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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역사 자 료 총 서 35 明史 外國傳 譯註 3 外國傳 下 譯註 中國 正史 外國傳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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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北史 外國傳 譯註 明史 차례 외국 8 달단전 해제 / 667 북원(北元)의 출현 / 671 초기 달단(韃靼)의 활약 / 692 소왕자(小王子) / 709 대원(大元) 대가한(大可汗) / 729 업답한(俺答汗) / 742 임단한(林丹汗) / 786 참고문헌 / 795 외국 9 와랄 타안 복여 태녕전 해제 / 801 와랄(瓦剌) / 804 타안(朶顏) 복여(福余) 태녕(泰寧) / 835 차례 661

4 참고문헌 / 858 세계표 860 연표 870 지도 892 색인 명사외국전역주 3- 외국전하

5 [상권 차례] 명사 외국전 해제 외국 3 일본전 해제 외국 2 안남전 해제 명초의 긴장관계 감합(勘合) 무역의 시작 안남의 기원과 진조(陳朝) 멸망 송소경(宋素卿)과 영파쟁공(寧波爭功) 여계리(黎季犛)의 권력 탈취 주환(朱紈)의 파견 영락제(永樂帝)와 여계리(黎季犛) 정벌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의 창궐 환관 마기(馬騏)의 수탈과 안남의 반란 왕직(汪直) 이후의 왜구 활동 여리(黎利)의 여조(黎朝) 창립 풍신수길(豊臣秀吉)과 임진왜란 막등용(莫登庸) 정권 참고문헌 가정제(嘉靖帝)의 안남 정벌론 여녕(黎寧)의 여조(黎朝) 부흥 막등용의 명조 투항 여유담(黎維潭)과 막씨 정권의 대립 참고문헌 외국 4 유구 여송 합묘리 미락 거 사요 눌필탄 계롱산 파 라 마엽옹 고마랄랑 풍가시 란 문랑마신전 해제 참고문헌 차례 663

6 [ 중권차례 ] 외국 5 점성 빈동룡 진랍 섬라 조와 사파 소길단 설리 일라하치 삼불제전 해제참고문헌 외국 6 발니 만랄가 소문답랄 수문달나 소록 서양쇄리 쇄리 람방 담파 백화 팽형 나고아 여벌 남발리 아노 유불 정기의 파나서 불랑기 화란전해제참고문헌 외국 7 고리 가지 소갈란 대갈란 석란산 방갈랄 소납박아 조법아 목골도속 불랄와 죽보 아단 날살 마림 홀로모사 유산 비랄 손랄 남무리 가이륵 감파리 급란단 사리만니 저리 천리달 실랄비 고리반졸 날니 하랄비 기랄니 굴찰니 사랄제 팽가나 팔가의 오사랄척 감파 아와 타회 백갈달 흑갈달 불름 의대리아전해제참고문헌

7 명사(明史) 권327 외국(外國) 8 달단전(韃靼傳) 역주: 김선혜 교열: 송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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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明史 外國傳 譯註 달단전(韃靼傳) 해제 명사 권327 달단전 은 원조(元朝) 붕괴 후 그 후계자들이 청(淸) 태종(太宗)에게 항복하 기까지 약 27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권328 와랄전 과 함께 명(明)의 북방에 자리 잡고 그 세력을 유지하였던 몽골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대의 몽골족은 칭기스칸이 세운 몽골 대제국과 정복왕조의 대표인 원조와 같이 화려한 활약상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역사에서 유목사회의 주변 여러 부족, 특히 명조(明朝)와의 치열한 갈등을 보여주어 당시 북아시아 유목민의 실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본전의 내용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첫 부분은 북원(北元)의 출현과 멸망 과정을 서술하였다. 북원은 학자에 따라 개념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통일왕조였던 원 멸망 이후 몽골리아 고지(故地)로 물러난 잔여 정권을 말한다. 홍무(洪武) 원년(1368)에 혜종(惠宗) 토관티무르(妥權帖木兒, Togo an Temür)가 대도(大都)로 후퇴해서 2년 후 응창 (應昌)에서 사망한 후, 아들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 Ayursiridara)가 계위(繼位)하여 막 북(漠北)으로 물러났으나 여전히 대원(大元) 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명조의 여러 차례에 걸친 진공(進攻)과 몽골 귀족 내부의 격렬한 투쟁으로 세력이 점차 쇠퇴하여, 칭기스칸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정통(正統)으로 피봉(被奉)되기는 했지만 대칸(大汗)의 권위는 쇠락하였 다. 반면 권신(權臣)의 세력이 강성해져 아유시리다라 이후 퇴귀스티무르(脫古思帖木兒, Tögüs Temür)에서부터 귄티무르(坤帖木兒, Gün Temür)에 이르기까지 대칸은 모두 내부의 분쟁으로 피살되었다. 이와 같이 원이 멸망한 후, 몽골 귀족들은 북방의 초원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정권을 유지하면서 중원에 다시 진입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반면 명조 는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에 대한 정벌과 초무(招撫)를 병용하는 책략 달단전 해제 667

10 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남북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는데, 그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둘째 부분은 타타르(韃靼, Tatar)의 출현과 초기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건문(建文) 4년 (1402) 몽골의 귀족 귀력적(鬼力赤)은 칸위(汗位)를 찬탈하고 북원의 국호를 폐지한 뒤 달단 가한(可汗) 이라 칭하였다. 그는 칸의 후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명조의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어 명과 통교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부(部)의 무리들이 따르지 않아 부장(部將) 아룩타이 (阿魯台, Arugtai)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1408년 아룩타이는 귄티무르의 동생인 분야시리(本 兒失里, Bunyasiri)를 칸으로 세우고 본인은 태사(太師)가 되어 전권(專權)을 행사하였다. 그 후 아룩타이와 몽골 서부의 오이라트(瓦剌, Oirat)부 귀족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아 각자 원의 후예를 칸으로 세웠다. 이때 명조는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대립을 이용하여 먼저 오이라 트의 수령(首領) 마흐무(馬合木, Mahmū) 등 3명을 왕(王)으로 삼고, 계속해서 타타르의 태사 아룩타이를 왕으로 삼아 서로 경쟁하도록 하였다. 마흐무의 아들 토곤(脫歡, Toghon)이 오이 라트의 각 부를 통일한 후, 아룩타이와 그가 세운 아타이(阿岱, Atai)칸을 공격하여 죽이고 따로 톡토부콰(脫脫不花, Toqto büqa)를 대총한(岱總汗)으로 세워 타타르 제 부락을 통치하 도록 하였다. 토곤의 아들 에센(也先, Esen)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타타르를 완전히 겸병하 고 대칸을 죽이고 자립하였다. 그러나 에센이 가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성(異姓) 귀족이 칸위를 찬탈한 것이어서, 이후 곧 부하들이 배반하여 내부 정쟁(政爭) 중에 피살당하였다. 이로 인해 오이라트의 세력이 약해지자 타타르의 세력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각 부의 이성 귀족이 권력을 쟁탈하고 가한을 조종하여 혼전(混戰)이 초래되었다. 셋째 부분은 소왕자(小王子) 시대를 다루고 있다. 에센이 피살당한 후 타타르 부락의 수령이 었던 볼라이(孛來, Bolai)는 경태(景泰) 6년(1455)에 대총한(岱總汗, 태태불화)의 어린 아들 마귀르기스(馬可古兒吉思, Margürgis)를 옹립하여 소왕자 라고 불렀다. 1465년 볼라이가 올 량합(兀良哈, Uriyangqai)과 연합하여 변방을 침입하고, 소왕자와 모리카이(毛里孩, Moliqai) 가 연수(延綏)를 침입하는 등 이 시기에 타타르는 다시 강성해져 명조와 대립하였다. 그 후 만두구룬(滿都魯, Mandugulun, 재위 )칸도 죽고, 모리카이 패로내(孛魯乃) 알 라출(斡羅出) 등 여러 강대한 추장들의 세력이 점차 쇠락하였다. 넷째 부분은 대원대가한(大元大可汗) 시대를 다루고 있다. 성화(成化) 15년(1479) 제2의 소왕 자, 즉 백안맹가왕(伯顔猛可王)이 즉위하여 대원가한 이라 칭했다. 이가 바로 다얀(達延, Dayan) 칸인데, 그는 칭기스칸계(系) 황금가족의 후예로서 몽골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였다. 오이라트를 668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11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여러 할거세력의 반항과 반란을 평정하여 타타르 각 부를 통일하였다. 6만호 를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찰합이(察哈爾) 객이객(喀爾喀) 오량해(烏梁海) 좌익(左翼) 3만호 를 직접 장악하였다. 악이다사(鄂爾多斯) 토묵특(土黙特) 영사포(永謝布) 우익(右翼) 3만호 는 세 번째 아들인 파이사박라특(巴爾斯博羅特, 吉能 즉, Jinong이라고도 부름)에게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칸의 권력이 크게 강화되어, 권신의 전정(專政)과 제 부족의 분쟁은 일단락 되었다. 명과의 관계에서도 초기에는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으나, 점차 변경을 침입하여 대립하였 다. 그런데 정덕(正德) 12년(1517) 다얀칸 사후에 타타르는 다시 분열되었다. 다섯째 부분은 알탄(俺答, Altan)칸이 활약했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파이사전라특(巴爾斯 傳羅特)의 두 번째 아들인 알탄은 비록 정식으로 대칸에 옹립되지는 않았지만, 우익 3만 호를 지배하였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대칸(다얀칸 후계자)과 대항하였다. 계속 진격하여 좌익 부락을 병탄하고 칸의 조정을 의주(義州) 변경 밖으로 옮기게 하였다. 결국 알탄은 명조를 크게 공격하여 1571년에 협의를 이루어 명조로부터 순의왕(順義王)에 봉해졌으며, 명과의 조공관계를 회복하였다. 그 후로 오이라트에 대한 정벌에 나서 감숙(甘肅) 청해(靑海) 서 장(西藏) 교계(交界)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때부터 티베트 불교가 다시 몽골에서 활기를 띄게 되었다. 타타르는 대칸이 동천(東遷)한 후, 토만칸(土蠻汗, 재위 ) 시대에 다시 강성해져 명조와 대립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릭단칸(林丹汗, Ligdan Khan, 재위 ) 시대를 다루고 있다. 호돈 토(虎墩兎, Khutuktu) 라고 표현된 릭단칸은 타타르 최후의 대칸으로, 타타르의 통일과 중건 (重建)에 힘쓰고, 명조와 연합하여 후금(後金)에 대항하였다. 그는 좌익 제 부족을 수복하고 막북의 객이객부(喀爾喀部)의 일부를 얻었지만 후금에게 협박을 당하여 서쪽으로 도망가 1634년에 사망하였다. 2년 후에 그의 아들이 16부를 이끌고 청(淸)에 항복함으로 타타르는 결국 멸망하였다. 명사 가 중국의 여러 정사 가운데 높이 평가받는 사서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전의 기록은 명실록(明實錄) 에서 타타르에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편찬한 것이다. 때문에 본 전의 내용은 여러 면에서 소략하거나 생략된 부분, 혹은 부정확한 내용이 매우 많다. 또한 본전은 명사 외국전에 포함되어 있지만, 타타르의 역사 자체를 서술하기 보다는 명의 입장 에서 바라본 타타르에 대한 한정된 내용이다. 때문에 본전은 타타르의 경제 정치 군사 및 제도나 문화 생활 등에 대해서는 극히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반면에 명과 타타르의 달단전 해제 669

12 관계, 특히 명의 타타르 정벌 전쟁과 귀부(歸附) 투항 과정은 아주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명군이 승리한 전투의 경우 구체적인 경로까지 자세하게 서술된 점, 변방의 관리들이 제안했던 타타르 대비책이 상당한 분량임에도 전문(全文)을 소개한 점, 명과 대치했던 타타 르의 수장이 명에 귀부하는 과정, 그에 따른 후속 조치 등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명과 타타르의 관계는 양자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오이라트와의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명사 외국전에 와랄전 을 별도로 편성해 두고서, 이 사정은 와랄전에 기재되어 있다 라고만 서술하는 등 관련 내용을 생략하여, 이에 관한 부분을 충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 간의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서는 반드시 와랄전 을 함께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한편 본전의 기록만으로는 타타르 대칸의 승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어렵다. 예컨대, 적은 탈고사첩목아 이후부터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어지럽게 서로 싸워 오대(五代)가 전해져 곤첩목아에 이르렀는데, 모두 피살되어 다시는 제(帝)의 호칭을 알지 못한다 라거나 이로부 터 달단 부락의 수령은 더욱 각자 제멋대로 하였다. 소왕자는 중국과 드물게 통교하여, 계승 세대의 순서는 대부분 고찰할 수 없다 라는 식의 서술이 많다. 즉, 명과 직접 관계를 맺은 경우만 기록해 놓고 있어, 타타르 전체 세계표(世系表) 중 누락된 호칭이 많다. 그런가 하면 당시 명의 타타르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제한적이고, 아로태가 죽은 후, 그가 예전에 세운 아태(阿台) 왕자 및 부하 타아지백(朶兒只伯) 등 과 같이 구체적인 시기가 불분명한 경우도 적지 않다. 또 마아가아(麻兒可兒)와 마아고아길사(馬兒苦兒吉思)가 동일 인물임에도 서로 다른 별개의 인물로 서술하고 있고, 마아고아길사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부르기 시작한 소왕자 라는 호칭을 다른 시기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어, 정확한 사실 파악을 위해서는 다른 관련 자료와의 대조 작업이 필요하다. 본전은 이와 같은 부분적인 결함이 있을지라도 중국과 타타르의 관계를 시기별로 망라하여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만한 자료가 없다. 또한 본전의 내용 중 명조와 타타르의 관계는 매우 세밀하게 다루고 있어,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북방의 국제질 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비교적 세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명실록 과 이밖에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 및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등에 있는 관련 내용을 대조하면서 본다면 많은 내용이 보충될 것이고, 또 잘못된 내용을 교정할 수 있어 더욱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670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13 明史 外國傳 譯註 달단전(韃靼傳) 역주 韃靼, 卽蒙古, 故元後也. 太祖洪武元年, 大將軍徐達率師取元, 元主自北平遁出塞, 居開平, 數遣其將也速等擾北邊. 明年, 常遇春擊敗之, 師進開平, 俘宗王慶孫 平 章鼎住. 달단(韃靼)1)은 곧 몽골로, 옛 원(元)2)나라의 후예다. 태조(太祖, ; 재위 )3) 홍무(洪武)4) 원년(1368)에 대장군 서달(徐達)5)이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를 공격하여 1) 韃靼: Tatar의 音譯이며, 達旦, 達怛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 북방민족을 일컫는 말로, 시대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唐代에는 몽골고원 동쪽에 있던 塔塔爾部를 가리켰다. 9세기 전후하여 陰山 남북 변경지 대에서 河西에 이르기까지 淸海에 모두 타타르인이 출현하였으며 宋, 遼와 교통하였다. 金代에 타타르는 주로 呼倫 貝爾池 서쪽에서 유목하였다. 1202년 칭기스칸이 塔塔爾部를 정복한 이후, 元代에 타타르는 몽골 각부에 대한 泛稱으로 사용되었다. 明代에 들어와서는 元 順帝가 大都에서 퇴출된 이후 林丹汗 (Ligdan Khan)에 이르는 시기의 漠南 漠北 蒙古人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韃靼에 대해서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에서는 北胡로, 동쪽으로는 兀良哈에서부터 서쪽으로는 瓦剌에 이르며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심지어 兀良哈도 그 안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또한 역대 중국 왕조에서 그 명칭이 각각 달랐는데, 夏代의 獯鬻, 周代의 玁狁, 秦漢代의 匈奴, 唐代의 突厥, 宋代에는 契丹이라고 칭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契丹은 女眞에게 정복당하였으나, 따로 西遼를 건국하여 존속 하였는데, 후에 몽골족에게 병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작은 부락으로는 泰赤烏, 塔塔兒, 克列 등이 각각 따로 있었으나 몽골족에게 병합되었고, 그 후 이러한 몽골족들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송을 대신하여 중국을 장악하고 元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2) 元( ): 몽골 제국 5대 황제인 쿠빌라이칸(忽必烈, Qubilai khan)이 남송을 멸하고, 1271년에 중국식 국호인 元으로 바꿨다. 달단전 역주 671

14 취했는데,6) 원의 군주7)는 북평(北平)8)에서 북방 변경으로 달아나9) 개평(開平)10)에 거주했 3) 太祖: 명 왕조를 창업한 洪武帝 朱元璋의 廟號이다. 그는 아버지 朱世珍(朱五四라고도 불림)과 巫術師 陳氏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1328년에 태어났다. 그의 처음 이름은 興宗(重八로도 불림)이 었으나 郭子興의 사위가 되면서 元璋으로 개명하였다.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무렵 전염병으 로 부모와 큰 형을 잃고, 부근에 있는 皇覺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3년여에 걸친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至正 12년(1352)에 고향인 濠州(지금의 安徽省 鳳陽縣)에 근거지를 둔 곽자흥의 紅巾軍에 가담하여 점차 그의 세력을 키워나갔고, 곽자흥이 죽은 뒤 실질적으로 곽자흥 군단을 이끌면서 강소 안 휘 절강 등지를 경략하여 세력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명망 있는 유학자와 지주들을 대거 흡수하여 이들의 도움을 받아 일대세력을 형성했는가 하면, 白蓮敎의 색채도 점차 탈각시켜 나갔다. 至正 23년(1363)에 강서 지역에서 漢王을 자칭하며 세력을 떨치던 陳友諒을 鄱陽湖에서 타도하여 화중 지방을 손에 넣었으며, 이어서 2년의 사투 끝에 1367년에 강소 지역에 세력을 떨치며 吳王을 칭하고 있던 張士誠을 그의 근거지인 平江(현재 蘇州)에서 멸하였다. 이어 그는 元의 군대에 패해 의탁해 와 滁州에 머물고 있던 小明王을 영접해 오는 도중에 양자강에서 익사시키고 大勢를 결정한 다음, 1368년 정월에 應天府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大明, 年號를 洪武 라 정하였다. 그는 31년의 재위 동안 명 왕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가지 제도와 정책을 행했으며, 1398년 윤 5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字는 國瑞이고, 諡號는 高皇帝이다. 4) 洪武: 明 왕조를 창업한 太祖 朱元璋의 연호이다. 明 太祖는 1世 1元制, 즉 한 명의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제정하여 사용하는 제도를 확립하여, 이후 명청 시대 중국의 황제는 하나의 연호만을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5) 徐達( ): 安徽省 鳳陽縣 출신으로 字는 天德이다. 농민이었으나 22세 때 郭子興의 수하에 있던 朱元璋의 부하가 되어, 孫德崖에게 붙잡힌 주원장을 구출한 뒤로 신뢰를 받았다. 揚子江을 건너 集慶路(南 京)를 공략한 뒤 대장이 되고, 鎭江을 점령한 뒤 統軍元帥가 되었다. 1361년에 주원장이 吳國公에 오르자 江南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서 江西의 漢帝 陳友諒을 격파하고, 주원장이 吳王이 되고서는 左相國에 올랐다. 1367년에 蘇州의 吳王 張士誠을 공략한 무공으로 信國公에 봉해졌다. 연이어 元軍 토벌에서는 25만의 대군을 총지휘하였고, 주원장이 應天府(南京)에서 즉위하자 武官 제일의 자리에 올랐다. 1370년 에 魏國公에 봉해졌다( 明史 卷125 徐達傳 참조). 6) 洪武帝는 즉위 후 江南을 평정하고, 中原에 격문을 선포하면서, 대장군 徐達과 常遇春에게 北伐을 지시하 였다(관련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원년條 참조). 大將軍 徐達의 북벌에 관한 상세한 내용 은 明史紀事本末 卷8 北伐中原 洪武 원년 2월條 참조. 7) 여기에서 元의 군주란 원나라의 15대 마지막 황제 順帝를 말한다. 8) 北平: 현재의 北京을 말한다. 원의 順帝가 도망간 洪武 원년(1368) 7월 말에는 아직 大都였고, 北平으로 改稱한 것은 洪武 원년 8월이다(이에 관해서는 太祖實錄 卷34 洪武 원년 8월 壬午條 참조). 9) 이때 원의 군주는 3명의 后妃와 太子를 이끌고 建德門을 통해 開平으로 달아났고, 徐達은 齊化門으로 들어와서 監國을 맡고 있던 宗室 淮玉帖木兒 등을 살해하고, 玉印과 玉璽를 획득하였다. 徐達은 宮殿과 府庫의 圖籍寶物 등을 봉쇄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원년條 참조). 10) 開平: 현재 內蒙古 正藍旗 및 多倫縣 附近 일대를 말한다. 中統 원년(1260)에 元朝는 이곳에 定都하여 府를 설치했으며, 이후 中統 4년(1263)에 上都라 칭하였다. 至元 4년(1267)에 中都(지금의 北京)로 672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15 으며, 여러 차례 그의 부하 장수 야속(也速) 등을 파견하여 북부 변경을 어지럽혔다.11) 이듬해 (1369)에 상우춘(常遇春)12)이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개평으로 진군하여 종왕(宗王)13) 경손(慶孫) 평장(平章)14) 정주(鼎住)를 사로잡았다.15) 時元主奔應昌, 其將王保保據定西爲邊患. 三年春, 以徐達爲大將軍, 使出西安搗定 西; 李文忠爲左副將軍, 馮勝爲右副將軍, 使出居庸搗應昌. 文忠至興和, 擒平章竹 천도한 후 이듬해 開平府를 上都路로 승격시켰다. 明初에는 開平衛로 고쳤으며, 宣德 5년(1430)에 治所 를 獨石堡(지금의 河北 獨石口)로 옮기고, 淸 康熙 32년(1693)에 赤城縣에 병합시켰다. 11) 이때 也速은 通州를 약탈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원년條 참조). 元의 丞相 也速이 通州 등 北邊 여러 지역을 침략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8 北伐中原 洪武 원년 2월條 및 洪武 2년 2월 庚辰條, 6월條 등에 보인다. 12) 常遇春( ): 명나라의 開國 功臣으로, 字는 伯仁이고 安徽省 懷遠 출신이다. 용맹하고 과감한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355년 太祖 주원장의 부하가 되어 각지로 轉戰하였으며, 陳友諒과 張士誠 등 群雄을 항복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68년에 徐達 등과 함께 북방정벌에 나서 원나라 수도를 함락시킨 다음, 다시 太原에서 擴廓帖木兒(Köke Temür)를 크게 물리치고 全寧에서 也速을 토벌하여 開平을 함락시킴으로써 원나라 順帝를 북쪽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개선 도중 柳河川에서 급사하였고, 사후 開平王으로 追封되었다( 明史 卷125 常遇春傳 ; 獻徵錄 卷5 참조). 13) 宗王: 元朝 및 蒙古 各部 首領의 封號 중 하나이며, 親王 爵位와 비슷하다. 元史 卷108 諸王表 의 기록에 의하면, 成吉思汗의 黄金家族과 관련 있는 蒙古貴族 男子는 宗王에 봉해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朝廷에서 王印을 수여받은 宗王은 大大王, 王印을 얻지 못한 宗王은 小大王 이라고 칭했다. 14) 平章: 관직명으로 원래 의미는 논의하여 처리한다는 것이다. 唐代에는 尙書 中書 門下省의 長官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일상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어서 다른 관원을 선임하여 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명칭을 더해주었고 同平章事라고 간단하게 불렀다. 宋代에는 이를 계승해서 나이가 많고 명망이 높은 중신들이 同平章事를 맡았는데, 재상보다도 위상이 높았으며 同平章軍國事라 하였다. 元代에는 平章政事 가 있었는데, 丞相의 바로 아래였고, 行中書省에 平章政事를 두었는데, 平章이라고 간단하게 칭하였다. 15)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43 洪武 2년 6월 乙卯條에 보이는데, 여기에서 慶孫을 慶生 으로 표기하고 있고, 葉向高의 四夷考, 全邊略記, 國榷 등에도 모두 慶生 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실록의 기사에 俘其宗王慶生孫及平章鼎住等斬之 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8 北伐中原 洪武 2년 6월條에도 보인다. 殊域周咨錄 에서는 鼎住의 이름이 鼎位 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때의 상황을 보면, 洪武帝는 常遇春에게 지시하여 也速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상우춘은 바로 永平과 惠州를 지나 大寧에 도착하였고, 야속은 그 소식을 듣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상우춘이 開平을 확보하였다. 원의 군주는 應昌으로 도망하였고, 상우춘은 北河까지 추격하여 宗王 3명과 平章 鼎位을 비롯하여 군사 수만 명을 사로잡았고, 開平衛를 설치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년條 참조). 달단전 역주 673

16 貞, 復大破元兵於駱駝山, 遂趨應昌. 未至, 知元主已殂, 進圍其城, 克之. 獲元主 孫買的里八剌及其妃嬪 大臣 寶玉 圖籍. 太子愛猷識理達臘獨以數十騎遁去. 而 徐達亦大破王保保兵於沈兒峪口, 走之. 太祖封買的里八剌爲崇禮侯, 諡元主曰順帝. 於是故元諸將江文淸等 王子失篤兒等, 先後歸附. 獨王保保擁太子愛猷識理達腊居 和林, 屢詔諭之, 不從. 당시 원의 군주는 응창(應昌)16)으로 도망가고 그의 장수 왕보보(王保保)17)가 정서(定 西)18)를 점거해서 변경의 우환이 되었다. [홍무] 3년(1370) 봄에 [태조는] 서달을 대장군(大 將軍)으로 임명하여 서안(西安)19)에서 출발하여 정서를 습격하도록 하고, 이문충(李文忠)20) 16) 應昌: 元代 蒙古 지역의 중요 도시로, 嶺北行省에서 兩都에 이르는 사이에 위치한 교통요지였다. 元朝 至元 10년(1270)에 按陳孫斡羅陳 萬戶 및 그의 처 囊加眞 公主가 城을 쌓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元 世祖 쿠빌라이가 동의하여 應昌府라는 이름을 얻었다. 至元 22년(1292)에 應昌路가 되었다. 1368년에 明軍이 大都를 점령하자, 이듬해(1369) 元 惠宗 妥歡貼睦爾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임시로 建都하였다. 1370년 惠宗이 病死하자 明軍이 다시 이곳을 점령하였고, 이후 황폐해졌다. 17) 王保保: 擴廓帖木兒(Köke Temür,? 1375)를 일컬으며, 원나라와 북원의 장군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몽골 皇子의 딸이고, 그의 아버지는 중국인으로 姓이 王氏였다. 원래 河南省에서 살았으며, 삼촌 察罕帖 木兒의 자리를 물려받아 山東에서 홍건적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황태자의 편에 서서 孛羅帖木兒 (Bolad Temür)를 중심으로 한 반황태자 파와 대립하였다. 1365년에 孛羅帖木兒를 사살하고 황태자를 복위시켰으며, 그 공으로 해남왕과 비서실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擴廓帖木兒는 원나라 군대에게 반원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했지만, 장교단에게 배반 당했다. 愛猷識理達臘(Biligtü Khan Ayursiridara)도 그를 저버렸으나 황제 혜종에 의해 정치 군사적인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패배 후에 그는 河南과 太原을 명나라에 잃고 甘肅省으로 달아났다. 1370년에 혜종이 죽고 愛猷識理達臘이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했는데, 그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1372년에 그가 이끄는 북원군은 사막에서 徐達이 이끄는 明軍에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이후 북원의 영향력을 山西省까지 확장시켰다. 18) 定西: 지금의 甘肅省 중부에 위치한 定西市이다. 19) 西安: 현재 중국 山西省의 省都이며, 周 이래 唐 때까지 1,000년 가까이 國都를 두었던 곳으로, 古代 漢族 활동의 중심지였다. 漢 高祖는 현재 서안의 서북에 長安城을 쌓아 기원전 200년에 洛陽으로부터 이곳에 천도하였다. 이후 魏, 晋의 수도로서 西京이라 불렸다. 北魏가 분열한 후, 西魏가 國都로 삼았고 다음 北周로 이어졌다. 隋는 전국 통일이 이루어진 文帝 開皇 연간( ) 初에, 漢의 장안성 동남쪽 에 新都를 건설하여 大興城이라 불렀고, 唐은 다시 이를 장안성이라 하였다. 太宗 때 大明宮, 玄宗 때 興京宮을 지어 인구 100만을 넘게 포용한 국제도시를 이루었다. 唐末 이후 점차 쇠락하다가, 明代 初에 674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17 을 좌부장군(左副將軍)으로, 풍승(馮勝)21)을 우부장군(右副將軍)으로 삼아 거용(居庸)22)에 서 출발하여 응창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문충은 흥화(興和)23)에 이르러 평장 죽정(竹貞)을 사로잡고,24) 다시 낙타산(駱駝山)25)에서 원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마침내 응창으로 급히 진군(進軍)했다.26)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원의 군주가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고, [계속] 진격하여 그 성(응창성)을 포위하여 함락했다. 원 군주의 손자 매적리팔랄(買的里八剌)27)과 그의 비빈(妃嬪) 대신(大臣) 및 보옥(寶玉) 도적(圖籍)을 얻었다.28) [원의] 태자 애유식리 달랍(愛猷識理達臘, ; 재위 )29)은 홀로 수십의 기병만을 이끌고 도망 唐代의 皇城 全域과 宮城 남부 등을 성벽으로 둘러쌓아 현재 서안성의 모습을 이루었다. 20) 李文忠( ): 字는 思本이고, 江蘇 盱眙 사람으로, 명조의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주원장 의 甥姪로, 19세에 군대를 이끌고 浙江 福建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하면서 공을 세웠다. 洪武 2년(1369) 에 元 順帝의 손자와 후비 및 공주를 사로잡고, 玉璽 등을 확보하여 曹國公으로 책봉되었다. 洪武 3년 (1370)에는 征虜大將軍 徐達과 함께 漠北 원정을 수행하였고, 洪武 5년(1372)의 두 번째 원정에서는 東路軍을 담당하였다. 이때 카라코룸(Karakorum)까지 진격하였지만, 원정에는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원정에 참여하였다. 사망 후 歭陽王에 봉해졌고, 시호는 武靖이다( 明史 卷126 李文忠傳 참조). 21) 馮勝(? 1395): 鳳陽府 定遠 사람이다. 이름을 國勝, 宗異라고도 한다. 원말에 주원장에게 歸依하고 공을 쌓아 元帥가 되었다. 陳友諒, 張士誠을 공격하고 西北과 遼東의 殘元 세력을 크게 격파하여 宋國公에 봉해졌으며, 太子太師가 되어 明의 開國功臣 중에서 3번째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후에 공이 높아지는 것에 시기를 받아 賜死되었다. 22) 居庸: 중국 北京 북서쪽 60km 지점에 있는 居庸關을 말한다. 華北 平原에서 몽골 고원으로 향한 도로가 산맥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지점에 있다. 건설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옛날부터 변방의 요새였고, 太行山脈의 고갯길 太行八徑 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23) 興和: 지금의 河北省 張北이다. 24)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49 洪武 3년 2월 戊子條에 보인다. 25) 駱駝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烏海市 境內에 위치한다. 26) 洪武 3년(1370) 당시 大將軍 徐達을 중심으로 한 北伐軍의 조직과 이들 북벌군이 거둔 구체적인 戰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3년條에 보인다. 27)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에는 買的裡八剌 으로 나와 있다. 28)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2 洪武 3년 5월 辛丑條에 獲元主嫡孫買的里八剌, 並後妃宮人, 暨諸王 省院達官士卒等, 並獲宋元玉璽金寶一十五, 宣和殿玉圖書一玉冊二, 鎭圭大圭玉帶玉斧各一, 及駝馬牛羊無 筭, 遣人俱送京師 라고 기재되어 있다. 29) 愛猷識理達臘: Biligtü Khan Ayursiridara의 音譯이며, 北元의 제2대 황제 昭宗을 말한다. 원나라 12대 황제이며, 몽골 제국의 17대 대칸이다. 원 혜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고려 출신 奇皇后이다. 1353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황태자의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황태자에게 반대하던 파의 지도 달단전 역주 675

18 갔다. 한편 서달도 심아욕(沈兒峪)30) 입구에서 왕보보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패주(敗走)시 켰다. 태조는 매적리팔랄을 숭례후(崇禮侯)에 봉(封)하고31) 원의 군주에게 순제(順帝, 재위 )32)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33) 이에 옛 원의 장수 강문청(江文淸) 등과 왕자(王子) 실독아(失篤兒) 등이 차례로 귀부하였다.34) 유독 왕보보만은 태자 애유식리달랍 을 옹위(擁衛)하며 화림(和林)35)에 머물렀는데36) [태조가] 여러 차례 조서(詔書)37)를 내려 자 孛羅帖木兒(Bolad Temür)가 1364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때 애유식리달랍은 그를 지지하는 擴廓帖 木兒(Köke Temür)에게 달아났지만, 그의 어머니인 기황후는 孛羅帖木兒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년에 그는 擴廓帖木兒와 함께 孛羅帖木兒를 공격했는데, 孛羅帖木兒는 부하에게 배반을 당한 뒤, 擴廓帖木 兒에게 사살되었다. 기황후는 擴廓帖木兒의 지지를 받아 愛猷識理達臘을 황제로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擴廓帖木兒는 원나라 군대에게 반원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했지만, 그를 초창기부터 따르 던 중국인 장교를 포함한 장교단에 의해 배반을 당했다. 1370년에 혜종이 사망하자 愛猷識理達臘은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하고, 宣光으로 改元하였다. 실각 당했던 擴廓帖木兒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擴廓帖木兒가 이끄는 북원의 군대는 1372년 사막에 서 서달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 명군이 2만 명 정도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甘肅에서 다시 서달과 대적할 때 북원군은 심하게 몰려서 고비 사막으로 달아나야 했다. 30) 沈兒峪: 지금의 甘肅 定西縣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31) 책봉하면서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昔帝王之有天下, 必封前代子孫, 使作賓王家, 其來尙矣. 曩因元失其政, 四海分爭, 朕以武功削平群雄, 混一區宇, 爲天下主. 而買的裡八剌實爲元之宗孫. 比者遣將北 征, 爾祖已殂, 旣克應昌, 爾乃來歸. 朕念帝王之後, 爰稽古制, 錫以侯封. 爾其夙夜恭稱朕優禮之意 ( 殊域周 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 32) 順帝: 원나라의 15대 마지막 황제로 妥權帖木兒汗(Togo an Temür Khan)이라고 한다. 順帝는 明이 내려 준 諡號이고, 北元의 廟號는 惠宗이다. 제8대 明宗의 맏아들로, 궁궐 안의 파벌싸움으로 어렸을 때부터 高麗와 廣西를 옮겨 다니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32년에 權臣 엔터무르에 의해 옹립된 친아우인 寧宗이 재위 43일 만에 죽자, 광서에서 돌아와 그 이듬해 上都에서 제위에 올랐다. 고려 출신의 奇氏를 황후로 맞았다. 1339년에 친히 정권을 잡으면서부터는 문화주의자인 타쿠타(조정의 실권자인 伯顔 Bayan의 조카)를 재상에 앉히고, 제9대 文宗 이후의 漢文化 존중주의로 돌아가 遼金宋三史 편찬 을 완성하는 등 원나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 재정적으로 실책이 많고 연속적인 천재지변까지 겹쳐 국내의 치안이 악화되어 홍건적의 난 이후 1368년 大都(北京)가 함락되자, 太子(昭 宗, 愛猷識理達臘, Biligtü Khan Ayursiridara)와 함께 上都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應昌으로 갔으나 그곳에 서 죽었다. 33)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2 洪武 3년 6월 壬申條와 乙亥條 참조.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 兵 洪武 3년 6월條,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34)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9 洪武 3년 12월 癸亥條에 있는데, 당시 王子 失篤兒와 더불어 國舅 阿里麻思海牙 駙馬 忙哥剌失 등이 투항하였다. 35) 和林: 원나라 太宗 定宗 憲宗 시대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을 말한다. 중국의 문헌에는 676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19 효유(曉諭)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五年春, 命大將軍徐達 左副將軍李文忠 征西將軍馮勝率師三道征之. 大將軍達由 中路出雁門, 戰不利, 守塞. 勝軍西次蘭州. 右副將軍傅友德先進, 轉戰至埽林山, 勝等兵合, 斬其平章不花, 降上都驢等所部吏民八千三百餘戶, 遂由亦集乃路至瓜 沙州, 復連敗之. 文忠東出居庸至口溫, 元將棄營遁, 乃率輕騎自臚朐河疾馳, 進敗 蠻子哈剌章於土剌河, 追及阿魯渾河, 又追及稱海, 獲其官屬子孫幷軍士家屬千八百 餘, 送京師. 達等尋召還. 明年春, 遣達 文忠等備西北邊. 元兵入犯武 朔, 達遣 陳德 郭子興擊破之. 未幾, 達等復大破王保保兵於懷柔. 時元兵先後犯白登 保 德 河曲, 輒爲守將所敗, 獨撫寧 瑞州被殘, 太祖乃徙其民於內地. [홍무] 5년(1372) 봄에 [태조는] 대장군 서달 좌부장군 이문충 정서장군(征西將軍) 풍승 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세 갈래 길로 이들을 정벌하도록 하였다.38) 대장군 서달은 중로 (中路)에서 안문(雁門)39)을 나왔지만 전세(戰勢)가 불리하여 요새(邊塞)만 지켰다. 풍승의 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和林 和寧 등으로 쓰인다. 1235년에 몽골 왕조 제2대 황제 오고타이에 의해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오르강 상류 右岸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정종 헌종까지 3대 약 20년에 걸쳐 몽골 제국의 수도로서 번성하였으며,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 전도사 상인 등이 모여들었 다. 쿠빌라이가 수도를 중국 내부에 있는 大都로 옮긴 뒤에는 몽골의 옛 도읍지 또는 和林行省의 소재지 에 불과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北元이 일어났을 때 다시 수도가 되었으나, 그 뒤에는 역사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36) 이러한 내용을 徐達이 洪武帝에게 보고하면서 15만 명의 군사를 요청하였고, 洪武帝는 15만 명의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진격하도록 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 참조). 37) 詔: 명대에 황제가 반포하는 문서에는 詔 誥 鐵券 制 勅 駕貼 冊文 諭 書 令 符 檄 批 答 赦書 등이 있었다. 詔는 중대한 政領을 천하 臣民에게 포고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다. 38) 洪武 5년(1370) 당시 大將軍 徐達이 중심이 된 和林을 공략하기 위한 北伐軍의 조직과 이들 북벌군이 거둔 구체적인 戰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5년條에 보인다. 39) 雁門: 중국 山西省 雁門山의 좁고 험한 길에 있는 雁門關을 일컫는데, 西徑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唐나라 때 개통되어 宋나라 때에는 북방민족에 대한 중요한 방위지점이 되었다. 隋 唐나라 때에는 突厥 위구르 沙陀 등 북방민족과의 사이에 쟁탈전이 되풀이되었다. 元나라 때에는 廢棄되었으나 明나 라 초에 복구되었으며, 關城이 지금의 장소에 건설되어 寧武關 偏頭關과 함께 外三關이라고 불렸다. 달단전 역주 677

20 군대는 서쪽으로 나아가 난주(蘭州)40)에 주둔(駐屯)하였다. 우부장군 부우덕(傅友德)41)이 먼저 나아가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면서 소림산(埽林山)에 이르렀고, 풍승 등의 군대가 합류 하여 평장 불화(不花)를 참하고 상도려(上都驢) 등이 관할하는 관리와 백성(吏民) 8,300여 호(戶)를 항복시켰고,42) 마침내 역집내로(亦集乃路)43)를 지나 과주(瓜州)44) 사주(沙州)45) 에 이르러 다시 그들(왕보보 군대)을 연이어 패배시켰다. 이문충은 동쪽으로 거용을 나와 구온(口溫)에 이르렀는데, 원의 장수가 군영(軍營)을 버리고 달아나 이에 경기(輕騎)46)를 이끌고 여구하(臚朐河)47)에서 빠르게 달려 만자(蠻子) 합랄장(哈剌章)을 토랄하(土剌河)48) 40) 蘭州: 甘肅省의 省都로, 중국 서북 지역의 중심도시이며, 옛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41) 傅友德(? 1394): 明의 開國功臣으로, 安徽 碭山 사람이다. 元末에 柳福通의 軍에 참가하여 李喜喜를 따라 蜀에 들어갔다. 그 후 주원장에 歸依하여 신임을 얻어 大將이 되었다. 洪武 初에 徐達을 따라 北上하여 元을 정벌하였고, 후에 湯和와 함께 蜀을 얻고 雲南으로 내려가 元軍을 추격한 공으로 潁國公에 봉해졌다. 42) 太祖實錄 卷74 洪武 5년 6월 戊寅條에는 左副將軍의 이름이 陳德으로, 斬殺한 平章의 이름이 百花로, 上都驢 등이 관할하는 관리와 백성이 830戶로 기재되어 있다. 43) 亦集乃路: 지금의 額濟納河의 下流 右岸으로, 索果泊 東南의 黑城(Khara-Khoto)에 위치했다. 元 至元 20년(1286)에 路를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 額濟納旗 達賴庫布鎭의 동남쪽 35km 지점에 있었고, 지금의 額濟納旗 지역을 관할했다. 44) 瓜州: 이전에는 安西로 불렸다. 河西走廊의 西端에 위치해 있으며, 甘肅 新疆 靑海 蒙古로 통하는 요충지로, 동으로는 玉門關, 서쪽으로는 敦煌, 南北으로는 蒙古族自治縣, 西北으로는 新疆 哈密市에 접해 있다. 45) 沙州: 지금의 甘肅省 敦煌市 지역이며, 타클라마칸(Taklamakan) 沙漠의 東端에 위치한 곳이다. 秦나라 이전 이 일대에는 大月氏 烏孫人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前漢 초에 匈奴가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점거하였으나 武帝는 흉노를 격파하고, 元鼎 6년(기원전 111)에 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唐 武德 2년 (619)에 沙州를 설치하고, 武德 5년(622)에 西沙州로 개편하였으며, 貞觀 7년(633)에 다시 沙州라 하였 다. 唐 建中 2년(781)에 吐蕃에 함락되었으나 大中 2년(848)에 다시 唐은 이를 회복하여 이곳에 節度使 를 두었다. 宋代에 西夏에 점거되었으나 元代에 다시 이를 회복하여 至元 12년(1277)에 沙州路로 승격시 켜 沙州總管府를 설치하고, 甘肅行省에 예속시켰다. 明 永樂 3년(1405)에 安定 阿端 曲先 罕東 赤斤 蒙古 哈密과 더불어 關西七衛(西北七衛 혹은 蒙古七衛라고도 함)의 하나로 沙州衛를 설치하였으나 正德 11년(1516)에 吐魯番에 점령되었다. 嘉靖 3년(1524)에 明朝는 嘉峪關을 폐쇄하고 關西의 백성을 관내로 이주시켰으며, 이후 200년간 이곳을 비워두었다. 그러다 淸 康熙 후반기에 이 지역을 점차 수복 하여, 雍正 3년(1725)에 沙州衛를 설치하였다. 46) 輕騎: 차림이 가볍고 날쌘 騎兵을 말한다. 47) 臚朐河: 지금의 克鲁倫河를 말한다. 漢書 에는 弓盧水, 舊唐書 에는 盧朐河 로 기재되어 있는데, 遼 史 에서 처음 臚朐河 라고 하였다. 金史 에서는 龍駒河 라고 하다가 명대에 다시 臚朐河라고 하였다. 678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21 에서 진격하여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아노운하(阿魯渾河)49)에 이르고, 또 추격하여 칭해(稱 海)50)에 이르러 그 관속(官屬)과 자손(子孫) 및 군사(軍士)와 가속(家屬) 1,800여 명을 붙잡 아 경사(京師)51)로 보냈다.52) 서달 등은 곧 소환(召還)되었다. 이듬해(1373) 봄에 [태조는] 서달 이문충 등을 파견하여 서북 변방을 수비하게 하였다.53) 원의 군대가 무주(武州)54) 삭 주(朔州)55)를 침범하여, 서달이 진덕(陳德)56) 곽자흥(郭子興)57)을 파견하여 그들(원의 군 淸代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克鲁倫河라고 불렀다. 克鲁倫河는 额爾古納河의 지류로, 몽골 肯特山 동부에 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최종적으로 呼倫湖 西南部로 흘러들어간다. 48) 土剌河: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土拉(Tula)河를 말한다. 49) 阿魯渾河: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鄂爾運河를 말한다. 50) 稱海: 和林의 북쪽에 위치했다. 51) 京師는 당시 수도였던 應天府, 즉 오늘날의 南京을 가리킨다. 應天이란 명칭은 元 至正 16년(1356)에 朱元璋이 集慶路를 應天府로 개칭하면서 불렸으며, 明初에 이곳에 定都했다. 그러나 永樂 19년(1421)에 北京으로 遷都하면서 북경이 새로운 京師로 칭해졌고, 응천부는 이후 正統 6년(1441)에 南京으로 명칭 이 바뀌었으며, 淸 順治 2년(1645)에는 江寧府로 개칭되었다. 52)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74 洪武 5년 6월 甲辰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5년 7월 乙未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53)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춘정월 壬子條에, 命魏國公徐達, 曹國公李文忠往山西北平練 兵防邊 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54) 武州: 지금의 山西 神池 五寨縣의 지역인데, 遼 重熙 9년(1040)에 세워졌으나 明初에 廢해졌다. 55) 朔州: 中國 山西省 西北部 桑幹河 상류에 위치한다. 魏晉南北朝, 西晉 시기에 將峪嶺(현재 雁門關 以北 各縣의 백성들을 嶺南으로 이주시켜 그 지역은 代王 拓跋猗盧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北魏 시기에는 畿內에 속해 桑乾郡(현재 山陰縣의 東), 繁峙郡(현재 應縣의 東), 馬邑郡이 설치되었다. 北齊 天保 8년 (557)에 馬邑郡을 招遠縣으로 개칭하고 朔州를 治所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삭주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北周 시기 삭주를 總管府로 변경하고, 明나라 때는 大同府 소속이었다. 56) 陳德( ): 字는 至善이며, 濠(지금의 安徽 鳳陽) 사람이다. 定遠에서 朱元璋을 만나 따랐으며, 萬夫長으로 종군하여 많은 功을 세웠다. 張士誠을 대패시키고 天策衛 親軍指揮使가 되었고 이어 大都督 府僉事에 올랐다. 이후 大將軍을 따라 元의 汴梁을 취한 후, 이어 平陽 太原 大同을 공략하였고, 鳳翔을 거쳐 秦州에 이르러 元의 守將 呂國公을 붙잡았으며, 徐達을 따라 張良臣을 격파하고 慶陽을 점령하였다. 또 古城에서 擴廓帖木兒를 대파하여 이 공로로 洪武 3년(1370)에 臨江侯에 봉해지고, 1,500石의 歲祿을 받았다. 이듬해 潁川侯 傅友德을 따라 蜀을 정벌하고 綿州로 들어가 龍德을 공격했다. 洪武 5년(1372)에 는 左副將軍에 임명되어 馮勝과 함께 漠北정벌에 나서 別篤山에서 적을 멸하고, 亦集乃路를 취하였다. 洪武 10년(1377)에 鳳陽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杞國公에 追封되었으며, 諡號는 定襄이다. 57) 본문 중에서 언급된 郭子興은 바로 郭興( )으로 濠州(현재 安徽省 鳳陽) 사람이며, 원말에 郭子興의 군대에서 활약하였다. 후에 朱元璋에게 투신하여 明 건국 초 정복활동에 참여하여 鞏昌侯에 달단전 역주 679

22 대)을 격파하게 하였다.58) 얼마 후 서달 등이 다시 왕보보의 군대를 회유(懷柔)59)에서 크게 격파했다.60) 당시 원의 군대는 차례로 백등(白登)61) 보덕(保德)62) 하곡(河曲)63)을 침범했 지만 번번이 수장(守將)에게 패배를 당했는데, 유독 무녕(撫寧)64) 서주(瑞州)65)만 피해를 입어 태조는 이에 그곳(무녕 서주)의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켰다. 七年夏, 都督藍玉拔興和. 文忠亦遣裨將擒斬其長, 而自以大軍攻高州大石崖, 克之, 斬宗王 大臣朶朶失里等, 至氈帽山斬魯王, 獲其妃蒙哥禿. 秋, 太祖以故元太子流 離沙漠, 父子隔絶, 未有後嗣, 乃遣崇禮侯北歸, 以書諭之. 又二年, 其部下九住等 寇西邊, 敗去. [홍무] 7년(1374) 여름에 도독(都督)66) 남옥(藍玉)67)이 흥화(興和)를 함락시켰다.68) 이문 책봉되었다. 그 동생은 武定侯 郭英이고, 여동생은 郭寧妃이다( 明史 卷131 郭興傳 참조). 58) 이 일은 洪武 6년 4월의 일로, 당시 陳德은 臨江侯, 郭子興은 鞏昌侯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殊域周 咨錄 卷16 韃靼 洪武 6년條 참조). 이와 관련하여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6월 甲申條에서는 이때 徐達이 臨江侯 陳德과 鞏昌侯 郭興의 군대를 보내 이를 격퇴하였다 고 기재되어 있다. 59) 懷柔: 현재 北京 동북부에 위치한 懷柔區 지역을 말한다. 60)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11월 壬子條에 보이는데, 徐達은 懷柔 三角村에서 元兵을 격파하고, 平章 康同僉을 사로잡고, 李文忠은 朔州로 나가 元의 太尉 伯顔不花를 사로잡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61) 白登: 白登山으로, 지금의 大同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62) 保德: 山西省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保德縣을 말한다. 63) 河曲: 忻州地區에 위치해 있는 河曲縣인데, 山西 陝西 內蒙古 三省의 交界 지역이다. 64) 撫寧: 河北省 秦皇島市에 소속된 撫寧縣을 말한다. 65) 瑞州: 지금의 江西省 高安市를 말한다. 66) 都督: 明代 전국의 군대를 통괄하는 五軍都督府의 長을 말한다. 左 右都督이 있으며, 品階는 正一品이고, 그 밑에 從一品인 都督同知와 正二品인 都督僉事가 보좌하고 있다. 67) 藍玉(? 1393): 安徽省 定遠 사람이다. 처남인 常遇春을 따라 공을 세워 大都督府僉事가 되었다. 1371년 에 蜀을 정벌하고, 1378년에는 西蕃을 정벌하여 그 공으로 永昌侯에 봉해졌다. 1387년에는 馮勝을 따라 원나라의 納哈出를 정벌하여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원나라 順帝의 아들 脫古思帖木兒를 토벌 하기 위하여 몽골에 원정하여 대승리를 거두어 凉國公에 봉해졌다. 1390년에는 湖廣 蠻族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듬해에는 西藩의 罕東 지역을 경략하여 그 공으로 太子太傅가 되었다. 그러나 1393년에 680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23 충 역시 부하 장수를 보내 [적의] 우두머리를 붙잡아 참하고, 직접 대군(大軍)을 이끌고 고주 (高州)의 대석애(大石崖)를 공격하여 승리해 종왕(宗王) 대신(大臣) 타타실리(朶朶失里) 등 을 참하였으며,69) 전모산(氈帽山)에 이르러서는 노왕(魯王)을 참하고 그 비(妃) 몽가독(蒙哥 禿)70)을 사로잡았다.71) [그해] 가을에 태조는, 옛 원의 태자가 사막을 떠돌아다녀 부자(父子) 가 떨어져있게 되어 아직 후사(後嗣)가 없었기 때문에 곧 숭례후를 북방으로 돌려보내고 새서(璽書)72)를 보내 그를 효유(曉諭)하였다.73) 또 2년 후(1376)에 그 부하 구주(九住) 등이 서쪽 변방을 침범하였으나 패주(敗走)하였다. 洪武十一年夏, 故元太子愛猷識理達腊卒, 太祖自爲文, 遣使吊祭. 子脫古思帖木兒 繼立. 其丞相驢兒 蠻子哈剌章, 國公脫火赤, 平章完者不花 乃兒不花, 樞密知院 愛足等, 擁衆於應昌 和林, 時出沒塞下. 太祖屢賜璽書諭之, 不從. 十三年春, 西 平侯沐英師出靈州, 渡黃河, 歷賀蘭山, 踐流沙, 擒脫火赤 愛足等於和林, 盡以其 部曲歸. 冬, 完者不花亦就擒. 明年春, 徐達及副將軍湯和 傅友德征乃兒不花, 至 河北, 襲灰山, 斬獲甚衆. 홍무 11년(1378) 여름에 옛 원의 태자(太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이 죽자, 태조는 직접 글을 써서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74) [그의] 아들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 1342 자신의 무공을 내세운 거만하고 방자한 행동 때문에 모반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그에 연좌된 자가 2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을 藍玉의 獄 이라고 한다. 68) 洪武 7년(1374) 4월의 일로, 都督僉事 藍玉이 군대를 이끌고 興和를 공격하니, 元의 장수 脫因帖木兒가 城을 버리고 달아났다.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7년 하4월 己亥條 참조. 69) 이에 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7년 추7월條에 있는데, 高州 火石崖를 공격했으 며, 宗王 朶朶失里를 斬하고 承旨 百家奴를 붙잡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70) 殊域周咨錄 에서는 魯王의 妃를 蒙頹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7년條). 71)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91 洪武 7년 7월 甲子條와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7년 8월 丙辰條에도 보이는데, 이들 외에도 宗王의 印을 획득했으 며 司徒 答海俊, 平章 把都, 支院 忽都 등을 斬하였다. 72) 璽書: 秦漢시대 이래 황제의 璽印을 찍은 문서의 총칭이다. 여기서는 御璽가 찍힌 외교문서를 가리킨다. 73)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93 洪武 7년 9월 丁丑條,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條,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7년 9월 丁丑條에 보인다. 달단전 역주 681

24 1388; 재위 )75)가 계승하였다.76) 그의 승상 여아(驢兒), 만자(蠻子) 합랄장(哈剌 章), 국공(國公) 탈화적(脫火赤),77) 평장 완자불화(完者不花) 내아불화(乃兒不花), 추밀지원 (樞密知院)78) 애족(愛足) 등이 응창 화림에서 무리를 옹유하고 있다가 때때로 변방 이남(以 南)에 출몰(出沒)하였다. 태조는 누차 새서(璽書)를 내려 이들을 효유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홍무] 13년(1380) 봄에 서평후(西平侯) 목영(沐英)79)의 군대가 영주(靈州)80)를 나와 황하 (黃河)81)를 건너 하란산(賀蘭山)82)을 거쳐 유사(流沙)를 지나갔는데, 화림에서 탈화적 애족 74) 愛猷識理達腊의 죽음에 대해서는 太祖實錄 卷118 洪武 11년 하4월조에 실려 있으며, 관련 내용은 太祖實錄 卷119 洪武 11년 6월 壬子條에 보인다. 75) 脫古思帖木兒: Tögüs Temür의 音譯이며, 北元의 3대 可汗 益宗 寧孝皇帝를 일컫는다. 北元의 惠宗 妥權帖 睦爾의 아들로, 洪武 21년(1378)에 형인 昭宗이 죽자 帝位에 올라 天元이라고 改元하였다. 洪武 21년 (1388)에 藍玉이 이끄는 明軍에 쫓기는 중에 部將 也速迭兒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蒙古 諡號는 烏薩哈 爾可汗(Uskhal Khan)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長子 天保奴는 1388년에 아버지와 함께 피살되었고, 次子인 地保奴는 明軍에게 붙잡혀 琉球에 安置되었다. 76)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11년 5월條에 보면, 脫古思帖木兒가 계승한 것은 그해 5월로 보인다. 77) 脫火赤(? 1433): Toqochi의 音譯이다. 泰寧衛 都督인 阿只罕의 아들로(혹자는 阿札失里의 아들이라고 도 함), 1428년에 指揮僉事로 명조에 入貢한 후 오랫동안 명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78) 樞密知院: 樞密院은 唐 五代 宋 遼 元 시대의 官署 명칭이다. 주로 軍政을 담당하였다. 唐 永泰 원년 (765)에 처음 설치되어, 본래는 內廷에 속해있었는데 宦官이 樞密使가 되면서 주요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宋代에는 군사기밀과 변방사무를 맡아보았는데, 中書省과 함께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다. 遼나라 시기에 北樞密院(兵部에 해당), 南樞密院(吏部에 해당 및 漢人樞密院이 설치되었다. 元代의 樞密院은 주로 군사기밀과 邊防, 宮廷 禁衛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고, 전쟁 시에는 行樞密院을 설치해 軍政만 담당하게 하였다. 명청 시대에는 폐지하였다. 79) 沐英( ): 安徽 鳳陽 사람으로, 字는 文英이며, 朱元璋의 義子이다. 일찍이 주원장을 따라 南征 北戰에 참가하였고, 明朝 建立 후에는 滇鎭에 남아 수비하며 屯田을 크게 일으켰다. 80) 靈州: 故城은 현재 寧夏 靈武縣 西南部에 위치한다. 北魏 시기에는 薄骨律鎭이었다가, 西魏 시기에 靈州 普樂郡으로 개칭하였다. 北周 시기에 靈州 靈武郡으로 바꾸었다. 隋代에 靈武郡이 되었다가 唐代에 다시 靈州를 두어 朔方節度使가 주둔하였다. 宋代에 西夏에 함락되어 翔慶軍 西平府가 되었다. 元代에 다시 靈州 이름을 회복하고, 甘肅行省 寧夏府路에 소속되었다. 明代에 靈州所가 설치되어 陝西省 寧夏衛 소속 이 되었고, 淸代의 靈州는 甘肅省 寧夏府 소속이었다. 81) 黃河: 중국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중국 제2의 강으로, 길이는 5,464km, 유역면적은 752,443 이 다. 靑海省 巴顔喀拉 산맥의 雅合拉達澤山(5,442m)에서 발원하는 約古宗列渠가 원류로서, 星宿海 및 鄂陵湖 札陵湖를 거치는 하류를 가리킨다. 청해성 남동부를 흘러서 四川省 경계에 이르고 積石山脈 동단을 굽어 甘肅省 남부로 들어가 북서로 흘러 다시 청해성으로 들어간 다음 西寧 남쪽을 흘러, 劉家峽 682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25 등을 사로잡고 그 부곡(部曲)83)을 모두 돌려보냈다.84) [그해] 겨울에 완자불화 또한 사로잡혔 다.85) 이듬해(1381) 봄에 서달과 부장군(副將軍) 탕화(湯和) 부우덕(傅友德)이 내아불화를 정벌하고, 하북(河北)에 이르러 회산(灰山)을 습격하였는데, 죽거나 포로로 잡힌 자가 아주 많았다.86) 時王保保已先卒, 諸巨魁多以次平定, 或望風歸附, 獨丞相納哈出擁二十萬衆據金山, 數窺伺遼. 二十年春, 命宋國公馮勝爲大將軍, 率潁川侯傅友德 永昌侯藍玉等, 將 兵二十萬征之, 還其先所獲元將乃剌吾. 勝軍駐通州, 遣藍玉乘大雪襲慶州, 克之. 夏, 師逾金山, 臨江侯陳鏞失道, 陷敵死. 乃剌吾歸, 備以朝廷撫恤恩語其衆, 於是 全國公觀童來降. 納哈出因聞乃剌吾之言已心悸, 復爲大軍所迫, 乃陽使人至大將軍 의 협곡을 지나 감숙성 蘭州에 이르러 북동으로 流路를 바꾸고, 寧夏回族自治區의 銀川 동쪽을 지나 內蒙古自治區 오르도스 지방으로 들어간다. 다시 巴頭 부근을 동류한 다음 山西省 河曲縣 부근에서 남하하여 潼關 부근에서 또다시 동으로 진로를 바꾸어 三門峽을 거쳐 황토고원을 관통하여 華北平野로 들어가 山東省 墾利縣에서 渤海灣으로 들어간다. 82) 賀蘭山: 中國 寧夏 回族自治區 西北쪽에 위치한 山嶺이다. 古代 鮮卑族 賀蘭氏가 이 지역에서 거주했던 연유로 이름이 붙여졌다. 賀蘭氏는 北魏 孝文帝가 漢化改革을 실행한 이후 漢族에 융합되었다. 賀蘭山 이 라는 명칭은 隋書 趙仲卿傳 에 제일 먼저 나오는데, 開皇 3년(583)에 趙仲卿이 突厥을 공격하기 위해 하란산을 나왔다고 한다. 明代에 하란산 서쪽과 북쪽의 韃靼이 하란산 지역에서 명조와 대치하기 시작하여 明朝 政府는 영하 北部에 대규모 長城을 쌓고, 영하에 總鎭 衛 千戶所 屯堡 등을 완비하고 삼엄한 軍事防禦 계통을 세웠다. 하란산 위의 명대 장성은 타타르와 명조 사이에 지속된 180여 년의 군사 분쟁을 보여준다. 83) 部曲: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군대의 편제와 사회계층을 가리키는 것이다. 漢代에는 군대 편제의 명칭이었다. 大將軍營 아래 다섯 개의 部가 있었고, 그 部 아래에 曲이 있었다. 따라서 部와 曲을 연결해서 지휘관이 통솔하는 군대를 지칭하였다. 그 후 部曲의 지휘가 하락하기 시작하였는 데, 魏晋南北朝 시기에는 家兵이나 私兵을 지칭하였고, 隋唐 시기에는 노비와 良人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회계층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뜻 외에 部下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84)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130 洪武 13년 2월 壬子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13년 춘3월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85)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134 洪武 13년 11월 丙午條에 보인다. 86)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135 洪武 14년 춘정월 戊子條에 보인다. 달단전 역주 683

26 營納款, 以覘兵勢. 勝遣玉往受降. 使者見勝軍還報, 納哈出仰天歎曰: 天弗使吾有 此衆矣. 遂率數百騎詣玉納降. 已, 將脫去, 爲鄭國公常茂所傷不得去. 都督耿忠遂 以衆擁之見勝, 勝重禮之, 使忠與同寢食. 先後降其部曲二十餘萬人, 及聞納哈出傷, 由是驚潰者四萬人, 獲輜重畜馬亘百餘里. 勝班師, 都督濮英以三千騎殿, 爲潰卒所 邀襲, 死之. 秋, 勝等表上納哈出所部官屬二百餘人, 將校三千三百餘人, 金銀銅印 一百顆, 虎符牌面百二十五事, 馬二百九十餘匹, 稱賀. 太祖封納哈出爲海西侯, 先 後賜予甚厚, 幷授乃剌吾千戶. 당시 왕보보는 이미 먼저 죽고87) 여러 거괴(巨魁)가 대부분 차례로 평정되거나, 혹은 형세 를 보아 귀부하였는데, 유독 승상 납합출(納哈出)88)만이 20만의 무리를 옹유하며 금산(金 山)89)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 요(遼)90)를 엿보았다. [홍무] 20년(1387) 봄에 [태조 는] 송국공(宋國公) 풍승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영천후(潁川侯)91)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 등 장병 20만 명을 이끌고 [납합출을] 정벌하였는데, 전에 잡힌 원의 장수 내랄오(乃剌 吾)를 돌려보냈다. 풍승의 군대가 통주(通州)92)에 주둔하여, 남옥을 보내 큰 눈이 온 틈을 87) 太祖實錄 卷100 洪武 8년 8월 巳酉條에 따르면, 王保保는 洪武 8년(1375) 8월에 사망했다. 같은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8년 8월條에도 보인다. 88) 納哈出(? 1388): 원나라 초기 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遼東 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말기에는 瀋陽을 근거지로 스스로 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1362년 2월 고려의 반역자 趙小生에 이끌려, 東北面 雙城을 공격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 나 東北面兵馬使 李成桂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北元이 세워 진 1368년 이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官位인 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었으나 후에 명나라에 항복, 海西侯에 봉해져 雲南정벌에 나섰다가 병으 로 사망하였다. 89) 金山: 지금의 吉林省 雙遼의 東北에 있다. 90) 遼: 遼河를 말한다. 91) 傅友德은 洪武 3년(1370) 11월에 潁川侯, 洪武 17년(1384) 4월에는 潁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洪武 20년(1387) 당시는 潁國公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太祖實錄 卷100 洪武 20년 춘정월 癸丑條에도 潁國 公이라고 나와 있다. 92) 通州: 현재 北京市 東南部의 通州區를 말한다. 金代 天德 3년(1151)에 潞縣에 通州를 두었는데, 漕運通 濟 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元代에는 大都路, 明初에는 北平府에 속해 있다가 永樂 연간( )부터 順天府가 관할하였다. 684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27 타 경주(慶州)93)를 습격하도록 하여 승리하였다.94) [그해] 여름에 군대가 금산을 넘었는데, 임강후(臨江侯) 진용(陳鏞)이 길을 잃어 적에게 공격을 받아 죽었다.95) 내랄오가 돌아가 [명] 조정의 무휼(撫恤) 은덕(恩德)을 그 부족들에게 상세하게 다 말하니, 이에 전국공(全國公) 관동(觀童)이 와서 항복하였다.96) 납합출은 내랄오의 말을 듣고서 이미 마음이 흔들렸는데, 다시 [명의] 대군이 압박해 오자 곧 겉으로 사람을 대장군의 군영에 보내 귀순하는 것처럼 꾸며 병력의 정황을 엿보았다. 풍승이 남옥을 파견하여 가서 항복을 받으라고 하였다. 사자(使 者)가 풍승의 군대를 보고 돌아와 보고하자 납합출이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늘 이 나에게 이 무리를 거느리지 못하게 하는구나 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백의 기병을 이끌고 남옥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얼마 후 도망가려고 했으나 정국공(鄭國公) 상무(常茂)97)에게 부상을 입어 갈 수 없었다.98) 도독(都督) 경충(耿忠)이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그(납합출)를 데리고 와 풍승을 알현하니, 풍승이 융숭한 예로 그를 대하고 경충에게 그와 함께 먹고 자도록 했다. 이어서 그의 부하 20여만 명이 항복했는데,99) 납합출이 상해를 입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놀라 흩어진 자가 4만 명이었고, 노획한 군수품과 가축과 말이 100여 리(里)100)나 이어 졌다.101) 풍승이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오는데, 도독 복영(濮英)102)이 3천의 기병을 이끌고 93) 慶州: 지금의 內蒙古 巴林左旗 索布力嘎이다. 94)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춘정월 壬子朔條, 同 2월 甲申條, 同 3월 辛未條에 기재되어 있다. 9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更子條에 보인다. 96)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癸卯條에 보인다. 97) 常茂: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음. 常遇春의 아들이며 馮勝의 사위이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條 참 조). 98) 그때 常茂의 휘하에 蒙古語를 하는 이가 있어 納哈出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常茂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常茂가 도망가려는 納哈出의 팔뚝에 상처를 입혔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條 참조). 99)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에는 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 이라고 되어 있다. 愛馬 는 蒙古語 aimak 을 音譯한 것으로, 몽골에서는 12 13세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일정한 遊牧地를 공동소유 로 하는 사회집단을 말한다. 淸朝를 거쳐 몽골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방 행정 단위가 되었다. 100) 里: 明代에 길이를 표시하는 尺度는 裁衣尺 量地尺 營造尺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明代 量地尺의 1里는 360步이고, 算法統宗 卷3에 의하면 五尺爲一步 로 되어 있음으로 1里는 1,800尺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리는 576m이다. 101)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에 보이는데, 於是其衆, 亦降凡四萬餘, 並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 이라 기재되어 있다. 102) 濮英(? 1386): 濮眞이라고도 불리며, 安徽 鳳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西安衛의 指揮였다. 洪武 19년 달단전 역주 685

28 맨 뒤에서 따라오다가 궤멸되어 흩어졌던 병졸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다.103) [그해] 가을에 풍승 등이 표(表)104)로, 납합출 휘하의 관속(官屬) 200여 명, 장교(將校) 3,300여 명,105) 금은 동인(金銀銅印) 100과(顆), 호부패면(虎符牌面) 125건, 말 290여 필(匹)을 상주하며 경하 드 렸다. 태조는 납합출을 해서후(海西侯)에 봉하고,106) 계속해서 아주 후한 상을 내렸으며,107) 아울러 내랄오를 천호(千戶)108)에 제수(除授)하였다. 納哈出旣降, 帝以故元遺寇終爲邊患, 乃卽軍中拜藍玉爲大將軍, 唐勝 郭英副之, 耿忠 孫恪爲左 右參將, 率師十五萬往征之. 冬, 元將脫脫等降於玉. 明年春, 玉 以大軍由大寧至慶州, 聞脫古思帖木兒在捕魚兒海, 從間道馳進, 至百眼井哨不見敵, 欲引還. 定遠侯王弼曰: 吾等奉聖主威德, 提十萬餘衆, 深入至此, 無所得, 何以復 命? 玉乃穴地而爨, 一夜馳至捕魚兒海. 黎明, 去敵營八十里. 時大風揚沙, 晝晦, 軍行無知者, 敵不設備. 弼爲前鋒, 直薄之, 遂大破其軍, 斬太尉 蠻子數千人. 脫 古思帖木兒以其太子天保奴 知院捏怯來 丞相失烈門等數十騎遁去, 獲其次子地保 (1386)에 洪武帝가 耿炳文에게 陝西에서 부대를 선발해서 변방수비를 담당하도록 했는데, 유독 복영의 부대가 뛰어나서 그를 都督僉事로 승진시켰다. 北元 納哈出과의 교전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자결하였다. 후에 金山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忠襄이다. 103) 納哈出의 투항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하6월 庚午條 및 丁未條에 있다. 104) 表: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를 表文이라 한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과 正旦 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표문)을 바치고 賀禮하였다. 天壽聖節인 경우에 在外 5품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通을 바치고, 正旦 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各 1通을 더 바쳤다. 조선 베트남 등도 명조에 입조할 때 표문을 바쳤다. 명초에 表文 등으로 인해 朝鮮과 明朝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105) 太祖實錄 卷184 洪武 20년 8월 丁丑條에는 所部官屬將校三千三百餘人 이라고 되어 있다. 106)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5 洪武 20년 9월 丁亥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戊寅條에도 보인다. 107) 이때 洪武帝는 納哈出에게 一品의 官服을 하사하였고, 그 부하들에게도 모두 의복과 관대를 내렸다. 얼마 후 納哈出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察罕을 瀋陽侯로 책봉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0년條). 108) 千戶: 明代 각 지역에 주둔하는 衛所制에서 世襲職인 千戶所의 長으로서 軍戶 1,120명을 통솔했다. 686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29 奴及妃主五十餘人 渠率三千 男女七萬餘, 馬駝牛羊十萬, 聚鎧仗焚之. 又破其將 哈剌章營, 盡降其衆. 於是漠北削平. 捷奏至, 太祖大悅, 賜地保奴等鈔幣, 命有司 給供具. 旣有言玉私元主妃者, 帝怒, 妃慚懼自殺. 地保奴出怨言, 帝居之琉球. 납합출이 이미 항복했지만, 황제는 옛 원의 남은 적구(賊寇)가 끝내는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여겨 군중(軍中)의 남옥(藍玉)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고, 당승(唐勝)109) 곽 영(郭英)110)을 부(副)장군으로, 경충(耿忠) 손낙(孫恪)을 좌 우참장(左 右參將)111)으로 삼아 군대 15만을 이끌고 가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112) [그해] 겨울에 원의 장군 태태(脫脫) 등이 남옥에게 항복하였다.113) 이듬해(1388) 봄에 남옥이 대군을 이끌고 대녕(大寧)114)에서 경주(慶州)에 이르렀는데,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포어아해(捕魚兒海)115)에 있다는 걸 듣고 샛길로 빠르게 나아가 백안정(百眼井)에 이르렀지만, 척후가 적을 보지 못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려고 하였다.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성주(聖主)의 위덕(威德)을 받들어 10만여 군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깊이 들어왔는데, 얻은 것이 없으면 어떻게 복명(復命)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남옥이 이에 땅에 구멍을 파고 밥을 지으 며, 하룻밤에 빠르게 달려 포어아해에 이르렀다. 희미하게 날이 밝을 무렵, 적의 군영으로부터 80리 떨어져 있었다. 그때 큰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려 낮인데도 어두워 군대의 행진을 알아차 리지 못해, 적이 대비를 하지 못했다. 왕필이 선봉(先鋒)이 되어 곧바로 [적] 가까이에 다가가 109) 太祖實錄 卷184 洪武 20년 8월 壬申條 및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丁未條에는 唐勝宗으로 되어 있다. 110) 郭英( ): 濠州(현재 安徽省 鳳陽) 사람으로, 郭興의 동생이다. 朱元璋 휘하에 있을 때 신임을 받아 그의 장막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朱元璋과 함께 武昌 淮安 등을 장악하는데 공을 세웠고, 徐達 常遇春과 함께 山西와 雲南 공략에서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洪武 17년(1384)에 武定侯 로 책봉되었다. 111) 參將: 明代 변경 지역을 수비하는 관직으로 정원은 없고, 지위는 總兵과 副總兵 다음으로 각각 路를 지켰다. 명청 시대 漕運 官員 중에는 參將이 있었는데, 식량 운반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12)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丁未條 참조. 113)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7 洪武 20년 11월 甲午條에 보인다. 114) 大寧: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寧城縣의 서쪽을 말한다. 115) 捕魚兒海: 淸水泊, 湖泊이라고도 한다. 明 奴兒干都司 哈剌孩衛 境內(지금의 貝爾湖)에 있었다. 달단전 역주 687

30 마침내 그 [적]군을 크게 격파하고, 태위(太尉) 만자(蠻子) 수천 명116)을 참(斬)하였다. 탈고 사첩목아는 그의 태자 천보노(天保奴) 지원(知院)117) 날겁래(捏怯來) 승상 실렬문(失烈 門) 등 수십 기(騎)를 이끌고 달아났지만, 그의 둘째 아들 지보노(地保奴)와 후비(后妃) 및 공주(公主) 50여 명118) 거수(渠率)119) 3천 [명] 남녀 7만여 [명], 말 낙타 소 양 10 만120) [마리]를 포획하고, 적의 개갑(鎧甲)과 병기(兵器)를 모아 태워버렸다.121) 또한 그의 부장(部將) 합랄장(哈剌章)의 군영을 공격하여 그 무리를 모두 항복시켰다. 이에 막북(漠北) 이 평정되었다. 전승(戰勝) 상주(上奏)가 도착하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지보노 등에게 초폐 (鈔幣)를 하사하고,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생활용구를 지급하도록 하였다.122)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남옥이 원 군주의 비(妃)와 사통(私通)한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노하였고, [원 군주의] 비는 부끄럽고 두려워 자살하였다. 지보노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홍무]제가 그를 유구(琉球)123)에서 거주하게 하였다.124) 116)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其太尉 蠻子率從據戰敗之, 殺蠻子及其軍士數十人 이 라고 되어 있다. 117) 知院: 樞密院의 업무를 주관하는 관직으로, 원래의 명칭은 知樞密院事인데 간략하게 知院이라고 불렀 다. 樞密使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118)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妃子等六十四人 이라고 되어 있다. 119) 渠率: 渠帥, 渠魁라고도 하며, 악당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120)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馬四萬七千匹, 駝四千八百四頭, 牛羊一十萬二千四百五 十二頭 라고 되어 있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1년條에는 이때 획득한 사람과 물품에 대해서 獲其次子地保奴 妃子等六十人, 及故太子妃 公主 吳王 代王等三千六十人, 軍士男女八萬, 得寶璽 金銀印 圖書 牌面百五十三, 車三千輛, 馬駝牛羊十餘萬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21) 藍玉이 慶州에 이르러 脫古思帖木兒를 토벌한 세부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1년 하4월條 참조. 122) 太祖實錄 卷192 洪武 21년 추7월 戊寅條에는 至京地保奴及后妃獻金印金牌, 賜鈔二百錠, 命有司給第 宅廩餼 라고 되어 있다. 123) 琉球: 14세기 후반, 沖繩(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北山, 中山, 南山의 세 세력(三山)이 형성되어 각기 명나라에 조공하였다. 고려와의 관계는 1389년에 中山王이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포로와 특산물을 바치면서 시작되었다. 1429년에 중산왕이 된 尙邑志가 三山을 통일하고 琉球 왕국을 성립시 켰다. 琉球 왕국은 명조와의 조공책봉체제 하에서 室町막부, 朝鮮王朝와도 국교를 맺었으며, 명 조 선 일본 타이 자바 수마트라 등을 잇는 중개무역지로 번영하였다. 중개 물품은 蘇木 胡椒 檀 木 象牙 등 동남아시아 산물들이었다. 琉球의 중개무역은 16세기에 이르러 명의 해금정책이 완화되면 서 중국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활약하게 되자 쇠퇴하였다. 그 후 琉球 왕국은 1609년 江戶막부에 사실상 복속되는 한편 明과 淸에도 조공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兩屬관계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 688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31 脫古思帖木兒旣遁, 將依丞相咬住於和林, 行至土剌河, 爲其下也速迭兒所襲, 衆復 散, 獨與捏怯來等十六騎偕. 適咬住來迎, 欲共往依闊闊帖木兒, 大雪不得發. 也速 迭兒兵猝至, 縊殺之, 幷殺天保奴. 於是捏怯來 失烈門等來降, 置之全寧衛. 未幾, 捏怯來爲失烈門所襲殺, 衆潰, 詔朶顔等衛招撫之, 來降者益衆. 탈고사첩목아는 도망한 후에, 승상(丞相) 교주(咬住)에게 의지하여 화림(和林)에 거주하려 고 가다가 토랄하(土剌河)에 이르렀는데, 그의 부하인 야속질아(也速迭兒)에게 습격을 당하 여 부하들이 다시 흩어졌고, 오직 날겁래(捏怯來) 등 16기(騎)만이 함께 했다.125) 마침 교주가 와서 맞이하여, 모두 활활첩목아(闊闊帖木兒)에게 의지하러 가려고 했으나 큰 눈이 내려 출발 할 수 없었다. 야속질아의 군대가 갑자기 이르러 [그를] 교살(絞殺)하였고126) 천보노도 함께 죽였다. 이에 날겁래 실렬문 등이 와서 투항하여, 전녕위(全寧衛)127)에 안치(安置)하였다. 얼마 후 날겁래가 실렬문에게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날겁래의] 무리가 흩어지져서, 타안(朶 顔)128) 등 위(衛)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날겁래의 무리를] 초무(招撫)하도록 하니, 와서 투항한 자가 더욱 많아졌다.129) 1879년에 琉球 왕국은 沖繩縣이 되어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24) 같은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1년條에도 있다. 12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94 洪武 21년 동10월 丙午條에 보인다. 126) 也速迭兒가 脫古思帖木兒를 시해한 시기는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明史紀事本末 에는 卷10 故元遺 兵 洪武 22년 추7월條에 기재되어 있다( 元也速迭兒弑其主脫古思帖木兒, 立坤帖木兒, 其部屬皆奔散, 元裔日微 ). 殊域周咨錄 에는 관련 내용이 卷16 韃靼 洪武 25년條에 있다. 그러나 太祖實錄 卷194 洪武 21년 동10월 丙午條에는 也速迭兒, 遣大王火兒忽答孫王府官孛羅, 追襲之,獲脫古思帖木兒, 以弓弦 縊殺之 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탈고사첩목아가 죽은 것은 洪武 21년(1388)으로 보인다. 127) 全寧衛: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翁牛特旗에 위치했는데, 洪武 22년(1389)에 설치하여 捏怯來 失烈門 등을 안착시켰으나 永樂 원년(1403)에 폐지하였다. 128) 朶顔: 朶顔衛를 일컬으며, 兀良哈 3衛 중 하나로, 그 명칭은 元代의 朶因溫都兒兀良哈千戶所에서 유래한다. 洪武 22년(1389)에 설치되어 脫魯忽察兒(脫兒火察)를 指揮同知로 삼아 大寧都指揮使司에 예속시켰으나 永樂 연간( )에 奴兒干都司로 바꾸어 예속시켰다. 이들은 초기에 洮兒河 유역에서 유목했지만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潢河를 넘어왔다. 喜峰口를 통해 明에 조공했고, 廣寧에서 명조와 互市했다. 129)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97 洪武 22년 8월條에 보인다. 달단전 역주 689

32 二十三年春, 命潁國公傅友德等以北平兵從燕王, 定遠侯王弼等以山西兵從晉王, 征 咬住及乃兒不花 阿魯帖木兒等. 燕王出古北口, 偵知乃兒不花營迤都, 冒大雪馳進, 去敵一磧, 敵不知也. 先遣指揮觀童往, 觀童舊與乃兒不花善, 一見相持泣. 頃之, 大軍壓其營, 乃兒不花驚, 欲遁, 觀童止之, 引見王, 賜飮食慰諭遣還. 乃兒不花喜 過望, 遂偕咬住等來降. 久之, 乃兒不花等以謀叛誅死, 敵益衰. 太祖亦封燕 晉諸 王爲邊藩鎭, 更歲遣大將巡行塞下, 督諸衛卒屯田, 戒以持重, 寇來輒敗之. 而敵自 脫古思帖木兒後, 部帥紛拏, 五傳至坤帖木兒, 咸被弑, 不復知帝號. 有鬼力赤者篡 立, 稱可汗, 去國號, 遂稱韃靼云. [홍무] 23년(1390) 봄에, 영국공(潁國公) 부우덕(傅友德) 등에게 명하여 북평(北平)의 군대 를 이끌고 연왕(燕王)130)을 따르게 하고, 정원후 왕필 등은 산서(山西)의 군대를 이끌고 진왕 (晉王)131)을 따르게 하여, 교주 및 내아불화 아노첩목아(阿魯帖木兒) 등을 정벌하게 하였 다.132) 연왕이 고북구(古北口)133)를 나와 내아불화가 이도(迤都)134)에 군영을 만들었다는 것을 정탐하여 알아차리고, 큰 눈이 내림에도 [이를] 무릅쓰고 빠르게 달려 적과의 거리가 하나의 여울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적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먼저 지휘(指揮)135) 관동(觀 童)을 파견했는데, 관동은 예전에 내아불화와 사이가 좋아 보자마자 서로 붙잡고 울었다. 잠시 뒤 대군(大軍)이 그 군영을 압박하자 내아불화가 놀라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관동이 130) 燕王: 후에 명 왕조 3대 황제인 永樂帝가 된 朱棣를 말한다. 태조의 4째 아들로, 성년이 되어 洪武 13년(1380)에 燕王에 봉해졌다. 131) 晉王: 明 太祖 朱元璋의 3子인 朱棡( )을 말한다. 洪武 3년(1370) 4월에 晉王에 봉해지고, 13년(1378)에 山西 太原에 就藩하였다. 朱棡은 書學에 뛰어나고 騎射를 즐겼으며 謀略이 있었다. 명초 에 태조가 邊防에 고심하여 여러 아들에게 兵事에 능숙하게 하고자 하였고 諸王에 봉하여 軍務를 담당케 했는데, 晉王과 燕王이 특히 뛰어났다. 여러 차례 將兵을 이끌고 出塞하고 屯田을 개간하도록 하여 明初 북쪽 邊防을 확고하게 하는데 공헌이 많았다. 宋國公 馮勝, 潁國公 傅友德 등이 모두 진왕의 節制를 받았다. 132) 이와 관련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3년 춘정월條 참조. 133) 古北口: 지금의 北京市 密雲縣 지역으로, 北京 東北의 重要 關隘였다. 134) 迤都: 지금의 蒙古 蘇赫巴托爾省의 達里甘戛 부근이다. 135) 指揮: 衛를 관장하는 指揮使의 약칭으로 正三品職이며, 1衛는 5,600명의 병사로 각 지역에 편성된 명조의 군사단위이다. 690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33 이를 제지하고 [그를] 데리고 [연]왕을 알현하니, [연왕이] 음식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효유(曉 諭)한 뒤 돌려보냈다. 내아불화는 과분한 대접에 기뻐하였고 마침내 교주 등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136) 이후에 내아불화 등이 모반(謀叛)으로 주살(誅殺)되자, 적은 더욱 쇠퇴하였 다. 태조는 또한 연(燕) 진(晉) 등 여러 왕을 봉하여 변경의 번진(藩鎭)으로 삼았고,137) 매년 대장(大將)을 파견하여 북쪽 변강 지역을 순행(巡行)하도록 하였으며, 제위(諸衛) 병졸의 둔 전(屯田)138)을 감독하게 하고, 근면하고 신중하게 경계하여 적구(敵寇)가 오면 바로 그들을 패퇴시키도록 했다. 적은 탈고사첩목아 이후부터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어지럽게 서로 싸워 오대(五代)가 전해져 곤첩목아(坤帖木兒, ; 재위 )139)에 이르렀는데, 모두 피살되어 다시는 황제의 연호를 알지 못한다.140) 귀력적(鬼力赤,? 1408; 재위 )141)이라는 자가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하여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고 국호(國號)를 136) 明史 에서는 咬住와 乃兒不花 등이 燕王에게 투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太祖實錄 卷200 洪武 23년 3월 癸巳條에는 今上率師至迤都, 故元太尉乃兒不花, 丞相咬住忽哥赤, 知院阿魯帖木兒等皆降 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3년 3월條에도 보인다. 137) 明 太祖의 諸王分封策을 말한다. 洪武帝는 수도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몽골고원에 여전히 원의 잔존세 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북방 변경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변 군대의 통수권을 在地의 장군들에게 위임한다면, 唐 시기의 藩鎭처럼 그들이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洪武帝는 북방 군사상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해결하기 위해 북방 및 지방 요지에 子弟들 을 분봉하는 제왕분봉책을 실시하였다. 제왕분봉책은 皇子들의 제위 계승 싸움을 막는 간접적인 효과 도 있었다. 그러나 洪武帝 사후 황실의 내란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分封과 관련된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0년條에도 있다. 138) 屯田: 변경이나 군사적 요충지에 軍糧에 충당하거나 官廳의 경비를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설치한 토지 로, 군인이나 모집된 농민들에게 이를 경작하도록 하였다. 139) 坤帖木兒: Gün Temür의 음역이다. 北元의 湣宗 順天皇帝로, 額勒伯克의 長子이다. 汗號는 掍特穆爾汗이 며, 1402년에 鬼力赤에게 피살되었다. 140) 明史 에는 帝號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和田淸은 東亞史硏究 (蒙古篇)에서 蒙古原流 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제1대 Togo an Temür(妥權帖木兒, 順帝), 제2대 Ayursiridara(愛 猷識理達臘, 昭宗), 제3대 Usqal(脫古思帖木兒), 제4대 Engke Joriktu(恩克卓里克圖), 제5대 Elbek(額勒 伯克), 제6대 Gün Temür(坤帖木兒). 그런데 이는 明史 의 敵自脫古思帖木兒後, 部帥紛拏, 五傳至坤帖 木兒 와 인원수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岡田英弘은 Engke Joriktu를 두 사람으로 보아 Joriktu可汗 뒤에 Engke可汗이 계승했다고 한다(岡田英弘, 1965). 141) 鬼力赤(? 1408): 建文 4년(1402)에 北元 湣宗 順天皇帝 坤帖木兒(Gün Temür)를 죽이고, 阿魯台 등에 게 옹립되어 大汗이 되었다. 그는 北元의 國號를 폐지하고 韃靼(Tatar)可汗이라 칭했으나 正統 汗의 後裔가 아니었기 때문에 明朝의 支持를 받을 필요가 있어 명조와 通交했다. 이로 인해 그는 蒙古 各部의 달단전 역주 691

34 버리고 마침내 달단(韃靼)이라 칭했다고 한다. 成祖卽位, 遣使諭之通好, 賜以銀幣幷及其知院阿魯台 丞相馬兒哈咱等. 時鬼力赤 與瓦剌相仇殺, 數往來塞下, 帝敕邊將各嚴兵備之. 성조(成祖, ; 재위 )142)가 즉위해서 사신을 파견하여 [귀력적을] 효 유하여143) 통교하고 은(銀)과 비단을 하사하였는데, 지원(知院) 아로태(阿魯台)144) 승상 마아합찰(馬兒哈咱) 등에게도 하사하였다.145) 당시에 귀력적과 와랄(瓦剌)146)이 서로 원수가 불만을 샀으며, 결국 1408년에 知院인 阿魯台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尊號는 兀雷帖木兒汗(Örüg Temür)이며, 그가 피살된 후 坤帖木兒(Gün Temür)의 동생 本雅失里(尊號는 完者帖木兒汗, Öljei Temür Khan)가 영입되어 大汗이 되었다. 142) 成祖: 명 왕조 3대 황제인 永樂帝 朱棣의 廟號이다. 성조 영락제는 태조의 4째 아들로, 성년이 되어 洪武 13년(1380)에 燕王에 봉해졌으며, 靖亂의 變 을 통해 建文帝로부터 帝位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었 다. 이후 그는 北京으로의 遷都, 漠北에 대한 대대적인 親征, 南海 遠征 등 수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재위한 지 22년만인 1425년, 北征에서 돌아오는 길에 楡木川(현재 內蒙古自治區 多倫縣의 서북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諡號는 文皇帝이며, 廟號는 太宗이었으나 嘉靖 연간( ) 에 成祖로 廟號를 바꾸었다. 그의 陵은 長陵이다. 143) 이때 永樂帝가 鬼力赤에게 내린 諭旨의 내용은 元運旣衰, 皇考太祖皇帝受天明命, 撫有天下. 朕太祖嫡子, 奉藩於燕. 恭承天眷, 入繼大統, 嘉興萬邦, 同臻安樂. 比聞北地推奉可汗正位, 特差指揮朶兒恍惚等齎織金文 綺四端, 往致朕意. 今天下大定, 薄海內外皆來朝貢. 可汗能遣使往來通好, 同爲一家, 使邊城烽堠無警, 彼此 熙然共享太平之福, 豈不美哉! 이다( 太宗實錄 卷17 永樂 원년 2월 丁巳條,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원년條 참조). 144) 阿魯台(? 1434): Aruktai의 音譯인데, 阿嚕克台로도 音譯된다. 阿蘇特部人으로, 1403년부터 1434년까 지 차례로 鬼力赤, 本雅失里, 阿台를 可汗으로 삼고, 스스로는 大元朝太師 라고 칭하여 實權을 행사했다. 永樂 8년(1410)에 영락제의 공격을 피해 本雅失里와 헤어져 그는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明에 말을 바치고, 永樂 11年(1413)에 和寧王에 봉해졌다. 永樂 14년(1416)에 瓦剌에 패해 사로잡혀 명조에 보내 졌으나 다시 阿台를 세워 실권을 쥐었다. 그러나 결국 宣德 9年(1434)에 瓦剌의 脫脫不花(Toqto Büqa) 에게 패해 母納山에 피신하였다가 곧 瓦剌部 綽羅斯 脫歡太師에게 피살되었다. 14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17 永樂 원년 2월 丁巳條에 보이며,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원년 춘2월條,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원년條에도 보인다. 146) 瓦剌: 몽골 서북쪽에서 일어난 蒙古族 別部의 族稱으로, 漠西蒙古 혹은 西蒙古 라고도 칭한다. 동 몽골 지역이 초원지대인데 비해 서북 몽골은 주로 초원삼림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17세기 이후 이곳에 사는 이들을 森林(oi)에 사는 民(arat) 이라는 의미의 오이라트(Oirat)라 칭하였다. 이들 부족은 692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35 되어 죽이려고 하여 여러 차례 북방 변경을 왕래했는데, 황제가 변경을 지키는 장수에게 칙서를 내려 각기 군대를 엄히 관리하여 그(귀력적)를 방비하도록 하였다. 永樂三年, 頭目埽胡兒 察罕達魯花等先後來歸. 久之, 阿魯台殺鬼力赤, 而迎元之 後本雅失里於別失八里, 立爲可汗. 영락(永樂) 3년(1405)에, 부락의 우두머리 소호아(埽胡兒) 찰한달로화(察罕達魯花) 등이 차례로 와서 귀부(歸附)하였다.147) 이후에, 아로태가 귀력적을 죽이고 원의 후예(後裔)인 본 아실리(本雅失里)148)를 별실팔리(別失八里)149)에서 맞아들여 가한(可汗)150)으로 세웠다.151) 12세기경에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에서 반수렵 반목축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207년에 족장 忽都合別 乞(Qutuqa Bäki)이 이곳에 출정한 쥬치(Züchi)에게 항복한 이후 4萬戶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세대로 元朝의 駙馬가 되어 원조치하에서 특수한 신분을 이루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분립항쟁이 격화되고, 몽골 동부의 韃靼(Tatar)이 쇠퇴해짐을 틈타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脫歡(Toghon) 시대에는 외몽골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타타르를 내몽골로 몰아냈다. 脫歡(Toghon)의 아들 也先(Esen)칸은 만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 권을 형성하고 점차 중국의 북쪽 변방을 침입하여, 명나라 英宗을 사로잡아(土木의 變) 중국에서도 이들을 두려워하였다. 에센칸이 암살된 뒤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외몽골을 보유하였다. 이후 타타르 의 達延(Dayan)칸이 내몽골을 통일하고, 이어 그의 손자인 俺答(Altan)칸이 침략해 오자 이르티시 (Irtysh)강 상류로 쫓겨나 약 반세기 동안 숨어 살았다. 이후 17세기에 들어와 巴圖爾(Batur) 噶爾丹 (Galdan) 父子가 등장하여 내부의 통일을 이룩하여 准噶爾(Jungar) 왕국을 건설하여 몽고리아의 패권을 놓고 청조와 다투었다. 그러나 1759년에 청나라 乾隆帝에게 토벌당하여 왕국은 붕괴되고 부족은 대량 살육을 당했으며, 伊犁(Ili) 將軍 밑에 소속된 하나의 藩部로 편성되었다. 147)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42 永樂 3년 5월 庚辰條에 보이며,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3년 춘정월條에도 보인다. 148) 本雅失里( ): Buniyasiri의 音譯으로, 額勒錐特穆爾라고도 불리며, 明代 北元의 可汗이다. 永 樂 6년(1408)에 鬼力赤汗 사후 太師 阿魯台에 의해 可汗에 옹립되었다. 永樂 7년(1409)에 瓦剌部의 공격을 받아 別失八里에서 臚朐河 流域으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명의 사신 郭驥를 살해하여 영락제의 분노를 사 공격을 받았으나 丘福이 이끄는 10만의 明軍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이듬해(1410) 永樂帝가 이끄는 50만 대군과 瓦剌軍이 공격해 와서, 서쪽으로 도망쳐 결국 오이라트로 들어갔으나 와랄의 首領 馬哈木에게 피살되었다. 149) 別失八里: 지금의 新疆省 吉木薩爾 북쪽이다. 150) 可汗: 원래의 의미는 王朝 神靈 上天으로, 처음에는 部落의 首領에 대한 尊稱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달단전 역주 693

36 六年春, 帝卽以書諭本雅失里曰: 自元運旣訖, 順帝後愛猷識理達腊至坤帖木兒凡 六傳, 瞬息之間, 未聞一人善終者. 我皇考太祖高皇帝於元氏子孫, 加意撫恤, 來歸 者輒令北還, 如遣脫古思帖木兒歸, 嗣爲可汗, 此南北人所共知. 朕之心卽皇考之心. 玆元氏宗祧不絶如線, 去就之機, 禍福由分, 爾宜審處之 不聽. [영락] 6년(1408) 봄에 황제가 곧 새서(璽書)를 보내 본아실리를 효유하여 이르기를, 원의 명운(命運)이 끝난 뒤, 순제(順帝)의 후예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으로부터 곤첩목아 (坤帖木兒)에 이르기까지 무릇 6대(代)가 이어졌지만 순식간이었고, 한 사람도 제 명에 죽은 자가 없었다. 나의 황고(皇考)152)인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원조의 자손(子孫)에 게 특별히 위무(慰撫)와 구휼(救恤)을 베풀어, 귀부해 온 자를 번번이 북쪽으로 돌려보내도 록 했는데, 예컨대 탈고사첩목아를 돌려보내 계위하여 가한이 되게 한 것으로, 이는 남북인 (南北人)153)이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이니라. 짐(朕)의 마음은 곧 황고의 마음이다. 이에 원씨 (元氏)의 종조(宗祧)가 실 같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거취(去就)의 기회와 화복(禍福)의 분별 은 네가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 처리해야 할 것이다 154)고 하였으나 [본아실리는] 듣지 않았 다.155) 북아시아 알타이어 계통 민족인 鮮卑, 回紇, 柔然, 高車, 突厥, 吐欲渾, 鐵勒, 女眞 등이 汗國을 건국하고 그 君主, 혹은 정치지도자를 모두 可汗이라고 불렀다. 大汗 또는 汗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151)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5월 丙寅條에는 鬼力赤이 부하에게 폐위되었고 그 무리들이 本雅失里를 옹립하고자 했다는 내용이 있다. 관련 내용이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4년 춘3월條에도 있다. 당시 阿魯台는 太師가 되었다. 152) 皇考: 돌아가신 황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洪武帝를 일컫는다. 153) 여기서 南北人은 漢人과 韃靼人을 가리킨다. 154)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77 永樂 6년 춘3월 辛酉條에 보인다. 155)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6년 춘3월條에 보이는데, 당시 鴻臚寺丞 劉帖木 兒不花가 織金文綺와 璽書를 가지고 本雅失里에게 가 曉諭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坤帖木兒 (Gün Temür)가 피살되자 鬼力赤을 세웠으나, 元의 후예가 아니어서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살해 하였다. 阿魯台는 太師가 되어 대신하여 그 무리를 이끌었고, 本雅失里를 汗으로 세웠다(관련된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6년條 참조). 694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37 明年, 獲其部曲完者帖木兒等二十二人, 帝因復使給事中郭驥齎書往. 驥被殺, 帝怒. 秋, 命淇國公丘福爲大將軍, 武城侯王聰 同安侯火眞副之, 靖安侯王忠 安平侯李 遠爲左 右參將, 將精騎十萬北討, 諭以毋失機, 毋輕犯敵, 一擧未捷, 俟再擧. 時 本雅失里已爲瓦剌所襲破, 與阿魯台徙居臚朐河. 福率千騎先馳, 遇遊兵擊破之. 軍 未集, 福乘勝渡河追敵, 敵輒佯敗引去. 諸將以帝命止福, 福不聽. 敵衆奄至, 圍之, 五將軍皆沒. 帝益怒. 이듬해(1409) 그 부하인156)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등 22명을 붙잡았는데, 황제가 이로 인해 다시 급사중(給事中)157) 곽기(郭驥)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곽기가 피살되자158) 황제가 분노하였다.159) 가을에 기국공(淇國公) 구복(丘福)160)을 대장군에 임명 하고, 무성후(武城侯) 왕총(王聰)161) 동안후(同安侯) 화진(火眞)에게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정안후(靖安侯) 왕충(王忠) 안평후(安平侯) 이원(李遠)162)을 좌 우 참장으로 삼아, 정예 156) 太宗實錄 卷121 永樂 9년 11월 庚辰條에는 韃靼哈兒哈孫完者帖木兒 라고 나와 있다. 157) 給事中: 六科에 속한 從七品 관직으로 시종과 6부 백관들의 감찰을 담당하였다. 左 右給事中이 1명씩 있고, 위로는 都給事中(正七品)이 있었다. 158) 이듬해 명 조정에서는 給事中 郭驥에게 璽書를 가지고 가서 本雅失里를 효유하여 通好하고자 하였으나, 살해되었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條 참조). 159) 永樂 7년(1409) 4월에 都指揮 金塔卜歹과 給事中 郭驥를 本雅失里에게 보냈는데, 郭驥가 살해당했다.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하4월條 참조. 160) 丘福( ): 濠州(지금의 安徽 鳳陽 사람이다. 明 永樂 시기의 將領으로, 일개 병사에서 시작하 여 靖難之役 이후 淇國公에 봉해졌다. 후에 戰鬪에서 패하여 奪爵되고, 가족과 함께 海南島로 이주하 였다. 161) 王聰( ): 巴河鎭 사람으로 明代 將軍이다. 왕총은 농민 출신으로 팔힘이 뛰어났으며, 燕王의 부하로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전술에 능했다. 洪武 29년(1396) 연왕을 따라 변경을 순시하여 軍功을 쌓아 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靖難之役 당시 武城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征虜大將軍 丘福을 따라 出征하여 本雅失里와 交戰했을 때, 본아실리가 패배를 가장하고 도망쳐 구복이 추격하였는데 왕총이 타타르의 계책을 알고 만류하였으나 구복이 듣지 않아 도중에 매복을 만나 전사하였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후에 비를 세우고 漳國公으로 追封되었다. 162) 李遠( ): 安徽 懷遠 사람으로, 아버지의 직함을 세습하여 蔚州衛 指揮僉事가 되었다. 燕兵이 蔚州를 공격하여 투항하고, 이후 成祖 시기에 공을 쌓아 都督僉事가 되고 安平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丘福을 따라 변방을 나가 臚朐河에 도착하여 구복에게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諫하였으 달단전 역주 695

38 기병(騎兵) 10만을 이끌고 북방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기회를 잃지 말고, 가볍게 적을 공격하 지 말고, 한번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하면 기다렸다가 다시 공격하도록 하라 고 유(諭)하였 다.163) 당시 본아실리는 이미 와랄에게 습격을 받아 패하여, 아로태와 함께 여구하(臚朐 河)164)로 옮겨가 지내고 있었다.165) 구복이 기병 1천을 이끌고 먼저 달려가 유병(遊兵)을 만나 격파(擊破)하였다. 군대가 아직 집결하지 않았는데도 구복이 승세를 타 강을 건너 적을 쫓으니, 적은 곧 패한 척하며 군대를 이끌고 갔다.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명으로 구복을 제지하 였지만, 구복이 듣지 않았다. 적의 무리가 몰래 이르러 그들(구복의 군대)을 포위하여, 다섯 장군이 모두 죽었다. 황제가 더욱 노하였다.166) 明年, 帝自將五十萬衆出塞. 本雅失里聞之懼, 欲與阿魯台俱西, 阿魯台不從, 衆潰 散, 君臣始各爲部. 本雅失里西奔, 阿魯台東奔. 帝追及斡難河, 本雅失里拒戰. 帝 麾兵奮擊, 一呼敗之. 本雅失里棄輜重孳畜, 以七騎遁. 斡難河者, 元太祖始興地也. 班師至靜虜鎭, 遇阿魯台, 帝使諭之降. 阿魯台欲來, 衆不可, 遂戰. 帝率精騎大呼 沖擊, 矢下如注, 阿魯台墜馬, 遂大敗, 追奔百餘里乃還. 冬, 阿魯台使來貢馬, 帝 納之. 이듬해(1410) 황제가 친히 50만 군대를 이끌고 변경에 출정하고자 했다.167) 본아실리가 나 듣지 않아 패하였다. 戰死 후 莒國公에 追封되었고 諡號는 忠壯이다. 163)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추7월條 참조.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條에도 본문의 공격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다. 164) 臚朐河: 몽골 肯特山 東麓에서 발원하여 중원으로 흐르는 克魯倫河의 古稱이다. 165) 이때 丘福은 臚朐河에 이르러 사로잡은 포로를 심문하여 本雅失里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작전을 실행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 8월條 참조). 166) 丘福이 本雅失里를 공격하다 全滅을 당한 구체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8월條 참조. 당시 安平侯 李遠, 武城侯 王聰 등이 극력 말렸지만 붙잡은 諜者의 말을 가볍게 믿고 공격하다 전멸을 당하였다. 이 패배에 대해서 永樂帝는 皇太子에게, 比遣丘福等率兵北征, 皆沒於虜. 辱國如此, 若不再舉殄滅之, 邊禍未已. 來春決意親征, 凡國家之事爾當愼重, 不可忽也 라고 언급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 9월條 참조). 167) 이 永樂帝의 親征에 楊榮과 金幼孜을 扈從하도록 하였고, 夏原吉은 皇長孫은 보좌하여 北京을 留守하도 록 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8년條 참조). 696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39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아로태와 함께 서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아로태가 따르지 않아, 무리 는 궤멸되어 흩어져 군신(君臣)이 비로소 각자 부(部)를 이루게 되었다. 본아실리는 서쪽으로 달아나고, 아로태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황제가 추격하여 알난하(斡難河)168)에 이르렀는데 본아실리가 항거하며 싸웠다.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여 힘껏 공격하니, 순식간에 그들을 패퇴 시켰다. 본아실리는 군수품과 가축을 버리고 7명의 기병(七騎)만을 데리고 달아났다.169) 알난 하는 원 태조가 처음 흥기한 땅이다. 군대를 퇴각하면서 정노진(靜虜鎭)에 이르러 아로태를 만났는데, 황제는 그를 효유하여 항복하라고 하였다. 아로태는 [투항하러] 오려고 했으나 부하들이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가 정예 기병을 통솔하여 크게 소리치 며 진격하니,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아로태가 말에서 떨어져 마침내 크게 패하였고, 달아나는 적을 100여 리 추격하다가 돌아왔다.170) [그해] 겨울에, 아로태의 사신이 내조하여 말을 바치니, 황제가 이를 받았다.171) 越二年, 本雅失里爲瓦剌馬哈木等所殺. 阿魯台已數入貢, 帝俱厚報之, 幷還其向所 俘同産兄妹二人. 至是, 奏馬哈木等弑其主, 又擅立答里巴, 願輸誠內附, 請爲故主 復仇. 天子義之, 封爲和寧王. 自是, 歲或一貢, 或再貢, 以爲常. 2년이 지나(1412) 본아실리가 와랄의 마합목(馬哈木)172) 등에게 살해되었다.173) 아로태는 168) 斡難河: 黑龍江 상류의 하나로 黑水라고 칭했다. 현재의 몽골 鄂嫩河이다. 169)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104 永樂 8년 5월 丙戌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8년 5월 己卯條에도 보인다. 170)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8년 6월條에 있는데, 永樂帝는 달아나는 賊 백수십 명을 斬하였고, 阿魯台는 家屬을 데리고 멀리 달아났다. 171) 太宗實錄 卷110 永樂 8년 12월 癸巳條에는 韃靼太師阿魯台, 遣平章脫忽歹等, 來歸貢馬, 命宴勞之, 賜襲衣彩幣 라고 기재되어 있다. 殊域周咨錄 에는 阿魯台가 사신을 보낸 내용이 永樂 9년條에 있다 (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9년條 참조). 172) 馬哈木(? 1416): Mahmū의 音譯으로, 明朝 初期 蒙古 瓦剌部의 수령 중 한 명이다. 東部 蒙古의 大汗 本雅失里와 太師 阿魯台는 明朝에 대항했는데, 馬哈木은 그의 동생 太平 把禿孛羅와 함께 永樂 6년 (1408)에 明朝에 귀순하였다. 永樂 7년(1409)에 永樂帝로부터 順寧王의 封號를 받았으며, 아로태 및 본아실리를 격파하고 和林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본아실리로부터 빼앗은 傳國璽를 바치겠다고 하며, 명조와 연합하여 아로태를 공격했다. 그러나 교만하고 횡포하여 明에 조공하지 않아서 永樂 달단전 역주 697

40 이미 여러 차례 입공(入貢)하여 황제가 모두 후하게 보답하였고, 아울러 전에 포로가 된 친형 제자매(同産兄妹) 2명을 돌려보냈다. 이에 이르러 상주하기를, 마합목 등이 그의 군주(본아실 리)를 시해하고 멋대로 답리파(答里巴)174)를 세웠으므로, 진심으로 조정에 귀부하기를 원한 다고 했고, 옛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기를 청하였다.175) 천자는 이를 의롭다고 여기고, [아로태를] 화녕왕(和寧王)에 봉하였다.176) 이로부터 해마다 한 차례, 또는 두 차례 진공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十二年, 帝征瓦剌. 阿魯台使部長以下來朝會. 賜米五十石, 乾肉 酒糗 綵幣有差. 十四年, 以戰敗瓦剌, 使來獻俘. 十九年, 阿魯台貢使至邊, 要劫行旅, 帝諭使戒戢 之, 由是驕蹇不至. [영락] 12년(1414)에 황제가 와랄을 정벌하였다.177) 아로태가 부락의 수령 이하를 보내 와서 천자를 알현하였다. [이에] 쌀 50석(石)과 마른 고기(乾肉) 주구(酒糗) 채폐(綵幣)178) 12년(1414)에 영락제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후 永樂 15년(1417)에 里海 지구에서 죽었다. 173)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0년 추9월條에 보이는데, 馬哈木은 本雅失里 를 滅한 후, 答里把를 세우고 정치를 專斷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174) 答里巴( ): Delbek의 音譯인데, 蒙古의 大汗으로 阿里不哥의 후예이다. 1412년에 瓦剌의 首領 馬哈木이 本雅失里를 시해하자, 瓦剌은 明朝에게 稱臣하고, 1415년에 答里巴를 大汗으로 옹립하였 다. 馬哈木은 太師로 自任하고 답리파가 본아실리의 동생이라고 칭하였다. 明 成祖가 제2차 몽골을 親征할 때 답리파와 마합목을 크게 패퇴시켰고, 明軍이 철수한 후 阿魯台가 재차 오이라트를 습격하여 답리파와 마합목이 차례로 전사하였다. 17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140 永樂 11년 5월 庚子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1년 7월條에도 보인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에서는 瓦剌의 세 추장이 함께 本雅失里를 폐하고 答里巴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176)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141 永樂 11년 7월 戊寅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1년 7월條에도 보이는데, 和寧王에 封함과 아울러 金帛을 내리고, 예전처럼 漠北에 거주하도록 했다. 177) 永樂帝는 永樂 12년 2월에 瓦剌을 親征하겠다는 詔書를 내리고 원정군을 편성하였으며, 3월에 北京을 출발하였다. 이때 皇太孫도 從軍하였으며, 8월에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2년條 참조. 178) 綵幣: 彩幣라고도 하는데, 綵 는 무늬가 있는 비단이고, 幣 는 絹織의 帛을 말하는 것으로, 무늬가 698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41 를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179) [영락] 14년(1416)에 와랄과 싸워 패퇴시키고서 사신을 보내 와 포로를 바쳤다.180) [영락] 19년(1421)에 아로태의 조공사신이 변경에 이르러 길가는 사람 들을 겁략하려고 하여, 황제가 사신에게 유지를 내려 경계하며 이를 그만두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교만해져 이르지 않았다. 阿魯台之內附, 困於瓦剌, 窮蹙而南, 思假息塞外. 帝納而封之, 母妻皆爲王太夫 人 王夫人. 數年生聚, 畜牧日以蕃盛, 遂慢我使者, 拘留之. 其貢使歸, 多行劫掠, 部落亦時來窺塞. 二十年春, 大入興和. 於是詔親征之. 阿魯台聞大軍出, 懼, 其母 妻皆詈之曰: 大明皇帝何負爾, 而必爲逆! 於是盡棄其輜重馬畜於闊灤海側, 以其 孥直北徙. 帝命焚其輜重, 收其馬畜, 遂班師. 아로태가 조정에 귀부한 것은 와랄에게 괴롭힘을 당해 생활이 곤란하게 되어 남으로 내려가 변경에서 잠시 휴식을 얻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그를 [왕에] 봉하 고 어머니와 처(妻)를 모두 왕태부인(王太夫人) 왕부인(王夫人)으로 삼았다.181) 수년간 인 구가 늘고 재산을 모았으며, 기르는 가축이 날로 번성하니, 마침내 우리 사신을 업신여겨 그들을 구류하였다. 그들의 조공사신이 돌아갈 때 여러 차례 겁략(劫掠)을 행하였고, 부락(部 落) 또한 때때로 와서 북방 변경을 엿보았다.182) [영락] 20년(1422) 봄에 [아로태가] 대거 흥화(興和)183)를 침입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친히 이들을 정벌하였다.184) 아로태가 있는 絹織物을 일컫는다. 179)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에는 阿魯台가 部落의 都督을 보내 來朝하자, 명 조정에서는 中官 王安에게 勅書를 가지고 가서 그를 위로하였고, 米 100石, 驢와 羊 각각 100마리를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180)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4년 춘3월條에 보인다. 181) 이때 영락제는 阿魯台를 和寧王으로 책봉하였고, 金帛을 하사하였다. 영락제는 그를 받아들이면서 虜性黠詐, 勢窮來歸, 非其本心. 然天地之仁, 發育而已, 豈有所擇哉! 라는 언급을 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0년條 참조). 182) 이에 관련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9년 동10월條에 보인다. 183) 興和: 元 皇慶 원년(1312)에 隆興路를 興和路로 개칭하고 治所를 高原(현재 張北)에 두었다. 지금의 河北 張北, 懷安, 山西 天鎭, 內蒙古 集寧市, 太仆寺旗 지역을 관할하였다. 明初에 興和府로 삼았다가 후에 폐지하였다. 洪武 말에 興和守禦 千戶所를 설치하였고, 永樂 12년(1422)에 阿魯台에게 습격을 달단전 역주 699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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