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 5 18 혁명 펴낸일 2015년 3월 30일지은이 김진경해설 정호기펴낸이 박상증펴낸곳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주소 ( ) 서울시종로구율곡로 6 트윈트리빌딩 A동 6~7층전화 (02) 팩스 (02)
|
|
- 지인 금
- 6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2 [ 개정판 ] 5 18 혁명 펴낸일 2015년 3월 30일지은이 김진경해설 정호기펴낸이 박상증펴낸곳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주소 ( ) 서울시종로구율곡로 6 트윈트리빌딩 A동 6~7층전화 (02) 팩스 (02) 제작 유통 오름 ( 사진자료제공 ( 재 )5 18기념재단 이전자책은대한민국저작권법의보호를받는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서면에의한허락없이이책의일부나전체를어떠한형태로도가공할수없습니다. 본전자책은콘텐츠생산자인해당출판사가 2 차저작권을소유하고편집방침과검수를통해최상의품질로제작하여한국출판 콘텐츠 ( 가공급하는양질의전자책입니다.( 본컨텐츠는문화체육관광부와한국출판회의의 KoPub 서체를 사용하고있습니다.)
3
4 개정판을내면서 우리청소년들에게한국민주화운동의역사를바로알리기위해쓰고찍어나누어왔던 역 사다시읽기 를군데군데깁고새로운내용을추가하여다시내게되었습니다. 1. 청소년들이보다쉽게이해할수있도록관련사진과설명글을추가하고편집을컬러로바꾸었습니다. 2. 본문의내용을더깊이있게이해할수있도록주요개념과사건, 인물을새롭게써서보태고상자글로처리하여본문의이해도를높였습니다. 3. 내용의흐름을살리면서도소주제별로읽힐수있도록소제목을새로달았습니다. 4. 기존판형 ( 신국판 mm) 을좀더넓고시원한판형 ( mm) 으로바꾸어보다편하게읽을수있게했습니다. 5. 과거의기억이현재와맞닿도록관련현장에조성된기념물형상을해당지면에수록했습니다. 개정판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오랜기간축적한다양한자료들이활용되었고, 정호기? 이종률? 양금식등이참여했습니다. 아무쪼록이개정판이널리읽혀서청소년들이우리나라의 역사에자긍심을갖는데기여할수있기를희망합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 발간사 역사는과거를빌미로현재와미래의변화를가로막고시간을거꾸로돌려놓는퇴행의발목잡기가아닙니다. 역사는단순히옛날이야기만도아닙니다. 역사는바로오늘현재우리앞에놓여있는과제가무엇이며나아갈방향은어디인지를가늠하는생생한현실인식입니다. 오늘의삶과사회를직시하고내일의변화와대안을찾기위한항해의나침반이자지도입니다. 역사는기억을뛰어넘는성찰이며, 지난날을오늘의눈으로다시보는동시에오늘을재인식하는진리탐구의망원경입니다. 일제시대에우리민족의과제가일본제국주의의식민지지배로부터독립을쟁취하는것이었다면, 해방후우리사회의과제는민주주의의확립과민족통일이었습니다. 그리고이과제는여전히오늘의과제이기도합니다. 우리들이민주화운동역사를지금이곳에불러들이는이유는이같은과정이우리모두의숙제를풀어나가는데반드시필요한일이기때문입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이 역사다시읽기 기획을통해우리사회를짊어지고나갈푸릇푸릇한젊은이들이우리의현실을있는그대로재인식하고새로운미래를열기위한주춧돌을놓는데나름의도움을주고자합니다.
6
7 1 사람은무엇으로사나 솔아, 흔히어른들은자기가겪은역사적사건에대해서너희들이당연히잘알아야하고, 그뜻을무조건깊이새겨야하는것처럼이야기하곤한다. 그래서때로는마음으로잘납득이되지않는데도너희들은기념행사장에동원되어서있기도했을게다. 잘될지는모르겠지만나는정말그런식으로이야기하고싶지가않구나. 그런식으로이야기할거라면아예이야기를하지않는게좋겠다는생각까지한다. 내가그렇게까지생각하는이유중의하나는우리도너희들과같은경험을많이가지고있기때문이다. 우리가고등학교 1학년때였으니까 1968년이었다. 어느날학생회를맡은선배들이운동장으로모이라고해서나갔더니 4 19혁명기념식을하더구나. 연단에올라오는사람마다 4 19가마치어제일어난일처럼이야기하는데우리에게는 3 1운동이나좀과장하자면조선조말기의갑신정변만큼이나까마득하게먼사건이어서전혀실감이나지않았다. 그러니장황하게이야기하는 4 19의의미가가슴에와닿을수없었지. *4 19혁명이승만정부와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의선거운동과정에서국민의낮은지지를인지하고, 다양한부정적인수단과방법을계획했다. 자유당은 1959년 11월경부터내무부장관의기획과지원을받으면서치밀하게선거를준비했다. 이들은선거막바지에이르러서는이승만과이기붕을대적할야당후보가없음을알았지만, 영구집권의기반을구축하고자갖가지부정선거를자행했다. 그리하여 2월 28일대구에서, 3월 8일대전에서고등학생의저항을불러일으켰다. 3월 15일선거당일에는전국의여러지역들에서부정선거규탄과선거무효등을주장하는시위가발생했는데, 특히마산에서격렬했다. 경찰은시위를진압하면서발포하여많은사상자가발생했다. 이는보다악화된상황을만들었고, 전국으로확산시키는요인으로작용했다. 이승만정부와자유당은학생과시민의진정어린목소리는귓등으로흘리고, 공산당의배후조종과선전 등과같이근거가없는담화를발표하여항거를잠재우려했다. 4월 18일고려대학교학생들이도심시위를벌이자, 자유당은폭력배를동원해짓밟았다. 이사건은서울지역대학생들의도심시위를자극했고, 중 고등학생을비롯해시민이대거동참하게했다. 경찰은국회의사당일대를점거한시위대가경무대로향하자또다시발포했다. 이런양상은지방도시들에서도유사하게나타났고, 많은사상자가발생했다. 미국은상황이악화되자 4월 19일이승만을압박했고, 4월 21일과 23일에걸쳐정부와자유당은유화책을발표했다. 4월 25일서울지역대학교수들의시위는오랫동안진행된일련의과정에종지부를찍게하는계기가되었다. 다음날이승만의대통령직사임과더불어자유당정권은해체되었다. 하지만 4 19혁명의의의를계승할새로운정치 사회체제가형성되기까지는많은시간이필요했고, 그사이에 5 16군사정변이발생했다.
8 불과 8년전의 4 19가그렇게느껴졌는데 20여년전의 5 18민중항쟁이너희들에게어떻게느껴질지는물을필요도없지. 그까마득하게느껴지는시간적거리감을넘어 5 18이너희들의지금삶에무엇일수있는가를가슴에와닿게이야기할수없다면장황한이야기들이무슨소용이있겠니. 솔아, 요즈음은 TV에서종종모모한정치인이나유명인사들이 5 18묘역에참배하는모습을비춰주곤한다. 그런장면이나오면나는가끔 TV를꺼버리곤한다. 묘하게모독당하는듯한느낌이들기때문이지. 적어도그시대를살았던많은사람들에게 5 18은역사적사건이전에자기삶에대한근본적물음이었고, 자기의전존재를뒤흔드는지진같은것이었다. 그러니정치적계산이깔린형식적말과행사를보며모독당하는기분이드는것도무리는아니다. 아마도 5 18의이와같은느낌에딱들어맞는시가한용운의 님의침묵 이아닐까싶다. 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은나의운명의지침을돌려놓고뒷걸음쳐서사라졌습니다. 그렇다. 5 18은역사적사건이전에한사람한사람에게던져진삶에대한질문이었고그사람의존재를뒤흔들어운명의지침을바꾸어놓은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같은것이었다. 그러니, 그삶에던져진물음이어떤것인지그물음이한사람한사람의존재를어떻게흔들고간건지를너희들의가슴에닿게이야기할수없다면장황한사건의나열이무슨소용이있겠니. 솔아, 이제너도본격적으로대학입시에시달릴학년이되었겠구나. 아침부터밤늦게까지보충, 자율학습, 학원에시달리겠지. 우리가중 고등학교를다닐때로부터 30여년이흘렀는데하나도변함없이획일적인입시경쟁에시달려야하는현실이참으로안타깝기만할뿐이다. 이제까마득한옛날얘기다만고등학교다닐적에밤늦게돌아오면서스스로에게이런질문을한적이있었다. 사람의삶중에무엇을이루기위한수단으로희생되어도좋은몇년이란게도대체있을수있는것인가? 획일적인대학입시를위해죽어지내야만하는몇년은도대체무엇이란말인가? 어쩌면일상의삶속에서늘다가오는이러한질문속에거창하게이야기되곤하는인간의본질이니민주니역사니하는것들이무엇인가하는답이들어있는지도모르겠다.
9 1980 년 5 월 16 일전남도청앞의횃불대행진 군사독재로얼룩진 19 년간의암흑을민주주의의횃불로밝히겠다는의지가담긴평화적인시위였다. 어떤철학자는자신의죽음을자각하는존재라는점이동물과구분되는사람의본질이라고했다. 꽤그럴듯한말이지. 사람은자신의죽음을자각하기때문에, 다시말해서자기의삶이일회적이고유한하다는것을알기때문에자신의삶을귀중한것으로인식하고충만하게채워가려한다. 그리고상상을통해다른사람도자기와같다는걸인식함으로써다른사람의삶을존중하게된다. 솔아, 사람의사람다움이란과연무엇일까? 그것은자신의죽음을자각함으로써자신의삶의귀중함을깨닫고자기의지대로자기삶을충만하게채워가려는데있지않을까. 그것은자기삶을그것자체가목적인것으로인식하고자기삶이무엇을위한수단으로전락하는것을허용하지않으려는데있지않을까. 민주화란과연무엇일까? 인간을수단시하는사고나관행, 제도를혁파하여인간을목적자체로서존중하는사회를만들어나가는것이아닐까. 역사란무엇일까? 인간을수단시하는족쇄들을하나씩해체하면서인간을목적으로서존중하는사회를향해걸어가는우리들의궤적이아닐까. 솔아, 우리는지금도여전히이런저런모독감에시달리며살고있다. 내가한인간으로서목적자체로존중되는것이아니라하나의수단으로취급되고있다는느낌을많이받는다. 이것은우리사회에서인간의본질이아직충분히실현되고있지못하다는것이고, 민주화가아직충분히성숙하지못했다는것을뜻하고, 5 18이라는거대한사건을포함하는우리의역사적궤적이아직끝나지않았다는것을의미하는것이다. 솔아, 나는결코너에게까마득하게지나간사건이나그시시콜콜한사건의전개과정을전달하고자하는것이아니다. 나는그것이우리의삶에던진질문에대해서, 지금우리의삶에대해서이야기하고싶은것이다. 그렇기때문에이이야기는일방적인것이아니라너와나의대화이다. 우리들의대화를통해사람이어떻게사람으로설수있는것인지, 사람은무엇으로사는것인지답을구해보고싶은것이다. 나는어떤거창한철학이든, 어떤거창한역사적사건이
10 든결국엔이질문과답으로귀착될수밖에없다고생각한다.
11
12 년서울의봄, 그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 솔아, 혹시전태일에대한이야기를들어보았는지모르겠다. 전태일은초등학교도제대로 못나온청계천피복공장의노동자였다. 1970년대초전태일은피복공장이늘어서있는청계천의길거리에서근로기준법을준수하라고외치며온몸에불을질러분신자살하였다. 이작은불꽃은 1970년대한국사회를밝히는등불이되었다. 전태일은왜근로기준법을준수하라는당연한주장을분신자살이라는극단적인방법을통해서이야기할수밖에없었을까? 1961년 5 16군사쿠데타로집권한박정희정권은경제발전을지상목표로노동자와농민을철저히희생시키는정책을펼쳤다. 농산물가격을값싸게묶어놓았기때문에빚더미에올라앉은농민들은고향을등지고도시로도시로향할수밖에없었다. 그들은도시로와서노동자가되었는데하루 12시간, 14시간노동에입에풀칠하기도어려운임금을받았고인간으로서의존엄은생각할수도없는기계취급을당하였다. * 근로기준법근로기준법은근로조건의최저기준을정하여노동관계일반에적용하는노동보호법이다. 1953년 5월 10일법률제286호로공포되었던근로기준법은 1953년 1월 27일제정된노동조합법, 1월 30일제정된노동쟁의법과더불어노동관련 3대법률로분류된다. 한국전쟁이진행중임에도불구하고, 이러한법률들을제정해야했을정도로노동자의처우와삶은열악한상태였으며, 제도적장치가미비했다. 근로기준법이제정되었으나, 현실에서는노동자를통제하는데활용되거나유명무실했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분신으로항거하며 근로기준법을지켜라 라고외친것은이와같이열악한노동환경과노동자의삶그리고거짓을일삼는노동관계기관의행위를세상에호소하기위함이었다. *5 16군사쿠데타(5 16 군사정변 ) 4 19혁명의여파가계속되던 1960년 5월 16일새벽박정희소장을중심으로한 3,600여명의군인들이서울을무력으로장악했다. 군사정변의주축은박정희, 그와개인적친분이있던장성들, 박정희가경비사관학교중대장시절생도였던육군사관학교제5기생, 그리고육군사관학교제8기생이었다. 군사정변으로윤보선대통령은연금상태에놓였고, 장면총리는피신했다. 이들은의장에장도영, 부의장에박정희를선임한 군사혁명위원회 를설치하여 3권을장악하고, 전국에비상계엄령을선포했다. 그리고 반공, 미국과의유대, 민정이양 등을담은 6개항의 혁명공약 을발표했으며, 포고제1호 ( 집회금지, 보도관제 ), 제2호 ( 금융동결, 물가동결 ), 제3호 ( 공항 항만봉쇄 ), 제4호 ( 장면정권인수, 각급의회해산, 정치활동금지 ) 를발표했다.
13 반군은사건이발생한지 24시간이경과했음에도불구하고군부전반의지지를획득하지못했다. 그린미미국대사와매그루더유엔군사령관은합헌정부 ( 장면내각 ) 를지지한다고공동성명을발표했다. 하지만 5월 18일육군사관학교생도들이군사정변을지지하는시가행진을벌이고, 군부전반에서지지를표명하는등분위기가전환되면서미국도불개입으로입장을선회했다. 장면총리는 5월 18일중앙청에나타나국무회의를개최하고내각총사퇴성명을발표했다. 군부는국정을비롯해정치 사회 언론 학원등전반에걸쳐통제를강화했다. 특히 5월 27일까지보도사전검열제실시, 남북교류운동을추진하던세력을포함하여 3,000여명의이른바혁신계와야당인사구속은중요한사건이었다. 5월 19일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로확대 개편되었고, 지령제92호를내려 민족일보 를폐간했다. 이어서 5월 22일정당 사회단체와노동조합해산을포고했으며, 5월 23일에는언론정화를포고하여정기간행물 1,200여종을폐간하는등언론을장악했다. 학원분야에서는 6월 1일문교부가학원정화 5개준수사항을발표했는데, 대학생교복착용과중고생삭발령등을포함했다. 법률로보면, 6월 6일에국가재건최고회의가입법 사법 행정 3권을장악한다는내용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을공포한것과 7월 4일 반공법 을공포한것이대표적인사례이다. * 혁명공약 1. 반공을국시 ( 國是 ) 의제일의로삼고지금까지형식적이고구호에만그친반공태세를재정비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준수하고국제협약을충실히이행할것이며미국을위시한자유우방과의유대를더욱공고히한다. 3. 이나라사회의모든부패와구악을일소하고퇴폐한국민도의와민족정기를다시바로잡기위하여청신한기풍을진작한다. 4. 절망과기아선상에서허덕이는민생고를시급히해결하고국가자주경제재건에총력을경주한다. 5. 민족의숙원인국토통일을위하여공산주의와대결할수있는실력배양에전력을집중한다. 6. ( 군인 ) 이상과같은우리의과업이성취되면참신하고도양심적인정치인들에게언제든지정권을이양하고우리들본연의업무에복귀할준비를갖춘다.( 민간 ) 이와같은우리의과업을조속히성취하고새로운민주공화국의굳건한토대를이룩하기위하여우리는몸과마음을바쳐최선의노력을경주한다. 박정희군사독재체제란이렇게국민의대다수를기계와같은도구로삼아소수기업가와관료들만배불리는체제였다. 그리고이같은체제에대한불만은아무리억눌러도투표를통해서든, 지식인의입을통해서든, 집단적운동을통해서든터져나오기마련이었다. 박정희정권은이를막기위해헌법에보장되어있는국민의참정권, 표현과집회결사의자유, 신체의자유, 노동기본권등국민의기본적권리들을원천적으로봉쇄하였다. 이렇듯유명정치인과지식인의입에까지재갈이물려지고모두가침묵하는상황에서한어린노동자가자기주장을사회적으로표현할수있는길이란있을수가없었다. 우리도한인간이고국민이다, 기계의부품처럼도구취급을받으며살수만은없다, 우리도한인간으로서자기삶을자기의지대로충만하게살권리가있다, 그최소한의권리를보장하라. 이인간다운삶에대한주장을사회적으로펼칠수있는유일한방법은역설이외에는없었다. 자기가가득채우고싶어하는삶과생명을불살라버림으로써인간적삶과생명의존엄을주장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14 전태일오직한가닥타는가슴속목마름의기억이네이름을남몰래쓴다 민주주의여만세! 전태일의분신이있은이후로도박정희정권의독재는나날이강화되어갔다. 국민의정치적참여와의사표현을원천적으로봉쇄하는유신헌법, 긴급조치등이그것이었다. 대학구내에는학생숫자와맞먹을정도의사복형사와전투경찰이상주하였고, 대여섯명이모여점심을먹으려고해도집회시위법위반이라고으름장을놓으며흩어놓는웃지못할풍경이벌어지는지경에이르렀다. 그러나사람으로서자기삶을자기의지대로충만하게하고자하는욕구는어떤억압으로도누를수있는것이아니다. 그욕구는때로전태일의불꽃처럼표면으로솟아오르기도하면서사람들의가슴에서가슴으로요원의불길처럼번져가고있었다. * 유신헌법 1972년 10월 17일박정희대통령은긴급국무회의를소집하고, 전국에비상계엄령을선포했으며, 4개비상조치를포함한 대통령특별선언 을육성으로방송했다. 특별선언의내용은 1 국회해산, 정당과정치활동중지, 현행헌법의일부조항의효력을일부정지, 2 일부효력이정지된헌법조항의기능을비상국무회의가수행, 비상국무회의의기능은현행헌법의국무회의가수행, 3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까지조국의평화통일을지향하는헌법개정안을공고하며이날로부터 1개월이내에국민투표를붙여확정, 4 헌법개정안이확정되면개정헌법절차에따라늦어도 1972년말이전에헌법질서를정상화한다는것이었다. 정부는유신의당위성을설명하는지도계몽반을편성하여캠페인등을벌이면서헌법개정에열을올렸고, 11월 21일실시된국민투표에서 91.9% 투표율에 91.5% 찬성률이라는놀라운결과를얻었다. 유신헌법에따라 12월 15일 2,359명의대의원이선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 가구성되었다. 이기구는 12월 23일대의원투표를통해박정희를대통령으로선출했고, 12월 27일제8대취임식이열렸다. 유신헌법은대통령에게모든권력을집중시켰고, 영구집권이가능하도록했다. 박정희는 한국적민주주의의토착화 라는명분을내걸고 10월유신을단행했지만, 이는자유민주주의기본원칙들을부정하고민주주의를역행시킨것으로평가된다.
15 * 긴급조치 1972년 12월유신체제가출범한뒤약반년동안은정국이안정된것처럼보였다. 유신체제에반대하는집회와시위가발생하지않았던것이다. 침묵의정세는 1973년 8월김대중납치사건이공론화되면서반전되기시작했다. 학생들은 9월부터반유신시위에들어갔다. 신민당은반유신세력들을규합하여개헌청원 1백만인서명운동을벌였다. 12월 19일박대통령은서명중지담화를발표하여이를규제하려했지만, 오히려개헌운동은전국으로확산되었다. 박대통령은유신헌법제53조에근거하여 1974년 1월 8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제2호를선포하여개헌운동을탄압하면서긴급조치시대를개막했다. 그리고 4월 3일에는제4호를선포하여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을조작하여단죄했다. 다음해 4월 7일에는긴급조치제7호를선포하여고려대학생집회와시위를진압했다. 긴급조치의절정은그해 5월 13일선포되어박정희정권이몰락할때까지맹위를떨쳤던제9호였다. 이는정부에대한비판과항거를일절금지시켰다. 세간의유행어였던 전국민의죄수화 는제9호위반자가급증한것에대한풍자였다. 그리하여사회적으로반공안보분위기가고조되었으나, 학생시위와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문인등의반유신운동은계속되었다. * 대통령긴급조치제9호전문 1 다음각호의행위를금한다. 가. 유언비어를날조, 유포하거나사실을왜곡하여전파하는행위나. 집회, 시위또는신문, 방송, 통신등공중전파수단이나문서, 도서, 음반등표현물에의하여대한민국을부정, 반대, 왜곡또는비방하거나그개정또는폐지를주장, 청원, 선동또는선전하는행위다. 학교당국의지도, 감독하에행하는수업, 연구또는학교장의사전허가를받았거나기타의례적비정치적활동을제외한학생의집회, 시위또는정치관여행위라. 이조치를공연히비방하는행위 2 제1에위반한내용을방송, 보도기타의방법으로공연히전파하거나, 그내용의표현물을제작, 배포, 판매, 소지또는전시하는행위를금한다. 3 재산을도피시킬목적으로대한민국또는대한민국국민의재산을국외에이동하거나국내에반입될재산을국외에은닉또는처분하는행위를금한다. 4 관계서류의허위기재기타부정한방법으로해외이주의허가를받거나국외에도피하는행위를금한다. 5 주무부장관은이조치위반자, 범행당시의그소속학교, 단체나사업체또는대표자나장에대하여다음각호의명령이나조치를할수있다. 가. 대표자나장에대한, 소속임직원, 교직원또는학생의해임이나제적의명령나. 대표자나장, 소속임직원, 교직원이나학생의해임또는제적의조치다. 방송, 보도, 제작, 판매또는배포의금지조치라. 휴업 휴교 정간 폐간 해산또는폐쇄의조치마. 승인 등록 인가 허가또는면허취소조치 6 국회의원이국회에서직무상행한발언은이조치에저촉되더라도처벌하지아니한다. 다만그발언을방송 보도 기타의방법으로공연히전파한자는그러지아니한다. 7 이조치또는이에의한주무부장관의조치에위반한자는 1년이상의유기징역에처한다. 이경우에는 10년이하의자격정지를병과한다. 미수에그치거나예비또는음모한자도또한같다. 8 이조치또는이에의한주무부장관의조치에위반한자는법관의영장없이체포 구금 압수또는수색할수있다. 9 이조치시행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제2조뇌물죄의가중처벌의죄를범한공무원이나정부관리기업체의간부직원또는동법제5조국고손실의죄를범한회계관계직원등에대하여는동법각조에정한형에, 수뢰액또는국고손실액의 10배에해당하는벌금을병과한다. 10 이조치위반의죄는일반법원에서심판한다. 11 이조치의시행을위하여필요한사항은주무부장관이정한다. 12 국방부장관은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또는도지사로부터치안질서유지를위한병력출동의요청을받은때에는이에응하여지원
16 할수있다. 13 이조치에의한주무부장관의명령이나조치는사법적심사의대상이되지아니한다. 14 이조치는 1975 년 5 월 13 일부터시행한다. 내머리는너를잊은지오래내발길도너를잊은지너무도오래오직한가닥타는가슴속목마름의기억이네이름을남몰래쓴다타는목마름으로타는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만세! 살아오는저푸르른자유의추억되살아나는끌려가던벗들의피묻은얼굴떨리는손떨리는가슴치떨리는노여움이네이름을남몰래쓴다타는목마름으로타는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만세! * 김지하 타는목마름으로 유인물로몰래몰래전해지는위와같은시들을골방에숨어읽으며사람들은그것이던지는인간다운삶이란무엇인가하는물음에전율하곤했다. 그리고가슴에서가슴으로번져가던이불길은 1979년 10월부산과마산에서시민항쟁으로활활타올랐다. 김영삼의국회제명으로촉발된부마민주항쟁은시민들의절대적지지속에유신독재퇴진과민주화요구로발전해가고있었다. 이에놀란박정희정권은계엄령에이어위수령을내렸고, 공수 2개여단과정규군 250여명을동원하고장갑차를투입하여진압하였다. 부마민중항쟁은그렇게진압되었지만박정희정권은그로인해심각한타격을입었다. 미국과도미묘한갈등관계에놓이게되었고집권층내부에갈등과분열이생기게된것이다. * 부마민주항쟁부마는부산시와얼마전에창원시로통합한마산시를줄인말이다. 이지역들의학생과시민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대규모반독재민주항쟁을전개했다. 부마민주항쟁은사건이전개된지역에따라구분되는데, 부산시에서는 10월 16일부산대학교학생들을중심으로항쟁이촉발되었다. 이들은경찰의제지를뚫고부산시청앞과광복동 남포동일대로진출했고, 동아대학교학생들이합류하면서도심전역으로시위가확대되었다.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 등의구호를외쳤고, 시민들은적극적으로지원하거나
17 시위에동참했다. 10월 17일부산대학교가긴급휴교에들어갔지만, 전날과비슷한양상의시위가전개되었다. 10월 18일 0시를기해부산일원에계엄령이선포되었고, 공수부대 2개여단이투입되었다. 그러자항쟁이마산시로확산되어경남대학교학생들을중심으로격렬한도심시위가벌어졌다. 이곳에도시위진압을위해경찰은물론군대까지동원되었고, 19일에는경남대학교에무기한휴교령이내려졌다. 그렇지만도시하층민을비롯해시민들이합세하여시위는계속되었다. 당국은 10월 20일 0시를기해마산시과창원시일원에위수령을발동했다. 4일간의항쟁으로부산에서는 1,058명이, 마산에서는 505명이연행되어검찰과군법회의에서즉결심판과유죄판결을받았다. 부마민주항쟁의배경에는심각한불경기와이들지역출신정치인김영삼에대한탄압이자리하고있었다. 부마민주항쟁은유신체제가종말을고하게되었던중요한요인으로작용했다. *(10월 15일부산대학교에배포된 ) 민주선언문 ( 일부 ) 우리는학원내의일체의외부세력을배격한다. 비민주적학칙의민주적학칙으로의개정과학원 언론의자율화와학생회의민주화와집회의자유를요구하며어용교수학자를반대하며학원당국의민주행정방향으로서의성의있는노력을요망한다. 우리는언론 인권 자유의유보나제약에반대한다. 우리는경제적민족주의를당위적인목표로한경제개발계획의자립경제에대한무방향역방향성을고발한다. 우리는총체적인책임과결과로서현독재집권층은유신헌법을철폐하고물러날것을요구한다. 학우들이여! 효원학우들이여! 민족의앞날과사회정의에대한우리들의되풀이된청원과요구는되풀이된억압으로. 얼굴을가렸던책을치우고틀어막혔던입과귀를열자. 형제의피를요구하는자유와민주의깃발을우리가잡고반민주의무리, 자유의착취무리, 불의의무리들을향해외치며나아가자! 10시도서관앞 * 위수령위수령은 1950년 3월 27일대통령령제296호로제정되었다. 제정목적은 육군군대가영구히일지구에주둔하여당해지구의경비, 육군의질서및군기의감시와육군에속하는건축물기타시설의보호에임 하는것이었다. 이법령은 1970년 4월 20일대통령령제 4949호로전부개정되었으나, 제정목적은그대로였다. 위수령은재해나비상사태시치안유지를위해병력출동, 병기사용, 국민의신체구속도가능하도록규정한다. 하지만박정희정부가위수령을주로발동했던목적은반정부시위를진압하기위해서였다. 이를테면 한일협정비준안 국회통과에반대하는학생시위가거세게일어났던 1965년 8월 26일서울시일원에위수령이발동되었다. 1971년 10월 15일대학가에서반정부시위가격화되자, 서울특별시일원에학원질서확립을위한특별명령으로위수령을발동하여 1,889명연행, 74개동아리해산, 13개미등록간행물폐간, 7 개대학학생회기능이정지되었다. 또한정부는 1979년부마민주항쟁이발발하자 10월 18일 0시를기해부산일원에계엄령을선포하고, 공수부대를투입해시위를진압했다. 하지만반정부시위가부산에서마산으로확산되고, 수출자유지역노동자와학생이가담할조짐을보이자, 10월 20일 0시를기하여마산과창원일원에위수령을발동했다. *1979년 10월 20일마산지역작전사령관조옥식소장이발표한담화문친애하는마산시민여러분! 마산시일원의일부학생과불순분자들의난동과소요로우리군은마산시의안녕과질서를유지하고시민의재산과생명을보호하기위하여마산시일원에위수령발동을하였습니다. 시민여러분께서는필요없이시위군중에휩쓸려구경함으로써주동자체포나질서확립에지장을초래케하고데모군중으로오인되어체포되는피해를당하지않도록주의하여주시기바랍니다. 우리군은데모대주위의모든군중을시위군중으로판단하고전원연행하겠습니다. 시민여러분께서는특히통행금지시간을엄수해주시기바라며마산시의질서가하루속히회복되고시민의안전한생활이유지될수있을때까지적극협조해주시기바랍니다.
18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한안가회식자리에서총성이울렸다. 당시의중앙정보부장인김재규가쏜권총에박정희가살해당한것이다. 박정희의죽음으로유신독재정권은갑자기붕괴되었다. 유신독재의붕괴와함께사람들의가슴속에억눌려있던인간다운삶에대한요구, 민주화에대한요구가눈부시게분출되어나오기시작했다. 이른바 서울의봄 이찾아온것이다. 솔아, 그것은말그대로눈부신것이었다. 그리고그분출은정치적차원의것만이아니라우리의일상적삶곳곳에서솟아오르는것이었다. 공장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사람들은눈부시게변화하고있었다. 자신의삶을자기의지대로충만하게채우고자하는의지는스스로를아름답게하고다른사람에대한신뢰와존중을통해모두를아름답게변화시키고있었다. 솔아, 박정희독재정권은무려 18년동안이나지속되었다. 그러니우리또래아래의젊은이들은자각할수있는능력이생긴이래독재정권아래서왜소화되고왜곡된사람들의모습만보아온셈이었다. 자기의인간적본질을실현하려는의지로가득차있는사람들의모습을보는건태어나서처음이었다. 정말사람이아름답게보였고진심으로사람에대한믿음을가질수있었지. 그리고이러한믿음을바탕으로민주화되고정의가실현되는사회에대한꿈을가질수있었다. * 김재규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경상북도구미 ( 당시선산군 ) 에서태어났다. 경북사범학교를수료하고김천중학교교사로있다가박정희와같이육군사관학교제2기로입교했다. 1956년에장군으로진급했으며, 5 16군사정변직후에는반혁명세력으로간주되어일시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호의로석방되었다. 그는 1973년중장으로예편하기까지육군방첩부대장을비롯해요직을맡았다. 전역후에는유신정우회소속으로제9대국회의원이되었고, 1976년 12월중앙정보부장에임명될때까지중앙정보부차장과건설부장관을겸직했다. 김재규는대통령경호실장차지철과갈등이심했고, 1979년에빈번하게분출되는저항들을보면서유신체제의현실을체감했다. 그해 10월 26일서울시궁정동소재중앙정보부안전가옥의술자리에서김재규는박정희와차지철을살해했다. 그는상황을유리하게조성하고자했으나, 10월 27일새벽보안사령부에의해체포되었다. 계엄고등군법회의는 1980년 1월 28일내란목적살인및내란미수를적용해사형을선고했고, 5월 24일형을집행했다. * 박정희박정희는 1917년경상북도선산군구미면에서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졸업한박정희는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동안교사로근무하다 1940년만주군관학교에입학했다. 그는 1942년만주군관학교를수석졸업하고일본육군사관학교에편입했다. 이곳에서우수한성적으로졸업한박정희는만주에주둔하던관동군소위로임관했다가중위로해방을맞았다. 1946년 9월조선경비사관학교제2기생으로입학했던박정희는그해에대위로임관했다. 그런데 1948년 여수 순천10.19사건 이발발하면서생사의위기에직면한다. 이사건으로대대적인군부숙청이단행되었는데, 박정희가남로당과관련된혐의로구속되었던것이다. 이와관련하여 1949년 2월박정희는사형선고를받았으나, 백선엽등의구명활동덕분에감형 석방되었다. 그리고얼마후육군본부정보문관이되었다가한국전쟁발발직후인 7월에육군정보국전투정보과장으로현역에복귀했다. 이후박정희는 1955년제5
19 사단장, 1957년제7사단장에부임했고, 1960년 4 19혁명시기에는부산군수기지사령관, 9월에는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을지냈다. 그리고 1961년 5 16군사정변시에는제2군부사령관이었다. 박정희등군사정변세력은군사혁명위원회를국가재건최고회의로재편하고권력을장악했다. 군부는민정이양과민정불참등의약속을이행하지않았다. 그리고박정희는 1963년 10월부터 1979년 10월 26일사망할때까지정적제거, 헌법개정, 각종통제법률의발동과제도의집행그리고기구를활용해대통령직을유지했다. 대통령박정희에대한평가는전반적으로상반된양상을보이는데, 민주주의와인권등의측면에서는부정적이다. *12 12쿠데타 1979년 12월 12일전두환계엄사령관을수장으로군부내사모임인 하나회 가중심이되어내란을일으켰다. 당시정승화계엄사령관겸육군참모총장은박정희정부시대에군의요직을독차지했던하나회를견제하기위해 12월 13일개각과함께전두환을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발령을내려했다. 신군부는 11월중순부터정승화에관한문제를모의하고있었는데, 자신들을견제및좌천하려한다는정보를입수하고반란을강행했다 사건 에관한수사결과를발표하면서정승화는이사건과합동수사본부장전두환은무관하다고밝혔다. 하지만 12 12군사반란을정당화할명분으로 정승화계엄사령관이대통령시해사건현장부근에있으면서도적절한조치를취하지않아내란을묵시적으로공모했으며, 김재규로부터불법자금을제공받았다 고번복했다 군사반란은평시작전통제권행사와관련한한 미합의를위반한것이었다. 또한신군부는임의로군인들을무장시켜상관을체포하는하극상을벌였으며, 이과정에서발생한무력충돌로 3명의사망자를비롯해많은사람들이부상을당했다. 반란가담자들은승진인사와군요직에배치되었고, 반란을거부했거나맞섰던사람들은숙청당했다. 신군부는여론악화를차단하기위해군사반란의정당성을담은홍보책자를배포 교육했다. 그리고시민여론을긍정적으로조성하기위해다양한사후수습을했다. 하지만김영삼정부에서 12 12군사반란은 하극상에의한쿠데타적사건 으로규정되었고, 대법원은반란죄를적용하여유죄판결을내렸다. 그러나이러한우리들의꿈위에빠르게그림자가드리워지고있었다. 전두환, 노태우로대표되는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쿠데타를통해당시계엄사령관정승화를제거하고실권을장악하였다. 박정희정권의충복으로성장한신군부가공백기를틈타권력의중심을빠르게장악해가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신군부의움직임에제동을걸기위한민주화세력의움직임도활발했다. 김대중, 김영삼등의정치인들은군부세력에발목이잡힌정부주도의개헌반대와구속자석방, 공민권정지자의즉시회복, 계엄령해제등을합의하여발표했다. 대학가역시신군부의음모와계략에결코눈을감고있지않았다. 대학의교정마다라일락꽃향기가피어오르는 1980년 5월 1일, 서울대생 1만 3천여명이민주화대총회를열고신군부세력이주도하는비상계엄의즉각해제등을외치며교문앞에서기동경찰과충돌한것을필두로연일시위가확대되고있었다. * 전두환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경상남도합천군에서태어났다. 대구공업고등학교와육군사관학교 ( 제11기 ) 를졸업하고, 1955년소위로임관했다. 그는군부내사조직이었던 하나회 를결성하여실질적으로주도했다. 전두환은 5 16군사정변이일어나자육군사관학교생도들로하여금지지행진을벌이게했다. 이것이인연이되어최고회의의장실민원비서관에발탁되었고, 박정희정부에서중앙정보
20 부와육군본부그리고청와대등의요직을두루거쳤다. 전두환국군보안사령관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에관한수사를총괄지휘했으며, 12 12군사반란을통해정부의실권을장악하게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계엄령을전국에확대하고, 5 18민중항쟁을무력으로진압하는등국민들의오랜민주화의열망을좌절시켰다. 이후전두환은승승장구하여중앙정보부부장서리를거쳐국가보위입법회의상임위원장을지냈고, 육군대장으로예편한후제11~12 대대통령이되었다. 민주정의당을창당하여초대총재를지낸전두환은육군사관학교동기이자하나회를함께이끌었던노태우가차기대통령에선출될수있도록지원하여후일을도모했다. 하지만전두환 노태우등신군부는시민의항쟁으로사법적처벌을피할수없었다. * 노태우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대구시에서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와육군사관학교 ( 제11기 ) 를졸업하고, 1955년에소위로임관했다. 그는전두환과함께군부내사조직이었던 하나회 를결성 운영했다. 방첩부대와수도사단그리고공수부대등을거친노태우는 1978년에는대통령경호실에서근무했다. 1979년박정희대통령이사망할때, 노태우는제9사단장이었으나, 12 12군사반란의주체로참여하여수도경비사령관으로부임했다. 노태우는신군부의핵심으로 5 18민중항쟁을유혈진압했던가해자이기도했다. 1981년육군대장으로예편한노태우는정무제2장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등행정부와체육계를두루거쳤다. 1985년에정치계로활동영역을전환하여민주정의당대표위원, 제12대국회의원, 민주정의당총재등을거쳐제13대대통령으로선출되었다. 대통령재임기 3당합당으로창당되었던민주자유당총재를지냈으며, 1991년 남북관계기본합의서 를채택했다. 하지만대통령에서퇴임한후에는시민의항쟁으로전두환등과더불어사법적처벌을받았다. * 김대중후광 ( 後光 )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전라남도신안군하의면후광리에서출생했다. 목포제일공립보통학교와목포상업학교를졸업하고, 1944년전남기선주식회사에서근무하다가해방을맞았다. 김대중은근무하던회사의관리위원장이되었고, 1950년에는 목포일보 를경영하기시작했으며, 1951년 3월에목포상선주식회사 ( 흥국해운 ) 사장이되었다. 1961년 5월강원도인제에서제5대민의원에당선된김대중은정치계에첫발을딛었으나, 5 16군사정변으로등원이무산되었다. 김대중은 1963년민주당대변인이되었고, 제6~8대까지지역구목포와전국구에서국회의원을역임했다. 김대중은 1970년 9월신민당대통령후보로선출되어경선을치렀는데, 박정희와 95만표차이였다. 김대중은신병치료차간도쿄에서유신반대성명을발표하는등의활동을하다가 1973년 8월 8일중앙정보부에의해국내로압송되었다. 1976년 3월 민주구국선언 을발표하여수감되었던김대중은 1978년 12월형집행정지로가석방되어가택연금되었고, 1980년 2월에사면 복권되었다. 5월 16일김대중과김영삼은비상계엄해제와모든정치범석방과복권등을주장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에김대중을연행했으며, 9월 17일내란음모사건으로사형을선고했다. 1982년 12월미국으로망명했던김대중은 1985년 2월전두환정권의반대와주위의우려에도귀국하여가택연금되었지만, 3월 18 일김영삼과함께민주화추진협의회공동의장이되었다. 1987년 5월 1일김대중과김영삼등은통일민주당을창당했다. 김대중은 7월 9일사면 복권되자제13대대통령선거에출마했으나낙선했다. 1988년 4월제13대국회의원선거에서전국구의원으로, 1990년 7월평화민주당총재, 1991년 4월신민주연합당총재로, 1992년 2월제14대국회의원선거에서전국구의원으로선출되었다. 제14대대통령선거에서낙선하고정계를은퇴했던김대중은 1993년 7월영국에서귀국하여정계에복귀, 새정치국민회의총재가되었다. 그는 1997년 12월제15대대통령에당선되었고, 2002년 2월 4일퇴임했다. 김대중정부는외환위기극복에전념했으며, 2000 년 6월 15일평양에서남북정상회담을열고 6 15남북공동선언을발표했다. 2000년 1월새천년민주당총재로선출되었고, 12월 10 일노벨평화상을수상했다. 한편김대중일행은 2003년 10월 23일서울고등법원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에대한재심을청구하여다음해 1월 29일무죄를선고받았다.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사망했으며, 서울국립현충원에안장되었다. * 김영삼 거산 ( 巨山 ) 김영삼은 1927 년 12 월 20 일경상남도거제시장목면대계마을에서출생했다.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와경남중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1 년서울대학교를졸업했다 년 1 월장택상국회부의장비서관으로정계에입문하여 1954 년 5 월 25 세의나이
21 에제3대국회의원으로당선되었다. 그는그해 11월자유당을탈당하고민주당창당에참여했다. 그는 1963년군정연장반대시위로서대문형무소에수감되는등박정희정권에서야당으로많은고초를겪었고, 민주화운동에도참여하면서중진정치인으로성장했다. 1980년 5월신군부에의해가택연금되었던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민주화를요구하며 23일간의단식투쟁을벌였으며, 1984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를발족했다. 1985년 2 12총선에서신한민주당에서대거국회의원에당선하는데기여했고, 1986년 2월에는 대통령직선제개헌 1천만서명운동 을전개했다. 1987년 5월통일민주당을창당하고, 6월민주항쟁에도적극참여했다. 그는그해말대통령선거에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0년 1월민주 민정 공화당의합당을통해 1992년 5월에민주자유당대통령후보가되었고, 12월 28일제14대대통령에선출되었다. 김영삼은민주자유당총재와신한국당총재를역임했다. 김영삼정부는전직대통령과재벌총수들에대한사법처리등부정부패척결을단행했으며, 깨끗한정치를구현하기위해민주주의공고화를위한조치들을실행했다. 그리고권위주의청산과 윗물맑기 개혁, 금융실명제, 하나회해체와군개혁, 역사바로세우기, 외교의지평확대등도실행에옮겼다. 하지만정권말기에경제위기국면이초래되었고, 남북관계개선등에서는답보를면치못했다 년 5 월 15 일의서울역시위 1979 년 10 월 26 일박정희의죽음으로유신독재의붕괴와함께 서울의봄 이찾아왔다. 15일오후, 서울역엔새로운군부독재의등장을막기위해 20만명가량의대학생과시민들이운집하였다. 운집한군중이남대문을경계로전투경찰과대치하는동안각대학학생회에는서울의효창운동장과잠실운동장에군인들을실은트럭과장갑차가집결한다는제보가잇따라들어왔다. 임시연단에오른학생대표들은 군인들이탱크를몰고오면달아나지도말고싸우지도말고간악한유신잔당과신군부에게총부리를돌리도록호소하자 며서울역사수를외친다. 그러나결국서울지역총학생회장단은 심야에군과충돌하는것은피해야한다 며해산하는이른바 서울역회군 을발표했다. * 신군부신군부는박정희시대의군부와구분하여 12 12군사반란에참여하고 5 18민중항쟁을진압하여권력을장악했던장성들과영관급군인들을일컫는다. 이들은한국전쟁시기였던 1952년 1월육군사관학교에입교하여 1955년소위로임관했던육군사관학교제11기가중심이되었고, 이하기수들까지가입시켰다. 신군부는 1958년에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최성택등 5명이 오성회 ( 五星會 ) 를결성한것이시초였다. 전두환등은육군사관학교학생들을움직여 5 16군사정변지지시위를벌였고, 이를계기로박정희의지원을받아요직을장악했다. 이들은 1960년대초에선배들을후견인으로끌어들이고, 후배들을가입시켜 하나회 로개칭했다. 하나회는지연, 학연, 혈연등을중시했고, 우리 의식이매우강했다.
22 하나회는군내부의큰영향력을행사하는사조직으로성장했다. 하나회가세상에알려지게된계기는 1973년 4월하순에발생한이른바 윤필용사건 이었다. 그러나하나회의주류는거의충격을받지않은채존속했으며, 주요보직에배치되었다. 박정희대통령유고시보안사령관직을역임하고있던전두환과하나회는두번의군사정변을주도했다. 전두환이대통령에취임한이후, 하나회구성원들은군내요직을차지했으며, 전역후장관과국회의원등을지냈다. 1993년 2월문민정부를표방하며출범한김영삼정부는군부를통제할필요성을절감하여군정종식을선언했다. 이를위해군부내의가장큰세력으로갈등의주요축이었고, 12 12군사반란과 5 18민중항쟁에밀접히관련되었던하나회를대상으로숙군작업을벌였다. 장기적으로보면, 1997년전두환 노태우등에대한사법적처벌도이의연장선상이라고볼수있다. * 계엄령계엄령은 계엄법 에의거하여선포되며, 비상계엄과경비계엄으로구성된다. 계엄령은전시, 사변또는이에준하는비상사태로인해행정및사법기능의수행이현저히곤란한경우와일반행정기관만으로치안을확보할수없는경우에대통령과같은국가원수또는행정부수반이입법부의동의를구해군대를동원해서치안및사법권을유지하는조치이다. 계엄령이선포되면, 계엄사령부가행정사무와사법사무를관장하는권한을갖는다. 계엄령은반정부세력을탄압하거나, 권력을장악하거나유지하기위한정치적수단으로빈번하게이용되었다. 계엄령은 1948년 여수 순천 10.19사건 이발발한직후였던 10월 25일에처음으로선포되었다. 하지만계엄법이법률제69호로제정된날이 1949년 11월 24일이어서첫계엄령선포의적법성여부를두고논란이있다. 마지막으로계엄령이선포된것은부마민주항쟁이전개되고있던 1979년 10월 18일이었다. 계엄령은 10 26사건이발생하자제주도지역을제외한전국일원에선포되고, 1980 년 5월 17일자정을시점으로전국으로확대되었다. 신군부는대도시들에군대를투입했는데, 특별히서울 광주 대전에는공수부대를, 부산 대구에는해병부대를배치했다. 광주에투입된공수부대는제7공수여단본부대, 제33대대, 제35대대였다. 계엄령은 1981년 1월 24일에해제되었다. * 포고문 1호 79년 10월 18일 0시를기하여아래사항을포고한다. 1 일체의집회 시위 기타단체활동을금한다. 단관혼상제와의례적인비정치적행사인경우는예외로한다. 2 일체의언론 출판 보도 방송은사전검열을받아야한다. 3 각대학은당분간휴교조치한다. 4 유언비어날조, 유포와국론분열언동을엄금한다. 5 정당이유없는직장이탈이나태업행위는엄금한다. 6 야간통행금지는 22시로부터익일새벽 4시까지로한다. 7 이포고를위반한자는영장없이체포구금압수수색한다. 8 시민의정상적인경제활동과일상생업의자유및출입국, 국내여행등활동의자유는이를최대한보장한다. 부산지구계엄사령관육군중장박찬긍 그리고 5월 18일 0시를기해신군부는계엄령을제주도를포함한전국으로확대한다고발표했다. 동시에정치인과지식인들을예비검속이란이름으로잡아들이기시작했다. 박정희유신독재의몰락이온전히민중의힘에의해이루어진것이아니었던만큼전두환신군부의정치적야심을막기에는민주세력의힘에한계가있었던것이다. 눈부시게찾아왔던서울의봄이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처럼운명의지침을돌려놓고멀어져가고있었다.
23 * 예비검속일반적으로예비검속은사법기관이조사수행에방해가된다고판단하여법원의통제를받지않고혐의자를사전에검거 구금하는행위를가리킨다. 예비검속을당한대부분의사람들은심각한고초를겪었고, 죽임을당한경우도흔했다. 한국현대사에서예비검속은한국전쟁직후, 5 16군사정변직후, 그리고 1980년 5월 17일자정계엄령확대선포직전등수차례에걸쳐이루어졌다. 1980년 5월의상황을예로살펴보면, 김대중은내란음모혐의로체포되었고, 김종필은권력형부정축재자로연행되었으며, 김영삼은가택연금되었다. 계엄사령부는전국에서총 2,699명을예비검속하여 2,295명은훈방, 404명은공소제기를했다. 광주지역에서는 505보안대가예비검속을담당했다. 505보안부대는 22대의차량과 86명의인원을투입하여 17일밤 11시부터학생회간부와재야인사등시위주동예비검속대상자로선별한 22명가운데정동년등 12명을연행했다.
24
25 년대를밝힌역설의등불, 5 18 민중항쟁 국민들이기울어져가는서울의봄을안타까워하고있는동안신군부는그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자체를말살하고자하는음모를착착진행시키고있었다. 전두환이이끄는신군부는엄혹한박정희유신독재아래서도가슴에서가슴으로번져갔던, 그리하여 1980년봄찬란하게개화하기시작했던인간다운삶에대한열망, 민주화에대한열망을쉽게잠재우기어렵다는것을잘알고있었으리라. 그래서국민을지킬의무를갖는군대를살인도구로해서국민의생명을말살하는무모한계획을세웠는지도모르겠다. 그것은국민을한낱도구로생각하는박정희군부독재의논리가극단화되어나타난것이었다. 1980년 5월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등으로대표되는신군부는수많은국민들의생명을빼앗음으로써정권유지의기반을마련하였다. 그음모의칼끝은바로광주를향하고있었다. 솔아, 그칼끝은물리적으로광주를향하고있었지만광주만을향한게아니었다. 그칼끝은온국민의가슴을향하고있었다. 온국민의가슴에서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을, 인간다운삶에대한열망을, 민주화에대한희망을도려내기위해온국민의가슴을찌르는칼날이었다. 광주의비극이담긴채전세계로알려진영정을든아이의사진 광주 전남지역시민들은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키기위해죽음을무릅쓰는역설을선택하였다.
26 솔아, 선량한군인들이국민을향한신군부의살인도구로돌변한기가막힌상황에서국민들이선택할수있는길은무엇이겠니? 굴종하여인간으로서의존엄을포기하거나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키기위해죽음을각오하는길이외에는없었다. 광주시민들은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키기위해죽음을무릅쓰는역설을선택하였다. 충만한삶을위하여삶을버리는전태일의역설이광주에서다시시작된것이다. 하지만전태일의불꽃은외로웠지만광주의불꽃은화엄의꽃밭과도같았다. 그만큼민주화에대한열망이국민들의가슴에서가슴으로면면히이어지며자라난것이다. 그래서한시인이노래한대로광주는우리나라의십자가였다. 아아, 우리들의도시우리들의노래와꿈과사랑이때로는파도처럼밀리고때로는무덤을뒤집어쓸지언정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나라의십자가를짊어지고무등산을넘어골고다언덕을넘어가는아아, 온몸에상처뿐인죽음뿐인하느님의아들이여! 김준태 아아광주여! 우리나라의십자가여! 솔아, 이제이대화엄의꽃밭이펼쳐지기까지의과정을잠시 짚어보아야겠다. 1. 이얼마나계획적인밤 12 시였던가 _5 월 15 일 ~17 일, 5 18 민중항쟁의발단 솔아, 젊은이들의피는뜨겁고순수하다. 그래서늘소수의이익을위하여인간을도구화하고억압하는불의가깊어지면젊은이들이가장먼저앞장서일어나곤했다. 구한말의의병운동에앞장서싸웠던사람들이너와같은 13세에서 18세사이의젊은이들이었고, 3 1운동, 광주학생의거도그러했다. 그리고 4 19혁명은중고등학생들이그주역이었지. 1980년 5월에전개되었던민주화운동역시마찬가지였다.
27 5월 13일학내에서시위를벌이던서울의대학생들이가두로진출하자그뜨거운민주화의물결은서울만이아니라전국적으로번져가기시작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전남대, 조선대학생들이처음으로경찰의봉쇄를뚫고교문을나섰다. 가두로진출한 1만여학생들은도청앞분수대에집결하여민주화성회를개최했는데시민들수천명이주위에모여들어박수를보내곤했다. 5월 15일에도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학생들은 14일에이어교문을나와가두로진출하였다. 의외로경찰의저지는없었다. 경찰들은오히려질서를지켜달라고부탁까지했다. 최루탄한발터지지않은평화로운시위가계속되었다. 그러나이평화는폭풍전의불길한고요와도같은것이었다. 그순간시위진압군인들의배치와특수진압훈련이시작되고있었고, 검거해야할민주인사명단이이미다만들어진뒤였다. * 노동3권노동3권은노동자의사회경제적지위향상을위해법률이정한기본권으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을가리킨다. 단결권은노동조건개선을위해사용자와협상할수있는노동자단체를조직할수있는권리를의미한다. 일반적으로노동조합결성, 자유로운가입 탈퇴에관한내용을담고있는데, 사용자가이를침해하면부당노동행위가된다. 단체교섭권은노동자단체가노동조건개선을위해사용자와교섭할수있는권리를의미한다. 단체행동권은노동자가노동조건개선을위해사용자에대한압력수단으로행동하는쟁의권을보장한다는것이다. 단단체행동권은행사요건에서제약을받으며, 사용자는직장을폐쇄할수있는대응수단이인정된다. 이렇게준비되고있는피비린내나는탄압을알리없는 1만 6천여명의학생들은전날처럼도청앞분수대에모여 비상계엄해제하라!, 노동3권보장하라! 등의구호를외치며시국성토대회를가졌다. 집회가끝나고학생들은학교로돌아갔다. 펼쳐든대형태극기뒤에는 50여명의교수들이따랐고그뒤를학생들이열을지어행진했다. 교수들의시위참여는 1960년 4 19혁명이후처음이었다. 솔아, 우리들이대학을다니던 1970년대는학교에나가는날이반정도밖에안되었다. 시위의확산을막기위해툭하면휴교령이내려졌기때문이지. 전남대총학생회간부들도이점을걱정하고있었다. 그래서휴교령이내려졌을때의행동지침을마련하여학생들에게널리알리고있었지. 휴교령이불시에내려지더라도다음날오전 10시에전남대교문앞에집결한다. 학교앞에집결하는게불가능하면 12시에도청앞분수대에집결하여가두투쟁을전개한다. 이날도시위대는흩어지면서다시한번이방침을확인하고, 상황변화가없으면다음날도
28 청앞분수대광장에모여민주화성회를개최하기로결의하였다. 솔아, 5월 16일부터서울을비롯한전국의대학은일단시위를중단하고정국을지켜보기로하였다. 시위의확대가신군부의무력탄압을가져올까우려해서였고이미그런조짐이서서히나타나고있었다. 전남의학생운동지도부는이와달리박정희군사쿠데타가일어난날이기도한 5월 16일횃불시위를벌이기로결정하였다.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조선대공전등 9개대학생 3만여명은오후 3시부터도청앞분수대광장에모여시국성토대회를벌였다. 그리고저녁 8시부터 2개조로나누어횃불시위에들어갔다. 1980년서울의봄을마지막으로밝히는수많은횃불이 계엄철폐 의구호와함께광주시내를수놓았다. 박관현열사혁명정신계승비박관현은 들불야학 강학으로활동했으며, 1980년전남대학교총학생회장에선출되었다. 그는 5월 14~16일전남대학교와광주도심에서전개된집회와시위를이끌었다. 수배자가된박관현은 2년여를도피하다가주변인의밀고로검거되었다. 광주교도소에수감된그는 50여일동안단식투쟁을벌이다병보석으로석방되었다. 그는전남대학교병원에서치료를받다가 1982년 10월 12일사망했다. 법과대학학생회는 1989년 5월 6일박관현의죽음을추모하며전남대학교교정에계승비를건립했다. 시위를마친학생들은토요일, 일요일인 17일, 18일은다른지역대학과보조를맞춰쉬면서사태를관망하고 19일부터다시시국성토대회를벌이기로하고흩어졌다. 휴교령이내리면전남대교문앞 10시집결이라는지침을다시한번확인했음은물론이다. 그날밤철야농성을하던학생들은 17일에여러가지불길한조짐들을관찰했다. 대사관이나영사관에서무슨연락이라도받았는지전남대에서강의를하던외국인들이출근을하지않고있었고, 오후 9시경에는학교주변과야산을정찰하는군인들몇분대가목격되었다. 5월 17일정부측에서는학생시위와김대중씨등재야정치운동의소용돌이를해소하기위하여오는 20일 104회임시국회를소집하기로했다고발표하였다. 임시국회에서 계엄령해제, 정치일정단축, 국회개헌특위가마련한개헌안접수 등시국문제를폭넓게다룬다는것이었다.
29 민주화운동지도부들은상황이잘풀려가리라는낙관적인판단을하고있었던모양이다. 특히학생운동지도부가더욱그러해서 55개대학생대표 95명이 16일오후 5시 30분부터이화여대에모여제1회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를열어 17일까지마라톤회의를하고있는중이었다. 하지만정부의그러한발표는속임수에불과했다. 그순간공수부대병력을실은군용차량들이호남고속도로를질주하는모습이여러사람들에의해목격되었고, 17일오후, 광주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에는공수부대 1천여명이작전개시준비를마치고위에서명령이내려오기만을기다리고있었다. 17일오후전남대총학생회실의전화벨이요란하게울렸다. 전화기를들자한여학생의다급한목소리가흘러나왔다. 서울의각대학학생회장단들이모두계엄당국에연행되어갔다는것이었다. 전남대회장단은일단무등산장으로피신했다가저녁 9시쯤상황점검을위해시내의대지호텔로옮겼다. 여러군데전화를걸어보았지만연락이되지않았다. 학생회장단은각자흩어져피신하며사태를지켜보자고결정하였다. 한시간뒤경찰이대지호텔을급습하였으나이미학생들은피신한뒤였다. 밤 11시, 거의같은시각에경찰과군보안대요원들이군홧발로안방에뛰어들어민주화운동에주도적역할을했던청년들과재야인사들을체포해가고있었다. 간신히체포를피한사람들은광주밖으로피신하거나지하로숨어들었다. 이세종추모비 1980년 5월 17일자정을기해계엄령이전국으로확대되면서주요대학들에계엄군이진입했다. 전북대학교에진입한계엄군은학내를수색했고, 이세종은이들을피해도망쳤다. 계엄군은이세종의사인을학생회관에서추락사한것이라고했으나, 당시부검을했던의사는 1989년에이세종의시신곳곳에피멍이있었다고증언했다. 그의동료들은 1985년 5월 18일전북대학교교정에추모비를세웠으나, 당국의탄압으로 7월에고향으로이전해야했다. 추모비는 1989년에원래의자리로돌아왔다. 솔아, 17 일밤 11 시 40 분늦은시간이라텔레비전을켜놓은채졸고있던사람들은갑자기 시끄러워진텔레비전을놀란눈으로지켜보았다 년 10 월 27 일 4 시부터제주도를제외한
30 전지역에내려져있던비상계엄을 1980년 5월 17일 24시를기해제주도를포함한전국으로확대한다는정부의발표와함께이희성계엄사령관을비롯한고위장성들의살기등등한모습이화면을가득채우고있었다. 국민들은그러한계엄확대조치로무엇이달라지는건지알수는없었지만어쨌든전두환신군부가전권을장악해가고있고, 찬란했던 80년서울의봄이군홧발에짓밟혀숨이끊어져가고있음을분명히느끼고있었다. 계엄사령부는 5월 18일 0시를기해김대중을비롯한재야정치인과민주인사들, 그리고사전에작성된명단을가지고민주화운동에앞장섰던학생운동지도부, 노조지도부, 종교계지도부들을순식간에잡아들이고있었다. 5월 18일 1시 40분경제7공수여단 33대대가전남대와광주교대에진주했다. 그들은전남대도서관과총학생회실등에서철야농성을벌이고있던학생들을급습, 진압봉과군홧발로무자비한구타를가한후에 69명을체포해갔다. 조선대교정에도 7공수제35대대가투입되어학생 43명을체포해갔다. 이렇게계획적인음모의칼날은한시인의다음과같은시구절처럼밤을도와광주깊숙이들어오고있었다. 암호명 화려한휴가 특전사제 7 공수군인들이전쟁터도아닌광주를총칼로강타해들어가면서붙인작전명령은 충정훈련, 암호명은 화려한휴가 였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년오월어느날이었다광주 1980년오월어느날이었다밤 12시나는보았다경찰이전투경찰로교체되는것을 밤 12 시나는보았다 전투경찰이군인으로교체되는것을
31 밤 12시나는보았다미국민간인들이도시를빠져나가는것을밤 12시나는보았다도시로들어오는모든차량들이차단되는것을 * 김남주 학살1 중에서 제 7 공수여단군인들이광주에투입되면서붙여진작전명령은 충정훈련, 암호명은 화려한 휴가 였다. 전쟁터도아닌광주를총칼로강타해들어가면서붙인암호가 화려한휴가 였다는 것은누가들어도어처구니없는상징이었다. * 충정훈련 / 화려한휴가육군본부는 1980년 2월 18일충정부대와주요후방부대에 2월중에충정훈련을조기실시하라는특별지시를하달했다. 충정훈련은군대를동원하여집회와시위를공세적으로진압하는제반훈련을일컫는다. 충정훈련은특수한임무를수행하는군부대를중심으로충정훈련이실시되는것이일반적이지만, 이시기에는수도방위사령부예하사단과수도권사단들에서도충정훈련이실시되었다. 공수부대등은일반훈련을중단하고, 길이 70cm의진압봉을제작하여충정훈련에열심이었다. 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은 3월 6일특전사령관, 4개공수여단, 3개사단의부대장과작전참모, 수도기계화사단장, 치안본부장, 시경국장등을소집했다. 2박 3일동안열린회의는수도권소요사태대비태세를점검하기위한자리였다. 이들은학생운동주도세력을 맹목적저항세력 으로규정하고, 사회로부터격리해야하며, 강경한응징조치를취해야한다는데의견을모았다. 4월 12일이후에는충정훈련을위한차량배치를비롯해항공기와다양한진압도구들이지원, 보급되었고, 5월 6일부터 9일까지 소요진압준비태세 점검이이루어졌다. 경찰과달리공수부대가 5 18민중항쟁의시위대를잔인하게진압했던배경에는이와같이오랜기간의준비와훈련이이루어졌기때문이었다. 한편 화려한휴가 는광주지역일원에서전개된충정훈련의별명으로알려졌으나, 군의공식문서에서는확인되지않는다. 2. 항쟁의불씨 _5 월 18 일, 5 18 민중항쟁첫날 18일새벽어스름, 주요관공서와거리마다경찰, 전투경찰, 군인, 공수부대원들이지키고서있었다. 일터로가기위해일찍집을나선시민들은어깨를움츠린채고개를숙이고그곁을지나갔다. 출근시간이되면서거리에붐비기시작한사람들역시암담한표정이었다. 9시경이되자하나둘모여상황이어떻게돌아가는지이야기를나누는시민들이경찰과사소한언쟁을벌이기도했지만저항이조직될가능성은없었다. 대중을조직하고지도할만한민주화운동지도부는이미검거되거나피신하여남아있지않았다. 같은시각전남대정문앞에는학생들이삼삼오오모여들고있었다. 평상시처럼도서관을찾기위해, 혹은 휴교령이내려지면오전 10시에학교정문앞에집결하자 는총학생회측의
32 지침을좇아기대를갖고모여든학생들이었다. 5 18민중항쟁사적 1 광주광역시는 1999년 5 18민중항쟁과관련된주요장소 25개소에대한사적지보존사업을시행했고, 현재에는 27개장소로늘어났다. 전남대학교정문앞은 5 18민중항쟁이시작된뜻깊은곳이어서 사적 1 로명명되었고, 가장큰표지석이설치되었다. 표지석에는 5월 18일오전의상황과계엄군이전남대학교에진주하여무엇을했는지기록되어있다. 교문에는공수부대원 7~8명이완전무장을한채버티고서서학교출입이금지되었으니돌아가라고명령했다. 학생들은주위를배회하며돌아갈기미를보이지않았다. 모여든학생들은 100명을넘어서고있었고여기저기불만의목소리가터져나오기시작했다. 학생들이점점불어나자공수부대중대장이메가폰을들고교문앞다리까지나와귀가를종용했다. 하지만그럴수록학생들의불만은커져서자연스럽게다리부근에모여앉아농성을하기에이르렀다. 학생들은 200~300명으로불어났고 계엄해제, 전두환물러가라, 계엄군물러가라, 휴교령철회하라 는구호가튀어나왔다. 공수부대책임자가앞으로나와즉시해산하지않으면무력으로해산시키겠다고협박하자학생들은오히려더크게노래를불렀다. 그때갑자기 돌격앞으로! 명령과함께공수부대원 7~8명이학생들사이로뛰어들어진압봉으로머리를내려치기시작했다. 몇명의학생이피를쏟으며실신하자공수부대원들은학교안으로질질끌고갔다. 광주교대와조선대앞에서도비슷한상황이벌어지고있었다. 그것은통상적인시위진압이아니었다. 공수부대원들의진압봉은길이가 70cm가량이었고, 박달나무로제작된것이었다. 그들의얼굴엔살기가어려있었다. 학생들은골목으로흩어져돌을던지며대항했지만폭동진압훈련과게릴라특수훈련을받은공수부대원을당해낼수는없었다. 진압봉에맞아피투성이가된채학생들은질질끌려갔다. 시내로나갑시다광주역앞으로모입시다 대열을지휘하던학생이외쳤다. 그자리에서싸우면피해만늘어나리라판단하고시민들에게이러한상황을알리자는것이었다.
33 학생들 3~4백명은광주역에서대오를정비한다음도청앞을목표로하여버스공용터미널을거쳐, 금남로 3가가톨릭센터앞까지진출하여연좌농성을시작했다. 11시쯤 5백여명이던대열은금방 7백여명으로불어났다. 비상계엄해제하라!, 김대중씨석방하라!, 휴교령철회하라!, 전두환물러가라!, 계엄군물러가라! 등의구호가튀어나왔다. 농성이시작되고십여분뒤, 대기하고있던전투경찰들이학생들을포물선형태로포위하며진압에나섰다. 숨을쉴수없을정도로최루탄이터졌고경찰은흩어져달아나는학생들을진압봉으로마구구타하며잡아들였다. 16일횃불시위때의경찰들모습과는전혀딴판이었다. 피를흘리며경찰에끌려가는학생들을보며시민들은그잔인함에항의하기도하며치를떨었다. 학생들은흩어져산발적인시위를벌이며사람들을모으기로했으나헬리콥터가따라다니며집요하게경찰들을동원, 시위를막았다. 계림극장앞에서시위를벌이던학생들도경찰에쫓겨다흩어졌는데그중 20여명의학생들은흩어지지않고인근탁구장에들어가이후대책을논의하였다. 이들은끝까지싸울것을다짐하고오후 3시충장로에있는학생회관앞에모이도록다른학생들에게알리기로한후점심을먹으러흩어졌다. 숫자는적었지만이들이전남대교문앞시위에이어민중항쟁의기폭제를만들어낸다. 진압봉으로머리를내려치는공수부대원 돌격앞으로! 명령과함께공수부대원들이학생들사이로뛰어들어진압봉으로머리를내려치기시작했다. 공수부대원의만행 진압봉에맞아피투성이가된채학생들은질질끌려갔다.
34 오후 1시쯤수창국민학교에몰려든 20여대의군용트럭이군인들을쏟아냈다. 전원공수부대원들이었다. 모두방석철망을단철모를쓰고, 총은등에비스듬하게메고, 한손에는대검을다른한손에는살상용진압봉을들고있었다. 그곳에서그들은한두시간동안작전명령을받고새로조를편성한후오후 2시부터시외버스터미널을중심으로시내곳곳에투입되어진압을시작했다. 학생들은오후 2시쯤시내중심가로모여들기시작했다. 한일은행앞에방어선을친전투경찰과투석전을벌이던학생들은공용버스터미널쪽으로밀리며흩어졌다모이기를반복하고있었다. 이때오후 3시쯤공수특전단이투입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서너명이 1개조가되어학생처럼보이는청년들은무조건쫓아가진압봉으로머리를강타하고가슴과배에발길질을했다. 만약에조금이라도반항기를보이면가차없이대검으로배를찔렀다. 팔을뒤로하여묶인청년들이트럭위로던져지면차위에있던무전병이다시한번사정없이구타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의만행은비단학생청년시위대들만을향한것이아니었다. 광주일고부근에서는공수대원들이길가던여성의머리채를붙잡고블라우스를낚아채자옷이찢어지면서맨살이드러났다. 그리곤시민들이보는앞에서차마입에담지못할욕설을하며피투성이로쓰러질때까지주먹과발로구타했다. 터미널의한골목끝에서는도망치다붙잡힌학생이무릎을꿇고살려달라고빌고있었다. 대문에나와지켜보던할아버지가너무애처로워몸으로가리며봐달라고사정했다. 공수부대원은 비켜이새끼! 하면서할아버지를진압봉으로내리쳤다. 피를뿜으며쓰러지는할아버지를본학생이돌을집어들고달려들었으나역시진압봉에맞아피투성이가된채끌려가고말았다. 한편오후 2시, 학생회관앞에모이기로했던학생들은그곳을경찰이장악하고있어서충장로파출소앞과태평극장사이에모여들었다. 오후 3시쯤 1,000여명으로불어난학생들은산발적인투석전을벌이다가허술한경계망을뚫고조용히학생회관앞으로급습해들어갔다. 방심하고있던 20~30명의경찰은도망치고가스차가연기를뿜으며타올랐다. 2,000여명으로불어난시위대는구시청을통해도청앞으로진출하려다가전투경찰에막혀광주공원후문으로물러났다. 시위대는대열을정비한뒤도교육위원회앞으로해서동명동쪽으로진출하였다. 동명동파출소와지산동파출소가시위대에의해파괴되었다. 시위대는산수동오거리를향해가던중담양에서올라오던경찰지원병력 45명을포로로잡기도했다. 부상경찰 3명은택시에태워보내고 42명은연행된학우들과인질교환을하기위해남겼다. 시위대가동명동입구인청산학원앞에이르렀을때군용트럭몇대가공수부대원을가득싣고시위대앞을가로질러지나갔다. 시위대사이에긴장이감돌았다. 붙잡은경찰
35 들을돌려보내자는의견이나와결국아무조건없이풀어주었다. 4시 40분경, 포로경찰들이풀려나기를기다렸다는듯포위하고있던공수대원들이시위학생들의전면으로치고들어왔다. 공수부대원들은시위학생을잡으면진압봉으로머리를때려쓰러뜨리고는서너명이달려들어군홧발로온몸을짓밟고얼굴을위로향하게한다음군홧발과진압봉으로피투성이를만들어놓았다. 죽었는지살았는지축늘어진청년들이군용트럭위로던져올려지고있었다. 공수부대가휘젓고간거리에는군데군데흥건히고인핏물위로을씨년스런침묵만이감돌았다. 동명동입구에서만도최소한 40여명의젊은이들이살상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사라진뒤어느할아버지는 저럴수가있단말이냐. 일제때무서운순사도많이보고, 6 25때공산당도겪었지만저렇게잔인하게사람을죽이는놈들은처음본다. 학생들이무슨죄가있길래저러는가. 죄가있다고해도저럴수는없다. 저놈들은국군이아니라사람의탈을쓴악귀들이야 하면서통곡을했다. 어느중년남자는 월남전에서베트콩을죽여봤지만, 저렇게까지잔인하지는않았다. 저런식으로죽일바엔차라리총으로쏴죽이지. 저놈들을죽여야해 하며울부짖었다. 오후 7시쯤계림동광주고등학교부근에서청년들과학생수백명이또다시공수부대와충돌했다. 그러나이때쯤부터는청년과학생들도자신을방어할무기로각목, 쇠파이프, 식칼등을지니고있었다. 공수부대와부딪친시위대는기왕에죽을바엔싸우다죽겠다는각오여서좀처럼물러서지않았다. 도로는금방흥건하게핏물로젖었고, 치열한공방전끝에공수부대가밀리기시작하여산수동방면으로도망치기시작했다. 시위대가추격하자증강된공수부대가반격을가해왔다. 열세에빠진시위대는주변주택가로몸을숨겼다. 공수부대는주위를포위하고산수동풍향동일대를이잡듯이뒤져학생처럼보이는젊은이는무조건끌고갔다. 전남북계엄분소에서는광주지역에계엄공고제4호를발표, 통금시간이밤 9시로앞당겨진다고발표하고빨리귀가할것을종용했다. 젊은이들의연행은밤새계속되고있었다. 시내주택가곳곳에서비명소리와욕지거리가끊이지않았고, 그와함께공수부대의만행을알리는숨죽인분노의소리들이전화선을타고퍼져나갔다. 3. 살아남기위해싸워야한다 _5 월 19 일, 항쟁 2 일째 1980 년 5 월 19 일아침. 시민들은전날눈으로직접목격했거나전해들은소식으로치를떨
36 며분노를삭이지못한표정들이었다. 공수부대의진압방식이단순폭력을넘어살인행위였다는것은일반시민들뿐만아니라육군제31보병사단 ( 광주소재향토사단 ) 지휘관들과지역기관장, 경찰관들의공통된인식이었다. 시민들은서로소식을주고받다가그냥이럴게아니라어떻게돌아가는지살펴보자고중심가인금남로로몰려들기시작했다. 오전 10시가되자금남로에빽빽이모여든군중이 3, 4천명을넘었다. 그들은딱히시위를한다기보다피해자로서의동질감을가지고탄압자인군경의저지선을묵묵히노려보고있었다. 이가운데학생들은별로없었다. 소상인들, 가게종업원들, 주변주민들, 부녀자들이대부분이었다. 군중숫자가수천명으로불어나자군과경찰은확성기와군헬기를동원해해산을종용했다. 군중은헬기를향해주먹다짐을해대며해산할기미를보이지않았다. 10시 40분부터경찰은최루탄을쏘며군중을해산시키려하였고, 시민들은투석으로대항하기시작했다. 시위대가운데섞여있던학생청년들은인근공사장에서각목, 철근, 파이프를가져다무장하였고화염병을던지기도하였다. 11시 10분경, 군용트럭 30여대에나누어탄공수부대가도청앞과광남로 4거리에진출하여시위군중을포위공격하기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진압봉과총개머리판, 대검으로때리고휘두르고찌르면서시위대가운데로파고들었다. 그들의얼룩무늬군복마저벌겋게피로물들고있었다. 시민들은무수한희생자들을길바닥위에놓아둔채주택가나다방, 사무실, 상점등지로뿔뿔이피신하였다. 하지만공수부대원의살육은끝나는법이없었다. 그들은아무집이나문을박차고들어가젊은사람이면남녀를불문하고진압봉으로난타한다음길바닥으로질질끌고나왔다. 시위에가담하지않았는데왜그러냐고항의하면그즉시허벅지나옆구리에대검을찔러넣었다. 붙잡힌시위대들은많은사람들이보는앞에서벌거벗겨지고양손을뒤로묶였다. 그리고화염병조각과돌조각이널려있는길바닥위로배로만기는올챙이포복을해야만했다. 공수부대원들은여성들에게도갖가지폭행과잔혹행위를가했고, 심지어옷을벗겨놓고기합을주기도했다. 수창초등학교앞에서는시위군중속에서잡힌청년을발가벗겨전봇대에거꾸로매달아놓고는시민들이보는앞에서공수대원여럿이진압봉으로난타했다. 청년은처음엔비명을지르다가얼굴이피투성이가된채축늘어졌다. 여기저기에서부상자가속출하자택시기사들은부상자들을실어날랐다. 하지만이모습이공수부대원의눈에띄면끝장이었다. 공수부대원은부상자만이아니라운전수까지끌어내려진압봉으로난타하여피범벅을만들었다. 공수부대의살육진압은그야말로광기어린것이었다. 그들은부상당한시민들을실어나르는경찰에게까지진압봉을휘둘러댔다.
37 점심때쯤살육의광풍이휩쓸고간시내는텅빈채깊은정적이깔려있었다. 시위군중은궤멸되어버리고저항의싹은꺾여버린것만같았다. 하지만솔아, 공수부대의잔인무도한살육을목격한시민들의가슴에선뜨거운무언가가꿈틀거리며깨어나고있었다. 그것은생명과인간의존엄에대한자각이었다. 그리고그것을지켜내기위해저가슴깊은곳에서눈을뜨고있는생명에의근원적의지였다. 시위의양상은 19일오후부터뚜렷이달라지고있었다. 우선시위의주도세력이학생에서일반시민으로완전히바뀌어가고있었다. 또한학생시위를훨씬뛰어넘는치열성을보였고, 방어적인양상에서공세적양상으로바뀌었다. 금남로가톨릭센터앞 (5 월 19 일 ) 오후 1시반경살육진압을벌이던공수부대는점심식사를위해잠시조선대로이동하였다. 금남로에는공수부대의경비병력과경찰병력만이남아있었다. 시민들이슬금슬금모여들어어느새오전보다더많은숫자로불어났다. 오전에는볼수없었던 40대이상의중년층과부녀자들도많이참여하고있었다. 시위대는돌과화염병을던지며금남로를지키고있는경찰들을밀어붙였다. 공방전이계속되면서가스가자욱해지고해산을종용하는방송소리가요란하게울렸다. 이제시민들의분노의대상은공수부대만이아니었다. 자신들은피를흘리며죽어가고있는데한마디보도도하지않으면서쇼프로그램을내보내는방송또한증오의표적이었다. 일군의시민들은 기독교방송 이들어있는가톨릭센터차고에서취재차량 2대를끌어다불을붙인다음시동을걸어군경저지선을향해밀어붙였다. 불붙은차가바리케이드에부딪치며폭발하여군중들의환호성과함께화염이솟아올랐다. 오후 2시가조금넘어가톨릭센터옥상에공수부대병력이남아있다는소식이전해졌다. 시민들은가톨릭센터측에이들을넘겨줄것을강력하게요청했지만거절당했다. 격분한시민들이셔터를뜯고옥상으로올라가 2명의군인을붙잡았다. 공수부대원으로부터빼앗은총을흔들자시민들은환호성을질렀다.
38 그러나승리의환호성도잠시 11공수대원들이장갑차를앞세우고군중속으로돌진해왔다. 뒤쳐져빠져나가지못한시민들은무차별구타를당했다. 가톨릭센터안에서미처빠져나가지못한시민들이들이닥친공수부대원들에의해무수히구타와폭행을당했다. 오후 2시 50분경부터 11공수여단 3개대대와 7공수여단 2개대대가금남로를중심으로시내에투입되어마치전쟁에서적을대하듯진압작전을벌였다. 시민들은밀려나긴했지만결코진압되지는않았다. 산발적인시위가이어지며항쟁은점점확대되어갔다. 그리고이제시민들도당하지만은않았다. 고등학생대자보 타오르는눈빛의젊은고교생들이여! 조국의민주화는앉아서되는것이아닙니다. 금남로 3가지하상가의공사장으로피했던시민들은공사현장인부들에게각목을얻어대항하며광주공원방면으로물러나고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끝까지추격하며심지어는사태를보러나온주부들까지무차별구타하였다. 이를보고있던노인들이만류하자공수부대원들은노인들의머리를진압봉으로내리쳤다. 노인들은머리에서피를뿜으며쓰러졌다. 이모습을본시위대들이어디서그런힘이솟았는지일시에돌아서 좋다, 다죽여라! 라고외치며정면으로공수부대원들에게달려들었다. 상대적으로숫자가적은공수부대원들은겁을먹고도망치기시작했다. 이중한명이무리에서떨어져광주천을따라양림교쪽으로도망쳤는데시민들은끝까지쫓아갔다. 공수부대원은양림교를지나고다급해지자광주천으로뛰어내렸다. 시민들이던진돌중하나가공수부대원의뒤통수를정통으로맞췄고그는앞으로푹고꾸라졌다. 이를목격한광주적십자병원의료진들은격분한시민들의분노를만류하고부상당한공수부대원을치료한후돌려보냈다. 이러한일이곳곳에서벌어지자공수부대원들은소수인원으로는감히진압에나설수없게되었다.
39 오후 3시 27분, 장동문화방송국앞에는 3천여명의시민들이결집하였다. 그들은광주상황은단 1초도내보내지않으면서아무일없다는듯쇼프로그램만방영하는방송에격분하고있었다. MBC 취재차량한대가불태워지고 MBC 사장이직영하는전자제품점문화상사가불길에휩싸였다. 오후 4시 40분경대인동공용터미널앞에서는가장치열한전투가벌어지고있었다. 천여명의시위대가가드레일과공중전화박스로바리케이드를쌓고 50미터앞까지다가온공수부대에투석으로맞서고있었다. 계엄군의뒤쪽에서대기하고있던장갑차가갑자기튀어나와바리케이드를부수고시위군중을양쪽으로갈라놓았다. 하지만시민들은다시모여들었고수천명으로숫자가불어나치열한공방전을벌였다. 그때갑자기금남로쪽의광남로를따라서공수부대원을가득태운군용트럭 10여대가나타나시위대의후면을강타하기시작했다. 그들은시위대가흩어지지않자갑자기방독면을쓰면서최루탄을수없이쏘아댔다. 시위대는골목으로, 옥상으로, 공용터미널지하로흩어져피했다. 이중공용터미널지하도로피신했던시민들은아무도보지않는어두컴컴한곳에서대검에난자당해죽어갔다. 여기서죽은사람들의사망원인은거의다자상이었고칼에찔린상처가두세군데가넘었다. 또한로터리부근전투에서피투성이가된부상자를병원으로이송하던택시를공수부대원이세우자운전수는 당신이보다시피다죽어가는사람인데병원으로운반해야하지않겠느냐 고하소연했다. 공수부대원은다짜고짜차창을깨고운전수를끌어낸다음마구구타했다. 운전기사에대한난타사건은여러곳에서발생했고, 몇명의운전기사가죽었다는풍문이떠돌았다. 20일차량시위는이러한상황이크게작용했다. 오후 5시 10분경광주고등학교앞도로에서시위대와공수부대사이에충돌이발생했다. 장갑차한대가일대를누비고다니며위력시위를벌였는데시위군중들은광주고와계림파출소사이의중앙로에서기다리다가차량앞부분에달린감시경에일제히돌을던져깨뜨렸다. 감시경은눈역할을하는것이기때문에장갑차는움직일수없었다. 시민들은짚단에불을붙여출입구인뚜껑위에올려놓았다. 잠시후공수부대장교가뚜껑을열고 M16을무차별로난사하기시작했다. 이사격으로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이던김영찬군이세군데총상을입었다. 이외에도우발적이지만계엄군이 19일에도총기를발사했음이여러증언에서확인되고있다. 오후 7시경부터어두워지는거리의핏자국위에비가내리기시작했다. 시민들은밤 10시경까지산발적시위를벌이다집으로돌아갔다. 하지만그들의가슴에선추적추적내리는비가기름이라도되는듯항쟁의불길이더욱거세게지펴지고있었다.
40 4. 저들을몰아내지않으면우리가죽는다 _5 월 20 일, 항쟁 3 일째 추적추적내리던비는 20일오전 9시쯤그쳤다. 비가그치면서오전 10시무렵대인동시장주변에는 1,000여명의시민들이모여들어전날의잔혹한살육광경을이야기하며울분을토했다. 고등학생부터가정주부, 50대노년층까지합세한군중은이날새벽 6시에발견된김안부 (36세, 광주시월산 2동 ) 씨의시신에대해이야기하고있었다. 그의시신은전남주조장앞길에서발견되었는데, 검안서에는머리에타박상을당해사망한것으로기록되어있다. 그냥진압하기위해살해한모습이아니었던것이다. 또발가벗겨진채두손이트럭뒤에묶인채질질끌려다니다숨을거둔한대학생에대해서도이야기가되었다. 대인시장상인들은저들을몰아내지않으면우리가다죽을판인데그냥있을수없다며가게문을닫고시위에나섰다. 그들은광주고교방면을돌아시민관사거리로나아갔다. 시위대는금남로로나가기전에탱크를앞세운채길을봉쇄하고있는공수부대에막혀흩어졌다. 하지만이런식으로사방에서모여드는사람들이금남로주위에사람의바다를만들어가고있었다. 오후 3시금남로의시위군중은수만명으로불어났다. 유치원꼬마손을잡고나온할머니부터술집여종업원, 점원,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 인근음식점의종업원등등모든계층의전시민이쏟아져나온것이다. 경찰이쏜최루탄이터지기시작했다. 시민들은잠시물러났다몰려들기를반복했다. 저마다들고나온각목이나쇠파이프등으로는어쩔수없는터라시민들은금남로와중앙로의교차로부근에서연좌농성을시작했다. 차라리우리모두를다죽여라! 누군가외치며준비해온태극기를펼쳐흔들었다. 금남로의차량시위 (5 월 20 일 ) 시위군중이수만명으로불어났고수많은차량이헤드라이트를켜고일제히경적을울리면서나타났다. 시위의파고는점점거세져도청앞광장으로통하는여섯갈래의길을따라시민들의대열
41 이몰려들고있었다. 시위대는맨앞줄에드럼통이나대형화분을앞세우고공수부대를향하여한걸음씩밀어나갔다. 시위대와계엄군은치열한접전과소강상태를반복하고있었다. 오후 5시 50분, 충장로입구쪽의시위군중 5,000여명은스크럼을짜고도청을향하여육탄돌격을감행했다. 계엄군과충돌한후물러나온시위대는 살인마전두환은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복귀하라 는구호를외치며연좌농성을벌였다. 싸움은갈수록치열해지고시민들의피해는늘었지만군경이철통같이지키고있는도청은접근하기가어려웠다. 7시경갑자기유동쪽으로부터수많은차량이헤드라이트를켜고일제히경적을울리면서나타났다. 맨앞에는짐을가득실은대한통운소속 12톤대형트럭과고속버스, 시외버스 11대가섰고, 영업용택시 200여대가뒤를이었다. 트럭위엔 20여명의청년이태극기를흔들었고, 저마다각목과태극기를든청년과아가씨들이타고있었다. 차량의행렬은거대한파도로밀려와시위군중을해일로일으켜세우고있었다. 민중항쟁의양적 질적비약이이루어지는결정적순간이었다. 이에앞서오후 2시좀넘어서광주역부근에는 10대가량의택시가모여들어있었다. 손님을태워준게무슨죄냐, 우리를이렇게진압봉과대검으로죽여대면우리도영업을집어치우고싸울수밖에없다 며울분을털어놓는동안택시는 20여대로불어났다. 택시기사들은조직적대응을위해광주시내택시들을모두무등경기장으로모으기로결의하고흩어졌다. 오후 6시경무등경기장앞에는 200여대의택시가모여들었다. 그들은이제까지자행된공수부대의잔학상과택시기사들의피해를알리고성토한후 군저지선돌파에앞장서자 고뜻을모았다. 완강한군경저지선앞에서어찌할바를모르고있던시위군중들은그들이도착하자환호성을지르며감격의눈물을흘렸다. 시위군중은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곡괭이, 식칼, 낫등을들고차를따라군경저지선을향해돌격해들어갔다. 갑자기돌변한상황에놀란군경은엄청난양의최루탄과가스를쏘아댔다. 차창을깨고떨어진가스탄에질식한운전수들은군경저지선에서 20미터도못되는곳에차를멈췄다. 공수부대원들이운전수들을끌어내진압봉과구둣발로짓이기기시작했다. 밤이되도록차량을앞세운시위대의공세는도청을둘러싸고계속되고있었다. 그사이에운수노동자들이봉기했다는소식을접한시민들이계속모여들어금남로일대의군중은 20만명선을넘어섰다.
42 불에탄 MBC 건물 밤 9시경부터 12시경까지는공수부대원과시민들이광주시청을두고공방전을벌였다. 광주시청이공수부대가진압을위한대기장소로활용하고있었기때문이다. 시의외곽은군경의손이미치지못한지오래였고, 이제도청과광주역을제외한전지역이시위대에의해장악되었다. MBC와 KBS가시위대에의해점거되었고학동, 산수동, 계림동, 양동등대부분의파출소가이날밤방화되거나파괴되었다. 밤 10시경 MBC가불타오르기시작했다. 광주의소식은한마디도전하지않으면서삐끔삐끔말도안되는계엄군측의발표만흘리는방송에대한시민들의분노가드디어폭발한것이었다. 광주역과도청을중심으로벌어진심야의공방전은더욱치열해지고있었다. 광주역은고속도로가막힐가능성이큰상태에서계엄군의증원과보급을위한유일한통로였다. 그만큼삼엄하게지킬수밖에없어서광주역에서뻗어나가는다섯갈래도로에는겹겹이바리케이드가쳐져있었다. 밤 10시 30분한청년이인근주유소에서드럼통 2개에기름을가득채운다음불을붙이고광주역을향해차를몰았다. 청년은계엄군전방 20여미터에서밖으로뛰어내렸다. 차는바리케이드를부수고돌진하여역앞분수대를들이받았다. 휘발유드럼통이폭발하며하늘높이화염을뿜어올렸다. 시청에서광주역으로이어지는도로쪽에서도이와같은차량돌격이여러차례감행되었다. 수많은차량이분수대주위에서폭발하거나불에타고있었다. 더이상버티기어려운지경에이른계엄군들은 M16을난사하기시작했다. 돌을던지던시민들이여기저기서총탄에맞아쓰러졌다. 새벽 2시경버스한대를선두로전춘심 (32세, 여, 일명전옥주 ) 이가두방송을하는가운데 2,000명가량의시위대가광주역으로합세해왔다. 일부시민들은시외곽지역을차량으로누비고다니며시민들을광주역으로집결시켰다. 공수부대의무차별사격에도불구하고시위대의필사적인공격이계속되었다. 드디어새벽 4시경계엄군은광주역으로부터물러났다. 시민들은태극기를휘두르며시체를넘어광주역사로진격해들어갔다. 이겼다! 우리가공수부대를물리쳤다!
43 감격의함성이광주역을뒤흔들었다. 한편도청앞에서도총격이시작되어수많은시민들이쓰러져가고있었다. 자정을넘기며시위대는사방에서계엄군을포위하고일각일각조여들어가고있었다. 총성이몇방울리자일순시위대는물을끼얹은듯조용해졌다. 위협사격의기관총예광탄이줄을그으며밤하늘로날아가고있었다. 시위대열의앞에선사람들은죽음이눈앞에와있음을직감했다. 하지만아무도피하려하지않았다. 이윽고 M16의자동사격이시작되었다. 콩볶는듯한소리가울려퍼지며앞장섰던청년들이두손에돌을든채픽픽쓰러져갔다. 다시한번연발사격소리가들렸다. 일순시간이멎는것처럼거리는얼어붙었다. 시위군중들은본능적으로상체를굽힌채흩어져빌딩모퉁이에몸을숨겼다. 길위에는시체들이즐비했고아직죽지않은부상자들의신음과고함소리가들렸다. 저놈들이총을쏘았어! 우리도총이있어야해, 총이! 시민들은눈물을삼키며부르짖었다. 새벽 1시, 도저히그대로집으로돌아갈수없었던시민들은광주세무서로몰려갔다. 세금은다같이잘살자고내는거지, 미국놈들무기사다가제국민죽이라고내는게아니다! 군중들은외치며정문을박차고들어가기물을부수고불을질렀다. 이어서노동청도불타올랐다. 한시인은선량한군대가국민을향한살인도구로돌변한위와같은상황을다음과같이노래하였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 년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 년오월어느날이었다 밤 12시나는보았다총건으로무장한일단의군인들을밤 12시나는보았다야만족의침략과도같은일단의군인들을밤 12시나는보았다야만족의약탈과도같은일군의군인들을밤 12시나는보았다악마의화신과도같은일단의군인들을
44 아얼마나무서운밤 12 시였던가 아얼마나노골적인밤 12 시였던가. 김남주 학살 1 중에서 새벽부터광주에서외부로통하는모든시외전화는완전히끊겨있었고, 열차와고속버스도시내에진입이금지되어광산군송정리에서승객을내려놓았다. 20일오후에열린국무회의에서는최초의소요사태에책임을지고전국무위원이일괄사표를제출했다. 그러나아직도광주지역의심각한상황에대해선단한마디도공식적인보도가없었다. 5. 왜우리는총을들수밖에없었는가 _5 월 21 일, 항쟁 4 일째 아침이밝자마자시민들은수레에시신 2구를태극기로덮어싣고금남로를향해행진했다. 지난새벽광주역전투에서죽은시민이었다. 계엄군들이죽은시신들을트럭에던져싣다가다급한나머지빠뜨린게분명했다. 지금까지저놈들은우리형제들의시신을빼앗아가고, 단한사람의시민도죽지않았다고보도했습니다. 자, 똑똑히보십시오. 우리의친구우리의형제는이렇게죽어있습니다. 오전 9시금남로로몰려든시위군중은십여만명을넘고있었다. 모두들지난밤계엄군의연발사격을떠올리며무장의필요성을절실히느끼고있었다. 아시아자동차공장에가서차를몰고나옵시다. 우리도무장이필요합니다. 무장을하려면우선차량을확보해야합니다. 한시민이외치자 20~30명의청년들이모여들었다. 아시아자동차공장에는대형 소형버스, 장갑차를비롯한군용트럭완제품이 360대나있었지만운전을할줄아는사람이적어버스 7대만몰고나왔다. 아직도공장에차량이많이있다는소식을듣고많은시민들이버스를타고몰려가차량을몰고나왔다. 이때몰고나온차량은 APC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대형버스 22대등모두 80여대였다. 그리고이후 360대모두를징발해사용하였다. 중고등학생과젊은이들은몽둥이로차체를두드리고구호를외치며시외곽에서시민들을모아실어날랐다. 계엄해제하라, 김대중석방하라, 노동3권보장하라, 찢어죽이자전두환 등의구호가외쳐졌는데그때는민주화운동을해온사람들로문화선전대가구성되어차량
45 과시내곳곳에구호가적힌선전문구를붙이고있었다. 금남로에는동별로나온수백명의가정주부들이김밥등을함지에담아펼쳐놓고시위대에게나누어주고있었다. 긴박한전투현장에서아름다운식사공동체가이루어지고있었다. 오전 9시 50분, 금남로의시위군중들은도청을중심으로계엄군과대치한가운데김범태 (27세, 조선대법대 1년 ), 전춘심등세사람을대표로뽑아협상을시도하였다. 시민들의요구를도지사에게전달토록한것이다. 1. 유혈사태에대한당국의공개사과 2. 연행시민, 학생들의전원석방과입원중인부상자의소재, 생사를파악하게해줄것 3. 계엄군은 21일정오까지광주시일원에서완전철수할것 4. 전남북계엄분소장과시민대표들의협상을주선할것 5. 이런문제들에대해도지사가직접시민들앞에나와서설명할것 이때도청을중심으로한여러갈래도로에는남녀노소구분없이 30만가까운시위군중이운집해있었다. 시민들은도지사가나오기를기다리며애국가를부르고구호를외쳤다. 구용상광주시장이나섰지만시민들의야유를받고물러났다. 10시 50분경, 장형태도지사는경찰헬기를타고금남로상공을돌면서 공수부대를철수시킬테니광주시민들은질서를지켜달라 고하며시민들을무마하려했다. 시민들은도지사가자기들앞에나타나지않은데대해화를내긴했지만공수부대를철수시키겠다는말에큰기대를걸고 12시를기다렸다. 12시가되어도공수부대가철수할기미를보이지않자시민들은힘으로그들을몰아내리라마음먹었다. 공수부대병력은장갑차를앞세운채 20열횡대로저지선을구축하고있었다. 광장분수대주변에서는헬기가자주이착륙하며도청의중요서류들을실어나르고있었다. 시민들이시위대중간에있던차량을앞으로빼자긴장감이감돌았다. 그때갑자기시위대가모는장갑차한대가앞으로나오면서공수부대의저지선을향해돌진했다. 오후 1시조금못된시각이었다.
46 헬기로도청의중요서류를실어나르는모습 공수부대의저지선이순식간에무너지면서공수부대원들이도청을향해도망치기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부대구분도없이뒤섞였고, 공수부대의장갑차가급히후진을하다가권용운일병을치어사망케하고다른한명에겐중상을입혔다. 저지선이붕괴되자시위대의트럭과버스들이장갑차의뒤를따라도청앞분수대를돌아나오기도하고도청을향해진격하기도했다. 12시 58분광성여객버스가접근했을때분수대근처의일부병력이사격을가했다. 운전사는즉사하고버스는수협전라남도지부건물에처박혔다. 그리고 1시정각느닷없이애국가가방송되면서일제사격이시작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엎드려쏴자세로집단발포를했다. 사격은메가폰으로사격중지명령이내려질때까지 10분간계속되었다. 금남로에는시신들이나동그라져있었고부상자들의신음과외침소리로지옥과도같았다. 용감한시민들이부상자들을구하기위해거리로뛰어나왔지만그들도저격수의총탄에쓰러져버렸다. 시민들은도저히믿을수없는사태에넋을잃었고, 공포감과분노로치를떨었다. 1시 30분경, 한대의장갑차가텅빈금남로를도청을향해질주했다. 상의를벗고머리에흰띠를두른청년하나가그위에서태극기를흔들며절규하고있었다. 광주민중항쟁민주애국학생임균수추모비원광대학교학생임균수는 1980년 5월 21일전남도청앞에서계엄군이쏜총탄에맞아사망했다. 그의동료들은 1981년그의넋을기려한의관 ( 구 ) 앞에태산목을심었으나, 다음날철거되었다. 한의대동기들은 1985년부터추모비건립모금을시작하여 1987년 임균수광장및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를출범시켰고, 그해 9월사회과학대앞에추모비를건립했다. 광주만세! 그러나그것도잠시뿐. 저격수의총탄에청년의고개가꺾어지고장갑차는화순방면도로를 향해사라졌다. 이어서금남로한국은행광주지점앞에 5~6 명의청년들이태극기를들고나타
47 났다. 전두환물러가라!, 김대중을석방하라!, 비상계엄해제하라!, 공수부대물러가라! 그들역시저격수의총탄에쓰러지자다른청년들이그들을골목으로끌어내고피묻은태극기를집어들고구호를외쳤다. 2시 55분경부터는도청별관옥상과수협전남지부옥상, 도심빌딩위에수명의저격병들이등장했다. 저격병들은지나가는행인은물론주변건물의창으로내다보는사람들에게도총격을가했다. 21일오후 1시부터 10여분사이에공수부대의집단발포로전남도청앞과금남로현장에서사망한사람은 54명, 부상자가 5백여명에이른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외에도시내도처에서자행된공수부대의과잉진압행위와총격으로숨진사람들이많았다. 전남대앞에서도시위대와계엄군사이의공방전이벌어지고있었는데오후 2시경 3공수여단병력들이시위대를향해일제사격을퍼부었다. 이때전남대학교근처신안동에살고있었던최미애씨는영어교사인남편을집앞에서기다리고있었다. 그녀는세살배기아이의어머니로임신 8개월째를맞이한무거운몸이었다. 그녀는공수부대가쏜 M16 총알에머리를맞아즉사했다. 같은집에살다가참변을목격한친정어머니의말에따르면당시임신 8개월째이던딸의뱃속에서는아기가 천장만장뛰는게보였다 고말했다. 집단발포에쓰러진부상자 딸의시신은연탄리어카에실려변두리공터에가매장되었다가항쟁이끝난후시검을거쳐망월동 5 18묘지에묻혔다. 장의차도구할수없었고시외곽은공수부대가눈에불을켜고지키고있었기때문에그렇게한동안변두리공터로옮겨져가매장으로묻혀있었던것이다. 광주시내모든병원은총상부상자들로초만원을이루었다. 전남대병원, 기독교병원, 적십자병원, 각종외과 내과병원, 심지어는산부인과병원에까지총상사망자와부상자들로넘쳐났다. 아비규환의와중에서총상환자들을살린것은고급약품이나최신기술이아니었다. 한사람이라도더살려내기위해전력을다한의사와간호사들, 병원으로달려와자신들의단한방울의피라도보태겠다며거리에까지길게줄을선헌혈행렬이었다. 한시인은국군이국민에대한살육자로돌변한이때의상황을암담한밤 12시로다음과같
48 이노래하였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 년오월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 년오월어느날이었다 밤 12시도시는벌집처럼쑤셔놓은붉은심장이었다밤 12시거리는용암처럼흐르는피의강이었다밤 12시바람은살해된처녀의피묻은머리카락을날리고밤 12시밤은총알처럼튀어나온아이의눈동자를파먹고밤 12시학살자들은끊임없이어디론가시체의산을옮기고있었다 이얼마나끔찍한밤 12 시였던가 이얼마나조직적인학살의밤 12 시였던가. 김남주 학살 1 중에서 팔십년오월의꽃박금희순의비 5 18민중항쟁으로인해많은사람들이죽거나부상을당해헌혈운동이벌어졌다.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학생박금희는 1980년 5월 21일광주기독병원에서헌혈을마치고귀가하다가계엄군의총탄에맞아사망했다. 전남여상동문회는박금희의넋을위로하기위해 1991 년 5월 23일학교본관앞에순의비를건립했다.
49 5 18 민중항쟁사적 : 화순역광장 전라남도는 1998 년 5 18 민중항쟁과관련된주요장소 80 개소를선정하여사적지보존사업을시행했다. 화순역광장은군민들이 5 18 민중 항쟁에참여할것을결의했던곳이다. 이를기념하여안내판과표지석이설치되었다. 한편도청앞집단발포직후광주시민들은자신들의공동체를지키고더이상의희생을막기위해무장할필요성을절감했다. 차량에탑승한청년들은무기를구하기위해곧장광주시외로빠져나가기시작했다. 2시 30분경, 시위대는광주로차출되어비어있는나주경찰서삼포지서, 금성파출소무기고를부수고 M1 소총과실탄을접수했다. 화순에서도화순탄광무기고를접수, 광산노동자들의도움으로 TNT와소총등을손에넣었다. 이무기로무장한시위대들은한무리는광주시내로, 다른한무리는나주, 목포, 함평, 무안, 해남, 강진등지로진출하여궐기를호소했다. 각지에서무기를실은차량들이오후 3시를전후해서광주에들어와지원동, 산수동, 백운동로터리등외곽지역에서시민들에게무기를나누어주었다. 중학생부터장년층까지수백명이공수부대를몰아내기위해총을들었다. 이무장시위대를광주시민들은시민군이라불렀다. 시민군이최초로중심가에나타난것은오후 3시 15분경이었다. 이들은충장로광주우체국으로부터도청방향으로진격하였다. 2,000명정도의시위대가그뒤를따르고있었다. 시민군대오가나타나자시민들은환호성을지르며맞이했다. 솔아, 현대식 M16과는상대가안되는, 제2차세계대전이나 6 25전쟁에서사용되었던 M1, 칼빈이었지만그것은단순한총이아니었다. 그것은광주시민들의꺾일수없는기개이자자존심이었다. 오후 3시 30분무렵부터시민군과공수부대사이에총격전이벌어졌다. 광주외곽으로부터계속무기가반입되어시민군의숫자는계속늘어났다. 시민군은도청을포위하고금남로, 노동청, 광주천변도로, 충장로, 전남대의과대학방면에서공격을가했다. 오후 4시 15분경, 전남대의과대학 12층옥상에시민군이 LMG 2정을도청방향으로설치하여위협을가하였다. 그러나시민군은 LMG를발사하지는않았다. 12층높이로부터 300미터밖에떨어져있지않은 4층높이의도청을향해사격을가하면공수부대원들에게많은사상자가날수도있었다.
50 21일오후 4시광주의공수부대에주둔지로철수하라는명령이하달되었다. 이에따라도청의 11공수여단 APC 장갑차가케리바 50을난사하며도로를왕복해퇴로를확보했다. 그리고 4시 30분 11여단 3개대대와 7여단 35대대병력이도로양편에 M16을난사하며장갑차를따라빠져나가기시작해 5시 50분경조선대에집결하였다. 그리고조선대에남아있던병력들과함께도로를따라, 그리고조선대뒷산을넘어화순군에인접한주남마을일대로철수했다. 이철수과정의무차별사격으로또무고한시민들이많이살상되었다. 무장한시민들은결의는높았지만아직조직적전투를벌일능력은없었다. 그리고총기가중학생부터장년까지무차별적으로나뉘어져사고가날위험도컸다. 도청앞전투에서한예비군장교가일어나공수부대를물리치려면조직적으로싸워야한다는것을힘주어말했다. 시민들은이주장을받아들여오후 4시경총기와차량을가지고광주공원으로몰려들었다. 미성년자나총을다룰줄모르는사람들이내놓은무기를 10대후반에서 20대사이의청년들이받아전투조직을편성하였다. 예비역장교들이나사병출신들이총을안전하게다루는법을가르쳤다. 명실상부한시민군이편성된것이다. 김동수열사추모비 조선대학교전자공학과학생김동수는 5 18 민중항쟁의마지막항전이벌어졌던 5 월 27 일새벽전남도청에서사망했다. 지광김동수열사 기념사업회 는그의죽음을되새기기위해 1992 년 6 월 7 일조선대학교서석홀앞광장에추모비를건립했다. 이들은총소리가멈춘것을깨닫고어스름이깔리는저녁무렵금남로양편을따라도청으로다가갔다. 8시경선봉대가총을몇방쏘며도청안으로뛰어들었다. 도청은텅비어있었다. 드디어시민군이공수부대를광주에서완전히몰아내고승리를쟁취한것이었다. 물론공수부대의퇴각조치는신군부의작전에따른것이었다. 그것은일반국민들에게광주상황을왜곡전파하여광주를고립시킨다음군대의힘을일거에집중시켜광주민중항쟁을분쇄한다는것이었다. 하지만신군부의의도가어떠했든광주시민들에게그것은피로쟁취한승리임에틀림없었다.
51 6. 해방광주, 자긍심의시민자치공동체 _5 월 22 일 ~26 일, 해방광주 솔아, 사람에게자기를긍정하는마음은가장중요한근거이자힘이다. 그렇기때문에전태일은기계처럼사는자기부정을거부하고목숨을던지면서까지한사람으로서자기를긍정하려하였다. 이자기를긍정하는마음은한사람에게서멈추지않는다. 전태일이피웠던자기긍정의불꽃은수많은사람들의마음에자기삶에대한본질적물음으로번져면면히이어졌다. 1980년 5월의광주시민들역시마찬가지였다. 목숨에대한위협을무릅쓰고한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켜냈다는자긍심은서로의가슴에반향을일으키면서무한한신뢰에바탕한아름다운공동체를만들어냈다. 그리고전두환신군부의칼날이광주만이아닌온국민의가슴에꽂힌것이듯그자기긍정의힘또한광주시민만의것이아니라온국민의것이었다. 광주는시민들의거대한공동체로거듭나고있었다. 5월 22일아침일찍부터시민들은금남로로모여들었다. 시민들은폐허가되다시피한거리를자발적으로정리하기시작했다. 말라붙은핏자국을물로씻어내고, 불탄차와바리케이드로썼던전화박스, 대형화분들을치웠다. 거리는제법산뜻한모습을되찾고있었다. 하지만정말중요한것은계엄군의봉쇄작전을어떻게극복하느냐하는것이었다. 광주는외부와통하는통신과교통이완전히두절된상태였다. 광주시민들은이러한어려움에현명하게대처했다. 우선매점매석을방지하여시내에있는생활필수품을최대한활용하였다. 쌀집에서는한번에두되이상의쌀을팔지않았고, 담배가게주인은한사람에게한갑씩만팔았다. 모든가게가마찬가지였다. 또주부들은동별로김밥을만들어시민군들에게제공했고가게들에서도빵, 우유, 드링크제등을아낌없이무상으로내놓았다. 지금까지자랑스럽게이야기되는사랑과상부상조의민중공동체를통해악조건을극복해나가고있었다. 이과정에서시민군과학생들의역할이컸다. 그들은치안유지를위해파괴행위를금지시키고, 주요시설과인사들에게경비를붙였다. 그리고시민들의교통편의를제공하기위해차량들에번호를붙여지역별로배치하였다.
52 시민군에게식사를제공하기위해 투사회보 광주시민의민주화투쟁 드디어전국적으로확산되다!! 수습대책위원회 21일까지의민중항쟁은계획되지않은자기방어적투쟁으로서명확한한계를가지고있었다. 하지만광주시민들은지도부가없는상태에서도흘린피와땀을바탕으로나름대로의길을찾아나가고있었다. 1970년대말광주시광천동성당을중심으로 들불야학 이운영되었다. 들불야학에참여했던강학과학생 7명은 5 18민중항쟁을전후하여유명을달리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이들의생전활동을기억하고널리알리기위해 2002년 5월 19일 5 18자유공원입구에기념조형물을건립했다. 시민들은무엇보다도진실을간절히원하고있었다. 공수부대가철수한후정부는언론을통해대대적인왜곡선전을하고있었다. TV에서는연일돌과화염병을던지는시위대와그에맞아다리를절며걷는공수부대원따위의화면만을내보내고있었다. 신문은연일광주시민을폭도로, 항쟁을폭동으로, 간첩과불순분자에의한책동으로몰아붙였다. 광주시민들은얼마
53 나많은사람들이죽고다쳤는지알고싶었고자신들의절박한상황을밖에알리기를원했다. 이러한시민들의요구에응답한것이바로 투사회보 였다. 윤상원을중심으로한광천동들 불야학팀은 22 일 투사회보 제 2 호를발간배포하고있었다. 들불열사기념조형물 * 윤상원윤상원은 1950년 8월 19일전라남도광산군임곡면신룡리에서출생했다. 본명은윤개원이다. 살레지오고등학교와전남대학교정치외교학과를졸업했다. 그는주택은행에입사했지만, 노동운동을위해사직하고 1978년 10월경광천공단에취업했다. 이곳에서박기순의권유로 들불야학 강학으로활동했다. 그리고 19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집회에서광주 전남을대표하는중앙위원으로선임되었다. 1980년 5월 14~16일광주시도심에서전개된민주화를촉구하는시위에참가했던윤상원은 5 18민중항쟁이본격화되자점차항쟁의중심이되어갔다. 그리하여 5월 25일이루어진민주시민투쟁위원회결성에큰영향을미쳤고대변인이되었으며, 26일도청홍보실에서개최된내외신기자회견을주도했다. 5월 27일새벽, 그는시민군에게 우리가저들의총탄에죽는다고할지라도그것이우리가영원히사는길입니다 라고마지막연설을하고, 끝까지계엄군에맞서다사망했다. 1982년에윤상원과들불야학강학으로활동하다가사망한박기순의영혼결혼식이열렸다. 1980~1990 년대민주화운동과정에서애창되었던 님을위한행진곡 은바로이영혼결혼식에서불리었던추모곡이다. 또한시민군들은 21일도청에진입한후상황실을설치하고계엄군이버리고간무전기로군의상황을파악했다. 그리고 22일아침신원이확인된사망자명단을옥외방송으로알려주었다. 시민들은오후가되어도돌아가지않고모여들어자발적인시민궐기대회를열었다. 가정주부, 상인, 농민, 종교인, 학생들이연단에뛰어올라울분을토하고자기나름대로투쟁방향에대한의견을피력했다. 진실이담긴외침들이모두의가슴을뜨겁게달구었지만그요구를수렴해투쟁을조직하고발전시켜나갈지도부는형성되고있지못했다. 이러한지도력의공백을틈타만들어진것이 5 18수습대책위원회 였다. 22일오전도청에출근한정시채부지사는지역유지들을모아회의를거듭한끝에수습대책위원회를만들어계엄당국과협상을시도하기로하였다. 지역유지만으로시민들의호응을받기어렵다고생각한정시채부지사는광주지역재야인사들에게참여를요청했다. 남동성당조비오신부, 홍남순변
54 호사, 송기숙, 명노근전남대교수등이오전 11 시경도청으로나가수습위에참여했다. *5 18수습대책위원회 5 18민중항쟁이본격적으로전개되었던기간은약 10일동안이었다. 계엄군이전남도청에서철수한다음날인 5월 22일, 전라남도부지사는상황을수습하고대책을강구하기위해친여 재야인사들을소집하여 5 18수습대책위원회 를결성했다. 그런데이들은평상시입장에서 5 18민중항쟁을바라보고있었던만큼, 사건을파악하는관점이크게차이가있었고, 수습대책에서도상당한이견을보였다. 수습대책위원회는부지사가모임을소집했던특성상계엄당국의요구를수용하는방향으로대안을마련하려했으나, 재야인사들의강력한주장이반영되어합의안이도출되었다. 그러나계엄당국은수습대책위원회의안을사실상수용하지않았고, 시민의지지를받지도못했다. 이에따라수습대책위원회는구성원과명칭등을변경하여 시민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가되었다. 수습위의토론과정에서의견이둘로갈렸다. 정부지사와지역유지들은총기반납이최우선과제라고했고, 재야인사들은계엄당국의사과가선행되어야무기가회수될수있다고주장했다. 결국다음과같은 7개요구조건에합의하고정시채부지사와이종기변호사, 장휴동태평극장사장등이전남북계엄분소로가서오후 1시반경김기석부사령관과협상을벌였다. 1. 사태수습전에군을투입하지말라. 2. 연행자를전원석방하라. 3. 군의과잉진압을인정하라. 4. 사후보복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에대한보상. 7. 이상의요구가관철되면무장을해제하겠다. 오후 5시경협상대표로갔던수습대책위원들이돌아와 10만시민앞에차례로올라와협상결과를보고하였다. 유혈을방지하고질서를유지하자 는수습위제안에시민들은열렬한박수를보냈다. 또수습위원들은계엄분소장이개인적으로는과잉진압을인정했다고보고했다. 하지만 무기를회수, 반납하고치안을계엄사에맡겨야한다 는장휴동씨의보고에대해서는분노에찬야유가터져나왔다. 시민들은 굴욕적인협상에반대한다!, 계엄을해제하라!, 전두환을처단하라! 등의구호를외쳐댔다. 수습위원들은시민들의야유와반대에부딪치자연단을내려와도망치듯이피해버렸다. 그러자김창길 (23세, 전남대농경과 3년 ) 등학생들이 이번사태는대학생이책임을져야할사건이기때문에우리가사태수습을책임져야한다 고나섰다. 송기숙, 명노근교수는이학생들을모아전남대, 조선대, 전문대생각 5명씩 15인으로학생수습위원회를만들게했다.
55 5 18기념공원광주시쌍촌동소재상무대는 5 18민중항쟁의진압을주관했던전투교육사령부가주둔했던곳이다. 5 18민중항쟁이후상무대에대한부정적이미지가고착되고, 도시발전을저해한다는비판이쇄도함에따라 1994년전라남도장성군으로이전했다. 2001년 4월상무대가이전한터의일부인 204,985m2 에 5 18기념공원이조성되었다. 주요시설은 5 18현황조각및추모승화공간, 5 18기념문화관, 오월루, 대동광장, 민주학생기념탑등이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주로계엄사와의협상을맡게되었고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직접적인대민업무를맡는것으로자연스럽게역할분담이되었다. 위원장김창길, 부위원장김종배 (27, 조선대 3년 ) 를중심으로한학생수습위원회는총무에정해민 (23, 전남대경제과 4년 ), 대변인에양원식 ( 조선대 ), 허규정 ( 조선대 ) 등을임명하고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등의부서를두었다. 신군부의광주고립화작전과미국, 그리고시외곽에서의민간인학살 광주의항쟁은 21 일부터목포, 함평, 무안으로, 나주, 영산포, 영암, 강진, 해남, 화순으로확 산되기시작했다. 전라남도전역으로의시위확산은신군부에게커다란부담이되었다. 광주의 차량시위대는인근의경찰서무기고를점령하여다량의총기와실탄을확보했을뿐만아니라 반실업상태의농촌청년들을광주로실어날라시민군의전투력을강화하고있었기때문이다. 신군부는공수부대를광주시내에서철수시키고다른작전을구상할수밖에없었다. 신군부는우선 21 일밤부터 3 개공수여단과 20 사단, 전교사병력으로광주로통하는모든 교통망을봉쇄했다. 이것은항쟁이타지역으로확산되는것을막아광주를고립시키는일종의 군사적공격이었다. 그리고무력소탕작전의준비작업이기도했다.
56 광주외곽으로통하는도로는모두봉쇄되었다. 신군부는군사공격과함께정치적, 이데올로기적공격도본격화했다. 꼭두각시인언론매체를활용하여민중항쟁을 고정간첩과깡패, 불순분자, 김대중잔당들이조직적이고계획적으로지역감정을자극하는유언비어를유포, 선량한시민들을선동해서일으킨폭력난동 으로매도하였다. 무력진압의명분을마련하려는의도였다. 그리고아울러광주시민내부를분열시키기위한공작과심리전을집요하게펼치고있었다. 미국은이러한신군부의광주고립화작전과진압작전을지원하고있었다. *5 18에서미국의역할 12 12군사반란은군대의이동을수반하는것이었다. 따라서한미연합사령부과미국대사관은이에관한상황을파악하고있었다. 미국은사건발발초기에는 쿠데타 로명명했으나, 며칠뒤에는신군부와충돌을피하기위해고전적인의미의쿠데타가아니라고하면서이중적태도를취했다. 1980년 5월전개된 민주화의봄 국면에서도군부는시위에대처한다는명목으로군대를이동했다. 한국과미국의군사작전통제권협정에따라일체의과정은미군에통보되었고, 미국의승인이필요했다. 5월 17일신군부의대규모군대투입계획에관한미국의입장은 헌법개정과민의에의한민간정부선출을위한노력이즉시재개되어야한다 는것이었다. 미국은사실상군사반란을받아들이고있었던것이다. 미국은 1989년 6월 19일 1980년 5월광주에서일어난사건에대한미국정부의성명서 를발표했다. 미국은성명서에서첫째, 사태의심각성을알지못했고, 이를인지한뒤에는당사자들에게자제를촉구하고대화로해결하라고요구했다. 둘째, 제20사단의재투입통보를마지못해받아들였으나, 이사단은한미연합사의작전통제권에서해제되어있던상태였다. 셋째, 북한으로하여금한국정세를오판하지않도록경고했고, 예방조치로미공군및해군부대를파견했다고밝혔다. 하지만 5 18민중항쟁당시시민들은미국이신군부를제압하기위해일련의조치를취했으며, 항공모함코럴시호를한국해역에진입시켜신군부를진압하려한다고오판했다. 미국이신군부를방조또는지원하는입장에서일련의조치를취했다는것을시민들이알게되면서미국에대한인식에변화가생기기시작했다. 5월 22일미국방성대변인토머스로스는 존위컴주한유엔군및한미연합사령관은그의작전지휘권아래있는일부한국군을군중진압에사용할수있게해달라는한국정부의요청을받고이에동의하였다 고밝혔다. 3개공수여단의학살을묵인한데이어 20사단의광주무력진압투입을허용한것이다. 그뿐만아니라미국은 5월 23일 12시부로 33사단 1개대대병력에대한작전통제권을 소요사태확대에대비, 광주지역질서유지를위해 이양해달라는
57 신군부의요청을즉시받아들였다. 또한미국은신군부의정치적, 이데올로기적광주고립화를지원하였다. 미국행정부는남침의징후가전혀없음에도불구하고 5 18민중항쟁이더격화될경우남침을야기할수도있다는경고를계속했다. 그리고실제로조기경보기와항공모함을급파함으로써일반국민이 5 18민중항쟁을불안하게생각하도록분위기를조성하였다. 그럼으로써광주를정치적으로고립시키고무력진압을정당화하는데크게기여한것이다. 신군부의군사적광주외곽봉쇄가일종의군사적공격이었음을, 그봉쇄선에서일어난수많은민간인학살이웅변해주고있다. 몇가지예만들어보기로하자. 광주교도소는광주 ~ 담양간국도와순천행고속도로사이에위치해있다. 담양은광주경제권에속하는지역이어서광주에직장이있는사람이나광주에물건을사고파는사람들이통과하지않으면안되는곳이었다. 3공수여단은 21일오후 7시경부터이도로를봉쇄하고차량과행인에게무차별로총격을퍼부었다. 22일오전김성수씨부부는 5살짜리딸아이를안고귀가하는중이었다. 김씨는트럭으로채소를실어다광주에서파는일로생계를꾸리고있었는데, 이날일을마치고진도의집으로돌아가는길이었다. 제발통과시켜달라고애원하다가안된다고해서할수없이차를돌려광주로돌아가려고하는데갑자기뒤에서총을난사했다. 이때문에다섯살짜리딸아이가총을맞아하반신이마비되었고아내는총상후유증으로세상을떠났다. 1989년 2월 22일, 광주특위제28차청문회에서김성수의증언 광주교도소앞에서이렇게사망, 부상당한사람은공식확인된사례만사망이 10명이고부상이 12명이다. 광주 ~ 화순간도로의길목에위치한주남마을 5월 23일오후 2시경, 길가숲에서잠복중이던공수부대원들이지나가던버스를무차별집중사격을가해이차량을벌집으로만들어버렸다. 그결과버스안에타고있던승객 18명중 15명이현장에서즉사하고살아난나머지 3명이생포되었는데그들은여고생 1명과남자 2명이었다. 1980년 5월 21일저녁계엄군은전남도청에서철수하여광주시외곽으로이동했다. 5월 23 일지원 2동주남마을인근에매복한계엄군이전라남도화순으로향하던소형버스를공격했다. 1989년 1월 5일주남마을인근계곡에서암매장된시신 2구가발견되었는데, 채수길과양민석으로밝혀졌다. 마을사람들로구성된 주남마을5 18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 는 2010년 5 월 4일이들을추모하며위령비를건립했다.
58 군인들은이들을데리고산으로올라가다가장교의명령에따라남자 2명을사살해버렸다. 버스승객들은모두현장에서암매장되었다가항쟁이끝난보름후에야발견되었다. 그들의시체는서너발의총탄을맞았던것으로보였다. 이끔찍한학살은유일한생존자였던당시 17세의여고 1년생이었던홍금숙씨등을통해서밝혀졌다. 위령비 당시고등학교 1학년학생이었다. 오빠를찾으러시내에나왔다가집으로돌아가는차를얻어탔다. 중간에계엄군이차를세우라고했다. 그러나운전사가차를세우면죽을것같아차를세우지않고달렸다. 그러자계엄군이총격을가해타이어가터지면서차가섰다. 차내에서사람들이응사를했다. 그러나이내버스에는산속으로부터집중사격이가해져응사를멈추고손을흔들고, 손수건을흔들며쏘지말라고애원했지만사격은계속되었다. 사격이멈추고계엄군이다가와발로툭툭차며시체를헤아렸다. 이때나는아파서소리를질러계엄군이죽지않은것을알았고, 그외남자 2명이부상을당한채함께산길로끌려갔다. 계엄군이시체를셀때 15명이죽었다고했다. 경운기를타고끌려가면서왜이런식으로이렇게같은동족끼리꼭이래야되냐고군인아저씨에게물었다. 그러니까군인한명이대검을딱들이대고너도유방하나잘리고싶냐고위협을하였다. 산길로끌려올라가니좀높은사람이뭐하러데려왔느냐며사살하라고그랬다. 그래서남자두명은살려달라고애원을하는데도군인들이다시오던길로끌고내려갔다. 그리고나만그곳에서헬기로후송되었다. 그때남자부상자한명은상처가심하지않았다. 이두사람은후에사살당했다고들었다. 당시군인한명이오전에도 11명이탄버스 1대가그앞에못미쳐서총격을받고모두사망했다고말해주면서죽고싶지않으면말을잘들으라며보호를해주었다. 1989년 1월 27일, 광주특위제26차청문회에서홍금숙의증언 24일엔광주외곽지대에서계엄군들끼리오인전투가있었다. 광주 ~ 나주간국도길목인송암동은 20사단병력이봉쇄작전을펼치고있던지역이었다. 주남마을뒷산에주둔하고있던공수부대 7, 11여단병력은오전 9시경 20사단보병에게임무를넘겨주고송정리비행장으로떠났다. 7공수여단 2개대대는헬기로떠나고 11여단은 APC 장갑차를앞세우고 54대의트럭
6 7 8 9 1 12 13 14 15 1-1 16 17 1-2 18 1-3 19 1-4 20 2 22 23 24 25 2-1 26 2-2 27 2-3 28 2-4 29 2-5 30 3 31 32 33 34 3-1 35 3-2 36 3-3 37 3-4 38 4 39 40 41 42 4-1 43 44 45 4-2 46 47 4-3 48 49 4-4 50
More information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More information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More information¹é¹üȸº¸ 24È£ Ãâ·Â
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More information(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More information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More information(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More information01¸é¼öÁ¤
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More information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More informationÈ޴ϵåA4±â¼Û
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More information741034.hwp
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More information¿©¼ºÀαÇ24È£
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More information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More information178È£pdf
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More information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More information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Ⅰ 일자 연 표(1948~2008) 감사관련 주요사항 일자 국내 주요사항 1948년 5. 10 5. 31 8. 5 8. 15 제헌국회 의원 선거 제헌국회(제1회 임시국회) 개원 (5.31.~12.18.) 국회, 의장 李承晩, 부의장 申翼熙 金東元 선출
More information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More informationⅠ. 지방의회기본현황 1 Ⅱ. 지방의회상임위원회현황 5 1. 총괄내역 8 가. 상임위설치의회수 8 나. 위원수별상임위원회수 10 2. 의회별내역 12 Ⅲ. 지방의회정당별등현황 37 1. 정당별및성별현황 41 2. 의원 1인당인구수 55 3. 직업별현황 69 Ⅳ. 지방의회의장협의회현황 83 1. 전국시 도의회의장협의회 일반현황 85 2. 전국시 도의회의장협의회
More information대학생연수용교재 선거로본대한민국정치사
대학생연수용교재 선거로본대한민국정치사 1 ----------------------------------- 1 2 -------------------- 3 1. -------------------------- 3 2. ------------------------------ 5 3. ------------------------------ 7 3 -------------------
More information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2012. 5. 14.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 1 - 그림 1 쓰나미의발생과정 그림 2 실제쓰나미의사진 ρ - 2 - 그림 3 땅을파는모습그림 4 완성된수조의모습 - 3 - 그림 5 삼각기둥그림
More informationp529~802 Á¦5Àå-¼º¸í,Ç×ÀÇ
제5장 >>> 성명서 선언문 항의 - 건의서 및 각종 공한 取材妨害 正 副統領 選擧 取材기자 暴行사건(서울)에 대한 聲明 1960년 2월 14일 / 聲明書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3일 영등포구청 앞 노상에서 한국일보 趙鏞勳기자와 미국 CBS서울주재 韓永道기자가 취재임무 수행중 수명의 폭력한들에게 피습된 불상사의 진상을 검토한 끝에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에
More information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More information조사구번호 가구번호 - 한국종합사회조사 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종로구성균관로 전화
조사구번호 가구번호 - 한국종합사회조사 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종로구성균관로 전화 srckgss@skku.edu http://src.skku.edu http://kgss.skku.edu 인사말씀 안녕하십니까 저희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에서는지난 년이래해마다한국종합사회조사 를시행하고있습니다 이조사는한국사회를종합적으로파악하고세계의주요국가들과비교연구하는데필요한자료를만들어내는목적이있습니다
More information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More information갈등관리 리더십 연구결과 보고서.hwp
- 3 - - 4 - - 5 - - 6 - - 1 - - 2 - 김영삼정권 (1993-1997) 김대중정권 (1998-2002) 노무현정권 (2003-2007) 이명박정권 (2008-2012) 93 94 95 96 97 98 99 00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방폐장건설갈등사례 (1991-2005.11) == == ==
More information±³À°È°µ¿Áö
은 국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역사와 체험의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국립경찰박물관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박물관은 역사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환영 환송의 장 등 다섯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어 경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찰의 업무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찰의
More information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More information해피메이커 표지.indd
Contents _ 02 _ 04 _ 06 _ 08 _ 14 _ 15 _ 16 _ 21 _ 24 _ 30 _ 32 _ 35 _ 38 _ 44 _ 56 _ 62 _ 66 _ 68 _76 _84 _86 _92 _112 COVER STORY CEO Message 02 03 KSD HISTORY HISTORY 2006-2010 2011-2012 04 05 ISSUE
More information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1960 년대 1960 년 35 1960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36 37 1960 년 [ è ] 1851 1 [ ] 1 é é é 1851 É 1960 년 2 1 2 11 1952 22 38 1961년 1961년 39 1961 년 3 월 14 일, 한국일보 4 면, 2 3 2 3 40 1962년 1962년 41 1962 년 1
More information....pdf..
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More information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More informationITFGc03ÖÁ¾š
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More information141018_m
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More information071115-2
Copyright eyesurfer. All rights reserved.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04면 종합 -9-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내일신문] 17면 산업/무역 - 11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37면 인물 - 16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동아일보]
More information24011001-07072015000.ps
Economy p/06 market index 코스피 코스닥 2053.93 (-50.48) 752.01 (-17.25) 금리 환율 1.83 (변동없음) 1126.30 (+2.80) (국고채 3년) KT, 콘텐츠 무단 사용 (원 달러) 메트로 2015년 7월 7일 화요일 제3252호 www.metroseoul.co.kr 지난 5월 22일 충남 천안에서
More information<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ISSN 2288-5854 Print ISSN 2289-0009 online DIGITAL POST KOREA POST MAGAZINE 2016. APRIL VOL. 687 04 DIGITAL POST 2016. 4 AprilVOL. 687 04 08 04 08 10 13 13 14 16 16 28 34 46 22 28 34 38 42 46 50 54 56
More information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More information001-015_¸ñÂ÷(02¿ù)
JAPAN Global 한국 팝음악, 즉 K-POP이 일본 내 한류 열풍의 선봉에 나섰다. 인기 걸그룹 카라가 도쿄 아카사카의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데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_ 이태문 통신원 또다시 열도 뒤흔드는 한류 이번엔 K-POP 인베이전 아이돌 그룹 대활약 일본인의 일상에 뿌리내린 실세 한류 일 본에서 한류 열풍이 다시 뜨겁게
More information통계내지-수정.indd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More information쌍백합23호3
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More information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news@hcc.or.kr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More information민주화운동연구보고서 2006 지역민주화운동사편찬을위한기초조사연구 제주한국민주주의연구소 - 1 - - 2 - - 3 - - 4 - - 5 - - 6 - l - 7 - l l l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 22
More informationMicrosoft PowerPoint _Monthly InsighT 19년 1월.pptx
2019년 1월 Monthly InsighT 우려보다는 용기가 필요한 2019년 박원재 02-3774-1426 william.park@miraeasset.com 김영건 02-3774-1583 younggun.kim.a@miraeasset.com 김철중 02-3774-1464 chuljoong.kim@miraeasset.com * 넋두리 * 드디어 2019년황금돼지해가밝았습니다.
More information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2005.6.9 5: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개 지역지식재산센터 를 통해 발명가와 중소기업들에게 기술개발에서 선진국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More information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More information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캥거루는 껑충껑충 뛰지를 못하고, 여우는 신경질이 많아졌어요. 동물 친구들이 모두 모두 이상해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멧돼지네 가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염소 의사 선생님은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상수리나무 숲에는 어떤 비법이 숨겨져 있는 지 우리 함께 숲으로 가볼까요? 이 동화책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More information2002report220-10.hwp
2002 연구보고서 220-10 대학평생교육원의 운영 방안 한국여성개발원 발 간 사 연구요약 Ⅰ. 연구목적 Ⅱ. 대학평생교육원의 변화 및 외국의 성인지적 접근 Ⅲ. 대학평생교육원의 성 분석틀 Ⅳ. 국내 대학평생교육원 현황 및 프로그램 분석 Ⅴ. 조사결과 Ⅵ. 결론 및 정책 제언 1. 결론 2. 대학평생교육원의 성인지적 운영을 위한 정책 및 전략 목
More information60
광복60년기념전 시련과 전진 주 최 :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 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중앙일보 후 원 : SK Telecom, (주)부영, 다음 일 정 : 2005.8.14(일) ~ 8.23(일) 장 소 : 대한민국 국회 1. 내용의 일부 혹은 전체를 인용, 발췌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 주셔야 합니다. 2. 본 자료는 http://www.kdemocracy.or.kr/kdfoms/에서
More information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More informationad-200400012.hwp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연구요약 표 주제 및 연도별 여성유권자 연구 현황 표 출마한 여성후보 인지시기 투표후보여성
More information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함선주, 김 영은는 삼성에스디아이(SDI)주식회사(이하 삼성SDI'라고 함)의 협력업체인 영 회사 소속 근로자였고, 피고인 강용환는 또 다른 협력업체인 명운전자 주식회사 소 였다. 삼성SDI는 세계 디스플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울산지법, 2008.6.10, 2008고정204] 판시사항 [1] 근로자 1인이 고용보장을 위해 회사 앞에서 벌인 소위 1인 시위 가 집회 법률 제2조 제2호의 시위 에 해당하는지 여부(소극) [2] 집회 또는 시위에 공모공동정범이론을 적용하여 미신고 옥외집회나 시위의 참가자 집회 또는 시위의 주최자로 볼 수 있는지 여부(소극) 판결요지
More information<B8D3B8AEB8BB5F20B8F1C2F72E687770>
발간사 발간사 KDI 정책연구사례 : 지난 30 년의회고 발간사 KDI 정책연구사례 : 지난 30 년의회고 목차 / 김광석 / 김적교 / 사공일 / 송희연 / 남상우 / 문팔용 / 김윤형 / 사공일ㆍ송대희 / 김수곤 / 김영봉 / 이규억 / 민재성ㆍ박재용 KDI 정책연구사례 : 지난 30 년의회고 / 황인정 / 남상우 / 양수길 / 고일동 / 김준경ㆍ조동철
More informationÇѹ̿ìÈ£-197È£
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More information82-대한신경학0201
www.neuro.or.kr 2010 1 Vol. 82 www.neuro.or.kr 01 5 January 2010 2007 Newsletter of THE KOREAN NEUROLOGICAL ASSOCIATION 2010 NO.82 2010.JANUARY C o n t e n t s 04 05 06 10 13 17 18 20 22 25 28 32 33 36
More information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5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7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9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More information목 차
Ⅴ. 광교지구택지개발사업지구단위계획결정 ( 변경 ) 도서 목 차 Ⅴ. 광교지구택지개발사업지구단위계획결정 ( 변경 ) 도서 1. 지구단위계획구역결정 ( 변경 ) 조서 가. 총괄 ( 변경없음 ) 도면표시번호 구역명위치 기정 면 적 ( m2 ) 변경후 변경 계 1단계 2단계 비고 - 수원시영통구매탄동, 이의동, 광교지구원천동, 하동, 팔달구우만동, 제1종지구단위계장안구연무동일원획구역용인시수지구상현동,
More information01정책백서목차(1~18)
발간사 2008년 2월, 발전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범한 새 정부는 문화정책의 목표를 품격 있는 문화국가 로 설정하고, 그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한편 권한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효율의 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 삶과 풍요로움을
More information09³»Áö
CONTENTS 06 10 11 14 21 26 32 37 43 47 53 60 임금피크제 소개 1. 임금피크제 개요 2. 임금피크제 유형 3. 임금피크제 도입절차 Ⅰ 1 6 7 3) 임금피크제 도입효과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① 중고령층의 고용안정성 증대 연공급 임금체계 하에서 연봉과 공헌도의 상관관계 생산성 하락에 맞추어 임금을 조정함으로써 기업은 해고의
More information1362È£ 1¸é
www.ex-police.or.kr 2 3 4 5 6 7 시도 경우회 소식 2008年 4月 10日 木曜日 제1362호 전국 지역회 총회 일제 개최 전남영광 경우회 경북구미 경우회 서울양천 경우회 경남마산중부 경우회 경북예천 경우회 서울동대문 경우회 충남연기 경우회 충남예산 경우회 충남홍성 경우회 대전둔산 경우회 충북제천 경우회 서울수서 경우회 부산 참전경찰회(부산진)
More information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More information[ 별지제3 호서식] ( 앞쪽) 2016년제2 차 ( 정기ㆍ임시) 노사협의회회의록 회의일시 ( 월) 10:00 ~ 11:30 회의장소본관 11층제2회의실 안건 1 임금피크대상자의명예퇴직허용및정년잔여기간산정기준변경 ㅇ임금피크제대상자근로조건악화및건강상
[ 별지제3 호서식] ( 앞쪽) 2016년제2 차 ( 정기ㆍ임시) 노사협의회회의록 회의일시 2016. 09. 12( 월) 10:00 ~ 11:30 회의장소본관 11층제2회의실 안건 1 임금피크대상자의명예퇴직허용및정년잔여기간산정기준변경 ㅇ임금피크제대상자근로조건악화및건강상이유로인한명예퇴직허용 ㅇ 정년연장형임금피크대상자의정년잔여기간변경은 퇴직적립금 소요재원증가로법정적립비율(80%)
More information<BABBB9AE2DC7D5C3BC2E687770>
* 주제어: 노무현대통령 참여정부 참여의 확대 갈등의 증폭 통합의 정치 세대.27 *** 이념 -.17 ***.12 *** -.18 *** -.06 * 여야 성향 정치 효능감.24 *** -.32 *** -.33 ***.01 탄핵 찬성여부 대통령 정부 만족도 -.02.19 *** -.35 *** 한나라당 지지 (지역) -.12
More information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More information5,678,689 5,462, , ,679,338 5,462, , 증 )649 5,222,334 5,006, ,
5,678,689 5,462,689 216,000 100.0 100.0 100.0-5,679,338 5,462,689 216,649 100.0 100.0 100.0 - 증 )649 5,222,334 5,006,334 216,000 92.0 91.6 100.0 100.0 5,222,983 5,006,334 216,649 92.0 91.6 100.0 100.0
More information¼øâÁö¿ª°úÇÐÀÚ¿ø
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More informationCT083001C
발행인 : 송재룡 / 편집장 : 박혜영 / 편집부장 : 송영은 경희대학교 대학원보사 1986년 2월 3일 창간 02447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전화(02)961-0139 팩스(02)966-0902 2016. 09. 01(목요일) vol. 216 www.khugnews.co.kr The Graduate School News 인터뷰 안창모 경기대학교
More information041~084 ¹®È�Çö»óÀбâ
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More informationA000-008목차
1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및 대도시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 고교를 설립하여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겠습니다.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등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고교를 설립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기숙사비는 학생의 가정형편을 반영한 맞춤형 장학금으로 지원하여 더 이상
More information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2008.7.23.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8.15 :. 서울 종로구 운니동 65-1 오피스텔월드 606호 02-763-5052 www.ser.or.kr -1- 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2008.7.23.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2)
More information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2009. 2. 6.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대 법 원 제 1 부 판 결 사 건 2012두6605 사업시행계획무효확인등 원고, 상고인 원고 1 외 1인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담당변호사 이인재 외 2인 피고, 피상고인 서울특별시 종로구청장 외 1인 소송대리인 정부법무공단 외 3인 원 심 판 결 서울고등법원 2012. 2. 2. 선고 2011누16133 판결 판 결 선 고 2015. 4.
More information<표 1-2-1> 시군별 성별 외국인 주민등록인구 (2009-2010) (단위 : 명, %) 구분 2009년 2010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전국 870,636 384,830 485,806 126 918,
시군별 성별 총인구 및 성비 (2012-2013) (단위 : 명, %) 구분 2012 2013 한국인(계) 한국인(여) 한국인(남) 성비 한국인(계) 한국인(여) 한국인(남) 성비 전국 50,948,272 25,444,212 25,504,060 100.2 51,141,463 25,553,127 25,588,336 100.1 경상북도 2,698,353
More information1220½É¹Ì¾Èâ27È£º»¹®
CONTENTS 1220심미안창27호본문 1904.1.29 4:51 페이지3 CTP175아트지 3인3색 문화이야기 광주브랜드 브랜드: 이것은 주문呪文이 아니다 이향준_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연구원, 재단 운영위원 도시 브랜드 는 시민생활의 총체적 이미지에서 힘을 얻는다 도시의 트랜드 -옛길의 향기와 문화, 예술 조덕진_ 무등일보 아트플러스 편집장, 재단
More informationÄ¡¿ì_44p °¡À» 89È£
2012 vol.89 www.tda.or.kr 2 04 06 8 18 20 22 25 26 Contents 28 30 31 38 40 04 08 35 3 photo essay 4 Photograph by 5 6 DENTAL CARE 7 Journey to Italy 8 9 10 journey to Italy 11 journey to Italy 12 13 Shanghai
More information*부평구_길라잡이_내지칼라
발 간 등 록 번 호 54-3540000-000057-01 2012년도 정비사업 추진 지연에 따른 갈등요인 길라잡이 INCHEON METROPOLITAN CITY BUPYEONG-GU INCHEON METROPOLITAN CITY BUPYEONG-GU 1970년대 부평의 전경 1995년 부평의 전경 2011년 부평의 전경 백운2구역 재개발지역 부평4동 재개발지역
More information2016년 신호등 3월호 내지A.indd
www.koroad.or.kr E-book 03 2016. Vol. 427 54 C o n t e n t s 40 50 24 46 04 20 46? 06,! 24 50 3, 08! BMW,? 28 54 12,! KoROAD 2 30 58 16, 34 60 18? 38 62? 40 64 KoROAD (IBA) 4!,, 2016 CEO!. 427 2016 3 2
More information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More information1. 경영대학
[ 별표 1] 1. 교육과정의영역구성및이수점표 경 영 농 업 생 명 과 동물생명과 과 ( 부 ) 명 경영 회부 ( 경영전공 ) 교 최소전공필수선택 심화점 7 12 1 18 38 18 27 45 0 45 47 단일전공 27 72 20 경영 회부 0 45 47 7 12 1 18 38 21 24 45 ( 회전공 ) 단일전공 27 72 20 경제 무역부 0 45 47
More informationÁÖº¸15.2.15
4 분당판 21권 7호 2015년 2월 15일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1권 7호 2015년 2월 15일 생명순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전도한 인원수를 추가합니다.
More information지지정당별지방선거투표의향별국정수행평가별국무총리인선평가별정부개각범위의견별사전투표제인지별사전투표참여의향별지방선거성격공감별차기대선후보선호도별성 * 연령별 자영업 (102) 블루칼라 (96) 12.
표 0. 응답자특성 성별연령별권역별직업별지지정당별지방선거투표의향별국정수행평가별국무총리인선평가별정부개각범위의견별사전투표제인지별사전투표참여의향별지방선거성격공감별차기대선후보선호도별성 * 연령별 % (700) 100.0 남자 (345) 49.3 여자 (355) 50.7 19~29세 (127) 18.1 30대 (136) 19.4 40대 (151) 21.6 50대 (138)
More information**09콘텐츠산업백서_1 2
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More informationCC......-.........hwp
방송연구 http://www.kbc.go.kr/ 프로그램 선택은 다단계적인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본 연 구는 TV시청을 일상 여가행위의 연장선상에 놓고, 여러 다양한 여가행위의 대안으로서 TV시청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과, TV를 시청하기로 결정할 경우 프로그램 선택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밝히고자 했다. 27) 연구 결과, TV시청
More information<3635B1E8C1F8C7D02E485750>
역사로 읽는 우리 과학 교사용 지도서 자연 6-1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Ⅱ) STS 프로그램이 중학생 과학에 관련된 태도에 미치는 효과 관찰 분류 측정훈련이 초등학생의 과학 탐구 능력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 국민학교 아동의 과학 탐구능력과 태도 향상을 위한 실 험자료의 적용 과학사 신론 중 고등학생의 과학에 대한 태도 연구 과학사를 이용한 수업이 중학생의 과학과
More information년도경상북도지방공무원제 1 회공개경쟁임용시험 - 필기시험합격자및면접시험시행계획공고 ( ) 필기시험합격자 : 491 명 ( 명단붙임 ) 2 필기시험합격자등록및유의사항. : ( ) ~ 7. 6( ) 3 등
- 2012 년도경상북도지방공무원제 1 회공개경쟁임용시험 - 필기시험합격자및면접시험시행계획공고 2012. 5. 12( ) 2012 1. 1 필기시험합격자 : 491 명 ( 명단붙임 ) 2 필기시험합격자등록및유의사항. : 2012. 7. 4( ) ~ 7. 6( ) 3 등록시간 : 09:00 ~ 18:00. : 2 ( 1 ). 1 3 (A4 1매, 워드작성 붙임서식
More information복지백서내지001~016화보L265턁
Photo S tory 사진으로 보는 서울의 사회복지 1950년대 아동복지시설 연합 체육대회 (창경원) 3 1950년 삼성농아원 초창기 구화교육 (이진주 선생) 1928년 용정부녀자합동급식소 (명진보육원 전신) 1920년대 초기 태화유치원 교육 1930년대 무산아동운동장 (태화여자관 전경) 1936년 경성양로원 (1927년 설립, 1954년 현재의 청운양로원으로
More information내지(교사용) 4-6부
Chapter5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01 02 03 04 05 06 07 08 149 활 / 동 / 지 2 01 즐겨 찾는 사이트와 찾는 이유는? 사이트: 이유: 02 아래는 어느 외국계 사이트의 회원가입 화면이다. 국내의 일반적인 회원가입보다 절차가 간소하거나 기입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정보 항목이 있다면 무엇인지
More information2001 년 4 월전력산업구조개편과함께출범한전력거래소는전력산업의중심 기관으로서전력시장및전력계통운영, 전력수급기본계획수립지원의기능을 원활히수행하고있습니다. 전력거래소는전력자유화와함께도입된발전경쟁시장 (CBP) 을지속 적인제도개선을통해안정적으로운영하고있으며, 계통운영및수급
2001 년 4 월전력산업구조개편과함께출범한전력거래소는전력산업의중심 기관으로서전력시장및전력계통운영, 전력수급기본계획수립지원의기능을 원활히수행하고있습니다. 전력거래소는전력자유화와함께도입된발전경쟁시장 (CBP) 을지속 적인제도개선을통해안정적으로운영하고있으며, 계통운영및수급 계획수립등전력수급안정에도최선의노력을기울이고있습니다. 이번에발간하는 2016년발전설비현황은
More information•••••1301(•••).pdf
K I A M O T O R S V o l _ 1 0 6. 2 0 1 3 01 K I A M O T O R S V o l _ 1 0 6. 2 0 1 3 01 Happy Place + 은빛 추억이 새록새록, 태백산 눈축제 태백산에 하얗게 눈이 소복하게 쌓이면 축제가 시작된다. 태백산 눈축제 는 은빛 으로 옷을 갈아입은 태백의 매력을 맘껏 느낄 수 있는 다양한
More information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More informationº»ÀÛ¾÷-1
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More information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More information12 December 소비자의날안전점검의날 (273 차 ) 무역의날 대설 ( 大雪 )
2019 C A L E N D A R 12 December 110.24 2 3 4 5 6 7 8 10.25 소비자의날안전점검의날 (273 차 ) 무역의날 10.29 대설 ( 大雪 ) 11.2 9 10 11 12 13 14 15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6 17 18 19 20 22 11.10 11.11 11.12 11.13
More informationallinpdf.com
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More information2011-67 차례 - iii - 표차례 - vii - 그림차례 - xi - 요약 - i - - ii - - iii - 제 1 장서론 대구 경북지역인력수급불일치현상진단과해소방안에대한연구 1) ( ) 574 208 366 263 103 75.6 77.9 74.3 73.0 77.7 19.3 19.2 19.4 20.5 16.5 3.0 1.0 4.1
More information1 (1) 14 (2) 25 25 27 (3) 31 31 32 36 41 2 (1) 48 (2) 56 (3) 63 72 81 3 (1) 88 88 92 (2) 96 (3) 103 103 104 107 115 4 (1) 122 (2) 129 (3) 135 135 141 153 165 5 (1) 172 (2) 187 (3) 192 201 207 6 (1) 214
More informationA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8 년 한국사회과학자료원 2008년 2008년
A1-1998-0031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8 년 한국사회과학자료원 2008년 2008년 이자료를연구및저작에이용, 참고및인용할경우에는 KOSSDA의자료인용표준서식에준하여자료의출처를반드시명시하여야합니다. 자료출처는자료명이최초로언급되는부분이나참고문헌목록에명시할수있습니다. 자료를이용, 참고, 인용할경우표준서식김상욱. 2005. 한국종합사회조사,
More informationsrc.xls
xml 선언부에한글처리 (utf-8) 인코딩선언 - 주간예보열기 - 지역, 구역헤더열기 전국육상주간예보 주간예보제목태그열고닫기 201003080600 발표시각 :yyyymmddhhmm 시간태그열고닫기 - 기상전망열기
More information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VOL.13 No.4 2011 08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CONTENTS XXXXXX XXXXXX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3 XXXXXXXXXXXXXXX XXXXXXXXXXXXXX 4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5 6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More information조사구번호 가구번호 - 한국종합사회조사 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종로구명륜동 가 전화 팩스
조사구번호 가구번호 - 한국종합사회조사 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종로구명륜동 가 전화 팩스 srckgss@skku.edu http://src.skku.edu http://kgss.skku.edu 인사말씀 안녕하십니까 저희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에서는지난 년이래해마다한국종합사회조사 를시행하고있습니다 이조사는한국사회를종합적으로파악하고세계의주요국가들과비교연구하는데필요한자료를만들어내는목적이있습니다
More information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