 군관들은 회령부의 정식 관원 즉 회령도호부의 부사와 판관, 보을하진과 고령진의 병마첨절 3) 이 의무 사항은 新 補 受 敎 輯 錄 ( 兵 典, 留 防 條 )을 거쳐 續 大 典 ( 兵 典, 留 防 條 )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4) 우인수, 1977, 앞의 논문, pp 이하 회령 주변의 상황과 군관의 임무와 관련한 서술은 이에 의거하여 가감하였다.

57 56 학예지 제18집 제사, 그리고 풍산보의 병마만호 등의 휘하에 소속되어 업무를 보좌하던 장교 집단이었다. 당 시 변경지역에서 부방하던 군관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일기에는 나타난다. 하나는 박계숙과 같이 무과 급제후 일당백장사 에 선발되거나 또는 박취문과 같이 신규 무과 급제자의 자격으로 복무하는 출신군관 부류이다. 다른 하나는 그 지역에 토착한 자 중에서 군관에 선발 되어 복무하는 토착군관 부류이다. 이 두 부류의 군관들은 같이 군관청에 소속되어 비슷한 업 무를 담당하기는 하였으나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신분이 출신군관은 대개 양반 들이었음에 비해 토착군관은 양반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고 출신군관이 정해진 기한 즉 대체 로 1년 정도를 의무적으로 복무하고 돌아가는 단기 복무자들인 데 비해 토착군관은 문자 그대 로 그 지역에 토착해서 장기간 복무하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출신군관은 신분상으로 볼 때 변경지역 관부에서 몇명 안되는 양반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부사나 첨사의 지휘 계통하에 놓여 있기는 하였으나 같은 양반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언제든지 발탁되어 관료로 임명될 수 있는 급제자 신분이었다. 이런 점에 서 부사나 첨사도 출신군관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군관은 군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맡아서 수행하였다. 그들이 수행한 업무는 형태상으 로 볼 때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정식 직책을 맡아 일정기간 지속적으로 업무 를 관장한 경우이다. 兵 房 軍 官 으로 병방의 일을 맡아 수행한다든지, 工 房 監 官 으로 공방의 일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박취문이 회령에서 근무할 때 기와 만드는 일을 책임 지고 2달 정도 걸려 마무리지은 것이나, 경성의 병영으로 전근되었을 때 공방 감관에 차임되어 수개월에 걸쳐 임무를 수행한 사실, 그리고 경성에서 조총 제조의 감독관까지 겸하여 맡아 전 력을 쏟은 사실이 그러한 예이다. 둘째는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업무를 담당한 경우이다. 상관이 관할지역을 순찰하거나 업무 수행차 인근 지역에 갈 때 배종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박취문의 경우 병영의 군관으로 있을 때 북병사의 南 巡 즉 8월에 경성을 기점으로 12일간의 남쪽 지역 순찰에 배종한 바 있었다. 그리고 北 巡 즉 10월에 경성을 기점으로 북쪽 지역의 순찰을 할 때도 병사를 배종하였다. 군관 들은 순행시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있는 요새에 대한 군기를 점검하고 온다든지 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 외 활쏘기 시합에 상관을 배종한 경우도 있었고, 觀 遊 할 때라든지 천렵 시에도 상관을 배종하였다. 그 외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업무는 매우 다양하게 있었다. 예컨대 첨사 부재시의 留 鎭 將, 두만강변 순찰시 守 護 將, 병사 행차시 앞서서 배행하는 先 隊 馬 兵 別 將,

58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57 청의 차사 행차 준비시 傳 語 將, 開 市 때 치안 담당하는 別 禁 亂 將, 산행 사냥시 代 將, 과거시험 장의 경비 책임자인 科 氣 差 備 官, 참호 수리시 감독관, 벌목시 감독관, 京 砲 手 이동시 인솔 책임 자, 풀베기 군사 인솔 책임자 등 실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복무의 대가로 주어지던 혜택도 있었다. 후일 관직에 진출하였을 때 부방한 기일이 복무 기 일에 포함되어 계산되어져 경력으로 인정되었다. 일정한 급료를 매달 지급받았으며, 관직에 진 출하기 전 변방의 군무를 익히는 실습의 기회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관직에 제수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혜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활쏘기 연습 부북일기 에 나타나는 병영생활에서 가장 자세하고도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끄는 것은 활쏘기였다. 활은 총이 나온 이후에도 무인의 무예와 힘을 가늠하는 수단, 체력을 단련하 는 수단 그리고 친목을 다지는 놀이의 수단 등으로 계속해서 각광을 받았다. 그래서 군관들을 위시한 무인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를 하고 있었다. 박계숙과 박취문도 별다른 업무가 없는 한 거의 매일 활을 쏜 듯하고, 또 그 사실을 일기에 꼼꼼하게 써 놓았다. 그만큼 무인에게 있어 활쏘기는 일상 속에서 대단한 관심사에 속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5) 부북일기 에서 박계숙 박취문과 함께 활을 쏜 무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먼저 박계 숙의 경우 회령부사, 회령판관, 보을하진첨사, 고령진첨사, 풍산보 만호 등 회령부 관내 관료들 과 부령부사, 무산진첨사 등 인근 지역 관료 및 각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일당백장사와 토착군 관 등이었다. 가끔 병마우후나 경초관과 같은 방문자들과도 함께 활쏘기를 하기도 하였다. 박 취문의 경우 역시 회령부사, 회령판관, 보을하진첨사, 고령진첨사, 풍산보만호 등 자신이 근무 한 지역인 회령부 관내 관료들과 역시 근무한 지역인 경성 북병영의 병사, 우후를 위시하여 종성부사 길주목사 등 인근 지역의 수령 및 각 고을 소속의 출신군관과 토착군관 등이었다. 가끔 함흥부 천총 등 무관들과도 활쏘기를 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따라서 부북일기 에는 박계숙과 박취문이 근무하였던 회령부와 북병영의 관료와 군관들이 활쏘기의 주체로 망라되어 5) 이순신의 난중일기 에도 활쏘기를 한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노승석 역, 2010, 교감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59 58 학예지 제18집 있는 가운데, 인근 지역의 무인들도 가끔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쏘기는 한 사람이 다섯 발 쏘는 것을 1 巡 이라하여 기본 단위로 삼았다. 대개 연습의 경우 한번 활쏘기를 시작하면 보통 10순 단위로 쏘았다. 시합에서도 10순을 쏘아 한 판의 승패를 판가름 지었다. 여력이 있거나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다시 10순을 더 쏘는 식으로 하여 늘려갔 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5순을 쏘아 실력을 겨룬 적도 있었다. 박취문이 부방을 위해 북상하던 중 함흥에 도착하여 며칠간 머물 때 동행한 군관 서너명과 함흥의 천총 이집이 함께 양무당에서 활을 쏜 적이 있었는데,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던지 5순을 각각 쏘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다시 5순씩을 쏘았다. 이 때 이집은 이틀 연속 25발을 명중시켰으며, 박취 문 일행은 24발에서 20발 사이를 명중시켰다. 6) 아마 장기간 이동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다소 연습량이 부족하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관들의 평상시 병영에서 활을 쏜 횟수와 연습의 강도를 살펴보기 위해 활쏘기에 관한 내용 이 좀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 박취문을 예로 들어 활을 쏜 날과 쏘지 못한 날로 나누어 월별 상황을 파악해서 제시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군관 박취문의 활쏘기 상황 7) 쏜 날 구 연 습 시 분 30순 이상 총 횟수 2월 3월 4월 5월 6월 윤6 월 월 별 횟 수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월 순 순 불명 소계 순 이상 순 ) 박취문, 부북일기, 1645년 1월 23 24일. 편의상 박계숙의 부북일기는 日 記 1 로, 박취문의 부북일기는 日 記 2 로 나타내겠다. 7) 회령에서 근무를 시작한 인조 23년 2월 21일부터 근무를 마감한 이듬해 1월 25일까지 총 357일간을 분석의 대상으로 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총 359일이어야 되는데, 일기에 6월 6일과 윤6월 21일 이틀의 일기가 누락되어 있기 때문에 357일로 되었다.

60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59 합 10순 불명 소계 쏘지 못한 날 합 계 다른 공무 악천후 질병 기타 미상 합 계 총 계 위 표에서 보듯이 전체 357일 중 분명하게 활을 쏘았음이 확인되는 날은 연습을 한 날이 96일, 시합을 한 날이 29일로 총 125일이었다. 물론 기록 자체의 누락으로 인해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겠음을 감안한다면 실제 활을 쏜 날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활을 쏘지 않은 날은 공무로 바빴던 날이 78일, 악천후로 인해 활쏘기를 할 수 없었던 날이 18일, 병으로 인해 앓았던 날이 11일, 기타 다른 사정이 있었던 날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날이 125일로 도합 232일이었다. 나타난 수치상으로 본다면 부방기간 중 적어도 3일에 1번 이 상은 반드시 활을 쏘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다른 공무로 바빴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활쏘 기를 하였다. 이렇듯 활쏘기는 당시 무인들에게 있어 거의 일상화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합이나 연습을 통틀어 10순을 쏜 경우가 45일로 제일 많았고, 20순이 19일, 30순 이상도 40 일이나 되었다. 얼마를 쏘았는지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은 날은 21일 정도였다. 30순 이상을 쏜 경우는 시합은 두 번 뿐이고 대부분이 연습 때였다. 최고로 많이 쏘았던 날은 60순 즉 300 발을 쏜 날이었다. 월별 상황을 보면 5월과 윤6월에 활을 가장 많이 쏘아 각각 20일씩을 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0월 이후 활 쏜 횟수가 급격히 감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동절기를 맞이하 여 경성에서 행영으로 전진 배치되는 병사를 모시고 北 巡 을 한 기간으로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 기 때문이고, 또 행영에 도착한 이후에는 조총 제조의 책임자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받아 이 일에 전념하여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61 60 학예지 제18집 활쏘기 연습을 한 날에는 몇 순을 쏘았느냐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기록해 놓았고, 명중률에 대해서는 따로 기록해두지 않았다. 다만 10순을 쏘아 50발 모두 명중한 날은 어김없이 그 사실 을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평상시 활쏘기 연습을 할 때의 명중률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 렵지만, 이는 후술할 활쏘기 시합에서 얻은 성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연습 때도 군관들이 10순 즉 50발을 쏘아 50발 모두 명중하면 상관이 상을 주어 격려하는 것이 상례였다. 특히 처음으로 50발을 명중하면 五 十 禮 를 행하는 풍속이 있었던 듯한데, 박취 문이 처음으로 50발을 맞추었을 때 동료들이 오십례를 행한다며 거꾸로 매달았고, 회령부사는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내려주어 축하해준 바 있었다. 8) 박취문이 연습 때 50발을 명중시켜 상 관으로부터 여러 가지 상을 탄 바 있는데, 일기에 나타나는 것을 제시하면 다음 <표 2>와 같 다. 최고 50발을 명중하고도 상을 타지 못하였거나 혹은 상을 탄 사실을 일기에 기록해두지 않은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실제 50발을 명중시킨 회수는 아래 표보다 훨씬 많았다. <표 2> 군관 박취문이 활쏘기 연습시 받은 상물 상황 연월일 준사람 상물 성적 회령부사 술상 5개, 소주 7선 50발 명중 북병사 쌀 5두, 콩 1석, 좁쌀 2석 50발 명중 회령부사 벚나무 껍질 10장 50발 명중 회령부사 쌀 3두 50발 명중 前 兵 使 씨 제거한 목화 4근 50발 명중 북병사 좁쌀 2석, 6승포 1필, 겉보리 4석 50발 명중 위 표에서 보듯이 50발 명중에 대한 축하와 포상의 의미로 상을 내려준 사람은 박취문의 직속 최고 상관이었던 회령부사와 북병사였다. 또는 활쏘는 장소에 있던 사람 중 최고 상급자 가 상을 내려주었다. 회령에 근무할 당시 병사로부터 받은 것이나, 병영에서 근무할 때 전병사 로부터 상을 받은 것은 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상금으로 받은 것은 곡물이나 옷감으로 거의 생활에 바로 쓰이는 필수품들이었다. 간혹 연습이나 시합에서 육량전이나 편전을 사용한 경우도 가끔 있었다. 육량전은 무게가 8) 日 記 2, 1645년 3월 13일.

62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61 보통 화살보다는 훨씬 무거운 六 兩 에 해당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무과나 무인의 시취 에서도 자주 채택된 화살로 무게가 무거운 까닭에 멀리 쏘기가 어려워 보통 100보 거리에서 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활을 쏘는 사람의 근력을 가늠하는 용도로 사용되 었다. 일부에서는 화살이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에 멀리 쏘는 것만을 능사로 여길 경우 무리를 해서 근육이 파열되는 부작용도 만만찮을 뿐만 아니라 실전에서의 효용성을 감안하면 별 필요 도 없는 부문이라고 그 시합 방식의 개선을 요구하는 건의가 제기된 적도 있었다. 9) 박계숙의 일기에는 육량전과 편전을 이용하여 시합하였다는 사례가 1건이 기록되어 있다. 회령 관내의 무인들이 모두 모인 시합에서 철전 즉 육량전과 편전으로 시합을 하였는데, 육량 전은 1순 즉 5발을 쏘는 것이었다. 이 때 박계숙은 5발 중 3발을 명중시켰는데, 3발 중 2발은 변에 그리고 한 발은 관곡에 명중시키는 우수한 성적으로 상을 받았다고 한다. 10) 박취문의 일기에도 육량전을 쏜 경우가 다섯 차례 정도 나오고 있다. 북병영에 근무할 당시 육량전을 쏘아 명중시켰으며, 군관인 방호생도 명중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다. 11) 그리고 병사는 비록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역시 군관들과 같은 100보 밖에서 육량전을 쏘았음을 특기하고 있다. 그 외 박취문 등이 강가에서 연어를 잡을 때 동개살을 활용한 사례도 일기에 나오고 있 다. 12) 위와 같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일상적으로 사용한 화살의 종류에 대해서는 일기에서 특별히 논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일기를 쓰는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논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짐작컨대 대개 120보(144m) 거리에서 쏘는 유엽전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활쏘기 시합 크고 작은 활쏘기 시합도 자주 열렸다. 대개 편을 나누어 시합하는 편사의 경우 참가자 모두 돌아가며 각각 10순 즉 50발씩을 쏘아 참가자들의 명중한 성적을 합산하여 승부를 가렸다. 관 9) 중종실록 24, 11년 3월 8일 기축. 10) 日 記 1, 1606년 4월 28일. 11) 日 記 2, 1645년 7월 9일. 12) 日 記 2, 1645년 9월 4일.

63 62 학예지 제18집 내 군관들끼리 적절히 편을 갈라 하는 시합이 많았다. 예컨대 새로 온 군관과 앞서 왔던 군관 으로 편을 가르거나 13) 출신군관과 토착군관으로 편을 가르기도 하였고, 14) 때로는 실력을 적절 히 맞추어서 편을 가르기도 하였다. 15) 그리고 인근 지역에 원정을 가거나 또는 인근 지역의 인사들이 원정을 와서 이루어지는 시합도 많았다. 예컨대 박계숙이 회령에 가서 우후 입회하에 시합한 것이라든지 16) 거꾸로 회령부사와 판관 그리고 고령진 첨사 등이 보을하진에 와서 시합 한 것이 그 예이다. 17) 박취문의 경우에도 보면 회령부 소속 군관과 종성부 소속 군관으로 나누 어 시합한 것이라든가, 18) 인근의 고령진이나 보을하진에서 시합하러 회령에 오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였고, 19) 경우에 따라서는 회령부에서 고령진으로 가기도 하였다. 20) 병사와 우후가 방문 하였을 때 적절하게 편을 갈라 시합하기도 하였고, 21) 행영으로 원정가서 행영군관들과 시합하 기도 하였다. 22) 경우에 따라서는 내기를 걸고 하는 시합도 있었다. 박계숙의 일기에 의하면 보을하진에서 무인들끼리 활쏘기 시합을 하였을 때 진 편이 다음 날 술과 안주를 크게 베푼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 술내기 시합을 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러고는 술자리를 빌미로 또 활쏘기 시합을 하였 고, 그 다음날에는 시합에서 진 상대편이 또 주찬을 마련하여 놓고 활쏘기를 하면서 즐겼던 것이다. 23) 박취문의 일기에도 출신군관과 토착군관이 편을 나누어 술 20 鐥 을 걸고 시합을 하 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처음 10순은 출신군관 편이 져서 먼저 술 20선을 내었고, 이어 식후에 다시 붙은 2차 시합에서는 출신군관이 통쾌하게 승리하여 토착군관 측에서 술 20선을 내었 다 24) 고위 관직자의 경우에는 더 큰 것을 걸고 내기를 하기도 하였다. 북병사와 길주목사는 소 한 마리를 걸고 시합을 벌인 바 있는데, 북병사가 47발을 명중시키고, 길주목사가 48발을 명중시켰다. 이에 북병사는 즉시 큰 소 한 마리를 잡아 하루 종일 잔치를 벌이며 군관들의 사 13) 日 記 1, 1606년 1월 26일. 14) 日 記 1, 1606년 4월 3일, 4월 4일 ; 日 記 2, 1645년 2월 30일, 3월 29일, 4월 7일. 15) 日 記 1, 1606년 4월 21일. 16) 日 記 1, 1606년 4월 14일. 17) 日 記 1, 1606년 5월 11일, 11월 7일. 18) 日 記 2, 1645년 3월 9일. 19) 日 記 2, 1645년 4월 28일, 5월 9일, 5월 18일, 5월 19일, 5월 24일, 6월 24일, 윤6월 26일. 20) 日 記 2, 1645년 5월 15일. 21) 日 記 2, 1645년 3월 16일, 윤6월 5일. 22) 日 記 2, 1645년 윤6월 10일. 23) 日 記 1, 1606년 4월 21일, 4월 22일, 4월 23일. 24) 日 記 2, 1645년 3월 29일.

64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63 기를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25) 활쏘기를 한다고 하면 상관들이 술상을 차려 보내주어 격려하는 것도 일기에 자주 눈에 띈 다. 사실 당시 활쏘기에서 술은 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국가적 차원에서 권장하던 것이기도 하였다. 금주령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예외로 인정되던 곳이 활쏘기터 였던 것이다. 1576년(선조 9) 사헌부에서 기근이 계속되던 끝에 봄 가뭄이 또 심하니 야외에 술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일체 금하라 고 건의한데 대해 선조는 禁 斷 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되, 그러나 활쏘는 곳에서는 금하지 말라 고 하여 특별히 활쏘기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 였던 것이다. 26) 성종 같은 군주는 한 술 더 떠서 활쏘기를 못하는 것이 술기운이 없어서라고 하면서 활쏘기 를 할 때 술을 적절하게 마실 것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성종은 무릇 활쏘는 것은 모름지기 술기운이 있어야 능히 잘 쏘게 되는 것인데, 술을 금한 것은 소비가 많기 때문이다. 활을 쏘고 술을 마시되, 기운에 적당하도록 하고 그치면 무엇이 해롭겠는가? 라고 자신의 소회를 밝힌 바 있다. 27) 일기에 나타나는 무인들의 활쏘기 실력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활쏘기 실력은 무인들 사이에도 편차가 있었겠음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실제로 실력에 따라 등급을 나누 어 시합을 한 예가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한번은 군관들의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실력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각 등급끼리 실력을 겨루게 한 경우가 있었다. 28) 등급을 나눌 때는 상 재는 중재 편에 들고자 하고 중재는 하재 편에 들려고 하여 서로 다툼이 그치지 않아 결국 최상급자인 병사가 직접 등급을 나누어주어야 하였다. 시합에서 나타나는 일등 솜씨를 가진 무인들의 활 실력은 다음의 두 예에서 잘 드러난다. 한 예는 회령부사를 모시고 군관들끼리 활쏘기를 하는 자리에서 보여준 박취문의 실력이다. 마침 開 市 를 위해 회령에 와있던 청나라 差 使 도 구경차 입회하였다. 10순 즉 50발을 쏘아 출신 군관 박취문과 토착군관 허정도가 나란히 50발을 명중시켰다. 쏘는 것마다 다 명중하니 보는 재미가 없다며 지금부터는 과녁 가운데에 있는 검은 부분 즉 貫 鵠 을 맞춘 것만을 인정하자는 차사의 제의를 받아들여 다시 10순을 쏘았다. 역시 박취문과 허정도가 50발을 과녁에 명중시 25) 日 記 2, 1645년 10월 14일. 26) 선조실록, 10, 9년 3월 19일 임자. 27) 성종실록 91, 9년 4월 22일 계축. 28) 日 記 2, 1646년 1월 18일.

65 64 학예지 제18집 킨 가운데, 관곡에 명중시킨 것은 취문이 46발, 허정도가 44발이었다. 29) 편을 갈라서 시합을 하는 편사의 경우에는 관곡이나 변을 구별하지 않고 과녁에 맞으면 명중 으로 간주하였다. 30) 관과 변을 구별하여 점수를 줄 때는 같은 명중이더라도 관곡에 맞았을 때 는 2분, 변에 맞았을 경우에는 1분의 점수를 주어 합산하였다. 이 방식을 따라 점수를 계산한 다면 박취문은 관곡에 맞춘 것이 46발이어서 92분, 변에 맞춘 것이 4발이어서 4분으로 총 96분 의 경이로운 점수를 받는 셈이다. 활을 잘 쏜 군주로 알려진 정조의 경우 유엽전 10순을 쏘아 49발을 명중시킨 예가 1792년 10월에서 12월에 걸쳐 9차례 있었는데, 마지막 화살을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고 버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두 명중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의 점수는 최하 68분에서 최고 80분에 걸쳐 있었다. 31) 또 한 예는 박취문이 행영에서 근무할 때 병사를 위시하여 근처 수령들을 모신 자리에서 군관들끼리 한 활시합의 경우였다. 이 시합에서 첫 10순을 쏘았을 때 박취문과 이시복 김낙 등 3명이 50발 명중이었다. 우열을 가리기 위해 다시 10순을 쏘았는데, 박취문과 이시복이 또 50발 명중이었다. 다시 또 10순을 쏘았으나 두 사람 모두 또 50발 명중이었다. 마지막으로 10 순을 또 쏘았을 때, 박취문이 제 8순 5번 화살을 명중시키지 못해 49발 명중으로 아깝게 패하 였다. 32) 그러나 박취문은 30순이상, 정확하게는 38순의 4번째 화살까지 즉 189발까지는 연속 으로 명중시킨 것이었으니, 가히 신궁의 경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군관 이시복은 200발 연속 명중으로 그 이상의 실력이었다. 위의 두 사례에서 우열을 다툰 군관들은 활쏘기 분야에서 최고 실력을 가진 무인이었다. 그 렇다고 하여 그와 같은 인물들이 회령이나 경성에만 특별히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각 지역별로 시합에 나가 우승을 다투는 군관들은 거의 이와 비슷한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 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시합에 참가한 무인들 중 꼴찌에 해당하는 자들의 실력을 살펴보는 것도 무인들의 활쏘 기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꼴찌들의 구체적 성적이 나와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 29) 日 記 2, 1646년 6월 14일. 30) 이중화, 1929, 조선의 궁술 조선궁술연구회, 65쪽. 남자 한량 획창은 다만 변이라 함은 편사에 관변을 구별하지 아니하는 연고이나, 기생 획창에는 변이라 함은 없고 일자살로 오자살까지 맞기만하면 관중이라 하여 31) 김문식, 2002, 정조의 활쏘기 기록 문헌과 해석 21, pp 한국의 활과 화살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쪽에는 49발 명중에 78분, 45발 명중에 57분, 49발 명중에 76분, 49발 명중에 77분의 성적을 낸 정조의 기록지가 제시되어 있다. 32) 日 記 2, 1646년 1월 21일.

66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65 만 몇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박취문의 일기 중에 인조 23년 5월에 있은 한 시합에서 꼴찌였던 군관 김신의 성적은 50발 중에서 43발을 명중시킬 정도의 괜찮은 성적이었다. 33) 12월에 군관들 끼리 4명씩 편을 갈라 시합했을 때 8명의 성적이 모두 나와 있는데, 50발 명중이 2명, 49발 48 발 47발이 각각 1명, 45발이 2명, 43발이 1명으로 꼴찌의 성적이 역시 43발이었다. 34) 그리고 인조 24년 새해에 경성 병영의 군관들이 병사 입회하에 활쏘기 시합을 하였는데, 꼴찌였던 군관 강성일과 김여해의 성적도 역시 43발을 명중시킨 성적이었다. 35) 인조 23년 6월 군관들끼리의 시합에서는 과녁 중간의 흑점인 貫 鵠 에 명중시킨 것만을 인정하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꼴찌였던 군관 박경간의 성적은 50발을 쏘아 35발을 관곡에 명중시킨 우수한 성적이었다. 36) 이와 같이 큰 규모의 시합이든 작은 규모의 연습 삼아 한 시합이든 간에 시합에 참가한 군관들 의 활쏘기 솜씨는 50발을 쏠 경우 40여발 이상을 명중시키는 실력이었다. 37) 물론 무인 중에도 솜씨가 신통치 않아 아예 시합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도 당연히 있었다고 하겠지만, 38) 위와 같은 꼴찌들의 성적으로 미루어 볼 때 군관들의 궁사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활쏘기 시합은 편을 갈라 시합했을지라도 개인기록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경기였다. 이에 참가 자 중 제일 잘 쏜 사람에게는 두둑한 상을 주어 격려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 때 상을 주는 사람 은 보통 그 자리의 최고 상급자였다. 더러는 장난기가 동한 상급자가 재미삼아 너무 잘한 죄를 묻는 경우도 있었다. 박계숙의 일기에 의하면 4월의 어느 날 회령에서 열린 인근 지역의 무인 들의 활쏘기 시합에 마침 병마우후도 와서 참가하고 있었는데, 참가자 중에 박계숙이 유일하게 50발을 명중시키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바 있었다. 이에 우후가 말하길 우리들은 모두 50발을 명중시키지 못했는데 네가 어떤 자이기에 감히 50발을 명중시키느냐? 그 벌이 없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뜰아래로 붙잡아 내려서 기생을 시켜 살짝 볼기를 때리고는 다시 붙잡아 대청 위로 올린 다음 큰 잔으로 술 석 잔을 마시게 했다. 그러고는 우후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상금 을 내려주면서 격려하였음은 물론이다. 39) 33) 日 記 2, 1645년 5월 9일. 34) 日 記 2, 1645년 12월 6일. 35) 日 記 2, 1646년 1월 1일. 36) 日 記 2, 1645년 6월 14일. 37) 참고로 난중일기 에는 이순신의 활쏘기 상황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는 구체적인 점수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다. 1592년 3월 28일조에 보면 이순신이 10순을 쏘아 5순은 5섯 발씩 모두 명중시켰고, 2순은 네 발씩 명중시켰으며, 3순은 세 발씩 명중시킨 것으로 나와 있다.( 교감완역 난중일기, p.61) 이순신은 50발 중 42발을 명중시킨 것이다. 38) 박계숙의 부북일기 1606년 1월 26일조에 보면 보을하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박계숙 일행 7명과 이미 도착해 서 근무하고 있던 일당백장사 7명이 편을 나누어 활쏘기 시합을 벌인 사실이 쓰여 있는데, 그 때 박계숙과 함께 경상도 에서 부방한 일당백장사 이덕붕과 김협은 본래 활쏘는 재주가 없어 시합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67 66 학예지 제18집 이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을 주어 격려하였다. 박계숙과 박취문은 활쏘기 와 관련하여 많은 상을 받았는데, 일기를 토대로 군관들에게 상을 준 사람과 상으로 받은 물건 등을 보면 다음 <표 3>과 같다. <표 3> 활쏘기로 군관들이 받은 상 40) 연월일 준사람 받은사람 상물 성적 보을하진첨사 박계숙 좁쌀 1석, 콩 1석 병마우후 박계숙 쌀 10두, 좁쌀 1석, 콩 1석 귀리 5석, 보리 5석, 콩 1석 1등, 50발 명중 회령부사 박계숙 세포 1필, 좁쌀 1석 6량전 3발 명중 보을하진첨사 박계숙 큰 항아리 4개, 돗자리 4장, 땅에 까는 깔개 1장, 좁쌀 1석, 콩 1석, 귀리 5석, 누룩 30덩어리 회령부사 허정도 좁쌀 1석 1등 회령부사 박취문 흰부채 1자루, 참빗 1개 1등, 50발 명중 1645.윤6.5. 북병사 박취문 술 한 주발 50발 명중 前 兵 使 박취문 쌀 5두, 좁쌀 1석, 콩 1석, 귀리 5석 1등, 50발 명중 북병사 박취문 고운 무명 1필, 여분거 1부, 콩 1석, 좁쌀 1석 1등 1등, 50발 명중 북병사 박취문 씨 제거한 목화 5근, 고운 무명 2필 1등, 50발 명중 북병사 박취문 좁쌀 23두 관곡 명중 23발 북병사 박취문 씨 제거한 목화 3근 1등, 50발 명중 북병사 박취문 6승포 3필, 씨 제거한 목화 2근, 쌀 5두, 좁쌀 1석, 콩 1석 2등, 30순 150발 명중 상을 주는 사람은 대개 그 자리의 최상급자였기 때문에 박계숙의 경우는 보을하진 첨사나 병마 우후 등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박취문의 경우는 회령에서 부방할 때는 회령부사, 병영에 서 복무할 때는 병사로부터 주로 상을 받았다. 상으로 받은 물품은 쌀, 좁쌀, 콩, 귀리, 보리 39) 日 記 1, 1606년 4월 14l일. 이 때 병마우후 우치적은 회령부사에게 청하여 쌀 10두, 좁쌀 1석, 콩 1석을 공식적인 상금으로 박계숙에게 주었다. 그런 뒤 우후는 쓸 곳이 있다고 하면서 회령부사에게 따로 귀리 5석, 보리 5석, 콩 1석이 적힌 첩지를 받아 또 박계숙에게 건네주면서 크게 격려하였다. 40) 1등을 하였거나 또는 50발 모두 명중하였음에도 상으로 받은 물건은 기록해 두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실제 상을 탄 횟수는 표에 나타난 것보다 많았다.

68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67 등 곡물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외에 목화나 베도 자주 주어졌던 품목이었다. 상금의 액 수는 시합의 경중이나 대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상으로 받는 현물 은 주로 帖 紙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상례여서 나중에 이 체지를 관청 창고로 가지고 가서 현물 과 교환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무인들은 상으로 받은 물건들을 당연히 家 用 에 보태었다. 일부는 친분이 두터운 기생들에게 선심을 쓰기도 하였다. 박계숙은 1등상으로 큰 항아리 4개, 돗자리 4장, 땅에 까는 깔개 1장, 좁쌀 1석, 콩 1석, 귀리 5석, 누룩 30덩어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며칠 뒤 그 중에서 돗자리와 땅에 까는 깔개는 회령 기생 삼상월에게 보내주었으며, 얼마 뒤 큰 항아리 2개를 또 보내준 바 있었다. 41) 박취문도 활쏘기 시합에서 1등을 하여 북병사로부터 받은 쌀 5두와 좁쌀 2석을 친분이 있던 기생인 월매와 설매에게 나누어 주었고, 42) 또 회령부사로부터 받은 흰부채 한 자 루와 참빗 한 개를 월매에게 준 바 있었다. 43) 또 박취문은 시합을 아니었지만 연습에서 50발을 명중하여 상으로 받은 벚나무껍질 10장을 생선과 바꾸어 먹은 적도 있었다. 44)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벌칙의 내용이다. 시합에 진편의 꼴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항상 치러야 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곤장을 맞기까지 하였다. 박계숙의 일기에 의하면 보을하진 첨 사가 주장이 된 무사 팀과 박계숙이 주장이 된 南 來 壯 士 팀이 활쏘기 시합을 벌인 적이 있었는 데,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 3번의 시합에서 보을하진첨사 팀이 모두 패하였다. 이에 극도로 감 정이 격해진 첨사는 둘째날 두 번의 시합에서 모두 꼴찌를 한 자기 팀의 토착군관 서기충에게 곤장 5대를 때리는 벌칙을 가한 바 있었다. 45) 또 한 예는 박취문의 일기에서 회령과 종성의 무인들이 편을 나누어 시합을 하였는데, 회령 쪽이 크게 패하자 자존심이 상한 회령부사가 크 게 부끄러워하면서 꼴찌한 무인 박완성에게 곤장 3대를 때린 바 있었다. 46) 아마 회령의 명예가 실추된 것을 질책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는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하게 표출된 특별 한 경우였다. 시합 중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이 우연히 날아가는 새에게 맞아 떨어져버린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명중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난 것도 과열된 열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47) 41) 日 記 1, 1606년 7월 20일, 7월 26일. 42) 日 記 2, 1645년 3월 16일, 3월 20일, 3월 21일. 43) 日 記 2, 1645년 6월 14일. 44) 日 記 2, 1645년 4월 26일. 45) 日 記 1, 1606년 4월 4일. 46) 日 記 2, 1645년 3월 9일.

69 68 학예지 제18집 꼴찌에 대한 벌칙은 대개 광대 옷을 입혀 절을 하게 하거나 춤을 추게 하여 희롱하는 것이 상례였던 듯하다. 48) 광대 옷이나 군뢰복을 입혀 화살을 줍게 하기도 하였다. 49) 때로는 그 방직 기에게 꼴찌한 책임의 일단을 물어 같이 희롱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꼴찌한 군관의 방직기로 하여금 광대춤을 추게 하거나 50) 군관과 함께 광대춤을 추게 하기도 하였다. 51) 또는 꼴찌한 군관 대신에 그 방직기에게 足 杖 을 가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술을 내게 하기도 하였고, 52) 광대 옷을 입힌 방직기를 소의 등에 태우고 꼴찌한 군관으로 하여금 끌게 하기도 하였다. 53) 5. 맺음말 이상에서 부북일기 에 나타나는 활쏘기와 관련한 내용들을 활쏘기 연습과 활쏘기 시합이라 는 측면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았다. 부북일기 는 경상도 울산에 거주하던 박계숙과 박취문 부자가 무과에 급제한 후 각각 1605년과 1644년에 1년간 함경도 회령 인근에서 의무적으로 부방할 때의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무인의 일기가 흔치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무인들의 일 상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일기에는 활쏘기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전해 주고 있어 무인들의 활쏘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다. 북방 변경지역 무인들 특히 군관들은 병영에서 활쏘기를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구체 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 활쏘기는 그 자체가 군사 훈련이었고, 체력 단련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오락이나 시합의 수단이기도 하는 등 다목적의 효용성이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군관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거나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활은 10순 단위로 쏘았는데, 하루에 10순 즉 50발을 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20순,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다. 연습 때라도 군관이 50발을 모두 명중시키면 상급자가 상을 내려 격려하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 47) 日 記 2, 1645년 8월 20일. 정작 활을 쏜 군관보다는 그들의 상관인 병사와 길주목사가 다툼의 주역이었다. 명중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박취문은 48발 명중, 상대는 47발 명중으로 승부에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다툼은 마무리되었다. 48) 日 記 1, 1606년 7월 20일 ; 日 記 2, 1645년 4월 7일, 6월 14일, 7월 24일, 12월 30일, 1646년 1월 18일. 49) 日 記 2, 1645년 5월 9일. 50) 日 記 2, 1645년 7월 26일. 51) 日 記 2, 1646년 1월 21일. 52) 日 記 2, 1645년 5월 23일. 53) 日 記 2, 1645년 12월 28일.

70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69 활쏘기 시합은 자체 지역 내 무인들끼리 편을 갈라 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인근 지역의 무인들과 원정 시합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웃 고을 간에 시합이 있을 경우에는 때로는 지나친 승부욕이 작동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기를 걸고 하는 시합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시합에 훨씬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시합에서는 과녁의 관곡과 변을 구별하여 점수 차를 두지 않 고 과녁에 맞으면 명중으로 간주하였다. 시합에 참가한 무인들의 실력은 대체로 50발을 쏘아 40발 이상을 맞추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편을 나누어 여러 명이 활쏘기를 하더라도 개인 기록이 남는 경기였기 때문에 1등과 꼴찌를 대하는 풍속이 있었다. 1등을 하는 경우는 최고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상을 주어 격려하는 것이 상례였다. 진편의 꼴찌에서는 광대 옷을 입혀 춤추게 하거나 화살을 줍게 하는 등의 벌칙을 내려 기롱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시합 자체가 과열되었을 때는 곤장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 투고일 : 2011년 11월 1일 *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9일

71 70 학예지 제18집 국문초록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우 인 수 본 논문은 부북일기 에 나타나는 활쏘기와 관련한 내용들을 활쏘기 연습과 활쏘기 시합이 라는 측면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본 것이다. 부북일기 는 경상도 울산에 거주하던 박계숙과 박취문 부자가 각각 무과에 급제한 후 1605년과 1644년에 1년간씩 함경도 회령 인근에서 의무 적으로 부방할 때의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 일기에는 활쏘기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많 이 남아있어 무인들의 활쏘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다. 이 일기를 통해 북방 변경지역 무인들 특히 군관들은 병영에서 활쏘기를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 활쏘기는 그 자체가 군사 훈련이었고, 체력 단련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오락이나 시합의 수단이기도 하는 등 다목적의 효용성이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군관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거나 활쏘기 시합 을 하였다. 활은 10순 단위로 쏘았는데, 하루에 10순 즉 50발을 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20순,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다. 연습 때라도 군관이 50발을 모두 명중시키면 상급자가 상을 내려 격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활쏘기 시합은 지역 내 무인들끼리 편을 갈라 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인근 지역의 무인들 과 원정 시합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웃 고을 간에 시합이 있을 경우에는 때로는 지나친 승부욕 이 작동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기를 걸고 하는 시합도 있었다. 시합에서는 과녁의 관곡과 변을 구별하여 점수 차를 두지 않고 과녁에 맞으면 명중으로 간주하였다. 시합에 참가한 무인 들의 실력은 대체로 50발을 쏘아 40발 이상을 맞추는 정도의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1등을 한 사람에게는 최고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상을 주어 격려하는 것이 관례였다. 진편의 꼴찌에서는 광대 옷을 입혀 춤추게 하거나 화살을 줍게 하는 등의 벌칙을 내려 기롱하 는 풍속이 있었다. 시합 자체가 과열되었을 때는 곤장을 맞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 주제어 : 활쏘기, 무인, 부북일기, 출신군관, 병영생활

72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71 Abstract A Study on Military Officers' Archery Training during Joseon Dynasty Based on 'Bubukilgi' Woo, In-soo This study investigated two sides of military officers' archery during Joseon Dynasty based on 'Bubukilgi( 赴 北 日 記 )'': military officers' archery training and competition. Bubukilgi was written by Bakgyesuk( 朴 繼 叔 ) and Bakchwimun( 朴 就 文 ) who had lived in Ulsan, Gyeongsangdo. After they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they served the army in the vicinity of Hoeryong, Hamgyeongdo in 1605 and 1644 and recorded their military service in the diary, 'Bubukilgi'. This diary details all the military officers' archery those days and makes it possible us to understand the military officers' archery. Through this diary, it was revealed clearly that military officers carried archery routinely in the barracks near the northern border. For military officers, archery was highly versatile utility such as a military training itself, a physical training, an entertainment program, and a competition. So in uneventful days, they practiced archery training and competition almost everyday. They routinely shot an arrow by the unit of 50 shoots. Of course, they would sometimes shot shoots. In a military training, when a military officer hit down all the marks, it was common that supervisors gave him an award to encourage. Archery competitions carried out not only split by two sides among military officers in one region. They took also place as an away game against military officers in another region. Especially, in case of an away game against military officers in another region, work was too much competition seriously. Every once in a while, there were also archery competitions for a deal. In the competition, the score were admitted to be hit targets

73 72 학예지 제18집 without discerning sensitively center and sides of targets. Most competitors were skillful to shot the target enough to match more than 40 tries over 50 tries. It was common to be given an award for the best person to encourage practice. On the other hand, the worst person of the losing team was given penalty such as dancing in a motley costume and picking up the fallen shots. Moreover, competition itself is overheating, the worst person could be beaten. * Key words : Archery, Military Officer, Bubukilgi, Chulsinkungwan, Barrack Lives

74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73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김 기 훈* 목 차 1. 서 론 2. 구한말 : 전통 스포츠로의 전환 (1899~1910) 3. 일제 강점기: 근대적 전통 활쏘기의 정착 (1910~1945) 1) 일제 강점기 활쏘기 문화의 실태 2) 식민지 정책과 활쏘기 문화 4. 결 론 <부록 1> 일제시기 전국 활터 명칭 및 지역별 분포 <부록 2> 일제 시기 궁술대회 연도별 개최 현황 및 명칭 1. 서론 1) 국궁문화에 대한 논의가 최근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무사 체육 혹은 전통 무예의 한 분야로서 연구된 경우도 있고, 궁술 자체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1)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가 조선조에 이르는 전통시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 활쏘 기가 근대적인 스포츠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특히 근대적인 스포츠로 정착하는 강력한 계기가 마련된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는 더욱 미미하다. 황학정 백년사 2) 의 출간은 이 시기에 대한 연구의 물꼬를 텄다. 구한말 이래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근대 궁도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던 황학정의 초기사의 대부분은 바로 일제 강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1) 대표적인 몇 가지 연구 성과만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영무, 1984, 國 弓 의 體 育 的 考 察 한국체육학회지 제23권 제2호; 나영일 오정석, 1991, 조선조 무사들의 활쏘기와 기타 체육적인 활동에 관한 연구 체육연구소논총 (서울대학 교) 12-1; 정진명, 1999, 한국의 활쏘기, 학민사; 손 환, 2005, 한국에 있어 활쏘기의 변천 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 체육과학회지 제14권 제1호; 이찬우, 조선시대 활쏘기 의식 : 18세기 영 정조 시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홍기석, 2009, 韓 國 傳 統 社 會 활쏘기 硏 究,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 黃 鶴 亭, 2001, 황학정 백년사. 이 기념비적인 서적은 집필 당시 사두였던 김 집씨의 노작이다.

75 74 학예지 제18집 점기의 국궁 역사였다. 당시의 동아일보 등 신문 자료와 황학정 역사 자료를 자유자재로 활용 하면서 일제 강점기를 개관한 이 책은 동 시기를 연구하는 인사들에게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 주었다. 뒤를 이은 개별적 연구로는 이건호, 정진명, 최석규 등의 연구를 손곱을 수 있다. 3) 본 연구는 이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의 국궁 문화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4)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 동안 전통 활쏘기가 일반적인 통념 이상으로 활성화 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 원인을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설적인 협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시기가 전 통 궁술이 근대적인 스포츠로서 면모를 확립할 수 있는 시기였다는 점도 강조하려 한다. 이러 한 주장을 전개하기 위하여 본고는 우선, 구한말 전통 무예로서 군사적으로 활용되던 활쏘기가 일시 폐지되었다가 부활되는 과정을 서술한 다음, 일제 강점기의 국궁 문화의 실태와 그 정치 적 배경을 차례로 서술해 나갈 것이다. 2. 구한말 전통 스포츠로의 변환 (1899~1910) 무과제도와 함께 발전되어 오던 조선의 궁술은 1894년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군제가 개혁되 어 무과제도가 폐지되고, 주요 무기 또한 근대식 총포로 바뀌게 되면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 었다. 서울에서는 서로 보일만큼 많던 사정들이 저절로 사라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5) 무과 폐지 이후 정부는 구습타파라는 입장에서 사정에서의 활쏘기 자체마저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6) 이렇게 쇠퇴 일로에 있던 궁술을 부활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종 황제의 장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가치가 사라진 궁술, 타파해야 할 구습의 온상인 궁술문화라고 인식하던 고 종이 궁술의 새로운 체육적 가치를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은 1899년 6월 독 일 왕자 하인리히의 방한이었다. 7) 3) 이건호, 2009, 근대신문에 나타난 활쏘기의 흐름, 국궁논문집 제 7집(온각지 궁사회); 정진명, 2009, 조선궁술연구 회 출범 전후, 활쏘기의 나침반 ; 최석규, 2009, 국궁의 변천과 사회문화적 기능, 충북대학교 석사논문. 4) 본 연구는 필자도 참여한 2011년도 문광부의 프로젝트인 한국 정체성 확립 방안 수립 의 역사 부분 집필 원고 중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5) 成 文 永, 1928, 黃 鶴 亭 記, (권용필 번역, 1994, 국궁1번지, 20쪽) 6) 1896년 5월 15일 동수문 안 율목정에서 활을 쏘던 사원들을 경찰이 출동하여 제지하고 돌려보낸 사실이 보도되고 있다. 독립신문 1896년 5월 28일자. 7) 당시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왕자는 1899년 6월 동아함대 사령관 자격으로 대한 제국 ( ) 을 공식 방문하였다. 그의 방문 결과보고서가 최근에 발굴되어 공개된 바 있다. 정상수, 2009, 발굴 특종: 하인리히 왕자 대한제국 방문기, 월간 중앙 (2009년 10월호).

76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75 방한 기간 중에 조선의 고유 무술인 궁술 시연을 본 하인리히 왕자는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 였다. 조선에서 이미 폐지된 궁술이 당시 군사 강국이었던 독일 왕자가 그 가치를 인정해 준 것이다. 이것은 고종으로 하여금 궁술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시범이 있은 다음 날인 1899년 6월 12일 고종은 궁예를 장려하여 신체를 발육시키라 는 지시를 내리게 된 다. 8) 궁술 장려 지시를 내린 고종은 그 해 가을에는 경희궁 북쪽 산록에 황학정( 黃 鶴 亭 )을 신축하 여 왕실과 고위 관리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습사 장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었다. 황학정 설립을 계기로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궁술이 다시 부흥되기 시작하였다. 폐정되었던 민간 사정들이 하나 둘 다시 되살아 났다. 지난 날 지방의 관설 사정들(관덕정, 연무정으로 불렸음)이 민간 사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9) 이렇듯 고종의 궁술 장려와 이에 부응한 민간 사정들의 부흥으로 소멸되던 한국의 전통 궁술 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과거 궁술의 부활이 아니었다. 활쏘기는 전투 기술이 아니라 체력 단련의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경기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편사라는 전통 궁술 경기로 계승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부활이 민간 사정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전래의 사풍 즉 예사의 전통 또한 계승되었다. 한국의 전통 궁술은 이제 전통 문화와 스포츠라는 양면적인 기능을 함께 보유한 궁술로 태동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구한 말 활쏘기가 부활한 것은 한국 궁술 발전을 위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통 스포츠로 변용되어 부활한 활쏘기가 보다 더 확실하게 착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더욱 근대적인 스포츠로서 성장될 필요가 있었다. 한국 전통 궁술이 근대적인 궁술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가의 여부는 일제 강점기의 궁술 문화 상황에 달 려 있었다. 3. 일제 강점기: 근대적 전통 활쏘기의 정착 (1910~1945) 그 동안 일제 시기의 국궁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매우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대한궁도협회의 모체가 된 20년대의 조선궁술연구회가 창설되어 궁술 문화를 지키는 역할을 8) 황학정 사두 성문영 인터뷰 기사. 묵은 朝 鮮 의 새 香 氣 조선일보 1938년 1월 1일, 1월 3일자 기사. 9) 黃 鶴 亭, 2001, 황학정 백년사 쪽.

77 76 학예지 제18집 한 점은 평가되지만, 전반적으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크게 위축 되어 거의 명맥을 유지 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고 평가된다. 10) 혹은 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모든 궁술활동을 전통 스포츠의 민족주의적 부흥운동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1)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일제는 조선 궁술을 제한한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기 동안 식민통치를 위한 교묘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묵인하거나 심지어 제국의 국방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정 부분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일제 말기인 1940년 당 시 한국 궁술계의 현황은 200여 사정에 일 만 여명의 궁도인 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의외 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2) 민족주의-식민주의-전통 체육 문화 간의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났던 일제 강점기 활쏘기 문화의 실태를 우선 활터의 수효와 연도별 대회 수를 통해서 먼저 확인해 본 다음, 일제의 통치 시기별로 나누어 일제의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가 상호 작용하는 구조 속에서 활쏘기 문화가 어떻게 변화 되어 가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일제 강점기 활쏘기 문화의 실태 일제 시기 국궁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당시 발간되었던 신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 시기에 발간되었던 한글판 신문지상에 나타난 자료를 중심으로 산출한 몇 가지의 통계를 중심으로 당시 활쏘기의 실태를 일부나마 엿볼 수 있는 기 회로 삼고자 한다. 분석을 위하여 참고한 신문은 매일신보( ), 조선일보 ( ), 동아일보( ), 시대일보( ), 중외일보( ), 그리고 조선중앙일보( ) 13) 등이다. (1) 전국 활터와 지역별 분포 14) 일제 시기 존재하였던 활터의 개수와 명칭 및 분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0년 4월 2일자 매일신보는 조선 궁도회가 10) 대한궁도협회, 2000, 한국의 궁도 27쪽; 대한양궁협회, 1992, 韓 國 洋 弓 三 十 年 史 149쪽. 11) 대부분의 근대 체육학사 관련 논문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전형적인 예로서, 정삼현 이동건,1991, 일제 무단통치하 한국 사회체육의 민족주의적 성격에 관한 연구 스포츠과학연구논문 (동아대학교) 제 9집, 28쪽. 12) 매일신보 1940년 4월 2일(2면). 13) 초기에는 제호가 중앙일보( )이었다가 1933년 3월 7일부터 조선중앙일보로 개칭되었다. 14) 이 절의 연구는 디지털 국궁신문 대표 이건호 선생이 일제 시기의 신문 기사를 분석한 결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건호 선생의 협조에 깊이 감사드린다.

78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77 조선체육협회의 정식 가맹단체로 인정되었음을 전하면서 현재 조선에는 사정( 射 亭 )이 二 백개 소에 대표적인 사수( 射 手 )만 一 만여 명에 달하여 15) 라는 언급을 하고 있어, 통칭 이백개의 활 터로 당시에 파악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보다 더 자세하게 활터의 총수를 언급한 기사는 또한 매일신보의 기사로서 제15회 전조선 남녀 궁도대회와 관련된 1941년 기사 이다. 전조선 一 백 七 十 二 개소 사정( 射 亭 )이 궁사와 경향 각지의 남녀궁사가 동원하야 옛 무 사의 기개를 펴는 조선궁도회와 본사( 매일신보 - 필자) 공동 주최의 제 十 五 회 전조선남녀공 동대회 라고 하면서 전국의 사정 수자를 172개 사정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비록 전국 사정 전 체의 명칭이나 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지는 않지만, 일제 시대 말기인 40년대 초 전국 의 활터 숫자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 넘는 많은 숫자였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실제로 본 연구에서도 138개의 활터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활터의 명칭은 부록 2에 첨부하 였다. 이 사정들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기 위하여 편의상 일단 권역별로 묶어 활터 이름과 수자 를 기재하였고, 세부 지역은 도와 광역시로 나누어 활터 수자만 기재하였다. 이때 권역은 남한 지역은 현재 행정상 분리되어 있는 道 와 광역시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경인권(서울, 경기, 인 천), 영남권(경상남북도, 부산, 울산), 호남권(전라남북도, 광주), 강원권 (강원도)으로 나누었고, 북한 지역은 이북( 현재의 북한지역)으로 일괄하여 하나의 권역으로 다루었다. <도표 1>이 그 결과이며 이를 공간적으로 쉽게 파악하기 위하여 지도 위에 옮겨 본 것이 <그림 1>이다. <도표 1> 일제 강점기( ) 전국 활터 수 권역별 (활터수) 지역별 (활터수) 경인권역(43) 서울 11, 인천 3, 경기32 충청권역(14) 충남 7, 충북7 영남권역(29) 경남 19, 경북 6, 부산 2, 대구 1, 울산 1 호남권역(34) 전남 11, 전북 21, 광주 2 강원권역(0) - 이북권역(18) 황해 14, 강원(이북) 1, 함경 3 전국(138) 15) 일반 종목으로 조선궁도를 공인 매일신보 1940년 4월 2일 (2면).

79 78 학예지 제18집 도표에서 보듯이 남한에서는 경인권역과 호남, 영남 권역의 활터 수가 3-40여개로서 가장 많았고, 충청권이 14개소로서 약간 적었다. 강원도나 제주도 등에는 활터가 발견되지 않는 다. 16) 이북 권역에서는 개성과 장단 등 황해도 남부 지역은 사정이 많고, 함경도 등 동북부 지역도 몇 개의 사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등지의 활터는 한 곳도 보이지 않아, 활쏘기 활동이 매우 미약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 결과 북한 전체 지역의 활터 수가 남한 지역보다 훨씬 떨어지게 되었다. 남한 지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북한 지역 의 활쏘기 활동이 미약하였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역적 편차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현재 단계는 실증적인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라서 추정단계를 벗 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평안도 지역에서 활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것을 이 지역이 구습타파 의 풍조와 개화사상이 일찍부터 고조되었던 지역이라 궁술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 17) 이 있으나, 추정 수준에 그칠 뿐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지역적 편차의 원인에 대한 해명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최소 138개 사정 이름이 확인되고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 수의 활터 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선에서 머물고자 한다. 16) 평강은 당시 강원도 북쪽이라 일제시대 강원도 권역에 활터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 이북 권역에 속하고 있어 남한 강원도의 통계에서 제외하였다. 17) 황학정, 황학정 백년사 44쪽.

80 <그림 1> 활터분포도(1910~1942년 기준)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79

81 80 학예지 제18집 (2) 활쏘기 대회 개최 회수 및 규모 일제 강점기의 활쏘기 활동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두 번째로 파악해 본 것은 활쏘기 대회 개최 회수 및 규모이다. 이런 통계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활쏘기 활동이 예상 외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도표 3은 연도별 활쏘기 대회 개회 회수를 알아본 것이다. 대회는 그 빈도수를 통하여 궁사들의 활동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 목적임으로 전국과 지방 대회 구분 없이 일괄하여 동일한 건수로 처리하였다. 개최되었던 대회의 구체적인 명칭은 부록2에 밝혀놓았다. <도표 2> 일제강점기의 연도별 활쏘기 대회 개최 회수 일제 통치 방식 연 도 대회 수 비고 무단통치기 ( ) 한일합병, 삼일운동 년 봄 조선, 동아 일보 창간 문화통치기 ( ) 만주 침략 중일전쟁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폐간 전시체제기( ) 태평양 전쟁 해방 근거 : <부록 2> 참조

82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81 <도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10년대는 대회 개최 건수가 매우 미약하였고, 1941년 이후 에는 대회 수가 격감하고, 1943년부터는 한 건도 개최된 바가 없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 는 대회 개최 건수가 10회에서 30회에 이르는 정도로 활발함을 보여 준다. 대회 건수의 변화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제의 정책과 이에 대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반응, 전시 등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활쏘기 대회가 활쏘기 문화의 활발성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되는 것은 당시 활쏘기 대회가 수많은 관중을 동원하는 관람 스포츠 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당시의 활쏘기 대회의 규모를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관련 신문 기사 중 출전 인원이 명확하게 표기된 경우를 통하여 그 대체적인 경향은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문 기사 중 출전 인원을 명기한 대회는 총 97개 대회인데, 이 대회에 출전한 궁사들을 모두 합하면 5,964 명에 이른다. 대회당 평균 61명이 출전한 셈이다. 규모 별로 볼 때, 한 대회당 많게는 삼백명이 넘는 경우도 있고, 50명 이하도 적지 않았지만, 60% 정도가 명 정도의 인원이 참석하는 규모였다. 당시의 교통 사정을 고려할 때 이 정도의 규모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참가 인원 규모별 대회 현황은 <도표 3>과 같다. <도표 3> 참가 인원 규모 별 대회 건수 출전인원 50명이하 명 명 명 300명 이상 대회수(건) 한편 관중에 대해서는 매 대회마다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통상 수천명이 운집하였다는 식의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수자의 정확성은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과 달리 그다지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활대회가 좋은 구경거리로서 많은 관중을 동원하던 관람 스포츠 였음 을 시사한다. 대회 규모를 알 수 있는 몇 개의 자료를 <도표 4>에 예시하였다. 대회명칭 김포각희 궁술대회 문산궁술 각희대회 <도표 4> 대회 별 관중수 전선 궁술대회 개성 궁술대회 인천전조선 궁술대회 이리전선 궁술대회 대회일시 ,06, ,12,10 관중수(명) 4,000 3,000 10,000 3,000 수천 5,000

83 82 학예지 제18집 2) 식민지 정책과 활쏘기 문화 통계적으로 살펴본 일제 강점기의 활터와 활 대회는 이 시기의 활 문화가 결코 침체 일변도 가 아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일제 강점기의 활쏘기 문화는 역설적이다. 민족주의와 식민 주의 모두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역설이 발생 하게 된 원인을 일제의 시기별 통치 성격과 연관 지어 가면서 살펴보려한다. 일제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성격에 따라 무단통치기 (1910년-1919년), 문화통치기 (1919년- 1937년), 전시동원체제기(1937년-1945년)로 크게 삼분해 볼 수 있다. 일제는 조선의 저항을 억압하고 식민지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헌병 경찰 제도를 활용한 강력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최초 10여 년간 시행된 이러한 억압 정책은 1919년 조선인들의 거족적인 반일운 동인 삼일운동을 촉발시켰다. 이에 놀란 일본은 식민지 통치 전략을 바꾸어 1920년대부터는 다소 완화된 그러나 고등 식민 통치 전략인 '문화 정책'을 실시한다. 이러한 문화통치기는 다소 의 굴곡이 있지만 대략 1930년대 전반기까지 지속된다. 일본의 식민 정책 상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소위 전시동원 체제기인 일제 말기에 해당한다. 일본은 1937년 7월의 중일 전쟁 그리고 1941년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확전을 거듭하면서 본격적인 전시 상황에 들어간 다. 조선 식민 통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조정되었다, 전시 물자 동원을 위한 각 종 수탈정책들이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한 황민화 정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일제 시기 조선 궁술의 활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과 그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이라는 구조 속에 전개되었다. 무단통치기인 1910년대에 일제는 집회와 결사를 극히 제한하였고, 따라서 사람들이 모여야 성립 가능한 궁술 등의 체육 및 민속놀이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도 서울 경기 지역의 일부 사정들 간에 편사가 행해지고 있다. 재력이 있거나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최소한 중립적이거나 아니면 친일적인 인사들만의 특혜였다. 1916년에 궁술 부흥 운동을 표방하면서 매일신보가 주최한 조선 궁술대회는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대회가 계기가 되어, 경성 궁술발기대회가 열리고 그 모임의 명칭이 관덕 회( 觀 德 會 )라고 명명되었다. 일제시기에 조선인들에 의해 최초로 시도된 궁술 부흥 운동이었고 부흥단체의 결성이었다. 그런데 이 부흥 운동 단체의 성격은 경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친일적 인 인사들의 친목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모임을 주도해 오고 또한 관덕회의 회장으로

84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83 임명된 사람은 친일파인 자작 조중응이었다. 그리고 궁술 부흥 단체에 관덕회라는 명칭을 부여 한 사람은 다름아닌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 백작이었다. 궁술 발기회의 구성원들 다수는 조중응 자작이 주도한 대표적인 실업가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구성원들과 중복되고 있 다는 점도 이 부흥 운동의 주체가 친일파 인사들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18) 관덕 회의 활동 또한 미미하였다. 관덕회 결성 다음해인 1917년 서울의 두 사정을 초청하여 편사대 회를 한 것 밖에 없다. 19) 이런 점에서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는 일제의 일반적인 제한 정책 하에서 친일인사들의 단기적인 부흥 운동이 존재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전통 활쏘기가 위축되었던 시기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 통치시대인 1920년대에 들면 궁술의 활동은 마치 1910년대 눌렸던 욕구가 반등 분출한 것처럼 보인다. 조선일보와 동아 일보의 지국들이 후원하거나 주최하고, 지방 청년회 등 단체 가 앞장서서 대소규모의 궁술대회가 연속적으로 열렸다. 당시 활쏘기 대회는 씨름 그네와 함 께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구경거리였다. 그 결과 지방의 소읍 장터에서도 궁술대회가 열리면서 단오놀이 등 민속 명절의 고정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20) 그러나 이러한 궁술대회는 흥행성과 오락성 위주로 지방마다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궁술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체계가 서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마다 흥행성 오락성 위주의 궁술대회를 저마다 하게 되니 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편사를 하던 궁술대회에서는 승패에 집착한 나머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패싸움 이 벌어지는가 하면 일부 한량들은 기생놀음으로 타락하는 경향도 있었다. 21) 전통 무예로서의 궁술이 날로 흥행화 오락화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현상이 만연하자 이 를 지탄하고 조선 궁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민족주의 단체에 의하여 추진되었 다. 타락한 현상을 정화 ( 淨 化 )하여 조선의 고유한 정신이 담긴 궁술도 를 부활시키려는 목적 으로 한 제 1회 전조선 궁술대회가 1928년 7월 중앙 기독교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리게 된다. 22) 이 대회는 궁술계에 각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을 요구하였다 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이 대회를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궁술 18) 관덕회의 회장 조중응과 주요 구성원인 예종석, 유해종, 백완혁, 엄주익은 대정 친목회에서도 회장(조중응)을 포함한 주요 구성원으로 역할하고 있다. 이건호, 2009, 근대신문에 나타난 활쏘기의 흐름, 49 쪽. 19) 李 學 來 외, 1994, 한국체육사 쪽; 이건호,2009, 근대신문에 나타난 활쏘기의 흐름 47-50쪽; 정진명, 2009, 활쏘기의 나침반 쪽. 20) 黃 鶴 亭, 황학정 백년사 69쪽. 21) 黃 鶴 亭, 황학정 백년사 74쪽. 22) 동아일보 1928년 7월 13일 사설.

85 84 학예지 제18집 계를 지도해 나갈 중앙조직으로 조선궁술연구회가 창립되었다. 23) 조선궁술연구회의 창립은 근 대 활쏘기의 확립과 정착을 알리는 이정표가 된다. 조선궁술연구회가 주도하여 궁술대회의 규 정들이 표준화 통일화 되었고, 그때 마련된 규정은 오늘날 한국 활쏘기 대회에서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또한 연구회는 한글학자인 이중화씨에게 위촉하여 1929년에 조선의 궁술 을 연구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은 표준적인 사법은 물론 사거리와 과녁의 크기 그리고 유엽전이 사용된 역사적 근거를 명확히 함으로서 근대 궁도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고전으로서 아직도 가장 정통적인 궁도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24) 조선궁술연구회는 1932년에 조선 궁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40년에는 일제의 체육단체 통폐합 정책에 따라 일본인이 주도하는 조선체육협회의 가맹단체가 되었다. 25) 일제 하의 식민지 적 상황 변화에 따라 명칭이나 소속은 변경되었지만, 조선궁술연구회가 시작한 중앙 조직으로서 의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26) 조선궁도회는 1928년부터 1942년까지 가장 권위가 있던 대표적인 전국 대회를 도합 16회나 주관해 나가면서 일제시기 조선의 궁술을 활성화시키는데 기여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근대적인 조선 궁도가 성립하고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하게 닦아 나갔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전국 경향 각지에서 활발하게 열린 궁술 대회는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이 민족주의 세력의 주도와 후원 하에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런 대회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일제의 묵인 정책이 있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문화통치라는 유화정책이 고등 식민전 략이듯이, 활쏘기에 대한 묵인 역시 고도의 식민 통치 전략이었다. 씨름과 궁술 같은 대중성이 높은 민속놀이를 묵인하거나 허용한 것은 조선 민중들을 이러한 놀이나 스포츠에 몰입하게 함 으로써 반일 정서를 마비시키고, 정치적 불만을 해소시키는 정책이었다. 궁술대회는 일제가 효 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사용한 안전판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27) 23) 金 龍 根, 1989, 일제하 한국체육사 연구 문화정치기를 중심으로 쪽; 黃 鶴 亭, 황학정 백년사 75 82쪽. 24) 이 책은 아직도 궁사들에 의하여 탐독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젊은 독자들을 위하여 현대어 번역서가 연속적으로 출간 되기도 하였다. 민속박물관, 2009, 새롭게 읽는 조선의 궁술 ; 김이수, 2010, 21세기에 바라 본 조선의 궁술. 이 고전을 검토한 논문도 몇 편 등장하고 있다. 조선의 궁술 출간 80주년 기념 논문집으로 기획된 국궁 논문집 제7집 (2009)에 이자윤의 조선의 궁술 과 현대의 활쏘기 와 류근원의 전통사법을 찾아서 가 있고, 최근에 김이수도 조 선의 궁술 에 관한 연구(1) ( 한국체육사 학회지, 제16권 제2호, 2011)를 발표하였다. 25) 1942년 이후 조선 체육협회를 포함한 모든 체육단체가 조선체육진흥회 한 조직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조선 체육협회의 가맹단체였던 조선 궁도회도 자연히 진흥회로 통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6) 조선궁술연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 궁도회(해방 후 1946년에 조선궁도협회, 1948년에 대한궁도협회로 개칭한다)의 회 장직도 황학정의 종신제 사두가 겸임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1954년 말까지 계속된다. 당시의 종신 황학정 사두(1928 년~1947년)는 성문영이었다. 황학정, 황학정 백년사, 88-89쪽. 27) 일제시기 조선인들의 체육활동과 식민 통치와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 한 사례는 이학래, 1985, 한국 근대 체육사 연구 민족주의적 성격을 중심으로 쪽 참조.

86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85 그런데 1930년대 말 전시체제기에 이르게 되면, 일제는 조선의 궁술을 단순히 묵인 내지는 허용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일제는 1937년에 일으킨 중일전쟁 이 장기화 되자, 전시 체제에 필요한 국민들의 정신과 체력을 단련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 하게 된다. 구기와 같은 일반 종목보다 체조와 무도 등 직접적으로 국방 체력 단련에 필요한 체육 종목들이 강조되었고, 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무사도, 상무정신 함양 등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제는 조선 전래의 궁술을 체력향상과 상무정신 함양에 부합된다고 판단 하고, 조선의 궁술을 장려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물자난 또한 일제가 궁술을 전시 식민지 조선인의 체위향상 에 도움이 되는 종목으로 장려하게 된 원인이었다. 28) 식민 권력의 정책 변화는 궁술을 사회체육은 물론 학교체육의 종목으로도 주목을 받게 만들 었다. 1937년 6월 조선 총독부는 남녀 중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에서 검도, 유도와 아울러 궁도가 교육될 수 있도록 학교 체육령을 개정하였다. 29) 이러한 총독부의 교육령에 따라, 이화 여전은 1938년부터 전통 활쏘기를 체육 종목의 하나로 시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하 는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는 이화 여전의 이러한 결정이 체위향상 과 상무정신 만이 아니라 굳센 어머니 를 만들기 위한 여자체육장려의 새로운 방침 이라는 점도 특별히 강조하고 있 다. 30) 그 해 가을 동아일보는 쏘아라! 가을의 창공을 이라는 제목 하에 이화여전 학생들이 하늘높이 활을 들고 습사하는 장면을 독자들에게 인상깊게 각인시키고 있다. 31) 이화여전에서 궁술 종목을 채택하게 된 까닭은 이화여전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었다. 1939년 초에 이르면 전국의 학교들이 운동 장비 구입 문제가 비교적 적은 종목인 널뛰기, 씨름, 궁술 등 조선고유 경기를 정규 과정화하는 방침을 검토하라는 식민 당국의 지시를 받고 그 세부안을 검토하느라 고 부심하고 있었다. 32) 당시 총독부가 조선의 궁술을 장려 하였다는 사실은 인천부회( 府 會 )의 한 회의에서 발생한 28) 무도의 고장 강화도에서 1939년 7월 체위향상 에 도움이 되고, 전시 물자난에도 불구하고 용구의 제한을 받지 않았던 궁술 갱생 을 위해 대흥정에서 성대한 회합을 가졌다는 기사는 사회체육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예의 하나이다. 조선 일보 1939년 7월 20일 (조간 3면). 29) 조선총독부, 각학교 체조교수요목(부훈령제36호), 조선총독부관보 ( ). 一. 體 操 科 의 敎 材 : 체조과의 교재 는 체조, 교련, 유희 및 경기로 한다. 단 남자의 사범학교, 중학교, 고등보통학교 및 남자의 실업학교에 있어서는 검도 및 유도 궁도를, 여자의 사범학교, 고등여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여자의 실업학교에 있어서는 궁도 치도( 薙 刀 )를 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도는 조선의 궁술을 말하는지, 일본의 궁도를 말하는지, 혹은 모든 궁술을 말하는 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조항은 조선의 궁술이 학교 체육으로 채택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만들어 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화여전의 예가 그러하다. 30) 체위향상에 등장되는 조선의 무예 궁술 매일신보 1938년 5월 22일. 31) 쏘아라! 가을의 창공을, 동아일보 1938년 10월 7일. 32) 조선 고유경기 정규화/운동구 제한으로 널뛰기, 씨름, 궁술 등용 동아일보 1939년 3월 18일.

87 86 학예지 제18집 에피소드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39년 3월 24일 인천부회에서 도시계획에 의하여 활터( 武 德 亭 ) 33) 가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하는 두 의원의 항의성 질문과 인천 부윤과의 답변이 있었다. 촌전( 村 田 )의원은 도시계획에 의해서 모처럼의 조선 고래로부터 전래되어 오는 무사도로서의 궁술도( 弓 術 道 ) 가 사라질 우려가 있는데, 이것은 현하 시국 하 국민체육 향상이 절규되는 때 모처럼의 조선의 체육 향상은 물론 무사도 정신 배양으로서의 유일한 이 궁술도( 弓 術 道 ) 장려 는 필요하고 또 긴요한 것 이라는 입장에서 궁사장( 弓 射 場 ) 이전 계획을 묻는다. 선처하겠다 는 부윤의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다른 의원(김윤복)이 보다 더 명확하게 궁술이 훼손되지 않을 대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현재 회원이 70여 명에 달하는 터이며 타 도시는 물론 총독부나 도 당국에서도 이 궁도 장려에 대하여 진력하고 있는 터이다... 사격장을 현재 장소보다 2리 나 3리 이상의 원거리에 옮길시 사도는 자연 소멸의 비운에 함할 것이다 라는 주장과 함께 이 전할 범위를 선명히 제시하라고 주문하였다. 두 의원의 주장 속에 조선의 궁술에 대한 식민 당국의 입장이 재차 확인 된다. 전시체제 하에 일제는 노동력과 병력의 자원으로 동원하게 될 조선 식민지인들의 국민 체육 향상 과 무사도 정신 배양 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런 상황은 식민지 조선의 궁술과 그 정신인 궁술도 를 일본 제국을 위하여 반드시 동원시켜야 하는 필요하고 긴요한 자원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총독부를 위시한 도나 시에서 모 두 궁도 장려에 진력 하게 된 것이다. 총독부의 조선 궁술에 대한 장려 정책은 당시 신문 매체 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영 되고 있었다. 34) 이 시기에 궁술 관련 특집 기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일보는 1938년 새해 연초 특집기사로 조선 궁술을 다루었다. 전통의 새로운 활용을 의미하는 제목- 묵은 조선의 새 향기 - 하에 근대 조선 궁술사의 상징인 황학정 사두 성문영의 인터뷰 기사를 2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35) 곡절 많은 근대 조선 궁술사의 산 증인인 성문영은 젊은 사람들이야 여러 가지 운동이 있겠지만 중년 이상에게는 이 활을 제일 권하고 싶소 라는 권유의 말로 인터뷰를 끝낸다. 한편, 동아일보는 1939년 5월 전조선궁도대회를 보고 라는 사설을 싣고 있다. 36) 동 33) 매일신보 에는 구체적인 활터 명칭이 나오지 않으나 도시 계획으로 문제가 된 桃 山 町 의 활터( 인천부 桃 山 町 공원 武 德 亭 )에서 전조선궁술대회가 열렸다는 기사( 조선일보 1940년 5월 28일)를 참조하여 기명한 것임. 34)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과 중일전쟁( )을 계기로 조선 총독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식민지 언론을 철저하게 장악하게 된다. 총독부의 언론 통제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물꼬를 트고, 중일전쟁으로 쐐기를 박았 다. 장신, 2005,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 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봄호, 179쪽. 따라서 전시동원 체제 기의 언론 매체의 기사나 논조는 대부분 총독부의 정책을 협조, 반영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35) 묵은 조선의 새 향기 조선일보 1938년 1월 1일, 3일 (2회분). 36) 전조선궁도대회를 보고 동아일보 1939년 5월 17일자 사설.

88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87 아일보가 후원한 1928년 제1차 전조선 궁술대회가 열리던 바로 그 첫날, 궁술의 질적 개선과 부활을 촉구하던 사설 37) 을 게재한지 11년 만의 사설이었다. 얼핏 보면 두 사설 모두 비슷한 내용이다. 궁술을 장려하고 개선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이 확연하게 달랐다. 1928년 사설은 민족주의적 문화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시기요, 1939년의 사설은 황민화 정책과 전시 동원 준비를 위한 강요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두 사설 모두 조선의 전통적인 궁술을 장려 하고 있지만, 그 동기가 - 자발적이든 강요에 의한 것이든 -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독해가 될 수 없다고 본다. 38) 현직 조선 총독의 활터 방문과 대회 관람보다도 더 총독부의 조선 궁술에 대한 장려 정책을 명시적이고 또한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사건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940년 5월 14일 서울 석호 정에서 사정 창립 30주년 기념 조선궁술연합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당시 총독이던 미나미 지로 ( 南 次 郞 )가 방문하였다. 매일신보는 총독의 활대회장 방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회는 점차로 가경에 들어 갈 지음 오후 4시 40분에 남 총독이 입장하게되자 동구로부터 활터에 이르기까지에 수 백명의 출전 선사가 각기 화살을 높이 들어 살문을 지어 총독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총독은 이 고풍( 古 風 ) 그대로의 살문의 터널 을 기뻐하는 안색으로 지나와서 정자 안 정좌에 이르자 활은 말과 칼과 더불어 동양 재래로 전하여 내려오던 세 가지 독특한 무술이니만큼 제군은 열심히 기술을 닦으라 는 뜻 깊은 인사의 말이 있자 총무위원 강영화씨가 일동을 대표하야 답사를 하였고 이 어서 경기에 들어간 바 남녀선사의 모범경기가 시작되자 때로 서로 과녁을 맞칠 때 기생의 지화자 소리와 전아한 조선 아악에 도취하면서 열심으로 궁술을 약 1시간 동안 관람한 다음 동 오후 5시 50분 경에 돌아갔다. 39) 이 방문 기사도 그러하지만 더욱이 이 기사와 함께 게재된 사진은 그동안 우리에게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자료이다. 대회 참가자들이 만든 살문을 통과 40) 하며 입장하는 총독의 모습 을 담은 이 한 장의 사진은 총독부의 조선 궁술 장려 정책을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동시에 황 37)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1928년 7월 13일자 사설. 38) 1939년의 사설은 이것이 궁도에 대한 현 단계의 역사적 요구 로서 先 民 의 상무적 전통 이 담긴 활쏘기를 통하여 중세 이래의 문약한 정신을 근본적으로 퇴치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제가 전유한 조선 궁술의 상무정신 을 반복 재생산 함으로서, 이 사설은 부지불식 간에 일제의 궁술 장려 정책을 지원한 것이 된다. 39) 南 總 督 나타나자 화살 드러 迎 接 / 古 風 그대로의/ 昨 日 열럿든 弓 術 聯 合 會 매일신보 1940년 5월 15일. 40) 살문은 화살로 문 모양을 만든 것으로서 矢 門 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때로 재현되는 편사놀이에서 편장들이 입장할 때 예를 표하는 시문 통과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장안편사에서는 기사통( 起 射 通 )이라는 구령과 함게 이 의식절차가 시행된다.

89 88 학예지 제18집 민화 정책의 기획자요 실행자인 식민 통치자로부터 직접 격려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근 대 궁술사가 밟아 온 역설 을 다시 한 번 더 씁쓸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 매일신보 1940년 5월 15일자 기사 및 사진) 일제 말기에는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궁술대회가 진행되었다. 1938년 이후 전시체제 속 에서도 전국적인 궁술대회가 계속 개최되었고, 41년 말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여 전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1942년에도 제16회 전조선남녀 궁도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대회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조선의 궁술이 장려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일제의 장려 정책이 시행되기는 하였지만, 그 결과는 미미하였다. 우선 1940년 8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폐간으로 궁술대회를 후원하고 주최하던 주요 단체가 사라진 영향이 그 하나이다. 다음으로는 태평양 전쟁 후 전시 하의 일반적인 통제 분위기나 개최 환경의 열악함으로 인하여 대회 자체가 매년 한 번으로 축소되거나, 전혀 개최 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시기는 그야말로 조선의 궁술은 각 사정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1) 41) 일제 말기 황학정의 분위기는 成 文 永 의 자제인 成 樂 寅 의 회고 참조. 黃 鶴 亭, 2001, 황학정 백년사, 쪽.

90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결 론 지금까지 논의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의 궁술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 초기의 무 단통치는 조선 궁술을 위축시켰다. 친일세력들에 의한 일시적인 부흥운동도 단발성에 그치고 말아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에 조선의 궁술은 전국적으로 비교적 활 발하게 진행 된다. 일제의 전략적 묵인정책과 민족주의 세력의 부흥 운동이 궁술 활동이 전국 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배경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30년대 말 전시체제 하에서는 국방 체력 단련과 상무정신 함양이라는 제국주의적 목적 하에 조선의 궁술이 장려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시 상황의 악화로 말미암아 궁술 활동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시기에 따른 세부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크게 보아 일제 시기는 한말 ( ) 에 회복된 궁술이 더 나아가 유지 확대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고종에 의해 민간사정들이 부활 되기 시작한 1900년대에는 20~30 여 개 정에 불과하던 사정 42) 이 1940년에는 대략 200여 개의 사정과 일만 여명의 궁사 라고 호칭될 정도로 확대되어 있었다. 이것은 해방 후 197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었던 높은 수준이었다. 양적인 확대 못지않게 질적인 변화 역시 주목할 만하다. 조선궁술연구회의 창립과 활약에 의하여 표준화되고 객관화된 규정을 지닌 근 대적인 스포츠로서의 활쏘기가 이 시기에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근대적 궁술로의 전환이 1900년대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면, 근대적 궁술로 정착은 일제시기, 특히 1920~30년대에 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시기에 한국의 전통 궁술이 근대적인 궁술로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만약 이 시기에 활쏘기의 기반이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지 못하였다 면, 한국 궁술이 해방 후 직면한 사회정치적인 혼란과 전쟁 등 10여 년 간 거의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과 같이 확고부동한 전통 스포츠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궁술이 그렇게 근대적인 전통 스포츠로 정착할 수 있었 던 것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전통 활쏘기를 부흥 발전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일제 강점기는 국궁 발달사에서 역설의 시대였다. 42) 당시 부활된 사정의 전국적인 통계는 없다. 가능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8개정, 개성 8개정, 경기 지역 4개정 등의 명칭이 존재하는데, 이를 근거로 대략 전국적으로 20~30개 정이 부활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黃 鶴 亭, 황학정 백년사, 43~44쪽.

91 90 학예지 제18집 본고는 일제 강점기의 궁술 활동이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 라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 하고 이것을 보고 하는데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 었다. 그러다 보니 분석 상 많은 문제점이 발견됨에도 이를 본고에서 다 해결하지 못하고 미래 의 과제로 남기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점들을 앞으로 보완해 나갈 생각이다. 첫 째, 본고에서 는 전통 궁술이 일제시기에 근대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자세하게 그려내지 못하였다. 조직과 규칙 등 전통 스포츠의 근대성 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연구를 진행하여 이 점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 43) 두 번째, 본 연구 과정에서 궁술계가 일제와 타협 협조 를 해 나간 사실들을 적지 않게 발견하였다. 이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드러내는 작업과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문제를 본 연구는 거의 다루지 못 하였다. 이 주제는 한국 궁술사의 판도라의 상자 를 여는 곤혹스러운 작업이 될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는 작업이라고 본다. 44) 마지막으로 민족주의와 식민주의가 공통적으로 전통 궁술을 장려한 현상을 본고에서는 그냥 역설 이라고 지적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 역설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작업 45) 은 일제 강점기의 궁술 문화를 보다 더 심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의 하나이다. 그럼으로 이 문제 또한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3) 전통 궁술의 근대적 변용에 관한 검토가 일부 이루어진 바 있는데 주로 알렌 굿맨의 근대화 지표에 편사나 현재 궁도를 비교해 보아 근대성을 확인하려는 시도이거나 알렌 지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들이다. 이훈영, 1994, 궁도의 스 포츠화 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 교원대학교 석사 논문; 오정석, 1997, 근대 스포츠의 수용과 전통 스포츠의 근대화 양상에 관한 연구 체육사학회지 제2호; 송형석, 2006, 스포츠에 나타난 근대성: 알렌 굿맨 (Allen Guttmann)의 근대 스포츠론을 중심으로 문화 과학 가을호. 44) 예컨대, 한국 근대 궁도의 산실로 자부하는 황학정의 일제시기는 민족주의와 식민주의가 공존하는 현장이었다. 판도라 의 상자 는 황학정 백년사 에서 사실상 조금 열려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민족주의적 업적은 매우 강조되어 있으나, 식민주의와의 협력이라는 측면은 별로 검토 되지 않았다. 45) 전통 문화의 하나인 궁술을 장려한 것은 일제가 조선의 문화를 말살 탄압만 시킨 것으로 일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조선의 고유문화를 식민 통치를 위하여 활용 하기도 하였던 점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일제의 문화정책을 검토한 논문들이 역설 을 해결할 실마리를 줄 것 같다. 이지원, 2000, 1920~30년대 일제의 조선문 화 정책 역사교육 75; 정종현, 국민국가와 화랑도 신라의 발견 (황종연 엮음, 동국대학교 출판부).

92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91 <부록 1> 일제시기 전국 활터 명칭 및 지역별 분포 * 활터 명칭 및 지역 분포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는 디지털 국궁 신문 발행자인 이건호 씨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 관련 기사로서 일차 검토한 건수는 1,000여 건이었으나, 그 중 중복 기사, 광고 기사, 연재 기사, 판독 불능 기사 등을 제외하고 활터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유효자료는 267건으로서 그 세부 사항은 아래 도표와 같다. <분석 신문 명칭 및 유효 자료> 신문 이름 관련 기사 건수 유효 자료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44 0 조선중앙일보 합 계 1, * 권역별 활터 수효 및 명칭 경인권역(43) : 서울 11, 인천 3, 경기32 강화 大 興 亭, 경성 南 德 亭, 경성 舞 鶴 亭, 경성 西 虎 亭, 경성 石 虎 亭, 경성 崇 武 亭, 경성 尋 鶴 亭, 경성 一 可 亭, 경성 靑 龍 亭, 경성 翠 雲 亭, 경성 華 水 亭, 경성 黃 鶴 亭, 고양 舞 鶴 亭, 김포 金 陵 亭, 문산 靑 楊 亭, 백암 白 虎 亭, 부천 蘇 華 亭, 부천 南 水 亭, 부천 蘇 萊 亭, 수원 鍊 武 臺, 수원 南 德 亭, 수원 半 月 亭, 시흥 軍 浦 亭, 안성 鳳 凰 亭, 안성 六 一 亭, 양주 崇 武 亭, 여주 黃 鶴 亭, 용인 仁 亭, 용인 金 鶴 亭, 의정부 乘 鶴 亭, 이천 雪 峰 亭, 이천 風 詠 亭, 인천 武 德 亭, 인천 高 亭, 일산 半 月 亭, 일산 松 鶴 亭, 장호원 觀 水 亭, 장호원 淸 湖 亭, 주천 淸 渼 亭, 죽산 鳳 凰 亭, 파주 金 虎 亭, 파주 松 鶴 亭, 포천 松 鶴 亭 충청권역(14) : 충남 7, 충북7 강경 德 有 亭, 공주 觀 風 亭 ( 觀 重 亭 ), 괴산 射 虎 亭, 괴산 中 心 亭, 금산 興 觀 亭, 논산 石 虎 亭,

93 92 학예지 제18집 부여 六 一 亭, 온양 觀 德 亭, 유성 萬 年 亭, 음성 仁 風 亭, 조치원 六 一 亭, 증평 尙 德 亭, 천안 鍊 武 亭, 충주 尙 武 亭 영남권역(29) : 경남 19, 경북 6, 부산 2, 대구 1, 울산 1 경주 百 穿 亭, 고성 南 射 亭, 김천 甘 湖 亭, 김해 觀 德 亭, 남해 講 武 亭, 대구 觀 德 亭, 마산 騶 山 亭, 밀양 嶺 南 亭, 해운대 春 川 亭, 부산진 虎 川 亭, 사천 觀 德 亭, 사천 洙 陽 亭, 삼천포 觀 德 亭, 상주 六 一 亭, 영산 靈 德 亭, 영주 射 鵠 亭, 예천 武 學 亭, 울산 靑 鶴 亭, 의령 六 一 亭, 진교 穫 射 亭 ( 木 冪 射 亭 ), 진영 錦 屛 亭, 진주 觀 德 亭 ( 覽 德 亭 ), 창원 南 山 亭, 통영 南 松 亭, 통영 白 虎 亭, 통영 六 一 亭, 통영 海 運 亭, 포항 東 湖 亭, 함안 儀 鳳 亭 호남권역(34) : 전남 11, 전북 21, 광주 2 고흥 鳳 凰 亭, 곡성 反 求 亭, 광양 柳 林 亭, 광주 觀 德 亭, 광주 大 歡 亭, 구례 鳳 德 亭, 군산 南 楊 亭, 군산 鎭 南 亭, 김제 천홍정, 김제 靑 雲 亭, 김제 취심정, 김제 紅 心 亭, 나주 仁 德 亭, 남원 觀 德 亭, 목포 鍊 武 亭, 무 남일정, 무주 一 洗 亭, 병영 觀 德 亭, 보성 靑 鶴 亭, 부안 觀 德 亭, 부안 審 固 亭, 순창 六 一 亭, 순천 喚 仙 亭, 여수 君 子 亭, 영암 閱 武 亭, 이리 觀 德 亭, 장성 君 子 亭, 전주 貫 心 亭, 전주 多 佳 亭, 전주 穿 楊 亭, 정읍 君 子 亭, 정읍 楚 南 亭, 정읍 必 也 亭, 황등 健 德 亭 이북권역(18) : 황해도 15, 함경도 3 개성 觀 德 亭 ( 觀 海 亭 ), 개성 反 求 亭, 개성 虎 亭, 개성 步 仙 亭, 금천 金 虎 亭, 남천 黃 虎 亭, 백천 文 武 亭, 신막 玄 鶴 亭, 연백 觀 延 亭 ( 觀 蓮 亭 ), 연안 靑 華 亭, 연해 海 蓮 亭, 해주 耆 社 亭, 장단 西 玉 亭, 장단 六 一 亭, 평강 六 一 亭, 성진 觀 鶴 亭, 청진 挽 海 亭, 함흥 山 射 亭

94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93 <부록 2> 일제 시기 궁술대회 연도별 개최 현황 및 명칭 * 범례: 연도(총회수), 월별(회수), 지역 및 대회 명칭 * 출처: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 * 참고: 디지털 국궁신문 편, 근대 신문 보도 궁술대회 기사 (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무예사료총서 12권(근대신문 1), 13권(근대신문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신문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12년(1회) 4월(1회) 경성 황학정-취운정 편사 1914년(1회) 7월(1회) 경성 황학정과 관덕정 (개성) 편사 1916년(1회) 4월(1회) 경성 조선궁사연합대회 (우이동: 황학정 청룡정 편사) 1917년(1회) 7월(1회) 경성 관덕회 射 會 (황학정 청룡정 초청) 1918년(1회) 6월(1회) 경성 황학정 편사 (황학정과 백호정) 1920년(3회) 4월(1회) 강경 궁술대회 5월(2회) 개성 궁술대회; 수원 궁술대회 1921년(14회) 4월(1회) 이천 궁술대회 5월(3회) 전주 전광 궁술대회; 해주 벽성 청호대회; 인천 편사; 밀양 궁술대회 6월(6회) 광주 궁술대회; 경성 황학정 기생 궁도대회; 개성 궁술대회; 사천 궁술대회; 강화읍 궁술대회; 함북경성 단오놀이(궁술 포함) 7월(2회) 경성 각희 급 궁술대회 (경무대); 경성 한강 남덕정 궁술대회 10월(1회) 논산 편사 (논산 석호정, 강경 덕유정) 1922년(11회) 3월(1회) 이천 궁술대회 5월(4회) 밀양 사회; 춘천 궁술대회; 호남 궁술대회; 대구 궁술대회 6월(3회) 의정부 궁술대회; 삼천포 관덕정 궁술대회; 의령 사장 궁술회 7월(2회) 강화읍 궁술대회; 인천 편사 11월(1회) 통영 궁술대회 1923년(14회) 6월(8회) 경성 왕십리 청련사 궁술대회; 경성 조선 융문사 궁예대회; 경성 청룡 서호 편사(동대문 밖); 개성 궁술대회; 인천 대 부천 편사;

95 94 학예지 제18집 군산 (군산 강경 편사); 경성 전선 궁술대회(경무대) ; 김포 편사 8월(2회) 여수 전경 (전라 경상)궁술대회; 고흥 궁술회 9월(2회) 영동 호서연합 궁술대회; 창원 궁술 경기회 10월(1회) 경성 경회루 기생(미인) 궁술대회 11월(1회) 구례 궁술대회 1924년(17회) 4월(1회) 천안 궁술회 5월(6회) 인천 전조선 궁술회; 사천 궁술대회; 경성 전선 궁술대회(경무대); 군산 궁술대회; 상주 연합 궁술대회; 문산 궁술대회 6월(5회) 전북 궁술대회 ; 인천 다미면 궁술대회; 남원 궁술대회; 여수 정구 궁술대회; 정읍 궁술대회 7월(1회) 대구 전선 궁술대회 9월(2회) 통영 전선 궁술대회; 대구 추계 궁술대회 10월(2회) 부산 (동래 온천장) 전선 궁술대회; 고흥 남선 궁술대회 1925년(25회) 4월(1회) 마산 전조선궁술대회 5월(8회) 경남 진교 남선 궁술대회; 여수 궁술대회; 경성 왕십리 전선궁술대회; 고성 궁술대회; 수원 궁술대회; 개성 궁술대회; 태안 궁술대회; 공주 탐승대회 6월(9회) 광양 전조선궁술대회; 사천 궁술대회; 여주 궁술대회; 예천 궁술대회; 이천 전조선 궁술대회; 김포 궁술대회; 진주 궁술대회; 개성 연합 궁술경기대회; 순천 전조선 궁술대회 7월(2회) 길주 궁술대회; 통영 연합 궁술대회 10월(4회) 김해 전조선 궁술대회; 경성 4개정 궁술대회; 김천 전조선궁술대회; 나남 마라손 각희 궁술 삼대운동대회 11월(1회) 고창 상사 궁술대회 1926년(13회) 4월(1회) 사천 궁술대회 6월(4회) 이리 호남 궁술대회; 연백 각희 궁술회; 평강 정구 궁술대회; 수원 기호 궁술대회 7월(3회) 이천 궁술대회; 통영 남조선 궁술대회; 광양 정구 축구 궁술대회

96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95 8월(1회) 연백 궁술 각희 대회 9월(1회) 강경 편사 10월(1회) 진주 궁술대회 11월(2회) 예천 전조선 궁술대회; 청주 궁술대회 1927년(26회) 3월(1회) 강경 궁술대회 4월(1회) 창원 궁술대회 5월(10회) 김포 전조선 궁술대회; 청주 궁술대회; 여수 궁술대회; 여주 궁술회; 수원 궁술대회; 사천 궁술대회; 진주 궁술대회; 부평 각희 궁술대회; 장호원 궁술회; 문막 궁술대회 6월(7회) 종성봉강 궁술회; 여주 궁술회; 대전 궁술회; 남천대 신막 편사대회; 이천 궁술대회; 종성용전 궁사추천회; 남원 남선궁술대회 7월(2회) 개성 편사대회; 경성 5정 연합 궁술대회 8월(1회) 해주 ( 對 정안) 궁술 시합 9월(4회) 연안 ( 對 해주) 궁술 편사; 고흥 궁술대회; 녹동 궁술대회; 광양 백일장과 궁술회 1928년(29회) 3월(1회) 통영 石 箭 대회 4월(6회) 구례 정구궁술회; 종성 봉강궁술회; 김포 궁술각력대회; 포천 목궁대회; 거제 궁술대회; 능곡 궁술대회 5월(8회) 진교 궁술대회; 전주 궁술대회; 하동 임시궁술회; 수원 궁술대회; 광주 궁술대회; 이천 개인 궁술대회; 전북 한산 동서편사 궁술대회 6월(4회) 마산 전조선 궁술대회; 천안 궁술대회; 김천 현상 궁술대회; 마포 편사대회 7월(3회) 경성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고양 춘기 편사대회; 평강 사회 8월(2회) 군산-한산 궁술 경기대회; 조치원 편사 시험 9월(1회) 고흥 궁술대회

97 96 학예지 제18집 10월(2회) 대전 궁술대회; 함양 궁술대회 11월(2회) 의령 궁술대회; 순천 상사대회 1929년(26회) 2월(1회) 무림(남해) 石 射 대회 3월(1회) 이리 중춘 시사대회 4월(1회) 하동 전선 궁술대회 5월(11회) 김포 궁술대회; 이리 전선 궁술대회; 경남 단성 궁술회 상사; 용인 궁술대회; 포천 궁술대회; 산양(문경) 궁술대회 장단 각희 궁술대회; 양주 궁술경기; 사천 전선 궁술대회; 무주 3개군 궁술대회; 회양 각희궁술 6월(5회) 이리 관덕정 2개군 편사대회; 순천 궁술대회; 용인 전조선 궁술대회; 남해 궁술대회; 연백 궁술대회 8월(1회) 남원 궁술대회 9월(4회) 단성(산청) 궁술대회; 청주 궁술대회; 상주 3군 연합궁술대회; 정읍 궁술대회 11월(2회) 정읍 호남 개인궁술대회; 군산 궁술대회 1930년(13회) 3월(1회) 동두천 궁술척사대회 4월(2회) 부여 궁술대회; 예천 3개군 연합궁술회 5월(3회) 수원 궁술대회; 한촌(황해도 평안군) 궁술대회; 회양 각희와 궁술 7월(1회) 개성 궁술회 9월(2회) 길주 북조선 궁술대회; 광주 전조선 궁술대회 10월(2회) 금천(경북) 경북 궁술대회; 김제 남선 궁술회 11월(2회) 논산 전조선 궁술대회; 이리 궁술대회 1931년(21회) 5월(4회) 하동 궁술대회; 장성 궁술대회; 청진구락부 궁술대회; 남원 전도 궁술대회 6월(3회) 부안 궁술대회; 김포 궁술대회; 평산군 한촌 각희궁술 7월(3회) 통영 궁술대회; 청진 북도궁술대회; 남천 궁술대회 9월(2회) 연천 각희 궁술; 인덕 궁술대회 10월(6회) 여수 궁술대회; 장단 편사대회; 남천 궁술대회;

98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97 가야 궁술대회; 군산 궁술대회; 밀양 궁술대회 11월(3회) 괴산 궁술대회; 부산 궁술대회; 경남 정구 궁술 대회 1932년(24회) 4월(3회) 대전 전조선궁술대회; 문산 전조선 궁술각희척사대회; 장단 전조선 궁술각희장기대회 5월(7회) 경성 제3회 전조선궁술대회; 김화 각력궁술척사대회; 장수 궁술대회; 경남 궁술대회; 파주 궁술각희 경기; 경남 진교 궁술대회; 벌교 궁술대회 6월(5회) 예천 4개군 궁술대회; 난곡 각희 궁술 육상 경기; 순천 궁술대회; 신막 서흥 대 평산 편사대회; 이천 궁술대회 9월(2회) 군산 궁술대회; 연천 각희 궁술대회 10월(5회) 김천 궁술대회; 목포 궁술대회; 고흥 전조선궁술대회; 강경 궁술대회; 김제 궁술대회 11월(2회) 금산 전조선 궁술대회; 통영 궁술대회 1933년(29회) 4월(4회) 장성 전조선 궁술대회; 온정원 각희 궁술대회; 구례 전조선 궁술대회; 유성온천 전선 궁술대회 5월(4회) 여수 전조선 궁술대회; 안성 궁술대회; 일산 궁술척사씨름대회; 회양 각희궁술추천육상 6월(7회) 정읍 궁술대회; 포항 상사대회; 통영 전조선 궁술대회; 순창 호남 궁술대회; 강경 궁술대회; 장호원 전조선 궁술대회; 개성 전조선 궁술대회 7월(3회) 괴산 궁술대회; 이천 중부조선 궁술대회; 천안 궁술대회 8월(1회) 진주 전조선 궁술대회 9월(4회) 유성 전조선 궁술대회; 청진 북선 연합 궁술대회; 하동 궁술대회 대전 궁술대회 10월(6회) 김제 만경 궁술대회; 이리 5사정 궁술대회; 광주 전조선 궁술대회; 천안 전선궁술대회; 울산 궁술대회; 포항 전조선 궁술대회 1934년(17회) 4월(2회) 경주 궁술대회; 문산 궁술 각희대회 5월(4회) 군산 전조선 궁술대회; 평산 궁술대회; 대구 춤 노래 씨름 궁술대회;

99 98 학예지 제18집 예천 4개군 연합 궁술회 6월(6회) 부산 전조선 궁술대회; 경성 전조선 궁술대회; 대구 궁술경기; 보성 궁술대회; 성진 관북궁술대회; 개성 궁술대회 8월(1회) 경주 신라문화제 씨름궁술대회 9월(2회) 연백 전연백 궁술회; 충북 3군 연합 궁술대회 10월(1회) 이리 궁술대회 11월(1회) 김화 궁술각희 1935년(33회) 3월(1회) 3군 연합궁도대회 (곡성 남원 구례); 4월(5회) 전조선 정구 궁술 축구 명창 대회; 장단 궁술 척사대회; 부여 궁술대회; 부산 전조선 궁술대회; 목포 전조선 궁술대회 5월(6회) 문산 궁술 각희대회; 경성 전조선 궁술대회; 목포 전조선 궁술대회; 진주 궁술대회; 평산 온정리 궁술대회; 대구 전조선 궁도(궁술)대회 6월(5회) 나남 궁사 마라손 대회: 강진 전조선 궁술대회; 성진 관북궁술대회; 김해 전조선 궁술대회; 이천 제10회 전조선 궁술대회 7월(2회) 장호원 궁술대회; 하동 전조선 궁술대회 8월(1회) 황해도 남천 궁술대회 9월(3회) 북선 연합 궁술대회; 전남 능성 궁술대회; 경성 궁술대회 10월(10회) 소록도 궁술 명창대회; 포항 전조선 남녀궁술대회; 사천 궁술대회; 진영 전조선 남녀 궁술대회; 정읍 궁술 명창회; 고흥 전조선 궁술대회; 충주 중선 궁술대회; 김제 전조선 궁술; 공주 궁술대회; 북청 궁도대회 1936년(26회) 2월(1회) 성주 궁술경기 4월(1회) 함안 남조선 궁술대회 5월(7회) 장단 궁술대회; 예천 전조선 궁도대회; 문산 궁술 각희대회; 함안 궁술대회; 양곡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전인천 궁술대회 김포 궁술 각희 6월(8회) 방어진 궁술대회; 광양 궁술대회; 안동 5군 연합 궁술회; 대구 궁술대회; 곤양 전조선 궁술대회; 광양 궁술대회;

100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99 평양 궁술대회; 함흥 제1회 북조선 궁술대회 7월(2회) 영주 궁술대회; 원산 전조선 궁술대회 8월(4회) 김제 전조선 궁술대회; 방어진 궁술대회; 황해도 금호정 궁술대회; 김천 궁술대회 10월(3회) 조치원 궁술대회; 전주 궁술대회; 관심정 전조선 궁술대회 1937년(19회) 4월(3회) 아산 궁술대회; 방어진 궁술대회; 부천 궁술대회 5월(8회) 전인천 궁술 한시 양대회; 장성 궁술대회; 개성 궁술대회; 금촌 궁술 척사 씨름대회; 장단 궁술대회; 강경 궁술대회; 김해 궁술대회; 전김포 궁술 각희대회 6월(5회) 영암 궁술대회; 백천 궁술대회; 인천 전선 궁술대회; 청진 전조선 궁술대회; 전주 궁술대회 7월(2회) 평강 궁술대회; 의령 전조선 남녀연합궁술대회 11월(1회) 영주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 1938년(14회) 4월(2회) 밀양 창녕 김해 연합 궁도대회; 고성 전조선 궁술대회 5월(5회) 대구 궁도대회; 금산 궁술대회; 공주 전조선 궁술대회; 부산 전조선 궁술대회; 충주 궁술대회 6월(3회) 부안 전조선 궁술대회; 온양 전조선 궁술대회; 이리 전조선 궁술대회 9월(2회) 은성 궁술대회; 장단 궁술대회 10월(2회) 목포 궁술대회; 강경 편사 1939년(18회) 4월(2회) 통영 제19회 전조선 궁도대회; 지리산 관광주간 씨름 궁술 명창대회 5월(10회) 경성 전조선 궁도선사권 대회; 함안 전조선 궁도대회; 동래 궁술대회; 김포 궁술 각희; 동두천 궁술 각희; 연백 연합 궁술대회; 개성 전조선 궁도대회; 나진 경사대회; 온양 궁술대회; 울산 궁술대회 6월(2회) 충북 궁술대회; 이리 황등 궁술대회 7월(1회) 장호원 궁술회 9월(2회) 김제 5정 궁술대회; 천안 6군 연합궁술대회 10월(1회) 공주 6개군 연합 궁도대회

101 100 학예지 제18집 1940년(13회) 4월(2회) 방어진 전조선 궁술대회; 해운대 전조선 궁술대회 5월(5회) 온양 전조선 궁도대회; 함안 전조선 궁도대회; 경성 석호정 궁도대회; 경성 전조선 궁도 선사권 대회; 양곡(김포) 전조선 궁술대회 6월(5회) 용인 궁술대회; 인천 대회; 공주 6개군 연합 궁술 편사대회; 영산 (경남) 5개정 연합 편사대회; 청진 전조선 궁도대회 7월(1회) 광주 목포 대항 궁도시합 1941년(2회) 5월(2회) 경북 전선궁술대회; 경성 전선 남녀 궁도대회 1942년(1회) 6월(1회) 경성 전조선 남녀 궁도대회 * 투고일 : 2011년 11월 2일 *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9일

102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101 국문 요약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김 기 훈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에 전통 활쏘기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고 있었는가를 규명해본 것이다. 일제 초기의 무단통치 기간 동안 조선 궁술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에 조선의 궁술은 전국적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 된다. 일제의 전략적 묵인정책과 민족주의 세력의 부흥 운동이 궁술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30년 대 말 전시체제 하에서는 국방 체력 단련과 상무정신 함양이라는 제국주의적 목적 하에 조선의 궁술이 일제에 의하여 장려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기간 동안 전통 궁술 활동은 일반적인 통념 이상으로 활성화 되고 있었고, 근대적인 스포 츠로서 변용될 수 있었다. * 주제어 : 전통 궁술,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제국주의, 상무정신, 근대적 변용

103 102 학예지 제18집 Abstract Korean Traditional Arche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i-hoon Kim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ituation of Korean Traditional Archery(KT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During the first 10 years of the colonial period (1910~1919), the activities of KTA was greatly shrank. The activities of KTA, however, had been flourished during the 1920s and early 1930s. It was because there existed the revival movement of KTA by the Nationalists, along with the tact consent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During the last stage of the colonial period(1937~1945), the KTA was ironically encouraged even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which had used the KTA for the imperial purpose as a means to cultivate martial spirit and to develop physical strength for military defence. As a result, the KTA had been stimulated much more actively than the common image and transformed as a modernized traditional sport during the colonial period. * Key Words : Korean Traditional Archery, Japanese colonial period, Nationalism, Imperialism, Martial spirit, Modern transformation

104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03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이 재 학** 목 차 1. 머리말 2. 과거와 현재의 활터[ 射 亭 ] 문화 1) 전국 활터의 설립 2) 전국 활터의 조직과 운영 3) 전국 활터의 회원 3. 현대 활터[ 射 亭 ]의 문화 1) 현대 활터의 모습과 규모 2) 현대 활터의 설립과 정명 3) 현대 활터의 의례 문화 4) 현대 활터의 운영 4. 전국 활터의 활성화를 위한 과제 1) 현대 활쏘기 용어의 통일 2) 현대 활터 운영 체계의 개선 3) 현대 활터 풍속과 사풍의 정착 5. 맺음말 1. 머리말 1) 인간의 삶에 있어 전통시대가 주는 교훈은 매우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현대인은 과거의 역사 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으며, 선성( 先 聖 )의 가르침을 통해 자기를 반성하고 미래를 위한 자화상 을 만든다. 예로부터 선성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문무( 文 武 )의 심오한 가치를 느낀다. 한국 전통시대의 활쏘기 문화는 고대사회로부터 삼국, 조선, 근대, 현대라는 측면에서 끊임 없는 문화적 변용이 있었다. 전통시대 활쏘기 문화는 궁시( 弓 矢 )의 출현으로부터 인간 생명의 유지를 위한 수렵, 이민족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전쟁의 노구를 다하였으며, 그 능력을 시험 *이 연구는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국고보조사업인 전통 활쏘기의 정체성 확립방안 수립 의 결과 보서 내용을 수정 및 보완하였음을 밝혀둔다. **연세대학교 체육연구소 연구원( @hanmail.net)

105 104 학예지 제18집 하여 사회적 위계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전통시대 활쏘기 문화의 중심에 무인( 武 人 )이 있었으며, 무인의 활은 전쟁의 병장기를 넘어서 개인의 인객을 수행하는 노구로 중요시 되었다. 이재학(2011)은 <한국 전통시대의 무예사를 통해 본 신체관의 함의>에서 각 시기별 무( 武 ) 의 의미를 유추하는 과정에서 무인( 武 人 )의 용어는 무사( 武 士 )로 전용되고 있으며, 그 용례는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는 무사의 명칭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하였다. 전통시대의 무( 武 )는 천지인( 天 地 人 )을 위한 지과( 止 戈 :전쟁을 그치는 것)가 인의예지( 仁 義 禮 智 )의 사상을 함양하였으며, 무사는 실천적 행동의 의( 義 )와 예( 禮 )를 중요시하고 지( 智 )를 통한 충( 忠 )과 효 ( 孝 )를 실천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통시대의 활쏘기 문화는 무( 武 )의 중심에 있었고, 그 예( 禮 )를 살펴보고 확인하는 근본으 로 삼았다. 이와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통시대의 활쏘기 문화는 다양한 의미를 부 연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궁사는 무엇이 전통 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으 며, 활쏘기 문화에서 찾고자하는 전통은 무엇인지?, 전통신체문화에서 찾고자 하는 선성( 先 聖 ) 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현대 활쏘기 문화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전통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중 활쏘기에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용어들의 문제를 지적하 는 경우가 있으며, 활쏘기 문화에 내재한 의례 또한 중요한 부분으로 논의하고 있다. 즉 전통성의 문제는 일본의 잔재의식인 궁도( 弓 道 ), 세계화의 용어에 부적합한 국궁( 國 弓 ), 전통에서 찾을 수 없는 궁술( 弓 術 )의 용어가 있으며, 전국 활터의 규모가 확대되고, 수련 인구 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구사와 신사의 갈등( 儀 禮 )은 심화되고 있다. 특히 활터[ 射 亭 ]의 운영은 지방자치단체와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국민들이 공공체육시설물의 전면적인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활터의 임원들은 기존의 제도를 보장받기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전국 활터의 활성화를 위한 현황과 과제를 통해 우리의 궁사가 고민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피력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즉 이 연구는 제2장에서 활터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제3장은 현대 활터의 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354개의 사정을 조사하였다. 또한 2, 3장의 논의를 통해 제4장은 전국 활터의 과제를 설정하 고, 제5장은 전국 활터의 활성화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106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과거와 현재의 활터[ 射 亭 ] 문화 1) 전국 활터의 설립 전통시대의 활터가 생성되고 변화되는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통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활터가 넓은 대지에서 수렵과 군사훈련의 장소로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에 의하면, 활터의 명칭을 < 정>으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 의 백제 비루왕(17년:320년) 때는 궁성에 사대를 설치하여 활을 쏘았다. 고려 신종(8년:1090년)때 는 호랑부랑에 활터를 설치하여 군졸과 백성에게 습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훈련 원과 모화관에서 무과시취의 장소로 사대를 설치하였으며, 춘당대와 경무대에 활터를 설립하 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전통시대 활터의 문화는 군사 훈련을 위한 습사의 장소를 만드는 한편, 왕실과 무과를 위해 관설사정을 설치하였다. 반면 민간사정의 설립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오운정>을 설립 하여 백성에게 개방한 것을 그 시초로 볼 수 있다. 갑오경장(1896) 이전은 무과시취의 장소와 같은 관덕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이후 도성(한양) 내외는 민간사정이 생성되었다. 이것은 황학정(1898)을 비롯한 석호정(1920)이 설립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중화(1929)의 조선의 궁술 에서 도성 내외에 활터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김기훈(2004)은 전국 군현지도에서 호남지방의 지도와 1871년과 1895년에 편찬된 호남읍지를 토대로 활터를 분석하였는데, 당시 현, 군, 부에 46개가 있었으며, < 정(당)>이 19개, <장대>는 7개의 명칭 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관덕정의 명칭이 많은 것으로 결과를 보고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 민간사정은 부흥기를 맞이한 반면, 폐정과 생성의 현상이 가속화 되었다. 즉 조선말기는 갑오경장에 의해 기록이 전소되거나 소멸되어 현재는 그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조선의 궁술 을 통해 당시의 명칭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전국 활터의 문화는 1910년대 이후 일부의 활터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 으며, 사계를 조직하여 새로이 복원하여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활터가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는 일본인을 비롯한 민족주의자에 의해 각종 궁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년 <동아일보>의 6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우리의 독특한 무술,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를 개최한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주요 전문은 옛날에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우리의 독특한 무기, 궁술대회를 연다.

107 106 학예지 제18집 고 보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통시대의 활쏘기 문화는 근 대적 경기규칙이 도입되는 한편 전국 활터는 새로운 사풍을 형성하였다. 제1회 전조선궁술대 회는 180여명의 궁사가 참가하였으며, 경성의 석호정, 인천의 무덕정, 이천의 운봉정 등이 참 가하였다. 하지만 현대 전국 활터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명확한 기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로 인해 1920년대의 활터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의 전국 활터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지만,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시대적 배경에 의해 전국 활터는 소멸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6.25의 역사적 격동기에 민간사정은 점차 감소하였 다. 반면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한 조선궁술연구회(1922)의 태동은 전국 활터를 정착시키는 토 대를 마련하였으며, 이는 조선궁도회(1926), 조선궁도협회(1946), 대한궁도협회(1948)로 개칭 하였다. 특히 대한궁도협회는 1947년 대한체육회의 가맹과 함께 전국체전종목의 채택으로 활 쏘기의 국민적 대중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근대 활쏘기 문화는 대한궁도협회를 주축으로 근대적 경기화를 지향하였으며, 전국의 활터는 새로운 모습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 였다(대한궁도협회, 1992). 현대 전국 활터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대한궁도협회의 <사정 등록(1968~2011)>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68년은 전국 80여개 활터가 존재하였으며, 1974년은 130개, 1985년 185개로 증가하였으며, 1986 년에 216개, 1999년은 298개의 활터가 대한궁도협회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2000년은 302개가 가입하 여 지속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2011년 현재는 357개의 활터가 증가하였다. 1986년 이후 지역별 활터의 숫자를 살펴보면, 가장 많이 분포한 시기는 서울(10개), 부산(6개), 대구(4개), 인천(10개), 광주 (4개), 대전(5개), 울산(9개), 제주(6개)의 활터가 10개 미만이며, 지역적 특성은 특별시, 광역시, 자치 단체의 특징이 있고, 활터의 증가보다는 유지 또는 일부는 폐정되는 현상을 보인다. 반면 경기(79개), 강원(34개), 충북(18개), 충남(34개), 전북(17개), 전남(42개), 경북(25개), 경남(56개) 등은 일부가 폐 정되는 경우도 있으나 유지보다는 지속적인 증가의 추이를 보인다. 대한궁도협회의 전국 활터의 생성과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증가의 추세 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 내 활터가 일부가 폐정과 새로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남, 전북, 경북, 경남은 안정적인 증가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활터의 비율이 상대적으

108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07 로 높은 지역은 경기(79), 경남(56) 전남(42), 강원과 충남(34)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역과 인구비율을 고려하면, 특별시 및 광역시 분포가 열악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지역의 크기 가 큰 곳이 분포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2) 전국 활터의 조직과 운영 한국 활터의 문화적 변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과거 전통 활쏘기가 군사적 또는 과거시험을 통해 궁사를 선발하고 사회적으로 예사의 문화가 정착하였다는 것이며, 근대는 활쏘기 단체의 결성을 통해 전국 각지에 민간사정이 확장되었으며, 자연 조직적 문화가 형성 변화 발전하였 다. 민간사정의 조직은 근대이후에 생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전통 활쏘기를 보급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의 활쏘기 조직을 살펴보는 기준은 <계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계의 규약을 기록한 <계첩>을 살펴보면,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규약의 서( 序 ), 입의( 立 議 ), 좌목( 座 目 ), 발( 跋 )로 구성되고, 서는 완의( 完 議 )라고 하며, 설립 유래, 목적, 역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입의는 절목( 節 目 ), 계헌( 契 憲 ), 범례, 조약, 규약 등 계원이 준수해야 할 규칙 등을 포함하고 있다. 계원의 감독 규정, 임원 선출 및 예우 등이 포함되며, 좌목은 계원의 신분, 생년의 간지, 호, 본관 등을 기재하고 계에 관련된 수지, 재산목록과 소유전답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 이 조선시대의 <사계>의 구성은 근대이후에 정관 또는 규약, 정칙으로 변화하였으며, 장( 章 ), 조( 條 )로 구분하고 끝부분에 부칙이 명기되고 조직(구성원)은 계장, 유사, 도가( 都 家 ), 장재( 掌 財 ), 서기 등이 있었다. 현재의 전국 사계는 활터의 자체적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전통시대의 사계와는 다른 조직이 운영된다. 과거의 사계는 국가적 운영의 차원에서 관설사정을 설립하여 문무신료를 비 롯한 백성들에게 습사하도록 하는 군사훈련 및 예사문화를 지향한 반면, 현재 민간사정은 심신 의 건강증진과 개인의 인격을 도야하는 전통문화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것은 동호회를 조직하 여 단체를 설립하고, 창립총회를 통해 단체를 설립한다. 동호회는 사계에 관련된 사계좌목의 내용을 구성하고 회원을 모집한다. 사계의 가장 핵심은 활터의 설립 목적을 분명히 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규약을 제정하는 것이다. 회원들이 활쏘기를 할 수 있는 활터를 만들고, 사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후기, 그리고 근대라는 측면에서 활터가 운영되고 있는 사례를 살펴보

109 108 학예지 제18집 면, 충남 논산의 강경 덕유정이 있다. 덕유정은 1828년에 59명의 발기인에 의해 사계를 조직하 여 창립하였으며, 설립 목적을 활쏘기에서 의를 찾고 예를 행하고 교유함으로써 덕을 본다"라 고 하였다. 이후 사계는 1846년, 1870년, 1884년, 1890년, 1893년에 수정 및 보완된 사계좌목을 작성하였다. 한편 덕유정은 2008년 새로운 정칙을 개정하였으며, 그 전문에 현대의 맞는 정칙 을 개정한다고 되어 있다. 제1장 총칙, 2장 목적, 3장 사원 및 임원, 4장 임원의 선출 및 이사회구성, 5장 임원 및 이사의 임무, 6장 입사 및 탈퇴, 7장 회의, 8장 궁도대회 및 출전, 9장 사범의 채용과 선수의 훈련, 10장 재정, 11장 회계, 12장 부칙으로 구성하고 각 장별 조항을 두고 42개 조항을 구성하고 있다. 그 설립목적은 전통 무예인 궁도연마로 사원의 심신을 단련하고 사원 상호간의 화합단결과 상경하애 및 상부상조하는 미풍 양속을 계승발전 시킴을 목적으로 한다. 고 하고 있으며, 별도부서는 이사, 총무, 사범을 두고 임원은 사백, 접장, 권무, 공원, 감사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신입사의 회원가입은 논산시내 거주하며, 생 활권에 위치하고, 2인 이상의 추천으로 게시판에 7일간 공시한 후 이사회에서 심의를 거쳐 입사한다. 덕유정의 규약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임원과 회원의 역할, 그리고 신입회원의 규정이 명시되 고 있으며, 다른 여타의 사계보다 그 규율이 엄격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원의 사백은 정의 재산과 정무를 총괄하고, 접장은 사백을 보좌하여 재정을 관리하며, 음력 7월 15일 제일에 정 재백미2입( 叺 )을 드려 봉제를 거행하고 권무는 사백과 접장을 보좌하고 양력 5월 1일 정의 개정 기념일에 50만원을 드려 기념행사를 전담하고, 사원은 행사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이러한 <정칙>은 강경 덕유정을 비롯한 전국 354개의 활터가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전국 활터의 설립은 지역사회에 의해 동호회를 결성,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회원을 조직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따라서 전국 활터는 동호회를 조직하고, 지역 시 도지 부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에 서울 영학정의 <정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제1장 총칙, 2장 목적, 3장 회원, 4장 임원의 제6조(임원의 구성)를 살펴보면, 1)고문 약간명, 2)사두, 3)부사두, 4)총무, 5)이사 7명 이내, 6)감사, 7)그 외에 재무 1명, 사범 1명 또는 임원 아닌 부총무를 둘 수 있다. 5장은 회의, 6장은 사업이 명기되고, 그 내용을 제16조에 설명하고 있다. 즉 제3조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1)대한궁도협회에 가입, 2)전국대회 및 서울시 친선대회 개최, 3)전국궁도대회에 대표선수 파견, 4) 입, 승단대회 유치 등이 있고, 7장 회계, 8장 상조 및 상벌 등의 부칙을 합한 37개 조항으로 구성되고 있다.

110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09 이와 같이 전국 활터의 동호회 조직은 지역과 활터의 특성에 의해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전통의 활쏘기를 개인과 사회의 공익을 위한다는 것이며, 원활한 사업과 운영을 위하여 그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규칙의 엄격함은 임원과, 회원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것이며, 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위반할 경우는 상벌을 통해 규칙을 적용하고, 회원을 제명 할 수 있다. 특히 전국 활터의 <정칙>에 제명에 대한 기준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회원의 제명은 단지 활터의 회원으로 제명되지만 전국 활터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다. 동호회 조직에서 제명된 사원은 타정에 이첩이 불가능하며, 타 사정에서 습사를 할 수 없다 는 것이 불문율이다. 3) 전국 활터의 회원 과거의 활쏘기는 누가하였는가? 문헌에 의하면 궁중의 왕들이 습사를 하였으며, 군사들의 주요 강무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통시대 각궁은 예사용으로 사용하고 일반 병사 가 취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각궁의 제작 과정이 단순하지 않 음이 주요 이유일 것이다. 전통의 활을 쏘는 사람들은 고위관료로 문무대신과 군사 중 직급이 높은 장군이 활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결국 고위 관직 자 및 병사를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목 궁, 죽궁 등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시대 활쏘기의 인원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 적이다. 현재 전통 활쏘기의 수련인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1986년 대한궁도협회가 발행한 한 국의 궁도 에 전국 211개의 팀이 있으며, 선수는 4,600명이 등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체육과학연구원(2003)의 한국체육의 지표 에 수록된 수련인구는 2003년부터 그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를 비교하면 팀 및 선수증가의 추이는 부진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00년 대 이후는 300개 팀이 넘어 2003년의 선수는 7,386명의 선수가 등록되어 점차 증가하고 있음 을 알 수 있고, 2005년은 557개 팀 7,915명, 2007년은 661개 팀 10,017명, 2009년은 705개 팀의 11,560명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국궁도연합회는 1998년 157개팀 4,898명, 2000년대는 대한궁도협회 보다 많은 클럽 이 생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398개 팀 11,391명의 1만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대한 궁도협회의 선수가 1만명으로 접어든 시기는 2007년 661개 팀 10,017명의 선수가 등록하여 두

111 110 학예지 제18집 단체는 1만명을 넘어 2만명의 시대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특히 궁도연합회의 클럽 및 회원 수는 급격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전국궁도연합회 수련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국가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다. 지속적인 국가정책의 실현은 전통 활쏘기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즉 2005년은 568개 팀 15,368명, 2007년은 689개 팀 17,872명, 2009년은 678개 팀에 17,968명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의 수련 인구는 2009년 대비 2만명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 된다. 이와 같이 한국 전통 활쏘기 수련 인구는 국가정책을 위임 받은 대한궁도협회와 전국궁도연 합회의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급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련인구의 증가 내면에는 다양 한 환경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전통의 사회로부터 전승된 활쏘기의 내면에 내재된 다양한 가치가 현재의 국민적 정서를 자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전통 활쏘기의 수련 환경은 다양한 장비의 개발과 보급, 단체의 대회 개최는 국민적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반면 1986년부터 수련인구는 급속한 성장을 보이 고 있으나 현재의 궁도수련은 특정 연령층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전국적 수련인의 연령층을 분석하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청소년의 수련인구가 극히 제한적이다. 즉 한국체육의 지표 에 수록된 연령대를 비교하면, 초중고대의 회원이 매우 부 족한 것을 알 수 있다. 3. 현대 활터[ 射 亭 ]의 문화 1) 현대 활터의 모습과 규모 (1) 활터의 모습 현대 전통 활쏘기의 상징적 문화를 찾는 것은 활쏘기의 위상정립에 직결된 일이다. 외면적인 측면에서 활쏘기의 가치는 각궁과 죽시로 대별될 수 있다. 이는 한국 고대 사회로부터 그 특성 이 현재에 전승되고 있다. 즉 전통시대 궁시의 제작과정이 현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활을 만드 는 재료 또한 전통 사회에서 사용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112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11 현재 각궁과 죽시를 제작하는 곳은 상당수가 있으며, 국가는 궁장과 시장의 인간문화재를 지정하여 전통의 활과 화살을 보존하고 있다. 이보다 한국 전통 활쏘기의 외면적으로 들어나는 상징은 활터의 모습이다. 전국 활터의 문헌 명칭은 정, 당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건물 을 설치하여 습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현이나 관은 연무장과 같은 군사훈련시설에 습사할 수 있는 장소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양반계층은 지역 내 정의 정자나 루를 건립 하여 솔포를 설치하여 습사를 하였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산과 강, 논과 밭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활터를 만들어 습사를 하였다. 따라서 현대 활터의 문화도 산과 강, 논과 밭에서 시작하여 종합운동장, 체육공원, 공원 등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 도심의 중심, 또는 인근과 외곽에 건립되고 있으며, 활터의 위엄을 드러 내는 정이 있다. 이들의 정은 광역시, 시 도 군의 관설 및 민간(정 소유, 개인 소유 또는 임대, 하천) 사정을 건립하고 있다. 관설사정은 광역시, 시 도 군의 관할 행정기관의 재원으 로 건립하고 이를 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그 명칭을 국궁장 또는 궁도장으로 표기 하고 있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의 재원에 의해 건립된 활터의 대부분은 궁도의 동호회에 위임하 여 운영하고 있다. 전국 활터는 외형적으로 규모와 정의 크기로 구별된다. 현대 활터는 최소 500평, 최대 1만평 을 자랑하는 곳도 있으며, 전통적인 측면에서 목조와 기와를 올린 한식목조구조 의 사정과 현 대 건물의 공법에 의한 콘크리트와 기와, 조립식건물, 컨테이너, 천막을 설치하여 활터를 만들 고 있다. 이들의 모든 형태를 정으로 표기하고 있다. 전국 활터의 구조적 형태는 <표-1>에서 살펴보 <표-1> 전국 활터의 형태 면, 정의 형태는 한식기와(22)가 6.4%, 콘크리트 정 형태 빈도(개) 퍼센트(%) 한식 기와 기와(132)가 38.8%, 콘크리트(49)가 14.2%, 조립 콘크리트기와 식(87)은 25.2%, 컨테이너 이하(55)는 15.9%로 나 콘크리트 타났다. 시설 형태를 살펴보면, 전통방식의 한식 조립식 컨테이너이하 목조구조가 활터의 상징을 갖는 의미로 볼 수 있 합계 으나, 전국적인 분포가 소수에 불과하며, 콘크리 *결측값(357개/12개) 트와 기와의 전통과 현대의 융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단층 또는 2층의 규모로 점차 대형화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조립식과 컨테이너가 설치된 경우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지원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신설 활

113 112 학예지 제18집 터의 경우는 건물의 형태가 아닌 관계로 사정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2-3평 정도의 천막 또는 10평의 비닐하우스로 만든 사정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 활터의 규모 전국 활터의 규모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표-2> 전국 활터의 규모 대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즉 대부분의 활터는 활터규모 빈도(개) 퍼센트(%) 주차장, 사정, 무겁(과녁)을 포함한 각종 시설을 2000평 이하 ~2500평 사이 갖추고 있으며, 이를 포함 한 전체 규모를 분석하 2500~3000평 사이 였다. 즉 전체 평수는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3000~3500평 사이 ,000평 이하(120)가 35%, 2,000~2,500평(63)이 3500평 이상 합계 %, 2,500~3,000평(92) 26.8%, 3,000~3,500평 *결측값(357개/15개) (33)이 9.6%, 3,500평 이상(35)이 10.2%로 나타났 으며, 전국 활터의 343개정 중 223개가 2,000평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 다. 그리고 전국 활터의 평수는 사대를 포함한 규모 <표-3> 전국 활터의 사정 규모 를 분석한 결과는 <표-3>에서 보는 같이 40평 이하 정 크기 빈도(개) 퍼센트(%) (90)가 26.2%, 40~70평(70)은 20.4%, 70~100평 40평 이하 ~70평 (122)이 35.6%, 100~130평(32)이 9.3%, 130평 이 70~100평 상(29)이 8.5%로 나타났다. 평균 정의 크기는 100~130평 ~100평이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전 130평 이상 국 활터가 145m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합계 *결측값(357개/30개) 과녁 수가 3개 이상, 사대수가 21개 이상이 설치가 되어야 경기를 진행할 수 있는 규모가 된다는 측면이 있다. 한편 정의 평수가 70평 이하인 경 우는 한식목조구조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 한식목조구조의 정은 지방자치단체의 재 원에 의해 만들어진 활터가 있으나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활터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 전통 활쏘기 문화의 규모는 점차 대형화의 추세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최근 설립되고 있는 활터의 과녁의 수가 3관 또는 4관 이상으로 설치하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통 활쏘기의 수련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114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13 있으며, 과녁수의 증가는 사대수가 증가하고 사대가 증가하면 정의 크기는 자연 100평 이상으 로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전국체전과 도민체전의 유치에 의해 규모는 대형화의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2) 현대 활터의 설립과 정명 (1) 활터의 설립 전국 활터의 설립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시대적 배경과 지역사회의 역사, 사회, 문화적 현상과 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전통의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고대 사회로 부터 조선시대를 거쳐서 현재라는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 다. 전국 활터의 문화는 전통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의 양식을 함유하고 있다. 이에 현대 사회에서 전통 활쏘기 문화의 상징성은 전통양식의 한식목조구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반면 전국 활터의 정신적 산물은 전통을 유지하여 계승하는 내면적 가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 한 과제이다. 전통 활쏘기의 내면적 가치를 살펴보는 것은 역사 문화적인 측면에 중요시 될 수 있다. 역 사적인 측면의 전통은 한 시대를 거쳐 다음의 세대를 넘어 현재에 그 모습이 어떠한가를 살펴 보는 것이며, 문화는 전통의 활을 쏘는 사람의 내면적인 정신세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지만 활터의 역사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즉 활터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 한 정지가 있거나 이를 고증할 수 있는 증빙 자료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임원들의 대 부분이 활터의 설립 유래와 역사를 알고 있는 경우가 제한적이다. 따라서 전국 활터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기 위해 각종문헌 및 각 정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 및 기록물을 통해 활터를 건립하는 유래를 편액으로 남기고 있으며, 사계좌목을 작성한 기록, 정을 건립한 중수기, 정의 건립비, 정을 이전한 편액, 정을 증축한 편액, 정의부속 건물을 건립한 편액, 사정의 정명을 개칭한 이유 등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전국 활터의 설립을 위해 노력한 지역사회의 인사, 사두, 임원, 사우들의 좌목을 기록한 편액이 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한 공적비가 있다. 이들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사계좌목을 작성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있으며, 사계를 작성하는 것은 활터를 보존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물 려주어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기록하고 있다.

115 114 학예지 제18집 전국 활터의 설립은 <표-4>에서 보는 바와 <표-4> 전국 활터의 설립 같이 1910년 이전(31)이 9%, 1911~1950년(51) 설립년도 빈도(수) 퍼센트(%) 이 14.8%, 1951~1970년(53) 15.4%, 1971~ 년 이전 ~1950년 년(91)이 26.4%, 1991~2011년(119)이 34.5%로 1951~1970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활터의 1971~1990년 설립 시기는 한국 사회의 시대적 사항과 무관하 1991~2011년 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것은 1910년 이전 은 조선시대 말기로 한국의 개화기와 밀접한 관 합계 * 결측값(357개/12개) 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시기는 근대화된 소총과 대포로 인해 전통 활쏘기는 점차 소멸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전국적으로 활터가 휴정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으나 근대화된 활쏘기 대 회를 개최하였으며, 광복과 함께 전국 활터가 개장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전소되어 폐정하였 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후반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양궁을 도입하는 한편, 분리되고 카본 궁시가 등장하여 활터 및 수련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1990년대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착과 함께 급속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통 활쏘기의 시대별 활터의 증가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여 정신적 상징성을 함유하고 있 으며, 활터가 한민족의 정신적인 산물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을 자랑하는 많은 활터는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 그 자료가 유실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유실되고 있다. 특히 전통과 현대라 는 측면에서 활터의 기록유산이 유실되고 있으며, 기록유산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있다. (2) 활터의 정명 전국 활터의 정명을 분석하는 것은 정명의 의미를 통해 분류하였다. 전국 정명은 유가의 덕 ( 德 )에 대한 정명이 있으며, 그 명칭을 관덕당, 또는 관덕정, 육일정과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무예의 수련장을 의미하는 연무정이 있으며, 무예를 숭상하는 충무정, 무덕정의 정명을 사용하는 한편 지역의 지명이나 산, 강의 명칭을 사용한 경기도 시흥의 시흥정, 경남 창녕의 창녕정이 있다. 반면 기타의 명칭으로 경기도 안성의 마춤정, 충남 천안의 거봉정 등의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국 활터의 정명은 <표-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가( 儒 家 )적인 의미를 사용하는

116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15 경우가 13.6%(47)로 나타났고, 무예의 덕을 숭상 <표-5> 전국 활터의 정명 하는 무( 武 )의 명칭은 15.6%(54)로 조사되었다. 정명 의미 빈도(개) 퍼센트(%) 기타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14.2%(49)로 나 지역명 儒 家 명 타났으며, 전국 활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武 의 명 은 현재 또는 옛 고을의 지명이 56.6%(196)로 나 기 타 타났다. 합 계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신설된 활터의 정명은 *결측값 357정 중 11개정 지역 명칭 또는 산과 강의 명칭을 사용하여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정명의 의미를 부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의 연혁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단지 많은 우승기와 상패를 진열하고 있다. 물론 신설 활터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 그 기록을 남기 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무엇으로 현재의 신입사원과 사원들에게 본을 보일 것인가? 활터의 규모가 3,000평, 정의 크기가 100평이 넘는 활터가 10년 이상의 역사가 있지만, 이를 기록한 정지 또는 편액을 설치하지 않은 활터가 상당수가 있으며, 단지 웅장한 현판을 걸고 있어 전통 활쏘기의 정신적인 문화가 보이지 않는다. 이에 전통 활쏘기의 전신적 문화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전국 활터의 정명은 전통 활쏘기의 정신적인 상징성이 있다. 무( 武 )의 덕( 德 )을 수련하 는 연무장 등을 의미하고 있으며, 무를 통한 충( 忠 )과 의( 義 )를 중요시 하는 정명이 사용되고 있고, 정명이 유가적인 측면은 동양사상의 근원을 형성한 공자, 맹자 등의 성현 말씀을 그 유래 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관덕정과 같은 명칭이 있고, 육예의 사( 射 )를 인용한 육일정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전통 활쏘기의 정신적 상징, 즉 내면적인 가치는 활쏘기를 통해 무예를 수련하고 이를 통한 덕을 함양하여 관덕을 살펴보는 것이다. 3) 현대 활터의 의례 문화 (1) 정간배례 한국 전통 활쏘기의 의례는 단순히 상대를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신성( 神 性 )이 함의되어 있 다. 즉 전통 활쏘기의 의례는 고대국가의 형성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국 문헌에 보이는 전통 활쏘기는 통치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통치권자의 상

117 116 학예지 제18집 징은 활과 화살( 弓 矢 )을 만들고 활을 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 다. 이것은 통치의 수단적인 측면의 상징물이며, 실제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 그리고 무예체계를 형성한 정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전통 활쏘기의 의례는 동양적 사고관이 필수적이며, 유가( 儒 家 )의 사상이 그 근원을 이 루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 활쏘기 의례의 체계를 형성한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 의례의 대표적인 사례는 왕과 군신간의 의( 義 )와 예( 禮 )를 살펴보고, 문무신료의 관덕( 觀 德 )을 살펴보는 대사례( 大 射 禮 )를 행하였으며, 지방은 향사례( 鄕 射 禮 )가 있었다. 한국 전통 활쏘기의 의례는 조선시대를 전후로 국가 및 지방, 그리고 풍속적으로 행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전통 활쏘기의 의례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의례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현대 활쏘기 문화를 찾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근대 이후 대사례의 형식을 취한 경우가 박정희 대통령(박정희 대통령의 활쏘기 장면은 대부 분 전국 사정에 액자를 진열하고 있음)이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궁도대회에서 시사를 하였으며, 1965년 경남 진해의 벽해정 준공식에 참석하여 시사를 하고 그 정명의 현판 을 친서로 남겼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 전통 활쏘기 의례의 근원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민간사정의 의례를 찾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먼저 현 재의 전통 활쏘기는 전국 활터를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부터 그 정명을 근원 으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사건에 의해 정명을 개정하여 현재에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전통 활쏘기 의례를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은 국내 민간사정의 설립 년도를 통해 의례적인 시발점을 찾는 것이다. 세 번째 전통 활쏘기 의례의 핵심 내용에 대한 근원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과 현대라는 전통적인 의례의 전승, 자연적 의례의 생성, 인위적인 의례의 형성으로 지속되고 존속되는 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전국 활터의 의례가 전승적, 자연적, 인위적 의례의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한국 전통 활쏘기의 의례를 찾는 작업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과거로의 회귀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전국 활터에서 행하고 있는 실태를 분석하였다. 의례의 기준 은 행위를 하는 그 자체에 의식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협의적인 의미는 단순히 예를 표현 하는 것이다. 광의적인 측면은 행위자체에 절차와 의식을 신성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국 활터의 정간배례는 현대 활쏘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18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17 현재의 정관배례는 전통 활쏘기의 핵심 의례중의 하나이다. 정간배례는 신입사로부터 구사 의 등정례, 즉 활터에 들어오는 순간 제일 먼저 정간에 예를 표한다. 그리고 정에서 행하는 편사나 전국대회개회식에서 또한 정간배례는 중요한 예식이다. 이에 정간배례의 조사는 활터 방문 당시 정간 설치의 유무를 확인하였으며, 유무에 따른 정간배례의 여부를 질문하였다. 전국 활터의 정간배례에 대한 조사결과는 <표-6> <표-6> 전국 활터의 정간배례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 325개의 활터 중 정간이 정간배례 빈도(개) 퍼센트(%) 없는 경우가 25개정으로 나타났으며, 정간배례를 하 정간배례 정간없음 지 않는 경우가 7.7%를 차지하였다. 반면 전국 활터 기타 에서 정간배례를 실시하는 경우는 90.2%로 대부분이 합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국 활터에 *결측값 357정 중33개정 정간이 없는 활터 중 일부는 특정 영정, 선생안 등에 배례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전국 활터의 정간배례는 전통 활쏘기의 의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행위이며, 기준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2) 신사의례 전국 활터의 신입사 의례는 <정칙> 또는 <정관>의 규정에 의해 실시하고 있다. 즉 신사의례 는 입회원을 제출하고 임원회의를 통해 입사 한다. 입사 결정 후 행하는 신사의례는 입궁, 집 궁, 일중, 이중, 삼중, 사중, 오시오중의 몰기례 <표-7> 전국 활터의 신입사 의례 를 실시한다. 전국 활터의 신입사 의례는 <표 신사의례 빈도(개) 퍼센트(%)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사의례를 하지 않는 없음 몰기례 만 경우가 4개정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일중례~몰기 이들의 활터 방문시 면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 입궁~몰기 는 것은 신사의례를 행하는 재원이 부족하고 특 입궁~연몰기 히 활터의 회원수가 극소수인 경우로 조사되었 합계 *결측값 357정 중 112개정 다. 따라서 대부분의 활터는 입궁~연몰기(26)를 행하는 곳이 10.6%, 몰기례(38)만을 행하는 경우가 15.4%, 일중례~몰기(87)는 33.4%, 입궁~몰 기(91)는 37%로 나타났다. 전국 활터 현장을 방문한 결과와 인터뷰의 내용을 설명하면, 활터의 규모에 따라 신사의례의

119 118 학예지 제18집 대부분은 약식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입궁의 형식은 <정칙> 또는 <정관>의 규정에 의해 추천을 받은 사람은 임원의 결정에 의해 입회를 실시하고 그에 대한 약식의 의례 를 실시한다고 하였으며, 일정한 수련의 기간(3개월)을 거치며, 실제 집궁을 하는데 집궁의 의 미는 수련기간이 끝나고 사대에서 과녁을 향해 습사를 할 수 있는 의례이다. 아울러 습사 이후 신입사가 처음 일중(초시)을 하면 그 동안 지도한 사두와 사범에 대한 감사의 예를 표하는 형 식으로 이루어지며, 관중 수에 따라 득중례의 절차를 거행한다. 한편 신사의례에 대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의 활인 각궁의 경우 과거 신입사가 처음 입궁에서 집궁 이후 일중하는 시간이 오랜 기간이 소유되는 반면 현재의 활쏘기 는 대부분이 카본 궁을 사용함으로서 신입사의 수련이 끝나면 초시에 일중을 한다는 것이며, 심지어 삼중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현재 전국 활터의 신사의례인 득중례는 퇴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과거의 사풍은 퇴색하고 있으나 이를 고집하고 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에 신사의례의 새로운 모습이 정착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신입사의 의례는 단순히 신사가 구사에 대한 의례를 행하는 차원을 넘어 정간 및 과녁 제, 선생제례로 이어지는 특성을 보였다. 입궁, 집궁시 정간제를 실시하고 신입사의 득중례 중 오시오중의 몰기례는 활터에서 잔치를 베풀어 축하를 거행하는 한편 정간의례를 실시하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간의례는 단순히 활터의 정간을 향해 배례를 하는 의미보다는 선사에 대한 제례를 시행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 활터의 신사의례(입궁, 집궁, 일중, 이중, 삼중, 사중, 오중) 가 있으며, 몰기례가 있다. 몰기례는 신사의 몰기가 있으며, 구사들의 연순 몰기(삼연, 오연)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의례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신사 의례는 일반적으로 사두와 사범 등의 구사에 대한 예를 표현하며, 이 형식을 넘어 선생제, 정간제, 과녁제의 형식으로 의례를 행하고, 지역에 따라 몰기를 기념하는 편사놀이와 기념품을 증정한다. 이때 제례진설은 지역에 따라 돼지머리를 올리는 경우가 있으며, 형식과 절차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몰기 및 연순 몰기는 활터 내에서 잔치의 형식을 취하며, 사우 상호간의 친목을 다지는 편사놀이를 하는 한편 제례를 함께 봉행하는 경우가 있다. (3) 제례 전국 활터 의례의 상징적인 의미는 선사와 구사, 신사라는 측면이 공존한다. 선사는 국가와

120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19 지역사회, 특히 궁도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인사에 대한 의례, 구사는 선사에 대한 의례를 행하 고, 신사는 구사와 선사를 존중하는 의례가 있다. 이와 같이 전국 활터의 제례는 영정, 정간, 위패 등을 놓고 제례를 시행한다. 정간은 평상시 활터를 등정할 때나 퇴정 할 때 예( 禮 )를 표하 는 것이며, 활터의 개정기념, 선사 봉제시 진설을 차려놓고 제례를 행한다. 즉 전국 활터 의례 의 기준이 되는 것은 특정 인물을 숭상하는 경우가 있으며, 정간이라는 명칭의 글자, 선사에 대한 위패를 모시는 경우가 있다. 영정과 정간에 대해 활터 방문 당시에 주목되는 것은 그 위치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으며, 정간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대부분은 사두의 자리를 배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의 활터는 정간의 아래에 앉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임을 지적하고 있다. 정간의 주변은 역대사두의 사진을 진열하는 것이 전국 사정의 모습이며, 현재는 태극기를 함께 걸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의 활터는 정간에 대한 위치적 개념이나 신성에 대한 의미는 부여하지 않고 단지 상징적으로 걸어 두는 경우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 활터의 제례의식은 지역간의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사전 조사되었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제례진설의 방법과 형식, 그리고 절차의 차이가 있으며, 그 명칭 또한 전문적인 이해가 필요하였다. 각 활터의 제례행위에 대한 명칭은 일반적인 과녁 및 정간제가 있으나 고 사, 기원제, 봉제, 선생제, 선진대제 등의 여러 가지 제례 형식을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국 활터의 제례의식은 <표-8>에서 보는 바와 <표-8> 전국 활터의 제례 같이 실시하고 있지 않는 활터가 33.8%(69)로 나타났 제례의식 빈도(개) 퍼센트(%) 없음 으며, 정간, 과녁, 선생제례를 행하는 활터가 1.5%(3), 정간제 선생제(5)는 2.5%, 과녁제(33)는 16.2%, 정간, 과녁제 과녁제 (39)를 19.1%, 정간제(55)는 27%로 나타났다. 이것은 선생제 정간 과녁 고사 형식의 과녁제를 실시하고 있는 활터가 많은 반 정간,과녁,선생제 면 정의 개정기념일을 축하하는 제례와 명절날에는 합계 대부분의 활터가 제례를 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 *결측값 357정 중 154개정 다. 또한 전통적인 명절인 대보름은 활터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기원하는 과녁제를 행하고 각 활 터에 따라 정간 및 과녁제를 함께 한다. 그리고 과녁의 보수(도색)나 새로이 신설하는 경우

121 120 학예지 제18집 과녁제를 행한다. 특히 전국 활터는 명절(구정, 신정, 추석), 정의 개정과 신축 날에 전 사우가 참가하는 정간과 과녁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통 활쏘기 의례의 가장 핵심은 선사에 대한 제례를 봉행하는 의식이 비중적인 면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된다. 일부 선생제례는 그 지역의 주민들이 함께 참가하는 한편, 선사의 가족이 함께 참가하는 최대 의례적인 행사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부 활터는 정간, 과녁제 및 선생제례 를 봉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전국 활터의 의례적인 측면은 조사 서를 통해 살펴보면, 정간이 없는 활터의 경우 정간을 대신한 영정을 설치하여 배례를 실시하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간배례 유무의 행위는 신입사, 구사들의 대부분이 활터에 등정하는 중요한 의례의 하나로 실시하며, 퇴정 역시 정간배례를 실시한다. 아울러 정간배례는 제례의식적인 측면으로 연결된 다. 반면 정간배례의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부의 궁사 는 활터에서 정간배례를 실시하고 있지만, 이를 종교적인 차원으로 해석하고 특히 조상 또는 정의 신성보다는 일종의 미신으로 이해하며, 정간배례의 전통성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 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 현대 활터의 운영 (1) 활터의 소유주 전국 활터의 운영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현대 활쏘기 문화를 살펴보는데 중요한 요인이다. 운영은 활터를 설립하는 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관련된 각종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다. 전통시대에 활터를 만드는 경우는 현, 관의 지원보다는 지역사회에 사계가 설립되었다. 즉 활 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토지가 있어야 하며, 습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는 것이며, 이를 확보하는 재원이 필요한 것이다. 활터의 재원은 일시에 마련되기 보다는 오랜기간 지역사회의 도움과 운영하는 임원과 사우 들의 노력에 의해 형성되고, 재원은 기부의 형식을 취하였다. 기부문화는 활터를 운영하는 촉 매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국 활터는 한 개인 또는 이를 운영하는 임원들의 특정 한 재산이 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이며, 우리의 문화이다.

122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21 따라서 전국 활터는 운영을 위한 규약과 규칙이 필수적인 법규이다. 운영 규약은 <정관> 또는 <정칙>을 만들며, 운영 목적을 명시하고 목적 사업에 필요한 제반 조항을 설립하는 것이 며, 임원의 구성과 직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단체의 운영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는 방법을 명시 하고, 새로운 회원의 모집을 위한 규약이 마련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현재 전국 활터의 재산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운영 의 또 다른 변수로 볼 수 있다. 즉 과거와 같이 지역사회의 기부로 만들어진 경우는 지역 공동 의 재산이 될 것이며, 이를 소유하는 것 또한 활터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전국 활터의 운영을 위한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먼저 활터의 재산권을 형성하는 소유주의 분석이 중요하다. 이에 전국 활터의 소유주를 분석한 결과는 <표-9>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군) 소유주가 219개정이 있으 며, 전체의 68.2%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소유주인 경우는 24개정, 개인 소유가 34개정으로 나타났다. 국유지는 13개의 정, 기타가 31개의 정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활터의 소유를 분석한 결과는 시(군) 소유의 <표-9> 전국 활터의 소유주 활터소유 활터(개) 퍼센트(%) 시(군) 국유지 13 4 정소유 개인 기타 합계 *결측값(357개/36개) 관설사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설사정은 지방자치제에 의해 시 군의 예산을 지원하여 활터를 만들고 이를 일반 시민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관설사정의 운영권 은 활터에 위임하는 경우도 있으며, 최근 대형화 되고 있는 관설사정의 경우 시 도의 시설관 리공단이 직접 운영하는 사례도 있다. 반면 민간사정(정소유)의 대부분은 지역사회에 의해 설립된 활터이며, 이들 활터는 최근에 형성되기 보다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개인소유의 정은 개인사유지를 임대하는 형식 으로 활터를 설립한 경우이며, 기타는 군부지, 농어촌공사, 도로공사, 토지개발공사 등의 소유 주로 나타났다. 한편 국유지로 설립된 활터의 대부분 하천부지에 건립되어 있으며, 이들은 특 정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 천막과 같은 조립식 건물의 정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전국 활터의 조직체계는 고문, 사두, 부사두, 총무, 재무, 이사, 감사 등의 임원으로 구 성되고 있으며, 그 규모에 따라 직책과 명칭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은 유사한 조직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중 신입사원을 지도하는 것은 교장과 사범이 전담하고 있다. 하지만 교장과 사범은 무급제 형태의 임원직을 맞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사범의 무급제는 현재 활터

123 122 학예지 제18집 의 운영체계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일부 활터는 유급제 사범을 두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 활터의 운영은 관설사정과 민간사정, 개인사유지를 임대하 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관설사정은 시설관리공단과 자치단체 체육회에서 운영을 하고 있으 며, 대부분은 사정을 위탁하여 운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관설사정의 시설 관리공단 및 자치단체의 지원이 있는 사정은 안정적인 운영을 유지하는 한편 소극적인 방법보 다 적극적인 신입사원을 모집하고 특히 유급제 사범을 두고 있는 일부 사정의 사원은 200명 이상이 있는 사정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 활터의 회원과 운영 현황 전국 활터의 회원은 <정칙>에 의해 신입회원으 로 가입하고 회원은 대한궁도협회 또는 전국궁도 <표-10> 전국 활터의 가입단체 가입단체 등록정 선수 수 대한궁도 331개 11,720명 연합회의 회원으로 가입한다. 전국 활터의 회원이 생활체육 159개 5,559명 가입하고 있는 단체는 <표-10>에서 보는 바와 같 이 대한궁도협회에 331개정이 가입하고 있으며, 시 구 군 등의 지역 생활체육회에 159개정 이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한궁도협회의 회원은 11,720명이 가입하고 있으며, 지 역생활체육회에 5,559명이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 활터의 사원은 <표-11>과 같이 344개정이 <표-11> 전국 활터의 사원현황 며, 10대가 있는 활터가 29개(88명), 20대는 82개 연령층 등록정 회원 수 (172명), 30대가 235개(889명), 40대는 324개 10 대 (2,827명), 50대가 337개(3,782명), 60대는 327개 20 대 대 (3,038명), 70대 이상은 273개(1,658명) 총 12, 대 324 2,827 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50 대 337 3,782 수련인구는 50대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60대, 60 대 327 3, 대 273 1,658 40대, 70대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전 합계 ,418 국 활터의 수련인구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 *결측값(357개/13개) 만 그 연령층이 젊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각궁을 사용하고 있는 활터는 <표-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체 354개 중 242개의 활

124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23 터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112 개의 활터는 각궁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한궁도협회는 각궁의 사용 을 권장할 수 있는 경기규칙을 운영하고 있으나 실 제 수련인구에 대비하면 각궁을 사용하는 사원은 1,794명으로 약 15% 정도가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각궁 사용 수요는 점차 감소하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여무사가 있는 사정은 222 개 사정이며 1,20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명궁을 보유하고 있는 사정은 160개정 442명이 있 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전국 활터의 운영 비용은 <표-13>에서 보 는 바와 같이 입회를 받지 않는 곳이 41개의 정으 로 나타났다. 입회비는 3만원에서 50만원으로 각 사정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0만원이 103개 정 20만원이 69개정으로 나타났다. 월 회비는 <표-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2만원이 136개정으로 나타났으며, 3만원이 82개정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월회비가 3만원 이상인 경우는 신 사의 수련비용과 월례회 대회의 경비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활터가 세금을 내는 용도로 사 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3만원 이상은 고전의 인건비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수 있 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 활터의 자치단체의 지원정도를 조사한 결 과는 <표-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체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응답한 활터는 112개정이 있는 것으 로 조사되었으며, 지원이 없는 경우는 30개정이 <표-12> 전국 활터 사원의 특성 사원특성 등록 정 회원 수 각궁사용 242 1,794 여 무 사 222 1,205 명 궁 <표-13> 전국 활터의 입회비 입회비 활터 수 퍼센트 없음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만원 합계 *결측값(357개/97개) <표-14> 전국 활터의 월회비 월회비 활터수 퍼센트 없음 일천원(1일) ,000원 ,000원 ,000원 ,000원 ,000원 ,000원 합계 *결측값(357개/95개)

125 124 학예지 제18집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15> 전국 활터의 지원단체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면, 단체의 지원이 지원단체 활터(개) 퍼센트(%) 있는 경우는 관설사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 무 즉 시, 군, 구의 자치단체 재산이며, 이들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건물유지 및 보수에 필요한 재원을 합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부의 사정은 시체육회로부터 대회출전 경비를 지원받고 있다. 특히 광역시 또는 시 군의 시설관리공단에서는 운영하고 있는 일부의 사정은 각종 세금을 지원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시군구의 시청, 군청, 구청에서 전기세, 물세를 지원받는 사정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 전국 활터의 활성화를 위한 과제 1) 현대 활쏘기 용어의 통일 전통과 현대의 문화는 서로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형성하여 유지된다. 특히 인간 신체문화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는 자연적 생성을 통해 변화와 발전, 그리고 변화 속에 새로운 문화를 창출 한다. 새로운 문화의 창출은 겉으로 보기엔 전통과의 완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 체의 근원은 그 문화의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한국 전통 활쏘기의 본질 적 가치 이다. 전통 활쏘기의 근원은 인간생활의 필연적인 도구의 기능과 이를 활용한 살생 무기로서의 기능이 활의 근원이다. 활의 기능은 단지 생존(수렵)과 전쟁(무기)을 위한 기능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 통의 활쏘기의 기능은 인간의 도구적인 측면에서 문화사회적 기능의 재생산을 요구하며, 문화 적 기능은 인간의 새로운 정신문화로서 생성을 가속화하여 문화적 변용을 시도하고, 문화는 새로운 정신적 문화를 창출한다. 하지만 모든 문화는 새로운 문화로 탄생하여 변화된 것이지 그 근원이 새로운 문화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에서 항상 수식어로 따라는 것이 전통 이다. 특히 현대 사회의 신체문화는 전통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21세기 무예신체문화의 화두는 전통성의 정립

126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25 이다. 전통 활쏘기의 정통성에 있어 우리나라의 어떠한 사람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통 과 현대의 만남은 새로운 전통을 요구하며, 현재의 전통에 대한 근원을 요구한다. 전통 활쏘기에서 요구되고 있는 전통성은 활쏘기 용어인 궁도, 국궁, 궁술이다. 이들의 용어 는 전통 사회로부터 사용한 용어가 있으며, 시대적 조류에 의해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여 만들 어진 것도 있다. 문제는 이들의 용어가 함축하는 방향은 단순히 전통 활쏘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 개념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활쏘기 연구자들 또한 궁도, 국궁, 궁술의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문화적인 습성 상 상황적 이론이 적용되어 표 현되는 것이다. 한국 전통 활쏘기의 본질적 가치를 확립함에 있어 중요한 과제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의 개념을 살펴보고 이들의 용어가 함축하는 개념을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의 무예, 무도, 무술의 개념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고, 현재도 지속적인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 다는 것을 인식하며, 전통 활쏘기의 용어의 정립도 매우 어려운 환경에 있다. 즉 궁술의 개념은 근대 사회의 한자어에서 비롯된 용어이며, 우리말로 표현하면 활쏘기 이 다. 궁도는 조선궁술연구회, 조선궁도협회, 대한궁도협회로 정착된 개념이며, 국궁 용어의 등 장은 양궁의 도입에 따른 반대적 개념으로, 양궁은 서양에서 도입된 개념이고, 국궁은 민족의 궁으로 표현하여 전통 활쏘기의 새로운 개념이 생성된 것이다. 현재 궁도라는 말은 버리고 전통의 궁술(활쏘기)이라는 용어를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며, 궁도의 용어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일본식의 궁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용어가 전통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 현재에 대별되는 활쏘기 용 어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국궁의 용어는 민족궁의 대변적인 개념에서 유용 하지만 전통 활쏘기의 세계화를 위한 현 단계에서 모든 나라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국궁이라 는 것이다. 현재 전통 활쏘기 용어의 정체성은 궁도라는 용어가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와 같이 단순히 용어가 전통 사회의 문헌에 존재하는지의 여부 로 결론지을 수 없지만, 현재의 궁도가 우리의 문헌 속에 등장하고 있다면, 전통 활쏘기의 개념 을 정립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따라서 전통 활쏘기 용어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전통 시대의 다양한 문헌을 통해 궁도( 弓 道 ), 국궁( 國 弓 ), 궁술( 弓 術 )이라는 용어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삼국유사, 삼국통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현재 사용되

127 126 학예지 제18집 고 있는 국궁, 궁도, 궁술이라는 용어를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 세조 권31, 9년(1463) 11월 4일의 기사에 내금위의 권이가 호랑이를 잡는 활쏘기에 능하므로 겸사복에 임명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종 20년(1489) 6월 3일 병조에서 여러 포( 浦 )의 첨절제사와 만호는 매번 선군을 나누 어 붙일 때에 사예( 射 藝 )의 능하고 능하지 못함을 분별하여 고르게 하기를 힘쓰게 하고, 또 항상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해이해짐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권45, 세조 14년(1468, 무자) 1월 16일에 주목되는 것은 임금이 세자 ( 世 子 )에게 활쏘기의 도리를 가르치는 내용에 궁도( 是 皆 弓 道 之 餘 奇, 弓 道 盡 矣 ) 용어가 등장하 고 있다. 반면 궁술의 용어는 <관찬사료>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그 용례를 찾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기사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전통 활쏘기의 한자 용어인 궁도는 세조 14년 1468년에 등장하고 있으며, 궁도의 도리를 다하는 것 즉, 활을 쏘는 기술을 말하고 있다. 원문의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궁도라는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유가적 궁도의 교육적 이념을 담고 있으며, 마음( 心 )의 덕을 닦는 중요한 수단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기사의 원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왕이 친히 다음의 왕위를 계승할 세자에게 활쏘기를 권유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현재 전통 활쏘기에 부여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따라서 현재 전통 활쏘기에 있어 궁도의 용어 정립은 그 시작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에 전통 활쏘기의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현재 궁도, 국궁, 궁술을 사용하고 있는 의 국궁 장과 같은 행정적인 용어의 개정이 필요할 것이며 이를 정착시키기 위한 학계와 궁도계의 노력 이 필요할 것이다. 2) 현대 활터 운영 체계의 개선 현대 전국 활터의 문화는 한국의 지리적 특성에 의해 도심의 중심보다는 외곽에 인접한 지형 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형적인 특성은 활터의 접근에 대한 용이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 다. 하지만 최근 전통 활쏘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것은 국가정책에 따라 조성된 전통 활쏘기의 중요성에 대한 우호적인 환경을 반증하고 있다. 특히 도시화 및 산업화로 인한 무예신체문화의 관심영역은 사회적인 현상을 넘어 교육적인 차원의 승화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 전통 활쏘기의 국민적 대중운동 전개라는 측면에서 활터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128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27 대한궁도협회가 중앙차원에서 정책적 제도를 입안하지만,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 국 전국 354개의 활터이다. 현재 활터의 문화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직면 하고 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전국 354개 활터가 동일한 운영체계를 형성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문화의 창출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이다. 전국 활터의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다양한 내용 중에 가장 절감한 것은 대부분이 재원이 부족하여 이를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미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한국 제1의 신체문화를 자랑하는 전통 활쏘 기의 위용과 웅장함을 간직한 활터의 현황을 보면, 월 회비를 납부하고 있는 회원은 불과 20여 명 내외에 지나지 않는 것을 확인할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가 없었다. 3천평의 넓은 대지에 100평 이상의 건물이 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잔디와 조경을 통해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함께 표출하고 있는 민족문화의 정신적 상징이 퇴색되고 있다. 최근 서울 석호정 문제는 다양한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수도의 중심인 석호정은 황 학정과 함께 전통 활쏘기의 대표적인 활터임은 부정할 수 없다. 석호정은 시대적 조류에 의해 남산공원 내에서 밀려나갈 위기에 직면하여 그 존치방안을 2011년 1월 20일 논의하였다. 석호 정의 수난 사례는 지방자치단체가 한국의 정신적 문화의 상징인 전통 활쏘기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한 경우이며, 서울특별시는 석호정의 운영에 대한 입찰을 공지하여 법인단체에 1년 간의 운영권을 위임하였다. 서울특별시의 남산공원내 석호정 허가조건은 허가대상물은 도시민의 건전한 휴식, 정서함 양, 심신휴양 등을 위해 설치된 도시공원 제반시설로서 시민고객 누구나 부담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함으로서 그 효용을 다하기 위한 목적달성 범위 내에서 사용 수익하여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 활터의 어떠한 곳도 이와 같이 운영되는 사례를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활 터의 운영에 있어 주목해야 할 것은 관설사정의 재산권 소유가 시, 도, 구, 군의 지방자치단체 에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에 전국 활터의 운영은 공익을 목적으로 하지만 법인 단체가 이를 운영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 강화될 수도 있다. 한편 전국 활터의 운영적 변화는 지속되고 있다. 즉 울산광역시의 사례를 보면, 시립문수궁 도장은 2004년 개정하였으며, 활터의 크기는 7,225평이며, 정은 300평, 과녁수는 5관, 사대는 35개의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이에 문수궁도장은 사업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무예인 궁도의

129 128 학예지 제18집 근본정신을 이어받아 예의와 규범을 중시하고 사풍의 진작을 통한 궁도발전과 함께 정서함양 및 체위향상은 물론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나아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 로 한다고 하였다. 조직체계의 임원은 사두, 총무, 사범, 간사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궁도협회 에 2011년 회원가입을 하였다. 울산광역시 시립문수궁도장의 운영은 울산광역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궁도 장 내에 공원정이 있다. 이에 시설관리공단의 문수궁도장 공원정은 2011년 대한궁도협회의 회 원으로 136명이 가입하였으며, 일반회원은 200여명이 등록하고 있다. 회원가입은 공원정의 정 관규정에 의하여 가입하고 가입비가 없었으며, 1일 일천원의 사용료로 자유롭게 활을 쏘고 있 으며, 사범의 안정적인 지원과 교육환경 등의 요건이 충족되어 있다. 특히 문수궁도장에서 주 목되는 사항은 궁도장은 회원제가 아니며, 일반인 또는 1일 사용료를 지급하면 누구나 자유롭 게 습사를 할 수 있다. 3) 현대 활터 풍속과 사풍의 정착 전통 활쏘기의 사풍( 射 風 )은 무엇인가? 이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협의적인 측면에서 활터의 풍속을 의미한다. 하지만 활터의 풍속만으로 사풍의 전모를 체계화하고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사풍은 활을 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풍속이며, 활쏘기를 진작시키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사풍은 한민족의 풍속과 직결되고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전통을 유지하고,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정착의 개념이다. 사풍은 반드시 규약과 거기에 맞는 규칙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활을 쏘는 것 은 개인이지만 활쏘기를 하는 활터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습사를 함으로써 여러 가지 규약과 규칙이 존재하고 특히 활터를 진작시키는 풍속이 생성된다. 이러한 전통 활쏘기의 사풍은 신사 교육을 비롯한 사원 상호간의 예절, 선사, 구사, 신입사 등의 다양한 풍속이 공유된다. 전국 활터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현재 354개정이 존재하고 있으며, 활터의 상징적 교훈은 궁도 9개훈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활터만의 예절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의례가 있다. 따라서 활터의 모든 행위는 현대에 생성되기 보다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승된 풍속이 존재 하고 새로운 풍속과 의례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이에 주목해야할 것은 활터의 사풍은 인위적 인 문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원적인 문화는 소용의 가치를 다하는 순간부터 소멸되고

130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29 사장되는 것이다. 결국 사풍이라는 것은 활터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전통의 활을 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문화이며, 또한 만들어가야 할 문화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문화의 산물은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초래한다. 전통의 활쏘기를 고집하는 구사는 신사에 대한 교육이 철저하고 그 교육 속에서 전통의 문화를 유지하 고자 한다. 혹자는 구사가 신사에게 대우를 받기 위해 만들어 낸 사풍이 있다고 지적한다. 활터의 풍속에 핵심적인 화두로 등장한 것이 의례이며, 이에 대한 논쟁 또한 전통성과 정신 적인 측면의 의식성을 강조한다. 신사는 의례의 미신적인 속성을 강조하는 한편, 구사는 유가 적인 관습과 풍습에 다른 전통성을 주장함으로서 상호간의 갈등을 심화한다. 특히 전국 활터의 사풍에 핵심적인 의례는 신사의례, 과녁 및 정간제례 등이 현재 사풍의 폐단으로 인식하고 있 으며, 그 갈등은 점차 고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풍 중 정간배례는 신입사의 종교적인 믿음과 직결되는 중요한 의식적인 측면에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구사 또한 활터의 문화로 인식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야할 의례로 보고 있다. 이에 궁도계의 일부는 정간에 대한 폐지를 주장하고 있으며, 정통성과 전통성이 없는 의례로 미신 외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간의 글자를 상징화 한 것은 전통사회의 관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정간의 전례 설을 주장하여 정당화하고 있다. 현재 전국 활터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사의례 중 득중례는 조선의 궁술 에서 설명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과녁 및 정간제에 대한 전통성을 문헌에서 찾아보기 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일부 활터에서 하고 있는 제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은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간이란 글자는 건물의 중앙을 표기하는 단어로 표기되고 있다. 전국 활터의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볼 때 현재 활터 문화에서 정간은 상당히 신성시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며, 미신적인 측면보다는 자기 수양의 덕목어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정간 배례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삼국유사, 삼국통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등을 살펴보았으며, 정간의 정확한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 중 조선왕조실록 의 원문을 분석하였다. 즉 조선왕조실록 권42, 정조 19년(1795, 乙 卯 ) 4월 30일의 내용을 살펴 보면, 상이 이르기를, 본궁( 本 宮 )의 궁제( 宮 制 )는 멀리서 헤아리던 바와 과연 같던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왼쪽과 오른쪽 칸[ 間 ]을 가운데 칸[ 正 間 ]과 비교해 보면 제도상으로 조금 협 소할 뿐만이 아니라서 익실( 翼 室 )이나 협실( 夾 室 )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따라 서 두 신위( 神 位 )를 가운데 칸에 함께 모신 것이야말로 정리상, 예법상으로 합당하다 하겠습니

131 130 학예지 제18집 다. 지금부터는 옛제도를 다시 밝혀 3년에 한 번씩 행하는 것으로 정식( 定 式 )을 삼고, 이를 본 역의 현판에 걸어두어 영구히 준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를 어길 경우에는 해당 찰방( 察 訪 )에 대해 곧장 법제를 위배한 율( 律 )을 적용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따랐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 등에 보이는 정간의 의미는 건물의 중앙을 의미 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왕실의 신위를 모시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정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1912년 전주 천양정의 규례( 規 例 )를 통 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양정( 穿 楊 亭 )은 1912년에 인근의 군자정, 읍양정, 다가정이 통합하여 정을 건립하였으며, 규례를 제정하였다. 규례는 천양정의 설립목적을 비롯한 사규( 射 規 )를 두 고 있다. 사규는 의습( 義 習 )을 정돈하고 순서를 준수하여 경약부박( 輕 躍 浮 薄 )의 행동을 불허 ( 不 許 )함으로 좌의 조항을 부함이라고 하고 1항에 사원이 사정에 진( 進 )할 시는 필선( 必 先 ) 정간( 正 間 )에 배례한 후 사반( 射 班 )에 입( 立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천양정의 사장( 射 長 ) 김희순( 金 熙 舜 )외 수명이 기초 위원이 되어 1958년 헌장( 憲 章 )을 개정하였는데 여기에 정간의 기록이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즉 제25조에 정간은 선생안 또는 사장의 정좌( 正 坐 )를 상징하는 존엄처( 尊 嚴 處 )이므로 정간의 정면은 타인의 침범을 불허한다. 제26조는 사원은 등정 즉시 정간에 경민한 태도로 배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1990 년 6월 6일 헌장을 정관으로 개정하였는데 제45조에 정간의 존엄성을 규정하고 제46조에는 정간배례를 기술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전통 활쏘기의 정간은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를 지나 최근 전국적으로 정착한 사풍이다. 하지만 전통과 현대라는 측면 즉, 전통 사회로부터의 관습인 선 인의 배례에 대한 관습은 현재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를 위해 궁도계는 보다 명확한 사풍을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의 마련과 앞으로 한국 전통 활쏘기를 위 한 학문적 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한국 궁도교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활터 문화에 의례는 이 연구과제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며, 궁도계의 합의로 사풍 을 정착하기를 기대한다. 특히 전통과 현대, 그리고 미래 사회의 전통 활쏘기의 의례는 종교적 인 측면 보다는 우리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는 보편타당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보편타당한 의례의 풍속은 전국 사정을 중심으로 창출해야 할 문화이다.

132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맺음말 한국 전통 활쏘기의 본질적 가치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각 시대별 가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시대의 문화를 통해 살펴 보면, 살생과 전쟁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덕성을 함양하고 살펴보는 예사( 禮 射 )의 문화를 정착 하였다. 우리의 선인들은 전통시대의 예사문화를 현대로 전승하였으며, 현대인들은 활터[ 射 亭 ]의 문 화를 통해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전통시대로부터 현대에 전승된 다양한 신체문화는 자의 적 또는 인위적인 문화의 변용을 거치고 있으며, 이들의 문화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의 궁사들은 전통의 문화를 갈망하고 있는 반면, 전통성에 있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시대의 문화적 변화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전통을 정립시키고 찾 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성의 문제는 일본의 잔재의식인 궁도( 弓 道 ), 세 계화의 용어에 부적합 국궁( 國 弓 ), 전통에서 찾을 수없는 궁술( 弓 術 )의 용어가 있으며, 전국 활 터의 규모가 확대되고, 수련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구사와 신사의 갈등( 儀 禮 )은 심화되 고 있다. 특히 활터[ 射 亭 ]의 운영에 있어 지방자치단체와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공공체 육시설물의 전면적인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기존의 제도를 보장받는 운영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도출하였으며, 전국 활터 의 새로운 운영을 위한 대안적 소재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첫째, 현재 전국 활터[ 射 亭 ]에서 사용되고 있는 정의 전통적 표기 방법은 유지하지만, 이를 지칭하고 있는 장은 궁도장으로 통일성이 필요한 것으로 사료되고, 정의 표기만 을 한정한 활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에 전통 활쏘기 의 표지판의 설치가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궁도의 도( 道 )에 대한 반감의 문제는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마치 도( 道 )라는 글자 가 일본의 전유물 내지는 무조건적인 차용에서 비롯된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 전통시대 <관찬사료>에서 무( 武 )의 도( 道 )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문헌에 문무이도( 文 武 二 道 ), 문무양도( 文 武 兩 道 )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 고려, 조선시대는 일본 무도 의 표징인 무사( 武 士 )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에 궁도( 弓 道 )의 용어가 등

133 132 학예지 제18집 장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용어가 일본의 전유물은 아님을 확인하였다. 둘째, 전국 활터[ 射 亭 ]의 대부분은 국가 및 시도 자치단체의 공공시설물을 위임받아 운영하 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위임운영의 기본 목적은 자치단체 시민 또는 소속 인원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며, 운영의 주체 자는 공공시설물을 개방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관리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따라서 국가의 재원으로 만들진 활터는 전통 활쏘기 문화 의 보존과 국민적 전승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전통 활쏘기의 예사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지역과 학교, 사회를 연결하는 교육프로그램 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활터의 운영에 있어 심각성이 있는 것은 회원이 부족하여 재정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광역시의 일부 활터는 사원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나 지방자치 활터는 여전히 사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에 전국 활터의 전통 활쏘기의 적극적인 홍보가 중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셋째, 전통 활쏘기 문화의 풍속과 사풍을 진작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활쏘기 문화의 풍속 은 예사를 통해 수련의 근본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적 행위의 의례적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정간( 正 間 )의 믿음은 신( 神 )이 아니며, 단지 마음의 지표를 삼을 수 있 는 기준일 뿐이다. 이에 정간의 전통성에 있어 제기하고 있는 종교적인 측면, 또는 근대이후 생성한 문화를 강조하는 것 또한 이미 전통이라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문화는 소용가치의 필연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이 인위적인 전 파에 의해 형성하기 보다는 자연적 문화를 만든 것이다. 특히 한국 전통시대는 정간( 正 間 )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 정간의 의미는 문무묘( 文 武 廟 )를 지향하는 사당을 만들어 선성( 先 聖 )의 가르침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 활터의 현황과 과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현대 활쏘 기의 문화는 전통시대의 활쏘기 문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활쏘기 문화에서 전통성 은 인간중심의 예사를 통해 덕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실천적 가치를 지향하는 여가의 문화로 변화되고 있다. 따라서 전통과 현대의 갈등은 새로운 예사의 문화로 확대되고 있다. 이에 전국 활터에서 주 목해야 할 것은 전통을 지향하는 현대문화의 정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한국 전통시대 활쏘기 문화의 국민적 대중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첫째, 전통 활쏘기를 주도하고

134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33 있는 단체 및 활터의 위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전통 활쏘기의 국민적 대중운동을 전개 하기 위한 가칭) 전통 활쏘기 진흥법안 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 전통 활쏘기의 위상과 보존을 위한 무형문화제 지정 이 시급한 일이다. 이와 같은 한국 전통 활쏘기의 범국민 적 대중운동의 전개를 위해서는 학교체육 보급을 위한 프로그램의 개발 및 세계화를 위한 정책 이 요구된다.

135 134 학예지 제18집 참고문헌 삼국유사 삼국통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아일보, 1928, 6월 27일자. 김기훈, 2004, 19세기말 호남지방의 사정 현황, 한국 사정의 역사와 문화. 대한궁도협회 홈페이지( 대한궁도협회, 1986, 한국의 궁도, 대한궁도협회 대한궁도협회, 1986년, 1991년, 1999년, 2000년, 2003년, 2006년, 2009년, 2010년, 2011년, <전국 사정주소록> 충남 논산 강경덕유정, 1828, 사계좌목 충남 논산 강경덕유정, 2008, <정칙> 경북 경주 호림정, 2011, <회칙> 체육과학연구원,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한국체육의 지표> 이중화(1929). 조선의 궁술, 경성: 조선궁술연구회. 이재학(2011). 한국 전통시대의 무예사를 통해 본 신체관의 함의, 도서출판 에이원. * 투고일 : 2011년 11월 2일 *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9일

136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135 국문초록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이 재 학 한국 전통시대의 활쏘기 문화는 생존을 위한 수렵과 전쟁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덕성을 함양 하고 살펴보는 예사( 禮 射 )의 문화로 변화되고 정착하였다. 현대 시대에 전승된 활터[ 射 亭 ]는 역 사적 배경과 시대적 사건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 과 현대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현재의 궁사( 弓 射 )들은 전통의 문화를 갈망하고 있는 반면, 전 통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시대 활쏘기의 문화적 변화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전통을 정립시키고, 찾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이 연구는 전통시대 활쏘기 문화의 과거와 현재, 현대 활터[ 事 情 ]의 모습과 규모, 설립년도 그리고 활터의 정명과 의례문화를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현재 전국 활터 는 국궁( 國 弓 )과 궁도( 弓 道 ) 장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궁도장으로 통일성을 갖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둘째, 전국 활터의 운영체계는 일부단체의 전유물 보다는 개방적 활터의 운영이 필 요하며, 다양한 활쏘기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이 중요시된다. 셋째, 전통 활쏘기 정간배례( 正 間 拜 禮 ), 신사의례( 新 射 儀 禮 ), 제례의식( 祭 禮 儀 式 )의 문화는 한국 전통의 풍속과 사풍을 진작시키 는 보편타당한 문화적 전승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전통 활쏘기 문화의 현대적 전승을 위한 활쏘기 단체 및 국가의 정책은 첫째, 전통 활쏘기 단체 및 활터의 위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전통 활쏘기의 국민적 대중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가칭) 전통 활쏘기 진흥법안 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 전통 활쏘기 의 위상과 보존을 위한 무형문화제 지정 이 시급한 일이다. 이와 같은 한국 전통 활쏘기의 범국민적 대중운동의 전개를 위해서는 학교체육 보급을 위한 프로그램의 개발 및 세계화를 위 한 정책이 요구된다. * 주제어 : 활쏘기 문화, 국궁, 궁도, 궁술

137 136 학예지 제18집 ABSTRACTS Lee, Jae-Hak The culture of the traditional archery in Korea had developed from a mean of hunting and warfare for mere survival to the establishment as a form of ceremonial culture for cultivating and searching one s virtue. The contemporary archery fields are subject to constant applicationsof new cultural transformation based on historical background and issues of the times. However, as seen in the words, traditional and contemporary, current archers have aspirations for traditional culture, but pose problems of traditionality. The efforts have been made in cultural changes of traditional archery with its preservation, and to establish and search new tradition continuously. The study examined the past and the present of the traditional archery culture, the current form, size, and the time of formation of contemporary archery fields, and the name and ceremonial culture of archery fields. The result is as followings. First, current archery fields across the country are marked as both Gukgung-jang and Gungdo-jang, which should be unified as Gungdo-jang. Second, archery fields should not be managed exclusively by particular organizations, rather it is should have more open management system, as well as to developa variety of archery training programs. Third, the traditional archery culture of Jeonganbarae, Shinsaeuirae, and Jereuishik needs to become a universally validate heritage to promote Korean traditional customs and Sunbee (noble scholars) culture. Hence, the policy of archery organizations and the government aiming at modern generation of the traditional archery culture would be as followings: First, the status of the traditional archery organizations and archery fields should be reestablished; Second, tentatively named a bill to promote the traditional archery should be prepared; Third, the traditional archery should be designated as an intangible cultural asset for establishment and preservation of its status. It is necessary to develop a program for a PE class at school and to prepare a globalization policy in order to develop a nationwide movement for the Korean traditional archery. * Key words : archery culture, Gukgung, Gungdo, archery

138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37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정 재 성*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체육과 스포츠, 그리고 활쏘기 1) 활쏘기의 학문영역 2) 활쏘기와 체육 3) 활쏘기와 스포츠 3. 스포츠로서 활쏘기의 전승문제 1) 활터 운영의 문제 2) 학교체육으로의 보급 문제 3) 스포츠로서 대중화의 문제 4. 전통의 활쏘기 전승문제 1) 활쏘기 경기의 원형 보존 2) 다양한 전통기법의 경기화 문제 3) 제도적 인식제고 노력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1) 애초에 활쏘기는 매우 효율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살상용 무기로 발달해 왔다. 인류 문명의 진화에 따라 그 기법도 정교해지고 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섬세하고 심오한 그 기 법수련에 있어서는 인간 삶의 철학적 교훈이 담겨졌다. 덕분에 활쏘기는 전쟁무기로써의 소용 은 물론이거니와 심신수련과 여가활동의 스포츠로써 오랜 전통을 지니며 전승되어 왔다. 동양고전 여러 곳에서는 활쏘기를 군자( 君 子 )에게 가장 적합한 스포츠이면서 교육적 의미가 강한 수양의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민족은 동이( 東 夷 )로 불렸으며, 고대국가의 건국설화에서부터 활쏘기가 하늘의 뜻으로 나라를 세우는 지도자가 갖춘 재능이었다. 실제로 역사적 위인이나 설화 속 많은 영웅들이 뛰어난 활쏘기 솜씨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거나 환난을 *영산대학교 초빙교수

139 138 학예지 제18집 극복하는 사건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시대에도 한국양궁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의 국제적 스포츠제전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줌에 따라 활쏘기는 우리민족에게 긍지와 자부심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물론 양궁이 이 연구에서 주제로 삼는 전통의 활쏘기와는 다소 다른 체제와 경기방식을 지니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모른 채 동일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활쏘기에 관한 한 우리민족의 장기( 長 技 )로서 막연히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지난여름부 터 전통의 활쏘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초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국궁과 양궁의 차이에 관심 을 갖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 전국의 각 활터엔 영화개봉 이전에 비해 동호인 수가 현 저히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활쏘기는 대한체육회 가맹종목으로서 대한궁도협회를 중심으로 전승 보급되고 있다. 한국체육계의 조직체계에 의해 엄연히 국민생활체육 전국궁도연합회가 따로 있으나, 대부분의 활터는 대한궁도협회의 조직적 관리체계에 따라 운영된다. 대한궁도협회의 각 시도지부가 대부분 생활체육회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이중적이면서도 모순 적 구조가 아닐 수 없는데, 본래 엘리트 선수들의 경기를 주관하는 대한궁도협회가 국민의 건 강과 복지를 위한 생활체육을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일면에서 국민생활체육회가 뒤늦게 시행 된 조직이므로 당연한 현상일 수 있으나, 그 이면엔 여러 가지 복합적 상황이 작용하여 생겨난 갈등과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다. 그것은 대개 활쏘기를 생활체육으로 즐기는 사람들에게 엘리 트선수 관리체계와 경기문화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조화로 볼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동호인은 생활체육으로서 활쏘기를 즐기는데, 그 조직의 운영체계는 엘리트선수 관리시스템에 따르는 까닭에서 혼선과 갈등이 파생되는 것이다. 이에 이 논의는 민족의 자긍심으로 인식되는 활쏘기의 현안 문제를 체육학적 입장에서 짚어 보고, 대중적 스포츠로서의 발전방안과 전통문화로서의 바람직한 전승방향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자 한다. 물론 우리시대 활쏘기 문화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대안에 대한 언급은 온깍지 궁사회의 국궁논문집 을 비롯한 여타의 선행연구들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진 바 있었다. 또한 국궁신문 이나 대한궁술원 등의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이거니와 대한궁도협회 홈페이지에서도 심심찮 게 제기된 바 있었다. 하여 섶부른 지적이 혹여 올바르지 못할까 염려스럽기는 하나, 체육학 연구자 입장에서 나름의 문제제기를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 활쏘기 문화를

140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39 비판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발전지향의 방안을 고민해 보자는 차원인 것이다. 부연할 것은 논자 또한 일선의 활쏘기 동호인이면서 지방의 작은 도시의 동호인 대표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궁도협회 소속의 동호인이면서 그 관할 시도지부의 임원들과의 접촉이 많은 입장 에서 활쏘기의 현안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을 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우선 체육학에서 접근해 볼 수 있는 활쏘기의 특성과 인식을 살펴본 후, 미래지향 적 스포츠와 전통문화로서의 전승 및 발전방향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체육과 스포츠, 그리고 활쏘기 1) 활쏘기의 학문영역 학문 영역에서 활쏘기는 사학과 교육학, 사회학, 인류학, 군사학 등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다 룰 필요성이 있다. 그렇지만 전통무예이면서 민속스포츠인 활쏘기는 체육학의 학문적 영역에 서의 접근이 용이하다. 활쏘기 자체가 신체문화이고 이미 오래 전부터 대한체육회 정식가맹단 체로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시대에 전쟁무기가 아닌 생활스포츠로의 정체성을 고려해 볼 때 우선적으로 체육학에서의 다양한 영역별 연구가 시급하다. 물론 체육학계에서도 활쏘기와 관련한 선행연구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선행연구는 史, 哲 學 의 인문학적 접 근이 주를 이루는 경향으로 파악된다. 이는 활쏘기에 관심을 지닌 연구자들의 성향이 사, 철학 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체육학은 종합적이면서도 다면적인 특성을 지닌 학문으로서 인문학은 물론이거니와 사회학, 운동역학과 스포츠생리학과 같은 자연과학 분야와 보건학, 의학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모든 학문과 연계되어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 활쏘기도 이처럼 모든 학문분야에서 다양한 시각으 로 연구될 필요성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분야 연구자들의 활쏘기 연구에 대 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활쏘기가 연구자 개인의 학문적 성취도에 만족하거나 수요 에 부합하는 어떤 여건이 조성되어 있거나 또는, 다양한 연구자들에게 개별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활쏘기 연구를 통해 연구자에게 얻어지는 보상이 있다거 나, 연구자 스스로 활쏘기를 즐기는 동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체육학계에서 활쏘기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은 이러한 동기부여 부족이 클 것이

141 140 학예지 제18집 며, 많은 연구자들이 활쏘기에 대한 관심을 둘만한 매력이 여타 스포츠 종목에 비해 상대적으 로 떨어진다는 반증일 것이다. 체육학에서 활쏘기는 체육일까, 스포츠일까 하는 문제도 있다. 또한 활쏘기는 엘리트 체육인 가 생활체육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우선 현대 체육학에서는 체육과 스포츠의 의미가 다소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체육과 스포츠 의 차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고, 사실 일면에서는 그 유사함으로 인해 명확한 구분에는 애매함이 따른다. 체육학계에서도 체육과 스포츠의 엄연한 구분을 따르지 않 는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다. 하지만 김홍식(2003)이 1) 스포츠(과)학을 학문의 반열에 위치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스포츠학의 성격 해명과 더불어 스포츠라는 용어의 의미규정에서 출발한다 고 했듯, 학문적으로 체육과 스포츠의 구분은 필요하다. 체육(Physical Education)은 대개 교육적 성격을 강조하는 의미로 인식된다. Caronlyn E. Thomas는 체육을 기본적으로 스포츠 같은(Sportlike) 활동에 의해 체력과 기능의 발달, 댄스와 리듬운동에 의한 신체인식과 우아함의 학습, 게임이나 놀이에 참가함으로써 심리의 발달, 신체 에 관한 문제해결로 해석하고 있다. 대체로 신체의 교육 또는 신체를 통한 교육 의 범주라는 것이다. 2) 물론 그 개념과 범위는 시대의 변천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체육은 인간의 신체활동 특히 대근활동을 수단으로 하는 신체의 교육인 동시에 개인의 특성과 방법을 고려하여 선택된 신체활동의 잠재적 가치를 구현함으로써 바람직한 인간을 형성시키려는 작용 또는 교육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3) 스포츠(Sport)는 경쟁과 유희적 성격을 지닌 신체운동 경기의 총칭으로 인식된다. 체육의 의 미와 마찬가지로 역시 학계에서 일관성 있는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지만, 스포츠는 대개 인간의 신체활동으로서 경쟁적 요소를 지니고 제도화된 규칙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들을 말한다. 그리 고 근본적으로 인류가 생존권을 위해 시작했던 투기를 비롯하여 인간이 유희로서 시작하여 게 임이 경기화 되어 스포츠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현대 스포츠는 경쟁적이고 규 칙적이며, 신체활동이면서 유희적 특징을 포함하는 모든 운동경기 종목의 총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4) 그렇다면 활쏘기는 체육으로 정의할 것인가, 스포츠로 정의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1) 김홍식, 2003, 스포츠철학시론 무지개. 2) CAROLYN E.THOMAS 이진수 역, 스포츠철학 교학연구사 3) 최종삼 손수범, 2007, 스포츠체육학 개론 보경문화사 4) 취종삼 손수범, 2007, 앞의 책

142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41 2) 활쏘기와 체육 전통사회에서 활쏘기는 교육적 가치가 강조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동양의 여러 고전에서 활 쏘기를 예찬했는데, 주례( 周 禮 ) 를 필두로 서경( 書 經 ), 예기( 禮 記 ), 논어( 論 語 ), 중용 ( 中 庸 ), 맹자( 孟 子 ) 등에서 활쏘기를 군자( 君 子 )의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다. 특히 주대( 周 代 )부터 활쏘기가 육예( 六 藝 )의 하나로서 교양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기예로 설명되고 있는 데, 이로 인해 한자문화권에서는 활쏘기가 교양인이 갖추어야 할 주요한 기예의 하나로 인식되 어 왔다. 5)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도 활쏘기는 교육적 의미가 강조되었다. 세종의 예 를 들면 1436년 근정전( 勤 政 殿 )에서 치러진 문과( 文 科 ) 책문( 策 題 )에서 제왕들이 백성을 다스 리는 길을 논하면서, 활쏘기를 무사( 武 士 )의 일로만 여기는 세태를 나무라고 있다. 그리고는 육예의 하나로써의 의의를 어떻게 다시 밝힐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6) 또한 세종은 세자의 교육에도 활쏘기를 통해 기력과 체질을 기르도록 하였다. 7) 세자에게 활쏘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본래 태종이 양녕대군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세종은 그를 상기하며 황희의 반대 를 물리치고 세자의 사부에게 치사( 馳 射 )를 교육하도록 하교하고 있다. 이는 역대 제왕에게 있어 활쏘기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성조 ( 聖 祖 ) 이성계가 신궁( 神 弓 )이었으므로 활쏘기는 조선왕실의 가법( 家 法 )이 아닐 수 없었고, 일 부 제왕은 활쏘기 기예를 통해 적통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이런 기사는 실록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된다. 조선시대 활쏘기가 귀족스포츠이면서 교육적 의미가 강조되었음을 엿볼 수 있 는 대목인 것이다. 현대의 활쏘기에도 집궁 제원칙( 執 弓 諸 原 則 )과 8) 구계훈( 九 戒 訓 )이란 9) 것이 있는데, 활쏘기 현장에서 항상 강조되는 사항으로써 습사( 習 射 ) 시 요령 내지는 주의점이면서 교훈인 셈이다. 특히 구계훈은 활쏘기가 유교적 가치관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상과 바람직한 사회철학의 실천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들에 주목하면 활쏘기는 체육이라고 해도 무방 5) 졸고, 2007, 전통무예로서 국궁의 특성 한국체육교육학회지 12. 6) 世 宗 72 卷, 18 年 (1436 丙 辰 正 統 1 年 ) 4 月 9 日 ( 乙 巳 ) 射 以 觀 德, 投 壺 以 治 心 ~ 射 者, 六 藝 之 一, 而 視 爲 武 士 之 事, 若 之 何, 則 射 義 復 明 7) 世 宗 58 卷, 14 年 (1432 壬 子 /명 선덕( 宣 德 ) 7 年 ) 10 月 25 日 ( 庚 戌 ) 念 世 子 年 旣 壯, 雖 無 强 勇 之 質, 不 合 馳 射, 然 時 時 射 的, 以 養 氣 體 宜 矣 8) 先 察 地 形 後 觀 風 勢 非 丁 非 八 胸 虛 腹 實 前 推 泰 山 後 握 虎 尾 發 而 不 中 反 求 諸 己 9) 仁 愛 德 行 誠 實 謙 遜 自 重 節 操 禮 儀 嚴 守 廉 直 果 敢 習 射 無 言 正 心 正 己 不 怨 勝 者 莫 灣 他 弓

143 142 학예지 제18집 하다. 그렇다면 스포츠로서 활쏘기는 어떠할까? 3) 활쏘기와 스포츠 전언했듯 스포츠의 특성은 경쟁과 유희적 성격을 지닌 신체운동이다. 그래서 게임과 놀이도 스포츠에 포함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바둑과 컴퓨터 게임(e-sport)조차 스포츠의 영역에 서 존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활쏘기에서도 스포츠로서의 특성을 얼마든지 열거해 볼 수 있다. 우선 현대 대한 궁도협회가 대한체육회(Korea Sports Council)에 정식가맹단체이다. 덕분에 전국체육대회와 시 도민체육대회 및 각종 전국대회 등에서 스포츠로서 경기가 행해지고 있다. 실제 이런 궁도 경기 운영 자체가 대한궁도협회의 가장 우선적인 정체성인 셈이다. 스포츠로서 활쏘기는 비단 위와 같은 공식적 대회만이 아닌 단순한 놀이와 게임의 형태로도 상존한다. 이런 형태는 이미 공자시대로부터 존재한다. 논어 의 팔일( 八 佾 )장에 君 子 無 所 爭, 必 也 射 乎! 揖 讓 而 升, 下 而 飮, 其 爭 也 君 子. 라고 10) 적고 있다. 이 문구( 文 句 )에서는 오늘날의 스 포츠가 지향하는 Fair ply"와 sportsmanship 등과 상통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현대스포츠의 목적은 본래 승부의 집착보다 건전한 심신의 단련을 지향한다. 따라서 스포츠 경기에서는 승부에 구애됨이 없이 경기 규칙을 지키고, 심판의 판정에 절대 복종하여 정정당당 하게 승부를 겨루어야 하는 신사다운 정신을 강조한다. 이것은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물론 경기를 참관하는 관중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공명정대 하게 스포츠에 참여하여 최선의 기량을 다하고 또 동료를 위해 희생하는 등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감동과 교훈을 받는다.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체력과 건강유지 및 증진, 인격함양 등을 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는 국민의 건강과 국민성 함양, 질서유지, 사회성 함양, 국가와 국가 간 우호증진을 통한 인류번영에 이바지 하는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1) 실제 활쏘기 경기에서도 Fair ply와 Sportsmanship이 강조되고 있다. 소위 집궁 제원칙이 그 예인데, 이것은 단지 언어적 표현이 다를 뿐 의미는 상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不 怨 勝 者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는 경기 또는 게임의 승부를 전제로 삼은 조항이 아닐 수 없다. 즉 스포츠로서 모든 조건을 거의 완벽히 각춘 셈이다. 10) 군자는 다투지 않지만 활쏘기에서는 반드시 경쟁한다. 예를 갖춰 존대하며 오르내리며 마시니, 그 다툼이야말로 군자답다. 11) 최종삼 손수범, 2007, 위의 책

144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43 이렇듯 활쏘기는 체육이기도 하고 스포츠이기도 하다. 활쏘기를 체육으로 규정할 것인가 아 니면 스포츠로 정의할 것인가를 한국 활쏘기의 총아라 하는 대한궁도협회에서 규정할 수도 있 고, 또는 학계에서 비교 선정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활쏘기를 접하는 동호 인 스스로의 마음에서 체육으로 여길 것인가 스포츠로 여길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 볼 필요성 은 있어 보인다. 그럼 그를 돕기 위해 이제 전통문화이면서 동시에 현대 스포츠인 활쏘기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스포츠로서 활쏘기의 전승문제 대한궁도협회가 한국의 활쏘기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상, 한국의 활쏘기는 경기 중심의 스 포츠문화 성격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전래의 전통문화가 현대의 스포츠로 전승된다 함은 대중적 인지도 확대와 더불어 폭넓은 계층과 연령의 참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 정적이다. 그래서 우리시대 활쏘기가 스포츠로서 활성화되고 또 발전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전 통문화의 계승이란 명분도 갖는다 하겠다. 반면 우려스러움도 있으니, 경기중심 일변도는 일면에서 전통문화로서의 정체성에 다소 부 정적 영향도 미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바람직한 활쏘기의 올바른 전승문제에 대해 다른 시각 에서도 고민해 볼 필요성이 있다. 특히 현장의 현안적 문제들에 대해 점검해 보자. 1) 활터 운영의 문제 나름 활발한 동호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논자의 시각에서, 대부분의 활터는 경기 중심의 헤게모니에 의해 운영된다. 다양한 직업군과 다양한 연령대의 동호인들이 亭 이라 하는 조직의 구성원이 되어 경기( 競 技 )에 길들여진 활쏘기를 즐기고 있다. 물론 다양한 연령대 라 함은 청년연령이 지난 기성인들을 말함이다. 젊은 층이 적다는 말이다. 대개는 청년기가 지난 나이에 생활체육에 참여하는 수준의 마음가짐으로 활쏘기에 입문하지만, 입문과 동시에 자동으로 엘리트 선수가 되어 처음부터 아예 경기에서의 성적(시수)을 위한 기법훈련을 받게 된다. 이런 특성은 우리 활쏘기가 여타의 스포츠와 같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만, 전통문화 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우려스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활쏘기가 추구하는 철학과 우리

145 144 학예지 제18집 활 본연의 전통기법 등이 경기화로 인해 다소 위축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활터 현장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동호인이 되는 까닭에 구성원들 간 이데올로기적 가치관 충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 활터운영의 철학과 규율이 불문율처럼 전승되며 지켜 지는 부분도 있지만, 다변화된 시대적 성향에 의해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결국 이럴 때 주요한 해결책이 엘리트 선수관리시스템에 의한 규제와 통제이다. 이 시스템은 일면에 서 구성원의 통솔과 관리에 편리함이 있지만, 이면엔 매우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생활체육동호인에게 엘리트선수로서의 의무와 역할 및 규제를 강요하는 셈인 것이다. 이로 인한 관리상의 고충은 물론이거니와 구성원 간 갈등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서 장기적으로는 진정한 엘리트선수(실업팀 선수)와 일반 생활체육 동호인을 좀 더 세밀히 구 별하여 적용 운영할 수 있는 체계와 시스템을 개발 적용할 필요성이 있다. 2) 학교체육으로의 보급 문제 대부분의 여타 스포츠는 어린 시절부터 전문적 선수가 육성된다. 학교체육으로 편입되어 있 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단계별로 경기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선수들이 관리된다. 이후 실업팀 또는 프로팀으로 진출하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조직 구조에서 우수한 선수와 지도자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고 또 그로 인해 대중적 인지도 와 호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인기 스포츠가 되어 진정한 의미의 대중성을 확보하기도 한다. 이는 곧 그 종목의 사회적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활쏘기는 대부분 학습연령을 넘긴 일반인들이 활터를 찾아와 활을 배우기 시작한다. 학교체육과 달리 별도의 전문적 지도자가 없고 체계적인 교육과정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사범을 정해놓고 신입동호인 교육을 전담하기도 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며, 운동지도를 위한 전 문적 교육을 통해 배출된 지도자가 아니다. 물론 개중에는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을 겸비 한 지도자도 있다. 그렇지만 대개는 개인의 경험과 그 활터의 성향에 따라 임시적으로 수행하 는 봉사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준 높은 경기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경기에 있어서도 65세 이상의 노인과 여성을 구분할 뿐이다. 12) 나머지는 모두 일반(장년)부 12) 지자체 체육회 지원에 의존한 실업팀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전국체육대회, 시 도민체육대회 등을 위한 지원이다. 각종 전국대회에서는 실업팀 경기를 별도로 구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대개 생활체육회 지원 대회이거나

146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45 로 경기에 임한다. 중고등부 경기가 있기는 하나 년 2~3회 치러질 뿐이고, 13) 대학부는 년1회 또는 아예 치러지지도 않는다. 이는 해당 선수층 부족과 예산확보의 문제가 있는 까닭이지만, 그만큼 젊은 학생들이 활쏘기를 배우도록 하는 동기부여 노력이 부족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결국 제도권 내에서의 전문적 연구자와 지도자가 배출되기 어려 운 구조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분야에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활쏘기의 주 향유층이 선거에서의 투표율이 높은 장년층과 노년층이라서 정치인들 이 무시할 수 없는 종목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지자체 지원 전국대회 개최수준에 서 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활을 쏘는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미래지향적이거나 생 산적인 요구를 명확히 제시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논자는 이것이 곧 학교체육으로서의 보급 미흡과 그로 인한 젊고 유능한 지도자와 관련 연구자들의 부족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활쏘기가 체육 또는 스포츠로서 좀 더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서는 학교체육으로의 보급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보는 것이다. 3) 스포츠로서 대중화의 문제 일각에서 스포츠마케팅은 21세기 최고의 고부가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현대인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스포츠의 가치에 각 기업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기업은 자신들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홍보 및 이미지 제고를 위해 특정 종목의 스포츠팀을 운영하거나 특정의 팀, 선수 또는 협회의 스폰서를 자청한다. 덕분에 몇몇 인기 종목과 특정 선수들은 걸어 다니는 기업이란 찬사를 들을 만큼의 호사를 누린다. 그런 종목과 선수가 활쏘기 선수라면 어떨까? 전언했듯 최근 활쏘기를 소재로 한 영화 한편이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가 흥행 하는 이유는 영화시나리오 상의 문학적 효과와 더불어 활에서 얻어지는 민족주의적 자긍심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영화 전편의 액션에서 보여주는 시원한 액션쾌 감과 사뭇 긴박감과 흥미진진함을 느끼게 하는 활쏘기 기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영화 에서의 액션이 지금의 활쏘기 경기스타일 일색이었다면 세인의 관심과 인기를 끌기 힘들었을 예산이 적은 대회는 실업팀 경기를 별도로 진행하지 못한다. 최근엔 국제경기 종목이 아니므로 전국체전의 퇴출논란이 있기는 했으나, 나름 대한궁도협회의 적절한 대응으로 심히 우려스러운 사안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13) 지난해부터 한국중고궁도연맹이 세워져 경기가 정례화 되고 있으므로 기대가 크다.

147 146 학예지 제18집 것이란 말이다. 현행의 활쏘기 경기방식은 관중의 흥미를 끌기는커녕 정작 활쏘는 사람들이 봐도 지루하고 재미없다. 내가 쏠 때만 재미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회장에서는 자신의 순서가 되지 않고는 활쏘기를 구경하는 동호인은 드물다. 그나마 관람하는 것은 대개 동료 또는 지인들의 경기이거 나, 아님 일부 주목받는 선수들의 특정 경기만이 겨우 눈길을 끌 뿐이다. 관중은 어쩌다 활쏘기 를 모르는 이들이 호기심에 잠깐 관람하는 정도가 다다. 지금의 경기는 입사( 立 射 ) 방식으로 과거 양반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활쏘기 유엽전이다. 이 런 기법이 전쟁이나 사냥 등에서 사용될 수도 있었겠지만, 실전의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긴장감 너머의 박진감이나 쾌감, 흥미를 끌기엔 한계가 있다. 이런 특성은 관중을 끌기 어렵고 관중이 없는 종목의 경기에 기업이 관심을 가질리 만무하다. 미래사회의 스포츠로서 활쏘기는 여타 스포츠와 경쟁 아닌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의 많은 스포츠 종목들은 경기규칙에 현실적 변화를 수용 적용하고 있다. 특히 인기스포츠일수 록 이런 변화의 수용은 두드러진다. 심지어 전통무예 택견에서도 TV 중계를 위해 경기규칙을 기꺼이 수정하고 또 흥미를 끌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개발 적용하기도 했었다. 물론 전통무예 로서의 원형적 경기방식은 별도로 존치해 둔 상태에서의 수용이었다. 논자의 시각엔 활쏘기에도 그러한 변화의 수용이 필요해 보인다. 성현들이 예찬했던 심신수 련의 교육적 효과를 캐치프레이즈로 존속 발전시키는 것도 꼭 필요할 테지만,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한 다양한 방식의 기법을 경기화 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 필요성이 있다. 어쩌면 이 것은 과거의 다양했던 경기방식을 재현하여 계승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이미 궁도경기장을 벗어나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의 활쏘기를 즐기는 이들도 있고, 또 과거의 실전적 인 기법을 재현하는 이들도 있다. 태산이 불사토양( 不 辭 土 壤 )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활쏘기는 다양한 경기방식의 수용과 개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때라 하겠다. 4. 전통의 활쏘기 전승문제 1) 활쏘기 경기의 원형 보존 전통 활쏘기를 좀 더 이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스포츠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148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47 과거의 다양한 경기방식 재현 및 계승을 제안하는 김에 논의를 더 해보자. 먼저, 과연 지금의 경기방식은 온전한 전통의 방식을 지키고 있는가? 일제강점기와 이후 동 서 이데올로기 대립시기와 격변의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혹여 과거와는 다른 어떤 변화를 갖지는 아니했던가? 또 대한체육회의 경기체계에 맞추기 위해 일부를 규제하거나 첨삭되지는 않았는가? 이에 대해서는 객관적 검토가 더 필요할 수 있겠으나, 지금의 활쏘기 경기와 수련기 법 등에 분명 어떤 변화 또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의견은 활쏘기와 관련한 인 터넷 사이트와 온깍지 궁사회의 국궁논문집 을 비롯한 여러 선행연구에서 수없이 지적되고 있다. 물론 활쏘기도 무형문화로서 시대와 환경에 따른 변화는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 면엔 전통의 무형문화유산이라서 원형 유지 및 전통성 보존이라는 중차대한 책임과 숙명이 따 른다. 현재 활쏘기와 관련하여 전통의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 궁시장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6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고, 14) 전통장( 箭 筒 匠 )도 중요무형문화재 제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활과 화살 그리고 화살통을 만드는 장인들이다. 활쏘기에도 장안편사( 長 安 便 射 ) 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7호, 전통 활쏘기 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서 활쏘기문화 원형을 유지하고 전승하는 책무가 이들 기 예능보유자들에게 있 지만, 그들이 만든 활쏘기 장비로 활을 즐기는 우리 동호인들에게도 우리 활에 대해 갖는 자긍 심만큼 활쏘기 문화 원형 보존과 전승보급에 연대책무가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동호인들은 활쏘기 문화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거 나 잘 모른다. 대한궁도협회의 소위 명궁 반열에 오른 이들도 각궁 죽시( 角 弓 竹 矢 )를 의무적 으로 사용하지만, 15) 그들 중 상당수는 활쏘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논자가 현장에서 만났던 명궁들만이 공교롭게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만, 전통장이 소위 인간문화재라는 것은 많이들 모르고 있었다. 또 장안편사 도 인지는 하고 있으되, 명칭을 정확히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전통 활쏘기 는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전통 활쏘기 는 2000년 7월 1일 평창의 대관정에서 활을 쏘던 이용달(작고)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지정 이후 투병하다 2002년 작고했다. 당시 3명의 전수장학생이 있었는데, 그들 중 2명은 아직 활을 쏜다. 그러나 무형문화재 제도 상 그 이상의 이수자 및 교육보조자(전 14) 궁시장은 각 시도무형문화재로 여럿 지정되어 있다. 15) 대한궁도협회 5단 승단대회부터는 반드시 각궁, 죽시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5단 이상자는 일정 규정과 절차에 의해 명궁( 名 弓 ) 칭호를 부여받는다.

149 148 학예지 제18집 수조교), 보유자(인간문화재)가 없어, 사실 상 지정해제의 수순만 남아 있는 상태라 하겠다. 장안편사 는 예능보유자가 전승활동을 하고 있지만 역시 서울시의 지원이나 활쏘기 동호인 들의 관심이 미흡한 편이다. 대다수 동호인들은 문화유산으로서의 활쏘기 전승은 내 일이 아닌 양 무관심하다. 활쏘기와 관련한 전통예법과 미풍양속에 대한 연구도 미진하며 전통의 사법( 射 法 )에도 관심이 적다. 대개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활터에서는 전통의 예법이나 사법이 일부 급진 적 궁사들만의 전유물인양 외면당하기도 한다. 전통에 대한 시각과 수용여부는 저마다의 이데올로기 또는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동이족( 東 夷 族 )을 자처하며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또 그런 우리 활쏘기를 즐기는 동호 인이라면 올바른 전통을 계승하고 또 전승시켜 주어야 하는 공동의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전통문화는 현실적 부가가치를 주지 못한다 해도 소중히 지켜져야 할 유산이다. 하물며 활쏘기 는 동양고전에서 심신수양의 으뜸으로 예찬했고, 그것은 현대인에게도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로 인식된다. 활쏘기는 현대인에게도 긍정적 심신수련의 역할을 수행하는 훌륭한 생활스 포츠인 것이다. 따라서 동호인 스스로 활쏘기를 만연한 생활스포츠로만 인지할 것이 아닌 전통문화유산의 계승 및 전승활동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활쏘기를 즐기는 모든 동호인들이 이런 인식을 지닐 수 있도록 각계에서 나름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 다양한 전통기법의 경기화 문제 우리시대 활쏘기의 저변확대와 대중화를 위해서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수용하며 새 로운 발전을 모색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근대 활쏘기의 원형과 그 특성은 변형 없이 온전하게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활쏘기는 유엽전( 柳 葉 箭 ) 기법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과거의 선조들은 다양하 고 여러모로 뛰어난 기법을 지녔었다. 그런데 조선의 궁술 에서부터 여러 가지 기법은 설명 만 하고, 실제는 유엽전 한 가지만 정리한 셈이다. 아마도 조선의 궁술 이 지어질 당시에도 이미 여타의 기법들은 온전하지 않았지 싶을 정도다. 아무튼 우리는 과거의 다양하고 뛰어났던 여러 활쏘기 기법을 잃어버렸다. 십중팔구는 버리고 한 가지만 가지고 전통의 활쏘기 문화와

150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49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연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온전하지 못하니 혼돈스 러울 수밖에 없고 혼돈스러우니 구성원 간 갈등의 싹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6) 유엽전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경기방식도 참으로 멋지고 훌륭한 전통의 경기방식이다. 그러 나 현대인의 정서로써 지금의 활쏘기가 경기 내내 관중의 시선과 관심을 끌며 몰입할 수 있게 하기엔 2% 부족하다는 판단이다. 경기 내용이 역동적이거나 예측이 어려운 변화무쌍한 변화도 적다. 활 쏘는 당사자라면 쾌감도 느끼고 긴장감 너머의 어떤 희열도 느낄 수 있겠으나 관중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호기심 정도에 머물 뿐이다. 일선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조차 자신 또는 동 료의 경기가 아니면 경기장을 떠나 대기할 뿐이다. 다른 선수들의 경기에 방해가 될까 하는 배려도 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자신의 경기가 아니면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타의 스포 츠에서는 관중을 끌기 위해 또는 TV 중계를 위해 경기규칙과 방식이 적절히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올림픽 종목인 양궁도 그렇다. 17) 과거에 우리의 활쏘기는 다양한 기법들이 있었다. 지금의 유엽전과 더불어 목전( 木 箭 )과 철 전( 鐵 箭 - 六 兩 箭, 亞 兩 箭, 長 箭 ), 편전( 片 箭 ), 세전( 細 箭 ), 신전( 信 箭 ), 예전( 禮 箭 ) 등이 있었고, 쏘는 방식에서도 입사( 立 射 ) 외에 보사( 步 射 ), 주사( 走 射 ), 기사( 騎 射 )가 있었다. 활의 종류도 조선의 궁술 에서 정량궁( 正 兩 弓 ), 예궁( 禮 弓 ), 목궁( 木 弓 ), 철궁( 鐵 弓 ), 철태궁( 鐵 胎 弓 ), 고(동 개궁), 각궁 등 7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18) 명확한 검증과 연구를 거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고 서라도 얼마든지 지금시대에 재현이 가능한 전통의 기법들이다. 지금의 경기방식으로 재현이 가능하다는 얘긴데, 이미 일부 동호인들은 이런 종목들을 재현하여 시범보이고 있다. 그들은 사거리와 표적에 다양한 변화를 주며, 쏘는 방식과 시간에도 흥미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들 의 활쏘기는 보는 이에게 역동적이면서도 긴장감과 쾌감을 준다. 이들의 활약상은 인터넷 동영 상으로도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데, 활쏘기에 무관심한 이들이 봐도 재미와 호기심이 발동할 만큼 흥미롭다. 19) 또한 기사는 마상무예와 더불어 국제대회로 정례화 되어있다. 그만큼 세인 의 관심과 인식을 끌만큼 상품가치로써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또한 과거의 활쏘기에는 군사훈련의 성격이라 할 질사법( 迭 射 法 ), 20) 근사법( 近 射 法 ), 21) 절사 16) 정재성, 2011, 전통시대 활쏘기 문화의 특성 소고 무예연구 5. 한국무예학회. 17)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의 독주를 막기 위한 대응책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결국은 흥미진진한 경기를 위한 자구 책의 일환인 셈이다. 18) 졸고, 2008, 국궁의 대중화 방안 소고 스포츠인류학 연구 3. 한국스포츠인류학회 19) 논자의 경험으로 지방대학 교양강좌에서 관련 동영상에 학생들의 반응을 목도한 바 있었다. 2010년 12월엔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들도 이 동영상에 대단한 흥미와 관심을 보였었다.

151 150 학예지 제18집 법( 節 射 法 ) 22) 등이 있는데, 23) 지금의 편사( 便 私 )와 개인 및 단체전 경기에서 응용해 볼법한 방 식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과거의 기법들을 복원하여 경기화 하고 또 전승시키는 것은 스포츠로서 우리 활쏘기의 진정한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음 물론이거니와, 문화유산으로서의 활쏘기 문화의 진 흥에도 더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문적이고 세부적이면서도 통시적 연 구가 뒷받침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3) 제도적 인식제고 노력 이분법적 시각으로 지금 한국의 활쏘기는 경기를 위한 활쏘기와 전통문화로 인식하는 활쏘 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경기를 주로 하는 성향의 문화를 말하는데, 경기를 위한 활쏘기를 배우고 경기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후자는 막연하나마 활쏘기를 전통문화로 인식하며 활쏘기에 대한 자긍심 또는 만족감을 느끼는 상황을 말한다. 현실적으로는 엘리트 체육의 성격이 짙을 수밖에 없는 대한궁도협회가 한국의 활쏘기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우리시대 활쏘기 문화가 대한궁도협회의 헤게모니에 의해 활쏘기 경기와 전통 의 활쏘기 문화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생활체육 전국궁도연합회가 엄연히 별도로 존재 하나, 최석규의 표현처럼 한국의 활쏘기는 대한궁도협회가 총아( 寵 兒 )로 군림하고 있다. 24) 실 제 각 시도에서 생활체육의 궁도 종목은 대한궁도협회의 경기방식과 운영체계를 벗어나지 못 한다. 25) 국민생활체육 전국궁도연합회가 주관하는 세계민족궁대회에서는 경기규칙이 다소 다 르지만, 대부분의 대회는 규제가 비교적 적을 뿐 대한궁도협회의 경기방식과 경기규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의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의해 경기규칙, 방식 등이 유사할 수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활쏘기는 대한궁도협회의 영향력이 크다. 이는 국민생활 체육이 대한체육회에 비해 역사가 턱없이 짧은 탓도 있고, 대한궁도협회가 출발부터 민족적 20) 군사들이 한꺼번에 쏘는 것이 아니고, 3대로 나누어 번갈아 쏘는 방식을 말한다. 증보문헌비고( 增 補 文 獻 備 考 )와 유성룡 ( 柳 成 龍 )의 전수기의( 戰 守 機 宜 ) 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21) 근거리에서부터 원거리로 단계별로 습사하는 방식이다. 22) 난사( 亂 射 )를 방지하고 절제하며 조준 사격하는 방식이다. 23) ) 최석규, 2011, 전통활쏘기의 경기체계 전통활쏘기 정체성 확립 방안 공청회 자료집 용인대무도연구소 25) 국민생활체육 종목으로서 궁도는 대부분의 시도지부가 대한궁도협회의 지부에서 겸직하고 있다. 당연히 대부분의 시도 생활체육대축전 등은 대한궁도협회 소속의 운영진에 의해 대한궁도협회 경기규칙이 적용된다.

152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51 성향의 생활체육으로서의 특성을 포함하며 성장해 온 까닭도 있다. 대한궁도협회가 단순히 활 쏘기 경기만을 주관하는 기관이 아닌 한국 활쏘기 문화의 헤게모니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 다. 26) 그래서 대한궁도협회는 바람직한 경기문화 선도는 물론이거니와 전통문화유산으로서 활 쏘기의 올바른 전승과 보급 발전에도 신경 쓰는 이유이다. 27) 물론 작금의 대한궁도협회 역할 은 일각에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 조직구성은 물론이거니와 전통문화와 미래스포츠로서 의 활쏘기 발전상과 미래상 제시에도 부족함과 한계가 있다. 대한궁도협회의 보수적이고 배타 적인 성향은 전통문화로서 활쏘기 문화의 계승과 전승에 일면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만 미래지향적인 비전 제시에는 난관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활 쏘기를 통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가 적은 것이 그 성향의 일면임을 말하는 것이다. 5. 맺는 말 우리 민족사와 민족문화에서 자긍심의 대명사로서 활쏘기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 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우리 활쏘기를 잘 모른다. 우리 활과 양궁과의 차이에 대해서 도 많이 모른다. 정작 활쏘기를 즐기는 동호인들조차 활쏘기의 진정한 전통성과 전승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경기 중심 일변도의 활쏘기 문화의 특성으로 인한 문제도 있고, 동호인 대부분이 학습연령을 지나서 활쏘기를 접함에 따른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활쏘기 동 호인 스스로의 자성은 물론 전체적인 활쏘기 문화를 선도하는 관련 기관의 근본적 문제인식과 적절하고 적극적인 대응책이 요구된다 하겠다. 최근 전통의 활쏘기를 소재로 한 영화 한편이 최고의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덕분에 일선 활터에서는 동호인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무기로서의 소용이 사라진 우리시대 활쏘기는 그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인기 스포츠로서의 발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동양고전이 한결같이 예찬한 심신수양의 방법론으로서, 무인은 물론 선비와 제왕까지 즐기던 선 26) 고종황제의 윤음에 의해 황학정이 지어지면서 갑오개혁 이후로 사라지던 전통 활쏘기의 부흥 및 전승 계기가 마련되었 다. 그리고 황학정을 중심으로 한 조선궁술연구회가 오늘날의 전통 활쏘기 바이블이라 할 조선의 궁술 이 지어졌고, 그 조선궁술연구회가 오늘날의 대한궁도협회로 발전했다. 27) 지난 여름, 논자는 대한궁도협회 실무진과 서울시지부 간에 활쏘기의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에 대한 논의가 오감을 목도했다. 활쏘기는 시도무형문화재로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시키고자 하는 계획에는 신중하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사례는 충주시 사)세계무술연맹에서의 학술보고서가 있다. 우리의 소중한 활쏘기 문화의 지적 재산권 행사를 위해서도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의 등재노력은 매우 고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53 152 학예지 제18집 조들의 활쏘기가 현대인의 생활스포츠로도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는 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시점에서 전통의 활쏘기는 미래지향적인 스포츠로 확실한 자리매김과 더불어, 누구에 게나 사랑받는 생활스포츠로 계승 발전되기 위해서는 나름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활쏘기에 대한 세부적이면서도 다양하고 심층적인 연구를 통한 학문적 정체성 정립이 필요할 수 있다. 그동안의 선행연구는 체육학계에서 대체로 활쏘기의 역사와 특성을 다루는 인문 사회학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마저도 연구 성과는 여타 여타 종목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다. 현대인이 활쏘기 수련에 대한 현실적 신뢰를 지닐 수 있는 분야의 연구, 예컨대 운동역학과 생리학, 의학 등과 같은 자연계열의 연구도 시급하다. 이를 통해 전통문화로서의 활쏘기 전승은 물론 스포츠로서의 발전방향을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전통문화와 스포츠로서 올바른 활쏘기의 전승 보급과 대중화를 위해서는 일선 동호인들의 활터 운영에 따른 여러 가지 갈등과 불협화음을 최소화 하고자 하는 자구적 노력도 필요하다. 다음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체육으로의 보급노력이 절실하다. 이는 우리 활쏘기에 대한 더 많은 분야의 다양한 연구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또한 한국사회에 서 활쏘기가 생활체육은 물론 경기스포츠로의 진정한 대중화를 위해 아주 절실하면서도 가장 현실적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활쏘기 미래상과 발전상 제시에 있어서는 전통문화유산으로서의 원형을 온전히 전승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애초에 민족문화로서 활쏘기는 고종황제의 윤음으로부터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는 문화재로서의 기 예능을 인정받은 소수의 법적 전수자들의 몫이 아니라, 활쏘기를 전통무예로 인식하며 즐기는 모든 동호인들의 몫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양한 전통기법의 복원연구와 재현을 통해 현대의 활쏘기 경기로 승화 발전시킬 당위성도 있는 셈이다. 더불어 이런 논의와 제안의 현실적 적용과 제도적 인식제고 노력은 한국의 활쏘기 문화를 주도하는 대한궁도협회의 책임 있는 역할수행의 노력도 기대해 본다. * 투고일 : 2011년 11월 2일 *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9일

154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53 국문초록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정 재 성 우리에게 활쏘기는 민족적 자긍심 또는 정체성으로 인식된다. 역사적으로 활쏘기는 살상용 무기로써의 발달과 더불어 심신수련을 위한 여가활동으로도 전승되어 왔다. 특히 동양고전에 서는 군자로서의 인과 덕을 수양하는 기법으로 예찬하였다. 덕분에 무기로써 소용도가 떨어진 현대에 활쏘기는 생활스포츠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전통의 활쏘기 기법과 철학에 대해 잘 모른다. 드라마, 영화 등에서 조차 국궁과 양궁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 활쏘기를 즐기는 동호인들조차 전통의 기법과 철학 에 대해 관심이 적다. 학계에서도 활쏘기 연구자가 드물다. 이런 까닭은 전통의 활쏘기가 학교 체육으로 편입되지 않은 연유가 가장 크다. 한국 활쏘기의 향유층은 대개 학령 연령을 지난 기성인이다. 한국의 교육문화에서 학교에서 교육되지 않는 활쏘기를 어린 학생들이 배운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활터에서 활을 배우는 사람들도 연구 교재를 찾기 보다는 선배구사들의 경험에 의존한다. 한국의 학문체계에서 활쏘기는 주로 체육학에서 다루어진다. 학문적으로 체육과 스포츠의 개념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활쏘기는 체육학으로든 스포츠학으로든 관련연구가 부족하다. 연 구자들의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 활쏘기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산적한 현안들이 많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스포츠의 구분 이 모호한 것으로부터, 전통의 일부 기법과 철학에 있어서의 변화가 있다. 그로 인한 궁사들 간 갈등구조도 심각하다. 또한 미래지향적 생활스포츠로서의 비전도 갖추지 못했다. 활쏘기는 전통의 원형보존을 전제로, 대중적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경기문화를 창출할 필요 성이 있다. 이를 위해 과거의 다양했던 기법들을 복원하여 경기에 적용할 필요성이 있다. 모두 학술적 연구를 통한 정책제안과 실천이 필요한 부분들이다. 이 연구는 이런 의도로 논의를 진 행하였다. * 주제어 : 활쏘기(국궁),체육학,전통사법

155 154 학예지 제18집 ABSTRACT Discussion of Korean Archery from the Perspective of Physical Education Research Jeong Jae-Seong The archery is recognized as national self-esteem or identity by us. Historically, along with the development of the archery as a lethal weapon, the archery has been handed down as one of leisure activities to train body and mind. In particular, the Oriental classics glorified it as a method to build up humanity and moral excellence by virtuous persons. Owing to that, even though the archery has not been used as a weapon, it has developed into leisure sports(sport for all) these days. But, many Koreans are not well aware of a traditional arrow shooting technique and its philosophy. Archery and Korean archery are not described correctly even in TV dramas and films. Moreover, those who like shooting arrows have little interest in the traditional shooting technique and its philosophy. Few researchers study arrow shooting academically. That is because the traditional archery is not admitted as the curriculum of physical education at schools. Most people who enjoy shooting arrows are adults. For the reason, it is very rare to see children learning Korean archery which is not included in an educational curriculum in Korea. Those who learn shooting at a shooting range rely on the experiences of senior archers rather than look for study textbooks. In Korea, the traditional archery shooting is mostly studied in the course of physical education. Even though physical education and sports have somewhat difference in the academic concept, few studies on the archery have been performed in the aspects of physical education or sports education. That is because researchers are lack of motivation. There are a lot of issues to be solved in the Korean archery area, such as vague distinction between elite physical

156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155 training and leisure sports, and changes in some traditional techniques and its philosophy. For the reason, there are serious conflicts between archers. In addition, the archery has no vision as futuristic leisure sports. On the assumption that archery is preserved in its original form, it is necessary to create events which will help draw public attentio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restore various original techniques and apply them to events. Such activities also include a proposal of policy related to Korean archery through academic researches and the realization of the policy. Therefore, this study was performed to discuss such various issues. * Key word : Korean archery, Physical education, Traditional shooting technique

15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157 자료소개 (근대신문 弓 術 大 會 기사 발췌)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이 건 호* 목 차 1. 자료소개 1) 자료 수집과정 2) 연재기사 조선궁도와 사풍 설명 3) 조선궁술연구회장 대담기사 설명 2. 근대신문에 보도된 궁술대회 기사목록 3. 주요 연재기사 현대어 전문 1) 조선궁도와 사풍 2) 조선궁술회연구회장 대담기사 1. 자료소개 1) 자료 수집과정 1) 국궁신문에서 조사한 근대신문 자료는 1896년부터 1949년까지 발행된 신문중 활쏘기와 관련된 약 천여 건의 기사 목록으로 1차 완성되었다.수집된 자료는 신문사 본사에서 복 사한 인쇄물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한 전자파일 형태이다. 2000년도에 조선일보를 대상으로 弓 術 大 會 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 약 200여건의 신문 자료 복사본 확보를 시작으로 동년에 동아일보 본사에서 직접 목록을 확인하면서 300여건 의 신문을 추가 수집하였다. 2002년도 이후부터는 국내의 IT정보산업의 발달로 한국의 역사자료를 체계적이고 종합 적으로 전산화하여 사용자들에게 제공하는 한국역사정보시스템 등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 해 좀더 쉽게 근대신문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져 근대국궁사의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검색사이트에 키워드 등록을 통해 이메일로 수집되는 자료를 확인하여 기사목 록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자료집을 작성했다.주요자료를 수집한 과정을 살펴 *국궁신문 대표

158 158 학예지 제18집 보면 아래와 같다 디지털 조선일보 궁술대회 기사 원문서비스 자료 동아일보 궁술대회기사(동아일보 본사) 궁술대회 자료 종합목록 작성완료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 각종 궁술 관련 자료 각종 인터넷에서 확보한 자료 목록 반영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궁술대회 로 검색자료 국립민속박물관 발간 한국무예사료총서의 근대신문Ⅰ,Ⅱ 자료 한국역사정보시스템 및 한국언론진흥재단 검색자료 신문기사의 자료 원문을 쉽게 볼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전무한 상태에서 활용이 쉽지 않다 는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나 근대신문에 보도된 궁술대회 기사의 종합목록만으로도 당시의 활 쏘기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고자 한 다. 아울러 근대신문 기사 목록중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 주요 연재기사와 대담기사는 소개 글과 함께 원문을 부록으로 실었다. 신문사의 사고( 社 庫 )에 쌓여있던 소중한 자료가 먼지를 털어내고 빛을 보듯이 아무쪼록 이것을 계기로 더 많은 자료가 학계와 국궁계에 의해 빛을 보며 한국의 전통활쏘기가 최 고의 민족문화로 자리매김과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문화로서 세계적인 문화 상품으로 승 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자료가 우리 민족의 국궁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작은 밀알 이 되었으면 한다. 2) 연재기사 조선궁도와 사풍 설명 조선일보 1934년 6월 3일부터 6월 26일까지 총 17회에 걸쳐 연재된 조선궁도와 사풍( 射 風 ) 기사를 쓴 필자는 신정언( 申 鼎 言 ) 1) 이며, 각 편에는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 이라는 책의 1) 연재기사의 저자 필명은 鼎 言 散 人 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朝 鮮 弓 道 와 射 風 -16 회 연재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1933년 10월 12일자 조선일보 컬럼 弓 道 에 대하야 필자 이름이 申 鼎 言 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동일인으로 간주하였다. 위키백과 사전 신정언( 申 鼎 言 )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야담가로 생애신상에 대해서는 자세 히 알 수 없으며 일제 강점기에 유명한 이야기꾼으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조선담우회 평의원을 지내면서 전국을 순회하 며 야담을 공연했다. 여성 대상 강연회에 불려나가 옛이야기 속 부인들의 무용담을 구연하는 등 전쟁협력의 성격이 뚜렷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15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159 내용과 대부분이 중복되기도 하지만 일부는 서로 보완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당시의 전통 활쏘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서론 부분인 제1회 연재기사에서는 조선궁도와 사풍 을 신문에 연재하는 이유와 목적의 의 미를 서술하였다. 조선의 궁술은 궁사도로써 생각하든지 혹은 오늘날의 운동경기로만 생각한 다 할지라도 장려할 필요가 결코 다른 운동 경기종목에 뒤떨어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조선 궁술의 발생, 발달과 궁도, 사풍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이니 그것이 그다지 무의 미한 붓장난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먼저 조선 궁시의 연원으로부터 그 발달의 원인과 장려 의 방법이 어떠하였으며 아울러 그 성쇠의 일단을 기록하여 독자 제현의 한 때 취미에 제공하 려 한다. 라고 서술하며, 글을 쓴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고,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2회 연재기사에서는 인류사의 보편성에서 궁시의 역사를 서술하며, 조선의 궁술은 궁시를 사용하던 여러 민족 중에 명예가 높고 동시에 조선 사람의 자랑거리의 일종이다 라며 독자로 하여금 조선의 궁술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선도적인 논조를 펼치고 있다. 연재기사 조선궁도와 사풍 3회와 4회에서는 조선시대 사용하던 활의 종류에 대한 내용이며, 제조법에 따라 수렵용과 전쟁용으로 구분되어 발전하였고 그것을 크게 대별하면 군용궁( 軍 用 弓 )과 평궁( 平 弓 )으로 분류하여 세별하였다. 군용은 전시( 戰 時 )의 병기용( 兵 器 用 )이 되고 평궁 은 평시의 연습용이 되는 그 용도의 목적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소개된 전문 대부분은 1929년 조선궁술연구회에서 발간한 조선의 궁술 에 기록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연재기사 제5회에서는 고조선의 호시 설명부터 삼국시대부터 거쳐 조선궁시의 분포도는 물 론 화살의 종류별 사용하는 용도에 이르기까지 화살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이어졌다. 대부분은 1929년 조선궁술연구회에서 발간한 조선의 궁술 에 기록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조선 궁도와 사풍 제6회에서는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서 간략한 삼한의 활쏘기 문화 와 더불어 사법의 요건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법의 요건은 조선의 궁술에 기록되지 않은 독특한 방식의 설명이다. 먼저, 삼한시대 활쏘기가 일상적인 문화라는 내용을 "예인 풍속 에 가족 중에 사망자가 생기면 그 사망 장소가 되었든 전날 주거하던 가옥을 전부 헐고 반드시 새 가옥을 축성하는 바 그 낙성연( 落 成 宴 )을 무천연( 舞 天 宴 )이라 하였고, 무천연은 반드시 거 행하고 동시에 무천연의 여흥으로는 활쏘고 말달리기를 위주로 한 것이 불변의 국속( 國 俗 )이었 다. 라고 삼한시대에 성행한 활쏘기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 궁사의 직립자세 12요건으로 구분하여 사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궁사의 사법이란 것은

160 160 학예지 제18집 마치 군인의 기착자세( 氣 着 姿 勢 )와 같다. 즉 군인이 먼저 기착자세를 취한 뒤에 교련 과목, 혹은 운동을 시작하는 것과 같이 궁사는 먼저 직립자세를 취한 뒤에 궁술을 발휘하게 된다. 이것을 총칭하여 사법이라 칭한다 라며 12개 요건에 대한 설명을 이어졌다. 조선의 궁술에 기 록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7회에서는 사정 직제( 職 制 ) 및 사풍 에 관한 글이며, 삼망단자( 三 望 單 子 )에 의해 임원을 선출하는 과정 등은 조선의 궁술에 언급된 내용과 동일하다. 이어 사풍은 4대 강령과 이에 따 른 18개의 세부 규정을 설명하고 있다. 견책( 譴 責 )등의 세부 규정에 대한 설명은 책자 조선의 궁술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보이며, 4대 강령인 사표( 師 表 ) 존경, 선진( 先 進 ) 경대, 동배( 同 輩 ) 예대( 禮 待 ), 규율( 規 律 ) 엄수 항목에서 당시 활터의 엄숙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제8회에서는 삼국시대의 복잡한 정치사적 관계와 외교적 상황에 따른 핀연적 요소에 의해 진전된 궁술 발달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국민개궁주의( 國 民 皆 弓 主 義 )하에 궁술이 국민화 하였 고 사회화 하였다는 논조로 쓰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궁술의 국가적 장려라는 주제로 각 시대별로 궁술장려에 대한 소개와 함께 구체적으로 국가에서는 무과로서 장려하였고, 민간에서는 편사로써 궁술을 장려 하였다고 제9회 연재기사는 전한다. 주요내용은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 기록된 내용과 유사하다. 제10, 11회는 편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준비과정 및 진행 절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서 언급한 내용보다 구체적인 사항도 있다. 특히 대회전날에 지 내는 고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용어를 쓰고 내용도 보완적이라 자료의 가치를 더한다. 연재기사 사정고유( 射 亭 告 諭 )=사정고유를 대회 전일에 거행하는 의식이니 즉 우승을 기원( 祝 )하 는 의미이다. 고유제를 거행함에는 사두가 수석제관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타 선생 행수 이하 전원이 청결한 의복으로 지성을 다하여 행한다. 그런데 소지백지는 16장을 사용하는 것이니, 즉 처음 1장은 부정소지라 하여 당일 모든 부정하고 불리한 귀신을 제거한다는 의미의 소지이고 다음 제2장은 수띠의 개선할 것을 기원하는 소지요 그외 14장은 각 편사원의 성공을 기원하는 소지이다. 조선의 궁술 대중회( 大 衆 會 )의 하루 전에 일반 사원들이 모여 본정( 本 亭 )에서 고사를 지낸다. 제물 은 청주, 삼색과실, 찹쌀시루떡, 쇠머리나 돼지머리를 풍부하게 차려놓고 낮이라도 촛대에 밀초 한 쌍을 켜고 노련한 사원 1인을 제관으로 하여 사례의식을 행한 후에 백지 16장을 준비해서 소지한다. 한 장은 부정을 쫓기 위해서 하고 다른 한 장은 수띠가 소지하고 14장은 편사에 참가하는 사원들이 소지한다.

16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161 제12회에서는 편사중 거기한량과 획창한량이 하는 일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였으며, 대부 분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었다. 획창을 마치고 풍악을 치는 부분 에서는 1,2중에는 장령산곡( 長 靈 山 曲 ), 3중에는 염불곡( 念 佛 曲 ), 4,5중은 타령곡 의 순서가 동 일하게 소개되고 있다. 터편사를 비롯한 10여종의 편사 종별은 제13, 14회에서 소개하고 있으며, 1929년 발간된 조 선의 궁술에 언급된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보여지며, 지방에서 이루어진 편사종별 은 기록하지 못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아울러 활쏘기의 민간장려와 사정 도성내에 산재한 활터 현황을 소개 하고 있으나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15, 16회는 고려시대의 무과와 조선시대 무과의 정착에 대한 설명으로 1929년 발간된 조선 의 궁술의 기록과 유사하다. 아울러 조선궁술의 정신을 로마의 기사도와 일본의 무사도 와 비교 하여 리망취진( 離 忘 取 眞 ), 출신보국( 出 身 報 國 ) 이라는 논거를 앞세운 논조가 매우 특이하다. 제17회는 연재기사의 결어부분으로 오늘날 경향 간에 궁술대회의 소식이 왕왕 들리나 요컨 대 이것은 일종의 오락화 일종의 운동화에 불과한 것이오, 옛날 궁도의 이상이 아직 그대로 남았는지 여부는 의문일까 한다. 라며, 필자는 고래의 엄격한 사풍( 射 風 )이 문란함을 지적하 고, 사계에 암시적으로 각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글을 맺었다. 3) 조선궁술연구회장 대담기사 설명 1938년 1월 1일과 3일자 조선일보에는 조선궁술연구회 성문영 회장의 대담기사가 실려있으 며, 대담기사를 살펴보면 국궁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그 중 중요한 내용 두가지중 첫 번째는 고종( 高 宗 ) 기해( 己 亥 )년에 궁술을 장려하야 신체를 발육 시키라는 윤음( 綸 音 ) 을 본인이 받았다는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조선궁술연구회 창립연도에 관해 지난 소화 삼년에 나와 몇몇 동지가 발기하야 조선궁술연구회( 朝 鮮 弓 術 硏 究 會 )라는 것을 조직하였 는데 소화 칠년에 그 명칭을 변경하야 조선궁도회( 朝 鮮 弓 道 會 )라고 하고 라는 대목이다. 즉, 조선궁술연구회는 1928년도에 창립되었고, 1932년에 조선궁도회로 개칭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으며, 200자 원고지 25장 분량의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이 외에도 근대국궁사에 있어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기사전문이다. 조선일보 원문에는 황학정에서 활쏘는 광경과 대담자인 성문영이 활을 만작한 상태의 사진 이 함께 게재되어 있다.

162 162 학예지 제18집 2. 근대신문에 보도된 궁술대회 기사목록 범례 (목록) 조선일보 開 城 弓 術 大 會 1921년 10월 14일자로 발간된 조선일보이며, 활쏘기와 관련한 開 城 弓 術 大 會 내 용이 신문기사로 보도되었다는 의미이다. 발행기간 : 자료내용 : 근대신문 1,082건 기사목록 일자별 기사목록 독립신문 이달 십오일 동수문안 률목전에서 활을 써기로 경무동서 대한매일신보 백발백중 대한매일신보 관혁제조 대한매일신보 황학정 기생연습 대한매일신보 매일숙습 대한매일신보 일의배종 대한매일신보 황학정풍류 대한매일신보 잘덜 논다 대한매일신보 편사대탁 대한매일신보 금 할만한 일 대한매일신보 리와정 습사 황성신문 궁술대회 개최 대한매일신보 습사상인 대한매일신보 아니 맛다 대한매일신보 취운정연회 대한매일신보 취운정사회 공립신보 편사는 언용고 대한민보 射 弓 消 遺 대한매일신보 편사

16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대한매일신보 황학정 의친왕 매일신보 황학정의 편사 매일신보 황학정 편사 매일신보 조선궁사연합대회 기사/궁술은 심신의 단련 매일신보 弓 術 復 興 의 機 運 매일신보 京 城 弓 術 發 起 會 매일신보 경성궁술회 관덕회 매일신보 觀 德 會 의 射 會 매일신보 황학정의 터편사 동아일보 강경 궁술대회 매일신보 開 城 弓 術 會 旅 行 매일신보 궁술대회거행 매일신보 全 光 弓 術 大 會 /전주 천양정에서 궁술대회 개최 동아일보 전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벽성 청호 궁술대회 동아일보 인천 편사대회 조선일보 開 城 弓 術 大 會 매일신보 光 州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妓 生 等 의 弓 術 演 習. 貧 民 救 濟 를 目 的 으로 西 大 門 황학정에서 매일신보 開 城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경성 각희급 궁술회 동아일보 논산 편사회 성황 조선일보 궁술대회는 금일 십일시부터 경무대에서 조선일보 漢 江 南 德 亭 에서 明 日 弓 術 大 會 開 催 매일신보 石 虎 亭 이 又 慘 敗 동아일보 논산 편사 궁술회 동아일보 통영 궁술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利 川 靑 年 會 主 催, 本 社 利 川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궁술대회 박스 광고

164 164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이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의정부 궁술대회(양주) 동아일보 밀양 사회 매일신보 春 川 弓 術 大 會 및 湖 南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대구의 궁술대회 동아일보 의정부 궁술대회(양주) 동아일보 관덕정 궁술대회(삼천포) 동아일보 의령 사장 궁술회 동아일보 강화읍 궁술대회 동아일보 인천에 편사대회 동아일보 통영 궁술회 시사 동아일보 창원 궁술회 조직 매일신보 天 中 佳 節 에 弓 術 會 동아일보 靑 龍 對 西 虎 便 射 大 會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를 開 催. 本 報 高 陽 支 局 主 催 로 往 十 里 靑 蓮 寺 에서 조선일보 대권계조직/전남광주궁술계 대권정 창립 매일신보 간간임박하는 궁술회 조선일보 청련사 궁술대회 동아일보 전선궁술대회, 경무대에서 조선일보 궁술회의 제1일/왕십리 청련사 궁술대회 동아일보 射 會 초일, 송림을 울리우는 지화자 소리 동아일보 청룡정 편사 복수전 조선일보 개성군 보선정 궁술대회 성황 매일신보 대회안내 박스 광고 및 사진 2컷 조선일보 군산 남양정대 강경 덕유정 편사대회 동아일보 전선궁술대회, 경무대에서 조선일보 金 浦 便 射 大 會 동아일보 여수 궁술대회 동아일보 전남 사우회(나주)

16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목포 궁술회 발기 동아일보 全 慶 弓 術 大 會, 麗 水 支 局 主 催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全 慶 궁술회 동아일보 全 慶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麗 水 支 局 동아일보 全 慶 궁술 편사대회 동아일보 全 慶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麗 水 支 局 동아일보 全 慶 궁술대회 찬조 동아일보 本 報 麗 水 支 局 主 催 全 慶 弓 術 會 와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고흥 궁술회 동아일보 창원에 궁숭 경기회 조선일보 湖 西 聯 合 弓 術 大 會. 永 同 弓 術 會 主 催 로 永 同 射 場 에서 동아일보 호서 연합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慶 궁술회 우승은 여수 조선일보 기생의 궁술전 동아일보 창원궁술회 주최 상사대회 매일신보 慶 會 樓 下 에 弓 術 會 매일신보 紅 粉 佳 人 의 弓 術 會 동아일보 기생 궁술대회 동아일보 志 願 者 만흔 弓 術 大 會 副 業 共 進 會 매일신보 美 人 弓 術 會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의 光 景 동아일보 美 人 弓 術 大 會 매일신보 美 人 弓 術 會 조선일보 弓 術 의 一 等. 기생궁술대회에서 한남권번의 朴 蓮 紅 이 당선 매일신보 最 終 日 에 美 人 弓 術 매일신보 弓 術 大 會 의 受 賞 美 人 조선일보 求 禮 에 弓 術 大 會. 來 二 十 三 日 부터 조선일보 來 十 三 日 부터 本 報 天 安 支 局 에서 조선일보 來 月 十 日 로 延 期. 本 報 仁 川 支 局 主 催 와 仁 川 射 亭 諸 氏 後 援 으로

166 166 학예지 제18집 조선일보 聯 合 弓 術 大 會 開 催. 本 報 尙 州 支 局 後 援 下 來 月 中 旬 頃 에 동아일보 인천 궁술대회 연기 시대일보 조선궁술대회, 오월 십일부터 조선일보 仁 川 에서 來 十 日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회 조선일보 仁 川 弓 會 에 寄 贈 遝 至. 本 報 仁 川 支 局 主 催 로 來 十 日 에 동아일보 두가지 구경 동아일보 인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전조선 활쏘기 대회 입상자 시대일보 궁술대회 개최 동아일보 大 盛 況 의 弓 術 大 會, 勝 利 는 麗 水 側 에 시대일보 사천, 궁술대회 매일신보 경무대에서 全 鮮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聯 合 弓 術 會. 尙 州 郡 弓 術 會 主 催 去 陰 十 四 日 後 川 沙 場 에서 조선일보 弓 術 試 合 會 開 催. 群 山 南 陽 亭 主 催 로 陰 四 月 二 十 二 日 隱 寂 寺 에서 시대일보 지방운동궁술시합대회성황 시대일보 안테나 시대일보 8군 궁술대회 시대일보 전북궁술대회 시대일보 도박적 궁술경기로 철야, 비난이 날로 높아가 시대일보 지방운동, 인천, 다미면 궁술회 조선일보 弓 術 及 白 日 場. 來 陰 五 月 二 十 一 日 本 報 南 原 支 局 主 催 로 시대일보 麗 水 庭 球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弓 術 會 의 盛 況. 井 邑 楚 南 亭 에서 去 十 五 日 부터 매일신보 궁술대회 입장료를 橫 領 逃 走 조선일보 京 城 日 日 新 聞 釜 山 支 社 主 催 東 萊 溫 泉 場 繁 榮 會 及 來 九 月 五 日 시대일보 궁술대회 개최, 오는 20일부터 5일간 시대일보 통영 전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京 城 日 日 新 聞 釜 山 支 社 主 催 本 報 釜 山 東 萊 兩 支 局 後 援 으로

16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시대일보 부산, 全 鮮 궁술대회 조선일보 南 鮮 弓 術 大 會. 全 南 高 興 에서 去 十 日 부터 조선일보 京 城 日 日 新 聞 主 催 兩 支 局 後 援 으로 東 萊 溫 泉 場 에서 시대일보 정 弓 豪 영면 동아일보 弓 術 賭 博 事 件, 二 七 三 名 이 罰 金 刑 ( 全 州 ) 도박( 賭 博 )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회 마산에서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馬 山 觀 德 契 後 援 朝 鮮 日 報 馬 山 支 局 동아일보 마산 궁술회, 관덕계 주최 동아일보 개성 궁술대회 동아일보 마산 궁술회 성황 조선일보 馬 山 에 관덕계 主 催 로 去 二 十 四 日 부터 동아일보 南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慶 南 辰 橋 覆 射 亭 後 援 東 亞 時 代 辰 橋 分 局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麗 水 水 産 學 校 新 築 落 成 을 맞아 去 一 日 에 동아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往 十 里 分 局 동아일보 왕십리 청련사, 전선궁술대회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참가기일 연장 시대일보 고성궁술대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開 催, 固 城 에서 동아일보 半 月 面 에 弓 術 大 會 ( 水 原 ) 동아일보 本 報 往 十 里 分 局 主 催 全 朝 鮮 弓 術 大 會 에 救 護 班 의 出 張 동아일보 개성 궁술대회 동아일보 남조선 궁술회 동아일보 태안 궁술대회 동아일보 전선궁술성황, 왕십리에서 동아일보 全 鮮 弓 術 盛 況, 女 射 手 가 多 數 參 加 동아일보 경남 고성 궁술대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盛 況 동아일보 公 州 市 民 鷄 龍 山 探 勝 大 會 동아일보 전남 광양 전조선궁술회

168 168 학예지 제18집 조선일보 泗 川 에 弓 術 大 會. 泗 川 繁 榮 會 及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동아일보 여주 청년회 주최 궁술대회 동아일보 醴 泉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利 川 射 契 後 援 東 亞 日 報 利 川 支 局 조선일보 金 浦 弓 術 大 會 盛 況. 金 浦 商 業 組 合 主 催 로 去 七 日 부터 동아일보 진주에 궁술대회 동아일보 개성 궁술대회 동아일보 이천 사계 주최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활쏘다가 애를 쏘아 시대일보 순천궁술대회, 성황리에 종막 조선일보 順 川 弓 術 大 會. 去 十 三 日 동아일보 순천 궁술대회 조선일보 全 南 弓 術 大 會. 去 十 五 日 에 동아일보 장호원에 사정 동아일보 길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연합 궁술대회, 통영 동아일보 전조선적으로 통영 궁술대회 동아일보 궁술대회 유회 동아일보 김해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4개정 궁술대회 동아일보 청룡정 우승, 4개정 궁술대회 동아일보 김해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회, 경북 김천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회, 김천 동아일보 상품 수여식, 김천 동아일보 羅 南 마라손 脚 戱 弓 術 三 大 運 動, 羅 一 靑 年 會 主 催 동아일보 高 敞 賞 射 궁술대회( 弓 術 大 會 )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泗 川 洙 陽 射 亭 에서 來 十 七 十 八 兩 日 間 開 催

16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호남 궁술대회, 이리에서 개최 동아일보 湖 南 弓 術 大 會, 東 亞 日 報 裡 里 支 局 主 催 동아일보 각희 궁술회, 연백 동아일보 시간장소 변경, 호남 궁술대회 동아일보 平 康 端 午 노리: 庭 球 大 會 弓 術 大 會 等 동아일보 湖 南 弓 術 大 會 今 日 부터 開 催 동아일보 기호 궁술대회, 수원 동아일보 畿 湖 弓 術 大 會, 三 支 局 後 援 ( 水 原 ) 시대일보 궁술대회에서 만세 부른 청년은 곧 경찰서에 시대일보 수원시민궁사대회 동아일보 朝 鮮 萬 歲 궁술회당에서 불너 益 山 面 李 璉 澤 동아일보 畿 湖 男 女 弓 術 會 本 報 水 原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호남 궁술대회 동아일보 長 湖 院 射 亭 落 成 式 동아일보 第 二 回 中 朝 鮮 弓 術 大 會 東 亞 日 報 利 川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이천 사계 주최 궁술대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盛 況, 優 勝 은 兪 瑾 植 氏 ( 利 川 ) 매일신보 統 營 의 南 鮮 弓 術 大 會 시대일보 光 陽 靑 年 主 催 三 大 競 技 大 會 庭 球 蹴 球 弓 術 大 會 를 開 催 시대일보 남선 정구 축구 及 궁술대회 동아일보 궁술급 각희 동아일보 江 景 서 便 射 동아일보 晋 州 弓 術 大 會 兩 日 間 開 催 ( 班 城 ) 동아일보 晋 州 弓 術 大 會 延 期 ( 班 城 )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예천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優 等 은 金 聖 大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準 備 매일신보 淸 州 의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弓 術 會 組 織. 鎭 川 邑 有 志 의 發 起 로

170 170 학예지 제18집 매일신보 威 容 堂 堂 한 弓 術 大 會 매일신보 무심천반의 궁술대회 조선일보 蔚 山 挽 河 弓 術 會. 蔚 山 弓 術 會 와 鶴 城 弓 術 會 를 合 同 조선일보 淸 州 弓 術 大 會. 去 二 十 二 日 조선일보 江 景 弓 術 大 會 大 盛 況 을 豫 期. 來 二 十 二 日 부터 三 日 間 동아일보 강경 궁술대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 昌 原 )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本 報 昌 原 分 局 後 援 동아일보 창원 궁술대회 폐막 조선일보 金 浦 郡 主 催 全 鮮 弓 術 大 會. 朝 鮮 中 外 兩 支 局 後 援 으로 來 二 十 九 日 동아일보 男 女 弓 術 大 會, 各 券 番 妓 生 도 參 加, 동아일보 本 社 新 築 落 成 紀 念 弓 術 講 演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男 女 弓 術 決 勝, 비만 개면 곳 결승전, 本 報 東 部 支 局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本 報 大 田 支 局 長 吳 淵 察 氏 의 發 起 로 準 備 中 동아일보 形 形 色 色 의 社 屋 落 成 紀 念 消 息 : 安 靜 寺 의 弓 術 大 會 /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本 報 大 田 支 局 主 催 各 有 志 後 援 으로 來 二 十 日 부터 조선일보 金 浦 郡 서도 全 鮮 弓 術 會. 市 民 主 催 金 浦 自 動 車 部 의 後 援 으로 동아일보 紀 念 寫 眞 畵 報 [ 寫 : 弓 術 大 會 에서 優 勝 한 石 虎 團 ] 동아일보 대전, 전조선 궁술회 동아일보 청주 궁술회 연기, 여수 궁술대회 조선일보 驪 州 弓 術 會 盛 況. 去 八 日 黃 鶴 亭 主 催 동아일보 수원 궁술성황 조선일보 水 原 弓 術 會 盛 況. 去 十 二 日 使 武 臺 射 場 에서 조선일보 泗 川 弓 術 大 會 大 盛 況 을 豫 期 동아일보 진주 궁술대회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會 延 期! 本 報 大 田 支 局 준비관계로 來 二 十 七 日 부터 중외일보 전조선궁술대회 조선일보 富 平 邑 脚 戱 弓 術 을 兼 하야. 有 志 諸 氏 의 發 起 로 來 二 十 五 日 부터 중외일보 準 備 整 理 된 궁술대회

17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조선일보 長 湖 院 弓 術 會. 去 二 十 六 日 盛 況 裡 에 終 了 동아일보 장호원 궁술대회 조선일보 弓 術 會 도 禁 止. 去 二 十 七 日 張 湖 院 주재소에서 동아일보 문막 궁술대회 동아일보 진주 관덕정 전선궁술대회 조선일보 大 田 弓 術 會 端 午 節 로 延 期. 本 報 支 局 主 催 大 田 體 育 會 後 援 으로 동아일보 봉강 시민운동, 궁술 조선일보 驪 州 弓 術 會. 本 報 支 局 주최 黃 鶴 亭 후원 來 二 十 日 조선일보 大 田 弓 術 會. 本 報 支 局 主 催 로 去 四 五 兩 日 間 盛 況 裡 에 開 催 조선일보 南 川 對 新 幕 弓 術 大 會. 去 十 一 日 에 동아일보 이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여주 이천 궁술대회 조선일보 鏡 城 龍 田 弓 射 추천 會. 市 民 主 催 로 端 午 節 에 조선일보 南 鮮 弓 術 大 會 盛 況 裡 終 幕. 南 原 觀 德 亭 射 員 一 同 주최로 조선일보 鏡 城 鳳 岡 弓 術 會. 去 一 日 부터 동아일보 신막 대 남천 편사대회 동아일보 驪 州 弓 術 盛 況 ( 利 川 ) 동아일보 개성 편사대회중 싸움 벌어져 동아일보 弓 術 場 殺 風 景, 쌈끗헤 사람따려 조선일보 陰 城 弓 術 會 好 成 績. 去 一 月 매일신보 五 亭 聯 合 의 궁술대회 매일신보 海 州 對 正 安 弓 術 試 合 조선일보 延 安 對 海 州 弓 術 便 射. 去 四 日 에 勝 利 는 延 安 동아일보 전남 고흥 궁술대회 동아일보 궁술 문예 성황 중외일보 녹동 궁술대회 중외일보 광양 백일장과 궁술회 성황 중외일보 한산궁술회 창립 중외일보 全 통영 石 箭 대회, 南 鮮 고유 시합

172 172 학예지 제18집 조선일보 求 禮 庭 球 弓 術 會 와 素 人 劇 開 催 조선일보 봉강궁술회 성황리 종료 조선일보 金 浦 弓 術 角 力 大 會. 市 民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동아일보 포천 목궁대회 동아일보 拳 鬪 選 手 權 大 會 와 排 球 弓 術 開 催 조선일보 巨 濟 島 舊 邑 에 書 畵 展 覽 會 동아일보 능곡 궁술대회 조선일보 陵 谷 에 弓 術 大 會. 弓 術 家 李 聖 弼 李 鍾 善 張 世 一 氏 동아일보 포천 목궁대회 성황 조선일보 辰 橋 弓 術 大 會. 舊 三 月 十 六 日 에 매일신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중외일보 금년 최초의 궁술편사대회, 대성황리에 중외일보 전주궁술대회 중외일보 하동군내 임시궁술회 중외일보 하동군 임시궁술회, 본보지국 후원 동아일보 전주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수원 궁술대회 중외일보 하동군 內 臨 寺 弓 術 會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馬 山 에서 開 催 동아일보 광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水 原 弓 術 大 會, 水 原 射 亭 主 催 本 報 水 原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전주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이천 개인 궁술대회 중외일보 하동군 궁술대회 성황, 본보지국 후원 중외일보 한산서도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에 밧븐 全 州 警 察 동아일보 水 原 弓 術 大 會 本 報 水 原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전주 전조선 궁술대회 중외일보 全 鮮 궁술대회 공전 대성황

17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중외일보 全 鮮 궁술대회 공전 대성황 동아일보 마산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道 弓 術 大 會 馬 山 에서 盛 況 중외일보 궁술대회 성황, 마산 사정에서 중외일보 천안에서 궁술대회 개최, 금월 십칠, 십팔일 중외일보 便 射 大 會, 화수정에서 중외일보 全 鮮 궁술대회, 24일로 연기 중외일보 練 武 亭 낙성, 弓 矢 사격 시합, 성황을 이뤄 중외일보 화수정 주최 便 射 대회 성황, 去 16일에 중외일보 단오놀이준비 김천서는 현상궁술대회 동아일보 마포 화수정 편사, 경성 6개 사정 동아일보 第 一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中 央 基 督 敎 靑 年 會 主 催 本 報 後 援 동아일보 우리의 독특한 무술,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7개 사정 대표회의,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第 一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中 央 基 督 敎 靑 年 會 主 催 동아일보 장소는 황학정으로,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경성은 물론 지방서도 참가,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남북의 名 手,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중외일보 04,08,춘기 편사 종료, 숭례정군 재패로 동아일보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4단 광고 동아일보 임박한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명일로 임박한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180여 용사 출전, 금일에 개최될 궁술대회 동아일보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화보 동아일보 개막된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중순은 종료 동아일보 석호정 결승,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 성적 동아일보 평강 射 會

174 174 학예지 제18집 중외일보 群 韓 山 궁술경기대회, 한산군 우승 중외일보 조치원 便 射 시험 중외일보 八 影 山 에서 문예궁술대회 동아일보 고흥 궁술대회 동아일보 대전 궁술대회 중외일보 全 鮮 궁술대회, 공진회를 기회로 동아일보 대전 궁술대회 동아일보 함양 궁술대회 중외일보 대전의 전조선 궁술회, 참가자 격증 중외일보 함양 궁술대회 중외일보 물산품평회와 각종대회, 협찬회 주최 중외일보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순천 상사대회 중외일보 무림 石 射 대회 동아일보 中 央 基 督 敎 靑 年 會 體 育 部 委 員 會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朝 鮮 씨름 大 會 중외일보 이리에서 중춘 試 射 대회 중외일보 하동의 전선궁술대회, 본보지국 후원 중외일보 하동의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黃 登 射 亭 에서 全 道 弓 術 大 會 裡 里 本 支 局 主 催 로 동아일보 석죽화(패랭이 꽃과 화살에 대한 이야기) 조선일보 金 浦 弓 術 大 會. 來 三 日 에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本 報 裡 里 支 局 主 催 동아일보 경남 단성 궁술회 상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裡 里 支 局 동아일보 龍 仁 弓 術 大 會 ; 主 催 白 岩 有 志 一 同 後 援 東 亞 日 報 白 岩 分 局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裡 里 支 局 동아일보 포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龍 仁 弓 術 大 會, 主 催 白 岩 有 志 一 同 後 援 東 亞 日 報 白 岩 分 局 조선일보 金 浦 弓 術 大 會. 去 三 日 부터

17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裡 里 支 局 동아일보 豫 想 以 上 申 請 으로 裡 里 本 報 支 局 主 催 의 全 朝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丹 城 弓 術 會 實 射 중외일보 전선 궁술 대회, 산양시에서 동아일보 慶 北 山 陽 市 場 市 民 의 弓 術 大 會 를 경찰이 금지하다 동아일보 예천 궁술대회 금지 조선일보 聞 慶 郡 山 陽 市 弓 術 大 會 中 止. 第 二 日 인 去 陰 四 月 八 日 부터 동아일보 이리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장단 각희 궁술대회 조선일보 楊 州 弓 術 競 技. 去 十 三 十 四 兩 日 間 議 政 府 乘 鶴 亭 에서 중외일보 사천에서, 전선궁술대회, 본보지국 후원 동아일보 全 北 黃 登 射 亭 에서 全 朝 鮮 弓 術 大 會 가 개최되다 동아일보 무주, 3개군 궁술대회 동아일보 南 朝 鮮 弓 術 大 會, 順 天 喚 仙 亭 弓 術 會 主 催 本 報 順 天 支 局 後 援 조선일보 延 白 弓 術 大 會. 來 六 月 六 日 觀 延 亭 에서 동아일보 長 湍 弓 術 及 脚 戱 동아일보 長 湍 弓 術 及 脚 戱 동아일보 准 陽 脚 戱 弓 術 동아일보 南 朝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淮 陽 脚 戱 弓 術 동아일보 이리 관덕정, 2개군 편사대회 동아일보 순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支 局 設 置 五 週 年 紀 念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龍 仁 金 鶴 亭 동아일보 支 局 設 置 紀 念 全 朝 鮮 弓 術 大 會 오는 이십구 삼십 량일간 동아일보 龍 仁 弓 術 延 期 동아일보 남해 궁술 성황 동아일보 남원 궁술대회 동아일보 단성 궁술대회 동아일보 淸 州 本 支 局 主 催 全 朝 鮮 弓 術 大 會

176 176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第 一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東 亞 日 報 社 淸 州 支 局 主 催 로 동아일보 南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丹 城 弓 術 會 後 援 東 亞 丹 城 支 局 동아일보 南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丹 城 弓 術 會 後 援 東 亞 支 局 丹 城 架 橋 期 成 會 동아일보 第 一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忠 北 淸 州 射 亭 동아일보 半 島 競 技 界 의 精 華, 野 球 庭 球, 籠 球, 陸 上, 弓 術 等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事 故 로 延 期 중외일보 3군연합 궁술대회 성화, 경북 상주에서 동아일보 정읍 궁술대회 동아일보 南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丹 城 弓 術 會 後 援 東 亞 支 局 丹 城 架 橋 期 成 會 동아일보 淸 州 支 局 主 催 弓 術 大 會 中 止 동아일보 남도 궁술대회, 단성에서 중외일보 운동과 경기 중외일보 단성교 낙성식, 성대히 거행 동아일보 弓 術 俱 樂 部 ( 高 敞 ) 동아일보 호남 개인 궁술대회, 2단 광고 동아일보 湖 南 個 人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湖 南 個 人 弓 術 大 會 중외일보 동화-수남이와 화살(1) 중외일보 동화-수남이와 화살(2) 중외일보 동화-수남이와 화살(3) 중외일보 동화-수남이와 화살(4) 중외일보 동화-수남이와 화살(5) 중외일보 射 亭 신축 시상궁술대회 중외일보 동화-수남이와 화살(7) 동아일보 궁술과 척사대회 조선일보 扶 餘 六 一 亭 주최 來 四 月 十 四 日 부터 삼일간 동아일보 3개군 연합 궁술회, 예천에서 중외일보 궁술대회 성황 중외일보 한촌 궁술대회 성황으로 종료

17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중외일보 회양서도 각희와 궁술, 본보분국 후원 조선일보 開 城 弓 術 會 盛 況. 開 城 對 京 城 弓 術 大 會 開 城 관덕정에서 동아일보 북조선 궁술대회 우승자(사진) 동아일보 북도 궁술대회, 함북 길주에서 동아일보 광주 관덕정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光 州 觀 德 亭 에서. 陰 曆 八 月 二 十 一 二 兩 日 間 중외일보 광주 관덕정서 궁술대회 동아일보 南 道 弓 術 大 會, 금천에서 개최 조선일보 慶 北 弓 術 會. 金 泉 俱 樂 部 主 催 去 十 三 四 兩 日 間 開 催 동아일보 경북 궁술대회 조선일보 南 鮮 弓 術 會. 金 堤 에서 去 十 四 日 부터 三 日 間 매일신보 慶 北 弓 術 大 會 盛 況 裡 에 終 幕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논산 석호정 조선일보 全 北 裡 里 觀 德 亭 에서 陰 曆 九 月 二 十 六 日 부터 동아일보 전북 이리에서 궁술대회 개최 조선일보 全 北 裡 里 觀 德 亭 主 催 去 十 六 日 부터 성황이루고 十 九 日 폐회 동아일보 전북 이리 궁술대회 결과 매일신보 長 淵 驛 前 商 民 主 催 弓 術 擲 柶 大 會 동아일보 하동 궁술대회 개최 동아일보 장성 궁술대회 동아일보 李 重 華 著 朝 鮮 의 弓 術 동아일보 청진 구락부 궁술대회 동아일보 廣 寒 樓 重 修 式 에 各 種 餘 興 準 備 동아일보 장성 궁술대회 성황 조선일보 去 二 十 三 日 長 城 에서 동아일보 부안 궁술대회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盛 況. 去 十 日 부터 김포에서 동아일보 漢 村 脚 戱 弓 術 동아일보 평산군 한촌 각희, 궁술

178 178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부안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궁술대회 풍파, 화살 뿌러트린 것이 발단 조선일보 統 營 弓 術 盛 況. 統 營 射 契 主 催 로 去 二 十 七 日 에 동아일보 통영 궁술대회 동아일보 북도 궁술대회, 청진에서 성황 동아일보 남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궁술대회 개최 조선일보 仁 德 弓 術 大 會. 來 陰 八 月 二 十 二 日 에 동아일보 연천 각희 궁술 조선일보 漣 川 弓 術 脚 戱. 去 二 十 二 日 부터 동아일보 괴산에서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麗 水 弓 術 大 會. 來 十 日 부터 동아일보 장단 편사대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開 催, 伽 倻 분국에서 동아일보 남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伽 倻 分 局 동아일보 군산 궁술대회 동아일보 밀양 궁술성황 동아일보 가야분국 주최 전조선 궁술 동아일보 南 川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괴산 궁술성황 동아일보 괴산 궁술성황 동아일보 궁술대회 성황, 가야 동아일보 궁술대회 개최, 부산 매일신보 소인국의 활쏘기(사진) 동아일보 慶 南 庭 球 弓 術 大 會, 主 催 車 黃 公 普 新 築 落 成 式 祝 賀 會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大 田 君 子 亭 조선일보 大 田 弓 友 會 主 催 來 二 十 九 日 부터 三 日 間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大 田 君 子 亭

17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戱 擲 柶 大 會, 主 催 汶 山 市 民 有 志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戱 擲 柶 大 會, 主 催 汶 山 市 民 有 志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戱 擲 柶 大 會, 主 催 汶 山 市 民 有 志 동아일보 우리의 고래무술,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戱 擲 柶 大 會, 主 催 汶 山 市 民 有 志 東 亞 日 報 社 汶 山 支 局 동아일보 汶 山 發 展 의 各 種 競 技 본보지국과 市 民 有 志 主 催 弓 術 脚 戱 擲 柶 等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戱 將 棋 大 會, 長 湍 招 賢 場 市 民 有 志 主 催 동아일보 조선 궁술연구회 주최 제3회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임박한 궁술대회, 3단 광고 동아일보 第 三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朝 鮮 弓 術 硏 究 會 동아일보 安 岳 어린이날 行 列 ( 上 ) 汶 山 ( 弓 術 ) 競 技 大 會 光 景 [ 寫 ] 동아일보 明 日 第 三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朝 鮮 弓 術 硏 究 會 동아일보 개최된 궁술대회, 각지에서 400명 참가(특집사진) 동아일보 궁술대회 결승전 광경(사진) 동아일보 궁술대회 우승자(사진) 동아일보 석호정 전부 우승(사진) 조선일보 八 日 遊 興 으로 脚 力 弓 術 擲 柶 大 會. 金 化 岩 井 里 에서 동아일보 장수 궁술성황 동아일보 慶 南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김천 궁술 구락부 동아일보 弓 術 脚 戱 競 技, 坡 州 舊 邑 서 동아일보 경기 파주 궁술, 각희 동아일보 경남 진교 궁술대회 동아일보 벌교 궁술대회 동아일보 예천에서 4개군 궁술대회 동아일보 射 를 復 興 ( 金 川 ) 동아일보 蘭 谷 三 大 運 動 : 脚 戱 弓 術 陸 上 競 技 等 음 五 월 四, 五, 六 일에 개최 동아일보 順 天 에서 弓 術 大 會 순천지국 후원 동아일보 안성 사정 복흥

180 180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順 天 喚 仙 亭 主 催 本 社 順 天 支 局 後 援 조선일보 六 一 射 亭 復 興 도모. 안성 弓 術 同 好 會 에서 매일신보 전선궁술대회 동아일보 순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서흥 대 평산 편사대회, 신막 동아일보 이천 궁술대회 성황 매일신보 활 쏘다 사람마처[강경] 동아일보 김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木 浦 開 港 三 十 五 週 年 區 域 擴 張 記 念 祝 賀 會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군산 궁술대회 동아일보 목포 궁술대회 광고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 고흥에서 개최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高 興 鳳 凰 亭 後 援 東 亞 日 報 社 高 興 支 局 동아일보 연천에 각희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東 亞 日 報 統 營 支 局 主 催 統 營 南 松 亭 射 員 一 同 동아일보 목포 궁술대회 폐막 동아일보 고흥 궁술성황 동아일보 김천 궁술대회 매일신보 궁술발전에 진력, 조선궁술연맹 관련 동아일보 김천 궁술대회 폐막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開 催, 卄 日 江 景 서 매일신보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後 援 南 松 亭 射 員 一 同 동아일보 김제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錦 山 興 觀 亭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錦 山 興 觀 亭 主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東 亞 日 報 社 統 營 支 局 主 催 南 松 亭 射 員 一 同 後 援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錦 山 興 觀 亭 後 援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後 援 南 松 亭 射 員 一 同

18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開 催, 오는 卄 일 統 營 支 局 서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大 盛 況 裏 終 幕 매일신보 조선체육협회 개조갱생안 매일신보 평의회에서 결정한 조선체육협회 갱생안 동아일보 통영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중앙일보 곡우절을 이용, 전조선 궁술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長 城 靑 雲 亭 主 催 동아일보 溫 井 院 에서 脚 戲 와 弓 術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長 城 靑 雲 亭 後 援 朝 鮮 東 亞 兩 支 局 동아일보 구례 봉덕정 전조선 궁술대회 매일신보 총독부 궁도대회 동아일보 閑 山 制 勝 堂 落 城 때 朝 鮮 弓 術 大 會, 本 社 統 營 支 局 主 催 조선중앙일보 전조선 궁술 대회 18일에 개막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淸 安 支 局 主 催 동아일보 長 城 弓 術 大 會 延 期 조선중앙일보 유성온천의 전선궁술대회 성황리 종막 동아일보 여수 군자정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申 請 日 變 更 ( 淸 安 ) 동아일보 여수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閑 山 島 制 勝 堂 落 城 때 全 朝 鮮 弓 術 大 會 開 催 동아일보 安 城 弓 術 大 會 主 催 安 城 六 一 亭 동아일보 淸 安 弓 術 大 會 當 分 間 延 期 해 동아일보 第 三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後 援 統 營 有 志 一 同 동아일보 第 三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麗 水 弓 術 盛 況 동아일보 지방논단(사설), 통영 궁술대회 동아일보 호남 궁술대회 동아일보 一 山 궁술 척사 씨름대회 동아일보 淮 陽 : 각희 궁술 추천 육상 경기 등 四 大 運 動 會

182 182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강경 궁술대회 동아일보 湖 南 弓 術 大 會 延 期 ( 淳 昌 ) 동아일보 장호원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강경, 통영 궁술대회 2단 광고 동아일보 第 三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後 援 統 營 南 松 亭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江 景 에서 來 月 三 日 부터 兩 日 間 조선중앙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정읍 궁술대회 조선중앙일보 포항 상사대회 동아일보 統 營 閑 山 島 에서 忠 武 公 李 舜 臣 將 軍 影 幀 奉 安 式 매일신보 순창궁술대회 매일신보 남원궁술대회 동아일보 호남 궁술 성황 동아일보 강경 궁술대회(사진) 조선일보 盛 況 이룬 江 景 덕유정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去 三 日 부터 兩 日 間, 조선중앙일보 全 朝 鮮 男 女 弓 述 大 會 동아일보 장호원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閑 山 島 制 勝 堂 重 建 忠 武 公 影 幀 奉 安 式 조선중앙일보 궁술대회 입상자, 한산도 제승당 축하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蔚 山 支 局 主 催 조선일보 開 城 記 者 團 主 催 弓 術 大 會. 去 十 八 日 동아일보 매일 활쏘기 연습, 아내의 이혼 소송에 원한 동아일보 괴산 사호정 궁술대회 조선중앙일보 궁술대회 성황 조선중앙일보 전조선궁술회, 괴산 사호정에서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槐 山 射 虎 亭 조선일보 利 川 雪 峰 亭 主 催 弓 術 大 會. 來 月 二 日 조선중앙일보 제2 개성 궁술, 호정이 우승 동아일보 第 六 回 中 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利 川 雪 峯 亭

18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後 援 鶴 城 挽 河 兩 弓 術 會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槐 山 射 虎 亭 조선중앙일보 궁술구락부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後 援 鶴 城 挽 河 兩 弓 術 會 蔚 山 體 育 協 會 동아일보 蔚 山 弓 術 大 會 無 期 로 延 期 동아일보 이천 궁술대회(사진) 조선일보 去 三 日 雪 峯 亭 主 催 本 報 利 川 支 局 後 援 조선중앙일보 괴산에서 궁술대회, 성황을 예기 동아일보 槐 山 弓 術 大 會 조선중앙일보 진주에서 궁술대회개최, 20일 義 妓 祭 日 에 동아일보 괴산 궁술성황 동아일보 편사대회 성황 조선중앙일보 천안에서 궁술대회 개최 동아일보 晋 州 南 射 亭 主 催 全 朝 鮮 弓 術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晋 州 南 射 亭 後 援 東 亞 日 報 晋 州 支 局 조선중앙일보 진주에서 전선궁술대회 동아일보 궁술 경기회, 5개 사정이 조직(강경, 황등, 이리, 군산, 김제) 동아일보 성진에서 북조선 궁술대회 조선중앙일보 유성온천서 전조선 궁술회, 본보지국 후원 조선중앙일보 북조선연합 궁술대회, 23, 24 양일 간 청진에서 거행 조선중앙일보 神 宮 경기 예선, 충북대회 성적 조선일보 弓 術 競 技 大 會. 淸 津 弓 術 俱 樂 部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조선중앙일보 제2회 北 鮮 연합 궁술대회 성황 조선중앙일보 추석가절을 기하여 각희급 궁술대회, 3지국 후원으로 개최 조선중앙일보 하동 섬진강 가교기공식, 10월 5일에 거행 조선중앙일보 성황 예기되는 대전 궁술대회 동아일보 裡 里 서 開 催 한 五 射 亭 弓 術, 月 桂 冠 은 金 堤 軍 조선일보 儒 城 에 開 催 될 大 盛 況 豫 期. 儒 城 萬 年 亭 主 催 去 六 日 부터 三 日 間 동아일보 萬 頃 弓 術 大 會 ( 金 堤 )

184 184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5개 사정, 궁술대회 성황 조선일보 弓 道 에 대하야( 放 送 趣 味 講 座 ). 申 鼎 言 매일신보 궁도에 대하야(컬럼, 신정언) 동아일보 광주 관덕정 궁술대회 동아일보 天 安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天 安 邑 市 民 一 同 조선중앙일보 전선궁술대회, 천안 연무대에서 조선일보 光 州 서 開 催 한 全 鮮 弓 術 大 會 盛 況 裡 終 了 동아일보 울산, 궁술대회 개최 조선중앙일보 본보지국후원으로 전조선궁술대회, 포항동호정에서 동아일보 弓 道 府 縣 團 體 朝 鮮 側 이 優 勝 동아일보 慶 州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문산, 궁술 각희 대회 조선일보 慶 州 에서 弓 術 大 會 開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戲 擲 柶 大 會 동아일보 弓 術 脚 戲 大 會 汶 山 에서 開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脚 戲 擲 柶 大 會 主 催 永 泉 酒 造 組 合 조선일보 盛 況 일운 慶 州 弓 術 大 會. 百 穿 亭 弓 術 會 主 催 去 二 十 六 日 에 조선일보 群 山 鎭 南 亭 主 催 來 十 八 日 부터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群 山 에서 開 催 매일신보 군산개항기념 전조선궁술대회 / 내용 해독 어려움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群 山 鎭 南 亭 後 援 群 山 府 조선일보 開 港 紀 念 으로 全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咸 北 慶 源 郡 安 農 面 承 良 洞 字 良 堂 에 朝 鮮 時 代 太 祖 의 弓 術 練 磨 場 이 發 見 동아일보 군산 궁술대회(사진) 동아일보 평산 궁술대회 동아일보 山 水 明 麗 한 新 綠 裏 에 淸 雅 한 花 園 遊 園 ( 大 邱 ) 조선일보 우리 武 術 精 華 弓 術 大 會. 朝 鮮 弓 道 會 主 催 로 來 六 月 三 日 부터 조선일보 城 津 端 午 노리 城 津 觀 鶴 亭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18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驚 異 의 新 記 錄! 弓 術 大 會 員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釜 山 鎭 弓 術 稧 後 援 釜 山 體 育 會 동아일보 慶 州 射 員 이 大 邱 서 弓 術 競 技 조선일보 四 郡 聯 合 弓 術 會 醴 泉 에서 盛 況. 去 二 十 八 日 에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釜 山 鎭 弓 術 稧 後 援 釜 山 體 育 會 동아일보 부산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중앙일보 보성궁술대회 내 단오절에 개최 매일신보 寶 城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중앙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端 午 節 을 期 하야 朝 鮮 朝 鮮 中 央 每 日 三 寶 城 支 局 後 援 으로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關 北 弓 術 大 會. 本 報 城 津 支 局 後 援 下 에 去 陰 五 月 五 日 부터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조선일보 開 城 記 者 團 主 催 全 開 城 弓 術 大 會. 去 二 十 二 日 에 조선중앙일보 開 城 三 射 亭 對 抗 弓 術 大 會 盛 況

186 186 학예지 제18집 조선일보 조선궁도와 사풍 동아일보 개성 궁술경기 조선중앙일보 開 城 弓 術 大 會 에 또 虎 亭 軍 優 勝 동아일보 전개성 궁술대회 조선일보 開 城 記 者 團 主 催 全 開 城 弓 術 會. 去 二 十 二 日 부터 동아일보 慶 州 에서 春 秋 2 回 에 新 羅 文 化 祭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全 延 白 弓 術 會. 白 川 문무정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조선일보 全 延 白 弓 術 會. 白 川 文 武 亭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去 六 日 에 매일신보 충북3군 연합 궁술대회 개최 / 내용 해독 어려움 조선중앙일보 신궁체육대회, 유도부 시합 참가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開 催. 來 十 月 十 九 日 부터 裡 里 에서 동아일보 성황 이룬 이리 궁술대회(사진) 동아일보 2백여 무사 출전, 이리궁술대회 동아일보 農 村 慰 安 會 金 化 에서 五 日 間 ; 弓 術 脚 戲 等 各 種 競 技 開 催 동아일보 양키 색시의 팔힘, 활쏘는 묘기 매일신보 삼군연합궁도대회-곡성, 남원 구례 조선중앙일보 전조선 정구, 궁술, 축구, 명창 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擲 柶 大 會 東 亞 日 報 社 長 湍 支 局 조선일보 第 二 回 開 催. 扶 餘 六 一 亭 射 友 會 主 催 동아일보 문산 궁술 각희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부산에서 개최 조선중앙일보 운동경기, 남녀궁술대회, 내월 중순 목포서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釜 山 鎭 虎 川 亭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延 期. 扶 餘 륙일정주최로 陰 四 月 一 日 로 조선일보 練 武 亭 新 築 紀 念 弓 術 大 會 開 催. 木 浦 射 友 親 睦 會 主 催 동아일보 五 專 賣 局 對 抗 庭 野 卓 弓 道 等 조선중앙일보 전조선 남녀궁술대회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목포에서 개최 동아일보 문산 궁술 각희

18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조선중앙일보 弓 術 練 習 하다가 六 歲 少 女 를 射 殺 조선일보 社 稷 洞 黃 鶴 亭 서 弓 術 大 會 를 開 催. 朝 鮮 弓 道 會 主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木 浦 鍊 武 亭 동아일보 진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03,07, 全 朝 鮮 聯 合 弓 術 大 會 主 催 覽 德 亭 조선일보 金 海 체육협회궁술부에서 射 亭 二 週 年 紀 念 으로 동아일보 목포 궁술대회 동아일보 평산 온정리 궁술대회 조선일보 盛 況 으로 終 幕. 木 浦 鍊 武 亭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전조선 궁술, 김해에서 개최 조선일보 金 海 弓 術 大 會. 金 海 體 育 協 會 主 催 來 月 三 日 로 연기 동아일보 전남 병영 관덕정, 전조선 궁술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金 海 體 育 協 會 弓 術 部 後 援 朝 鮮 中 央 每 日 동아일보 전조선 궁도대회, 대구 궁도회 관덕정 동아일보 제4회 전조선 궁술대회, 성황리에 개막 동아일보 대구궁술대회 광경(사진) 매일신보 김해에 궁술대회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盛 況 으로 進 行. 大 邱 弓 道 會 主 催 조선일보 康 津 觀 德 亭 에서 兵 營 運 動 俱 樂 部 後 援 동아일보 平 壤 奬 武 會 弓 術 部 를 新 設 조선중앙일보 평양장무회, 궁술부를 신설 조선중앙일보 대구 궁술대회, 대성황리에 종료 동아일보 대구 궁술대회, 1등은 광양 이문화씨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金 海 體 育 協 會 弓 術 部 동아일보 羅 南, 단오에 弓 射 及 마라손 等 開 催 조선일보 關 北 弓 術 大 會. 城 津 弓 術 俱 樂 部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조선일보 全 鮮 弓 術 大 會. 大 邱 弓 道 會 主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全 南 兵 營 觀 德 亭 동아일보 城 津, 단오에 궁술대회와 추천대회 개최

188 188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端 午 노리 활쏘기[ 寫 ] 동아일보 김해 궁술대회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盛 況. 金 海 體 育 協 會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병영 궁술대회 조선일보 端 午 노리 經 過. 脚 戱 추천 弓 術 동아일보 궁술에 청진 우승 조선일보 盛 況 裡 에 閉 幕. 全 南 兵 營 관덕정 主 催 동아일보 第 十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利 川 雪 峯 亭 동아일보 第 十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利 川 雪 峯 亭 동아일보 驪 州 弓 術 延 期 동아일보 長 湖 院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第 六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京 畿 道 長 湖 院 觀 水 亭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河 東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河 東 河 上 亭 射 友 會 동아일보 南 川 弓 術 大 會 ( 金 川 ) 동아일보 황해도 남천 궁술 성황 조선일보 綾 城 體 育 會 主 催 本 報 綾 州 支 局 後 援 下 조선중앙일보 제3회 北 鮮 聯 合 궁술대회, 來 14, 5일 거행 조선일보 一 般 委 員 을 選 定. 綾 城 體 育 會 主 催 本 報 綾 州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북조선 궁술대회(사진) 동아일보 함북 궁술대회, 청진이 우승 조선일보 二 百 武 士 參 加 의 盛 況. 全 南 綾 城 體 育 會 主 催 동아일보 鏡 城 聯 合 大 運 動 會 敎 育 展 覽 會 弓 術 大 會 조선중앙일보 조선신궁 무도 10월 26, 7일 양일 동아일보 궁술명창 대회, 소록도에서 개최 동아일보 포항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男 女 弓 術 大 會, 主 催 浦 項 東 湖 亭 後 援 조선일보 泗 川 鄕 校 重 脩 記 念 弓 術 會. 觀 德 亭 에서 동아일보 경남 진영 전조선 궁술

18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경남 사천 궁술대회 동아일보 井 邑 弓 術 名 唱 會 동아일보 全 朝 鮮 男 女 弓 術 大 會 進 永 錦 屛 亭 主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高 興 郡 鹿 洞 市 民 매일신보 本 報 忠 州 支 局 後 援 中 鮮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忠 州 體 育 協 會 及 尙 武 亭 聯 合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來 二 十 四 日 동아일보 全 朝 鮮 男 女 弓 術 名 唱 大 會, 主 催 必 世 亭 後 援 井 邑 保 勝 會 동아일보 충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김제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男 女 弓 術 大 會, 主 催 進 永 錦 屛 亭 射 場 後 援 조선일보 泗 川 서 開 催 된 弓 術 會. 觀 德 亭 主 催 조선일보 弓 術 大 會 盛 況. 忠 州 體 育 會 主 催 조선일보 進 永 弓 術 大 會 大 盛 況 裡 擧 行 동아일보 神 宮 競 技 弓 道 동아일보 弓 道 中 道 朝 鮮 關 係 分 ( 東 京 ) 동아일보 進 永 男 女 弓 術 盛 況 조선중앙일보 궁도중등예선 조선중앙일보 금년 동경 신궁 경기에 조선 선수 대활약 동아일보 공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북청 궁도대회 매일신보 동경올림픽출전 산하단체 기부금(궁우회로 표기됨) 조선일보 星 州 弓 術 競 技 盛 況. 本 報 支 局 後 援 去 十 五 日 동아일보 조선 궁도 4단까지 조선중앙일보 본보 구례지국 후원, 연예와 경기대회, 금월 중순경부터 동아일보 南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咸 安 儀 鳳 亭 射 友 會 조선중앙일보 본보지국후원 남녀궁술대회 조선일보 本 報 長 湍 支 局 後 援 去 三 十 日 부터 四 日 間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長 淵 繁 榮 會 後 援 조선중앙일보 장단지국후원 전조선궁술대회

190 190 학예지 제18집 조선중앙일보 全 조선궁술대회, 來 5월 9일에 거행 조선일보 脚 戱 弓 術 擲 柶 三 大 會 盛 況 조선일보 來 十 八 日 부터 四 日 間 本 報 醴 泉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道 大 會 醴 泉 서 開 催 동아일보 汶 山 弓 術 脚 戲 오는 十 八 일부터 조선일보 新 綠 의 來 十 六 日 本 報 汶 山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道 大 會, 主 催 醴 泉 武 學 亭 後 援 中 央 朝 鮮 東 亞 支 局 조선중앙일보 예천지국 후원 궁술대회 동아일보 光 陽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咸 安 弓 術 大 會 盛 況. 去 五 日 조선일보 本 報 光 陽 支 局 後 援 來 月 五 日 부터 三 日 間 동아일보 第 一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陽 谷 商 民 一 同 동아일보 大 邱 弓 術 大 會 主 催 東 亞 日 報 大 邱 支 局 조선중앙일보 전조선 궁술대회, 내 24일 거행 조선중앙일보 함안 궁술대회 성황 조선일보 仁 川 武 德 亭 主 催 全 仁 川 弓 術 大 會 大 盛 況 裡 에 終 了. 去 十 七 日 조선중앙일보 인천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全 南 光 陽 郡 柳 林 亭 後 援 조선중앙일보 광양 柳 林 亭 주최,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大 邱 弓 術 大 會 主 催 本 報 大 邱 支 局 後 援 大 邱 弓 道 會 동아일보 汶 山 弓 術 脚 戲 盛 況 裏 에 終 幕 동아일보 전조선궁술 각희대회 脚 戲 部 會 場 에서( 金 浦 ) 동아일보 문산 궁술 각희 동아일보 예천 궁도대회 성황리에 종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昆 陽 鳳 陽 亭 매일신보 최초의 궁도4단,무덕회 조선본부 궁도 동아일보 광양 유림정,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김포 궁술 각희 성황 동아일보 씨름, 활쏘기, 영화 기생연주, 안동에서

19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脚 戲 弓 術 演 奏 等 安 東 市 民 慰 安 會, 二 十 九 日 부터 三 日 間 조선중앙일보 예천 弓 術 大 會 성황 동아일보 大 邱 弓 術 大 會, 主 催 本 報 大 邱 支 局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全 南 光 陽 郡 柳 林 亭 동아일보 양곡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방어진 궁술 성황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主 催 全 南 光 陽 郡 柳 林 亭 조선중앙일보 안동 상공회 주최, 연합 弓 術 會 상황 동아일보 安 東 五 郡 聯 合 弓 術 大 會 [ 寫 ]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全 南 光 陽 郡 柳 林 亭 局 동아일보 大 邱 花 園 園 遊 大 會 에 異 彩 이룰 兩 會 合 동아일보 盛 況 裏 閉 幕 된 安 東 市 民 餘 興 會 弓 術 大 會, 씨름 동아일보 昆 陽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미국에서도 유행하는 궁술 조선중앙일보 神 宮 여자경기는 단기간으로 통제 동아일보 광양 궁술대회 성황 조선일보 本 報 平 壤 支 局 後 援 大 盛 況 裡 終 了. 去 五 日 부터 三 日 間 조선중앙일보 음악과 영화의 밤, 경도, 제1회 북조선궁술대회 함흥 조선중앙일보 영주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茂 山 弓 術 巖 의 絶 景 [ 寫 ] 동아일보 영주 궁술 성황 조선일보 明 二 十 六 日 元 山 松 濤 園 서 元 山 弓 道 聯 盟 主 催 로 조선중앙일보 원산 송도원에 전조선궁술대회 동아일보 불허가의 궁술 사장에서, 소아를 적중 중상 동아일보 김제 전조선 궁술회 조선일보 本 報 金 堤 支 局 後 援 來 十 日 부터 三 日 間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無 期 延 期 ( 金 堤 ) 동아일보 今 日 의 寫 眞 뉴스 ; 上 으로부터 同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방어진 궁술대회

192 192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궁술 정구대회 동아일보 김제 전조선 궁술 동아일보 金 堤 弓 術 延 期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金 堤 靑 雲 亭 主 催 동아일보 황해도 금호정 궁술대회 동아일보 金 川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金 堤 靑 雲 亭 主 催 조선일보 本 報 鳥 致 院 支 局 後 援 來 六 日 부터 十 日 間 조선일보 本 報 全 州 支 局 後 援 今 二 十 七 日 부터 三 日 間 조선일보 本 報 全 州 支 局 後 援 大 盛 況 裡 終 幕. 去 二 十 七 日 부터 三 日 間 조선일보 貫 心 俱 樂 部 가 주최하는 全 朝 鮮 弓 術 大 會 조선일보 本 報 牙 山 支 局 後 援 의 來 二 十 四 日 부터 조선일보 蔚 山 方 魚 津 에서 靑 鶴 亭 弓 道 會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來 二 十 三 日 조선일보 富 川 蘇 萊 亭 弓 道 會 主 催 와 本 報 分 局 後 援 으로 昨 二 十 二 日 부터 매일신보 弓 術 漢 詩 兩 大 會 와 全 仁 川 學 童 運 動 會 조선일보 本 報 長 城 支 局 後 援 白 羊 館 主 催 로 來 十 八 日 부터 조선일보 觀 燈 節 을 期 하야 開 城 商 工 會 議 所 及 本 報 支 局 後 援 來 十 七 日 조선일보 金 村 市 場 繁 榮 會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來 二 十 三 日 에 조선일보 白 川 溫 泉 에서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來 二 十 日 부터 조선일보 本 報 淸 津 支 局 後 援 의 淸 津 弓 術 俱 樂 部 主 催 로 來 六 月 十 九 日 부터 조선일보 本 報 長 湍 支 局 後 援 으로 來 二 十 四 日 부터 조선일보 金 村 弓 術 大 會 義 損 金 遝 至 조선일보 本 報 白 川 支 局 後 援 의 백천온천문무정 主 催 로 來 二 十 八 日 부터 조선일보 仁 川 體 育 會 主 催 全 鮮 弓 術 大 會. 來 二 十 九 日 부터 조선일보 本 報 長 城 支 局 後 援 의 長 城 白 羊 館 主 催 로 去 十 八 日 에 조선일보 本 報 江 景 支 局 後 援 來 二 十 八 日 부터 조선일보 本 報 金 海 支 局 後 援 으로 來 陰 四 月 二 十 日 부터 조선일보 仁 川 體 育 會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來 二 十 九 日 부터 조선일보 全 金 浦 弓 術 脚 戱 大 會 大 盛 況 裡 終 幕

19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조선일보 長 湍 번영회 主 催 와 本 報 去 二 十 四 日 부터 盛 況 조선일보 本 報 靈 岩 支 局 後 援 의 來 四 日 부터 조선일보 白 川 弓 術 大 會 盛 況. 去 二 十 八 日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매일신보 仁 川 弓 術 大 會 盛 況 裡 에 終 了 조선일보 仁 川 體 育 會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으로 去 二 十 九 日 부터 동아일보 청진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盛 況 終 了. 淸 津 弓 術 俱 樂 部 主 催 와 本 報 支 局 後 援 去 二 十 日 에 조선일보 全 州 弓 術 大 會 盛 況. 去 二 十 四 日 부터 조선일보 平 康 弓 術 大 會. 去 五 日 六 一 亭 創 立 記 念 으로 동아일보 全 朝 鮮 男 女 聯 合 弓 術 大 會, 新 反 正 心 亭 主 催 동아일보 全 朝 鮮 男 女 聯 合 弓 術 大 會 新 反 正 心 亭 主 催 매일신보 해상궁술대회 매일신보 궁도의 발전, 각궁수요량 증가 매일신보 예천궁도회, 국방헌금 동아일보 第 一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射 鵠 亭 繁 榮 會 조선일보 弓 術. 묵은 朝 鮮 의 새 香 氣 弓 術 篇 A 조선일보 묵은 朝 鮮 의 새 香 氣 弓 術 編 B 동아일보 밀양, 창녕, 김해 연합 궁도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固 城 弓 道 會 主 催 조선일보 錦 山 서 開 催. 錦 山 記 者 團 主 催 로 來 五 月 七 日 부터 興 觀 亭 동아일보 전북 금산 흥관정 궁술대회 개최 동아일보 대구에 궁도대회 동아일보 대구 궁도대회 2단 광고 조선일보 錦 山 弓 術 大 會 盛 況 裡 閉 會 동아일보 금산 흥관정 궁술대회 성황 조선일보 公 州 練 藝 協 會 弓 術 部 主 催 觀 風 亭 에서 동아일보 本 報 公 州 支 局 後 援 朝 鮮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東 亞 日 報 社 公 州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公 州 鍊 藝 協 會 主 催

194 194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 扶 安 )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裡 里 觀 德 亭 主 催 동아일보 부산 전조선 궁술대회 매일신보 體 位 向 上 에 登 場 되는 朝 鮮 의 武 藝 弓 術 매일신보 조선의 무예궁술, 이화여전에 교과편성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扶 安 審 固 亭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裡 里 觀 德 亭 後 援 東 亞 日 報 裡 里 支 局 동아일보 弓 術 大 會 開 催 ( 忠 州 ) 동아일보 공주 궁술대회 동아일보 이리 궁술대회 동아일보 충주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부안 전조선 궁술대회 종막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溫 陽 溫 泉 繁 榮 會 동아일보 이리 궁술대회 조선일보 盛 況 裡 에 終 了. 온양온천번영회 主 催 동아일보 男 女 射 員 義 擧, 궁술대회 상금을 위문금으로( 牙 山 ) 동아일보 조선체육회는 금후 조선체육협회와 합체 동아일보 고등 전문학교 궁도대회 매일신보 안동여고에서 궁도를 정과로 동아일보 궁술 간친회 개최 동아일보 궁술 간친회 개최 동아일보 음성 궁술대회 성황 동아일보 장단 궁술대회 종막 동아일보 쏘아라! 가을의 창공을(이화여전 사진) 동아일보 목포 연무정 궁술대회 조선일보 木 浦 米 穀 大 會 의 餘 興 으로 本 報 支 局 後 援 下 에 來 二 十 二 日 부터 동아일보 강경 편사 성황 동아일보 목포 전조선 궁술대회 (사진) 동아일보 씨름 그네 줄다리기 弓 術 의 由 來 ( 一 )

19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궁술 사설 동아일보 씨름 그네 줄다리기 弓 術 의 由 來 ( 二 ) 동아일보 씨름 그네 줄다리기 弓 術 의 由 來 ( 三 ) 동아일보 만철 궁도부 내왕(주-일본인 선수 등장) 매일신보 활 잘 쏘는 왕자주몽 - 주몽신화에 관한 내용임 매일신보 부인네의 체격을 바르게 고칩시다(여자활쏘기 사진) 동아일보 朝 鮮 固 有 競 技 正 科 化 運 動 具 制 限 으로 널뛰기, 씨름, 弓 術 登 用 동아일보 전통의 궁술을 장려하라 동아일보 學 園 體 育 의 現 狀 ( 六 ) 梨 專 ; 異 彩 잇는 固 有 弓 術 동아일보 學 園 體 育 의 現 狀 ( 七 ) 京 保 ; 異 彩 잇는 固 有 弓 術 동아일보 제19회 통영 전조선 궁도대회 동아일보 第 十 九 回 全 朝 鮮 弓 道 大 會 主 催 統 營 南 松 亭 海 雲 亭 六 一 亭 동아일보 지리산 관광주간, 씨름, 궁술, 명창대회 개최 동아일보 김포 궁술 각희 대회 동아일보 제13회 전조선 궁도 선사( 士 )권 대회, 조선궁도회 주최 동아일보 대망의 궁도대회, 조선 고유 무술의 대중화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道 大 會 伽 倻 亭 主 催 동아일보 十 三 回 全 朝 鮮 弓 道 選 士 權 大 會 朝 鮮 弓 道 會 主 催 동아일보 本 報 東 萊 支 局 後 援 弓 術 大 會 開 催 동아일보 第 十 三 回 全 朝 鮮 弓 道 選 士 權 大 會 朝 鮮 弓 道 會 主 催 동아일보 김포 궁술 각희, 성활리에 종막 동아일보 동두천 궁술, 각희 성황 동아일보 궁도 선사권 대회 개최 동아일보 연백 연합 궁술대회 동아일보 궁도 선사권 대회 첫 날의 성황 동아일보 제1일 성황리 경과, 복활되는 우리 고전 경기 동아일보 궁도대회 명일에 결승 동아일보 260여명 선수 운집, 궁도대회 성황 동아일보 전조선 궁도 선수권대회를 보고

196 196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개성 반구정 전조선 궁도대회 동아일보 羅 津 競 射 大 會 延 期, 羅 津 弓 道 會 주최 조선일보 新 綠 의 反 求 亭 에서 開 城 弓 道 會 主 催 조선일보 溫 陽 繁 榮 會 主 催 와 온양기자단 等 後 援 으로 來 三 十 日 부터 동아일보 이리 황등 건덕정 궁도대회 동아일보 학성 궁도연맹 주최 동아일보 弓 道 에 藥 專 優 勝 조선일보 온양온천번영회 主 催 와 本 報 아산지구 後 援 으로 去 三 十 日 에 동아일보 궁술대회장이 (화재로)대혼란 동아일보 충북 궁술 연합회, 괴산 우승 동아일보 황등 궁술대회 동아일보 궁도 중상(모략) 기사로 총회 열고 성토 조선일보 長 湖 院 에서 弓 術 會. 來 二 日 에 동아일보 궁도 복흥 운동 재연 조선일보 武 道 의 고장 江 華 에서 弓 術 更 生 을 圖 謀 동아일보 고등학교 궁도대회 동아일보 속화된 궁도단체, 전북 오수 득가정 해체 강요 조선일보 五 亭 弓 術 大 會. 來 二 十 四 日 金 堤 紅 心 亭 에서 동아일보 천안 6군 연합 궁술대회 동아일보 무도덕한 궁수, 여아 사격후 도주 동아일보 공주 관풍정 6개군 연합 궁도대회 동아일보 復 活 되는 弓 術 大 射 場 을 新 設 公 認 얻도록 競 技 場 等 改 裝 매일신보 일반경기 종목으로 조선궁도를 공인 조선궁도회 체육협회 가맹 매일신보 조선궁도를 공인, 조선체육협회 가맹 동아일보 방어진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方 魚 津 弓 道 會 主 催 동아일보 해운대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海 雲 臺 春 川 亭 主 催 동아일보 방어진 전조선 궁술대회, 성황리에 종막

19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術 大 會 主 催 海 雲 臺 春 川 亭 後 援 동아일보 조선궁도현대화, 체육협회에 가맹 동아일보 경남 함안 궁도대회 동아일보 第 二 回 全 朝 鮮 弓 道 大 會 主 催 咸 安 驛 前 伽 倻 亭 後 援 동아일보 제14회 전조선 궁도대회 개최(사진)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道 大 會 咸 安 支 局 後 援 으로 開 催 동아일보 전조선 궁도 연합대회, 장춘단 공원 석호정에서 동아일보 함안 제2회 전조선 궁도대회 동아일보 全 朝 鮮 弓 道 大 會 溫 陽 記 者 團 主 體 로( 牙 山 ) 동아일보 함안 전조선 궁도대회 종막 동아일보 제14회 전조선 궁도대회 시일 변경 동아일보 第 十 四 回 全 朝 鮮 弓 道 選 士 權 大 會, 朝 鮮 弓 道 會 主 催 동아일보 궁도 선사권 대회를 앞두고 황학정에 모여 맹연습 동아일보 30주년 석호정 궁도대회 동아일보 오늘 석호정의 궁도대회 성대 동아일보 임신의 묘기를 발군, 제14회 전조선 선사권 궁도대회 매일신보 남총독 나타나자 화살드러 환영 동아일보 힘찬 화살에 재현된 무도, 궁도 선사권 대회 첫 날 동아일보 第 四 回 全 朝 鮮 弓 道 大 會 主 催 溫 陽 記 者 團 後 援 溫 陽 繁 榮 會 동아일보 弓 道 選 士 權 의 爭 奪 今 日 黃 鶴 亭 의 壯 觀 [ 寫 ] 동아일보 영예의 궁도전사(사진) 동아일보 여자 궁도 선사(사진) 동아일보 양곡 전조선 궁술대회 동아일보 第 四 回 全 朝 鮮 弓 道 大 會 主 催 溫 陽 記 者 團 後 援 溫 陽 繁 榮 會 조선일보 金 浦 陽 谷 市 場 市 民 主 催 每 新 東 亞 朝 鮮 三 支 局 後 援 동아일보 온양 관덕정, 전조선 궁도대회 종막 동아일보 양곡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第 二 回 仁 川 武 德 亭 主 催 本 報 支 局 後 援 來 三 十 一 日 부터 동아일보 龍 仁 弓 術 大 會 主 催 龍 仁 金 鶴 亭 弓 術 硏 究 所

198 198 학예지 제18집 동아일보 龍 仁 弓 術 大 會 龍 仁 金 鶴 亭 弓 術 硏 究 所 主 催 동아일보 裡 里 觀 德 亭 臨 時 會 弓 道 會 로 改 稱 조선일보 本 社 仁 川 支 局 後 援 으로 去 一 日 동아일보 용인 금학정 전조선 궁술대회 조선일보 本 社 仁 川 支 局 後 援 去 四 日 盛 況 裡 에 終 幕 동아일보 공주 6개군 연합 궁술 편사대회 동아일보 경남 영산 5개정 연합 편사회 동아일보 공주 연합 편사대회 동아일보 청진 전조선 궁도경기 종료 동아일보 광주 목포 궁도 시함연기 조선일보 光 州 木 浦 對 抗 弓 道 試 合 擧 行. 今 二 十 八 日 동아일보 光 木 弓 道 試 合 延 期 ( 木 浦 ) 매일신보 궁술(여무사 만개궁체, 조선체육협회 관련) 매일신보 경성부궁도장 개장식(사진1, 일본식 궁도장으로 추정) 매일신보 全 鮮 弓 術 大 會 慶 北 支 社 後 援 으로 매일신보 전선남녀궁도대회 매일신보 궁도대회(경성운동장) 매일신보 弓 士 의 練 習 最 高 潮 매일신보 제15회 전조선남녀궁도대회, 전조선명궁운집 매일신보 弓 道 大 會 開 幕 매일신보 무예의 정화를 자랑(궁술대회 사진) 매일신보 弓 道 復 興 에 큰 成 果 매일신보 묘기에 관중들 열광(궁술대회 사진) 매일신보 전경성궁도전 매일신보 궁도, 씨름장 설치 매일신보 궁도는 발전 途 上 매일신보 조선체육협회 해소, 후생국서 체진조직 매일신보 부민궁도장 사용료 매일신보 전조선남녀궁도대회 광고

19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매일신보 제16회 전조선남녀궁도대회, 단련의 명궁들 접전 매일신보 무덕회 강원지부 궁도장 준공(일본활) 매일신보 조선신궁봉찬무도(일본활) 매일신보 일본활쏘기 사진 매일신보 재래체육운동의 이것저것 상고로 부터 활쏘기가 성행 대중일보 전조선남녀궁술대회 ; 대중일보 臨 迫 한 全 鮮 弓 術 大 會 및 대회 안내 3단 박스광고 대중일보 今 日 全 鮮 男 女 弓 術 開 幕 ; 개성, 수원등 南 朝 鮮 射 手 總 集 동아일보 全 國 弓 術 大 會 本 社 支 局 後 援 ( 素 砂 ) 동아일보 弓 術 選 手 權 大 會 동아일보 全 國 弓 術 大 會 동아일보 弓 道 選 手 權 大 會 동아일보 弓 道 朝 鮮 올림픽 豫 選 동아일보 서울 市 弓 道 選 拔 戰 績 동아일보 大 韓 弓 道 協 會 定 總 동아일보 弓 道 協 會 今 年 事 業 計 劃 동아일보 男 女 弓 道 選 手 權 大 會 동아일보 全 國 體 育 大 會 弓 道 大 會 동아일보 大 韓 弓 道 協 會 事 務 所 移 轉 3. 주요연재기사 현대어 전문 2) 1) 조선궁도와 사풍 3) 원문출처 : 조선일보 연재기사( ) 기사제목 : 朝 鮮 弓 道 와 射 風 원문필자 : 鼎 言 散 人 ( 申 鼎 言 ) 연재기사 차례 2) 한자와 고어로 작성된 기사원문을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현대어로 고쳐서 전문을 게재한다. 3) 1934년 6월 3일부터 조선일보에 17회 연재된 원문을 현대어로 고치고 연재순서에 맞게 편집, 목차번호를 부여하여 하나 의 문서형태로 재구성 했다.

200 200 학예지 제18집 1) 서론 2) 조선최초의 궁시 3) 조선궁의 종별( 種 別 ) 4) 시촉( 矢 鏃 )의 발달 5) 조선궁시의 분포 6) 사법의 요건 7) 사정 직제( 職 制 ) 및 사풍 8) 궁술발달의 원인 9) 궁술의 국가적 장려 10) 편사와 준비 11) 편사 거행한 종별 12) 민간장려와 사정 13) 무과제도의 이상 14) 관한( 官 閑 )의 내력 15) 결론 (1) 서론 근래 경향을 물론하고 궁술을 새로 배우는 사람도 많고 또는 전날( 前 日 )에 배웠던 것을 다시 연습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 비록 그 규모나 절차는 옛것을 따를 수가 없다 할지라도 다만 활쏜다 하는 풍속만이라도 사라져버리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는 오히려 새로운 느낌이 없지 아니하다. 오늘날 궁술을 배우고 연습하는 것은 결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오락 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궁술은 오늘날과 같이 한량( 閒 良 )의 일시적 오락으로만 전래한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가장 유력한 병기로써 쓰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궁술은 다만 기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오 궁술에는 궁도(혹은 弓 士 道 )라는 것 이 엄정히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신식( 最 新 式 ) 과학적( 科 學 的 ) 병기( 兵 器 )가 발달된 지금( 現 下 ) 황금시대를 당( 當 )하여 궁시 ( 弓 矢 )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궁시는 무기로서는 아무 가치를 인정할 여지가 없다 할지라도 그 궁사도( 弓 士 道 )에 있

20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01 어서는 오히려 본 받을 것이 상당히 있을 줄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파렴치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들은 조선사람이라고 하면 하잘 것 없는 민족으로써 생각하고 멸시하기를 마지아니 하지마는, 우리의 종래 문물만은 우리의 눈을 숨겨가면서 집어다가 이것을 다시 우리에게 자랑 하기도 하고 팔아먹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최신식 문물이라 하여 부러워하기도 하고 혹은 고가로 사기도 한다. 이러한 실례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아 조선의 궁사도( 弓 士 道 ) 그 것도 조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날도 없지 아니한 줄 생각한다. 하여간 조선 궁술에는 궁사도가 있으며 그 궁사도가 어떠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자세히 알게 되는 날에는 조선궁술은 동양에서는 물론이오 저 구미 스포츠계에까지도 새로운 환영( 歡 迎 )이 있을 줄로 생각한다. 조선의 궁사도는 아닌 게 아니라 한 운동으로만 생각한다 할지라도 확실히 이상적 운동의 가치가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궁술은 서 양 사람들이 신사 운동으로 가장 숭상하는 테니스에 비교하기를 주저할 만한 가치를 가졌다. 조선의 궁술은 궁사도로써 생각하든지 혹은 오늘날의 운동 경기로만 생각한다 할지라도 장 려할 필요가 결코 다른 운동 경기종목에 뒤떨어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조선 궁술의 발생, 발달과 궁도, 사풍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이니 그것이 그다지 무의미한 붓장난 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먼저 조선 궁시의 연원으로부터 그 발달의 원인과 장려의 방법이 어떠하였으며 아울러 그 성쇠의 일단을 기록하여 독자 제현의 한 때 취미에 제공하려 한다. (2) 조선최초의 궁시 활은 세계 병기사상의 최고 발명품이다. 그 발명이 이와 같은 소이는 우리 인류의 생활관계 상 자연적 이치와 추세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활의 발명발달의 그 유래를 알고자 하면 먼저 최초 인류의 생활상태가 어떻게 발달된 그 연유를 알지 아니할 수가 없다. 자, 우리 인류의 최초생활은 어떠하였는가? 즉 원시시대의 인류생활 상태가 어떠하였다는 것은 또렷이 알 길이 없다. 다만 역사가와 과학자의 주장에 의할진대 우리 인류의 생활은 처 음에는 매우 단순하였던 것이 점차 복잡해졌고 처음에는 매우 혼돈하였던 것이 점차 개명( 開 明 )하여 마침내 모든 것이 통일되고 조화가 되어 오늘날과 같이 고등생활을 하는데 큰 유기체 를 형성하였다. 한다. 즉 인류 생활에 관계가 맺어있는 모든 문물의 진화는 일조일석에 돌발된 것이 아니오 소위 생활과학적 진화의 머나먼 도정을 차례차례 밟아온 것이다. 일례로써 다시 말하면 우리 인류는

202 202 학예지 제18집 맨 처음에는 여러 동물들과 휩싸이어한 데 생활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지능이 점점 개명해감에 따라서 일직부터 같이 섞여 살던( 同 棲 ) 어려 동물들을 물리치고 비로소 인류와 인류끼리만 집 단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래상태를 생물학적 진화라 한다. 그러면 활이 처음으로 창작되고 발달된 것은 이상에서 본 생물학적 진화의 원칙을 따르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어제 날까지 같이 섞여 살던 여러 동물들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그 어려 동물들을 잡아서 우리 의 생활 자료에 사용하였는데 이 시대를 수렵시대라 하는 바 활은 이 수렵시대에서 처음 창작 되었고 그 다음으로부터 점차 전시용 병기로 변한 것이다. 무릇 궁시는 그 창작의 연대가 높을 뿐만 아니라 궁시를 사용하던 국민들도 역시 많았다. 중국 역사의 기록으로만 볼지라도 지나( 支 那 )의 궁시는 황제 당시에 그 신하 모속( 牟 束 )이 창 작하였다 하고, 일본 역사의 기록에는 천조대신( 天 照 大 神 )이 다스릴 때( 御 代 )부터 궁시가 있었 다고 한다. 그밖에도 아직 미개지로 있는 남양 제도의 토인들도 궁시와 비슷한 무기를 수렵할 때에 쓴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예로만 볼지라도 궁시는 무척 오랫적 부터 생겼고 그것을 사용 하는 민족들도 각처에 널리 흩어져있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궁시라하는 무기를 오래 전부터 어려 민족이 사용해왔던 것은 선배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는 동시에 부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궁시라 하여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오, 그 중에는 사이비한 것이 많으니 궁시의 발달을 고찰할진대 누구보다 우리 조선에서 매우 발달되었던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 사실이다. 즉 조선의 궁술은 궁시를 사용하던 여러 민족 중에 명예가 높고 동시에 조선 사람의 자랑거 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아! 조선의 궁시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던가? 이것도 역시 멀리 단군( 壇 君 )시대에서부터 시 작되었다 한다. 첫째 아득한 옛날에는 해 돋는 동방을 진( 震 ) 이라고 불렀는 바, 진인들은 수렵으로써 생활 자료를 얻었으며 그 수렵용의 무기가 즉 궁시의 종류였다. 그런데 단군께서 등극하신 뒤에 가옥 짓는 것과 농사짓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과 사람과 사람이 모여지내는 예절을 가르치시는 중에 맹수와 적을 물리치는 무기를 만들어 그 쓰는 법을 가르치셨으니 이것 이 즉 궁시창모( 弓 矢 槍 矛 )이다. (3) 조선궁의 종별( 種 別 ) 조선 최초의 활은 단궁( 檀 弓 )이다. 단궁은 조선 목궁의 원조이니 단목( 檀 木 )으로 제작한 까

20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03 닭에 단궁( 檀 弓 )이라 한 바, 길이가 약 3척( 三 尺 ) 5촌( 五 寸 )이다. 단궁시대의 활은 그 제작 방법 이 유치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민지( 民 智 )가 개명( 開 明 )되어 갈수록 활에 대한 이상과 기술이 발달되지 아니 할 수 없었으니 활의 종류로만 말할지라도 처음에는 다만 목궁( 檀 弓 ) 한 종류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목궁을 위시하여 각궁, 철궁 등 수종이 있게 되고 그 제작방법으 로 말할지라도 처음에는 오직 목재( 檀 木 ) 일종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수종의 원료로써 섞어서 제작( 混 作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별종으로써 다수가 있게 되고 제조법에 개량이 있게 된 큰 동기( 動 機 )는 활이 수 렵용( 狩 獵 用 )으로부터 전쟁용( 戰 爭 用 )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 발달된 활의 종류를 대 별하면 군용궁( 軍 用 弓 )과 평궁( 平 弓 )이 있는 바, 다시 세별하면 정량궁( 正 兩 弓 ), 목궁( 木 弓 ), 철 궁( 鐵 弓 ), 철태궁( 鐵 胎 弓 ), 弓 古 (고, 속칭 동개활), 각궁( 角 弓 ), 예궁( 禮 弓 ) 등 칠종인데 정량궁 ( 正 兩 弓 ), 목궁( 木 弓 ), 철궁( 鐵 弓 ), 철태궁( 鐵 胎 弓 )은 군용궁류( 軍 用 弓 類 )이오 예궁( 禮 弓 ), 각궁 ( 角 弓 ) 등은 평궁( 平 弓 )에 속했다. 또한 궁력( 弓 力 )의 강약( 强 弱 )으로서 구별하면 상중하( 上 中 下 )로 3등분( 三 等 分 )하여 강력궁 ( 强 力 弓 ), 실력궁( 實 力 弓 ), 연력궁( 軟 力 弓 )이 있는데 실력궁( 實 力 弓 )에는 실상력궁( 實 上 力 弓 ), 실중력궁( 實 中 力 弓 ), 연상궁( 軟 上 弓 ), 연중궁( 軟 中 弓 ), 연하궁( 軟 下 弓 ) 등의 3종( 三 鍾 )이 있다. 이외에 활쏘는 사람( 射 者 )의 사법( 射 法 )으로써 구별하면 좌궁( 左 弓 ), 우궁( 右 弓 )이 있으니 좌궁 ( 左 弓 )은 왼손으로 활을 당기는 것( 左 便 變 弓 )이고 우궁( 右 弓 )은 오른손으로 활을 당기는 것( 右 便 變 弓 )을 칭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군용궁( 軍 用 弓 )과 평궁( 平 弓 )의 특질은 전시( 戰 時 )의 병기용( 兵 器 用 )이 되고 평시의 연습용이 되는 그 용도의 목적이 다름을 따라 제조방법이 같지 아니하니, 그 상이점( 相 異 點 )을 말하면 정량궁은 속칭 큰활이라 하는 것이니, 길이가 대략 5척 5촌이다. 그 제조재료 는 각궁과 같으나 다만 활의 몸채( 體 幹 )가 두텁고 크고 궁력이 매우 강하여 활쏘는 사람( 射 者 ) 이 활을 당길 때 후퇴약진의 반동력을 얻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다. 목궁=은 일명 호( 弧 )라 하는 것이니 호는 옛날 진한에서 붙은 활 이름이다. 그 제조는 순 전히 柘 (속에 산뽕나무)와 산비마자(속에 앳기지) 등 목제이다. 철궁=은 전체 철제이다. 철태궁=은 다만 활채만을 회로 제조하였다. 고=는 속에 동개활이니 즉 활과 화살을 동개( 鞬 )에 넣어서 짊어지고 말 위에서 달리며

204 204 학예지 제18집 쏘는 것이다. 이상 여러 활은 즉 전시용으로 제조한 것이므로 철제가 아니면 목제라 할지라도 모두 활채가 두텁고 크고 궁력이 강하여 거의가 약자로서는 사용하기가 불능하다. 그런데 평궁의 각궁이라 는 것은 소뿔을 주된 재료로 하여 제조한 것인데, 일명 휘궁, 혹은 장궁이라 하는 것이니, 연습 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궁은 각궁과 동일한 재료로써 제조한 바 다만 길이가 6척이요 궁중 대사, 혹은 향음주례에 쓰는 것-즉 예식용이다. 이상과 같이 활의 제조는 군용과 평시용을 따라서 그 재료가 서로 다르나 전시용, 평시용을 물론하고 철궁과 목궁 이외에는 대동소이한 재료로써 제조하는 것이니 보통으로 군용궁의 재 료로는 뽕( 桑 ), 뿔( 角 ), 심( 筋 ), 부레풀( 膠 ), 실( 絲 ), 칠( 漆 ) 등 일곱 종이오, 평시궁의 재료로는 뽕, 뿔, 심, 부레풀, 참나무, 대, 벗나무껍질 등 칠종이 든다. 그런데 목궁은 앞서 쓴 것과 같이 순전히 柘 (산뽕나무), 산비마자(앳기지) 등을 사용하는 바 전자를 궁간상( 弓 幹 桑 ), 후자를 궁간목( 弓 幹 木 )이라 한다. 궁간상과 궁간목은 보통 산양의 산물이 아니오 그 소산지가 따로 있으니 궁간목의 저명한 소산지는 의주, 창성, 삭주, 위원, 희천, 태천, 영변, 은산, 영원, 서흥, 수안, 곡산, 영덕 등지요, 궁간상의 저명한 소산지는 운천, 개천, 남해, 강릉, 삼척, 울산, 정선, 회양 등지이다. (4) 시촉( 矢 鏃 )의 발달 조선 최고의 살은 호시( 楛 矢 )이다. 호시는 조선시의 원조라 할 수 있으니 호목(싸리나무)으 로써 제조한 까닭에 호시라 하였다. 호시는 숙신시라 하나 실은 고조선의 시는 숙신만 호시를 사용하던 것이 아니오 숙신 이외의 각지에서도 호시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오직 호시를 숙신 시라 함은 숙신에서 제조한 호시가 가장 정교하였고 가장 정예하였던 소이이다. 어찌 해서 하필 호시를 사용하게 되었던가? 그 원인은 천연적 이치와 추세로써 그리된 것이 다. 즉 호목은 함경도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백두산의 호목은 그 질이 강하고 그 몸채가 곧은 것이 타처의 소산물로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을 만한 특산물이다. 그리하야 백두 산을 중심한 고조선 여러 나라의 모든 문물이 성산 백두로부터 발상되지 아니한 것이 없음을 따라 역시 백두성산의 특산물이 되는 호목으로써 화살을 만들게( 作 矢 ) 된 것이 하늘이 낸 이치 ( 天 理 )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 사람이 백두산에 올라서 호목을 취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천제를 거행하였으니, 그것은 지성스럽게 구하는 바가 아니면 그 만주 호목이 한 개도

20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05 보이지 아니한다는 이유였다. 이제 우리는 나무 하나 물 한 포기도 모두 무심물이 아닌 것을 새로이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궁시의 과학적 기술이 개명되자 그 종류 제조 방법이 점차 개량될 것은 당연한 사실 이니, 저 목전 철전 예전 편전 동개쌀 장군전 세전 유엽전 등등의 다수 개량시는 실로 호시의 후예라 할 수 있다. 이상 여러 살 중에 유엽전 이외에는 전부가 전쟁용이니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오직 유엽전 한 가지 뿐이다. 그런데 그 제조 재료는 싸리 대 쇠 심 깃 도피 등 일곱 종이다. 그리고 철전 중에는 육량전(짧게는 육량)과 아량 두 종류가 있는데 그 살의 총 중량이 육량전은 육량이요, 아량전은 넉 냥 즉 육량의 다음이 되는 까닭에 전자를 육량전, 후자를 아량 전이라 명칭한 것이다. 목전이라는 것은 순전히 목재로만 제조하였으니 살무게( 箭 重 )가 여덟 돈( 八 錢 )이다. 또한 장전이라는 것은 육량전과 제조방법이 똑같으나 문자 그대로 좀 긴 것 뿐이니, 이것은 보통용이 아니요 궁수용이다. 편전은 속에 애기살 이라고 하는 것이니, 살이 작다는 의미인 바 길이는 촉을 제거하고 포백척으로 약 8촌 가량이다. 동개살은 혹은 대우전이라 하는 것이며 장군전은 순전히 철제이니, 그 살무게가 3근 내지 5근이나 되며 포를 발사하는 것인 바 예를 들면 큰 성곽 혹은 거함 등류를 격파할 때에 쓰는 것이다. 다음에 세전이라는 것은 속칭 가는 살 인데 연습용으로도 되었으나 주된 용도는 적진에 격문을 보낼 때에 쓰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신용이며 유엽전은 순전히 연습용으로 제조한 것인 바 그 살무게가 약 여덟 돈이다. 다음에 촉으로 말하면 최초에는 돌촉을 사용하였는 바 소위 마제석촉 타제석촉 등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마제석촉은 돌을 갈어서 제조한 것이요, 타제석촉은 돌을 다듬어서 제조한 것 이니 그 수공( 手 功 )이 얼마나 들었든 것을 상상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정교한 것이 일종의 미술품이라 할 수 있다. 그 원료는 역시 백두산에서 산출하는 흑요석 이라는 것이니 다른 돌로 는 제조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경흥, 웅기, 서수라, 성진, 회령, 북청 등지에서 간혹 땅속으로부 터 이런 돌촉이 발견되어, 행자( 行 者 )로 하여금 회고의 느낌을 종종 일으킨다. 요컨대 이와 같 은 돌촉을 사용한 것은 당시 문화정도가 석기시대에 처하였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는 쇠로써 제조하였는데 철제촉은 마한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촉에도 전시용과 평시용 의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평시용 촉은 방금 황학정 혹은 기타 사장에서 사용하는 촉이어니와 전시용은 제조방법이 대개 구구불일하나 간략히 말하면 모두가 크고 두텁고 예리한 것이 특색 이라 할 것이오, 또는 독약을 바르는데 약칠하는 것은 의례히 7-8월 경에한다. 이와 같이 독약

206 206 학예지 제18집 을 바른 까닭에 촉을 맞은 곳은 득시 부패하여 생명에 위험이1 몹시 빠르게 된다. (5) 조선궁시의 분포 단궁이 생긴 뒤로부터 강궁국( 强 弓 國 )의 칭호가 있었던 것은 숙신을 가리킴이다. 숙신의 궁 시는 매우 발달이 되었는데 특히 그 호시 는 유명하였다. 지나인 중 그 어떤 사람이 새매가 맞고 죽은 살을 뽑아서 공자께 감정하였던 바 공자께서 이것은 숙신살 이라 한 것이 즉 호시 이다. 호시는 호목으로 제작한 것인데 그 제조방법이 극히 정교하여 모든 살 중에도 특색이 있었다 함은 먼저 서술한 바 있거니와 숙신에서는 지나 제요( 帝 堯 ) 25년에 호시를 선사한 일이 있었으니 고조선의 궁시가 해외에까지 진출한 것은 호시로써 비롯되었다. 그 뒤에도 숙신에서 는 무왕이 은을 토벌하던 당시에도 역시 그 호시의 주문을 받아 공급한 일이 있었다. 또한 옛날 삼한에서는 10월에는 반드시 새로 익은 오곡( 五 穀 )으로써 천제( 天 祭 )를 거행하였 고 그 천제의식( 天 祭 儀 式 )이 끝난 뒤에는 위로는 조정을 비롯하여 아래로는 여항( 閭 巷 )의 촌부 ( 村 夫 村 婦 )들 까지라도 주효( 酒 肴 )를 연설하고 가무로써 위아래가 한데 어울리는 풍속이 있었 는 바 여흥 중에 활쏘고 말달리기( 弓 射 馳 馬 )가 반드시 일개 국기로써 성행하였다. 예인( 濊 人 ) 의 무천연( 舞 天 宴 ) 중에도 유일한 여흥이 역시 활쏘고 말달리기였다. 즉 예인 풍속에 가족 중 에 사망자가 생기면 그 사망장소가 되었든 전날 주거하던 가옥을 전부 헐고 반드시 새 가옥을 축성하는 바 그 낙성연( 落 成 宴 )을 가로되 무천연( 舞 天 宴 )이라하였다. 그런데 이 무천연은 반드시 거행하는 것이오 동시에 무천연의 여흥으로는 반드시 활쏘고 말 달리기를 위주로 한 것이 불변의 국속( 國 俗 )이었다. 그런데 저 삼한 중에도 가장 궁술에 진력 한 것은 마한이었으니, 마한은 실로 삼한 시대의 대궁국( 大 弓 國 )이었다. 하여간 고조선 시대에는 어떤 나라( 何 國 )를 물론하고 궁술을 장려( 獎 勵 )하지 아니한 곳이 없었는 바 그 궁술은 자국 내에서만 장려한 것이 아니요, 해외에까지 진출된 것은 일대장관( 一 大 壯 觀 )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 궁시가 해외에 진출되기는 벌써 지나 제요 25년에 숙신( 肅 愼 )의 궁시로써 시작이 되었으며 그 뒤 주나라 무왕( 周 武 王 ) 당시에도 수출( 輸 出 )이 되었다는 것은 먼저 서술한 바와 같거니와 그 뒤로부터 지나( 支 那 ) 역대의 여러 조정에서 조선 궁시를 수입하지 아니한 때가 별로 없었다. 특히 한 무제 당시에는 조선 문물에 가장 욕심을 내인 것 이 궁시였으니 저 소위 낙랑단궁( 樂 浪 檀 弓 ) 이라는 것은 즉 낙랑으로부터 틈틈이 수입한 조선 궁시( 朝 鮮 弓 矢 )이다.

20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07 그 뒤 환( 桓 ), 헌( 獻 ) 양제( 兩 帝 ) 때에는 예맥( 濊 貊 )으로부터 다수 수입하였고 고구려 산상왕 ( 山 上 王 )은 오나라 손권( 孫 權 )에게 정제한 궁시를 다수 공급하였으며 고원왕( 故 原 王 )은 진나라 왕 부견( 秦 王 符 堅 )이 즉위할 때에 역시 단궁 3천개( 檀 弓 三 千 筒 )를 예물로써 공급한 바 있었다. 또한 위진( 魏 晉 )과 문물상 교환이 빈번하게 됨을 따라서 조선 궁시의 진출이 많았던 것은 자연 의 추세 이어니와 특히 오호십육국( 五 胡 十 六 國 )이 벌어지게 되매 고구려의 정예한 궁시가 그 진지에 미만( 彌 滿 )하였고 그 뒤 조선강산을 짖 밟은 수당양대원정군( 隋 唐 兩 大 遠 征 軍 )이 배하여 돌아간 뒤로부터 조선 궁시의 위력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자 없었고 동시에 수입을 전력하였던 것은 역사상 기록으로 그 필치가 매우 굉장( 宏 壯 )하였다. 조선궁시는 지나( 支 那 ) 방면으로만 진출되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남으로는 일본에도 진출하 였으니 즉 백제 백이왕( 百 爾 王 ) 51년에 옷 짓는 여자( 縫 衣 女 )를 일본에 보내어 그 복제를 시작 하였고 그 이듬해 52년에는 박사 왕인으로 하여금 천자와 논어를 가지고 가게 하여 이것이 일본문학의 시초가 된 것은 세상 사람이 두루 아는 바 사실이거니와 양국간에 국교관계가 밀접 함과 동시에 백제 문물이 일본에 수입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며 그 중에서 궁시의 수입이 많 았던 것도 당연한 추세이었다. 요컨대 당시 조선 궁시의 분포상태는 극동의 유수한 국가에 거의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6) 사법의 요건 무릇 궁시는 옛 사람이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궁시의 사용법은 옛사람이 현대 사람만 못할 것이니 이것은 지식정도에 금석의 차이가 현저히 다른 까닭이다. 옛사람은 활을 쏜다 할지라 도 어떠한 교범이 있다든가 어떠한 훈련이 있다든가 또는 어떠한 법도가 있다든가 어떠한 규율 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활을 당기어 살을 맞추기에만 열중하였든 것만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인지가 개명됨을 따라서 궁술에 대한 교범 훈련, 법도, 규율 등등이 매우 엄격하였다. 가령 고대 각 민족이 모두 궁시를 사용하였다 할지라도 앞서 기록한 규범의 유무를 따라서 궁 술에도 자연히 문명과 야만의 차별이 있게 되었다. 하여간 궁술에는 사법이 있고 사풍이 있다. 그러므로 이 양개 규범을 만일 무시 한다든가 어긴다면 이것은 원시인의 궁술에 불과한 것이 다. 사법과 사풍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먼저 그 사법의 요령을 설명하고 다음에 그 사풍을 말하려 한다.

208 208 학예지 제18집 궁사의 사법이란 것은 마치 군인의 기착자세( 氣 着 姿 勢 )와 같다. 즉 군인이 먼저 기착자세를 취한 뒤에 교련 과목, 혹은 운동을 시작하는 것과 같이 궁사는 먼저 직립자세를 취한 뒤에 궁술 을 발휘하게 된다. 이것을 총칭하여 사법이라 칭하는 것이니 그 주요한 조건을 열거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신체=신체는 반듯이 직립하되 전체를 과녁... 즉 과녁이 이마와 바루게 하라 하는 것은 과녁정면을 향하여 직립하라는 것이다. 정신=정신은 신체의 직립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이 모쪼록은 일체 사심과 공상을 버리고 침착하여 심신을 안돈할 것. 발=발은 정자형도 아니오 팔자형도 아닌 형상으로 과녁 좌우 아래끝을 향하여 벌려서되 양쪽 발 끝이 항상 숙지 아니하도록 하며 전 체중은 발 장심-손바닥이나 발바닥의 중심-에 다가 집중시킬 것. 방광부=방광부(불두던)께를 아무쪼록 팽팽히 하는 동시에 엉덩이를 내밀지 아니할 것. 흉부=흉부는 평평히 하면서도 허하게 할 것. 턱끝은 가슴께로 묻히게 할 것. 목덜미는 항상 핑핑하게 들 것. 줌손은 하삼지를 흘려서 거드쳐 쥘 것. 깍지손은 오지로 쥐거나 삼지로 쥐고 높히 걸되 중구미와 등힘으로 활을 당기어서 살을 용맹스럽게 놓을 것. 중머리는 밧투붙어서 턱과 가깝게 할 것. 중구미는 잘 업히어야 할 것. 등힘은 줌손 외부로 부터서 생기는 힘인 까닭에 다핑핑히 직선으로 되어야 할 것. 이상 12개 요건은 궁사 직립자세에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다. 그 직립자세의 요건으로 볼진 대, 궁술은 현대체조법상 다만 팔의 운동에 불과한 것 같으나 실상은 전신운동의 요건이 구비 한 까닭에 궁술은 체조법으로도 가치가 높다 할 것이다. 직립자세는 외형으로만 볼지라도 흉허복실(가슴은 죽이고 배는 내미는 것)의 체격을 비정비 팔의 발모양으로 떡 버티고 선다하면 그 씩씩한 태도가 현대군인이 양각을 착 붙이고 선 기착 자세보다 오히려 활발하고 용맹스러워 보인다. 직립자세는 외형으로 씩씩한 것은 물론 이거니 와 과녁을 맞추는 데도 직립자세를 잘 취하고 못 취한 데 따라서 크게 관계가 있다.

20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09 다시 말하면 총의 사격은 조준이 있는 까닭에 그 조준을 의거하여 사격을 하나 활은 이러한 조준이 없고 다만 사자( 射 者 )의 목측을 조준 삼는 고로 직립 자세를 잘 취하지 아니하면 적중 의 명예를 이룰 길이 없다. 그러므로 직립자세의 양부( 良 否 )는 즉 궁술의 우열을 좌우하는 힘 을 가졌다. (7) 사정 직제( 職 制 ) 및 사풍 사정에는 고래로부터 일정한 직제가 있어서 그 직원으로 하여금 사정질서를 유지하고 사정 의무를 장려하였다. 직원의 중요한 자는 사두 1인, 선생1인, 행수 1인 도합 3인이니 이 3인은 사정의 간부다. 사두는 당상관 중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 추대하고 선생은 당하관, 혹은 무과급 제자 중에서 역시 인망이 높은 자로 선정하며 행수는 한량 중에서 품행이 단정하고 지덕과 궁 술이 아울러 우수한 자를 선정한다. 그 선거는 사두, 선생, 행수의 어떤 사람을 불문하고 먼저 삼망단자-즉 후보자 3인을 예선한 뒤에 전사정원이 총선거를 행하여 최고득점자가 피선되었으니 요컨대 불성문 선거법이 시행되 었다. 사두는 사정을 대표하고 선생은 문자 그대로 궁술교수를 담당한 자이며 행수는 각 한량 을 감독하는 임무를 가졌다. 직제는 비록 간단하나 그 규율이 엄격한 것은 군대의 규율과 조금 도 다를 것이 없었다. 사풍이란 것은 사정의 규율, 질서, 예의 등등 - 일종 헌법적으로 인정한 사정의 풍규( 風 規 )이 다. 이 사풍도 옛날 인지가 미개하였던 시대에는 역시 유치하였던 것은 물론이나 우리의 문명 이 계발됨에 따라서 점차 엄격히 되었으니 우리 조선에서 사풍을 가장 엄격히 규정하고 시행하 기는 이조 현종 때로부터 시작되어 가지고 이래 수 백 년을 전래하였다. 사풍에는 4대 강령이 있으니 사표( 師 表 )를 존경할 것. 선진( 先 進 )을 경대할 것. 동배( 同 輩 )를 예대( 禮 待 )할 것. 규율( 規 律 )을 엄수할 것. 등등이다. 그런데 이상 4대 강령을 원칙으로 하고 다시 세별적으로 규정한 것이 있으니, 그 요건이 약 18개 종목이다. 견책( 譴 責 )

210 210 학예지 제18집 취격벌( 聚 格 罰 ) 계급( 階 級 ) 신입사( 新 入 射 ) 연전( 揀 箭 ) 영접( 迎 接 ) 등정 및 초순시( 登 亭 及 初 巡 時 ) 연전띠내기( 賭 揀 箭 隊 ) 꿇내기( 賭 跪 ) 고풍( 古 風 ) 팔찌동( 腕 上 下 序 ) 순차례( 射 巡 禮 ) 대우( 待 遇 ) 별선( 別 選 ) 초입사( 初 入 射 ) 사계( 射 契 ) 편사( 便 射 ) 이접( 移 接 )에관한 것 등등에 관한 규정 및 풍기( 規 定 及 風 紀 )이다. 이상 규정을 다시 대별하면 (1)예의( 禮 義 )에 관한 것, (2)벌칙( 罰 則 )에 관한 것. (3)시술( 試 術 )에 관한 것. (4)사적( 射 籍 )에 관한 것. (5)사재( 射 財 )에 관한 것 등 5종이다. 즉 계급 신입사 등정 및 초순 등은 예의 부문에 속한 것이니, 그 의의를 간단히 말하면 활을 쏠 대에는 반드시 작위가 높다든지 혹은 고참자의 순으로 서서 쏘는 것 등이 계단 규정에 속한 것이요, 한량이 처음 사정에 왔을 때에 첫인사가 활을 배우러 왔소 하는 것이 있으니 이런 것 을 신입사례라 하며, 활을 처음 쏠 때에 반드시 한량은 활 배오 하면 선생이나 행수는 잘 맞 추시오 하는 인사를 한다. 이런 인사가 등정 및 초순시의 규정에 속한 것이니, 이런 인사는 사 정 예식으로써 고정된 것이다. 다음에 사원 중에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을 때에는 견책 혹은 취격 벌을 집행하는 것이 통례 이다. 견책은 대개는 사두가 보통으로 행하는 것이나 특히 당상자 견책은 반드시 사두가 행하 며 취격 벌이라는 것은 한량 중 범과자가 있을 때에는 행수가 집행하는 바 체형인데 전한량을

21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11 총동원하여 당하( 堂 下 )에다가 위의를 베풀고 범과자를 붙잡아다가 矢 (화살)로써 태형으르 하는 것이 통례이니, 즉 견책 취격벌 등은 모두 벌칙부분에 속한 것이다. 또한 연전, 연전띠내기 꿇내기(속칭 무릎꿇내기) 팔찌동 사순례 별선 등은 시술( 試 術 ) 부문 에 속하였으니 예를 들면 편사라는 것은 가령 갑을 양 사정에서 경기하는 것이오 꿇내기라는 것은 한량들이 연습 중 과녁을 맞추지 못한 자는 벌로써 무릎을 끓는 것이다. 다음에 고풍, 사계 등은 사재( 射 財 ) 부분-즉 사정 재정부에 속한 것이니, 사계라는 것은 사원이 계를 조직하 여 애경을 상조하고 사정재원을 만드는 것이오 고풍이라는 것은 장신 기타 귀빈이 사정에 왔을 때에는 사원 이하 전사원 연명으로 고풍 이라고 쓴 단자를 올린다. 귀빈은 그 능력에 따라서 금액을 그 단자에 적는 것이니 일종 기부행위와 같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정에 적을 두는 것은 반드시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적이 있는 사정에 입사치 아 니치 못하는 것이니 무고히 타사정에 입사하는 경우에는 명예상 큰 치욕을 면치 못한다. 이같 은 규정이 모두 초입사 규정에 속하였다. (8) 궁술발달의 원인 이상 수회에서 말한 것은 다만 조선 궁시의 창조로부터 발달된 유래를 대략 기술한 것이다. 그러면 조선의 궁술은 어느 때부터 어떠한 동기로 발달이 되었는가? 그역사적 유래를 일고할 필요가 있으니 조선 궁술의 발달사는 즉 조선정치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범상히 보아넘 길 수 없다. 대개 조선의 궁술이 놀랍게 발달이 된 연대로 말하면 즉 삼국시대요 그 발달이 된 동기로 말하면 필연적 추세로 된 것이다. 어떤 이유냐 하면 독자 여러분이 두루 아는 바와 같이 고구 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솥발의 세로써 대립된 뒤로부터 삼국간의 정치상, 군사상 내지 문화상 관계가 복잡 다단하였던 것은 고사하고 그 밖에 외국간의 국제관계도 역시 다사하였다. 다만 문화 망변의 일례로만 말 할 지라도 첫째 한인( 漢 人 )의 문물을 위시하여 위진( 魏 晉 ) 문명과 당 송 이하의 모든 지나 문물이 흘러 들어오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 재래의 문물과 새로 수입 된 지나(중국) 문물을 한데 뭉쳐서 일본으로 건너보내는 등 문물 수출입의 국제적 관계가 여간 복잡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옛날 로마문명이 로마 재래 문명에다가 애급, 희랍의 양대 문명을 윗짐져서 더욱 이 채를 발휘한 것과 같이 조선고대문명은 지나 대륙에서 무르녹은 서방문명과 인도계통에 속한

212 212 학예지 제18집 남방문명(예를 들면 불교문물전래)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여 조선 문화에 스며든 결과 그 찬 연한 꽃과 열매가 맺히기는 오로지 삼국시대였다. 환언하면 조선의문화적 정수와 정치적 발전 과 군사적 무위( 武 威 )가 세계에 떨치기는 삼국시대이다. 그런데 국제상 가장 복잡하였던 것은 정치 및 군사문제이다. 이와 같이 정치 및 군사문제가 복잡할수록 국방의 필요성이 생기고 국 방상 필요성이 절실할수록 군비충실의 필요성이 생기고 군비충실의 필요성이 진작된 결과 궁 술의 장려가 왕성하였다. 궁술의 발달은 당시 정세상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돌이켜 그 원인( 遠 因 )을 고찰할진대 궁술발달의 동기는 삼국시대에서 돌발한 것이 아니오 기실은 멀리 소위 위만 조선시대에서부 터 시작되었다. 아! 위만이라 하는 괴상한 오랑캐( 怪 胡 )가 조선지경을 침입한 뒤에 가옥으로 치면 마치 안대 척과 같은 대동강 유역을 딱 뻐개고 들어앉으며 소위 낙랑이라는 군읍을 설치한 뒤에는 모든 세력을 가지게 되고 그 세력의 뿌리가 깊어갈수록 우리 조선인과 이해충돌이 심하게 되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이 더부살이 등살을 방관할 길이 도저히 없음을 깨닫고 사방에 흩어졌던 민 중이 처처이 국가를 창립하게 되니 즉 낙랑을 중심하고 남으로 지금 충청 전라 경상 삼도에는 한이 생기고 그 한의 남으로는 지금 강원도에는 예가 생기고 또 그 북으로 지금 함경도에는 옥저가 생기고 정북으로 압록강 골짜기에는 고구려가 일어나고 또 그 북에는 예전부터 내려오 든 부여가 있어 각각 자기 힘으로 낙랑을 몰아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낙랑의 굳은 뿌리는 얼른 흔들리지 아니함으로 조선사람은 비로소 전민족의 힘을 모 아 필경은 낙랑을 몰아냈으니 그것이 평화적 해결이 아니오 결국은 무력적 해결이었다. 그 무 력적 해결을 준비함에 있어 가장 다량으로 준비한 것은 궁시요, 가장 진력하여 연습한 것은 궁술이었다. 그런데 그 뒤 삼국이 벌어지자 서로서로 패권을 다투는 중에 밖으로는 수당 등 대군의 침입을 받게 됨에 내외형세가 모두 군비충실을 요하게 된 바 궁술 그것은 이러한 정세 에 싸이어 발달되지 아니치 못할 기외가 늘어가게 되었다. 하여간 당시인이 인재를 칭찬하는 표어가 모는 궁마지재( 弓 馬 之 才 ) 가 있는 사람이라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궁마지재가 아니면 입신 출세할 도리가 없었다. 하여간 지나에서 우리 조선을 가르쳐 동이 라 하였으며 夷 라 한 것은 물론 모욕이나 실상 은 모욕의미로써만 夷 로 칭호한 것이 아니오 조선은 동방 대궁( 大 弓 )국 이라 하는 뜻으로써 대자 궁자의 합성자인 이( 夷 )자를 붙여 동이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예로만 볼지

21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13 라도 조선 궁술의 발달과 위력이 얼마나 놀라웠던 것을 가히 짐작할 것이니, 당시는 국민개궁 주의 ( 國 民 皆 弓 主 義 ) 하에 궁술이 국민화 하였고 사회화하였던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이었다. (9) 궁술의 국가적 장려 조선의 궁술이 어떠한 동기로써 발달이 되게 되었다는 것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거니와 조선 의 궁술은 어느 때부터 어떠한 방법으로써 장려하였는가 그 유래를 대략 일고하건대 대저 궁술 의 장려를 조직적으로 시행하기도 역시 삼국시대다.-즉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산국이 모두 궁술 을 장려하기는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고구려가 더욱 셩황하였다. 그 장려의 방법 및 수단은 허다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에서는 무과로서 장려하였고 민간에서는 편사 로써 장려하였다. 무과의 방법과 편사의 규정은 다음 회로 미루고 먼저 순연히 최초에 국가적 장려가 어떠하였던 것을 말하려 한다. 먼저 말한 것과 같이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에서 가장 궁술과 기초무예를 장려하였다. 즉 그 국초부터 국민에게 대하여 궁창( 弓 槍 )의 사용법과 무기를 만드는 법을 연습시켰다. 그래서 당 시 고구려 사람들은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 이라 칭호하였으니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7세 부터 선사( 善 射 )하나 가닭에 주몽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궁술을 국가적 사업으로 장려하기는 고구려에서는 시조 동명성왕 때부터요 백제에서는 비류왕 때요, 신라에서는 원성 왕 때부터이니 즉 비류왕은 즉위 제17년에 궁성동쪽 담장 안에 동사대 ( 東 射 臺 )라는 사대를 짓고 왕으로부터 조신과 서민까지 매월 1일과 15일에 궁술을 연습케 한 바 이것을 삭망시( 朔 望 試 )라 하였다. 그 뒤 아신왕 때에 이르러서는 다시 궁성 서쪽 담장 안에 서사대를 새로 짓과 군신이 모여서 그 삭망시를 장려하여 행하였다. 신라 원성왕은 즉위 제 4년에 역시 궁중에 사정을 건축하고 신민으로 하여금 궁술을 연습케 한 바 매년 8월 15일 즉 추석일에는 관민 등의 궁사를 홍백 양대로 하여 경기케 하였고 동시에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왕이 친히 상을 주었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동서 양쪽 교외에 사장 을 설치하고 먼저 문관 중 4품 이상 되는 자와 연령 60 미만 자로 하여금 연습케 하였고 선종 때에는 호부 남청을 사장으로 하고 관민 합동으로 연습케 하였는데 특히 매월 초 6일에는 경향 이 모두 관민합동으로 대연습을 거행하였다. 이조시대에는 이태조께서 한양으로 천도 후에 즉시 동교장( 東 敎 場 )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궁 술을 중심으로 하고 기타 무예를 연습케 하였으니 동교장이 즉 훈련원이다. 그 뒤 태종 때에는

214 214 학예지 제18집 특별히 사청( 射 廳 )이라는 관서를 신설하고 궁마장려의 사무를 장리케 하였으니 사청은 곧 궁술 의 감독관청이다. 그러다가 인조 때에 이르러서는 다시 서쪽 교외에 강무관( 講 武 館 )과 홍전문 ( 紅 箭 門 )을 설치하였으니 강무관은 지금 모화관이오 홍전문은 지금 독립문이다. 그 뒤 다시 무과장을 설치할 새 훈련원을 1소라 하고 모화관을 2소라 하여 평소에는 궁술 기타 무예를 연습케 하고 무과 거행시에는 과장으로 사용하였다. 이외에 특히 궁성 내에는 사장을 설치하였으니 그 중요한 것은 춘당대, 경무대, 내사복, 중일 각 등이다. 춘당대 경무대는 왕께서 친히 활쏘는 사정이오, 내사복은 별군직 등으로 하여금 연습케 하던 사장인데 즉 별군직으로 유명한 8장사가 사습을 하던 곳이다. 중일각은 숙직군관 으로 하여금 연습케 하던 곳이니 중일각 연습에는 중일시와 삭시의 양개 대연습이 있었다. 즉 삭시라는 것은 일반 군관이 삭월일에 집합하여 정식으로써 시사하는 것을 이름한 것이오, 중일시라는 것은 당지 숙직군관이 숙직을 통례로 3일간을 하는 바 제2일-즉 중간일에는 반드시 궁술을 연습케 하였으므로 중일시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조의 궁술장려도 국가사업으로 힘써 시행하였는 바 특히 효종대왕께서 북벌을 계획하게 되자 궁술 기타 무예의 장려를 명암 양면으로 노력하였다. 지금 우이동 앵목( 櫻 木 )은 지금은 오가는 이의 일종 완상물에 불과하나 최초에 나무를 심은 것은 그 북벌계획 중에 함유된 활 제작의 원료를 목적하여 왕명으로 재배 한 것이다. (10) 편사와 준비 편사라는 것은 평일에 연습하였던 궁술을 편을 갈라 가지고 우열을 경쟁하는 것이니, 즉 궁 술의 경기이다. 그런데 편사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정규의 수속과 준비를 행치 아니치 못한다. 예를 들면 먼저 선단의 발송과 응단 혹은 방단의 수수를 위시하여 거기한량 장족한량 획창 한량이며 편사대와 수띠의 선정과 고사례 등을 준비 거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총칭 하여 편사대회 절차라 하는 것이니 다시 세별하면 다음과 같다. 선단 = 은 가령 갑 사정에서 을 사정에게 편사를 청하는 공문단자-즉 선전 포고문을 선단 이라 하는 바 선단에는 사두, 선생, 행수 3인이 연명하며 그 송달 방법은 한량 중에 풍채가 늠름하고 체격이 씩씩한 두 사람을 선정하여 보낸다. 이 선단을 휴대한 한량은 을 사정에 이르러서 즉시 당에 오르지 아니하고 뜰에 머물러 갑사정에서 왔소 하고 청령식으로 온 뜻을 고한다. 그러면 을 사정에서는 사두 이하 전원이 의관을 정제하고 일제히 일어서서

21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15 나와 맞되 오르시오 하는 말을 역시 청령식으로 하여 당상하기를 청한다. 그런 뒤에 갑 사정한량은 당에 올라 사두를 비롯하여 배례로써 인사를 한 뒤에 사두에게 선단을 전달한 다. 그러면 사두는 선단을 받어 들고 잘 받다 왔소 한다. 이것으로써 선단 전달식은 마치 고 그 한량은 다시 배례로써 물러난다. 응단 및 방단 = 응단이란 것은 선단을 받은 사정에서 편사 할 것을 승낙하는 단자요 방단 이라는 것은 편사를 거절하는 단자이며 응단 및 방단을 송달하는 절차방법은 선단을 송달 하는 절차방법과 동일하다. 지일단자 = 는 응단을 받은 사정에서 기일을 택하여 응단을 보낸 사정에 송달하는 단자이 니 단자 송달의 절차방법은 역시 선단의 송달방법과 동일하다. 이상에 말한 것이 즉 대회개최의 수속 절차이다. 대회 개최의 수속절차가 완료된 뒤에는 대회 당일의 준비를 쌍방( 雙 方 )에서 다 각각 시행하 는 바 그 요건은 다음과 같다. 편사원 및 수띠 선거=편사원은 정규상 15명을 선정하고 편사원 중에서 다시 수띠를 선정 하는데 수띠라 하는 것은 즉 편장이다. 거기한량 선정=거기한량이라는 것은 편사원이 과녁을 적중한 때에 적중하였다는 것을 표 시하기 위하여 기를 들어 휘두르는 임무를 가졌다. 장족한량 선정= 장족 한량은 거기한량이 적중한 것을 표시하는 즉시로 맞출 준비하여 가 지고 있던 맛치 를 들고 과녁에 달려가서 마친 곳을 두드리며 그 적중한 것을 표창하는 임무를 가진 한량이다. 획창한량 선정=획창한량이라는 것은 장족한량이 표창하는 즉시로 사정 대청에서 다시 그 적중한 것을 표시하는 것이니 즉 모의 적중한 것을 정식으로 공포하는 것을 창( 唱 ) 으로 써 하는 임무를 가졌다. 사정고유( 射 亭 告 諭 )=사정고유를 대회 전일에 거행하는 의식이니 즉 우승을 기원( 祝 )하는 의미이다. 고유제를 거행함에는 사두가 수석제관이 되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기타 선생 행 수 이하 전원이 청결한 의복으로 지성을 다하여 행한다. 그런데 소지백지는 16장을 사용 하는 것이니 즉 처음 1장은 부정소지라 하여 당일 모든 부정하고 불리한 귀신을 제거한다 는 의미의 소지이고 다음 제2장은 수띠의 개선할 것을 기원하는 소지요 그외 14장은 각 편사원의 성공을 기원하는 소지이다.

216 216 학예지 제18집 이상 여러 절차로써 대회준비를 완료하고 다음에는 대회 당일의 편사원의 사기를 고취할 것 과 주의사항을 행수로부터 훈시하는 것이 통례이다. (11) 편사 거행한 종별 대회 당일은 즉 편사한량의 명예의 판단일이다. 궁술의 우열은 물론이오 일거수 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만일 한량의 행세성에 벗어나는 것이 있다 하면그 한량 개인은 고사하고 사정 전체 의 불명예가 된다. 그러므로 편사원을 위시하여 기타 한량이 모두 특별한 조심을 하는 것은 다언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편사 정각 전에 행수 한량은 반드시 편사전원에게 대하여 종래 관례의 주의사항을 들어 훈시한다. 그 요령은 다음과 같다. 음주하지 말 것 장내장외를 물론하고 출입행동을 단정히 할 것. 웃음을 함부로 웃지 말 것. 타인과 언어를 말 것. 좌우를 둘러보지 말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요항은 행수가 임시로 훈시하는 주의사항이 아니요, 편사규정에 속한 주의사항이 오, 동시에 사풍인 까닭에 만일 어기는 자가 있다 하면 그 경중을 보아 견책 혹은 취격벌을 행하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사적( 射 籍 )을 제거하는 경우도 있어 상벌이 매우 엄격하다.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대회당일은 편사한량(즉 선수)의 명예 심판일이 되는 까닭에 궁술의 기능을 힘껏 발휘하려는 모든 준비가 흉중에 가득 잠긴 것은 물론이오 의복으로만 말할지라도 속칭 한량의 치레라 하는 말과 같이 화려한 의복으로 치레를 하고 대회장에 입장하여 역시 계급규정의 순서로 착석한 뒤에 편사를 시작한다. 아! 흉허복실의 씩씩한 체격을 비정비팔의 자세로 떡 버치고 서서 궁현을 힘껏 당기어 깍지 손을 뚝 떼이자 시위소리 핑하고 나면서 과녁 맞는 소리가 땅하는 데에는 그 한량은 그야말로 어깨춤이 으쓱 날 것은 물론이오 관중의 긴장한 기세도 충천한다. 이때에 먼저 말한 바 거기한 량은 기를 번쩍 들어 공중에 날리고 장족한량은 망치를 들고 과녁 앞으로 향하여 마치 한량무 를 추려는 것과 같이 두 팔을 떡 벌리고 허리를 움춤거리며 익살스러운 보법으로 과녁 앞에 달려가서 민진 곳을 망치로 두드리며 누가 변이오 하고 창을 하며 동시에 획창 한량은 청상에 서 관중을 향하여 역시 누가 변이오 창한다.

21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17 그런데 초중( 初 中 )에는 변 이라 하고 초중 이후에는 또 변 이라 하는 것이니 그 또 자는 초중과 초중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획창한량이 창을 마친 뒤에 만일 기악의 준비가 있다 하면 제화자 창을 하고 고인( 鼓 人 )은 喨 한 풍류를 외는 바 1,2중에는 장령산곡( 長 靈 山 曲 ), 3중에는 염불곡( 念 佛 曲 ), 4,5중은 타령곡이다. 이와 같은 순서로 반복하여 대회를 마치게 된다. 그런데 편사는 다만 일정한 것이 아니오 편사의 상대자와 혹은 성질에 의하여 자연히 여러 개의 종별이 있으니 그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터편사=는 사정 대 사정의 편사 골편사=구역 대 구역의 편사 장안편사=도성 대 홍제원 남문 밖 아현리 양화도, 북한( 北 漢 ), 서강, 마포, 용산, 한강, 잠 도( 蠶 島 )의 편사 사랑편사=사랑 대 사랑 편사이니 즉 교우중의 편사 사계편사=사계를 조직한 사정 대 사정의 편사 한량편사=한량 중심의 편사 한출편사=한량과 무과출신의 연합 편사 아동편사-한 동네 아동 한량을 중심한 편사 남북촌 편사=남촌 대 북촌의 편사이니 고종 병자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상의 편사 종별은 도성을 중심으로 한 종별이다. 각지방에서는 그 지리상 관계로 종별이 구구불일하여 혹시에는 조성 대 지방 편사도 있었어나 이것은 당시 교통상 관계로 많지 못하였 던 바 편사종별의 예외가 되었다. (12) 민간장려와 사정 편사는 순연히 민간의 궁술 장려법이나 내용으로는 유독 민간의 소위일 뿐 아니요 그 실은 반관반민( 半 官 半 民 )의 제도라 할 수 있으며 또는 경성의 풍속뿐만 아니요 각 지방에서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요컨대 궁술의 장려는 거국일치의 소위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자고로 국민개궁 주의였던 것이 그 궁술장려의 일례에만 의할지라도 명확한 사실이라 할 것이오 동시에 병기충 실정책의 중심적 병기가 궁시에 있었다. 우선 신라군제의 일례로만 볼지라도 신라에서는 특히 궁대( 弓 隊 )가 있었으니 저 소위 이궁( 二 弓 )이라 하며 또는 외궁( 外 弓 )이라 한 것은, 이궁은 즉

218 218 학예지 제18집 2개 궁대를 지칭한 것이오 외궁은 2개의 정규궁대 이외의 궁대를 지칭한 것이다. 이조에 이르러 궁술을 장려한 것이 현저한 것은 사실이나 그 규모가 넓고 깊지 못하였던 것은 회피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 원인이 나변( 那 邊 )에 있었던가 함은 다음 회에서 자세히 서술하려 하거니와 모든 정치상 문제가 통제되지 못하는 동시에 궁술 장려의 문제 그것도 역시 불통일 되어 이래 성쇠가 무상하였던 것이니 돌이켜 생각하건대 만사가 모두 유감 아닌 것이 없다 할 것이다. 민간의 궁술 장려가 성행됨을 따라 사정이 민간적 경영으로 발달될 것은 자연적 추세라 할 것이다. 그런데 민간경영의 사정이 발달되기는 선조 임진 이후부터 비로소 착수되었으니 경복 궁 내의 오운정을 위시하여 당시 장안의 대표가 되는 민간사정은 다음과 같다. 윗대=백호정 아랫대=석호정 서대문 밖=노지사정 한강=풍벽정 이상 4개 사정을 도성 4대 사정이라 하였다. 그런데 저들 4대 사정이 건립된 이후에 사정 건축 열이 남다르게 비등하여 성안 성밖의 새로 생긴 사정이 즐비하여 과연 가관( 可 觀 )을 이루 었다. 그 중요한 것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으니 먼저 남북촌 구별로써 보면 남촌=상선대, 함문교, 세송정, 왜장대, 청학정, 읍배정 등 7곳 북촌=일가정, 열무정, 취운정 등 3곳 또 다시 상하촌의 구별로써 보면 그 수가 약 수십 곳에 이르니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을 예시 하면 다음과 같다. 상촌(윗대)=백호정 이외에 풍소정, 등룡정, 등과정, 운룡정, 풍벽정, 대송정, 동락정 등 7곳 하촌(아랫대)=석호정 외에 좌룡정, 화룡정, 이화정 등 4곳 이상 여러 사정 중에 풍소정, 등룡정, 등과정, 운룡정, 대송정 등 5정을 상촌5장-즉 속에 윗대 오터라 칭호하고 하촌에 백호정, 좌룡정, 화룡정, 이화정 등 4정을 총칭하여 하촌4장-즉 아랫대 네 터라 하는 것이니 상촌5장과 하촌4장은 도성 내외의 여러 사정 중에 대표격으로써 유명한 사정이다. 이상 상촌5장, 하촌 4장 이외에 또한 각처에 산재한 사정이 다하니 가장 유명한 것을 열거 하면 다음과 같다.

219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19 서소문밖=이화정, 태호정 동촌=율목정, 사반정 경희궁 내=경운정 동대문 밖=영풍정, 젓나무터, 썩은바위터 등 3곳 서대문 밖=노지사정 이외에 무반정, 서호정, 무암정 등 3곳 남대문 밖=청학정, 청룡정, 화룡정, 풍학정 등 4곳 수구문 밖=무정 창의문 밖=연융대, 월천정 강교=풍벽정 이외에 화수정, 영무정, 육일정, 평사정, 복화정, 흥무정, 남덕정 등 9곳이다. 이상 총계가 37곳인 바 지금 황학정은 고종 광무 3년에 건축한 것으로서 경성 내외 사정으로 는 최후로 생긴 것이라 할 것이오 그 이상은 모두 선조 임진 이후에 점차 건축된 것이다. 그런데 궁술 그 나마가 역시 쇠퇴되고 또는 시대의 변천이 현저히 달라진 결과 오직 그 명칭과 폐허만 잔존한 것이 많고 또 어제의 형체를 지금까지 보존한 것은 성안과 성밖을 불문하고 수 개에 불과하다. 이 역시 오가는 길손들의 회고가 없지 아니할 것이나 당시 인사의 사업열과 입신열이 그렇게 맹렬하였던 것만은 그 잔존한 폐허 흔적의 한 예로서도 가히 볼 수 있을 것이다. (13) 무과제도의 이상 무과제도의 최초 이상은 다만 궁술을 장려하는 일개방편이 아니었다. 국가의 간성지재를 양 성하자는 원대한 목적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무과의 최중요과목( 最 重 要 科 目 )이 궁술이었으니 만큼 무과제도는 부지불식간에 궁술을 장려하는 일대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아마도 자타가 공 인하는 사실일 것이니 그것의 실증은 오로지 무과규정이 스스로 역사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하여간 무과는 입신양명하는 입문이라 조정반열에 서서 국가정무를 잘 운용하여 국가의 백 년대계를 수립하고 일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남아로서는 고금을 불문하고 누구나 거 기의 뜻을 두지 아니한 자가 없었을 것이니 무과제도가 특히 열혈남아에게 관영이 되었던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동시에 무과에 뜻을 둔 남아로서는 궁술에 유의하지 않니치 못하였으니 무과 와 궁술발달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밀접 관계인 것을 가히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고래 무과의 호번한 사실은 다른 날 설명으로 양보하고 다만 그 최초 유래와 궁술에 관한 일단만을 간단히 쓰려 한다.

220 220 학예지 제18집 고려 의종 4년 7월에 왕이 국학7재를 설치하고 무학을 전공케 하였으니 이것이 무과의 남상 일까 한다. 그런데 조야의 반대적 물의가 빈번하여 그 실현이 아직 결정나지 않은 중에 방황하 다가 왕 11년 4월에 필경은 왕의 엄명으로 시항은 되었으나 기대하던 바와는 무학의 발전이 부진하였다. 그 뒤 인종 11년에 무과급제자를 문과급제자와 동일대우로써 채용하였으나 의연 히 무과의 성적이 양호치 못하였다. 공양왕 2년에 이르러 송래의 불철저하였던 규정을 개선하 여 소위 인신기해년제로써 무과를 장려하여 1등 3인, 2등 7인, 3등 23인을 정원으로 하고 일등 시험은 제가병서의 보예( 步 藝 ) 정통자이오, 2등 시험은 병서 병서약통, 무예조습( 粗 習 )자이며, 3등 시험은 병서 및 무예의 상식이 있는 자이니 무과제도가 이때로부터 기초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이조에 들어와서 태조 6년에 삼군부에 명하여 사인소 ( 舍 人 所 )라는 것을 부서를 신 설하고 경학, 병학, 율학(법학), 수학, 의학, 궁술 등 6학을 전공케 한 바 즉 문무양과의 공학제 ( 共 學 k 制 )이다. 그래서 대소신료와 한량 등 자제 중에 성동( 成 童 ) 이상자로서 아직 벼슬에 아 나가지 아니한 자를 모아서 가르쳐서 뒷날 과거로써 채용케 하였다. 그 과규는 간단치 아니하 므로 대략 말하면 고려 과제와 같이 갑신사해 년에 경성은 물론이오 지방 각처에서 일제히 초시를 거행하고 이듬해 자오묘유년에는 초시의 입격자를 경성에 집합하여 궁술 이외에 기사, 기창 등을 시험하 고 다시 강서로써 28인을 뽑았으니 이것을 회시 라 하였다. 회시에 입격자는 다시 어전 시재 를 하는 바 이것을 전시 라 하였다. 초시는 2종이 있으니 왈 원시, 왈 향시이다. 원시는 훈련원 에서 거행하는 바 정원이 78인이오 향시는 각도 병마절도사가 시재하는 바 그 정원은 각 도가 다르니 경상도 70인, 충청 전라도 각25인, 강원 황해 함경 평안 은 각 28인이다. 이외에 또한 도시( 都 試 )라는 것이 있으니 도시는 매년 춘추 양 시기에 거행하는 바 세조 2년 데는 130근의 궁력을 당기는 자로만 시재에 응하였으니 즉 장사시험이라는 별칭이 있었던 것 이 사실이었다. 특히 선조 임진년에는 이충무공의 제의로써 주사과를 특설하여 해전궁술을 장 려하였으니 한산도를 위시하여 부산, 거제, 경도, 전남 등 해만은 주사의 근거지였다. 그런데 무과시에 쓰는 궁시는 대개 종류를 지정한 바 예를 들면 육량전은 3시를 쏘되 그 보수는 150보 이상이오, 목전은 그 시수가 육량전과 동일하나 보수는 140보이니 초시복시의 규정이 같다. 이상과 같이 무과의 제일 중요시하던 것이 즉 궁술이요 그 다음은 태도창( 太 刀 槍 )-즉 창법이 다. 그러므로 무과에 응시코저 하는 자는 궁술이 숙달치 아니하고서는 출신 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무과는 궁술 발달의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무과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후일을 기하

221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21 여 다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4) 관한( 官 閑 )의 내력 무릇 군인은 국가의 간성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무위가 굳세지 못하고는 내로는 국방을 완전히 못하고 외로는 국위를 떨치지 못하였다. 부전( 不 戰 )을 주론하고 군축을 제의하던 전례 가 불무하였으나 이것은 평화주의 외입장이의 수작에 불과한 것이오 기실은 부국강병을 구가한 것이 모르면 모르나 고금불변의 통례일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문귀무천의 차별 관념이 심하였으니 인간사는 대모순의 지배하에 운행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고려 시대 무사 중부( 仲 夫 )의 반란은 종래 문귀무천의 폐단을 숙청하려던 행동이었던 것은 이미 옛 사기가 입증하는바가 아니랴. 조선 궁술은 자고로 국가로서도 필요시하였고 국민으로서도 중대시하였다. 당제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참패귀국 후에 고구려국의 궁술은 국가의 보배 라 찬탄한 것이 偶 感 을 토한 것이 아니다. 국가의 보배라 하는 그 궁술을 가졌고 그 위력을 발휘하는 지능을 가진 조선인은 곧이어 문귀무천의 차별 관념이 더욱 심하여 점차로 무학과 무예가 부진하였으니 무과제도를 신설한 것은 무학 무예의 진작을 목적한 것이나 저 문귀무천의 뿌리 깊은 관념으로 말미암아 무과의 목적을 달성치 못하게 된 비운이 거듭하였으니 관한량의 출처는 그 문귀무천의 숙폐를 일소하려고 국왕이 강행한 제도이다. 저간의 파란곡절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이에 일고할 의미 를 가진 줄로 생각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무과제도는 고려 의종 4년에 기안이 된 것인 바 당시 반대의 물의가 빈번하여 약 8개년간을 미루어 해결하지 못한 일대 현안이 되어 있다가 동11년에 왕이 전교하 였으되 문무양학은 국가교화의 근원이오 양학 설립은 장래 장상을 준비함이니 국민은 힘써 시행하라: 이와 같이 왕명으로 그 실시를 강요하였으나 의연히 무학이 부진하였으며 이래 무과제도는 있는 듯 마는 듯 한 상태에 있었다. 공민왕 원년에 이목은이 상소하여 무과설정을 주론하였으 나 역시 일편 공론에 돌아가고 말았다. 공양왕 이후 이조에 들어와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실현 이 되었으니 환언하면 려조 이래 일대 현안이던 그 무과제도는 이조에 이르러 완전히 해결된 것이다. 이조의 무과제도는 국초 당시에는 비교적 완비하여 과시 문무양학은 국가교화의 근원이 된

222 222 학예지 제18집 사실을 보게 되었으니 궁술의 발달도 가관할 것이 많아서 우선 국왕으로는 이태조를 비롯하여 태종, 세조이며 신민 중으로는 이지란 최윤덕 김덕생 등 선궁가가 배출하였다. 그러함을 불구 하고 문무차별의 숙폐는 의연 계속하여 려조에서 천무부( 賤 武 夫 )라 대하던 인격벌명사는 불변 하였다. 그런데 선조 임잔 이후에 무과가 매우 힘써 시행되었으나 광해군에 이르러는 과풍이 부패하 고 과규가 문란하여 소위 만인과( 萬 人 科 )라 하는 일대 폐풍이 생겨나 마침내 무과의 가치는 하루하루 땅에 떨어져 당시 사대부 공경가의 자질은 무과응시를 큰 욕으로까지 생각하여 이미 무과제도는 존폐의 비운에 싸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12년데 무과초시의 성적이 매우 불량한 것을 국왕이 친히 보고 백시전교( 白 時 傳 敎 )를 내렸으되 근래 무과 중에 쓸만한 자가 적거늘 금번 초시에 사대부 자제는 십여인에 불과하니 장래 임용을 어떻게 바랄 것인가? 국가가 인재를 씀에 어찌 문무를 가리리오 마는 무인인 즉 사람들이 모드 경멸하는 고로 사대부 자제가 과거에 응치 아니함이니 나랏일이 한심 하다. 여러 신하의 자제는 무과에 힘쓰라. 하여 먼저 무천의 숙폐를 통론하고 여러 신하의 자제로 하여금 무예를 권장할 것을 엄숙히 훈계하였다. 그리고 동 16년에 또 다시 전교를 하여 가로되 사람이 충성을 하는데 어찌 문과 무가 다르 리오? 근래 무과 방목 중에 사대부 자제가 끊어진 것은 사족이 무업을 섬기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라 무과를 설치하여 권장하라 하사 이에 권무청이라는 관서를 신설하고 사대부 자제로써 궁술을 학습케 하였으니 이것이 속칭 관한량 이다. 요컨대 관한량의 출처는 조선의 무풍, 무예가 부진하는 것의 선후책을 강행한 것이니 조선 궁술의 성쇠가 여하한 것을 여기에서 가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15) 결론 궁사도의 이상 이미 서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조선 궁술은 다만 무예로만 인정하고 그 가치를 운위한 것이 아니다. 일편으로 병기적 가치를 발휘하려고 하는 목적, 다른 한편으로는 떳떳한 궁도가 엄연히 존재한 데서 더욱이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금일과 같이 병기문명이 최절정에 달한 이때에 그 궁시를 논하는 것은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것보다 시대에 뒤떨어진 어리석은 논의가 극하다 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논박을 부인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병기적 가

223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23 치로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할지라도 그 궁도로서는 현대 스포스계에 추천한다 할지라도 하등 불합리한 운동이라 할 수 없고 불합법한 경기라 할 수 없을 것을 믿는다. 특히 정신상 수양의 효과로는 도리어 다른 운동 경기에 비하여 무게 가 더 높다 할런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궁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 궁술의 정신이 되고 골자가 되는 그 중도를 일언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 로마의 기사도와 일본의 무사도가 그 국민성의 독특한 기풍을 함양한 특생이 있었다 하면 조선의 궁도는 조선 민족의 독특한 기풍을 훈도( 薰 陶 )한 일종의 대훈련이라 할 것이니 조선인이 그 독특한 기풍을 온전히 발휘한 것은 삼국시대이다. 그러면 궁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골자를 따져서 말하면 리망취진( 離 忘 取 眞 ) 출신보국( 出 身 報 國 ) 등등이다. 이망취진이라는 것은 순연히 궁사 개인의 자신수양 문제이오 출신보국이라 함은 부과급제로서 국가 간성이 되어 알충보국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량은 호협심이 장하고 용감성이 부한 것을 인격의 중심으로 하였으니 이 같은 수양이 즉 이망취진의 도로써 수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쉬운 일례로만 말할지라도 궁술을 연습할 때에 먼저 망사와 실상을 버리지 아니하고서 든 몇 백 발을 발시하더라도 적중할 수 없으며 비록 그 정신상으로는 정심화기를 하였다 할지 라도 직립자세를 무시할 때에도 역시 기능이 떨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량이 활을 잡을 때에 한량이 정심화기의 공작을 아니치 못하는 것이니 흉허복실의 체격을 취하는 것은 그 정심화기 의 공작을 목적한 것이오 직립하되 반드시 비정비팔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용감하고 씩씩한 기상의 공작을 목적한 것이다. 하여간 고래로 사풍이 엄격한 것은 즉 그 궁도의 실천을 목적한 것이다. 황차 동명성왕께서 궁술은 지, 인, 용의 입문이오 충효쌍전( 忠 孝 雙 全 )의 대로라 명시한 것은 궁도의 이상을 상세히 주석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궁도를 실천하지 못하는 궁술은 능히 쏘아서 능히 맞출지라도 궁사라 못할 것이니 사적 고찰은 결국 이조 성종 이후에 있었던 것이라. 어떤 까닭으로 하면 선조 임진 이후로부터 궁술의 장려가 다른 시대 다른 왕조에 비하여 현저히 성왕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조의 고질이라 칭호하는 사화쟁론의 해독이 역시 궁도에 까지 파급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종

224 224 학예지 제18집 이래로부터 이조의 문화가 난숙기에 들어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이 침체로부터 점차 부패에 파묻히다가 연산조 때에는 사화의 진혈이 들고 선조 때에는 당쟁의 독 뿌리가 퍼 져나가는 대로 국가를 파먹으니 문화의 일부분에 불과한 그 궁도 궁술이 온전할 길이 없을 것 은 자연적 추세이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숙종께서 무학부진은 국래한심이라 하는 비장한 전교가 있게 된 것은 조선의 종래 찬연하였던 궁술과 궁도가 어떻게 부패하여 땅에 떨어졌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바이다. 그러나 숙종 이후에도 권무의 실상은 좀처럼 나타나지 못하고 의연히 궁도가 부패하고 궁술이 부진하는 통탄할 일만이 계속 되었다. 일례를 볼지어다. 수년 전까지 조선 화류계에 소위 4처소 외입일근( 一 近 ) 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그 중에는 한량이 외입의 중심세 력을 잡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궁도가 부패되고 한량의 지조가 타락이 된 실증이 아니고 무엇이랴. 돌이켜 과거 궁술의 문명을 생각할진대 유심의 장탄이 없지 못한 것 이다. 오늘날 경향간에 궁술대회의 소식이 왕왕 들리나 요컨대 이것은 일종의 오락화 일종의 운동화에 불과한 것이오 옛날 궁도의 이상이 아직 그대로 남았는지 여부는 의문일까 한다. 필자=재료의 고증, 사실의 상위가 불무할 것은 다대한 유감이나 그 정정은 사계 선배의 지도 를 바라며 이것으로써 조선 궁술의 사적 고찰을 약술하고 붓을 놓는다. 2) 조선궁술회연구회장 대담기사 4) 원문출처 : 조선일보( /1.3) 기사내용 : 조선궁술연구회 성문영 초대회장의 대담기사 弓 術 -묵은 朝 鮮 의 새 香 氣 大 弓 後 裔 의 面 目 朝 鮮 武 術 의 精 華, 六 弓 手 의 百 發 百 中 에 台 擥 德 國 親 王 驚 嘆 大 弓 後 裔 의 面 目 朝 鮮 武 術 의 精 華, 近 世 名 弓 成 翁 의 回 舊 談 李 朝 의 全 盛 期 는 宣 祖 當 代, 物 換 星 移 * 壯 老 年 스포츠로 옛날의 조선을 중국 사람들은 동이( 東 夷 )라고 부르고 또는 대궁( 大 弓 )이라고도 일컬었다고 4) 조선일보 1938년 1월 1일, 3일 양일간에 걸쳐 조선궁술연구회 성문영 초대회장의 대담기사를 날짜 구분없이 원문을 현대어로 고치고 하나의 문서형태로 재구성 했다.

225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25 하는데 이 대궁이라는 이름은 그 당시 이 땅의 할아버지들이 활을 뛰어나게 잘 쏘았다는 데서 연유해 생긴 것 이라고 한다. 이처럼 활이란 것은 옛날 조선의 상징( 象 徵 )으로까지 되어있다. 고대조선의 숙신( 肅 愼 )의 고시석노( 楛 矢 石 砮 )와 예의 단궁( 檀 弓 )과 고구려( 高 句 麗 )의 맥궁 ( 貊 弓 )이 모두 각각 특이하게 뛰어난 활이었으며 그 후 삼한시대( 三 韓 ) 삼국시대( 三 國 ) 고려시 대( 高 麗 ) 조선시대( 朝 鮮 )를 통하여 이 궁시( 弓 矢 )가 가장 중요한 무기였고 가장 보편화된 무예 였었다. 오늘날 총포( 銃 砲 )시대가 벌서 공중전( 空 中 戰 ) 화학전( 化 學 戰 ) 시대로 변천한 때에 있 어서 새삼스레 옛날 그 시절에 천하를 울리던 궁술( 弓 術 )을 찾아서 무엇하리요마는 비록 시대 가 변천하고 물형이 달라졌다고 하드라도 예궁예시( 禮 弓 禮 矢 )하며 향음주례( 鄕 飮 酒 禮 )하는 궁도 ( 弓 道 )의 동양무사도적 호백은 현대의 무사도에 오히려 능가함이 없지 않아 이제 그 옛날의 빛나던 상무( 尙 武 )의 길을 오늘날 그 잔재의 형태에서 나마 그 나머지 향기를 찾아보려 합니다. 이제 전조선에 흩어져 있는 사정( 射 亭 )을 망라하야 조직된 조선궁도회( 朝 鮮 弓 道 會 )의 현재 회장이요, 근세조선 궁도부흥의 선구( 先 驅 )가 된 황학정( 黃 鶴 亭 )의 사두( 射 頭 )로 있는 성문영 ( 成 文 永 )씨를 방문하야 조선궁도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무얼 이야기 할 것이 있어야지요 이야기한다면 모두 대강 다 아는 것 뿐이지오 조선에 궁술 이 전하여 내려온 지가 벌서 수 천년이고 이 궁도는 비단 조선의 무술일 뿐만 아니라고 하여도 좋을 만큼 발전하여 내려온 것 이지오. 아마 활이 처음 생기기는 아득한 옛날에 사람이 짐승을 잡아먹느라고 한 기구로서 생각해낸 모양입디다. 또 누구의 말을 들으면 아주 옛적 사람의 지 혜가 발달되지 못 하였을 적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묻을 줄을 모르고 그대로 들판에 내 버려두었는데 그때 날 짐승과 길짐승들이 그 시체를 쪼아 먹음으로 그 부모 형제들의 시체가 눈 앞에서 무참하게 쪼여 먹히는 것을 차마 보다 못하여 이것을 묻을 줄은 채 생각하지 못해내 고 그 눈에 보이는 침해를 막으려고 생각해낸 것이 활의 원시형( 原 始 形 )인가 봅니다. 이런 말이 정말인지는 모르되 그러하면 이 활이 처음 나던 동기로 부모를 생각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효제( 孝 悌 )의 관념에서 우러났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것이 차차 수렵( 狩 獵 )용으로 쓰이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부락과 부락이 또는 한 나라와 한 나라가 싸우는데 무기 로 사용되게 되었나 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것이 동양무사도의 으뜸되는 자리를 차지하야 옛날부터 활이란 예악사어서수( 禮 樂 射 御 書 數 )란 육례의 한 가지로 까지 되어 읍양이승( 揖 讓 而 升 )하고 기쟁야군자( 其 爭 也 君 子 )하며 불원승기( 不 怨 勝 己 )하며 반구저기( 反 求 諸 己 )하는 사풍이 완성되어 무사도( 武 士 道 )의 정수( 精 粹 )가 되어 이것이 한갓 무술로 뿐 아니라 군자의 심신수양

226 226 학예지 제18집 의 가장 적절한 것이 되었지요. 이조( 李 朝 )때에 들어와서 궁술이 성해지기는 아마 임진란( 壬 辰 亂 ) 이후인가 봅니다. 선조( 宣 祖 )께서 군비의 충실을 통감하시고 병화( 兵 火 )에 없어진 영문( 營 門 )과 사정( 射 亭 )을 설치하시 고 궁술을 장려 하셨는데 특히 경복궁( 景 福 宮 ) 건춘문( 建 春 文 )안 넓은 뜰에 사정을 신축하시여 오운정( 五 雲 亭 )이라고 명명하셔서 민간의 일반 한량( 閑 良 )에게도 활을 쏘게 하셨답니다. 이때 부터 경향을 물론하고 관설 혹은 사설의 사정이 도처에서 일어나서 조선의 궁술이 일대 진보를 하게 되고 무과에도 궁술이 주요한 과목으로 선정되었던가 보오 이리하야 한참 오랫동안 조선 에 궁술이 성히 전하여 내려와서 궁술이 성할 때 국운이 흥하고 궁술이 쇠 할때에는 국운까지 쇠하여지는 관계를 가지고 내려오더니 이조 말엽에 와서는 점점 궁도가 쇠잔하여가서 군문궁 수( 軍 門 弓 手 )가 아주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다만 요즈음 말로 체육용으로 각궁유엽전( 角 弓 柳 葉 箭 )이 겨우 민간에서 연맥하여 왔을 따름이오. 새로 수입된 총기( 銃 器 )의 서양식 병대 교련도 하잘 것 없는 형편이었소 이리하랴 그전에는 전조선 각지에 임립( 林 立 )하였던 사정도 모조리 황폐하여 버리고 말았었오 묵은 조선이 남기고간 이 땅의 늙은 기사( 騎 射 ) 성노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야기 같이 이조말엽에 조선의 궁술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었는데 고종( 高 宗 ) 기해( 己 亥 ) 년에 궁술을 장려하야 신체를 발육 시키라는 윤음( 綸 音 )이 내린 때로 부터 다시금 경향에 궁도 가 부흥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 것 이지오. 그런데 그때 궁도가 다시 부흥되든 서슬에 내가 직 접 본 것을 이야기하여 보리까? 그때가 기해년이니까 꼭 삼십구년전 일이겠소 그때 서양 덕국 ( 德 國 )의 친왕( 親 王 )이 조선시찰을 왔었지요. 덕국이니까 지금의 독일( 獨 逸 ) 나라겠지오. 그 친 왕의 이름이 누구던지는 모르겠오만 좌우간 이 덕국친왕이 와서 덕수궁( 德 壽 宮 )에서 이태왕( 李 太 王 )께 폐현( 陛 見 )하였는데 그가 묻기를 조선에 고유한 무술이 있거든 구경시켜 달라고 하였 답디다. 그런즉 그때에 잇던 병정의 총가지고 훈련하는 것이야 별고유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조선에는 고래로 궁술( 弓 術 )이 전해온다고 하야 이 궁술을 보이기로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열 다섯 살때 부터 활쏘기를 배워서 지금까지 오십오년이나 되었고 스무 한살 때에 장충단( 獎 忠 壇 )에서 각지의 응모자를 여섯달 동안 시험하여 그 중에서 가장 시수( 矢 數 )가 많은 사람을 뽑는 회시( 會 試 )에서 우승을 하였오만 그 후 궁술이 쇠퇴하여 그때 고종 기해년에는 내가 활을 폐지하고 집에 들어 앉은지가 사년 동안이나 되고 아무도 활쏘는 사람이 없던 때인 데 졸지에 내가 집에 있으라니까 덕수궁에서 이태왕께서 무감( 武 監 )을 내여 보내시어 시방 경

227 일제 강점기의 국궁연구 기초자료 227 성 중학교 자리에 있던 대궐안에서 관병식( 觀 兵 式 )을 하는데 활 쏘는 것을 덕국친왕에게 구경 시킬테니 시작을 지체 말고 곧 활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분부가 내렸지요. 그러더니 좀 있다 곧 다시 기별이 나왔는데 그 대궐에서는 관병식만하고 활은 경복궁( 景 福 宮 ) 후원에서 쏜다는 문표( 文 票 )가 전달되었소. 이래서 황급하게 활을 가지고 경복궁으로 들어 가보니 그때 장안에 서 이름난 궁수( 弓 手 )로 여섯 사람을 뽑아들였습니다. 그전 활쏘아 과거보이던 중일각( 中 日 閣 )에는 덕국친왕과 그 공사( 公 使 ) 영사( 領 事 )며 그 수 원등 덕국인 남녀가 십여명이 와 있고 궁내대신( 宮 內 大 臣 )이 태황제의 대리로 친왕을 접견하고 있습디다. 그래 여섯사람이 활을 쏘기 시작하였는데 대개 화살 다섯을 잡고 네 개 또는 다섯 개를 땅땅 마치니까 화살이 관혁에 맞출 때마다 덕국인의 박수갈채가 일어납디다. 그러더니 이윽고 친왕이 관혁으로 가서 화살을 손으로 빼여보라고 하는데 그 때 살이야 살촉이 길고 커 서 쇠장돌이 아니면 어데 빼져야지요. 그러니 친왕이 몸소 활을 쏘아 본다고 쏘니 활시위가 자꾸만 귀볼 때리기만 하고 맞어 주어야지요. 그래도 친왕이 기운이 장사입디다. 연달아 오십 개를 쏩디다 그려 그러니까 오십개째에 한 개가 관혁에 맞습디다. 그러니 웃음소리와 박수소리 가 터져 나오더군요. 이날 친왕이 대개 다른 곳에서는 한 곳에서 오래있어야 오분 가량밖에 구경하기를 안했는데 이 활터에서는 반나절을 더 보내고 즐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태왕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날 석양때에 파사( 罷 射 )하고 돌아갈 즈음에 여섯궁수에게 주대( 酒 代 )를 하사하시고 그 이튼 날 활 한장식을 주셨지요. 그후 덕국친왕이 작별하고 떠날 때에 말하기를 조선 활이 군기에 없지 못 할 물건인 것이 총은 한명을 쏘면 한명이 마자 죽지만 활은 활촉에 독약을 칠하야 쏜즉 맞아서 곧 죽지는 않고 군사가 폐인( 廢 人 )이 되고 말터이니 이 폐인된 군사를 끌고 다니 느라고 성한 군사까지 못쓰게 될 터인즉 총은 천명이 맞으면 천명이 못쓰게 되나 활은 이천명 이 못쓰게 되지 않겠느냐 고 하였답디다. 하여튼 이 덕국친왕이 한번 다녀간 뒤로부터 이태왕께서 여태 없어지다 시피한 활을 다시금 장려하시게 되었는데 그때 궁술 장려의 칙령을 내가 받았었오. 처음에는 지금 덕수궁 보 리에 터를 잡고 활을 쏘았는데 이태왕을 근시하는 내시와 조관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서 습사( 習 射 ) 를 하였지요. 그후 경희궁( 慶 熙 宮 ) 북쪽기슬, 지금 경성중학교터에 사정을 새로 지어서 황학정 ( 黃 鶴 亭 )이라고 하였는데 현 이왕전하( 李 王 殿 下 )께서 총재가 되시고 내가 우궁수( 右 弓 手 )로 임 명되었지요. 그 후 지금 전매국( 專 賣 局 ) 관사를 짓는 통에 현재의 사직공원뒤로 옮겨왔소.

228 228 학예지 제18집 현재 전조선 각지에 수백의 사정이 있어 다만 체육운동으로 활을 쏘고 있으나 활이라는 것이 원래 법이 있고 예절과 인사를 차리는 군자의 길로서 지금 일본 내지의 궁도는 그대로 잘 발전 되어여 있나봅디다. 지난 소화 삼년에 나와 몃몃 동지가 발기하야 조선궁술연구회( 朝 鮮 弓 術 硏 究 會 )라는 것을 조직하였는데 소화 칠년에 그 명칭을 변경하야 조선궁도회( 朝 鮮 弓 道 會 )라고 하 고 매년 춘추로 궁술대회를 열어 궁도를 장려하고 있지요 이 궁도회의 총재( 總 裁 )는 경기도지사로 되어 있고 부총재는 경성부윤으로 되어있지요. 활이 란 것은 몸을 튼튼히 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나아가서는 그 지키는 예절이 미풍양속( 美 風 良 俗 ) 을 만들어 내는데까지 영향하는 것으로 젊은 사람들이야 여러 가지로 운동이 있겠지만 중년 이상에게는 이 활을 제일 권하고 십소.

229 2011육군 박물관 연보 229 부 록 2011 육군 박물관 연보 ( ~ ) Ⅰ. 학 술 활 동 1. 강원도 원주시 횡성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1) 조사기간 : (예비조사 : , 본조사 : / ) (2) 대 상 지 : 노성 산성(평창), 대화 산성(평창),애산리 산성(정선), 신월리 산성(정선), 송계리 산성(정선), 고성리 산성(정선) (3) 조 사 자 : 학예사 안재한, 보존처리사 이두원 2. 대 외 활 동 (1) 한국박물관협회 신년 교례회 참석 - 일자 / 장소 : 일 / 국립중앙박물관 - 대 상 : 박물관장 대령 최 정 민 (2) DMZ 박물관 교류협정 체결 - 일자 / 장소 : 1. 27일 / DMZ 박물관 (강원 고성) - 대 상 : 박물관장 등 4명 (3) 2011년 우리가족 박물관 탐방 참여관으로 신청 - 일자 : 일 (4) 한국 대학박물관협회 세미나 및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장소 : / 한국교원대학교(청주)

230 230 학예지 제18집 - 내 용 : 춘계학술대회 및 정기총회 참석 - 대 상 : 학예사 권소영 (5) 한국박물관협회 사업설명회 참석 - 일 시 / 장 소 : / 국립중앙박물관 - 내 용 : 2011년 주요 사업 설명회(전시 지원 사업 포함) - 대 상 : 학예사 안재한 (6)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외규장각 의궤") 참석 - 일시 / 대상 : / 박물관장 등 8명 (7) 한국대학박물관협회 세미나 및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장소 : / 제주대학박물관 - 대상 : 학예사 권소영 (8) 서울 동부지역 대학박물관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대상 : 학예사 권소영, 보존처리사 이두원 (9) 영집 궁시박물관 특별전 참석 - 일시 : 대상 : 박물관장, 학예사 권소영 (10) 서울특별시 박물관협의회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대상 : 박물관장 3. 교 육 (1) 문화유산 방제 국제심포지엄 참석 - 일자 / 장소 : / 국립중앙박물관

231 2011육군 박물관 연보 내 용 : 문화유산 방제에 대한 전락적 접근 - 대 상 : 보존처리사 이두원 (2) 공군 사관학교박물관 군사 세미나 참석 - 일시 / 대상 : / 박물관장 등 3명 (3) 국방부 군 문화재 전통문화학교 관리교육 참석 - 일시 / 대상 : / 6급 김용환 (4) 보존과학 연수 참가 - 일시 / 장소 : / 국립 중앙박물관 - 대상 : 보존처리사 이두원 (5) 박물관 학예사 전문교육 - 일시 / 장소 : / 국립 중앙박물 - 대상 : 학예사 권소영 (6) 노원구 자원봉사자센터 교육 - 일시 / 장소 : / 노원구보건소 - 대상 : 학예사 권소영 (7) 한국대학박물관협회 세미나 및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장소 : / 제주대학박물관 - 대상 : 학예사 권소영 (8) 박물관 심포지엄 참석 - 일시 / 장소 : / 국립중앙박물관 - 대상 : 6급 오경래, 6급 김자현 4. 간행물 발간 (1) 육군박물관, 강원도 평창군,정선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2) 육군박물관 대표유물 도록 발간

232 232 학예지 제18집 Ⅱ. 전시 보존 및 시설관리 1. 육군박물관 (1) 박물관 특별 기획(국방현안 바로알기) 전시 - 기 간 : 계속 - 내 용 : 멈추지 않는 총성 계속되는 북한의 위협과 도발 - 주요 전시물 : 연평도 포격 포탄 10여점 (2) 박물관(청헌당) 군 관 합동 소방훈련 - 일시 / 기관 : 2011년 일 / 노원소방서 - 내 용 : 서울시 지정문화재(청헌당), (3) 화랑정 대보름 삭회 특별 전시 - 기 간 : /육사 화랑정 - 내 용 : 흑각궁 등 2점 (4) 박물관 탐방표시판 부착 - 기간 : 내 용 : 국립중앙박물관 주관의 '2011년 우리가족 박물관 탐방'행사 참여 기관으로서 인증 사진촬영용 표지판 부착(박물관 로비) (5) KBS춘천방송국 촬영 지원 - 일시 : 내 용 : 6.25전쟁 다큐멘터리 '장군 백선엽' 제작용 유물 촬영 지원 (6) 군사사학과 국사 과목 박물관 현장수업 지원 : 대상 / 시간 : 1학년 문과생도 3개반 / 08:00 15:00 (7) 박물관 전시보존 환경 개선 - 박물관 강당 누수 조치 - 다중시설의 실내공기 측정

233 2011육군 박물관 연보 233 (8) 소장유물 보존처리 - 대 상 : 사서화류(70점) 탈산처리 (9) 옥외전시물 정비 - 일시/ 대 상 : / 홍의포 등 16점 (9) 국립중앙박물관 대여유물 위탁 보존처리 - 일시 / 기관 : 8. 2 / 국립중앙박물관 - 대상 : 조선시대 이봉상 갑주 2. 육사 기념관 (1) 기념관 전시환경 개선 - 생도생활관 벽면 도색 : 생도 생활관 도배 / 비품 교체 : 유물 구입 : 11종 25점 Ⅲ. 유물 및 자료 수집 순 번 유 물 명 수량 (점) 계 25 1 화문 황동장 환도 1 2 환도 (조선시대 실전용 도검) 1 3 화포식 언해 1 4 고 풍 1 5 홍패교지 칙명 9 6 병조병과 교지 5 7 홍 패 2 8 행 군 수 지 1 9 문 월 당 집 2 10 금성 효충열록 1 11 반공 국민 가용집 1

234 234 학예지 제18집 2. 유물 수증 : 26건 66점 기증번호 기 증 일 기 증 품 11-1 수량 (점) 계 66 임춘수 소령 화랑무공훈장 수 첩 (사본) 사 진(원본1 및 사본4) 졸업 앨범 편 지 보국 훈장 화랑무공 훈장 예복 (상,하) 전투복 (상,하) 철 모 지휘관 요대 지 휘 봉 자서전 (전투) 훈장 (정장) 육사 모포 앨 범 김화수 중위 충무무공훈장 김화수 중위 전사자 통지서 육군사관학교 제9기 졸업기념 사진첩 김화수 중위 편지 김재이(김화수의 처) 군인유가족 기장 수여증서 김재이(김화수의 처) 국민훈장 석류장 고 강재구소령 태극무공훈장 부장, 약장, 일기 등 프랑스 사관학교 예도 프랑스 예복 외국사관학교 교류/방문 기념패 기 증 자 임옥자 김정수 차규헌 (26대학교장) 김용해 미망인 온영순 이 주왕 (화랑리더십센터) 박종선 (49대학교장)

235 2011육군 박물관 연보 235 Ⅳ. 홍보활동 1. 소장품 대여 - 미8군 한국지원단 평택지원대 (6.25전쟁 한국전투복 상.하 등 6점) : 일 - 국립 민속박물관 ( 故 강재구소령 유품 등 4점) : 사단 (광복군장교 군복 등 10점) : 한양대 박물관( 진위부대인 등 4점) : 국립중앙 박물관(무관초상- 쵀용신 구군복 무관상) : 학국학 중앙연구원(홍대묵 해유문서 ) : 제2작사(광복군 장교군복 등10점) : 과천시 (한국경비대장교복 등 8점) : 국립중앙박물관 (이봉상 갑주1식) : 경기도 박물관 (조총, 마경초집언해, 현자총통) : 기갑 여단 (M1소총 등 9점) : 제2사단 (무관복장 8벌, 병사복장 8벌) : 육군 군연소(광복군사령장 등 25점) : (2) 장기 대여 - 강화역사관(조총 2종 2점) : 독립기념관(일본도 등 4종 4점) : 육군 기무학교(방첩부대기 1종 1점) : 육본 군연소(마제석검 등 10종 10점) :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미군우의 등 21종 21점) : 화천군 베트남파병용사 만남의 장(권총 등 61종 61점) : 전쟁기념관(광복군 모자 등 3종 4점) : 해사박물관(신제총통 3종 3점) : 육군 기록정보관리단(신태영지휘봉 등 4종 4점) :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김백선 유묵병풍 등 2종 2점) : 육군 기록정보 관리단(학도호국단 수첩 등27종) :

236 236 학예지 제18집 (3) 유물 자료 사용 승인 번호 내 용 일 자 청아출판사 명장열전-나라를 구한사람들 출판용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사진자료 제공 엔쓰리 디엔티 역대대통령 휘호 표구 제작 요청자료: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 전두환대통령, 김영삼대통령 휘호 영천시 최무선과학관 전시용 자료복제 요청 요청자료: 현자총통, 황자총통, 삼총통, 차중전, 조총, 화차 주)시몽포토에이전시 EBS 초등5년 사회 출판용 요청자료: 부산진 순절도 주)사회평론 용선생님 친절한 한국사 출판용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조총, 호준표, 천지총통 국제방송교류재단 한국 정신문화의 요람, 서원 출판용 요청자료: 동래부 순절도 현충사 도록 영상자료 출판용 요청자료 :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장양공 정토시전부호도 청아출판사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사건 출판용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오가작통 청아출판사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사건 출판용 요청자료: 초창기 육군장교 동정복, 북한육군 동정복 청아출판사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사건 출판용 요청자료: 독립신문(제185호 1920년6.22자 봉오동전투기사 주)SHE'S MON 201년 6월호 전쟁이 품고 잇는 이야기 출판용 동래부 순절도 전상언 회화에 나타난 조선시대 궁술의 잔신 출판용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이화여자대학교 도록 출판용 요청자료: 불량기 자포 강원민방 GTB창사10주년 특집 찬란한 기록유산 의궤 방송 이미지 요청자료: 화성부성 조도 국립 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기획전 사진제공 요청자료: 채용신 구국 복무관상 사회평론출판사 서양여성 그리고 동아시아 회화 사진제공 요청자료: 채용신 구국 복무관상 국립이천 호국원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 사진 제공 요청자료: 역사적 주요사건,인물

237 2011육군 박물관 연보 237 번호 내 용 일 자 도서출판 램블러 조선의 무 사진제공 요청자료: 불량기,호준포 부산시 동래구 문화가 쉼쉬는 벽화 사진제공 요청자료: 동래부 순절도 동명대학교 동래성전투 재현 포토 전 사진제공 요청자료: 동래부 순절도 주)교원 교육본부 아동도서 팀 한국을 이끄는 사람들 사진제공 요청자료: 대장군포 달성군 달성 한일 우호관 사진제공 요청자료: 부산진 순절도 주)창 비 내가 원래 머였는지 알아 출판 사진제공 요청자료: 유제 도시락 주)미디어 소풍 다큐 동의보감 출판 사진제공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주)사계절 출판사 한국사 통사 출판 사진제공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대완구 주)리베 출판사 역사교양시리즈 출판 사진제공 요청자료: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주)파랑새출판사 어린이 역사책 출판 사진제공 요청자료: 승자총통, 천지총통, 비격진천뢰 관람인원 ( ~ ) : 44,853명 1. 전 출 (1) 학예사 안재한(박물관 육본) : Ⅴ. 인사이동 2. 전 입 (1) 6급 오경래 (3사단 박물관) : (2) 6급 김자현 (군사연구소 박물관) :

238 238 학예지 제18집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제 1 집 ( 1989 ) 창간사 육군박물관 보물 10점 승자총통계 실태소고-현존유물을 중심으로- / 이강칠 다관식 고대화기 / 김순규 육군박물관소장 주요 고화기 / 모동주 조선시대 궁시의 발달 / 박윤서 자료소개 / 권영란 육군군사박물관소장 현대총기류 목록 제 2 집 ( 1991 ) 조선전기의 화약병기 대외급비책 / 허선도 호준포의 실태소고 / 이강칠 노 / 김순규 조선전기의 병역제도 / 이현수 고려 무인정권기의 병제운용 / 김대중 소개 철제유물 과학적 보존처리 / 박윤서

239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39 제 3 집 (1993, 정하명 교수 정년기념 특집) 정하면 교수 근영 발간사/약력 저작목록 1406년 조흡의 사령장에 대하여 / 정구복 조선시대 환도의 기능과 제조에 관한 연구 / 강성문 임오군란후 친군제도와 군복에 대한 소고 / 이강칠 조선말기의 군적 / 이현수 육군박물관 소장 군적문서의 분석 삼군부 설치와 변천에 대한 연구 / 이대숙 고려전기 중앙군의 군역제도 소론 / 정경현 고려말기의 백정대전 / 이경식 조선시대의 양반 / 이태진 개념과 연구동향 충무공 이순신의 하옥죄명 전몰상황 자살론 순국론에 관한 검토 / 장학근 만주국 시대 일제의 대만 조선인 농업이민정책사 연구 / 김기훈 군사작전에 있어서 지형의 영향 -주요 전례를 중심으로- / 이충진 한의 고조선 침공시 패수 왕검성의 위치에 관한 소고 / 김광수 한국전쟁시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고찰 / 양영조 한국전쟁시 육군의 교육 및 훈련체계, ~ / 박일송 20세기초 영국 육군 개혁 -남아프리카전쟁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 원태재 루소의 평화사상 -초기저작을 중심으로- / 박영준 통합이론과 통합전략의 연구동향 / 박기수 Preliminary Report on the Archaelogical Survey in the Eastern Mongolia / 최복규 임진강 유역의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 / 이재 강성문 김기훈 <부록> : 육군박물관 소장 군적 문서

240 240 학예지 제18집 제 4 집 (1995, 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운촌 이강칠 선생 고희기념 특집) 이강칠 선생 근영 발간사 이강칠 선생 연보 특별기고 육사박물관이 군사문화재의 보고가 되기까지 / 이강칠 박물관학류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의 발전방향 / 이재 공 사립 박물관의 과제와 발전방안 / 신도근 철제 판갑의 과학적 보존처리 / 이오희 복식류 고려복식양식 / 유희경 군복, 관모에 관한 연구 / 강순제 원의 군복, 융복에 관한 연구 / 김미자 답호와 전복재고 / 박성실 조선시대 군복에 관한 연구 / 이현숙 비천복식에 관한 연구 / 임영자 대한제국시대 육군장병 복장제식과 대원수 예 상복에 대하여 / 이미나 무기류 조선시대 편전에 관한 연구 / 강성문 동서양 전장의 도와 검 / 김순규 노해번역 / 김기훈 임란기 조선수군의 무기체계 / 정진술 임진왜란기 화약병기의 도입과 전술의 변화 / 박재광 한국의 쇠뇌 / 유세현

241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41 기타류 한국의 예사상과 예학의 역사적 고찰 / 남상민 광개토대왕의 내치와 외치 / 이형구 빙고제의 고찰 / 손영식 18세기 말 경상도 현풍현의 군비실태 / 이현수 민화는 가시화된 우리 문화의 원형 / 김만희 평산신씨 무변고 / 김재갑 무구에 상감된 문양에 대한 소고 / 이경자 육군군기에 관한 소고/ 이대숙 부록 육군박물관 연보 제 5 집 (1997, 육군박물관 창립 40주년 기념) 양대박의 운암전 고찰 / 강성문 동아시아 삼국의 화기제조와 교류 / 박재광 삼국시대의 성곽전투와 운제의 운용 / 김대중 육군박물관 소장 양계지도 해설 / 강석화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공포에 대한 고찰 / 이덕부 불랑기 실태 고찰 / 이강칠 조선시대 도검의 실측과 분석 / 김성혜 박선식 고대 군사유물의 과학적 보존처리 / 임선기 조선중기 이일의 관방정책 / 강신엽 궁인위궁에 대한 고찰 / 유세현 부록 1. 자료소개 훈국신조군기도설 훈국신조기계도설

242 242 학예지 제18집 부록 2. 연보 육군박물관 40주년 연보 제 6 집 (1999) 제 1 부 무구편 정익공 이완 장군 유물에 대하여 / 이강칠 도검의 기능성 연구 / 김성혜 김영섭 Weapons of the 1871 US Korean Campaign (Shinmiyangyo) / THOMAS DUVERNAY 제 2 부 군사편 조선초기 화기 방사군의 실상 / 강성문 임진왜란 해전시의 함포운용술 연구 / 최두환 임진왜란 초기 전투 연구 / 서영식 외 클라우제비츠 중심 이론의 현대적 적용 / 나종남 제 3 부 박물관 운영편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의 박물관의 역할 / 박재광 육군 부대역사관의 실태 분석 / 모동주 제 4 부 부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행통정대부 남원도호부사임공행장초 / 강신엽 군사(무구류 성곽 봉수)관련 논저 목록 제 5 부 육군박물관 연보

243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43 제 7 집 (2000, 국궁 문화 특집) 발간사 삼국시대 궁의 연구 / 김성태 조선시대 활의 군사적 운용 / 강성문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 심승구 조선시대 활의 제작과 궁재의 확보 / 우다가와 다케히사 저 서영식 역 국궁에 반영된 철학사상 / 강신엽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국궁 / 정재민 우리나라의 궁장 시장에 대한 보고 / 유세현 국궁의 과학적 분석 / 최진희 부록 나의 국궁 체험기 / 담도성 글 학예지편집실 역 사료 조선왕조실록의 대사례 향사례 관련 기사 녹취 한국 역사 속의 국궁 문화 세미나 육군박물관 연보 제 8 집 (2001, 관방유적 특집) 경기 서울 인천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 / 백종오 김병희 김주홍 강원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과 과제 / 유재춘 대전 충남지역 관방 연구의 현단계 / 서정석 충청북도의 관방유적 / 현남주 경남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과 과제 / 나동욱 경상북도의 관방유적 / 이희돈 전남의 관방유적 연구현황 / 박준범 전북지역의 관방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 / 강원종 제주도 관방시설에 관한 연구와 실태 / 김명철

244 244 학예지 제18집 육군박물관 연보 제 9 집 (2002, 화약 병기 특집) 한국의 화약병기 / 이강칠 고려말 조선초 화약병기 연구의 현황과 과제 / 김대중 15~16세기 조선의 화기 발달 / 박재광 조선후기 화기 발달사 연구 현황과 이해의 방향 / 노영구 조선의 역대 화차에 관한 연구 / 강성문 대원군 집권기 무기개발과 외국기술 도입 - 훈국신조군기도설 과 훈국신조기계도설 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 / 연갑수 임진왜란기 무기류 발굴의 고고학적 성과 - 용인 임진산성 출토품을 중심으로 - / 백종오 훈국신조군기도설(번역) / 강신엽 육군박물관 연보 제 10 집 (2003, 사서화류 특집) 육군박물관 소장 동래부순절도 연구 / 권소영 육군박물관 소장 조천도 연구 / 정은주 당포전양승첩지도 에 대한 일고찰 - 노씨본과 신씨본을 중심으로 - / 이상훈 임진왜란기 조총의 전래와 제조 - 철포기 를 중심으로 - / 이왕무 해동지도 의 봉수표기형태 고찰 / 김주홍 말갈문제 를 통해 본 6세기말 요서 정세의 변화 / 이성제 The Archery Tradition of Korea / 김기훈 훈국신조기계도설(번역) / 강신엽 육군박물관 연보

245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45 제 11 집 (2004, 조선의 도검 특집) 조선시대 도검 연구의 현황과 과제 / 박재광 조선시대 도검의 유형 분석 - 칼몸의 슴베와 자루의 종합구조 / 이석재 애자문 연구 - 조선검의 고동, 그 명칭의 오류 / 이석재 칠성검 연구 / 김미경 조선시대 도검에 나타난 문양과 매듭장식에 관한 연구 / 이승해 조선시대 운검 별운검 보검 연구 / 강신엽 조선왕조실록 을 통해 본 환도의 의미와 기능 / 강순애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도검의 모습 / 안재한 육군박물관 연보 제 12 집 (2005, 무구류 제작법 특집) 고대 철 제련에 대한 일고 / 박현욱 여말선초의 화약 화기 제조에 대한 일고찰 / 박재광 조선초기 군기감 무기제조의 변화 추이 / 김일환 조선시대 도검 모극의 결합구조 연구 / 이석재 조선시대 각궁과 교자궁의 제작실태 / 유세현 승자총통에 대한 과학적 연구 / 이재성 조선시대 갑주의 제조 / 박가영 조선시대의 군사 교육 기관에 관한 연구 / 김기훈 숙종대 국방개혁안에 관한 일고창 / 노영구 육군박물관 연보

246 246 학예지 제18집 제 13 집 (2006, 육군박물관 개관 50주년 특집) 고구려 중장기병에 관한 제문제 / 서영교 최충헌 정권과 중방 도방 교정도감 / 김대중 연산군대 서정논의과 대여진정책의 변화 / 김낙진 조선시대 화약무기 운용술 / 김병륜 미이라를 통해 본 조선시대 한 무관의 삶과 행적 / 심승구 문경새재 어류산성에 대하여 / 이재성 조선시대 갑주의 제조 / 박가영 왜성연구를 위한 예비적 검토 / 김기훈 김태산 김인욱 이정빈 한국전쟁 중 한국군의 재편성에 관한 연구, 1951 ~ 1953 / 나종남 육군박물관 개관 50주년 연보 제 14 집 (2007, 관방유적 축조법 특집) 한성 백제시대 산성 축조방식에대하여 / 김호준 신라 성과성문의특징과 변천과정 검토 / 김병희 고려시대 성곽의 축성법/ 김낙진 조선시대 도성축조와 성랑/ 신영문 화성건설의물자 조달 / 이달호 한국성각유적의 문화자원 활용 방안 연구 / 백종오 한국 내지봉수의 구조.형태 고찰 / 김주홍 경남지역 지방봉수대 고찰 / 홍성우 사법비전공하 연구시론/ 김기훈 육군박물관 연보

247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47 제 15 집 (2008, 군사 신호체계 특집) 조선후기 군사 깃발 / 노명구 조선후기 군사 신호체계 연구 / 최형국 조선수군의 전술신호 체계 / 정진술 육군군기 개관 / 안재환 성문출토 확쇠 현황 / 김병희, 백영종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 백영종 정사론 / 김세현 육군박물관 연보 제 16 집 (2009, 전통 군사복식 특집) 삼국시대 판갑의 특징과 성격 / 송정식 조선시대의 군복에 관한연구 - 군군복을 중심으로 / 최영로 조선시대 두정갑에 대한군사사적 검토 / 김병륜 경기도박물관 소장 헌종가례진하계병의 군복류에관한 연구/ 정미숙,남경미 육군박물관 소장 망수에 관한 소고 / 최은수 말갑옷 연구 시론 / 장경숙 특별기고 (세계의 군사박물관 탐방) 일본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에도도코박물관,국립역사 민속박물관을 중심으로 / 강신엽 영국 제국전쟁박물관 / 이내주 프랑스 박물관 소계 / 김진찬

248 248 학예지 제18집 제 17 집 (2010, 우리나라의 전통기병 특집)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 김병륜 신라기병 과 목장 / 서영교 19세기 전반기 조선기병 역화의 배경연구 / 최형국 조선 정조대 장용영창설과 마상무예의 전술적 특성 / 최형국 17세기 조선의 마구 收 給 에 관한 연구 / 장원주 육군박물관 연보 부록 2011 육군박물관 연보 수증도서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49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49 투고 규정 1. 일반원칙 1) 학예지 에 논문게재를 희망하는 자는 다음의 투고요령에 글 파일을 편집위원회에게 이메일 을 통해 제출한다. 2) 논문 투고자는 논문과 함께 1 필자명과 논문명의 영문 표기 2 외국어 초록(300단어 내외) 3 논문의 주제어(3~7개, 국문 및 외국어)를 편집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단, 외국어로 작성 된 원고인 경우 국문초록을 작성하며, 사용이 가능한 외국어는 영어 일어 중국어로 한다. 3) 공동집필의 경우 2인까지는 병기하며, 3인 이상일 경우 대표 저자와와 공동 저자로 구분하며, 후자는 각주로 내려서 표기한다. 4) 원고분량은 원칙적으로 논문의 경우 200자 원고지 150매 이내를 원칙으로 하며, 비평 논문과 자료소개, 학술기획의 경우 100매 내외, 그리고 서평의 경우에는 30매를 기준으로 한다. 이를 초과할 시, 논문 게재자는 추가 조판 비용을 부담하여야 한다. 2. 본 문 1) 논문의 목차는 머리말(혹은 서언, 서설 등)과 맺음말(혹은 결론, 결언, 결어)을 포함하여 아라 비아숫자(1, 2, 3 )로 표기하며, 목차 안의 항목은 1)-가-가) 순으로 표시한다. 2) 도표는 반드시 표 기능을 사용하여 작성한다. 3) 괄호 표기는 [ ], ( ), 순으로 하고, 원문에 있는 주석은 ( )로 처리한다. 4) 연대의 표시는 서기를 원칙으로 하며 불가피한 경우 ( )안에 서기를 병기한다. 5)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6) 인용문은 한글로 번역함을 원칙으로 한다. 3. 각 주 모든 주는 각주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참고문헌을 포함한다. 1)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 동양어권의 논문은 (반각)안에, 단행본은 (반각)안에 제 목을 넣는다.필자, 연도, 논문명, 서명, 출판사(혹은 발행기관) 순서로 하며, 논문과 서명 및

250 250 학예지 제18집 출판사 사이에 쉼표는 생략한다. 잘 알려진 학회지의 경우 발행기관을 생략할 수 있다. 논문과 각주의 끝은 마침표로 표시한다. 김민경, 2005, 조선전기의 군사제도와 궁술문화 학예지 3, 165쪽. 강석환, 1996, 조선후기 화포연구 일조각. 2)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 서양어권의 된 논문은 안에 제목을 쓰고, 단행본의 書 名 은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논문과 서명 사이에는 반드시 쉼표로 구분한다. 서명과 권수 사이도 쉼 표로 구분해 준다. Lee, Hai-soon, 1990, Sijo Revival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l-3 Seoul: Institute of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23쪽. 3) 역서일 경우는 저자 역자, 연도, 번역서명, 출판사를 쓰고, 괄호 안에 원서를 밝힌다. 2인의 공저일 경우 병기하되, 3인 이상일 경우 대표저자 혹은 제1 저자만 쓰고 외 ~인 으로 표기한 다. 三 品 彰 英 심호섭 역, 2009, 南 鮮 과 北 鮮 경희출판사(1957, 南 鮮 と 北 鮮 ハ バ ド 燕 京 同 志 社 東 北 文 化 講 座 委 員 會 ). 김인욱 강원묵, 2009, 무기발달사 연구의 동향 경희출판사. 김헤영 외 3인, 2009, 대한제국 연구의 동향 경희출판사. 5) 동일한 자료를 여러 번 인용할 경우 연도, 앞의 논문 혹은 연도, 앞의 책 으로 표기한다. 강석한, 2005, 앞의 논문, 20쪽. 김민결, 1996, 앞의 책. 6) 기타 이 요강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기존의 학예지 편집 관례에 따른다.

251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51 심사 / 간행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욱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게재 논문의 심사와 간행을 위한 것이다. 제2조( 학예지 의 내용과 투고) 1. 학예지에 대한 논문, 자료, 서평 및 기타 본 학회의 취지에 부합하는 사항을 수록한다. 2. 논문 투고는 원칙적으로 회원만이 할 수 있지만, 편집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예외를 둘 수 있 다. 3. 논문 원고는 학예지 투고지침 에 맞게 작성한 것이어야 하며, 소정의 심사를 통과해야 학예 지 에 게재될 수 있다. 4. 논문은 수시로 제출할 수 있으나, 최소한 간행 2개월(9월 30일) 이전에 편집위원회에 제출하여 야 한다. 5. 자료와 서평 등은 위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으며, 편집위원회에서 논의 결정한다. 제3조 (간행일자 및 면수) 1. 학예지는 매년 12월 30일(연 1회) 간행한다. 2. 학예지는 매호 300쪽 안팎의 분량으로 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4조 (편집위원회) 1. 연구지의 편집과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편집위원회를 둔다. 2. 편집위원회는 육군박물관장이 위촉한 편집위원으로 구성하며, 편집위원 중 위원장을 선출한 다. 3. 편집위원회는 학예지 의 간행을 기획하고, 모든 원고의 1차 심사를 담당한다. 4. 편집위원회는 2차 심사의 결과를 종합하고 최종 처리한다. 5. 편집위원회는 연 4회 정기적으로 개최함을 원칙으로 한다.

252 252 학예지 제18집 제5조 (심사위원) 1. 2차 심사위원은 편집위원회를 거쳐, 해당 분야 전문연구자 중에서 위촉한다. 단, 논문 추천자와 투고자의 지도교수는 2차 심사위원이 될 수 없다. 2. 심사위원에게는 소정의 심사료를 지급할 수 있다. 제6조 (논문심사) 학예지 에 투고된 논문은 1 2차 심사를 모두 통과하여야 한다. 단 박물관장이 주관한 학술회의 에서 발표한 논문의 경우 1차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1. (1차 심사) 분야, 제목 및 목차 설정, 형식, 분량 등의 적합성 여부를 검토하고, 참석 편집위원 3분의 2 이상 의 통과 판정을 얻어 2차 심사에 회부한다. 2. (2차 심사) 1) 2차 심사위원은 각 논문당 3명을 위촉한다. 2) 심사위원은 논문의 학문성을 객관적으로 심사하여, 정해진 양식에 따라, 게재 가능(A), 수정 후 게재(B), 수정 후 재심사(C), 게재 불가(D)의 4 등급으로 판정하며, 그 결과를 편집위원회 에 제출한다. 단 B, C 등급의 경우 수정이 필요한 사항을 제시하고, D 등급의 경우에는 그 이유를 명시한다. 3) 편집위원회는 제출된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A,A,A) (A,A,B) : 게재 (A,B,B) (B,B,B) : 수정 후 게재 (A,A,C) (A,A,D) (A,B,C) (A,B,D) : 편집위원 또는 제3자 1인에게 수정 후 게재 또는 수정 후 재심사 판정을 의뢰 (A,C,C) (B,B,C) (A,C,D) (B,C,C) (B,B,D) (C,C,C) : 수정 후 재심사 (A,D,D) (B,C,D) (B,D,D) (C,C,D) (C,D,D) (D,D,D) : 게재불가 4) 재심사는 1회에 한하며, 심사위원 전원 수정 후 게재(B) 이상의 판정을 받아야 게재하며, 그 이후의 판정이 나올 경우 게재불가 조치한다. 5) 심사를 통과한 논문 편수가 편집중인 연구지 수록 분량을 초과할 경우에는 우선 주제가 해당 호의 편집 기획에 부합하는 것을 선정하고, 다음으로는 심사성적을 기초로 순위를 정하여 선

253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53 정한다. 6) 심사성적을 기초로 투고의 순서를 정한다. 제7조 (심사결과 통보) 1. 논문의 심사위원이나 심사과정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비공개로 한다. 2. 논문 제출자에게는 심사결과와 수정 요구 사항, 게재 불가의 이유를 공개한다. 3. 논문 제출자는 심사위원의 수정 요구 사항을 존중하며, 최대한 반영하도록 한다. 제8조 (논문 심사료 및 게재료) 학회는 게재가 확정된 논문의 심사료와 게재료를 논문 투고자에게 청구할 수 있다. 부 칙 제1조. 이 규정은 2010년 1월 1일부로 소급 적용한다. 제2조. 이 규정에서 나오지 않는 사항은 관례에 따른다. 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육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제반 학술 연구 활동의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준수하여야 할 연구윤리의 기준을 확립하고, 이를 관리 감독할 연구윤리위원회의 조직 임무 운 영에 관한 사항을 정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제2조 (적용대상 및 범위) 이 규정은 육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학회지 투고자에 적용된다 제3조 (윤리규정) 육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회원 및 투고자는 아래 행위를 부정행위 로 간주한다. 1. 타인의 연구 성과를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연구 성과로 발표하는 행위 2. 수행되지 않은 연구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허위로 제시하는 행위 3. 이전의 연구를 새로운 연구처럼 출판하거나 발표하는 행위. 단 여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예외 사항을 둔다.

254 254 학예지 제18집 1) 석 박사 학위논문 혹은 그 일부의 경우, 그 성과를 다른 학회지나 출판물 등에 게재한 적이 없다면, 이를 부정행위 로 간주하지 않는다. 2) 연구윤리위원희의 심의를 거쳐 승인을 받고, 그 사유를 출판이나 발표에서 서면으로 밝힌다 면, 이를 부정행위 로 간주하지 않는다. 4. 이외 일반적으로 연구윤리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행위 제4조 (연구윤리위원회의 구성) 1. 위원회는 편집위원장이 임명한 8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며, 편집위원장이 위원회의 위원장 을 맡는다. 2. 위원은 다년간 학예지 연구에 종사한 중진학자를 선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3. 위원이 심의 대상인 경우, 해당 심의 건에 대하여 위원 자격을 일시 정지한다. 제5조 (연구윤리위원회의 기능 및 임무) 위원회는 본 규정 제3조에 위반되는 행위에 대하여 심의하고, 필요한 조치 및 징계를 결정한다. 제6조 (연구윤리위원회의 소집, 심의, 및 제재) 1. 위원회는 위원회의 위원 및 내 외부의 심의 요청이 있을 시에 위원장이 소집하고, 재적 위원 과반수 출석, 출석 위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2. 위원회는 신청인이 제시한 최대한 관련 자료를 서면을 통해 심사하며, 신청인의 신원을 철저히 보호하는 한편, 피신청인에게는 소명의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여야 한다. 3. 부정행위 로 판정될 경우 그 수위에 따라 다음의 징계 조치를 취한다. 1) 경고: 부정행위 의 고의성이 없고, 그 수위가 경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구두로 경고 조치한 다. 2) 출판물 삭제: 부정행위 의 고의성이 인정되며, 그 수위가 상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만주학회 명의로 출간된 저서 학술지 등 제반 출판물의 성과를 삭제하며, 향후 3년간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 3) 출판물 삭제와 영구 제명: 부정행위 의 고의성이 인정되며, 그 수위가 심각하다고 판단될 경우, 만주학회 명의로 출간된 저서 학술지 등 제반 출판물의 성과를 삭제하며, 본 학회에 서 영구 제명한다. 4) 이상 2)와 3)의 판정이 나오면 최초 발간되는 본 학회의 홈페이지와 학회지에 판정의 내용을

255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55 공시한다. 4. 모든 회원은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수용해야 하며, 신청인 또는 피신청인의 불복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1회에 한해 재심 요청을 할 수 있다. 부칙 이 규정은 2011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정: 2011년 12월 1일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학예지 연구윤리위원회 위원장 : 최 정 민(육군사관학교) 위 원 : 이재(육군사관학교 ), 강성문(육군사관하교), 김기훈(육군사관하교), 이내주(육군사관하교), 이현수(육군사관하교)

256 육군박물관 학예지 제18집 편집위원장 : 최정민(육군박물관장) 편 집 위 원 : 우만옥(경희대 사학과 교수) 김영관(제주대 사학과 교수) 나종남(육사 군사사학과 교수) 노영구(국방대 군사전략학부 교수) 윤훈표(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학 예 지 제 18 집 전통시대 무예 국궁 특집 2011년 12월 20일 인쇄 2011년 12월 30일 발행 발 행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사서함 77-1호 우 : ) ~4 편집 제작 : 황금알 [email protected] Tel 02) Fax 02) (비매품)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출처를 명시하면 자유로이 인용할 수 있습니다. 무단 전재하거나 복사하면 법에 저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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