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와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는양국을대표하는문화재종합연구기관으로서한일고대도성을주제로한연구교류를 1999년부터추진해오고있습니다. 그간도성유적을비롯한문화재조사연구및보존에관한전문가상호교류를통하여학술적성과를공유하고, 고고 건축 미술 보존과학등다방면에걸친협력적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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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日文化財論集 Ⅲ A Collection of Learned Papers on Korea-Japan Cultural Properties 2016 한일문화재논집 대한민국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

2 발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와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는양국을대표하는문화재종합연구기관으로서한일고대도성을주제로한연구교류를 1999년부터추진해오고있습니다. 그간도성유적을비롯한문화재조사연구및보존에관한전문가상호교류를통하여학술적성과를공유하고, 고고 건축 미술 보존과학등다방면에걸친협력적관계를구축해왔습니다. 이러한성과를토대로 2006년부터는세부주제별로심도있는비교연구가가능하도록공동연구를 5년단위로추진하기에이르렀고, 한일문화재논집 Ⅰ (2007), 한일문화재논집 Ⅱ (2011) 발간을비롯한심화연구와폭넓은교류확산이지속되고있습니다. 이번 한일문화재논집 Ⅲ 는 2011년부터 2015 년까지진행된 한일고대도성문화의형성과발전과정에관한공동연구 성과를수록한책자입니다. 한일도성비교연구의학술적깊이를한층더높이고, 유적정비보존및활용에관해서도진전있는연구결과물로활용될수있기를기대합니다. 앞으로도이러한토대를바탕으로양기관이한일고대도성문화에관한보다실질적이고폭넓은공동연구를지속할수있기를바라며, 바쁜일정속에서도교류성과를논고로알차게정리해주신양기관의연구자들에게감사의마음을전합니다 년 12 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최맹식

3 序 나라문화재연구소와대한민국국립문화재연구소간의공동연구가시작되고 15년이지났습니다. 이동안학술적성과를공유하는연구교류에머무르지않고, 실제발굴현장에서로의연구원을참여시키고발굴조사의경험에관한교류도가져왔습니다. 이런교류는한일양측의연구상황이나연구방법의차이성을인식할기회가되고있어향후양국의상호이해와연구의진전에큰의의를가질것으로기대됩니다. 특히이러한교류를통하여신진연구자가큰자극을받는것도중요합니다. 그리고 2011년부터는 한일고대도성문화의형성과발전과정에관한공동연구 이란주제로교류를진행하고있는데, 이에관련한조사연구성과를한일연구자의논문집으로만들기로했습니다. 그동안의공동연구로써 한일문화재논집 Ⅰ (2007), 한일문화재논집 Ⅱ (2011) 을간행했습니다. 이번논집은뒤이은것으로두연구소에서 15명의연구자로부터, 고고, 역사, 건축, 자연과학분석등의분야의논고가모였습니다. 두연구소의공동연구는도성, 왕경의연구주제를중심으로착실히진전하는한편각분야각각독자적인주제를가진다양한연구도진행되고있습니다. 본서를읽어보면그경향을이해하실수있다고생각합니다. 두연구소의공동연구는본서에수록된분야에그치지않고정원역사유적정비 활용, 보존과학등다방면에걸친분야에서진행하고있습니다. 앞으로도이들의다각적인공동연구의성과가이런논집의형태로결실을맺기를기대하며양국의상호이해와문화재보존노력이더욱심화될것을기원합니다 年 12 月 独立行政法人国立文化財機構 奈良文化財研究所長 松村恵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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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 o n t e n t s 권택장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세기대외교섭 6 青木敬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28 廣瀬覚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58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신종우 한일고분공간구조영상화를위한물리탐사연구 80 諫早直人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104 이은석 계 ( 繫 ) 의재현을통한제작방법고찰 132 小田裕樹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백제사비기자료를중심으로- 150 박성진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관한검토 174 石橋茂登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해서 庄田慎矢 한지선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210 渡辺晃宏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230 箱崎和久 鈴木智大 海野聡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48 서민석 강소영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02 藤井裕之 한일교섭사연구와연륜연대학 -일본에서의과제- 318

6 권택장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Ⅰ. 머리말 Ⅱ. 무덤과매장주체부 Ⅲ. 출토유물의부장양상 Ⅳ. 출토유물에대한검토 Ⅴ. 5세기왜의정세와동북아연안항로 Ⅵ. 맺음말 요약문 야막고분을비롯하여한반도서남해안의연안항로를따라왜계유물이나葬法이채용된고분의사례가점증하고있다. 지금까지왜계고분에대해서는재지수장설, 왜인용병설, 왜계백제관료설등이주장되고있는데, 야막고분과같이연안항로상에서발견되는왜계고분들은그배경과성격이내륙의거점지역에서발견되는왜계고분과는다를것으로본다. 부산에서신안군까지연안항로상에서확인된왜계고분은 14 기정도된다. 그중에서 5세기전엽에서중엽의시기에혁철식갑주가출토되는곳은김해율하 B-1 호분, 고흥안동고분, 야막고분, 해남외도고분, 신안배널리고분등 5곳이다. 고흥안동고분을제외하고는모두 5세기전엽에해당하며, 매장주체부도북구주의석관계수혈식석실과비교된다. 특히매장주체부내유물부장양상의전모가확인된야막고분과배널리고분은鏡과갑주등유물의구성과배치가거의유사하다. 5세기대기내를중심으로한왜왕권은일본열도의철과말, 금공품에대한공급확대를통해일본열도전역의지역세력에분배하면서열도내의지배권을강화해나갔을것이다. 이러한공급확대는기존한반도남부에의존하던공급지를한반도서남부와중서부로다변화하면서안전한항로개척이필요했을것이다. 그래서항해가가장어려운여수반도에서신안군에이르는구간에해당하는고흥과해남, 신안지역에交易船의寄港과導船의역할을담당하는왜인을파견하였을것으로추정된다. 그리고그출자는앞서살핀매장주체부의계보가구주지역과관련된점, 帶金式甲冑의생산과배포가왜왕권에서一元的으로이루어진다는것을참고하면, 구주에출자를두고왜왕권의영향하에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 주제어 : 왜계고분, 연안항로, 삼각판혁철판갑, 충각부주 6 한일문화재논집 Ⅲ

7 고흥 야막고분을 통해 본 5세기 대외교섭 권택장* Ⅰ. 머리말 야막고분을 비롯하여 한반도 서남해안의 연안항로를 따라 왜계 유물이나 葬法이 채용된 고분의 사 례가 점증하고 있다. 지금까지 왜계고분에 대해서는 재지수장설, 왜인용병설, 왜계백제관료설 등이 주 장되고 있는데, 야막고분과 같이 연안항로상에서 발견되는 왜계고분들은 그 배경과 성격이 내륙의 거 점지역에서 발견되는 왜계고분과는 다를 것으로 본다. 야막고분의 장법과 출토유물의 계보 등을 살펴 그 시기를 짐작하고, 연안항로와 관련된 당시 동북 아의 정세를 파악하여 야막고분을 비롯한 연안항로상의 왜계고분 등장의 배경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검토과정에 고분 피장자의 출자와 재지세력과의 관계도 파악될 것이다. Ⅱ. 무덤과 매장주체부 야막고분은 직경 24m 내외의 원분으로 무덤 표면 일부에 즙석이 있다. 매장주체부는 분구상에 위 치하며, 분구성토와 병행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조는 석곽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벽석의 축 조방법을 보면, 목곽이 구조틀이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벽석이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이다. 따라서 목곽 을 먼저 설치하고 나서 벽석을 쌓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석이라든지 별도의 폐쇄시설은 없었으며, 목곽을 폐쇄한 木蓋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또 벽석 외연으로 돌을 채워 보강한 것도 이 고분의 * 韓國 新羅王京 核心遺蹟 復原 整備事業 推進團 1) 목곽의 존재를 인정하면, 야막고분의 매장주체부는 영남지역에서 분류되는 위석식 목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남지역의 위석식 목곽의 위석보다는 비교적 정연하게 쌓은 벽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보강석도 정연하 게 채워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축조순서를 보면 위석식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그 구조를 보면 영남지역의 위석 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목곽과 석곽이라는 이중곽의 구조로 설명하고자 한다. 고흥 야막고분을 통해 본 5세기 대외교섭 7

8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벽석 내부는 길이 310cm, 너비 73~86cm, 깊이 45cm로 비교적 좁고 얕은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덤 표면의 즙석과 매장주체부 형식은 국내에 비해 일본에서 그 비교 사례가 더 많다. 물론 뒤에서 설명될 출토유물을 고려한다면 후자가 더 타당할 것이다. 즙석은 일본 고분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무덤의 외표를 마감하는 방법이다. ① ② ④ ⑤ ① 고흥 야막고분 ② 김해 율하 B-1호분 ③ 마산 대평리 M1호분 ④ 笹原古墳 ⑤ 七夕池古墳 ⑥ 柿原古墳群C-4号墳 도면 1. 매장주체부 비교 8 한일문화재논집 Ⅲ ③ ⑥

9 야막고분의 매장주체부는 벽석 외연으로 비교적 넓은 보강석을 가진 것과 좁고 얕은 내부구조, 목 곽을 채용한 특징 등은 북구주지역에서 5세기 대에 유행하던 石棺系竪穴式石室(重藤輝行 2007)과 비 교된다. 이러한 유형은 김해 율하 B-1호분, 마산 진북 대평리 M1호분과 배널리 3호분 등에서도 확인 되는데, 기본적인 형식은 가야의 수혈식 석곽과 비교할 수 있겠지만, 좁고 얕은 구조와 출토유물 또는 무덤의 즙석을 고려한다면, 북구주의 석관계수혈식석실과의 비교가 더 바람직 할 것이다. 구체적인 비교대상으로 그 구조와 규모, 개석이 없는 점 등은 후쿠오카현의 笹原古墳2)과 비교되며, 내부에 목곽을 설치하여 벽석을 쌓는 방법 등은 七夕池古墳을 참고할 수 있다. Ⅲ. 출토유물의 부장양상 야막고분에서는 갑주와 철촉, 철모 등의 무구 무기류와 鐵鋤, 철겸, 도자 등의 농공구류, 동경과 곡옥, 환옥 등의 장신구류 등 250여 점이 출토되었다. 출토위치는 석곽의 벽석과 석곽 외부, 목곽 내부로 구분되고, 목곽 내부는 다 시 피장자 주변과 피장자의 발치 아래쪽의 부장공간으로 나뉜다. 석곽 외부의 보강석 상부에서는 철서, 철겸, 도자 등의 농공구류와 철모가 수습되었고, 석곽 내부 피장자의 머리 쪽 단벽 모서리에서 장식형 철촉이 꽂힌 채로 확인되었다. 목곽 내부 피장자 주변에는 머리쪽에 竪櫛과 동경(位至三 公鏡), 벽옥제 곡옥, 가슴과 허리 주변에서 환옥이 다수 확 인되었고,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劒과 刀가 배치되어 있었 다. 경옥제 곡옥은 석곽 내부퇴적토 중간 위치에서 확인되 도면 2. 매장주체부 내 유물 부장양상 었기 때문에 목곽의 목개 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매장주체부에서 출토된 유일한 토기 인 광구소호는 벽석 가장자리의 상단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석곽바깥의 벽석 가장자리에 있었을 것 2) 발굴조사 과정에서 개석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도굴로 인해 교란된 분구 사면에서 확인된 2매의 석재를 개석으로 추정한다고 한다(大野城市教育委員会 1985). 하지만 도굴로 인해 없어진 다른 한쪽 단벽의 석재이거나 벽석 일부 에서 큰 석재를 사용하고 있어서 벽석에 사용되었던 석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고흥 야막고분을 통해 본 5세기 대외교섭 9

10 이다. 피장자의 발치 아래쪽에는 삼각판혁철판갑과 충각부주, 견갑, 경갑 등의 무구류 一襲과 철촉, 집게, 刀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충각부주 내부에서 素文鏡 1점이 확인되었다. ① ② ③ ① 신안 배널리고분 ② 兵庫縣 小野王塜古墳 ③ 岡山県 随庵古墳 도면 3. 매장주체부 내 유물배치 비교 Ⅳ. 출토유물에 대한 검토 1. 갑주 帶狀의 긴 철판을 구조틀로 하여 삼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철판(地板)을 가죽 끈이나 못으로 꿰어서 만드는 갑옷과 투구를 帶金式甲冑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갑옷의 출토사례가 5세기 대 고분에 서 25건 정도 보고되고 있다.3) 부산 김해 합천 등 가야지역과 여수 고흥 해남 등 서남해안의 연안항 로상, 영암 장성 등 영산강 유역, 청주와 음성 등 금강유역의 백제지역 등으로 주로 내륙수계상의 거점 3) 김혁중(2012)이 정리한 23건의 자료에 영암 옥야리 방대형고분 제1호분(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12)과 신안군 안 좌면 배널리 고분(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2011)에서 출토된 삼각판혁철판갑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10 한일문화재논집 Ⅲ

11 지역과 연안항로상에 나타나는 분포정형을 보인다. 한편 일본은 고분시대 중기에 이러한 대금식갑주가 무덤에 폭발적으로 부장되는데, 일본 전국에서 570여 건4)이 보고되고 있다. 또한 그 제작기술의 단계적 변화가 뚜렷하다. 송계현(2004)은 한반도 출토 대금식갑주의 기술적 체계의 성립과 제작지를 한반도 남부로 보았지만, 지금까지 양국의 출토수량과 가장 이른 형식의 출현시기, 형식의 단계적 변화상 등을 고려하면 일본으 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일본의 대금식갑주의 성립과 변화상을 소략하면 다음과 같다. 고분시대 전기 후엽, 帶金을 사용하 지 않은 方形板革綴이나 竪矧板革綴에서 중기 초(4세기 말)에 삼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작은 철판을 대 금에 꿴 대금식갑주가 성립된다. 이후 중기 말까지 일본 전역의 고분에서 중요한 부장품으로 나타난다. 대금식갑주의 변화상은 크게 철판의 연결기법으로 가죽 끈(革綴)에서 못(鋲留)으로 고정하는 방식으 로 발전하며, 세부적으로는 철판의 형태와 크기에서도 변화의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야막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는 삼각형의 철판을 가죽 끈으로 꿴 형식이다. 이러한 유형은 국내 에서 10기의 고분에서 10점, 일본에서는 73기의 고분에서 86점의 출토사례가 보고되어 있다(阪口英毅 1998). 표 1. 국내 삼각판혁철 갑옷 출토 현황 연번 고분 갑옷 투구 및 부속구 삼각판혁철충각부주, 견갑, 경갑 매장시설 공반유물 목곽 (석관계수혈식석실) 조설촉 등 왜계 철촉 석곽 장경촉, 토기, 철모 등 1 고흥 야막고분 혁철/A 2 부산 복천동 4호분 혁철/A 3 김해 두곡43호분 혁철/B 4 김해 율하 B-1호분 혁철/B 석곽 (석관계수혈식석실) 횡장판 차양주 조설촉 등 왜계 철촉 5 합천 옥전 68호분 혁철/B 목곽 함안 도항리 13호분 혁철/B 목곽 7 해남 외도 1호분 혁철/B 상식석관 석곽 (석관계수혈식석실) 철경 석실 경옥제 곡옥 등 신안 배널리 고분 혁철/B 9 영암 옥야리 방대형고분 제1호분 혁철/B 10 파주 주월리 혁철/B (삼각판병유충각부주) (즙석) 석곽 6 8 기타 (즙석) 지표 수습 ① 갑옷의 A 는 삼각판의 형태가 등각(정삼각형), B'는 둔각(이등변삼각형)을 말함 ② ( ) 는 추정되는 사항임 4) 橋本達也(2012a: )의 일본 고분시대 중기 갑주 집성 635건에서 소찰갑을 제외한 대금식갑주 출토수량이다. 고흥 야막고분을 통해 본 5세기 대외교섭 11

12 이와 같은 삼각판혁철 갑옷도 삼각판의 형태에 따라 등각계(정삼각형)와 둔각계(이등변삼각형)로 구 분되며, 등각계를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등각계 내에서도 갑옷을 구성하는 삼각형 철판의 수와 겨드 랑이 부분 철판의 형태에 따라 시기적 차이를 구분한다(阪口英毅 1998). 야막고분의 갑옷은 등각계이며, 국내에는 부산 복천동 4호분의 출토품을 포함하여 2점이 이에 해당 한다. 갑옷의 구성을 보면, 앞판과 뒷판 모두 7단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야막고분의 갑옷은 앞판(前胴) 7단, 뒷판(後胴) 9단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겨드랑이 부분의 철판은 일본에서 초현기의 형식으로 보고 있는 滋賀県 大塚越古墳의 갑옷보다 발달된 형식으로 谷内21号墳의 갑옷과 많이 닮았 다(도면 5). 표 2. 한국과 일본의 등각계 삼각판혁철 갑옷 지판 비교 지판매수 竪上2段 출토고분 長側1段 長側3段 합계 능형 능형 谷内21号 능형 向山1号 변칙 井手ノ上 2 5 (13) (11) (31) 변칙 복천동 4호분 (12) (34) 능형 장측1단 장측3단 합계 전동 지판배치 능형 前胴 後胴 大塚越 4 佐野八幡山 일본 한국 전동 지판배치 수상2단 야막고분 수상4단 전동 후동 후동 일본에서도 등각계의 갑옷은 6점으로 그 사례가 많지 않고, 둔각계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등각계 갑옷의 편년은 초현기의 형식(등각계 Ⅰ식)을 고분시대 중기 초(4세기 말), 야막고분과 유사한 谷内21号 墳 또는 向山1号墳의 형식(등각계 Ⅱ식)을 중기 전엽(5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등각계에서 둔각계로의 변화는 삼각판이 커지면서 갑옷 제작에 사용되는 삼각판의 수량도 줄어드는 데, 이는 제작기술이 안정화되어 본격적인 양산체제로 접어드는 것으로 본다. 그 변화 시점도 5세기 전 반에 이루어진다(阪口英毅 1998). 12 한일문화재논집 Ⅲ

13 야막고분의 투구는 갑옷과 마찬가지로 삼각 형 철판을 가죽 끈으로 꿴 충각부주로 板錣과 볼가리개가 붙어 있다. 판철은 투구 뒷부분에 붙어 뒷목을 보호하는 것으로, 비교적 폭이 넒 은 1매의 철판에서 여러 매의 좁은 철판을 이어 붙이는 형식으로 변화한다. 야막고분의 투구는 1매의 판철로 이루어져 있고, 판철의 가장자리 는 가죽 끈으로 꿰어 마무리 했다. 혁철이라는 도면 4. 삼각판혁철판갑 형식변천(阪口英毅 1998) 기술적 속성과 더불어 1매로 이루어진 판철의 형식, 그리고 판철의 가장자리를 가죽 끈으로 마무리하는 제 속성들을 고려하면, 갑옷과 같은 시기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충각부주에 볼가리개가 붙어 있는 것은 일본에서도 아주 예외적인 것이어서 주목된다. 일본에서 갑주의 부장위치는 고분시대 전기에 피장자의 머리 위쪽, 중기에 들어서는 발치 아래 쪽에 두는 것으로 변화한다. 물론 그 시작도 고분시대 중기 古市 百舌鳥古墳群을 중심으로 하는 왜 왕권에 서 성립되어 확산된다(橋本達也 1999). 야막고분과 배널리 고분이 이러한 장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도면 3). 2. 鐵鏃과 農工具 1) 철촉 철촉은 피장자 발치 아래의 부장공간에서 갑주 뒤편과 옆, 그리고 앞에 다발로 출토되었다. 또 피장 자의 머리 쪽 석곽 단벽 한 쪽 귀퉁이에 꽂힌 채 출토된 것도 있다. 철촉의 형식은 유엽형과 유엽역자 형, 능형, 규두형, 착두형 그리고 장식성이 강한 無莖式 역자형으로 구분된다. 한국과 일본의 공통 기 종인 능형 철촉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 고분시대 중기 철촉과 비교된다. 착두형과 무경식 역자형은 피 장자 머리 쪽 단벽에서 출토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갑주 주변에서 출토된 것이다. 유엽형은 소위 鳥舌鏃이라 불리는 것으로 촉신이 S 자형의 곡선을 보이며, 關部가 뾰족하게 돌출된 형태이다. 일본 고분시대 중기 초옆에 나타나 중엽이 되면 사라지는 형식이다. 유엽역자형은 촉신 하단 부에 逆刺를 가진 것으로 유엽형(조설촉)과 마찬가지로 관부가 뾰족하게 돌출되어 있다. 국내에서 유사 한 형태가 있으나 관부가 돌출된 것은 왜계 이다. 촉신의 단면이 초승달 모양으로 오목한 것과 가운데 고흥 야막고분을 통해 본 5세기 대외교섭 13

14 가 볼록한 렌즈형으로 구분되는데, 야막고분의 것은 전자의 형태이다. 단면형태가 오목한 것이 시기가 앞서는 것인데, 일본의 和泉黄金塚, 下山天神山塚 등의 출토품과 비교된다. 렌즈형의 출토품은 五ヶ山 B2号墳 野毛大塚古墳 등에서 확인된다. 규두형 철촉은 유엽형과 마찬가지로 촉신 하단에 관부가 돌 출되어 있고, 鏃先端이 규두 모양으로 각이 진 형태이다. 이와 같이 야막고분의 철촉은 그 형식에 있어서 왜계이며, 5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에서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5세기 중반의 요소인 장경촉이 보이지 않아 전반적으로 앞서 살핀 갑 주와 시기적인 차이가 없다. 2) 농공구 야막고분에서 농공구는 鐵鎌과 鐵鋤, 刀子가 있는데, 모두 석곽 외연을 채운 보강석 위에서 출토되 었다. 철서와 도자는 한일의 형식 차이가 거의 없지만, 철겸은 국내보다는 일본의 출토품과 비교된다. 일본에서는 고분시대 전기 장방형의 直刃鎌에서 중기가 되면 한국의 곡인겸의 영향을 받아 鎌의 끝부 분이 뾰족해지고 刃部가 곡선형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분시대 중기 초에 시작되어 중엽이 되 면 곡인겸으로의 변화가 완성되는데, 야막고분의 철겸은 중기 초에서 전엽에 보이는 변화의 과도기 형 태를 보이고 있다. 또 같은 고흥지역에서 5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동강면 장덕리 고분의 철겸과는 분명 한 차이가 있다(도면 6). 3. 동경과 갑주 야막고분에서 출토된 銅鏡은 位至三公鏡(직경 10.0cm)과 素文鏡(직경 6.5cm) 2점이다. 위지삼공경 은 位至三公 이라는 문자와 龍文이 새겨진 것으로 西晉代에 낙양을 중심으로 주로 제작되었다. 位至 三公 이라는 銘文의 의미는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吉祥句이며, 중국에서는 秦 漢대부터 동 경에 이러한 문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사용되는 吉祥句로는 位至三公', 君宜高 官', 長宜子孫', '壽如金石' 등인데, 높은 벼슬(位至三公, 君宜高官)과 자손번영(長宜子孫), 무병장수(壽 如金石) 등을 의미한다(王仲殊 1985). 위지삼공경의 국내 출토사례는 경주 교동 출토품이라고 전해지는 1점이 유일한 사례이며, 일본에서 는 고분 부장품으로 북구주지역에서 13점, 오사카지역에서 6점, 그리고 瀬戸内海上의 香川縣, 山口縣, 岡山縣 등에서 각 1점, 島根県 1점, 그 외 출토지 미상 등 기타 6점을 포함한 모두 29점의 출토사례가 14 한일문화재논집 Ⅲ

15 보고되어 있다.5) 또 素文鏡과 位至三公鏡이 공반되는 사례는 大阪府堺市의 カトンボ山古墳 에서 찾을 수 있다. 동경은 갑주를 비롯한 부장유물과 상당한 시기 차를 보이고 있다. 일본 고분시대 중기에는 갑주와 동경이 함께 공반되는 사례가 일반적이며, 특히 위삼공경과 같이 전세된 중국경은 대금혁철식 갑주 단 계에 주로 함께 부장된다(上野祥史 2012). 야막고분의 동경과 갑주는 일본 고분시대 중기의 이러한 부장관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고흥 지역인 길두리 안동고분과 신안 배널리 고분에서도 이러한 대금식갑주와 동경, 철경이 함께 부장된 모 습을 볼 수 있다. 표 3. 일본 고분시대 갑주와 경의 공반현황(上野祥史 2012) 鉄生産段階 中国鏡 漢鏡 三国西晋 鏡 倭鏡 小札革綴冑 南北朝鏡 第1期 7 85 第2期 備考 第3期 三重県石山古墳 京都府 瓦谷1号墳を含む 2(3) 竪矧板革綴短甲 方形板革綴短甲 帶金式甲冑(革綴の み) 10(4) 16(10) 29(15) 6(1) 三重県石山古墳を含む 帶金式甲冑(革綴 鋲留共伴) 1 5 8(4) 13 奈良県五条猫塚古墳を 含む 帶金式甲冑(鋲留の み) 3(1) 6 17(2) 13(6) 17(2) (1) 帶金式甲冑(鋲留) と挂甲共伴 小札甲 6 3 京都府瓦谷1号墳を含む 熊本県江田船山古墳を 含む Ⅴ. 5세기 왜의 정세와 동북아 연안항로 일본 고분시대 정치세력 통합의 배경은 철 자원을 중심으로 한 선진문물 입수 루트의 지배권을 둘 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세기 중엽 철 자원을 비롯한 선진문물이나 정보의 공동입수기구 로서 왜 정권 이 성립되며, 그 맹주인 畿內의 왜 왕권 은 각지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외교권을 위임받는 5) 2005, 魏志倭人伝を読む 卑弥呼のもらった鏡, 邪馬台国の会 第236回 講演会資料 ( 고흥 야막고분을 통해 본 5세기 대외교섭 15

16 대신에철자원등의안정적인확보와분배의책임을부담하게된다. 또한 4 5 세기단계에일본열도에유입되는갑주, 마구등새로운철기가공기술이나금동제품등의금속공예기술을장악함으로써왜왕권의권력이강화되었을것이다 ( 白石太一郎 2010). 오사카평야의百舌鳥 古市古墳群에갑주등철제무기 무구의부장이폭발적으로증가하는것도이시기와맥을같이한다. 일본열도에서말의도입시기는마구 ( 재갈등 ) 6) 의존재로서파악할수있다. 近畿지역의兵庫県行者塚古墳, 九州지역의福岡県池の上 6 号墳 熊本県八反原 2 号墳등 5세기초의고분에서도입시기의마구 ( 재갈 ) 를확인할수있다. 그리고그계보를김해대성동 39호분과청주봉명동 A-76 호분및 C-9 호분의출토품과비교하고있는것이주목된다 ( 諌早直人 2012). 또일본열도에서마구 ( 재갈 ) 는 5세기초구주와기내를중심으로도입되어 5세기전엽에동일본지역인長野県, 5세기중엽경이되면동북지역인宮城県까지일본열도전역으로급속히확산된다 ( 諌早直人 2010). 이를보면, 고분시대중기열도의지방세력이마구로상징되는기승문화에대한수요가어느정도였는지짐작케한다. 그리고이에대한공급을담당하고있던왜왕권은한반도와의적극적인교섭을통해물량을확보했을것이다. 왜왕권의교섭대상은앞서초기마구의계보가가야지역과백제지역으로확인된바와같이다원적인루트를상정할수있다. 또 4세기후반백제로부터말 2마리가왜왕권으로전해지는일본서기의기사를참고하면, 5세기초일본열도의기승문화도입은한반도남부의가야지역은물론한반도중서부지역과의관계도분명해진다. 그리고그러한교섭과정을구체적으로살피면, 한반도서남해안의연안항로상에나타나는왜계고분들이가시권에들어오게된다. 문헌에나타나는 4세기후반에서 5세기대왜의백제또는중국과의관계를보면, 卓淳國을통한백제와의통교개시, 고구려와의군사적긴장관계에따른백제와왜간의七支刀외교, 倭五王 의중국남조와책봉외교등이다. 그리고열도에서대륙으로향하는항해의시발점인沖ノ島에서왜왕권이해양제사를주관하는것도이즈음이다. 왜의교역로는 백촌강전투 (663 년 ) 의개입으로인해신라와의관계가틀어지기전까지대한해협을거쳐한반도의남해안과서해안을경유하는연안항로이다. 이곳의해상지리를살펴보면, 조석간만의차가크고, 복잡한해안선을가진리아스식해안으로서항해가쉬운곳이아님을알수있다. 특히여 6) 마구 ( 재갈 ) 는騎乘이나말을운용하는데, 있어서필수적인요소로마구 ( 재갈 ) 의존재는곧말의존재를증빙하는것이된다. 일본에는본래부터야생말이존재하지않았기때문에마구 ( 재갈 ) 가나타나는시기가일본열도에말이도입된시기이다. 그리고그마구의계보가어디냐에따라일본이한반도어느세력과교섭을통하여도입했는가를알수있다. 16 한일문화재논집 Ⅲ

17 수반도에서신안군까지는연안에섬들이많아바닷길이복잡하며, 또이러한섬과육지사이에해협이발달해있어강한潮流 7) 가발생한다. 이로인해이곳은뱃길이가장험한곳으로알려져있다. 이지역의연안항로를이용하려면현지의복잡한해상지리와潮水의흐름을정확히파악하는것이항해성공의최대관건이다. 지금까지연안항로와관련된왜계고분이이지역에집중되는것도이러한정황을傍證하는것으로볼수있다. Ⅵ. 맺음말 지금까지살펴본바에따르면, 야막고분은 5세기전반일본열도의유물이부장되고, 매장주체부도구주의영향이있었음을확인하였다. 그렇다면야막고분의피장자는누구였을까? 보수적인기제가강한葬俗에있어서재지의요소는드물고, 상대적으로외래의요소가더많다면그피장자는외래인즉, 왜인일가능성이높다. 한반도에나타난일련의왜계고분에대해서는그입지와주변재지고분군과의관계, 그리고당시의정치사회적인상황을고려하여, 그피장자를재지수장설, 왜계백제관료설, 왜인용병설등으로나뉘어있다. 야막고분을비롯한연안항로상의고분들은이와별도로살펴볼필요가있을것이다. 부산에서신안군까지연안항로상에서확인된왜계고분 8) 은 14기 9) 정도된다. 그중에서 5세기전반에서중엽의시기에혁철식갑주가출토되는곳은김해율하 B-1 호분, 10) 고흥안동고분, 야막고분, 해남외도고분, 신안배널리고분등 5곳이다. 고흥안동고분을제외하고는모두 5세기전반에해당하며, 매장주체부도북구주의석관계수혈식석실과차이가있다. 특히매장주체부내유물부장양상의 7) 이지역의섬과연안사이에형성된해협의조류는평균 3~5kn(1kn=1.852km/h) 으로나타나며, 가장강한곳은 12km에이른다 ( 大韓民國水路局 1988). 8) 무덤의즙석여부와매장주체부, 출토유물등에서왜와관련성이밝혀진고분을잠정적으로 왜계고분 이라명명해둔다. 9) 김해율하 B-1 호분, 거제장목고분, 마산대평리 M1호분, 고성송학동고분, 사천선진리고분, 여수죽림리차동고분, 고흥안동고분, 고흥야막고분, 해남외도 고분, 해남신월리고분, 해남장고봉고분, 해남조산고분, 해남용두리고분, 신안배널리고분등이다. 10) 김해율하 B-1 호분에서는삼각판혁철갑옷편과조설촉, 역자가있는도자형철촉등이확인되었다. 보고서에서는삼각판혁철갑옷과매장주체부의구조등을들어 5세기중 후반으로보고있으나, 출토된유물이모두왜계이며, 일본쪽의편년체계를고려하면, 5세기전반으로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또매장주체부의구조도북구주의석관계수혈식석실로볼수있으며, 고분가장자리에서확인된흐트러진석재들도호석이아니라즙석일가능성이높다. 야막고분과마찬가지로무덤의구조와매장주체부, 출토유물모두왜계이다.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17

18 전모가확인된야막고분과배널리고분은鏡과갑주등유물의구성과배치가거의유사하다. 서구학계의이론에서보면, 고대에서근대에이르기까지국제적인교역장 (Places of Foreign Trade) 에서는정치적중립성즉, 교역을위한居留外人 (Trade Diaspora) 들의거주와활동이보장되는것이보편적이라고한다. 그리고이러한교역장은재지의거점지역에서다소떨어진공간에형성된다고한다 ( 김창석 2012). 김해율하 B-1 호분 ( 경남발전연구원 2008) 과김해관동리나루터유적 ( 삼강문화재연구원 2009) 이이에부합되는유적으로여겨진다. 당시정치세력의거점지역인김해대성동이나봉황동에서일정거리를유지하고있으며, 그입지가배가접안하여기항하기알맞은조건을갖추고있다. 특별한접안시설을갖출수없었던고대에는내륙으로깊숙이들어간灣이배가접안하여기항하기에는최적의조건을갖추었다고할수있다. 야막고분의입지는고흥만의배후에있어이러한조건을충족하고있다. 고흥지역의고분분포를보면, 고흥북쪽의동강면과, 안동고분이위치한해창만의배후인도화면일대에집중되는양상을보이고있다. 도화면은지표조사를통해서석실이나석곽을채용한고분으로추정된다. 동강면일대는발굴조사를통해어느정도고분의시기와성격이밝혀졌다. 4~5 세기대제형주구에목곽을매장주체로한다장묘등이확인되고있으며출토유물을보면, 소가야, 아라가야등가야계토기를다수부장하고있다. 또한동강면장동유적 (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2011) 에서는경옥제곡옥이頸飾으로부장된것이확인된다. 장법에있어서는범영산강유역문화권에포함되며, 출토유물로서는부산, 김해등의가야세력과왜와의교역상을볼수있다. 야막고분과같은시기의재지세력으로는동강면일대로추정되며, 야막고분은거류왜인집단으로서재지세력과는상당한거리를둔포구에위치하는것으로볼수있다. 고흥안동고분은야막고분의반대편인포두면길두리의해창만배후에위치한다. 안동고분의입지와장법, 출토유물로볼때야막고분과마찬가지로거류왜인집단으로추정된다. 다만시기적으로는야막고분보다늦은 5세기중반 11) 언저리로생각된다. 부산에서서해안으로이어지는연안항로상에서야막고분이입지한고흥만일대는항로의진행방향에서역으로돌아서야되는곳이기때문에기항지로서최적의조건은아니다. 오히려안동고분이입지한해창만일대가항로상의진행방향에위치하고있기때문에보다적합하다고할수있다. 야막고분과관련된거류왜인들은최초해창만을원했을지도모른다. 하지만재지세력의양해를받지못하여부득이고흥만일대로갔을수있으며, 이후재지의양 11) 김영민 (2011) 은안동고분의연대를 5세기말의정치적상황과결부시켜부장유물의편년보다다소늦은 5세기말로보고있으나, 피장자가교역을위한거류왜인이라면유물편년보다늦게볼필요가없을것같다. 18 한일문화재논집 Ⅲ

19 해로해창만으로옮긴것이안동고분일가능성이높다. 5세기대기내 ( 畿内 ) 를중심으로한 왜왕권은일본열도의철과말, 금공품에대한공급확대를통해일본열도전역의지역세력에분배하면서열도내의지배권을강화해나갔을것이다. 이러한공급확대는기존한반도남부에의존하던공급지를한반도서남부와중서부로다변화하면서안전한항로개척이필요했을것이다. 그래서항해가가장어려운여수반도에서신안군에이르는구간에해당하는고흥과해남, 신안지역에交易船의寄港과導船의역할을담당하는왜인을파견하였을것으로추정된다. 그리고그출자는앞서살핀매장주체부의계보가구주지역과관련된점, 帶金式甲冑의생산과배포가왜왕권에서一元的으로이루어진다 ( 橋本達也 2012b) 는것을참고하면, 구주에출자를두고왜왕권의영향하에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19

20 참고문헌 경남발전연구원역사문화센터, 2008, 김해율하리유적Ⅰ. 경남발전연구원역사문화센터, 2011, 마산진북대평리유적.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12, 영암옥야리방대형고분제1호분발굴조사보고서., 2014, 高興野幕古墳발굴조사보고서. 김영민, 2011, 고흥길두리안동고분의갑옷과투구, 고흥길두리안동고분의역사적성격, 전남대학교박물관. 김낙중, 2012, 한반도에서본구주세력과의교류, 沖の島祭祀と九州勢力の對外交涉, 第 15 回九州前方後円墳研究会. 김창석, 2012, 고대교역장의중립성과연맹의성립 -3~4 세기가야연맹체를중심으로 -, 역사학보 216 집. 김혁중, 2011, 한반도출토왜계갑주의분포와의미, 中央考古硏究 제8호, 중앙문화재연구원. 김현구외, 2002, 일본서기한국관계기사연구 (Ⅰ), 일지사.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2011, 고흥장덕리장동유적. 大韓民國水路局, 1988, 韓國沿岸水路誌 第 2 卷南海岸編.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 2011, 안좌면읍동고분및배널리고분발굴조사 현장설명회자료. 삼강문화재연구원, 2009, 김해관동리삼국시대津址. 송계현, 2004, 가야고분의갑주변화와한일관계,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연구보고 제110 집. 우병철, 2008, 鐵鏃과鐵矛로본新羅, 加耶그리고倭, 영남고고학 47호, 영남고고학회. 하승철, 2006, 巨濟長木古墳에대한一考察, 巨濟長木古墳 ( 경남발전연구원역사문화센터 ). 諌早直人, 2012, 九州出土の馬具と朝鮮半島, 沖ノ島祭祀と九州諸勢力の対外交渉, 第 15 回九州前方後円墳研究会., 2010, 海を渡った騎馬文化,( 風響社 ). 古代學硏究會, 1953, カトンホ 山古墳の研究 古代學叢刊第一冊. 橋本達也, 2012a, 古墳時代甲冑研究の現状, 国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第 173 集., 2012b, 倭王の武裝, 漆黑の武具 白銀の武器 第 3 回百舌鳥古墳群講演會發表資料集 ( 堺市 )., 1999, 野毛大塚古墳出土甲冑の意義, 野毛大塚古墳. 近藤匣樹, 2009, 繩文時代の裝身具, かながわ考古學財團入門講座發表資料. 大野城市教育委員会, 1985, 笹原古墳 大野城市文化財調査報告書, 第 15 集. 20 한일문화재논집 Ⅲ

21 白石太一郎, 2010, 鉄とヤマト王権, 鉄とヤマト王権 - 耶馬台國から百舌鳥古市古墳群の時代へ -, 近つ飛鳥博物館. 福岡教育委員会, 1989, 老司古墳. 上野祥史, 2012, 帶金式甲冑と鏡の副葬, 國立歷史民俗博物館硏究報告 第 173 集 ( 國立歷史民俗博物館 ) 圓墳硏究會北大九州会発表資料集 ( 九州前方後圓墳硏究會 ). 小矢部市教育委員会, 1992, 谷内 21 号墳. 総社市教育委員会, 1965, 隨庵古墳. 中川正人, 1999, 櫛の造形ー弥生時代の飾り櫛 -, 紀要 第 12 號, 滋賀県文化財保護協會. 重藤輝行, , 埋葬施設 - その変化と階層性 地域性 -, 九州における中期古墳の再檢討 第 10 回九州前方後圓墳硏究會宮崎大会発表資料集, 九州前方後圓墳硏究會. 鈴木一有, 百舌鳥古墳群の武器武具にみる特質, 漆黑の武具 白銀の武器 ( 堺市 ). 王仲殊, 1985, 三角緣神獸鏡の謎 ( 角川書店 ) 浅羽町教育委員会, 1999, 五ヶ山 B2 号墳. 阪口英毅, 1998, 長方板革綴短甲と三角板革綴短甲, 史林 八一卷五號.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21

22 일본고분시대중기를중심으로한갑주와철촉의변천 ( 橋本達也 2012b) 大塚越古墳 ( 阪口英毅 1998) 2 向山 1 号墳 ( 阪口英毅 1998) 3 야막고분 4 谷内 21 号墳 ( 鈴木一有 2012) 도면 5. 일본고분시대중기갑주변천및야막고분갑주비교 22 한일문화재논집 Ⅲ

23 고흥장동유적 ( 대한문화유산연구센타 2011), 야막고분, 6 老司古墳, 7 8 五ヶ山 B2 号墳 도면 6. 야막고분철겸비교 야막고분출토왜계철촉 도면 7. 야막고분출토왜계철촉과일본열도철촉 五ヶ山 B2 号墳 / 下山天神山古墳 / 和泉黄金塚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23

24 도면 8. 한반도서남해안연안항로상의왜계고분분포 도면 9. 고흥야막고분전경 24 한일문화재논집 Ⅲ

25 도면 10. 야막고분출토유물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25

26 도면 11. 야막고분출토유물 26 한일문화재논집 Ⅲ

27 도면 12. 야막고분출토갑옷 ( 上 : 외면, 下 : 내면 ) 고흥야막고분을통해본 5 세기대외교섭 27

28 青木敬아오키다카시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Ⅰ. 머리말 1. 신라및주변지역의수혈계매장시설과분구 2. 신라및주변지역의횡혈계매장시설과분구 3. 분구의고대화 ( 高大化 ) 와그평가 4. 한일분구의비교검토 Ⅱ. 맺음말 요약문 본고에서는신라및그주변지역고분의분구를분석하고, 일본열도고분과비교검토를실시한다. 분석방법은대상이되는사례의분구형상이타원형혹은정원형 ( 正圓形 ) 중어느쪽을지향하는지지수를이용하여수치를산출한다. 또한분구길이에대한분구높이의비율을나타내기위해여기에도지수를사용한다. 도출된지수를바탕으로출현연대나지역성등을파악한다. 분석결과대상지역에서는분구가타원에서정원으로변화하는것을파악하였고, 그것이수혈계매장시설에서횡혈계매장시설로전환하는시기와획을같이함을명확하게알수있었다. 그이유로는수혈계매장시설을가진고분에서는매장시설의형상을따라주위를높이피복하는것이, 분구의제일첫역할이었기때문이라고생각하였다. 그후횡혈계석실의채용이분구주위의정비를유인하여, 분구외표에기단외장상 ( 基壇外裝狀 ) 의표식을행하고, 거기에십이지상을위시한부조물을설치한다. 이러한점이분구정원화의계기라고해석하였다. 또한신라에서는북위 ( 北魏 ) 의고대화된황제릉의축조가재개된것을계기로, 적어도 5세기후반부터신라식고총으로서의고대화된분구를축조하고, 횡혈계로매장시설이변화함에도계속이어진다. 거기에분구의고대화는중국북조에서처음시작된것으로, 북조의영향이점차신라에서일본열도로파급되어갔다고생각하였다. 5세기후반이후분구는고대화라고하는소위중국적인분묘형태를채용하였고, 동아시아의동향을살펴봤을때, 권력의소재를명확화한다는점에서, 각지의왕권에공통된지향성이있었던것으로추론하였다. 주제어 : 분구, 정원화 ( 正圓化 ), 고대화 ( 高大化 ), 신라, 가야, 일본열도 28 한일문화재논집 Ⅲ

29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青木 敬* 아오키 다카시 Ⅰ. 머리말 이전 필자는 한일 분구축조기술의 상관성을 추정할 수 있는 사례가 소수이지만 확인되는 점, 또한 한국의 전방후원분에서 유사한 기술이 채용되는 예도 존재하는 한편, 재지의 기술로 축조된 예도 많 고, 토목기술의 채용은 피장자의 출자(출신) 등에서 따라 다양하다고 논하였다.1) 또한 분구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검토를 실시하여, 上方으로의 확장이라고 하는 개념이 일본고분에서는 생소하지만, 한국에 서는 전라남도 나주시 신촌리 9호분이나 복암리 3호분 등 영산강유역의 복합묘에서 복수로 존재하는 것에서, 고분 혹은 분구에 대한 개념이 한일간 이질적인 부분이 많다고 이해하였다.2) 또한 필자는 분구와 석실의 상관성에 대해 검토를 실시,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전 중기고분은 중 앙부 매장을 원칙으로 하지만, 분정부(墳頂部) 매장이 증가함에 따라 분구의 중심을 피해 의례의 장 으로서의 공간을 확보하는 듯 한 매장시설 배치로 변천함을 지적하였다.3) 뒤이은 후 종말기 고분에서 는 횡혈계 매장시설을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중앙부 매장을 중시하는 여태까지의 경향을 암묵 적으로 지키는 예도 존재한다. 또한 분구 규모를 우선하였기 때문에 매장시설이 분구 중앙에서 이탈한 장소에 구축된 예도 6세기대에는 각지에서 넓게 확인되지만, 7세기대가 되면 서서히 중앙부 매장 중시 로 수렴되어 간다고 하였다.4) 다만 이 분구와 매장시설의 상관성이라는 관점은, 한반도의 고분에서는 중앙부 매장을 관철하고 있 기 때문에 별로 유효하지 않다. 횡혈계 매장시설을 한 예로 들어도, 분구 중심부가 현실의 어디에 위치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1) 青木 敬, 2005, 韓国の古墳における墳丘構築法 墳丘断面からみた検討, 専修考古学 第11号, pp ) 青木 敬, 2007, 前期古墳における墳頂部の性格と地域性 拡張する古墳 しない古墳, 古墳文化 Ⅱ, 國學院大學 古墳時代研究会, pp ) 青木 敬, 2007, 前期古墳の埋葬儀礼 墓 から 場 へ, 専修考古学 第12号, p ) 青木 敬, 2007, 古墳における墳丘と石室の相関性, 日本考古学 第23号, pp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29

30 하는가 하는 작은 차이점은, 사례분석에 의해 지역차 혹은 시기차라는 경향을 보이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중앙부 매장이라고 하는 큰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로 이성주의 연구를 따르는 吉 井秀夫(요시이 히데오)는, 분구와 매장시설의 축조순서에 주목하여 1~6세기에 걸친 한반도의 분묘를 분구선행형과 분구후행형으로 양분하고, 그 지역성 및 시간적 변화 과정을 규명하였다.5) 또한 吉井는 횡혈계 매장시설의 본격적인 채용 이후, 이러한 분류는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며 그 이유로 축조순서 가 어떻든, 고분이 완성된 후 피장자매 매장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6) 그렇기 때문에 吉井가 제시한 시선을 횡혈식석실에도 채용하여 분류하기에는 아무래도 생산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필자가 근래 수년간 한국 고분의 분구를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분구형태 등에서 변화하는 경 향을 추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것은 분구 규모가 대형일수록 분구 평면형이 일그러진 예 가 많으며, 소형의 분구일수록 깔끔히 정리된 예가 많은 것을 확인 한 것에서 출발한다. 처음에는 이 점에 주목하여 검토하였다. 그러나 검토를 진행하면서 이유는 단지 그것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본고 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한반도 고분의 분구 특질의 일단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만 검토대상이 방대한 이유로, 여기서는 주로 신라를 대상으로 하며 왕릉급고분의 분구의 특징 및 그 변천에 대해 정리하고, 가야를 위시한 신라 주위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루겠다. 이를 바탕으로 신 라의 양상과 일본열도의 양상을 비교하고, 쌍방에서 공통되는 영향이나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도 언 급하고자 한다. 1. 신라 및 주변지역의 수혈계 매장시설과 분구 1) 경주지역의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고분의 개관 경주지역에는 3세기 중반에 대형목곽묘가 출현하고, 4세기 중반~5세기 초에 걸쳐 적석목곽묘가 출 현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간다. 묘제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매장시설을 분구축조에 선행하여 설치하고, 매장 후 분구를 구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가야의 여러나라에서도 대형목곽묘가 출현 하며, 그 후 고령 옥전 함안 고성에서 수혈식석실(석곽)과 대형분구를 가진 고분이 축조된다. 분구 바 깥 둘레에는 호석을 사용하는데, 본래에는 봉토 유출(유실) 방지 등의 기능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여기 서는 대형분구를 가진 5 6세기의 대표적 사례를 들어 보겠다. 5) 吉井秀夫, 2002, 朝鮮三国時代における墓制の地域性と被葬者集団, 考古学研究 第49巻 第3号, pp ) 吉井秀夫, 朝鮮三国時代における墓制の地域性と被葬者集団, (前掲註5), p.44. 7) 吉井秀夫, 朝鮮三国時代における墓制の地域性と被葬者集団, 前掲註5. 30 한일문화재논집 Ⅲ

31 경주지역에서는삼국시대신라시기에매우많은수의적석목곽묘가축조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조선고적연구회등에의해발굴조사가이루어져, 광복이후에는황남대총이나천마총등의왕릉에대한전면조사를시작으로다수의고분이발굴조사되었다. 현재에도시내중심부의쪽샘유적에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의한장기간의대규모조사가실시되어, 매장시설의구조, 분구규모, 부장품의내용등에서명확한계층관계를살펴볼수있는점이나, C10 호목곽묘에서완형으로출토된마갑, 갑주등삼국시대신라의묘제나유물연구에크게기여할만한성과들이나타나고있다. 아래에서는분구와매장시설의전모가밝혀진발굴조사예가운데분구의전용을파악할수있는기존보고된사례를들겠다. 타원 ( 橢圓 ) 지수와장고 ( 長高 ) 지수또한본고에서는검토를위해분구의높이를길이로나누고, 100 을곱하고자한다. 이것을장고지수라고가칭한다. 거기에원분의경우분구형상이정원형에가까운지혹은타원형이라고해야하는지, 그근거로타원지수를도출한다. 타원지수는단축을장축으로나누고 100을곱하여산출한값이다. 황남대총 ( 황남동 98호분 ) 경주시내중심부에위치하는읍남고분군중, 황남동고분군에소재하는황남대총 8) 은신라최대의왕릉으로유명하다. 분형은소위표형분 ( 쌍원분 ) 을이루며, 남성을매장한남분, 여성을매장한북분의 2기가연접한다. 분구의전장은남북으로 114m 이지만, 직경약 80m전후의원분 2기가붙어있고, 분구높이는북분이 22.6m, 남분이 21.9m 이다 ( 도면 1 上 ). 서로의분구가연접해있기때문에타원지수는정확히나타낼수없지만, 각각의직경을 80m라고했을경우장고지수는북분이 28.2, 남분이 27.3 정도이다. 분구규모는물론이고, 비교를할수없을정도의금은제품을필두로한부장품에서볼때, 신라왕 왕비의분묘로보아도틀림없다. 부장품등에서남분보다북분이조금뒤에축조되었다고생각되지만, 대략 5세기후반대일것이다. 천마총 ( 황남동 155 호분 ) 천마총 9) 은경주시황남동 262번지에소재하는적석목곽묘 ( 제 1도下 ) 이다. 황남대총과같이황남동고분군에속한다. 천마총의동측에는황남대총 ( 제 98호분 ) 이인접하며, 남동에는미추왕릉도자리하고있다 년황남대총보다먼저전면발굴조사가실시되었고, 출토된다량의금속제품이나도질토기로보아 6세기전반에축조된왕릉으로추정되어, 최근에는지증마립간 ( 재위 년 ) 의묘라는설이강하다. 분구는규모에서볼때황남대총보다는소형이지만, 근처에있는금관총과거의같은규모의원분이다. 보고서에서는분구직경 47m 라고만기록되어있으나이것은동서방향의직경으로, 남북방향은단면도를계측했을때약 44m이므로, 약간에불과하지만타원형을 8) 文化財管理局文化財研究所, 1985, 皇南大塚 ( 北墳 ). 文化財管理局文化財研究所, 1994, 皇南大塚 ( 南墳 ). 9) 文化財広報部文化財管理局, 1974, 天馬塚.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31

32 띤다. 이상을정리하면분구는장경 47m, 단경 44m, 분구높이 12.7m 의타원형을하고있다 ( 타원지수 94, 장고지수 27). 황오동 54호분 ( 갑총 ) 본고분은경주시황오동 번지로현재조사가계속되고있는쪽샘유적 B지구내에소재하는적석목곽묘이다 ( 도면 2) 년에조선고적연구회의有光敎一 ( 아리미츠쿄우이치 ) 에의해발굴조사가실시되었다. 10) 상세한축조연대는밝혀지지않았으나, 5세기대로보아도좋을것이다. 고분은갑총과을총의 2기이지만, 다음에다룰황오동 16호분과는달리호석으로서로를연접하지는않는다. 갑총의분구는장경약 20m, 단경약 16m, 분구높이 5m의타원형이다 ( 타원지수 80, 장고지수 25). 황오동제16 호분본고분은경주시황오동 번지에소재하며, 년에조선고적연구회의有光敎一에의해발굴조사가실시되어, 최근발굴조사보고서가간행되었다. 11) 조사결과적석목곽묘 12기가확인되었으며상세하게는 A~E 분구의 5개분구로되어있고, 거기에 A분구와 D분구의호석남부를잇는호석의존재가밝혀졌다 ( 도면 2의左 ). 분구전체의규모는동서약 35m, 분구잔존높이약 3m( 타원지수 86, 장고지수 8.5 이상 ) 이다. 각분구는붙어있기때문에분구장경 단경을정확히나눌수없으나, A분구는동서약 17.7m, B분구는동서약 18.8m, C분구는동서약 15.4m, D분구는동서 21m이상, E분구는동서 10.2m 를띠고있어, 각각의분구단위로본장고지수는 14.2~29.4 로대략 20 을중심으로하는수치에분포한다. 호석의접합관계등에서 D분구 B분구 C분구 A 분구순으로구축되었고, E분구는 A분구와만접합관계를가지고있으며, A분구보다선행한다. E분구옆의와관을포함하면, 본고분은도합 8기의매장집합체라고할수있다. 출토유물로보아매장이실시된시기는 5세기후반 ~6세기전반의장기간에이른다. 수혈계매장시설분구의특징이상의예에서타원지수를종합하면 90전후의값을나타내지만, 80대인타원형이라고할만한예도많다. 다만타원지수가 100에가까운예, 즉정원형이라고할만한예는확인할수없었고, 수혈계매장시설을가진대형고분의분구는종합하면타원형혹은타원형에가까운형상을한다. 앞서다룬황오동제16 호분의호석을볼때, 본분롱 ( 墳壟 : 분구 ) 의외주를구획하여총괄적으로호석을받치고자 ( 돌리고자 ) 한흔적 12) 이있어, 최종적으로분구를하나로둘러싸모으려는의식이있었던것으로보인다. 개별적인매장에있어서는원분을지향하였지만매장이끝난후인접한고분을포 10) 有光教一, 1934, 皇吾里第 54 號墳甲乙二塚, 昭和 8 年度古蹟調査概報, 朝鮮総督府. 11) 有光教一 藤井和夫, 2000, 朝鮮古蹟研究會遺稿 Ⅰ, CEACS ( 財 ) 東洋文庫. 12) 有光教一 藤井和夫, 朝鮮古蹟研究會遺稿 Ⅰ, ( 前掲註 10), p 한일문화재논집 Ⅲ

33 도면 1. 신라의수혈계매장시설고분 (1) 1 : 1000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33

34 괄하는 조작이 행해졌기 때문에, 포괄한 결과가 부정형이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구의 정 연함보다도 매장행위를 반복한 집합을 중시한 것이 경주의 적석목곽묘를 위시한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 진 분구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장고지수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대략 20 이상의 높은 분구를 지향했다는 경향성이 보인다. 거기에 경주지역에서는 이러한 높은 분구가 적어도 5세기 후반에는 축조되었다.13) 2) 신라 주변지역의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고분의 개관 다음으로 신라 주변지역의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고분에서는 신라와의 공통점이나 상이점이 나타 나는지 대표적인 발굴조사 예를 개관한다. 덧붙여 원래대로라면 성산동고분군(성산가야), 교동고분군 (비화가야), 도항리고분군(아라가야) 등, 가야 제지역의 여러 예들도 포함하여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 나, 지면 관계상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검토에 머물 수밖에 없어, 이번에 검토에서 하지 못한 점 은 다음에 다시 논하고자 한다. 지산동 제73호분 지산동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에 있는 주산(主山)의 서남방향 능선과 거 기에서 파생된 가지능선상에 입지하는 대가야의 주요고분군이다. 이 중 73호분은 대형의 분구를 가진 목곽묘로 매장시설은 지표 아래에 파인 묘광 내에 설치된 소위 지하식이다(도면 3).14) 축조연대는 후술 할 75호분을 포함하여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분구는 장경 23m, 단경 22m, 복원 높이 약 7m의 약타원형이다(타원지수 95.6, 분구 높이지수 29). 지산동 제75호분 설상대지 말단부의 미고융기부에 걸친 경사지에 입지하는 수혈식석실 및 부장곽이 나 다수의 순장곽을 가진 고분이다(도면 3).15) 수혈식석실은 소위 지하식으로 호석의 외측에 추가로 주 연부(周緣部)를 형성한 사례이다. 분구는 장경 27.3m, 단경 23.5m, 복원 높이 약 8m의 타원형이다 (타원지수 86, 분구 높이지수 30). 지산동 44호분 주산 서남록의 능선 완경사면에 입지하는 대형의 고분으로 지산동고분군을 대표하 13) 그 초현 및 황남대총을 위시한 적석목곽묘의 연대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높고 대형화된 분구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정견(定見)을 볼 수 없으나, 황남대총은 白井克也의 신라토기편년에서 신라ⅡA期中 (남분) 신단계(북분)이라는 견해를 따라 5세기 후반으로 하였다. 白井克也, 2003, 新羅土器の型式 分布変化と年代観-日韓古墳編年の並行関係と暦年代-, 朝鮮古代研究 第4号, pp ) 高霊郡大伽耶博物館 大東文化財研究院, 2012, 高霊池山洞第73~75号墳. 15) 高霊郡大伽耶博物館 大東文化財研究院, 高霊池山洞第73~75号墳, (前掲註14). 34 한일문화재논집 Ⅲ

35 도면 2. 신라의 수혈계 매장 시설 고분 도면 3. 신라주변의 수혈계 매장 시설 고분 는 왕묘로 일컬어진다.16) 년에 발굴조사되었다. 최근 간행된 보고서에 따르면 소위 지하식의 주곽 남곽 서곽을 감싸듯이 32기의 순장곽이 설치된, 5세기말에 축조된 대가야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도면 3). 분구는 장경 27m, 단경 25m, 현존 높이 3.6m의 거의 정원에 가까운 타원형이다(타원지 수 92, 분구 높이지수 13). 본래의 무덤 높이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복원했을 경우 분구 높 이지수는 조금 더 높은 수치를 나타낼 것이다. 옥전 M3호분 본 고분은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의 구릉능선상에 소재하며, 다라국왕 릉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수혈식석곽을 가진 고분이다(도면 3).17) 마구를 위시한 출토유물은 일본과 의 관련성이 높은 자료로 이전부터 주목되었지만, 대가야와 다라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도 유명하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옥전고분군 3단계(5세기 후반 이후)의 수장묘로, 보고서 16) 慶北大学校博物館 외, 2006, 高霊池山洞44号墳-大伽耶王陵-, 慶北大学校博物館学術叢書37 慶北大学校考古 人類学科考古学叢書1. 17) 慶尚大学校博物館, 1990, 陜川玉田古墳群Ⅱ M3号墳, 慶尚大学校博物館調査報告 第6輯. 趙栄済, 2007, 玉田古墳群과多羅國, 혜안.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35

36 에 따르면 5세기말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분구는 남북(장경) 21.6m, 동서(단경) 19.4m, 잔존 높이 2.5m의 타원형이다(타원지수 89, 분구 높이지수 12). 타원형이 되는 이유 이상의 예는 타원지수가 80대 후반~90대 전반으로, 타원형 내지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상을 나타내는 예로, 이런 점에서 경주의 예와 같은 경향을 보인다. 즉 신라 및 그 주변지역 의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왕릉급의 고분에서는 분구가 정원형을 지향하는 의식이 희박하다고 판단 된다. 그럼 분구가 타원형 내지는 그것에 가까운 형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도면 2 3을 살펴봤을 때,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고분은 장경의 방향이 모두 매장시설의 추축방향 으로 길다. 이는 매장시설의 형상을 반영한 결과로 분구가 타원형 혹은 그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수혈계 매장시설의 형상에 따라 분구를 구축하는 것이 신라나 가야 등 지역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당시기의 분구는 매장시설의 형상과 불가분의 관계로 형상을 정연하게 구축하는 요소보다도 매장시설을 피복(덮음)하고, 거기에 높은 분구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였다. 첨언하면 적석목곽묘나 수혈식석곽묘 등의 분구는 매장시설을 피복하는 구조물로 매장시 설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였음을 시사한다. 높은 분구와 완만한 분구 후술할 장고지수에 대해 여기서 누설하는 것은 피하겠지만, 5세기전반부 터 높은 분구를 축조했던 지산동고분군, 이와 달리 비교적 완만한 분구인 옥전 M3호분에서 분구 높 이에는 지역차가 있는 듯하다. 물론 분구의 잔존 상태에 따른 장고지수는 본고에서 표시한 값을 후술 하겠지만, 극단적인 수치의 변화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장고지수에서 보이는 지역성이 존재했을 가능성 이 높다. 이것은 가야에서는 분구의 높이를 강조하는 지역과, 그 정도까진 강조하지 않은 지역으로 나 뉠 가능성이 크다. 덧붙여 시기적으로는 분구 축조가 현저해지는 5세기 전반부터 높은 분구를 축조하 고, 이것이 계속되는 것도 명시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가야에서는 경주지역보다 앞서 높은 분구를 축조 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지역에서는 높은 분구를 축조하는 계기가 서로 달랐을 가 능성도 시야에 둘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신라에서 횡혈식석실이 채용된 이후의 고분 개요에 대해 서술하도록하겠다. 2. 신라 및 주변지역의 횡혈계 매장시설과 분구 1) 경주의 횡혈식석실분 개관 경주지역에서는 보문리 부부총이나 황남리 151호분 등을 시작으로, 횡혈식석실분이 출현한다. 그 시 기는 6세기 초반경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초기의 석실 평면형은 장방형으로 연도를 가지지 않는, 한국 36 한일문화재논집 Ⅲ

37 에서말하는횡구식석실이다. 이후 6세기중반경이되면적석목곽묘에서횡구식석실로점이적으로변화하며, 6세기후반에는횡혈식석실이등장을하게된다. 석실평면형이방형으로변화하고석실의위치는한국에서말하는지상식을채용하게된다. 신라에서횡혈식석실의수용및정형화된석실구조와매장의례를갖추게되는것은 6~7 세기로, 일본열도의畿內 ( 키나이 ) 계횡혈식석실의확산과전방후원분의소멸과거의대응된다. 이것은신라만이아닌가야나백제에서도거의동시기에중심적인세력이횡혈식석실을수용하며, 고구려이외의한반도각지와일본열도의양상이유사한점은중요하다. 피장자는시상대라고불리는침대상의시설위에안치되지만, 횡혈식석실도입초기에는관을사용하였다. 18) 처음에는단장 ( 單葬 ) 이었으나추가장을포함한복수장이주류가되는점도신라횡혈식석실분의특징이다. 이하에서는우선경주의횡혈식석실분부터다룰것이다. 또한경주에서는다수의횡혈식석실분이발굴조사되어발굴조사보고서도간행되었지만, 분구형상을정확히파악한다는본고의목적상, 정밀한분구측량도가작성되어있는근래의조사성과를중심으로검토를진행하도록하겠다. 황성동석실분 1987 경주시황성동 번지, 후술할황성동석실분의 170m 남쪽에소재하는원분이다 ( 도면 4). 19) 동일하게후술할용강동석실분도본고분의남동약 1.5m 에소재하는데, 주위는횡혈식석실분이다수분포하는지역이다. 석실은거의정방형의평면형을갖는다. 분구내출토도질토기로볼때 7세기후반이후의축조로판단된다. 분구는직경 14.1m, 분구높이 1m 이상의정원형을갖는다 ( 타원지수 100, 장고지수 7이상 ). 황성동석실분 2005 경주시황성동 번지에소재하는원분이다. 경주시가지북편의평탄지에소재하는원분이다 ( 도면 4). 20) 석실은평면장방형의片袖式石室로석실내출토유물로볼때피장은 7 세기중반경, 이후 9세기전반까지추가장이행해진듯하다. 호석주위에서도질토기등이출토되어분구주위에서장송의례가행해졌다고추정된다. 분구는장경 10.0m, 단경 9.8m, 분구높이 1m이상, 정원형에가까운평면형태이다 ( 타원지수 98, 장고지수 10이상 ). 용강동고분경주시용강동에소재하며석실내출토도질토기로볼때 7세기말 ~8세기초의축조로추정되는원분이다 ( 제 4도右 ) 년에발굴조사가실시되었고평면장방형의횡혈식석실동남모서리및서남모서리에서인물토용 28점, 土馬 4점, 토기 15점, 청동제십이지신상 7점이출토되 18) 曺永鉉 ( 堀田啓一訳 ), 1993, 三國時代の横穴式石室墳, 季刊考古学 第 45 号, pp 曺永鉉 ( 吉井秀夫訳 ), 2000, 新羅 加耶の横口 横穴式石室墓, 考古学ジャーナル No461, pp ) 李康承 李煕濬, 1993, 慶州隍城洞石室墳 國立慶州博物館 慶州市. 20) 國立慶州文化財研究所 慶州市, 2005, 慶州隍城洞石室墳 番地, 学術研究叢書 47.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37

38 었다.21) 분구는 동서 13.5m, 남북 14.0m의 거의 정원형을 띠며, 분구 높이 3m이다(타원지수 96, 장고 지수 21). 또한 분구 하단의 외호석은 최하단만 잔존하여 있으나, 화강암 절석을 사용하여 마치 건물 기단의 지복석(地覆石:기석) 같이 놓여있다. 보고서에도 지적되어 있지만, 기단 외장(外裝)의 영향을 받은 호석의 한 예로 명기해 둔다. 냉수리고분 6세기 전반에 축조되었다는 본 고분은 경상남도 영일군에 소재하며, 신라의 횡혈식석실 로는 극히 초기에 속하는 원분이다(도면 4).22) 석실은 대형으로 묘광과 같이 생토를 파낸 후 석실을 구 축한다. 소위 반지하식의 사례로 이후 대다수를 점하는 소위 지상식과는 석실의 위치가 분명히 다르 다. 분구도 조영현이 말한 양파식 성토방법이 채용되어, 재지 공인의 손에 의하지 않은 고분으로 추측 되고 있으며, 고구려의 횡혈식석실분과 구축기법이 유사한 것이 지적되고 있다.23) 분구 동측이 삭평되 어 있어 동서 직경은 불명하지만, 호석의 상황에서 볼 때 거의 정원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분구 는 남북 직경 21.0m, 분구 높이 현상 5m, 복원 높이 6m이다(타원지수 불명, 장고지수 29). 분구 측량도와의 비교도 있어 여기서는 겨우 네 사례에 한한 사례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주 횡혈식석실분의 조사 사례는 상기한 사례 외에 대표적인 것들만 해도 동천동 와총, 충효동고분군, 노 서동의 쌍상총(노서동 137호분), 마총(노서동 133호분), 서악동고분이나 서악동 석침총 등 다수에 이르 고 있음을 추가로 기록해 둔다. 2) 신라 주변지역의 횡혈식석실 개관 다음으로 신라 주변지역의 횡혈식석실분 중, 최근 발굴조사가 행해져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두 사례에 대해 기술한다. 학미리고분 1호분 본 고분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산, 해발 162.6m의 모지산(暮知山) 산 정에 소재한다 년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1호분~3호분 3기의 고 분을 확인하였다(도면 5).24) 이 중 본고의 검토대상인 1호분(보고서에서는 1호로 기재)은 지상식의 횡 혈식석실분으로, 3기 중 최대의 분구규모를 갖고 있다. 횡혈식석실은 평면 장방형의 兩袖式으로, 현실 내에서 3기의 屍床이 확인되었다. 출토 도질토기로 볼 때, 初葬은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분구는 21) 文化財研究所 慶州古蹟発掘調査団, 1990, 慶州龍江洞古墳発掘調査報告書. 22) 國立慶州博物館, 1995, 冷水里古墳. 23) 曺永鉉(吉井秀夫訳), 新羅 加耶の横口 横穴式石室墓, (前掲註18). 24) 金東淑(土生田純之訳), 1998, 義城鶴尾里古墳発掘調査概報, 専修考古学 第7号, 専修大学考古学会, pp 慶北大学校博物館 외, 2002, 鶴尾里古墳, 慶北大学校博物館学術叢書 한일문화재논집 Ⅲ

39 도면 4. 신라의횡혈식석실분 1 : 500 도면 5. 신라주변의횡혈식석실분 1 : 500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39

40 동서(단경) 15.5m, 남북(장경) 16.5m, 분구 잔존높이 3.2m로 약간 타원형을 띤다(타원지수 94, 장고 지수 19이상). 구산동고분 본 고분은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분성산(盆城山)의 남쪽으로 뻗는 설상지의 능선상 에 소재하며, 보고서에 따르면 6세기 후반에 축조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도면 5의 右).25) 매장시설은 주석실(主石室)로 불리는 분구 중심에 구축된 片袖式의 횡혈식석실 이외에도, 2기의 부장석곽이나 석 곽묘과 확인된다. 분구는 동서 14.2m, 남북 14.1m, 분구 현존높이 약 2m로 거의 정원형을 띤다(타원 지수 99, 장고지수 14이상). 3) 신라 및 주변지역 횡혈식석실분의 평가 횡혈식석실분의 분구와 석실의 특징 이상, 다룬 사례는 적지만 경주 및 그 주변지역의 횡혈식석실분 은 모두 타원지수가 100에 가까운 값을 보이며, 정원 혹은 정원에 가까운 정연한 원분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수혈계 매장시설을 갖는 고분보다도 명확하게 정원에 가깝다. 경주에서 떨어진 지역의 횡혈식석 실분에서는 학미리 1호분과 같이 타원형을 하는 사례도 있지만, 그마저도 횡혈계 매장시설과 비교하면 타원지수가 80대인 예는 없으며, 수치적으로도 정원형을 지향한 것이 명백하다. 경주에서 떨어진 지역 에서도 구산동고분과 같이 거의 정원형인 사례도 있어, 넓게는 정원형을 지향하였음은 거의 틀림없다 고 할 수 있다. 장고지수를 보면 수는 적지만 수치가 구해진 사례를 봤을 때 20~30대를 나타내고 있 으므로,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고분과 수치적으로는 큰 차가 없다. 또한 장고지수에 대해서는 수혈 계 매장시설과 같이 20을 넘는 예가 보여, 계속해서 높은 분구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분구 내 횡혈식석실의 평면위치를 보면, 모든 예가 현실중앙부 부근으로 중심점이 모이 듯 설계되어 있다. <도면 4 5>에 표시한 것처럼, 황성동 석실분의 2기, 용강동고분, 거기에 학미리 1호 분, 구산동고분의 모두가 횡혈식석실의 현실중앙부 부근으로 분구의 중심점이 모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 획일성으로 보면 횡혈식석실분은 유해를 분구의 중심에 놓는, 모두(冒頭)에서 말한 중앙부매장을 하기 위해 계획된 것임이 확실하다. 이러한 피장자를 매장시설과 분구의 중심에 놓는 의식이 횡혈식석 실의 본격적인 도입과 함께 고분과 매장시설의 배치를 엄격히 행하여, 의식하도록 된 것은 확실할 것이 다. 이러한 매장관념에 관한 사상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현상에서 확실한 가설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으므로 금후의 검토과제로 삼고 싶다. 분구 정원형을 지향하는 횡혈식석실분 신라 횡혈식석실분의 분구 규모는 대체로 작다. 본고에서 다 25) 釜慶大学校博物館, 2000, 金海亀山洞古墳, 釜慶大学校博物館研究叢書 第5輯. 40 한일문화재논집 Ⅲ

41 룬사례는직경 10~15m 전후의것들이대부분으로, 경주등의대형적석목곽묘가대략 25m이상, 경우에따라서는 50m를넘는분구도존재하는것과비교했을때, 그차이는확연하다. 이분구가소규모인점을주목하면, 분구가소규모인대신분구의정확한분할이가능했음을추측할수있다. 그런데수혈계매장시설을가진분구에서도이번에다룬황오동 54호분과같이분구가 20m에이르는사례들이압도적으로수가많다. 하지만이러한비교적소규모의예에서도분구가정원을띠는예는희박하다. 그렇게되면분구가소규모가되었다는이유만으로정원형으로변용되었다고는생각하기힘들며, 그외의이유도생각해볼필요가있다. 그런데이번에예를든횡혈식석실분은모두단독의분구로완결된다. 그런데시기가올라가는경주의적석목곽묘를위시한수혈계매장시설을가진고분은, 복수의매장시설과그에대응하는분구가있어, 상호가연접하는예가많다 ( 연접분 ). 그결과최종적으로는복수의분구가집합하는소위분구의복합체가된다. 이러한구조적인특징은높이와분구길이의비율에는일정정도배려되어있지만, 분구를정원형으로하는의식에는그정도로강하지않았던것에기인한것으로보인다. 한편횡혈식석실분은단독으로분구로완결하는점에서, 연접분을필요로하지않는구조면에서의변화가분구의정원화를가속시켰다고판단된다. 측면이중시되는분구한편분구정원화를이룬이유는거기에서만머물진않는듯하다. 횡혈식석실의분구정원화에는설계외에도복수의이유가있다고필자는추측했지만, 여기서는그이유의하나로서분구외표시설의양상을주목하고자한다. 횡혈식석실분은기본적으로연도가붙는다. 한편한국의횡구식석실예는무연도이며, 이들은백제를중심으로분포한다. 무연도인이유는횡구식의구조를볼때확연한것과같이백제에서는단장을지향했다는, 신라와는다른묘제였던것에서기인한다. 그런데경주지역에서는통일신라시대의축조로추정되는장산 ( 獐山 ) 토우총 ( 분구직경 19m, 분구높이 7m, 장고지수 36.8, 도면 6 左 ) 이나구정동방형분 (8세기후반 ~9세기전반, 분구길이동서 8.9m, 남북 8.8m, 도면 6 右 ) 등, 연도가분구端部 ( 말단부 ) 까지붙는것으로인해석실개구부가명료한예가다수존재한다. 이들은모두정연한원분내지는방분이다. 신라의경우횡혈식석실을도입함으로인해단일의매장시설내에추가장이가능해졌다는점에서, 분구정원화의원인이되었다고생각하고싶다. 물론이유는그것만이아니다. 횡혈식석실의도입은바꿔말하면고분의정면을결정하는것이기도하다. 26) 한반도의횡혈식석실을보면백제에서는 7세기를전후한시기에단장화가진행되지만, 신라에 26) 小林行雄, 1951, 日本考古学概説, 東京創元社.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41

42 도면 6. 신라 횡혈식 석실분의 사례 서는 추가장이 계속된다. 그러한 이유로 신라에서는 석실의 출입구가 필수가 된다. 출입구의 존재는 출 입구의 방향이 고분의 정면이 되는 것 외엔 말할 수 없다. 일본열도에서는 횡혈식석실이 열도 내에서 넓게 정착한 이후 횡혈식석실에 이르기까지의 묘도나 전정부(前庭部)에서 소위 묘전(墓前) 제사가 행해 지는 사례가 빈번하다. 횡혈식석실의 경우 정면 쪽으로 어떤 의례나 제사를 행할 공간이 설치되었다. 앞에서 다룬 황성동 석실분(2005)에서는 분구 주위에서 장송의례가 행해졌던 흔적을 확인하였다. 이 것은 매장행위가 분구축조 완료 후에 행해졌음을 시사하지만, 이러한 분구 주위에서의 의례가 경주를 위 시한 신라의 횡혈식석실을 가진 고분에서 폭넓게 행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매장이나 매장 후에 행해진 의 례나 제사도 수혈계 매장시설을 사용한 시기와는 장소나 타이밍을 포함해 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횡혈식석실화와 함께하는 매장순서의 변화는 매장의례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분구의 모양마저도 바꾸게 된 것이 아닐까. 또한 분구 완성 후의 고분 주위에서 의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자 연히 직면하는 분구 외표를 중시하고, 종래 이상으로 정비하는 것이 자연적인 흐름이다. 그렇게 볼 때 신라에서는 횡혈식석실분의 도입에 의해 분구의 측면관(側面觀)을 중시한 것, 더하여 앞서 기술한 분 구구조의 변화와 함께 분구가 정원화 되었다고 이해하고 싶다. 십이지상과 분구 상술한 것처럼, 횡혈식석실의 도입에 의해 분구의 측면관이 중시되었을 것으로 이 해하였다. 이를 호응하듯 통일신라의 왕릉에서는 분거(墳裾)에 십이지상 등의 석조부조를 배치하게 된 다. 십이지상은 수혈계 매장시설을 가진 분구 단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5세기 후반 이후 에 유행하는 묘지(墓誌)는 6세기가 되면 지석(誌石)과 개석(蓋石)이 세트로 정형화되며, 이들에 문양이 새겨진다. 거기에 사신상(四神像)이 출현하며, 그 후 6세기 말~7세기 초에 십이지상이 확인된다. 또한 의인화 된 수수인신(獸首人身)의 십이지상이 성행하는 것은 唐 중기(8세기 전반)로, 그것과 시기를 같 이하여 통일신라에서 창의를 가미한 십이지상이 분구 단부에 기단 외장(外裝)과 같이 배치되어, 이후 42 한일문화재논집 Ⅲ

43 도면 7. 신라의 정원화된 분구, 빈번히 사용된다.27) 원래 신라의 고분은 지형적 환경도 영향을 한 것인지, 돌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앞서 기 술한 것처럼 수혈계 매장시설 때부터 호석에 의한 분거의 흙막음이 행해졌고, 이 구축은 분구 구축과 일체화 되었다.28) 또한 호석만이 아닌 매장시설 본체나 분구 구축시에, 그 구축 단위로서 블록으로 구 획하는 경우에도 역시 석렬을 사용하는데, 이들은 분구 완성시에는 매몰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은 분구구축 혹은 그 후의 봉토 유출(유실) 방지로서의 호석이나 석렬에 관한 사례는 대단히 많지 만, 여기에 부조 등을 넣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호석의 기능은 봉토의 유실 방지가 주이며,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효과는 별로 기대되지 않았던 것 같다. 분구에 십이지상을 놓게 되는 8세기는, 매장시설에서 말하면 횡혈식석실의 도입 후가 된다. 이러한 분구 표식을 정확하게 나누어 표시하고, 거기에 像의 성격상 방위를 정확하게 표시하는 것이 요청되어, 27) 姜友邦, 1983, 新羅の十二支像 韓國美術シリーズ8 近藤出版社. 28) 沈炫㬚, 2013, 新羅 積石木槨墓의 구조와 축조과정, 韓國考古学報 88, pp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43

44 그결과분구형태는엄연하게정원형혹은정방형을지향하게되었음은상상하기어렵지않다. 또한선술한분구의측면관이중시되어간점도십이지상등의표식을도입한배경이되었을것이다. 실제로경주의김유신묘 (7세기후반축조, 9세기에改修, 도면 7 上 ), 성덕왕릉 (8세기전반 ), 괘릉 ( 傳원성왕릉, 8세기말, 도면 7 下 ) 등은분거부에십이지상을배치한예로유명하다. 여기서는한예로괘릉의삼차원분구측량도를넣었으나, 일견하기에도평면형이모두정원형이된것이분명하며, 분구정원화의경향이강하게확인된다 ( 도면 7 右下 ). 따라서십이지상을위시한분구표식의연원은斎藤忠 ( 사이토타다시 ) 이가말한것처럼호석렬로귀결된다고한다면, 분구정원화는십이지상을배치하기이전, 즉횡혈식석실도입시를계기로한다고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29) 다시말해십이지상의표식이존재하는고분의발굴조사예는한계가있지만선술한구정동방형분이외에傳민애왕릉 (815 년이전축조 ) 이나헌강왕릉등이있으며, 그중헌강왕릉의매장시설은횡혈식석실로판명되어있다. 30) 따라서십이지상의표식이보이는고분은모두횡혈식석실분일가능성이높으며, 분구정원화가횡혈식석실과밀접하게관련되었다는앞의추정을보강한다. 신라사원의기단장식그런데이러한석조의표식은고분에국한되지않는다. 월성군외동면모화동의원원사지 ( 遠願寺址 ) 에서는동서석탑의기단에승복을입은십이지상이각면에 3체씩확인된다. 경주이외에도경상북도예천군폐 ( 廢 ) 개심사오층석탑, 전라남도구례군화엄사오층석탑등에서확인된다. 31) 사원에서도금당기단이나수미단에십이지상이사용된예가있다. 또한사원기단외장에도도상 ( 圖像 ) 을배치한전 ( 塼 ) 이사용된예가있다. 그대표적예로사천왕사지를들수있다. 사천왕사는문무왕 19년 (679) 에완성된통일신라의호국사원으로, 유적은경주시가지에서동으로 5km정도떨어진낮은구릉상에소재한다. 쌍탑식가람배치를가진사원으로유명하며, 현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의한발굴조사가계속해서실시되고있다. 조사에서는여러당우 ( 堂宇 ) 의상세한구조가판명되었고, 금당양끝으로붙는익랑 ( 翼廊 ) 의검출이나, 양호하게잔존하는동서양목탑지의사천왕상전 ( 四天王像塼 ) 을배치한기단외장, 굴착작업을포함한기단조성기술을위시한수많은식견들을알게되었다. 32) 양호하게남겨져있던서목탑지및동목탑지의기단은, 지복석 ( 地覆石 ) 위에우주 ( 隅柱 ) 와속주 ( 束柱 ) 를설치하고, 그사이에장방형전 ( 塼 ) 을 3단이상쌓아, 각면의중앙에붙는계단끝에, 양지 ( 良志 ) 가만든것으로추정되는녹유사천왕상전을놓았다. 사천왕사지기 29) 斎藤忠, 1986, 統一新羅の陵墓の考察 - 十二支像をもつ王陵を中心として -, 朝鮮学報 第 輯, pp ) 國立慶州文化財研究所, 1995, 憲康王陵補修収拾調査報告書. 31) 大坂金太郎, 1969, 十二支方位神を装飾彫刻した新羅時代の遺蹟と遺物, 朝鮮学報 第 53 輯, pp ) 池炳穆 崔장미 ( 高田貫太訳 ), 2008, 大韓民國慶州四天王寺址, 考古学研究 第 55 巻第 2 号, pp 한일문화재논집 Ⅲ

45 단표식의 백미는 십이지상이 아닌 절 이름에서도 보이듯 사천왕상이지만, 신라에서 圖像을 각 방위에 놓는 풍습은 이미 7세기대에는 시작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사원의 기단장식 등도 고분의 표식을 도입한 배경에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선술한 용강동고분과 같이 7세기후반~말 이후, 호석은 건물 기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배경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圖像에 의 한 구조물의 표식이라는 행위는 사원이나 고분 등 토목구조물에 연이어 채용되어, 통일신라시대에 뿌 리내린 문화일 것이다. 3. 분구의 고대화(高大化)와 그 평가 1) 분구의 고대화란 吉備(키비) 남부의 전방후원분 후원부의 높이 및 각도를 검토한 宇垣匡雅(우가키 타다마사)에 따르 면, 고분시대 전기이후 분구 높이는 점차 낮아져 가는 경향이 있으나 전방후원분 집성편년33)(이하 집 성편년으로 약칭) 7기부터 다시 분구 높이가 높아지며, 집성편년 8기에 그 전성기를 맞는다. 경사각은 중기후반까지 27 전후로 수렴되고 있지만, 분구 높이의 증가와 함께 40 전후의 급경사로 변화한다고 하였다.34) 또한 宇垣는 분구 높이가 증대할 때 분구구축법의 변화도 그 배경에 있다고 생각하고 즙석 을 사면(四面) 전면에 구축하는 것이 곤란할수록 경질의 성토가 되는 점도 이유의 하나라고 하였다.35) 이러한 배경으로 宇垣는 집성편년 7기 분구에서의 일련의 변화를 큰 변혁으로 평가하고, 분구 길이를 중시하는 종래의 가치관이 전환하여 분구 높이를 중시하는 것처럼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필자도 대왕묘 클래스를 제외한 대형고분의 분구가 열도의 넓은 범위 에서 집성편년 9 10기에 급경사화되는 것을 지적하였으며,36) 宇垣의 견해를 수긍하는 입장이다. 추가 하여 최근에는 이를 고분의 변천 안에서의 분구의 고대화(여태까지 높은 분구라고 호칭해 왔지만, 이 하에서는 고대화라고 한다)라고 하는 일대 획기로 평가하고 있다.37) 이하 그 획기의 평가에 대해서 설 명하겠다. 33) 広瀬和雄, 1991, 前方後円墳の畿内編年, 前方後円墳集成, 中国 四国編 山川出版社, pp ) 宇垣匡雅, 2010, 古墳の墳丘高, 考古学研究 第57巻 第2号, pp ) 宇垣匡雅 古墳の墳丘高, (前掲註33), p ) 青木 敬, 2003, 古墳築造の研究-墳丘からみた古墳の地域性-, 六一書房. 37) 青木 敬, 2013, 日本古墳の墳丘築造技術とその系統, 연산동고분군의 의의와 평가, 釜山広域市蓮堤区 釜山大学 校博物館, pp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45

46 2) 신라 가야지역의분구길이와높이여기에서조금시야를넓혀한반도의고분에서는분구와매장시설이어떤양상을보이는지검토해보겠다. 검토대상은신라및가야지역의대표적인대형분 ( 각고분군의최대규모고분수기 ) 이다. 해당지역의양상을검토한심현철은길이를높이로나눈수치에의한검토를실시하였는데, 38) 앞서기술한것처럼필자는높이를길이로나누어 100 을곱한것을사용한다. 이미기술하였지만이를장고지수라부르며, 높이의비율에따라명료하게표현할수있다고생각했기때문이다. 최대규모의고분이고분군중몇기존재하며, 그규모에대해정리한심현철의연구성과에따르면각각의장고지수는다음과같다. 경주지역 ( 중심고분군, 80m급 4기 ) 25 대구지역 ( 불로동고분군, 30m급 3~4 기 ) 24.8 성주지역 ( 성산동고분군, 30m급 3~4 기 ) 24.3 창녕지역 ( 교동 송현동고분군, 30m급 2~3 기 ) 24.4 고령지역 ( 지산동고분군, 최대규모는 47 호분의약 40m) 15.2 합천지역 ( 옥전고분군, 최대규모 25m 정도 ) 17.2 함안지역 ( 말이산고분군, 30m급 2~3 기 ) 16.8 부산지역 ( 연산동고분군, 25m 급 3기정도 ) 16.4 심현철이말한것처럼, 장고지수가 24전후인경주의적석목곽묘와근사치를보이는一群과지산동고분군을위시한 16전후의값을보이는一群으로양분되는데, 그는전자를신라식고총, 후자를가야식고총으로분류하였다 ( 도면 9). 39) 즉분구높이는분구길이에대해일정한비율로설계되었음을시사하는것과함께, 지역에따라그비율이달랐다고가정하였다. 후술하겠지만장고지수가 20을넘는예는고대화된분구로파악되기때문에, 심현철이말한신라식고총은말하자면고대화된분구에해당한다. 또한그가분구외형과규모의차이를표시한도면에따르면, 분구의높이는 4m전후 6m전후 20m 정도의몇개의수치로정리된다 ( 도면 8). 한편길이에대해서는경주의예를제외하면 20~30m 정도이며, 높이가지산동보다 3m이상높은성산동고분군이나불로동고분군에서는, 분구길이가역으로수 m로작아진다. 이와같이높이에서는명료한차이가추출되는반면평면규모에대해서는명확 38) 沈炫㬚, 2013, 新羅 加耶高塚古墳의築造技術 - 地域別高塚築造 model 의提示 -, 연산동고분군의의의와평가, 釜山広域市蓮堤区 釜山大学校博物館, pp ) 沈炫㬚, 新羅 加耶高塚古墳의築造技術 - 地域別高塚築造 model 의提示 -, ( 前掲註 37), pp 한일문화재논집 Ⅲ

47 도면 8. 신라와가야지역분구의규모 도면 9. 신라와가야지역의고총분포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47

48 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라 가야지역의 고분축조에서는 분구 길이보다도 오히려 높이 가 중요한 지표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고분의 계층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높이를 중시하였던 것이 신 라나 가야 등의 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일부를 앞서 이야기했지만 가야지역에서 고대화 된 분구가 5세기 전반부터 출현하였고, 신라 왕릉은 조금 늦게 고대화 된 듯하다. 다만 가야나 신라에서의 일련의 고대 화는 일본열도의 분구 고대화에 앞서 있음 또한 분명할 것이다. 3) 北朝의 분구 황제릉 급의 분구 한반도의 고분, 특히 신라식고총이 고대화 되었다면, 신라가 遣使했던 곳인 북조 등, 동시기 중국의 예도 비교검토의 대상에 추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華北의 4~5세기 황제릉을 개관하면, 西晉( )에서는 분구를 갖지 않으며, 北魏( )에 서 高大한 분구(원분)를 축조하게 된다.40) 소위 거대분구를 가진 분묘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 단 서가 되었다고 하는 文明皇后(文成帝皇后) 方山 永固陵은 太和 5(481)에 축조가 개시되어 동 8년 (484)에 완성되었다. 분구는 높이 28.87m, 남북 117m, 동서 124m로 장고지수는 남북으로 나눴 을 경우 24.7이다. 宣武帝(51년 沒) 景陵은 직경 105~110m, 높이 25m, 장고지수는 22.7~23.8 이다(도면 10). 이 2기의 분묘는 모두 장고지수 가 24~25정도로, 한눈에도 고대한 분구이며, 앞 서 기술한 고대한 원구(圓丘)를 가진 신라식고총 과 시각적인 이미지도 근사하다. 이상의 예를 감 안해 고대화 된 분구라는 것은, 장고지수가 20을 넘는 것으로 정의해 둔다. 황제릉 급 이외의 분구 다음으로 황제릉 급 이 외의 분묘 양상도 잠깐 살펴본다.41) 6세기의 예가 도면 10. 북위 경릉 40) 塩沢裕仁, 2010, 千年帝都洛陽, その遺跡と人文 自然環境, 雄山閣. 41) 罗 丰, 2013, 从山陵为贵到不封不木対-北朝墓葬封土的转変, 연산동고분군의 의의와 평가, 釜山広域市蓮堤区 釜山大学校博物館, pp 한일문화재논집 Ⅲ

49 되지만 封龍墓(523년 매장)는 일변 40m, 높이 6m로 장고지수는 15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대형분은 분구가 대단히 높아지는 예가 많다. 분구의 잔존상태에 따라 수치는 다소 변동되겠지만, 예를 들어 京 兆王墓(498년)에서는 주위 길이 약 128m, 높이 20m이므로 장고지수는 98로 극단적으로 높다. 이를 극단적인 예로 한다 해도 6세기 이후의 예에서는 장고지수가 50을 넘는 것들이 많다. 분구 규모는 그 다지 크지 않으며 분구의 잔존상태도 좋다고 할 수 없음에도, 돌출된 탑과 같이 높게 하고자 한 지향 성을 느낀 것은 필자만인건가. 높은 지위의 인간은 특히 분구 높이를 사용해 권력의 소재를 명백히 나 타내고자 하는 의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것들에서, 북위에서도 분구 축조 시에 그 격식을 표현하는 데에는 높이가 큰 요소였었음이 확실히 나타난다. 즉 북조에서 신라 가야라는 동아시아의 복수지역에서 높이야 말로 분구의 계층표시 에 중요한 지표였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북조에서 이러한 고대한 분구를 갖춘 분묘가 다 시 출현하는 단서가 북위 方山永固陵임을 주의해야 한다. 5세기 후반 고대한 분구를 갖춘 분묘 조영이 화북에서 부활하고, 그 후에도 광대(廣大)한 분구 축조가 계속된다는 일련의 동향은 간과해선 안된다. 이는 북위 즉 鮮卑가 중국문화를 5세기대에 수용하면서 그 후반에 크게 진전을 보인 것과 결코 무관 하지 않으며,42) 그 영향은 중국의 동향을 주시하던 주변 제 지역에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5세기 후반 이후 분구 고대화가 현저해지는 신라를 바로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다만 신라가 처음으로 북위에 遣使하는 것은 6세기 초반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북위 와 신라와의 직접적인 외교관계에 의해 신라에서 분구 고대화가 시현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 게 되면 신라의 북쪽에 위치하는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4세기대부터 북조와의 조공관계를 중시하였고, 당연히 북위의 동향에 대해서도 민감했을 것이다.43) 또한 신라는 4세기 이후 5세기대, 연구에 따르면 6세기 초44)까지 고구려의 강한 영향아래 있었던 것 은 널리 알려져 있다. 결국 신라는 고구려를 경유해 간접적으로 분구의 고대화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 였거나 분구 고대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분구 고대화를 지향했을 가능성 도 있다. 4) 연산동고분군의 출현 연산동고분군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고분군은 부산지역에서 유일하게 분구를 가진 고분군으로 42) 向井祐介, 2009, 北魏の考古資料と鮮卑の漢化, 東洋史研究 第68巻 第3号, pp ) 李成制(田中俊明監訳 篠原啓方訳), 中国南北朝との関係, 高句麗の政治と社会, 明石書店, pp ) 糸永佳正, 1999, 新羅の高句麗からの自立時期について, 歴史研究 第36巻, pp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49

50 알려져 있으며 최근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가 실 시되었다(도면 11).45) 현재까지 분구를 가진 것은 18기에 달하며, 이들은 세 군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이 중 중앙에 위치하는 제 2군이 중심적인 존 재로 여겨진다. 분구를 가진 고분은 5세기 후반 ~6세기 초반경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물론 일본과의 편년조율이라는 과제를 가 지고 있는 중에, 이 연대관을 일본의 고분에 직 결시키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연대적인 전후를 가 미하더라도 5세기 말의 일본에서의 분구 고대화 와 연산동고분군에서 돌연 출현한 분구와의 사이 에 전혀 어떤 인연도 없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때까지 무분구였던 지역 유력자묘에 갑자기 분구를 도입하는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존재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 도면 11. 연산동고분군 문이다. 연산동고분군 출현의 배경 5세기 후반은 대가야가 세력을 넓히고 가야의 주위에는 백제와 신라가 강대화해 가는 시기이다. 그 북으로는 이전만큼 강성함은 덜하였지만, 여전히 세력을 갖춘 고구려도 존 재하고 있었다. 각각의 판도 확대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한 무력 충돌이 반복되어, 통일신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해 가던 이 시기, 권력을 표현하는 수단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 가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서 위정자가 숙고를 더했음에 틀림없다. 그 하나로 권력의 소재를 시각적이 면서 효과적으로 내세우는 수단으로 분구를 도입한다는 사상으로 결부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분구를 도입한 전형적 예야 말로 연산동고분군이었다. 한편 이전부터 분구를 축조해 오던 일 본열도에서는 동아시아적 내지는 중국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구를 고대(古代)화시키는 점을 배움으 로서, 권력의 계층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분구 고대화와 무분구 지역에 분구가 출현하는 점은 일견 무관계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문맥 안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지적하 고 싶다. 45) 釜山市博物館 釜山広域市蓮堤区, 2012, 蓮山洞古墳群-高塚古墳基礎調査-, 釜山博物館学術研究叢書 한일문화재논집 Ⅲ

51 4. 한일 분구의 비교검토 1) 신라의 분구 구조 변화와 일본에의 영향 신라 분구 형태의 변화 신라에서는 횡혈식석실의 도입을 계기로 분구가 정원화함을 지적하였다. 그 이 유로 횡혈식석실은 추가장이 가능한 것에서 연접분 등 분구를 추가하여 매장시설을 구축할 필요가 없어 졌다는 점, 거기에 분구 외표에 설치한 기단 외장상의 표식을 도입한 점 등을 들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럼 일본에 신라 분구 변화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있었는가라고 하면, 그다지 명확하게 말하긴 어렵다. 일본열도와 신라와의 관계성을 지적할 수 있는 점은 다음의 십이지상 및 분구 고대화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십이지상 여기서는 일본 고분에서의 십이지상의 몇 예를 다루겠다. 십이지상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奈良(나라県) 高市(다카이치)郡 明日香(아스카) 키토라고분석실(횡구식석곽) 안에 그려 진 십이지상일 것이다(도면 12 左). 십이지상은 사신상과 함께 석실 벽체를 구성하는 동서남북의 4면에 그려져, 여태까지 북벽에서 子 丑 亥, 동벽에 寅, 남벽에 午, 서벽에 戌의 계 6체분이 발견되었다.46) 단장(單葬)의 석실 내에 있는 벽화인 이유로 매장 후에는 불가시상태가 되며, 통일신라의 왕릉 등에서 보이는 표식적인 요소는 없고 용강동고분과 같이 청동제 像의 형태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키토라고분 의 사례는 신라와는 묘제적인 자리매김이 크게 다르다. 奈良市 那富山墓(나호야마보카)는 奈良山 구릉 의 동단에 소재하며, 聖武(쇼우무)천황 황태자의 능묘로 알려져 있어, 최근까지 상세한 것이 밝혀 지지 않았다. 다만 여기에는 준인석(隼人石)이라 고 불리는 양휘석 안산암(兩輝石 安山巖)에 나체 의 수두인신(獸頭人身) 선각(線刻)이 존재하여(도 면 12 右), 예전부터 주목되어 왔다.47) 그 후 궁내 청의 능내석조물 긴급 보존처리와 함께, 奈良県立 橿原考古学研究所도 참가한 조사가 1998년에 실 시되어 도록 돌의 문화 고대 야마토의 석조물 이 도면 12. 일본 십이지상의 예시 46) 文化庁 奈良文化財研究所 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 明日香村教育委員会, 2008, 特別史跡キトラ古墳発掘調 査報告, pp ) 柴田常恵, 1909, 元明陵の隼人石に就て, 東京人類学会雑誌 第25巻 第284号, pp 한일 왕릉급 고분 분구의 특질과 평가 51

52 공개되었다.48) 이에 따르면 각각 子頭人身, 戌頭人身, 卯頭人身, 丑頭人身의 4石이지만 모두 원위치는 아 니다. 준인석이 당초 놓여 있던 자리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래는 분묘의 요석(腰石:기단석)으로 12石이 신 라 분묘와 같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河上邦彦(카와카미 쿠니히코)는 추정하고 있다.49) 이것이 타당하 다면 신라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예로 那富山墓를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일본에서 신라와의 친근 성을 엿볼 수 있는 석조십이지상은 那富山墓에만 국한되는 것이 되어, 그 영향은 한정적이었던 듯하다. 중국의 십이지상은 십이지상 출현이전의 5세기 후반부터 墓誌가 성행하던 北朝에서까지 출현한다. 시기는 6세기말로 묘지석(墓誌石)의 장식으로 나타난다. 묘지석의 주변에 십이지상이 나타는 사례는 중국 외에는 契丹만이 있다. 한편 신라와 고구려 능묘의 십이지상은 이미 본 것과 같이 분구 표식으 로 표현하기 때문에,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50) 그렇게 되면 애 초에 중국에서 십이지상을 분구표면에 보여주려는 의도는 전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없던 것이 된 다. 姜友邦이나 西嶋定生(니시지마 사다오)가 말한 것처럼 신라 십이지상의 사례는 신라 단독의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서도 고찰했지만, 이는 가장 근거리에서 십이지상을 보여주는 기능을 중시한 소산으로, 圖像을 정연하게 배치하는 것은 정확한 방위의 설정 및 정연한 분할이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에 따라 분구도 가지런한 형태를 지향하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사원 기단 등에서 도상에 의한 표식(表飾)이 사용되고, 이러한 점들도 관련되어 신라 고분의 분구는 도상을 배치하는 묘제의 도입에 의해 정원화를 지향하였다고 이해하고 싶다. 2) 분구 고대화의 영향과 그 평가 분구 고대화의 시대 분구의 고대화는 우선 華北(北魏)에서 鮮卑의 漢化가 진행되고, 거대한 분구가 부활한 것을 발단으로, 이러한 동향이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에 의한 것이라고 추론된다. 대표 적 사례로 고구려에서 간접적인 영향에 의해 성립한 것으로 추정한 신라의 예를 먼저 들었으나, 바다 건너의 倭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다. 신라보다 뒤늦게 분구 고대화라는 풍조는 일본열도에도 이르게 된다. 일본열도의 분구 고대화는 어느 지역에서의 영향이었는지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곤란하나 왜와 북조의 관계의 희박성을 참작할 때, 역시 한반도를 경유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며 신라와 같이 48) 北條朝彦, 2000, 元明天皇陵内碑 那富山墓内 隼人石 桧隈墓内 猿石 の保存処理及び調査報告, 書陵部紀要 第51号, pp ) 河上邦彦, 2001, 隼人石, 図録 石の文化 古代大和の石造物, 橿原考古学研究所, pp ) 西嶋定生, 1978, 中国 朝鮮 日本における十二支像の変遷について,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下巻, 吉川弘文館, pp 한일문화재논집 Ⅲ

53 간접적인영향아래서성립했다고보는것이무난할것이다. 한반도서남부를중심으로전방후원분이분포하는것은이전부터알려져있으나, 이들전방후원분이영산강유역에출현하는시기는 5세기후반이다. 51) 5세기후반이라는시대는동아시아규모에서바라봤을때, 한부류의글로벌화를지향하지않으면안되는시대성이었을가능성이높으며묘제에서봤을때이때까지의전통적인요소를남기면서도, 중국적인방법을따라왕권의위세를표시했던시대였다고바꿔말할수있을지도모르겠다. 6세기일본열도의분구고대화분구고대화는특별히 5세기후반 ~ 말에만있었던현상은아니다. 일본열도에서는 6세기중반 ~ 후반에걸쳐서도福岡 ( 후쿠오카 ) 市元岡石ヶ原 ( 모토오카이시가하라 ) 고분 (6세기중반, 장고지수 20), 長崎 ( 나가사키 ) 県壱岐 ( 이키 ) 市対馬塚 ( 츠시마즈카 ) 고분 (6세기후반, 동 21.4~25.7), 双六 ( 소우로쿠 ) 고분 (6세기후반, 동 23.2), 熊本 ( 쿠마모토 ) 県大野窟 ( 오오노이와야 ) 고분 (6 세기후반 ~ 말, 동 22.5) 등대단히높은후원부와저평한전방부를가진전방후원분혹은奈良県高取 ( 다카토리 ) 町与楽鑵子塚 ( 요우라쿠칸스즈카 ) 고분 (6세기후반, 동 32) 을위시한분구경사각이급격하게대단히높아지는분구가되는원분등을찾아볼수있다. 최근이러한특징에더해세장한전방부를가진점등을 見瀬丸山 ( 미세마루야마 ) 型전방후원분 으로부르고, 欽明 ( 킨메이 ) 朝와의외교관계에활약했던유력자라는역사적평가를받고있다. 52) 한반도나대륙과의접점을가진유력자가그지역에서추세였던고대화된분구에대해정보를얻기쉬웠던환경에있었다고추측할수있다. 판축의채용과분구고대화그후近畿 ( 킨키 ) 지방종말기고분의일부에서는분구에성벽이나기단구축을위한기술이었던판축을채용하였고, 이러한예들은모두분구가고대하다. 이는飛鳥 ( 아스카 ) 지역에집중되는것이특징으로, 牽牛子塚 ( 켄고시즈카 ) 고분 53) ( 변에대한길이약 22m, 분구높이 4.5m이상, 장고지수 20.5), 高松塚 ( 타카마츠즈카 ) 고분 54) ( 분구직경약 23m, 남측분구높이 5.8m, 장고지수 25.2), 키토라 ( キトラ ) 고분 55) ( 분구직경 13.8m, 분구높이 4.1m 이상, 장고지수 29.7), 中尾山 ( 나카오야마 ) 고분 56) ( 분구길이약 19m, 잔존분구높이약 4m, 장고지수 21.1) 등이대표적인예로, 모 51) 朴天秀, 2007, 加耶と倭韓半島と日本列島の考古学, 講談社選書メチエ ) 土生田純之, 2002, 墳丘の特徴と評価, 馬越長火塚古墳群, 豊橋市埋蔵文化財調査報告書第 120 集, pp ) 明日香村教育委員会, 2013, 牽牛子塚古墳発掘調査報告書- 飛鳥の刳り貫き式横口式石槨墳の調査 -, 明日香村文化財調査報告書第 10 集. 54) 奈良文化財研究所, 2006, 高松塚古墳の調査国宝高松塚古墳壁画恒久保存対策検討のための平成 16 年度発掘調査報告. 55) 若杉智宏, 2012, キトラ古墳の墳丘形状, 文化財論叢 Ⅳ, 奈良文化財研究所学報第 92 冊, pp ) 明日香村教育委員会, 牽牛子塚古墳発掘調査報告書- 飛鳥の刳り貫き式横口式石槨墳の調査 -, ( 前掲註 53).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53

54 두장고지수 20을넘는고대화한분구의범주에속한다. 또한발굴조사는실시되지않았지만, 檜隅大內陵 ( 히노쿠마노오오우치노미사사기, 天武 [ 텐무 ] 持統 [ 지토우 ] 천황합장릉 ) 도분구변에대한길이약 37m, 분구높이약 7.7m, 장고지수 20.8 로, 마찬가지로고대화한분구이다. 57) 이중牽牛子塚고분은斉明 ( 사이메이 ) 천황릉, 中尾山고분은文武 ( 몬무 ) 천황릉이라는설이가장유력하며, 필자도이설을따른다. 분구규모에서볼때高松塚고분은천황릉다음의등급, 키토라 ( キトラ ) 고분은그보다더하위에위치한다. 이러한복수 ( 複數 ) 계층의고분에는판축이채용되지만먼저이들고분이축조되었던 7세기후반 ~8세기초반경에는고분축조자체가대단히한정적이다. 유례가飛鳥지역에서한정적임과동시에천황릉등급에이르기까지채용되는기술이판축이다. 즉판축이라는토목기술은본격적인불교사원조영개시이후, 왕권중추부 ( 中樞部 ) 를대표하는기술의하나로정권중추에서관리하였을가능성이높다. 58) 고대화한분구를구축함에있어수직으로서는기단을구축하는판축은꼭알맞은토목기술이었음이틀림없다. 당시의정권은고대화한분구축조에알맞은판축을사원조영기술에서전용 ( 轉用 ) 하여, 분구구축기술에적용하였을것이다. 이상의점에서봤을때, 대단히높은분구가고분의축조종언 ( 終焉 ) 까지명맥을이어갔음에주의해두고자한다. 즉일본열도에서는고대화한고분이일시적인현상에그치지않고, 일정한시간폭을두고축조하였고, 피장자측은고대화를단순히유행으로끝낸것이아닌, 당시의동아시아정세를거울삼아의도적으로채용했을가능성이있다고생각된다. 이문맥으로이해한다면, 고분이라는 과시 의장치 59) 가변질되어, 규모보다도높이라고하는동아시아의분묘에서평면규모의거대함과같은열혹은그이상으로중시되었을분구의높이라고하는기준이일본열도에들어와분구길이를넘어설정도의계층성을표시하는요소가되었을가능성이있을것이다. 즉일본열도의고분이길이를강조하는기념물에서높이를강조하는기념물로전환되어가는시기가 5세기후반 ~ 말로서, 역사적으로해당시기를평가할수있을것으로생각된다. 말하자면열도고유의가치관을가진분묘에서동아시아세계의가치관을구비한분구에로크게방향타를전환하고, 이로인해일본의고분은중기후반 ~ 말에걸쳐전환기를맞이하고, 후기고분의시대로나아간다. 횡혈식석실의보급에대해서도이러한관점을가미해검토해야한다고생각된다. 57) 明日香村教育委員会, 牽牛子塚古墳発掘調査報告書- 飛鳥の刳り貫き式横口式石槨墳の調査 -, ( 前掲註 53), p ) 青木敬, 2012, 掘込地業と版築からみた古代土木技術の展開, 文化財論叢 Ⅳ 奈良文化財研究所学報第 92 冊, pp ) 若狭徹, 2013, 古墳時代ガイドブック シリーズ 遺跡を学ぶ 別冊 04, 新泉社, p 한일문화재논집 Ⅲ

55 Ⅱ. 맺음말 본고에서는신라및주변지역고분의분구형상을분석한결과, 타원에서정원이라는분구형태의변화를파악하였다. 우선수혈계매장시설을가진분구가, 모두타원형내지는그에가까운분구형태를갖는이유로매장시설의형상에따라피복하는것을가장우선시했던분구였기때문으로판단했다. 즉이시기의분구는매장시설에종속적이었다고판단하였다. 다음으로분구가정원화하는계기로, 횡혈식석실이라는종래에는없던새로운묘제의채용을우선들수있다. 거기에횡혈식석실의채용이분구주위의정비를유인하였고, 이를위해분구외표에기단외장상 ( 外裝狀 ) 의표식을행하고, 거기에십이지상을위시한부조를설치하는데, 설치에는방위나정확한위치분할이불가결했기때문에, 그결과정연한원구 ( 圓丘 ) 를구축하게된다. 이상의두가지점이분구정원화의계기로보았다. 그리고분구의표식에십이지상을채용한점에서는소수이긴하지만일본에도유례가존재하여신라와의직접적인영향을엿볼수있었다. 다만그영향은한정적이었다고판단된다. 또한신라에서는북위에서분구를가진황제릉의축조가재개되었음을계기로, 고구려를경유한, 말하자면간접적인영향을받아적어도 5세기후반부터신라식고총으로의고대한분구를축조하게되며, 매장시설구조가전환하는 6세기이후에도지속된다. 즉고대화한분구를축조할필요성이불변하였던지역이신라나가야등이었다. 대조적으로일본열도의고분은종래의분구길이를중시하던지향성에서, 분구높이를중시하여고대화하는지향성으로전환하였다. 그시기는 5세기말로보이며일본열도에서는처음으로높이를중시하여고대화한분구로방향타를전환하고, 지역성을뛰어넘어신라등동아시아와공통되게되었다고이해하고자한다. 일견관계가없어보이는일본열도와신라의고분은동아시아규모에서볼때, 분구의고대화라는소위분묘의중국화라고하는공통항목을추출하는것이가능하다. 그역사적인배경에대해서는중국적인분묘조영에의해권력의소재를현저화하는공통된목적이있었던것이아닐까. 각각중국을필두로한주변지역의동향을주시하고, 그결과로공통된지향성을구비하게된고분의분구, 분구는넓은영역에서정치적동향을반영해주는존재로, 앞으로도상세한속성분석을진행해가야한다는중요성을강조해둔다. 거기에정치적측면의고찰에만머물지않고, 분묘와사회와의관계에대해서도검토를진행하여, 보다다각적인시점에서분구를바라보는것을목표로하고자한다.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55

56 삽도출전 도면 1 上 :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2007, 新羅古墳基礎学術調査硏究 Ⅲ 文獻 考古資料, p.338 도 1. 下 : 文化財廣報部文化財管理局, 天馬塚, ( 前揭註 9), 도면 2. 도면 2 左 : 有光教一 藤井和夫, 朝鮮古蹟硏究會遺稿 Ⅰ, ( 前揭註 10), p.44 図版第 2. 右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2007, 新羅古墳基礎学術調査硏究 Ⅲ 文獻 考古資料, p.189 도 1. 도면 3 左 : 高靈郡大伽耶博物館 大東文化財硏究院, 高靈池山洞第 73~75 号墳, ( 前揭註 14), p.42 도면 11. 中央左 :高靈郡大伽耶博物館 大東文化財硏究院, 高靈池山洞第 73~75 号墳, ( 前揭註 14), p.279 도면 128. 中央右 : 高靈郡, 1979, 大伽耶古墳群發掘調査報告書, p.14 도4. 右 : 慶尚大學校博物館, 陜川玉田古墳群 ⅡM3 号墳, ( 前揭註 17), p.5 도면 3. 도면 4 左上 :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2007, 新羅古墳基礎學術調査研究 Ⅲ 文獻 考古資料, p.454 도2. 上中央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慶州隍城洞石室墳 番地, ( 前揭註 20), pp37-38 도면 13. 右上 : 文化財硏究所 慶州古蹟發掘調査團, 慶州龍江洞古墳發掘調査報告書, ( 前揭註 21), p.22 도면 4. 下 : 國立慶州博物館, 冷水里古墳, ( 前揭註 22), p.27 도7. 도면 5 左 : 慶北大學校博物館외, 鶴尾里古墳, ( 前揭註 24), p.29 도면 4. 右 : 釜慶大學校博物館, 金海亀山洞古墳, ( 前揭註 25), p.19 도면 4. 도면 6 좌우모두필자촬영. 56 한일문화재논집 Ⅲ

57 도면 7 上左 右모두필자촬영. 下左 : 필자촬영. 下右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2007, 新羅古墳基礎學術調査硏究 Ⅳ 石造物資料, p.599 掛陵平面 / 斷面圖. 도면 8 沈炫㬚, 新羅 加耶高塚古墳의築造技術 地域別高塚築造 model 의提示, ( 前揭註 38), p.150 도면 13. 도면 9 沈炫㬚, 新羅 加耶高塚古墳의築造技術 地域別高塚築造 model 의提示, ( 前揭註 38), p.151 도면 14. 도면 10 罗丰, 从山陵为贵到不封不木対 北朝墓葬封土的转変, ( 前揭註 41), p.93 図 3. 도면 11 釜山市博物館 釜山廣域市蓮堤區, 蓮山洞古墳群 高塚古墳基礎調査, ( 前掲註 45), p.17 도면 2. 도면 12 左 : 奈良文化財研究所촬영. 右 : 河上邦彦, 隼人石, 図録石の文化古代大和の石造物, ( 前揭註 49), p.102 隼人石の第一石탁본. 한일왕릉급고분분구의특질과평가 57

58 廣瀬覚히로세사토루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Ⅰ. 머리말 Ⅱ. 飛鳥시대이후의왕릉및벽화고분의전개 Ⅲ. 통일신라이후의왕릉및벽화고분의전개 Ⅳ.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왕릉및벽화고분의공통성의배경 Ⅴ. 맺음말 요약문 飛鳥시대말에축조된キトラ ( 키토라 ) 고분, 高松塚 ( 다카마츠즈카 ) 고분이라는 2기의벽화고분의특징은협애 ( 狹隘 ) 한석곽내에중국유래의星宿 ( 별자리 ), 四神, 十二支像등을그린점이다. 또한이와유사한벽화고분은고려시대나조선시대전기에도존재한다. 小論에서는벽화고분과밀접한관계가있는왕릉의방식을포함해,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묘제를비교하여, 시대나지역도다른양자사이에서서로비슷한벽화고분이출현한배경을살펴보았다. 양자의묘제의기본적인공통항으로는첫째, 입지선택에서의풍수사상의영향과함께, 매장시설의소형화, 즉 槨 化의진행을지적할수있다. 飛鳥시대, 고려 조선시대의벽화고분은이렇듯 槨 化된협애한매장공간에반해, 본래적으로는다양한내용을가진중국유래의벽화를반강제적으로집어넣을필요가있었다. 이때飛鳥시대, 고려 조선시대모두, 불가결한묘화 ( 描畵 ) 대상으로서星宿, 四神, 十二支像을선택한것이된다. 거기에는쌍방의사회에황제를중심으로하는중국유래의지배관념에바탕을둔자국내의정치적지배를강화하고자하는공통된정치적세력이존재했던모습을엿볼수있다. 거대한唐에대치할수있도록그정치기구나예제 ( 禮制 ) 의도입을노린飛鳥시대와, 같은모습으로송 원 명과관계를맺던고려 조선시대에서, 중국에대한정치적자세에일정한공통성이있으며, 중국적인왕릉에의지향도그일환으로평가할수있다. 이점이야말로대국적 ( 大局的 ) 으로는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에유사한묘제가생겨난요인으로판단된다. 주제어 : 飛鳥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왕릉, 벽화, 星宿, 四神, 십이지상, 석곽 58 한일문화재논집 Ⅲ

59 한일의 왕릉 및 벽화 고분의 비교 연구 서설 -아스카 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廣瀬 覚* 히로세 사토루 Ⅰ. 머리말 2009년 11월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된 原州 桐華里 盧懷愼壁畵墓 發掘調査報告書 를 손에 넣었을 때, 뇌리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벽화세부의 표현은 달랐지만 여태까지 내 머리 속에 있던 삼국시대의 어떤 벽화고분보다도, 飛鳥(아스카)의 벽화고분과 친근감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컬러 도판에는 일본에서 횡구식석곽으로 불리는 것과 많이 닮은 구조의 매장시설 내에 星宿, 四神, 十二支 像이 그려져 있었으며, 곳곳의 석재 틈새에서 흘러 들어온 갈색의 빗물이 벽면을 더럽히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어, 마치 高松塚(다카마츠즈카)고분이나 キトラ(키토라)고분의 석곽 안을 보는 것 같았 다(도면 1). 대저 星宿, 四神, 十二支像으로 된 キトラ(키토라)고분벽화와 구성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동아시아 를 넓게 둘러보아도 현재 상태에서는 노회신(盧懷愼)묘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석곽 내부의 규모가 길이 2.5m전후, 폭 1.1m, 높이 1.2m전후로 대단히 비슷한 것과 더불어 석재 사이 이음매의 외면부터 회반죽을 충전하고, 주위를 판축으로 고정하면서 석곽을 구축하는 기술적인 유사성도 양자의 친근성 을 한층 부추기고 있다. 시대나 지역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와 같은 공통성이 생긴 것일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飛鳥 벽화고분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단면이 되는 것은 아닐까. 대단히 소박하긴 하 지만 이 점이 소론을 집필하게 된 계기이다. 기이하게도 高松塚고분의 벽화 수리를 위한 석곽의 해체 조사1)가 2007년에 실시되었고,2) 노회신묘의 해체이축(이전)조사는 그 다음해에 실시되었다. 한일 양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1) 본 사업을 실시한 문화청에서는, 高松塚고분의 매장시설을 석실로 부르나, 고고학적으로는 횡구식석곽으로 호칭하 는 경우가 많다. 문화청의 사업상에는 석실 해체조사 이나, 여기서는 高松塚고분이나 キトラ고분의 매장시설에 대해 서는 석곽 의 명칭을 사용하도록 한다. 2) 松村恵司 廣瀬 覚 岡林孝作 相原嘉之, 2009, 高松塚古墳の石室解体に伴う発掘調査, 日本考古学 第27号. 한일의 왕릉 및 벽화 고분의 비교 연구 서설 -아스카 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59

60 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벽화고분의 해체조사가 실시된 것으로, 이 점도 양자의 관계를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필자의 기분에 박차를 가했다. 이와 같이 소론은 飛鳥시대와 고려 조선시대의 왕릉이나 벽화고분의 비교라는 신기축(新機軸)을 세 워, 약간 막다른 골목에 선 느낌이 있는 飛鳥시대의 고분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자 함에 있 다. 또한 시대도 지역도 다르지만 양자에서 비슷한 묘제를 만들어 낸 역사적 요인을 추구하여 고려 조 선시대 벽화고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함에도 기여할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연구는 아직 구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현재의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문제임을 무겁게 인지하고 있지만, 여기 서는 본 공동연구를 통해 얻어진 현단계까지의 이해와 앞으로의 전망을 중심으로 기술하도록 하겠다. 盧懐愼壁画墓2号石室 髙松塚古墳石槨 도면 1. 노회신벽화묘와 高松塚고분의 석곽 내 비교 60 한일문화재논집 Ⅲ

61 Ⅱ. 飛鳥시대 이후의 왕릉 및 벽화고분의 전개 飛鳥시대 일본에서는 7세기대에 들어서면, 여태까지 규모의 거대함을 경쟁하듯 만들던 전방후원분 은 모습을 감추고, 동시에 왕궁이나 왕릉은 飛鳥나 그 주변에 만들어지게 된다. 飛鳥시대 전반의 왕릉 급 고분은, 한변 60m 전후의 방분(方墳)으로, 매장시설에는 대형의 석재를 짜 올린 횡혈식석실이 사 용되었다. 사용된 석재는 경질의 화강암류(석영섬록암)이 주체로, 당초에는 자연석이었으나 머지않아 사원건축의 초석이나 기단 외장석의 가공기술을 응용하여 인공적으로 가공된 석재(切石)가 석실의 구 축에도 사용되게 된다. 또한 입지는 골짜기 깊숙한 부분의 남사면을 선호하여 만들어지는 특징이 있으 며, 중국 南朝의 堪輿術(風水術)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3) 飛鳥시대 중반에는 段ノ塚(단노즈카)고분(舒明[죠메이]陵)을 시작으로 왕릉은 八角墳이 되며, 이후 飛鳥시대말까지 팔각분의 축조가 이어진다. 段ノ塚고분(舒明陵)에는 남사면에 3단에 걸친 단을 돌리고 있어(도면 2),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 고분 전체를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추측되나 이 도면 2. 舒明陵(段ノ塚고분)의 분구 3) 来村多加史, 2004, 谷を兆域とする飛鳥の陵墓に関する考察, 関西大学博物館紀要 第10号. 한일의 왕릉 및 벽화 고분의 비교 연구 서설 -아스카 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61

62 러한段狀시설은동시기왕릉이외의고분에서도곧잘채용되어段ノ塚고분으로호칭되고있다. 4) 또한이즈음부터상위계층의매장시설로는관을매장할수있을정도의좁은공간을가진횡구식석곽이채용되어, 관은들어옮기는것이가능한유기질제의옻칠관 ( 漆塗棺 ) 이사용되게된다. 횡구식석곽의사용석재는당초에는경질석재 ( 석영섬록암, 석영안산암 ) 가주체였으나, 점차연질의응회암이사용되게되며, キトラ ( 키토라 ) 고분이나高松塚고분등, 飛鳥시대말의석곽에서는규격적으로가공한석재의접합면에仕口 ( 접합을위한홈 ) 를만들어, 이들 10여장을계획적으로짜맞춰구축하게된다. 또한분구구축에는토낭쌓기나판축공법이사용되며완성된분구의표면에는응회암을가공한외장석이붙여지는경우도있다. 이러한응회암가공이나판축공법도, 사원의기단구축을통해길러진기술이응용된것으로판단된다. 또한일본에서최초의중국식도성인藤原京 ( 후지와라쿄우 ) 의조영을착수한天武 ( 텐무 ) 천황의능은, 정확히藤原京주작대로의남쪽연장선상에위치하며, 天武陵이藤原京과일체적으로설계, 축조되었음을이야기해주고있다. 藤原京에서治世를보낸持統 ( 지토우 ) 천황과天武천황은사료에서화장되었음이알려져있으며, 持統천황의유골은아버지인天武천황의능에추가장되었다. 文武 ( 몬무 ) 천황의능은天武 持統陵에근접한팔각분으로, 골장기를매납할수있을정도의소규모횡구식석곽을매장시설로하는中尾山 ( 나카오야마 ) 고분인것이확실시되고있다. 奈良 ( 나라 ) 시대이후奈良시대이후의왕릉 ( 천황릉 ) 은, 분구의소형화나박층화 ( 薄層化 ) 가거듭진행됨과더불어능묘에대한출입이제한되기도하여실태는자세히알수없으며, 문헌의기록을중심으로단편적으로그양상이파악되고있음에불과하다. 奈良시대前半의元明 ( 겐메이 ) 元正 ( 겐쇼우 ) 천황은持統 天武천황을이어화장되며, 눈에띄는분구가축조되진않은것으로추측된다. 하지만奈良시대후반의聖武 ( 쇼우무 ) 称德 ( 쇼우토쿠 ) 천황은화장되지않고, 称德陵에대해서는役夫 6300 인을동원했음이사료에서보이기때문에, 양천황의능은그에상응한규모를가진 山陵 형식이었을가능성이있다. 다만양자모두묘앞에寺나庵이세워져, 장례는불교식으로거행되었다. 平安 ( 헤이안 ) 시대초두의桓武 ( 칸무 ) 陵에대해서도, 실태는불명확하나일정규모를가진 山陵 형식이었을것으로보인다. 桓武陵은당초平安京 ( 헤이안쿄우 ) 서북의 宇太野 ( 우다노 ) 에역부 5000인을동원하여조영하는것이계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京동남의 柏原( 카시와라 ) 땅에만들어졌다. 鎌倉 ( 카마쿠라 ) 시대의柏原陵에대한도굴기록 ( 日野資宣 仁部記 ) 에는, 산릉은올라가는데十丈 ( 약 30m) 가량, 壇은도는데八十丈 ( 약 240m) 으로기록되어있다. 한편桓武의아들인淳和 ( 쥰나 ) 천황은 4) 高野陽子, 1998, 終末期古墳の新たな墳丘形態 - 段ノ塚式古墳の出現と意義 -, 古代探求, 央公論社. 62 한일문화재논집 Ⅲ

63 화장후산골 ( 散骨 ) 되었고, 이어지는仁明천황이후, 陵上에의솔도파 ( 卒塔婆, 스투파, 사리탑 ) 의건립이시작되는등, 奈良 平安시대의왕릉의형식은하나의모습은아니다. 그후平安시대중기의円融 ( 엔뉴 ) 천황이후는사원내에능이세워지게된다. 그형태는분명하진않지만, 능이라곤하지만사원내에세워진것에서도역시나소규모의분구가만들어지는정도였다고보인다. 거기에平安시대후기이후는寺내의塔 堂안에매골하는형태가주체가되어분구자체가만들어지지않게된다. 鎌倉시대에는四条 ( 시죠우 ) 천황이平安京동남의泉涌寺 ( 센뉴우지 ) 의뒷산에매장된것을계기로이절이천황가의菩提所 ( 보리사 ) 가된다. 室町 ( 무로마치 ) 시대후기의後光厳 ( 고코우곤 ) 천황이후는泉涌寺가천황가의葬儀 荼毘所 ( 다비소, 화장소 ) 가되어, 江戶 ( 에도 ) 시대초기의後水尾 ( 고미즈노오 ) 천황이후, 幕末 ( 마쿠마츠 ) 까지의역대천황은, 同寺에九重의석탑을세워토장 ( 土葬 ) 된다. 벽화古墳 ( 고훈 ) 시대의九州 ( 큐슈 ) 를중심으로성행한기하학적인문양이나원시적인회화를그린 장식고분 을제외하면, 일본열도의벽화고분은현재까지는飛鳥시대말의キトラ ( 키토라 ) 고분, 高松塚고분의 2기뿐이다. 양고분은응회암제의횡구식석곽을매장시설로하며그내벽의바탕을회반죽으로도포한후광물성안료를사용하여, キトラ고분에서는星宿 ( 천문도 ), 日 月像, 四神圖, 十二支像, 高松塚고분에서는星宿, 日 月像, 四神圖, 남녀의인물상을그렸다. 벽화의계보에대해서는바탕에회반죽을칠하고, 念紙 ( 습자지 ) 를사용하여예각선 ( 豫刻線 ) 으로바탕그리기를행한수법이나, 高松塚고분과중국西安의永泰公王墓와의인물상의유사성에서볼때, 양고분의벽화는중국당의벽화묘영향을받았다고보는것이타당할것으로판단된다. 墓誌가존재하지않아양고분의피장자에대해서는명확하지않으나, 양고분모두天武 持統陵이나中尾山고분에근접한藤原京의서남부에지어져있는점, 당에서유래된당시의최선단지식이나기술을뒷받침하는벽화의내용, 금동제의飾金具를곁들인漆塗 ( 옻칠 ) 목관의사용에서피장자는황족이나상급관인으로보는편이유력하다. 필자자신은藤原京의서남부땅에는天武, 持統, 文武의세천황외에도, 사료에서斉明 ( 사이메이 ) 천황이나間人 ( 하시우도 ) 大田 ( 오오타노 ) 皇女, 草壁 ( 쿠사카베노 ) 川島 ( 카와시마노 ) 皇子등이매장되었음추정되는점에서キトラ ( 키토라 ) 고분, 高松塚고분의피장자는황족급의인물일가능성이높다고본다. Ⅲ. 통일신라이후의왕릉및벽화고분의전개 통일신라통일신라기의왕릉은신라왕경을감싸듯京의교외에분산되어배치되어있다. 각왕릉은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63

64 남쪽을정면으로하며, 북측에산내지는작은언덕을등진것이많으며, 지역선택에풍수적인관념이들어가있음을엿볼수있다. 분구는원분을원칙으로주위에切石에의한호석이나十二支像, 난간을돌리고, 鎭墓獸로서의사자상을세운것이많다. 상세한발굴조사가실시된사례가적은이유로매장시설의구조에대해서는불명확한점이많으나신당리 1호석실분이나용강동고분등, 왕릉에준하는분묘의사례에서통일신라초기의왕릉매장시설은할석을사용한횡혈식석실로추정되며, 그후구정동방형분등의사례에서늦어도 8세기후반이후에는切石을쌓은횡혈식석실로변천해가는것으로판단된다. 호석에대해서는당초는川原石 ( 천석 ) 을쌓아올린구조였던것이 7세기중반으로비정되는선덕여왕릉 5) 의단계에서조잡한할석을사용하게되며, 거기에 7세기후반의민애왕릉이나신문왕릉의단계에서는완전한切石狀의블록을쌓아올리는구조로발전한다. 이러한호석의발달과정과상술한매장시설의변화는같은화강암절석을사용한구조물의전개로서, 병존하는관계에있는것으로추측된다. 그리고 8세기전반으로비정되는성덕왕릉의단계에서, 地臺石 ( 地覆石 ), 面石 ( 羽目石 ), 幀石 ( 束石 ), 甲石 ( 葛石 ) 을정연하게조합하는기단상의호석으로墳丘裾 ( 분구가장자리 ) 를구획하고, 그주변에십이지상을배치하게된다. 경덕왕릉이후는성덕왕릉에서는입체적인神將像이었던십이지상이, 束石외면에부조 ( 浮彫 ) 되어호석내로들어가며, 이것이그후신라왕릉의스타일로정착한다. 또한 8세기말부터 9세기전반으로비정되는괘릉이나흥덕왕릉에서는남측분구로의진입부분의동서양옆에문인이나무인, 호인 ( 胡人 ) 의석조물이배치된다. 이러한왕릉의스타일이발달, 확립해가는배경에는동시대인唐代를기본으로하는중국의황제릉으로부터의영향이있었다고봐도무방하다. 고려고려의都 개경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에있으며, 그왕릉도대부분이개경부근에있다. 발굴조사가실시된것이적어상세에대해서는불명확한것이많으나구릉의남사면에원구 ( 圓丘 ) 를만들어, 주위에호석과난간을돌렸고그전방에문인 무인의석조물을배치하는점을특징으로하는데, 이기본적인스타일은신라왕릉의방식을답습한것으로이해할수있다. 다만입지는신라왕릉보다도급경사의땅을선택하는경향이있으며, 분구前面에는이중, 삼중의단상시설이나계단이설치되었는데, 왕릉이외에도비슷한시설을설치하는경우가많다. 이구조는전술한일본의飛鳥시대에성행하는段ノ塚고분이라불리는분구前面의단구조와닮아있다. 분구자체를가까이에서보는것이아닌남쪽전방의낮은위치에서올려다보도록하는의식이신라왕릉보다도상대적으로강했다고평가할수있을것이다. 5) 통일신라왕릉비정의진위에대해서문제가있음은명백하나, 여기서는곤란을피하기위해, 현재비정된명칭을그대로사용한다. 64 한일문화재논집 Ⅲ

65 도면 3. 강화석릉의분구 대몽골항쟁기에해당하는 13세기에강화도에만들어진석릉, 곤릉, 가릉에서도이러한造墓, 選地의이념을명확하게찾아볼수있다. 이들강화도의왕릉에대해서는발굴조사및정비가실시되어이번공동연구에서도현지를답사할수있었다. 모두평지에서얼마간헤치고들어간산중턱에축조되어있으며, 수목으로덮여있지않았다하더라도산밑에서눈으로찾기에는곤란하게느껴졌다. 오히려산중턱에입지하면서도배후에산을등진듯남사면을엄밀히선택한점에는, 풍수사상에대한지향이강했음을알아볼수있을듯하다. 강화도의고려왕릉은몽골과의항쟁기의조영이라는점도있어, 매장시설이나주위의석조물도비교적검소하나, 고려말의공민왕릉에서는獸冠人身의십이지상이나雲文, 靈芝文을조각한호석이나난간, 石燈籠을배치하고, 거기에주위로虎, 羊의석조물을놓는점에서그때까지의고려왕릉에서의비약이확인된다.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65

66 조선 고려말기의 공민왕릉에서 보였던 조형미가 풍부한 석조물은, 거의 그대로 조선왕릉에 계승된 다. 오히려 분구주위의 구조에 대해서는 고려말기와 조선전기의 왕릉은 거의 동일하다고 말해도 무방 할 정도이다. 하지만 조선왕릉에서는 분구를 감싸는 陵寢空間만이 아닌 정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 공간이나 제사의 준비 등이 행해지는 새실(賽室)을 중심으로 하는 진입공간이 부설, 정비되어 신라 고 려왕릉과는 조역(兆域) 내의 공간구조에서 상이함이 존재한다. 또한 입지도 주위를 산으로 감싼 谷間을 고르고, 그 골짜기 안에서 튀어나온 작은 능선상에 능침을 놓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골짜기 가운데를 흐르는 流路는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수에 해당한다고 하 였다. 드물게 단독으로 입지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복잡하게 얽힌 일정한 평지를 가진 골 도면 4. 조선왕릉(인조 장릉)의 분구와 조역 66 한일문화재논집 Ⅲ

67 짜기를복수의왕릉이공유하는형태를취한다. 조선왕릉은사료나산릉도 ( 山陵圖 ) 의존재로, 그選地는엄격한풍수사상에의거했음이밝혀져있으며, 왕릉의選地에대한풍수상의길흉을둘러싸고術官이나관료의사이에서격렬한논쟁으로발전한경우도있다. 이러한장송이념에명확히뒷받침된選地의방식은사료가희박한시대의왕릉조영방법을판단하는데시사하는바가크다. 벽화한반도의벽화고분전개에대해서는집안이나평양주변의고구려벽화나, 백제송산리 6호분이나능산리 1호분의四神이나蓮花文, 순흥於宿知述干墓나邑内里벽화묘등, 삼국시대의사례가알려져있다. 이에반해신라왕릉에서는횡혈식석실의네벽과棺床에黃 朱 群靑 紺靑 白의오색을채색한신덕왕릉을제외하면, 현재까지확실한벽화고분은발견되지않았다. 전술한것처럼호석에십이지상을배치하는방식에서볼때신라왕릉에서는묘실안보다외부에서시인 ( 視認 ) 이가능한분구외표면에, 십이지상에의한분묘장식의장을설치했을가능성이고려된다. 다만용강동고분과같이석실내에서도용 ( 陶俑 ) 이나청동제십이지상이출토된예가있는것에서도당묘제의영향을받아매장시설내에도분묘장식의장이같은모습으로설치되어있었을가능성은충분히고려해둘필요가있을것이다. 고려왕릉에서는전술한것처럼, 정식적인발굴조사가실시된고분이거의없으며, 상세한내부구조가판명된왕릉은공민왕릉외엔없다. 이공민왕릉에서는사방 3m의현실에星宿 四神 십이지상을그렸다. 같은모습의벽화고분은경기도수락암동 1호분이나파주서곡리벽화묘에서도발견된다. 또한고려의석관에서는棺身외면의四周에四神을그린것이있으며, 인종 22년 (1144) 의기년을가진許裁석관에는사신과함께십이지상을그렸다 ( 도면 5). 이들사례에서고려의묘제에서는星宿이나四神, 십이지상을묘실이나관에그리는것이일반화되었던상황이이해된다. 고려의벽화에서주목되는점은십이지상의표현이다 ( 도면 5 7). 일본의キトラ ( 키토라 ) 고분벽화나신라왕릉의십이지상이수두인신상인것에반해, 고려의것은관인풍의남성의冠에간지 ( 干支 ) 가올려진모습으로그려져있는관수인신상 ( 冠獸人身像 ) 으로되어있다. 같은관수인신상은福建省尤溪麻洋宋벽화묘에있으며, 일본의平安말기이후의십이신장상 ( 十二神將像 ) 에도奈良室生寺 ( 무로우지 ) 像과같이머리위에십이지를표현한것이나타난다. 중국에서십이지상은당후기의 8세기후반에는수두인신상에더하여, 가슴에간지를품은것이나타나는것이알려져있다. 6) 五代十國期의吳越 2 代王后馬씨를뭍은浙江省臨安市吳越國康陵 (929 년 ) 에도가슴에간지를품은문관의모습이벽면에부조, 채색되어있다. 관수인신상은대략그후의遼, 宋代에이르러출현한것으로추측된다. 어쨌든이 6) 岩瀬透, 2002, 十二支像の系譜について - 獣頭人身像を中心として -, 大阪府立近つ飛鳥博物館館報 7.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67

68 도면 5. 許裁석관의십이지상과주작 ( 조선총독부 1920) 러한십이지상의변천은중국왕조를기점으로하는동아시아에서연동한변화로보기에틀림없으며, 고려의왕릉이나그에준하는분묘에서는그러한새로운십이지상의수용이간취되는것이중요하다. 모두에서든조선전기의노회신벽화묘도관수인신의십이지상을채용하고있으며, 고려벽화묘의방식을계승한것임이분명하다. 다만그표현에는변화도있는데특히사신은보고서에 다소우스꽝스럽고익살맞은사신도의모습 으로표현되어있는것처럼, 고려석관에그려졌던것으로는표현이현저히퇴화되어있다. 그렇지만노회신묘의 1호석실과 2호석실에서는사신도의표현이매우닮아있으며, 이와많이닮은표현이안동서삼동고분에서도확인되는점에서공통된밑그림이넓게유포되었을가능성이고려된다. 발굴조사가실시되지않은조선왕릉벽화의실태는알수없지만, 왕 왕후릉조영에관한기록인 산릉도감의궤 에는찬궁 ( 欑宮 ) 이라불리는목재를조합한곽의내면에종이로채색된사신도가붙어있음이기록되어있다. 조선왕조의예제를기록한 국조오례의 (1474 년 ) 나 국조속오례의 (1744 년 ) 에도같은기록이있으며, 후자에는석실천정에日 月과星宿을묵서하고, 네벽에사신을배치한것이기록되어있다. 星宿이나사신으로된벽화가조선왕조에있어필수가되었던상황을읽을수있다. 또한종이에그려진사신을매장시설내벽에붙이는실례는, 조선시대의副司直이었던丁聃 ( 정담 ) 의 68 한일문화재논집 Ⅲ

69 부부합장묘 (16 세기전반 ) 를통하여확인된다. 거기에는회곽묘내에담겨진목관내면에星宿, 四神, 비천 ( 飛天 ), 다라니불적 ( 陀羅尼佛籍 ), 삼재부 ( 三災符 ) 가먹을입힌판화에붙어있다 ( 도면 6). 7) 이예는한편으로불교나도교와의습합 ( 習合 ) 방식을시사하면서, 일본의江戶시대병행기에해당하는시기의한반도에서는星宿 四神圖가장송과더불어매장시설내에배치되었던상황을명확히보여주고있으며, 산릉도감의궤 의기록의신뢰성을뒷받침함과함께그러한장제가왕릉만이아닌관인층에도넓게보급되었던상황을이야기해주고있다. 도면 6. 정담부부합장묘의목관내에붙어있던판화 ( 별자리, 사신외 ) 7) 국립안동대학교박물관, 2010, 장담부부의무덤과출토유물.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69

70 Ⅳ.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왕릉및벽화고분의공통성의배경 앞절까지일본열도의율령국가형성기, 한반도의통일신라이후의왕릉및벽화고분의전개를개관하였다. 일본의飛鳥시대, 한반도각왕조의왕릉스타일은조금씩이지만각시기의중국황제릉주변의영향을받았음은틀림없다. 하지만한일의방식을철저하게비교했을때, 한반도에서는통일신라기에성립한왕릉스타일이왕조가교체되어도그기본적인방식을크게바꾸지않고유지해감에반해, 일본열도에서는飛鳥시대왕릉의방식은그후에거의계승되지않고奈良시대이후의왕릉 ( 천황릉 ) 은점점눈에띄지않는존재가되어간다는대조적인도식을떠올릴수있다. 모두에서지적한것처럼キトラ ( 키토라 ) 고분 高松塚고분과조선시대전기의노회신벽화묘에일정한유사성이생긴배경으로, 그러한한반도의왕릉및그에준하는묘제에시대나왕조를뛰어넘는스타일의일관성이존재했음을우선지적해두고자한다. 그위에, 아래에서는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전기의왕릉및벽화고분의공통성과차이에대해좀더상세히살펴보자. 飛鳥시대와통일신라이후묘제의공통점으로는, 우선양자의입지가크게堪輿術 ( 風水 ) 사상을배경으로하고있는점을지적할수있다. 물론그원류는중국왕조에있으며동아시아세계에공통의관념이넓게침투한모습으로평가한다면, 특별히내세워강조할것도없는사상이라고말할수있을지도모른다. 그러나古墳시대나삼국시대의묘제에서는반드시남쪽이분묘의정면이라고는인식되지않았으며, 한편으로飛鳥시대나통일신라이후가되어매장시설이엄밀한南開口가되고, 주위의산이나골짜기를의식한選地가명확화하는것을근거로할때풍수사상도입의배경에는강한중국묘제에의지향이있었음은의심할수없다.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왕릉이나그에준하는분묘가남측에 2중, 3중으로방형의단상시설을돌리는점도, 단순한우연의일치로보기보다는시대를넘어서는장송상의사상이나관념이공유된결과로봐야할것이다. 거기에고려 조선시대의분묘에는, 일본飛鳥시대의횡구식석곽과같이대단히소형화된매장시설이드물게보이는점도주목된다. 발굴조사된고려말공민왕릉의현실규모는 3 3m 이며, 조선왕릉에서는제2대정종의정안왕후후릉이나, 제3대태종의원경왕후의헌릉 ( 모두 15세기전반 ) 에있어서, 현실안쪽규모가모두길이 11척, 폭 8척임이사료에서판명된다. 이들은飛鳥시대의횡구식석곽보다도규모는약간크지만, 전술한것처럼조선왕릉에서는석곽내에 찬궁 이라불리는목재를조합한곽이놓이며, 이경우石 木의이중곽이되어사신도가붙는내곽부분의안쪽규모는상기한값보다더욱좁아지는것으로보인다. 또한관인층의분묘에서는당연하지만석곽규모자체가왕릉보다도한층소 70 한일문화재논집 Ⅲ

71 형이되며노회신벽화묘에서는길이 2.7m, 폭 1.1m, 높이 1.12m 로高松塚고분의석곽과각수치가거의일치한다. 어쨌든고려말기부터조선시대전기분묘의매장시설은내부에관만을넣는정도의좁은공간이었다고보아도좋다. 그후조선왕릉및그주변에는제7대세조의광릉 (15 세기후반 ) 이후, 주자 가례 의기술을따른회격묘가보급된다. 회격묘는틀판을이용하여石灰, 炭粉, 황토, 모래를섞은흙을단단하게경질화시켜외벽으로삼는매장시설로, 내부에들어가는목관보다도한층크게구축된다. 제11대중종의장경왕후 (1515 년沒 ) 는, 최종적으로서삼릉 ( 경기도고양시 ) 의희릉에改葬되나, 당초능의蹟地는대모산록 ( 서울시서초구 ) 에있으며 2008년에발굴조사가실시되었다. 8) 이원희릉의조사성과는통상내부조사가실시되지않는조선왕릉의실태를알수있는중요한사례이다. 매장시설은횡구식의회격묘로, 내부규모는길이 2.90m, 폭 1.62m, 높이 1.42m 이다. 소재나판축방법은다르나회격묘도그형태나규모 구조는飛鳥시대의횡구식석곽과흡사함을알수있다. 이러한고려 ~ 조선시대의석곽 회격묘와飛鳥시대의횡구식석곽의구조에있어서, 결정적으로다른점은飛鳥시대의석곽이분구의최하부에만들어짐에반해고려 조선시대의것은지하에만들어지며, 하강하는통로를통해곽내에출입하는점이다. 또한飛鳥시대의것은한분구내에석곽 1기를설치하는방식이통상적이나, 고려 조선시대의것은동일분구내에 2기를병렬시켜묘실을설치하는경우가적지않다. 최근飛鳥에서八角墳임이판명되고斉明천황릉설이유력해진牽牛子塚 ( 켄고시즈카 ) 고분의매장시설은, 거대한一石의응회암에두개의횡구식석곽을옆으로줄지어파낸것으로, 언뜻보면고려 조선시대의석곽 회격묘를방불케한다. 일본서기 에따르면斉明천황은딸인間人황녀와합장된것으로알려져있으나, 고려 조선시대의쌍분및쌍곽은부부합장을기본으로하는점에서다르다. 애초에 2기의석곽을병렬하는방식자체가飛鳥의고분에서는특수한존재이다. 이러한세부구조나단장 합장의상이점은있지만,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왕릉및그에준하는분묘에서는매장시설이 곽 화된다는점에서는기본적으로공통된다고말할수있다. 그위에상기한것과같은구조의곽안에그려지는벽화를다시주목해보고자한다. 고려시대부터조선시대전기의벽화묘는 10례정도가알려져있다. 고려말공민왕의현릉에는星宿, 四神, 十二支像, 花, 竹, 松, 人物이그려져있으며, 전술한것처럼조선왕릉에도星宿, 四神등의벽화의존재가추정된다. 또한관인층의묘에서는노회신묘의 1호석실과 2호석실에서대단히비슷한四神圖가그려져있으며, 이것과흡사한것이안동서삼동고분에서도확인되는점에서공통된밑그림의유포가추정된다. 8) 문화재청, 2008, 舊禧陵章敬王后初葬地보존 정비보고서.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71

72 キトラ古墳 ( 寅 ) 瑞谷里壁画墓 ( 未 ) 呉越国康陵 ( 馬 ) 尤渓麻洋宋壁画墓 ( 未 申 ) 도면 7. 십이지상의비교 72 한일문화재논집 Ⅲ

73 정담부부합장묘의판화를걸어벽화로삼은사례의존재에서도고려 조선시대에서는왕릉만이아닌상위계층의묘에서벽화가일반적으로그려졌을것으로봐도틀림없을것이다. 그벽화의내용에는풍속화나불교 도교관련의것도보이지만, 주제의중심이星宿, 四神, 십이지상에있었음은틀림없다. 묘사의세부표현은다르지만이점은飛鳥시대의キトラ ( 키토라 ) 고분이나高松塚고분과같은양상이다. 십이지상이고대의수두인신상과는달리관수인신상이되는점이단적으로보이는것처럼고려 조선시대星宿, 四神, 십이지상을그리는법에는, 시시각각의중국의영향이미쳤음은확실할것이다. 그러면서그들이묘사대상으로선택되는배경에는천상과지상에서의時空의바른운행에바탕한황제중심의정치적인지배이념이존재한다고보아도문제가없을것이다. 실제로고려 조선시대전기에는 五福太一信仰 이전개되어, 한반도에서완결되는分野說이존재한것이지적되고있다. 9) 더불어飛鳥시대나고려 조선시대의곽내는, 중국벽화묘의매장시설과는비교할수없을정도로협애하며, 애초에벽화를그릴공간이현저히제한되었던점이중요하다. 중국에서는飛鳥시대와병행하는당대, 거기에고려시대에병행하는송대에도, 왕릉을중심으로星宿이나四神외에도인물이나건물, 풍속화등다양한벽화가광대한묘실내에그려지지만, キトラ ( 키토라 ) 高松塚고분이나고려 조선시대의곽화된매장시설에는, 애초에이런다종다양한벽화를그리기위한캔버스가준비되지않았다. 이와같이벽화공간이현저히제한받는안에서, 飛鳥시대, 고려 조선시대의양자가主題로선택한것이星宿이나四神, 십이지상이었던것이다. 이는星宿, 四神, 십이지상이야말로장송벽화에있어서불가결한題材였음을보여주는것이라고말할수있다. 그배경에는중화제국에서배양된황제를중심으로하는정치적인지배이념을자신들의정치적영역에서도재현하고, 그지배를정통화시켜가려는공통된의식의존재했음을엿볼수있다. 일본에서벽화고분이등장한飛鳥시대말은, 거대한중국당왕조의위협에대향 ( 對向 ) 할수있도록국내의중앙집권화가가속화된시기에해당한다. 그具體策으로대치하고있는당의선진적인정치기구나예제 ( 율령제 ) 를오히려적극적으로받아들이는방법을취했다. キトラ ( 키토라 ) 고분이나高松塚고분에보이는극채색벽화 ( 極彩色壁畵 ) 의기법이나사상적내용도당벽화묘의직접 간접적인영향아래있었다고보아도좋다. 양고분의벽화에관한지식은 704 년제8차견당사의귀국에의한당과의교류재개를통해수용된것으로보는설이유력하다. 하지만상술한것처럼キトラ ( 키토라 ) 高松塚고분의매장시설은飛鳥시대를통하여소형화, 간소화가진행된최종단계의횡구식석곽이었고, 양고분의벽 9) 山内弘一, 1979, 李朝初期における対明自尊の意識, 朝鮮学報 第 92 輯.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73

74 표 1. 한일왕릉과벽화고분의변천 화는당의묘실벽화내용을그러한협애한공간에반강제로밀어넣은모습이었던것이다. 고려 조선시대벽화의전개도기본적으로는キトラ ( 키토라 ) 高松塚고분벽화가출현한과정과같다고말할수있다. 당연하지만양자에문화적접점은존재하지않는다. 또한앞에서본것처럼고려는대외관계를가진중국송의묘실벽화내용을새롭게받아들였다. 그런한편고려에서도 곽 화된좁은 74 한일문화재논집 Ⅲ

75 묘실내에그내용을전부그려넣기는곤란했다. 고려벽화묘중에는불교화나풍속화를그린것도있으나, 역시가장중요시된것은황제를중심으로하는정치지배의이념을상징하는星宿, 四神, 십이지상이었다고생각된다. 이러한고려시대의묘제는조선시대전기의묘제에도이어져, 모두에서본것과같은노회신묘의벽화가생겨난것으로판단된다. 그런데한국사연구자인奥村周司 ( 오쿠무라슈우지 ) 는고려왕조가거행한圜丘祀天禮를들어, 중화제국에있어황제권의정당성에관한제사로서황제가거행하는고유의祭天禮를고려왕권이실시한점에서, 고려왕권에의한중화제국세계관의내면화를읽어내고있다. 한편고려가도입한환구사는, 중화제국에충실한冬至祀로서가아닌祈穀 雲祀를대상으로한것이었던점, 제사거행시에는외국인使客을제외함과함께輿服 奏樂은황제가아닌왕후에대한것을도입한점에주목하여, 중국과의종속관계에모순하는요소가배제되어있음을지적하였다. 이러한상황을바탕으로奥村는고려왕권에대해 이중구조적인독자의세계질서를형성하는것으로, 중화제국과의종속관계를대외기조로하면서도자립 자존의자세를유지하고이어갔다 고평가하고있다. 10) 이러한중국왕조에대한자립 자존의식은일시적인고려국왕에대한 황제 호의사용 11) 이나, 자국의독자적인연호의제정에서도엿볼수있다. 이러한중국왕조를주시한대외의식은천명에의한왕조교체의정통화, 전술한자국내에서의분야설이나환구사의계승이조선왕조에도그대로이어짐이山內弘一 ( 야마우치코우이치 ) 에의해강조되고있다. 중요한것은이들의자립 자존의식의소재가모두 문화적으로는중국적인발상을따르고있다 12) 는점이다. 이상과같은고려 조선왕조의대외의식이나祭政의방식은당의정치구조나지배이념, 예제를도입하는것으로당에대치하고자한율령국가형성기의일본의상황과유사한부분이적지않다고말할수있다. 즉중화제국에대치하는한편, 그수단으로상대방의제사나정치체제를적극적으로수용하지않으면안된다는二面性을,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전기의정치체가공통적으로가진역사적배경으로인식할수있을것이다. 양자의사회에서많이닮은벽화고분을만들어낸하나의요인이었다고생각되지않을까한다. 10) 奥村周司, 1997, 高麗の圜丘祀天礼と世界観, 朝鮮社会の史的展開と東アジア, 山川出版. 11) 하남시선법사 ( 禅法寺 ) 의약사여래좌상 ( 송태평 2년= 景宗二 (977년)) 이나보현사 ( 普賢寺 )(1044 년건립 ) 의 9층석탑등의석조물명문안에는, 고려국왕에대해 皇帝 호가사용되어있다. 다만대외적인장면이나국내의정식적인장에서의칭호에는 王 이사용되고있어, 그배경에는역시나자존의식과그억제라고하는양자의측면이존재했음이지적되고있다. 12) 山内弘一, 李朝初期における対明自尊の意識, ( 前掲註 9).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75

76 물론풍수에바탕한토지의선택, 星宿, 四神, 십이지자체는원래근대이전의동아시아사회의보편적인문화이다. 그럼에도일본의벽화고분은飛鳥시대말에 2기가확인될뿐이며고려 조선시대에병행하는시기에는전혀존속되지않는다. 그뿐아니라일본의왕릉은奈良시대이후불교와의연결이깊어지며이윽고명확한분구를만드는것마저포기해간다. 애초에奈良시대이후의천황릉은 반드시동시대묘제의정점혹은핵이되고 있지않으며, 13) 이점에서도이미 동시대묘제의정점 으로서이어진통일신라, 고려, 조선의왕릉과는크게다르다. 한편으로일본의고대 중세에서는선행하는시대의왕릉에대해정변이나天變地異등의보고, 황위계승의정당성확인등을행하는제사는계속되었고, 14) 선조의왕릉을숭배하는의식이존속했음은틀림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시대적인왕릉은사회에대한시각성이나존재감을잃어가고, 벽화도쓸모없는것이되어갔다 ( 표 1). 이렇게보면일본의왕릉을중심으로하는묘제에있어飛鳥시대야말로가장중국적인왕릉스타일을의식한시대였다고평가할수있을것이다. 중국왕릉의구성요소중하나인벽화가飛鳥시대말기에단편적으로도입되면서도그이후로계승되지않았다는점도, 이러한문맥에서이해할수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그럼일본왕권에서중국적인묘제가쇠퇴하는한편에서, 한반도에서는왜근세까지이것이존속하는것일까. 이점에관해세계각국의왕릉을비교고고학적인관점에서서술한都出比呂志 ( 츠데히로시 ) 는중국이나한반도에서왕릉이계속되는요인에대해살펴보고, 중국에서의전통적인선조숭배와왕권교체의격렬함이, 하늘( 天 ) 의신 ( 神 ) 인호천상제 ( 昊天上帝 ) 로부터의정당성의증거를얻기위한제 ( 祭 ) 가계속되도록하게했다고지적한다. 또한宗廟 왕릉제사는유교의례의중요한요소이기도하며이것이한반도에서도 왕릉을계속하게한사상원리가되었다 고정확한평가를내리고있다. 15) 다만都出는이러한중국 한반도와의비교에서일본의중 근세왕릉의쇠퇴 단절이라는현상에는주의를기울이고있으나, 그배경을적극적으로논하고있지는않다. 필자는전술한것과같이율령국가형성기의일본이동시대중국의정치제도나예제를적극적으로받아들이고그일환으로중국적인왕릉이나고분벽화를일시적으로도입하면서, 그후는쇠퇴일로를걷는점, 한편으로한반도에서는통일신라이후의왕릉형식이각시기중국에서의새로운영향을받으면서계속되는점을근거로할때, 奈良시대이후, 일본에서왕릉이쇠퇴하는본질적인이유는, 이러한중국왕조에대한의식의후퇴에서구할수있는것은아닐까하고생각한다. 13) 菱田哲郎, 2013, 奈良 平安時代の陵墓, 季刊考古学 第 124 号, 雄山閣. 14) 田中聡, 1995, 陵墓 にみる 天皇 の形成と変質 - 古代から中世へ -, 陵墓 からみた日本史, 青木書店. 15) 都出比呂志, 2000, 王陵の考古学 岩波新書. 76 한일문화재논집 Ⅲ

77 이점에관해서는고려왕조의자존자세를다각적으로분석한森平雅彦 ( 모리히라마사히코 ) 의논고가많이참고된다. 논지는복잡하게얽혀있으나, 모두에서森平가조선의역대왕조가 눈앞에솟아있는대륙왕조의거대한존재압 ( 存在壓 ) 에대해, 대단히현실적인대응을재촉당하며, 한편으로는국내나인근지역에대해스스로의권위를떨쳐가야하는난제에늘직면하고있었다 하고, 그절실함이나지정학적인조건에서중국왕조에대해정치적인거리를둘수있었던일본열도의정권등은비교가되지않는것이었다 고기술하고있는점은시사하는바가크다. 16) 즉한반도에서왕릉이존속한배경으로는, 중국과같이왕조교체가반복되었다는점이나유교신앙에더해대국적 ( 大局的 ) 으로는그러한중국왕조와의긴장관계가중 근세에도끊어지지않고지속한것에서큰요인을찾을수있는것은아닐까. 한편일본왕릉의쇠퇴현상에대해서는중 근세의조정, 武家, 寺社를둘러싼복잡한권력구조, 신앙 종교관의문제등, 일본사의범주에서따로검토해야할과제도많이있다. 하지만이문제는동시대적, 혹은일국사적 ( 一國史的 ) 인검토로는반드시충분한해답을얻지못하는것은아닌가생각된다. 앞으로도중국왕조를둘러싼동아시아세계를대상으로, 거기에장기적인시야에서왕릉이나벽화고분의비교연구를심화하여, 각각의시대 지역에서의왕권의역사적특질이나정치적자세가한층분명해질것으로기대한다. Ⅴ. 맺음말 이상잡다한기술이되었으나, 시대나지역도다른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왕릉이나벽화고분을굳이비교연구한의의나단서를찾아보았다. 양자에서로닮은묘제나벽화고분이출현한요인으로는, 우선일본열도도한반도도고대국가의형성이후, 거대한중화제국에대치해야하나그정치기구나예제를적극적으로도입하는공통된대외의식이존재한것을지적할수있다. 하지만일본에서는奈良시대이후이러한의식이서서히후퇴하면서중국적인왕릉의쇠퇴를맞이했음에반해, 한반도에서는통일신라이후에도왕릉이그기본적인스타일을크게바꾸지않고존속하였다.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묘제의유사성의배경은, 대국적으로는시대는다르지만양자가모두중국적인왕릉을 16) 다만森平는왕조 민족의자존의식이나자기중심적세계관이원래, 동아시아에그치지않는동서고금의보편적인것임을근거로할필요성을강조하고, 고려왕조의자존논리를 内帝外王 의이중체제나다원적천하관이라는華夷秩序의보편적유추를가지고설명하는것에서경종을울리고있다. 森平雅彦, 2011, 朝鮮中世の国家姿勢と対外関係, 東アジア世界の交流と変容 九州大学出版会.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77

78 수용한것에서찾을수있다. 추가하여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에는양자모두매장시설의소형화, 간소화, 즉 곽 화가진행되는과정이있으며, 그흐름중에둘다중국에서유래한묘실벽화의도입을의도한결과본래는다종다양한내용을가진묘실벽화를좁은공간안에억지로밀어넣게되었다고판단된다. 이와같이묘화공간이현저하게제약받던중에飛鳥시대, 고려 조선시대모두황제중심의지배이념을상징하는것으로의星宿, 四神, 십이지상을벽화의중심대상으로선택한것이된다. 그배경으로는강대한중국왕조의주변에위치하면서, 그에대치할필요를강요받는다는공통된역사적환경을쌍방의사회에서찾아내는것이가능하다고생각된다. 어쨌든여기에제시한한반도왕릉의기본스타일의존속과그에반한율령기이후의일본왕릉 ( 천황릉 ) 의쇠퇴라는대비자체는, 동아시아에서왕릉의역사적의의를찾는데앞으로도중요한관점이되어갈것이라고생각된다. 그위에고려 조선시대의묘제에는묘비나묘지가풍부하게남아있고, 조선시대에는왕릉에관한상세한사료도많은수가남아있는점이주목된다. 이들여러사료로부터한반도에서는鎭護國家를위한여러의례가거행되는안에서, 당연하게왕릉의조영과제사가사회적인데몬스트레이션으로큰의의를지녔음이간취된다. 특히조선시대장례의장려함은회화자료에서도여실히엿볼수있고, 또한정기적으로실시된왕릉에의行幸도 왕도통치를구현하는방법의하나였다 17) 고평가된다. 이러한왕릉을둘러싼풍부한문자 회화자료가보여주는세계는동아시아각지역, 각시대의왕릉성격을생각하는상에서대단히중요한정보를제공하는것이될것이다. 한편으로일본의고분에서는문자문화가보급되는飛鳥시대에서도묘비나묘지를남기는풍습이없으며, 피장자나매장에관한문자정보는 8세기이후에완성된 고사기 나 일본서기 등에서단편적으로얻을수있을뿐이다. 시대나지역이다른것은명백하지만, 飛鳥시대와고려 조선시대의묘제사이를넘나드는공통성에주목하는것에서, 문자정보가보다풍부한고려 조선시대묘제를둘러싼사회적 정치적맥락을飛鳥시대묘제의이해에도참조할수있는부분이적지않게존재할것으로판단한다. 謝辭 ( 감사의말 ) 본연구의수행에있어서카운터파트너인신종우씨를위시한한국국립문화재연구소의여러분, 발 17) 한현주, 2011, 朝鮮初期における王陵祭祀の整備と運営, 陵墓からみた東アジア諸国の位相 関西大学文化交渉学教育拠点. 78 한일문화재논집 Ⅲ

79 굴교류기간중에머문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여러분으로부터많은협력과지원을받았다. 한국인도 좀처럼찾지못할것같은산중의벽화고분이나왕릉의답사에도동행해주시고많은자료나정보를 제공해주신것에대해, 이자리를빌어깊은감사를드린다. 삽도출전 도면 1. ( 상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09, 原州桐華里盧懐愼壁画墓発掘調査報告書. ( 하 ) 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編, 1972, 壁画古墳高松塚中間報告. 도면 2. 森本徹編, 2010, ふたつの飛鳥の終末期古墳, 大阪府立近つ飛鳥博物館平成 21 年度冬期特別展. 도면 3.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江華碩陵, 을개변. 도면 4.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朝鮮王陵總合學術調査報告書 Ⅴ을개변. 도면 5. 조선총독부, 1920, 朝鮮古蹟図譜 第七冊 ( 각저자판 1978 복각 ). 도면 6. 국립안동대학교박물관, 2010, 장담부부의무덤과출토유물. 도면 7. ( 좌상 ) 奈良文化財研究所제공. ( 우상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3, 坡州瑞谷里高麗壁画墓發掘調査報告書. ( 좌하 ) 杭州市文物考古所臨安市文物館, 2000, 浙江省臨安市呉越国康陵発掘簡報, 文物 NO.2. ( 우하 ) 福建省博物館 三明市博物館 尤溪県博物館, 1989, 福建省尤溪麻洋宋壁画墓清理簡報, 考古 7 期. 표 1. 필자작성 한일의왕릉및벽화고분의비교연구서설 - 아스카시대와고려 조선시대를중심으로 - 79

80 신종우한일고분공간구조영상화를위한물리탐사연구 Ⅰ. 서론 Ⅱ. GPR 탐사 Ⅲ. 전기비저항탐사 Ⅳ. 탐사사례 1. 나주복암리고분군 2. 미야자키현사이토바루고분군 3. 고령고아동벽화고분 4. 전남고흥야막고분 5. 고령지산동고분군제518 호분 6. 서울풍납토성성벽 Ⅴ. 결론 요약문 한국의고고학적물리탐사는 1995 년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활용중인물리탐사를참고로국내에도입되었다. 도입당시한국에서는건축, 토목분야에서물리탐사가활성화되어있었지만고고학에접목시켜탐사를하는전문가는없었다. 이에국립문화재연구소는고고학적물리탐사를도입하기시작하여오늘날에이르게되었고그간한국과일본은탐사전문가교류를통해공동탐사등을진행하고탐사방법의개선과탐사결과의신뢰성을높여왔다. 고고학적물리탐사방법에서가장많이활용된방법은 GPR 탐사법이다. 이는투과깊이는낮지만해상도가뛰어나발굴착수전에많이활용을하였다. 하지만투과깊이가깊은대형고분및깊이 5m 이상의지하구조에서는 GPR 탐사투과깊이의한계성으로인해탐사의어려움을겪어왔다. 탐사하고자하는구조물의크기가매장깊이에비해작은경우는탐사자체가불가능해질수있는경우도생긴다. 또한탐사지역의지하를구성하는물질이매우불균질할수있는데이러한경우에데이터의해석에어려움이존재하여왔다 년부터진행된한일고대문화공동연구에서는보다깊은곳까지투과하여지하구조를연구할수있도록 GPR 탐사와전기비저항탐사방법을상호연구해왔다. 한국에서는다수의고분등에서탐사를실시하여좋은결과를얻을수있었다. 일본은미야자키사이토바루고분군의지하GIS 맵작성이라는프로젝트를수행하는과정에서상호협력하였다. 이에그동안한국과일본에서수행한탐사결과와한국내에서진행했던고분탐사사례를소개하고공동연구의성과와향후발전방향을논하였다. 주제어 : GPR(Ground Penetrating Radar), time-slice, 전기비저항탐사 80 한일문화재논집 Ⅲ

81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신 종 우*1) Ⅰ. 서론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인 유구와 유물 등은 지표면 밑에 묻혀 있어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눈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물리탐사는 지하에 묻힌 유구분포 등을 지상에서 비파괴 방법으로 지표면을 파거나 훼손하지 않고 매장문화재의 위치, 깊이, 크기 및 분포양상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리탐사의 목적이 지표 밑에 존재하는 불균질성을 기록하여 지하구조를 분석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흙 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물리 화학적인 요소 등을 측정하여 유적의 양상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국의 고고학적 물리탐사는 1995년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활용중인 물리탐사를 참고로 국내 에 도입되었다. 도입당시 한국에서는 건축, 토목분야에서 물리탐사가 활성화 되어 있었지만 고고학에 접목시켜 탐사를 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고학적 물리탐사를 도입하기 시 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고 그간 한국과 일본은 탐사전문가 교류를 통해 공동탐사 등을 진행하고 탐사방법의 개선과 탐사결과의 신뢰성을 높여 왔다. 고고학적 물리탐사 방법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방법은 GPR탐사법이다. 이는 투과깊이는 낮지만 해상도 가 뛰어나 발굴 착수 전에 많이 활용을 하였다. 하지만 투과깊이가 깊은 대형 고분 및 깊이 5m 이상의 지하 구조에서는 GPR탐사 투과깊이의 한계성으로 인해 탐사의 어려움을 겪어왔다. 탐사하고자 하는 구조물의 크 기가 매장 깊이에 비해 작은 경우는 탐사 자체가 불가능해 질 수 있는 경우도 생긴다. 또한 탐사지역의 지하 를 구성하는 물질이 매우 불균질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 데이터의 해석에 어려움이 존재하여 왔다. 2011년부터 진행된 한일 고대문화 공동연구에서는 보다 깊은 곳까지 투과하여 지하구조를 연구할 수 있도록 GPR탐사와 전기비저항 탐사방법을 상호 연구해 왔다. 특히, 고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을 연구 중에 있으며 고분에서 적용 가능한 전기비저항탐사 프로그램을 개발, 활용하고 있다. 그 사례 * 韓國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81

82 로 일본은 미야자키 사이토바루 고분군을 탐사하여 GIS시스템을 활용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 국에서는 다양한 고분탐사를 통해 고분 및 풍납토성 성벽 탐사 등에 활용해 왔다. 이에 그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수행한 탐사결과와 한국 내에서 진행했던 고분 탐사사례를 소개하고 공동연구의 성과와 향 후 발전방향을 논해보고자 한다. Ⅱ. GPR탐사 고고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물리탐사 방법으로 GPR탐사와 전기비저항탐사법이 있다. GPR탐 사는 물리탐사법 중 해상도 및 분해능이 가장 높아 매장문화재의 분포나 양상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영상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전기비저항 탐사는 GPR탐사법보다 더 깊은 곳 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하여 활용되고 있다. GPR탐사법의 원리는 간단하다. 흔히 공항에서 하늘에 떠있는 비행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 하는 레이더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공항에서는 하늘에 떠있는 비행체 위치를 파악 하기 위해 하늘로 레이다파를 방사하여 파악하지만 GPR탐사는 용어에서 나타나듯 지하(지표면 아래) 로 레이다파를 방사시켜 파악한다. 방사된 레이다파는 지하의 이상대에서 반사되어 지상으로 돌아온 다. 즉 레이다파는 질이 다른 곳에서 강하게 반사된다. 예를 들어 토양에서 질이 다른 토층의 경계면이 나 토양과는 질이 다른 금속과 돌 등이 있으면 강하게 반사하는 것이다(도면 1). 도면 1. GPR탐사의 기본원리 모식도 및 스넬의 법칙 반사된 레이다파를 안테나 수신기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뒤 컴퓨터에 의한 자료처리와 해석과정을 거쳐 지하의 구조물이나 유구 등의 위치, 범위 및 양상을 영상화하는 순으로 GPR탐사는 진행된다. 쉽 82 한일문화재논집 Ⅲ

83 게 이야기하면 반사되어 되돌아온 레이다파를 반사의 강약에 따라 색을 입히거나, 흑백의 농담으로 표 시한다. 또한 빨리 되돌아온 것은 얕은 위치에 표시되고 오랜시간이 걸린 것은 깊은 위치에 나타나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표현하면 지층의 단면 을 나타내는 영상이 얻어진다(도면 2). 도면 2. GPR 수직단면 데이터(wiggle trace와 color 형태) 이것을 컴퓨터로 자료처리를 통해 도면 3과 같이 수직단면과 수평단면을 얻어 고고학적으로 분석하 고 해석하는 과정이 GPR탐사이다. 도면 3. 2차원 수직단면영상에서 수평단면영상(timeslice)으로 전환 GPR탐사는 일반적으로 송수신 안테나를 지표면에 밀착시켜 사람이 끌거나 이동장치를 이용하여 탐사를 실시한다. 일반적으로 탐사지역이 사적이나 문화재관련 지역으로 정비가 잘된 곳이라면 안테나 를 이동장치(cart)에 장착하여 탐사를 보다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반면, 야산이나 기타 지형굴곡이 크 거나 장애물이 많은 곳이라면 보조 탐사자가 직접 끌어 당기면서 탐사를 해야한다(사진 1).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83

84 ] 사진 1. Cart를 이용한 GPR탐사(좌), 보조탐사자를 활용한 GPR탐사(우) 탐사를 실시하는 동안 레이다파는 송수신 안테나에서 송신과 수신을 반복한다. 반복된 송수신을 통한 데이터는 수직단면으로 표현되고 반사 신호의 강약을 통해 컬러를 통한 그래픽 영상으로 다시 표 현된다. 이렇게 색상을 입혀 고고학자나 관련 연구자들이 수직단면을 이해하기 쉬운 영상으로 표현한 다. 이를 레이더그램(radargram)이라고 하며 레이더그램에 포함된 반응은 실제 깊이가 아니라 반사되 어 온 시간으로 표시한 것이며 실제깊이는 지하매질의 속도를 분석하여 파악할 수 있다. 도면 2 3에서 볼 수 있듯 이상대에서 반사되어온 레이다파는 진폭이 커서 흑백명암이 뚜렷하거나 붉은색 반응을 보 인다. 이러한 수직단면 신호는 고고학자 등 관련 연구자들이 지하 내부 유적분포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하 기 위해 도면 4와 같이 컴퓨터로 데이터 분석을 거쳐 각 깊이별 수평단면(time slice)으로 만들 수 있 다. 지형에 상관없이 동일한 레벨값으로 단면을 만드는 방법과 지형을 따라 topo 단면을 만드는 두가 지 방법이 있다. 도면 4. Time slice 분석법의 종류 / level 수평단면(좌), topo 수평단면(우) 또한 수평/수직단면 분석이 3차원 분석법이지만 2차원적인 map의 형태로 표현되는 한계가 있다. 이 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fence diagram법과 다양한 각도로 매장 구조물을 바라보고 주변 의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iso surface 3차원 분석법이 있다. 이를 통해 84 한일문화재논집 Ⅲ

85 탐사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매장구조물 등을 파악하여 전체적인 유구분포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이 다(도면 5). 도면 5. Fence diagram(좌)과 Iso surface 3차원 입체분석(우) 표 1. 국립문화재연구소 GPR 탐사장비 제원 SIR-3000 (GSSI社, 미국) 안테나 All GSSI antennas 채널수 1 저장용량 256MB internal memory, 1Gb CF memory Display 8.4 TFT LCD, resolution, 64K colors Data Format RADAN (dzt) Scan Rate Examples 300 Scans/sec at 256 samples/scan 150 Scans/sec at 512 samples/scan Sample size 8 bit or 16 bit, user selectable Scan interval User selectable samples/scan 256, 512, 1024, 2048, 4096, 8192 Operating Modes Free run, survey wheel, point mode Time Range 0~8000 nanoseconds Gain Manual or Automatic, 1~5 gain points (-20 ~ 80dB) Filters Low-Pass and High-Pass IIR and FIR Stacking, Background Removal 전원 10.8 V DC, internal Interface USB port, CF memory, Ethernet GPS 외부 GPS와 RS232 케이블로 연결 장비크기 mm 무게 4.1Kg SIR-3000(본체) 및 안테나 종류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85

86 Ⅲ. 전기비저항 탐사 전기비저항 탐사의 원리는 지면에 전기를 흐르게 하여 토양과 그 이외의 것에서 나타내는 전기 저항 의 차이로 유구나 지하구조 등을 분석해내는 방법이다. 즉 지하에 존재하는 구성물질의 성질이나 상 태에 따라 전기가 흐르기 쉬운 부분과 어려운 부분에서 나타나는 전기저항의 차이를 분석하는 방법 이다. 예를 들면 지하의 젖은 점토는 전기를 쉽게 흐르게 하여 저항이 낮고, 석재로 만들어진 고분 석 실 등에서는 석재 사이에 공기가 있거나, 석재 그 자체가 전기를 흐르게 하기 어려워 저항은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전기흐름의 쉽고 어려운 정도를 전기비저항(전기전도도의 역수)이라고 하며 전기비저항이 작을수록 전기의 흐름은 좋아진다. 이와 같이 전기비저항이 다른 요소를 분석하여 연구하는 것이 물 리탐사분야의 전기비저항 탐사법이다. 전기비저항 탐사법 중에는 수직탐사, 수평탐사 등이 있다. 이들은 탐사목적이나 탐사장소의 상황에 맞게 달리 사용되며 최근에는 수직, 수평 탐사의 개념보다는 2차원탐사, 3차원탐사의 개념으로 탐사 를 실시하고 있다. 3차원 탐사는 지형의 굴곡과 탐사측선 아래의 수직단면을 포함한 모든 방향으로 전 기비저항 분포 변화가 발생한다는 전제로 탐사를 실시하고 분석하기 때문에 문화재 탐사에 있어 가장 적합한 영상을 제공할 수 있다. 사진 2. 전기비저항 탐사장면 도면 6. 전기비저항 탐사 모식도 전기비저항 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전극 배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극배열의 종류에 따라 웨너배열, 슐럼버저배열, 쌍극자배열, 3극배열(단극-쌍극), 단극배열, 변형된 전극배열 등으로 나뉜며 이 전극 배열법들은 각각의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하구조물을 정밀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인 분해능(resolution)은 쌍극자 배열이 가장 좋으며 그 다음으로는 3극배열, 단극배열, 슐럼버저배열, 웨 너법의 순서로 낮아진다. 반면에 측정자료의 질을 의미하는 신호 대 잡음비(S/N ration)은 위의 분해 86 한일문화재논집 Ⅲ

87 능은 쌍극자 배열이 가장 낮으며, 3극배열, 슐럼버저배열, 웨너배열 순으로 증가한다. 위의 경우, 쌍극 자 배열은 신호대 잡음비가 낮은 단점이 있지만 좋은 분해능의 자료를 취득할 수 있고, 웨너 배열은 그 반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어느 특정한 배열이 좋다라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탐사지역의 상황과 탐사목적에 맞그 전극배열을 선택하거나 복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면 7. 전기비저항 탐사 배열법 / C : 전류전극, P : 전위전극 표 2. 국립문화재연구소 GPR 탐사장비 제원 Terrameter LS (ABEM社, 스웨덴) Modes Resistivity, Resistance, SP, IP, Battery voltage Measurement range +/- 5V Measuring resolution 3 nv at 1 sec intergration 입력 Impedance 200 MOhm, 20 MOhm and 300 kohm 입력 Voltage +/- 600V 출력 Current 2500 ma 출력 Voltage +/- 600V 출력 Power 250 W Input gain range Automatic/수동 겸용 채널수 8채널 Isolation All Channels are Galvanically isolated 스위치수 64개(확장가능) 장비크기 mm 무게 12 Kg 전원 Inter NiMH 12V, External 12VDC Batt. 저장용량 1,500,000 readings Display 8.4 TFT LCD, Full color, Daylight visible Interface 2 USB port, Lan Cable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87

88 Terrameter LS (ABEM社, 스웨덴) 연동프로그램 RES2D/3D연동가능 GPS 20 channel SirFstar III chip 내장 Terrameter LS 본체 및 전극 설치 모습 Ⅳ. 탐사 사례 물리탐사결과는 한국의 고분 탐사결과와 일본에서 한일 공동으로 수행하였던 미야자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탐사결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한국과 일본의 물리탐사법 및 활용성을 비교 분 석하여 상호 발전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1. 나주 복암리 고분군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행정구역상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875-4번지 일대로 사적 제404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이 고분군 중 가장 큰 고분인 3호분을 대상으로 전기비저항 탐사를 실 시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였다. 3호분은 기 발굴조사로 내부에 다수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복암리 고분군 3호분을 대상으로 전기비저항 3차원 탐사를 통해 내부 구조와 비교분석 을 하였다. 향후 매장문화재 유형중 대형고분의 공간구조 영상화를 통해 고고학적 기초자료 확보에 주 요한 연구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탐사는 동서방향으로 48m, 남북방향으로 52m의 탐사범위를 설정하여 격자를 구성하였으며 각자의 격자에 전극을 설치하여 실시하였다(도면 8). 격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각 격자마다 GPS를 이용하여 3차원 측량좌표를 생성하였다. 탐사 자료는 측선별로 수직단면탐사(2차원)를 통해 획득하였으며 남북방향으로 49개, 동서방향으로 3 개의 측선에 대한 탐사자료를 획득하였다. 측선간격은 1m, 측점간격은 2m로 하였으며 각 측선이 남북 방향으로 1m씩 위아래로 이동하면서 측정을 하였다. 이는 전극간격은 2m이지만 1m간격으로 측정하 88 한일문화재논집 Ⅲ

89 사진 3. 나주복암리 고분군 및 탐사 대상인 3호분(화살표) 도면 8. 나주복암리 고분 3호분 측량도 및 전기비저항 탐사 격자 는 것과 같이 분해능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하였고 탐사에서 사용된 전극배열은 쌍극자배열이다(국립 문화재연구소, 2011, 고분과 물리탐사, 고총고분 조사를 위한 3차원 전기비저항 영상화). 도면 9는 복암리 3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유구 도면이며 도면 10에서 도면 12는 각 깊이별 전기비저 항 탐사 결과이다. 탐사결과 붉은색 계열로 표시된 고비저항 부분은 복암리 3호분 내의 무덤 및 관련 시설에 대한 반응으로 파악된다. 발굴유구와 탐사결과를 비교하면 고비저항 반응이 상당부분 발굴유 구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89

90 도면 9. 발굴유구 도면 도면 10. 깊이 2.25m의 탐사결과 도면 11. 깊이 2.75m의 탐사결과 도면 12. 깊이 3.5m의 탐사결과 2.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군 사이토바루고분군은 일본 열도 중에서 규슈섬에 위치한 미야자키현에 있다. 히토츠세강의 오른쪽 에 높이 60 80cm의 대지에 남북 4.2km, 동서 2.6km의 넓은 범위에 약 320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 한다. 그 종류도 전방후원분, 원분, 방형분, 횡열식, 지하횡열식 등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에 서는 사이토바루고분군을 1934년에 국가사적으로, 1952년에는 특별사적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 다. 사이토바루고분군 내에 오사호즈카, 메사호즈카 2기는 규슈에서 가장 큰 고분으로 황실과 관련된 고분이라고 생각되며 일본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박물관에서는 오사호즈 카, 메사호즈카 2기를 포함한 사이토바루고분군 전체를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탐사결 과를 바탕으로 지하유적 GIS시스템을 구축하여 학술조사 및 복원정비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발굴조 90 한일문화재논집 Ⅲ

91 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고분의 원형형태 그대로 보존하면서 조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국 립부여문화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백제도성 GIS시스템에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도면 13 : 미야자키현교육청 문화재과 東憲章 제공) 도면 13. 미야자키 사이토바루 고분군 및 오사호-메사호 탐사결과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91

92 도면 14. GIS시스템 도입 및 탐사결과의 활용 東憲章, 2008, ベールを脱いだ男狭穂塚女狭穂塚~地中レーダー探査による墳形復元~, 宮崎県立西 都原考古博物館研究紀要 第4号. 東憲章, 2012, 特別史跡西都原古墳群地中探査 地下マップ制作事業報告書 1, 宮崎県教育委員会. 92 한일문화재논집 Ⅲ

93 3.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고아리에 위치한 사적 제165호로 고분의 높이는 3.1m, 남북길이 20m, 동서길이 25m이다. 이 고분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가야시대 말기 고분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탐사의 목적은 고분 물리탐사법 연구와 관련하여 고아동 벽화고분의 내부축조구조 연구를 위해 실 시하였다. 탐사는 고분외형의 대략적인 크기와 형태를 파악하고자 지표에서 전기비저항탐사를 실시하 였고 고분내부에서 GPR탐사를 통해 고분 축조구조 및 두께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사진 4.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 전경 및 전기비저항 탐사모습 전기비저항 탐사는 도면 15에서처럼 고분 연도부(1 2번 측선)와 묘실 중심(3번측선)에서 실시하여 <표 3>과 같은 결과를 획득하였다. 붉은색의 결과는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고비저항값(500 Ωm)를 나타내며 초록색은 일반적인 토양에서 나타나는 저비저항값( 60Ωm)을 보였다. 3번 측선 탐사결과, 묘실이 위치해 있는 부분의 전기비저항 값이 높게 나타났으며 지표면 부근에서는 전기비저항 낮게 나 타났다. 묘실의 중심 수직모양은 내부의 모양과 유사한 형태를 가진 원형에 가까운 아치형모양으로 파 악된다. 또한 묘실의 왼쪽과 윗부분에서의 고비저항은 고분내부로 빗물 등이 스며들어가지 않게 방수 시설 등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도부 내부 천장은 큰 판석으로 놓아져 있으나 1, 2번 측선 탐사결 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묘실 중심 수직모양과 유사하게 아치형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93

94 도면 15. 고령고아동벽화고분지형도및전기비저항탐사측선 표 3. 고령고아동벽화고분전기비저항탐사결과 구분전기비저항탐사결과비고 3 번측선 2 번측선 1 번측선 94 한일문화재논집 Ⅲ

95 GPR 탐사는고분의축조두께와축조형태를파악하고자고분내부에서안테나를한점씩접지하는방법으로실시하였다. 일반적인 GPR 탐사방법은파악하고자하는면에접지를한후끄는형태로탐사를실시하는것이다. 하지만고아동고분의경우내부벽이매우약한상태로안테나를벽에접지하여끄는방법으로탐사를할경우, 벽화및벽체가손상되기쉬운상태여서점형태의접지방법을선택하였다. 또한양질의데이터확보를위해 1점에서최소 10번이상의테스트를수행하면서데이터를취득하였다. 도면 16. 동 서벽각지점에서의탐사결과및축조외형분석결과 ( 북벽을바라보며 ) < 도면 16> 은북벽을바라보며동벽과서벽쪽을탐사한결과로 1 4지점각각의레이더그램 (radargram) 을분석한결과, 벽체의두께가약 40 50cm 인 2개층이존재하는것으로파악되었다. 이는매장주체부의외부벽체의모양이사각형으로축조되었다는예상과다르게내부형태와같이축조된것으로파악된다. 이결과는전기비저항탐사결과와도일치한다. < 도면 17> 은서벽을바라보며고분의천장, 바닥및북벽각지점에대한탐사결과를보여주고있다. 레이더그램을분석한결과, 내부형태와동일한모양의형태로축조된것으로보인다. 동 서벽과유사하게두개의층이나뉘어져분석되고각측의두께는약 40 50cm 로확인된다. 한일고분공간구조영상화를위한물리탐사연구 95

96 도면 17. 천장 바닥및북벽의지점에서의탐사결과및축조외형분석결과 ( 서벽을바라보며 ) 96 한일문화재논집 Ⅲ

97 도면 18. 동, 서, 북벽 지점에서의 탐사결과 및 축조 외형분석결과(바닥을 바라보며) <도면 18>은 바닥을 바라보면서 고분의 동, 서, 북벽 지점에서의 탐사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동서북 벽 모두 내부형태와 동일한 모양으로 축조되었으며 각 측의 두께도 천장과 바닥 등에서 파악된 층의 두께와 동일한 두께인 약 40 50cm로 확인되었다. 탐사는 지표에서 전기비저항 탐사를 통해 고분외형의 대략적인 크기와 형태를 파악하였고 고분내부 에서 GPR탐사를 실시해 고분 축조구조 및 두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탐사결과 고분내 매장주체부를 둘러싼 석재 모양이 사각형으로 축조되었다는 예상과 달리 내부벽체의 둥근 모양을 따라 동일하게 40 50cm 2개층으로 축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는 매장주체부 전체를 동일하게 둘러싸며 축조 한 것으로 보인다. 4. 전남 고흥 야막고분 고흥 야막고분은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야막리 461-5의 나지막한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은 장축방향인 북서-남동방향으로 22.7m, 단축은 18.7m, 높이 약 3m 정도로 파악되었다. 발굴조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97

98 사 진행에 앞서 매장시설의 규모와 위치파악을 위해 GPR탐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도면 20>의 탐사결과에 따르면 매장주체부는 북서-남동방향으로 위치해 있으며 크기는 약 m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봉분 외곽으로 호석이 존재하고 있으나 많은 부분 소실 된 것으 로 분석되었으며 탐사결과와 발굴조사 결과가 상당부분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 5. 야막고분 전경 도면 19. GPR탐사 수평결과 (Time slice) 98 한일문화재논집 Ⅲ 사진 6. 발굴조사 전경

99 도면 20. GPR탐사결과(60~110cm)와 발굴조사 실측결과 5. 고령 지산동 고분군 제518호분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2012년 국립가야문화재연 구소에서는 제518호 고분조사를 위해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하였다. 봉분 높이는 3 4m정도이고 매장 주체부의 깊이 및 형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GPR탐사와 전기비저항탐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결 과는 도면 5 8과 같다. GPR탐사결과, 매장주체부는 봉분에서 지하 약 2 3m 깊이에 남동-북서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또한 전기비저항 탐사 결과를 통해서 봉분의 위쪽에서 매장주체부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도굴 흔적 등이 파악되었다(도면 21).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99

100 도면 21. 고령지산동고분군 518 호전경, 남에서 / 상전기비저항탐사결과, 518 호중심, 서 동방향 / 하 100 한일문화재논집 Ⅲ

101 도면 22. GPR탐사결과(time slice) 및 세부탐사결과(0.7~1.5m) 6. 서울 풍납토성 성벽 풍납토성은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백제 시대 토성이다. 최근, 토성의 북벽을 중심으로 집 중호우에 의한 붕괴 현상이 발생하여 원인분석을 위한 전기비저항 탐사를 실시하였다. 탐사결과는 기울기가 급한 경사면에서 고비저항 값을 가지고 있었다. 고비저항값은 일반적으로 지 하 깊은 곳의 암반 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지표면 가까운곳의 고비저항값은 이상대를 의미 하는 것이다. <표 4>는 탐사지점 근처에서 붕괴 된 모습과 탐사결과를 보여준다. 이상대에서 자갈, 모 래 및 폐기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최근 폭우로 인 한 붕괴가 잘못된 토성 복원 재료의 성질, 방법 등이 원인임을 알 수 있었다. 도면 23. 풍납토성 조사현황도 및 탐사 측선 한일 고분 공간구조 영상화를 위한 물리탐사연구 101

102 표 4. 서울풍납토성성벽의전기비저항탐사결과 측선 L1 주변상황 (a2 에서본정상부 ) / 측선 L1(a1~a2) 의전기비저항탐사결과 측선 L2 주변상황측선 L2(b1~b2) 의전기비저항탐사결과 측선 L3 의탐사장면 (c2 에서본정상부 ) 측선 L3(c1~c2) 의전기비저항탐사결과 측선 L5 의탐사장면 (e2 에서본정상부 ) 측선 L5(e1~e2) 의전기비저항탐사결과 102 한일문화재논집 Ⅲ

103 Ⅴ. 결론 한국과일본은문화재연구와관련된포괄적인교류를활발히펼쳐오고있다. 특히고고학분야에서는상호인적교류를비롯하여많은연구자료와정보들이교류되고있다. 하지만고고학적물리탐사교류는탐사전문가의인적자원의한계성을띄며진행되고있다. 일본은물리탐사초기, 나라문화재연구소西村康 (Nishimura Yasushi) 선생님의활발한탐사를수행하며여러가지탐사법과장비발전의계기를마련하였고한국에서문화재물리탐사가자리매김할수있게많은도움을주었다. 현재한국과일본은문화재물리탐사전문가는손에꼽힐정도밖에되지않는실정에있다. 한국은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총 3명이담당하며 1년에 회정도의탐사를진행하고있으며일본은나라문화재연구소의 1 2 명, 미야자키사이토바루박물관에서 1 2 명이탐사를수행하고있다. 특히미야자키사이토바루박물관은최근에고분군탐사를수행하며 GIS시스템화를추진하고있다. 이런노력등으로인해물리탐사는고고학분야에서일정한역할을하며자리매김하고있다. 이번한일공동연구를위해한국과일본연구자들은사이토바루고분군에서의탐사와관련한내용들을상호협력하였으며좋은결과를획득하기위하여노력하였다. 특히, 일본연구자중에서미야자키현교육청문화재과에계신東憲章님은한국연구자들에게좋은자료를제공해주셨으며탐사현장에서다양한의견에주셨기에감사의말씀을전한다. 향후한국과일본은탐사분야에있어두나라뿐만이아니라다른여러나라들과의큰틀에서탐사공동네트워크를공식화하여공동연구수행을할필요가있다. 지금까지는문화재탐사분야가각나라에서필요성, 적용가능성, 신뢰성을중심으로수행해왔다면앞으로는문화재연구분야의별도연구테마를형성하고융복합학문으로의계기를마련해야할것이다. 한일고분공간구조영상화를위한물리탐사연구 103

104 諫早直人이사하야나오토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Ⅰ. 머리말 Ⅱ. 문제의소재와본고의시각 Ⅲ. 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의조금 Ⅳ. 복천동 1호분출토금공품의조금 Ⅴ. 맺음말 요약문 신라의금공품은冠이나大刀등기종별로치밀한형식학적연구가축적되어, 변천이나제작기법, 지역성등많은것이밝혀져왔다. 하지만각종금공품이어떤식으로생산되고유통되어, 최종적으로피장자의손에옮겨지고부장되었는지에대해서는불명확한점이많다. 본고에서는 5세기중엽의신라왕릉인경주황남대총남분, 그리고동시기의지방수장묘인부산복천동 1호분에서출토된금공품을대상으로, 기종을넘나들며확인되는조금기술, 구체적으로는축조 ( 蹴彫 ) 나파상열점문 ( 波狀列点文 ) 등을관찰하여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에대한예측을시도하였다. 우선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의분석에서조금의다양성을파악한후에, 방대한금공품의제작에관계된복수의공방의존재를밝혔다. 또한기술수준이다른복수의공인이동일공방에서협업했을가능성을지적하였다. 그리고복천동 1호분의분석에서는신라의중앙과지방에서출토되는금공품사이에엄연한기술수준의격차가존재하는것, 지방에서는타지역의금공품이유입되어복식이나말장식에있어신라왕권의의도가반드시관철된것만은아님을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과거의사진이나실측도에서는표현되지않았던축조, 파상열점문의개성이나기술수준의고저 ( 高低 ) 가, 당해기의금공품생산 유통을해명할기초자료가될것임을논하였다. 주제어 : 신라, 금공품, 조금생산 유통, 황남대총남분, 복천동 1 호분 104 한일문화재논집 Ⅲ

105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諫早直人* 이사하야 나오토 Ⅰ. 머리말 眼炎く金 銀 彩色, 多に其の国に在り(눈부신 금 은 채색, 대부분 그 나라에 있다), 신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日本書紀 仲哀紀 八年条에 기록된 그 기사 자체의 신빙성은 차치하고, 신라에서 금 은을 사용한 금공품의 출현은 경주 월성로 가-13호분에서 4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1) 이어지는 5 6세기대의 대형 적석목곽분에서도 대량의 금공품이 출토되는 것을 통해, 記紀(古事記와 日本書紀)2)의 기술을 완전한 허언이나 후세의 수식어(修辭)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문헌을 따랐을 때 7세기 후반까지 금 은이 채굴된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왜에서,3) 황금의 나라 신라의 금이나 은, 그리고 그 것을 사용한 화려한 금공품은 필시 동경의 대상이었음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이다. 금 은의 채굴유적이나 금공품의 제작지는, 신 라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4) 금공품이나 그 소재가 되는 금 은이 쉽게 이동될 수 있음을 감안하면,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1) 李漢祥, 黄金의 나라, 新羅, 2004, 김영사. 월성로 가-13호분에서는 이식이나 경식 등의 장신구류, 장식대도나 胡籙 등의 무기 무구류, 장식마구, 금제 은제 의 용기류 등 다종다양한 금공품이 출토되었다(国立慶州博物館 慶北大学校博物館, 1990, 慶州市月城路古墳群. 2) 古事記 仲哀天皇段에 西の方に國有り 金銀を本として 目の炎耀く種種の珍しき寶 多に其の国に在り(서쪽에 나라가 있다. 금은을 근본으로, 눈부시는 종종의 진귀한 보물, 대부분이 그 나라에 있다. 라는 기술이 있다. 3) 문헌에 기록된 금 은 채굴의 초출자료는 아래와 같다(小林行雄, 1962, 古代の技術 塙書房, p.178). 銀 日本書紀 天武天皇三年(674) 三月庚戌朔丙辰 対馬国司守忍海造大国言 銀始出于当国 即貢上 由是大国授小錦 下位 凡銀有倭国 初出于此時 故悉奉諸神祇 亦周賜小錦以上大夫等 金 続日本紀 文武天皇五年(701) 戊子 遣追大肆凡海宿禰麁鎌于陸奥治金 甲午 対馬嶋貢金 建元為大宝元年 4) 한병삼은 현재의 경주나 그 주변에 금광이 없는 점에서, 금소재를 외부에서 수입했다고 본다(韓炳三, 1995, 韓国 の古代文化, 日本放送出版協会, p.99). 이에 반해 이한상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 후대에 경상북도 상주 일대 등에서 금이 채굴된 것에 주목하고,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李漢祥, 黄金의 나라, 新羅, (前掲註1), pp.60-62). 또한 최근 경주 및 그 주변의 하천에서 사금의 채취가 가능함이 박홍국에 의해 밝혀 져, 앞으로의 전개가 주목된다(朴洪国, 2014, 新羅 黄金에 대한 小考 慶州 및 隣近 地域에서 採取한 砂金을 중 심으로, 威徳大学校 博物館 叢書 第5冊, 威徳大学校博物館).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05

106 유통의최종단계로불리는분묘에부장된금공품을아무런고증도없이신라제라는전제아래논의해버리는것은, 그것이경주의대형적석목곽분에서출토되었다하더라도위험할것이다. 金銀錦繡を以って珍と為さず ( 원문 : 不以金銀錦繡爲珍, 금은이나비단같은것은보배로여기지않는다.) 는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의기록이나원삼국시대의진한과관련된고고자료의양상에서볼때, 신라 ( 斯盧國 ) 영역에있어서금공품의보급이주변지역보다도크게선행되었다고보기는어렵다. 특히 5세기전반이전의초기자료에관해서는고구려, 혹은그보다서방에서의반입품일가능성을충분히고려할필요가있을것이며, 설사신라에서만들어졌다하더라도이는일찍부터금공품을제작하고있던중원및그주변 ( 고구려를포함 ) 으로부터의기술이전이없다면생각하기힘들다. 또한신라의금공품생산은늦어도 5세기중엽에는궤도에올랐다고보이지만그즈음이되면백제나가야등인접지역에서도활발하게금공품생산이이뤄지고있어타지역으로부터의반입품일가능성을지적하는자료도있다. 어찌됐든제작지가분명하지않은현재상태에서신라의분묘에서출토된금공품이어디에서생산되었는지에대한문제를풀열쇠는, 전적으로금공품그자체에대한검토에달려있는것이다. 본고에서는국립문화재연구소와공동연구의일환으로행해진조사성과를바탕으로,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에대해생각해보고자한다. Ⅱ. 문제의소재와본고의시각 1. 문제의소재 삼국시대금공품에관한연구의대부분은일본고분시대의금공품연구와같은, 기종별형식학적연구이다. 지금여기에서그연구사를풀어낼여유는없으나그들연구의흐름을크게정리하면형태나문양, 장식등 모양 을기준으로분류하던단계에서, 제작기법이나조금 ( 彫金 ) 등 모양 을만들어내는 기술 에근거하여, 기존의분류체계를재구축하는단계로이행하고있다고말할수있다. 이와보조를맞춘듯출토고분이나공반토기의연대관을그대로금공품의연대에끼워맞추는것이아닌, 유물자체의전후관계나병행관계가논의되게된것도최근의경향일것이다. 5) 이와같은형식학적연구는 5) 예를들어마구연구에있어서는, 당초는형식학적연구와병행하여신라 가야등의지역색을밝히는것 ( 金斗喆, 1992, 新羅와加耶의馬具 - 馬装을中心으로-, 韓国古代史論叢 第 3 輯, 駕洛國史跡開発研究院. 金斗喆, 1993, 三国時代轡의研究, 嶺南考古学 第 13 号, 嶺南考古学会등 ), 출토고분의연대관을축으로지역별 고분별출토 106 한일문화재논집 Ⅲ

107 새로운자료의증가와기존자료의재검토에의해현재도갱신되고있으며, 앞으로도보다정교하고치밀하게발전될것으로예상된다. 한편금공품전체를훑어본연구는, 이한상에의한일련의연구 6) 를제외하면생각보다적다. 그의연구도각종금공품에대한형식학적연구를기초로지역색의추출이나지역간관계를선명히그려내는것은성공했지만, 금공품생산의실태에관한검토는충분하지않다. 후술할것처럼병행하는시기의일본에서출토되는각종금공품에는종종공통된기술적특징이확인되며, 상호밀접한관계아래생산되었음이밝혀지고있다. 이는하나의공방, 한사람의공인이다종다양한금공품의제작에관련되어있음을의미한다. 물론신라에서도그랬는지는자료의실태를바탕으로판단해야만할것이다. 어찌됐든신라의금공품연구는개개의금공품연구의축적을바탕으로금공품생산의방식을구체적으로논의하는단계에와있다. 필자는이전에신라의대표적인금공품의하나인장식마구의출현과전개에대해정리를시도한적이있다. 구체적으로는신라가 5세기전반에고구려의장식마구의영향을강하게받으면서도독자적形 意匠 소재의장식마구를창출하는과정을밝힘과함께, 그것이冠이나대금구등복식을구성하는착장형금공품의생산개시와도밀접하게연동하고있을가능성을논하였다. 7) 그시기에복식을구성하는착장형금공품은그소유자의서열을가시화하는중요한 위세품 8) 이며, 왕권은그생산이나유통을관리하는것으로, 자신들의구심력유지 확대를의도했다고하는이해가일반적이다. 9) 하지만이것들은어디까지나부장품이라는유통의최종단계에서도출된가설로각종금공품이생산되고, 피장자의손에건네져최종적으로고분에부장되기까지의프로세스에대해서는거의알수없다. 마구의변천을확립하는것에주안을두었으나 ( 申敬澈, 1994, 加耶初期馬具에대하여, 釜大史学 第 18 輯, 釜山大学校史. 柳昌煥, 2000, 大伽耶圏馬具의変化와画期, 鶴山金廷鶴博士頌寿紀念論叢韓国古代史와考古学 学研文化社등 ), 최근에는광범위한지역을넘나들며확인되는기술적인특징에바탕을둔광역편년이나제작연대가논의되고있다 ( 張允禎, 2008, 古代馬具からみた韓半島と日本, 同成社. 諫早直人, 2012, 東北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学的研究, 雄山閣등 ). 6) 李漢祥, 黄金의나라, 新羅, ( 前掲註 1). 李漢祥, 2011, 東아시아古代金属製装身具文化, 考古등. 7) 諫早直人, 2012, 洛東江以東地方における馬具生産の展開とその特質, 東北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学的研究, 雄山閣. 8) 한국고고학에서사용되는 위세품 은 prestige goods 의번역어로, 이에대응하는일본고고학의용어는 위신재 ( 威信財 ) 이다. 이희준은위세품을용기류등의 보유형위세품 으로, 복식의일부를구성하는 착장형위세품 으로대별하고, 후자에대해 기본적으로특정한장착자를위해제작되어, 장착자의신분을항상적으로보여줌과동시에, 지배계층내에서의위계를구체적으로나타내는것 으로보았다 ( 李煕濬, 2007, 新羅考古学研究, 社会評論, p.77). 이는일본에서도종종혼동되기도하나 위신재 보다는 신분표식 ( 표징재, status symbol) 에가까운개념이다 ( 内山敏行, 2000, 鉄器副葬の性格を考えるための視点, 表象としての鉄器副葬 鉄器文化研究会.). 9) 李漢祥, 1995, 5~6 世紀新羅의辺境支配方式, 韓国史論 33, 서울大学校国史学科. 李煕濬, 2002, 4~5 世紀新羅古墳被葬者의服飾品着装定型, 韓国考古学報 47, 韓国考古学会.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107

108 2. 본고의시각 제작지가분명치않은현재상태에서생산 유통이라는문제에다가가기위해서는개개고분에부정된각종금공품간의관계성을연구하고, 생산단위를밝혀가는기초작업이필요하다. 이작업을진행하면서필자가특히주목한것은각종금공품에사용된조금기술이다. 그당시한반도나일본열도에서출토되는금공품, 특히금동제품중에는끌 ( 鏨 ) 에의한축조 ( 蹴彫 ) 나점타조 ( 点打彫 ) 라는조금이시문된것이많다. 축조의흔적인삼각문이나, 축조나점타조의연속으로이루어지는파상열점문의모양이나끌을때려넣는정도에는공인 공방이보유한기술력이나버릇, 공구의차이가여실히반영된다. 유물에나타나는조금기술을상세히관찰하여공인 공방을구분하는시도는일본에서는鈴木勉 ( 스즈키츠토무 ) 을중심으로연구가축적되어있으며, 10) 필자도鈴木와함께福岡県月岡古墳 ( 후쿠오카현츠키오카고분 ) 출토품의분석을실시하여, 古墳시대중기중엽에시작된초기금공품생산의한면을밝힌적이있다. 구체적으로는제품간상호의기술적관계를바탕으로月岡古墳에서출토된다양한금공품중에, 眉庇付冑의조금기술과밀접한관계가추정되는一群과관계가희박한일군의존재를찾아내어, 전자에대해서는국산품의가능성이높다고결론내렸다. 11) 한국에서도신라 가야고분출토금공품에대해권향아에의한선구적인연구가있는데, 경주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을효시로하는특유의축조유형이경주지역에존재하는것이나다른제품간의조금에공통성이보이는것등, 중요한지적이이루어져있다. 12) 또한최근에는冠을중심으로조금기술의상세가관찰가능한고배율의컬러사진을게재한도록이나보고서가간행되어, 13) 앞으로더욱많은정밀한논의의전개가예상된다. 이와같은문제의식과연구시각을바탕으로, 황남대총남분과부산의복천동 1호분에서출토된금공품에관한조사결과를가지고, 14)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에대한예측을기술하고자한 10) 勝部明生 鈴木勉, 1998, 古代の技藤ノ木古墳の馬具は語る, 吉川弘文館. 鈴木勉, 2004, ものづくりと日本文化, 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附属博物館. 11) 諫早直人 鈴木勉, 2015, 古墳時代の初期金銅製品生産- 福岡県月岡古墳出土品を素材として -, 古文化談叢 第 73 集, 九州古文化研究会. 12) 権香阿, 2000, 三国時代金属遺物의線彫技法様相 - 蹴彫技法을中心으로-, 文物研究 第 4 号, 東아시아文物研究学術財団. 13) 国立春川博物館, 2008, 権力의象徴, 冠慶州에서江原까지. 国立公州博物館, 2011, 百済의冠 등. 14) 황남대총남분출토품의조사는 2011년 11월, 2012년 9월, 2013년 12월에국립경주박물관, 2015년 2월에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복천동 1호분의조사는 2012년 9월에국립경주박물관에서각각실시하였다. 108 한일문화재논집 Ⅲ

109 다. 두 예는 신라 금공품 중에서도 초기의 대표적인 자료로 알려져 있으며 전자는 신라의 왕릉, 후자 는 지방의 유력 수장묘로, 출토된 고분의 성격이 다르다. 양자의 조금기술을 비교함으로서 보다 다각적 인 시점에서 금공품 생산의 실태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3. 조금기술의 계측 단위의 미세한 흔적에 바탕을 둔 본고의 논의에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前稿15) 와 같은 고배율 의 사진과 조금에 의한 가공흔적의 수치화이다. 이하 계측항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두고자 한다. 파상문 파상문의 크기는 기본적으로 제품의 크기에 좌우되기 때문에, 파상문비(波狀文比)라는 지 수를 바탕으로 비교한다(도면 1). 파상문비는 (파상문 높이 파상문 피치) 100으로 산출되는 수치로, 값이 클수록 높은 파상문이 된다. 도면 1. 파상열점문과 그 계측부위 도면 2. 삼각문과 그 계측부위 삼각문 축조참(蹴彫鏨)에 의한 가공흔적이다. 길이와 폭을 계측하여, 삼각문 종횡비(삼각문 길이/ 삼각문 폭)를 산출하였다(도면 2). 값이 클수록 세장한 삼각문이다. 축조간폭(蹴彫間幅)을 수치화하기 위해 蹴피치(삼각문의 저변에서 다음 사각문의 저변까지의 거리)를 계측하고, 축조의 거칠기(蹴피치/삼 각문 길이)를 산출하였다. 값이 클수록 긴밀한 축조, 작을수록 거친 축조이다. 또한 계측은 직선부와 곡선부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점문 점문참(点文鏨)에 의한 가공흔적이다. 직경을 계측하였다(도면 1). 이들 계측항목은 기본적으로 전고를 답습하고 있으나, 전고에서는 계측수를 가능한 늘리고 평균치만 이 아닌 표준편차를 구했음에 반해, 본고에서는 평균치만을 구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계측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논지를 세우기 위한 신뢰성이 높아지며 표준편차를 구함으로 인해 수치의 산포도를 논의하는 15) 이하 전고는 (諫早直人 鈴木勉, 古墳時代の初期金銅製品生産, (前掲註11))를 지칭함.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09

110 것도가능하게되나, 지면을모체로하는현행의방법에서는막대한계측개소를검증가능한형태로제시할수없다는어려움이있다. 이에이번에는기본적으로제시한사진안에서계측을행하고, 한자료에서의계측개소를파상문비는 1점, 축조삼각문과점문은 3점으로통일하였다 ( 표 3). 계측수가적기때문에, 수치데이터는어디까지나참고에머물며, 사진에의거한논의가됨을미리양해부탁드린다. Ⅲ. 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의조금 1. 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의개요와그의의 황남대총은경상북도경주시에소재하는대형적석목곽분이다. 남분과북분으로나뉜쌍원분으로전체길이약 120m, 높이약 23m에달한다. 1973~1975 년에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에의해발굴조사가실시되어, 남분이북분보다선행하여축조된것과매장시설에서각종금공품을포함한대량의유물이확인되었다. 16) 그규모에서볼때대부분의연구자는신라왕 ( 마립간 ) 과그부인의묘로보고있으나, 구체적으로어떤왕으로비정할지에대해서는연구자간에의견의일치를보지못했다. 17) 필자는이전에황남대총남분출토마구에대해 5세기전반 ~ 중반이라는제작연대를부여하고, 그피장자에대해서는눌지왕 ( 재위 417~458 년 ) 의가능성이가장높다고보았다. 18) 남분에서는매장시설 ( 주부곽식목곽 ) 을중심으로 2만점이넘는유물이출토되었고, 금공품만도 2 천여점에달한다. 그품목도관 이식 경식 지환 대금구 식리등의장신구류, 장식대도 갑주 호록등의무기 무구류와각종장식마구, 용기류등실로다양하다. 그중에서도주목되는것이장식마구나대금구등, 일부금공품투조의아래에깔린엄청난양의비단벌레의날개이다 ( 도면 3). 황남대총남분을효시로하는신라의비단벌레장식제품은 5세기대에는경주지역, 그것도왕릉급적석목곽분에서만출토된다. 황남대총남분과거의동시기의고분으로비단벌레장식제품을부장하는것은황남대총북분만이며, 이야말로최상위계층에의해독점된금공품으로말할수있다. 금공품의생산 유통이라 16) 文化財管理局文化財研究所, 1985, 皇南大塚 ( 北墳 ). 文化財管理局文化財研究所, , 皇南大塚( 南墳 ). 17) 황남대총남분의피장자에대해서는, 지금까지奈勿王 ( 재위 356~402 年 ) 설, 訥祗王 ( 재위 417~458 年 ) 설이대치하고있으며, 최근에는実聖王 ( 재위 402~417 年 ) 설도제시되어있다. ( 國立中央博物館, 2010, 黄金의나라新羅의王陵皇南大塚.) 에는각설의대표적인논자의최신견해가나와있다. 18) 諫早直人, 2008, 古代東北アジアにおける馬具の製作年代 - 三燕 高句麗 新羅 -, 史林 第 91 巻第 4 号, 史学研究会. 110 한일문화재논집 Ⅲ

111 도면 3. 황남대총남분출토비단벌레장식금공품 (S=1/5, 鞍橋와居木飾金具만 S=1/10)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111

112 는문제로끌어들이고자한다면, 다음내용도중요하다. 첫번째는소재가된비단벌레의생식지역北限이한반도동 남해안변으로보이는점이다. 19) 이사실은이들비단벌레장식제품이고구려가아닌, 신라에서만들어졌을가능성을강하게시사한다. 물론비단벌레의생식지역이현재와는크게달랐을가능성이나, 소재자체가이동했을가능성은고려해야하지만신라에서는비단벌레장식제품이그후 6세기대까지성행하는데반해고구려에서의출토는아직 1점밖에없으며, 그시기도신라보다늦다. 20) 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중에는고구려적요소가강한것도확실히존재하지만, 21) 가장화려한장식이베풀어진금공품이신라제라는사실은, 신라가적어도 5세기중반에는고구려에뒤지지않는독자의금공기술을가지고있었음을의미한다. 한편대량으로필요한비단벌레의날개가, 보다온난하고번식에알맞은일본열도에서가져왔을가능성을충분히고려하지않으면안된다. 다만수지형대관 ( 樹枝形帶冠 ) 에달린비취제의곡옥이나, 보요부식금구 ( 步搖付飾金具 ) 의일부에사용된감자조개 ( 芋貝, イモガイ ) 제의대좌를고려하면, 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에일본열도에서가지고온소재가사용된것은그리큰문제는아니다. 이러한고구려가접근하기힘든소재를금공품의장식에적극적으로집어넣는것자체에서신라의독자성을찾아내야할것이다. 두번째는착장형금공품과장식마구가같은의장 소재로만들어졌다는점이다. 양자의공통성은비단벌레날개의사용외에도, 금동장식이나용문을기조로한투조, 파상열점문등많은공통점이확인된다. 이러한공통점에더해비단벌레장식의희소성을감안하면, 양자는왕에게만허락된 치장 으로당초부터세트로제작되었다고생각하는것이자연스러울것이다. 이예를통해신라의착장형금공품과장식마구중에는같은상황에사용함을전제로제작되어소유자의죽음에따라부장되는대단히屬人性이높은것이존재함을확실히인식할수있다. 이와같이황남대총남분에부장된막대한금공품중에적어도비단벌레장식의금공품에대해서는신라에서제작되었을가능성이대단히높다. 하지만이는어디까지나비단벌레를전제로한논의이며, 비단벌레장식이외의많은금공품에대해서는아직충분한검토가이뤄지지않았다. 이번에주목할 19) 神谷正弘 李午憙 鄭永東, 2004, 韓国慶州市皇南大塚出土玉虫装杏葉の復元製作について, 古文化談叢 第 51 集 九州古文化研究会. 20) 고구려의사례는 6세기전반으로비정되는평안남도진파리 1호분출토비단벌레裝金具 1점뿐이다 ( 神谷正弘, 2003, 玉虫装飾品集成, 古文化談叢 第 50 集 ( 中 ), 九州古文化研究会 ). 21) 예를들어황남대총남분에서출토된羽毛形帯冠이나鳥翼形冠飾은, 고구려의소위 鳥羽冠 의영향을강하게받은것으로판단되고있다. 또한북분에서는집안마선구 1호분출토와같은형식의太環耳飾이출토되었다. 전자는적어도그계보를고구려에서찾으며, 후자는고구려로부터의반입품일가능성이대단히높다. 112 한일문화재논집 Ⅲ

113 축조나 파상열점문은, 보다 광범위한 기종 간 비교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비단벌레장식제품이 어떤 체 제에서 만들어 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계기도 된다. 표 1. 황남대총 남분출토 파상열점문이 시문된 금공품 製品名 備考 出典 服飾 金銅 被葬者着装品 図面19 樹枝形帯冠 服飾 金銅 図面20 帯輪片 服飾 金銅 挿図18-④ 羽毛形帯冠 服飾 金銅 挿図19 透彫装飾板付帽冠 服飾 金銅 主槨 透彫装飾板付帽冠 副槨 用途 材質 樹枝形帯冠 服飾 銀 図面30 透彫装飾板は金銅 図面31-① 玉虫装透彫帯金具 服飾 金銅 図面44-① 胡簶金具 武具 金銅 報告書未掲載資料含む 図面48 49ほか 帯先金具 不明 金銅 図面48 透彫長方形金具 不明 金銅 挿図39 扁円魚尾形杏葉 馬具 金銅 12点出土 図面62-⑥ ⑦ 玉虫装透彫鞍橋 馬具 金銅 前 後輪出土 図面110 玉虫装透彫居木飾金具 馬具 鉄金 2点出土 図面133-① ② 居木飾金具 馬具 金銅 1点出土 図面133-④ 玉虫装透彫鏡板轡 馬具 鉄金 図面117-① 透彫鏡板轡 馬具 鉄金 図面118-① ② 鏡板轡片 馬具 鉄金 図面118-③ ④ 素文心葉形杏葉 馬具 金銅 報告書の第Ⅰ型式 6点出土 図面126-① ② 三葉文心葉形杏葉 馬具 鉄銀 周縁板は金銅 報告書の第Ⅲ型式 4点出土 図面126-⑦ 扁円魚尾形杏葉 馬具 鉄銀 周縁板は金銅製 報告書の第Ⅴ型式 1点出土 図面126-⑧ 扁円魚尾形杏葉 馬具 鉄金 報告書の第Ⅵ型式 8点出土 図面127-① ② ③ 透彫扁円魚尾形杏葉 大 馬具 鉄金 報告書の第Ⅶ式 2点出土 図面126-⑨ 127-⑤ 透彫扁円魚尾形杏葉 小 馬具 鉄金 報告書の第Ⅷ型式 1点出土 図面126-⑦ 玉虫装透扁円魚尾形杏葉 馬具 革金 報告書の第Ⅸ型式 10点出土 図面127-④ 玉虫装透彫扁円魚尾形杏葉 馬具 鉄金 報告書未掲載 国立中央博物館2010 杏葉形異形装飾具 馬具 鉄銀 周縁板は金銅 3点出土 図面127-⑥~⑧ 玉虫装透彫長方形金具 馬具 金銅 歩搖付飾金具に伴う 216点出土 図面128~130 方形留金具 馬具 金銅 10点出土 図面135-① 爪形留金具 封土 扁円魚尾形杏葉 馬具 金銅 30点出土 図面135-⑤ ⑥ 馬具 金銅 23点出土 図面198-⑦ 凡例 鉄金 鉄地金銅張 革金 革地金銅張 鉄銀 鉄地銀張. 太字は今回調査した資料. 出典は 国立中央博物館, 2010, 黄金의 나라 新羅의 王陵 皇南大塚, 以外すべて 文化財管理局文化財研究所, , 皇南大塚 南墳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13

114 < 표 1> 은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중파상열점문이시문된금공품을모아놓은것이다. 비단벌레장식제품은기본적으로파상열점문이시문되어있다. 황남대총남분에서는표에정리된것외에도이식이나식리, 장식대도나용기류등의각종금공품이출토되었지만, 파상열점문의사용은일부의착장형금공품과장식마구에한정됨을알수있다. 착장형금공품은주곽에서, 장식마구는주로부곽에서출토되나이는파상열점문을시문하지않은착장형금공품이나장식마구도같은양상이다. 또한파상열점문이시문된금공품은모두금동제품 ( 복합소재제품의경우도금동부분에시문되어있다 ) 인것에도주의해두고자한다. 파상열점문은황남대총북분에서는금관이나용기류등에도시문되지만당초에는금동제품, 그것도장착하여사용하는것에한정되었던문양이었다고보인다. 또한파상열점문이시문된금공품중에, 필자가실제조사한것은 < 표 1> 중에도굵은글씨로쓴 11 품목에그친다. 따라서지금부터논할것도어디까지나현재까지실제로본자료를중심으로이뤄진것임을미리양해를얻고자한다. 2. 대관 ( 帶冠 ) 의조금 대관 22) 은수지형 ( 出字形, 山字形으로도불린다 ) 이금동제 6점 ( 추정 ), 羽毛形이금동제 1점, 은제 1점이출토되었다. 금동제수지형대관의하나 ( 도면 4-1) 가목관내에서피장자착장상태로출토된외에, 모두주곽부장품수장부에서출토되었다. 파상열점문은금동제수지형대관 2점 ( 도면 4-1 2) 과금동제우모형대관 ( 도면 4-4), 그리고歸屬이분명치않은帶輪파편 ( 도면 4-3) 의총 4점이확인되며, 모두대륜부분에시문한다. 이번에조사를실시한 3점의파상열점문을보면, 각각전체형상이다른것을알수있다 ( 사진 1, 표 3). 또한수지형대관 ( 사진 1-1) 이나대륜파편 ( 사진 1-2) 의축조는, 삼각문과다음의삼각문을조금씩겹쳐가며, 거의일정한피치로때려넣었음에반해, 우모형대관 ( 사진 1-3) 의축조간격은불안정하며삼각문과삼각문이크게떨어져있는곳도있다. 삼각문의모양도자세히보면수지형대관만이장변의한변이불룩한부등변삼각형 ( 사진 1-1) 인것등으로다양하다. 또한피장자착장상태로출토된금동제수지형대관 ( 도면 4-1) 에대해서는이번에조사하지못했으나, 권향아에의해촬영된사진에서볼때폭에비해길이가짧은삼각문이각각작은간폭을두면서 22) 冠의용어에대해서는함순섭의연구에의거하였다 ( 咸舜燮, 2012, 新羅樹枝形帯冠의展開過程研究, 慶北大学校大学院碩士学位論文, 金宇大訳, 2013, 新羅樹枝形帯冠の展開過程研究, 文化財と技術 第 5 号, 工芸文化研究所 ). 114 한일문화재논집 Ⅲ

115 도면 4. 황남대총 남분출토 파상열점문이 시문된 대관 (S=1/8) 사진 1. 황남대총 남분출토 대관의 조금 (약 5배, ④는 축척부동)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사진 1-④, 표 3).23) 먼저 본 3점의 조금은 확연히 다른 거친 축조로 말할 수 있다. 황남대총 남분출토의 수지형대관에 대해서는 형식차가 존재하며, 제작시기 가 다른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의견이 유력하다.24) 조금의 다양성은 제작시기가 다른 점 은 제쳐두고 이들이 다른 공인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3) 権香阿, 三國時代 金属遺物의 線彫技法 様相, (前掲註12), 図1. 24) 李漢祥, 黄金의 나라, 新羅, 前掲註1, 咸舜燮, 新羅 樹枝形 帯冠의 展開 過程 研究, 前掲註22 예시.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15

116 3. 帽冠의 조금 금동제 1점(도면 5-①), 은제 1점(도면 5-②) 외에 백화제(白樺製)가 3점 출토되었다. 모두 주곽 부장 품 수장부에서 출토되었다. 파상열점문은 금동제 모관과 금제 모관의 前面에 박혀있는 금동제 투조장 식판에 시문되어 있다. 양쪽의 축조는 기본적으로 삼각문과 다음의 삼각문 사이를 조금 떨어뜨리면서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때려 넣었다(사진 2, 표 3). 또한 폭에 비해 길이가 짧은 삼각문의 모양도 많이 닮아 있다. 형태적 특징의 유사성에 더해 조금의 공통성을 근거로 하면, 이들이 동일 공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보다 깊은 검토를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동일 공방에서 제작되었다(조금되었 다)고 볼 수 있다. 도면 5. 황남대총 남분출토 모관 (S=1/4) 사진 2. 황남대총 남분출토 모관의 조금 (약 5배) 116 한일문화재논집 Ⅲ

117 4. 대금구의 조금 주곽목관 내에서 금제품이 피장자 착장상태로 출토된 외에, 은제품 5점, 비단벌레장식투조 금동제 품 1점(도면 3-②)이 주곽 부장품 수장부에서 출토되었다. 파상열점문은 금제나 은제의 대금구에는 보 이지 않으며, 금동제의 비단벌레장식투조 대금구의 과판(銙板)과 수식(垂飾)에만 시문되어 있다. 양쪽 축조는 기본적으로 삼각문과 다음 삼각문이 붙을지 안 붙을지 정도의 간격으로 거의 일정하게 때려넣 었음을 알 수 있다(사진 3, 표 3). 또한 세장한 삼각문의 형태나 점문의 크기도 많이 닮아 있다. 그 외 의 금구도 포함하여 각각의 금구에 시문된 조금에 큰 차이는 보이지 않으며, 한사람의 공인에 의해 제 작되었다(조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3. 황남대총 남분출토 비단벌레장식대금구의 조금6(약 5배) 5. 호록금구의 조금 보고서에서는 일부에 대해 호록금구의 가능성을 지적하면서도, 각종장식금구 로 하여 금구별로 기재하고 있다. 모두 주곽에서 출토되었다고 보이나, 개개 금구의 상세한 출토상황은 확실치 않다. 土屋隆史(츠치야 타카시)는 개개 금구의 귀속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2세트분의 호 록금구로 추정하고 있다.25) 역심엽형과판(逆心葉形銙板)이 2세트분 확인되는 것에서 필자도 금동제 25) 土屋隆史는 표 중에서 2점의 호록금구를 모두 双方中円形Ⅰa群으로 분류하고, 이들과 월성로 가-13호분 출토예를 바탕으로 双方中円形Ⅰa群을 신라의 특징적인 호록금구군으로 보았다(土屋隆史, 2012, 日朝における胡籙金具の展 開, 考古学研究 第59巻 第1号, 考古学研究会, 表1). 하지면 공표되어 있는 자료를 보는 한, 그것을 구성하는 중 요한 요소인 双方中円形金具나 方形銙板은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파상열점문이 시문된 금구는 모두 금동제임에 반해 무문의 逆心葉形銙板이나 円頭形勾玉状金具는 은제이다(도면 6). 즉 보고서 게재자료를 바탕으로 했을 때, 황 남대총 남분에서 双方中円形Ⅰa群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곤란하다.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17

118 와 은장식26)의 적어도 두 개의 호록이 부장되었다고 판단한다(도면 6). 조금은 금동제 호록금구에서만 확인된다. 금동제 호록금구는 조금에서 두 가지로 대별 가능하다. 세장한 삼각문으로, 삼각문과 다음 삼각문 을 약간 겹치는 A군(사진 4-①27)~④)과, 삼각문의 길이가 폭에 비해 짧고, 삼각문끼리 기본적으로 겹 쳐지지 않는 B군(사진 4-⑤~⑧28))이다(표 3). A군은 대금구, B군은 조수금구(吊手金具)로, 조금의 차 이는 사용되는 부위와 대응한다. 도면 6. 황남대총 남분출토 호록금구 (S=1/4, ③은 축척부동) B군은 높은 산과 같은 파상문을 가진 B1군과, 낮고 매끄러운 파상문의 B2군으로 세분할 수 있다. B1군의 3점은 모두 폭이 2.2cm임에 반해, B2군의 사진 4-⑦은 2.6cm로 넓은 것, 이에 대응하여 병 (鋲)도 전자는 직경 2.0 정도임에 반해, 후자는 직경 1.5 정도로 작은 점에서, 조금의 미묘한 차이는 호록 자체의 차이와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조금 자체는 크게 다르지만, A군의 대금구와 B1군의 26) 황남대총 남분에는 금동제 외에 短冊形吊手金具를 가진 은장식의 호록이 존재했다고 생각되나, 현재 공표되어 있 는 파편에서 구체적인 세트관계를 추출하긴 어렵다. 또한 호록금구의 분류에 있어서는 土屋隆史씨로부터 많은 교시 를 받았다. 27) 蛇尾(도면 6-①)에 대해서는 뒷면에도 鍍金 彫金이 시문되어 있으나, 앞면의 조금에서 차이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 다(사진 4-① ②). 28) 도면 6-③, 10-④의 逆心葉形銙板은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國立中央博物館, 黄金의 나라 新羅의 王陵 皇南大塚, (前掲註17))의 088에 기재되어 있어, 검토대상에 추가하였다. 또한 사진 4-⑤에 보고서 도면 48-③으 로 표시된 것은 보고서 도판 220의 오른쪽 위의 개체(도면 6-④)이다. 그 외의 개체는 보고서의 도판과 도면이 대 체로 대응하나, 본 자료의 도면과 비교할 때 결손부위 등에 차이가 있다. 118 한일문화재논집 Ⅲ

119 사진 4. 황남대총 남분출토 호록금구의 조금 (약 5배) 조수금구가 모두 직경 2.0 정도의 鋲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양자는 같은 호록을 구성하였 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을 정리하면, 금동장식 호록은 조수금구에서 볼 때 복수개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각각 다른 공인에 의해 만들어진(조금된) 것으로 보이는 조수금구와 대금구가, 鋲에서 볼 때 동일한 호 록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은 점도 밝혀졌다.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19

120 6. 마구의조금 轡의수에서볼때적어도 8세트의마구가부곽에부장되었으나, 29) 파상열점문을시문한것은표 1 에제시한 18점이다. 이번에분석한것은, 비단벌레장식마구 ( 居木飾金具 2점 ( 도면 3-7), 鏡板轡 ( 도면 3-4), 扁圓魚尾形杏葉 ) 30) 와, 鐵地金銅張透彫橢圓形鏡板轡 ( 도면 7) 이다. 모두철지금동장으로, 금동제의緣金부분에파상열점문을시문하고있다. 우선같은제품의부품간조금기술을비교해보자. 2점의비단벌레장식거목식금구를보면모두폭이좁은삼각문으로파상문비나점문직경도많이닮아있다 ( 사진 5-1 2, 표 3). 鏨의형상은비단벌레장식거목식금구와는완전히다르며투조경판비의좌우경판에대해서도같은모습으로, 어느쪽이든폭에비해길이가짧은삼각문을약간떨어트린정도의피치로거의일정하게때려넣고있다 ( 사진 6, 표 3). 또한銜孔 ( 재갈구멍 ) 의周緣에단緣金에시문되어있는파상열점문의축조도투조금동판에때려넣은투조를비교했을때, 삼각문의형태, 축조피치모두많이닮아있다. 이상에서볼때동일제품내의조금은기본적으로같은공구를사용한동일공인이담당했을가능성이높다고말할수있다. 한편, 비단벌레장식마구사이는어떨까. 우선언뜻보기에삼각문자체의형태가모두다른점을볼수있다 ( 사진 5). 또한비단벌레장식거목식금구의축조는, 삼각문과삼각문이아주약간붙을정도의간격으로거의일정하게때려넣어져있음에반해, 비단벌레장식편원어미형행엽의축조는삼각문끼리떨어져있음이드문드문보이는등거친축조이다. 비단벌레장식경판비의축조도행엽정도까지는아니나, 간격에약간의흐트러짐이확인된다. 어디까지나조금에한정된논의이지만, 鞍, 경판비, 행엽의순으로조금의기술수준 31) 에격차가존재한다. 이와같이, 같은제품의부품간에대해서는비단벌레장식대금구는동일공인에의한조금을상정할수있으나, 다른제품간즉비단장식마구전체가되면, 그조금에는기술차가확인된다. 검토자료가충 29) 황남대총남분의부곽에서는轡 8점 ( 環板轡 3점, 鏡板轡 5점 ), 鐙 5 6~7세트, 鞍 5세트, 心葉形杏葉 3형식, 扁圓魚尾形杏葉 6형식, 歩揺付飾金具 8형식등다수의마구가출토되었다. 30) 보고서에서는비단벌레장식투조행엽은地板이革製라되어있고, 지판이철제인본자료은보고되어있지않다. 본자료는 ( 國立中央博物館, 黄金의나라新羅의王陵皇南大塚, ( 前掲註 17)) 의 232에해당하며, 같은구조 ( 제작 ) 의것이여러매있는듯하다. 31) 鈴木勉는기술의수준을 역사적수준 과 속인 ( 属人 ) 적수준 혹은 사회적수준 으로구별하고있는데 ( 鈴木勉, 2008, 古代史における技術移転試論 Ⅱ- 文化と技術の時空図で捉える四次元的技術移転の実相 -, 橿原考古学研究所論集 第十五, 八木書店 ), 여기서말하는기술수준은후자를가리킨다. 즉축조나투조, 병유등을기초기술로하는점에서, 황남대총남분에서출토된파상열점문을시문한각종금공품은같은 역사적수준 의제품으로볼수있으나, 개개의제품을만든공인의 속인적수준 내지 사회적수준 에는명확한차이가존재한다. 120 한일문화재논집 Ⅲ

121 분하지 않지만 비단벌레장식마구의 제작에 기술수준이 다른 복수의 공인이 참가했음은 확실할 것이다. 사진 5. 황남대총 남분출토 장식마구의 조금(1) (약 5배) 도면 7. 황남대총 남분출토 투조경판비 (도면 118-① ②) (S=1/4) 사진 6. 황남대총 남분출토 장식마구의 조금(2) (약 5배)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21

122 6. 소결 황남대총남분출토금공품에대한몇가지관찰을통해밝혀진바는다음의세가지로요약된다. 첫번째는조금의다양성이다. 폐기 ( 부장 ) 의일괄성이뒷받침된, 파상열점문이라는문양을공유하는금공품간에도그조금은천차만별이었다. 기존의사진이나실측도에서는논의할수없었던그미세한차이는, 직접적으로는鏨의형상이나그것을금동판에때려넣는각도나간격에유래되며, 공인을식별하는단서가된다. 두번째는동일제품의조금은부품이다르더라도기본적으로같으며, 한사람의공인에의해만들어졌다 ( 조금되었다 ) 고볼수있다. 이는당해기의신라금공품생산을복원하는데있어, 가장기초가되는단위라고말할수있다. 세번째는같은곳에서사용하는것을목적으로, 당초부터세트로만들어졌다고보이는제품간에도각각조금에는차이가있으며기술수준이다른복수의공인에의해만들어졌다 ( 조금되었다 ) 고보이는것들이있는점이다. 이와같은차이는의장의공유, 그리고소재의조달이라는면에서볼때, 기본적으로는동일공방내에서의변이로이해해야할것이다. 32) 비단벌레장식마구사이에서보이는기술수준의격차는, 鞍作공인이지도적인입장을담당한당시의마구만들기현장을선명하게되살려준다. 황남대총남분의축조금동제품에대해서는선술한것처럼권향아도상세한검토를실시하였는데, 일부의자료를제외하고 강하고날카로운삼각축조로된공통점 을갖는점, 이것이뒤에이어지는황남대총북분이후의금관의조금에도이어져가는 경주지역특유의축조유형 인점등, 중요한지적을하였다. 33) 분명히피장자착장상태로출토된수지형대관 ( 사진 1-4) 에서대표되는 강하고날카로운삼각축조 는, 鏨의미세한차이요소를버리면모관이나호록금구 B군, 마구의일부에도통하는특징으로말할수있다. 다만한편으로같은대관에서도완전히다른조금이존재하며 ( 사진 1-1), 세장한삼각문을붙일지붙이지않을지정도의간격으로축조하는비단벌레장식제품과같은조금이일정량존재하는것도분명하다. 권이 황남대총유물의축조성향과는완전히다른부류 로평가한삼각문과삼각문을조밀하게겹친금동제소문 ( 素文 ) 심엽형행엽도동일하다 ( 사진 7). 34) 이와같은다양성을근거로한후, 굳이단순화를시도한것이라면황남대총남분에서출토된파상열점문을시공한금공품의조금은세장한 32) 다만비단벌레장식대금구가비단벌레장식마구와같은공방에서만들어졌는가에대해서는논의의여지가있다. 33) 権香阿, 三國時代金属遺物의線彫技法様相, ( 前掲註 12), p ) 権香阿 三國時代金属遺物의線彫技法様相, ( 前掲註 12), 도 한일문화재논집 Ⅲ

123 삼각문으로, 삼각문과 삼각문을 약간 겹친 A그룹과 삼각문의 길이가 폭에 비해 짧고 삼각문끼리 기본 적으로 겹쳐지지 않는 B그룹의 적어도 두 개로 대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표 3). 양자의 차이는 기술수준의 차이로 말하기 보다는 축조에 대한 의식 작업습관의 차이로 말할 수 있 고, 동시에 5세기 전반에서의 세세한 시간차가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를 검토할 지면이 부 족하다. 여기서는 폐기(부장)의 동시성이 뒷받침된 일괄자료인 점을 중시하여, 5세기 전반에 신라왕권 의 그늘아래에서 금공품제작에 관여한 공방의 차이로 파악해 두고 싶다. 권이 주목한 경주지역 특유 의 축조유형 을 공유하는 B그룹의 공방은, 어디까지나 황남대총 남분출토 금공품을 제작한 주요한 공 방의 하나로 봐야할 것이다. 다만 복수의 공방을 상정하는 경우에도 공방에 관계없이 같은 형태, 같은 의장의 금공품이 만들어 진 것, 권이 황남대 총 남분의 금공품에서 특징적인 가공흔적으 로 지적한 삼각문과 삼각문을 잇는 세선(細 線) 35)이, 많은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 등을 감안하면(표 3), 발주자(왕권)를 같이하는 각 공방이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사진 7. 황남대총 남분출토 소문심엽형행엽의 조금 (축척부동) Ⅳ. 복천동 1호분출토 금공품의 조금 1. 복천동 1호분출토 금공품의 개요 복천동 1호분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소재한 수혈식석곽묘이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본래는 낮고 평 평한 분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9년에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어, 매장시설에서 각종 금공구를 포함한 풍부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다.36) 그 연대에 대해서는 4세기 제4분기에서 5세기 35) 권향아는 축조의 삼각형과 삼각형의 사이에 날카로운 도구로 눌러 끈 것과 같은 세선 이라 하였다(権香阿, 三国時 代 金属遺物의 線彫技法 様相, (前掲註12), p.131). 이는 필자들이 月岡고분출토 금공품의 일부에서 확인한 삼각 문과 삼각문을 잇는 세선 과 같은 가공흔적으로(諫早直人 鈴木勉, 古墳時代の初期金銅製品生産, (前掲註11)), 황남대총 남분에서 이 가공흔적을 가진 금공품이 출토되고 있는 점은, 일본열도의 초기 금공품생산의 계보를 고려 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36) 東亜大学校博物館, 1970, 東萊福泉洞第一号古墳発掘調査報告.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23

124 말까지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필자는 복천동 1호분출토 마구에 대해 황남대총 남분과 병 행하는 5세기 중반이라는 연대를 부여하였다.37) 금공품은 수지형대관, 垂飾付耳飾이라는 복식을 구성하는 것과 말장식을 구성하는 장식마구로 대 별된다(표 2). 이번에 조사를 실시한 것은 수지형대관 2점과 장식마구이다. 수지형대관과 수식부이식 은 유해에 착장되지 않은 채 피장자의 머리부근에 각각 놓여 있었고, 마구류는 피장자의 발밑쪽에 놓 여 있었다. 재질은 다양하여, 복식은 금으로 꾸며져 있음에 반해 말장식은 일부를 은으로 꾸몄다. 이 와 같이 복천동 1호분에는 다른 色彩(재질)의 착장형금공품과 장식마구가 부장되어 있음을 우선 주의 해 두고자 한다. 표 2. 복천동 1호분출토 금공품 製品名 服飾 馬具 材質 数量 樹枝形帯冠 金銅製 2 垂飾付耳飾 金製 2 内彎楕円形鏡板轡 鉄地銀張 1 瓢形杏葉 鉄地銀張 3 板状別造辻金具 銅地銀張 6? 사진 8. 복천동 1호분출토 대관의 鋲과 조금 (약 5배) 2. 대관의 조금 그럼 鏨에 의한 조금이 확인되는 2점의 금동제 수지형대관부터 살펴보자. 대관①은 파상열점문, 대 37) 諫早直人, 2011, 洛東江 下流域 出土 馬具의 地域性과 그 背景, 慶北大学校 考古人類学科 30周年紀念 考古学 論叢, 慶北大学校出版部. 諫早直人, 2012, 洛東江下流域における馬具生産の展開とその特質, 東北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学的研究, 雄山閣. 124 한일문화재논집 Ⅲ

125 관②는 타출(打出)한 열점문과 조금(彫金)은 다르지만(사진 8, 도면 8-① ②) 함순섭은 두 예를 모두 Ⅰ형식군으로 비정하고,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5점의 수지형대관(Ⅱ형식군)보다도 약간 선행하여 제작된 초기 신라관으로 보았다.38) 하지만 파상열점문이 조금된 대관①의 조금을 상세히 보면, 그 파 상문은 매끈한 활모양을 하지 않으며, 파상문 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거치문 으로 불러야 할 것이며, 蹴의 피치도 일정하지 않다. 또한 축조선의 일부에 끊어짐(破綻)이 확인되는 점 등(사진 9), 앞에서 본 대관을 위시한 황남대총 남분출토 금공품과 비교했을 때 만들기가 조잡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삼각 문의 크기 등을 보아도, 적어도 황남대총 남분출토 금공품의 제작에 관여했던 공인들의 것이 아닌 것 은 확실하다. 문제는 그 제작지에 있다. 해당시기의 금공품생산이 왕권에 의해 독점되었다고 한다면, 이 격차는 경주지역 내의 공방 간 차이로 인식된다. 즉 정밀한 제품이 왕을 위해 만들어지고, 조잡한 제품은 지 방에 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금공품생산이 왕권에 의해 독점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각 지 역이 보유한 공방의 기술수준의 차이로 파악할 수 있다. 양자택일과 같이 보이는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이 부산지역, 복천동 고분군 내에서의 조 금의 다양성이다. 예를 들어 복천동 1호분에 선행하는 복천동 10 11호분 출토 수지형대관의 조금은, 권향아가 제시한 사진을 보았을 때 분명히 1호분, 더욱이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 착장상태로 출토된 대관보다도 정밀한 것을 알 수 있다(사진 10).39) 자료조사가 충분하지 않은 현재 상태에서 답을 내는 것은 어려우나, 신라 독특의 형태적 특징을 가진 수지형대관의 제작은,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기술 수준에 차이가 있는 복수의 공방에서 행해졌음을 여기서도 재확인해 두고자 한다. 사진 9. 복천동 1호분출토 대관①의 조금 (축척부동) 사진 10. 복천동 10 11호분출토 대관의 조금 (축척부동) 38) 咸舜燮, 新羅 樹枝形 帯冠의 展開 過程 研究, (前掲註22). 39) 権香阿, 三国時代 金属遺物의 線彫技法 様相, (前掲註12), 도17. 신라 초기 금공품의 생산과 유통 125

126 3. 장식마구의 제작지 장식마구에 대해서는 조금이 시문되어 있지 않아 대관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려우나, 고정식유환 (固定式遊環)을 가진 내만타원형경판비(內彎橢圓形鏡板轡)(도면 8-④)나, 중앙의 방형금구에 稜을 가 진 판상별조십금구(板狀別造辻金具)(도면 8-⑥)라는 장식마구는 신라가 아닌 대가야에 유사한 예가 있 다.40) 표형행엽(瓢形杏葉)(도면 8-⑤)에 대해서는 福岡県 山ノ神古墳(야마노카미 고분)에 유사한 예가 있을 뿐으로 현재 상태에서는 비정하기 어려우며, 사용된 동제은피병(銅製銀被鋲)은 직경 3.0, 높이 1.5~1.8 로, 내만타원형경판비에 사용된 鋲과 같은 재질, 같은 크기이다(도면 18). 같은 의장, 같은 鋲 이 사용된 이들 마구는, 당초부터 같은 말장식에 사용됨을 의도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가 은 으로 통일된 이들 장식마구는 세트로(아마도 말과 함께) 대가야로부터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11. 복천동 1호분출토 장식마구의 鋲 (약 5배) 40) 諫早直人, 洛東江 下流域 出土 馬具의 地域性과 그 背景, (前掲註37). 諫早直人, 洛東江下流域における馬具生産の展開とその特質, (前掲註37). 126 한일문화재논집 Ⅲ

127 도면 8. 복천동 1 호분출토금공품 (1 2 : S=1/4, 4~6 : S=1/3, 3 은축척부동 )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127

128 표 3. 계측치일람 計測資料 図番号 分類 波状文比 三角文 長さ幅縦横比 直線部 蹴りピッチ蹴り彫りのあらさ皇南大塚南墳 樹枝形帯冠 図 5-1 A 帯冠 帯冠片図 5-2 A 鳥羽形帯冠図 5-3 B 樹枝形帯冠 ( 参考資料 ) 図 5-4 B 帽冠 金銅製帽冠図 7-1 B 銀製帽冠図 7-2 B 帯金具 玉虫装帯金具 ( 銙板 ) 図 8-1 A 玉虫装帯金具 ( 垂飾 ) 図 8-2 A A 群 : 蛇尾 ( 表面 ) 図 10-1 A A 群 : 蛇尾 ( 裏面 ) 図 10-2 A A 群 : 銙板 図 10-3 A 胡簶金具 A 群 : 銙板図 10-4 A B1 群 : 吊手金具図 10-5 B B1 群 : 吊手金具 図 10-6 B B1 群 : 吊手金具 図 10-7 B B2 群 : 吊手金具 図 10-8 B 玉虫装居木飾金具 図 12-1 A 玉虫装居木飾金具 図 12-2 A 玉虫装鏡板轡 図 12-3 A 玉虫装扁円魚尾形杏葉 図 12-4 A 馬 具 透彫鏡板轡 1( 縁金 ) 図 13-1 上 B 透彫鏡板轡 1( 透彫板 ) 図 13-1 下 B 透彫鏡板轡 2( 縁金 ) 図 13-2 上 B 透彫鏡板轡 2( 透彫板 ) 図 13-2 下 B 素文心葉形杏葉 ( 参考 ) 図 14 A 福泉洞 1 号墳 樹枝形帯冠 図 福泉洞 号墳 樹枝形帯冠 ( 参考資料 ) 図 凡例 計測項目 計測位置などについては ( 諫早直人 鈴木勉, 2015, 古墳時代の初期金銅製品生産 福岡県月岡古墳出土品を素材として, 古文化談叢 第 73 集 九州古文化研究会 ) に準拠した なお波状文比は 1ヶ所, そのほかは 3ヶ所を図上で任意に計測した平均値である. 三角文長さ 幅 蹴りピッチ 点文直径の単位はmm. 波状文比 =( 波状文高さ / 波状文ピッチ ) 100. 蹴り彫りのあらさ = 蹴りピッチ / 三角文長さ. 細線は, 三角文と三角文を繋ぐ細線 を確認できたものに を付した. 参考資料については ( 権香阿, 2000, 三国時代金属遺物의線彫技法様相, 文物研究 第 4 号, 東아시아文物研究学術財団.) の各図より計測した. 128 한일문화재논집 Ⅲ

129 曲線部 三角文 長さ幅縦横比 蹴りピッチ 蹴り彫りのあらさ 点文直径 細線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129

130 4. 소결 이상을 정리하면, 신라제의 대관을 쓰고 대가야제의 장식마구를 장착한 장식말에 올라앉은 피장자 의 모습이 떠오른다(도면 19). 장쇄식(長鎖式)의 금제 垂飾付耳飾(도면 19-③)은 백제 대가야에서 계 보를 좇을 수 있으며,41) 또한 손잡이(把)의 의장에서 볼 때 왜제(倭製)로 보이는 녹각장철검(鹿角裝鐵 劍)이 공반하는 등,42) 복식 자체의 유래도 다양한 한 듯하다. 복천동 1호분에서는 신라양식 토기가 주 체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부산지역 자체, 복천동 1호분보다도 이전에 신라왕권의 영향아래에 들어갔다 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43) 다만 신라에서 제작된 금공품과 신라 이외에서 제작된 금공품 두 가지를 입수한 것으로 볼 때, 부산지역은 복천동 1호분의 시기에도 어느 정도 독자적인 대외교섭을 행할 수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44) 외부에서 입수한 금공품을 꾸미기 의 안에 집어넣어, 그것을 살아있을 때나 장 송의 장에서 사용한 것은, 외부세계와의 연결이나 신라왕권에 대한 독자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효 과가 있었을 것이다. Ⅴ. 맺음말 본고에서는 신라 초기 금공품 중에서도, 황남대총 남분과 복천동 1호분이라는 두 고분에서 출토된 금공품을 주목하고, 각각의 조금에 대해 검토를 행하였다. 전자의 분석에서는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막대한 금공품의 제작에 관여한 복수의 공방의 존재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의 금공품연구 는 기종별 형식학적 연구를 정밀화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왔다. 그 영위 자체를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으나, 이번의 분석 결과에서 冠공방, 마구공방이라는 단일 기종만의 제작에 종사하는 공방을 상정하는 것은 어렵다. 본고에서 결론을 낼 수는 없었으나, 공인 공방의 실태나 각 공방간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왕의 형식학적 연구 성과를, 조금기술 등 기종을 넘나드는 새로운 시점에서 상대 화 해 나갈 작업이 필요 불가결함은 보여준 것이 아닐까한다. 41) 高田貫太, 2012, 考古学による日朝関係史研究の現状と課題, 考古学研究 第59巻 第2号, 考古学研究会. 42) 복천동 1호분 출토 鹿角装鐵剣의 평가에 대해서는 金宇大씨의 教示를 얻었다. 43) 李煕濬, 新羅考古学研究, (前掲註8) 등. 44) 高田貫太는 복천동단계의 동래지역은 신라의 강한 통제아래에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낙동강 以東지역에 경주를 중 심으로 형성된 정치네트워크(광역 신라)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葬性을 선택하거나, 대외교류활동을 빈번히 행하 는 자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 추정한다(高田貫太, 考古学による日朝関係史研究の現状と課題, (前掲註41), p.22). 130 한일문화재논집 Ⅲ

131 또한후자의분석에서는거의동시기의중앙과지방의고분에서출토된수지형대관의기술수준에엄연한격차가존재하는것을확인하였다. 이차이가어디에서유래하는지를밝히기위해서는보다많은유사한예를조사할필요가있으나, 신라독특의冠으로일컬어지는수지형대관이왕권의그늘아래의공방에서일괄생산되어각지에분배되었다는기왕의유력한모델에일정한재검토를요하게되었다고생각한다. 또한지방에있어서는타지역의금공품이유입되어, 복식이나말장식에신라왕권의의도가반드시관철된것만은아닌것도, 당해기에있어금공품의생산 유통, 나아가서는중앙과지방의관계를생각하는중요한시점이될것이다. 시종개별적구체적인사상의나열에그친감이있으나, 같은축조, 같은파상열점문에서떠오르는개성, 거기에기술수준의고저는당해기의금공품생산을복원하기위한기초자료가될수있는것을마지막으로한번더강조해두고싶다. 황금의나라 신라의금공품생산을해명할실마리는, 아직제품안에남겨져있다. 謝辭 ( 감사의말 ) 본고를작성함에있어아래의여러분, 각기관에많은신세를졌다. 특히바쁘신중에도, 조사를같이하여주신국립문화재연구소의이은석선생님, 박성진선생님, 거기에자료조사와사진 도면의게재에협력해주신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의여러선생님에게, 다시한번이자리를빌어감사의말씀을올린다. 또한본고에는 JSPS 科硏費 의성과를일부포함했다. 이은석이정은이한상이연재金宇大김규운김대환김혁중권향아鈴木勉土屋隆史박성진박홍국유정한국립경주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신라초기금공품의생산과유통 131

132 이은석계 ( 繫 ) 의재현을통한제작방법고찰 Ⅰ. 머리말 Ⅱ. 계의형식분류 Ⅲ. 일본출토계의조사 ( ) 1. 天理大所藏傳慶南출토유물 2. 天理大所藏持田 56 號墳유물 3. 梁山夫婦塚출토계 4. 遼代계 5. 十善の森古墳출토계 6. 上塩冶築山古墳출토계 7. 竹原古墳출토계 Ⅳ. 계의재현 1. 가죽의가공 2. 계의제작 Ⅴ. 맺음말 요약문 본연구는중국, 한국, 일본등에서출토되는고대마구중계 ( 繫 ) 에대한제작방법에대한고찰을통해 8 가지형식으로분류하였다. 가장기본적인 A형식과복대인 I형식을제외하면 7가지형식중중국식제작방법은 2형식 (B,H), 신라 가야식 2형식 (D, E), 일본하니와에서만보이는 1형식 (C) 이확인된다. 최근全北의高敞鳳德里 1 號墳의호록금구에서가죽을접고가장자리는직물끈으로보완한 F형식이日本上塩冶築山古墳출토품과같아 5세기대백제의마구와제작기술이일본에전해졌을가능성을제시할수있다. G형식은가죽끈내부에삼베 ( 大麻 ) 를넣어이중적인가죽끈보완형식이확인되고있고출토유물에서도점차증가하고있는점이주목된다. 한국과일본출토마구의제작방법을살펴보고이를토대로계를재현해본결과, 가죽끈을보다튼튼하게제작하여오랜기간사용해도쉽게끊어지지않도록하였다. 고대마구에있어서복대제작은넓은폭으로 1m 이상사슴가죽으로제작하기가힘들어, 가장견고하게유지하기위해서는여러줄을엮어서제작했음이공통적으로확인할수있는기술이다. 일본출토마구에서계의제작방법에따라신라계, 가야계, 백제계등기술전파의지역적인요소까지세분할수있을것으로판단된다. 삼계 ( 三繫 ) 에대한연구는고대마구제작의기술연구와마장복원에중요한단서가되리라기대된다. 주제어 : 계 ( 繫 ), 복대 ( 腹帶 ), 삼베 ( 大麻布 ), 모시 ( 苧麻布 ) 132 한일문화재논집 Ⅲ

133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이 은 석* Ⅰ. 머리말 재갈과 고삐는 말을 타기 위한 각종 장착되는 마구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騎乘에 안정된 자세 유지와 전투 시 무기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는 안장과 등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마구를 연 결하는 面繫, 胸繫와 尻繫에 대해서는 그 제작방법을 검토하고 형식을 분류한 바 있다.1) 본 연구에서는 한일공동연구를 통하여 조사한 자료를 공개하고 실제로 계의 형식에 따라 실물로 재현, 출토된 유물과 의 비교 검토를 통하여 유물의 특징을 살펴보고 향후 고대 마장 복원에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Ⅱ. 계의 형식분류 계의 제작방법과 형식 분류는 기 분류한 형식(이은석 2012)을 활용하되 일부 문구를 수정 보완하였다. 가. A형식 : 가죽을 접어 중앙부에만 바느질하여 제작한 것으로, 陶俑이나 埴輪에 가장 많이 표현되 고 있음(中國 金盆嶺 21號 陶俑, 日本 荒蒔古墳 埴輪 등) 나. B형식 : 가죽을 가운데로 접고 4열로 바느질하여 제작한 것(中國 朝陽十二臺鄕磚廠) - 제작수 법으로 볼 때 내부에 직물을 부착하여 보완하였을 가능성이 있음 다. C형식 : 가죽을 가운데로 접고 X 자 형태로 가죽끈을 엮어 견고하게 제작한 것으로 실물이 확 인된 것은 없음(岡寺前方後圓墳 埴輪) * 韓國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1) 국내외 마구 조사 후 그 결과를 학술지에 게재한 바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분류방법을 본고에 재인용하였 으며, 추가 조사 자료도 동일한 방법으로 분류하였음을 밝혀 둔다. 이은석, 2012, 고대 동북아시아 계(繫)에 관한 연구, 中央考古硏究 第11號.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133

134 라. D형식 : 가죽을 가운데로 접고 중앙에 바느질한 후 양쪽으로 작은 가죽띠를 상하로 박아 넣어 매우 견고하게 제작한 것(天馬塚, 路東里 4號墳 등) 마. E형식 : D형식과 제작방법이 동일하나, 양쪽에 박은 것은 가죽이 아닌 직물류의 끈으로 박아 제 작한 것(天馬塚, 藤ノ木古墳) 바. F형식 : 가죽을 가운데로 접고 중앙에 바느질한 후 직물끈으로 가장자리를 보완 결구한 것(高敞 鳳德里 1號墳, 上塩冶築山古墳) 사. G형식 : 가죽을 가운데로 접으면서 접혀진 안쪽에 직물을 깔아 이중적인 보완을 한 것(天理大 所藏 傳慶南, 綿貫觀音山, 馬の博物館所藏 遼代遺物 등) 아. H형식 : 가죽을 2매로 붙이고 양쪽으로 바느질한 것(唐三彩, 正倉院 鞍裝 등) 자. I 형식 : 복대 등에는 가죽끈이 아닌, 말총 등을 꼬아 연결한 것이나 직물로 꼬아 여러겹을 연결 한 것으로, 조선시대 이후 혹은 일본 江戶시대 유물로 남아 있음(한국 崔文炳 鞍裝, 보 물 제747호) 표 1. 계의 형식 A型式 B型式 C型式 D型式 E型式 F型式 G型式(內部 織物) H型式 I型式(腹帶) 기 발표한 제작방법 분류는 현재까지 큰 차이가 없으나, 상기 발표(2012)한 고찰부에서 上塩冶築山 134 한일문화재논집 Ⅲ

135 古墳 출토 F형식 의 유물이 일본에서 새로이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유사한 제작방식이 한국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최근 국내유물 조사 시 高敞 鳳德里 1호분에서 동일 제작방법의 유 물이 호록금구에 부착된 것이 확인되었다.2) 사진 1. 고창 봉덕리 1호 출토 호록금구 사진 2. 고창 봉덕리 1호 출토 호록금구(세부) <사진 1 2>에서 보면 호록금구 양쪽으로 직물끈이 남아 수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출토유 물 가운데 왜계 토기가 있어 당시 교류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자료이며, 이러한 제작방법이 신라 와 가야지역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어 백제의 제작방법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Ⅲ. 일본 출토 계의 조사( ) 한일공동연구의 일환으로 2012년도에는 일본 奈良, 東京 지역을 중심으로 각 기관 소장자료를 수집 하고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奈良文化財硏究所의 도움으로 綿貫觀音山古墳, 金鈴塚 등 여러 출토유 물을 실견하였으나, 소장 기관이 허락하여 게재 가능한 天理大所藏 傳慶南 출토품과 持田 56號墳 유 물, 馬の博物館 遼代遺物, 東京國立博物館 梁山夫婦塚 유물 등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13년 도에는 若狹町 지역의 十善の森 丸山塚 大谷古墳, 岡山지역의 勝負砂古墳, 出雲市의 上塩冶築山古 墳와 中村1號墳 上島古墳 출토 마구를, 2014년도에는 九州지역의 若宮市 竹原古墳, 九州歷史資料館 에서 船原遺蹟, 番塚古墳, 山ノ神古墳 출토 마구를 조사하였다. 본고에서는 도면으로 발표된 자료에 실제로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여 세부적인 차이점이나 추가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2) 현재 유구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호록금구 사진은 원광대학교에서 연구자료로 제공받았음을 밝혀둔다. 圓光大學校 馬韓 百濟文化硏究所 高敞郡, 2012, 高敞 鳳德里 1號墳.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135

136 1. 天理大所藏 傳慶南 출토유물 天理大 소장 유물 중 한반도 출토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제운주에 계(朝 25,745)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이 확인되었다.3) 내부에 직물을 넣고 가죽을 접어 제작한 것으로 폭은 3.0cm 에 이른다. 종형행엽의 입 문부 연결금구의 폭이 2.4cm 보다 좁은 1.8cm 크기의 행엽도 있어, 흉계나 고계에 부착할 때 좁은 폭의 계를 사용하여 연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구 1세트에서 흉계, 고계나 면계에 사용되는 계의 폭이 다 양하게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죽이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아 G형식 으로 분류하였다. 사진 3. 天理大 朝25 운주 사진 4. 天理大 朝25 운주 사진 5. 천리대 朝745 운주 사진 6. 천리대 朝745 운주 세부 3) 天理大學校博物館의 협조로 한반도출토유물과 持田56號墳 유물의 실견과 도면게재를 허락받았다. 136 한일문화재논집 Ⅲ

137 2. 天理大所藏 持田56號墳 유물 이 고분은 직경 20m의 원분으로 심엽형행엽 4점, 심엽형경판부재갈 1점, 운주 11점이 출토되었다.4) 금동제 심엽형 행엽에서 배면에 계가 수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계의 현존 폭은 1.7cm 정도이며, 연결된 책금구도 1.8cm 폭으로 큰 차이가 없다. 계의 제작방법은 양쪽으로 접었고, 일정 간격으로 투 공 2개씩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D형식 으로 판단된다. 사진 8. 持田56號 금동제심엽형행엽(背面) 계 사진 7. 持田56號 금동제심엽형행엽 사진 9. 금동제심엽형행엽 계 단면 사진 10. 금동제심엽형행엽(배면)계 수착상태 4) 宮崎県敎育委員會, 1969, 北の谷(空ケ谷)の諸圓墳, 持田古墳群.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137

138 도면 1. 양산 부부총 출토 계 3. 梁山 夫婦塚 출토 계 양산 부부총 출토유물 중 마구류는 금동 안장 1세트와 재갈, 등자 및 행엽 등 이에 따른 각종 부속 구가 출토되었다.5) 이 중 유기질은 안장아래 놓는 안장언치(韀)일부가 확인되었고, 그 중 행엽과 연결 되는 계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제작방법은 폭 약 3.2cm, 두께 약 0.2cm 정도의 가죽끈을 접어 중앙부 에 직교되도록 바느질한 흔적이 확인된다. 계의 폭은 1.6cm이며, 고정시키는 금구의 폭이 1.7cm 정도 이다. 행엽 입문의 폭이 1.6cm인 점을 감안하면 남아있는 상태로 보아 보통 1.7cm 이상 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등자나 다른 행엽의 입문부 폭이 cm 내외인 점을 보면 마구에 연결하는 계 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제작방법은 보통 신라식 계인 D 나 E형식 이 아닌 A형 식 으로 고계에 연결하는 부속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5) 발굴보고된 자료는 아래의 책자로 간행되었고, 1990년 동아대학교박물관이 유물 재조사를 실시한 바 있으나, 당시 마구는 일부 샘플만 조사되어 계의 유무가 확인되지 않았다. 2012년 6월 東京國立博物館의 협조로 유물 실견 후 계가 남아 있는 부분은 실측이 가능하였다. 朝鮮總督府, 1927, 梁山夫婦塚ト其遺物, 東亞大學校博物館, 1991, 梁山 金鳥塚 夫婦塚. 138 한일문화재논집 Ⅲ

139 4. 遼代 계 이 유물은 馬の博物館 소장품으로 遼代(A.D )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6) 마구 장식 1세트로 전체 금동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행엽형금구와 대금구 등과 연결된 흉계와 고계금 구가 양호한 상태이다. 계는 대부분 부식되었으나, 일부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사진 11 12>에서 보 면 상단에 일부 직물이 남아 있고, 이중의 가죽끈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계의 제작 시 G형식 으로 제작하였고 이는 삼국시대부터 보이는 계의 제작방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대략 10세기 정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11. 흉계금구 세부(직물흔) 사진 12. 계 잔존상태 5. 十善の森古墳 출토 계 若狹町에 소재하는 전방후원분인 十善の森古墳 출토 계는 가죽을 가운데로 접고 중앙에 바느질한 후 양 가쪽으로 직물끈이 부착되어 있는 F형식 으로 上塩冶築山古墳 출토품과 동일한 제작방법이다. 그러나 杏葉形金具에서 확인된 것은 계 내부에 직물흔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이는 G형식 과 동일방 식으로 제작된 것이며, 3.4cm 폭의 계는 흉계로 판단된다. 계의 제작방법이 F와 G형식이 합쳐진 이중 보완적인 것으로, 폭이 넓은 것은 견고히 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판단된다. 계의 폭은 2.2cm, 2.4cm, 2.6cm, 3.4cm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다. 6) 이번 조사에서 직접 실견할 수 있었다. 馬の博物館, 2007, 馬のシルクロ ド, 馬の博物館開館30周年記念 秋季特別展 p49.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139

140 사진 13. 十善の森古墳 출토 계 사진 14. 十善の森古墳 출토 杏葉形金具 6. 上塩冶築山古墳 출토 계 上塩冶築山古墳 보고서에 게재되어 있던 F형 식 의 실물조사 결과,7) 계의 양쪽에는 직물로 제 작한 끈을 연결하였는데, 계의 가죽과 직물 끈의 연결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흔적은 보이 지 않는다. 양쪽을 실로 연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 으나, 이후 재현방법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아 래의 <사진 16~18>은 上塩冶築山古墳 출토유물 로 재현한 것이다. 사진 15. 上塩冶築山古墳 운주에 부착되어 있는 계 7) 島根縣古代文化センタ-, 1999, 上塩冶築山古墳の硏究-島根縣古代文化センタ-調査硏究報告書4- 에 보고되어 있다. 140 한일문화재논집 Ⅲ

141 사진 17. 복원된 마구 세부 사진 16. 복원된 마구와 계 사진 18. 복원된 면계 7. 竹原古墳 출토 계 若宮市 竹原古墳은 석실 내 벽화가 그려져 있는 중요한 고분으로, 출토된 금동제행엽 뒷면에서 繫가 부착된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계는 2.4cm 폭으로 4.8cm 정도 남아 있으며, 전형적인 D형식 으로 가 죽을 접고 양쪽으로 폭 0.5cm 작은 가죽끈을 삽입하여 제작하였다. 소형의 가죽끈 삽입을 위해 cm 크기의 펀치같은 도구로 찍은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별도의 가죽끈 제작도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엽의 형식은 신라계통의 心葉形으로, 계의 제작방법 또한 신라 가야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과 동일하여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 21>에서 + 자형으로 수착된 계로 보 아 고계에 연결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141

142 사진 19. 竹原古墳 금동제행엽 전면(前面) 사진 20. 행엽 배면(背面) 계 부착세부 사진 21. 행엽 배면(背面) 계 부착 상태 Ⅳ. 계의 재현 본고에서는 계를 재현하는 실험을 통하여 제작방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고대 마구를 연결하거나 이어주는 계는 기본재료가 주로 사슴가죽(鹿皮) 내지는 말가죽(馬皮)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슴가죽은 두께 0.2~0.3cm 내외로 고대 계에서 보이는 가죽의 일반적인 두께로 판단된다.8) 국내에 서는 사슴가죽 마련이 쉽지 않아 가죽의 두께 확인을 위하여 고라니 가죽을 구해서 털 제거작업과 함 께 기본적인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직접적인 제작을 위해서는 가공된 가죽을 사용해야 하기 때 8) 사슴가죽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하게 활용하는 가죽제품이며, 매우 질기고 끈으로 제작하면 잘 끊어지지 않아 지금도 다양한 제품으로 제작되고 있다. 142 한일문화재논집 Ⅲ

143 문에 양(羊)가죽으로 제작을 진행해 보았다. 부속으로 사용한 가죽은 얇게 가공된 소가죽이며, 삼베 (大麻布)와 마끈(麻糸), 모시(苧麻布)도 비교자료로 제시하였다. 1. 가죽의 가공 사슴가죽의 두께 파악을 위해 같은 종류인 고라니의 가죽을 구해서 털제거작업과 두께 등을 파악해 보았다.9) 먼저 털의 제거 작업은 호미 등으로 긁어내었고, 내면의 지방질은 철제작업도구로 긁어낸 뒤 칼을 이용하여 남아 있는 부분을 제거하였다. 가죽과 붙어 있던 육질(肉)은 이미 대부분 제거되어 있 어서10) 작업이 어렵지 않았다. 남아있는 가죽부분은 두께가 0.3~0.4cm 정도로, 냄새 제거 및 세척을 위해 물에 불려져 있어서 두터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 24> 에서 보면 물기를 빼고 적당히 건조시 킨 결과 두께가 0.2cm 정도이며 가죽은 매우 질긴 상태로 신축력이 뛰어나고 가공처리를 거친다면 활 용할 수 있으나, 처리방법은 별도의 기술력이 필요하여 재료 파악에 중점을 두고 처리하였다.11) 사진 23. 고라니 털과 가죽 분리작업 사진 22. 수거한 고라니 모습 사진 24. 고라니가죽 단면상태(단면 0.2cm) 9) 도로에서 차량사고로 죽은 고라니(죽은 지 20일 정도 지남)는 계속되는 차량이 밟고 지나가면서 건조되어 미이라처 럼 납작해져 있었다. 이를 수거하여 가죽분리작업을 추진하였음을 밝혀둔다. 10) 건조되는 등 여러 요인으로 육질(肉質)이 분해되었지만, 개미 등 곤충에 의해 분해된 것으로 판단된다. 11) 별도의 가공처리를 하지 않고 건조시키면 종이처럼 얇고 딱딱하게 굳어진다. 계(繫)의 재현을 통한 제작방법 고찰 143

144 2. 계의 제작 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가죽의 접어진 폭을 고려하여 <사진 25>과 같이 양가죽을 폭 6cm로 재단 한다.12) 양가죽의 두께는 0.1cm 내외로 매우 부드러운 편으로, 바느질하기가 쉬워 얇은 실을 사용하 여 진행하였다. <사진 26>과 같이 중앙부에 0.4~05cm 간격으로 비스듬하게 감침질로 바느질하여 <사 진 27>와 같이 완성한 것이 가장 기본적인 A형식이다. 대표적 제작방법인 D형식 (天馬塚 등)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사진 28>에서와 같이 칼을 사용하여 간격 0.5cm, 1.5cm, 폭 0.5cm 크기로 홈을 파서 가죽끈으로 연결하였다. <사진 29 30>는 완성된 것 으로 길이가 14.5cm, 폭이 2.8cm 내외이다. <사진 31 32>는 제작방법은 동일하나 양 가쪽에 직물류 의 끈으로 연결한 것으로 藤ノ木古墳에서 출토되는 E형식 이다. 직물류는 현재 그 재료를 정확하게 파 악할 수 없어 여러 겹으로 꼬아 만든 일반판매 제품을 사용하여 재현해 보았다. 사진 25. 가죽의 재단 사진 26. 중앙 바느질(감침질) 사진 27. A형식 완성품 사진 28. D형식 제작 12) 天馬塚 출토 유물은 6.2cm 이상의 가죽으로 접어 제작한 것으로, 가죽의 두께가 0.2cm 정도로 두껍고 출토 당시 너비가 2.8cm에 이른다. 144 한일문화재논집 Ⅲ

145 사진 29. D 형식완성품 ( 외면 ) 사진 30. D 형식 ( 내면 ) 사진 31. E 형식완성품 ( 외면 ) 사진 32. E 형식 ( 내면 ) 사진 33. F 형식제작방법 사진 34. F 형식완성품 ( 내면 ) 사진 35. C 형식완성품 ( 외면 ) 사진 36. C 형식 ( 내면 ) 계 ( 繫 ) 의재현을통한제작방법고찰 145

146 사진 37. 삼베(大麻)와 모시(苧麻) 비교 사진 38. 天理大 朝745 운주 사진 39. G형식 재현 사진 40. G형식 펼친 상태 사진 41. A C D E F형식(외면) 사진 42. A C D E F형식(내면) 上塩冶築山古墳 출토 계와 高敞 鳳德里 1호분 호록금구에 부착된 가죽끈의 제작방법은 <사진 33 34>에서와 같이 A형식 으로 제작된 곳에 양 가쪽으로 마끈(麻絲)을 부착하는 방식으로 F형식 이 다. 유물상으로 볼 때에는 바깥에 부착되어 있어 바깥쪽에서 바느질하여 연결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 는데, 견고하게 붙어있도록 하기에는 어렵다. 실제로 제작할 때에는 양 끝쪽으로 마끈을 먼저 바느질하 여 연결한 후 가죽을 접어 중앙부에 감친질로 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다. 146 한일문화재논집 Ⅲ

147 岡寺前方後圓墳에서출토된馬形埴輪 13) 에서보면馬面에연결되는계의표현이흥미롭다. 이는 C 형식 으로실물이출토된바는없으나재현을시도하였다. 먼저 5cm 폭의가죽에중앙부에감친질로바느질한후 0.7cm 간격으로가죽끈을연결하기위한구멍을뚫어 X 자형태로연결하였다. < 사진 35 36> 에서보면운동화끈을연결하는방법으로일정간격동일하게 X 자형태의문양이만들어진다. < 사진 37> 은마구에서부착되거나운주아래지판에서부착되어나타나는삼베 ( 大麻 ) 와모시 ( 苧麻 ) 를비교한도면이다. 천리대소장품 < 사진 38> 인운주의연결금구아래에남아있는것을 < 사진 39 40> 에서재현해보았다. 이는 G형식 으로天理大所藏傳慶南, 綿貫觀音山古墳출토품과馬の博物館所藏遼代遺物등에서확인되고있다. 고급품인경우내부에보다부드러운직물조직이확인되고있어올이가는모시 ( 苧麻 ) 등이사용되었을가능성이높다. < 사진 41 42> 은 A C D E F 형식 의재현품을모두비교하였다. 기본적으로계가최대한끊어지지않도록고안한방법임을알수있다. 그러나계가재갈을끼워고정하는역할은했지만, 말등위에서안장을유지하는역할에대해서는큰역할을하지않았을것으로판단된다. 흉계나고계는운주나마탁혹은행엽을매달기위한것으로장식을위한가죽끈이다. 현대의마장은흉계나고계가필요없이안장을유지시켜주는복대만으로안장을연결하고있다. < 사진 43> 은현대의안장을연결하는복대이다. 가죽끈으로제작하였으나, 상하 2중의가죽끈으로각각다른교구로연결하여안장이쉽게끊어지거나탈락되는것을방지하고있다. 모두소가죽으로제작되어있으며탈부착이편리하도록한것이다. 이에비해고대부터근대까지의복대는가죽끈으로제작되는것이아니라직물혹은말총으로여러줄로연결하여만들었다. 왜가죽끈으로제작하지않고직물등으로만들었을까? 복대는말의배를둘러싸야하기때문에길이가매우길어야한다. 적어도 1m 이상의가죽끈이어야한다. 그러나사슴가죽으로는폭이넓고 1m 이상연결부위없이제작하기가힘들다. 소가죽은가공상에있어서현대와같이폭 10cm 정도로제작하기에는그공정이쉽지않았을것으로판단된다. 역시복대의특성상가장견고하게유지하기위해서는연결끈이가장오래, 튼튼하게유지할수있는여러줄로제작했고, 일부가끊어지더라도보수가가능한방식 으로기술이유지되었던것으로본다. 사진 43. 현대안장의복대 ( 가죽 ) 13) 鳥栖市敎育委員會, 1984, 岡寺前方後圓墳 - 鳥栖遺跡群範圍確認調査第 4 次調査報告書 -, 鳥栖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 21 集. 계 ( 繫 ) 의재현을통한제작방법고찰 147

148 Ⅴ. 맺음말 이상에서공동연구의주제로진행한일본출토마구자료및이를토대로계를재현해봄으로써고대기술적인방법을고찰해보았다. 일본출토마구에서파악할수있는계의제작방법에따라신라계, 가야계, 백제계로지역적인요소까지세분할수있을것으로판단된다. 계제작에가장기본적인 A형식-가죽을접어바느질하는형식과복대인 I형식을제외하면 7가지형식중중국식제작방법은 B형식 과 H형식 이있다. B형식 은중국동북지방의방식이며, 遼代까지그전통이연결될수있을것으로판단된다. H형식 은당나라의三彩陶俑에서흔적이보이며, 일본정창원소장안장에서도나타나고있는점이주목된다, 신라 가야식은 2형식 (D,E) 으로가장많은양이확인되고있다. 최근全北의高敞鳳德里 1 號墳의호록금구에서가죽을접고가장자리는직물끈으로보완한 F형식이日本上塩冶築山古墳출토계와동일한실물이확인되어 5세기대백제의가죽끈과마구제작기술이일본에전해진결정적인자료로판단된다. 일본하니와에서만보이는 1형식 (C) 은삼국시대에는확인되는유물이없어일본자체적으로발전했을가능성을염두에두고자한다. 그리고보다세부적인기술, 예를들면가죽내부에포를깔아만든 G형식 에대해서도구체적인제작방법을인식하는단계로, 마구뿐만아니라각종유물 ( 과대등 ) 에서도나타날수있을것으로보인다. 당시의제작기술을단계적으로복원해나가면고대기술상의발전단계를더욱폭넓게파악할수있을것으로기대한다. 148 한일문화재논집 Ⅲ

149 참고문헌 東亞大學校博物館, 1991, 梁山金鳥塚 夫婦塚. 朝鮮總督府, 1927, 梁山夫婦塚ト其遺物. 圓光大學校馬韓 百濟文化硏究所 高敞郡, 2012, 高敞鳳德里 1 號墳. 이은석, 1998, 경주황남대총소고 ( 小考 ), 1, 연보 8,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2002, 繫에관한小考, 文化財 第 35 號 pp83-99., 2012, 고대동북아시아계 ( 繫 ) 에관한연구, 中央考古硏究, 第 11 號. 李炫姃, 2006, 嶺南地方三國時代三繫裝飾具硏究, 慶北大學校大學院文學碩士學位論文. 張允禎, 2008, 古代馬具からみた韓半島と日本, 同成社. 諫早直人, 2012, 동북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學的硏究, 雄山閣., , 九州出土の馬具と朝鮮半島, 冲ノ島祭祀と九州諸勢力の對外交涉, 第 15 會九州前方後圓墳硏究會北九州大會發表要旨 資料集. 宮代榮一, 1997, 古墳時代の面繫構造の復元 -X 字脚辻金具はどこにつけられたか -, HOMINDS 1, CRA., 2003, 古墳時代における尻繫の復元 - 馬裝が示しもの, HOMINDS Vol.003. 內山敏行, 2012, 裝飾付武器 馬具の受容と展開, 馬越長火塚古墳群, 豊橋市埋藏文化財調査報告書第 120 集. 桃崎祐輔, , (6) 笊內 37 號橫血墓出土馬具から復元される馬裝について, 文化財と技術 2, 工藝文化硏究所, 2012, 3 交通と傳達 3 乘馬, 古墳時代の考古學 5 時代を支えた生産と技術. 宮崎県敎育委員會, 1969, 北の谷 ( 空ケ谷 ) の諸圓墳, 持田古墳群. 山口格, 2002, 馬具と馬裝の基礎的考察 - 腹帶を中心として, Mie history Vol.13. 馬の博物館, 2007, 馬のシルクロード 馬の博物館開館 30 周年記念秋季特別展. 奈良文化財硏究所飛鳥資料館, 2010, 北方騎馬民族のかがやき三燕文化の考古新發見. 島根縣古代文化センター, 1999, 上塩冶築山古墳の硏究 - 島根縣古代文化センタ - 調査硏究報告書 4-. 鳥栖市敎育委員會, 1984, 岡寺前方後圓墳 - 鳥栖遺跡群範圍確認調査第 4 次調査報告書 -, 鳥栖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 21 集. 계 ( 繫 ) 의재현을통한제작방법고찰 149

150 小田裕樹오다유우키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Ⅰ. 머리말 Ⅱ. 백제의유개대부완에관한연구사 Ⅲ. 문제의소재 Ⅳ. 사비기유개대부완의제작기법과그특질 Ⅴ.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전개와특질 Ⅵ. 결론 요약문 본고에서는일본의고대 율령적토기양식 의성립에있어서영향이강했다고지적되는백제사비기의유개대부완을대상으로제작기법의분석을행하고, 백제 신라의도성출토토기와일본의토기를비교하고유개대부완의수용에서보이는공통점과차이점에대해검토하였다. 사비기의유개대부완을관찰한결과, 우선점토띠를쌓아올려球體를만들고, 개부 신부로분할하여각각을만들어올린후, 다시짜맞춰마무리조정을행하여완성시키는제작공정을복원할수있었다. 이와같은유개대부완의제작방법은, 제작자및주문자그리고공급처의사용자가, 개 신일체의조합형 에의미를찾고, 이형태를얻기위해가장효율적인제작기법을선택한결과라고판단된다. 그리고이개 신이조합된형태는불기 ( 佛器 ) 인금속제의완을모방했을가능성이높다고생각했다. 7세기대의일본 백제 신라의토기를볼때, 모두유개대부완을주체로하는식기구성으로전환한다. 중국에서유래된향연 의식의장에서의식상에관련한공통의예법을각국이수용한것과관련하여, 대부 ( 臺付 ) 식기를대 ( 臺 ) 의위에놓고, 젓가락 숟가락을사용해먹는공통의식사작법이각국에전해져, 수용된것을나타낼가능성이크다고생각하였다. 한편 금속기 ( 金屬器 ) 를보다충실히모방한백제, 인화문으로기면 ( 器面 ) 장식을베푼신라, 土師器와須恵器를섞은일본 과각국의식기의시각적요소에독자성이나타나있음을찾아냈다. 공통의식사양식 식사작법을수용하면서각국독자의논리에따라식기의모양이나구성등의제요소가선택 부여되었음이고려된다. 주제어 : 유개대부완, 풍선기법, 식기구성, 시각적요소, 비교연구 150 한일문화재논집 Ⅲ

151 고대 한일 유개대부완의 제작과 전개 -백제 사비기의 자료를 중심으로- 小田裕樹* 오다 유우키 Ⅰ. 머리말 고대 일본 飛鳥시대의 토기양상을 보면, 크게 두 획이 있다. 첫번째 6세기 말~7세기 초의 금속기 지 향형의 토기양식 성립, 두 번째는 7세기 후반의 율령적 토기양식 의 성립이다. 이 중 필자는 율령적 토기양식 의 성립에 대해, 원저(圓底)식기 주체의 식기구성에서 대부 평저식기 주체의 식기구성으로의 전환이 그 본질이며, 대부 평저식기의 정착은 식기를 臺에 올리고 젓가락 숟 가락을 사용하여 식사를 입에 옮기는 식사작법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 거기에 대부 평저식기 주체의 식기구성은 중국 한반도에서 이미 보이던 양상인 것에서, 고대 일본이 대륙풍의 식사양식을 수용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1) 하지만 이상의 가설은 어디까지나 형태의 유사함이라는 시점에서의 검토에 불과하며, 일본의 식기와 중국 한반도의 식기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되어있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율령적 토기양식 의 성립에 있어서 영향이 강하다고 지적되는 백제 사비기의 유개대부 완을 대상으로 제작기법의 분석을 중심으로 행하고, 백제 신라의 도성 출토토기와 일본 토기와 비교 하여 유개대부완의 수용에서 보이는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밝히겠다. 이것들의 검토에 의해 고대 동 아시아에서 일본의 율령적 토기양식 의 위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자 한다. Ⅱ. 백제의 유개대부완에 관한 연구사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1) 小田裕樹, 2012, 都城の土器と東アジア世界, 花開く都城文化, 飛鳥資料館. 小田裕樹, 2012, 食器構成からみた 律令的土器様式 の成立, 文化財論叢Ⅳ, 奈良文化財研究所. 고대 한일 유개대부완의 제작과 전개 - 백제 사비기의 자료를 중심으로 - 151

152 1. 사비기의토기양식에대하여 사비기는백제의정치적중심이웅진에서사비에로옮겨간 538년부터, 당 신라연합군에의해망하는 660년까지를말한다. 사비기의토기연구에대해서는김용민 2), 김종만 3), 박순발 4), 山本孝文 ( 야마모토타카후미 ) 5) 등의연구가있다. 이들의연구에의해사비기에는한성기 웅진기의주요기종이었던三足杯등의배형토기가적어지고, 6세기말부터 7세기초에는대부완을주체로하는토기양식이성립하는것이밝혀졌다. 특히王宮址로추정되는부여관북리유적등의도성중추시설에서나오는정제된유개대부완 ( 회색토기 ) 은, 규격성이나크기 ( 法量 ) 분화의존재가특징이며, 지배자계층의생활 의례용기로서정착하는것, 백제에서의고대국가의형성 성숙과깊게관련되는것등이지적되고있다. 2. 사비기유개대부완의제작기법에대하여 백제사비기를특징짓는유개대부완의제작기법에대해서는, 일체성형이라는설과틀 ( 型 ) 만들기라는설의두가지설이제기되고있다. 김용민은유개대부완의개와신이어긋남없이일치하는것에서, 球形을만든후에중앙부를절단하여개 신의각각을만들어올리는방법을고려했다. 6) 한편김종만은회색토기유개대부완의규격성과대량생산에대해, 틀 ( 笵 ) 만들기를사용했다고해석하고, 7) 소재윤도틀만들기에의해개 신을성형한후에, 양자를합치는방법을취했다고하였다. 8) 이에반해酒井清治 ( 사카이키요지 ) 는완의身내면에남은小穴을밀폐폐쇄 ( 密閉閉塞 ) 에의한수축 2) 金容民, 1998, 百済泗沘期土器에대한一考察, 文化財 31, 文化財管理局. 3) 金鐘萬, 1998, 百済後期土器盌의様相과変遷, 国立博物館東垣学術論文集 第 2 楫, 韓国考古美術研究所. 金鐘萬, 2004, 泗沘時代百済土器研究, 書景文化社. 金鐘萬, 2007, 百済土器의新研究, 書景文化社. 4) 朴淳發, 2003, 熊津 泗沘期百済土器編年에대하여, 百済研究 37, 忠南大学校百済研究所. 5) 山本孝文, 2003, 百済滅亡에대한考古学的接近, 百済文化 32 号, 公州大学校百済研究所. 山本孝文, 2005, 百済台付椀의受容과変遷의画期, 国立公州博物館紀要 4. 山本孝文, 2006, 百済泗沘期土器様式의成立과展開, 百済泗沘期文化の再照明, 国立扶余文化財研究所. 山本孝文, 2008, 考古学から見た百済後期の文化変動と社会, 百済と倭国, 高志書院. 山本孝文, 2009, 7 世紀における土器様式の転換と東アジア, 史叢 第 81 号, 日本大学史学会. 6) 金容民, 百済泗沘期土器에대한一考察 ( 前掲註 2). 7) 金鐘萬, 1999, 百済後期土器盌의様相과変遷, 国立博物館東垣学術論文集 第 2 楫, 韓国考古美術研究所. 金鐘萬, 2002, 百済土器に見られる製作技法, 朝鮮古代研究 第 3 号, 朝鮮古代研究刊行会. 8) 蘇哉潤, 2002, 台付椀에관한小考, 年報 2002, 国立扶余文化財研究所. 152 한일문화재논집 Ⅲ

153 및건조촉진을위한공기공 ( 空氣孔 ) 으로해석하고, 유개대부완이풍선 ( 風船 ) 기법에의해제작되었다고하였다. 9) 김종만은酒井清治의지적을수용하여, 틀만들기가아닌풍선기법과마찬가지로내부의공기압을이용한타날에의한제작이라하고, 삼국시대토기제작에사용되었던투각기법의일종으로보고, 구절 ( 球切 ) 기법의명칭을부여했다. 10) 이러한제작기법이채용된배경에대해틀만들기설은대부완의규격성과대량생산을위한것이라하였고, 11) 다른한편의일체성형설에서도규격성높은대부완을효율적으로대량생산하기위한것 12) 이라하였다. Ⅲ. 문제의소재 백제사비기의토기양식에대해, 이시기대부완을주체로하는토기양식이성립하는것이알려져있다. 특히유개대부완은사비기의식기구성가운데주체를점하는토기로규격성을갖는것, 크기분화가보이는것, 특징적인제작기법에의해제작되었음이밝혀져있다. 하지만유개대부완의제작기법에대해일체성형설과틀만들기설의두설이제시되어있어, 다시필자나름대로자료의관찰을행하고제작기법을밝힐필요가있다. 또한본고에서논할것처럼필자는일체성형설을취하나, 왜풍선기법 ( 구절기법 ) 에의한일체성형방법을채용할필요가있었는지그의의를분명히할필요가있다. 또한유개대부완형태의토기는 7세기전반의신라나 7세기후반의일본등인근諸國에서도가까운시기에식기구성의주체가되는점에서, 이들의토기양상과비교하여백제유개대부완의특질을평가할필요가있다. 이상의문제의식아래, 본고에서는백제사비기의유개대부완의관찰에서제작기법을복원하고유개대부완제작의특질을밝힌다. 또한이들의검토를근거로백제 신라와일본의도성출토토기의비교에서, 유개대부완의수용에서보이는공통점과상이점을밝힌다. 그리하여고대동아시아에서일본의 율령적토기양식 의위치에대해고찰을진행하고싶다. 9) 酒井清治, 2003, 百済泗沘時代台付椀의製作技法, 泗沘都城 忠南大学校百済研究所. 酒井清治, 2012, 百済泗沘期の風船技法で製作された高台付椀, 土器から見た古墳時代の日韓交流, 同成社. 10) 金鐘萬, 2003, 泗沘時代灰色土器의性格, 湖西考古学 9, 湖西考古学会. 同 泗沘時代百済土器研究, ( 前掲註 3). 11) 金鐘萬, 百済後期土器盌의様相과変遷, 同 百済土器に見られる製作技法, ( 前掲註 7). 12) 金容民, 百済泗沘期土器에대한一考察, ( 前掲註 2).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53

154 Ⅳ. 사비기 유개대부완의 제작기법과 그 특질 1. 유개대부완의 관찰 1)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부여 신암리유적 출토 유개대부완의 관찰 본 자료는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한 부여 신암리유적 출토의 화장골장기이다(도면 1). 이것은 식기 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개 신의 세트관계가 확실한 사비기의 유개대부완이며, 개 신 양방에 걸친 성형 조정흔적의 관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높은 자료적 가치를 갖는다. 본 자료에 대해서는 이미 酒井清治의 검토에 의해 제작과정의 복원안이 제시되어 있다.13) 필자도 국 립부여박물관의 허가를 얻어, 2013년 8월에 실견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그 관찰결과를 제시한다. 身의 관찰과 제작흔적 신은 구경 18.5~18.8cm, 기고 9.2~9.7cm, 고대(高臺)경은 14.2~14.5cm이다. 반구형의 형태로, 원저기미의 저부에서 점점 내만하면서 구연부가 세워져 올라가며 구연단부는 둥글게 마무리되었다. 저부외면의 바깥쪽으로 높게 외측으로 곧게 뻗은 高臺를 붙인다. 다음으로 제작기법에 관한 흔적에 대해 기술한다. 본 개체의 저부외면을 관찰했을 때 물레깎기조정 에 의해 사립이 시계방향으로 움직인 흔적이 확인된다. 이 점에서 본 개체의 제작에 있어 반시계방향 의 물레를 사용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를 전제로 기면의 사립이 움직인 흔적 등의 관찰에서, 토기가 正 立 倒立의 어떤 상태로 조정을 입혔는지에 대해 판단하였다. 체부 내외면에 물레물손질흔적이 남아있으나, 외면을 관찰했을 때 종방향의 평행타날을 입힌 후 정성을 들여 물레물손질조정을 입혔다. 또한 체부 외면 하반에 물레깎기를 하였다. 이는 저부 외면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것으로 倒立상태에서 물레깎기를 행하고 있다. 저부 외측에 高臺를 붙 이나, 酒井清治가 지적한 대로 고대의 위치가 공 기 빼기의 소혈(공기공)을 숨기는 위치에 해당한 다.14) 저부 내면을 보면 체부의 물레물손질조정 후, 우선 중심부근에 한방향으로 물손질을 하고, 도면 1.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유개대부완 1 : 3 13) 酒井清治, 百済 泗沘時代 台付椀의 製作技法, 同 百済泗沘期の風船技法で製作された高台付椀, (前掲註9). 14) 酒井清治, 百済 泗沘時代 台付椀의 製作技法, 同 百済泗沘期の風船技法で製作された高台付椀, (前掲註9). 154 한일문화재논집 Ⅲ

155 다음에그주위를 4~5 회로분할하여물손질을입힌다. 공기공을지우는물손질은이들의분할물손질보다기면의건조가진행된상태에서행해져, 강한힘을이용해실시하나완전히지우지못하고점토가솟아오른채로남는다 ( 도면 2의사진4). 체부외면하반에는 七 의刻字가있고, 이는倒立한상태에서쓰여있다. 개의관찰과제작흔적개는외구경이 18.4~18.8cm, 턱경이 17.1~17.4cm, 기고는 8.9cm 로개 신을조합한기고는 17.3cm 가된다. 반구형의형태로, 정부 ( 頂部 ) 에서구연부가온화하고완만하게내려온다. 구연부내면에내경하는턱을붙인다. 턱은구연단부의신을받는부분에걸리지않도록약간안쪽으로붙였다. 정부에큼지막한보주형의꼭지를붙이는데, 중심에서약간어긋난위치에있다. 정부는정성스레물레물손질조정이시행되어있다. 꼭지를붙였을때의물손질이이물레물손질조정에의해지워져있어꼭지의붙임보다도뒤에정부의정성스런물레물손질조정이시행되었다고판단된다. 내면은물레물손질조정을행했다. 단면을봤을때, 정부부근에두께가두터워지는부분이있는데, 이곳을경계로정부중심에걸쳐, 물레물손질조정과는다른물손질조정을행하고있다. 이물손질조정은기본적으로한방향이며그주위에일부방향이다른물손질조정을행했다. 개 신에걸쳐진제작흔적본자료는개 신세트관계가확실한개체로양자를조합하여관찰한결과, 개 신양자에걸쳐진조정흔적이남겨진것을알수있다. 우선개 신의구연부는수평이아닌약간경사져이어지며이경사진부분과그것을수평방향으로수정하듯작은단차가만들어진장소가적어도 2~3 개소에서관찰된다. 거기에이단차는개와신에서대응하고있다 ( 도면 2의사진1). 이는우선구체를만들고, 그후개 신으로분할할때, 주걱공구 ( 근개 ) 를사용하여절단한흔적을나타내는것으로생각된다. 즉구체를분할할때근개를수평방향으로넣었으나, 한둘레를한번에절단한것이아닌몇회에나눠 ( 바꿔쥐어 ) 절단하였고근개의수평위치를수정한결과단차가생긴것으로판단된다. 다음으로개 신의구연부외면의물손질조정이주목된다. 개 신의접합부부근의폭약 3cm의범위에서물레물손질조정의흔적이관찰된다. 이는개 신에걸쳐연속하여행해져있어, 개 신을조합한후에구연부외면에행한조정의흔적이다 ( 도면 2의사진2 3). 이물레물손질조정이행해진범위를관찰하면, 기면의미사립이움직여있고, 흑색입자가묵퍼짐 ( 墨流し ) 상으로이동한흔적이보인다. 이것들은다른외면의물레물손질조정의흔적과는다른특징으로, 기면의건조가진행된단계에서의조정으로판단된다. 개 신을다시맞춘후에 3~4cm 폭의물을묻힌가죽등을이용해건조가진행된기면에물손질조정을행한것으로판단된다. 이물손질조정은개 신을분할한후각각의성형 조정이나건조등의과정에서생긴개 신의구연부의뒤틀림등을최종적으로조정할목적으로, 다시개와신을맞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55

156 도면 2. 백제유개대부완의세부사진 156 한일문화재논집 Ⅲ

157 춘 후에 시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이 물손질조정을 마무리물손질(仕上げナデ) 로 가칭한다.15) 이 마무리물손질을 시행한 후에, 예리한 공구를 사용하여 신 개에 걸친 합인(合印)을 밑에서 위로 새긴다. 풍선기법에 의한 제작 이상의 개 신에서 대응하는 절단흔적 과 개 신에 걸친 마무리물손질조정 의 존재에서, 이 유개대부완은 우선 점토띠를 쌓아올려 구체를 만들고, 주걱공구(근개)로 개부 신부를 절 단 분할하고 각각 조정을 베푼 후, 다시 조합하여 마무리조정을 베풀어 완성시켰음이 분명하다. 필자 는 酒井清治가 지적한 공기공의 존재를 합쳐 사비기 유개대부완은 풍선기법(구절기법)을 사용한 일체 (一體)성형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판단한다. 2) 관북리 군수리유적 출토 유개대부완의 관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자료의 관찰에서 예상된 제작기술 순서를 근거로, 각 유적 출토 대부완 자료의 관찰에서 제작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흔적을 남긴 사례를 소개한다. 원반(圓盤)폐쇄의 흔적 사비기 유개대부완이 풍선기법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했을 경우, 폐쇄방법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北野博司(키타노 히로시)에 따르면 풍선기법의 폐쇄방법에는 원반폐쇄 와 회전조임폐쇄의 2종류가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도면 3).16) 군수리 40-6례(도면 2의 사진5, 도면 4)는 원반폐쇄의 가능성을 가진 유개대부완 개(蓋)다.17) 물레 물손질조정의 부분은 조정 및 그릇 표면(器表面)의 상태가 확연히 다르고, 정부(頂部) 내면에는 물레 물손질조정이 베풀어 있지 않으며, 표면의 건조가 진행된 상태에서 부정(不整)방향의 물손질조정이 베 풀어져 있다. 이는 점토띠를 쌓아올려 성형하고, 물레물손질조정을 베푼 부분과 폐쇄하여 물레물손질 조정이 행해지지 않고 분할 후에 물손질조정을 베푼 부분과의 조정의 차이가 생긴 것을 나타낸다. 또 한 단면도를 보았을 때 정부보다 약간 밑부분에 기벽의 두께 차가 생기는 단이 붙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과 조정이 다른 경계가 대응하고 있다. 이는 점토띠를 쌓아올린 체부와, 원반폐쇄 점토와의 단차 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비기의 유개대부완에는 이와 같은 단면을 가진 개체가 많이 확 인되고 있으므로, 원반폐쇄에 의한 폐쇄방법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5) 酒井清治은 이 마무리물손질조정을 물레깎기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前掲註9). 기면의 사립이 움직이고 있는 점에 서, 깎기흔적으로 판단하였다고 생각되나, 이 조정의 범위는 개 신의 접합면을 구체의 면에 부합하도록 폭넓은 범 위에서 시행되었고, 점토를 깎았을 때 생기는 일정폭의 능선을 갖는 듯한 직선적인 깎기의 흔적과는 다르다. 이 점 에서 필자는 기면의 건조가 진행된 상태에서의 물손질조정으로 판단하였다. 16) 北野博司, 2001, 須恵器の風船技法, 北陸古代土器研究 第9号. 17) 忠南大学校百済研究所, 2003, 泗沘都城. 고대 한일 유개대부완의 제작과 전개 - 백제 사비기의 자료를 중심으로 - 157

158 회전조임폐쇄의 가능성을 가진 흔적 군수리 43-8례(도면 2의 사진6)에서는 상기의 흔적에 반 해 내면에 비스듬한 라인이 확인된다. 이것은 회 전조임폐쇄에 의해 생긴 점토의 주름에서 유래했 을 가능성이 있다. 폐쇄방법의 차이에 대해서는 기형의 대소에 의한 차이나 제작 공인 공방방의 차이와 관련할 가능성이 있으며, 보다 상세한 관 찰을 한 후 검토를 행하고 싶다. 구연부의 마무리물손질조정 관북리 )례 (도면 2의 사진7)는 신(身) 구연부의 마무리물손 질조정의 흔적을 보여준다. 다른 부분의 물손질 도면 3. 풍선기법에서의 폐쇄방법 모식도 조정 흔적과는 달리, 사립이 움직여 깎기흔적과 같이 보인다. 이는 기면의 건조가 진행된 상태에 서 마무리물손질조정이 베풀어졌기 때문에 생긴 흔적으로 판단된다. 이 마무리물손질조정은 구연 단부 외면만 이루어진 뒤 끊어져, 구연단부 상면 이나 구연부 내면에는 연속되지 않는다. 개 신을 포갠 상태에서의 소성 관북리 3845례 도면 4. 군수리유적 출토 유개대부완 개 (도면 2의 사진8)는 개 구연단부에 신 구연부가 녹아 붙어(溶着) 있다. 이는 개 신을 포개어, 개와 신의 구연부가 밀착된 상태로 소성되었음을 보여준 다. 2. 사비기 유개대부완의 제작공정 복원 이상 각 자료의 관찰에서 상정되는 대부완의 제작공법은 아래와 같다(도면 5). ① 점토 원반으로 저부의 형태를 만듦. 그 위에 점토띠를 쌓아올림. ② 점토띠를 위 부분(上方)까지 쌓아올림. 체부를 성형할 때 평행타날을 시행. 그 후 타날흔적을 지 18) 이 숫자는 국립부여박물관의 관리번호를 말한다. 출전은 尹武炳, 1999, 扶余官北里百済遺跡発掘報告(Ⅱ), 忠南大 学校博物館. 158 한일문화재논집 Ⅲ

159 도면 5. 백제유개대부완의제작공정복원안 우듯내외면에물레물손질조정을시행. 이때정부부근까지개구 ( 開口 ) 함. 3 정부에점토원반을막아폐쇄함. 회전조임에의한폐쇄의가능성도있음. 19) 4 폐쇄한구체 ( 球體 ) 상태로반건조시킴. 건조시의수축을조절하기위해, 찌르개를사용하여공기구멍 ( 空氣孔 ) 을뚫음. 5 구체를주걱공구 ( 근개 ) 로절단하여개부 신부로분할함. 6 개부와신부로나누어제작을진행함. 이때싯타 20) 를사용했다고추정됨. 19) 이때폐쇄상태로변형되었을가능성도고려할수있다. 개의정부가평탄하고, 구연부부분에서굴곡하는유개대부완의경우, 폐쇄상태로성형하는편이제작할때용이하다. 일본의須恵器壺 K 등의경우는, 이와같은제작기법을취했다고추정되고있다 ( 平尾政幸, 2001, 須恵器製作技法の検討にむけて, 古代の土器研究須恵器の製作技法とその転換, 古代の土器研究会 ). 20) 습대 ( 湿台 ) 로도표기함, 물레의위에설치하는통상 ( 筒状 ) 의도구로토기제작시의변형을방지하기위한받침이다.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59

160 개 6-1 반전 ( 反轉 ) 시켜, 도립 ( 倒立 ) 상태로만듦. 정부내면에부정 ( 不整 ) 방향의물손질조정을실시하여폐쇄흔적을지움. 6-2 구연부내면에턱을붙임. 6-3 반전시켜정립 ( 正立 ) 상태로되돌리고, 꼭지를붙임. 정부외면에물레물손질조정을시행함. 신 6-1 반전시켜도립상태로만듦. 저부외면에물레깎기를시행함. 6-2 高臺를붙임. 6-3 정립상태로되돌려, 저부내면에부정방향의물손질조정을시행하고, 공기공을지움. 7 개와신을다시포개어맞춤. 8 개 신의접합면에마무리물손질조정을시행하고, 구경이맞도록조정함. 9 합인 ( 合印 ) 을넣음. 21) 10 정립상태로건조시킴. 11 개 신을포갠상태로소성함. 3. 백제유개대부완제작의특질 이상과같이유개대부완의제작공정을복원하였다. 이는酒井清治의관찰결과및제작공정복원안을대체로좇아인정하는것이다. 그런데일련의제작공정을볼때, 유개대부완의 개 신이한세트를하는상태 를얻기위해서는크나큰노력이필요한점이주목된다. 구체를절단하여개 신을따로만들어다시포갠상태로마무리하는공정은, 처음부터개 신을따로제작하는방법에비해효율적인토기제작이라고는말할수없다. 필자는이제작방법을굳이채용한이유는 개 신이한세트를하는유개대부완형태를얻음 이라는목적에가장적합한방법이었기때문이라고생각한다. 즉개 신을따로제작하여마지막에포개어조정하는방법보다도頂部를閉口하고가운데가빈구체를일단만들어이를분할하여제작하고, 다시포개어미세조정을 21) 합인은밑에서위를향해시문함, 선의단면이예리하여기면의건조상태가상당히진행된상태에서시문된것으로판단된다. 이때문제가되는것은국립부여박물관소장자료인身저부외면의 七 刻字이다. 이글자는身을도치시킨상태로쓴것으로보인다. 刻字부분의점토를볼때合印과같은기면의건조상태에서쓴것처럼관찰되는점. 刻字를쓴곳이合印이새겨진곳과가까운점에서刻字와合印이일련의동작에서쓰였을가능성도고려된다하지만, 도립한상태가아니면 七 의각서 ( 刻書 ) 가곤란한점에서, 이단계에서는일시적으로도립시켰을가능성이남는다. 이경우제작공법상, 불합리한느낌이있다. 신 6-2 의공정에서刻書했을가능성도생각해볼수있으나, 기면의건조상태관찰과모순된다. 刻書가어느시점에서쓰였는지에대해서는, 다른관찰사례를살펴본후앞으로과제로하고싶다. 160 한일문화재논집 Ⅲ

161 하는편이보다효율적으로개 신일체의유개대부완형태를얻을수있었기때문에있다고생각한다. 北野博司에따르면풍선기법에는 2가지목적이있다고한다. 22) 첫번째는胴頂部가開口되지않은가운데가빈기형을만드는경우로, 대부분은상부를폐쇄한후에동부의일부를잘라내고따로만든구연부등을붙인것이다. 두번째는건조단계를거치지않고는성형이곤란한기형을만드는경우로동부를일단풍선상태로만들어내부의공기압을이용하면서가압변형시켜연속적으로성형하는것이다. 北野는須恵器를예로들어횡병 ( 橫甁 ) 은첫번째목적이주이고두번째요소를가진것, 제병 ( 提甁 ) 과평병 ( 平甁 ) 은두가지목적으로장경병 ( 長頸甁 ) 은후자의목적에의한것으로하였다. 필자는백제의유개대부완의제작기법은상기한것중첫번째목적을가지고있다고생각한다. 또한이기법으로제작하여개 신을포갠상태로소성하여개 신의수축 소성시의일그러짐이거의같게되는것에서다른개체의개 신과는포개지지않으며, 동일개체에서도합인한곳을제외하면개 신이정확히들어맞지않는다. 이는한개체가다른개체와의호환성을갖지않음을의미하며, 풍선기법을사용하여제작된유개대부완은제작단계에서이미 사용하는곳에서개 신의일대일관계 를규정하고있다. 이점에서유개대부완의개 신세트관계의중요성이제작자및주문자, 사용자사이에서공통되는인식이었음을엿볼수있다. 이상의검토에서백제의유개대부완제작의특질은개와신이포개진형태를얻기위해모든제작기술과노력이있었던점에있으며, 제작자및주문자거기에공급처의사용자가이유개대부완형태에의미를갖는공통된인식을가졌음을추정할수있다. 백제사비기의사람들에게유개대부완이라는것은비슷한구경의개와신을적당히포개어사용하는것과같은단순한뚜껑달린식기가아닌, 일대일관계가있는개와신이포개진형태그자체에의미가있으며이형태를얻기위해제작자는특징적인제작기법을사용하여제작하였고, 사용자는그의미를의식하면서식사를했던것으로추정된다. Ⅴ.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전개와특질 1. 백제사비기유개대부완의조형 ( 祖形 ) 22) 北野博司, 須恵器の風船技法, ( 前掲註 16).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61

162 이상과같이백제사비기유개대부완이개 신이하나로포개진형태를얻는것을목적으로제작되었음이판명되었다. 그럼이와같은사비기유개대부완의개 신일체의형태라는것은무엇을의미하는지이점에대해검토하고자한다. 유개대부완의형태에대해중국에서유래한금속기혹은도자기를모방하여제작된것으로보는견해가있다. 김용민은중국제도자기나금동합의영향을받았다고하고직접적으로는고구려토기나청동기와의관계를고려하였다. 23) 김종만은중국제도자기및동제품의영향으로보았다. 24) 山本孝文은백제에서는한성시대에중국제도자기의완형 ( 椀形 ) 용기가출토되며, 웅진시대에는공주무녕왕릉등에서중국제의청동완이출토되고있어, 이들도자기나금속기를모방한초기대부완이늦어도웅진시대에는백제내부에서제작이개시되었음을지적하고이들을모델로했을가능성을고려하였다. 25) 酒井清治는풍선기법을포함한백제사비기의고도 ( 高度 ) 한물레기술과의관련에서, 대부완은종래의백제토기계보위에중국으로부터의물레기술이도입되어만들어진것으로추정하고대부완의기형은금속기모방이아닌중국의기형을지향한것이라고하였다. 26) 이들설에서는유개대부완중신부분의형태를주목하고, 금속기만이아닌도자기를모방했을가능성을언급하고있다. 하지만본고에서분명히한것처럼사비기유개대부완은개와신을포갠형태를중시하고있다. 중국의도자기를보면高臺가붙은완은동시시대에보편적으로존재하나이들은기본적으로무개 ( 無蓋 ) 기종이며, 개를조합한 유개대부완 은거의존재하지않는다. 이점에서사비기유개대부완이중국도자기를모방한것이라고는생각하기어렵다. 필자는백제사비기의유개대부완은중국의도자기가아닌, 금속기완을모방한것이라고생각한다. 사비기유개대부완의조형이된금속기에대해서는, 毛利光俊彦 ( 모리미츠토시히코 ) 의분류인고대부완 ( 高臺付椀 ) A류 27) 및桃崎祐輔 ( 모모사키유우스케 ) 가보고한茨城 ( 이바라키 ) 県かすみがうら ( 카스미가우라 ) 市風返稲荷山고분출토동완 ( 銅鋺 ) 례 28) 를후보로생각하고있다 ( 도면 6의 3-8). 毛利光분류의고대부완 A류는한반도에서도백제공주무녕왕릉에서신이출토되는것외에, 진주수청봉 2호분이나신라경주황룡사서금당에서도출토되고있다 ( 도면 6의 1-2). 23) 金容民, 百済泗沘期土器에대한一考察, ( 前掲註 2). 24) 金鐘萬, 泗沘時代百済土器研究, ( 前掲註 3). 25) 山本孝文, 百済台付椀의受容과変遷의画期, ( 前掲註 5). 26) 酒井清治, 百済泗沘時代台付椀의製作技法 酒井清治 百済泗沘期の風船技法で製作された高台付椀, ( 前掲註 9). 27) 毛利光俊彦, 1978, 古墳出土銅鋺の系譜, 考古学雑誌 第 64 巻第 1 号. 28) 桃崎祐輔, 2000, 銅鋺蓋 銅鋺身 承盤, 風返稲荷山古墳, 霞ヶ浦町教育委員会 日本大学考古学会. 桃崎祐輔, 2006, 金属器模倣須恵器の出現とその意義, 筑波大学先史学 考古学研究 第 17 号. 162 한일문화재논집 Ⅲ

163 도면 6. 한반도 일본 출토의 동완(銅鋺) 1 : 5 이와 같이 개 신을 포갠 합 형태가 되도록 금속기 완을 모방하여 유개대부완이 제작된 것으로 보 인다. 거기에 이들 금속제 완이 주로 불기(佛器)로 사용되었던 점도 중요하다.29) 사비기 백제에서는 왕 실 중앙 귀족층을 중심으로 불교가 융성하였음이 알려져 있다.30) 불기인 금속제 완을 충실히 모방한 유개대부완이 사비도성이나 왕궁리유적 등 백제 사비기 도성 중추시설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점에서, 이들 시설에서의 식사의 장31)도 불교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2. 고대 한일 유개대부완의 공통성 1) 일본의 율령적 토기양식 일본에서는 7세기 후반에 토기양식의 획기가 있다. 그 당시 토기양식에 대해 西弘海(니시 히로미)는 29) 毛利光俊彦, 古墳出土銅鋺の系譜, (前掲註27). 30) 田村圓澄, 1978, 百済仏教史序説, 百済文化と飛鳥文化, 吉川弘文館. 31) 일상적인 식사의 장이 아닌, 예를 들어 백제왕과 신하, 외교사절 등과의 의식 향연의 일환으로서의 식사의 장일 것 이다. 고대 한일 유개대부완의 제작과 전개 - 백제 사비기의 자료를 중심으로 - 163

164 도면 7. 飛鳥시대전반의식기구성 ( 甘樫丘東麓 [ 아마카시노오카토우로쿠 ] 유적 SK184) 도면 8. 飛鳥시대후반의식기구성 ( 大官大寺하층 SK121 출토토기 ) 164 한일문화재논집 Ⅲ

165 금속기지향을기조로하고 크기 ( 法量 ) 의규격성 과이를전제로한 다양한기종분화, 土師器 須恵器의호환성 이특징인것으로보고, 이들은관료제의발전과함께하는대량의관인층 ( 官人層 ) 의출현과그특수한생활형태를전제로이해할수있다고하였다. 거기서이토기양식에 율령적토기양식 이라는명칭을제시하였다. 32) 西口壽生 ( 니시구치토시키 ) 玉田芳英 ( 타마다요시히데 ) 는大官大寺 ( 다이칸다이지 ) 의하층출토토기를재정리하여, 飛鳥편년 Ⅲ단계에서 기종구성 =식기양식 이변화하는것을지적하고, 이를 율령적토기양식 의맹아적 ( 萌芽的 ) 성립이라고평가하였다. 또한 율령적토기양식 의성립에는백제멸망전후의백제유민이가져온문화적영향이고려된다는견해를제시하였다. 33) 필자는식기구성에주목하여 율령적토기양식 성립전후의토기양상을검토하였다. 그결과飛鳥시대전반의식기구성은소형환저 ( 원저 ) 형태의杯를주체로하며 ( 도면 7), 古墳시대이래전통적기종과금속기모방종이병존하는점이특징인점, 이것이飛鳥시대후반 ( 飛鳥 Ⅲ) 이후대부 평저기종주체의식기구성 ( 도면 8) 으로전환함을제시하였다. 여기서이대부 평저기종주체의식기구성은중국 한반도와같은식기구성을채용한것을의미한다고판단하였다. 34) 또한이환저식기에서평저 대부식기로의변화는城ヶ谷和広 ( 죠우가타니카즈히로 ) 나內山敏行 ( 우치야마토시유키 ) 의연구성과 35) 도포함해식기의잡는법이나놓는법, 수 젓가락의사용등식사작법에관한변화에있을가능성이높다고판단된다. 필자는飛鳥시대전반의토기양식은금속기를모방한신기종을채용하면서도식기작법에서는古墳시대이래의식기를손으로잡는전통을보유한채로의수용에그쳤고, 飛鳥시대후반의 율령적토기양식 의성립에의해대부 평저식기를臺의위에놓고젓가락이나숟가락을사용하여식사를입으로옮기는대륙풍의식사작법으로전환하였다고생각하고있다. 36) 2) 고대동아시아식기구성의공통성 32) 西弘海, 1974, 土器様式の成立とその背景, 考古学論考, 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集刊行会. 탈고는 1974 年. 33) 西口壽生 玉田芳英, 2001, 大官大寺下層土坑の出土土器, 奈良文化財研究所紀要 2001, 奈良文化財研究所. 玉田芳英, 2002, 大官大寺下層土坑出土の貯蔵器と煮炊具, 奈良文化財研究所紀要 2002, 奈良文化財研究所. 34) 小田裕樹, 都城の土器と東アジア世界, 同 食器構成からみた 律令的土器様式 の成立, ( 前掲註 1). 35) 城ヶ谷和広, 1984, 七 八世紀における須恵器生産の展開に関する一考察, 考古学雑誌 第 70 巻第 2 号, 日本考古学会. 内山敏行, 1997, 手持食器考, HOMINIDS vol.1. 内山敏行, 2009, 匙 箸の受容と食器の変化, 野州考古学論攷, 中村紀男先生追悼論集刊行会. 36) 小田裕樹, 都城の土器と東アジア世界, ( 前掲註 1).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65

166 도면 9. 백제 신라 일본의 유개대부완 7세기대의 백제 신라 일본의 도성 출토토기를 보면 모두 유개대부완 주체의 식기구성을 취하게 되 는 점에서 공통된다(도면 9). 이는 금속제 완을 모방한 유개대부완을 대의 위에 놓고 수 젓가락을 사 용하는 공통된 식사작법이 중국(수 당)에서 각국으로 전해져 수용되어 간 것, 각국의 지배자층과 그 집주(集住)지역인 도성을 중심으로 먼저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일본 백제 신라에서 공통되는 유개대부완 주체의 토기양식이 성립하는 배경에는 중국식 예제(禮制)의 정비나, 그 일환으로서의 향연 의식의 장에서의 식사에 관련한 공통된 예법의 수용이 관 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37) 이 점은 각국의 독자성에 대해 검토한 후에 다시 고찰한다. 3. 고대 한일 유개대부완의 독자성 백제 신라 일본의 유개대부완을 주체로 하는 식기구성의 공통성을 지적하였으나, 그 한편으로 독 37) 山本孝文, 7世紀における土器様式の転換と東アジア, (前掲註5). 小田裕樹, 都城の土器と東アジア世界, 同 食器構成からみた 律令的土器様式 の成立, (前掲註1). 166 한일문화재논집 Ⅲ

167 자성도보인다. 이하각국의유개대부완을위시한식기의독자성에대해검토하겠다. 1) 백제의식기에서보이는독자성본고에서밝혀온바와같이, 백제에서는제작에서사용단계에이르기까지유개대부완의개 신일체가포개진형태를중시하는점이특징이다. 일본 신라는개 신을각각따로제작하고구경이맞는사이즈의것을적절히조합하여사용하고있는것에반해, 백제에서는일체성형에의해유개대부완을제작하고사용하였다. 이는불기인금속제완을모방한토기로신라 일본과비교해보다충실하게금속기를모방한것으로비정할수있다. 그외백제사비기의토기에는鍔付土器등신라 일본에는없는식기가존재하는데, 이는고구려의영향을받은것이라는설도있다. 38) 2) 신라의식기에서보이는독자성신라에서는식기구성가운데큰위치를점하는기면을인화문으로장식한인화문토기가특징으로일컬어진다. 인화문토기는신라의지배자층 상위층이거주하는왕경을중심으로사용되었던토기였다고평가된다. 39) 이인화문수법에의한기면장식은중국등의바깥에서전해진것이아닌신라의도질토기공인이자발적으로사용하게된기법으로판단되고있다. 40) 이에반해중국江西省의洪州窯제품을모델로한다는설 41) 도있으나, 인화문에의한기면장식을베푼점은백제 일본에는없는신라독자의표현으로비정된다. 인화문이베풀어진유개대부완의형태그자체는금속제완의모방에따른것으로백제 일본과공통된다. 그기면을인화문수법으로장식하는점이신라의독자성이발휘된것으로판단된다. 그외유개대부완의개의꼭지가원환상 ( 圓環狀 ) 꼭지나륜상 ( 輪狀 ) 꼭지인점도특징적이다. 신라토기를보면壺蓋를중심으로일본과같은보주형의꼭지를가진개도존재하지만, 圓環狀 輪狀의꼭지가주체이다. 7세기이전신라의주요기종인고배의개를보면圓環狀꼭지가주이며, 필자는이와같은신라도질토기전통이새로운식기구성의주체가된유개대부완의꼭지형태에영향을주었을가능성을지적하고싶다. 38) 金容民, 百済泗沘期土器에대한一考察, ( 前掲註 2). 土田純子, 2009, 泗沘様式土器에서보이는高句麗土器의影響에대한검토, 韓国考古学報 第 72 輯, 韓国考古学会. 39) 重見泰, 2012, 新羅土器からみた日本古代の国家形成, 学生社. 40) 宮川禎一, 1998, 文様からみた新羅印花文陶器の変遷, 考古学と歴史学, 高井悌三郎先生喜寿記念事業会. 41) 山本孝文, 2007, 印花文土器의発生과系譜에대한試論, 嶺南考古学 41, 嶺南考古学会.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67

168 3) 일본의식기에서보이는독자성일본에서는土師器와須恵器가병존하는식기구성이특징이다. 백제 신라와함께토제의식기는須恵器에대응하는도질토기 ( 경질토기 ) 만이다. 도질토기는식기 저장기, 土師器에대응하는연질토기는煮炊具로사용된다고하는것처럼, 백제 신라에서는기본적으로토기의기능과재질이각각대응된다. 이와비교할때土師器 須恵器의식기가병존하는일본의식기구성은독자적인것이다. 또한土師器는일본독자의식기로, 暗文이나주걱닦기 ( ヘラミガキ ) 에의한기면장식방법도당해기의백제 신라에서는많이쓰이지않는일본의특징적인방법으로생각된다. 이들暗文이나주걱닦기에의한기면장식은금속기의질감을표현하기위해채용되었다고판단되고있다. 42) 또한重見泰 ( 시게미야스시 ) 도신라토기와비교하면서, 일본의식기에서土師器의존재가특징적인것으로평가하고須恵器를묘의부장품이란의식으로인해식기류에서는쇠퇴경향과비슷한상황을보인다고평가하였다. 43) 土師器를일본토기의특징으로보는점에대해서는필자도重見와같은의견이나, 須恵器의자리매김에대해서는다른견해를갖는다. 飛鳥지역의飛鳥시대전반 ( 飛鳥 Ⅰ~ 飛鳥 Ⅱ 44) 의토기를보면, 土師器杯 C와須恵器杯 G 杯 H가주요기종이다. 飛鳥 Ⅰ에서飛鳥 Ⅱ로의각기종의변천을보면, 土師器杯 C는크기가축소되고暗文이나주걱닦기가간략화되는경향이있으며, 須恵器에서도杯 G 杯 H가조정의생략과함께크기가축소되는경향이있는등, 三者의크기축소경향과조정의간략화가연동되어있다. 그리고飛鳥 Ⅱ 단계에서는土師器杯 CⅢ, 須恵器杯 G 杯 H의소형원저 ( 환저 ) 杯가거의같은용량이되는데, 45) 이는형태의차이가있음에도용량이라는점에서 土師器 須恵器의호환성 46) 을달성한것으로평가할수있다. 이러한사실에서飛鳥시대전반의須恵器의쇠퇴라는重見의견해에는동의할수없으며, 이시기토기양식은土師器 須恵器양자가포함된형태로구성되어있는점에특징이있는것으로평가하고싶다. 필자는飛鳥시대전반의토기양식은 須恵器 土師器에의한다양한소형원저배를주체로, 서로비슷한형태 ( 相似形 ) 를취하는법량 ( 크기 ) 분화한대형 중형의土師器원저배가추가되는식기구성 이 42) 桜岡正信 神谷佳明, 1998, 金属器模倣と金属器指向, 研究紀要 15, 財団法人群馬県埋蔵文化財調査事業団. 43) 重見泰, 2008, 新羅土器形式分類の検討, 考古学論攷 第 31 冊, 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 44) 飛鳥시대의토기편년에대해서는西弘海의飛鳥편년 ( 西弘海, 1978, 土器の時期区分と型式変化, 飛鳥 藤原宮発掘調査報告 Ⅱ,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에따른다. 또한필자의飛鳥편년의이해에대해서는다른논고를참조하고자한다 ( 小田裕樹, 2014, 土器群の位置づけについて, 奈良山発掘調査報告 Ⅱ, 奈良文化財研究所.). 45) 西口壽生, 1995, 5 小結, 飛鳥 藤原宮発掘調査報告 Ⅳ,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거기에須恵器杯의蓋도거의같은용량이다 ( 小田裕樹, 食器構成からみた 律令的土器様式 の成立, ( 前掲註 1)). 46) 西弘海, 土器様式の成立とその背景, ( 前掲註 32). 168 한일문화재논집 Ⅲ

169 특징이라고판단한다. 그외일본의식기는대부식기가주체가되긴하지만, 백제 신라와비교해평저식기가점하는비율이높고, 도성이외의지역에서는대부식기보다평저식기가주체인경우도많다. 이배경에는식기를손으로잡는일본의전통적인식기작법이영향을미쳤을것으로판단되고있다. 이점은일본국내자료의분석을실시하여보다깊게검토하고싶다. 4) 시각적요소의독자성이상과같이백제 신라 일본에서는금속제완형태를모방한유개대부완을토제식기로채용한다는공통점을가지면서도독자성을보인다. 이는 금속기를보다충실히모방한백제, 인화문으로기면장식을베푼신라, 土師器와須恵器를섞은일본 으로정리할수있다. 그리고이들은기본적으로 겉보기, 시각적요소를중심으로독자적인특징이나타나고있음을알수있다. 식기의시각적요소에대해각국의독자성이반영되어있는점에서는, 각국이공통되어유개대부완이라는식기형태를채용하면서도식기그자체의재질이나장식에대해서는범동아시아적인공통된규범같은것이아닌, 각국독자의논리에서식기에대한시각적요소를선택 부여하였다고판단된다. 이와같은식기의시각적요소에있어독자성이표출되는배경으로, 필자는 7세기중반부터후반에걸쳐일본고대율령국가의형성과정에서보이는예식 복장 ( 服裝 ) 면에서중국적인의례 형식을수용한다는일련의당풍화 ( 唐風化 ) 정책 47) 의문맥안에서파악이가능하다고생각한다. 필자는특히의복제 ( 衣服制 ) 의전개와그특질을밝힌武田佐知子 ( 타케다사치코 ) 의연구에주목한다. 武田는 服制와행동양식으로의예법은예적질서의구체적 가시적표현형태로서불가분의관계로연결되어있다 고하고, 개개국가의복제에가시적으로표상되는것이야말로, 각국독자의국왕을중심으로하는신분질서 =예적질서 로이해하고, 東夷내부의諸國에있어서服制는지역적공통성에필연적으로초래되는유동성 ( 類同性 ) 임에도불구하고, 이웃한諸國혹은중국에대해서도개개의예적질서가獨立不羈 ( 독립되어얽메이지않는 ) 의것임을현저하게나타내기위해구성된, 독자성을주장할만한것으로존재 한다고하였다. 48) 47) 西本昌弘, 1998, 元日朝賀の成立と孝徳朝難波宮, 古代中世の社会と国家, 大阪大学文学部日本史研究室. 2008, 遣唐使と古代日本の対外政策, 吉川弘, 文館. 48) 武田佐知子, 1984, 古代国家の形成と身分標識, 古代国家の形成と衣服制, 吉川弘, 文館. 괄호내의인용은같은논문 240~243 쪽.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69

170 식기양식의변화는이와같은의복제의획기 전개와궤를같이하는것으로보이며, 그배경에대해서도같은맥락으로이해하고싶다. 즉각국도성출토토기에서보이는시각적요소의독자성은, 수 당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諸國이, 왕 신하의관계를시각적으로표시하는방식을수용한것과관련되며, 식기의형태나식기구성에대해서도각국의전통을계승하면서독자의신분질서 신분표식의체계를표시하기에적합한요소가선택 부여된결과인것으로판단된다. 그래서국내에있어서는지배자계층내부의서열화등독자의신분질서를표현하는기물로서체계화되어간것으로추정된다. 4. 고대동아시아에서의 율령적토기양식 백제 신라 일본의도성출토토기를보면, 7세기대에가까운시기에각국이유개대부완을주체로하는식기구성으로전환한다. 이는중국 ( 수 당 ) 의예법 식사양식의영향을받은것으로각국이금속기에서유래한대부식기를臺위에놓고, 수 젓가락을사용하는공통된식사작법을수용한것을반영하는것으로판단된다. 하지만이식기의외형적특징에는각국의개성이나타나있다. 이는공통의식사양식 식사작법이라는틀안에서사용의장에서의시각적인계층성의표시방법이나조달하는생산 수급시스템, 식기에대한전통적인의식등, 국내의사정에따라취사선택이이루어진결과독자성이발휘된것으로판단된다. 일본에서의 율령적토기양식 성립의배경에대해서, 西口壽生 玉田芳英는백제에서의영향을고려하였다. 49) 율령적토기양식 의맹아적성립기에해당하는飛鳥 Ⅲ의시기 (660 년대후반 ~670 년대 ) 에는, 고대산성의조영이나국가체제의정비에백제계도래인에의한영향이컸음이밝혀져있다. 50) 이러한당해기의시대배경을근거로했을때, 토기양식변화의배경에백제의영향을상정하는것이가능하다. 하지만본고에서본것처럼, 유개대부완의제작기법이라는점에서는, 백제와일본에서는대부완 ( 杯 B) 을만드는법이크게달라직접적인영향은인정하기어렵다. 오히려개 신을따로제작하는점에서는신라와일본이비슷하다고평가할수있다. 또한토기의규격화 크기분화나供膳具를중심으로하는다양한기종분화라는특징은, 백제만이아닌신라에서도확인할수있어이것들은수 당의식사양식이주변국에퍼지는와중에같은형태로영향을받은것으로파악된다. 또한일본의유개대부완 ( 杯 B) 의제작기법에대해飛鳥 Ⅲ의내면에턱을가진杯蓋의제작이, 앞선양식의須恵器杯 G 蓋의만드는 49) 西口壽生 玉田芳英, 大官大寺下層土坑の出土土器, ( 前掲註 33). 50) 森公章, 1999, 白村江 以後 講談社. 森公章, 2002, 倭国から日本へ, 日本の時代史 3 倭国から日本へ, 吉川弘文館. 170 한일문화재논집 Ⅲ

171 법을답습한것으로보이는예가존재하는점에서, 51) 율령적토기양식 성립직후의杯 B가, 飛鳥시대전반의전통적인제작기법의연장으로서제작된것으로파악할수있다. 율령적토기양식 의성립에있어, 중국 ( 수 당 ) 의예법이나식사양식이라는이념이나유개대부완의제작에이르는기술을어떤식으로도입하였는지는, 현시점에서는판단하기어렵다. 필자는 율령적토기양식 의성립이라는것은, 수 당에서유래한식사양식의수용을반영하여, 중국 한반도의영향을받은대부 평저식기주체의식기구성으로변화한것으로파악하고있다. 52) 본고의검토를근거로했을때, 동아시아안에서의 율령적토기양식 은 일본적신분질서를독자적으로표현하는 의도도포함되어있었던것으로평가할수있으며, 이와같은의도아래, 앞선양식에서이어진기종이나금속기를모방한새로운기종을재편성한토기양식이었다고자리매김할수있다. 또한토기양식의전환은당해기의토기생산체제 ( 土師器 須恵器모두 ) 에규정된것으로, 실제로국내에서식기를조달하는체제를어떤식으로정비하였는가하는시점에서도, 당해기의생산 유통체제를검토할필요가있다. 또한이문제는일본고대율령국가의형성과정에있어서의의식 예법의수용 정비를위시한다양한요소와연동하는것으로, 토기연구에만머물지않고보다넓은시야를가지고연구를진행할필요가있다. Ⅵ. 결론 본고에서는이하의것을분명히하였다. 1 백제사비기의유개대부완을관찰하여제작과정의복원을실시하여, 풍선기법에의한일체성형에의해제작되었다는설이타당하다고판단하였다. 2 백제의유개대부완은제작에서사용단계에이르기까지, 개 신일체의포개진형태 에의미를갖고중요시되었음을밝혀냈다. 또한 개 신일체의유개대부완 은합형태를띠는금속제의완을모방한것으로판단하였다. 3 7세기대일본 백제 신라의도성출토토기를볼때, 유개대부완을주체로하는식기구성으로전환하는점이공통된다. 한편각국의유개대부완에는 금속기를보다충실히모방한백제, 인화문으로기면장식을베푼신라, 土師器와須恵器를섞은일본 이라는독자성도보인다. 51) 小田裕樹, 2014, 杯蓋の分類, 同 土器群の位置づけについて, 奈良山発掘調査報告 Ⅱ, 奈良文化財研究所. 52) 小田裕樹, 都城の土器と東アジア世界, 食器構成からみた 律令的土器様式 の成立, ( 前掲註 1).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71

172 4 유개대부완에서보이는독자성은, 시각적요소와관련된부분에나타난다. 이는공통의식사양식 식사작법을수용하면서도각국독자의논리에의해식기의형태나식기구성등의제요소가선택 부여되었음이고려된다. 고대동아시아의토기, 특히유개대부완의전개에는수 당을중심으로하는세계안에서일본 백제 신라의각국이어떻게독자성 자립성을가지면서편입되어가는지, 그과정이반영되어있은것으로판단된다. 각국토기에서보이는공통성과독자성을찾아내고, 그배경을읽어들이는것이야말로, 고대동아시아의국제관계및국가의아이덴티티를살피는데있어중요하다고생각된다. 앞으로도이문제의식아래에서연구를진행해나가고싶다. 백제 신라에있어서대부완의수용이점진적이었는지, 일본과같이급격했는지는현재자료상황에서는판단하기어렵다. 앞으로한국에서도일괄자료에바탕한편년과정량적분석에의해, 토기양식전환의보다상세한프로세스가해명되길기대한다. 謝辭 ( 감사의말 ) 본고를작성하면서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국립부여박물관,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에서자료조사의편의를봐주었다. 또한본연구를진행하면서박성진씨를위시하여, 대한민국국립문화재연구소의많은분들의협력을얻었다. 깊이감사드린다. 또한이하의여러분에게서협력과조언을얻었다. 마음에새기며감사의말씀을드린다. 青木敬諫早直人이상준우재병김희중庄田慎矢崔文禎진성준寺井誠馬場基박순발廣瀬覚황인호若杉智宏이럼에도불구하고, 남아있는많은잘못 결점은모두필자의책임임을명기해둔다. 또한본연구성과의일부는과학연구비若手 ( 젊은이 ) 연구 (B) 古代東アジアにおける食器構成と食事作法の変化に関する比較硏究 ( 과제번호 ) 에근거하고있다. 도면출전 172 한일문화재논집 Ⅲ

173 도면 1. 각주 9의문헌을근거로, 필자가관찰한것을토대로개변하여작성. 도면 2. 필자촬영. 도면 3. 각주 16의문헌에서전제. 도면 4. 각주 17의문헌에서전제. 도면 5. 필자작성. 도면 : 桃崎祐輔, 2006, 金属器模倣須恵器の出現とその意義, 筑波大学先史学 考古学研究 第 17 号. 3~7 : 각주 29 문헌 8 : 각주 28 문헌에서전제. 도면 7 8. 각주 1 문헌에서전제도면 9. 도면 1 8.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황남동신라건물지, 2003 년에서전제. 고대한일유개대부완의제작과전개 - 백제사비기의자료를중심으로 - 173

174 박성진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Ⅰ. 머리말 Ⅱ. 개성고려궁성공동발굴조사와용두기와출토현황 Ⅲ. 국내외출토사례의형식분류와시기적변화 Ⅳ. 맺음말 요약문 용두 ( 龍頭 ) 는장식기와의한종류로단어의의미그대로 용의머리 를형상화한것으로장식기와의출토사례가많지않아아직정확한사용개시시점을특정할수없었다. 그러나최근고려정궁 ( 正宮 ) 에대한발굴조사를비롯해과거발굴조사가이루어졌던평양대화궁, 파주혜음원지, 진도용장성에서용두가출토되어유물에대한대략적인윤곽이드러나고있다. 고려시대용두의등장은기존의장식기와인 치미 -귀면 에서 치문 -용두-잡상 으로의변화를의미한다. 본논문에서는개성고려궁성, 평양대화궁, 파주혜음원지출토용두를대상으로각부분의속성을검토, 큰틀에서의형식을분류하고개성성균관소재傳고려궁성출토석제용두, 傳수창궁출토석제용두, 원상도출토석제, 장식기와용두등과의비교를통해시기적특징을유추하였다. 주제어 : 용두, 치미, 잡상, 장식기와, 고려궁성, 대화궁, 파주혜음원지, 진도용장성 174 한일문화재논집 Ⅲ

175 개성 고려궁성 출토 龍頭瓦에 대한 검토 박 성 진*1) Ⅰ. 머리말 용두(龍頭)는 전통건축물의 상부에 평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쓰임새의 특수, 장식기와 등과 함께 올 라가는 장식기와의 한 종류로 단어의 의미 그대로 용의 머리 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용두는 통상 고려초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장식기와의 출토사례가 많지 않아 아직 정확한 사용 개시 시점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대 삼국시대의 장식기와가 치미-귀면 으 로 대표되는 반면 중세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는 치문(鴟吻)-용두(龍頭)-잡상(雜像) 등으로 다양해 졌 으며 이러한 변화는 근세 조선시대로 이어져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 등으로 정립되게 되 어 현재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고대부터 현 시점까지의 장식기와가 변화해가는 흐름은 대부분의 관 련 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라 생각되며 매우 일반적인 경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본 논문 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고려시대 장식기와 중 용두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장 식기와와 관련된 연구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간헐적으로라도 진행돼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치미와 잡상, 귀면와 등에만 집중되어있었던 것이 현실이며 용두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 가 없는 상태다. 이러한 장식기와 연구의 편향성은 연구자들의 취향이라기 보다 용두라는 연구대상이 매우 드물게 출토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최근 북측 황해북도 개성에 자리하는 고려시대 정궁(正宮)유적(개성 고려궁성=만월대)에 대 한 남북공동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평양 대화궁, 파주 혜음원지, 진도 용장성 등 이미 이전부터 조사가 진행되었던 고려시대 왕실과 관련된 일련의 유적에서 장식기와 용두가 출토됨에 따라 완전하지는 않지 만 고려시대 장식기와 용두에 대해 대략적인 윤곽을 잡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는 고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우리문화의 중간자리 역할을 하는 시기로 인식하고 * 韓國 國立文化財硏究所 考古硏究室 개성 고려궁성 출토 龍頭瓦에 대한 검토 175

176 있으나실제고려시대의물질문화에대해서는그다지많이알려져있지않은것이현실이다. 특히장식기와는출토수량이매우제한적인관계로연구를진행하는데도많은어려움이있다. 하지만고대의장식기와에는존재하지않았던 치문 -용두- 잡상 등이 10~12 세기이후동아시아대륙과반도의여러나라들에서공통되게사용되어지는현상과그과정을분명하게확인해야할필요가있다. 그이유는현재우리가장식기와에서 전통 으로인식하는기와의종류와형태가시작된시점, 즉지금고궁에서볼수있는장식기와의 원형 이고려시대특정시기치미가사라지고사용되었던 치문 -용두- 잡상 이기때문이다. 본논문은이러한문제의식을바탕으로향후반도에서의장식기와출현과변천, 동아시아차원의장식기와양식의교류등을연구하기위해개성고려궁성출토용두를중심으로동시기주요유적출토용두를비교검토하고자한다. Ⅱ. 개성고려궁성공동발굴조사와용두기와출토현황 1. 개성고려궁성공동발굴조사현황 북측의국보유적제122 호로지정되어있는개성고려궁성 ( 통칭만월대 ) 은고려왕조의정궁 ( 正宮 ) 으로 919 년 ( 태조 2년 ) 건립된이후강도 ( 江都 ) 시기를제외한약 440년간고려왕조의중심로자리하였다. 궁성의규모는둘레 2,170m 넓이 25만m2로각성벽의길이는북벽220m 남벽450m 동벽755m 서벽 745m 로남쪽이넓은형태이며, 동-서 -남 -북으로동화문 ( 東華門 )-서화문 ( 西華門 )-승평문( 昇平門 )- 현무문 ( 玄武門 ) 을통하여황성 ( 皇城 ) 과연결되어있다. 하지만아직까지그경계를확정할수있는명확한고고학적자료는남측에알려지지않은상태이다. 고려궁성에대한고고학적조사는공개된자료등으로유추해볼때일제강점기부터시작된것으로짐작되지만현재와같은전면적인조사는이루어지지않았던것으로추정된다. 고려궁성에대한고고학적조사는해방이후북측에의해본격적으로진행되어졌다. 필자가파악한고려궁성에대한북측의최초발굴조사는 1954 년부터제1정전인회경전 ( 會慶殿 ) 전문 ( 前門 ) 주변에대해이루어진것으로 중심건축군 주변에대한정비작업과정에서진행된것으로보인다. 1) 이조사를시작으로이후의고고 1) 1909년순종의남부순행과 1936년 5월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학생들의기념사진에서확인되는회경전문남쪽의소위 만월대계단 으로불리는 33층인 4개의대형계단은고려왕조의멸망이후관리되지않은상태로계단돌이상당부분빠지거나밀려나온것을확인할수있다. 현재의회경전문계단은이후정비된것으로추정된다. 176 한일문화재논집 Ⅲ

177 학적 조사는 조선고고연구 등 북측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려궁성에 대한 북측의 발굴조사 현황은 아래와 같다. 표 1. 북측의 고려궁성 조사현황 기간 내용 성과 제1정전인 회경전 등 중심건축군 발굴조사2) 고려궁성 중심구역에 대한 최초의 공식 조사 보고로 고려궁성 배치와 관련된 기본자료 제공 1985 궁성 동지(東池) 및 배수로 발굴조사3) 청자를 비롯한 막새, 암 수키와 명문화 등 확인 1994 중심건축군 북쪽에 위치하는 원덕전 발굴조사4) 건물배치 확인 및 유물 다량 확인 1999 궁성 동지(東池) 발굴조사5) 연못 규모 확인 및 못을 둘러싼 인공둑 토층조사 1973~74 2)3)4)5) 고려궁성에 대한 최초의 조사 기록은 1954년 북측에 의해 회경전(會慶殿) 전문(前門) 주변에 대해 이루어진 발굴조사6)로 별도의 조사보고 없이 책자에 간략하게 소개된 것으로 볼 때 해방 이후 중심 건축군 주변에 대한 정비작업 과정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7) 이후의 발굴조사는 모두 북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조선고고연구 등에서 조사개요를 다루고 있다. 1973~1974년 북측은 궁성에 대해 대규모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제1정전인 회경전이 포함된 중심 건축군 을 비롯하여 서북건축군 의 배치와 대략적인 지형을 표현하였다. 남북 모두 궁성과 관련된 이후 의 연구는 대부분 이 도면을 기본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수의 발굴조사가 이 도면을 기준으로 이 루어졌다. 다만 이 조사와 관련되어 공개된 자료는 중심건축군 과 서북건축군 일부 건물에 한정되어 있어 앞으로의 보다 심화된 연구를 위해 조사 당시에 수집된 세부적 자료의 공개가 필요할 것이다. 이후로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1985년 궁성 동지(東池)의 못과 배수로에 대한 조사이다. 조사된 유구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배수로와 암거식배수로이며 궁성의 동쪽 배수로에 해당된다. 이와 동일한 시설물 2)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0, 외국문종합출판사, ) 개성발굴조, 1986, 개성 만월대의 못과 지하하수도 시설물에 대한 조사발굴 보고, 조선고고연구 제3호. 4) 한인호, 1994, 만월대 중심건축군의 원덕전터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제92호. 5) 리창언, 1999, 만월대의 동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제112호. 6)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선기술발전사 3 고려편, p89. 만월대의 회경전문터에서 1954년에 기둥밑장식판이 발굴되였다. 이 장식판은 발해의 것과 비슷한데 4개가 무어져 기둥 밑을 감싸 장식하게 되었는데 둘레에는 풍려한 련꽃잎을 돋우어 장식하였다. 7) 1909년 순종의 남부순행과 1936년 5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기념사진에서 확인되는 회경전문 남쪽의 소위 만월대 계단 으로 불리는 33층인 4개의 대형계단은 고려왕조의 멸망 이후 관리되지 않은 상태로 계단돌이 상 당부분 빠지거나 밀려나온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현재의 회경전문 계단은 이후 정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 고려궁성 출토 龍頭瓦에 대한 검토 177

178 이 궁성의 서쪽에서도 확인되었으며, 청자를 비롯한 막새, 암 수기와 명문와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1994년 회경전-장화전(長和殿)의 북쪽으로 위치하는 원덕전(元德殿)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 다. 원덕전은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진 독립된 건축군으로 본전(本殿)과 후전(後殿)으로 이루어졌으며 남쪽 회랑에는 출입시설의 기초가 위치한다. 발굴조사를 통해 원덕전터의 초석과 기단석을 확인하였 으며 북쪽의 공터를 발굴조사하여 후전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또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막새, 벽전, 바 닥전, 못, 구슬 자기편 등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1999년 궁성의 동지(東池)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동지는 회경전의 동쪽축대에서 동쪽으로 약 130m가량 떨어진 곳에 남북으로 긴 형태로 자리한다. 못의 크기는 남북 270m 동서 190m로 주 위로 둑을 쌓아 조성하였다. 인공적인 둑을 조성한 것으로 볼 때 판축기법 등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 다. 둑의 토층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둑을 절개하여 토층조사를 실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측에서 발간된 자료로 볼 때 동지에 대한 조사를 마지막으로 궁성에 대 한 공식적인 조사는 이루어 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 2. 고려궁성 조사현황(2007~2014) 차수 기간 성격 내용 성과 1차 ~7. 시굴 서부건축군 시굴조사 건물지 40여동 확인 축대 및 배수로 등 확인 2차 ~11. 발굴 제1건물지군 발굴조사 건물지 5동 발굴 3차 ~12. 발굴 제2 제3건물지군 발굴조사 건물지 10동 발굴 4차 ~5. 발굴 추정건덕전구역 발굴조사 건물지 5동 발굴 복구 조사 ~12. 복구 서부건축군 복구조사 - 6차 ~8. 발굴 제5건물지군 발굴조사 대형계단 및 배수로 발굴 7차 ~11. 발굴 제6 7 8건물지군 발굴조사 건물지 20여동 발굴 이후 2007년 5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60일간 궁성 중심건축군의 서쪽 30,000 에 대한 시굴조 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2015년도 까지 총 7차례의 고고학적 조사가 이 루어 졌다. 2007년 5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이루어진 1차 조사는 궁성의 중심인 회경전(會慶殿)의 서편구역 30,000 에 대해 시굴조사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서부건축군 전체에 대한 유구의 유무를 확인하였던 1차 조사는 지금까지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던 궁성의 서쪽지역에 대한 많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 였다. 조사결과 서부건축군 의 건물은 위치한 지점에 따라 중심축선이 서로 다른 상태로 확인되며 조 사구역의 북쪽으로는 대형 건물지가 위치하는 반면 남쪽으로는 소형 건물지가 조밀하게 위치하고 있 178 한일문화재논집 Ⅲ

179 음을확인하였다. 이러한차이는건물혹은건물군의성격과용도에따른공간의분리때문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특히 서부건축군 의가장서쪽에위치하는 17호건물지에서는건물내부에 5개의예단 ( 禮壇 ) 기초시설이확인되어기록상 5대왕의초상화를봉안하였다는경령전 ( 景靈殿 ) 으로추정된다. 또한평면형태가 亞 자형인건물의본채와좌우곁채로이루어진구조적특징을가지는건물을확인하였는데본채와곁채간의주칸거리, 특히본채와곁채의접속부분이현저한차이를가지고있음이확인되었다 년 9월 7일부터 11월 16일까지이루어진 2차조사는 서부건축군 의북동쪽 1건물군을대상으로이루어졌다. 1건물군은시굴조사당시확인된건물지중가장규모가큰 1-1 호건물지를중심으로하는동서 47m, 남북 90m 규모의건물지군이다. 전체 7개의건물로일곽 ( 一廓 ) 의건물지군을이루고있으며동 서 남쪽의세방향으로회랑식건물을배치하여 1-1 호건물지를둘러싼형태이다. 북쪽은 서북건축군 축대를경계로구분되는데건물지군의북쪽과남쪽으로는계단과문지를두어주변건물지군으로의이동이원활하도록하였다.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이루어진 3차조사는 서부건축군 의북쪽중앙에위치하는 2 3 건물군에대해이루어졌다. 2건물군은전체규모동서 32m, 남북 37m 로 2-1 호건물지를중심으로하는 3동의건물이동 서 남쪽으로둘러싸고있는일곽의건물지군이다. 건물의배치상태는 1건물군과유사하며 2호축대와 2-4 호건물지에의해상 하단으로구분된다. 건물지군의규모는 1건물군에비해작은편이다. 건물군의중심에위치하는 2-1 호건물지는정면 5칸, 측면 3칸으로건물내부의초석과여기에연결된인방석및건물지뒷편으로연결되는문지등으로볼때내부에벽이설치된특수한용도의건물로추정된다 년 3월 23일부터 5월 18일까지이루어진 4차조사는 1차조사당시조사지역의중앙에서확인된바있는건물지군과 건물군전반에걸쳐이루어졌다. 조사는 서부건축군 의중심건물지에대한평면구조확인과 건물군에대한토층조사를중심으로이루어졌다. 서부건축군 중심건물지군은현재파괴가심하게이루어져초석과적심은확인되지않으며기단일부만이확인되는데중심건물주변으로회랑이둘러져있는것을확인할수있었다 건물군에대한토층조사는 서부건축군 의조성방법과현재까지의변형과정을확인, 유추 복원하기위한것으로개별건물지군에동-서, 남-북방향의탐색갱을원지반까지설치하여각건물지군이자리하고있는자연구릉의본래형태를확인하였다. 이러한조사를통해궁성축조이전의지형에대한정보를얻을수있었으며, 현재건물지군의아래에위치하는선대유구의흔적을밝혀조사지역이궁성내부에서오랜기간동안지속적으로사용되어졌음을확인할수있었다.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179

180 도면 1. 개성고려궁성발굴조사현황도 ( ) 2011 년 11월 24일부터 12월 20일까지이루어진안전진단과긴급복구조사는 2011 년여름폭우로인해궁성유적의일부가파괴될위험에노출됨에따라궁성의중심건축군과서부건축군에대한긴급복구의필요에의해추진되었다. 따라서조사는폭우로인해파괴될위험성이높은 1건물지군남쪽으로자리한석축과건물지등의유구에대한보존조치를중심으로이루어져석축이탈예방과주변유구의유실여부에대한긴급조사가이루어졌다. 조사결과일부석축의이탈예상구간이확인되었으나석축서쪽으로자리한 4건물지군내건물지 8개소에서는폭우로인한피해상황은확인되지않았으며, 막새를비롯한기와류와청자 180 한일문화재논집 Ⅲ

181 등약 1,500 여점의유물이수습되었다. 또한긴급조사기간중 1~4 차발굴조사구간에대한복토등유적의추가적인보존조치가이루어졌다 년 7월 22일부터 8월 16일까지이루어진 6차조사는고려궁성 4건물지남쪽의중심건축군과서부건축군연결지점인 5건물군에대해이루어졌다. 조사결과대형계단 2개소와이들계단과연결되는문지가확인되었다. 대형계단은각각 13.4m 10.7m, 5.8m 12.4m 의규모이며문지는전면 3칸 ( 중앙칸 4.3m, 양측칸각각 3.6m) 측면 2칸 (2.5m) 으로아래로는대형계단과연결되는 5m 2.3m 규모의가구식계단이확인되었다. 또한대형계단의주변으로남북방향의암거식배수로를비롯하여총 4기의배수로가확인되는등고려궁성제1정전인회경전이자리하는중심건축군과제2정전인건덕전이자리하는서부건축군간이동및서부건축군내배수체계를규명할수있는기초자료를확보할수있었다 년 6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이루어진 7차조사는고려궁성 건물군남쪽지역 건물군 7,000 m2에대해이루어졌다. 조사결과 2007 년시굴조사당시확인된바있는비좌를비롯하여경령전일곽과통행하기위한대형계단및이와연결된회랑, 2014 년에조사된대형계단의서쪽으로이어진보도와문지, 남북방향으로조성된건물지와이를둘러싼대형회랑, 중심건축군장화전의서쪽축대, 우물등고려궁성을구성하는다양한유구가확인되었다. 2. 개성고려궁성용두기와출토현황 공동발굴조사이전까지보고되었던개성고려궁성출토용두기와는일제강점기에출토되어보고된것이전부이다. 이유물의경우사진자료만이전하고있는데용두의속성을확인할수있는측면이아닌입을벌린모습만을강조하여촬영한것으로거의완형에가까운유물이지만자료로의가치는그다지높지않다. 다만, 용두의좌측일부인눈과귀및정면의이빨과입술, 혀, 코등의표현이확인되고있어이후자세한비교를필요로한다. 이후 2007 년부터진행된공동발굴조사과정에서용두편이 다수출토되었으나완형은한점도확인되지않았다. 따라서 사진 1. 개성고려궁성출토용두 ( 일제강점기 ) 본고에서는완형은아니지만용두기와의특성을확인할수있는출토유물을소개하고그특징을검토 하도록한다.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181

182 2007 년 5월부터 7월까지진행된시굴조사과정에서다수의용두편이확인되었다. 8) 그중잔존상태가그나마양호하여본연구의대상이되는것은 1점으로개성고려궁성서부건축군 S2E2 그리드의시굴갱에서확인되었다. 이지역은 2015 년현재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않은지역으로금년이후발굴조사과정에서유구의성격이명확하게확인될것으로판단된다. 본고에서는이유물을편의상 궁성-1 로이름붙이기로한다. 궁성-1 은약 1/3 가량이남아있는상태로입을중심으로턱부분과그아래가없어진상태이다. 눈, 코, 구랫나루, 눈썹이남아있으며색조는회색이다. 눈은반구형으로정면을향하여돌출되어있으며, 그위의눈썹은곡선으로표현되어있다. 코는중심의콧대를기준으로콧망울이넓은편이다. 윗입술은들려있으며안쪽으로는입천장이표현되어있다. 눈의뒤로는구랫나루가있으나둥글게만표현되었을뿐수염에대한세부적인묘사는되어있지않다. 궁성-1 외에도 2007 년이후진행된고려궁성공동발굴조사과정에서몇개의용두가확인되었으나관련내용이수록된보고서가발간되지않은관계로본고에서는다루지않도록한다. 9) 도면 2. 개성고려궁성 S2E2 그리드 Tr. 및유구평면도 8)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開城高麗宮城 - 試掘調査報告書 -. 9) 개성고려궁성공동발굴조사에서몇개의용두가확인된바있으나궁성-1 을제외하고는아직까지정식보고가이루어지지않은상태이다. 나머지용두는 2010 년도 4차조사과정에서추정건덕전내부에서확인된용두 1점과 2015년도 7차조사중 5건물지군내부에서출토된용두 1점으로향후발간예정인발굴조사보고서에서정식보고할계획이다. 182 한일문화재논집 Ⅲ

183 사진 2. 개성 고려궁성 S2E2그리드 Tr. 출토용두(우측면) 사진 3. 고려궁성 S2E2그리드 Tr. 출토 용두(정면) 개성 고려궁성 공동발굴조사에서는 궁성-1과 몇 개의 완형에 가까운 용두 외에도 용두의 각 부분 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 중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공개된 자료에 대해 소개하고자 하며 본고에서는 편의상 참고 로 이름 붙이도록 한다. 참고-1 참고-2 참고-3 표 3. 개성 고려궁성 출토 용두 참고 유물 참고-1 은 용두의 입으로 추정되는데 위, 아래 중 어느 부분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내부의 중앙과 바깥으로는 구멍이 다수 확인되는데 제작상의 필요에 의한 것인지, 제작 후 결합을 위한 것인지에 대 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고려궁성에서 확인된 대부분의 용두에서 이러한 구멍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참고-1 의 경우는 대형 용두의 일부분으로 안과 밖의 구 멍은 대형의 용두를 제작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음으로 부분으로 제작 후 용두의 각 부분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것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참고-2 는 뿔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유사한 사례가 遼代 용두에서 확인된다. 개성 고려궁성 출토 龍頭瓦에 대한 검토 183

184 사진 4. 遼白塔출토 용두(중국 내몽고 자치구) 전체 및 세부 참고-3 은 용두의 눈과 눈썹, 구랫나루의 일부분으로 유물의 크기는 궁성-1 보다는 작으나 세부적 인 표현은 정밀한 편이다. 곡선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된 눈썹 등으로 볼 때 참고-3 은 궁성-1 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내몽고자치구 소재 遼白塔유적에서 출토된 용두는 세부적인 표현에서 고려궁성의 것과는 차이를 가지나 용두의 기본구성은 대부분 일치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자료는 아직까지 완형이 확인되지 않 은 고려궁성을 포함한 남북측 출토 용두에 있어서 세부적인 속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Ⅲ. 국내외 출토사례의 형식분류와 시기적 변화 1. 용두기와의 국내외 출토사례 앞의 Ⅱ장에서는 개성 고려궁성에서 출토된 용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아직 정식보고가 184 한일문화재논집 Ⅲ

185 되지않은 2010 년도와 2015 년도의용두 2점을제외한고려궁성용두의현황과세부적인모습을확인할수있었다. 이번장에서는개성고려궁성외에국내외에서출토된동시기용두자료의현황을살펴보고유물의부분적특성을상호비교하여고려시대용두의구체적인모습과시기적인변화양상을확인하고자한다. 또한이를통해고려중심지용두의특징을확인하고자한다. 1) 평양대화궁유적대화궁유적은평양지역에위치한다. 이곳은본래 12세기까지임원역이자리하고있었으나고려 17 대인종 ( ) 이개경 ( 개성 ) 에서서경 ( 평양 ) 으로천도를결정한뒤대화궁이건설되었다. 하지만 1135 년묘청의난이진압되면서대화궁의건물들은모두파괴되어흔적만남아있다고알려져있다. 현재까지대화궁에대한발굴조사는북측에의해서이루어졌는데남측에는아직까지정식발굴조사보고서가알려지지않은상황이며다만발굴조사이후대화궁발굴조사에대한논문은북측의관련연속간행물에다수개재되어있다. 대화궁에서출토된용두에대한자료는국내언론기사를통해확인된다. 북측평양방송을인용한보도 10) 에서는북측김일성종합대학역사학부에의해평양인근의고려시대궁궐인大花宮이발굴되었음을 2006년 12월 9일자로공개하였다는것을알렸다. 이후남측의같은언론사를통해보도된사진자료 11) 에는대화궁유적에서출토된용두의사진이개재되었는데이를통해단편적이나마고려의 12세기용두에대한자료를확인할수있다. 이자료는남측의파주혜음원지에서출토된용두와함께고려시대황실에서사용되었던장식기와문화의한부분을보여주는것으로학사적으로매우큰가치를가진다. 보도된사진자료만으로는대화궁출토용두에대한정확한설명은부족하지만확인되는특징은다음과같다. 용두의색조는회백색이며위아래의입술을연결하는턱의관절부분은파괴되어분리된상태로추정된다. 윗입술과아랫입술은각각 6개, 4개의돌출된선문으로표현하였으며이빨은위아래를포함해 10개이상이잔존하는데그다지날카롭지않다. 눈은반구형으로돌출되었으며눈썹은유실된상태인데사진상으로는용두의우측면만관찰할수있어좌측의상태는알수없다. 우측의구랫나루와귀, 머리, 뿔등역시유실되어정확한형태는확인할수없으나일부구랫나루혹은머리의흔적은관찰된다. 코역시대부분파괴되어흔적만남아있어정확한형태는알수없다. 대화궁의완 10) 北김일성대, 고려궁궐대화궁새로발굴, 연합뉴스, ) 北김일성대, 고려궁궐대화궁새로발굴, 연합뉴스,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185

186 공은고려인종6년 (1129 년 ) 이며 1135 년묘청의난이후모두파괴된후다시사용하지않았기때문에대화궁에서출토된다양한유물들은폐기동시성이확보된상태로 12세기전반의표식유물로뛰어난학술적가치를가진다. 따라서대화궁에서출토된용두는 12세기를대표하는유물중하나로보아야할것이다. 2) 파주혜음원지유적혜음원지유적은경기도파주시광탄면용미4 리 번지일원으로현재사적제446 호로지정되어있다. 동문선 ( 東文選 ) 권 64 기 혜음사신창기 ( 惠陰寺新創記 ) 에는남경과개성을통행하는관료및백성의안전과편의를위하여고려예종 17년 (1122) 에건립된국립숙박시설로국왕의행차에대비하여별원 ( 別院 ) 도축조되었다고기록되어있다. 혜음원지유적은 1999 년주민의제보에의해현재위치에서이루어진조사중 惠蔭院 이새겨진명문암막새가출토됨에따라지속적으로발굴조사가실시되어동서약 104m, 남북약 106m 에걸쳐 9개의단 ( 段 ) 으로이루어진경사지에 27개의건물지를비롯하여연못지, 배수로등의유구와금동여래상,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등의많은유물이확인되었다. 출토된용두편중원형을짐작할수있는것은 1점으로 1차조사당시 가 지구에서출토된것으로보고되어있다. 용두는아랫부분이네모꼴로위로는용의머리가환조로제작되었는데좌측면의대부분만이남아있는상태로우측면과상부는정확한형태를알수없다. 입은크게벌렸으며안으로는 8개의이빨이남아있으나본래는윗니 13개, 아랫니 6개정도였을것으로추정된다. 앞니와입술사이는 5 개의부채꼴모양의선이단을이루고있으며입술부분은입의가장자리를따라 1조의침선이돌아간다. 코는뭉퉁한형태이며 2개의구멍이뚫려있는데보고자는밤의모습과유사한것으로설명하고있 사진 5. 파주혜음원지출토용두 ( 좌측면 ) 사진 6. 파주혜음원지출토용두 ( 정면 ) 도면 3. 파주혜음원지출토용두도면 186 한일문화재논집 Ⅲ

187 다. 눈은둥글며눈의위로는짧고뾰족한눈썹이붙어있다. 귀는나팔모양으로안쪽으로는 2조의침선이새겨져있다. 귀의아래로는직선형태의구랫나루가, 뒤로는머리가위로솟아있다. 용두의머리중앙부분은모두유실된상태로뿔의유무는확인할수없다. 용두의뒤쪽으로수키와를삽입하기위한둥근구멍이뚫려있다. 용두의외면은각부분의모양을만든후표면을마연하여마무리하였다. 혜음원지역시 12세기전반에지금과같은형태로완성된유적으로이전시기사용된기록과유물들이확인되기도하지만용두등의자료는고려왕실과관련된체계가완비되는 12세기전반을대표하는유물로판단할수있어앞서설명한대화궁유적과함께몽골침입이전까지의고려용두를대표하는유물로학술적으로매우중요한유물로평가할수있다. 앞의평양대화궁유적과파주혜음원지유적 외에도진도용장성유적 12) 에서도용두가출토된 사진 7. 진도용장성출토용두 바있다. 하지만진도용장성에서출토된용두의경우일반적인용두가환조 ( 丸彫 ) 형태로제작된것에반해부조 ( 浮彫 ) 형태를띠고있어귀면와에가깝다고볼수있다. 진도용장성출토용두는일반적인용두와는확연히다른모습을가지나보통의용두에서표현되는다양한속성을모두표현하는등용두로서최소한의형식을유지하고있어앞으로개성고려궁성, 평양대화궁, 파주혜음원지유적등과비교하여연구가필요한유물임에는분명하다. 다만진도용장성출토용두의경우본논문에서집중해서다루고자하는고려시대한반도내에서의용두의시기적변화양상을파악하는데적합하지않은자료로판단된다. 따라서연구자료로의이용은잠시보류하기로한다. 다만본격적인비교연구등이이루어져야할부분이기는하나진도용장성출토용두의경우는시기적특성보다지역적특성이반영된유물로추측되며, 향후이러한시각에서별도의연구를진행하고자한다. 2. 형식분류와시기적변화검토 현재국내에서고려시대장식기와에대한연구는매우드문편이다. 그중용두의경우본격적인연 12) 진도용장성, 1990, 목포대학교박물관.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187

188 구는거의찾아볼수없다. 따라서고고학적유물로서의용두에대한분석은이루어지지않았으며대신삼국시대의치미와조선시대취두사이를연결하는중간단계로만인식되어왔다. 이러한이유로용두의각부분즉유물의속성에대한비교와검토, 이를통한형식의정립과각형식의선후관계규명등일반적인고고자료에게적용되는연구는진행되지않은것이현실이다. 이번장에서는비록출토유물의수량이절대적으 로부족하나앞서소개하였던개성고려궁성, 평양 도면 4. 용두분류안 ( 유대가 ) [ 김홍식저서중발췌 ] 대화궁, 파주혜음원지에서출토된용두에대해일관된기준의속성을적용하여형식분류의기본자료를마련하며, 이를통해고려시대에사용되었던용두의형식을확인하고자한다. 다만장식기와로출토된수량이매우한정적이기때문에현재개성고려박물관 ( 개성성균관 ) 에전시되고있는석축의돌못으로사용된것으로추정되는 2점의석조용두 ( 傳개성고려궁성및수창궁출토 ) 와중국원상도유적 ( 중국내몽고자치구正蓝旗 ) 출토용두등참고자료와비교하여부족한사항을보충하고자한다. 용두각부분에대한명칭은아직국내에서는정리된바는없는데본논문에서는김홍식의저서 13) 에인용되어있는유대가 14) 의분류안을따르기로한다. 유대가의용두속성분류도면은중국의용두를기본으로하는것이지만기본적으로용두는치문 ( 鴟吻 ), 잡상 ( 雜像 ) 등과함께당시동아시아도성문화를구성하는하나의요소로서도성체계를계승, 수용한송 요 금 원등 10세기이후의중국내한족및북방왕조를비롯하여고려와일본, 서하까지널리공유된물질문화이다. 15) 현재까지한반도내에서출토된용두의경우는유대가의분류안보다많이간략한데뿔 눈썹 눈 어금니 입술 구랫나루 귀 머리등이표현되어있어용어그대로 용의머리 만을형상화하고있다. 반면유대가의분류안중고려시대용두에서나타나지않는턱수염 허벅지 종아리 무릎털 화염등은용두이후에등장하는취두 ( 鷲頭 ) 에반영된다. 13) 김홍식, 2009, 조선궁궐의막새기와문양과장식기와, 민속원. 14) 유대가편저, 중국고건축와석영법 ( 瓦石營法 ), 230쪽. 15) 다만일본의경우치문 ( 鴟吻 )= 어룡은수용하나용두와잡상은수용하지않았던것으로보이며, 용두가들어가는곳에귀면이자리하고있다. 이는한반도와는다른양상으로향후한일양국의중세장식기와수용과변화-발전에대한비교연구가필요하다. 188 한일문화재논집 Ⅲ

189 이와 같은 분류기준으로 용두의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는 각 부분에 대한 속성을 아래와 같이 분류 하였다. 표 4. 출토 용두 분류안 1 분류 직선형 곡선형 한반도 개성 고려궁성(10~14세기) 평양 대화궁(12세기) 파주 혜음원지(12세기) 개성 고려궁성(10~14세기) 중국 - 원상도(13~15세기) 속성 눈썹 구랫나루 귀 머리 출토유적 한반도 출토 용두의 경우 크게 눈썹, 구랫나루, 귀, 머리의 4가지 속성에서 각각 직선형과 곡선형으 로 구별된다. 직선형의 경우 개성 고려궁성, 평양 대화궁, 파주 혜음원지 출토 용두에서 모두 나타나 개성 고려궁성 출토 龍頭瓦에 대한 검토 189

190 는데 직선형 속성을 가지는 용두가 출토되는 평양 대화궁, 파주 혜음원지 모두 유적의 중심연대가 12 세기이므로 고려 전기 한반도에는 직선형 속성을 가진 용두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곡선형 속성 을 가지는 용두의 경우 현재까지 개성 고려궁성을 중심으로 확인되는데 강도(江都)시기를 제외한 고려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용된 유적의 특성으로 볼 때 이러한 곡선형 속성의 용두가 사용된 시기를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이러한 곡선형 속성의 용두는 개성 고려박물관(개성 성균관)에 전시되 어 있는 傳 수창궁(壽昌宮) 출토 석제 용두에서 확인되는데 이곳의 사용시기가 고려 전기와 후기를 모 두 포함하고 있어 역시 시기를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傳 수창궁(壽昌宮) 출토 석제 용두와 유사한 형태의 석제 용두와 장식기와 용두가 중국의 원상도 유적(13~15세기)에서 확인되고 있어 대략 적으로 고려후기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표 5. 출토 용두 분류안 2 직선형 곡선형 傳 수창궁 출토 석제 용두 중국 원상도 출토 석제 용두 傳 개성 고려궁성 출토 석제 용두 190 한일문화재논집 Ⅲ 중국 원상도 출토 장식기와 용두

191 Ⅳ. 맺음말 장식기와의한종류인용두 ( 龍頭 ) 는정확한사용개시시점은알수없으나대략고려전기부터귀면와를대신하여전통건축물에사용된것으로알려져있다. 고려시대용두의등장은기존의장식기와인 치미 -귀면 에서 치문 -용두-잡상 로의변화를의미한다. 이러한현상은고려의물질문화가기존의고대적특징에서벗어났음을알려주는것이다. 지금까지고려시대장식기와특히용두에대한연구는중요성에도불구하고거의이루어지지않았는데이는출토유물의부족함이기인한것이라판단된다. 다만최근고려의정궁 ( 正宮 ) 유적을비롯하여왕실과관련된몇몇유적들에서드물게나마용두가출토되어기초적인비교검토가가능하게되었다. 본논문에서는개성고려궁성, 평양대화궁, 파주혜음원지출토용두를대상으로각부분의속성을검토, 큰틀에서의형식을분류하고개성성균관소재傳고려궁성출토석제용두, 傳수창궁출토석제용두, 원상도출토석제, 장식기와용두등과의비교를통해시기적특징을유추해보았다. 출토수량의부족으로고고학적조사를통한용두자료집성이용이하지않은상황에서몇몇유물들로고려시대용두의특징을개괄적으로설명한다는것이무리한감이없지않으나현시점에서간략한비교만으로검토가가능한부분에대한정리에의미를두고자한다. 현재시점에서분명한것은개성고려궁성에서출토된용두는직선형과곡선형으로크게구분된다는것으로직선형은 12세기가중심연대인평양대화궁, 파주혜음원지에서도출토되며, 곡선형은 13~15 세기기간동안사용된원상도유적등에서확인된다는것이다. 물론이러한자료만으로용두를편년하기에는많은무리가있으나시기적차이에따른용두형태의변화가능성검토라는점에서의미를두고자한다. 향후본논문에서이루어진기초적검토를보다포괄적으로진행하여중세동아시아장식기와와관련된다양한연구를진행하고자한다.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191

192 참고문헌 고문헌 高麗史 高麗圖經 世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강호선외, 2002, 고려의황도개경, 한국역사연구회. 고유섭, 1964, 韓國建築美術史草稿, 考古美術資料第六輯. 考古美術同人 1977, 松都의古蹟, 열화당. 김창현, 2002, 고려개경의구조와그이념, 신서원. 박용운, 1996, 고려시대開京의연구, 一志社. 리창언, 2002, 고려유적연구, 사회과학출판사. 임효헌, 2000, 高麗宮闕圖略, 松京廣攷 5(1832). 전룡철 김진석, 2002, 개성의옛자취를더듬어, 문학예술출판사. 前間恭作, 1963, 開京宮殿簿, 朝鮮學報 第 26 輯, 朝鮮學會. 조선유적유물도감 10, 1991, 외국문종합출판사. 조선기술발전사 3( 고려편 ), 김홍식, 2009, 조선궁궐의막새기와문양과장식기와, 민속원. 황의수, 1993, 조선기와, 대원사. 발굴조사보고서 개성고려궁성 -시굴조사보고서 -, 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고려궁성,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고려궁성남북공동발굴조사보고서Ⅰ, 2012, 국립문화재연구소. 파주혜음원지발굴조사보고서, 2006,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진도용장성, 1990, 목포대학교박물관 192 한일문화재논집 Ⅲ

193 논문김동욱, 1997, 11,12 세기高麗正宮의건물구성과배치, 건축역사연구 제13 집. 김창현, 1999, 고려개경의궁궐, 사학연구 57. 개성발굴조, 1986, 개성만월대의못과지하하수도시설물에대한조사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3. 이상준, 2009, 개성고려궁성 ( 만월대 ) 의발굴성과와과제, 한국중세사학회제74 회연구발표회. 장상열, 1989, 만월대회경전건축군에쓴자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제3호., 1986, 만월대장화전건축군의배치와거기에쓴자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제4호., 1988, 고려왕궁 -만월대건축에쓴측도기준, 고고민속논문집 (Ⅱ), 과학백과사. 전룡철, 1980, 고려의수도개성성에대한연구 (1), 력사과학 , 1980, 고려의수도개성성에대한연구 (2), 력사과학 정찬영, 1989, 만월대유적에대하여 (1), 조선고고연구 제1호. 한인호, 1994, 만월대중심건축군의원덕전터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제3호 ( 루계 92호 ). 홍영의, 2009, 고려궁궐내景靈殿의구조와운용, 한국중세사학회제74 회연구발표회. 장영기, 2004, 조선시대궁궐장식기와와잡상의기원과의미, 국민대학교국사학과석사학위논문. 윤나영, 2010, 고려와조선의마루장식기와연구, 홍익대학교미술사학과석사학위논문. 박정인, 2006, 조선시대궁궐잡상의조형적특징에관한연구, 공주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조원창, 2013, 고려시기잡상연구, 지방사와지방문화 16권 1호. 개성고려궁성출토龍頭瓦에대한검토 193

194 石橋茂登이시바시시게토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하여 - Ⅰ. 머리말 Ⅱ. 쩐지 ( タタリ ) 와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 Ⅲ. 맺음말 요약문 일본과한반도의고대문화에관해서는, 여러상호관련성이이야기되어왔다. 목제품등의유기질유물도그중하나이다. 본고에서주대상으로하는것은, 쩐지라고불리는방직관계도구이다. 목제품집성도록킨키 ( 近畿 ) 원시편 에따르면, 쩐지의기능은두가지이다. 민속예등을참고했을때, 첫번째는가는소형의기둥 ( 봉 ) 을세우고, 섬유를일시적으로걸어두기위한걸이이다 (A류 ). 나뉜식물섬유를이어서연결시키는 잣기 작업에사용하는경우가많다. 두번째는짧은봉을세운대를복수로짜맞추어, 타래걸이와같이뽑는실을감는도구이다 (B 류 ). A류의출토품으로는沖ノ島 ( 오키노시마 ) 22호유적출토의금동제품이쩐지로유명하다. 千葉 ( 치바 ) 県菅生 ( 스고우 ) 유적, 鳥取 ( 톳토리 ) 県塞の谷 ( 사이노타니 ) 유적, 島根 ( 시마네 ) 県타테쵸우 ( タテチョウ ) 유적등의목제품이쩐지로보고되어있다. 한국에서는광주신창동출토의판상품이나경산임당동저습지유적출토품에서이와비슷한것들이있다. 쩐지는일본독자의도구는아니다. 현대한국의민속예, 한산모시의전통기술 ( 苧麻 모시의방적 ) 에서 A류의쩐지형제품을사용하고있다. 魏志倭人傳 의기재나출토된베 ( 布 ) 에서예부터왜인은모시의방적을하고있다. 중국의회화에도 A류가그려져있기때문에, 중국에그기원이있을지도모른다. 민속예에서는모시에쩐지를사용하는경우가많으나, 비단의실을연결하는작업에도쩐지와많이닮은물건이보인다. 쩐지는모시 베에한정되지않고, 짧은섬유에서실을잣는작업을할때섬유를거는 A류와, 실뭉치를걸어실타래에감아내는작업에사용하는 B류의것등이필요에따라사용되었다고판단된다. A B 류모두간단한형태이기때문에, 출토되어있으면서도불명품으로간과되고있을가능성이있다. 주제어 : 목제품, 쩐지, 방적, 저마 ( 苧麻 ), 모시 194 한일문화재논집 Ⅲ

195 한일 고대 목제품에 대한 각서 -쩐지형(タタリ狀) 제품에 대하여- 石橋茂登*1) 이시바시 시게토 Ⅰ. 머리말 고대 일본과 한반도에 대해서는 여러 문화요소에 대한 상호 관련이 알려져 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들어보아도, 수도(水稻)경작, 청동기나 철기의 제작기술, 須惠器(스에키) 제작기술, 기마관련 기 술, 횡혈식석실, 불교와 사원, 천문역법의 전래 등이 있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과 함께 기술이나 사상 을 포함하여, 弥生(야요이)시대, 古墳(고훈)시대, 飛鳥(아스카)시대 등등, 일본 고대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들어왔다. 물론 지금 예를 든 이외의 前後(전후)시대에 서도 같았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역방향의 움직임도 있었을 것이다.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초 삼국시대의 목기였다. 한정된 시간 중에 아주 약간의 조사만 할 수 있 었는데, 일본의 목기와 비 교하면서 우선 그 유사성 에 놀랐다. 기종, 기법 등 의 면에서 일본의 弥生시 대, 古墳시대의 목기는 한 반도에서 큰 영향을 받았 다고 느꼈다. 농구류에 대 해서는 수도농경의 기술 그 자체가 대륙에서 유래 되었고, 한반도의 농구류 와 대단히 닮았음은 당연 1. 경산 임당동 유적 2. 鳥取県 青谷上寺地유적 도면 1. 목제용기의 把手의 비슷한 예(축적부동)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한일 고대 목제품에 대한 각서 - 쩐지형(タタリ狀) 제품에 대하여 - 195

196 한 것으로 여겨진다. 체계적으로 도구가 닮아있는 것이라면 사용법, 농경기술 자체도 유사하였다고 추 측할 수 있다. 그 외의 목제품, 예를 들어 숟가락(匙)의 형상이나 용기류의 파수 형태 등, 디자인 면에 서의 유사함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도면 1), 컵형 용기를 세로로 마름질 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 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특수한 제품에서도 같아서, 원형의 蓋(개) 두 개를 늘어 놓은 특징적 인 蓋가 青谷上寺地(아오야카미지)유적에 있으며, 한국의 함안 성산산성에서 같은 류의 二連蓋1)가 출 토되었다. 또한 목제 埴輪(하니와)와 많이 닮은 것이 한국 광주의 월계동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이외 에도 유사한 목제품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토기나 묘제 등 여러 방면의 것들이 영향을 받았기 때 문에, 목기도 같았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이것들을 찾아낸다면 양 지역의 특 질이나 문화의 전파와 변용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과 한반도의 목제품, 그 외의 유기질제품도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는 것을 장래적인 시야에 넣어두면서, 본고에서는 그 단서로서의 필자가 관심을 가진 유물에 주목하여 논하고자 한다. 주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방적에 관련한 유물인 쩐지(タタリ)이다 沖ノ島22号遺跡 9. 沖ノ島5号遺跡 10. 八代神社 도면 2. 금동제 쩐지 1)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국립김해박물관, 2012, 나무, 사람 그리고 문화 no 한일문화재논집 Ⅲ

197 Ⅱ. 쩐지(タタリ)와 쩐지형(タタリ狀) 제품 쩐지는 방적(紡績)관계의 도구 중 하나이다. 목기집성 도록 킨키(近畿) 원시편 에 따르면, 쩐지의 기 능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2) 하나는 두드려 패어 유연하게 만든 마의 섬유 묶음을 거는 대(臺), 거기 에서 섬유를 가늘게 나누어 쪼개고 연결하여, 꼬기 이전의 실을 물레질하는 績麻(삼에서 실을 뽑는) 도구이다. 또 하나는 실을 뽑아 타래에 감은 실뭉치를 일시적으로 걸어두는 타래걸이로 쓰인다. 민속예 등을 참고하여 고려하면, 전자는 가는 소형의 기둥(봉)을 세우고, 섬유를 일시적으로 걸어두 기 위한 걸이이다(이하 A류). 끝부분이 두 갈래로 나뉜 것이 많다. 기둥은 나무나 대나무로 만들며, 가 공하여 가지를 나누어 만드는 경우와 자연의 형상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臺)를 사용하지 않고 찔 러 세워 사용하는 것도 있다. 작업에서는 단독인 것이 많으나, 2개를 한 묶음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다. 나뉜 식물섬유를 이어서 연결시키는 잣기 작업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며, 그 식물은 마에 한 정되진 않는다. 후자는 짧은 봉을 세운 대를 복수로 짜 맞 추어, 봉에서 봉을 감듯이 타래를 거는 도구이다(이하 B류). 太田英蔵3)는 沖ノ島 출토품에서 쩐지를 확인하고, A류는 네 갈래 머리의 쩐지, B류는 실 걸기의 쩐지 라 하고, A류 를 귀의 유무로 제 1~3류로, B를 유물조합 상황에서 1~3 으로 나누었다. 본고의 A류는 沖ノ島 이외도 대상으로 하므로, 갈래의 수 를 넷으로 한정하지는 않으나, A와B류의 대별은 이것과 기 본적으로 같다. 출토품에서는 沖ノ島 22호 유적 출토 금동 제품의 일부(도면 2 1~3)가 太田의 B류, 본고의 B류에 해당 도면 3. 쩐지(B류) 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물론 실용품이 아닌, 形代(의례품)이다. 사전류를 보면 일본 민구(民 具)사전 4)에서 들고 있는 쩐지는, 긴 대에 2개, 짧은 대에 1개, 상부가 좁은 봉을 세운 것으로, 실의 두 께를 조절하면서 얼레에 싸는 도구라고 되어 있다. 和漢三才図会 의 그림은 이것과 같으며, B류와 비 슷한 예이다(도면 3). 근세 초기의 職人尽絵 (喜多院蔵)에는 그 사용 장면이 그려져 있다. 다음으로 A류는 평면 방형 혹은 원형의 臺에 기둥을 세운 것으로, 頭部가 둘 혹은 넷으로 나누어 2)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93, 木器集成図録 近畿原始編 解説, pp ) 太田英蔵, 1972, 沖ノ島出土の紡織具, 海の正倉院 沖ノ島 毎日新聞社, pp ) 日本民具学会編, 1997, たたり 絡, 日本民具辞典 ぎょうせい, p.328. 한일 고대 목제품에 대한 각서 - 쩐지형(タタリ狀) 제품에 대하여 - 197

198 졌거나 갈라진 틈이 있다. 기둥의 측면에는 귀(耳) 나 가지가 붙은 것도 있다. 형태와 기능의 차이 는 명확하지 않다. 三重(미에)県 神島八代(카미시 마야츠시로)神社5)나 福岡(후쿠오카)県 沖ノ島 22 호 유적 5호 유적의 금동제품은 이를 모방한 의 례품에 해당한다(도면 2). 沖ノ島 22호 유적은 금 동제 방직기 관계품(쩐지 방추 베틀 북[刀杼] 등) 과 함께 금동제 인형이 출토되었고, 연대는 7세기 후반으로 여겨진다. 5호 유적은 半岩陰(반 바위 그늘) 半露天(반 노천)제사에서 Ⅲ단계로 보이며, 스에키에서 7세기 후반으로 여겨지고 있다.6) 여 기서도 금동제 철제의 인형 등과 함께 동제 방직 관계품(쩐지 방추 베틀 북 등)이 출토되었다. 또 한 노천제사에서 Ⅳ단계에 속하는 1호 유적(8~9 세기)에서도 동제 방직 관계품(쩐지 베틀 북 타 래[혹은 실패] 등)이 발견되었다. 沖ノ島의 금동제 1. 타테쵸우(タテチョウ)유적 2. 山の花유적 쩐지형은 두부가 네갈래로 나눠져 있는 것과, 기 둥 축부(軸部)의 측면에 귀가 달려있는 것이 많 도면 4. A류 쩐지 쩐지형 목제품(축적부동) 은 것, 臺에 삽입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확인되어, 그 근원이 되는 쩐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 었다. 목기집성 도록 에 소개된 千葉県 菅生유적(6세기)이나 鳥取県 塞の谷유적(5세기)의 사례는 고분 출토품의 玉杖(옥 막대 혹은 옥 지팡이)이라고 불리는 것과 닮아있지만, 두부가 갈라져 있는 점, 귀가 있는 점에서 쩐지의 柱部로 여겨지고 있다. 静岡県 山の花(야마노하나)유적의 쩐지형 목제품(도면 4 2) 도 儀杖(의례용 막대)과 같은 두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측면에 지느러미와 같은 귀가 달려 있고 하단 은 뾰족하다. 이들은 장식적인 제품으로 실용품이 아닌 의례용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측면의 귀는 판상 의 장식일 가능성도 있으나 伊勢(이세)神宮의 神宝 등을 참고로 했을 때 갈래가 나뉘어 있던 것을 표 현한 것인가? 島根県 タテチョウ(타테쵸우)유적의 목제품(도면 4-1)은 臺에 삽입할 수 있도록 角柱의 선단이 두 갈래로 나뉜 심플한 것으로, 실용품 쩐지로 여겨진다. 실용의 쩐지는 臺의 한변이 20cm전 5) 金子裕之, 三重県鳥羽八代神社の神宝, 奈文研紀要2004, pp ) 小田富士雄, 2013, 沖ノ島祭祀の再検討3, 宗像 沖ノ島と関連遺産群 研究報告 3, プレック研究所. 198 한일문화재논집 Ⅲ

199 후, 대의하단에서기둥의상단까지 40~50cm 가표준적인크기로추정되고있으며 19세기의회화에서보이는모습과같이, 바닥에놓고앉아서작업하기에적당한높이로여겨진다. 이들목제쩐지는장식적인면에서고분출토의玉杖과닮아있으나, 역으로보면玉杖이라고불리는것에쩐지의모형이라고말할수있는석제모조품이포함되어있을가능성이있는것이다. 또한쩐지라고보고되지않았지만출토목제품중두갈래로갈라진柱狀의목제품이있다면, 실용적인쩐지일가능성이있다. 출토품에서쩐지, 쩐지형제품이라고불리는것의대부분은 A류이다. 두부의갈라짐이나기둥측면의귀가특징적이기때문일것이다. 일본에서의쩐지는古墳시대중기이후에보이는듯하다. 실패나실감개류는弥生시대부터보이기때문에, 쩐지는그보다늦게출현한것으로보인다. 쩐지의출토수도제한적이어서, 그다지보편적인도구는아니었을지도모른다. 쩐지가일본의독자적인도구인지, 한반도에서비슷한예가있는지는하나의문제이다. 한국의출토예로는광주신창동출토품 ( 도면 5-1) 중의판상품 ( 길이 59.6cm) 으로선단이두갈래인것이있다. 7) 함안성산산성출토품 ( 도면 5-2) 은길이 94.4cm 이나두갈래로나뉜막대이다. 또한경산임당동저습지유적 ( 도면 5-3) 도 89.2cm 의약간대형이지만, 두갈래로나뉜막대이다. 8) 이들을아직상세하게관찰할기회를얻지는못했으나, 의자에앉아작업하는경우도고려하면, 실용의쩐지일가능성도있을수있을것이다. 小林行雄 ( 코바야시유키오 ) 9) 는雄略朝에漢織 吳織이도래했다는기사가있는것에서, 5세기후반에백제등의도래인에의해직물기술이전해졌다고판단하고있다. 쩐지에대해소개한角山幸洋 ( 츠노야마유키히로 ) 10) 는한국의민속예를소개하고있다. 그사례가고대로거슬러올라갈가능성은충분하다. 또한쩐지 ( タタリ ) 의어원은여러설이있으나, 享保 2년 (1717) 성립으로여겨지는新井白石 ( 아라이하쿠세키 ) 가쓴어원서 東雅 11) 에따르면, 타타리 ( タタリ, 쩐지 ) 는백제의방언이라고한다. 현대한국의민속예로는한산모시의기술자가바로 A류의쩐지형제품을사용하고있다. 모시라고하는것은苧麻를말하는것으로, 苧布도모시라고부른다. 타타리 ( タタリ ) 狀제품은쩐지라고불리고 7)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4, 한국목기자료집 Ⅲ. 8) 財團法人嶺南文化財研究院, 2014, 慶山林堂洞低濕地遺蹟木器. 9) 小林行雄, 1962, 古代の技術, 塙書房, pp ) 角山幸洋, 1990, 出土多多利について, 青陵 75, 橿原考古学研究所, pp ) 古事類苑, 産業部 17, p.79 에서인용.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하여 - 199

200 1. 광주 신창동 2. 함안 성산산성 3. 경산 임당동 저습지유적 도면 5. 한국의 쩐지형 목제품 축적부동 있다. 임재규12)나 한산 모시를 소개하는 동영상13)을 참조하면, 모시의 인피(靭皮)섬유를 찢은 모시실 을 다시 얇게 찢어 간격을 두고 놓아둔 2개의 쩐지형 제품 상부의 갈라진 부분에 걸쳐 놓는다. 이것을 2개씩 잡아 무릎 위에서 굴리고, 꼬아서 실을 잇는다. 그 후 공정을 거쳐 대형의 쩐지형 제품(A류) 2개 의 위에, 구멍을 복수로 판 봉을 마주 걸쳐, 각 구멍에서 풀려 나오는 실을 모아 가는 작업이 있다. 한산 모시의 기술은 고대에서의 쩐지 용법을 방불케 한다. 万葉集 의 2990번 노래(歌)는 をとめら が績麻の絡垜打麻掛け うむ時なしに恋ひ渡るかも(소녀들이 績麻(삼베 길쌈)의 쩐지에 때린 삼베를 걸 12) 林在圭, 2013, 韓服の特徴と韓国伝統織物の韓山モシの技術伝承, 静岡文化芸術大学研究紀要, vo.14, pp ) 한산 모시는 한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1년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 홈 페이지에 일련의 공정에 대한 동영상이 공개되어 있으며, 대나무제의 쩐지도 보인다(2015년 5월 현재) 한일문화재논집 Ⅲ

201 면 (실)잣을 때 없이 사랑이 건너올지도) 라고 노래한다. 때린 삼베라고 하는 차이가 있으나, 소녀들이 마의 길쌈 작업을 하고, 쩐지에 실을 거는 작업이 눈에 떠오르는 듯하다. 이 쩐지는 타래걸이와 같은 뽑은 실을 감는 B류의 쩐지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나, 한일 민속예를 참고로 하면, 때린 삼베를 걸어 실을 뽑는 작업이라 한다면 柱狀의 A류 쩐지이진 않을까? 한산 모시에서 쩐지형 제품(쩐지)을 사용하는 것은, 얇게 푼 모시의 섬유 두 가닥을 합쳐 꼬아 실을 만들어 가는 모시를 잣는 작업에서이다. 같은 모시의 방적에서도 일본의 민속예에서는 쩐지를 쓰지 않 는 경우도 많은 듯하나, 福島(후쿠시마)県 昭和村(쇼와무라)의 모시 짜기 에서는 앞잡이 막대(おさき 棒) 라고 불리는 쩐지형 도구가 사용되고 있다.14) 원형의 臺에 1개의 대나무를 세운 것이나, 맥주병에 상단을 가른 대나무를 넣어 섬유를 가늘게 찢는 작업을 할 때 걸어 두는 臺로 단독으로 쓰인다. 또한 이 앞잡이 막대(おさき棒) 는 원래는 囲炉裏(이로리: 마룻바닥을 사각으로 파내어 만든 난방 취사용 의 일본식 화로)에 찔러 놓고, 화롯가에서 작업했던 것이라고 한다. 臺에 세워 마루에 두도록 하게 된 것은 민가에 囲炉裏가 없어지면서 된 것이다. 고대의 쩐지도 臺 없이 찔러 놓고 쓰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는데, 선단이 뾰족한 목제 대나무제 쩐지의 柱가 출토되었을 경우, 이것이 모형인지 실용품인지는 선단 형상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고대와 현대의 쩐지의 존재는, 고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모시의 방적기술과 도구가 전래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중국에서도 회화자료에 쩐지형 제품이 확인된다. 角山幸洋가 소개한 그림15)에는 柱狀의 쩐지형 제품(A류)이 하나 세워져 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이 허벅지 위에서 모시실을 꼬아 합쳐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 다. 또한 盛唐期의 궁정화가였던 張萱의 회화를 徽宗皇帝(북송 12세기) 가 모사하였다고 여겨지는 搗練圖 (보스턴 미술관 소장)에도, 장식된 원 형의 臺에 기둥에 세워지고, 붉은 리본과 같은 것이 붙어 있는 쩐지형 제품(A류)의 옆에, 무릎을 세운 채 땅에 앉아 실을 끌어당기는 듯한 동 작을 하고 있는 여성이 그려져 있다(도면 6). 太田英蔵16)는 이를 春日(카 스가)大社의 綿柱와 같이 재봉용의 실을 걸어 당기는 도구로 보고 있다. 또한 太田은 漢代의 화상석(畵像石)에도 얼레의 쩐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도면 6. 搗練 図 에서 보이는 쩐지형 제품 14) からむし(모시)工芸博物館의 吉田有子 및 織姫交流館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5) 角山幸洋, 1990, 出土多多利について, 青陵 75, 橿原考古学研究所, pp.1. 16) 太田英蔵, 1967, 紡織具と調庸絁, 日本の考古学 Ⅵ, 河出書房新社, pp 한일 고대 목제품에 대한 각서 - 쩐지형(タタリ狀) 제품에 대하여 - 201

202 있다. 지금필자는쩐지의중국에서의출토예나, 더오래된사례를파악하지못하고있으나, 쩐지를사용하는기술은중국에근원이있을지도모른다. 그런데모시실을잇는작업은, 모시의섬유가 1.5~2m 정도로짧기때문에꼭필요한작업으로긴실을얻을수있는소재 ( 누에에서명주를잡아빼는것과같은 ) 에서는불필요할것이다. 후에볼것처럼모시에만한정되어있는것은아니나, 쩐지는모시와같이비교적짧은섬유의방적에서사용하는도구로생각된다. 여기에서모시가고대에있었는지에대해살펴보자. 다만고대에서는苧 ( 모시 ) 와麻 ( 삼 [ 大麻 ]) 은나뉘어사용되었다는지적이있어, 17) 史書의苧麻라는기재한것은모시와대마의양쪽을가리키는것일지도모른다. 한반도에서는 麻紵 의기술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제11의憲安王 4년 (860) 9 月條에나온다. 또한일본쪽에대해서는 후한서 왜전에 땅은禾稻 麻紵 蚕桑에알맞으며, [ 왜인은 ] 織績을알아, 縑布를만든다 라하였고, 위지왜인전 ( 삼국지 위서동이전왜인조 ) 에도 禾稻 紵麻를심고, 蠶桑 緝績하여, 細紵 縑綿을낸다 고하였다. 18) 후한서 는 삼국지 보다늦게성립되었지만, 중국측의기록에서볼때왜인은 3세기에는모시에서실을뽑아베를짰음을알수있다. 布目順郞 ( 느노메준로우 ) 는 위지왜인전 의기술이 한서지리지 와비슷하기때문에신용할수없다고하였지만, 출토품에서도야요이시대전기의山口 ( 야마구치 ) 県綾羅木郷 ( 아야라기고우 ) 유적에서모시의섬유가발견되고있어 19), 오히려상당히오래전부터왜인은모시의방적을행하고있었다고볼수있다. 한반도에대해서는기록이없는듯하나, 아마도비슷하게예부터사용했었을것이다. 東村純子 ( 히가시무라준코 ) 20) 에따르면, 모시의編布는縄文 ( 죠몬 ) 시대부터있다. 또한인피섬유를얻기위해모시의표피를벗겨낼때사용하는苧引具도한손에들수있는소형의손낫 ( 手鎌 ) 과구별하기힘들긴하지만, 古墳시대의출토품이알려져있다. 飛鳥 ( 아스카 ) 시대가되면 일본서기 持統天皇 7년 (693) 3월조의詔에서, 桑 紵 梨 栗 蕪菁 ( 순무 ) 등의재배를권장하고있다. 肥前国風土記 基肄群姫社郷에는珂是古 ( 카제코 ) 가본꿈에臥機 ( 쿠츠비키 ) 와絡垜 ( 타타리 ) 가춤추고즐기며나타나, 몸을밀어놀래키는이야기가있다. 姫社 ( 히메코소 ) 의신은도래인의길쌈하는이가봉헌한여신이라고한다. 일본고전문자대계 에는臥機을한국풍의일종의베틀, 絡垜을사각형틀의얼레도구로하였는데, 쩐지라고하기보다는실패, 실패걸이 17) 永原慶二, 2004, 苧麻 絹 木綿の社会史, 吉川弘文館. 18) 藤堂保明 竹田晃 影山輝國, 2010, 倭国伝中国正史に描かれた日本, 講談社. 19) 布目順郎, 1985, 麻と絹, 弥生文化の研究 5, 雄山閣, pp ) 東村純子, 2012, 考古学からみた古代日本の紡織, 改訂新装版, 六一書房. 202 한일문화재논집 Ⅲ

203 ( 舞羽 ) 로판단하고있는듯하다. 또한 延喜式 ( 엔기시키 ) 축사중, 竜田의바람신의祭 ( 제사 ) 에는 比売 ( 히메 ) 神에게예복을갖추고, 金의麻笥 ( 가늘게찢어길게이은삼을넣어두는용기 ) 金의栭 ( 타타리, 쩐지 ) 金의桛 ( 실패 ), ( 중략 ) 여러공물 ( 幣帛 ) 을드려 ( 후략 ) 이있다. 沖ノ島출토의금동제유물을방불케하는묘사이다. 한국의모시에서도쩐지형제품에걸었던실을꼬아서통에넣고, 그후의공정을거쳐감아내므로, 축사에서보이는도구는모시방적에관련된도구를표현하고있는것인가? 延喜式 권4 伊勢大神宮 ( 이세다이진구 ) 에는 神宝廿一種 ( 신보이십일종 ) 으로금동多多利 ( 타타리, 쩐지 ) 2 基, 금동麻笥 2 合, 금동賀世比 2 枚, 금동鎛 ( 종 ) 2 枚, 은동多多利 1 基, 은동麻笥 1 合, 은동賀世比 1 枚, 은동鎛 1 枚, 그외가기재되어있다. 이多多利는높이 1 尺 1 寸 6 分, 土居 ( 臺 ) 의직경 3 寸 6 分이라고하며, 원형의臺에柱 ( 막대 ) 가세워진형상으로보인다. 바닥에앉아작업하기에는적절한높이일것이다. 현재의伊勢神宮 ( 이세진구 ) 의神宝에도형상은沖ノ島와다르지만, 쩐지를위시한이들물품들이보이며, A B 두가지의쩐지가포함되어있다. 21) 皇大神宮 ( 코우타이진구 ) 의황실재산 ( 御料 ) 金銅御 ( 온타타리 ) ( 도면 7-1) 이 A류이다. 방형대에柱 ( 막대 ) 가세워지고, 상단은두갈래그아래로좌우의가지가있어, 도합 4 枝의頭部를갖는다. 측면에는鉤 ( 갈고리 ) 손모양의가지가나와있다. 막대높이 35.1cm, 土居높이 3.9cm, 土居方 10.9cm 이다. 寛正 3년 (1462) 주문받아바친伊雑宮 ( 이자와노미야 ) 古神宝에도거의비슷한것이있다. 한편豊受大神宮 ( 토요우케다이진구 ) 의황실재산 ( 御料 ) 御 ( 온타타리 ) ( 도면 7-2) 는, 방형대에하부가四角, 상부에圓柱의막대를세웠다. 가지가나눠지거나갈라짐은없다. 막대높이 35.1cm, 土居높이 3.9cm, 토거方 10.9cm 로, A류와같이실용적인크기이다. 실을감아걸치는 御木絡 ( 온오카케 ) 는이것이 L자형으로 3 基를연결한것과같은형상을하고있다. 막대높이 31.2cm, 土居높이 3.9cm 로약간낮은편이다. 이는 B류쩐지와동류로실패걸이로생각되나, 太田英蔵씨는이대로는사용할수없으므로, 다른 1 柱의도구가필요하다고보고있다. 그렇다면豊受大神宮御料의 御 ( 온타타리 ) 는 搗練図 와같이단독으로쓰였는지, 본래는 御木絡 ( 온오카케 ) 와함께썼는지는알수없으나, 후자의가능성도있었을지모른다. 또한일본이나한국의민속예에서, 모시의수확에서실을뽑아베를짜는작업까지일관되게행해지는듯하나, 예전에는꼭그렇지만은않았던듯하다. 永原慶二 ( 나가하라케이지 ) 에따르면, 모시의조달에서베의생산은공정이분화되지않아자급성이높았으나, 일본의律令期에서중세의사료나회화에서는, 모시에서얻은섬유가 青苧( 청모시 ) 로유통되고이를입수한서민이실을짜던모습을엿볼수있다. 22) 따라서역사시대의유물에서쩐지유물이나온다하더라도, 반드시전공정 ( 全工程 ) 의도구 21) 四日市市立博物館, 1996, 神宝の美. 22) 永原慶二, 2004, 苧麻 絹 木綿の社会史, 吉川弘文館.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하여 - 203

204 1. 金銅御椯(콘도우온타타리) 2. 御椯(온타타리) 도면 7. 神宝의 쩐지(タタリ) 도면 8. 撚綿軸(하즈) 가 같이한다고 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민속예에서는 모시 작업에 쩐지형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쩐지형 제품은 반드시 모시에 한정되지만은 않는다. 竹內晶子(타케우치 아키코)23)가 소개한 비단 실을 만드는 작업 안에서도 A B류의 쩐지형 제품이 보인다. 비단의 실은 얇고 질이 좋은 견사(絹糸) 와, 벌레가 나온 구 멍이 나 絹糸 로는 할 수 없는 누에고치에서 뽑아 낸 주사(紬糸) 가 있다. 후자의 누에고치를 잡아 늘 린 眞綿 에서 실을 뽑은 작업에서, A류의 쩐지형 제품에 진면을 걸어 놓은 모습이 그림에 표현되어 있 다. y자형으로 가지가 나뉜 나무 봉을, 臺에 세운 간단한 도구이다. 명칭은 쓰여 있지 않다. 또한 동일 하게 B류의 쩐지형 제품도 2本의 막대와 1本의 막대를 세운 臺를 조합하여, 실타래를 걸어 두고 실을 뽑아내면서 실패에 감는 작업이 보인다. 따라서 쩐지형 제품은 모시, 베에 한정되지 않고 비단에도 사 용된다. 짧은 섬유에서 실을 뽑아내는 작업을 할 때 섬유를 걸치는 A류와 실타래를 걸어 실패에 실을 감는 작업에 사용하는 B류가 각각 필요에 따라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和漢三才図会 24)(江戶[에도]중기)에 기재되어 있는 絡柅(타타리) 는 B류이다. 同書에 쩐지형의 제 품 중 다른 하나인 撚綿軸(하즈) 라고 하는 것이 있다(도면 8). A류의 쩐지와 비슷하며, 木 石의 臺 위 에 선단이 갈래(叉)로 된 길이 1尺정도의 軸을 꽂는다, 갈래의 머리에 綿(솜뭉치)를 걸쳐, 면을 뽑아내 23) 竹内晶子, 1989, 弥生の布を織る 機織りの考古学, 東京大学出版会, p.7,15. 24) 島田勇雄외 訳注, 1986, 和漢三才図会 5, 平凡社. 204 한일문화재논집 Ⅲ

205 꼰실을걸쳐가며綿糸를만들어, 軸에감아건다고되어있다. 木綿에사용하는도구이나, 이것은竹內씨가圖示한누에고치의 眞綿 에서絹糸를뽑는작업도구와거의같은것이다. 목면의 면 이나비단의 진면 을걸치기위해, 이타입의도구에는가지가필요하다고한다면沖ノ島등의頭部가베어져갈라진것이아닌가지처럼된형태의쩐지는, 비단 ( 紬糸 ) 과관계된것은아닌가하는추정을하고싶다. 누에로부터만드는면을걸치는것이기때문에, 일반적인봉형태의막대나베어서갈라낸것이아닌가지형태가편리한것은아닐까? 근세이전의비단생산기술에대해상세하게알고싶어지는대목이다. 고대에는비단과모시가주요한방적의재료였으나, 永原慶二에따르면, 비단이고급품이고모시가민중적이라는것은아니며, 모시도고급품은귀족의衣料로서중요했다. 섬유류가調庸 ( 조공용 ) 의주요한품목이었음을볼때, 화폐경제가미발달한시대에서비단과함께모시의방적관계기술이중요했음은틀림없으며, 비단만이중시되진않았다. 神宝등에쩐지와함께하는도구에 麻笥 와같이 麻 라는글자가들어가있기도하며, 이들이모시 베에관계된것이었을가능성이있다. 令義解 권 2, 神祈令에는伊勢神宮의 神衣( 칸미소노 ) 祭 에대해, 參河의赤引의神調의실을가지고神衣를짜서만들고, 거기에麻積連등, 麻를쌓아이로써敷和의옷을짜고, 이를神明에게바친다. 고로神衣 ( 칸미소노 ) 라고한다. 라고쓰여있다. 현대의伊勢神宮관련제사에서는, 赤引의실은絹糸로, 비단으로짜는神衣의布가 和妙( 니기타에 ) ( 겨울용 ), 삼베로만든것이 荒妙( 아라타에 ) ( 여름용 ) 가된다. 따라서神宝의紡績具에는삼베관련도구와비단관련도구두가지가있다해도좋을것이다. 비단에관련한도구로쩐지가사용되었을가능성도고려해둬야할것이다. 모시, 비단등의재료에따른특유의도구를분별할수있는재료를찾아내고싶은대목이다. 한편예전부터쩐지臺로보였던方形臺狀목제품에는실패걸이혹은그외의臺일가능성도지적되고있다. 또한쩐지형의것으로하단이뾰족한것이있다면, 臺를사용하지않고지면에꽂아세웠던것일것이다. 이러한실용적인수단이있었을가능성도모형으로사용되었을가능성도생각할수있다. 실용품의쩐지는 A류라면선단이 2~4 으로나뉘어있거나, 두갈래혹은쪼개진나무나대나무막대와臺로이루어진다. B류는곧게뻗은棒狀의막대와臺로이루어진것이많은것으로보인다. 모두간단한제품이다. 따라서출토되고있으면서도不明品등으로간과되고있을가능성이있다. 죽제품의경우에는잔존하기어려운것도생각할수있다. 앞으로출토품에대한재검토를포함해예가증가하길기대한다. 상기와같이쩐지 쩐지형제품은한일의민속예가있으며, 유적출토품에도그가능성을엿볼수있는것들이있다. 일본쩐지의祖形은한반도에서찾을수있다고생각하고싶다.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하여 - 205

206 Ⅲ. 맺음말 일본에서목제품의연구가진전된것은, 저습지유적에서양호한자료군이각지에서발견되면서부터이다. 목기집성도록近畿古代編 25) 과同 近畿原始編 26) 은목기연구의그시점에서의집대성으로그후연구의기반이되었다. 근래 20년간자료도연구자도늘어났지만, 아직연구의여지가많이남아있는분야일것이다. 한국에서도발굴조사사례가증가하면서근년에는목기에초점을맞춘전람회와도록의간행, 목기자료집의출판등이보이며양국의목기를종합적으로연구할수있는조건이갖춰지고있다. 각각의특징을밝혀가면서일본에수용된것, 수용되지않은것, 반대로한반도로전해진것을검토한다면문화의전파와수용을밝힐수있을것이다. 그것은당시사회의움직임을반영한것임을미루어짐작할수있다. 농구류는농경기술과함께목제농구의총체라고할수있는것들이체계적으로일본에전래되었을것이다. 한반도고대의청동기에대해서는낙랑군에의조공에의해삼한의귀족층에전해진한의문물이개별적인전파에서본래의용도에서떨어져나간듯한양상임에반해하위계층에서는밀접한교류에의해非漢式유물의체계적인전파가있었다고지적되고있다. 27) 한반도에서일본으로의청동기전파도아마도이와같았을것이며한반도나중국의청동기사용법이체계적으로전해진것이아닌, 단편적으로청동기가전해져그에기인한독자적변화가일어났다고추측된다. 목제품도비슷한상황이었다고추측되며, 농구나방적구와같이기술체계와밀접하게관련되는도구류는체계적으로일본에수용된다. 특수한제사품등은그와같은수용을이루지못한경우가있을것이다. 앞으로의과제로, 이번에는충분히조사되지않았으나목제품만이아닌유기질유물을연구하면서흥미로운것을간단히소개해둔다. 하나는刻骨이다. 飛鳥藤原 ( 아스카후지와라 ) 제 177 차조사에서, 말의中足骨製의각골이출토되었다. 鹿角이나牛馬의골에평행선을다수새긴각골은, 죠몬시대에는없고야요이시대부터고대까지일본에여러예가있으며, 동시병행적으로한반도에서도사용되었음이유물에서알수있다. 스리자사라 ( スリザサラ : 일본향토악기 ) 와같은악기, 혹은제사용구라고불리며, 그용도는확실치않으나마모가좁은범위에한정되어있는것에서사사라 ( ササラ : 일본향토악기 ) 에는 25)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85, 木器集成図録近畿古代編, 解説 図版. 26)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93, 木器集成図録近畿原始編, 解説 図版. 27) 高久健二, 1995, 楽浪郡と三韓, 韓半島考古学論叢, すずさわ書店, pp 高久健二, 楽浪郡と三韓 三国文化, 考古学ジャーナル 392, pp 한일문화재논집 Ⅲ

207 의문이든다. 각골에대해서는木村幾多郎 ( 키무라키타로우 ) 28) 가전체적인정리를하였고, 그후木川正夫 ( 키가와마사오 ) 29) 가집성하여근년에도비슷한예는증가하고있다. 木村는한국에서는경상남도동남부해안지역에한정된다고하면서卜骨의분포와겹쳐짐을표명했다. 최근에도경산임당동저습지유적에평행선을새긴각골이있으며, 같은유적에서복골이출토되고있다. 이것들은한반도에서일본으로전파한문화의하나로생각되며제작방법, 사용법과함께흥미를일으킨다. 또한각골, 사사라 ( ササラ ) 와관련된유물로鋸齒狀목제품등으로불리는새김이있는봉 ( 棒 ) 이있다. 木川 30) 에따르면때림몽둥이, 가죽무두질, 斎串 ( 나무가지에종이오리를달아신에게바치는물건 ), 編臺의눈금판, 사사라고 ( 簓子, ササラゴ ) 라고하는여러설이있다. 일본출토예는잡기쉽도록자루가달려있고, 폭넓은부분에규칙적으로새김이있어, 사사라고로서의사용에적합하다. 하지만한국에서는거치형목기, 이형목기등으로불리며, 비슷하게봉상목제품에거치상이새겨져있으나, 반드시일본의것과같이정연하지는않다. 국립김해박물관의 나무, 사람그리고문화 도록 31) 에서는이형목기중긴손잡이가달린전장 30cm정도의것을거치형목기, 손잡이가없는전장 10 수cm 의것을척 ( 尺 ) 으로하고있다. 도량형에관계된도구로보기에는눈이약간곤란해지는인상을받지만, 일본출토예에서는太宰府 ( 다자이후 ) 의것 32) 이전장 16cm 로비교적정연하게鋸齒를정형하고있어같은도구의가능성도있다. 또한목질유물로는건축부재를토대로한한일상호비교도과제라고생각한다. 목제용기나토목기술에서한반도로부터일본에의영향을농후하게알아볼수있으므로건축기술, 목공기술도상호비교에의해얻어지는지식이많을것임은틀림없다. 飛鳥寺에서시작되는본격적인사원건축에관해서는, 백제에서의기술자혹은고구려 백제계의繪師등의존재가문헌상으로알려져있고, 고고학이나건축사학의면에서확실한기술의이입을확인할수있다. 목기의상황에서보자면, 그이전고훈시대나야요이시대의건축또한한반도에서기술이나디자인을대부분받아들였음은상상하기어렵지않다. 앞으로는지금예로든요소들을포함하여, 일본과한반도의목제품등의연구를행하고싶다. 本論 28) 木村幾多郎, 1987, 刻骨, 弥生文化の研究 8, 雄山閣出版, pp ) 木川正夫, 1999, 刻骨と鋸歯状木製品に関する比較考察 楽器説をめぐる諸問題について, 年報平成 10 年度 財団法人愛知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 pp ) 木川正夫, 1999, 刻骨と鋸歯状木製品に関する比較考察 楽器説をめぐる諸問題について, 年報平成 10 年度 財団法人愛知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 pp 木川正夫, 1990, 刻目のある木製品について ササラの起源と変遷, 民具研究 87, pp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국립김해박물관, 2012, 나무, 사람그리고문화 no ) 九州歴史資料館資料普及会, 1981, 大宰府史跡昭和 55 年度発掘調査概報, 第 44 図 9.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하여 - 207

208 은적은수의유물에대해글을쓴것에불과하지만, 유기질유물의종합적인비교검토를통하여, 일본과한반도의밀접한교류에의해생긴그윽한고대문화의모습이떠오르게될것이다. 한일공동연구의기회를주신것과, 여러형태로협력해주신여러분에게감사하면서붓을놓고자한다. 208 한일문화재논집 Ⅲ

209 도면출전 도면 1 財團法人嶺南文化財研究院, 2014, 慶山林堂洞低濕地遺蹟木器. 鳥取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 2005, 青谷上寺地遺跡出土品調査研究報告 1 木製容器 かご. 도면 2 第三次沖ノ島学術調査隊, 1979, 宗像沖ノ島, 本文編 宗像大社復興期成会, FIG 도면 3 和漢三才図会 를바탕으로그림. 도면 4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93, 木器集成図録近畿原始編, 解説. 도면 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4, 한국목기자료집 Ⅲ. 財團法人嶺南文化財研究院, 2014, 慶山林堂洞低濕地遺蹟木器. 도면 6 搗練図 를바탕으로그림. 도면 7 四日市市立博物館, 1996, 神宝の美 을바탕으로그림. 도면 8 和漢三才図会 를바탕으로그림. 그림작성에는辻本あらた ( 츠지모토아라타 ), 美濃久美子 ( 미노쿠미코 ) 의협력을얻었다. 한일고대목제품에대한각서 - 쩐지형 ( タタリ狀 ) 제품에대하여 - 209

210 庄田慎矢 한지선 쇼다신야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Ⅰ. 서론 Ⅱ. 연구의배경과목적 Ⅲ. 한일고대목제식기의기종과수종 ( 樹種 ) Ⅳ. 한일고대의특징적인목제식기사례와그배경 Ⅴ. 결론 요약문 최근의연구를통해, 일본의고분시대부터고대에걸쳐서토기를중심으로한조리구 식기가한반도로 부터의큰문화적영향을받았음이밝혀져왔다. 그러나당시의식사내용이나방법을생각함에있어서는토제뿐만아니라목제식기에관한검토도반드시필요할것으로생각된다. 최근한국내저습지유적에대한발굴조사의증가는이러한연구에절호의기회를제공해주고있다. 본고에서는최근축적된한국출토목제식기의기종및수종선택의경향과, 집대성작업이진행된일본출토품을기원전 2세기경부터기원후 9세기무렵까지의넓은시기폭으로비교하고양자의공통성과독자성을추출하려고시도하였다. 그결과한반도남부에서확인되는折板목제식기는일본열도에서는확인되지않고일본열도에서자주확인되는曲物容器나折敷, 도려내제작한통 ( 刳物桶 ) 은한반도에서거의확인되지않는다는배타적인상황을확인하였다. 이차이점은중국대륙으로부터의문화적영향의정도의차이나, 재지의식생의차이에서기원하는것이라생각된다. 이와같이목제식기의검토를통해종래는시대와함께증가하는유사성이강조되는경향이있었던한일양국의고대食膳형태에있어, 양자의독자성또한더욱명확하다는점이밝혀졌다. 주제어 : 목제식기, 절판, 곡물, 고분시대, 아스카 나라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210 한일문화재논집 Ⅲ

211 한일 고대 목제식기의 비교연구 -器種과 樹種을 중심으로庄田慎矢** 한지선*1)2) 쇼다 신야 Ⅰ. 서론 21세기인 현재, 한국과 일본의 식탁 풍경은 크게 다르다(도면 1). 그 차이란, 구체적으로는 숟가락 젓가락을 항상 함께 사용하며 기본적으로는 그릇을 손에 들고 먹지 않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국 그릇과 밥그릇을 손에 들고 주로 젓가락을 이용하거나 직접 그릇을 입에 대고 음식을 입으로 옮기는 식의 먹는 방법의 차이나, 한국에서는 반찬의 대부분을 함께 먹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각각을 나누 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 등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차이가 언제부터 뚜렷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명확하지 않다. 물론 통시대적으로 생각한다면 중근세의 물질문화나 회화 문자 사료가 좋 은 연구재료가 되겠지만 본고에서는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시대의 물질문화를 논의의 소재로 삼았 다. 그 이유는 양자의 차이가 현재부터 수백년이라는 단위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시기로부터 그 연원 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內山敏行(1999)에 따르면 일본열도에서 손에 식기를 드는 식사법의 성립은 고분시대 중기의 스에키[須恵器]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한 특화는 9~10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內山敏行 2009). 또한 조리구나 조 리방법에 대해서는 長胴甕 시루[甑] 부뚜막이라는 조합에 의한 찜 요리가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를 경 유하여 고분시대부터 고대의 일본열도에 널리 퍼진 과정을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정리하였는데(庄田愼 矢 2012), 그 수용의 양상은 지역은 물론 취락에 따라 상이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中野咲 中久保 辰夫 2013). 식기나 조리구에 대해 한반도 移住民(일명 渡來人)적 요소뿐만 아니라 재지계 요소가 보 다 상세히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의 연구는 자료의 제약 상, 다수가 토기를 중심으로 한 논의로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 韓國 國立中原文化財硏究所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한일 고대 목제식기의 비교연구 - 器種과 樹種을 중심으로- 211

212 사진 1. 현대의일본 ( 좌 ) 과한국 ( 우 ) 의식탁 토기는식생활에있어서가장다수이고양호한연구재료임에는논의의여지가없으나목제식기의중요도또한그에뒤지지않다는점은현재의우리들의식탁에서유추하여도용이하게상상할수있다. 그래서본고에서는최근저습지유적의발굴조사가진행되는한국의출토목제식기사례를들어그것을일본의출토사례와비교하고, 마지막에토기를중심으로논의되어온한반도부터일본열도로의식기구성에대한영향에대해다른각도로고찰해보고자한다. 다만상세한시기를쫓아논의를전개하기에는아직한국출토목제식기의자료수가충분하지않기때문에한반도중남부의초기철기시대부터통일신라시대까지, 일본열도의야요이시대후기부터헤이안 [ 平安 ] 시대초기까지 1), 대략기원전 2세기전후부터기원후 9세기전후까지의매우긴시기의폭을일괄하여대국적인시점에서비교함으로써어떠한경향을추출하는것을목적으로하였다. 목기를연구대상으로하는이상, 본래라면재목의마름질이나제작기법에대한논의가당연히행해져야하지만본고에서는기초적인연구로써대략적인기종조성과수종을검토대상으로하였다. 이들을함께다루는이유는어떠한수종이용기에적합한목재로선택되었는지를알기위한것이기도하지만그것보다지역간의식생의차이나목제식기의차이를관련지어논의하기위해서이다. 또한이러한시도는지금껏이루어지지않았기때문에분석과정을통한비교검토를위한많은제약도존재했다. 따라서본고에서는실제로비교연구를진행하는데있어서제약이무엇인지, 그리고그것을해소하기위해어떠한대책을생각할수있는지에대해서도언급하도록하겠다. 1) 이러한시대구분을채용하기때문에검토대상지역은당시일본열도전역을지칭하는것은아니다. 212 한일문화재논집 Ⅲ

213 Ⅱ. 연구의배경과목적 본고는천년정도의시간폭을대상으로하기때문에이시기의식사내용이나식사방법의변화에대한선행연구도방대하다. 그러나본고가매우대략적인비교연구에지나지않음을생각하면이들연구사를망라하는것은여기에서는딱히필요하지않을것이다. 따라서본고에서는지금까지특히집중논의되어온일본고분시대부터고대의일본열도에있어서의식사양식변화와한반도 ( 및중국대륙 ) 로부터의영향에대한평가를둘러싼한일양국에서의연구를되돌아보며본고의목적을명확히하도록하겠다. 일본고대의齊一的토기제작전개에대해서田中琢 (1962) 은한걸음빨리율령제도입과관련시켜논의하였는데, 西弘海 (1982) 에의해고분시대부터고대로의토기변화를 금속기지향형 이라표현하는것이나법량의규격성으로대표되는토기군의특징을잡아 율령적토기양식 이라부르는등이새롭게시도되었다. 그리고이러한토기에서보이는변화는일본독자의것이아니라대륙과깊은영향관계에있었음을宇野隆夫 (1999) 가명확히지적하였다. 또한한국에서도한반도와일본열도의관계에착목한연구가이루어졌다. 권오영 (2007) 은백제와고구려의군사적충돌을배경으로백제로부터의다양한단계의이민이일본열도로이주한것으로상정하고그결과로이동식아궁이와大壁建物과같은이주계문물이일본에보급되었다고보는등백제에서일본열도로의강한문화적영향관계를지적하였다. 정수옥 (2012) 은북부큐슈및기나이 [ 畿内 ] 지역의취사에사용된하지키 [ 土師器 ] 의형태나취사흔적을분석하여신라 가야지역으로부터의영향을인정하면서도역시백제로부터의영향이강하다는사실을추인하여위의논지를보완하였다. 한편식선 ( 食膳 ) 방식에대해서山本孝文 (2009) 은 7세기에중국의영향을받았던백제 신라 일본이대외적으로는중국의제도를따랐지만, 대내적으로는중앙정권의권위를표현하는외교상의필요성에따라식기구성을포함한생활 의례의식을변화시켰다 라고명확히지적하였다. 또한小田裕樹 (2012) 는 7세기의아스카 [ 飛鳥 ] 지역토기에서보이는臺付 평저식기로의전환에대해山本孝文과마찬가지로동아시아에공통되는식사양식의수용을반영했다고보았고그것과동시에스에키와하지키의조합으로대표되는일본열도의식기구성에대한독자성도강조하였다. 이상을보더라도알수있듯이식생활이나식선방식에대한연구는토기 토제품을그소재로한연구가압도적으로많고목제식기에대해서는아직크게연구가이루어지지않았다. 물론목제식기에대한기존의연구가전혀없는것은아니다. 예를들어金子裕之 (1995) 가고대의漆器가율령체제아래에서신분질서를구현화하는기능을하였다고지적한연구나, 정수옥 (2012) 이백제지역에서고급화된목제식기의존재를지적하거나, 녹로의사용등제작기법상의변화를추적하거나한연구등은선구적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213

214 인것이다. 또한중국과의관계를포함해, 일본야요이시대의목제식기를토기와함께검토한長友朋子 (2013a) 의연구도빠질수없다. 그러나이러한소수의연구를제외하면목제식기에관한연구는매우저조하다. 2) 한편최근의한국에서는저습지유적에대한발굴조사가급증하여그에더불어목제유물의확인건수도급증하고있다. 한국출토목제식기는현재필자가파악하고있는자료의수만으로도 400건이넘는다. 급증하는자료에대한집대성작업도진행되고있어, 한국의고대목기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8), 새로운만남백제의목기 ( 국립공주박물관 2010), 한국목기자료집 Ⅰ -농기구및공구편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2), 함안성산산성의목제유물과활용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1), 나무, 사람그리고문화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국립김해박물관 2012년 ), 한국목기자료집 Ⅱ -용기및생활구편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2), 한국목기자료집 Ⅲ -무기 의례구 기타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4) 등의책자가계속해서간행되고있다. 다음장에서는이들집성자료들을적절히활용하며한일출토목제식기의비교를시도해보고자한다. Ⅲ. 한일고대목제식기의기종과수종 ( 樹種 ) 본장에서는한일양지역에있어어떠한종류의목제식기가어느정도의수량이발견되었으며그것은어떠한목재로제작되었는지를비교한다. 그러기위해서는먼저양국및각국내의지역사이에통일된분류기준이필요한데이것을수립하는것은쉽지않다. 우선器種名인데당연히보고자에의한분류명칭이채용되므로보고자가다른경우는기종명이통일되어있지않은경우가많다. 그래서본고에서는가능한대략적인분류에맞춰혼란을피하려고시도하였다. 椀과鉢을 椀 鉢 로일괄한것은가장극단적인예이다. 자료가증가할수록통일된분류기준을적용하는것이어려워지는것은당연한데가능한명확한기준에따른대분류방법이모색될필요가있다. 다음으로수종분류명칭이科인지, 屬인지, 亞屬인지아니면종까지동정되었는지명확히기재되어있지않은경우가많다. 그중에는목재조직해부학상, 현재로써는종까지동정하는것이불가능한목제까지종의레벨로기술하고있는경우도있다. 그리고한국의보고서에서보이는 種 이라는용어 ( 예 2) 한국의목기연구사에대해長友朋子가정리한것이있지만, 그것을보면목기연구에있어서관심은농구에집중되어있고, 목제 식기 에대해서는특별한관심을가진것은아니었다 ( 長友朋子 2013b). 214 한일문화재논집 Ⅲ

215 를들어 상수리나무류 ) 는속이나아속의하위에해당하여종의상위에해당하는분류개념인듯한데일본에서는예를들어북가시나무아속 ( アカガシ亜属 ) 에속하는수종을일괄하여 種 이라하는경우 ( 伊藤隆夫 1995) 가있기때문에, 완전히같은분류단위가아닌듯하다. 이러한혼란을정리하기위해본고에서는학명의표기및사용하는한일수목명의대응표를제시함으로써적어도본고내에서의혼란은피할수있을것으로생각된다. 이후, 한일연구자가보다긴밀하게공동연구를진행함에있어이러한개념의대응관계가서서히정리되어나가기를기대한다. 본격적으로일본의출토자료를다룬 木の考古学 ( 伊藤隆夫 山田昌久編 1995) 3) 에서는본고에서다루는자료군을 용기 ( 容器 )(6293 件 ) 조리가공구 ( 調理加工具 )(386 件 ) 식사구 ( 食事具 )(490 件 ) 으로, 한국목기자료집 Ⅱ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3) 에서는 용기 (200건 ) 칠기 (172 건 ) 식사구 조리구 (24 건 ) 으로분류한다. 전자에서는세별기종에대해용기를 공기 [ 椀 ] 접시 [ 皿 ] 주발 [ 鉢 ] 단지 [ 壺 ] 고배 [ 高杯 ] 술통 [ 槽 ) 소반 [ 盤 ) 상자 [ 箱 ) 저판 개판 [ 底板 蓋板 ) 측판 [ 側板 ) 통[ 桶 ) 컵형 손잡이가달린큰잔 합자 [ 合子 ] 두레박 [ 釣瓶 ] 으로, 조리가공구를 국자 [ 杓子 ] 주걱 국자 [ 柄杓 ] 笊籠類 막자[ 擂粉木 ] 도마 [ 俎 ] 로, 식기구를 젓가락 [ 箸 ] 숟가락 [ 匙 ] 포크 절부 [ 折敷 ] 로나눈다. 후자에서는통일된분류기준을설정하지않고보고서의기재에따르고있다. 본고에서는일본의자료분류에대해서는가능한전자의기준에따른다. 단, 집계 비교작업의편의상, 판단기준이명확하지않은경우가있는완 ( 椀 ) 과발 ( 鉢 ) 을동일분류에포함하는한편, 底板 蓋板및側板을曲物 4) 과그이외로분류하였다. 게다가전자의분류법에따라한국의자료도재분류하여한국의자료중해당하는것이없는경우에한하여새로운세별기종항목을세웠다 ( 구체적으로는 折板 5), 耳杯 등세별기종 ). 한국의자료에대해서는상기문헌에서집성된데이터외에경산임당동저습지유적출토목기 ( 朴升圭 河眞鎬 禹炳喆 2014) 를더해검토하였다. 이유적에서는용기류가 77 점, 취사용구로국자 [ 杓子 ] 가 7점보고되었다. 특필할만한것으로는대다수의유물에대해조직해부학적수종동정이이루어져기종과수종의대응관계를쫒을수가있다는점이다. 3) 또한그이전의일본출토목제식기에관한집성자료집으로는 古代の木製食器 : 弥生期から平安期にかけての木製食器 ( 埋藏文化財硏究會 1996) 가있다. 4) 나무판을둥글게휜후끝단과끝단을겹쳐벚나무껍질등으로바느질하듯엮어만든용기. 바닥판은별도로제작해나무못등을이용해몸체에고정시킨다. 5) 구획을나눈용기, 대표적으로구절판이있다.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215

216 표 1. 한국일본출토목기의기종및수종 대분류소분류일본점수일본수종한국점수한국수종한일공통수종 용기 완 발 ( 椀 鉢 ) 접시 ( 皿 ) 단지 ( 壺 ) 고배 ( 高杯 ) 조 ( 槽 ) 가시나무아속, 개비자나무속, 개서어나무류, 팽나무속, 단풍나무속, 계수나무속, 비자나무, 녹나무, 녹나무과, 상수리나무류, 밤나무, 뽕나무속, 느티나무, 금송, 벚나무속, 잣밤나무속, 삼나무, 후박나무속, 차나무류, 칠엽수, 풀무레나무속, 마가목속, 음나무, 오리나무아과, 편백, 너도밤나무속, 소나무속, 목련속, 전나무속가시나무아속, 개비자나무속, 팽나무속, 단풍나무속, 계수나무속, 비자나무, 황벽나무, 녹나무, 상수리나무류, 밤나무, 느티나무, 헛개나무속, 졸참나무류, 비쭈기나무, 벚나무속, 화백, 잣밤나무속, 삼나무, 후박나무속, 칠엽수, 계수나무속, 느릅나무속, 느릅나무과, 음나무,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너도밤나무속, 무환자나무, 전나무속뽕나무속, 느티나무, 벚나무속, 구골나무가시나무아속, 나한백류, 개비자나무속, 비자나무, 황벽나무, 녹나무, 뽕나무속, 느티나무, 벚나무속, 삼나무, 칠엽수, 느릅나무속, 오리나무속, 편백, 측백나무과, 굴거리나무속가시나무아속, 예덕나무, 나한백류, 개비자나무속, 팽나무속, 가래나무, 닥나무속, 계수나무속, 자작나무속, 비자나무, 황벽나무, 참오동나무, 녹나무, 상수리나무류, 밤나무, 느티나무, 헛개나무속, 금송, 졸참나무류, 비쭈기나무, 벚나무속, 화백, 잣밤나무속, 붓순나무. 모새나무, 삼나무, 후박나무속, 송양나무속, 솔송나무속, 차나무속, 칠엽수, 풀무레나무속, 계수나무속, 느릅나무속, ネズコ ( 한국미자생 ), 굴피나무, 음나무, 오리나무속, 사스레피나무속,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나한송속, 푸조나무, 무환자나무, 목련속, 전나무속, 버드나무속, 사시나무속, 소귀나무 팽나무류, 산벚나무류 ( 註 1), 가래나무류, 자작나무류, 느티나무속, 밤나무류, 느릅나무속, 굴피나무류, 음나무류, 오리나무속, 버드나무속, 산뽕나무류 산벚나무류 ( 註 1), 밤나무류, 음나무, 오리나무류 ( 類 ), 오리나무속, 오리나무류 ( 節 ), 사철나무류, 소나무류, 층층나무류, 버드나무류 3 굴피나무 헛개나무, 벚나무속, 느릅나무속, 굴피나무, 오리나무속오리나무류 자작나무과, 밤나무류, 밤나무, 호두나무과, 뽕나무, 느티나무속, 느티나무, 참나무속 ( 註 2), 참나무류 ( 註 2), 느릅나무과, 굴피나무, 오리나무속, 오리나무류, 소나무류 ( 註 3), 소나무 ( 註 3), 버드나무류 팽나무속, 벚나무속, 느티나무속, 밤나무, 음나무, 오리나무속, 밤나무, 음나무 오리나무속 자작나무과, 밤나무, 느티나무, 참나무속, 느릅나무과, 오리나무속, 버드나무속 216 한일문화재논집 Ⅲ

217 대분류소분류일본점수일본수종한국점수한국수종한일공통수종 용기 소반 ( 盤 ) 264 가시나무아속, 나한백류, 비자나무, 황벽나무, 녹나무, 밤나무, 뽕나무속, 느티나무, 헛개나무속, 금송, 참나무아속, 벚나무속, 잣밤나무속, 삼나무, 칠엽수, ネズコ ( 한국미자생 ),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층층나무속, 목련속, 전나무속, 버드나무속 상자 ( 箱 ) 32 삼나무, 편백 2 불명 저판 개판 ( 底板 蓋板 ) ( 곡물 ( 曲物 )) 저판 개판곡물이외 ( 底板 蓋板曲物以外 ) 측판 ( 側板 ) ( 곡물 ( 曲物 )) 측판 ( 側板 ) ( 곡물이외 ( 曲物以外 )) 절판 ( 折板 ) 이배 ( 耳杯 ) 통 ( 桶 ) 컵형 ( コップ形 ) 가시나무아속, 나한백류, 비자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금송, 벚나무속, 화백, 삼나무, 가문비나무속, 칠엽수,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목련속, 전나무속 가시나무아속, 나한백류, 개비자나무속, 팽나무속, 녹나무, 뽕나무속, 느티나무, 삼나무, 편백, 측백나무과, 나한송속, 전나무속 나한백류, 비자나무, 상수리나무류, 밤나무, 화백, 삼나무, 가문비나무속, ネズコ ( 한국미자생 ),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소나무속, 전나무속 가시나무아속, 녹나무, 느티나무, 화백, 잣밤나무속, 삼나무, ネズコ ( 한국미자생 ), 편백, 편백나무속, 전나무속 산벚나무류 ( 註 1), 참나무류 ( 註 2) 1 대나무? 30 산벚나무류 ( 註 1), 참오동나무류, 밤나무속, 느티나무, 헛개나무, 피나무, 느릅나무속, 굴피나무, 소나무 ( 註 3), 버드나무 ( 註 3), 산뽕나무류 1 대나무? 0 1 불명 나한백류, 개비자나무속, 가래나무, 비자나무, 녹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벚나무속, 화백, 잣밤나무속, 삼나무, 후박나무속, 칠엽수, ネズコ ( 한국미자생 ), 음나무, 편백, 편백나무속, 나한송속, 목련속, 버드나무속 개비자나무속, 뽕나무속, 느티나무, 삼나무, 대나무아속, 굴피나무, 전나무속 참오동나무, 장미과벚나무속, 오리나무속오리나무류 ( 節 ), 오리나무류 ( 類 ), 버드나무류, 삼나무속 녹나무과, 느티나무, 헛개나무, 느릅나무과, 오리나무속, 굴피나무, 버드나무 참나무속 느티나무 느티나무, 굴피나무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217

218 대분류소분류일본점수일본수종한국점수한국수종한일공통수종 용기 조리가공구 식사구 손잡이가달린큰잔 ( ジョッキ ) 합자 ( 合子 ) 두레박 ( 釣瓶 ) 국자 ( 杓子 ) 주걱 ( しゃもじ ) 국자 ( 柄杓 ) 笊籠類 68 막자 ( 擂粉木 ) 도마 ( 俎 ) 젓가락 ( 箸 ) 숟가락 ( 匙 ) 포크 ( フォーク ) 절부 ( 折敷 ) 多数 141 개비자나무속, 뽕나무속, 삼나무, 칠엽수, 버드나무속 녹나무, 뽕나무속, 느티나무, 회양목, 측백나무과단풍나무속, 비자나무, 황벽나무, 참오동나무, 녹나무, 녹나무과, 벚나무속, 잣밤나무속, 삼나무, 칠엽수, 편백, 소나무속, 전나무속, 버드나무속가시나무아속, 나도밤나무속, 개비자나무속, 박과, 황벽나무, 녹나무, 녹나무과, 상수리나무류, 밤나무, 뽕나무속, 느티나무, 참나무아속, 졸참나무류, 비쭈기나무, 화백, 잣밤나무속, 삼나무, 후박나무속, 차나무속, 차나무류, ネズコ ( 한국미자생 ), 구골나무, 사스레피나무속,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너도밤나무속, 목련속, 전나무속가시나무아속, 화백, 삼나무,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전나무속, 상수리나무류물푸레나무속, 삼나무, 화백, 편백, 가시나무아속, 비쭈기나무편백, 대나무아과, 마삭나무속, 버드나무속, 다래나무속, 주목과, 벼과, 벚나무속, 무환자나무졸참나무류, 비쭈기나무, 편백나무속개비자나무속, 삼나무, 음나무, 편백, 전나무속비자나무, 금송, 벚나무속, 화백, 삼나무, 대나무아과, 가문비나무속, 물푸레나무속,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소나무속, 작살나무속, 전나무속, 버드나무속가시나무아속, 개비자나무속, 팽나무속, 단풍나무속, 비자나무, 밤나무, 뽕나무속, 금송, 비쭈기나무, 삼나무, 차나무속, 칠엽수, 풀무레나무속, 사스레피나무속,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나한송속, 전나무속 1 삼나무 0 59 나한백류, 벚나무속, 화백, 삼나무, 측백나무, 편백, 편백나무속, 측백나무과, 전나무속 7 5 불명 헛개나무, 굴피나무, 오리나무속 소나무 ( 註 3), 층층나무류 산벚나무 ( 註 1), 참오동나무류, 밤나무류, 뽕나무류, 느티나무류, 헛개나무, 느릅나무속, 굴피나무, 굴피나무류, 음나무, 오리나무속, 사시나무 ( 註 4) 자작나무속, 밤나무류, 참나무 ( 註 2), 버드나무속 2 밤나무, 소나무 ( 註 3) 8 불명 10 0 떄죽나무류, 합다리나무류 ( 註 6) 소나무속 밤나무, 느티나무속 218 한일문화재논집 Ⅲ

219 註 1 벚나무속을가리킬가능성이높다. 註 2 참나무 류 란, 참나무아속의한단계하위간계를가리키고있는듯한데, 졸참나무류와같은의미 ( 同義 ) 인지는알수없다. 註 3 소나무속을가리키는것일까? 註 4 버드나무속을가리키는것일까? 註 5 사시나무속을가리키는것일까? 註 6 나도밤나무속을가리키는것일까? 표 2. 한일식물명및학명의대응표学名 일본어名 한국어名 Thujastandishii(Gordon)Carrière ネズコ - Juglansmandshurica var. sachalinensis/ JuglansmandshuricaMax. オニグルミ 가래나무 Quercussubgen.Cyclobalanopsis アカガシ亜属 가시나무아속 Cephalotaxus イヌガヤ属개비자나무속 Cercidiphyllum カツラ属계수나무속 Osmanthusheterophyllus(G.Don)P.S.Green ヒイラギ구골나무 PlatyacaryastrobilaceaS.etZ ノグルミ굴피나무 Sciadopitysverticillata(Thunb.)SieboldetZucc. コウヤマキ금송 Thujopsis アスナロ属나한백류 Podocarpus マキ属나한송속 Cinnamomum camphora クスノキ녹나무 Cinnamomum クスノキ属녹나무속 Ulmus ニレ属느릅나무속 Zelkovaserrata(Thunb.)Makino ケヤキ느티나무 Zelkova ケヤキ属느티나무속 Broussonetia カジノキ属닥나무속 Aralia タラノキ属두릅나무속 Styrax エゴノキ属때죽나무속 VacciniumbracteatumThunb. シャシャンボ모새나무 Magnolia モクレン属목련나무속 SapindusmukorossiGaertn. ムクロジ무환자나무 Pyrus ナシ属문배나무속 Fraxinus トネリコ属물푸레나무속 CastaneacrenataSieboldetZucc. クリ밤나무 Castanea クリ属밤나무속 Salix ヤナギ属버드나무속 Cerasus サクラ属벚나무속 Prunus サクラ属벚나무속 IlliciumanisatumL./IlliciumreligiosumS.etZ. シキミ붓순나무 Torreyanucifera(L.)SieboldetZucc. カヤ비자나무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219

220 学名 일본어名 한국어名 CleyerajaponicaThunb. サカキ 비쭈기나무 Moraceae クワ科 뽕나무과 Eurya ヒサカキ属 사스레피나무속 Populus ヤマナラシ属 사시나무속 Euonymus japonicus マサキ 사철나무 PrunussargentiiRehder オオヤマザクラ 산벚나무 MorusbombycisKoidz. ヤマグワ 산뽕나무 Cryptomeriajaponica(L.f.)D.Don スギ 삼나무 QuercussectionCerris クヌギ節 상수리나무류 MorellarubraLour. ヤマモモ 소귀나무 Pinus マツ属 소나무속 Tsuga ツガ属 솔송나무속 Ehretia チシャノキ属 송양나무속 Mallotusjaponicus(L.f.)Müll.Arg. アカメガシワ 예덕나무 Alnus ハンノキ属 오리나무속 Ginkgo biloba イチョウ 은행나무 Kalopanax septemlobus ハリギリ 음나무 Betula カバノキ属 자작나무속 Castanopsis シイ属 잣밤나무속 Abies モミ属 전나무속 QuercussectionQuercus コナラ節 졸참나무류 Camellia ツバキ属 차나무속 Quercus コナラ属 참나무속 Quercus subgenesis Quercus / Lepidobalanus コナラ亜属 참나무아속 Paulownia tomentosa キリ 참오동나무 Cupressaceae ヒノキ科 측백나무과 Cornus ミズキ属 층층나무속 AesculusturbinataBlume トチノキ 칠엽수 Celtis エノキ属 팽나무속 Chamaecyparisobtusa(SieboldetZucc.)Endl. ヒノキ 편백 Chamaecyparis ヒノキ属 편백나무속 Aphanantheaspera(Thunb.)Planch. ムクノキ 푸조나무 Tilia シナノキ属 피나무속 Meliosmaoldhamii フシノハアワブキ 합다리나무 Hovenia ケンポナシ属 헛개나무속 Chamaecyparispisifera(SieboldetZucc.)Endl. サワラ 화백 PhellodendronamurenseRupr. キハダ 황벽나무 Machilus タブノキ属 후박나무속 220 한일문화재논집 Ⅲ

221 < 표 1> 에서나타내는것은한일의출토목제식기기종및수종이다. 그러나상기와같이일본의수종동정기준과기재방법은반드시한국의그것과일치하지않는다. 그래서오해를가능한피하기위해본고에서이용한수종명에대한대응표를 < 표 2> 6) 에표시했다. 이표는삼림종합연구소목재데이터베이스 7) 와 BG Plants 일본식물학명검색시스템 8) 및각보고서를이용한외에, 다양한분들로부터의조언에의해작성하였는데오류가있다면전적으로필자의책임이다. 물론식물의분류명은연구의진전과함께변화하며, 번역어도이에한정되는것은아니다. 이표는어디까지나본고가의거하는식물명의대응관계를제시하기위한것임을강조한다. 그러나동시에이러한정리없이는용재에관한논의자체가불가능한것은자명하다. 기종에대해표에서파악할수있는것은椀 鉢, 접시 [ 皿 ], 단지 [ 壺 ], 高杯, 조 ( 槽 ), 두레박 [ 釣瓶 ] 등이한일공통으로확인되는반면, 한국에서몇개가확인되는절판 ( 折板 ) 이일본에는없고, 반대로曲物 ( 折敷를포함 ) 이나桶이한국에서거의확인되지않는다는점이다. 임당동유적출토품의수를반영하여한국의컵출토점수가많다는점도눈에띄는데자료의많고적음에대해서는평가가어렵기때문에다루지않도록한다. 다음으로사용수종에대해서는앞서언급한것과같은분류학상의한계가있지만그것을토대로한일에공통되는수종을추출하였다. 한국측에서수종동정이행해진자료수가 143 점으로한정되어있는것이현실인데그래도 < 표 1> 오른쪽단에나타내었듯이몇몇의공통되는수종선택을지적할수있다. 또한깊이가있는挽物容器類 9) 로사용하는수종은한일양국에서현재의수종선택과공통되는부분이많다. 일본의와지마 [ 輪島 ] 에서는挽物椀에는느티나무 가래나무를사용하고카가 [ 加賀 ] 에서는挽物容器에느티나무 칠엽수 가래나무 밤나무 노송나무를사용한다고한다. 10) 이들수종은일본출토유물에서도확인된다. 또한한국의남원에서는만물용기에물푸레나무, 느티나무, 오리나무, 은행나무등을사용하고, 적송을사용하는경우와피하는경우가있다. 11) 이에대응하는것으로느티나무 6) 검색의편의를위해한국어식물명의가나다순으로나열하였다. 7) 8) 9) 녹로를이용하여강한회전력으로나무의속을파서만드는용기 10) 2012년 11월에실시된현지조사내용을근거한것이다. 가래나무 ( ミズメザクラ ) 의정식식물명은불명이다. 또한본고에는직접관련이없지만, 와지마 [ 輪島 ] 에있는상자형의목제품 ( 箱物 ) 이나목제를휘어엮은목제품 [ 曲物 ] 에는나한백류 ( アスナロ ), 도려내어만든목제품 ( 刳物 ) 에는후박나무 ( ホオノキ ) 가사용되었다고한다. 11) 2013년 7월에현지에서인터뷰 ( 전라북도무형문화재제11-1 호목기장김광열선생님 ) 를통해조사된내용에근거한것이다.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221

222 屬, 오리나무屬이한국출토유물에도확인된다. 일본측의출토목기목재로특징적인삼나무 노송나무 나한송屬등의침엽수가한국에서보이지않는것은목기의수종선택이식생, 즉입수가능한목재의실태를반영하고있다고보아도좋을것이다. < 표 1> 에서알수있듯이, 이들수종을이용하여제작되는것이많은일본의曲物과折敷, 도려내제작하는桶이한국에서확인되지않는것은다음장에서언급할한국의식생양상과잘들어맞는것같다. Ⅳ. 한일고대의특징적인목제식기사례와그배경 본장에서는전장에서의비교를통해떠오른한일각각의특징적인기종에대해검토한다. 折板이란일본에서는익숙하지않은용어인데조선시대의요리인 구절판 에내부를 9개로나눈용기를이용하기때문에용기자체도그렇게부르게된것이유래라고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편집부 1991). 용기의내부를판등으로칸을막은것을가리킨다 ( 도면 2). 도려내서제작하는것에는원형 ( 도면 2-2) 과방형 ( 도면 2-4) 이있고, 그것과달리판을조합하여제작하는것 ( 도면 2-1) 도보인다. 뚜껑및뚜껑을고정하기위한돌기를동반하는예도있다 ( 도면 2-4, 5). 뚜껑이필요한경우는부엌에서식탁까지가어느정도떨어져있었음을암시함과동시에크기에있어서는개인용식기의크기가아님을상상할수있으므로다양한요리를수북이담은화려한宴席요리에사용되었을지도모른다. 이들의사용수종은도려내어만든목제품 [ 刳物 ] 에는버드나무류 ( 속?), 오동나무, 오리나무속, 벚나무속이이용되었고, 목재를조합하여만드는 [ 指物 ] 사례는쌍북리의일례 ( 도면 2-1) 밖에없지만여기에삼나무속낙송우과 (Taxodiaceae) 가이용된점은한국의사례로는매우특수한것이다. 또한동일한예는칠을입힌정 ( 精 ) 제품이다. 칠기절판의사례로는이외에천마총출토예가있다 ( 문화재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4). 이와같은용기의내부에칸막이를만든사례는일본에서도드물게확인되는데 12) < 도면 2> 에나타낸것과같은다수의공간으로나눈형태는보이지않는다. 이것이무엇으로부터유래하는지는앞으로밝혀내야할과제이다. 한편중국의예로安徽省鞍山市雨山郷三国呉朱然墓출토漆器 槅 의사례를들수있어 ( 丁邦钧 1986), 이렇듯한반도중남부에서확인되지만, 일본에서보이지않는기종인절판은목제식기에있어서중국에서의영향이깊을가능성이있다. 또한 1점출토되었을뿐이지만경주 12) 福岡市今宿五郎江유적에서는내부를두부분으로나눈칸막이를만든심도가얕은용기가複數출토되고있다.( 福岡市教育委員会 1991, 福岡市教育委員会 2011) 222 한일문화재논집 Ⅲ

223 1. 쌍북리 유적 출토 折板 2. 신창동 유적 출토 折板 3. 황남대총남분 출토 曲物 4. 송현동 출토 折板 5. 송현동 출토 折板 도면 1. 한국 출토 목기 각종 식리총 출토 耳杯(朝鮮総督府 1932)도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 짙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시기적 간격을 채울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현재로써는 충분한 논의가 불가능하다. 반대로 일본에서 상당히 자주 발견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기종으로 曲物 折敷, 刳 物桶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향후 한국에서의 발견 사례의 주의를 촉구하기 위해 曲物의 사례를 소 한일 고대 목제식기의 비교연구 - 器種과 樹種을 중심으로- 223

224 개하고자한다. 일본출토曲物로는평면형에원형 ( 도면 3-1, 2) 타원형 ( 도면 3-3) 방형 ( 도면 3-4) 이있고, 원형의것을이용한국자 ( 柄杓 ) 도확인된다 ( 도면 3-5, 6). 이러한곡물의대부분은노송나무판재를이용해제작된다 13). 기본적으로이것은한국에서는확인되지않지만유일한예외로경주시황남대총남분 ( 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 1994) 출토곡물 ( 도면 2-3) 이있다. 근거는제시되어있지않으나보고에따르면이곡물의재질은대나무라고한다. 14) 대나무로만든곡물은宮崎縣民具 15) 에사례가있지만본고의대상시기내에는일본에서도확인되지않는것으로보아여기서도중국칠기일가능성이있다고추측된다. 주지하다시피일본의曲物은측판과저판에노송나무 삼나무 화백나무 나한송속등의침엽수재를이용하고산벚나무껍질등으로교차로엮어마감한다. 16) 이들재료의수종은한국출토목기에서는확인되지않는다. 나무통을도려내어제작한통 [ 刳物桶 ] 에있어서도마찬가지로동일수종선택의일정경향을파악할수있는데 ( 표1 참조 ), 역시한국출토목기에서는확인되지않는다. 또한식생과목제품의분포와관련해서는山田昌久 (2012) 가평야삼나무의생육지대에대형의도려내만든용기 [ 刳物 ] 가집중되며, 대형曲物容器는그러한식생분포를뛰어넘은출토예가적지않다고한다. 이러한시점에서서각각의목제품이왜수종별로제한요인이있었는지검토가필요하다. 또한수종에대해비교할때, 각지역의식생, 즉유적주변에서입수가능한수목의종류에관한정보가필요하다. 입수는가능하였으나사용하지않은것인지, 입수불가능하였는지는의미하는바가다르기때문이다. 일반적으로한국의산림에서는소나무속이우세하다는이미지가강하다. 그러나이현상이선사시대부터계속된것은아니다. 종실 목재 화분의사례를검토한안승모의연구 (2012) 에따르면기원후 3~4 세기에는한반도남부를중심으로신석기시대이래우세하였던졸참나무속이감소하고밤나무가증가하여우세해졌으며, 동시에소나무속과벼과 ( 科 ) 가증가하는경향을지적하고있다. 한편건축물에사용된목재를선사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검토한박원규등의연구 (2007) 에서는신석기시대부터삼국시대까지는졸참나무속이많이사용되고고려시대가되면느티나무나적송이이 13) 曲物의제작에대해서는 2013년 11월에조사했던秋田市紫田慶信商店이란공방에서확인할수있었다. 대체로삼나무등의제작판재를약 2-3 년정도벌목후건조시킨다. 그다음제작하려는목제품의크기로재단한목재를뜨거운물에넣어연하게만든후틀에고정시켜구부려집게로짚는다. 이후다시건조장에서며칠건조후저판과측판을본드등으로고정시키는데, 고대에는저판에나무못을사용하여측판을고정시켰다. 맞물리는끝단은칼로홈을내어바느질하듯벚나무껍질등으로엮어마무리한다. 14) 황남대총출토품이외에도광주신창동유적 ( 국립광주박물관 2012) 에서는목제집게가출토된바있는데, 곡물의제작공정에있어서휜판재를고정해건조할때사용했을가능성이있다. 따라서曲物의한국내발견가능성은있다고판단됨으로향후조사를기대해본다. 15) 2013년 10월에高鍋町歴史総合資料館에서실견한바있다. 16) 현대의사례로는秋田縣大館市의 曲げわっぽ ( 마게왓파 ) 가잘알려져있다. 224 한일문화재논집 Ⅲ

225 2. 藤原宮出土曲物蓋 1. 平城京出土円形曲物容器 3. 吉田南遺跡出土楕円形曲物容器 4. 平城宮出土長方形曲物容器 6. 曲物柄杓 5와6은 동일개체)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84 전제 5. 曲物柄杓 5와6은 동일개체)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84 전제 도면 2. 일본 출토 목기 각종 를 웃돌게 되며, 조선시대에는 거의 적송이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 수종은 목제식기에도 사 용되고 있으므로 각각의 시대에 있어서의 비율이 어떠한지를 이후 검토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목기에 사용되는 목재의 조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출토유물에 대한 수종의 전체조사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조사가 행해진 유적은 아직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이 식기에 한정하여 수종 의 경향을 논의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으므로 목기 전체에 대해 검토하도록 하겠다. 이것이 가능 한 사례로 아산 갈매리 유적(이홍종 외 2007)과 앞서 소개한 경산 임당동 유적(박승규 외 2014)의 사 례가 있다. 기원후 3~4세기에 해당하는 갈매리 유적에서는 총 359점에 대한 수종동정이 이루어져 23개 분 류군이 확인되었다(能城修一 佐々木由香 2007). 사용된 주된 수종은 졸참나무 속 상수리나무 마디 (35%), 밤나무(23%), 졸참나무 속 졸참나무 마디(12%), 소나무 속 복유 관속 아속(複維管束亞屬)(10%) 이다. 삼나무나 노송나무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보고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용기류 6점 중 5점이 오 리나무 속 오리나무 마디를 사용했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한편 임당동 유적에서도 오리나무 속은 완 한일 고대 목제식기의 비교연구 - 器種과 樹種을 중심으로- 225

226 ( 椀 ) 발 ( 鉢 ) 이나고배, 컵형용기등에일정량사용되었으므로이후이러한수종을사용하는경향이서일본과는다른한반도의특징인지확인이필요가있을것이다. 마찬가지로기원후 3~4 세기에해당하는임당동유적에서는총 313점에대한수종동정이이루어졌으며 24개분류군이확인되었다 ( 이광희 2014). 목기전체에서는상수리나무마디 (25%), 굴피나무 (18%), 소나무속 (17%), 오리나무속 (9%) 이우세한데칠기에있어서는특히오리나무속 (27%), 굴피나무 (25%), 호깨나무 (20%) 가비교적많이사용되었다. 여기서도역시삼나무나노송나무는보이지않는다. 같은유적에서보통은칠기에사용되는경우가많은散孔材를사용하지않고굴피나무나호깨나무등環孔材를사용한것은주변의식생으로부터얻을수있는소재를선택한것에서기원한것으로추정된다. 한국에서용기의사용수종경향으로는임당동및갈매리유적이외를집계하면밤및 밤류, 오리나무속, 산벚나무가모두 15점으로, 1~4 점밖에확인되지않는다른수종을압도하고있어굴피나무나호깨나무를이용하는것은적어도전형적인것은아니다. 또한일본에서는호깨나무를이용한용기는繩文時代에많이확인되는데본고의대상시기에는거의확인되지않는다 (6건 ). 굴피나무를이용한용기는전시대를거쳐매우드물어 4건밖에없으며본고의대상시기에는 2건밖에확인되지않는다. 이상의두유적에있어서의양상은신석기시대이래의졸참나무속이우세한산림에서점차밤나무나소나무속이증가해가는과도기적양상을보이고있는것으로생각된다. 바꿔말하면당연한것이지만목기의수종선택은당시의식생과대응관계에있다. 일본과의비교라는점에서는삼나무나노송나무가확인되지않는점도중요할것이다. 다만식생과목기의수종관계가통시대적으로어떻게변화하였는지를상세히검토하기위해서는자료의증가를기다릴수밖에없다. Ⅴ. 결론 이상에서보았듯이목제식기의기종구성과수종의선택경향에대해서는한일간공통성과동시에독자성도선명하다. 이것은중국대륙으로부터의영향차이에서기원하는것으로보이는특정기종의유무나, 식생의차이에기원하는입수가능한목재의차이때문에발생하는차이였을가능성이크다. 이러한독자적인목제식기가小田 ((2012) 가지적하는토기에있어서의독자성과어떻게연관되는지, 그리고중국식식선양식이중요시되었을외교의현장에서는어떻게등장하였는지, 토제와목제의식기가어떠한조합으로사용되었는지등의문은끝이없다. 앞으로의검토과제로남겨둔다. 226 한일문화재논집 Ⅲ

227 다만그러한의논을시작하기이전에본고는그비교연구의시작단계로, 시대별변화의추적이나상세한지역간관계의복원, 제작기법과수종선택의관련성등기초적인연구과제는미루어두고있다. 山本 (2009) 의지적과같이한반도에있어서는국가의영역에따라토기의내용이크게상이한특징이있다. 이에관해서는예를들어본고에서주목한 절판 에있어서백제의것과가야의것에서확실한차이가있다. 목제식기전체로보았을때어느정도차이가있는지검토를더해나가도록하겠다. 본고를발판으로앞으로의연구가진전되기를기대한다. 謝辭 ( 감사의말 ) 본연구를진행함에있어특히이하의분들, 기관으로부터협력을받았습니다. 기재하여감사의마음을전합니다 ( 경칭생략 ). 荒山千恵, 石川岳彦, 石橋茂登, 伊藤武士, 浦蓉子, 小田裕樹, 垣地廣志, 北濱幸作, 小嶋芳孝, 小林正史, 佐々木由香, 佐竹巧成, 柴田慶信, 柴田昌正, 清水香, 下濱貴子, 隅堅正, 津田幸信, 中野咲, 中野知幸, 西出徹雄, 能城修一, 藤井裕之, 藤木聡, 三浦正人, 村上由美子, 望月精司, 森岡健治, 森本仙介, 山本孝文, 김광열, 김주홍, 박강용, 박원동, 송지애, 안승모, 안소현, 양숙자, 우병철, 윤정현, 이광희, 이영복, 이명옥, 이미숙, 이의지, 이형만, 정수옥, 정종태, 지성진, 진성준, 차순철, 최성국, 아키타성적 ( 秋田城跡 ) 조사사무소, 이시카리시사큐노카제 ( 石狩市砂丘の風 ) 자료관, 코마츠시 ( 小松市 ) 매장문화재센터, 사루가와 ( 沙流川 ) 역사관, 타카나베쵸 ( 高鍋町 ) 역사종합자료관, 니부타니 ( 二風谷 ) 아이누문화박물관, 하쿠이시 ( 羽咋市 ) 역사민속자료관, 홋카이도도립매장문화재센터, 원주전통공예연구소, 원주칠문화센터, 한국고고환경연구소, 금강문화유산연구원, 국립공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충청문화재연구원, Sainbury Institute for the Study of Japanese Arts and Cultures. 한일고대목제식기의비교연구 - 器種과樹種을중심으로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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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渡辺晃宏와타나베아키히로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Ⅰ. 머리말 Ⅱ. 성산산성출토목간의특징 Ⅲ. 성산산성출토목간의해독 Ⅳ. 출토문자자료로서의목간의해독 -맺음말을대신하여 - 요약문 일본에서사용하는목간의기원이한반도목간이라는것은, 일본의목간연구자의공통인식이라고할수있다. 나라문화재연구소와대한민국국립문화재연구소와의공동연구소재의하나로목간을제안한일본측의생각은이점에있다. 하지만문자자료로서의목간의교류만으로는발굴조사기관간의교류로서그다지의미가있는일이된다고는생각되지않는다. 이에우리가생각해낸것은목간을실제로발굴하고, 정리 조사하여, 보존 공개까지실시하고있는같은조사기관으로서그노하우를교류하고, 연구기반을공유할수없을까라는것이었다. 유물 유적그자체를대상으로한발굴조사기관이아니면불가능한연구교류를궤도에올려놓는것에는여전히넘지않으면안될허들이남아있지만, 이번에각별한배려를주셔서성산산성출토목간의일부에대해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일상적으로사용하고있는기재를가지고가촬영하는것이가능했다. 그성과인적외선사진에의해깨달은것을기록하는것이앞으로목관에관한한일공동연구의초석이된다면좋겠다고생각하여해독의검토결과를제시한것이본고의主旨이다. 출토문자자료인목간의성격에서부터해독은발굴조사기관이책임을가져야만한다는것이우리의이념이다. 여태까지한국의목간해독은반드시一義的으로정해져있지만은않았으나, 출토점수가서서히증가하면서비슷한예가증가하였고, 한국목간자전 과같은잘만들어진자전도간행되게된지금, 한국목간의연구는아마도그러한百家爭鳴의시대에서기관이책임을갖고공표하는시대로의이행기에도달한한것은아닌가생각한다. 본고가그것을위한하나의도움이되었으면하고생각한다. 주제어 : 목간, 출토문자자료, 성산산성, 적외선사진 230 한일문화재논집 Ⅲ

231 성산산성 출토 목간 소고 渡辺晃宏*1) 와타나베 아키히로 Ⅰ. 머리말 일본에서 목간을 사용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한반도에서 목간을 사용한 것이며, 현재 일본 목간 연구자의 공통된 인식이다. 한국의 목간 출토 수는 현재는 아직 1000점이 안되지만, 앞으로 계속 출토 될 것이며, 거기에는 일본의 목간을 해석할 많은 열쇠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목간 연구 자의 대부분이 한국의 목간에 주목하는 연유이다. 나라문화재연구소와 대한민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의 공동연구의 소재로 목간을 제안한 일본측의 사정은 여기에 있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시대배경도 사용환경도 다른 양국의 목간을 같은 도마 위에 올려놓고 논의하기에는 무리도 있고 양쪽의 목간을 자세히 살펴보고 조사하였다 하더라도, 역사적 배경도 출토유적도 충분히 이해하 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야 말로 우리가 늘 경계하고 있는 트레져 헌터적인 검토 밖에는 될 수 없다. 진 정한 목간의 연구는 바랄 수조차 없다. 거기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은 목간을 실제로 발굴하고 정리 조사하여 보존 공개까지 실시하고 있는 같은 조사기관끼리 그 노하우를 교류하고 연구기반을 공유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목간을 자료로서 활용하는 것만이 연구교류라면 굳이 같은 기관끼리 연계가 필요할 리 없다. 같은 기관과의 연계가 없으면 안 됨을 지향하자는 것이 우리들의 의도였다. 다행히도 한국측의 목간연구에 관한 대표 로 있던 김성범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후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 모두 동시)의 동의를 얻어 이 번의 공동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서로가 취급하고 있는 자료 그 자체를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 목간 그 자체 만이 아닌 그것이 출토된 유적 혹은 그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사회를 포함해 연구대상을 넓게 포함 시켜 온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연구 초기 단계에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박종익 학예연구실장님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성산산성 출토 목간 소고 231

232 께발굴조사중인성산산성을안내받고, 목간이출토된부엽 敷粗朶의모습을견학할수있었던것은그점에서대단히유익했다. 또한김성범씨가늘강조했던것이있는데, 목간만이아닌풍부하게남아있는石碑등의 1차자료의문자도포함해연구대상으로삼는자세에는많은배움을받았다. 그사이한국에서목간연구의최대연구성과는 한국목간자전 1) 의간행일것이다. 목간문자들의사진 ( 畵像 ) 을집성한자전부분에추가해각목간의전체사진과해독문 ( 수치데이터를포함 ) 을기재하고, 이책한권만있으면현시점의한국목간의전모를개관할수있는대단히편리한자전이다. 특히난해문자나기호에대해서도번거로움을마다않고기재하고있음은훌륭한견식일것이다. 우리가이보다먼저간행한 일본고대목간자전 2) 과함께이용한다면, 7 8세기동아시아목간의문자에관한지식이한층깊어질것으로생각된다. 그런데이러한유물 유적그자체를대상으로한연구교류를궤도에올려놓기위해서는넘어야할산들이많지만, 이번국립문화재연구소당국과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이주헌소장 ( 당시 ) 의각별한배려에힘입어, 성산산성출토목간일부에대해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일상적으로사용하고있는기재를가지고가서촬영할수있었다. 목간자체의연구교류는아직가야할길이멀지만이번에촬영을허락해준사진을통해깨달은바를기록하는것이, 앞으로의한일공동연구의초석이된다면좋겠다고생각하여각별한배려에대한감사의의미를담아이소논문을쓰게되었다. Ⅱ. 성산산성출토목간의특징 성산산성출토목간은현재알려져있는한국목간의약반수를점하는하나의큰자료군이다. 신라영역에소재하는산성중골짜기능선에해당하는성문부분의성벽을만들때의기초공사와함께, 소위敷粗朶중에포함되어있던유물이다. 6세기로거슬러올라간다고일컬어지며확실히일본의목간보다오래되었고, 패 ( 稗 ) 등의곡물짐꼬리표를중심으로하는내용임이알려져있다. 당초이것들이주목을받았던것은일본목간의경로일지도모른다는점은물론, 한쪽끝에만홈이있는짐꼬리표의경우그대부분이아래끝에홈을가지고있는일본에서는그다지비슷한예가많지않은형태를취하고있는점, 거기에나뭇가지를그대로이용한듯한특이한재료를사용한점, 이상의 1) 国立伽耶文化財研究所, 2011, 韓国木簡字典, 文化財庁. 2) 奈良文化財研究所, 2009, 日本古代木簡字典. 여기에이를増補, 改訂하여 改訂新版日本古代木簡字典, 로간행. 모두八木書店에서시판. 232 한일문화재논집 Ⅲ

233 두가지점에의한것이크다. 전자에대해서는이렇듯하단에만홈을가진형상의짐꼬리표가일본에도오래된시대에서많이보인다는그릇된인식에의해성산산성의목간에서일본목간의경로를보는근거의하나로삼았던것도있었다. 하지만그러한형상의목간은전체수는많지않지만 8세기에도비교적보편적으로보이는것이명확해졌고, 일본의목간과연결하여논의할수없음이판명되었으며나뭇가지를이용한목간의존재와함께성산산성의목간을특징짓는요소임이명확해졌다. 이러한성산산성목간의특징을낳는요인으로는, 가지를이용하는목간의작성이한국의식생에기인하는면이큼은쉽게예측된다. 한편아래끝에만홈을가진형상에대해서는홈부분까지문자가이어지는사례가거의보이지않는점에서, 이미대부분의사람들의인식이되고있다고생각되지만문자기재의시점과방법에서이유를찾는것은아닌가생각된다. 일본고대짐꼬리표의경우, 문자는홈이파인위치에도기록되어있고, 짐에장착되었던시점에는기재의일부가끈에가려져보이지않게됨은분명하다. 이점은묵서 ( 墨書 ) 가짐에동여매지기전에쓰였음을보여준다. 물론성산산성짐꼬리표의경우에문자가홈부분에없는이유를문자가끈으로가려지지않도록하는것에서찾는것도가능하지만, 짐꼬리표를짐에장착한후에문자를기록했을것을고려하면이는당연한것이다. 거기에장착후에짐꼬리표를손에놓고묵서한것을고려하면문자를쓰기시작하는상단부를손에잡아들고, 자유자재로높이를바꾸는유흥이있는것이편리함은말할필요도없을것이다. 역으로상단을동여매었다는것은필연적으로하단을내려뜨릴수밖에없으며쓰기힘든것은명료할것이다. 하단에만홈이있는짐꼬리표의탁월함에대해서는이와같이목간의사용법까지시야에넣음으로인해해결될것으로보인다. Ⅲ. 성산산성출토목간의해독 이번촬영으로인해보다선명한적외선화상에의한문자의관찰이가능하게되었다. 그결과해독에대해약간의진전을보인부분이있다고보이므로번잡하지만알아낸몇개소에대해순차적으로기록해가도록한다. 관계된목간의사진은본고말미에일괄하여도판을기재한다. 사진촬영은 2014 년 6월 24 25일의양일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동연구소의이주헌소장, 최인화학예연구실장, 정인태학예연구사, 민경선학예연구사, 문화재청의권택장,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의문옥현연구원등과함께행한것이다. 일본측에서는渡辺晃宏 山本祥隆 ( 야마모토요시타가 ) 諫早直人 ( 이사하야나오토 ) 가참가하였고, 촬영은栗山雅夫 ( 쿠리야마마사오 ) 가담당했다.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233

234 4. 43 1. 31 裏 도면 1. 성산산성 출토 목간 또한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대한 조사 주체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기관으로서 공표하고 있는 최신의 해독성과는 전게한 한국 목간자전 에 수록된 것으로, 이를 전제로 기술을 전개해 가는 것으로 한다. 다만 해독에 대해서는 당초부터 각 연구자의 해독안을 병기하여 보고해 온 경위가 있고,3) 그 후 3) 國立昌原文化財研究所, 2004, 韓国の古代木簡 등. 234 한일문화재논집 Ⅲ

235 의연구성과는와세다 ( 早稲田 ) 대학조선문화연구소 대한민국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편 일한공동연구자료집함안성산산성목간 4) 에집약되어있다. 또한이에이어진와세다대학조선문화연구소와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공동조사에의거한해독문으로는橋本繁 ( 하시모토시게루 ) 의 咸安 城山山城木簡釈文 5) 이있으므로 ( 이하 橋本繁釋文 으로칭함 ) 적절히참조하고자한다. 1) 31호목간이면毛羅次尸智稗石네번째문자의 ([ 城 ] 한국목간자전 에서부여된문자의번호. 이하같음. 다만성산산성출토목간에대해서는 [ 城 ] 은생략 ) 尸 는근소하지만 1획째의기필 ( 起筆 ) 부분에종획이있으며, 마지막획첫부분의위치도횡획의중앙에있다. 마지막획은최종적으로는왼쪽으로내어제치고, 尸 의분위기도있지만字形전체로본다면일본목간에많은비슷한예가있는 部 의방 ( 旁 ) 부를간략히한자형에가깝다. 일본목간의경우그 1획째기필부분의걸림이있다면 部 의생획 ( 省劃 ) 으로보고 部 로보며, 걸림이없다면자형을따라 部 의異體字 ( 다른모양글자 ) ア 내지 マ 로하는것이일반적이다 (7세기단계에는전자가일반적인자형이지만 8세기에는차츰후자가일반적이되며시대에따른자형의변화가있다 ). 한국목간자전 에기재된 尸 의비슷한예에도이자형은보이지않는다. 다만 部 에도명확하게이자형으로말할수있는것은없다. 한편 橋本繁씨釋文 에 尸 는그대로이나橋本繁씨의 성산산성목간과 6세기신라의지방지배 수록의표3 성산산성목간분류표 6) 에는 卩 로하고있어, 部 의異體字로보고있을가능성이있다. 또한 稗石 에대해 橋本繁씨釋文 은다른사례를포함해기본적으로 稗一石 으로해독하고있다. 성산산성출토목간에는 稗一石 稗一, 거기에 稗石 으로읽히는사례가혼재하고있는것에서 稗石 이 稗一石 의뜻이있음은확실할것이다. 하지만 一石 의의미가있음과이것이한글자로 一石 으로읽혀질지는완전히별개의문제이다. 자형에서말해도 石 으로전혀부자연스럽지않으며, 오히려 一 을생략하고있다고생각하는것이자연스럽다고생각한다. 한국목간자전 도기본적으로이입장에서해독하고있으며본고도이에따르고자한다. 31호목간裏面해독안毛羅次尸智稗石 4) 早稲田大学朝鮮文化研究所 大韓民国国立伽耶文化財研究所編, 2009, 日韓共同研究資料集咸安城山山城木簡, アジア研究機構叢書人文学篇, 雄山閣. 5) 橋本繁, 2014, 咸安 城山山城木簡釈文, 韓国古代木簡の研究, 吉川弘文館. 6) 橋本繁, 2014, 城山山城木簡と六世紀新羅の地方支配, 韓国古代木簡の研究, 吉川弘文館.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235

236 2) 33호목간仇利伐 < 彫谷村 / 仇禮支負 > (< > 와 / 는割書와그改行 ( 줄바뀜 ) 을나타냄 ) 네번째문자 ( 촌명의첫글자 ) 는 彫 로읽히고있지만, 변 ( 偏 ) 은오히려더욱간략하여 月 로읽어야할것이다. 문자로서는 178 호목간의표면다섯째글자 ( ) 와흡사하지만 ( 현재의읽기는 服. 橋本繁씨釋文 이나이경섭씨 신라목간의세계 7) 는 肪 으로함 ), 旁의자형이조금다르다. 즉 178 호목간의다섯째글자는 久, 33호목간의네번째글자는 公 에가깝다. 月 + 久, 月 + 公, 모두적당한문자는찾을수없지만유사한자형으로는月 + 広 (= 肱 ) 이있고, 혹은 育 의글자를상하가아닌좌우로나열했을가능성이상정될지도모른다. 거기에비슷한예를검토할필요가있겠지만 33호목간의 彫, 178 호목간의 服 에의문이있는점을확인해두고싶다. 이점과관련해方國花의교시에따르면 舟 도 月 의자형이되는경우가있다고한다. 그렇다고하면旁을 公 으로읽어들일가능성이있기때문에, 船 의가능성도생기는것이된다. 또한다섯번째글자 ( 촌명의두번째글자, ) 는 八 一 口 를옆으로쌓은자형으로쓰여있어이를 谷 의異體字로보아도전혀문제가없다 ( 후술 ). 이상본목간의해독에대해서는아직의심이남기때문에, 해독안의제시는하지않고, 이후의검토를기대하고싶다. 3) 35호목간內恩知奴人居助支負두번째글자 ( ) 는 恩 으로불리고있으나, 자형은 里 + 一 이다. 일본목간에서이자형의문자는자주나타나며, 里 인지 黑 인지에대한판단에고민하는경우가많다. 특히사람이름 [ 人名 ] 에서도있을수있는이유로결정짓지못하는일도자주있다. 하지만 心 을 一 과같은자형으로쓰지는않기때문에이글자를 恩 으로읽을필연성은나타나지않는다. 그렇다면 里 인지 黑 인지가되는데, 여기서는 里 보다도 1획많은것을중시하여 黑 의가능성을고려해두지만, 이와같은 里 가전혀없는것은아니며 橋本繁釋文 도이글자를 里 로해독하고있다. 다음으로 知 로읽히고있는세번째글자 ( ) 에대해, 확실히필획은 知 로의모순은없으나偏의 矢 부분을이런자형으로쓴예를알지못한다. 한국목간에서비슷한예를찾았을때같은성산산성 72호목간의세번째글자 ( ) 가겨우이에가깝다. 하지만 72호목간의경우는偏을 矢 로보기에는특별히지장은없어보이나 35호목간에서는자획이산재하고있어, 矢 로보기에는상당한곤란이동반될것으로생각된다. 한편旁은 35호목간과 72호목간이흡사하지만첫획을옆 7) 李京燮, 2013, 新羅木簡의世界, 景仁文化社. 236 한일문화재논집 Ⅲ

237 8. 57 表 도면 2. 성산산성 출토 목간 으로 긋지 않는 점에서 口 로 보기엔 상당히 특이한 자형으로 자형은 오히려 々 에 가깝다. 유사한 자 형의 수집에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5호 목간을 해독하면서 주목되는 것은 37호 목간이다. 37호 목간은 內只次奴須礼支負 으로 해독 되어 있다. 35호 목간의 內恩知 와 37호 목간의 內只次 가 대응하는 관계에 있음은 분명하며 자형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恩知 只次 에 대해서는, 아직 검토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5호 목간 해독안 內黑知奴人居助支負 4) 43호 목간 陽村文尸只 첫 두 번째 글자( )에서 陽村 이라는 촌명을 풀어내고 있으나, 첫 번째 글자의 오른쪽 아 래에, 左上에서 右下를 향해 경사지게 이어진 묵흔(墨痕)이 확인된다. 비슷한 예를 성산산성 출토 목간 성산산성 출토 목간 소고 237

238 중에서찾으면 102 호목간 陽々村文尸只稗 가있으며, 여기서는 陽々村 으로해독되어있다. 43호목간에는 稗 의문자는남아있지않으나, 거의같은글로봐도좋다. 따라서 43호목간의 陽 의오른쪽아래묵흔도畳符 ( 반복부호 ) 々 로보아도좋으며, 해독문은 陽々村 으로고쳐야할것이다. 43호목간해독안陽々村文尸只 5) 45호목간夷建阿那休智稗두번째글자 ( ) 의 建 은, 정확히접힌부분에겹쳐진위치에있어판독이어려우나, 旁은 聿 ( 붓율 ) 로틀림없으나, 하부에잔획이없으므로 辶( 쉬엄쉬엄갈착 ) 의글자는아니다. 偏은보다판독이곤란하나 氵( 물수 ) 로보는것이가장무난하게보인다. 따라서 建 이아닌 津 으로해독하는것이좋을것으로생각된다. 즉 30호목간 夷津支阿那... 나 101 호목간 夷津本波... 에보이는 夷津 과같은지명으로판단하는것이가장온당할것이다. 특히 101 호목간은필적도유사한것이주목된다. 또한두번째글자는 橋本繁釋文 도이미 津 으로하고있다. 45호목간해독안夷津阿那休智稗 6) 48호목간道鐵十之네번째글자 ( ) 의 之 는자형만보면, 확실히 之 로읽어도지장이없는자형이라말할수있다. 十 에이어져글끝에올가능성이있는기재로는단위가고려되지만, 之 를단위로해독하기엔어려우며 十之 로는의미가얻어지지않는다. 자형에서판단하면 之 외에 六 으로보는것도불가능하진않다. 그렇다면 十六 으로숫자가되며, 단위가생략되어있는것으로해독하는것이가능하다. 또한 六 으로하게되면 2획째횡획의말미 ( 末尾 ) 에서 八 의왼쪽획을잇고, 그대로오른쪽획으로이어지는특이한붓글쓰기라는것이되지만비슷한예가없는것만은아니다. 반드시자형에만얽매이지말고, 내용에서해독을해보는것이필요한경우도있을것이다. 또한네번째글자는 橋本繁釋文 도이미 六 으로하고있다. 48호목간해독안道鐵十六 7) 51호목간仇伐阿那舌只稗石다섯번째글자 ( ) 는 舌 로해독되고있으나, 口 로보이는하반부분은, 3획째의종획을바로오른쪽으로꺾고, 열쇠형 [ 鍵型 ] 의필획을이어서쳐내고있어 口 와는다른붓의움직임이다. 1획째가오른쪽에서들어오고있는것을제외하면, 자형은확실히 汚 의旁부분과일치한다. 238 한일문화재논집 Ⅲ

239 이자형의비슷한예를성산산성출토목간에서찾아보면, 85호목간 于利沙 의첫번째글자 ( ) 를들수있다. 이것은 于 로해독되며, 이를따르면 51호목간의다섯번째글자도 于 로해야할것이다. 51호목간해독안仇伐阿那于只稗石 8) 57호목간표면石密日智私첫번째글자의 石 으로되어있는글자중 口 에해당하는부분의 1획째는종획만이아닌오른쪽으로꺾이는열쇠형의획을구성하고있다. 결국 口 가아닌, 그문자의자형은전체로봐서 厄 으로보지않으면안된다. 또한성산산성출토목간에는 石 의사례가다수있지만 口 를확실히쓰지않는사례도많다. 口 의 1획째의획을생략하고왼쪽으로잇기에서히라가나의 つ 의자형으로이어지는경우도많고 ( , , , , ), 거기다마지막의횡획을문자전체의하단이아닌약간위에쓰는경우도보여, 그경우전체적으로 百 으로오인할법한자형이되어버리는것으로조차보인다 (185 호목간등 ). 稗 에이어지므로 稗石 으로읽히고있으나그게아니라면 石 임을알아볼수없는자형이라고말해도좋을것이다. 이어지는두번째글자 ( ) 의 密 은하부가 虫 이기때문에, 密 이아닌 蜜 로해야할것이다. 이와관련해네번째글자 ( ) 의 智 도성산산성출토목간에사례가많은특징적인자형으로쓰여있다. 즉 日 이旁의아래로들어가 口 에이어져쓰여지고, 마치 矢 를偏으로한것같은위치관계 밸런스를취하고있다. 또한 橋本繁씨釋文 도첫 두번째글자를 厄蜜 로하였으나, 세번째글자는 [ 日?( ヵ는한국말로하면말미에붙이는의문형의 ~ 까? 에해당한다. 해석의정확성에의심이있어ヵ를붙인듯하며여기서는물음표로대체한다 )] 로하여단정하지않고있다. 57호목간해독안厄蜜日智私 9) 59호목간표면大 ( 部 )( 是 ) 家書夫鄒只, 동뒷면出稗石두번째글자 ( ) 의 ( 部 ) 는일본의표기에서말하면 [ 部?] 에상당하는대우인것으로보인다. 旁은확실히 阝( 언덕부, 우부방 ) 에가까우나꺾임이한번밖에없으며, 자형은 卩 ( 병부절 ) 이다. 또한偏은 立 + 口 ( 部의偏 ) 과는달리, 초두머리 에상당하는 艹 에 艮 포개어쓴자형이다. 즉초두머리 ( 冠 ) 가偏의상부에있기는하나, 초두머리 에 即 을포갠문자임이분명하며, 이는 節 로읽어야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239

240 裏 도면 3. 성산산성 출토 목간 할 자형이다.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는 없지만, 월성 해자 20호 목간의 표면에, 이 자형의 節 이 있으 며, 보다 해서(楷書)에 가까운 자형이나 참고가 된다. 일본의 목간에도 사례는 많다. 橋本繁씨 釋文 도 節 로 하고 있다. 세 번째 글자( )의 是 도 단정할 수 없다. 문자의 하반 중앙부분이 날아갔을 가능성도 있으 나, 잔획에서 볼 때 갓머리 의 문자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是 일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은 처음 종 획의 오른편에서 묵흔을 확인하고, 日 로 판독하였기 때문으로 보이나 붓의 움직임에서 봐도 처음의 종획은 굵고 짧게 왼쪽으로 써서 왼쪽 끝의 종획에 접속하는 것이 명료하다. 또한 하부의 잔획도 결손 을 상정하더라도 획의 생략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어 是 로 자획을 따르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대안이 240 한일문화재논집 Ⅲ

241 없는것은마음아프지만 是 의가능성은없다고보는게좋을것이다. 또한 橋本繁釋文 에서는 屯 으로하고있다. 또하나주의할것은두번째글자와세번째글자사이, 두번째글자최종종획의좌측에왼쪽아래에서오른쪽위를향해써올리는얇은필획이보이는점이다. 전후 ( 前後 ) 의문자와는독립된필획으로보인다. 깎아내고남은것일가능성이없는것은아니나짐꼬리표라는재이용을생각하기힘든자료의특성이나묵흔의형상에서볼때, 우선은다른가능성이상정되지않을까생각해볼필요가있을것이다. 여기서주목하고자하는것은, 이묵흔의형상이轉倒符 ( 전도부호 ) 로보아도모순이없다는것이다. 전도부는 レ 의형상인것이일반적이지만종획이생략되어왼쪽아래에서오른쪽위를향해써올리는, 이와같은형상을하는것도있다. 부가되는위치는문자와문자중간의왼쪽곁 [ 左傍 ] 혹은오른쪽곁 [ 右傍 ] 에있는것이많으나문자사이에쓰여있어도이상하지않다. 세번째글자가판독되지않아검증은할수없으나두번째글자와세번째글자의순서를바꾸기위해기호가붙어있을가능성을고려해둘필요가있을것이다. 다섯번째글자 ( ) 의뒷면첫번째글자는완전히같은자형의문자로, 書 의초서체로보아도전혀문제가없는자형이나필획을일반적으로살린다면 出 로도읽힌다. 성산산성출토목간에는여태까지간략화된자형이검출되지않은점도초서체로읽는것에불안이남는다. 하나의안 ( 案 ) 으로기록해둔다. 또한이와같은표면다섯번째글자와뒷면첫번째글자는같은자형으로생각되지만 橋本繁釋文 에서는표면다섯번째글자를 [ 城?], 뒷면첫번째글자는 [ 出?] 로나누어읽고있다. 또한표면의문자는현재여덟글자분으로보고있으나, 말미의 只 의아래에목간의좌변에걸치듯이묵점상 ( 墨点狀 ) 의필획이확인된다. 판독은곤란하지만좌측에아주얇은묵흔이확인되는듯하게도생각된다. 한글자분의존재를상정해두는것이무난할것이다. 59호목간표면해독안大節レ 家 [ 出?] 書夫雛只, 同뒷면해독안 [ 出?] 稗石 10) 63호목간뒷면居 첫번째글자 ( ) 의 居 로되어있는문자는 尸 에상당하는부분의왼쪽으로긋기가직립하고있어, 오른쪽끝의필획과함께 阝( 언덕부, 좌부방 ) 로읽어야할것이다. 古 에상당하는부분의횡획이왼쪽으로지나치게이어진데다종획도없으며, 오른쪽변의결손상황에서볼때오른편에필획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241

242 의결손을상정해야할것이기에, 이들은 可 의일부일것이다. 可 의횡획이 阜 ( 언덕부 ) 의왼쪽으로빠져나가는자형은, 다른성산산성출토목간에도비슷한예가있다 ( , , 등 ). 따라서첫번째글자는 阿 로해독하는것이온당할것이다. 橋本繁釋文 도 阿 로하고있다. 이에이어지는부분은현재한글자로보고 로하고있으나 ( 사진에는번호가없으나 에상당 ), 이는두글자로봐야하지않을까? 그상부는판독이어려우나, 하부는 禾( 벼화변 ) 가명료하게확인되며, 잔획에서볼때, 利 의가능성을생각할수있을것이다. 63호목간표면해독안阿 [ 利?] 11) 65호목간居珎 ( 尺 ) 乙亥세번째글자 ( ) 에 尺 의가능성을고려한것은, 왼쪽으로그어써내는위치에서볼때의문이다. 상반부는종획이생략되어있는것으로보아 口 로읽을수있어, 오히려 只 일것이다. 같은자형은성산산성 102 호목간등에서도보인다. 더하여 只 의하부의 八 을 人 과같이쓰는사례는성산산성 177 호목간등에도있다. 또한 橋本繁씨釋文 에서는 [ 尺? 只?] 로, 尺 只 두가지모양의가능성을병기하고있다. 다섯번째글자 ( ) 의 亥 는, 한국출토목간에는비슷한예가없는문자이다. 乙亥 라면간지 ( 干支 ) 로보는것이가능하나, 亥 라고하면대단히초서체에가까운것이된다. 하지만좌측에점을찍고있는것이나, 왼쪽으로긋는도중에한번꺾고있는것등의자형의특징에서생각했을때, 오히려성산산성출토목간에서빈번히나오는 支 로읽어들이는것이가능할것이다. 橋本繁釋文 도 支 로하고있다. 65호목간해독안居珎只乙支 12) 87호목간蔦知支첫번째글자 ( ) 의 蔦 로되어있는문자는선명하지않으나, 艹 ( 초두머리 ) 에 即, 즉 節 로보는것이자연스러울것이다. 59호목간두번째글자의 초두머리 부분이본래의冠의위치에쓰여있는자형이다. 또한 橋本繁釋文 는 [ 兮?] 로하고있다. 87호목간해독안節知支 13) 108 호목간王私鳥多伊伐支卜烋 첫번째글자 ( ) 는명료한종획이확인되지않는다. 따라서 王 으로보기보다는 三 으로 242 한일문화재논집 Ⅲ

243 表 表 表 도면 4. 성산산성 출토 목간 판단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橋本繁씨 釋文 는 王 으로 하고 있다. 108호 목간 해독안 三私鳥多伊伐支卜烋 14) 117호 목간 표면 買谷村古先斯珎于 184호 목간 표면 買谷村物礼利 60호 목간 표면 谷支村 116호 목간 仇利伐谷(珎)(次)(負) 이들 목간에서 谷 으로 읽고 있는 문자( , , , )는, 모두 八 一 八 口 를 겹쳐 쓴 자형의 문자로, 이는 答 의 異體字이다. 谷 이라면 하부의 八 은 불필요하 다. 谷 을 八 一 八 口 를 겹치는 자형으로 쓴 사례는 없다. 따라서 자형에서는 答 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성산산성 출토 목간 소고 243

244 한편 117 호목간과 184호목간의 買谷村 에대해서는 삼국사기 卷第三十五, 雑志第四, 地理二, 朔州奈靈에 奈靈郡本百濟奈巳郡 領縣二 善谷県本高句麗買谷縣 景德王改名今未詳 이라하여, 買谷縣 의존재가알려져있다. 성산산성출토목간에는 谷 을통상異體字 ( 八 一 口 ) 로쓰는사례도있으므로 ( : ( 前 ) 谷村 : 谷村 : 谷村 ), 谷 의異體字와 答 의異體字는구별은하고있었던듯하다. 117 호목간과 184호목간 ( 이들은공통의필자 ) 도 八 一 八 口 를겹친같은자형으로쓰고있는사실을중시하여 삼국사기 가오기일가능성을고려할지, 목간필자의글쓰기습관으로이해할지판단에어려움이있으나, 지명으로는 谷 이자연스러운것은확실하다. 橋本繁釋文 은자형을중시하여 答 으로보고이해하고있으나, 현시점에서는 谷 의의도에서 答 의異體字를쓰고있는것으로이해하고, 해독은 答 으로하며, [ 谷?] 의校訂註를붙이는것으로상세한것은뒷사람의연구를기대하고싶다. 또한方國花의교시에따르면, 八 과 合 을상하로겹친 谷 의자형이있다. 8) 이는部品으로분해하면 八 八 一 口 이므로, 두번째의 八 과세번째의 一 의상하가바뀌면 八 一 八 口 를겹친 答 의異體字자형이된다. 그렇다면 八 一 八 口 를겹친 答 의異體字로 谷 을표기할가능성을보다적극적으로인정하는것이가능하게되며, 지명으로서부자연스러운 答 을읽고이해할필요가없어지는것이다. 117 호목간표면買答 [ 谷?] 村古先斯珎于 184호목간표면買答 [ 谷?] 村物礼利 60호목간표면 答 [ 谷?] 支村 116호목간仇利伐答 [ 谷?] [ 珎次負?] 15) 147 호목간呵盖癸 利稗세번째글자 ( ) 의상부는 癶( 필발머리 ) 가아닌 大 임이명료하며, 奈 로읽힌다. 奈 하반부의 示 의종획이 1획째의횡획까지꿰뚫고나가는사례가있으며, 215호목간에서 奈 로읽고있는문자와같은자형이다 ( 또한이번의촬영대상은아니었으나 215호목간의해독중 ( 工 )( 利 ) 로되어있는부분은 147 호목간과비교했을때, 呵 임이분명하다. 다만모두 口 와 可 를상하로겹친다. 따라서 215호목간의해석문은 呵盖奈 가되어, 147 호목간의처음세글자와같은글자가된다 ). 8) 東魏居士廉富義道俗造天宮壇廟記 唐驍騎尉皇甫璧墓誌 등. 모두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所蔵石刻拓本資料 에의함. 244 한일문화재논집 Ⅲ

245 네 번째 글자( )의 자형은 吏 가 가장 가까우나, 吏 는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는 유사한 예 가 없다(능산리 출토 목간에 1례가 있다. [陵] ). 使 의 亻(사람인변) 을 생략한 것으로 볼 지, 夷 의 변형으로 볼지 등, 몇 가지 가능성이 있어 하나로는 결정하기 힘들다. 또한 橋本繁 釋文 도 세 번째 글자를 奈, 네 번째 글자를 로 한다. 147호 목간 呵盖奈 利稗 16) 167호 목간 及伐城(癸)奴稗石 네 번째 글자( )는 상부에 일부 겹쳐 쓴 부분이 있다. 문자를 일부 오기하였으나 지우지 않 고 맞는 필획을 겹쳐 쓴 것일 것이다. 필발머리 의 문자임이 확실하나, 하부의 자형은 足 의 異體字에 가깝다. 癸 보다 오히려 登 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橋本繁 釋文 도 登 으로 한다. 167호 목간 及伐城登奴稗石 이상에서 기술한 해독 정정안은, 어디까지나 문자의 자형에 의한 것으로, 반드시 내용 문맥을 가미 한 것은 아니다. 한국사의 상식에 반하는 것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점 용서를 바라지만 선명한 적외선 사진을 얻어, 그 위에 釋文의 검토가 가능해진 점은 이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슷한 예의 비교 검토에 의해 읽혀지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점도 분명해 졌다고 생각한다. Ⅳ. 출토 문자자료로서의 목간의 해독-맺음말을 대신하여목간은 고고유물로, 유적이나 출토상황을 빼고서는 그 정보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자정보는 목간이 가진 정보의 일부이며, 목간의 해독은 본래 유적이나 출토상황의 정보를 충분히 답습한 후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고고자료로서의 속성이 있어야 처음으로 문자자료로서의 유효성도 발휘될 수 있다. 출토 문자자료의 문자는, 문자로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 고고자료로서 의 목제품(목간도 넓은 의미에서는 목제품의 일종이다) 나름의, 토기 나름에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것 으로, 물건(혹은 유물)으로서의 관찰도 문자의 해독에서의 불가결한 작업인 것이다. 거기에 목간의 경우 특수한 사정으로 자료 그 자체의 취약성이라는 요인이 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출토되는 목간은 수분에 지켜지면서 적외선과 산소로부터 차단된 상태로 부식의 진행의 늦춰진 결과,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취약한 유물이다. 이를 일상적으로 일반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조 성산산성 출토 목간 소고 245

246 사자는자료로서의공개와함께이를후세에보존하여전해줘야한다는막중한임무를띤다. 또한출토문자자료에는묵흔이옅거나문자의일부가떨어지는등기본적으로불완전한상태의자료라는또하나의요인이있다. 이를위해문자를포함해정보를꺼내기위해서는충분한관찰이필요한것이다. 이러한자료로서의다양한특성에서, 목간의해독에대해서는유물그자체를관찰할수있는입장에있는조사자가최종적인책임을지지않으면안된다. 그것은역으로조사기관에부과된임무이기도하다. 일반인의눈에일상적으로는접할수없는자료야말로끄집어낼수있는최대한의정보를끄집어낸후, 이를바르고남김없이일반에공개할무거운책임을지고있는것이다. 따라서해독그자체, 그에이르는경위는어찌되었든조사기관이주체가되어행하지않으면안될것이다. 해독은문자가출토문자자료로서가지고있는정보의일부인이상, 이렇게읽어야만한다는이용자의예측에의해만들어져야하는것은아니다. 해독은자료로서의속성결정수속중에행해져야할작업으로, 어디까지나조사기관이책임을져야할것으로우리는판단하고있다. 물론조사기관에서해독의근거는오픈되어야할것이며, 객관적인증거로사진제시가불가결하다. 하지만특히묵흔이열화 ( 劣化 ) 되어불완전한경우에는객관적인증거가될사진을제시할수없는경우도있다. 조사자의관찰결과를남김없이사진에표현하는것이기술적으로불가능한경우도있기때문이다. 사진에서보이는것만이유물의정보인것만은아니다. 이러한정보는처음부터제시하지않는것도또하나의식견이될것이다. 그렇게되면이야기는참으로간단하다. 하지만만약사진에찍히지않아도관찰되었던정보를지워버릴수는없다. 이는관찰자의양심이라고말해도좋을것이다. 이를어느정도의확실함으로전할것인지조사자는다양한정보를가미한후에고뇌의판단을행하여해석문으로공표하는것이다. 이것이조사기관의책임이며, 그판단을신뢰받을수있도록매일노력하는것또한조사기관의책무라고생각한다. 해석문은조사기관이책임을져야한다고생각하는것은이러한이유이다. 따라서사진이공표된이상, 조사기관이공표한해석문을최대한존중한후, 그럼에도그독해에의심을보이는것은자유이며많은논의는있어도좋다고생각한다. 이렇게읽힌다면이와같은역사가그려진다는가설의제시까지가거절된다는것은아니지만, 거기에는일정한절도가요구된다고생각된다. 조사기관이종합적인검토를한후공표한해석문을머리에서부터부정하는것과같은논설은엄중하게삼가야할것이라고생각한다. 또한정당하지않은해석문이혼자걸어다니는것은금해야할것이며, 논의를거친최종적인판단은조사기관에위임해야만하는것이다. 이러한기본적인이념에비추었을때, 본고는이를크게일탈하고있다는비난을피할수없을지도모른다. 본래우리가말참견할것은아닌것은충분히인지하고있다. 하지만한국의목간해독은반드 246 한일문화재논집 Ⅲ

247 시一義的으로정해져있지않으며, 많은연구자의의견을병기하는형태로이루어져왔던실태가있다. 특히성산산성출토목간의경우 6세기로거슬러올라갈지도모르는올라가는시기의, 게다가특이한자형을많이쓰고있는점에서해독을결정하기까지많은시간을필요로하게되었다. 하지만출토점수가점점증가하면서비슷한예가증가하였고, 한국목간자전 과같은잘만들어진자전도간행되게된지금, 한국목간연구는필시이러한百家爭鳴의시대에서기관이책임을갖고공표하는시대로의이행기에도달해있는것은아닌가라고생각된다. 본고를쓸수있었던것도, 선명한사진을촬영할수있게해주었기때문이다. 공공연구의일환으로솔직한의견을논할수있도록해주신것에서, 그에공헌이된다면좋겠다고생각하며감히케이스스터디로서글을썼다. 의미가있는곳을참작하여취해주신다면다행이다. 끝으로귀중한자료의촬영을허가해주신, 대한민국국립문화재연구소당국에대해거듭심심한감사의마음을표한다. 도면출전 도면 1~4 성산산성출토목간. 모두栗山雅夫촬영. 성산산성출토목간소고 247

248 箱崎和久 鈴木智大 海野聡하코자키카즈히사 스즈키토모히로 운노사토시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Ⅰ. 머리말 Ⅱ. 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Ⅲ. 일본의고대사원금당 Ⅳ. 한반도고대사원금당의특징 Ⅴ. 맺음말 요약문 동아시아고대사원의금당유적에대해서는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10 년에간행한 동아시아고대사지비교연구 Ⅱ 금당지편 에집성되어있다. 본고에서는이책을기본데이터로삼고, 8세기일본의금당유적이나현존건축을추가하여건물규모, 기둥배치를중심으로하는평면형식, 기단규모, 하층기단위에세운초석의성격등에대해분석하였다. 적어도백제 신라의금당평면은桁行 ( 도리칸 ) 5칸 梁行 ( 보칸 ) 3칸이주류로보인다. 일본 7세기의금당은桁行 5칸 梁行 4칸이주류로, 8세기가되면桁行 7칸 梁行 4칸이일반적이되며, 柱間寸法 ( 기둥간수치 ) 도커진다. 梁行을 4칸으로하는한반도의금당은백제미륵사나백제왕궁리폐사, 신라황룡사에서보이며, 이들은각각일본의四天王寺 ( 시텐노우지 ), 法隆寺 ( 호우류우지 ), 文武朝大官大寺 ( 문무쵸우다이칸다이지 ) 의금당과공통점이있다. 일본으로전해진건축문화가백제로부터였다면이들사원이소재하는익산지역을원류로볼수있고, 신라였다면황룡사가규범이되었을가능성이있다. 건물外周의기둥에서기단의삐짐이판명된사례에서는, 한반도의금당은비교적복잡한組物 ( 쿠미모노, 공포 [ 栱包 ]) 를사용한상부구조를가졌다고상정할수있다. 한반도의예가비교적많은하층기단위의礎石 ( 遮陽間 [ 차양칸 ] 의초석 ) 에올린상부구조는裳階 ( 부연 ) 이었을가능성이높으며, 신라사천왕사나일본法隆寺의예는창건이후의改修에의한것이다. 8세기일본에서는전보다부연을가진금당이만들어지지만, 그이전부연의상태를고려했을때, 遮陽間의초석과그에동반하는기단구성에대해서는좀더검토할필요가있다. 일본의山田寺 ( 야마다데라 ) 에서보이는것과같은특이한기둥배치를한예는, 한반도에서는현재까지는유사한예가없어원류를알수없다. 주제어 : 고대, 금당, 평면, 柱間寸法, 부연, 遮陽間 248 한일문화재논집 Ⅲ

249 일본에서 본 한반도의 고대사원금당 箱崎和久* 鈴木智大* 海野 聡 하코자키 카즈히사 스즈키 토모히로 운노 사토시 Ⅰ. 머리말 한국에서는 최근 고대사원의 발굴조사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에 서 최초의 본격적 사원은 飛鳥寺(아스카데라)[奈良県 明日香村(아스카무라)]이나, 그 창건에 있어서는 백제에서 舍利나 승려만이 아닌, 寺工이나 露盤博士, 瓦博士 등의 工人이 도래하였다. 그보다도 이전, 일본에의 불교의 전래에도 백제가 관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백제, 크게 보면 한반도의 기술이 6세기 말에서 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지고, 그 후 일본의 건축이나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천황이 발원한 사원은, 639년 舒明(죠메이)천황이 발원하여 九重塔을 건립한 百 濟大寺(구다라오오데라)인데, 그 유적은 1997년에 발견된 吉備池廃寺(키비이케하이지)가 유력하다. 이 창견연대에 주목하면 신라 황룡사는 645년에 탑을 건립한 것이 삼국사기 나 목탑의 刹柱本記 등에서 보이며, 백제 미륵사에서는 서탑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舍利奉迎記에 639년의 연호가 보여, 백제, 신 라, 일본에서 거의 동시기에 국가의 위신을 건 大寺院의 조영이 행해졌다. 이러한 발견은 동아시아 문 화의 동시대성을 더 강하게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사상과 동반된 기 술도, 동시에 전해졌다고 판단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法隆寺 西院의 건축군은 이후의 현존 건축과 비교해 특이한 양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그 원류에 대해서는, 제 요소는 각 시대의 중국에 있으면서, 한반도에서 뒤섞인 것이 일본으로 전해졌 다고 생각되고 있다.1) 그렇다고 한다면 한반도의 건축에서 法隆寺의 건축양식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건 축이 당연히 발견될 것이고, 그것이 판명되면 기술의 동시대성이라는 점도 동시에 증명이 가능하게 된다.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1) 関口欣也, 1976, 朝鮮三国時代建築と法隆寺金堂の様式的系統, 日本建築の特質, 太田博太郎博士還暦記念論文 集, 中央公論美術出版. 일본에서 본 한반도의 고대사원금당 249

250 하지만현존하는건축에의한직접비교는불가능하다. 따라서본고에서는 6~8세기의일본과한반도의사원금당의유적에대해현존건축과함께비교검토하고자한다. 금당을선택한것은사원안에서중요한건물이면서특징이잘나타난다고판단되는점, 후술할것과같이한국에서집성작업이진행되고있는점등에의해서이다. 또한탑에관해서는선행연구가있다. 2) 최근한국의고대사원의발굴성과는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를중심으로한집성작업이이루어지고있는데, 금당에대해서는 동아시아고대사지비교연구 Ⅱ 금당지편 3) ( 이하 금당편 ) 에정리되어있다. 여기에는일본의발굴유구도집성되어있으며, 한국의건축사연구자에의한본고와유사한관점에서의논고도있다. 4) 또한 2013 년에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출판한 백제사찰연구 5) 에도, 일련의집성작업에서얻어진연구에서백제의사원이대상이긴하지만, 9명의연구자에의한논고가있다. 이러한한국의활발한연구배경을보면한국내에서이러한종류의연구는막대한수에이르는듯하나, 한국의발굴조사성과에대해서는기본적으로 금당편 을참고하였고, 필요에따라발굴조사보고서를찾아보는것으로한다. 이하본고에서는우선한반도금당의특징에대해서발굴성과에서의분석성과를기술하고, 이어서일본의금당에대해같은관점으로분석한다. 그후이들을비교검토하여한반도금당의특징에대해논하고자한다. 다만일본의발굴유구는집성이충분이이루어지지않았고, 금당편 에서는 7세기를중심으로한일본의유구를수집하고있으나, 이시기의기단규모와기둥배치가판명된사원의수는적다. 또한일본의사례에서는오히려 8세기의유구가조사사례가많으며그상세도판명되어있다. 따라서여기서는 8세기의주요유구를포함하여고찰하는것으로하였다. 집필에있어서는제 2장의한반도금당에대해서는鈴木智大가, 제 3장의일본금당에대해서는海野聡이, 그이외를箱崎和久가집필하여, 3자의협의를거쳐논고를완성하였다. 또한海野의집필분에는 JSPS 科研費 ( 두건의연구대표자海野聡 ) 의연구성과일부가포함되어있다. 2) 箱崎和久, 韓国版은 2010, 日本語版은 2011, 日本からみた韓半島の古代木塔址, 日韓文化財論叢 Ⅱ, 韓国国立文化財研究所 奈良文化財研究所. 3) 国立扶余文化財研究所, 2010, 東アジア古代寺址比較研究 Ⅱ 金堂址編, 国立扶余文化財研究所学術研究叢書第 54 輯. 4) 金堂編 의고찰에는 基壇 礎石 平面 이기재되어있는데, 각각의저자는명기되어있지않다. 이세고찰의저자는韓旭 趙恩慶 李恩善 朱東訓의네명이다. 또한 金堂編 에는논고로李炳鎬 東アジアの古代仏教寺院と仏殿について, 鄭子永 百済寺院の伽藍配置と展開過程についての考察 - 塔 金堂址を中心に -, 箱崎和久 日本における7 世紀の寺院金堂跡とその諸問題, 何利群 北朝 ~ 隋陶磁器仏教寺院の考古学的考察 - 塔, 殿, 院に関する変遷を中心とする - 가기재되어있다. 또한 金堂編 은奈良文化財研究所가 2015 年度에일본어로번역하여출판할예정이다. 5) 国立扶余文化財研究所, 2013, 百済寺刹研究. 일본어판은 2014 년에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에의해번역 간행되었다. 본고와관련된논문으로는韓旭 百済寺院金堂跡の平面と構造 가기재되어있다. 250 한일문화재논집 Ⅲ

251 마지막으로 표기에 대해서 말해두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유구를 미륵사지 西金堂址나 황룡사 中金 堂址와 같이 址 를 붙여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도 山田寺 金堂跡과 같이 유적에는 跡 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자칫하면 山田寺 金堂跡의 조영에 있어서는 이라고 하는, 유적을 조영 하는 작업인 것과 같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山田寺 金 堂跡에서 판단되는 山田寺 金堂 그 자체의 조영 양상이다. 柱間수치 등이나 基壇外装에 대해서도 유 적에서 판명되는 事象(사상 혹은 현상)이긴 하지만, 그 건물이 존속했던 시기의 양상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문맥상 유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址와 跡을 생략하여 표기한다. 이 러면 法隆寺 금당 외의 현존 건축과 구별하기 힘들어 질 수도 있으나, 현존 건축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海竜王寺(카이류오우지) 西金堂 이나 東大寺 法華堂(현존) 과 같이 현존 건축임을 알 수 있도록 표기 하고자 한다. 또한 한반도의 상오리사지나 능산리사지 등, 지명+사지의 명칭을 가진 유적에 대해서는, 상오리폐사나 능산리폐사와 같이 지명+폐사의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柱間수치 등의 수치는 금당편 에 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으나, 소수점 이하 첫째자리까지 표기하였다. 이를 위해 예를 들어 건물 桁行의 全長이 20.0m로 柱間 3칸이 等間일 경우, 柱間수치는 6.7m로 표기하였으나, 이 柱間수치에 3을 곱했 을 경우 건물 전장은 20.0m가 되지 않고 만다. 각자의 판단을 요한다. Ⅱ. 한반도의 고대 사원금당 우선은 금당편 에서 한반도 금당의 평면규모, 기단규모, 기단 주위의 초석이라는 3개의 관점에 대 해서 사례를 정리해 둔다(표 1 도면 5-8). 여기서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다른 왕조와의 관계가 조금 엷 기 때문에 우선 모아서 개략을 기술하는 것으로 한다. 1. 고구려의 금당 건물규모와 평면형식 총 8례 중 기둥배치가 판명된 3례는, 모두 桁行 3칸 梁行 2칸의 身舎(내주)만 있는 형식이다. 건물규모는 유사하며, 柱間수치는 桁行이 4.8~6.0m, 평균 5.5m, 梁行은 3.8~4.1m, 평 균 3.9m이다. 이 柱間수치는 후술할 한반도의 다른 왕조나 7세기의 일본에 비교하면, 桁行은 단순히 크 며 梁行은 내주梁行을 2칸으로 하는 예와 비교했을 때, 큰 부류에 속한다. 이에 따라 건물의 규모(實長) 는 다른 왕조의 桁行 5칸, 즉 四面행랑을 가진 금당과 같은 정도이다. 이는 다른 왕조의 금당이 고구려 일본에서 본 한반도의 고대사원금당 251

252 금당의발전형으로그외측에행랑을부가한것이아닌, 일정한건물규모의금당내부를내주와행랑으로분할하고건물의형상이나외관을정돈했다는해석이가능하다. 桁行兩脇間과梁行의柱間수치, 즉모서리간의평면 桁行脇間 / 梁行 의값은 1.26~1.44 로장방형을띤다. 따라서이들금당은일본건축사의상식에대입하면, 모서리木 ( 기둥 ) 을쓰지않은切妻造 ( 지붕최정부의용마루에서지상을향해, 두개의경사면이책을엎어놓은것과같은山모양의형상을한지붕 ) 의지붕형식으로판단된다. 기단규모기단규모가판명된 8례 ( 상오리폐사는동 서금당을 2례로한다 ) 를보면, 청암리폐사중금당이다른예보다도한단계더크며, 이를제외하면桁行이 17.8~25.8m, 평균 22.1m, 梁行이 9.1~14.8m, 평균 12.9m 이다. 기둥배치가판명된 3 례의기단규모는평균이桁行 20.2m, 梁行 12.1m 로, 기단규모가판명된 7례보다약간작지만, 거의 비슷한정도로보아도좋을듯하다. 따라서이들 의건물규모는모두桁行 3 칸 梁行 2 칸으로생각 사진 1. 川原寺복원모형 된다. 청암리폐사중금당은다른 7례의평균과비교해도桁行이 10.0m, 梁行이 5.9m 크며, 기둥배치가판명된 3례의柱間수치를감안하면, 청암리폐사중금당은桁行 5칸 梁行 3칸의평면으로추측된다. 이는중금당과동금당, 서금당이규모나意匠에다름이있거나하는점에관련된다. 금당이복수로존재할경우, 중금당이가장격식이높다고생각되는데, 적어도평면형식이같거나혹은유사한예로고구려정릉사, 백제미륵사, 신라분황사, 일본飛鳥寺, 川原寺 ( 카와라데라 ) 가있으며, 중금당의규모가큰예로고구려청암사폐사, 신라황룡사, 일본興福寺가있다. 6) 평면형식이같거나유사한규모에서도일본飛鳥寺나川原寺에서는 2중지붕을가진건물로중금당의격식을높게추정하고있는데 ( 도면 1), 이러한상정이타당한지앞으로실증적인증명을할필요가있다. 기단의삐짐과상부구조건물外周의기둥끝에서기단의가장자리까지의 기단의삐짐 은, 토성리폐사가약 0.7m 로대단히작지만, 정릉사동 서금당에서는桁行 梁行모두약 2.8m 로비교적크다. 건물규모에따라처마의삐짐도일정한대소가있는부재의실제길이나단면적등의목재로서의수치적한계를고려하면, 공포를가진형식을상정해도좋을지모르겠다. 일본에서는切妻造의건축은시대가떨어져도앞으로나오는공포를사용하지않는것이통례이다. 하지만한국에서는봉정사극락전, 수 6) 興福寺는 8세기에창건된것으로화재와재건이반복되어, 현존하는동금당은창건당시의규모 형식을유지하면서 1421 년에재건된건물이다. 중금당은이보다규모가크며, 2중의지붕을가진것등高位化 ( 후술 ) 가의도되어있다. 252 한일문화재논집 Ⅲ

253 덕사대웅전, 강릉客舍門등, 국내최고급의건축에서앞으로삐치는공포를쓴切妻造의건축이있으 며, 그후시대의건축에서도드물지않다. 고구려의유구와는평면형식도다르고규모도작으며, 시대 도동떨어져있지만, 이러한구조 형식이오랜형태를전하고있을가능성도부정할수없다. 2. 평면규모 백제총 18례중기둥배치가판명된것은 8례이다. 모두桁行은 5칸으로, 梁行은미륵사의중 동 서금당과왕궁리폐사의 4례가 4칸, 다른 4례는 3칸이다. 왕궁리폐사의桁行 3칸 梁行 2칸 ( 내주 )+ 四面행랑의평면형식이일본에서는일반적이며, 미륵사중 동 서금당의용마루를따라기둥을세우는總柱形式은, 한반도의다른왕조에서도예가없는특이한평면형식이다. 7) 그외의桁行 5칸 梁行 3칸의건물은總柱形式일가능성도생각할수있으나, 梁行중앙칸이넓은것에서, 桁行중앙 3칸 梁行중앙 1칸이내주로, 그네주변에행랑을가진건물로생각하는것이타당할것이다. 梁行을 4칸으로하는 4례 2사원은 7세기에익산지역에건립된사원으로, 시대적 지역적양상이있는것으로생각된다. 이를제외하면백제에서는桁行 5칸 梁行 3칸의규모가주류로보인다. 건물규모는桁行이 11.9m( 傳천왕사 )~22.6m( 동남리폐사 ) 로평균이 16.5m, 梁行은 8.1m( 傳천왕사 )~14.0m( 미륵사중금당 ) 이며평균이 11.0m 이다. 桁行은 5칸으로일정하므로 梁行총길이 / 桁行총길이 로보면, 梁行 3칸의것은 0.60~0.68, 梁行 4칸의것은 0.63~0.72 가된다. 이수치에서는梁行기둥칸수가증가해도실제길이가크게확대되는것은아님을알수있다. 다만梁行 3칸보다 4칸쪽이약간큰경향이확인되며, 이는내주梁行기둥칸의확대경향을나타내주는것일것이다. 다음으로柱間수치를검토해보자. 桁行은중앙 3칸을거의等間으로하며, 梁行은중앙 1칸혹은 2 칸을兩脇間이상으로한다. 梁行전체에대한내주의비율은梁行 3칸의경우의제일큰것이동남리폐사로, 梁行총길이 13.6m 에대해내주梁行 5.9m 가 43% 에해당한다. 梁行 4칸의경우는최소로해도미륵사동 서금당의 50% 이며, 미륵사중금당과왕궁리폐사는이를넘는다. 즉내주梁行의총길이 7) 백제미륵사의세금당에는잘만들어진초석이평활한초석 ( 보고서에서는기반석으로부르고있다 ) 의위에올려진특이한형식으로, 기단의높이를감안하면, 잘만들어진초석의頂部가기단상면에나타난다. 중금당과동 서금당에서도기반석을확인했으나, 잘만들어진초석은내주내부의용마루위치의각 2개소에서는발견되지않았다. 용마루자리에도기반석이다른것과같이놓여있는것으로보아, 거기에잘만들어진초석이놓였을가능성이있다. 미륵사에서는토방 ( 흙마루 ) 아닌마루를깔았을것으로판단되고있으며, 용마루자리의초석은마루를지탱하는기둥을지지했을가능성을부정할수없다. 다만그렇다면다른기둥보다약간좁고좋은것이었을텐데, 용마루의기반석의크기는다른기반석과손색이없다. 용마루를지탱하는기둥으로판단할것인가, 보를 1칸마다놓았던것인가결정할수없으나, 상부구조와관련되어있다고했을때, 약간특이했을가능성은부정할수없을것이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53

254 가행랑의柱間수치의합계이상이되는경우에梁行을 4칸으로하는것을엿볼수있으며, 내주梁行의확대와함께내주를 2칸으로나누었다고추정할수있는것이다. 내주의柱間수치실제길이는桁行은 2.6m( 傳천왕사 )~5.0m( 동남리폐사 ) 로평균 3.7m, 梁行은 1칸의경우와 2칸의경우가있으므로, 내주梁行총길이를보면 4.2m( 傳천왕사 )~7.4m( 미륵사중금당 ) 로평균은 5.5m 이다. 내주梁行 1칸의최대치는 5.9m( 동남리폐사 능산리폐사 ) 이다. 행랑의柱間수치 ( 행랑의삐짐 ) 는桁行방향과梁行방향에서모두거의같은수치이다. 이로인해지붕은모서리木을가진入母屋造 ( 상부에는切妻造, 하부에는寄棟造를한구조 ) 혹은寄棟造 ( 네방향에경사진지붕면을가진구조 ) 로판단된다. 실제수치는 1.9m( 傳천왕사 )~3.9m( 동남리폐사 ), 평균은 2.7m 로, 모두내주의柱間수치를넘지않는다. 또한행랑의삐짐과내주의柱間수치와의비는, 桁行 행랑 ( 桁行端間 )/ 桁行兩脇間 은 0.50( 왕궁리폐사 )~0.91( 성주사제3차금당 ), 梁行 행랑 ( 梁行兩端間 )/ 梁行中央間 은梁行이 3칸과 4칸의예가있긴하지만, 0.45( 傳천왕사 : 梁行 3칸 )~1.00( 미륵사동 서금당 : 梁行 4칸 ) 의값을갖는다. 桁行 梁行모두 0.75 를밑도는것은왕궁리폐사뿐이다. 이중기단은 7례가있으며, 傳천왕사는하층기단위에초석을놓는다. 하층기단위의초석 ( 遮陽間 8) ) 의삐짐은 1.9~2.0m 로, 행랑의삐짐 1.9~2.0m 와거의같은수치이다. 신라기둥배치가판명된 6례중, 황룡사가 3시기의동금당등 5례를점하며, 거기에桁行규모가 7 칸이나 9칸을취하는등특이하다. 황룡사를제외하면사천왕사만남기에, 사천왕사는통일신라사원과함께검토하도록하고, 여기서는황룡사의여러금당에대해서생각해본다. 중금당을桁行 9칸, 동 서금당을桁行 7칸으로하며, 梁行은중 동금당을 4칸, 서금당을 3칸으로한다. 桁行 9칸의예는다른왕조의사원에는없으며, 중금당은한반도에서도격이다른양상을갖는다. 柱間수치는중금당은桁行 梁行, 거기에내주 행랑모두 5.0m 의등칸이며, 대단이단순하다. 동금당은제1 2차가桁行중앙칸을 4.4m 전후, 兩脇間을 4.7m 전후로하며, 桁行중앙칸을좁게하는것이특징이다. 제3차에이르러중앙칸을 4.7m, 兩脇間을 4.6m 로하며, 중앙칸을크게하는일반적인평면을하였다. 梁行은내주의중앙 2칸을각각 3.6m 전후, 행랑의삐짐을 3.9~4.1m 로하고, 내주梁行보다행랑의삐짐이큰특이한평면이된다. 제3차서금당은내주梁行을 1칸 7.1m 로하고, 행랑을 4.0m 로하였다. 그내주梁行의규모는 3시기의동금당의내주梁行총길이도거의같다. 즉같은내주梁行을서금당에서는 1칸으로, 동금당에서는 2칸으로하여동서의금당에대응을달리한듯하다. 이양상 8) 하층기단의초석柱筋 ( 기둥줄기 ) 에대해서는, 이하한국의호칭을따라차양칸 ( 遮陽間 ) 으로가칭한다. 상정되는차양칸의성격 기능으로는四周에지붕을돌리는裳階 ( 부연 ), 마루를지지하는床束, 쳐진처마를지지하는軒支柱등이있다. 또한모든건물의차양칸이동일한성격이나기능인지에대해서도증명되지않았다. 254 한일문화재논집 Ⅲ

255 은동금당이행랑의삐짐과의관계를고려치않고단순히내주를 2칸으로나눈것으로, 백제미륵사의동 서금당이행랑의삐짐을내주梁行보다크지않게한수법보다도오래된것으로생각된다. 행랑의삐짐은모든금당의桁行 梁行모두같던지근사치를하고있기때문에, 入母屋造이거나寄棟造의지붕으로생각해도좋을듯하다. 중금당과제1차동금당이차양칸을갖고있지만, 차양칸의삐짐은중금당에서는桁行 梁行모두 3.6m, 제1차동금당에서는 2.6m 전후이다. 이상황룡사의 3금당은동 서금당의내주梁行길이가약간작으며, 내주梁行 1칸의경향을남기고있음에반해, 중금당은기둥칸수만이아닌柱間수치도크게하며비교적단순한평면이면서새로운설계이념에서만들어진금당으로판단된다. 통일신라이후앞서기술한것처럼, 여기서는신라사천왕사를포함해고려하고자한다. 기둥배치가판명된것은 5례로, 그중 3례는桁行 5칸 梁行 3칸, 2례는桁行 3칸 梁行 3칸이다. 기둥배치를볼때桁行 5칸 梁行 3칸중사천왕사와감은사는 3칸 1 칸의내주의四周에행랑을돌린평면으로생각되나, 천관사는모서리칸이桁行과梁行에서다르기때문에, 5칸 1 칸의내주의正背面에행랑을가진평면으로생각된다. 桁行 3칸 梁行 3칸의 2례도모서리칸이정방형이아니므로, 桁行 3칸 梁行 1칸의내주正背面에행랑을가진평면으로해석가능하다. 이들예는모두내주梁行이 1칸이라는점에서공통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는보이지않는평면형식이이시기에나타났음을알수있다. 건물의전체규모는四面행랑의사천왕사가桁行 17.8m 梁行 11.4m, 二面행랑의천관사가桁行 17.5m 梁行 10.1m 로四面행랑과二面행랑에서명확한차이는없다. 한편桁行 3칸 梁行 3칸의건물규모는간월사가 m, 지곡사가 m 로梁行은모두 3칸이나桁行 5칸의금당보다梁行전체는작다. 桁行 5칸의사천왕사나감은사에서는내주桁行 3칸의규모가 10.7m 전후로, 지곡사와거의차이가없다. 여기에서四面행랑의건물에서梁行을크게만드는필요가있었던것같음을알수있다. 柱間수치는사천왕사는桁行 5칸을 3.6m 등칸으로하나, 행랑의삐짐을桁行의柱間수치와같게하는수법은황룡사중금당으로이어진다. 감은사의행랑의삐짐은내주桁行의 71%, 내주梁行의 63% 로, 이규모의금당에서는백제왕궁리폐사다음으로작다. 二面행랑의천관사 간월사 지곡사는, 천관사가내주梁行에대한행랑의삐짐이작은것에반해, 다른두절은비교적크다. 3. 기단규모 백제기단규모가판명된것은 18 례이다. 여기서는왕흥사와같은창건금당과재건금당이나, 용 정리폐사와같은제 1 2 차금당도각각 2 례로계산하였다. 기단규모의값은桁行이 14.1m( 부소산폐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55

256 사 )~32.2m( 용정리폐사 ), 평균 22.8m, 梁行이 11.1m( 부소산폐사 )~23.6m( 제석사 ), 평균 16.9m 이다. 이값은이중기단의경우는하층기단의규모를채용하였다. 기둥배치가판명된 8례의기단규모는桁行이 17.3m( 미륵사동금당 )~30.3m( 동남리폐사 ), 梁行이 13.8m( 미륵사동금당 )~21.2m( 동남리폐사 ), 기단의종횡비 桁行/ 梁行 는 1.22( 傳천왕사 )~1.43( 동남리폐사 ) 이다. 이들은모두桁行 5칸이나梁行은 3칸인것과 4칸인것이있다. 기둥배치를알수없는금당의규모는기둥배치가판명된금당내주의柱間수치 (2.6~5.0m) 를감안하면, 桁行을 3칸이나 7칸으로했다고보기는어려우며, 역시桁行은 5칸인것으로보인다. 한편梁行은앞절에서검토한바와같이梁行을 4칸으로하는것은백제에서는 7세기창건의익산지역사원으로, 이역시익산에소재하는제석사를제외하면梁行은 3칸으로볼수있을것이다. 제석사는梁行의기단규모가최대치를보이며, 梁行 3칸의동남리폐사보다도 2.4m 크다. 그렇기에역시梁行 4칸의가능성이높다고생각된다. 이상에서백제의금당은桁行 5칸 梁行 3칸의평면이주류이며, 익산지역의사원이梁行을 4칸으로한것으로판단된다. 이중기단을가진금당은 5례이다. 기단규모가큰제석사에서비교적작은傳천왕사까지이중기단을갖추고있으며, 기단규모와기단형식의관련성은거의없다. 하층기단의폭 ( 상층기단에서하층기단의삐짐 ) 은, 기단규모가작은傳천왕사가가장넓은약 1.4m 로그외는 1.0m 이하이다. 傳천왕사는하층기단위에차양칸의초석을놓았으며, 하층기단의폭은차양칸초석의유무와관련되는것으로보인다. 기단의삐짐 ( 이중기단의경우는건물의행랑柱筋에서하층기단가장자리까지의삐짐 ) 은, 모두桁行방향과梁行방향의삐짐이균등혹은근사치이다. 그값의범위는 2.0m 전후 ( 왕궁리폐사 성주사제3 차금당 )~3.9m( 동남리폐사 ) 로, 2.4m 전후 ( 능산리폐사 미륵사동금당 ) 와 3.0m 전후 ( 傳천왕사 미륵사중금당및서금당 ) 으로집약된다. 행랑의삐짐과의관계 기단의삐짐 / 행랑의삐짐 에서는 0.68( 성주사제3차금당 )~1.64( 傳천왕사금당 ) 이나, 傳천왕사는돌출되어큰편이다. 이는차양칸의초석을가진것과관련될것이다. 즉傳천왕사에서는상층기단위의하부구조에서하층기단바깥까지처마를늘이지않고, 차양칸에걸친지붕이하층기단을덮었을것으로추정된다. 신라기단규모가판명된금당은 8례이다. 이중황룡사의 4례는桁行 9칸의중금당과桁行 7칸의동금당으로기단규모도크다. 또한분황사가 3례를점하며그외가사천왕사이다. 분황사와사천왕사의 4례의기단규모평균은桁行이 22.9m, 梁行이 17.5m 로, 백제의 18례와桁行은거의같으며, 梁行이 0.6m 크다. 따라서분황사의 3례도桁行은 5칸으로보아도좋을것이다. 기단의종횡비 桁行/ 梁行 을보면, 桁行이큰황룡사의두금당 4례는당연히세장한평면을보인다. 분황사중금당은 1.73 으로실제길이도桁行이크고梁行이작은특징이있다. 분황사동 서금당 256 한일문화재논집 Ⅲ

257 은桁行은작지만梁行은사천왕사와동등한규모로, 종횡비는 1.12 로정방형에가까운값이다. 중금당과동 서금당을가진황룡사나백제미륵사에서는건물규모만이아닌桁行 梁行의柱間수치도중금당이동 서금당보다크다. 이를참고하면중금당은桁行 5칸 梁行 3칸, 동 서금당은桁行 5칸 梁行 4칸으로추정할수있다. 이중기단을가진것은황룡사의중금당과제1차동금당, 사천왕사의 3례로, 모두차양칸의초석을갖는다. 백제의경우와같이기단의규모와형식간의관련은없어보인다. 하층기단의폭은황룡사의중금당이약 2.9m, 동금당이약 2.0m, 사천왕사가약 1.8m 로모두백제의예와비교해크다. 이는역시이 3례가차양칸을가지고있기때문일것이다. 기단의삐짐은桁行 梁行방향모두같은정도이다. 황룡사제2차동금당이약 1.6m 로짧으나, 이는제1차동금당의상층기단을전용하였기때문일것이다. 이상에서기단의삐짐이판명된 5례는入母屋造혹은寄棟造의지붕형식으로생각해도좋을듯하다. 통일신라이후통일신라시대이후의사원에서기단규모가판명된금당은 6례이다. 9) 앞절에서지적한것과같이, 二面행랑에서는四面행랑의경우보다梁行규모를작게하는듯하며, < 표2> 를볼때그경향은기단규모에서도확인할수있다. 기단의종횡비 桁行/ 梁行 는천관사가 1.75 로횡장하나이는梁行, 그중에서도正背面행랑의삐짐이작음에의한것이다. 桁行 5칸에四面행랑의감은사, 桁行 3 칸에二面행랑인간월사와지곡사는모두 1.30 전후의값을한다. 백제 신라의예로볼때, 감은사의값은표준적이다. 한편桁行 3칸 + 二面행랑의금당이梁行이 3칸임에도불구하고, 桁行 5칸 + 四面행랑의금당과동등한값을보이는것은, 역시梁行규모가작은것에의한것으로판단된다. 천군동폐사와고선사는모두 1.12 를보이며, 10) 신라분황사동 서금당과함께한반도에서최소치를보인다. 이중기단을가진것은감은사로, 하층기단위에는초석을놓지않으며, 하층기단의폭은 0.7m 전후이다. 초석을놓지않은예로서그폭은적당하다고본다. 기단의삐짐이판명된 4례를볼때, 감은사는약 4.3m 로한반도에서도황룡사중금당다음으로크며, 행랑의삐짐 2.5m 에대해서도 1.72 의값을하여, 한반도의금당에서는최대치를한다. 천관사는 9) 천군동폐사의기단규모는 금당편 에서는이중기단으로상층 하층기단규모가쓰여있으나, 수치는황룡사중금당의것과완전같아명백한誤記이다. 참고문헌인 昭和 13 年度古蹟調査報告 ( 朝鮮古蹟研究会, 1940) 을보면, 기단규모는桁行 64.6 唐尺 梁行 57.8 唐尺 ( 唐尺 = 現尺 0.98) 이라고기록되어있다. 이를미터로환산하면桁行 19.2m 梁行 17.2m 이된다. 또한이문헌에서는기둥배치를桁行 6칸 梁行 5칸은복원하고있다. 10) 천군동폐사와고선사의기둥배치를생각했을때, 桁行 5칸 梁行 4칸의규모라고생각되지만기단의삐짐내지는행랑의삐짐이桁行과梁行에서같지않은평면으로보는것이무리가없을것이다. 즉천관사와같이正背面二面행랑의건물로보는것이자연스럽다고생각된다. 다만고선사에서는검출된초석을기준으로생각했을때, 이案과같이는되지않는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57

258 기단의삐짐이桁行약 0.3m, 梁行약 0.1m 로대단히작다. 금당편 에수록된도면을보면초석이상 층기단에들어가있는것처럼보인다. 대체로二面행랑인 3 례의처마의삐짐은약간작으며, 앞으로나 오지않은공포를사용한상부구조로추정된다. 4. 기단주변의초석 하층기단위의초석앞절에서기술한것과같이이중기단에서하층기단위에초석을놓는 ( 차양칸을가진 ) 경우는차양칸이없는경우에비교해하층기단의폭이크다. 이는차양칸의초석을놓기위한폭을확보하였기때문일것이다. 차양칸을갖춘예는이중기단을가진 12례중, 고구려청암리폐사, 백제傳천왕사, 신라황룡사중금당및 1차동금당, 신라사천왕사의 5례로, 통일신라를제외한소위삼국시대에쓰였음을알수있다. 桁行을 9칸이나 7칸으로한황룡사의금당만이아닌, 桁行 5칸의傳천왕사나사천왕사에서도사용되나, 桁行 3칸의건물에는없다. 우선초석그자체를보면, 사천왕사의것은圓柱座가있는격식이높은형상이나, 상층기단위의초석과비교했을때, 잘만들어졌으며柱座의형상이다르다. 또한상층기단의지복석과간섭하여, 초석을깎아내어설치하였고, 하층기단위의초석이상층기단의기단외장보다후에설치되었음은분명하다. 즉차양칸은상층기단위의기둥을이용한건물본체와는설계시기가다르며, 구조적으로도하나가아니라고생각된다. 이때차양칸이없는이중기단에서하층기단의폭이큰것은없으므로, 차양칸을마련함과함께하층기단의폭을크게하는改修가행해졌다고생각된다. 이러한선후관계를사천왕사이외의금당에서확인하는것은불가능하나, 하층기단위의초석이후에보수된것인지, 당초부터설계되었던것인지를검증해야, 이상부구조를정확하게고찰할수있게될것으로판단된다. 차양칸의삐짐 ( 건물본체의행랑기둥초석에서하층기단위의초석까지의心心間거리 ) 은, 傳천왕사가약 1.9m 전후, 황룡사중금당이약 3.6m, 同제1차동금당이 2.6m 전후, 사천왕사는 1.9m 11) 이다. 모두桁行과梁行에서거의일정하다. 행랑의삐짐과의비 차양칸의삐짐 / 행랑의삐짐 은傳천왕사는 0.95( 桁行 ) 1.05( 梁行 ), 황룡사중금당이 0.72, 제1차동금당이 0.64( 桁行 ) 0.66( 梁行 ), 사천왕사가 11) 신라사천왕사금당의하층기단위의초석에대해서는, 발굴조사보고서 四天王寺 Ⅰ 金堂址 ( 慶州國立文化財研究所, 2012, 139쪽 ) 에서, 후대에기단의확장후다시기단을굴착하는형태로설치되었다고하였다. 하지만상층기단위의행랑기둥초석과의柱間수치에대해서는 금당편 에서도, 또한 四天王寺 Ⅰ 金堂址 에서도언급이없다. 본고에서는 四天王寺 Ⅰ 金堂址, 129쪽에기재되어있는평면도를기준으로계측하고, 桁行 梁行모두 1.9m 로하였다. 258 한일문화재논집 Ⅲ

259 0.53( 桁行 梁行 ) 이다. 傳천왕사가 1.0 에가까운것이특이하지만, 그이외는행랑의 1/2~2/3 이다. 차양칸의성격이상에서하층기단위의초석에는 1 四面행랑을가진건물에설치되어있다, 2 건물의네면을둘러싼다, 3 건물본체의柱筋에맞춰설치되어있다, 4 상층기단위의초석보다작다, 5 그삐짐은桁行과梁行에서일정하게한다, 6 행랑의삐짐의 1/2~2/3 으로한다, 7 하층기단의폭이크다, 라는특징이있음을알수있다. 이러한특징을가진상부구조를고려했을때, 1에서일정정도의격식을가진처마의삐짐이비교적큰건물에설치한다, 2에서구축물이건물을에워싸듯설치될수밖에없는것이다, 3에서건물본체의기둥과橫架材로연결했을가능성이크다, 4에서건물본체와한몸인구조는아니다, 5에서모서리부에서 45 방향으로들어가는部材를가졌을가능성이크다는등의것들을알수있다. 이런바탕에서신라사천왕사에서추정되듯 8 건물본체보다도늦게만들어진 이라는특징을갖는다면, 차양칸의상부구조로추정되는것은부연이었을가능성이높다. 상층기단의삐짐차양칸을가진금당 5례의상층기단의삐짐 ( 상층기단위의건물外周柱心에서상층기단가장자리까지의거리 ) 은 1.6m( 신라사천왕사 )~2.2m( 신라황룡사 ) 이며, 차양칸을갖지않은금당 4례에서는통일신라감은사가 3.5m 로현격하게크나, 백제미륵사중금당이 2.1m, 同寺동금당이 1.8m, 백제능산리폐사가 1.6m 전후로, 감은사를제외하면상층기단의삐짐은큰차이가없다고할수있다. 즉차양칸의유무와관계없이상층기단의삐짐은일정하며, 차양칸의설치와함께改修하였다고한다면하층기단의폭을확대했을가능성이크다고말할수있을것이다. 차양칸기둥의단면차양칸기둥의단면형상은초석이나그柱座의형상에서, 백제傳천왕사와신라사천왕사는丸柱 ( 圓柱, 둥근기둥 ) 로생각된다. 신라황룡사중금당은상층기단의초석을포함하여角柱座이나상층기단위의초석을중심으로丸柱의흔적을남기고있다. 차양칸의초석도잔존하는흔적에서丸柱로생각된다. 고구려청암리폐사의차양칸의초석에는角形의배꼽穴이뚫려있어, 백제 신라의금당에는보이지않는초석의형식이다. Ⅲ. 일본의고대사원금당 본장에서는일본의대표적인고대사원의금당사례에대해, 앞장과같은관점으로정리하겠다. 일본에는발굴유구외에현존하는고대의건축이있고, 거기에건물의규모 구조가판명된문헌자료나회화자료도상부구조를고려하는데유효하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정리한 금당편 에는일본의금당에대해서도 7세기의유구를중심으로정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59

260 보를집성하고있다. 또한일본의기존연구에서는大岡實 ( 오오오카미노루 ) 나宮本長二郎 ( 미야모토쵸우지로 ) 에의한집성과분석이있다. 12) 일본의발굴유구는 금당편 에서다룬것이상으로성과는축적되어있으나, 그집성작업은제 5장에서기술할것처럼현재진행형이므로, 본고의자료는집성도중단계의정보임을미리밝혀둔다. 또한본고에서다룬유구는 7~8 세기의기단규모와柱間수치가판명된것에한했다 ( 표 3 도면 9-14). 따라서기단규모만혹은柱間수치만판명된유구나그규모가확정되지않은유구는포함되지않았다. 다만그렇게되면한반도의금당과의비교에서부족한부분도있기때문에, 특징적인유구에대해서는고찰에서추가해가는것으로한다. 그외필자 ( 海野聡 ) 는고대사원의제1급금당에대한검토로, 이중지붕에관한논고를전개하고, 부연의자리매김과변천을기술한적이있다. 13) 여기서는이들성과를추가해가면서논지를진행해가고자한다. 또한여기서는 694~710 년의藤原京 ( 후지와라쿄우 ), 710~784 년의平城京 ( 헤이죠쿄우 ), 794 년이후의平安京 ( 헤이안쿄우 ) 에서각각운영되던사원을京內사원으로총칭하는것으로하였다. 거기다 8세기중기에는나라를수호하는목적으로일본의각지방 ( 당시일본의행정단위에서는国에해당함 ) 에国分寺 ( 고쿠분지 ) 와国分尼寺 ( 고쿠분니지 ) 가조영되었다. 이들은 8세기각국의중심적인사원으로, 官立사원으로서의격식을갖춘것이었다. 또한 續日本記 에는 759 년에 国分二寺圖 를반포한다는기사도있는데, 그실태는명확하지않으나国分寺에일정한규격성이존재하였음을엿볼수있다. 본고에서는 7세기의사원 ( 표 3의 24~31), 8세기의京內사원 ( 표 3의 1~9 36), 国分寺 ( 표 3의 10~23) 로나누어분석을진행하고자하며, 이와는달리특이한기둥배치를가진금당 ( 표 3의 32~35) 에대해서기술하는것으로한다. 1. 일본고대사원금당의특질 평면규모와기둥배치일본금당의평면은내주의梁行을 2칸으로하며, 내주의네면에柱筋을갖추고행랑을돌려, 梁行총길이를 4칸으로하는것이일반적이다. 梁行총길이가 4칸을넘는금당은 1 내주梁行을 3칸으로한경우 ( 東大寺, 東寺 ), 2 부연을돌린경우 ( 平城薬師寺 [ 헤이죠야쿠시지 ], 興福寺, 東大寺, 東寺 [ 토우지 ]) 가있다. 즉平城薬師寺, 興福寺는내주梁行 2칸 + 행랑 + 부연의평면형식을갖고있음에반해, 東大寺는내주梁行 3칸 + 행랑 + 부연의평면형식을갖고있으며, 東寺는내주梁行 3 12) 大岡實, 1966, 南都七大寺の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宮本長二郎, 1979, 飛鳥 奈良時代寺院の主要堂塔, 日本古寺美術全集 第 2 巻, 法隆寺と斑鳩の古寺, 集英社. 13) 海野聡, 2013, 古代における裳階の類型化と二重金堂の変遷に関する試論, 佛教藝術 327 号. 260 한일문화재논집 Ⅲ

261 칸 + 부연의평면 구조를갖는다. 14) 東寺와같은구조형식은기둥배치만으로는행랑과부연을구별하기힘들다. 또한藤原京의薬師寺 ( 本薬師寺 [ 혼야쿠시지 ]) 는유구에서확인되는것은桁行 7칸 梁行 4칸이지만, 부연용의소형기와가출토되어내주 + 행랑 + 부연이라는平城京의薬師寺 ( 平城薬師寺 ) 와같은규모 같은형식의금당으로판단된다. 15) 또한하층기단위에초석을갖는飛鳥寺동 서금당 16) 은상층기단위의초석은미검출되었으나, 하층기단위의초석에柱筋을합치는것으로생각하면, 내주 + 행랑 + 부연의평면형식이된다. 이들의대부분은경내사원이다. 한편桁行의柱間수는 7세기의금당은 5칸이며, 8세기의금당은 7칸을넘는규모이다. 내주의규모에서말하면, 7세기의금당은 3칸이나, 本薬師寺를처음예로할때 8세기의금당대부분이 5칸을한다. 国分寺에서는이런경향이현저하게나타나며, 표 3에기재한 14례중 11례가해당하며, 예외가肥前 ( 히젠 )[ 佐賀 ( 사가 ) 県 ] 의내주桁行 7칸, 薩摩 ( 사츠마 )[ 鹿児島 ( 카고시마 ) 県 ) 若狭 ( 와카사 )[ 福井 ( 후쿠이 ) 県 ] 의 3칸이다. 경내사원에서는文武朝大官大寺의내주桁行 7칸을初例로, 東大寺와西大寺 ( 사이다이지 ) 약사금당이내주桁行을 7칸으로하며, 新薬師寺가내주桁行을 11칸으로한다. 선술한것처럼부연을가진금당 ( 東寺를제외하고 ) 은, 행랑과부연의柱間 4칸을더한수가총柱間數가된다. 부연을포함하여桁行 7칸을넘는금당의대부분은경내사원이며, 梁行규모와함께일반적인사원과는격차가있는제1급의규모 성격을가지고있었다고판단된다. 여기서는경내사원의이러한양상을 高位化 라호칭하고, 뒤에서검토하고자한다. 또한현존하는法隆寺금당은내주 + 행랑 + 부연의평면형식을가지지만, 부연의기둥은초석위에세우지않고, 기단위에깐構架材 ( 토대 ) 위에세운다. 부연의柱間은桁行 9칸 梁行 7칸이나, 기둥은내주나행랑과柱筋을갖추지않은구조로규모의비교는적당하지않으며, 또한경내사원과같은예로취급할수도없다. 한편, 금당편 평면 의고찰에서는, 내주의중심부에도기둥을세우는総柱型의기둥배치의사례 17) 로, 崇福寺 ( 소우후쿠지 ) 소금당과四天王寺를들고있다. 하지만崇福寺소금당은桁行 3칸 梁行 2 14) 上野勝久, 1990, 東寺金堂の創建形態について,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 415 号. 15) 花谷浩, 1997, 本薬師寺の発掘調査, 仏教芸術 235 号. 16) 大阪府羽曳野市의埴生廃寺금당도이중기단으로하층기단위에小礎石이있었다고보도되어있으나상세는알수없다. 藤沢一夫, 1967, 河内埴生廃寺の調査, 大阪府の文化財, 大阪府教育委員会. 17) 기둥배치를바탕으로금당의평면구조를분류한유형으로, 단일공간형 과 다공간형 으로나뉜다. 단일공간형 에는正置型과減柱型이있다. 직치형은모든柱筋에기둥을놓는기둥배치이며, 감주형은外周에만기둥을놓고, 내부의기둥을생략하는형식이다. 다공간형 은竝列型과內外陣型으로나뉜다. ( 韓旭 李恩善, 2011, 韓 日古代仏教寺院金堂の平面比較研究, 東北亜文化研究 29 号, 東北アジア文化学会.). 다공간형은일본의내주+ 행랑에대응한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61

262 칸의정면 ( 東面 ) 에만행랑을갖춘평면형식으로, 확실히総柱狀을하지만, 내주내부의초석이작아, 마루를깐건물의기둥 ( 床束 ) 으로판단된다. 또한四天王寺금당의내주내부의기둥은, 보고서를봤을때床束으로보긴어려우나, 창건당초의유구로확인된것은桁行 3칸 梁行 2칸뿐이며, 행랑의기둥은검출되지않았다. 후세에의한改變도컸으며, 당초의양식이명확하지않아, 표 3 도면 6 에는기재하지않았다. 일본에서総柱型의가능성이있는금당으로는四天王寺금당만을들수있다. 柱間수치 7세기의금당에서는川原寺의내주桁行 3.6m, 내주梁行 3.0m 가거의최대규모로, 18) 7세기사원금당의일반적인柱間수치를엿볼수있으며, 川原寺의寺格을보여준다고생각된다. 그외의 7례에서는내주桁行 3칸을같은수치로하는예가많으나, 高麗寺 ( 코마데라 ) 와같이桁行중앙칸만을넓게하는예도있다. 내주의柱間수치는桁行에서는 1.5m( 杉崎廃寺 [ 스기사키하이지 ])~3.2m( 法隆寺 飛鳥寺동서금당 ), 梁行에서는 1.5m( 杉崎廃寺 )~3.2m( 法隆寺 ) 로, 梁行의평균은 2.4m 이다. 내주의桁行과梁行에서는桁行중앙칸등桁行을크게하는예가많으나, 檜隈寺 ( 히노쿠마데라 ) 에서는梁行을약간크게한다. 행랑의삐짐 ( 梁行방향 ) 은 1.5m( 杉崎廃寺 )~3.0m( 飛鳥寺 ) 로평균은 2.5m 이다. 내주와행랑의柱間수치의관계에서는, 내주와행랑을같은수치로하는예도많으며, 檜隈寺나高麗寺에서는행랑의삐짐이크다. 7세기의금당은행랑의삐짐이큰예가많으며, 후대의금당과비교했을때특징적이다. 한편현존하는法隆寺금당은행랑의삐짐을 2.2m 로하며, 내주桁行 梁行의 3.2m 에대해 69% 의값을취한다. 그이유는상부구조와관계되므로후술한다. 8세기의경내사원 10례중, 내주 + 행랑의평면을갖지않는海竜王寺서금당 19) 과파격적으로큰東大寺를제외한내주柱間수치는桁行 梁行모두 3.0m( 本薬師寺 平城薬師寺 )~5.0m( 大官大寺 ) 이며, 모두 3.0m(10 尺 ) 이상의값을취한다. 내주梁行의柱間수치평균은 3.9m 이다. 東寺의내주梁行柱間이 3.4m로비교적짧은것은, 내주梁行을 3칸으로했기때문 20) 으로, 2칸이었을경우 5.1m(17 척 ) 이된 18) 여기서는지붕형식의상세에대해서는언급하지않으나, 桁行 5칸 梁行 4칸으로지붕을寄棟造로하면큰마루 ( 大棟 ) 가桁行中央 1칸의크기가되어대단히짧아진다. 이점을고려했을때, 8세기의제1급사원금당과같은寄棟造는곤란하며, 이규모의금당은入母屋造였을지도모른다. 19) 현존하는海竜王寺서금당은桁行 3칸 梁行 2칸으로, 행랑을가지지않고내주만있는건축으로, 平城京内에있는금당으로서는이례라고말할수있을정도로규모가작다. 海竜王寺는平城천도이전에창건된사원으로, 서금당이가람의중심건축이아니었기때문일지모르겠다. 20) 東寺금당의경우, 선술한것과같이내주+부연의구조를하고있어, 내주기둥만으로入母屋造의지붕을하지않으면안되게된다. 8세기에서入母屋造나寄棟造라고하는모서리목 ( 隅木 ) 을가진건물은통상興福寺중금당이나東大寺와같은내주+행랑의평면을취한다. 이경우隅木을내주와행랑의모서리기둥 ( 隅柱 ) 위에서지지할수있기때문에구조상문제는없다. 하지만내주만있는기둥배치에서隅木을가진건물은隅木을지지하는것이隅柱 1점만이되므로기술적인곤란을동반한다. 이를보충하기위해양측면의기둥위에서桁行방향의梁 ( 妻梁이라부른다 ) 을가구했다고생각된다. 東寺금당의내주梁行총길이 10.2m(34 척 ) 은, 수치적으로는梁行 2칸 ( 각 17척 ) 으로 262 한일문화재논집 Ⅲ

263 다. 내주桁行에서는大官大寺가등칸을하지만그외의사원에서는중앙칸혹은중앙 3칸을크게하며, 그외柱間과약간의차이를두는예가많다. 내주梁行과의관계는桁行중앙칸을크게하는예가많으나, 文武朝大官大寺는내주梁行을 5.3m(18 척 ) 으로한가장큰柱間을한다. 내주와행랑의柱間수치관계는東寺를제외하면내주의柱間보다행랑을작게하는것이통상적인예로, 本薬師寺와平城薬師寺가내주梁行과행랑을같게한것이약간특이하다. 한편本薬師寺와平城薬師寺의柱間수치는川原寺와같은정도를한다. 선술한것처럼평면형식은내주桁行을 5칸으로한 8세기금당의양상을갖는다. 하지만柱間수치는 8세기의금당과비교했을때작고 7세기의양상을가지고있어과도적인상태를보인다고판단된다. 평면형식및柱間수치의양쪽에서 8세기의양상을갖춘것은文武朝大官大寺까지기다리지않으면안된다. 国分寺에서는선술한것처럼桁行이 9칸이나 5칸인금당이 3례이나, 이들의柱間수치는桁行 7칸의금당과손색이없다. 가장큰柱間수치를가진것은駿河 ( 스루가 )[ 静岡 ( 시즈오카 ) 県 ] 를제외하고桁行중앙칸으로, 14례에 3.6m( 薩摩 )~5.9m( 武蔵 [ 무사시 ] 相模 [ 사가미 ]), 평균은 4.5m 이다. 거기에내주梁行의柱間수치는駿河에서는건물중최대柱間수치를하지만, 그외에는桁行중앙칸과같거나그보다작게하는데, 상기한 14례에서 3.5m( 薩摩 )~4.9m( 駿河 ), 평균은 4.0m 이다. 내주와행랑의柱間수치를비교하면, 행랑의柱間수치는薩摩 ( 鹿児島県 ) 을제외하고桁行과梁行에서같은수치를하며, 豊後 ( 분고 )[ 大分 ( 오오이타 ) 県 ] 를제외하면내주梁行의柱間수치이하이다. 행랑의규모는薩摩를제외한 13례에서 3.0~3.9m 로, 그값의폭은내주보다작으며평균은 3.4m 이다. 이들의관계는경내사원과공통된다. 또한豊後에서는내주梁行보다도행랑의삐짐이 0.1m 크다. 이는기둥의내기울임 ( 기둥을건물의안쪽을향하게약간기울이는기법 ) 으로인한것으로판단되며, 기둥꼭대기 ( 柱頂 ) 에서는내주梁行등과같은수치가될것으로생각된다. 豊後에서는탑에서도같은기법이확인된다. 따라서기본적으로国分寺에서는내주梁行보다도행랑의삐짐이커지는예는없다고생각해도지장이없다. 기단규모 7세기금당의기단규모는桁行방향은 11m 이상, 약 22m 이하가 8례가있으며수적으로많고, 梁行방향은모든사례가 9m 이상, 20m 이하이다. 官立사원인川原寺나本薬師寺에서도梁行방향은 20m이하로, 상대적으로이두절이기단규모는크지만, 7세기의일반적인금당의연장선상으로이해할수있다. 처리하는것이가능하다고생각되어지나, 이를 3칸으로나누는것은妻梁을 2개걸치게되는이유로힘들다고판단된다. 이妻梁은일본에서현존하는고대건축에서는校倉을위시한倉庫건축에는사용되지만, 금당등의주요건축에서는보이지않는다. 海野聡, 2013, 古代日本における倉庫建築の規格と屋根架構,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 692 号.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63

264 文武朝大官大寺이후 8세기의경내사원이나国分寺에서는桁行방향은약 30m(100 척 ), 梁行방향은 20m를넘는규모가대부분이된다. 이는이들금당이桁行 7칸이기때문이기도하지만, 梁行은 7 세기와같이 4칸을하면서도규모가확대된다. 이는선술한것처럼 8세기가되면柱間수치가커지는것을반영하고있다. 기단의형상을나타내는하나의지표로서, 기단규모의종횡비 桁行/ 梁行 을보면, 7세기의桁行 5 칸 梁行 4칸의금당에서는 1.2 전후에집중된다. 이에비해 8세기의금당은 1.2 를넘는값을한다. 이에따라건물의평면이판명되지않아도기단종횡비의값외에, 기단규모의실제길이에서, 桁行이 5 칸인지 7칸인지대략판단할수있다. 기단의삐짐과상부구조통상건물의처마끝 ( 軒先 ) 은기단보다도평면적으로밖에위치하며, 빗물을기단밖으로떨어트린다. 처마끝에서의빗물을직접받게되는雨落溝 ( 낙수도랑 ) 가검출된다면처마의끝을복원하는정밀함이높아지겠지만雨落溝가검출된예는적다. 따라기단의삐짐 ( 건물外周柱心에서기단가장자리까지의수치 ) 가처마의삐짐을추측하는근거가된다. 다만기단의삐짐은처마삐짐의최저수치가되는것으로, 그이상이되는경우가있음을주의할필요가있다. 우선현존건축의처마의삐짐을검토해보자. 雲斗雲肘木 ( 익공 [ 혹은설미 ] 과첨차 ) 의공포를사용한法隆寺금당은, 처마가地垂木 ( 서까래 ) 만으로된홑처마이지만, 처마의삐짐은 4.4m( 약 15척 ) 이다. 唐招提寺 ( 토우쇼우다이지 ) 금당은 3제공의공포를가진地垂木 ( 서까래 ) 과飛檐垂木 ( 부연 ) 으로된겹처마로, 그처마의삐짐은약 4.4m( 약 15척 ) 이다. 또한금당은아니지만新薬師寺본당 (8세기 ) 은제공을내지않는大斗肘木 ( 주두와첨차 ) 의공포를사용, 겹처마로약 2.4m( 약 8척 ) 의처마삐짐을가지고있다. 東大寺의法華堂은出組 ( 제공 ) 의처마를한겹처마로처마의삐짐이약 4.0m(13.5 척 ) 이다. 이들에서처마의삐짐 2.4m( 약 8척 ) 가제공을내는공포를가졌는지에대한하나의기준이될것이다. 또한처마의삐짐을검토하는데에는, 실수치만이아닌柱間수치와의관계를고려하지않으면안된다. 현존건축사례는모두四面행랑을가진건물이며, 처마의삐짐과크게관계되는것은구조적으로행랑의삐짐이다. 그런이유로행랑의삐짐과처마의삐짐과의관계 처마의삐짐 / 행랑의삐짐 을검토한다. 法隆寺금당에서는 4.4/2.2=2.00, 唐招提寺금당에서는 4.4/3.0=1.33, 東大寺法華堂에서는 4.0/3.0=1.33, 新薬師寺본당에서는 2.4/3.0=0.80 이다. 제공을내는처마에서는행랑의삐짐보다도처마의삐짐이크다고판단된다. 이상의현존건축을참고로했을때, 2.4m 를넘는기단의삐짐을가진경우, 혹은행랑의삐짐보다도기단의삐짐이큰경우에, 제공을내는공포를갖춘다고상정할수있다. 7세기금당의기단의삐짐을보면, 飛鳥寺동 서금당 (3.2m), 川原寺 (3.3m) 는큰기단의삐짐을갖으며, 法隆寺 (4.4m) 에는미 264 한일문화재논집 Ⅲ

265 치지못하지만, 기단의삐짐 / 행랑의삐짐 도 1.00 을넘어제공을내는공포로판단된다. 한편高麗寺 (2.2m) 나檜隈寺 (2.1m), 賞田廃寺 [ 쇼우다하이지 ](1.5m) 의기단의삐짐은비교적작다. 기단의삐짐 / 행랑의삐짐 의값은, 高麗寺 (0.92), 檜隈寺 (0.71), 賞田廃寺 (0.56) 로작으며, 이들은제공을내지않는공포를가진것으로생각된다. 8세기에들어서면, 건물규모와함께기단의삐짐도커진다. 경내사원에서는모두기단의삐짐이 3.0m(10 尺 ) 를넘으며, 東大寺부연처마의삐짐이약 5.7m(19 척 ) 이라는파격적인규모를필두로, 興福寺와新薬師寺가 4.5m(15 척 ) 정도의기단의삐짐으로, 이들은三手先組物 ( 미데사키쿠미모노, 3단공포 ) 를사용했다고판단된다. 国分寺도대부분이 3.0m(10 척 ) 를넘으나, 그중에서도武蔵나周防 ( 수오우 ) 와같이 4.5m(15 척 ) 를넘는것들이일부확인된다. 이들도경내사원과같이 3단공포를가졌다고생각해도좋을것이다. 한편相模 (2.6m), 遠江 [ 토오토우미 ](2.7m), 伊賀 [ 이가 ](2.9m), 出雲 [ 이즈모 ] (2.4m), 薩摩 (2.1m) 의각国分寺에서는행랑의삐짐에비해기단의삐짐이작고, 제공을내지않는공포가상정된다. 또한부연을갖춘건물에서는法隆寺금당과같이부연의처마끝이건물본체 ( 내주 + 행랑 ) 의처마끝보다내측으로들어가는지아닌지하는점도문제가된다. 이점에대해서도이전에논한바있으나, 8세기초두의興福寺중금당까지는, 부연은처마안에들어가는구조였으나, 東大寺대불전에서는행랑기둥에서의기단의삐짐이 12m를넘어, 건물본체의처마는기단의바깥까지뻗지못하고, 빗물은부연의지붕을통해서기단밖으로배수되는것으로판단된다. 21) 또한桁行방향과梁行방향의기단의삐짐은, 지붕형상을판단하기위한재료의하나가된다. 표 3에기재한海竜王寺서금당 ( 현존 ) 을제외하면, 모두四面행랑의기둥배치를가져, 寄棟造혹은入母屋造의기둥형식으로판단된다. 일본에서는校倉 ( 교창, 각재나삼각재를짜올려서지은창고 ) 을제외하면, 振隅 22) 로하는경우는없기때문에, 처마의삐짐은梁行방향 桁行방향모두거의같은크기가된다. 이를위해기단의삐짐도같은정도로하는것이통례이다. 표 3을봐도梁行방향과桁行방향의기단삐짐의차이는伊賀国分寺의 0.6m 가최대로, 대부분은 0.3m 이하이다. 즉四面행랑의기둥배치를취하는건물에서는기단의삐짐을梁行 桁行모두거의같은수치를하고있다. 한편현존하는海竜王寺서금당과같이규모가작은제공을내지않는공포 ( 平三斗 二軒 : 복원 ) 를 21) 부연의초석은건물본체의초석에비해작으며, 구조가확인되지않는것도있을수있으나, 건물본체의모서리기둥에서기단모서리까지의거리가현저히큰경우, 부연이붙었을가능성을생각해둘필요가있을것이다. 22) 振隅는건물에대비하여隅木 ( 모서리목 ) 을 45 보다어긋나게하는수법으로, 棟木을길게하는방향으로隅木을내는것이일반적이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65

266 가진경우, 梁行방향처마의삐짐 (1.8m : 복원치 ) 과桁行방향螻羽 ( 너새 ) 의삐짐 (1.7m) 이근사치이기때문에切妻造라하더라도, 桁行방향과梁行방향의기단의삐짐은근사치이다. 이와같이기단의삐짐만으로지붕형식을복원할수있는것은아닌점도주의할필요가있다. 부연의삐짐은동대사의 6.8m 를따로하면, 平城薬師寺가 1.9m, 法隆寺가 2.2m 興福寺중금당이 2.9m 전후, 東寺가 3.9m 이다 세기의제 1 급금당의고위화 선술한것처럼 8세기의금당은桁行 5칸 梁行 2칸의내주의四周에행랑을돌리는정형화가보인다. 여기에더하여 8세기의제 1급사원인南都六大寺 ( 興福寺 東大寺 西大寺 薬師寺 元興寺 大安寺 [ 다이안지 ]) 나新薬師寺에서는한층더특징을갖는다. 이를여기서는 고위화 ( 高位化 ) 라가칭한다. 제 1급사원의금당에서는, 규모나외관의고위화를꾀함에따라, 다른사원과는다른특징을가진건축을만들어냈다고판단된다. 고위화의수법결론을먼저말하면, 제 1급사원의고위화에는다음의두가지수법이쓰였다고판단된다. 또한여기서말하는건물규모는건물본체 ( 내주 + 행랑 ) 에대한것으로부연은포함되지않는다. 1 桁行규모를확대하여금당의정면관을거대화한다. 2 부연을붙임혹은구조상積層시킴, 혹은그두가지를사용하는것으로意匠的으로다중의지붕을한다. 1은桁行 13칸의新薬師寺, 桁行 9칸의文武朝大官大寺, 東大寺, 西大寺薬師金堂이해당하며, 桁行 7칸의일반적인금당보다도桁行을크게하는수법이다. 2는平城薬師寺 ( 아마本薬師寺도 ), 興福寺중금당, 東大寺, 東寺가해당한다. 23) 한편国分寺의금당은발굴조사성과에서부연을확인할수있는사례는없었고, 이중의지붕으로 23) 平城薬師寺는 薬師寺縁起 (11 세기성립 ) 에 二重二閣 으로기록되어, 二重 부연붙임의구조로현존하는동탑에서그意匠을엿볼수있다. 興福寺중금당은桁行 5칸 梁行 4칸의건물본체 ( 내주 + 행랑 )+ 부연의평면형식을갖는다. 발굴조사성과에따르면창건이래, 여러번의화재로재건을반복하면서, 같은규모 형식을유지해왔다고판단된다. 14세기의 春日社寺曼荼羅 에는, 중금당이寄棟造의이중지붕으로그려져있고, 건물본체의四周에부연의지붕이돌려져이중지붕의외관을가진건물이었음을알수있다. 東大寺금당은 七大寺巡礼私記 (12세기중경성립 ) 에 二蓋 라하였고, 756년에그려진 東大寺堺四至図 에도이중 寄棟造의모습이그려져있다. 내주 + 행랑의건물본체에더하여一重의기둥열이돌아가는평면에서볼때, 부연을가진구조로생각하는것이타당하다. 東寺금당은이미기술한것처럼 東寺金堂柱損色注文 (1192) 에서부연이붙은것으로추정되었고, 발굴조사성과에서현존하는 1603년재건의금당과같이내주 + 행랑의구조였다. 266 한일문화재논집 Ⅲ

267 보이는 자료도 없어 적극적으로 이중지붕의 금당 으로는 생각하기 힘들다. 柱間수치도 唐招提寺 금당에 가까운 것이 많아 国分寺의 금당은 부연 이 없는 桁行 7칸 梁行 4칸의 단층이라는 위치 매김이 타당할 것이다. 지방에서 7세기대의 사원 은 桁行 5칸 梁行 4칸인 금당이 일반적인데 国 分寺 금당의 桁行 7칸 梁行 4칸의 규모 및 柱間 수치의 확대는, 그 자체가 그때까지의 사원금당에 도면 1. 특수한 기둥배치의 설계이념 서 볼 때 고위화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二重의 금당 고위화의 ②의 시점에 대해 그 구조를 보자. 고대의 제 1급 금당은 지붕을 이중으로 하 는 것들이 많으며(이하 이중금당이라 함), 그 형식은 法隆寺 금당과 같이 구조상 이중으로 하는 건물 ( 積層型 으로 가칭함)과 건물본체의 四周에 부연의 지붕을 돌린 건물( 부연형(型) 으로 가칭함)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別稿에서 8세기의 금당과 7세기이전의 금당을 비교하였다.24) 그 주요 결 론은 이하의 네 가지 점이다. ① 고대 寄棟造의 현존건축을 검토한 결과 불당에서 振隅를 하는 예는 없으며, 振隅의 수법은 8세 기의 校倉에 한정적으로 사용된 특수한 방법이었다. 이는 隅行방향으로 제공을 내는 공포와 크게 관계 하며, 3단 공포를 가진 8세기의 금당은 隅木이 振隅가 아닌 眞隅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② 8세기의 제 1급 금당의 대부분은 이중금당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적층형이 아닌 興福寺 중금당이 나 東大寺 금당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부연형이었다. 8세기의 부연형은 東寺 금당과 같은 내주+부연에 의한 기둥배치는 구조상 곤란하며, 내주+행랑+부연이라는 柱筋이 내주를 중심으로 柱筋이 삼중으로 도는 평면을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부연의 기둥이 角柱에서 圓柱(丸柱)로 변화하였고25), 부연의 공간 을 확대하는 것에서, 건물본체의 부연이 일체적인 공간을 구성하게 되었다. 또한 本薬師寺 平城薬師 寺의 금당은 적층형 이중지붕의 각중(各重)에 부연을 돌리는 구조로 판단되었으나, 부연 기둥은 角柱 이며 거기에 柱間수치나 기단규모의 면에서도 7세기 금당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게 된다. ③ 부연에는 평면이 정방형에 가까워지는 것에 의한 건물의 안정성 향상과, 건물본체의 기둥과 부연 의 기둥을 繫梁(퇴량, 툇보)으로 고정함으로 인한 벗트레스효과(buttress, 수평방향의 압력에 의한 무 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건물의 주체 벽에서 돌출시켜 설치하는 보강용의 벽)라는 두 가지 구조적 기능 24) 海野 聡, 古代における裳階の類型化と二重金堂の変遷に関する試論, (前掲註13). 25) 法隆寺 금당과 平城薬師寺 금당에서는 角柱이나, 興福寺 중금당 東大寺 대불전에서는 圓柱(丸柱)이다. 일본에서 본 한반도의 고대사원금당 267

268 이고려되었다. 4 적층형에서부연형으로변화한요인으로, 적층형의梁行규모의한계, 二重 에의욕구, 梁行柱間의확대에따른처마삐짐의확대 (3단공포의사용 ) 라는세가지점이크게영향하였다. 이중의지붕은제 1급금당을고위화하는데에주요한수법중하나였다. 그구조는시대를거치면서적층형에서부연형으로변화하였다. 또한부연의삐짐이대단히작아부연공간이종속적인위치였던것이, 부연의주칸이건물본체와동등한규모가되고, 부연이일정한넓이의공간을획득한점이 8 세기제 1급금당의큰특징이다. 3. 특수한기둥배치를가진금당 山田寺 [ 야마다데라 ] 夏見廃寺 [ 나츠미하이지 ] 穴太廃寺 [ 아노우하이지 ]( 재건금당 ) 은내주 행랑모두桁行 3칸 梁行 2칸의평면을가지며, 柱筋의교점 ( 交点 ) 에기둥이세워지지않는곳이있다 ( 도면 2). 柱間수치는내주의桁行양끝칸 ( 兩端間 ) 을극단적으로좁게하고, 행랑을거의등칸으로취하는것이특징이다. 正家廃寺 ( 쇼우게하이지 ) 는내주를桁行 3칸 梁行 2칸, 행랑을桁行 3칸 梁行 3칸으로하며, 내주와행랑의柱筋이방사상이되어측면에서는내주와행랑이 1 대 1로대응되지않고, 내주측면중앙기둥에서행랑기둥으로두방향에柱筋이뻗는것으로상정되는점에서다른예가없다. 특이한상부구조를갖는다는점에서는法隆寺금당도그실례이다. 法隆寺금당에서는선술한것처럼행랑의삐짐 (2.2m) 을내주주칸 ( 桁行 梁行모두 3.2m) 의 69% 로좁게한다. 행랑기둥위의공포는雲斗雲肘木라불리는형태로, 45 외측으로만내고 ( 통상은桁行 梁行 隅行의세방향에공포를냄에비해, 이것은모서리의한방향만이기때문에 隅一組物 로가칭되고있다 26) ), 현존하는금당에는예가없다. 탑을포함하면法隆寺가소재하는奈良県斑鳩 ( 이카루가 ) 지방에서만보이는형식이다. 이들기단의삐짐은山田寺 穴太廃寺 ( 재건금당 ) 로, 건물규모가桁行 3칸 梁行 2칸으로작음에도불구하고, 기단의삐짐이 3.5m 를넘으며, 夏見廃寺도 2.9m 로크다. 이들은제공을내는공포를갖추 26) 隅一組物은上野邦一가제창한조어로, 아래와같이설명하고있다. 隅一組物은 측기둥모서리에서隅行방향으로바깥의한방향만공포 ( 組物 ) 을짠 것으로, 法隆寺금당 五重塔의雲斗雲肘木가이예이다. 隅三組物은제공을내는일반적인공포로, 唐招提寺금당과같이桁行 梁行 隅行의세방향으로제공을낸다 ( 上野邦一, 1987, 隅一組物の建物について, 建築史学 8 号.). 法隆寺금당도같은모습이나, 隅一組物의경우桁材를지지하는칸폭이구조상중요하며, 이에바탕을둔수치설계사상을엿볼수있다. 法隆寺금당에서는행랑의柱間수치를등칸으로하지않고, 端間을좁게하여, 出桁을받는지점간의거리가균등하게되도록배려하고있다. 여기서들고있는특수한기둥배치의금당도, 모서리의공포는隅行방향으로만낸다고판단되고있다 ( 도면 1). 268 한일문화재논집 Ⅲ

269 도면 2. 특수한 기둥배치의 금당 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이들 사원의 강당은 일반적인 내주+행랑의 기둥구조를 갖는 것으로 이들의 평면형식은 금 당에만 사용되었던 특수한 것이다.27) 그 상부구조는 여태까지도 法隆寺 금당의 隅一組物 와의 관계 가 지적되어 왔다. 이는 桁을 받는 지점, 즉 공포의 선단(先端)끼리의 거리를 대략 균등하게 하기 위한 기둥배치 상의 고안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금당의 창건시기는 正家廃寺가 8세기 후반으로 떨어지긴 하지만, 法隆寺 금당을 포함해 7세기의 건축으로, 8세기 금당과 같이 평면이 정형화되지 않 고 다양성을 갖는 점도 7세기 금당의 특색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중기단과 하층기단 상의 초석 이중기단은 飛鳥寺 동 서금당이나, 法隆寺, 檜隈寺 등 7세기의 사원건축에는 비교적 많이 보이는 27) 箱崎和久, 日本における7世紀の寺院金堂跡とその諸問題, 金堂編. 일본에서 본 한반도의 고대사원금당 269

270 특징으로, 上淀廃寺 [ 카미요도하이지 ]( 鳥取 [ 톳토리 ] 県米子 [ 요나고 ] 市, 7세기후반 ) 도그대표례의하나다. 28) 또한금당외에탑에서도확인된다. 한편 8세기의관립사원인平城薬師寺나興福寺은切石을쌓은一重기단으로, 8세기의사례는적지만唐招提寺금당 ( 현존 ) 이당초에는이중기단이었을가능성이지적되고있다. 29) 이중기단이격식이높은형식이라고일괄적으로말할수는없지만, 일정한격식을띠는것으로판단된다. 또한이미지적한것처럼하층기단이일정한높이를가진경우는이중기단으로해석할수있으나, 기단의외측에서그높이를거의가지지못하는경우는, 기단인지소단 ( 犬走り, 건물외측, 벽과溝사이에설치된좁은지면 ) 인지에대한해석이곤란하다. 30) 하층기단상에초석을두는명확한사례는일본에서는飛鳥寺동 서금당뿐이다. 여기에서는하층기단상에직경 60cm정도의화강암자연석의초석이설치되어있어, 부연기둥의것으로추정된다. 31) 하층기단상에세워진부연은아니나, 法隆寺금당이나오중탑의부연은건물본체의완성후얼마간시간이지난후만들어졌으며, 건물본체의구조와는거의관계가없다. 또한탑에서하층기단상의초석은확인되지않았다. 하층기단에부연기둥이세워진경우, 부연공간의실용성은거의기대할수없으며, 의장적인기능에한정되는것으로생각된다. 다만부연의처마끝이건물본체의처마안으로들어오는경우, 부연기둥의초석은 ( 상층 ) 기단의연변부 ( 緣辺部 ) 에놓이게된다. 부연기둥에는상술한벗트레스효과에의해구조적인부담이드는것으로추정할수있으나, 기단연변부에기둥을배치하게되면기단의파손, 혹은건물불안정화의원인이되기도한다. 이를위해부연을하층기단상에놓는것은이치상적절한것으로판단된다. 이때기둥이길어지는만큼, 벗트레스효과로인한강도가문제가될지모른다. 이현상은부연이실용적인공간이아닌, 건물본체와비교했을때종속적인위치였던시기, 즉일본에서는東大寺금당이만들어지는 8세기전반까지시기의것으로생각하는것이타당할것이다. 28) 上淀廃寺에서는초석이유실되어, 기둥배치를알수없기때문에여기서는상세히다룰수없으나, 기단중심부의桁行이 13.8m 梁行 12.0m 은와적 ( 瓦積 ) 으로상층기단에해당하며, 그외주 ( 外周 ) 의높이 0.3m 의할석을쌓은부분이하층기단에해당한다. 29) 奈良県教育委員会事務局文化財保存事務所, 2009 年, 国宝唐招提寺金堂修理工事報告書, 瓦調査編 発掘調査編. 30) 箱崎和久, 日本における 7 世紀の寺院金堂跡とその諸問題, ( 前掲註 27). 31) 처마를지지하기위한처마지주 ( 支柱 ) 로보는견해도있다 ( 大岡實, 奈良時代寺院の伽藍配置と主要堂塔, ( 前掲註 12).) 270 한일문화재논집 Ⅲ

271 Ⅳ. 한반도 고대사원금당의 특징 이 장에서는 앞장까지 분석한 한반도와 일본 사원금당의 구체적인 양상에서 공통점이나 차이점에 대해 검토하고, 한반도 고대사원금당의 특징을 살펴봄과 더불어 일본 고대사원금당의 원류라는 관점 에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다만 고구려 금당에 대해서는 큰 영향을 인정하기 힘든 이유로, 백제 신라 통일신라의 금당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한다. 1. 평면과 기단의 규모 백제 신라 통일신라에서는 桁行 5칸 梁行 3칸의 금당이 주류로, 기둥배치가 불명확하더라도 기단 규모에서 그런 해석이 가능한 금당이 많다. 梁行을 4칸으로 하는 백제 미륵사나 백제 왕궁리폐사, 신 라 황룡사는 한반도의 금당에서는 특이한 예에 속한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7~8세기를 통틀어 梁 行 4칸을 기본으로 하며, 柱間수치의 차이는 있으나 정형화되었다고 일컬어진다. 한욱은 백제사원의 금당을 예로, 桁行 5칸 梁行 4칸의 형식이 7세기의 사원조영에 관련하며 일본 에도 전해진 것을 지적하고 있다.32) 백제의 사원을 대상으로 했을 때 桁行 5칸 梁行 4칸의 규모에 한 정되지만 신라를 포함해 고려하면 桁行 규모의 제한은 없으며, 내주梁行이 2칸으로 四面행랑을 가진 형식이 일본에 정착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이에 선행한다고 생각되는 6세기말에 창건 된 飛鳥寺 중금당의 양상이 불명확한 것이 유감스럽다. 2. 평면형식 내주梁行의 규모와 상부구조 백제 신라 통일신라의 금당은, 梁行 중앙의 柱間수치가 큰 것에서 桁 行 3칸 梁行 1칸을 내주로 하며, 그 四周에 행랑을 돌린 형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7 세기대에는 桁行 3칸 梁行 2칸을 내주로 하며, 그 四周에 행랑을 돌린 형식을 취한다. 8세기가 되면 내주梁行 5칸이 주류가 되며, 平城京의 관립사원에서는 桁行이 그 이상의 규모가 되는 것, 혹은 내주 梁行을 3칸으로 하는 것도 나타난다. 내주梁行을 1칸으로 할 때, 측면이 홀수칸(奇數間)이 되기 때문에 중앙 주칸이 생기며, 측면 외관에 32) 韓 旭, 百済寺院金堂跡의 平面と構造, (前掲註5). 일본에서 본 한반도의 고대사원금당 271

272 중심성이나타난다. 이로인해기단의계단이나건물의문을측면중앙에설치해도위화감이없다. 백제성주사, 신라사천왕사, 통일신라감은사, 통일신라간월사등이그실례이다. 다만이경우내주梁行의규모에는제한이생긴다. 구조적으로는내주梁行을어느정도크게하는것은가능하겠지만, 벽이나문이라는설비의설치에문제가생기기때문이다. 예를들어벽을설치했을때, 벽의下地材 ( 기초재 ) 를큰주칸에만들지않으면안되게되어, 횡방향의기초재가장대 ( 長大 ) 해지기때문에벽의강도에문제가생긴다. 또한문을설치했을때, 문자체가커지는것과함께큰문을개폐하기위한면적이필요해지며, 문을일정한크기로억눌렀다하더라도, 문짝옆의소벽 ( 小壁 ) 이커져버린다. 한편내주梁行을 2칸으로나누면, 벽의강도의문제는해결되지만측면중앙에문을설치할수없게된다. 또한문의위치에맞추어기단에계단을설치하면측면중앙에계단을배치할수없게된다. 기단측면중앙에계단을설치하면계단을올라가정면중앙에기둥이세워지는것이된다. 그런데내주梁行 2칸인백제왕궁리폐사에서는측면중앙에계단을설치하고있으며, 일본에서도 7세기대의山田寺, 法隆寺 ( 현존 ), 8세기의平城薬師寺에서는내주梁行이 2칸임에도불구하고, 측면중앙에계단을배치하고있다. 모두금당이회랑의내부에독립해세워진경우로, 외관을중시한계단의배치가엿보인다. 그런데 8세기초반의興福寺중금당에서는측면전단부 ( 前端部 ) 에회랑이붙기때문에, 기단도측면전단부에설치되어있다. 이와같이회랑이금당에붙는경우는측면의외관을고려할필요가없었다고판단된다. 측면에회랑이붙지않고계단이측면중앙이아닌위치에설치된예로平城宮第一次大極殿 (8세기전기 ) 이있는데, 여기서는측면전방에계단의흔적이있으며, 이것이梁行 4칸의정면에서 2칸째의주칸에상당하는것으로판단된다. 이를볼때적어도 7세기에는내주梁行을 2칸으로하여도, 측면의중심성을의식하면서기단의계단을설치했을가능성이있으며, 이는내주梁行 1칸의외관상합리성이이어진것으로해석하는것도가능하다. 내주梁行 1칸의현존고대건축내주梁行 1칸인금당의현존건축예로 9~10 세기와시대는약간떨어지지만室生寺 [ 무로우지 ] 금당 ( 奈良県 ) 이있다. 이상부구조를확인해보자. 室生寺금당은桁行 3칸 梁行 1칸의내주의四周에행랑을돌렸고, 현재는정면쪽에 17세기경에改修된梁行 1칸의礼堂을갖추고있다. 예당이설치된연대에는여러설이있으나, 예당이없던당초형식이내주梁行 1칸의실례가된다. 다만여기서는측면의행랑柱筋에서중앙칸을 2칸으로나누기때문에, 외관은梁行 4칸으로보이나, 내주의측면중앙에는기둥을세우지않기때문에梁行 1칸의내주로해석해도지장이없다 ( 도면 3 4). 이평면은일본에서도특이한형식임이이미지적되어있다. 그요인에대해서는평지에 272 한일문화재논집 Ⅲ

273 도면 3. 室生寺금당평면도 도면 4. 室生寺금당단면도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73

274 조영된, 정비된가람배치를가진사원이아닌, 산간부에조영된사원 ( 일본에서는산림 [ 山林 ] 사원이라부름 ) 인점, 건물의규모가약간작고격식이낮은건물인점등으로설명되어왔다. 33) 현재상태에서는지붕은寄棟造이나, 당초에는入母屋造였으며, 내부의천정이없어전부化粧屋根裏 ( 천정을붙이지않고, 도리나보등의지붕안쪽이보이는구조 ) 였다고판단되고있다. 공포는大斗肘木로제공을내지않으며, 入母屋造의妻壁 ( 양단의삼각으로된벽의부분 ) 은내주양측면의柱筋에세운다. 柱間수치는桁行 2.4m(8 척 ) 등칸, 梁行은내주가 3.6m(12 척 ), 正背面兩端間이 2.4m(8 척 ) 로, 내주梁行을행랑의 1.5 배로하였다. 또한전체적으로마루를붙인점이고대의정통적인가람배치를가진평지의사원금당과는다르다. 구조적으로는내주梁行에虹梁 ( 홍량, 홍예보혹은대들보 ) 를걸치고, 행랑기둥과내주기둥을繫虹梁 ( 계홍량 ) 으로잇는구조로, 내주의내주梁行을 2칸으로하는唐招提寺강당 ( 현존 ; 奈良市 ) 이나내주梁行 3칸의新薬師寺본당 ( 현존 ; 奈良市 ) 과다르지않다. 즉내주梁行의규모차이가상부구조의차이와연결되진않으며내주에걸쳐지는虹梁이긴지작은지혹은내주梁行이작아棟高를확보하기위해虹梁위의叉首 ( 차수 ) 가비교적급경사가되는정도의차이밖에없다. 내부사용상의문제에서말하면, 내주의공간은대부분본존등의불상을놓는공간이점하게된다. 하지만이는내주梁行 2칸의경우도같아서현존하는法隆寺금당이나東大寺법화당에서는須彌壇 ( 수미단 ) 이대부분의내주공간을점하고있다. 하지만신라사천왕사금당의불상대좌석의크기나위치를봐도내주공간가득불상을배치하는것은아니며, 내주의背面側, 즉내영벽 ( 來迎壁 ) 에바짝붙여불상을배치하고, 내주의정면측에는약간의공간을마련하는형식이일반적이다. 따라서梁行 1칸의경우, 불상의크기에는얼마간제한이있으며, 내주의불상전면공간은넓게취할수없었다고추정된다. 이상에서梁行 1칸의상부구조는梁行 2칸의것과크게차이가없다고추정된다. 總柱의형식백제미륵사의 3금당에서보이는, 용마루길 ( 棟通り ) 에도기둥을돌리는總柱의형식은고대일본에서는창고건축에서사용되었고, 제 3장에서논한것처럼금당에서는四天王寺금당 ( 大阪市 ) 이그가능성이있는유일한예이다. 유감스럽게도그상부구조에대해서는불명확하다고말할수밖에없으나, 총주형식의금당이라고했을때, 불상의크기나안치방법에큰제한이생긴다. 용마루길의초석에대해서마루 ( 床 ) 를지지하는짧은기둥으로생각할수는없으나충분히검토할필요는있다. 백제미륵사의세금당의柱間수치는가장큰중금당의내주에서도桁行 4.4m 梁行 3.7m 로그다 33) 鈴木嘉吉, 1976, ( 室生寺 ) 金堂, 大和古寺大観 第 6 巻, 室生寺 岩波書店. 274 한일문화재논집 Ⅲ

275 지거대하다고는말할수없으며, 大虹梁 ( 대홍량, 대들보 ) 을걸치면기둥을생략하는수법은취할수있다고보인다. 불상의안치법을포함하여기둥이상부구조와관련되는총주형식이될수있을지는충분한검토가필요하다고생각한다. 상부구조와관련될경우는일반의형식과는다른구조를고려하지않으면안될것이다. 어찌됐든이형식은고대동아시아의사원금당에서는, 현재까지는백제미륵사와일본四天王寺에서만보이는특이한것이다. 3. 柱間수치 柱間수치의비교금당의柱間수치는한반도 일본을막론하고내주에해당하는桁行중앙 3칸 ( 일본에서는桁行중앙 1칸의경우도있다 ) 과梁行중앙칸을넓히고, 外周의행랑의삐짐을좁게하는예가많다. 한반도의桁行 5칸 梁行 3칸의규모를가진금당의柱間수치는, 내주桁行이 2.7~5.0m, 내주梁行이 4.2~5.9m, 행랑이 1.9~3.9m 에분포하고있다. 이중돌출되어큰것이백제동남리폐사인이유로, 이를제외하면백제능산리폐사가내주桁行 (3.8m) 과梁行 (5.9m) 에서최대치를보이며, 행랑의삐짐은신라사천왕사가 3.6m 의최대치를띤다. 7세기일본에서桁行 5칸 梁行 4칸인금당에서는내주桁行이 1.5~3.6m, 내주梁行이 1.5~3.0m, 행랑의삐짐이 1.5~3.0m 에분포한다. 이중모든최소치를갖는것은일본에서가장작은사원으로도불리고있는杉崎廃寺 ( 岐阜県飛騨 [ 히다 ] 市 ) 로, 이를제외하면최소치는내주桁行이 2.1m( 高麗寺 ), 내주梁行이 2.4m( 高麗寺 ), 행랑의삐짐이 2.4m( 高麗寺 賞田廃寺 ) 가된다. 내주梁行은 2칸이므로단순하게두배로하면내주梁行총길이의값은 4.2m( 杉崎廃寺를포함하면 3.0m)~6.0m 가된다. 또한현존하는法隆寺금당은행랑을작게취한특이한예이므로, 이들과는따로검토하도록한다. 상기한柱間수치를가장큰백제동남리폐사와가장작은일본杉崎廃寺를제외한값으로비교하면 < 표 1> 과같이된다. 내주의桁行과梁行, 즉내주의규모는놀라울정도로근사치를하고있는것을알수있다. 내주梁行은일본이柱間을 2칸으로취하는만큼, 柱間수치는작지만내주전체에서는약간크다. 한반도에서는능산리폐사의내주梁行이동남리폐사와같이 5.9m 로돌출되어크지만, 그외에는 4.0m( 감은사 )~4.5m( 성주사제 3차금당 ) 로내주梁行값의분포폭이작아진다. 동남리폐사와능산리폐사가 6세기중기로시기적으로약간올라가는데, 이러한이유로내주梁行이큰것이라면, 6세기말 ~7세기에걸친한반도금당의내주梁行총길이는작아지는경향이있는듯하다. 또한행랑의삐짐에대해서는일본이약간의차이지만작으며, 한반도에서는크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75

276 표 1. 금당의 柱間수치의 분포 単位 m 身舎桁行 身舎梁行全長 廂の出 韓半島5例 2.6~ ~ ~3.6 日本 7世紀 6例 2.4~ ~ ~3.0 百済東南里廃寺と日本杉崎廃寺を除く 日本の身舎梁行は柱間寸法の2倍 이상을 종합하면 분석대상의 모수가 적고, 또한 시대도 약간 다르기 때문에 실증성이 충분하지 않 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내주의 桁行규모에는 유사성이 있는 듯하다. 7세기대의 사원에 한정하면, 일본 에서는 내주梁行을 확대하여 주칸을 2칸으로 한 것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내주梁行의 수치를 일정하게 하고, 행랑의 삐짐을 크게 하는 것으로 건물규모를 조정한 경향을 보인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신라 사천왕사가 桁行의 柱間수치를 내주와 행랑에서 등칸으로 하는 것이 약간 특이하다. 桁 行의 내주와 행랑의 柱間수치를 같게 하는 것은, 桁行 9칸을 5.0m의 柱間수치로 통일하는 신라 황룡 사 중금당이 유구가 판명된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황룡사에서는 내주梁行을 2칸으로 하므 로 내주梁行과 행랑의 삐짐의 확대를 동시에 노린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 사천왕사는 황룡사의 柱間수 치 계획을 답습하여, 내주梁行을 1칸으로 하면서 행랑의 삐짐을 크게 하는 것으로 규모의 확대를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의 삐짐이 큰 예 일본에서는 내주의 柱間수치보다도 행랑의 柱間수치를 크게 하는 예가 7세기 의 유구에서 비교적 많다. 8세기가 되면 건물규모와 함께 柱間수치도 확대되며, 행랑의 삐짐이 건물 안에서 가장 작은 柱間수치를 하게 된다. 이는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행랑 삐짐의 확대비보다 내주 의 柱間수치 확대비가 크기 때문으로, 반대로 보면 행랑의 삐짐은 7세기 단계에서도 그 실제 길이는 일 정 정도 확보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신라 황룡사 동금당은 桁行 7칸의 규모를 가지며, 제 1~3차를 통틀어 행랑의 삐짐은 桁行방향 으로는 최소치가 되지만, 梁行방향에서는 내주보다 크게 취한다. 이는 내주梁行 총길이 7.2m~7.4m 를 2칸으로 나누어 주칸을 각각 3.6~3.7m로 했기 때문에 행랑의 삐짐 3.9~4.1m가 크게 보이는 것으 로 해석할 수 있다. 내주梁行 총길이는 桁行 7칸에 대응하는 규모로 판단되나, 내주梁行 1칸으로 그 규모가 최대가 되는 백제 동남리폐사가 5.9m였음을 감안할 때, 내주梁行의 확대에 따라 내주의 梁行 을 2칸으로 나누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제 2장에서 논한 것처럼, 황룡사 제 3차 서금당은 제 3차 동금당과 내주梁行이 거의 같은 규모이나, 주칸을 1칸으로 하는데, 여기에서 내주梁行의 확대에 따른 대응이 나뉘었다고 판단된다. 이 양상은 동금당이 행랑의 삐짐과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단순히 내주를 2칸으로 나누었다고 생각되며, 백제 미륵사의 동 서금당이 행랑의 삐짐을 내주梁行보다 크게 276 한일문화재논집 Ⅲ

277 하지않는배려를엿볼수있음을고려할때, 미륵사의동 서금당보다도황룡사동금당의수법이오래되었다고생각된다. 행랑의삐짐이작은예한편행랑의삐짐을작게한것이法隆寺금당이다. 여기서는내주의桁行 梁行모두 3.2m 임에반해행랑의삐짐을 2.2m, 69% 를취한다. 이와유사한평면을가진금당은, 적어도일본에서는보이지않으나한반도에서는백제왕궁리폐사가행랑의삐짐을 2.4m 전후로하며, 내주桁行 4.8m 에대해서는 50%, 내주梁行 3.6m 에대해 67% 를취한다. 또한통일신라감은사에서도행랑의삐짐을 2.5m 로하며, 내주桁行 3.5m 에대해 71%, 내주梁行 4.0m 에대해 63% 를한다. 반복해서논하고있는바와같이한반도에서는내주梁行을 1칸으로하는예가많으며, 그경우감은사와같이내주梁行에대한행랑의삐짐은작은값을한다. 하지만내주梁行이 2칸인왕궁리폐사가桁行 梁行의양방향에서 70% 를밑돌고있어이특이성이두드러진다. 이상부구조에대해서는후술하도록한다. 4. 기단의삐짐과상부구조 상부구조의추정제 2장에서분석한것처럼, 한반도금당의 ( 하층 ) 기단의삐짐은최대가신라황룡사중금당의 5.1m, 이어서통일신라감은사의 4.3m 전후, 가장작은것은통일신라천관사로수치적으로는 30cm이하이나초석과의관계도있어약간검토가필요하다. 그외에작은기단의삐짐을갖는금당으로 2m에달하지않는통일신라간월사와고려지곡사가있다. 일본의사례에대해서는제 3장에서약 2.4m(8 척 ) 를경계로기단의삐짐과행랑의삐짐의관계를통해제공을내는공포인지아닌지의추정을행했다. 그결과 8세기의경내사원은모든기단의삐짐이 3.0m(10 척 ) 를넘으며, 7세기금당에서도 3.0m 를넘는큰기단의삐짐을가진것과, 2.0m 대전반이하의작은기단의삐짐인것이있었다. 8세기의国分寺에서는이것이나뉘었다. 한편고구려를제외한한반도의금당은기단의삐짐이크며, 桁行방향과梁行방향의삐짐을거의같은규모로하고있어, 역시복잡한공포를가진격식높은건축으로상정된다. 통일신라천관사는기단의삐짐이극단적으로작으며, 이기단의삐짐이처마의삐짐과직결된다고는생각할수없어, 처마끝은기단끝보다더바깥에있을것으로판단된다. 또한桁行 3칸 梁行 3칸의통일신라간월사와고려지곡사도 2m에달하지않는기단의삐짐을갖는다. 이들은그규모와함께처마의삐짐도작으며, 제공을내지않는공포를갖추고있었다고판단된다. 백제왕궁리폐사의기단의삐짐도 2m전후로비교적작다. 다만왕궁리폐사는 1.0~1.5m 돌출된계단부근에溝狀의유구가있어, 이를雨落溝로한다면처마의삐짐은역시 3.0m 를넘는것으로판단된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77

278 이상에서한반도 일본모두기단의삐짐만이아닌雨落溝등에서의검토가필요하지만, 규모가큰금당은제공을내는공포를갖추고, 규모가작은금당은제공을내지않는공포를사용했다고추정할수있다. 행랑의삐짐이작은금당앞절에서행랑의삐짐이내주의주칸보다대단히작은사례로현존하는일본法隆寺외에, 백제왕궁리폐사와통일신라감은사를들었다. 왕궁리폐사는法隆寺와같이桁行 5칸 梁行 4칸의규모를갖는점도공통된다. 法隆寺금당의공포의특징은제 3장에서논한바와같으나, 法隆寺에서는오중탑이나중문에도이수법을사용하고있으며, 이외에현존하는法起寺 ( 홋키지 ) 삼중탑이나法輪寺 ( 호우린지 ) 삼중탑 (1944 년소실 ) 에서도예가있는데, 일본고대사원의탑유구를검토해도奈良県斑鳩지방이외의지역에서는확인되지않는다. 34) 하지만부여국립박물관소장의청동제소탑편에隅行방향으로만제공을내는공포가새겨져있어, 백제지방에이러한건축이있을것으로추정되어왔다. 35) 유감스럽게도기둥배치가판명된백제목탑유구가없기때문에, 목탑에서는실제로증명할수없었으나, 백제에서이가능성이있다고했을때, 왕궁리폐사금당이그유력한후보가된다. 감은사도그가능성을부정할수없다. 5. 이중기단과부연 하층기단상의초석의성격이중기단을갖는예와하층기단상에초석을갖는예가비교적풍부한점도한반도금당의특징이다. 하층기단상의초석 ( 차양칸 ) 의특징에대해서는제 2장에서기술하였으나, 그성격은제 2장에서는부연의기둥을지지하는초석으로추정하였다. 한국의연구자도부연의초석으로추정하고있어, 36) 이를지지하는결과가되었다. 부연과그성격法隆寺금당이나오중탑의初重에설치된부연은, 건물의완성후일정정도의시간이흐른후만들어졌음이部材의풍식 ( 風蝕 ) 차이등에서판명되어있다. 37) 이는신라사천왕사의하층기단의양상과공통된다고생각된다. 다른한반도의유구에서차양칸의설치시기에대해서는명확하지않다. 제 3장에서기술한것처럼, 8세기의일본에서는부연이달린금당은비교적예가많으나, 이들은건물의의장 구조에서볼때, 건설후에설치되었다고는생각하기힘들다. 이들은계획적으로건설되어있으며, 그구조적의미로는건물본체의보강으로서의벗트레스효과를기대한것으로제 3장에서추정 34) 箱崎和久, 2012, 古代寺院の塔遺構, 文化財論叢 Ⅳ, 奈良文化財研究所. 35) 前掲註 2의箱崎論文에서이점에대해정리하였다. 36) 韓旭, 百済寺院金堂跡の平面と構造, ( 前掲註 5). 37) 法隆寺国宝保存委員会, 1962, 国宝法隆寺金堂修理工事報告, 法隆寺国宝保存工事報告書第 14 冊. 278 한일문화재논집 Ⅲ

279 하였다. 당연한것이지만건물본체의기둥이나기단을빗물로부터보호하는역할을담당하였다고판단된다. 이들은모두기단위에부연의기둥을세운예로, 法隆寺금당은명확하지않지만 8세기부연이달린금당은, 당초부터기단위에부연을설치하는것을의도하여기단의크기가결정된것이된다. 초석설치위치와기단제 2장에서기술한것처럼한반도금당의하층기단의폭은차양칸을가진것이갖지않은것보다크다. 또한상층기단의삐짐은차양칸의유무에관계없이 1.6~2.2m 로, 이에반해기단위에부연을놓는일본금당의기단의삐짐 ( 행랑柱心에서기단가장자리까지의거리 ) 은東大寺를제외하면 3.2~4.7m 를취한다. 또한부연 ( 차양칸 ) 의삐짐은일본에서는東大寺 東寺를제외한 4례에서 1.9~2.9m, 한반도 4례에서는 1.9~3.6m 였다. 이상에서한반도의금당은부연을가진일본의금당에비해상층기단의삐짐이작은것을알수있다. 그러므로상층기단위에부연을설치해도유효한부연의공간을확보할수없다고생각된다. 또한상층기단위에부연의초석을설치한다고하면, 기단緣辺部에배치하는것이되어초석의안정성에문제가생길것이다. 상층기단의삐짐은당초부터이중기단으로하고하층기단도처마아래로들어오기때문에작게하지않으면안됐다고판단된다. 일본에서는이중기단을포기하고기단의삐짐을크게했다고해석할수있다. 차양칸의초석은위와같은이유로상층기단위에놓을수없기때문에하층기단위에초석을놓게되었다고추정된다. 차양칸을갖는한반도의금당이, 모두상기한것과같은프로세스를거쳤는지는확증이없으며정형화되었을가능성도부정할수없다. 제 2장에서도기술한것처럼, 하층기단의축성상황이나하층기단위의초석의설치상황에대해재검토할필요가있을것이다. 부연기둥의단면형현존하는 8세기까지의일본건축에서부연을갖는것은法隆寺금당, 같은절의오중탑, 薬師寺동탑으로, 시대가떨어지면平等院 ( 뵤우도우인 ) 鳳凰堂 ( 京都府宇治市 ; 1052 년 ), 法界寺 ( 호우카이지 ) 阿弥陀堂 ( 京都市 ; 13세기 ) 등이있다. 모두부연은角柱이며, 일본에서는전통적인부연기둥의방법 ( 혹은규격 ) 으로판단된다. 法隆寺금당과오중탑의부연은상층기단위에토대를깔고角柱를세우고, 柱筋을건물본체와맞추지않고, 부연의지붕을本瓦葺 ( 기와지붕 ) 으로하지않고板葺 ( 판자지붕 ) 으로하는등의다른예는없는특징이있다. 이와같은구축물을유적에서검출하는것은거의불가능하다고생각된다. 8세기興福寺중금당, 東大寺대불전, 東寺금당은부연기둥에圓柱 ( 丸柱 ) 를사용하며, 제 3장에서논한것처럼건물본체와의일체화가그려진다. 한편한반도금당의차양칸의기둥은백제傳천왕사, 신라황룡사중금당, 신라사천왕사에서는圓柱가사용된듯하다. 발굴된한반도금당에서차양칸의기둥이角柱인것을확인한예는없는데, 현존건축과발굴유구에서그양상이다른사항의하나이다. 일본의부연기둥을角柱로하는이유나그원류, 한반도의부연에圓柱를사용하는이유와, 일본의 8세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79

280 기일부금당과의관계유무등은앞으로의과제이다. 6. 일본금당건축의원류 이상한반도금당에대해일본의금당과의비교검토를통해특징이나문제점을기술했으나, 마지막으로이를총괄하여일본에의건축문화전파에대해약간생각해보고자한다. 7세기의일본에도입되어보급된금당의평면은, 桁行 3칸 梁行 2칸의내주의四周에행랑을돌린형식이었다. 그중에서도내주의梁行을 2칸으로하는점이중요할것이다. 한반도에서梁行 2칸의금당을확인할수있는것은, 현재백제의익산지역에있는미륵사와왕궁리폐사, 신라황룡사뿐이다. 거기에이들사원에는이외에도몇가지일본의사원과의공통점이있다. 익산과일본우선왕궁리폐사금당과공통점이있는것은法隆寺금당이다. 이는내주의梁行을 2 칸으로하는것외에, 이미논한것처럼행랑의삐짐이내주의柱間수치와비교해작은점, 계단이각면의중앙에있는점등이다. 이중행랑의삐짐이내주의柱間수치와비교해작은특징은隅行방향으로만제공을내는공포를가진法隆寺건축의평면적특징이며, 이것이왕궁리폐사금당에도사용되었을가능성이있음을보여주고있다. 현재백제의사비 ( 부여 ) 지방이나신라에는이러한특징을가진금당은보이지않는다. 다음으로내주梁行이 2칸으로총주의형식을취하는것은한반도에서는미륵사뿐이나, 일본에서는四天王寺금당이그가능성을가진유일한사례이다. 이와같이일본에서보이는특이한평면적특징을가진금당은, 모두백제익산지방에존재하는사원이다. 익산에미륵사나제석사가창건된것은 7세기전반으로, 四天王寺나法隆寺의창건연대는그보다약간올라가는감이있으나, 가람건축의조영이창건보다약간늦었다고한다면, 익산지방의문화가導引되었을가능성을부정할수없다. 一塔一金堂式 ( 일본에서는四天王寺式으로부름 ) 의가람배치는, 제석사나왕궁리폐사등익산지방에서도사용되고있고, 일본의四天王寺나法隆寺당초 ( 唐草 ) 가람에도채용되었다. 法隆寺의隅行방향으로만제공을내는공포의직접적인원류가왕궁리폐사에있다는엄밀한이야기를하자면, 왕궁리폐사의창건연대나법륭사당초가람의조영연대에대한논의를하지않으면안되게된다. 여기서는일본의 7세기전반의사원건립에익산지방의불교문화나건축문화가영향을주었을가능성이있음을지적하는것에그치고싶다. 신라와일본내주梁行을 2칸으로하는황룡사는, 이와함께桁行 7칸이상의규모를취하는것이특징이다. 제 3장에서다른일본의사례에서는桁行 5칸을넘는금당의출현은 7세기후기의本薬師寺 280 한일문화재논집 Ⅲ

281 까지떨어진다. 하지만제 3장에서다룬사례는기단규모와柱間수치를거의확정할수있는것에한해서였기때문에, 거기에는빠진중요한유구가있다. 吉備池廃寺 ( 百済大寺跡 ) 가그것으로, 여기에는掘込地業 ( 일단건물을세울범위를파내고, 그안을판축토나돌을섞은흙으로다시묻는지반개량공법 ) 과기단판축이잔존하고, 기단규모나기둥배치는명확하지않지만그규모에서桁行 7칸정도의금당이추정되고있다. 38) 吉備池廃寺는 7세기중기의건립으로本薬師寺에선행하며, 시기적으로봐도파격적인규모였음은의심할여지가없다. 百済大寺는 2번의移建을거쳐文武朝大官大寺가되는데, 文武朝大官大寺금당은桁行 9칸 梁行 4칸의규모를갖는다. 이百済大寺와文武朝大官大寺의사이에는天武朝大官大寺라는사원이있으나, 天武朝大官大寺의소재는아직까지분명하지않으며, 文武朝大官大寺에선행하여桁行 9칸규모의금당이세워졌을가능성도부정할수없다. 한편百済大寺는 639년에舒明천황에의해발원되어구중탑이세워진것을문헌에서알수있으나, 모두에서논한것처럼그건립시기는 645년의신라황룡사 9층탑의건립시기와겹친다. 百済大寺구중탑 ( 吉備池廃寺塔 ) 의정확한기단규모나기둥배치는명확하지않으나, 기단판축의잔존상황에서볼때, 황룡사 9층탑에필적하는크기를갖는다. 39) 이에더하여금당의규모도황룡사중금당과文武朝大官大寺에서는大官大寺가내주梁行을 5.3m(18 척 ) 으로하며, 황룡사중금당의 5.0m 보다 0.3m(1 척 ) 큰것, 황룡사중금당이내주 + 행랑에더하여차양칸을갖는것이다를뿐으로, 그외柱間수치는 5.0m 등간으로공통된다. 만약황룡사의차양칸이건립후의改修에의한것으로하면, 내주梁行의미세한차이만있을뿐으로, 황룡사중금당과大官大寺금당은거의같은규모라고말해도과언이아니다. 이러한탑의건립시기나그규모와함께, 금당의규모에있어적어도황룡사와文武朝大官大寺가동등하며, 이에선행하는文武朝大官大寺의금당도같은규모라한다면, 大官大寺즉百済大寺가황룡사를의식하고세워졌고, 혹은이를목표로이축, 개조가이루어졌을가능성은충분히생각할수있다. 40) 38) 箱崎和久, 2003, 堂塔の復原的考察, 吉備池廃寺発掘調査報告, 奈良文化財研究所. 39) 箱崎和久, 堂塔の復原的考察, ( 前掲註 38). 40) 신라황룡사중금당과일본 ( 文武朝 ) 大官大寺금당, 거기에北魏永寧寺불전의규모가유사하다는지적은, 梁正錫, 新羅 皇龍寺九重木塔の造成に関する比較史的検討 ( 東アジア 6~7 世紀における勅願寺高層木塔の考古学的比較研究, 東北学院論集歴史と文化第 40 号, 2006) 에서행해졌다. 또한여기서는永寧寺불전과洛陽城태극전, 大官大寺와藤原宮대극전의규모가유사하다는지적도있으며, 태극전의형태가이들사원금당의형태에반영되었을것으로판단하고있다. 또한百濟大寺와文武朝大官大寺에서는금당의규모는文武朝大官大寺에서커지고황룡사중금당과거의같은규모가되나, 탑은文武朝大官大寺에서느百濟大寺보다규모가작아진다. 이의미는명확하지않으나, 九重塔의건립의일찍이없던미증유의사업으로, 기술적인개변이추가되었기때문이라고해석하는것도불가능하지않다.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81

282 한편百済大寺의건립은국내적으로는蘇我 ( 소가 ) 씨에의대항의식에의한산물, 국외적으로는격동의동아시아정세를반영하여건립되었음이지적되고있다. 41) 일본최초의본격적인불교사원인飛鳥寺의건립에맞춰백제의기술이도입된것은문헌에서분명히보인다. 이에이어지는 7세기전반일본의사원건립, 구체적으로는四天王寺와法隆寺는선술한것처럼백제에서도익산지역과의관련이깊을가능성이있다. 그리고百済大寺와그後身의大官大寺 ( 文武朝 ) 가신라황룡사와유사한규모의탑이나금당을갖는것은, 역시단순한우연은아닐것이다. 이것이핵심이라고한다면, 百済大寺의건립에맞춰신라의최신기술의도입을의도했을가능성이있다. 잘알려진것처럼 삼국유사 나황룡사목탑의 찰주본기 의기사에서, 신라황룡사 9층탑의건립에는백제에서초빙한工匠인阿非知가관여하고있다. 여기에서황룡사의건축기술은백제를원류로할지도모른다. 어찌됐든이는飛鳥寺나四天王寺, 法隆寺를뺨치는거대건축을조영하는기술이었다고판단된다. 舒明천황이발원한百済大寺에는종래의蘇我씨혹은蘇我씨계열의씨족이건립한사원을뺨칠건물규모와그와공반한기술을필요로했으며, 동시에한반도의거대사원과동등이상의규모와기술로건립하는것을추구했던것일것이다. 사원의건물규모에이것들이여실히반영되었음을읽어낼수있지않을까? 그외의문제점그렇게되면飛鳥寺의건립에있어서, 사비지역의건축이영향을미쳤는지, 그러한기술이도입되었는지가문제가될것이다. 그렇지만飛鳥寺중금당의양상이명확하지않으며, 또한동 서금당도상층기단위의기둥배치가명확하지않은이유로충분한검토가불가능하다. 한편飛鳥寺의가람배치는고구려에서보이는 1탑 3금당식으로백제의 1탑 1금당식이아닌점도의문이었다. 이해독의하나로飛鳥寺의기본적인가람배치는 1탑 1금당식이며, 동 서금당은백제의사원에서발견되는동서의부속건물이라는지적도있다. 42) 飛鳥寺동 서금당은이중기단으로하층기단에초석을가지나, 백제의동서부속건물에서이중기단을갖고하층기단에초석을마련한예는발견되지않는다. 또한건물규모나복원가능한평면형식을보아도, 동 서금당은부속건물이아닌금당으로추정하는편이자연스럽다. 다만하층기단이당초부터만들어져있었는지, 동 서금당이창건당초부터세워져있었는지는재고할여지가있을것이다. 飛鳥寺회랑의동서규모는, 동 서금당을두는데다공간에여유가있으므로, 동 서금당이후대의증축이라고한다면, 회랑의증축을공반할지도모른다. 41) 熊谷公男, 2006, 日本百済大寺の造営と東アジア, 東アジア 6~7 世紀における勅願寺高層木塔の考古学的比較研究, 東北学院論集歴史と文化第 40 号. 42) 佐川正敏, 2010, 王興寺と飛鳥寺の伽藍配置 木塔心礎設置 舎利奉安形式の系譜, 古代東アジアの仏教と王権 - 王興寺から飛鳥寺へ -, 勉誠出版. 282 한일문화재논집 Ⅲ

283 이와같이飛鳥寺의가람배치에대해서는, 현재까지는역시백제보다도고구려에가깝다고생각하지않을수없다. 가람배치와관련되는것은, 일본의양薬師寺 ( 本薬師寺 平城薬師寺 ) 의당탑 ( 堂塔 ) 이다. 양薬師寺는회랑내에동서양탑을배치하는쌍탑가람으로, 신라사원의가람배치와유사하다. 그중에서도平城薬師寺는회랑전체가남북방향 ( 奧行 ) 보다동서방향 ( 間口 ) 이긴직사각형 ( 矩形 ) 을띠는점외에, 회랑의종횡비나당탑간의거리비율등이근사치인점에서, 신라감은사와가람배치계획상의유사성이지적되고있다. 43) 하지만탑은감은사가석탑임에반해薬師寺는목탑이며, 금당도감은사가내주梁行을 1칸으로한桁行 5칸 梁行 3칸의당임에반해, 薬師寺에서는내주梁行을 2칸으로하고, 桁行 7칸 梁行 4칸의건물본체에부연을돌린형식으로완전히다르다. 이금당의평면은오히려황룡사제 1 차동금당과유사하다. 즉당탑의평면이나구조는각각의사원이독자적으로그형식을채용했다고추측된다. 따라서여전히양절의가람배치에직접적인관계가있는지, 혹은양절이모방한미발견의사원이있는지는매듭지어지지않는다. 역시동시대중국의양상이마음에걸리는부분이다. 마지막의문은山田寺금당과같이내주 행랑모두桁行 3칸 梁行 2칸의규모를취하는특이한평면형식의원류에대한것이다. 한반도에서는현재까지이와같은사례는찾아볼수없다. 다만山田寺의유구에서보이는높은석재가공기술은대륙의영향이크다고생각된다. 穴太廃寺에서는도래계의유구나유물이발견되고있어, 역시대륙의기술이도입되었다고판단된다. 이시기중국의양상은명확하지않지만앞으로한반도에서이와같은유구가발견되길기대해본다. Ⅴ. 맺음말 이상한반도와일본의금당에대해서비교검토하고, 그유사성이나차이점을정리하였고, 일본으로의건축문화전파라는관점에서도검토를덧붙여보았다. 하지만이러한관점은단순히금당만이아닌그외의건축, 예를들면탑이나문, 강당, 회랑, 거기에가람배치등의비교검토를행한후에야비로소실증적으로나타날수있는것이다. 본고가이를위한시론으로자리매김이된다면다행이다. 일본의금당에대해서는 7세기의양상이아직명확하지못한점이많다. 이는발굴조사성과는증가하고있으나, 집성작업이충분이이루어지고있지않아유효한데이터가적은실정이기때문이다. 한편 43)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 1987, 薬師寺発掘調査報告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83

284 8세기의양상은비교적판명되어있어제 3장에서는 8세기금당의특징을개관했으나, 한반도에는 8 세기의사례가적은점이있어비교가충분히이루어지지못한경향이있다. 한편으로일본에서는발굴조사에서출토된기와의문양이나제작기법을분석하여, 와범 ( 瓦笵 ) 의이동이나제작공인의이동이라는당시제작배경에대한연구도진행되어인접하는사원이나관아와의관련이밝혀진예도많다. 이러한연구배경에서발굴유구를집성하고, 건축적인시점에서사원간이나사원과관아와의관련을추구하는작업이요구되고있다. 다행히필자들은 2015 년도부터 5개년계획으로, 일본의과학연구비기반연구 A 발굴유구에의한고대사원건축사의구축 ( 연구대표자 : 箱崎和久, 과제번호 15H02284) 를얻어연구를개시하였다. 이성과를피력할수있기를기대한다. 한국의연구스피드는빠르다 년에 금당편 이간행되었는데, 이전년도에는 同목탑편 이출간되었고, 거기에 2012 년에는 同그외의유구편 이만들어졌다. 모두일본과중국의사례를수집하여검토가이루어진역작이다. 그정보수집능력과출판까지의빠름은감복하지않을수없다. 한편일본의연구에서는단순히그유적만이아닌주변의유적을포함해, 그배경을추구하는정밀한검토가축적되어오고있다. 이들의연구는말하자면복잡하게얽힌실을풀어헤치고이를종실 ( 縱糸 ) 과횡실 ( 橫糸 ) 로짜내어, 역사를밝혀가는행위로한국과일본이관련되어있는것에대해서는한국과일본의연구자에의한공동작업이필요하다고생각된다. 건축사에대해서도 12세기경까지는유적을대상으로한연구가가능하지만, 앞으로도한국의연구를따라갈 ( 추종할 ) 수있도록연구를진행해가고싶다. 284 한일문화재논집 Ⅲ

285 도면출전 사진 1 : 奈良文化財硏究所소장. 도면 1 : 海野聡작성. 도면 2 : 奈良文化財硏究所, 2002, 山田寺発掘調査報告 奈良文化財硏究所学報第 63 冊, 奈良文化財研究所. 도면 3 4 : 室生寺, 1976, 大和古寺大觀 第 6 巻, 岩波書店. 도면 5-8 : 鈴木智大작성. 도면 9-14 : 海野聡작성.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85

286 표 2. 고대한반도금당의평면규모 柱間 番号 建立年代王朝名寺院名堂名時期 平面類型 間数 総長 (m) 身舎柱間寸法 (m) 桁行 廂の出 (m) 1 4C 後 高句麗 土城里廃寺 西金堂 身舎のみ (5.6 3) 2 5C 後 高句麗 上五里廃寺 東 西金堂 3 5C 高句麗 定陵寺 中金堂 4 西金堂 身舎のみ ( ) 5 東金堂 身舎のみ ( ) 6 5C 後 高句麗 清岩里廃寺 中金堂 遮陽間付 7 東金堂 8 6C 前 中 百済 軍守里廃寺 9 6C 前 中 百済 東南里廃寺 四面廂 (5.0 3) 百済 陵山里廃寺 四面廂 ( ) 百済 王興寺 創建 12 再建 13 7C 前 百済 金剛寺 創建 14 再建 15 7C 百済 扶蘇山廃寺 16 7C 前 百済 龍井里廃寺 1 次 17 2 次 18 6C 後百済伝天王寺 四面廂遮陽間付 ( ) C 前百済弥勒寺中金堂総柱 (4.4 3) 東金堂総柱 (2.7 3) 西金堂総柱 (2.7 3) C 前百済帝釈寺 23 7C 中百済王宮里廃寺四面廂 (4.8 3) 百済聖住寺 2 次 25 3 次四面廂 (3.3 3) 新羅皇龍寺中金堂 27 東金堂 1 次 四面廂遮陽間付 四面廂遮陽間付 (5.0 7) ( ) 한일문화재논집 Ⅲ

287 遮陽間の出 (m) 総長 (m) 身舎柱間寸法 (m) 梁行 廂の出 (m) 遮陽間の出 (m) 桁行 / 梁行 桁行 (m) 基壇 梁行 (m) 桁行 / 梁行 基壇の出 7.8 (3.9 2) (4.1 2) (3.8 2) 上成 桁行 (m) 梁行 (m) 桁行 / 梁行 下成 上成 下成 (3.7 2) (2.3 2) 下成 上成 下成 上成 下成 上成 (2.3 2) (3.6 2) 下成 上成 下成 上成 (5.0 2) (3.6 2) 下成 上成 下成 上成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87

288 柱間 番号 建立年代王朝名寺院名堂名時期 平面類型 間数 総長 (m) 身舎柱間寸法 (m) 桁行 廂の出 (m) 28 2 次 四面廂 ( ) 次 四面廂 ( ) 西金堂 1 次 次 四面廂 ( ) 新羅 芬皇寺 中金堂 33 東 西金堂 新羅四天王寺 四面廂遮陽間付 (3.6 3) C 後 統一新羅 感恩寺 四面廂 (3.5 3) 統一新羅 天官寺 二面廂 (3.5 5) 37 統一新羅 澗月寺 二面廂 ( ) 38 統一新羅 千軍洞廃寺 39 統一新羅 高仙寺 高麗 智谷寺 二面廂 ( ) 間数 総長は遮陽間を除いたもの 표 3. 고대일본금당의평면규모 番号 寺院名 年代 間数 身舎柱間寸法 (m) 桁行 柱間 廂の出 (m) 身舎柱間寸法 (m) 1 新薬師寺 8 世紀中頃 13 4 カ 壇正積 2 東大寺 8 世紀中頃 壇正積 3 西大寺薬師金堂 8 世紀後半 9 4 カ 梁行 廂の出 (m) 形式 壇正 or 切石積 4 大官大寺 ( 文武朝 ) 8 世紀初 切石積 5 興福寺 ( 中金堂 ) 8 世紀前半 壇正積 6 薬師寺 8 世紀前半 壇正 or 切石積 7 本薬師寺 7 世紀末 切石積 8 東寺 9 世紀初 切石積 9 唐招提寺 8 世紀後半 壇正積 10 肥前国分寺 8 世紀中頃カ 9 4 カ 不明 11 武蔵国分寺 8 世紀中頃 乱石積 288 한일문화재논집 Ⅲ

289 遮陽間の出 (m) 総長 (m) 身舎柱間寸法 (m) 梁行 廂の出 (m) 遮陽間の出 (m) 桁行 / 梁行 桁行 (m) 基壇 梁行 (m) 桁行 / 梁行 桁行 (m) 基壇の出 15.4 (3.7 2) (3.6 2) 梁行 (m) 桁行 / 梁行 下成 上成 下成 上成 総長 (m) 桁行 基壇の出 (m) 基壇 総長 (m) 梁行 基壇の出 (m) 桁行 / 梁行 以上 裳階付 ( 裳階の出 6.8m) 基壇の出は裳階隅柱から 備考 裳階付 ( 裳階の出桁行 2.8m 梁行 3.0m) 基壇の出は主屋隅柱から 裳階付 ( 裳階の出 1.9m) 基壇の出は主屋隅柱から 裳階付カ 基壇の出は主屋隅柱から 現存遺構と同規模 現存遺構 二重基壇の可能性あり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89

290 番号 寺院名 年代 間数 身舎柱間寸法 (m) 桁行 柱間 廂の出 (m) 身舎柱間寸法 (m) 12 相模国分寺 8 世紀後半カ 葺石状 13 飛騨国分寺 8 世紀中頃カ 美濃国分寺 8 世紀後半カ 磚積 15 駿河国分寺 8 世紀中頃カ 乱石積 16 遠江国分寺 8 世紀中頃 7 4 カ 木製 17 伊賀国分寺 8 世紀中頃カ 不明 18 出雲国分寺 8 世紀中頃カ 瓦積 19 周防国分寺 8 世紀中頃 磚積 20 讃岐国分寺 8 世紀中頃カ 豊後国分寺 8 世紀後半 7 4 カ 乱石積 22 薩摩国分寺 ( 創建金堂 ) 梁行 廂の出 (m) 8 世紀後半 乱石積 23 若狭国分寺 8 世紀後半カ 乱石積 24 観世音寺 8 世紀前半 5 4 カ 瓦積 25 法隆寺 7 世紀後半 切石積 形式 26 飛鳥寺 ( 東金堂 ) 6 世紀末 川原寺 7 世紀後半 乱石積カ 壇正 or 切石積 28 檜隈寺 7 世紀後半 乱石積 29 高麗寺 7 世紀後半 瓦積 30 賞田廃寺 7 世紀後半 瓦積カ 31 杉崎廃寺 7 世紀末 乱石積 32 山田寺 7 世紀中頃 壇正積 33 夏見廃寺 7 世紀末 玉石積 34 穴太廃寺 ( 再建金堂 ) 7 世紀後半 瓦積 35 正家廃寺 8 世紀中頃 盛土 36 海竜王寺 ( 西金堂 ) 8 世紀前半 壇正積 *柱間 間数には裳階を含めていない また柱間寸法 基壇総長は四捨五入し 10 cm単位までとしている そのため 柱間総長と 基壇の出の合計が基壇総長と一致しないものもある アミカケは基壇の出が約 4.5m(15 尺 ) をこえるもの 290 한일문화재논집 Ⅲ

291 総長 (m) 桁行 基壇の出 (m) 基壇 総長 (m) 梁行 基壇の出 (m) 桁行 / 梁行 40 カ カ 基壇不明 基壇不明 備考 各面で四面廂の出が異なる 現存遺構 二重 裳階付 ( 裳階の出は 2.2m ) 基壇の出は主屋隅柱から 二重基壇 二重基壇 下成基壇上に礎石アリ 下成基壇上の礎石の出は 1.95 m 基壇寸法は下成基壇のもの 二重基壇 下成基壇上に礎石は不明 基壇寸法は下成基壇のもの 16.0 カ 二重基壇 基壇寸法は下成基壇のもの 放射状柱配置 放射状柱配置 基壇は地山 + 盛土 放射状柱配置 基壇の出が大きい 放射状柱配置 現存遺構 切妻造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91

292 도면 5. 고대한반도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2 에대응 ) 292 한일문화재논집 Ⅲ

293 도면 6. 고대한반도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2 에대응 )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93

294 도면 7. 고대한반도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2 에대응 ) 294 한일문화재논집 Ⅲ

295 도면 8. 고대한반도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2 에대응 )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95

296 도면 9. 고대일본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3 에대응 ) 296 한일문화재논집 Ⅲ

297 도면 10. 고대일본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3 에대응 )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97

298 도면 11. 고대일본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3 에대응 ) 298 한일문화재논집 Ⅲ

299 도면 12. 고대일본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3 에대응 )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299

300 도면 13. 고대일본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도면 3 에대응 ) 300 한일문화재논집 Ⅲ

301 도면 14. 고대일본의금당평면복원모식도 1:800 ( 번호는표 3 에대응 ) 일본에서본한반도의고대사원금당 301

302 서민석 강소영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Ⅰ. 서론 Ⅱ. 고생물유체조사방법 1. 동물유존체분석 2. 인골분석 3. 고민족식물학 (Palaeoethnobotany) 4. 수종분석 5. 화분, 기생충란분석 6. 연륜연대학 (Dendrochronology) 7. 식물규소체분석 8. 대형식물분석 Ⅲ. 고찰 요약문 고고학은유적지에서출토되는잔존물질 (material remains) 로부터과거사회와사람들을연구하는분야이다. 최근에는보존된생물자료또는지질자료를토대로과거의인간이점유한경관과그들이이룩한경제에대해서자연과학적분석방법이활용되고있다. 여기서생물자료라고말하는것은고고학적유적지에서보존되거나동반된동식물유체또는그러한고생물유체의자국들을일컫는말이다. 생물은죽어서부패하거나화석이되어오랜시간동안매장되어현재의우리에게과거를보여줄수있는증거로남아있을수있다. 한일고생물유체비교연구 과제초반에는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진행하고있는분자유전학적연구결과의비교만을고려하였으나, 1 2 차년도에걸쳐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를방문하고 생물환경조사과정 연수를통하여다양한연구방법론에대한이해와연구주제의방향을폭넓게설정할필요가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수행하고있는고환경분석, 동물유체동정등에대한결과물의이해도중요하지만, 현재일본에서시행되고있는다양한고생물유체대한분석방법을소개하고국내적용가능한분야와연구자를연결하는것이필요할것으로판단하였다. 주제어 : 잔존물질, 동식물유체, 고생물유체 302 한일문화재논집 Ⅲ

303 일본 고생물유체 연구 방법 조사 서 민 석* 강 소 영**1) Ⅰ. 서론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진화인류학연구소(Pääbo 그룹)과 마인츠대학교 고대유전학연구소(Burger 그룹)는 1980년대 후반부터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포유류 및 멸종 동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왔 다.(Krings et al, 1997; Krings et al, 1999; Krings et al, 2000) 또한 영국 더럼대학교의 고고과학 연구소에서는 고DNA 분석을 통한 돼지의 가축화와 인류의 확산 루트에 대한 연구 및 고대 말의 기원 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고생물유 체의 분류를 통해 지역 및 시대별 환경 비교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나고야대학교 연구진(Sakahira F, Niimi M.)은 일본 고대 바다사자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분자계통학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국내 고고유적지에서 출토된 고생물유체에 대한 연구는 형태학 및 분류학적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 져 있으며, 주요 연구기관으로는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고려대학교, 단국대학교, 제주대학교 등 을 언급할 수 있다. 특히, 서울대학교에서는 미라에 대한 분자유전학적 연구를 시행하였으며, 단국대 학교에서는 미라에서 얻어진 기생충 알에 대한 분석연구를 발표하였다(Seo et al, 2007; Seo et al, 2008; Oh et al, 2000; Shin et al, 2011). 제주대학교 연구팀은 제주도에서 출토된 고대 말, 돼지에 대한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를 보고한 사례가 있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고인골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분석 연구를 진행하 고 있으며, 한민족과 관련하여 몽골의 출토 인골 및 동물유체에 대한 유전학적 종 동정 연구를 수행하 고 있다(지상현 등, 2008; 지상현 등, 2009; 강소영 등, 2010; 서민석 등 2014). 또한 중요 유적지의 토 양에서 고대 기생충 알에 대한 분석, 토양 성분에 대한 이화학적 특성 연구 등을 실시하고 있다(김윤 지 등 2014). * 韓國 國立文化財硏究所 硏究企劃科 ** 韓國 國立文化財硏究所 保存科學硏究室 일본 고생물유체 연구 방법 조사 303

304 이러한연구기반을중심으로한국과일본의유적지또는저습지에서출토되는고생물유체의형태학적동정및분자유전학적특성을비교분석하는연구의가능성을모색하고자하였다. 또한, 유적지에서발굴되는고생물유체에대한인문학및자연과학적융합연구를목적으로한국과일본간고생물유체의비교분석연구를추진하게되었다. 2012년부터시작된본연구는나라문화재연구소매장문화재센터를방문하면서진행되었다. 매장문화재센터에서는연구주제에대한토론을통해향후진행할연구방향을모색하였으며, 이에대한보다구체적인사례연구를논의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익산왕궁리화장실유구토양분석및기생충알동정결과를설명하였고, DNA 분석연구로는김포장기지구출토인골및창녕송현동고분출토순장인골의유전자분석연구결과를발표하였다. 매장문화재센터에서는일본고환경분석최신연구결과와일본의국내외공동연구성과를설명하였다. 특히, 일본히가시묘우 ( 사가현 ) 습지유적지출토꽃가루, 씨앗, 나무등의고환경분석결과와한국의김해회현리패총및비봉리등의고생물유체분석결과를발표하였다. 나라문화재연구소매장문화재센터에서설명한일본의고생물유체연구동향의주요내용을요약하자면다음과같다. 1 일본은고고학자의시각에서발굴현장에서얻어지는유물을어떠한방법으로채취할것인가에대한방법론적인연구가진행되고있다. 2 습지유적, 패총, 동굴유적이대표적으로고생물유체연구에중요한유적지로평가하고있으며, 특히습지유적에서는식물과유기물을많이포함하고있기에식물학자들과의공동연구를병행해서진행하고있다. 3 건조지역은탄화된견과류껍질, 인골, 동물뼈등의출토가빈번하며, 이러한흔적은주요발굴유물과는다르게인간의식생활에관한유물로판단하고있다. 4 연구목적으로는식물, 나무, 꽃가루등을이용한고환경복원이며, 이를통하여인간이어떻게환경을변화시키며생활했는지를알아보는방향으로진행하고있으며, 향후동물의사육과식물의재배에대한기원연구가필요할것으로예측한다. 한국과일본간고생물유체비교연구에필요한연구분야로는양기관에서진행하고있는인골과동 물뼈에대한비교연구를포함하여유적지출토식물, 나무, 꽃가루등을이용한고환경복원에관한 연구가중요한주제로판단되었다. 이를위하여매장문화재센터에서진행하고있는고생물유체를분석 304 한일문화재논집 Ⅲ

305 하기위한현생표본제작기술에대한실습을수행하였다. 현생비교표본제작을위하여시장에서구입한참돔을이용하였다. 표본제작에앞서생선의이름, 학명, 산지, 길이 ( 꼬리를포함한길이와꼬리를제외한길이 ), 무게등세부항목을기록하였다. 참돔의살을제거하였으며, 뼈를노출시킨상태에서중탕하여삶아냈으며모든살을완벽하게제거한후건조과정을거쳐현생비교표본으로보관하는일련의과정을수행하였다. 생선뼈를이용한종동정은일반적으로 11개부위를활용하는데실습에서는 9개의주요부위만을선별하여참돔의종구분에활용하였다. 또한, 유적지토양내미세유물채집기술에대해서도실습을수행하였는데, 일본의패총유적지에서채취한토양을대상으로실시하였다. 저습지, 동굴, 패총등에서채취한토양을채 (sieve) 를이용하여분리하고, 0.25 μm의채를이용하여가장작은뼈까지도분리하여동정하는실습을진행하였다. 특히우물, 화장실유구와젖은지역토양, 인골주변토양, 도랑유구등에서동물뼈, 탄화곡물, 식물등이다수출토되는경향이있기에유구토양의세심한관찰이필요하다는것을알수있었다 년도에는고생물유체동정연구의상호협조및분석결과공유를위한기초작업이수행된것으로볼수있다. 특히일본의고환경분석최신연구경향과현생표본제작방법등에대한자료를통하여보다구체적인비교연구방향을설정할수있는기반을마련하였다 년 2월에는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주관하고매장문화재센터에서진행한 생물환경조사과정 연수에참가하였다. 본연수는일본의발굴현장담당자및유적지생물, 환경연구자뿐만아니라외국의연구자도참여할수있는있는데, 이론과실습과정을병행하여발굴현장담당자가유적지에서출토된시료의생물, 환경연구에대한중요성을인식하도록하는데목적을두고있었다. 주요강의주제와강연자는다음의표와같다. 그리고, 7일간진행된연수중국내에서얻을수있는연구목적이나방법도있었지만, 아직국내에도입이되지않거나미미한연구주제도있었기에강의명순서대로연수내용을정리하여일본의고생물유체연구방법을소개하고자한다.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05

306 표 1. 생물 환경 조사 과정 연수 내용 강의명 강연자 소속 및 직위 동물유존체 야마자키 타케시 (山崎 健)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 환경고고학연구소 연구원 (奈良文化財研究所 埋蔵文化財センター 環境考古学研究室 研究員) 인골 시게하라 노부오 (茂原信生)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 객원연구원 (奈良文化財研究所 埋蔵文化財センター 客員研究員) 고민족 식물학 오바타 히로미 (小畑弘己) 쿠마모토대학 문학부 교수 (熊本大学 文学部 教授) 수종분석 이토 타카오 (伊東隆夫) 화분, 기생충란 분석 카네하라 마사아키 (金原正明) 연륜연대학 호시노 야스하루 (星野安治)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 연대학연구실 연구원 (奈良文化財研究所 埋蔵文化財センター 年代学研究室 研究員) 연륜연대학 코지마 다이스케 (児島大輔)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 연대학연구실 특별연구원 (奈良文化財研究所 埋蔵文化財センター 年代学研究室 特別研究員) 식물규소체 우다츠 테츠로 (宇田津徹朗) 미야자키대학 농학부부속 농업박물관 조교수 (宮マ崎大学 農学部附属農業博物館 准教授) AMS 연대측정학 나카무라 토시오 (中村俊夫) 대형식물유체 사사키 유카 (佐々木由香) 동위원소체 요네다 미노루 (米田 穣) 환경고고학 총론 마쯔이 아키라 (松井 章)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 객원연구원 (奈良文化財研究所 埋蔵文化財センター 客員研究員) 나라교육대학 고문화재과학전공 교수 (奈良教育大学 古文化財科学専修 教授) 나고야대학 연대측정종합연구센터장 (名古屋大学年代測定総合研究センター センター長) (주)팔리오 라보 통괄 부장 ( 株 パレオ ラボ5 統括部長) 도쿄대학 종합연구박물관 교수 (東京大学総合研究博物館 教授)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장 (奈良文化財研究所 埋蔵文化財センター長) 외부 전문가 초청 강연 Ⅱ. 고생물유체 조사 방법 1. 동물유존체 분석 일본에서는 환경고고학을 지고고학(geoarchaeology)과 생물고고학(bioarchaeology)으로 분류하 고 있다. 지고고학은 지질학적 측면을 강조한 분야이며,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적 기법을 응용하여 해 석하는 분야를 생물고고학으로 구분한다. 동물유존체를 발굴하고 분석하고자 할 경우에는 분석 목적 의 명확성이 강조된다. 이는 분석 의뢰 시 분석의 목적이 분명해야함을 의미하며, 자연과학적 분석을 도입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과학적인 연구가 되기 어렵다. 결국, 분석 의뢰자의 책임 이 중요하고, 현장에서 추구하지 않은 연구는 자연과학적 연구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움을 이해하여야 한다. 또한, 단일 분석보다는 복수의 분석을 병행하여 상호 보완적인 결과를 도출하여야 하며, 시료가 306 한일문화재논집 Ⅲ

307 한정되어있을경우에는우선시해야하는연구를선별결정하여야한다. 발굴현장에서동물유존체를채취할경우에는층위구분이확실해진상태에서이루어져야한다. 현장조사시층위, 출토상황에대하여세밀하게기록을남겨두어야하고, 토양채취시기존에발굴하던벽면을긁어낸후채취하여오염을방지해야한다. 자연과학적분석의우선순위결정을위해서는우선현장에서육안으로분석가능한시료 ( 대형화석류 ) 와육안으로구분이불가능한시료 ( 미화석등 ) 를구분해서조사해야한다. 토양을분석시료로선별하기위해서는발굴현장에서 5mm 채 (sieve) 로 1차적으로걸러내야하나, 생선뼈는최소 1mm의채로걸려내야손실을방지할수있다. 현장에서작업하는연구자들을대상으로 1차적으로시료분류를위한기본적인교육이선행되어야하며, 이를위해서는현대동물뼈또는모형을이용한형태학적종동정실습이필요하다. 2. 인골분석 시게하라노부모는일본의발굴현장에출토된인골의조사를위해서현장에인골표본을비치해놓는것을권장하고있다고설명하였다. 이는인골이발굴되었을때발굴자가채취부위의확인을위해서필요하며, 이를근거로분류및보관의편리성을강조하였다. 뼈의관절은신체부위판단의기준이될수있으므로인골발굴시에는관절부위가부서지지않도록주의해야한다. 특히, 추후필요한실험이나조사를위해서보관하여야하는인골은물로세척하는일이없어야한다. 현장에서직접확인할수있는형태적동정으로뼈부위별좌우구분과비슷한부위 ( 윗팔뼈, 정강이뼈, 손가락뼈 / 발가락뼈등 ) 에대한특징을우선파악해놓는것이중요하다. 특히, 척추뼈는돌출부위의수에따라경추, 흉추, 요추로구분되므로세심한관찰이필요하다. 현장에서제일중요하게판단하는성별판별기준은골반뼈가벌어진각도, 머리뼈뒤통수뼈돌출, 관자뼈꼭지돌기, 이마뼈눈위모서리, 그리고마지막으로미간융기등으로구분할수있는데이에대한일반적특징은다음표로정리하였다.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07

308 표 2. 출토 인골의 일반적 성별 특징 구분 특징 골반뼈가 벌어진 각도 남<여 머리뼈 뒤통수 뼈 돌출 크기 남>여 관자뼈 꼭지돌기 남>여 미간 융기 남>여 이마뼈 눈위 모서리 남자 : 부드러움, 여자 : 날카로움 3. 고민족식물학(Palaeoethnobotany) 식물고고학과 고민족식물학은 공통적으로 고고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 지만, 식물 자체에 대한 연구를 식물고고학으로 구분하고 있는 반면, 과거 식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복 원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를 고민족식물학이라 할 수 있다. 식물체가 발굴현장에서 출토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식물 종류에 따라 남겨져 있는 양이 다르기에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또한 출토되는 양이 극소량일 경우에는 출토 식물체의 오염 가능성을 우선 고려하여야 하며, 그 가능성을 배제해 나가면서 조사 연구를 진행하여야 한다. 식물체 중에서도 종자의 출토 사례가 많은데, 이러한 종자를 검출하는 방법으로는 부유선별법, 채 질, 압흔법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부유선별법은 식물자료의 파괴 가능성이 매우 낮기에 주로 사용되 고 있는 방법이지만, 침전물의 부유 여부에 따라 회수 되는 종자의 종류가 달라질 수 있는 한계도 가지 고 있다. 압흔법은 1991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방법으로 토기 내 남아있는 식물종자 흔적을 전자현미경 (SEM) 또는 실체현미경, 3D 스캐너 등을 이용하여 종자의 형태를 추출하는 방법이다. 압흔법은 종자 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토기 제작 시 태토에 있던 종자가 소성 시 사라지면서 토기 표면에 남아 있는 흔적을 실리콘으로 성형하여 종자를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종자의 오염가능성을 배제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며, 특히 토기 제작 시기의 주변 환경과 식생, 경작 곡식 등을 판단 할 수 있는 분석법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토기 압흔법으로 고민족식물학과 더불어 곤충고고학도 발전하게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는 토기 압흔에서 곤충의 흔적을 다수 발견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최근에는 1만년 전 쌀벌레가 압흔법에 의해 분석되었으며, 토기 제작시기와 압흔 형성 시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 다. 지금까지는 발굴 현장의 퇴적물에서 곤충이 발견되기가 어렵기에 미세 환경에 대한 파악이 어려웠 다. 하지만, 토기 압흔법을 이용하여 고대 인류 주변에서 공존했던 가옥 해충과 농경문화 정착에 따른 농업해충에 대하여 이해하는 노력이 진행 될 수 있었다. 308 한일문화재논집 Ⅲ

309 4. 수종분석 유적지에서출토되는목재의종을동정하는방법이수종분석이다. 수종은 DNA 분석으로도가능하지만유적지에서나온고대목재에는잔존 DNA의양이많지않거나아예없을수있기에수종분석법을주로이용한다. 물론 DNA 분석으로는종구분이가능할수있지만, 수종분석으로는속까지동정이가능하다는한계는있다. 하지만, DNA 분석보다분석조건이간편하고부분적으로종까지나눌수있기에종동정으로효율적인방법으로판단된다. 수종분석에사용되는시료는구조적변화가발생하지않게하기위해서는건조시키지말아야한다. 분석용시료는최소 5mm 이상확보해야분석이가능하며, 기본적으로 3단면 ( 횡단면, 종단면, 방사방향 ) 을채취해서분석해야한다. 그러나시료가목재유물이거나부분파손이곤란한경우에는최소한을사용하여야한다. 동일수종의경우부위별차이가없으므로보존상태가가장좋은부분을선별하여시료를채취하여야하며, 가급적목재유물의보존처리전에수종분석시료를채취하는것이바람직하다. 5. 화분, 기생충란분석 화분은퇴적입자의한가지로거주지유적보다습지환경에서보존상태가좋기에습지유적지에서주로발굴될수있는경우가많다. 화분은지역성, 계절성을고려해야하기에개별유적에서는구별하기어려운한계가있어서화분이발견되어분석할경우에는광범위한지역에대한이해를필요로한다. 화분에대한연구동향은주로화분양 ( 정량 ) 을계측하여당시산림량을추측하고당시식생및기후를복원하는데중점을두고있다. 화분을기준으로층위를구분하는화분층서가설정되는경우가있는데, 일본에서는고고유적의토양환경이다양하여충분히대응하기어렵기에화분분석결과가활용되는경우도있다. 화분동정은수종분석과동일하게속레벨까지동정이가능하며주변환경에대한식생의전반적인모습을알기위해가장적절한방법으로평가받고있다. 또한, 화분은종자, 과실보다유적지에잘남아있거나다량으로남아있을확률이높으며, 특히내구성이우수하여다른고생물체에비해동정이가능한시료로선택되고있다. 참고로종자, 과실의시료는종레벨까지구분이가능하며, 식물규소체분석은주로벼과를중심으로세분된레벨에서동정이가능하다. 화분분석을위하여유적지유구의벽면을깨끗하게깎아낸후 5~10cm 크기로토양시료를채취한다. 시료를채취하는방법으로는하나의층위에서 2~3 곳을대상으로채취하는방법, 기둥모양으로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09

310 트렌치를넣어채취하는방법, 또는토벽전체를통째로실험실에가져오는방법을사용할수있다. 시료채취는시료별교란을막기위해서층위아래부터채취하는것을원칙으로한다. 화분분석시필요한시료의양은필름통정도크기의시료를확보하여분석이가능하다. 모래층이포함된토양시료는일반적시료양보다더많이사용하여하기에양을늘려서분석하는것이필요하다. 화분분석용시료도수종분석시료와동일하게건조를방지해야만약품처리시팽창하여형태가불분명하게되는것을방지할수있다. 기생충란은주로화장실로추정되는유구의토양에서발견되는데, 일본에서는기생충란이 1cm2당 1,000 개이상발견되면화장실유구로추정하고있다. 일반적으로기생충란조사를위한방법에대해서는국내에서도사용하고있기에국내연구방법으로대체하고자한다. 국내에서는유적지토양에존재하는기생충란을확인하기위해서토층별시료를각각 10g 씩 50ml 시험관에넣은후 sodium phosphate tribasic(0.5%) 40ml을용매로사용하여혼합해준다. 용매에담긴토양시료는 1주일이상실온에놓아두며, 매일 1회이상살며시흔들어준다. 또한, 2일간격으로시험관을뒤집어놓음으로써밑부분의토양내에존재할수있는기생충알의부유를유도한다. 2주경과후, 시험관은거주 2겹과증류수를이용하여여과하고, 1시간이후에상층액을덜어서최종부피가 20ml이되도록증류수를첨가한다. 이시험관을 10초정도흔들어준후 20ul를파이펫으로뽑아낸후슬라이드글라스위에놓고커버글라스를올려놓는다. 관찰하는각토양층의시료들은각각 5 개씩준비하고, 관찰된기생충알을기록한다. 기생충알의관찰을위한현미경은주로편광현미경, 광학현미경을사용된다. 6. 연륜연대학 (Dendrochronology) 역사적과거를종합적으로연구하는학문분야중하나인연륜연대학은나무의나이테 ( 연륜 ) 를조사하여인류의역사와수목, 환경등을연구하는학문으로자리잡아가고있다. 연륜폭을매칭시킴으로써목재의산지를추정하고변동요인을해석할수있는데, 이는연륜고고학, 연륜생태학또는연륜기후학등다양한학문분야로의발전을거듭하고있다. 연륜연대학에서사용하는방법중교차연대법 (cross dating) 이있는데, 이는 2개이상의자료를대상으로연륜폭을계측하고비교하는방법이다. 해당되는연륜이짧으면여러부분에서매칭될수있으므로최소한 100년이상된나무를비교해야하는어려움이있다. 기준이되는나무또는유적지출토자료에근거하여시기를아는나무 (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이루어진것 ) 를기준으로하는경우가 310 한일문화재논집 Ⅲ

311 있다. 또한표준연륜곡성작성이필수적인데이는연륜결정의신뢰성을높이는데매우중요한작업중하나이다. 연륜이동심원상을나타내고있고, 연륜수가 100개이상인시료를대상으로연륜연대분석이가능하다. 그리고연륜폭이비교적좁은 (1mm 기준 ) 것을선택해서분석해야적정한값을얻을수있는데, 너무넓은것은국지적환경을반영하므로적합하지않다. 연륜분석을위해서는시료의목부면, 정목면및심이나오도록사진을촬영을하여야하며수피부착여부도확인하여야한다. 또한 PEG 처리후에도분석은가능하나가능하면보존처리전에연륜연대를의뢰하여분석을하도록하는것이바람직하다. 일본내연륜연대분석을실시하는기관으로는동북대학식물원, 나루토교육대학, 그리고나라문화재연구소등주로대학과연구기관에서진행하고있다. 7. 식물규소체분석 식물규소체분석은규소체를생산하는식물을대상으로연구하는분야이다. 주로벼과식물, 갈대, 도토리등을대상으로하고있는데, 주로물과함께토양내규소질을흡수하는식물체에존재한다. 규소체의크기는평균몇십μm에서 200μm정도의크기로점토보다큰것이특징이고, 비결정질인 SiO 2 로구성되어있으나결정구조가없는것도하나의특징이다. 화분보다소량존재하며구조가약하므로토양환경내에서오랫동안남아있기는어려우나, 벼잎의기동세포등에서주로발견될수있다. 모든표피세포에서생성되는것으로밝혀져있고, 일본이외의나라에서는다양한부위의규소체를조합하여식물을동정하는연구가진행중에있다. 식물규소체분석법으로는정성분석, 정량분석, 토기태토분석, 그리고형상해석법 ( 형태분석 ) 등으로구분할수있다. 정성과정량분석은건조토양 1g 내에포함된식물규소체종류를분석하거나정량화 ( 토양중정량밀도기록용 ) 하는방법이다. 토기의형식을알수있는자료로토기의기능, 용도별로 5cm 5cm 크기로시료를채취하여분석하는토기태토분석법과이와동일한형상해석법이규소체분석에활용되고있는데, 토기시료는추후검증을위한실험을하기위하여일부를보관해놓는것이필요하다. 식물규소체분석용시료를채취하기위해서는채취지점의지층을관찰하고퇴적구조를파악한후에나무뿌리또는상층의영향을받지않는부분을선택하여복수로채취하며, 주변토양과의비교를위하여대조토양도반드시동시에채취하여야한다. 이러한전과정에서는시료가토층또는주변부와오염이되지않도록각별히주의를기울여야한다.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11

312 8. 대형식물분석 식물유체는크게대형식물유체와미소유체로구분하는데, 대형식물유체는육안이나실체현미경으로관찰이가능한나무뿌리, 종실, 꽃, 잎등을포함한다. 종실은종레벨로식생과식용유용식물복원이용이하나, 시료가저습지나탄화된자료만남아있는경우가많아분석빈도는많이있지않은실정이다. 잎은퇴적물의성격에따라발굴현장에서다량발견가능하며, 종레벨이근거리식생복원에유용하고종실보다세분화한분석이가능하다. 다만, 잔존상태가좋지않아동정하기어려우며원형이남아있는경우가많지는않다. 목재시료는속레벨의식생, 목재의이용및복원이유용하나종실과마찬가지로저습지나탄화된자료가주로발견되는경향이있다. 대형식물유체분석용시료를채집하기위해서는일반적으로 0.5mm 이상을기준으로하며, 논과같은특수한대상의경우에는 0.25mm 채를사용하기도한다. 시료를채집할경우에는목적에맞는회수량과크기를고려하여채를사용하여야하며, 특히습성퇴정물의경우 100~500cc 정도를채집하고건조토양은 500~1,000cc 정도를채집하는것이분석에용이하다. 대형식물유체분석방법으로는부유선별법, 수세선별법등이활용되고있다. 부유선별법은물보다가벼운부유물을회수하여주로탄화된종실을확보할수있는것이특징이다. 수세선별법은눈금을이용하여선별하여회수하는것인데, 종류마다부위와개수, 그리고상태를기록하여분석한다. 채취한시료는건조상태또는 70% 에탄올에보관하여분석동안시료의변형이이루어지지않도록하여야한다. Ⅲ. 고찰 고고학은잔존물질 (material remains) 로부터과거사회와사람들을연구하는분야로볼수있다. 이를근거로요즘에는보존된생물자료또는지질자료를토대로과거의인간이점유한경관과그들이이룩한경제에대해서자연과학적분석방법이활용되고있다. 여기서생물자료라고말하는것은고고학적유적지에서보존되거나동반된동식물유체또는그러한고생물유체의자국들을일컫는말이다. 생물은죽어서부패하거나화석이되어오랜시간동안매장되어현재의우리에게과거를보여줄수있는증거로남아있을수있다. 고고유적지에서얻어질수있는고생물유체로는동물또는식물에관련있는물질들이나올수있 312 한일문화재논집 Ⅲ

313 는데, 대체로뼈, 기생충알등이대표적인동물시료로볼수있으며화분, 플랜트오팔, 대형식물유체등이식물시료로구분될수있다. 실질적으로이런잔존물질들이발굴되면현장에서는분석이가능한시료를자연과학연구실로의뢰를하게되는데, 사실분석의뢰자는무엇을밝히고싶은지명확하게인지하고있어야한다. 단순하게자연과학적분석결과를얻고자하는것이아니라, 현장에서층위, 출토상황에대한사실과함께기록을남겨야하며이를분석자 ( 자연과학적방법을이용하여실험, 분석, 연구하는자 ) 에게도제공하면서분석의뢰자와분석자가공동으로연구하여분석결과에대한해석을함께도출해야한다. 예를들어, 유적지에서벼가나왔다고고대논으로오해하면안될것이다. 이러한논리를확보하기위해서는화분분석, 식물규소체분석, 종자분석등을동시에수행하여종합적인결과를도출하여야한다. 분석의뢰자가준시료에서벼가나왔다고분석자에게이것이논의증거냐고묻는다면분석자는난처한상황에빠질것이다. 고고유적지의잔존물질의분류는위에서언급한식물, 동물로분류하는것보다는오히려대형화석, 소형화석 ( 미화석 ) 으로분류하는것이유용하다. 눈으로볼수있는지없는지또는어디까지잔존물질이고문화재인지를구분하는것이필요하다. 그만큼현장에서는보이는것과안보이는것의구분하여분석대상시료를분류하는것이중요하다할수있다. 대형화석으로는목제품, 부재, 과일등의씨앗, 동물뼈, 고인골등을말할수있으며, 소형화석으로는화분, 기생출알, 식물규소체등을말한다. 고고학적자료에서유기물을대상으로하는연구는다양하다. 그다양성만큼이나방법도나날이발전하고있으며, 이제는많은사람들이하나의연구로얻어진결과보다는다양한방법을통하여복합적인결과를필요로한다. 유기물의분석방법으로는목재수종분석, 식물규소체분석, 기생충알분석, 압흔분석, 인골및동물뼈형태분석과유전자분석, 안정동위원소분석, 화분분석, 연륜연대, AMS 방사성탄소연대, 대형식물유체분석등을열거할수있다. 한일고생물유체비교연구 과제초반에는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진행하고있는분자유전학적연구결과의비교만을고려하였으나, 1, 2차년도에걸쳐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를방문하고 생물환경조사과정 연수를통하여다양한연구방법론에대한이해와연구주제의방향을폭넓게설정할필요가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수행하고있는고환경분석, 동물유체동정등에대한결과물의이해도중요하지만, 현재일본에서시행되고있는다양한고생물유체대한분석방법을소개하고국내적용가능한분야와연구자를연결하는것이필요할것으로판단하였다. 현재국내에서는고인골을이용한 DNA, 안정동위원소분석등이다양한연구기관에서수행되고있으며, 또한, 화분분석, 토기압흔분석, AMS 분석등에서도다수의연구결과물들이도출되고있는실정이다. 하지만, 앞에서도언급했듯이발굴현장에서채취한시료에대한이해는분석자에서시작하기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13

314 보다는고고학자또는발굴담당자에의해서시료의채취, 보관, 분석전처리등이우선적으로이루어 져야하며, 이를중심으로분석하고자하는목적을명확히한이후에분석자와의공동연구또는분 석의뢰가진행되어야할것이다. 314 한일문화재논집 Ⅲ

315 ABSTRACT Archaeology can be found in the field to study the historical society and human being from the remaining material. Nowadays, the natural scientific analysis is used for understanding the landscape and the economy achieved in the ancient human on the basis of the biological materials or geological data. The biological materials is ancient biological remains(fauna and flora) accompanied or preserved in archaeological sites. We considered only the comparison of the molecular genetic studies that are conducted at the Korea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for the comparative study of ancient organisms between Korea and Japan. But through a training course such as biological environmental investigation process of Nara Research Institute for Cultural Properties, we were able to confirm the need to establish broad directions of research projects and understand a variety of research methodologies. It is very important that we understand the results of ancient environmental analysis and animal bone identification performed in Nara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Also we determined now to introduce a variety of Paleontology analysis methods in force in Japan and connect the applicable field to researchers.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15

316 참고문헌 Kim, K., Yang, Y.H., Lee, S.S., Park, C., Ma, R., Bouzat, J.L. and Lewin, H.A., (2001) Phylogenetic relationships of Cheju horses to other horse breeds as determined by mtdna D-loop sequence polymorphism. Animal Genetics, 30(2), Krings, M., Capelli, C., Tschentscher, F., Geisert, H., Meyer, S., von Haeseler, A., Grossschmidt, K., Possnert, G., Paunovic, M. and Paabo, S., (2000) A view of Neandertal genetic diversity. Nature Genetics, 26, Krings, M., Geisert, H., Schmitz, R.W., Krainitzki, H. and Paabo, S., (1999) DNA sequence of the mitochondrial hypervariable region II from the Neandertal type specimen. Proc. Natl. Acad. Sci. USA, 96, Krings, M., Stone, A., Schmitz, R.W., Krainitzki, H., Stoneking, M. and Paabo, S., (1997) Neandertal DNA sequences and the origin of modern humans. Cell, 90, Oh, C.S., Seo, M., Chai, J.Y., Lee, S.J., Kim, M.J., Park, J.B. and Shin, D.H., (2010) Amplification and sequencing of Trichuris trichiura ancient DNA extracted from archaeological sediments.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37(6), Seo, M., Guk, S.M., Kim, J., Chai, J.Y., Bok, G.D., Park, S.S., Oh, C.S., Kim, M.J., Yil, Y.S., Shin, M.H., Kang, I.U. and Shin, D.H., (2007) Paleoparasitological report on the stool from a Medieval child mummy in Yangju, Korea. Journal of Parasitology, 93 (3), Seo, M., Shin, D.H., Guk, S.M., Oh, C.S., Lee, E.J., Shin, M.H., Kim, M.J., Lee, S.D., Kim, Y.S., Yi, Y.S., Spigelman, M. and Chai, J.Y., (2008) Gymnophalloides seoi eggs from the stool of a 17th century female mummy found in Hadong, Republic of Korea. Journal of Parasitology, 94(2), 한일문화재논집 Ⅲ

317 Shin, D.H., Oh, C.S., Chai, J-Y., Lee, H-J. and Seo, M., (2011) Enterobius vermicularis Eggs Discovered in Coprolites from a Medieval Korean Mummy. The Korean Journal of Parasitology 49(3), 강소영, 권은실, 문은정, 조은민, 서민석, 김윤지, 지상현. (2010) 조선시대인골에대한생화학적분석의유 용성 : 서천군옥남리회곽묘출토인골을중심으로. 보존과학회지, 26(1), 김윤지, 김수훈, 권은실, 조은민, 강소영. (2014) 부여큰독골유적출토인골조직및외부토양의세균군 집의비교연구. 문화재, 47(4), 오문유, 정용환. (2001) SSCP 분석을이용한제주도와대마도재래마의미토콘드리아 DNA 다형현상. Genes & Genomics, 23(1), 지상현, 김윤지, 정용재, 서민석, 박양진. (2008) 아산명암리출토인골의고유전학적연구. 보존학회지 23: 지상현. (2009) 그들은누구이고무엇을먹었나, 1500 해앞 16 살여성의삶과죽음. pp 서민석, 조은민, 김윤지, 김수훈, 강소영 (2014) 김포장기동유적출토인골의유전자분석연구. 보존과학 회지, 30(4), 일본고생물유체연구방법조사 317

318 藤井裕之후지이히로유키 한일교섭사연구와연륜연대학 - 일본에서의과제 - Ⅰ. 머리말 Ⅱ. 일본의지금까지와현상 Ⅲ. 몇가지과제 Ⅳ. 그극복을위하여 Ⅴ. 맺음말 요약문 일본의문화재에관련한연륜연대학의진전을그연구의중핵이되는역년표준패턴의작성상황에서검토했을때지역편년이아직미개발상태에있는것, 세기에확인되는 연륜패턴의벼랑, 이두가지가큰과제로인식된다. 예부터물자의장거리이동이추정되는일본에서, 연륜데이터가그것을제공한유적이나고건축이있는장소와직접연결시켜줄리도없고, 지역편년은어찌됐든현생목 ( 現生木 ) 이나매몰목 ( 埋沒木 ) 과같은현지성이높은시료에입각할필요가있다. 매몰목의출현에는편차가있으므로, 거기에는주로각지의현생목에의한지리적인정점 ( 定點 ) 을세우는것이중요하나, 현재까지古材와의연륜패턴의접속에성공한것은아오모리노송 ( 靑森ヒバ ) 와키소노송 ( 木曽ヒノキ ) 에한정되어있으며, 전국적인지역편년네트워크에의한계통적인산지연구가행해질태세는갖추어지지않고있다. 연륜패턴의벼랑은이러한지역편년구축에도큰악영향을미치고있다. 또한 2000 년대이후새롭게참여하고자하는연구자가나타나는칭찬할만한일이있었음에도불구하고, 아직도연륜패턴의벼랑이란존재가그앞길을막고있는상황이다. 이것을극복하기위해서는일본의주택사 ( 住宅史 ) 상혹은목재이용사 ( 木材利用史 ) 상, 최고의수준을보이는것으로알려진근대의주택건축등, 종래연륜연대학이중요시되지않았던새로운시대의연구에매진할필요성이있다. 키워드 : 일본, 연륜연대학, 역년표준패턴, 지역편년, 근대건축 318 한일문화재논집 Ⅲ

319 한일교섭사 연구와 연륜연대학 -일본에서의 과제- 藤井 裕之* 후지이 히로유키 Ⅰ. 머리말 평성 25년(2013), 연륜 전문의 영문지 Dendrochronologia에 발표된 신안 침몰선의 나무상자에 관 한 논문1)(이하 신안선 논문)은, 동아시아 연륜연대학의 하나의 도달점을 보여 주었다. 신안선 논문에서는 생물현미경에 의한 수종 동정(同定)과 연륜연대법을 구사하여, 짐을 쌓는 나무 상자에 사용되었던 목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산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우선 수종 동정에서는 조직구조가 대단히 비슷한 넓은잎삼나무속(Cunninghamia spp.)과 삼나무(Cryptmeria japonica: 일본삼목)로 후보를 압축하였다. 넓은잎삼나무속의 경우 중국과 대만에 생식분포가 있으며, 삼나무 의 경우 일본만이 아닌 중국에서의 분포도 생각할 수 있어 수종 동정의 성과만으로는 산지를 축약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2) 여기에서 연륜연대법의 적용을 실시해 보았다. 다행히도 나무상자의 재료에는 100~250년 정도의 연륜이 포함되어 있어 연륜폭의 계측이 가능하였다. 이에 나무상자에서 계측된 연륜패턴과 일본의 삼나무에서 작성된 역년표준패턴과의 비교가 실시되어, 대상으로 선택된 25점의 나무상자 用材 중 간접적인 조합에 의한 것을 포함하여 21점에서 연대가 판명되었다. 따라서 이상의 결과 위에 나무상자에 들어갔던 用材의 산지는 중국보다도 일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이른다.3) * 日本 奈良文化財硏究所 1) Y. Kim Y. Yoon T. Mitsutani W. Moon W. Park, 2013, Species indentification and tree-ring dating of wood boxesexcavated from the Shinan shipwreck, Korea, Dendrochronologia 31. 2) 중국 절강성에서 나고 자라는 柳杉은, 여태까지 일본의 삼나무(Cryptmeria japonica)와는 별종(Cryptmeria fortunei)이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엽록체 DNA 등의 조사에 의해, 일본의 삼나무와 동종이라는 생 각이 유력시 되고 있다. 津村義彦, 2012, 日本の森林樹木の地理的遺伝的構造(1) スギ(ヒノキ科スギ属), 森林遺伝育種 1. 3) Y. Kim Y. Yoon T. Mitsutani W. Moon W. Park, Species indentification and tree-ring dating of wood boxesexcavated from the Shinan shipwreck, Korea, (前掲註1). 한일교섭사 연구와 연륜연대학 -일본에서의 과제- 319

320 이와같은연륜연대법에의한목재의산지연구를영어로 Dendroprovenancing 이라하며, 4) 일본에서는연대연구다음으로큰목표이다. 신안선논문의의의는동아시아의국제관계라는문맥에서이를처음으로완수했다는점에서높이평가할만하다. 그럼산지연구를진행하고자하고있는일본의연구도달도 ( 到達度 ) 는어느정도일까. 본고에서는신안선논문을다루면서그결론의뼈대가되었던일본의문화재와관계된연륜연대학연구의진전상황을검토하고, 몇가지과제를추출해보고자한다. Ⅱ. 일본의지금까지와현상 1. 역년표준패턴의중요성 그런데연륜연대법에의한연구는역년표준패턴 5) 과관련되어있다. 역년표준패턴은연대결정의척도만이아닌, 거기에서파생되는여러응용연구의기반이된다. 바꿔말하면이역년표준패턴이일어서지않는것에는어떠한것도명확히확언할수없기때문이다. 이상적으로는실제의역년표준패턴만들기에서구성요소가되는계측시료의점수가많으면많을수록좋으며, 커버되는기간도짧은것보단긴것이좋다. 6) 또한한지역에서만들어진패턴이다른넓은지역을커버하기보다는, 각각지역별로다양한패턴이있는편이좋다. 그리고어느한지역내에서도단독으로 1 本의패턴이존재하는것보다는, 유래를달리하는복수의패턴이동시에병존하고, 거기에서로간의관계가확실한것이바람직하다. 이는연륜연대학에의한성과를풍부하게하는것만이아닌, 연륜패턴에의한조합의신뢰성을뒷받침해주는것으로이어진다고판단된다. 7) 4) English Heritage, 2014, Guidelines on producing and interpreting dendrochronological dating, Dendrochronology. 5) 본고에서사용하는연륜연대학의전문용어는, 年輪に歴史を読む - 日本における古年輪学の成立 - (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学報 48, 1990) pp.5-6 및 pp 의설명을따랐다. 또한구체적인시료점수의많고적음에따른역년표준패턴과평균치패턴의분리사용은일본독자의개념이다. 영어의번역에대해서는상기의설명에관계없이, 역년표준패턴, 평균치패턴모두기본적으로 master chronology 에상당하는것으로보아도무방하다. 6) 구성요소가되는시료의수를매년표시한것을 sample depth 라고한다. 연륜패턴의신뢰성을평가하는지표의하나로일컬어진다. 7) 동시에존재하는연륜패턴이많다는것은, 조합작업의세기둥 ( 수학적인상관도의계산, 그래프의목시 ( 目視 ) 확인, 거기에재현성의반복확인 replication) 중최후의재현성의검증에있어서대단히중요하다. 320 한일문화재논집 Ⅲ

321 우선일본에서의그작성상황을중심으로여태까지의현상을간단히정리해보자, 또한역년표준패 턴의작성등상세한방법에대해서는각문헌 8) 을참조하고자한다. 거기에개별조사나응용사례는 대단히여러갈래이므로, 여기서는생략한다 년까지 일본에서현재의계보에직접연결되는연구는, 昭和 54년 (1979) 동경과나라의국립문화재연구소가거의동시에착수한것이최초이다. 그때까지의시행착오의경험으로연륜연대법에대한부정적인의견이뿌리깊던중에일어난일이었다. 9) 이윽고그때까지의견해는하나의억측이었음이판명되어, 현생목이나유물출토재, 고건축재등의다양한종류를각지에서모아, 보다많은측정을실시하는것에전념한奈文硏 ( 光谷拓実 [ 미츠타니타쿠미 ]) 의연구가질, 량에서다른것들을리드하게된다. 특히장기간에걸친역년표준패턴의작성에관해서는일본국내에서는奈文硏이유일한존재가되었다. 또한그것과병행하여각지의다양한수종을대상으로한현생목의검토가상세하게실시되어연륜연대법의적용이가능한수종으로침엽수 12 종, 광엽수 2종, 곤란한수종으로는침엽수, 광엽수각 1종이꼽히게되었다 ( 표 1). 10) 또한노송 ( ヒノキ : 檜 ), 삼 ( スギ : 杉 ), 노송편백 ( ヒノキアスナロ [ ヒバ ]: 檜翌檜 ) 의 3종에대해서는지리적으로넓은범위에서비슷한연륜패턴을형성하고있으며, 같은지역에서산출된材일경우, 이들 3수종이외의침엽수라도연륜패턴이비슷하다는중요한발견이있었다. 11) 이에따라예를들어노송 ( ヒノキ ) 의성과를삼 ( スギ ) 이나高野槙 ( コウヤマキ : 금송 ) 등의다른수종에도적용할수있다는것, 또한중부지방의岐阜 ( 기후 ) 長野 ( 나가노 ) 県경계부근에서生育하는키소노송 ( 木曽ヒノキ ) 12) 에서작성된역년표준패턴으로킨키 ( 近 8) 고고, 건축, 미술사에관한분야를중심으로다른것으로는 M.G.L. Baillie. Tree-ring dating and archaeology.(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Ltd., London, 1980), M.G.L. Baillie. A slice through time:dendrochronology and precision dating.(b.t. Bastford Ltd., London, 1995), 평이한일본어문헌으로는 古年輪 ( 飛鳥資料館図録 40, 2007) 이있다. 9) 佐原真, 1984, エックシュタイン先生を迎えるまで, 日本文化財科学会会報 3. 伊藤延男 三浦定俊, 1982, 木材年輪年代学序説, 保存科学 ) 光谷拓実, 暦年標準パターンの作成, ( 前掲註 5), p.18 光谷拓実, 1993, 年輪年代学 (10),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年報 T. Mitsutani. Present situation of dendrochronology in Japan.(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dendrochronological symposium, Nara, Japan, ) 光谷拓実, 暦年標準パターンの作成, ( 前掲註 5). 12) 長野県木曽지역은통칭 表木曽, 岐阜県東濃지역동부는 裏木曽 이라고부르며구별되지만, 본고에서는편의상양자를일괄하여 木曽 라고표기한다. 한일교섭사연구와연륜연대학 - 일본에서의과제 - 321

322 畿 ) 지방의紀伊 ( 키이 ) 半島나四国 ( 시코쿠 ) 지방부근, 혹은동북지방의岩手 ( 이와테 ) 나靑森 ( 아오모리 ) 부근에서생육하는材까지적용되는등, 광역적인연륜네트워크의가능성이발견되었다. 그후역년표준패턴은키소노송 ( 木曽ヒノキ ) 의현생목을기점으로, 東大寺 ( 토우다이지 ) 二月堂 ( 니가츠도우 ) 参籠所 ( 산로우쇼 )[ 奈良県 ] 의건축부재, 이하유적의출토재를이용하여清洲 ( 키요스 ) 城下町 ( 시로시타쵸우 ) 유적 ( 愛知 [ 아이치 ] 県 ), 草戸千軒町 ( 쿠사도센겐쵸우 ) 유적 ( 広島 [ 히로시마 ] 県 ) 과鳥羽離宮 ( 토바리큐우 ) 跡 ( 京都 [ 쿄토 ] 府 ), 平城宮 ( 헤이죠큐우 ) 跡 ( 奈良県 ) 의순으로, 주로노송 ( ヒノキ ) 에의지해연대를거슬러올라간다 ( 도면 1). 그리고昭和 59년 (1984) 의단계에서노송 ( ヒノキ ) 에의해 1009 년까지, 13) 6년후의平成 2년 (1990) 에는삼 ( スギ ) 으로기원전 420년까지, 노송 ( ヒノキ ) 으로는기원전 317 년까지이르게되었다. 14) 거기에 10년이경과한平成 12년 (2000) 에는삼 ( スギ ) 로기원전 1313년, 노송 ( ヒノキ ) 으로기원전 912년까지의연장이성공하였고, 그외高野槙 ( コウヤマキ ) 에관해서는 22년부터 741 년까지와 1749 년부터현재까지, 노송편백 ( ヒバ ) 의경우 924년부터 1325 년까지와 1743 년부터현재까지, 각각의역년표준패턴이정비되었음이보고되었고역년표준패턴은약 3000년간의길이에이르게되었다 ( 도면 2). 15) 적용가능한지리적범위에대해서는노송 ( ヒノキ ) 의경우九州 ( 큐슈 ) 에서関東 ( 칸토우 ) 까지, 삼 ( スギ ) 는九州에서東北까지, 高野槙 ( コウヤマキ ) 九州北部, 中国 ( 츄고쿠 ), 四国 ( 시코쿠 ), 近畿, 東海 ( 토우카이 ), 노송편백 ( ヒバ ) 은岩手, 靑森부근이되었다. 16) 또한그사이 1993 년부터 1999 년에걸쳐奈文硏은중국사회과학원심양응용생태연구소의협력아래, 처음으로국제공동연구를실시, 백두산 ( 長白山 ) 주변및小興安嶺地區의만주당송 (Larix olgensis: マンシュウカラマツ : 滿洲唐松 ) 과조선오엽 (Pinus koraiensis: チョウセンゴヨウ : 朝鮮五葉松 : 잣 ) 을조사하였다. 그결과만주당송의현생목에의한평균치패턴이靑森県産의노송편백 ( ヒバ ) 에의한역년표준패턴과유의한상관관계가있음을확인하였고, 백두산록의화쇄류 ( 火砕流 ) 퇴적물에포함되어있던만주당송의매몰탄화수간 ( 樹幹 : 나무줄기 ) 9점에서역년미확정의평균치패턴 379 년분을작성하는등의성과를얻었다. 17) 이연구는그이후, 중국과조선 ( 북한 ) 국경의정세악화에의해, 중단하지않을수없었다. 13) 光谷拓実, 1984, 年輪年代学 (4),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年報 ) 光谷拓実, 暦年標準パターンを応用した研究, ( 前掲註 5). 15) 前掲, T. Mitsutani. Present situation of dendrochronology in Japan,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dendrochronological symposium, Nara, Japan, ) 光谷拓実, 2001, 年輪年代法と文化財, 日本の美術 421, 至文堂. 17) 光谷拓実, 1995, 年輪年代学 (12),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年報 추가하여하기의 web정보를따랐다. 科学研究費助成事業データベース 中国長白山の巨大噴火年代と渤海に関する年輪年代学的研究 ( 研究代表者 : 光谷拓実 ) ( 年 5 月 11 日열람 ). 322 한일문화재논집 Ⅲ

323 년 이후 2000년까지 만들어진 역년표준패턴의 큰 틀은 그 후 15년이 경과한 현재도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 았다. 하지만 새로운 연륜데이터가 추가되면서 부분적인 보강이 계속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까지 공 표된 문헌에 따르면, 近畿지방의 문화재에서 계측된 삼(スギ)에 관해서는, 興福寺(코우후쿠지)[奈良県] 의 宋版一切経 경문상자에 의해 770년에서 1253년에 걸친 평균치패턴,18) 正倉院(쇼우소우인)[奈良県] 의 목공품(杉小櫃[삼소궤])에 의해 158년부터 736년 및 903년부터 1266년에 걸친 평균치패턴을 알게 되었다.19) 또한 노송편백(ヒバ)의 역년표준패턴에 대해서도 古材側 부분에서 674년부터 1541년까지로 연장되었다(도면 2).20) 이러한 비슷한 작업이 이외에도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표 1. 奈文硏에 의한 연륜연대법의 수종별 적부(適否) 適用可能樹種 和名 トドマツ ツガ エゾマツ 針葉樹 学名 英名 Abies sachalimensis (Fr.Schm.)Masters Sakhalin fir Tsuga sieboldii Carr. Southern japanese hemlock Picea jezoensis (Sieb. et Zucc.)Carr. Yezo spruce ヒメバラモミ Picea maximowiczii Masters Japanese bush spruce カラマツ Larix kaempferi (Lamb.)Carr. Japanese larch スギ Cryptmeria japonica D.Don Japanese ceder Sciadopitys vertcillata Sieb. et Zucc. Japanese umbrella pine ヒノキ Chamaecyparis obtusa Endl. Hinoki cypress サワラ Chamaecyparis pisifera Endl. Sawara cypress Thujopsis dolabrata Sieb. et Zucc. Hiba arbor-vitae (asunaro) コウヤマキ アスナロ ヒノキアスナロ Thujopsis dolabrata Sieb. et Zucc. Var. Hondai Makino 広葉樹 Hiba arbor-vitae (hinoki asunaro) クロベ Thuja Standishii Carr. Japanese thuja ブナ Fagus crenata Blume Japanese beech ミズナラ Quercus crispula Blume Japanese oak 適用できない樹種 和名 針葉樹 モミ 広葉樹 ケヤキ 学名 英名 Abies firma Sieb. et Zucc. Japanese Fir Zelkova serrata (Thunb.)Makino Japanese Zelkova *註10 文献より作成 18) 光谷拓実 綾村宏, 2003, 年輪年代法による興福寺一切経箱の調査, 奈良文化財研究所紀要 ) 光谷拓実, 2001, 年輪年代法による正倉院宝物木工品の調査, 正倉院紀要 ) 光谷拓実, 2008, 年輪年代法, 文建協通信 93, 財団法人文化財建造物保存技術協会. 한일교섭사 연구와 연륜연대학 -일본에서의 과제- 323

324 도면 1. 연년표준패턴 ( 노송 [ ヒノキ ]) 의소급경과 (1990 년까지, 주 11 에서작성 ) 도면 2. 奈文硏에의한역년표준패턴의작성상황 (2008 년까지, 주 15, 20 에서작성 ) 이상의동향과는달리 2000년대이후의일본에서는, 奈文硏에서연구성과를쌓은연구자가각지에서활약하게됨과동시에, 문화재연구와는다르게발전해온연륜기후학분야의연구가진전되는등, 여태까지와는다른새로운동향이보이게된다. 21) 연륜데이터의수집도각자가독립해서행하였고, 그안에서새로운역년표준패턴만들기를모색하기시작했다. 이중동일본방면에서는, 동북지방의靑森県産의노송편백 ( ヒバ ) 현생목을기점으로매몰樹幹의출토재에의해연장된 684년부터 2001 년까지의패턴, 22) 중부지방 ( 長野県 ) 과関東지방 ( 群馬 [ 군마 ] 県 ), 동북지방 ( 靑森県, 岩手県, 秋田 [ 아키타 ] 県 ) 의너 21) 연륜기후학의주요한연구대상으로하는그룹은이전부터일정한층을형성하고있었다. 여기에더해연륜기후학과문화재의연륜연대학모두들취급하는사람, 문화재만을주로취급하는사람이출현한것이새로운경향이라고말할수있다. 22) 1. M. Ohyama, M. Ohwada, M. Suzuki. Chronology development of Hiba arbor-vitae (Thujopsis dolabrata var. hondae) and dating of timbers from an old building. Journal of Wood Science, 53. DOI /s , 箱崎真隆, 2012, 完新世後期針葉樹埋没林の年輪年代学的研究, 東北大学博士学位論文. 324 한일문화재논집 Ⅲ

325 도밤나무 ( ブナ ) 현생목에의한 17세기부터현재까지의것이보고되어있어, 23) 유난히동북지방에서성황하고있음이주목된다. 이에비해서일본방면은저조한편인데, 近畿지방 ( 奈良県, 大阪 [ 오사카 ] 府, 和歌山 [ 와카야마 ] 県 ) 과四国지방 ( 愛媛 [ 에히메 ] 県, 高知 [ 코우치 ] 県 ) 의솔송 ( ツガ : 栂 ) 古材및현생목에의한 1359 년부터 1979 년까지의것이발표된정도에그친다. 24) 또한본래는기후복원을위해작성된것이있으나문화재연구에도적용가능하다고생각되는것중하나로長野県王滝 ( 오우타키 ) 産의키소노송 ( 木曽ヒノキ ) 의현생목에의한 1719 년부터 2001년까지의패턴의존재가알려져있다. 25) 역년표준패턴의작성으로긴시간奈文硏이유일한위치를점하던상황도서서히변해가고있다. 26) Ⅲ. 몇가지과제 1. 지역편년 일본에서연구가본격적으로시작되고 36년, 종사하는연구자가한사람밖에없다고하는상태가길게이어졌으나, 겨우이문제는해소되었다. 인적자원이부족한와중, 고심끝에만들어낸여태까지의큰틀은연대연구라고하는면에서볼때, 노송 ( ヒノキ ) 등의침엽수가많이쓰이기시작하는야요이시대이후를대상으로했을경우, 이미필요한내용을갖추고있으며현재는여러손에의해, 수종의확대등의한층충실해질수있는단계이다. 여기에서직면하고있는과제를크게두가지들고자한다. 23) 星野安治 米延仁志 安江恒 野堀嘉裕 光谷拓実, 2006, 東日本におけるブナ年輪幅暦年標準パターンの広域ネットワーク構築, 考古学と自然科学 ) 藤井裕之, 2014, 日本産ツガ属の年輪年代測定 ( その 7)- 四国地方の文化財建造物における調査 -, 日本文化財科学会大会研究発表要旨集 31 외. 25) H. Yonenobu, D. Eckstein. Reconstruction of early spring temperature for central Japan from the tree-ring widths of Hinoki cypress and its verification by other proxy records. Geophysical Research Letters 33, L Doi: /2006GL026170, 2006 年. 26) 본고에서다루는연륜폭에의한연륜연대법에추가하여, 새로이산소동위체비의経年변화를이용한방법이개발되는등새로운전개들도보인다. 中塚武 樹木年輪セルロースの酸素同位体比による古気候の復元を目指して, 低温科学 65, 北海道大学低温科学研究所, 한일교섭사연구와연륜연대학 - 일본에서의과제 - 325

326 표 2. 奈文硏이 수집한 현생목(1990년까지) 樹種 長野 ヒノキ 最長 平均 木曽 上松 採取地 木曽 王滝村氷ヶ瀬 木曽 王滝村三浦 , 1985 木曽 中津川市付知 , 1984 木曽 下呂市小坂 大洞150 林班) 木曽 下呂市小坂 大洞211 林班) 三重 尾鷲 , 1987 青森 岩手 秋田 高知 馬路村魚梁瀬 大畑 むつ市川内 横浜 外ヶ浜町増川 今別 五所川原市金木 宮古市川井 藤里 秋田 馬路村魚梁瀬 ,1962, 鹿児島 屋久島 コウヤマキ 1981 岐阜 高知 スギ 伐採年 木曽 王滝村小俣 和歌山 高野山 ヒバ 年輪数 点 数 県名 長野 木曽 王滝村樽沢 *光谷拓実 現生木による年輪年代法の基礎的検討 前掲註5 より作成 첫째는 지역별 역년표준패턴(지역편년, local chronology)이 미개발된 상태로 있는 것이다.27) 이것은 모두에서 서술한 것처럼 산지연구에 있어서 큰 장해가 된다. 대저 유적이나 고건축의 어느 한 장소와, 거기에서 얻어지는 연륜데이터의 내용은 단순하게는 얽혀 있지 않다. 특히 예부터 물자의 장거리이동이 상정되는 일본에서는, 목기나 건축용재라는 재질을 물을 수 있는 목재에 대해 생육지를 멀리 떠나 사용되었음을 전제로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28) 한편 지역편 년 만들기에서의 지리적 定點은 어떻게든 수목 자체의 생육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는 현 27) 지역별 역년표준패턴 을 어떤 식으로 호칭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年輪に歴史 を読む (前掲註5)에서 채용되었던 용어법을 따르면 지역역년표준패턴 이 되지만 너무 길다. 본고에서는 local chronology의 직역인 지역편년 을 여기에 전용하고자 한다. 28) 석기석재, 반입토기 등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326 한일문화재논집 Ⅲ

327 지성이높은시료가중요시되나, 해당되는것이대단히적으며, 벌채의경위가확실한현생목이나토사붕괴등에의한매몰목, 普請帳 ( 공사노트 ) 등의문자자료나각종의흔적에서목재의입수루트를명확하게알수있는고건축재등을들수있는정도일뿐이다. 동시에압도적다수에달하는유적출토재나고건축재에이러한단서가없다면, 벌채지를알수있는현생목을기점으로할때, 그기점이단독혹은수가적은경우, 여러연륜패턴을이어가는중에원래의지리적인관계에서서서히멀어져감은피할수없다. 현재의역년표준패턴이나조사보고를개관했을때, 각지에서모여진현생목중지금까지동북지방의靑森県産의노송편백 ( ヒバ ) 29) 과중부지방木曽産의노송 ( ヒノキ ) 에의한것외에는古材側에서이어지지않는다. 또한매몰목등의정점도시기적, 지리적으로한계가있어, 30) 현재산지에대해어떻게든언급이가능한것은靑森県주변의노송편백 ( ヒバ ), 長野県주변의노송 ( ヒノキ ) 에관한것, 또는정점을가진패턴과직접조합이성립되는경우 31) 등, 극히적은범위밖에없다 ( 표 2 3, 도면 3). 현재상태는이들의상대적인관계를대조하여, 가능한범위내에서추측이이루어지고있을뿐으로, 전국각지에서복수의지역편년을갖고, 그네트워크에서계통적인산지를명확히하고자하는태세는아직갖추어지지않았다. 2. 신안선논문에사용되었던역년표준패턴의재검토 이상과같은관점에서처음에소개했던신안선논문을다시돌아보자. 이논문의글에따르면, 秋田県과山形 ( 야마가타 ) 県의유적출토재에의한삼 ( スギ ) 28점에서작성된동일본을커버하는역년표준패턴 (405년부터 1285년까지 ) 과, 京都府의유적출토재와奈良県興福寺의経箱 ( 경전상자 ) 에의한삼 ( スギ ) 30점의材에서작성된서일본을커버하는역년표준패턴 (891 년부터 1253 년까지 ) 을비교하여, 나무상자용재의산지를연륜패턴의조합이성립된후자의서일본에서찾았다. 32) 이들두개의역년표준패턴의성립에대해다시검토하면아래와같다. 29) 箱崎真隆, 完新世後期針葉樹埋没林の年輪年代学的研究, ( 前掲註 22 文献 2). 東北大学의노력에의해이루어졌다. 30) 光谷拓実, 2007, 年輪年代法と自然災害, 埋蔵文化財ニュース 128. 光谷拓実, 1998, 箱根芦ノ湖の湖底木と南関東の巨大地震,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年報 ) 다만높은상관관계로조합이성립하는것만으로는관련성을시사하는것에그친다. 산지추정에는직접적으로이어지지않음을주의할필요가있다. 32) Y. Kim Y. Yoon T. Mitsutani W. Moon W. Park, Species indentification and tree-ring dating of wood boxesexcavated from the Shinan shipwreck, Korea, ( 前掲註 1). 더구나이조합에의한 t값은 3.7~8.1 이었다. t값의의미에대해서는아래의주 34) 참조. 한일교섭사연구와연륜연대학 - 일본에서의과제 - 327

328 도면 3. 연륜연대법으로 조사된 현생목 매몰목의 분포(제 2표, 제 3표에서 작성) 표 3. 연륜연대법으로 조사된 매몰목(2015년 현재) 樹種 県名 1 ヒバ 青森 青森県下北郡東通村 猿ヶ森埋没林 7~17世紀 2 スギ 秋田 能代市二ツ井町 3~10世紀 註5, p.126 B.C.14~B.C.5世紀 註5, p.126 註29文献 秋田 にかほ市一帯 鳥海山麓 山形 最上郡真室川町 スギ ヒノキ 神奈川 箱根町芦ノ湖湖底 ヒノキ 7 8 採取地 スギ 時期 備考 註22文献2 東北大による調査 ~9世紀 註5, p.127 B.C.2~11世紀 註29文献2 静岡 裾野市須山 1~9世紀 註5, p.127 長野 飯田市内一帯 遠山川埋没林ほか B.C.8~16世紀 註29文献1 島根 大田市三瓶町多根小豆原 三瓶山埋没林 時期不明 註29文献1 전자의 역년표준패턴은 1989년에 보고된 것이다. 그 상세한 보고33)에 따르면 이 패턴은 東大寺 二月堂 33) 光谷拓実, 1989, 年輪年代学(8) ( 奈良国立文化財研究所年報 1989) 및 光谷拓実, 暦年標準パターンの作成 의 東 北地方の遺跡出土品と古建築部材によるスギの暦年標準パターンの作成, 東北地方のスギの暦年標準パターンの延 長 의 항목 前掲註5, pp 한일문화재논집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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