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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題字 : 石峯<千字文>에서 集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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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학술지는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 판되었음. This journal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MEST).

4 17 차 례 땅이름 지리산 고찰 곽재용 5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金武林 35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김순배 61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미즈노 슌페이(水野俊平) 105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박승홍 141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제주군 신좌면(新左面:조천읍) 지명을 중심으로 오창명 179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 봉황형국을 중심으로 천인호 211 한국지명학회 회칙 한국지명학회 편집위원회 관련 규정 地名學 논문 투고 규정 한국지명학회 연구 윤리 규정 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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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땅이름 지리산 고찰 곽재용 국문요약 지리산은 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초 기록은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인데, 여기에는 知異山으 로 되어 있다. 지리산은 순우리말 지루하다 의 방언인 지리하다 에서 온 말이다. 두류산(頭流山)은 한자말로 백두산의 맥이 뻗어 내려 온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나 역시 고유어에서 온 말로 본다. 두류산의 두류 는 고구려어 達[높음] 을 나타내는 /들 에서 유래하였다. >달>다 라>다루>두루 로 변해온 것 같다. 또 廻 나 周 의 뜻인 우리말 두루, 두리 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두류산이 되었다. 지리산을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이라고도 하였다. 지리산은 두류 산이나 방장산보다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고 많이 사용하던 땅이름이 었다. 지금은 방장산은 거의 쓰지 않고, 두류산은 특수한 경우에만 쓰 는 정도이고, 대부분이 지리산을 쓰고 있다. 지리산이든 두류산이든 그 뿌리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핵심어 : 지리산, 두류산, 방장산, 지리하다,, 고유어 * 진주교육대학교 *

7 6 地名學 17 (2011) 1. 서론 땅이름은 고유명사 중 가장 수가 많다. 또 일상의 생활 터전을 나 타내기에 한번 정해지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그 활용도가 매우 높다. 이글은 땅이름으로서 지리산 의 뿌리는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썼다. 지리산은 지리산 외에도 두류산, 방장산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 다.1) 지리산을 왜 智異山, 知異山, 地理山 등으로 달리 썼는가? 두류산은 지리산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예로부터 지리산을 방장 산(方丈山)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땅이름 지리산 에 대한 어원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라 위의 질문들에 답하는 형태로 이 글을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지리산이 갖는 위상부터 살펴볼 필 요가 있다. 2. 지리산의 위상 모든 산은 나름대로 특색과 멋이 있다. 따라서 산에서 느끼는 감 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산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그 산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통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지리산의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지리산은 이 외에도 불복산(不伏山), 덕산(德山)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불 복산은 이성계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덕산은 남명학파에서 조식(曺植)이 학 문을 닦던 곳이라고 붙인 이름인데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8 땅이름 지리산 고찰 7 첫째, 지리산은 국립공원 1호이다. 지리산은 1967년 12월 29일 국 립공원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1988년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과 비교하면 21년이 앞섰다. 지리산이 문화재의 보고인 경 주,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 서울에 있으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북한산보다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지리산이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는 자연유산임을 국가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둘째, 지리산은 높다. 산을 말할 때 높이가 갖는 중요성은 크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5개의 산들 중 가장 높은 산이 한라산으로 1,950m이고, 두 번째가 지리산으로 1,915m이다. 그 뒤를 설악산 (1,708m), 덕유산(1,614m), 오대산(1,563m), 소백산(1,439m), 가야 산(1,430m), 치악산(1,288m), 월악산(1,097m), 속리산(1,058m), 계 룡산(845m), 북한산(837m), 월출산(809m), 내장산(741m), 주왕산 (720m)이 따르고 있다.2) 첫 번째 높이인 한라산이 제주도에 있으 니 육지에 있는 산으로서는 지리산이 가장 높다. 셋째, 지리산은 넓다. 지리산은 3개도 5개 시 군, 16개 읍 면, 59개 동 리에 걸쳐 펼쳐져 있다. 3개 도는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 라남도이다. 5개 시 군은 경상남도의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이고 전라북도의 남원시, 전라남도의 구례군이다. 지리산의 행정구역별 면적의 분포를 알기 위해 2011년 1월 관보의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표로 만들어 보니 다음과 같았다. 2) 국립공원누리집( 나오는 공원소개/공원안내 에서 국립공원의 15개 산을 조사한 것이다.

9 8 地名學 17 (2011) 지리산의 도, 시 군 별 면적 현황(관보 제17423호 ) 도 시 군 경남 면적( ) 산청군 하동군 86,255 함양군 백분율(%)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계 5개 시 군 국립공원의 면적이 해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2011년 통계 자 료에 의하면 지리산의 면적은 이다. 그 중 경남이 로 56.05%, 전북이 로 23.08%, 전남이 로 20.87%를 차지하고 있다. 시 군별 면적은 산청군( )과 남 원시( )가 비슷하고, 그 뒤를 구례군( ), 하동군 ( ), 함양군( )이 따르고 있다. 3) 이들 행정구역을 더 잘게 나누어 지리산이 분포되어 있는 행정구역 현황을 동 리까지 조사해본 결과 다음과 같았다. 지리산국립공원 행정구역 현황 지역별 사무소별 지리산 시/도 시/군/구 경상 남도 산청군 면 동 리 시천면 내대, 중산, 동당, 반천 삼장면 내원, 대포, 유평, 평촌, 석남 금서면 오봉, 방곡, 수철, 지막 3) 지리산 면적의 분포는 국립공원누리집( 나오는 자료실/통계자료 번(관보 제17423호)을 참고했다.

10 땅이름 지리산 고찰 9 전라 지리산 북부 북도 전라 지리산 남부 남도 합계 3 하동군 화개면 대성, 운수, 용강, 범왕, 정금 청암면 묵계 악양면 등촌 함양군 마천면 강청, 삼정, 추성, 군자, 덕전, 의탄, 가흥 휴천면 송전, 운서 남원시 운봉읍 동면 산내면 주천면 화수, 공안, 주촌, 용산 구인월, 중군 내령, 부운, 입석, 덕동 장항 호경, 은송, 용궁, 고기, 덕치 구례군 산동면 광의면 마산면 토지면 좌사, 위안, 수기 수월, 방광 황전 갑산 마산, 광평 문수, 구산, 송정, 내서, 내동 지리산은 3개도 5개 시 군 중 16개 읍 면과 여기에 소속된 59 개의 동 리에 걸쳐있는 방대한 산이다.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고 지 리산에서 여러 해를 주석한 서산대사는 지리산에 대해 장엄하나 수 려하지 못하다(壯而不秀) 고 산수평을 했다고 하나, 지리산을 속속 들이 들여다보면 수려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산의 품이 하도 넉넉하여 충분히 다 다녀보지 못했을 수 있다. 지리산의 넓이를 국립공원의 다른 산들과 비교해 보면 1위 지리산이 이고, 2위가 설악산으로 이다. 그 뒤는 오대산 ( ), 소백산( ), 월악산( ), 속리산( ), 덕유산 ( ), 치악산( ), 한라산( ), 주왕 산( ), 내장산( ), 북한산( ), 가야산( ), 계룡산( ), 월출산( ) 순이다.4)

11 10 地名學 17 (2011) 넷째, 지리산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2010년 지리산의 연 간 탐방객 수는 3,043,859명이었다.5) 이를 다른 산들과 비교해 보면 북한산 8,508,054명, 설악산 3,791,952명에 이어 3위를 차지한다. 북 한산이나 설악산은 아름다운 산이기도 하지만 서울에 있거나 서울 에서 가까운 곳에 있기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측면이 있다. 지리산 다음으로는 내장산(1,875,058명)과 덕유산(1,822,378명)인데, 지리산 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단풍 으로 유명한 내장산이나 스키장이 있는 덕유산에 비해 훨씬 더 많 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지리산의 특색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지리산은 탐방객 수가 3위이지만 국립공원 수입금은 다른 어떤 국립공원의 산보다 많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밝힌 2010년도 국립공원 내 사무소별 수입금6)은 지리산(지리산 남 북부 사무소 포함)이 2,629,215,000원으로 가장 높았다. 2위인 북한산(북한산도봉 사무소 포함)의 916,350,000원, 3위인 덕유산의 627,215,000원과 상당 한 차이가 있다. 이들 수입금은 주로 대피소 사용료, 스낵사업, 주차 료 등에서 얻어진다. 이는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1회성 관광이 아니라, 진정으로 산을 좋아하고 지리산에 동화되기를 원하는, 소위 마니아층이 많음을 나타내는 의미 있는 통계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높이와 넓이, 사람들의 선 4) 국립공원누리집( 나오는 공원소개/공원안내 에서 15개의 산을 검색하여 작성하였다. 5) 국립공원 탐방객 수는 국립공원누리집( 나오는 자료실/통계자료 번 참조하였다. 6) 국립공원 수익금은 국립공원누리집( 나오는 자 료실/통계자료 번을 참조하였다.

12 땅이름 지리산 고찰 11 호도 등을 통해 볼 때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위상을 가진 산임을 알 수 있다. 3. 지리산 두류산 방장산 지리산은 지리산 말고도 두류산(頭流山, 頭留山), 방장산(方丈山) 으로 쓰였다. 이 세 가지 이름의 어원과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지리산 고문헌상으로는 지리산을 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 등 여러 가지로 사용했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쓰고 있는 것은 智異山이다. 이를 대개 한자의 뜻 그대로 지혜롭고 기이한 산 이란 뜻으로 풀이한다. 국립공원누리집( knps.or.kr/main/main.do)에도 지리산을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지혜롭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고, 이인이 난 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맞는다면 다른 한 자로 쓰인 것들 예컨대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 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대상은 하나인데 그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이 여러 가지가 된 셈인데, 이는 결국 지리산의 어원은 한자와 관련이 없다는 걸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즉 지리산의 본래 뜻은 순우리말 이라는 뜻이다. 원래 순우리말이었지만, 그것을 표기하는 수단이 한 자 밖에 없었으므로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한자어의 변용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지리산이라는 한자어를 쓴 최초의 기록은 최치원(857

13 12 地名學 17 (2011) 915)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 이다. 국보 제 47호로 쌍계사에 있는 이 비는 서기 887년에 세워졌다. 천년이 넘는 풍상을 겪으면서 비의 몸에는 총탄 자국 등으로 훼손되었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 비문에는 智異山 이 아닌 知異山 으로 씌어 있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왼편에서 여섯째 줄, 세 번째 글자부터 知異山 이 나타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 진감선사대공탑비에 知異山 이 새겨진 비문 이로부터 2백 수십여 년 뒤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에는 地理山 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의 권32에는 나라의 제사인 중 사(中祀)를 지내는 곳 다섯 개의 산[五岳]을 말하는바, 동쪽 산은 토함산(吐含山), 남쪽 산은 지리산(地理山), 서쪽 산은 계룡산(雞龍 山), 북쪽 산은 태백산(太伯山), 중앙 쪽은 부악(父岳, 팔공산)으로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인 1281년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도 地理山 이 나와 있다. <삼국유사> 권제2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국

14 땅이름 지리산 고찰 13 경을 언급하면서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이라고 적고 있다. 또 <삼국유사> 권 제5 영재우적(永才遇賊)에는 同隱智異 가 나오는데 같이 지리산에 숨다 라는 뜻으로 비록 산(山)이란 글자는 없지만 智異山 을 나타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에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의 표기가 나타나고 있다. 같은 작가가 쓴 동일한 책에서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은 당시 지리산은 고유어였기에 한자로 어떻게 표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는 주로 智異山 이 나오고 있다. <고려사>에 처음 나오는 지리산 관련 내용은 가을 9월 신축 일에 견훤이 아찬 공달을 보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 대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 이다.7) 이를 필두로 <고려사>에 지리산 (智異山) 이 19번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에 智異山 의 변이형태인 地理山 은 두 번 나오는데, 처음 기록을 보면 9년 5월에 지리산(地 理山) 남쪽으로부터 장성현에 이르기까지 때때로 벼락 치고 우레 소리 나며 번개 치면서 폭풍우가 일어나서 나무들이 자빠지고 곡식 들이 결실되지 못 하였다. 8)고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지리산의 이 칭이 다 언급되어 있는 내용도 있다. 남원부(南原府)를 언급하면서 용성(龍城)이라고도 부르며 지리산[지리(地理), 두류(頭流), 방장 (方丈)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남악(南嶽)으로 되어 중사(中 祀)에 올랐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두었다.]과 순자진(鶉子津)이 있 고 이 부에 속한 군이 2개, 현이 7개가 있다. 9) 고 하여 지리산의 7) 秋九月辛丑甄萱遣阿粲功達獻孔雀扇智異山竹箭. <高麗史>卷1-世家1-太祖1. 8) 九年五月自地理山南至長城縣 往往震雷電烈風大雨樹木僵仆禾穀不實. <高麗 史> 卷53-志7-水. 9) 別號龍城有智異山[一云地理一云頭流一云方丈新羅爲南嶽躋中祀高麗仍之]有

15 14 地名學 17 (2011) 다른 이름들을 거론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사>에 나오는 지리산 이름은 智異(山) 19, 地理(山) 2, 頭流 1, 方丈(山) 2회이다. 즉 <고려사>에는 대부분 오늘날과 같 은 智異山 으로 표기되었다. 두류산을 나타내는 頭流는 1회만 나올 뿐이다. 이를 보면 지리산 이란 지명은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쓰여 왔으나, 한자를 표기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좀 달랐 다. 문헌으로만 볼 때 대체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는 知異山 이나 地理山 으로 쓰던 것을 고려시대에 와서는 주로 智異山 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여러 한자이름들이 있 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지리산을 표기하는 한자 지명어 智 異山 은 원래의 확고부동한 이름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대개의 한 자 지명어가 그렇듯이 원래는 우리말이었는데 뒤에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실지로 지리산의 어원을 지혜로운 이인의 산 과 같은 단편적 인 뜻풀이를 제외하고 한자어 뜻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문헌을 찾아 보지 못했다. 지리산의 처음 이름은 한자어 표기와 무관한 순우리말 이었다. 智異山이라 쓰고 이를 읽을 때는 지이산 이 아닌 지리산 으 로 읽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지리산의 어원이 우리말이라면 어디서 온 것일까? 여기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매우 영성(零星)하다. 국어학 전공자의 연구물은 찾지 못했 지만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었다. 성락건 남경옥(1996:227)에서는 지루하다 의 남녘 사투리는 지리하다 라 말한다. 지리한 산이라 사람 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지리산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본다. 라고 하여 지리산의 어원을 지리하다 와 관련시키고 있다. 강정화 최석기(2010, 21)에서는 그중 믿을 만한 것으로는 우리말의 지리하다 에서 나왔다 鶉子津屬郡二縣七. <高麗史>卷57-志11-地理2.

16 땅이름 지리산 고찰 15 는 주장이다. 라고 하였다. 필자의 견해도 이와 같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상남도나 전라도 지역에서 지리하다 는 지루하다 의 뜻으로 많이 쓴다. 지리산을 지리하다 고 한 것은 산이 워낙 넓고 높아서 다녀 보니 매우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는 뜻에서 유래한 듯하다. 즉 삶을 영 위하기 위해 지리산에 오르내리는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리산 은 (다녀보니 무척이나 멀고) 지리(루)한 산 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리(루)한 산 이란 말이 지리산 이 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리 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국립공원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산이 다. 지리산의 광활함과 넉넉함이야말로 지리산의 어원과 직접 관련된 다고 할 수 있겠다. 지리산이 우리말 어원에서 출발했다는 근거는 그 표기를 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 처럼 매우 다양하게 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만약 뚜렷한 의미를 지닌 한자어에서 출발했다면 이런 여 러 표기가 있을 수 없다. 한자로 된 땅이름이 우리말보다 먼저일 리 는 만무하다. 지리산은 한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고, 그 이름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자어보다 토박이말 땅이름이 당연히 먼저 였다. 토박이말에 한자를 갖다 붙이려고 하니 지리산이라고 말하면 서 지이산 이라고 쓰게 되어 본음이 실종되었다. 그런데 여러 한자 어 지명 중에서 하필이면 지리산(智異山)이었을까? 아마 지혜로운 이인의 산 이 되어 여러 한자어 중에 이것의 의미가 가장 특별하고 나았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 지식인들이 선호한 이름이 되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지리산과 두류산의 관련성을 음운현상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지리산이 두류산이 되었다고 보면 역구개음화나 이화 현상이 일어난 지리>디리>두리>두루(>두류) 정도로 추정해 볼 수

17 16 地名學 17 (2011) 있다. 그런데 지리산이란 지명이 생긴 것은 진감선사대공탑비문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적어도 9세기 이전이다. 이에 비해 두류산은 고 려시대 문헌에 와서 나타나고 있다. 즉 시기적으로는 지리산>두류 산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ㅈ>ㄷ 의 역구개음화 현상으 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ㄷ>ㅈ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난 시 기가 근대에 와서이니 ㅈ>ㄷ'역구개음화 현상도 그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의 음운변화 현상으로 그보다 앞선 9세기나 고려 시대에 나타난 지리산>두류산 변화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리산이 두류산으로 변했다는 현상을 음운변화인 역구개음화로 설명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따라서 두류산이 지리산에서 왔다는 설은 근거가 약하다 두류산 두류산(頭流山)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맥이 뻗어 내려 와 우 리나라의 남쪽인 이곳에 자리 잡은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 다. 두류산의 연원을 알 수 있는 주요 기록 몇몇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언급은 도선 국사( )의 언급이 아닌가 한다. 신라 말기에 살았던 도선 국사는 우리나라 지세를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은 도선의 <옥룡기>에 있는 말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 10)라고 하 여 지리산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인로( )도 <파한집>에서 도선 국사와 비슷한 견해를 10) 玉龍記云 我國 始于白頭 終于智異 <高麗史節要> 권26 恭愍王一.

18 땅이름 지리산 고찰 17 밝혔다.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일어나서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옛 대방군이었던 남원 땅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고 얽혀 있다. 그 둘레는 무려 십여 고을에 걸쳐 있다. 한 달이 넘게 다녀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 다.11) 이를 통해 짐작해볼 때 두류산은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이미 쓰이 던 이름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 이전 시기에는 백두산에서 지리산 으로 이어지는 국토 의식이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광활한 중국 땅과 백두산이 국토였기에 오늘날 백두대간 개념처럼 백두산 을 지리산과 연결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까 지의 영토에는 백두산이 포함 안 된 축소된 통일이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잇는 통일국가는 고려였다. 이 때 비로소 우리나라 산맥을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잇는 것으로 인식했을 수 있다. 물론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토 안으로 편입된 것은 조선 세종 때 4군 6진 개척 이후지만, 고려 시대 국토의식은 백두산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 다. 어쨌든 두류산이란 이름이 쓰이기 위해서는 지리산과 그 첫 글 자인 두 가 나타내는 백두산 이름이 동시에 언급되어야 했다. 고대 에는 백두산을 태백산으로 불렀으며 백두산은 고려시대에 와서 부 른 이름이다. 따라서 두류산의 어원을 백두산과 결부시키는 것은 빨 라도 고려시대에 와서라고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지리산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11) 智異山或名頭留 始自北朝白頭山而起 花峯萼谷 綿綿聯聯 至帶方郡 蟠結數 千里 環而居者十餘州 歷旬月 可窮其際畔 <破閑集> 券上.

19 18 地名學 17 (2011) 지리산 부의 동쪽 60 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 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 자는 유 (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12) 두류산의 어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백두대간이 흘러내리다 바닷가에 이르러 멈추었다는 뜻에서 두류산(頭留山) 이라고도 하나 그 연원은 두류산(頭流山)과 같다 이규경의 <청학동변증설>에도 두류 라는 말은 백두산의 맥이 남 쪽으로 흘러 이 산이 되었기 때문에 두류 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라고 하여 두류의 어원을 밝히고 있다.13) 향토지인 <진양지>에는 지리산은 진주 서쪽 1백 리 지점에 있다. 산세가 높고 크며, 수백 리에 웅거하고 있다.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연이어 뻗어내려 이곳에 이르렀기 때문에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 다. 라고 역시 백두산의 산맥과 지리산의 상호 관련성을 밝히고 있 다.14) <증보문헌비고>에는 지리산은 우리나라 남쪽 극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극히 높고 크다. 백두산의 신령스럽고 맑은 기운이 흘러 이곳에 쌓였기 때문에 또한 두류산 이라고도 한다. 15)고 하여 역시 12) 智異山:在府東六十里 山勢高大雄據 數百里 女眞 白頭山之脉 流至于此 故 又名頭流 或云 其脉至海而窮 停留于此 故流作留爲是 <新增東國輿地勝覽> 券39. 13) 頭流者 白頭山脈 南流爲此山 故名頭流 <靑鶴洞辨證說>. 14) 智異山在州西一百里 山勢高大 雄據數百里 女眞白頭山之脉 連延之此 故一 名頭流 <晉陽誌> 券1. 15) 智異山居國之極南 極高大 白頭靈淑之氣 流畜于玆 故亦曰頭流 <增補文獻 備考> 券19.

20 땅이름 지리산 고찰 19 두류산의 어원을 밝히고 있다. 백두산의 기운이 신령스럽고 맑다고 하여 우리 민족을 상징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기록들은 지리산을 백두대간과 관련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두산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머릿속에 하늘에 닿아 있는 영산이 자 최고의 산이었다. 지리산을 두류산으로 부르게 된 것도 민족적 근원을 찾아 천상의 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초월 의지로 볼 수 있다. 백두산이 하늘과 맞닿아 있어 천상을 넘나드는 경계이고, 그 산맥이 흘러내려 온 두류산은 인간 세상에 가장 우뚝 솟은 현실세계에 군 림하는 산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두류산을 백두산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은 매우 인공적이 고 작위적이다. 산이나 땅의 이름은 매우 자연스럽게 불리어지고, 이것이 굳어져 익숙해지면서 강한 보수성을 가진 지명이 탄생하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산의 이름을 부르는데 저 멀리 있어서 눈에 보 이지도 않은 백두산을 염두에 두고 그 산과 관련지어 부르기가 쉽 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당시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고, 지 도도 널리 보급되지 못해 지리산을 백두산과 결부시키는 자체가 어 려웠을 수 있다. 또 백두대간의 개념도 주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둘째, 두류산이란 지명이 지리산에만 쓰인 것은 아니라 전국적으 로 여러 개 있다. 춘성군(春城郡) 사내면(史內面), 신안군(新安郡) 지도읍(智島邑), 문천군(文川郡) 운림면(雲林面), 길주군(吉州郡) 역사면(晹社面) 등에 있고, 두류봉(頭流峰)은 화천읍(華川邑), 순창 군(淳昌郡) 인계면(仁溪面)에 있다. 해남군(海南郡)의 두륜산(頭輪 山)은 이것이 변형된 이름이다. 두류산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마치

21 20 地名學 17 (2011) 보통명사처럼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산들의 이름을 명명할 때 모두 백두산과 관련지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두류 - 라는 이름이 갖는 보편성은 이 단어가 사람들이 자주 쓰던 일상어 에서 나왔음을 시사한다. 셋째, 다른 큰 산들은 두류산이라 이름 짓지 않았다. 금강산이나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등도 백두대간에 포함된다.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산들이 많은데 유독 지리산만을 백두산과 관련짓는 것은 억지 스럽다. 이런 문제점들은 두류산의 어원이 백두산과 관련해서 지어 지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의 두류 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두류산의 어원, 즉 출발점이 한자어가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땅이름처럼 토박이말 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두류산의 두류 는 고유어인 /들/두리 등에서 유래하였다.16) 이들의 어원은 고구려 지명어 達 과 관련된다. 達 은 용법상 어두 에 쓰일 때는 높음[高]과 대응하고, 피수식어인 지명 접미사로 쓰일 때는 산(山)이나 땅[地. 野]과 대응한다. 이 의 본래 의미는 높 은 곳 이나 땅 혹은 들판 을 말하며, 이후 이 어사가 지명어로 통용 되다 보니 자연스레 높은 지역에 위치한 거주지를 일컫게 된 것으 로 보인다. 현대어에서도 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달다, 달아 매다 [附, 縣]의 경우는 이 동사로, 다락[樓], 다람쥐의 경우 접미 사 -악 과 또 다른 어사 -(암)+쥐 가 연결되어 복합어를 형성한 예 16) 이영택(1986, 132)에서는 두류 를 두래 에서 나왔고 이는 (달)의 분음 (分音)으로서, 두리 두류 등으로 변음하였다고 하였다. 천소영(2003, 217)에서는 두르/두리/드르- 형 지명은 산이나 들이 사방으로 둥글게 둘 려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어형의 표기에는 豆里/頭里/頭流 등의 차음자가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22 땅이름 지리산 고찰 21 이다(천소영, 2003: 198). 원래의 우리말인 /들/두리 등이 산 이 름에서 한자어된 형태가 頭里/頭流/豆利 등이다. 이 두루/두류 로 변한 과정을 음운적으로 보면 >달>다라>다루>두루 정도로 나 타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변화를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 다. >달 은 아래아( ) 가 ㅏ 로 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달>다 라 의 변화는 음절유형 가운데 CV 형이 가장 보편적이고 자연스럽 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자음은 첫소리 자리에 올 때, 모음은 자음 뒤에 올 때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특히 연음법칙은 이러한 원 리에 기인된 현상이다. 또한 방언에서는 표준어의 CVC형태가 CV-CV로 재구조화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다. 경남 방언에서 이런 보기들로는 샘 새미, 몽침(목침) 몽치미, 홀아비 호래비 등이 있다. 다라>다루 는 이화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화현상은 소곰 소 금, 나루, 가루 등의 예에서처럼, 한 낱말 안에 같은 혹은 비슷한 음소 둘 이상이 이웃해 있거나 또는 다른 음소를 사이 에 두고 있을 때에 발음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고 말에 표현력과 생 명력과 신선한 맛을 더하기 위하여 그 중 한 음소를 다른 음소로 바 꾸는 일을 말한다. 다루>두루 는 위와 반대로 동화현상으로 볼 수 있다. 동화현상이란 모 - 모로-, 고 - 고로-, 여듧 여덟 등 에서와 같이 한 음소가 그와 같은 소리로 바뀌거나 비슷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은 말의 속도를 빨리하고 음성기관의 노력경 제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다라>다루>두루 는 한 낱말에 이화와 동 화현상이 동시에 적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동화와 이화 현상이 같이 적용되는 경우는 모 다>모로다>모르다, 고 다>고로다>고르 다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산 의 뜻인 계의 한자어 가 두루/두류 로 변했다.

23 22 地名學 17 (2011) 그런데 지리산은 두루/두리 등의 발음들이 구개음화되어 지리- 로 변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7) 만약 이 견해가 성립한다면 두 루>두리>드리>디리>지리 의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ㄷ>ㅈ 처럼 잇몸소리가 구개음화되는 현상은 둏다>좋다, 디다>지다, 티다> 치다. 텬디>천지, 부텨>부처 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음 운법칙을 준용하면 두류산이 지리산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두류산과 지리산의 상호 관련성을 뚜렷이 증명해 주는 현상이다. 그 러나 이 이론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나 는 기록상 지리산의 기록이 두류산보다 먼저 나온다는 점이다. 지리 산은 앞서 언급했듯이 통일 신라 시대의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 탑비 에 나온다. 그러나 두류산은 고려시대 문헌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하나는 /ㄷ/ 구개음화는 /ㄱ/ 구개음화보다 앞서기는 했 지만 16세기나 17세기 이후로 봐야 한다. 즉 두루>지리 의 구개음화 는 중세국어 이전에 일어난 음운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구개음화현 상으로 설명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의미적으로 보면 두리/두루 형은 산의 속성이랄 수 있는 廻 나 周 와 관련된다. 18) 즉 의미와 관련하여 산이 워낙 크고 넓기에 돌 아오다, 돌아보다, 둘러보다, 두루두루 (돌아보다), 둘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전체적인 산세가 험하지 않고 두루뭉술하며 사 방에 산들이 첩첩이 둘러쳐 있기에 우리말 두루, 두리 가 한자로 표 기되면서 두류산이 되었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두루 는 경상도 일대 17) 구개음화된 지리- 의 전신이 바로 이 두리/두루라 생각된다.(천소영, 2003: 198) 배우리( 두류산>두 리산>디리산>지리산 으로 구개음화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18) 이런 견해는 천소영(2003: 198)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르- 를 廻 와 관련짓고 있다.

24 땅이름 지리산 고찰 23 에서 두리 라고도 한다. 즉 이들 두루- 관련 우리말들이 한자로 표 기하는 과정에서 한자화하기 좋은 두류산(頭流山) 으로 되었을 것 이다. 두류산은 백두산과 관련짓기 쉬우므로 식자(識者)들이 선호하 는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두류산과 지리산, 지리산과 두류산의 어원적 관련성 을 음운현상으로 설명하기에는 시기적인 문제로 맞지 않다. 다만 지 리산의 지리하다 와 두류산의 두루 는 의미적으로 약간의 관련성은 찾을 수 있다. 산의 넓이가 지루할 정도로 넓다면 두루두루 둘러보 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름이란 대체로 매우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만들어진다. 동네 땅이름들을 살펴보면 그런 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새로 생긴 동네 라고 새터 이고, 양달에 있는 마을이라고 양지뜸 이며, 큰밭이 있었 다고 한밭 혹은 이를 한자화한 대전 인 것이다. 한밭<대전 이나 무실<수곡(水谷) 같은 예는 본래 순우리말이었는데 한자화하는 과 정을 거치면서 변개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두류산의 어원이 두 루/두리 와 같은 순우리말이라는 견해는 이런 땅이름 명명 방식의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에 근거를 둔다 방장산 방장산(方丈山)은 신선이 산다는 중국 전설 속의 삼신산(三神山) 의 하나로 인식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 리지>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주 및 <통감집람>에 모두 방장산은 대방군 남쪽에 있는 것이 그것

25 24 地名學 17 (2011) 이다 라고 하였다.19) 세상에서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 라산을 영주산이라 하니, 이른바 삼신산이다. 지리지에 지리산은 태 을이 사는 곳으로, 산신들이 모이는 곳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20) 이들 문헌은 방장산의 유래를 나타낸 것이다. 대방군은 우리나라 를 나타낸다. 지리산이 방장산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당나라 때 시 인 두보(杜甫)가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方丈山三韓外) 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방장산은 조선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 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이는 분명 삼신산이 우리나라에 있 음을 밝힌 것이다. 삼신산은 우리 동방에 있는데 풍악, 한라, 방장이 다. 풍악산(楓岳山)은 봉래산(蓬萊山, 금강산)이고, 한라산(漢拏山) 은 영주산(瀛洲山)이며, 두류산이 이 방장산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 은 여기에 묘향산(妙香山)과 구월산(九月山)을 합쳐 5대 신산(神 山)이라 하였다. 지리산은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악(南嶽)이라 하여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삼신산의 세 신은 신 선이므로 신선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장산은 태을이 사는 곳 이다. 태을은 태을진군(太乙進君)이라고도 한다. 태을은 도가의 천 신으로 북극신(北極神)의 별명이다.21) 19) 又名方丈 杜詩 方丈三韓外 注及通鑑輯覽 皆云方丈在帶方郡之南 是也 <新 增東國輿地勝覽> 券 ) 世以金剛爲蓬萊 智異爲方丈 以漢拏爲瀛洲 所謂三神山也 地誌 以智異爲太 乙所居 羣仙所會 <擇里志> 卜居總論 山水. 21) 삼신(三神)을 해석하는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즉 환인, 환웅, 단군을 말하거나, 아기를 점지해 주고 낳게 해 주는 신을 말하기도 한다. 앞의 것 은 우리 민족의 민간신앙과 신선사상을 엿볼 수 있고, 뒤의 것은 삼기 다 (생기다), 삼줄 (탯줄)과 어원적으로 관련된다. 지리산 삼신봉(三神峰)

26 땅이름 지리산 고찰 25 두보의 언급은 방장산이란 명칭이 중국에서 그 이전부터 사용되 어 왔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 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서복(徐福)을 파견한 전설과도 관련된다. 그 는 진(秦)나라 때의 사람으로 진시황의 명으로 동남(童男), 동녀(童 女) 3천 명을 데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바다 끝 신산(神山) 으로 배를 타고 떠났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이 전설은 남 해 바닷가에도 남아 있고 그것을 뒷받침 하는 서복(불)의 암각화가 남해 금산 중턱에 있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방장산을 흔히 방호산(方壺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을 방호산이 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동군 악양면에 소재한 학명재(鶴鳴 齋) 의 기문에 방호산이 나온다. 악양은 방호산(方壺山) 중에 가장 뛰어나고 화창한 곳인데 소상팔 경보다 낫다고 사람들이 족히 칭찬하여 감상한다. 매계(梅溪)에 이르 러서는 또 특별한 경치가 있어 이른바 청학동은 나라 안에서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왕왕 사람들이 이 땅을 거기에 비기는 일이 있다.(악양 면지)22) 방호산과 방장산은 같은 계열이라고 보아 따로 논의하지 않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리산은 대개 세 가지 명칭으로 쓰여 왔다. 이 중 가장 많이 쓴 것은 지리산(智異山)이고, 다음이 두류산 (頭流山), 마지막이 방장산(方丈山)이다. 은 방장산과 관련된 삼신산과의 연관성보다는 우리 민족의 신선사상과 관 련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삼신산 안에 다시 같은 이름인 삼신 봉이 있다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22) 岳陽方壺山中最開暢華麗之處而有瀟湘八景之勝足 可爲人所稱賞而至若梅溪 則又有別焉者形家所謂靑鳴洞國中勝地而往往人有以此地擬之者<岳陽面紙>

27 26 地名學 17 (2011) <사진 2> 서복의 글로 추정되는 암각화, 남해 금산 참고로 2011년 8월 10일 한국고전종합DB( itkcdb/mainindexiframe.jsp)를 검색해본 결과 智異山이 834건, 智理 山이 4건, 知異山이 10건, 地異山이 3건, 地理山이 15건으로 나타났 다. 두류산과 관련해서 頭流山은 474건, 頭留山은 5건으로 검색되었 다. 그리고 방장산(方丈山)은 265건, 방호산(方壺山)은 6건이 나온 다. 결국 지리산 계열이 866건, 두류산 계열이 479건, 방장산 계열이 271건이 검색된 셈이다. 따라서 문헌상 가장 많이 오른 이름의 순서 는 지리산, 두류산, 방장산이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지리산이 智異山이 74건, 두류산이 13건, 방장산은 1건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은 100 편 정도인데 그 가운데 유람록 형식을 갖춘 64편을 분석한 결과 제 목을 지리산(智異山)으로 쓴 것이 10편, 두류산(頭流山)으로 쓴 것 이 47편, 방장산(方丈山)으로 쓴 것이 7편으로 나타나 두류산이 압

28 땅이름 지리산 고찰 27 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최석기, 2009: 156 참조). 이는 앞 에 제시한 고문헌상의 통계와 상반된다. 아마 조선시대 유교지식인 들이 지리산보다 두류산을 즐겨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 리산의 개념을 백두산에서 뻗어 온 백두대간으로, 국토의 축이며 민 족의 영산이라는 개념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4. 마무리 지리산은 국립공원 1호이며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또 한 3개도 5개 시 군, 16개 읍 면, 59개 동 리에 걸쳐 펼쳐져 있 는, 로 남한에서 가장 넓은 산이다. 지리산은 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 등으로 기록되 어 있다. 최초의 기록은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인데, 여기에는 知異山으로 되어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는 지리산을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 으로 하였지만 기원은 그것과 무관하다. 지리산은 순우리말 지루하다 의 방언인 지리하다 에서 온 말이다. 두류산은 백두산의 맥이 뻗어 내려 와 우리나라의 남쪽인 이곳에 자리 잡은 산이라는 뜻으로 보는 기록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 다. 두류산을 백두산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은 인공적이고 작위적 이라는 점, 두류산이란 지명이 지리산에만 쓰인 것은 아니라 전국적 으로 여러 개 있다는 점, 금강산이나 설악산 등은 두류산이라고 하 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이유가 된다. 두류산 역시 고유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두류산의 두류 는 우리 말 /들/두리 등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어원은 고구려 지명어에서

29 28 地名學 17 (2011) 많이 쓰인 達 과 관련된다. 達 은 용법상 어두에 쓰일 때는 높음 [高]과 대응한다. 이 의 본래 의미는 높은 곳이다. /들/두리 등이 산 이름에서 한자어된 형태가 頭里/頭流/豆利 등이다. 이 두루/두류 로 변한 과정을 음운적으로 보면 >달>다라>다루>두루 정도로 나타낼 수 있다. 결국 산 의 뜻인 계의 한자어가 두루/ 두류 로 변했다. 그런데 지리산을 두루/두리 등의 발음들이 구개음화되어 지리- 로 변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두루>두리>드리>디리>지리 의 변 화를 겪었을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상 지리산이 먼저 나오고, 구개음화 현상은 중세 이전에는 일어났다고 보기 어려우므 로 이 이 가설은 맞지 않다. 한편 의미와 관련하여 해석해 보면 두리/두루 형은 산의 속성이 랄 수 있는 廻 나 周 와 관련된다. 즉 산이 워낙 크고 넓기에 돌아 오다, 돌아보다, 둘러보다, 두루두루 (돌아보다), 둘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전체적인 산세가 험하지 않고 두루뭉술하며 사 방에 산들이 첩첩이 둘러쳐 있기에 우리말 두루, 두리 가 한자로 표 기되면서 두류산이 되었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두루 는 경상도 일대 에서 두리 라고도 한다. 즉 이들 두루- 관련 우리말들이 한자로 표 기하는 과정에서 한자화하기 좋은 두류산(頭流山) 으로 되었을 것 이다. 특히 두류산의 한자어는 백두산과 관련시킬 수 있으므로 식자 (識者)들이 선호하는 산 이름이 되었다. 지리산을 방장산 혹은 방호산이라고도 하였다. 삼신산은 우리 동 방에 있는데 풍악, 한라, 방장이다. 풍악산(楓岳山)은 봉래산(蓬萊 山, 금강산)이고, 한라산(漢拏山)은 영주산(瀛洲山)이며, 두류산은 이 방장산인 것이다.

30 땅이름 지리산 고찰 29 현재 탑재되어 있는 한국고전종합DB에는 智異山이 834건, 智理山 이 4건, 知異山이 10건, 地異山이 3건, 地理山이 15건으로 나타났다. 두류산과 관련해서 頭流山은 474건, 頭留山은 5건으로 검색되었다. 그리고 방장산(方丈山)은 265건, 방호산(方壺山)은 6건이 나온다. 지리산은 두류산이나 방장산보다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고 많이 사용 하던 땅이름이었다. 지금은 방장산은 거의 쓰지 않고, 두류산은 특 수한 경우에만 쓰는 정도이고 절대 다수가 지리산을 쓰고 있다. 지 리산이든 두류산이든 그 뿌리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31 30 地名學 17 (2011) 참고문헌 1. 자료 <고려사>(1451) <고려사절요>(1452) <관보 제17423호>( ) <삼국사기>(1145) <삼국유사>(1281)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악양면지>(2004) <조선왕조실록DB> <증보문헌비고>(1770) <진감선사대공탑비문>(887) <진양지>(1632) <청학동변증설>(19세기 중엽) <통감집람>(1767) <파한집>(1260) 2. 논저 강정화 최석기(2010),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보고사. 곽재용(2011), 땅이름으로서의 지리산, 오백예순다섯 돌 한글날 맞이 학술발 표대회, 한글학회 진주지회. 김민수 편(1997), 우리말 어원사전, 태학사. 김양식(1998), 지리산에 가련다, 도서출판 한울. 도수희(2011), 삼국사기 지리지에 관한 제 문제, 제21회 한국지명학회 학술발 표대회 발표논문, 한국지명학회. 서정범(2000), 국어 어원 사전, 보고사. 성락건 남경옥(1996), 남녘의 산, 도서출판 산에 미친 사람. 유창돈(1990), 이조어 사전, 연세대학교 출판부.

32 땅이름 지리산 고찰 31 이영택(1986), 한국의 지명, 태평양. 이중환 지음/이익성 옮김(2011), 택리지 (개정판 16쇄), 을유문화사. 지리산권문화연구단(2010ㄱ), 지리산과 인문학, 커뮤니케이션 브레인. 지리산권문화연구단(2010ㄴ), 지리산과 명산문화, 커뮤니케이션 브레인. 천소영(2003), 한국 지명어 연구, 이회. 최석기 외 옮김(2007),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최석기(2009), 지리산에서 살다 간 큰 선비 남명 조식, 지리산, 국립진주박 물관. 최석기(2010), 지리산 유람록을 통해 본 인문학의 길 찾기, 커뮤니케이션 브 레인. 3. 누리집 백과사전) DB)

33 32 地名學 17 (2011) Abstract A Study on the Place Name of the Jirisan' Kwak, Jae-yong Jirisan is the first national park and the second highest mountain in South Korea. It lies over three provinces, five cities or counties, sixteen districts, and fifty-nine villages. It is in area, which is the largest in South Korea. Jirisan is written as 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地理山. It was first described as 知異山(Jirisan) in a document called 'Jingamseonsadaegongtapbi' in Ssanggyesa temple. The web-site of the Korean National Park Authority( kr/main/main.do) describes Jirisan as 'the mountain of the wise and exceptional people'. However, it came from original Korean words 'Jirihada;tedious'. Duryusan means it starts from Baekdusan, which is located in the north, and it extends southward. However, this is not true. It is artificial to relate to Bakdusan. The name, Duryusan, is also used about other mountains. Gumkangsan and Sulaksan are not called Duryusan. Duryu also came from original Korean words /들/두리. The origin is related to 達 that is used a lot as place name in the Goguryeo era. 達 is equivalent to 高(high) when it is used as a

34 땅이름 지리산 고찰 33 prefix. The original meaning of is high place. The mountain names of /들/두리 have changed 頭里/頭流/豆利 as Sino-Korean words. has changed to 두루/두류. The changing process can be indicated >달>다라>다루>두루 phonologically. Finally, the Sino-Korean representation of class which means mountain has changed to first, 두루, then 두류. 두리/두루 are related to 廻 or 周, which have to do with some characteristics of the mountain. That is, we can say it has changed in this way: come back', look back, look around, pan, 'circumferance', because mountains are usually very big. Korean words 두루, 두리 have changed to Duryusan when they are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In Gyeongsang dialect, 두루 is 두리. It is assumed that 두루 related words became 두류산(頭流 山), which is more convenient in translating into Sino-Korean. Especially, the Sino representation of 두류산 has somethings in common with Bakdusan, and intellectuals favored that name. Jirisan is also called Bangjangsan or Banghosan. We call Pungak, Halla, Bangjang as Samsinsan and these mountains are located in the east of Korea; Pungaksan(楓岳山) is Bongraesan (蓬萊山, Keumgangsan), Hallasan(漢拏山) is Yeongjusan(瀛洲山), and Duryusan is Bangjangsan. There are 834 智異山 instances, 4 智理山 instances, 10 知異山 instances, 3 地異山 instances, 15 地理山 instances in the current Korean-traditional-name DB; relating to Duryusan, we can see 頭流山 474 times, 頭留山 5 times, Bangjangsan(方丈山) occurs 265 times, Banghosan(方壺山) 6 times. Jirisan has a longer history and has been used more frequently than Dryusan and Bangjangsan. Now, Bangjangsan is rarely used, Duryusan is only

35 34 地名學 17 (2011) used in special cases, and Jirisan is most common. Both Jirisan and Duryusan come from original Korean words. Key words : Jirisan, Duryusan, Bangjangsan, Jirihada;tedious, original Korean words. 성명 : 곽재용(郭在鏞) 주소 : ( ) 경남 진주시 신안동 380 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전화 : 전자우편 : ok9san@hanmail.net 이 논문은 2011년 10월 31일 투고되어 2011년 11월 01일부터 12월 1일까지 심사하고 2011년 12월 3일 편집회의에서 게재 결정되었음

36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 金武林 국문요약 본 연구는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등의 借音字 表記를 살 펴보면서 중세국어와는 다른 고대국어 한자음의 일단을 밝히기 위하 여 작성되었다. 특히 이러한 借音字에 대해서는 南豊鉉(2009)에서 中 古韓國語의 單母音化 라는 주제로서 논의하였는데, 즉 令(령>리), 呂 (려>리), 禮(례>리), 兮(혀/혜>히), 亦(역>익/이기>이), 喩/鍮(듀>디), 儒(뉴>누) 등의 음변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南豊鉉(2009) 의 논의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고대국어(또는 중고한 국어)의 표기에 사용된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등의 한자음을 대체로 중세국어의 현실 한자음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진행 했다는 것이다. 令(령), 呂(려), 禮(례), 兮(혀/혜), 亦(역), 喩/鍮 (듀), 儒(뉴) 등의 괄호 안의 한자음은 喩/鍮(듀), 儒(뉴) 를 제외하 고는 그대로 중세국어 현실 한자음이며, 喩/鍮(듀), 儒(뉴) 의 韻母 역시 중세국어의 한자음에 그대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古代國語 漢字音과 中世國語 漢 字音의 차이를 논의하면서 古代와 中世 한자음의 불연속적 성격을 주 장하였다. 결론적으로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등의 고대국 어 한자음은 중세국어 한자음과는 달리 令/리, 呂/리, 禮/리, 兮/히, 亦/이/익, 喩/鍮/디, 儒/누, 留/루/리 등의 한자음으로 재구하였다.

37 36 地名學 17 (2011) 여기에 사용된 論據는 借字表記에 나타나는 해당 한자의 異文을 이용 하였다. 핵심어 : 借字表記, 借音字, 異文, 單母音化, 古代國語 漢字音, 中世國語 漢字音 1. 導入 고대국어의 同音性 異文을 일람하면 중세국어(15~16세기)의 한 자음과는 맥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고대국어의 한자음 이 중세국어 한자음과는 체계적인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고 대국어의 차자표기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당시의 한자음에 대 한 준거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이미 상식적인 견해가 되어 있다고 하겠으나, 그 이해의 실상에 있 어서 고대국어 한자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아직도 다기망양(多 岐亡羊)의 미혹에서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다.1) 본고의 집필은 南豊鉉(2001, 2009에 再錄)에 의하여 자극을 받았 다. 南豊鉉(2009: 300~317)에서는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등 의 음차 표기를 살펴보면서 해당 한자음의 단모음화를 논의한 것이 * 본 논문은 2011년도 강릉원주대학교 교수연구년 연구 지원에 의하여 수행 되었음. **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 異文의 개념은 異表記와 다르지 않다. 본고에서 고대국어는 고대국어 전기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와 고대국어 후기(고려의 초기 및 중기, 10~13세 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김무림 2004: 29).

38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37 다. 즉 令(령>리), 呂(려>리), 禮(례>리), 兮(혀/혜>히), 亦(역>익/ 이기>이), 喩/鍮(듀>디), 儒(뉴>누) 등의 음변화가 있었다고 하였 다. 그렇지만 南豊鉉(2009)의 논의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고대국어(또는 중고한국어)의 표기에 사용된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등의 한자음을 대체로 중세국어의 현실 한자음과 같 은 것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令(령), 呂(려), 禮 (례), 兮(혀/혜), 亦(역), 喩/鍮(듀), 儒(뉴) 등의 괄호 안의 한자음 은 喩/鍮(듀), 儒(뉴) 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중세국어 현실 한자음 이며, 喩/鍮(듀), 儒(뉴) 의 韻母 역시 중세국어의 한자음에 그대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南豊鉉(2009: 300~317)에서 논의한 내용을 보면 모호한 점이 있 다. 즉 南豊鉉(2009: 304)에서 儒禮 와 儒理 의 두 표기를 논하면 서, 先代에는 儒禮 로 표기하던 것이 後代의 단모음화에 의하여 儒 理 로 바뀌어 표기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禮 음이 理 음으로 바뀌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禮 의 한자음이 바뀌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대국어의 단어 *누려[世] 가 儒禮 로 표기되다가, 단모음화에 의한 형태 변화에 의 하여 중세국어와 같은 누리[世] 가 되면서 儒理 로 표기가 바뀌었 다는 것인지 논점이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南豊鉉(2009: 300~317)의 전체적인 맥락은 한자음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국어의 형태 변화에 따른 한자음 표기의 변화, 또는 하나의 借字에 대한 後 代의 讀音의 변화를 논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借字에 대한 讀音의 변화라는 것은 亦 이 역 익/이기 이 와 같은 讀音의 변화를 거 쳤지만, 국어의 한자음에서 亦(역) 의 한자음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주장인 것이다.

39 38 地名學 17 (2011) 본고에서는 南豊鉉(2009: 300~317)의 논점을 비판적으로 이해하 면서, 아울러 해당 借字의 漢字音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얻고자 한다.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등의 고대국어 한자음을 직접 알 수 있다면 문제에 대한 해결은 간단하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간 접적인 다른 논거에 의지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종 합적인 시각을 토대로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등의 고대 국어 한자음의 실상에 접근해 보려는 것이다. 2. 各論 2.0. 한자음 운모 변화 各論에 앞서서 본고에서 논의하게 될 한자의 漢語音을 대상으로 王力(1985)에 의한 漢字音 韻母 변화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2) (1) 漢語史에서 韻母의 變化 時代 先 秦 韻母 西 漢 東 南北 隋 漢 朝 唐 五 代 宋 元 明 淸 現 代 該當 漢字 je je je je i i i ʅ ʅ ʅ 支 開四(齊) iei iei iei iei iæi iæi i i i i 兮, 禮 開四(丁) ieŋ ieŋ ieŋ ieŋ iɐŋ iɐŋ iŋ iŋ iŋ iŋ 令 開三(支) 2) 王力(1985)은 자신을 포함한 기존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漢語 音韻史에 대한 자신의 최종안이다. 특히 漢語 音韻史의 단계를 10 단계 로 제시하고 있어서 국어 한자음의 비교에 유용한 준거로 삼을 수 있다. 口 訣 借音字 목록에서 제시한 上古音은 王力(1985)에서 先秦 語音에 해당하고, 中古音은 隋唐 語音에 해당한다. 도표의 韻母는 先秦 語音의 韻部를 기준으 로 한 것이다. 그러나 本論에서 제시하는 開合이나 音價에 있어서 약간의 차 이가 있는 것은 再構音에 있어서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까닭이다.

40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39 開三(利) je:t je:t je:t jei 開三(戟) jak jak jak i i i i i i 利 jek jɐk jək it i i i 亦 開三(魚) ja jɔ jɔ jɔ jo ju ju ju y y 呂 開三(基) jə jə jə jə i i i i i i 吏, 里/理 開三(岐) je je je je i i i i i i 易(陰聲韻) 合三(雨) juɔ juɔ juɔ jo ju ju ju ju y y 合三(求) ju ju ju ju jou jəu jəu jəu jəu jəu 開一(侯) ɔ u u u ou əu əu əu əu əu 喩 留 偸/鍮 2.1. 令 釋讀口訣에서 이 리 의 표기에 쓰인 것이라고 할 때, 의 原 字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3) 南豊鉉(1999)에서는 의 原字를 令 으로 보았고, 이장희(1996)와 백두현(2005: 88) 등에 서는 於 라고 하였다. 原字에 대한 견해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의 독음을 바탕으로 한 令 의 고대국어 한자음을 논의한다는 것이 아 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의 原字는 南豊鉉(1999: 201~212) 의 논거가 가장 실증을 얻었다고 생각되며, 의 독음도 ㄹ 이 아 닌 리 가 옳다는 전제에서, 令 의 고대국어 한자음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漢語史에서 令 의 음가의 추이를4)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3) 令 을 原字로 하는 구결자 를 이 로 읽는 경우에는 音借에 대한 논의 는 무의미하다. 4) [(現代音) 聲調/音標 (近代音) 聲調/音標 (中古音) 攝/開合等/聲調 /韻/紐/反切/音標 (上古音) 韻/紐/聲調/音標(李 周 面數)] [(上古音) 董同龢 / Karlgren / 周法高(周 面數)] 문헌: 李珍華 周長楫(1993), 漢 字古今音表, 中華書局. 周法高(1974), 漢字古今音彙, 中文大學出版社.

41 40 地名學 17 (2011) (2) 令 의 漢語音 가. [陽平/liŋ 陽平/liəŋ 梗/開4/平/靑/來/郞丁/lieŋ 梗/來 /平/lieŋ(364)] [ljeng / ljěng / lieng(5)]5) 나. 吳語[lin], 相語[lin], 贛語[lin], 客語[lin], 粤語[liŋ], 閩東話 [liŋ], 閩南話[liŋ] 令/ 은 釋讀口訣에서만 나타나며,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인 華 嚴經䟽 를 기준으로 12 세기 중엽에 사용된 것이다. 令 의 漢語音에 서 주목되는 것은 宋代의 [liŋ]이며, 아울러 현대의 거의 모든 漢語 方言에서도 [liŋ]이나 [lin]인 것을 참조할 수 있다. 이러한 令 의 음 가의 변화는 4等 介母 [i]가 음절 구성에서 核母를 밀어낼 만큼 강 한 작용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介母의 특성이 강 조된 음가는 方言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漢語에서도 宋代 이전으로 소급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令 은 고대의 지명 표기에 나타나지 않지만, 같은 反切字인 靈 은 三國史記 의 지명 표기에서 사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표기가 주목 된다. (3) 靈 의 지명 표기 가. 奈靈郡 本百濟奈已郡 婆娑王取之景德王改名 今剛州(삼국사기 35-8) 나. 武靈郡 本百濟武尸伊郡 景德王改名 今靈光郡(삼국사기 36-9) 이와 같은 靈 의 표기는 靈 : 已, 靈 : 尸伊 등의 異文과의 비교 에서 音借로 이해되므로, 靈 의 음가가 [li]로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已 의 음가는 [i]로, 尸伊 는 [li]의 표음으로 이해되 5) 令 은 去聲字도 있음.

42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41 기 때문이다. 口訣에서 令 의 표음이 [li]인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韻尾 [ŋ]이 表音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借字表記에서 다음과 같이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4) 口訣 및 吏讀에서 韻尾 [ŋ]의 脫落 가. 等: /드 의 表記6) 나. 上: 자 의 表記 다. 丁: 뎌 의 表記 라. 應: 의 表記 (5) 固有名詞 表記에서 韻尾 [ŋ]의 脫落 가. 同: 奴同覔縣一云如豆覔(삼국사기 34-4) 同福縣本百濟豆夫只縣(삼국사기 36-10) 나. 良: 加良(삼국사기 4-8), 加羅(삼국사기 2-5) 大良(一作耶)州(삼국사기 34-11) 豆等良只/置等亽只(두드라기, 향약구급방 상-5, 중-20) 다. 蒙: 鄒牟或云朱蒙(삼국사기 23-1) 라. 上: 佐魯縣本上老(삼국사기 37-17) 마. 省: 蘇泰縣本百濟省大号縣(삼국사기 36-4) 省只草(속새, 향약구급방 중-32)7) 바. 膺: 膺廉(膺一作疑)(삼국사기 11-6) 借字表記에서 연구개 韻尾 [ŋ]의 탈락은 치경음 [n]이나 양순음 [m]에 비교하여 매우 두드러진다. 이것은 연구개 入聲 韻尾 [k]가 치경음 [t]나 양순음 [p]에 비하여 탈락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도 6) 等 에 대한 /드 가 等 의 훈 ㅎ 에서 왔다면 韻尾 [ŋ]의 탈락을 논의 할 수 없다. 7) 省 의 俗音으로 소 가 있다.

43 42 地名學 17 (2011) 평행적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마도 고대국어 한자음 에서 연구개 韻尾의 성립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 측을 가능하게 한다. 令 의 韻尾가 표음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8) 2.2. 呂 呂 는 均如의 鄕歌에서 사용되어 그 音借의 특수성에 주목 받았 다. 즉 三國遺事 의 鄕歌에서는 里 나 理 로 표기되던 것이 均如의 鄕歌에서는 世呂/누리, 慕呂白乎隱/그리 본, 邀呂白乎隱/모리 본, 有叱下呂/이시리/이샤리 등과 같이 呂 로 교체되고 있으므로, 均如 의 鄕歌에서 呂 의 表音은 리 임이 분명하다. 呂 의 漢語音을 보이 면 다음과 같다. (6) 呂 의 漢語音 가. [上/ly 上/liu 遇/合3/上/語/來/力擧/lǐo 魚/來/上 /lǐa(97)] [ljag / gljo / liaɣ(38)] 均如의 鄕歌에서 呂 의 音價가 리[li] 인 것이 어느 시기의 漢語 音을 반영한 것인지는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中古音 以後의 것임은 분명하다. 均如(923~973)가 활약한 시대가 10세기의 高麗 初期임을 생각하면 당시의 漢字音이 보수적인 규범화의 단계에 이 르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均如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 나 송악산의 귀법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므로, 신라에서 형성된 한자 8) 이장희(2005)에서는 고대국어의 차자표기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고대국어 의 /ŋ/이 7세기 이전에는 부재했다가 8세기 중엽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 으로 논의하였다.

44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43 음과는 어느 정도 다른 계열의 한자음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呂 의 現代 漢語音에서 [li]를 주목할 수 있다. (7) 呂 의 漢語音 가. 吳語[li], 相語[lei], 贛語[li/lui], 客語[li], 粤語[løy], 閩東話 [ly], 閩南話[lu] 以上의 現代 漢語 方言에서 呂 는 [li]의 분포가 가장 폭넓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근원은 呂 의 한자음 [li]의 깊은 역사성 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唐五代 西北方音에서도 呂 와 里 의 동음성이 확인된다는 보고를 참조할 수 있으므로9), 均如의 漢字音 呂 의 리[li] 는 近代 이후의 漢語音 에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鄕歌를 지을 때 均如가 사용한 呂 의 한자음이 리[li] 라는 것도 분명하다.10) 2.3. 禮 禮 는 앞에서 살핀 呂 와 마찬가지로 고유명사 표기에서 里, 理 와 同音性 異文을 이루어 그 表音이 리[li] 로 간주된다. 우선 禮 의 역사적인 漢語音과 現代 方言音을 함께 보이면 다음과 같다. (8) 禮 의 漢語音 가. [上/li 上/li 蟹/開4/上/薺/來/盧啓/liei 脂/來/上 9) 羅常培(1933), 邵榮芬(1963) 등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는 권인한(2002)의 지적을 참조하였다. 10) 본고에서 근대 한어(近代漢語)는 중고 한어(中古漢語) 이후를 폭넓게 지 칭하므로, 대략 송대(宋代), 원대(元代), 명대(明代)에 이르는 한어이다.

45 44 地名學 17 (2011) /liei(132)] [lied / liər / ler(228)] 나. 吳語[li], 相語[li], 贛語[li], 客語[li], 粤語[lɐi] 閩東話[lɛ], 閩 南話[le] 禮 의 漢語音에서는 역시 [li]의 폭넓은 분포에 주목할 수 있다. 禮 의 조선 한자음은 례 이지만, 다음과 같은 삼국의 고유명사 표기 를 적용하면 禮 의 고대국어 한자음이 조선 한자음 그대로 례 라고 하기는 어렵다. (9) 禮 의 異文 가. 古記第三第十四二王同諱儒禮 或云儒理未知孰是(삼국사기 2-12) 나. 第十四儒禮尼叱今 一作世里智王(삼국유사-10) 다. 解禮縣 本皆利伊(삼국사기 37-17) 라. 丁吏 盖丁壯之人 初置吏者也 舊說轉爲頂禮(고려도경 21)11) 禮 의 異文으로는 위에 나타난 바와 같이 理, 里, 利, 吏 등이다. 里 와 理 는 같은 反切字이므로 어느 경우에나 同音이므로, 理/里, 利, 吏 로 나누어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0) 理/里 의 漢語音 가. [上/li 上/li 止/開3/上/止/來/良士/lǐə 之/來/上/lǐə (62)] [ljəg / ljəg / liəɣ(365)] 나. 吳語[li], 相語[li], 贛語[li], 客語[li], 粤語[lei] 閩東話[li], 閩南 話[li] (11) 利 의 漢語音 가. [去/li 去/li 止/開3/去/至/來/力至/li 脂/來/去/lǐei 11) 南豊鉉(2009: 304)에서 再錄.

46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45 (72)] [lied / ljəd / lier(23)] 나. 吳語[li], 相語[li], 贛語[li], 客語[li], 粤語[lei/lɐi] 閩東話[lei], 閩南話[li/lai] (12) 吏 의 漢語音 가. [去/li --- 止/開3/去/志/來/力寘/lǐə 之/來/去/lǐə(77)] [ljəg / ljəg / liəɣ(37)] 나. 吳語[li], 相語[li], 贛語[li], 客語[li], 粤語[lei] 閩東話[lei], 閩 南話[li] 禮 와 異文을 이루는 理/里, 利, 吏 의 漢語音을 참조하면 이들의 음가가 례[ljəj] 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中古音 以前으로 漢語音 을 소급시키면 理/里 와 吏 는 려[ljə] 정도의 음가로 실현될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禮 와 理/里, 利, 吏 등이 同音性 異文이 되기 위해서는 리[li] 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漢語의 基層으로는 中古音 以後의 어느 方言일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儒禮 와 世里 의 대응에 서도 중세국어 누리(훈몽자회 중-1, 악학궤범-동동) 를 표기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에는 異論이 없을 것이다. 南豊鉉(2009: 300~317)의 논의에 따르면 儒禮 는 *누려[世] 에 대한 前代의 表記이고, 儒理 는 형태 변화를 반영한 누리[世] 에 대 한 後代의 表記가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서 두 표기 모두 古記 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解禮縣 本皆利伊 의 기록에서는 解禮 縣 보다 皆利伊 의 표기가 좀더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利 가 禮 로 바뀌어 표기되었다면 려/례 리 의 변화를 반영했다는 주장 과는 정반대의 논거, 즉 리> 려/례 의 변화를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禮 에 대응하는 理, 利 는 共時的인 차 원에서 그 同音性을 논의하는 것이 적절하고 타당할 것이다.

47 46 地名學 17 (2011) 2.4. 兮 兮 는 吏讀 및 口訣에서 히 로 독음되고, 삼국의 地名 表記에서 音借字로 사용되었다. 히 로 독음되는 口訣字 의 原字를 屎 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백두현 2005: 27, 金武林 1999), 南豊鉉(2009: 306)의 견해가 옳은 것으로 추정된다. 兮 의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 과 같다. (13) 兮 의 漢語音 가. [陰平/ɕi 陽平/hi 蟹/開4/平/齊/匣/胡鷄/ɣiei 支/匣/ 平/ɣie(122)] [ɣieg / --- / geɣ(19)] 나. 吳語[--], 相語[ɕi], 贛語[--], 客語[hi], 粤語[hɐi] 閩東話[e], 閩南話[he/e] 이러한 兮 의 漢語音을 고려하면 兮 의 독음인 히[hi] 는 中古音 以後의 어느 方言에서 그 근거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地名 表記에 사용된 兮 의 용례는 많지만, 異文으로서 주목할 수 있는 경우는 많 지 않다. 다음의 용례를 검토하기로 하겠다. (14) 兮 의 異文 가. 菓支縣 一云菓兮(삼국사기 37-9) 나. 芼兮縣 一云化雞(삼국사기 34-9) 다. 八谿縣 本草八兮縣(삼국사기 34-11) 兮 와 異文을 이루는 雞, 谿 는 兮-匣母, 雞-見母, 谿-溪母 로서 비록 牙音과 喉音이라는 聲母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韻(平聲 齊云) 에 속하여 韻母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通用의 범위가 예상되는

48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47 牙音과 喉音의 聲母라는 점을 감안하면, 兮 와 雞, 谿 의 異文으로 서의 성립은 충분히 가능하다. 주목할 것은 兮 와 支 의 異文 관계 이다. 支 의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5) 支 의 漢語音 가. [陰平/tʂʅ 陰平/tʂï 止/開3/平/支/章/章移/tɕǐe 支/章 /平/ṭǐe(39)] [kjeg / tjěg / tjieɣ(125)] 나. 吳語[tsɥ], 相語[tsɿ], 贛語[tsɿ], 客語[tsɿ], 粤語[tʃi] 閩東話 [tsie], 閩南話[tsi/ki] 兮 와 異文을 이루는 支 는 韻母에서 [-i]의 대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다만 聲母의 대응에 난점이 있으나, 支 와 같은 反切字인 氏 의 조선 한자음이 시 였다는 것을 참조하면,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氏 는 支 와 같은 反切인 章移 切 도 있으며, 聲母가 禪母인 承紙切 도 있다. 漢語의 역사에서 漢字 의 異音은 원래부터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漢字에서 방언 차이로 나타나는 변이음의 결과를 수집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氏 의 조선 한자음 시 는 물론 後者의 音價를 반영한 것이지 만, 파찰음이 발달하지 않았을 고대국어의 음운 체계를 고려하면, 고대국어에서 支 의 한자음이 시[si/ɕi] 나 [ɦi]에 가까웠을 가능성 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12) 2.5. 亦 亦 은 口訣에서, 의 原字로서 여 로 읽는 것이지만, 조선 12) 백두현(2005: 90)에서는 支 의 독음을 히 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支 의 독음도 한자음의 측면에서 살핀 본고의 견해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어서 주목된다.

49 48 地名學 17 (2011) 시대의 吏讀에서 주격 조사로 사용된 경우는 이 로 읽는다.13) 亦 은 佛國寺釋迦塔重修形止記 (1024)에서 주격 조사로 사용된 것이 문헌상으로는 최초의 것으로 생각된다. 南豊鉉(2009: 307)에서 제시 한 바와 같이 淨兜寺造塔形止記 (1031)의 吏讀 표기에서 주격조사 로 사용된 郡百姓光賢亦, 副戶長稟柔亦, 右長亦 등의 亦 의 독음에 대해서는 그 표음의 음가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南豊鉉(2009: 309)에서는 亦 과 같은 기능을 하는 後代의 吏讀 弋只(익) 을 근거 로 亦(역) 이 단모음화된 것을 弋/弋只(익) 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우선 亦 의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6) 亦 의 漢語音 가. [去/i 去/i 梗/開3/入/昔/以/羊益/jǐɛk 鐸/餘/入 /ʎiak(386)] [djăk / zjăk / riak(4)] 나. 吳語[jiɪh], 相語[i], 贛語[it], 客語[it], 粤語[jik] 閩東話[ih/ia], 閩南話[ik/iah] 비록 亦 의 조선 한자음(15~16세기의 중세국어 한자음)이 역 이 긴 하지만, 中古音 時代의 亦 의 反切이 羊益切 이란 것에 주목할 수 있다. 昔韻의 조선 한자음은 擲/텩, 亦/역, 隻/쳑, 奕/혁, 積/젹, 石/셕, 璧/벽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韻母가 역 으로 나타나는 것 이 대세이지만, 液/, 益/익 등에서는 이나 익 으로 나타난다. 특히 亦 의 反切 下字가 益/익 이라는 점은 조선 한자음 이전의 亦 의 한자음이 익 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昔韻에서 益 의 한자음이 역 이 아닌 익 으로 나타나는 것은 昔 13) 吏讀의 亦 이 주격 조사로 쓰일 경우 이 로 읽는다는 것은 人心亦(已)潰 勢似難合(亂中日記 癸巳條) 의 용례가 증언해 준다.

50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49 韻이 職韻에 합류되는 변화로 설명되며, 이러한 변화는 陽聲韻보다 는 入聲韻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伊藤智ゆき 2002:256~257) 亦, 益 이 入聲이라는 사실은 조선 한자음 이전의 이들 한자음이 익 이었을 가능성을 높여 주며, 吏讀 및 口訣에 사용 된 亦 의 용법이 오히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論據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南豊鉉(2009: 309~310)에서는 吏讀의 亦 과 같은 용 법의 구결로 /익 을 제시하면서, 그 연대를 11 세기 전반기로까 지 소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吏讀 문헌인 淨兜寺 造塔形止記(1031)의 亦 과 이 경우의 /익 은 시대 차이가 없는 것이므로, 역 익 의 단모음화에 의한 亦(역) 弋只(익) 의 표기 의 변화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논거를 잃는 셈이다. 中古音을 기준으로 한 漢語에서 亦 은 譯, 驛, 易, 液, 掖, 腋 등 과 同音이다. 亦 과 易 이 同音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역 과 이 의 두 音을 가진 易 의 역사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易 은 위에 보 인 亦 과 같은 入聲韻도 있지만, 이미 中古音에서 다음과 같은 陰聲 韻에도 속해 있어서, 易 의 조선 한자음 이 가 漢語에서 이미 그 뿌 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 易 의 陰聲韻 가. [去/i 去/i 止/開3/去/寘/以/以豉/jǐe 支/餘/去 /ʎǐe(70)] [djeg / djĕg / ɣieɣ(133)] 나. 吳語[ji], 相語[i], 贛語[i], 客語[i], 粤語[ji] 閩東話[ei], 閩南話 [i] 易 의 상고음은 韻尾 [-g]를 가진 것으로 재구하는 것이 일반적 이이서, 이후 陰聲韻으로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 관점

51 50 地名學 17 (2011) 이다. 그런데 漢語 文獻에서 亦 이 쉽다 는 의미의 易(이) 의 互用 字로 사용된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18) 列子 의 黃帝編에서14) 가. 常勝之道曰柔 常不勝之道曰彊 二者亦知而人未之知 나. 張湛의 注: 亦當作易 張湛은 東晋人이므로 그 시기는 4~5세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이미 易 의 陰聲韻字가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며, 이러한 互用에는 亦 의 漢字音이 易 와 같았다는 점이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러므로 吏讀 및 口訣에서 亦 을 익 이나 이 로 읽는 것이 亦 자체 의 한자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국어의 형태(여기서는 주격 조사)가 역 익 이 로 바뀐 것에서 온 것이라는 설명보다는, 애초부터 고 대국어의 주격조사는 익 (또는 이 )이었으며, 여기에 해당하는 한자 음을 가진 亦 으로 표기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喩 13세기 중엽까지 소급되는 吏讀의 不喩 는 안디 로 읽히어 異論 이 없다. 이 경우에 중세국어 한자음이 유(上/平) 인 喩 가 音借일 것으로 추정되는 디 로 독음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南豊鉉(2009: 311~314)에서는 鍮 의 한자음이 訓蒙字會 에서 듀 로 나타난다는 14) 8권 8편. 열어구(列禦寇: 列子)가 서술한 것을 문인과 후생들이 보완하여 천서(天瑞), 황제(黃帝), 주목왕(周穆王), 중니(仲尼), 탕문(湯問), 역명 (力命), 양주(楊朱), 설부(說符)의 8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전한(前漢, B.C. 202~A.D. 220) 말기에 유향(劉向)이 교정하여 8권으로 만들고, 동 진(東晉, A.D. 317~419)의 장담(張湛)이 주(注)를 달았다.

52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51 점에 착안하여 독음 디 는 喩 의 상고음이거나 鍮 의 중세국어 한 자음 듀 가 10세기경에 단모음화하여 생긴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내 면서도, 吏讀의 토가 신라통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하여 喩 의 상고음보다는 鍮 의 중세국어 한자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렇지만 不喩/안디 에서 喩 가 디 로 읽히는 것을 鍮 의 한자음에서 그 근거를 구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며, 듀 가 디 로 단모음화하였다 는 것도 前述한 여러 경우와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 된다. 不喩 의 喩 가 디 로 읽히는 것의 근거를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喩 의 한자음이나 새김에서 직접 논의할 문제이며, 다만 鍮 의 중세 국어 한자음은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喩 및 鍮 의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9) 喩 의 漢語音 가. [去/y 去/iu 遇/合3/去/遇/以/羊戍/jǐu 侯/餘/去 /ʎǐwɔ(114)] [--- / dju / riew(43)] 나. 吳語[jy], 相語[y], 贛語[y], 客語[i], 粤語[jy] 閩東話[øy], 閩 南話[u/lu] (20) 鍮/偸 의 漢語音 가. [陰平/tʰəu 陰平/tʰəu 流/開1/平/侯/透/託侯/tʰəu 侯 /透/平/tʰɔ(411)] [ --- / tʰu / tʰew(12)][djug / --- / riew(12)] 나. 吳語[tʰʏ], 相語[tʰəu], 贛語[tʰɛu], 客語[tʰɛu], 粤語[tʰɐu] 閩 東話[tʰɛu/tʰau], 閩南話[tʰɔ/tʰau] 不喩/안디 에서 喩 의 音借가 확실하다면, 再構한 上古音의 하나

53 52 地名學 17 (2011) 인 [dju]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 梁柱東(1965: 226~232) 에서는 디 가 喩 의 訓이라고 하면서, 不喩 에서 喩/디 의 용법은 義訓讀이라고 하였으나, 그 근거가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다. 디 로 읽는 喩 의 근거는 音借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不冬, 不等, 不喩 등의 일련의 어휘에서 冬, 等 이 본질적으 로 音借인 것이므로, 喩 역시 音借라고 하는 것이 평행적이기 때문 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喩 의 새김에서 디 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兪昌均(1996: 285~288)에서는 喩 의 이른 시기의 土着化 된 漢字音을 이라고 하면서 독음 디 는 여기에서 변화된 형태라 고 하였으나, 漢語와의 관계에서 喩 : 의 대응을 성립시키기 어 렵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논의한 항목을 살펴보면 令 : 리, 呂 : 리, 禮 : 리, 兮 : 히, 亦 : 익/이 등의 독음에서 모음이 모두 -이[i] 인 것이 공통이 며, 이들 한자의 漢語音과의 대응은 核母를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介母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공통이다. 이것은 喩 : 디 에서도 같 은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偸(투) 와 같 은 反切字인 鍮 는 訓蒙字會 의 듀 를 비롯하여 근대국어 시기에 유, 투 등으로 혼선을 빚다가 현대국어에 유 로 정착되었다. 즉 兪 를 聲符로 하는 한자의 국어 한자음은 규범성이 강화된 중세국어 이후에도 혼란이 있었던 것을 참작하면, 굳이 上古音을 언급하지 않 더라도 중세국어 이전의 고대국어 한자음에서 喩 의 한자음이 聲符 兪 의 영향을 입어 [디/ti]로 독음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 나 喩 : 디 의 대응에 대한 해석은 아직 미해결의 상태라고 하는 것 이 옳다.

54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儒 지금까지 살핀 令 : 리, 呂 : 리, 禮 : 리, 兮 : 히, 亦 : 익/이, 喩 : 디 등은 모두 口訣 및 吏讀에서 조사, 접미사, 어미 등과 같은 어휘의 후부 형태소에 해당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儒 는 그렇지 않다. 三國遺事 에서 新羅의 王名인 儒禮 는 弩禮 와 異文을 이루 어 儒 와 弩 가 同音임을 알려 준다. 儒 와 弩 의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20) 儒 의 漢語音 가. [陽平/ʐu 陽平/ɽiu 遇/合3/平/虞/日/人朱/ɽǐu 侯/日/ 平/ṇǐwɔ(89)] [ńjug / ńju / njew(16)] 나. 吳語[zɥ], 相語[y], 贛語[ə], 客語[i], 粤語[jy] 閩東話[y], 閩 南話[lu] (21) 弩/努/怒 의 漢語音 가. [上/nu 上/nu 遇/合1/上/姥/泥/奴古/nu 魚/泥/上 /na(106)] [nɑg / no / naɣ(91)] 나. 吳語[nəu], 相語[ləu], 贛語[lu], 客語[nu], 粤語[nou] 閩東話 [nu], 閩南話[lɔ] 고대국어의 借字表記에서 儒 와 弩 가 同音性 異文인 것은 고대 국어 한자음과 중세국어 한자음의 차이를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示唆的이다. 漢語史에서 弩 의 聲母는 泥母[n]로서 변동이 없 지만, 儒 의 聲母는 日母로서 그렇지 않다. 漢語에서 日母는 대체로 남방 계열의 [n/ɲ/ń]과 북방 계열의 [z/ʒ/ʐ]으로 갈리는데(董同龢 1979: 154~155), 중세국어 한자음에서 日母를 ㅿ[z] 으로 반영한 것은 북방 계열의 한자음을 기준으로 한 것인 반면에 고대국어 한

55 54 地名學 17 (2011) 자음에서 日母인 儒 가 泥母[n]인 弩 와 同音性 異文을 이룬 것은 남방 계열의 日母의 音價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고대국어 한자음에서 儒 와 弩 의 音價는 [nu]임이 확실하다. 이 것은 三國遺事 (王曆 第一)에서 第十四儒禮尼叱今 一作世里智王 의 기록에서 儒禮 는 世里 와 異文을 이루어 중세국어 누리[世] 의 표기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儒 의 音價가 [뉴/nju]가 아니고 [누 /nu]인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고대국어 의 음절 구조에서 뉴 가 성립되지 않았을 가능성, 그리고 다른 하나 는 儒 의 聲母가 구개음화된 [ɲ/ń]이어서 介母 [j]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前者는 중세국어의 어휘에서 뉴- 로 시작되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방증이 될 것이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떠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든지 고대국어 한자음과 중세국어의 한 자음이 언어의 연속성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 儒 의 한자음을 통해 서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연속성 위에 있다 는 것은 국어 한자음의 내적 변화에 의해서 儒 의 한자음이 누(古 代) (中世) 의 변화를 겪은 것이 아니라, 고대국어 한자음 누 가 새로운 한자음 에 의해 교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儒 의 한자음이 처음의 뉴 에서 단모음화를 거쳐 누 가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儒 의 고대국어 한자음은 누 라고 하는 것이 옳다 留 高句麗 王名 표기에서 留 의 音價를 확립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논의에 속한다. 우선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에서 留 와 관련된 異 文 용례와 漢語音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56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55 (22) 留 의 異文 用例 가.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삼국사기 13-5) 나. 第二瑠璃王 一作累利 又(孺)留(삼국유사 2) 다. 第五慕本王 閔中之兄 名愛留 一作憂(삼국유사 4) 라. 慕本王 諱解憂 一云解愛婁(삼국사기 14-8) (23) 留/劉/流/琉/(瑠) 의 漢語音 가. [陽平/liəu 陽平/liəu 流/開3/平/尤/來/力求/lǐəu 幽/ 來/平/lǐu(403)] [ljŏg / ljôg / liəw(206)] 나. 吳語[lʏ], 相語[liəu], 贛語[liu], 客語[liu], 粤語[lɐu] 閩東話 [lieu/lau], 閩南話[liu/lau] 留 의 異文은 利, 璃 의 리[li] 계열과 婁, 憂 등의 루[lu] 계열 로 갈린다. 우선 留 와 瑠 가 同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留 의 고대 국어 한자음이 리[li] 였을 가능성은 적어 보이므로, 留 는 루[lu] 로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均如의 鄕歌에서 留 는 조사 -루/-로 의 표기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점도 留 의 고대국어 한자음이 루[lu] 라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留 의 한자음이 리[li] 와 루 [lu] 사이에서 역사적(古代의 前期와 後期)인 또는 공간적(주로 南 北의 차이)인 변동이 있었을 것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綜合 지금까지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등의 借音字 表記와 이에 대응하는 異文을 살펴보면서 중세국어와는 다른 고대국어 한 자음의 일단을 논의하였다. 특히 이러한 借音字에 대해서는 南豊鉉

57 56 地名學 17 (2011) (2009)에서 中古韓國語의 單母音化 라는 주제로서 논의하였는데, 즉 令(령>리), 呂(려>리), 禮(례>리), 兮(혀/혜>히), 亦(역>익/이기> 이), 喩/鍮(듀>디), 儒(뉴>누) 등의 음변화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였 다. 그렇지만 南豊鉉(2009)의 논의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고대국어(또는 중고한국어)의 표기에 사용된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등의 한자음을 대체로 중세국어의 현실 한자음과 같 은 것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令(령), 呂(려), 禮 (례), 兮(혀/혜), 亦(역), 喩/鍮(듀), 儒(뉴) 등의 괄호 안의 한자음 은 喩/鍮(듀), 儒(뉴) 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중세국어 현실 한자음 이며, 喩/鍮(듀), 儒(뉴) 의 韻母 역시 중세국어의 한자음에 그대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古代國 語 漢字音과 中世國語 漢字音의 차이를 논의하면서 古代와 中世의 한자음의 불연속적 성격을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등의 고대국어 한자음은 중세국어 한자음과는 달 리 令/리, 呂/리, 禮/리, 兮/히, 亦/이/익, 喩/鍮/디, 儒/누, 留/루/ 리 등의 한자음으로 재구하였으며, 여기에 사용된 論據는 借字表記 에 나타나는 해당 한자의 異文을 이용하였다. 고대국어 한자음과 중 세국어 한자음의 불연속성이 전체 한자음을 대상으로 했을 경우에 는 어느 정도에 이를 것인지 속단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의 연구의 진척과 축적이 이루어져야 전체적인 안목을 얻을 수 있 을 것이다.

58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57 參考文獻 權仁翰(1997), 한자음의 변화 國語史硏究 태학사. 권인한(2002), 고대 한국한자음에 대한 한 고찰 문법과 텍스트 서울대학교 출판부. 金武林(1999), 高麗 時代 口訣 漢字音의 硏究 口訣硏究 5, 口訣學會. 김무림(2006), 한국 한자음의 근대성(1) -반영 양상의 종합- 한국어학 30, 한국어학회. 김무림(2007), 국어 한자음의 체계적 근대성 한국어학 34, 한국어학회. 金完鎭(1980), 鄕歌解讀法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南豊鉉(1981), 借字表記法硏究 檀大出版部. 南豊鉉(1999), 國語史를 위한 口訣硏究 太學社. 南豊鉉(2009), 古代韓國語硏究 시간의물레. 文璇奎(1987), 中國古代音韻學 民音社. 백두현(2005), 석독구결의 문자체계와 기능 한국문화사. 梁柱東(1965), 增訂古歌硏究 一潮閣. 兪昌均(1996), 鄕歌批解 螢雪出版社. 이장희(1996), 고려시대 석독구결의 에 대하여 문학과 언어 17. 문학과 언어 연구회. 이장희(2005), 고대국어의 /ŋ/에 대하여 언어과학연구 34. 언어과학회. 이장희(2006), 고구려어의 어말모음의 교체 원인 언어과학연구 39. 언어과 학회. 藤堂明保(1957), 中國語音韻學 江南書院. 王力(1985), 漢語語音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有坂秀世(1936), 漢子の朝鮮音について 國語音韻史の硏究 (1962)에 收錄. 伊藤智ゆき(2002), 朝鮮漢字音の硏究 東京大. 河野六朗(1968), 朝鮮漢字音の硏究 天理時報社. 기타 辭典類 文獻은 省略.

59 58 地名學 17 (2011) Abstract A study on the loan characters of ancient Korean Kim, Moo-rim There are two kinds of method in the loan characters of ancient Korean. One is the using of meaning of Chinese characters, another is the using of sound of Chinese characters. We can reconstruct the sound of ancient sino-korean by investigation of that loan sino-korean characters. In this study I suggested that the sounds of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in ancient Korean are 令/li, 呂/li, 禮/li, 兮/hi, 亦/i/ik, 喩/鍮/ti, 儒 /nu, 留/lu/li. In addition to the sounds of ancient sino-korean (令, 呂, 禮, 兮, 亦, 喩/鍮, 儒, 留) were replaced with the sounds of middle sino-korean. Key words : writing system of loaning Chinese characters, character of loaning sound, monophtongization, sounds of ancient sino-korean, sounds of middle sino-korean.

60 古代國語 借音字 異文 硏究 59 성명 김무림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지변동 산1 강릉대학교 인문대학 국어 국문학과 전화 (033) , 전자우편 이 논문은 2011년 10월 31일 투고되어 2011년 11월 01일부터 12월 1일까지 심사하고 2011년 12월 3일 편집회의에서 게재 결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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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 김순배 15) 국문요약 지명은 존속성과 함께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지명이 간직한 존속 성으로 인해 지난 역사의 흔적을 간파해 낼 수 있고, 지명의 가변성 은 그 흔적의 사회적이고 언어적인 변동 폭과 깊이를 과정적으로 이 해하게 한다.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역사적, 언어적 지명 연구에 지리 적 방법론을 통합하여 하남시 일대의 지명 변천을 고찰한 본 연구는 고려 시대 이전과 조선 시대 이후의 시간 단면을 기준으로 하남 지역 에 분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지명들의 위치 비정과 변천 양상을 분 석하였다. 고려 시대 이전의 지명 변천에서는 고문헌 등에 등재된 백 제 초기 도읍지의 입지와 천도를 담고 있는 고지명들과 하남 지역을 지칭하던 대규모 지명들의 변천 양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조선 시 대 이후의 지명 변천에서는 행정 지명, 산천 지명, 촌락 지명으로 구 분하여 하남 지역에 나타나는 지명 변천의 특성을 동시대의 다른 지 역의 지명 변천 양상과 비교하여 언급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에 있던 다양한 하천 지명들이 한강 이라는 하나의 지명으로 통칭되어 온 하 천 지명의 영역화 양상을 분석하였고, 한성백제 시대 이래로 이 지역 에 나타났던 역사적 사실들과 관련 지명들을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핵심어 : 지명, 하남, 다학문적 지명 연구 * 본 논문은 지난 2010년 11월 12일 하남문화원에서 주최한 제2회 백제지명 학 술대회: 한홀 지역 지명을 중심으로 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 ** 한국교원대학교

63 62 地名學 17 (2011) 1. 서론 地名(place names)은 질긴 存續性(보수성, 고착성)을 지니고 있 는 동시에 자연 환경과 역사적, 사회 문화적, 언어적 변화에 의해 끊임없이 변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명이 간직한 존속성으로 인 해 지난 역사의 흔적을 간파해 낼 수 있고, 지명의 可變性은 그 흔 적의 사회적이고 언어적인 변동 폭과 깊이를 과정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명의 존속성과 가변성을 아우르는 지명학적인 시 선과 함께 지명을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론적 유연 성과 다양성을 고려해야 지명의 참 면모를 밝혀 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연구 지역인 경기도 하남시 일대의 시대별 지명 분포와 변 천 양상을 고찰하는 기본적인 토대로 삼았다. 하남시는 시의 동쪽과 남쪽으로 黔丹山(658m) 엄고개(은고 개) 南漢山(청량산)(522m)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면 서 광주시와 경계하고 있다. 서쪽은 남한산에서 연결된 一字山 (126m)을 경계로 서울시 강동구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곡류하는 漢江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경계하고 있다. 남한산의 북쪽 사면으로 는 金岩山(321m)과 二聖山(208m)으로 연결된 능선이 하남시 중심 가인 덕풍동 일대를 지나 한강변의 망월동까지 이어지고, 남한산에 서 客山(292m)으로 연결된 또 다른 능선은 천현동을 지나 신장동 의 더우개 부근에서 한강과 만난다. 이 두 능선 사이로 엄고개에서 시작된 산곡천과 남한산에서 발원한 덕풍천이 북류하면서 남북 방 향의 긴 곡지를 형성하며 한강으로 유입된다. 이러한 하남시의 자연 환경은 인구 분포에 영향을 미쳐 시의 중

64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63 심부인 덕풍동과 신장동이 덕풍천과 산곡천하류의 구릉 및 평야 지 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 서울 대도시권의 급속한 도시 화와 교외화로 한강 주변의 저평한 범람원으로 시가지가 확대되는 현상이 하남시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하남시의 대부분 지역 (93%)이 개발제한구역인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어 급속한 시가지 확대보다는 도농 경관이 혼재된 근교 농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1989년 광주군으로부터 독립한 하남시는 예로부터 한강 하류 에서 중 상류 방향인 강원도와 경기도 남동부 및 충청도를 잇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로 인해 덕풍역과 경안역 등의 주요 역원 시설 이 입지해 있었고, 남한산성과 같은 서울을 방어하는 주요 關防 시 설과 要害處(엄고개, 널문이 등)가 입지했었다.1) 이러한 군사적 요 충지이자 교통 결절지로서의 역사를 반영하듯 현재 하남시에는 다 수의 군부대와 함께 중부 고속국도를 비롯한 판교-구리간 고속국도, 서울-춘천간 고속국도, 올림픽대로 등과 한강 양안을 연결하는 대규 모 교량들이 위치하고 있다. 한강 하류의 평야 지역에서 경기 동부 및 강원도의 산지 지역으 로 연결되는 점이 지대에 위치한 하남시 일대는 삼국 시대 이래로 그 지리적 입지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왔다. 특히 하남시는 고구려에 1) 과거 하남을 포함하던 광주가 수도 한양의 중요 방어선으로 인식된 사실은 이중환(1751)의 擇里志 에서도 확인된다. 광주의 州治는 만 길이나 되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이곳은 곧 옛 백제의 시조 溫祚王의 고도다. 성안 은 평평하고 그리 높지 않으나 밖은 대단히 험하고 높다 성 안은 그리 험하지 않지만, 성 외의 산기슭은 殺氣를 띠고 중요한 방위선이 되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전쟁터가 되므로 광주 일대는 살 만한 곳이 못된다(州治在 萬仞山巓, 卽古百濟始祖溫祚王故都也, 內夷淺而外峻絶 城內則不險, 而城 外山脚帶殺, 且重鎭, 若有事, 爲必爭之地, 故廣州一境, 不可居.) [ 八道總論 (京畿道 條), 擇里志 ].

65 64 地名學 17 (2011) 서 남하한 百濟 溫祚王이 BC. 18년에 도읍한 河南慰禮城 과 BC. 6 년에 천도한 漢山 아래의 漢城 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써 지역 주민 들에 의해 백제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강하게 남아 있는 지 역이다. 또한 백제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춘궁동 궁말 및 二聖山 城 과 교산동 담안 일대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인조 4년(1626)에 현 남한산성 내로 옮기기 전까지 廣州府의 읍치가 위치하던 고골 (古邑) 과 古邑基, 그리고 廣州 鄕校 등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러 한 사실들은 과거 이 일대가 지니고 있던 국가적 스케일에서 국지 적 스케일에 이르는 정치적, 행정적 중심성을 대변해 준다. 과거 하남시가 소유했던 정치적, 행정적 중심성은 이 일대에 분포 했던, 혹은 현재 변형되어 존속되고 있는 지명들에서 그 면모를 유 추해 볼 수 있다. 漢城 百濟(BC.18 AD.475)의 도읍지 위치를 연구 한 국내외의 많은 선행 연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읍지 비정에 있어 아직까지 일치된 견해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성 백제의 도읍지를 비정하는 연구들은 크게 두 가지의 불일치를 보이 고 있다. 첫째, 河北慰禮城 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위 치는 어디인가? 둘째, 한성백제의 河南慰禮城 과 漢山 은 남한산성, 춘궁동, 풍납토성, 몽촌토성, 직산 중 어디이며, 이후의 遷都地인 漢 城 은 어디인가? 백제 역사에 있어 과반의 시기를 점유하고 있는 한성백제와 그 도읍지의 비정은 이와 같이 다양한 견해가 상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연구의 시간 단면을 고려 시대 이전과 조 선 시대 이후로 구분하여 지명의 위치 비정과 변천 양상을 분석하 였다. 특히 고려 시대 이전의 지명 변천에서는 三國 등에 등재된 백제 초기 도읍지의 입지와 천도를 담고 있는 古地名들에 대해 지

66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65 리적이고 텍스트 맥락에 터한 기초적인 위치 분석을 실시하였다. 또 한 慰禮城, 漢城, 漢山, 漢山州, 南漢山州, 漢州, 廣州 등 고려 시대 이전 하남시 일대를 지칭하던 대규모 지명들의 변천 양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 이후의 지명 변천에서는 行政 지명(군현 지명, 면 지 명, 역원 지명), 山川 지명(산 고개 지명, 하천 지명), 村落 지명 (동부면, 서부면)으로 구분하여 하남시 일대에 나타나는 지명 변천 의 특성을 동시대의 다른 지역의 지명 변천 양상과 비교하여 언급 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에 있던 다양한 하천 지명들이 漢江 이라는 하나의 지명으로 통칭되어 온 하천 지명의 영역화(territorialization) 양상을 분석하였고, 한성백제 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 나타났던 역사 적 사실들과 관련 지명들을 연관시켜 살펴보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2. 고려 시대 이전의 지명 변천 고려 시대 이전 하남 일대에 존재했던 지명으로는 三韓 시대의 目(月)支 와 伯濟 가 있다. 이 두 지명은 魏志 (BC. 3세기)와 周 書 (636)에 기재된 馬韓의 54개 國名들이다. 두 지명의 위치에 대해 정인보(1946, )는 目支(月支) 를 慰禮 에, 伯濟 를 廣州 에 비정하였다. 한편 이병도(1959)는 目支(月支) 를 辰王이 도읍했다 는(辰王所都) 현 천안시 직산면에 비정하였고, 伯濟 를 慰禮忽 이라 고 제시하였다. 두 연구자의 위치 비정이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伯 濟 를 현재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부근과 하남시 춘궁동 부근으로 비정한 점과 慰禮忽 을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제시한 점 은 일치한다.

67 66 地名學 17 (2011) <표1> 하남 광주 지명의 변천(삼한시대~현재) 지명 三韓 (馬韓) 三國 (백제)(신라) 河南慰禮城(백제 溫祚 王 BC.18) 慰禮城(온조왕BC. 11/ 6/2) 慰禮城(온조왕AD. 23) 慰禮城(責稽王 AD.286) 漢城(漢山 下)(온조왕 BC.5) 漢山郡(고구려 長壽王 AD.475) 伯濟 新州(신라眞興王 553) 新興州,新州停(진흥왕, 하남 目(月)支 大志 ) 광주 ( 직 산 설 北漢山州(진흥왕 557) 도 존재) 南川州(진흥왕 568) 北漢山州( 진평왕 604/618) 漢山停(진평왕, 大志 ) 漢山州(文武王 664/ 668/672/680) 漢山州(聖德王 718) 南漢城( 世宗 ) 南漢山城( 新增, 東 國 ) 南漢山州( 世宗, 新 增, 東國, 輿地 ) 統一新羅 高麗 朝鮮 朝鮮 日帝 河南 경덕왕16 태조23 태종13 고종32/33 대정3 廣州 (757) (940) (1413) (1895/1896) (1914) (2001) 비고 *지명 영역 축소됨 革罷됨 (1505) 廣州牧 (1559) 廣州 廣州府 (1577) 廣州牧 漢州 廣州留 (983) 守 府 漢州都督 (1623) 府( 大志 淮 安, 廣州府 ) 奉國軍 (1630) (995) 廣州留 守 府 (1690) 廣州府 (1699) 廣州郡 廣州郡 慶 安 面> 廣 州 面 (1932) 廣州面> 廣州邑 (1979) 東部面> 東部邑 (1980) 廣州郡 東 部 面 西 部面 中部面 일부>河 南 市 (1989) 廣州郡> 廣州市 (2001) 廣州邑> 京 安 洞 松 亭洞 廣南洞 (2001) *백제 왕도 이전: 河南慰禮城(온조1 년,BC.18)(현 남한 산성)(= 漢山) 漢城(漢山 下)(온 조13년, 6)(현 하 남시 춘궁동) 漢山(근초고왕26 년,371)(현 남한산 성)( 三國 ) *蓋鹵王 21년(475) 의 北城(王都 漢 城)(=현 춘궁동) 과 南城(현 남한산 성) *한강 西北에 築城 (온조14년,BC.5) (현 風納 및 夢村 토성): 漢城(현 하 남시 춘궁동)의 백 성을 分居케 함 * 慰禮者當時方言 凡匡廓之四圍謂之 圍哩圍哩慰禮聲相 近也 ( 大志 ) 이후 慰禮忽 관련 지명은 <표1>에 제시된 바와 같이 三國史記(百濟 本紀) (1145) 등에 河南慰禮城 과 慰禮城 등으로 백제 溫祚王 1년 이후 몇 차례 기재되었다.2) 한편 漢城百濟(BC. 18 AD. 475)의 王都 위치에 2) 본 논문에서 인용한 고문헌과 고지도 등의 약호는 다음과 같다: 新增東國 輿地勝覽 = 新增, 東國輿地志 = 東國, 輿地圖書 = 輿地, 戶口總數 = 戶口, 東輿圖 = 東輿, 大東輿地圖 = 大圖, 大東地志 = 大志,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 舊韓,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 面里洞名稱一覽 = 新舊, 韓國地名總覽17(京畿篇) = 韓國, 歷史都市 河南 = 河南, 三國史記(地理志) = 三國, 高麗史(地理志) = 高麗,

68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67 대한 다수의 선행 연 구들이 일정한 합의 점을 찾고 있지 못하 고 있는 현 상황에 서, 필자는 한성백제 의 왕도 이동이 삼 국 등에 등재된 기 사들의 지리적 입지 와 텍스트의 맥락을 고려하여 河南慰禮 熊津百濟(475~538)의 왕성 입지(충남 公州市) 城 (漢山) (온조 1년, BC. 18년)(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南漢 山城) 漢城 (漢山 下)(온조 13년, AD. 6년)(현 하남시 춘궁 동) 漢山 (近肖古 王 26년, 371년)(현 泗沘百濟(538~660)의 왕성 입지(충남 扶餘郡) 남한산성)으로 진행 <그림1> 공주 부여의 지리적 입지 되었을 것으로 추정 주 ( 위성 영상 위에 왕성의 위치 정보를 기입한 것임) 한다. 필자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 일행이 漢山 (현 남한산성으로 추정)의 負兒嶽 (현 남한산성 부근 淸凉山/日長山 등의 봉우리로 世宗實錄(地理志) = 世宗, 重訂南漢志 = 南漢, 廣輿圖 = 廣輿, 海東地圖 = 海東, 朝鮮地圖 = 朝圖, 靑邱圖 = 靑丘, 1872년지방지도 = 1872, 朝鮮地誌資料 = 朝鮮.

69 68 地名學 17 (2011) 추정)에 올라 헤아렸던 十濟 의 첫 도읍지를 현 광주시 중부면 산 성리의 남한산성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박해옥(1994, )이 漢城 의 위치와 관련하여 거론한 熊津百濟의 公州와 泗沘百濟의 扶 餘가 입지한 공통적인 지리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그림1과 2>에 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공주와 부여는 금강과 백마강과 같은 대하천 이 곡류하는 보호사면 쪽의 구릉지와 산지 사이에 입지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한성백제의 첫 왕도 또한 자연적인 垓子 역할을 하 는 한강의 곡류 지점에 입지하여 그 남쪽과 동쪽 부근이 높은 산지 로 차단된 지점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본다. 특히 세력이 미약했던 당시의 온조 일행으로서는 방어를 왕도 입지의 최우선 조건으로 고 려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한강의 범람원 상에 입지하여 상습적인 홍수와 침수가 우려되던 風納土城 및 夢村 土城이나, 상대적으로 저평한 구릉지에 위치하여 방어가 불리한 현 하남시 춘궁동 일대 보다는 높은 고도에 위치한 남한산성이 첫 도 읍지의 입지로 선호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울러 필자는 고구려 長壽王의 군사 3만에 의해 蓋鹵王이 피살 되고 한성백제가 멸망한 개로왕 21년(475) 당시의 北城 (왕도 漢 城)과 南城 의 위치를 각각 현 하남시 춘궁동과 광주시 중부면 산 성리의 남한산성으로 판단한다. 김기섭(2008)이 제시한 북성(大城) 으로서의 풍납토성 과 남성(王城)으로 추정한 몽촌토성 은 삼국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 에 기록된 당시의 戰況으로 보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바와 같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직선거리는 700m 정도에 불과하다. 불리한 전세 속에서 북성이 7일 만에 함락될 동안 겨우 700m 지척에 있는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남 성, 즉 몽촌토성에 개로왕이 있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70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69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고구려의 접근이 용이한 광나루 부근에 위 치하고 있어 단지 하남위례성의 허결한 서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 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2> 漢城百濟(BC.18~AD.475)의 왕성 위치(경기도 河南市 일대) 주 위성 영상 위에 표시된 점선 화살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 시(475년) 백제 개로왕의 피신 방향을 추정하여 표시한 것임. 삼국 에 기록된 텍스트의 맥락으로 볼 때 북성과 남성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사이에 일정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어야 한 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북성(한성)으로서의 현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7일 만에 함락될 동안 개로왕은 가파른 급경사 위의 중위평 탄면에 위치한 남성, 즉 조선시대 丙子胡亂 시(1636년 12월) 仁祖가 피신했던 현 남한산성(춘궁동 古邑 남쪽 약 4.5km에 위치)으로 피

71 70 地名學 17 (2011) 신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남성마저 함락되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도망가다가 再曾桀婁 등에게 사로 잡혀 가까운 阿且城 (현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성으로 추정)으로 縛送된 후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그림2) 이상에서 거론한 慰禮城 과 漢城, 漢山 으로 지칭되던 한성백제 시대 하남 일대의 지명들은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 이후 <표1>과 같이 漢山郡 (고구려 長壽王, AD.475년), 新州 (신라 眞興王, 553 년), 新興州 新州停 (신라 진흥왕, 大志 ), 北漢山州 (신라 진흥 왕, 557년), 南川州 (신라 진흥왕, 568년), 北漢山州 (신라 진평왕 604년/618년), 漢山停 (신라 진평왕, 大志 ), 漢山州 (신라 文武王, 664년/668년/672년/680년), 漢山州 (신라 聖德王, 718년), 南漢城 ( 世宗 ), 南漢山城 ( 新增, 東國 ), 南漢山州 ( 世宗, 新增, 東 國, 輿地 ) 등으로 변천되어 등장하고 있다. 통일신라 성덕왕 대까지 漢山州 으로 불리던 하남 일대의 공식 지명은 景德王 16년(757) 중국식 郡縣制의 시행과 함께 2字식 漢字 地名인 漢州 로 개정되었고, 大志 에는 漢州都督府 가 등재되어 있 다. 漢州 로의 개정은 현재 公州市를 지칭하던 熊川州>熊州 로의 변 경과 같이 전부 지명소의 끝 표기자를 탈락시켜 만든 것이었다. 이후 漢州 라는 지명은 고려 太祖 23년(940)에 廣州 로 개정되었 다. 이 때 전부 지명소인 廣 은 크다 라는 뜻을 지닌 한(漢) 과 그 3) 二十一年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來圍王都漢城王閉城門不能出戰麗人分兵 爲四道夾攻又乗風縱火焚燒城門人心危懼或有欲出降者王窘不知所圖領數十騎 出門西走麗人追而害之...是髙句麗對盧齊于再曽桀婁古尓萬年再曽古尓皆複姓 等帥兵來攻北城七日而拔之移攻南城城中危恐王出逃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乃數其罪縛送於阿且城下戕之桀婁萬年夲國人也獲罪逃竄髙句 麗 [ 三國 (百濟本紀) (蓋鹵王21年條, 475)].

72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71 의미가 유사하여 채택된 訓借 表記로 보여 진다. 그 후 廣州 는 12 牧을 설치한 고려 成宗 2년(983)에 廣州牧 이 되었고, 別號인 淮安 과 奉國軍 (995년)으로도 불리었다. 3. 조선 시대 이후의 지명 변천 3.1. 행정 지명의 변천 조선 시대의 하남시는 廣州府의 東部面과 西部面이었다. 광주부 에 존재했던 행정 지명으로서의 군현 지명, 면 지명, 역원 지명의 변천을 살펴보기에 앞서 조선 후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광 주부의 행정 구역, 즉 광주부의 地名 領域(territories of place names)의 변화를 검토해 보았다. 조선 시대, 특히 面 지명이 구체적 으로 기재된 輿地 ( ) 당시의 광주부 영역은 <그림3>에 서 보이는 바와 같이 犬牙相入地4)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당시의 의곡면, 왕륜면, 월곡면, 북방면, 성곶면, 송동면, 일용면 (현 의왕시, 군포시, 안산시 일부, 수원시 일부)이 과천현, 수원부, 안산군 경계 사이에 분포하면서 서쪽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는 형 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견아상입지 형태의 광주부 지명 영역은 1895년의 23부제, 1896년의 13도제, 1914년의 전국단위 행정구역 개 편5)으로 정리되어 인접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갔다. 4) 犬牙相入地는 군현의 경계선이 서로 交入하여 마치 犬牙(개의 치아)가 위 아래로 相錯해 있는 모습과 같은 구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이수건, 1989, ). 본 연구 지역에서는 견아상입지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조선시대 광주부의 행정구역이 23부제가 실시된 1895년부터 일제에 의한 전국단위 의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1914년에 걸쳐 정리되어 다른 행정구역에 편입 되어 정리되었다.

73 72 地名學 17 (2011) 조선후기(1626년 이후) 현재 <그림3> 광주의 행정 구역 변천 주 조선시대전자문화지도시스템( 지도에 행정구역 경계를 굵게 기입한 것임.

74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73 <그림4> 하남시 행정구역도 주 조선시대전자문화지도시스템의 지도에 행정구역 경계를 굵게 기입한 것임. 특히 1960년대 이후 수도권의 인구 급증과 도시화로 인해 <그림 3>과 <표3>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서울특별시의 시역 확장(구천면,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 등)(1963년)과 성남시(대왕면, 낙생면, 돌마 면, 세촌면 등)(1973년), 하남시(동부면, 서부면)(1989년)의 신설로 광주군의 지명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하남시는 1989년에 광주군 동부읍과 서부면, 중부면의 상산곡리 등을 통합하여 신설되었다.(그 5) 1914년 4월 1일, 府 郡 面의 행정 구획에 대한 폐합 정리가 대규모로 실 시되었다. 당시 부 군을 폐치 분합하여 12부로 만들고 군은 317군 중에서 107개 군을 폐합하고 10개의 군이 신설되어 220군이 되었다. 면의 경우 4,322면 중에서 1,801면을 정리하여 2,521면으로 재조정되었다(손정목, 1996, ). 이 같은 행정구역 개편 결과 당시의 전국 행정구역은 13道 12府 220郡 2,521面으로 정리되었다.

75 74 地名學 17 (2011) 림4) 河南 이란 지명은 삼국(백제본기 온조왕조) 에 기록된 보통 명사로서의 河南 이 백제 발상지라는 역사적 사실과 당시 지명 언 중들의 기억(memory)과 결합되어 새롭게 고유명사로 자리 잡게 되 었다. 조선 시대 廣州 와 관련된 郡縣 地名은 <표2>에 제시된 바와 같 이 각 시대별 문헌의 建置沿革條와 郡名條 등에 등재되어 있던 郡 名, 古名, 一名들이다. 대체로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군현 지명들은 일부 前部 지명소의 변화와 함께 행정 단위를 지칭하는 後部 지명 소가 변화됐을 뿐 대부분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각 군현 의 행정 구역이자 군현 지명이 지칭하는 범위, 즉 지명 영역은 시대 별 행정 구역 개편과 통폐합 등으로 인해 확대 혹은 축소되었다(김 순배, 2009b, 68-70).6) 조선 시대 광주 와 관련된 군현 지명들은 世宗 (1454), 新增 (1530), 東國 ( ), 輿地 ( ) 등에 廣州牧, 廣州府, 淮安, 奉國軍, 南漢城, 南漢山城, 南漢山 州, 廣陵 으로 등재되어 있다. 특히 仁祖 4년(1626) 이후 광주부의 治所는 현 하남시 춘궁동의 고골(古邑, 古邑基)에서 현 광주시 중부 면 산성리의 南漢山城 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 후 남한산성 을 지칭 하는 이표기로서 南城 과 日長城 등이 南漢 (1846)에 기록되어 있어 지명 언중의 편의를 위해 일부 표기자가 탈락되는 현상이 나 타나고 있다. 6) 지명은 배타적으로 통용되거나 지칭되는 일정한 공간적 범위, 즉 영역 (territory)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지리적이고 문화정치적인 분석 을 요한다. 특히 한국 지명의 변천 과정에는 지명 영역의 형성과 함께 지 명 영역이 분화되거나 타 영역을 잠식, 혹은 다른 영역으로 이탈되어가는 다양한 영역 변동의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

76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75 <표2> 광주 지명의 변천(조선 시대 이후) 지 新增 東國 輿地 戶口 東輿 大圖 大志 舊韓 新舊 명 (1530) ( ) ( ) (1789) (1800년대 중엽) (1912) (1917) 河南 (2001) 廣州市 河 南市 城南 市 義王 廣州牧 市 軍浦市 南漢山, 廣州府 일부 安山 廣州牧 漢山州, 南漢山,漢山 廣州府 광 市일부(경 南漢山,漢山 漢州,淮 州, 漢州, 淮 廣州府 *南城=日長城= 廣州郡 廣州郡 주 기도) 州,漢州,淮安 安,奉國 安,奉國軍,廣 晝長城( 南漢 ) (郡名條) 軍( 郡 陵(郡名條) 江東區 松 名條) 坡區 江南 區 瑞草區 (서울시) 비고 *지명 영역 축소됨 * 高麗成宗十四年乙未置 十二節度使號爲廣州奉國 軍節度使 ( 世宗 ) * 別號淮安 ( 世宗 ) * 廣州石城山一枝北走漢 江之南州治在萬仞山巓卽 古百濟始祖溫祚王故都也 內夷淺而外峻絶 ( 擇里志,1751) * 城內卽不險而城外山脚 帶殺且重鎭若有事爲必爭 之地故廣州一境不可居 ( 擇里志,1751) *치소(군청) 이전: 현 하 남시 춘궁동 고골(古邑)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인조4년,1626) 경안면 경안리(대정6년, 1917) 이후 廣州府 라는 지명은 행정 단위를 나타내는 후부 지명소의 표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高宗 32년(1895)에 실시된 23부제로 廣州郡 이 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행정 구역의 일부가 서울시, 河 南市(1989년), 城南市(1973년)(남한산성의 남쪽)로 분리되었다. 전 부 지명소로서의 광주 라는 지명은 慶安面 > 廣州郡 廣州面(1932 년) > 광주군 廣州邑(1979) > 廣州市(2001) 로 그 후부 지명소가 바 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때 경안면이 광주면으로 변경되는 것 은 남한산성 내에 있던 광주군의 군청이 大正 6년(1917)에 과거 慶 安驛과 慶安場의 입지로 번성하던 경안면 慶安里로 이전하면서 이 루어진 것이다. 또한 광주 의 廣 이라는 지명소는 현재 광나루(廣 津) 에서 유래한 서울시 廣津區 廣壯洞 과 광주시 廣南洞 으로 존속 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광주에는 鄕 所 部曲 지명이 존재하지

77 76 地名學 17 (2011) 않았다. 그 이유는 광주가 고려 시대 이래 수도인 開京 및 漢陽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중앙의 행정력이 쉽게 파급될 수 있었고 그 결 과 매우 이른 시기에 향 소 부곡이 정리되어 直村化되었기 때문 인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시대 광주부에는 23개의 面 地名이 분포하였다. 면 지명 중 주로 조선 전기의 方位面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方位面 지명(東西 南北면, 內外면 등)이 4개(동부면, 서부면, 중대면, 북방면), 조선 후 기의 새로운 面里制에서 발생한 면 지명이 19개이다. 일반적으로 지 명 변천과 소멸에 있어 조선 전기의 방위면 지명은 현대로 오면서 소멸되는 경향이 강하며, 조선 전기의 방위면에 존재하던 촌락( 里)이 面으로 승격하면서 등장했던 조선 후기의 새로운 면 지명( 面)은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는 비율이 높다. 그 이유는 실제 언중 들의 지명 인식과 사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행정 관청에 의해 획일 적으로 부여한 방위면 지명은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통용되고 동시 에 구체적인 촌락 단위의 지명 영역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면 지명보다 취약한 생명력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김순배, 2009b, 68-70). <표3> 면 지명의 변천 지명 新增 東國 輿地 戶口 東輿/大圖/大志 舊韓 新舊 河南 (1530) ( ) ( ) (1789) (1800년대 중엽) (1912) (1917) (2001) 동부 東部面 서부 古廣州(古蹟 西部面 條) 東部面 東部面 하남시 東部面 東部面 ( 경 기 도) 西部面 하남시 西部面 古邑(山水條 客山 西部面 西部面 ( 경 기 細註) 도) 비고 *하남시가 신설되면서 행정 지명 소멸됨(1989년) *동부초등학교, 동부중학교 (덕풍1동) *東部面>東部邑(1980년) *東西二部[ 三國 (백제본 기 온조왕 33년조)] *하남시가 신설되면서 행정 지명 소멸됨(1989년) *서부농협(춘궁동)

78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77 구천 龜川面 龜川面 龜川面 성내 각리 城內各里 城內南 洞內 城內二洞南北 城內北 洞內 경안 慶安面 慶安橋(關梁 慶 安 石 橋 慶安面 慶安面 條) (橋梁條) 오포 五浦面 五浦面 五浦面 도척 都尺面 都尺面 都尺面 실촌 實村面 實村面 實村面 초월 草月面 草月面 草月面 퇴촌 退村面 退村面 退村面 초부 草阜面 草阜面 草阜面 중대 中臺面 中臺面 中垈面 세촌 細村面 細村面 細村面 돌마 突馬面 突馬面 突馬面 낙생 樂生面 樂生面 樂生面 강동구 九川面 九川面 ( 서 울 시) 산성리 ( 광주 郡內面 中部面 시 중부 면) 慶安面 [ 慶安 京安洞 川( 驛 ( 광주 村)] 시) [ 慶安 慶安面 慶 安 場( 酒 面> 廣 幕里)] 州 面 [ 慶安 (1932) 坪( 酒 幕里)] 오포읍 五浦面 五浦面 ( 광 주 시) 도척면 都尺面 都尺面 ( 광 주 시) 실촌읍 實村面 實村面 ( 광 주 시) 초월읍 草月面 草月面 ( 광 주 시) 퇴촌면 退村面 退村面 ( 광 주 시) 草阜面 瓦阜面 와부읍 ( 양주 ( 양주 ( 남양 군) 군) 주시) 송파구 中垈面 中垈面 ( 서 울 시)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지명 소멸됨(1963년) *廣州邑>京安洞 松亭洞 廣南洞(2001년) *慶安里>京安里(1932)>京 安洞(2001) (慶>京) *양주군에 편입됨(1895~ 1896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지명 소멸됨(1963년) (臺>垈) *신설된 중부면에 편입됨 (1914년) 중원구 *성남출장소에 편입되면서 細村面 ( 성남 지명 소멸됨(1971년) 시) *성남출장소>성남시(1973 년) 분당구 *성남출장소에 편입되면서 突馬面 突馬面 ( 성 남 지명 소멸됨(1971년) 시) 樂生面 수정구 *성남출장소에 편입되면서 [ 樂 生 樂生面 ( 성 남 행정지명 소멸됨(1971년) 坪( 遠 시) *낙생초등 고등학교(판교

79 78 地名學 17 (2011) 대왕 大旺面 大旺面 大旺面 언주 彦州面 彦州面 彦州面 의곡 義谷面 義谷面 義谷面 왕륜 王倫面 王倫面 旺倫面 일용 一用面 一用面 ( 수원 부) 월곡 月谷面 月谷面 月谷面 북방 北方面 北方面 北方面 송동 松洞面 松洞面 ( 수원 부) 聲串面 聲串面 聲串面 성곶 남종 聲串( 世宗 ) 川洞)] 동),낙생저수지(동막동) 大旺面 강남구 [ 大旺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지명 ( 서울 坪( 淡 소멸됨(수서,세곡,율리,일 시) 泊洞)] 大旺面 원,자곡)(1963년) 수정구 [ 大旺 *성남출장소에 편입되면서 ( 성남 洑( 屯 지명 소멸됨(1971년) 시) 田里)]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행정 강남구, 지명 소멸됨(1963년) 서초구 *언주초등학교(도곡동),언 彦州面 彦州面 ( 서 울 주중학교(삼성동) 시) *서초구(양재,염곡,신원,내 곡) 의왕시 *신설된 수원군 儀旺面에 편 儀谷面 ( 경기 입됨(1914년) 도) 의왕시 *신설된 수원군 儀旺面에 편 旺倫面 ( 경기 입됨(1914년) 도) 一用面 日荊面 수원시 *18세기 후반에 수원부(일용 ( 수원 ( 수원 ( 경기 면)에 편입됨 군) 군) 도) 안산시 *안산군에 편입됨 ( 경기 (1895~1896년) 도) 안산시 *안산군에 편입됨 ( 경기 (1895~1896년) 도) 松洞面 梅松面 화성시 *18세기 후반에 수원부(송동 ( 수원 ( 수원 ( 경기 면)에 편입됨 군) 군) 도) 안산시 *안산군에 편입됨 ( 경기 (1895~1896년) 도) 남종면 *楊根郡에서 편입됨(1914 南終面 ( 광 주 년) 시) 주: 舊韓 (1912) 항목에 있는 대괄호([ ]) 안의 내용은 朝鮮 (1911)에 수록된 자료임. 특히 광주 일대는 20세기 후반 급속한 도시화로 행정구역 변동 및 통폐합이 잦아 존속성이 강한 조선 후기의 면 지명들(세촌면, 돌 마면, 대왕면 등)도 일부 소멸되었다. <표3>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하남시에 존재했던 방위면 지명인 동부면(동부읍)과 서부면이 1989

80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79 년 하남시 신설로 행정 지명이 소멸되었다. 특히 동부면과 서부면은 다른 지역의 방위면 지명들과는 다르게 최근까지 존속했던 면 지명 들로 백제의 五部制와 관련하여 三國(백제본기) 온조왕 33년조 (AD.15)에 등장하는 국내의 民戶를 東西 二部 로 나누었다는 기 록으로 그 유래를 조심스럽게 소급할 수도 있다.7) 행정 지명의 마지막으로 驛院 地名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광주에 존재했던 역원 지명은 총 28개로 驛 6곳, 站 5곳, 院 16곳, 步撥 1곳 이다. 조선 시대 광주 일대는 수도인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 해당되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역원 지명이 분포하였다. 일반적으로 역원 지명은 역원 제도의 변화와 함께 지명 변화를 겪 어 왔다 세기 상업과 사설 숙박 시설의 발달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원은 대부분 18세기 이전에 革 罷되어 사라지게 된다. 조선 시대 광주부에 분포했던 원 지명들도 이와 유사한 변화를 나타낸다. 이들 원 지명은 역 지명과는 달리 대 부분 소멸되는 경향이 강하며 일부 원 지명의 전부 지명소가 촌락 지명으로 승계되거나, 후부 지명소인 院 이 촌락 지명의 전부 지 명소로 존속되는 경우(원골, 院洞)도 발견된다. <표4> 역원 지명의 변천 지명 新增 (1530) 東國 輿地 ( ) ( ) 德豐驛 덕풍역 德豐( 世 德豐驛 宗 ) 德豐驛 德豐里 戶口 (1789) 東輿/大圖/大志 (1800년대 중엽) * 豊德驛 [ 廣輿 (19세기초 德豊驛 반] 德峯里 舊韓 (1912) 新舊 河南 (1917) (2001) 역말, 덕 [ 德豊驛 풍역말, ( 東部面 驛村, 덕 德豐里 德豊洞)] 풍굴, 德 德豐洞 豊洞(하 남시) 비고 *현 현대아파트 자리 *杞溪 兪氏 종족 촌(덕풍골,역 말) *廣州 李氏 종족 촌(수리골) 7) 春正月分國内民戸爲南北部 秋八月加置東西二部 [ 三國 (百濟本紀) (온조왕 31年~33年條, 13~15)].

81 80 地名學 17 (2011) 慶安驛 경안역 慶安( 世 慶安驛 宗 ) 慶安驛 樂生驛 낙생역 樂生( 世 樂生驛 宗 ) 慶安驛 良才驛 良才驛 奉安驛 봉안역 奉安( 世 奉安驛 宗 ) 奉安驛 奉安驛 돌마역 突馬驛 *慶安里>京安 里(1932)>京安 洞(2001) (慶>京) [ 突馬驛 ( 突馬面 藪內村)] 下津站 신천참 新川站 新川(驛站條 步撥) 율목참 栗木站 栗木(驛站條 步撥) 검복참 黔伏站 黔北(驛站條 步撥) 경안참 慶安站 慶安(驛站條 步撥) 쌍령참 雙嶺站 雙嶺站 사평원 沙平院 沙坪小路 (道路條) 판교원 板橋院 京安洞, 京安川, 역말, 驛 洞(광주 시) 樂生驛 양재역 하진참 下津站 [ 慶安驛 ( 慶安面 驛村)] 板橋院 板橋(橋梁條) 동양원 東陽院 말을 末乙川院 末川院 천원 황교원 黃橋院 黃橋院 금척원 金尺院 金尺院 이부원 利夫院 理輔院 利夫院 理輔嶺(山川 條) 봉헌원 鳳獻院 鳳獻院 둔입원 芚入院 대야원 大也院 大也院 도미원 渡迷院 斗迷院 인덕원 仁德院 仁德院 * 在渡迷遷 ( 新增 ) 사근 沙斤乃院 沙斤院 내원 정금원 鄭金院 鄭金院 [ 鄭琴坪, 졍금안들

82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81 ( 大旺面 栗峴)] [ 鄭琴坪 洑] 광진원 廣津院 廣津院 쌍령원 雙嶺院 雙嶺院 쌍교 보발 雙橋(驛站條 步撥) 雙橋(橋梁條) 주: 舊韓 (1912) 항목에 있는 대괄호([ ]) 안의 내용은 朝鮮 (1911)에 수록된 자료임. 역(역참)은 고종 32년(1895) 郵遞司의 설치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역은 원보다 늦게 폐지되어 역 지명의 전부 지명소가 촌락 지명으로 승계되어 존속되고 있는 경우가 다수 발견되며, 일부는 驛村, 역말 등과 같이 후부 지명소만이 존속하는 경우도 있다(김순 배, 2009b, 68-70). 조선 시대 광주부에 존재했던 역 지명 중 德豊驛 과 慶安驛이 이에 해당된다. <표4>에 보이는 바와 같이 덕풍역은 현 재 하남시 德豊洞(역말, 驛村, 덕풍역말, 덕풍굴)으로 표기자 변화없 이 존속되고 있으며, 경안역은 현재 광주시 京安洞[慶安里>京安里 (1932)>京安洞(2001)](역말, 驛洞, 京安川)으로 일부 표기자(慶>京) 가 바뀌어 존속되고 있다.8) 3.2. 산천 지명의 변천 하남시 일대에 분포하는 山川 地名은 조선 시대 광주부의 동부면 과 서부면 등에 위치하였다. 그 결과 조선 시대 고문헌과 고지도에 등재된 하남시 일대의 산천 지명은 광주부 관련 자료들에 기록되어 있다(그림5). 8) <표4>에 제시된 덕풍역 과 경안역 을 제외한 역원 지명들의 舊韓 (1912 년) 이후 자료들은 조사가 완료되지 않아 공백으로 처리했으며, 추후 보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83 82 地名學 17 (2011) 廣州 朝鮮地圖 (1750~1768) 廣州府 廣輿圖 (1800년대 전반) 東輿圖 大東輿地圖 (1850~1861) 廣州全圖 1872년지방지도 <그림5> 하남 일대를 표현한 고지도 일반적으로 산천 지명을 포함한 자연 지명들은 다른 지명들의 有 緣性에 비해 그 유래가 정확하며 가시적인 형태 확인이 가능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김순배, 2009b, 89-91). 이로 인해 산천 지명은 지명 언중들의 지명 인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표5와 6>에 제시된 바와 같이 지명 변천에 있 어서도 강한 존속성을 보이고 있다. 산천 지명 중 산 및 고개와 관련된 지명들의 변천은 <표5>에 제 시되어 있다. 黔丹山 은 남한산성으로 광주부의 치소가 옮겨간 1626 년 이전에는 광주부 古邑(현 하남시 춘궁동)의 鎭山으로 인식되었

84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83 으며, 조선 시대를 통틀어 표기자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현재의 淸凉山 은 과거 南漢山, 日長山 이라는 경합 지명(contesting place names)이 공존하였으며, 일장산 이란 산 지명은 현재 소멸되었다. 金岩山, 客山, 望月峰 은 표기자 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으며, 다만 망월봉은 산 지명은 사라지고 행정 지명으로서의 望月洞과 멍덜개, 望月, 望月浦, 上望, 下望이란 소지명들이 남아 있다. 한편 한성백제의 유적지이자 고구 려, 신라의 城址로 추정되는 二聖山 은 전부 지명소의 二聖 이 한때 二城, 二星, 理城 으로 다양하게 음차 표기되기도 하였다. 고개 지 명인 엄고개(은고개) 는 掩峴 으로 표기되다가 현재는 奄峴 혹은 嚴峴 으로 표기되고 있다. <표5> 산 고개 지명의 변천 지명 新增 東國 輿地 戶口 東輿/大圖/大志 舊韓 新舊 (1530) ( ) ( ) (1789) (1800년대 중엽) (1912) (1917) 黔丹山 黔丹山 黔丹山 검단산 ( 世宗 ) 黔丹山 *黔丹山 *黔丹山[ [ 廣輿 黔丹山 絅菴集 (18 ] 세기초반)] 日長山 日長山 남한산 南漢山 日長山 (청량산) 日長山城,南 淸涼山 城( 世 (일장산) 漢山城(古蹟 宗 ) 條) 금암산 (얼거산) 日長山 南漢山 淸凉山 南漢山城(城池 條) *日長山=淸涼山 =南漢山=漢山 ( 南漢 ) *南城=日長城= 晝長城( 南漢 ) *百濟故都[ 靑 丘 ] 金岩山 金岩山古城(城池 條) *金岩峯[ 1872 ] 河南 (2001) 비고 [黔丹山 (郡內面 上山谷 洞)] 黔丹山(하남 시 창우동-하 산곡동-배알 미동) * 州人稱爲鎭 山 ( 世宗 ) *古邑의 鎭山( 南漢 ) *檢丹山( 韓國 ) [山城場] [淸凉山 (郡內面 廣州邑 城內] 南漢山城, 南 漢山, 淸凉山 (하남시 상사 창동-감이동학암동-광주 시 중부면 山 城里) *淸冷山( 韓國 ) *春長과 晝長城 /日長城: 三國 신라 文武王 12 년(672)조의 晝 長 및 日長과의 유사성 *廣州府의 鎭山 ( 南漢 ) 金岩山, 金巖 山,얼거산(하 남시 항동-감 이동)

85 84 地名學 17 (2011) 이성산 객산 *二城山[ 海東 ] *二城山 *二星山[ [ 廣輿 二聖山 南漢山城地 ] 圖 ] [理聖山 (西部面 草二洞)] 客山(하남시 [ 客山 校山洞-하사 (東部面 客山洞 창동-하산곡 客山洞)] 校山里 동) 客山洞 客山瀑布(교 산동) 멍덜개,望月, 望月浦,上望, 望月峰 望月里 望月里 下望, 望月洞 (하남시) 엄고개, 은고 [奄峴酒 개,奄峴,嚴峴 幕, 음고 奄峴 (하남시 상산 쥬막 *奄峴[ 1872 ] 곡동-광주시 (郡內面 중부면 奄尾 奄峴里] 里) * 客山 *客山[ 海 [ 廣輿 客山 東 (18세 (19세 *客山[ 1872 ] 기 중반)] 기초반] 망월봉 望月峯 望月峯 望月峯 *望月[ 朝 圖 ] 엄고개 (엄현) 掩峴( 關阨 條) *掩峴[ 海 東 ] 二聖山(하남 시 춘궁동-광 암동) 聖山洞(춘궁 동) ( 二> 理> 二) (城 星>聖) *성산동: 궁말 북서쪽에 있는 마을, 이성산 밑 이 됨( 韓國 ) *校山里: 鄕校 洞+客山洞 (1914년) (掩>奄 嚴) 주: 舊韓 (1912) 항목에 있는 대괄호([ ]) 안의 내용은 朝鮮 (1911)에 수록된 자료임. 한강이 경유하고 있는 하남시 일대는 유역별로 다양한 河川 地名 들이 분포하였다. <표6>에 보이는 바와 같이 漢江 은 삼국 시대에 阿利水 ( 廣開土王碑 ) 혹은 郁里河 ( 삼국 )로도 지칭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밖에 漢水, 漢山河, 漢江渡 등으로 불리어졌다. 현 재 한강으로 유입하는 京安川 은 다양한 경합 지명이 존재했었다. 소내, 쇠내, 小川, 石湖, 牛川, 牛渚, 昭川, 苕溪, 苕川, 淮安 水 등으로 불린 경안천 유역에는 조선 시대 平山 申氏와 羅州 丁氏 등의 주요 士族들의 田庄이 분포하고 있어 경안천 지명의 다양한 이표기를 양산하였다. 백제 蓋婁王 대( )(蓋鹵王?)의 都彌 부인 전설[ 삼국(列傳) 都彌傳]과 관련된 도미 나루 는 전부 지명 소인 도미 가 渡迷津, 斗迷津, 豆尾, 斗尾峽, 斗峽, 斗浘江 등 으로 다양하게 음차 표기되었다.

86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85 <표6> 하천 지명의 변천 지명 新增 (1530) 東國 輿地 戶口 東輿/大圖/大志 ( ) ( ) (1789) (1800년대 중엽) 舊韓 (1912) 新舊 (1917) 河南 (2001) 비고 *郁里河[ 三國 (蓋鹵王21,475)] * 漢江 漢水(形勝 *阿利水[ 廣開 坊 漢江 條) 土王碑 ] 漢江 * 漢江里 [漢江洑, 契( 漢 *漢水 漢 漢江渡 ( 高 陽 郡 漢江(하 *漢水: 申靖夏 漢水( 形勝 *漢水[ 恕 城府 南 한강나드 江[ 三國 ] *漢山河=漢水= 漢芝面)[ 남시-구 (1681~1716)는 한강 菴集 (18세 部) [ 條) 리( 樂生 일제지형 리시-서 牛川이라 自號하 *漢江渡(沙 열수=北瀆( 신 承政院 기초반)] 漢江 面 洑坪 울시) 도 平渡 沙里 고 현재 경안천과 라)=沙平渡(고 日記 里)] (1926)] 津渡)[ 世 한강이 합류하던 려)( 南漢 ) (1783) 宗 ] 곳(石湖亭 앞)을 ] 漢水라 칭함( 恕 菴集 ) 소내 (소천) (우천) 小川 (경안 천) 昭川 牛川 *小川[ 朝 圖 ] *石湖( 絅 菴集 ) *牛渚,牛峽 [ 屯菴集 (1706)] *慶安川( 屯菴集 ) *牛川, 苕溪,苕 川,淮安 水[ 與 猶堂全 書 (1800) ] [ 慶安川 ( 慶安面 驛村,退村 面 支渭 洞)] [牛川嶺, 소 실고 ( 都尺 面 老谷 洞)] 麻岾津 馬峴 마점진 도미나 渡迷津 斗迷津 渡迷津 루 渡迷津( 世 斗迷口(關梁 *豆尾[ 朝 (두미 宗 ) 條) 圖 ] 진) 바뎅이 나루 (팔당 진) 昭川 牛川 雙嶺川,慶安川,細 皮川,崑池岩川,女 妓川(並昭川上 流) *石湖亭[ 1872 ] 八堂里 * 斗尾 峽[ 與 猶堂全 書 (19 세기초 반] 斗迷津 [ 斗浘江 斗迷遷 *渡迷津,渡迷遷 ( 退 村 面 拜謁浘里] [ 1872 ] *斗峽( 南漢 ) 八堂里 [八堂津, 바당이나 루( 東部 面 八堂 里] 八堂里 소내, 쇠 내,牛川, 金良川, 京安川 (하남시 배알미 동) (小>昭 苕>牛) * 入渡迷津 ( 新增 ) * 自陽智邑由本 府慶安面渡迷津 流去 ( 輿地 ) 마재, 馬 峴(남양 *茶山 丁若鏞의 주시 조 묘소가 있음 안면 능 내리) (渡>斗>渡 豆> 斗 渡) 도미나 (迷>尾>浘>迷) 루, 斗迷 (津>遷>津 江) 津, 斗迷 *渡迷津( 韓國 江, 渡迷 ) 津(하남 * 楊根郡大灘龍 시 배알 津下流其北岸號 미동) 渡迷遷 ( 新增 ) 바깥바 뎅이, 바 뎅이나 루, 八堂 나루(하 남시 창 우동) 上八, 下

87 86 地名學 17 (2011) 八, 八堂 里(남양 주시 와 부읍) 미음나 루 (독진) (미호) 禿浦 *未音浦,鹵 水浦( 高麗 ) 太湖 芚地 禿浦 迷湖 渼湖 大湖 渼音津 美陰浦 * 禿津 [ 渼陰津 渼陰 [ 廣 ( 東部面 *渼陰津[ 1872 輿 ] 船村)] ] *禿浦,太湖=芚池 湖( 南漢 ) 석탄 구산못 게내 (해천) 蟹川 廣津 廣津 광나루 廣津灘 廣津( 鎭堡 廣津渡( 世 (광진) 廣津渡(關梁 條) 宗 ) 條) 세고탄 洗姑灘 洗姑灘 廣津 [石灘(東 部面 望月 里)] [龜山澤, 구 산 못 ( 東部面 望月里)] [ 蟹川酒 幕,계 쥬 막( 九川 面 上一 洞)] [廣津, 광 나루( 九 川面 曲橋 洞)] 洗姑灘 송파진 松坡津 松坡 松坡坪 *松坡串津( 南漢 ) 삼전도 三田渡 三田渡 三田渡津 (양진) 麻田浦?( 三田渡(關梁 三田渡 [ 松坡津 ( 中垈面 松坡洞)] [松坡江] [松坡場] [ 三田渡 洞( 中垈 미음나 루, 미움 나루(하 남시 선 동 배말, 둔지) (未音浦>鹵水 浦>禿浦>禿津 太湖 芚地 大 湖 迷湖 渼 湖> 渼音 美 陰 渼陰津>미 음) *未音浦>鹵水浦 (고려 成宗 11, 992)( 鹵水浦前 號未音浦廣陵 郡 )( 高麗(食 貨志) 漕運條) *미음나루: 배말 서남쪽에 있던 나 루터( 韓國 ) * 渡迷津下流 ( 新增 ) 龜山(하 *慶州 金氏 종족 남시 망 촌 월동) 게내, 蟹 川(하남 시 광암 동) 廣壯洞, 廣津大 橋, 광나 * 禿浦下流 ( 루유원 新增 ) 지, 廣津 區(서울 시) * 廣津下流 ( 新增 ) 松坡洞, 松坡區 (서울시) 三 田 洞 (三田: 삼밭의 음 (서울시 차+훈차 표기)

88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87 世宗 ) 숯내 (대천) 炭川 (탄천) 條) 楊津 面)] (麻田: 삼밭의 훈 차 혹은 훈음차+ 송파구) 훈차 표기)? * 楊州人稱楊 津 ( 東國 ) 炭川 炭川 [炭川, 슌 ( 中垈 面 松坡 洞)] [炭川(大 旺面 栗 峴)] [ 炭川洑 ( 突馬面 二梅洞)} 炭川(서 울시 송 파구 신 천동-강 남구 삼 성동) 良才川 [ 良才坪 (彦州面] 良才川, 良才洞 (서울시 서초구) 양재천 동계 東溪 大川 炭川 東溪 * 入三田渡 ( 新增 ) * 自龍仁邑由本 府大旺突馬樂生 三面流去三田渡 津卽炭川 ( 輿 地 ) * 出山城中由水 門合諸谷水東流 入昭川 ( 東國 ) 주: 舊韓 (1912) 항목에 있는 대괄호([ ]) 안의 내용은 朝鮮 (1911)에 수록된 자료임. 그런데 하남시 일대를 경유하는 하천을 현재 한강 으로 통칭하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조선 시대에는 각 유역별로 다양한 하천 지명이 분포했었다.9) 일반적으로 한국의 하천 지명은 각기 일정한 지명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주체의 권력관계가 작용하면서 활발한 영역 변동과 함께 변천해 왔다. 특히 조선 시대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는 각 유역에 분포했던 江, 川, 津, 浦, 渡, 灘 등의 다양 한 후부 지명소를 지닌 하천 지명들은 후대로 오면서 특정 유역의 하천 지명으로 대체되어 통일되는 경향이 나타난다(김순배, 2009a, 9) 洪敬謨(1846)의 南漢 (山川條)에는 광주부 동북으로부터 서해에 이르기까 지의 한강의 다양한 유역별 명칭을 언급하고 있다(渡迷津~廣津~松坡串 津~三田渡~斗尾浦~漢江~西氷庫津~銅雀津~露梁津~龍山江~西江~楊 花渡~孔岩津~祖江). 이러한 언급은 하천의 이름이 각 유역에 따라 주민들 에 의해 다양하게 불리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89 88 地名學 17 (2011) 17). 이러한 경향은 특정한 하천 지명의 영역이 상 하류로 확대되 어 다른 하천 지명의 영역과 경합하거나 이를 잠식 혹은 대체하는 쟁탈과 영역화(territorialization) 양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림6> 하남 일대 산천 지명의 분포 주: 위성사진에 산천 지명의 정보를 기입한 것임. 본래 하천 지명은 하천 유역과 지류에 따라 유역 주민들에 의해 달리 명명되어 지칭되었으며, 주로 하천 유역에 존재하는 촌락 지명 이 하천 지명의 전부 지명소로 겸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 대로 오면서 교통, 통신, 매스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중앙 및 지방 의 행정 권력에 의한 획일적인 하천 명칭 부여로 인하여 여러 유역 의 하천 지명 중 행정적으로 중심성이 강한 촌락과 도시 부근의 하 천 지명이 하천 상 하류의 전 유역으로 그 지칭 범위, 즉 지명 영 역이 확대되어 갔다. 특정한 하천 지명의 영역화는 각 유역에 존재

90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89 하던 기존의 소규모 하천 지명들을 대체하였고, 그 결과 소규모 하 천 지명들은 대부분 소멸되거나 일부 극소수의 지명 언중들에 의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김순배, 2009a, 22-23). <그림6>에 보이는 바와 같이 20세기 중반까지 하남시 일대의 한 강 유역에도 각 유역별로 다양한 하천 지명이 분포하고 있었다. 현 재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평군 양서면 兩水里(두물머리)로 부터 炭川이 유입하는 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부근까지 龍津 소 내(牛川) 馬岾津 斗迷津 바뎅이나루(八堂津) 馬灘 미음나루(渼陰津) 石灘 楸灘 광나루(廣津) 洗 姑灘 松坡津 三田渡 등의 하천 지명이 분포하였으며, 그 하 류로는 斗尾浦 漢江(渡) 西氷庫津 銅雀津 露梁津 龍山江 西江 楊花渡 孔岩津 祖江 등이 분포하 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서울의 행정적 중심성과 지명 인식 의 확대로 한강 이란 하천 지명으로 통칭되면서 각 유역에 존재하 던 소규모의 하천 지명들이 대부분 소멸되어 왔다.10) 한편 하남시 일대의 한강에 분포하던 堂亭島, 舞童島 등의 河中島들이 한강종합 개발사업( )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명명 기반(명명 유연 성)과 명명 대상을 잃게 된 堂亭里(당젱이나루, 당젱이섬)와 舞童島 10) <표6>에 제시된 바와 같이, 漢江 이란 지명은 삼국 시대 이래 漢水 등으 로 지칭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漢城府 南部에 소속된 漢江坊 漢江契 [ 承政院日記 (1783년)]와 같이 촌락 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한강계 란 지 명은 일제시대 지형도(1:50,000)의 纛島 도폭(1926년)에는 경기도 高陽郡 漢芝面의 漢江里 (현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한남대교 북단)로 기재되고 있어, 촌락 지명의 구체적인 지명 영역을 가진 한강 이란 하천 지명은 서 울과 가까운 지리적 근접성과 활발한 지명 인식으로 인해 상 하류로 지 명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 주변에 분포하는 다른 소규모의 하천 지명을 대 체하여 통용되고 있다.

91 90 地名學 17 (2011) 里 등도 지명이 현재 소멸되었다 촌락 지명의 변천 하남시 일대에 분포하는 촌락 지명은 대부분 조선 시대 광주부 동부면과 서부면에 분포하던 지명들이다. <표7과 8>에 제시된 촌락 지명들은 18세기 중 후반의 문헌인 輿地 와 戶口 에 등재된 지 명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면 지명과 촌락 지명 등의 소규모 지명들은 소지명 분석의 기준 사료로 평가되는 輿地 와 戶口 이후에 대량으로 등재되고 있다. 필자는 이 두 문헌에 집 중적으로 등재되고 있는 촌락 지명들과 함께 舊韓 (1912년)과 新 舊 (1917년)에 새롭게 등재된 일부 촌락 지명들을 중심으로 <표7과 8>을 작성하였다. 촌락 지명에 대한 분석은 과거 면 단위의 행정 구 역이었던 동부면과 서부면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표7>. 촌락 지명의 변천(동부면) 지명 사창 법화골 샘골 (천암동) 新增 東國 輿地 戶口 東輿/大圖/大志 (1530) ( ) ( ) (1789) (1800년대 중엽) 司倉里 司倉里 舊韓 (1912) 新舊 (1917) 河南 (2001) 비고 *둔지와 창모루 에서 稅米길로 운 반된 세미를 보관 하던 창고가 상사 창동에 있었음 *서부면에 편입 됨(1914년) *廣州 安氏 종족 촌(하사창동) *仁同 張氏 종족 法 華 洞 法 華 洞 법화골,法華 촌 (군내면) (상사창 洞(하남시 상 *法華庵이 있던 [ 法華山 리) 사창동) 곳(淸 太宗 관련 (法華洞)] 지명) 샘골,시암골, 泉 巖 洞 사양골,泉岩 泉 巖 洞 (상사창 洞, 泉 岩 谷 (巖>岩) (군내면) (하남시 상사 리) 창동) 上司倉 里(서부 上司倉里 면) 下司倉里 下 司 倉 里(서부 면) 웃사창,上司 倉,上司倉洞 (하남시) 골말,아랫말, 아래사창,下 司倉,下司倉 洞(하남시)

92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91 산골 (산곡) 下山谷洞 上山谷洞 (군내면) 下 山 谷 [ 山谷酒 里 幕( 上山 谷洞)] 山谷里 山谷里 덕풍골 德豐驛 (덕풍역 德豐( 德豐驛 말) 世宗 ) 德豐里 德豐驛 德峯里 * 豊德 驛[ 廣輿 德豊驛 (19세 기 초 반] 德豐洞 [ 德豊驛 ( 東部面 德豊洞)] 거칠미 (황산) 荒山里 荒山里 荒山洞 둔지 바뎅이 (팔당) 향교말 (교촌) 芚地 屯池洞 屯地里 * 屯地 *屯地[ 海 [ 廣 東 ] 輿 ] 八堂里 八堂里 鄕校洞 ( 서부 면) 八堂里 [ 八堂津, 바당이나 루( 東部 面 八堂 里] 校村 아래산골,下 山谷,下山谷 洞(하남시) 웃산골,上山 谷洞( 하남 시) *杞溪 兪氏 종족 촌(하산곡동 새 능,고양골)(상산 곡동 거문다리) *靑松 沈氏 종족 촌(상산곡동 거 문다리) *坡平 尹氏 종족 촌(상산곡동 섬 말) 德鳳谷,덕풍 골,덕풍역말, 역말,驛村,德 豊 川, 德 豊 *杞溪 兪氏 종족 德豐里 1,2,3洞(하남 촌(덕풍골,역말) 시) 豊山洞(하남 시) *密陽 朴氏 종족 거칠미,거칠 豐山 촌 미산, 荒山 里 *豊山里: 德豊洞 (하남시 豊山 荒山洞 +荒山洞(1914 洞) 년) (芚>屯) (地>池> 地) *둔지: 배말(船 村) 서남쪽에 있 屯地(하남시 던 마을( 韓國 ) 선동) *광주관아로 운 반되는 군량미를 하역하던 稅米길 의 기점) 上八,下八,八 *신설된 양주군 堂里(남양주 와부면에 편입됨 시 와부읍) (1914년) 바깥바뎅이, *속바뎅이: 신장 바뎅이나루, 동 석바대,石海, 八堂나루(하 石海坪 남시 창우동) 校山里 校村 *校山里: 鄕校洞 +客山洞(1914 년) *현 춘궁동 향굣 鄕校말,校村 골(校洞): 궁말 (하남시 校山 서쪽에 있는 마을, 광주향교가 있다 洞) 가 숙종 29년 (1703)에 현 교산 동 향교말로 이전 함( 韓國 )

93 92 地名學 17 (2011) *담안: 과거 광주 부 객사터 혹은 백 제 궁궐지로 추정 함 배말 (선동) 船里 배말,船村,船 *潭陽 田氏 종족 洞(하남시) 촌 望月里 望月里 멍덜개,望月, 望月浦,上望, 下望,望月洞 (하남시) 미사촌 渼沙村 渼沙里 장예말 (장례촌) 長禮村 新長里 長禮村 멍덜개 望月峯 望月峯 (망월) 船村 *望月[ 朝 圖 ] 望月峯 望月峰 새뜰 (신평) 당젱이 (당정) 창모루 (창우동) 新坪里 新長里 [新坪村] 新坪里 堂亭里 당젱이,당젱 이섬,堂亭島, 당젱이나루, 堂亭나루,堂 亭洞(하남시 신장2동) 倉隅洞 [ 倉隅場, 倉隅里 창모루장] 창모루,안창 모루,바깥창 모루,倉隅洞 (하남시) * 堂長 堂亭島 島 [ *堂亭島[ 1872 *堂長島[ 堂亭里 廣 輿 ] 海東 ] ] * 倉隅 *倉隅([ [ 廣 海東 ] 輿 ] 渼沙,渼沙村, 渼沙洞(하남 시) 장예말,장리 말,長禮村新 長1,2동) 새뜰(하남시 신장1동) *南陽 洪氏 종족 촌(상망) *廣州 李氏 종족 촌(하망) *慶州 崔氏 종족 촌 *新長里: 新坪里 +長禮村(1914 년) (新: 새의 훈음 차) (亭>長>亭) *1925년(을축 년) 홍수로 더우 개로 집단 이주함 *한강종합개발 사업( ~ 1986)으로 명명 기반(有緣性) 상 실됨 *둔지와 함께 광 주관아로 운반되 는 군량미를 보관 하던 창고와 稅米 길의 기점) *全州 李氏 종족 촌(산골) *海平 尹氏 종족 촌(안창모루) *퇴촌면 拜謁浘 洞(현 윗배알미) 이 동부면 배알미 리에 편입됨(1914 년) *尾와 浘가 터쓰 임 밸미 (배알미) 밸미,밸미산, 윗배알미,아 拜謁尾里 拜謁尾 래배알미,拜 拜謁浘洞 里 謁尾洞(하남 (퇴촌면) 시) 샘재 (천현동) 泉峴洞 泉峴里 샘재,안샘재, *咸平 李氏 및 南 바깥샘재,泉 原 梁氏 종족촌 峴洞( 하남 (안샘재) 시) 客山洞 校山里 客山,客山瀑 *校山里: 鄕校洞 객산동 *客山[ 海 * 客 山 客山

94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93 [ 廣 [客山(東 輿 東 (18세 ( 1 9 세 *客山[ 1872 ] 部面 客山 客山洞 기 중반)] 洞)] 기 초 반] 布(하남시 校 山洞-하사창 +客山洞(1914 동- 하산곡 년) 동) 주: 舊韓 (1912) 항목에 있는 대괄호([ ]) 안의 내용은 朝鮮 (1911)에 수록된 자료임. <표7>은 동부면의 촌락 지명을 정리한 것으로 우선 조선 시대 광 주부가 지녔던 수도 한양의 保障之地 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 는 司倉(상사창, 하사창), 屯地, 창모루(倉隅) 지명을 살펴보았다. 이들 세 지명은 조선 시대 稅米길 의 기종점 및 경유지였다(이영민, 1991, 70). 1917년에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던 광주군의 군청이 경안면 경안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廣州留守의 관할 지역으로부터 수 취한 세미를 운반, 보관하던 곳들이다. 한강 水運으로 운반하여 둔지 나루와 창모루(바뎅이 나루)에 하역된 세미는 육로를 통해 司倉里로 집하되었고, 이를 다시 등짐으로 상사창리의 법화골을 지나 남한산 성 북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이동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둔지와 창 모루의 두 지점에서 사창리로 연결되던 과거의 두 갈래 세미길을 <그림7>을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한강 유역에 있던 둔지와 창모 루 등의 나루들과 세미길의 발생은 지난 한성백제 때로 소급될 가능 성이 크며, 당시 慰禮城, 漢山, 漢城 을 이곳 하남시 일대의 남한산 성과 춘궁동 일대로 비정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한편 동부면에는 조선 시대 광주부의 鄕校가 있던 곳으로 1626년 광주부의 치소가 남한산성 내로 이전한 후에도 향교의 입지는 고골 (古邑) 일대에 유지되었다. 현재 교산동 향교말(校村)에 위치한 향 교는 본래 춘궁동 의 궁말 서쪽에 있는 향굣골(校洞)에 있던 것을 숙종 29년(1703)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과거 향교의 존재를 확인 하게 하는 지명이 바로 현 춘궁동의 향굣골(校洞) 과 향교 고개(생

95 94 地名學 17 (2011) 이 고개) 로 남아 있다. 특히 하남시 교산동의 담안 이란 곳에는 치 소를 옮기기 전 광주부의 客舍 터 혹은 백제 궁궐지로 추정되는 유 적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 있는 客山 이란 산 지명이 광주부 객사의 입지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표8>의 궁말 항목에 보이는 古廣州, 古邑基, 古邑 이란 지명들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옮기기 전의 광주부의 舊 치소를 지칭하는 것들이다. 독도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1926년) <그림7> 일제시대 하남 중심부의 지형도 및 세미길 경로 주: 지형도 위의 굵은 점선은 조선시대 세미길 경로를 표현한 것으로 각각 남한산성 북서쪽의 한강 둔지나루와 북동쪽의 창모루(바뎅이 나루)에서 시작되어 상사창리의 법화골을 지나 남한산성 북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연결된다. <표7과 8>의 新舊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부면과 서부면 에 있는 촌락 지명에는 1914년 일제에 의해 단행된 전국 단위의 행 정 구역 개편 당시 생성된 混成 地名(合成 지명, blending place names)이 분포한다. 이러한 혼성 지명에는 校山里(鄕校洞+客山洞),

96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95 新長里(新坪里+長禮村), 豊山里(德豊洞+荒山洞), 春宮里(春長里+ 宮村)가 있으며, 구체적인 행정 구역 통합 사실과 지명의 혼성 과정 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후에 간행된 舊韓 (1912년)과 新舊 (1917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부면의 촌락 지명중에는 한성백제 시대(BC. 18 AD. 475)의 유적과 관련된 지명들이 일부 분포하고 있다. 현재 한성 백제의 도 읍지와 관련하여 여러 연구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상존하고 있다. 이 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지리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였을 때 현 춘궁동 의 궁말(宮村) 이 바로 삼국(백제본기) 의 온조왕 13년조(BC. 6) 에 언급된 漢山下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남한산성) 아래], 즉 漢 나아가 城 인 것으로 판단한다. 동일한 기사에 등장하는 내가 어제 남쪽 을 巡觀하였는데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11) 기존의 漢水의 도읍지인 위례성에서 단 하루( 어제 ) 만에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 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도읍지는 기존의 도읍지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한강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三國 에 기록된 신라 文武王 12년(672)에 축성된 晝長城 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남한산성, 즉 日長城으로 비정되는데, 남한산 성 아래의 二聖山 동록에 위치한 春長里(행기리) 라는 지명과 일 부 표기자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晝長 日長 春長(행기리) 의 유사성 속에서 이 일대 지명들의 和同性(지헌영 2001, 123)과 역사 적 사실을 유추해 볼 가능성이 있는가의 여부는 앞으로의 연구 과 제이기도 하다. 11) 夏五月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北有靺鞨侵軼疆境少有寧曰 况今妖祥屢見 國母弃養勢不自安必將遷國予昨出巡觀漢水之南圡壤膏腴冝都於彼以圖久安 之計...秋七月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戸[三國(百濟本紀) (溫祚王13年, BC.6)].

97 96 地名學 17 (2011) <표8> 촌락 지명의 변천(서부면) 지명 新增 東國 輿地 戶口 東輿/大圖/大志 舊韓 新舊 (1530) ( ) ( ) (1789) (1800년대 중엽) (1912) (1917) 河南 (2001) 내미길,나 무길,木道, 목골,황골, 黃谷,項洞 (하남시) 목골 (항동) 項洞 項洞 項洞 項里 춘장 (행기 리) 春長里 春長里 春長里 춘동,春長, 春宮里 행 기 리 春長里 ( 하 남 시 春宮洞) 초덕 草德里 草德里 草 一 洞 草一里 草一洞 (하남시) 草二 草二洞 草 二 洞 里 (하남시) 甘泉洞 가무나리, 甘泉,玄村, 감북골,甘 甘一洞 甘一里 北洞( 하 甘二洞 甘二里 남시) 甘北洞 甘北里 甘一洞,甘 二洞( 하 남시) 冬音巖 里 두름바위, 학바위,학 鶴岩洞 鶴岩里 바위골,鶴 岩,鶴岩洞 (하남시) 가무 나리 (감천) 두름 바위 (학바 위) 甘泉里 冬音巖里 비고 (나무길>내미길>木道> 목골>項洞>황골>黃谷)? *경합지명(나무길/황골 /項洞) *項洞이란 지명영역 내 에서 나무길과 황골이 각 기 다른 지명영역을 차지 함 *春宮里: 春長里+宮村 (1914년) *백제 도읍지로 추정함 *春長과 晝長城/日長城: 三國 신라 文武王 12년 (672)조의 晝長 및 日長 과의 유사성 *溫陽 方氏 종족촌(버구 리 法洞) *延安 李氏 종족촌(초일 동 상화울) *豊川 任氏 종족촌(초일 동 청뜰) *忠州 池氏 및 晋州 姜氏 종족촌(초이동 지지미) (甘: 가무의 음차 표기) (玄: 가무의 훈차 혹은 훈 음차 표기) *密陽 朴氏 및 廣州 安氏 종족촌(감북동 가무나 리) *廣州 安氏 종족촌(감북 동 安村) *密陽 朴氏 종족촌(감북 동 갈미) *綾城 具氏 종족촌(감일 동 시리미,효때배기,능 안) *密陽 朴氏 종족촌(감이 동 정림) *驪興 閔氏 賜牌地(감이 동 널문이) (두름바위>冬音巖>鶴 岩) (冬音: 두름의 음차) (鶴: 두름의 훈차 혹은 훈 음차)

98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97 창동 倉洞 너븐 바위 (광암) 궁말? 너븐바위, 너분바위, 廣岩洞 廣岩里 廣岩,廣岩 洞( 하남 시) * 古邑 *古邑( 大圖 ) 古廣州(古蹟 *古邑基[ 基([ *古邑基[ 1872 宮村 條) 海東 ] 廣 輿 ] ] *지명 소멸됨 (廣: 너븐의 훈차 혹은 훈 음차) *豊壤 趙氏 종족촌(너븐 바위) *고골(古邑): 궁말 북동 쪽에 있는 들[고려 때부 터 광주 고을이 있다가 조 선 인조 4년(1626)에 남 궁안,궁말, 한산성으로 옮기었음]( 春宮里 宮 村 ( 하 韓國 ) 宮村 남시 春宮 *백제 궁궐지로 추정함 洞) *조선 宣祖의 손자이자 仁祖의 동생인 綾昌大君 (1599~1615)의 묘소가 있음 4. 결론 많은 역사학자들은 고금에 걸쳐 문헌과 문서 등에 기록된 다양한 지명들의 위치 비정을 수 없이 시도해 왔다. 그러나 역사학적인 방 법론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통해 많은 결과를 거두어 왔으나, 그 결 과의 질적인 성과에 있어서는 쉽사리 긍정만은 할 수 없는 상황이 다. 그 이유는 역사서에 기록된 지명 자체가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속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지명 위치 비정은 지리적인 시선과 방법론이 간과된 채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 다. 洪敬謨가 南漢 (1846)의 序文과 敍例에서 우리나라 地誌가 郡 과 邑의 위치를 기록해 놓고도 어느 곳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 함을 지적하면서 古今의 歷史를 쓰는 사람들이 대대로 天文志와 五行傳 같은 것은 말하면서 왜 地理는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인 가? 라고 비판한 바와 같이,12) 앞으로의 지명 연구는 지리적 방법

99 98 地名學 17 (2011) 론이 통합된 다학문적인 지명 연구가 절실하다. 한편 고지명에 대한 정확한 위치 비정은 시대별 역사 지도 작성에 필요한 기본적인 선 행 작업이기도 하다. 역사적, 언어적 지명 연구에 지리적 방법론을 통합하여 하남시 일 대의 지명 변천을 고찰한 본 연구는 고려시대 이전과 조선 시대 이 후의 시간 단면을 기준으로 하남시 일대에 분포했거나 존재하고 있 는 지명들을 분석하였다. 고려 시대 이전의 지명 변천은 촌락 지명 같은 소지명보다는 군현 단위 이상의 대지명들을 주로 다루었다. 삼 한시대 하남시 일대에 분포했던 지명으로는 마한의 54개 국명 중 하나인 伯濟 등이 있었으며, 그 위치로는 위례홀, 즉 현재의 남한 산성 혹은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때 위례홀, 즉 위례성 의 위치는 학자마다 일치된 위치 비정이 이루어지고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위례성 을 언급하고 있는 삼국 등의 기사에 대한 일정한 지리적 입지 분석과 텍스트 의 맥락을 고려하여 백제 온조왕이 BC. 18년에 도읍한 위례성 을 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으로 비정하였다. 또한 BC. 6년에 위례성에서 漢山 아래로 옮긴 두 번째 도읍지, 즉 漢城 을 웅진백제와 사비백제의 도읍에서 나타나는 지리적 입지의 유사성에 비추어 현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비정하였다. 즉 한성 백 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과 한성의 위치는 대하천의 곡류지점을 택해 자연적인 해자를 삼고 있으며, 곡류 안쪽의 산지와 구릉지에 성채를 조성하여 도읍을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성백제 가 멸망한 개로왕 21년(475) 당시의 南城과 北城의 위치를 각각 남 한산성과 춘궁동 일대로 비정하였다. 12) 古今作史者世世爲天文志五行傳而地理則未之言者歟 [ 南漢 (序)]

100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99 한편 慰禮城, 漢城, 漢山 을 제외한 고려 시대 이전 하남시 일 대를 지칭하던 지명으로는 漢山郡, 新州, 新興州 新州停, 南川 州, 漢山停, 漢山州, 南漢城, 南漢山城, 南漢山州 등이 있었다. 삼국 시대 정치적 변동 속에서 지명을 달리한 하남시 일대의 지명 은 경덕왕 16년(757)에 2자식 한자 지명인 漢州 로 개정되었고, 고 려 태조 23년(940)에는 廣州 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 시대 이후 하남시는 광주부에 포함되었으며, 20세기 중반 이 후 이루어진 급속한 도시화의 영향으로 견아상입지 형태를 보이던 광주부의 지명 영역이 정리 및 축소되어 서울시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의왕시, 안산시, 군포시, 하남시(1989년)로 분리되었 고, 그 외 지역만이 광주시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행정 지명으로서의 廣州 라는 군현 지명은 행정 구역을 지칭하는 후부 지명소가 바뀌어 존속되고 있다. 광주부에 분포하던 다양한 면 지명 들은 조선 전기의 방위면 지명들(동부면, 서부면, 중대면, 북방면)은 모두 소멸되었고, 조선 후기의 새로운 면리제 하에서 생성된 면 지 명들은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역원 지명은 18세기 이후 원의 쇠퇴와 1895년 우체사의 설치로 인한 역참의 폐 지로 인해 전부 지명소가 소멸되거나 일부 지명이 촌락 지명으로 계승되었고, 후부 지명소였던 원 과 역 이 촌락 지명의 전부 지명소 가 되어 원골, 역골 등의 이름으로 존속되기도 하였다. 산천 지명은 대체로 지리적 형태 확인이 가능하고 일상생활에서 지명 언중들에 의해 활발하게 사용되어 존속성이 높게 나타났다. 다 만 하남시 일대를 경유하는 한강 유역에는 다양한 하천 지명들(용 진 마점진 우천 두미진 바뎅이나루 마탄 미음나루 석탄 추탄 광나루 세고탄 송파진 삼전도 등)이 분포하였으나 현재는

101 100 地名學 17 (2011) 특정 지명인 漢江 으로 대체되어 지명 영역이 축소되거나 지명이 소멸되었다. 하남시 일대에 분포하는 촌락 지명들은 고유 지명이 음 차, 훈차, 훈음차로 다양하게 표기되고 있으며, 지명 변천과 연관된 지명 영역의 변이도 다채롭게 나타났다. 특히 촌락 지명에는 한성 백제의 유적과 관련된 춘궁동의 궁말, 춘장(행기리) 과 교산동의 담안 등이 있으며, 1626년 광주부 읍치가 이전하기 이전의 유적과 관련된 고골(古邑), 향교말(校村) 과 세미길과 관련된 둔지, 창모 루(창우동), 사창동 등의 지명들도 주목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하남시 일대 지명들의 분포와 변천 양상은 삼한 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 분포하던 고지명들의 정확한 위치 비정을 위해 이후 정밀한 학제간 보완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고문 헌에 등재된 고지명들에 대한 정확한 위치 비정은 한성 백제의 역 사를 정밀하게 재구하는 데에도 기초적인 선결 과제이다. 앞으로 역 사학, 언어학, 지리학 등을 아우르는 다학문적인 지명 연구가 활발 하게 이루어져 홍경모가 고민한 한국 지명의 위치 부재를 해결하는 토대가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102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101 참고문헌 三國史記 (김부식, 1145). 三國遺事 (일연, ). 朝鮮王朝實錄 ( ). 高麗史地理志 (김종서 정인지, ). 世宗實錄地理志 (정인지, 1454). 新增東國輿地勝覽 (이행, 1530). 東國輿地志 (유형원, ). 海東地圖 ( ). 朝鮮地圖 ( ). 輿地圖書 ( ,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 1973). 戶口總數 (1789,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重訂南漢志 (홍경모, 1846, 하남역사박물관 간행, 2005). 廣輿圖 (1800년대 초반). 靑丘圖 (김정호, 1834). 東輿圖 (김정호, , 서울대규장각 영인본, 2003). 大東輿地圖 (김정호, 1861). 大東地志 (김정호, ). 1872년 지방지도 (1872). 朝鮮地誌資料 (조선총독부, 1911).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조선총독부, 1912).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越智唯七, 1917). 舊韓末 韓半島 地形圖 (1:50,000)(일본육군참모본부, ).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1:50,000)(조선총독부, ). 四佳集 (徐居正, ). 絅菴集 (申琓, ). 恕菴集 (申靖夏, ). 屯菴集 (申昉, ). 擇里志 (李重煥, 1751). 與猶堂全書 (丁若鏞, ).

103 102 地名學 17 (2011) 광주문화원(2005), 廣州의 地名由來, 광주문화원. 국토지리정보원(2008),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김기섭(2008),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 성립과 몽촌토성, 백제문화, 김순배(2009a), 하천 지명의 영역과 영역화, 지명학 15, (2009b), 韓國 地名의 文化政治的 變遷에 關한 硏究: 舊 公州牧 鎭管 區域을 中心으로,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김윤우(1993),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 考, 사학지 26, 단국대동양학연구소(1984), 천자문, 단국대출판부. (1995), 훈몽자회, 단국대출판부. (2002), 신증유합, 단국대출판부. 도수희(1997), 백제어 연구, 백제문화사. (2008), 삼한어 연구, 제이앤씨. 박해옥(1994), 百濟前期都城 漢城 의 位置, 응용지리 17, 손정목(1996),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연구, 일지사. 엄기표(2004), 정말 거기에 백제가 있었을까, 고래실. 이병도(1959), 한국사(고대편), 을유문화사. 이수건(1989),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이영민(1991), 廣州의 舊治所 고골 에 관한 歷史地里的 硏究, 지리학 26(1), 이종묵(2006), 조선의 문화공간: 4책 조선 후기 내가 좋아 사는 삶, 휴머니스 트. 정인보(1946), 조선사연구(상 하), 서울신문사. 지헌영(2001), 한국 지명의 제문제, 경인문화사. 하남시사편찬위원회(2001), 역사도시 하남, 하남시. 한글학회(1985), 한국 지명 총람 17(경기편: 상), 한글학회. 조선시대전자문화지도시스템(

104 하남(河南) 지역의 지명 변천 103 Abstract The Changes of Place Names in Hanam City Kim Sun-Bae Place names are including continuity as well as changeability. By the changeability of place names, we are able to recognize past historical traces, while we could gradually understand the social and linguistic change and depth in its traces. Based on this understanding, this article aims to investigate the changes of place names in Hanam City, Gyeonggi province, through the multidisciplinary toponymy such as historical, linguistic, and geographical approaches. Particularly, this research checks into the concrete location and features of changes of place names on the criteria of dividing a period between before the Goryeo Dynasty and after the Joseon Dynasty. In the first chapter dealt with the changes of place names before the Goryeo Dynasty period, I briefly investigated the old place names which have reflected the location and transfer of the capital in early Baekje Dynasty period, and the large-scale place names representing the Hanam area. And then I remarked the place names' changes related to administration, mountain, river, and village in the second chapter, comparing to the features of changes in another region. Especially, characteristics of territorialization on river

105 104 地名學 17 (2011) place names which signified a phenomenon unified several river place names into single river place name, so-called Hangang river as time goes by had been examined in the later part of second chapter. Key words : Place names, Hanam city, Multidisciplinary toponymy. 성명 김순배(金淳培) 주소 ( )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 산 7번지 한국교원대학교 제2대학 지리교육과 전화 043) , 전자우편 gogeo@hanmail.net 이 논문은 2011년 10월 31일 투고되어 2011년 11월 01일부터 12월 1일까지 심사하고 2011년 12월 3일 편집회의에서 게재 결정되었음

106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미즈노 슌페이(水野俊平)* 13) 국문요약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는 1895년부터 1896년에 걸쳐 제작된 5만분 의 1 지형도를 말한다. 이 지형도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 따른 군 사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의해 비밀리에 제작 되었고, 일본 육군의 육지측도부가 측도(測圖, 측량과 제도)를 담당했 다. 일반적으로 약도(略圖), 제1차 지형도 라고 불리는 이 지형도에 는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의 한반도 지명이 수록되었으며 각 지명 에는 그 독법이 가타카나로 된 토로 표시되었다. 이 토는 지형도 제 작 당시에 통역과 현지에서 고용된 한국인 통변(通辯) 이 현지 주민 으로부터 직접 청취하여 채집한 것으로 보인다. 지명에 첨가된 토의 60% 이상은 음독된 것이지만 일부는 훈독된 것도 포함되어 있어 그 당시의 훈독 지명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들 토 중에는 조선지지자료, 한국지명총람 등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09년부터 1911년에 걸쳐 지형도, 제2차 지형도 라는 불리 는 지형도가 제작되었는데, 그 지명에는 제1차 지형도 와 동일한 방 법으로 가타카나로 된 토를 달았다. 제2차 지형도 의 지명에 첨가된 토는 비록 그 연대는 후대의 것이지만 제1차 지형도 의 자료적 가치 를 보완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 日本 北海商科大學

107 106 地名學 17 (2011) 다만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에 첨가된 토는 불충분한 요건 속에서 채집되었으며, 음독과 훈독이라는 양면성을 가 진 지명의 어느 한쪽만을 채집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 가 있다. 따라서 이들 지형도의 지명에 첨가된 토를 자료로 활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다른 자료와의 비교 대조 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 핵심어 :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음독 지명, 훈독 지명, 외방도(外 邦圖), 제1차 지형도. 1. 들어가며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일본이 제작한 한반도 지형도를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외방도(外邦 圖) 라고 부르며 근대(메이지[明治] 시대 제2차 대전 패망) 아시 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제작한 지형도 를 뜻한다. 이 외방도 의 범주에는 한반도, 대만, 사할린, 쿠릴(지시마) 열도, 중국 대륙, 남서 태평양 지역의 지형도도 포함된다. 다만 외방도 라는 명칭은 일본의 시각에서 정해진 명칭으로, 한국에서는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일 제 강점기 지형도 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고에서는 한일합 방 이전에 일본이 제작한 지형도를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한일합 방 이후에 제작한 지형도를 일제 강점기 지형도 라고 부르기로 한 다. 본고에서는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중에서 1895년부터 1906년에

108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07 걸쳐 제작된 한국 최초의 5만 분의 1 지형도( 제1차 지형도, 약도 [略圖] )와 거기에 수록된 지명을 주된 고찰 대상으로 삼아 지형도 의 제작 경위와 지명학적인 자료 가치를 검증하고자 한다. 2. 각 지형도의 제작 경위 일본의 한반도 지형도 제작은 19세기 중엽, 조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 1876년) 체결 전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해군 장 교에 의한 한반도 내륙의 측도가 시작된 시기는 1877년인데, 그 측 도 범위는 부산 및 서울 부근에 한정되어 있었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에는 일본 공사관 직원의 한국 국내 여행이 허용되면서 그들의 여행을 통해 간편한 지형도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지형도 제작 작업 은 그 후 일본 육군 장교에게 인계되어 청일전쟁(1894년)까지 한반 도 전역을 망라하는 20만 분의 1 지형도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형도는 정확성에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 에 일본은 청일전쟁 발발 후 5만 분의 1 지형도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초로 제작된 5만 분의 1 지형 도를 일반적으로 약도(略圖) 또는 제1차 지형도 라고 부른다. 선행 연구의 성과를 참고로 제1차 지형도 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 다. 1894년 9월, 일본 육군에 임시측도부(臨時測圖部) 가 편성되었는 데, 이것은 한반도나 중국 대륙의 군용 지형도를 제작하기 위해 특 별히 편성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에는 육지측도부 지형과의 측도 기 술자들이 소속되었으며, 이들은 청일전쟁 당시 한반도를 북상하는

109 108 地名學 17 (2011) 제1군 의 일원으로 측도 작업을 실시했다. 측도반의 활동을 기록한 육지측량부연혁사(초안) 에는 1895년 9월 하순부터 10월 초순에 걸쳐 임시측도부에서 한반도 측도를 담당한 제1반 과 제4반 이 몇 개 조로 나뉘어져 비밀리에 한국에 입국하여 각종 장애 요소가 있 음에도 불구하고 대상 지역에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896년에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따른 민심 악화와 정세 불안 으로 인해 측도 작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1896년 5월 20일에 작 업을 중단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임시측도부는 1896년에 해 체되었는데 육지측량부연혁사(초안) 에는 측량수(測量手) 외 열 명이 한국 각지의 비밀 측도에 종사했는데, 정세 불안으로 인해 9월 17일에 철수했다 는 기사가 보이며, 1903년에는 노일 관계가 긴박 함에 따라 10월 7일에 세 명의 측량수가 한국에 파견되었고, 29일에 22명, 30일에 17명이 한국의 비밀 측도에 참가했다 는 기사가 보인 다. 따라서 제1차 지형도 의 측도 작업은 1895년부터 20세기 초엽까 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제1차 지형도 는 1911년과 1912년 에 군 요새 지역이나 측도되지 않았던 지역을 제외하고 약도(略 圖) 라는 명칭으로 간행된 후 일반인에게 판매되었다. 이 제1차 지형도 에 이어서 지형도(地形圖) 또는 제2차 지형도 라고 불리는 지형도가 제작되었다. 제2차 지형도 의 측도 작업은 1909년부터 1911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13년부터 1916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 지형도는 삼각쇠 측량 이라는 간단한 삼각 측량법 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제1차 지형도 보다 정확성이 눈에 띄게 향상 되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으로 조선 임시 토지조사국이 설치되었으며 토지 조사 사업에 따른 지적도 제작과 함께 한반도 전역을 망라한 기본도(基本圖) 또는 제3차 지형도 라

110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09 고 불리는 지형도가 제작되었다. 제3차 지형도 는 1914년부터 1918 년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1918년부터 1921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기 본도 는 그 후 일제 패망까지 몇 차례에 걸친 수정 측도에 의해 내 용과 정밀도가 보완되었다. 3. 선행연구 검토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에 대한 연구는 최근까지 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로 지형도 자체가 군사 기밀이었기 때문에 그 제작 경위(측량 제도 인쇄)가 분명하지 않았고, 1945년 당시 일제 패망 에 따라 지형도나 관련 자료가 소각된 것을 들 수가 있다. 일본 국 내에서도 이른바 외방도 의 자료적 가치는 일찍이 인식되고 있었으 나, 그 분량이 방대했기 때문에 분류 정리 작업을 거쳐 일반에 공 개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2000년대 초에 외방도 의 목록이 완성됨에 따라 연구가 활성화되었으며, 구한말 한반도 지형 도 및 일제 강점기 지형도 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1) 그 러나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에 대한 연구는 주로 지리학의 분야에 서 이루어졌고 국어학 및 지명학의 자료로 활용하려는 연구는 일부 에 한정되었다.2) 1) 1991년에는 제3차 지형도 의 영인본, 1996년에는 제1차 지형도 의 영인본 이 각각 간행되었다. 2) 제1차 지형도, 제3차 지형도 의 지명을 데이터 베이스화한 연구 성과로는 김 선희(2008), 김종혁(2009) 등을 들 수 있으나 일본어로 표기된 토(ruby)가 연 구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국어학이나 지명학의 분야에서는 충분히 연구 성과를 활용할 수 없다. 김종혁(2009)에 의해 작성된 제1차 지형도 의 데이터 베이스는 다음 주소에서 공개되고 있다.

111 110 地名學 17 (2011)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의 지명학 적 가치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논저로 光岡雅彦(1982)을 들 수 있다. 光岡雅彦(1982:8)은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에 대해 그 부락 명칭 표기에 훈독 지명, 고훈독명(古訓讀名, 옛 훈독 지명), 고차자 명(古借字名, 옛 차자 표기 지명)이 많이 포함되었다 고 지적하며 한일합방 후에 추진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 일본인이 지명을 정리 개편한 점을 고려할 때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은 그 이전의 오래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光岡雅彦(1982)은 제1차 지형도 의 지명 가운데 북위 38도 이남의 이명(里名), 동명(洞名) 약 3만 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① 음독 지명 : 18,000개(예 : 劫飛カッピ) ② 훈독 지명 : 4,000개(예 : 新基セット) ③ 음독과 훈독이 혼합된 것 : 3,000개(예 : 沃野ワイテル) ④ 옛 차자 표기에 의한 것 : 2,000개(예 : 斗豆米アヅミ) ⑤ 옛 훈독에 의한 것 : 3,000개(예 : 四加里ヌドリ) 光岡雅彦(1982:43)은 일제에 의한 지명 정리 및 개편 작업으로 ②③④⑤는 모두 음독 지명으로 통일되거나 지명 표기가 음독에 맞 추어서 바뀌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 농촌의 언어 생활이 큰 변화를 겪었다고 지적했다. 光岡雅彦(1982)은 앞에서 언급한 이명(里名), 동명(洞名) 약 3만 개 중 5, 600개를 추출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宋基中(2001)은 고유어 지명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한자 표기에 한글 혹은 다른 문자에 의 해 훈독 표기가 병기된 자료 만이 지명의 훈독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宋基中(2001)은 그러한 자료의 하나로 일본 육지 측량부 가 1912년 1915년에 걸쳐 발행한 지형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자

112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11 료성에 대해 이 지도에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에 가타카나(片假名) 로 국어 한자음이 주음(注音)되었는데, 간간이 훈독음이 보인다 고 지적했다. 다만 宋基中(2001)에서 언급된 지형도는 제3차 지형도 이 며 토지 조사 사업이 이루어진 후에 간행된 지형도이기 때문에 제1 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에 비해 자료적 가치는 낮다. 또한 김종혁(2009)은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이 갖는 자료적 가치 에 대해 구한말 지형도에서는 행정 지명과 자연 지명, 그리고 취락 명을 비롯한 각종 인문 지명이 고유의 이름으로, 즉 한글 이름을 가 타카나(カタカナ)로 표기하고 있다 고 지적한 바가 있다. 4. 제1차 지형도 의 지명 채집에 대한 검토 4.1. 제1차 지형도 의 제작 과정 제1차 지형도 는 1911년 1912년에 걸쳐 간행되었으며 1996년에 는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제1차 지형도 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고 있는 지형도를 저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 분량이 445장에 이른다. 다만, 제1차 지형도 의 색인에는 484장이 수록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나머지 39장은 분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제1차 지형도 는 각각 경도 15분, 위도 10분 간격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삼각점망을 이용한 측도가 아니기 때문에, 곽선(郭線)과 지형도의 구분이 일치 하지 않는 부분도 보인다. 제1차 지형도 의 원판과 원도(原圖)의 일 부는 미국의 Clark 대학에 소장되어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에 445장, 쿄토(京都) 대학 종합 박물관이나 도호쿠(東北) 대학 및 오차노미즈(お茶の水) 대학 등에 제1차 지형

113 112 地名學 17 (2011) 도 의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도 79장의 제1차 지형도 가 소장되어 있다. 제1차 지형도 는 경위 및 도곽(圖郭)이 있는 지형도와 그것이 없 는 지형도로 구분된다. 전자가 제1차 지형도 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후자는 서북 지방(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의 일부)의 지형도 가 해당된다. 또한 대부분의 제1차 지형도 에는 측도 제판(製版)에 관한 연도 표시가 없다. 아마도 이는 군사 기밀에 저촉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1차 지형도 중에는 明 治32年(1899년)測圖, 明治33年(1900년)製版 과 같은 측도 제판 연 도가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 대략적인 제작 연대를 추측할 수 있다. 谷屋鄕子(2004)는 일본 국토 지리원의 국외 지도 목록, 국외 지도 일람표 등을 바탕으로,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 는 1895년에 측도되었고, 1896년과 1898년에는 충청도, 1899년에는 전라도, 1900년에는 함경도, 1905년 1906년에 걸쳐 평안도가 측도 된 사실을 밝혔다.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의 수는 선행 연구에 의해 이미 밝 혀진 바가 있다. 김종혁(2009)에 의하면 제1차 지형도 445장 전체 에 수록된 지명은 총 43,764개이며,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 도 경기도의 순서로 지명 수가 많다. 평안도의 지명이 17.1%를 차 지하는 반면에 강원도의 지명은 4.7%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강원도 의 지형도가 많이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도별로 제1차 지형도 에 수 록된 면적을 보면 경기도는 도서(島嶼) 지역을 제외하고 99.6%가 수록된 반면에 산악 지대가 많은 함경도는 50% 정도 밖에 수록되 지 않았다.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면적은 한반도의 68.9%, 15만 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평안도의 지명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114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13 은 측도의 조건이나 측도 방침의 차이 등에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제1차 지형도 를 이용할 때는 측도의 실시 요건에 따라 지 명의 채집이 편향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지명 채집의 경위에 관한 검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1차 지형도 는 1895년 1906년에 걸쳐 측도된 지형도이며 지리학적인 자료 가치는 충분하다. 그런데 지명 학적인 가치를 고려할 때 지명과 지명에 가타카나(片假名)로 병기 된 토(ruby)의 성격을 검증하지 않을 수 없다.([도표1]) 光岡雅彦(1982:12)은 지명 의 채집 작업에 대해 현지 한국인 밀정을 동원했다 고 주장했고, 南縈佑(2006, 2009) 는 (지명을 채집하기 위해) 1880년경에 일본인 어학 연수 생을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어 를 습득시켰다 고 주장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3) [도표1] 제1차 지형도 의 지명 표기 여기에서는 측도반의 활동을 기록한 육지측량부연혁사(초안) 를 통해 제1차 지형도 의 지명 채집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육지측량부연혁사(초안) 에는 통역, 통변(通辯) 이라는 말 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통역이 측도반에 동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통역, 통변 은 현지에서 임시에 고용된 일본인 및 현지 주민 3) 光岡雅彦(1982:12)에는 구체적인 근거 제시가 없다. 또한 일본 외무성 관 비 유학생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1891년이었다.

115 114 地名學 17 (2011) 으로 측도반의 정식 직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지측량부연 혁사(초안) 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通譯ハ陸軍戰時給與規則第三十條ニ依リ測圖部限ノ臨時雇ニ到候 仁川 漁陰洞ニ着スル第二 第三班ノ分ハ京城ニテ雇入差廻申候釜 山元山ハ其地ニテ雇入ルル方便利ニ有之候ニ付班ニテ雇入ルルコトニ 申付候 (明治28年10月11日) ( 통역은 육군 전시 급여 규칙 제30조에 의해 측도부에 한정된 임 시 고용직으로 한다., 인천, 어음동에 도착한 제2, 제3반의 통역은 서울에서 고용하고 이쪽으로 파견하도록 한다. 부산, 원산에서는 현지 에서 고용하는 편이 편리하므로 각 반에서 고용하도록 지시했 다. [1895년 10월 11일]) 이 자료에 일본인 통역이나 한국인 통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 로 보아, 측도반은 통역을 동행하면서 측도를 실시하는 한편 현지 주민으로부터 지명을 채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조사 방법은 현지 주민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土民ノ妨害ヲ受クルコト頻繁ニシテ或地方ニ於イテ地名ヲ問ヒタル ニ彼等ノ習慣ノ如ク地名ヲ聞ヒテ何ノ爲ニスルト反問シ容易ニ敎ヘス 依テ種々ノ方便ヲ以ツテ漸ク地名ヲ聞キ得タリ又一村落ニ文字ヲ知ル モノハ一 二名ナルヲ以テ筆談モ亦容易ノ事ニアラス (明治28年1 1月29日 大邱及其附近) (현지 주민들로부터 빈번하게 방해를 받거나 혹은 지명을 물어봐도 그들은 습관처럼 무엇 때문에 지명을 물어보냐? 라고 반문하여 쉽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따라서 여러 방편을 써서 겨우 지명을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한 마을에 문자를 아는 사람이 한두 명밖에 없어서 필담 [筆談] 역시 쉽지 않았다.[1895년 11월 29일, 대구 및 그 부근])

116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15 당시는 을미사변 및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으며 측도반은 현지 주민으로부터 빈번하게 습격이나 방해 를 받아 측량이나 지명 채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명을 물어도 답 을 얻을 수 없거나 사실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 사례가 많아 현지의 관아에 도움을 요청해 미리 받아 적은 지명과 현지 주민의 답변을 대조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지명을 조사한 것을 알 수 있다. 右村名ニ付村人ニ對シ問フ所アリシモ實ヲ吐カス或ハ事實ヲ言フト シテモ疑ハシキ擧動ニ見受ルヲ以テ測圖ヲ施行セムトスル時ハ前以テ 其地方ノ郡衛ニ赴キ測圖區域ノ村名ヲ寫取之ヲ携行シ又一面ニハ郡衛 ヨリノ訓令ヲ示シ其地方ニ到ル每ニ村落名問ヒ一ハ言ハシ一ハ記セシ メ以テ寫シト對照シテ初メ事實ナルコトヲ認メ註記ヲ爲スニ至ル從來 ト雖モ以上ノ如ク今日ニ於テモ以上同樣ニ有 (明治明治30年11月 3日 平壤近郊光德寺) (마을 이름에 대해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 고 또한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수상한 행동이 눈에 띄기 때문에 측도 (測圖)를 실시할 때는 미리 그 지방의 군[郡] 관아에 가서 측도 구역 의 마을 이름을 적어서 이것을 휴대하고 한편으로는 관아의 훈령(訓 令)을 제시하고 그 지방에 갈 때마다 마을 이름을 물어보고 한 번은 말하게 하고 한 번은 쓰게 하고 미리 적어 놓은 마을 이름과 대조하 며 비로소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지형도에 주기를 했다. 종래 도 그렇게 했었고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1897년 11월 3일, 평양 근교 광덕사]) 제1차 지형도 의 지명과 그 토에는 측도반에 동행한 통역과 통변 이 현지 주민으로부터 청취한 결과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 만, 현지 주민의 반발과 방해로 인해 정확한 지명이 채집되지 않았 거나 일본인 통역의 한국어 능력에 한계가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17 116 地名學 17 (2011) 5.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에 대한 검토 5.1. 제1차 지형도 지명의 수집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은 주로 한자로 표기되었고 그 옆에 가타카 나로 된 토를 달아 그 독법(讀法)을 제시했다. 여기에서는 제1차 지형도 의 일부를 대상으로 거기에 기록된 지명과 그 토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지역으로는 광주(光州) 를 선정했는데 이 지 역에 대한 측도 연도는 1899년경으로 보이며 지형도의 발행 연도는 1911년이다. 제1차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를 검증하기 위해 같 은 지역의 제2차 지형도 및 제3차 지형도 의 지명과 비교 대조 작 업을 실시했다. 같은 지역에 대한 제2차 지형도 의 측도 연도는 1909년, 제3차 지형도 의 측도 연도는 1917년이다. 조사 방법은 다 음과 같다. ① [도표2]와 같이 제1차 지형도 중 광주 를 25개로 분할한 다음 모든 지명을 채취한다. [도표2] 제1차 지형도의 분할 5 4 3 2 1 10 9 8 7 6 15 14 13 12 11 20 19 18 17 16 25 24 23 22 21 ② 채취된 지명을 토와 함께 기록한다. ③ 채취된 지명을 토를 참고로 음독되는 것(음차자[音借字]로

118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17 판단되는 것도 포함), 훈독되는 것(음독과 훈독이 혼합된 것도 포함), 토가 없는 것, 가타가나만으로 표기된 것, 음독 훈 독의 판단이 어려운 것으로 분류한다. ④ 같은 방법으로 제2차 지형도, 제3차 지형도 에서 지명을 채취 한 다음 로 분류한다. ⑤ 제1차 지형도 에서 채취된 지명을 제2차 지형도, 제3차 지형 도 의 지명과 대조하며 그 변화를 살펴본다 제1차 지형도 의 지명 분석 제1차 지형도 에서 채취된 지명은 모두 217개이었다.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3] 제1차 지형도의 지명 유형 음독 지명( ) 143(65.9%) 훈독 지명 및 음독과 훈독이 혼합된 지명( ) 34(15.7%) 토가 없는 지명( ) 23(10.6%) 가타카나로만 표기된 지명( ) 3(1.3%) 음독 훈독의 판단이 어려운 지명( ) 14(6.5%) 합계 217(100%) 이 중 훈독 지명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지명 중 분명히 고 유어 어휘라고 생각된 부분에 대해서는 宋基中(2001)을 참고로 한 글을 병기했다.

119 118 地名學 17 (2011) [도표4] 제1차 지형도의 훈독 지명( ) 01 梨峙 梨パイ(배[ ]) 峙チャイ 02 尺峴 尺チャツ(자/잣) 峴コーカイ(고개[고 ]) 03 新村 新セエー(새) 村 03 內洞 內アン(안) 洞ドン 03 新基 新セツ(샛) 基トー(터) 05 本頭 本ホン 頭モリ(머리) 07 元首 元ヲン 首モリ(머리) 07 花山 花コル(꽃?) 山メー( ) 09 寺洞 寺チョル(절[졀]) 洞 09 新垈 新セツ(샛) 垈トー(터) 10 洞尾 洞コル(골) 尾ミー 11 蛇谷 蛇ヘイム(뱀[ 암, 얌]) 谷コル(골) 13 笠岩 笠カツ(갓) 岩チョム 13 大洞 大ハン(한) 洞 13 大峙 大ハン(한) 峙チー 14 鴨山 鴨オリ(오리) 山メ( ) 14 黃山 黃ノラ(노랗-[노르-, 노 -]) 山クメ(?) 14 低石 低チョツ(졷-?) 石テ(?) 14 梧石 梧オツ 石トル(돌) 15 泉峰 泉セアム(샘[ ]) 峰ボン 16 三川 三サム 川ネー(내[ ]) 17 芦里 芦カル(갈) 里 18 項頂岩 項モク(목) 頂チョン 19 新垈 新セツ(샛) 垈トー(터) 19 板橋 板ド 橋トリ(다리) 岩パウイ(바위[바회]) 20 金馬山 金チ 馬マ 山メー( ) 21 竹靑里 竹タェツ(대) 靑ポ 里 23 蓮花洞 蓮ヨ 花ナ 洞コル(골)

120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耳谷 耳クイ(귀) 谷シル(실) 24 東橋 東トク 橋ダリ(다리) 25 酉田 酉タク(닭[닥]) 田パツ(밭[받]) 廣鳳里 廣ノ(넓[널-, 너르-]) 龜川 龜ク 鳳ベン 里イー 川ナェー(내[ ]) 제1차 지형도 에 나타난 훈독 지명 중에는 국토지리정보원 5만 분의 1 지형도 및 한국지명총람 과 대조한 결과 그 소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다. 02 : 尺峴(チャツコーカイ[chatsukôkai]) : 현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동 잣-고개[잣곡, 척곡] 마을 잣고개 밑에 있는 마을. 잣-고개[잣곡, 척곡] 고개 장안춘 동북쪽에서 청옥동에 가는 고개. 무진도독(武珍都督) 고성(古城)의 위쪽인데 잣나무가 많음. 한국지명총람 의 해설에서 尺峴(チャコーカイ) 은 잣고개 이며, 잣나무 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지지자료 (광주군 두방면)에도 尺峴(자고 ) 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尺 峴 의 尺 은 잣나무 내지는 城 을 나타내는 훈차 표기로 생각된다. 07 : 元首(ヲンモリ[wonmori]) : 현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원머리[원두리, 원지리, 원지] 마을 밀양동 남쪽에 있는 마을. 원집이 있었음. 07 : 花山(コルメー[korumê]) : 현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골매, 꽃매, 화산리] 마을 용강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제1차 지형도 에서는 コルメー(korumê) 라는 토를 달았으나 이

121 120 地名學 17 (2011) 것은 골매 가 채집된 결과로 보인다. 09 : 寺(チョル[choru])洞 :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절-골 절골 망월 앞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고 함. 13 : 大洞(ハンドン[handon]) : 현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 대동[큰골, 횻골, 효우동] 마을 두암 서쪽에 있던 큰 마을. 효 우동면의 원 마을이 됨. 한국지명총람 의 해설에 따르면 대동 은 큰골 에 해당되는 지명 임을 알 수 있으나 제1차 지형도 의 지명 채집 당시 한동 이라고 불 렸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13 笠岩(カッチョム[katchomu])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임암동 갓바우[입암] 마을 행림 서쪽에 있는 마을. 갓바우[입암] 바위 갓바우에 있는 바위.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는 입암리(立岩里)였다 가 그 후 효천면 임암리(林岩里)가 되었다.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으 로 입암리 는 갓바우 에서 유래했으며, 笠岩 이라는 한자 지명이 갓바우 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4 : 鴨山(オリメ<orime>)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올미실[북촌, 올밑, 압촌, 압보촌] 마을 압촌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14 : 黃山(ノラクメ<norakume>)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노랑매[황산] 마을 압촌리에 있는 마을.

122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 低石(チョッテー<chottê>)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지석동 조터[하지석] 마을 지석 아래쪽에 있는 마을. 17 : 蘆里(カル<karu>リ) : 현 나주시 남평읍 노동리 노동-리(蘆洞里)[갈굴, 노동] 리 본래 남평군 동촌면의 지역으 로서 갈이 많이 있으므로 갈굴 또는 노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 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동리라 하여 나주군 남평면에 편입됨. 17 : 新垈(セット<setto>)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신장동 새-터[신장] 마을 신장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19 : 板橋(ドトリ<dotori>)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촌동 너들[판촌] 마을 양촌 동쪽에 있는 마을. 너들 의 들 을 다리 로 잘못 청취하여 橋 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21 : 竹靑里(テェッポリ<tettupori>) : 현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죽청-리(竹靑里) [대푸리, 대포리, 축정] 리 본래 능주군 오도 면의 지역으로서, 푸른 대나무가 많으므로 대푸리, 대포리 또는 죽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죽청리라 하 여 화순군 도곡면에 편입됨. 23 : 耳谷(クイシル<kuishiru>) : 현 화순군 덕곡면 덕곡리 구-실[이곡] 마을 덕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지형이 귀처럼 생겼음. 25 : 酉田(タクパッ<takupat>) : 현 나주시 금천면 석전리 닭-밭[개전, 유전, 월전] 마을 천석 서남쪽에 있는 마을. 닥나 무가 많았음.

123 122 地名學 17 (2011) 酉 는 닭 이라는 훈을 이용해 닥나무 의 닥 을 표기한 훈차 표기로 보인다. 25 : 廣鳳里(ノベンイー<nobenî>) : 현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 너-뱅이[광산] 마을 광석 서남쪽, 무제산 밑에 있는 넓은 마 을. 鳳 은 뱅 을 나타내기 위한 음차 표기로 보인다. 제1차 지형도 지명 중에는 음독 훈독의 판단이 어려운 지명 ( )이 포함되고 있다. [도표5] 음독 훈독의 판단이 어려운 지명 04 牛山 牛エン[en] 山 04 馬勒 馬マ[ma] 勒リ[ri] 08 尋牛 尋シン[shiin] 牛ヨク[yoku] 08 楓岩 楓シ[shi] 岩ナム[namu] 08 板峙 板ヅル[zuru] 峙チェー[chê] 11 二十谷 二イ[i] 十シプ[shipu] 19 鶴村 鶴ソシ[soshi] 村 19 嶝溝 嶝トル[toru] 溝トン[ton] 19 馬城 馬モセ[mose] 城シイ[shii] 19 荷洞 荷ハマグ[hamagu] 洞 21 禮村 禮スル[suru] 村ム[mu] 24 艸邊 艸セイ[sei] 邊カン[kan] 24 山抵 山サン[san] 抵チニー[tinî] 24 夜山 夜フル[furu] 山 里 谷ノ[no] 이 중 다른 자료와의 대조를 통해 지명 채집 과정에서 생긴 오류

124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23 를 수정한 결과 훈독 지명임이 밝혀진 것도 있다. 04 : 牛(エン<en>)山 :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제2차 지형도 에서는 牛洞(ウドン<udon>) 으로 돼 있다. 한국 지명총람 에는 우산(牛山) 마을 우산리, 우산-리(牛山 里)[말매, 독산, 덕산, 문산, 소매, 우산] 리 로 되어 있다. 04 : 馬勒(マリ<mari>)里 : 현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한국지명총람 에는 마륵-리(馬勒里)[말구레, 마륵] 로 되어 있 기 때문에 마륵리 또는 말구레 의 오기로 생각된다. 08 : 尋牛(シムヨク<shimuyoku>) : 현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한국지명총람 에는 심-국[心谷][심실], 만호 북쪽에 있는 마 을. 깊숙한 골짜기가 됨.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심곡, 심실 의 오기로 보인다. 제2차 지형도 에서는 尋室 에 シムシル <shimushiru>라는 도를 달았다. 09 : 楓岩(シナム<shinamu>) : 현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한국지명총람 에는 신암(新岩) 마을 풍암리, 풍암리(楓 岩里)[풍암] 리 로 되어 있기 때문에 풍암리 의 별칭인 신암 이 채집된 결과로 보인다. 09 : 板峙(ヅルチェー<zuruchê>) : 현 광주광역시 동구 선교동/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 한국지명총람 에는 너릿-재[판치, 널재, 너리재] 고개 로 되 어 있다. 한자 표기는 板峙 가, 지명은 널재 가 채집된 것으로 보 인다. 19 : 鶴(ソシ<soshi>)村 : 현 광주광역시 남구 월성동 한국지명총람 에는 학촌(鶴村) 마을 소스라기, 소스라기 [학촌] 마을 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 표기는 鶴村, 지명은 소스라기 의 소스 가 채집된 것으로 보인다.

125 124 地名學 17 (2011) 19 : 嶝溝(トルトン<toruton>) : 현 나주시 산포면 등정리 한국지명총람 에는 똘뚝 마을 구등, 구등(溝嶝)[똘뚝] 마을 정자 남쪽에 있는 마을. 똘뚝 등성이가 됨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 표기는 嶝溝 ( 溝嶝 의 오기), 지명은 똘뚝 이 채집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지형도 에서는 溝嶝/トルツク <torutuku> 라는 토를 단 것으로 보아 똘뚝 이 채집된 것으로 보 인다. 21 : 荷(ハマグ<tamagu>)洞 : 현 화순군 화순읍 감도리 한국지명총람 에는 하만 - 동(荷晩洞) 마을 하망굴, 하망-굴(감한리, 하동, 하만동) 마을 감도리에서 으뜸되는 마 을 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하망(河望)굴 이 채집된 것으로 보인다. 24 : 禮村(スルム<surumu>) : 현 나주시 산포면 송림리 한국지명총람 에는 예림(禮林) 마을 송촌 남쪽에 있는 마을 로 되어 있다. 24 : 山抵(サンチニー<santinî>) : 현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한국지명총람 에는 산재-리(山齊里) 마을 로 되어 있다. 25 : 夜(フル<furu>)山 : 현 나주시 금천면 동악리 한국지명총람 에는 야산 산 배매산, 배매 - 산(야산) 산 상야, 중야, 하야에 걸쳐 있는 산 으로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대조 작업을 통해 08 尋牛, 09 板峙, 19 鶴村, 19 嶝溝 등이 각각 심실, 소스라기, 널재(너릿재, 너리재), 똘뚝 이 라는 훈독 지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제1차 지 형도 에 수록된 훈독 지명은 38개, 전체의 17.5%가 된다.

126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제2차 지형도 와 제3차 지형도 의 지명 제2차 지형도 지명과의 비교 이상 제1차 지형도 의 지명과 그 유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한자 표기 지명 가운데 17.5%에 해당되는 지명이 훈독되거나 부분적으로 훈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제1차 지형도 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의 지명 독법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충분한 자료성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1차 지형도 를 제2차 지형도 및 제3차 지형도 와 비교함으로서 그 자료적 가치를 검증하고자 한다. 한일 합방 이후에 간행된 이들 지형도의 지명은 당연히 정리 개편 과정을 거친 것으 로 생각되며 제1차 지형도 의 지명과의 비교는 그 자료적 가치를 검증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제2차 지형도 를 제1차 지형도 와 같은 방법으로 25개로 분 할한 다음 모든 지명을 채취했다. 그 결과 297개의 지명이 채취되었 는데 그 내역을 제1차 지형도 의 내역과 비교하면 [도표6]과 같다. [도표6] 제2차 지형도 의 지명 유형 지명 유형 제1차 제2차 음독 지명( ) 143(65.9%) 261(87.9%) 훈독 지명 및 음독과 훈독이 혼합된 지명( ) 38(17.5%) 26(8.7%) 토가 없는 지명( ) 23(10.6%) 2(10.6%) 가타카나로만 표기된 지명( ) 3(1.3%) 1(0.7%) 음독 훈독의 판단이 어려운 지명( ) 10(4.8%) 7(2.4%) 합계 217(100%) 297(100%)

127 126 地名學 17 (2011) 지명이 제1차 지형도 에 비해 증가한 것은 측도 과정에서 지명 채집이 치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제2차 지 형도 제작 과정에서 측도뿐만 아니라 지명 채집도 추가 실시된 것 을 의미한다. 제1차 지형도 에 나타난 훈독 지명이 제2차 지형 도 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면 [도표7]과 같다. [도표7] 제1차 지형도 훈독 지명의 변화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01 梨峙パイチャイ(배[ ]) 梨峙ペイチー(배[ ]) 02 尺峴チャツコーカイ(잣고개[고 ]) 尺峴チャクコケ(잣고개[고 ]) 03 新村セエー(새) 新村セイモリ(새머리) 03 內洞アンドン(안) 內洞ネードン 03 新基セツトー(샛터) 新村シンチョン 05 本頭ホンモリ(머리) 本頭ホンモリ(머리) 07 元首ヲンモリ(머리) 元頭ウオンモリ(머리) 07 花山コルメー(골 ) 花山ハーサン 08 尋牛シムヨク(シムシル)(실) 尋室シムシル(실) 09 寺洞チョル(절[졀]) 寺洞チョルコル(절[졀]골) 09 新垈セツトー(샛터) 新岱シンテー 09 板峙ヅルチェー(널) 板峙ヌルチェー(널) 10 洞尾コルミー(골) - 11 蛇谷ヘイムコル(뱀[ 암, 얌]골) 蛇谷ヘイムコル(뱀[ 암, 얌]골) 13 笠岩カツチョム(갓) 笠岩カッアム(갓) 13 大洞ハン(한) 大洞テーコル(골) 13 大峙ハンチー(한) 大峙テーチ 14 鴨山オリメ(오리 ) 鴨山オリメ(오리 ) 14 黃山ノラクメ(노랗-[노르-,노 -]/ - ) 14 低石チョツテ(졷-?) 朝基チョツテー(데?)

128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梧石オツトル(돌) 漆乭オットル(옻돌) 15 泉峰セアムボン(샘[ ]) 泉峰セアムボン(샘[ ]) 16 三川サムネー(내[ ]) 德村トクチョン 17 芦里カル(갈) 芦里カルリ(갈) 18 項頂岩モクチョンパウイ(목/바위[바 項頂岩モクチョンパウ(목/바위[바 19 鶴村ソシ(소스) 회]) 회]) 鶴村ハクチョン 19 溝嶝トルトン(똘뚝) 溝嶝トルツク(똘뚝) 19 新垈セツトー(샛터) 新基シンギ 19 板橋ドトリ(널다리) 板橋トトル(널다리) 20 金馬山チマメー( ) 金馬山クムマサン 21 竹靑里タェツポ(대) 竹靑里チクチョンニー 23 蓮花洞ヨナコル(골) 蓮花洞ヨナコル(골) 23 耳谷クイシル(귀실) 耳谷クイシル(귀실) 24 東橋トクダリ(다리) 東橋トンタリ(다리) 25 酉田タクパツ(닭[닥]밭[받]) 酉田タクパツ(닭[닥]밭[받]) 25 廣鳳里(넓[널-,너르-])ノベンイー 廣鳳里(넓[널-,너르-])ノボンニー 25 龜川クナェー(내[ ]) 龜川クナェー(내[ ]) 밑줄 부분이 훈독된 부분이며 로 표시된 지명이 제1차 지형 도 에서는 훈독되었다가 제2차 지형도 에서는 음독된 지명이다. 38 개 지명 중 26.3%에 해당되는 10개 지명이 음독 지명으로 바뀐 것 을 알 수 있다. 또한 제1차 지형도 의 低石(チョッテ[졷-]) 이 제2 차 지형도 에서는 朝石(チョツテー) 이 되는 등 훈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한자로 표기한 예를 볼 수 있었다. 제2차 지형도 에서 채취된 지명 중 훈독 지명은 26개이며 전체의 약 8.7%에 해당된다. 훈독 지명의 개수나 비율은 제1차 지형도 와 비교해 크게 감소했다. 다만 제1차 지형도 에서 음독되거나 토가 없

129 128 地名學 17 (2011) 었던 지명이 훈독된 예도 있다.([도표8]) [도표8] 제2차 지형도 에서 새로 훈독된 지명 제1차 지형도 02 丹砂洞 丹タ 砂サ 제2차 지형도 洞 丹沙洞 丹ター 沙サ 村モリ( 머 리) 03 新村 新セエー 村 (새) 新村 新セイ(새) 04 新村 新 村 新基 新セツ(샛) 基ピョク 07 泥橋 泥 橋 申橋 申チン(진) 07 酒谷 酒チュ 谷コク 酒谷 酒スル(술) 谷コク 洞コリ (고리, 골) 橋タリ( 다 리) 08 東相洞 東トグ 相サン 洞 東山洞 東トン 山サン 08 松山 松 山 松山 松ソル(솔) 山メ( ) 09 細洞 細シエー 洞 細洞 細セツ 09 寺洞 寺チョル 洞 寺洞 寺チョル 洞コル(골) (절[졀]) 洞ゴリ (고리, 골) 洞コル(골) 11 二十谷 二イ 十シプ 谷ノ 二十谷 二イ 十シプ 16 鴨谷 鴨アプ 谷 鴨谷 鴨アプ 谷コル(골) 16 蘿谷 蘿ソレ 谷 蘿谷 蘿ソレ 谷コル(골) 16 臺谷 臺タイ 谷 臺谷 臺タェー 谷コル(골) 21 芝谷 芝チ 谷 芝谷 芝チー 谷シル(골) 谷コル (골) 이 중 제1차 지형도 에서 토가 없었던 松山 (08)은 조선지지자 료 (광주군 당부면)에는 松山谷(솔 골) 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130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29 지명총람 에도 이 마을이 송-산(松山)[솔매, 송산리] 마을 입하 북쪽, 좁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 로 되어 있다. 제1차 지형도 의 음독 지명이 제2차 지형도 에서 훈독 지명으로 바뀐 예도 있다. 07의 酒谷 은 제1차 지형도 에서는 チュコク (chukoku[주곡]) 라는 토를 달았지만 지형도 에서는 スルコク (surukoku[술곡]) 라는 토를 달았다. 제2차 지형도 의 측도 시에 지 명에 대한 재조사 결과 정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한국지명총 람 에는 이 마을이 임곡(林谷)[임곡리, 숙실, 숲실] 마을 밀량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숲이 울창했음 으로 되어 있어 지명의 어원 해 석을 달리하고 있다. 현행 국도지리정보원 발행 '5만분의 1 지형도' 에서는 숫실 로 되어 있다. 07에 나타난 泥橋 는 제1차 지형도 에서는 토가 없었지만 제2차 지형도 에서는 한자 표기가 申橋 로 바뀌고 チンタリ(chintari[진다 리]) 라는 토를 달았다. 이 チン(chin) 은 제1차 지형도 의 한자 표 기로 보아 진<(질다) 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진다리 는 현 재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부근에 해당되며 한국지명총람 에는 진-드리 마을 진다리, 진-다리[진드리] 마을 난지실 동 쪽에 있는 마을 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생긴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요인을 거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째, 제1차 지형도 측도 과정에서 이루어진 불충분한 지명 채집 을 들 수 있다. 한자로 표기된 지명에 토가 없거나 일부만 토를 단 예는 지명을 충분히 조사할 수 없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제2차 지 형도 측도 과정에서 지명이 재조사되어 제1차 지형도 에서는 누락 된 토가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지형도 의 지명은 제1차 지

131 130 地名學 17 (2011) 형도 의 지명을 보충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제1차 지형도 보다 후대에 제작되었으나 제1차 지형도를 보완하는 자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지명의 양면성을 들 수 있다. 제1차 지형도 와 제2차 지형 도 사이에서 나타난 內(アン[안])洞 > 內洞(ネードン[내동]), 新 岱(セツトー[샛터]) > 新岱(シンテー[신태]), 大(ハン[한])洞 > 大洞(テーコル[대골]), 新垈(セットー[샛터]) > 新基(シンキ[신 기]) 라는 변화는 지형도 상에서 훈독 지명이 음독 지명으로 바뀐 예이다. 다만 실제 지명에서는 동일한 지명이 음독되기도 하고 훈독 되기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제1차 지형도 의 07 花山 의 경우, 제1차 지형도 에서는 コルメー(골 ) 라는 토를 달았으나 제2차 지형도 에서는 ハーサン(화산) 이라는 토를 달았다. 이것은 골 > 화산 이라는 지명 변화로 파악할 수도 있으나 한국지명총람 에서는 화산[골매, 꽃매, 화산리]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1차 지형도 에서는 골 (골매) 가, 제2차 지형도 에서는 화산(화산리) 이 채집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酒谷 도 같은 유형에 속한 예이며 제1차 지형도 에서는 주곡 이, 제2차 지형도 에서는 술곡 이 채집된 결과 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제1차 지형도 에는 17 鹽峙 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ヨム チー(염치) 라는 토를 달았다. 제2차 지형도 에서도 ヨムチー(염 치) 라는 토를 달았는데 이 토만 보면 이 지명은 음독 지명으로 간 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지명총람 에서는 소금-재(염재, 염 치) 고개 앵무촌 서쪽에 있는 고개, 나주군 남평으로 넘어가는데 소금 장수가 쉬었다고 함 으로 되어 있어 소금재, 염재, 염치 라

132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31 는 지명이 병존하고 있다.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가 측도된 당시 음독 지명인 염치 만이 채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앞에서 제1차 지형도, 지형도 에서 음독 지명으로 나타 난 지명 중에도 훈독된 지명이 상당수 존재했던 가능성이 높다. 제 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의 지명을 검토할 때는 당시의 지명이 음독과 훈독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던 가능성을 고려하고, 반 드시 다른 자료와의 대조를 통한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제3차 지형도 지명과의 비교 에서는 제1차 지형도 의 제2차 지형도 의 훈독 지명을 비교 했다. 제2차 지형도 에 수록된 훈독 지명은 제1차 지형도 에 비해 개수나 비율은 감소했으나 제1차 지형도 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훈독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1차 지형도 를 보완하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1차 지형도 를 제3차 지형도 와 비교함으로서 그 자료적 가치를 검증하고자 한다. 제3차 지형도 는 1914년부터 1918 년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거기에 수록된 지명은 토지조사 사업에 따 른 대대적인 정리 과정을 거친 것으로 생각된다. 제1차 지형도 의 지명과의 비교는 그 자료적 가치를 검증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제3차 지형도 를 제1차 지형도 와 같은 방법으로 25개로 분 할한 다음 모든 지명을 채취했다. 그 결과 485개의 지명이 채취되었 다. 그 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297개의 지명이 채취되었는데 그 내역을 제1차 지형도 의 내역과 비교하면 [도표9]와 같다.

133 132 地名學 17 (2011) [도표9] 제3차 지형도 의 지명 유형 지명의 유형 제1차 제3차 음독 지명( ) 143(65.9%) 453(94.0%) 훈독 지명 및 음독과 훈독이 혼합된 지명( ) 38(17.5%) 28(6.2%) 토가 없는 지명( ) 23(10.6%) 0(0.0%) 가타카나로만 표기된 지명( ) 3(1.3%) 0(0.0%) 음독 훈독의 판단이 어려운 지명( ) 10(4.8%) 4(1.4%) 합계 217(100%) 485(100%)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에 비해 지명이 증가한 요인은 지명 채집이 치밀하게 이루어진 것과 새로운 지명이 생성된 것 이외에 지명 정리 작업이 실시된 결과 개정된 행정상의 지명과 기존 지명 이 병기된 예가 증가했기 때문이다.4) 기존 지명은 괄호에 넣어 표 시되었는데 그러한 지명이 57개에 이른다. 또한 단독으로 표기된 기 존 지명을 행정상의 지명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 괄호에 넣은 예 가 264개에 달한다. 이것은 제3차 지형도 에 나타난 지명 중 절반을 차지한다. 제3차 지형도 에 나타난 훈독 지명은 28개가 된다. 이것은 전체 지명의 5.8%에 지나지 않아 비율로 보아서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지명이 증가했는데도 훈독 지명이 감소한 이유는 지명 정리 작업이 실시된 결과 훈독 지명이 음독 지명으로 대치(代置)되었고 새로 생겨난 지 명도 주로 음독 지명으로 정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4) 김선희(2008)에 의하면 기본도 에는 123,532개의 지명이 수록되었다고 한 다.

134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33 제1차 지형도 에 나타난 훈독 지명이 제3차 지형도 에서 어떻 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면 [도표10]과 같다. [도표10] 제1차 지형도 훈독 지명의 변화 01 梨峙パイチャイ(배[ ]) (梨峙里ペーチェニー)(배[ ]) 尺峴チャツコーカイ(잣고개[고 ] 02 尺峴チョクコケ(잣고개[고 ]) ) 03 新村セエー(새) 柳村里ユーチョンニー 05 本頭ホンモリ(머리) 內防里ネーパンニー(内洞ネートン) 新礼里シンレーリー(新興里シンフン ニー) 素村里ソチョンニー 07 元首ヲンモリ(머리) 元頭ウオンモリ(머리) 07 花山コルメー(골 ) 花山コンメー(꽃?매) 08 尋牛シムヨク(シムシル)(실) (心谷里シムシルリー)(실) 03 內洞アンドン(안) 03 新基セツトー(샛터) 09 寺洞チョル(절[졀]) 寺洞チョルコル(절[졀]골) 09 新垈セツトー(샛터) - 09 板峙ヅルチェー(널) 板峙ヌルチェー(널) 10 洞尾コルミー(골) (尾谷里ミコクニー) 11 蛇谷ヘイムコル(뱀[ 암, 얌]골) 龍淵里ヨンヨンニー 13 笠岩カツチョム(갓) (笠巌里カッパウリー)(갓) 13 大洞ハン(한) (大洞クンコル)(골) 13 大峙ハンチー(한) 大峙テーチー 鴨村里アプチョンニー 14 鴨山オリメ(오리 ) 黃山ノラクメ(노랗-[노르-,노 -]/ 14 ) 14 低石チョツテ(졷-?) 支石里チソクニー 漆石里チルソクニー(本洞里ホンコル 14 梧石オツトル(돌) ニー)(골) 15 泉峰セアムボン(샘[ ]) (月山里ヲルサンニー) 16 三川サムネー(내[ ]) 広徳里クヮントクリー(德村トクチョ

135 134 地名學 17 (2011) ン) - 17 芦里カル(갈) 項頂岩モクチョンパウイ(목/바위[ 18 바회]) 19 鶴村ソシ(소스) 19 溝嶝トルトン(똘뚝) (溝嶝里クーツンニー 19 新垈セツトー(샛터) - 19 板橋ドトリ(널다리) (板村里パンチョンニー) 20 金馬山チマメー( ) 金馬山クムマサン 21 竹靑里タェツポ(대) 竹青里チュクチョンニー 徳谷里トクコクニー(耳谷クイシル)( 耳谷クイシル(귀실) 귀실) 東橋トクダリ(다리) (道川里トネリー)(내[ ]) 石田里ソクチョンニー(酉田タクパツ) 酉田タクパツ(닭[닥]밭[받]) (닭[닥]밭[받]) 廣鳳里(넓[널-,너르-])ノベンイー (廣巌里クヮンアムニー) 23 蓮花洞ヨナコル(골) 龜川クナェー(내[ ]) 廣石洞クァンソクトン 밑줄 부분이 훈독된 부분이며 로 표시된 지명이 제1차 지형 도 에서는 훈독되었다가 제2차 지형도 에서는 음독된 지명이다. 소 멸된 지명은 - 로 표시했다. 제3차 지형도 에서는 38개 지명 중 42.1%에 해당되는 16개 지명이 음독 지명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 다. 훈독을 유지한 지명도 행정상의 지명과 함께 괄호 속에 표시된 예가 있다. 가령 梧石(オツトル, 옷돌), 酉田(タクパツ, 닭밭) 은 漆石里(チルソクニー, 칠석리), 石田里(ソクチョンニー, 석전리) 로 바뀌었으나 本洞里(ホンコルニー, 본골리), 酉田(タクパツ, 닭 밭) 이라는 훈독 지명도 병기되었다. 또한 제3차 지형도 에서는 새로 훈독 지명으로 밝혀진 사례가 극

136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35 히 적다. 예외적으로 제1차 지형도 에 나타난 新坪 이라는 지명이 제3차 지명도 에서는 (新坪洞セエーカチ) 와 같이 표기돼 新 을 새 로 훈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제1차 지형도 에서 훈독 여 부를 알 수 없었던 夜山フル(furu) 라는 지명이 제3차 지형도 에서 는 夜山パエムサン(paemusan) 과 같이 표기돼 밤산 이라는 훈독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를 볼 때 제3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은 토 지조사 사업에 따른 지명 정리 및 개편을 거친 것으로, 상당수의 훈 독 지명이 음독 지명으로 대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3차 지형도 는 제1차 지형도 를 보완하는 자료적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있다. 6. 맺는 말 이상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제1차 지형도)와 거기에 수록된 지 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해 검토했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 다. 첫째,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제1차 지형도)는 1895년부터 1906 년에 걸쳐서 측도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측량법에 의한 5만 분의 1 지형도이며,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 지명이 수록되었다. 제1차 지형도 의 측도는 일본 육군의 임시측도부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지 명의 채집은 측도반에 동행한 통역과 현지인 통변 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제1차 지형도 는 삼각 측량법 이전의 간략한 측량법으로 제 작된 것으로 정확한 공간치(경도와 위도)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

137 136 地名學 17 (2011) 나 지명의 위치를 지형도에서 확인할 수가 있으며 그 분포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셋째,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에는 그 독법이 가타카나(片假名)로 된 토로 표시되어 있어, 당시 그 지명이 어떻게 읽혔는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다른 지명 자료와의 대조 작업을 통 해 훈독 지명 중 음차 및 훈차 지명을 어느 정도 판별할 수 있다. 넷째,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을 조사한 결과, 217개의 지명 을 채취할 수 있었다. 과반수 이상이 음독 지명이며 그 중 훈독 지 명은 34개(16%)를 차지한다. 다만 지명 채집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 나 불충분한 조사로 인한 오류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수록된 지명을 자료로 활용하기에 앞서 반드시 다른 자료와 대조를 거쳐 수정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제2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을 조사한 결과 297개의 지 명이 채취되었다. 제2차 지형도 측도에 따른 추가 조사로 지명의 증가와 지명의 정확도 향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제1차 지형도 에 비해 훈독 지명의 개수는 감소하고 그 비율도 현저히 낮아졌다. 그 러나 제1차 지형도 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훈독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제1차 지형도 의 지명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인정된다. 다만 지명의 양면성으로 인해 지명 채집 과정에서 음독 훈독 지명 가운데 주로 음독 지명이 채집되었을 가능성도 고 려해야 한다. 여섯째, 제3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을 조사한 결과 485개의 지 명이 채취되었다. 토지 조사 사업에 따른 지명 정리가 실시된 결과 개정된 행정상의 지명과 기존 지명이 병기된 예가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훈독 지명의 비율은 현저한 감소를 보였다. 따라서 제3차

138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37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은 기존의 훈독 지명이 음독 지명으로 대치된 것이 많으며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에 비해 자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지명에 관한 선행 연구에서는 이 제3차 지 형도 의 지명이 자주 참고 자료로 인용되어 왔으나 그 자료적 가치 를 고려할 때 제1차 지형도, 제2차 지형도 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제1차 지형도) 는 현지 주민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채집된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의 지명이 수록되었으며, 실제 독법이 가타카나로 병기된 점에 서 높은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제1차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은 무 려 4만 3천여 개에 달해 이들 지명을 정리하면 지명 개편이 실시된 이전인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의 지명의 실태와 분포를 개략적 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불충분한 현지 조사로 인 해 정확한 지명이 채집되지 않았던 점이나, 측도 요건의 변화로 인 해 지명의 채집에 지역적인 편중이 생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지명의 해석에 있어 지형도 이외의 자료와의 대조 작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139 138 地名學 17 (2011) 참고문헌 김선희(2008), 五萬分一地形圖에 나타난 20세기 초 한반도의 지명 분포와 특 성, 대한지리학회지 제43권 제1호, 대한지리학회, 김종혁(2008a), 디지털시대 인문학의 새 방법론으로서의 전자문화지도, 국학 연구 제12집, 김종혁(2008b), 고지명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19세기 지명의 지역별 유형별 분포 특징, 문화역사지리 제20권 제3호, 김종혁(2009),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에 수록된 지명의 유형 분포, 문화역사 지리 제21권 제2호, 宋基中(2001) 近代 地名에 남은 訓讀表記 地名學 6, 한국지명학회, 谷屋鄕子(2004) 朝鮮半島の外邦圖の作製過程 大阪大學文學部卒業論文. 淸水靖夫(2009)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圖の槪要 近代日本の 地圖作製とアジア太平洋地域 大阪大學出版會, 南縈佑(2006, 2009), 植民下以前の韓半島における日本の軍用秘圖作製 近代 日本の地圖作製とアジア太平洋地域 大阪大學出版會, 光岡雅彦(1982), 韓國古地名の謎, 學生社.

140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139 Abstract The Data value of geographical placenames included in Guhanmal-hanbando-Topographical Maps" MIZUNO, Shumpei This paper is the study of topographical maps that are called "Guhanmal-hanbando-Topographical Maps". This is the 1/50,000 topographical maps manufactured from 1895 to This topographical map was manufactured for the military purpose in accordance with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Japanese army made this map and was generally called a "yak-do" or "the first topographical map." The place names early in the 20th century are mentioned in this topographical map from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reading of the place names is expressed in katakana of Japanese. It seems that the Japanese interpreters and the Korean interpreters heard the katakana added by this place names directly from local residents. This katakana is the precious data for getting to know the reading of the place names of those days. Moreover, the topographical map called 'jihyeongdo' or "the second topographical map" was manufactured from 1909 to Although katakana is written together by the place names of this map, this katakana is worth of complementing data of

141 140 地名學 17 (2011) "yak-do". However, the place names of these maps were collected in insufficient requirements. Therefore, to utilize the place names of these topographical maps, it is necessary to certainly perform comparison and contrast with other datas. Key words : Placenames of Korea around 1900, reading of the placenames, Guhanmal-hanbando-Topographical Maps", uem-dok, hun-dok. 성명 : 미즈노 슌페이(水野俊平) 주소 : ( ) 北海道札幌市豊平区豊平6条6丁目10番 전화 : 011(841)-1161 전자우편: spmizuno@hotmail.com 이 논문은 2011년 10월 31일 투고되어 2011년 11월 01일부터 12월 1일까지 심사하고 2011년 12월 3일 편집회의에서 게재 결정되었음

142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 박승홍 5) 국문요약 가야 악사 우륵의 출신지 省熱縣은 省熱:辛尒:斯二 음운 대응을 근거로 가야 소국 斯二岐國과 함께 신라 지명 辛尒縣인 경남 宜寧郡 富林面 新反里 일대에 유력하게 비정되어왔다. 그런데 주자본 삼국 사기 에는 辛尒縣 이 辛分縣 으로 나온다. 그 동안 分 은 尒 의 오기 로 여겨졌지만, 본 논문에서는 辛分縣 이 고려 지명 新繁縣, 현재 지 명 新反里, 별칭 朱烏村 과 대응하는 등 辛尒縣 보다 이표기 대응을 더 많이 보여주는 데에 착안하여 오히려 尒 가 分 의 오기일 가능성 을 제기하였다. 이 경우 斯二岐國과 散半奚國을 기존 辛尒縣과 草八 兮縣(합천군 초계면)에서 三岐縣(합천군 대병 봉산면)과 辛分縣(부 림면)으로 재비정하면 斯二岐:三岐, 散半:辛分 대응에 의해 언어학적 유연성이 더 강화된 지명 대응도 가능하다. 그리고 봉산면 저포리에 서 출토된 명문 下部思利己 의 思利己 는 斯二岐 의 이표기로서 이 지역이 고대 斯二岐國이었고 대가야와 上 下部制로 정치적으로 결 속되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이다. 省熱:斯二 음운 대응을 인정 하는 한 우륵의 출신지를 합천군 대병 봉산면 일대에 비정할 수 있 다. 핵심어 : 우륵, 성열현, 사이기국, 산반해국, 하부사리리. * 한국외국어대학교 전 강사

143 142 地名學 17 (2011) 1. 머리말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일컫 는 가야 악사 于勒의 출신지가 어딘지 논쟁이 뜨겁다. 고령군, 거창 군, 의령군 등에서는 지역 단체 주관으로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이는 기본적으로 삼국사기 에 나오는 그의 출신지 省熱縣 이 어 디인지 명시한 문헌이 없어서 음이 비슷한 지명을 찾는 언어학적 접근이 불가피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지명 비정이 이루어졌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성열현을 경남 宜寧郡 富林面 新反里 일 대로 비정한 富林說이 末松保和(1949) 이후 정설로 자리 잡았다. 가 야사 연구자들 주도로 2009년 발간된 악사 우륵과 의령 지역의 가 야사 는 이 설을 확고히 했다고 볼 수 있다. 부림설은 省熱縣 과 부림면(面治 新反里)의 옛 지명인 辛尒縣 의 음운 대응에 역사지리학적 정황을 추가한 학설인데, 필자는 顯宗實 錄字本1) 삼국사기 에 辛尒縣 이 辛分縣 으로 나온 점에 주목하였 다.2)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中宗本(정덕본) 기준으로 分 을 尒 의 오기로 여겨 왔지만, 오히려 尒 가 分 의 오기일 정황들이 앞선 연 구들에서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分 이 옳다면, 부림설은 재고 되어야 하는데, 본 논문은 그 가능성의 검토이다. 1) 이하 鑄字本 으로 칭한다. 2) 신태현(1958:42), 양주동(1965:36) 등 辛分縣 으로 읽은 초기 연구자들은 주자본을 참고했을 것이다.

144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문제의 제기 2.1. 연구사 검토 우륵의 출신지 성열현 비정의 근거가 되는 기본 사료는 다음과 같다. (1) 신라 옛 기록에서는 가야국 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그것을 만들었는데, 왕은 여러 나라 방언이 각기 다르니 성음을 어찌 통일할 수 있을까? 하고 이에 樂師인 省熱縣 사람 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게 했다. 후에 우륵은 그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 같으므로 악기를 가지고 신라 眞興王에게 귀순하니, 왕은 그를 받아들여 國原 에서 편히 살게 하고 大奈麻 注知 階古와 大舍 萬德을 보내 그 업을 이어받게 했다. ( 삼국사기 32 악지 ) (2) 3월에 왕이 순행하다가 娘城에 이르러 于勒과 그 제자 尼文이 음악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은 河臨宮에 머 물러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했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의 嘉悉王이 12현금을 만 들었는데 그것은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떴다. 우륵에게 명하여 그 악곡 을 짓게 했는데,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의탁 해왔다. ( 삼국사기 4 진흥왕 12년) (3) 유신은 押梁州의 군주가 되었다가, 13년(644)에는 소판이 되었 다. 가을 9월에 왕이 上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의 加兮城, 省熱城, 同火城 등 7성을 치게 했더니, 크게 승리했다. 때문에 加兮의 나룻길을 개통시켰다. 을사년(645) 정월에 돌아와 왕을 미처 뵙기 전에 국경을 지키는 벼슬아치가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의 買 利浦城을 침공한다고 급히 보고하니, 왕이 또 유신을 上州將軍에 임 명하여 백제군을 막게 했다. 유신이 명령을 듣고 곧 출발하니 처자도

145 144 地名學 17 (2011) 만나보지 못했으며 백제 군사를 맞아 쳐서 이를 패주시키고 머리 2천 개를 베었다. ( 삼국사기 41 김유신 열전 ) (1)에 대가야(고령)의 왕으로 추정되는 嘉實王과 省熱縣人 于勒 이 나오고, (2)에서는 진흥왕 12년(551)에 우륵이 활동했음을 알 수 있으며,3) (3)의 7성 중 省熱城이 바로 省熱縣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에 근거해 다음과 같은 위치 비정들이 제기되었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 정약용, 김기빈 경남 의령군 부림면: 末松保和, 김동욱, 田中俊明, 김태식 대구광역시 동구: 전영래, 백승옥 경북 고령군: 주보돈 경남 거창군 가조면: 오필제, 김종택, 정호완, 이병선 청풍설은 정약용(1883)이 省熱縣을 沙熱伊縣(충북 제천군 淸風 面)4)에 비정함으로써 제기되었다.5) 이를 받아서 김기빈(2003:169) 은 忠州邑誌 6) 堤堰 조에 나오는 上 下加羅堤, 加也谷堤, 加羅谷 堤 등 가야 계통 지명을 근거로 청풍면 출신 우륵이 가야금 12곡을 충주 지역에서 지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설은 제천 충주 지역이 3) 南齊書 에는 479년 제나라에 사신을 보낸 加羅王 荷知가 보인다. 연대 차 이가 꽤 있지만 우륵이 섬긴 嘉實王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田中俊明 1992:66-69) 4) 淸風縣, 本高句麗 沙熱伊縣. ( 삼국사기 35 奈隄郡) 5) 鏞案:省熱者, 沙熱也[沙與省, 聲近]. 沙熱者, 今淸風也. 于勒游於淸風 忠州 之間, 故忠州有彈琴臺[在州南五里], 四休亭[在州西二十里, 荷潭之上]. 皆于 勒之所嘗游也, 則河臨宮者疑在今安東地, 安東有臨河故縣[臨河之爲河臨猶臨 津之爲津臨]. ( 疆域考 2 弁辰別考 ) 6) 조선 憲宗 대에 집대성된 忠淸道邑誌 에 포함된 忠州邑誌 는 正祖 대에 편찬되었다고 추정된다.(양보경 1984:5)

146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45 가야 영역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省熱縣을 신라의 新尒縣인 의령군 부림면 일대에 비정한 것은 末 松保和(1949: )였는데, (3)에서 加兮城(고령군 우곡면)7), 同 火城(구미시 인의동)8)이 낙동강의 주요 나루이므로 같이 거론된 省熱城(省熱縣)도 같은 입지를 갖춘 부림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 다. 또 가야 소국 斯二岐國의 新尒縣 비정(鮎貝房之進 1937:159)을 인용하고, 삼국사기 악지 에서 辛熱樂, 上辛熱舞, 下辛熱舞 의 辛熱 도 省熱 의 이표기로 보았다. 田中俊明(1992:64)와 김태식 (2009)도 이를 따랐는데, 김태식은 일본서기 에 나오는 爾列比도 부림으로 보았다. 따라서 부림설에서는 언어학적으로 省熱縣=辛尒 縣=斯二岐國=辛熱=爾列比 관계가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 럼 省熱縣에 대해 동일지 이칭이 많이 전제되고 또 제각기 근거가 있기 때문에 부림설은 상대적으로 견고한 논리 체계라 할 수 있으 며 비판을 위해서는 각 이칭에 대한 검토가 불가피하다. 대구 동구설은 백제 남방 영역의 변천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4) 가. 겨울 10월에 신라의 速咸 櫻岑 岐岑 烽岑 旗懸 冗柵 등 여섯 성을 쳐서 이를 빼앗았다. ( 삼국사기 27 무왕 25년) 나. 가을 7월에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범하여 獼猴 城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에 장군 允忠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大耶城을 치니 성주 品釋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했으나 모두 죽여 그 머리를 서울로 보내고, 남녀 1만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의 서쪽 州 縣에 나 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 삼국사 기 28 의자왕 2년) 7) 新復縣, 本加尸兮縣. ( 삼국사기 34 高靈郡) 8) 壽同縣, 本斯同火縣. ( 삼국사기 34 星山郡)

147 146 地名學 17 (2011) (4)가의 6성 가운데 速咸(경남 함양)만 비정이 확실한 가운데, 전 영래(1985: )는 岐岑은 三岐(합천군 대병 봉산면)에, 旗懸 은 발걸이 로 훈독하여 草八兮(합천군 초계면)에, 冗柵은 冗 을 穴 의 오각으로 본 듯9) 闕支(산청군 단성면)에 비정함으로써 백제가 남강 유역에 진출하고, 이어서 (4)나에서 獼猴城10) 등 40여 성을 빼앗아 낙동강 동안까지 미쳤다가 (3)에서 그 중 加兮城, 同火城 등 7성을 신라에게 빼앗겼다고 보았는데, 같이 거론된 省熱城 역시 낙 동강 유역 雉省火縣(대구 동구)11)에 비정하였다. 백승옥(2007: )은 (4)가에서 岐岑은 加利縣(고령군 성산면)의 별호 岐城에, 旗懸은 八居里縣(칠곡군 칠곡면)에, 穴柵은 구멍村 으로 읽고 琴湖 (달성군 하빈면)에 비정함으로써 624년에 이미 백제가 낙동강 동안 에 진출했다고 보았지만, 20년 후 신라가 되찾은 省熱城은 역시 雉 省火縣에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 설은 대구가 일찍이 신라에 편입되 어 가야 영역이 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주보돈 2006:52-53) 고령군설을 제기한 주보돈(2006:56-60)은 省熱縣 의 縣 이란 표 현에 주목하였다. 郡縣制를 전제로 한 縣 은 가야 지역의 縣邑, 任 那四縣, 諸縣 등으로 일본서기 에도 나오지만 그 위 단계인 郡 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郡縣制는 백제나 신라 같은 고대국가 단계에서나 실시되는데 6세기에 대가야가 그 단계에 이르렀는지 의 심스럽다는 점에서 후대 신라 縣制의 소급 부회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주보돈은 省熱縣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초입에 도달한 대 9) 같은 사건을 서술한 진평왕 46년 조에는 穴柵 으로 나온다. 10) 아직 비정되지 못한 지명이다. 11) 解顔縣, 本雉省火縣[一云美里]. ( 삼국사기 34 獐山郡)

148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47 가야의 직할 현이며, 加兮城과 同火城 사이에 있는 고령군 관내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설은 지명의 언어학적 대응보다는 일반적 인 역사적 정황을 중시한다고(김태식 2009:30) 평가할 수 있다. 가조설에서는 嘉實王을 居昌郡 加祚面 소재 加召加耶 의 왕으로 보고 省熱縣을 관내 石岡里 省草 마을에 비정하는데, 이 마을에는 우 륵이 살았다는 우륵터 가 전해진다.(오필제 2006:75;김종택 2006: 25) 또 省熱城은 基里 서리터12), 加兮城은 남하면 대야리 加川 지 역,13) 同火城은 남하면 屯馬里로 보아 관련 지명을 모두 가조면 남 하면 일대에 비정했는데, 삼국사기 등에 보이는 縣 이나 城 은 독 립적인 山城 정도가 아니므로 이처럼 작은 里나 마을에 비정하면 문 제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백승옥 2007:256) 그런데 가조설에서 省 熱:省草 대응을 통해 省熱縣을 省草 마을에 비정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5) 가. 省 良縣, 今金 良部曲.14) ( 삼국사기 34 河東郡) 나. 來蘇 郡, 本高句麗 買省 縣. ( 삼국사기 35 來蘇郡) 다. 蘇 泰縣, 本百濟 省 大號縣. ( 삼국사기 36 富城郡) 라. 史省 夫人~史肖 夫人. ( 삼국사기 1 파사니사금 1년; 삼국유사 왕력 파사니질금) 마. 述 川郡[一云省 知買] ( 삼국사기 37 漢山州), 今嶺南之省 바. 方言呼省 爲所, 所 或作蘇 所 又轉爲所乙 12) 오필제의 비정이다. 省熱城은 같은 가조설이라도 비정이 약간씩 다르다. 정호완(2006:36-37,42)은 省 을 살피 의 살 로, 熱 은 省 을 음독하지 말 고 훈독하라는 의미로 쓰인 末音添記로 보아 거창읍과 가조면 사이 살피 재(沙浦峴/살포재)에 비정하였고, 김종택(2006:21-22)은 基里 廣城 마을 에 비정했다. 13) <그림2>에서 가조천과 황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14) 金 의 훈 쇠 와 省 이 대응한다.

149 148 地名學 17 (2011) 峴, 是也. ( 증보문헌비고 14 輿地考 2) 峴, 俗號所乙 (6) 가. 나. 다. 라. 日 谿縣, 尼 山縣, 黽白 縣, 淸 風縣, 本熱 兮縣[或云泥 兮]. ( 삼국사기 34 古昌郡) 本百濟 熱 也山縣. ( 삼국사기 36 熊州) 本買熱 次縣. ( 삼국사기 34 臨臯郡) 伊縣. ( 삼국사기 35 奈隄郡) 本高句麗 沙熱 김종택(2006:11-17)은 (5)에서 省 이 so나 su/suri의 음차표기임 을 밝혔고, 熱 도 (6)가, 나에서 日, 尼, 泥 와 대응하듯이 음차표 기로 보았지만, 제2음절 이하에서는 훈음차표기로 보았고 이병선 (2007: )도 동의하였다. 즉 (6)다, 라에서 白 을 / 이 의 로 보고 이와 대 이두 표기로15), 沙熱伊 를 소슬 의 고대어 이 응한 熱 을 爇(사를 설) 로 풀이해 의 표기로 보면, 省熱 은 소 이 /소 리 인데 草 의 고훈이 새 이므로 후대에 省草, 즉 소새 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에 쓰이면 熱 은 음차표기가 예사이지만 제2음절 이 하에 쓰일 때에는 훈음차 표기로 쓰인다 는 전제에 대한 반론도 있 다. 신라악인 辛熱樂 의 熱 이 느/니/ㄴ- 로 음독되어 詞腦, 思內, 詩腦 등의 제2음절과 대응했다면(양주동 1965:36-37), 제2음절에서 반드시 훈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김태식 2009:43) 본고 에서도 省熱 이 소니 등으로 읽혔을 가능성을 열어두겠다 辛尒縣인가 辛分縣인가? 이 절에서는 辛尒縣 의 尒 가 오각일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15) 白 은 중세국어의 겸양 선어말어미 - - 에 대응하는 문법형태이거나(서 종학 1995: ) 다 (사뢰다)와 대응한다.

150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49 (7) 江陽郡, 本大良[一作耶]州郡, 景德王改名, 今陜州. 領縣三: 三岐 縣, 本三支縣[一云麻杖16)], 景德王改名, 今因之; 八谿縣, 本草八 兮縣, 景德王改名, 今草谿縣; 宜桑縣, 本辛尒縣[一云朱烏村, 一云 泉州縣], 景德王改名, 今新繁縣. ( 삼국사기 34 江陽郡) 지금의 합천읍인 신라 江陽郡에는 영현으로 三岐縣(대병 봉산 면)과 八谿縣(초계면), 宜桑縣(부림면)이 있었다. 그 중 부림 일대 의 지명 변천은 辛尒縣>宜桑縣>新繁縣 이고 별호로 朱烏村과 泉州 縣이 있었는데, <표1>의 각종 지리지 원문을 비교하면 辛尒縣 과 泉州縣 의 표기가 조금씩 다르다. 첫째, 삼국사기 2종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제1음절이 辛 인데, 고려사 와 세종실록 등에는 新 이다. 둘째, 주자본 삼국사기 17)에는 제2음절이 分 이지만, 나머지는 尒 이다. 셋째, 삼국사기 2종에서는 별호가 泉州 이지만 다른 문헌에는 泉川 이다. 먼저, 辛 과 新 의 차이는 통용으로 볼 수밖에 없다. 辛 에 대해 서는 많은 차자표기 용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辛:新 에서 신 으 로 음독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斯羅:新羅 에 보이는 新 의 훈 새 와 대응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尒 와 分 의 차이는 지금까지 거의 논란이 되지 않았다. 중 종본은 물론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등에도 尒 로 나오므 16) 대동지지 와 증보문헌비고 에는 三岐縣의 별호 麻杖 을 麻枝 로 고쳤 다. 岐 支 와 대응한 杖 은 枝 의 오기일 것이다. 17) 康熙五十年十月初五日 內賜司憲府大司憲權尙夏 三國史記 一件 이라 적 힌 1711년 판본이 일본 學習院大學에서 영인되었다. 三國史記(鑄字本) (1986),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51 150 地名學 17 (2011) 고려사 (1451) 세종실록 지리지 (1454) 삼국사기 중종본 (1512) 신증동국 여지승람 (1530) 삼국사기 주자본 (1711) 대동지지 (1866) <표1> 각종 문헌에 나오는 新繁縣의 옛 지명 로 分 을 글자 형태가 비슷한 데서 기인한 주자본의 誤植으로 보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辛分縣 과 현재 지명 新反里 18)의 선 행형인 고려 지명 新繁縣 의 대응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단 辛分縣: 18) 反 의 음이 반 외에 번 도 있음을 감안하면 新反里 는 고려 지명 新繁 縣 을 온전히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無名齋 權壽大( )의 문집에 는 新蕃里 로도 나온다.

152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51 新繁縣 대응 이외에 辛分縣:宜桑縣, 宜桑縣:新繁縣 음운 대응 관계 를 찾을 수는 없지만19), 宜桑縣 이 중간에서 연결해 주지 못한다고 해서 전후 지명 辛分縣 과 新繁縣 이 언어학적으로 무관하다고 단 언하기는 힘들다. 지명 복고 가능성 때문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는 A>B>C 형태로 지명 변천을 기록하는데(A:원래 지명, B:경덕 왕 개정 지명, C:고려 지명), 지명이 복고된 경우 今復古 로 A>B>A 변천임을 명시한다.20) 그러나 今復古 로 명시되지 않았지 만 역시 지명 복고로 추정되는 다음 예들도 있다. (8) 가. 나. 다. 라. 大木縣>谿子縣>若木縣 ( 삼국사기 34 星山郡) 速含郡>天嶺郡>咸陽郡 ( 삼국사기 34 天嶺郡) 南川縣>黃武縣>利川縣 ( 삼국사기 35 漢州) 召彡縣>玄武縣>召彡部曲 ( 삼국사기 34 咸安郡) (8)에서 B인 谿子縣, 天嶺郡 등은 A, C와 전혀 다른 반면,21) C는 A와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어 A의 복고로 볼 수 있다. 辛分縣>宜桑 縣>新繁縣 변천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러나 辛分縣:新繁縣 대응은 우연일 수 있으므로 추가 이표기 대응 이 있는지 보자. 19) 이 점은 辛尒縣:宜桑縣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漢字에 밝은 신 라 관리가 음차표기의 어순을 뒤집으면서 멋을 부렸다 면서 辛尒縣 의 글 자 순서가 뒤바뀌어 宜桑縣 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김태식 2009:45) 있 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 삼국사기 34 巨濟郡) 20) 예컨대 南垂縣, 本松邊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21) 특히 (8)다, 라의 黃武縣 과 玄武縣 은 신라의 十停 주둔지로서 단위 부 대의 옷깃 색에 따라 경덕왕 때 개칭된 지명이므로 이전 지명과 언어학적 으로 무관함이 확인된다.(송하진 2000:36)

153 152 地名學 17 (2011) 浦縣. ( 삼국사기 36 比豊郡) (9) 가. 赤 鳥縣本百濟 所比 忽. ( 삼국사기 25 白城郡 ) 나. 赤 城縣, 本高句麗 沙伏 다. 赤木縣[一云沙非斤乙] ( 삼국사기 37 漢山州) 도수희(1998: )는 (9)에서 所比ㆍ沙伏ㆍ沙非 와 赤 의 대 응을 지적하여 赤 의 고훈이 所比ㆍ沙伏ㆍ沙非 였음을 밝혔다.22) 그런데 赤ㆍ丹ㆍ朱 는 의미상 통용되었으므로23) 朱 의 고훈도 所 比ㆍ沙伏ㆍ沙非 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전술한 대로 辛 이 新 과 통 용되어 그 훈 새 로 읽혔을 가능성과 分 의 음이 夫, 波 와 통했음 縣:朱 烏村25) 대응이 성립한다. 을24) 고려하면, 辛分 이처럼 尒 分 교체로 뜻밖에도 새로운 이표기 대응이 2개나 드러나는데,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辛分縣이 新繁縣, 朱烏村과 함께 어원이 朱(붉음) 인 같은 계통 지명이었음을 시사한다고 생각 한다. 셋째로, 泉州 인지 泉川 인지는 宜桑:泉川 대응에서 실마리를 찾 을 수 있다. 桑:川 대응은 州 가 川 의 오기일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泉 에 대해서는 보통 辛尒縣:泉州 에서 辛尒 (시니) 가 泉 의 중세훈 과 대응한다고 본다.26)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22) 용비어천가 의 블근못 赤池 (제153장), 블근셤 赤島 (제4장)에 보이듯 이 赤 의 15세기의 훈은 븕은 이지만, 삼국시대의 훈은 사비 소비 이다. (도수희 1998:109) 23) 丹 川縣, 本百濟 赤 川縣, 景德王改名, 今朱 溪縣. ( 삼국사기 36 進禮郡) 24) 分 嵯郡[一云夫 沙]. ( 삼국사기 37, 武珍州) 分 嵯州, 本波 知城. ( 삼국사기 37) 25) 朱烏村 의 烏 는 馬等烏村, 白烏縣, 郁烏縣 등에 보이는데 정확한 의미 는 알 수 없다. 26) 천소영(1996:277), 송하진(2000: ) 등.

154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53 宜 가 泉 과 대응함도 이미 지적된 바 있다. (10) 가. 나. 다. 라. 買]. ( 삼국사기 37) 泉 井郡[一云於乙...( 여지승람 德源) 高麗時...成宗十四年改宜州 買]. ( 삼국사기 37) 泉 井口縣[一云於乙 郡名: 宣城, 泉井口, 屈火, 原井. ( 여지승람 交河縣) <그림1> 宜:열을 의 (대동급본 천 자문 영인본 13a 朝鮮學報 93) (10)가, 나의 덕원 연혁에서 泉:於乙:宜, (10)다의 파주 연혁에서 泉:於乙 이 보인다.27) 도수희(1998:113)는 宜 의 훈이 光州本 천 자문 과 유합 에서 맛당 맛 이지만 大東急本28) 천자문 에는 열을 29)이므로, 宜 를 *ər(於乙)로 풀 수 있어서 宜:泉 대응이 된다 하였다.30) 즉 泉川 의 제1음절 泉 은 於乙 로서 宜桑縣 의 宜 와 대 27) 도수희는 (10)라에서 泉 井口縣(파주)의 별호 宣城 도 宜 城 의 오기로 보 았다. 28) 大東急本은 光州本(小倉本)에 선행한 1520년대 刊本의 後印으로 추정된 다.(후지모토 2006:463) 29) 열을 은 현대 국어 옳- 로 이어진다.(도수희 1998:113) 30) 於 의 중세훈 늘 을 기반으로 於乙 을 훈독하는 일련의 연구가 있지만, 대동급본을 언급하지 않아 於乙 이 음차표기로서 宜 의 훈 열을 과 대응 함을 간과하였거나(천소영 1996; 김종택 2002), 宜 의 훈으로 열을 외에 *늘 도 추정해야 하는(황금연 2001:64) 난점이 있다. 어두에서 於 의 차 훈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컨대, 於支呑:翼谷縣

155 154 地名學 17 (2011) 응한다. 한편 제2음절 川 은 고대한자음이 善 과 통했으므로 桑 과 도 대응했을 가능성이 높다. (11) 가. 餘善 縣, 本南內 縣. ( 삼국사기 34 居昌郡) 나. 善 谷縣, 本高句麗 買 谷縣. ( 삼국사기 35 奈靈郡) 다. 旌善 縣, 本高句麗 仍買 縣. ( 삼국사기 35 溟州) (11)의 善:買(內) 에서 買 는 川 의 차자표기이고, 內 도 川 의 중세훈 내 와 통하므로 모두 善:川 대응인데, 음운 대응 말고는 이 대응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표2> 川, 善, 桑의 한자음 비교. 郭錫良(1986) 참조. 川 善 桑 상고음 昌文 * hĭwən 禪元 *ʑĭan 心陽 *sɑŋ 중고음 昌仙 ʨhĭwɛn 禪仙 ʑĭɛn 心唐 sɑŋ h h 川 의 성모 * -/ʨ -가 고대국어에서 s-로 수용된 善 의 성모 ʑ와 대응하고, 川 과 善 의 상고음 핵모음 ə와 a가 혀의 높낮이만 다 를 뿐 같은 중설 평순모음이고, 말음 -n이 일치하므로 川 의 음을 *san 으로 재구할 수 있다.31) 그러므로 川 과 桑 (*sɑŋ)은 말음만 에서 於支 를 翼 의 훈 날개 에 대응하는 개 로 볼 수도 있지만(김종택 2002:95), 於 가 상고음 ĭɑ, 중고음 ĭo로 이 의 표음도 가능해서 支 가 ㄱ 표기라면, 於支 가 翼 의 음 표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송하진 2000:154) 필자는 於 가 어두에서 음독, 훈독 가능성이 다 있지만, 於乙 은 열을 과 의 대응례를 따라서 음독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31) 川 善 과 桑 의 핵모음이 중고음에서는 ɛ와 ɑ로 벌어지므로 川:善:桑 음운 대응은 상고음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56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55 다른데, 국어 음운사에서 한어음 -ŋ은 -, -n으로 반영되다가32) 8 세기 후반에 정착되었으므로(이장희 2005:218) 宜桑 으로 개칭된 8 세기 중엽에도 桑 의 말음으로 -ŋ과 n이 통용되었다고 볼 수 있 다.33) 따라서 宜桑 과 泉川 은 이표기 대응하고 州 는 川 의 오기 로 보아야 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글자 하나를 고침으로써 부림의 옛 지명들이 泉 계통인 宜桑縣 泉川縣과 朱 계통인 辛分縣 新繁 縣 朱烏村으로 양분되고34), 泉 이 동일 자료 내에서 두 가지 훈 辛尒( ) 과 宜(*ər) 을 갖게 되는 문제35)도 해결되는 등 이표기 대응이 이전보다 수적으로 증가하고 언어학적으로 더 가지런해진다 는 점이다. 縣~朱 烏村>宜桑 縣~泉川 縣>新繁 縣 辛分 주자본의 辛分縣 이 新繁縣 의 繁 에 끌려 尒 를 分 으로 교정한 결과인지(송하진 2000: ) 辛分縣 으로 나온 판본을 참조한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점에서 분명 주목할 만하다. 32) ŋ n 반영 예는 아래와 같다.(이장희 2005) 眞 峴縣[一云貞 峴]. 金志全 ~金志誠. 外孫安舜 [羅記作勝 ]. 33) 삼국유사 소재 일연의 包山二聖讚 에서 泉 年 迎 이 압운되는데, 권 인한(1997b: )은 적어도 신라 시대에는 이들의 말음이 같았고 고 려 시대까지 그 간섭을 받았다고 보았다. 또 훈몽자회 와 광주본 천자 문 에서 賓 의 음이 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권인한 1997a:306) 34) 기존대로라면 辛尒縣 泉川, 朱烏村, 宜桑縣으로 삼분된다. 35) 어떤 지명 표기에서 한 차자가 동일 자료 내에서 각각 다른 표음으로 쓰 일 가능성은 적다 (황금연 2001:64)

157 156 地名學 17 (2011) 3. 고대 합천 의령 지역의 재인식 3.1. 散半奚國은 辛分縣 辛尒縣 이 辛分縣 이라면 斯二:辛尒 에 의해 부림에 비정했던 斯 二岐國은 더 이상 부림에 비정될 수 없지만 그 대안은 금방 찾을 수 있다. (12) 가. 比自㶱, 南加羅, 㖨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 ( 일본서기 9, 신공 49년 3월의 7국 평정 기사) 나. 安羅, 加羅, 卒麻, 散半奚, 多羅, 斯二岐, 子他. ( 일본서기 19, 흠명 2년 4월의 1차 사비회의 참가국들) 다. 安羅, 加羅, 卒麻, 斯二岐, 散半奚, 多羅, 子他, 久嵯. (흠명 5 년 1월의 2차 사비회의 참가국들) 라.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嗟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 (흠명 23년 1월의 임나10국 기사) 마. 半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 양 직공도 百濟國使傳) 가야 소국 목록 (12)에는 위치가 확실치 않은 지명도 적지 않은 데 나, 다, 라의 散半奚國도 그 중 하나로서 鮎貝房之進(1937:163) 이후, 草八兮縣(합천군 초계면)에 비정해왔다. (13) 군사를 보내 比只國 多伐國 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삼국 사기 1 파사니사금 29년)36) 36) 파사니사금 때에 창녕, 합천까지 신라가 진출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대 부분 연구자들이 후대의 기사가 소급되었다고 본다.

158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57 <그림2> 고대 합천 의령, 기존 비정의 예(전덕재 2011) (13)에서 比只國은 (14)가의 比自㶱로 창녕에 비정하는 데에 이 의가 없고, 多伐國은 多羅로 볼 수도 있지만 현풍이나(鮎貝房之進 1937:79)37) 達句伐(대구)에 비정할 수 있고, 草八國은 散半奚國과 같은 존재로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후부지명소 奚(下) 를 빼면 散半:草八(沙八) 38)보다는 散半:辛分 이 더 유연성이 있어보이므 로 필자는 散半奚國을 부림에 비정한다.39) 37) 古之吹火良縣一云多 良火縣. ( 경상도지리지 玄風縣) 38) 沙八兮 는 뒤에 다룰 우륵 12곡에 나오는 지명인데 草八兮 의 이표기로 보는 데에 이의가 없다. 39) 散半奚(陜川廢縣의 舊辛分縣, 지금의 新繁) 라 하여 이병도(1959:403)도

159 158 地名學 17 (2011) 이 경우 초계 지역에는 별도로 草八國이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 草八國을 초계면에 자리 잡은 나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현 재까지 합천읍을 포함한 합천의 다른 지역에는 多羅國의 위상에 어 울리는 대군장급의 고분이 발견되지 않아서, 대군장급 고분이 발굴 된 옥전 고분군이 있는 쌍책면을 다라국의 중심지로 보는 것이 불 가피하다는 견해(박천수 1997: ; 조영제 2007:222)가 제출되 었고40), 이 경우 합천읍은 물론 옥전 고분군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초계 지역도 다라국 영역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41) 그러나 사학계에는 여전히 쌍책 초계면 일대에 多羅 대신 散半 奚國(草八國)을 비정하는 경향이 있는데42), 거기가 아니면 散半奚 國을 비정할 마땅한 곳이 없고, 草八國 은 국명으로서 多羅의 일부 가 아닌 多羅 자체를 뜻하는데, 언어학적으로 多羅 와는 무관해 보 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 散半奚國과 분리된 草八國은 고고학적으로 밀접한 多羅의 별칭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 나 草 가 음독으로 島 와 통한 예가 있어 草 八國:多 羅 대응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다. 散半奚를 辛分縣 에 비정하였다. 이는 주자본 삼국사기 를 이용한 비정 같은데, 1977년 발간된 原文 三國史記 (을유문화사)에서는 辛尒縣 으로 교감하였다. 이형기(2009:154)는 沙八兮 를 散半奚 와 연결시켜 의령 富 林 新反 일대로 추정하였다. 필자는 散半奚의 부림 비정은 동의하지만, 沙八兮 는 散半奚 보다는 草八兮 의 이표기로 본다. 40) 쌍책면 옥전 고분군 주변에 多羅里 라는 지명이 있기도 하다. 41) (15)의 多伐國을 多羅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병기된 草八國이 이처럼 고고 학적으로 多羅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초계 분지 안에서는 소국 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조영제 2007:222) 42) 예컨대 김태식(2002:144)은 초계면과 쌍책면 일대에, 전덕재(2011)는 초 계 지역에 散半奚國을 비정하고, 多羅는 공통적으로 합천읍 일대에 비정 하였다. <그림2> 참조.

160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59 (14) 가. 碣島 縣, 本百濟 阿老縣. ( 삼국사기 36 壓海郡) 나. 葛草 縣[一云何老, 一云谷野]. ( 삼국사기 37) (14)가, 나의 碣島 縣과 葛草 縣은 모두 백제 阿老縣(영광군 군남 h 면)의 신라 시대 이표기인데 淸모자(ts -) 草 와 端모자(t-) 島 가 대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尒 를 分 으로 고치면 散半:辛分 대응에 의해 斯二岐國을 대신해서 散半奚國이 부림에 비정될 수 있는데 이는 매우 공교롭다 斯二岐國은 三岐縣 이제 斯二岐國도 새로 비정해야 하는데, 부림 이외 지역으로는 이 병도(1959:403), 이형기(2009:158), 김세기(2003:292) 등이 斯二岐 面에 비정한 바 있다. 그러나 三嘉 는 조선 초에 國을 합천군 三嘉 생긴 지명이므로 음운 대응 관점에서는 옳은 비정이 아니다.43) 대 신 필자는 (7)에 나온 신라 지명 三岐縣에 주목한다. 황강수계 서부 지역권인 합천군 대병 봉산면 일대44)인 이 지역은 비교적 풍부한 고고자료가 출토되어 일정 수준 이상의 정치체가 있음직하지만 기 縣:斯二岐 國 대응에 록이 남아있지 않은데(이형기 2009:143) 三岐 의해 斯二岐國 비정이 가능하다. 단 三:斯二 를 신승용(2007:35)이 예시한 甲:甲比, 習:習比, 福:保皐 등처럼 말음의 표기 차이로 볼 43) 현재의 三嘉面은 신라 이후 嘉壽縣이었는데 1414년 三岐縣(대병 봉산 면)과 합쳐서 신설된 三嘉縣( 三岐縣 의 三 과 嘉壽縣 의 嘉 를 조합한 지 명)에 속했고 지명도 거기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상으로 현재는 같은 합천 군에 속해있지만 신라 때에는 대병 봉산 일대가 江陽郡, 삼가 일대가 康 州에 속해 있어서 서로 다른 권역이었다. 44)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古三岐縣은 현재의 병산면으로 나오지만 고대 의 중심지는 고고자료가 더 풍부한 봉산면이었다.

161 160 地名學 17 (2011) 때, 三 의 -m이 二 의 n-과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阿湌餘三 [或本餘山 ]. ( 삼국유사 2 원성대왕) 伊伐湌 [ 或云舒發翰, 或云舒弗邯 ] ( 삼국사기 38 직관) 三 斤王[或云壬 乞]. ( 삼국사기 26 삼근왕1) 百濟 文 斤王薨. ( 일본서기 14 웅략 23년 4월) 마. 來 蘇郡, 本高句麗 買 省縣. ( 삼국사기 35) 바. 任 那~彌 摩那. ( 일본서기 6 垂仁 2년) (15) 가. 나. 다. 라. 그러나 (15)가, 나에서 三 과 邯 45)의 말음 m이 山 과 湌 翰 의 말음 -n과 구분되지 않았고, (15)다, 라에서 三斤王 이 壬 乞王 <그림3> 필자의 산반해국 사이기국 비정

162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61 이나 文 斤王 으로도 읽혔듯이 고대에는 m과 n이 통용되었으므로46) 대응에 문제가 없다. 辛分縣 일 때 기존의 斯二岐:辛尒, 散半:草八(沙八) 대응에 비해 언어학적 유연성이 증가한 斯二岐:三岐, 散半:辛分 대응이 가능한 데, 앞 장의 辛分縣:新繁縣:朱烏村 대응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우연 의 일치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부림의 지명 으로서 辛尒縣 보다 辛分縣 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下加羅都 삼국사기 에는 대가야 가실왕이 명하여 우륵이 지었다는 12곡의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 (16) 우륵이 지은 열두 곡은 첫째 下加羅都, 둘째 上加羅都, 셋째 寶 伎, 넷째 達已, 다섯째 思勿, 여섯째 勿慧, 일곱째 下奇物, 여덟째 師子伎, 아홉째 居烈, 열째 沙八兮, 열한째 爾赦, 열두째 上奇物 이요, 泥文이 지은 세 곡은 첫째 烏, 둘째 鼠, 셋째 鶉이다. ( 삼 국사기 악지 ) 곡명 중 寶伎와 師子伎 빼고는 지명으로 인식되는데, 上奇物(임 실 장수), 下奇物(남원), 達已(여수)47), 思勿(사천), 居烈(거창), 沙八兮(합천 초계면)는 위치 비정에 별로 이의가 없다. 勿慧와 爾赦 는 다음 장에서 비정하고 이 절에서는 上 下加羅都의 위치를 비정 45) 邯 의 한어음은 상고음(ɣam), 중고음(ɣɑm)에서 m이었는데 한국한자 음은 함 한 으로 m과 n이 통용된다. 46) 송하진(2000:133)도 /ㄴ/과 /ㅁ/이 대응하는 예를 들었다. 47) 達巳 로 읽으면 帶沙(하동)로 볼 수 있다.

163 162 地名學 17 (2011) 해보자. 上 下加羅都 에서 加羅 가 대가야를 지칭하고 상위 를 뜻하는 上 이 붙은 上加羅는 대가야(고령), 上加羅都 는 그 중심지인 연조 리 지산동 일대를 뜻한다는 데에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문 제는 下加羅都이다. <그림4> 합천군 봉산면 저포리 E지구 4-1호분에서 출토된 항아리의 下部思利己 명문. 6세기 2/4분기. 下加羅都 의 下加羅 는 김해로 보기도 하지만, 합천군 봉산면 저 포리 출토 명문 下部思利利 의 下部 와 연결시켜 대가야가 上 下 2部制였다고 보고(백승충 2000) 봉산(이형기 2009:146), 쌍책(백승 충 2006:117), 합천 함양 의령(김세기 2003:276) 등 대가야 권역 에서 찾는 추세이다. 또 명문의 下部 뒤에 나오는 思利利 는 下部

164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63 출신 인명으로서 下部의 성격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경우 출신지와 인명만 적혀서 문제가 된다. 삼국시대 금석문에서 직명, 출신지명, 관등명, 인명 가운데 직명과 출신지명은 생략될 수 있으 나 관등명과 인명은 반드시 기록되기 때문이다.(김창호 2001:26) 思利利 는 원래 思利 다음 자를 중복부호 〻 로 판독해 앞 글자 利 를 받아 적은 석문인데 思利己 로 읽어도(田中俊明 1992:258) 문제가 없다.(백승충 2006:103) 이에 필자는 명문 思利己 가 斯二 岐 의 이표기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① 思利己 가 지명이면 관등명이 병기되지 않은 문제가 해소되고, ②思利己:斯二岐 음운 대응이 상당 히 안정적이고48), ③명문 출토지의 신라 지명이 三岐 로서 思利己: 三岐 대응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봉산 일대를 斯二岐國의 위치로 보 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49) 그런데 부림이 辛尒縣 이었다면 대병 봉산 지역에 같은 지명인 斯二岐國(三岐縣)이 있게 되는데, 인접한50) 두 지역이 같은 지명으 로 표기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따라서 한 지명 斯二岐國 이 금석문 으로 확증된다면 다른 지명 辛尒縣 의 오류 가능성이 부각되는데, 그런 면에서 필자의 辛尒縣 오각 주장이 의미를 갖게 된다. 辛分 縣 표기는 출현 시기가 늦어서 인정받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辛 尒縣 이 나오는 가장 이른 기록인 고려사 보다도 약 900년 앞서는 48) 상고 중고음에서 思 와 斯 는 心모자이고 같은 止攝인 之, 支운자이다. 利 의 상고음과 중고음은 l-이지만 중세한자음 니 리 는 고대에 利 와 二 가 동음이었음을 시사한다. 49) 가야 소국 가운데 위치(출토지)와 국명이 금석문을 통해 밝혀진 최초의 예라고 생각한다. 50) 대뱡 봉산 지역과 부림 지역 사이에는 고고학적으로 별다른 세력의 존 재가 보이지 않으므로 두 지역이 경계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고, 최소한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5 164 地名學 17 (2011) 금석문이 辛尒縣 표기의 오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면에서 신빙성 이 상당히 보강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증에서 봉산 지역은 下部에 편제되어 上部인 고령 지역 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소국으로 볼 수 있지만 下部 가 思利己 의 동격으로서 대병 봉산 지역만을 지칭하는지, 합천군이나 그 이 상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상 하가라도처럼 대가야 연맹체 속에서 굉장히 핵심적인 지역이라고 한다면, 문물의 양상이 고령하고 거의 비슷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면서 쌍책 지역을 下 加羅都 비정에서 제외시킨 견해51)를 참고하면, 역으로 고령과 고고 학적으로 가장 닮은 대병 봉산 일대를 下加羅로, 그 중심지인 반계 제 고분군 일대를 下加羅都로 볼 수 있다.52) ①봉산면에서 출토된 우륵 활동 시기의 思利己 명문, ②대병면의 신라 지명 三岐縣 은 省熱縣 의 이표기로 볼 수 있고, ③맞닿은 가 조면에는 우륵터 가 있으므로 필자는 이상의 고고학, 문헌, 전승 자 료를 근거로 우륵의 고향 省熱縣을 합천군 대병 봉산 지역에 비정 한다. 斯二岐國 사람 우륵이 대가야 왕의 명을 받아 가야 통합을 기 원하는 12곡을 지었던 배경에는 지리적으로 맞닿았고 정치적으로 上 下部制로 결속되었던 고령과 대병 봉산 지역의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省熱縣의 위치 비정을 마쳤지만, 이 비정이 인정을 받기 51) 조영제 발언(338쪽),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에 대한 종합토 론,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 계명대 학교 한국학연구원, ) 下加羅가 斯二岐國이라면 師子伎를 斯二岐國으로 보는 주장(田中俊明 1992:109)은 성립할 수 없다. 우륵 12곡에서 같은 지명이 下加羅 와 師子 伎 로 중복되었다고 볼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師子伎와 寶伎는 아무래도 지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166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65 위해서는 辛熱, 爾列比 등 부림설에서 주장하는 다른 이칭들에 대한 검토도 있어야 한다. 4. 관련 지명 검토 4.1. 爾列比 일본서기 의 爾列比는 爾列 을 獐 의 훈 노루 의 음차로 보고 獐含縣(의령읍)에 비정하거나(전영래 1985:149; 남재우 2000:182), 辛尒縣 에서 辛 의 탈락으로 보아 부림에 비정하는데(김태식 2002: ), 후자의 경우 부림의 지명 辛分縣 과 양립할 수 없는 견해이므로 이 절에서는 그 위치 비정을 검토하겠다. (17) 반파는 子呑과 帶沙에 성을 쌓아 滿奚에 잇고 烽堠와 邸閣을 설 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 또 爾列比 麻須比에 성을 쌓아 麻且 奚 推封에 연결하였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였다. 伴跛築城於子呑 帶沙, 而連滿奚, 置烽候邸閣, 以備日本. 復築城 於爾列比 麻須比, 以絙麻且奚 推封. 聚士卒兵器, 以逼新羅. ( 일본서기 17 계체 8년) (17)에서 대가야(반파)의 축성지 요충지들은 일본과 신라에 대 비한 것이므로, 爾列比 등 지명 비정은 다음 두 계열별로 서로의 연 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리라 생각한다. (18) 가. 일본 대비: 자탄-대사-만해 나. 신라 핍박: 이열비-마수비-마차해-밀봉

167 166 地名學 17 (2011) (18)가에서 子呑은 거창,53) 帶沙는 하동54)이 확실하다. 滿奚는 문맥상 子呑 帶沙 滿奚 순서로 보고 馬老縣(광양)에 비정하기도 (鮎貝房之進 1937:62-63; 김태식 2002:190) 하지만, 이 경우 滿奚 : 馬老 대응이 제2음절에서 불안하다. 그래서 滿奚를 茂溪(고령군 성 산면 무계리)에 비정해 滿奚 子呑 帶沙 연결선을 상정한 견해(今 西龍 1937:360; 남재우 2000:182)가 있는데, 대가야가 왜에 대비하 여 섬진강 방면 帶沙에 성을 쌓았다면, 그보다 더 치명적인 낙동강 방면에도55) 대비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滿奚에는 대가야 토기가 발견되는 무계리 성지가 있고 우륵 12곡의 勿慧도 이곳이겠다. 한편 (18)나에서 麻且奚는 삼랑진56), 推封은 밀양읍에57) 보통 비 정되는데, 爾列比와 麻須比의 비정이 어렵다. 麻須比는 奴斯火(慈仁 53) 子呑 의 일본음은 釋日本記 에는 しとん 으로 나오지만 통상 ことん 인 데 전자인 경우 마땅한 비정지가 없고, 후자인 경우 거창이나 진주에 비 정할 수 있는데(鮎貝房之進 1937:59-61), 진주설은 주보돈(2004: ) 에 의해 비판된 바 있다. 54) 河東郡, 本韓多沙郡. ( 삼국사기 34) 55) 왜가 낙동강을 따라 고령 지역에 침입한 전례가 있다. 일본서기 神功 62년(369) 기사에서 왜의 襲津彦이 신라를 치러 갔다가 미인계에 유혹되 어 도리어 대가야를 쳤다는데, 미녀가 나루에서 맞았다고 하니 그가 수군 을 이끌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뱃머리를 돌려 대가야를 공격하려면 낙 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밖에 없다. 56) 知 自 子 次 등이 사이시옷 표기 叱 과 통용되었으므로(안배근 2002:93) 음이 비슷한 且 도 사이시옷으로 보면 麻且奚 는 麻奚 인데 麻 는 삼랑진 읍의 신라 지명 密津縣 의 密 과 대응하고, 奚 와 津 은 후부지명소이다. 57) 封 은 風 과 음이 통하고 風 은 훈독으로 伐 과 통하므로, 封도 火 와 통 한다고 보는 것이(鮎貝房之進 1937:68) 일반적이다. 원래는 推風 인데 風 이 훈독되지 않고 음독되면서 豊, 封 으로도 표기되었다고 추측된다. 현풍으로 보기도(今西龍 1937: ) 하지만, 밀양에 비정함(末松保和 1949:127)이 옳다고 생각한다.

168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67 縣)에 비정한 견해가 있지만(酒井改藏 1970:16) 신라 쪽으로 깊이 들어간 느낌이 있었는데 최근 전덕재(2008:66-67)가 馬首院(창녕군 유어면 부곡리)에 비정했다. 馬首院 은 늦어도 16세기에는 쓰인 지 명인데58) 馬首:麻須 음운 대응이 뚜렷하고, 지리학적으로 推封(밀 양)-麻且奚(삼랑진)-麻須比(마수원) 선이 밀양읍에서 고령군 쪽으 로 뻗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爾列比도 신라 핍박 이라는 대가야의 공세적 태도를 감안 하여 밀양-삼랑진-마수원 의 연장선에서 찾는다면 酒井改藏(1970: 15)의 견해대로 三良火(달성군 현풍면)에 비정함이 옳다고 본다. 三 良火:爾列比 에서 (12)에 의해 三 의 훈 麻 密 의59) m- 음은 爾 의 n- 음과 대응할 수 있고, 比:火 대응은 물론60), 列:良 대응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爾列比 의 列 은 居烈 의 烈 처럼 新羅 의 羅, 駕洛 의 洛, 加良 의 良 과 말음은 다르지만 상고음의 중심모음이 a로서 통 용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앞에서 위치 비정을 보류한 우 륵 12곡의 爾赦는 제1음절이 일치하는 爾列比에 비정해 둔다.61) 이상의 지명 비정을 <그림5>에 옮기면 고령을 중심으로 무난한 동 서 방어선이 그어진다. 이런 전체적인 구도에서 爾列比를 낙동 강 서안에 비정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58) 이대기의 壬癸日記 와( 雪壑先生文集 ) 정인홍의 遺與兒孫昌後看 에( 來庵先生文集 ) 茂溪 와 馬首院 이 보인다. 59) 三 支縣[一云麻 杖]. ( 삼국사기 34 江陽郡) 三 峴縣[一云密 波兮]. ( 삼국사기 37) 대응 60) (17)은 百濟本記 에서 인용된 백제계 사료인데 比 는 泗比 :所夫里 에 보이듯이 신라 지명의 火 에 해당한다. 61) 삼국사절요 에는 爾赤欠 으로 나오는데, 이 경우 赦 나 赤欠 이 赧 (난)이나 赤皮 (난 년)의 오각으로서 爾列比 의 列 (렬)과 대응할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69 168 地名學 17 (2011) <그림5> 512년 대가야의 군사 요충지 위치 비정 4.2. 辛熱 이 절에서는 省熱縣=辛熱 등식을 살펴보겠다. (19) 會樂과 辛熱樂은 유리왕 때 지은 것이고, 突阿樂은 탈해왕 때 지 은 것이며, 枝兒樂은 파사왕 때 지은 것이다. 思內樂[詩惱樂이라 고도 한다]은 나해왕 때 지은 것이고, 笳舞는 나밀왕 때 지은 것 이며, 憂息樂은 눌지왕 때 지은 것이다. (중략) 內知는 日上郡의 음악이고, 白實은 押梁郡의 음악이고, 德思內는 河西郡의 음악이 고, 石南思內는 道同伐郡의 음악이며, 祀中은 北隈郡의 음악이다. (중략) 다만 옛 기록에 政明王 9년(689)에 新村에 행차하여 잔치

170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69 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는데, 茄舞는 監 6명, 茄尺 2명, 舞 尺 1명이었고, 下辛熱舞는 감 4명, 琴尺 1명, 무척 2명, 歌尺 1명 이었으며, 思內舞는 감 3명, 금척 1명, 무척 2명, 가척 2명이었고, 韓岐舞는 감 3명, 금척 1명, 무척 2명이었으며, 上辛熱舞는 감 3 명, 금척 1명, 무척 2명, 가척 2명이었고, 小京舞는 감 3명, 금척 1 명, 무척 1명, 가척 3명이었으며, 美知舞는 감 4명, 금척 1명, 무 척 2명이었다. ( 삼국사기 32 樂志 ) (19)에서 內知(日上郡樂), 白實(押梁郡樂), 德思內(河西郡樂), 石 南思內(道同伐郡樂) 등은 지명과 연결되는 郡樂 이지만62), 그냥 <그림6> 辛熱과 詞腦野 추정지 62) 郡樂이 신라가 정복하면서 얻은 주변 소국의 음악임은 일반적으로 인정 된다.(여기현 1999:53; 백승옥 2007:236)

171 170 地名學 17 (2011) 樂 인 會樂, 辛熱樂, 突阿樂, 思內樂 등도 지명과 연결되는지는 논란 이 있다. 또 舞 에서도 韓岐舞와 小京舞는 지명과 연결시킬 수 있지 만 上 下辛熱舞, 思內舞, 美知舞 등은 확실치 않다. 樂, 上辛熱 舞, 下辛熱 舞 등에 포함된 어휘인데, 末松 辛熱 은 辛熱 保和가 省熱 의 이표기로 본 바 있고, 양주동(1965:33-37)도 詞腦, 思內, 詩惱 등의 이표기로서 어떤 노래의 汎稱 으로 보았지만 역 시 詞腦野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우선 辛熱 이 지명임은 경남 창녕군 교동의 仁陽寺碑(810) 명문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에는 仁陽寺의 順表師63)가 771년에 서 810년까지 벌인 佛事가 적혀있는데, 그 중 辛熱驛과 楡川驛에 곡 식을 기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20) 임술년(782)에 仁陽寺 取妙戶의 頂礼石을 이루고, 같은 절 金堂 을 수리했다. 같은 해에 辛熱 楡川 2驛64)에 곡식 102석을 주었 다. 壬戌年, 仁陽寺 取妙戶 頂礼石成, 同寺金堂治. 同年辛熱 楡川 二駟, 施食百二石.65) 楡川 의 청도군 청도읍 楡湖洞 비정에는 이론이 없지만66) 문제는 63) 師 는 비문에서 명확하지 않다. 이하 하일식(1996)의 석문과 해석을 따랐 다. 64) 남풍현(2000:351)은 辛熱 楡川二駟 를 辛熱楡 卅二駟 (辛熱楡 32 수레) 로 읽고 辛熱楡는 그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燃料로 쓰인 나무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하였고, 송기중(2004)도 辛熱楡 를 표제어로 올렸지 만 辛熱 과 楡川 바로 다음에 나오는 二 까지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駟 는 鮎貝房之進의 의견을 따라 驛 의 약자로 본다.(하일식 1996:28) 65) 石 에서 첫 획 一 이 없는 글자이다. 66) 楡川驛[在郡南四十里] ( 신증동국여지승람 26 淸道郡)

172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71 辛熱 이다. 하일식(1996:35)은 辛熱 이 지명임은 분명하지만 辛熱 樂이 郡樂이 아니라는 점에서 王京 부근인 경주시 內南面의 辛乙里 와 上辛里에 비정될 가능성을 제시했다.67) 辛乙里는 1914년 신설된 德泉里 안에 辛乙 로 지명이 남아있고(越智唯七 1917:489), 인접한 上辛里에는 上辛과 下辛이라는 마을이 있어서(한글학회 1979:222), 辛熱樂, 上辛熱舞, 下辛熱舞과 각각 대응한다. 따라서 辛乙 은 辛 熱, 上辛 과 下辛 은 上辛熱 과 下辛熱 에서 유래했다고 보아야 하 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辛熱:辛乙 에서 乙 이 니 로 읽힌 예 가 있어68) 이와 대응하는 熱 이 제2음절에서 니 로 읽혔을 가능성 도 재확인된다. 다음에는 詞腦野의 위치를 찾아보자. (19)에서 思內樂(詩惱樂)도 辛熱樂처럼 郡樂이 아니므로 王京의 한 지역과 연관된 음악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실제로 詞腦野라는 지명이 경주에 있었다.69) (21) 그 알을 깨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 웠다.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 아이를 東泉(東泉寺는 詞腦野 북쪽 에 있다)에서 목욕시켰다.( 삼국유사 1 신라시조 혁거세왕) (21)에서 詞腦野 북쪽에 있다는 東泉寺는 동천동 헌덕왕릉 인근 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70) 詞腦野는 좁게는 황룡사지 부근 평 67) 仁陽寺碑에는 王京의 奉德寺, 永興寺, 天嚴寺, 寶藏寺에 곡식 2,713石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왕경과의 교류 과정에서 그 경로에 있는 청도군과 내남면의 역참에 기부를 했을 수 있다. 68) 內乙 買[一云內尒 米]. ( 삼국사기 37 漢山州) 69) 신라의 53 金入宅 중 思內曲宅도 詞腦野에 있었을 것이다. 늦어도 고려 초까지 소급되는 思腦寺라는 절의 존재도 충북 청주에서 확인되지만(김정 현 2009:32-64) 본고의 논의와는 무관하다.

173 172 地名學 17 (2011) 야,71) 넓게는 북천과 남천 사이 경주평야 전체로72) 보아야 하겠다. 이상의 논의에서 省熱, 辛熱, 詞腦野는 음이 같거나 비슷할지 모 르지만 각각 다른 지명임이 밝혀졌다. 5.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末松保和 이래 우륵의 출신지 省熱縣이자 가야 소 국 斯二岐國으로 인식되었던 辛尒縣 (의령군 부림면)의 尒 가 分 의 오각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그 방증으로서 <표3>과 같이 辛尒縣 보다는 辛分縣 일 때 더 가지런한 이표기 대응이 이루어짐을 들었 다. 그리고 이에 따라 辛分:散半 대응으로 散半奚國을 기존의 쌍책 초계면 일대에서 옮겨 부림에 비정하고, 斯二岐國은 斯二岐:三岐 대 응에 의해 三岐縣(합천군 봉산면 일대)에 비정하였다. 봉산면 출토 명문 下部思利己 에서 思利己 는 斯二岐 와 省熱 의 이표기로서 그 일대가 우륵의 출신지였음을 입증한다. 70) 高仙寺誓幢和上碑의 하단부가 1968년 동천동 傳 東泉寺址 근처 석용제 씨 집에서 발견되었고(국립문화재연구소 2005:257), 동천동 瓢巖齋에 있 는 당간지주 일부는 헌덕왕릉 주변 東泉寺(東川寺)에서 옮겨왔다고(엄기 표 2004:278) 한다. 71) 김동욱(1966:21)은 황룡사에서 안압지 사이 들판을 현지에서 사릿들 로 부른다는 점을 들어 寺里>사릿들 말고 詞腦野>사릿들 도 생각해볼 수 있 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72) 양주동(1965:42)은 詞腦野 를 徐那伐 로 보았다.

174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73 <표3> 辛分縣 과 辛尒縣 의 이표기 대응 비교 辛分縣 삼국사기 지리지 辛尒縣 縣>宜桑縣>新繁 縣 辛分 縣~朱烏 縣 辛分 宜 桑縣~泉 川縣 縣~泉 州 辛尒 일본서기 奚國:辛分 縣 散半 國:三岐 縣 斯二岐 國:草八兮 縣 散半奚 岐國:辛尒 縣 斯二 삼국사기 악지 :草八兮 沙八兮 :草八兮 :散半奚 沙八兮

175 174 地名學 17 (2011)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2005), 한국금석문자료집(상) (선사~고려), 국립문화재연 구소. 권인한(1997a), 한자음의 변화, 국어사 연구, 태학사. 권인한(1997b), 고려시대 한국한자음에 대한 일고찰, 관악어문연구 22, 김기빈(2003), 국토와 지명 2, 그 땅에 빛나는 보배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 물관. 김동욱(1966), 于勒十二曲 에 대하여, 新羅伽倻文化 1, 김세기(2003), 고분 자료로 본 대가야 연구, 학연문화사. 김정현(2009), 淸州 思惱寺 金屬遺物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종택(2002), 於乙買(串)를 다시 해독함, 지명학 7, 김종택(2006), 우륵의 고향 省熱 은 어디인가?, 거창의 역사와 문화 III-거창 고대 사회의 이해-, 거창군, 김창호(2001), 大伽耶의 金石文 자료, 伽倻文化 14, 김태식(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3, 푸른역사. 김태식(2009), 우륵 출신지 省熱縣의 위치,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우륵문화발전연구회, 남재우(2000), 文獻으로 본 安羅國史, 가야 각국사의 재구성, 혜안, 남풍현(2000), 吏讀硏究, 태학사. 도수희(1998), 지명 차자 표기 해독법, 지명학회 1, 박천수(1997), 政治體의 相互關係로 본 大伽耶王權, 加耶諸國의 王權, 신서원. 백승옥(2007), 加耶 縣 의 성격과 省熱縣의 위치-于勒의 출신지에 대한 재검 토, 한국민족문화 30, 백승충(2000), 가야의 정치구조- 부체제 논의와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17, 백승층(2006), 下部思利利 명문과 가야의 部, 역사와 경계 58, 서종학(1995), 吏讀의 歷史的 硏究, 영남대학교출판부. 송기중(2004), 古代國語 語彙 表記 漢字의 字別 用例 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송하진(2000), 古代 地名語 硏究, 전남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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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176 地名學 17 (2011) 황금연(2001), 옛 지명 형태소 於乙- 에 대한 통시적 고찰, 한글 254, 후지모토 유키오(2006), 朝鮮版 千字文 에 대하여, 국어사 연구 어디까지 와 있는가 (연세국학총서 66), 郭錫良(1986), 漢字古音手冊, 北京大學出版社. 今西龍(1937),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末松保和(1949), 任那興望史, 吉川弘文館. 田中俊明(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鮎貝房之進(1937), 雜攷 7下, 朝鮮印刷株式會社. 酒井改藏(1970), 日本書紀の朝鮮地名, 親和 195, 16. 越智唯七(1917),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中央市場.

178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177 Abstract Revisit to the Location of the Birthplace of Ureuk Park, Seung-Hong Soni(省熱) or the ancient Gaya state of Saniki(斯二岐國) is the birthplace of Ureuk, the famous Gaya musician in the 6th century, and widely believed to be located in Shinban(新反) area (Uiryeong County, Southern Kyeongsang Province) based on their supposed linguistic associations with Shini(辛尒), the ancient name of Shinban. (i.e. Soni-Saniki-Shini) But, according to a version of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hini may be a typo of Shinbun (辛分) (尒 vs. 分) because Shinbun rather than Shini is well associated with other ancient names of the site such as Shinbeon (新繁縣) and Sabio (赤烏村). I think that Daebyeong Bongsan area (Hapcheon County), the ancient name of which was Samki (三岐縣), is a likely site for Soni and Saniki, and Shinban is a likely site for Sanbanhae (散半奚), another Gaya state. 思利己, the inscription on an ancient pot excavated in Bongsan denotes Saniki(斯二岐) and proves that Ureuk was born there. Key words : Ureuk, Gaya, Seongyeol, Saiki, Sanbanhae.

179 178 地名學 17 (2011) 성명 박승홍(朴勝鴻) 주소 ( ) 서울 도봉구 방학1동 전화 (02) , 전자우편 이 논문은 2011년 10월 31일 투고되어 2011년 11월 01일부터 12월 1일까지 심사하고 2011년 12월 3일 편집회의에서 게재 결정되었음

180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 제주군 신좌면(新左面: 조천읍) 지명을 중심으로 - 오창명** 73) 국문요약 이 글은 조선지지자료 (1911)의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오늘날 조천읍)의 지명을 대상으로 하여, 지명을 국어학적으로 해독 하고 그 형태를 분석하여 의미 파악을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 다. 특히 당시 제주군 신좌면 에 소속된 지명을 중심으로 해서, 고유 어의 본디 이름은 무엇이고, 변음은 무엇인가, 지명이 국어학적으로 어떻게 분석되고, 지금 어느 이름에 대응하는 것인가, 나아가 그 뜻은 무엇인가 등을 밝혀 보려고 했다. 조선지지자료 전라남도 편의 제주군의 신좌면 지명을 정리하면 110여 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 한자 표기는 72개(65%)이고, 한 글 표기는 38개(35%)이다. 이 중에는 上所幕尼岳(상소막니악: 웃바 메기오롬)이나 왕 르 등과 같이 본디 이름을 비교적 온전하게 표기 한 것도 있다. 하지만 文漵(문서: 문서물)나 말찻(말찻오롬) 과 같이 지명의 후부요소인 못 물 또는 오롬 을 생략하여 표기하거나, 槐水 (괴수: 궷물)와 같이 불완전하게 표기한 것도 있다. 그러므로 지명의 본디 이름을 표기하고, 분석하고 해석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또한 조 * 완결(完結)되지 않은 글을 읽고, 좀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도록 지적해준 익명의 심사 위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제주대학교 교육과학연구소

181 180 地名學 17 (2011) 사된 지명 자료를 해석하고 분석할 때는 반드시 오늘날 민간에서 전 하는 지명과 대응시켜서, 본디 이름인지 변음인지를 정확히 가려서 분석하고 해석해야 한다. 가령 同水橋(동수교)는 표기로 볼 때 리>다리[橋교] 와 관련이 있을 듯하나, 실제 지명 조사를 하면 리>다리[橋교] 와 관련이 없 는 동수 로 동수 르 의 차자표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수 는 동물통(동통) 과 관련이 있고, > 로 르 는 르겡이 렝 이(별로 크지 않은 밭) 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핵심어 : 조선지지자료, 제주군, 신좌면, 조천읍, 제주 지명, 차자 표기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의 제주군(濟州郡) 신좌면 (新左面: 오늘날 조천읍)의 지명을 대상으로 하여, 지명을 국어학적 으로 해독하고 그 형태를 분석하여 의미 파악을 하는 것을 주목적 으로 한 것이다. 조선지지자료 는 1910년대 초반, 1911년 전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주요 지명과 시장 주막 이름, 토산물 따위를 개략적으로 조 사하여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료는 필사본 54책으로, 국 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 에 속했는데, 전라남도 지명은 54책 중 7책(17책~23책)에 기록되어 있다. 제주 지명의 경우, 전라남도 1-1(17책) 맨 앞부분에 제주군 (濟州郡), 대정군(大靜郡), 정의군(旌義郡) 등 3군으로 나누어 그

182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81 지명을 기록했다. 제주군은 당시 중면(中面), 신좌면(新左面), 구좌 면(舊左面), 신우면(新右面), 구우면(舊右面) 등 5개 면으로 구성되 어 있었다. 지명은 종별(種別), 지명(地名), 언문(諺文), 비고(備攷) 등 네 부 분으로 나누어 정리했는데, 지명 란에는 한자로 기록하고, 언문 란에는 한글로 기록했다. 한자로 기록한 지명은 대부분 한자차용표 기로 기록했기 때문에 제대로 해독해야 함은 물론, 지금 어느 지명 에 대응하는 것인지, 국어학적으로 어떻게 분석되는 것인지 등을 바 르게 밝혀야, 살아있는 지명이 된다. 또한 언문 란은 민간에서 부르는 고유어 지명의 소리를 거의 그 대로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개인 방언을 심하게 반영한 듯한 것들도 눈에 많이 띄기 때문에 국어학적으로 분석할 때는 주 의해야 할 듯하다. 여기서는 당시 제주군 신좌면 에 소속된 지명을 중심으로 해서, 고유어의 본디 이름은 무엇이고, 변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국어학적으로 어떻게 분석되고, 지금 어느 이름에 대응하는 것인가, 나아가 그 지명의 뜻은 무엇인지를 밝혀 보려고 한다. 먼저 조선지지자료 전라남도 편의 제주군의 신좌면 지명을 정 리하면 아래와 같이 110여 개를 확인할 수 있다. 종별 山名 29개 (한자 표기 20개+한글 표기 9개) 지명 표기 元堂峰(三陽新村兩里), 屛牛峰(咸德北村兩里: 犀 牛峰?), 上所幕尼岳(善屹里), 下所幕尼岳(善屹里), 巨文岳(善屹里), 夫大岳(善屹里), 少用岳(善屹里), 敏岳(善屹里), 雨陣低飛岳(善屹里), 堂岳(臥山善屹 兩里), 大川尼岳(臥山善屹兩里), 思尾岳(大屹里), 鶯岳(大屹里), 半月岳(臥屹里), 大地氣理岳(臥屹 비고

183 182 地名學 17 (2011) 平野名 51개 (한자 표기 28개+한글 표기 23개) 川池名 20개 (한자 표기 15개+한글 표기 5개) 浦口名 8개 (한자 표기 7개+한글 표기 1개) 里), 小地氣理岳(臥屹里), 房尼岳(橋來里), 沙閑尼 岳(橋來里), 帽岳(橋來里), 古便尼岳(橋來里) 노리오롬(大屹里), 거시 오룸(臥屹里), 산굼모리 (橋來里), 말찻(橋來里), 넙지리오롬(橋來里: 넙거 리오롬?), 물찻(橋來里), 사 라 (橋來里: 가끄레 기?), 돔배오롬(橋來里), 놉새리오롬(橋來里) 同水橋(新村里), 長坪(新村里), 元南旨(新村里), 蓮 井坪(新村里), 廣地童山(朝天里), 攸久旨(朝天里), 烏鳴伊旨(朝天里), 長堤員(朝天里), 北貴龍(咸德里), 東長旨(咸德里), 南先旨(咸德里), 質田(咸德里), 烟 臺童山(咸德里), 西長旨(咸德里), 爵貴男旨(咸德里), 霹靂童山(咸德里), 靑鳥旨(咸德里), 金城門(咸德里), 地境野(北村里), 江南坪(北村里), 屛牛邊田(北村里: 犀牛邊田의 오기?), 柳枝南旨(北村里), 牧之童山(北 村里), 明堂旨(北村里), 思理田(大屹里), 大屈田(大 屹里), 邊田(大屹里), 助仁納(橋來里) 발이드르(新村里), 수군 르(咸德里), 상동남빌 (咸德里), 우 이(咸德里), 손한이 르(咸德里), 가시암 르(咸德里), 산시 르(咸德里), 강럭골드 르(北村里), 빌 드르(北村里), 사시드로(咸德里), 남 르(咸德里), 왕 르(北村里), 공고물(北村 里), 작빈 르(北村里), 쥬장이 르(北村里), 보미 르(北村里), 신잰 르(北村里), 먼남 르(臥屹 里), 공 르(臥屹里), 얏왜골왓(橋來里), 범구산 전(橋來里), 개남슐(橋來里), 여우란 르(橋來里) 文漵(新村里), 如銀澤(新村里), 伐元池(朝天里), 長 池(朝天里), 桶水(朝天里), 槐池(咸德里), 水口池 (咸德里), 亭子水(北村里), 高水(北村里), 卞大池 (善屹里), 松南池(善屹里), 堂岳池(臥山里), 沙世美 (臥山里), 廣池(臥屹里), 前川(橋來里) 후릉(朝天里), 돌리못(咸德里) 윳남못(臥屹里), 버 들리못(大屹里), 물(橋來里: 물의 오기) 大水浦(新村里), 東浦(新村里), 新城滄(朝天里), 康 任浦(咸德里), 沙浦(咸德里), 大浦(北村里), 檢時浦 (北村里) 래창 (朝天里)

184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83 市場名 1개 酒幕名 1개 총 110개 朝天場(朝天里) 槐水酒幕(新村 朝天兩里) 한자 표기 72개(65%) + 한글 38개(35%)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군 신좌면 지명 표기의 예 2. 지명의 분석 2.1 표기의 특징 한자 표기 제주군 신좌면의 지명은 총 110개가 표기되었는데, 한자 표기가 72개(65%), 한글 표기가 38개(35%)이다.

185 184 地名學 17 (2011) 한자 지명은 대부분 한자차용표기로 되어 있다. 한자차용표기 중 에는 민간에서 전하는 음성형을 비교적 온전하게 표기한 것이 있는 가 하면, 민간의 음성형 중 일부는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불완전한 표기도 있다. 그러므로 한자차용표기를 제대로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간에 서 전하는 음성형을 제대로 조사해 내야 한다. 그리고 민간에서 전 하는 음성형이 본디 이름인지, 변음인지, 변음이라면 얼마나 변했는 지 등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한편 민간에서 전하는 음성형을 조사하여 수집 정리한 지명 자 료집의 경우, 이른 것은 1950년대의 것이 있고, 최근 것은 2000년대 초반 것이 있는데, 이것들도 참고할 때 조심해야 한다. 특히 당시 민간의 음성형을 제대로 표기했는가, 개인어만을 반영해서 표기했는 가, 고유어 본디 이름이 있는데도 한자어로 기록했는가, 본디 이름 과 변음의 관계 등을 제대로 설명했는가 등을 고려해서 자료를 이 용해야 한다. 신우면의 오롬 중에, 사람에 따라서 바메기(바메기오롬>바메기오 름), 웃바메기(웃바메기오롬>웃바메기오름), 알바메기(알바메기오 롬) 로 전하는 것이 있다. 조선지지자료 에는 한자로 上所幕尼岳, 下所幕尼岳 으로 되어 있다. 이때 尼(이)는 둘째 음절 이하에 쓰였어도 니 의 표기가 아니 라 이 의 표기임을 알 수 있고, 바메기 의 셋째 음절 기 의 첫 소리 ㄱ 은 표기에 반영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민간에 전하 는 음성형을 참고로 하면, 上所幕尼岳은 웃바메기오롬, 下所幕尼岳 은 알바메기오롬 의 차자표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웃바메기오롬 과 알바메기오롬 은 후부요소 오롬 을 생략하여 웃바메기, 알바메기 라

186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85 고도 하고, 나아가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인식하여 바메기 라 한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촌리에 있는 高水(고수)는 궷물 또는 궤물 을 표기한 것인데, 당시 궤 의 유사음 괴 에 대응하는 한자가 많은 데도 高水(고수)로 표기한 것을 주의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신촌과 조천 경계에 있던 궷물 은 槐水(괴수)로 표기했다. 동일한 음성형이 한자를 달리해서 표기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함덕리 궤못(궨못) 은 槐池(괴지)로 표기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잇소리 ㅅ 과 관 형사형 어미 -ㄴ 등이 표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독할 때 주의해야 한다 한글 표기 38개의 한글 표기 지명을 살펴보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와 관련된 표기이다. 지금도 제주어를 말하는 고로층에서는 가 실현 되므로 표기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중세국어에서 (旨)로 실현되었던 것이 르 또는 를 로 실현되었는데, 이것은 둘째 음절에서 가 으 로 변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르 는 현대 제주어에서 루>모루 머루 로 도 실현되고 있는데, 자료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도 유 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오롬 은 모음조화를 지킨 형태이고, 오룸 은 모음조화가 깨 진 형태이다. 중세국어에서 이중모음이었던 (거시 오롬/빌 드 르), ( 남 르), ( 공 르),, ( 창 ), (수군 르) 등이 쓰였다는 것도 눈여겨 볼 문제이다., 등은 중세국 어에서 근대국어 초기까지 이중모음으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근대국

187 186 地名學 17 (2011) 어 이후에는 의 동요 내지는 비음운화에 따라 단모음화가 일어 났다. 그런데 조선지지자료 에 (빌 ), ( 창 ), ( 남 르) 등이 표기되었는데, 이것들은 이중모음인 듯이 표기되었지만 실제 발음에서는 단모음으로 실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은 모두 단 모음으로 실현되고 있다. 중세국어에서 개[浦] 로 실현되었던 것이 [浦] 로 표기한 것도 특이하다. 그렇더라도 의 ㆎ 가 이중모음으로 실현되고, 그것을 반영한 표기라 하기 어려울 듯하다. 어두의 합용병서 ㅺ (사 라 : 갓 라?)은 각자병서 ㄲ 와 다 르지 않은 듯한데, 앞 음절 끝소리를 뒷 음절 첫소리에 쓴 것이다. 윳남못 의 윳남 은 표준어 윤노리나무 에 대응하는 말로, 오늘날 도 윤뉴리낭 윤뉴리, 윤누리낭 윤누리 등으로 실현되고 있기 때 문에,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먼남 르 의 먼남 은 제주어사전에서 멋남 멋낭 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빌 는 오늘날 제주어사전에서 모두 빌레 로 쓰고 있다. 그러므 로 당시도 빌 로 실현되었을 듯한데 빌 로 인식해서 쓴 듯하다. 개남슐 의 슐 은 오늘날 술 로 실현되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는 이중모음으로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의 특징 지명의 형태상 특징은 지명의 후부요소와 전부요소로 나누어 살 펴볼 수 있다. 이들 지명과 비교하는 데 참고할 기존 자료집은 한글 학회의 한국지명총람 16: 전남편Ⅳ 제주편 (1986)<지명1>과 도서

188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87 출판 반석의 우리나라 으뜸마을 함덕리 (1990)<지명2>, 김민규의 조천읍지 (1991)<지명3>, 제주학연구소의 북제주군 지명 총람 (2006)<지명4> 등이 있다. 이외에 1980년대 중반에 각 초등학교에서 향토 교육 자료로 만든 향토지 도 참고할 수 있다 후부요소 지명의 후부요소로는 한자어 峰(봉), 岳(악), 城滄(성창), 童山 (동산), 水(수), 旨(지) 등을 확인할 수 있고, 고유어 드르, 르, 오 롬 오룸, 못, 물, 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후부요소 橋[ 리] 歸龍[구릉 구룽] 童山[동산] 한 자 어 조선지지자료 의 지명 예 *同水橋(동수교)의 橋(교)는 리>다리 [橋] 와 관계가 없다. 同水橋(신촌) 北歸龍(함덕) 烟臺童山(함덕), 霹靂童山(함 덕) 등 門(문) 金城門 (함덕: 금성물?) 峰(봉) 元堂峰(신촌), 峰?)(함덕) 등 漵(서) 新城滄(신촌) 世美[세미] 沙世美(와흘) *金城門(금성문)의 門(문)은 믈>물 의 변 음을 반영한 듯하다. 屛牛峰(犀牛 文漵(신촌) 城滄[성창] 水[물] 비고 桶水(신촌), 亭子水(신촌), 高 水(신촌) 등 *文漵는 문서못 문 수물 의 표기이므로, 漵(서)는 지명의 후부 요소라 할 수 없다.

189 188 地名學 17 (2011) 岳[오롬] 場(장) 田[밧 왓] 酒幕(주막) 池[못] 旨[ 르] 川[내] 朝天場(조천) *場(장)은 목장의 뜻 과 시장의 뜻이 있는 데, 朝天場(조천장)은 시장을 뜻한다. 質田(함덕), 思理田(대흘), 大 屈田(대흘), 邊田(대흘), 屛牛 邊田(犀牛邊田?)(함덕) 등 槐水酒幕(신촌 조천) 槐池(함덕), 伐元池(조천), 長 池(조천), 水口池(함덕), 卞大 池(선흘), 松南池(선흘), 堂岳 池(와산), 廣池(와흘) 등 元南旨(신촌), 攸久旨(조천), 烏 鳴伊旨(조천), 東長旨(함덕), 西 長旨(함덕), 南先旨(함덕), 爵貴 南旨(함덕), 靑鳥旨(함덕) 등 前川(교래) 坪[드르] 長坪(신촌), 蓮井坪(신촌) 등 坪[벵디] 江南坪(북촌) 大水浦(신촌), 東浦(신촌), 康 任浦(함덕), 沙浦(함덕), 大浦 (북촌), 撿時浦(북촌) 등 浦[개] 고 유 어 上所幕尼岳(선흘), 下所幕尼岳 (선흘), 巨文岳(선흘), 夫大岳 (선흘), 少用岳(선흘), 雨陣低 飛岳(선흘), 堂岳(와산선흘양 리) 등 澤[못] 如銀澤(신촌) [浦] 창 (조천) 드로 사시드로(북촌) 드르[野 坪] 발이드르(신촌), 빌 드르(북 촌) 등 못[池] 윳남못(와흘), 버들리못(대흘), 돌리못[함덕] 등 * 드로 는 로>도로 의 변음인 듯하다.

190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89 물[水] 르[旨] 빌 산전(山田) 슐[藪] 오롬 / 오룸 왓 * 공고물 은 물[水] 과 관계된 말이 아니라 공고물(북촌), ᆯ물(교래) 등 르[旨] 의 변음이 다. 먼남 르(와흘), 남 르(북 촌), 왕 르(북촌), 작빈 르 (북촌), 주장이 르(북촌), 보 미 르(북촌), 신잰 르(북촌) 등. 상동남빌 (함덕) 범구산전(교래) 개남슐(교래) 노리오롬(대흘), 넙지리오롬 (교래), 돔배오롬(교래), 놉새 리오롬(교래), 등 / 거시 오룸 (와흘) / 산굼모리(교래), 말찻 (교래), 사 라 (교래) 등 얏왜골왓(교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산굼모리(산굼모리오롬) 와 말찻(말찻오롬) 등과 같이 지명의 후부요소인 오롬 을 생략해 부르거나 표기한 것, 文漵(문서: 문서못 문세물 문수물)와 같이 못 물 을 생략한 지 명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同水橋(동수교)와 같이 지명 후부요소가 橋(교)로 표기되었 기 때문에 고유어 교 또는 리[橋] 를 표기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지 조사를 통한 음성형은 동수 르>동수 또는 동시 르>동시 등으로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同水橋(동수교)의 橋(교)는 음가자나 훈독자가 아니라, 르 의 변음 리 를 반영한 훈가자 표기라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峰(봉)으로 표기한 오롬과 岳(악)으로 표기한 오롬도 본

191 190 地名學 17 (2011) 디 이름은 주로 오롬 으로 불렸던 것이므로, 지명의 후부요소로 표기가 다른 것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소위 지명의 복수 표기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명 표기 자료를 통한, 지명의 후부요소를 파악할 때는 생략해서 표기한 것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부요소 지명의 전부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확인된다. 전부요소 巨文[검은] 廣[넙은] 동 사 형 조선지지자료 의 지명 자료집 예 지명 예 巨文岳(선흘) 廣池(와흘) 기타 거문이오름 <지명 1> 너부못(와흘) <지 명1> *槐池(괴지)는 괴못(조천) <지명 고인못 고연 1> 못>궨못 의 표 궤못 <지명2> 기이다. 槐[궤] 槐池(함덕) 大[큰] 大浦(북촌), 大屈田 큰개성창 (대흘) 큰-[大]+-ㄴ 믜-(미-/禿)+ㄴ 리-/ 리-+思理[사리/사린] 思理田(대흘/野坪) ㄴ 남선모루 <지명1> 남 [ 木 ] + 서 先[선] 南先旨(함덕) 남선 루 <지명2> [立]+-ㄴ+ 남선 르 <지명4> 르 長坪(북촌), 東長旨 진모루(함덕) <지 질-[長]+-ㄴ+ (함덕), 西長旨(함 長[진] 명1> 르 덕), 長池(조천) 敏[믠>민] 敏岳(선흘) 質[질] 質田[(함덕) 질왓(함덕) <지명 질-[粘]+-ㄹ+ 1> 왓[田]

192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91 도로못(함덕) <지 돌리-+-못 명1> * 여우란 르 의 란 은 난 란 여우란 르(교래) [生] 의 변음인 듯하다. 강남뱅디(북촌) 江南[강남] 江南坪(북촌) 강남 <지명1> 강림사, 강녕개 감 녕개 강림개 <지 명1> 康任(강임/강님) 康任浦(함덕) 강님(?) 강영개 <지명2> 강녕개(함덕), 강림 사터 <지명4> 검석개(북촌) <지 명1> 檢時(검시/검싯) 檢時浦(북촌) 검시+ㅅ+개 검서개(북촌) <지 명3> *高水(고수)와 槐水(괴수)는 궷물 의 표기, 槐池(괴지)는 명사 高水(북촌) 굇물(북촌) <지명 궨못 의 표기이 형 高 槐[궤] 槐水(신촌 조천) 1> 다. 궷물 의 궤 槐池(함덕) 는 바위굴, 궨 못 의 궨 은 괴 -[瀦]+-ㄴ 의 뜻이다. 古便尼[궤페니] 古便尼岳(교래) 궤페니 금성문(함덕) <지 명1> 금성+문(물?) 金城(금성) 金城門(함덕/野坪) 금성물(조천) <지 명1> 돌리- 돌리못(함덕) 南(남) 南先旨(함덕/野坪) 남선모루(함덕/대 남+선+ 르 흘) <지명1> 大屈田(대흘리) 큰굴왓(선흘) <지 큰+굴+왓 명1> 大屈(큰굴)

193 192 地名學 17 (2011) 大水[큰물] 大水浦(신촌) 東(동) 東浦(신촌) 牧之(목지) 伐元(벌원) 牧之童山(북촌) 伐元池(조천) 큰물, 큰물성창 <지 명4> 동개머리(신촌) <지명1> 목지동산(북촌) <지명1> 벌논못(조천) <지 명1> 벌원못(조천) <지 명3> 벌연못 펄연못(조 천) <지명4> 큰+물+성창 동(東) 목 (목지)+동 산 벌원+못 卞大(변대/벵듸) 卞大池(선흘) 벵듸+못 북굴흘(함덕) <지 北(북) 北貴龍(학덕/野坪) 명1> 북(北) 북구랭이 <지명2> *如銀澤(여은 如銀(여은) 如銀澤(신촌) 택)은 여웃못 의 표기이다. 大川尼岳(와산 선 大川尼[대처니] 대처니 흘) *邊田(변전)은 벤밧 의 표기이 邊[벤] 邊田(대흘/野坪) 다. 베-[重]+ㄴ+밧[田] 夫大岳 부대오름 夫大(부데) 夫大岳(선흘) 부데 <지명1> 바매기, 웃바매기, 所幕尼[바메기] 所幕尼(선흘) 바메기 알바매기 <지명1> 沙閑尼[살한이] 沙閑尼岳(교래) 北(북) 北歸龍(함덕) 살란이 <지명1> 살라니 북굴흥(함덕) <지 명1> 북구랭이(함덕) <지명2> 북+굴흥(구룽) 북구룡(신흥) <지 명4> 부끄랭이(함덕) <지명4>

194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93 廣地[광지] 堂(당), 堂岳[당오롬] 同水[동수] 明堂[명당] 文漵(문서) 廣地童山(조천) 광지동산 <지명1> 堂岳(와산 선흘), 당오름 당악(堂 堂岳池(와산) 岳) <지명1> 동수동 동시모르 <지명1> 同水橋(신촌) 동수동 동시 르 <지명4> 맹당머르(북촌) 明堂旨(북촌) <지명1> 문서 문서못 문 文漵(신촌/川池名) 수물 <지명1> 反月[바눨] 反月岳(와흘) 房尼[방이] 房尼岳(교래) 霹靂[벽력] 霹靂童山(함덕) 思尾[ 미>세 미] 沙 思美岳(대흘) 沙世美(와흘/川池) 松南[솔남>소남] 松南池(선흘) 烟臺[연 ] 烟臺童山(함덕) 蓮井[연정이] 蓮井坪(신촌) 元南[원남] 元南旨(신촌) 元堂[원당>웬당] 元堂岳(신촌) 鶯[굇고리> 鶯岳(대흘) 리] 攸久[유구] 攸久旨(조천) 광지+동산 신당(神堂) 동수(동물/동 물통) 멩당(明堂) 문서 바능오롬>바농오롬 바농/바늘 방아오름(교래) <지명1> 벼락동산(신흥) <지명4> 베락동산(조천) <지명4> 새미오름 소미오 름 천미악 은미 악 <지명1> 방아[臼 舂] 벽력(霹靂)>벼 락 / 베락 미 > 세 미 [泉] 새+세미 소남(소낭: 소 나무) 연디못 <지명2> 연 (연대) 연정이(연젱 이) 원넘(원남?)+ 원너머르 <지명1> 르 새웬당 <지명1> 원당>웬 굇고리[鶯] 는 것구리 의 변음 으로, 鶯을 뜻하 는 말이 아님. 孺久洞(조천), 바구 머르(조천) <지명 바구(바그)+ 1> 르 바구머르 <지명4>

195 194 地名學 17 (2011) 烏鳴伊[오명이] 烏明伊旨(조천) 柳枝南[유지남] 柳枝南旨(북촌) 爵貴男[자귀남] 爵貴男旨(함덕) 亭子 亭子水(북촌) 외멍이머리(조천) <지명4> 유지남모르 <지명 1> 자구낭머르 <지명 1> 정지물(북촌) <지 명1> 助仁納 助仁納(교래) 之奇里岳, 大地氣理 地氣理[지기리] 岳, 小地氣理岳(와 흘) 地境[지경] 地境野(북촌) 靑鳥[청조] 靑鳥旨(함덕) 沙[몰레 모살] 沙浦(함덕) 帽[사모] 帽岳(교래) 通[통] 桶水(조천) 지경 청조머르(신흥) <지명1> 청주머르(조천) <지명1> 청조(靑鳥)>청 청조마르 청조 주 르(신흥) <지명4> 청조 루(조천) <지명4> 한모살 <지명2> 모살[沙] 모살개 <지명4> 紗帽(사모) 통 노리 노리오롬(대흘) 개남 거시 정 (정지) 지기리 공고 강럭골 유지남(유자나 무) 자귀남(자괴나 모>자귀나무) 조린납 가시남모르(함덕) <지명1> 가시남 르(함덕) 가시남 루 <지명 2> 강탁굴(북촌) <지 강럭골드르(북촌) 명3> 개남슐(교래) 개남술 <지명1> 구그네오름 기시 거시 오룸(와흘) 네오롬 <지명1> 공고물(북촌/野坪) 가시남 외멍이(?) 가시남(가시나 무) 강럭(?)+골+ 드르 개남 거시 /구그네 (고무래) 공고(?)+물 노 리 ( 노 루 노리오름 <지명1> [獐])

196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95 놉새리 놉새리오롬(교래) 놉새리(?) 돔배 돔배오롬(교래) 돔배오름 돔바름 돔베(도마) <지명1> 먼남 먼남 르(와흘) 먼나머르 <지명3> 멋남(먼나무) 남 남 르(북촌) 베남(배나무) 창 창 (조천) 창+ 발이 발이드르(신촌) 발리 루 발리도 바리[鉢] 루(신촌) <지명1> 버들리 버들리못(대흘) 버드르못(대흘) 버 들 리 ( 버 드 <지명1> 르: 버들) 범구 범구산전(교래) 벙구산전 <지명1> 범구(벙구?) 보미 보미 르(북촌) 빌 빌 드르(북촌) 사시 사시드로(북촌) 산시 산시 르(함덕/野 坪) 상동남 상동남빌 (함덕) 손한이 손한이 르(함덕) 수군 수군 르(함덕) 신잰 신잰 르(북촌) 보미(등겨)+ 르 빌레+드르 사시(?)+ 르 (드로) 삼수 삼수 삼수몰 삼수 머르(함덕/마을) <지명> 삼싯머리 <지명2> 상동낭빌레 <지명 1> 존한이모루 준한 이모루(함덕) <지 명1> 나니 루 즌나 니 루 <지명2> 존하니모루당 <지 명3> 죽은디모루(함덕) <지명1> 산시(삼수?)+ 르 상동남(상동나 무) 손하니(존하 니?) 숙은데(숙은 디) : 숙은 곳 신재(신자)+ㅅ

197 196 地名學 17 (2011) 얏왜골 여우 왕 우 이 윳남 얏왜(양에?)+ 골+왓 여우[ 狐] +난 [出]+ 르 얏왜골왓(교래) 여우란 르(교래) 왕모루(선흘) <지 명1> 우랭이(함덕/들) 우 이(함덕/野坪) <지명1> 윤남못, 윤남동산 윳남못(와흘) <지명1> 왕 르(북촌) 왕[王]+ 르 우렝이 윤남(윤노리나 무) 재공(제공)+ 르 공 공 르(와흘) 재공 <지명1> 작빈 작빈 르(북촌) 잣병모루 잣빈모 잣병(잣빈)+ 루(선흘리) <지명 르 1> 주장이 주장이 르(북촌) 주젱이 후 후릉(조천/川池名) 후릉(굴흥?) 물(교래/野坪名) (?)+물 기타 3. 지명 조사와 표기 분석 해석의 문제 지명 조사와 표기, 분석, 해석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 든 모든 자료를 대상으로 하여 논의하는 데는 분량에 제한이 있다. 그러므로 몇 개의 예를 바탕으로, 지명 조사를 한 뒤에 기록을 할 때 표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조사한 자료가 과연 본디 소리를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변음을 반영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할 때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등을 검토하도록 한다.

198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金城門(금성문)? / 금성물?(함덕리)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금성문(金城門) 으로 전하는 지명이 있다. 野坪名 : 金城門 (함덕리) < 조선지지자료 제주군, 신좌면> 금성문 [들] 배아리 서남쪽에 있는 들. < 한국지명총람 (1986) 권16:454> 금성문(禁城門) 병문(兵門) 남문기 동문 : 모두 옛 현(縣) 시절에 문이 있었던 장소인 듯. <제주의 마을 ③ : 함덕리(1986: 43)> 금성물 [밭] 만세동산 동쪽에 있는 밭. 금성물이 있음. 금성물 [우물] 금성물에 있는 우물, 부근에 조천관성이 있었음. < 한국지명총람 (1986) 권16:449> 金城門(금성문)이라 표기한 함덕리 지명의 실제 이름이 금성문 인지, 금성물 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문(門)과 물[水 池]은 기본적으로 다르다. 필자는 본디 금성물 로 부르던 것이 나중에 금 성문 으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고려시대에 설치된 함덕현(咸德縣)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 은 속현이기 때문에, 이 당시에 조선시대의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과 같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함덕현의 현청 대문이 이 곳에 있었다는 데서 붙인 것이라는 설명은 지나친 비약인 듯하다 攸久旨(유구지), 攸久洞(유구동), 바구 르>바구머르>바구머리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남서쪽에 바구 르>마구머르 로 전하는 지 명이 있다.

199 198 地名學 17 (2011) 野坪名 : 攸久旨(조천리) < 조선지지자료 제주군, 신좌면> 바구머르 [마을] 웃동네. 바구머르 [산] 상동 남쪽, 국민학교 앞에 있는 산. 웃동네 상골, 상동, 바구머르, 유구동 [마을] 조천의 위쪽 마을. 유구동(攸久洞) [마을] 웃동네. < 한국지명총람 (1986) 권16:450> 바구머르 [밭] 자바니머들 동쪽, 언덕머르(마루)에 있는 밭. < 한국지명총람 (1986) 권16:446> 攸久洞 : 上洞, 바구머리, 찻대거리 찻대거리 나무 세 자루를 가지고 뚜들다. 머리[旨] - 바구머리 : 신안동에 가는 길 남쪽 동편. < 조천읍지 (1991: )> 바구머르 : 조천리 2258, 2265, 2268번지 일대의 동산 이름이다. < 북제주군 지명 총람 (2006:252)> 이곳의 지명은 예로부터 바구 르>바구머르>바구머리 또는 바 그 르>바그머리 바긋 르>바긋머리, 바그 릇동산>바그머릿동산 등으로 부르던 곳으로, 한자차용표기로 攸久旨(유구지)로 표기하게 되었다. 이 일대에 동네가 형성되면서 그 동네를 바그 릇동네 바 구 릇동네 바구머릿동네 라 부르고, 한자로 攸久洞(유구동)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한자 표기 攸(유)는 바 의 훈가자로 쓰인 것이므로 읽을 때 유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더욱이 아직도 고유 지 명으로는 바그 르>바그머리 또는 바구 르>바구머리 라 하고 있 는데, 이곳 일대에 형성되었던 동네를 攸久洞(유구동)이라 하는 것 은 문제가 있다. 곧 攸久洞(유구동)은 바그 릇동네>바구 릇동네> 바구머릇동네>바구머릿동네 를 한자를 빌어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 다.

200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199 민간의 음성형에서는 바그-- 또는 바구-- 로 실현되는데, 그 음 성형도 불확실하고 그 뜻을 추정하기도 어렵다 同水橋(동수교) / 동수 리 동수 르 동수 로>동시 리 동시 르 동시 로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 동수 리>동시 리 또는 동수 로>동 시 로, 동수 르>동시 르 등으로 전하는 지명이 있다. 野坪名 : 同水橋 (신촌리) < 조선지지자료 제주군, 신좌면> 種時洞 チョン シー ドン <일제강점기 1:5만 지형도> 동수동 종시모르, 종시동, 동시모르 [마을] 신촌 남쪽 언덕 마루 밑에 있 는 마을. 동시모르 [마을] 동수동. 종시동(宗時洞) [마을] 동수동. 종시모르 [마을] 동수동 < 한국지명총람 (1986) 권16:446> 동수동(종시동) : 지금부터 120여 년 전 설촌된 부락으로, 이 부락에는 동수 라는 못이 있기로 못 이름을 따서 동수동 혹은 종시동이라 부른다. < 조천읍지 (1991:186)> 동수동 : 신촌리 1423번지 일대이다. 동수라는 못이 있어 이 못 이름을 따서 동수동 혹은 조시동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시 르 (혹 은 종시 르 )라고 하는 고유 지명을 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 르 : 동수동 일대를 말한다. 종시동 동수동 종시 르 동수동 < 북제주군 지명 총람 (2006: )> 同水洞(동수동) 東水洞(동수동) > 東水洞(동수동) <동수동 복지회관 비석>

201 200 地名學 17 (2011) 이곳의 지명은 예로부터 동수 리>동수 로 동수 르 또는 동 시 리>동시 로 동시 르 등으로 전해온다. 동시 르 는 동시 르 일대의 마루를 이른 말이거나, 동시 르 를 잘못 쓴 것으로 추 정된다. 조선지지자료 에서 확인되는 同水橋(동수교)의 표기를 고려하 면, 동수 리 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 서쪽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자그마한 내(종잇내)가 흐르기는 하지만, 이 내에 있는 리(다리: 橋)를 일컬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의 지명 자료집 일부에서 동수 라는 못이 있었다는 것을 단서 로 잡을 수 있다. 이 동네에서 지명 조사와 수집을 하면, 동수 라는 물 이름은 확인할 수 없고, 동수동 복지회관 바로 앞(지도 방위상 서쪽)에 물통 4개가 있었는데, 예전에 이것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 다. 이 물통을 예로부터 동통 이라 불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동통 을 동물 또는 동물통 으로 인식하고 차자 표기로 同水(동수) 또는 東水(동수)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촌리 동수동 복지회관 주변에 있는 묘비에서 同水洞(동수 동)과 東水洞(동수동), 그리고 東視月(동시월) 同示月(동시월) 등 의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東視月(동시월)과 同示月(동시월)은 동 시 (동시 르) 의 한자차용표기이다. 특히 同示月(동시월)은 광무 을사년(1905)에 세운 비석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1905년 전후에 이미 동시 (동시 르 동시 로) 로 실현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초반에 이미 동수 는 소리가 변하여 동시>종 시 로 실현되고, 나아가 종시 롯동네 로 실현되면서 한자로 種時洞 (종시동)으로도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202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손하니 르 / 존하니 르 조천읍 함덕리 남쪽에 손하니 르 또는 존하니 르 로 전하는 지명이 있다. 조선지지자료 에는 손한이 르 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지명총람 16 (전남편Ⅳ 제주편)에는 존한이모루 준한이모루 등 이 등재되고, 제주의 마을 시리즈③ : 함덕리 에는 나니 루 즌나니 루 존한이모루 등이 등재되어 있다. 이 일대의 묘비에는 尊漢旨(존한지), 尊漢伊旨(존한이지), 尊閑伊 旨(존한이지)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모두 존하니 르>존하니 루 를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지지자료 에서 손한이 르 라 표기했기 때문에, 존 하니 르( 하니 르) 와 비교할 때 첫소리에서 차이가 난다. 조선 지지자료 는 1910년 초반의 자료이다. 하지만 이 일대의 묘비에 표 기된 지명과 민간에서 전하는 음성형을 아울러 고려할 때 본디 이 름은 존하니 르( 하니 르) 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소리의 변음 중 하나가 손하니 르 이고, 다른 하나는 나니

203 202 地名學 17 (2011) 르 즌나미 르, 준하니 루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지지자료 의 손한이 르 는 제대로 된 표기라고 할 수 없다. 존하니 르 는 존하니 와 르> 루 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존하니 는 존하+니 또는 존한+이 로 분석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존하 또는 존한 의 뜻을 쉽게 찾을 수가 없기 때문 에다. 하니 는 하님 의 변음일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존하니 를 단 일어이든 합성어이든 하나의 단어로 판정하고, 이것이 본디 소리인 지, 변한 소리인지 등을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뜻을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沙世美(사세미) / 새세미 조선지지자료 를 보면, 와산리에 沙世美(사세미)로 표기한 지명 이 있다. 표기를 바탕으로 언뜻 추측하면, 世美(세미)는 >샘[泉] 의 제주어 세미 의 표기로 보인다. 沙(사)는 음차자인지 훈차자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기존에 조사된 자료에서 이에 대응하는 고유 지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김민규의 조천읍지 제10장 와산리 편을 읽다 보면, 오늘날 부락의 형성과정을 보면 눈산 당오름에 샘물이 있고, 또 새 샘이 있어 그 영향으로 토질이 비옥하다고 본다. 는 문장에서 새샘 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새샘 이 沙世美(사세미)에 대응하는 표기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沙世美(사세미)의 沙(사)는 관형사 새 에 >샘[泉] 의 제주어 세미 가 결합한 새세미 의 차자표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흘리에 있는 오롬 중에 思尾岳(사미악)으로 표기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미오롬>세미오롬 을 표기한 것이다. 이 경

204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203 우에는 思尾(사미)가 > 미 // >세미[泉] 의 표기로 쓰였다 沙閑尼岳(사한니악) / 하니오롬>살라니오롬 조선지지자료 를 보면, 교래리에 沙閑尼岳(사한니악)이 있다고 했다. 이 오롬에 대응하는 고유어 이름은 오창명(2007)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다른 기존 자료집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다만 沙閑尼岳(사한니악)의 沙閑尼(사한니)에 대응하는 소리는 한국지명총람 16 (1986:444)에서 찾을 수 있다. 살란이[마을] : 살란이(군 산천) 밑에 있는 마을. 한국지명총람 16 (1986:444) 이 설명을 참고하면, 살란이[살라니] 라는 오롬도 있고, 그 밑에 형성된 마을을 살란이 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군(북제 주군) 산천 조에서 살란이 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오롬은 일찍부터 민간에서 인식되어 불러왔을 뿐만 아 니라, 그에 대한 차자 표기를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 (1703) 산장구마 (1702)를 보면, 맨 위에 城板岳 (성판악)이 있고, 그 밑에 孤片岳(고편악)이 있고, 그 밑에 鄒多岳 (추다악)이 있다. 이 鄒多岳(추다악)이 沙閑尼岳(사한니악)에 대응 하는 표기이다. 또한 18세기 제주삼읍도총지도 를 보면, 城板岳(성판악) 바로 밑에 舍羅岳(사라악)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舍羅岳(사라악)이 沙閑 尼岳(사한니악)에 대응하는 표기이다. 1899년의 제주지도 를 보면, 古片岳(고편악) 동쪽에 米漢峯(미

205 204 地名學 17 (2011) 한봉)과 小紗羅峯(소사라봉)으로 표기한 오롬이 있는데, 이 米漢峯 (미한봉)과 小紗羅峯(소사라봉)이 沙閑尼岳(사한니악)에 대응하는 표기이다. 결국 이 오롬은 鄒多岳(추다악), 舍羅岳(사라악), 米漢峯(미한 봉), 沙羅峰(사라봉), 沙閑尼岳(사한니악) 등으로 표기했다. 이 한자 표기들은 민간에서 전하는 산라니[살라니] 또는 살라니 라는 음성 형을 고려해서 해독하면, 동일한 이름의 본디 이름 또는 본디 이름 의 변음을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鄒多岳(추다악)은 한이오롬>살한이오롬 의 표기이고, 舍羅岳 (사라악)은 살라니오롬 의 표기이고, 米漢峯(미한봉)는 하니오롬 의 표기이고, 小紗羅峯(소사라봉)은 족은살라니오롬 의 표기이고, 沙閑尼岳(사한니악)은 살하니오롬 의 표기이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오롬을 살라니 또는 살라니오롬 이라 부 르고 있는데, 오늘날 지형도에는 엉뚱하게 궤펜이오름 으로 표기되 어 있다. 또한 국토지리정보원에 엉뚱한 이름이 등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엉뚱한 위치에 전혀 다른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것 은 제주도 지형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제주도 지명 조사를 철저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 제주도 지명 관계자가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것, 제주도 지명 위원회에 서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는 것 등 제주 지명 조사와 표기에 있어 서 총체적 부실 또는 오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屛牛峰(?) / 서모오롬 // 屛牛邊田(?) / 서모 벤밧 조선지지자료 를 보면, 함덕리와 북촌리 경계에 屛牛峰(병우봉) 이 있다고 하고, 또한 북촌리에 屛牛邊田(병우변전)이 있다고 했다.

206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205 여기서 屛牛峰(병우봉)은 오늘날의 犀牛峰(서우봉)을 잘못 표기 한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표기부터 함덕리에 있는 서모오 롬 을 犀牛峰(서우봉)으로 표기했다. 그러므로 屛牛峰(병우봉)은 犀 牛峰(서우봉)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한편 犀牛峰(서우봉)은 고유어 서오오롬>서모롬 서모름 의 한자 표기인 西山岳(서산악)을, 민간의 풍수 사상인 물소가 물에서 뭍으 로 오르는 듯하다는 데서 犀山岳(서산악)으로 표기하게 되고, 나아 가 犀山岳(서산악)을 犀牛岳(서우악)으로 표기한 데서 생겨난 것이 다. 더욱이 조선 초기에 서모오롬 북쪽 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고, 이 봉수를 서모봉수 라 하고 한자로 西山烽燧(서산봉수)라 했는데, 나중에는 西山烽(서산봉)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100여 년 전에 봉수 를 폐지하면서 西山烽(서산봉)을 犀牛峰(서우봉)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屛牛峰(병우봉)은 犀牛峰(서우봉)의 잘못이고, 犀牛峰 (서우봉)은 본디 이름은 서모오롬의 차자 표기 西山岳(서산악)을 민간에 풍수 사상을 반영한 표기이다. 한글학회(1986:406)에서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모 서산봉대, 서산봉수, 서산악, 서우봉 [산] 조천면 함덕리와 북촌리 경 계인 바닷가에 있는 산. 높이 111.3m. 조선 때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은 입산(笠山)에 응하고 서쪽은 원당 봉수에 응하였음. 서산봉대 [산] 서모. 서산봉수(西山烽燧) [산] 서모. 서산악(西山岳) [산] 서모. 서우봉(犀牛峰) [산] 서모.

207 206 地名學 17 (2011) 도서출판 반석의 우리나라 으뜸마을 함덕리 (1986: 41)을 보면, 벤밭: 犀牛峰 남쪽 밭 이름. 北村과의 경계 라고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 에서 확인되는 屛牛邊田(병우변전: 犀牛邊田의 오 기)의 邊田(변전)의 제주어 벤밧 의 차자 표기이다. 밭에 자갈이 많 고 흙이 굳어져 갈기에 어려운 밭이라는 데서 벤밧 이라 부른 것이 다. 결국 屛牛峰(병우봉)은 犀牛峰(서우봉)의 오기이고, 犀牛峰(서 우봉)은 본디 이름이 아니다. 또한 屛牛邊田(병우변전)은 犀牛邊田 (서우변전)의 오기이고, 犀牛邊田(서우변전)은 犀牛峰(서우봉) 邊 田(변전)을 표기한 것이다, 邊田(변전)은 벤밧 의 차자표기이다. 벤밧 은 밴밭 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고, 지형도에는 뱀밭 으로 도 표기했는데, 표기로 볼 때는 형태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형태 분 석과 의미 파악에 주의해야 한다. 4. 마무리 모든 지명 조사와 수집, 그리고 표기 또는 기록이 그렇듯이, 민간 에서 전하는 음성형을 정확하게 적기는 매우 어렵다. 더욱이 본디 소리를 한글로 적고, 소리 나는 그대로 적지 않는 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자 표기든 한글 표기든 필자의 주관을 가 미한 표기는 제대로 된 지명 표기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한글맞춤법 을 적용한 표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한자를 빌어 표기했을 때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명 조사자도 방언 조사자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에 대한

208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207 음성 또는 음운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하고, 음성을 어 떤 글자로 어떻게 적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존의 지명을 적은 고문헌이나 고지도는 물론, 우리가 살펴본 조선지지자료 의 지명 대부분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 한자 표 기들은 대부분 매우 불완전하게 표기되거나 온전하게 표기되지 않 았다. 또한 지명을 조사하여 기록한 사람들도 민간의 음성형을 온전 하게 반영한 경우가 많지 않다. 나아가 향토학자들이 조사해서 기록한 지명 자료집의 경우도 민 간의 음성형을 온전하게 기록한 것이 많지 않다. 지명을 연구할 때 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비교적 온전한, 본디 소리(음성형)는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표기할 때는 온전한 소리를 어느 정도 반영해서 써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지명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도 비교적 온전하게 본디 음성형을 조 사한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변이음을 대상으로 한다든가, 변 이음을 불완전하게 기록한 지명 자료집을 대상으로 할 때는 여러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 를 비롯한 옛 지명 자료집을 분석할 때도, 그리고 기존의 지명 자료집을 분석할 때도, 위와 같은 것을 고려해서, 새로 이 분석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209 208 地名學 17 (2011) 참고문헌 김민규(1991), 조천읍지, 도서출판 제주문화. 도서출판 반석(1986), 제주의 마을 ③: 함덕리. 북제주군 (사)제주학연구소(2006), 북제주군 지명 총람 下. 오창명(2007), 제주도 지명 연구(1) :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군 중면 지명을 중심으로, 영주어문 13집, 영주어문학회. 오창명(2007), 제주도 마을 이름의 종합적 연구 Ⅰ Ⅱ, 제주대학교출판부. 오창명(2007), 제주도 오롬 이름의 종합적 연구, 제주대학교출판부. 일제강점기 1대 5만 지형도(1918) 한글학회(1986), 한국지명총람 16: 전남편Ⅳ 제주편. 한글학회(1986), 한국지명총람 16: 전남편Ⅳ 제주편 도서출판 반석(1990), 제주의 마을 ③ : 우리나라 으뜸마을 함덕리

210 조선지지자료 의 제주 지명(1) 209 Abstract The Jeju place name having been used for to a Joseon-Jiji-Jaryo(朝鮮地誌資料) - Around the Jeju-gun Sinjwa-myeon place name - Oh, Chang-Myoung The papers studied by the place name of Jeju-gun(濟州郡) Sinjwa-myeon(新左面) of Joseon-Jiji-Jaryos(朝鮮地誌資料, 1911). A main purpose of this paper analyzes a decipher, a form of the place name to of Korean theories by the Jeju place name, and be to grasp meaning. Specially, I studied around the place name to have belonged to Jeju-gun Sinjwa-myeon, at that time to be built name native the unique meaning of a word. Flat of the too native place name about anything. And the Jeju place name analyzes no matter how much to of Korean theories, and studied about Variance sound. And relevant place name studied whether or not there was about thing corresponding to now which name. Advanced, and meaning of the place name tries to have would light up what there was about. A Joseon-Jiji-Jaryo can confirm the Jeju place name 110, if arrange, 72 Chinese character notation(65%) rises during these, and 38 Korean notation(35%) rises during these. If 同水橋(Dongsugyo) seems to be related 리>다리[橋: with a

211 210 地名學 17 (2011) bridge] when see by notation. However, it nominates in practice, and be by Chinese character borrowing notation of the same number to things unrelated to 리>다리[橋: with a bridge] and can know if check. Also, 同水(Dongsu) is thing related to 동 물통(Dongmultong). And can know thing that (Doro)> 로 르 는 was related with 르겡이 렝이(the field which is not large). Key-words : Joseon-Jiji-Jaryo(朝鮮地誌資料), Jeju-gun(濟州郡), Sinjwa-myeon(新左面), Jocheon-eup(朝天邑), The Jeju place name, Chinese character borrowing notation. 성명 : 오창명(吳昌命) 주소 : (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만덕로 3길 26 현대아파트 108동 701호 전화 : 전자우편 : garinyeo@naver.com 이 논문은 2011년 10월 31일 투고되어 2011년 11월 01일부터 12월 1일까지 심사하고 2011년 12월 3일 편집회의에서 게재 결정되었음

212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 봉황형국을 중심으로 ** 천인호 74) 국문요약 본 연구는 풍수의 형국론이 지명형성에 미친 영향을 봉황형의 산 과 마을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지명은 사회계약적 성격을 가지 고 있으며, 특징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역사, 전설, 민속, 종교, 가치관 에 의해 이름 붙여지고 변화한다. 지명이 문화 역사의 산물이라면 우 리 고유의 문화 중의 하나인 풍수도 지명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 로 추측 할 수 있다. 동양에서 봉황은 상서롭고 귀한 상상의 새이다. 봉황은 고고한 인 품의 인격자, 성군(聖君) 더 나아가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전국적으로 산재(散在)한 봉황관련 134개의 산과 마을을 조사한 결과 봉황형의 산이나 마을에는 봉황이 날아가지 않고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 지 방책이 지명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봉황형의 산이나 마을에는 봉의 먹이로서 대나무, 봉의 서식처 로서 오동나무의 지명이 있었으며, 봉황이 마시는 물을 의미하는 지 명이 있었다. 따라서 봉황형과 관련된 지명에는 풍수 형국론의 핵심 요소인 산(땅)은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생태주의적 인식이 있음을 의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 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 B00859) **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213 212 地名學 17 (2011) 미한다. 이상의 연구결과는 향후 봉황형 지명의 합병, 신설, 개칭 등 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핵심어 : 풍수, 지명, 봉황, 형국론, 봉황형국 1. 서론 지명은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유 명사이며, 지역의 특성에 기반하여 붙여지는 유연성(有緣性)에 근거 하여 만들어지고 사람들 간의 합의에 의해 불러진다. 아울러 지명은 상호 합의하에 유지되는 사회계약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변 하기 않는 보수성이 있다.(도수희, 1991, 23) 또한 지명은 특정인에 의해 붙여지기 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서로 인정하고 불러져야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지명은 유연성과 함께 사회적 계약이 중요한 형성요인이 된다.(조성욱, 2007, 527) 지명은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자 숱한 세월 속에 불러온 가치개념 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특정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역사적 사건, 지리적 조건, 언어학적 조건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에 문화사적 측면에서의 의미도 크다. 또한 지명은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어원은 국어학이나 언어학의 영역이 되겠지만 우리 옛 선인들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 것도 많아 그 자체가 역사가 되므로 역사학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지명은 역사, 지리, 문화, 언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주로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문화학 등의 영역에

214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13 서 연구되었다. 그런데 지명은 시대의 가치관 즉, 문화, 관습 등이 반영되어 변화 하는 복잡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풍수지리나 사상 또 는 종교 등의 사상적 기반 변화와 함께 집단 간의 관계 등의 사회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거나 대체되기도 한다.(권선정, 2004, ) 한국의 지명에는 풍수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들이 많고 풍수적 사 고가 아니면 해석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는 지명이 동 식물, 사람, 사물의 형상을 차용하여 명명된 경우가 많고 이는 풍수적 사 고 또는 풍수의 형국론적 사고에서 해석 가능한 것이 많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본 연구의 주요 관심사인 지명과 풍수지리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강릉지역의 지명 유래를 24가지로 구분한 김기설(1994)의 연구에는 풍수적인 측면에서의 지명형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충북 청주지역의 풍수와 지명의 관련성을 의인화, 의상징동물화, 의가축동물화, 의야 생동물화, 의야생식물화, 의물화, 비보압승 풍수지명으로 분류한 예 경희(2005)의 연구, 전북 진안지방의 풍수지명을 용 혈 사 수 비보진압 형국론으로 분석한 김병균(2006)의 연구가 있었고, 강원 도 양양읍의 명당을 지명유래의 측면에서 분석한 이한길(2008)의 연구가 있었다. 지명과 관련한 연구는 아니지만 풍수 형국론에 관련한 연구로서 먼저 강영조(1996)는 풍수형국 중 용의 모양을 한 용산(龍山)을 대 상으로 지형지상을 고찰하였고, 허준(1998)은 형국론의 의미를 조경 학적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풍수가와 일반인이 느끼는 인식과의 차 이를 정량적 차원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김동찬 김진성 (2000)은 풍수 형국론의 형국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입지적 특성

215 214 地名學 17 (2011) 을 통해 밝히고자 와우형(臥牛形)을 중심으로 기상요소, 지형요소, 풍수구성요소를 비교 분석하였다. 이상과 같은 지명과 관련한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명형 성에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풍수지리의 역할에 대해 규 명한 연구는 드문 실정이었다. 다만 지명과 풍수지리의 관련성에 대 한 연구는 대부분 향토지 등을 조사하여 문헌적 기계적으로 분류 한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지명형성에 있어 고유문화의 하나인 풍수지 리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그 유연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풍수 형국론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동물형국 중 봉황형국 이 지명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담론화 할 것이다. 담론이란 어떤 주제에 대해 토론한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서는 토론을 위한 주제의 제시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주제와 관련 한 선행연구가 극히 미미한 실정에서 이러한 주제를 학계에 제시한 다는 의미에서 분석, 연구보다는 포괄적 의미에서 담론이라는 용어 를 사용하였다. 2. 풍수형국론의 이론적 검토 풍수는 많은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지명형성에 가장 큰 영향 을 미친 것은 형국론으로 볼 수 있다. 형국론은 물형론(物形論) 또 는 갈형론(喝形論)이라고도 하는데 정기 가득한 좋은 땅을 사람, 동 물, 물질, 식물, 문자 등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산천의 겉모양 과 그 안의 정기는 서로 통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보거나 잡을

216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15 수 없는 정기를 구체적인 형상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김광언, 1993, 24). 村山智順(1936,210)은 풍수에서는 물체 유형의 영향에 따라 인간 의 길흉 운명을 정하게 되는데 이러한 관념은 원시시대에 이미 나 타나고 있는 민간신앙의 하나인 유물신앙(類物信仰)으로부터 유래 된 것으로 보았다. 즉 원시인은 자연현상을 해석하려 할 때 가장 이 해하기 쉽도록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을 표준으로 하여 해 석하는 의인화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형국론은 산, 물, 바람 등 모든 것들이 아우러져 형성된 전체적 모습이 인간에게 영향을 준다는 유물신앙의 일종으로 본질적으로 천지인(天地人) 합일 사상에 근거한다. 만물은 독특한 기가 있으며 이러한 독특한 기는 주로 산세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형상을 형국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자리의 기가 어떤 것이며 그 에 상응하여 어떠한 인물이 나올 것인가는 그 혈(穴)과 주변 형국 을 살피면 된다는 이론이다(김두규,2005,717). 형국론은 중국 지가서(地家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우 리 풍수의 독특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풍수의 본질 이론 과는 괴리된 내용임이 분명하다(최창조, 1984, 39). 그러나 형국론은 우주만물의 만상은 이(理)와 기(氣)가 있으며 상(像)이 있기 때문 에 외형물체의 그 형상에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 산천의 모양을 빗대어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풍수의 중요한 주 제이기도 하다. 김광언(1993)이 국내의 마을터와 집터 2,146개소를 조사한 결과 형국의 종류는 모두 266개로서 동물형이 61.27%로 가장 많고, 물질 형이 14.28%, 인물형이 13.53%, 식물형이 8.64%, 문자형이 2.25%로

217 216 地名學 17 (2011) 나타나 동물형 형국이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하였다. 형국론의 속성은 기복적인 신앙과 아울러 생태주의적 사고를 반 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정한 형국에서는 특정한 인물이 탄생한다는 것은 땅의 힘을 빌려 발복하고자 하는 풍수의 신앙과 유사하다. 그러나 형국론의 기본은 산천을 살아있는 유기체(주로 사 람, 동물, 식물 등)에 비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산(땅)을 살아있는 생물체 다루듯이 신중하게 대하고 산천의 인위적인 변경을 극도로 제한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도모하는 생태주의적 사고 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3. 봉황의 의미와 풍수형국에서의 변용 3.1. 봉황의 의미 봉황은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서롭고 귀한 뜻을 지난 상상 의 새로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겼다.1) 봉황 은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을 함께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러나 원래 봉과 황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신조(神鳥)를 의미했고, 한나라 또는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볏이 있는 수컷을 봉 으로 볏이 없는 암컷을 황 으로 지칭하게 되었다.(김주미, 2004, 137) 봉황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韓詩外傳 에 잘 나타난다. 황 1) 四靈以爲畜 故飮食有由也 何謂四靈 麟鳳龜龍之四靈 鳳凰麒麟皆在郊棷 龜龍在宮沼, 禮記, 禮運. 2) 鳳凰 羽族之靈者 其雄爲鳳 其雌爲凰, 書經, 第九章.

218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17 제가 천로(天老)에게 봉황의 모습을 묻자 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 한다. 봉의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기린,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용의 무늬에 거북의 몸, 제비의 턱에 닭의 부리모양을 하고 있다고 답하면서 (봉황은) 다섯 가지 색깔이 다 갖추고 있으며 움직이면 여덟 가지 바람이 나며 기가 응하면 비가 내린다. 그리고 먹을 때도 법식이 있고 마실 때도 풍모가 있으며, 봉황이 떠나면 문이 시작되 고 돌아오면 훌륭한 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봉황만이 하늘의 신지 에 통하고 땅의 영험에 응할 수 있으며 오음을 맞추고 구덕을 갖추 고 있다 3) 봉황의 소응은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山海經 에 다음과 같은 표 현이 있다. 어떤 새는 생김새가 닭과 비슷한데 오색의 무늬가 있고 봉황이라 고 이름한다. 이 새의 머리무늬는 덕, 날개무늬는 의, 등무늬는 예, 가 슴무늬는 인, 배무늬는 신을 뜻한다. 이 새는 먹고 마시는 것이 자연 스럽고 스스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새가 보인다면 천하가 안녕 하다는 것이다 4) 따라서 봉황은 덕 의 예 인 신(德 義 禮 仁 信)이라는 유가(儒家)의 다섯 가지 덕목과 관련되기 때문에 유가의 입장에서 3) 天老對曰 夫鳳象鴻前麟後 蛇頸而魚尾 龍文而龜身 燕頷而雞 延頸奮翼 五彩備明擧動八風 氣應時雨 食有質 飮有儀 往卽文始 來卽嘉成 惟鳳爲能 通天祉應地靈 律五音覽九德, 韓詩外傳, 券八, 四庫全書本. 4) 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 首文曰德 翼文曰義 背文曰禮 膺文曰 仁 腹文曰信 是鳥也 食自然 自歌自舞 見則天下安寧, 山海經, 南山經, 南 次三經, 四庫全書本.

219 218 地名學 17 (2011) 는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다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황을 길조로 판단한다. 이러한 의미는 論語 에 봉황새가 오지 않으며, 황하에서 하도 가 나오지 않으니 그만이다 5)라고 하였는데 봉은 신령스러운 새로 서 순(舜)임금 때 나타나 춤을 추었고 문왕(文王) 때는 기산(岐山) 에서 울었다고 하여 봉황과 하도가 문명의 상징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荀子 에서는 옛날 왕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삶을 좋아 하고 죽임을 싫어하였다. 따라서 봉황이 나무에 열 지어 나타나고 기린은 교외 들판에 있으며 까마귀와 까치의 둥지를 몸을 숙이면서 도 살필 수 있다 6)고 하여 성군이 나타나 태평성대를 이루면 봉황 이 열 지어 나타나 이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봉황이 오동나무와 짝을 이루어 이미지화 된 것은 詩經 에 나타 나 있다.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울도다. 오동나무가 자라니 저 아침 해가 뜨는 동산에서 울도다. 오동나무가 무성하니 봉황의 울음소리 화(和)하도다. 7) 여기서 봉황은 좋은 세상의 현재(賢才) 이고, 조양의 오동은 다스려진 조정의 어진 임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봉황과 오동은 같은 환경 속에서 공생하는 존재로서 동일한 취향 과 품격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또한 봉황과 오동은 주목 할 만한 존숭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유병례, 2009, 206) 봉황은 오동과 짝이 될 뿐만 아니라 먹이로서는 대나무 열매(竹 5)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論語, 子罕. 6) 古之王者 其政好生而惡殺焉 是以鳳在列樹 麟在郊野 烏鵲之巢 可俯而窺 也, 荀子, 哀公篇. 7) 鳯凰鳴矣 于彼髙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菶菶萋萋 雝雝喈喈, 詩經, 大雅, 卷下, 四庫全書本.

220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19 實), 음수(飮水)는 단물만 마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莊子 에 원추(鵷鶵)라는 봉황새가 남해에서 북해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 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 이 나오는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8)고 한다. 따라서 莊子 에는 봉황과 오동, 죽실(竹實)의 관계가 훨씬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대나무 열매는 먹이, 오동나무는 서식처, 예천은 물로 형상화되어 봉황이 깃들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봉황은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고고한 품격을 가진 인격자로 상징되며, 오동은 고아한 품격을 지닌 사물로서 봉황이 좋아하는 대 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유병례, 2009, 206) 그리고 봉황은 잘 다스 려지는 나라에서 나타난다고 하여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인식 되었다. 또한 봉황은 자웅이 서로 정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화목한 남녀의 상징이 되었고, 죽실을 먹고살며 오동나무에 깃든다는 봉황 의 생태와 관련하여 청렴한 선비를 지칭하게 되었으며, 봉황이 새 중의 으뜸이라 하여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데도 사용되었다.(김주미, 2004, 138) 3.2. 풍수형국에서의 봉황형 풍수 형국론에서 봉황형은 전체적으로 화성(火星)의 특징을 가지 지만, 같은 화성의 특징을 갖는 닭보다는 그 규모가 크며, 몸통 부 분은 금성(金星) 혹은 토성(土星)을 그리고 꼬리부분은 수성(水星) 의 형태를 가진다. 錦囊經 에는 소(牛)는 부(富)를 의미하고 봉 (鳳)은 귀(貴)를 의미한다(牛富鳳貴) (최창조 역주,1993,180)고 하 8) 夫鵷鶵 發於南海 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莊子, 秋水篇.

221 220 地名學 17 (2011) 였는데 이는 봉황의 원래의 속성인 고고한 품격의 인격자, 성군의 의미가 풍수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풍수에서의 봉황은 주작(朱雀)으로도 표현된다. 즉 풍수에서 사 신사의 하나인 주작은 단조(丹鳥)라고도 하는데 봉황의 일종이며 남방을 주관한다.(김주미, 2004,1 45) 春秋元命苞 에는 화리는 난새이다.(火離為鸞) 9), 화리는 공 작이다.(火離為孔雀) 10) 화리가 봉황이다.(火離為鳯) 11)고 하여 난새, 공작, 봉황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六家詩 名物疏 에는 봉황은 일명 악작(鸑鷟)이라고 하며 오동이 아니면 살지 않고 죽실이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 하늘에 있는 주작이다. 12)고 하여 봉황과 주작을 동일시하고 있 다. 欽定禮記義疏 에는 사신사의 모습으로 주작이 표현되고 남쪽을 주관한다는 방위의 개념이 나타나는데 현재의 사신사의 방위와 일 치하는 함을 볼 수 있다. 행군할 때 천문을 상징하여 진법을 정하는데 앞은 남쪽, 뒤는 북 쪽, 좌는 동쪽 우는 서쪽이다 주작, 현무, 청룡, 백호가 4개가 별 자리 이름이다 따라서 행군할 때 주작기를 앞에, 현무기를 뒤에, 청룡기를 좌측에, 백호기를 우측에 세우고 초요기를 가운데 세운 다. 13) 9) 太平御覽, 第九百十六, 四庫全書本. 10) 위의 책, 第九百二十四. 11) 六家詩名物疏, 第四十九, 四庫全書本 12) 詩義疏云鳯皇 一名鸑鷟 非梧桐不棲 非竹實不食 非醴泉不飲 在天為朱雀, 위의 책, 第四十九. 13) 明軍行 象天文而 作陳法也 前南後北左東右西也 朱雀玄武青龍白虎 四

222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21 이러한 방위개념은 이후 淮南子 의 天文訓 과 兵略訓 에도 소 개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동방을 창룡(蒼龍), 남방을 주조(朱鳥), 서 방을 백호, 북방을 현무, 중앙을 황룡(黃龍)으로 하여 오신(五神)이 오행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김일권,2001, 120). 풍수의 방위론에서는 봉황이 주작의 형태가 되어 남방을 주관하 지만, 풍수 형국론에서는 봉황 그 자체가 길조가 된다. 따라서 봉 황형의 터에서는 대대로 고귀한 인물이 나온다고 판단한다. 村山 智順(1936,249)은 봉황은 희대의 영조(靈鳥)이다. 만일 이 새가 나타나면 군자가 나오거나 성인이 나온다고 본다. 보금자리로 돌 아옴은 새끼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형의 소응은 성인과 군자가 출생하는 곳으로 대단히 좋은 땅이다 고 하여 봉황형 중 봉황이 둥지를 튼 모양인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에 대해 소개하 고 있다. 특히 봉황은 오색의 깃털을 지니고 오음(五音)을 내며 오동나무 에 깃들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새라 하여 이러한 땅에서는 고 결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 배출된다고 믿었으며, 봉황의 지세에 허결 한 부분이 있을 경우 이를 보완해 주는 비보(裨補)가 행해졌다. 최창조(1997, )는 풍수상으로 봉황의 터가 있으면 봉황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항상 머무를 수 있도록 한 쪽에는 봉황이 서 식할 벽오동나무를 심고, 또 다른 쪽에는 봉황의 먹이가 될 대나무 숲을 일군다고 하였다. 方宿名也 故行 前朱雀而 後玄武 左青龍而 右白虎 招摇在上, 欽定禮 記義疏, 第五, 四庫全書本.

223 222 地名學 17 (2011) 4. 봉황형국과 지명의 유연성 전국적으로 산재한 봉황형국을 조사하기 위해 첫째, 국토지리원 의 국토공간영상정보서비스( 이용하여 봉황과 관련된 지명을 조사하였다. 둘째, 각 지자체의 홈페이지와 향토지 등에 나와 있는 산과 마을 이름 중 봉황과 관련한 지명을 조사하였 다. 이에 따라 총 134개의 봉황과 관련한 지명을 찾아내고 정리한 것이 부록에 제시되었다. 이 중 몇 개를 사례지에 대해 실제 답사를 통해 봉황형국과 지명과의 유연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경북 영천시는 신라 때는 절야화군(切也火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임고(臨皐)라 고치고, 고려 초 도동(道同)과 임천(臨川)의 두 개현 을 합쳐 영주(永州)라 고쳤으며 조선 태종 13년 영천으로 이름을 고쳤다. 경북 영천시의 금호읍 일대의 지명에 대해 김광언(1993:67)은 영천군의 지세는 봉이 날아가는 형국으로 봉이 사라지면 불길하다 고 여겨서 봉이 좋아하는 대숲을 만들고 남쪽 산 이름을 죽방산이 라고 고쳤다. 또 봉은 까치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잡으려고 다 른 곳에로 날아가지 않는다고 하여 남쪽 산을 까치산으로 바꾸었다 고 한다 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에는 작산(鵲山), 죽방산(竹防山)이 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작산은 군의 남쪽 6리에 있고 민간에 전 하기를 군의 지세가 나는 봉황과 비슷하다 한다. 봉은 대나무를 좋 아하며 또한 까치가 날아가지 않는 것을 보았기에, 산의 이름을 작 (鵲)이라 하고 또 죽방 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죽방산은 고을 남쪽 9리 떨어진 곳의 남천(南川)과 북천(北川) 두 물 어구에 있다 14)고

224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23 하여 이 지명이 풍수와 연관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영천군의 각 지명에 대해 여지도 (1736년 추정)에는 유봉산(留 鳳山)이, 조선지도 (1750년 추정)에는 성황봉(城皇峰), 죽방산(竹 防山), 작산봉(鵲山峰)이, 동역도 (1770년 추정)에는 성황산(城皇 山), 작산(鵲山)이, 청구도 (1834 추정)와 동여도 (19세기 중엽) 에는 죽방산, 작산이 나타난다. 조선총독부의 지형도 15)에는 유봉 (留鳳), 봉죽동(鳳竹洞), 죽방동(竹防洞), 봉산동(鳳山洞), 봉정동 (鳳停洞)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현재에도 이러한 지명이 존재한 다. 영천군의 지세가 봉이 날아가는 모양이라 함은 비봉형(飛鳳形) 을 의미한다. 이 경우 봉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는 지명이 유래된다. <그림1>에서 보듯이 유봉산(留鳳山:241m)과 이 산에서 기인한 봉정리(鳳亭里), 봉동(鳳洞), 봉(鳳)과 황(凰)과는 자웅관계이므로 짝을 맞추고 동시에 물을 의미하는 황정(凰井),16) 까치를 의미하는 작산(鵲山), 봉황이 대나무 열매를 먹기 때문에 봉죽리(鳳竹里)라는 지명이 있다. 그리고 대나무를 의미하는 죽방산(竹防山), 봉은 조양 (朝陽)에서 울기 때문에 인위적인 건축물인 조양각(朝陽閣)17)이 있 다. 14) 鵲山 在郡南六里 俗傳 郡地勢似飛鳳 鳳愛竹又見鵲噪不飛去 故山名曰鵲 曰竹坊 竹防山 距郡南九里 在南川北川二水之口. 新增東國輿地勝覽, 永川郡. 15) 朝鮮總督府, 五萬分之一地形圖, 종로도서관 소장. 16) 凰井里는 1610년대부터 영천군 거여면 凰井이라고 하였다가 그대로 행정 명칭이 되었다. 17) 조양각은 고려시대 명원루(明遠樓)로서 당나라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 운데 遠目增雙明 에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군수 한덕급 이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고 이름하였다.

225 224 地名學 17 (2011) <그림1> 경북 영천시의 봉황관련 지명18) 영천시의 봉황관련 지명은 풍수 속성을 반영한 인위적인 작명이 며, 이러한 지명은 영조(靈鳥)인 봉황이 이 지역을 떠나가지 않고 계속 머물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봉의 먹이, 물, 서식 지 등을 지명으로 부여함으로써 지명 자체가 풍수적인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은 봉산(鳳山:398m)이 중심이 된다. 봉산은 고려 말 라씨(羅氏)들이 입향하면서 산의 모양이 봉황의 머리모양 같다고 하여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성주군 초전면, 초전면은 읍치가 아닌 까닭에 고지도 18) 자료 : 국토지리원, 국토공간영상정보서비스( 사진 : 필자(이하 같음)

226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25 에서의 지명을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총독부 지형도 에는 용봉동 (龍鳳洞), 봉무동(鳳舞洞), 봉오(鳳五), 봉산동(鳳山洞), 작동(鵲洞), 봉천동(鳳川洞) 등의 지명이 나타나는데 현재에도 이러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림2> 경북 성주군 초전면의 봉황관련 지명 <그림2>에서 보듯이 봉산에서 기인한 마을 이름으로서는 봉산리 (鳳山里), 봉정리(鳳亭里), 봉하정(鳳下亭) 등이 있으며 봉황의 먹 이에 해당하는 지명으로 죽내(竹內), 까치를 의미하는 작촌(鵲村), 마실 물을 의미하는 봉소(鳳沼), 봉황이 조양에서 울기 때문에 봉산 의 건너편에 봉명조양(鳳鳴朝陽) 을 의미하는 조양동(朝陽洞)이라 는 지명이 있다.

227 226 地名學 17 (2011) 그리고 용봉리(龍鳳里)는 한 마을(龍頭마을)은 龍의 머리와 같 은 형상이며 다른 한 마을(鳳舞마을)은 새가 춤을 추는 형상을 하 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성주군청, kr). 초전면의 봉황관련 지명은 봉황형의 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 되었고, 봉황이 날아가지 않고 머물게 하기 위한 먹이, 물, 까치 등 이 지명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남 진주시는 <그림3>에서 보듯이 주산(진산)이 비봉산(飛鳳 山:141.9m)이다. 비봉이란 지명은 봉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날고 있다는 의미 (진주문화원, 1996, 480)이다. <그림3> 경남 진주시 봉황관련 지명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비봉산은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이 라고 하고 있으며 또한 비봉산이 북쪽에 머물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고 되어있다.19) 해동지도 (1750년)와 지승 (1776년 추정)

228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27 에는 비봉산, 봉곡리라는 지명이 나타나며, 청구도 (1834년 추정) 및 광여도 (19세기 초)에도 비봉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일제시대 지형도 에는 비봉산(飛鳳山), 상봉동(上鳳洞), 죽전동(竹 田洞)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진주의 경우 대부분의 고지도에 비봉산이라는 지명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봉산에서 유래된 지명은 상봉동(上 鳳洞), 봉곡동(鳳谷洞), 봉안동(鳳安洞) 등이며 봉의 먹이를 의미하 는 지명인 죽전(竹田)이 있다. 오죽광장(梧竹廣場)은 봉황이 대나무열매를 먹고 오동나무 숲에 서 산다는 의미에서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이 일대 에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오죽광장이 란 명칭은 시민의 공모에 의해 1979년 지어진 이름이다(진주문화 원,1996:474). 이는 진주의 풍수형국을 지명으로 비보하기 위한 것 으로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진주는 비봉산에서 비롯되는 풍수적 관점의 지형해석이 존재하였으며, 비봉루(飛鳳樓), 봉명루(鳳鳴樓), 조양관(朝陽館), 대 숲(竹田) 등 대부분의 공공건축물과 도시공간 들이 비봉산, 즉 봉황 과 관련되어 건축되거나 도시개조가 이루어지고 있음은 주목할 필 요가 있다(신상화,2007, ). 특히 죽전의 경우는 1576년 비보하 는 곳이 된다고 하여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晉陽誌, 林藪 條 ). 전북 완주군은 삼국시대에는 완산주, 고려시대에는 전주, 완산부, 조선시대에는 전주부였는데 비봉면은 조선시대에는 고산군(高山郡) 이었다. 19) 新增東國輿地勝覽, 晋州牧.

229 228 地名學 17 (2011) 비봉면은 비봉산(飛鳳山 : 291m)에서 유래하였다. 동여도, 청 구도, 청구요람, 대동여지도 에 비봉산으로, 동국지도 에는 봉 산(鳳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일제시대 지형도 에는 비봉산(飛 鳳山), 비봉면(飛鳳面), 죽산(竹山), 죽림(竹林), 봉산리(鳳山里), 봉곡(鳳谷), 봉동(鳳東), 봉실산(鳳實山), 봉암리(鳳岩里) 등의 지 명이 나타나는데 현재에도 이들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림4> 전북 완주군 비봉면의 봉황형국과 지명 <그림4>에서 보듯이 비봉산에서 비롯된 지명은 봉산(鳳山)과 봉 산리(鳳山里)이며, 봉의 먹이를 의미하는 지명인 죽산(竹山)과 대숲 말, 봉이 깃드는 서식처인 오동을 의미하는 오산(梧山)이라는 지명 이 있다. 비봉산에서 볼 때 동쪽에 동봉(東鳳), 서쪽에 서봉(西鳳) 이 있다. 그리고 봉실산(鳳實山:373m)에서 비롯된 이름은 봉암리

230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29 (鳳岩里)가 있으며 봉이 깃든 숲을 의미하는 지명인 봉림(鳳林)과 마실 물을 의미하는 지명인 봉담(鳳潭)이 있다. 특히 봉황형의 산에서 마을이 위치한 방위에 따라 동봉, 서봉의 이름이 명명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상주시 은척면의 봉상(鳳上) 봉중(鳳中), 문경시 호계면, 논산시 연무읍, 광양시 봉강면의 상봉 (上鳳) 하봉(下鳳), 고흥군 도화면의 봉동(鳳東) 봉서(鳳西), 구 례시 구례읍의 봉동(鳳東) 봉서(鳳西) 봉남(鳳南) 봉북(鳳北) 등이 조사되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은 봉두산(鳳頭山), 천덕산(天德山), 통명산 (通明山), 장군봉(將軍峰), 비래봉(飛來峰)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보성강이 중앙부를 관통하면서 섬진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그림5> 전남 곡성군 죽곡면의 비봉형국20) 20) 자료 : 네이버 위성지도.

231 230 地名學 17 (2011) 봉정리(鳳停里)는 봉황지명의 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마을이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아다. <그림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덕산, 통명산을 봉의 날개, 성주봉이 봉의 머리모양을 한 형국에서 유래되 었다. 죽곡면은 읍치가 아닌 까닭에 고지도에서 지명 확인은 곤란하나 조선총독부의 지형도 에는 비래봉(飛來山), 봉두산(鳳頭山), 동계 리(桐溪里), 비봉(飛鳳), 유봉리(畱鳳里), 상죽(上竹), 하죽(下竹), 봉정리(鳳停里)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현재에도 이러한 지명이 존 재하며 畱鳳里가 留鳳里로 바뀌었으나 한자의 뜻을 동일하다. <그림6> 전남 곡성군 죽곡면의 봉황형국과 지명21) 봉황형과 지명의 관련성을 <그림6>에서 살펴보면 마을형국이 비 21) 자료 : 국토지리원, 국토공간영상정보서비스( 사진 : 필자(이하 같음)

232 지명형성의 풍수담론 231 봉형이기 때문에 봉을 날아가는 것을 붙잡기 위해 봉정리(鳳停里) 라 하였고 특히 亭 이 아니라 停 으로 명명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 다. 봉의 먹이를 의미하는 대나무 관련 지명으로 죽성(竹成), 하죽 (下竹)이 있다. 봉두산 아래는 오동나무를 의미하는 동계리(桐溪 里), 봉황 자체를 의미하는 비봉(飛鳳), 봉황이 머물기를 의미하는 유봉리(留鳳里) 등의 지명이 명명되어 있다. 전남 곡성군 오산면은 <그림7>에서 보듯이 북쪽에 괘일산(掛日 山), 남쪽에 성덕산(聖德山), 동쪽에 오지봉(梧枝峰), 서쪽에 기우산 (騎牛山)이 있으며, 성덕산에서 발원한 옥과천이 남에서 북으로 흘 러 섬진강에 합류되고 있다. 봉동리는 봉황은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살지 않는다고 하여 이 지역의 형국 이 오봉귀소형(梧鳳歸巢形)에서 나온 이름이다.(곡성군청, 2002: ) <그림7> 전남 곡성군 오산면의 봉황형국과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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