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00000001.hwp"

Transcription

1 중국 엘리트 정치의 변화 -권력승계 제도화의 과정과 요인 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 정 수

2 중국 엘리트 정치의 변화 -권력승계 제도화의 과정과 요인- 지도교수 전 성 흥 이 논문을 정치학 석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08년 7월 일 서강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 정 수

3 논 문 인 준 서 박정수의 정치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2008년 7월 일 주심 신 윤 환 부심 김 영 수 부심 이 현 우

4 감사의 글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도 많이 돌아왔습니다. 아마 아직도 방황하고 있었 을 지도 모를 저를 여기까지 잘 인도해 주신 전성흥 교수님과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이 논문을 바칩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싶습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항상 모든 일에 최선 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파른 오 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절정에 도달 할 수 있습니 다. 라는 명언을 항상 가슴속에 새겨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 다. 사랑하는 어머님께 좋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공부하는 큰 아들을 항상 격려해주시고 걱정해주신 어머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제 아내에게 훌륭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항상 절 믿고 따라와 준 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유민이 유현이 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논문 쓴다고 같이 놀아주지 못하고 외롭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눈에 넣어 도 아프지 않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제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5 <목 차> * 국문초록......ⅰ 제1장 서론...1 제1절 연구목적...1 제2절 기존의 시각과 논쟁...5 제3절 연구방법 및 논문의 구성...11 제2장 파벌의 형성과 권력투쟁의 전개...17 제1절 비공식집단으로서의 파벌...21 제2절 마오쩌둥의 1인지배 인지배 체제...30 제3장 신( 新 )후계구도의 등장과 좌절...35 제1절 파벌의 존속과 진화...39 제2절 덩샤오핑의 1인우위 인우위 체제...56 제4장 과도기적 권력승계...64 제1절 파벌정치의 질적 변화...67 제2절 과도기적 집단지도체제 I -

6 제5장 권력승계의 안정화...78 제1절 타협과 합의의 정치과정...81 제2절 집단지도체제의 제도화...89 제6장 결론...94 참고문헌...97 ABSTRACT II -

7 < 표 목 차> <표-1> 제14 14차 1중전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표-2> 제17 17차 1중전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표-3> 제16 16차 1중전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III -

8 국 문 초 록 이번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이전 제16차 전 국대표대회에 이어서 안정적으로 발생한 것은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게는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선거처럼 권력승계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종종 노선 투쟁과 권력투쟁을 동반하며, 동시에 정치적인 갈등과 사회적 인 분열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은 경제와 문화 부문에서는 이미 선진국과 궤를 같이할 만큼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치적인 부문에서는 아직도 민주화 와 정책결정의 투명성의 문제, 공산당 일당 독재 및 다당제의 부재 등 많 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 논문은 어떻게 이처럼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중국에서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문제제기 를 통해 중국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친 요인과 현상을 설 명했다. 기존의 권력승계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의 견해로 나누어 대립하고 있다. 첫째,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영향을 준 요인을 표면적으로 나타난 공식 비공식 규범 및 법에 의한 통치로 규정해서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제도화 되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는 퇴진제도에 관해서만 적용될 뿐 지도자 선출은 여전히 장막 뒤에서 진행되고 있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권력승계가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게 이양되어 타협과 합의를 통해 이 루어졌지만 지도자의 선출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화의 한계 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전히 중국정치의 비민주성을 보여주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과거와 마찬 가지로 심각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이전의 중국 엘리트 정치를 연구하면서 보여주었던 비공식정치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시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각은 비공식정 - i -

9 치 부분이 점차 변화되고 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과거에는 비공식정치 부분이 권력승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러 한 요인들은 더 이상 중국에서의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만 아 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승자독식 의 원리에 따라 중국정치가 작동했으나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그리 고 후진타오의 시기로 넘어오면서 파벌에 기초한 비공식정치 부분이 점차 변화되고 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 논문은 안정적인 권력승계의 요인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서 살펴보았다. 중국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의 요인을 공식 비공식 규범 및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닌 지도자의 카리스마 약화 내지 카리스마적 지도자 의 부재, 그리고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대립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의 부재와 정책 노선상의 의견대립 축소는 중국정치에서 이데올로기와 파벌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으며, 각 파벌들 간의 타협과 합의를 중요시하는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으로 귀결되어 불안정했던 중국의 권력승계가 보다 안정적 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설명하였다. - ii -

10 중국 엘리트 정치의 변화 -권력승계 제도화의 과정과 요인- 제1장 序 論 제1절 연구목적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이하, 제17차 당 대회)가 2007년 10월 개최되었다. 이번 당 대회가 주목을 받는 두 가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 다. 첫째, 그간 장쩌민( 江 澤 民 ) 세력의 영향력을 받아온 후진타오( 胡 錦 濤 ) 체제가 독자적인 위상을 수립하고 권력을 공고화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이해하는 주요지표가 되는 회의이기 때문이다. 둘째, 201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자, 즉 제5세대의 형성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 다. 제5세대 지도부의 형성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정치적 안정문제 와 연관되어 내부 권력관계의 변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당 대회는 중국정치 사회 변화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이 루었던 역대 당 대회에 비해 인사나 정책면에서 큰 변화를 가지고 오지는 못했다. 이것은 얼마든지 예상이 가능한 시나리오의 테두리 안에서 주요 인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 개방이후 권력승계에 따른 역대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의 주요 인사 및 정책방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2차 당 대회에서의 주요인 사문제는 덩샤오핑( 鄧 小 平 ) 체제의 확립과 후야오방( 胡 耀 邦 ) 총서기와 자 오쯔양( 趙 紫 陽 ) 총리 선출 그리고 주요정책방향은 사회주의 현대화 목표 제시와 독립자주외교 노선을 제시했으며, 제14차 당 대회는 천안문사태이 후 장쩌민 체제의 구성과 후진타오 후계자의 등장,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 경제론을 제시했다. 제16차 당 대회는 후진타오-원자바오( 溫 家 寶 ) 체제의 등장과 장쩌민의 군에 대한 장악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3개대표론을 당 - 1 -

11 장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제17차 당 대회는 장쩌민의 영향력을 증명했으 며, 제5세대 지도자군 형성의 윤곽이 나타났다. 1) 다만 한 가지 이전 당 대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총서기 후보에 일찍이 내정돼 취임 전 10년 동안 정치국 상무위원으로서 주요 당무를 경험할 수 있었던 후진타오 자신의 경우와는 달리 제5세대 지도자의 등 장을 불과 5년 앞둔 이 시점에서도 과거와 달리 확실한 총서기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즉, 과거처럼 특정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 이 아니라 복수로 구성-시진핑( 習 近 平 )과 리커창( 李 克 强 )-된 후보자 그룹 을 선정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이는 후보지도자간의 경쟁체제를 도입 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당 대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 전의 제16차 당 대회에 이어 보다 권력승계과정이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데 있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중국에서 권력승계는 심각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선거처럼 권력승 계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권 력승계는 종종 노선 투쟁과 권력투쟁을 동반하며, 동시에 정치적인 갈등 과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2) 예컨대, 마오쩌둥( 毛 澤 東 )시기의 류사오치( 劉 少 奇 )와 린뱌오( 林 彪 )의 비참한 최후와 문화대혁명, 덩샤오핑 시기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비극적 삶과 천안문사건은 권력승계에 있 어서 정치적인 갈등과 사회적인 분열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권력승계는 1) 김흥규, 중국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평가 및 대외정책적 함의 주 요국제문제분석, (외교연구안보연구원, ), p.2. 2) 중국 정치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로서 많은 학자들이 비제도성, 혹은 낮은 수준의 제도화를 꼽는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 사회가 일반적으로 법치 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여, 어떤 특정사안을 처리하는데 있어서의 법의 지배보다 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인치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과정에 있어서는 법률 제도적 차원이 아니라 권력구조 내의 비공식적 요소를 잘 파악 분석함으로써 엘리트간의 갈등, 더 나아가서 정책의 변화와 정치변동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홍표, 등소평 이후 중국의 정치변화: 분석적 개관, 김동성 외, 중국의 개혁과 정치변화 (서울: 세종연구소, 1996), p

12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불린다. 3)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체제에서 권력승계가 반 드시 체제에 위기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체제의 역사를 볼 때, 권력승계가 정책혁신의 기회로 작용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이들 체제에서 새로운 지도부는 자신의 독자적 권력기반을 공고 히 하기 위해 권력승계 과정에서 정책혁신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권력을 승계한 새로운 지도부가 독자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또 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경우 정책혁신이 가능해 질 수도 있 다. 4) 기실 중국은 경제와 문화 부문에서는 이미 선진국과 궤를 같이할 만큼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치적인 부문에서는 아직도 민주 화 투명성의 문제, 공산당 일당 독재 및 다당제의 부재 5) 등 많은 문제점 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 게 권력승계가 안정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지는 중국을 연구하는 맣은 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 논문 역시 어떻게 과거 중국 정치의 관행과는 달리 제16차 당 대회에 이어서 제17차 당 대회에서도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가 3) Lowell Dittmer, "Patterns of Elite Strife and Succession in Chinese Politics," The China Quarterly, No.123(September 1990), p.405; Michel Oksenberg, "China's Political System: Challen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The China Journal, No. 45(January 2001), p.29. 4) 김재철, 등소평 이후 중국: 권력승계에 따른 정책혁신 가능성 검토, 김동성 외, 중국의 개혁과 정치변화 (서울: 세종연구소, 1996), pp ) 일당독재를 고집해 온 중국이 지방 행정조직에 제한적인 다당제( 多 黨 制 ) 실험 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공산당 외 다른 정당과 정파의 인사를 지방 행정의 중 심에 기용하면서 정치 개혁을 추구하려는 의도다. 이처럼 외부 인사를 대거 발탁 한 것은 폐쇄적인 공산당에 활력을 불어넣고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포석 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10월에 열렸던 제17차 중국공산당 당 대회에 서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가 정당 민주화를 강조한 이후 다당제 실험 이 갈수록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동아일보,

13 능했는지에 분석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존의 논의들은 안정 적인 권력승계가 나타난 현상에만 치중함으로써 변화 요인을 설명하는 데 미흡했다. 즉 과거에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쳤던 비공식정치 부분의 중요 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든지, 아니면 제16차 당 대회에서 발생한 안정 적인 권력승계만을 보고 권력승계의 제도화 추세를 주장하는 정도에 머무 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지금처럼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일어날 수 있 게 한 요인과 이로 인해 나타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향후 중국에서 발생할 권력승계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한계를 가 진다. 중국의 권력승계과정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논의들은 한번 안정 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영향을 준 요인을 표면적으로 나타난 공식 비공식 규범 및 법에 의한 통치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아직도 비공식정 치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견해는 비공식정치 부분이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과거에는 승자 독식의 원리에 따라 중국정치가 작동했으나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그리고 후진타오의 시기로 넘어오면서 파벌에 기초한 비공식정치가 변화되고 있 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 논문은 중국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나타난 것을 다음 두 가지의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중국에서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이 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의 카리스마 약화 내지 카리스마적 지도자 의 부재, 그리고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대립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의 부재와 정책노선 상의 의견대립 축소는 중국정치에서 이데올로기와 파벌의 중요성을 감소 시켰으며 각 파벌들 간의 타협과 합의를 중요시하는 집단지도체제의 강화 라는 현상으로 귀결되어 불안정했던 중국의 권력승계가 보다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게 했다. 이런 논지의 본 논문이 지니는 연구 의의는 다음과 같 은 기존 연구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14 제2절 기존의 시각과 논쟁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정치체제에서 엘리트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단적 으로 중국에는 아직까지 민주적인 선거제도나 다당제 6) 가 도입되지 않았 고, 그래서 일반 인민들이 중요한 정책결정에 직접적이고 의미 있게 참여 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소수의 통치엘리트가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엘 리트 정치의 변화가 중국정치개혁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인 예가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중국에서 안정 적인 권력승계과정은 정치엘리트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런 변화 의 요인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을 연구하는 것은 향후 중국 에서의 권력승계과정을 예측하고 분석하는데 아주 유용한 틀이 될 것이 다. 하지만 기존의 권력승계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 하고 있는 것에 그치고 있다. 즉,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제도화가 되었 다는 시각과 이전의 중국 엘리트 정치를 연구하면서 보여줬던 비공식정치 부분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의 권력 승계가 제도화되었다고 보는 주장과 중국에서는 여전히 비공식정치가 중 요하다는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자의 시각은 제16차 당 대회에서의 제4세대 지도자의 등장은 이전과 6) 현재 중국의 공산당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어떤 정당의 설립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년 중국정부가 전국적으로 수백 명이 참가한 중국민주당 창당사건을 가혹하게 탄압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민주당 창당사건에 대 해서는 Teresa Wright, "Intellectuals and the Politics of Protest: The Case of the China Democracy Party," Edward Gu and Merle Goldman(eds.), Chinese Intellectuals Between State and Market(New York: Routledge, 2004), pp ; Merle Goldman, From Comrade to Citizen: The Struggle for Political Rights in China(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

15 는 다르게 이들의 등장과정에서 파벌투쟁이나 원로의 개입, 기존 후보자 의 불명예스러운 퇴진 등 정치엘리트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투쟁이 없었 다는 측면에서 중국의 정치과정이 이전보다 제도화 되었다고 보는 견해이 다. 7) 또한 제16차 당 대회에서 있었던 당 지도부의 개편과정에서 장쩌민 이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지킨점, 예정된 후계자가 순조롭게 권력을 이어 받았다는 점, 70세를 넘으면 누구도 정치국 위원으로서 새 임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는 점, 정치국 위원의 선임이 정치적 합의 에 의해 이루어졌다 는 점 등에서, 중국정치 발전과정에서 권력승계과정이 제도화가 시작되었 다고 평가할 수 있다 8) 는 점에서 제도화를 주장한다. 이들의 논의는 권력 승계가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진행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요 인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제3세대 지도 자의 등장과 함께 권력승계와 관련된 공식 비공식 규범이 만들어졌고, 그 것이 이번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규범으로 중국 헌법에 의하면 국가기관의 수장은 2회 이상 연임할 수 없다. 그래서 2회 연임자는 다른 자리로 옮기든지 아니면 퇴임을 해야 한다. 또한 1997년 제15차 당 대회를 준비하면서 당 내에서는 70세 규정, 즉 70세가 넘은 사람은 국가주석,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정치국위원, 중앙군사위 위원 등 당 정 군의 최고직위에 취임할 수 없다는 비공식적 규범이 만들어 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9) 7) 이에 대해서는 조영남,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정치 (서울: 나남출판, 2006), Frederic C. Teiwes, "Normal Politics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The China Journal, No. 45(January 2001), Frederick C. Teiwes, "The Politics of Succession: Previous Patterns and a New Process," John Wong and Yongnian Zheng(eds.), China's Post-Jiang Leadership Succession Problems and Perspectives (Singapore: Singapore University Press and World Scientific Publishing Co., 2002), pp ) 최우길, 중국 신지도부 분석과 정책전망, 현대중국연구 제5집 1호 (2003), pp ) 개혁기 중국에서는 최고지도자들의 퇴직과 관련된 규범이 점차 확립되기 시 작했다. 간부의 퇴직 제도를 마련하는 노력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지만, - 6 -

16 둘째, 1990년대 초부터 중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법에 의한 통치( 依 法 治 國 ), 즉 국가의 모든 통치는 법률에 근거해야 하고 공산당도 법이 정한 범위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정책도 중국정치의 제도화를 더욱 촉진할 것 이라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결국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법에 의한 통치 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적극 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과 제도를 강조할 경우 국가 주석과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라는 공식직위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에게 유리하 기 때문이다. 11) 또한 법에 의한 통치는 행정 효율성 제고와 부패방지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공산당은 1997년 제15차 당 대회 에서 이것을 국책으로 정했고, 1999년 헌법 개정을 통해 서문에 이를 명 시했다. 특히 2001년 11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법 에 의한 통치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앞으로 중국에서는 꽌시( 關 係 )를 기초로 형성된 비공식정치의 중요성은 감소되고 대신 법과 간부의 퇴직에 관한 규정이 최고 지도자들에게 적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 요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대다수의 혁명원로들이 사망하면서 퇴직과 관련한 규범이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최고 지도자들의 교체와 관련하여 나이 와 연임제한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당과 정부의 최고 직위에 대해 70세 이후 퇴직과 2차 연임 금지가 당의 규범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가령, 1992년에 개최된 제14차 당 대회에서 군 지도자들을 제외한 정치국원들이 70세 이후 퇴직이라는 규범에 따라 퇴진했다. 계속해서 1997년에 개최된 제15차 당 대회에서는 차오스( 喬 石 )가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전인대 상무위원장 직위에서 퇴임했다. 물론 차오스의 퇴진은 장쩌민과의 권력경쟁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공 식적으로는 70세 퇴직이라는 규범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퇴진은 최고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이 지도부 교체에 관한 규범을 더욱 공고화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사례였다. 김재철, 중국의 정치개혁 -지도부, 당의 지도력 그리 고 정치체제- (서울: 한울, 2002), pp ) 1999년 수정헌법에서 법에 의해 국가를 다스려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 한다 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김창희, 중국의 정치과정과 권력 구조의 개관, 지방자치연구 제9집 (2003), p ) 조영남, 중국 후진타오-원자바오체제 의 등장과 정치 개혁: 현황과 전 망, 현대중국연구 제6집1호 (2004), p

17 제도에 근거한 공식정치가 더욱 강화될 것이다. 12) 이처럼 권력승계를 제 도화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 반면 후자의 시각은 중국에서의 권력 승계는 여전히 비공식정치 부분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이다. 중국정치에서 비공식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근의 논의로서 개혁시 기 비공식정치의 연속과 변화 라는 논쟁 13) 에서 퓨스미스(Joseph Fewsmith)의 주장을 들 수 있다. 퓨스미스는 타이위스(Frederic C. Teiwes)의 정상정치 14) (Normal Politics)를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는 아 직도 중국정치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의 형태는 지도 자의 능력자원이고, 또한 비공식적인 권위의 중요성, 특히 후견인-피후견 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5) 12) 조영남, 중국 제4세대 지도자의 등장과 엘리트 정치, 계간사상, (서울: 사회과학원, 2003), p ) 이 논쟁은 Teiwes(2001), pp.69-82; Frederic C. Teiwes, "The Paradoxical Post-Mao Tradition: From Obeying the Leader to 'Normal Politics',"The China Journal, No. 34(July1995), pp.55-94; Joseph Fewsmith, "The New Shape of Elite Politics," The China Journal, No.45(January2001), pp.83-93; Fewsmith,"Elite Politics," in Merle Goldman and Roderick MacFarquhar(eds.), The Paradox of China's Post-Mao Reform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p.47-75; Jonathan Unger(ed.), The Nature of Chinese Politics: From Mao to Jiang (Armonk: M. E. Sharpe, 2002); Joseph Fewsmith, Elite Politics in Contemporary China (Armonk: M. E. Sharpe, 2002). 14) 정상정치(Normal Politics)는 비록 중국정치에서 파벌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 를 갖지만 개혁기에 들어 중국정치는 크게 변했다. 즉 중국정치도 다른 국가의 정치, 즉 정치엘리트들이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에 반영하고, 국민들로 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정치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 해가고 있고, 그래서 중국정치도 정상정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Frederic C Teiwes, "Normal Politics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The China Journal, No. 45(January 2001), pp.69-82; Teiwes(1995), pp ) 중국에서 아직 정상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에 따르면 비록 개혁기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지만 중국정치는 여전히 승자독식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파벌에 기초한 비공식정치(Informal Politics)가 법과 제도에 기초한 - 8 -

18 디트머(Lowell Dittmer)도 개혁기 중국의 비공식정치에서는 파벌정치가 중요하며 또한, 법치( 法 治 )가 아닌 인치( 人 治 )의 영향으로 강한 지도자에 의한 통치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예로 퇴진제도 는 도입되었지만 지도자 선출은 여전히 장막 뒤에서 진행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후계자의 정치적 기반, 특히 대중적 기반이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대부분 후계자들이 정치투쟁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던 것도 그들의 정치적 운명이 자신을 낙점해준 사람들의 선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후계자로 지명되어 권력승계에 성공한 경우는 후 진타오가 유일하다. 따라서 이번 제16차 당 대회와 제17차 당 대회만을 가지고 권력승계가 순탄하게 진행 될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다. 이처럼 권력승계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치열한 논쟁을 통해 전개되고 있으며 아직도 어느 입장의 논의가 권력승계를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없고 여전히 이 두 가지의 견해가 대립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권력승계과정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논의들 즉, 제도화되 었다고 보는 견해는 한번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 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영향을 준 요인을 표 면적으로 나타난 공식 비공식 규범 및 법에 의한 통치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퇴진제도에 관해서만 적용 될 뿐 지도자 선출은 여전히 장막 뒤에서 진행되고 있는 점을 간과 하고 있다. 이는 권력승계가 표면적으로 는 평화롭게 이양되어 타협과 합의를 통해 이루어 졌지만 지도자의 선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화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은 여전히 중국에서의 비민주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향후 언제든지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정치적 갈등 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아직도 비공식 공식 정치(Formal Politics)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Fewsmith(2001), pp.83-93; Fewsmith(1999), pp

19 정치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견해는 비공식정치 부분이 점차 변화하 고 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과거에는 비공식정 치 부분이 권력승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더 이상 중 국에서의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 라 많이 변화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승자 독식의 원리에 따라 중국정 치가 작동했으나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그리고 후진타오의 시기로 넘어오면서 파벌에 기초한 비공식정치 부분이 점차 변화되고 있음을 설명 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 논문은 안정적인 권력승계의 요인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서 살펴보고자 했다. 중국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의 요인을 공식 비공식 규 범 및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닌 지도자의 카리스마 약화와 지도부 내 정책 노선상의 의견대립의 축소라는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이와 같은 요인으로 파벌의 약화와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이 나타나 기존의 연구들이 설명해 내지 못한 중국에서의 권력승계는 안정적으로 나타났음 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20 제3절 연구방법 및 논문의 구성 본 논문은 안정적인 권력승계과정에 영향을 미쳤던 주요 변수들을 지도 자의 카리스마의 약화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축소라는 것으로 상정하고 이로 인해 파벌의 약화와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이 나타 났음을 설명하였다. 즉, 요인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나타난 현상을 설명 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지도부 내부의 변화과정을 통해서 신 중국건설 이후 의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의견대립의 축소로 인해 나타난 파벌의 약화와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 최상부층의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기존의 중국의 정치엘리트에 대한 자료 및 기존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중국의 엘리트 정치에 대한 분석은 중국 정치 및 문화와 조직의 특수성, 고위급 지도자의 임면 과 해면의 과정과 같은 주요 사안에 대한 투명성 부재, 권력승계에 대한 기본적 자료의 미비 등으로 인해 연구의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중 국 최고지도부의 선출과정 및 지도자들 간의 실제 관계 등 주요 연구측면 에 대한 실상은 극히 일부만이 외부에 알려져 있는 실정이다. 결국 자료 의 문제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중국정치의 투명성 부재라고 할 수 있 다. 그래서 본 논문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중국정치엘 리트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 및 한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했 다. 이와 같은 연구의 한계로 인해 본 논문은 중국의 정치엘리트 연구와 권력승계 연구에 관한 자료의 수집 및 정확성 판단을 위해 다양한 출처를 사용하였다. 끝으로 본 논문의 내용 구성은 위와 같은 기존연구 검토 및 한계를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1장은 왜 제16차 당 대회에 이어 제17차 당 대회에서도 안정적인 권력 승계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와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 친 요인을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의 약화 내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재, 그리고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대립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요인으로

21 상정하고 권력승계에 대한 기존의 시각과 논쟁, 그리고 연구방법 및 논문 의 구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제2장은 마오쩌둥 시기에는 지도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대립이 사회주의와 근대화를 이루는 방식을 둘러싼 갈등의 심화로 그 차이의 정도가 매우 컸기 때문에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마오쩌둥 자신의 강한 카리스마는 자신과 의 의견이 다른 집단들을 제거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정책상의 대립 역시 지도부 내부와 사회간에 심각한 분열을 발생시켜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함 에 있어서도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이 로 인해 나타난 파벌과 집단지도체제의 현상을 설명하였는데, 전자는 권 력을 유지 획득하기 위한 비공식집단의 개념이었으며,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력과 강한 카리스마, 권력승계에 대한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파벌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마오쩌둥의 권력을 능가하지 못했으며 이 시기의 파벌은 절대권력자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 는 현상을 보였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후자는 형식적으로 집단지 도체제라는 것을 형성하고는 있었지만 이것이 실질적으로 정책을 결정하 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라 마오쩌둥 개인의 절대적 권력을 더 욱 강화시켜주는 도구로 작용했음을 설명하였다. 즉 마오쩌둥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이와 같은 집단지도체 제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이는 결국 마오쩌둥의 1인 지배체제를 의미하며,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아주 작은 것에 불과 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제3장은 덩샤오핑시기에는 이전의 마오쩌둥과는 다른 형태로의 카리스 마가 나타났다. 즉,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이용하기 보다는 각 집단들 간의 대립에 있어서 계속 최고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는 마오쩌둥 이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자신과의 의견이 다른 집단을 제거하는 데 사용 한 반면 덩샤오핑의 카리스마는 집단들간의 갈등을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

22 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또한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를 시기별로 구분해서 살펴보았다. 첫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시기 는 개혁 개방에 따른 경제정책과 관련된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둘째, 자오 쯔양과 리펑( 李 鵬 ) 시기는 경제개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체제 개혁의 논쟁으로 변화되었으며, 셋째, 장쩌민과 리펑 시기는 개혁 개방이 심화되면서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으로 점차 변화되었음을 설명하였 다. 덩샤오핑시대 역시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강한 카리스마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는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이루는데 불안정한 요인 이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나타난 파벌과 집단지도체제의 현상을 설명하 였는데 전자는 마오쩌둥 시기와는 다르게 한 파벌이 다른 한 파벌에 우위 를 점해서 완전하게 패배시켜 제거한다는 쩌우(Tong Tsou) 교수의 파벌 개념을 약화시키고 타협을 통해서 즉, 파벌싸움에 진 다른 파벌과 타협을 통해서 정치적 안정을 꾀했음을 설명하였다. 이는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 로 파벌이 존속하기는 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파벌이 진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후자는 이전과는 다르게 1982년 당장에 집단지도체제 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실질적인 집단지도체제가 성립하는 계기를 마련하 게 되었으며, 이는 집단지도체제의 구축이라는 과도기적 조치를 통하여 덩샤오핑 자신이 권력승계의 제도화를 도모하고자 노력했으나, 마오쩌둥 과 마찬가지로 권력이 개인에게 지나치게 비대화 되어 있다는 점, 당의 절대적인 정치지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 당내 민주주의가 결여된 가운데 정치의 불투명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 등에서 실패로 돌아갔 음을 설명하였다. 제4장은 개인적 카리스마가 이전 두 지도자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장쩌 민은 경제우선주의로 인해 손상된 사회주의 문화의 재건과 인치에서 법치 로의 제도화를 통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통성과 합법성 수립에 노력한 점을 설명하였다. 또한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도 이전과는 다 르게 보수파와 개혁파간에 경제개혁에 있어서 개혁 개방의 확대와 속도의

23 문제, 그리고 소유제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개인의 카리스마의 약화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가 줄어든 것-이전과는 다르게 서로 정책지도자들 간에는 지속적인 경제발 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방법상의 차이만 존재했는데 이는 정책지도자들간의 정책노선상의 차이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변화된 것 을 설명하는 것이다-은 안정적인 권력승계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장쩌민 시대의 파 벌과 집단지도체제의 현상을 설명하였는데 장쩌민 시기에 나타난 파벌은 제14차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인선 결과로 보았을 때 개혁파의 승리 로 나타났으며, 이는 개혁 개방의 속도에 제동을 걸어온 보수파를 중앙인 사에 과감히 제외시킨 한편, 정치적 개혁까지도 주장했던 후야오방과 자 오쯔양계 개혁파의 재기를 차단하여 정치적 갈등의 소지를 없애려 했으 며, 친 덩샤오핑계 인사 및 장쩌민, 주룽지( 朱 鎔 基 ), 우방궈( 吳 邦 國 ) 등을 잇는 상하이방이라는 파벌이 등장하게 되었음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시 기의 파벌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기보다는 지속적인 경제성 장으로 인한 발전을 위해 다른 파벌과 협력하였기 때문에 이전처럼 권력 투쟁의 형태로 나아가지 않았음을 설명하였다. 이는 이전의 파벌과는 다 르게 파벌정치의 약화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집단지도체제에 역시 권력의 과도한 집중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덩샤오핑의 기본 인식하에 확 립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러한 집단지도체제는 1970 년대 말 덩샤오핑 복권이후 계속해서 중국지도체제의 기본형식을 이루어 왔음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 강력한 1인체제가 무너진 이후 다른 1인체제가 구축되기 이전까지의 과도기에 출현한 과도기적 성격을 띠는 집단지도체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특히, 1992년과 1993년 사이에 확립된 제2기 장쩌민체제 하에서의 최고 결정기관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구성원 7인의 상호분업적인 역할과 권한이 제 도화됨으로써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음을 설명하였다

24 제5장은 장쩌민으로부터 불완전한 권력승계를 받은 후진타오는 이전의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카리스마보다 매우 약하다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부족한 카리스마 때문에 정치개혁 및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인치에 의해 이루기 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설 명하였다. 또한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 역시 이전과는 다르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의 문제로 발생했으며 이는 이전의 대립과는 다르게 지도자들간의 정책적 대 립이 매우 작게 나타났음을 설명하였다. 이는 향후 있을 제5세대의 안정 적인 권력승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정책결 정을 지도자 개인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파벌간의 타협과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인으로 인해 나타 난 파벌과 집단지도체제의 현상을 설명하였다. 후진타오 시대의 파벌은 각 파벌들이 권력을 공유함으로써 파벌간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을 초래하 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특히 제17차 당 대회에서 나타난 권력승계 는 파벌간의 타협과 합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장쩌 민 시기의 파벌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대립보다는 중국정치체제의 안정 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각 파벌들간의 타협과 합의를 통해 지도자 를 선출한 것처럼 후진타오 역시 파벌들간의 대립보다는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으며, 향후 중국정치에서 파벌의 강화현상이 감소하고 집단지도체제의 강화가 나타남을 설명하였 다. 또한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은 기존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9명으로 늘어난 데에 있으며, 이는 좀 더 세분화 되고 다양한 집단지도체 제의 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정 및 당무 처리에 있어서 다수인의 공동으로 참여하는 집단지도체제의 제도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제6장은 결론 부분으로써 향후 중국에서 최고지도자간 권력장악을 위한 대립 보다는 각 파벌간 타협과 합의를 통해 정책결정 및 국가 주요사안이 논의될 것임을 조심스럽게 예측했으며, 향후 중국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승

25 계는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 약화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차이가 크 지 않은 요인에 의해서 계속 유지될 것이며, 이로 인해 나타난 파벌의 약 화와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은 중국의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향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예측하였다

26 제2장 파벌의 형성과 권력투쟁의 전개 지난 제16차 당 대회에 이어 이번 제17차 당 대회에서도 안정적인 권 력승계를 이루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카리스마 약화와 지도부 내 정책노 선상 대립의 차이가 작아진 요인 때문이며, 이로 인해 파벌의 약화와 집 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이는 지난 과거와는 달리 권력승계과정에서 각 파벌간의 대립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타났던 심 각한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1세대, 즉 마오쩌둥 시기에는 지도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 즉, 사회주의와 근 대화를 이루는 발전방식을 둘러싼 갈등의 심화로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이 룰 수 없었다. 먼저 마오쩌둥의 카리스마를 살펴보면 마오쩌둥은 중국 정 권 수립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90년대에 들어서도 중국 농촌의 많은 지역에서 마 오쩌둥은 여전히 신격화된 지위를 갖고 있다. 마오쩌둥 저서의 수집과 각 종 기념활동이 거행되고 있으며 마오쩌둥 사상과 그의 생전의 공로와 과 실을 새롭게 학습하는 그룹까지 나타나고 있다. 마오쩌둥 생전에 받았던 맹목적인 숭배는 그가 혁명에 성공한 역사적 지위와 관련된다. 옥센버그 (Michel Oksenberg) 같은 학자는 마오쩌둥의 정치 권위 획득의 과정을 변증법적인 발전모델로 개괄하면서, 부하들의 분할 통치, 중요문제의 장 악, 지도자 이미지의 탁월한 운용, 또한 정책결정에 대한 대중매체의 적 절한 이용, 인사임명과 군사 부분의 중시 등 16) 을 주요 요인으로 꼽고 있 다. 17) 그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 Michel Oksenberg, "The Political Leader," in Dick Willson(ed.),Mao Tse-tung in the Sales of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pp ) 강준영 박기철, 포스트 등소평시대의 중국식 사회주의: 강택민 권위수립의 제약요인 분석, 중국학연구 제14권 (1998), p

27 첫째, 마오쩌둥은 부하들에게 분할 통치술을 사용했다. 마오쩌둥은 통치 엘리트를 제1선과 제2선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어떤 때는 이 두 그룹이 동시에 다른 정책노선을 추진하도록 함으로서 상호경쟁적인 분리와 통치 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저우언라이( 周 恩 來 )는 외교관계 를 책임지게 되었으며, 류사오치, 펑전( 彭 眞 ), 덩샤오핑은 조직을, 그리고 천윈( 陳 雲 )과 이셴녠( 李 先 念 )은 경제를 천보다( 陳 伯 澾 )와 장춘차오( 張 春 橋 ) 는 이데올로기를 관장하였다. 50년대 중반 이후 마오쩌둥은 점차적으로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제1선의 지도노선이 자 신의 사회주의관과 편차가 있다고 판단하여 제2선의 지도자 즉, 린뱌오, 천보다, 장칭( 江 靑 )등을 동원하여 제1선을 와해시켜버렸다. 둘째, 마오쩌 둥은 줄곧 중요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외교 및 농촌 사업과 농민혁명의 경험은 마오쩌둥에게 농업정책을 가장 중요시하 게 하였으며, 자신이 문예와 문화에 대한 흥미와 개입,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운용에 대한 특수한 인식이 이를 편애하게 하였다. 또한 중국공산혁 명의 化 身 으로 마오쩌둥은 항상 외부적으로 중국을 대표했다. 셋째, 마오 쩌둥은 항상 자기의 지도자적 이미지 형상 수립에 매우 신경을 써서 일반 민중으로부터 경외심을 이끌어냈다. 즉, 과거 전제왕조의 통치술을 적절 히 이용하여 인민이 자신에 대한 존경과 추앙심을 극대화시켰다. 넷째, 마오쩌둥은 줄곧 대중매체와 인사 및 군사권의 통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중요정책의 결정에 있어 발언권을 유보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또 대중매체와 인사 및 군대의 통제에 상당히 민감하였다. 특히 권력투쟁이 심화되면 자신을 지지하는 군대를 주변으로 이동시키곤 했으 며, 인민일보 사설을 집필하는 등 여론의 선도에도 재능을 보였다. 18) 하지만 마오쩌둥은 자신의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하면서 생애를 마감 한 것은 아니다. 즉,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책들을 스스로의 권력과 권위만으로는 추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비록 마오쩌둥 자신이 권 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다른 정책 지도자들간의 정책노선상의 대립이 자 18) 강준영 박기철(1998), pp

28 주 발생하였고 이 대립은 결국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들을 과감하 게 제거하게 되는 현상을 초래했으며,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도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마오쩌둥 시기 정책노선상의 대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9년 이 전 중국공산당은 때로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때로는 특정 정책을 둘 러싸고, 그리고 때로는 권력 그 자체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어온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내부적 책략, 주 요 당 조직(정치국과 같은)회의에서의 투표, 그리고 패배자의 숙청과 이 들에 대한 비판운동 등 다양했다. 정시소비에트 시기 마오쩌둥도 당 지도 부가 소련 추종자들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다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동 안 감금당한 적도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국가 지도부는 상대적으 로 통일되어 있었으며, 사회(기존의 사회 경제적 엘리트들까지도 포함하 여)는 온건하고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공업화와 농업생산합작사를 추진하 는 과정에서 지도부 내에(즉, 두개의 노선 과 정부 기구 간에), 사회 간에 (대약진의 재앙, 부패와 대약진 후의 조정, 문화대혁명, 덩샤오핑주의적 개혁 등을 둘러싸고)심각한 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 는 점차로 갈등적인 환경에서 정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중 국의 사회와 경제를 자신의 신념에 따라 만들어 갈 수 있는 정책결정을 내리기가 갈수록 힘들어졌고, 위기 대응적 정책결정에 치중하게 되었 다. 19) 1949년 이후 중국의 지도부는 첨예한 이념적 분기를 경험해 왔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두 노선간의 투쟁 (the struggle between two lines) 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921년 이후의 중국 공산주의운동과 공산당 역사 전체에서 그 유래를 찾고자 하지만, 사실 이는 대약진운동의 와중에서 권력 중심부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 한편은 류사오치를 비롯하 여 중앙집중화된 경제계획과 관료적 기술적 조직의 합리성을 신뢰하는 사 19) 마크블레처 지음, 전병곤 정환우 옮김, 반조류의 중국 (서울: 돌베개, 2001), p

29 람들이다. 다른 한편은 마오쩌둥을 비롯해서 대중동원과 자력갱생적 지방 공동체를 통한 경제 발전에 관심이 있고 사회 정치 조직 생활에서 대중의 참여와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다른 노선은 정치 스타일 에서도 차이를 보여준다. 류사오치주의는 안정적인 행정 및 점진적인 변 화를 신뢰하는 반면, 마오쩌둥주의는 이보 전진과 일보 후퇴, 즉 일단 급속하고 심지어는 잘못된 정치적 공격을 통해 무기력성을 극복하고 난 뒤 처음의 오류와 성급함을 다시 수정해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마오쩌둥 시기에 이 노선간의 차이는 여러 차례에 걸쳐 드러났다. 1955년 마오쩌 둥은 신속한 농업생산합작사화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사 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이고 부농을 흡수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류사오치와 그의 동료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농 업기계화가 어느 정도 진척된 다음에나 농업생산합작사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속도를 조정할 것을 촉구했다. 20) 이러한 마찰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무대를 제공했다. 즉, 어떻게 사회주의와 근대화 라는 목표를 이룰 것인가라는 발전방식을 둘러싼 정책노선상의 갈등이 점 차 첨예하게 대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마오쩌둥 자신의 강한 카리 스마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집단들을 제거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정책노선 상의 대립 역시 지도부 내부와 사회간에 심각한 분열을 발생시켜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 절에서는 이와 같은 요인으로 나타난 현상들, 즉 파벌과 집단지도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았다. 20) 마크블레처(2001), p

30 제1절 비공식집단으로서의 파벌 신 중국 건설이후 초기에 나타난 파벌은 각 집단의 정책적 차이와 집단 의 권력적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정책적 차이 는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마오쩌둥을 비롯 해서 대중동원과 자력갱생적 지방공동체를 통한 경제 발전에 관심이 있고 사회 정치조직 생활에서 대중의 참여와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사람들-린뱌 오,사인방( 四 人 幇 ) 등-과 류사오치를 비롯해 중앙집중화된 경제계획과 관 료적 기술적 조직의 합리성을 신뢰하는 사람들-덩샤오핑, 천윈, 펑더화이 ( 彭 德 懷 ) 등-과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사회주의와 근대화라는 목표를 이룰 것인가라는 발전방식을 둘 러싼 정책노선상의 갈등이 점차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갈등 의 원인은 우선 구조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즉, 새로운 제도 들이 점차 관료화되면서 지도자 개인과 그 지도자가 속한 기관의 결속력 이 강해지고 이해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관료조직 간의 부분별 갈등이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관료집단간의 갈등은 정책결정 및 수행의 성격에 따라 또한 의사소통의 구조적 수직적 위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중국의 정 치구조 속에서 더욱 심화되어 갔고, 이러한 관료정치와 경쟁의 결과 대약 진 21) 이라는 급진적인 정책을 낳게 되었다. 22) 21) 대약진이란 사회주의건설사업의 대약진 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경제사업 의 대약진 이며, 사회적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이었다. 1958년 6월 5일자 인 민일보 사설에 따르면 사회발전의 근본문제는 생산문제이며 사회적 생산력을 부단히 발전시키는 문제이다. 1958년은 공 농업생산 및 기타 각종 건설사업의 대약진의 1년 이라고 규정되었다. 6월 14일자 인민일보 사설에 의하면 중국 은 대단히 빠른 속도의 전진을 통해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만큼의 생산력 대발 전이라는 멋진 국면을 출현시켜 1년이 20년에 맞먹는 위대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약진이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생산력의 대발전을 실현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고지마 도모유끼 저, 백완승 장미희 역, 중국정치와 대중노선 - 대중운동과 마오쩌둥, 중앙 및 지방의 정치동태- (서울: 논장, 1989), pp

31 하지만 대약진 운동은 결국 중국에 경제적 인간적 재난과 마오쩌둥의 정치적 기반 붕괴를 초래하면서 1960년에 그 막을 내렸다. 또한 대약진 은 농민과 공산당 사이의 상호불신과 반감이라는 유산을 남겼으며, 권력 엘리트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이후에 전개되는 분열과 혼란의 역 사적 기원이 되었다. 이는 대약진 이후 파벌의 형성이 정책적 차이에서 집단의 권력적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대약 진과 과열된 인민공사화운동을 비판한 루산회의 23) (1959년 7월-8월 개 최)를 통해서 당시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장인 펑더화이가 대약진 정책, 특히 추진속도와 과장된 생산수치, 그리고 공사프로그램을 비난하 였고 당의 정책을 비난하는 과정 24) 에서 회의의 초점을 펑더화이를 비판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쇠퇴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펑더화이와 그 추종자들에게 반당파 를 조직 했다는 혐의를 씌워 숙청했으며, 린뱌오가 펑더화이의 후임자로 선출되었 22) 대표적인 시각으로는 David Bachman, Bureaucracy, Economy, and Leadership in China: The International Origins of the Great Leap Forwar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23) 江 西 省 盧 山 에서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개최된 중앙정치국확대 회의와 8월 2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8차 전체회 의(8기 8중전회)를 통칭한다.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는 중앙의 책임자(천윈 덩샤오 핑은 건강상의 원인으로 참가하지 않았음), 각 성 시 자치구의 책임자 및 국무원 과 工 交 財 務 각 부문의 책임자가 참가했다. 주요 의제는 1958년 大 躍 進 이래 경 제영역의 경험교훈을 총괄하고, 지속적으로 좌 적 오류를 교정하는 것이다. 중앙 위원회는 매년 개최되는데 이때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전원이 참석하는 것이 원 칙이다. 8기 8중전회에는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191명 중 147명이 참석했다. 주 요 의제는 1959년 국민경제계획의 집행정황을 검사하는 것과 펑더화이 동지를 우두머리로 한 우경기회주의 반당집단 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강명화, 1959년 盧 山 會 議 시기 彭 德 懷 의 대약진 인식과 中 國 共 産 黨 의 대응, 中 國 近 代 史 硏 究 會 第 26 輯 (2005), p ) 1959년 7월14일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고, 7월 16 일 마오쩌둥은 이것을 彭 德 懷 同 志 的 意 見 書 라는 제목을 친필로 써서 이를 전당 에 배부하였다. 강명화(2005), p

32 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위신 역시 추락했으며, 회의에서는 마오쩌둥을 대 신해 류사오치를 국가주석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과정 없이 류사오치가 중국공산당의 당권 을 장악하게 된 배경은 마오쩌둥이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 사회주의노선 의 총노선 그리고 인민공사의 삼면홍기운동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모든 권한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5) 그러나 대약진 이후 나타난 현상의 중요성과 해결책을 둘러싼 지도부 내의 갈등은 중국 전체 사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문화대혁명 26) 을 폭 발시키는 갈등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1966년 5월부터 시작된 문 화대혁명의 원인 가운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하였지만 크게 보면 파벌투쟁의 연장선에서 보는 시각과 마오쩌둥이 스스로 위대 한 혁명실천가 로서 이른바 자산계급의 상층문화 건설 을 타도해야 할 필 요성 때문에 발동한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일찍부터 대중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류사오치와 의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게 된 일련의 갈등 때문에 그를 제거해야만 하였 고 따라서 문화대혁명은 파벌 투쟁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960년 11월 당의 중앙위원회는 류사오치의 제의에 따라 마 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된 인민공사운동을 사실상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농촌인민공사 당면의 정책문제에 관한 긴급지시 를 각급 지방당위원회에 25) 송영우, 중국 정치권력의 변동, 중국연구 第 16 輯 (1997), p.9. 26) 현대 중국 정치사에서 無 産 階 級 文 化 大 革 命 (The Great Culture Revolution of Proletariat)만큼 전국적으로 충격과 혼란을 야기 시킨 사건은 없었다 년부터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 은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추진한 사회주의 개조( )와 사회주의 건설( )시기에 노정된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을 마오쩌둥의 통치 철학적 입장에서 해결해 보려는 노력으로 도 볼 수 있으나, 그 결과 당, 국가, 인민에게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 왔으며 대혼란만을 초래했던 것이다. 文 化 大 革 命 으로 인해 중국사회의 정치, 경제 및 사 회 전 부문에 걸쳐서 파국적인 상황은 중국의 전통적 가치 및 사회주의 가치체 계에 대한 인위적 전복을 의미하였다. 최관장, 中 國 文 化 大 革 命 ( )에 관한 硏 究, 중국연구 第 25 券 (2000), pp

33 시달하였다. 류사오치의 이러한 인민공사의 조정 및 완화조치는 당중앙의 펑전( 彭 眞 ), 천윈, 루딩이( 陸 定 一 ), 보이보( 薄 一 波 ), 진의( 陳 毅 ), 후차오무 ( 胡 喬 木 ), 양상쿤( 楊 尙 昆 ) 등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아 취해졌다. 마오쩌둥 중심의 파벌과 류사오치 중심의 파벌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이 실패한 정책들을 수정하며 권력의 중심이 자기측(류사오치)에 있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당권을 빼앗긴 마오쩌둥은 그것을 좌시만하고 있지 않았다. 역시 마오쩌둥은 빼앗긴 당권을 탈취하기 위해 또 다른 사건을 마련하였다. 그 사건은 바로 문화대혁명 이다. 27) 문화대혁명 이후 당의 최상부층에서는 세 가지 세력이 경합하게 되었는 데, 하나는 정부조직의 지도자였던 저우언라이( 周 恩 來 ), 다른 하나는 린뱌 오와 장칭으로 대표되는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문화대혁명의 주동자들이었 다. 전자는 무 ( 武 )를, 후자는 문 ( 文 )을 각각 지배했다. 마오쩌둥은 이 세 집단과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오쩌 둥이 당 국가의 행정을 다스릴 때는 저우언라이를, 문화대혁명의 이념적 정당화와 대중동원을 위해서는 사인방을, 그리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 해서는 린뱌오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세력들은 정치적 이해관계 면에서는 때로는 화합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상충하기도 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린뱌오와 장칭이 이해를 같이 했다. 28) 양자 모두 중 앙정치 지도자들을 제거하려 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그 직 책에 대신 끼워 넣기 위해서였다. 특히 린뱌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군내부의 요직에 앉히고 군의 영향력을 민간인 관료조직에 확 대함으로써 일종의 파벌조직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마오 쩌둥의 충실한 제자이자 사인방의 친밀한 협력자로서 줄곧 그럴듯한 선전 활동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지방수준에서 대중조직과 군부 지도자 간에 마찰이 생기자 이 두 세력의 이해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중국인들로부 27) 송영우(1997), p ) 이홍영 저 강경성 역, 중국의 정치엘리트-혁명간부 세대로부터 기술관료 세대로- (서울: 나남출판, 1997), p

34 터 소지식인들 이라고 불리던 장칭집단은 지방단위에서 군부세력을 장악 하기 위해 대중을 이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린뱌오는 군부 특히 지방 군 지도자들의 제도적 이해관계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린뱌 오는 급진파 홍위병을 지지하는 장칭집단의 압력과 인민해방군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지방 군지도자들의 압력 등 상충하는 두 가지 압력에 봉착했 다. 이런 딜레마에 처하자 린뱌오는 원로지도자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장 칭세력과 협력하는 한편, 동시에 수하의 숙청과정에서 생긴 공석을 놓고 장칭집단과 경쟁하였다. 장칭과 린뱌오의 불편한 관계는 저우언라이의 비중을 높여 놓았다. 저 우언라이는 사심 없는 태도 혹은 능숙한 수완 때문에 여러 가지 객관적 제약 속에서도 마오쩌둥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공정한 행정가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힘과 영향력이 허락 하는 한 당 및 행정부관료들을 보호하였고, 다른 엘리트 집단과의 이해관 계 때문에 더 이상 보호 할 수 없을 경우에도 분파이익의 옹호자가 되기 보다는 사심 없이 중재자 혹은 조정자로서 역할을 했다. 정책목표를 설정 하고 희생자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저우언라이는 확실히 분파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행동했다. 아마도 그는 행정을 맡고 있었기 때 문에 상대적으로 파벌싸움에 무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우언라이의 정치적 수완, 변치 않는 중도적입장, 핵심간부들의 신뢰와 마오쩌둥의 신 임등은 장칭집단의 사람들까지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를 존경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장칭집단 내의 과격파들은 개인적으로 저우언라이를 핵심 당원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제3의 지도자 이며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는 모두 정책결정시 매우 실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인방에 대항하여 연합을 이루 었다면 분명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29) 그러나 이들 집단들 간의 대립은 9기 중앙위원회의 구성문제를 놓고 대 립하게 된다. 29) 이홍영(1997), pp

35 1968년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당의 8기 확대 12중전회가 북경에서 열렸다. 이 회의를 결산하는 보고서에서 류사오치는 반혁명적 행위를 자 행하였기 때문에 그를 영원히 당에서 추방하고 모든 공직을 박탈하며 류 사오치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당과 국가에 대한 범죄행위를 청산할 것을 결의하였다 30) 고 밝혔다. 마오쩌둥 세력은 제1단계 문화대혁명을 마무리 짓고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제9차 당 대회를 개최하여 마오쩌둥의 정 권 탈취가 성공하였음을 확인하고 이를 공표하였다. 그러나 그 후 1976 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였다.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인해 문화대혁 명파(이하 문혁파), 마오쩌둥 추종세력 및 문혁파를 반대하는 세력간에 권력투쟁의 전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권력승계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중국정치에서 여러 세력들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을 하게 되었다. 여러 파벌이 권력투쟁을 전개하는 와중에 화궈 펑( 華 國 鋒 )등 마오쩌둥 추종세력은 10월 7일 문화대혁명의 주도 세력인 소위 문화대혁명 사인방을 체포하여 권력투쟁의 장으로부터 제거하고 당 중앙정치국은 화궈펑을 당중앙위원회 및 주석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명에 관한 결정 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10기 3중전회를 개최하여 화궈펑의 당주석 및 중앙군사위 주석 결의를 추인하였다. 류사오치, 린뱌오 그리고 왕홍원( 王 洪 文 ) 31) 등의 후계자들을 연거푸 내 30) 인민일보, ) 왕홍원의 발탁은 마오쩌둥의 낭만적 이상주의적 산물이었으나 그가 왕홍원 에게 실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1년 린뱌오의 쿠데타 미수 이후 자신과 함께 공산혁명 활동을 한 인물을 후계자로 삼는 데 두려움을 느낀 마오쩌둥은 왕홍원에게서 대안을 발견했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부상한 왕 홍원은 농촌출신에다 군 경력도 갖고 있었고, 또 문화대혁명 당시 노동자였다. 마오쩌둥이 염두해 둔 기준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의 학력을 지닌 왕홍원은 무능했으며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 했고, 그 흐름에 편승했을 뿐이다. 마오쩌둥은 1973년 그를 당 주석에 임명한 뒤 중난하이의 자신의 거처인 菊 香 書 屋 에 머무르게 하면서 직접 후계자 교육을 시키기까지 했으나 결국 1년 만에 쫓아냈다. 류동희,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36 몰았던 마오쩌둥의 죽음에 앞서 선택한 후계자는 화궈펑이었다. 마오쩌둥 은 문화대혁명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어놓았다. 자신이라는 울타 리가 사라진 다음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화궈펑은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때문 에 마오쩌둥은 사후에도 화궈펑이 자신의 노선을 충실히 이어나갈 것이라 는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확실하게 화궈펑을 후계자라고 언 명한 바는 없다. 하지만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한 이래 관 련 당사자는 물론 관측통들의 의표를 찌른 일련의 깜짝 인사는 화궈펑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의지를 드러냈다. 저우언라이가 병사했 을 때, 수석 부총리는 덩샤오핑이었다. 따라서 덩샤오핑이 대리총리, 즉 총리서리를 맡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선택은 화궈펑이었 다. 이는 덩샤오핑의 등용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파탄이 난 경제를 되살 리고 린뱌오의 쿠데타 시도 이후 경계를 늦추지 않을 수 없는 군부를 제 대로 통제하기 위해서였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 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같은 해 4월 초 저우언라이 추모 화환 철 거에서 비롯된 천안문 시위 사태 이후 화궈펑에게 당 부주석을 맡김으로 써 마오쩌둥의 뜻은 한층 뚜렷해 졌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정교한 사전 설계가 있었기에 능력과 경력 또한 중앙무대에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던 화궈펑이 그의 사후 빠른 시간 내에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할 수가 있었다. 32) 그리고 특기할 만한 것은 체제출범의 시작으로 10기 3중전회에서 덩샤 오핑의 동지직무회복에 관한 결의 및 덩샤오핑의 중앙위원, 정치국원, 정치국상무위원, 중앙부주석, 중앙군사위부주석, 국무원부총재, 인민해방 군참모장직무 회복결정 을 통과시켰으며, 또한 동시에 이 회의에서 문화 대혁명 사인방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한다는 결정 및 이들의 당내외 모든 공직을 박탈한다는 결정 을 통과시켰다. 2 노선투쟁과 세대교체 (서울: 한울, 2002), pp ) 류동희(2002), pp

37 그러나 이후 1980년 2월 23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되었던 11기 5중전 회에서는 덩샤오핑의 최측근 인사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정치국상무위 원으로 선출하고,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 여 앞으로 개최될 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3차회의에서 화궈펑을 국무원총 리직에서 면직시키고 자오쯔양을 총리로 대체한다고 결정하였다. 33) 이런 상황에서 개혁파들은 한편으로는 후야오방을 중심으로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내걸고, 정치 이데올로기 논쟁을 전개하면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비판함으로써 화궈펑의 당내 지도력을 와해시켰고, 또 한편 실무적으로 자오쯔양을 내세워 국무원의 행정력을 장악하고, 실 질적인 경제발전과 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협공을 받은 화궈펑은 1980년에 당과 정부, 그리고 1981년 에는 군부의 최고 지휘권까지 차례로 양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궈펑이 장악하고 있던 당주석직은 당 총서기제의 부활과 당주석제의 폐지로 자동 적으로 상실되었으며, 당은 자연히 후야오방 총서기 중심으로 운영되었으 며, 국무원 총리직도 역시 1980년에 자오쯔양으로 교체되었고, 1981년에 는 화궈펑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덩샤오 핑에게 양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4) 결국 1981년 6월 27일부터 29일까 지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를 통해 후야오방을 당주석으로 화궈펑을 주 석에서 부주석으로 또 화궈펑의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직케하고 덩샤 오핑을 당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1982년 9월 12일과 13일에 개최된 12기 1중전회에서 화궈펑은 모든 주요 당직을 상실하고 중앙위원회 평위원직만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덩샤오핑의 체제가 확 고하게 확립되었다. 물론 마오쩌둥 사후에는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오쩌둥 생전에는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권력승계 33) 송영우(1997), pp ) 서진영, 자오쯔양( 趙 紫 陽 )과 중국개혁정치의 한계, 동아시아연구 제10 호 (2005), pp

38 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마오쩌둥 시대의 파 벌은 권력을 유지 획득하기 위한 비공식집단의 개념이었으며, 마오쩌둥의 절 대적 권력, 강한 카리스마, 권력승계에 대한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파벌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마오쩌둥의 권력을 능 가하지는 못했다. 즉, 이시기의 파벌은 절대권력자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 는 현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으며 각 파벌의 협력은 존재하였으나 일시적이 었고 정치적 이해가 달라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9 제2절 마오쩌둥 1인지배 인지배 체제 당규약에 의하면 중앙위원회가 정치국 및 상무위원회 위원을 선임하도 록 규정되어 있으나, 1935년에서 197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즉, 마오쩌 둥이 권력을 잡고 있었던 시기동안 마오쩌둥은 실질적으로 위원의 선출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실제로 중앙위원 중에서 누구를 정치국원의 자리 에 앉힐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마오쩌둥의 특권이었다. 즉, 형식상의 집 단지도체제가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와 카리스 마로 인해 유명무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호운(Franklin Houn)은 마오쩌 둥이 후보자들 가운데 정치국원을 선출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일련의 일 반적 지침을 준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당내에서의 연공서열, 마오쩌 둥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였을 당시의 공헌도, 마오쩌둥과 당에 대한 충성 심과 효용성 등이 주된 근거였다. 35) 1953년 3월 마오쩌둥은 자신이 먼저 읽고 승인하지 않은 어떤 중앙당 의 문건도 그 실효가 없음을 천명했다. 1959년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 패에 대한 펑더화이의 충심어린 비판이 실질적인 권력투쟁으로 다다랐을 때에도 마오쩌둥은 가볍게 자신의 카리스마와 권위만으로 펑더화이와 그 의 추종자들을 숙청하고 어려운 국면을 수습할 수 있었다. 36) 그러나 마오쩌둥이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공산당내에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고 파벌을 이끄는 간부 또는 원로가 있다. 그 리하여 중국공산당내에는 여러 명의 원로 또는 간부들이 공존공생하며 당 을 유지하고 이끌고 있으므로 중국공산당은 실질적으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상으로는 당주석이 또는 당총서기가 당의 최고 정책결정자 같이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파벌을 대표하는 35) James C. F. Wang, Contemporary Chinese Politics,(New Jerwsey: Person Education, 2002), p ) 정재호, 중국의 정책과정 연구, 정재호 편, 중국정치연구론:영역, 쟁점, 방법 및 교류 (서울: 나남출판,2000), p

40 당의 원로들이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하므로 중국의 정치체제는 집단지도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언제나 중국의 정치권력 을 독점적으로 행사해 온 것 같아 보이지만 1950년대 및 1960년대 전반 은 류사오치 등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실질적으로 독자적인 당권의 행사가 불가능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당내에는 대중동원과 자력갱생적 지방공 동체를 통한 경제발전에 관심이 있고 사회 정치조직 생활에서 대중의 참 여와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마오쩌둥 중심의 세력과 중앙집중화된 경제계 획과 관료적 기술적 조직의 합리성을 신뢰하는 류사오치 중심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까지 마오쩌둥의 세력이 우세하였으나 류사오치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고 더욱이 류사오치는 세가 불 리하여 마오쩌둥 세력과의 불균형 상태를 뒤엎을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는 그 상황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인정하고 그 상황을 유지하였다. 그런 가운데 마오쩌둥은 1958년 8월 당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여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하나인 인 민공사의 실시를 결정하였다. 류사오치는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을 선호하 지 않았으나 공공연한 반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류사오치는 현상을 유지하고 중국적인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공존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제1단계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주도로 마 무리되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마오쩌둥이 당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측면에서 보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나 그 성공은 마오쩌둥 혼자의 힘 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군부, 문혁파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문화 대혁명 이후에도 군부 및 문혁파, 그리고 마오쩌둥 중심 세력 이렇게 세 개의 파벌이 공존하며 역시 실질적인 집단지도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와 같이 중국은 언제나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여 왔다. 그런데 이 집단 지도체제내에서 파벌간의 권력지분 또는 그 세력이 언제나 똑같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큰 힘을 얻기 위해 체제내의 파벌들은 대립하고 투쟁하고 또

41 불만족스러운 현상을 뒤엎으려 했던 것이다. 중국에 있어 당내권력의 현 상을 뒤엎는 것은 곧 정치권력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중국공산당내에 는 현상유지세력과 현상전복세력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당내 세력간의 대립 갈등은 항상 상존할 수밖에 없으며, 현상유지 세력이 우세한 세력이어서 이들의 노선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었다. 즉, 이들이 추진하는 정책이 계속 성공적으로 전개된다면 현상 전복세력은 그 들의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후자는 우선적으로 전자가 추 진하는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필요한 경우 반응한다. 집단지도체제하 에서 현상을 전복하려는 세력은 현상유지세력의 정책이 실패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그 정책을 비판하고 공격하여 상대방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다. 1958년 펑더화이 등이 마오 쩌둥에 의해 추진되었던 인민공사의 실패를 공격한 것은 현상유지세력인 마오쩌둥 등을 공격하여 정치권력의 현상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다. 37) 결국 이 같은 공격은 마오쩌둥의 권력기반을 쇠퇴시켰으며 마오쩌둥을 대신해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지도부내에서의 인 민공사의 해결책을 둘러싼 지도부 내의 갈등은 중국 전체 사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해 문화대혁명을 폭발시키는 갈등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이렇 게 발생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자신의 권력기반을 되찾기 위한 파벌간 의 투쟁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 시기 에도 형식적으로나마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는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 이후의 시기는 린뱌오와 장 칭, 그리고 저우언라이의 파벌간의 영향력의 차이는 있었으나 여전히 상 호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9차 당 대회에서 린뱌오의 군부파가 다른 파벌에 비해 득세하 였으나 문혁파와 온건파가 여전히 중앙위원과 정치국 위원에 직책을 유지 하고 있었다. 38) 37) 송영우(1997), pp ) 송영우 외 공저, 중국학 개론, (서울: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 p

42 그러나 제9차 당 대회 이후 체제의 실질적 지도력은 당이 아니라 마오 쩌둥 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당의 권력기구들은 정기적으로 소집되지 않았고 당의 규범이나 규율 등은 마오쩌둥의 필요나 편의에 의해 변형되 었다. 마오쩌둥을 위시한 일부지도자들이 당장과 같은 공식적 규약이나 제도적 틀에 별다른 제약을 느끼지 않음에 따라 당내의 정상적인 업무 절 차나 질서가 지켜지지 않게 되었고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정치국이나 정 치국 상무위의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소수의 지도자에 의해 결정되었 다. 39) 그 결과 당 간부나 당의 이름으로 정책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정책이 반 드시 조직으로서 당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종종 공개적으로 당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개인적 이익이나 지방의 이 익을 추구했다. 이와 함께 관료주의도 극성을 부렸다. 당과 그 서기에게 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형식주의가 심화되고 비효율이 초래되었다. 결정된 정책은 현실과 괴리되었고, 문서들은 끝없이 회람되었으며, 책임은 이 사 람에게 저 사람에게로 계속해서 전가되었다. 40) 당의 권력 독점은 다시 개별 지도자에 의한 권력독점으로 발전했다. 당 위원회 내에서 모든 결정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론적 규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권력은 점차 소수 지도자, 특히 다 양한 수준에서 당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최고 지도자 개인의 수중으로 집중되었다. 41) 특히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정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불확실성이 높 아지는 한편 정치적 주역들이 생존 가능성이 위태로워지자 견제를 추구하 는 행동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42) 결국 문화대혁명은 더 이상 당을 통제 39) 김재철(2002), p ) 김재철(2002), pp ) 김재철(2002), p ) 새무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문명의 충돌 (서울: 김영사, 1997), p

43 시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였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시기는 당과 정 부의 실질적인 권한이 약했으며, 모든 정책결정은 마오쩌둥 개인에게 집 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차이가 심했기 때 문에 마오쩌둥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실권을 잡고 있을 때 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의 차이가 심할 때에는 이와 같은 집단지도체제가 큰 의미를 가질 수는 없었으며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4 제3장 신( 新 )후계구도의 등장과 좌절 덩샤오핑시기 역시 지도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 차이의 정도가 커서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이루지 못했다. 물론 카리 스마는 마오쩌둥과는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다. 즉, 마오쩌둥의 카리스마 는 자신의 절대권력에 기초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덩샤오핑의 카리스마는 다른 집단들과의 중재자 및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 고, 정책노선상의 대립도 이전과는 다르게 개혁 개방으로 인해 나타난 사 회주의냐 자본주의냐의 문제로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비록 덩샤오핑의 카리스마는 이전의 지도자에 비해 약해졌지만 그의 영 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덩샤오핑은 1989년 중공 13기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서 물러나면서, 제2세대 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이며 개혁 개방의 總 說 計 師 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덩샤오핑의 당내경력이나 지위가 그보다 앞서 정치국에 진 입한 천윈과 펑전보다 높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샤오 핑이 1977년 세 번째 복권 후 최고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 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인의 문화대 혁명과 정치운동에 대한 반감이 문화대혁명 최대의 피해자 중 한사람인 덩샤오핑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덩샤오핑과 사인방의 힘겨루기에 나 타난 그의 실용주의적인 태도는 그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사망 이후 중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후계 지도자감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둘째, 덩샤 오핑은 마오쩌둥과는 다른 리더십을 모색하였다. 그는 마오쩌둥의 가부장 적인 영도방식이 문화대혁명의 재난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임을 친히 체험 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다른 원로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구했다. 셋째, 덩샤오핑도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파벌의 위에 군림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분리 통치술과 파벌간의 상호견제를 통해 권위를 확보하는 방식과는 다른 양상

45 을 보였다. 사회주의 공유제의 기초를 전제로한 시장경제 개혁이 당내에 서 불가피한 논쟁을 초래하는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여전히 급진개혁파와 신중개혁파간 갈등의 주요한 중재자였으며 조정자였다. 예를 들어 경제특 구 문제와 관련하여 1983년 중국지도부에서는 매우 심각한 논쟁을 벌여 졌고, 당시 천윈은 경제특구에 대한 공개적인 견해를 유보하였다. 이에 덩샤오핑은 1984년 1월과 2월, 친히 경제특구를 시찰하면서 특구를 지지 하는 주장을 하였다. 또 후야오방이 1987년에 총서기직에서 파면된 후, 반자산계급자유화 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총서기직을 이어받은 자오쯔양 이 반자산계급자유화 투쟁의 左 傾 경향을 알리자, 덩샤오핑은 직접 나서 당시 보수세력의 리더였던 덩리췬( 鄧 力 群 )의 기세에 타격을 입히면서 경 제개혁과 이념이라는 두 가지 핵심 지도권을 스스로 전면에 나서 장악하 기도 하였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조정자적 성격에 따라 일선 지도자들은 언제나 덩샤오핑의 지지가 필요했다. 즉, 덩샤오핑은 서로 다른 파벌간 갈등의 중재자로 그리고 이 파벌들의 정치권력의 원천으로 충실한 조정자 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덩샤오핑의 지도적 지위는 그가 거친 특수 한 역사적 상황과 그 개인의 지도자적 자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43) 또한 정책노선상의 대립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오쩌둥 시기와는 다 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패리스 장(Parris Chang)에 의하면 1976년 사인 방 체포 이후 고위간부들 사이에 두 개의 연합 또는 정치적 그룹이 등장 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는 범시파( 凡 是 派 ) 라 불리는 그룹으로서 마오 쩌둥 신봉자였던 정치국원과 문화대혁명 당시 사인방과 연합했던 인사들 로 이루어진 파벌이었다. 화궈펑이 바로 이 범시파 의 상징적인 리더였 다. 두 번째 파벌은 실용주의적 그룹으로서 덩사오핑이 주도하고 있었고 정치국 내의 원로 간부들과 북부지역의 군부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 다. 44) 43) 강준영 박기철(1998), pp ) 제임스 왕 지음, 금희연 옮김, 현대중국 정치론 (서울: 도서출판 그린,

46 이러한 범시파와 개혁 개방을 중요시하는 실용주의파와의 대립속에서 1978년 덩샤오핑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당에 대한 지배력을 강 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11기 3중전회(1978년 12월)에서 덩 샤오핑은 중요한 것을 얻어냄과 동시에 양보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큰 소득이라면 자신의 심복인 후야오방을 당 총서기에 임명함으로써 당시 당 주석이었던 화궈펑의 권력을 약화시켜 후야오방으로 하여금 당무를 관 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또 하나의 승리는 중앙위원회가 자신의 측근들을 정치국원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1978년 덩샤오핑은 개 혁파, 보수파(이데올로기적으로 좌파)와 군부들로 구성된 대연합 의 실질 적인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권력기반과 당권을 공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연합 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두 파벌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났을 때 양 쪽 파벌들을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1987년 1월 후야요방의 실각은 바로 이러한 대연합 내에서 생긴 이견이 있어왔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보수파들은 후야오방이 당 의 지시를 어긴 것에 대해 덩샤오핑이 그를 비난하자 자신들 편이라 생각 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의 실각을 방치한 것은 1978년 이래 추진되어온 개혁 개방정책을 보호하기 위한 보수파 달래기 의 일환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 다른 해석은 덩샤오핑이 후야오방 을 실각시킨 것은 바로 보수파세력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덩샤오핑 자신 에 대한 정적들의 공세를 미리 차단하려는 전략적 묘수로도 볼 수 있 다. 45) 1990년 초에는 세 파벌간의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성과 지 방의 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장쩌민과 주룽지가 이끄는 온건개혁파로 서 개혁 개방을 주장하는 젊은 그룹들이었다. 두 번째 파벌은 중국의 계획 통제경제이론가이면서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조치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 는 당시 86세의 천윈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리펑과 야오이린( 姚 依 林 )이 2000), p ) 제임스 왕(2000), p

47 이끄는 보수파 그룹이었다. 리펑과 야오이린이 주도하고 있는 파벌은 일 부 당내 원로들과 중앙의 관료조직의 일부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 파벌은 경제개혁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해결, 경제에 관한 중앙정부의 통 제 강화, 동유럽과 고르바쵸프하의 소련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가 사회 주의 체제에 미칠 영향 등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첫 번째 파벌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세 번째 파벌은 소위 좌파 또는 범시파 로 불리는 파 벌로서 주요인사로서는 당내이론가인 덩리췬을 위시하여 덩샤오핑의 개혁 에 반대하고 과거 마오쩌둥이 추진했던 어떠한 정책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불멸의 지지 를 선언한 당내 원로지도자들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덩샤오핑 시기의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차이는 개혁 개방의 폭 과 속도, 그리고 발전전략에 따른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차이처럼 크게 나 타났으며 덩샤오핑의 카리스마 역시 마오쩌둥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는 했지만 여전히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역시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음절에서는 이와 같은 요인으로 나타난 현상들, 즉 파벌과 집단지도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았다

48 제1절 파벌의 존속과 진화 이 시기의 특징은 후계자가 당 정의 제1선에서 일상업무를 담당하고 덩 샤오핑은 제2선에서 중요한 정책결정만 관여하는 라인에 의한 승계구도 였다. 이러한 제1선과 제2선의 분리시도는 마오쩌둥 시대인 1952년의 정 치국 회의에서 제안되어 1953년 시도된바 있다. 덩샤오핑이 막후에서 권 력을 행사한 점은 마오쩌둥과 다를 바 없으나 당 주석제를 폐지시키고 자 신이 공식적인 최고지도자 지위를 보유하지 않은 점은 마오쩌둥과 다른 점이다. 덩샤오핑은 이미 1979년부터 자신의 은퇴문제를 거론하였고 1982년에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진 직후 제2선으로 물러나면서 중앙서기처를 부활 시켜 자오쯔양 당 총서기로 하여금 제1선을 맡도록 했다. 그 자신은 정치 국원, 당 중앙군사위 주석, 중앙고문위원회 주석직을 천윈에게 넘기고 정 치국 위원직도 사퇴한 채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만 유지하다가 1989년 11월 제13기 5중전회에서는 군사위 주석직에서도 물러남으로써 모든 권 력을 이양한 듯 보였다. 그러나 1992년의 남순강화 46) 를 계기로 그의 권 위가 건재함을 과시하고, 1992년 10월의 제14차 당 대회에서 막강한 영 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그의 권력이 직위와 무관하게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47) 또 다른 특징은 권력승계 차원에서 중국은 소련과 달리 권력승계가 이 루어지기 전에 권력투쟁을 벌여 후계자를 결정하는 방식을 취해 왔고 덩 46)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하순 경제특구인 廣 東, 深 圳, 珠 海, 上 海 등 남부 지방을 시찰하면서 개혁 개방은 중국의 유일한 활로이며, 개혁을 행하지 않는 자는 퇴진해야 할 것이다...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채택된 개혁 개방노 선을 적어도 1백년간은 지속돼야 할 것이다 라고 발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덩샤 오핑이 행한 남순강화 라고 하는 것이다. 박치정, 鄧 小 平 이후 中 國 勸 力 構 造 의 動 態, 中 國 硏 究 第 11 輯 (1992), p ) Lowell Dittmer, China under Reform (Boulder: Westview Press, 1994), pp

49 샤오핑시대의 권력승계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후계경쟁과 연관된 것이고 장쩌민-리펑체제도 후계구 도를 덩샤오핑 死 前 에 확립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시기 역시 권력승계에 대한 절차를 확립하지 못한 체 각 파벌들간의 권력 투쟁속에서 후계자가 선출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덩샤오핑시대의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대립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서 볼 수 있다. 첫째, 제12차 당 대회(1982.9)이후 87년 1월 후야오방이 실각하기까지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시기, 둘째, 제13차 당 대회 이후인 1987년 11월부터 1989년 천안문사태 후 13기 4중전회에서 자오쯔양이 실각하기까지인 자오쯔양과 리펑의 대립으로 점철된 시기, 셋째는 1989 년 이후 장쩌민과 리펑체제의 시기이다. 첫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시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80 년 11월과 12월 중국공산당 정치국은 화궈펑을 비난하였고 그의 중국공 산당 주석직과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박탈하였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직은 덩샤오핑의 오랜 동맹자이자 청년동맹의장인 후야오방으로 대체되었 고(중국공산당 주석직은 폐지되었다) 덩샤오핑 자신은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처음 몇 달 후 수상은 덩샤오핑의 추천에 의해 쓰촨성 출 신이며 정치기업가인 자오쯔양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년 동안 덩샤오핑을 계승한 주요 경쟁자인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공업개혁과 관 련하여 두 개의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지도자는 열렬한 개혁주 의자였고, 중국 관료세계의 주요 그룹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개 혁정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서로 다른 정책선호는 그들의 정치 적 강점과 약점을 반영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갈등은 이 전에 마오쩌둥시대에는 정책적 차이와 집단의 권력적 이익을 중심으로 형 성되었던 파벌의 형태가 초기 개혁 개방시기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개혁 개 방 이후에 나타난 경제정책에 관한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시기의 파벌의 특징이다. 경제정책 에 관한 대립은 자오쯔양의 이개세에 대한 입장과 후야오방의 이윤계약제

50 의 대립이었다. 이개세 48) 에 대한 자오쯔양의 옹호는 권력승계투쟁에서 후야오방에 대한 도전자로서의 그의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공산당의 총서기로서 그리고 북경 정치엘리트의 오랜 일원으로서 후야오방은 최고지위에 대한 선두주자 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후야오방의 경쟁자로서 신중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자오쯔양은 덩샤오핑과 나머지 선택권자들에게 그가 경제개혁을 주도할 수 있고 잘 진행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총리라는 자리는 그 가 경제를 운영하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최적의 위치였다. 그 자신과 많 은 개혁성향의 경제학자들이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가장 합리적인 틀이라 고 여겼던 이개세를 추진함으로써, 자오쯔양은 총체적인 경제여건을 개선시 켰다는 공로를 인정받기를 바랬다. 49) 후야오방은 북경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의 리더 로 일하면서 쌓아놓은 거대한 지지자들의 전국적 네트워크에 의존할 수 있었 다. 그는 마오쩌둥과 같이 추진력 있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항일전 쟁동안 정치선동가로서 활약했던 그의 장점은 인민들이 행동을 하도록 추동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가 과거에는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지 만, 총서기가 된 이후로 그는 경제개혁자로서 다시 태어난 사람 이 되었다. 그의 정책선호는 종종 신속한 성과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였다. 1982년 제 12차 당 대회에서 그는 2000년까지 7100억 元 (1980년)에서 2조 8천억 元 으 로 중국의 산업과 농업생산량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비록 이 목 48)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기업이윤을 모두 국가가 환수해 재정수입으 로 삼았다. 중앙재정만 있을 뿐 지방재정은 없었다. 그러나 80년 이후 기업이윤 의 일부를 기업에 떼어주는 이윤상납제로 전환한 뒤 84년에 이윤에 세금을 매기 는 이개세( 利 改 稅 )로 제도를 바꾸었다. 매일경제, ) 자오쯔양을 전국적 지도자로 각인시킨 것은 농업생산책임제의 도입을 통한 농촌경제 활성화 정책의 성공이었다. 1975년, 아직도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사 인방을 중심으로 한 좌파의 영향이 살아 있었던 당시, 중국에서 농촌인구가 가장 많은 지방인 쓰촨성( 四 川 省 )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농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 과감한 농업생산책임제를 도입,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하 였다는 것이다. 서진영(2005), p

51 표는 매년 7.2%(과도하게 높지는 않은 비율인)의 경제성장으로 변하였지만, 성장과 동원에 대한 그의 강조는 마오쩌둥 시대의 재생이었다. 그에게서 새 롭게 발견된 개혁에 대한 열정은 심지어 중국사회로 보다 확장되었다. 후야오방의 가장 큰 정치적 자원은 그의 지지자들의 전국적인 네트워크였 다. 그는 적절한 지원을 통해 이 조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은총적 계약 은 일종의 중국식 포크 (의원이 정치적 배려를 받는 일종의 정부보조금), 즉 후야오방과 같은 정치가들이 그들의 추종자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었 다. 중국의 성공한 간부나 원로들은 대체로 그 주위에 자신의 추종자를 거느리게 된다. 왜냐하면 간부나 원로들은 그 추종자를 많이 거느려야 그 것이 세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부나 원로들이 자신의 추종세력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만 일 당의 간부나 원로들이 그의 추종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이 추종자들은 다른 추종자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간부나 원로 는 지지세력을 잃게 되어 세력 없는 간부나 무기력한 원로로 전락하게 되 고 더 나아가 원로나 간부의 지위까지 위협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 의 간부나 원로들은 그의 지지자나 추종세력을 보다 많이 거느리기 위해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의 간부나 원로들이 정치에 보다 깊이 관여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간부나 원로 들이 여러 명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각기 정치 참여의 비율을 높이기 위 해 대립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투쟁도 하며 필요한 경우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 또는 확장하기 위해 타협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행태는 몇몇 간 부나 원로들이 정치참여를 촉진하고 이것이 파벌의 존재 또는 파벌정치를 가능케한다. 50) 그러나 이윤계약제 51) 를 보편적 방법인 이개세로 대체하는 것은 자오쯔양 보다 후야오방에게 보다 많은 상처 52) 를 주었고 그는 개인적인 파벌을 잃게 50) 송영우(1997), p,17. 51) 기업은 국가에 대해 기본적 양만큼의 이윤을 제공하는 대신 그 이상의 모든 이윤은 기업이 가지는 것이다. Susan L. shirk 지음, 최완규 옮김, 중국경제개 혁의 정치적 논리 (서울: 생각의 나무, 1998), p

52 되었다. 53) 이개세와 이윤계약제 사이의 년 논쟁은 경제개혁 정책을 둘러 싸고 벌어진 권력승계 경쟁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년의 재정부 와 이개세의 예기치 않은 승리는 경제적 문제, 특히 인플레이션뿐만 아니라 중앙관료와 선발위원회 내부의 강력한 집단인 보수적 당원로에게 신임을 얻 어야 한다는 자오쯔양의 이해관계와 이러한 쟁점에 있어 보수적 집단에게 도 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덩샤오핑의 결정 또한 반영하고 있다. 54) 그러나 년에 자오쯔양이 직면한 정치 경제적 문제는 어떻게 하면 경제개혁의 여세를 유지하는지였다. 그는 자신이 매우 신중한 신개혁주의자 이지만 여전히 개혁을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1986년 여름에 덩샤오핑은 정치개혁조치들을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55) 52) 1983년 국무원은 이윤계약제 대신 이개세를 선택하는 것으로 마침내 결정 을 내렸다. 이런 결정은 재정적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놀랄만한 것이었고, 기술관료들의 생각이 선택된 지역과 기업의 혜택을 배분한다는 정치논리를 압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선택은 년 동안 진행된 경제개혁의 은총의 형태와, 그리고 확장주의적 추진의 관점에선 예외였다. 이윤계약의 승인을 추구 하던 후야오방의 실패와 자오쯔양이 찬성한 이개세의 승리는 년 동안 천윈과 다른 보수파 원로들의 힘을 반영한 것이었다. 53) Shirk(1998), pp ) Shirk(1998), pp )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표면화시킨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1986년 중반 이후 여러 차례 정치개혁 문제를 제기한다. 우선 그해 6월 그는 당 시의 경제상황에 관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정치체제의 개혁문제를 지금 다시 일정에 올려야 한다 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그는 같은 달에 열린 全 國 省 長 會 議 에 서 부정적 경향 을 포함한 많은 문제의 근원을 당의 권력독점으로 돌림으로써 당의 지도력을 개혁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러한 정치개혁의 필요성 에 대한 덩샤오핑의 적극적인 제기에 힘입어 그해 9월에 개최된 제12기 당중앙 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는 정치체제 개혁을 공식적으로 결의하기에 이른다. 이처 럼 지도부 내에서 개혁을 다시 의제에 올리려는 노력이 시작될 무렵 개혁의 속 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후야오방이 퇴진하는데, 정치개혁은 이러한 곡절에도 불구하고 1987년 10월에 개최된 제13차 당 대회의 중요의제로 채택된다. 김재철(2002), pp

53 정치개혁에 관한 덩샤오핑의 생각들은 매우 온건하였지만 그의 관심은 지 식인들을 자극하여 공공회의 및 언론에서 급진적인 민주개혁의 가능성에 대 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후야오방은 정치개혁에 대한 덩샤오핑의 발언에 고무되어 정치개혁을 지지하면서 그의 동료들에게 중국 의 민주적 미래에 관해 주저 없이 논의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 으로 자오쯔양은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이 서있지 않았으며 신중한 태도를 보 이면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지지하지 않았다. 1987년 1월초 당내 80대 원로들이 덩샤오핑에게 후야오방 당서기가 노선 을 너무 많이 이탈하는 행동을 해왔기 때문에 해임되어야 한다고 충고하였으 며 후야오방이 조장한 민주개혁에 관한 공개적인 논쟁과 1986년 12월 이러 한 논쟁에 의해 촉발된 학생들의 대규모 민주화 요구시위가 당의 통치력과 사회안정을 위협하게 되었다. 후야오방의 특정한 경제정책노선이 사임의 공 개적인 이유는 아니었을지라도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의 그의 충동적인 행동 들이 당 정치국에 의해 사임의 이유로 거론되었다. 56) 후야오방이 축출되자 권력승계 계획과 개혁운동이 혼란에 빠졌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당총서 기로 지명함으로써 개혁의 미래를 보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원로 강경 론자들은 부총리 리펑이 동시에 총리로 승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야오방 이 해임되자 권력승계경쟁은 시장개혁주의자인 자오쯔양과 중앙계획론자인 리펑이 대결하는 구도로 변하였다. 57) 그러나 자오쯔양은 총서기가 되고 나서도 총서기로서의 영향력을 발휘 할 56) 후야오방의 실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나타낸 문헌은 존재하지 않지만 후야 오방의 실각이 1986년말 학생운동에 유화적이었다는 이유로 총서기직을 박탈당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덩샤오핑의 퇴진문제 가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후야오방은 1986년 10월 당지도부를 젊게 만들기 위해 노인 들이 용퇴하자 는 덩샤오핑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정치국 회의석상에서 덩샤오핑 동지를 포함한 지도부가 곧 물러나 젊은 지도자들에게 길을 열어줄 것 이라고 발언했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발언이 자기 인물을 (당 중앙에)심으려는 권력투쟁의 신호탄으로 해석해 반격에 나섰다. 결과는 후야오방의 실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다. 한계레신문, ) Shirk(1998), p

54 수 없었다. 자오쯔양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리펑과 야오이린 등 강경보수파는 모든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자오쯔양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해 나갔다. 따라 서 후야오방의 퇴진은 자오쯔양과 덩샤오핑의 관계도 소원하게 하였고, 이것 은 상대적으로 강경보수파의 자오쯔양 등 개혁파에 대한 공격을 더욱 적극화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자오쯔양의 퇴진은 단순한 천안 문 사건에 대한 문책과 그에 따른 숙청이 아니라, 당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 고 있는 궁정식 권력투쟁 58) 즉 권력투쟁 또는 파벌정치의 한 단면이며, 개 혁정책의 심각한 변화의 조짐을 예견한 것이었다. 59) 둘째, 자오쯔양과 리펑의 시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0년대, 특히 1980년대 후반에 중국이 실천한 개혁 개방정치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대부분 자오쯔양이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테면 1987년 제13차 당 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60) 을 제창하면 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도입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론적 근 거를 제시하였고, 또한 대담한 경제개혁과 더불어 점진적인 정치개혁도 추진 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경제개 혁과 정치개혁의 관계에 대한 논쟁에서 보수파와 개혁파의 의견을 절충하여 나름대로 단계적이고 진화론적 개혁노선인 자오쯔양 노선을 제시하기도 하 였다. 다시 말해 자오쯔양 노선이란 결국 국가 주도의 대담한 경제개혁정책 을 추진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인 정치개혁도 실천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접근해 가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실 천을 통한 안정적인 체제전환을 모색하는 자오쯔양의 정책노선이 1989년 천안문사태로 역사적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실현하려면 더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이 필요하고, 경제개혁의 효과를 극대 58) 오진룡, 등소평, 이붕, 강택민 신동아, (1989년 10월), p ) 김정계 정차근, 중국정치론, (서울: 평민사, 1995), p )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관해서는 이민자, 文 化 大 革 命 이후의 社 會 主 義 再 認 識 -탈사회주의화과정, 東 亞 硏 究 第 26 輯 (1992), p

55 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개혁파의 논 리와, 중국 경제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용인할 수 있지만, 당 국가 체제의 포기를 허용할 수 없다는 보수파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자오 쯔양과 자오쯔양 노선은 양자택일의 기로로 내몰린 것이다. 여기서 자오쯔양 은 개혁파의 논리와 명분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 그의 정치적 후원자인 덩 샤오핑과 당 원로의 결정에 저항함으로써 마침내 비극적 개혁정치의 희생물 이 되었던 것이다. 61) 사실 기존 사회주의체제의 보존을 강조하는 보수파와 사회주의체제의 혁 파를 주장하는 개혁파간의 대립과 갈등은 개혁 개방 초기부터 시작된 것이었 다. 그러나 그동안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 주도 세력이 한편으로 사상 해방과 체제개혁, 문호대개방을 선언한 11기 3중전회의 노선과 정신을 강조 하면서 개혁파와 급진개혁파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였고, 또 한편으로 이른바 4대 원칙의 견지를 강조하면서 보수파의 주장도 반영하면서 보수파 와 개혁파간의 균형과 조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파와 개혁파간 의 긴장과 갈등은 개혁 개방이 심화되면서 더욱 첨예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 었다.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사영경제의 역할과 비중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근간이 동요되자 보수파는 시장경제의 부작용 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기본 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개혁지도부 를 압박하였고, 개혁파들은 중국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실현시키려면 계획경 제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전면적으로 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해야 하며, 동시에 대담한 경제개혁에 대응하는 대담한 정치개혁도 추진해야 한다고 주 장하여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결국면이 날로 심각하게 악화되는 실정이었다. 이처럼 당 국가체제와 계획경제의 기본 틀을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대담한 경제개혁과 더불어 대담한 정치개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개혁파의 압 박이 증대되면서 후야오방 총서기와 자오쯔양 국무원 총리로 구성된 개혁지 도부 내부의 균형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야오방 총서기가 당 내외 에서 활동하는 급진 개혁파, 그리고 개혁파 지식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 61) 서진영(2005), pp

56 지하면서 이들의 진보적 의견을 옹호하는 성향을 보이면서 보수파들의 총공 세에 표적이 되었고, 개혁파 진영 내부에서도 후야오방의 정치적 입장에 대 해 비판하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 지도부 내부의 균열과 당 안팎에서의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논쟁과 갈등은 마침내 1987년 1월 후야오 방 총서기의 퇴진 사태까지 초래하였다. 62) 그러나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개혁파의 자오쯔양 총리를 새로 운 당 총서기로 임하고 자오쯔양은 후야오방이 실각한 1987년 초부터 명실 상부하게 범 개혁세력을 대변하면서 당 안팎에서 개혁노선을 재정비, 개혁 개방의 심화 발전을 지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오쯔양은 전임 후야오방과 는 달리 급진 개혁파나 개혁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치안정과 경제 발전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권위주의론 63) 의 입장에서 당 안팎에서 치열하 게 전개되고 있는 보수파와 개혁파를 모두 수렴하려고 하였다. 자오쯔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내세워 기존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전면적으로 개혁 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급격하게 변하였다. 이처럼 천안문 사태 이전에 중국 사회와 중국지 도부 내부에서는 개혁 개방의 폭과 속도, 그리고 발전 전략을 둘러싸고 보 수파와 개혁파, 그리고 신권위주의론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62) 서진영(2005), pp ) 신권위주의의 개념은 신권위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것은 실제로 는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며...경제적 자유가 없다면 개인은 자유로운 자본 축적을 할 수 없으며, 시장에서는 상품, 노동력, 재산권의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상품경제에서 손을 뺀다면 물가상승과 사회적 부패 등이 만연할 것이다. 이때 강력한 권위를 통해 시장을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정치와 경제의 이원화로서 정치권력이 시장에 대한 간섭을 배제 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거래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권위가 없으면 자유의 건 강한 발전은 없다...신권위주의는 지도자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정책결정그룹의 현명한 견해와 과단성 있는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진영, 등소 평 사후 중국의 정치체제 변화전망,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0), pp

57 있었고, 이런 정책논쟁은 당 안팎에서 지도부 내부의 권력투쟁과 복잡하 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정국을 산출하 였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는 덩샤오핑의 뜻에 따 라 대외개방정책과 연해개발지구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 이 같 은 경제정책하에 중국은 경제개혁을 활발히 추진해 나갔으며, 중앙권력의 경제권한을 점차 하부에 이양하면서 부분적으로 시장경제정책을 단행하였 다. 그러나 보수파인 리펑 총리는 천윈의 지지를 바탕으로 연해지구개발 정책을 적극 반대했으며, 새장경제이론 64) 을 주장하여 중앙집중의 경제 모델을 채택한 바 있다. 이러한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경제정책논쟁은 권 력갈등을 심화시켰으며, 마침내 이는 천안문사태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 다. 1989년 당시 중국 지도부의 핵심을 구성했던 자오쯔양 당총서기와 리펑 국무원 총리는 천안문사태가 발생한 초기부터 그 대응방법을 놓고 서로 상반 되는 입장을 견지했다. 천안문 페이퍼 65) 와 기타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면, 당 시 국무원 총리였던 리펑 등은 처음부터 보수파의 견해를 대변하여 1989년 4월, 후야오방 전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불 순하게 보고,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자오쯔양 총서 기는 강경책보다 민주와 법제에 의한 해결책 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6) 리펑 등은 천안문사태를 학생운동들의 정치동란으로 규정하고, 반대로 자 오쯔양은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상대로 강경책은 잘못 64) 이는 보수세력의 논리로서 1995년 4월 10일 사망한 중국공산당 제1의 경제 전문가 천윈의 鳥 籠 (새장)경제이론, 즉 경제의 자유화는 사회주의 경제의 틀 안 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는 주장이다. 65) 지난 2001년 초 장리앙이라는 가명의 중국 공산당 간부가 미국에서 편찬 출판한 천안문 페이퍼가 공개된 이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 싸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전개된 정책논쟁이 드러나면서 주요 정책결 정자들의 입장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66) 서진영(2005), p

58 된 것이고, 그런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당의 대응 정책을 변경시켜야 한다고 설득하려 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5월초에 중국 공산당 최고 공식 정책결정 기구인 정치국 상임위원회에서 계엄령 선언과 무력진압 등 강경책보다는 민 주와 법제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는 기본 방향에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직후인 1989년 5월 17일 천안문 광장은 100만 인파들로 가득 메워 졌고, 민주와 자유 를 요구하는 슬로건은 물론이고,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까지 등장하여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원로들의 합동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국 지도부는 계엄령 선포 와 무력 진압 방침을 최종 결정하였고, 자오쯔양의 유화책에 대해서도 비판 하였다. 이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더 이상 자오쯔양을 지원하지 않았고, 오히 려 자오쯔양에게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런 결정에 대해 자 오쯔양은 즉각 수긍하지 않고, 곧 이어 개최될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자 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서도 투표까지 가는 격론을 벌였지만, 결국 계엄령 시행을 결정하게 되자 자 오쯔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건강을 이유로 총서기직 사임을 표명하였 다. 67) 결국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모두 개혁파의 지도자로 출발해서 오늘날 중 국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역사적 공헌을 했으면서도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불균등 발전과정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모순에 직면,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 고 노력하다 희생된 비극적인 정치 지도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희생은 중국 현대화과정에서 정치 경제의 동시발전론의 좌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장쩌민과 리펑의 시기를 살며보면 다음과 같다. 자오쯔양의 사회주 67) 실제로 자오쯔양은 공식적인 기소나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2005년 1월 17일 사망할 때 까지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윤근로, 조자양 ( )사망과 중국 그 이후 月 刊 아태지역동향, (2005.3월), p

59 의 초급단계론 에 근거한 개혁정책 또한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갈등을 불식시 키지 못하였고, 더욱이 경제가 인플레이션의 유발과 당 정 간부들의 부패 만 연 등으로 인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덩샤오핑은 인민들의 불만과 보수파들 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1989년 6월 13기 4중전회에서 자오쯔양을 실각시 키고 상해시 당위원회 서기인 장쩌민을 총서기로 임명함으로써 정국을 수습 하려고 하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퇴진은 곧 보수파에 의한 새로운 권력 투쟁을 예고 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장쩌민에게 총서기 겸 군사위 주석까지 넘겨줌으로써, 결국은 덩샤오핑 자신이 생전에 보수파에 의한 권력 승계를 막고 덩샤오핑 사후 일어날지 모를 권력투쟁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개혁 개방정책도 계속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68) 장쩌민은 자오쯔양에 비해 당과 정부내의 뚜렷한 기반이 없었던 관계로 덩 샤오핑의 지지하에 서서히 당 정 군에 세력을 확대하다가 1992년 10월에 개 최된 제14차 당 대회 69) 를 계기로 최고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 다. 결국 이러한 파벌 투쟁에서 어느 한 파벌이 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그들 이 주장해온 정책노선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정권수립 이래 중국에서 수차례 발생해온 권력갈등은 거의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사상 투쟁에서 비롯되었고, 상호 충돌과 타협을 거쳐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나면 최종적인 단계에 가서 조직적인 노선으로 구체화 되는데, 이것이 곧 세력구 분이 됨과 동시에 파벌형성이 되는 것이다. 70) 68) 김정계 정차근(1995), pp ) 1992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는 덩샤오핑이 주도 한 마지막 공산당대표대회였다. 여기에서는 1978년이래 덩샤오핑이 주장해온 이 념들을 중국공산당 당장 에 삽입하면서 그것을 중국특색사회주의이론 으로 개괄 하여 역사적인 지위를 부여하였으며, 개혁 개방 정책의 100년 不 變 을 강조하였 다. 김창희, 중국의 정치과정과 권력 구조의 개관, 지방자치연구 제9집 (2001), p ) 박치정(1992), pp

60 중국공산당 제14차 당 대회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중국내의 양대 파벌인 개혁파와 보수파의 인적구성 및 성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혁파는 장 쩌민 당총서기가 주도하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당정치국 상무위원인 리루이 환( 李 瑞 環 )과 차오스( 喬 石 ), 당정치국위원으로는 전인대 상무위원장인 완리 ( 萬 里 )를 비롯한 여러명의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즉 개혁파는 현재 중 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개혁파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권력기반은 덩샤오핑의 지지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천안문사건 이후 공식적으로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으나, 여전 히 중국의 최고 실권을 쥐고 있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파벌간의 대립에 있어 서 계속 최고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막후에서 강 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71) 한편 보수파는 리펑 국무원 총리와 야오이린 당정치국 상무위원이 주도하 고 있었으며, 이들은 당 원로인 천윈, 펑전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 다. 또한 보수파에는 당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쑹핑( 宋 平 )과 당이론가인 덩 리췬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보수파는 비록 수적인 면에 있어서는 개혁 파에 비해 열세이지만, 당원로들을 배경으로 정책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 휘하고 있었다. 특히 보수파는 리펑의 정권장악을 지원함으로써 발언권을 강 화하려 하고 있었으며, 천안문사태 이후 국무원을 중심으로한 개혁파의 세력 균형을 모색해 왔다. 72) 이러한 점에서 패리스 창은 중국에 있어서 개혁의 장래는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세력균형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73) 비록 개혁파는 덩샤오핑의 내면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는 했었지만, 덩샤오 핑은 천안문사태 이후 무엇보다도 국내의 정치안정을 두드러지게 강조해왔 71) Li Ying-ming, "Power, Line and Ideology in the CCP as Seen from the Seventh Plenum," Issue & Studies, Vol.27, no.7(july 1991), p.2. 72) Li (1991), pp ) Parris H. Chang, "The Emergence of Reform Forces and Politics," Sang-Woo Rhee(ed.), China's Reform Politics (Seoul: Sogang University Press, 1986), pp

61 기 때문에 개혁파나 보수파나 상대방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적 지위를 차지하 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개혁파와 보수파는 각 기 자신들의 당내 권력기반 강화와 정치적 실권의 장악을 위해 막후에서 커 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제1세대 혁명원로들의 보다 많은 지원 과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공개적인 권력투쟁보다는 내부적인 결속 의 강화를 통해 세력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갈등은 위어서도 언급했듯이 무엇보다도 먼저 1989 년에 발생한 6 4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자오쯔양 전 당총서기의 책임문제를 둘 러싸고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장쩌민 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자오쯔 양이 단지 정책상의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의 책임문제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리펑 총리가 주도하는 보수파는 자오쯔 양이 당을 분열시킨 대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 키려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경제문제에 나타난 부작용에 대해서도 자오 쯔양에게 책임을 물었다. 즉, 천안문사태가 발생하자 리펑을 중심으로 한 보 수파는 1989년 6월 23일 당정치국 전체회의를 열어 천안문사태의 책임을 자오쯔양에게 전가시키며 그가 다음과 같은 4가지 잘못을 범했다고 주장하 였다. 첫째, 동년 4월 15일부터 22일까지의 후야오방 애도기간 중 발생한 학 생들의 민주화요구 시위에 대해 자오쯔양은 관용적 태도를 보여 동란이 일어 나게 했다. 둘째, 자오쯔양의 모호한 태도로 인해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던 학 생운동이 격화돼 동란으로 치닫게 되었다. 셋째, 자오쯔양은 동란에 대해 양 보하는 정책을 취해 여론을 조장, 여론의 화살을 덩샤오핑에게 돌리게 했다. 넷째, 자오쯔양은 당조직, 기율 및 단결을 파괴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취했 다. 74) 이처럼 보수파가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자오쯔양을 강력히 비난하게 된 것 은 개혁파의 당내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덩샤오핑의 권위를 실 74) 民 族 統 一 硏 究 員, 中 國 의 改 革 開 放 現 況 과 展 望, 硏 究 報 告 書, 92-02(서 울: 同 硏 究 員, ), pp

62 추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자오쯔양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곧 덩샤오핑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보수파는 자오쯔양을 공격하여 덩샤오핑 의 영향력을 줄이는 투쟁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보수파가 개혁파와의 권력투 쟁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권력갈등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초연한 입장을 취했다. 즉, 덩샤오핑은 천안문사태의 책임을 물어 자오쯔양 에게 과도한 처벌을 내릴 경우 자신이 정치적 입장도 난처하게 될 것으로 여 긴 나머지 자오쯔양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주장하였고, 그의 이러한 입장은 개혁파의 입장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윈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천안문사태가 덩샤오핑이 추진한 정치체제 및 경제체제의 개혁에서 비롯된 결과인 만큼 덩샤오핑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러한 보수파의 주장에 따라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제13기 4중전회에서 장 쩌민을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한편, 리루이환을 정치국 상무위원으 로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파벌간의 대결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그 후 덩샤오 핑은 천안문사태 이후 당 총서기가 된 장쩌민에게 당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직 을 물려줌으로써 모든 공직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조치는 자신의 권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생전에 이양함으로써 자신의 사후에 예상되는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장쩌민은 당총서기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함께 보유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마 오쩌둥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그는 역대 총서 기 중 당 정 군 분야에서 가장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 간주 되고 있다. 따라서 1989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3기 5중전회 이후부터 제14 차 당 대회가 개최된 1992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덩샤오핑 건재하의 鄧 以 後 (Post-Deng) 時 代 라는 아주 독특한 권력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75)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직접 발탁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덩샤오핑은 실각 한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장쩌민을 선택한 것은 80대의 원로들이 받아들 75) 전성흥, 13 旗 5 中 全 會 以 後 의 중국정치, 統 一 問 題 硏 究 第 3 卷 3 號 (서 울:통일원, ), pp

63 일 수 있는 하나의 협상카드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분열된 당내 파벌 투 쟁을 종식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유명한 반체제 인사 로서 현재는 추방되어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류빈옌( 劉 賓 雁 )은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그의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정치국 상무위 원들 중에서 세력균형을 위한 하나의 선택이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76)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마오쩌둥 시대에 일어난 정치변혁뿐만 아니라 70년대 말부터 덩샤오핑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과 이에 수반된 정치변혁 의 방향은 크게 지도부 내부의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되어 오고 있기 때문에 중앙지도부내의 역학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마오쩌둥 시절 파벌간의 대립은 국내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대립은 중요하게도 때로는 다투는 세력간에 죽느냐, 사느 냐 의 투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띠었다. 따라서 세력간의 대립결과는 매우 잔인한 것이었다. 패배한 측은 명예, 권력 및 부를 상실하였으며, 종종 중노 동에 처해지거나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예로는 문화 대혁명을 꼽을 수 있다. 또한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의 몰락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지도부 내부의 정책적 대립은 또한 권력승계와 연 관되어 더욱 격렬한 모습을 띠기도 하고, 이러한 것이 중국 정치의 안정 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정치변동의 주요 부분을 차지해 오고 있다. 권력승계를 둘러싼 당 정 군 지도자들간의 치열한 투쟁은 기본적으 로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 시대에도 권력갈등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투 쟁수단의 차이점만 달리한 채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 시대 하의 권력 갈등이 문화대혁명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격렬하 고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덩샤오핑 시대하의 권력갈등은 보다 제도화되고, 사회적으로도 덜 분열된 양상을 띠고 있다 77) 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한 파벌이 다른 한 파벌에 우위를 점해서 완전하게 패배 76) Liu Binyan, "After Deng Xiaoping: How Long Can Jiang Zemin Remain on Top?" China Focus, vol. 1, no. 3 (30 April 1993), p.3. 77) Dittmer(1990), p

64 시켜 제거한다는 쩌우 교수의 파벌개념-쩌우 교수는 중국공산당 정치의 기본적인 가정은 한 집단(또는 파벌)이나 집단의 연합이 주요 경쟁 집단 이나 연합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수 있고, 또한 (실제로)패배시키고, (궁 극적으로)제거한다는 것이다 라고 역설하였다. 78) -을 약화시키고 타협을 통해서 즉, 파벌싸움에 진 다른 파벌과 타협과 합의를 통해 정치적 안정 을 꾀했다고 할 수 있다. 78) Tang Tsou, "Prolegomenon to the Study of Informal Groups in CCP Politics," The China Quarterly, No. 65 (January 1976), p

65 제2절 덩샤오핑의 1인우위 인우위 체제 덩샤오핑 체제내에서는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서 속도와 폭을 놓고 급진 적인 개혁 개방을 추구하는 덩샤오핑 세력과 점진적인 개혁 개방을 추구하 는 보수파가 있어 또 하나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집단지도체 제에서는 덩샤오핑 중심의 세력이 우세하여 이들의 노선이 실제로 정책에 반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파는 현상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지만 현상을 뒤엎기에는 세가 불리하다고 느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 다. 79)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덩샤오핑은 6년이라는 장기간의 기간을 통해 화궈펑과 예젠잉( 葉 劍 英 )과의 협력과 견제를 통해 점진적으로 권력 을 구축하였고, 이러한 점진적 권력구축과정은 덩샤오핑의 이론적 기초인 실사구시 ( 實 事 求 是 )원칙과도 관련이 있다. 실제상황을 연구 분석하여 실 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실사구시 원칙은 계급투쟁을 반대하고 사회주 의 근대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집단지도를 통한 협동과 견제를 용인하면서 권력엘리트 전문가 인민대중과 같은 위 아래 옆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80)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의 지속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자신의 사후에도 정 치적 안정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집단지도체제라는 과도기적 조 치를 통하여 후계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고자 노력해왔다. 1980년 국 무원 총리에 자오쯔양을 임명하고, 덩샤오핑 자신은 제12차 당 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르고, 당총서기는 후야오방이 맡도록 하였다. 한편 전인대는 펑전이 관장하게 되었고, 이셴녠은 국가주석에 임명되었 다. 결국 당 정 군의 최고지도자가 개혁지향적인 인물로 교체됨으로써 집 단지도체제가 원칙적으로 구축되었다. 81) 79) 송영우(1997), p ) 차성섭, 북한과 중국의 체제개혁에 대한 비교연구-혁명지도자 사후를 중심 으로-, 한국과 중국정치 제24호 (1996), p

66 여기서 우리는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당 대회에서 통과된 당장 은 마오쩌둥 시대의 당장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그것은 당대민주주의와 집단지도체제의 도입이다. 12대 당장 은 1956년 8대 당장과 마찬가지로 당내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개인숭배와 개인독재를 배격하였다. 즉, 12대 당장은 민주집중제를 강조하는 동시에, 또한 직무가 높거나 낮거나를 막론하고 어떤 당원이라도 중대한 문제를 개인적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어떠한 지도자도 개인독단을 실행해서도 안 되고 개인이 조직을 능가할 수도 없다 고 규정하면서 집단지도체제와 개인의 책임제를 서로 결합할 것을 요구하였다. 82) 즉 집단지도체제를 당 장에 삽입함으로써 더욱 더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물론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중국은 표면적으로 덩샤오핑, 후야오방, 자오쯔양이라는 세 명의 지도자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하에 놓여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鄧 - 胡 - 趙 라는 삼두마차체제는 黨 政 軍 이라는 중국정치 의 세 개의 중요한 지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삼두 마차체제는 단지 탁월한 영도자인 덩샤오핑의 역할을 위장하는 하나의 외 형적인 허울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83) 그러나 덩샤오핑의 통치방식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위에서도 언 급했듯이 자신이 정치적 무대의 전면에 나서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항상 배후에서 조정자 역할을 충실히 해온 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최고 실력자(권력자)가 된 뒤에도 1인 지배체제 보다는 집단 지도체제를 선호 하였으며 당 지도층 내부에는 그의 정책노선에 비판적인 개성이 강한 지 도자들도 많았지만 이들을 잘 포용하여 보수와 개혁파간의 균형을 유지하 면서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84) 81) 국방군사연구소, 중국연구, 第 3 輯 (1995), p.8. 82) 서진영, 중국공산당의 힘: 개혁개방기 중국공산당과 권력구조의 변화, 동아시아연구 제9호 (2004), pp ) 제임스 왕(2000), p ) 김익도, 현대중국정치 (서울: 부산대학교출판부, 1997), p

67 이러한 정치적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집단지도체제의 시 스템에 권한을 이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마오쩌둥과 그와 관련된 개인 적 숭배는 중국사회를 성숙하는데 장애와 비이성적인 성향에 종속되게 만 들었다. 이러한 것들을 바꾸고 정치적 성숙과 질서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 해서 덩샤오핑은 당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 화궈펑을 점차적으 로 퇴각시키고 그러한 여파를 막기 위해서 그를 중앙위원회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총체적으로 덩샤오핑의 목적은 집단보다는 개인에 권력이 집중 되는 관례를 바꾸는 것이었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단계는 상무위원회를 재구성하면서 실현되었다. 1987년까지 상임위원회는 11명 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6명은 정치국의 일원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보 유하고 있는 이러한 구성원들은 모든 주요한 문제들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당, 정부, 군부, 농업, 국내 경제, 계획, 문화와 문화 선전 그리고 무역 등 을 포함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비하면 덜 권위주의적었고, 권력도 덜 소유했다. 오늘날은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지도자들을 제거하거나 침묵하게 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후야오방과 자오쯔양과 같 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권력기반을 갖고 있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서 내몰릴 수 있었으나 덩샤오핑은 지도층 내부의 서로 다른 견해를 잘 조정하고 인내하였다. 85) 또한 덩샤오핑은 권력 장악보다는 오히려 사후역사에 남길 명예와 정치 적 유산을 더 중시하면서 집단지도체제의 형성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권력을 이양할 때에도 최종적으로는 장쩌민을 제1인자로 선택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물러날 것을 예상했던 차오 스나 리루이환을 전인대위원장과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세우는 동시 에 이 기구들의 감시와 제어기능을 대폭 강화한데서 찾아 볼 수 있다. 86)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의 정책결정 구조는 집중 의 측면에 강조점을 두 85) 자오 찬성, 중국의 외교정책 (서울: 도서출판오름, 2001), p ) 한홍석, 江 澤 民 시대의 중국 (서울: LG경제연구원, 1997), p

68 었다. 그러나 이의 엄청난 폐해를 경험한 중국의 지도부는 개혁 개방 정책 과 더불어 이들 두 가지 요소의 미묘한 균형을 회복하려 하였고, 점차 의 도적으로 민주 의 부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70년대 말에 민 주 의 원칙과 집단지도체제 의 원칙이 기반이 된다는 주장들이 주요매체 에서 제기되었다. 1979년 2월25일 인민일보는 집단지도체제를 촉구하는 유명한 사설 領 導 是 一 个 集 團 을 발표하여 정책결정이 집단적으로 도출되 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1979년 공산당 제11기 5중전회는 당의 지 도원칙으로 집단지도체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원칙에 의하면 어 떠한 개인지도자도 주요 안건에 대해 단독으로 정책결정을 내릴 수가 없 으며 오직 집단만이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들 은 정책결정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정 책의 현실성과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87)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마오쩌둥에 의해 두 번이나 비판을 받으면서 실각된 경험을 통해 공산당 내부에서 권력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마오쩌둥이 집단지도체제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문화 대혁명 과 같은 재난을 가져다 준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러 번 강 조하면서 마오쩌둥 시대의 개인숭배 와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이 봉건 사회의 유산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마오쩌둥의 황제 식 지위와 통치 방 식이 당과 국가 뿐 만 아니라 마오쩌둥 자신을 타락시킨 원인임을 의심하 지 않았다. 88) 또한 덩샤오핑은 당의 민주집중제 89) 와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87) 김흥규, 중국의 정책결정과 민주 집중제-1980년대 합의와 정치 형성과 제도화-, 국제정치논단 제44집 1호 (2004), p ) 최관장(2000), p ) 개혁 개방시기에 정책결정은 상명하달식이라기 보다는 합의를 중시하였으며, 이러한 합의에 대한 강조는 흔히 제시되는 개인이나 정치적 집단들 간의 비공식 적 연대나 세력 갈등의 결과물이 아니라 민주집중제 라는 기존 기제의 새로운 해석과 실천 속에서 안정적인 형태의 규범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규범은 개

69 권력의 분산과 제도화의 실현에 힘썼다. 권력의 분산과 관련해서 살펴보 면, 1980년 8월 당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덩샤오핑은 정치개혁의 필요 성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은 당 정기구의 개편작업을 추진해 왔다. 종래 정치국에 집중되었던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중국은 1980년 당 서 기처를 부활시켜 당의 정책대안 마련 등 일상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정 치국은 집행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등 역할분담을 꾀하였다. 또한 당중 앙을 중앙위원회, 고문위원회(1982년 신설, 1992년 폐지) 및 기율검사위 원회(1978년 구성)로 개편하여 서로 견제 감독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을 분 산시켰다. 아울러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 및 국가주석제를 부활시킴 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90) 혁 개방 초기인 1980년대에 이미 널리 실천되었으며 당시 정책 갈등이 정치적 갈등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주요한 기제였다. 레닌주의적 정당의 정책 이론이자 조직구성이론인 민주집중제는 소련에서 상명하달식의 정책결정원칙들 로 정착되었던 반면에 중국은 상대적으로 혁명전쟁과 대장정의 경험을 공유한 지도자들의 결합력을 바탕으로 합의를 중시하는 원칙으로 실천된 전통이 존재하 였다. 이러한 전통은 1959년 루산회의가 계기가 되어 상명하달식으로 전환되었 고, 지도자들간의 합의, 절충 및 합의에 의해 주요정책을 결정하던 전통이 깨져 나갔다. 문화대혁명에서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이념이 정책판단의 주 근거가 되어 이념적 정확성에 대한 척도를 지닌 당 지도자나 지도부의 의사가 정책결정 에 가장 주요한 요소가 되었고 자연히 상명하달식의 정책결정이 지배적이 되었 다. 그러나 탈 마오쩌둥의 시기에 오면서 정책결정의 방식은 점차 정책결정자들 간의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형태로 재전환 되었다. 중국이 이러한 정책 결정방 식을 도입한 이유는 첫째, 마오쩌둥의 독단적인 정책결정의 폐해를 경험한 덩샤 오핑을 위시한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개인에 의한 독단적 정책결정을 회피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중국혁명과 내전 및 국가 건설 초기에 토의와 상호이해 를 중시하는 민주집중제 가 정책결정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진 전통이 이미 존재 하였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셋째, 당시 어느 정치 지도자도 마오쩌 둥과 같은 절대적 권위를 지니지 못하였으며, 지도자들 간의 정책 갈등이 권력투 쟁으로 전환하지 못하게 견제할 현실적인 장치가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과 권력관계 및 역사인식은 장쩌민 시기에도 그 정도의 차이 는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어 규범의 연속성이 존재하는 요인이 되었다. 김흥규(2004), pp

70 제도화와 관련해서는 임기제와 정년제의 제도화를 들 수 있는데 임기제 는 1982년 개정된 헌법에 국가주석, 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 등의 국가, 행정부, 입법부의 최고직책의 경우는 5년 임기의 연임만이 가 능하다고 규정하며 도입되었다. 그리고 정년제는 1982년 노간부 퇴직 및 휴직 제도에 관한 결정( 中 共 中 央 關 於 老 幹 部 退 休 制 度 的 決 定 ) 에서 당 중앙 및 국가기관의 부장, 부부장; 성. 직할시, 자치구 당위원회 제1서기, 성장, 부성장; 법원, 감찰원 주요 책임 간부들은 정직( 正 職 )은 일반적으로 65세를 초과할 수 없으며, 부직( 副 職 )은 일반적으로 60세를 초과하지 않 는다. 사국장급의 간부는 일반적으로 60세를 초과하지 않는다 라는 규정 으로 규범화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권력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 치국원에 대해서는 정년과 관련한 명확한 법적 규정은 없으나 68세를 선 출기준으로 삼고 있고, 총서기의 경우는 정년과 관련한 제약을 받지 않는 다. 이러한 임기제와 정년제는 중국에서 권력계승이 예측 가능한 정치일 정을 통해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드는 동시에 권력구도 변화에 새로운 역동 성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1992 년 제14차 당 대회였다. 즉 소위 제3세대 집단지도체제가 전면에 등장하 였다. 91) 덩샤오핑은 집단지도체제 구축이라는 과도적 조치를 통하여 권력승계의 제도화를 도모하고자 했으나, 1987년 부르주아 자유화운동의 책임을 지 고 후야오방이 당총서기직에서 물러나고, 1989년에는 천안문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오쯔양이 당총서기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 았다. 그 후 덩샤오핑은 천안문사태 이후 개최된 13차 4중전회에서 보수 파와의 타협하에 장쩌민을 총서기에 임명하였고, 5중전회에서는 중앙군사 위원회 주석직까지 장쩌민에게 물려주었다. 또한 14차 1중전회에서도 장 쩌민을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에 유임시키고, 1993년 8기 전인대 1차 90) 국방군사연구소(1995), p.5. 91) 이남주, 중공 17차 전대회 분석: 중국 후계구도의 특징과 불안요인, 미래연구원 ( ), p

71 회의에서 장쩌민을 국가주석에 임명함으로써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후계 체제 구축을 모색해 왔다. 아울러 덩샤오핑을 지지하는 개혁파 지도자들 의 입지를 약화시켜 온 당중앙고문위원회를 폐지하여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92) 그러나 덩샤오핑시기 역시 다음과 같은 집단지도체제의 한계를 가지고 는 있다. 첫째,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시대 모두 개인의 권력이 지나 치게 비대화 되어 있는 점과 그것이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오쩌둥 이 그의 권력을 카리스마적 권위에 기반하고, 덩샤오핑이 조직력을 바탕 으로 지도력을 행사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두 지도자 모두 실질적 인 최고권력자로서 중요한 정책을 실질적으로 결정한 당사자였다. 둘째, 덩샤오핑 시대에도 마오쩌둥 시대와 마찬가지로 당의 절대적인 정치지배 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덩샤오핑 시대가 마오쩌둥 시 대보다는 사상해방 과 실사구시 그리고 개혁 개방 의 구호가 말해주듯이 사회가 전체적으로 다원화되었지만, 공산당의 일당독재라는 절대적인 권 력구조는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그에 대한 도전은 용납되지 않았다. 셋째, 덩샤오핑 시대는 마오쩌둥 시대와 마찬가지로 당내 민주주의가 결여된 가 운데 정치의 불투명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도 당내에서 상황변화에 따른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지만,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으로 연 결되어 하나의 세력이 다른 다양한 세력을 타도하는 비극이 있었다. 이것 은 덩샤오핑 시대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구도에는 변화가 없 었다. 즉,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정치일선에서의 탈락 등이 이것을 말해 준다. 또한 당내 민주주의 결여는 당연히 당내에서의 다양한 의견대립이 사실 공개되고 있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정치권력이 군이나 공안 ( 公 安 )등 폭력장치에 의존하는 정치구조라는 점이다. 마오쩌둥 시대의 문 화대혁명 수습과정이나 덩샤오핑 시대의 6 4 천안문 사태의 정리과정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볼 수 있겠다. 93) 92) 국방군사연구소(1995), pp

72 결국 덩샤오핑의 시기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된 현상을 보이고 있었으 며,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대립의 차이가 마오쩌둥시기와 마찬가지로 크게 나타났기 때문에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아주 작 은 것에 불과 했었음을 알 수 있다. 93) 정천구 외, 중국정치 산책 (부산: 세종출판사, 2002), pp

73 제4장 과도기적 권력승계 덩샤오핑은 정치적 불안정성을 제거하기 위해 장쩌민을 제3세대 집단영 도체제의 핵심으로 지명하였으며 장쩌민 자리잡아주기에 부심하였다. 또 장쩌민을 수반으로 하는 권력구조의 정상적인 운용을 위해, 특별히 중앙 고문위원회를 해체하였으며, 자오쯔양으로 대표되던 군권을 축출하고 장 쩌민에게 이전에 없던 대권을 맡겼다. 장쩌민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가졌던 개인적인 권위를 갖추지 못한 상태이며, 이념적으로도 경제자유화 의 추진에 따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매우 약해져 있었다. 장쩌 민체제의 안정과 중국의 지속발전 여부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유산을 극복했던 것처럼 덩샤오핑이 남긴 모순과 문제점을 장쩌민이 어떻게 극복 할 수 있는 가에 있다. 개인적 카리스마가 이전 두 지도자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장쩌민은 경제우선주의로 인해 손상된 사회주의 문화의 재건과 인치에서 법치로의 제도화를 통해 정통성과 합법성 수립에 부심하고 있었 다. 94) 또한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도 이전과는 다르게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장쩌민 시기에는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노선 투쟁은 경제개혁에 있어서 개 혁 개방의 확대와 속도의 문제 및 소유제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 히 소유제 문제에 대해서 당 지도부들은 무응답으로 일관하다가 1997년 덩샤오핑의 사망이후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는 개혁의 심화로 사회주의 경제의 근간인 공유제 문제를 건드리지 않 을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유제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덩리췬은 2000년에 들어서자마자 재차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2000년 1월 발표한 문건에서 국유기업 개혁작업이 계속 된다면 당의 통치 기반이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유기업이 경제의 근간이 되지 않는 한 10년 이내에 공산당이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말까 지 했다. 또한 당 정 기관들이 세수 등 수입의 원천이 되고 있는 민간 및 94) 강준영 박기철(1998), pp

74 외국기업들에 종속되어 있다면서 국유기업의 역할감소는 향후 중국의 정 치 사회 상황의 변화를 초래, 결국 공산당의 일당 독점체제도 위협받을 것 이라고 주장했다. 95) 이런 상황에서 집권세력은 제15차 당 대회를 앞두고 개혁이 보수이론가 들이 지적한 것처럼, 공산당의 정체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필 요성이 절박해졌다.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대립속에서 장쩌민은 개혁파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이론적 곤경을 헤쳐나가려 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 사망 100일째인 1997년 5월 29일 당 최고 간부 연수 수료식 연설에서 중국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덩샤오핑 이론견지, 사회주의 초급단계 재제기, 국유기업 비중 축소를 근간으로 한 경제체제의 개혁, 당 지도 강화 등 4대 노선을 제시했다. 이 중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1987년 13대에서 자오쯔양이 내세운 이론으로 중국 사회를 자본주의 요 소가 남아있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채택을 정당화한 이론이다. 장쩌민은 자오쯔양의 초급단계론을 다시 꺼내 모든 경영 방식과 조직 형태를 과감하게 이용해 비공유 부문을 확대시키고자 강조했다. 장쩌민의 이러한 노선 천명은 이제껏 좌고우면( 左 顧 右 眄 )자세 에서 벗어나 개혁파로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에 이 미 제시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다시 동원한 것은 한편으로 이론적인 취약점을 드러낸 셈이다. 상당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 뒷걸음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장쩌민은 공유 제의 정의를 확대하였다. 국유기업 개혁과정에서 도입하려는 주식제를 공 유제의 한 형태로 규정한 것이다. 강경 보수파의 이론적 공세에 대해 이 렇게 입장을 정리한 지도부는 이후 총공세로 나왔다. 96) 개혁문제에 관해 개혁파의 입장으로 돌아선 장쩌민이지만 개방에 들어서 선 개방의 확대문제를 놓고 한동안 개혁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망적 인 자세를 취했다. 주룽지 총리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개방에 대해 보수파 95) 류동희(2002), p,89. 96) 류동희(2002), pp,

75 의 공격이 거세지자 뒷짐을 지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다. 보수파의 주장 은 주룽지 총리가 주도해온 WTO 가입 추진에 대해 본격적으로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들은 추종세력들을 지방에 순회시켜 WTO 가입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게 했다. 당시 주요 주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국의 값싼 원유가 들어오면 다칭유전 등 국내의 모든 유전은 망한다. 둘째, 1,000만명 이상이 직장을 잃는다. 셋째, 자본시장 개방으로 금융위기가 온다. 넷째, 매년 730만 톤의 밀을 미국에서 수입해야 하며 이는 농민에 게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때 주룽지 총리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1999년 4월 미국 방문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는 5월에 들어 나토 소속 미군기의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이라는 악재까지 만나 더욱 곤혹스런 입장에 처했다. 국유기업 개혁을 담당한 우방궈 부총 리, 후진타오 국가 부주석, 심지어 과거 WTO 협상을 책임졌던 리란칭( 李 嵐 淸 ) 부총리마저도 주룽지 총리의 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주룽지가 개방의 속도를 완화하는 선에서 장쩌민 등 다른 세력과 타 협에 성공, 보수파의 반격을 저지했다. 97) 이처럼 공유제문제 및 개혁 개방의 확대와 속도의 문제가 덩샤오핑 사후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은 그만큼 장쩌민의 카리스마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 이러한 논쟁이 중국정치사회를 혼란에 빠지지 않고 크게 확대되 지 않은 것은 각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가 적었다는 것을 보 여준 것이다. 결국 지도의 카리스마 약화와 정책노선상 대립의 차이가 심 하지 않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의 권력승계가 안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 로 다음 절에서는 이와 같은 요인으로 나타난 현상들, 즉 파벌과 집단지 도체제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았다. 97) 류동희(2002), pp

76 제1절 파벌정치의 질적 변화 덩샤오핑은 1989년 6월에 개최된 13기 4중전회에서 상해시 당위원회 서 기였던 장쩌민을 총서기로 임명함으로써 보수파를 견제하고, 천안문사태 이 후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였다. 문화대혁명 수혜파에 해당하는 장쩌민은 온 건개혁파로서 천안문사건 당시 상해지역의 안정을 이루어냄으로써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총서기로 부상할 수 있었다. 자오쯔양에 비해 당과 국가기 구내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장쩌민은 총서기가 된 이후 점차 당 정 군을 장악 해가면서 1994년 제14차 당 대회를 기점으로 최고지도자로서의 정치적 권 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제14차 당 대회가 1992년 10월 18일 개혁주도세력 의 부상속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를 1백년 불변의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폐 막되었다. 이어 10월 19일 소집된 14대 1중전회에서는 중앙정치국상무위원 및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선출했다. (표1) 제14 14차 1중전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위원 98) 이름 나이 주요직책 장쩌민 66 총서기, 군사위원회 주석, 국가주석 리펑 64 부주석 차오스 68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리루이환 58 정치협상회의주석 주룽지 64 국무원총리 98) 한국경제,

77 류화칭( 劉 華 淸 ) 76 군사위원회부주석 후진타오 49 상무위원회서기 위의 인사들을 분석해 보면 거의 개혁파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새로 상무위원이 된 주룽지와 류화칭, 후진타오의 인선은 덩샤오 핑의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주룽지는 덩샤오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중국의 고르바쵸프 라 불릴 만큼 정력적으로 개혁 개방을 추진하고 있는 인물로서 상해 시장을 거쳐 1991년 3월 제7기 전인대 제4차 회의에서 부총리에 선임, 국무원 경제무역 판공실주임을 맡으며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순조롭게 해온 테크노크라트이 다. 76세의 류화칭의 상무위원의 진입은 덩샤오핑의 군에 대한 통제의도로 풀이된다. 13대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상무부주석을 맡은 그는 홍군 출신 혁명 2세로 소련에서 유학한 군사엘리트이다. 14대의 경우 그의 발탁 은 6 4 천안문사태시 강경진압으로 국민적 지지기반을 상당히 상실한 양씨 형제의 군권을 승계, 군내 안정과 軍 令 의 통일을 기해 장쩌민 정권의 군내기 반을 든든히 하는 버팀목 역할을 맡기는 동시에 군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자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겠다. 그의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겸임은 이를 더 욱 명백히 하고 있다. 한편 양바이빙( 楊 白 氷 )에게는 중앙서기처 서기 및 군 사위원회 비서장이라는 날개를 떼고 정치국원으로 입국케 한 것은 양씨형제 에 대한 견제와 배려를 동시에 고려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티베트 자치 구당위 서기 후진타오의 상무위원의 진입은 젊고 유능한 인물에 대한 배려로 풀이된다. 1985년에는 전국 최연소(43세) 省 委 ( 貴 州 )서기가 되었으며, 소수 민족 독립으로 치안질서가 어려운 티베트자치구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당중 앙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실 貴 州 省 委 는 후야오방의 추천이 있었 고, 티베트자치구 委 의 서기는 자오쯔양의 신임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보수파 의 쑹핑 역시 그를 아끼고 있었다. 쑹핑에 이어 막강한 당의 인사 및 조직을 담당하게 되며, 14대 중앙서기처 서기(1순위)도 겸직, 당중앙의 일상공작을

78 주재하게 되었다. 이상 14기 인사를 볼 때, 총체적으로 원로 및 천윈계 보수 파의 퇴조와 개혁의지 및 실천력이 있는 덩샤오핑계의 개혁파의 승리로 볼 수 있다. 특히 14대 보수파 원로들이 포진하고 있던 중앙 고문위원회의 폐지 는 이를 더욱 입증해 준다. 99) 결국 14기 중앙정치국위원의 인선은 개혁파의 완승이라 할 정도로, 리펑 을 제외한 모든 위원이 개혁파로 채워졌다. 사실 14기 중앙정치국위원 인선 을 놓고 천윈은 1992년 9월 4일 열린 정치국생활확대회의 에서 서면발 언을 통해 14기 정치국 국무원 인사를 不 動 또는 少 動 으로 조정할 것을 주 장하며 쑹핑과 야오이린의 유임을 강력히 요청한 반면, 주룽지와 후진타오의 정치국위원 진입을 단호히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14기 정치국 인선결과 는 保 革 논쟁을 막기 위해 보수파의 리펑만을 유임시키고, 친덩샤오핑세력과 보수파의 원로들을 동반 퇴진시키는 동시에 급진개혁파의 재기를 차단함으 로써 보수파와의 긴장을 최소화 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100) 이를 통해 장쩌민시대의 특징은 혁명1세대의 완전퇴진과 더불어 차세대 후계자를 대거 기용했으며, 개혁 개방의 속도에 제동을 걸어왔던 보수파를 중앙인사에서 과감히 제외시킨 한편, 정치적 개혁까지도 주장했던 후야오방 과 자오쯔양계 개혁파의 재기를 차단하여 정치적 갈등의 소지를 없애려던 노 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친덩샤오핑계 인사 및 장쩌민-주룽지-우방궈을 잇는 상하이방의 등장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14차 당 대회에서는 무엇보다도 당지도부의 대폭적인 세 대교체와 당권력의 핵심인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덩샤오핑노선을 지지 추종해온 신진 개혁파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다는 점에서 1989년 천 안문사태 이후 당대 권력기반의 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온 파벌 들간의 권력갈등은 개혁파의 우위확보로 마무리되었다. 101) 99) 김정계, 중국 최고정책엘리트의 실체분석, 韓 國 行 政 學 報 第 27 卷 第 1 號 (1993), pp ) 김정계(1993), pp ) 박치정(1992), p

79 그러나, 1992년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4차 당 대회는 상해방이라 는 하나의 파벌의 출현을 예고했다. 제14차 당 대회는 무엇보다도 사회 주의 시장경제 의 도입을 결의함으로써 앞으로 더욱 개혁과 개방을 심화, 확대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했다는 점에서 개혁파의 승리를 확인하였고, 또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통하여 온 건개혁세력이 중심이 된 덩샤오핑의 후계체제를 구축하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제14차 당 대회의 인사개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측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보수세력이 쇠퇴하고, 온건개혁인사들이 대거 중용되었고, 둘째, 당 원로들의 퇴진으 로 주요 지도부의 세대교체와 年 輕 化 가 현저하게 진척되었으며, 셋째, 실 무형 관료집단들이 중용되었고, 넷째, 상해를 비롯한 개혁 개방지역을 대 표하는 인물들의 진출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102) 이와 같이 제14차 당 대회를 계기로 온건 개혁세력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도 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장쩌민, 주룽지, 우방궈를 중심으 로 하는 새로운 상해인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장쩌민은 1987년 제13차 당 대회 이전에는 중앙정계에 별로 알려 지지 않았던 실무관료였다. 그러나 제13차 당 대회에서 상해시 당위원회 서 기겸 중앙정치국원에 선임됨으로써 주목을 받았고, 1989년의 천안문사건으로 자오쯔양 총서기가 사임하면서 일약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제14차 당 대회에 서 장쩌민은 다시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 유임됨으로써 덩샤 오핑 이후의 중국공산당을 대표하는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주룽지도 역시 1989년 천안문 사건 이전에는 중앙정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관련 실무 관료이었다. 그러나 장쩌민과 함께 상해시의 당과 정부를 관장하다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주도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여 중앙당 정치국원이며 국무원 부총리로 활동하면서 개혁파의 기수로 주목받게 된 인물이다. 우방궈는 장쩌민과 주룽지가 모두 중앙당과 정 부로 진출한 이후 상해시를 대표하는 신진세대이다. 제14차 당 대회에서 선 102) 서진영, 현대중국정치론 (서울:나남출판, 1997), pp

80 임된 정치국원중에서 금년 50세인 후진타오 티베트 자치구 당위 서기와 더불 어 51세인 우방궈는 최연소의 지도자 그룹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제 14차 당 대회에서 선임된 총 20명의 정치국원중에서 상해시를 대표하는 인 물인 장쩌민, 주룽지, 우방궈 등 3인이 모두 포함됨으로써, 상해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과다 대표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장쩌민과 주룽지는 7명으로 구 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핵심세력 중에서 상하이 방이 차지하는 비중을 과시하였다. 제14차 당 대회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다 시 등장한 상해인맥의 특징은 고학력의 전문기술 관료들이란 점에서 개혁 개 방시대의 인사정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장쩌민, 주룽지, 우방궈는 모두 상해교통대학과 칭화대학을 졸업하였고,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전에 모두 실무 관료로서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한 경력의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라고 할 수 있으며, 모두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시대에 급성장한 인물들이란 점에서 공통 점이 있다. 특히, 장쩌민과 주룽지는 모두 좌파세력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차원에서 반좌파 성향이 뚜렷하고, 1989년의 천안문사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면서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노선의 충실한 실천자라고 할 수 있 다. 장쩌민과 주룽지가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1989년 사태를 수 습하는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고 덩샤오핑노선을 견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쩌 민과 주룽지는 천안문사건이 상해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자, 상해지역에서 급진개혁파의 대변지 역할을 하던 세계경제도보( 世 界 經 濟 導 報 ) 에 대한 개 편을 단행하고, 공안규찰대를 조직하여 상해지역의 학생과 지식인의 동요를 사전에 봉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장쩌민과 주룽지, 우방 궈로 대표되는 새로운 상해인맥의 특징은 정치안정을 바탕으로 대담한 경제 개혁을 추구하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 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103) 장쩌민 시기의 파벌은 이전 지도자의 개혁 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 하기 위해 형성된 비공식집단이다. 이는 파벌의 개념이 정책적 차이와 집 단의 권력적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과는 다르게 서로 공동된 이해 103) 서진영(1997), pp

81 관계를 가진 집단으로써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다른 집단과의 타 협과 합의를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이전과는 다르게 파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을 초래했다

82 제2절 과도기적 집단지도체제 덩샤오핑은 이전의 정치적 불안정을 제거하기 위해 장쩌민은 제3세대 집단영도체제의 핵심으로 지명하였으며 장쩌민 자리잡아주기에 부심하였 다. 또 장쩌민은 수반으로 하는 권력구조의 정상적인 운용을 위해, 특별 히 당중앙고문위원회를 해체하였으며, 楊 家 將 으로 대표되던 군권을 축출 하고 장쩌민에게 이전에 없던 대권을 맡겼다. 104) 특히 당중앙고문위원회의 폐지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 다. 중국공산당은 제14차 당 대회를 통해 1982년의 제12차 당 대회때 설치한 당중앙고문위원회를 폐지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당중 앙고문위원회는 보수파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천윈이 주임을 맡아 막후 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점에서 단순히 당조직개편 이 상의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당중앙고문위원회의 폐지는 그동안 중국공산당의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 보수파 원로들이 제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일종의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신진 세대가 중국의 새로운 지도층으로서 정책결정의 주역 으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곧 중국에 있어서 당 원로들 에 의한 垂 簾 聽 政 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 다. 105) 그 당시 장쩌민은 독자적으로 생존할 만한 기반이나 당내의 투쟁에서 승리할 힘도 없었다. 당총서기에 임명되었을 당시 그는 군대의 지지를 받 을 수 있는 군부와의 연결고리가 없었다. 1990년 9월 덩샤오핑이 중앙군 사위원회 주석직에서 물러난 후에 이를 물려받았다. 당시 중국의 군부는 양씨 형제들에게 장악되고 있었다. 장쩌민은 군부내에서 양씨 형제들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대거 승진시킴으로 써 점차 군부에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마침내 덩샤오핑의 적극적인 동 104) 강준영 박기철(1998), pp ) 박치정(1992), pp

83 의하에 양씨 형제들을 제거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장쩌민은 당내 권력 구조속에서 80대의 원로들을 교묘히 조종함으로써 이들의 비판을 약화시 킬 수 있었다. 물론 장쩌민은 1989년 덩샤오핑의 계승자로 선택을 받았으나 그는 권 력의 지속성은 보장받지 못했다. 즉,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것 도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대나 공산당 내에 권력기반도 없었다. 1990년대 중엽까지 북경의 당 정 지도층의 모든 파벌은 덩샤오핑 이후 시대의 도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총서기이면서 국가주석인 장쩌 민이 새로운 주도권 권력의 핵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첫째, 1989년 의 천안문사태 이후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중국 공산당 제3세대 집단지도 부 의 핵심으로 지명하였으며 그 후 장쩌민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인 권력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106) 따라서 포스트 덩샤오핑 핵심의 이 후에 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인물로 장쩌민 총서기가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둘째, 장쩌민은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로서 국정 전반에 걸쳐 광 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에 대해 때로는 조정자 로서 또는 필요하면 상급자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107) 그러나 장쩌민이 당 중앙 정치국의 핵심 의 의미는 이는 복수의 지도자로 구성된 중앙지도집단 중의 핵심을 가리키 며, 따라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권위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였 다. 108) 장쩌민 지도체제는 권력의 과도한 집중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덩샤오핑 의 기본 인식하에서 확립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고, 이러한 집 단 지도체제는 1970년대 말 덩샤오핑 복권이후 계속해서 중국지도체제의 기본형식을 이루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 공산국가에서 일반적으로 106) 자오 찬성(2001), p ) 정종욱, 제4세대 지도층과 21세기 중국: 15기 전당 대회와 9기 전인대를 통해 등장한 새 엘리트 분석, 新 亞 細 亞 제6권 제4호(1999 겨울), p ) David Shambaugh, "The China Leader": The Reform Era (New York: Vintage books 1999), p

84 강력한 1인체제가 무너진 이후 다른 1인체제가 구축되기 이전까지의 과 도기에 출현한 과도기적 성격을 띠는 집단지도체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 다. 특히 1992년과 1993년 사이에 확립된 제2기 장쩌민체제 하에서의 최고 결정기관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구성원 7인의 상호분업적 인 역할과 권한이 제도화됨으로써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 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992년 10월 제14차 당 대회 이후 중국 의 지도체제는 일견 당 정 군 3권을 장악하고 있는 장쩌민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엄밀하게 말해서 장쩌민, 리펑, 차오스, 리루이환, 주 룽지 등 정치국 상무위원에 의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비록 장쩌민이 국가주석, 당총서기, 당중앙군사위 주석 등 세 개의 주요 핵심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국의 주요 정책은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에 의해 집단적으로 결정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09) 즉, 권력이 장쩌민으로 오면서, 집단지도체제의 제도화가 정착되고 구성 또한 제도화되고 있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덩샤오핑 이후 시대에 있어서 중국사회 발전의 기본 추세에서 볼 때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형 통치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제도화가 정책결정에 새로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추세는 덩샤오핑의 건강악화로 정책결 정에 대한 덩샤오핑의 역할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미 출현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특히 제14차 당 대회 이후 출현한 민군분리나 교차겸직제도가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에 따라 정치국상무위의 대부 분이 정치부문의 중요한 직책을 겸직하게 됨으로써 상호분업적인 권력 분 점과 상호 견제와 균형이 가능해 지게 되었고 특히 군부의 전면적 세대교 체와 민군분리 제도에 따라 해방군 장성 중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110) 그러나 장쩌민 시기의 집단지도체제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유산을 109) 국방군사연구소(1995), p ) 박두복, 등소평 이후 권력구조 개편과 정치개혁의 전망, 東 西 硏 究 (1997), p

85 극복했던 것처럼 덩샤오핑이 남긴 모순과 문제점들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 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 카리스마가 이전 두 최고 지도자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장쩌민 은 경제우선주의로 인해 손상된 사회주의 문화의 재건과 인치에서 법치로 의 제도화를 통해 정통성과 합법성의 수립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111) 그러나 이런 선결조건 보다도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는 덩샤오핑의 영향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체 여전히 덩샤오핑의 노선을 답습하고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장쩌민은 14전대회 정치보고 에서 도 1978년 이래 중국이 기본노선으로 견지해온 政 治 反 右 經 濟 反 左 노선 에는 변함이 없음을 밝혔다. 또한 강력한 중국의 건설을 위해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에 치중한 개혁 개방 실시는 어디까지나 덩샤오핑이 천명한 바 있는 4항 기본원칙 의 견지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 다. 112) 물론 제3세대로 분류되어지는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의 구 성원들이 기본적으로 실용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관을 보유하고 정치보 다는 경제개혁이나 발전에 더 많은 이익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관이 바로 중국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경제발전과 아울러 그들의 경제개혁 추진에 필요한 사회 안정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113) 결국 장쩌민 시기의 집단지도체제는 마오쩌 둥, 덩샤오핑 시기에 비해 정착되고 있으나 장쩌민 집단지도체제만이 독 자적인 특성을 나타내주고 있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전 과는 다르게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기 보다는 당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의 7인의 구성원에게 집중되어 집단지도체제의 강화와, 각 파벌간의 정책 노선상 대립의 차이가 적었기 때문에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이전의 파벌 111) 강준영 박기철(1998), p ) 박치정(1992), pp ) 이동률, 중국의 제3세대 정치엘리트와 권력승계, 중국연구 13호 (1992), pp

86 의 형태와는 다르게 파벌의 개념이 약화 되었다. 이는 결국 후진타오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87 제5장 권력승계의 안정화 제16차 당 대회와 제10기 전국인대 제1차 회의를 중심으로, 후진타오 시대의 개막과정 즉, 당 정지도부의 세대교체 면에서 보면, 제3세대 지도 자로부터 제4세대 지도자로의 권력승계는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장쩌민 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유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장쩌민 세력 또는 상하이파가 공산당과 정부의 요직에서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후진타 오 원자바오 세력의 권력기반은 그렇게 강고하지 못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은 두 개의 권력중심이 병존하는 매우 불안정한 상 황을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분석해 보면 후진타오에게는 이전의 지도자들에게서 나타 나는 카리스마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든지 국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는 등의 급격한 정치개혁은 공산 당의 기득권을 심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당내의 저항은 매우 클 것이며, 밑으로부터의 강한 요구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급격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당내의 저항을 극복 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지 도력이 있어야 하는데 후진타오에게는 이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후진타오 시대에 있어서 추진될 수 있는 정치개혁은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로 인 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사법개혁, 의회의 역할 강화, 정부 및 공산당 기 구 간소화, 법에 의한 통치확대 등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된 것들 이 외에, 장쩌민 시대에 시작된 몇 가지 새로운 조치들, 즉 사영기업가의 입 당확대, 향장( 鄕 長 ) 및 진장( 鎭 長 )의 직접선거 시험실시 확대 등으로 제한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개혁기 공산당은 통치의 정당성을 혁명적 이념 (사회주의)이나 선거 등의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경제적 업적에 근거하기 때문에, 후진타오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행정개혁, 인사개혁, 법치 이외에 는 소극적일 것이다. 특히 어떤 정치개혁이 사회안정을 해쳐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저해할 가능성이 클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114)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의 차이도 매우 작게 나

88 타났다. 후진타오 시대에는 지속적인 발전을 전제로한 성장과 분배의 문 제 즉, 성장과 분배 중 어느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차이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개혁 및 국가정책의 면에서 보면, 후진타오 시대의 출범은 장쩌민 시대와의 연속성과 함께 변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우선, 정치 개혁을 보면, 제4세대 지도자들이 제기한 정치개혁과제는 이전 시대의 것 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점에서 보면 후진타오 시대는 장쩌민 시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불완전한 권력승계로 인해 권력기반이 취약한 후진타오의 입장을 놓고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대신 후진타오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초기부터 민중 속으 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집권 초기에 후진타오 체제가 당 내 보수파 및 장쩌민 세력과의 대립을 피하면 서 독자적 권력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은 국민들 사이에 독자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체제가 출범 후 2년 동안 권력구조 개편이나 국민의 정치참여 확대와 같은 실질적 정치개혁은 추진 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친근한 활동을 통해 대국민 이미지를 제 고해 지지기반을 넓히는 민중 속으로 전략을 추진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미약한 자신의 카리스마 및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후진타 오 체제는 국민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중정치 차원에서 권력기반의 강 화노력을 펼쳤다. 문화대혁명 이후 덩샤오핑이 기존 당노선과 완전히 다른 개혁 개방정책 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원로로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권위 및 인 적 네트워크와 함께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후진타오 체제가 자신만의 정치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 들로부터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15) 114) 조영남(2006), pp ) 조영남(2006), p

89 국가정책을 보면, 후진타오 시대는 장쩌민 시대와는 일정 정도 다를 것 임을 예고했다. 장쩌민 시대가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 일변도 정책을 추진했다면, 후진타오 시대는 경제성장 일변도 정책을 수정해 지 난 경제개혁의 성과분배에서 소외된 집단(노동자 농민 도시빈민)과 지역(중 부 및 내륙지역)에 좀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도록 정책기조를 변경하려 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삼농문제 해결에 대한 강조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처럼 후진타오 시대는 권력교체 면에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 게 출범하였다. 향후 후진타오 원자바오 세력은 명실상부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장쩌민 세력과 맞서서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중 국이 당면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얻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결국 후진타오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국민들로부터 확보하는 것 이 중요하며, 동시에 정책집단들간의 정책노선상의 차이를 적게 하기 위 해서 성장일변도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90 제1절 타협과 합의의 정치과정 지난 2002년 11월의 중국 공산당 제16차 당 대회에서 예상했던 대로 장쩌민 총서기와 제3세대 지도부가 전원퇴진하고,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가 당 지도부 전면에 등장하였다. 또한 2003년 3월 제10기 전체인민대표대회에서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장쩌민 국가 주석이 임기만 료로 퇴진하고, 1998년 이후 국가 부주석직을 역임하고 있던 준비된 국 가 주석 후보 후진타오 총서기 겸 국가 부주석이 정식으로 국가 주석으 로 선출되었으며, 제3세대의 주룽지 총리가 물러나고 후진타오와 더불어 제4세대를 대표하는 원자바오 신임총리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내각이 구성되었다. 116) 물론 16차 당 대회와 10기 전인대에서 선임된 당과 국가 기구의 지도부가 완전히 후진타오체제로 구축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제3세대 지도자에서 제4세대 지도자로의 권력승계가 실질적 이고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승계 이후 중국에는 후 진타오 국가주석과 장쩌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함께하는 두 개의 주 석체제, 법적 권력중심(후진타오세력)과 실제 권력중심(장쩌민 세력)이 분할된 두개의 권력중심체제 가 형성되었다. 즉, 후진타오 체제가 비록 공식적으로 출범했지만 실제권력의 상당수를 장쩌민 세력과 공유하는 불 완전한 권력승계였기 때문이다. 117) 이번 권력승계는 사실 당의 최고결정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에서 5명이 장쩌민 계통인사로 분류되었고, 2003년 3월에 새로 구성된 원자바오 중심의 신내각의 4명의 부총리 중에서도 3명의 부총리가 장쩌민 계열이라고 분류 될 만큼 장쩌민 시대의 후광이 상당히 남아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동의 폭과 내용에 있어서 사실상 상당한 정도의 116) 2002년 11월의 중국공산당 제16기 당 대회와 2003년 3월의 제10기 전인 대에서의 인사개편을 다각적으로 분석한 것은 H. Lyman Miller, "The 10th National People's Congress and China's Leadership Transition," China Leadership Monitor No. 7 (Summer 2003). 117) 조영남(2006), p

91 권력이동이 있었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제3세대를 중심으로 한 장쩌민 시대는 실질적으로 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고, 제4세대를 대표 하는 후진타오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후진타오체제로의 권력승계과정의 특징은 무엇인가? 장쩌민에 서 후진타오체제로의 권력승계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법과 제도에 따른 권력승계였다는 사실이다. 118) 사실 마오쩌둥 시대 이후 여러 차례 최고 권력의 승계 기회가 있었지만, 류사 오치에서부터 자오쯔양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상적인 승계에 실패했으며, 장 쩌민의 경우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최고 권력자로 선출된 것이 아니라, 천 안문사건이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방식에 따라 총서기와 국가 주석 직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후진타오의 경우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의 권력 승계는 당헌과 헌법에서 정한 임기제와 은퇴 제가 적용되었으며, 사전에 미리 예고되고 준비된 권력 승계의 절차 119) 를 밟 아 구체화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는 것이다. 120) 이를 테면 후진타오는 1992년에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고, 1998년에 국가 부주석으로, 그리고 1999년에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 로 선출됨으로써 내외에 준비된 후계자임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또한 장쩌민의 퇴진은 두 번 이상 국가 주석의 연임을 금지한 헌법의 임기규 정과 70세 이상이거나 2회 이상 당의 최고 정책 결정기구인 정치국원으로 선임될 수 없다는 당 내부의 은퇴 규정을 적용할 때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118) 이에 대해 퓨스미스는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즉 장쩌민의 중앙군위 주석직 유임이나 승계계획의 변화 등을 놓고 볼 때, 이번 권력승계가 중국정치가 제도화되었고 당내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Joseph Fewsmith, "The Sixteenth National Party Congress: The Succession that Didn't Happen," China Quarterly No. 173(March 2003), pp ) 이를 두고 전성흥은 기획인사 또는 배양의 정치과정 이라고 표현했다. 전 성흥, 중국 16차 당 대회에 대한 서설적 평가: 주요 쟁점과 시각을 중심으로, 신아세아 제10권 제1호(2003년 봄), p ) 서진영(2004), p

92 장쩌민의 퇴진과 후진타오의 승계는 사실상 오래 전부터 예상되고 준비된 것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1) 물론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의 권력승계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에 대 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에만 기초할 때 당 총서 기를 비롯하여 주요 중앙 지도자들은 사전에 기획과 같은 작업을 통해 발탁 하여 상당 기간에 걸쳐 정치지도자로서 배양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개인의 능력에 대한 검증도 할 뿐 아니라 다양한 경력을 통해 지도자로서 갖 추어야 할 자질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지방지도자로 능력을 인 정받은 자로서 중앙 무대에 발탁되면 정치국원과 상무위원회의 단계를 점진 적으로 밟게 된다. 제16차 당 대회 인사의 경우, 14대 이후 줄곧 정치국 상무 위원 자리를 지켜온 후진타오를 제외한 8명의 상무위원은 모두 15대 정치국 성원에서 승진한 것이며, 상무위원을 제외한 정치국원 16명 역시 모두 15대 중앙위원 내지 정치국 후보위원( 誤 儀 )에서 승진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국 후 보위원에서 상무위원으로 1.5단계 정도 승진한 쩡칭훙( 曾 慶 紅 )을 제외하면 소위 파격적인 인사는 없으며 대체적으로 단계별 승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다. 122) 또 다른 특징은 권력승계에 있어서 각 파벌들이 권력을 공유함으로써 파벌 간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16차 당 대회에서 보여준 지도부의 교체는 과거와 같이 1인에 의한 인사라기보다는 당대표들 의 합의에 의한 작품이었다는 측면에서 중국이 처음으로 평화적 민주적으로 이양하는 제도적인 장치와 선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당 대회가 개최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장쩌민이 121) 1982년 헌법에서 정한 주요 국가 지도자들의 임기제한, 그리고 당 지도부 의 연령제한에 대한 당내 내규에 대한 설명은 H. Lyman Miller, "The Sixteenth Party Congress and China's Political Processes," Gang Lin and Susan shirk(eds.). The Sixteenth CCP Congress and Leadership Transition in China, Asian Program Special Report.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No. 105(September 2002), pp ) 전성흥(2003), p

93 일선에서 퇴진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 의 역사를 보면 최고지도자의 교체는 사망 혹은 대대적인 사건에 휘말려 서열에 따라 권력을 계승하는 것이 통례였고 그 임기 또한 사망시까지 가 는 것이었다. 장쩌민도 13년간의 통치경험을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도 많 은 직책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고집한다면 이번 대회에서도 권력을 유지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쩌민은 정한 규정에 의해 퇴진하고 연공서열이 아닌 중국의 장래를 위해 젊은 엘리트를 기용하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이양하였 다는 측면을 보면 중국 정치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한 그 동안 중국공산당의 정치는 실질적으로는 법치가 아닌 인치에 가까 운 권위주의 체제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지 도부는 상술한 바와 같이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을 띄고 있어 권위주의체제 로의 정치는 사라지고 지도부간의 타협과 합의를 통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체제로 탈바꿈했다는 측면은 민주적인 정당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인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23) 결국 제16차 당 대회는 중국 최고지도층의 권력승계가 어느 정도 제도 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덩샤오핑이 1980년대 간부 四 化 ( 革 命 化, 年 經 化, 知 識 化, 專 業 化 ) 정책으로 후계세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 다고 평가된다. 개혁 개방이후, 중국 최고 지도자의 후계 승계과정에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로의 권력이양이 그런 대로 안 정된 추세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국 상무위원 등 최고 지도층의 선발이 연령원칙과 합의에 의하며 능력주의에 따른다는 각 파벌들간의 묵계가 지켜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124) 적 123) 박광득, 中 國 共 産 黨 第 16 次 全 國 代 表 大 會 에 대한 分 析, 대한정치학회 보 10집 3호 (2003), p ) 이번 17차 당 대회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및 후보위원, 당 기율검사위원을 당선자보다 후보자가 많은 제한적 경쟁선거 방식인 차액( 差 額 )선거를 통해 선출 했다. 중앙위원의 경우 16차 당 대회에서는 후보자가 당선자보다 5% 많았으나, 이번에는 8.3%로 확대되었다. 또한 후진타오 이후의 차세대 지도자로 시진핑과

94 어도 최고 지도층의 선발 및 충원에 계획적인 인사관리가 이루어지고 있 음을 지적할 수 있다. 1989년 장쩌민을 중심으로 등장하였던 제3세대 지 도자 집단은 원로그룹과 정치군의 개입, 최고지도층의 모호한 역할 분담 등으로 상당 기간 불안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에 비해 제4세대 지도자 집단은 제3세대 지도자 집단보다, 통일감과 안정감이 있어 정치적 변화와 정책 수행의 측면에서 예측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후진타오가 합의형 지도력을 보이며 집단지도체제를 잘 이끌어 나간다면, 서로 권력 을 분담하며 협력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125) 이번 제17차 당 대회에서 나타난 권력승계 역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각 파벌간 타협과 합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17차 당 대회는 후진타오를 정점으로 업무분담과 합의를 중시하는 집단지도체제의 출범을 의미한다. 물론 제17차 당 대회에서 파벌간의 역학관계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하 는 것은 사실이다. 즉, 17차 1중전회에서 확정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의 구성을 단파( 團 派 ) 126) 와 상하이방 127) 및 태자당( 太 子 黨 ) 128) 간 경쟁할 리커창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중용하여 어느 일인을 지명하지 않음으로써 향후 경쟁을 통한 성과와 능력위주의 인사를 예고했다. 전병곤,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의 의미와 전망, Online Series ( ), p ) 3 世 代 指 導 部 의 역할이 中 國 을 經 濟 的 貧 困 과 國 際 的 孤 立 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면 4 世 代 指 導 部 의 과제는 發 展 과 成 長 을 持 續 하는 동시에 이 과 정에서 파생된 不 安 定 要 素 들을 解 決 하고 國 家 統 合 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김도 희, 中 國 新 指 導 部 의 課 題 와 社 會 安 定, 新 亞 細 亞 제10권 제1호(2003), p ) 홍콩과 대만의 언론에서는 공청방이라는 용어 대신 團 派 라는 명칭으로 후 진타오가 제1서기를 지낸 공산주의 청년단, 즉 공청단 출신들을 지칭하고 있다. 류동희,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1 새 주역들과 주변 인물 (서울: 한울출 판, 2002), p ) 상하이방은 상해에서 출생한 간부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상해에서 주요 공 직생활을 한 간부집단으로 이들은 중앙무대에 진출한 이후에도 끈끈한 유대를 과시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제16차 전국공산당대회와 중국의 미래, Issue Paper, 2002, p

95 수 있는 인적구도로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9) 즉, 정치국 상무위원회 구성원 중 후진타오, 원자바오 및 리커창은 단파 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태자당의 쩡칭훙 계열로는 새로 뽑힌 시진핑, 허궈창( 賀 國 强 ), 저우융캉( 周 永 康 ), 그리고 상하이방의 장쩌민 전 주석 계열은 우방궈, 자칭린( 賈 慶 林 ), 리장춘( 李 長 春 )으로 분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2) 제17 17차 1중전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출생년 이름 전직 도 국가주석/ 1942 후진타오 총서기 (65) 우방궈 전인대 위원장 1941 (66)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 1942 (65) 정치협상회의 1940 자칭린 주석 (67) 리장춘 정치국 상무위원 1944 (63) 시진핑 상하이시 당서기 1953 (54) 리커창 랴오닝성 서기 1955 (52) 출신지 안후이성 안후이성 텐진시 허베이성 랴오닝성 산시성 안후이성 출신대학 칭화대 수리공정학과 칭화대 무선전자학과 베이징 지질대학 지질구조학과 허베이공학원 전력계 하얼빈 공대 전기공정학과 칭화대 인문사회계 베이징대 유임여 부 비고 유임 단파 유임 상하이방 유임 단파 유임 장쩌민계 유임 상하이방 신임 태자당 경제학과 신임 단파 허궈창 중앙기율검사위 /조직부장 1943 (64) 후난성 베이징 화공대학 무기화학학과 신임 태자당 128) 198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간부세대의 배양이라는 목표 하에 급속한 성 장을 이룬 세력 중의 하나인 태자당은 고급간부 및 원로의 자제, 친척까지도 포 괄하는 개념이다. 태자당의 구분기준은 혈연, 학연, 직업상의 연계, 정략결혼 등이 있으나 이에 대한 논의는 본 논문에서는 논외로 한다. Cheng Li, China's Leaders: The New Generation (Lanham: Rowman & Littlefield, 2001), pp ) 김흥규(2007), p

96 저우융캉 공안부장 1942 (65) 장쑤성 베이징 석유대학 석유탐사학과 신임 쩡칭훙 직계 이처럼, 중국정치에서 특히 권력승계문제에 관해서 파벌의 개념이 대두 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중국에서 비공식적인 부분으로서의 파벌은 존재하 고 있으며 어느 정도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첫째,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후진 타오가 지원했던 단청 계열의 리커창이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에게 밀린점 과 둘째, 여전히 상하이방이라고 불리는 장쩌민이 발탁한 인사들이 정치 국 상무위원으로 잔류한점, 마지막으로 당내의 2인자로 인정받던 쩡칭훙 의 퇴진과 더불어 그의 세력이 잔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인사가 보여주는 것을 파벌간의 역학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은 특정 개인의 독단을 견제하는 다양 한 장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후진타오의 인사에 대한 영향력이 제약을 받 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장쩌민이 1990년대 말 당시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쩡칭훙을 정치국원으로 승진시키기 위한 시 도가 여러 차례 좌절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내외에서 후진타오 계 열이라고 지목한 리커창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라 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중국의 권력장치는 과거 대장정, 항일, 내 전 등과 같은 비상한 상황에서 형성된 매우 긴밀한 인맥관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파벌정치를 1980년대 원로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할 때의 파벌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즉, 상하 이방이나 장쩌민계라는 것을 응집력이 강한 파벌집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소위 상하이방으로 간주되는 우방궈나 장쩌민의 오른팔이라고 하는 쩡칭 훙이 지난 5년 후진타오에 대해 협력적 태도를 취했다는 알려진 점이 이 를 잘 보여준다. 130) 그렇기 때문에 파벌 정치적 시각에서 중국정치를 연구함에 있어 유의할 130) 이남주(2007), p

97 것은 특정인사를 성급하게 특정파벌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것과 공산당 내 파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특히 현재 중국 내 파벌정치는 형 성과정에 있어 상당수 당내 인사들은 계파의 중간에서 힘의 향배 및 상황 변화에 따라 정치적 결정을 유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기에, 특정인 사가 단파인가 상하이방인가에 대해서는 향후 보다 구체적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131) 파벌정치는 상대방을 절멸시켜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에, 근본적 대립 보다는 타협과 합의를 기초로한 주도권 다툼으로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향후 파벌정치가 강화되더라도, 공산당이라는 조직적 틀 을 부정하거나 개혁 개방과 같은 당의 기본노선을 부인하는 것은 어렵고, 다만 분배나 성장과 같은 일정한 정책적 차별을 중심으로 쟁점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파벌간 집단지도체제가 공산당 내 게 임의 룰로서 형성되어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32) 결국 장쩌민 시기의 파벌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대립 보다는 중국정 체체제의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각 파벌들간의 타협과 합의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후진타오 역시 파벌들간의 대립보다는 합의와 조정을 중시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더욱 더 공고히 하게 되었으며, 이는 향 후 중국정치에서 파벌 현상이 감소하고, 집단지도체제의 강화가 나타난다 고 할 수 있다. 131) 대표적인 것이 시진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여러 파벌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칭화대를 나왔기 때문에 일각의 분석대로라면 칭화 방 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전 국무원 부총리 경바오의 비서를 지냈기 때문 에 비서방 으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도 같은 대학을 나온 후진타오와 비서방 출신인 것으로 알려진 원자바오와 시진핑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는 없 다. 이렇게 본다면 그를 특정 파벌의 인사로 보는 것을 매우 비현실적이다. 오히 려 그의 살아온 역정을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이 더 적실성 이 높다고 판단된다. 주장환, 제17기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 인선의 함의, KNSI 현안진단 104호 (2007), p ) 최지영,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평가 및 의의-파벌 정치적 관 점에서-, KNSI 현안진단 105호 (2007), p

98 제2절 집단지도체제의 제도화 제16차 당 대회 이후 장쩌민의 후계자로 후진타오가 선출되었고, 2003 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면서, 후진타오-원자 바오 체제가 시작되었다. 물론 후진타오는 이전의 지도자와 경력면에서나 카리스마적인 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능력면에서는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인정을 받고 있 었다. 즉 티베트와 귀주 등 낙후된 지역의 발전 공로를 인정받아왔고, 16 대에 돌연히 부상한 스타라기보다는 꾸준히 경력과 실력을 인정받아온 인 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후진타오는 이미 덩샤오핑에 의해 1992년 50 세라는 젊은 나이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중앙무대에 발탁되면서 예상되 어 왔고 실제로 10년 여년 동안 지도자수업을 쌓아온 준비된 지도자이다. 그는 당 중앙에서의 과도한 권력기반 강화에 집착하기 보다는 참신한 이미지와 실용적 리더십을 구축함으로써 최고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강화 하고 있는데, 133) 실제로 후진타오는 공식적 발언 중에서 당 중앙의 새로 운 領 導 集 團 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이는 곧 권력의 정점으 로서 자신을 내세우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강조하 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134) 후진타오의 집단지도체제의 특징은 기존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9명 으로 늘어난 데에 있다. 이는 좀 더 세분화되고 다양한 집단지도체제의 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정 및 당무 처리에 있어서 다수인의 공동으로 참여하는 집단지도 체제로의 제도적 변화를 의미한다. 135) 133) 엄구호, 동북아국가의 부패: 문화, 구조, 정책 (서울: 도서출판역락, 2005), p ) 엄구호(2005), p ) 소치형,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분석, 中 國 硏 究 제21집 (2002), p

99 위원 136) (표3) 제16 16차 1중전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서열 이름 생년 출생지 1 후진타오 1942 안후이성 2 우방궈 1941 안후이성 3 원자바오 1942 텐진시 4 자칭린 1940 허베이성 5 쩡칭훙 1939 장쑤성 6 황쥐 1938 저장성 7 우관정 ( 吳 官 正 ) 1938 장쑤성 8 리장춘 1944 랴오닝성 9 뤄간 ( 羅 干 ) 1935 산둥성 학력 칭화대학 수리공정 학과 칭화대학 무선전 자학과 베이징지질 대학 지질구조 학과 허베이공학원 전력학과 베이징공업 학원 자동공제 학과 칭화대학 전기공정 학과 칭화대학 동력학과 하얼빈공업대학 전기학과 베이징강철 공업학원 성향 친 장쩌민 친 주룽지 친 장쩌민 친 장쩌민 친 장쩌민 친 장쩌민 친 장쩌민 친 리펑 136) 김소중,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평가와 전망, 한국동북아논 총 제25집(2002), p

100 그래서, 후진타오체제 또한 중국에서 더이상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같 은 권위체제가 수립되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 왜냐하면 덩샤오핑 집권이 후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권력분산시스템에 따라 중국의 새로운 지도체제는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의 구성원들이 일정한 권력과 역할을 분담하는 상호 분업적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 등의 지도적 직책을 겸직하는 분업적 체 계를 유지함으로써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을 이루고 있기 때 문이다. 137)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는 중국의 경제도약 시기를 맞아 과학기술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중국의 정치 경제 분야에 포진해 있으며, 중국의 경제개혁과 산업구조조정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등 21세기 중국 호 라고 불리고 있다. 138) 향후 후진타오는 이전 세대보다 권력 공유나 협상, 자문, 의견일치 등에 더욱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산주의 혁명 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제4세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는 전설적인 배경이 없다. 지난 30여년 동안 전쟁이나 국내 혼란 같이 제 4세대 지도자들이 특별히 두각을 나타낼 만한 주요 사건들이 전혀 없었 다. 둘째, 제4세대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문화혁명기에 정치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정치적 결속력이 약하다. 제4세 대 리더 그룹의 분열은 한 명의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들 었다. 셋째, 공식적인 관료 제도의 구성원들과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의 구 성원들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다양한 파벌 사이에 복잡한 상 호 의존 관계가 형성되었고 어떠한 파벌이나 기관, 지역, 개인도 실제로 권력을 지배할 수 없다. 넷째, 개혁기 제도의 발전(여러 분야에서 인민대 표대회의 역할 증대,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위원 선거)역시 최고 리더나 137) 강준영, 胡 錦 濤 체제 2년-평가와 전망, 중소연구 통권104호 (2004/2005), p ) 홍덕화, 중국권력의 핵 상해방 인맥: 당 정 군 사실상 장악 호금도 위협 월간중앙 (2003.4) p

101 특정 파벌의 권력 장악과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다섯째, 오늘날 중국은 공식적으로 독재자를 원하지 않는다. 덩샤오핑이 사망하던 해 그에 대한 조롱과 장쩌민에 대한 존경심 부족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중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쇠퇴는 위대한 지도자 탄생의 필수 조건인 개인숭배의 성장을 어렵게 했다. 139) 위의 모든 요소들은 덩샤오핑이 사망한 해에 시작된 독재정치의 쇠퇴가 제4세대 지도자들에게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 후진타오를 비롯 한 제4세대 선두주자들은 그의 동료들보다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결 국 후진타오시기의 정치권력은 다양한 정치파벌과 관료 조직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리더십에 의해 점차 공유될 것이다. 그러나 제17차 당 대회 이후 후진타오의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를 각 파 벌간 대등한 권력 분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분석 또한 존재 한다. 140) 그 이유는 첫째, 중앙정치국 위원에 후진타오 계열이 다수 포진했다는 것이다. 25명의 정치국위원 중 리커창을 비롯한 9명이 후진타오 주석의 계열로, 자칭린을 비롯한 6명의 장쩌민 계열이나 시진핑을 필두로 하는 5 명의 쩡칭훙 태자당의 계열보다 다수이다. 중립적인 군 인사 5명을 감안 할 때 후진타오 계열이 반드시 열세이거나 다른 계열과 동등하다고 볼 수 는 없다. 둘째, 지방 당 서기와 성장 등이 교체되면서 후진타오의 권력기 반이 되는 단파 계열의 인사들이 지방에도 다수가 포진되었다. 베이징, 톈진, 상하이, 총칭 등 4대 도시에서는 후진타오 주석 계열이 다소 약세 이지만 내륙의 성과 지방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후진타오는 전통적인 발전된 대도시인 베이징, 샹항, 텐진, 총칭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정치국 위원으로 진입한 총칭시 당서 기 왕양( 汪 洋 )을 비롯해 주요 직책에 단파가 포진되어 있어 주목할 필요 139) 리청지음, 강준영 김만기 박보현 옮김, China's Leaders (서울: 예담차 이나, 2002), pp ) 이태환, 17차 당 대회의 의미와 후진타오 집권 2기 정책전망, 정세와 정책 ( ), pp

102 가 있다. 셋째, 당 조직과 해방군 인사에 깊이 관여해 영향력을 지녔던 쩡칭훙의 퇴임으로 군에 관한 후진타오 주석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이 제 후진타오 주석만이 새로 뽑힌 상무위원 중 유일하게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인맥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회 못지않게 권력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차기 지도 자로 거론되는 시진핑과 리커창 모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진타오 주석이 군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후진타오 주석의 영향력은 그의 이론적 기초인 과학적 발전관 이 그 재 임 중에 당의 헌법과 같은 당장에 삽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론과 장쩌민의 3개대표론 의 경우에도 퇴임 후 당장에 삽입된 것과 비교해 볼 때 후진타오 주석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고 보기에는 무 리가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후진타오가 장쩌민 세력의 견제로 자신의 권력 기반인 단청 출신들을 대거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시키는데 실패했고 시진핑의 등장으로 후계구도를 둘러싼 향후 권력투쟁이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과 보 도가 있지만, 후진타오의 집권2기는 후진타오의 영도 하에 집단지도체제 의 성격을 띈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시대의 제왕적 통치 스타일에서 권력분점 속에서 타협을 위주로 하는 후진타오의 엘리트 정치 스타일로 변화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권력구도는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유지한 채 결국 후진타오 주석의 리더십이 어떻게 발휘될 것인가에 따라 향후 정국과 후 계구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03 제6장 결론 본 논문은 신중국 건설 이후 후진타오 집권2기까지 권력승계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지도자의 카리스마 약화 내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재, 그 리고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대립의 축소라는 요인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 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들 즉, 파벌의 약화와 집단 지도체제의 강화라는 것이 안정적인 권력승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을 보여주었다. 물론 지금까지 중국에서의 권력승계에 대한 논의는 제도 화 되었느냐, 혹은 중국과 같이 최고지도자를 뽑는데 선거와 같은 민주적 인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여전히 비공식정치의 영역이 권력승 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논의들은 향후 중국에서의 권력승계에 대한 예측을 제대로 할 수 없 을 뿐만 아니라, 왜 지금처럼 안정적인 권력승계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현 상 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 본 것처럼 지금까지 중국에서의 권력승계의 형태는 권력투 쟁의 형태에서 지금처럼 제도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의 약화와 지도부 내 정책노선상 차이의 정도가 작아진 요인으로 인해 나타난 파벌의 약화와 집단지도체제의 강화라는 현상이 중 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설명으로 중국정치체제 를 바라보게 되면 전체적으로 신 중국 이후 지금까지의 권력승계의 흐름 과, 권력승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비공식정치 부분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는 권력승계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처럼 어느 한 부분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장점 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이로 인해 나 타날 수 있는 강한 파벌과 집단지도체제의 약화라는 것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권력승계의 불안정을 설명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는 있다. 하 지만 지금처럼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정치적인 안정을 원하는 중국지도부

104 가 독단적인 지도자의 출현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권력은 무주공산과 같다. 정확 하게 말하면 중국의 정치변화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중국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역사적인 변화와 전환 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과정이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는 지적도 지나 친 표현이 아니다. 141) 처음부터 중국의 정치권력은 국민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창출되어 정당 한 절차에 의해 그것을 담당할 사람에게 위임되지 않고 중국공산당에 의 해 임의로 창출되었고 장악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정치권력은 근원적으 로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지 않고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누 구든지 언제나 국민의 동의 없이 불법적으로 정치권력을 담당할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중국의 정치권력은 정통성이 없는 정치권력에 의해 통치행위가 전개되어 왔다. 그리하여 정치권력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간에는 보다 큰 힘을 갖기 위해 또 그 정치권력을 독점적으 로 장악하기 위해 대립 경쟁 갈등 충돌 등으로 권력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 어 왔다. 이러한 연유로 중국공산당 정권하에서는 정치권력이 한번도 합 법적으로 승계된 일이 없었으며 언제나 권력투쟁의 결과에 의해 정치권력 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각각 개인에 의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어 파벌을 형성하여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의 정치를 파벌정치라 한다. 142) 그러나 과거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시대에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 었다면, 현재 중국 정치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장쩌민 시대에서처럼 집단 적 리더십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쩌민 세대 이후의 제4세대 지 도자들 사이에서는 집단적 리더십을 향한 더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인 다. 143) 즉, 이전처럼 개인에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지 않고, 권력이 각 141) James R. Townsend, Politics in China(Little, Brown and Co., 1974), pp ) 송영우, 중국특색적 정치, 중국연구 第 15 輯 (1996), p

105 파벌에게로 분산되는 형태를 띠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정책결정을 한 개인이나 한 파벌이 좌지우지 할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 파벌간 의 타협과 합의를 통해서만 모든 정책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 권력장악을 위한 이해 대립이 제기될 소지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과거 1989년 천안문사건 당시 덩샤오핑(중앙군사위 주석)과 자오쯔양(총서기)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었는 데, 이러한 권력 분산체제 하에서 자오쯔양과 덩샤오핑간의 갈등이 초래되었 기 때문이다. 144) 하지만 후진타오 집권 2기에는 집단지도체제의 안정을 토대로 각 파벌간 합 의와 타협을 통해 정책결정 및 국가 주요사안이 논의될 것임이 분명하다. 왜 냐하면 중국에서 이제는 더 이상 특정세력이 다수파가 될 수는 있어도 전체 권력을 독식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벌사이의 권력분배와 이들 사이의 합의를 통한 통치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143) 리청(2002), p ) 신상진, 후진타오 시대 중국의 대내외정책 전망: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 대표대회 결과분석을 중심으로, 통일연구원 (통일정세분석 ), pp

106 참고문헌 국내 문헌 1. 단행본 고지마 도모유끼, 중국정치와 대중노선 -대중운동과 마오쩌둥, 중앙 및 지방의 정치동태- (서울: 논장, 1989). 김익도, 현대중국정치 (서울: 부산대학교출판부, 1997). 김재철, 중국의 정치개혁 -지도부, 당의 지도력 그리고 정치체제- (서 울: 한울, 2002). 김정계 외, 중국정치론 (서울: 평민사, 1995). 리청, China's Leaders (서울: 예담차이나 2002). 류동희,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1 새 주역들과 주변 인물 (서울: 한 울, 2002).,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2 노선투쟁과 세대교체 (서울: 한 울, 2002). 서진영, 현대중국정치론 (서울: 나남출판, 1997). 엄구호, 동북아국가의 부패: 문화, 구조, 정책 (서울: 도서출판역락, 2005) 이홍영, 중국의 정치엘리트-혁명간부 세대로부터 기술관료 세대로- (서울: 나남출판, 1997). 이홍표, 중국의 개혁과 정치변화 (서울: 세종연구소, 1996). 마크블레처, 반조류의 중국, (서울: 돌베개, 2001). 民 族 統 一 硏 究 員, 中 國 의 改 革 開 放 現 況 과 展 望 (서울: 同 硏 究 員, 1992). 새무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서울: 김영사, 1997)

107 송영우 외, 중국학 개론 (서울: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 수잔 써크, 중국경제개혁의 정치적 논리 (서울: 생각의 나무, 1998). 자오 찬성, 중국의 외교정책 (서울: 도서출판 오름, 2001). 제임스 왕, 현대중국 정치론 (서울: 도서출판 그린, 2000) 정재호 편, 중국정치연구론:영역, 쟁점, 방법 및 교류 (서울: 나남출판, 2000). 정천구 외, 중국정치 산책 (부산: 세종출판사, 2002). 조영남,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정치 (서울: 나남출판, 2006). 한홍석, 江 澤 民 시대의 중국 (서울: LG경제연구원, 1997). 2. 논문 강명화, 1959년 盧 山 會 議 시기 彭 德 懷 의 대약진 인식과 中 國 共 産 黨 의 대응, 中 國 近 代 史 硏 究 會 第 26 輯 (2005). 강준영 박기철, 포스트 등소평시대의 중국식 사회주의: 강택민 권위수립 의 제약요인 분석, 중국학연구 제14권 (1998). 강준영, 胡 錦 濤 체제 2년-평가와 전망, 중소연구 통권 104호 (2004/2005). 김도희, 中 國 新 指 導 部 의 課 題 와 社 會 安 定, 新 亞 細 亞, 제10권 제1 호(2003). 김소중,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평가와 전망, 한국동북아논 총 제25집(2002). 김정계, 중국 최고정책엘리트의 실체분석, 韓 國 行 政 學 報 第 27 卷 第 1 號 (1993). 김흥규, 중국의 정책결정과 민주 집중제-1980년대 합의와 정치 형성과 제도화-, 국제정치논단 제44집 1호 (2004)

108 , 중국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평가 및 대외정책적 함의, 주요국제문제분석 ( ). 김창희, 중국의 정치과정과 권력 구조의 개관, 지방자치연구 제9집 (2003). 소치형,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분석, 中 國 硏 究 제21집 (2002). 송영우, 중국특색적 정치, 중국연구 第 15 輯 (1996), 중국 정치권력의 변동, 중국연구 第 16 輯 (1997). 이동률, 중국의 제3세대 정치엘리트와 권력승계, 중국연구 13호 (1992). 이민자, 文 化 大 革 命 이후의 社 會 主 義 再 認 識 -탈사회주의화과정, 東 亞 硏 究 第 26 輯 (1992). 이태환, 17차 당 대회의 의미와 후진타오 집권 2기 정책전망, 정세 와 정책 ( ) 박광득, 中 國 共 産 黨 第 16 次 全 國 代 表 大 會 에 대한 分 析, 대한정치학회 보 10집 3호 (2003). 박두복, 등소평 이후 권력구조 개편과 정치개혁의 전망, 東 西 硏 究 (1997). 박치정, 鄧 小 平 이후 中 國 勸 力 構 造 의 動 態, 中 國 硏 究 第 11 輯 (1992). 삼성경제연구소, 제16차 전국공산당대회와 중국의 미래, Issue Paper (2002). 서진영, 등소평 사후 중국의 정치체제 변화전망, 고려대학교 아세아 문제연구소 (2000)., 중국공산당의 힘: 개혁개방기 중국공산당과 권력구조의 변화, 동아시아연구 제9호 (2004)., 자오쯔양( 趙 紫 陽 )과 중국개혁정치의 한계, 동아시아연구 제 10호 (2005)

109 신상진, 후진타오 시대 중국의 대내외정책 전망: 중국공산당 제16차 전 국대표대회 결과분석을 중심으로, 통일연구원 (2002). 이남주, 중공 17차 전대회 분석: 중국 후계구도의 특징과 불안요인, 미래연구원 ( ) 윤근로, 조자양( )사망과 중국 그 이후, 月 刊 아태지역동 향 (2005). 전병곤,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의 의미와 전망, Online Series ( ). 전성흥, 13 旗 5 中 全 會 以 後 의 중국정치, 統 一 問 題 硏 究, 第 3 卷 3 號 (1991)., 중국 16차 당 대회에 대한 서설적 평가: 주요 쟁점과 시각을 중 심으로, 신아세아 제10권 제1호(2003). 정종욱, 제4세대 지도층과 21세기 중국: 15기 전당 대회와 9기 전인대 를 통해 등장한 새 엘리트 분석 新 亞 細 亞 제6권 제4호 (1999). 조영남, 중국 제4세대 지도자의 등장과 엘리트 정치, 계간사상 (2003)., 중국 후진타오-원자바오체제 의 등장과 정치 개혁: 현황과 전 망, 현대중국연구 제6집1호 (2004). 주장환, 제17기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 인선의 함의, KNSI 현안진 단 104호 (2007). 차성섭, 북한과 중국의 체제개혁에 대한 비교연구-혁명지도자 사후를 중 심으로-, 한국과 중국정치 제24호 (1996). 최관세, 中 國 文 化 大 革 命 ( )에 관한 硏 究, 중국연구 第 25 券 (1999). 최관장, 중국 문화대혁명( )에 관한 연구, 중국연구, 제25 권 (2000). 최우길, 중국 신지도부 분석과 정책전망, 현대중국연구 제5집 1호

110 (2003). 최지영,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평가 및 의의-파벌정치적 관 점에서-, KNSI 현안진단 105호 (2007). 외국문헌 1. 단행본 Cheng Li, China's Leaders: The New Generation (Lanham: Rowman & Littlefield, 2001). David Bachman, Bureaucracy, Economy, and Leadership in China: The International Origins of the Great Leap Forwar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Dick Willson(ed.),Mao Tse-tung in the Sales of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David Shambaugh, "The China Leader": The Reform Era (New York: Vintage books 1999). James C. F. Wang, Contemporary Chinese Politics,(New Jerwsey: Person Education, 2002). James R. Townsend, Politics in China(Little, Brown and Co., 1974). John Wong and Yongnian Zheng(eds.), China's Post-Jiang Leadership Succession Problems and Perspectives (Singapore: Singapore University Press and World Scientific Publishing Co., 2002). Jonathan Unger(ed.), The Nature of Chinese Politics: From Mao to Jiang (Armonk: M. E. Sharpe, 2002). Joseph Fewsmith, Elite Politics in Contemporary China (Armonk: M

111 E. Sharpe, 2002). Kenneth Liberthal, Governing China: From Revolution Through Reform (New York: Norton 1995). Lowell Dittmer, China under Reform (Boulder: Westview Press, 1994). Merle Goldman and Roderick MacFarquhar(eds.), The Paradox of China's Post-Mao Reform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Merle Goldman, From Comrade to Citizen: The Struggle for Political Rights in China(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Sang-Woo Rhee(ed.), China's Reform Politics (Seoul: Sogang University Press, 1986). Teresa Wright, "Intellectuals and the Politics of Protest: The Case of the China Democracy Party," Edward Gu and Merle Goldman(eds.), Chinese Intellectuals Between State and Market(New York: Routledge, 2004). 2. 논문 Frederic C. Teiwes, "The Paradoxical Post-Mao Tradition: From Obeying the Leader to 'Normal Politics',"The China Journal, No. 34(July1995)., "Normal Politics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The China Journal, No. 45(January 2001). Gang Lin and Susan shirk, (eds.), The Sixteenth CCP Congress and Leadership Transition in China, Asian

112 Program Special Report. (2002). H. Lyman Miller, "The 10th National People's Congress and China's Leadership Transition," China Leadership Monitor No. 7 (Summer 2003). Joseph Fewsmith, "The New Shape of Elite Politics," The China Journal, No.45(January2001)., "The Sixteenth National Party Congress: The Succession that Didn't Happen," China Quarterly No. 173(March 2003). Li Ying-ming, "Power, Line and Ideology in the CCP as Seen from the Seventh Plenum," Issue & Studies, Vol.27, no.7(july 1991). Liu Binyan, "After Deng Xiaoping: How Long Can Jiang Zemin Remain on Top?" China Focus, vol. 1, no. 3 (30 April 1993). Lowell Dittmer, "Patterns of Elite Strife and Succession in Chinese Politics," The China Quarterly, No.123(September 1990). Lucian W. Pye, "Rethinking the Man in the Leader," The China Journal, No. 35 (January 1996). Michel Oksenberg, "China's Political System: Challen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The China Journal, No. 45(January 2001). Tang Tsou, "Prolegomenon to the Study of Informal Groups in CCP Politics," The China Quarterly, No. 65 (January 1976)

113 기타자료 동아일보 매일경제 신동아 인민일보 월간중앙 한계레신문 한국경제

114 The Change of Chinese Elite Politics -The process and cause of power succession institutionalization- Park, Jeong Soo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Graduate School of Sogang University Abstract The stable power succession on this 17th CCP(Chinese Communist Party), after successful 16th CCP, can be explained very important phenomena to the scholars who have looked into China. On this structure of socialism likewise China, we can find line struggle and power succession on account of the systems ; institutionalization's absence. In addition power succession can cause the national conflict and social division, of course China has gotten the evaluation that she can compete with other advanced nations on economic and cultural fields. But on the field of politics, China has a number of problems ; Democratization, transparency, the dictatorship of Communist party and the absence of multi-party system and so on

115 And then I explain the main causes and phenomena which have affected the stable power succession in China. Though raising the question ; how the stable power succession can be in this thesis. Mostly there are two compatible viewpoints about the power succession which is the argument. First this viewpoint, Institutionalization, can be replaced this power succession in China, is defined through the formal of informal practice ; control by the law. However that point of view still overlooks the behind story back of the secret curtain, adapting the only system of retirement. This point shows the limitation of institutionalization ; not having the solution about choice of their leader through power succession has made peacefully with the compromise and mutual agreement. Likewise these facts still show the non-democraticism and the serious political conflict and division in all the times. Second, the viewpoint, is the emphasis of informal politics which have shown in the process of the previous chinese elite politics. But the point of view has a limitation which can not explain the changing of this informal political boundary. Absolutely, in the past times, informal part of politics took a great role in power succession. It can not affect the process of power succession. Also it can be changed by the flow of times. That is, chinese politics had been operated in the bases of the principles ; -The winner takes it all- but after being Mao-ze-dong, Deng xiaoping, Jiang zemin, and Hu jintao. Now, we can have some weak points, which can not make an explanation for the changing of informal political party in the basis

116 of factism during those times. And then, I have dealt with the causes of stable power succession on this thesis and explained the causes not by the control of a law and formal or informal practices, but by the causes of their leader's charisma's absence or the diminishes of their different opinion among the policy leaders. And in conclusion, I have analyzed the power succession, between the weakness of faction and the strength of the collective leadership, and explained that power succession has been stable in China like these phenomena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More information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More information

- 2 -

- 2 - -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More information

³»Áö_10-6

³»Áö_10-6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More information

(012~031)223교과(교)2-1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More information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More information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More information

....pdf..

....pdf.. 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More information

**09콘텐츠산업백서_1 2

**09콘텐츠산업백서_1 2 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More information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More information

152*220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More information

»êÇÐ-150È£

»êÇÐ-150È£ 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More information

<5BB0EDB3ADB5B55D32303131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28322920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3031292D3135B9AEC7D72E687770>

<5BB0EDB3ADB5B55D32303131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28322920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3031292D3135B9AEC7D72E687770> 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More information

5 291

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More information

¾Æµ¿ÇÐ´ë º»¹®.hwp

¾Æµ¿ÇÐ´ë º»¹®.hwp 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More information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More information

È޴ϵåA4±â¼Û

È޴ϵåA4±â¼Û 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More information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東 京 大 月 書 店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新 報 關 東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相 互 銀 行 計 數 集 計 ꌞ ꌞꌞ ꌞ ꌞꌞ

More information

ad-200400012.hwp

ad-200400012.hwp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연구요약 표 주제 및 연도별 여성유권자 연구 현황 표 출마한 여성후보 인지시기 투표후보여성

More information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More information

CR2006-41.hwp

CR2006-41.hwp 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More information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More information

2002report220-10.hwp

2002report220-10.hwp 2002 연구보고서 220-10 대학평생교육원의 운영 방안 한국여성개발원 발 간 사 연구요약 Ⅰ. 연구목적 Ⅱ. 대학평생교육원의 변화 및 외국의 성인지적 접근 Ⅲ. 대학평생교육원의 성 분석틀 Ⅳ. 국내 대학평생교육원 현황 및 프로그램 분석 Ⅴ. 조사결과 Ⅵ. 결론 및 정책 제언 1. 결론 2. 대학평생교육원의 성인지적 운영을 위한 정책 및 전략 목

More information

<BFA9BCBABFACB1B8BAB8B0EDBCAD28C6EDC1FD292E687770>

<BFA9BCBABFACB1B8BAB8B0EDBCAD28C6EDC1FD292E687770> 성매매방지법 제정과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에 관한 연구 - 거버넌스 관점과 여성단체의 역할을 중심으로 오 혜 란 * 1) 초 록 주요용어:성매매방지법, 성매매, 여성관련 법률, 여성단체, 여성정책, 입법과정, 젠더, 거버넌스, 젠더 거버넌스, NGO I. 들어가는 말 II. 이론적 배경 여성정책과 거버넌스 거버넌스의 의미 거버넌스의 유형 1) 국가(정부)주도형

More information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진 의학 지식과 매칭이 되어, 인류의 의학지식의 수준을 높 여가는 것이다. 하지만 딥러닝은 블랙박스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단지 결과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의학지 식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제로 의학에서는 인공지능을 사용하게 될 때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해

More information

*074-081pb61۲õðÀÚÀ̳ʸ

*074-081pb61۲õðÀÚÀ̳ʸ 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More information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2005.6.9 5: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개 지역지식재산센터 를 통해 발명가와 중소기업들에게 기술개발에서 선진국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More information

01¸é¼öÁ¤

01¸é¼öÁ¤ 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More information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More information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More information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More information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More information

allinpdf.com

allinpdf.com 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More information

<C3E6B3B2B1B3C0B0313832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C3E6B3B2B1B3C0B0313832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More information

º»ÀÛ¾÷-1

º»ÀÛ¾÷-1 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More information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More information

(중등용1)1~27

(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More information

감사회보 5월

감사회보 5월 contents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동정 및 안내 상장회사감사회 제173차 조찬강연 개최 상장회사감사회 제174차 조찬강연 개최 및 참가 안내 100년 기업을 위한 기업조직의 역 량과 경영리더의 역할의 중요성 등 장수기업의 변화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윤정구 이화여자대학교

More information

24011001-03072015000.ps

24011001-03072015000.ps News News p/3 메트로 2015년 7월 3일 금요일 제3250호 www.metroseoul.co.kr 조선 중앙이 사이비언론 p/6 삼성SDI 전지사업 적신호 한국광고주협회의 간담회 모습. /출처=반론보도닷컴 아주 나쁜 위헌적 단체 광고주협회 존재 자체가 위헌적입니 다 2일 한국광고주 협회(회장 이정치)의 사이비 언론 조사결과 발표 보도 를 본 뒤

More information

2. 4. 1. 업무에 활용 가능한 플러그인 QGIS의 큰 들을 찾 아서 특징 설치 마 폰 은 스 트 그 8 하 이 업무에 필요한 기능 메뉴 TM f K 플러그인 호출 와 TM f K < 림 > TM f K 종항 그 중에서 그 설치 듯 할 수 있는 플러그인이 많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 림 > 다. 에서 어플을 다운받아 S or 8, 9 의 S or OREA

More information

연구노트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More information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More information

2ÀåÀÛ¾÷

2ÀåÀÛ¾÷ 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More information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More information

º´¹«Ã»Ã¥-»ç³ªÀÌ·Î

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More information

01정책백서목차(1~18)

01정책백서목차(1~18) 발간사 2008년 2월, 발전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범한 새 정부는 문화정책의 목표를 품격 있는 문화국가 로 설정하고, 그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한편 권한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효율의 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 삶과 풍요로움을

More information

단양군지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More information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More information

CC......-.........hwp

CC......-.........hwp 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More information

ÃѼŁ1-ÃÖÁ¾Ãâ·Â¿ë2

ÃѼŁ1-ÃÖÁ¾Ãâ·Â¿ë2 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More information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GM작물실용화사업단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GM작물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김욱 박사 1. 조사목적 GM 작물 관련 인식조사는 사회과학자들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GM 작물 관련 인식 추이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조사설계 2.1.

More information

!¾Ú³×¼öÁ¤26ÀÏ

!¾Ú³×¼öÁ¤26ÀÏ AMNESTY MAGAZINE Imagine 2 AMNESTY MAGAZINE contents 06 Imagine Good news 02 04 Cover story Interview Amnesty news 06 14 18 14 Opinion 24 21 Act now Member zone 26 28 Welcome 29 Accounting report 30 23

More information

#7단원 1(252~269)교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More information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More information

나하나로 5호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More information

......-....4300.~5...03...

......-....4300.~5...03... 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More information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vii 요 약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 동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정책은 기존의 정책 방향과 내용을 유지 변화시키면서 정책을 계승 완료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 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과 조직,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More information

60

60 광복60년기념전 시련과 전진 주 최 :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 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중앙일보 후 원 : SK Telecom, (주)부영, 다음 일 정 : 2005.8.14(일) ~ 8.23(일) 장 소 : 대한민국 국회 1. 내용의 일부 혹은 전체를 인용, 발췌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 주셔야 합니다. 2. 본 자료는 http://www.kdemocracy.or.kr/kdfoms/에서

More information

.....6.ok.

.....6.ok. Ⅳ 성은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므로 성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청소년기에 형성된 성가치관은 평생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 성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성과 건강 단원에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피임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성매매와 성폭력의 폐해, 인공임신 중절 수술의 부작용 등을 알아봄으로써 학생 스스로 잘못된 성문화를

More information

Çѹ̿ìÈ£-197È£

Çѹ̿ìÈ£-197È£ 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More information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1960 년대 1960 년 35 1960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36 37 1960 년 [ è ] 1851 1 [ ] 1 é é é 1851 É 1960 년 2 1 2 11 1952 22 38 1961년 1961년 39 1961 년 3 월 14 일, 한국일보 4 면, 2 3 2 3 40 1962년 1962년 41 1962 년 1

More information

<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More information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4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 등을 수행하여 인니전력 이다. 공사(PLN)를 비롯한 인니

More information

6 7 8 9 1 12 13 14 15 1-1 16 17 1-2 18 1-3 19 1-4 20 2 22 23 24 25 2-1 26 2-2 27 2-3 28 2-4 29 2-5 30 3 31 32 33 34 3-1 35 3-2 36 3-3 37 3-4 38 4 39 40 41 42 4-1 43 44 45 4-2 46 47 4-3 48 49 4-4 50

More information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More information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한국형 노사관계 모델의 탐색 제 절 머리말 제 절 시장체제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유형 제 절 박정희 시대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시장 형성적 권위주의 제 절 전두환 정권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시장순응적 권위주의 제 절 노태우 김영삼 정권 하에서의 자본주의 정치경제 규제되지 않은 개방 경제 시장 민주주의 발전국가의 쇠퇴와 국가규율의 약화 재벌체제의

More information

071115-2

071115-2 Copyright eyesurfer. All rights reserved.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04면 종합 -9-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내일신문] 17면 산업/무역 - 11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37면 인물 - 16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동아일보]

More information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1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상현고등학교 2 1 28 유 훈 2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6 24 정 찬 3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8 3 김 헌 4 [1]2018개방실험-학생2기[

More information

2003report250-12.hwp

2003report250-12.hwp 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More information

10월추천dvd

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More information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More information

그 리 고 꼭 같은 내 용 의 녹 권 이 변 사 펠 사한 깃과 꽉활자로 인 출 한 갓이 있 디. 편 사 - 한 갓도 fj-. i

More information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email protected]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More information

178È£pdf

178È£pdf 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More information

DocHdl2OnPREPRESStmpTarget

DocHdl2OnPREPRESStmpTarget 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More information

01-02Àå_»ç·ÊÁýb74öÁ¤š

01-02Àå_»ç·ÊÁýb74öÁ¤š C O N T E N T S 7 13 35 44 44 62 65 76 92 121 131 138 151 163 174 180 185 193 199 204 206 209 228 256 287 296 318 321 322 344 348 354 357 359 364 367 399 410 428 446 투명한 법, 공정사회로! 2010 부패영향평가 사례집 부패영향평가는

More information

041~084 ¹®È�Çö»óÀбâ

041~084 ¹®È�Çö»óÀбâ 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More information

<B9ABC1A62D31>

<B9ABC1A62D31> 08학년도 교육과정안내 P A R T 0 중국비즈니스 교육목적 대학의 교육목적 탁월한 실용전문인 양성 화합하는 민주시민 양성 연계전공 교육목적 학제적 연계 프로그램을 통하여 교과과정을 운영함으로써 종합적인 사고 능력과 실무능력을 구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 교육목표 대학의 교육목표 연계전공 교육목표 봉사하는 리더십 함양 건강한 육체와 정신함양 중국 사회, 문화

More information

2013unihangulchar {45380} 2unihangulchar {54617}unihangulchar {44592} unihangulchar {49328}unihangulchar {50629}unihangulchar {51312}unihangulchar {51

2013unihangulchar {45380} 2unihangulchar {54617}unihangulchar {44592} unihangulchar {49328}unihangulchar {50629}unihangulchar {51312}unihangulchar {51 Proem Se 4 산업조직론 (ECM004N) Fall 03. 독점기업이 다음과 같은 수요함수를 각각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소비자 그룹에게 제품을 공급한다고 하자. 한 단위 제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상수 이다. 다음 질문에 답하시오. P = A B Q P = A B Q () 두 그룹에 대하여 가격차별을 하고자 할 때 각 그룹의 균형생산량(Q, Q )과

More information

기본소득문답2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More information

0904-6부 tta부록

0904-6부 tta부록 1988 6부 Appendix 부록 2008 우리 경제가 이처럼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세계 IT시장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명실상부한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연표 정보통신표준 제 개정 현황 임원 부서장 표준 제 개정 및 폐지 절차 이사회

More information

2015-05

2015-05 2015 Vol.159 www bible ac kr 총장의 편지 소망의 성적표 강우정 총장 매년 1학년과 4학년 상대로 대학생핵심역량진단 (K-CESA)을 실시한지 5년이 지났습니다. 이 진 단은 우리 학우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직업인으로서 핵심역량을 어느 정도 갖추었나를 알아보는 진단입니다. 지난번 4학년 진단 결과는 주관처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More information

歯이

歯이 Korea Marketing Best Awards 1. CI 2002 2 3 5 / - Cyber 6 7 Best Goods ( ) 8 11 FDA 1 6 7 8 [ ] CI 11 100 12 ( ) 12 2001 5 7 1999 3 ( ) 7 12 ISO 9001 2000 2. 경영 리더십 1) 경영 철학 경영 철 학 CEO 경영철학 건강한 행복의

More information

기후변화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중 하나

기후변화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중 하나 기후변화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중 하나 세계적 차원서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일어날 가능성 높아 기후변화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중 하나 물에 관한 리스크가 감소되지 않고 있지만 이해는 증진 세계적 차원서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일어날 가능성 높아 제4편 불확실성과 리스크에서 물관리(Managing Water under

More information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More information

< > 수출기업업황평가지수추이

< > 수출기업업황평가지수추이 Quarterly Briefing Vol. 2017- 분기 -02 (2017.4.) 해외경제연구소 2017 년 1 분기수출실적평가 및 2 분기전망 < > 수출기업업황평가지수추이 산업별 기업규모별수출업황평가지수추이 (%) : 수출선행지수추이 1 2 2.. 3 - ㅇ 4 . 5 6 . 1 ( ) 7 1 (). 1 8 1 ( ) 1 () 9 1 () < 참고

More information

741034.hwp

741034.hwp 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More information

트렌드29호가제본용.hwp

트렌드29호가제본용.hwp - 309 - - 310 - - 311 - - 312 - - 313 - - 314 - 외부적 탐색단계 새로운 정보에 자극받는 외부적 탐 색단계 새로운 광고 메시지에 의하여 소비자가 제품 및 브랜드 평가를 하는 대안의 평가 단계까지의 일련 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림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비자의 구매태도형성 어느 단계에서도 상품 광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More information

¾ç¼ºÄÀ-2

¾ç¼ºÄÀ-2 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More information

피해자식별PDF용 0502

피해자식별PDF용 0502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IOM 인신매매 방지 교육 지침서 시리즈는 인신매매 피해자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 에 대한 지원 서비스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개발 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인신매매 방지 되었다. IOM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실무자에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비정부기구, 정 게 도움이 될

More information

20061011022_1.hwp

20061011022_1.hwp 조사 보고서 주40시간 근무제 도입 성과와 과제 실태조사 2006. 9 내 용 목 차 Ⅰ. 조사개요 1. 조사 목적 1 2. 조사의 기본설계 1 Ⅱ. 조사결과 1. 주40시간제 도입 이후의 경영성과 3 1-1. 주40시간제 도입 성과가 좋았던 이유 4 1-2. 주40시간제 도입 성과가 좋지 않았던 이유 4 2. 주40시간제 도입 기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과제

More information

141018_m

141018_m 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More information

Microsoft Word - 20040422_pricing strategy.doc

Microsoft Word - 20040422_pricing strategy.doc HUNET Information 2004-04-22 전략적인 가격 설정 고객과 함께 성장하는, 신뢰받는 경영지식 파트너 휴넷 마케팅 믹스의 4P 중 가격은 판매와 시장 점유율에 가장 큰 직접적 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많은 소비재의 가격 탄력성이 광고탄력성보다 10~20배 높다고 한다. 또한 다른 마케팅 믹스 변수에 비해서 가격 결정은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