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마추어무선연맹 (KARL) 창립에서 시작한 한국의 반도체 산업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왕분실 에서 운영한 무선국 dddddddddddddd dd 김규한 金 圭 漢 이인관 李 寅 觀 KARL 이사장 Ohio State Uni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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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머리말 이 책은 한국식 자서전은 아닙니다. 전문가의 도움이나 출판기념은 없습니다. 글은 제가 콤퓨터로 치고 인쇄 제본등 모두 자업 자작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번 돈도 못 챙긴 이야기가 되고 보니 불만이 뒤에 깔린 글이 되였습니다. 사실이 그렇고 남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고- 그래서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은 돈으로 중동전쟁이 몰고 온 세계적 경제파동의 악재를 업고 미 국방기술 유출 위협을 피해가며 불모지 한국에 첨단 반도체기술을 정착시킨 한강의 기적 이야기인 것입니다. 삼성이 1987 년에 발간한 반도체 10 년사 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으로 보였다 -- 1 메가 디램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사건 --등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삼성은 반도체역사를 다시 쓰고 제가 시작한 반도체역사는 지워졌습니다. 여기에는 저와 같이 한강의 기적 을 이룬 많은 공로자들이 자신이 만든 직장에서 쫓겨나고 외국 기술자들은 그냥 내버려졌던 용서 못할 불행한 과거가 있습니다. 이 책으로 한국반도체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저 때문에 고통 받은 여러분 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년 12 월 미국 Reno 에서 강기동 ****양해를 구합니다 **** 여기에 쓰인 한국말은 1950 년대에 제가 쓰던 말이 그 후 60 년 동안 미국서 퇴화 변질된 것 입니다. 저의 한국말은 여기까지 인것 같습니다. 1

3 한국 아마추어무선연맹 (KARL) 창립에서 시작한 한국의 반도체 산업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왕분실 에서 운영한 무선국 dddddddddddddd dd 김규한 金 圭 漢 이인관 李 寅 觀 KARL 이사장 Ohio State University 반도체연구소 김규한 1955 KARL 이사 1973 한국반도체 에투자 KARL 창설 1974 년 12 월 6 일 이건희 이동호 이덕빈 정혜선 강기동 1974 년경기도 부천시 내국인지분 50% 인수 1955-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설립공로자 반도체사진공정실 표지 해설 : 한국 반도체역사의 시작을 사진으로 엮었습니다. 저는 생애에 두 번 한국과 미국 에서 국가 안보에 관련된 비밀 PROJECT 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 동안 반세기란 세월이 지났스니 이제는 숨길필요도 없습니다. 625 휴전 직후 공산간첩이 기승을 부리던 1954 년에 저는 아마추어무선을 추구하다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에 연행 되였습니다. 그 후 정보과의 일원으로 무선국 HL1TA 를 운영 하게 됩니다. 이 혼란 중에도 모두가 겁을 먹고 피하던 단파 무선통신 단체 아마추어 무선연맹 의 창설이 가능했던 것은 약전계의 원로이신 이인관 기감님과 특히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 김임전 실장의 도움 이였습니다. 그때 실무자가 가운데 사진에 있는 분들 입니다. 연맹 창설로 모셔온 기독교 방송국의 이덕빈 씨는 저를 미국 OHIO 로 끌어 주시어 반도체 연구소에 들어가게 됐고 KEMCO 의 김규한 사장은 반도체공장 설립에 국내외의 재산을 모두 투자 하셨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큰 부자가 많은 돈을 두고 약간을 투자하는 것 과는 그 투자 성격의 차원이 다릅니다 년에 반도체 공장이 경기도 부천에 생기고 CMOS-LSI 제품인 시계칩의 대 성공으로 1975 년에 일약 반도체 한국이 시작 됐습니다. 한편 저의 회사는 유류 파동으로 재정이 어려워저 시제품 생산 직전에 삼성으로 넘어가서 삼성반도체가 됩니다.. 전자시계사업은 정부에서 스위스 수준으로의 육성안까지 나왔으나 삼성의 강박사계 제거와 동시에 우선순위에서 맨 뒤로 밀려나서 결국 사라저 버립니다. 2

4 한국 반도체 산업 의 시작 이야기 장 : 없던 Project 1.1 나의 신원 확인 극비 Project Cobalt 60 장치 의 도입 설치 Sample 합격 --- 꿈이 깨이다 이 최신 반도체 기술로 세계를 =라게 해야지 나의 결심 참고 Minuteman II 장 : 해방 그리고 6.25 동란 -아마추어무선의 발견 2.1 해방 1945 년 8 월 15 일 :2.2 대구 10.1 폭동 -- 우리집 이 털리다 서울로 이사오다 경기중학교 에 입학원서 ---실망 문안으로 이사 그리고 사고 Hi Tech 와의 만남 (1) Hi Tech 와의 만남 (2) 앞서가는 친구 유홍배 와 전자공학 단파 라지오 동란 김일성이 처 내려오다 QST 지의 발견과 나의 Amateur Radio 의 시작 부산 대신동 천막 학교 Ham 으로의 집착 - 나도 한다 ,14 서울공대 전기과에 입학-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장: 아마추어무선연맹-KARL 의 창설 3.1 서울공과대학 통신공학과의 실상 통신과 교수들을 모함한 나뿐 학생 나와 체신부 한국최초 Ham 통신사 면허증 송신기 제작 나 혼자서 해보자 치안국 특수정보과의 비밀활동 HL1TA 냬 호출부호 육군 제 3 범죄 수사대에 잡히다 내가 실패한 HL2AA 배명승 이로 가다

5 3.9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KARL 의 창설 KARL 기관지 발행 HL9AA/P 공과대학 산악반 이동무선국 아마추어무선과 나의 주위 사람들 한국 HAM 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분이 한분 계십니다 미국유학 반도체 기술 습득 장 : 미국서 반도채기술 모아담다 4.1 반도체로 가는 길 미국유학 = The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로 가다 대학원 학위자격 시험 반도체연구소 발령 반도체연구소 설립 Diffusion Data 의 반도체 업계 공급 = 석사 그리고 박사학위 = 강대원박사 세게최초의 MOS Transistor Motorola 반도체공장으로 가다 연구소 내 갈등 - Motorola 로 온것 후회 내부서 만들기 Surface Studies 연구실 생산장비 사용률 2 배 이상으로 증가 Mask 사진의 정밀도 향상 = 모토롤라 PNP transistor 가 No = 나의 특허 : US Patent #3,302, == 반도체기술 발전사 -Bipolar NPN 에서 대규모 MOS Tr 시대로 Trade Secrets = Electro-Chemical Society Meeting = 우리기술 TI 사로 가다 물과 공기--타회사로 생산기술의 전파 Application Lab 장: 모토롤라의 한국진출 --한국으로 가는길 (1) 5.1 모토롤라의 한국 진출 조립공장 LA 총영사의 방문 = 최첨단 반도체공장(?) New Korea 전자의 실패 KIST 와의 만남 ---검방진 자식

6 5.5 KIST 영빈관에서 쫒겨남 = 년대 말의 일본 반도체 업계와 삼성과의 만남 년 내가 본 한국의 실정 Dr. Hogan Fairchild 회사로 가다 --서부의 승리 장 : 한국으로 가는길 (2) 6.1 쌍용그룹 조해형을 만남 Sunnyvale - Silicon Valley 로이사 한국으로 가는 길 대만으로 돌아가다 대만의 관심 주인 잘못 만나 보따리 장사 한국에 태여난 죄 KEMCO 김규한사장 한국반도체역사의 시작 실리콘밸리의 생태 ICII 사 서니베일에 세우다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다 Engineer 면접과 영어회화 한국으로 이사 오다 -- 역이민 위반사항 -- 부모의 무식 또 잘못, 잘못, 잘못 잔 품목 조달 - 나도 보따리 장사 나도 빽이 있다 -- 관세청장 사외활동 ---- 문제는 나만 아는 첨단기술 조립업만이 반도체로 알고있는 황무지 한국 장 :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삼성에 팔리다 7.1 차관도입 --또 다시 기술검토 중앙정보부가 끼어들다-그래도 Reliability 걱정이먼저 나의 ICII 주식 반납 제의 -또 큰 실수 끌려온 준공식 Joe Sudduth--나의 실망 보이지 않는 손 --삼성의 인수작전 항복 문서 조인 전자 전시회 -- 위험한 모험

7 7.9 새 희망 -- 그래도 내 회사 제품 선정 -- 의견충돌 반(anti 反 ) 삼성사장 만들기 이병철회장 과 돈봉투- 부패한 삼성고위층 시계칩의 KS-5001 의 대성공--다음은 강박사 제거 숙청--새 출발의 결심 장: 미국으로 돌아 와서 원진전자 8.1 KDK Electronics,Inc. Sunnyvale 에 설립 세계제일의 Semiconductor Operation-새희망 그리고 실패 LC 의 불법 개정 원진전자 의 잔꾀 국제분쟁--미연방법정 TRO 반도체사업의 본질을 몰라서온 후진국형 실패 반도체 Hi Tek 사기꾼 나같이 되지말라 새 일거리를 찾아서 인도를 가다 장: 한국 Memory 왕국 - 현대가 64K DRAM 으로 시작 9.1 나의 7 번째 반도체사업계획-정주영회장의 결심 한국으로서는 64K DRAM 이 최적 선택 내가두고 나온 삼성 반도체공장 강박사 현대전자 사장내정 --계획 데로 추진 한국 Memory 왕국 건국의 진실- 나의 사장직 시퇴가 시작점 K DRAM 내가 만든 부천공장에서 나오다 Memory 왕국의 원동력- 두 재벌총수의 기 싸움 내 이름으로 받은 유일한 상장 내 계획으로 시작한 두 반도체회사 전세계시장 10%이상 공급 이건희 회장 앞으로 보낸 편지-회답이 없다 참고 자료 ),2) 현대자문 3)강진구회장 회고록-사실과 다르다 4) 나의 이력서 6

8 1 From Wikipedia 1.0 장 없던 Project 1965 년 어느날 세계최대 반도체 공장 Motorola 에서의 일이였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남이 알아서는 안될 절대 비밀을 없던 일 로 합시다 로 잘 표현한다. 이 없던 Project 가 바로 이런 프로젝트로서 미국의 국방 안보를 담보로 한 극비의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가 나로 하금 한국 행의 결심을 하도록 했다. 1.1 나의 신원 확인 인사 과장 이 만나자고 해서 그의 방을 찾았다. 전에 흑인 엔지니어 고용에서 법적 문제가 생겨 서로 잘 아는 처지였다. 나의 신변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곳 그리고 나의 처의 신변 등을 꼬치 꼬치 뭇는것이다. 외 그러냐고 물었더니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대답을 회피했다. 우리 집안은 원래 옛날에 낙동강 하류에 정착한 농가로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처가식구들은 해방되면서 평양에서 38 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왔다. 또 어머니 쪽 집안은 삼형제로 두 형제가 이북에 있다는 정도 외에는 아는것이없다. 고모부가 때 월북했다. 고모부는 세상이 다 아는 공산주의자 (빨갱이) 이다. 내 집 사람도 잘 안다. 경기여고 다닐 때 영어를 이 선생한테서 배웠다고 했는데 가 나자 운영위원장이 되어 경기여고 교장 노릇을 했다. 실력 있는 영어선생으로 알려져서 이북에 가서 미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슬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찜찜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분단의 비극이 나한테까지 덮친 것 같았다. 약 일주일 후에 나를 다시 찾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미국방성에서 왔다고 하며 두 사람이 나를 인터뷰했다. 누가 잘못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서 일단 마음은 놓였으나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며칠 후에 또다시 인사과로 불려갔다. 이젠 뭔가가 정말 잘못 돼서 쫓겨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느껴 저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당시는 미국서 쫓겨 난다는 것은 나에게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인생의 실패이고 망신이다. 지금도 한국이 그렇게 잘살게 됐는데도 미국에서 불법 거주하는 한국인이 수만 명이 넘는다고 들었다. 모두가 겉으로는 미국을 욕하면서도 미국에서 숨어서라도 살려고 야단이다. 심지어 북쪽에 사는 김정일이 까지도 미국망명을 고려한다 는 말을 들었다. 이번에는 정복을 한 공군 장교 두 명이 나타났다. 아-, 내가 하고 있는 국방관계 project 와 관련이 있구나 하고 직감했다. 난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잘못한 일이 있어 심문 장에 끌려들어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되고 있었다. 아마 정장한 군복 차림에다 체구가 커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은 공군대령(?)으로 국방성 서부지역 보안 책임자 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공군대위로 minuteman 에 관련된 일을 한다고 했다. 인사과장은 나가고 셋이서 따로 준비된 조고만 회의실로 갔다. 누가 옆에서 보았다면 내 모습이 꼭 죄인을 앞세우고 경찰관이 1

9 2 뒤 따르는 것 같이 보였을 것이다. ㅡ Minuteman 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그 극에 달했슬때 쏘련 핵무기에 대항 해서 개발된 미국의 핵탄두 유도 탄이다. 정확도 와 양의 절대 우위를 내세워 소련의 핵무기 사용 의지를 억제 압도하여 neutrize 하는 목적의 정말 무서운 최신 전략 핵무기인 것이다. 불과 3 년전에 Kennedy 대통령이 쏘련 핵무기의 Cuba 배치에 제 3 차대전도 불사하고 이들의 제거를 요구하며 쏘련 수상 Khrushchev 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쏘련 보다 우수한 이 핵무기의 덕분이기도 했다. 그 후 고성능화는 크게 가속되어 새로 개발된 minuteman II 가 전진 배치되고 있슬때였다. Minuteman 사령부는 록키산속 깊이 설치되어 있고 별도의 독립된 이동 사령부가 24 시간 미국 어딘가에 높이 떠서 유사시에는 미 국방 총사령부 가 된다. 여기서 전국 지하 Silo 에 감추어 저 있는 minuteman II 의 발사를 지희 하게 된다. 또 이 사령부 소속의 핵무기를 탑재한 폭격기가 24 시간 쏘련 주위를 맴돌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어 일반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겉으로만 평화로운 무시무시한 비상시기였다. 국가가 온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모습이다. 새로운 정보에 의하면 소련 핵무기의 습격을 받으면 여기서 나오는 강력한 방사능으로 Control Computer 가 그 기능을 상실하여 지금 실전 배치되고 있는 최신무기 minuteman II 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쏘련 핵폭탄에서 나오는 방사능이 어느 정도 쇠퇴 되려면 Ground zero 가까이서는 적어도 xx 일은 걸린다고 한다. 이래서야 game 이안된다. 소련의 선제공격 억제력이 없어진다. 이 사실 자체가 극비일 뿐 아니라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들어가 있는 컴퓨터의 특정 IC 와 Tr 이 제일 먼저 기능상실이 되는데 이들은 내가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1.2 극비 Project 이러한 극비 사항을 신원 미상의 임시 체류 외국인 그것도 공산 스파이들이 들락거리는 South Korea 에세서온 한 개인에게 알리고 그 해결을 요구한다는데 미 국방성 으로서는 전 예가 없는 큰 보안 문제가 된 것이다. 특히 시간이 급하다. 그래서 국방성의 최고 보안 책임자가 모든 Top Secret Clearance 같은 형식 절차를 생략하고 직접 나를 면접하고 OK 하기에 이르렀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이 행동하고 외부에서 급한 민간 프로젝트를 따온 것으로 위장 추진키로 했다. 그들은 나에게 내 자유를 속박 할려는것이 아니라 내 안전을 위해서니까 필요하지 않는 곳은 가지 말라고 부탁도 했다. 사람 많은 곳도 피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 불이 났슬경우 내가와서 불을 끄는 것이 아니면 오지 말라고 했다. 곧 이어 우리 회사 사장 방에서 실무 회의가 열렸고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책임자 몇 명이 내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그저 앉아서 듣고만 있었는데 내 연구실 시설은 많은 부분이 production line 에서 물려받은 물건들이고 다른 프로젝트도 같이 겸하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국가의 안보가 걸려있는 문제인 만큼 내가 하고 있는 실험실 에서의 소꿉장난 규모는 여기서는 맞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말은 안 했지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해결방법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면서 나는 문제의 Transistor 속에 내 자신이 들어가서 방사능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섰다. 나에게는 현재 있는 시설을 약간만 보완하고 몇 명의 인력을 더 투입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 같이 보였지만 높은 분들은 나와는 달리 소련을 상 대로한 국가의 안보차원에서 이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비밀 유지가 제일 중요한 과제다. 분리된 단독 시설로 한다고 결정하는 것을 보고 그렇다면 이 기회에 나도 못했던 실험도 하고 비싼 새 2

10 3 장비도 사들이는 절호의 기회라고 중대한 국가안보의 위기 보다 나의 기술적 ego 를 먼저 생각하며 그냥 듣고만 있섰다. 이 문제는 미국을 죽이고 살리고 또 전인류가 핵으로 파멸 될 수도 있는 참으로 심각한 상황 이라고 나에게 설명했다. 비밀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다 보니 기술적으로는 별것도 아닌 것이 극비가 되 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별로 실감이 안 나고 있섰는데 누가 와서 문제 해결을 못하게 나를 암살 할 수도 있다고 하니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프로젝트는 Cost plus 로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회사 이익도 커지는 것이다. 내가 문제를 단시일에 해결해도 철저한 테스트와 production 을 거쳐 실전 배치가 되려면 적어도 1 년은 걸릴 것 같았다. 그 누구의 결재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결재 하면 된다 고 했다. 나중에 나에게 질문이 왔다. 실험 결과를 확실히 하고 생산 설비도 업그레이드 할려면 시간도 xx 개월은 잡아야 한다고 했더니 모두가 그 시간이면 되겠느냐고 재확인했다. 그리고 안도의 눈치였다. 그 순간 나는 시간을 더 길게 이야기할 것을 하고 후회도 했다. 시간의 단축이 가장 중요하고 돈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제작과 발주는 2 중으로 해서 만약에 대비하는 등 나에게는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방식이 채택되고 모든 것의 최종 결정자는 나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몇 몇 사람에게는 전에는 나 같은놈 눈에도 보이지 않았슬 존제인데 이제는 이 친구 그게 아니구나 하고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이 비서라는 명색으로 미 공군 보안사령부에서 젊은 미인 연락원이 파견되었다. 이름이 Elaine xxxxxx 라고 부르는 007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았다. 물론 이름은 본명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그렇게 안보여도 워낙 비밀 Project 라서 개인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물어보지를 않았고 일상 대화에서도 자기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없섰다. 아직도 현역이거나 공군 pilot 출신이 아닌가 하는 짐작도 해보았다. 기술계통 배경으로 미리 사전교육을 받고 배치된 것이 틀림없었다. 하여튼 전국에서 추려진 잘난 여자이다. 모든 서류와 외부 연락을 맡고 내 주변 청소와 개인 쓰레기까지 모든 것을 직접 관리했다. 위의 사진은 그 당시에 극비였던 내가 만든 Transistor 가 문제가 된 Autonetics D-37 computer 와 이 computer 가 탑재된 Minuteman II 핵탄두 ICBM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3 Cobalt 60 장치 의 도입 설치 여러 가지 사건이 있섰으나 Cobalt 60 한가지만 여기에 소개 한다. Cobalt 60 는 gamma ray 를 내는 Cobalt 의 동위원소로 병원에서 암 치료에도 쓰이고 식품의 살균으로도 쓰이며 대량의 노출은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암의 원인이 된다고도 한다. 핵폭탄이 터지면 고강도의 Gamma ray 가 나와서 내가 만든 Transistor/IC 가 기능을 상실 하는 것이다. 내 실험실에서 이 Co 60 장치를 이용해서 새로 나오는 Sample 을 test 하고 gamma ray 에 견디도록 성능개량도 하게 된다. 3

11 4 하루는 아침에 출근 하다 보니 크다란 Flat Bed 추럭이 길을 막고 회사 앞에 서 있고 나의 연구실 한쪽 벽을 큰 기계가 와서 부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Elaine 에게 물어보니 내가 부탁한 Cobalt 60 의 gamma ray source 가 도착 했다는 것이다. 아직 급하지 않아서 한번 이야기하고는 그냥 잊어 버리고 있섰는데 내 비서가 Top Priority 라고 해서 공군본부를 통해서 order 를 낸 것이 Huston Texas 의 공군기지에서 어젯밤에 공군 수송기로 보내왔다고 했다. 벽은 왜 부수냐고 물었더니 워낙 무거운데다 문이 작아서 밖에서 벽을 부수고 설치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 문이 큰 방이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내가 지금 부시고있는 방에 설치하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내가 다른 곳도 좋다는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즉 그녀와 you didn t tell me --. OK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고 나는 지금 진행 되고 있는 상황을 그냥 아무 말 않고 받아 들였다. 이 기계는 옆으로 누운 큰 냉장고 만한 크기의 납덩어리인 것이다. 하여튼 벽을 부수고 중장비로 이 큰 납 덩어리를 설치했다. 모두들 저게 뭐하는거냐고 야단이다. 범죄 현장같이 접근 금지 선을 설치했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 기계는 벽도 통과하는 X- ray 와같은 gamma ray 를 방출 하기 때문에 그 방 밖에 큼직한 경고 판이 여러 개 붙혀젔다 그리고 나의 주위사람 들에게 모두 방사능 노출량 기록 딱지를 가슴에 달도록 했다. 내가 실제 방사능의 노출강도를 측정해보니 걱정할 정도는 안되는것이다. 모두들 이 방사능 경고판이 붙어 있는 낭하는 피해서 먼길로 돌아 다니고 있섰다. 낳는다 장님이된다 등의 말들이 사내에 퍼지고 있었다. Co 60 을 쏘이면 아이를 못 나는 Elaine 을 시켜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내용의 공지사항을 회사 여러곳 계시판에 사장이름으로 냈다. 그러나 공지사항은 별 효과가 없었다. 사실 그 Co 60 이 설치된 방안에서 24 시간 일하는 사람에게나 주의가 필요했다. 나는 때때로 졸옴이 올때면 거기서 의자를 뫃아놓고 낮잠을 잔일도 한두번 있었다. 사람들의 공포를 줄이기 위해서 일부러 나는 방사능기록 딱지를 안달고 다녔다. 남들이 이 방사능 기록딱지를 가슴에달면 매우 중요한일을 하는 인물로 본다는 것이다. 내 옆방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자기도 방사능 딱지를 하나 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이 Co60 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실험도했다. 우리가 쓰고있는 Petri-dish (유리그릇)에 gamma-ray 를 쏘이면 투명하던유리가 갈색으로 변한다 많은 보석의 색 갈을 변화 시킬수가 있는것이다 특히 Gamma ray 로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jade 의 색깔을 여러 가지로 바꿀수가있다. 또 투명한 무색 diamond 를 Red Diamond 나 Blue Diamond 로도 만들 수 있슬것 같았다. 내가 생각만 있었지 실제로 실험 해볼 기회는 갗지못했다. 그렇게 쓸 없었지만 -. Diamond 도 최근에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가 만드러낸 새로운 Radiation Warning 표시판 1.4 Sample 합격 - 꿈이 깨이다 Sample 제조는 schedule 대로 진행되고 Original Zero Pf 보다 더 작은 transistor 도 만들었다. Zero Pf Transistor 는 처음 나왔슬때 그 Collector 의 capacitance 를 보통 Transistor 를 재는 meter 로 재보니까 0 가 나와서 붙은 별명으로 그 당시 기술로는 워낙 작아서 Photo Mask 의 dimensional Error 를 피하기 위해서 하나의 Mask Plate 에 transistor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Pattern 을 다 올려 놓았다. 이 한 장의 Mask 를 평행이동을 해 가면서 사용해서 Transistor 를 만들게 된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negative 와 positive photoresist 물질을 둘 다 4

12 5 쓰게 된다. 이 zero Pf transistor 는 그때까지 만해도 반도체로 대체 불가 라는 진공관을 대체한 영웅이었는데 외부의 Shield 가있어서 방사능에는 신경을 안 쓰고 대체를 했었다. 그렇다고 진공관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공관은 방사능에 끄떡도 하지 않는다. Sample 이 나오는 날 Sample 인수차 직접 사람이 회사 현관까지 와 있다고 해서 내 비서와 같이 현관에 Sample 을 들고 가보니 현관 문 앞에 공군 소속 Jeep 차가 거기 와 있었다. 여기까지 차가 올라오는 곳은 아닌데-. 공군장교 한 사람이 내려서 거수경례를 하고 sample 을 받아 떠났다. 모든 절차가 사전에 준비 되어 있섰다 New York 의ㅁㅁㅁㅁ Air Force Base 서 온 2 대의 미 공군 전투기는 내가 준 Tr. 5 개씩을 싣고 2 개의 다른 항로로 30 분 간격으로 Phoenix 의 Sky Harbor 비행장을 떠나 New York 으로 돌아 갔다고 들었다. Test 는 여기 공군기지 내의 xxxx Air Development Center 가 책임지고 있었다. 합격이다. 문제가 해결되자 제 2 의 생산시설을 만들고 내 실험실을 돌려 받았다. 그 동안 새로 알게 된 것 다시 개량된 장비 나의 새 idea 등을 새로 만드는 시설에 incorporate 했다. 이것이 끝나자 일정거리 이상 떨어진 제 3 의 장소에 세 번째 시설을 설치하게 되었다. 전부 3 번의 시설을 내 마음껏 했다. 돈도 많이 썼다. 마지막 시설은 정말 세계에서 최첨단 반도체 생산 line 으로 내가 갖고 있는 실력과 Motorola 가 보유하고 있는 제조장비 기술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Project 가 끝날 무렵에는 Elaine 자신도 super technician 이 되고 있섰다. 모든 서류는 내가 정검만하고 자기가 만들었다. 나는 많은 것을 단시일에 배우고있섰다 특히 내가 갖고 있던 돈의 가치 개념도 뭔지 모르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문제를 엄살을 부려 과장 확대해서 나랏돈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내 sign 으로 돈이 나가고는 있섰지만 누구 하나 돈의낭비라는 측면에서 이 project 를 보지는 않았다. 사실 이것은 미국 minuteman 규모에 비하면 또 이것의 중요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그저 막연히 비밀 무기 개발이란 이런 것이고 이렇게도 운영 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생전에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꿈만 같고 내 전문분야에 극한 되기는 했지만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할수있섰다. 진시왕이 부럽지 않았다. Project 가 끝날 때 모두가 나에게 수고하고 고맙다고 했다. 모든 관련 정보가 Code 로 되어 있고 강기동이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물어본다 해도 국방성으로서는 그런 사람도 모르고 그런 일이 있지도 않았다고 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또한 만약을 위해서 얼마 동안 나를 보호한다고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알았지만 내 비서는 핸드백에 항상 소형 권총과 특수 무전기를 지니고 다녔고 특별보안 책임자도 회사에 파견 상주하고 있섰다고 들었다. 많은 서류에 sign 을 하고 끝을 냈다. 나의 국외 여행은 국방성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되 있섰다. 꿈이 깨였다. 그후 얼마 동안 누가 날 따라오는 것 만 같았고 그럴 때마다 한번씩 뒤를 돌아보고 의외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한국에 Motorola 조립 공장을 내기 위해서 갈 때도 여행허가를 힘들게 얻어냈고 공군서 나온 보안관이 나를 따랐다. 내 행동은 서울에 극한 되여 승강기도 사람 많이 탈 때를 골라서 이용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하나는 절대로 외부에 이 사실을 누설 안 한다고 서약한 것이고 다음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독자가 안 믿어 줄 것도 같다. 5

13 6 1.5 이 최신 반도체 기술로 세계를 놀라게 해야지 나의 결심 문제의 해결은 기술적으로 말하면 반도체 Reverse bias junction 에서 ionizing radiation 으로 발생하는 Leakage Current / Photo Current 를 줄이고 이를 안정 시키는 것이다. 하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이론적으로 아주 기초적인 문제이다. 나는 문제를 design/ process 에서는 geometry 의 극소화, doping level, junction depth 그리고 약간의 gold diffusion 등을 radiation 에 가장 적게 반응 하도록 개선했고 또 완성된 후 Co 60 의 Gamma Ray Radiation source 를 이용해 Pre-irradiation 으로 transistor 의 gain 이나 leakage/ photo current 를 하향 조절해서 안정시켜 그 변화폭을 극소화시켰다. 회로설계 에서도 lower beta, higher leakage current 에 동작 하도록 대처했다. 이젠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개선된 단어 그대로 Radiation hardened device 가 나왔다. 이 용어는 내가 처음 쓰기 시작 한 것 같은데 그 후부터 모두가 쓰개 되었다. 해결 방법은 나에게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으나 회사 높은 분들은 굉장히 힘든 큰일을 하는 것 같이 국방성 관계자 들에게 호들갑 떨고 있었다. 많은 돈을 쓰고있스니 그럴 만도 하다. 하여튼 나는 무제한의 예산 (적어도 나에게는) 을 이용 하는 기회를 안 놓질려고 Process repeatability 나 reproducibility 에 중점을 둔 automation 기계를 이 계통 전문가 들과 설계 개발했다. 반도체 production 에서는 이런 것이 경쟁에 이기는 중요한 요소이다 첫 Sample 이 생각 보다 속히 좋게 나와서 이들 automation 기계 개발은 반은 미완성으로 끝나서 그 마무리를 Production 쪽으로 넘겨주었지만 이제는 반도체 제조 장비의 나갈 길이 뚜렸해젔다. 그때 나를 도와 같이 일한 xxxxxxx 는 Silicon valley 에 와서 Applied Materials 라는 반도체 제조장비 회사를 설립하고 여기서 만든 기계는 모두 Hit 하여서 세계 최대의 회사로 자라났다. 그는 큰 부자가 되어 은퇴했다. 내가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한 후로는 나도 Silicon Valley 로 이사 와서 이 친구를 일부러 멀리했다. 그는 나의 비밀활동을 전부 알고 있는 민간인 이였기 때문이다. 논문 활동의 금지는 처음에는 불만도 생겼지만 어차피 나는 학자는 아니고 건설업에서 말하는 현장 노가다 인 것이다. 세 번식이나 설치한 최신 production line 은 내 머릿속에 완벽하게 저장 되었다. 앞으로 나는 논문을 발표하고 학계에서 활동 하는 것이 아니고 공장 짓고 이 기술로 새 물건을 만드는 거다. 그 동안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한번씩 많은 돈을 써가며 나를 스쳐갔다. 할아버지가 자기아들을 일본유학 보낼 때 우리나라는 농업국이고 이 좋은 땅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 이 매년 홍수에 시달리고 또 짠 바닷물이 들어오니 치수( 治 水 )를 배워 오라고해서 아버지는 일본서 농업토목기술을 배워와서 낙동강 유역에 많은 저수지와 제방을 지은 공적을 남기셨다. 내가 미국올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너는 전기계통이니까 우리나라에 필요한 전기 기술을 배워와서 남이 못하는 큰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전자공업의 허허 벌판 한국에서 최첨단 반도체 제품을 만든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기술은 문제가 아니다. 혼자서 할수 있다. 그러나 나를 알아줄 사람도 없고 나와 미 국방성과의 연관이 더 큰 문제다. 하여튼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해 봐야겠다. 6

14 7 1.6 참고 Boeing SM-80/LGM-30 Minuteman II The LGM-30F Minuteman II featured many improvements. It had a completely new Aerojet General SR19- AJ-1 second stage motor, which increased range by about 1600 km (1000 miles). Its guidance unit used solid-state circuitry, and could store up to eight sets of target coordinates. The first LGM-30F launch occurred in September Eventually 500 LGM-30Fs were placed in silos, some replacing older LGM- 30A/B missiles. The Minuteman II initially experienced a lot of reliability problems with its new guidance unit, because semiconductor electronics were very new at the time, but the problems were eventually solved The LGM-30F was the first U.S. ICBM to use decoys (Tracor Mk.1) in its warhead section. The LGM-30F was also the missile selected for the ultimate ERCS (Emergency Rocket Communication System), and it replaced the interim MER-6A Blue Scout Junior rockets in this role in October 장: 해방 그리고 6.25 동란 --아마추어무선의 발견 2.1 해방 년 8 월 15 일 우리 나라가 해방을 맞은 것은 내가 국민학교 5 학년때 대구에서였다. 나는 이북 함경남도 함흥에서 1934 년 12 월 9 일에 태어난 우리집안 장손의 장남이다. 할아버지 ( 姜 廷 煥 ) 는 경남 김해의 유지로 이조 말에 솔선해서 상투를 자른 개화파였다. 일직이 아들( 姜 琮 武 )을 일본에 유학시켜 야마구치 고교 ( 山 口 高 校 )와 일본 동경제국대학 농업토목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인 Engineer 로서는 드물게 일본정부에서 Elite 코스를 밟고 있었다. 일본서는 동경제국대학출신은 대부분이 일본정부 관료가 된다 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군량미(쌀) 확보를 위해서 일본정부에서 아버지를 고등관으로 승진하여 조선총독부로 발령 내서 경북 대구에 파견 쌀 증산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한국인 기술자 로서는 그 당시 최고의 지위라고 들었다. 쌀 증산을 위한 많은 수리사업 토목공사와 홍수방어용 제방이 낙동강유역에 한참 건설되고 있슬때 해방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해체되고 아버지께서는 실업자가 되셨다. 미 군정청이 설치되고 최소한의 치안유지로 극도의 혼란은 겨우 막고있섰으나 못사는 사람들의 수는 늘고 도둑이 많아졌다. 해방의 즐거움은 곧 혼란과 배고품으로 이어졌다. 비상용으로 저축해온 일본군용 쌀과 통조림이 방출됐다. 극소수의 재주꾼의 돈벌이 외에는 이렇다 할 효과는 없섰다. 미국서 많은 밀가루가 수입되고 안남미 라고 해서 쌀모양이 길죽한 동남아 쌀도 수입되고 있섰다. 빈곤층은 밀가루 음식이 주식이되였고 오늘날에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 국민이 된 시작점이 이때이다. 기본 일상 필수품이 절대 부족했다. 성냥, 비누, 칫솔, 치약, 종이 같은 것 들이다. 성냥 대용으로 서문시장에 가면 긴 담뱃대용 담배를 파는 할아버지가 있섰는데 담뱃대에 불 붙이는 Kit 도 같이 취급 하고 있섰다. 여기서 이 Kit 는 부쇳돌, 부쇠, 그리고 쑥 잎을 말린 것 의 세가지로 되어있어 이것을 사다가 성냥 대신 으로썼다. 도토리 크기의 흰 차돌에다 신용카드 반쯤 되는 크기의 부쇠( hard steel plate) 를 성냥 켜듯 탁 옆으로 치면 불똥이 튀는데 이 불똥을 차돌과 같이 쥐고 있는 쑥 잎에 튀도록 해서 불똥이 쑥에 와 앉으면 입으로 불어서 불을 이르키게된다. 비누도 없었다. 모두가 소기름으로 만든 가짜들이다. 한번은 비누로 몸을 씿었다가 피가 났다. 비누 속에 작은 유리조각 같은 것이 들어 있섰다. 내 손가락이 칫솔이고 치약은 굵은 천연 소금이였다. 손가락으로 소금을 찍어 닦는데 잘못하면 돌 가루도 섞겨들어서 우선 왼손 바닥에 소금을 펼치고 돌을 골라내야 했다. 모양이 7

15 8 비슷해서 골르기가 쉽지를 않았다. 또 종이가 절대 필요한 곳이 변소 (화장실)다. 집에 따라서는 호박 잎을 들고 가야 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부인을 끼고 하는 아줌마들의 양키물건 장사는 날이 갈수록 호황 일수밖에 없었다. 미군용 칫솔, 치약, 비누, 담배, 성냥, 내복-- 무엇이던 총알만 빼고는 모두 돈이 되는 것 들이었다. 양키물건시장의 시작이다. 겉으로는 숨겼지만 집안에 양부인이 한 사람 만 있으면 온 집안이 그런대로 먹고 살수가 있섰다.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자기를 희생해서 양부인이 되고 결국 페쇠된 시회에서 그 이상 살수가 없어 흑인병사 하고라도 결혼해서 미국가는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요 앞날을 위한 해결책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시간이 가면서 미국 각지에 허터져 있는 한국 출병부대를 중심으로 늘어났고 이민법이 Quota 에 묶여있던 그 당시 이들과 이들의 가족 연고자들에 의하여 미국에 한국인 이민 사회의 기초가 이루어 졌다. 주제로 돌아가서 어찌된 것인지 이렇게 어려워진 생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집에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얼굴 두꺼운 손님들이 많았다 아버지 손님이라서 나는 내놓고 불평은 못했지만 식사 때까지 있다가 식사를 챙기고 가는 얌체족 까지는 참겠는데 늘어 붙어서 자고 아침까지 먹고 가는 손님에게는 내 잠자리를 양보해야되서 이들이 미웠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일만했서도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로 몰리고있을때다. 나는 해방 전 어느 행사에서 경상북도 도지사가 말 타고 군복에 긴칼차고 일본 헌병대가 호위하며 시내를 행진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때 도지사가 조선사람 김대우 ( 金 大 羽 ) 라고 했다 얼마나 당당하고 잘났스면 모두가 창씨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는 것) 를 해야 하는데 이 사람만은 김이란 성을 그대로 쓰고 있섰다. 나는 그때 매우 자랑스러웠다. 해방되고 친일파로 잡혀갔다고 들었다. 우리 집에 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전에 알던 수리조합장들 이였다 하루는 나도 잘아는 경주의 서면수리조합장이 밤늦게 찾아와서 내가자는 옆 마루에서 대화 하는 것을 나는 듣고 있섰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저수지공사는 절대 중단 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이미 파헤쳐놔서 앞으로 한쪽은 크게 침수될 우려가 있어 그 피해가 너무 크다는 이야기다. 하루가 급한데 문제는 노무자다. 이들은 일본정부가 추진 하던 사업은 모두 나뿐 걸로 알고 있고 더욱이 큰 문제는 남조선노동당이 끼어들어 노동자 들을 정치도구화 하면서 패가 갈려 싸움이 시작 됬다고했다. 미 군정청으로 힘좀써달라는 부탁 같았는데 아버지는 이젠 아무 힘도 없고 공사비도 나올 데가 없다고 하시는 것 같았다. 경주의 서면 수리조합장은 그 후에도 친분이 계속되어 두 아들이 서울로 유학하여 우리 집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큰아들 이원석씨는 서울 의대를 졸업하고 경주로 돌아가서 지방유지로 의사 생활을 했고 동생 항석씨는 서울 공대 전자과를 나와서 금성사에 취직했다. 2.2 대구 10.1 폭동 우리 집이 털리다 대구에서 우리가 살뎐 집은 남산동 산기슭에 있는 장길상이집 이라고 알려진 대구에서 제일 큰 집 이였다. 댓문체, 문간체, 안체, 사랑체, 연못, 연당 등 모두가 담으로 구분되고 작은 궁궐 같았다. 우리는 장씨집안과의 오랜 친분으로 집을 봐달라는 명분으로 여기로 와서 안체에 살고있섰다. 문간체에는 내 친구 히로모또 (일본이름) 경택이 네가 살고 있었고 사랑체에는 관리인이있섯다. 댓문체는 어느 사이에 무직자 아편쟁이 들이 모여들어 나날이 주위환경은 악화 되어갔다. 해방전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얼신도 못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이들이 도리어 큰소리치고 있섰다. 파출소에 가서 이야기 해도 집없는사람 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는것이다. 우리는 안체로 통하는 문을 잠그고 작은 뒷문을 이용했다. 댓문간 한쪽구석은 노천 8

16 9 화장실이되 서 그 냄새가 안으로 수며 들어왔다 우리 집 주변으로 빈민들이 몰려들고 앞에 조고마한 개천은 아낙네들이 와서 빨래도 하던 곳인데 어느 새에 쓰레기장이 되어 여기서도 파리가 기승을 떨고 악취가 나고 있섰다.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해방이되서 좋아진것이 하나도 없다. 특히 노동자들은 이제는 일은 안하고 데모만 하는것이다. 우리도 이런 환경에서 더 견딜수가 없어서 대구를 떠날 준비를하고 있섰다. 히로모또네는 조고마한 시계수리상을 하고 있어서 나도 때때로 친구 따라 그 시계 가게도 가본 일이 있었는데 몇 일 전에 도둑이 들어서 가게에서 많은 물건들을 집으로 옮겨왔다. 그래서 집이 좁아졌다고 나에게 불평을 했다 여름이 돌아왔다. 날씨가 더워지자 무서운 유행병인 호열자가 돌기 시작했다 약으로 고처지는 병이 아니라고 한다. 무서운 전염병이라서 아무도 치우려고 안 해서 죽은 노숙자의 시체가 시내 여기저기에 가마니로 덮은 채로 널려져 있섰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런관경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학교도 임시 휴교가됬고 어머니는 우리를 밖에 못나가게했다. 댓문체에 사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호열자로 죽어나갔다. 시에서 와서 소독약을 뿌리고 새끼줄을 치고 모두 철거시켰다. 너무나 불결한 환경 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물 냄새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섰다. 호열자도 그 기세가 좀 풀렸다. 민심은 날이 갈수록 악화만 되고 온 세상이 빈민굴이 되어가고 공산당 데모는 그칠 줄을 모르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섰다. 나와 경택이는 장기를 갓 배워서 시간만 나면 장기두는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어있었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나서 우리는 장기를 두다 말고 구경하러 막 뛰어나갔다. 몽둥이 곳굉이 쇠망치를 든 20 명 정도되는 한때가 여기 경찰관 집이 어디냐고 소리치며 큰댓문으로 들어 닥치고 있섰다. 한 아줌마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 떼들의 앞장을 서고 그 뒤에는 2-30 명의 애들 아낙내가섞인 떼가 따르고있섰다. 큰댓문에서 문간체로 가는 문이 잠겨 있는 것을 알자 손에든 곳굉이로 때리고 발로차고 하여 댓문을 부수고 속으로 들어갔다. 앞장선 아줌마가 이 집이라고 했다는 거다. 이 집이 바로 내 친구 히로모또 네 집이다. 무조건 덤벼들어 보이는 것은 모두 때려 부시고 있섰다. 또 돈이 있을만한 곳 옷장 설합 상자 모두 뒤집어놓고 나갔다. 이차 떼가 들어 닥쳤다 서로들 경쟁 하면서 보이는 것은 모두 들고 나가는 거다. 여자들은 치마폭에 싸고 나갔다. 애들도 뭣이던 닥치는 대로 들고 나갔다. 우리는 겁에 질려 몰려든 구경꾼 틈에 끼어 보고만 있었는데 한남자가 몽둥이로 얻어맞고 밖으로 못나오고 집 안쪽으로 튀어 들어갔다. 몇 사람이 뒤를 쫓아갔다. 이번에는 폭도들이 건너편 안체로 이동했다. 아- 우리 집이다. 문을 열지 않고 일부러 발로 차서 문을 부시고 들어갔다. 우선 다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숨은 사람을 찾는 거다. 다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락 물건이 모두 방바닥에 흩어졌다. 어느덧 구경꾼들이 늘어났다. 나는 우리 집이 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섰다. 우리식구들도 구경꾼틈에 끼어있섰다. 구경꾼의 일부가 우리 집에 들어가서 보이는 데로 우리 살림사리 물건을 들고 나가는 것이다 대부분은 뒷문으로 빠저나갓는데 이제는 대담하게 모두가 보는 데서 앞으로 당당이 들고 나가는 거다. 나는 눈에서 불이 나는데 그것 내거라고 말도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여기에는 세 떼가 있섰다. 하나는 앞장서서 들어 닥치는 대로 때려 부시는 폭도 떼로 손에 몽둥이 농기구 쇠망치 등을 들고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고 여기에 두목이 끼어있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도둑떼다 부시고 흐트러진 것을 치워주는 역활을한다. 셋째가 구경꾼 떼로 구경꾼과 도둑떼는 그 구분이 확실하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돌아갔다. 경택이하고 나는 우선 경택이네집으로 가봤다 모두 깨끗이 쓸어갔다. 부서진 가구하고 이불만이 허터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히로모또 네 아줌마하고 부억에서 울고있섰다. 방에 들어와보니 장이 부서저서 9

17 10 넘어저있고 그 뒤에 책들이 얼켜저 있고 이불도 헤처저있섰다. 우리도 깨끗이 털렸지만 히로모또네는 장사미천마저 털린 것이다. 도둑맞는다고 집으로 옮겨온 물건들을 더 큰 날강도들이 갖고 갔다. 아버지는 친구 이효상씨를 찾아가서 쌀과 기타 구호물자?를 리야까(손수레)로 얻어왔다. 우리보다 더 한심하게 된 히로모또네도 나누어 주었다. 이효상씨는 아버지와 동경제국대학 동창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여서 우리 집에 자주 놀려오셨다. 대륜중학교 교장으로 대구에서는 알려진 유지였다. 이 폭동은 남조선노동당이 시작한 데모가 진압불능이 되자 경찰이 발포해서 데모 꾼 한 명이 죽은 데서 시작됐다. 그러자 데모대가 폭도로 변하여 형무소문을 부시고 죄수들을 모두 데모 대에 가담 시켰다 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경찰관을 보이는 대로 때려죽였다. 이들은 돌아다니며 경찰관 색출에 나서 경찰관 집을 찾아 가족을 협박하고 재산을 모두 강탈해갔다. 길가에서 누가 저놈 경찰관이다 라고만하면 그 자리에서 무조건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이 폭동은 대구에서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미군 군정청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미군에 의해서 대구시내는 폭동이 진압되고 경찰서를 다시 찾았다. 이젠 재산이 털리고 동료가 맞아 죽어 악에 바친 경찰들이 데모 대와 탈옥범 색출에 나섰다. 데모 폭동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시외로 빠저 나가면서 지방으로 폭동을 확산시키고 숨을 곳이 없어지자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학교 마당 에는 하급 데모 꾼들이 잡혀왔다. 내가보기에는 이들은 데모 대에 끼어들어 도둑질에 가담한 도둑떼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데모 주동자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애매하게 이들이 빨갱이로 몰려 대신 처벌을 받았다. 시내에 그 많던 의원회 감판이 모두 철거됐다. 이젠 공권력의 복수가 시작됐다 내가 아는 아저씨 벌 되는 사람도 데모 꾼으로 오인되서 경찰에 잡혀가서 심한 고문을받고 몇일후에 풀려났다. 이젠 빨갱이 빨자만 뻥긋해도 잡혀들어가는 세상이됬다. 우리집에 경찰관이 찾아왔다. 피해 진상조사와 데모꾼/폭도 색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이야기 하라고 했다. 나는 사랑체에사는 아줌마가 히로모또네 집에서 뭔가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경택이도 보았다고 했다. 경찰관과 같이 온 두 사람이 우리를 앞세워 사랑체로 아줌마를 찾아 갔다. 우리가 경찰관과 같이 온 것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서 자기는 절대로 남의물건 안 갖고 왔다고 딱잡아떼는거다. 도리어 우리가 거짓말 한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다. 경찰관이 우리하고 집안을 뒤졌스나 증거물은 아무것도 안 나왔다. 증거가 없스니 별도리가 없다. 경찰관도 돌아가고 우리도 그냥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이야기 했더니 어머니는 우리가 경찰관을 데리고 가서 집까지 뒤젔스니 어떤 보복이 올지도 모른다고 매우 걱정 하시고 하로 속히 여기를 떠나야 되겠다고 하셨다. 우리 집에 Hi Tec 물건이 세가지가 있섰는데 라지오 (Radio) 와 축음기는 이때 없어지고 작은 손재봉틀은 이불 밑에 숨겨져 있어서 도둑떼가 못보고 남아있섰다. 이젠 가진 것이 없스니 이사 가기도 쉬워졌다. 이 폭동이 일어난 날이 1946 년 10 월 1 일이었다. 최근에 쏘련이 남노당에 폭동을 지령하고 자금을 공급한 사실이 그 당시 연해주 군관구 부사령관이던 "스티코푸"의 비망록에 의해서 외부에 알려졌다. 2.3 서울로 이사 오다 우리 집은 청량리 전차 종점에서 한참 걸어 들어가서 회기동에 있었다.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집 주위는 모두 논밭이 였다. 아버지도 미군 군정청에 직장이 생겼고 대구에서의 악몽은 많이 지워지고 시골 같은 분위기의 평화로운 서울외각 이였다. 나의 학교 는 청량국민학교 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길을 따라가면 15 분 정도, 논을 가로질러 가면 10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6 학년은 모두 세반으로 여자는 한반 밖에 되지 않았다. 10

18 11 복장도 반은 흰 저고리, 검은 치마에다 고무신이었다. 그 때만해도 농가에서는 손도 모자랐지만 얼마 되지 않는 월사금(수업료)도 내기가 힘들어, 여자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벤또(도시락의 일본말) 와 책들을 사각형 책보(책을 싸는 보자기)에다 대각선으로 뚤뚤 말아서 허리에다 단단히 묶었다. 항상 반찬의 양념이 흘러서 책의 한쪽 구석은 누렇게 굳어져 있었다. 책보 속에는 교과서 몇권, 공책, 필통, 책받침 그리고 벤또가 들어 있었는데, 필통에는 고무(지우개, 게시고무라는 일본말의 줄임 말), 연필 몇 자루, 그 중의 한 자루는 내가 애지중지 아끼는 일제 잠자리 표(Tombo) 연필이 들어 있었다. 국산 연필은 나무의 질이 나빠서 깎기에도 힘이 들었고, 연필심에는 때로는 돌 가루 같은 것이 섞여 있어서 공책이 찢어지기도 하였다. 고무는 쓸 수도 없었으나 그냥 가지고 다녔는데, 고무로 지운다는 것은 종이가 찢어지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 하였다. 책받침은 plastic 제로 중간이 찌그러져서, 항상 절반만 걸쳐서 사용하고 계속하여 그 위치를 옮겨야만 했다. 이 때, 오래 동안 기다렸던 운동화가 전달되었다. 귀한 물건만 취급하는 아줌마가 한 달에 한 두 번씩 집에 들리곤 하였는데, 주로 설탕, 조미료 등과 특별히 주문한 공책, 연필, 운동화 등을 갖다 주었다. 나는 이 새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왔다. 논을 건늘 때는 신발을 벗어서 손에 쥐었으나 이 날은 운동화를 허리에 찼다. 논두렁의 어떤 부분은 미끄러워서 넘어지게 되면 손으로 땅을 짚어야 되는데, 운동화를 손에 쥐고 있으면 그것이 물에 젖게 된다. 논을 다 건느면 종아리에 거머리가 붙어 있나 살펴보고 신발을 신는데, 이 날은 맨발로 학교까지 갔다. 새 운동화여서 신을 신기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6 학년 1 반은 대부분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었고, 2 반은 그렇지가 못하였는데, 가난한 학생과 불량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았다. 점심시간은 1 시간으로,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가서 노는 시간인데, 우리 반은 반 이상이 벤또를 가지고 왔고 2 반은 벤또를 가지고 오는 학생이 거의 없어서 2 반 학생들은 곧바로 운동장에 나가서 놀았다. 벤또를 다 먹고 운동장에 나가면 이미 시작한 게임에 끼어들기가 힘이 들었고 때로는 주변에서 맴돌다가 들어오곤 하였다. 그 날은 나도 맨발로 운동장에 나갔다. 많은 아이들이 맨발로 운동장에서 놀아서 맨발이 이상하지가 않았다. 며칠 전에 TV News 에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맨 발로 축구공을 차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도 그 나이 때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다른 점이 하나가 있섰다. 아푸리가 애들은 정식 축구뽈을 차고 있는데 그때 우리는 되지 창자(?) 로 만들었다는 주목만한 크기의 뽈 을 차고있섰다. 우리동내에 태창공장 이라는 큰 공장이 있섰는데 이 공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공장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고 들었다. 나는 꺼먼 연기가 오랫동안 나는 것만 멀리서 보았다. 여기는 평화로운 곳이라고 좋아했는데 대구 폭동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삽이나 곡굉이를든 데모 꾼은 안보였다. 우리 집이 이 동내에서는 큰집이라서 혹시나 해서 걱정이됬다. 우리가 세를 들고 있는 집의 사랑방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갔다. 항상 밤이 되면 사람들이 찾아 들고 아침이면 돌아가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집 주인이 폭동의 주모자로 잡혀 들어갔다. 집을 팔아 경찰에서 빼냈다고 들었다. 새로 온 집 주인이 들어오게 되어 우리는 당장 집을 옮겨야만 했다. 2.4 경기중학교 에 입학원서 실망 중학교 입학원서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경기중학에 냈다. 나와 친한 원형이와 같은 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이 친구는 경기를 포기 하였다. 포기했다기 보다는 선생님이 경기중학에 11

19 12 추천을 안한것이다. 문안 (사대문안- 서울 시내) 에있는 유명한 국민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인다는 것이었다. 그 때의 나에게는 좋은 학교라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았었고, 단지 친구하고 같이 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인다니 떨어질 것만 같아 겁도 났다. 경기중학을 포기하고 원형이가 가는 학교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내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다. 어른들 중에는 경기중학을 일제시대(해방전)의 이름인 제일고보 ( 京 城 公 立 第 一 高 等 普 通 學 校 ) 라고 하면 알아들었으나, 경기중학 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 가는 사람이 거의 없던 때라서 고등 보통학교만 나와도 고등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경성제일고보라면 제일로 처 주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소리는 경기중학도 별것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우리나라 에서는 제일가는 학교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지원학교를 옮겨달라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고 거절을 당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는 충분히 경기를 갈 수 있다. 고 격려를 해주셨으나 헛소리로 들렸다. 중학교 진학이 나에게는 실망과 불안을 갖고 왔다. 나하고 같이 우리 반에서 경기중학교에 간 친구가 외무부에서 활동했던 김태지와 일직이 고인이 된 고명삼이 였다. 김태지는 멀리 문안 효자동에서부터 통학하고 있섰다 추운 겨울날 방석을 둘로 접어서 만든 즈킹 (방탄용 모자로 해방전에 일본정부에서 아이들에게 장려한 머리 보호용 모자-일본말)을 쓰고 자주 지각해서 늦게 오곤 했다 그때 뭐라고 하면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힘들게 문안에서 등교했는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잊었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잋어지지않는 옛날 장면이기도 하다. 입학시험에 체력검사도 해야 하는데, 나는 공부보다도 체력검사가 더 겁이 났다. 나는 빼빼 로 남의 앞에서 벗고 나설 수 있는 체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턱걸이는 한 번도 못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혼자서 운동장 구석에 있는 철봉 대에 가서 매달려 보곤 하였다. 턱걸이는 적어도 한번은 해야 합격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2.5 문안으로 이사 그리고 사고 1947 년 늦은봄이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고모네 집의 2 층으로 이사를 하였다. 물론 임시였지만, 통학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동대문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타고 종착역인 청량리 역에서 내려 또 20 분쯤 걸어야만 학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턱걸이는 한 번도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보는 데서는 창피하여 못하고 학교가 끝나고 연습을 하였다. 그러다가 철봉에서 떨어졌다. 철봉 밑은 모래가 없어서 굳은 땅이었는데, 오른 팔과 팔꿈치를 땅바닥에 부딪쳤다.. 나는 피가 나는 사고라면 응급치료라도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아서 그냥 참고 집으로 왔다. 뭐가 부러진 것 같았고, 몹시 아팠다. 결국 아버지가 잘 아시는 백인제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받았다 입학시험 날이 닥아 오고 있었다. 팔은 더 악화 되었다. 입학시험을 칠 형편이 아니어서 1 년을 노는 것으로 단념을 하고 학교도 못 가고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있섰다. 다행히 입시 수일 전부터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아주면 오른손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고통이 줄어 들었다. 이왕 떨어질것 경험삼아 시험이나 처 보자고 나는 억지로 필기시험을 치르고, 체력검사는 다친 팔을 의사에게 보이는 것으로 끝났다. 내 생각보다 문제가 쉽게 나온 것 같았다. 시험공부도 안 했는데 날 위해서 내가 아는 것만 냈구나 하고 혼자 좋아했다. 나에게 쉬우면 다른 사람에게도 쉬웠슬 것이다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합격자 발표 날 나는 떨어질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는데 의외로 합격이 되었다. 아마도 팔을 다치지 않았다면, 체력검사에서 낙제를 했을 거라고 혼자 자위하였다. 팔이 낫는데 팔목관절이 변형이 되어 팔을 펴면 방향이 30 도 정도 꾸부러진다. 후에 이로 인해서 군대면제 병종 판정을 받았다. 팔을 펴지만 않으면 정상적으로 보인다. 12

20 13 입학과 동시에 남산밑에있는 필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일제시대 정부 관사를 불하 받은 것이었다. 더 좋은 집도 많았는데 필동에서 제일 산 쪽으로 들어가있고 마당이 없고 산이 바로 사작되는 쓸모 없는 터였다. 그나마도 우리능력으로는 이 집도 천만 다행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후에 들었다. 나중에 나에게는 이 집 산 지형이 단파 라지오 안테나 가설에는 큰도움이됬다. 지은 지 10 년이 되었다는데, 가스관이 부엌까지 들어와 있었고, 전기 콘센트가 방마다 방바닥 높이에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전기는 그 당시 내가 알기로는 조명용으로 천청 가운데서 줄이 나와 있어, 전기기구들을 사용하려면 Y 자로 된 Adapter 로 줄을 별도로 끌어 내야만했다. 그런데 이 집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화도 있어서 전화벨이 울려오는 것이다. 1m 크기의 전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옛날 수동식 전화는 오른손으로 소형 발전기를 돌려서 신호를 보내면 교환수가 나오는데, 교환수에게 상대방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연결되는 것이었다. 전화번호부도 없었지만, 전화를 걸 상대도 없었다. 10 년전에도 (1930 년대 중반) 일본 사람들은 라지오, 전축, 전화, 전열기구 그리고 도시가스 등을 쓰고 있섰다. 이제는 하루두번 을지로 3 가, 종로 3 가 인사동, 안국동, 학교를 왕래하게됬다 2.6 Hi Tec 와의 만남 (1) 나는 경기공립중학교 ( 京 畿 公 立 中 學 校 ) 1 학년 4 반, 출석번호 9 번? 이었다.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 이조 왕실 자손, 정부 고관 자식 그리고 덕수, 재동, 교동, 수송, 등 문안에서 알려진 최고 국민학교에서 일등 했다는 애들이 모두 모였다. 내가 나온 청량국민학교는 문밖에도 한참 밖이다. 여기서는 모두들 좋은 운동화를 신고 맨발로 운동장에 나가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점심 벤또(도시락의 일본말) 는 안 싸오는 애들은 볼 수가 없다. 입학 축하로 좋은 시게 고급 만년필 등을 선물로 받아 학교에 와서 자랑을 하였다. 나는 외톨이로 한쪽에 밀릴 수밖에 없섰다. 그래도 나는 청량국민학교를 다닐 때 벤또를 늘 싸가고, 남들이 신지 못하는 새 운동화와, 한 자루 뿐이었지만 일본제 연필을 가지고 다녔고, 큰 집에서 살았고 때때로 찦차를 타고 퇴교하는 등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 처음 영어를 배우면서 인상에 남는 것이 Penmanship 이라고 해서 펜에 인크를 찍어서 글을 쓰는데 물방아인크를 모두가 썼다. 이 인크는 특별한 향료를 넣어서 그 냄새가 아주 향기로웠다. 책상 오른쪽 앞에 직경이 10cm 정도 되는 원형의 인크병 놓는 자리가 파저있었다. 사고로 많이 엎지르기도 했고 뚜껑이 잘 안 맞아 가방에서 새어나서 모두가 가방 한구석은 잉크로 늘 염색되어 있었다. 하루는 효자동에 있는 같은 반 내 옆 친구 김위녕이 네 집에 놀러 갔다. 그 때 나의 눈에는 으리으리하고 큰 한옥이었다.. 서재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니 책들도 많았지만, 동상 같은 것들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내 눈에 띈 것이 지금의 소형 냉장고만한 크기의 전기 축음기 ( 電 蓄 ) 였다. 축음기의 위 뚜껑을 열면 turntable 과 pick up 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그 pick up 이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생겨서 와시가다 (일본말로 독수리형)라고 불리는 최고급 전축으로, 물론 라지오 (radio 의 일본말) 도 겸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 만든 최고급 음향제품이었다. 지금은 귀한 골동품으로 되어 불르는게 값 이라고 한다. 내가 전축에 관심을 보이자 그 때 들려준 노래에 사의 찬미 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음반 취입을 한 가수로, 이바노비치의 왈츠 곡을 고쳐 부른 것으로 일본서 돌아오다 현해탄에 목숨을 던진 윤심덕의 노래였다. 우리 집에도 축음기( 蓄 音 機 -- 有 聲 機 라고도했슴) 라는 것이 있섰다. 그때에도 구식인 수동식으로 태합 (spring) 이 끊겨서 다락에 버려져 있었는데 대구서 10-1 폭동 때 폭도들이 우리 집 라디오 하고 같이 우리가 보고있는 데서 들고 갔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축음기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 학교에 가게도서부터 한번 다시 그 소리를 듣고 싶었섰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전축소리에 큰 감명을 받았다. HLKA 정동방송국의 방송도 들었다. News 를 말하는 남자의 13

21 14 목소리는 내가 쓰는 한국말과는 좀 다른 것 같이 느껴졌다. 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뒤의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니 커다란 나팔(speaker)이 밑에 붙어 있고, 중간에 큼직한 진공관들로 만들어진 앰프가 있었다.. 우선 흥미를 갖일려면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내가 전기음향제품 그것도 그 당시의 최고급 품을 처음으로 보고 듣고 하는 기회를 갖었다. 이때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무척 부럽고 나도 갖고 싶었다. 김위녕이네 집에 다시 놀려가려고 했는데 그 후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북으로 넘어갔다고 들었다. 그때 내 머리에는 친구보다 그 전축이 어떻게 됐는지가 더 마음에 걸렸다. 또 그 당시 HLKA 정동방송국에서는 아동연속극 똘똘이의 모험 이 대단한 인기였다. 이 연속극 주인공이 내 앞 옆에 앉아 있는 덕수국민학교에서온 윤승진이었다. 우리 집에는 라지오가 없어서 나는 그런 연속극이 있는 줄도 몰랐다. 우리도 라지오가 있어야겠다고 졸라서 얼마 안 가서 라지오가 하나 생겼다. 옛날 집에 있던 라지오는 그 크기가 커다란 사과 궤짝을 세워놓은 것만 했다. 이것은 손바닥 보다 조금 큰 미군 PX 에서 새어나 온 싸구려 였다. HLKA 는 잘 들려서 이것으로 만족했다. 문제는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면 전압이 내려가있거나 정전이 자주 생겼다. 필동에서도 우리 집은 멀리 들어가서 산 골짜기 끝에 위치해 있어서 우리 집 위로는 남산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사를 올 때만 해도 그리 많지 않던 하꼬방 (일본말의 상자방, 판자집)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해서 우리 집 앞에서 시작해서 산 위쪽으로 수십채가 늘어섰다. 조금 위로 올라가면 맑은 물이 있고, 개천에 걸쳐 하꼬방을 지으면 개천을 폐수로로 쓸 수 있고, 더욱이 전기도 쉽게 끌 수 있어서 집에 필요한 최소한의 infrastructure 가 제공된다. 서울 시내이면서도 겉에서 잘 보이지 않아 당국의 단속은 거의 없었다. 커다란 통을 개천 위에 놓고 배설물을 위에서 떨어뜨리고 정기적으로 수거해야 되는데, 넘쳐흘러도 급할 것이 없고, 장마철에는 그냥 개천 물에 떠내려 보내고 있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이 전기를 불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저녁이면 과부하가 되고, 불실 배선으로 인한 정전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우리가 청량리에 살 때는 큰 공장 덕분에 정전이라곤 거의 모르고 살았다. 우리동내 전기 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기만 했다. 2.7 Hi Tec 와의 만남 (2) 김해에서 농사지시는 할아버지로부터 매년 추수가 끝나면, 쌀 몇 가마가 우리 집으로 전달되었다. 그 당시 쌀이 있고 집이 있으면 부자였다. 그리고 때때로 찦차가 집 앞에 서 있어서 하꼬방 주민들에게는 우리는 별 세계의 사람이었다. 우리 집에 쌀을 꾸려오는 아줌마들이 많았다. 그 집에 가면 쌀을 꿔준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사정이 딱해서 꿔주었는데, 쌀을 떼어 먹었다고 어머니가 속상해 하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어떤 사람은 저질의 쌀로 갚았는데, 그나마도 양이 모자란다고도 하셨다. 우리 집에 전기 특선(무정전)이 들어왔다. 나는 특선이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다. 관청이나 고관집이면 특선을 끌어 주었다. 알고 보니, 아라이(일본 이름) 아줌마의 덕분이었다. 자주 쌀을 꿔가고 해서 잘 알고 있었고 때때로 설탕도 갖다 주었다. 전기 사정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라이 아줌마가 자기 아들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아들 이름이 정태범이었다. 이젠 라디오도 듣게 되었고, 밤에 전기도 환하게 켤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전기를 밝게 켜지 못하게 하셨다. 밖에서 안 보이는 방만 불을 켰다. 아라이 아줌마는 내가 라디오에 흥미가 있는 것을 알고 하루는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하꼬방에 산다고 업신여기고 있었는데, 나는 방에 들어가 보고는 놀랐다. 방 하나는 매우 깨끗했고 옆에 부엌도 있고 또 정태범씨 방은 14

22 15 여러 가지 라지오와 기계들이 있었다. 물론 이집의 전기도 특선이다. 정태범씨는 나보다 3~4 살 위로 시내 라지오상에서 일하는 전기 라지오 의 도사 라는 것이다. 자기 방에 라지오 2 대, 전기축음기 하나 그리고 전기도구, 테스타(Analog Multimeter) 등이 있었다. 전기축음기는 내 친구네 집에서 본 것과는 아주 달랐다. 크기도 작고 턴테이블도 직경이 20cm 정도이고, pick up 도 손가락 같이 가는 미제였다. 거리에서 듣던 유행가 몇 곡을 들려주었다.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 전부 여기에 있었다. 그 집에 매일 놀러 가고 싶었지만, 정태범씨는 집에 잘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태범씨는 나에게 전기가 없어도 들을 수 있는 광석 라디오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광석 라디오를 듣기 위해 청계천에서 레시바(headphone)을 하나 사왔다. 레시바를 통해 방송은 잘 들렸으나, 광석의 접점이 불안정하여 문제가 많았다. 정태범씨는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라지오, 전축 등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다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석 라지오 등을 만들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번은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의 가게를 찾아갔으나 그는 가게에 없었다. 가게주인 인줄 알았는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어디 갔다고 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 달라졌다. 꼭 청계천 3 가와 4 가에 있는 전기 고물상을 거쳐서 집으로 왔다. 이젠 나도 뻰찌, 닛빠, 고데(전기인두), 테스타(multimeter) 등을 모으는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고, 집에서 돈 달라고 할 형편도 되지 못하였다. 사고 싶은 물건의 값만 알아보고 그냥 놓고 오기가 일수였다. 같은 물건도 가게에 따라 그 값이 모두 달랐다. 그 당시의 청계천에는 개천 위에 하꼬방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한 때였고 전부가 전기 관계는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약장수, 장기판을 벌리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곳, 옷 몇 가지를 펴놓고 있는 곳 등도 많았다. 물방개로 도박을 하는 곳도 있었는데, 물방개를 대야에 넣으면 (ㄷ)자 모양으로 된 집으로 찾아 들어가게 되고 이 방게가 어느 집으로 가는지를 맞추면 돈을 따는 것이다. 잘 보고 있으니까, 이 물 방게가 들어가는 집을 예측할 수가 있었다. 나는 자신이 생겨서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걸고 게임을 하였는데, 물방개가 내가 지정한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두 배의 돈을 땄다. 돈을 받고는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 나왔다. 왜냐하면 거액의 돈을 땄기 때문에 그 돈을 다시 달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길로 나왔다. 그 다음날 게임에서 딴 돈으로 전기 고데를 사왔는데, 광석라지오의 코일부분의 접점이 좋지 않아서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도 고데가 필요했었다. 이 전기고데 (인두-일본말)는 며칠 전부터 가게에서,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구경만 하던 것인데, 오늘은 이것을 돈을 주고 사온 것이다. 중고품으로 일제도 있었으나, 그것은 워낙 값이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값이 싼 국산을 택한 것이다. 재주 있는 사람이 집에서 몇 개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은 것 같았다. (ㄱ) 자형 모양으로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고, 쇠 부분이 두 개로 되어 있어서 가운데는 연필 굵기 정도의 구리를 끼우고 그 사이에 NiCr 저항선을 감고 운모로 절연을 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전기를 넣어보니 뜨거워는 졌는데, 납이 녹지 않는다. 전압이 낮아서다. 할 수 없이 부엌에서 사용하는 풍로에 숯불을 피워서 그 위에다 전기고데를 달구었다. 납은 녹는데, 이번에는 손잡이 나무도 같이 뜨거워졌다. 부엌에서는 불편하고 방에 가지고 오기는 위험하고, 할 수 없이 마당에 놓고 그 옆에 가마니를 깔고 사과 궤짝을 책상 대용으로 하여 우선은 납땜이 가능해 졌다. 이제는 여러 가지 물품들을 가져다가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땜질 연습을 해보았다. 그런데, 고데의 손잡이 나무부분이 검게 타기 때문에 풍로로는 작업이 곤란하여 결국은 손잡이와 쇠 부분을 연결하는 나사 구멍이 타서 고데가 모두 해체가 되고 말았다. 싼 게 비지떡이었다. 15

23 앞서가는 친구 유홍배 와 전자공학 어느 듯 나는 중학교 2 학년생이되어 1 반에 배치됐다. 1 학년때 여섯 반이 있섰는데 재편성돼서 80%가 새 얼굴이다. 충무로 4 가에서 아버지가 일용품가계를 하시는 유홍배라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우리친구들 간에는 유홍배보다는 연통으로 알려저있다. 겨울에 난로가 유홍배 유홍배 劉 弘 培 (1957, 2008 년 사진) 책상 바로 옆에 있어서 난로 관리로 얼굴에 까만 연탄 칠을 모르고 다녀서 시커메 로 시작된 별명이 연통으로 발전된 것이다. 아침에 등교하면 모두 다투어 벤또(도시락)를 난로위에 올려 놓는다. 그 당시는 벤또 상자는 모두 금속 재품이였다. 추운겨울에 더운점심을 먹을 수가 있다. 그러나 맨 먼저 올려놓은 벤또는 잘못하면 숫덩어리가 되고 만다. 난로 벤또 관리자- 연통 에게 잘보여야한다. 우리 반에서 막대한 power?- 의 자리다. 집이 가까워서 친해졌다. 무선기술에 관한 일본 책을 여러 권 내가 물려 받았다. 그 중에서 Radio 회로집 과 전기시험소 제 4 부 연구소 에서 편집한 무선이론 은 나에게는 처음 보는 일본말로된 전자 전문서적으로 나의 한 평생의 방향 잡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무얼 안다고 전자관련 책을 유홍배가 모았는지? 하여튼 나보다 한발 앞서가는 친구였다. 한번은 같이 학교를 가면서 "토스트"를 아침으로 먹고 왔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있섰다. 물려받은 책은 이해가 가든, 안가든 무조건 읽었고, 두 번 째 읽을 때는 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 갔다. 진공관 회로도 에는 간단한 것들도 많이 있어서 어쩌면 나도 만들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특히 "111B"라는 진공관으로 만든 전지식 Radio 회로가 있섰다. 1.5V 건전지 한 개로 동작한다고 되어있어서 "111B" 진공관을 구할려고 천개천 고물상을 멏일을 두고 전부 삿샃이 뒤진적도 있셨다. 후에 그 책을 번역하여 KARL 지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여러 진공관 이름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UX 라고 하면 네발, UY 라고 하면 다섯 발, 또 80 하면 정류관. 청계천 고물상에 가서도 진공관 이름을 읽게 되었다. 이때 내 인상에 남는 곳이 한군데가 있섰는데 진공관 재생공장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울역과 서대문가는거리의 corner 에 큰 건물이 있섰는데 그 2 층에서 Filament 가 끊어진 진공관을 유리관을 녹여서 새로 재생하고 있셨다 년경 이야기다. 2.9 단파 라지오 먼 친척아저씨 벌 되는 사람이 미제 물건의 보따리 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고 있었는데, 미제 단파 Radio 2 대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2 대 모두를 갖고 싶었는데, 졸라서 싼 것 1 대를 샀다.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는 크고 더 고급이었다. 단파대(SW Band)가 2 개였다. 밖에 10m 가량 되는 안테나도 나무에 올라가서 높이 쳤다. 밤이 되면 많은 외국의 방송국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전압이 낮고 변동이 많아서 나는 청계천에서 가변형 승압 트랜스를 사가지고 왔다. 이 트랜스를 먼저 샀더라면 전기고데를 사용하면서 풍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고, 전기고데를 태우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도 하였다. 나는 단파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외국 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갈 수도 없는 상상만 하는 먼 곳으로 생각되었는데, 일본 방송 외에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소련, 중국, 필리핀 등 가까운 곳만이 아니라 미국도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것이 이북방송이었다. 이들의 말투도 재미있었고, 남조선을 욕하는 것도 재미가 있어 자주 들었다. 문제는 말이었다. 내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일본말과 이북 말 뿐이었다. 영어는 매일 학교에서 배우고는 있으나 진짜 영어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학교에서의 영어교육도 불만이었다. 16

24 17 한참 BCL/SWL (방송 듣는 것) 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전기 도전 단속반에 걸렸다. 전기 특선의 혜택이 끝이 났다. 사실 우리는 도전을 한 것은 아니다, 전력계를 통과한 전기를 사용하였으니 전기요금은 다 낸 셈이다. 전기단속반이 우리 집에도 와서 부엌의 두꺼비집만 보고 갔다. 정태범씨가 우리 동네 도전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안주고 특선을 끌어 썼는데, 다른 집들은 돈을 주었던 모양이다. 나는 정태범씨를 나쁜 놈으로 욕하는데 매우 듣기가 거북하였다. 그는 내가 부러워하는 나의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나도 라지오에 대하여 좀 기술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정전이 심해서 전지용 라지오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 다음으로는 회로도에 있는 부품을 모으는 단계가 되었고, 고물 전기인두도 다시 하나 구입하였다. 엿장수들이 모아오는 고물에 더러는 라지오 부서진 것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엿장수들이 하루 동안 수집한 물건을 팔아 넘기는 Recycle Center 를 발견하였는데, 여기에도 자주 들려서 일제 전자제품 부서진 것을 몇 개 사오기도 하였다. 여기서 엿장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요즈음 개념으로는 엿장수는 Recycle 할 수 있는 폐품수집가였다. 가지고 오는 폐품의 댓 가로 흰 엿 판에서 엿을 쇠 조각으로 쳐서 잘라 주는데 값나가는 폐품은 엿을 크게 잘라 주고 그렇지 못하면 엿을 작게 자른다. 또 엿장수에게 잘 보이면 별것 아닌 것도 엿을 크게 잘라주기 때문에 그래서 엿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엿장수인 것이다. 또한 엿장수도 못하는 것은 불가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엿장수도 자기 영역이 있어서 무턱대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부자 동네일수록 텃세가 컸다고 들었고, 거지들 역시 조직이 있어서 아무 곳이나 갈 수가 없었다. 오야붕(두목의 일본말)이 시키는 동네만 다녔던 것이다. 그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78 rpm 의 옛날 Record, 즉 유성기판이었다. 새로운 유행가가 나오면, 레코드 판을 찍어서 팔아야 하는데, 그 원자재가 국내에는 없었고 엿장수가 모아오는 유성기판을 녹여서 새 유행가판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 엿장수덕분에 귀한 옛날 78rpm 유성기판은 우리나라 에서는 거의 그 자취를 영원히 감추고 말았다 동란 - 김일성이가 처 내려오다 1950 년 6 월 내가 중학교 4 학년 (고 1) 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6.25 가 일어났다. 나에게는 새 학년이 되는 바로 그날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섰다. 학제 변갱으로 6 월 1 일이 새 학년이 되는 날이다. 이홍구와 같이 요번에도 같은 반에 들기로 했는데 나는 1 반 홍구는 2 반으로 배정 됐다. 나는 학교의 반 배정을 무시하고 2 반에 끼어들어서 출석번호를 받았다. 나중에 발각이 되어 문제가되서 불려가서 야단을 맞았지만 이미 1 반 2 반 모두다 출석 번호가 확정된 상태라서 내가 2 반에 끼어드는 것을 고칠 수가 없게되여버렸다. 6 월 25 일 새벽 김일성이가 3 8 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했다. 서울이 함락되던 날 폭탄소리가 요란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는데, 나는 몰래 을지로 4 가까지 가보았다. 미아리에서 곳짱 들어오면 을지로 4 가 까지 내려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와 있었고, 여기에는 타다 남은 인민군 탱크가 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국군의 시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인민군의 무혈점령은 아닌것 같았다. 세상이 뒤집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출장 중이셔서 집으로 돌아오실 수는 없었는데,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벌써 곳곳에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있었고, 또 총을 든 민간인이 붉은 완장을 차고 설치고 있었다. 그들은 숨어 있던 지하조직원 들이었다. 이들은 소위 인민재판 이라고해서 자기네들에게 협력안한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보라고 공개 총살하고 있었다. 공포의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쌀을 꿔가고 자취를 감추었던 한 아줌마가 자기 17

25 18 남편(?)과 총 든 인민군을 데리고 집에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는데 그 남자는 우리 동네를 책임진 위원장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집에서 쫓겨났다. 우리가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우리를 두려워하였다. 동네사람들은 우리도 빨갱이가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 학생들은 모두 학교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학교로 가보았더니,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을 시키고 있었는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애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지휘를 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학년인 지병영이도 빨간 완장을 차고 설치고 있섰다 어떤 빨간 완장을 찬 선생이 단상에 올라가 일대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당장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긴박한 분위기였다. 그는 우리 모두 위대한 인민군을 도와 조국해방 전에 참가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소름 끼치는 말들이었다. 일본에서 해방된 것이 얼마 안되는데 또 무슨 해방이란 말인가? 조국해방에 참여할 사람은 오른쪽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겁에 질려 몇 사람이 오른쪽으로 나갔는데, 또 다시 협박조의 강연을 하니, 몇 사람이 더 오른쪽으로 나갔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떨고 있었다. 나가지 않으면 모두 잡혀갈 것 같은 무섭고 험악한 분위기여서, 나도 겁에 질려 할수없이 오른쪽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는데 내옆에있던 최광수는 지병영이 눈치를보면서 옆으로 나서고 있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거의 동시에 오른쪽으로 나갔다. 그러던 중 오른쪽으로 나가던 학생들이 뒤쪽에서부터 별안간에 우르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나도 이때가 찬스라고 생각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도망을 쳐서 학교 교문을 빠져나왔다. 그 후에 도망가는 학생을 막으려고 교문을 닫아버려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교문 안에 갇힌 학생들은 트럭에 실려 가서 강제로 의용군 (남한사람으로 조직한 인민군) 에 끌려갔다고 들었다. 빨갱이들은 젊은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서 강제로 의용군에 입대를 시켰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민군의 수송능력은 거의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인민군은 식량을 현지 조달하였다. 집집마다 뒤져서 먹을 양식을 빼앗아 갔다. 총들고와서 강도질 하는 거다. 그리고 남자들은 보는 대로 잡아간다. 나도 의용군에 잡혀갈 나이였다. 또 우리 집에는 아직도 쌀이 있었다. 빨갱이들이 총을 들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나는 항상 구석방에 있다가 밖에서 소리만 나면 집 뒤 나무 뒤에 쓰레기 상자들을 모아서 숨을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쪽으로 뛰어가 숨거나 집밖으로 도망하기로 되어 있었다. 집에 남아 있는 식량은 뒷마당을 파고 상자 속에 넣고 풀로 덮어 감추었다. 외부소식에 굶주린 우리는 전기가 들어오면 항상 Radio 를 켜 놓고있섰고 김일성 장군노래 나 빨치산노래가 나오면 열심히 연습했다. 만일 잡혀가서 사상 검증에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모르면 반동분자로 몰려 죽고 살기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장군 노래의 일절은 장백산 으로 시작헤서 김일성장군 으로 끝나는데 우리는 형재끼리 일부러 크게 밖에서 들으라고 부르면서 마즈막을 김일 똥 장군이라고 불르고있섰다. 그러다 어머니께 들켜서 혼이난 일이있섰다. 잡혀도 가지만 잡혀가서 무의식 중에 똥 장군이 튀어나오면 그건 사형 감이다. 그리고 장백산이 백두산인 것은 극히 최근에야 알게됬다.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첫째, 서울 시내에는 식량이 바닥이 나서 모두들 시골로 먹을 것을 찾아 서울을 빠져나갔다. 저녁이면 한 집에서 한 명씩 나가 지정된 국민학교에 집합했다.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인력이다. 90%가 아낙네들이었다. 포탄 등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열 명 정도가 한 조가 되어 총을 든 인민군의 감시를 받으며 해가 뜰 때까지 강행군 하여 지정된 장소에 군수물자를 옮겨놓고 오는 것이다. 우리도 식량이 곧 떨어지게 되었다. 들리는 소문은 나쁜 것뿐이었다. 위대한 인민군이 남조선을 거의 다 해방시켰다고 했다. 우리도 집을 떠날 18

26 19 작정이었으나 들고 나가서 돈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라지오와 재봉틀이 있었는데, 라지오는 단파를 들을 수 있는 것이어서 잘못하면 이것 때문에 잡혀가거나 총살당할 우려가 있고 재봉틀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라지오는 상자에 넣어 땅을 파고 묻었다. 집을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많은 검문소를 피할 수도 없었고, 검문당하면 나는 의용군으로 잡혀가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뒷산에 감춰둔 식량이 바닥이 날 때까지 집에서 버티기로 하였다.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 뒷산에 가서 먹을 만한 풀을 뽑아 와서 풀 죽을 쑤어 먹었다. 얼마 후에는 어떤 풀은 맛이 좋고, 어떤 풀은 맛이 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깨소금과 참기름을 쳐서 간을 맞추면, 아마 항상 배고픈 상태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것도 참 별미였다. 깨소금과 참기름 모두 아껴서 먹어야 했다. 김일성 초상화가 전달되어 밖에서 들어서면 곧 보이는 곳에 걸도록 했다. 어느 매우 더운 날 나는 옷을 벗고 밖에 나가 세수 대야에 물을 떠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명의 인민군과 두 명의 민간인이 총을 들고 우리 집에 들어 왔다. 나는 당황했다. 인민군 한 명이 나에게 옷 입어 라고 소리치고 모두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겁이 나서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그들은 집안을 모두 뒤졌다. 우리가 먹다 남은 풀 죽을 보고는 그냥 앞문으로 나갔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식량을 찾으러 왔던 모양이었고, 그 풀죽 덕분에 나도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집 뒤로 들어와서 김일성 초상화가 걸린 것을 보지도 못하고 나갔다 우리는 사진을 잘 못 걸었다 고 하며 웃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도 즐거운 순간들이 있었다. 미군 비행기가 와서 남산 위에 있는 고사포대를 폭격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포대 전부는 안보여도 한 두 개의 포신을 우리 집에서 볼 수 있었다. 거의 매일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했으나 포대는 없어지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가고 나면 포대가 다시 나타나곤 했으나 비행기 안 오는 날은 무척이나 기다려지고 또 불안해지기도 했다. 갈수록 죽음이 닥아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고 곧 전국이 인민군에 의해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이젠 떠나갈 곳도 없어 젔스니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UN 군의 인천상륙-서울 탈환은 생애 최고의 감격의날 들이였다 그러던 중에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1950 년 9 월 15 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며칠 있으니까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희망의 대포 소리였다. 인민군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젊은 청년들을 그냥 두면 남조선 군에 가담한다고 총을 들 만한 남자면 무조건 잡아 쇠줄에 묶어서 북송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의 진격이 빨라져서 북송이 곤란하게 되자, 잡은 남쪽사람들을 모조리 현장에서 총살 해버렸다 년 9 월 28 일, 서울이 재탈환 되었다. 한미 연합 해병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탱크와 찦차의 행렬, 그 얼마나 반가운지, 정말 이것이 해방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나라를 구해준 은인이다 해방 때는 나는 멋도 모르고 남이 좋아해서 나도 떠라 했다. 지금은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가서 마음에서 울어나는 환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서울탈환은 인민군들이 철수한 뒤여서 무혈 입성 이였다. 너무 좋아서 집밖에 나갔다가 여기저기 타다 남은 시체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는 돌아올 때는 다른 길을 택했는데 거기도 시체가 있섰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많은 시민을 족이고 시체를 모아서 불을 지르고 갔다. 유엔군의 북진은 일사천리로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김일성이가 모택동에게 원조를 청하여, 별안간에 중공군이 밀려온 것이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겨울 준비 없이 올라간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많은 사상자를 내며 밀려 내려 왔다. 그 당시 해병대에 있었던 친구의 말로는 밀려드는 19

27 20 중공군을 기관총으로 다 쓰러뜨리고 나면, 또 몇 천 명이 밀려오고 끝도 없이 계속 중공군이 밀려들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총알이 떨어져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중국을 폭격하자고 했는데 투루만 대통령이 반대하고 맥아더 장군을 해임 시켰다. 만주를 폭격했다면 우리는 통일이 되었다. 이때 쏘련은 원자탄이 없을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 하는 것이다 년 1 월 4 일, 서울은 다시 인민군이 점령 했다. 우리는 그 전에 큰 트럭 위에 타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홍구도 우리와 같이 피난 가기로 했는데 사정이 바뀌어서 같이 못 갔다. 무척 추운 겨울이었다. 대부분의 피난민은 화물열차를 이용하였다. 전쟁으로 다리가 끊기고 트럭이 고장 나고 군 작전 지역은 작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해서 서울에서 대구 근방까지 5 일이나 걸렸다. 우리는 5 일 만에 처음으로 따뜻한 온돌방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고, 이젠 죽을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QST 지의 발견과 나의 Amateur Radio 의 시작 나의 본적지인 경남 김해군 대저면이 우리 피난의 종착지다. 여기에 도착한 것이 1950 년 12 월 말경이었다. 김해에 오니 전쟁을 더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군 공병대가 비행장 K2 를 짓고 있었고, 밤낮으로 불도저가 작업을 하고 다이나마이트로 산을 깎아 활주로를 만들고 있어 칠점산 이라고 불리는 작은 산들의 모양이 달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환갑 때 내 땅이라고 보여준 곳도 비행장이 되고있섰다. 여기가 오늘의 김해 비행장인 것이다. 일부 완성된 활주로를 이용하여 전투기가 출격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이 비행장에 바로 붙어 있어 밤이면 전깃불이 달밤 같이 종이 창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사랑채는 방이 3 개 있고 큰 곳간과 소가 자는 소 침실(?) 겸 지푸라기 창고가 붙어 있었다. 전에는 체격이 좋은 일꾼이 있어서 아침에는 소를 밖에 내고 소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군대에 입대하여 조그마한 체격의 판돌 이가 모든 일을 떠맡았다고 했다 년이됬다. 미군 통역관으로 다니는 김 선생이 사랑방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놀러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곤 했는데, 더운밥에 부대에서 나온 마가린, 베이콘 써른 것, 양파말린것, 달걀가루 등을 섞어서 비벼 먹으면 그 맛도 일품이었다. 김 선생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잡지 등을 모아서 일주일에 한번씩 부산에 가져다 팔고 있었는데, 하루는 판돌 이가 나를 나오라고 하더니, 김 선생님 방에 좋은 책이 많다고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것은 PLAYBOY 잡지 같은 것들이었다. 판돌 이는 학교는 안 갔지만 나보다 2 년쯤 아래(중 2)의 나이였다. 이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참고서 바이블 (Bible) 이 됬을뿐 아니라 아마추어무선을 알게되서 KARL 을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서 맛난 분들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시작 된 것이다 미국 아마추어무선연맹 ARRL 월간지 QST 와 ARRL 에서 만든 Handbook 나는 여기에서 QST 지를 발견한 것이다. QST 는 미국 아마추어무선연맹이 발행하는 기관지다. 아마추어무선은 일명 Ham 이라고도 하는데 무선통신기술을 이용해서 같은 동호인들 끼리 통신을 즐기는 개인 취미를 말한다. 일직이 미국에서 태서양 횡단 통신등 무선통신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런 취미인이 모여서 1912 년에 미국에서 20

28 21 아마츄어무성연맹 (ARRL American Radio Reley League)이 결성됬다. 오늘날 이런 취미로 모인 회원이 ㅡ 세계적으로 30 만 명이 넘는다. 나는 판돌 이를 시켜서 PLAYBOY 지와 QST 지를 빼내도록 하였다. PLAYBOY 지는 내가 감출 곳이 없어 판돌 이에게 돌려 주고, QST 지는 내가 가지고 왔다. 미국 군대에는 많은 HAM 국이 MARS (Military Amateur Radio Service-정식은 Military Auxiliary Radio System) 라고 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 QST 지의 발견이 나의 Amateur Radio 의 시작이 된 것이다. QST 지는 무선잡지인 것만은 확실한데, 별로 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영어책이라서 이해도 힘들었다. 나의 영어실력의 한계를 또 한번 느꼈다. 이해할 만한 기사는 열심히 콘사이스(영어사전)와 싸우면서 읽었다. 김 선생이 영어 선생인데도, 나는 QST 지를 훔쳤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여러 약어들이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아서, 나는 사전이 너무 골동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김 선생은 얼마 안 가서 부산으로 떠나버려서, 영어를 배울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QST 지에 있는 광고도 새로운 기기나 회사 이름을 배우는 좋은 재료였다. Hallicrafters, Collins, National 등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움물안 개구리인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서울이 부산으로 옮겨왔고, 1951 년 여름, 나도 부산으로 갔다, 처음에는 보수동 일가 집에 끼어 들었는데. 집도 좁았지만, 수돗물이 거의 안 나오는 상태라서 밥 짓는 외에는 물을 쓸 수가 없었다. 세수도 수건을 적셔서 닦는 정도로 끝냈다. 그래서 여기서는 잠만 자고 낮에는 밖에 나와 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남포동에 있는 조남욱이 아저씨? 가 계시는 일식집 2 층 xx 장 에 매일 모였다. 이홍구, 조남욱, 이응선 박기성 그리고 내가 주 멤버였고 홍구가 장패라고 불렀다. 벗꽃피는 봄이 왔다 진해에서 충무공 동상 제막식에 갈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부산 부두에서 해군 LST 가 떠난다고 했다. 우리 장패들이 모두 가기로 했다. 진해 축제에서 박기성이가 노래자랑에 나가 벼슬도 싫다마는 --- 을 불러 일등 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파도가 세서 모두가 멀미로 고생을 李 洪 九 李 應 善 趙 南 昱 ( 朴 起 成 - 사망) 나 부산 피난시 장패가 2008 년에 서울에서 다시 맞났다. 했는데 나만은 꺼 떡도 안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난중에도 가능한 한 정상을 찾으려고 노력도 했다. 하루에 두 번씩 광복동을 지나게 되니, 서울에서 청계천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오던 것과 같은 일과였다. 이 광복동에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청계천은 주로 일제시대의 고물들 이었으나, 광복동은 최신 미제나 일제 일용품 들이었고, 잡지만을 전문으로 하는 노점이 많았다. 나는 여기에서 The Radio Amateur s Handbook 을 발견했다. QST 지에서 몰랐던 것들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었다 부산 대신동 천막학교 부산 대신동에 피난 천막학교가 열렸다. 낯익은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홍구가 벌써 우리주위에도 미국갔다온 친구가 생겼다고 크게 자랑했다. 홍구는 항상 말재주로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동기 친구 강영순이가 포병장교 교육 차 미국 갔다 돌아왔다고 했다. 우리동기로는 제일먼저 미국유학(?) 을 했다. 다른 친구 주병국이도 미 공수부대에 다니면서 때때로 군복 차림으로 학교에 왔섰다. 또 이때 3 학년 6 반에서 내 앞에 앉았던 윤종열이가 우리 피난집에와서 좀같이 잇자고 부탁한 일이 생각난다. 무슨 일이 있어서 숨겨달라는 21

29 22 뜻이었다. 며칠 후에 행방불명이됬다. 어릴 때 서당에 다녔다고 해서 내 기억에 남아있는 친구다. 어디에 아직 살아있다면 한번 맞나 보고 싶다. 나는 부산 천막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천막학교에서 가장 인상적이였던것이 국어시간에 배운 고문이였다.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계시던 이명구 소령의 국어 구운몽 시간은 정말 재미있었다. 그때가 우리 국문학 Renaissance 시대로 영조 정조 때라고 했다. 그 작가가 서포 김만중 으로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 썼다는 것도 지금까지 기억이 난다. 선생님들이 모두 이랬스면 좋겠다. 내가 처음 경기중학에 입학을 했을 때 제일 먼저 과외반을 모집한 것이 미술반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입상은 못했지만 국전에도 출품했다. 조요한-무선반 1952 년 초 나의 친구 김중기(승순) 의 형 김승세가 부산역 앞 창고 2 층 방에서 송신기를 제작해서 전파를 낸 것이다. 송신기 라기 보다는 자그마한 진공관 발진기 였는데, 하여튼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 전파를 수신하고는 둘이 다 같이 흥분을 하였다. 그런데 그 때 무선반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부산에 가서야 알았다. 이 무선반은 조요한씨가 설립한 것으로 김승세 형은 경기중학 무선반 출신이었던 것이다. 나의 고교 일년 선배이고 금성사 부회장을 지낸 이희종씨도 무선반 출신으로 알고있다. 조요한씨는 무선과학이라는 Radio 에 관한 기술 서적을 한국서는 처음으로 출판했다. 나는 이 책의 출판사가 국사원 이라고 되어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섰는데 이런 기술계통 출판을 해주는 곳이 없어서 조요한씨 어머니가 주선한 곳이 국사원이 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학생으로 과학기술 서적을 그혼란중에 출판 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조요한씨 외에도 오세규 선배에게서도 큰 감명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반이 였는데 일본의 노벨 물리학자 유가와씨의 업적등 소입자 양자역학의 세계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문리대 물리과에 진학했고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한 활동가 였다. 나는 부산의 천막학교에서 물리반을 차렸다. 신입생 모집에 친구 정한모의 동생 정근모 (전 과기처장관 대통령후보)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던 기억이난다. 또 나의 후배로 배명승, 박대선을 여기서 만났는데, 그들에게 HAM 바람을 불어 넣어 동업자가 되었다. 박대선이는 집이 월래 부산이어서 우리들 피난민과는 달리 자기집이 있었다. 집도 상당히 큰 2 층집이여서, 나와 배명승은 박대선이네 집에 자주 놀려갔다 HAM 으로의 집착 - 나도 한다 박대선 이네 2 층은 HAM 을 위한 우리의 전초기지 아지트가 된것이다. 7Mhz 의 HAM BAND 는 일본 UC(무허가) 세상이었고, 그때 일본은 HAM 개방 직전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미 군용통신기 GRC9 의 수신부를 구해와서 항상 7Mhz 대를 틀어놓고 있섰다. 전리층 상태도 좋을 때고 부산에서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국들이 이웃집같이 수신이되고 있었다. 일본말을 아는 나에게는 국경이 없어지고 나도 이들의 일원이된것 같은 환상과 착각을 갖게 되였다. 교신 내용도 개국준비, Rx, Tx 준비 모두가 새롭고 재미있고 그리고 끝도 없다. Mic 는 어느회사제가 좋고 어느 상점이 값이 싸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어 환상에서 깨어나기가 일수였다. 재미나게 듣고 있는데 S9++신호가 덮지면 못들은부분이 아쉽고 때로는 신경질도 났다. 이러다 Ham 아지트에서 나오면 꿈에서 깨어나서 피난살이 현실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일본이 무척 부러웠고 한국에 태여났스니 별수없다고 단념도 햇섰다. 시간이 갈수록 Ham 에대한 집착 obsession 은 더 해가기만 했다. 절망에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너이들같이 할수있다. 서울로 돌아가면 내 집도 있고 내방도 있다. 나도 송신기 수신기 만들고 22

30 23 모르는 것은 학교 통신과 교수님들에게 물어보고 체신부에가서 무선국 허가 받고 나는 서울공대 통신과 에 ㅣ 꼭 들어 가야겠다 --나도 한다 두고 봐라--.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시작은 되였스나 치열한 전투는 그칠줄 모르고 있섰다. 이제는 Ham 보다는 서울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면서 휴전회담에 온 신경을 쓰게 되였다 서울공대 전기과에 입학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낼 때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통신공학과가 전기공학과에서 따로 독립된 학교는 서울대 공과대학이 유일하였다. 내가 갈 곳은 바로 여기다. 통신에 특별히 무게를 두고 강조해서 통신 만을 전공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곳으로 여기에는 원로 대가들이 모여있어서 수신기 전문교수 송신기 전문교수들이 틀림없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전기과로 가자고 했다. 전력 ( 電 力 )은 국가의 기간 산업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통신과 에는 꼭 들어가야겠는데 모집정원이 전기과의 반이어서 합격하기가 전기과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통신과로는 입학하고 나서 옮기면 된다. 그래서 대신동 천막교실에서 모두 서울공대 전기과로 가기로 하고 희망자를 더 모았다. 서울공대 전기과 45 명모집에 9 명이 전기과에 입학 하였다. 강기동, 강만희, 김동주, 김형실, 문희성, 이동우, 이동호, 이정복 의 8 명이다. 지창희도 합격이 되였는데 바로 미국 유학을 간결로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모두 9 명이 된다. 나와 지창희를 제외하고 모두가 오늘날 세계 최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의 주역 들이다. 드디어 2 년반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다. 우리나라는 이제 완전히 폐허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나라 라는 이름만 있었지, 세금을 걷고 예산을 집행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미국 군대의 보급물자는 포탄을 제외하고는 그 절반이 시중에 흘러나와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시켜 주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것도 미 군복을 물들인 것이고, 신고 있는 신발도 미군화였다. 많은 구제품이 정부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시장에서 유통되어 그 당시 많은 정부 관계자, 교회 목사와 간부들이 재정적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오늘날까지 이여저서 주위의 다른 나라보다 기독교신자가 많은 나라가 됐다. 폐허가 된 동네는 하꼬방(판자집)촌으로 재생되고 깡통(can 이깡이됨) 을 잘라 이어서 만든 평판은 지붕의 기와 대용의 건축 재료였다. 또한 식기로도 많이 사용하였다. 제일 큰 깡통은 음식 저장으로, 바가지 대용으로 집에서 이용되었고, 특히 거지들이 구걸용으로 큰 깡통을 들고 다녀서 깡통 찬다 는 단어도 여기서 생긴 것 같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잊어지지않는 추억의 하나다. 하루속히 통신과로 전과를하고 교수님들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불암산 밑 본교사가 개교한 첫날 등교했다. 급해저서 변소를 찾았다. 미군 야전 병원이였던 학교에는 모두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앉아야 할 자리에는 모두 배설물로 덮여 있는 것이었다. 종이도 없어서 신문, 잡지 등이 찢어져 널려 있었다. 물도 나오지가 않는다. 종이 조각을 하나 줏어서 나도 별수없이 서서 일을 마쳣다. 우리도 언젠가는 수세식 변기를 사용할 것인데, 주어진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철거해 버렸다 년에 잠간 귀국했슬 때 나는 화장실 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화장실 이란 얼굴 단장하는 곳으로 해석되어서, 남자 화장실은 연극배우나 사진을 찍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방으로 생각했다 23

31 3 장: 아마추어무선연맹 - KARL 의 창설 ㅡ 3.1 서울공과대학 통신공학과의 실상 나의 계획은 첫째 Priority 가 통신과로 전과해서 교수님들의 지도로 송수신기를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통신과내 아마추어무선-Ham 동지를 규합해서 무선국 허가를 받는 것이었다. 국민학교에서 경기중학에 입학하여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였다. 통신과 학생은 전국에서 통신을 전공하겠다고 모여든 곳이어서 당연히 무선통신-HAM 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일 것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입학을 하고 보니 나의 기대와는 반대로 통신과 학생의 상당수가 지방 출신으로 HAM 은 고사하고 통신하고도 거리가 먼 학생들이었다. 그 이유는 그 당시는 통신과는 인기가 없고 입학 Cut Line 이 낮아서 제 1 지망에서 밀려나서 가는 곳이 통신과 였다. 제일 인기가 좋은 화학공학과에서 밀려나면 통신과로 넘어 왔다고 들었다. 이들은 통신공학에는 관심이 없고 등록금만 내고 4 년후에 졸업장을 받아가는 학생들이 였다. 나에게 더 큰 실망은 통신과 교수들이었다 년 8 월 15 일 해방이 되어 경성제국대학( 京 城 帝 國 大 學 ) 에서 일본교수와 직원이 모두 귀국하자. 선생할 사람 이 없어서 문을 닫을 지경이되자 미 군정청에서는 하급 전문학교를 모두 통합해서 하나의 국립 서울대학 으로 새 출발을 시켰다. 많은 자격미달의 교원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서울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서 불만이 있던 모교수가 전기공학과의 일부를 떼어서 통신공학과를 차렸다. 그나마도 선생할 사람 이 없던 때라 통신하고는 거리가 먼 자기 추종자들로 선생 숫자를 억지로 채웠다고 나는 들었다. 이들이 내가 기대했던 한국의 통신공학 최고학부의 교수들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들 교수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전기공학과 하고도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3.2 통신과 교수들을 모함한 나쁜 학생 나는 Ham 국 개설 준비를 시작했다. Hallicrafter 사의 S-72 도 마련했다. Main Dial 밑에 Band Spread dial 이 별도로 달려있어서 SWL 에 편리한 구조다. 자작 수신기는 National 사의 HRO 를 본따서 Band SW 는 안 쓰고 Coil Box 전체를 바꾸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을지로 4 가 화원시장 속에 있는 철물상에다 Chassis 를 주문하고 매일 천계천을 돌면서 부품을 주서 모았다. 그 동안 모아 노았던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들이 많았다, 통신과로 옮기는 것을 전제로 우선 친분도 쌓을 겸 교수님들을 찾았다. 처음 찾은 교수에게 수신기 RF 증폭단 설계 관련 질문을 했는데 수신기 RF coil 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알지도 못한다. 완전 먹통이다. 아마 책으로만 공부해서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이론은 잘 알겠지 하고 좋게 해석하고 다음날 RF coil 몇 개를 들고 갔다. 바쁘다고 다음에 보자고 하며 나를 피했다. 얼마 후 다시 교수님을 찾을 일이 생겼다. 송신기와 안테나의 matching 이 문제다. 내 안테나는 long wire 로 한쪽 끝이 송신기까지 와 있었다. Feed line 이 필요 없다. 송신기에서 만들어진 전력을 안테나로 제대로 옮기려면 Impedance matching 이 중요하다. 통신과 교수에게 내 문제를 가지고 가서 설명했다. 내 문제를 이해 시키지도 못하였다. 전에 봤던 어떤 교수는 나를 보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통신과에서 통신의 기본이 되는 송신기와 안테나의 결합문제도 이해 못하는 교수님 들이었다. 그래도 알고 있는 교수는 한 명은 있겠지 하고 통신과 선생님 이라는 사람은 모조리 찾았스나 아무도 24

32 없다. 결과는 더 큰 실망으로 끝났다. 답답해도 나와 맞장구 칠 사람도 없섰다. 내가 부산에서 7mhz 대를 켜놓으면 일본 UC 국들이 항상 주고받던 상식수준의 내용 인데 ---. 내가 부산서부터 그리고 기대 했던 서울 공과대학 통신공학과는 이젠 완전히 허상 虛 像 이 되였다. 전기과에도 엉터리 교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논밭 팔아서 최고의 교육 받으라고 서울로 유학 보낸 부모나 서울로 유학온 학생들은 교수 모두가 돌팔이 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있스니 내가 도리어 흥분되고 열이 오르는것이다. 교실로 돌아와서 통신과와 전기과 학생들 앞에서 나의 실망을 터트렸다. 많은 과목을 전기과 와 통신과 학생들이 같이 수강을 하고 있섰다. 통신과 교수 100%가 엉터리 돌파리 라는 나의 공개 증언은 당장 통신과만 아니라 전기과 교수귀에 까지 들어갔다. 이런일이 오늘날 개인 학원에서 있섰다면 사기쳤다고 돈 내 노라고 소동이 일어났슬것이고 학원은 문을 닫았슬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들 교수들은 내가 송신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거짓이고 어디서 엉터리 질문을 갖고 와서 자기네를 모함 했다고 도리어 나를 나쁜학생으로 뒤집어 씌웠다. 더 억울한 것은 내가 자기네들 때문에 이렇게 흥분했는데 이들 학생들의 상당수가 내가 거짓말 한다고 믿는 것이었다. 나는 거짓말한 것도 없고 엉터리 질문을 한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통신과로 적을 옮길 수도 없게 되였고 또 그럴 이유도 없어졌다. 마즈막 으로 나는 나의 억울함을 통신과 주임 교수 이재곤씨에게 항의 할려고 기회를 기다렸스나 학교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외부에 다른 직장을 가지고 학교에는 교수라고 이름만 걸어놓고 월급만 챙겨가는 얌치였다. 이제 나에게는 서울공대교수는 모두 돌팔이 교수로 보였고 공과대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거액의 등록금을 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이런 대학은 왜 다녀야 되는지? 학교를 고만두고 장사를 생각한적이 있섰다. 공과대학에서 출판하는 불암산 이라는 월간지가 있어서 여기다가 5 구 super heterodyne 식 수신기를 한대 만들어서 자작기사를 올렸다. 혹시 Radio 를 만들어 장사하자는 동업자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내가 바라던 반응은 전무- zero 였고 이것도 혼자서 실망으로 끝났다. 여기서도 나를 나쁘게 본 통신과 교수중에 내가 일본책을 번역해서 자작 기사를 만들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나혼자힘으로는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상대로 싸울수는 없는 것이다. 나도 별수없이 등록만하고 졸업장을 기다리는 학생이 되고 있었다. 3.3 나와 체신부 한국 최초 HAM 통신사 면허증 피난살이 부산에서부터 계획한대로 서울로 올라온 후로는 아마추어무선을 허가해 달라고 반겨줄 사람은 없지만 틈만 나면 광화문에 있는 체신부를 찾았다. 나는 Ham 희망자가 많다고 찾아갈 때마다 졸랐다. 체신부 전파관리과에는 직원이 5 명 정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매우 친절 하였다. 개인국은 신원문제가 제일 큰 걸림돌 이지만 신원만 확실하면 무선국 허가를 못 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그럼 그렇지 나도 한다. 체신부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전파관리과 젊은 사무관에게 들려 혹시나 좋은 소식이 없나 물어 보곤 하였다. 이 젊은 사무관의 자리는 들어가는 문 바로 옆에 있었고,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들린 것이 25

33 아니므로 몇 마디 이야기하고는 곧 나오곤 하였다. 무선통신사 자격증을 취득하라고 했다. 전파관리법 책자도 빌려왔다. 그래서 나는 자격시험을 치기로 하였다. 일본이 7Mc 대는 2 급으로, CW (모르스 부호) 는 몰라도 A3 로 가능했는데 우리도 일본 같이 CW 는 몰라도 되었다. 나는 체신부에 사진하고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월 일이 시험일이라고 오라고 하여 갔다. 그런데 시험 시작 시간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시험을 쳤다. 매우 멋쩍었다. 그리고 시험장준비를 해주신분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시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는 입학 시험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인 1953 년 10 월 말경에 아마추어무선통신사 면허증 (아 년 10 월 6 일) 이 전달 됐다. 혼자 시험치고 혼자서 합격했다. 3.4 송신기 제작 나 혼자서 해보자 SWL (단파 방송 청취자)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일본의 SWL 이 있었는데, 서로 없는 것을 보내고 받곤 하면서 물물 교환에 재미를 붙였다. 내가 보내는 것은 주로 일본서는 값비싼 미제 진공관이었고, 일본으로부터 보내오는 3.5 것은 송신기 제작에 필요한 부품이었는데 3 주일이면 일본으로부터 물건이 도착을 하였다. 나는 1953 년 봄 부산에서부터 송신기 설계를 해두었던 것을 토대로, 종단에 807 로 설계를 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전원부의 전압이 그다지 높지 않아 천계천에서 구한 2E26 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변조는 plate 변조로 여러 번 진공관을 갈다가 6V6 pp 로 정착을 했다. 초단에 6SJ7 을 써서 pp 용 Input Trans 로 6V6 pp 를 Drive 했다. Plate 변조, PP input trans 는 부서진 일본군용 비행기통신기에서 뜯어낸 것이었다. 6SJ7 은 5 극관이어서 고출력 Xtal mic.로 충분한 전압 증폭이 되었다. 나는 Dip meter 를 사용하지 않고 Neon 관을 사용하였다. 안테나 입력에 매단 Neon 관이 mic 에 아 아 할 때마다 더 밝게 켜졌다. 조절이 잘못되면 neon 관이 더 어두워질 때도 있다. 지금은 Plate 출력이 제대로 변조되고 있었다. 동생보고 아 아 하고 있으라고 해놓고 나는 Radio 를 가지고 송신기에서 멀리 떨어진 집구석에 가서 RF gain 을 푹 죽이고 들어보았다. 분명히 아 아 하는 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성공이다. 추운 봄날이었다고 생각된다. 추워서 몸을 움츠리고 찬바람이 들어오는데, 안테나 선 때문에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하고 아 아 하던 기억이 난다. 고생했던 안테나 matching 도 ㅠ Network 로해서 잘 되는 것 같았다. 송/수신 스위치, 마이크 등을 재정리하고 전파가 정말 나가는지 초조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7Mc 대를 들어보니 여전히 UC (무허가 무선국) 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송신기의 전원 스위치를 넣었다. CQ, CQ 고찌라와(여기는) HBC 를 몇 번 반복하고 standby 하였다. 그런데, HBC, HBC 고찌라와 "라고 불러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랍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였으나. 여러해를 두고 밤낮 듣고 있던 HAM 교신이라 곧 응답을 하고 RS59 을 보냈다. 잘 들렸기에 좋은 Report 를 보내 준 것이다. "TX 는 2E26 10W"라고 하고, RX 는 GRC-9 이라고 했다. 받은 RS 도 59 이었다. 얼떨결에 TX-RX 교대하는 안테나 스위치를 잘못 조작하여 2 번째 QSO 는 중간에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하여튼 대성공이었다. 전파가 서울서 일본까지 날아간 것이다. 상대도 UC 국이어서 정확한 QTH 확인은 되지 26

34 않았으나, 일본 남쪽 Kyushu 였을 것이다. 나의 Call sign HBC 라고 한 것이 한국방송 이라는 의미에서 만든 것이었다. 조작이 미숙한데다 흥분이 되어서 송신/수신 standby switch 가 잘못되었다. 좀더 Automatic 으로 고쳐야겠다. 임시로 급한 마음에 Ant. switch 는 수동으로 하고 있었다. 안테나 선 때문에 창문을 닫지 못하던 것도 고쳤다. 그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다시 on the air 를 하였다. HBC 가 Hokkaido 냐? 고 물어서 그렇다 고 했다, UC 국만 상대를 하였다. 2E26 의 TX 와 GRC9 의 RX 는 이들 일본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부터는 나의 정체가 드러날 것도 같아, TX 는 807 이고, RX 는 보통 수퍼헤드 라디오에 7Mc converter 를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외국하고 이렇게 쉽게 통화가 되는 것이 나 자신 매우 신기하였다. 일부러 밖에 나가 안테나를 쳐다보았으나, 별것 아닌 구리전선이 들어간 빨래 줄인데, 여기서 전파가 일본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발사한 전파가 불법이어서 남에게는 이 기적과 같은 QSO 를 말할 수가 없었지만, 혼자서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이때의 즐거움은 글로 표현할수가없다. 며칠을 계속 on air(전파발사) 를 하다가 보니까, 몇 국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이라고는 못하고, 계속 Hokkaido(북해도)라고 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즐거움은 두려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만일 체신부가 알게되면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 이된다. 3.5 치안국 특수정보과 의 비밀활동 첫 on air 에서의 QSO 감격도 이젠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의 옆 문은 모두 도장을 찍은 딱지로 봉함이 되어 있다. 첫 마디로 경찰서 형사 같기도 하였지만, 치안국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우선 집을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SHACK(?), 책상, 전기 물건 모아 놓은 것 등 모두를 보고는 나를 보고 같이 가자고 하였다. 이때 나는 우리 집 가장으로 부모들은 경북 고모에서 조고마한 사과 과수원의 자작농을 하고 있슬때다. 나는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갔다. 그 당시 내무부 치안국이 을지로 입구에 있었는데, 특수정보과는 그 후에 중앙정보부로 됐고 중앙분실은 이 조직에서 대 이북업무 (빨갱이 간첩잡는곳) 담당부서였다. 거기에서 나는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내가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제일 억울하였다. 이들은 나를 거물간첩의 일원으로 보고 앞으로 더 큰 협력을 위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대해주었다. 집에서는 내가 등산으로 하루 이틀 집을 자주 비우기 때문에 집에 없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좋은 일도 아니라서 집 식구 들에게는 아무 아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까지도 집안식구들은 내가 잡혀간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결국 나의 모든 혐의가 풀렸다. 여기에는 Ham 이 뭐라는 것을 잘 아는 미 고문관 (CIA?) 의 도움이 한 목 했다고 들었다. 그들에게 아마추어무선 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식시켜 주었다. 이젠 반대로 자기네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대 이북 관계에서 많은 공작원이 침투되어 있고 휴전이 되었다고 해도 도리어 스파이 전쟁은 더 강화가 되었다고 했다. 많은 정보와 자금이 일본을 통해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파로 이북과 교신을 하고 있는데 이런 통신 분야는 손댈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스파이 활동으로 나라의 존망까지도 좌우되는 심각한 사례가 지난 2 차 대전 때 있었다고 도리어 내가 그 중요성의 설명을 들었다. 물론 전파 감시는 체신부 소관이다... 우리는 같이 일을 하기로 하였다. 간첩을 잡기 위해서는 나도 전파를 내고 교신을 해야 정체나 위치를 알아낼 수 27

35 있다고 했더니 필요한 것은 모두 OK 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주파수, 호출번호, 출력 장비 무제한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선국 허가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가라기보다는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왕분실 에서 운영하는 국가의 안보를 위한 HAM(?) 무선국이 된 것이다. 한 달에 한번씩 보고를 했다. 생각나면 시간을 내서 간첩 잡으려고 전 band 를 뒤져도 보았다. 바로 옆집에서 나오는 S++ 신호가 아니면 그 많은 신호를 구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눈에 뜨이게는 안 했을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어딜 가나 집밖에 안테나 줄이 없나 살피면서 다녔다. 정체불명의 신호는 얼마든지 있어서 보고서 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가 잡힌 단서는 UC(무허가 )무선 국을 운용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무선통신장비 부품 등이 우편으로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에 와서 무선국이 있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국내로 들어오는 우편물은 전부 정보계통에서 검열을 하고 있어서 내가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이제는 아마추어무선에 관한 모든 서신이 나의 손을 거쳐 가게 되였다. 나도 검열관이다. 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230 번지의 흐리아 (HL1AA 무선국 호출부호)로 오는 QSL(교신 확인증) 이 검열용 우편물속에 끼어 있었다. 이 QSL Card 를 들고 이 집을 찾아 갔다. 추운 겨울날이 였다. 안테나만 쳐다보면서 찾았지만, 안테나는 보이지 않고 조그마한 옛날 초가집이 있었다. 할머니가 나오셨다. 주소는 맞는데 무선국은 없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실망하고 돌아섰다. 그 후에 HL1AA 정혜선씨를 일본 Ham 을 통해서 알게됬는데, 광주 육군 통신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군용 통신기 BC-191 로 HAM BAND 에서 CW 로 전파를 냈다는 것이다. VFO 가 불안정하여 신호음이 삐욱 삐욱 한 것이 특징이었다고 JA(일본) HAM 들의 평을 후일에 들은 기억이 난다. 외국으로부터 오는 모든 QSL card 비슷한 우편물은 검열 후 조동인, 이동호, 김동주, 정혜선 등, 내가 아는 사람 것은 따로 빼내서 직접 전달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1958 년 여름까지 Ham 과 관련해서 전파발사로 경찰이나 정보당국에 걸려든 사건은 한 건도 없섰다. 비공식이지만 이 분야는 그 당시 나의 관할이었다. 그 후 정혜선씨는 제대하고 서울에 있는 동국무선고등학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여기 사진은 정혜선씨가 HL1AA -(UC) 로 교신해서 받은 QSL Card 들 앞에서 나의 Rx 와 박대선씨 소유의 Tx 을 놓고 1956 년에 내가 찍은 사진이다. 3.6 HL1TA 내 호출부호 일본 HAM 에게 개인국이 허가되었고, 수백 국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UC 국으로 7Mc 에서 나간 지도 오래되었고, 나도 남들 같이 CQ (Hello 와 같은 의미)를 내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젠 나는 'HL1TA'라는 호출부호로 나가서 JA (일본무선국)들과도 정식으로 QSO(교신) 를 하기로 하였다. QSL(교신 확인 카드) 도 준비하고, 사서함도 있어야 하겠다. 주소는 복잡하지만, UC 같이 보이지 않으려고 QSL 에 집주소를 넣기로 하였다. 다른 나라들은 QSL 을 연맹이나 클럽이 취급해 주고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서울우체국에 가서 사서함도 샀다. 현재 KARL 이 사용하고 있는 서울 중앙우체국 사서함 162 가 이때 내가 사서 쓰던 것이다. (KARL 을 만들고 KARL 로 28

36 넘겨주었다) 1954 년 여름부터 나는 HL1TA 라는 Call Sign 으로 전파를 내기로 했다. 여기에서 TA 는 Temporary 에서 온 것으로 임시국 이라고 했다. 주파수는 BC-1335 FT243 Xtal 7,050Khz 로 고정했다. VFO 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QRM(혼신)을 피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다. CQ 를 내면 많은 국이 몰려드는데, 나의 RX(수신기)는 선택도가 나빠서 ±20kc 내에 있는 무선국들은 모두 들렸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신호만을 골라서 회답하게 되니까, 도리어 선택도가 좋은 RX 로 Dial 을 돌려서 수신하는 것보다 편리하였다. QSL 을 발행하니까, JA(일본국)들이 의문이 생겼다. 진짜냐? 가짜냐? 논란이 일어났다. 또한 공식으로는 한국은 교신 금지 국으로 되어 있었다. 7Mc 대에서 A3 로 나오니까, 모두가 일본 말이다. 내가 영어로 해도 일본말로 대답을 한다. 내가 일본말도 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은 영어가 서툴러서 우선 일본말로 나온다, 7Mc 에서 나오는 2 급 JA HAM 들에게는 유일한 Oversea STN 으로 대인기였다. Ragchew(잡담)는 거의 없었다. 한국 Station 으로 알려진 이상 우리말로 QSO 도 하고 싶었다. 그 많은 HAM 국 중에 한국은 하나도 없으니, 서글프기도 하고 국력(?)의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한 때는 3 element Yagi beam Ant. 도 구상해 보았다. 이젠 나도 남과 같이 전 세계로 정식으로 CQ 를 내보내고 싶었다. 욕심이란 한이 없는 것이다. 혹시 HL1TA 를 체신부에서 알고, 개인국을 안 주겠다면 뭐라고 해명을 해야 되나, 걱정이 되였다. 그러나 나는 나라의 보안의 일원으로 간첩 잡는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체신부가 할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체신부가 나에게 감사장을 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HL1TA Tx 는 지이산 이동국용 소형 송신기를 만들기 위해서 1955 년에가서 해체했다. HL1TA 는 이때 사실상 역사적인 사명(?)을 다하고 끝났다.. HL1TA QSL Card 와 교신한 일본 국 들 29

37 3.7 육군 제 3 범죄 수사대에 잡히다 내가 특수정보과 중앙불실에 연행돠고 얼마 안됬슬때다. 청계천에서 미군 통신기 한대를 샀다. 새것으로 찦차에 싣고 다니는 신형 통신기였다. 대개 이런 것은 불법으로 훔쳐서 나오기 때문에 나오자마자 해체하여 부품으로 팔고 껍데기는 부셔버리고 있었다. 때때로 미군 MP 와 한국 헌병의 합동 조사도 있었다. 이 날은 보슬비가 와서 우비를 입고 있었다. 상당히 무거워서 단거리라도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는 사람이 많지 않아 타고 나서 무전기를 우비로 가리고 있었다. 나는 버스를 내려서 집까지 비를 맞으면서 우비로 무전기를 싸서 들고 몇 번을 쉬면서 집까지 왔다. 나는 힘이 들어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는데,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온 것이다. 무엇인가 보자는 것이다. 집에 들어와서 다른 무선 장치와 다른 잡동사니도 보았다. 그는 큰 간첩을 잡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군복은 입었는데 계급장은 보지를 못하였다. 그 때가 저녁때였는데 그는 나를 보고 같이 가자는 것이다. 잡혀간 곳이 남대문에 있는 서울시경찰국 지하실 육군 제 3 범죄수사대 라는 조고만 간판이 붙어있는 곳이였다. ㅇㅇㅇ대위가 나와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숨기거나 거짓말을 할 것도 없었다. 단파무선국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두운 창고방 같은 지하실 한쪽 구석에 가처 있섰다. 사람 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된 모양이다. 나는 시계가 없섰다. 매우 바쁜 일이 생겼는지 내가있는 창고방문이 몇 번 열렸다 다첬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심문은 안하고 나를 딴 곳으로 옮기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 건수라 상부 부서로 보내려는 것이다. 큰일 났다. 나는 매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명령을 내린 날이였다. 그러니까 이날이 1953 년 6 월 18 일이였다.,. 나는 창고 밖으로 끌려 나왔다. ㅇㅇㅇ대위에게 전화를 한번 쓰자고 부탁을 하였으나 전화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책상 위에 있는 전화를 가리키니까, 이것은 경비 전화야! 라고 하는 것이다. 경비 전화는 경찰과 정보계통에만 특별히 설치되어 있는 특수전화로 일반 전화와는 별개였다. 나는 경비 전화가 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경비전화면 더 좋다고 했더니, 네가 뭔데 하는 눈치로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내가 전화 수화기를 드니까 서울시 경찰국 교환이 나왔다. 그냥 치안국 이라고 했다. 치안국은 서울시 경찰국의 직속 상부 관청인 것이다. 곧 치안국 교환과 연결이 되어, 특수정보과는 빼고 중앙분실 이라고 말했더니, 귀에 익은 김경위가 나왔다. 나는 중앙분실에서 경비전화를 쓰는 것을 많이 듣고 봐서 내가 경비전화를 쓰는데 익숙하다는 인상을 ㅇㅇㅇ대위에게 준 것 같다. ㅇㅇㅇ대위의 얼굴 인상이 달라지는 것을 나는 옆에서 느낄수가 있섰다. 김경위는 우리 집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 분이었다. 내가 강기동이라고 말하고 방 주임을 바꿔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방 주임은 대개 오후에는 자리에 없으나 마침 아침이라 그는 자리에 있었다. 방필주 주임은 왜 그래? 라고 물어 왔다. 내가 잡혀왔다고 했더니,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시경지하실이라고 했다. ㅇㅇㅇ대위는 이상하다고 듣고 있었다. 방 주임은 누가 거기 있으면 전화를 바꿔달라. 고 하였다... 방 주임과 ㅇㅇㅇ대위가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전화가 끝났다. 나는 무척 불안했다. 약 1 시간이 지나서 ㅇㅇㅇ대위가 나를 부르더니 조사실에서 다른 방으로 옮겼다. 아마도 ㅇㅇㅇ대위의 방인 것 같았다. 그는 서류를 만들고 있었는데 나는 뭔지는 모르지만, 이름을 적으라고 하였다. 그 때 방 주임이 도착 하였다. 한참 동안이나 밖에서 뭔가를 이야기한 후 방 주임이 들어와서는 나를 보고 가자 고 하였다. ㅇㅇㅇ대위는 보이지 않고 방 주임과 나는 지하실에서 밖으로 나왔다. 방 주임은 나를 보고 집에 돌아가! 라고 한마디 하고는 자기 갈대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30

38 치안국에서 강기동의 신변을 인도받은 것이었다. 후에 그 때 잘 못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는 말을 들었다. 즉 끌려가서 간첩으로 고문 받는다는 뜻이었다. 군 첩보기관에 잡힌 간첩은 고문하다 죽으면 그냥 묻어버린다고 했다. 생각만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였다. 천만 다행이다. 경비전화 덕분이다. 하여튼 큰 간첩도 빼내줄 수 있는 막강한 빽이 있다는 것을 나는 실감하였다.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나에게 말해준 사람도 없어서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왕분실의 실체를 모르고 있섰다. 배도 고팠지만 집에 와서 잠부터 잤다 3.8 내가 실패한 HL2AA 배명승 이로 가다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체신부에 들렸더니 개인은 어렵지만 학교 명의의 실험무선국은 허가가 가능할거라는 Hint 를 얻었다, 이젠 나도 큰소리치고 CQ 를 낼 수 있게 됐구나 하고 새로운 희만이 솟아났다. 치안국 특수정보과 관련 Project 는 위장 Ham 국인것이다. 내용이 비밀이긴 하지만 혹시 체신부에서 알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섰다. 그래서 HL1TA 는 FT-243 Xtal 로 7050Khz 에서만 전파를 냈고있섰다. 처음에는 신이 났스나 UC 로 첫 전파를 낼 때와 같은 흥분은 없었다. JA 에서는 큰 인기였지만 정식으로 인정된 Ham 국은 아닌것이다. 우선 정혜선씨에게 가서 이 소식을 알렸다. 같이 학교 무선국을 신청하자고 했다. 실험무선국 허가신청서류를 만드는데 정혜선씨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의 공과대학에는 아주 높은 굴뚝이 있다 여기에 3 Element Yogi Antenna 를 구상해 보았다. 나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BC342 수신기도 마련했다. 송신기도 Amateur Band 를 전부를 Cover 하는 것을 만들어야겠다. 별안간에 할 일이 많아진 것이다. 이제부터는 가능한 한 모든 준비작업을 학교에서 해야 된다. 학교 내에 무선국을 개설할 방을 마련하는 것이 급하다. 이젠 통신과 교수들 에게도 봐라 하고 내 실력으로 전기과에서 무선국을 개설하는 거다. 전기과 과주임 우형주 교수를 무선국 HL2AA Call sign 까지 넣어서 신청서류를 만들어 찾아갔다. 학생활동이 전무 상태이고 전기과의 위상도 높이고 공과대학 대외 홍보도 된다고 내용을 설명했다. 과에서의 지원은 대정부 행정과 비어있는 방 하나면 족하다고 했다. 나는 대환영으로 적극 도와주겠다는 대답이 올 줄 알았는데 정반대의 NO 였다. 이것은 통신과 영역이라서 안 된다는 것이다. 나의 희망이 살아지는 순간이었다. 전기과에서도 나를 나쁜 학생으로 보고있슬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이상 더 설득할 여지가 없었다. 통신과 에서는 이미 나는 나뿐 학생으로 찍혀있는 상황에서 내가 직접 통신과를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김세대와 기타 몇 몇 같은 반 통신과 학생들을 설득도 해 보았스나 Ham 이 무언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도리어 내가 이들을 이용 할려고 한다고 오해만 더 샀다. Ham 에 관심을 보인 몇몇 통신과 친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부산에서부터 나의 HAM 동업자인 배명승이가 집에 놀러 왔다. 이젠 공대는 싹이 노라니 속히 문리대에서 허가를 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서류와 장비들을 명승이에게 넘겨 주었다. 그때 늘씬한 흑색 미제 Dodge 세단 차에 나의 필동집에서 가회동 명승이네 집까지 무거운 통신기들을 실어 보내던 장면이 어제같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명승이는 일년을 월반해서 서울물리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권영대 과주임에게서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실험무선국 HL2AA 허가가 나왔다. 드디어 명승이가 해냈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 로 Ham Band 에서 CQ 를 낼수있는 HAM 국(?) HL2AA 가 탄생한 것이다. 31

39 바로 이어서 정혜선 선생 지도로 동국무선고의 실험국이 둘이나 생겨났다. 일년쯤 지나서 다른 대학에서도 무선 실험국이 나오게 되였다.나와 조동인 등 Ham 열성분자들이 제일 많이 있는 서울공대는 모두가 전기과 에 적을 두고 있었다. 무선 실험국은 자기네 영역이라고 통신과가 버티고 있어서 전기과 학생들에 의한 한국최초 Amateur Band 에서 운영한 실험무선국 서울공과대학 실험국은 불가능했다. 그 당시의 서울공대 통신과는 나에게는 동국무선고 보다도 못한곳 으로 보였다. 동국무선고에서는 선생 학생 모두 무선통신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고 있었다. 몇 년후 거의 꼴찌-10 번째로 서울공대 통신과 HL2AJ 가 나왔다. 아마 김세대가 주동이 된 것 같다. Ham 은 내가 통신과의 김세대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김세대를 설득해서 통신과에서 학교 실험국을 시도한했다가 오해만 샀다. 얼마 안가서 통신과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전자과가 생겼다. 3.9 한국 아마추어 무선 연맹 KARL 의창립 나는 "건방지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체신부와의 접촉은 문간에 앉아 있는 사무관 외에는 없었다. 이 사무관은 나를 나쁘게 이야기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어서 체신부에 들렸다. 이번에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일어나서 문 쪽으로 와서는 나와 젊은 사무관 앞에서 한마디 하였다. 처음에는 칭찬 비슷하게 말을 꺼내더니, 나라 정책은 어느 개인이 하라, 말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의를 들었다. 이사건(?)이 KARL 창설의 직접 동기였다. 이젠 개인국 허가는 나 혼자로서는 한계에 도달했다. 체신부와 동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할 수 있어야겠다.. 우선 HAM 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야 하겠고,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도 ARRL 이라는 단체가 있고 일본도 JARL 이 있다. 그러나 내가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혜선 씨를 빼고는 같은 전기과의 이동호 김동주 그리고 부산 피난시절 동업자가 된 배명승, 박대선 정도다. 다음은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고등학교 학생들인 것이다. 그것도 열손가락으로 세면 몇이 남는다. 몇몇 SWL 에게 단체의 필요성을 강조해 보았으나 단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없었고 도리어 내가 단체장이 될려고한다는 오해를 샀다. 또 다른 큰 이유는 먹고 사는 것도 힘든 때여서 관심이 있서도 돈 내라고 할 가봐 무서워서 모두가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다. 나는 정혜선씨와 HAM 단체 만드는 것을 상의하였다. 한번 해보자는 거다. 긍정적인 대답을 한 유일한 분이였다. 정혜선씨는 HAM QSO 의 경험이 있는 사회인으로 친구가 된 분이었다. 밤이면 조그마한 장난감 송신기로 CW 를 배우기도 했다. 또 생전 처음 통신형 단파수신기 Hallicrafters 사의 SX28 을 중림동 정혜선씨 집에서 구경을 하였다. 녹이 쓰러 폐품이 된 것을 완전 해체해서 정성 것 녹을 닦고 재 조립을 하고 있섰다. 대단한 정성이다 나는 밖에서 알려진 분들의 이름만 빌리고 일은 우리가 하는 조직을 생각하였다. 사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방식밖에 없었다. 우리가 접촉할수 있는 인사들을 알아보았다. 일제시대에 Ham 활동을한 한진동씨와 황태영씨를 찾아냈다. 한진동씨는 외무부에 계셨고 황태영씨는 종로 1 가 화신백화점 32

40 마즌편에있는 Korcad 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계셨다. 큰 희망을 갖고 찾아 갔스나 나의 접근이 좋지 않아서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금전상의 부담은 드리지 않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든 일은 우리가 할 테니 이름만 빌려달라고 한 것이 나쁜 협잡꾼으로 보였다. 내가 혼자 찾아간 것도 잘못이었다. 낮 시간이 나에게는 자유로웠고 누구를 데리고 다니면 서로가 교통비 찻값 점심 등의 부담이 있어서 였다. 그 당시 한국에서 약전(전기통신) 분야 라면 방송국 밖에 없었는데, 마침 기독교 방송국이 생겨서 나는 종로 2 가에있는 HLKY 기독교 방송국을 찾아갔다. 내가 혼자 갔는지 정혜선씨와 같이 갔는지 기역이 확실하지 않다. 기술책임자인 이덕빈 씨를 만났다. 여기서 나는 Ham 을 설명하고 솔직히 연맹조직을 도와달라고 했다. 이름만 빌려달라고는 안 했다. 도와 주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이것이 KARL 의 시작이다. 이덕빈 씨의 소개로 KEMCO 의 김규한 사장, 공보실의 이인관 기감을 정혜선씨와 같이 찾아가서 만났다. 취지를 설명 드렸더니 모두들 도와 주겠다고 하셨다. 이인관 기감은 우리 약전계의 원로로 우리나라 방속국을 총괄하는 공보실에서 기술계통으로 제일 높으신 분이다. 이인관 이덕빈씨 모두가 김규한사장은 단체조직도 잘 아신다고 하셨다. 저녁때 HLKY 의 이덕빈씨와 종로 2 가 기독교회관 지하에 있는 시온 다방에서 자주 맞나면서 단체창설의 윤곽이 급속도로 잡혀갔다. 단체 발기인들이 총회를 소집해서 단체이름, 정관을 채택하고 임원들을 선출해서 단체를 결성한다. 우리의 경우는 관련 주무관청 체신부에서 사단법인 인가를 얻어 등록을 하면 단체가 정식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나의 필동집이 단체 창립 사무실이 되였다. 단체이름은 한국 아마츄어 무선연맹 영어로 Korean Amateur Radio League-KARL, 정관은 친분 있는 JA ham 에 부탁해서 JARL 정관을 얻어와서 이것을 참고로 우리의 정관을 만들었다. 이인관 기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총회 때 김규한사장께서 사회를 봐주시도록 했다. 임원은 이사장이 선임하는 걸로 했다. 정혜선씨의 주선으로 창립총회 : 1955 년 4 월 20 일--장소: 서울시 중구 봉래동 1-83 동국무선고 로 확정됐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이 총회에 참석해서 숫자만이라도 채워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돈 달라는 회의는 아니라고 강조도 했다. 체신부에서 Ham 자격시험 칠 때 희망자가 많다고 했는데 시험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요번에도 Ham 지망생이 많다고 했는데 ---. 총회 날이 가까워 오니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창립총회 날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동국무선고 강당에 와보니 정혜선씨는 이미 몇 안 되는 자리였지만 반은 동국무선고 학생들을 배치해 놓고 있섰다. 약간 마음이 갈아 앉았다. 나는 밖에 나가서 오시는 손님을 안내하기로 했다. 외부서 모셔온 VIP 세분은 정시에 도착하셨다. 와줄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새로 발견된 사진에서 확인된 서울공대 총회 참석자는 나외에는 3 명 뿐이였다. 총회는 사회를 맡으신 김규한 사장께서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어 HLKY 이덕빈씨가 투표수 점검 등의 진행을 담당해주셨다. 준비해온 단체이름, 정관, 이사장 선출 등 모두 순조로 히 진행되고 이인관 기감의 이사장 취임사로 총회를 끝냈다. 외부에서 모셔온 분들은 곧바로 돌아가시고 남어지 참석자들은 나의 필동집으로 장소를 옮겨서 어머니의 수고로 국수를 대접했다'. 드디어 우리의 무선연맹이 생겼다. 외부에서 모셔온 분들에게 체신부 교섭을 부탁 할수 있게 됬다. 나의 on air 꿈이 머지않아 현실화 되어가고 있는것이다 33

41 사진사 친구 김동주가 총회에 오지 않아서 사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HL2AA 배명승 om 이찍은 위의 사진 두 장이 56 년이 지나서 발견 됐다. 여기서 보면 외부 VIP 세분, 서울공대 4 명, 서울문리대 1 명, 동국무선 선생과 그의 동료 3 명, 미확인 3 명, 남어지는 동국무선고 학생 들이다. 모두 33 명으로 총회를 치렸다. 오른쪽 사진에서 맨 윗줄 오른쪽에 앉으신 분이 KARL 초대 이사장 이인관기감, 그 왼쪽이 강기동, 기둥에 가려저 있는 분이 정혜선 동국무선고 선생님, 당상에 서 계신분이 총회 사회를 맡으신 김규한사장, 앞 을보고 투표수 확인 하고 있는 분이 HLKY 이덕빈씨 이다. 왼쪽 사진은 맨 앞이 HLKY 이덕빈씨, 그 뒤에 고교생이 아닌 분으로 왼쪽 부터 김형실, 서정욱, 김세대 모두 서울공대 동기 나의친구들이다. **** 이글을 쓰면서 사진을 다시보니 동국무선고 학생들이 없었다면 출석자 미달로 이때 총회를 치루지 못했을겁니다. KARL 창립은 사실상 정혜선 om 의 작품 입니다.** *** HL1FO 이양수 om 은 이날 일요일 청소 당번이라서 학교에 와 보니 상급생 들이 이미 강당 회의장에 앉아 있었다고 그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인관 KARL 초대 이사장 (오른편-당시 공보실 기감) 과 김규한 KARL 이사 (왼편-당시 KEMCO 사장) 이분들의 도움 없시는 연맹창설은 불가능 했습니다 년에 찍은 사진 입니다 3.10 KARL 기관지 발행 김규한 金 圭 漢 이인관 李 寅 觀 회원이 있어서 단체가 생기는것이 정상이지만 나는 "체신부 교섭" 때문에 단체를 먼저 만드렀다. 회원이 필요한데 회원은 적어도 아마츄어무선(Ham) 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앞으로 회원 될 사람 교육부터 해야겠다. 교육 받았다고 모두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연맹 기관지 발행이다. 서울시 서대문구 중림동 230 에있는 4m x 3m 크기의 정혜선씨방에 KARL 지 출판사가 채려젔다. 정혜선씨 자신이 KARL 이 된것이다. 나는 거의 매일 여기로 34

42 출근하게 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일때는 필동 우리집을 이용했고 이덕빈씨가 참석해야할 모임은 저녁때 종로 2 가 시온다방 을 이용했다. KARL 총회때는 와 주지도 않던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 했다. 특히 조동인 om 은 열심히 연맹일을 도와주었다, 한국 SWL 조직을 만드렀다. HL_SWL 번호는 우리가 정해서 할당할 수가 있는것이다. SWL 4 번은 희망자가 없어서 나에게로 배당이되였다. 첫 #를 1001 에서 시작 하고보니 내가 천사( 天 使 ) 가 된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써본일은 없다. 책을 만드러야 하는데 원고가 없다. 보는 사람마다 원고 구걸 하며 다녔으나 책 한권 분량이 모이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원고를 만들수밖에 없다. 인쇠장비 (가리방-일본말)가 좁은 방으로 들어왔다. 책 만드는 경비는 정혜선씨 주머니에서 나왔다. 정혜선씨의 글씨체는 웬만한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였다. 긁고 고치고 다시긁고 7 개월 만에 창간호가 나왔다. 연맹주소는 박대선 이네 집주소를 빌렸다. 아래 편집후기에서 보듯이 이때까지도 체신부에서 KARL 사단법인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섰다. 35

43 3.11 HL9AA/P-공과대학 산악반 이동무선국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문희성이가 학생회 운영위원장이 되고, 내가 공작부장이 되었다. 서울공대 산악반은 워낙 관록이 있어서 많은 활동을 해왔다. 같은 전기과의 김형실이가 산악반 반장이 되고, 문희성, 이동호, 김동주, 강기동 모두가 산악반의 활발한 멤버였다. 우리는 주말이면 서울 주변의 산에 올랐고, 겨울에는 동기 등반, 또 스키 타러 대관령에도 갔었다. 한국스키연맹 제 1 회 대회에 정명식 대장 인솔하에 선수로 나간 기억이 난다. 잘 타지도 못했지만 경사가 급한 직 활강 코스에서 미군 군화에 억지로 맞춘 binding 이 자꾸 빠져서 많이 넘어지고 그래도 기권도 할 수 없어 꼴지를 했다. 여름에는 태백산을 타고, 평창, 정선을 거쳐 강릉으로 넘어가서 친구 최돈웅이네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몇 년 후에 돈웅이의 동생인 돈첩 이도 우리 대원 이됬다. 울릉도, 독도 원정도 갔었다. 우리는 공대 산악반 행사로 지이산 등반을 하기로 하고 지이산 등반대에 특별 이동무선국 운영을 계획하였다. 정식으로 CQ (hello 와 갈은 ham 용어)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전기과나 통신과 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수한 학생 자치활동이다. 직접 황영모 학장을 찾아갔다. 학생활동의 일환으로 학교 선전도 되고 좋다고 승낙하셨다. 공과대학 학장 황영모 명의로 임시 이동무선국 허가가 나왔다. HAM BAND 에서 운영을 허가하는 실험극이었다. 그런데 Call Sign 이 HLAA9 으로 되어있는 거다. 이 호출부호로는 HAM Band 에서 다른 무선국하고 교신을 할수없다. 체신부의 직원이 잘 모르고 한 것 같다. 알고 했다면 체신부에 교정 부탁 할려고 학장실을 찾았다. 학장은 안 계시고 비서 아가씨가 있섰다. 실험국 허가 신청서 작성으로 알게된 사이라서 우리의 이름도 그 쓰는 방식이 나라에 따라 다르듯이 이 호출부호도 그렇다고 내용을 설명했더니 외국 이름을 취급해본 학장 비서다운 희한한 해답이 나왔다. 동양인 교신은 HLAA9 으로 하고 서양인 교신은 HL9AA 로 하면 될 것 아니냐 였다??? 기다렸다가 학장이 들어와서 내용 이야기를 했더니 HL9AA 로 쓰라는 것이다. 체신부 하급직원이 몰랐슬수도 있고 단기간의 임시 허가인데 공문 내고 별것도 아닌 교정부탁 할 필요가 있겠냐? 통신하는 사람이 우리공대 등산대원이면 되는것이지 이씨냐 김씨냐가 무슨 상관 있겠냐 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마음 놓고 HL9AA 로 전파를 내기로 했다 지이산 전투경찰대 대장(가운데)과 같이 HL9AA BASE CAMP 36

44 얼마 전만해도 이산은 빨치산 (무장한 골수 빨갱이 돌격대) 의 소굴이었다. 우리의 등반은 정부가 지이산에 치안이 확보된 것을 홍보하는 좋은 기회도 되는 것이다. 지리산 지구 경찰에게 협조공문도 보냈다. 우리가 지이산 Base Camp 에 도착했을 때, 지이산지구 전투경찰대 대장이 우리를 마중 나와주었다. 송수신기 장비는 공대 3 층에 있던 공작부실에서 만들었고, 안테나는 14Mc 대 전용 2 element Yagi Antenna 를 설계해서 조립식으로 학교 지하에 있는 기계공작실에 부탁을 했다. 현지에서 Yagi 안테나 main pole 연결 장치가 잘못돼서 Yagi Antenna 는 실패작이 됐고 Longwire 안테나로 Base Camp 에서 14Mc 출력 8W CW/phone 으로 CQ 를냈다. HL9AA/P Call Sign 으로 상당히 많은 외국의 HAM 국과 교신을 하였다. 그 당시 JA 국 들에게 "노란 목소리의 YL 국 으로 유명했던 LU4DMG 도 QSO LIST 에 끼어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HL9AA/P 의 QSL CARD 를 만들어서 교신상대에게 보냈다. 지이산 등반계획은 KARL 창립 전에 시작 했스나 실제등반은 거의 일년후인 1956 년 1 월이었다 정식으로 KARL QSL Bureau 서울 중앙국 사서함 162 로 QSL card 를 받았다. 내가 만든 KARL 이 이제는 국제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받은 SWL Card 는 우리나라에도 Ham 의 기초가 전국으로 생긴것이다. 어느 DX 국의 Card 보다 귀중한 의미있는 것이 였다. 서울의 이상열 OM 의 SWL Card 부산의 조병주 OM ( HM5AP) 의 SWL Card HL9AA QSL Card 와 교신한 Ham 국들 37

45 HL9AA 와 교신한 Ham 국들 3.12 아마추어무선과 나의 주위 사람들 제일 먼저 꼽아야 할 사람이 내가 경남 김해에서 피난 생활을 할때 일꾼으로 있던 판돌 이다. 판돌 이는 내게 QST 지를 구해다 준 것이다. 그 다음이 역시 피난 시절 부산 천막교사에서 만난 경기고 2 년 후배인 배명승, 박대선 이다. 부산에서 박대선이네 집이 우리 예비 HAM 아지트였다. KARL 은 만드렀는데 시내 주소가 없서서 명동에있는 박대선 이네집주소를 KARL 이 빌려 썼다. 배명승이는 검정시험으로 1 년을 월반하여 서울 문리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로 와서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문리대 무선국 (HL2AA) 개국할때 배명승의 부친이 대법관이어서 때때로 늘씬한 검정 미제 세단차 도두게 DODGE- 를 빌려서 필동의 우리 집과 가회동 자기집 사이의 통신장비 운반에 이용되었다. 이동호(HL1AH), 김동주(HL1AF) 가 같은 전기과 여서 SWL 로 활발히 활동을 하였고, 내가 자주 가던 종로 3 가의 삼영사 에서 당시 최신형 Collins 제 수신기 R388 을 김동주 에게 구해 주었다. 삼영사에 공대 일년 선배인 이홍채씨가 일하고 있섰다.. 내가 치안국 특수정보과에 걸려들어 검열관 일를 할때 정혜선 씨를 만났다. 조동인 (HL1AJ)씨는 정혜선/JA1BU 소개로 돈암동의 한 빵집에서 쉽게 알아보도록 조요한씨의 무선과학책을 갖고 오기로 하고 만났다. 알고 보니 같은 전기과 일년 후배였다. KARL 이 생기고 나서 Active 한 KARL 회원이 되였다. 주말이면 등산, 시간이 나면 부속을 모으려고 청계천 고물상 훑기, 집에 놀러온 HAM 또 한번씩 생각나면 체신부 방문이었다. FAN 들 과의 잡담, 정기적으로 치안국 특수 정보과 출입 38

46 그 외에 공과대학 공작반 과외 활동으로 1 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 에게 영화 상영도하고 음악 감상회도 열었었다. 음악 감상회에 쓴 장비는 박대선이가 제공한 12 인치 speaker unit 를 사용한 자작 cabinet 와 송신기 변조회로와 같은 6V6 PP Amp 를 만드러 썼다. 영화 필름을 싸게 빌려오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한번은 문산까지 시외뻐스를 타고 갔다 온 일도 있다. 영화상영 중에 정전이 되면, 일년 아랫반의 강신규가 3 층에서 지하실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며 자가용 발전기를 돌렸다. 아주 성실한 좋은 친구였다 당시 고교생인 임일명 조요성 이상열 셋이 우리 집으로 자주 놀러 왔다. 음악감상회 곡 해설은 서정욱의 담당이었다. 서정욱은 서울공대 전기과에 입학해서 알게되여 매우 친하게 지냈다. 학교뒤의 불암산에 SCR536 통신기를 들고 가서 교신한 일도 있섰다. 학창시절에 KARL 활동에 끌어드렸스나 Ham 보다 아나운서 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어학에 소질이 있는 재주꾼으로 졸업후 HAM (HL1BX)도 되고 아나운서도 되고 출세해서 과기처 장관도 됬다.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미국 올때마다 나를 찾아준 가까운 친구다 정태범씨 이야기가 빠졌다. 내가 처음 무선기술을 배운 나의 선생님(?) 으로 어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정태범 씨는 무척 가난하게 자라서 학교는 가 보지도 못하고 일제시대 일본인 전자상의 심부름 아이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돈만 생기면 술을 사서 마시는 분이어서 어머니가 혼자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외아들인 정태범씨는 6.25 때 인민군에 끌려가서 미군과 맞대고 전투도 했고 포로로 귀순 하려다 도망병으로 오인되어 국군에 입대 또다시 최전방에 배치되서 휴전 몇일전에 중공군과 싸우다가 발목에 총알을 맞아 제대 했다. 다리를 쩔룩거리며 우리 집에 한번 왔다는데, 나는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만 만났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비 오는 날 전선주에 올라가서 작업하다 감전으로 떨어져서 파란 많은 한평생을 젊은 나이에 마쳤다. 한때는 불법으로 온 동내 판잣집에 전기를 가설해서 걸려들기는 했지만 무선기술을 갖인 분이라서 내가 무척 부러워했던 나의 선생님이었다. 불암산을 배경으로 서정욱(좌) 하고

47 3.13 한국 HAM 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분이 한분 계십니다 **************** 다음 글은 한국의 Ham 동호인클럽 올드래디오 Web site 에 2009 년 8 월에 올린글 입니다. 지금까지 그당시 약속 대로 국가 비밀이라고 저는 이분 이름은 숨겨 왔었습니다 ************************ 이분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저만이 알고 있는 KARL 창설 비화( 秘 話 ) 입니다. 고인이 살아 계셨슬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했습니다. 625 동난 휴전 직후인 1954 년 공산간첩이 기승을 부릴 때 였 습니다. 제가 Amateur Radio 한다고 쫓아다니다가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 분실에 연행 됬 습니다. 제가 일본서 단파 통신부품을 구입한 것과 완전히 동작하는 단파 통신장비가 서울 남산 계곡 으슥한 (필동 3 가)곳에서 발각이 된 것입니다. 하급 정보기관과 달리 한국정부의 최고 정보 기관답게 저를 거물간첩으로 보고 앞으로 더 큰 협력을 위해서 정중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저는 Amateur Radio 라는 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주장 했습니다. 이때 천만 다행이 치안국의 미 고위고문관 (CIA?)이 자기 집안에도 저명한 HAM 이있고 이들을 기술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간첩 혐의가 풀리고 특히 미고 문관은 한국에도 이 혼란기에 Amateur Radio 를 추구하고 통신기를 자작했다는데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람을 많이 도와 주라고 까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한편 정부로서는 남파 간첩들이 모두 단파장비로 활동하는데 여기에는 몰라서 아무런 손도 쓰지를 못하니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중앙분실 비밀 Project HL1TA 무선국이 생겼습니다. 이 무선국을 뒤에서 적극 밀어주신 분이 김임전 실장입니다. 사단법인 KARL 체신부 인가 KARL 이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서 등록을 해야 정식 단체로 인정을 받는데 그 주무관청이 체신부 였습니다. 단파통신이라면 모두가 간첩과 연결을지여 무서워했슬 때 입니다. 단파 통신단체? 체신부 뿐만 아니라 정부 부서 어디서나 그런 단체의 인가란 그때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 옹호하다가는 자기도 의심 받게 됩니다. 저는 저의 상관의 상관인 김임전 실장을 찾아가서 체신부의 KARL 사단법인 인가의 도움을 부탁 했습니다. 도와주겠다는 대답을 못 받았습니다. 실망 했습니다-. KARL 의 초대 이사장 이인관 기감 (KBS) 그리고 HLKY 이덕빈 씨가 열심히 체신부를 접촉 했스나 희망이 안보였습니다. 일단 체신부에 서류를 접수시켜보고 포기라도 해야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체신부에서 접수거절도 걱정이되 서 이인관 이사장께서 직접 체신부를 찾아가셔서 서류를 접수시켰습니다. ***체신부인가 가 났습니다.**** 모두가 이 이사장님 의 노력이라고 감사했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 갓 결혼한 김경위가 임시로 살고 있섰습니다. 당장 갈데가 없다고 해서 저의 집 방하나를 쓰게 했섰습니다. 저녁에 우연히 KARL 이야기가 나와서 이분 한테서 듣고 후에 방주임 한데서도 확인 했습니다. 정부 고위층 안보회의에서 김임전 실장이 체신부장관을 맞 날 기회가 생겨서 장관도 모르는 Amateur Radio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곧 체신부에서 HL1TA 가 특수정보과 중앙분실 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도 알아내고는 신청서류가 들어오자 장관이 알아서 결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연맹이 등록되고 한참 있다가 들었습니다. 실제 체신부에서 우리 KARL 로 통보한 날자 와는 상당한 시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40

48 그 당시 저는 특수정보과 중앙분실은 간첩 잡는데 정도로만 알고 있섰지 한국에서 제일무서운곳 이였다는 것은 모르고 있섰습니다. 저에게 이야기해줄 사람도 없고 또 저도 남에게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ㅡ 저는 김임전 실장의 특수한 직책이 아니였스면 연맹 창설이 그 당시 상황으로는 불가능 했다고 생각 합니다. 따라서 Amateur Radio 개방 역시 많이 늦어 졌겠지요 년대에 이북 간첩분야에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김임전 실장은 이분 뒤에서 모든 어려운 일을 남모르게 하신 분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약 10 년전에 New York 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따님이 지금은 할머니- Las Vegas, Nevada 에 살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 제가 한번 통화했습니다. 아버지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살아계실 때 KARL 에서 감사패라도 전했서야 했는데--. 우리 HAM 들이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년 8 월 Reno Nevada 에서 강기동 이덕빈 씨는 HLKY 기술 책임자 였고 정혜선 씨는 동국무선고 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던 사회인이 였습니다. 이 두분은 KARL 창립전부터 KARL 일을 하시면서 모든 경비를 부담 해주신 분들입니다. 특히 정혜선 씨는 HL1AA-UC 사건으로 개인국 허가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KARL 창립전부터 희생적 으로 제일 많이 일을 해주셨습니다. KARL 창립 이전의 이야기는 저와 한국에 계시는정헤선씨 기억에 의존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왼쪽 사진 에서 이동호 씨 와 이덕빈 씨는 고인이 되신지도 오래 됐습니다. 이동호 李 東 昊 이덕빈 李 德 彬 정혜선 鄭 慧 善 강기동 姜 起 東 KARL 창립 공로자들 --- 사진사는 김동주 金 東 柱 최근에 KARL 총회사진이 발견되여 글을 다시 정리 하면서 보충 상황을 정혜선 씨에게 물어 보았스나 너무 오래 되서 기억이 가물 가물 하다고 하시드군요. ***저의 KARL 선사( 先 史 ) 회고록 검토 의뢰에 대한 정혜선씨의 답신 입니다. **** 강기동 형, 보내 주신 파일 감명 깊게 잘 보았습니다. 강 형의 기억력에 놀랄 뿐입니다. 나로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기록으로 남기를 기대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건강 하세요. 정혜선 ( ) 41

49 3.14 미국 유학 - 반도체기술 습득 내가 고등학교때 부터 단파 통신인 아마츄어무선에 온 정력을 바첬다. 초단파통신은 선진국 에서도 새로운 분야로 한국에서는 이런 것도 같이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나던 1958 년까지도 아마추어무선 개인국의 허가는 나지 않고 있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서 시작한 개인 HAM 국의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게 됐다. 그 당시 외국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유학시험에 합격하고 병역을 마치고 신원조사가 끝나야 된다. 나는 국민학교 때 오른팔을 다쳐서 팔목의 관절이 변형되어 방향이 30 정도 꾸부러지고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팔을 꾸부리고 있으면 외부에서 보면 정상으로 보인다. 신체검사에서 병종을 받아 병역이 면제 되었다. 신원조사가 6 개월에서 1 년도 걸린다는 것이다. 미국유학이 결정되어서 치안국 특수정보과에 인사차 들렸다. 신원조사 이야기를 했더니, 방필주 주임이 2 층 외사과에 가봐. 가 지금 외사과장이야 라고 하는 것이다. 유학생 신원조사는 치안국 외사과 담당이었다. 나는 전에 중앙분실에서 조사를 이틀이나 받아서 그 조서만 해도 책으로 2 권이나 될 것이다. 나는 방 주임의 말대로 2 층 외사과를 찾았다. 씨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특수정보과에 잡혔슬때 나의 조사관이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서 신원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래, 그것 내가 하는 거야 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당장 담당관에게 지시하는 것이었다. 외사과장이 직접 신원보증을 서주었다. 그렇게 하여 일년도 걸린다는 신원조사가 수일로 끝이 났다. 그 때는 병역도 안 마치고 신원조사도 안받고, 외국유학 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상당히 이상하게 생각을 하였다. 또 더러는 강기동이 빽이 누구냐가 궁금한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치안국 특수정보과와 연관된 일들이 나에게 많은 추억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다하게 국가에 해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갓 결혼한 중앙분실에 근무하는 직원이 갈 곳이 없다기에 우리 집에서 한참 동안 같이 살았다. KARL 을 창설하기 위하여 모셔온 이덕빈 씨는 내가 Ohio State University 로 오도록 주선해 주셔서 전공을 초단파 통신에서 반도체로 바꾸고 또 김규한 씨는 반도체회사 설립에 국내외의 재산을 모두 투자 하셨다 년 미국 Silicon Valley 의 한 작은 motel 식탁에서 김규한씨와 만든사업계획으로 한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시작된 것이다. KARL 의 인연으로 이덕빈 씨와 김규한 씨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한국반도체주식회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한강의 기적 도 틀림없이 달라졌을 것이다 년 경기도 부천에 설립한 한국최초의 반도체 소자 생산공장인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이회사는 세계적 유류파동이 몰고온 자금난으로 삼성에 팔려가고 1978 년에는 이름도 삼성반도체로 됐다..) 42

50 [텍스트 입력] 4 장: 미국서 반도채기술 모아담다 4.1 반도체로 가는 길 미국유학 이야기는 내가 미국에 유학 올 때인 1958 년 여름이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왔지만 많은 유학생이 비행기 값이 너무 비싸 화물선을 타고 왔다. 배에서 허드레 일을 하면서 오면 시간은 수개월이 걸리지만 몇 백 불의 돈을 벌 수가 있었다. 나도 배편을 예약해 놓았으나 한국에 오는 화물선은 몇 척 되지도 않았지만 한 배에 몇 명 뽑지를 않기 때문에 날짜가 안 잡혀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때다.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 친구네 집을 한 시간을 걸어서 찾아간다. 전화도 없거니와 약속한 것도 아니다. 가서 문 밖에서 태준아 몇 번 크게 부르면 안에서 없다 하면 마냥 밖에서 기다리다가 지치면 다시 한 시간 걸어서 돌아오곤 했다. 기다림에는 익숙되 있섰지만 가을 학기에 맞추어 가려면 이대로 기다릴 수 만은 없다. 잘못하면 일년을 손해 볼 수도 있기에 부모님께 이야기를 했더니 비행기표를 사주신 것이다. 세계에서도 바닥권의 경제 국에서 내 비행기표는 온 식구 일년 생활비였다. 내가 장남이라서 동생들 대학교 학비에도 지장이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내가 한국을 떠날때 아버님의 말씀이 좋은 기술 많이 배워와서 이 가난한 나라를 위해서 남이 못하는 큰일을 해달라고 하셨다. 미네소타 대학이 있는 Minneapolis/St. Paul 비행장에 정명식 대장이 나를 마중 나와 주셨다. 공과대학 산악 부 시절 태백산 답사등반대장 이여서 정명식형을 대장이라고 불렀다. 그때 강원도 정선경찰서에서 빨치산이 나온다고 해서 등산을 포기하고 강릉으로 빠져 친구 최돈웅 이네 집에서 신세를 졌다. 강원도 평창, 정선 일대는 깊은 산악 지대로 나의부친 강종무 姜 琮 武 외부와 차단되어 비행기는 보았어도 자동차는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입학허가를 받은 미네소타대학은 서울공대와 협력관계가 체결되어 있어 내가 아는 교수, 조교수들이 연수 차 와 계셨고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로 택했다. 도착해서 짐을 푼 곳이 한국학생과 나의 교수님들이 여럿 있는 공동부엌이 달린 이층 하숙집이었다. 여기서 며칠 전에 학위를 받으셨다는 최형섭박사, 강웅기교수 등을 만났다. 모두가 공과대학에서 오신 국비 유학생들 이고 나만이 자비 유학생으로 나이도 가장 어렸었다. 나의 지도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만이 아니고 다른 한국학생들(나의 공대시절의 교수들)의 지도교수도 되어 있어 일년간은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과목을 보충하고 나서 대학원 정규과정을 밟으라는 advice 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고 나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문제는 학비조달이다. 등록을 해야 하는데. 등록금 외에 비거주자 부가 금이 굉장히 비싸다. 우리 교수님들은 국비장학생이라 등록금과 생활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다. 등록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찾아야겠다. 자비유학생을 만났다. 학교에서 job 을 구하면 학교직원이 되어 비거주자 부가 금이 면제된다는 것이다. 학교에 있는 Employment office 를 찾았다. 정원 일, 청소 등은 벌써 waiting list 가 있어서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고 대학원 학생이면 Assistant Ship 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식 대학원 학생으로 등록이 안되어 있었다. 우선 돈은 벌어야겠다. Employment office 의 벽에 붙은 광고에 연락해서 주말에 일을 했다. 수퍼마켙의 냉장고 정리다. 큰 트럭으로 들어온 냉동식품을 궤짝에서 뜯고 팔린 물건은 보충해 넣는 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작은 상자를 뜯는 일을 했다. 사람이 들어가서 일하는 아주 큰 냉동창고라서 뭣 모르고 반소매로 들어갔다가 처음에는 너무 추워서 떨었으나 얼마 동안 43

51 [텍스트 입력] 노동을 하고 나니까 추위가 없어졌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했는데도 그나마도 이 일을 계속 못했다. 체력이 - 모자라고 Fork Lift(지게차)도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 집 교수님들은 주말이면 Fight of the Week 라는 정기 권투프로가 저녁식사 후에 있어서 옆집에 계시는 분 까지 모여 맥주와 간단한 안주로 각자가 선택한 선수를 응원하며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같이 나누고 있었다. 나는 즐기기는커녕 그냥 걱정만 되었다. 맥주가 떨어져서 내가 나가서 더 사왔다. 내가 제일 나이가 아래라서 당연히 내가 해야 했고 더욱이 아직 방을 구해 나가기 전이어서 공짜로 끼어 자고 있을 때였다. 내가 번 미국 돈 으로 맥주와 약간의 안주를 사 들고 왔다. 4.2 The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로 가다 이렇다 할 해결책이 없다. 오하이오에 계시는 이덕빈씨에게 전화를 했다 미국에 오면 곧 연락을 하기로 했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연락을 못하고 있었다. 이덕빈씨는 내가 한국에서 아마추어무선연맹을 창설할 때 이사로 모셔온 분으로 종로 2 가에 있는 기독교방송국의 기술책임자로 계시던 분이다. 나보다 약 일년 전에 Ohio State 대학으로 유학 오셔서 내 문제를 이야기 했더니 당장 오하이오로 오라고 하면서 한국에서의 학위를 인정해 주어서 곧 바로 대학원에 등록이 가능하다고 했다. 곧 기차를 타고 오하이오로 옮겨왔다. 정말 미국은 큰 나라다. Ohio 로 오는 동안 끝없는 평야의 연속이었다 여기는 산이라고는 볼수도없어 실망도됬다. 산을 좋아하는데. 이덕빈씨의 주선으로 한국학생들만 있는 Rooming house 에 끼어 들었다. 여기의 분위기는 같은 미국인데 미네소타 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모두가 자비 유학생이고 모두가 밤에 일하러 나갔다. 한국에서는 최고 층의 자식들이다. 아버지가 장관, 은행장, 부자 등 나보다 경제적으로 다 좋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이다. 쉬는 날에는 직장(식당) 이야기가 그치지 않고 서로가 소개를 해서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내가 보기는 이미 미국사람이 다된 인상을 받았다. 서로 영어로도 의사가 통하고 교수님들처럼 찌게 와 밥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이들의 직장은 콜럼버스(오하이오의 주청 소재지)에서도 알려진 고급식당으로 밤에는 나이트클럽이 성황이라는 것이다. 영어를 좀 하게 되면 주방에서 접시 닦기를 면할 수 있고 밖에서 웨이터나 Valet Parking 같은 손님을 접하는 일은 Tip 을 많이 받아 수입도 좋고 때때로 외국 학생이라고 하면 Tip 을 더 준다는 것이었다. 잘 하면 여름 한철 일해서 일년간 학교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좋은 곳이어서 학교 안 가고 일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말도 들었다. 음식도 하루 두 끼를 여기서 먹고 약 6 개월만 있으면 영어회화도 웬만한 것은 눈치로 통하게 되고 일년이면 미국인을 상대로 쌍소리로 싸움도 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들은 정식 웨이터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음식 종류, 술, 식탁 manner 등 고급인사, 정치가, 갑부들의 생활상을 일반 미국인들 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한국서 비싼 돈 내고 배운 영어보다 여기서 막 배운 것이 진짜 미국영어 라고 해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도 나도 여기서 받아준다면 접시 닦기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덕빈씨의 말로도 자기는 나이도 들고 장학금도 받아서 식당 접시 닦기는 안 했지만 미국을 제대로 알려면 이들과 섞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 놀란 것은 한국서는 직업적으로 가장 바닥일인 식당 설거지 일을 하나도 거리낌없이 자랑 삼아(?)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국서는 최고 층에 속하는 자식들이. 미국사회에 동화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미국의 위대함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리고 바닥일 이라고 돈을 조금 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고교 동기 친구 전선웅 이와 나대섭 이도 여기서 학교를 다니고 있섰다. 44

52 [텍스트 입력] 전기과에서 경기고, 서울대 선배인 강대원씨를 만났다. 곧 Ph.D. 를 끝낸다고 했다. 나는 지도교수를 정하고 전기과에서 Assistant ship 도 받게 되었다. 거액의 비거주자 부가 금이 되돌아온다. 내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식당에서의 접시 닦기 계획은 취소 했다. 그리고 좀 비싸기는 했지만 대학원 학생만 들어가는 기숙사에 들기로 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둘이서 쓰는 방으로 정했다. 나의 기숙사 룸메이트는 오하이오 시골서 온 말없는 아주 고지식한 문과계통 친구였다. 말이 없는 것이 나의 불만 이었다. 영어를 배우려는데 학교가 시작되었다. 나의 직책은 교수님의 뒷바라지로 주로 리포트나 시험답안 채점이었다. 때때로 시험시간에 내가 대리로 들어갈 때도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리포트나 시험문제 정답을 주고 또 채점 요령도 가르쳐 주었지만 몇몇 교수는 아예 아무 재료 없이 답안만 맡기었다. 우선 내가 알아야 채점이 가능하고 또 내 Assistant ship 이 계속 되려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Assistant ship 의 보수는 파트타임이긴 하지만 학비 내고 혼자서 먹고 살 수가 있었다. 처음엔 정답도 안 준 채점은 앞이 캄캄했다. 한국서 배우지 못한 과목이다. 중학교 4 학년 (고 1) 이 되자 곧 6 25 사변이 터져서 중학교에서 바로 미국 대학원으로 월반한 것과 다름없는 나로서는 우선 내용을 이해하고 채점 하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보통 5 일 정도이고 일주일까지 봐주는 교수도 있었다. 무척 급하다. 교과서 공부부터 해야 한다. 독학이 시작되었다. 나의 공부보다 채점이 더 급하다. 없는 시간이 생길 수가 없다. 잠을 줄일 수 밖에 없다. 먹는 시간도 아깝고 학교시간도 빼먹었다. 기숙사 독방을 쓰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내 룸메이트의 친구가 방에 놀러 오면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가 기숙사 로비 구석 테이블이 항상 비어 있어서 거기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영어공부? 이건 배부른 소리다. 시간의 귀중함을 처음 체험했다. 제일 원하는 것이 잠 좀 실컷 자는 것이었다. 먹는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잠을 잤다. 한국에서 공부 안 한 것도 한이 되었고 제목만 스쳐가는 교수님도 원망스러웠다. 고등학교와 4 년간의 대학과정 공백을 9 개월의 채점과정에서 독학으로 때웠다. 채점요령도 생기고 내 실력도 많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댓 가도 치러야 했다. 첫 학기는 반정도의 과목을 drop 했다. 출석도 제대로 못했지만 수업시간에 자꾸 졸기만 했기 때문이다. 또 친구도 없고 고시공부 식의 혼자 독학으로 지냈다. 남 때문에 시간 빼앗기는 일은 적극 피했다.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을 것이다. 모든 과목이 다 힘들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기초실험과목으로 Electronics Lab 이라는 실습시간이 있었다. 이 과목은 실제로 전기인두나 진공관을 만져본 적이 없는 학생들을 위한 실습반의였다. 내가 이 과목 담담교수보다 실습 면에서는 더 경험이 많았다. 하여튼 이 과목교수는 모든 것을 나를 믿고 내게 맡겨서 사실상 이 과목은 내가 주도했다. 과목내용을 내가 다 알고 또 학생들이 내가 아는 것이 많다고 인정을 해주어 언어의 장벽이 문제가 이니 였다. 몇몇 학생은 내용을 다 알고 실력도 있섰다. 알고 보니 출석만하면 학점을 딸 수 있어서 등록을 한 것이다. 이들은 곧 납땜질도 내가 잘했고 측정기 다루는 것도 실력 있다고 알아 보았다. 이 시간만은 즐겁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실습의 마즈막은 두 명이 팀이 되어 진공관 6V6 를 쓴 송신기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내가 아마추어 무선에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목이 끝날 때 담당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자기보다 경험 많은 조수덕분에 자기가 편했다고 칭찬도 해주었다. 내가 생전 처음 미국학생들 앞에서 서툰 영어로 가르쳤스나 언어의 장벽을 못 느껴서 큰 자신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한국에서 아마추어무선 한다고 혼자 배운 실력을 미국 대학에 와서 써 먹었스니 그게 아니였다. 나는 정식 개인국 호출부호도 없었고 내가 낸 전파는 한국이 아마추어무선을 개방하기 전이어서 사실상 외국에서 볼 때 불법전파 인 45

53 [텍스트 입력] 것이다. 자랑할 것이 못 되었다. 우리 전기과에 Amateur Radio 로도 유명한 W8JK 의 John D. Kraus 교수가 있었다. Radio Astronomy 의 권위자이며 또 8JK Antenna 로도 유명해서 내가 한국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기숙사가 main campus 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셔틀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기숙사 식당 앞에서 떠나기 때문에 식당에서 보고 있다가 떠나기 직전에 올라타는 습관이 생겼다. 운전사도 내가 마지막인 것을 알고 내가 타면 차가 떠나는 습관이 자연히 생겼다. 차 안에서 미리 타고 기다리는 시간은 절약되고 내릴 때는 맨 먼저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너무 늦으면 I am sorry. 하고 차가 떠난 일도 있었다. 한번 차를 놓치면 한 시간 이상의 손해를 보기도 했다. 모두 따지면 마지막에 탄다는 것이 결코 시간 절약은 아니었다. 4.3 대학원 학위자격 시험 반도체 연구소 발령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 유학 초년생이 Ohio State University 의 Research Foundation 에서 새로 설립하는 반도체 연구소의 사실상의 설립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로 부터 13 년 후에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에 한국반도체 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선 외부에서 온 학생들에게 대학 학위(Ms, Ph.D) 후보생 자격시험이란 것이 있었다. 생전에 시험공부란 제대로 해본 일이 없섰다. 국민학교서 중학교는 오른팔을 다쳐 겨우 글을 쓸 수 있는 상태여서 입학시험을 준비 없이 치렀고 고등학교는 학제변경으로 자동입학이 되었다. 대학은 6.25 동란 부산 피난살이 때라 천막학교는 있었으나 입학시험 공부라고 따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입학시험은 아니라도 중간시험 학기말 시험 때면 친구들이 찾아와서 시험공부 시켜달라고 해서 모여서 반은 놀다가 다음 날 그냥 가서 시험을 치곤 했다. 이 학교의 자격시험은 일년에 두 번으로 전 공과계통 학생을 모아서 치려 지는데 그 응시자가 명이 되었다. 자격시험은 주로 기본지식 테스트로 내 생각에도 잘 치른 것 같았다. 합격했다. 다음 날 나의 지도교수가 날 불러서 그의 사무실로 찾아 갔더니 이번 자격시험에서 최고점수를 받아 일등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도 채점위원 이었는데 다른 교수들도 자기를 좋은 학생을 가졌다고 축하해 주었다며 내게 악수를 청해 왔다. 수학문제 두 개와 물리문제 하나는 특별히 까다롭게 출제해서 특별히 뛰어난 학생을 목표로 했는데 나만이 이 문제를 제대로 풀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의외의 제의를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반도체 연구실을 크게 짓는데 여기에 들어오라는 권고다. 한참 칭찬을 받은 직후라 그냥 좋다고 YES 를 했다. 그랬더니 반도체공학이 앞으로 전자공업을 주도하고 우리의 생활도 반도체 중심이 된다고 나를 격려했스나 나는 그냥 얼떨결에 별 반응 없이 듣고 있다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다른 학생들이 나보고 잘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있지도 않은 연구실에 들어가서 연구실 짓고 언제 연구, 실험하고 논문 써서 졸업 하겠다는 거냐 다. 더욱이 반도체는 물리학도 많이 공부해야 하고 어려운 학문이라고 했다.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반도체 책을 봤다. 전기과 학문하고는 너무나 다르다. Band gap, Fermi level 그리고 Hole 은 또 뭐냐? 내가 전기과에서 Microwave 통신, Non-linear control system 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고 반도체 관련공부는 안하고 있어서 이 방면은 아는 것이 없섰다. 그러고 보니 46

54 [텍스트 입력] 나만이 YES 라고 했다. 이미 그러겠다고 한 학생들도 마음을 바꾸어 빠져 나오고 있섰다. 며칠 간 고민 끝에 No 하려고 큰 마음 먹고 용기를 내서 지도교수 방을 찾았다. 마침 강의에 나가서 방이 비어 있었다. 한 쪽으로는 힘든 말을 안 하게 되어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오기로 했다. 결국 다시 찾아갈 용기를 못 내서 하루 이틀 미루다가 No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반도체연구소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계속 졸업 못한다 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월급이 두 배나 올랐고 좋은 직장인데도 불구하고 좋은 기분은 아니 였다. 나는 이것이 더 잘된 거라 혼자서 위로했다. 4 층에 큰 교실만한 빈 방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헌 책상, 의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누가 오래 전에 썼던 방 같았는데 이 것이 내 방이라고 했다. 아마 전교에서 개인 사무실로는 제일 큰방 이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정식 연구소 직원이 되었고 사무실도 생겼다.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 전화라도 오면 받아야지 하는 생각에 매일 아침 이 곳으로 출근했다. 강의에 들어가는 시간을 빼고는 여기서 자리를 지켰다. 하루 종일 있어야 지나가다 호기심에 뭐 하는 곳인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사람이 혹간 있을 정도였다. 내 지도교수가 여기 연구소의 소장이고 내가 제일 먼저 이 연구소에 들어온 staff member 인 것이다. 나의 상관인 소장을 찾아가서 무엇을 해야 되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우선 좀 기다려보라는 거다. 그러면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Research Foundation 에서 의과대학 부설 연구소를 짓는데 예산이 초과되어 반도체연구소 예산을 빌려 썼는데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팔자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에 쪼달리고 잠잘 시간도 없었던 때가 불과 얼마 전 인데 지금은 돈도 더 받고 일이 없어 놀고 있으니 말이다. 나 자신도 믿기 힘들었다- 반도체 연구소 가 들어있는 전기과 건물 앞에서 (Caldwell Lab, Electrical Engineering) 4.4 반도체연구소 설립 거의 한달 동안을 하는 일 없이 넓은 방만 지키고 있었는데 하루는 책상이 하나 더 들어오면서 Research Foundation 에서 실무자가 파견되어 왔다. Pat Clark 라는 몸집이 큰 중년 아줌마로 어제까지 의과대학 연구소 설립을 끝내고 여기로 왔다고 했다. 내가 여기 설립책임자가 되어 있고 자기는 나를 보조하는 비서라는 것이다. 나는 겁이 났다. 내가 무얼 안다고 내가 오기 전에 몇가지 승인해 놓은 공사가 있었는데 그 동안 보류한 것을 이제는 풀고 진행하겠다고 여러 서류를 나에게 내밀고 싸인하라고 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해서 싸인을 했다. 그 내용은 4 층의 내부를 전부 허물고 새로 remodeling 하는 공사였다. 그리고 일꾼 두 명을 당장 채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도 서류를 보여주면서 자기가 다 Type 를치고 나보고 싸인만 하라고 해서 47

55 [텍스트 입력] 그렇게 했다. 내가 싸인한 서류들은 그 COPY 가 내 책상 위에 파일 되어 있어서 저녁에 혼자서 다시 그것을 열심히 공부했다. 생전 처음 닥친 일이다. 이틀 후에 일꾼후보 5 명이 아침에 왔다. 나보고 인터뷰를 하라고 해서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큰 마음 먹고 마주 앉아서 Application 에 적은 것을 확인하는 정도의 질문만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누구를 뽑겠느냐고 해서 그저 좋은 인상을 준 사람 둘을 지적했더니 자기도 옆에서 봤는데 동의한다고 했다. 그들은 다음 날부터 일하러 나왔다. 다음은 연구실용 집기와 책상, 캐비닛 등을 사야겠다고 내 앞에 여러 권의 catalog 를 갖다 놨다. 예산이 충분하기 때문에 좀 비싼 것을 사도 된다고 했다. 내가 보기는 진짜 모두 미제 로 일류 품으로 보였다. 색깔도 앞으로 전부 통일하자고 해서 깨끗한 기분을 주는 회색에 가까운 것으로 택했다. 우리가 있는 방만 제외하고 Remodeling 이 시작되었다. 전기과가 5 층 건물인 Caldwell 빌딩 전부를 쓰고 있는데 4 층을 몽땅 리모델링한다고 야단이다. 조용하던 곳이 이젠 너무나 시끄러워 정신이 없다. Bell Lab 에서 찍어온 사진 등을 참고로 새로운 연구실 내부를 꾸몄다. 화학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조수도 한 사람 채용했다.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싸인 하면 며칠 내에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서류양식서부터 일의 진행순서 등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연구원 스태프 두 명이 더 들어왔다. 중국과 대만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백인학생은 다 빠져 나가고 나처럼 얼떨결에 예수하고 들어온 친구들 인 것 같았다. 내 부하가 생겼다. 이 연구소에 오면 졸업 못한다는 이야기 못 들었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이야기 못 들었다고 했다. 둘이 다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어서 아주 다행이었다. 그 동안 눈치로 배운 실력으로 이들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일을 잘했다. 나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한 친구는 중국대륙에서 피난 온 Joe Tsai 라 고했고 또 한 친구는 대만 출생인 Sing S Lee 었다. 둘이 다 우등생 중에서도 특별히 뽑힌 우등생이었다. 나와는 달리 대학에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왔다. 특히 여러 과목을 미국 교과서로 배웠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교과서(원서)를 자기네들이 사진판으로 복사해서 쓰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교 때 영어로 된 원서라는 것 본일도 없다. 우리는 낮에는 시끄러워서 저녁에 주로 일을 했는데 앞으로 할 연구내용을 셋이서 같이 공부하고 모르는 것은 지도교수에게 가서 물어보아서 진행시켰다. 우리 지도교수가 몇 달 동안 Bell Lab 에가서 배워온 프로젝트를 우리가 인계 받은 것이다. Bell Lab 에서 온 Equipment List 를 보고 같은 것 더 좋은 것들은 발주했다. 이제는 나도 제법 내용을 알아서 이들에게 발주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나보고 비즈니스에도 소질이 있다고 했다. 이들도 나와 같이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제법 자리가 잡혔다. 내 비서를 보조하는 비서가 한 명 더 들어왔고 Lab Technician 이 2 명, 허드레 일하는 Technician, 그리고 내 밑에 스태프 2 명, 그래서 모두 10 명 가까이 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미국 사람들은 제 시간이되면 전부 돌아갔다. 우리 동양인 셋은 낮에 강의에 들어가서도 그랬지만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공부도 했다. 나도 우리의 연구실이 도서관 보다 더 좋았고 또 모두가 퇴근한 뒤가 더 좋았다. 우리만의 공간이다. 낭하에 나가서 고암도 질러보고 중국 애들은 저의 둘이서 중국말로 떠들어 대기도 했다. 우리연구소 소장님은 우리가 가서 물어보기 전에는 참견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몇 사람 모아놓고 왕이 된 것이다. 드디어 내 연구실이 완성되었다. 일년은 48

56 [텍스트 입력] 걸릴 거라 예측과는 달리 6 개월 만에 이룬 성과다. 모두가 열심히 일한 결과 이다. 내 비서가 적을 옮겨와서 우리연구소의 정식직원이 되었다. 그때 직책이 아마 Senior operation manager 였다고 생각된다. 월급이 올랐다고 좋아했다. 대개 설명만 하고 용도를 알려주면 연구용 기자재를 전국을 뒤져서 찾아내 주었다. 나도 국내의 웬만한 supplier 들을 다 알게 되었다. 사진은 내가 개발한 Diffusion Furnace 1 호기 이다 Diffusion Data 의 반도체 업계 공급 우리 연구소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Marshall Furnace 라는 회사가 있었다 새로생긴회사로 거기서 만든 신형 Furnace 를 우리도 쓸수 있슬것 같아서 우리의 조건에 맞게 하나를 주문했다. Furnace (용광로) 의 온도 조절 제어장치 Diffusion Furnace Liner, Sample Holder Box, Push boat, Push rod, Sample capsule 등을 내가 설계해서 외부에 주문했다. 이들은 모두 섭씨 1000 도가 넘는 온도에 견디는 순도가 높은 Quarts 로 만드러야한다. 우리 연구 프로젝트의 제일 큰 Sponsor 는 미 육국성의 Signal Corps Supply Agency 라는 곳이었다. 우리가 보낸 연구보고서는 여기서 관련부서와 군관 계 민간업체에게 배부하고 있었다. 실험장비의 설치와 그 Calibration 이 끝나고 시험방식을 정돈해서 누가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했다. 많은 데이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온 데이터를 분석하고 또 여기에 따라서 다음 시험을 준비하고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나날을 지나게 되었다. 프로젝트 별로 monthly report, quarterly report, final report, 마냥 바쁘기만 하다. Solid State Diffusion 이란?. 다음 그림에서보는것이 이 Diffusion 장치의 개념도이다. 우리가 이장치를 Closed box diffusion system 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쓰고 있는 장치와 그 원리는 다를것이없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해야겠다.. Diffusion 은 반도체 제조기술의 기본으로 고온 도에서 극소량의 P-type 또는 N-type 의 물질 (impurity 라고 함)을 주입하는 제조과정을 말한다. 실제 주입은 P-type 로는 Boron 을 N-type 로는 Phosphorus 의 산화 물을 썼다. 아주 높은 고온도에서 주입이 되기 때문에 용광로가 그 주장비이다. 노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작은 Silicon Ingot 이다. 풋고추 크기의 이 Ingot 은 실리콘의 단결정체로 약 1mm 정도의 두께로 얇게 썰어서 한쪽 면을 거울같이 갈아 원판을 만든다. 이 원판은 Wafer (웨이퍼) 라고 불러 여기서부터 와이퍼가공이 시작된다. 49

57 [텍스트 입력] 그 당시 우리가 썼던 Ingot 은 그 직경이 1.5 cm 정도의 크기로 오늘날의 30cm 크기와는 비교도 안된다. 이 원판 wafer 위에 산화막(SiO2) 을 키워서 Diffusion 을 원하는 부분은 이 SiO2 를 화학적으로 녹혀내서 실리콘을 노출시킨다. 그림에서는 사각형의 모양을 만들었다. 실제로는 사진술을 이용한다. SiO2 층이 impurity (여기서는 N-Type)의 투입을 막아주어 사각형 모양의 N-Type 섬이 실리콘 와이퍼 속에 생기게 된다. 이러한 반도체 제조기술의 기본이 Ohio State University 의 Semiconductor Research Lab 에서 거의 50 년 전에 동양계 유학생 3 명이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리포트의 주인공은 우리 지도교수로 되어 있었다. 이미 이 때부터 동양계 학생들이 미국대학 이공계 연구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4.6 석사 그리고 박사학위 우리는 연구실에만 처박혀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있었지만 나의 지도교수이자 우리 연구소 소장은 우리가 내고 있는 연구보고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또한 평이 매우 좋았다. 내가 석사학위 논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지금 내고 있는 리포트로도 훌륭한 학위논문 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가 돈 받고 연구하고 있는 시간도 실습학점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따져보니까 이미 석사과정 학점은 초과했고 논문도 이미 다 되어 있었다. 학위논문 이야기를 비서에게 했더니 자기가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에 지난 번 리포트의 겉장만 다시 타이프 쳐서 석사학위 논문이라고 나에게 갖고 왔다. 자기가 타이프를 잘 쳐서 이공계통의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내 지도교수는 내 논문의 내용을 아니까 보지도 않고 통과되었다. 곧 이어서 나의 조수인 두 중국 유학생도 내 뒤를 따라 석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때 입학한 다른 학생들보다 빨리 학위를 딴 셈이다. 졸업 못한다고 반도체연구소를 외면했던 학생들이 후회하는 소리를 나도 직접 들었다. 나는 하루 속히 학위 끝내고 생산공장에 가서 반도체 제품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만들어야 하는데 좀 더 이론적인 설명이 필요하여 금속공학과 도서관을 찾았다. 금속의 고온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순물의 오염에 관한 논문들이 많이 있어서 참고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반도체 Diffusion 과 비슷한 학위논문이 있었다. 그 저자가 바로 지금 금속공학과의 주임교수로 계시는 분이다. 찾아가서 조언도 들었다. 자기가 옛날에 한 일이 지금 와서 반도체연구에 참고가 된다고 매우 좋아하셨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옛 논문을 복사해와서 나에게 친절하게도 논문은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내 지도교수도 잘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고 있는 Diffusion 은 자기네 금속과에서도 흥미가 있는 과제라서 한번 와보겠다고 했다. 박사학위의 마즈막 관문이 Oral Exam 이다. 겁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뭐를 물어볼지 알 수가 없어서 준비를 하려고 해도 별 방법이 없섰다. Oral Exam 은 박사 학위 자격이 있는지를 직접 학위 Committee 에서 확인하는 면접시험으로 자꾸 떨어지면 논문내용을 다시 써야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자기 지도교수와 두 명 또는 네 명의 다른과에서온 교수로 그 committee 가 구성된다. 남들이 많이 걱정하던 박사학위 Oral Exam 은 의외로 쉽게 통과되었다. 시험장에서 내 지도교수가 다른 시험관에게 나의 논문이 이미 반도체 업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설명도 해주어서 시험이라기 보다는 내 논문 발표회같이 끝났다. 한 시험관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시험장치를 어디서 샀느냐 또 어떻게 만들었냐 등 자기도 만들려는 것처럼 아주 세밀한 것들을 뭇는거다. 이런 것은 내 전문이다. 여러 번 뜻어고치고 전국을 뒤져서 물품구입하고 학교 내서 안되는것은 외부 용역도 한 것 실패도하고 사고도내고 또 50

58 [텍스트 입력] 사고 내고 정리하느라고 밤새 고생한 것 모두 이야기했다. 내 비서도움이 많았다. 내 학위논문을 위한 것 보다는 이 일이 미국 국방성의 Project 여서 전국을 뒤지고 외부용역도 쓰고 만들어진 논문이다. 이 설명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래선지 정말 어려운 학문적인 것은 못지않고 기초적인 질문만 형식적으로 하고 끝낸 것이다. 몇 년 전에 치른 자격시험 성적표도 시험관들의 참고자료에 포함되어 있었다. 별것도 안인 것을 공연이 미리 겁먹고 떨었다고 생각했다. 내비서로있는 Pat 가 내 박사학위 Oral Exam 의 제일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이 반도체연구소에서 나온 첫 번째 Ph.D.였다. 박사학위에 필요한 모든 절차는 다 끝났다. 이젠 졸업식장에 나가서 졸업장을 받는 형식만 남았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뉴욕 Poughkeepsie 에 있는 IBM Research Lab 하고 또 같은 뉴욕주의 알바니 근처에 있는 GE 연구소에 인터뷰를 갔다. 며칠 후에 아리조나주의 피닉스에 있는 Motorola Motorola 반도체 공장은 사막을 하루 아침에 Hi Tec 도시로 만들었다 Semiconductor Products Div. 도 방문했다. PHONIX 는저녁 해질 무렵에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춥지 않고 맑은 날씨에 야자수를 배경으로 지는 해는 내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장관이었다. 이 때 여기 와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다음 날 인터뷰는 형식적으로 내가 병신 아닌 것만 확인하는 정도로 끝났다. 여기 연구실에 내가 만든 Diffusion Report 가 모두 모여 있어서 내가 한 일을 다 알고 있었다. 학교 학위 논문이 직접 제조업에 도움을 주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하면서 모토롤라에 와서 일해 달라고 했다. 지금 연구소를 확장 중이라서 연구원을 많이 뽑아야 된다고 했다. 공장구경을 하면서 반도체 제조과정을 처음 보았다. Diffusion 에 쓰는 Furnace 도 기능만 같지 굉장히 크다. 나는 한번에 직경이 1.5cm 되는 워이퍼 한 장을 굽는데 여기서는 2.5cm-3cm 되는 워이퍼를 50 장씩을 한꺼번에 굽고 있었다 diffusion 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주먹구구식 제조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미국서 최신 제조기술 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인터뷰한 세 곳에서 모두 오라는 offer 를 받았다. 초봉이 모두 비슷했다. 그러나 내가 듣던 초봉 보다는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 돌아와서 연구소 소장에게 피닉스로 가겠다고 했더니 모토롤라의 연구소장 I.A.Lesk 박사를 자기도 잘 안다고 하면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내 지도교수 Prof. Marlin O. Thurston 은 나를 반도체에 들어오게 해주신 분이고 모토롤라에서의 내 상관인 I. Arnold Lesk 박사는 반도체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예상하고 나의 연구방향을 잡아주신 고마운 분들로 모두 전문분야에서도 알아주는 학자들 이었다. 내가 모토롤라로 가게 되었다고 Pat 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처음 자기가 왔을 때 내 지도교수인 소장이 자기에게 내가 앞으로 이 연구소를 책임질 사람이 될 터이니 지금은 힘들겠지만 참고 같이 일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아서 배우라고 나를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번은 대학원 수준의 반도체 공학 강의를 나에게 부탁해서 한 학기를 강의했는데 전기과 학생들이라 반도체 물리의 기초가 힘들어서 학기 중간에 내용을 재조정한 일이 있었다. 이것도 내 지도교수가 나의 교수능력을 테스트해 본 것이었다. Ph. D 가 결정되자 Assistant Professor 로 발령이 나서 강단에 서지 않더라도 실습지도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전에 사임하고 학교를 떠났다. 내가 막 대학원 자격시험을 치르고 반도체연구소에 발령이 났을 때 약혼녀가 미국에 유학생으로 왔다. 결혼식은 이덕빈씨가 교회를 주선해 주셨고 강대원씨는 피로연을 맡아주셔서 일요일 오후에 교회 예배가 끝나고 바로 교회 51

59 [텍스트 입력] 목사님의 주례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교회에 있던 꽃을 그대로 쓸 수가 있어 꽃 값이 절약된다고 해서 그 시간을 택했다. 이덕빈씨는 나를 오하이오로 오게 했고 착실한 기독교신자로 늘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 가자고 찾아 오셨는데 그때의 내 사정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바쁜 때라서 딴 구실을 만들어서 교회를 안 간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다 가면 반드시 설교 때 졸고 있다가 아멘 만 끝에 같이한 기억이 난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 우리와 가까이 지내던 이영덕씨부부가 교육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하게 되여 그아파트를 그대로 우리가 인계받았다. 귀국해서 국무총리도 하신 분이다. 4.7 강대원 박사 세게최초의 MOS Transistor 강대원박사는 경기고 서울대 Ohio State 대학 전기과 모두 나의 선배로 유일하신 분이다. 내가 미국에와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Ohio State U. 전기과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Bell Telephone Lab 으로 가서 세계 최초로 반도체분야인 MOS 의 특허를 받으신 분이다. 오른쪽 사진은 강대원 박사가 만든 세계 최초의 MOS Transistor 이다. 내가 한국반도체회사로 한참 바쁠 때 한국에 나오셔서 부천 공장에서 만나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미국 NEC 반도체연구소 소장을 하셨고 한국이 낳은 수재로 반도체의 선구자 이시고 동시에 나의 반도체 선배이시다 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The first Mosfet transistor, designed by M. M. Atalla, Dawon Kahng, and E. Labate in late (left picture) Courtesy: Lucent Dawon Kahng obtained Ph.D. from the Ohio State University in 1959 and joined the Bell Telephone Lab. in the same year. He owns the world first MOS transistor patent. 나의 미국생활의 첫 해는 잠도 못 자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반도체연구소 직원이 된 후로는 유학생으로는 여유 있는 생활을 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큰 아파트에 들었다. 학교 축구경기장 바로 앞이라서 축구(Football, 미식 축구)가 있는 토요일이면 아침부터 교통이 날 리가 나고 많은 한국학생 친구들이 미리 우리 집에 와서 북적거렸다. 그 당시 오하이오 주립대학은 전국에서 1, 2 위를 다투는 축구팀으로 온 도시가 축구로 뭉쳐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었다. 나는 골프는 안 하지만 그때 학생으로 있던 Jack Nicholas 도 유명 해졌슬때였다. 축구를 알게 되고는 주말이 기다려지고 주말이 축구로 소비되고 만다. 축구경기 시작이 오후 1 시인데 아침 9 시부터 밖에서는 파킹, 파킹 외쳐대고 추운 날이면 담요를 들고 나갔다. 돌아올 때는 목이 쉬어서 말도 할 수 없게 될 때도 많았다. 축구가 끝나면 또 다들 우리 집으로 몰려든다. 교통이 막혀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기던 지던 축구이야기가 끝일줄 모르고 같이 저녁을 마치고 나서야 헤어진다. 미국이 과학발전에 공헌한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스나 운동분야 역시 그 공헌은 과학 발전 이상일지도 모르다. 많은 운동경기가 미국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의 야구는 미국서 수입한 경기이다. 미국을 이해하려면 미식 축구를 알아야 한다. 전국의 미국대학교는 옛날부터 big ten league, ivy league(football conference)등 이름으로 비슷한 학교들끼리 모여서 축구시합을 하는 전통이있다. 물론 프로축구 리그도 도시별로있다. 다 민족이 뭉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매체가 미국에는 있는 것이다. 가을에 시작하여 추운 겨울을 미국인들은 고등하교, 대학교, 그리고 프로팀의 응원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내고 있다. 1 월말/2 월초 경에 치르는 Super Bowl 은 미국에서 가장 큰 행사가 되어있다. 물론 야구도 있고 농구도 있다. 52

60 [텍스트 입력] 축구는 초면의사람 들도 쉽게 친해질수있는 공통 화제가 된다. 나도 축구 없이 못사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이 때 같은 축구광의였던 이창민씨는 나중에 한국반도체 부천공장을 설계했고 그 공사 마무리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 축구는 캐나다로 수출되어 Canadian Football league 가 생겼다. 워낙 육체적으로 심한 운동이어서 금지해야 할 것 같은데도 심한 부상을 예측하고 미리 구급차를 대기해놓고 하는 운동이다. 많이 다치고 평생 불구자가 되 기도한다. 이런 운동이 미국의 국기처럼 되어있는것을 여기에 빠저보기전에는 외국인에게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Motorola 반도체 공장으로 가다 하이오 연구실에서 내 손으로 반도체 소자 Transistor 를 만들고 싶었으나 특수장비가 없는 연구소에서는 쉽지가 않았다. 나는 일직부터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흥미를 갖고 있섰다. 특히 정적이 아닌 그 어떤 전기적 기능 동작을 하는 것이어야 만족했다. Transistor 를 만들고 싶었다. 이론적인 공부도 많이 했다. 나의 학위논문이 Transistor 만드는 방법이다.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연구소를 외면하고 반도체 제조업체인 모토롤라를 택했다. Bell Lab 에 가 계시는 강대원 박사에게 Phoenix Arizona 에 있는 Motorola 로 간다고 인사차 전화 했더니 잘못 생각한 것 이라고 지금이라도 당장 IBM 연구소로 가라는 거다. Ph. D 를 하고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Ph. D 를 쉽게 따서 그런지 그런 것 별로 대스러운것 같이 느껴지지도 안았다. 내가 가는 곳은 이름만 연구소지 생산공장 이라는 것이다. 나는 연구소의 권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내가 직접 Transistor 를 만들 수 있다는 것과 따뜻한 겨울에 큰 선인장과 Palm Tree 정경들이 그 결정에 한 몫을 했다. 이삿짐이라곤 책상 자 몇 개 정도였다. 잡동사니들은 새로 유학 온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큰 이삿짐 전용추력에 자동차 한 대만 덜렁 태워 보내고 사람은 비행기로 Phoenix 로왔다. 새 희망으로 시작되는 새 직장이다. 내 Boss 인 소장은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으나 어쩐지 분위기가 썰렁했다. 알고 보니 몇몇 연구원이 그날 사표를 내고 나갔다는 것이다. 피닉스는 라스베가스와 마찬가지로 사막에 세워진 인공도시다. 본사를 시카고에 둔 모토롤라는 일찍이 서남부의 사막도시에 첨단기술 기지를 계획하여 Solid State Div. 을 Scottsdale 에, 그리고 곧이어 Semiconductor Div. 을 피닉스에 건설하여 사막이 하루 아침에 High Tech Industry 로 변한 것이다. 반도체의 선발업체들이 모여있는 보스턴 하이텍회사들은 나갈 길을 Hybrid IC 의 고도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Texas Instruments 가 텍사스에, 모토롤라가 피닉스에, 그리고 Fairchild Camera and Instruments 가 캘리포니아의 Silicon Valley (그 당시는 아니였슴) 에 Silicon Single Wafer 중심의 대량 생산기지를 만들었다. 모두가 새로운 개척지였다. Technology 의 선구자들로 TI 는 Jack Kilby 를 중심으로, Fairchild 는 팔로알토의 Shockley Transistor Lab 에서 옮겨온 Noyce, Moor 가 이끌고 있었다. 모토롤라는 뒤늦게 대학교수였던 I.A.Lesk 박사를 영입해 새로 만든 Central Research Lab 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Phoenix 옆 동내인 Scottsdale 에 있던 Solid State Div. 의 연구 관련 인력을 모두 피닉스의 Central Research Lab 으로 합류시켰다. 이들은 대부분이 동부 회사들 저럼 Hybrid IC 신봉자 들이었다. 고성능 회로를 만들려면 절연 사기 판 위에 개별적으로 선택된 Transistor, resistor, capacitor 등을 올려놓고 이들을 연결해서 만든다. 즉 Hybrid IC 다. 이러한 고성능 회로는 큰 Wafer 에 한거번에 수백 개 수천 개의 transistor 를 만드는 Monolithic process 로는 어림도 없다는 주장이다. 53

61 [텍스트 입력] 새로 온 소장은 반도체 공업의 앞길을 Hybrid IC 가 아니라고 판단 이들의 예산을 대폭 축소했던 것이다. 여기에 반발한 몇 연구원이 사표를 내고 나갔다고 했다. 나중에 듣기에는 연구소 소장도 자기네 중에서 나오는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Solid State Div. 에서 연구인원이 모두 이사 와서 합류 하자마자 또 연구소의 확장이전 계획이 발표되고 책상 노을 장소도 없는데 연구원을 계속 뽑고 있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고 나역시 연구소의 새로운 부서를 맡게 되어 있었지만 장소, 인원 모두 무 에서 시작해야 했다. 넓은 방에 많은 책상을 서로 맛 대고 있스니 잡담하기에 아주 좋게 되어 사람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소재가 여기에 있섰다. 4.9 연구소내 갈등 - Motorola 로 온것 후회 내 Boss 가 나를 소개할 때 좀 과장된 것도 있었다. 회의에서나 일반 대화에서도 나를 떠보려고 일부러 불필요한 것도 물어보고 또 조크도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이들과 친하게 지내야겠는데 이미 이들의 태도는 너 Chinese (이들에게는 모든 동양인이 Chinese 이다.) 얼마나 잘 났나 두고 보자 하고 벼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특히 이들의 영어는 오하이오에서 경험하지 못한 말투로 저속한 slang 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들과 가까워져야지 하는 생각으로 한번은 이들과 같이 저녁에 Bar 에 갔다. 나는 술을 안 하기 때문에 술에 대한 상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아예 술을 못한다고 했으면 좋았는데 같이 어울리려고 알지도 못하는 칵테일을 시키는 데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고 자기네들끼리 slang 이 오고 가는데 한마디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어차피 친구가 못될 거라면 거리를 두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내가 오하이오에 있을 때는 나를 외국인으로 취급해서 영어를 자기네들 같이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내 주위에 있는 미국인은 교수, 내 비서, 그리고 내가 뽑은 사람들로서 막말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고 적어도 서로 respect 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오하이오를 떠날 무렵에는 일상생활에서 영어 때문에 지장을 받는 일은 없었고 그래서 영어가 문제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섰다. 여기 모토롤라에 오니까 사정이 다르다. 나도 자기네들과 같이 경쟁하는 경쟁 대상이고 말 못한다고 해서 사정 봐줄 것이 못되는 것이다. 특히 나의 경쟁 대상자들은 이것을 나의 약점으로 보고 막말로 엿 먹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언어란 시험공부 식으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하이오에서 식당 접시 닦기 영어가 진짜 영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따져 보면 막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미국사람과 대화할 기회는 나에게는 없었다. 회의석상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건네 왔고 때로는 비꼬는 말의 공이 나에게 넘어 왔다. 나는 같은 수준의 회답을 하지를 못해서 그 자리에서 넘어온 공을 뭉게 버리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즉, 겉으로는 태연히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멸시(?)를 당하고도 참고만 있어야 했다. 아침에 출근이 싫어졌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연구소는 이런 환경은 아닐 거라 생각하니 모토롤라로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때 강대원 선배의 말을 들었서야 됐다. 이젠 늦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여러 해를 살수 있는지 아니면 곧 직장을 옮겨야 하는지 고민이 시작 됐다. 아마 이때 누가 나에게 조언을 원했다면 절대 생산공장 같은 데는 가지 말라고 했슬것이다. 많은 외국 유학생들이 자기가 정든 학교에 남는 것도 충분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우선 일하는데 마음이 편해야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게 되었고 나도 속히 내 주위에 내 사람이 있어야겠다. 54

62 [텍스트 입력] 4.10 내부서 만들기 내 Boss 가 하루속히 사람들을 뽑으라고 했다. 나도 동의하고 있섰스나 아직 장소가 없다. Production 에서 회사가 생길 때부터 일해온 Process Engineer 를 한 사람 뽑았다. 매일 같은 일만 반복하는데다 아무런 Incentive 가 없다고 해서 불만인 친구인데 연구소에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데 도와달라고 했더니 무척 좋아했다. 월급도 많이 올려주어서 일을 열심히 했다. 나는 시간이 나면 이 친구를 데리고 Production Line 을 구경하고 Reject 된 샘플들을 얻어와서 분석하고 일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연구소가 들어갈 장소가 비기 시작했다. 이들이 완전히 새 건물로 이사 가려면 앞으로도 수개월 걸린다고 했다. 우리도 가능한 한 속히 옮겨야겠다. 나의 Boss 는 정말 사면초가였다. 혼자서 열심히 하는데 협력해야 할 사람들이 협력은커녕 방관하고 뒤에서 불평만 하는 것이다. Solid State Division 에서 온 사람들이 문제다. 이들은 교수출신이 뭤을알아서 이 연구소를 끌고갈것이냐? 잘못되기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옆에서 보기가 딱하다. 또 하나는 내 Boss 가 유태인이다. 말만 들었지만 같은 백인들 간에도 이런 갈등이 있는 것을 처음 체험했다. 내 Boss 의 이름부터가 문제다 First name 이 Israel 이다. 물론 이스라엘 이란 나라가 이차대전 후에 생겼스니까 그전에 지어진 이름이지만 누가 보나 유태인이다.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백인들 중에서 유태인을 무조건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내 기분으로는 협력안하는 자들을 모조리 해고시켜 버렸스면 속이 시원 할 것 같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이것도 일종의 권력 싸움이다. Lesk 박사는 나를 중심으로 이상적인 Elite 연구 팀을 구상하고 있섰다. 그러면서 하루속히 고급 두뇌들을 뽑으라고 재차 독촉했다. 내가 유태인도 아니고 다른 백인측도 아니라서 나를 중심으로 했슬 가능성도 있섰다. 나는 인사과에 Ph.D. 소지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서류심사에서 마음에 들면 Phoenix 로 부부동반으로 초청을 한다. 낮에 Interview 를 하는 동안 배우자가 있스면 인사과 직원이 배우자를 데리고 시내 관광 겸 거주환경을 보고 다니게 된다. 낮 interview 에서 꼭 채용하고 싶은 사람이면 내가 직접 저녁 식사와 그 후의 entertainment 까지 가게 된다. 그때 우리가 좋다고 해서 채용 offer 를 하는 경우가 약 50% 그리고 우리의 offer 를 받아들이는 것도 50% 정도로 Interview 해서 25% 정도가 채용됐다. 채용되면 이사비용과 Hotel 같은 임시숙소 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한다. 내 부서에 박사학위 소유자 5 명을 채용했다. Ohio 에서 같이 일한 중국학생 Joe Tsai 는 아직 졸업을 못하고 있섰다. MIT 에서 John Keil 을, British Columbia 대학 에서 Ron Burgess 를 Illinois 대학에서 Clearence Lund 등 모두 Ph.D 소지자이고 한국 사람으로는 New York Polytech 에서 우대식 박사 New Mexico 대학 에서 권영덕 박사 그리고 UCLA 대학 에서 김정규박사등 이였다. 김정규박사는 곳 다른 부서로 갔다. 우대식박사는 우리나라에 나와서 전자연구소 부소장도 지냈다. 잠깐 삼성 에서 일했던 Stanford 출신인 강찬술 박사도 이때 interview 를 했섰다. 내 부서에 박사들만 나를 포함해서 6 명이나 됬다. 비꼬는 말도 들렸다. Dr. Kang 은 Ph.D. 들만 모아서 Lesk 를 위 해서 원자탄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거냐고. 내가 뽑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뽑은 것만은 아니 였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핸디캡이 있었다. Phoenix 라는 곳이 더운 사막 한가운데 강제로마든 도시로 일반 지식인이 선호하는 환경이 아니다. 그때만해도 신생 도시로 시내에 큰 소 사육장 (stock yard)이 있어 바람이 불면 불쾨한 냄새가 온 도시에 퍼지곤 했다. 또 강대원박사 말대로 여기는 생산공장이다. 박사학위 소유자가 갈 곳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연구소 조직도 도움이 안됐다. 내가(chinese) 자기 Boss 가되고 그 위는 유태인이다. Chinese 도 싫고 유태인도 싫다. 이러한 이유로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섰슬것이다. 55

63 [텍스트 입력] 4.11 Surface Studies 연구실 내가 연구소 소장을 찾아가서 새 시설을 설치하고 하루 속히 이사를 하자고 했더니 일이 생각같이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Production Line 이면 수익과 직결되어서 비능률적인 행정은 용서가 안 되는데 연구소의 능률이란 평가할 수도 없고 여기 연구소는 독립되어 운영되기 때문에 누가 걱정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내가 오하이오에 있을 때 연구소 설립에 참여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자기는 연구활동만 알고 있었지 나의 다른 경험을 모르고 있었다고 도움을 청하여 왔다. 별도로 퇴근 후에 신간을 내서 나의 경력을 설명했다. 자기 권한으로 많은 예산을 Semiconductor Div. 의 간섭 안 받고 집행할 수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정말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조건을 냈다. 전 회사를 뒤져서 가장 유능한 비서/사무원을 한 사람 내게 붙여달라고 했다. 어차피 많은 인원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새 비서가 왔다. 전 CEO 의 비서였었는데 지금은 marketing 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CEO 비서에서 marketing 으로 갈 때 직책상 월급이 약간 줄었는데 연구소로 오면 다시 월급을 올려주기로 했다. 회사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매우 유식했다. 우리 연구소가 들어갈 장소가 정해지고 이미 Production manager 는 새로운 건물로 이사를 나가서 그 방이 비어 있었다. 나하고 내 비서는 당장 그 방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있던 방은 출입하려면 여러 사람들 있는 곳을 통과해야 되는데 여기는 아주 출입이 자유로웠다. 이젠 내가 실력발휘를 할 때가 왔다. 앞으로 새 장소로 옮겨가는 Schedule, production 에서 안 쓰게 되어 창고로 보내는 설비 목록, 새로 사들일 물건들의 명세서를 만들고 또 새 연구소 운영규칙을 Ohio 연구소에서 쓰던 서류양식을 거의 그대로 베끼고 여기 Semiconductor Div. 에 맞출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맞추어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여행이나 출장에 관한 규칙 등이다. 옛 사장 비서의 실력을 발희했다. 내 비서를 통해서 나는 Organization 의 천재라고 소문이 났다. 제일 좋아한 사람은 내 Boss 였다. 일이 풀리기 시작했고 불평불만 분자들은 입을 다물고 종용해졌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무시해 버렸고 내가 그러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June 이 제의해왔다. Solid State Division 에서 온 사람을 한 사람 뽑자는 거다. June 은 연구소 돌아가는 것을 이제는 나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섰다. 나는 이들하고의 접촉이 거의 없다. June 보고 한 사람 골라 보라고 숙제를 주었다. 방이 비워지면 내부를 확 뜯어서 Remodeling 을 해야 되는데 연구소 자체 노동작업부서는 없고 생산부서의 노동력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항상 생산부서가 바빠서 우선권을 빼 겨셔 연구소는 일이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우리 소장은 그건 할 수 없다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나는 내 비서와 해결책을 상의해 보았다. 외부 노동력을 하청 형식으로 드려오자는 제의이다. 연구소의 독립운영이 보장되어 있어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사내에서 알아보니까 아무 문제는 없는데 다만 생산부서의 비밀유지 그리고 도난사고만 관리할 수 있다면 OK 이다. 곧 외부 사람을 써서 연구소 이전작업을 하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내 boss 소장에게 제의했다. All OK 이다. 외부 일꾼이 들어왔다. 특별 명패를 가슴에 달도록 했다. 모두가 저 사람들이 뭐냐고 물었다. 상부에서는 다 아는 일이였으나 일반 직원들에게는 혼란이 왔다. 우리 소장과 회사사장(CEO) 이름으로 공지사항을 회사 여러 곳에 붙혀서 모두에게 알렸다. 이젠 스케줄이 우리 마음대로 될 수 있게 제도를 만든 것이다. 제일 먼저 내 Pilot line 을 설치했다. Production Line 에서 폐기하는 생산설비를 무상으로 인계 받았다. 내 비서는 연구소 확장이전 본부의 본부장 역할을 했다. 웬만한 잔일은 내 비서가 직접 order 를 내고 또 감독도 했다. 매우 유능한 분이었다. 만일 남자였다면 그때 공장장이 56

64 [텍스트 입력]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새로 설치된 Pilot 생산 line 의 점검, 보수 개량 등 내 소신껏 그것도 필요한 인력을 모두 투입해서 소규모의 생산 line 이 가동되었다. 내가 직접 Transistor 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Diffusion Room, Photo processing Room, Metal deposition Room, Special Processing Room, Test Room,, Assembly Room 등 나만의 왕국이 다시 생겼다. 나의 소원이 성취됐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모토롤라에 오게 되어서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자 기능공 즉 Diffusion operator, Photo process operator 들을 전 공장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들로 뽑았다. Production 에서 온 Dennis 가 가능하면 미혼의 미인만을 뽑아 왔다. 전국에서 몰려든 여성 기능공이 3500 명이나 되고 대부분이 젊고 미혼이라서 뽑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해명했다. 내 Boss 가 나의 실력을 다시 봤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비서에게서 들었다는 것이다. 회사 연구소의 많은 행정양식이 내 아이디어라고 알고 있었다. 이것이 모두 오하이오에서 갖고 온 것들인데--. 또 영어가 모자라서 싸움 한번 못해 보고 회의 중에도 그냥 꾹 참고만 있었는데 남의 사정은 모르고 남이 뭐라고 해도 이를 무시하고 자기 일에만 주력하고 인내력으로 이들을 설득했다고 높이 평가해 주었다. 이제는 그들이 끽소리 않고 잘 따르게 만든 것도 리더십이라고 했다. 일년에 두 번 있는 개인 성적평가에서 A+ 학점을 받은 셈이다. 또 책정된 장비나 기타 계기 등의 예산도 나는 반 정도도 쓰지 않아도 일이 되는데 다른 부서는 돈을 더 달라고 한다고도 했다. 사실 내 비서가 사내에 아는 사람도 많고 수단이 좋아서 내가 원하는 장비나 측정장치들을 모두 폐기처분 하도록 설득해서 이들을 무상으로 받아 온 것이다. Production 에서는 새것을 살 기회가 생겨서 이야말로 Win Win 수법이었다. 회사가 돈을 잘 벌어서 확장하고 있슬 때라서 우리의 계획이 쉬게 이루어 젔던것이다. 나는 또 욕심을 내서 장소는 제일 크게 잡았는데 장소 비용은 연구소 전체로 내고 세분 되어 있지는 않았다. 새로 시설된 Pilot Line 은 내가 만들고 싶은 Transistor 종류는 다 만들 수 있는 최신장비다. 다만 그 용량이 적다고 폐기 처분했을 따름이다. 그때만해도 멀정한 새 기계를 페기처분 하는 것을 나는 이해를 못하고 있섰다. 나는 무상으로 얻어온 장비를 내가 원하는 대로 개조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설치되고 뽑은 사람들도 전 사내에서 특별히 고른 사람들이다. 생산부서와 달리 Coffee Break 나 출퇴근 시간을 나는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잇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고들 했다. 때때로 퇴근 후에 남아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집에 가라고 했더니 오늘 늦게 와서 좀 더 일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사무실 여직원처럼 작업복 복장에서 사무실 복장과 하이힐을 신고 오게 되었다. 몇몇 여자 operator 를 시간 직에서 월급제로 바꾸어 주었다. 이젠 Ohio 에있슬때보다 더 큰 내 왕국이 만드러젔다. 내가 선정한 최신시설, 전 회사에서 골라서 뽑아온 숙련공, 전국에서 뒤저온 고급두뇌, 이젠 더요구할것이 없다. 모두가 Dennis 와 전 사장비서의 덕분이다. 미국서 제일의 회사에서 최고시설과 최고숙련공 들이라면 전 세계에서 최고 일 것이다 생산장비 사용률 2 배 이상으로 증가 생산부서의 문제는 그 동안 보고 들은 것으로 충분히 파악이 되었다. 급격한 생산품목의 증가로 그 생산방식의 종류 역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새 Transistor 가 개발되면 여기에 전용 Line 이 생긴다. 생산량이 증가하면 문제 가없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는 새 시설이 놀게 된다. 모두가 인정하는 문제라서 자체 내에서 한 때는 해결을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현재의 57

65 [텍스트 입력] 철칙은 잘 돌아가는 생산라인은 절대로 다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양이 많든 적든 일단 어떤 spec 에 맞추어 놓은 것은 변동하지 못하게 되어 생산설비만 계속 늘리게 되었다. 극히 비능률적 확장의 계속이다. 생산 관련 부서장 회의에서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났다. 자체 해결은 실패했다고 인정하고 모두가 회의적이었지만 연구소는 두었다 뭐하는 거냐 연구소로 문제가 넘어왔다. 그 임무를 내가 떠 맡았다. Transistor 의 특성은 크게 따져서 1) 표면에 그려진 모양과 크기 2) P-N junction 의 깊이 3) 표면과 내부의 불순물의 농도 및 분포상태의 3 가지로 결정이 된다. 우선 가장 종류가 많은 2N xxxx 의 Small Signal Transistor 의 생산 라인부터 정비하기로 했다. Geometry 를 SL-1 과 SL-2 의 두 가지로 통일하고 Starting Material, Base diffusion, Emitter duffusion 을 특성에 따라 3 가지로 분류했다. 그래도 총변수는 2 x 3 x 3 x 3 = 54 즉 54 종류의 Transistor 가 가능하고 NPN / PNP 까지 합치면 기본 분류가 100 가지 이상이 된다. BVcbo 그리고 Current gain, hfe (Beta) 분류를 하게 되면 x 10 은 쉽게 되어 1,000 가지의 특성이 다른 Transistor 가 만들어진다. 우선 Production 의 중요 간부들을 모두 모아서 어떠한 방법으로 이 혼란스러운 현황을 해결하려고 하는가를 자세히 예를 들어 설명하고 의견교환도 했다. Transistor 가 왜 이렇게 종류가 많아졌는지 그 이유도 알기 쉽게 설명했다. 대부분이 진지한 태도로 우리에게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기성 도면을 UP GRADE 하고 Assembly 할 때 Bonding 을 쉽게 bonding Pad 크기 등을 고쳤다. 우리 부서의 Operator 들은 모두가 Production 에서 Supervisor 이상의 경력 소유자이고 그 중에서도 제일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서 취지만 설명하면 결과까지 분석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이 내가 모르고 있는 과거의 생산 라인 History 를 나에게 가르쳐 주어서 문제 해결과 생산부서와의 의사소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시험 도중에도 의문점이 있으면 자기네들이 일하던 곳으로 다시 찾아 가서 해답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 이상 더 이상적인 연구소 - 생산라인의 협력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 부서의 Operator 들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Power 를 주었다. 똑 같은 Process 도 좀 의심스러운 것은 우리 연구소와 생산라인에서 동시에 테스트도 진행시켰다. Dennis 가 신이 나서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고 있섰다. 어떤 생산부서에서는 우리가 하는 테스트에 우선권을 주기도 했다. 어떤 operator 는 Coffee Break 때 이들에게 donut 을 사주었다고도 했다. 모두가 구두로 부탁하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일(개혁?)을 추진했다. 나로서는 큰 모험을 하고 있었다. 하급 직원이 생산부서에 출입하면서 구두로 OK 만 받고 일을 한다는 것은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문책 대상이다. 어느 곳이나 사람이 일하면 개인적 불화, 부서간의 알력, 책임회피, 단순한 질투 등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Organizatin 의 Control 을 위해서 또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사고의 방지로도 하급 직원의 개인 접촉을 금지하고 필요하면 반드시 상급자의 허락을 문서로 받도록 하는 것이 보통 큰 회사의 운영방침인 것이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한두 번 내 부서의 사람들이 너무 설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내 비서를 보내서 납득을 시킨 일은 있었다. 그 후로는 또 연구소 생산라인 간의 어떤 마찰이나 오해 등이 없나 첩보활동도 시켰다. 집안일로 때때로 늦게도 출근하고 또 일찍 퇴근한 일 들을 모두 눈감아 주었다. 이들이 모두 나에게 보답형식으로 좋게 돌아오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대성공이다. 생산시설의 이용률이 두 배 이상 향상했다. 나는 중간 중간 테스트 결과분석에 Production 사람들과 우리 Operator 들을 모두 참석시켜 자기네들도 이 일(개혁?)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주었다. 현존 시설로 58

66 [텍스트 입력] 두 배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측도 못했던 큰 성과이다. 문제 해걸에 회의를 가졌던 사람들도 반도체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추진한 것과 자기네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추진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때 내가 개발한 NPN 의 2N2222 Series 와 PNP 의 2N2907 series 가 업계의 표준 Transistor 가 되었다. 이야기는 내가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떠나던 1976 년으로 앞서 간다. 삼성이 내회사를 인수하고난 후에도 수년간 내가 떠날 때까지 회사이름은 한국반도체로 그대로 유지했는데 그 당시 나의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에서 만든 C-MOS LSI 제품은 전량이 홍콩 일본 스위스 시장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삼성전자는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 는 전량 일본에서 조달했다. 이 때 높은 분이 왜 한국반도체에서 Transistor 를 안 만드느냐고 물었을 때 강박사는 C-MOS 에는 전문가일지 몰라도 기본 Transistor 는 만들 줄 모른다고 보고 됐다고 그 자리에 있던 한 분이 나에게 이야기해 준일이 있었다. 내가 모토롤라 에서 많은 세계 표준 transistor 를 개발해낸 지 13 년 뒤의 이야기다. 나는 그때 값이 싼 Transistor 의 제조(나에게는 개발은 이미되어있슴)를 반대하고 있섰다. 내가 고만두고 나오자 LSI C-MOS 공장은 높은 분의 한마디로 인건비도 안 나오는 Bipolar Tr 공장으로 전락하고 있섰다 Mask 사진의 정밀도 향상 내 Boss 가 찾아왔다. Camera 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Camera 는 갖고 있지만 남보다 특별한 지식은 없다고 대답했다. 자기도 나와 마찬가지인데 현재 만들고 있는 Mask 정밀도가 좋지 않아 고밀도 IC 를 만드는데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흑백사진술로 크게 만든 IC / Transistor Pattern 을 축소하고 같은 Pattern 을 step and repeater 라는 기계로 반복 촬영해서 Wafer 위에 다시 사진술로 수많은 원본 Pattern 이 옮겨진다. 그 전부터 문제를 제기해 왔으나 워낙 분야가 달라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는데 이것도 결국은 반도체연구소에서 해결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다. 그래서 나더러 문제를 한번 검토해 보라는 것이었다. 박사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내 Boss 자기도 박사다. 우선 하던 일을 대충 정리해 놓고 Mask 만드는 곳을 찾아 갔다. 지하실에 모든 설비가 되어 있고 고 정밀 Camera 빨간 불, 노란 불을 켠 형상실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최고급이다. 우선 시설 구경을 했다. 문제를 알고 싶다. 해결해 보라고 명령(?)을 받았다고 취지를 이야기했다. 자기네들은 좋다는 것은 다 하고 있는데 정밀도가 나쁘다는 것이다. 우선 진동을 피할려고 Machine Shop 이나 창고 같은 곳은 멀리하고 지하실에 Camera 를 설치했고 온도도 다른 곳보다 더 정밀히 조절하고 있었다. 물론 Camera Lens, 감광용 Film 등은 모두 그 당시에는 제일 정밀도가 높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렌즈나 감광필름이 낼 수 있는 최고 정밀도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진동을 피해서 정밀도가 더 필요한 Mask 는 모두가 퇴근한 뒤에 만든다고 했다. 나도 한심하다. 전문분야가 다르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문제해결을 하겠다고 찾아 왔으니 말이다. 아마 나에게 설명하는 사람은 더 한심했을 것이다. 우선 내가 공부를 해야겠는데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 마냥 시간만 끌 수도 없는 사정이다. 대개 연구소로 오는 문제는 자기네들이 하다 하다 안되면 마지막 판에 급해져서 자기네들도 별 수 있겠냐 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오는 것인데 그래서 시간이 급한 것이다. Mask Shop 을 다시 찾아 갔다. 일하는 것을 관찰도 했다. 외부인사 출입금지 지역이 많아서 한 곳에서는 쫓겨나기도 했다. 높은 책임자에게만 허가를 받았지 하급 직원의 허가는 안 받았으니까 당연하다. 59

67 [텍스트 입력] 도서관을 찾았다. 전문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어려운 책은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내가 읽고 이해할 만한 책들을 보았다. 상식은 좀 늘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Camera 회사와 필름 공급처에 전화 문의도 해보았으나 Sale 관계 외에는 잘 상대도 해주지 않는다. 설득력 있는 유창한 영어실력이 필요한데 내 영어로는 불가능하다. 일차적으로 남을 설득하는것은 말이다. 내가 아는 한국말로도 나는 남을 설득하는 말 제주는 갖고 있지 않다. 일단 이들 회사를 방문하기로 해서 출장을 갔다. 최고 최신 제품은 모두 우리 회사에서 쓰고 있었다. 새 렌즈가 나왔다고 해서 꽤 비싼 것이었는데 사자고 해서 일본에서 특별히 비행기 편으로 부쳐 왔다. 필름도 더 좋다는 것을 샘플로 얻어도 오고 사기도 했다. 내가 테스트용 Pattern 도 만들었다. 사진관계는 아무 시설도 없는 나의 연구실이어서 모든 테스트는 Photo shop 에 부탁을 해서 이루어진다. 매우 비협조적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방해만 한다는 불평이다. 새 렌즈와 새 감광필름 다 테스트했지만 별 다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 갔다. 회의 때 나의 보고는 No new findings 였다. 하루 종일 이것저것 생각도 해 보았으나 더 이상 내가 혼자서 할수있는것은 없고 체면을 세울 구실도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그저 최선은 다 했지만 모르겠다 로 끝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어서 하루 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뭐라도 하는 것이라고 남이 보겠지만 그 당시는 그저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무의식적으로도 사물은 보는 눈이 정밀사진이었다. 밤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리조나는 하늘이 맑은 날이 많아서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저런 것이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얼핏 떠올랐다. 별의 정밀사진은 지구상에서 찍을 수가 없다. 공기 층이 방해를 해서 별이 흔들리게 보인다. 즉 반짝거린다. 공기 층의 작용이다. 공기 층이 흔들림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 공기 때문이다. 이 거창한 장치를 모두 진공 속에 넣어서 사용할 수는 없다. 적어도 당장은 불가능하다. 하여튼 테스트는 한번 해보아야겠다. 열심히 설득해서 사진을 가능한 한 가까이서 찍었다. 밖으로 나갈수록 직선이 찌그러지지만 그것은 다른 이유이고 확실히 정밀도가 향상 되었다. 가까이서 찍으면 필름은 자기 실력 발휘를 하는 것 같다. 실제로는 가까이서 찍는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피사체를 작게 만들어야 되는데 IC 의 화로가 복잡해질수록 피사체인 IC 도면은 커지기만 하는 것이 발전의 방향이었다. 공기 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불과 10m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그것도 일정한 온도의 공기가 정밀도를 해칠 수가 있을까?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움직이면 사진이 흐리게 나오는 것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진동이다.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는 커다란 철근 I- Beam 이 두 개가 기초를 이루고 있어서 진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진동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결론이 나왔다. 우리는 몸으로 못 느끼고 있지만 지구는 항상 진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공사현장은 인공진동이 주위를 흔들지만 지구 속에서도 인공진동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진동이 계속 되고 있어 별이 반짝이는 것과 같은 진동효과를 지구자체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철근 I-Beam 은 이런 진동은 차단 못하는 것 같다. 첫째 철근은 건축자재로 휘청 휘청하여 부러지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철근 양단이 따로 놀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리는 한덩어리로 진동하거나 양단이 따로 놀게 되면 그 진동을 흡수 못하고 깨지고 만다. 유리도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물건으로 만든 기초(Base)가 필요하다. 테스트용 구조물을 만들어서 실제로 사진을 찍어 demonstration 을 해야겠다. 미 공군사령부가 록키산맥 속에 원자탄 진동을 피하기 위해서 스프링 위에 건설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스프링으로 카메라 기초를 만들어야겠다. 스프링은 여기에 맞는 것을 곧 구할 수가 없었다. 특별히 주문을 해야 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우선 마음이 급해져서 간이 60

68 [텍스트 입력] 시험 Base 를 땅을 파고 스폰지 같은 진동차단제를 약 1m 정도를 채우고 그 위에 1m 정도의 시멘트를 부어서 카메라 대(Base)를 만들었다. 아직도 퇴역을 안 한 보조 Mask 제조장치가 있어서 이를 옮겨놓고 렌즈와 기타 최신 부속을 써서 실험했다. 성공이다. 문제는 진동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극히 상식적인 문제였다. 다만 땅이 항상 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실감을 못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재고를 안 했던 것이다. 회사에서 Photo shop 을 조용한 장소를 택해서 특별 진동 차단 층을 만들고 그 위에다 Camera 를 설치했다. 이 건설을 회사 극비로 해서 외부누설을 방지했다. 비밀 자체가 워낙 상식적인 사항이라 모토롤라가 얼마 동안이나 이 비밀을 유지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후로는 Photo shop 의 카메라는 무진동 기초를 써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 되었다. 물론 기초 지구는 항상 진동 하고있다 시공이 시공 기술에 따라 잘된 것도 있고 못된 것은 돈만 들이고 아무 효과도 없슬수도있다. 내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이렇게 시멘트로 무식한 구조물을 만드는 일도 해보았다 모토롤라 PNP transistor 가 No.1 내 부서의 이름을 Surface Studies 라고 하자고 내 보스가 제안해 왔다. 해군에서 잠수함이 잠망경을 올려서 해상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Surface Study 이다.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을 못 잡았다. 반도체에서 Surface Studies 가 뭐냐고 내가 물었다. 앞으로 반도체는 그 자체가 Surface 에서 동작하는 Device 가 되고 문제가 모두 Surface 에서 온다고 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날 내 보스의 말은 매우 정확했다. 반도체 선구자로 T.I.의 Kilby 나 Fairchild 의 Noyce (나중에 Intel)들을 들지만 그들은 Digital 이란 Application 에서만 보면 선구자 같지만 진짜 물리 이론 면에서는 나는 내 Boss 였던 I.A.Lesk 를 그들의 앞에 내세우고 싶다. 미국에서 그 당시에 이 사람보다 더 잘 반도체소자의 나갈 길을 예축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반도체소자 제조기술에서 노벨상을 준다고 하면 나는 당연히 I.A.Lesk 박사를 추천할 것이다. Surface Studies 는 처음에는 Bipolar Transisor 의 Reliability 문제 MOS Transistor 관련문제가 모두 포함되는 연구분야를 의미했다. 오늘날의 반도체소자의 발전이 이 surface Study 에 서 온 것이다. Reliability 문제 해결이 여기에 있었고 surface 문제를 이해하게 되니까 MOS Transistor 의 동작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MOS 반도체 즉 Surface device -표면 반도체-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초기단계에서 Surface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서 Production 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시험실 에서도 똑같이 재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의 실험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그 시설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모토롤라가 생산하고 있던 PNP transistor 는 전 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신뢰도에서 타사 제품이 따라올 수가 없었다. Jack Heanechien 의 Annular Ring 특허가 PNP 의 문제를 남보다 일찍이 해결해서 시장점령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후에 이 특허로 Royalty 를 받기 시작했다. 특허의 도움으로 타사에서 PNP 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신뢰도에서 모토롤라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Motorola 의 Production 에서는 PNP 의 제조문제는 더 이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때때로 전 Lot 가 불량이 되고 고전압 제품 개발에 문제는 더 심각했다. Annular Ring 이 PNP 의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최근에 와서는 이 약이 듣지 않게 되었다. Production 에서 SOS 가 왔다. 문제를 알아보니 Surface 관련 문제인 것이 확실하다. 시간이 급하다고 야단이다. 61

69 [텍스트 입력] 샘플로 만든 PNP 는 모든 테스트에 합격했고 신뢰도 역시 아무 문제없이 통과되어 큰 주문을 받았는데 막상 생산에 들어가서부터는 아무리 만들어도 같은 특성이 나오지를 않고 전량 불량이 되었다고 했다. BVcbo 즉 Base 와 Collector 의 Breakdown 전압이 150V 가 되어야 하는데 120V 이상은 올라가지가 않고 겨우 통과된 것도 신뢰도 테스트에서 전멸해 버렸고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Order 를 받은 것은 납기를 연기하고 손해배상을 해주면 해결되겠지만 더 큰 타격은 PNP 가 No. I 이라는 회사의 체면이 깨어지고 PNP 의 Annular Ring 특허의 로열티가 이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잘못하면 Annular Ring 특허가 엉터리라고 소문이 나게 되면 특허료도 못 받게 되어 앞으로의 장사에까지 큰 영향이 있게 될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나는 우선 문제가 무엇인지 규명해야겠다. Test Transistor 를 설계하는데 Mask 부터 만든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쓸만한 Mask 를모두 뒤졌다. 이미 만들어진 Big Eye 라는 별명의 mask 를 쓰면 되겠다. 곧바로 복사해 내서 내 Pilot Line 과 Production Line 에서 똑같이 돌려서 Test Transistor 를 제조했다. Production 에는 우리 측 사람이 가서 전 과정을 같이 돌렸다. 내 Pilot Line 에서 만든 PNP transistor 는 모두 합격인데 Production 에서 만든 것은 전량 불합격이 되었다. 우선 급한 불은 끄고 보자고 우리에게 PNP 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이 왔다. 자기네 사람들이 와서 우리 Pilot Line 을 24 시간 가동해서 사용하고 우리가 감독만 했다. Order 받은 것을 시일 내에 납품했다. 연구실에서 완전한 Pilot Line 은 가져서 뭐하냐고 하던 이들이었지만 거꾸로 이런 시설이 연구소에 있어서 자기네들이 살아났다고 고마워했다. 이 사실이 공식 보고서가 작성되기도 전에 경영 고위층으로 소문으로 전달됐다. 나는 아무런 보고서도 만들지 않았다. 자연히 연구소의 위상이 올라가고 신뢰가 깊어졌다. 이젠 아무 때나 production 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오게됬다. 모두가 구두이고 아주 편하게 의사 소통이 되고 간단한 실험이나 문제의 처방도 말 한마디로 실행에 옮겨 문제를 해결하고 있섰다. 구멍가계 식 경영이다 나의 특허 : U S Patent #3,302,076 Big Eye Transistor 는 사실상 MOS transistor 와 PNP/NPN 이 합친 형태였다. 그 당시는 이런 종류의 MOS transistor 는 연구실에만 있던 Transistor 였다. 급한 불을 끄고 나서나는 MOS Gate 역할을 하는 전극을 이용해서 Surface 특성을 조사했다. Production 에 원인을 모르는 오염이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나는 내렸다. 어디서 어떤 오염인지는 알 수도 없고 테스트할 방법도 나는 갖고 있지 않았다. 모든 약품 세척제를 그 당시 가장 순도가 높은 것만을 쓰고 있었고 그 이상의 순도를 요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현실성이 없었다. 우선 현재 쓰는 모든 약품, Diffusion Source, 그리고 Wafer 를 취급 하는 모든 그릇 등을 완전히 새것으로 갈았다. 배관도 오래되고 의심 나는 것은 새로 했다. Production 문제가 해결됐다. 모든 약품의 순도를 한 단계 올려야겠다. 특히 Photo process 에서 쓰는 것은 모두 재 점검해서 공급원에 부탁 해서 남아 있는 불순물의 종류와 그 함유량을 가능한 한 아는 대로 보고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나는 Semiconductor Grade 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다. 이렇게 더 고순도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 내가 제일 처음이었다. 약품 공급회사들이 우리에게 공급하는 약품에 semiconductor grade 라고 표시하도록 해서 별도로 관리했다. 약 품값이 비싸저서 제조비가 너무 올라 간다고 다른 부서에서는 반대 의견도 생겼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당한 PNP Engineer 들은 한참 동안 원인을 몰라서 불량품만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만은 그 가치를 62

70 [텍스트 입력] 인정했다. 점차적으로 전 공장에서 Semiconductor grade 약품을 쓰게 되였고 약품 제조회사측의 광고와 더 부러 전 반도체 업계가 일년이 훨신 지나고 나서 우리에게 합류하게됬다. 이 Big Eye transistor 로 나는 SiO2 표면에 금속 전극을 만들어 표면에 생기는 전가를 제거하고 또 전압을 가하여 표면전가를 상쇠 할 수 있는 Gate Ring 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표면 Control 이 가능하게 된다. 나는 회사 변호사를 통해서 특허를 신청했다. 아직 이런 시도는 아무도 해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Mask (Transistor 도면 사진) 를 만들어준 David Metz 도 공동발명자로 해서 이름을 넣어 주었다. 거의 일년을 기다려서 US PATENT #3,302,076 Semiconductor Devices with Passivated Junction 이란 제목의 특허가 1967 년 1 월 31 일자로 나왔다. 이것은 Gate electrode 와 같은 것으로 일정한 전위를 유지하도록 하는 Field relief electorde technology 또는 Equipotential Ring technology 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반도체 제조에 널리 쓰게 되어 막대한 특허사용료가회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오늘날 반도체 설계에서는 이런 Passivation technology 를 쓰는 것은 알게 63

71 [텍스트 입력] 모르게 반도체 design rule 에 자동적으로 포함되어있어서 이 patent 의 응용은 junction passivation 에 상식이 되어 있다 반도체기술 발전사 -Bipolar NPN 에서 대규모 MOS Tr 시대로 PNP production 은 일단 옛날대로 돌아가서 제품이 제대로 나오게 됐지만 또 언제 이런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상태였다. 문제를 알아서 해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Motorola 에 오기 전에 많은 형태의 Transistor 가 개발되었다. 이들은 모두 없어지고 오늘날 쓰고있는 Planar technology 로 정착됬다. Planar Technology 란 시리콘 원판에 얇은 유리 막을 키워서 이유리막에 사진술로 창을 내서 고온에서 Diffusion 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P 나 N-type 의 불순물을 주입해서 Transistor 나 IC 를 만드는 방식이다. 즉 오늘날 쓰고 있는 제조 방식이다. 이 transistor 가 기초 소자이고 이들을 여러 개 모아서 회로를 만들면 IC 즉 Integrated Circuit 가 된다. 집적도가 커지면서 LSI - Large Scale Integration, 더커저서 VLSI - Very Large Scale Integration 이란 술어들이 계속 나왔다 모두 IC 이다. 이 반대 단어가 discrete Transistor 즉 한개를의미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도체 소자에는 bipolar 와 unipolar 라는 두 가지의 동작 원리가 있다. Bipolar 는 반도체내에 전류를 흘리는데 electron 과 hole 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PN junction 과 함께 동작에 관련된다. Unipolar 는 그 동작원리가 Field effects 에 의한 것으로 전류의 흐름이 electron 또는 hole 한가지만으로 된다. 오늘날 Field Effects 라는 말을 Unipolar 보다 더 많이 쓰고 있다. Junction Field Effect Transistor 는 IC 에는 거의 안 쓰이고 특수한 Linear 회로에 쓰이고 있다. 반도체소자에서 제일 쉽게 만든 것이 PN Junction 하나 인 Diode/Rectifier 이고 다음이 Bipolar NPN Transistor 이다 년경에 Planar 방식으로 바뀌고 그 후에 PNP transistor 가 Surface 문제 때문에 많은 고난 끝에 실용화가 됐다. 제조 방식은 NPN 이나 다를 것이 없는데 동작이 불안정 한 것이다. Surface 에서 원인 불명의 병이 감염되어 PNP 의 바같 Collector P 표면이 시간이 갈수록 N- type 로 변하는것이다. 초기에는 실용가치가 없다고 평이나빴다. 그이유도 모르고 있섰다. 쉽게 표현하면 Transistor 표면에 암이 생기는 것이다. silicon Wafer 표면에 생기는 암문제를 해결 했어야 했다. Motorola 에서 이 문제를 나의 부서에서 6 명의 Ph.D 고급두뇌를 투입해서 전면전을 별렸다. 입사해서 얼마 안됬슬 초기라서 나도 감을 못 잡고 있었스나 내 상관 Lesk 박사 만이 그 당시에 앞을 내다 보았던 것이다. 이 암이 반도체의 yield 와 Reliability 를 좌우하고 있섰다. 여기서 Reliability 라하는것은 기계적인 결함에서 오는것은 제외 하기로 한다. 내가 해결한 번도체 제조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바로 반도체 소자발전으로 연결됬다. 우선 무엇이 원인인지 알아야겠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표면을 비교해 보았다. 구별이 안된다. MIT 에서 온 John 이 자기가 학교에서 써본 64

72 [텍스트 입력] 경험이 있다고 Electron Microscope 를 사자고 했다. John 에게 그렇게 하라고 전권을 매겼다 이런 비싼 고급기계가 하로 아침에 배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필요에 맞추어서 주문 생산이 되여 적어도 반년은 걸린다. 그래도 사왔다. 기다리는 동안에 외부 연구기관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순물 검출 시도도 해보았다. 뭣이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그 검출은 우리의 능력 밖이었다. 이것은 안 보이는 것과의 전쟁이다 그저 그 영향이 만들고 나서 Reliability 형태로 나타나고 있섰다. 이젠 statistical approach 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많은 실험을 하는 동안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우리는 P-type 의 boron diffusion 을 받은 유리판 표면(Wafer) 과 N-type 의 Phosphorous diffusion 을 받은 유리판 표면이 그 밑에 Silicon 표면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 냈다. 반도체 제조에 경험이 있스면 Phosphorous Diffusion 을 받은 유리 막은 Boron Diffusion 을 받은 유리 막 보다 훨신더 빨리 HF 약품에 녹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 Phosphorous oxide rich silicon dioxide layer 의 sodium gettering effects 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는 Ph.D 논문 열개 분양의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는 고만 하겠지만 몇 달을 전부서가 고생한 결과가 제조과정에서 간단한 2 분간의 Hot DI water wash 과정 도입으로 해결한 것도 있섰다. 심각한 문제도 일단 알게 되면 별게 아니다. 이런 것이 제조기술의 knowhow 이다. 결과가 나오면 Production 에는 Process improvement memo 정도로 끝낸 것도 많았다. 이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그 간단한 Memo 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발행하는 memo 는 모두 심각하게 받아 지고 이였다. surface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문제의 암 물질은 암 세포같이 눈으로 볼수있는것이 아니고 고순도 물에 용해되는 물질로 그 범위가 좁혀졌고 모든 실험결과가 Sodium (한국서는 나토륨이라고함) 과 이와 유사한 성질의 물질 이었다. 우리는 이제 암 자체를 보지는 못 했지만 제거하는 방법은 찾아 냈다. 이젠 high voltage PNP transistor 도 쉽게 만들게됬다. 왜 나의 특허가 효력을 내는지도 알게 된 것이다. MOS transistor 의 Gate Threshold Voltage Control 도 이론대로 조절 할수있게됬다. 우리가 고생하는 동안 반도체 제조 장비도 더 정밀해지고 따라서 선폭이 줄어 더 많은 transistor 를 같은 면적에 만들 수 있게 됬다. Logic 회로의 제조과정이 간단한 N-MOS 가 표준으로 되였다. 많은 LSI 회로가 N-MOS 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R-TL, D-TL, T-TL 등 의 Bipolar NPN 의 시대를지나 대규모 MOS IC 의 Digital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N-MOS 와 P-MOS 를 합처서 만든 Complementary MOS 즉 C-MOS 는 Logic 회로에서 저전력의 특별한 성능을 가추고 있섰스나 일반 Production 에서의 양산은 Surface Control 이 안되어 두 gate 의 Threshold 를 마추는데 어쩌다 성공 하면 대서특필하는 단계였다. C-MOS 가 아니면 안다는 Battery 로 동작 하는 손목시계와 같은 응용 분야와 집적도가 높아 저서 열이 많이 나는 데에 사용될 것으로 내다보고 설게도 해서 여러 가지 Sample 은 만드렀스나 오늘 만든 것과 어제만든것이 다 달랐고 그 성공 율도 20% 정도로 생산부서에서는 제조방식에 문제가 있어 대량으로 상품이 나올 단계가 아니였다. 그때 Motorola 에서 내가 개발한 C-MOS process 는 그 제목이 C- MOS 가 아니고 Simultaneous Gate Threshold voltage control technique on N and P channel transistors during manufacturing processes 라고 해서 연구 Notebook 에 Raw Data 로 기제 되어있다. 내가 고만둘 때 시간이 없어서 Report 형식으로 정리를 못하고 많은 다른 Data 들과 함께 내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 제목이 힘든 연구논문 같고 Surface study 의 부산물이어서 그대로 사장 됬을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data 는 모두 내 머릿속에 완벽히 저장 되었다. 65

73 [텍스트 입력] 4.17 Trade Secrets 모든 회사는 회사마다 자기네의 독특한 운영방식이 있고 특히 제조회사 일 경우 그 회사만의 고유한 제조방식이 있다. 이 제조방식을 쓰지 않으면 그 회사제품의 고유한 특성이나 성능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유의 제조 방식을 일반적으로 Trade Secret 또는 Production Knowhow 라고 해서 회사들은 외부 유출을 막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회사 최고 간부회의에 나는 불려 갔다. 우리 회사 사장 CEO, Marketing Manager, Production Manager, 그리고 고문 변호사가 거기에 있었다. 나를 부른 이유는 회사의 비밀(Trade Secret)유출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몇몇 생산 부 직원이 다른 회사로 가서 Transistor 를 제작해서 이미 시장에 제품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모토롤라의 큰 고객도 되기 때문에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다고도 했다. 그 회사에서 생산된 제품과 이것을 분석한 보고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모양도 같고 이름도 같다. 이것만 가지고는 모토롤라의 비밀을 갖고 나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잘 팔리는 물건은 모두가 Copy 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입수되었는지 생산 Recipe 가 이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었다. 옛 생산방식을 고쳐서 내가 만든 새로운 Recipe 가 여기에 있었다. 극히 최근의 것이다. 나는 우리의 Trade Secret 이 유출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회사의 Trade Secret 이 유출된 이상 강력히 대응하는 방향으로 회의가 마무리 지어졌다. 앞으로 회사도 더 커질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야 된다고 모두가 이런 결론에 찬성했다. 이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에 나는 들은 바가 없는데 그 이상 경쟁제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제품판매는 못하게 된 것 같다. 짧은 시간의 회의였지만 나의 한국 사업계획에 큰 참고가 됐다. 그 후에도 한두 번 이런 일이 있었다. 뒤에 나오지만 한국에서 전자공업 초기에 한국형 반도체사업이라고 해서 큰 희망을 걸고 설립된 New Korea 전자가 그냥 만들기만 하면 파는줄 알고 박대통령까지 관련해서 시작 했다가 Patent, Trade Secret 문제로 미국에서 수입금지 당하여 실패한 일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당시 한국에도 이 정도는 아는 사람이있섰슬 터인데 Electro-Chemical Society Meeting 우리가 주로 참석하는 학술회의는 Electro-Chemical Society Meeting 이었다. 내 상관도 이 학회의 요직을 맡고 있어 낯선 곳은 아니었다. 일년에 두 번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회의가 개최되어 우리 연구소에서는 많을 때는 10 명, 적어도 5 명은 참석했고 나는 거의 빠지지 않고 갔었다. 우리 연구소는 대개 한두 개의 새 논문발표를 했는데 그 내용을 모두 사전 검열을 하고 있어 보통 일년이 지난 것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새로운 제조방식에 관한 것은 내용의 핵심을 감추거나 다음 회기로 미루었다. 즉 6 개월에서 1 년을 늦추어서 발표하곤 했다. 이렇게 거의 일년이 지난 논문도 발표 후에 많은 질문을 받고 일반의 인식이 모토롤라에서 나오는 논문은 대개가 이들에게는 최신 정보였다. 회의 참석자들의 분포는 유럽 과 일본사람이 처음에는 약간 눈에 뜨일 정도 였으나 몇 년 내로 1/4 이되고 나머지는 미국이었다. 한국사람으로 처음 만난 것이 Westinghouse 에 있던 장유길 씨였다. 장유길 씨는 내 고교 후배로 한때 Cupertino 에 이사 와서 우리동네에 살았다. 골푸를 좋아해서 같이 골프도 치려 다녔고 한국에 나와서 전자연구소 부소장도 했다. 여기서 또 Battery 를 연구하는 강홍열박사도 만났다. 이분도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일본사람들은 특별히 모토롤라에 접근하고 싶어 했다. 일본에 파는 반도체 제품에서 모토롤라 제품이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고 일본 반도체업계가 이 때만 해도 도저히 미국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어 비관론까지 나오고 있을 때였다. 몇몇 일본 엔지니어는 내 이름표에 Motorola SPD 를 보고 접근해 왔다. 나 역시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66

74 [텍스트 입력] 더욱이 내가 일본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말로 접근해 오기도 했다. 나도 일본말을 다시 쓰게 되어 일본말 연습도 할 겸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회사로 찾아오는 일본 바이어들과는 자주 접촉이 있어 일본말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일본 사람들 하고 쉽게 가까워졌던 것은 물론 말 때문이었다. 영어에 자신 있다고 하는 일본인들조차 회의에 나와 질문을 해도 알아 듣기가 힘들 때가 많았다. 물론 이들도 영어를 우리나 마찬가지로 책으로 배운 것이다. 나는 회화를 더 중요시 했다. 혼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 회화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데서 배우는 것이지 혼자서는 안 된다. 일본 바이어들의 영어도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끼어 들었지만 일본에서 온 논문발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NEC, Hitachi 연구소에서 많이들 논문을 내고 있었다. 그네들 말로는 일본도 반도체는 어느 정도 수준이 높다고 멸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논문을 갖고 나오고 있다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면 고백 하기도 했다. 저녁 때 호텔 bar 나 휴계실 같은 데서 서로 어울리는 기회가 많아서 엔지니어 스카웃 이나 job 을 옮기는 좋은 기회도 되어 미국 industry 의 정보교환 사람교환의 마당 역할을 하고있섰다. 나는 Electro-Chemical Society Meeting 외에도 IEEE 가 주최하는 Reliability Physics Meeting, 내가 개인적으로 속하고 있는 Electron Devices Group 의 Meeting, 일년에 두 번 열리는 Consumer Electronics Show 에도 참가하고 IEEE Region 6 Meeting 은 우리가 주도하는 행사였다. 내가 Motorola 를 떠나기 바로 전 Electrochemical Society Meeting 에서 매우 중요한 발표를 했다. 그 당시 회사 Trade secret 라서 발표를 못하고 일년을 미루었던 내용이다. 나의 마즈막 기화라고 생각돼서 내용을 축소해서 News Letter 형식으로 발표했다. 내용은 반도체 생산공정에서 Wafer 의 contamination 제거에 관한 것이 였다. 이문제 즉 Reliability 에 관련된 process engineer 에게는 이것이 뭤을의미 하는지 곳 알수있는 내용이었다. 논문은 나의 부서의 Engineer 로있는 Faith Lee 가 공동 저자로 되어있어 Faith Lee 를시켜 발표했다. yield 와 Reliability 에 직결되는 내용이다 die yield 는 만들어서 Test 할때 알게 되는 문제이고 Reliability 는 제 품속에 들어가서 회사 밖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훨신더 심각하다. 이때 Fairchild 사에서도 같은 일을 Andy Grove (후에 Intel 회장)가 하고 있섰다. Andy 의 Contamination 에 관한 연구는 업계에 널리 발표되고 많은 Reliability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오늘날의 반도체 제조/ Reliability 의 기초가 이때 확립 된 것이다. Andy 같은 실력자가 Intel 최고 자리에서 회사를 관리하게 되였으니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기술 TI 사로 가다 Surface Study 가 반도체의 신뢰도를 다루는 가장 어려운 기본적인 분야여서 많은 군 관계 연구프로젝트가 나에게 주어졌다. 특히 공군에서 주도하는 프로젝트는 모토롤라로 제일 많이 배정됐다. 나는 Research Contract Final Report 마무리나 새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서 여러 곳의 공군기지의 연구소를 방문했다. 이들 연구소는 여러 회사제품의 Reliability 의 비교시험도 내부에서 하고 있섰다. 외부에 내지 않는 Report 라도 기밀문서가 아닌 것은 보여도 주고 주기도 했다 우리가 만든 Transistor 가 가장 Reliability 가 좋았다. 이러다 보니 반도체회사별 기술의 수준도 알게 되고 여기에 연관된 사람들과도 친분이 생기고있섰다. 나는 주로 Production 과 관련된 문제 중에서 당장 해결 해아될것과 process 개량으로 yield 올리는 것에 많이 시간을 보내고 다른 연구원들은 보다 더 기본적인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연구를 하게했다. 내기한 일중에서 재미있던 한가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우리가 가장효과적인 Reliability test 방식을 고안해냈다. 그때 제일 많이 쓴 것이 high voltage 67

75 [텍스트 입력] reverse bias high temperature accelerated test 였다. 여기에 통과되면 다른 Test 는 안 해도 됐다 이 Test 자체의 실뢰도 도 높게 만들었다. accelerated test 과정에서 이 test 때문에 절대로 extra failure 가 생기면 안 된다. Reliability 가 향상되면 Human Error 도 문제가 된다. 한 test panel 에 2000 개의 Transistor 를 꽂았는데 3 개를 거꾸로 꽂았다. 우리는 이런 점도 모두 고려 해서 만들어낸 (발명해낸) Test 방식이다. 이 test 방식도 내가 설정한 회사 비밀이었다. 공군 연구소에 이것은 우리 만이 쓰고 있는 비밀이지만 한번 이 test 방식을 써보라고 했다. 큰일이 일어났다. 중요한 project 에서 이미 모든 test 를 다 거친 Primary source 인 TI 사 제품이 전량 불합격이됬다. Secondary Source 인 Motorola 제품은 전량 Pass 했다. 물론 Motorola 제품이 더 reliability 가 좋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이미 사용 하고 있는 TI 제품에 앞으로 문제가 온다는 거냐? 상부에 보고 해야 되냐? 이 Test 는 공식 test 가 아니 여서 안한걸로 치고 무시 할거냐? 결국 상항이 심각할 수 있다고 판단돼서 Base commander 에 보고됐다. 이젠 Motorola 가 Primary Source 가 됐다. Primary source 하고 secondary source 는 임의로 자기들 권한으로 바꿀 수가 있섰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외에도 많은 project 에 TI 제품이 들어가고 있섰다. TI 제품이 나쁘다는 소문이 퍼지면 회사 주식에도 큰영향이온다. 공군에서 한 Test 는 믿을 수 없고 엉터리라고 TI 에서 항의가 들어왔다는 거다. 공군에서는 이 test 방식이 Motorola 에서 왔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있섰다. 최고 층까지 올라가는 문제로 확산됐다. 이 Test 방식이 엉터리가 안일뿐 아니라 더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불량품을 가려 낸다는 것이 확증됐다. 분쟁은 TI 가 굴복하고 자기 제품을 Motorola 수준으로 개량하기로 약속하고 조용히 외부에 안 알리고 해결했다. TI 가 큰 돈을 지불하고 Motorola 생산기술을 사갔다고 들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든 Motorola 의 생산기술이 다른 회사로 전해지고도 있었다 물과 공기--타회사로 생산기술의 전파 우리부서에서 반도체제조 과정 에서 꼭 지켜야 할 것들을 많이 지적하고 떠들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그중에서 일반 사람들이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를 여기서 이야기한다. 하나는 Wafer 표면에 와서 접족하는 물질이다. 이물질 중에 아주 소량이지만 앞에서 지적한 암 물질이 들어있다. 처음에는 이 암 물질이 무엇인지 몰라서 무조건 고순도 약품을 사용했다. 만들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물 이면 이 암불질이 여기에 용해되어 제거할 수가 있섰다. 물의 문제를 우리도 몇 년 동안 모르고 지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의 순도를 그때까지 의심하지를 안았섰다. One way Feed system 으로 Source 에서는 제대로 conductivity 가 최고치 18 meg ohm 이어서 그냥 믿고 쓰고 있섰다. 문제를 알고 나서는 이 중요성을 Motorola 는 1 년이상 밖으로 알리지 않았다. 워낙 기초적인 문제라서 타회사가 금방 실천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효율적인 보안이 몇몇 사람만 알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실제로 쓰고 있는 사람들은 몰랐지만 우리는 전 회사의 DI Water system 을 큰돈을 투자하여 새로 Circulating system 으로 고치기도하고 또 End point 에 새로운 filtration 장치를 신설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 질을 한 단계 높여서 쓰고있섰다. 우리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똑같이 다른회사에가서 만들어도 같은 결과가 안나오는것이다. 물 순도 문제를 다루다가 발견한 사실인데 순수한 고온도 물은 금 (gold) 도 녹이는 것이다. 금은 물에 안녹는걸로 알고 있섰는데 이사실은 나에게 수수꺼기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한국에 반도체공장을 설립할때 공장용으로 순수물 68

76 [텍스트 입력] 제조장치를 일본에서 구입할려고 했스나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은 아주 멀었섰다. 일본서 반도체 Reliability ㅡ 문제가 미국에 뒤떨어젔던 이유가 여기에도 있섰다. 그다움이 표면에 와서 닿는 공기다. 공기 속에 눈에 안 보이는 먼지가 Wafer 표면에 올라앉는다.. 사람 입에서 코에서 나오는 공기는 수십만 개의 눈에 안보이는 미세한 먼지와 함께 박테리아가 섞여있다. 먹은 음식에 따라라 입에서 나는 냄새가 다른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 극단의 예를 든다면 우주복을 안 입으면 반도체 위이퍼 위에 오염되는 물질이 김치 먹는 사람과 빵 먹는 사람하고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공기 속의 먼지나 이런 불순물 역시 아주 기초적인 상식 범위에 드는 문제다. 회로가 복잡해지고 die 가 커짐에 따라 급속도로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는 특허다 신기술이다 떠들지 않기로 결정하고 먼저 실천에 옮겼다. 오늘날 LSI 반도체 제조에 먼지 없는 방을 만들고 우주복을 입는겻은 상식이 되었다. 또 많은 연구가 약품에 투입됬다 오늘날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약품은 옛날 문제들을 모두해결 해서 이런 것을 모르고도 좋은 제품이 나오도록 발전했다. 내가 Motorola 에서 많은 제조기술 문제들을 해결했는데 상식 범위내의 것들이 많았다. 이들이 다른 회사로 전파되는데 1-3 년이 걸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현상은 Silicon valley 에 있는 회사는 대개가 일년이고 3 년이 되는 회사들은 모두 도퇴되고 있섰다. 이러한 관찰이 가능 했던 것은 내가 새 기술의 공급 원에 있섰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의 공급은 대게 반도체기계설비 제조회사를 통해서 새 기계와 더부러 퍼져나갔다. 새 기계를 사면 이러한 Fringe Benefit (따라들어오는이익)이 있었다. 그 당시 공기 Filter 장치를 개발 해서 우리만 쓰기로 계약을 했섰는데 얼마 후에 이 회사가 더 효율적인 것을 개발해 내서 분쟁이 생긴 일이 있었다. 이들은 자체 개발이라고 했다. 우리가 필요한 물건이라서 싸우지 않고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그대신 물건의 공급을 우선적으로 받기로 했다. 다른 경쟁사들은 6 개월에서 일년을 기다렸고 일본은 미국서 license 를 해가서 비슷한 제품이 2 년후에 나오게됬다. 일본은 많은 장비를 자국 내에서 조달하고 있었고 언어와 움물안 경영진의 장벽 등으로 미국 Silicon Valley 에 있는 회사들의 최신 정보의 혜택을 누리지를 못했다. 간단한 새 정보를 몰라서 생산 특히 yield 에 차질이 난 것을 돈으로 환산 한다면 놀랄만한 액수일 것이다. 미국 동부 회사들은 우리가 보기에 속도가 느리다. 점심 시간에 나가서도 새 정보를 듣지 못한다. 들었다 해도 돈이 많이드는 기계면 결제 과정이 필요하다. 왜 이 기계가 필요한가 이 기계가 어떤 이익을 갖고 오는가 등등을 윗사람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많은 engineer 들은 귀찮아서 그런 것 안한다. 마음에 안 들면 회사를 옮기면 된다. 성공하는 회사는 이러한 기술발전 과정을 알거나 이런 문제를 직접 체험한 기술자가 결정권을 가진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서 자기가 결제한다. 회사에 따라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기술자 출신이다. 나중에 생긴 인텔이 그런 회사였다 (Intel 회장 Andy Grove). 기계를 잘못 샀다고 알게 되면 새 기계라도 당장 갈아치워야 한다. 이런 Silicon Valley 회사는 모두 발전했다. 비싼 기계를 선택해서 구입한 하급 직원이 그렇게는 못한다. 이런 회사는 도퇴되고 만다. 살아남은 회사들은 모두가 특별했다 그래서 Silicon Valley 가 반도체 멕카로 발전한 것이다. 후에 내가 삼성에서 제거된후 새 회사를 창립해서 한국의 섬유관련 재벌과 반도체회사를 설립했다가 LC 개설 직전에 더 비싼 새로 나온 생산장비로 내가 바꾼 것이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 한국측에서는 나쁘게 받아드려 국제분쟁으로 까지 확대 되어 사업을 접은 일이 있섰다.(제 8 장) 69

77 [텍스트 입력] 4.21 Application Lab 내 사무실 맞은 편에 Application Lab 이 있었다. 여기서는 모토롤라에서 새로 나오는 Transistor 와 IC 의 응용을 연구 하고 Application Note 도 만드는 곳이다. 여기가 내가 즐겨 찾던 곳으로 Amateur Radio 를 하는 사람들도 몇이 있었다. 아리조나에서 제일 유명한 Amateur Radio Operator 는 공화당 상원의원이고 대통령 후보로도 나갔던 Barrey Goldwater 였다. 그의 호출부호는 K7UGA 로 Camelback Mountain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그의 Yagi Antenna 가 올려다 보였다. National HRO-5 (1936) HRO-50 (1950) HRO-500 (1966) All Transistorized Application Lab 에서 National 사의 HRO 통신형 수신기를 발견했다 피난시 알게 된 수신기였다. 매우 반가웠다. 진공관을 모두 Transistor 로 대체하는 작업을 하였다고 했다. 이 HRO 수신기는 복잡한 Coil 을 외부에서 갈아 끼우게 되어있어 RF 회로가 간단하다. 내가 이 HRO-5/Sr 를 본따서 설계하여 만들려고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약 50%의 부품을 모아놓고 있었다. 한국서 완성은 못했지만 내가 그 내용을 잘 아는 통신형 수신기인 것이다. 다른 project 도 있섰다. 내가 만든 Transistor 들 중에서 특별한 Transistor 를 골라서 Application Lab 의 Ham 에게 써보라고 갖다 주었다. 그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이들에게 간접으로 시키고있섰다. 내 연구실 cabinet 에는 실험용으로 만든 다양한 성능의 TR 들이 많이 잠자고 있다. 이 중에 0 PF (Zero Poff) 라고 이름한 Transistor 가 있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작은 Bipolar Transistor 였을 것이다. 한 장의 특수 Mask Printing 기술(한 장의 Mask 로 전 과정을 평행이동 하면서 인쇄할 수 있음)로 만든 것으로 Collector 의 용량이 0 으로 나온다고 해서 0 Pf 라고 불렀다. 사실 0 는 아니고 자기네들이 늘 쓰고 있는 Analog Capacitance meter 의 보통 Scale setting 으로 Collector Capacitance 를 재보니까 바늘이 0 pico farad 를 가리켜서 부르게된 이름이다. 이 0 Pf transistor 가 새로운 미공군 프로젝트를 맡은 Hughes Aircraft 사의 자회사인 Autonetics Division 에 공급되고 Application Lab 에서는 이 Transistor 의 성능이 현존하고 잇는 Transistor 들보다 한단계 더 발전한 것으로 지금까지 Transistor 로 대체 불가 라고 하던 회로를 이것으로 대치하고 있섰다. *이때 없던 Project 가 있섰다* 이야기는 맨앞으로 연결된다. 여기 Application Lab 에서 알게 된 HAM 이 였던 Charlie I Anson 은 내가 반도체를 떠나서 혼자할수있는 일을 찾고 있슬때 자기가 하고 있던 미군 진공관 통신장비 보수 점검 일을 소개해준 은인이 되었다. 이때 Viet Nam 전에서 철수할 때 모두 수류탄으로 부셔버렸다고 하는 Collins 51S-1 수신기 몇 대를 깨끗한 것으로 골라서 수집하기도 했다. 51S-1 을 계기로 기회가 있슬때마다 다른 Collins 기계도 사 모았다. 70

78 5 장 한국으로 가는길 (1) 5.1 모토롤라 반도체공장 의 한국진출 조립공장 남에게 예기 할 수도 없었던 없던 프로젝트 를 마치고 이렇다 할 일 없이 허탈한 심정으로 그날그날 지나는 것에 익숙해젔슬때였다. 낭하에서 우리 회사 사장 CEO 인 Les Hogan 과 마주쳤다. Can you speak Korean? We need your help. We are visiting Korea next month. 라는 것이다. 모토롤라도 저임금 지역으로 어셈블리 시설을 이전한다는 것이다. 현지답사 팀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을 가는데 도와달라는 말이다. 만일 내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꿈도 못 꾸었던 일이다. 미국에서 무 신분으로 회사에서 매년 정월에 체류기간 연장을 해주고 있었다. 귀국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귀국하면 일반인으로서는 여권 재발급이 안되어 해외여행은 불가능한 시대였다.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우대식 박사, 권영덕 박사가 꼭 귀국해야 할 사유가 있었는데도 일시 귀국을 포기한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투자 조사단의 일원이라면 문제는 없슬 것이다. 곧 바로 내 Boss 에게와서 한국 여행을 허가해 달라고 했더니 큰 Boss 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OK 라고 했다. 나도 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0 일간의 여정이다. 나는 약 열흘쯤 먼저 귀국해서 숙소와 교통편을 돌보고 정부 인사와 민간 유지들을 골라서 스케쥴을 잡는 것이다. 한국 다음은 대만, 홍콩, 마지막이 싱가폴로 되어 있고 한국은 2 일간의 체류로 되어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조사 팀은 2 주일 후에 떠나게 되어 있어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으나 나는 그 전에 떠나야 함으로 4 일 밖에 시간이 없다. 급해졌다. 회사 내에 여행 전담부서가 있어서 유효기간이 지난 나의 한국 여권을 갖다 주었더니 내가 미국 시민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 같은 외국인 의 외국 여행을 취급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LA 영사관에 연락해서 여권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여행 목적지를 추가해야 되는데 LA 영사관이 비협조적 이라고 했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한국인에게 도움을 구했으나 이런 종류의 문제는 빽 없이는 신속한 처리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이다. 특히 한국 영사관 직원의 mentality 가 업무처리를 No 하면 안전하지만 Yes 했다가 잘못하면 큰 일 난다는 것이다. 영사관 입장에서는 가짜나 사기꾼이 많아서 내용을 확인이나 조사할 권한이 없는 하급 직원은 욕을 먹더라도 No 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이라고 했다. 빽 을 당장 찾을 수가 없는 나로서는 거의 10 년 만의 고국 나들이가 무산되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귀국은 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조사단의 일원이 되어야 여권이라도 쉽게 나오지 개인으로 귀국하면 미국에 재 입국도 못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조사단에서 제외 되었다. 회사에서 여행 서류를 마련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애원하다시피 다시 교섭해서 한국만이라도 조사단의 일원으로 넣어달라고 해서 내 이름이 다시 올라갔다. 이제는 정말 한국을 가게 되었다고 희망을 다시 찾았는데 또 날벼락을 맞았다. 인사과에서 강기동이는 해외 여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서류를 들고 나왔다. 나는 그 날 일이 끝나는 대로 사장실을 찾았다. 그는 이 내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없던 프로젝트 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고 있었다. 문제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키고 알아보겠다고 했다. 강기동이는 이번 여행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보내달라고 국방성에 부탁 했더니 그렇다면 한국만 제외하고는 허가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권 관계로 귀국(한국행)은 가능해도 타 지역은 갈 수가 없다고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꼭 이 기회에 일시 귀국하고 싶다고 했다. 내 여권은 유효기간만 지난것이아니고 여행 목적지도 미국으로 한정되어있다. 71

79 마지막 방법으로 친분이 있는 주지사를 통해서 미 상원의원에게 부탁을 했다. 여행지역을 서울로 극한해서 ㅡ 어렵게 허가를 얻어냈다. 항공 표를 사고나니 이틀 밖에 시간 여유가 없었다. 나의 신변보호를 위해서 Denver 에서 파견 나온 보안관이 나를 서울까지 동행했고 서울서는 미 공군기지의 보안관에게 인계했다고 한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날 날씨는 좋았으나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겨울이 없는 Phoenix Arizona 에서 귀국을 거의 단념하고 있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귀국했다. 뒤에 오는 분들의 편의를 도와야 겠는데 시차도 있고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우선 다음 날 아침에 경제기획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좀 컸지만 아버지 겨울 옷과 오버를 빌려 입고 길가의 가게에서 털이 붙은 겨울 장화를 사 신었다. 친구들이 이 장화는 새우젓 장사들이 신는 것이라고 놀렸었다. 새우젓 장사 차림의 촌놈이 불쑥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실을 찾은 것이다. 뭐 이런 사람이 있어? 하는 인상을 주었다. 여기서 이강두 사무관과 이선기, 박필수 투자진흥관을 만났다고 기억한다. 이런 일은 서양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해야지 한국 시골 새우젓 장사 같은 사람은 적격이 아니라고 혼자 생각했다. 미국서 조사단은 나를 포함해서 4 명이 도착했고 한국 변호사 한 분이 우리 팀에 가담했다. 아주 다행이다. 나는 이틀 전에 왔지만 그 동안에 한 일도 없거니와 시내 사정도 잘 몰라서 이네들을 안내할 수가 없는 입장이다. 나중에 이분은 회사 고문변호사 가된 한복 씨였다. 한국 정부의 High Tech / 전자공업을 유치하려는 노력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Motorola 같은 하이텍 기업이 들어가려고 해도 서로 믿고 일할 업체가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합작대상을 조사했는데 큰 재벌일수록 부정이 많은 걸로 결론이 나 있섰다. 그래서 단독투자로 말 다르고 풍속 다른 먼 낯선 곳에 땅 사서 집 짓고 공장을 내게 되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도 극히 상식적인 것 들로 포장된 도로, 양질의 전력, 전화통신, 상하수도, 불편 없는 은행업무 등의 Infrastructure 였다. 한 예를 들자면, 국제 전화는 전화국에 미리 신청을 해야 한다. 일본의 중계국을 통하게 되는데 중계시간 배당이 있어서 통화량이 많은 날은 무작정 기다리다 그것도 연결이 안될 때가 많다고 했다. 내가 투자 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나의 가장 큰 걱정은 출국 예정일까지 여권이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두 분의 투자진흥 관에 감사한다. 여권을 시일 내에 받아 주었다.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를 도와 준 여러 정부 관계자들에게 점심 한끼 대접하지 않은 것이다. 회사에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긴 했지만 나는 너무 융통성이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좋은 대접을 나는 많이 받았다. 친구들이 술 못 마시는 나에게 많은 술을 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부서에서 일하는 권영덕 박사의 장인이 단사천씨로 한국 금융/사체업계에서는 많이 알려진 분이었다. 인사차 방문했더니 교통이 불편할 것이라고 한국에 몇 대 밖에 없는 미제 대형 승용차를 제공해 주셨다. 좋긴 한데 높은 분을 만날 때는 대개 교통편을 제공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특별히 타고 갈 데도 없었지만 큰 차라서 내가 가는 곳은 주차도 힘들었고 그런 고급 차가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더욱이 정복 차림의 운전기사를 오랫 동안 대기 시키는 것이 매우 부담이 되어 하루만 쓰고 사양했다. 반도체에 관심이 있는 기업인들을 몇 분 만났으나 모두가 합작사업을 원했고 내가 생각하는 정규반도체 사업은 이해 시키기도 힘들뿐더러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어서 그 이상의 활동은 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곳이 하나 있었다. 나의 공대전기과 동기동창 이양수의 안내로 정만영 박사의 반도체 연구실을 방문했다. Transistor 기초 일을 하고 계셨다. 내가 버리는 장비와 NPN Transistor 의 제조 Recipe 를 갖다 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도 해봤으나 버리는 장비는 사내 설계여서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완전폐기 처분하고 Recipe 는 회사 72

80 비밀인 것이다. 그저 그런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미국을 떠날 때는 이미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서 해외투자의 윤곽은 마련되어 있었다. 즉 한국에 직접투자로 Phoenix 에 있는 시설을 옮길 것은 옮기고 신규 확장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잘못된 점은 없는지 최종 결정자가 현지에 가서 확인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설립될 공장의 staffs 로 일할 사람들을 면접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을 찾았으나 변호사도 그랬지만 하늘에 별따기다. 처음 부임하는 미국인은 의사소통에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미국에 돌아와서 새로 부임되는 한국 공장 책임자 Charlie Da'silva 에게 최윤근, 정동준 씨등 여러 사람의 명단을 넘겨 주었다. 5.2 노신영 LA 총영사의 방문 한국에 모토롤라 공장이 생기자 한국 사람들의 Phoenix 출입이 많아졌다. 노신영 LA 총영사가 (그후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우리 집에 오셨다. 노신영씨는 우리 회사 사장님이 많이 칭찬을 해서 한번 찾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재외 공관도 조국 근대화 High Tech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좋은 기회라고 우리집으로 찾아 오셨다 생각되어 나의 배경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적어도 미국의 어느 회사보다 수년은 앞섰다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한국서 많이 하고 있는 반도체 Assembly 는 여성의 노동 비를 버는 것이지 별다른 기술적 merit 가 없음을 강조했다.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의 한국 이식은 시설만 있으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한국서 똑 같이 생산해 낼 수 있지만 한국에 그러한 기술이 없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이런 기술을 누가 제공했느냐고 알아보면 곧 명백해져서 나 자신이 미정 부와 모토롤라에서 기술유출로 제소될 것이 너무나 뻔하다고 설명을 드렸다. 그리고 실행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했다. 즉, 나는 즉각 타 지역의 작은 회사로 옮기고 나와 무관계환 외국기업과 반도체 생산이나 기술지원 계약을 체결하여 제 3 회사 이름으로 한국에 공장을 설립하고 생산 시설 제를 구입 설치하여 맨 마지막으로 나를 그 공장의 기술과장 정도로 스카웃해야 하고 모든 과정을 비밀리에 추진해서 모토롤라에서 법적 근거를 잡을 수 없도록 완전 차단을하는일이 기술보다 더 어렵고 중요하다고 나는 이야기 드렸다. 총영사께서는 내용을 이해하시고 서울로 연락을 해볼 터이니 강기동이를 소개할 자료를 달라는 것이다. 국방성에 보내고 있는 보고서를 보여 들였다. 그리고 unclassified 이기는 하지만 외국에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더니 외교 pouch 편으로 보내면 비밀유지가 되고 볼 사람도 극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Report 두 권을 드렸다. 얼마 있다가 이광택 공사라는 분이 찾아 왔다. 회사를 하루 쉬고 모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회사의 생산시설과 나의 연구실도 창 너머로 구경했다. 한번 해 볼만 할 일이라고 상당히 흥분된 상태로 돌아가면서 2 차 대전 중에 독일 나치정부가 많은 기술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내가 이름을 바꾸는 것도 검토 했다. 수일 후에 다시 만났다.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일이 성사되면 옷 벗고 나와서 나와의 Coordination 에 전력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 왜 옷을 벗는다고 했는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는 정보 계통에서 나온 현역 군인이었다. (이글을 쓴후에 이후락, 김완희 두분이 타계 하셨습니다. 다음은 제 차레인것 같습니다.) 73

81 5.3 최첨단 반도체공장(?) New Korea 전자 의 실패 나는 제일 높은 분에게 편지를 썼다. 이후탁이란 이름으로 편지 받았다 적극 추진해 보겠다 는 간단한 내용의 회답이 왔다. 이후탁이가 아니고 이후락이라고 이 공사로부터 정정을 받았지만 역시 No.2 가 되는 높으신 분이라고 했다. 곧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마음이 들뜨고 설레였다. 곧 다른 지방의 작은 회사로 옮길 준비를 했다. 연락이 안 된다. 영사관에서는 그냥 안 계신다, 출장 중이다, 이외에는 다른 말은 없었다. 드디어 소식이 왔다. 나뿐 소식이다. 어떤 영문인지 한국형 반도체 사업이라고 해서 반도체 header 공장으로 대체 됐다고 했다. Header 란 silicon transistor 가 들어가는 case 를 말한다. transistor 개발 초기에 Hermetically Sealed Package 가 필요하여 진공관 관련업체에 주문해서 개발해 낸 것으로 glass-metal seal 을 응용한 제품 이였다. 하나도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표면 산화방지로 초기에는 금속부분이 순금으로 도금 되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진공관과 같은 수십년이나된 기술이다. 그 당시 한국에 많은 반도체 조립업이 들어온 것은 Header 를 사용하는 재래식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 조립방식이 Header 자체가 너무 비싸고 매우 노동 집약적인 데다 Header 를 안 쓰는 새로운 Plastic Package 가 개발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Header 를 쓰는 조립 방식이 사양화 되기 시작하자 이 작업을 극동지역으로 옮기는 것이 미국 반도체 업계의 유행으로 되었다. 모토롤라도 이 유행에 동참한 것이다. 국내로 많은 조립공장이 들어오고 header 의 사용 양이 급속히 증가하자 이를 정부에서는 성장업종으로 지정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Header 생산공장을 목표로 미국 Veritron West 의 기술자 김병준씨를 중심으로 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섰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반도체라고 하면 조립 업이고 이를 뒤 바침 하는 것이 Header 제조 라고 알려져 있섰던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이광택 공사가 추진하는 진짜 반도체 사업은 창와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때 이 Header 제조업을 누군가가 한국형 반도체사업이라고 해서 이광택공사가 추진하는 사업과 바꾸어 친것이다. 이공사는 사후에 이 사실을 알고 항의를 하자 함구령이 내려지고 다른 곳으로 보직되었다. 머지않아 경기도 부평에 반도체공장으로 알려진 header 제조공장 New Korea 전자 회사가 설립되고 최첨단 반도체공업의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여 직원들을 격려했다. 얼마안가서 이 사업은 header 제품의 급속한 사양화와 Patent 문제로 판로가 막혀 실패하게 되자 박대통령의 체면도 있어서 청와대 비서실이 나서서 아남산업의 김향수 사장에게 인수를 부탁했다. 이 공장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액체질소 생산시설이 가추어저 있어서 후일에 내가 신세를 지게되여 그 내용을 자세히 들은 적이 있섰다. 강기동- 이광택- 이후락- 박정희로 이어지는 진짜 반도체사업이 New Korea 전자로 바꾸어저 실패작으로 끝낸 내막은 이후락씨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영원히 알수없게 될 것이다. 이미 이광택 과 박정희 두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박대통령의 개인적 관심을 받은 New Korea 전자 는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박대통령의 하이텍 전자사업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여주는 좋은 예 라고 생각된다. Header 의 74

82 사양화를 뻔히 알면서 누군가가 박대통령을 속인 것이다. 시도한 첫 작품이였다. 한국에서 최첨단 반도체산업 이라고해서 의욕적으로 5.4 KIST 와의 만남--검방진 자식 Gamma 방사능을 내는 Cobalt 60 장비를 갖고 있는 반도체회사는 그 당시 내가 일하는 Motorola 밖에 없었다. 나는 unclassified 된 reliability 관련 Radiation Hardened Device (방사능에 견디는 반도체소자) 의 연구보고서를 내고 있섰다. 여기에 관련된 특별 Symposium 이 Columbus Ohio 에 있는 Ohio State University 에서 열리게 되었다고 초청이 와서 이 회의에 가 보기로 했다. Columbus, Ohio 는 나에게는 제이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인사차 옛 연구소의 내 상사였고 또 지도 교수였던 M.O. Thurston 박사를 학교로 찾아갔더니 지금 한국 사람들이 여기 와 있는데, 반도체를 전공한 한국 학생을 찾고 있다고 해서 이들에게 내 이름을 주었으니 한번 맞나 보라는 것이다. 여기 학교 바로 옆에 Battelle Memorial Institute 라고 하는 알려진 큰 사립 연구소가 있는데,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이 베트남 전쟁을 도와준 감사의 표시로 기술 연구소를 지어주는데 그 용역을 이 Battelle 연구소가 맡았다. 그래 서 한국 연구소 간부될분들이 여러명 여기에 와서 Training 을 받고 있었다. 꼭 만나 보라고 해서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 전화로 숙소주소를 알아 주었다. 학교 주변에 있는 숙소 주소였고, 나도 그 동네는 잘 알고 있었다. 걸어서 약 10분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 바로 찾아 갔다. 저녁때라서 네 사람이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그 중의 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들 이었다. 한 사람은 내가 미국에 도착 했을 때 Minnesota 대학에서 갓 박사학위 를 딴 최형섭씨로 같이 관광도 했던 분이었다. 둘째사람은 Indiana 대학에서 공부하고 연세대학에와서 화학과 교수 를 했고 내 wife 의 가까운 친구와의 재 결혼으로 말이 많아서 잘 알게된 심문택 박사였다. 세 번째 사람은 정부관련 연구소의 전자부서 책임자로 일본에서 Microwave 를 공부한 정만영 박사 였다. Motorola Assembly 공장 건으로 한국 갔을 때 공대 동창 이양수 소개로 맞났섰다. 내가 Ohio State University 서 반도체 전공이고 또 Motorola에서도 반도체 개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꼭 자기 연구소에 와 달라고 나에게 새로 짓는 연구소의 자랑을 늘어 놓았다. Johnson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도 모두 이 연 구소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초연구 보다는 우리 공업계에 당장 공헌 할 수 있는 Transistor 개발부터 시작하기로 했고, 내가 오게 되면 연구원과 예산을 넉넉히 지원할 수 가 있다고 했다. 나는 Motorola 에서 Transistor 개발은 이미 끝낸지가 오래고 세 번이나 세계 최고의 생산시설로 누구보다도 가장 앞선 Transistor 생산 Line을 개발 설치했다. 지금 나에게는 생산공장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시설만 있스면 바로 생산에 들어가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Transistor를 만들 수 있고 이 시설도 모두 내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우리가 누군데 네 말을 믿을 줄 알아? -- 무시한다는 눈치다. 국방성에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또 했다는 구체적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 해서도 안되는것이다. 제가 알면 얼 마나 안다고 건방진 자식. 내가 나올 때 등 뒤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75

83 5.5 KIST 영빈관에서 쫓겨남 이것도 KIST 와 관련된 이야기다 년초에 설립된 KIST 는 그 설립 기념으로 국제 전자학술 대회를 연다고 정만영 박사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재미 전자업계 한국인 모두에게 알렸다. 높은 수준의 학술대회라고 해서 나도 특별히 내 논문주제를 골랐다. 한국에 많은 반도체 조립회사가 들어가 있어서 반도체 조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최근에 해결된 문제를 종합해서 논문을 작성했다. 앞으로 미국의 Electro-Chemical Society Journal 에 낼 계획이었다. 회사 측에서 시기상조라고 했다. 일년 후에나 발표하자는 나의 상사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한글로 하기 때문에 미국사람은 못 읽는다고 설득해서 반도체 조립의 Bonding Reliability 문제를 다룬 화학 / 금속관련 논문을 갖고 왔다. 최신 정보이다. 내가 소개한 강창술박사 (LED 전문가), 강홍열박사 (Battery 전문가)도 참석했다. 내 논문 발표에는 8 명이 참석했다. 그 중에서 반은 도중에 나가고 남어지는 내 체면 때문에 그냥 끝까지 참고 앉아 있었다. 이 학술대회의 참가자는 모두가 전자계통 의 대학생들이고 Industry 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참가자 내용을 파악 못한 것이 내 잘못이지만 이것이 그 당시 한국 전자산업의 현주소이기도 했다. 나의 논문과 대조적으로 강창술박사의 논문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논문발표라기 보다는 HP 의 LED 홍보였다. HP 에서 제작된 LED (발광 Diode)의 동작원리 그 응용분야를 슬라이드와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이 세미나 기간 중에 반도체를 하는 강박사를 찾는다는 전화를 강창술박사가 받고 저녁에 나가서 좋은 대접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내가 사무실로 찾아가서 나와 바뀐 것이 알려진 Comedy 도 있었다. 이 세미나의 최종 프로그램은 청와대 방문이었다. 얼마 전에 나의 Ohio State University 미국인 동창으로 Nonlinear control system 과목을 같이 수강한 일이 있던 친구를 국방 관련 회의에서 만났는데 박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내용이 예민한 사항이라서 남을 통해서 이야기할 성질이 아니라고했다. 즉 자기가 유도무기를 발명 했는데 사정거리가 짤다고 미국방성에서는 무기로 채택이 안됬지만 제조하기가 아주쉬워서 한국에는 꼭맞는 무기라는 것 이였다. 그래서 요번에 박대통령을 맞나게되서 매우 좋은 기회인 것 같아 이야기 해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청와대로는 전자책임자인 정만영 박사와 KIST 소장인 최형섭 박사가 안내해 주었다. 큼직한 Tea table 을 중심으로 우리 일행 6,7 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둘러 앉았고 나는 테이블의 먼 쪽으로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내 옆에 정만영박사가 있었다. 이야기는 하이텍 전자공업 국내유치와 우리와 같은 고급 두뇌가 자주국방을 위해서 도와달라는 취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일은 자기가 직접 챙기겠다고 하셨다. 나는 말할 chance 를 기다리며 여러 사람 앞에서는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참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뭐 물어볼 것이 없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때다 판단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미팅이 끝나고 박대통령과의 좋은기회를 노쳤다 별도로 만나자고 했다. 정박사가 내입을 막으려고 손을 내밀었고 나를 뒤로 밀었다. 박대통령도 무엇 때문인지 그냥 쳐다보는 것 같았다. 최형섭소장은 자, 일어 납시다. 하고 내가 더 이상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 방에서 나왔다. 내가 대통령에게 너무 실례의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난 정박사와 최소장은 곧 영빈관에서 나가달라고 했다. 돌아와서 바로 짐을 싸 들고 영빈관을 나왔다. 기회는 아주 좋았는데---. 최소장은 내가 미국에 처음 도착 헤서 만난 분으로 교회에서 마련한 짧은 관광여행에도 같이 간 일이 있었고 또 76

84 KIST 준비과정에서 Columbus Ohio 에서도 만났었는데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른 척하고 야단맞고 숙소에서 쫓겨났다 년대 말의 일본 반도체 업계와 삼성과의 만남 모토롤라의 가장 큰 고객은 일본이었다. 내가 일본말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일본에서 온 큰 Buyer 나 의사소통이 힘든 Buyer 가 오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너무 자주 오는 일본 손님에 지친 marketing 사람들이 저녁 대접을 아예 나에게 맡길 때가 많아졌다. 시내서 좀 떨어진 곳에 Pinnacle Peak Patio 라는 서부 식 스테이크 집이 있어 넥타이를 매고 가면 가위로 짤라 버리는 곳으로 유명하여 나도 그 곳을 많이 이용했다. 일본회사에서 내가 일본 방문객을 대접하는 것을 알게 되자 Buyer 에 고급 엔지니어를 동행시키거나 엔지니어 틈에 Buyer 를 끼워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거이다가 공장구경을 원했고 우리는 특별히 감추는 것도 없었다. 이런 일이 오래 계속되자 나는 일본 업계의 실상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어떤 때는 marketing 용으로 갖고 온 선물을 전부 나에게 주기도 했다. 나는 PNP transistor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특허를 가지고 있섰다. 이 Patent 로 많은 돈이 회사로 들어왔다. 입사시 $1 로 특허권을 회사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내 개인으로는 아무 금전상의 이익은 없다. 일본의 반도체의 원로 Tohoku 대학 Nishizawa 교수의 특허가 내 것과 비슷하다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막대한 로열티 지불을 피해보자는 의도가 뻔했지만 워낙 큰 일본이란 고객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모토롤라에서는 성의를 보일 겸 내가 일본 북해도대학의 니시자와교수를 방문하기로 했다. 모토롤라 일본 대리점에서 안내원이 나왔고 반도체업계에서는 이미 내가 일본에 알려져 있는 명사라고 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미국에서 본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일본에 와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유혹도 있었으나 어차피 외국서 산다면 미국이 제일이라고 생각 되어 거절했다. 그 후에도 나하고 같은 연구실에 있던 Dave Metz 가 일본 Motorola 사장으로 부임돼서 기회가 있슬때마다 일본에 들렸섰다. 내가 명실공히 일본 반도체업계 통 ( 通 expert) 이 되어 있을 때였다. 여름 휴가 차 한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서 삼성전자의 조용달 사장하고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조용달씨가 삼성전자의 초대사장으로 알고 있었다. 하네다 비행장으로 VIP 용 미국 캐딜락 승용차가 나를 마중 나왔다. 삼성물산은 그 당시 일본서 최고인 Kasumigaseki 빌딩 에 자리 잡고 그 권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병철회장의 사무실도 여기에 있다고 들었다. 마침 점심 때여서 일본서 최고급이라는 식당에 갔다. 요리사가 직접 나와서 요리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는데 일본요리에 특별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동란 전후 세대라서 한국요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일본요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 때 생선창자로 만든 요리라고 생각된다. 입에 넣었다가 그 맛이 이상해서 씹지 않고 넘기다가 고생한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새우를 못 먹었다. 새우는 발이 많아서 발 많은 벌레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조영달사장은 삼성이 전자사업을 할려고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특히 반도체사업은 일본도 돈만 퍼붓고 있는 실정 이라서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반도체 이야기와 내가 알고 있는 일본 반도체의 현 위치, 일본이 많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기타 내가 아는 전자업 전체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내가 일본 대표업체의 많은 고위인사를 만났다는데 크게 놀라고 있섰다. 자기보다 더 많은 높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나를 유치할 의도가 었었거나 반도체 정보를 얻으려고 저 77

85 자세였고 따라서 매우 솔직했다고 생각되는데 그와 정반대로 조사장이 만난 일본업계의 높은 분들은 한국을 내려다 보고 또 기술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꼭 하루 더 쉬어 회장님도 만나고 가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미국서 다시 보자고 하고 나는 예정대로 떠났다. 이것이 삼성과의 첫 만남이었다 년 내가 본 한국의 실정 내가 1967 년초 모톨롤라 투자조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직접 가서 본 이후로는 내 돈으로 반도체사업을 한다면 몰라도 그 누구를 설득시켜서 한국에서 반도체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결론 짓고 있었다. 한국 기업들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조국 근대화의 일환으로 전자공업은 꼭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또 전자공업에 참여를 해야 정부의 여러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전자공업 중에서도 반도체는 기본이 되는 제조업이고 최첨단 공업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방한했을 때 나에 대한 소문이 잘못 전해졌다. 내가 투자단을 이끌고 온 것처럼 전해진 것이다. 신문에 그렇게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름만 투자 단의 한사람이었지 이렇다 할 임무도 주어지지 않고 그냥 묻어 갔었던 것이다. 내가 특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직후여서 우리 사장님이 나에게 준 보너스와도 같은 것이었다. 개인자격으로는 일시 귀국이란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어서 이러한 방법으로 일시귀숙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주 행운이었고 동시에 교포여권(복수여권)을 발부 받아서 미국 이외 여행이 가능해졌다. 내가 호텔에 투숙하지를 않아서 연락이라곤 오늘날과 달리 전화는 안되고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전자공업을 해보겠다는 회사에서 꼭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찾아 갔다. 이 회사는 재봉틀과 여성작업자를 많이 써서 성공해서 같은 노동집약적인 전자공업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처음 회의에 들어갔을 때의 인상이 Master 하나에 나머지는 모두 Slave 같았다. 자유로운 의사표시는 없고 높은 분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기대도 어긋나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혼자 온 것이다. 다른 미국사람들은 어디 있냐 였고 또 이들은 노무자를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자사업의 합작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반도체 제조기술을 이용해서 같이 반도체사업을 논의하는 쪽으로 의제를 돌리고 싶었었다. 모토롤라의 직원으로 공식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장소였다. 저녁에 별도로 실무자들과 어울리는 기회를 가졌다. 이들은 전자공업에 투자하기 위해서 많은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으나 모두가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이 Transistor Radio, TV 에서 미국을 능가할 거라고 보고 있었고 반도체도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서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이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2, 3 년 앞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내가 나를 혼자 북치고 있다는 인상 밖에 줄 수가 없었다. 한국에 여러 반도체 조립공장이 직접투자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이들에게는 이미 반도체 최첨단 기술이 한국에 들어오고 잇는 것으로 알고 있섰던 것이다. 이들은 조립 업도 반도체사업이고 내가 이야기 하고있는 Wafer fabrication 은 Assembly 를하고 있다보면 자연히 연결이 될것으로 알고 있섰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를 소개해 준 친구를 만났다. 큰 투자를 하는데 강기동 이는 한국 실정도 모르고 앞뒤가 안맞는 현실성이 없는 것을 갖고와서 떠들고 갔는데 "강박산가 하는 사람 좀 사기성이 있는 것 아니냐?" 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진짜 반도체 사업을 열심히 설득하려고 한 것이 그렇게 들린것 같아 나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대학교 다닐 시절 아마추어무선에서 친해진 공대 후배인 조동인의 말이다. 반도체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나봐야 실망만 하고 강박사는 머리가 삐딱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니까 손해보는짓 하지 말라고 충고도해 주었다. 그 후로는 아무도 안만났다 78

86 지금 자기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AM-FM Transistor Radio 를 일본 것, 미국 것 갖다가 개발하고 있는데 FM 에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GE Transistor 와 Silicon Transistor 의 차이를 몰라서 같은 회로를 쓰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GE 와 Silicon 은 같은 반도체이지만 물리적 특성인 Band Gap 이 달라서 Bias 조정을 별도로 해야 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이것은 기본상식이라 학교에서 배웠을 터인데 나도 그런 학교 다닌 것을 벌써 잊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전자공업의 실상은 어느 정도 파악 했다. 부모님과 기타 식구들은 내가 크게 금의환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Dr. Hogan 이 한국에 도착하자 내가 묵고 있는 우리 옛 필동 집을 인사차 방문하고 부모님을 만나고 내 칭찬을 많이 해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서도 유명한 큰 회사의 한국 책임자로라도 되어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내가 떠날 때 언제 다시 한국에 올지 모르겠다고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떠났다. ******* 여기서 바보 노릇한 웃지 못할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경제기획원과 관련된 이야기다. 친구 회사가 남대문 근처에 있었는데 경제기획원에 다녀와야겠다고 하니까 자기 차를 쓰라고 했다. 친한 사이라서 거절하지를 않았다. 까만 Toyota Corona 차로 하얀 Seat Cover 등 쪽에는 학이 수 놓여져 있었고 뒤창에는 머리를 끄덕이는 옆으로 누운 개와 Kleenex 통이 놓여 있었다. 첫째 촌놈 태를 안 내려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자꾸만 습관이 되어 앞문을 열고 탔다. 한국서는 조수석이다.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Jeep 차에 지붕을 만들어 씨운 문 두 개의 차가 내가 아는 승용차였고 미국 가서 내 차가 생겨서부터 미국식 습관 밖에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뒷좌석은 애들이 타거나 짐을 싣는 곳이다. 조수석에 타고 경제기획원 현관 앞에서 내렸다. 들어가면서 적어도 45 분은 걸릴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일은 다시와야해서 5 분 정도로 끝이 났다. 밖에 나와보니 똑같이 생긴 차가 약 10 대 정도 주차장에 서있는데 어느 차인지 알 수가 없다. 현관 앞에서 내렸으니 주차를 어디다 했는지 모를 수 밖에 없다. 어떤 차는 기사가 낮잠을 자면서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운전기사 얼굴도 똑똑히 보지를 않았다. 기사 대기실로 가 봤는데 복장이 모두 같아서 그런지 얼굴 생김새까지 모두 같은 것 같았다. 그 쪽에서 나를 알아봐 주어야지 내가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주차장으로 와서 여기저기 나를 봐 주시오 하고 기웃거려 봤으나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수위실로 찾아가서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혹시 식사하러 갔을지도 모르니까 뒤쪽에 있는 식당으로 가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바로 뒤 인줄 알았는데 한참 걸어가서 식당을 찾았다. 그 앞에 검정 Toyota Corona 가 두 대가 서 있었다. 식당 속으로 들어가서 날 좀 보소 했는데 왔다 갔다 하니까 대개의 손님들은 나를 쳐다 보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쳐다보지를 않아서 그 앞에 가서 어물쩡 거렸더니 한번 슬쩍 쳐다보고 그냥 식사를 계속했다. 이 사람도 아니구나 확인하고 식당에서 나와서 경제기획원으로 되돌아 왔다. 수위실에다가 회사로 돌아간다고 내 이름을 적어놓고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Taxi 를 타고 친구회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근처까지는 왔는데 아침에는 알고 있었는데 건물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근처를 여러번 돌면서 건물 입구 모양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친구 김사장은 안 계시고 여직원이 있어 차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했더니 웃으면서 아직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했다. 내가 이름을 적어놓고 온 것도 잘못 되었다. 그 기사가 내 이름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나도 한심한 놈이다. 빌려준 차도 못 타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 79

87 5.8 Dr. Hogan, Fairchild 로 가다 - 서부의 승리 1968 년 피닉스의 Motorola Semiconductor Products Division 에 상상 못했던 큰 쇼크가 왔다. General Manager (CEO)인 Les Hogan 이 8 명의 최 측근 간부를 데리고 캘리포니아의 팔로알토에 있는 Fairchild 사로 옮겨 갔다. 물론 거절할 수 없는 파격적 대우를 받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온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신문, TV 모두가 야단이다. Motorola 의 맨 위 사람이 몇 빠졌다고 해서 회사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 높은 분들은 휴가 등으로 몇 주씩 빠지는 일은 항상 있는 일로 회사운영자체에는 아무 지장도 없었다. 도리어 유능한 No.2 자리에 잇던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고 회사 전체로 볼 때 나쁜 것은 아니었다. Dr. Hogan 이 나이 38 세 때 하버드대학 물리학 교수에서 모토롤라 반도체회사 책임자로 발탁되어 온 것이 1958 년이었다. Bell Telephone Lab (미국에서 제일 권위 있는 연구소) 에서 Transistor 를 발명해서 노벨상을 받은 Dr. Shockley 와 같이 일도 했었다. Dr.Hogan 의 Fairchild 행은 Hogan 의 업적을 높이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Silicon Valley 의 승리였다. 미국의 최고 기술 경영자가 온 것이다. Dr.Hogan 이 떠나기 전에도 많은 경영관련 잡지에 그의 성공비결을 분석 보도하고 있었다. 하이텍의 Innovation 은 사람 머리에서 나온다. 특히 반도체 같은 새로운 분야가 경쟁에서 앞서고 계속 발전하려면 Innovation 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제 고급 두뇌를 발굴해 내야 하고 이들이 Innovation 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모토롤라의 성공은 시카고 본사에서 Vice Chairman 인 Dan Noble 이 젊은 Les Hogan 을 총책임자로 또 연구소장으로 I.A.Lesk 를 발굴했으며 Les Hogan 역시 젊은 두뇌를 모아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최적 환경을 조성해 주어 전례 없는 성공을 이루었다. 미국은 합중국이다. 주마다 특색이 있고 주법이 모두 다르다. 유타주는 많은 처를 거느릴 수 있고 네바다 주는 도박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고 공창제도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의 하나이다. Hogan 의 경영 역시 각 부서마다 다른 형태로 운영되는 것을 허용했다. 나쁘게 표현하면 재 멋대로 하는 경영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면 그대로 받아주었다. 사실 Hogan 의 경영도 제멋대로 식 이라고도 볼 수도 있었다. 미국에는 없지만 독일에는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가 있다. Hogan 의 모토롤라는 이런 고속도로 였다. 모두가 자기 실력껏 차를 몰고 달릴 수가 있다. 회사는 철저한 도로보수를 해서 사고가 안 나도록 한다. 속도 내는데 지장을 주는 저속도 차는 모두 제거한다. 사고는 모두 회사에서 해결하고 더 빨리 달리도록 격려 재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부의 회사들은 속도가 제한된 고속도로였고 사고가 잘나는 곳은 저속운행을 하도록 하고 위반자를 단속했다. 고급 두뇌들이 모두 자유 분망한 서부로 빠져나갔다. 처음 나간 사람이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노벨상을 탄 Dr. Shockley 였다. 실리콘밸리는 두뇌와 Venture 돈이 모여들어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고 발전했다. 반도체를 시작한 Boston 을중심으로한 동부의 반도체산업은 스름스름 쇠퇴하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생활 환경 이나 작업환경이 HI TEK 발전에 큰 요소로 작용했다. 보스턴 중심의 초기의 반도체 회사들은 Harvard, MIT 등의 인재양성 등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단의 극을 달리는 UC Berkeley 대학, 또 팔로알토의 Stanford 대학이 있는 실리콘밸리 회사에 패배 당했다. 복장으로 비유한다면 넥타이 매는 경영식회사는 실패하고 노타이 반소매 경영식회사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80

88 6.0 한국 으로 가는길 (2) 6.1 쌍용그룹 조해형을 만남 Dr. Hogan 이 떠나간 다음 해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조해형이가 나를 만나려고 식구들과 같이 Phoenix 우리 집에 휴가 차 놀러 왔다. 얼마 전에 보스턴대학에 있는 장유상교수가 피닉스를 다녀 갔을 때 조해형이가 보스턴에 있다고 들었다. 유상이, 조 친구 조해형 해형이 모두 경기고 49 회 동기동창으로 일찍이 미국에 유학 온 친구들이다. 유상이 말로는 해형이는 MIT 를 졸업하고 쌍룡양회로 알려진 상용그룹의 기획업무를 모두 떠맡고 있다고 했다. 상용의 회장은 김성곤씨로 박정희당(공화당을 모르는 나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음)의 재무담담 책임자로 한국 재계에서는 제 일인자일 뿐 아니라 해형이의 장인이라고 했다. 아들 김석원은 아직 어리다고 했다. 나는 한번 만나보자고 연락을 했던것이다. MIT 는 아무나 다니는 학교가 아니다. MIT, Harvard 모두 동부에 있는 세계 일류대학으로 나도 그런 학교 한번 다녀보고 싶었지만 학비도 학비였지만 대학교 공부를 제대로 안한 나로서는 생각도 못했었다. 같은 경기고 동기동창으로 MIT 나온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같이 일해 보고싶은 마음이 생겼다. MIT Lincoln Lab 은 2 차 대전 당시 Microwave, Radar 등 최첨단 기술의 발상지로 전자공업의 Mecca 였고 반도체 역시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공업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조해형과는 아무런 사전 설득이 필요 없었고 그는 반도체에서 한발 더 나가서 전자공업 전반의 보다 큰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해형이는 김성곤 쌍용회장과 유럽에서 제일가는 Philip 사를 방문하고 전자공업 전반의 제휴도 상담하고 구미에 수십만 평의 공단기지도 확보 했다. 우리는 우선 한국에 반도체 제조공장을 하루 속히 건설하는데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고 곧 바로 계획을 마련하여 우선 이들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나의 가장 큰 걱정은 어떻게 나와 모토롤라를 차단하는가 였다. 한국에 반도체생산(wafer fabrication) 뿐 아니라 전자공업 자체가 황무지인데 내가 모토롤라를 그만 두고 바로 한국으로 가서 Try / IC 를 만든다는 것은 자살행위인 것이다. 모토롤라 기술을 유출한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법적 문제는 처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투자가 완료되고 제품이 나와서 판로가 개척돼서 팔기 시작할 때가 아니면 좀 더 늦게 제품이 나와서 이 제품이 들어간 더 큰 제품이 나오기 시작할 때가 법적 문제 제기의 적기이다. 왜냐하면 처음제품의 제작회사와 그 고객까지를 모두 포함시켜서 고소할 수가 있어 문제가 몇 배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속히 모토롤라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한국으로는 가능한 한 늦게 가야 하고 강기동이가 표면에 나오는 것이 좋지 않다. 제품이 실패작이면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으나 크게 성공하면 이 무서운 무한경쟁 시대에 한국은 첨단 기술도입을 강조하고 있지만 돈주고 사오는 기술도입이 아닌 경우 성공시에 있을 수 있는 법적인 문제를 경험한 사람은 한국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이런 기술유출에 대한 회사측의 대응, 비밀 프로젝트 운영시의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조치 등 많은 것을 연구하고 또 걱정도 하고있섰다. 나는 내 조건에 맞는 회사를 찾아 나섰다 81

89 6.2 Sunnyvale- Silicon Valley 로 이사 Hogan 의 Fairchild 행은 반도체업계에서는 너무나 shocking 한 화제였다. 모토롤라의 위상이 크게 부각되고 Hogan 식의 경영과 그가 일구어 놓은 세계 제일의 반도체 업체로 키운 공로는 나의 인터뷰에도 많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옛날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미국 반도체업계의 내용도 잘 알고 모토롤라의 최고위층부터 웬만한 간부들은 내가 8 년을 같이 일 한 사람 들이다. 특히 얼마 전에 Fairchild 로 간 Hogan 을 정점으로 한 Fairchild 의 간부들역시 다 잘 아는 사이다.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로 가기로 하고 거기서 한국행 제품 개발의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모토롤라를 떠나는 시기도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Hogan 이 많은 사내 비밀을 갖고 떠났다고 해서 법적 투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다. 내가 알려지지 않은 회사로 가는 것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 종이 한장 갖고 나오지 않았다. 없던 프로젝트 이후 나는 미 국방성에서 Secret Clearance (비밀문서 취급 허가)를 받고 있었으나 과거의 경험으로 비밀문서는 100% 피해서 그 점은 아주 깨끗했다. Hay Fever 를 구실로 해서 실리콘밸리로 간다고 했다. 처음 내가 피닉스로 올 당시는 황무지로 나무라면 큰 키의 선인장과 야자수가 주종이었으나 그 후에 인공수로(운하)의 연장으로 농사도 확장되고 오렌지나무, 목화밭들이 8 년 동안에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일년 내내 꽃이 피어 꽃에서 오는 Pollen 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래서 Hay Fever 는 악화일로였다. 실리콘밸리로 여러 회사를 인터뷰했다. 모두 날 오라고 했다. Stewart Warner Microelectronics 로 직장을 잡았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잘 모르는 작은 회사 이어서다. 본사가 시카고에 있어 자동차 계기 군 통신장비를 만드는 회사로 RTL(Resistor Transistor Logic)이나 DTL (Diode Transistor Logic) 의 IC 를 제조해서 집안에서 쓰고 남는 것은 일반시장에 팔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 맞지 않는 구식 경영체제라서 몇몇 간부가 그만두고 Accounting 계통 사람이 사장으로 있었다. 모토롤라의 기술과 경영방식을 도입하자는 의도에서 나를 데려왔다. 처음에 VP 를 주겠다는 것을 나는 당분간 엔지니어링에만 전념하겠다고 해서 행정책임이 적은 Technical Director 라는 title 로 했다. 시카고 본사의 통제를 받는 매우 경직된 조직으로 모토롤라와 대조가 되었다. 직원도 300 명 정도로 내가 있던 회사의 5,000 명의 1/20 정도 되는 회사다. 새 생산라인을 설치하기로 들어올 때 약속했다. 여기가 한국으로 가는 전초기지가 되는 것이다. 일년 후면 그만두기로 시일을 잡고 내가 그만두어도 별 지장 없이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아야 뒤가 깨끗하다. 그리고 Trade Secret 이다, Knowhow 빼갔다 이런 후유증을 안 만들어야 한다. 내가 데리고 갈 사람은 Engineer, Technician, Process Operator 각 한 명씩으로 하고 여기에 맞을 사람을 고르기로 계획했고 모토롤라에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도 데려오지 않기로 했다. 조해형이가 한국에 가서 공장을 짓고 생산설비를 설치할 공장장 후보로 손명원이를 스카웃해서 서니베일로 보내 주었다. 손명원이는 Structure Engineering 을 공부한 건축설계사로 영어도 유창하고 성격도 아주 좋았다. 아버지가 나도 같이일할 손명원 씨 잘 아는 해군제독으로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장군 이었다 손명원이는 서니베일 Wolf Road 에 Sunken Garden 이라는 조그마한 9 홀 골프코스가 있는데 그 입구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서 매일 저녁 같이 식사하고 공장설계를 상의하고 때때로 내가 일하는데 와서 공장구경도 했다. 내가 지난 10 여년간 공부하고 일한 모든 것이 낭비 하나 없는 한국의 반도체공장을 위한 것이라고 볼수 있는것이다. 공장설계 윤곽도 잡았다. 82

90 기계의 발전이 빠른 반도체의 특수한 시설 제 선정은 Stewart Warner 에서 일단 설치 운영 후에 결정해야 한다. Risk 의 극소화 이다. 우리 집에서 기까운거리에 김충기박사가 살고 있섰다 나와는 경기고 서울공대 전기과 후배로 Columbia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Fairchild 에 다니고 있었다. 내 한국 행 project 를 같이하자고 권유 했으나 그때 막 Fairchild 에 입사했슬 때여서 좀더 미국에서 경험을 쌓겠다고 했다.. 지나고보니 아주 다행이였다. 그때 나하고 한국 나갔스면 지금은 삼성에서 쫓겨나서 내 꼴이 됬슬지도 모른다. 한국에 나가게 될 중심인물로 Terry Martin 을 뽑았다. Electro Chemical Society Meeting 에서 자주 만났는데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일하고 있는 반도체 Technician 이었다. 서부로 오기를 희망하고 있어서 엔지니어로 승격시켜서 서니베일로 데려왔다. Terry 는 아주 유능한 Semiconductor Fabrication Engineer 로 발전했고 모토롤라에서 개발된 기술을 다시 Terry 를 시켜서 우리가 새로 개발하는 process 로 재정리 했다. Stewart Warner 반도체공장은 모토롤라와 같은 활기는 없고 반도체를 모르는 Chicago 본사의 VP 는 군용장비에 들어가는 기계 개발을 장악하고 있어 반도체는 나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피해서 우선 CMOS 의 생산기술을 확립하고 자동차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자동차의 발동이 걸리지 않는 Seat belt interlock system 을 개발한뒤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시간을 미루었다. 차에 사람이 타기 전부터 Seat belt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CMOS 기술이 여기에적합했다. 여기서 CMOS 공정은 완벽하게 개발되고 Reliability 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조해형이가 최종계획서 작성차 서니베일로 온다고 연락이 왔다. 예산규모, 스케쥴 등을 곧 결정해야겠다. 또 연락이 왔다. 서니베일에 오는 계획이 연기 되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좀 진상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김성곤 쌍용회장이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 조해형이는 일단 hold 를 하고 좀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사실상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한평생의 과업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명원이는 샌프란시스코 일본타운에 있는 Karaoke bar 를 자주 찾았다. 나도 명원이와 같이 이 bar 를 찾아간 일이 몇번있었다.. 피닉스와 달라서 여기는 한국사람이 좀 있었다. 김성곤씨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도 있섰다. 삼선개헌/오치성 내무장관 사건으로 알려진 국회에서의 작은 쿠데타에 김성곤씨가 주모자로 잡혀가서 콧수염을 하나씩 뽑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 사는 한 엔지니어로서 한국의 정치풍랑에 직접 영향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이젠 손명원이도 떠나고 조해형이도 멀어졌다. 내가 너무 Stewart Warner 회사일에 등한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6.3 한국으로 가는 길 대만으로 돌아가다 정례 간부회의에서 월말 재정보고가 나왔다. 지난 달은 겨우 적자를 면했는데 앞으로 DTL / RTL 의 가격이 더 내려가면 적자를 면하지 못 할거라는 결론이었다. 내가 와서 Plastic Package 를 개발했으나 아직도 많은 양이 비싼 재료의 Ceramic Package 여서 더 이상 Cost cutting 이 불가능하다. 여공의 수가 줄어서 약 250 명이 3 교대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년 전만 해도 판매가 현상유지만 되면 약간의 흑자가 생겨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이렇게 가격이 속히 하락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이 회사에는 일할만한 사람이 없다. 실리콘밸리에 맞지 않는 시카고 본사의 경영방식이 일할 사람을 모두 쫓아냈다. 나는 미국회사로는 Motorola 밖에 모르고 있섰는데 여기와 서보니 83

91 이런 회사는 기술자도 필요 없고 같은 것만 찍어내는 일을 할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떠날 궁리를 하면서 월급만 챙기고 있다. 나에게는 장말 잘된 것이다. 나도 회사 경영 불만을 구실로 고만 두면 아무도 의심 안 할 상황이다. 시카고의 VP 가 정기적으로 서니베일을 방문하고 있어서 나는 조립업을 해외로 내보내자고 제의했다. 인건비가 반으로 줄면 당분간은 적자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한 계산으로도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모토롤라에서 한국 조립공장에 관련이 있었다고 Survey 를 해보자고 했다. 나의 한국 행 반도체사업의 미련이 아직 죽은 상태는 아니라서 한번 동남아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나와 Production Manager 가 같이 대만, 비율빈, 싱가폴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홍콩은 이미 인건비가 올랐고 한국은 내가 안 가기로 했다. 잘못하면 나의 계획이 알려질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었다. 떠나기 이틀 전에 Production Manager 는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결국 나 혼자 떠나게 되었다. 그는 아주 약은 친구로 후에 혹시 책임질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이를 피하려고 한 구실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스면 한국도 포함했으면 좋았는데 후회도 했으나 이미 여정은 잡혀 있어서 그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대만에서 안내원을 따라 기차로 Taichu 에서 내려 Shinchu 의 공업지대로 갔다. 넓은 농지에 Philip 의 TV 브라운관 공장이 하나 덩그렁이 서 있었다. 여기서 교통대학교 (통신대학) 교수들도 몇 만나고 Transistor / IC 를 제조하고 싶다는 사람도 몇 있었다. 그러나 공적 일만 추진하고 내 개인 관심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우리는 직접투자로 시작할 생각은 없었고 현재 조립을 하고 있는 회사와 하청생산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Unitron( 宇 環 電 子 )이라는 회사가 이미 IC 의 소규모 조립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건은 우리가 Bonding Machine 을 제공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우리 역시 서니베일의 시설을 옮겨오면 되는 것이다. 다음 날 마닐라에 도착했다. 여기도 대만과 같이 무더운 날씨로 마음에 안 들었다. 놀란 것은 비행장이 불이 나서 임시 천막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비행장 건설 감사가 나온다고 해서 아예 증거를 없앨 겸 비행장 건물을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비행장에서 호텔까지 택시로 가는데 할 일 없는 많은 청년들이 시원한 호텔 로비를 점령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매우 험상스러웠다.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아주 귀찮게 굴어서 호텔 방에서 두 사람 면접하는 것으로 끝냈다. 조건이 좋은 상담이 있어도 여기는 안되겠다고 느꼈다. 저녁에 싱가폴로 떠나는 비행기가 있어서 무조건 비행장으로 나갔다. 비행기 자리는 있었으나 비율빈 경유 여객이 싱가폴에 입국하려면 호열자 예방주사를 맞아야 된다고 했다. 나하고 같이 주사 맞으러 가는 서양 친구가 있어서 말동무가 되었다. 미국인은 아니고 호주국적의 군 장비 브로커로 마닐라 호텔은 깡패들의 소굴 같았다 자기가 지금 막 비율빈 국방상과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비율빈에서 고위층에 연결이 필요하면 자기가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모든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비율빈에는 관심이 없었다. 비행기는 많은 좌석이 비어 있었다. 같이 옆에 앉아서 싱가폴에 도착했다. 내가 하루 먼저 와서 호텔예약에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고 했더니 자기가 잘 아는 호텔이 있어 같이 가자고 해서 안심했다. 도착이 한 시간이 늦어져서 늦은 밤이라 공항은 비어 있었다. Passport 에 문제가 생겼다. 내 여권은 교포여권이지만 가는곳은 한국에서 승인을 받게 되 있섰다. 여행 목적지에 싱가폴이 없다고 입국을 거부당했다. 내가온 목적을 설명하고 사정을했다. 여권은 맡기고 통행증 같은 것 한 장을 받고 비행장을 나왔다. 고맙게도 호주인 Frazer 는 나를 84

92 기다리고 있었다. Frazer 가 잘 아는 Summit Hotel 에 갔더니 미 7 함대 기함이 들어와서 싱가폴정부가 파티를 열어주고 있었다. 많은 미해군 장교들이 정장을 하고 호텔의 Ballroom 을 메우고 있었는데 방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는 Frazer 의 교섭으로 약 10 분 거리에 있는 VIP Condo 를 하나 마련해 주어 노숙? 을 면했다. 더 고마운 것은 이 Hotel VIP 친구라서 Condo 를 공짜로 제공해 주었다. 이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도 가끔 가다 있다. 입국절차에서 기분을 잡쳐서 그 다음 날 형식적으로 미리 약속한 사람만 만나고 저녁 비행기로 돌아왔다. 나는 Unitron 으로 조립하청을 주기로 하고 Production Manager 에게 실무를 맡겼다. Plastic Package 문제로 수개월 후에 다시 대만을 방문했다. 이 때 반도체 Transistor / IC 생산공장에 관심이 있는 대만의 기업인을 정식으로 만났다. 내가 혼자서 하는 프로젝트이고 Stewart Warner 와는 무관함을 밝혔다. 내가 대만서 이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의사소통이었다. 여기 높으신 분은 영어가 안 통한다. Business 에는 항상 상반된 이해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이것의 해결이 성실한 대화다. 통역을 통한 설득이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외교관계에서는 단어 한 개의 의미 갖고도 트집 잡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제는 사업을 할려면 중국말도 배워야할 판이다. 6.4 대만의 관심 내가 시작한 조립업의 대만행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었다. 앞으로 반도체 값이 좀 떨어져도 이삼년은 적자를 면할 것 같았지만 장기대책은 아니다. 시카고 본사에서는 서니베일공장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속 IC 값이 내려가고 또 더 좋은 IC 가 나오는데 자체 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이제는 사서 쓰는 것보다 더 비싸진다는 결론이다. 내 판단도 지금과 같은 경영체제로는 여기 실리콘밸리에서 곧 도태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내가 하는 C-MOS Project 도 앞으로 Production Line 을 제대로 확장하고 Production Marketing 도 해야 된다. 그런데도 예산 책정이 안되고 있는 상태여서 나도 나의 갈 길을 속히 정해야 할 때도 되었다. 내가 돈을 마련해서 헐값에 사서 C-MOS 공장으로 새로 태어나면 좋을 것 같았다. 모토롤라를 떠나와서 벌써 2 년 째 가 되는데 한국을 가기 위해서 너무 저자세로 일한 것이 Venture Capital 사람들을 만나는데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았지만 한번 부딪쳐보기로 했다. 내 예상대로 나는 알려진 사람이 아니어서 말이 먹혀 들지가 않았다. Stewart Warner 에서 일한다는 것이 negative 로 작용했다. 쌍용 프로젝트를 보여줬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아직도 한국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우선 대만에서 관심이 있으니 한번 다시 대만에 가서 이들을 만나보고 내가 나갈 방향을 정할 작정이었다. 보통사업과 달라서 반도체만은 Timing 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여기 실리콘밸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반도체업계의 정보가 점심 먹으러 갔을 때와 저녁 먹으러 갔을 때가 다르다. 또 신문으로 도 항상 접하고 있어서 날이 갈수록 나는 초조해지기만 했다. 대만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는 내가 1967 년에 만난 한국 기업인과는 아주 달랐다 5 년간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이 Unitron 사람들은 현재 IC Assembly 를 하고 있고 그 전 단계인 Wafer Fabrication 이 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assembly 관개로 대만인 기술책임자 겸 사장 인 MR. Chew 가 자주 미국에 와서 내가 Stewart Warner 의 모든 기술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서 한국서와 같이 Assembly 가 반도체의 전부 같은 생각은 갖고 있지 않고 그와 정 반대였다. 도리여 Wafer Fabrication 기술을 도입 해야 된다고 생각 하고 있섰다. 쌍룡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Transistor 와 IC 제조용 시설을 정돈했다. 사실 C-MOS 제조시설이나 NPN / PNP 제조시설이나 같은 것이다. 왜 그런지 C-MOS 는 나만의 것이고 너에게는 아직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85

93 그때의 나의 심정이었다. 대만의 Assembly 는 Production manager 관할이였지만 내가 시작했고 QC 나 기타 Plastic Package 의 신뢰도에 관한 문제는 내가 직접 챙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대만 행 스케줄을 잡았다. 그 당시는 동경 경유를 해야됬다. 동경의 Akihabara 는 전자상의 집중지로 한국의 청계천/장사동 상가의 성격과 같아 옛날에 Kanda 부터 시작했다. 아마추어 무전기, 새로 나온 Audio 기기 등 모두가 나의 관광 대상으로 이런 곳의 방문이 나에게는 지방, 경치관광보다 흥미롭고 즐거웠다. 일본 동경에서 하루 자고 대만으로 들어갔다. Unitron 에서 공식 일을 마치고 나의 반도체 프로젝트를 상의했다.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고 현재 Stewart Warner 에서 생산하는 DTL / TTL Logic IC 와 NPN / PNP Transistor 그리고 Stewart Warner 는 안 만들지만 Linear IC 의 생산라인을 만든다는데 합의했다. 나에 대한 보수, 또 내가 여기 와서 사느냐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하기로 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여기 와서 살기를 원했지만 말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아이들 교육도 문제고 100% 마음에 드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Taipei 에 공장을 지으라고 조건을 걸었다. 여기서 Unitron 에서 내놓은 제안을 내가 받아들인다면 내일이라도 새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단계였다. 아직 한국에 미련은 남아있섰다. 지난 5 년 동안에 한국의 사정도 많이 달라졌겠고 이번에는 업계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김규한 사장을 만나서 상의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동경-서울 왕복 비행기 예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6.5 주인 잘못 만나 보따리 장사 -한국에 태여난 죄 서울행 비행기 check in 이다. 그 당시 대한항공은 주 항로가 중동과 일본이었고 미국은 취항한지 얼마 안 되었슬때였다. 기종은 잘 생각 안 나는데 비행기를 타면 앞의 반이 승객 좌석이고 뒷부분은 칸막이를 해서 화물칸으로 되어 있었다. 승객의 대부분이 한국 아줌마들이다. 손에 든 것이 모두가 일본제 가전제품으로 밥솥, TV 가 그 주류를 이루고 중량 초과료를 안 내려고 하는 싸움판이 바로 여기였다. 나는 줄은 섰는데도 줄이 줄어들지가 않는다. 같이 싸울 생각도 없고 꼭 이 비행기를 타야 된다는 이유도 없다. 항상 그랬지만 서울에 연락을 안 해서 마중 나올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저 뒤에서 기다리다가 못 타면 다음 비행기로 가기로 마음을 편히 먹고 그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비행장인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떨고 있으니 질서를 위해서 인본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KAL 직원은 이 혼잡/난리를 일본경찰에 도움을 청하지 않는지, 남 보기 창피해서 나도 흥분이 돼였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 같은 승객도 없고 이런 혼란을 불평하거나 고발할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다행 이도 예약된 사람은 모두 탈 수가 있었다. 맨 마지막에 탔는데 비행기 안도 장관이다. 이건 화물비행기다. 아줌마들의 반입품이 자리 밑에 안 들어가는 것은 통로에다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기내 방송은 통로에 있는 휴대품을 정리하라고 계속 떠드는데도 모두들 귀먹어리고 무표정이다. 정말 한국사람으로 창피하고 어디 매너라는 것이 있는지 내 것만이 중요하고 네 것은 모르겠다 놓을 장소가 없으니 자기 짐만 좌석 밑에 쑤셔 넣고 남의 것은 통로로 밀어내기도 했다. 앞으로는 절대 KAL 은 안타겠다고 다짐했다. 옆에 앉은 아줌마, 뒤에 앉은 아줌마 모두가 악에 받친 흥분된 얼굴이다. 왜 그렇게 목소리가 큰지? 악을 써야 이기게 되어 있기도 했다. 나는 휴대품이 없어서 내 좌석 앞은 옆 아줌마 보따리가 놓여 있었는데 한 시간만 참아달라고 애걸해서 못마땅하지만 그저 가만 있었다. 86

94 비행기가 이륙하자 비행기소리만 들리고 아줌마들의 싸움소리는 없어졌다. 시간이 좀 지나서 비행기가 착육하자 아직 출구까지는 멀었는데 또 한 차례 아줌마들의 난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젠 여기저기 쑤셔 넣은 짐을 챙기는 싸움이다. 기내방송은 자리에 앉아있어 달라고 계속 부탁하고 있었지만 용감한 우리 아줌마들에게는 그런 방송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이네들의 고함 소리룰 나는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더 큰소리 더 거친 소리가 이들에게는 생존경쟁 도구 인 것이다. 특히 경상도 말이 여기서는 서울말보다 거치러서 더 좋은 싸움도구로 나에게 듣겨젔다. 우리말은 내가 이렇게 잘 알아 듣는데 대만에서 통역을 통한 나의 고전을 다시금 되새겼다. 사업은 내가 아는 말로 해야겠다. 어떻게 해서 한국은 이렇게 못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불과 한 시간의 사이를 두고 한 쪽은 세계에서도 일등국, 일등국민이 되었고 한 쪽은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비행기가 항행고도에 도달하자 내 옆의 아줌마가 너무 소란을 떨어서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죄를 했다. 자기는 남이 부러워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주인을 잘못 만나서 보따리장사가 됐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 보기 창피했지만 이젠 이것이 자기 밥 줄인 이상 죽기 살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주인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지를 않았다. 사실 나라 체면, 질서가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라도 주인 잘못 만나서 이 꼴이 됐다. 주인 잘 만난 일본은 일찌감치 동양에서 제일 강한 나라가 되어서 한국, 만주, 중국 모두 먹었다가 미국의 힘에 토해냈고 우리는 나라까지 빼앗기고 남의 힘으로 나라는 찾았지만 찾자마자 또 우리끼리 전쟁까지 치른 더 못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들이 불쌍하게 보였다. 한국에 태어난 죄다. 뒤에 나오지만 나 역시 공장에 필요한 잔 품목 조달을 위해서 보따리 장사를 안할수 없게된다 (6.14 page96) 6.6 KEMCO 김규한사장 한국반도체 역사의 시작 보따리 장사 틈에 끼어 김포 공항을 빠저 나왔다. 김규한사장 사무실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으로 좁은 길이 있는데 이 길로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는 6 층짜리 고려빌딩 건물 안에 있었다. 5 층 Elevator 를 내리자 바로 Korea Engineering and Manufacturing Co. 라고 한 영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쉽게 만나고 또 상의도 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이분 뿐이었다 년 내가 공과대학 학생일 때 한국 아마추어 무선연맹을 창설했다. 학생신분이라서 그 때 외부에서 여러분의 이사를 외부에서 모셔왔는데 김규한씨만이 전자사업을 하시는 분이었다. 김규한씨의 KEMCO 는 이상규씨의 오퍼상(일종의 무역중계상)과 합병하고 있었다. 대만도 반도체 제조업(Wafer fabrication)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니 한국업계도 1967 년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판단은 갔으나 이번에는 좀 조심스럽게 김규한씨에게 자문을 받아야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니 김규한사장이 아주 반가이 맞아주셨다. 서로의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박사, 뭐 좋은 사업 없어요? 라고 묻는 것이다. 사실은 한국실정도 물어보고 또 사업에 대한 조언도 듣고 싶어서 찾아 왔다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했다. 대만에서의 투자규모 등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김규한씨는 조금도 서슴없이 바로 이거 우리가 합시다 라고 하시며 더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보시는 것이다. 사업 시작이 이렇게 쉽게 될 수가 없다. 쌍용의 조해형 때도 그랬지만 반도체가 뭔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더욱이 내 자신의 소개도 필요가 없었다. 대만에 제공하는 반도체 기술은 C-MOS 가 아니고 주로 NPN 과 PNP Transistor 였다. 물론 이 시설로 C-MOS 제조가 가능하다. 한국서 하려는 반도체는 C-MOS 기술이 우선이다. 한 세대 앞선 것이어서 대만에 없는 문제가 여기에 따르고 있다. 그것은 Trade Secret 또는 Production Knowhow 로 일컫는 것으로 하이텍, 유행하는 물건, 87

95 아주 비싼 특별히 디자인된 물건들 안에 함유되어 있는 눈에 안 보이는 가치이다. 무형물이어서 후진국에서는 이해도 못하고 따라서 인정을 해주지를 않는다. 그리고 자기 머리 속에 들어있다고 해서 다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 머리에 들어간 경로도 중요하다. 나의 걱정은 Technology 가 아니다. 그것은 완벽에 가깝게 내 머리 속에 정리되어 있다. Trade Secret, Production Knowhow 에서 오는 이해가 상반되는 회사나 나라 간의 문제들이다. 여기에다 나는 한때 미국 극비 반도체 관련 방위산업 Project 의 주인공이였다. 6.7 실리콘밸리의 생태 내가 실리콘밸리로 이사온 것은 1969 년 쌍용프로젝트 때문이었다. 그 때는 이미 이 동네의 대부분이 빈 땅이거나 과수원 그리고 꽃밭 비닐하우스였던 것이 현대도시로 바뀌고 있는 과정이었다. 서니베일 한복판의 과수원에서 따 온 과일을 처리하는 통조림공장이 있었는데 이것도 철거되기 시작했다. 명문교인 스탠포드대학이 팔로알토에 있어서 여기만이 농촌을 벗어난 교육도시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이텍은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은 William Shockley 박사가 팔로알토의 Page Mill 에다 Shockley Transistor Lab 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사로 많은 젊은 반도체 두뇌들이 몰려들었고 내가 여기 오기 조금 전에는 피닉스의 모토롤라에서 Les Hogan 이 8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Fairchild 사로 옮겨온 것이 이 동네의 가장 큰 뉴스였다. 전국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하이텍에 새 아이디어가 있는 기술자는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돈있는 사람들은 Venture Capital 투자가로, 변호사들은 분쟁해결사로 모여들어 말 그대로 전세계의 반도체 개발 및 제조활동이 이 좁은 바닥에서 들 끓고 있었다. 사람이 모여드니 공장, R&D 건물, 주택이 태부족이 되어 대규모 건축 붐이 생기고 하이텍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조건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땅 가진 농부들은 땅값이 오르자 모두 땅 팔고 농부신세를 면하게 되었고 많은 농부들이 별안간에 거부가 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2 차 대전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일본계 사람들이어서 전쟁 중의 격리수용과 전후의 차별대우를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싸고 비옥한 땅을 차지해서 과수원이나 화원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쫓겨나지 않은 중국인들은 좁은 차이나타운에 계속 몰려 살고 있어서 집 한 칸 없는 신세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그 가난한 팔자를 고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실리콘밸리의 Boom 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한참 좋을 때는 새 사업의 성공률이 65%까지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35%에 속하는 실패자들이 다시 시도하면 그 중에서 65%는 또 성공하니까 두 번만 시도한다면 88%가 성공한다는 계산이 된다. 그래서 모두가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동으로 남으로 뛰어다니며 투자가, 변호사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은 중국식당이 들어 섰지만 서니베일의 엘카미노 길에 있던 Michael Restaurant 는 매우 유명했다. 점심시간 저녁시간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새 사업 상담하는 것을 거의 항상 목격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note 몇 장 들고와서 교섭하는 엔지니어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의 뒷면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남의 아이디어를 베끼고 안 해보고도 했다고 속이고 내용을 과장 확대하여 우선 seed money(착수금)라도 챙기자고 하는 재주꾼들이 극성을 떨었다. 미처 대비를 못한 법정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법정은 새로 시작하거나 약한 쪽을 많이 봐주는 경향이 있어 새로운 venture 는 더욱 더 극성을 떨었고 여기에 편승한 변호사들의 횡포도 말이 아니었다. 경쟁사를 죽이려고 없는 사실을 조작해서 고소부터 하고 보는 악덕 사업가 88

96 나 변호사들도 생기고 부당하게 고소 당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은행자금 줄이 막혀 망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망할 기미가 보이면 하루 속히 회사를 접고 그 옆집에다 간판의 이름만 갈아 부치고 계속하는 경우도 목격했다. 나도 이제 여기 실리콘밸리에서 새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변호사도 몇 만나 보았다. 그들의 경고도 나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법적 분쟁이 생기면 외국인 또는 외국회사에 유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하이텍의 외국 유출은 이 냉전시대에 적국, 우방국을 막론하고 모두가 미국서 원하지 않는 사항이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 공군 프로젝트에서 안보에 관한 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에 이런 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문제가 되는것이 외국인이 외국에다 하이텍 공장을 미국 기술을 빼가서 짓는 것이다. 이 사항은 변할 수가 없지만 외관상으로라도 미국사람이 미국에서 하는 사업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런 개념은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오해 받기 좋은 것이었다. 6.8 ICII 사 서니베일에 세우다 김규한씨가 약속대로 나를 따라서 곧 미국으로 오셨다. 서니 베일 마이클 레스토랑 뒤에 있는 Executive Suit Motel 에 짐을 풀었다. 쌍용의 조해형이와 만든 사업계획을 최소로 축소하고 아주 tight 한 스케쥴로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계획서를 작성했다. 처음에 필요한돈이 미화로 $1,695,000 으로 나왔다. 진공 펌프, 이상규 (좌) 김규한 한국반도체에 투자 압축공가펌푸, 고순도 질소가스, 고순도 물 등의 공급 장치들은 가까운 일본에서 사기로 하고 일단 김규한씨가 알아보았다. 일본에 반도체공장이 있어서 그 정도는 가능하리라고 생각 했섰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에서 의 구입은 일체 안 하기로 했다. 나는 어떤 장비가 어디서 생산되고 그 시일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정확한 구매 그리고 한국으로의 운송계획이 가능했다. 일단 생산라인이 가동되어 신제품이 나오면 그 다음 단계 금융지원은 기술이 입증되기 때문에 쉽게 될 것으로 예상 했다. 저녁에 둘이서 회사에 가서 생산시설도 보고 고순도 가스, 물 등의 시설도 보았다. 옥상에 설치된 냉동, 통풍장치 천정 속에 만들어진 배관 등 모든 것을 똑같이 한국공장에 이관하는 것이다. 공장설계는 오하이오 주립대학 건축과를 나온 내 친구 이창민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회사 설립구조는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일반 미국사람들에게 색다르게 안 보이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엔지니어를 뽑는데도 중요하고 내가 있던 Stewart Warner 사에서 나쁜 마음을 안 갖도록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회사의 구조는 미국에 모체를 두는 것으로 하고 그 동안 생각해 두었던 회사 이름을 ICII (Integrated Circuit International, Inc.)라고 하기로 했다. 회사 사무실은 1010 stewart Drive Sunnyvale 에 마련 하고 회사 사장은 오랫동안 Kemco 와 친분이 있던 Joe Sudduth 를 쓰기로 했다. 그는 Kemco 가 한국 공군통신망을 구축할 떼 Collins Radio 사의 한국지사장을 지낸 사람으로 그때는 은퇴해서 샌디에고에서 일본가전제품 수입대리점을 하고 있다고 했다. ICII 에 Joe Sudduth 가 투자하고 ICII 사의 지분 50%를 강기동이에게 공로주로 주기로 했다. 한국에는 ICII 사와 한국측 자본가와 50:50 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곧 ICII 로 반도체공장 시설재의 LC 를 열기로했다. 한국통인 Joe Suduth 가 Stewart Warner 에서 일하는 한국인 강기동 이와 합작해서 반도체회사를 소자본으로 Sunnyvale 에 89

97 설립하고 공장은 Joe Suduth 의 옛 Business Partner 인 Kemco 가 한국 내에 짓는 것으로 외부에 알리기로했다. 회사 설립자문은 그당시 반도체 venture 관계로 유명했던 Scornia 변호사 한테서 받았다. ICII 회사가 설립되고 Joe 가 산호세로 이사왔다. 미국인 엔지니어로는 Terry Martin 이 Wafer fabrication 전반과 모든 Coordination 을 맡고 Test /design 으로 한국사람을 못 찾아 베트남 출신의 Anh Nguyen 을 뽑았다. 시계 Chip 디자인은 Bob Lipp 이 하고 Fabrication process 가 정착되면 그 때 한국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통풍 배관 관계는 국내에는 이런 식의 공장이 없어서 Stewart Warner 사의 유지 보수 책임자로 있는 Wes Neil 을 설득해서 부천공장의 배관을 책임지고 우리 사람도 훈련해 주기로 해서 일단 첫 Round 의 인선을 매듭 지었다. Anh 이 나에게 한 말이 있다. 나는 내가 얻은 지식을 갖고 자기 나라를 찾아가는데 자기는 그런 형편도 못 된다고. 내가 많이 부럽다고 했다 한국공장은 김규한사장이 책임 지기로했다. 내가 집에서 그린 공장 Layout 와 specification 을 한국으로 보냈다. 나와 Terry Martin 이 Stewart Warner 를 사임하고 새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나올 때 종이 한 장 안 가지고 나오기로 약속했다. 다행히도 아무도 ICII 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매일같이 새 IC 회사가 생기고 또 문을 닫고 하는 것이 여기 실리콘밸리인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저자세로 일을 해야한다.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제품은 손목시계용 LSI IC 이다. 나혼자만 알고 필요할 때까지 회사 비밀사항으로 했다. 쓸데없이 타 경쟁자에게 정보를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ICII 이름으로 반도체장비의 발주가 시작 되었다. 이장비가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비밀로 할 수는 없지만 일부러 남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장비들는 컨테이너에 넣어서 오클랜드 항구를 통해서 한국으로 보내게된다. 모든 장비가 거의 동시에 도착해서 창고에 머무르는 기간을 최소화 하도록 발주시에 정확한 도착시일을 명시하고 계속 감시 하도록 세밀한 계획을 만들었다. 모두가 손에 익은 일들이다. 6.9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다 Yom Kipper 라는 유태인의 큰 휴일의 하나가 10 월 6 일이었다. 이 날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기습공격을 시작하여 또다시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전에도 중동에서의 전쟁은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아무 관심도 없고 멀리서 일어난 전쟁이라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좀 보고 들은 것 이중동전쟁은 반도체사업의 운명을 바꾸었다 외에는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고 보니까 이 전쟁이 나의 한평생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의 비즈니스는 모든 것이 짜여 있고 정리가 되어 있어 특히 구매에 문제를 느껴 본 적이 없다. 내가 오하이오 있을 때도 연구소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했고 모토롤라에 있을 때도 여러 번 많은 반도체 생산장비를 구입했다. 최근에는 Terry 가 나와 같이 Stewart Warner 에서 C-MOS 라인 설치로 많은 장비구입을 했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우리가 뽑아놓은 물건값이 달라졌고 어떤 경우는 배달이 불확실하다. 소위 유류파동 이 시작된 것이다. 아랍 산유국에서 이스라엘을 돕는 나라들에는 기름을 안 팔기로 했다. 90

98 기름에 의존하고 있는 모든 활동과 생산품은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큰일이 났다. Plastic 제품이 order 가 안 된다. 벌써 사재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큰 회사들이 유류파동이 장기화 될 것으로 보고 물건을 확보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구매 선을 바꾸는 것도 생각할 수 있으나 고순도를 요하는 반도체 제조에는 써보지 않은 제품은 잘못하면 생산품 전체가 불량이 될 수도 있고 그 불량의 원인 조차 찾을 수 없을 때가 많다. 특히 우리의 운명이 첫 시제품 생산에 달려 있다. 불량품이 나왔다면 이것은 회사에 치명적이고 내 체면, 신용도 땅에 떨어진다. 지금까지 물건이 제대로 안 나올 거라는 걱정은 해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기술에 관한 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산자재나 원료 등을 모르는 안 써본 것으로 대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원칙을 세웠다. 우리가 모르는 것으로 대체는 절대로 안되고 값을 더 주어서라도 같은 것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되니까 배달 날짜가 불확실해지고 또 늦어져서 트럭으로 운송이 비행기로 바꾸는 경우도 생겼다. 휘발유가 없어 수송 트럭의 운송이 비싸지고 늦어졌다. 처음에 스케쥴에 맞추어서 한다는 것은 이젠 불가능하다. 물건값, 송료, 그리고 스케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주문한 물건이 도착 안 해서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는데 지장이 생겼다 새 선박을 잡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행 화물선의 취항이 유류 난으로 취소 되었다. 시간이 돈이다 급해졌다. 다음 출항을 기다릴 수가 없어 알아보니 남쪽 롱비치항에서 떠나는 배가 있었다. 급히 운송료를 보통보다 두 배 이상 주고 롱비치항으로 실어 보냈다. 예산초과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매일 문제가 생기고 있다. 돈이 더 필요하다. 유류팡동이 장기화될 조짐이다. 김규한씨와 상의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제품 생산 까지만은 자금을 계속 지원해 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전세계 경제가 흔들리는데 제품이 나온다고 해서 낙관할 수도 없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사업의 중심 인물이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 사업에 참여시켰고 앞으로도 더 사람을 뽑아야 되는 형편이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유류파동에 연관된 문제는 모두 해결하고 있다고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그 자체가 내게는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제일 힘든 일이 나를 믿고 큰 용단을 내서 출자한 김규한, 이상규씨에게 할 말이 없다. 나를 믿고 좋은직장도 버리고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전 처음 당하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도 보이지가 않고 있다 Engineer 면접과 영어회화 생산시설재를 발주했다. 인수 전에 우리 엔지니어를 보내서 사용법, 보수, 조정법 등을 배워와야 된다. 보통 하루나 이틀 동안에 이 모든 것을 배워와야 하는데 주로 현장에서 설명하는 것을 알아 듣고 또 모르는 것을 물어봐서 짧은 시간에 최대의 수확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시설이 이중으로 되어있지 않아 한 공정이나 기계가 서게 되면 전 공장이 정지되고 그렇게 되면 시 생산에 차질이 오고 내가 갖고 와서 정착시키려는 기술자체에 의문을 주게 된다. 또 후속 금융차관에까지 영향이 온다. 급한 문제가 생기면 곧 국제전화로 상의해서 해결해 내야 한다. 당장 Diffusion, Photo Processing, Ion implentation, Final test 에 각 한 명씩 엔지니어를 뽑아서 미국으로 보내 인수할 기계를 생산공장에서 점검 인수하도록 해야 한다. 뽑는 엔지니어의 조건은 첫째도 영어 둘째도 영어다. 그것도 책보는 영어가 아니라 1:1 로 대화하는 영어다. 한국에서 반도체 경험이란 있을 수 없으니 학교 갓 나온 학생으로 영어회화 잘하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여러 대학을 방문했다. 결국 회화 잘하는 이공계 졸업생은 찾을 수가 없었다. 미국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뽑기로 하고 신문광고를 냈다. 미국 91

99 직접투자 반도체 조립업체에서 미국인과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박등윤이를 모토롤라에서 송대호를 Signetic 에서 데려왔다. 네명 뽑을 예정이 이 두명으로 끝났다. 영어능력이 없는 사람을 미국으로 보낼수는 없었다. 내가 미국 가기 전에 영어를 열심히 공부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주에 시험친다는 것도 못 알아들어서 시험을 망친 일도 있었다. 아무리 이론이고 뭐고 잘 알아도 의사 소통이 안되면 병신취급 받기 마련이다. 모토롤라 투자조사로 한국 나가기 전에 나에게까지 한국 변호사 선정을 장비인수차 미국으로 가는 박등윤(좌) 송대호 부탁했었다. 한국에 영어소통이 되는 변호사는 없느냐고? 전화로 인터뷰를 했는데 첫마디부터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전화로의 회화는 쉬운 것이 아니다. 영어를 안쓰는 나라에서온 서양 백인들은 고등교육 까지 안 받아도 미국와서 자기네 영어 실력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우리는 대학을 나와도 그 근처도 못 간다. 기술자를 구한다고 동창 친구들에게 부탁도했다. 뭐하는 엔지니어냐는 설명과정에서 내가 들은 말들이 생각난다. 왜 하필 반도체냐 회사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전도체로 바꾸라고도 했다. 또 반도체 소자는 아주 정밀하고 조그만 것이어서 현미경을 써서 작업을 한다고 설명하니까 하필 돈 주고 공부한 것이 고작 그런 거냐? 사내자식이 이왕이면 큼직한 것을 해야지. 그런 것이면 여자들을 뽑아서 훈련시키는 것이 훨씬 싸게 먹는다고 충고도 들었다. 물론 친한 사이에서 지나가는 소리지만 우리의 의식구조가 정밀공업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으로 이사 오다 -- 역 이민 활동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야 했다. 15 년 만에 생활근거지를 다시 한국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제는 한강변에 반포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이미 입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탄을 안 때는 중앙 난방장치가 된 최신형 아파트라고 해서 회사에서 전세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 학교도 걱정했었는데 같은 단지 내에 국민학교도 곧 개교한다고 해서 학교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서니베일에 있는 집은 미국 왕래가 자주 있을 것이니까 그냥 두고 Joe Sudduth 에게 관리를 부탁했다. 냉장고는 하나 새로 사고 창에 장치하는 에어컨도 샀다. 그리고 한국의 학용품의 질이 좋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연필, 공책 등 학용품을 듬뿍 샀다.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제일 좋은 선물이 될 것이고 친척아이들이 많이 있어 이들에게도 나누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옷만은 한국이 더 좋고 싸다고 해서 사지 않았다. 사실 여기 백화점의 의류는 모두가 Made in Korea 이니까 구태여 여기서 사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애들은 한국말을 못하는 국민학교 2, 3 학년이었다. 한국말 배우는데 일년만 고생하면 될 것으로 예정하고 새로 생기는 반포국민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했다. 개교하기 전에 학생 등록을 해야 해서 학교를 찾아가서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년만 있으면 말이 가능할 터이니까 그 때까지만 좀 특별히 봐달라고 부탁했다. 교장선생님도 특별히 배려할 터이니 걱정 말라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개교 첫날 내가 애들을 데리고 학교에 등교했다. 애들 교실만 찾아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운동장에 어머니들로 꽉 차 있었다. 미처 내가 몰랐다. 모든 학년이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전교가 입학식인 것이다. 나는 빨리 회사로 나가봐야 되는데 학교 측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다. 어머니들은 서로 인사하고 떠들고 야단들이다. 모두가 다 아는 사이 같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쪽 구석에서 기다렸다. 날씨가 좀 쌀쌀해서 우리는 좀 추운 것을 92

100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기가 더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털옷들을 입고 그것도 상당히 좋은 것들로 보였다. 기다리면서 학교가 시간을 안 지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한 20 분쯤 늦어서 학교 선생님이 나와서 학생들에게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일학년 학생은 오른쪽 이학년 학생은 우리 아이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 말 못하는 애들을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까 교장선생님이 눈에 띄었다. 애들을 데리고 가서 교장선생님에게 부탁했다. 지금 이 애들은 어리둥절해서 뭐가 뭔지 모르고 자기 교실도 못 찾아가니까 어떡하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맡아서 있다가 좀 정리가 되면 교실을 찾아서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교장선생님에게 두 아이들을 맡기고 나는 학교를 빠져 나왔다. 교장선생하고도 말이 안 통하는데 좀 걱정도 되었다. 별안간에 집에 가정부가 둘이 생겼다. 한 사람은 집사람이 친구에게 부탁해서 오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우리 부모한테서 옛날부터 우리 집안 일을 봐주던 가정부라고 해서 특별이 미국서 온 식구를 위해서 보내왔다. 그것도 가정부는 아무나 쓰지 말라는 경고까지 부쳐서 보내와서 둘이 다 거절하기 힘들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아이들 한국 말 선생님이다.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애들을 성심껏 가르치겠다고 해서 두 사람 중에서 선택했다. 나도 귀가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늦을 때가 많다. 미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은 주로 내가 저녁 때 살펴주어야지 자기네들끼리 갈 곳도 없다. 미국에서 같은 직장에서 온 친구들이 아니어서 서로가 잘 어울리지도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비싼 술집에 늘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두 가정부가 문제였다. 할 일이 없는 낮에는 부모님이 보낸 가정부는 이틀에 한번은 낮에 부모님에게 가서 일을 했다.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가 전달되고 있었다. 한번은 좋은 식당에 가서 양식을 먹을 일이 있었는데 집에 와서 미국보다 많이 비싸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비싼 저녁이 우리 부모네 집에 알려졌다. 살림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식모를 셋이나 두고도 저녁을 나가 먹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저녁 한끼 값이면 자기네는 한 달을 먹고 산다고 했다. 다른 흠도 많이 전해졌다. 당장 부모네 집에서 보낸 가정부는 내보냈고 우리 부모와 냉전이 시작되었다. 부모들이 못산다고 우리까지 부모수준에 맞추어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돈이 많아 부모 생활수준을 우리와 같이 올려드리면 문제는 없는데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그 동안 계획하던 집안 식구 모임은 성사되지 못했다. 낮에 시간이 많은 집사람은 15 년 만의 귀국으로 여고 동창 만나는데 바빴고 졸업하고 처음으로 동기동창 총회를 준비한다고 반포아파트에서 준비 모임도 열리고 있었다. 애들이 하교가 너무 춥다고 불평을 했다. 어떻게 좋은 수가 없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전기사가 요사이 새로 나온 석유난로가 크고 좋다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씩 학교에 선물하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해 왔다. 교실이 더워지지는 않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운전기사를 시켜서 제일 큰 난로 두 개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우리 애들이 겨울이 없는 지방에서 온 것을 알고 있는 선생님은 난로를 우리 애들에 가까운 곳에 설치해 주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도 될 때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둘이가 다 가슴에 외제품 쓰지 맙시다 라고 쓴 표어의 리본을 달고 왔다. 우리 애들은 머리서 발 끝까지가 외제품이다. 취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구 귀국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서 아이들에게 필요하고 또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사 가지고 왔는데 쓰지도 못하게 하고 더욱이 질이 나쁜 것으로 새로 사서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새 환경 적응이 어려운데 아직은 시기상조인것이다. 선생님이 이해하니까 하고 그냥 무시해 버렸다. 93

101 하루는 집에 오는 길에 둘이 다 학생들에게서 돌멩이로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돌이 얼굴에는 맞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고 이렇다 할 상처가 없어서 별 것 아니라고 말이 안 통해서 온 문제라고 판단하고 좀 더 참고 일년만 기다려 보자고 설득하고 억지로 애들을 계속 학교에 보내고 나는 회사 일로 더 이상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를 통해서 같은 반 학부모한테서 상황을 들었다 6.12 위반사항 - 부모의 무식 상황은 너무나 의외였다. 부모의 무식(?)과 무관심(?)으로 우리 애들은 학교에서 많은 금지사항을 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 들에게서 몰리고 있었다. 1. 자가용 등교가 금지되어 있는데 이 애들은 매일 교문 앞까지 자가용 등교를 하고 있다. 학교를 안 갈려고 해서 내가 출근시간을 바꾸면서까지 아이들을 교문까지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2. 도시락 전달이 금지돼있다. 가정부가 일이 없어 애들에게 도시락 점심 해다 주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낮일이었다. 햇밤을 해서 반찬도 새로 만들어 직접 점심시간에 전해주게 되어 있었다. 도시락 상자도 나도 보지 못한 특별한 일본제를 가정부가 어디서 구해 왔다. 그것도 물통하고 두개씩이다 % 흰밥은 금지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일이다. 4. 모두 외제 물건만 쓴다. 알고 있었지만 애들이 원치 않아서 무시했다. 5. 숙제를 안 해 와도 선생님이 봐주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6. 학교에서 난로를 애들 앞에 놓아 주었다. 내가 사주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다.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교장선생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특별히 봐주고 자기로서는 애들에게 잘해 주고 있는데 선생님도 의사가 안 통해서 답답하다고 했다. 문제는 일부 소수의 같은 반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이라고 했다. 같은 반에도 좀 질이 좋지 못한 학생이 있어서 선생님도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데 이런 애들의 Control 이 매우 어렵다고 했다. 귀가 시에 돌멩이로 집단폭행 당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쟤는 무슨 빽이 있길래 선생님도 쩔쩔 맨다고 소문이 나서 학부모까지도 항의해 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말이 안 통해서 오는 문제라고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이미 아이들에게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서는 또 한국말 가정교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2-3 시간 말공부를 하게 된다. 부모도 말 배우는 것을 우선 순위로 하고 있었다. 마음껏 자기 말(영어)로 편히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어야 했었다 또 잘못, 잘못, 잘못 내가 데려 온 Digital Engineer 인 Anh Nguyen 은 베트남 출신 으로 적격의 한국 엔지니어를 국내에서 구하지를 못해서 미국에서 데려 왔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댓 명 되었었는데 유일한 동양계라서 밖에 나가면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더욱이 35 년 전의 한국은 외국인이 저녁에 갈만한 곳은 한 곳도 없었고 호텔에 있는 시설들은 별 것도 아니지만 주로 일본인을 위해서 만들어져 있었다. 백인들은 말이 안 통해도 그런대로 대접을 받는데 이 베트남 친구는 어디를 혼자 갈 수가 없었고 택시를 타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시간이 끝나면 내가 주로 데리고 다녔다. 쌀을 먹는 국민이라 한국음식점에 갈수 있어서 아주 다행이었다. 낯 94

102 설은 나라에 장기출장이란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없으면 외롭게 지나게 마련이다. 사실 나 밖에 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 친구에게 처음에 한 약속을 못 지킨 죄책감도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저녁에 시간이 나면 이 친구를 데리고 다녔다. 직장에서 귀가하는 시간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좀 일찍 귀가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부자 나라에서 뒷 받침하는 큰 전자사업을 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다. 우리 부모가 자랑한 것이 틀림없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금의환향 했다고 북을 많이 쳤던 것이다. 물론 큰 기대를 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또 그렇게 보이게 한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전화 통화가 쉽게 되는 시대가 아니어서 이들은 무조건 찾아 왔고 친척이라고 찾아 왔으니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대개는 저녁까지 대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대개가 취직 부탁이었고 더러는 돈 빌려달라는 부탁도 있었는데 나는 모두 거절했다. 이들 눈에는 딱한 사정을 호소하는데 내가 자기들을 무시하는 냉혈동물로 보이고 있었다. 한 두 명의 직원은 충분히 내 힘으로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이고 또 돈도 나에게는 몇 푼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다. 취직 부탁은 나의 경기고 동창도 몇 명 있었다. 친척이나 아는 친구는 처음부터 안 뽑기로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는 데에는 아무런 부담도 안 느꼈다. 이때의 부작용은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내가 처음 와서 잘못한 것의 또 하나가 나의 승용차였다. 유류파동 덕분에 남이 못 타는 차를 나는 타고 다니고 있었다. 전 미 8 군 사령관이 귀국하면서 자기가 쓰던 승용차를 정일권총리에게 선물로 주고 갔다. 이 차가 정일권씨가 쓰던 미제 Ford Ltd 번호판 "서울자 8080" 이다. 유류파동으로 8 기통 대형 승용차는 운행정지 되어 차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현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회사의 재정을 관리하는 이훈전무가 외국 합작회사라는 구실로 외제차 운행허가를 얻어내서 이 차가 내가 타는 차로 되었다. 운전기사도 그 동안 놀고 있던 청와대 출신이었다. 이훈전무의 장인이 정일권 국무총리였다. 교통이 불편하고 지리도 잘 몰라서 회사의 양해를 얻어 우리 집 에서도 쓰게 되어 낮에는 사모님 차 로 되고 저녁에 집에 손님이 오면 이 차로 보내주고 있었다. 사실 내가 쓰는 시간은 특별한 날을 빼고는 출퇴근시간 만이다. 이 차를 타게 되면 정치권력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었다. 교통신호가 없거나 교통경찰이 교통 정리하는 곳에서는 우선 통과를 시켜 주었고 통과 시는 무조건 거수경례를 했다. 서울의 교통순경이면 국무총리 차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차는 몇 달 전만 해도 국무총리가 타고 다녔다고 했다. 주차할 자리가 없는 곳이라도 교통순경이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주고 또 차까지 봐주니 온 나라의 모든 교통순경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한번은 점심에 짜장면이 먹고 싶어 시내에 나온 김에 옛날 추억을 더듬어서 종로 2 가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언제 봤는지 교통순경이 우리가 주차하려는 골목에 노점상인 몇 명을 옮기게 하고 주차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들어가는 곳이 그 옆 허름한 중국집이라서 나도 미안해서 이 교통순경까지 불러서 셋이서 짜장면을 시켜 먹은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차를 타고 짜장면 먹으러 찾아 다니는 것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점차로 그런 마음은 없어지고 아주 당연한 것 같이 느껴졌다. 이것도 적응이다. 이태원, 용산 등지에서는 대통령 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대통령 차 타 본 일은 없지만) 권력의 변두리에 끼어들기만 해도 세상이 내 것으로 보이니 어찌 권력싸움을 안 하겠는가? 반포아파트 단지에서 그리고 애들 학교에서 나를 밉게 본 95

103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 애들에게 집단폭행으로 미움이 터져 나왔다고 볼 수도 있었다. 주위 식구들에게 잘못된 image 만 주었다 잔 품목 조달 - 나도 보따리 장사 내 일이 바빠졌다 원래부터 최소 규모의 예산으로 시작한 관계로 기계 부속, 보수관련 물품에는 별 여유가 없이 짜여져 있었다. 유류파동으로 처음 구매 명세서에 없는 유지 품목들은 아예 추가로 살 수도 없고 있다고 해서 수량을 늘릴 수도 없는 것들이 많았다. 조그마한 집을 지어도 짓는 과정에서 잔 물건이 계속 필요하게 되는데 큰 공장 그것도 최첨단 반도체공장을 Infrastructure 가 없는 황무지 땅에다 지으니 왜 그렇게 한국에 없는 물건들이 많은지? 별 것 아닌 나사 하나도 제대로 조달할 수가 없다. 있다고 해도 어떤 것은 터무니 없이 값이 비쌌다. 또 자금사정에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시제품 생산이 하루가 늦어도 그것을 돈으로 환산해 보면 2000 달러가 넘는 액수가 된다. 급한 물건을 미국으로 부탁해서 사서 항공편으로 보내와도 세관에서 수일씩 묶을 때가 많다. 밀수를 막으려고 하는 노력이 정말로 필요한 물품 수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제일 확실한 것이 사람이 휴대 짐으로 들고 들어오는 것이다. 웬만한 휴대품은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아줌마들의 보따리 장사가 가능한 이유이다. 그 당시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김포공항 왕복으로 KAL 특별 할인권이 있다는 것을 Sunnyvale 에서 여행사를 하는 장팔기씨가 알려주었다. 미국서 사면 2 주 이상 한국에 체류하는 왕복 비행기표가 490 불이었다. 일반표의 약 반값이다. 앞으로 2-3 개월 내에 시 생산이 끝나고 곧 정규생산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된다. 내 한평생의 과업의 성적표가 나오는 것이고 내가 시작한 이 반도체사업의 성패도 결정된다. 장팔기씨와 상의해서 10 개의 비행기표를 사기로 했다. 비행기표 여러 개를 잘 조절하면 아무 때나 다닐 수 있게 되면서도 $490 로 왕복이 가능하다. 시차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비행기에서 자고 다니는 것이 제일 좋다. 나의 보따리장사 식의 잔 잡품 조달은 몸은 많이 고단했지만 공장건설 시생산 스케쥴을 가능한 한 늦추지 않고 끌고 나가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했던 것은 Contamination 이 주적 인 반도체 제조에서 모르는 부품 이나 약품은 절대 금물이다. 이런 물품의 조달은 남을 시킬수도 없었고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챙겨서 보따리장사 형태로라도 공급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였다 이 때 미주노선에 KAL 기가 취항하고 있었다. 미국 행은 이민가는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서울로 올 때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항상 같은 노선을 타다 보니 승무원들과도 친해지고 때로는 승무원들이 먹는 라면도 얻어먹기도 했다. 맨 뒤 가운데 좌석들이 승무원석으로 비워져 있슬때는 여기서 담요를 여러 개 부탁해서 자면서 다녔다. 한번은 기장이 방송하는데 안인수 라고 해서 내 친구 안인수는 중동만 다닌다고 들었는데 승무원에게 물었더니 요사이는 미주편도 탄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쪽지를 보냈다. 내가 중학교 3 학년 때 내 옆 옆에 앉았던 친구였다. 내가 비행기 맨 뒤에 앉아 있으니까 기장 권한으로 일등석으로 옮겨 주었다. 고급 술이 공짜인데 술을 안 마시는 나는 일등석 특전을 이용하지를 못했다. 그 대신 뒷좌석에서 얻어 먹던 승무원 라면 서비스를 일등석에서 받았다. 나에게는 이것이 더 좋은 서비스였다. 내가 일등석으로 오는 것을 내 옆 좌석에 앉으신 높은 분이 얼굴을 찡그렸다. 급이 다른 친구가 옆에 온 것이 못 마땅하다는 눈치였다. 안인수기장은 공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공군 pilot 로있다 제대해서 KAL 조종사가됬다. 그 후 일을 마치고 New York 에서 KAL007 편으로 서울로 돌아가다 소련 전투기에 격추 당해 사망했다.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 96

104 6.15 나도 빽이 있다 --관세청장 공장건설 도중에 공장 지붕에 올라가는 대형 에어컨의 Base Adapter 의 크기가 잘못되어 새 Adapter 를 비싼 항공편으로 주문해왔는데 에어컨은 국내 생산이 된다고 (소형 가정용이 금성사에서 나오고 있었다.) 해서 그 부품도 수입금지가 되어 있었다. 하루는 아침에 출근했더니 에어컨이 설치 안 되어서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비가 밤새도록 새서 밑에 있는 물건들이 다 젖고 침수되어 못쓰게 된 것들도 있었다. 전자공업을 육성한다고 만든 법이 이 꼴을 만들어 놓았다. 화가 치밀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때 이훈이의 장인인 정일권 총리를 생각 했섰으나 나는 맞나본적도 없다. 이훈 이가 나서야 될 일인데 반응이 없다. 나는 당장 서울역 뒤 쪽에 있는 관세청을 찾아 떠났다. 우리 집안에서 정치적으로 출세한 유일한 사람이 어머니 편으로 친척이 되는 최대현 형이다. 고대 법과 시절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아침마다 바이올린 연습한다고 삑삑거려서 잠을 설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군법무관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출세해서 검찰에서 정인숙사건도 다루고 지금은 관세청장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아직도 관세청장 이길 바라면서 관세청 정문에 가서 청장을 찾았다. 무엇 때문에 오셨느냐고 물어서 통관하려고 왔다 고 하니 그건 여기서 취급 안 한다고 김포공항으로 가라는 것이다. 거기서 안돼서 왔다. 청장을 만나야겠다.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난 신분증(여권)을 안 갖고 왔다. 소란이 벌어졌다. 할 수 없이 최대현이 형님이니 좀 면회 해야겠다고 했다. 내 이름을 대고 면회를 부탁했다. 조금 있다가 여직원이 나를 데리러 왔다. 떠든 덕분에 당장 면회가됬다. 가슴에 딱지 하나 달고 청장실에 들어서니 다짜고짜 왜 그렇게 소란을 떠냐고 야단부터 맞았다. 심리분실의 오과장을 불러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김포공항의 수입담당 책임자도 알게 되었다. 내 보따리에서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내버리고 가면 내 보따리는 높은 사람을 통해서 통관이 되었다. 최대현형 덕에 내 보따리 장사가 가능했고 적어도 한 달의 시간을 단축 또는 연장되는 것을 줄일 수 있었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으니 저승으로 감사편지라도 보내고 싶다. 내가 반도체사업에 도움을 받은 유일한 높은 분이었다 사외활동 --문제는 나만이 아는 첨단기술 한국에 오니까 이것도 출세라고 공공기관에서 오라는 곳이 많다. 처음에는 오라는 데는 내가 필요한 가보다 하고 가서 좋은 일 해야지 생각하고 부르는 곳은 대개다 나갔다. 부르는 곳에 따라서 모두 성격이 틀리는데 나는 그런 것을 처음 에는 알지도 못했고 구별할 아무런 지식이 없섰다. 이런 면에서는 말만 통했지 외국에 온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한번은 상공부주최의 수출확대회읜가 하는 것으로 꼭 사장님이 나와야 된다는 연락이 왔다. 가봤더니 대개가 사장들이다 내 가제일 젊은나인것 같았다. 높은데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두 사람은 아는 얼굴이다 한 사람은 기게공업국장으로 내 친구이고 또한 사람은 박필수씨로 1967 년에 경제기획원 에서 내 Passport 를 받아준 사람이다. 회의의 대부분은 나와는 관계가 없거나 듣고도 내용을 모르는 것 들이였다. 이야기가 바뀌어서 이번에는 사업하는데 애로 사항을 듣겠다고 하는 거다. 이것은 내 문제다. 나는 불만이 많다. 내 옆에 금성통신의 윤사장 이 앉아 있섰다, 전에 맞난일이 있어서 내가 많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두가 가만이 있다. 꿀 먹은 벙어리 들인가 자기회사 에서는 큰소리치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윤사장이 나를 보고 한마디 하라는 거다. 우리는 말 못해도 강박사는 할 수 있다고 추겼다. 그래서 내가 손들고 한마디 했다. 내가 봇따리 장사를 한다. 전자공업 육성한다고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은 97

105 전자공업 육성 목표의 제일 앞에 있는 사항이다. 나의 문제를 내놓고 따졌다. 누군가가 답변을 했다. 나는 그 답변을 받아줄수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모두가 나를 처다 보고 있섰다.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속 시원이 말 잘했다고 격려해주었다. 뒤에서 친구인 오태환국장이 나를 부르는 거다. 너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런 말 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거다. 정반대의 충고다. 박필수씨는 차관보라고 했다. 단에 앉은 사람이니 5 년만에 높은 사람이 된 것 같다. 그 다음부터는 정부관련 모임은 안 가면 안되는데만 가고 가서도 맨뒤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모임이 있섰다. 이것은 반도체공업을 진흥 하자는 민간단체 모임으로 나의 전문 분야이다. 이것만은 내가 낄 수 있는 제번지 모임으로 기대를 가지고 갔다. 여기서 서강대학 임태순교수를 만났다 한국에서 가까이 지냈던 분이였다. 나는 이모임 에서도 외툴이가됬다. 반도체 사업하는 회사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나는 한국에서 반도체회사는 나 하나라고 알고 있섰던것이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반도체사업은 내가 아는 반도체가 아니였다. Assembly 를 말하는 거다. 아남산업이 한국 최대 반도체회사로 수출실적이 어마어마하다. 알고 보니 이것도 요지경이다. 원재료는 모두 수입한다. 주 부품은 반도체 chip 또는 die 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header, 금선 등과 같이 수입한다. 수입값이 1000 이라고하면 여기에 10 이라는 인건비와 비용 이익을 합처서 1010 을 수출 액이라고해서 수출실적을 따진다. 반도체사업을 위한 관련규정은 수출실적이 큰 회사 위주로 만들어저있다. 진짜 반도체사업은 내가 하는데 반도체관련 규정은 비슷하지도 않은 조립업을 상대로 만드렀다. 처음에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도 했스나 이들에게 보도 듣도못한 진짜 반도체 사업의 본질을 가르칠 수도 없었지만 진짜를 위해서 규정을 만든다면 이 가짜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게 되 있섰다. 이들은 나의 노력을 뒤에서 방해했고 나를 적응할줄 모르는 나뿐 독불장군으로 만들었다. assembly 용 사양화된 header 즉 반도체 Case 관련 품목은 무 세로 자동 통관이 되는데 진짜 반도체에 중요한 새로 나온 먼지 제거용 필 타는 통관이 안돼서 시간이 급하니 돈 주고 뒤로 빼내야 했다. 당국에 항의가 되지를 안는다. 이들로서는 반도체업계 자신이 최근에 만든 규정 이라는 거다. 그들에게는 나는 반도체용도 아닌 것을 어거지로 통관하려는 악덕 장사꾼으로 보인데다 무세로 통관 해주어도 이렇다할 별도의 보상이 없섰스니 이들이 협력할 이유가 없는것이다. 나는 그저 현실을 받아드리고 나쁜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가까이 하고 싶었던 분들이 반도체관련 교수 들이었다. 이들도 나와 멀어졌다 나는 Ohio State University 전기과에서 물리학의 반도체응용을 공부하고 많은 시간을 드려서 강의 재료를 만들어 전기과 대학원에서 강의를 한 경력이 있다. 전기과 에서 Semiconductor Electronics 의 박사학위를 따고 현장 경험까지 하고 한국에 귀국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는 없섰다. 내가 귀국하고 얼마 있다가 김충기박사가 귀국했다. 김충기박사 가 내가 아는 최초의 반도체 전자계통의 교수이다. 한국에서 최고수준의 반도체관계 교수님과 반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정식 큰 모임은 이니 였지만 이모임에 가는 목적은 나에게는 뚜렸했다. 반도체관련 분야의 교수님들이니 이들은 assembly 와 내가 하는 Wafer Fabrication 은 구별할 것이다. 이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잘못 알려진 반도체 사업을 고쳐달라고 부탁 해보기로 했다. 내가 이야기할 기회가 와서 교수님들에게 나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가능하면 학교에서 한국말로 번역 하지말고 영어로 가르켜 보라고했다. 또 정부의 반도체공업의 육성이 Assembly 사업 위주로 잘못되어 있스니 여러분이 나서서 도와달라고 도 했다. 나의 부탁을 좋게 받아드리는 교수들도 많았스나 보다 나쁘게 발아 들이는 교수들이 더 많으것 같았다. 원로 교수들이 더 부정적이였다. 우리를 장사꾼의 뒷바라지로 아느냐? 선배도 몰라보고 자기하인 같이 98

106 취급 한다고 했고 영어 이야기는 국내 출신 교수님들을 자극했다. 미국 가서 영어 좀 배워왔다고 국내 ㅡ 학자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어느 교수를 지목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닌데 듣는 편에서는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고 영어 못하는 교수들은 개인적인 비판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도움 좀 받을까 해서 좋은 마음 먹고 갔섰는데 밑천도 못건젔다. 몇몇 연구소에서 온분이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모두 자기네가 해본 거라고 자랑도 했다. 한 사람은 자기실력을 과시하면서 기술용역을 달라고 했다. 상대 안하고 무시해 버렸다. 뒤로 내 욕을 하며 다녔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1958 년에는 정말 공과대학 교수님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섰다. 내용을 아는 친구 이야기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고 젊은 사람들이 오는것이 무서워서 늙은이들끼리 짜고 담을치고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양로원이 바로 내가 졸업한 서울공과대학 이라고 했다 년인 37 년전 이야기다. *********** 주제를 좀 벗어나지만 내가 보따리장사로 미국 다닐때는 미국행 비행기가 이민가는 가족들로 만원이 되던 시기였다. 이들 틈에 끼어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 와 느낀바를 적어본다. ******* 나쁜 아버지 --미국 행 비행기 안에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어느 가장의 이야기는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 나는 너무 나 혼자만 생각하는 아주 개인주의 적인 나쁜 아버지-가장 으로 묘사되었다. 너무나 내가 잘못되었다. 아무 변명도 할 것이 없고 따져보면 사실인 것이다. 내가 잘 지내고 있는 애들을 애들의 장래와 교육은 생각도 안하고 가난하고 장래도 없는 한국으로 돈 번다고 역 이민하는 것은 아버지의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애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이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국 가서 돈 잘 벌면 뭐하냐는 것이다. 애들이 교육 받아야 될 시기에 교육 못 받고 후진국에서 병신 만들 거냐? 나에게 거센 반발이다. 모두가 썩어빠진 한국의 정치구조, 사회구조를 나보고 너무 모른다고 했다. 옛날엔 논밭 팔아서 서울로 보내서 공부 시켰지만 이젠 논밭 팔아서 미국유학 가도 돌아올 가치도 없는 곳이 됬다고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 도리킬수 없는 잘못은 저질러진 것이다. 이민 --오죽하면 말, 의식주 습관도 모르는 미지의 세상으로 무턱대고 온 가족이 떠나 가겠는가? - 아무런 사전교육도 없이. 미국으로 가는 저녁 비행기였다. 내 양쪽이 다 이민가는 가족들이다. 나는 회사에서 직접 공항으로 나오는 길에 기사식당에서 곰탕 한 그릇을 먹고 왔다. 배가 안 고픈데 기내 식사가 나왔다. 물론 양식이었다. 난 단것을 좋아해서 우선 케잌을 먼저 먹기 시작했다. 양쪽 옆에 앉았던 분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더니 이들 모두가 케잌부터 먹기 시작했다. 이것은 후식으로 다른 것 다 먹고 나서 먹는 것이라고 가르쳐 줄려다가 무안해 할 것 같아서 가만 있었다. 시간이 가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부디 미국가서 속히 적응하고 잘 살아 주었스면 좋겠다. 주인-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 주인을 잘못 만난 백성 들이니 주인은 바꿀수가 없고 나라라도 바꾸어 보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첫째로 우리는 민주정치니까 주인 될 사람을 잘 뽑아야 된다. 지금 99

107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국가 단위의 무한경쟁 시대이다. 자기가 잘 살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고 있다. 자기가 잘 살려면 첫째로 자기 나라가 부강해야 한다. 우선 인정해야 할 진리가 있다. 인간의 두뇌 능력은 제각기 개인마다 다 다르다. 종족 별로도 그러하다. 정치적 평등을 인간 두뇌, 체력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Transistor 의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은 William Shockley 박사는 흑인이 백인보다 두뇌가 나쁘다고 했다가 스탠포드대학에서 물러났다. William Shockley 박사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다. 흑인들이 운동에서는 백인들보다 우수하다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듣고 있다. 그반대 이야기를 하면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한다.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교육은 그 나라를 부강으로 이끌어갈 인재와 지도자를 배출해 내는데 최우선을 해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기회를 주되 낭비는 없어야 한다. 모두다 대통령이 될수는 없는것이다. 내가 다닌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본 이야기다. 주립대학이라서 지원자는 거의다가 입학허가를 받는다. 첫 학기에 축구경기 등 많은 학생들이 달라진 환경에 놀기에도 바쁘다. 일년이 지나면 능력있는 학생만 추려서 반 정도를 학교에서 정리한다. 교육은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와도 같아야 한다. 모두가 자기 실력껏 차를 몰게 된다. 좋은 차도 있고 나쁜 차도 있다. 조심스럽게 모는 사람도 있고 거칠게 모는 사람도 있다. 일등은 한 사람뿐이다. 사고도 나고 사망도 할 수 있다. 지도자 양성에는 절대로 속도제한을 해서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일등도 없고 꼴지도 없다. 모두가 잘났다고 헐뜯고 모함하고 -- 싸움만 생긴다. 또 그 반대가 되면 모두 바보가 된다. 나라 사이는 힘만이 존재한다 조립업만이 반도체로 알고읶는 황무지 한국 회사초기 일꾼들- 권성우 윤학범 최은숙 강경석 정대영 최태현 한경학 신만섭 이명오 이정수 등 여러분이 빠졌습니다. 100

108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의 공식 설립 일자는 1974 년 1 월 26 일 이다. 같은해 12 월 6 일에 이건희 회장이 이 회사의 내국인 지분 50%를 50 만불에 인수했다. 삼성은 남어지 ICII 지분을 1977 년 12 월 30 일에 인수하여 한국반도체 는 완전히 삼성으로 넘어 갔다 년 3 월 2 일 설립 4 년 2 개월만에 이름도 삼성반도체 로 바뀌었다. 삼성이 1987 년에 발간한 삼성반도체통신 10 년사 에 나와있는 이야기 101

109 7 장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삼성에 팔리다 ㅡ 7.1 차관도입-- 또 다시 기술검토 재정관계 악화로 예정보다 앞당겨 차관도입을 서둘러야 했다. 물론 이 일은 업무부서 담당이다. 기술검토가 필요 하다고 하면서 경제기획원에서 기술을 아는 사장님을 보자고 한다고 업무부서의 정대영과장이 알려왔다. 서울 시내로 나갔다 오면 최소한 반 나절은 낭비하게 된다. 사장이 나와야 된다는 회의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약 10 분 정도면 끝나는 일도 꼭 저녁 약속을 해서 술이 있는 장소를 택하고 정당한 거래도 뒷거래 식으로 하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못마땅 했다. 술을 좋아하거나 술좌석 분위기가 상담이나 설득에 더 좋다고 생각 할 수도 있스나 술에 약할 뿐 아니라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가 못해서 나에게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이 날은 내가 부탁하러 가는 것이니까 넥타이를 매고 경제기획원을 찾았다. 차관도입 신청에 기술 타당성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도 화가 났다. 이미 반도체공장 설립시에 이 공장이 무엇을 생산한다는 것 등을 모두 검토 받아 인가가 이미 났고 지금은 공장이 거이다 완성되어 시설재를 도입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 때문에 지금 와서 또 다시 이 기술 타당성 검토를 해야 된단 말인가? 전자공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반도체사업인데 전자공업육성을 국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당신네들이 또다시 이 기술의 타당성 검토를 해야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따졌다. 무조건 이것은 규정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 검토한 것은 뭐냐고 했더니 무조건 새로 해야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당장 청와대로 쫓아가서 박대통령과 담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 계획서에는 미국서도 최신기술인 C-MOS LSI 제품을 만든는것으로 되어있다. 13 년이지난 간단한 NPN transistor 도 못 만들어 이것을 국내 연구기관에서 개발목표로 잡고 있슬때다. 전자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C-MOS LSI 가 무어냐고 나에게 무러오는것이다. 내가 알기는 한국 내에 반도체제조에 대해서 기술적으로는 아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KIST 의 정만영박사 정도다. 그러나 이분도 반도체 전문가는 아니고 내가 알기로는 Microwave 를 전공한 사람이다. 계속 따졌더니 검토를 미국 콜럼비아대학 교수인 김완희박사 한테서 받으라는 것이다. 김완희 박사는 반도체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거기서 한번 더 항의했다. 자기 전문분야도 아닌 사람이 남의 전문분야의 기술검토를 할 수 있느냐? 이들 이야기는 김완희박사는 전자 계통의 세계적 권위자여서 이분의 검토는 받아들일 수가 있다고 했다. 수년 전에 반도체가 아닌 Header 제조업을 한국형 반도체사업 이라고 해서 정규 반도체사업을 바꿔 친 일이 있섰다. 나의 짐작이긴 하지만 김완희 박사가 크게 작용 했다고 생각된다. 김박사도 이 회사의 임원이었다. 만나게 되면 옛날 일도 물어봐야겠다. 과장 선에서가 아니라 사장 선에서 해결을 하자고 일부러 불렀는데 강박사는 감을 못 잡는다. 거기 있던 직윈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말이 틀려서도 아니다. 이건 돈 꾸는 일이다. 이런 일은 그 당시의 관행에 따라야 했다. 김완희박사는 미국에 있다. 이것은 하나의 구실인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장이니 한심하다. 그래서 엿 먹인 것이다. 내가 한국식 사업가 였다면 경제기획원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정과장 102

110 불러서 이럴ㄸㅐ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비자금을 회사금고에서 꺼내서 이것으로 알아서 잘해봐 라고 했스면 해결되는 사항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비자금의 개념도 없섰고 나의 판단은 가서 정면으로 부딪치자 였다. 안되면 그때 가서 한국식으로 해결 할 수도 있지 않나. 우선 내가 김완희 박사를 맞나 보는 거다. 내가 경제기획원을 방문한 목적은 실패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충고를 많이 들었다. (1) 강박사 한국에 오셨스면 한국식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라고---) (2) 옳은 것은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유학 가셨습니까 좋은 것은 배우고 나뿐 것은 고쳐야지요. 박사학위 있겠다 큰 회사 사장이겠다 뭐가 딸립니까 Leader 가 되셔야 합니다. 저이들 피라미하고는 다르십니다. 돈이 급하니 별수 없다. 당장 비행기가 잡히는 대로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으로 떠났다. 세계 최고 권위자 그래서 으리으리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찾았으나 오래 된 건물 한쪽 구석 조그마한 방에 동양사람이 앉아 있었다. 김완희박사라고 했다. 우선 나 자신을 소개하고 미국에 사는 교수니까 학자적인 양심에서 기술검토는 자기 분야가 아니라서 사양할 것을 기대하고 김완희박사의 전문분야를 물어보았다. 나도 잘 모르는 분야였다. 그래서 호소했다. 이 사업은 반도체소자의 제조이고 이미 기술검토를 거처서 공장이 거이다 완성됐다고 이야기했다. 얘기가 안 먹혀 들었다. 사실 그때 나는 김완회박사가 어떤 힘이 있고 또 있다고 하면 무엇을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지 나는 모르고 있섰다. 나는 돈이 필요하지 그 외에 밖에서 도움이 필요 하다면 그것은 이훈전무의 영역이다. 이전무의 장인이 그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였다. 박정희가 나오고 이후락이가 나왔다. 자기가 한국의 전자공업을 일으킨 사람이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이들과 친분이 있는 자기를 고문으로 써야 일이 순조로이 된다고 했다. 전자공업을 하는 회사는 모두 자기가 자문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의 이병철회장도 나왔다. 친하게 지내고 자기가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내가 또 잘못 했다 무조건 "아이고 그렇게 높은 분들과 친분이 있으신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 저의 회사의 최고 고문으로 모시겠습니다 많이 도와 주십시요" 가 옳은(?) 태도였다. 검토를 안받을 수가 없게 되어 사업계획 내용을 설명했다. 내가 김박사의 전문분야를 모르듯이 김박사도 나의 전문분야 반도체는 잘 모르고 있섰다. 김완희 박사는 Assembly 와 Wafer Fabrication 의 구별을 안하고 있섰다. 그 많은 반도체공장 (조립공정만하는) 을 유치 한것이 모두 자기의 공이라고 강조했다. 오래전에 New Korea 전자의 헤다 공장을 반도체공장 이라고 누군가가 밀고 나간 일이 있섰다. 여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한국형 반도체공장이라고 특별이 강조 하는 대답이 왔다. 지금 이 기술검토에 지장이 있슬 것 같아서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기술에 대한 질문은 없고 돈에 대한 것 특히 ICII 설립 등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다. 그리고 ICII 라는 현지 법인을 내세워 한국서 차관해서 돈을 빼돌리려는 위장사업이 아니냐고 따지는 거다. 나는 ICII 103

111 사 설립을 이런 식으로 볼지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 잘못하면 이 기술검토가 나쁘게 결론이 나면 사업이 중단된다. 상황이 어쩔 수 없게됬다. 미국에 있는 이 돈은 사실 한국사람의 돈으로 Joe Sudduth 는 미국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이름만 빌린 사장 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든 operation 의 실무는 내 가하고 있다고 했다. 돈 빼돌리려는 위장사업은 절대 아니라고 강조하다 보니 돈 내용을 설명 안 할 수 없었다. 처음 Sunnyvale 에서 김규한사장 (김규한씨는 나에게는 항상 사장이다) 하고 사업검토 때부터 미국에서 쓸 수 있는 돈이 Kemco 의 Collins 사 와의 사업에서 나온 이익금으로 우리가 이 돈으로 한국에 필요한 전자사업을 위해 한국으로 당당히 투자하는 것으로 알고 있섰다. 모두가 미국으로 돈을 빼돌리지 못해서 야단인데 김규한씨는 미국에 있는 돈을 한국으로 갖고 들어 가겠다고 나 하고 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정말 존경스러운 사업가이시다. 나는 그 당시 외환관리법이란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한국가서 비로서 외환관리법을 알았다. 외부 인사에게 돈 내용을 말한 것이 맘에 걸렸지만 좀 비싸다고 느낀 기술검토료도 냈스니 비밀은 유지해주겠지 그리고 한국 전자공업에 꼭 필요한 사업이니 잘 될거라고 나 혼자 낙관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차관은 나오게됬었다. 7.2 중앙정보부가 끼어들다--그래도 Reliability 걱정이 먼저 그 후 얼마 시간이 가서 New York 에서의 기술검토 건은 거의 잊고 있슬때다. 그때도 짧은 미국출장에서 돌아와서 그 다음 날 출근했더니 내가 없을때 중앙정보부에서 왔다는 사람이 이훈 전무를 만나고 갔다고 비서로 있는 이명오가 알려주었다. 내 가슴이 덜컹했다. 이훈씨는 출자자 이상규씨의 아들이고 회사경영을 맡고 있는 CFO (재정 책임자) 이다. 내가 없을 때는 CEO (사장)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훈 전무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물어보기도 안 되어서 뭐 중요한 것이면 말하겠지 하고 좀 두고 보자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의 머릿속에는 하루라도 속히 시제품 생산하고 제일 중요한 Reliability 를 확인 해야 마음이 노인다. 나는 한꺼번에 두 가지 걱정을 못하는 것 같다 Reliability 걱정이 먼저 날 지배하고 있섰다. 경험이 없거나 특히 후진국에서는 일단 만들어서 동작만 하면 그것으로 다 된 것 같이 생각하지만 반도체에서 Reliability 는 만들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야 말로 생존의 열쇠이고 나아가서 회사의 Longevity 를 좌우하게 된다. 만일 Reliability 에 문제가 있으면 짧게는 1-2 개월 길게는 6 개월의 시간의 낭비가 올 수도 있고 해결이 안 된다면? --- 남에게 말 못할 스트레스가 계속 나에게 쌓이고 있었다. Motorola 에서, 미 공군 Project 에서, Reliability Physics Meeting 등에서는 내가 이런 문제를 강조하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우 리고 밀려와서 많은 질문을 했섰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의 Reliability 걱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이런 것을 걱정하고 Reliability 의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하면 도리어 나의 엉터리 경영 특히 예산 낭비로 회사가 어려워진 것을 정당화 하려는 변명으로 받아드리고 있어 말하면 도리어 손해만 보게되서 혼자서 걱정 해야 했다. 이해 시킬 수는 없고 일은 제대로 해야겠고 그러니 방식은 하나밖에 없섰다. 사장의 권한으로 밀고 나갔다. 이런 점에서 주위에서 알아 받지 못하는 매우 어렵고 외로운 나 혼자의 반도체 경영 이 기도했다. 사실 나로서는 돈의 낭비는 하나도 없었다. 아주 tight 하게 짜진 예산을 예측 못한 유류 파동으로 블가피한 지출이 많이 104

112 늘어난 것이였다. 그래서 돈이 더 필요했다. 만일 그 당시 내 고집을 출자자 측에서 꺾었다면 이 사업은 실패 했슬것이다. 7.3: 나의 ICII 주식 반납 제의 - 또 큰 실수 미국에 와서 며칠 되었다. 이상규씨가 날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갑자기 미국까지 찾아와서 만나자고 한 것은 중앙정보부 사람이 이훈 전무를 찾아온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 만날 수도 있는데 이상규씨가 미국에 와 있는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상규사장는 김규한씨와 함께 한국반도체 사업 투자자이며 이훈씨의 부친이다. 서니베일에 있는 Ramada Inn 의 Bar 에서 저녁에 만났다.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젠 중앙정보부 남산의 무서운 이야기 외화 도피이야기 모두 잘 알게 되었다. 중앙정보부 사람이 공장으로 이훈전무를 찾아온 후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더 불안하다. 무슨 큰일이 있었다는 느낌은 들었다. 나는 이상규회장 하고는 사업이야기를 한일이 없다. 항상 김규한사장이 나의 출자가로 모든 것을 상의 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인수를 결정한 삼성 측의 공작도 한 목 한것 같았다. 유류파동은 전세계로 퍼져나가 나의 첫 제품인 시계칩이 잘 나온다 해도 그 전망은 반드시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예산은 초과했지만 시계칩은 꼭 성공할 테니 그때까지 차질 없이 재정지원을 부탁했다. 이러한 회사운영 이야기일 것이다. 딴 이야기는 안일 것이라고 나 자신을 억지로 달래면서 위로하고 기다리고 있섰다. 돈 이야기는 돈 이야기다. 강박사는 이제 돈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돈 이야기는 절대로 안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상규사장의 부탁이었다. 이상규씨는 우리의 재정 비밀을 내가 누설한 것으로 단정 하고 있었다. 김완희 박사가 정보부장 이후락씨하고는 가깝다고 강조했고 자기가 삼성의 이병철씨 고문이고 나도 자기를 고문으로 쓰라고 했었는데 나는 거절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나 역시 김완희박를 의심했지만 나로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이다. 증거 없이 남을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앙정보부는 자체적으로 외국 투자회사를 조사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 시기가 우연히 내 의심과 일치한 것뿐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나쁜 일이 발각되면 죽어도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 떼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강하게 나온다고 들었다. 증거가 없으니 나도 절대 그런 일 없다고 잡아 뗄수도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똥 뱃장의 정치가도 아니고 사실 사업가라고 할 주제도 못 된다. 그저 내가 배운 지식으로 한국서 남보다 먼저 새 물건 만들어 보겠다는 고집을 빼면 아무것도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나는 이때 결정적인 잘못을 또 저질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만 믿겠다고 했는데 이상규사장이 듣고 싶었던 말을 내가 못했었다. 만약 제가 어던 기관에 잡혀가서 신문을 받는다면 저는 거짓말을 못할 것입니다. 결국 저는 아는 대로 다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돈 이야기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으니 절대 안심하십시요 라고 했어야 했다. 이제는 강박사는 믿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나는 또다시 시제품이 나올 때 까지만 이라도 계속 재정지원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 헸다, 돈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 현금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 돈도 보탠다는 의미에서 105

113 나는 ICII 50% 의 주식은 모두 돌려드리고 깨끗이 재정관계에서는 손을 떼겠다고 했다. 아무 대답이 없다. 이젠 나는 돈에 관련된 이해관계는 모두 정리했다. 월급만 받는 월급쟁이 신세로 돌아갔다. 한국반도체주식회사는 새 주인을 찾게 되었다. 시제품 이런것 문제가 아니다. 생산장비를 있는 대로 나열해서라도 겉 모양만 가추어지면 중공식을 올리자는거다. 빨리 팔기위해서다. 김규한사장이 투자한 돈을 이상규회장은 회수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새로 개발한 시계칩만 나오면 일본, 홍콩 등의 민수 전자제품 시장에서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또 이런 설탕 발린 좋은 말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면 정말 내가 사기꾼으로 몰릴 것 같아 새 주인 찾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이때 친구 조남욱 이가 공장으로 찾아와서 여러가지 충고를 많이 해 주었스나 이미 모든 상황은 내힘으로는 어쩔수 없게 되 있섰다. 7.4 끌려온 준공식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준공식 날이 잡혔다 년 10 월 4 일이다. 하나도 좋을 것이 없다. 마지못해 끌려온 것이다. 유류파동을 몰고 온 중동전쟁 시작에서 이틀이 모자라는 일년이 되는 날이다.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감안하면 내가 나 자신이 해낸 일이 기적 같기도 했다. 공장 건설 Schedule 이 거의 차질 없이 진행됬다. 그 당시의 서울은 오늘날과 같은 밝은 도시는 아니었다. 에너지 절약으로 깜깜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인지 내가 내 자신 보기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온 세계의 경제 전망이 어둡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오하이오에서 피닉스에서 또 서니베일 에서 반도체 설비를 설치 운영했지만 가격, 납기, 또 예측이 안 되는 상황에서 자금난에 쪼달리며 일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젠 세상이 모두 무서워하는 중앙정보부까지 끼어들었으니 악재란 악재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섰다. 준공식은 이훈전무가 모두 Coordinate 하고 나는 간섭하지 않았다. 나는 한두 명 초대 하고 싶은 사람은 있었지만 아무도 알리지조차 않았다. 반도체용 해더 생산공장 준공식에는 박대통령이 직접 참석해서 종업원을 격려했고 내가 일했던 모토롤라의 한국 조립 공장 준공식에는 내가보기는 아무런 기술혜택도 없는 공장인데 국무총리 이하 모든 경제 각료들이 참석한 사실을 알고 있다. 혹시나 박대통령이 전자공학을 전공한 자기 딸을 데리고 오지나 않나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한국에 와서 임태순 서강대학 교수와 가까워졌다. 전기과에 다니는 박대통령 딸 박근혜의 지도교수로 청와대에 자주 출입하면서 부자(녀?)가 모두 반도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반도체 제조가 어떠한 것인지 와 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훈전무에게 누가 오냐고 물어보면 되는데 별 이유 없이 물어보고 싶지가 않아서 나 혼자 준공식 날이면 알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준공식 날이 다 되어가는데 높은 분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도 정일권 국무총리는 나타나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훈전무의 장인 이니까. 준공식 날이다. 집안 식구를 빼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분은 오현위 교수와 임태순교수 또 이름은 잊었지만 전자공업 진흥회 에서 오신 분 정도로 얼마 안되는 의자에도 많이 자리가 남아 있었다. 반도체 Wafer Fabrication 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찾아온 손님은 다섯분 도 안되는것 같았다. 삼성의 강진구 사장이 106

114 왔다갔다고 나중에 들었는데 나는 본것같지가 않았다. 이훈전무의 장인 얼굴은 안보였다. 정부에서 나온 높은분으로는 내 고교 친구인 기계공업국 오태환국장이 와서 상공부장관 축사를 읽어주고 곧 돌아갔다. 그래도 다행히 내외경제신문사의 성의경 기자가 와서 그 다음 날 신문에 준공식 사진이 나서 고마웠다. 성기자는 전자공업 첨단기술에 많은 관심과 조해를 가진 유일한 분이였다. 반도체 분야 지원 강화 라는 큰 제목 옆에 조그마한 웨이퍼공장 준공 기사는 우리 사정을 보고 지원 강화라고 하는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도 이 준공식은 투자회수의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한평생의 과업의 실패를 기념(?)하는 날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107

115 여기서 이글을 쓰면서 준공식 관련 사진을 찾았스나 나에게는 사진만 아니라 다른 자료도 가진것이 없다. 반도체 10 년사 편집에 필요하다고 강진구사장이 사람을 보내와서 갖고있는 자료는 다 줬다. 아직 돌려 받지를 못하고 있다. 결혼식은 했는데 결혼식 사진이 없는 것과 다를 게 없다. 7.5 Joe Sudduth - 나의 실망 내가 김규한씨를 처음 만난 1955 년 당시는 Kemco 가 김규한씨 회사였는데 그 후에 수입대행업을 하는 이상규회장 하고 합병한 후에도 이름은 Kemco 로 유지했다. 이상규회장이 돈 문제에서 손 떼라고 한 후부터는 Joe Sudduth 의 태도도 달라졌다. 내가 봐달라고 한 나의 서니베일 집은 내가 한번씩 미국에 오면 쓸려고 했었는데 집 봐준다는 명목으로 자기 친구를 입주시켰다. 내가 회사 짐도 싣고 다니려고 산 Ford Station wagon 도 뺏어갔다. 나는 또 내 월급을 내가 데리고 온 미국인 엔지니어 Terry Martin 하고 같은 액수로 ICII 에서 받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월급은 받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일이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미국으로 돌아오는 이삿짐 운송비를 거부했다. 이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내가 한국 간 것은 영구 귀국이라서 다시 돌아온 것은 회사가 그 비용을 낼 성질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가구들을 하나도 팔지 않고 다시 미국으로 가져왔다. 가져온 가구 값보다 운송비가 더 들었다. Sudduth 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비행장에서 이제는 친구 이재윤이나 그의 와이푸가 나를 픽업해 주게 되었다. 나는 내 집을 쓰고 있는 집세를 내라고 했으나 거부 당했다. 내가 데려간 미국 엔지니어들이 나에게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강기동의 돈 낭비가 심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회사의 재정이 파산 지경으로 되었고 이제는 강기동이 없이 ICII 를 운영해야 된다고 이들을 설득시키고 있섰다. 뭐라고 그래도 다 좋다. 시제품이 나오고 하루 속히 시계칩 생산에 들어가야 된다. 미국 사람이 없어도 회사가 돌아갈 수 있게 기술의 정착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우리 Engineer 와 생산라인 operator 의 훈련 역시 철저히 했다. 그리고 나의 Stress 도 나타내서는 안 된다. 눈치 채지 않도록 행동 해야 된다. 작업능률에 지장이 온다. 나를 믿고 일하는 사람들 에게 내가 힘이 되야 한다. 7.6 보이지않는손 -삼성의 인수작전 회사의 인수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삼성은 창업보다는 Risk 가 적은 확실한 기존 회사 인수를 선호했다. 인수작전 대상인 한국반도체주식회사가 이미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여서 노련한 인수작전 팀에는 작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재정적으로는 후-ㄱ 불면 꺼지는 풍전등화였다. 여기 이야기는 내가 그 동안 들은 이야기와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종합한 것이다. 나의 삼성과의 첫 인연은 1969? 년 조용달 사장을 동경서 맞났슬 때 다 반도체 사업은 전자에 손댄 이상 꼭 해야겠는데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병철회장도 친구로 믿고 있던 일본 NEC 회장이 반도체공장 구경만은 안 된다고 거절 했슬때 모욕마저 느꼈다는 것이다. 한국반도체 사업내용이 이회장에게 전해졌다. 이회장은 투자규모가 작은데 놀란다. 자기가 알고 있는 액수의 1/5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곧 조사를 지시했다. 108

116 일차조사가 올라왔다. 출자자인 이상규씨와 김규한씨의 재정능력은 볼 것 없고 강기동박사는 서울공대를 나와 미국 Motorola 사의 반도체 기술자로 C-MOS 전문가라고 긍정적으로 보고됐다. 또 미국 ICII 사장 Joe Sudduth 의 재정배경은 의심스러우나 더 조사가 필요 하다고 되있섰다. 나에 대한 나뿐 소문을 처음 드른것은 인수되기 3 개월 전 쯤 이였다. 강박사의 경영능력 부족으로 곧 회사가 망한다. 유류 파동에 대처는커녕 처음 결정한 품목을 재검토 생각은 안하고 그냥 고집 부려서 비싸게 사고 있다. schedule 맞춘다고 비싼 항공편을 쓰는 등등 투자가에 겁주는 소문이 퍼졌다. 이것이 삼성의 인수작전의 시작 이였던 것 같다. 내 비서와 운전기사도 접촉했다. 시제품이 나올때까지 운영자금을 약속했던 감규한씨가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젠 운영자금의 지원도 불투명해졌다. 인수작전이 먹혀 들고 있섰다. 곧 월급도 못주게된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훈 전무에게 확인해 보았다. 그건 헛소문 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집안에서 퍼트린 것이다. 삼성에서는 우리의 재정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있섰다. 미국에서 쓰는 돈은 모두 외환관리법에 문제가 있고 국내자금 역시 은행에서의 신용대출이 막히면 바로 부도가 난다. 국내외 모두 한방(one punch) 이면 이 회사는 끝나게 되어 있섰다.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 생산시설의 설치, Tune up 시제품생산, Reliability 확인, 시계칩 투입 -TEST 등등 다른데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이미 삼성은 다 알고 있섰지만 차관도입 심사에서 미국 ICII 에 투자된 돈이 한국사람 돈으로 강박사를 통해서 확인도 됐다. 삼성은 년 내에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중앙정보부 조사관이 공장으로 이훈전무를 찾아왔다. 나는 지금까지 진짜 중앙정보부원 인지 삼성이 보낸 가짜인지 의심이 안 풀린다. 하여튼 이떼 삼성의 인수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상규사장이 급히 미국으로 와서 ICII 의 Joe Sudduth 를 맛났다. 모든 돈 관계에서 강박사를 분리 시켰다. 급히 서둘러서 형식적으로 10 월 4 일에 준공식을 치렀다. 이상규사장은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는 삼성에 접근했다. 삼성전자의 강진구 사장이 준공식 날 공장을 점검 하고 가서 TR 만 만들어도 50 만불 이면 시설도 최신이고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고 좋게 보고됐다. 인수작전의 마즈막 단계가 go 로 결정이 났다. 삼성은 곳 바로 광화문에 있는 한국반도체 주 거래은행인 상업은행본점에 한국반도체의 신용대출을 12 월 6 일로 마감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날이 한국반도체가 부도가나는 날이 되었다. 즉 삼성에게 항복 하는 날이 잡힌 것이다. 준공식을 치르고 간신이 두 달을 넘겼슬때다. 이사실이 이상규 사장에게 전해졌으나 나와 김규한씨는 모르고 있섰다. 강진구사장 회고록(참고-책맨끝 p. 145)은 사실과는 다르다. 내가 회사매각을 주선한 것으로 되어있고 날 자도 틀린다. 나는 회사매각에 처음부터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Joe Sudduth 는 내가 고만두고 나서 2 년가까이 더 있다가 삼성에 ICII 의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지분을 팔고 떠났다. 이상규사장은 나 때문에 투자한 원본을 힘들게나마 모두 건진 셈이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큰돈을 챙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오늘날 까지도 그 오해가 계속되고 있다. 109

117 7.7 항복문서 조인 그날도 아침에 나가서 시제품 생산에 필요한 차질이 올 물건들이 없나 점검하고 있었다. 상황을 판단하여 필요하면 저녁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 년 12 월 6 일날 이었다. 만나자고 해서 내가 서울 광화문의 Kemco 사무실로 갔다. 이상규회장, 그리고 유창룡전무(Kemco 의 CFO)등이 거기 있섰다. 김규한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삼성으로 회사를 넘기게 되었다고 했다. 강박사가 계속 남아서 일을 봐줘야겠다는 부탁이다. 삼성의 인수조건이 강박사를 포함시키는 것이였다. 강박사는 양산과 판매(전량수출)의 성공을 보장하고 그 댓 가로 10%의 지분을 주는 것으로 합의되어서 그 계약서에 서명하러 간다고 했다. 이젠 내가 재정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고 했는데 내 싸인 이 그래도 필요한가 보다 하고 느꼈다. 우리는 중앙일보시로 갔다. 결국 삼성이구나 년 모토롤라 Hogan 사장이 한국가면 부패한 xx 은 접촉하지 말라 는 경고 가 내 머리를 스처 갔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조고마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남하는 대로 손 내밀어 악수하고 나는 거기 테이블의 제일 끝에 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기분이었고 지분 10%로 나를 포함해서 팔아 넘긴데 대해서 나는 거의 무감각 상태였다. 아무도 계약내용을 읽으려는 사람도 없고 말 없이 다들 사인을 하고 나에게 싸인 하라고 서류를 내밀어서 그냥 사인을 했다. 내가 내용을 읽어볼 분위기도 아니었고 전쟁에서 패한 장군의 항복문서 서명인데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목숨만 살려주셔도 황송합니다 라고 해야 될 판인 것이다. 일어날 때 거기 있던 한 사람이 자기가 재무(?) 책임자라고 하면서 별도로 만나서 합의서를 만들자고 했다. 이것 만은 지금도 그 말이 생생히 기억된다. 내가 도망갈까 봐 묶어놓으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 방을 나왔다. 아직 시제품도 안 나온 회사를 집과 기계만 살 삼성은 아닌 것이다. 나의 지분이 ICII 50% 에서 10%로 떨어졌다 그것도 조건부다. 그 당시는 이것이 날 위해서인지 나를 삼성에 묶어놓는 것인지 감도 안 잡혔다. 내가 노예가도서 팔려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훈전무하고 권성우부장이 말없이 조용히 회사를 떠났다. 삼성에서 강진구사장이 가장 신임하는 이충수이사가 경리담당 문창원차장을 대동하여 한국반도체로 부임했다. 처음에는 사주라고 대접해 주는 것 같아 고마웠지만 때때로 의견이 다를 때 사주가 왜 그러시냐고 할 때는 힘없는 사주라서 비꼬는 것 같은 느낌을 줘서 본인 의사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별로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7.8 전자 전시회 -- 위험한 모험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난 뒤였던것같다. 장충체육관 가건물에서 전자 전시회가 열리는데 꼭 참가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겉치레하는 것을 좋아 안 한다. 그리고 회사 선전의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보나마나 주최측에서는 최첨단 기술이라고 북 치며 야단 떨 것은 뻔한 노릇이다. 나는 바로 그것이 무섭고 위험한 짓이다. 많은 외국인도 와 본다고 했다. 미 국방성도 국방기술의 해외유출을 들고 나올수도 있지만 그와 별도로 실리콘밸리에 기술 공갈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미국은 Trade Secret, Production Knowhow 같은 지적 소유권을 중요시 하는 나라여서 이것을 악 이용하는 예를 많이 보았다. 신제품이 나오는 회사를 주시하고 있다가 그 기술의 출처에 110

118 의문이 가기만 하면 상품이 나와서 큰 판매계약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법적 문제를 일으킨다. 많은 회사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소송경비, 판매, 은행관계 때문에 소문이 나기 전에 적당히 돈 주고 해결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가 전자전에 나가서 이러한 화를 자초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내 걱정을 이야기하고 전자전을 그만두는 것이 나의 불안,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재앙을 줄이는 방법이긴 하지만 투자가들에게 모르고 있는 위험까지 알려야 되는지 며칠 고민하다가 돈도 돈이지만 지금 회사가 한참 바쁘고 우리는 선전이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사실 실리콘밸리의 기술 공갈단에게는 둘도 없는 좋은 건수 인 것이다. 한국에 없던 기술이고 강기동이가 xx 사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했다 고. 이러한 공갈단의 존재와 그 활동을 나에게 자세하게 가르쳐준 것이 내가 속해 있었던 xx 사의 Marketing Manager 였다. 나는 그가 제일 무서운 존재였다. Terry Martin 이 그 쪽으로 가면 사실상 한국반도체는 끝이다. 그 Marketing Manager 는 Terry 를 잘 알고 있다. 모토롤라 하고는 차단이 성공했지만 xx 사와는 그 차단이 불가능하다. 전자전 주최측에는 이런 최첨단기술 도입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말이라도 통할사람은 아무도없었다 또 전자전 주최측에서 연락이 왔다. 반도체가 이번 전자전의 주제가 되기 때문에 정문 들어가는 곳에 한국반도체를 전시하고 전시장 열기 전에 박대통령이 참관하게 모든 계획이 짜여져 있어서 안나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 강제다. 몇일 밖에 안남았다고 독촉이 와서 가겠다고 우선 말은해놓았다. 거절할수는 없는 상황이다. 나는 그 당시 장발로 알려져서 박대통령을 만날 자격도 없었다. 나는 안 가고 내 여비서와 엔지니어 한사람만 보내기로 집안에서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전시회 전날이다. 주최측에서 또 확인 연락이 왔다. 내가 자리에 없어서 내 비서가 전화를 받았는데 내일 9 시까지 꼭 나와야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확답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장발이라서 안된다고 다시 전화해서 내가 못간다고 연락하라고 했더니 자기하고 내일 아침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감아 올리면 된다고 나를 설득했다. 결국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와서 미장원을 찾았다. 시간이 일러서 잠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머리를 감아 올려서 장발을 감추고 나왔다. 몇시간만 이대로 있으면 되는데 미장원서 하루는 걱정없다고 했다. 9 시에 전시장에 들어갔다. 모두가 날보고 놀랐다. 이젠 장발이 아니라고. 주최측에서 좋아했다. 절차 설명이 있은 후 모두들 내보내고 주최측 간부, 나, 강진구사장, 박승찬사장, 네 사람만 남았다. 순서로는 내가 제일 먼저 박대통령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둘이다 다 아는 사람인데 큰 사람이 먼저 눈에 띄었다. 박대통령은 세상이 다 아는 사람이지만 옆에 같이 들어온 큰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친구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있었던 최광수다. 나는 외교관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 대통령과 같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나하고 가까웠던 친구로 오래간 만에 만나서 무의식 중에 야 하고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최광수가 박정희보다 더 가까웠다. 지금 확실치는 않는데 최광수가 손을 안 잡고 움츠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박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고 박대통령이 내미는 손을 잡고 인사했다. 111

119 나는 기다리는 동안에 반도체 Wafer Fabrication 이라는 하이텍 기술과 많은 여공을 써서 하는 반도체 조립의 다른 점을 대통령께 설명 드려야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이제는 반도체 Wafer Fabrication 이 뭐라는 것쯤은 알거라 고 나는 임교수와 강경석이 에게 서 듣고 있었다. 강경석이는 내가 뽑은 Engineer 로 박근혜 하고는 서강대학 전기과 동기였다. 그래서 준공식 때도 그랬지만 혹시 딸 박근혜도 같이 여기 나오지나 않나 하고 기대도 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수 년 전에는 반도체 Assembly 와 Wafer fabrication 둘이 다 같은 것으로 설득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Diffusion 용광로가 주장 치이고 이것의 model 을 여기 전시장에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설명이 더 쉬웠고 좀 깊이 들어가서 다른 Photo process 과정도 이야기해서 우리 공장 한번 와 봐 달라고 유도까지 할 것을 계획하고 있섰다. 그런데 강진구사장이 끼어들었다. 내가 기술적인 제조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삼성전자가 어떻고 하면서 주제를 바꾸고 있다. 강진구사장은 삼성이 이 어려운 사업을 하고 있다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고 있다는 요지의 이야기다. 결국 나는 밀려나고 나중에 강진구사장이 그런 장소에서는 기술적 이야기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야단까지 했다. 그래서 내 말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내가 장발이라서 만일 너무하면 강박사를 내보내고 강진구사장이 대신해서 반도체에 관해 이야기 하도록 사전에 준비까지 했다고 주최자 측에서 이해해 달라고 이야기해 왔다. 박대통령과의 또 다른 기회를 이번에는 내가 주인 격인 위치인데 놓친 것이다. 완공된 한국반도체주식회사-경기도 부천시 Photo processing room 7.9 새 희망 --그래도 내 회사 자금 지원이 되는 한 시계칩은 곧 나올 것이고 이런 제품이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안아서 약간의 선전 만으로도 판매(전량수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섰다. 삼성이 회사인수 시 나에게 준다는 주식 10%의 회사 참여도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 때 가서 나는 큰소리 치고 새 계약을 하는 것이다. 이젠 나도 얼마는 안 되도 정식 주주가돠어 경영에 참가 하게 됐다. 일도 만들어 놓기 전에 돈 이야기는 좋지 않다. 그래도 내 회사다. 공장건물, 시설 뭐 하나 내 손이 안간 데가 없다. 내 자신 대견스러웠다. 이 시계칩이 성공하면 회사가 적어도 현상유지는 가능할 것이고 정규 반도체공장으로 출발할 수가 있다. 미국서 배운 Hogan 식 경영을 도입하여 후진국 한국에 선진 반도체공장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가 있다. 삼성의 다른 회사로도 이런 식의 경영이 퍼져나가게 해야겠다. 112

120 LSI C-MOS 기술이 정착되면 현재 Battery 로 동작하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에는 이 C-MOS 제품이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실리콘밸리에서 내가 잘아는 Jim xxxxx 를 Product Manager 로 쓴다면 전세계에서 C-MOS 최고 수준의 Designer 들을 모두 우리 편으로 끌어드릴 수가 있다. 아무리 유류파동 불황이라고 해도 전자산업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신제품 개발- 준비는 이럴 때 해야 된다. 우리 한국은 C-MOS 제품 특히 Custom industrial products 선구자가 된다. 생산과정을 C-MOS 로 표준화해서 통일하고 - 이것이 내 전문분야다 Full 로 24 시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제품종류와 무관계 하게 C-MOS 생산라인에 Wafer 만 계속 집어넣고 Process Check 은 Test Pattern 으로 하고 제품은 Final Test 에서 분류하는 양산체제를 확립한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Tester 가 한 대 더 필요할 것 같다. 새 제품은 Designer 와 50/50 으로 합작하게 되면 전세계에서 좋은 디자인을 들고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될 것이다. 신제품의 고가격 유지기간을 6-12 개월로 잡고 제 2, 제 3 의 제품을 대기시킨다. 앞으로 올 가격변동, 시장변화, 경쟁업체 등의 data 를 계속 분석하여 시장전략을 만들고 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여 나간다. 이런 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다 이젠 나도 반도체다운 사업을 하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이고 새로운 희망과 힘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제품 선정 --의견충돌 첫 제품은 손목시계용 LSI-CMOS 회로로 Sunnyvale 에서 확정된 나혼자만 알고았는 회사 비밀이였다. 재래식 바늘시계와 달리 숫자가 바로 나오니까 Digital 이 되어 서 일반인들에게도 새 Technology 로 평가된다. 하루하루의 상황이 달라지는 Consumer Market 은 생산제품을 미리 정해 놓는다는 것이 도리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 공장이 시작되는 첫 제품을 미정으로 할 수는 없었다. 서니베일에서 Bob Lipp 를 채용했을 당시 시계용 IC 를 설계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 가서 일하는데 동의 했다. 전자 손목시계 display 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빨간 불이 켜지는 LED 이고 또 하나는 LCD 라는 것인데 LED 는 어두운 데서도 잘 보이지만 Battery 소모가 커서 단추를 눌러서 시간을 읽게 되어있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 반면 LCD 는 전력소모가 적어서 항상 켜 놓을 수가 있으나 어두운 곳에서 잘 안보이고 C- MOS 회로에서 보통보다 높은 전압이 나와야 한다. 특별히 LCD 용 생산방식이 필요하게 되어 바람직하지 않다. 첫 생산품은 LED 용 시계칩이다. 이 시계칩이 양산이 될 때 제 2 생산품목을 고르기로 마음 먹고 LCD 시계칩 역시 그 때 가서 다시 검토해 보기로 했다. 새로 나오는 하이텍 제품은 반짝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또 장래가 좋은 경우는 후발업체가 시장장악을 위해서 가격 덤핑도 할 수 있어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 이 하이텍 시장이다. 한국기업가의 실력이 부도 막기 위해서 돈 끌어대는 것이라면 하이텍 실력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주위환경에 대처해서 제품을 선정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기술의 발전 변화의 방향 그 속도 경쟁사의 정보 등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분석되고 장래를 예측해서 미리 투자도 해야 한다. 이런 반도체 사업의 특수성 이야기는 그 당시 높은 분들은 내 말을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고 강박사의 과장된 자기 자랑으로 밖에 받아주지를 않았다. 나의 생각을 강진구사장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았고 제품전략에서 나와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이병철회장에게 한국반도체 인수 시 일본에서 기술 113

121 도입해서 생산하는 흑백 TV 에 들어가는 Tr. 이나 IC 만 만들어도 충분히 인수가치가 있다고 해서 이회장은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TV 제조기술을 가르쳐 주고 그 주요 부품은 후진국에 비싸게 팔아 먹는 것이 이들의 후진국 Marketing 이다. 그러다 그 후진국내에서 부품을 생산하게 되면 그 값을 무진장 떨어뜨려 국산화의 의미가 없어지게 만든다. 나는 13 년 전에 개발한 Tr.이나 흑백 TV 용 IC 생산을 반대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3 inch Wafer 시설은 CMOS LSI 를 겨냥해서 설치한 것으로 값싼 2 inch 에 비해서 같은 생산과정으로 4: 9 의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반도체공장의 생산능력 생산단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생산 라인에서 취급하는 wafer 의 크기이다. 강진구사장은 전혀 감을 못 잡는다. 2 inch Line 이면 돈 안 주고 얻어 올 수가 있어 정 Tr 를 만든다면 폐기처분하는 2 inch Line 을 무상으로 얻어 오겠다고까지 했으나 도리어 강진구사장은 나를 설득했다. 나는 LSI 만들어서 일본등 외국에다가 팔고 그 돈으로 Tr 이나 TV 용 IC 를 사 오자고도 했다. 안 통한다. 이회장은 일본에서 사오고 있는 반도체가 국산화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자기는 그 뜻을 따라야 된다고 했다. 나는 이병철회장을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나에게 충고를 했다. 높은 분에게는 말을 이랬다 저랬다 바꾸면 안 된다고 했다 반 (anti 反 ) 삼성 사장 만들기 나는 높은 데서부터 하이텍의 본질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나의 생각은 강진구 사장이 나를 제거하는데 꼭 해야 할 일이 뭐인가를 도리어 내가 제시해준 것이다. 내가 회의에 나와서 나의 의견 이나 판단을 강조할 것을 우려해서 강진구사장은 나의 삼성 고위간부 접촉을 사실상 차단했다. 한번은 이병철회장이 찾았을 때 강박사가 장발이어서 좋지 못한 인상을 줄 것 같아 자기가 대신 갔다고 했다. 이때부터 뭔가가 잘못됐다고 느꼈으나 이것이 나의 제거 음모의 하나 라는 것까지 생각 할 수는 없었다. 강진구사장은 나에게 잘해준다고 느끼고 있섰기 때문이다. 회사가 팔리기 전에는 기술이나 반도체 관련 된 꼭 지켜야 할 중요 사항은 사장 직권으로 밀고 나갔다. 이젠 game rule 이 나도 모르게 달라진 것이다. 새로 적용되는 rule 은 나의 모든 행동이 반칙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였다 내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우선 시계칩이 성공 해야 된다. 성공은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참아라 그러면 나는 얼마 안되기는 하지만 주주가 된다. 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 때 시간이 나면 외톨이 베트남출신의 Anh 을 데리고 광화문 네거리 뒷골목에 있는 국제(?)라는 스넥바에 자주 갔다. 여기는 49 회 경기고교동창이 많이 찾는 곳으로 같은 동창인 조남욱이가 경영하고 있어서 내가 편히 들릴 수 있는 곳이다. 내가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또 한 곳 있었다. 여기 역시 가까웠던 친구 강영순이가 경영하는 맥주홀 엠파이어 였다. 이런 곳에 가면 여러 동창들로부터 세상소식을 제대로(?) 얻어들었다. 나의 내용을 아는 친구들은 내가 한국 실정을 모른다고 삼성에 대한 경고도 해주었다.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게 되면 너 같은 놈들은 다 쫓겨나 내 말 명심해서 들어 이런 소리 들은 것이 한번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계칩이 성공하면 그럴 수는 없다고 일축하고 흘려버렸다. 114

122 처음 이충수 이사가 경리 책임자로 문 차장을 데리고 왔을 때 삼성하고 너무나 다른 회사 분위기에 불만이 있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삼성이사의 권위가 안 먹혀 드는 것이다. 문차장은 한국반도체 분위기에 급속도로 동화되고 있었다. 여기에 불만인 이충수이사는 문차장을 삼성정신에 보다 더 충실한 신현옥 부장으로 대체했다. 제거된 문차장은 대우건설로 적을 옮겼다. 새로 온 신부장은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놀란다. 삼성정신을 심으려고 시도했으나 강박사의 반대로 실패하게 된다. 이충수이사는 부임 당시부터 강진구사장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섰다. 그때는 강진구사장은 방송국 출신으로 전자사장 자리가 아직 불안정한데다 강기동박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서 교육받은 전자전문가로 비서실에서 그런 기술자 사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느 전시장에서 정회장이라는 분을 만났다. 이 사람이 강박사냐고 하면서 이병철회장이 좋은 인재가 들어 왔다고 하더라고 나에게 칭찬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는 그때 이병철 회장은 만난 일도 없고 정회장이 누군지도 몰라서 나는 무슨 소리인지 감을 못 잡았다. (정회장은 이병철회장 하고는 사돈지간 이고 가까운 친구 사이이다) 시계칩이 성공하게 되면 강박사가 강진구사장을 대체 할수도있다. 시계칩은 강박사가 꼭 성공 시킬 거다. 그때까지 강박사를 제거해야 한다. 그때를 넘기면 제거 못 할수도있다. 시계 chip 이 성공하고 강박사를 제거하면 회사는 이충수 손안에 들어오게 된다. 강박사를 반 삼성 사장으로 만들어서 꼭 제거하는 거다. 국내실정을 모르는 강박사 제거는 눠서 떡먹기다. 이런 기회는 평생에 한번 올가말가 한 것이다. 이충수이사는 아침 출근서부터 저녁 퇴근 때까지 강박사 제거작업에만 전념하고 있섰다. 지금 자기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다. 제거전략이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강박사가 동의할 수 없는 안건을 결제서류로 만들어 올려 보낸다. 부결하면 삼성방침을 반대하는 증거로 위로 보고한다. 수원경찰서 뻐스사건은 강박사를 반 삼성사장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였다. 나는 사장실 문을 잘 열어 놓는다. 그리고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한번도 거절하지를 않았다. 몇몇 동창이 취직부탁을 올 때도 싫어도 다 만나주었다. 하루는 수원경찰서에서 왔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이야기는 우리가 출퇴근용 마이크로 버스를 샀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경남관광 이라는 관광회사에서 직원의 출퇴근을 도우고 있섰는데 회사가 조고만 버스를 사면 경비가 절약된다고 해서 마이크로 버스 한대를 사기로 했섰다. 나는 산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고 모 삼성고위간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밖에 있는 비서 아가씨보고 경리과장을 불러오라고 했다. 곳 문밖에 왔다 내가 나가서 Yes No 로만 대답하라고 하고 물어봤다. 우리 Bus 산게맞냐? 대답은 no 였다. 알겠다고 하고 다시 내방으로 들어와서 세금하고 문제가 되는 것 같아 최악의 경우에는 벌금이 나오겠지 뭐 잡혀가기까지 하겠나 하고 생각됐다. 맞대놓고 경찰서에서 온 사람에게 물어봤다. 내가 잡혀갈 수도 있냐고 했더니 아닙니다. 해결하시면 됩니다 라고 해서 갖고 온 조서(?)에 싸인을 해서 보냈다. 문제를 돈 주고 해결하는 것이 한국식인 것은 알지만 나는 적어도 내 회사 "한국반도체" 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후에 벌금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강박사는 자기 회사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경찰조서에 싸인까지 해가며 반 삼성 행동을 하는 사장 이라고 소문을 삼성 고위층에 퍼트렸다. 일의 뒤처리에 이충수이사가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사건의 진상을 모르고 있다. 또 115

123 내가 Tr. 흑백 TV 용 IC 개발 반대도 과장 왜곡해서 위로 보고 되었다. 회장님 뜻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고 구릅 전략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장이라고 되있섰다. 또 별거는 아니지만 다른 사건이 생각이 난다. 삼성 비서실에서 부른다고 해서 중앙일보사를 찾아갔다. 서울 시내로 나오는 길에 물건 살 것이 있어서 운전기사를 시켜서 내가 회의하는 동안에 심부름을 보냈다. 오후 3 시 회의였는데 한 5 분 늦었다. 마침 입구에 주차장 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거기다 주차하고 나는 중앙일보사로 뛰어 들어갔다. 밖에서 야단이다. 이병철회장 자리에 내가 차를 세웠다는 것이다. 빵빵 하고 기사를 찾았으나 기사도 없다.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와서 회장자리에 주차했다는 것이다. 반( 反 )삼성 행동이 실증 된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회장님 자리를 강박사만 모른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 외에도 내가 모르는 사건이 더 있슬것이다 그 7.12 이병철회장 과 돈봉투 - 부패한 삼성 고위층 이병철회장이 한국반도체를 연례행사로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 동안 나는 한번 회의에 갔었는데 그것도 말 한마디 안하고 멀리 앉았다가 왔다. 이번에는 우리 회사를 보러 오니 내가 이야기할 기회가 왔다. 시계 칩이 다 나오게 되었을 때인것 같다. 내 책상 위에 결제서류가 놓여 있다. 이병철회장 방문을 위해서 특별자금을 지출하겠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니 이건 말도 안 되지만 액수가 너무 크다. 무슨 큰 도로공사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여 드린다. 회장이 온다고 일 더하고 안 온다고 일 안 하는 그런 회사는 아니라고 결재를 안 했다. 나는 회사가 잘되게 해서 돈을 많이 벌어주는 것이 내 임무라고 했다. 나에게 또 부탁이 들어왔다. 회장 브리핑을 자기가 하도록 해달라는 거다. 모두 No 할 수가 없고 이 기회에 높은 분에게 점수 따려고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아서 OK 했다. 브리핑 자료 만든다고 직원들을 야근을 시키는 것이다. 회장 오기 이틀 전부터 대청소다. 환경을 가꾼다. 또 이야기가 들려온다. 수원경찰서에서 모터사이클 경호경찰을 사오고 도중에 길이 나쁜 곳은 고친다 등등 하여튼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들이다. 나는 회장을 만나면 반도체사업 특성도 이야기하고 이런 것들을 모두 고치자고 제안 할려고 별도의 자료를 준비해 놓고 있섰다. 회장이 오는 당일이다. 회의실이 차려졌다. 꽃이 들어오고 비싼 과일 바나나 등이 책상에 준비되어 있었다. 호위경찰 모터사이클이 5 대 그리고 까만 세단차가 3 대가 들어왔다. 회의실에서 이충수이사가 회사 활동들을 이야기하는데 허식 과장이 많다. 한국에선 꿈도 못꾸던 반도체 C-MOS LSI 제품이 곧 나오는데 Hi Tec 에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비서실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나는 가기전에 차라도 같이하면서 대화 시간을 갖자고 부탁했다. 내가 준비하고 있섰던 기회는 무시되고 떠나갔다. 며칠을 두고 준비한 행사인데 조곰이라도 우리를 배려하는 태도는 보여야 되지 않나. 높은 사람들의 우리를 대하는 태도나 무조건 굽실대는 주위사람들의 태도가 나에게는 옛 왕조시대 연극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내가 속해있는 실존 조직이고 현실인것이다. 나는 모르고 있섰지만 이때는 이미 강박사는 반 삼성으로 찍혀 있어서 쓸데없는 말을 할 가능성을 미리 짜고 차단 한 것이었다. 116

124 따라온 높은 사람들에게 돈봉투가 전해졌다. 누구에게 얼마를 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점심값 용돈 정도로 만족할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이충수이사가 사장이라고 앉아있는 나를 무시하고 한 행동이다. 하여튼 나에게는 속임수다. 회사 돈을 사장이 결제를 거부한 것을 하급 임원이 빼내서 자기들끼리 논아 먹는게 대 삼성인가? 이들은 삼성의 최고 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일대 일로 뒤에서 남모르게 한 것이 아니고 10 명 정도되는 단체(?) 앞에서 그것도 회사업무 중에 돈을 돌렸는데도 아무도 뭐라고 한 사람이 없스니 주는 놈 받는 놈 모두가 다 썩었다. 이런 게 대 삼성의 관례인가? 돈을 직접 다룬 것으로 보이는 경리과의 한 하급직원이 사장님은 알고 계셨느냐고 물어와서 우물쭈물 해버렸다. 나는 그럴 짓 안 할거라고 그리고 알았다면 못하게 했슬거라고 생각해서 내게 물어본 것이다. 변명도 못했스니 나도 한패로 보게됬다. 이보다 10 년전에 한국에 조립공장을 짓기위해서 나는 Motorola 의 조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간 일이 있섰다. 이때 사장 Dr. Hogan 사무실에서 한국에 갈 사람들 4 명이 사전교육을 받았는데 이별철회장의 삭가린 밀수 로 국회에서 국무총리가 똥 바가지를 뒤집어 썼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나는 창피해서 제대로 앞을 처다 보지도 못했다. Dr. Hogan 은 나에게 한국가면 부패 한 xx 회사는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지금 나는 이 조직의 한 사람으로 내가 어떡하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나도 이 삼성 최고위층의 부패의 동업자가 아닌가? 한국에 오셨스면 한국식으로 해야 되는것이 이런 것인가? 이런 것도 충고라고 받아야 되는 건가?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모른척하고 있섰다. 적어도 사장 몰래 돈을 빼 썻스니 양심이 있다면 나에게 와서 변명이라도 할거라고 기다렸스나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더 당당해 졌다. 이제는 회사자금을 자기마음대로 사장 결재 없이 쓰고 있었다. 이미 강박사를 반 삼성 사장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시계칩 생산에 기술적 문제만 없스면 언제라도 강박사 제거는 가능하게 되어있섰다. 삼성 측이나 나나 똑같이 서로 정반대 시각에서 시계칩만 잘 나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계칩 CMOS/LSI KS-5001 의 대성공 --다음은 강 박사 제거 시계칩은 대성공이다. 만약에 대비해서 미리 시계칩 KS-5001 의 소개 책자를 미국 ICII 에서 만드러서 한국서는 조립만 하는 것 같이 보이도록 하고 나는 저 자세를 유지 했다. 3 교대로 공장을 돌려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다. 생산 3 개월째 월별 재무 장보는 흑자를 기록했고 그 동안 걱정했던 시제품의 Reliability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제일 큰 걱정이 해결됐다. 나의 고집이 헛되지 않았다. 나로서는 감동적인 성취이다. 나의 평생을 바쳐서 배운 것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바로 여기 경기도 부천시에 이식 된것이다. 일본에서도 많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일본 Sanyo 에서 온 Buyer 가 나를 안다고 해서 강진구 사장이 한식 요정에 저녁 자리를 특별히 마련했다. 생산 라인의 인원 훈련이 충분이 잘 돼서 기술인력은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잘 돌아간다고 자랑도하고 같이 축배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자리는 강진구 사장이 강박사가 없어도 공장이 돌아갈수 있겠다고 직접 확인 하는 자리가 되었던것이다. 117

125 삼성에서 1987 년 2 월 15 일에 출판한 삼성 반도체 통신 10 년사 의 P. 172 한면을 소개한다. 이때부터 나에게 검은구름이 몰려오고 있섰다. 나의 반대를 무시하고 시계사업부를 독립시켜서 한국반도체에서 떼어내서 삼성전자로 가져갔다. 그룹차원의 결정이라고 했다. LCD 용 시계 칩 은 그 만드는 방법이 LED 와달리 고전압이 필요하기 때문에 표준이 아니 여서 제조방식을 하나로 통일해서 고정하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제품은 아니다. 이젠 C-MOS LSI 생산능력이 검증된 만큼 나는 더 고가의 Industrial products, computer 관련 제품들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섰다. 나도 모르게 LCD 개발이 이미 결재가 났다고 했다. 나는 시계사업부 이전, LCD 시계칩 개발, Tr.생산, 흑백 TV 용 IC 개발 모두 반대입장에 있섰다. 미리 강박사 공백을 예상하고 ICII 에서 두 사람의 Process Engineer 가 한국에 도착했다. Ray Kennedy 와 Brian Tighe 였다. Ray 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고 Brian Tighe 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둘이다 CMOS 를 아는 사람은 아니고 이미 한물간 사람들이다. 이들의 도움으로 Tr 개발 할 계획인 것이다. 이젠 모든 것이 내가 반대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나를 빼놓고 회사가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이충수이사와 118

126 의견충돌이 크게 생겨 강진구사장한테 항의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다가 그냥 내려 놓았다. 이충수이사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모두가 시나리오 대로 되고 있는데 항의나 해명을 요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만 병신이 되는 거다. 이제 나는 허수아비다. 나로서는 지금까지 시계 chip 성공 하나만 바라보고 잘 참고 견디어왔다. 이충수 강진구 이병철로 이어지는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나의 제거음모를 어떻게 내가 맞선다는 말인가? 나는 이미 반 삼성 사장으로 찍혔고 내편은 아무도 없는데. 나는 그 다음 날 간부 직원들을 모아 놓고 그만 둔다는 작별 인사말을 했다. 모두가 좋아서 성공을 경축해야 할 때였다. 수고한 직원들하고 점심한끼도 같이 못했다. 누구는 현금으로 회사돈 끄내서 서로 논아먹는데- 떠나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잰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이북 식 표현으로는 모든 약속을 초과 달성 한 것이다 양산 성공에다 감당 못하도록 많은 주문이 들어와 24 시간 공장이 돌고 있고 회사도 돈을 벌고 있다. 지금의 시계칩 인기로 봐서는 적어도 일년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강진구사장은 삼성에서 최신 전자 손목시계를 개발했다고 크게 선전하고 Sample 을 청와대에도 돌려 외국 귀빈에게 선물로 쓰게 했다. 사실 이 전자 손목시계는 세계 어느 시장에 내놓아도 최신제품으로 손색없는 상품이였다. 정부의 관련 부처에서는 시계사업을 Swiss 수준으로 양성한다는 육성 안이 마련되고 상공부의 전자과장 윤정우 서강대학 임태순 교수를 포함한 시장조사단이 세계일주를 하고 왔다. 가까이 지내던 임태순 교수로부터 손목시계사업에 관한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 한일이 있었다. 내가 내용을 몰라서였다. 임교수는 내가 지기에게까지 회답을 피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때 나는 이미 시계사업에서 밀려난 신세라는 말을 해서 해명 했어야 했다. 별수없다 돈이나 받고 끝내자. 이충수이사보고 내 주식이 10% 이니까 10 만불을 달라고 했다. 10 만불이 아니고 5 만불이라고 했다. 나는 100 만불에 회사를 이병철회장이 샀는줄 알았는데 50 만불에 이건희이사가 내국인 지분만 인수했다고 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이건희이사가 누군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러면 그 5 만불을 달라고 했다. 나는 5 만불이 전해질 줄 알고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이 없다. 몇 일 후 거진 강제로 강진구 사장을 끌고 이병철 회장한테 갔다. 이병철회장하고 상의하고 와서 돈 벌게 되면 준다고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거다. 당장 있슬곳이 없다. 나도 돈이 좀 있어야겠다. 또 다시 강진구 사장에게 조곰이라도 달라고 따젔다. 그까짓 10% 삼성이 떼어 먹겠습니까 돈 벌면 준다고 했스니 자기를 믿으라는 거다. 안 주겠다고 안 한 것만도 다행이다. 돈 벌면 주겠지 내 월급은 삼성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ICII 에서 파견 나온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있는 미국인 engineer 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ICII 에서 받고 있었다. 돈은 고사하고 이 반도체 기술을 내가 어떻게 한국으로 갖고온건데 미 국방성에서 제기할지도 모르는 국방기술 해외유출에 대처책의 하나로 돈은 한국서 안받기로 했던것이다. 너무나 허무하다. 그저 일만 죽어라 하고 하고 남 좋은 일로 끝난 셈이다. 내가 쫓겨날 당시 시계칩 수출실적이 $4,184,989 불로 이건희이사가 낸 돈의 8 배가 넘는 액수였다. 그뿐인가 돈 주고도 살수 없는 C-MOS LSI 기술을 공짜로 얻은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여러 번 "내 돈" 달라고 했다. 이것만은 내가 한평생을 바쳐서 배운 반도체기술로 번 내 돈인 것이다. 아직까지 못 받았스니 결국 대 삼성은 내 돈을 떼 먹었다. 나에게 삼성은 아주 나뿐 일을 했다. 남이 불가능하다고 하던 반도체 119

127 사업을 한국서 성공시켰지만 나는 돈 하고는 인연이 없는 팔자인 것 같다. 이젠 돈도 없고 가정도 엉망이됬다. 남들이 나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는데 나의 개인적 내막은 남에게 이야기를 못했다. 했봤자 믿지도 않겠고 도와줄수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말이 앞서간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의 원진 재벌과의 반도체사업을 새로 추진했스나 실패로 끝나서 그후로는 한국과 한국사람 그리고 반도체와 나 자신을 차단했다. 모든것을 잊어야 내가 살수 있다. 삼성반도체가 언제부터 돈을 벌기 시작 했는지 알지도 못한다. 돈 벌면 준다고 약속하고 기다리라고 한 높은 사람은 이미 이세상을 떠났고 자기만 믿으라고 했고 그래서 믿었던 강진구 사장은 건강이 좋지 못해서 10 여년 전부터 주위사람도 못 알아 본다고 들었다. 그 외에 알만한 사람은 그때 내 회사를 인수했다는 이건희 회장이다. 이회장 앞으로 여러번 편지를 했스나 회답 조차 없다. 흔히 듣던 잘 먹고 잘살아라 라는 말이 이럴 때 나보고 쓰라고 만드러진것 같이 느껴젔다 숙청--새 출발의 결심 내가 떠나던 1976 년 여름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한국반도체주식회사에서 이충수이사가 신현욱부장을 앞세워 공산당 식 숙청이 단행되고 있었다. 내가 고만두고 난 며칠 후에 신만섭 과장이 대기발령을 받았다고 소식을 들었다. 강박사 이임 사 때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린 사람이라서 찍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곧 더 많은 사람이 대기발령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사임하자 신부장이 사람을 보내서 강박사의 반포아파트 출입을 며칠 동안 감시했다. 공산당 이나 다름없는 무서운 회사다. 나의 갑작스런 사표는 많은 간부들이 영문을 몰라서 나를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나의 아파트를 찾아온 사람 들을 파악했다. 생산 기술부서의 이기윤 박등윤 송대호 이종호 등 핵심간부가 강기동계 라고 대기발령을 받고 회사에서 물러났다. 나, 강기동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고생을 해서 이루어 놓은 반도체기술의 한국 정착의 공로자들을 이런 식으로 벌을 주어도 되는 것인지 상상도 못했던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공장이 돌아가게 되면 쫓겨난다 는 친구들의 경고도 여러 번 상기해 보았지만 그렇다면 성공시키지 말았어야 되는 것인가? 돈 없어 허덕이는 회사를 그것도 은행하고 짜고 부도로 유도 해서 원가에 집어 먹고 회사가 잘되니까 그것도 모자라 고생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돈까지 떼어먹고 쫓아내는 곳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 삼성 인가? 나는 내가 당할 때까지도 이런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텍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너무나 내가 삼성을 몰랐던 것이다. 그 옛날 직장 구하기도 힘든 시절 좋은 직장에서 잘 있는 사람들을 장래가 좋다, 더 큰 재정적인 보답이 온다 등으로 설득하여 데려 온 한국서도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직업을 뺏기고 또 남아 있으면서도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현실을 보고만 있겠는가? 이들이 배운 것이 첨단 반도체기술이지만 그 당시 한국서는 새 직장을 구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무용지물이였다. 더욱이 삼성에서 쫏겨닜다는 소문 만으로도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결국 그 동안에 강기동이의 꼬심에 직장 옮겨 몇년의 시간 낭비만하고 실업자로 끝난 것이다. 나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나 역시 한평생을 바쳐서 키워놓은 120

128 자식을 놓고 나오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떠나더라도 내 자식만은 잘 키워주겠지 하는 기대가 ㅡ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없다고 학대하고 집에서 쫓아 내는 것을 보니 어떻게 참고 가만 있으란 말인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한을 풀 줄 아는 주제도 못 되는 쪼다 인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힘 앞에 죽어갔나. 나치가 유태인을, 스탈린이 소위 반동분자를, 모택동이가 지식인을, 그리고 우리와 같은 족속의 김일성, 김정일이가 같은 민족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자. 이젠 한국에서도 LSI-CMOS 는 만들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내가 이들을 다시 모아 Next Generation Wafer Fabrication 공장을 만들고 남이 못하는 일을 하는 거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라. 아무 말도 안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 강박사계를 제거 하고 반도체회사의 전권을 장악한 이충수이사는 Transistor 개발을 명령한다 Tr 은 C- MOS 공정의 1/4 만으로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Tr 이 나오자 강박사도 못한 Tr 을 이충수이사가 해냈다고 강진구사장은 대대적으로 사 내외로 PR 했다. 기술적으로는 13 년을 후퇴했지만 한국서 Tr 시대를 열었다고 역사를 고쳐 쓰고 강진구사장은 이충수를 상무로 승진한다. 그리고 한국 최고 기술자 영웅으로 만들어 1977 년 9 월 이충수는 대통령상을 받는다. 강진구 사장이주는 강박사 제거의 보답이다. 한때 잘나가던 LED/LCD 시계사업도 바깥 세상을 모르고 시장의 변화와 가격의 급격한 하락을 하급직원의 충성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섰다. 결국은 Seiko, Timex, Casio 등과의 국제경쟁에서 간단히 밀려나고 말았다. 수많은 IC 를 개발했지만 모두가 한물간 흑백 TV 용 수입대체 품으로 돈 되는 제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Tr 개발로 대통령상까지 준 공로자를 회사의 적자가 늘어났다는 구실로 내보냈다고 들었다 년 말에 삼성은 반도체 지사를 독자적으로 Sunnyvale 에 내고 미국현지 법인 ICII 사의 한국반도체 지분 50% 를 50 만 불에 인수했다. 서류상으로는 그 떼도 ICII 의 50% 는 나의 주식이였다. 나는 삼성이 ICII 주식을 인수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ICII 는 소기의 임무를 잘 마치고 문을 닫았다. Joe Sudduth 가 California 수도 Sacramento 근교에 골프장을 샀다는 풍문도 들렸다 년 3 월에는 나의 한평생을 바쳐서 고생해서 만든 한국반도체주식회사는 이름도 사라졌다. 이름이 삼성반도체로 바뀌었다. 상호가 바뀌었다고 설립자가 달라질수는 없다. 삼성반도체는 내가 만든회사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이렇게 나 혼자 위로했다 년에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위해서 미국 현지에 세운 ICII 사의 건물은 38 년이 지난 지금도 옛날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내 사무실이 저기 였섰는데. 그 앞에는 computer chip 을 만드는 AMD 본사가 들어섰고 뒤로는 California 최대의 전자 백화점 FRY S Electronics 가 생겼다. 왼쪽 사진은 1976 년에 여기 ICII 서 Engineer 로 일했던 주동혁 박사가 2005 년에 찍었다 1010 Stewart Drive Sunnyvale, CA 121

129 8 장 미국으로 돌아와서 원진전자 8.1 KDK Electronics, Inc. Sunnyvale 에 설립 한국반도체 재직중에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David Heck 이였다. 이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야겠다. 학력은 Purdue 대학 전기과를 졸업하고 Harvard 에서 MBA 를 한 실리콘밸리에서 알아주는 반도체 엘리트였다. 일찌감치 한국 Fairchild 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돌아올 때 한국 고아를 입양해서 온 친한 파이기도 했다. 한국에 미국과 같은 수준의 Wafer Foundry 를 만들고 미국에서 제품 디자인을 갖고 가서 만들어오는 방식의 아주 큰 비즈니스가 형성될 수 있다는데 둘이다 생각하는 것이 일치했다. 장래가 좋은 제품 디자인은 알아내는 재주가 있어야 하고 또 이 디자인 샘플을 차질 없이 만들고 양산까지 순조로이 이어지는 공장이 되어야 한다. 많은 외부 사람, 조직을 이용하고 coordinate 해야 하기 때문에 한 회사에서 모든 것을 하고 있는 현재의 큰 회사 경영 방식과는 많이 다른 경영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 신뢰와 계약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조금도 의심스러운 경영은 절대 안하고 정말 말 그대로 투명한 경영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한국에서 실패한 것도 한국식 경영환경에 반도체란 첨단기술이 끼여들 수가 없었다. David Heck 역시 한국식 경영이 국제사회 특히 여기 실리콘밸리의 체질을 따라오려면 한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 Harvard 동창들이 여기 금융계, 법률 계에서 굵직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멀리 Washington DC 에서도 크게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첫 투자가 문제다. 우리는 둘 다 돈이 없다. 여기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공장 건설은 생각도 못한다. Intel 이나 AMD 정도의 큰 투자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경제성이 없다고 보고 있어 그런 규모의 사업은 우리 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Dave Heck 은 나로 하여금 한국의 돈 있는 사람을 연결 지어 한국에 반도체공장을 세우자는 것이다. 내가 이미 실증했다. 한국서 반도체공장 투자가를 찾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코론의 이원천회장이 첨단 전자사업을 하기로 했다. 한국의 전자공업관련 기사를 취급하고있는 내외경제신문 성의경 기자의 소개로 그당시 우리나라의 섬유산업계의 재벌로 두형제가 갈라저서 이원천회장이 장래가 유망한 업종을 찾고 있슬때였다. 곧 원진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공장을 짓기로 했다. 원진전자가 1976 년 여름에 설립되자 나는 곧 미국에서 KDK Electronics, Inc.를 서니베일에 설립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도 동시에 취득했다. 원진전자에서 책임자와 실무진이 왔다. 이들은 한국의 공장건설 생산시설제 구입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삼성에서 숙청되어 나온 이기윤, 강경석, 이종호가 원진팀에 합류되어 미국 현지 실리콘벨리의 사람들과 똑같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기술이전이란 것이 이런것이고 정말로 실감나고 내 자신 나의 업적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국반도체 계획당시의 생산장비는 이미 한세대 지난것이다 그때로부터이미 5 년이지났다. 오늘날 Computer 를 알고 또 쓰고있는 사람은 5 년전의 기계가 어떤것인지 알것이다 년 한국반도체 계획때에 비해서 값이 많이 올랐다 그때 값은 유류파동 전이였고 그후에 많은 기계들이 더 자동화되였다. 한국반도체때의 시행 착오는 모두 시정되고 특히 반도체용 소모품은 충분히 처음부터 LC 에 포함시켰다. 미국에서는 반도체 장비가 그동안에 이렇게 발전되었는데 한국의 반도체 관련분야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122

130 8.2 세계 제일의 반도체 Operation --새 희망 그리고 실패 나는 가능한 한 새로 나온 장비를 선정하여 새로 생기는 원진공장은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앞선 CMOS 공장으로 만들 것이다. 원진 측에서도 최신 최 첨단을 많이 강조했다. 5 년 전에는 혼자서 ICII 의 미국 회사, 한국반도체의 한국 회사 두 다리 걸치고 그 당시 나를 포함해서 경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정말 힘든 일을 했었는데 이젠 호강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David Heck 이 자기가 하던 일을 정리하고 KDK 로 왔다. 재정관리, 법률 관계 하나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도 이젠 걱정 되는 사항이 아니다.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고 이젠 우리가 원하면 막강한 미국 굴지의 변호사들이 친구로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첫 작품이 성공하면 Venture Capital 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Dave 의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 쫓겨날 걱정도 없다. 실리콘밸리의 디자인센터, 그리고 한국에 Wafer Fab Foundry, 다국적 반도체사업체재 의 새 개렴 이다. 원진의 생산능력이 앞으로의 성장에 Bottle neck 이 될 것이라고 미리 걱정도 해봤다 ---앞이 보이면 미리미리 주저 없이 해야 되는데----- 잘하면 Intel 이나 AMD 보다 더 커질 수가 있다. 외냐 하면 우리는 Overhead 가 이들 보다 훨신 낮고 한국의 생산 단가는 더 좋은 노동 질과 훨신낮은 인건비로 미국의 절반으로 가능하다. 수송비는 문제가 안 된다 삼성에서 쫏겨나서 못 푼 한을 이제는 풀수있게됬다. 이젠 나도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빛을 갚게 됬다. 조고만 Pilot line 을 Sunnyvale 에 만드러 옛날 공로자들을 모두 여기로 모으는 거다. 우리의 조고마한 왕국을 만들 수 있다. 8.3 LC 의 불법 개정 원진전자 의 잔꾀 원지공장이 필요한 건설재 생산시설의 List 가 정리되어 LC (물건 매매계약서-신용장 Letter of Credit)가 열렸다. Sunnyvale 에 파견 나왔던 김대무이사가 돌아가고 김경욱이사가 후임으로 왔다. 삼성에서 보낸 이충수이사와 그 행동이 흡사했다. 이충수는 주주 삼성의 권한으로 왔으니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원진전자와 KDK 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 회사이다. 이젠 Technical coordination 외에는 할 일도 없다. 원진에서 휴가가 아니면 없는것이더 낫다고 생각해서 미국으로 보낸 것 같았다. 여기 KDK 에있는 사람은 전부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반도체 전문가들이다. 회의에서도 장비선정 Process 방식 검토 무엇 하나 끼어 들 수가 없다. 미국사람이 찾아오거나 미국사람이 끼게 되면 영어를 제일 못 알아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살아있어 의미 없는 질문을 하면서 본인은 자기도 동등하게 한 목 끼어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국반도체에서 수년간 미국인 Engineer 들과 일을 했기 때문에 기술에 관련된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기술관계는 내 담당이어서 한국말로 되지만 김경욱이사와 이야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Business 에 관련된 사항은 Dave Heck 하고 이야기 해야 된다. 자기의 능력, 권위를 과시하려는 것이 너무나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의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김주인씨로 원진회장이 정치적인 이유로 뽑았다고 나는 알고 있다. 어린애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트집부리고 망나니 짓을 하는데 바로 김경욱이사가 나이만 들었지 이런 애들과 꼭 같았다. 잘했던 못했던 간에 나와 Dave Heck 은 미국과 한국에서 반도체공장을 경영했던 경력의 소유자이다. 김경욱이사는 뭐하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원진을 내세워 모든 것을 간섭하려고 했다. 그래도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이라서 시간도 때울 겸 지금 그는 별로 할 일이 없으니 Dave Heck 과 같이 영어도 배우고 또 미국식 경영도 좀 배우게 할려고 했는데 Dave 가 waste of time 이라고 거절했다. 123

131 나보고 다시 과거의 mistake 를 반복하려는 거냐고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두라는 거다. 나는 김경욱 이사는 일할 것이 없으니 미국서 소환해달라고 원진의 강부사장에게 부탁했다. 김경욱이사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ㅡ 얼마 후다 내가 한국에 출장 갔다가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Dave Heck 한태서 한국으로 전화가 왔다. LC 가 발행된 뒤에 내가 LC 개정에 합의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 거다.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별 관심 없이 미국으로 돌아와서 보니 LC 가 KDK 도 모르는 사이에 개정 되었다는 것이다. 원진이 승인하는 서류를 한가지 더 첨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서류가 없으면 물건을 보내고도 돈을 못 찾게 되었다. 그래서 Dave Heck 이 은행에 갔다가 서류미비로 퇴짜를 맞았다. 이 LC 는 취소 불능으로 특히 국제간에 물건을 사고 파는데 일방적인 계약 사항 변갱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문서이다. 사고 파는 당사자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쪽은행을 포함해서 4 자가 합의 안하고는 그 내용을 고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지금 바로 이런 원진 의 일방적 행위를 막자는 것이 LC 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원진은 국제사업을 한다고 한국에서 최고라는 서울 상과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을 고용 해서 요직에 앉었다. 이런 기초상식도 없이 이들이 행동 했다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원진에 전화를 걸었다. LC 가 개조되었다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항의 했스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급해졌다 큰돈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물건값을 제때에 지불 안 하면 신용이 떨어지고 지금 막 시작 하는 회사로 신용대출도 안되고 큰 상처를 입으면 회복이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원진에게 앞으로 공장 기자제 선정 뿐만 아니고 기술지도 도 무상으로 해주기로 되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KDK 가 죽으면 원진은 자동적으로 죽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Dave Heck 이 샌프란시스코로 알려진 금융관계 변호사 친구인 Ted Collins 를 찾았다. 이야기를 듣고는 아직도 이런 불법 행동을 미국을 상대로 하는 회사도 있느냐고 하면서 바로 길 건너 연방법정을 찾아가서 Temporary Restraining Order (TRO 가처분)를 얻어 주었다. 8.4 국제분쟁 미 연방법정 TRO 이 사실은 바로 Telex 로 원진에 전달되었다. 다음 날 아침 법정문서를 들고 Dave Heck 이 Red eye flight(밤새서 가는 비행기)편으로 뉴욕에 있는 한국상업은행 지점에 가서 돈을 찾았다. 만약 한국상업은행이 지불을 거부를 할 경우 곧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federal marshal(미 연방 경찰) 에 조치도 해 노았었다. 우리의 San Jose 에 있는 은행이 자기네는 이런 분쟁에 끼어들기 싫으니 직접 원진측 은행으로 가라고 권유했기 때문에 뉴욕까지 간 것이다. 우리측 미국은행은 LC 가 일방적으로 개정됐을 리가 없다고 우리의 주장을 믿지를 않고 원진이 요구하는 서류를 KDK 가 제출 못하는 이유가 KDK 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원진 측은 강박사는 돈이 필요해서 당장 날아와서 살려달라고 무룹 꿀고 빌 거라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엉뚱하게 미연방법정의 TRO 가 전달 된 것이다. 원진은 크게 당황했다. 문제가 한국식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회장에게 숨길 수는 없게됬다. 강기동이가 사기꾼입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사기친 겁니다.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기계인데 강박사가 요구한 개조라고 해서 그값이 두배가됬습니다. 이런 국제사기꾼을 그냥뒤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회장에게 보고했다. 반도체 최신장비란 우선 그 생산성 즉 워이퍼 처리능력에 비래 해서 비싸지고 새 방식이 나오게 되면 124

132 구식장비는 그날부터 고철 신세가 된다. 특히 자동 처리가 되지 않으면 양산에서 처리하는 품질의 균일 성을 보장 할수가없다. 완벽한 새 기계라도 큰 Wafer 를 다를 수 없으면 창고로 보내서 보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페기처분한다. 앞으로도 쓸 chance 가 없기 때문이다. 기계선택의 한 예를 든다면 지금은 3 inch wafer 를 쓰고 있지만 1-2 년 후면 5 inch Wafer 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살때 3 inch 전용 기계를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3 inch 와 5 inch 겸용을 사느냐 결정을 해야한다. 겸용은 값이 두배 정도 된다. 그러나 5 inch 로 바꾸게 될 2 년후면 그때 새로 나온 5 inch 기계에비해서 처리속도가 늦으면 미련 없이 버릴 수도 있다. 새 기계가 나와도 워낙 인기가 좋으면 돈 주고도 못살수도있다. 반도체는 이런 면에서 장치 산업이기도 한 것이다 장치를 잘못 선택하면 경쟁을 못한다. 잘못 선택이 확실해지면 더 좋은 것으로 지체 없이 바꾸고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원진만이 아니라 한국에 이런 반도체 의 경험이 있슬리가 없다. 이젠 김경욱이사가 원진전자를 사기꾼에서 구출한 영웅이 된 것이다. 생전처음 자기의 실력을 인정 받았다. 원진의 이원천 회장을 설득시켜 강기동이를 다시는 못 이러 나게 완전히 매장하기로 했다. 원진은 국제사건을 담당할 변호사를 찾아나 섰다. 미국 연방법정에서 싸울 수 있는 변호사는 고사하고 영어로 된 법적 문서를 재대로 읽고 쓸 수 있는 변호사는 국내에서는 찾기 힘들었다. 나는 딱 한 사람 이런 변호사를 안다 한국법조계에서 알려진 신씨 집안의 아들로 나의 옛 서울 필동 집의 옆 옆 집에 살고 있었다. 또 경기후배이고 미국서 공부했다. 그의 누이 신연자는 나의 친구 최필동이의 Wife 로 역기미국서 우리동네에 살고 있다. 의외로 이 신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를 만나러 급히 미국에 왔다고 했다. 비밀리에 맞나 자는 거다. 나는 우리 변호사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변호사는 이건 절대 안 된다. 미국서 교육받은 변호사라면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 거라 정 그렇다면 자기가 만나겠다고 했다. 신변호사 하고 통화가 나의 변호사하고 이루어졌다. 신변호사는 그냥 돌아깄다. 신변호사는 그후 세종이라는 큰 변호사 회사를 만드렀다 우리 변호사의 예측과는 달리 맞고소가 들어왔다. 원진측의 주장은 처음부터 LC 가 강기동이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잡아달라는 내용이다. 사실 모든 업무는 원진에서 파견된 직원이 했고 KDK 에서는 강기동 이외에는 관련자가 없었다. 정식으로 국제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증거서류는 강기동이가 원진에서나온 engineer 들이 선정한 장비를 안 사고 마지막 판에 새로 나온 최신 장비로 고쳐서 발주한 것들이 모두 여기에 증거로 들어 있었다. 최신장비는 모두 내 의견이 들어간 주문 제작으로 그 값이 많이 올랐다. 내가 특별히 개조해 달라고한 부분에 나의 sign 이 있섰다. 한편으로 나로서는 미 연방법정의 도움으로 LC 가 개정전의 원상으로 살아 났스니 하루 속히 선적해서 모든 조건을 조금도 차질 없이 이행해야만 했다. 살아있는 LC 를 시일내에 이행 하지 않으면 나도 문제가 된다. 원진측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law firm 인 Baker and McKenzie 를 고용 했다. 그들은 첨단 반도체장치가 어떤 것이고 그 가격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도체 장비수출관련 국제분쟁을 얼마 전에 원진 측 변호사가 해결한 사실을 우리 변호사가 알아냈다. 내용인즉 여기 Silicon Valley 의 한 반도체 장비 Broker 가 유럽으로 반도체 제조 장비를 수출 했다. 수입 자는 반도체 장비를 값이 좋아서 샀는데 알고 보니 한 세대 지난 장비를 샀다는 것이다. 미국 Broker 가 첨단 최신 장비라고 속였다는 내용이다. 일년 전만 됐어도 최신장비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수입 125

133 측이 반도체장비의 발전속도를 몰라서 온 문제로 그 값으로는 그것밖에 살수 없고 더욱이 반도체사업에서 기계선정과 LC 개설의 시차가 커지면 기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새 기계가 나오는 경우는 여기서는 상식화 되어있다. 새로 개발된 장비는 2 배 이상의 값이 나왔다. Baker and McKenzie 는 자기 유럽고객을 설득 시켜서 고소를 취하했다. 사는 측이 반도체장비를 아는 사람들이였다. 우리와 정반대의 사건이었다. 이런 것이 반도체 사업이다. 8.5 반도체사업의 본질을 몰라서 온 후진국 형 실패 KDK 는 Silicon Valley 에서도 막 개발 되서나오는 기계들을 남보다 먼저 Order 한것이다. 부당 이득을 취득한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원진측 변호사의 전략은 달라졌다. LC 이행과정에서 KDK 가 돈이 필요해서 부정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그것을 잡아내고 또 시간만 끌면 자금난으로 굴복할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하여 우리 변호사를 별것도안인 일을 만들어서 많은 비용을 내게 하고 시간 지연작전을 폈다. 그래서 거의 2 년을 끌었다. 부러 나는 변호사 비용은 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원진 측에서 갖고 나온 증거는 아무런 merit 가 없고, LC 이행과정에서 원진이 기대했던 KDK 에 불리한 증거는 아무 것도 안 나왔다. 고소는 취하되고 잘잘못은 안 따지고 서로의 갈 길을 가기로 합의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다. 원진 측은 시간을 끌어서 재정적으로 KDK 압박하는 데는 성공했다. 분쟁이 길어질 것 같아 중학교 때 가까웠던 친구 정인용 이한테 도움을 청했다. 경제기획원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고 원진의 이원천 회장도 잘 안다고 해서였다. 결과는 내 정보를 원진 쪽에 넘겨 준는걸로 되어 도리어 문제가 악화됐다. 학교 때 친했다는 것 만으로 내편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잘못이 였다. KDK 는 늘어난 변호사 비용을 5 년에 갈라서 내기로 하고 끝이 났다. LC 가 뭔지도 모르면서 KDK 길들이기(?) 로 시작된 LC 불법 변조사건은 세계굴지의 Harvard 출신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국제소송으로 발전됐고 원진 역시 외국 땅에서 비싼 미국 변호사를 고용한 법적 싸움은 막대한 비용과 KDK 와의 이별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됬다. 강기동이를 죽이려다 거꾸로 자기회사가 끝이 났다. 한국 국회에서도 진상규명 논의가 있섰다. 반도체사업의 본질을 모르고 고치면 안 되는 서류 좀 고치는 것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던 후진국 형 어리석은 사건이였다. 수입한 원진전자 재산은 삼성이 인수했다. 미국 현지에서도 최신 LSI 생산장비인것을 알아볼 사람도 없거니와 이것으로 싸구려 Tr 이나 만들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매어질 것 같았다. 벤츠 이름도 못 들어본 시골서 택시용으로 최신 벤츠차를 쓰는 격이다. 한국에 이렇게도 반도체사업 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한국에서 반도체시대를 열었다고 부평에 한국형 반도체공장 New Korea 전자 가 설립되고 대통령 이하 전 경제각료가 참석해서 축하한지도 이젠 10 년이나 됐는데-. 박정희 정부는 계속 High Tech 의 북을 쳤고 이젠 충분히 반도체 전문가가 나올 만도 할 때이다. 그 후 한국화약구릅의 친구 오태환 기획실장의 초청으로 서울에 체류하면서 진지하게 반도체사업 검토를 했고, 또 한때 재계의 큰손으로 알려진 장영자회장과 롯데호텔옆 사무실에서 반도체사업과 특정 방위산업을 검토한일이 있었다. 모두 사업자체에는 긍정적이였스나 내가 한국에 와서 이 사업을 추진할 생각이 없다고 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에 아남산업의 김주진씨도 Sunnyvale 에서 자주 만나서 반도체 공장 검토도 했섰다. 126

134 8.6 반도체 Hi Tek 사기꾼 나 같이 되지 말라 앞에서 한말이 반복 되지만 1967 년 내가 모토롤라에 있을 때 한국에 조립공장을 내는데 조사 팀으로 한국에 간 일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사전교육을 모토롤라 사장실에서 받았는데.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과 국회에서 김두한의원이 항의 차 똥물을 뿌린 사건을 거기서 처음 들었었다. 이 사건은 대 재벌이 국법을 어기고 나라를 속인것이다. 개인간의 속임수 하고는 차원이 다르나. 나는 그후에 한때 이 조직의 사장 이라는 자리에 있섰다. 이제는 누구를 나쁘게 말할 자격도 나에게는 없게 된것이다. 나쁜일에 가담 했건 안했건 사장쯤되면 동업자인것이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나는 남을 속이는 일은 안 했지만 남이 사기꾼 이라고 해도 그냥 무시하고 아무런 해명이나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도 같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사람 의식 속에는 속인다 속는다 는 것이 깊이 박혀있는 것 같다. 조심해! 너 그러다 속는다. 이런 말은 어디서나 많이 들었다. 관계없는 사람이 날 속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이 모두 나를 속이려는 사람들인가? 또 그 반대로 그들은 내가 그들을 속이려고 한다고도 보고 있을 것인가? 사실 나는 1967 년부터 한국에서 강박사가 사기 친다는 소리를 간접으로 많이 들었다. 이런 말이 어디서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반도체관련 학계나 전자 공업분야의 높은 분들 눈에 벗어나고 있섰다. 물론 적극적으로 동창이나 친지들을 통해서 만나고 친분을 쌓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해명하고 해서 이러한 오해를 극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최우선과제 highest priority 가 내 회사일인 시제품 생산이었다. 이런 것은 이차 삼차의 문제이고 그 당시는 이런데 관심을 둘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또 하나는 술을 좋아하고 친구나 사업관련자들과 자주 어울려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기회가 있어도 피할 때가 많았다. 내가 Motorola 반도체 공장에서 Silicon Bipolar Transistor 제조 기술을 정리해서 완성 한 것이 1960 년대 초반이였다. 회사내의 제조공정을 내가 새로 만들었다. 한국서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개 연구소 연구원이 그 큰 공장의 공정을 만들어? 그 후 반도체 생산기술이 미국에서 Motorola 가 제일 앞섰다고 업계에 알려졌던 것이다. 기술회의에서도 일년씩 묵혔다가 발표한 논문도 전세게 특히 일본과 독일 에서 몰려온 기술자들의 질문공세를 받고 우리 Motorola 의 앞선 기술을 인정 받았섰다. 세계적, 최첨단 등 의 형용사는 한국에 와서 배웠지만 한국식 표현으로 한다면 세계 최 첨단 기술 을 내가 개발 했고 또 내가 갖고 있었다. 일본에 가면 일본 반도체 업계에서 VIP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이 없는 한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 당시 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반도체사업을 같이할 생각으로 최신기술로 혼자서 시작할 수 있다고 열심히 설득했었다. 이 때의 반응이 나는 반도체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사업이라고 알고 있다 강기동이가 사기 친다는 것이다. 내가 미 국방관련 비밀 사업에 관련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사업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는 것이 매우 위험했고 그럴 필요도 없섰다 년 당시는 NPN, PNP transistor 시대라서 혼자서 다 할수있섰다. 한국반도체회사 때도 그랬다. 김규한/ 이상규씨에게 혼자서 다 한다고 사기 쳐서 투자하도록 했다. 그래서 회사를 말아 먹었다. 삼성 때는 강박사는 반도체는 다 안다고 사기첬다. C-MOS 전문가 였는지는 모르지만 Tr 이나 TV IC 는 모르는 사람이다. 또 원진전자 하고 는 강박사가 LC 조작으로 값을 부풀려 사기치는 것을 보고만 있슬수 없어서 원진전자 이사로 있던 김경욱이가 용감하게 총대를 멨다고 했다. 강박사는 고단수의 반도체 Hi 127

135 tec 사기꾼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까지 나를 나쁘게 말하는 것을 해명 하거나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모른척하고 무시해 버리고 사기꾼이 됐다. 한국에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조용이 떠나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서는 끝난 사업가 인 것이다. 그들이 필요해서 날 찾아야지 내가 사업하려고 돈이 필요해서 먼저 찾아가서 생긴 오해다. 후진국은 첨단 사업은 할 수 없는 구조이다. 적어도 그 당시 나와 한국에서의 반도체는 그런 것 같았다. 삼성에서 쫓겨나고 나서 때때로 과학원을 찾았다. 그래도 날 알아주는 사람들이 거기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김충기 박사 하고 조장희 박사다. 김충기박사는 고교. 대학 후배일 뿐만 아니라 미국서 김박사가 Fairchild 에 다닐 때 우리와 Sunnyvale 한 동내 가까운 곳에 살고 있섰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 Wafer Fabrication 을 Fairchild 사에서 제대로 경험한 유일한 반도체 Engineer/교수 이다. 조장희 박사는 대학 시절의 산( 山 ) 친구 후배로 의료 기기의 왕좌를 차지하는 Body Scanner 전문가가 되 있섰다. 내가 과학원에 들릴 때마다. 김충기박사는 학생들을 교실에 모아서 강의(?) 를 부탁 했다. 한번은 강의가 끝나고 질문하는데 후배들에게 도움될 말 좀 해달라는 부탁이 있섰다. 나는 할말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뭐 있지 않겠냐는거다. 그래서 너의 들은 나같이 되지 말라 고했다. 그랬더니 그게 무슨 뜻이냐는 거다. 이런 예기는 잘된 사람이 자기같이 잘되는데 필요한 지혜를 후배 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인데 내 이야기는 실페로가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7 새 일거리를 찾아서 인도를 가다 때는 1981 년말경이라 생각된다 Sunnyvale 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온도 차가 크지 않아 계절감각이 둔해진다. 현대에서 신규사업 현지조사 차 왔다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부탁이었으나 이젠 반도체에서 손을 떼었다고 거절했다. 반도체 신기술 개발 현장에서 멀어진 지도 10 년이 가까워 나는 이제 한 물 간지도 옛날이다. 반도체 그리고 특히 한국을 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을 때 인도친구 Rama Reddy 가 인도에 한번 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Rama 는 인도 갑부의 아들로 Stewart Warner 사에서 전자회로설계 엔지니어로 인도사람답지 않게 말이 적고 머리 좋은 착실한 엔지니어였다. 같은 외국인이라서 회사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반도체를 고만두고 내 앞길을 새로 잡는 기회도 될 것 같아 날자를 잡아 인도로 갔다. 아버지는 Hyderabad 의 유지로 한국으로 친다면 대구시장 정도의 위치 같았다. Hyderabad 는 인도 중앙지대에 있어 국책으로 여기를 공업단지로 육성하게 되어 정부 고위간부들이 다 와 있었다. 나의 여행도 여기에 맞추어져서 미국서 온 VIP 로 대우를 받고 국방장관, 상공장관도 만났다. 국방장관은 국방관련 전자단지를 생각하고 나하고 신무기 개발 등을 이야기했으나 나는 이런 것 하고는 사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반도체 제조 엔지니어인 것이다. 그 당시 인도는 미국을 등지고 소련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인도 국방장관의 걱정은 미국 무기를 살수 없는 상황이라서 자주국방을 어떻게 하는가 였고 소련제무기를 사와도 인도에 맞도록 개조해야 되는데 영어를 쓰는 나라가 소련 system 도입도 문제라고 했다. 인도도 이젠 국방 공백상태를 방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Rama 이야기로는 가난한 나라지만 막대한 돈이 무기개발과 무기구입에 쓰여질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그 당시 가능성조차 상상 못했지만 이들은 원자탄 개발을 추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 electronics 장비가 필요했다. 내가 인도까지 와서 미국의 정보라도 빼낸다고 의심 받기가 딱 좋은 128

136 환경의 Setting 이기도 했다. 여기는 무엇을 하던 간에 Infrastructure 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아주 넓은 원시적인 벌판 밖에 없었다.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내 전문은 반도체 제조인것이다. 인도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인도에 갈 때에는 트랜지스터 공장이라도 짓자고 할 것 같은 기대가 없지도 않았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런 기대는 10 년을 기다려도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한국을 황무지로 봤는데 여기는 그때의 한국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황무지의 황무지였다 내가 사기꾼이였다면 Rama 하고 짜고 인도의 국방 Project 로 크게 한 밑천 했슬 것이다. 두 나라에 회사 채리고 비밀무기개발 을 한다. 나에게는 익숙한 일들이다. 비밀무기 개발은 모든것이 비밀로 추진됨으로 실패해도 그것으로 끝난다. 무기제조 자재 자금을 제 3 국에 빼돌린다. 얼마나 좋은 사기건수 인가? (a) 우리도 이런 나라였다 인도 의 첫날밤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인도에서의 체혐한것 몇 가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인도를 떠나면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일본식민지였던 우리의 과거를 비교해보았다 내가 입국한 New Deli 공항은 매우 한적한 느낌을 주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도 몇 안된데다 나는 중형 가방 하나만 check 했기 때문에 통관은 그냥 가방을 한번 열어만 보이고 끝났다. 내짐이 보세구역에서 밖으로 나가는 table 에 노이기가 무섭게 서너 명의 남자가 달려들어 내 가방을 서로 빼슬려고 하더니 그 중 한 놈이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컹 났다. 쫓아서 나도 공항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멀찌감치 서있는 Taxi 로가서 내 가방을 차에 실 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Taxi 기사의 고객 확보 방식이었다. 도둑인줄 알고 나는 진땀을 뺐다. 그냥 달아났어도 나는 별수없이 바라만 보았슬것이다. Hyderabad 에서는 옛날 영국 고관이 살던 개인 집을 개조한 곳에 나를 위해서 새로 정돈한 좋은 방을 마련해주었다 여기는 날씨가 무척 더워서 내가 온다고 해서 하루 전에 자작 Air Con 을 새로 설치했다. 침대 위 청정에 큼직한 바랑개비가 돌고 있고 내 침대 바로 창 밖에 Compressor 가 설치되어 있어서 고단한데도 머리가 울리고 시끄러워 잠이 안 온다. 냉방이 너무 잘 듣는 것 같아서 이에 끄고 자기로 하고 Switch 를 찾았스나 보이지가 않는다. 밤이 늦어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망설이다 창 밖을 보니 거기에 compressor 용으로보이는 큼직한 switch 가 있었다. 창을 열고 끌려고 했스나 손이 자라지가 않는다. 다행이 창이 커서 창을 넘어 밖으로 나가서 compressor 를 껐다 장치는 전기 motor 하고 compressor 를 따로따로 갔다가 조립해서 만들어서 그 결합 부분이 잘 안되어 진동이 심한 것 같았다. 이제는 됐다고 잠을 청했는데 창에서 무슨 소리가 나고 있다. 커튼을 열고 보니 매미만한 큰 날벌레가 밖으로 나가려고 야단이다. 내가 창을 열 때 들어왔다 밖에 전기등이 있어서 밝은데다 보니까 많은 날벌레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창을 열고 쫓아 낼 수도 없다. 잘못하면 더 벌레가 들어오게 된다. 옛날에는 매미 잡으려 간 일도 있었는데 이젠 맨손으로 잡기에는 이 벌래는 너무 크다. 파리채 같은 것이 없나 찾아 봤스나 그런 것은 안 보인다 모두 포기하고 침대 cover 를 깔고 방바닥 구석에서 자기로 했다. 이젠 또 더워서 못 자겠다. 자는 둥 마는 둥 누었다가 아침식사가 들어와서 일어났다. 이것이 미국 서온 한 VIP 의 인도에서의 첫날밤이었다. 다음날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129

137 (b) 25 년 전의 인도 --교통순경 과 단독주택 시내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길가에 가득 차 있섰다. 꼭 무슨 큰 행사가 끝난 뒤 같았스나 이들은 그냥 거기서 사는 사람 들이었다. 밤에는 길가에서 자는 Homeless 들이다. 자동차도 제법 있섰스나 반쯤은 뒤를 보고타는 삼륜차로 만든 Taxi 들과 자전거들이다 네거리는 교통순경이 서있어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건널목도 확실하지 않지만 손으로 정지신호를 하면 정지하는데 거짓말 안하고 일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가던 차는 서지 않고 계속 가고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건늘려고 도로로 나오면 가는 차와 건늘려는 사람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전쟁의 계속 시간이 일분이다. 사람에 치여서 차가 멈추고 사람 떼가 길을 건는다. 요번에는 그반대로 사람을 멈추고 차를 보내는 신호를 한다 사람 떼가 그칠 줄 모른다 차들이 사람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또 일분 정도 의 전쟁을 치르고야 차도에서 사람이 끊긴다 그것도 서서히. 신장로가 생겨서 시외로 나왔다 여기저기 소가 있서서 소가 보이면 속도를 줄였다. TV 에서 소에 대한 시 의회 토론이 있섰다. 소가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자는 편과 막으면 안 된다는 편의 토론이었다. 신장로에는 차가 별로 없어선지 중앙 분리 선은 없고 차가오면 그때 가서 옆으로 피해준다 paint 가 비싸서 못한 것 같다. 한참 시외로 나오니까 하수도 공사용으로 크다란 직경이 2 meter 길이가 4 meter 쯤 되어 보이는 콘크리트 원통 Tube 를 많이 갔다 놓았다. 가까이 가보니 한쪽은 막고 다른 쪽은 문을 만들어 사람이 이 안에서 살고 있섰다. 여기 Hyderabad 평야 횡단 하수도 공사용으로 일년 전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해서 여기 인구 가늘고 대책 없이 쫓아 낼 수도 없고 하여튼 지방정부의 큰 골치거리라고 했다. 지금은 이런 신규 단독 주택(?) 을 금지해서 그나마도 구하기가 힘들고 이것도 집이라고 값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언제 하수도공사가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넓은 평야에 계획에 없던 수천 채의 단독주택이 널려져 있섰다. 우리도 하꼬방(판자집) 시대가 있섰다. 서민들의 생활 근거지라서 철거도 할수없섰다. 9.0 한국 Memory 왕국 현대가 64K DRAM 으로 시작 9.1 나의 7 번째 반도체 사업계획 정주영 현대 회장의 결심 인도에서 돌아오니 나는 현대사람을 만나지도 안았는데 강박사가 현대반도체를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몇몇 사람이 나에게 확인도 했다. 나는 그런 것 모른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 중에는 나에게 옛날부터 관심이 많은 UC Berkley 대학의 이임성교수도 있었다 이교수는 삼성하고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나의 일거일동에 관심이 많았다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한국 Memory 왕국 건국공신 그러던 중에 현대에서 한국으로 한번 나와 주십시오 하는 부탁이 왔다. 인도가 기대 밖이어서 거절은 안하고 미국에서라면 자문에 응하겠다고 했다. 곧 미국 현지에서의 자문에 동의한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 과학기술처의 허가를 얻어 현대중공업주식회사 이현태사장과 나의 회사인 미국 KDK Electronics, Inc. 간에 기술용역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얼마 전에 그런 것 모른다고 현대하고의 관계를 부인했는데 이젠 정말 나는 거짓말쟁이가 됐다. 현대그룹의 신규사업부의 이종운부장이 기술계약에 따라 서니베일로 왔다. 회장님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 했스니 사업계획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다. 나는 이것으로 반도체사업 계획만도 무려 7 번을 하게 되었다. 130

138 첫 번째는 1968 년 LA 노신영 총영사의 주선으로 이광택공사 와 만들었고 두 번째 는 1970 년 친구인 조해형이와 쌍용구릅 반도체 프로젝트, 세 번째는 1972 년 Unitrode (Taiwan 의 宇 環 電 子 )의 Andy Chew 하고, 그리고 같은 해 네 번째로 Kemco 의 김규한사장과 한국반도체(지금의 삼성반도체), 다섯 번째는 1977 년 코오롱그룹의 원진전자, 여섯 번째는 결실은 안됐지만 1979 년에 내친구인 한국화약 기획실의 오태횐실장과 한국화약구릅 반도체사업(참고), 그리고 7 번째가 지금 하는 현대 반도체사업이 된다. 실제로 정부인가 받고 땅 사서 공장 건설한 것은 모두 4 곳으로 한국반도체가 경기도 부천에, 원진전자가 경기도 용인에 그리고 현대번도체 (지금의 Hynix)는 경기도 이천과 미국 Santa Clara, California 의 두 곳이다. 내가 처음 경기도 부천에 한국반도체공장 계획을 할 1972 년 당시는 생산기술 그 자체를 내가 개발 했고 반도체 세계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 문제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투자가에게 알리는 것과 또 하나는 내가 미국 비밀무기 개발에 직접 관련했는데 이때 비밀 누설 안 한다는 서약을 했섰다. 이것도 내가 감당 해야 할 문제였다. 지금 이 현대반도체 사업은 정말 그 때와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조건이지만 제대로 되려면 내가 미국 의 주류 반도체 회사에서 개발 책임자쯤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새 기술 개발 현장에서 손을 뗀 지도 10 년이 됐다. 현대는 무턱대고 반도체사업을 하겠다고 날 찾아왔다. 얼마 전에 면회를 거절 했슬때 내가 무례하게 했다고 매우 섭섭하다고 했다. 날 찾아준 것은 고맙지만 내가 반도체를 잘 알아서라기 보다 다른 한국사람이 없어서 찾아 왔다. 이부장 말로도 미국 전국을 다 뒤졌는데 이런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나 역시 한국화약구룹의 신규 반도체 사업을 시작 하려고 맡길 사람을 찾았섰다. 나는 한국에 와서 살지 않겠다고 해서 반도체사업을 포기 했다. 미국의 반도체 사업은 그 대부분이 Silicon Valley 에 모여있어 여기서 못 찾으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자 첨단기술 도입을 국책의 우선과제로 하고 있는데 그 많은 유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나도 삼성에서 밀려났지만 공부한 사람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선호하고 풍랑이 심한 생산 현장은 기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내 경험으로도 미국서 자라나지 않은 한 언어 장벽도 특히 생산 현장에서는 무시 못할 factor 인 것이다 년 한국반도체를 시작할 때와는 달라서 10 년이지난 지금은 회로나 설비 모두가 더 고도화 되어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또 제품이 제대로 나와도 새 회사는 Reliability 에 관련된 Customer Acceptance 라는 장벽이 있어서 회사가 흑자운영이 될 때까지 많은 시일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걱정이되서 기회 있슬때마다 반도체 사업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는데 내가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먹혀 들지가 않았다. 현대 정회장은 한번 한다고 하면 그냥 밀고 나간다고 했다.. 이부장의 입장은 나는 심부름 온 사람이니까 군소리 말고 사업계획이나 만들어 달라는 거다. 빨리 돌아가서 정부에서 사업계획 승인 받고 땅 사서 공장 지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처음 "한국반도체"를 시작할 때와는 말 그대로 천지 차이다. 큰 돈이 들고 국내 사장이 있는 것도 아닌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반도체사업을 자체기술도 없이 이렇게도 쉽게 시작할 수가 있는지 믿어 지지도 않았다. 현대는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스러이 느꼈다. 131

139 9.2 한국으로서는 64K DRAM 이 최선의 선택 반도체 IC 에서 동일제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것이 Memory 다. 일본이 이미 미국을 앞질러 양산체제를 가추고 있섰다. 처음에는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앞으로 전개될 Memory 수요의 급격한 증가가 예상되어 Memory 설계 제조 기술을 확보 해 놓고 시장이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섰다. 그렇지만 일본제품이 값싸게 밀려와서 memory 가격이 폭락하면 도리어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그 당시 미국 반도체업계의 공통된 견해 라고 나하고 같이 일하던 David Heck 한테서 들은 일이 있섰다. 즉 미국 반도체 회사들에게는 큰 매력이 없는 제품인 것이다. 나는 그때 막연히 이런 것을 한국에서 만들면 승산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적이 있섰다. David 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Fairchild 출신의 Silicon Valley 에서 알아주는 반도체 Elite 였다. 일본 반도체기술은 이때까지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나는 보고 있섰다. 우선 나는 Memory 를 검토해보았다. 1. 양산효과가 가장 큰 제품 2. 설계의 비중이 낮은 제품 3. 시장이 큰 제품 4. 설계를 밖에서 구할 수 있는 제품 5. 계속 성장하는 제품 6. 미국 반도체 업게 에 겁을 안주는 제품 7. 한국의 장점을 가장많이 반영하는 제품 8. 삼성이 안 하는 제품 -- 이런 조건으로 제품을 좁혀가다 보니 결론은 DRAM (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이다. 처음에는 집적 도를 64K 로 시작해서 64K x 4 로 올라간다. 또 내 전문이 C-MOS 기술이다. 삼성이 무시해버린 기술이어서 나에게는 더 이 기술에 미련이 있섰다. 회로가 커지면 지금은 N-MOS 기술이 DRAM 제조에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앞으로 C-MOS 기술을 써야될때가 온다. 내가 Memory 를 택한 이유에 이러한 나의 미련도 작용하고 있섰다. 제품은 반도체 메모리다. 년 말까지 준비를 모두 끝내고 날씨가 풀리면 곧 바로 공장 건설을 시작하기로 했다. 미국 현지 공장도 동시에 착수하는 것으로 계획이 확정되었다. 9.3 내가 두고나 온 삼성반도체 공장 현대는 삼성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지금 상태로는 아무런 걱정도 할 것이 없다고 안심시켰다. 삼성은 기회를 잡을 줄을 모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회장 눈치만보는 경영이다. 10 년 전에는 C-MOS 반도체 생산기술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첨단기술이었는데 시계칩이 크게 성공하자 강박사를 반 삼성의 죄명을 쒸워 제거 하고 나서 Tr 이나 TV 용 IC 공장으로 전락하여 수출제품에서 내수제품으로 바뀌었다. 기술면에서도 CMOS LSI 에서 Bipolar Transistor 로 132

140 뒷걸음질 쳤고 그 때 고급 기술자들이 나하고 같이 숙청도 되고 나가 버렸다. 더욱이 LSI 용으로 설계한 최신장비는 아깝게도 가격 경쟁력도 없는 Tr 이나 만드는 후진 반도체공장으로 되어버렸다. 기술면에서도 이젠 이 시설마저도 10 년이된 골동품인 것이다. 반도체에서는 2-3 년만 지나도 생산시설이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처음에는 13 년이지난 TR 을 만들고도 한국서는 최신기술이라고 생전 Silicon Wafer 는 구경도 못한 사람에게 반도체개발 최고 기술자로 대통령상 표창을 했고 그 후 무엇이던 만들기만 하면 한국최초, 최신, 최첨단, 세게 수준, 의 형용사로 한국의 전자업계를 삼성이 독점 하고 있섰다.. 그룹차원의 전략이라고 많은 Tr 과 새 IC 제품들을 개발했지만 모두가 한물간 흑백 Tv 용 수입 대체품으로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것 들이 였다. 내다 팔곳도 없었지만 patent 에 걸리지 않으면 인건비도 못 건지는 것 이 되어 회사의 적자는 늘어만 났다. 내가 떠날 때 호황을 누려 정부까지 나서서 Swiss 수준까지 육성한다고 떠들던 손목시계사업은 강박사 작품으로 강박사계를 숙청하고 나서 여기에 관심을보이면 불이익이 올 수도 있어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Hi Tek 제품의 개렴도 없었고 그냥 내버려 젔다. 결국 회사는 재정악화로 대통령상까지 준 책임자를 문책하고 경영불실이된 회사를 삼성전자에 흡수시켰다. 기술부분을 포함한 많은 간부직이 생전 반도체공장은 구경도못한 회사의 충성파로 채워졌던것이다. 내가 떠나고 몇 년 지났슬 때다. 옛 한국반도체 직원을 만났다. 요새 회사는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말 마십시오 오늘도 일이 없어서 노는 사람은 모두 밖에 나가서 잔디밭 잡초 뜯으라고 명령이 내려 저서 잡초 뜯고 왔다고 했다. 이런 소리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미국에서는 주가가 오르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분야가 바로 이 반도체인데 ---. 도리켜 보건데 현대 정주영회장이 아니였스면 삼성은 반도체사업에서도 비료공장이나 시멘트공장 Mentality 에서 벗어나지 못 했섰을것이다. 즉 한번 차려놓고 그대로 몇십년을 우려먹을수 있다고 생각 했슬지도 모른다. 반도체가 이런 식이면 그건 망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삼성은 몇 년 전에 싸구려 가전제품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시설도 새것으로 갈고 메모리를 시작했어야 했다. 자사 내에 C-MOS LSI 제조능력을 갖고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있섰다. 회장에게 약속한 수입반도체의 대체 외에도 강진구사장은 강박사를 제거해서 강박사가 못 만든 TR 과 TV 용 IC 를 만들어서 더 잘됐다는 평가를 받을려고 했던 것이다. 그당시 Digital 부문에 감각이 있는 사람은 삼성에는 없었다. 사실 이들을 탓 할수도 없다. 알아야 면장이지 전자공업 황무지인 우리나라에서 어디서 이런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겠는가? 일본의 NEC 가 그때 10 년 동안 Memory 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고 있는것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그게 뭔지도 모르고 멍청이 지냈다. 일본이 N-MOS 로 Memory 만들고 있슬때 삼성은 이미 차세대 기술인 silicon gate C-MOS 기술을 갖고있섰다. Terry Martin / Anh Nguyen 의 지도하에 Process Tuneup 으로 Intel K SRAM 도 만드렀다. 나를 숙청한 세력이 들어와서 제품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강박사하고 관련된 project 는 모두 뒷전으로 돌려 버려젔다. 앞으로 현대가 5 inch wafer 의 최신 시설로 나오게 되면 삼성이 메모리에 참가하더라도 오래된 시설로 생산단가의 경쟁력 면에서는 비교도 안 된다. 반도체사업은 기술이나 다른 여건이 같으면 그 승부는 Wafer 크기로 판정이 난다. 133

141 삼성이 반도체를 포기하지 않는한 현대가 메모리를 만들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이들도 메모리를 한다고 나올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제품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이런 큰 프로젝트를 삼성이 모르게 할 수가 없으니 이번에 현대를 보고 삼성이 눈을 뜰 것 같은 예감과 기대도 나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날 쫓아낸 곳이지만 그래도 내가 설계하고 감독하고 지은 건물, 내가 일하던 사무실, 비가 새서 야단 떨던 Diffusion Room, 나의 한평생을 거기에 두고 나왔다. 그냥 뺏기고 나왔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정확한 표현이다. 좀 잘됬스면 좋겠다. 나는 이젠 아무 관련도 없지만 껍데기만이라도 오래 오래 남아 있어주었스면- 아직도 나는 삼성에 미련이있고 잘되기를 바라고 있섰다. 반도체공장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강조되고 전자교환기 사업에도 삼성은 반도체공장을 내세워 다른 업체를 따돌릴 수가 있섰다. 그러나 집안 충성파 만으로는 반도체특성상 살아나기는 힘든 상태였다. 그렇다고 당장 삼성이 Memory 를 한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안았다. 그럴수는없다 현대에 맡설려면 적어도 현대와 같이 새 5 inch 생산 Line 을 설치해야 된다. 그럴 라면 새로 땅 사고 공장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큰 투자를 현대가 한다고 알지도 못하는 Memory 에 회장한테 가서 돈 달라고 할 정신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를 보고 있다 돌다리를 여러번 두들겨보고 시작 하게 되면 1, 2 년 후가 된다. 그렇다고 이회장이 반도체를 아는 전문가도 아니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그 당시 Hi Tec 을 Low Tec 으로 전환시켜 불실로 만든 장본인 인 것이다. 그리고 적자가 늘었다고 책임자를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밑에서 반도체에 엄청난 돈을 드려 국내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memory 만들자고 회장을 설득 시켜? 말도 안 된다. 밑의 사람들은 그 반대 일거다 회장이 한다고 해도 겁이 나서 말릴 것이다. 9.3 강박사 현대전자 사장내정--계획 데로 추진 나는 자문만 하고 그냥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정주영회장이 미국 서니베일로 나를 찾아 왔다. 나의 자문 보고서를 보았다고 했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미 사장으로 내정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현대의 최고 높은 분이 여기 끼지 오셨는데 No 라는 말은 차마 할 수도 없었지만 나에게 반도체 사업의 전권을 준다고 했다. 삼성이 나의 반도체회사를 인수하고 나서 나는 몇 년을 거기서 사장이라고 있섰는데 이병철 회장하고는 의미있는 대화라고는 한적이 한번도 없섰다. 특히 반도체에 남다른관심을 갖고 있서서 사재를 털어 나의 한국반도체회사를 인수(내국인지분 50%) 했다는 이건희 회장은 알지도 못하고 맞난일도 없다. 사실 나는 쫓겨날 때까지 이병철 회장이 내 회사를 산 걸로 알고 있섰다. 정주영 회장의 반도체사업 동기는 그 전해(1981) 전경련회장으로 있슬때다. 정회장은 일본서 초대한 matsushita 회장과 아남의 김향수사장을 동반하여 세미나 후에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자리에서 matsushita 화장으로부터 강력한 반도체사업 진출의 권유를 받고 여기에 全 대통령도 합세하자 거기서 마음을 굳쳤다고 그 당시 전자공업 진흥업무를 담당한 송태욱씨의 말이다. 또 이부장 말로는 덩치큰것만 잘하지 덩치가 작은 정밀공업은 못할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 이러한 정밀산업도 삼성을 이길 수 있다는 재벌 총수의 EGO 에 반도체사업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낙하산이란 단어를 여기에도 쓸 수 있다면 이것이 정주영 자신이 만든 낙하산 사업이였다. 뚱딴지같이 난데없는 전자의 핵심분야인 일본도 허덕이는 반도체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기 때문에 결심한 것이다 정회장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러한 사업동기는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삼성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보다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다. 정회장과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전자공업도 선발업체인 삼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134

142 정회장은 확신하고 있섰다. 자기는 삼성처럼 국내시장에서 쉽게 돈 벌 생각은 없고 전세계가 자기시장 이라고 했다. 나하고 같은 생각이다. 정회장 하고는 상당한 시간을 반도체사업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많은 사항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삼성이 이랬다면--. 아쉬움이 앞섰지만 지난 일은 잊고 다시 앞날을 생각해볼 기회인 것 같았다. 특히 나는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는 그런 것 상관 안 한다는 것이었다. 삼성하고는 보는 차원이 다른 것을 나는 느낄 수가 있섰다. 과연 정주영이구나 하고 나의 마음은 변하고 있섰다. 곧 이어 이현태 현대건설사장으로부터 비행기 1 등석으로 한국으로 초청이 왔다. 서울서 수행원이 나와서 울산으로 내러 갔다. 현대자동차 공장을 구경하고 다른 시설도 보여 주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정회장의 전시장이다. 정말 잘난 사람이다 만에서 하나뿐인 사람이다. 12 년 만에 쌍용의 반도체사업을 같이 시작했던 손명원씨를 여기서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쌍용반도체사업 준비로 Sunnyvale 에 와서 나하고 반년쯤 같이 지냈다. 쌍용반도체사업은 박정희 정권 때 쌍용회장 김성곤씨가 관련된 정치파동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후에 손명원씨는 쌍용자동차 사장도 했다. 그때 명원이는 현대건설의 부사장으로 있다고 하면서 곧 집안 사람이 된다고 나를 축하해 주었다. 저녁에 고급 요정에서 정주영회장이 저녁과 술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동석했다. 내가 손명원부사장을 초대했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했다. 현대 반도체사업에 데려와서 한국공장 책임자가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주빈인데 술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주는 술은 다 받아 마셨다. 그 후의 절차는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사장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 이부장이 나에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정회장한테 여러 곳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김경욱이가 강박사가 울산까지 온 것을 알고 이현태 사장을 만나고 자기 아버지인 정치가 김주인, 코롱 이원천회장, 이병철회장을 동원해서 원진전자의 예를 들면서 강박사의 사장직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고 했다. 강박사한테 이런 큰 사업을 맡기면 걸과는 뻔하다는 것이다. 원진전자에 있던 김경욱이는 그 때 현대에와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삼성이 현대에 심어노은 인물이다. 모두가 밀어 주어도 어려운 사업인데 집안에 적이 있스니 역시 여기는 내가 일할 곳은 아니다. 85%까지 갔던 내 마음이 0 % 로 완전히 식었다. 나는 미국에 돌아오자 마자 마음 변하기 전에 사장직을 안 한다고 통보했다. 서울서는 강박사의 부임이 늦어지더라도 시간낭비 말고 강박사 Plan 대로 반도체사업을 추진하라고 명령이 내려저 있섰다. 내가 한국으로 안 온다는 것이 확인되자 대안이 없던 정주영회장은 자기가 직접 전자 사장으로 취임했다. 여기가 한국반도체사의 일대 전환 점이다. 다음에서 다시 설명 하겠다. 내가 추천한 배명승, 남종우, 천동우, 이용각등 은 모두 현대전자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이용각이를 빼고는 이들은 반도체 주류 회사에서 일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국 엔지니어로는 반도체사업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KDK Electronics, Inc. 의 전화번호는 모두 바뀌어졌고 그 이상 현대하고의 연락은 받지 않았다. 이것으로 나의 반도체 생애는 영원이 그 막을 내렸다. 앞으로는 반도체를 떠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거다. Sunnyvale 사무실도 정리하고 집으로 옮겨왔다. 135

143 9.4 한국 Memory 왕국 건국의 진실 - 나의 사장직 사퇴가 시작점 한편 삼성 이병철회장은 현대의 전자공업 참여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있섰지만 처음부터 어려운 반도체에 진출 한다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섰다. 그러다가 현대는 Tv 와 같은 민생용 전자는 건너뛰고 computer 의 핵심 반도체부품 부터 만든다는 전략이 알려졌다. 더욱이 강기동박사의 현대전자 사장취임을 막는데에는 성공 했스나 사장 적임자를 못 찾아서 정주영회장이 직접 사장직을 맡은데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되니 현대 정회장에 맞설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직접 자신이 발벗고 나설수밖에 없섰다. 반도체 전략 긴급 검토 명령이 내려젔다. 반도체는 내 영역이다. 현대에 그냥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삼성은 지금까지 반도체관련 사업검토를 안 한 것은 아니였다. 합작이나 기술도입 형식으로 검토하고 있섰다. 워낙 기술료가 비싸다 보니 잘못하면 남 좋은 일로 끝날 것 같아 돌다리만 계속 두드리고 있던 상태였다. 현대와 같이 혼자서 해본다는 정주영 식 뱃장은 없었다. 이번은 다르다. 현대가 독자적으로 한다고 나왔스니 그냥 보고만 있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삼성에서도 많은 인원이 Silicon Valley 를 찾아왔다. 반도체에 관한 한 여기밖에 찾아갈 곳이 없다. 와서도 만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 있다. 가만 앉아있서도 한국의 정보가 모두 나에게 집중적으로 몰려오고 간접으로 자문을 요청하기도 한다. 나의 현대반도체 자문보고서는 여기 Sunnyvale Elcamino Real 에서 종교서점을 하는 분에게 한글 타자와 제본을 부탁해서 만들어 왔는데 부탁한 것보다 많이 만들어와 돈을 더 달라고 해서 더는 필요 없스니 남어지는 버리라고 했섰다. 삼성 손에 들어갈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 였지만 어차피 모든 내용을 알게 될 것이고 보안을 해 보았자 삼성 손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년에도 한국반도체 사업계획서를 경제기획원에 내자 마자 그 내용이 삼성에 알려졌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였다. 삼성이 보고서도 거의 동시에 위로 전해졌다. 삼성 보고서는 나는 보지 못했지만 Microprocessor 개발을 포함한 반도체전반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볼때 결론은 뻔하다. 삼성이 반도체 세상을 안다면 한국에서 할만한 품목은 Memory 외에 다른 것이 있슬수가없다. 그것도 DRAM 한품목뿐이다 년 11 월, 현대전자 Memory 계획서가 상공부에 접수됬다. 처음 계획한 날짜보다 좀 늦어젔다. 제품은 64 K DRAM 으로 시작해서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공장 건설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이병철 회장의 마음이 급해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것이다. 급히 서둘러서 1983 년 2 월에 나도 memory 하고 대형 반도체 신규사업을 동경서 발표했다. 새로 땅을 사서 한국과 미국에서 시작한다는 현대의 사업공식( 公 式 ) 그대로다. 사실 현대에 지지않을려면 이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 총수의 기득영토 (반도체)를 침범 당할 수 없다는 rival 의식에서오는 오기 에 가까운 결정이 였다. 삼성의 많은 참모 들이 이건 아닌데 하고 어리둥절했다. 몇몇 간부들은 좀더 심중하게 검토해야 된다고 하면서 조심하는 의견을 표명했었다. 모든 사업을 상의하던 홍진기 회장 에게는 발표 바로 전에 알리기만 했다고 한다. 강박사가 선정한 현대의 반도체 Memory 사업이 엉뚱하게 이병철회장의 동경 발표로 이어졌다. 이발표는 동경에서 이루어지긴 했스나 일본보다는 정주영회장 드르라고 일부러 크게 북을친것이였다. 전 예가 없는 삼성의 대형 HI TEK 독자 개발 계획이다. -- 미국 Micron technology 사에서 일부 기술을 사오기는 했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애들 장난 같다고 느꼈저서 믿기가 어려웠다. 이미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고 136

144 10 년 가까이 내버려두고 나서 지금 와서 갑자기 현대에 겁 먹고 더 크게 현대와 똑같은 공식으로 나온 것이다. 갖인 사람 그것도 대단히 많이 갖인 재벌총수의 독점의욕 그리고 경쟁심리를 나는 제대로 모르고 있섰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를 일부라도 내줄 수는 없다. 이때 묵묵히 사업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현대가 대견스러웠다. 처음에는 정주영 회장이 나도 정밀공업 하면서 엉뚱한 반도체 삼성 이병철회장 Memory 왕국 건국 memory 사업에 뛰어 들었고 이것을 보고 있던 이병철 회장이 급해져서 네가해? 그럼 나는 더 크게 해- 하면서 장군 멍군 하고 나온 것이다. 꼭 애들 장난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이 한국 반도체 memory 왕국 건국의 진실이다 K DRAM 내가 만든 부천 공장에서 나오다 이병철 회장 Memory 왕국건국 경기도 부천에 있는 반도체공장에 비상이 걸렸다. 64K DRAM 을 최단 시일에 만들어 내라는 구릅 총수의 명령이다. 이것 역시 반도체 memory 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높은 데서 내려온 낙하산 명령이다. 내가 택한 품목이기도 했지만 다른 더 좋은 품목이 있슬수가없다. 따라서 잘못된 선택은 아닌것이다. 이보다 8 년전 나는 1975 년 초에 시계칩을 생산하기위해서 생산 Line Tune up 으로 C-MOS 4000 series memory 를 만드러서 TEST 했다. 그러니까 한국땅에서 재일처음만든 반도체제품이 TEST 용 이긴 하지만 memory 였다. 이때 생산공정은 Terry Martin 이 Test 는 Anh Nguyen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또 얼마후 부천공장에서 Terry 가 Silicon Gate CMOS 공정을 설치해서 그 Test 도 할겸 Anh Nguyen 이 Intel 의 1101 을 바탕으로 16K SRAM 을 만드렀다. 이때 옛날에 구입한 Teradyne Tester 로 Test 하느라고 애 먹었다고 하면서 Memory 를 만들려면 전용 tester 를 사야 겠다고 Anh 이 나에게 이야기 한일이 있었다. Terry 는 내가 미국 Stewart Warner 사 에서 부터 데리고있던 반도체 생산 기술자로 한국반도체회사의 C-MOS Line 설치를 지희 감독 했다. Anh 은 한국반도체 설립때 국내서는 찾을수가 없어서 미국서 데려온 Digital/ test Engineer 였다. 둘이다 나의 설득으로 나를 믿고 한국까지와서 고생만했다. 이들은 반도체기술을 한국에 정착시킨 말 그대로의 진정한 최고 공로자 들이다. 나는 우리나라 현대화에 이들보다 보상도 없이 Hi Tek 에 공헌한 외국인은 없다고 본다. 나는 이들에게 채용할때의 약속도 못 지키고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냥 오해속에서 헤어졌다. 부천공장 으로서는 memory 는 하나도 낯선 제품은 아닌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급히 한국인박사 Engineer 들이 여러 명 채용 됐다. 다른 회사에서 서로 다른 배경으로 자라난 박사님들을 별안간에 모두 부천공장 한집웅 밑에 투입했다. 위에서는 64K DRAM 생산이 박사들이 많아서 쉽게 됄줄알았으나 선장이 너무 많아젔다. 배가 방향을 못잡는다. 모두가 급해젔다. 시간이없다. Design 은 사와야 된다. 그렇게되면 여기에 따른 제조기술, 테스트기술 까지도 모두 Design 에 마추어야된다. 이때 삼성의 재수도 좋았다. 미국의 memory 제조업체인 Micron Technology 사는 재정난으로 허덕이고 있을때였다. 미국 Micron Technology 사의 64K DRAM 설계와 sample 칩 3 천 500 개를 급히 돈주고 구해왔다. 원체는 3000 개로 되어있는데 좀더달라고 졸라서 몇 개를 덤으로 더주었다고 들었다. 137

145 기술자도 여러명을 보내서 생산공정도 뵈워 왔다. 새로 사온 설계는 N-MOS 로 되어 있어 C-MOS 보다 한단계 쉬운 공정이다. 그동안 내버려진 부천공장의 C-MOS 생산 라인을 외부에서 만든 N-MOS 공정으로 하향 조정 하여 동경발표에서 9 개월만인 1983 년 11 월에 64K DRAM 의 시제품이 나왔다. Design 을 일직이 사왔스면 더 속히 나올 수도 있섰다. 삼성은 자체실력으로 개발했다고 크게 선전하고 개발 책임자에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현대로서는 예상하고 있섰던 일이지만 놀란 것은 일본이다. 일본이 DRAM 생산에서는 미국을 앞서고 있슬때였다. 적어도 2-3 년은 걸릴 거 라고 마음 놓고 있섰기 때문에 이들 눈에는 삼성이 불가능을 해낸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1975 년에 한국에서 LSI-CMOS 시계 칩이 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섰다. 민생품이 여서 그때 미국 ICII 에서 시계칩을 사다가 조립만 했다고 밖으로 알렸섰다. 강박사는 혹시라도 있슬수있는 Trade secret 의 국제분쟁-미 국방성에서 제기할수도있는 국방기술의 해외유출 등을 우려하여 한국서의 Wafer Fabrication 에 연막 전을 쓴것이 성공 한것이다. ICII 사는 강박사가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설립을 위해서 미리 미국 sunnyvale 에 세운 현지법인이고 한국반도체회사에서 일한 주요 기술지들은 모두기 미국 ICII 사에서 출장 나온 것으로 되어 있섰다.. 64K DRAM 시제품이 삼성의 부천공장에서 나왔다. 이 사실이 삼성의 Memory 사업에 아주 중요한 역사적 시발점이 된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최신 설계(씨앗)를 밖에서 구해오면 최신제품이 나온다는 것을 반도체를 모르는 높은 곳에서 감을 잡았다. (후에 한국에 없는 설계전문가들을 파격적 대우로 모셔오게 됨) 물론 집안에서 그런 설계를 소화할 수 있는 시설과 제조 능력(밭)이 있어야만 된다는 전제하에서다. 그 당시 삼성은 비옥한밭이 경기도 부천에 있섰던 것이다. 10 년이지난 골동품이 된 시설이지만 아직도 몇 개의 시제품 제조에는 문제가 없었다. 외부로는 이회장이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신과 용기를 얻은 계기가됬다. 삼성은 무서운 회사다. 삼성을 비웃고 내려다보던 일본사람들이 그 이상 무시 못하게됬다. 대형 반도체 사업을 우려 했던 staff 들도 더 할말이 없어젔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일본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이회장은 많은 점수를 땄다. 자기네들도 모르는 64K DRAM 의 선택은 이병철 회장만이 할수있는 용단이라고. -이것은 맞는 말이다-. 현대 정회장 의 덕분이라고 했스면 더 정확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DRAM 의 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구릅 총수의 신통력으로 승화 시켰다. 9.6 Memory 왕국의 원동력- 두 재벌총수의 기 싸움 내가 Memory 를 선택하고 나서 삼성하고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서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섰는데 현대 64K DRAM 계획이 살공부에 접수되고 3 개월 후에 이회장이 그것도 현대와 똑같은 공식으로 나도 하고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이병철 회장은 모든 것을 꼼꼼히 분석하고 결정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섯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삼성이 전자사업을 시작할깨 기존업체들이 못하게 방해한 것을 이회장은 잘 알고 있다. 정회장의 반도체 진출을 막고 십지만 이젠 세상도 달라 저서 내놓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업으로 그리고 돈으로 이겨야 한다. 나는 가까이서 양쪽을 다 보면서 이런 것이 드라마구나 하고 얼마 전에 TV 에서 맹수들이 남의 영역을 침략하고 또 자기 영역이라고 목숨을 내걸고 방어하는 것과 비교가 되었다. 좁은 땅에서 한국 최대의 두 재벌총수가 반도체 memory 가 뭔지도 모르면서 동시에 memory 판에 재벌의 명예(자존심?) 를 걸고 뛰어든 것이다. 현대 역시 삼성에 지지않을려고 정주영회장은 나 때문에 공석이 된 사장직을 직접 자기가 맡아서 미국과 한국에서 공장건설이. 138

146 추진됐다. 적격자가 없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정회장이 직접 반도체 사장직을 맡은 것은 현대로서는 잘못이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정주영 회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Silicon valley, Santa Clara 에 있는 높은 건물의 Intel 회사 옆에 제법 큰 빈터가 있섰다. 나는 여기가 좋다고 이종운 부장한테 이야기한 일이 있섰는데 얼마 후에 현대는 바로 이 터에 현지공장을 짓고 있섰다. Intel 의 부속 건물 같이 나에게는 보였다. 이미 나는 반도체에서 손을 뗀 후 였지만 여기 San Jose 의 Silicon Valley 를 관통하는 101 Free Way 를 지날 때마다 높지는 않지만 꼭 한번은 처다 보고 지나가는 건물이 되었다. 64K DRAM 의 시제품이 나오자 이병철회장은 마음 놓고 돈주머니 끈을 풀게됬다. 현대 정주영회장 역시 같은 Memory 를 목표로 많은 돈을 밑 빠진 독에 물 퍼붓듯이 퍼붓고 있섰다. 정회장의 스타일이다. 정주영 회장의 밀어붙이는 뚝심은 이병철 화장의 현대에 질 수 없다 의 All-In 의 일종의 오기와 같은 투자 전략이 되어 구릅의 운명을 건 이병철 대 정주영의 기 싸움으로 발전했다. 이 싸움판이 다름 아닌 Memory 였다. 이 두 재벌 총수의 기 싸움으로 memory 한 부분에만 집중된 막대한 자본투자 경쟁은 도리어 오늘날 Memory 왕국의 원동력 이 되어 튼튼한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삼성은 그 동안 막대한 수업료를 냈고 이제는 반도체 정규 코스에 들어 섰스나 현대는 초보과목에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얼마 후 정회장은 반도체과목에서 낙제를 하고 물러났다. 오늘날 반도체에서 정회장의 실패는 알아도 그의 공헌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국반도체 Memory 왕국의 건국 공신은 현대의 정주영회장인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Memory 에서 현대를 크게 앞지른 삼성은 요번에는 나도 자동차 하고 현대와 자동차 의 싸움판에 뛰어들게 된다 년후 2007 년 7 월 Internet News 에 현대전자로 시작한 Hynix 반도체가 삼성반도체를 따라 잡았다는 기사가 크게 나있섰다. 그렇다면 세계 1 위(memory 에서) 라는 삼성반도체를 따라 잡았다니 Hynix 가 세계 No.1 이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회사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 겠지만- 싶었다. 그러나 Hynix 에는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아는 사람도 없섰다. 하여튼 축하 이라도 보내고 9.7 내 이름으로 받은 유일한 상장 여기 사진은 나의 반도체업적을 내 이름으로 외부에서 받은 딱 하나 있는 상장 수상 장면이다. 아마도 한국반도체가 손목시계 제품을 성공 시키고 상공부에서 시계산업 육성안을 추진할 때인 1975 년 말인것 같다.. 그 당시 상공부장관이 장예준씨였다. 나의 반도체 개발로 많은 크고 작은 공로상 표장장이 주어 졌지만 모두가 일은 내가하고 표창은 다른 사람이 받았다 반도체 국산화로 수출의날에 받은 상공부장관상 139

147 9.8 내 계획으로 시작한 두 반도체회사 전세계 시장 10% 이상 공급 내가 집에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며 만든 사업계획으로 시작된 한국반도체주식회사와 현대전자는 지금은 삼성 반도체와 Hynix 로 그 이름도 바뀌고 주인도 바뀌었다. 모두 Memory 분야에서 세계정상을 바라보는 대 회사로 자라났다. 다음표에서 보는 바와같이 2006 년 기준으로 삼성반도체는 세계에서 둘째 Hynix 는 아흡째가 되었다. 두회사를 합치면 전세계 반도체시장의 10.2% 를 공급하고 있는것이다. KDK 에서 같이 있던 David Heck 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Hint 를얻어 선택한 Memory 가 두 재벌의 엄청난 투자와 많은 기술인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때는 부녀자의 머리가락을 팔아서 연명하던 세계에서도 최하의 경제권의 나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반도체 Memory 왕국이 건국된 것이다. 반도체 전체시장은 Memory 가 아닌 분야가 Memory 시장보다 훨신 더 크다. 이 분야도 한국이 개척 한다면 명실공히 세계 반도체 왕국이 될 날이 곧 올것이다 년 봄 미국 Reno Nevada 에서 강기동 2005 Rank Top 10 Worldwide Semiconductor Vendors by Revenue 2004 Rank Company 2005 Revenue 2005 Market Share (%) (Millions of U.S. Dollars) 2004 Revenue Growth (%) 1 1 Intel 34, , Samsung Electronics 18, , Texas Instruments 10, , Toshiba 8, , STMicrolectronics 8, , Renesas Technology Infineon Technologies 8, , , , Philips Electronics 5, , Hynix Semiconductor 5, , NEC Electronics 5, , Others 119, , Total Market 234, , Source: Gartner Dataquest (April 2006) 140

148 9.9 이건희 회장 앞으로 보낸 편지 - 모두 회답이 없다 편지 이회장앞으로 보낸편지와 배달증명

149 편지 - 2 이건희 회장님 보십시요 년 3 월 30 일 Reno NV 저는 1973 년도에 부천에 '한국반도체주식회사' 를 설립하고 삼성에 반도체 기술과 사업을 처음으로 들여 온 강기동 입니다. 현재 미국 Reno Nevada 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삼성을 세계 제일의 전자회사로 키우신 회장님의 역량을 옛 삼성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서신을 올렸습니다만 바쁘셔서 미처 못 보신 것 같습니다. 오래된 일이라서 제가 편지를 올리게 된 배경을 대충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회장님께서 당사자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를 통할 수 없는 내용이라 판단됩니다. 회장님께서는 저의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1974 년말에 저를 포함하는 조건으로 인수하셨습니다. 회장님이 인수하시고 3 년후에 이름이 삼성반도체 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는 중동전쟁이 몰고 온 유류파동으로 인한 세계적 불경기의 와중에서 가까스로 도입된 제조설비 설치를 겨우 끝낸 상태로 시제품도 나오기 전이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반도체 양산기술의 정착과 제품의 전량수출이 이루어지면 인수하신 회사의 10%의 지분을 저에게 주시는 것으로 약속 하셨습니다. 첫 제품인 C-MOS LSI 시계 칩은 심한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뒤엎고 없어서 못 파는 공전의 Hit 를 하여 생산 3 개월만에 월별 회계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제가 떠나던 1976 년에는 수출실적이 $4,184,989 가 되었습니다. 당시 자본금의 4 배가 넘는 액수 입니다. 이 사실은 삼성반도체통신 10 년사 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해당 면을 편지 끝에 첨부 합니다. 제가 만든 전자손목시계는 청와대에도 공급되어 외국 귀빈 선물용으로 쓰여졌고, 상공부에서는 전자시계사업의 스위스 수준으로의 육성 안이 마련되어 조사단이 해외로 파견 되는 등 저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올라 갔습니다. 여기에 놀란 그룹 내의 일부 세력은 급기야 저에게서 시계 사업부를 떼어내고 저를 자기네들 앞날의 걸림돌로 단정하고 모략 중상으로 저를 제거하였습니다. 창업자 사장이 회사를 성공시키고 떠나는데 간소한 송별회식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곧 이어 강기동계 라고 저를 믿고 따라와서 저하고 같이 고생한 사람들도 제거 되었습니다. 제가 어려운 환경에서 창업한 반도체회사는 지금 세계 으뜸으로 성장했고 당시 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을 인정 받은 한 임원은 단시일에 국가 최고 반도체 기술자가 되어 대통령상도 받고 승진도 했습니다. 삼성은 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던 최첨단 C-MOS LSI 기술을 무상으로 얻은 것입니다. 저는 삼성에서 월급을 포함한 금전적인 보상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의 월급은 미국에 제가 먼저 세운 ICII 사로부터 받았습니다. 혹시 미 국방성에서 제기할지도 모를 국방기술 해외유출 에 대한 저의 대비책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한국반도체주식회사'의 역사는 지워지고 제가 한 일들은 모두 삭제 되거나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142

150 특히 미국서 제가 데려온 설계기술자중 한 사람인 Nguyen Anh 이 C-MOS silicon gate 공정 조정용으로 Intel 1011 의 16K S Ram 을 만들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제가 설립한 부천공장에서 1983 년에는 C-MOS 공정보다 만들기가 쉬운 N-MOS 공정으로 64K DRAM 이 6 개월이란 단시일에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삼성은 정말 남에게 말 못할 도리에 옳지 않은 일을 저희들에게 했습니다. 이들은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기네들까지 쫓겨나는지 영문도 모르고 후환이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는 반도체 기술은 쓸 데도 없었지만 삼성에서 쫓겨났다는 이유만으로 안정된 직장에 취직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억울한 희생 위에 오늘날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삼성 반도체가 서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어려운 환경에서 회사를 성공시키고도 저 때문에 고통 받은 국내외의 많은 동료들에게 지금까지 제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살아 오고 있습니다. 회사를 떠나면서 저는 약속 받은 저의 10% 지분'을 요구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지금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있으니 돈을 벌 때까지 좀 기다려 주십시오 였습니다. 안 주겠다는 것이 아니니 저로서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 습니다. 저의 지분은 오랜세월동안 삼성반도체사업에 기여한 것입니다. 대 삼성이 강박사 돈을 떼어 먹겠습까? 라며 걱정 말라고 하신 강진구 회장님은 오래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약속하신 저의 회사 지분은 오늘날 계산하기도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생각하여 당시 '한국반도체주식회사' 발행주식 100 만주(자본금 $100 만불)중 제 몫은 10%인 100,000 주 입니다. 현시가로 환산하여 약 900 억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삼성전자 규모나 반도체기술 불모시대에 제가 이룬 업적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지만 지금이라도 약속을 이행하여 주심이 마땅하다고 생각 됨이다. 이제 회장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이시어 지워버린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역사를 되살리시고 년대 삼성 나아가서 한국반도체산업 개척사에 새로운 전설 한 장을 추가해 주십시오. 회사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당하게 해고된 창업 공로자들의 노고에 대한 응당한 보상은 당연히 하셔야 된다고 봅니다. 미국은 2 차대전 당시 나라가 격리 수용하여 고통 받은 일본계 시민들에게 뒤 늦게나마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을 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을 넘어서 세계 정상에 오르신 대 재벌기업가 이십니다. 삼성이 신뢰와 양식으로 상징되는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멀리서 회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강기동 올림 Ki Dong Kang Redmond Loop Reno, NV USA [email protected] * 삼성이 발간한 삼성반도체통신 10 년사 Page 172 * (앞 P.118 보십시요) 143

151 9.10 참고 자료 1)정주영 아산 박물관 내의 자료관 2) 현대의 Memory 선택 3)강진구회장 회고록 사실과 다르다 4) 나의 이력서 1)정주영 아산 박물관 내의 자료관 1982 년 8 월, 이현태 그룹종합기획실장을 미국으로 보내서 재미 교포 회사 KDK Electronics 와 전자 사업의 기술과 제품 전략에 관한 조사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 조사 결과와 그룹종합기획실의 기초 조사를 토대로 기본 전략을 만들었다. 한국의 생산 능력과 미국의 엔지니어링의 설계 능력을 결합하는 전략을 채택, 최단기간 내에 일본을 제압한다. 이를 위해서 미국에 현지 법인을 설립, 미국에서 설계를 담당하고, 국내에서는 미국에서 개발한 제품을 양산하는 이원화 체제를 갖춘다., 목표 기술 수준은 선폭 2 미크론(당시 국내 수준 5 미크론), 웨이퍼 크기 5 인치, 집적도 64K 내지 2 백 56K 급의 VLSI(고집적 메모리 반도체 회로)로 한다 년 12 월 사업 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했고, 1983 년 2 월 23 일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 의 설립 등기를 마쳤다. 그리고 20 여 일 후인 3 월 16 일에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크라라에 Modern Electrosystems Inc.(MEI)라는 상호로 미국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2) 현대의 Memory 선택 --미국 KDK Elect 자문보고서에서 144

152 (3) 강진구회장 회고록 사실과 다르다 ㅡ 145

153 나의 이력서 姜 起 東 1934 年 12 月 9 日 咸 南 咸 興 生 ( 本 籍 : 慶 南 金 海 ) New Media-2007 京 畿 高 等 學 校 1953 年 卒 (49 回 ) 서울 大 工 科 大 學 電 氣 工 學 科 1957 年 卒 (11 回 ) The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M.Sc. and Ph.D Motorola Inc. Semiconductor Products Division, Phoenix Arizona Stewart Warner Micro-Electronics Inc., Sunnyvale California Integrated Circuits International, Inc.(ICII) 設 立 Sunnyvale California 韓 國 半 導 體 株 式 會 社 ( 現 : 三 星 半 導 體 ) 設 立 京 畿 道 富 川 市 KDK Electronics, Inc. 設 立 Sunnyvale California Reno Nevada 나의 計 劃 으로 建 設 된 半 導 體 工 場 (1) 韓 國 半 導 體 ( 株 ) 京 畿 道 富 川 ( 現 三 星 ) (2) 源 進 電 子 京 畿 道 龍 仁 ( 三 星 이 買 入 ) (3) 現 代 電 子 - 京 畿 道 利 川 ( 現 Hynix) (4) MEC ( 現 代 電 子 Santa Clara, California 半 導 體 工 場 ) 現 住 所 : [email protected] Redmond Loop Reno, NV USA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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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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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¼ºÀαÇ24È£ 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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