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史의 西海交涉史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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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末 美國系 醫療宣敎를 통한 西洋醫學의 受容 Ⅰ. 醫療宣敎의 시작( ) 1. 長老敎 宣敎와 濟衆院 2. 監理敎 宣敎와 민간병원 3. 초기 醫療宣敎의 의학사적 의의 Ⅱ. 醫療機關의 擴散( ) 1. 각 선교부의 선교지역 분할 2. 미국 北長老敎 3. 미국 北監理敎 4. 미국 南長老敎 5. 미국 南監理敎 6. 醫療事業의 특징 Ⅲ. 綜合病院으로서의 成長( ) 1. 세브란스 병원 2. 각 선교부의 醫療事業 3. 醫療事業의 특징 李 萬 烈* Ⅰ. 醫療宣敎의 시작( ) 1. 長老敎 宣敎와 濟衆院 1882년 韓 美修好通商條約이 맺어지고, 그 이듬해 5월에 비준서가 교환되면서 주한미국 공사관이 개설되고 초대공사에 전 캘리포니아주 검찰을 지낸 푸트(Lucius Foote, 福德)가 임명되었다. 이 무렵 한국에는 서양인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의료시설의 필요성이 매우 긴요하게 되었다. 한국에 가장 먼저 서양의사로서 들어온 알렌이 선교사로서보다는 의 사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당시의 이러한 요구 때문이었다. 알렌(Horace N. Allen, 安連)1)은 서양 특히 미국의 한국진출과정에서 그들의 의료를 맡은 * 淑明女子大學校 韓國史學科 敎授. 1) 알렌( )은 미국 Ohio州 Delaware에서 태어나 Ohio Wesleyan University를 졸업 (1881)하고, Ohio州 Oxford 소재 Miami의과대학을 수료(1883), 이해 10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 교사로서 중국 上海에 부임하였다. 그 무렵 주한미국공사관에서 公醫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 고 당시 한국 세관에 근무하던 Joseph Haas에게 편지, 한국에서의 외국인 의사의 필요성 여 부를 확인한 후 선교본부의 허락을 얻어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 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 閔泳翊을 치료하게 된 인연으로 궁중과 한국정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 다.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개원시킨 그는 1887년 워싱톤주재 한 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부임하기까지 제중원의 책임자로 활약하였고, 2년 후 1889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의료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의 관심은 선교사로서보다는 외교관리에 있었기 때 문에 1890년 그는 다시 선교부와의 관계를 끊고 주한 미국공사관의 관리로 들어가 1897년에 는 주한미국공사겸 총영사가 되어 1905년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2 의사로서 한국에 정착하였다. 그런 만큼 알렌의 의료활동은, 뒷날 그가 세운 제중원이 선교 병원으로 전환되었다 하더라도, 선교적 차원에서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푸트 공사가 알렌의 채용을 한국에 보고하던 자리에서 국왕이 알렌에 대해 선교사가 아닌가를 물었으나 푸트는 그는 공사관 소속의 의사 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그후의 알렌의 입장과 역할을 더 잘 밝힌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해서는 의료선교사로, 한국입국의 명분과 공사관의 필요에 의해서는 공사관 공의로 부임한 알렌은 새로이 올 선교사들의 부임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는 등 본국의 선교부와 연락을 취하며 활동을 전개하였다. 푸트는 선교사의 입국과 한국에서의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에 노력 하였는데,2) 알렌 역시 나는 한국이 기독교국가로 될 그날 을 보기 위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3)고 하여 선교사로서의 그의 사명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외국인을 상대로 활동하던 알렌이 한국인 및 한국정부와 밀접한 관 계를 맺게 된 계기는 그가 도착하던 해 12월 4일 저녁에 일어난 甲申政變이다. 그날 저녁 郵政局開設을 축하하기 위해 국내의 개화 수구계 인사와 의국사절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었 는데, 개화파는 이를 기회로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진행시켰다. 수구파 인물 중 당시 중국의 신임을 받고 있던 閔泳翊은 우정국 연회에서 크게 상처를 받아 목숨이 위태 롭게 되어 묄렌도르프(P.G. Möllendorff, 穆麟德)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옮겨져 알렌의 치료 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알렌은 한국인 의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석달이나 치료하여서 양의술의 신비스런 효과를 나타내었다. 알렌과 민영익의 이같은 접촉이 그 뒤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선교사의 활동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알렌은 한국에서 서양의술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미국(선교사)의 영향력 증대를 위해 서양식 병원설립을 구상 추진하였다. 이 설립을 위해서 미 대리공사 포크(George C. Foulk, 福久)와 민영익의 협조를 얻었다. 포크는 1885년 1월 27일자로 당시 督辦交涉通商事務 金允 植에게 알렌의 병원설치 제의를 추천하면서, 나는 최근 서울에서 행한 그의 시료행위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알 렌 의사의 성격과 능력에 대해 어면 특별한 추천의 말을 부연할 필요가 없다.4) 고 하였다. 알렌은, 그의 병원건설안에서, 자기는 그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감당 해 왔다는 것과, 자신이 살고 있는 곳 근처에 있는 적은 숫자의 부한 환자들을 매일 돌볼 수 있었지만 많은 수의 가난한 환자들은 적당한 시설의 부족으로 외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는 것, 일개의 미국시민으로서 자신은 한국민을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으 면 기쁘겠다는 것과 만일 한국정부가 자신에게 약간의 시설을 허락한다면 서양과학 (Western Science)에 따라 시급하게 환자들을 충분히 돌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아 울러 젊은 사람들에게 서양의 의술 및 위생과학을 가르칠 것도 건의하고 있다.5) 알렌은 또 자신은 한국정부의 관할 아래 한 직책을 원하지만 자신의 봉사에 대한 대가를 원치 않는다 는 것과, 병원설비와 유지를 위해서는 깨끗한 곳에 거대한 주택이 있어야 하고 조명, 난방 2) 1884년 11월 12일자 L. Foote의 편지(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이하 p. H.S micro-film #174). 3) 1884년 10월 8일자 H.N. Allen의 편지(P.H.S. microfilm #174). 4) 美國 安連의 病院設置提議에 대한 추천( 舊韓國外交文書 第 10卷 美案 1, 高麗大 아세아문 제연구소). 5) 위의 책.

3 및 조수 간호원 잡부들을 위한 비용, 그리고 너무 가난하여 자기들의 능력으로 급식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급식대를 포함한 일년 경상비와 약품대 약3백달러6)가 필요하며, 이러한 조건 들이 허락되면 6개월 내에 다른 미국인 의사를 데려올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더욱이 자신 을 포함한 미국인 의사들의 봉급은 필요하지 않는데, 이는 현재 북경 천진 상해 광동 및 다 른 중국의 도시에 있는 병원(그 중의 두 곳은 이홍장에 의해 지급되고 있다)들을 지원하는 미국의 자선기관들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7) 그리고 이 설립안이 수락된다면, 그는 이 병원의 명칭을 조선정부의 병원 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8) 병원설립 안은 묄렌도르프 등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 다. 정부는 백성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마침 병원으로 쓸 수 있는 집 한 채가 있 음을 알리고 병원설비를 위해 알렌과 상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을 시작하는 데는 여러 곳에서의 반대가 있었으니 외국관리들과 그 무렵 도착한 자매교단들의 선교사, 그리고 한국 의 전통적인 韓醫들이었다. 그러나 근대병원의 설립은 국왕이 갈망하는 바였기 때문에 반대 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다. 국왕은 알렌이 선교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 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자기에게 요청하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9) 이 병원은 1885년 4월 10일 개원되었다. 처음에 병원은 洪英植의 집을 개조하여 만들었는 바 알렌은 병원설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병원은 혜민서(Hay Min So) 혹은 신식 약효의 집 (House of Civilized Virtue)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 건물은 전에 홍영식이 쓰던 집이었는데, 그는 최근의 정변에서 살해되었다. 우 리가 그 집을 인수받았을 때, 정변 때에 입은 매우 극심한 약탈 때문에 집의 뼈대만 남아 있었다. 한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혀 있었다. 그 집을 병원으로 꾸미는 데는 600 달러 내지 1천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정부에서 지불하였다. 일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대가 소요되 고,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약품과 施術이 무료로 된다. 약 40개의 침대를 수용할 만한 방이 있고,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할 수도 있다.10) 처음에 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한 이 병원은 1885년 4월 23일(음력으로는 3월 12일) 한국정부로부터 濟衆院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니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다 라는 뜻이다. 그 전에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 이라는 의미의 광혜원이 개원되었을 때, 한국정부는 朴準 禹 申洛均 成翊永 金奎熙 金良默 등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임명하여 이 병원에 근 무케 하였다.11) 왜냐하면 환자를 치료하고 의학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은 선교사들이 맡았지 6) 安連의 病院建設案(上掲文書의 附屬文書).그런데 이 문서 p. 113에는 and about $ for drugs라 하여 문맥상으로 약품대 3백달러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점은 1885년 7월호 The Foreign Missionary 에 실린 Allen의 Medical Work in Korea 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원문은 There is an annual appropriation of $300 for drugs, and the running expenses are borne by the Government, the medicine and services being free to all who cannot pay 이다. 따라서 백락준 박사가 3천달러로 표기한 것 ( 韓國改新敎史, 延世大出版部, 1973, p. 110)은 印刷上의 錯誤로 보인다. 7) 上 同. 8) 이 병원의 名稱은 영문으로 His Corean Majesty s Hospita, 로 하였고, 위의 同 提案의 漢譯 에는 此是朝鮮政府之病院 이라 하였다. 9) H.N. Allen, Medical Work in Korean ( The Foreign Missionary, July, 1885) pp 백락준, 앞의 책 pp 참조. 10) H.N. Allen, Medical Work in Korea ( The Foreign Missionary, July, 1885) p. 75.

4 만, 이 국립 병원의 운영과 행정상의 감독은 한국정부가 맡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병원은 알렌이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시작하였지만, 얼마가지 않아 의료선교 동역자를 얻게 되었다. 미국 감리회에서 파견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Dr. Wm. B. Scran-ton, 施蘭敦)이 그해 5월 22일부터 6월 24일까지 제중원에서 봉사하였고, 그 뒤를 이 어 미국북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헤론(Dr. John W. Heron, 惠論)이 알렌을 도와 봉사하 게 되었다. 헤론은 테네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부임하였으 며, 1887년 9월 알렌이 주미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한 뒤에는 제중원 책임자가 되어 1890년 7월 과로로 사망하기까지 이 땅에서 봉사하였다. 1886년에는 미국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은 엘러즈(Annie J. Ellers)양을 맞아 부녀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엘러즈의 책임 아래 부녀과가 신설되었다. 그녀는 왕비와 궁중 귀부인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12) 병원이 개설된지 1년동안 약 8백여 명의 부녀자를 포함한 10,460명의 환자들을 치료하였 다. 알렌의 보고서에 의하면,13) 지난 일년동안 이 병원은 민주적으로 관리되었고, 소액이나 마 진찰권을 구입케함으로 건전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으며, 여성환자를 위한 병원의 설립 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병원사업의 일환으로 의학교육이 실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의학교육 과 관련하여 알렌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병원의 영향력과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방법(way)과 비용(means)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費用 은 정부에 요청하는 것이었다. 국왕폐하께서는 백성들을 위한 의료사업에 대해 매우 호의적 이었으므로, 곧 병원과 인접해 있는 일련의 건물들을 매입해서 학사로 꾸미도록 칙령을 내렸다. 새롭고 완전한 외과장비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과 함께, 기구와 제반설비를 위한 비용도 곧 하사 되었다. 장로교 선교회의 언더우드 목사에게 의학교 사업을 조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의학의 일부 과정을 수료했기 때문에, 이 일에 자격이 있음을 느끼고 일을 맡기로 동의했다. 의학부는 1886년 3월 29일 경쟁시험을 거친 16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영어를 배웠고, 학생 가운데 몇 명은 벌써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곧 과학과 목 수업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督辦과 協辦과의 회의에서 채택된 교칙에 의해, 이 청년들은 4개월간의 시험기간을 거친 후, 성적이 우수한 자 12명은 정규과정에 들어가도록 하고 성적이 불량한 4명은 낙제시키게 될 것이다. 매년 이 방식으로 12명의 학생이 정해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숙식비와 수 업료가 지불되고, 전 과정을 수료하면 즉시 정부관리로 등용되어 主事職이 주어질 것이다.14) 1887년에 이르러 제중원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제중원 건물이 구리개(銅峴)로 옮겨 졌고, 주미한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알렌의 후임으로 같은 선교부의 헤론이 병 원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해에 엘러즈양이 育英公院 교사로 왔던 벙커(D.A. Bunker, 房巨) 와 결혼하자, 이듬해(1888) 3월 27일에는 그의 후임으로 의학박사 호튼(Dr. Lillias S. 11) 承政院日記 高宗 22년 3월 7일자( 高宗時代史 권2, 國史編纂委員會, p. 724). 12) 백락준, 앞의 책 p. 125, 1886년 8월 16일자 Annie Ellers 양의 편지(P.H.S. microfilm # 170) 참조. 13) H.N. Allen, Medical Work in Korea), ( The Foreign Missionary, Oct., 1886) pp ) H.N. Allen Medical Work in Korea) p. 216 및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p. 5 참조. 병원내의 의학교육에 대해 Heron은 1886년 4월 8일자 편지(P.H.S. microfilm #174)에서, 선교사들은 학생들이 의학의 전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서는 5년이 필요 할 것이라고 제의하였다는 것이다.

5 Horton)양이 부임하여 제중원의 부녀과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호튼은 閔妃의 시의 및 袁世 凱의 가정의가 되었고, 1889년에는 언더우드(H.G. Underwood)와 결혼하여 의료선교 사업을 계속하였다. 제중원이 1893년 에비슨(O.R. Avison)을 맞기까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1889년 9월에는 워싱턴의 주미한국공사관에 근무하던 알렌이 다시 선교사로 부임하게 되 었다. 헤론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가던 병원에 새로운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그 이듬해(1890) 알렌은 헤론과의 알력 속에서 의료선교사업을 버리고 주한미국공사관의 관리로 취임하게 되 었고 1905년 그가 외교관직을 떠날 때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한편 알렌의 후임으로 병원책 임을 맡게 된 헤론은 희생적인 봉사활동에 따른 격무로 1890년 7월 26일 痢疾에 걸려 서울 주재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망하였다. 한국정부는 처음에 제중원 설립에 큰 관심을 보였던 만큼, 지원 또한 대단하였다. 정부는 경비지원을 위해 전에 惠民署와 活人署에 공급하던 쌀 돈 옷감 등을 제중원에 보냈다.15) 또 제중원에 병설된 부인병원에서 의술을 익힐 13세 16세의 총명한 기생 2명을 선발하여 보내 기도 하였다.16) 수고의 덕택으로 알렌과 엘러즈양은 嘉善大夫와 二品職의 官階를 제수받기 도 하였다.17) 서양 의사들은 한국의 시민들은 물론 왕족과 고급관리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들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하며 60 70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그러면서 그 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회를 가지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헤론은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임무가 위대하신 의사(The Great Physician)에 관해 알리는 것이며, 단순히 나 자신 의 의료기술을 시행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를 이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약 60여 명의 외래 환자를 매일 치료해 왔는데, 가끔 수마 일 떨어진 시골에서 온 환자들도 있다. 업무는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곳에서 주님께 쓰여질 수 있도록 당신들의 끊임없는 기도를 부탁드린다.18) 헤론의 순직으로 1891년 4월에 내한한 빈튼(C.C. Vinton, 賓頓)이 제중원을 책임지게 되었 다. 그는 제중원에서는 전도사업에 일정한 제약이 가해짐을 의식하고 동년 9월 1일부터 자 신의 집에서 진료소를 개설하고 첫 4개월간 187명을 치료하였는데, 이것이 왈더 진료소(The Walder Dispensary)이다. 순회진료활동도 벌이던 빈튼은 이듬해 보고서에서 정부가 필요한 약품을 공급해 주지 않아 후반기 활동이 부진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빈튼의 이러한 일련 의 노력과 불만은 국립병원 으로서의 제중원의 한계점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 로 다음 시기인 1890년대 중반부터 제중원은 선교병원 으로 그 성격을 전환하였던 것이 다. 2. 監理敎 宣敎와 민간병원 국립 병원인 제중원을 중심으로 미북장로교가 의료선교를 전개하였다면, 미북감리교는 민 15)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高宗 乙酉년 3월 20일 21일조. 16) 위의 책 高宗 乙酉年 3월 13일, 14일조. 17) 承政院日記 高宗 23년 9월 27일 및 同 24년 11월 23일자. 18) 1885년 6월 26일자 Heron의 보고( The Foreign Missionary, Nov., 1885, p. 273).

6 간병원인 施병원과 保救女館 등을 통해 의료활동을 펴 나갔다. 제중원이 개설된 1885년에 역시 스크랜튼(Dr. Wm. B. Scranton, 施蘭敦)에 의해 施병원 이 개설된다. 제중원에서 일하던 스크랜튼은 알렌과 불화가 싹텄을 뿐만 아니라 6월 21일에 헤론이 파송되어 오자, 6월 24일 제중원을 사임하고, 본국에서 탁송되어 온 의약품과 의료기 기로 이미 매입한 한옥에 9월 10일 독자적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불완전한 설비였으나 처음 1년동안 842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진료소를 개설한 지 1년 후에 보낸 연례보고서에서 스크랜튼은, 지난 1년간의 의료선교활 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해에 의약판매수입은 크지 않다. 그것은 단지 $34.83에 불과하다. 얼마 전에 지나간 호열자 유행기간 동안에는 의약대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첫째, 호열자가 특히 매우 가난한 계층 의 사람들에게 만연되었기 때문이며, 둘째, 우리가 환자들에게 필요로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치료업무는 주로 가장 불쌍한 계층, 그 중에는 간혹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행해졌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병이 그들의 전생애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혹독하다고 할 때 에는 치료기간 동안 전적인 보조를 우리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꽤 많은 수의, 더 고귀 한 계층의 사람들도 역시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거나 그들의 집에서 검진을 받기도 한다. 그들에게 는 규정에 따른 치료비가 요구되는데, 그리하여 더욱 부한 사람들이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며, 더 가난한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 치료비를 덜 물게 되거나 가끔은 전 혀 물지 않도록 한다. 치료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많은 경우 밝히기 곤란하다. 환자들이 완치되 었거나 혹은 사망했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보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노력이 결 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들을 알고 있다. 치료를 받은 오랜 기간 후에 그들은 다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끔 다시 오기 때문이다.19) 위의 보고는 주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에 관한 것이지만, 스크랜튼의 이해 보고서는 그의 異國에서의 신기한 경험들을 종합하려는 듯이 약값, 전염병에 걸린 환자 및 여러가지 질병 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가 열거한 질병들은 감기와 열병에서 시작하여 피부병 連珠瘡 매 독 등이 있으며,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천연두는 흔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아시 아형 호열자가 창궐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인의 약품사용, 특히 한약의 무익성 에 대해 언급하면서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을 사용하다가 죽음을 당한 경우를 지적하였 다.20) 스크랜튼은 다른 보고서에서도 병원 표지와 구조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개설 때 병 원의 문에, 한쪽에는 한자와 한글로 美國醫員 施病院 미국의원 施병원 이라 썼고, 다른 한쪽 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있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날이든지 낮10시에 빈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의원에게 보이시오 라고 썼다.21) 병원의 건물구조는 환자대기실(16 16피트), 응접 실 혹은 사무실(16 12피트), 조제실(16 12피트), 수술실(16 20피트) 등이 있고, 실험실과 부 엌도 곁들여 있었다. 본건물 옆에는 병실 3개가 달린 여성전용 건물을 마련했다. 이 병원은 25 30명의 남자와 15명의 여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 Annual Report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M.E.C. Repoyt) for 1886 pp ) 위의 책 pp ) 위의 책 p. 272.

7 선교사들이 도래했던 초기에는 호열자가 창궐하고 있었으니 서울에서만도 매일 수백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1890년대에 가면 의료선교사들이 전염병 퇴치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초 기에는 그렇치 못했다. 인력과 시설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스크랜튼은 고민 하 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들 전염병들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에 의해서 처리되어야만 한다. 국립병원(Government Hospital)은 전염병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병원 밖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한국인들은 병원건물 안에서 전염병 치료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도 전 염병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 혼자 밖에 손을 쓸 수 없는데다가 나의 병원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전염병 환자를 내병원으로 들일 수 없다. 내가 만약 그렇게 했다 간 한국인들이 다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에게 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 한 방법은 우리가 지방으로 가서 가건물들을 세우거나 혹은 더 좋기로는 그곳에 고가를 수리해서 이용하는 것이다. 그 비용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얻는 전체적인 이익과 비교해 볼때 무시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멕시코 은화 $ 정도면 매입과 수리의 전체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만약 그 병원을 돌볼 동료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리 멀지않은 도성 의 건물에서 이들 환자들을 돌보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22) 제중원보다는 한국민중에 더 접근하고 있던 스크랜튼은 1890년 안식년으로 일시 귀국할 때까지 민중 중심의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료활동이 급속하게 전개됨에 따라 한 사람의 의사로서는 그 업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국 선교부 에 의료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는 한편 의료선교 지역도 두 군데 이상 넓혀갈 것을 구상 하 고 있었다. 이러한 현장에서의 요청에 따라 의료선교사들이 증파되었다. 1887년에 맥길(Dr. W.B. McGill)의사와 하워드(Dr. Meta Howard)양, 1890년에 셔우드(Rosetta Sher-wood) 1891년에 홀(Wm. J. Hall)의사, 그리고 1893년에 버스티드(J.B. Busteed) 의사 등이 내한하 여 의료선교팀이 보강되었다. 1892년에는 영국인 와일즈(I. Wiles)의사도 施병원에서 봉사하 였다. 시병원은 제중원과 달리 1890년부터는 병원 안에서 특별 종교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환 자 가운데 學習敎人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교병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매일 예배로 일 과가 시작되었고, 培材學堂 출신 한용경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면서 환자들에게 전도하였 다. 1893년의 경우 한용경의 주관하에 오전 9시에는 아침기도회 형식으로 모이고, 오후 2시 에는 교리문답과 성경이 조직적으로 가르쳐졌다. 스크랜튼은 1890년 안식년으로 잠시 도미하게 될 때까지 6년간 2만명의 환자를 돌보았는 데, 시병원의 환자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1891년 7월 1일부터 1892년 6월 30일까지 3,224명이 었다가 그 이듬해 1년간에는 5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스크랜튼은 정동에서 남대문의 상동병 원으로 모든 의료시설을 옮길 것을 구상하였던 것이다.23) 1890년 가을 맥길의사는 남대문로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이어서 10월 중순에는 2개의 입 원실과 조제실, 대기실을 갖춘 벽돌건물로 된 남대문 상동병원 을 완공시켰다.24) 22) 위의 책 pp ) M.E.C. Report for 1893 pp ) M.E.C. Report for 1891 pp

8 년 7월부터 1892년 6월까지의 진료통계를 보면, 정동병원(시병원)이 3,224명이었는데, 상동병원은 2천2백명으로, 거의 동일한 수준에 까지 상동병원이 성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1894년에 정동병원이 상동으로 이전해 올 수 있는 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의료사업 확장에 따라 스크랜튼은 1888년 12월 서대문 밖 애오개(현 아현동) 지역에 진료 소를 개설하였다.25) 이 진료소는 매월 약 백명의 환자들을 받아 1889년 7월 1일까지 721명 을 치료하였다. 이 진료소는 일년 남짓 계속되었으나 왕복 소요시간에 비해 성과가 적었기 때문에 1890년 스크랜튼의 휴가와 함께 의료업무는 중단된 듯하다. 그러나 올린저(F. Ohlinger) 목사의 기독교 선교와 스크랜튼 대부인의 여성 전도사업은 그곳에서 계속되었다. 미북감리회의 의료사업 중에서 많은 공헌을 하면서 날로 확장되어 간 것은 여성과 어린이 를 위한 진료였다. 당시의 엄격한 내외법으로 한 병원에서 남녀 공동진료가 힘들고 또 남자 의사에 의한 여성환자 진료가 거의 불가능함을 깨달은 스크렌튼 대부인(Mrs. Mary Scranton)과 스크랜튼은 선교부에 여의사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1887년 10월 최초로 하워 드(Meta Howard)양이 내한하였다. 하워드 의사는 곧 부인진료소를 이화학당 구내에 개설하 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婦人病院이다. 민비는 이를 가상히여겨 保救女館(Salva-tion for all women Hospital)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26) 이는 제중원의 부녀과와 함께 부인병에 대한 전문적인 진료의 효시를 이루었고, 특히 女權伸張 면에서도 크게 기여하는 기관이 되 었다. 의료혜택과는 거리가 멀었고 굿이나 迷信的인 방법에 의존해 있던 여성들이 현대 서 양의학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워드에 이어 셔우드(Rossetta Sherwood, 1892년에 홀의사와 결혼)양이 1890년부터 보구 여관의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Medical Work for Woman By Woman) 라는 표어를 내걸고 여성들을 모아 의료강습을 실시했는데, 그 중에 한명이 김점동, 곧 박에스더(Esther Kim Pak)이다.27) 그녀는 셔우드 홀부인의 후의로 1896 년 도미하여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900년 졸업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여 자의학박사가 되어 귀국한다. 3. 초기 醫療宣敎의 의학사적 의의 1884년 9월 의료선교사 알렌이 도착하면서 시작된 의료활동은, 뒤에서 지적할 선교적 의 의에 앞서 한국 의학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곧 서양의술이 처음 직접적으로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甲申政變을 계기로 한국의 왕실 및 귀족층과 연결됨으 로 급속히 한국에 소개 보급될 수 있었고, 그 가시적 효과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양과학의 위력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도 감당하게 되었다. 25) M.E.C. Report for 1889 p ) W.F.M.S. Report for p. 90. 보구여관은 영어로 Caring for and Saving Women s Hospital 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27) Sherwood Hall, 김동열,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 p 김점동은 홀부부 의 주선으로 1893년 5월 24일 박유산과 기독교식 결혼을 올렸다.

9 둘째, 서양의술과 함께 근대 태서의학 (Western Medical Science)교육이 이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서양의 세계관과 밀접히 연관된 洋醫學의 도입은 한국사의 문화 전반 에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여자간호원과 여자의사의 양성교육은 여권신장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학사적 의미를 지니는 이 시기의 의료선교의 단적인 한 실례가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濟衆院 첫 年例報吿書 이다.28) 여기서 두 사람은 10,460명의 진료환자를 洋醫學 체계에 따라 18개과로 분류하고 이들에 대한 분석과 수술 및 입원환자에 대한 상세한 기록 을 남기고 있다. 진료환자 분류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표> 번호 분류 병종 류 1 발열 12 2 소화기계 질환 순환기계 질환 6 호흡기계 질환 16 신경계 질환 36 6 임파선계 질환 7 비뇨생식계 및 30 매독 전신질환 새로운병 2 10 눈병 32 환 환자가 자 제일 많은 수 병 1,147 사일열 (713) 2,032 소화불량 (582) 천식(148) 833 간질 (307) 경부 214 임파선 비대(212) 1,902 매독 (760) 연주창 365 (146) 음낭의 7 부분 오한 (6) 629 번 호 분류 병종류 11 귀병 7 환 자 수 종양 골 관절 건질환 외상 기형 결체 조직 질환 피부 질환 부인병 미분류 계 환자가 제일 많은 병 음(160) 백대하(2 7) ,460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발병율이 높은 천연두와 학질, 그리고 기생충과 이 등과 같은 해충 에 의한 소화기계 피부질환 등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특히 임질(156명)과 매독(760명) 환자 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콜레라나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 그리고 매독과 같은 성병 이 만연되고 있음은 公衆衛生의 낮은 수준과 함께 開化期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 다. 셋째, 의료선교의 선교사적 의의이다. 초기의 의료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좋은 평판에도 28)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under the care of H.N. Allen & J.W. Heron, For the Year Ending April 10th, 1886.

10 불구하고 육신의 치료 자체에 그들의 의료사업의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의료사업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적을 기독교 복음의 전파에 두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외국 의사들이 기독교와 관련하여 그들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차차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기독교와 서양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학교는 그 토지를 부드럽게 하고 손질하는 써레이다. 학교가 병원을 능가하는 기관이 될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쟁기만 가지고 땅을 경작할 수 없으며 써레만 가지고도 땅 을 손질할 수 없다.29) 기독교선교의 세 기둥이었던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 가운데, 초기 단계에서는 병원사업 이 그 선도적인 쟁기 의 역할, 곧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한 준비 도구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료선교사업은 짧은 기간 동안에 한국의 궁중으로부터 오두막살이에 이르기까지 외국인 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을 제거해 갔다. 斥邪衛正系의 반발에 의해 간간히 선교활동에 대한 금령이 표면화되는 기간에라도, 의료활동은 어떠한 강압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의료선교사들의 활동력이, 필요한 곳에 잘 자리잡혀 갔기 때문에 그들의 저지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의료선교는 기독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료(medicine)는 한국 선교사업에서 두 번째 위치에 있지 않다. 이 나라의 선교사업의 위치는 사실 의료와 더불어 시작한 것이며, 앞으로 오랫동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의료는 나 라의 문호를 열었고, 아직도 넓게 그리고 멀리 하나님의 씨를 뿌리고 있는 중이다.30) 장로교의 언더우드도 초기 의료선교가 거둔 다섯 가지 주목할 만한 결과를 논하면서 하나 님의 복음을 촉진시켰다고 이렇게 지적하였다. 반복되고 계속된 정부의 선교단체에 보인 공식적인 호의표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거의 모두 의료선교에 기인한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촉진시킨 것이다.31) 이것이 바로 초기 의료선교가 복음선교를 위한 새 지평을 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 라서 공식적인 布敎 자유가 없었던 상황에서도, 성경(번역)위원회가 조직되고, 성례가 집행 되며,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순조롭게 설립되어 나간 것은 모두 이 기간에 의료선교활동이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점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29) M.E.C. Report for 1893 p ) M.E.C. Report for 1889 p ) H.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pp 에 그가 지적한 의료선교의 5가지 결과 를 볼 수 있다. 그는 1890 년대 콜레라가 만연할 때 의료선교사들이 보여준 헌신과 관련, 이 렇게 썼다. 콜레라가 대단히 유행할 때, 선교사와 한국보조원들의 놀라운 치료성과와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은, 응급실에 배치된 검사관들이 보여준 신속하고 알맞은 도움 이 때문에 콜 레라가 초기에 근절되고 더 이상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一과 함께 전국에 걸쳐 주목을 받았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부자나 빈자들로부터 외국인들 만큼 우리는 우리 백성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왜 그런가? 라고 하는 각성을 일으켰다.

11 Ⅱ. 醫療機關의 擴散( ) 1. 각 선교부의 선교지역 분할 구미계통 선교사의 한국정착이 1884년 미국 北長老敎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그 해에 미국 監理會도 정식 입국 절차를 밟아 그들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하여 선교가능성을 타진한 바가 있다. 즉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8일까지 당시 미국 감리회소속의 일본주재선교사로 있던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가 한국에 다녀간 적이 있는데, 그는 이 여행에서 미국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미국의 두 교단(미국 감리회와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한 아펜젤러(H.G. Appen-zeller)와 언더우드 (H.G. Underwood)가 복음선교사(목사)로서 내한하게 되었다. 이어서 두 교단에서는 복음 및 의료선교사를 계속 파견하여 그 규모면에서 가장 앞서는 교파를 형성시켰다. 미국의 두 교단에서 선교사가 파견될 즈음에는 한국이 歐美諸國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하 고 있었다. 한국의 개방화정책에 따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개신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 결과 1890년대 말까지는 세계의 유력한 교단들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1889년에는 호 주(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 1890년에는 영국의 聖公會와 미국의 浸禮敎, 1892년에는 미국의 남장로교, 1896년에는 미국의 남감리교,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그리고 1900년대에 이르 러서는 安息敎 救世軍 聖潔敎 등이 각각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각 선교부가 활동을 개시한 곳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여러 선교부가 겹치게 되 어 선교의 효율성 등이 문제시되었다. 처음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선교경험이 적었으므 로 서로의 정보와 경험을 교환하는 협의체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선교협의체가 중심이 되어 선교지역을 분할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같은 교파 내에서 진행되던 협의가 교파간의 것으로 발전하였다. 미국 북장로교는 선교의 정보와 경험, 선교지역의 분할 등을 토의하기 위하여 1899년 오 스트레일리아 장로교의 도착과 함께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고,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의 도착과 함께 선교사(뒷날 장로회)공의회라는 협의체를 조직하였다. 이 협의체는 뒷날 1907년 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로 발전하였는데, 그때까지는 장로교단의 치리권을 장악하면서 대의적으로 장로교를 대신하였다. 뒷날 감리교와 선교협의를 가졌던 것은 이 기관이었으며 선교지역을 분할하게 된 것은 장로교 4개 선교부와 감리교 2개 선교부간에 협의를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1910년대까지 진행된 선교지역의 분할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국 북장로회는 경북 일대와 충청북도의 남부지역, 경기 남부지방과 북부지방,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선교거점(Mission Station)이 있는 곳은 대구 안동 청주 서 울 재령 평양 선천 강계 등지였다. 미국 남장로교는 처음에 충남과 호남 일대를 할양받았으 나, 충남지역은 북감리회(미국 감리회)에 양여하였다. 남장로교의 선교거점은 군산 전주 광 주 목포 순천 등이었다. 1889년에 입국한 호주 장로교의 데이비스(J.H. Davies)목사가 그 이 듬해 장기간의 선교여행 끝에 4월 중순 부산에서 순교하자, 호주 장로교는 그 소식을 듣고 몇사람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직접 부산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그 때에 이미 선교지역을 부 산과 경남 일원에 확보해 가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그 지역을 접수하는 한편 낙동강 서쪽의 경남 일대에 선교활동을 개시하였다. 호주 장로교의 선교거점은 부산 마산 통영 진

12 주 거창 등지였다. 한편 1898년 장로교단 중에서는 가장 늦게 한국에 상륙한 캐나다 장로교 는 함경도 일대를 선교지역으로 분할받고, 원산 함흥 성진 회령 등지에 선교거점을 확보하였 다. 장로교와는 달리 미국의 남북 감리교도 장로교와 감리교 등 선교부와의 협상을 통해 그들 의 선교지역을 확보해 갔다. 북장로교와 같은 시기에 입국한 미국 감리교(북감리교)는 서울 과 평양을 거점의 축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경기도의 서남쪽 일원과 충청남도, 강원도 남부 등지와 북쪽으로는 황해도 남부 해안지대와 평북 영변 일대를 분할받았는데, 선교거점은 공 주 원주 인천 수원 서울 해주 평양 영변 등지였다. 남감리교는 尹致昊의 알선에 의해 한국에 입국, 처음에 서울을 중심으로 거점을 확보했으나 곧 송도로 옮겨 경기도와 강원도의 중북 부를 중심으로 교세를 넓혀갔는데, 선교거점은 서울 송도 춘천 등지였다.32) 위의 장로교와 감리교는 서로 협의하여 선교지역인 한국의 영토를 분할하였는데, 그 중 미국계의 북장 남장로교와 북감 남감리교가 전국토의 71%와 한국인구의 77% 이상을 그 둘 의 선교영역으로 확보했다.33) 그리고 이러한 선교영역의 확보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시 기에 종료되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니라고 생각된다. 장로교 감리교를 제외한 교단은 초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교지역 분할협상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였다. 단지 영국의 성공회가 일찍부터 한국선교에 깊은 관심 을 보였고, 초기의 서울 인천 중심의 선교열은 얼마 안있어 강화지방으로 연결되어졌던 것 이다. 개신교 각 파가 이같이 선교지역을 분할하고 선교거점을 중심으로 정착하게 되자, 복음선 교와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던 의료선교도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한 교회 교육(학교) 의료(병원)는 삼위일체가 되어 한국의 산천과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2. 미국 北長老敎 제중원이 에비슨(O.R. Avison)의 책임하에 선교병원으로 전환되고, 평양 부산 대구 선천 등지에 선교거점 마련을 위한 의료사업이 확산되는 1894년 이후 10여 년간의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업을 살피보자. 에비슨(O.R. Avison, 魚不信)은 캐나다에서 영예로운 교수직과 의사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박차고 34) 1893년 7월에 내한하여 11월 1일부터 빈튼 후임으로 제중원 원장에 취임하였다. 병원 책임을 맡은 에비슨은 한국 관리들의 부패와 나태를 이유로 사임하려 하였다. 이 사 건은 알렌의 居中調整으로, 부패관리를 제거하는 등의 에비슨의 제의가 수용됨으로써 마무 리되었다. 이 때 불필요한 주사직의 사무직원을 감축, 년 $1,500의 경비를 절감하게 되었고 32) 李萬烈, 한국기독교와 미국의 영향 ( 한국과 미국 3,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88) p ) 위의 책 p ) A.D. Clark, 에비슨전기 (연세대출판부, 1979) p. 163, 에비슨의사가 내한할 무렵 선교사 들 사이에는 서울에서 병원사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의견이 대립되어 있 었다 (위의 책 p. 242).

13 간호원직을 대행하고 있던 기생 혹은 醫女를 물리치고 본국 선교부에 간호원 파견을 요청했 다.35) 또한 이 무렵부터 제중원 내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양해도 얻게 되었다.36) 1894년은 東學革命 淸日戰爭 및 甲午改革이 있었다. 갑오개혁에 의한 관제의 개혁으로 內 務衙門에 위생국을 두어 전염병 예방업무와 의약 및 종두 등의 사업을 겸행케 했으나, 재정 난으로 제중원의 사업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자, 정부는 설립 9년만에 제중원의 경영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이관하였고, 따라서 제중원은 순수한 선교병원으로 재조직되었다.37) 에비슨을 도와 제중원의 업무를 진행한 의료선교사들은 1893년 11월에 도착한 의사 어빈 (C.H. Irvin, 魚乙彬)을 비롯하여 1895년에 도착한 여의사 화이팅(Georgiana Whiting, 뒷날 Mrs. Owen 이 됨)양과 간호원 제콥슨(Anna p. Jacobson, 雅各善)이 있으며, 1897년 제콥슨 이 사망하자 쉴즈(Esther Shields) 양이 간호원 일을 맡았다. 1895년 7 8월 콜레라가 만연 할 때 선교사들은 헌신적으로 봉사했는데 특히 아버클(Victoria Arbuckle 후에 Mrs. B. Hunter로 됨)양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897년에 내한한 여의사 필드(Eva H..Field)는 제중 원의 부녀과를 맡고 있었으며, 이해 12월에 도착한 피쉬(Alice Fish, 뒷날 Mrs. S.A. Moffett 가 됨)와 1899년에 내한한 의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謝樂秀)도 합류, 에비 슨을 돕고 있었다. 이 외에도 1904년까지 남감리회 소속의 하디(R.A. Har-die, 河鯉泳)와 황 실의전의 독일인 분취(R. Wunch), 그리고 사또(Sato)양을 포함한 2명의 일본인 간호원38)이 근무하였다. 1896년의 환자통계를 보면, 입원 160, 진료 6,514, 왕진 127, 순회여행 치료 275, 합계 7,076건이었는데, 이후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기까지 매일 평균 20 3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한편 에비슨은 1895년 한해동안만 해도 30회 이상 왕실에 가서 치료하였는데, 고종은 친절한 봉사에 대한 감사 의 표시로 $ 3백을 하사했다. 이는 의료선교사에 대한 왕 실의 신임과 지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중원 내에 1886년 엘러즈(A. Ellers)에 의해 설치된 부녀과는 화이팅의사, 필드의사, 쉴 즈간호원, 피쉬의사 등이 내한, 부인들을 치료하였다. 제중원의 부녀과와는 별도로 언더우드부인(Mrs. L.H. Underwood)은 1893년 1월 정동 구 내에 뉴욕의 오닐부인(Mrs. Hugh O Neil)이 희사한 돈으로 휴오닐 기념진료소 를 설립하였 는데, 진료는 1894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부인은 1895년 민비의 시의가 되었고, 그 해 여름 콜레라 만연시에는 희생적으로 검역과 치료에 힘썼다. 그녀는 또 1898년 10월 중순 부터 이듬해 3월 1일까지 獨立館(옛날 모화관)에서 1주일에 5일간 진료하면서 전도활동을 겸하여 수십명을 개종시켰다. 1901년에는 1주일에 한번씩 진료함으로써 500명 정도를 치료 하였다. 그것은 체계적인 의료사업보다는 여성전도사업에 더 주력해야 할 필요 때문이었는 데, 이는 필드의사의 경우도 동일하였다. 35) 위의 책 pp ) N.P. Report for 1894 p ) 연세대학교사 (연세대출판부, 1969) p. 52. 따라서 이 때부터 제중원은 명칭상 국립병원 이지만 실제로는 선교병원 으로 민영화되었다. 그러므로 구리개에서 남대문으로 병원을 옮길 때 정부는 선교부의 시설투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 高宗實錄 권46, 光武 9년 7 월 11일조). 38) N.P. Report for 1903 pp 에비슨의 일본인 간호원 채용에 대해, 평양의 웰즈의 사는 1902년 8월 22 일자 편지에서 선교병원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하면서 에비 슨의 의료정책을 비판했다.

14 베어드(W.M. Baird) 부부가 1891년 2월 상주함으로써 시작된 부산의 선교사업은 그해 12 월에 내한한 브라운(Hugh M. Brown) 부부에 의해 의료선교의 문이 열렸다. 1892년 그들은 진료소를 개설, 여름까지 870명을 치료했는데, 그 중 재진이 340건, 수술이 84건이었다. 남편 의 건강악화로 1895년 4월 이들이 귀국하자,39) 대신해서 어빈(C.H. Irvin, 魚乙彬) 의사가 부 산으로 내려왔다. 그는 메리콜린스화이팅진료소(Mary Collins Whiting Dispensary)를 세워 진료활동을 전 개하였는데, 1899년의 경우 8,124명을 치료하고 1900년에는 8,658명의 치료에 $937의 자체 수입을 올림으로써 운영비의 자조를 이루어 나갔다. 시설확충을 절실히 원하던 어빈은 1901년 미국 뉴저어지주의 몽클레어 제일장로교회에서 보내준 $2,000의 헌금으로 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이해에도 8,582명을 치료해 $1,032의 수입을 올렸고, 한국인 유초시(Choti You)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했다. 1902년 어빈은 8년만 에 안식년 휴가를 떠나면서 그간의 의료활동으로, 남자 30,895 명, 여자 18,120명, 어린이 9,197명, 총 58,185명을 치료했으며, 5,396건의 왕진과 2,472건의 성공적인 외과수술을 행했다 고 보고하였다.40) 마펫과 리(Graham Lee)목사에 의해 시작된 선교사업에 1895년 6월에 내한한 엘즈(J. Hunter Wells, 禹越時) 의사가 합류하였다. 1896년 그는 평양에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1897 년 10월부터 1년간 11,886명(입원 583)을 치료하였다. 1897년 12월 피쉬(Miss Alice Fish)의 사가 평양에 와서 웰즈의사와 합류하였다. 진료소개설 이후 1899년까지 3만 6천명을 치료했 고, 1900년은 한 해동안 11,678명을 진료하였다. 웰즈는 한국인 조수들에게 의학을 가르쳤는데, 1901년에는 8명의 의학도가 있었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선천까지 진료활동을 벌였다. 한편 웰즈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雲山금광과 영 국인이 운영하는 殷山금광의 외국인과 한국인 노동자를 위한 의료사업에도 깊이 관여 하였 다.41) 이 무렵 웰즈를 도운 의료선교사로는 피쉬 외에 샤록스( ), 화이팅( ) 등이 있으며, 전도자로는 1894년 1월 8일 평양에서 최초로 세례 받았던 김종섭이 있 었다. 대구에서는 1898년초 존슨(W.O. Johnson)의사가 부임해 옴으로써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해 대구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 이라는 진료소를 열었으나, 시설과 의료품이 도착한 1899년 10월에 가서야 새로이 진료소를 동산동에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 는데, 이것이 대구동산기독병원의 전신이다. 1900년 여름까지 1,756명(초진 800, 수술 50)을 치료한 그는 조수 서씨와 부산의 어빈과 로스부인(Mrs. Ross)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1903년 4월부터는 새 병원 건축이 시작되어 필라델피아 제 2장로교회의 후원과 라이트 39) 일 내한한 브라운은 渡美 후 사망했다. 40) N.P. Report for 1902 p ) 이혜경, 舊韓 改新敎 宣敎師의 韓國經濟에 대한 認識 및 經濟活動 (고려대학교 교육대학 원 석사논문, 1988). 평양제중병원은 운산광산으로부터 매년 $250의 운영비를 지원받고 있었 다 The New Century, Pyung-Yang), The Korea Review, Feb., 1901, p. 58).

15 (M.H. Wright)양의 거액헌금으로 라이트기념병원 (Wright Memorial Hospital)이 완공되었 다. 서울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전개한 바 있는 샤록스는 1901년 11월 선천에서 진료소를 개설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3월 자신이 장티푸스에 걸려 4개월 밖에 문을 열지 못했는데, 이 기 간동안 1,100명을 치료하고 60명을 입원가료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환자수가 3천 5백명으로 늘어났다. 러 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에는 양국의 부상군인들을 치료하였다.42) 이해 샤록 스는 신자가 아닌 일반 여성환자들도 진료소를 찾고 있다고 특별히 기록하고 있다. 3. 미국 北監理敎 1894년은 정치 사회적 격변의 해였을 뿐만 아니라, 의료선교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제중 원의 선교병원으로의 전환과 함께, 북감리교의 시병원이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겨감으로써 남대문 상동병원시대를 열었고, 보구여관도 커틀러의사의 책임하에 동대문에 볼드윈 시약 소 (Baldwin Dispensary)를 운영하였으며, 지방에도 의료사업이 확산되어 평양과 원산에 병 원이 설립되었다. (1) 남대문 상동병원(시병원) 1890년 10월에 완공된 상동병원에 1894년 정동의 시병원 이 이전하여 하나로 합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 해 청 일전쟁 등의 혼란으로 제중원이 여러 달 문을 닫고 영국성공회 병원은 안전을 위해 도피했으나 시병원43)은 계속 문을 열었다. 1894년부터 병원의 책임을 맡은 버스티드(J.B. Busteed) 의사는 예산삭감과 거 주지와 병원간의 거리가 먼 점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진료와 전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 였다. 1896년의 경우 시병원의 직원을 보면 버스티드와 제 1 조수요 약제사인 상동 교회 교 인 고바야시(小林), 제 2 조수인 정동교회 교인 권씨(Mr. C.U. Quan), 그리고 전도사 김씨가 있었는데, 1일 평균 진료환자는 10명 이었다.44) 병원외 전도사업을 보면, 8시에 입원환자의 예배, 11시에 진료환자의 예배가 버스티드 의 사의 인도로 찬송과 간단한 설교로 이루어졌다. 낮에는 진료활동을 하고 밤에는 전도활동까 지 하던 버스티드 의사45)는 과로로 건강을 잃게 되어 1897년 봄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부의 예산삭감에 이어 버스티드의 귀국으로 상동병원은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셔먼(H.C. Sherman)이 올 때까지 거의 1년간 입원실(hospi-tal)은 폐쇄 되었다.46) 다만 진료실(dispensary)은 왕실 전의로 있던 영국성공회 여의사 쿠크(Miss L.A. Cooke)에 의해 1887년 11월부터 재개되어 이듬해 봄 셔먼에게 인계되었다.47) 42) N.P. Report for 1905 p ) 남대문으로 이전한 후에도 스크랜튼병원 의 뜻인 施病院, 이름은 계속 사용되었다. 이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4) M.E.C. Report for 1896 p ) 기독교문사, 기독교대백과사전 제 7권(1984) pp ) 일반적으로 병원은 입원실(Hospital)과 진료소(Dispensary)로 구성되었다. 담당의사의 부재시 대부분 Hospital은 문을 닫고, 조수나 간호원에 의해 Dispensary는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Hospital 폐쇄를 상동병원 전체의 폐쇄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16 셔먼은 1898년 2월 14일 상동병원에 부임하여 첫 5개월간 입원환자 20명, 진료환자 1,578 명을 치료함으로써 의료업무를 정상화시켰다. 교통 요지에 자리잡은 시병원에는 시골에서 온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병원에서 쪽복음을 읽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 성경 공부반을 조직하였고, 이것이 장래 교회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셔먼은 한국인 의사에 의한 한국인 치료가 최상의 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많은 노 력을 기울였는데, 일찍부터 申興雨 청년을 의사로 훈련시키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였다.48) 그 러나 이 계획은 1899년 여름 셔먼이 과로로 인해 결핵에 걸려 지방의 전지요양도 효과 없이 1900년 봄에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무산되었다. 셔먼은 미국에 도착한 지 6주만인 1900년 7월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00년 3월에 2차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귀국한 스크랜튼 감리사49)는, 셔먼의 귀국과 예 산부족에 따른 후속 의사의 미도착, 그리고 본국에 돌아간 셔먼과 버스티드 두 의사가 각각 1900년 7월과 1901년 3월에 사망하자 상동병원의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01년 병 원을 완전히 폐쇄하였다. 이는 또한 의료사업의 도움없이도 복음전도 사업이 독자적으로 가능해 50)졌기 때문이다. 1900년 5월 초로 추정되는 셔먼의 귀국 이후 상동 병원은 자동적 으로 폐쇄된 듯하다.51) (2) 보구여관 하워드와 셔우드양에 이어 1893년 3월 30일에 내한한 커틀러(Miss M.M. Cutler)의사가 보구여관을 맡았는데, 그녀는 이후 20년 가까이 책임자로 병원을 운영하였다. 보구여관을 찾는 여성들은 대부분이 하층계급의 사람들이었다. 환자들은 대부분이 하층 계급이었는데 상류층 여성들은 대낮에 거리에 나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 다. 이들은 가끔 가마를 타고 오거나, 의사가 왕진을 가야만 했다.52) 여성 의료사업이 확산되는 속에 보구여관에서 봉사한 의료진을 보면, 간호원 루이스(Miss Ella A. Lewis), 1897년에 내한한 해리스 의사(Miss Lillian Harris), 1899년에 내한하여 커 틀러의사의 1900년 안식년 휴가 때 병원을 책임진 언즈버거 의사(Miss Emma Ernsber-ger), 그리고 1901년에는 홀부인(Mrs. Rosetta Sherwood Hall)과 박에스더 부인 (Mrs. Esther Kim Pak), 1902년에 내한하여 커틀러를 도우며 1903년에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학교 를 설립한 에드먼즈(Miss M.J. Edmunds)간호원 등이 있다. 또한 부인권서 (Bible-woman) 황메리(Mary Whang)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3) 볼드원시약소 1893년 동대문에 보구여관 분원 진료소인 볼드윈 시약소 (Baldwin dispensary)가 개설되었다. 커틀러가 첫 책임자로 있었으며, 년까지는 릴리안 해 리스가, 1901년 이후에는 언즈버거가 운영하였다. 한편 해리스의사는 1901년 평양의 광혜여 47) M.E.C. Report for 1898 p 쿠크양은 낙동부인병원인 성베드로병원에서 근무하고 있 었다. 48) C.H. Jones, Memoir of Dr. Harry C. Sherman M.E.C. Minutes for 1901 p. 70. 신흥 우는 1903년 미국에서 셔먼부인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여 배재학당 출신으로 최초의 석 사학위를 받았다. 49) 스크랜튼은 이후 1909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이듬해까지 조선총독부병원 부속의학교에서 생리학교수로 지냈으며, 1911년에는 운산광산 의사로, 년은 철산광산 의사로 지내 다가,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갔고 1922년 3월 23일 사망하였다. 50) 백락준, 한국개신교사 p ) M.E.C. Minutes for 1900 pp ) Sherwood Hall, p. 76.

17 원에서 일한 후 서울에 왔는데, 1902년 5월 16일 과로로 인한 발진티푸스로 여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사망하였다. 1899년 가을부터 보구여관은 동대문으로 이전해 가기 시작했는데, 1913년 동대문으로 완전히 통합될 때 해리스양을 추모하여 그 이름을 릴리안해리스기념병 원 (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이라 하였다. 제물포와 부산에 이어 지방에서의 의료선교사업은 평양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본격적인 사업은 청 일전쟁 후에 세워진 기홀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에 의해 전개되었다. (1) 紀忽病院 평양에서의 의료선교는 1892년 8월 홀(Wm. J. Hall) 의사에 의해 시작되 었다. 그는 1893년 4월 평양 서문에서 한옥을 구입하고 진료소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부인 홀(Mrs. Rossetta Sherwood Hall)의사와 함께 진료활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청 일전 쟁의 발발로 서울로 귀환하였다. 평양전투가 끝난 뒤 1895년 10월 마펫(S.A. Moffett) 목사 와 함께 평양으로 내려간 홀의사는 부상자들과 전염병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나 과로하 여 이질에 감염, 한달만에 다시 귀경하는 도중 발진티푸스가 겹쳐 1895년 11월 24일 사망하 였다. 기홀병원 은 바로 이 홀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부인이 모금한 돈으로 설립되었는데, 1895 년에 내한한 폴웰(E.D. Follwell)이 원장직을 맡아 1897년 2월 1일 48 16피트의 진료소를 개 원하였다. 그러나 2명의 의사가 평안도지역 전부를 감당하기란 벅찬 일이었다. 2년 뒤엔 입 원실이 완공되었는데, 개업 4주년을 맞이한 1900년에는 12 12피트의 입원실 3개와 8 12 피 트의 수술실을 갖추어 12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으로 확장되었다.53) 기홀병원은 1901년까지 개업 4년 반동안 2만 4천명을 치료했고, 수술 121건, 취급한 병은 75종에 달하였다. 1901년 한해 동안에는 5,862명의 환자를 치료함으로써54) 關西地域 굴지의 병원으로 성장해 나갔다. (2) 廣惠女院 평양에서의 부인진료사업은 1894년 5월 15일 홀부인이 남편의 진료소 한 쪽을 빌어 설립한 해외여선교부(W.F.M.S)의 부인진료소에서 비롯되었다. 홀부인은 남편의 사망 후에 도미하였다가 1898년 5월 1일 다시 평양에 와서 6월 18일 진료소를 재개하였는 데, 이 때 평양감사는 광혜여원 (Women s Dispensary of Extended Grace)이라는 이름을 하 사하였다.55) 한편 이 때 홀 여의사는 뉴욕점자(New York Point)를 개조하여 맹인교육을 시작했다. 이 것은 1894년 평양주재 전도사 오석형의 딸인 오봉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56) 자신 의 죽은 어린 딸을 추모하여 세운 에디스 마가렛 어린이병동 (Edith Margaret Children Wards)에서 교육을 시작하여, 1899년에는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를 열었다. 1900년에는 의학박사가 된 박에스더부인이 평양으로 돌아와 의료활동에 가담하였는데, 1910년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헌신 봉사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뒷날 海州 결핵요양원으 53) E.D. Follwell, Hall Memorial Hospital and Dispensary ( The Korea Mission Field, Nov., 1905) p ) M.E.C. Report for 1902 pp 폴웰의 보고서는 1901년 의료수입 740, 안과치료 482, 백신 173, 발치 124, 안경제조 113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55) Sherwood Hall, 앞의 책 p 이것은 4년전 1894년의 평양 기독교 박해사건과 비교할 때 그만큼 지방관리들과 기독교의 관계가 우호적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대인 (洋大人)으로서의 선교사들의 힘이 인식된 결과이기도 했다. 56) 위의 책 p. 117.

18 로 결실을 맺게 된다. 개항장 원산의 의료선교는 1892년 맥길(W.B. McGill)의사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순회 진 료활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1897년에는 여자병동을 마련하였고, 1898년에는 의료수입이 1,300에 달하였다. 그러나 1902년 335명의 진료를 끝으로 맥길의사는 원산을 떠났고, 이후 원산지방은 남감리회 선교구역으로 이월되었다. 4. 미국 南長老敎 1893년 한국에 상륙한 미남장로교의 의료선교는 1894년 봄 드루(A.D. Drew, 柳大模) 의사 가 레이놀즈(W.D. Reynolds) 목사와 함께 2개월간 호남지역을 순회하면서 진료와 전도 활 동을 전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東學革命의 발발로 일시 서울로 철수하였다가,57) 1895 년에 재개하였다. 군산이 선교거점이 되고 의료선교가 시작된 것은 드루 의사의 공이다. 그는 1894년 순회 여행에 이어, 1895년 3월에 군산순회진료를 실시하였다. 이듬해에는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 여 선교선(Mission Vessel) 을 구입하고 강변과 해변, 도서 지방에 대한 순회진료를 적극 모색하였다. 1896년에는 자택에서 진료소를 개설하고 2천여 명을 치료하였는데,58) 이것이 군 산야소교병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드루는 1901년 과로로 병원을 떠나 귀국했는데 결국 병사하였다. 그의 부재로 인 해 공백 상태가 된 군산야소교병원은 1902년 가을 알렉산더(A.J. Alexander)의사를 원장으 로 맞이함으로써 재개될 조짐을 보였으나, 도착 직후 부친 별세의 통보를 받아 장남으로서 유산을 정리해야 하는 개인적 사정 때문에 부득이 귀국치 않으면 안되었고, 이후 병원은 계 속 문을 닫고 후임자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의사의 내한이 전혀 무의미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귀국할 때 뒷날 한국의료사에 큰 공을 남기는 吳兢善을 데리고 가서 의학공 부를 하도록 한 점이다. 1896년 2월 해리슨(W.B. Harrison) 목사는 전주에 선교거점을 설치하면서 서문밖에 시약 소를 개설하였다.59) 그러나 늘어나는 전도업무로 진료사업은 이듬해 도착한 잉골드(Miss 57) 드루는 서울에서 서대문 밖에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부녀자 치료는 테이트(M.S. Tate)양이 맡았다. 58) Mission Statistics for Korea for 1896 ( The Missionary ), Oct., 1897) p 당시 선교부별 진료통계는 다음과 같다. 선교회 병원 입원환자 진료소 진료환자 미북장 ,295 미남장 1 2,000 미북감 ,778 영 성공 회 3 약 약 30,000 59) 김수진 한인수,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범론사, 1980) p <표></표>

19 M.E. Ingold) 의사에게 일임하였다. 그녀는 1898년 은송리에 진료소를 개설 운영하였는데, 주민들의 기독교와 서양인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테이트양과 함께 무당을 지냈던 오씨부인이 잉골드를 도왔다. 1899년 봄 4개월간에 4백명을 치료 했을 때, 진 료소는 확실한 전도기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60) 1902년에는 현재의 예수병원의 전신이 되는 건물을 화산동 새 선교부지에 테이트(L.B. Tate) 목사의 노고로 설립하였다.61) 1902년 9월까지 6개월 반 동안의 통계는 진료 1,586명, 왕진 150명, 수입 한국인 348.5냥 ($29.04), 외국인 10.1 엔($5.05)이었다.62) 포사이드(W.M. Forsythe) 의사가 올 때까지 7년간 잉골드의사는 주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치료하였다. 목포 선교거점은 1898년 가을 벨(E. Bell) 목사 가족과 오웬(C.C. Owen, 吳基元) 의사의 도착으로 개설되었다. 오웬 의사는 1899년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환자들을 치료하였는데, 늘 어나는 업무로 간호원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1900년 서울 제중원의 여의사 화이 팅(C. Whiting)과 결혼하게 되어 목포를 일시 떠나면서 진료소도 문을 닫아야 했다. 비록 그가 1901년 가을에 다시 목포로 왔으나 전도사업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의료사업을 포기함 으로써 목포 의료사업도 군산과 함께 새로운 의사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다. 1899년까지 군산 전주 목포의 진료소에서 치료받은 환자수는 1만2천여 명이었으나, 의사의 부족으로 1904년 러 일전쟁이 일어나자 호남의 의료선교사업은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그리 고 해리슨 목사와 오원 의사의 전도사업에의 전념은 의료사업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전환기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5. 미국 南監理敎 1896년 리드(C.F. Reid)박사의 부임으로 출발한 美南監理敎는 1898년 5월 15일 하디(R.A. Hardie, 河鯉泳) 의사를 의료선교사로 임명하면서 송도와 원산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하였 다.63) 하디의사는 캐나다 대학선교회(Canadian Colleges Mission)소속으로 1893년 이후 6년 간 원산에서 의료사업을 하였는데 남감리회로 옮긴 것이다. 하디 의사는 1898년 5월부터 9월까지 제중원에서 에비슨 의사에게서 의료기술을 익힌 뒤 송도에 부임했다. 1899년 4월에는 인삼 헛간을 개조하여 진료소를 정식 개원하였다. 여기에 는 성경과 소책자를 판매하는 서점이 있어 그 해에 2천여 명이 이용하였다. 재정난 속에서 하디는 병원이나 진료소들이 직접적인 전도기구인 이상 그 지원은 정당하다64) 고 주장하였 으나, 1900년 말에 원산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1908년 아이비기념병원이 설립될 때까지 송도 60) M.B. Ingold, A Korean Dispensary ( The Missionary, Oct., 1899) pp ) Annual Report of M.B. Ingold, 1902 p ) 참고로 당시 화폐는 1 =l0sen, $1= 2=10냥= 0.2이었다. 63) W.T. Reid, History of Our Medical Work) ( Southern Methodism in Korea ) pp ) M.E.C. South Report for 1900 p. 43.

20 의 의료사업은 전담자없이 원산의 로스(J.B. Ross, 羅約耳) 의사에 의해 간헐적으로 실시되 었다. 송도에 있던 하디 의사는 1900년 12월 23일 다시 원산으로 파송되어 맥길(W.B. McGill) 의사와 함께 작은 진료소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순회진료를 하였다. 1901년 11월 8일 로스 (J.B. Ross) 의사가 도착하여 하디의사를 조력하게 됨에 따라 하디는 전도사업에만 전념하 게 되었고, 1903년부터는 로스가 병원을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1902년에 원산지역은 북감리 교에서 남감리교로 이양되었는데, 이는 맥길 의사가 평양으로 파송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원 산 救世病院은 1915년 원산연합기독병원(Union Christian Hospital)이 설립 될 때까지 로스 의사 책임하에 복음기관으로 성장해 나갔다. 6. 醫療事業의 특징 이 시기( )에 수행된 미국 개신교 의료선교사업은 전 시기와 비교해 볼 때 다음 의 몇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청 일전쟁 이후의 의료선교 활동의 특징은 무엇보다 복음전도를 방편으로 한 의료선교는 지양되고 그 자체가 선교기관이 되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기독교와 서양인에 대한 한국인 의 편견을 제거하는 쟁기 의 역할에 머물렀다면, 이 시기에는 이미 그러한 整地作業이 이루 어졌기 때문에 진료소와 병원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전도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제중원의 경우 1894년 경영권이 선교부로 이전되면서 종교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이 후 병원은 기독교적인 가르침과 영향속에 운영됨으로써 입원환자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65) 제중원의 전도방법은 예배(아침 저녁 일요일)와 기도 회, 대기실 진료환자 전도, 입원실 방문전도, 그리고 성경공부모임 등이 있었는데, 성경 찬송 가 소책자 및 성경구절이 든 그림 등이 이용되었다. 이러한 추세와 전도방법은 다른 진료소와 병원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띄었다. 특히 한국인 의료조사와 전도사, 그리고 부인권서(Bible Woman)의 열심과 헌신이 환자들로 하여금 위대 한 의사 (The Great Physician)인 예수를 만나게 하였다. 한편 순회진료여행이 활발하게 전 개되어 지역교회 설립의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병원이 전도기관화되었다는 것은 곧 의료사업이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했음을 뜻한다. 이 것은 의료선교사와 복음전도 선교사와의 분리 현상을 낳았다. 즉 전도를 위한 도구로써 의 료 선교에 종사했던 선교사들은 전도의 문이 열린 이 시점에 와서 의료활동을 중단하고 복 음전파에만 전념하게 되는 발전적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북감리교의 스크랜튼과 남감리교 의 하디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고, 그 밖에 보구여관의 루이스(E.A. Lewis, 劉義善), 전주의 오웬과 해리슨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65) N.P. Report for 1896 p. 158.

21 서울과 평양, 그리고 개항장인 제물포 부산 원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 시기의 의료사업이 각 교파의 내륙진출과 선교사업의 확장과 함께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기존지역의 의 료시설과 의료진은 보강되어 나갔다. 선천 송도 군산 전주 목포 대구 등지에 병원과 진료소 가 설립되었으며, 본고에서 다루지 않은 영국계 개신교인 캐나다 장로교의 함경도 진출 역 시 이 당시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진료소의 규모나 시설은 빈약하였다. 작은 초가나 기와집 한 채를 진료소로 사용하는 정도였고, 그나마 서구식 벽돌 건물을 가진 서울 평양 제물포 등도 대동소이한 실 정이어서, 충분한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의 설립이 시급하였다. 한국교회의 자립을 추구한 네비어스정책(Nevius Method)은 의료선교사업에도 적용되어 재정의 자조와 한국인 의료진 양성의 두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먼저 병원의 건축비나 시설 구입비 그리고 의사의 봉급 등을 제외한 운영비의 자립도가 증가하였다. 환자 가운데는 무료치료를 받는 극빈자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지불능력이 있는 환자들로부터는 치료비와 약품비를 받음으로써 일반 경상비는 자체조달이 가능하였다. 한국인 의사와 간호원의 교육도 이 때 적극 추진되었다. 각 병원과 진료소에서는 필요한 조수와 간호원을 실습 위주로 훈련시켰는데, 서울에서는 정식 의학교와 간호학교가 시작되 었다. 제중원은 1886년 3월 29일 16명의 학생으로 의학반을 개설한 뒤 이를 발전시켜 1899 년에는 현재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의학교를 창설하여, 이듬해 1900년 9월 정부에 정식 등록되면서 제중원의학교 로 호칭하였다.66) 개교 당시의 교수진은 에비슨 필드 웰즈 샤록스의사와 쉴즈 간호원 김필순 등이었다. 1901년 9월 1일에는 8년 과정 으로 확대하였는데, 이 때 전병세 서효권 박서양 김정원 홍익후 홍덕수 등이 등록하고 있었 으며,67) 교과목은 해부학 유기화학 무기화학 등이었다. 교재는 에비슨이 번역한 그레이(H. Gray)의 해부학 과 무기약학 등이 사용되었다.68) 한편 1903년 북감리교의 에드먼즈(M. Edmunds)양은 보구여관에 한국 최초의 간호원양성 학교(Nurse s Training School)를 개설하고 6년 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1904년에는 5 명의 학생이 있었다.69) 看護員 이라는 말도 이때 생긴 新造語였다.70) 66) 제중원의학교는 1909년 교육령개정시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1913년부터는 세브란스연합의 학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연합사업을 전개했다. 1917년에는 다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 학교로, 1942년에는 총독부에 의해 아사히(旭)의학전문학교로 개명하였고, 1947년 세브란스연 합의과대학이 되었다. 67) 4학년 서효권은 송천교회 장로 서경조의 아들이고, 2학년 박서양은 백정 박씨의 아들이었으 며, 1학년 홍인후는 새문안교회 홍장로의 아들, 홍덕수는 서상륜의 사위 될 사람이었다. 이 보다 앞서 1900년 말에는 이전에 있던 7명의 학생이 에비슨의 휴가로 흩어져 버렸는데, 1명 은 일본인 의사가 운영하는 진고개의 의학교에 입학했고, 1명은 왕립군관학교로, 3명은 생계 를 위해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Annual Report of Imperial Korean Hospital, 1901 p. 14). 68) The General Report of Seoul Station, p. 26, The General Report of Seoul Station, 1904 pp , N.P. Report for 1906 p ) W.F.M.S. Report for p ) Sherwood Hall, 앞의 책 pp

22 이 밖에도 셔우드의 김점동 곧 박에스터의 유학과, 군산의 알렉산더 의사에 의한 오긍선 의 유학이 이 시기에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초창기 의료사업을 이끌어갈 많은 선구자들이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청 일전쟁에서 러 일전쟁까지의 10여년간에는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이 만연하였다. 이에 각 선교부는 연합으로 국립콜레라병원 등을 설립 운영하여 전염병 퇴치에 앞장섬으로써 왕 실의 환심을 샀는가 하면,71) 한편으로는 당시의 연합활동의 경험이 세브란스병원 운영의 기 초가 되었다. 평양에서의 맹인교육은 한국특수교육의 효시가 되었고, 동학혁명 청일전쟁 을미사변 의병 투쟁 등의 전란으로 인한 군인치료도 선교병원이 감당하였다. 이렇게 의료선교는 모두의 환 영 속에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Ⅲ. 綜合病院으로서의 成長( )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해체 전락되어 가던 이 기간에 한국교회는 성장하면서 연합화 조 직화되었다. 1905년 교육 전도 의료사업에서의 6개 장로교 감리교 교단 연합을 위한 재한 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 의 조직, 1907년의 대부흥운동과 독노회의 조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교계의 발전 추세 속에 20세기에 들어선 의료사업의 현대화와 종합화도 적극 논의 추진되었다 년 하디의사는, 의료사업은 그 시초부터 강력하게 조직되어야 한다. 한 선교부의 의료진이 분리되어 일인진료소 (one-man-dispensary)들이 여러 선교거점에 충당되는 것보다 한 기관에 집중되는 것이 훨씬 낫 다. 여러해의 진료소 경험을 통해 이 결론에 도달했는데, 점점 그 확신이 더해 가므로, 우리는 완 전한 시설과 의료진을 갖춘 병원을 강력히 요청한다.72) 는 의견을 밝혔다. 에비슨 역시 한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일시적인 구호활동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병원시설임을 확신하고, 그해 캐나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한국에 현대적인 종 합병원을 건립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 세브란스 병원 1899년 안식년 휴가 때부터 병원 설립을 구상해 온 에비슨은, 1900년 5월 뉴욕 국제 선교 사대회에서 실업가인 세브란스(L.H. Severance)를 만나 $1만5천을 희사받고, 북장로교 선교 본부의 $1만을 지원받음으로써 도합 $2만5천의 자금을 약속받고 1900년 가을 귀국할 수 있 었다. 71) 년 국립콜레라병원 운영시 에비슨은 정부의 재정보조는 물론 경찰동원권까지 위 임받았다. 그는 콜레라 계몽을 위해 소책자도 배포하였다. 72) M.E.C. South Report for 1900 p. 43.

23 그러나 대규모 종합병원 건립에 대해서 정부 관리들과73) 특히 선교사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다. 미국의 부에 대한 방어가 없을 때 이 선교지는 다른 선교국의 전철을 밟게 될 것 이고, 74) 세속적 수단을 위해 영적 수단을 포기 75)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평양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독교는 그 자체로 천명할 것이요, 어떠한 기관을 대변물로 민중 앞에 내세워서는 안되며 교회 발전에 앞선 거대한 기관은 기독교를 하나의 자선사업 대행기관으 로 보이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선교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브란스씨의 부지 대금 $5천의 송금과 선교부 총무 브라운(A.J. Brown)의 지 지76)로 1902년 11월 27일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에서 세브란스병원 정초식을 거행하였 다. 이날 보낸 초청장에서 우리는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의 전통을 이어 받은 그 후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본월이십칠일(음력십월이십팔일) 오후세시에남문밧게새로짓 졔중원(쎄버란씨긔럼병원)긔초의 모통이돌을놋켓 오니오셔서참예 심을바라 이다. 이 돌을대미공 안련씨가놋켓 구쥬강 一千九百二년十 月 대한광무六년임인十一月 졔즁원 77) 러 일전쟁으로 인한 일시 공사 중단이 있기도 했으나 에비슨과 건축가 고든(H.B. Gor-don)의 노력으로 세브란스병원은 1904년 9월 23일 개원식을 가졌다. 곧 구리개 제중원 시대를 마감하고78) 현대식 종합병원 세브란스병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병원은 세브란스의 후원 속에 세브란스의학교와 간호원양성학교 등의 설립 발전과 더불어 성장해 나갔다. 1904년에 허스트(J.W. Hurst, 許時泰) 의사가 보강되었고, 1905년에는 북감 리교와 합동하여 연합사업을 개시하였다. 1907년 세브란스가 자신의 주치의인 러들러(A.I. Ludlow, 羅道魯)와 함께 내한해서 병원의 적극 지원을 약속하고 $3만를 희사하였는데, 러들 러는 1913년 세브란스 외과의사로 내한하게 된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의 진료통계는 다음의 표와 같다. 73) 1900 년말 고종황제는 병원부지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에비슨에게 전했으나, 외국인의 활동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재정관 때문에 대지구입이 1902년까지 연기되기도 하였다. 74) W.B. Hunt 의 일자 편지(P.H.S. Microfilm, #280). 75) S.A. Moffett 의 일자 편지(P.H.S. Microfilm, #280). 76) A.J. Brown, Report of a visitation of the Korea Mission (1901). 77) 연세대학교백년사 제 1권 사진자료. 78) 高宗實錄 권46, 光武 9년 7월 11일조 議政府因度支部請에는 제중원환수 후 미국인 주거 권리 일개년 부담금 일천 칠백원 경의상진제왈가 라고 하였는 바, 구리개의 제중원을 정부 가 환수한 후 북장로교에 보상금을 지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부는 구리개병원을 폐쇄하 고, 1899년 4월 병원관제령에 의해 김홍집의 집에 光濟院을 설립하는데, 이것은 1907년 3월 대한병원관제령에 의해 연건동의 大韓病院으로 발전하고,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의원이 된다 ( 해관오긍선, 연세대출판부, p. 45).

24 - 194 <표> 세브란스병원 진료통계 ( ) </표> 구분 년도 입원 (여 72) 일 평균 15일 655 외과 내과 316 산부인과 침대 40개 광 개인진료 진 료 왕 진 견 상 담 수 술 총환자 수입($) 수 병 6, , , ,218 3, (왕실 1,086 13, ) 618 1,568 한국인 ,000 외국인 1 한국인 14,679 6, 외국인 왕실 ,312 7 외국인 진료소 657 1,241 9, ,716 7, 한국인 병 원 ,791 외국인 진료소 위의 환자통계에서 보듯이 1906년경에는 외래진료환자 1만명, 입원환자 4백명 선을 넘어 서고 있다. 1908년 병원사업은 입원치료와 진료소치료, 의학교와 간호학교, 의학서 번역 등 14개 부문으로 시행되었다.79) 특히 광견병 치료를 위해 왁찐제조부를 설치했고,80) 안경제조 9, 남 6,578 여 2,037 유아 1,337 79) N.P. Report for 1909 p ) A.D. Clark, 앞의 책 p. 296.

25 소도 있었다. 비체계적 사업이 그 면모를 일신한 것이다. 1907년 8월 1일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군대해산이 있던 날 서소문과 남대문을 중심으로 시가전이 있었는데, 한국군은 2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 때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감부병원인 大韓病院을 거부하고 자진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기를 원하였는데, 서 울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의료진들이 모두 동원되어 적극 치료하였다.81) 1899년에 창설된 제중원의 학교는 1908년 6월 3일 개교 10년만에 제 1회 졸업생 7명을 배 출하였는데, 金熙榮 金弼淳 朴瑞陽.申昌熙.朱賢則.洪錫厚.洪鍾殷이 그들이었다.82) 졸업식은 서 울의 한 사건이었고, 한국 근대문명의 진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83) 이날 졸업식에 는 초대통감 伊藤博文이 졸업장을 수여했는데, 통감부는 정부면허증을 줌으로써 이들의 자 격을 공인하였다. 정교분리정책하에서 선교사들과 통감부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 여주는 이 사건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학사상 획기적인 날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통감부의 교육령 개정에 의해 제중원의학교는 사립세브란스의학교 로 개명하였으 며 1911에 가서야 처음으로 4개학년을 동시에 운영하는 체계를 갖추고 2회 졸업생 6명을 배 출하였다.84) 의학교과서는 에비슨 웰즈(J.H. Wells) 샤록스(A.W. Sharrocks) 등의 의료선교 와 한국인 번역조사들의 협력으로 편찬되었는데, 해부학 무기약학 무기화학 세균학 간호학 생리학 생약학 질병과 치료 피부질환 수술 등에 관한 책이 번역되었다.85) 이렇게 간행된 책 들은 비단 세브란스뿐만이 아니라 국내 각 병원의 의료조수 양성 교재로도 널리 사용됨으로 써 미국의학의 도입을 촉진시켰다.86) 의학교육과 함께 의학서의 번역은 미래의 한국인에 의 한 한국인 의료사업시대를 위한 장기적 사업이었다. 에비슨은 의료교육에서의 교파 연합을 주창하고 협동정신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 의 조직화와 연합화의 추세속에 1907년 9월, 한국의료선교사회 (The Korean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결성되었으며 1908년부터 세브란스의학교교육은 여러 교파에서 협력 하게 되었다. 영국성공회의 웨어(H.H Weir) 북감리회의 폴웰(E.D. Follwell) 남감리회의 리 드(W.T. Reid)의사들이 참가하였다. 한국 의료선교사회는 1910년 세브란스의학교를 한국 내 모든 개신교 단체의 연합의학교로 할 것을 결정 합의하였다.87) 에비슨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醫女가 간호원으로 있었는데 그는 이들을 기생 기녀로 여기고 해고하였다. 당시의 큰 난점은 여자가 남자환자를 간호할 수 없다는 관습이었다. 그 래서 에비슨은 선교사 부인들을 교육시키기도 했으며, 본국 선교부에 한국의 간호원 양성을 81) Mrs. J.W. Hodge, A Glimpse of the Wounded in the Severance Hospital ( The Korea Mission Field Aug., 1907) pp 및 연세대학교사 (1965) p ) 연세대학교사 (1965). 83) N.P. Report for 1909 p ) N.P. Report for 1912 p. 312, 연세대학교사 (연세대학교, 1965) 부록 졸업생통계표. 85) Severance Hospital)( Korea Review Feb., 1906) p. 65 및 Medical Books Needed and Medical Education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May, 1906) p ) 교과서 편찬사업에 도움을 준 미국의사위원회가 있었는데, 필라델피아의 H.A. Wilson, W.W. Keen, 뉴욕의 P. H. Loomis, 보스톤의 R.W. Lovett 등의 의사가 그 위원이었다(위의 책). 87) 각 교파연합의 실현은 1912년 다섯교파에서 7명의 의사가 파견되어 옴으로써 가능하였다. 1913년에 북장 남장 북감 남감 호주 및 캐나다장로교 등 6개 교파가 협력하면서 학교와 병원 이 보강되고 사립세브란스의학교의 발전이 가능케 되었다.

26 위해 두명의 간호원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필드(E.Field) 여의사와 쉴즈(E.L. Shields) 간호원이 내한하였으니, 한국 초창기 간호원제도 발전에 큰 기여를 남긴 인물이 바로 이 쉴즈양이다. 그녀는 1937년 은퇴할 때까지 이 분야에 헌신하였다. 1900년 쉴즈양의 병원소년반 운영이나 이듬해 필드양의 2명의 소녀교육이 있었으나, 정 식 간호원교육은 1903년 보구여관의 에드먼즈(M.J. Edmunds) 간호원이 세운 간호원양성학 교에서 시작되었다. 미북장로교 의료위원회는 1906년 북감리교 선교부와 공동으로 간호교육 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 일의 책임자로 쉴즈를 임명하였다. 이에 1906년 9월 쉴즈간호원에 의해 경성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내에 간호원학교(the School for Nurses)가 2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내외법과 조혼풍습, 그리 고 직업여성에 대한 멸시풍조로 지원자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88) 보구여관의 간호원양성학교와 상호 교환실습이나 연합강의를 하였다.89) 년까지 2년간 박사혜 학생이 간호교육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1907년에는 4명, 1908년에는 버피 (E.B. Burpee)양이 내한하였고 7명의 학생이 있었다. 교육 첫해의 지원자격은 글을 읽고 쓰 며 시계를 볼 줄 알면 되었는데, 기독교인으로서 복종심이 있고 교육규칙을 지키고 2개월 이상의 예비기간을 거친 자라야 했다. 정규과정은 6년이었으나, 3년간의 단축과정도 있었다. 1908년에 7명이 가관식 시험을 치렀고, 이 중 5명이 1908년 6월 12일 처음으로 간호원 모 자를 쓰고90) 수술실에서 일하였다. 드디어 1910년 6월 10일 첫 졸업생 김배세(Bessie Kim) 양이 배출되었는데, 그는 박에스더(김점동)의사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곧 병원의 간호과 부과장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한편 1908년 3월에 대한간호원졸업인협회 (The Graduate Nurse s Association of Korea) 가 조직되어 간호사업을 발전시키고 한국에서의 효율성 있는 최선의 간호방법을 연구하는 것91)을 목적으로 학술활동을 시작했다. 2. 각 선교부의 醫療事業 1904년에 채택된 북장로교의 의료정책은 이 시기 의료선교의 실태와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대략 아래와 같다 첫째, 의료사업의 일차적 목표는 복음전도여야 하며, 모든 사업은 사람들이 복음을 기쁘게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최상의 복음적인 결과는 최상의 의료사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시설을 잘 갖춘 병 원과 진료소만을 설립해서 의사가 평상시에 필요한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 교부의 정책이어야 한다. 셋째, 가능한 한 모든 병원과 진료소들이 자조하도록 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치료비를 지 불할 수 있는 환자라면 모두 돈을 받도록 하는 것이 선교부의 정책이어야 한다. 넷째, 조수는 필요한 경우 한국인 조수를 고용할 수 있는데, 기독교인에게 우선권을 준다. 88) 따라서 젊은 과부가 좋은 학생이 될 수 있었다(M.J. Edmunds, Training Native Nurses) The Korea Mission Field June, 1906, pp ). 89) E.L. Shields, Co-operation in Training Nurses ( The Korea Mission Field Jan., 1907) pp ) S.H. Jones, The Capping of the Nurses) (((The Korea Mission Field April, 1907, pp ). 이 보다 앞서 보구여관의 간호원양성학교가관식은 1907년 1월 3일에 있었다. 91) N.P. Report for 1909 p. 281.

27 또한 의학공부를 원하는 적절한 기독교인이 있고, 의사가 가르칠 시간이 나면, 교육할 수 있 다. 그들은 학생조수(student assistant) 라 한다. 다섯째, 외국인이나 한국인으로부터 받는 치료비 및 기부금은 연례보고서에 반드시 명기 한다.92) 1909년 현재 북장로교는 서울 부산 평양 선천 대구 등지에 6개의 병원을, 청주 강계 안동 등 3개처에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간호원이 임명된 곳은 세브란스병원과 평양의 래드 병원 선천병원 대구 동산병원 등이었다. (1) 부산 1901 년에 짓기 시작한 전킨기념병원(The Junkin Memorial Hospital)이 1904 년 9월에 완공 개원됨으로써, 부산은 한국에서 개원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가지게 되었 다. 메리콜린스화이팅진료소가 복음의 씨를 뿌리는 곳이었다면, 전킨병원은 그 열매를 거두 는 곳이 되었다. 그 결과 두 기관은 의료전도작업장 (Medical-evangelical workshop)93) 으로 부산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어빈(C.H. Irvin)의사를 도와 한국인 의사 유초시(Cho-ti You)와 조수 고명우 등이 근무하였다. 진료환자는 1907년부터 1만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편, 어빈의사는 인도 나병선교회의 도움으로94) 스미드(W.E. Smith)와 함께 1910년 나병 환자수용소를 설립하고 12명의 환자로 개원하였다. (2) 평양 평양의료선교도 1906년 10월 15일 캐롤라인 에이 래드병원(Caroline A. Ladd Hospital)이 개원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10여년간 악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한 웰 즈(J.H. Wells) 의사는 1904년 휴가시 오레곤 포틀랜드 제일교회의 래드부인(Mrs. Wm. S. Ladd)으로부터 병원기금을 약속받고 귀국하여 병원을 지었던 것이다. 병원은 한식과 서양식 의 장점을 조화시켰는데, 온돌방과 침대입원실이 공존하였다. 래드병원(평양제중병원)의 특징은 북감리교의 기홀병원과의 연합사업이다. 기훌병원의 폴 웰과 홀의사, 북장로교의 웰즈의사는 서로 협조체계를 이루고 래드병원을 연합기구(Union Institude)로 운영하였는데, 의학반 교육도 공동으로 진행하여 1905년의 경우 선교회 규칙을 따라 지원자 20명 중 6명을 선발하였다.95) 1908년부터 북감리회의 홀맨(S.B. Hallman, 許政) 양이 동역하였고, 마펫부인은 부녀자 진료를 계속했다. 웰즈의사를 도와 많은 활동을 해왔던 조익선의사는 1908년 건강악화로 진료과장직을 사임했다.96) 총진료환자수는 1908년의 경우 8,444명으로, 여기에 환자가족 2 3천명을 포함할 경우 한해에 1만 3천여명이 복음을 들었 고, 1910년의 경우 개종자가 300명 정도되었다.97) (3) 대구 필라델피아 제 2장로교회의 라이트(M.H. Wright)양이 희사한 자금으로 1904년 병원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1906년 재완공하였다. 이것이 메리라이트기념병원, 곧 대구 동산병원의 개원이었다. 의료진은 초대원장 존슨(W.O. Johnson)에 이어 눌(M.M. Null)이 년까지 임시 92) N.P. Minutes for 1904 pp ) N.P. Report for 1909 p ) Help for the Leper ( The Korea Mission Field Oct., 1907) p ) 1905년 북장로교 의료위원회는 각 병원의 의료조수 수를 6명으로 제한하는 규칙을 제정하였 다 ( N.P. Report for 1906, pp ). 96) N.P. Report for 1906 에 의하면 웰즈의사가 217건 수술, 조익선이 118건을 수술하고 있 다. 당시 그의 월급은 35이었다. 97) N.P. Report for 1911 p. 280.

28 로 근무했다. 존슨의사는 계속되는 건강악화로 1910년 플레처(A.G. Fletcher, 敝禽湫)에게 병 원을 인계하고 복음선교사로 전직하였으나, 결국 1913년 선교사직을 사임 귀국하였다. 간호 원은 카메론(C.H. Cameron)양이 년까지 근무했고, 이어 맥켄지(M. McKenzie)양 이 봉사했다. 환자진료는 1년에 2 3천명 정도였다. 전도사 서재명의 전도 활동이 두드러졌 는데, 그는 개종자의 주소록을 작성하여 순회진료시 활용케 하였다. (4) 선천 선천 미동병원(In His Name Hospital)은 샌프란시스코청년회(Young People s Societies)에서 보낸 기금으로 1905년 11월 개원하였는데, 이후 9개월간 8,541명을 치료하고 아편중독자 55명을 진료, 그 절반을 치료하였다. 이보다 앞서 러 일전쟁 때에는 다른 병원들 과 마찬가지로 군인들을 치료하였다. 1910년까지 의료진을 살펴보면, 1901년 이후 샤록스(A.M. Sharrocks)의사가 계속 책임을 맡았고, 1902년부터 로스부인(Mrs. C. Ross)이, 년까지 쉴즈(E.L. Shields)양이 간 호원으로 있었고, 1909년에는 헬스트롬(H. Helstrom)양이 간호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샤록 스의사는 1903년부터 의료조수를 육성하기 시작하여, 1910년 5명을 졸업시켰다.98) 샤록스는 병원 내에 대중목욕탕을 마련하고 2.5센트의 요금으로 일반에게 개방하였는데, 하루에 20 30명 정도가 이용하였다. (5) 재령 재령의 의료선교는 1906년 선교거점이 설치되면서 화이팅(H.C. Whiting, 黄浩 里)의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해 9월에 올린 화이팅의 첫 보고서를 보자. 현재 진료실로 사용되고 있는 한옥의 방 2개는 크기가 8 6피트이며, 천정은 낮고 바닥과 벽은 진흙이며, 초가지붕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난 한 해동안 5천명을 치료하였다.99) 1907년 뉴욕의 매디슨가 장로교회에서 보내준 건축헌금으로 1908년 1월 3일 재령병원을 개원하였다. 재령교회 지도자인 첫 의료조수 유몽택을 비롯한 몇 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의 료반이 상해 북장로교출판소에서 발간된 한문의학서로 화이팅의사의 지도를 받았으며,100) 부인권서 이성순씨가 봉사하였다. 화이팅은 선천, 조도 등 순회진료여행에도 힘썼다. (6) 청주 선교사들로부터 소외당했던 충청도 청주에서는 5년간의 전도활동 끝에 1907년 선교거점이 설치되었다. 대구에서 일하던 눌(M.M. Null) 의사 부부가 청주로 옮겨와서 1907 년 5월 건강악화로 귀국할 때까지 3개월간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였다. 후임으로 퍼비안스 (W.C. Purviance) 의사가 1908년 2월에 임명되었으나, 선천의 샤록스 의사가 안식년 휴가로 병원을 비우자 먼저 선천병원에 가서 일한 후 8월에 청주로 옮겨 왔다. 밀러(F.S. Miller) 목 사의 하인 집을 개조한 진료소에서 퍼비안스는 의료조수 2명과 함께 첫해에 2,300명을 치료 했다. 이때 뉴욕의 덩컨(Mrs. J.P. Duncan)이 $5천을 희사하여 1910년 4월에 초석을 놓고 공사를 시작, 1912년에 완공하였다. 98) 5명중 주씨는 화이팅의사와 함께 재령 병원에서 근무하였고, 2명은 선천병원에 남았으며, 2명 은 개인병원을 개업했는데, 그 중 1명인 정씨는 의주에서 개업하여 하루 60명을 치료할 정도 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의료조수들의 졸업 후 진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99) N.P. Report for ) H.C. Whiting, The Doctor s Point of View)( The Korea Mission Field Feb., 1907) pp 이때 의료조수의 자격은 ① 신실한 기독교인 ② 한문독해 가능자 ③ 재정능력 등이었다.

29 [그림제목] 북장로교 의료통계_(총진료수) ⑦ 강계 강계 선교거점이 1908년 설치되고 1909년 5월 2일 밀즈(R.G. Mills) 의사가 부 임하면서 강계의료선교의 문이 열렸다. 첫해 여름 300명을 치료했는데, 진료소는 나무 창고 를 개조한 것이었다. 1910년 뉴욕 케네디(J.S. Kennedy)부부의 헌금으로 동문 밖에 케네디 병원(桂禮知病院)이 완공되어 1911년 2월에 정식 개원하였다. ⑧ 안동 대구의 소텔(C.C. Sawtell) 목사와 흘레처 의사의 노력으로 개설된 안동선교거 점에서는 1909년 600명이 플레처의 진료를 받았다. 1910년 대구의 존슨이 사임하자 플래처 는 동산병원으로 옮겼고 새 의사가 올 때까지 안동진료소는 존슨이 임시로 맡아 3개월 반 동안 13,000명을 치료하였다. 이상의 북장로교 각 지방의 의료사업에서의 총진료환자 통계는 앞 표와 같다.

30 호남지방 선교를 맡아오던 남장로교의 의료사업은 러 일전쟁 때까지는 부진했으나 1904년 3명의 의사가 부임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포사이드(W. Forsythe, 保衛廉)는 전주에, 다니엘(T.H. Daniel)은 군산에, 놀런(J. Nolan)은 목포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러나 역 시 잦은 의료진 변동으로 군산을 제외하고는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1) 전주 포사이드의 내한으로 전주 야소교병원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료선교에 서 늘 문제가 된 것은 한 두명의 의사가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로와 질병으 로 인해 건강을 잃거나 사망함으로써 빈번하게 의료진이 변동된다는 것이다. 1904년에 파송 된 포사이드의사는 피습으로 인한 건강 약화로 귀국하였고,101) 군산에서 전주로 옮겨 온 전 킨(W.M. Junkin, 全衛廉)목사도 포사이드와 함께 고아원을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과로로 1906년 사망하였다. 포사이드의 휴가 기간에는 다시 잉골드(Mrs. Tate)의사가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진료활동 을 벌였다. 1906년에 귀국한 포사이드는 그해 6천여명을 치료하였다. 잉골드는 1908년 6월 의료사업에서 손을 뗄 때까지 진력하였으며, 목포의 버드맨(F.H. Birdman) 의사가 가을에 전주로 옮겨와서 그녀 대신 일하였다. 버드맨을 도와 코델(E. Cordell)양이 진료소를 맡았으 며, 한국인 조수와 전도인, 부인권서들이 활약하였다. 버드맨이 1909년 사임하자 포사이드가 다시 임명되었으나, 그는 목포로 옮겨갔고, 군산의 다니엘이 후임으로 왔으나 그 역시 몇 년 못가 건강을 헤쳐 1915년 로버트슨(M O. Robertson) 의사가 전주 병원을 맡게 되었다. (2) 군산 드루(A.D. Drew)의사의 귀국으로 1901년 가을 알렉산더(A.J. Alexander)가 임 명되어 왔으나 집안 문제로 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귀국시 오긍선과 함께 도미하였 고, 오긍선은 센추럴대학과 루이빌의대를 거쳐 1907년 3월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높은 관직과 보수를 조건으로 하는 통감부의 대한병원 근무요청을 거절하고 9월 군산야소교 병원에 부임해서,102) 이후 1910년 봄 광주야소교병원장으로 옮길 때까지 4년간 헌신하였다. 한편 알렉산더 후임으로 1904년에 파송된 다니엘부부는 드루 의사가 사용하던 방 2개를 진료소로 사용하다가 곧 영명학교의 작은 교실로 옮겼다. 1905년 남장로교 최초의 간호원인 케슬러(E. Kestler)양이 합류함으로써 활기를 띈 군산병원은 1906년 알택산더의 기부금으로 프랜시스브릿지즈앳킨슨기념병원(Francis Bridges Atkinson Memorial Hospital)이 세워짐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 병원은 미국 남장로교가 세운 첫 병원으로서, 진료소와 수술실 그리고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 2동 등을 갖춘 한식집이었다. 앳킨슨병원의 설립과 오긍선의사의 부임으로 1907년은 1906년에 비해 3배나 많은 8,006명의 환자를 치료 할 수 있었다. 1909년 다니엘이 수술차 도미한 뒤 다시 내한하여 전주로 옮겨가고, 대신 오긍선이 병원 장에 취임했다. 1910년 봄 오긍선의사가 광주로 전임해 가자 후임으로 패터슨(J.B. Patterson, 孫培焞) 의사가 임명되었다. 패터슨은 입원실을 온돌로 건축하여 환자의 회복율 을 높혔으며, 그의 명성으로 일본인 부자들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이 무렵 군산야소교병원은 한명의 의사가 운영하는 것으로는 한국 최대의 병원 103)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1907년에 101) 포사이드의사는 1905년 한 양반집에 치료차 있던 중 강도(의병?)를 만나 귀가 잘리는 등 상처를 입은 후 일시 귀국했고, 1911년에는 이질까지 겹쳐 1912년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102) 해관오긍선 pp 및 A Letter from Dr. Oh, Korea ( The Missionay, March, 1908) p 놀런의사가 $25( 50)를 제의했을 때 그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도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므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통감부는 그에게 정3품 관직과 150의 월급을 제시하였다. 103) G.T. Brown, Mission to Korea (Board of World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

31 설치된 의학반은 3명에서 이듬해 봄 11명으로 늘어나 있었다.104) (3) 목포 1904년 목포에 임명된 놀런 의사는 이전의 오웬 의사가 설립해 놓은 진료소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1905년 말부터 약 4년간 잦은 의료진의 변동으로 순회진료 중심으로 진 행되었다. 1907년 버드맨의 부임과 이듬해 전주 이전에 이어 1909년에 다시 포사이드가 임 명되었다. 그는 여러 명의 조수들을 훈련시켰고, 1910년에는 제주도 순회진료여행도 하였다. 한편 맥컬리부인(Mrs. McCallie)이 섬을 돌아다니면서 선박진료소를 운영한 것은 특기할 만 한 일이었다.105) ④ 광주 1904년 12월 오웬 의사는 벨목사와 함께 목포에서 광주로 옮기고, 순천 목포 광 주 등지의 순회진료를 벌였다. 오웬의 후임으로 온 놀런 의사도 1905년 가을 광주로 옮겨 왔으며, 1년 6개월간 재직하면서 광주진료소를 설립하고 많은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오 전에는 수술을 하고 오후에는 외래환자를 진료하였는데 남녀 조수의 도움을 받아 어린이와 부녀자를 먼저 치료한 뒤 남자환자를 받았다. 놀런에 의해 개원되었다가 그의 사임으로106) 잠시 중단된 광주야소교병원은 1907년 월슨 (R.M. Wilson, 禹 善) 의사가 원장으로 부임해 옴으로써 지속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09년에 새 진료소를 건립하였으나 새 병원이 필요한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렸다. 1910년 의 총진료환자수는 9,900명, 수술이 175건 행하여졌다. 오웬부인이 윌슨을 도왔다. 1899년 시병원 상동병원이 폐쇄된 이후 북감리교의 의료선교는 서울의 보구여관, 평양의 기홀병원 광헤여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09년경에 가서야 영변 해주 공주에 진료소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의료사업 없이도 전도활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재정난과 의사의 부족 등 으로 인해 선교정책상 의료선교에 큰 중점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07) 1902년 제정 됐던 정책이었던 대한선교사업의 한가지 고정 방침은 의료담당직원이 없이는 지방에 새 선 교거점을 개설할 수 없다 108)는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109) 그러므로 대부분의 의료시설은 작은 진료소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병원의 내적인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여의사 박에스더부인의 등장과 1903 년 에드먼즈(M.J. Edmunds)양에 의한 간호원양성학교의 설립, 그리고 한국인 통역관과 의 료조수들의 활동 등이 그것이다. 홀부인에게 박에스더가 있었다면, 폴웰에게는 김재손 (Chaison Kim)이 있었다. 그는 왕진이나 수술의 절반을 맡을 정도였으며 이와는 달리 해주 병원에서는 윤성열이 켄트(E.M. Kent) 의사를 도왔다. (1) 서울 서울에서는 부인진료소만 운영 하였다. 동대문진료소에 언즈버거 의사, 정동 보구여관에 커틀러 의사와 에드먼드 간호원 등이 임명되어 있었다. 에드먼드양은 한국 최초 의 간호원양성학교를 세우고 한국인 여성간호원을 양성했는데, 년에는 모리슨 1962) p ) W.B. Harrison, From Kunsan, Korea)( The Missionary June, 1908) p ) From April to June at Mokpo ( The Missionary Nov., 1910) p ) 놀런 의사는 의료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07년 평안도 광산 의사로 갔다. 107) M.E.C. Report for 1905 p 스크랜튼감리사는 지금부터 우리의 주된 사업은 이미 모은 교회를 교육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고 했고, 1909년 폴웰의사는 일반적 분위기가 의료 사업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108) M.E.C. Report for 1902 p ) 예를 들면 1905년 해주와 공주에 선교거점이 설치되지만 의료선교사가 파송된 것은 1908년 과 1909년이었다.

32 (A.I. Morrison)양이 책임을 맡았다. 동대문의 릴리안해리스병원은 1906년 언즈버거의 요청에 의해 이듬해 부지가 확정되고, 1908년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에 커틀러와 언즈버거 두 의사가 새 병원에서 연합하여 일하기로 하고 정동에는 진료소만 운영키로 계획하였다.110) 그러나 커틀 러의 휴가와 병원시설 미비로, 언즈버거는 1910년 진료소를 동대문 볼드원예배당으로 옮겼 고, 이듬해 1월에 귀국한 커틀러도 정동에 머물면서 모리슨이 떠난 간호원양성학교를 책임 졌다. 릴리안해리스병원은 1912년에 가서야 개원된다. 1907년의 통계를 보면, 보구여관이 2,194명, 동대문진료소가 7,974명을 치료하였다. (2) 평양 폴웰이 담당한 기홀병원과 홀부인, 박에스더부인, 홀맨(S.B. Hallman)양 등이 맡은 광혜여원은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특히 장로교 감리교의 연합운동 속에 기 홀병원의 폴웰과 평양제중원의 웰즈는 의료조수양성반을 1905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紀忽病院은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8시 오후 4시까지 문을 열었는데, 1910년 경우 337건의 왕진도 있었다. 왕진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이 왕진으로 인해 다른 선교사가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매우 가깝게 접촉해서 그들과 하나가 되는 특권을 의료선교사는 가질 수 있다.111) 약 3만명 인구의 평양에서 1년 평균 1만명 진료에 3천여 명을 전도하였다. 1909년 초까지 12년간 총진료수는 8만 5천명이었다. 廣惠女院은 홀부인(Mrs. R.S. Hall)과 박부인(Mrs. Esther Kim Pak)이 계속 맡았다. 1906년에는 박부인의 질병과 병원전소로 큰 시련을 겪었다. 1907년 홀맨양이 도착하여 의 료진이 보강되었으며, 박에스더 의사는 1910년 4월 13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909년 의 료통계는 진료 4,465명, 왕진 210명, 수입 $ 213이었다. (3) 공주 맥길(McGill) 의사는 1903년 남감리교로 이양된 원산을 떠나 공주에 임명되었 다. 그는 1년간 의료사업에 주력하면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난 1905년 이후 몇년간 의료사업은 중단되었고, 1908년 반버스커그(J.D. Van Buskurk, 潘福寄)의사의 부임 으로 재개되었다. 1909년 12월 20일 진료소가 개원되어112) 이듬해 5월 1일까지 2,315명을 치 료하였고, 전도인 부인권서 등의 전도로 3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4) 영변 관서지방에서는 드물게 감리교 선교거점이 1906년 영변에 설치되었다. 그해에 폴웰이 2회에 걸쳐 순회진료를 하였고, 1908년 노튼(A.A. Norton) 의사의 임명으로 정식의 료선교를 개시하였다. 노튼은 1908년 12월 1일 방 3개의 작은 초가집을 진료소로 사용하다 가 이듬해 9월 1일 새 진료소로 이전하였다. 그는 1910년 10월 첫주까지 영변진료소(제중원) 를 담당하다가 밀러(I.M. Miller)부부에게 인계하고, 해주진료소로 옮겼다. (5) 해주 1909년 선교거점이 설치된 해주의 의료선교는 그해 켄트(E.W. Kent)에 의해 11월 중순 진료소가 개설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이듬해 2월까지 999명을 진료하였다. 당 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다. 110) W.F.M.S. Report for 1909)) p ) M.E.C. Report for 1911 pp ) M.E.C. Report for 1911 pp 진료소는 대기실 8 8자, 조제실 8 12자, 수술실, 진찰실 등 방 4 개로 이루어졌다.

33 한국인 통역관(윤성열)을 통해 일하기 때문에 선교사는 전도할 기회나 시간이 없지만, 권서들과 부인권서들이 용감히 일하고 있다. 진료환자들의 개종비율은 높지 않지만, 입원환자 경우 적어도 90%가 개종한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충분한 기간동안 남아있기 때 문이다. 그래서 오래된 이교숭배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한 후에 퇴원한다.113) 처음부터 전도사업에 중점을 두고 활동한 남감리교는 교육과 의료 선교사업을 점진적으로 성장시켰다. 송도 남성병원과 원산 구세병원 그리고 춘천진료소가 그들의 의료선교현장이었 다. (1) 원산 1901년 시작된 원산진료소는 1903년부터 로스(J.B. Ross, 羅約耳) 의사 단독으 로 운영되었다. 1907년에는 선교부 근처와 10리쯤 떨어진 마을에 진료소를 각각 설치하여 마을진료소는 일반진료를 하고 원산 구세병원에서는 중환자, 외국인 및 세관업무를 담당하 였다. 1908년부터 메이어즈(W.C. Mayes) 의사가 일했고, 의료조수 최숭현(Syung-hyun, Choi)이 봉사했다. 1910년에는 새 병원건물이 완공단계에 있었는데, 월의 통계 를 보면 총진료 6,579명, 중 일인환자치료 229명, 왕진 229명, 수술 477명, 총 수입 $1,034.27, 총지출 $1, 등이었다. (2) 송도 리드(C.F. Reid, 李德) 의사의 병원기금모금에 린치버그감리교회 아이비(W.C. Ivey)부부가 $5천을 희사함으로써, 1908년 9월에 파송받은 그의 아들 리드(W.T. Reid, 李慰 萬) 의사는 이듬해 아이비병원(The Ivey Memorial Hospital)의 본관을 완공하였다. 이 무렵 리드는 배선명 조수의 도움과 1908년 4월에 건물감독차 내한한 리드(J.W. Reed)114) 의사의 도움을 받아 월 수 금요일 오후에만 진료하고 나머지 시간은 언어공부에 진력하였다. 송도(개성)는 남감리교 선교의 중심지로서, 만월동에 아이비기념병원, 곧 南星病院이 세워 짐으로써 의료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특히 아편중독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줌으로써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반아편연맹(Anti-Opium League)까지 조직되었다.115) 서울에서도 아편환자가 찾아왔는데, 평균 25명이 입원해 있었다. 지난해(1910) 162명의 아편환자가 치료를 받았는데, 반 이상이 완치되었다. 이중 10명이 신실한 신자가 되었고, 4명이 세례를 받았다.116) 월의 의료통계는 총진료 3,290명, 입원 262명, 왕진 312명, 대수술 32건, 수 입 $122.42, 지출 $2, 였다. (3) 춘천 1908년 선교거점이 된 춘천에는 1909년 리드(J.W. Reed)의 감독하에 10 12명 을 수용할 수 있는 진료소가 설치되고, 이듬해 원산의 메이어즈 의사가 춘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을에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함으로써, 1911년 바우맨(N.H. Bowman) 의사가 올 때까지 진료소는 운영되지 못했다. 113) M.E.C. Report for 1911 p ) J.W. Reed는 선교부 건축가(mission architect)로 내한하여 1909년 상반기까지 거주지 9동, 아이비병원 춘천진료소 등의 건축감독을 맡았는데, 의사 신분이 드러나자 환자들이 몰려들 어, 1주일에 몇 번씩 정기진료를 하였다. 115) 반아편연맹은 규칙과 부칙을 정하고 45명의 회원으로 출발하여 145명의 등록회원을 갖게 되었다. 116) M.E.C. Report for 1911 pp

34 안식교 선교와 함께 1908년 러셀(R. Russell, 魯雪) 의사에 의해 순안진료소가 개설되었다. 1909년에 샤펜버그(M. Scharffenberg)양이 살던 집을 $20에 매입하여 진료소를 옮겼는데, 이것이 순안병원의 시작이었다. 러셀은 이곳에서 이후 4년간 2만명을 치료하였는데, 이 사실 에 대해 워성턴포스트 지는 20불짜리 집에서 2만명의 환자를 이라는 기사와 사진을 게 재하기도 했다. 월 평균 5백명 진료와 지방순회진료는 조수 이석관과 김창세의 도움이 없었 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117) 3. 醫療事業의 특징 전 시기에 걸쳐 이룩된 진료소의 복음전도 기관화, 재정의 자립 경향, 한국인 의료진의 양 성, 진료소의 전국 확산 등이 이 시기에 와서는 더욱 진전되었으며, 그 발전적 현상으로 나 타난 것이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한 현대적인 종합병원의 설립과 체계적인 의학교육과 전도활 동, 그리고 각 교파간의 연합화 등이었다. 그러나 선교사업 전체에서 의료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되었다.118) 이 시기에 북장로교의 경우 전킨기념병원(1904, 부산) 세브란스기념병원(1904) 래드기념병 원(1906, 평양) 메리라이트기념병원(1906, 대구) 미동병원(1905, 선천) 덩컨병원(1910, 청주) 재령병원(1908) 케네디병원(1910, 강계) 등 8개의 현대적 병원이 완공되었고, 남장로교의 앳 킨슨기념병원(1906, 군산) 북감리교의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1909, 서울) 남감리교의 아이비 기념병원(1908, 송도) 등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이들 병원의 건립은 모두 미국교회의 헌금과 희사로 가능했다. 미국의 부가 한국 의료선 교를 가능케 하는 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세브란스의학교를 중심으로 의학교과서가 편찬되고, 소수의 학생들이 교과과정에 따라 현 대미국의학을 임상실습과 겸하여 배워나갔다. 1907년의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식에 이 어 간호원양성학교도 1910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한국인 의사와 간호원은 통감부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료현장에서의 활동이 뛰어나 병원선교와 한 국의료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유학생출신 의사도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김점동)부인 과 뒷날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된 오긍선이 그 효시였다. 이후 선교사의 배려 117)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 (시조사, 1965) p ) 참고로 북장로교의 의사 목사의 수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閔庚培, 대한예수교장로회백 년사 (1984) p. 75. 년도 구분 목사(여자제외) 의사(여자포함) <표></표>

35 로 많은 유학생들이 그 뒤를 이음으로써 장차 한국 의료계를 한국인의 손에 맡긴다는 미래 지향적 의료정책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자립과 아울러 의료사업의 자립을 위한 발판이었다고 하겠다. 확고한 전도기관으로 성장한 병원들은 보다 체계적인 전도사업을 벌였다. 매일 열리는 예 배와 기도회가 전도의 방편이 되었음은 물론이요, 대개의 경우 병원마다 전도인과 부인권서 (Bible Woman)들이 있어서, 이들이 대기실과 입원실, 그리고 가정을 방문하면서 전도하였 다. 교회의 병원전도 봉사도 정기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고, 개종한 환자의 주소록이 작성되 어 사후관리에 활용되었다. 그 결과 해주병원의 경우에는 입원환자의 90% 정도가 개종하였는데, 입원환자들은 오랫 동안 전도인이나 의사와 함께 있으면서 충분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을 수 있었다.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뿌려진 전도의 씨가 지역교회의 조직으로 열매를 맺어 나갔던 것이다.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에비슨의 기본정신의 하나가 연합정신이었다. 세브란스의학교의 연 합교육이나 병원의 연합사업은 그것의 당연한 결과였다. 부족한 의사와 그들의 노력의 분산 으로 인한 손실을 연합병원과 연합의학교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교회 각 교파 간의 연합을 위한 한 터전으로서, 학교사업과 함께 착실히 진행되었다. 1906년 평양에서의 래드병원과 기홀병원의 연합은 연합사업의 첫 기념비가 되었고, 1907 년에 결성된 한국의료선교사회와 1908년에 조직된 한국간호원졸업인협회도 교회 연합운동에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하였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인의 종교심과 윤리의식을 고양시켰다면, 과학적인 서구 현대의술은 민중들의 서양문화와 서양인에 대한 적대감이나 편견을 불식하고 미신을 타파해 나갔다. 여기에는 의료선교사들이 왕진이나 입원치료를 통해서 민중들의 생생한 삶을 접함으로써 상호이해의 폭을 좁힐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여의사와 여자간호원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을 것인데, 이로 인해 여성의 지위와 의식이 향상되었고, 직업관에 새로운 변화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과부를 비롯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가능케 된 것과 어린이들에 대한 의학적 인격적 관심제고도 의료선교 의 한 결과라 하겠다. 이렇게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개화에 미친 여러 가지 영향 가운데는 의료선교의 역할이 지대하였던 것이다.

나하나로 5호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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