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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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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目 次 발간사 책머리에/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이 나오기까지 고대사회(삼국 및 통일신라) 고대사회 개관 (강영경) 유화/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 (강영경) 소서노/고구려와 백제 창업의 주역 (박용욱) 평강공주/지혜로운 울보 공주 (강영경) 선덕여왕/삼국통일의 기반 닦은 최초의 여왕 (강영경) 진덕여왕/왕권의 위엄을 세운 여왕 (강영경) 지은/종노룻으로 눈 먼 어머니 봉양한 효녀 (강영경) 진성여왕/국가 위기 극복 위해 노력한 여왕 (이배용) 중세사회(고려) 중세사회 개관 (권순형) 신혜왕후/고려왕조의 기틀 마련한 태조비 (권순형) 염경애/고려 최고의 사랑 받는 아내 (권순형) 언양인 김씨 (이숭인의 모)/ 자녀 교육의 귀감 (권순형) 갑향인 문씨(강호문의 처)/적의칼날에 항거한 여인 (권순형) 근대사회(조선) 근세사회 개관 (이순구, 한회숙) 정희왕후/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청정한 왕후 (이배용) 소혜후/여성 교육 위한 책 내훈( 內 訓 ) 펴내 (한희숙) 신사임당/뛰어난 화가요 현모양처의 모범 (허미자) 황진이/풍류로써 자기 완성 이룬 시인 (이순구) 이항복의 모 최씨/훌륭한 자녀교육을 실천한 지혜로운 어머니 (이배용) 허난설헌/불운( 不 運 )에 몸부림 친 천재시인 (허미자) 논개/임진왜란 때 적장( 敵 將 )과 함께 순국 (한희숙)
2 이매창/거문고와 시의 명수 (허미자) 해평인 윤씨(김만중의 모)/시련 속에서 유명한 효자 길러 (이순구) 임윤지당/여중군자( 女 中 君 子 )의 칭송 받아 (박용옥) 혜경궁 홍씨/사무친 한( 恨 )을 '한중록' 으로 남겨 (이배용) 김만덕/굶주린 백성을 살린 사업가 (이순구) 이사주당/태교( 胎 敎 )의 백과사전 쓴 선각자 (박용옥) 서영수각/시문( 詩 文 )과 수학( 數 學 )에 밝아 (박용옥) 이빙허각/생활에 도움되는 실학( 實 學 )책 써내 (박용옥) 권유한당/천주교 여성교훈서 '언행실록'의 저자 (이순구) 강완숙/천주교 전도에 앞장선 순교자 (한회숙) 김삼의당/과거( 科 擧 )에 실패한 남편과 행복하게 산 문인 (이순구) 강정일당/당대( 當 代 )에 칭송 받은 문장가 (이순구) 근대사회(개화기) 근대사회 개관 (이배용) 명성황후/개화( 開 化 )의 빗장 연 여걸( 女 傑 ) (이배용) 김양현당/여학교 설립에 나선 선구적인 교육자 (박용옥) 순헌황귀비 엄비/진명 숙명 양정학교 세워 구국( 救 國 ) (한희숙) 윤희순/여성 의병( 義 兵 )노래 지어 항일투쟁 (박용옥) 박에스터/사회봉사에 몸 바친 여자 의학박사 (이배용) 부록 저자소개 참고문헌 발간사 조물주가 남성과 여성을 창조한 이래 과거 역사 속에서 여성도 남성과 분명히 함께 활동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은 아주 특이한 경우뿐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인간의 하는 일이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로 구분되고, 여성의 일은 남성의 일에 비해 중요하지 않게 또 가치없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서구에서 시작된 여성해방운동이 불을 당긴 후 여성들은 '역사 속의 여성' 을
3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잃어버린 역사 속의 여성인물을 발굴해 내기도 하고, 대다수 여성이 해 온 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남성만의 반쪽의 역사가 아닌 여성이 포함된 전체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 여성 연구의 핵심과제 중 하나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학계와 여성학계에서도 여성주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해 보는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고. 연구성과도 축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여성개발원에서도 그간 각급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여성인물을 분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의 초 중등학교 교과과정과 교과서 분석을 통해 여학생들이 모델로 삼을 만한 역사적 여성인물이 극히 부족하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관련 부서에 건의서를 보낸 바가 있습니다 금년에 나온 보고서에서도 분석 대상 교과서에 등장하는 전체 역사적 인물 가운데 여성은 2.9%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미래 역사의 주인공은 분명히 남성과 여성입니다. 남녀가 함께 세상을 이끌어 갈 때, 우리가 바라는 남녀평등사회를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본원에서는 개원 15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자라나는 우리의 2세들에게 균형있는 역사관을 갖게 하고. 특히 여학생들에게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자 우리 역사 속의 여성인물에 대한 짧은 전기 모음집을 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집필진은 각 분야 전공의 역사가 등 전문가들이며 본원의 실무진과 긴밀한 협조하에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인물의 선정에서부터 자문과 집필, 수록 사진의 선정, 그리고 윤문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은 강영경, 권순형, 박용옥, 박재희, 신영숙, 이배용, 이순구, 한희숙, 허미자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특히 한국여성사 연구의 태두이신 박용옥 교수님(성신여대)과 이배용 교수님(이화여대)은 원고 전체를 감수해 주셨고, 작가이신 박재희 선생님은 원고를 윤색해 주셨습니다. 본원은 이번 작업 결과를 금년 하반기에 데이터베이스로구축, 이미 개설된 본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에 서비스할 계획입니다. 또한 앞으로 역사적 여성인물을 계속 발굴하여 데이터베이스를 확충하고자 합니다. 끝으로 이 책이 중등학교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 널리 읽히고, 추후 교과서 개편 시 기초 자료나 학교 현장의 교수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여성개발원장 박 인 덕 책머리에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이 나오기까지 초 중등학생들의 위인전에 등장하는 여성은 과연 몇 명일까? 한국인으로 한정할 때 신사임당, 유관순, 선덕여왕, 김미리아 등 5명이 되지 않는다. 또 역사책이나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또한 남성에 비해 극히 낮은 비율로 여성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남성 혼자서 이룩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여성사( 女 性 史 )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첫 번째 관심은 여성이 역사에서 소외된 원인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밝혀내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여성의 삶을 추적, 복원하여 남녀가 함께 이룬 인류 역사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일이다. 세 번째는 미래 사회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끌어 가야 한다는 사실에서 여성들에게 여성도 역사의 주체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은 역사 속에 묻힌 여성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삶을 보여 줌으로써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균형된 역사관을 심어주고 특히 여성에게는 역할 모델을 제시하여 여성의 역사주체의식을 높이기 위해 기획, 발간된 것이다. 이 책의 발간을 위해 한국사 전공자이면서 여성사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7인의 자문위원들이 모여 수록 인물을 선정하였다. 시대적으로는 고대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여성들을 골고루 선정하기로 하였다.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 와 같은 역사서에 기술되거나 금석문이나 문집 등과 같이 기본적인 사료( 使 料 )들이 남아 있느냐. 당시 신문기사나 증언 등의 자료가 있느냐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즉 야담( 野 談 )이나 전래 이야기로만 전해오는 인물은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런 기준에 의해 이미 발간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된 여성인물 120여명의 명단을 놓고, 최종적으로 약 70명의 인물을 선정하였다. 집필자는 자문위원인 7인의 역사학자 외에 국문학자와 작가 등 2인이 추가되어 총 9명이
4 맡아하게 되었다. 서술의 방향은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먼저 역사적 고증에 바탕을 두어 서술하되 왜곡된 여성의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서술의 기본 자료인 정사( 正 史 )로 남아 있는 현존 역사서의 집필자가 남자이고, 그 시대의 시대적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였다. 삼국유사 를 제외한 많은 역사서가 유교적 사관( 史 觀 )에 입각하여 서술되었고, 특히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설립된 조선조의 역사가들은 신라의 세 여왕에 대해 "여자가 왕위에 있음은 후세에 교훈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들을 역사에서 내쫓아 왕이라 아니하고 주( 主 )라 칭한다"고까지 할 정도로 여성 차별의 역사관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술해야 했다. 다음은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지켜나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봉건적 전통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였으며, 여성으로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회와 구국( 救 國 )에 아낌없이 목숨을 던졌으며,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여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음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셋째는 시대별로 여성 삶의 변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 시대 마다 여성사 시대 개관을 싣도록 하였다. 시대는 고대사회(삼국 및 통일신라), 중세사회(고려), 근세사회(조선), 근대사회(개화기), 일제시대로 구분했다. 끝으로 가능한 전문 용어는 풀어서 중 고등학생들이 읽기 쉽게 서술하였다. 즉 역사의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다. 집필된 원고는 자문위원이기도 하고 집필자이기도 한 성신여대 박용옥 교수와 이화여대 이배용 교수 두 분이 내용을 감수하였으며, 역시 집필자이면서 작가인 박재희 선생님께서 윤문을 맡았다. 선정된 인물은 탄생연대 순으로 수록하고, 상 하권으로 분리 출판하기로 하였다. 상권은 고대사회부터 대한제국시대(개화기)까지의 여성인물을 수록하고, 일제시대 인물은 하권에 수록하기로 했다. 고대부터 개화기까지의 인물 대부분이 속한 계층은 양반 사대부 계층 이상이며, 특별한 계층으로는 기녀들이 있으며, 일반 서민은 효녀 지은 외에는 없다. 따라서 일반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사료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나, 일제시대로 내려오면서 계층의 범위가 보다 확대된다. 개화기까지 전체 35인중 왕족이나 왕가에 속한 인물이 12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서( 史 書 )가 왕의 치적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이들에 관한 서술이 다른 계층보다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일하게 여성이 최고 통치자였던 신라시대에 여왕이 3명 탄생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되며, 진성여왕의 경우는 '사련( 邪 戀 )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수렴청정을 처음으로 시작한 조선시대의 정희왕후와 개화기의 여걸 명성황후의 경우는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한 시대에 남성의 고유 영역인 정치 활동의 중심에서 맹활약했던 여성으로 기록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가문의 여성으로 학문과 시문에 능해 문집과 그림 글씨를 남긴 여성들이 또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체체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 휘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현모( 賢 母 )로서 자녀교육의 모범을 보이고, 양처( 良 妻 )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성리학자 임윤지당, 태교를 집대성한 이사주당, 권유한당, 이빙허각, 강정일당 등은 지금까지 학교교육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와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자녀교육의 모범으로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많다. 조선시대의 주변 집단인 기녀들은 풍부한 감수성과 인간적인 자유로움을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시로 남겼다. 기녀 가운데 김만덕은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상업으로 수많은 재산을 모은 데 그치지 않고, 그 재산을 주민을 위해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통해 왜구의 침입은 국가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여성에게 닥친 시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였다. 여성들은 왜구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온 몸을 던졌다. 고려말 왜구에게 잡혀가다 목숨을 던진 강호문의 처를 비롯해 적장( 敵 將 )과 함께 순국( 殉 國 )한 조선시대 기생 논개, 개화기에는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 '안사람' 의병투쟁을 일으킨 윤희순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다양한 형태로 항일독립투쟁을 한 여성들이 등장했다. 항일운동을 육영사업을 통해 실천한 여성들이 있었다. 개국과 함께 개화운동이 시작된 대한제국시기에 여성을 위한 관립학교 설립을 주장한 김양현당이 있었고. 순헌황귀비 엄비도 여성의 개화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양 백과부'로 유명했던 백선행이 막대한 재산을
5 민족교육사업에 헌납했고, 최송설당, 왕재덕, 김정혜, 차미리사 등이 학교를 설립, 여성의 개명( 開 明 )을 통한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최용신은 당시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계몽운동의 횃불이었다.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여성해방운동과 항일운동을 동시에 펼친 여성들도 있었다. 조신성, 김경희, 김마리아, 나혜석, 김활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여성계몽운동 또는 여성해방투쟁을 전개하면서 독립투사를 지원하거나 직접 항일운동에 나섰다. 항일독립투쟁에 직접적으로 나선 경우도 있다. 안경신, 남자현은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고, 유관순은 어린 학생으로서 천안의 만세시위운동을 이끌었고 끝내 감옥에 순국하였으며, 김순애도 상해 폭립운동에 직접 가담, 활동하였다. 식민지 시대 사회문제 그 중에서도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공 파업을 이끈 강주룡, 소설로 표현한 강경애가 있다. 개국이래 근대화 과정에서 전문직을 갖거나 서구 학문을 연마한 선구적인 여성들이 등 장했다.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터,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하란사, 파리로 유학간 서양화가 나혜석, 최초의 여자박사 김활란, 최초의 여자비행사 권기옥,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 최은희, 최초의 근대무용가 최승희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전통을 계승하는데 전 생애를 바친 여성도 있었다. 전재산을 헌납하여 국악학교를 설립한 박귀희, 소리꾼 이화중선, 가야금 연주가 함동정월, 승무가 한영숙이 그들이다. 특이한사실은 일제시대에 활약한 많은 여성인물들이 과부 그것도 소년과부였거나 미혼이었다는 점이다.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시절에 사업을 일구고,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여권운동을 펼치고, 계몽운동을 일상적인 결혼생활과 함께 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또 가부장(또는 남편)이 없을 때 여성 속에 잠재해 있는 남성성이 발휘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에서 서술하고 있는 여성들의 삶은 그 시대의 대중 여성의 삶이라기 보다는 특수한 계층 또는 선구적인 여성의 삶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시 대적 억압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노력으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고, 꿰뚫는 통찰력으로 가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성들의 삶을 보았다. 이들의 삶 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푯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집필진 고대사회 (삼국 및 통일신라) 고대사회 개관 인류의 모태는 여성이고, 어머니이다. 고대사회의 인류는 식량의 보급과 외부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었다. 이러한 집단의 기본적인 유대조건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맺어진 혈연관계의 씨족사회였다. 출산과 수유( 授 乳 ),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위대함은 성( 聖 )스럽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이집트의 속담에서 '신은 어디에든지 있을 수 없기 때문 어머니를 만드셨다'고 하였다. 비엔나 셍제르맹 박물관에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으로 유명하다. 풍만한 가슴과 불룩한 복부, 그리고 커다란 둔부로 표현된 이 비너스는 성스러운 어머니를 표현한 것으로서 구석기시대 이래의 여성에 대한 신비스러움과 경외심이 담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석기시대 수렵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과 함께 무리사회의 구성원이 많아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신석기시대에 와서는 인류의 최대 혁명이라고 하는 농업이 발견되었다. 이 농업의 발견도 여성에서 비롯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대지( 大 地 )의 생산력과 결부하여 대지모신( 大 地 母 神 )의 숭배는 농경과 여성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즉 생존과 직결된 안정적인 식량의 획득이 여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풍요의 신으로서, 생산과 번식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여러 종교의식에서 여성이 신( 神 )으로서, 그리고 사제( 司 祭 )로서 주역을 맡았으며. 이러한 종교관념과 여성의 긴밀한 연관성은 비교적 근대까지도 존속해 왔다. 뿐만 아니라 토기의 제작과 직포( 織 布 ) 기술의 등장도 주로 여성의 공적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토기는 식량을 저장할 뿐만 아니라 불을 사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는 용기( 容 器 )이기도 하다. 이 토기 속에서 음식물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데 과학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토기에는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농경생활에 필수적인 비를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어로( 漁 撈 )생활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생선의 가시를
6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 외에 토기에 문양을 새기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여성의 예술적인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직조( 織 造 )는 손이 기계의 역할을 한 것인데, 수공업의 시작이 여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이 수렵을 나가는 사이에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를 위하여 주거지를 지키게 되는데, 주생활에 있어서도 주로 여성이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생활의 기본이는 의 식 주가 모두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학 수공업 예술에 있어서도 고대의 생활과 사회 속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와 철기의 금속문화가 등장하면서 주로 남성이 주도하는 정복과 전쟁이 사회를 크게 변혁시켰다. 무기가 발달하고, 군사력이 중강되면서 힘에 의한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이전의 평화적이고 평등하던 공동체사회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그 범위가 좁아지게 되었으며 남성은 힘과 권력으로 계급사회를 형성하여 여성을 예속시키고 억압하게 되었다. 고조선에서는 부인의 정신( 貞 信 )을 강요하였고, 고구려와 부여에서도 부인의 질투( 嫉 妬 )를 엄중히 다스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백제에서는 만약 부인이 음란하면 남편 집의 노비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인 조치들은 지배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며, 초기에 억압적인 조치가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그 이면에는 확고했던 여성의 우월적인 지위를 찾아볼 수가 있다. 고구려의 결혼풍습인 서옥제는 여자 집에서 허락받은 이후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으로서, 자녀들이 태어나면 외가( 外 家 )의 가풍( 家 風 )과 외척( 外 戚, 어머니의 친척)들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계사회의 모처혼( 母 處 婚 )과 같은 것임을 볼 때, 고구려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여성과 어머니의 비중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구려 풍습에는 유녀( 遊 女 )가 많아서 일정한 남편이 없는 여성이 많았으며 주몽의 아들인 유리( 類 利 )를 예씨녀( 禮 氏 女 )가 키우는 것을 볼 때 어머니에게 자녀가 귀속( 歸 屬 )된 가모장적( 家 母 長 的 )인 가족구성이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도 박제상(또는 金 堤 上 )의 경우와 같이 두 성( 姓 )을 가지는 경우와, 경주 호장( 戶 長 )을 지낸 거천( 巨 川 )의 가계를 밝힐 때 어머니와 할머니의 계보만을 밝히는 경우, 또 어머니만 나타나 있고 아버지는 나타나있지 않은 출자( 出 自 ) 기록, 그리고 무녀( 巫 女 )의 모계계승 등은 가계계승에서 어머니의 비중이 중요하였던 고대사회의 관념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에 있어서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남녀의 결합은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의하면 여성이 더 주체적이었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단군신화에서는 웅녀가 잉태를 원하여 환웅과 결합하게 되었고, 고구려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우씨녀 ( 于 氏 女 )가 왕의 동생인 발기( 發 岐 )와 연우( 延 優 )를 찾아가서 연우를 산상왕( 山 上 王 )으로 세우고 그의 왕비가 되었으며,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의 집을 찾아가 그의 부인이 되었던 것을 보면, 여성이 결혼에 더욱 주체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면을 단편적으로나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는 일반적으로 중매와 부모의 허락(유화가 중매 없이 해모수와 결합하여 하백이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 있어야 하며, 근친혼( 近 親 婚 ), 동성혼( 同 姓 婚 )과 함께 축첩( 蓄 妾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도 어머니, 왕비, 딸의 비중이 여전히 높아서 고구려 왕에 대한 동모제( 同 母 第 )의 기록은 왕의 즉위에서 '같은 어머니의 동생'이라는 출신이 중시되어 어머니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신라와 가야에서 왕모( 王 母 ), 왕비( 王 妃 )에 대한 출자 기록도 여계( 女 系 )의 비중을 중시하였던 것이며,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성의 가계상속권과 더불어 재산상속권도 인정하는 사회적 관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4, 5세기 경의 신라 지배계층의 무덤인 황남대총은 표주박 형태의 부부 합장묘인데 남쪽은 무기류와 금동관이 출토된 남성의 무덤이고, 북쪽은 많은 장신구와 순금관이 출토된 여성의 무덤이었다. 남성의 무덤보다도 여성의 무덤이 외형적인 규모에 있어서도 크고 내용물인 부장품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많고 좋은 유물이 상당히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여성에 대한 관념이 남성과 비교하여 어떠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가족구성은 일반적으로 일부일처( 一 夫 一 妻 )가 원칙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주거지의 넓이로 보아 가족의 수는 대체로 5인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라의 촌락문서에 의하면 11인의 가족구성도 있지만 4인 정도의 가족이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7 고대사회에서는 곡식과 함께 옷감( 布 帛 )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여성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생산과 유통 교환에 주체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은 상속 받은 재산과 함께 사유재산을 소유하였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여성들이 사찰에 시주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경주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현재 남아있는 가장 큰 에밀레종보다도 4배나 더 컸던 황룡사의 종을 만들도록 시주한 사람은 경덕왕비였던 효정이왕 삼모부인( 孝 貞 伊 王 三 毛 夫 人 )이었다. 상원사종( 上 院 寺 鍾 )도 유휴대사( 有 休 大 舍 )의 부인인 휴도리( 休 道 里 )가 시주하였으며,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 있던 법광사( 法 光 寺 )의 석탑은 원적( 圓 寂 )이라는 여승이 세웠고 취서사( 鷲 棲 寺 )의 석탑도 언부( 彦 傅 )스님의 딸이 세웠다. 이와 같은 여성의 시주기록은 여성이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유재산 및 경제권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종교와 여성의 관계는 특히 밀접하여 여사제( 女 司 祭 )와 여신( 女 神 )에 대한 기록과 여신상( 女 神 像 ) 등의 유물이 고고학적인 발굴과 사료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자료에 의하면 한국 고대사의 서막에서 민족의 시조, 고대국가의 개국에 있어서 여성과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 ( 熊 女 B.C 24세기)가 있다. 웅녀는 한국사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 속에서도 여성 인물 신화를 찾아볼 수가 있다.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신화에 의하면, 웅녀의 전신( 前 身 )인 곰은 사람의 몸을 얻고자 하여 호랑이와 함께 신( 神 )에게 기원을 하였다. 곰이 사람이 되고자 하여 신에게 기원을 하였다는 것은 동물의 차원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발전, 승화하고자 하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웅녀가 여사제( 女 司 祭 )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웅녀는 주어진 현실에 안주( 安 住 )하기 보다 높고 큰 뜻을 세우고, 그 실현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과 시련도 견디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높은 뜻과 강한 의지를 지닌 웅녀였기에 신단수( 神 檀 樹 )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여 민족의 시조(단군)를 배태 ( 胚 胎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군이 죽어서 아사달( 阿 斯 達 )의 산신이 되어 고조선의 호국신으로 받들어졌음을 볼 때, 또 동북아시아에서 곰 숭배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웅녀에 대한 숭배와 신앙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여사제로는 웅녀 외에 신라의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였던 남해왕의 누이 아노( 阿 老 ), 탈해가 실려 온 배를 끌어올린 후 하늘에 길흉을 물었던 아진포의 촌장( 村 長 ) 아진의선( 阿 珍 義 先 ) 할머니, 고구려 대무신왕 때에 비류수 강가에서 솥을 들고 놀던 여인 등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고대사회에서 여성을 여신으로 숭배하고 제사지냈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삼국 개국 시조의 어머니는 호국신모( 護 國 神 母 )로 숭배되었는데, 고구려의 국모( 國 母 ) 유화( 柳 花 ), 백제의 국모 소서노( 召 西 奴 ), 신라의 국모 선도성모( 仙 桃 聖 母 ) 또 박혁거세와 동등하게 이성( 二 聖 )으로 추대되었던 박혁거세의 비( 妃 ) 알령부인 등이 있다. 제2대 남해왕비였던 운제성모( 雲 梯 聖 母 ),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신모, 김유신을 도와주었던 나림 ( 奈 林 )산, 혈례( 穴 禮 )산. 골화( 骨 火 )산의 세명의 호국( 護 國 ) 여산신( 女 山 神 ), 대가야의 국모 정견모주( 正 見 母 主 )등도 여신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여신상으로는 돌이나 뼈에 얼굴과 가슴, 그리고 복부가 점으로 표현된 여신상이발굴되었다. 그리고 경주 남산에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새겨진 여인상도 여신상에 속하는 것이다. 불교가 유입린 이후에는 여승관( 女 僧 官 )으로서 도유나랑( 都 維 那 郎 )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대부분 할머니, 어머니들이 비손(두 손을 마주 비비는 것)을 하는 것을 볼 때, 종교생활과 여성이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 속에서 여성은 자녀의 출산과 양육,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 衣 食 住 )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여러 측면에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고려시대까지도 여성은 가계상속권, 제사상속권, 재산상속권 등에 있어서 남성들과 큰 차별이 없었음이 기록에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관념은 조선시대 전반까지 지속되었다. 고대사회 여성인물 개관 역사 기록은 승자( 勝 者 )의 기록이다. 역사는 후대의 귀감( 龜 鑑 )으로 삼기위해 기록하였으며, 그리고 찬자( 撰 者 )의 입장과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수는 없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이후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넘어가고 여성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갔다. 여성의 질투와 시기에 대한 부여의 법속은 매우 가혹하여 투기한 부인은 모두 죽이고 시체를 남산( 南 山 )에 두어 썩게 했으며 여자의 친가( 親 家 )에서 그것을 가져가려 하면 우마( 牛 馬 : 당시의
8 소와 말은 큰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를 보내야 시체를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키고 자유를 억압하였으며 할동을 제한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기록도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 중심으로, 남성을 위한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사서 ( 史 書 )에 한줄이라도 기록이 남아 있는 여성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여성들은 기록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여성이기에 여성의 입장에서 재해석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태조왕의 어머니 고구려에서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여성으로서는 태조왕( 太 祖 王, 53~145 재위)의 어머니를 들 수 있다 전왕인 모본왕( 慕 本 王 48~52 재위)이 돌아가자 그의 아들 익( 翊 )이 태자로서 왕위에 나아가야 하는데 불초( 不 肖 )하다고 하여 국인( 國 人 )들이 7세인 태조를 세워 왕위에 나아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태조가 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눈을 떴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태조가 7세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인 태후가 수렴청정으로 섭정을 하였다. 더구나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 再 思 )가 생존해 있었는데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린 아들을 세워 어머니가 섭정하도록 한 것은 아버지 보다도 어머니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으로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공인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에는 그 어머니의 역할이 컸으며, 태조왕 즉위 초기의 정치활동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정비하며 주변의 여러 부족을 복속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정치활동은 그 어머니가 직접 주도한 것이었다. 고구려에서 태조왕의 위치는 '국조왕( 國 祖 王 )'이라고 불리운 만큼 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왕으로서 고구려가 정복국가로 비약하여 고대국가의 체제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그의 정치적인 공헌이 많았는데 이는 태후의 정치적 역량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고구려가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정복국가로 나아가는데 있어 태조왕의 어머니가 끼친 영향력은 고구려사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로도 고구려는 중국의 한족( 漢 族 )과 끊임없이 대치하면서 우리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진흥왕의 어머니와 혜공왕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섭정한 경우는 신라에서도 제24대 진흥왕(540~575재위)의 어머니와 제36대 혜공왕(765~779 재위)의 어머니가 있었다. 신라사에서 진흥왕이 차지하는 위치도 고구려 태조왕의 위치와 비견될 수 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였던 시기가 바로 진흥왕 때였다. 진흥왕은 화랑을 제도화 시키고,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당( 唐 )과의 직접통로를 뚫고, 불교를 통하여 백성들의 정신적인 구심점( 求 心 點 )을 모색하였으며, 순수비 ( 巡 狩 碑 )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진흥왕대의 비약적인 발전을 토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던 것으로 사료에 나타나 있다. 역시 진흥왕의 어머니도 신라사에서 끼친 영향력이 막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혜공왕도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만월태후( 滿 月 太 后 )가 섭정하였다. 혜공왕은 즉위하여 죄인을 크게 사면하고, 태학( 太 學 )에서 박사의 강론을 듣고, 왕 4년(768년)에는 당( 唐 )에서 왕을 책봉하면서 겸하여 왕모를 대비( 大 妃 )로 봉하였다. 이는 왕모의 역할과 정치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녀는 문치 ( 文 治 )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왕모( 王 母 )의 정치참여는 고구려와 신라 사회에서 중대한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한 것으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우씨여인 이 외에 고구려에서 주목되는 여인은 제9대 고국천왕(179~197 재위)의 비( 妃 )이자, 제10대 산상왕(197~227 재위)의 비가 된 우씨 ( 于 氏 ) 여인이다. 우씨녀는 고국천왕이 죽은사실을 발표하지 않고 왕의 동생인 발기( 發 岐 )의 집에 가서, "황이 후사( 後 嗣 )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고 하였다. 발기는 "천도( 天 道 )는 정해지는 것이고 부인이 밤에 다니는 것은 예( 禮 )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그러자 우씨녀는 다시 그 아우 연우( 延 優 )에게 가니, 연우가 의관( 衣 冠 )을 갖추고 주연( 酒 宴 )을 베풀어 주었다. 다음날 우씨녀는 거짓으로 고국천왕의 유명( 遺 命 )이라고 꾸며서 연우를 왕으로 삼아 산상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우씨녀가 산상왕후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제11대 동천왕
9 때에는 왕태후( 王 太 后 )로 책봉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그녀의 유언으로 산상왕릉의 곁에 묻혔다. 또한 산상왕이 주통촌( 酒 桶 村 )의 후녀( 後 女 )를 만나 아들을 낳자(후에 동천왕이 된다), 이를 투기 ( 妬 忌 )하여 죽이려 하였다. 우씨녀에 대한 윤리적인 평가는 접어두고, 우씨녀의 입장에서 보면 우씨녀가 자신의 뜻과 맞는 사람을 고구려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으로 세웠다. 우리나라 역사에 전례가 없는 두 왕의 왕비가 되었고, 소생( 所 生 )이 아닌 동천왕 때에도 왕태후의 위치에 있었으며, 죽은 후에도 그녀의 유언대로 산상왕의 곁에 묻혔다. 이와같이 우씨녀는 살아서도 그녀의 뜻대로 막강한 힘을 지녔으며, 죽어서도 그녀의 뜻을 이루었던 여인이었다. 우씨녀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그녀는 당시의 형사처수( 兄 死 妻 嫂 :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처로 맞이하는 제도)의 제도 아래에서 일처다부( 一 妻 多 夫 )적인 삶을 살았으며, 막강한 권력과 화려한 인생편력,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여성으로 주체적인 삶을 산 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알영과 운제부인 신라에서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여성은 다음과 같다 시조비( 始 祖 妃 )인 알영( 閼 英 )은 박혁거세와 함께 지방을 다니며 농사를 장려하고 뽕나무를 심게 하여 이성( 二 聖 )으로 숭앙받았다. 제2대 남해왕(A D. 4~ 24 재위)의 비( 妃 )인 운제( 雲 帝 )부인은 운제( 雲 帝 )부인이라고도 하는데, 경상북도 영일 지방에 있는 운제산( 雲 帝 山 )의 성모( 聖 母 )가 되어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하면 응답을 해주었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가뭄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서 운제부인의 응답에 대한 신앙은 신라인에게 대지모신으로서, 대자모신( 大 慈 母 神 )으로서 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오녀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 때 동해안 지방에 연오랑( 延 烏 郞 )과 세오녀( 細 烏 女 )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해초를 따러 바닷가에 갔는데 홀연히 한 바위가 있어 그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비상한 인물이라 하여 왕으로 세웠다. 한편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아보니 바위 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이 보여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전과 같이 세오녀를 일본에 데리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왕에게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를 세워서 귀비( 貴 妃 )로 삼았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자( 日 者 : 고대사회에서 해를 관찰하여 그 징후로 왕에게 조언을 해주는 관리)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 精 )이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괴이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 使 臣 )을 보내 두 사람을 구해오려 하자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인데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짐의 비( 妃 )가 짠 세초가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달라왕에게 아뢰니 그 말대로 제사한 후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났다. 신라에서는 그 비단을 국보( 國 寶 )로 삼아 어고( 御 庫 )에 보관하였으며 그 이름을 귀비고( 貴 妃 庫 )라고 하였다. 고대 사회에서 해와 달이 지니는 의미는 지대하다. 광명과 따뜻함과 만물을 생육( 生 育 )시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신화에서도 해와 달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사회에서나 매우 크다. 연오랑 세오녀 신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중차대한 이변이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었으며, 다시 예전처럼 해와 달이 빛을 찾은 것은 세오녀가 짜서 준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때문으로 나타나 있다. 세오녀가 비단을 짜 주었기 때문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찾았으며 또한 세오녀가 짠 비단이 신라의 국보로서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아달라왕 때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위기가 세오녀가 짜 준 비단으로 제사함으로써 모면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오녀는 신라의 해와 달의 빛을 잃게도 하고 다시 빛나게도 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던 여인으로 나타나 있다. 도화랑 신라 제25대 진지왕(576~579재위) 때에 신라의 수도 경주의 사량부에 도화랑( 桃 花 娘 )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진지왕이 그녀를 궁중에 불러서 범하려고 하였다. 도화랑이 말하기를, "여자가 지켜야할 바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은 만승( 萬 乘 : 왕)의 위엄으로도 끝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0 왕이, "죽인다면 어찌 하겠느냐?"하니, 도화랑이. "저자( 市 :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지언정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남편이 없다면 가능하겠느냐?"고 하니,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 해에 왕은 폐위되어 죽었고, 2년 후에는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얼마 후 진지왕의 혼이 나타나 도화랑과 7일 간을 머물다 가고 이로 인하여 비형랑이 태어났다. 비형랑은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 귀신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하였다. 이 때의 귀신신앙은 돌아가신 조상들을 숭배하는 것으로서, 불교를 반대하였던 전통신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신라 왕실은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진 귀신신앙을 불교의 석가모니 신앙으로 귀일( 歸 一 )시켜 백성의 신앙 및 사상을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비형랑은 진지왕과 도화랑을 부모로 하여 태어나서 낮에는 왕궁에서 살고 밤에는 사량부의 귀신들과 어울려 놀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귀신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앞장 설 수 있었다. 비형랑은 당시의 신라사회에서 불교를 보급하는데 있어 이와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비형랑의 어머니가 도화랑이었기에 이 일은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화랑의 위치가 신라의 불교 보급에 있어 중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보여준 도화랑의 의지는 왕의 위엄과 권력으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한 남편만을 섬기는 것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시 재가( 再 嫁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재가가 금지되었던 조선시대보다 혼인이 자유로웠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소부인 신라의 삼국 통일에 앞장섰던 명장( 名 將 )인 김유신의 부인은 지소부인( 智 炤 夫 人 )이었다. 그녀는 태종 무열왕의 셋째딸이며 원술랑의 어머니이다. 원술랑이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자 김유신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만나러 온 원술랑을 지소부인은 삼종지도( 三 從 之 道 :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한 후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여자의 도리)를 내세워 끝내 원술랑을 보지 않았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개인적인 모성 본능보다도 나라에 대한 충정심을 더 앞세웠던 것이다. 원술랑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위태로운 전쟁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 중 가장 열세( 劣 勢 )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아가 당( 唐 )의 야심마저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난의 시기에 지소부인과 같은 위대한 정신력을 지닌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노의 처 우노( 于 老 )는 석씨( 昔 氏 )로서 신라 석씨 왕의 후손이며 제10대 내해황(196~230 재위)의 아들이고 제16대 걸해왕(310~356재위)의 아버지이다. 조분왕(230~246재위)과 점해왕(247~261 재위) 때에 부하를 아끼는 무장( 武 將 )으로 활약하였는데 왜국( 倭 國 )의 사신이 왔을 때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으로 소금 만드는 노비를 삼고, 왕비로 불 때어 밥짓는 사람으로 삼겠다" 고 하였다. 왜왕이 듣고 노하여 군사를 내어 치니 우노가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럴 줄 알았겠는가?" 하였다.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우노를 잡아서 나무를 쌓아 불태워 죽인 후 돌아갔다. 제13대 미추왕(262~284재위) 때에 왜국의 대신( 大 臣 )이 사신으로 왔는데 우노의 아내가 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다가, 대신이 몹시 취하게 되자 장사( 壯 士 )를 시켜 마당에 끌어내려 왜국의 대신을 불태워 전( 前 )의 원한을 보복하였다. 왜인이 분하여 와서 금성( 金 城 : 신라의 왕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기에서 우노의 처가 보복한 '전의 원한'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농담으로 한 말로 죽음을 당한 남편의 원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찮은 일을 빌미로 하여 국가의 대신이 죽임을 당한 손상된 국가의 체면에 대한 원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노의 처는 남편과 국가를 위해 왜국의 사신에게 보복을 한 것이다. 이러한 우노 처의 행위는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여기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0여년 후에 제16대 신라 왕으로 즉위한 걸해왕은 우노의 아들이었다. 이와같이 우노 처의 개인적인 판단과 결단력 있는 용감한 행위로 남편과 국가의 원한을 회복할 수 있었다. 치술신모
11 제19대 눌지왕(417~458 재위)때 활약한 박제상의 처는 치술령의 신모( 神 母 ), 치술신모가 되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왕족( 王 族 ) 보해( 寶 海 )를 구해오고, 또 왜국에 볼모로 간 미해( 美 海 )를 구하러 갔다. 고구려와 왜국에 가서 신라의 왕족을 구한 박제상의 처가 신라에서 신모로 받들어져 숭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치술신모가 어떠한 의미로 받들어 졌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박제상의 대외적인 활약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산신이 호국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볼 때 치술신모는 호국신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치술신모는 제18대 실성왕의 딸이기도 하다. 실성왕은 왕위에 있을 때 눌지를 죽이려고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였으나 고구려인들이 오히려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웠다. 눌지왕 때에 활약한 박제상의 뒤에는 치술신모의 정치적 위치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설씨녀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 때에 경주에 살았던 설씨녀( 薛 氏 女 )는 비록 보잘 것 없고 단촐한 집안이었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과 행실이 의젓하여 보는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모두들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그 아버지가 나이 늙게 먼 곳에 가서 방술( 防 戌 : 교대로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병역의 의무)하게 되었는데 설씨녀는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었으므로 차마 멀리 떠나보낼 수 없었고, 또 여자의 몸이라 대신 갈 수도 없어서 한갓 극심하게 번민하기만 하였다. 이때 소년 가실( 嘉 實 )이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나 마음가짐은 곧은 남자로서 일찍부터 설씨녀를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실은 설씨녀의 아버지가 늙어서 종군하게 되어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대신 가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대가 이 노인을 대신하여 가려한다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무엇으로 갚을까 생각하는데 만일 그대가 나의 어린 딸을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아내로 삼아 그대를 받들게 하고 싶다"고하니 가실이 재배( 再 拜 )하며.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정말로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나와 혼인을 청하니 설씨녀가 말하기를, "혼인은 인간의 큰 윤리라 갑자기 이루어 질 수는 없다 내가 마음으로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하지는 않겠다. 그대가 방술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받아 성례( 成 禮 )하여도 늦지 않겠다"고 하고 거울을 가져다 절반씩 나누어 각기 한 조각씩을 가지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신표를 삼는 것이니 후일에 합하여 봅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 필을 주고 떠났다. 그리하여 설씨녀와 가실은 3년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는 일이 있어 군사들을 교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6년이 지나도 가실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설씨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설씨녀는 "전날에 아버지를 편안케 하기 위하여 억지로 가실과 약속을 하였고. 가실도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종군하여 여러 해 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경 ( 敵 境 )에 바짝 가 있어 손에서 병기 ( 兵 器 )를 놓지 않고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물릴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신의( 信 義 )를 저버리고 식언( 食 言 : 말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하는 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명령은 감히 끝까지 따르지 못하겠사오니 다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또 늙어서 딸이 장성하였으나 배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비밀히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미 날을 정하여 그 사람을 맞아들이니 설씨는 굳게 거절하고 물래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며 크게 한숨 쉬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가실이 교대되어 왔는데 형체는 마르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가실이 거울 조각을 내미니 설씨녀가 받아 가지고 소리내어 울었으며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드디어 다른 날로 약정하고 서로 만나 일생을 해로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설씨녀는 아버지를 지극하게 위하는 효녀 임과 동시에, 한번 약속한 말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의리의 여성이었다. 또한 지혜도 있어 신표로서 거울을 나누어 가졌고 그 거울로 인하여 알아볼 수 없었던 가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씨녀는 가실이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헤아릴 줄 아는 혜안( 慧 眼 )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이었다. 이러한 설씨녀는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는 한국의 모범적인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강수의 처 제29대 태종 무열왕(654~660 재위 ) 때에 대문장가( 大 文 章 家 )로 활약한 강수( 强 首 )의 처는
12 대장장이 딸로서 신분이 미천하였다. 문무왕이 강수의 공을 보답하고자 강수의 직위를 올려주고 녹봉 이외에 해마다 조( 租 ) 이백석을 더 주었다. 신문왕 때 죽어 장사( 葬 事 ) 비용을 나라에서 많이 주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사사로히 가지지 않고 모두 절(절의 이름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호국사찰이었을 것이다.)에 보내 주었다. 그 후 강수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 지방으로 내려가려 하자 대신( 大 臣 )이 이를 알고 왕께 청하여 조( 租 ) 백석을 주게 하였는데 그 아내가, "저는 미천한 사람으로 의식( 衣 食 )을 남편에 의지하고 국은( 國 恩 )을 받은 바가 많았습니다. 이제 혼자 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후한 물건을 받겠습니까" 하며, 결국 받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 갔다고 한다. 국가의 재산을 사사로히 축낼 수 없다는 여인의 충심과 높은 기개를 강수의 처는 알게 해준다. 이러한 강수의 처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도 나라의 큰 역할을 하는 남편을 위해 많은 내조를 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소나의 처 제30대 문무왕(661~680 재위) 때에 활약한 소나( 素 那 )는 홀로 아달성을 지키다가 말갈의 급습을 받아 용감히 싸우다가 적의 화살이 고슴도치 털과 같이 꽂혀 넘어져 죽었다. 집에 있던 아내에게 그 고을 사람들이 소나의 죽음을 알리며 애도하니, 아내가 곡( 哭 )을 하며 대답하기를, "내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 丈 夫 )는 마땅히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 어찌 자리에 누워 집안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죽겠는가 하였다. 평소의 말이 이러하더니 지금의 죽음이 그 뜻과 같이 되었다" 고 하였다. 소나의 처는 남편의 전사( 戰 死 )를 슬퍼하면서도 평소의 남편의 용감하고 충성했던 뜻을 널리 알리며, 남편이 죽은 슬픔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심을 앞세우고 있다. 단편적인 기록 속에서도 한국 고대의 여성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경제, 사회,종교, 문화, 가정에서 강한 의지와 신념으로 살아온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화(?~B.C.24)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朱 蒙 )의 어머니는 유화부인( 柳 花 夫 人 )으로 사료( 史 料 )에 나타난다. 이규보가 쓴 동명왕편 에 의하면, 압록강 유역의 세력가인 하백( 河 伯 )의 맏딸 유화가 해모수( 解 慕 漱 )의 왕비가 되어 햇빛을 받아 잉태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아들을 명궁사( 名 弓 士 )로 키워 주몽이 어렸을 때 파리들이 귀찮게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자, 유화가 주몽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다. 주몽은 이 화살로 물레 위의 파리를 백발 백중으로 쏘아 맞혔다. 부여 ( 扶 餘 )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는데,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주몽'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는 수렵을 중요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누구나 활쏘기를 단련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몽이 뛰어나게 활쏘기를 잘하게 된 배경에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어 그 재능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을 떠나 보내는 강한 의지의 모정( 母 情 ) 주몽은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 남쪽 땅에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주몽의 마음을 알고 어머니가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준마)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 고 하였다. 유화부인은 마굿간에 가서 긴 채찍으로 말을 때려, 여러 말이 모두 달아나는 가운데 두 길이나 되는 높은 난간을 뛰어 넘는 준마를 골라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고 안심시키며 주몽을 떠나 보냈다. 주몽은 어머니가 골라준 준마를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
13 유화부인은 소중하게 키운 아들이 위험을 안고 미지의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할 일에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러나 주몽의 의지를 알고는 아들과 생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참으며 아들이 떠나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주몽이 위험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방법으로 준마를 골라 주었다. 또한 주몽이 떠날 때 유화가 오곡( 五 穀 )의 종자를 싸주었다. 고구려를 건국하는 영웅인 주몽의 가장 두드러진 자질은 활 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유화부인이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어 그 자질( 資 質 )을 길러 준 것이다. 또한 주몽이 먼길을 떠나야 하고 위험에 처할 것을 예견하여 준마가 필요함을 알고 유화부인은 아들과의 생이별도 감수하며 지혜로운 방법으로 준마를 골라주었으며, 양식으로 삼아야 할 오곡의 종자를 줌으로써 고구려에서 신모( 神 母 )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부여와 고구려의 두 나라에서 신( 神 )으로 모셔 유화가 B. C. 24년에 동부여에서 돌아가자 그 왕 금와( 金 蛙 )가 태후( 太 后 )의 예( 禮 )로 장례를 지내고 신묘( 神 廟 )를 세웠다. 신묘를 세웠다는 것은 유화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며 그 묘 앞에서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를 계속 지 낸다는 의미이다. 고구려에서도 매년 10월의 제천행사 때 수혈( 隧 穴 )로부터 수신( 隧 神 )을 모셔와 나무로 부인상을 만들어 신좌( 神 座 )에 모셔놓고 제사지냈다. 이 제천행사 때의 수신은 유화부인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마지막 왕인 보장왕 때, 동명왕모의 소상( 塑 像 )이 3일이나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것은, 유화가 고구려에 있어 호국신( 護 國 神 )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고구려의 개국시조인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으로 하여금 신궁( 神 弓 )이 될 수 있도록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어 그 자질을 개발시키고 이끌어 주었으며, 주몽이 큰 뜻을 품고 떠나서 고구려를 세울 수 있도록 격려하여 주었다. 준마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지혜로운 방법으로 준마를 골라 주었으며, 오곡의 종자를 보내주어 고구려의 양식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화부인은 고구려에서 풍요와 호국신의 의미로 숭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부에서도 신모로 받들어져 숭배를 받았던 두 나라의 큰 어머니이셨다. 소서노(B.C. 66~B.C. 6) 고구려와 백제 창업의 주역 삼국시대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중세 고려 사회나 근세 조선조 사회에서 찾아볼 수없는 모권제적 흔적들이 사회 여러 면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있어 성차별적 경향이 없이 거의 평등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삼국에 관한 역사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2세기 중반에 저술된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와 14세기 초의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가 있으며 조선왕조 창건 이후인 4세기 말에 저술된 동국사략( 東 國 史 略 ) 과 15세기에 편찬된 동국통감( 東 國 通 鑑 ) 등이
14 있는데, 그 중 삼국유사 를 제외한 세 사서는 모두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되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창업한 조선조의 역사가들이 저술한 삼국의 역사서는 고려 중엽 역사가들이 쓴 삼국사기 와는 아주 다른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역사자체를 철저하게 유교정치 확립에 활용하였던 만큼 특히 상고사회 여성의 정치적 위치나 활동 등의 실제적 역사 사실조차도 용납할 수 없어, 역사 서술에서 그러한 역사 사실을 때로는 고의적으로 삭제하고 또 때로는 유교적 예와 명분에 어긋나는 비인륜적인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 매도하였다. 유교적 역사 안목에 의하여 저술한 위의 세 역사서 중 조선조 수성기에 편찬이 완성된 동국통감 의 경우는 여성차별적 역사관이 더욱 철저하여 역사 중심부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한 여성의 역사 사실조차도 무참히 생략해버리거나 또는 오로지 유교적 강상( 綱 常 )에 입각한 사론( 史 論 )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창업에서 소서노 ( 召 西 奴 )는 아주 중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유교적 이념에 사로잡혔던 남성 역사가들은 이 여성을 폄하하거나 또는 삭제해버리는 어리석음을 역사에 남겼다.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 창업자가 주몽( 朱 夢 ) 온조( 溫 祚 ) 그리고 박혁거세( 朴 赫 居 世 )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삼국 창업사에서 이들 창업자와 같은 비중을 갖는 중요한 여성 주역들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창업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인 소서노( 召 西 奴 )가 바로 그러한 여성이다. 주몽과 결혼 주몽이 북부여에서 망명하여 졸본부여에 당도했을 때, 졸본부여왕은 주몽의 출중함을 보고 탄복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주몽을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하게 하였고, 그들 사이에는 비류( 沸 流 )와 온조 두 아들을 두게 되었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당도했을 당시 그는 창업에 필요한 오곡(5가지 곡식)과 세 명의 동지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소서노는 젊은 과부로서 굉장한 재산가였다. 그녀의 재력이 주몽의 고구려 창업을 위한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당시의 재력이란 광역의 토지와 그 토지에서 생산에 종사하는 노예와 같은 민력( 民 力 )인 것이다. 이것이 경제적 기반이자 정치적 기반이다. 재력가인 소서노에게는 사별한 전남편 우태( 于 台 ) 때부터의 추종 세력들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소서노의 이같은 기반을 중심으로 역사의 영웅 주몽이 강한 나라 고구려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몽은 북부여에 있을 때 이미 예씨( 禮 氏 )와 결혼하였고 망명 당시 예씨부인은 임신 중에 있었다. 예씨는 아들(유류)을 낳아 혼자 힘으로 늠름하게 키웠다. 그 아들은 장성한 후 주몽이 제시한 어려운 과제를 풀어내고 아버지 동명성왕(B.C. 58~B.C. 19 재위) 앞에 나타나 원자(원자)로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2대 유리왕(B.C.19~A.D. 18재위)이며,
15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은 소서노 소생인 비류 형제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당시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해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는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업을 조성하는데 온 힘을 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제쳐놓고 대신 유류에게 나라를 넘겨주니 이제 우리들은 여기 있으면서 헛되이 울적하게 근심하고 지내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하는 것이 낫겠다." 고 말하고, 온조와 추종자들을 이끌고 미추홀로 내려왔다. 소서노 또한 원자의 극적인 출현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위를 이어 받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두 아들과 함께 미련없이 고구려를 떠나 다시 남으로 내려온 것이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서 백제를 창업하게 된다. 이때에도 어머니 소서노는 나라를 세우는데 필 요한 경제적 도움을 주었고 정신적으로 백제인의 지주가 되었다. 소서노의 죽음 온조왕 13년 3월에 소서노가 61세로 사망하였다. 그 두 달 후인 5월에 도성에서 여러 괴변들이 일어나고, 또 말갈의 침입까지 받는 등 백제는 내외로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 때 온조왕은 신하들에게 "국모가 세상을 버리는 등 정세가 편안치 못하니 서울을 옳겨야겠다." 라고 말하였다. 61세의 국모 사망을 자연적인 노환으로서의 사망으로 보지 않고 나라의 운 명문제와 연결하고 있음은 국모 소서노의 죽음이 온조왕에게는 물론 백제민 전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수난으로 여겨졌던 때문인 것이다. 상고사회에서의 모자관계는 주몽의 건국설화를 담은 동명성왕편 에 잘 나타난다. 지략과 용기가 뛰어난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을 남겨놓고 차마 흔자 떠날 수가 없었다. 아들은 눈물로 떠나기를 주저하였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주저없이 떠날 것을 강건하였다. 그리고 창업에 필요한 오곡을 챙겨주었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창황히 떠나느라 그만 맥자( 麥 子 )를 떨어뜨린 채 도망하였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몽은 멀리서 날아오는 비둘기를 보았다. 그는 저 비둘기는 내가 잊어버리고온 맥자를 보내주는 어머니의 사자( 使 者 )임을 영감처럼 알아차렸는데, 고대사회에서 어머니란 아들의 어떤 어려움도 처리해줄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처럼 상고 사회에서는, 아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단순한 혈친을 넘어선 지모신( 地 母 神 )과 같은 신앙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문의 동명성왕편 에는 부인 예씨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상고사회에서 모자( 母 子 )가 부부( 夫 婦 )보다 우선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백제는 온조왕(B.C.18~A.D.25 재위) 17년 4월에 국모묘( 國 母 廟 )를 세웠는데, 이것은 소서노를 백제의 창업주이자 지모신이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숭배한 때문이다. 평강공주(6세기) 지혜로운 울보공주 고구려 제25대 평원왕(559~589재위) 때는 중국에서는 통일왕조인 진( 晋 )이 망하고 남북조시대( 南 北 朝 時 代 )로서 여러 나라가 계속 생겼다가는 사라져가는 혼란한 시기였다.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시기로서 제25대 진흥왕(540~576 재위)에서 진지왕(576~579 재위)을 거쳐 진평왕(579~632재위)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북쪽에서는 이민족이 세력팽창을 하며 고구려를 괴롭히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쪽 영역을 침범하여 빼앗으며 팽팽하게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자청하여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어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 平 岡 公 主 )가 어렸을 때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온달,?~590)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 고 늘 이야기하였다. 공주의 나이가 16세가 되니 평원왕은 귀족인 고씨( 高 氏 )에게로 시집보내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 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 匹 夫 )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며 지존( 至 尊 )의
16 지위에 있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의 지위에 있는 자는 희언( 戱 言 )이 없다.' 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화가 나서 이르기를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진실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가 있겠느냐?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공주는 보물 팔지 수십개를 팔꿈치에 메고 궁궐을 나와 혼자 가다가 사람에게 물어 온달의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노모( 老 母 )가 있음을 보고 가까이 가서 절하고, 온달이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귀인)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좋고 손을 만지니 부드러운데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아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공주가 산 밑에 다다르니,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였다.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에 오지 말라."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모자( 母 子 )에게 자세한 것을 말하였는데, 온달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되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금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 소와 말 그리고 기물( 器 物 )들을 사서 살림을 모두 갖추었다. 말을 살 때에 공주가 온달에게 이르기를 "시장에서 파는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 國 馬 )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니 공주가 말을 잘 먹여서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강해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 山 川 神 )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온달이 빨리 달리고 잡은 짐승도 많아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그를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는 놀라기도 하고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 後 周 )의 무제( 武 帝, 561~578 재위)가 요동을 침범하니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크게 이겼다. 공( 功 )을 논할 때에 모두가 온달을 제일로 삼았다. 왕이 기쁘고 감탄하여 온달을 드디어 사위로 인정하여 예( 禮 )를 갖추고 맞이하며 높은 작위도 주었다. 그리하여 온달은 위엄과 권세를 모두 갖추었다. 온달 고구려 제일의 장수가 되어 몹시 가난하여 옷과 신발은 모두 헤진 것이었으며 먹을 것도 없어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산에서 나무 껍질을 벗겨다 먹던 온달을 위엄과 권세를 지닌 고구려의 귀족으로 만든 것은 평강공주의 능력과 뒷받침 때문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공주는 좋은 말을 고를 줄 알고 키울 줄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공주가 바보 온달을 만나게 된 것은 지존의 위치에 있는 왕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물론 사랑스러운 귀여운 딸의 울음버릇을 고치기 위해 평원왕은 가벼운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신뢰' 이다. 평강공주는 부왕( 父 王 )을 훌륭한 왕으로서 말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여 신뢰할 수 있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온달을 찾아갔으며, 그리고 결국은 온달을 위엄과 권세를 갖춘 훌륭한 장수로 만들었다. 가난하여 누추한 온달의 집에 가서
17 눈 먼 노모에게 귀한 공주의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을 하였다는 것에서도 평강공주의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모습과, 포용력과,한 번 먹은 마음에 대한 변함없는 실천력을 보여주고 있다. 온달과 그 어머니가 공주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립문 밖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또한 거부하는 모자( 母 子 )를 끝까지 설득하는 모습에서도 더욱 그녀의 훌륭한 모습은 드러난다. 그리하여 온달은 한족( 漢 族 )이 요동을 침범하였을 때 고구려의 장수로서 무공( 武 功 )을 세워 나라를 지켰으며, 590년(영양왕 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과 죽령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자 출정하였다가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온달이 활약하였던 6세기 후반의 고구려는 북쪽에서는 한족( 漢 族 )이,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여 오는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온달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장수로서 이민족( 異 民 族 )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삼국의 요지로서 서로의 각축장이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최후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온달장군의 활약 뒤에는 평강공주의 역할이 또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군의 화살 맞아 온달 사망 온달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장례를 치루는데 영구( 靈 柩 )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 棺 )을 어루만지며, "사생( 死 生 )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온달이 전장으로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 鷄 立 嶺 : 지금의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고구려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고 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죽어서도 관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평강공주가 뜻은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괜찮으니 돌아가자고 하자 그때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표현으로 보아, 온달이 실지( 失 地 ) 회복을 위해 출전하였던 배경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상황이 있었겠지만 평강공주의 위치와 역할도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처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짊어진 온달 장군의 뒤에는 평강공주의 역할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공주의 이미지는 더없이 곱고 여리고 나약하고 귀하게만 생각되는데, 평강공주가 보여준 한국 고대의 공주는 왕의 위엄과 신뢰를 갖춰주기 위하여 혼자 몸으로 궁궐을 나와 누추한 온달의 집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문 밖에서 밤을 새우고도 끝까지 설득한 강인한 의지와 두려움 없는 실천력과 변치않는 결단력을 지닌 여성이었고, 좋은 말을 선택하고 병든 말을
18 잘 치료하고 건강하게 키우는 능력도 지닌 여성이었다. 온달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내조( 內 助 )를 한 평강공주는 오늘날에도 한국의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선덕여왕 삼국통일과 기반 닦은 최초의 여왕 제 27대 선덕여왕( 善 德 女 王, 632~646 재위)은 신라의 첫 여왕이자 기록에 나타난 우리 나라의 첫 여왕이었다. 여왕의 이름은 덕만( 德 曼 )이었으며 아버지는 제 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 摩 耶 夫 人 )이었다. 신라에서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보수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가계계승에 있어서도 아들과 딸, 사위가 크게 차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미 남성이 정치의 주도권을 쥔지 오래인 사회에서 여성이 왕위에 즉위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도 특별한 경우로 인식되어 있었다. 선견지명의 특별한 능력 지녀 선덕여왕이 미리 알았다는 지기삼사( 知 機 三 事 : 기미를 미리 알은 세 가지 일)의 설화는 선덕여왕의 선견지명( 先 見 之 明 )에 대한 특별한 능력을 말하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왕의 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첫번째 예지( 豫 知 : 미리 아는 것) 능력은 다음과 같다. 덕만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진평왕 때에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신라에
19 보내왔다. 이를 보여주니 덕만이, "이 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웃으며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림에 나비가 없기 때문에 압니다. 대체로 여자가 아름다우면 남자가 따르기 마련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나비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 꽃은 아름다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니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겠습니다. " 라고 하였다. 그 꽃씨를 심으니 과연 덕만이 말한 것과 같았으니 그녀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더구나 덕만은 향기없는 꽃을 그려 보낸 당 태종의 의도는, '당나라 임금이 덕만이 배우자가 없는 것을 비웃은 것' 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로 보면 덕만은 이미 의사소통의 국제적인 감각도 지니고 있었으며, 당 태종도 덕만이 비록 배우자는 없으나 꽃 중의 꽃이라고 하는 모란꽃에 선덕여왕을 비유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예지능력 발휘는 여왕이 즉위한 5년(636년) 5월에 있었다. 선덕여왕은 개구리들이 옥문지( 玉 門 池 )에 모여있다는 말을 듣고, "개구리는 성난 눈을 한 병사들의 모습이다. 서남쪽에 옥문곡( 玉 門 谷 )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혹시 그곳에 적병이 몰래 숨어있는지 모르겠다." 하여 장군 알천( 閼 川 )과 필탄( 弼 呑 )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수색하게 하니 과연 백제장군 우소( 于 召 )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날랜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그들을 공격하여 모두 죽이고 돌아왔다. 나중에 신하들이 여왕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개구리는 성난 모습으로 병사의 모습과 같고, 옥문은 여근( 女 根 )이며, 여성은 음( 陰 )이고, 그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군사들이 서쪽에 있을 줄 알았으며, 남근( 男 根 )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쉽게 잡을 줄 알았다." 고 하였다 선덕여왕은 관상론( 觀 相 論 )과 음양이론( 陰 陽 理 論 )과 오행사상( 五 行 思 想 )을 동원하여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사실을 유추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의 예지는 많은 사상이 복합되어 논리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선덕여왕의 지혜로 적국의 공격을 미리 알아내어 쉽게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병법( 兵 法 )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 上 策 )이라고 하였는데, 여왕의 능력으로 마주 싸우지 않고 이겼으니 선덕여왕은 병법상으로도 뛰어난 현군( 賢 君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예지 능력은 죽은 후에 입증된 것이다. 여왕이 아프지도 않을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텐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 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 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으니 여왕이 "낭산( 狼 山 )의 남쪽이다." 라고 하였다. 그 날에 과연 여왕이 죽고 신하들이 여왕을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 후 10여년 후에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이 사천왕사( 四 天 王 寺 )를 여왕의 무덤 아래쪽에 세웠다. 불경( 佛 經 )에 사천왕천( 四 天 王 天 )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여왕의 영험스러운 예지를 후대의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천왕사는 신라가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가 신라를 복속시키려고 대군( 大 軍 )을 거느리고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종교적인 힘을 빌려 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명랑법사( 明 朗 法 師 )가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어 도량을 설치하면 가능하다고 하여 문무왕 19년(679년)에 세운 호국사찰이다. 지금도 경주 낭산에 가면 사천왕사의 터가 있으며 뛰어난 수법으로 만들어진 귀부와 초석들이 남아있다. 도리천과 사천왕천이 있는 경주의 낭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산인 수미산에 비견될 수 있다. 선덕여왕은 낭산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불국토 사상을 신라에 구현시킨 위치에 있다. 이와 같이 선덕여왕의 예지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외교적인 국제감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재위 중에는 적군과 마주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었으며, 죽은 후에도 경주의 낭산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아 불국토 사상( 佛 國 土 思 想 : 부처님이 계시는 나라, 또는 부처님이 교화하는
20 나라)을 신라에 뿌리 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문왕 때에 세계적인 인류의 유산으로 공인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주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호국사찰이 어디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그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다( 寬 仁 明 敏 )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 聖 祖 皇 姑 )라는 최고의 칭호를 올렸다고 한다. 여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나라 안의 고독하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인자한 정치를 베풀었다. 또한 '인평 ( 仁 平 )'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대외 적으로도 자주적인 국가임을 표명하고 너그럽고 공평한 정치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여왕은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지귀( 志 鬼 )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왕이 영묘사( 靈 廟 寺 )에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묘사 탑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여왕은 그의 가슴 위에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 탑을 태웠다고 한다. 이는 영묘사의 창건 설화와 함께 당시의 복잡한 종교정책이 얽혀진 설화이지만, 여왕의 공평한 종교정책과 함께 백성을 인자하게 사랑하여 백성들로부터 사모( 思 慕 )를 받았던 여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설화이기도 하다. 여왕이 재위한 시기는 신라의 중고시대( 中 古 時 代 : 삼국유사 에서 신라사를 세시기로 구분한 것으로서 제23대 법흥왕으로부터 제28대 진덕여왕 때까지를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중요한 시기이다. )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전쟁을 하던 시기이며, 국력을 키우기 위해 당과의 외교를 긴밀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당과의 긴밀한 외교관계 유지는 나중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볼 때, 선덕여왕의 외교정책은 신라사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에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부분이지만, 신라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 신라인들을 위하여 왕으로서 취할 수 있었던 지혜로운 방법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는 결국 신라마저 장악하려는 당의 야심을 알고 이를 물리쳤음을 볼 때 신라인들에게 자주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호국의지 담은 황룡사 9층탑 건립 한편 선덕여왕은 김유신( 金 庾 信 )의 누이와 김춘추( 金 春 秋 )가 결혼하는 것을 도와주고 인정함으로써 앞으로 삼국통일의 두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두 집안을 맺어주었다. 이로써 그들은 국가를 위해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결국 신라가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왕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실로 선덕여왕은 인재를 발탁하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여 국가의 운명을 이끌어 가도록 하였던 중요한 역할을 한 능력 있는 현명한 군주였던 것이다.
21 종교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써서 분황사( 芬 皇 寺 )와 영묘사를 이 여왕대에 이루었으며 특히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탑은 당나라에 다녀온 자장법사( 慈 藏 法 師 )의 청으로 건립한 높이 42척(약 80여m)의 대탑이다. 이를 9층으로 한 뜻은 구이( 九 夷 )를 복속시키키 위한 것인데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吳 越 ), 제4층은 탁라( 托 羅 ), 제5층은 응류( 鷹 遊 ),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단국( 丹 國 ), 제8층은 여적( 女 狄 ), 제9층은 예맥( 穢 貊 )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선덕여왕은 싸우지 않고 위엄으로 이들 아홉 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종교적인 힘으로 이 거대한 불탑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선덕여왕은 왕의 자제( 子 弟 )를 당( 唐 )에 보내어 국자감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이는 당의 선진문물을 배우려는 의도와 함께 당과의 외교가 중요한 시기에 국제적인 감각을 키우고 외교에 능숙하게 대처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양 최고( 最 古 )의 천문대인 첨성대도 선덕여왕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너그러운 내치( 內 治 )와 적극적인 외교, 종교와 과학등의 여러 방면에서 당시를 이끌었던 훌륭한 현군( 賢 君 )으로서 최고의 숭배를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은 당과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쳐 삼국통일의 외교적인 기반을 닦았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하여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진덕여왕(7세기) 왕권의 위엄을 세운 여왕 진덕여왕( 眞 德 女 王, 647~654 재위)은 신라 28대 왕이다. 27대 선덕여왕에 이어 여왕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579~632 재위)의 동생인 국반갈문왕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성품과 소질이 풍부하고 수려하였으며 키가 7척이나 되고 팔이 길었다고 한다.
22 여왕은 즉위하여 '태화( 太 和 )'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주체의식을 높였고, 정치 이념으로 신라인의 큰 화합을 도모, 국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신라인의 화합 도모, 국력신장에 주력 당( 唐 )과의 외교를 돈독히 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에 군사를 청하고, 의관( 衣 冠 )을 청하였으며, 나중에는 외교적인 필요에 의하여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진골에게는 아홀( 牙 笏 : 관직에 있는 자가 관복을 갖추었을 때 손에 지니는 상아로 만든 패)을 쥐게 하여 신분의 위계질서를 확고히 하여 관계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여왕이 조원전( 朝 元 殿 )에서 백관들로부터 하정례( 賀 正 禮 )를 받음으로써 백관들로부터 여왕의 위엄을 확고히 하였다. 왕 5년에는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하여 왕실의 기밀 사무를 총괄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당과의 외교 승패가 신라의 존망과 관련된 중요한 시기에 진덕여왕은 스스로 오언시의 '태평가( 太 平 歌 )'를 지어 그 내용을 무늬로 한 비단을 짜서 당의 태종에게 보냈는데 그 한시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대당이 왕업을 개창하니, 높고 높은 임금의 모책은 창성해 진다. 전쟁을 그치니 군사들은 안정을 얻게 되고, 문치를 숭상하니 백왕의 뒤를 잇게 되었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매 물체마다 광채를 머금었다. 깊은 인덕은 일월과 짝할만 하고, 순환하는 운수는 당우의 세로 향한다. 번기의 번덕임은 어찌 그리 혁혁하고, 쟁고의 소리는 어찌 그리 황황한가. 오랑캐로 제명을 어기는 자는,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덕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나 다 모여들며,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친다. 사시( 死 時 )는 옥촉과 같이 흐르고, 칠요( 七 曜 )는 널리 만방에 돌아 다닌다. 옥에서 제보를 내리고, 임금은 충량한 사람에게 맡기었다. 오제 삼황의 덕을 한덩어리로 하여, 우리 당나라 임금을 밝게 한다. 학문과 문학 실력 뛰어나 이러한 오언시를 여왕이 직접 짓고 또 직접 비단에 무늬로 넣어 짰다고 기록되어 있다.기록대로라면 여왕의 학문과 문학 실력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라 할 만했다. 직조 능력과
23 솜씨도 뛰어났다. 혹, 여왕이 시를 직접 짓거나 비단을 직접 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외교적인 필요성을 인식하여 여왕이라는 입장을 최대한으로 부각, 외교 활동을 벌인 지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앞서 선덕여왕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진덕여왕의 외교 활동 또한 신라사에 있어 그 역할이 적지 않은 것이었다. 지은(9세기) 종노릇으로 눈먼 어머니 봉양한 효녀 효( 孝 )는 모든 선행의 근본이라고 했다. 효녀 지은( 知 恩 )에 대한 얘기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지은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경에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는 혼란한 시기로서 중앙에서는 왕위 계승 다툼이 치열하였다.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이 날뛰는 데다 중앙의 세금은 무거웠다. 부역도 해야 하며 흉년까지 겹쳐서 백성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아버지 없이 어머니 부양 지은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32세가 되도록 시집도 가지 않고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때로는 봉양할 것이 없어 품팔이도 하고 구걸도 해야 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지은은 부잣집에 자청하여 몸을 팔아 노비가 되어 쌀 십여 석을 받았다. 하루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며칠, 어머니가 딸에게 이르기를, "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아도 맛은 전과 같지 않고 오히려 간과 마음을 에이는 것 같으니 웬일이냐?" 고 하였다. 딸이 그제서야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가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다니 내가 빨리 죽느니만 못하다." 고 하면서 소리내어 크게 우니, 딸도 울어서 그 슬픈 정경이 길 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조상숭배 사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미풍양속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중시되었다.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아서 죽은 후에 자식으로부터 제사와 숭배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지은이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시집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헌신적으로 희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머니의 육체만을 봉양할 줄 알았지 얼굴색을 살펴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효심에 감동, 왕이 상 내려 지은의 효성은 모든 백성 뿐 아니라 왕까지도 감동시켰다.
24 제 50대 정강왕(886~887)은 벼 5백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부역을 면제시켰다. 군사를 보내 그 집을 도둑으로부터 지키게 하는 한편 그 마을을 '효양방( 孝 養 坊 )'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에는 진성여왕 때라고 기록되어 있음). 왕은 당나라 왕실에도 그 아름다운 행실을 알려, 지은의 효행은 중국에까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 왕이 국가적으로 효를 장려하고, 군사들이 개인 재산을 지켜주어야 할 정도로 도둑이 많았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혼란하였으며 백성들의 삶이 그만큼 고달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은은 그러한 시대에도 어머니의 얼굴 색까지 살펴, 그 마음을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는 효성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효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효녀이다. 진성여왕(9세기) 국가위기 극복 위해 노력한 여왕 진성여왕( 眞 聖 女 王, 887~897 재위)은 50대 정강왕(886~887 재위)의 여동생으로서 신라 51대 왕이다. 신라에는 이미 통일 이전에 27대 선덕여왕과 28대 진덕여왕이 있었다. 그러니까 진성여왕은 신라의 세 번째 여왕이었다. 당시는 45대 경문왕계가 왕위를 계속 이어가는 시대로서 49대 헌강왕(875~885 재위)과 50대 정강왕은 경문왕의 아들이고,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다. 정강왕이 후사가 없어 비록 여자이지만 자질이 총명하고 골상이 장부같은 여동생을 왕으로 세운 것이다. 진성여왕은 11년 동안 재위하였다. 진성여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 역사를 정리하고자 삼대목 을 집성케 하였다. 또한 죄수를 사면하고 여러 주 군에 일년간 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 수습에 노력하여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동왕 2년, 정치의 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제까지 누적되어 온 하대사회의 모순이 마침내 전국적인 반란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어지러운 신라사회 반란의 도화선이 된 것은 지방 농민들의 조세 반항이었다. 진성여왕 3년, 지방의 주 군 현에서 공부( 貢 賦 )를 수송하여 오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세를 독촉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전국 곳곳에서 납세를 거부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 반란은 47대 헌안왕(857~860 재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나, 진성여왕에 이르러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동왕 3년에는 사벌주에서 원종, 애노 등의 세력이 상당히 강대해져서 이를 토벌하려고 출동한 정부군이 그들이 기세에 눌려 감히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으며, 5년 10월에는 북원의 양길이 궁예의 보좌를 받으며
25 북원의 동쪽 부락들과 명주 관할 10여개 군 현을 습격하였다. 또 5년에는 완산에서 견훤이 일어나 자칭 후백제라 하였고 무주의 동남군 현이 그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로 하여 지방행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팽배해지자 중앙정부는 골품제를 강력히 유지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왕실의 안정을 꾀하게 되었다. 또한 진성여왕 시기에는 육두품 출신의 지식계층이 족벌 정치에 의해 성립된 골품제의 모순을 규탄하고 정치개혁 사회개혁을 주장하다가 탄압 당하거나 배척 당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동왕 8년에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그 내총은 골품제에 의한 관리임명이 아니라 능력과 학문에 의해 등용해야 한다는 유교 정치 사상을 담은 것으로, 최치원은 상당한 정치적 경륜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시무책에는 중앙집귄 정책의 강화에 대한 견제와 지방 호족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들어 있었다. 왕은 이 시무책을 가납하고 그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곧 이어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의 시무책이 진골 귀족의 반대로 하여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중앙통치력 강화 위해 노력 흔히 진성여왕은 무능하고 음탕하고 그로 인해 신라의 멸망을 재촉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다분히 고려시대 삼국사기 를 쓴 김부식의 유교사상에 의한 여성비하적 태도가 담겨진 것이다. 미소년들을 비밀히 측근으로 불러 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는 비난이 있지만, 이것은 여왕이 화랑 세력에 의탁하여 왕권의 안정을 모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경문왕의 가계는 화랑 세력과 관계가 깊다. 경문왕이 화랑출신이었음을 비롯하여 대대로 왕권의 기반을 화랑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진성여왕의 정치적 방향에 반발을 한 측은 다름 아닌 반 경문왕계 진골 세력이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린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라고 볼 수 있다. 경문왕계의 계속적인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다른 가계의 진골 세력이 만만찮은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성여왕 시기에는 다른 왕 때보다 불교 행사가 많이 눈에 띈다. 즉 동왕 1년에는 백좌를 황룡사에 베풀과 친히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다. 2년에는 왕이 병환이 나서 고승 60명으로 기도를 올렸다. 4년에 다시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베풀었다. 이것 역시 왕실이 불교에 의지하여 위축된 왕권을 만회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진성여왕이 이룬 공적으로 무엇보다도 삼대목 의 수찬을 들 수 있다. 위홍과 승려 대구에게 명하여 향가를 모아 집대성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신라인들이 천여 년간 내려온 그들의 역사를 삼대로 구분하고 향가집을 낼 수 있었다는 점은 당시에도 시대적인 전환을 인식하고 신라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하대 통치자로서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더욱이 향가의 내용이 대부분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진성이라는 여왕의 왕명에서도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나타남은 진성여왕이 국가적인 위기의식을 불교사상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불교적 행사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구해 보려는 노력에도 모든 수습에 실패하자 자신의 부덕함을 내세워 후계자에게 양위하는 과정은 여왕이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미덕이자 동시에 한계였다고 볼 수 있겠다. 진성여왕의 왕위 계승은 골품제적인 요소로서 경문왕계를 이어가려는 과도기적 의미와 또 하나는 호국의 상징으로서 여왕을 추대하여 당시 혼란한 국가적 위기를 구하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빈번히 추진되는 불교적 행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성여왕의 정치적 성격은 당대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중세사회 (고려) 중세사회개관 고려 (918~ 1392)는 918년 태조 왕건(918~943 재위)에 의해 건국되었다. 당시 한반도는 고려와 후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리고 그들의 딸과 혼인하는 등으로 회유, 견제하였다. 이후 광종(949~975 재위)은 노비안검법( 奴 婢 按 檢 法 ), 과거제 실시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성종(982~997 재위)은 중앙집권적인 여러 정책들을 펼 수 있었다. 문종(1046~1083 재위)대에 이르러 고려는 관료제가 완성되고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기 지배층은 귀족이었다. 이들은 과거( 科 擧 )나 음서( 陰 敍 )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뒤 출신 가문을 바탕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음서와 공음전시( 功 蔭 田 柴 )
26 제도를 통해 자손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여러가지 특권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이들의 출세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인의 능력보다도 친가 외가 처가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친족망( 親 族 網 )이었다. 이에 고려의 귀족들은 왕실이나 비슷한 수준의 문벌귀족들과 겹치는 혼사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유지 확대해 나갔다. 고려시대 여성의 결혼 생활을 보면 오늘날과 다른 점이 많다. 가장 특징적인 것이 서류부가혼이라 하여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도 친정에서 계속 살다가 나중에 시집으로 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집에 들어가 살거나 남편 벼슬 때문에 분가를 했다가도 뒤에 친정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다. 또한 재산 상속면에서도 딸 아들 간에 차별없이 균분되었다. 이는 고려의 친족제가 비부계적 ( 非 父 系 的 )이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대표적인 부계친족제 ( 父 系 親 族 制 ) 사회인 중국에서는 결혼식 자체를 남편 집에서 하고 결혼 첫 날부터 시집살이를 하게 되며, 재산도 아들에게만 상속시켰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과 다른 결혼과 친족제도를 가지고 있어 '출가외인( 出 嫁 外 人 )'이라는 관념이 약할수 밖에 없었고, 아들 딸 간의 차별도 그다지 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된다거나, 호적 문서에 남녀 순이 아니라 출생 순으로 기재한다거나 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를 가지고 여자의 지위가 높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결혼이 신분상승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할 때 그 주체는 남성에 한한다. 여성은 자신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친족의 일원으로서만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시대에 여성이 받는 남자형제와 동등한 양의 상속 재산이나 사위와 외손자에게도 부여되는 특권 등은 여성의 진정한 힘이나 지위가 아닌 '결혼지참금'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집이 가난해 결혼을 못하고 승려가 된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처를 버리고 새 장가를 든 남성들의 예가 여럿 보인다. 특히 무신 집권기나 원간섭기처럼 정치적 격변이 심할 때는 처가의 죄에 연좌되지 않기 위하여, 또는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외에도 여성은 칠거지악( 七 去 之 惡 )을 범했을 때 쫓겨나는 등 이혼에 있어서도 남성에 비해 불리했으며, 간통죄를 범했을 때도 자녀안( 子 女 案 : 나쁜 행실을 기록한 문서)에 올라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남성에 비해 열악한 지위에 있었다. 고려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교와 불교를 들 수 있다. 유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이미 고대에도 삼종지도, 수절 등의 관념이 일부나마 엿보이는데, 고려에서도 상류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칙 이나 여사서 등 중국의 여성 도덕서가 읽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었고 불교는 마음을 수양하는 도구였으므로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특히 불교였다. 불교에서 이상적으로 여겼던 여성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친척들에게 이익을 베 풀고, 여공( 女 工 )에 힘쓰며 자식을 현명하게 기르는 어머니였다. 이는 유교나 기독교 등 전근대시대 다른 종교의 여성관과 특별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불가능했던 시절 가정내 존재로서의 여성에게 기대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 여성 묘지 명에 보면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위와 같은 덕목을 가진 여성들의 삶이 여럿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유교 사회와 한 가지 차이라면 상례( 喪 禮 )나 제례( 祭 禮 )등이 불교식으로 치뤄져 여성들에게도 참여의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상례나 제례가 절에서 치뤄졌으므로 행사를 실제 집행하는 사람은 승려였고 자식들은 행사 비용만 내면 되었다. 따라서 제사가 적장자( 適 長 子 )에게 독점되지 않고 딸과 아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 輪 廻 奉 祀 )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이에 대를 잇기 위해 양자( 養 子 )를 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원간섭기가 되면 고려의 가족제도나 친족제도에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 원인으로는 공녀( 貢 女 ) 징발과 주자학의 수용을 들 수 있다. 공녀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만으로도 수천 명의 여성들이 끌려갔는데, 일단 공녀가 되면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원 관리의 처첩이나 궁녀, 노비로 일생을 마쳐야 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공녀를 피하기 위하여 조혼( 早 婚 )이 성행하고 일부다처제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게 되었다. 비록 이 법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다처( 多 妻 )를 두는 것이 묵인되어 전기의 처첩제가 붕괴되었다. 한편 여원관계의 진행으로 제도와 풍습, 언어는 물론 학문면에서의 교류가 빈번해졌다.원에 갔던 관리들을 통해 주자학이 도입되고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들은
27 가묘( 家 廟 )의 설치, 친영제( 親 迎 制 )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가묘의 설치는 제사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적장자 중심으로 제사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친영제 실시 역시 혼인과 그 이후의 결혼생활이 부계친족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또 공양왕 때에는 고위 공직자 부인들의 재가를 금지하자는 상소도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여성들에게 정절이 강조되기는 했으나 재혼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이는 결국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만 한정되던 정절관념이 남편이 죽은 뒤까지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조선에 들어와 본격화되며, 여성들의 생활과 지위는 또 한차례의 격랑을 겪게되는 것이다. 신혜왕후(10세기) 고려 왕조의 기틀 마련한 태조비 태조비 신혜왕후 유씨( 神 惠 王 后 柳 氏 )는 정주 사람으로 삼중대광( 三 重 大 匡 ) 유천궁의 딸이다. 정주는 예성강변에 위치하여 한반도 서남해안은 물론 중국과의 교통이 편리하였다. 이에 신라 하대 이래 무역이 발달하였고 부를 축적한 사람도 많았다. 고려사 에 보면 유천궁이 큰 부자였고 장자( 長 者 )라 불렸다고 한다. 이는 곧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호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정주라면 송악(개성)과도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송악 지역의 토호였던 왕건의 선조들 역시 정주 지역과 무관하지 않았다. 왕건의 집안 역시 송악 지방에 살면서 서해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하여 재산과 세력을 키운 호족이었다. 호족의 딸로 태어나 왕건을 만나 왕건(고려 태조, 918~948 재위)이 유씨 부인과 처음 만난 것은 왕건의 나이 스물이 좀 지나서였다. 왕건의 인물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과 같은 얼굴에 미간이 시원스럽고 턱이 야무지며 이마가 훤했다 한다. 또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지에 가득 차 있었으며 기상과 도량이 웅대 심오하고 목소리가 웅장하여 세상을 구원할 빛이 엿보였다고 한다. 당시 왕건은 태봉의 궁예(901~918재위) 휘하의 장군으로서 여러 지역을 정복하며 용맹을 떨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늙은 버드나무 아래서 잠시 말을 쉬고 있었다. 그 때 유씨가 길 옆 시냇가에 서 있었는데, 얼굴이 매우 덕성스러웠다. 왕건은 그녀에게 누구의 딸인가를 물었고, 그녀는 이 고을 장자의 딸이라 대답했다. 왕건은 군사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가 묵기를 청하였고, 그 집에서는 왕건과 군사들에게 음식을 잘 차려 대접하였다. 그리고는 처녀로 하여금 그날 밤 왕건을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왕건은 군대를 이끌고 떠나야 했다. 견훤이 거느리는 후백제 군에 맞서 계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서해로부터 광주로 들어가 금성군( 錦 城 郡 : 나주)을 비롯한 10여 개 군현을 쳐서 점령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고, 이로써 파진찬 겸 시중( 侍 中 )이라는 태봉 최고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유씨는 왕건이 떠난 뒤 그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그녀를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와 후백제, 태봉의 세 나라로 나뉘어져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태봉의 군주 궁예는 한반도 북부의 넓은 영토와 큰 세력을 차지하게 되자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졌다. 무고한 신하와 백성들을 의심해 모반하였다는 구실로 죽이는 일이 잦았고, 눈 밖에 벗어난 처첩들에게는 간통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신라를 멸도( 滅 都 )라 부르며 원수로 여겨 신라에서 항복해오는 자들까지 모두 죽였다. 어느날 궁예는 왕건을 급히 불러 노기 띤 어조로 "경이 지난 밤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역을 음모한 것은 무슨 일인가." 물었다. 왕건은 웃으며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내가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경의 마음을 본 뒤 그 일을 설명하겠다."
28 하고는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한참 무엇인가 외는 듯했다. 이 때 장주( 掌 奏 )로 있던 최응( 崔 凝 )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붓을 짚는 척 하면서 왕건의 옆을 지나며 "굴복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라고 속삭였다. 왕건은 그제야 깨닫고 "사실은 신이 반역을 음모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 하였다. 그제야 궁예는 웃으며 "경은 정직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며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말고삐를 상으로 주었다. 그리고는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마오." 라 당부하였다. 이는 왕건이 여러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울 뿐 아니라 포용력 있는 인격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자 궁예가 그를 시기하며 의심한데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왕건은 이후 스스로 근신하며 자청해 자주 변방에 나가 궁예의 눈 앞에서 멀어지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왕건의 명망은 높아 가고, 반면 궁예는 점점 인심을 잃어갔다. 신민들을 함부로 죽일 뿐 아니라 사치가 심해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다. 여기다 기근, 전염병까지 겹치자 신민들은 더욱 그를 미워하여 마침내는 그를 왕위에서 몰아낼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신라 경명왕 2년(918)에 기병장( 騎 兵 將 )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의 집으로 와서 궁예를 폐립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왕건은 유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텃밭에 새로 익은 오이가 있는지 알아보고 따 오라 했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를 알아 차리고 나왔다가 다시 북편 창문으로 해서 가만히 휘장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 때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낯을 붉히면서 굳게 거절하였다. 이 때 유씨가
29 급히 휘장 속에서 나와 남편에게 "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손수 갑옷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그를 옹위해 나가며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달리며 "왕공( 王 公 )이 이미 의기( 義 旗 )를 들었다." 라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달려와 합세하였고, 먼저 궁문 앞에 이르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왕건을 기다리는 자도 많았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변장하고 도망치다 부양(강원도 평강)의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왕건은 그날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 天 授 )'라 하니 이 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태조는 즉위한 이듬해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고,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오대( 五 代 )의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서경 경영을 통해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과단성 있는 그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는 여전히 복잡하였다. 궁예의 옛 신하 중 불복하는 무리도 있었고, 고려를 배반하고 후백제에 가담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한 서남쪽에는 강성한 후백제가 버티고 있었고, 동쪽에는 신라가 여전히 잔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는 각지의 호족들에 게 겸손한 태도로 후히 대접하여 회유에 노력하였으며, 그들 딸들과의 결혼을 통해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29명의 부인을 맞이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친신라 반후백제 정책을 표방하여 마침내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받아 내었다. 그리고 왕실의 내분으로 분열된 후백제를 격파하여 마침내 태조 19년(936)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하였다. 유씨 부인은 이 모든 정치적 격변기에 태조와 함께 하였다. 그녀는 처음 결혼해서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남편이 거의 매일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지위가 오르고 공이 커지면서는 당시 군주였던 궁예의 시기와 의심으로 남편이 더욱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는 일도 겪었다.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태조는 전쟁터를 전전해야 했고, 호족들의 반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 호족 회유책의 일환으로 태조와 결혼한 수 많은 호족의 딸들이 저마다 '태자'를 낳아 그녀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이 시대에는 처첩( 妻 妾 )이나 적서( 嫡 庶 ) 관념이 후대와 달라 먼저 결혼했다고 처가 되고, 뒤에 결혼했다 해서 첩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처첩이 구분되며 신분이 엇비슷할 경우에는 대체로 병렬적인 지위에 있게 되는 것이 당시 왕실의 상황이었다. 태조에게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왕후와 부인의 호칭은 대체로 여자 친정쪽 호족 세력의 크기에 따라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부인보다는 왕후가 높은 지위였다고 여겨지지만 6명의 왕후 간에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건국에 내조 다해 왕후로 책봉 게다가 그녀에게는 자식도 없었다. 왕건은 모두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두었다. 충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긍달의 딸이었던 왕후 유씨는 6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았으며, 신혜왕후 유씨와 비슷한 시절에 왕건과 결혼했던 장화왕후 오씨는 왕위 계승자인 혜종을 낳았다. 자식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지위가 오씨나 유씨에 비해 낮아질 가능성도 있었고, 그녀 역시 여자로서 남편의 다른 부인들에 대해 질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창업 군주 배필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였다. 그녀는 943년(태조 16년) 후당( 後 唐 )으로부터 왕후로 책봉되었는데, 그 글을 읽어보면 그녀의 성품과 내조의 공로를 잘 알 수 있다. 남의 처가 되어 남편을 잘 섬겨 부귀를 누리게 된 사람을 그 집안의 가장 좋은 아내라고 보리라. 대의군사 특진 검교 태보 사지절 현토주 도독 상주국 고려국왕의 처하동 유씨는 내조하는 말이 정당하였고 방조한 바도 실로 많았다. 국가 대사를 좋은 계책으로 보좌하였으며 부인으로서 총애와 우대를 받아왔다. 임금을 보좌하여 충절을 이루었으며 남편을 섬기는데 유순하고 현명하였다. 이에 일반적 관례를 초월하여 특수한 명예를 주노니 더욱 근왕( 勤 王 )의 뜻을 가다듬어 나간다면 이것이 국은에 보답하는 규범이라고 할 것이다. 그대를 하동군부인( 河 東 郡 夫 人 )으로 봉하노라. 유씨는 죽은 뒤 시호를 신혜왕후라 하였으며 태조의 현릉에 합장되었다. 신라 왕녀는 물론 유수한
30 호족 딸들을 제치고, 더구나 왕위 계승자의 어머니인 장화왕후 오씨까지 물리치고 그녀가 태조릉에 합장된 것은 오직 현명하고 유순하게 남편을 섬기고 내조한 그녀 자신의 덕과 인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녀야말로 5백년 고려 왕조의 기틀을 연 고려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염경애(고려 중기) 고려 최고의 사랑 받는 아내 믿음과 맹세를 잊지 않았으나 함께 죽지 못한 것 매우 애통하네. 아들 딸 기러기 떼처럼 날으니 기필코 부귀하여 대대로 번창하리 이것은 고려시대 한 남편이 아내가 죽은 뒤 묘지명을 쓰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글귀이다. 전 근대적 시대에 남편이 아내의 묘지명을 쓴 예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그녀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행복한 여인이라 하겠다. 고려 제일의 효자와 결혼 염경애는 효자로 유명한 문신 최루백의 처이다. 그녀의 집안은 당대의 명문가였다. 어머니 의녕군대부인 심씨는 부덕이 뛰어난 여성으로 천성이 총명하고 근검하여 가업을 잘 지켰으며,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일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염경애는 4남2녀 중 장녀로서 유학적인 집안 분위기와 어머니의 부덕을 보고 그 가르침을 따르면서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해갔다. 묘지명에 보면 그녀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정숙할 뿐 아니라 문자를 많이 알고, 대의에 밝아 말이나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한다. 염경애는 25세 때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시댁은 대대로 수주(수원) 지방의 향리를 지낸 가문이었는데, 남편 최루백은 늦게 과거에 급제해 벼슬하였다. 그의 벼슬살이가 늦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최루백의 나이 15세 때에 그의 아버지 상저가 사냥을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최루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호랑이를 잡으러 떠났다. 마침내 호랑이를 찾아낸 최루백은 "네가 내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도 너를 잡아 먹겠다." 며 호통을 친 뒤 순식간에 호랑이를 도끼로 내리치고, 그 배를 갈라 호랑이 고기를 항아리에 담아 개울 바닥에 묻었다. 그리고는 부친의 뼈와 고기점을 골라 그릇에 넣어 홍법산 서쪽에 매장하고 그 곁에 여묘( 廬 墓 )를 세웠다. 3년간의 거상이 끝난 뒤 그는 묻어 두었던 호랑이 고기를 꺼내서 다 먹고 산을 내려왔다. 이후 어머니를 모시고 과거 준비를 하여 뒤늦게 급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인의 모범이 될 효행을 베푼 남편 최루백 못지 않게 염경애 역시 효성스러웠다. 시집오기 전에는 친정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 온 뒤에는 홀로 되신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더구나 시아버지에 대해서는 생전에 섬겨 보지 못했다 하여 더욱 효도를 다하였다. 명절이나 복일( 伏 日 ), 납일( 臘 日 )이 되면 몸소 제물을 드렸고, 또 평소 부지런히 길쌈을 하여 저고리나 바지 등을 지어 두었다가 제삿날이 되면 그 옷을 영전에 바쳤다. 제를 올리러 절에 갈 때면 버선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가 가지고 가 중들에게 시주하였다. 남편 최루백은 그녀의 묘지명을 쓰면서 특히 이 일을 가장 잊을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일가 친척의 길흉 경조사에도 늘 정성을 다하여 모든 사람들이 훌륭히 여겼다. 가시나무 비녀 꽂고 베옷 입을지라도 또한 그녀는 아내로서의 도리도 다 하였다.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 잘 받들었으며, 남편이 전쟁터에 나갈 때는 갑옷 위에 입는 옷인 자주색 전포를 만들어 보내 주었고,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때로는 전장에 음식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이나 자식들이 오로지 관직 생활과 공부에만 전념하기를 바랐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정 살림을 잘 꾸려가야 한다고 염경애는 생각했으나, 당시 그녀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사료를 보면 고려시대에 여성들이 상행위나 고리대를 통해 돈을 번 사례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의 봉급이 많지 않았고 시댁도 부자가 아니었던 그녀로서는 자본금이 적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유교적 도덕관에 젖은 그녀가 그러한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 기도했다. 기껏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길쌈이나 품앗이 정도였다. "제가 집안 살림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의식을 맡아 힘써 하려고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 제가 죽은 뒤, 자식들이 많은 녹을 받아 무엇이든지 뜻대로 된다면 이 어미를 재간이 없다고 여기고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느라 고생한 것을 잊지는 않을런지요?" 라며 염경애는 남편인 최루백에게 안타까운 말을 남기기도 했다.
31 1145년(인종23년) 봄에 최루백은 사직에서 우정인지 제고로 승진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의 가난한 살림이 구제되겠다." 며 기뻐했다. 그러나 남편이 "간관은 녹만 먹는 자리가 아니다." 라며 나무라자 "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이 전각의 섬돌에 서서 임금과 시비를 다툰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간다 해도 마음이 기쁘겠습니다." 라고 했다. 남편이 신하로서, 관인으로서 올바른 도리만 다 해 준다면 자신은 어떤 어려움도 견딜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내 덕에 최루백은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대간이나 백성의 살림살이를 직접 보살피는 지방관 등 중요한 직책을 남의 지탄을 받지 않고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사후에 남편과 자식 잘돼 그러나 훌륭한 아내이며 며느리 어머니였던 그녀의 생애는 짧았다.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남편 최루백은 이 해 여름에 우사간으로 승진하고 겨울에 좌사간이 되었으며, 종 3품직인 국자제주에까지 올랐다. 또 그녀가 낳은 4남 2녀 중 아들 셋은 모두 관직에 나갔고, 막내 아들은 승려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집은 나라에서 많은 녹을 받게 되었으나, 남편 최루백은 집안의 의식이 오히려 그녀가 고생하며 살림 꾸릴 때만 못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그녀가 얼마나 평소 여공( 女 工 )에 힘썼고 가정 살림을 잘 이끌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정치나 사회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경우 그녀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효성스러운 며느리, 어진 아내, 현명한 어머니였다. 염경애는 누구보다도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이 결과 남편과 자식들을 국가의 동량으로 길러낼 수 있었다. 남편과 자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여성의 사회활동이 자유로워진 시대에서는 높이 평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삶도 시대 상황을 뛰어넘어 평가될 수는 없다. 그녀같은 여성들이야말로 고려의 5백년 사직을 지탱해온 숨은 공로자였다 하겠다. 언양인 김씨(이숭인의 모, 1328~1381) 자녀교육의 귀감 도은( 陶 隱 ) 이숭인( 李 崇 仁 )은 고려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가 목은 이색( 牧 隱 李 穡 ), 포은 정몽주( 圃 隱 鄭 夢 周 )와 함께 끝까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켜 삼은( 三 隱 )으로 추앙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점이 크다고 하겠다. 며느리로 효성이 지극 이숭인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계림 언양사람이다. 그녀는 고종(1213~1259 재위) 때 재강으로서 요나라 금산( 金 山 ) 왕자를 격파해 사직에 큰 공이 있었던 위렬공( 威 烈 公 ) 김취려( 金 就 礪 )의 후손이다. 그녀의 아버지 김경덕( 金 敬 德 )은 소부시( 少 府 寺 ) 판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대 유학자 문헌공( 文 憲 公 ) 최충( 崔 庶 )의 12세 손인 헌부전서( 憲 部 典 書 ) 최중유( 崔 仲 濡 )의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1328년(충숙왕 15년) 섣달 초 이렛날에 태어났는데 여덟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8세에 성산 이씨 원구( 元 具 )에게 시집을 갔다. 시댁은 대대로 성산 고을의 향리였는데, 증조부대부터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집안이었다. 남편 이원구의 증조부는 유명한 학자였던 이조년( 李 兆 年 )의 맏형이었으며 조부는 평양 부윤을 지냈다. 그러나 부친은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집간 이듬해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녀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 것을 볼 때면 늘 탄식하고 부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의 몫까지 합하여 지성으로 시집 어른들께 효도 하였다. 시할아버지인 평양공( 平 壤 公 )과 시할머니인 선부인( 宣 夫 人 )이 춘추 72, 73세에 병환이 들어 몇 달째 누워 계시자 그녀는 손수 약을 다리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였다. 지극한 병구완에도 불구하고 시조부모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크고 작은 염을 전부 자기 손으로 하고 곡을 하다가 여러 번 까무라쳐 일가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모두
32 칭찬하였다. 몸소 실천하여 가르친 자녀교육 김씨 부인은 숭인( 崇 仁 )과 숭문( 崇 文 )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훌륭히 교육하였다. 자랄 때 숭인이 문( 文 )에, 숭문이 무( 武 )에 재능을 보이자 그들의 적성대로 각각 문인과 무인으로 키웠다. 그러면서 늘 타이르기를 "몽가( 蒙 哥 )야, 너는 서생( 書 生 )이니 배움에 힘써 게을리 하지 말아라 보한( 普 漢 )아, 너는 무인이니 활쏘고 말타는 것을 마땅히 잘해야 한다. 그러나 함부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하도록 해라." 라고 하였다. 몽가와 보한은 숭인과 숭문의 어릴 적 이름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을 단지 입으로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몸소 자신이 실천하면서 가르쳤다. 김씨 부인은 이른 새벽 닭이 울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 단정히 앉아서 금강반야경( 金 剛 般 若 經 )과 화엄행원품( 華 嚴 行 願 品 )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매일 몸소 베를 짜고 실을 뽑고 바느질하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이 늘 불경을 외우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여자의 일이라 할 수 있는 베짜기, 실뽑기, 바느질 등을 열심히 할 때 자식들도 공부에 전심전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어머님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아 숭인은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19세 때(공민왕16년, 1367년)에는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관( 學 官 )에 임명되었다. 당시 성균관에는 이색을 우두머리로 하여 정몽주 박상충( 朴 尙 衷 ) 정도전( 鄭 道 傳 ) 김구용( 金 九 容 ) 김재안( 金 齋 顔 ) 등이 학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의 중소지주, 향리의 후예들로서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당시 권문세족들의 비리에 비판적이었다. 이들을 소위 신진사대부라 부르는데, 이숭인 역시 이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열심히 성리학을 연구하며 가르쳤다. 1370년(공민왕 19년) 명에서 과거 시행을 반포하자 이숭인은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예비시험에 응시한 결과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당시 그의 나이가 22세로 명의 과거응시 자격이었던 25세에 미달되어 본 과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예의산랑( 禮 儀 散 郞 ) 예문응교( 禮 文 應 敎 ) 문하사인( 門 下 舍 人 ) 등 문반의 주요 직책들을 두루
33 역임하였다.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하던 그에게 공민왕이 시해되고, 권문세족들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면서 시련이 시작되었다. 정부에서는 친명반원( 親 明 反 元 )에서 친원( 親 元 )으로 외교정책을 바꾸었다. 이에 이숭인은 우왕 원년(1375) 정도전 김구용 권근 등 신진사대부들과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되고 경산부에 유배되었다. 1377년(우왕 3년) 귀양에서 돌아온 그는 성균사성( 成 均 司 成 ), 우사의대부( 右 司 議 大 夫 )로 승진하였고 조정에 9개 조에 달하는 정치 사회 경제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당시 고려사회는 권문세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토지를 침탈하여 농민이 유리도산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시정 책에서 어진 사람을 수령으로 임명하고, 성곽을 수리하여 왜구에 대비하며, 사패전( 賜 牌 田 )을 규제하고, 불필요한 정부기구를 축소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밀직제학( 密 直 提 學 ), 동지사사( 同 知 司 事 )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어머니의 교훈으로 충절의 삶을 산 이숭인 이무렵 어머니 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351년(우왕 7년)정월에 병이 들어 그 달 28일에 춘추 54세로 졸하였다. 이 때 숭인은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지제교( 判 典 校 侍 事 藝 文 館 堤 學 知 製 敎 )였고 숭문은 흥위위 대호군( 興 威 衛 大 護 軍 )이었다. 딸 셋도 모두 결혼하였고 사위들 역시 관직에 있었다. 손자도 다섯, 손녀도 셋이나 되었다. 잘 자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주들 앞에서 그녀는 행복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뒤 고려의 정세는 더욱 말기를 향해 치달아갔고, 자식들의 삶 역시 이와 무관할 수 없었다. 1358년(우왕 14년) 권문세족과 무장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인임( 李 仁 任 )이 제거되었고, 이승인은 이인임의 인척으로서 유배되었다. 그러나 청렴하고 능력이 있었던 그는 곧 서울로 불러 올려져 첨서밀직사사( 簽 書 密 直 司 事 )로 승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차츰 자신과 노선을 같이 했던 신진사대부 내에서 이상한 기류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준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단순히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차원이 아니라 왕조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그는 이들과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로부터 탄핵을 받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파가 마침내 정몽주를 살해하고 새 왕조를 건립하였다. 이숭인은 정몽주일파라 하여 관직을 삭탈 당하고 나주로 마지막 유배길을 떠났다. 그리고는 거기서 정도전 남은 등이 보낸 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 한창 활동할 나이에 비극적 최후를 마쳐 그의 정치적, 학문적 능력으로 볼 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신진사대부로서 고려의 성리학 발전과 고려말의 정치사에서 큰 역할을 한 정치가였지만, 특히 그의 문장은 동방 제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명과 외교관계를 맺은 뒤 고려에서는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거의 모두 그에게 짓게 하였다. 당시 명과의 관계로 볼 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의 아름다움과 절실함은 명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글이 매우 정성스럽고 간절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여러 외교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가 명에 보내는 금 은 마 포 등 세공( 歲 貢 )을 면하게 한 것도 이숭인 문장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의 저술들은 중국의 사대부들까지 서로 칭송하며 다투어 읽었고, 읽는 이 마다 탄복치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심지어 고려 말에 그가 살해된 것은 윤소종과 정도전이 그의 문장을 시기해서 죽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 모두가 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를 몸소 보여 아들로 하여금 공부에 전력할 수 있게 만든 어머니의 덕이라 하겠다. 또한 이숭인은 여러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가 누구나 바라던 진기한 중국 물품을 구입할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함을 보여주었다. 이 역시 "옷은 몸을 따뜻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니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지 말며, 음식은 배고프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진기한 것을 숭상하지 말라." 고 가르친 어머니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회유책을 물리치고 죽음을 택한 것도, 그리고 한석봉이 조선 제일의 명필이 된 것도 모두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김씨부인은 만인의 귀감이 될 충절을 길러낸 어머니로서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34 갑향인 문씨(강호문의 처, 14세기) 적의 칼날에 항거한 여인 문씨는 광주 갑향 사람으로 판전교시사( 判 典 校 寺 事 ) 강호문( 姜 好 文 )의 처였다. 전교시는 국가의 경적( 經 籍 )이나 축문, 신하들이 올리는 상소문 등을 맡아보는 관청이었다. 판사는 이 곳의 장관이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 문씨가 살았던 고려 말은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안으로는 권문세족들이 많은 토지를 겸병하여 농민들이 땅을 잃고 유리 걸식하였으며,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홍건적은 1359년(공민왕 8년)에는 모거경 등이 4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쳐내려 왔으며, 1361년(공민왕 10년)에는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갔으며, 최영과 이성계 등의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이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왜구의 침략은 훨씬 심했다. 왜구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를 침범한 사례가 보이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우리의 해안을 어지럽혔다. 고려 말이 되면 침략이 극심해져 공민왕부터 공양왕 때까지 1년 평균 약 l2회 이상을 침입하였다. 게다가 고려 말의 왜구는 전국을 무대로 내륙지방까지 깊숙이 횡행하였다. 예성강 일대 수도권 지역에도 자주 출몰해 서울에 계엄령이 내려질 정도였고 천도론이 대두하기까지 하였다. 이 시기 이처럼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일차적으로 일본의 혼란한 국내 사정 탓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333년 가마쿠라( 鎌 倉 )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찌( 室 町 ) 막부가 들어섰다. 이와 동시에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는 남북조시대가 6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에 중앙의 통치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 해 각 지방 무사들은 자신의 영지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백성들은 이 와중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해적이 되어 중국과 고려의 해안에 출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고려의 사정 역시 매우 혼란스러웠다. 공민왕은 부원세력 제거 및 여러 개혁 정책을 통해 폐단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암살 당했으며, 우왕이 10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였다. 우왕은 자신을 추대한 권문세족들의 영향력하에 있었으며, 또한 우왕 자신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유흥으로 날을 지새웠다. 게다가 고려의 군사력도 매우 취약하였다. 고려는 원 간섭기 내내 강력한 군사력을 갖지 못하도록 통제 당했으며, 군대의 기강도 해이했다. 그러니 왜구를 막기가 쉽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왜구는 특히 곡식 약탈에 주력하여 고려의 조운선을 습격하고 연안의 곡물 창고를 노략질하였으며, 심지어 민가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곡물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35 이들에 대한 대책으로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자 백성들이 입는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내륙에까지 쳐들어와 닥치는대로 살육과 방화, 약탈을 일삼아 이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의 강을 이루었다. 또 이들은 많은 백성들을 잡아가 자기들의 부족한 농업 노동력에 투입하거나 노예로 팔아먹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뒤에 외교 교섭 등을 통해 그들일부를 소환해 오기도 했지만 살상자를 포함해 왜구에 의한 인명 피해는 매우 컸던 것이다. 왜구에 끌려가다 절벽 아래로 몸 던져, 기적적으로 살아나 1387년(우왕 14년)에도 왜적이 침입해 문씨가 사는 마을에까지 들이 닥쳤다. 문씨는 황급히 어린 아들을 업고 큰 아이 손을 잡고는 피난 길에 나섰다. 그러나 도중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고 미처 숨지 못한 그녀는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왜적들이 그녀를 끌고 가려하자 문씨는 버티며 한사코 끌려가지 않으려 했다. 왜적들은 그녀의 목에 줄을 묶어 강제로 끌고 가며 등에 업은 아이를 버리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등에 업었던 아이를 포대기로 잘 싸서 나무 그늘에 눕혔다. 그리고는 큰 아들에게 "네가 여기 아기와 함께 있어라. 누군가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너희를 보면 구해 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떼를 쓰며 억지로 어머니를 따라왔다. 문씨가 함께 잡힌 10여명의 여성들과 함께 몽불산 극락암 근방에 왔을 때 였다. 그 곳에는 높이가 1천 척이 넘어보이는 암석 벼랑이 있고 그 위에 실포라기 같은 길이 나 있었다. 문씨는 같이 잡혀가던 여자에게 "왜놈에게 욕을 당하고 사는 것 보다는 몸을 깨끗이 하고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하며 몸을 날려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미처 제지하지 못한 적들은 그의 아들을 죽이고 떠났다. 그런데 그 절벽 아래에는 칡 덩굴이 얽혀 있었고 풀들이 무성하였다. 그 위로 떨어진 문씨는 죽지 않고 오른 팔만 부러진 채로 깨어났다. 근방에 바위굴이 있었는데 이 굴에는 마을 사람들이 왜적을 피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문씨를 불쌍히 여겨 죽을 쑤어 먹였다. 문씨는 사흘 동안 바위 굴에 머물러 있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 이 시기에는 외적의 침입을 맞아 많은 여성들이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퍼런 칼날 아래서도 죽음을 무릎쓰고 지조를 지켰다. 문씨 보다 먼저 강화부 관리의 세 딸이 우왕 3년에 왜적이 강화에 처들어오자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서로 손을 맞잡고 강물에 투신하였다. 또 진주 호장( 戶 長 ) 정만의 처 최씨는 우왕 5년 왜구가 쳐들어오자 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 속에 숨었다. 그러나 적에게 잡히게 되자 나무 등걸을 끌어안고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 며 꾸짖음을 그치지 않았다. 적은 그녀를 칼로 내리쳐 죽이고 두 아들을 잡아 갔다. 강보에 싸인 아기가 기어가 엄마 젖을 빠니 피가 입에 흘러들어가 얼마 뒤 아기까지 죽었다. 경산부( 京 山 府 ) 낭장( 郎 將 ) 이동교의 처 배씨는 우왕 6년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의 추격을 받자 어린아이를 업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적이 해안에서 활에 화살을 끼우며 "네가 물에서 나오면 죽음을 면할 것이다." 라 하였으나 배씨는 "어찌 속히 죽이지 않느냐. 나는 서생의 딸로 일찍부터 '열녀는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 는 말을 들어왔거늘 내가 어찌 적에게 더럽혀지겠느냐." 라고 하였다. 적은 활을 쏘아 먼저 어린아이를 죽이고, 또 배씨를 위협 했으나 그녀는 끝내 나오지 않고 해를 당하였다. 서운정( 書 雲 正 ) 김언경의 처 김씨는 우왕 13년 왜적이 쳐들어오자 숲에 숨었으나 잡혔다. 적이 김씨를 욕보이려 하자 항거해 죽임을 당하였으며 같은 해 전의정( 典 醫 正 ) 경덕의의 처 안씨 역시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우왕 14년에는 강호문의 처 문씨가 죽음을 각오하고 항거하다가 천운으로 살아났던 것이다. 노예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 고려시대에 여성이 국난을 당했을 때 남자들과 같이 군사로 활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당시 여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한 일이 여성들에게 허용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대 전쟁이 있으면 여성은 전리품 내지는 피해자의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적군이 침입해 왔을 때 그녀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두 가지였다. 순순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노예로
36 끌려가든지, 아니면 맨몸으로 버티다 죽음을 당하든지 였다. 많은 고려의 여성들이 후자를 택했다. 그들은 적의 칼날 아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거했으며 이는 곧 남성들이 적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것과 같은 마음, 같은 행위였다 하겠다. 비록 그녀들의 행동이 직접 적에게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뜨거운 애국심, 드높은 기개는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근세사회 (조선) 근세사회 개관 조선(1392~1897)은 유교사회다. 그래서 흔히 그 시대의 여성은 억압 받았으리라 상상한다. 과연 여성이 그렇게 권력에 억눌려 어렵게 생활하였을까? 유교의 윤리가 반드시 여성을 통제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조선은 이상적인 유교사회를 꿈꾸고 제도 등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성리학( 性 理 學 )이 영향을 미치는 중기( 中 期 ) 이후에야 나타났다. 제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민중의 생활에 뿌리 박힌 풍속이나 관습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생활상을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누어 보자. 전기에는 남귀여가혼( 男 歸 女 家 婚 )이 유행하였다. 결혼한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 사는 풍습이다. 이 제도를 못마땅히 여긴 태종은, "우리의 혼인제도가 남주여가( 男 往 女 家 )여서 웃음거리가 되니 고금( 古 今 )의 법을 참작하여 새 제도를 정하라." 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제도가 바뀌어도 오랜 풍습은 갑자기 바뀌지 않았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자라므로 외조부모에 대한 정이 친조부모보다 많았다. 자연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딸이나 외손자가 제사를 지냈다. 재산상속도 현대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혼인한 후에도 그 재산을 남편이나 시집에 주지 않고 혼자 관리했다는 점이다. 노비의 소유주를 '아무개의 처( 妻 ) 모씨( 某 氏 ) 노비' 등으로 표시한 것이 있다. 조선 전기에 여성은 조선 후기에 비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불교 행사를 참석하는 것, 남녀가 어울려 술과 가무( 歌 舞 )를 하는 것, 격식을 차리지 않은 옷차림으로 거리에 서서 동네 잔치를 구경하는 것 따위를 제약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봉건체제가 흔들리자 양반들은 아들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가계를 계승할 아들이나 손자가 없을 경우에는 여자가 올리던 제사권을 양자( 養 子 )에게 주었다. 또한 혼인도 결혼 후 곧바로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시집가는 형태인 친영제( 親 迎 制 )를 정착시켜 친정과 멀어지게 했다. 자연 여성의 권한과 재산권은 위협을 받았다.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 되는 동시에 남편의 종속적 위치에 처했다. 마음대로 절에도 못 가고, 노래를 못함은 물론 외출할 때에도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등 일상생활이 강하게 규제되었다.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가정에서 뿐이었다. 이로써 자유분방한 허난설헌의 시풍( 詩 風 )은 비난 받고, 부덕( 婦 德 ) 높은 신사임당이 전형적인 조선의 여성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평민이 양반을 꿈꾸듯 현모양처를 꿈꾸는 여자가 늘어나면서 재혼( 再 婚 )은 죄악시( 罪 惡 視 )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동요한다. 여성들은 국토를 짓밟는 일본군이나 여진족을 이빨로 물어 뜯고 막대기와 돌맹이로 대항하여 자식과 남편을 지켜내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 많은 여성이 무참하게 살해되었지만 대전란( 大 戰 亂 )이 휩쓴 뒤의 여성들은 종전의 다소곳한 그 여성들이 아니었다.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현모양처만이 여성의 모습은 아니라는 자의식이 고개를 든 것이었다. 점차 학문과 식견이 뛰어난 여성이 생겨났다. 시나 소설 등 문학활동을 하는 여성, 기녀, 의녀, 무녀 등 특수직 여성이 증가했다. 몰락한 양반들이 학문에 연연하여 생활에 무능력했던 반면 여성들은 밭일이나 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베틀에 앉아 짜낸 면포는 화폐로 사용되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니 가정 내에서의 역할도 커져갔다. "부인은 근검과 삼계( 三 戒 )만 알면 족하느니라. 독서와 강의는 장부( 丈 夫 )의 일이다. 부인이 이를 알면 해( 害 )가 끝이 없다." 라는 실학자 이익의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 여성의 활동에 박수치는 남자는 드물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봄볕에 아지랑이 오르듯 실학자 가문에서 여성들이 문집을 내고 할 일을 찾아 뛰었다.
37 천주교는 조선 후기에 서학( 西 學 )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천주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은 조선의 오랜 선분질서를 부정하였다. 여성에게 보다 인간적인 삶을 찾아 나설 용기를 주었다. 최재우가 창시한 동학( 東 學 )도 여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인내천( 人 乃 天 ) 사상은 아내에 대하여 위압적인 가부장권에 강한 재동을 걸었다. 최시형은,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한울(하느님)의 말인 줄 알고 배울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삼을 것은 스승으로 삼으라." 고 권하여 여성의 인격적 평등을 인정하였다. 엄격한 부덕( 婦 德 )을 요구하던 지배층의 봉건적 이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허물어져 갔다. 인습의 굴래를 벗기 위한 여성의 피나는 몸부림은 대한제국시대를 거쳐 일제시대에 거대한 분수령을 이룬다. 정희왕후(1418~1483) 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청정한 왕후 조선왕조 최초의 수렴청정( 垂 簾 聽 政 )은 세조비 정희왕후( 貞 喜 王 后 )에 의해 이루어졌다. 수렴청정은 즉위한 왕이 너무 어린 경우에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잠정적으로 왕을 대리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렴이란 신하와 왕대비가 서로 상견할 수 없도록 중간에 발을 친다는 뜻으로 유교적인 내외법에 기인한 것이다. 수렴청정은 남성보다 여성에 의한 섭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것은 왕권을 보호하는 데 철저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세조가 승하하자 대리로 정무를 보던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너무 어리다하여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상들과 국정을 협의하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국왕과 자리를 함께하고 모든 정무를 일일이 결재하였다. 유교사회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여성으로서 국정 참여에 한계도 있었으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을 볼 때 가장 능동적인 여성의 정치활동의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세조와 결혼, 세조의 즉위 적극 도와 정희왕후는 1418년(태종 18년)에 태어나 1483년(성종 14년)에 사망하였다. 정희왕후는 세조비( 世 祖 妃 )로서 영의정 윤번의 딸이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혼인은 세종 10년경에 이루어졌다. 정희왕후가 세조와 결혼할 당시의 정희왕후의 대담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지고 있다. 1428년(세종 10년) 당시 윤번 집에 수양대군의 배필감을 구할 사명을 띤 감찰상궁이 찾아왔다. 윤번의 아내는 신부 후보로 큰 딸을 데리고 나와서 감찰상궁에게 선을 보였으나 작은 딸 윤씨가 나와 단의동발( 短 衣 童 髮 : 짧은 옷과 짧은 머리)로 어머니 등 뒤에 숨어서 구경을 하였다. 민망하게
38 생각한 어머니는 작은 딸을 방 안으로 떼밀어 넣으면서 매우 꾸짖었는데 오히려 감찰상궁이 "그 아기의 기상이 범상하지 않아 심상한 사람과 겨눌 바가 아니니 다시 보기를 청합니다. " 하여 보기를 청하여 다시 만나보고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대궐에 들어와 알리고 작은 딸을 극구 천거하여 마침내 정혼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1428년 가례( 嘉 禮 )를 행할 당시 정희왕후는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의 김종서 등의 제거를 위한 거사 때 용병이 누설되어 손석손 등의 만류가 있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였다. 수양대군이 망설이자 정희왕후는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는 등 정세 판단과 그에 대한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이날 수양대군 일파는 서대문 밖에 있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이어서 정적들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계유정난이다. 그리고 임금인 단종을 몰아내고 수양이 왕위에 오르니 윤씨는 나라의 국모가 되었다. 예종 즉위 후 섭정 자리에 앉아 정치적 역량 발휘 정희왕후는 세조와의 사이에서 의경세자( 懿 敬 世 子, 후에 덕종으로 추존)와 예종, 의숙공주( 懿 淑 公 主 )를 두었다. 예종은 한명회의 딸을 빈으로 삼아 1남을 두었으나 빈과 아들이 죽자 당시 권문세족인 청주 한씨 한백륜의 딸을 간택하여 2남2녀를 두었다. 의경세자는 세조가 등극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 후에 나이 20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원래 의경세자는 우의정 한확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 사이에 월산군과 자을산군(후에 성종이 됨)을 낳았다. 그리고 의숙공주는 당시 공신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정현조 가문에 시집보냈다. 세조가 재위 13년만인 52세에 승하하자 둘째 아들 광이 19세로 왕위를 계승하여 예종(1468~1469 재위)이 되었다. 남편인 세조의 뒤를 이어 아들 예종이 즉위하자 정희왕후는 조선왕조 최초의 여성 통치자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나이 어리거나 자질이 미흡해서 국정을 담당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 한하는 것이 통례인데, 예종의 나이 19세로서 성인에 속했으며 자질도 탁월하였다. 부왕세조의 생존시 세조의 건강이 악화되어 서무에 참석케 했을 때 매우 사태파악이 정확하고 명민하여 마음 놓고 뒷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내 우려할 바 없다고 세조가 크게 기뻐할 정도였다 한다. 더구나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등이 원상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모로 따지거나 여성인 윤씨가 국정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없었건만 윤씨는 섭정 자리에 앉아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성종을 예종의 후계자로 지목 예종이 즉위한 지 1년여 만에 죽자 그 뒤를 성종이 잇는다. 조선의 건국 이래 왕위계승자는 그 방법이 평화적이었든, 폭력적이었든 전왕의 생시에 결정되었다. 그러나 예종이 왕위계승자로 원자를 남기고 승하하자 대통의 결정권은 당시 왕가의 최고 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돌아갔다.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예종이 승하하자 "마땅히 상주( 喪 主 )부터 먼저 정하여야 할 것인데, 큰 일을 중사( 中 使 )에게 전하여 아뢰게 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직접 품달하게 하소서." 하자, 이에 이 말을 들은 대비는 한참 있다가 편실( 便 室 )에 나와서 신숙주 등과 권감을 불러서 들어오게 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원자( 元 子, 예종의 아들)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장자 월산군( 月 山 君 )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산군( 者 山 君 )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고 한다. 정희왕후는 13세의 자산군을 상주로 삼음으로서 대통을 잇게 하였다. 성종은 예종의 어린 아들과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정희왕후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 예종 사후에 대비는 주상자( 主 喪 者, 왕위계승권자)를 정하기 위하여 신숙주 등 대신을 소집하여 이를 묻고 성종을 왕위 계승권자로 결정하고 있다. 대비가 성종을 선택한 까닭은 예종의 아들은 아직 어리고, 월산대군은 평소에 질병이 있어 부적격한 반면에 자산대군은 비록나이 어리지만 세조가 그를 태조에 비견할 정도로 국량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왕위 계승권자 결정은 전적으로 대비가 한 것이다.
39 이것이 조선시대 왕비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왕대비들이 왕실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왕위 계승권을 주도할 수 있게 되는 길을 터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통이 결정된 직후 원상 신숙주 등 당시 관료들은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제안하였다. 비법제적 통치방식인 수렴청정은 성종이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출 때까지의 과도기 정치를 말한다. 수렴청정은 왕이 혼자 또는 대비와 상의하여 내린 결정을 대왕대비에게 복문( 復 問 )하는 형식을 취한다. 왕위찬탈 막고 조선왕조 기틀 마련 수렴청정을 통해 정희왕후는 정치 제일선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정희왕후의 정치적인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형벌에 대한 완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의 불편함을 해소시키기 위한 정책, 다른 하나는 세조의 불교진흥정책과 관련하여 호불정책을 전개한 것이다.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시키기 위한 정책으로는 우선 당시 쌀값이 치솟고 비싸서 면포 1 필의 값이 쌀 4. 5두여서 호패와 군적으로 인해 백성의 생활이 점차 빈곤해져 감을 지적하여 이 법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는 모두 민생안정에 역점을 두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음을 보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희왕후의 태도는 보다 적극적으로 왕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왕실에 공상하는 물품이 백성들에게 폐해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보고 공상을 줄이도록 명한 것, 왕실과 신료들에게도 절검하는 생활 태도와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정희왕후의 정치 활동의 주 내용은 남편인 세조의 유업을 따르고 그에 어긋나지 않게 한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정희왕후는 자신의 임무를 선왕의 업적을 후대에 잊지 않게 계승시키며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정희왕후의 불교 진흥사업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한 여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정희왕후 수렴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에는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불교를 진흥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의 기본 이념인 성리학을 강화시켜 유교 문화를 정착시키고 있다. 불교의 장의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리고 동성불혼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삼강행실을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성종 즉위년부터 동왕 7년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행해졌으며, 483년 3월 30일 남편인 세조와 자주 다니던 온천에 갔다가 온양 행궁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6세였다.
40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왕실의 최존장자인 여성에게 정치를 맡김으로서 왕위 찬탈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었으며, 이에 조선왕조 5백년의 왕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디딤돌의 역할을 하였고, 자칫 원상들을 비롯한 훈신 세력들의 정치적 독점으로 위기에 몰릴 왕권을 철저히 보호하여 왕실의 안정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를 발판으로 성종은 재위 기간 동안 조선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소혜왕후(1437~1504) 여성 교육 위한 책 내훈 펴내 소혜왕후( 昭 惠 王 后 ) 한씨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1469~1494 재위)의 어머니로서 여성을 위한 교육서들이 제대로 없던 당시에 여성 교훈서인 내훈 을 쓴 인물이다. 소혜왕후는 1437년(세종 19)에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 韓 確 )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시대는 조선왕조의 가장 성군( 聖 君 )이었던 세종(1418~ 1450 재위)이 집권하던 때로 문화가 발달하고 성리학적인 유교사상이 왕실과 양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많이 보급 실천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녀는 양반의 가문에서 유교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 1455년에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비로 간택되어 수빈( 粹 嬪 )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남편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왕비가 되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어려움을 참으며 자식인 월산대군과 뒤 성종이 된 자을산군 형제를 훌륭히 교육시켰다. 세조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자 의경세자의 동생이었던 예종(1468~1469 재위)이 왕위에 올랐다. 그 또한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는 예종이 죽던 날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대신들이 손을 쓸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당일로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을 결정하였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던 같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인 월산군도 있었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군은 4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하더라도 세조(1417~1468 재위)의 장손으로 세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16세의 월산대군을 배제하고 동생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것은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성종의 왕위 계승 배경에는 정치적 결탁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정희왕후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장손인 월산대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찰을 본 것 같다. 이리하여 1469년 11월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남편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고 자신은 왕후에 책봉되었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덕종비라 불려지기도 하지만 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인수대비( 仁 粹 大 妃 )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부녀자를 위한 교훈서 내훈 을 펴내 소혜왕후는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불경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일찍이 범( 梵 ) 한( 漢 ) 국( 國 ) 3자체로 쓴 불서를 펴내었을 만큼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또 예의가 바르고 부도( 婦 道 )를 몸에 익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자녀와 부녀들의
41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당차고 엄격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부덕을 쌓는 일이었다.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 특히 아들을 잘 키우는 것이 최고의
42 덕목이었다. 궁중의 여성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1475년(성종 6년)에 내훈 3권 4책을 펴냈다. 내훈 이라는 것이 어떠한 책인지는 그 서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태어남은 천지의 영적인 기운을 타고나며 다섯 가지의 상덕 (오륜)을 갖게 되어 그 이치는 옥이나 돌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난초와 쑥이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몸을 닦는 도리를 다 하였는가 다 하지 못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나라 문왕의 훌륭한 교화는 태사의 밝음 때문에 더욱 빛이 났고, 초나라 장왕이 패주가 된 것은 번희의 힘이 컸었다. 임금을 섬기고 남편을 섬기는 데에 누가 이들보다 나을 것인가. 내가 글을 읽다가 달기의 미소와 포사의 총애와 여희의 눈물과 비연의 참소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 또한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같은 마음의 며느리라도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 小 學 ), 열녀( 烈 女 ), 여교( 女 敎 ), 명감( 銘 監 ) 등이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었으나 수가 많고 복잡하여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으므로, 이에 네권의 책 가운데에서도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르침을 취합하여 일곱 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아아! 한 몸에 대한 가르침이 모두 여기에 있다. 그 도를 자칫 한 번 잃게 된다면 비록 후회한다 하여도 어떻게 쫓을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이를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어 날마다 성인의 경지를 바라도록 하여라. 밝은 거울은 빛이 나는 것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성화( 成 化 ) 을미 첫 겨울 어느 날에 내훈 이란 이름의 훈육서는 소혜왕후의 내훈 외에도 이미 중국 명나라 성조의 비인 인효문황후가 지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우리의 실정과 잘 맞지 않았고 또 간략하여 완전한 책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혜왕후의 내훈 은 부녀자들에게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별로 없었던 당시에 부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우리나라의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한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소혜왕후는 내훈 을 통해 언행의 규범을 가르치고 효친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혼인의 중요성과 부부의 도리를 강조하였으며 어머니의 자식 가르치는 의무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형제와 친척의 화목을 역설하고, 욕심없이 사는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고 있다. 불행한 노년, 연산군과의 갈등 그러나 소혜왕후의 말년의 삶은 평탄하지 만은 않았다. 성종이 집권한지 10년이 되던 해에 며느리이자 연산군(1494~1506 재위)의 생모인 윤씨가 성종이 규방을 자주 출입하며 자신을 멀리한다는 이유로 다투던 끝에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이를 알게된 소혜왕후는 격분하여 그녀를 폐비시키고자 하였다. 세자의 친어머니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소혜왕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하여 성종 13년에 윤씨는 폐비가 되고 사저로 추방되었다. 추방된 윤씨는 몹시 참회하고 왕의 부름만을 기다렸으나 "매일 화장만 열심히 하고 후회하는 빛이 없다." 고 주변 사람들이 고자질함으로써 결국 사약( 賜 藥 )을 받고 죽고 말았다. 세자가 자신의 생모의 죽음에 대해 알까 걱정이 된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결국 손자인 연산군이 알게 되고 연산군은 어머니를 폐비시키는 일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였다. 이에 할머니인 소혜왕후는 병석에서도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였다. 하지만 1504년 소혜왕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이 머리로 그녀를 치받아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무덤은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서오릉에 있으며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신사임당(1504~1551) 뛰어난 화가요 현모양처의 모범 사임당( 師 任 堂 ) 신씨는 1504년 (연산군 10년) 10월 29일에 외가인 강릉 북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신명화( 申 命 和 ), 어머니는 생원 이사온( 李 思 溫 )의 딸이었다. 신명화는 딸만 다섯을 길렀는데, 사임당은 둘째였다. 그는 어질고 재주도 뛰어난 둘째를 가장 사랑하여 마음속으로는 아들처럼 여기며 가르치고 키웠다. 딸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아버지 그 당시에는 여성들에게 특별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사대부 양반 집안에서도 학문보다 예절,
43 길 쌈, 바느질, 육아법이나 가르쳤으며, 글을 읽더라도 소학( 小 學 ) 이나 내훈( 內 訓 ) 정도를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스승이 있을 수 없었다. 사임당은 일곱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스승을 찾아다니며 배운 것이 아니라 안견( 安 堅 )의 산수화를 본따 그리며 스스로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산수화를 공부했지만, 차츰 그림솜씨가 나아지면서 잠자리, 벌, 나비, 풀벌레, 포도 등의 그림도 공부하여 안견보다도 더 잘 그렸다는 칭찬을 들었다. 물감도 없는 때에 식물에서 물감을 얻어 풍뎅이며 포도를 그린 이 절묘한 그림들은 지금도 강릉 오죽헌에 생생히 전시되어 있다. 사임당과 같은 시대의 학자 어숙권( 魚 叔 權 )은 패관잡기( 稗 官 雜 記 ) 에서 사임당의 그림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신씨(사임당)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 그림과 산수화는 절묘해서 평하는 자들이 안견의 그림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그러니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길 것이며, 또 (그림 그리는 것이)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사임당은 그림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수도 잘 놓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 지금 해서로 쓴 글씨 한 폭과 초서로 쓴 글씨 여섯 폭이 전해지고 있다. 사임당은 다른 사대부들처럼 유의 경전과 문집들도 즐겨 읽었다. '남녀칠세부동석( 男 女 七 歲 不 同 席 )'이라 하여 여자가 특별히 글을 배우러 다닐 교육기관이 없었지만, 그는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41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재상이 벼슬을 권했으나 그는 굳이 사양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연산군(1494~ 1506 재위) 시대에 정치가 어지러웠으므로 풍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사화( 士 禍 )가 여러 차례 일어나 양심적인 학자와 관원들이 목숨을 잃거나 쫓겨날 때 그는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학문과 인격수양에만 힘썼다. 그리고 자식들을 열심히 교육하였다. 덕분에 사임당도 현모양처가 될 자질을 기르게 되었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도 무남독녀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사랑과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점은 모녀의 인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사임당은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어머니에게서 덕을 배우며 성장했다. 외도하는 남편을 체념하지 않아
44 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 李 元 秀 )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품이 유약하였다. 그는 자기 아내가 자기보다 훨씬 어질고 현명하다는 점을 알고서 아내의 생각이나 주장을 잘 받아들였다. 부인을 마치 스승이라도 모시는 것처럼 공손히 대하였다. 아내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남편이 아내를 높이 받드는 것은 당시로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학식이나 재주가 어울리는 남편을 만나지 못할 바에는 아내의 현명함을 인정하는 남편이라도 만난 것이 사임당 자신에게나 자식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사임당은 결혼한 뒤에 서울 시댁으로 올라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할 형편이었지만, 둘째 딸을 가장 사랑하였던 아버지는 딸을 놓아주지 않았다. 한양은 강릉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한 번 시집가면 좀처럼 만나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명화는 병이 있어서 오래 살 수도 없었으므로, 둘째 딸과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위의 의향을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다른 딸이 시집가서 내 곁을 떠나는 것은 그리 서운치 않으나, 자네 처만은 그렇지 않으니, 여기서 좀더 머물다 가면 어떻겠나?" 이원수도 장인과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였으므로 좀더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사임당은 출가한 외인이었지만, 여전히 친정에 머물러 친정아버지와 남편을 함께 섬겼다. 그러나 신명화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 7일에 사랑하는 둘째 딸과 사위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47세 한창 나이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임당은 다시 서울에 올라가기가 힘들게 되었다. 갑자기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친정어머니를 혼자 두고 시댁으로 떠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임당은 결국 강릉 친정에서 아버지의 삼년상을 지낸 뒤에 서울 시댁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21세 때부터 사임당은 한양으로 올라가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혼례를 드렸다. 이원수는 자신의 친척이자 영의정이었던 이기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데, 이기는 물욕이 많은데다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므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사임당이 이기를 멀리하라고 당부하자, 남편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몇년 뒤인 1545년에 이기가 을사사화를 일으켰지만 이원수는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뒤로도 선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이원수가 아내 사임당을 존경하였지만, 마음이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긴장을 이기지 못한 남편은 결국 첩을 맞아들였다. '삼종지도' 와 '칠거지악' 을 배운 조선조 여인이었지만 이 문제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 사임당은 다른 여인들처럼 질투하거나 앙탈을 부리지 않았지만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잠시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법을 닦으며 마음을 달랬다. 마음의 평정을 찾은 뒤에,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집안살림과 자녀들을 평온하게 돌보았다. 남편보다 재주가 많으면서도 언제나 남편을 공경하고 학문과 인격수양에 힘쓰도록 권면( 勸 勉 )한 사임당은 조선조 어진 아내의 본보기이다. 딸과 며느리 역할 수행 사임당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홀어머니에게 더욱 정성을 쏟았다. 시집생활을 하면서도 한양에서 강릉까지 그 먼 길을 자주 다니며 친청어머니를 보살폈다. 교통이 나쁘던 당시에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는 멀고도 험하기만 하였다. '대관령을 넘으면서 친정을 돌아보다( 踰 大 關 嶺 望 親 庭 )' 라는 시에 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님은 백발이 되어 강릉에 계시건만 이 몸 서울을 향해 홀로 떠나는 심정이여.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 번 바라보자. 흰 구름 날아가는 아래로 고향산천은 저물어가네. 시집간 딸들의 보살핌을 받던 친정어머니는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18년이나 더살아 90세까지 장수하였다. 사임당이 친정어머니께 효도하는 모습을 본 그의 자녀들도 모두 효자 효녀로 자랐다. 사임당이 37세 때에 강릉 친정에 머물다가 큰 병을 앓았는데, 다섯 살 율곡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온 집안이 걱정하며 찾았는데, 율곡은 집 뒤에 있던 외할아버지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 병환을 빨리 낫게 해 주십사 기도하고 있었다. 사임당이 48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남편은 재혼하였다. 계모 권씨는 포악스러운 여인이었지만 율곡 남매들은 효성스럽게 계모를 모셨다. 율곡이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정성을 다해 모셨으므로 결국 권씨도 감동해 현모양처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과 가족의 꿈, 모두 성취 사임당은 33세에 남편과 함께 대관령 서쪽에 있는 '봉평( 蓬 坪 ), 속칭 판관대( 判 官 垈 )라는 곳에서 한동안 지냈다. 어느날 동해 바닷가에서 선녀가 옥동자를 품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 이때부터
45 태기가 있어 친정으로 가서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낳는 날 밤에도 검은 용이 동해에서 날아와 산실( 産 室 ) 문앞에 서린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 아기 이름을 현룡( 見 龍 )이라 하고 그 방 이름을 몽룡실( 夢 龍 室 )이라 하였다. 이 아들이 바로 율곡( 栗 谷 ) 이이( 李 珥 )다. 강릉시 보물 165호 오죽헌( 烏 竹 軒 )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자 그 어머니 사임당이 어린 시절에 자란 곳이기도 하다. 사임당은 7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똑똑했다. 그런데 맏아들 선( 璿 )은 뛰어나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사임당은 맏아들에게 정성을 쏟으면서 한편으로는 입신출세를 서두르지 말라고 타일렀다. '공부하려면 먼저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면서 마음가짐에 힘쓰게 하였다. 아우 율곡은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급제한 천재였지만, 선은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41세에 진사가 되었다. 아우들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7남매를 잘 돌보며 집안을 발전시켰다. 사임당은 매창( 梅 窓 )을 비롯한 세 딸들에게 바느질 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가르쳤다. 그래서 매창 자매들의 바느질과 수놓는 솜씨는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 큰딸 매창의 수예품에는 글을 잘 짓는 여인다운 분위기가 있었다. 율곡도 어떤 일을 하다가 잘 안되면 매창 누이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친정어머니 이씨와 사임당, 그리고 매창에 이르는 여인 3대는 당시 조 선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인들이었다. 넷째 아들 우( 瑀 )는 학문에도 업적을 남겨 옥산선생( 玉 山 先 生 )이라고 추앙받았다.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경세치용( 經 世 致 用 )의 큰 업적을 남긴 율곡 이이를 비롯한 이들 7남매는 어머니 사임당의 가정교육을 받으며 훌륭하게 자라, 당시 조선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들이 되었다.
46 황진이(16세기) 풍류로써 자기완성 이룬 시인 황진이( 黃 眞 伊 )는 조선시대 명기( 名 技 ). 본명은 진( 眞 ), 기명( 妓 名 )은 명월( 明 月 ), 개성 출신, 중종 때 사람이며 단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일생을 알 수 있는 사료( 史 料 )는 없고 야사( 野 史 )가 많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이야기 속에는 황진이를 미화시킨 흔적이 많아 허실( 虛 實 )을 가리기는 어렵다. 뛰어난 미모와 재능 지녀 출생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서녀( 庶 女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맹인의 딸이라 는 것이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이덕형이 쓴 송도기이( 松 都 記 異 ) 에는 황진사의 서녀로 나오고 허균이 쓴 식소록( 識 小 綠 ) 에는 맹인의 자식이라고 되어 있다. 송도기이 를 살펴보자. 황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자못 자색( 姿 色 )이 고왔다. 18세에 병부교 밑에서 삼베를 빨고 있었는데, 의관이 화려한 남자가 현금을 눈여겨 보았다. 날이 저물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자 남자는 현금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다. 그녀가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자 남자는 반쯤 마시고 그녀에게 권했다. "너도 마셔 보아라." 현금이 마셔보니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두사람은 정이 깊어져서 진이를 낳게 되었다. 그후 어떻게 기녀가 되었을까. 잠시 김택영 소호당집( 韶 濩 堂 集 ) 을 보자. 옆집에 한 서생( 書 生 )이 살았는데 황진이의 미모에 매혹되어 상사병을 앓았다. 그러다가 병이 깊어 죽었는데, 장례식날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진이가 자신의 치마 저고리를 관에 덮어주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황진이는 기녀가 되었다. 정상적인 양반 신분이 아니면서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가졌다는 것도 기녀로 나선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기녀로서의 명성과 행적에 전설적인 일화가 많다. 그녀와 가까웠던 사람은 개성유수 송공( 宋 公 ), 선전관 이사종( 李 士 宗 ), 이생원( 李 生 員 ), 종실( 宗 室 ) 벽계수( 碧 溪 水 ), 소세양( 蘇 世 讓 ), 서경덕( 徐 敬 德 ) 등이 있다.
47 기녀 생활 통해 재예 발휘하고 인간적 성숙 이루어 송공과의 관계 때문에 황진이는 흔한 기생이 아닌 명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공의 어머니 회갑연에서 황진이가 노래를 너무나 절묘하게 잘 불렀던 것이다. 송공은 천재라고 극찬하고 또 악공( 樂 工 )들은 선녀라고 감탄하고, 좌중의 사람들 역시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고 한다. 선전관 이사종은 명창( 名 唱 )이었다. 그의 노래에 매료되어 황진이는 6년 동안 동거생활을 하였다. 처음 3년은 황진이가 다음은 이사종이 생계를 책임지는 계약동거였다. 두 사람은 음악예술을 통한 영혼의 교감으로 어울렸다. 이생원은 재상의 아들로서 놀기를 좋아하고 세속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황진이가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금강산 구경을 하고자 하였을 때 이생원은 동반자로서 적격이었다. 그 들은 신선처럼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가진 것 없이 떠난 길이라 점차 곤궁해져서 황진이는 밥을 얻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때로는 몸도 팔았다. 벽계수는 황진이의 애정을 갈구하였으나 거절 당했고, 소세양은 황진이의 문학적 재능에 탄복하여 절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황진이가 평생 존경한 인물은 서경덕이었다. 그는 성리학을 완성한 학자이며 시서화( 詩 書 畵 )에 자유로운 대인( 大 人 )이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풍류와 인품을 통해 한 단계 높은 삶의 철학을 배웠다. 학자와 기녀라는 신분의 벽을 넘어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성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이러한 여러 남성과의 관계는 남성편력이라기 보다 현실에 초탈하여 삶을 관조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의 성숙 과정으로 보인다. 문학성 뛰어난 시조 황진이를 평가하는 자료는 구전( 口 傳 )을 후대에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보다 황진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그 자신이 직접 쓴 문학작품을 통해서이다. 시조 6편과 7편의 한시( 漢 詩 )가 있는데, 주제는 사랑과 이별, 추억 등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구비구비 펴리라. 꿈결같은 아쉬움과 기다림이 절절히 밴 사랑 노래이다. 그녀의 시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세련되며 우리 말의 부드러운 뉘앙스를 잘 살려낸 빼어난 작품이다. 이처럼 그녀는 마음 속에 회오리치는 감흥을 언제나 즉흥적이고도 정열적으로 읊어 냈다.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 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 청산을 못잊어 우러예며 가는고. 이 시에서 황진이는 자신을 붙박이 산, 떠나가는 남자는 계곡을 흘러가는 물이라고 비유하였다. 물은 흘러 가지만 산인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호언장담에는 삶에 대한 당찬 자신감이 드러나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이 가고 아니 오노매라. 산은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있지만 물은 그 산 밑을 돌아 흘러 가버린다. 즉 자연은 변함이 없으나 인간은 변덕스러운 존재여서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구한 자연에 대해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탁월한 인생관을 조선시대의 여성 그것도 기녀가 체득( 體 得 )했다는 것이 놀랍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언뜻 자연시로 보인다. 그러나 벽계수와 명월이라는 남녀의 호를
48 사용한 애정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길지 않은 인생이니 나에게 머물러 쉬라는 황진이의 적극적인 애정표현이 재미있다. 좋아하는 남자를 이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잡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으니 말이다. 오랜 고뇌와 방황 통해 삶 깨달아 황진이는 기녀로서 일부일처제와 안락한 가정생활의 틀을 벗어나 있었다. 여성으로서의 상실감과 불안감이 컸으리라.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 많은 남자를 편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관계들은 또 다른 외로움을 더해줄 뿐이었다. 결국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경덕을 찾은 것은 애정관계만으로는 근원적인 삶의 공허함이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황진이의 문학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오랜 고뇌와 방황을 통한 깨달음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자기완성으로 삶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명작을 남긴 것이다. 이항복의 모 최씨(? ~1571) 훌륭한 자녀교육을 실천한 지혜로운 어머니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교육열과 최씨부인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성들 자신이 직접공식적인 교육의 혜택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아이가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 童 蒙 先 習 ) 을 읽으면서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책거리' 라 하여 떡을 하고 마을잔치를 벌여 아들에 대한 학습독려를 하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학습진도를 점검하는 역할도 되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들의 교육적 정성은 양반가문의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조선왕조는 유교(성리학)를 지배이념으로 하는 양반 중심사회로서 출세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관직을 얻는 것이었고, 그것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과거제도였다. 즉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제수를 받는 길만이 양반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왜냐하면 대체로 양반가문이라 하면 4조(4 祖 :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이내에 관직자가 있어야만 지 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행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직을 얻으려면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여야 하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면 부단히 학문을 연마해야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식에 대한 일차적인 학문의 독려는 어머니에게 책임이 돌아갔으며, 따라서 여성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 어머니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는 자식을 올바른 사회인으로 키우는데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49 바로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는 누구보다도 극진한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아들을 가르쳐 조선 중기에 이항복은 명재상과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항복( 李 恒 福, 1556~1618)은 자( 字 )는 자상( 字 常 ), 호는 필운( 弼 雲 ), 또는 백사( 白 沙 )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고려 말기의 유명한 학자 이제현의 후예로서 참찬 벼슬에 있던 아버지 몽량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서울 필운동은 그가 탄생한 곳이며 그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도의적 수양과 근검절약 정신 가르쳐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이틀동안 젖을 먹지도 않고 사흘동안 울지도 않아서 모두 근심한 나머지 점장이를 불렀는데, 점괘를 떼어놓고 보던 소경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장차 대단히 귀하게 될 점괘입니다." 라고 하며 오히려 경하해 마지 않았다 한다. 오성 이항복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 최씨는 아들을 아버지 없이 키우는 데 버릇없이 자라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이항복은 오성부원군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 어렸을 때 성격이 호방하여 동네 개구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과 기지( 機 智 )와 장난으로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학문에 마음을 못 붙이는 아들을 독려하여 도덕적인 수양과 경제적으로 근검 절약하는 정신, 그리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르쳤다. 하루는 항복이 대장간에서 버린 쇳조각을 주어모아 집에 와서 그냥 뜰에 던져버린 것을 보고 부인은 아들에게 "이 쇠가 귀한 것이고, 또 이렇게 적은 것이라도 송곳같은 것을 만들 수 있으며, 만일 탄환을 만들면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쓸모있는 것이니 버리지 말아야 한다." 고 타일렀다. 이후 항복은 대장간 근방에서 버린 쇳조각을 계속 모아 3년만에 큰 독으로 셋이나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항복이 어머니에게 여쭙기를 대장장이가 술과 도박이 심하여 밑천까지 모두 날려 버리고 불쌍하게 되었으니 저 쇳조각을 돌려주는 것이 어떠한가를 의논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이 자기가 모은 쇳조각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살피던 차에 아들이 이렇게 물으니 대단히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그후 대장장이는 감격하여 술을 끊고 일을 열심히 하였고, 이항복을
50 존경하게 되었다. 말년에 이항복이 정적들의 음모로 북청으로 귀양갈 때 대장장이는 이항복이 무사할 수 있도록 극진히 호위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감화는 아들 뿐 아니라 이웃사람들에게까지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부인의 손위 오라버니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부인이 그 오라버니를 뵈러 갈려면 반드시 종이 옆에 있어야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만나지 않았다. 이것은 비록 남매간이라도 남녀유별( 男 女 有 別 )의 예( 禮 )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최씨부인은 일찍이 딸들에게도 특별히 훈계하였다. "비록 남매 사이라도 함부로 지껄이며 웃고 희롱해 예절을 손상케 하지 말아라. 누울 때나 앉을 때나 말할 때도 각별히 삼가서 분별있게 하도록 하라." 고 가르쳤다. 또한 항복이 집안에서 부녀자를 상대로 하여 자라는 것이 나약하게 될까 우려하여 절간에 공부하러 보냈다. 항복은 며칠에 한 번씩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는데 최씨부인은 그 편지를 읽고 아들의 공부가 진척되는 정도를 알았다. 편지의 내용이 지나치게 어머니를 위로하고 정에 기울어지거나, 또는 편지의 글씨 범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지 구절에 붉은 줄을 치고 고쳐서 보내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일화는 오성이 열 두세 살 때 일이었다. 밖에 나갈 때에 새 옷을 입고 나갔는데 돌아을 때는 옷과 신을 벗어 모두 남을 주고 돌아왔다. 이것을 본 부인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오성은 태연하게, "함께 놀던 옆집 아이가 좋은 옷을 심히 부러워하기에 벗어 주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이에 가르치기를 "네가 한 일이 결코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의복이 없어 헐벗고 추위에 떨고 있다면 몰라도 남의 새옷을 탐내는 것에 옷을 벗어주면 그것이 습관이 될 수 있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잘못하면 도리어 도와주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어머니의 감화로 아들이 재상까지 올라 이렇게 항복은 어렸을 적부터 호방한 기질로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장난이 심해 어머니는 이를 크게 걱정하여 여러모로 타일렀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하루는 집안 사당 앞에 가서 흰옷을 입고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를 풀어 조상께 칼을 앞에 놓고 엎드려 자식 잘못 키운 것을 사죄하였다. 마당으로 장독으로 뛰어다니면서 놀던 항복이 이를 보고 어머니가 자결하려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어머니 앞에 가서 땅에 엎디어 이마를 조아리고 이후부터는 절대로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겠으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어머니가 타이르기를, "아버지 없이 너를 기르는 동안 나 자신이 교육을 잘못한 탓이다. 자식을 잘못 기른 죄로 조상앞에 갈 면목이 없어 죽지도 못할 죄인이니 내 잘못을 이 칼로 머리를 삭발하여 조상께 사죄드리려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호탕하고 의리에 강한 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나 그 호탕함이 충분한 인격과 교양으로 받쳐지지 못하면 일개 한량으로 이름을 날릴 뿐 장래 사회에 공헌할 큰 재목이 될 수 없다." 라고 하니 항복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송구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여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드릴 것을 굳게 약속하였고, 이후 학문에만 전념하여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고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올라갔다. 그의 강직하고 바른 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어머니 최씨는 항복이 16살 때 세상을 떠났지만 자라는 동안 가르친 어머니의 끊임없는 감화는 훗날 항복이 재상까지 올라 임진왜란 때 국가적 위기에서 구국에 앞장서며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허난설헌(1563~1589) 불운에 몸부림친 천재시인 조선시대 여성이 자기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만의 삶을 누렸다는 뜻이다. 여성에게 비인간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자기만의 이름과 자( 字 ), 그리고 호( 號 )로 문학작품을 창작한 여인이
51 바로 허초희, 허난설헌이다. 그러나 다른 조선여인 대부분이 가지지 못했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행복한(?) 불행일 수도 있다. 문장가 집안에서 태어나 양천 허씨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문장가와 벼슬아치를 길러냈다. 아버지 초당( 草 堂 ) 허엽( 許 曄 )도 도가풍( 道 家 風 )의 학자 화담( 花 潭 ) 서경덕( 徐 敬 德 )과 퇴계( 退 溪 ) 이황( 李 滉 )에게서 글을 배웠다. 난설헌의 시에 도가적( 道 家 的 )인 분위기가 풍기는 신선시( 神 仙 時 )가 많음도 그 영향이다. 초당은 두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은 한숙창의 딸인데, 큰 아들 허성과 두 딸을 낳아 기르다가 먼저 죽었다. 둘째 부인은 호조참판을 지낸 김광철의 딸이다. 허봉과 허균 그리고 난설헌을 낳았다. 첫 부인의 아들이나 사위들은 학자와 관리로서 평탄하게 지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이 넘쳤던 김씨 부인의 자녀들은 모두 불행하게 살다가 죽었다. 난설헌은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왔다. 정승 노수신, 유성룡, 충무공( 忠 武 公 ) 이순신, 원균 등 유명한 인물들이 이웃에 살았다. 오라버니 허봉은 떠돌이 시인 이달과 절친한 글벗이었다. 최고의 감성파 시인이었던 이달은 난설헌과 허균에게 시를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도가 서적을 읽으며 자란 난설헌은 하늘에 신선세계가 있음을 믿었다. 그래서 신선세계의 광한전에다 백옥루( 白 玉 樓 )를 짓는다면, 자기가 상량문( 上 樑 文 : 상량할 때에 축복하는 글)을 지어야겠다고까지 생각하였다. 그가 8세에 지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은 그를 일약 신동( 神 童 )으로 이름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자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지 않았다. 과거시험을 볼 자격도 없고 살림살이에는 한문이 소용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설헌은 오라버니가 글을 읽을 때에 어깨 너머로 따라서 배웠다. 그러자 그의 천재적인 소질이 드러나서, 결국은 자기를 가르쳤던 오라버니 보다도 더 돋보이는 여류시인이 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자유분방한 시는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인간본연( 本 然 )의 성정( 性 情 )을 노래한 송나라의 시보다 감동적 이었다. 시를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감성으로 받아들여 자기의 시세계를 재창조한 것이다. 중국에는 예전부터 악부( 樂 府 )라는 민요체 시가 있었다. 중국 장간리라는 마을에 사는 청춘 남녀의 정한을 다룬 '장간행( 長 干 行 )'이라는 시가 있는데, 난설헌은 그 악부의 제목과 소재를 본받아 시를 지었다. 그렇지만 옛시의 답습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이었다. 우리 집은 장간리에 오래 살아서 장간리 길을 오가곤 했죠. 내가 더 예쁜가 이 꽃이 더 예쁜가 꽃가지를 꺾어들고 님께 묻기도 했죠.
52 이처럼 낭만적으로 사랑을 꿈꾸던 그도 다른 여자들처럼 결혼하게 되었다. 실제로 사랑해야 할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결혼과 좌절 난설헌은 시집가기 전부터 사랑에 대하여 행복스러운 꿈을 지녔다. 여염집 처녀들은 자기의 사랑이나 본능적인 감정을 자유롭게 노래하면 안된다고 가정교육을 받았지만, 난설헌은 아직 만나지도 못한 미지의 낭군을 그리며 시를 지었다.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우거진 속에다 목란배를 매었네.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봤을까봐 한나절 부끄러웠네. '채련곡( 採 蓮 曲 )' 난설헌은 사랑에도 솔직하고 적극적인 여성이었으며, 남자보다 먼저 사랑을 표시할 줄도 알았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남매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다. 당시에는 부모상을 입는 동안 여자를 멀리해야 했는데, 작은 오라비는 기생과 놀다가 탄핵 당했다. 아우 허균도 같은 이유로 비난을 받자 비인간적인 당시 봉건사회에 대하여 인간선언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갔던 난설헌의 오라비들은 결국 봉건사회에서 따돌림받았다. 난설헌의 남편감은 그를 가장 사랑하던 오라비 허봉이 직접 골라 주었다. 당시 조선사 회에서 가장 훌륭한 집안이라는 안동 김씨 김첨의 아들 김성립( 金 誠 立 )에게 누이를 시집보낸 것이다. '4대 호당( 湖 當 )' 으로 유명한 집안으로 시집간 난설헌은 그러나 미지의 낭군과 현실의 남편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냥 행복해야 할 시집살이였지만 난설헌은 신혼 초부터 불행하였다.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의 문명( 文 名 )이 부담스러웠는지 열등감에 차서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과거 공부를 한다는
53 핑계를 대고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은 기생방에서 파묻혀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설헌은 남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 지어 날고 지는 꽃은 어지럽게 비단옷 위를 스치는구나. 규방에서 혼자 기다리는 마음 사뭇 아프기만 한데, 봄풀은 푸르러져도 강남에 가신 님은 여지껏 돌아오시질 않네. 신혼살림을 차린 방에서 오지도 않는 님을 기다리며 지은 시이다. 제비가 날아오고 봄풀도 푸르러졌는데, 자기만 홀로 있는 것이다. 허나 이 시가 너무 방탕해서 그의 시집에 실리지 않았다고 지봉유설( 芝 峰 類 說 ) 은 기록하고 있다. 난설헌의 세 가지 한( 恨 )과 죽음의 예언 사방을 둘러보아도 누구 하나 난설헌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여도선( 女 道 仙 )을 자처하며 많은 시를 읊었지만 형제들 외에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난설헌의 체질이 유약한 탓인지 몇 해를 살다 죽고 세 번째 아이는 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팎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회의했다. 첫째, 이 넓은 세상 천지에서 하필이면 왜 좁은 조선에 태어났나? 둘째, 조선에서도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났나? 셋째, 수많은 남자 가운데 하필이면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나? 남존여비( 男 尊 女 卑 ), 삼종지도( 三 從 之 道 ), 칠거지악( 七 去 之 惡 )이란 형틀, 모든 것이 남자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사회가 그에게는 무덤 속만큼이나 갑갑했으리라. 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연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이 시를 지은 뒤에, 그는 초당에 가득하던 책들 속에서 향불을 피우고 고요하게 죽었다.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몸을 깨끗하게 씻고서 새 옷으로 갈아 입은 뒤에,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올해가 바로 내 나이 3.9의 수(3 9=27)에 해당된다. 마침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으니,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지었던 시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 나처럼 시를 짓다가 불행해지는 여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하라. 자신이 읽던 책과 손수 지은 시를 불태워 없앴지만 짓궂게도 그의 동생 허균이 타고 남은 시를 간직했다. 조선에서 버림 받은 시들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 의해 명나라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이 죽은 그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는 곧 새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삼년 뒤에 임진왜란을 맞아 싸우다가 죽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경수산 안동 김씨 선영에 두 번째 부인 홍씨와 함께 있다. 난설헌은 그 아래 따로 묻혔는데, 어려서 죽은 아들과 딸의 무덤이 그의 발치에 있다. 그러나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한많은 무덤들은 모두 자리를 옳겨야만 했다. 시대를 앞서 살면서 지식인으로서 자아분열을 앓았던 허난설헌, 끝내 남존여비의 봉건 제도를 뛰어넘지 못하고 말았지만, 제도에 안주하지 않고 갈등하며 살았던 그의 선구자적 의지는 오늘에도 돋보인다. 논개(?~1593) 임진왜란 때 적장과 함께 순국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 강낭콩 꽃보다도 더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붉은 그 마음 흘러라. 지금은 변영로의 시로 우리 가슴에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논개.
54 논개는 경상남도 진주목의 관기로써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중에 일본군의 적장을 유인하여 함께 남강에 빠져 장렬하게 산화한 의기( 義 妓 )로 감동적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논개의 출생과 사랑 논개의 출생 신분과 생장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가장 천대 받는 신분층의 하나인 관기는 대개 관아에 딸린 노비 가운데서 미색이 뛰어난 자들이 뽑혀서 되든지 아니면 관기인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세습되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논개의 신분도 이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녀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면서 1876년(고종 9년)에 편간된 호남읍지 가운데 장수현읍지에서 논개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을 찾게 된다. 곧, "의기 논개는 임현내면 풍천 사람이다. 충의공 최경희가 현감으로 있을 때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에 최공이 진주 병사로 임진난을 당했을 때 논개가 따라 갔다." 는 것이다. 논개가 장수의 임현내면 풍천 태생이란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 논개의 순국 사실 역사상에 일어난 사건들이 뒷날 객관성을 지닌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서책이나 금석문에 명기되어 있어야 한다. 다행히 구전되어 오던 논개의 순국사실이 1620년 경부터 금석문이나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논개의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은 자신이 지은 어우야담( 於 于 野 談 ) 이라는 책에 이
55 사실을 채록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창기( 娼 妓 )편도 설정해 놓고 있으나 논개의 순국 사실만은 효열( 孝 烈 )편에 수록하고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장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밑은 깊은 강물이었다. 왜병들은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내달았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이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 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함께 죽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충신이거나 효자 열녀였던 자들을 뽑아 새로 편찬한 조선 후기의 동국신속삼강행실(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 에는 그녀의 순국( 殉 國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 책을 찬진할 무렵에는 전국의 각 읍에서 추천한 충신 효자 열녀 중에 논개를 비롯한 관기들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나, 이들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이 관기를 음탕한 여자라고 해서 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몽인은 어우야담 에서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임진난에 관기로서 왜장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이 또한 논개만이 아니었으나 그 이름들을 다 잊어버렸다. 관기는 모두 음탕한 창기들이라고 해서 정열(정열)로 칭함이 불가하다 하지만 끝내 나라를 등지거나 목숨을 걸고 왜장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것이 충성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애달픈 일이로다. 논개를 기리기 위한 진주성민들의 노력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의 많은 사람들은 논개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뜻을 기리고자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1722년(경종 2년) 4월에 관민이 공동 출자하고 정식에게 비문을 짓게 하여 논개가 순국한 의로운 바위 즉, 의암( 義 巖 )위에다 '의암사적비' 라는 비문을 건립하였다. 이는 비록 진주성 백성들이 숙원하였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 建 祠 賜 額 )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의기란 호칭이 공인되었다. '의암사적비문' 의 내용은 유인몽의 어우야담 에 실린 논개의 순국 사실을 먼저 쓰고 명문을 붙인 것이다. 유독 가파른 그 바위 위에 그녀 홀로 우뚝 서 있도다. 그녀가 그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었겠으며 바윈들 이 여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의롭다 소리를 들었겠는가.
56 이 남강가의 높파란 바위엔 만고( 萬 古 )의 꽃다운 마음 서렸도다. 이후 사당으로 의기사( 義 妓 祠 )가 건립되어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진주성민들이 제사를 올리고, 우병영에서 제사 지낼 재수품을 보조하였다. 논개는 사대부들의 회롱의 대상에 불과한 관기였고 사회에서 천시되던 미천한 여인이었지만 진주성민의 학살 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 겨레의 원수였던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순절했다. 그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나라가 짓밟힐 때, 그녀의 분노는 참으로 종교보다도 더 거룩했고, 겨레를 위한 열정 또한 사랑보다도 더 강하였다. 이매창(1573~1610) 거문고와 시의 명수 아전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다 매창( 梅 窓 )은 전라도 부안에서 아전 이탁종의 딸로 태어났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 癸 生 )이라고 불렀는데, 계생( 桂 生 )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자는 천향( 天 香 ), 호는 매창이라고 하였다. 글자가 모두 꽃과 관계가 있어 기생임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간단한 한문을 배웠는데, 워낙 재주가 뛰어나 곧 시( 詩 ) 지었다. 거문고도 잘 타고 노래도 잘 불렀다. 당연히 그는 화류계의 건달들보다 글 짓는 선비들과 가깝게 지냈다. 지봉 이수광은 그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계랑은 부안의 기생인데, 스스로 호를 매창이라고 하였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이름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그를 유혹하였다. 계랑이 그 시에 차운( 次 韻 : 남의 운을 써서 시를 지음)하여 답했다. 떠돌며 밥 얻어먹는 법이라곤 평생 배우지 않고 매화나무 창가에 비치는 달 그림자만 나 홀로 사랑했다오.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을 그대는 아지 못하고 뜬 구름이라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구나. 그랬더니 그 사람이 서운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를 즐겼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지봉유설 권14 '기첩( 妓 妾 )' 물론 이 시에 나오는 매화나무 창가는 글자 그대로 자신의 집이자, 자신의 호이고, 자기자신을 가리킨다. 고결하고 품위있는 매화, 찬바람과 눈 속에서 꽃 피는 매화는 매창의 분신 ( 分 身 )이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매창이라고 지어, 스스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절개를 지킨 것이다. 그는 짓궂게 구는 취객에게 이렇게 시를 지어주며 물리쳤다.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명주 저고리가 손길을 따라 찢어졌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쉬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恩 情 )까지도 찢어졌을까 두렵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을 만나 유희경( 劉 希 慶 )은 1545년 서울 대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민이어서 벼슬할 수가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겼다. 열세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인부도 사지 못하고 직접 무덤을 만들고 곁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마침 남언경이 이 소문을 듣고는 기이하게 여겨 유희경에게 글을 가르쳤다. 천민 출신의 그가 사서삼경을 배우게 된 것이었다. 글을 배운 뒤로 그는 상갓집에 불려다니며 상복( 喪 服 )을 지어주는 틈틈이 한시를 지었다. 자신과 같은 신분의 시인 백대붕과 어울렸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풍월향도( 風 月 香 徒 )' 라고 불렀다. 유희경의 시집 촌은집 에는 매창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가 젊었을 때에 부안으로 놀러 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기생이 살고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이때 비로소 파계( 破 戒 )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서 즐겼는데, 계생도 또한 시를 잘 지어 매창집 을 간행하였다. 유희경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매창을 처음 보던 날, 너무 감격해서 그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57 남국의 계랑 이름이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와 노래솜씨가 서울까지 울렸네.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하구나. 유희경은 매창과의 사랑을 오래 나누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매창은 그에게 마음을 주었기에 기생이면서도 수절하였다. 유희경도 원래 예학( 禮 學 )에 밝았기에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 뒤 곧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유회경은 의병이 되어 임금을 모시고 다녔으므로 이들 사이에는 자연히 연락이 끊어졌다. 매창은 그를 그리워하며 시조를 한 수 지었다. 이화우( 梨 花 雨 )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 시조는 가곡원류 에 실려 있는데,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계랑은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시를 잘 지었으며, 매창집 이 있다. 촌은 유희경의 애인인데,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으므로 이 노래를 짓고는 절개를 지켰다. 그러나 촌은이 아무런 소식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보낸 수많은 시들이 이를 증명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를 소개한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때면 애가 끊기네. '회계랑( 懷 癸 娘 )' 허균과의 정신적인 만남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을 지은 허균은 매창과 가장 오랜 세월을 사귀었던 친구이다. 그는 1601년에 세금을 거두러 전라도 일대에 출장 나가 있었는데, 매창을 처음 만나던 날의 모습을 기행문 조관기행 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기생 계생은 이귀(허균의
58 친구)의 애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 만하였다. 하루종일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다. 경원하면서도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관리들이 지방에 출장나갔을 때에 기생들이 수청드는 것이 당연하였다. 하지만 허균은 자기 친구와 매창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날부터 서로의 사람됨과 문학을 사랑하였다. 그 뒤에도 부담없이 자주 만났으며, 편지와 시를 주고 받았다. 허균이 보낸 편지에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 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년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언제야 이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겠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년 9월 이들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 않았는데도, 세상에서는 이들 관계를 오해하였다. 마음 맞는 시인들 사이에는 남녀간에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매창의 애틋한 노래를 들으며 허균 때문이라고 오해하였다. 그 소문이 서울까지 퍼져서 허균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나무꾼들이 성묘해주다 매창이 1610년에 세상을 떠나자, 허균이 시를 지어주면서 슬퍼하였다. 허균은 그 시에 다 이러한 기록을 붙여, 그와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계랑은 부안의 기생이다. 시를 잘 짓고 문장을 알았으며, 노래와 거문고도 또한 잘하였다. 성품이 고결해서, (기생이지만) 음란한 짓을 즐기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서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 비록 우스개소리를 즐기긴 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가 오래되어도 시들지 않았다. 지금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서 한 번 울어준 뒤에, 율시 2수를 지어서 슬퍼한다. 그는 남편이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봉덕리 공동묘지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으며,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불렀다. 그가 죽은지 58년 뒤인 1655년에는 부안읍의 아전들이 외워 전하던 58수의 시를 모아서, 개암사의 스님들이 시집 목판을 만들어 간행하였다. 지금까지 매창집 이 전하는 것은 모두 부안읍 아전들과 개암사 스님들 덕분이다. 매창의 무덤은 마을의 나무꾼 총각들이 해마다 벌초하였다. 남사당이나 유랑극단이 들어오면 읍내에서 판을 벌리기 전에 매창의 무덤에 성묘부터 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도 여러 남성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 뒤에는 부안읍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 扶 風 詩 社 )' 에서 그의 무덤에다 새로 비석을 세우고 돌보고 있다 해평인 윤씨(김만중의 모, 1617~1689) 시련속에서 유명한 효자 길러 '저 사람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구운몽' 이란 조선 문학사상 첫 한글 소설을 쓴 서포 김만중( 金 萬 重 )이 그렇다. 홀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려고 귀양지에서 하룻밤에 쓴 소설, 인간의 부귀영화가 하룻밤의 꿈처럼 허망하다는 내용의 구운몽 말고도 사씨남정기, 윤씨행장기 등이 모두 어머니를 위해 김만중이 쓴 글들이다.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 부인은 고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영의정을 지낸 휼륭한 가문의 외동딸이다. 아버지 윤지( 尹 遲 )는 딸을 늘 곁에 두고서 글을 가르쳤다. "여자인 것이 애석하구나!" 총명하여 한 번 배우면 곧 외우니 아버지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윤씨가 조금 자란 후에 아버지는 의복과 음식을 사치하지 말도록 일렀다. "이 다음에 가난한 선비의 처가 된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느냐?" 시집갈 때에는 또, "너는 예법( 禮 法 )을 아는 집 자녀다. 혹시라도 아녀자의 도를 어겨서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 고 훈계하였다. 집안의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 윤씨는 나이 14살에 시집 가서 시댁 집안의 칭찬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59 남편 순절한 후 친정으로 남편은 충렬공 김익겸이다. 김익겸은 1635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당시 큰 아들 김만기는 5살이었고 둘째 김만중은 윤씨의 뱃속에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두 아이를 이끌고 친정 부모 밑으로 갔다. 윤씨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 일을 관리하고 밖으로는 아버지를 잘 봉양하였다. 평소에 들은 것이 있으면 곧 책을 열어 찾아보니 날로 박식해졌다. 할아버지는 탄식하며 "매번 우리 손녀와 이야기하면 가슴이 확 열리는 것을 느낀다. 만약 이 애가 남자였다면 어찌 우리 집안의 대제학이 되지 않았겠는가?" 평생 검고 흰 옷만 입어 부모가 타계하자 가세가 곤궁해지기 시작했다. 윤씨는 수를 놓아 생계를 꾸리면서도 늘 태연하였다. 근심하는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아 자식들이 어려운 사정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자식들이 집안의 자잘한 일에 근심하여 공부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이다. 윤씨는 자식의 스승을 밖에서 구하지 않고 소학( 小 學 ), 사략( 史 略 ), 당시( 唐 詩 ) 등을 직접 가르쳤다.
60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가 없다. 반드시 훗날 다른 사람보다 재주와 학문이 남달라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행실이 바르지 않을 때 사람들이 반드시 '과부의 아들이라 그렇다'라고 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당시 난리를 겪은 지 얼마되지 않아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큰 아들은 좌씨전( 左 氏 傳 ) 을 매우 좋아했으나 값이 비쌌다. 윤씨는 비단을 짜서 그 책을 사주었다. 그리고 이웃에 홍문관 관리가 있었는데, 사서나 시경 을 빌려 모두 베꼈다. 그 글씨체가 정교하고 세밀하여 구슬을 꿰어 놓은 것과 같았으며 한 글자도 서투른 것이 없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매우 경건하게 하였다. 집안 일을 며느리에게 넘겨준 후에도 손수 제기를 닦고 음식을 만들었다. 스스로 미망인이라 자처하여 평생 검고 흰 옷만 입었다. 잔칫집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즐거운 음악도 멀리 했다. 훗날 왕은 윤씨의 행동을, '선비나 군자와 같다' 고 극찬하였다. 두 아들의 성공과 시련 속에서 정도( 正 道 ) 지켜 윤씨는 두 아들을 키웠는데 큰 아들은 김만기, 둘째 아들은 김만중이다. 김만기는 22세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제학까지 지냈다. 김만중은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채 난리 중에 태어났다. 따라서 윤씨는 이 아들을 안쓰럽게 여겼다. 김만중은 29세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당파싸움에 휘말려 귀양을 가는 등 시련도 많아서 늘 어머니의 근심을 샀다. 김만중은 항상 이것을 어머니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하고 죄송해 했다. 그의 작품 윤씨 행장기 에는 동방의 현명한 여자인 윤씨 부인의 덕과 행적이 적혀 있다. 윤씨는 단지 부덕을 지닌 여성 이라기 보다는 어려운 삶을 당당히 살아낸 의지적인 인물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자들을 자신을 억압하는 상대로 의식하지 않았으며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따라서 이른 바 똑똑하다고 하는 여성들은 남성에게 대적하기 보다는 그 남성사회를 어떻게 잘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온 힘을 기울였다. 즉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여성에게 독립적인 의식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실제적인 공헌도를 정당하게 평가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윤씨 부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다. 임윤지당(1721~1793)
61 여중군자의 칭송 받아 당시 학문이나 문학은 남자만이 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시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고 가정 살림을 맡는 것이 전부였다. 부부유별( 夫 婦 有 別 )이란 곧 서로의 일이 확실히 구분되어 침해할 수 없음을 뜻했다. 남자의 일이 여자의 일보다 높게 가치를 인정 받는 것은 물론이었다. 남녀가 배우는 내용 크게 달라 조선조 어린이 교육의 필독서인 소학( 小 學 ) 을 보자. 남아는 대답을 힘차고 빠르게, 여아는 조용하고 천천히 하도록 가르친다. 남아에게 6세에는 수( 數 )와 방위를, 7세에는 남녀 부동석을 가르친다. 8세에는 예절을, 9세에는 시서( 詩 書 )를, 13세에는 음악을 배운다. 20세에는 혼인하고 30세에 학문을 완성하고 40세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서 50세에 나랏일을 하고 70세에는 그 벼슬을 임금에게 돌려준다고 하였다. 여아는 10세에 문밖 출입을 삼가고 어머니에게 여자의 일, 즉 가정 일을 배운다. 혼인해서는 부부간에 옷걸이며 옷선반을 구분하여 쓰고, 문밖 출입은 밤에만 하도록 소학은 가르치고 있다. 여성교육은 부덕을 강조한다. 내훈( 內 訓 ), 여사서( 女 四 書 ), 열녀전( 烈 女 傳 ) 등의 내용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러나 총기 있는 여아는 부덕 교육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쁜 틈틈이 경사( 經 史 ) 등 학문에 접한다. 부모나 형제에게 배우기도 하나 대개는 독학한다. 사회적 변혁이 일던 16~17세기 이후 여성에게 유교적 윤리의 틀을 벗어나려는 의식이 싹튼다.
62 학문과 시작( 詩 作 )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배출되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적 기풍은 학문에 뛰어난 여성을 숭앙하였다. 형제간 부부간에 학문을 논하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런 분위기에 힘 입어 훌륭한 문집을 남기는 여성학자들과 문학인들이 나오게 되었다. 여성차별 극복, '기일원론' 탐구 임윤지당( 任 允 摯 堂 )은 허난설헌이나 신사임당과 달리 경사( 經 史 )를 논한 학자였다. 함흥판관 임적( 任 適 )의 딸이며, 당대의 석학 임성주( 任 聖 周 ), 임정주( 任 靖 周 )의 누이이다. 그는 부덕과 학문을 잘 조화시켜 학문을 크게 성취한 몇 안 되는 여성 성리학자였다. 윤지당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침착하고 총명하였다. 형제가 경사를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어려운 것을 질문하고 논의하였다. 그 내용이 너무도 논리적이고 뛰어나 형제는 감탄을 거듭하였다. 오빠 성주는 윤지당에게 효경( 孝 經 ), 열녀전, 소학 과 사서( 四 書 )등의 책을 주었다. 윤지당은 너무나 기뻐서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마다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었다. 오래지 않아 윤지당은 형제들의 토론 자리에 참여하였다. 경사와 의리( 義 理 )와 고금의 인물을 논할 때 윤지당의 이론은 정연하고도 높았다. 형제들은 탄복하면서 말했다. "네가 장부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그는 가학( 家 學 )의 영향을 받아 도학과 실천 공부에 힘썼다. 때문에 그의 문집에는 한편의 시문도 실려 있지 않다. 이기심성설( 理 氣 心 性 說 ), 인심도심사단칠정론( 人 心 道 心 四 端 七 情 論 ) 과 같은 관념철학 논문 25편이 윤지당유고 에 남아 있다. 그는 여성차별이 심한 시대에 살았으나, 스스로 차별을 극복하여 기일원론( 氣 一 元 論 )에 입각한 우주론과 평등적 인간관을 탐구하였다. 어려운 이론을 태양에 비유 윤지당의 학문적 특징은 유기 철학적 관점에 입각한 우주관과 인간관이다. 그는 성리 ( 性 理 )와 형기( 形 氣 )의 관계를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태양에 비유하였다. 태양이 하늘에 올라 그 광선이 창문에 비추일 때 창을 활짝 열어 젖히면 광선이 그만큼 많이 들어오고, 창을 적게 열면 그만큼 적게 비쳐든다고 했다. 태양이 많이 비치건 적게 비치건 태양광선임에는 틀림 없다는 것이다. 허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신광유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도 없이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40세가 넘어서야 양자( 養 子 )를 맞아 정성과 사랑으로 키워서 말년에는 손자 손녀와 즐거이 지냈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양자는 불의에 사망하여 그에게 상처를 남겼다. 윤지당은 결혼 후에도 오라버니 성주와 학문적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가 죽은 후, 남동생 정주와 시동생은 그의 학문을 귀하게 여겨 출간하였다. 윤지당유고 발문에서 시동생은 임지당을 가르켜 '규중의 도락이오 여중군자( 閨 中 之 道 學 女 中 之 君 子 )'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고, 더 나아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 의지와 기개는 후세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혜경궁 홍씨(1735~1815) 사무친한을 '한중록'으로 남겨 우리에게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한중록( 閑 中 錄 ) 을 남긴 혜경궁 홍씨, 그녀는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은 사도세자의 빈( 嬪 )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혜경궁은 10세에 세자빈으로 입궁하여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년의 궁중생활을 하였지만, 왕비도 아니고, 수렴청정을 한 대비도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한중록 을 저술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단지 정치적 알력 속에서 비운의 생을 살아야 했던 한 세자빈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중록 을 남김으로써 당시 혼잡했던 정쟁 속에서 기민하게 대처했던 여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와 결혼 혜경궁 홍씨는 1735년(영조 11년) 홍봉한의 4남 3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성격이 유순하고 덕성이 있어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일곱 살 때에 집이 매우 가난하였는데 부유한 집 아이가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어른스러움을 보이기도 하였다. 10살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을 때, 당시 궁중에는 숙종비인 대왕대비 인원왕후 김씨, 영조의 중전인 정성왕후 서씨,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요절한 효장세자의 빈( 嬪 )인 현빈 조씨와 시누이들이 있었다. 혜경궁은 윗전(대왕대비전, 대전, 내전)들과 영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며,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께는 닷새만에 한 번, 영빈께는 사흘만에 한 번씩 문안드리기로 되어 있으나
63 거의 날마다 찾아 뵐 정도로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며 세자 빈으로서의 덕을 쌓았다. 영조와 세자의 갈등은 깊어만 가 1750년(영조 26년) 겨울에 혜경궁은 의소세손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세손은 죽고, 그 해 1752년 9월에 정조를 낳았으며, 1854년에 청연, 1856년에 청선 두 궁주( 宮 主 : 왕녀의 칭호)를 낳았다. 한편,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는데(영조 25년), 그 후 영조와 여러 가지로 갈등을 겪게 된다. 그 사이에서 혜경궁은 많은 심적 고통을 받았다. 거기에다 세자와 세자빈을 감싸주던 정성왕후와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년)에 차례로 승하하자 영조와 세자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이 고변( 告 變 : 반역을 고발함)하여 세자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영조 몰래 평양을 유람한 일 등 세자의 행동을 일러 바쳤다. 이를 계기로 그 해 윤 5월 13일 세자는 폐위되어 뒤주에 갇히게 되었다. 8일만에 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바로 세자의 시호를 '사도'라 높이고, 빈궁(혜경궁)에게는 '혜빈'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 후 혜경궁은 세손(정조)을 보호하기 위해 세손을 자신의 곁에서 떼어 영조곁으로 보내는 등 영조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덕에 영조에게서 가효당( 嘉 孝 堂 )이라는 당호를 받았고, 세손과 자신의 친정가문을 위협하는 여러 세력들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2월, 영조가 세손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시켜 사도세자와 세손사이에 부자의 인연을 끊은 갑신처분이 내렸다. 또 그 해 7월 영빈 이씨가 죽었다. 이는 혜경궁에게 또 한 번의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이 때 부친 홍봉한은 영의정에 있었고, 삼촌과 동생들이 관직의 길에 오르는 등 혜경궁의 친가는 가장 번성하였다. 정조 즉위했으나 죽음으로 괴로움은 더해 1776년(영조 52년)에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인 정조(1776~ 1800 재위)가 왕위에 올랐다. 혜빈은 '혜경궁'이 되었다. 왕의 모친으로서 궁중내에서 대비 버금가는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초년에는 아들이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여러 친족들에 대한 탄핵 상소가 계속되어 마침내 친정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정조의 효성과 홍인한을 제외한 친정 식구들의 복권으로 후에는 만족스러운 나날들을 보냈다. 특히 회갑되던 해에 정조, 효의왕후 김씨(정조비), 가순궁(순조의 생모), 두 군주들과 함께 현륭원(정조 13년 화성으로 이장한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고 친지들을 청하여 화성행궁에서 큰 잔치를 열었을 때에는 아들 둔 보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된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 (180~1834 재위)가 즉위했다. 혜경궁은 스스로 '돌아갈 데 없는 신세로서 한 늙은 궁인 같다'고 한탄할 만큼 입지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왕의 생모, 현왕의 친조모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한중록 을 통하여 친정식구들을 변호하고,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정순왕후의 친족에 대해 정면으로 비난할 수 있었으며, 정순왕후 사후에는 아버지와 동생의 복권을 이룰 수 있었다. 1815년(순조 15년)에 혜경궁은 81세의 나이로 경춘전에서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헌경으로 올려졌다. 사도세자의 추존은 1895년(광무 3 년)에야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라 혜경궁도 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다.
64 정치상황 파악, 한중록 저술 이와같이 혜경궁의 일생은 파란 만장하였지만 그녀가 말년에 저술한 한중록 을 통하여 혜경궁의 진가는 더욱 드러난다. 한중록 은 네 번에 걸쳐 씌어진 것으로 저술 시기, 저술동기, 내용이 각각 다르다. 첫 번째는 회갑되던 해에 친정조카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생장과정이야기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국혼을 치르고 입궁한 이래 화성행궁에서 자신의 회갑연이 열리기까지의 50년간의 궁중생활을 적은 회고담이다. 두 번째는 혜경궁이 67세 되던 해, 즉 1801년(순조 원년)에 동생인 홍낙임이 사사( 賜 死 )되고 아버지가 역적 누명을 쓰게 된 것에 충격을 받고 쓴 글이다. 세 번째는 1802년에 씌어진 글로 정조의 자신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함께 정조가 자신의 친족을 신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회상하고 있다. 네 번째는 혜경궁이 71세 되던 해 (1805년)에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의 요청으로 임오화변의 내막에 대해 증언한 글이다.
65 이렇게 혜경궁은 네 번에 걸쳐 한중록 을 저술하였지만 이 네 편의 글에 주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살 펴보면 임오화변에 대한 입장 정리와 친족에 대한 변호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또 아버지, 숙부, 동생에 대한 변호 내용을 살펴보면, 혜경궁이 자신의 친족들이 어떠한 이유로 탄핵을 받고 있는지 그 상소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해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으며, 그 모든 사안에 대해 조목조목 설득력있게 반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박 내용들이 탄핵받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변호하였던 내용과 모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혜경궁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명석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 여인의 풍습을 기록 한중록 은 이러한 정치적인 의미 이외에도 간접적으로 당시 궁중 여인들의 생활과 언어와 같은 궁중 풍습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 과 같은 정사에서는 혜경궁에 대해서 왕의 며느리, 세자의 아내, 왕의 어머니, 왕의 할머니라는 남성에 종속된 유교적인 규범내에서의 여성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혜경궁 자신이 저술한 한중록 에서도 그러한 입장에서 서술하려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중록 의 이면을 살펴보면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초월할수 없었던 왕비나 세자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한중록 에서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빈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임오화변을 철저하게 세자의 병환탓으로 돌렸다. 그럼으로써 정쟁을 예방한 것이다. 정쟁에 휘말린 친족들을 변호하는 모습을 볼 때 혜경궁은 그저 규방에만 갇혀있는 소극적인 여성이 아니다. 적어도 당시의 정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수 있는 정치적 돌발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만덕(1739~1812) 굶주린 백성을 살린 사업가 이백년 전에 이 땅에서 사업을 한 여성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바깥 출입하던 시대에 왕에게 벼슬을 받고 왕비를 만난 평민 출신의 여성,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사업가 김만덕( 金 萬 德 )이다. 정조 때 문신 채제공이 지은 번암집 에 기록된 선행( 善 行 )의 제주 여인 만덕은 아버지 김응열( 金 應 悅 ), 어머니 고씨에게서 태어났다. 1750년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를
66 잃고 기녀의 수양딸로 갔다. 만덕이 일도 잘 하고 노래와 춤과 거문고도 잘 하자 기녀는 만덕을 역시 기녀로 만들려고 하였다. 만덕은 본래 양인( 良 人 )의 딸로서 기녀가 되기 싫었으나 어쩔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부모 잃고 기생으로 전락 기생 김만덕 그러나 그녀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버리지 못했다. 특히 어머니가 들려준 김천덕( 金 天 德 ) 열녀 이야기는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천덕은 본래 하인의 아내였다. 어느 해 남편이 배 침몰로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풀고서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부모가 다시 시집 보내려 하자 목을 매어 죽으려 하여 끝내 그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열녀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만큼 만덕은 기녀로서 기예( 技 藝 )를 할 뿐 방만한 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미모 때문에 인기가 대단하였다. 관가( 官 家 )의 연회는 물론 부잣집이나 양반집의 잔치에도 만덕의 참석여부가 그 격( 格 )을 좌우할 정도였다. 서울에서 어사나 벼슬아치의 환영연과 송별연에는 반드시 만덕이 나갔다. 모두들 제주도에도 이런 명기가 있었는가라고 감탄하였다. 고려 때의 승( 僧 ) 혜일, 어승마( 御 乘 馬 )가 된 노정 등과 함께 만덕은 제주도의 삼기( 三 奇 )라 칭송 받았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만덕은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천민으로 대우받는 것이 괴로웠다. 관가에 나가 기녀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목사인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갔다.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 良 女 )로 환원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양녀로 환원시켜준다면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특히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목사와 판관은 그 진정을 받아들여 명단에서 제명해 주었다. 그러자 지체 있는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허나 만덕은 일찍이 결심한 바가 있어서 결혼을 하지 않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간의 돈으로 객주집을 차렸다. 객주집 차려 큰 돈 벌어 기생살이를 통하여 세상사를 직접 체험한 만덕은 나이는 비록 젊었지만 장사할 자신이 있었다. 당시 객주집은 상인들이 물건 매매를 소개하고 또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육지 상인들이 이곳에 상품 매매를 위탁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수입도 많았다. 명기였던 만덕이 객주집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육지 상인들이 즐겨 찾아왔다. 상인뿐 아니라 관원들까지 투숙( 投 宿 )하여 객주집은 날로 번창하였다. 전국 각 지방에서 오는 장삿군들을 상대하다 보니 물건의 유통 경로와 교역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만덕은 장사가 돈을 버는데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 물자의 유통과
67 수요자의 편의를 주는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만덕은 제주도 사람들의 물건을 적당한 값으로 사두었다가 육지의 상인들에게 싸게 팔았다. 소문을 들은 상인들이 앞다투어 만덕의 객주집으로 모여들었다. 만덕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이익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것, 둘째 적정한 가격 매매, 셋째 정직한 신용본위가 그것이었다. 만덕은 기녀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 부녀자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염가로 공급했다. 나아가서 관가의 물품까지도 조달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육지 상인들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자연 만덕의 객주집은 큰 규모의 무역 거래소가 되었다. 몇 년만에 만덕은 제주의 거상( 巨 商 )이 되었다. 이처럼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만덕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하여 절약하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어렵게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하여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1792년(정조 16년)에서 1795년(정조 19년)까지 제주에는 계속 흉년이 들어 식량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1795년에는 국가에서 보낸 구호식량마저 풍랑으로 바다에 빠지자 제주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 때에 만덕은 '바로 지금이 자신이 나서야 할 때' 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보리고개까지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야 하니 육지로 나가서 되는 대로 양곡을 사오세요." 흉년에 가장 많은 곡식을 헌납 1천금을 갖고 육지로 건너간 상인들은 한 배 가득 곡물을 싣고 돌아왔다. 만덕은 곡물의 10분의 1을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에 보내어서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당시 관가에서는 한양에서 구호곡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굶어죽는 사람은 늘어가고 구호곡의 수송은 늦으니 그 초조함이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마침 만덕의 구호곡이 들어오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목숨은 만덕이 살렸으니 만덕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다." 사람들은 만덕의 후덕함을 칭송하였다. 제주 목사 이우현( 李 禹 鉉 )은 한양에 장계를 올렸다. "제주의 김만덕 여인이 곡식을 사서 450석을 냈고 고한록( 高 漢 祿 )은 300석을, 홍삼필( 洪 三 弼 )과 양성범( 梁 聖 範 )은 각각 100석을 내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부자 양반도 아닌 일개 양민, 그것도 여자가 가장 많은 곡식을 기부한 것이다. 정조는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김만덕에게는 불러서 그 소원을 물어보고 어려운 일이더라도 특별히 시행하라. 그리고 고한록은 대정현으로 임명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은 모두 순장으로 승진 임명하라." 아마도 김만덕이 남자였다면 꽤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사는 만덕에게 왕의 뜻을 전하고 소원을 물었다.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고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이루기 어려운 소원이었다. 백성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통제되고 특히 여자의 육지행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제주도가 척박하여 인구 유지가 쉽지 않아서 였다. 그러나 만덕의 소원은 그대로 왕에게 보고되었다. 왕은 쾌히 허락하고 말을 하사하였다. 오는 지역의 관사에서는 만덕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라고 분부하였다. 왕의 초청으로 상경 만덕은 1796년, 관원의 안내로 제주를 출발하였으니 나이 58세였다. 해남, 강진, 영암, 정읍, 여산, 공주, 수원을 거쳐 한양에 올라왔다. 왕은 먼길의 노고를 위로하고 선혜청의 의녀반수( 醫 女 班 首 : 내의원에 속한 수석여의)란 벼슬을 내렸다. 그것은 평민으로서 왕을 직접 알현할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심을 발휘하여 천백여 명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리었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왕은 치하의 말과 함께 상으로 비단 5필을 내렸다. 왕비도 만덕을 만나보고 장신구( 裝 身 具 )를 상으로 내렸다. 만덕은 한양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금강산으로 떠났다. 왕명이 있었기 때문에 강원관찰사의 배려하에 소원인 금강산을 편히 구경했다. 이와같이 사람들의 칭송과
68 환대를 받을 만큼 당시 만덕의 업적은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의지의 자선사업가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만덕은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였다. 검소한 생활로 자선사업에 주력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만덕의 부친 김응열을 가의대부로 봉하고 오빠인 만석에게는 만덕의 사업을 도운 공로로 가선대부에 임명하였다. 만덕은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무덤은 동문 밖, 성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했다. 판관 이국표는 만덕의 행적을 오륜( 五 倫 )의 바탕이라며 비문( 碑 文 )을 지어주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조차 드문 시대에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만덕은 특기할 만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업의 원리를 잘 파악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한 점이다. 그리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재산을 헌납했다는 사실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김만덕은 요즘도 보기드문 자선가이며 성공한 사업가로서 당당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인물이다. 이사주당(1739~1821) 태교의 백과사전 쓴 선각자 사주당( 師 朱 堂 ) 이씨는 인간교육의 기초가 태아 교육에서 출발되어야 하며 아울러 여성에 대한 태교 실천 교육이 체계화되고 강화되어야 함을 깊이 깨닫고 태아 교육과 그 실천화의 방안을 집대성한 태교신기( 胎 敎 新 記 ) 를 저술한 18~19세기 초의 선각적 여성이다. 사주당은 1739년(영조 15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李 咸 )와 아버지는 모두 관직에 나가지 못한 한사( 寒 士 )로 조용하고 깨끗한 선비의 기상을 지녔다고 한다. 지식을 두루 익혀 실천하기 노력 사주당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적이었으며 길쌈 바느질 등의 여홍( 女 紅 )에 열심이었다. 성장하면서는 부덕( 婦 德 ) 함양을 위하여 소학, 주자가례( 朱 子 家 禮 ), 여사서( 女 四 書 ) 등을 읽고 공부하였는데, 일년 만에 이것을 모두 마칠만큼 천품이 총명하였다. 또한 언행이 내훈 여범( 內 訓 女 範 )에 조금도 모자라는 데가 없었다. 이씨는 부덕 함양을 위한 교육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학문을 사랑하였다. 그의 종가 안에서 그의 학문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고 하니 그의 학자로서의 타고난 자질의 폭을 가늠할 수 있겠다. 뒷날 태교신기 를 간행할 때 그의 따님들이 쓴 발문에서, "어머니는 경사( 經 史 )에 박통하시고 여러 책을 두루 보실 뿐 아니라 의감( 醫 鑑 )과 속설에 이르기까지도 지식이 되는 것이면 버리시는 일이 없다." 고 평하고 있듯이 그의 박학함과 또 배운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남편인 목천현감 유한규는 상처 후 심하게 망녕이 든 어머니를 돌보아 줄 만한 아내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결혼하지 않고 자기가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 禮 )에 어긋남이 없는 이사주당의 덕행과 학문을 사랑하고 정진하는 그의 총명함을 전해 알게 되었다. 유한규는 그녀라면 능히 자신의 지적( 知 的 )인 반려가 될 수 있으며 또 노모에게 지극히 효성스러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혼인을 청하였다. 과연 사주당은 눈이 흐리고 정신이 아득한 늙으신 시어머니의 곁에서 조금도 착오없이 그 뜻을 받들어 뫼시어, 시가 식구들이 너나 없이 "저 신부는 피로할 줄도 모르고 노할 줄도 모른다." 고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타고난 성품이 엄격했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다. 평생 학문하며 남편과 도의를 논해 사주당이 특히 다른 여자와 달랐던 점은 무엇보다 평생을 학문하는 생활로 일관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남편이 아내 사주당을 가리켜 "부부로서의 중( 重 )함과 도의( 道 義 )를 논하는 벗됨을 겸비하였다." 고 일컬은 것을 보면 그녀가 선비의 배필로서 가장 이상적인 아내였음을 알 수 있다. 실학의 대가로서 우리말을 연구하여 언문지( 諺 文 志 ) 를 펴낸 유희가 사주당의 아들이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배우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덕 높은 어머니에게서 출생하고 성장한 그녀의 네 자녀가 어찌 범상한 필부필부( 匹 夫 匹 婦 )일 수 있겠는가! 유희는 어머니를 추모하는 발문에서 다음의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 어머니의 품격과 학덕을 기렸다. "어머니는 늘 집에서 경사를 읽고 익히셨다. 외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유( 大 儒 )의 어머니 중 글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셨다."
69 사주당은 자신이 학문하는 가운데 깊이 느낀 것은, 인간이 생태( 生 胎 )할 때는 누구나 하늘로부터 똑같은 천품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다만 태내 10개월 사이에 인간의 좋고 나쁜 품성이 형성되고, 또 출생 후의 생장 과정에서 다시 군자와 소인의 분별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품성이 결정되는 처음 10개월의 태내 교육이 출생 후의 교육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수태 후부터 자식은 이미 지각운동을 행하고 호흡 천식( 喘 息 )과 배고픔, 춥고 더움 등의 지각적 일들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태아가 혼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태모의 행함을 따라 그 성품을 이루게 되는 것인 만큼 태모의 인격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하였다. 태교신기 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그녀는, 중국 주나라 때 문왕과 같은 성인이 태어난 것은 어머니 태임의 철저한 태교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태임 이후로 태교가 거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이같이 귀중한 태교의 법을 제대로 알려 주는저술이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여범과 소학 등에 제시된 태 교법과 민간에 전승되는 태교 등을 널리 수집하고 그 위에 자신이 네 아이를 임신하고 낳아 기르는 가운데 스스로 체험하고 시험한 바 경험들을 모두 살려 이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태교법을 집대성한 책으로는 아마도 태교신기 가 처음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주당이 서문에서 "내 책에 빠져 있는 것을 모두 갖추었다." 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 책의 중후한 가치와 풍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수태, 출산 등의 풍부한 내용의 태교 책 저술 태교신기 는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주당은 수태 출산은 여성의 가장 귀중한 직분이며 이 직분 수행을 위하여 인간의 첫 출발이 되는 혼인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0 태모의 심성과 태아의 환경이 태아의 성장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임신한 부인은 앉고 서고 잠자고 일어나고 또 나가고 들어옴도 절도 있게 하고 음식도 임부의 혀끝이 원하는 대로 섭취하지 말고 태아의 육성에 맞게 영양 있고 깨끗한 음식을 취하여야 하며, 특히 모양이 반듯하고 제 색( 色 )을 지닌 것만을 먹으라고 하였다. 또 일상생활에서 예에 어긋나는 것은 일체 듣지도 보지고 말고 오직 성현의 아름다운 말씀만을 상고하면 태아는 건강하고 준수하게 성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래 서양에서도 태교의 중요성이 과학적으로 연구 논의되고 있다. 여러 가지 과학적 실험을 거쳐 인간의 품성이 이미 태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한 바가 있다. 근래 성 도덕이 문란하여지면서 전통적 태교를 등한히 하고 인간교육을 오직 생후 교육에만 의지하려고 하나, 태교란 천부의 인권을 완성하는 첫 길이며, 이것은 여자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주위의 협력과 보살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 존재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었던 실학 융성기인 18세기에 이사주당이 이사주당 를 새로 저술한 것은 인간의 완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인간 이해에 의해서 였다고 하겠다. 사주당은 83세의 수( 壽 )를 누리고 1821년 9월 21일 (음)에 임종하였다. 서영수각(1753~1823) 시문과 수학에 밝아 한 집안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새 사람에게 달렸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며느리로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집안의 위세가 변한다는 뜻이다. 명문가에 태어나 역시 명문가로 시집 가서 집안을 일으키는 얘기는 흔하다. 그러나 서영수각은 결혼해서 처음은 가풍을 배우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결혼 10년이 넘어 집안이 안정되어서야 자신의 문학적, 수학적 재능을 화려하게 꽃 피운 것이다. 환경이 나쁘다고 일찍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여성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71 조선시대 여성 수학자 서영수각( 徐 令 壽 閣 )은 아버지 서회수( 徐 廻 修 )와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자질이 뛰어나고 글읽기를 좋아했다. 특히 시를 좋아하여 늘 도연명( 陶 淵 明 )의 '전원으로 돌아가리 ( 歸 田 園 )' 를 암송하였다. 14세에 홍인모( 洪 仁 模 )와 결혼하여 3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집안은 친정과 시가가 모두 명망 있는 양반가였다.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시집인 홍씨 가문도 재상을 많이 배출한 양반가였다. 그녀는 유교적 사회가 요구하는 유순하고도 순종적인 여성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자질은 여성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유교적의 딱딱한 껍질속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시대를 앞선 여성의 삶을 살았다. 남편에게는 시문( 詩 文 )을 나누는 이상적인 벗이자 아내였다. 자녀들에게는 학문과 수학에 뛰어난 스승이자 자상한 어머니였다. 자녀에게 정치의 정도( 正 道 ) 가르쳐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여러 남형제 곁에서 함께 글 공부를 하여 결혼 전에 이미 웬만한 경적( 經 籍 )은 모두 익혔다. 어느 정도 학문을 습득하자 그녀의 언변과 행동은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는 영수각이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학식이 높고 논리가 뛰어나도 벼슬자리에 나갈 수 없음을 애석해 한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부란 꼭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여성의 정신적 재산은 사회의 근본이 되는 가정과 남편과 자식을 통해 얼마든지 불어날 수 있지 않은가. 영수각은 결혼하고 10년간이나 글 아는 체를 하지 않아서 시집에서는 그녀를 평범한 며느리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철저한 자제력( 自 制 力 )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애정은 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다양한 학문적 소양은 자식이라는 거목( 巨 木 )에게 질 좋은 거름이 되었다. 영수각은 밤이면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잠자리에 들 때는 조용히 경전을 외워 주고 시문과 격언을 들려주었다. 정치에 몸 담을 아들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다. "왕에게 곧게 간( 諫 )하다가 화를 입되 두려워 하지 않는 신하보다는 어진 정사를 베풀어 사지( 死 地 )의 백성을 건져내는 신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활민( 活 民 ) 즉 백성을 살게 하는 정치가 정도( 正 道 )라고 믿고 가르친 것이다. 맏아들 홍석주는 좌의정을 지냈는데 성품이 겸허하고 언행이 평민과 같아 주위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도가적 사상, 그리고 슬기로운 몸가짐 모두 어머니 영수각의 가
72 르침에 말미암은 것임은 물론이다. 또 아들 석주가 1909년(순조 3년)에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 연경에 갈 때였다. 영수각은 항상 경을 지니고( 持 敬 ) 얼음 밟는( 履 氷 ) 마음 가짐으로 덕( 德 )을 쌓으라는 뜻의 시를 지어주었다. 아들이 오만한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옛 성현 유훈 잇기를 그 몸에 경( 敬 ) 지님보다 더 나음이 없노라. 항상 빙계( 氷 戒 )를 간직하면 몸이 평안해지고 덕이 날로 새로워지네. 또한 그녀는 자녀들에게 부귀영화는 화( 禍 )의 근원이므로 항상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셋째 아들 홍현주( 洪 顯 周 )가 부마( 駙 馬, 임금의 사위)가 되었을 때 영수각은 검소해야 할 어린 자식이 행여 사치에 빠질까 근심하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대궐에서 하사한 비단옷을 집에서는 입지 못하도록 엄하게 했다. 미신을 믿지 않고 합리적인 생활 영수각은 냉철할 만큼 정도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굿과 같은 미신에 마음을 의탁하는 일을 일체 금하였다. 큰 아들이 여러 달 병으로 고생할 때와 셋째 아들이 두환( 痘 患 )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때였다. 주위에서는 무당을 불러 굿으로 병마를 몰아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신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확고한 생활 태도와 그의 학문을 통한 선비 정신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돌봄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은 더욱 지극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입은 옷이 무거울 정도로 파리하고 가냘펐다. 그렇지만 자신이 몹시 아플 때도 어른이 편찮으시면 수척한 몸을 이끌고 꿋꿋하게 베개 밑에서 병수발을 하였다. 그는 몸은 약했으나 뛰어난 정신력 때문에 60세가 넘도록 신비한 얼굴색을 지녔다. 심한 불면증으로 고생할 때도 잠 못이루는 괴로움을 정신수양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아랫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여 집안 분위기가 늘 화애로웠다. 추운 곳에서 궂은 일 하는 하인들이 있어 너희들이 이처럼 평안히 공부하는 것이니 감사하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수리학자로서 재능 발휘
73 남편에게 있어 영수각은 도학자적 정신과 시문생활의 반려자였다 그는 남편에게 과거공부보다는 천리( 千 里 ) 그대로의 품성을 기르는 것이 낫다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결혼 10년이 되도록 문자나 시문을 일체 내보이지 않아 그녀의 수준을 남편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와글 192편은 남편 홍인모의 시집 족수당집( 足 睡 堂 集 ) 6권에 '부영수각고( 府 令 壽 閣 考 )'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남편이 늙으막에 시골에 있으면서 시를 화답( 和 答 )할 사람이 없어서 아내에게 시짓기를 권한 때문일 터였다. 영수각이란 당호도 남편이 지어준 것을 보면 이들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구가한 평등부부로 보인다. 시 가운데는 자연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아마도 도연명의 시풍의 영향과 인간적 욕망을 초월한 아름답고 깨끗한 그녀의 삶이 이러한 정신 세계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가적인 삶은 타고난 수리학자로서의 재능도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 냈다. 개평방( 開 平 方 ) 방정식( 方 程 式 ) 삼각형( 三 角 形 ) 등 난해한 공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냈다. 홍석 주가 훗날 중국에서 들여온 수리정온( 受 理 精 蘊 ) 이란 책을 가지고 어머니가 해놓은 것과 비교하여 보니 그 이론이 똑같았다. 아들은 어머니의 수학자로서의 학문적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유교적인 온갖 제약 속에서 영수각은 결혼 초기에 자신의 능력을 숨겼다. 그 갈등이 한 평생 쇠잔한 몸으로 지내는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갈등을 넘어서서 끝내는 자신의 능력을 펼쳐서 수신제가( 修 身 齊 家 )의 삶을 누렸다. 그 높은 정신력은 그의 안색을 늘 신비와 총기가 감돌게 하여 71년의 수( 壽 )를 누리게 하였다. 이빙허각(1759~1824) 생활에 도움되는 실학책 써내 조선조의 성리학은 그 이론을 정립하고 심화( 深 化 )시킨 면에서는 유학의 본거지인 중국을
74 능가하였다. 그러나 그 학문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도 관념적이었다. 17세기 말부터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대신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자는 실학( 實 學 )이 머리를 들었다. 실학은 사회 여러 분야를 변화시켰다. 이 시기에 한 실학자의 가정에서 '가정실학' 의 금자탑을 쌓은 이빙허각( 李 憑 虛 閣 )이 태어난 것이다. '가정실학' 의 금자탑 쌓은 실학자 이빙허각은 아버지 문헌공( 文 獻 公 ) 이창수( 李 昌 壽 )와 어머니 유씨 부인 사이에서 탄생했다. 남편 서유본( 徐 有 本 )은 천문 수학에 능통한 학자였다. 연암( 燕 巖 ) 박지원( 朴 趾 原 )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학( 學 )과 문( 文 )의 지우( 知 遇 )였다. 그녀의 시숙인 서유거는 초년에 형수인 이빙허각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임원경제지 를 저술할 때에도 빙허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빙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6, 7세에 이미 아버지의 무릎에서 들은 소학 과 모시( 毛 詩 ) 를 줄줄 외웠다. 빙허각의 친정과 시가는 원래부터 대대로 정의( 情 誼 )가 있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빙허각의 총명함을 서로 잘 아는 터였다. 한 번은 그녀의 시조부가 되실 분이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소학 을 잘 읽는다고 들었는데 '가행( 嘉 行 )'과 '선행' 두 편의 대의( 大 意 )를 아느냐." 그녀는 정중히 대답하였다. "실행하기 전에 말을 먼저 할 수는 없습니다." 소학 이란 유교 윤리의 기본적인 실천서이다. 그대로 실천하여 산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이요 군자인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이미 책의 내용보다는 그것의 실행을 더 중요시하였던 것이니 가히 여중군자( 女 中 君 子 )라 할만하다. 빙허각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뜻이 강하였다. 어릴 때 그의 친구들이 이를 가는데 자기는 이를 갈지 않아 망치로 생이를 두드려 뺄 정도였다. 금슬 좋은 부부 학자로 살아 학문이 있는 집안에서는 학문의 소양을 지닌 여성을 좋아하였던 것을 역사에서 적지 아니 볼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 학자들은 학문은 실행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빙허각의 외숙모 이사주당( 李 師 朱 堂 )은 태교의 백과사전이라 할 태교신기 를 남겼다. 남편이 아내의 학문적 자세를 아끼고 책내기를 독려( 督 勵 )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학문을 논하고 시문을 주고 받는 시우( 詩 友 )로서 산 아름다운 부부들이 꽤 있었다. 빙허각 부부도 금슬이 좋았고 학문적으로도 평생지기로서 지냈다. 그녀는 1822년 남편이 죽자 세상에 살 뜻을 잃고 두 번이나 자결을 하려고 하였다. 나중에는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곡식을 끊고 지냈다. 그러다가 19개월 만에 '절명사( 絶 命 詞 )'를 짓고서 66세의 나이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75 가정실학 백과 규합총서 널리 읽혀 그녀의 저술로는 규합총서( 閨 閤 叢 書 ), 청규박물지( 淸 閨 博 物 誌 ), 빙허각고( 憑 虛 閣 槁 ) 등이 있다. 이 저술들은 양의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실로 알차고 방대하여 당대의 실학자들과 견줄 만한 것이었다. 특히 가정실학백과의 최고봉이라 할 규합총서 는 양반가 부인들의 교양있고 수준 높은 삶의 양태를 상세히 보여주는 실로 귀중한 저술이다. 총 5책으로서 주식( 主 食 ) 봉임( 縫 ) 산업( 産 業 ) 의복( 醫 卜 ) 등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청규박물지 는 총 4책으로 천문지리 세시( 歲 時 )초목 등 8부분으로 나누어 해설을 하였다. 빙허각고략 에는 자작시와 산문이 실려 있다. 저술은 모두가 순 한글로 되어 있다.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천히 여긴 때문인지 일반에게 널리 활용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술중 규함총서 는 양반가 부녀자들에게 긴요한 지식이므로 목각판본의 책 한두권이 후대까지 전해졌다. 황해도 장연군 진서( 津 西 )에 사는 빙허각의 방손( 傍 孫 ) 서정만이 간직해 오던 것을 민영규( 閔 泳 珪 )가 출판하여 그녀의 진가는 더욱 널리 알려졌다. 권유한당(18세기) 천주교 여성훈서 '언행실록'의 저자 권유한당( 權 柳 閑 堂 )은 천주교 초기의 중요한 인물인 권일신( 權 一 身 )의 딸이다. 권일신에게는 4남매가 있었는데 권유한당은 그 세 번째로 생각된다. 한국 가톨릭 여성사에 특별한 신앙생활과 덕행을 실천했던 권데레사가 그 여동생이며 동정부부 생활을 했던 이루갈다는 이종사촌이었다. 따라서 권유한당은 당시 가장 대표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 집안에 태어나, 천주실의 한글로 번역 권유한당은 남편 이벽(이벽, 1754~1786)의 내조를 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벽은 천주교의 중심인물로서 1784년 이승훈( 李 承 薰 )이 북경에서 가져온 책을 얻었다. 서울 수표교의 집에서 몇
76 달 동안 서학서인 천주실의, 칠극 등을 연구하였다. 그런데 그 때 부인 권유한당이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권유한당은 한국 천주교사에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유한당이 한국 천주교사에서 갖는 의미는 유한당언행실록( 柳 閑 堂 言 行 實 錄 ) 에 의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숙부인 권철신( 權 哲 身 )은 권유한당과 그 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견문 박학하고 규범 내측( 內 側 )이 수범하더니 그 말들을 기록하였구나. 유한당언행실록 의 내용은 무비가언( 無 比 可 言 ) 선행의 목적이다." 권유한당의 인물을 잘 지적하고 책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조선조 여성에게 '견문박학' 이란 말은 대단히 드물게 쓰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 말을 대학자( 大 學 者 )인 권철신이 썼다는 것은 그녀의 활약상이 특출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부부를 인륜의 으뜸으로 여성교훈서 언행실록 지어 권유한당이 집필한 언행실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마음 가지는 법' 이다. 인간의 모든 행실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은 형체도 없으나 복을 일으키는 근거다. 마음에서 선과 악이 생기고 만사의 길흉화복( 吉 凶 禍 福 )이 나온다. 마음이 진중하면 오래 살고 마음이 조급하면 단명한다. 이 항목은 조선시대의 다른 책과 달리 종교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두 번째는 '용모 가지는 법' 이다. 일반 부녀자들을 위한 것으로 대단히 자세하고 섬세한점까지 지적하고 있다. 용모가 깨끗하고 단아한 부인을 연화에 비유하고 있다. 연꽃이 비록 진흙에서 태어나지만 흙이 묻지 아니하고 모습이 화려하여 꽃 가운데 군자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몸 가지는 법'이다. 여성의 동작과 그에 따른 예의범절을 서술하였다. 여성들의 전형적인 몸가짐인 칠거지악( 七 去 之 惡 )과 삼종지도( 三 從 之 道 )를 교훈하였다. 특히 삼종지도는 여자의 마음이 좁고 성격이 편벽되어서 모든 일을 여성이 마음대로 하게 되면 망국패가( 亡 國 敗 家 )한다고 하였다. 유교적이고도 전통적인 관념이라 하겠다. 네 번째는 '말하는 법'이다.흉한 말은 옮기지 말고 좋은 말만 전해야 한다. 어두운 밤에는 사귀( 邪 鬼 )와 도둑과 죽이는 일을 이야기하지 아니한다. 비와 바람을 탓하지 말며 옷을 단정히
77 입고 천주를 공경할지니라 등이 쓰여있다. 다섯 번째는 '기거( 寄 居 )하는 법'이다. 주로 부모와 웃사람을 대할 때 부녀자로서 지켜야 되는 예법( 禮 法 )을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거가( 居 家 )하는 법' 이다. 천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십년의 계교로는 나무를 심고 일년의 계교로는 곡식을 심으라 하셨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말씀을 잊지 말고 명심하여 행하라. 평생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세계에 명예가 있으리라. 이 글 가운데 '십년계획에 나무를 심고 일년에 곡식을 심는다'는 내용은 사마천( 司 馬 遷 )의 사기( 史 記 ) 에 나오는 말이다. 이를 작자는 '천주의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다. 돈독한 신앙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일곱 번째는 '처녀 수신하는 법'이다. 보석을 갑 속에 감추어 둔 것과 같이 남이 알지 못하게 조심하라는 교훈이다. 여덟 번째는 '출가하는 법' 이다. 여러가지 예절을 설명하고 혼인의 중대함과 평등한 관계에서 맺어지는 부부 간의 신의를 강조했다. 근대지향적 사고 지녀 아홉 번째는 '가장 섬기는 법'이다. 이 내용은 유교의 윤리관과 같아서 천주교가 가부장( 家 父 長 ) 성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열 번째는 '부모 섬기는 법' 이다. 부모를 섬기는 도리는 효도가 으뜸이라 하였다. 즉 부모가 마음이 즐겁고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이 해드려야 한다고 했다. 특히 시부모를 정성되이 모시며, 살림살이나 재산을 시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사용해야 된다고 하였다. 열한 번째는 '자식 교육하는 법' 이다. 부모가 자식을 항상 데리고 앉아서 바른 말과 재미있는 말로써 교육하면 자연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 공경과 사랑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자녀교육법'은 다른 여러 교훈서에는 없고 이 언행실록 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다. 열두 번째는 '며느리 교훈하는 법' 이다. 여성이 결혼하면 새 가족을 만나 가칙( 家 則 )을 배워야
78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 역시 다른 교훈서에는 없는 조목이다. 권유한당은 한문으로 된 천주교서를 한글로 옮기는 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문장이 아름답고 섬세한데다 글씨도 깨끗하였다. 이 번역서들은 복사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교재도 성물( 聖 物 )도 빈약했던 천주교 창립기( 創 立 期 )에 이 책은 신도들의 신앙심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완숙(1760~1801) 천주교 전도에 앞장 선 순교자 천주교는 우리나라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종교다. 특히 여성들의 봉건성은 종교의 평등사상에 힘 입어 깨어지고 자의식의 꽃봉오리를 내밀었다. 강완숙( 姜 完 淑 )은 최초의 전도부인이자 순교자다. 천주교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여인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도 많이 남아 있다. 여성의 신앙활동은 유교적인 가족제도의 붕괴에서 출발한다. 신도들 중에는 유교사회 체제를 용감히 이탈하여 활동을 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강완숙 역시 당시의 풍습에서 탈피하여 양반들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남성들도 추종할 수 없었던 영역에까지 활동하였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감동 강완숙은 충청남도의 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있고 용감하였으며 한 때는 수도자가 되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는 덕산( 德 山 )사람 홍지영( 洪 芝 榮 )의 후처가 되었으나 남편과 마음이 맞지 않았다.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낼 때 마침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천주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사상은 가부장적 유교 윤리에 억압 받던 천민이나 여성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조선의 오랜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유교사상을 천주 숭배로 대치했기 때문에 천주교는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천주교가 들어오자 강완숙은 책을 구하여 읽고 마음을 기울여 믿음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매사에 열성적이었고 자제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먼저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을 교화시키면서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전도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온 힘을 다해 섬기고 전도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듣지 않았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해박해로 고향이 소란해지자 그녀는 천주교를
79 믿지 않는 남편을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주문모 신부를 보살퍼 당시 중국인 신부 주문모( 周 文 謨 )는 밀입국하여 은밀히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강완숙은 주신부 곁에서 교회의 일을 도왔다. 주신부는 그녀의 영리함과 성실함을 인정하여 콜롬바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나라에서 잡으려고 혈안이 된 주신부를 그녀는 자기 집의 나뭇광에 숨겨두고 보호하였다. 포졸들이 문앞까지 왔지만 그녀는 과부라는 핑계로 집안 수색을 못하도록 막았다. 그녀는 여신도 회장으로서 주신부의 지시에 따라 교인들을 돌보며 지도했다. 박해가 지난 후 주신부는 그녀의 집으로 아주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음으로 양으로 주신부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녀는 6년 동안 자기 집에 주신부를 모시고 교회내의 업무처리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체포되었다. 관리는 그녀의 다리를 주리 틀며 주신부의 종적을 캐어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화려한 전도활동은 낱낱이 드러나서 그녀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형장에서 강완숙은 형리들에게 말하였다. "국법에는 사형을 당하는 자의 옷을 벗기라고 명해졌으나 여인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소.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 강완숙은 옷을 입은 채 십자성호를 긋고서 참형을 당했다.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나라에서 찾는 외국인 죄인을, 그것도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외간남자인 주신부를 생명을 걸고 보호한 신앙의 힘, 한편으로는 눈부신 전도활동을 통하여 많은 신도로부터 숭앙을 받은 그녀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혁명적인 신앙활동으로 여성의 활동범위 넓혀 신유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박해 때 주신부와 함께 순교 당한 신도는 300여명에 달하였다. 이때 국문( 鞠 問 )을 받았던 여신도들이 강완숙과 어떻게 관련이 있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많다. 각계 각층의 여신도들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신앙활동을 했으며 이들을 이끌고 밀어 준 것은 강완숙이었다. 한 상소문에서 그녀는 전도의 괴수( 魁 首 )로 불렸다. 또한 특기할 만한 일은 왕가와 궁궐의 나인들에 대한 선교이다. 즉 강화도에 유배중인 은언군 이인의 아내 송씨와 그의 자부 신씨 부인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영세를 받게 했다. 양반과 중인들, 동정녀와 과부들을 교육시켜 교회활동을 함께 함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한국교회사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여성사 안에서도 강완숙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의 교회 활동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인습 속에서 행동을 제약받았던 조선시대 영 정조 때에 활동범위를 넓혔다는데 의의를 가진다. 그녀는 남 다른 생애를 살았다.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혁명적인 행동과 엄청난 선교 활동으로 개척적인 여성상을 구현하였다. 이와 같은 여성의 존재는 분명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여성관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김삼의당(1769~?) 과거에 실패한 남편과 행복하게 산 문인 삼의당 김씨는 전라복도 남원( 南 原 ) 누봉방( 樓 鳳 坊 )에서 태어났다. 남편은 동년월일생이며 같은 마을에 사는 하욱이었다. 부부는 나이도 같고 가문이나 재주가 비슷했다. 결혼 한 첫 날 밤에 마주 앉아 시를 주고 받았다 하여 사람들은 천정배필이라고 부러워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틈틈이 한문을 해독하고 시를 짓고 편지를 보내는 등 문학활동을 하였다. 삼의당이란 호는 남편이 붙인 것이라고 문집( 文 集 ) 삼의당고( 三 宜 堂 槁 ) 에 기록되어 있다. 남편은 부인의 집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그리고 뜰에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80 그녀의 소원은 물론 남편의 과거급제였다. 삼의당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거나 비녀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기도 하고, 이별의 고통을 각오하고서 남편 혼자 먼 산 속으로 공부를 보내기도 하였다. 금슬 좋은 부부로서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이별을 거듭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고요한 봄날 홀로 창가에 서서 먼 들판을 바라보며 님에게 보내는 사연을 쓰는 삼의당. 그 모습은 아무런 가식도 허위도 없는 한 여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애틋함은 바람 불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는 또 다른 형태의 슬픔을 자아낸다. 괴로워라! 괴로워라! 사모하기 괴로워라! 닭은 울어 삼차이요 밤은 이미 오경이라. 말똥말똥 잠 못 이뤄 원앙침만 대하니 쏟아지네! 쏟아지네! 눈물이 쏟아지네! 깊은 밤 원앙침에 홀로 누워 잠 못 이루며 눈물로서 님을 기다리는 심정을 절규하듯이 부르짖고 있다. 조선의 시 가운데 이렇게 원색적이고도 격정적인 작품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 치다가도 다시 현모양처의 본래 마음을 찾아가는 힘, 그것이 바로 글을 통해 수양하는 시인의 마음 아니겠는가. 삼의당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경험은 아내로서 또 어머니로서의 역할이었다. 생활 속의 기쁨과 슬픔을 시로 또 편지로 표현하면서 그녀의 작품세계는 깊이를 더해갔다. 혹시 정 때문에 공부를 포기할까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기도 하였다. 반야에 등불 아래 옛 글을 읽네. 부모 위한 맹세 신혼 초에 하였네. 베개 맡에 이따금 집에 돌아가는 꿈 꾸네. 공부가 성공 못할까 염려되네. '부부자시( 附 夫 子 詩 )' 삼의당의 작품은 크게 세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과거를 준비하는 남편에게 내조를 약속하는 것이고, 둘째는 과거 응시로 인한 이별에서 오는 괴로움을 읊은 것이고, 셋째는 남편이 수 차례의 실패 끝에 과거를 단념하고 농사를 지을 때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녀는 유교적인 사상에 순응하여 상당히 행복한 삶을 누렸다. 이러한 생각은 작품의 곳곳에 녹아
81 있다. 글이란 사람의 마음을 화( 和 )하게 하는 것이지 감정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님을 자주 강조하였다. 행복한 말년 이러한 고통과 절제와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은 돌아왔다. 비록 과거에 급제는 못하고 한낱 촌부로 돌아왔지만 삼의당에게는 이것은 더 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삼의당에게 있어서 남편은 신선이었고 남편과 함께 있는 세계는 별천지( 別 天 地 )였다. 투철한 유교적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삼의당으로서는 부부가 화합하여 한 생애를 마감하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는 마침 격에 맞는 반려자를 만나 자기의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글 속에서도 정직하고 부끄럼없이 느끼고 관찰한 바를 표현하였다. 김삼의당은 18세기 조선의 지성적이고도 온후한 여성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강정일당(1772~1832) 당대에 칭송 받은 문장가 영조 48년에 출생하여 순조 32년까지 생존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성 문학인이다. 본관은 진주, 호는 정일당이며 제천 출신이다. 강희맹이 그 선대이고 아버지 강재수는 일찌기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권서응의 딸이다. 남편은 파평 윤씨 윤광연( 尹 光 演 )으로 양가가 모두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정일당유고( 靜 一 堂 遺 槁 ) 라는 문집이 있다. 가난한 명문가에서 출생, 효성 지극 강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부모를 공경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는 약을 다리고 음식을 대접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1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몸이 상할 정도로 애통해 하며 삼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학문이나 문학에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82 20세에 출가하여 홀시어머니를 친부모처럼 섬겼다. 그리고 남편을 귀빈처럼 존경하고 모든 일을 물어서 처리하였다. 혹 남편의 처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더라도 사랑채에 직접 드나들지 않고 서간( 書 簡 )으로 연락해서 경계의 말을 하였다. 자식은 모두 5남 4녀를 낳았다. 그러나 모두 어려서 죽어 한 사람도 장성하도록 키우지를 못하였다. 이것은 정일당에게 인간적으로 가장 큰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행 중에도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여,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은 자기 분수에 정해져 있습니다. 모두 꼭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근심되는 것은 자기의 도리를 스스로 다할 수 없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원망하여 허물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보통의 감정을 넘어선 의연한 모습이다. 생계를 책임지면서 학문에 정진 조선 후기에는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학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관직에 오를 확률은 높지 않았다. 즉 남자들은 실현되기 어려운 학문에 연연하여 집안의 생계는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렇게 되면 집 안의 경제적인 배경이 든든하지 않을 때 여자들이 생계를 책임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생계수단은 대개 바느질이나 길쌈인 경우가 많았다. 제가 재덕( 才 德 )이 없어 부끄럽습니다만 어려서 바느질은 배웠습니다. 참공부에 모름지기 스스로 힘쓰시고 입고 먹는 데는 관심 두지 마소서. '정부자( 呈 夫 子 )' 남편에게 올린 시다. 학문에 전념하고 생계 걱정은 말라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는
83 남편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적인 윤리관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생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계를 책임지면서 정일당은 비로소 학문을 시작한다. 즉 집안이 어려워 단간방에서 바느질을 해가며 남편의 어깨 너머로 학문을 익힌 것이다. 30살에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경서에 두루 통하고 시문에 뛰어나 당시에 문명( 文 名 )이 높았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정일당이 대신 지어주는 일이 많았다. 한 번은 이직보가 그의 시를 한 수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정일당은 이 소문을 들은 뒤로 작품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또 글씨에도 능하여 홍의영 전복인 황운조 등의 필법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문집에는 시가 가장 많으나, 그 내용은 흔히 여성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감상적인 것 보다는 학문 또는 수신에 관한 내용이 많다. 여성으로는 이례적으로 성리학적인 시 지어 밤 깊어 뭇 동물 쉬고 있는데 뜰은 비어 흰 달이 더욱 밝구나. 마음이 씻은 듯 맑으니 환하게 밝은 성, 정을 보겠네. '밤에 앉아서' 52세 때 지은 시이다. 고요한 밤의 정밀 속에서 밝은 달빛을 벗하면서 홀로 마음을 가라 앉히는 원숙한 경지를 보인다. 성( 性 ), 정( 情 )은 성리학의 대표적인 용어들인데 이를 시어로 사용하고 더구나 환히 볼 수 있다고 표현한 것은 학문적인 성과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나에게 실덕( 實 德 )이 있으면 남이 비록 알아주지 않아도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나에게 실덕이 없다면 비록 헛된 명예가 있어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옥이 여기에 있는데 사람이 돌이라고 말하더라도 옥에는 손해될 것이 없고, 돌이 여기에 있는데 그 돌을 옥이라고 말하더라도 돌에는 덕될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당신께서는 실덕에 힘써서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게 부끄럽지 않게 처신하셔서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는 데에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스승이 제자에게 훈계하듯 정일당은 남편에게 시속과 무관하게 군자의 학문에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위인지학( 爲 人 之 學 )이 아니라 자기 완성의 위기지학( 爲 己 之 學 )을 근본으로
84 삼고 있지 않다면 이런 충고는 나오기 어렵다. 한편 자사의 책이 천년 동안 열고 이음이 많구나. 체득하여 홀로 섬에 치우침이 없고 쓰고 행함에 어긋남이 없으니 처음에 능히 경계하고 삼가야 마침내 중화를 이를 수 있도다. 도에 달하는데는 삼덕( 三 德 )이 관문이니 정성스럽도다! 그 이치에 무엇을 더하리요? '중용을 읽음' 중용( 中 庸 ) 을 읽은 감회를 묘사하였다. 비록 시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학문적인 생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중화의 사상은 성리학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도 체득하기 어려워 한다. 그런데 정일당은 나름대로 중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삼가면서 행하고 치우침이 없는 중도를 지키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의연한 정일당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정일당의 시가 모두 성리학적인 성격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늙음을 생각하며 인생의 원리를 읊은 '원운', 마음을닦 으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제석감음' 등은 자신의 감상을 그대로 표현한 시다. 또 '청추선' 에서는 초가을 매미소리를 들으며 심란한 여심( 女 心 )을 읊고 있다. 그외에 서( 書 )는 남편과 주고 받은 서찰들이며, 남편 대신 써서 송치규에 보낸 별지도 있다. 별지에서는 심의 제주 초반 등에 관한 예설을 묻고 있다. 잡저는 11대 할아버지로부터 시아버지까지 좋아하였던 음식을 적은 것이다. 대개 조선시대 여성들의 활동은 대사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글재주가 있다고 해도 뒷날 그 자손에 의해서 드러나는 정도이며 당시 사람들에게 직접 칭송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글의 내용도 시나 짧은 감상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일당은 시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의 문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 기, 설, 행장, 전, 찬까지도 집필하였다. 따라서 정일당은 단순한 문장가이기 보다는 한 사람의 학자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사회 (개화기) 근대사회 개관 1876년, 항구를 개방하자 외국 선박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문물을 선보였다. 쇄국( 鎖 國 )에서 개항( 開 港 )으로의 정책변화는 우리나라가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이중 삼중의 외부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세력을 확장하려는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제 조선은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와 열강( 列 强 )의 침략을 막아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 받은 것이다. 사실 개항 이전부터 조선 사회는 내부 갈등과 서양문물이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간 중심의 사고( 思 考 )가 고개를 들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여성관을 변화시켰다. 여성을 억압하던 여러 가지 제도와 관습에 대한 비판이 서서히 등장하였다. 이미 조선 후기의 실학( 實 學 )사상에서 근대 의식은 싹 트고 있었다. 여성의 가치와 본능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정해야 한다는 연암 박지원, 유교적인 정절관을 비판한 다산 정약용이 그 좋은 예다. 서학( 西 學 ) 즉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여성의 삶에 실로 격심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전도( 傳 道 ) 활동은 내외법에 묶였던 여성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성경교리라는 지식세계를 접하게 해주었다.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념은 여성도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동학( 東 學 )사상 역시 인간평등사상을 내세워 여권향상에 기여하였다. 1880년대에 들어온 기독교는 여성의 개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육과 의료사업 등 여러 방면에서 여성이 행동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준 종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필두로 많은 여성교육기관이 생겨났다. 여성들의 지식은 놀랍게 고양되고 무한한 능력이 개발되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자유연애 자유혼인의 봄바람에 내외법 삼종지의 칠거지악 등은 허물어져
85 갔다. 평등한 부부가 아름다워 보이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개화파 중에서 여성의 개화문제를 제일 먼저 거론한 사람은 1888년 박영효이다. 그는 상소문에서 여아교육( 女 兒 敎 育 ), 내외법( 內 外 法 ), 조혼( 早 婚 ), 축첩( 蓄 妾 ), 청상과부( 靑 孀 寡 婦 )의 재혼 허용, 신분 차별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다음으로는 유길준의 서유견문( 西 遊 見 聞 ) 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서구사회의 문물, 특히 결혼 과정과 여성을 대접하는 예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여자교육의 목적이 자녀교육, 인격향상, 원만한 사회생활에 있다고 소개하였다.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여론화( 與 論 化 )시킨 인물은 독립신문 을 만든 서재필이다. 그는 신문을 통하여 여성 개화의 시급함을 논하고, 그 실천 방법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성 단체들의 활동을 적극 격려하였다. 또한 이종일은 한글 전용의 제국신문 을 만들어 여성의 홍보지( 弘 報 紙 ) 역할을 자처하였다. 이러한 사회의 흐름은 여성 스스로의 노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98년 설립된 찬양회는 '여권통문( 女 權 通 文 )' 을 작성, 배포한 후 여성단체로는 처음으로 순성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여권통문' 에서 주장하는 권리는, 첫째 문명, 개화 정치를 수행하는 민족 대열에 여자도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둘째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직업을 가지고 일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셋째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교육받음으로써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터진 물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여성도 가정 밖의 활동을 통해 사회와 국가 발전에 한 몫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역시 증폭되었다. 이것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 國 權 )을 회복하려는 구국의 동참자( 同 參 者 )를 양산하였다. 항일독립운동사( 抗 日 獨 立 運 動 史 )는 이렇게 여성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명성황후(1851~1895) 개화의 빗장 연 여걸 '구한말의 여걸'이라 불리는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민비( 閔 妃 ), 그러나 그의 비극적인 최후는 '여걸'이라는 호칭을 무색하게 할 뿐 아니라 민족수난의 근대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몰락양반의 후손으로 고종비에 간택 민비가 살았던 1851년부터 1895년은 한국의 역사 중 가장 국내외로 격변이 심했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봉건체제에 도전하는 민중세력이 형성 되어가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세동점의 물결 속에서 제국주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상황이었다. 즉 근대화를 추진해야 되는 과제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안겨졌던 시
86 기였다. 그러면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여성의 정치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사회에서 민비는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을까? 민비가 아무리 총명하고 성격이 강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국왕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민비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이는 그것을 묵인 내지는 조장하고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과 함께 정치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당시 민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인 성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세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러한 정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세심한 고려 속에 올바르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민비는 대원군의 내실인 부대부인( 府 大 夫 人 )민씨의 혈족으로 여흥 민씨( 驪 興 閔 氏 ) 가문으로 숙종대왕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여양( 驪 陽 )부원군 민유중의 6대 손이 된다. 민비 (민자영 : 閔 紫 英 )는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이씨부인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민비는 8세에 양친을 잃고 고향 여주를 떠나
87 서울에 올라와 일가에 기탁하고 있는 외로운 처지였다. 민치록은 딸 하나만 두고 아들이 없어서 11촌 조카뻘 되는 승호( 升 鎬 )를 양자로 들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여흥 민씨 가정의 한 불운한 고아가 1866년(고종 3년) 3월에 왕비로 책봉받아 궁중에 들게 되었으니 당시의 민비는 고종보다 한 살 위인 16세였다. 고아나 다름없는 민비가 국모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데에는 고종의 아버지, 즉 민비의 시아버지가 되는 대원군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한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왕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에 불만을 품은 왕족으로서 당시 부패한 사회의 모든 원인이 세도정치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며느리를 맞는데서도 세도정치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원칙에 준해서 왕비를 간택하게 되는데, 이 조건에 맞는 사람이 바로 민비였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이 민비를 왕비로 선택하게 된 것은 여흥 민씨 가문을 왕비족으로 설정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정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는데, 대원군의 어머니, 대원군의 부인이 모두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사돈이라는 인척관계를 끈으로 지지기반을 확대시켜 보고자 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외척의 득세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부모, 형제가 없는 미약한 가계에서 왕비를 택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대원군의 치밀한 계산 아래 민비는 고아 출신으로 왕비가 되었고, 정치주도권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갈등구조 속에 휩싸여 파란만장한 생을 보내게 된다. 대원군의 섭정 종식시켜 민비에 대한 당시인들의 묘사를 보면 아름답고 총명하고 기품있고 사교적이고 매우 독서열이 강하였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처음에 왕비가 된 민비는 대원군과 부대부인( 府 大 夫 人 )을 공경하고 궁중의 모든 어른들과 궁인들에게도 잘 대하여 궁내에 칭찬이 자자하였으나 정작 지아비인 고종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춘추좌씨전( 春 秋 左 氏 傳 )과 경서( 經 書 )등의 독서를 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왕비로서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1868년 윤 4월에 고종의 사랑을 받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나자 민비의 위기의식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종과 대원군이 완화군을 귀여워하였을 뿐 만 아니라 궁내외 정세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 국모로서의 지위까지 불안한 처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민비는 1871년 자신이 낳은 첫 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게 되었다. 대원군이 안동 김씨 세도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면 확고한 정치기반이 있어야 함을 교훈으로 얻었듯이 민비도 인현왕후 민비에게서 정치적 지지세력과 자신의 후사가 있어야 왕비의 자리가 튼튼할 수 있음을 항상 교훈으로 삼고 있었다. 이에 자신의 입지에 대해 점점 불안감을 느낀 민비는 적극적으로 세력 만회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자신의 첫 아들의 사망 원인이 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먹인 데 있다고 믿은 민비는 대원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고조되었고, 또한 차츰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는 고종에 대해 민비는 여인으로서 관심을 끌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정치적 반려자로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는 갈등을 부추겨 남편인 고종의 편에 서서 시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비의 정치적 도약과정에서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의 독점체제가 1870년대로 들어서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즉 대원군의 실정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대두됨에 따라 반대세력들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민승호, 규호, 겸호 등 민씨 척족계열들이 정부요직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대원군에 대한 불만세력인 조성하를 중심으로 한 조대비 세력, 대원군의 장자 재면과 형 이최응 세력, 최익현등 유림세력과 결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원군은 최익현을 대표로 하는 유림들의 거센 비판에 의해 드디어 1873년 12월 실각하게 되었고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자적인 정치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고종은 그의 친정의지를 실현시키고자 민비를 통해 민씨 척족세력을 정치적 배후세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인 대원군에 대한 정면도전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비를 전면에 내세워 우회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 즉, 대원군의 고종에 대한 직접 도전은 유교적 충( 忠 )의 윤리에 어긋나고, 반면에 고종의 대원군에 대한 도전은 유교적 효( 孝 )의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민비를 통해 우선 아버지로 인한 정치적 장벽을 허무는데 성공할 수 있었으며, 쇄국이냐 개국이냐의 문제로 국론이 분열된 1870년대의 정치상황을 민비와 민씨 척족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한 개화파들의 지원을 받아 풀어나갈 수
88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비의 정치참여는 그 자신의 야망과 정치적 역량에도 기인한 것이지 만 그보다는 정치주도권을 둘러싼 대원군과 고종의 갈등구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후 고종은 수많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민비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직접적인 도전을 피해갈 수 있었다.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이래 일본인들의 경제 침탈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느낀 구식 군인들과 도시빈민들은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바로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다. 이는 일본에 대한 위기감과 거부감에서 촉발되었고, 한편으로는 민씨 척족들의 인사행정 독점에 대한 불신과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즉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면서 주요 요직은 민씨 척족들이 모두 차지하게 되자 개화는 오로지 민씨 척족들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는 불신과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게다가 민비의 세자를 위한 기도가 국고를 낭비한다는 풍설이 돌아 이들의 불만을 더욱 자극시켰던 것이다. 이 난의 결과 민씨 척족들, 민겸호, 민창식 등 민씨 세력들이 난군에 의해 살해되고 민비는 구사일생으로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여졌다. 또한 이 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다시 정권을 잡게 된 대원군은 민비의 생존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조급히 '중전 승하' 를 발표하여 민비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다. 한편 민비는 그가 살아 있음을 고종에게 알리고 이에 조정에서는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이 출동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니 사태는 역전되고 민비의 환궁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수습과정에서 민비는 매우 능동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자세를 갖추고 있다 하겠다. 또한 반란군들이 생각한 것처럼 무조건 민비가 일본 세력에 동조하였다든가 민씨 척족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개화정책이 모두 국익에 위배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정국은 유생들이나 보수군인들이 지향하 는 기존체제로의 복귀보다는 한 걸음 더 근대화를 향한 개혁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에 당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개화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별다른 믿을만한 정치조직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민씨 척족 중심으로 폐쇄적인 인사독점을 함으로써 정치권의 소외계층이 많아지고 인사행정에 대한 불신감이 조장되었던 것이다. 또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갑작스러운 변화에 불안심리를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민생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책을 펴지 못함에 한계가 있었다. 임오군란을 겪고 난 후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 척족세력들은 더욱 경직되게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반대세력의 도전이 격렬하다보니 미처 정치적 여유를 갖추지 못하고 폐쇄적인 경향이
89 짙어졌던 것이다. 즉 급진적 개화파들에게 거리를 두고 개화정책의 참여를 제한하였고 청국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국의 방향에 대해 급진개화파들은 자구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 정변은 곧 청국의 도움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때부터 민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 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일본인에 시해 당해 당시 청국과 일본의 각축이 치열한 상황에서 민비는 세력균형 정책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즉 갑신정변 이후 청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자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한러밀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세력으로 하여금 청국을 견제하도록 계획하였고, 청일전쟁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친러배일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다가 사면으로 복귀하여 내무대신에 올랐던 박영효와 결탁하여 정부내의 친일적인 반대세력을 견제하고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일본은 조선병합의 최대의 장애물로 민비를 지목하게 되었고, 결국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1895년 10월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 때 민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속에서 국장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다가 드디어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난지 2년 만인 1897년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국호를 '대한'이라 일컬었으며 그해 10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일단 폐위되어 서인( 庶 人 )이 되었다가 복호된 민비에게 명성( 明 成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명성태황후로 봉한 다음 국장을 거행하였다. 명성황후는 지금 금곡에 있는 홍릉에 잠들어 있다. 1919년 고종의 승하로 인한 국장과 아울러 그렇게 구애해 마지 않던 남편의 곁에 누운 것이다. 총명했으나 정치적 희생물이 되어 민비는 19세기 후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정치주도권을 둘러싸고 초래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면충돌을 피할수 있게 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으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통해 고종을 보좌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정치적 역할에는 여전히 한계점이 존재한다. 왕권 중심의 봉건체제와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선 왕비가 정치전면에 나선 것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 여론이 고조되어
90 많은 제약과 함께 쓸데없는 정치적 소모를 하였다는 점이다. 당시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관계와 더불어 외세의 각축속에서 험난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의 과감한 결단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였다. 왕비가 아무리 총명하다 하더라도 왕의 강력한 보호가 없는 한 정치적 희생물이 되기 쉬운 혼란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비는 고종의 보호는 커녕 고종의 바람막이가 되어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다. 고종이 좀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민비의 총명성도 국가의 발전을 위해 쓸데없는 마찰과 소모없이 발휘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하튼 민비는 철저한 반일주의자로서 일본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후 조선은 열강들이 내세우는 최혜국 조관에 의해 이권획득의 각축장이 되었다. 민비가 시해 당한지 10년 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데 성공하고, 1910년에는 한일합병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개화기 민비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보게 한다. 김양현당(?~1903) 여학교 설립에 나선 선구적인 교육자 김양현당( 金 養 賢 堂 )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이 땅에 처음으로 사립 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단체를 조직하였던 여성 개화운동의 선구자이다. 또 그는 관립 여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학부에 거듭 청원서를 내면서 이 땅에 여성교육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던 개화기의 여성교육지도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나 업적, 사상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91 그가 여성 개화운동에 뜻을 갖게 된 것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낡은 사회체제와 부 패한 정치제도를 뜯어 고치고 발전된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제도를 받아 들여야 나라가 부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만민공동회 운동이 있었던 1898년부터였으며, 1903년 3월 그의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기까지 5년간 계속되었다. 그 이전의 그의 삶에 관하여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녀가 출생하고 성장한 곳이 평양이었고, 그 곳에서 결혼도 했으나, 자녀도 없이 남편과 사별한 후 1898년 이전에 서울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김양현당은 그의 당호에도 나타나 있듯이 여성 현량을 양성할 목적으로 평양으로부터 서울에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 온 후 그녀는 주로 서울에서 가장 지체 높은 양반들이 사는 북촌의 여인네들과도 깊이 교류하면서 그네들에게 여성 개화사상과 그 실제적 활동에 관한 것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반부인들 모아 '여권통문' 발표, 여학교 설립과 남녀평등 주장 1898년 9월, 서울 북촌 양반부인들 약 4백명이 결속하여 여학교 설립과 남녀 평등권 획득의 취지서인 '여권통문'을 발표하였다. '여권통문'이 발표되자 도하 온 신문과 개화 지성인들은 규문에 갇힌 생활만 하던 대한의 여인들이 어떻게 이처럼 진취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여권 획득을 위한 사회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는가 라고 감탄해 하였다. 유교적 여성관에 젖어 있었던 북촌 양반부인 4백여 명을 같은 생각으로 결속하려면 적어도 그 일을 전적으로 맡아 추진할 사람이
92 있어야 함이 상식인 것이다. 그 추진자가 틀림없는 김양현당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통문' 에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구습을 버리고 날로 새로와져야 하는데 어째서 늘 귀 먹고 눈 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만 빠져 있는가,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가 남녀가 다른가, 어째서 병신 모양 사나이가 벌어다 주는 것만 앉아 먹고 평생을 심규( 深 閨 )에 박혀 있어야 하는가, 어려서부터 모두 학교에 다녀 지식을 넓혀 부부된 후에도 사나이의 압제를 받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옛 풍습을 전폐하고 개명 진보하여 우리나라도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여야 한다. 김양현당이 아니었다면 우리 나라에 처음 있었던 이 놀라운 주장의 소리가 진정 500년간 유교적 여성으로 훈련된 북촌 양반부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올 수 있었을까? 여성의 차별된 지위를 일찍부터 느끼고 있던 선각적 여성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여성 혁명적인 주장을 온세계를 향하여 조리와 체계를 잡아 외 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여성에 의한 여권운동을 주장한 이 통문이 발표되자 뜻을 같이 하는 부인들이 구름처럼 몰리게 되었다. 김양현당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여권 획득운동을 보다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하여 남자들의 찬조를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그 이유의 첫째는 사회적 훈련이 없었던 여자들로만 이 거대한 사업을 계획성 있게 추진시켜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둘째는 여권운동이 여성만의 운동이 아닌 전사회적 운동임을 널리 인식시키고 동시에 이 운동의 사회적 공인력을 높여 성공적 운동으로 끌어가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은 서로 높고 낮음이 없는 보완적 관계이다. 다만 인간들이 이것을 높낮이의 위계질서로서 인정 운영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통문' 에서는 남자 세계를 향하여 상당히 투쟁적으로 도전하듯 외치고 있으나 실은 음양조화론에 입각한 남녀 조화의 여성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서구 여성운동과 다른 우리 나라 여성운동의 특색이며, 이로 인하여 여성운동의 한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남녀의 평등한 교육기회 주장, 여성들의 힘으로 학교 설립 '통문' 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여성들이 남자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권운동은 자연히 여학교 설립 운동, 그것도 관립 여학교 설립 운동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시간과 절차와 예산 등이 필요하므로 우선 부인들의 힘으로 운영하는 순성( 順 成 )여학교를 설립하고 1899년 4월에 학생을 선발하여 문을 열게 되었다. 학교의 설립운영에는 막대한 경비가 따른다. 양현당은 이와 같은 경비 확보를 위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양성원( 養 成 院, 일명 찬양회( 讚 養 會, 贊 養 會 )라고도 함)을 조직하였다. 양성원 조직의 목적은 첫째는 회원의 회비를 모아 순성사립여학교를 운영하는 후원회로서의 역할이며, 둘째는 학교 밖에 있는 대부분의 성인부녀에 대한 교육으로서의 역할이다. 사회적 면에서 본다면 후자의 교육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양성원에서는 일요일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강연회 및 토론회를 개최하여 주로 부녀자들에게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의 부녀자들의 역할 등에 관한 애국적 개화의식 계발교육에 힘썼다. 전제주의국가에서 국가적 지원이 따르는 관립학교는 사립학교보다 훨씬 빨리 성장한다. 순성여학교 교장직을 맡은 양현당은 양성원의 이름으로 정부에서 관립 여학교를 속히 설립시켜줄 것을 청원하는 상소문(1898년 10월 11일부)을 올렸다. 또 탁지부에서는 학교 설립 예산의 규모를 세워 정부회의에 올렸으나 정부회의에서는 국가재정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각하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회적 이유는 김양현당이 이끄는 여성운동이 독립협회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양현당은 학도들을 이끌고 정부의 무력함과 정치의 부패를 규탄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였었다. 보수정치인에 있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눈의 큰 가시였다. 그러므로 정부와 보수세력은 1898년 말부터 독립협회를 탄압하면서 동시에 독립협회와 직접 간접의 관련을 가진 순성여학교와 양성원의 운동을 꺽어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에도 관립여학교 설립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양현당은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또한 그는 수준 있는 교육으로 졸업하는 여학생들이 자활적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이론적인 학습과 더불어 1인 1기의 기계재봉 교육을 행하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실로 첨단적 교육이었던 것이다. 고가의 재봉틀을 여러 대 매입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의 기계재봉 교육을 행한 것이었다. 이처럼 충실한 교육을 행하려니 자연 교육비가 태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여성교육사업을 계속하였다. 때로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빌린 빚을 제 때에 갚지 못하여 차임한 교사( 校 舍 )에서 쫓겨나기도 하는 등 학교 문을 닫기 직전의 곤경에 빠진 일도
93 있었다. 거의 혼자 힘으로 꾸려온 여성교육 5년에 그녀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져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죽음에 임하여서도 사회적 국가적 무관심 속에서 오직 여성교육이 계속 되지 못할까 안타까워 하는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내가 한낱 여자로 우리 대한 여자를 외국과 같이 문명 교육케 하기를 밤낮으로 천지신명께 축도하였더니 불행히 잔명( 殘 命 )이 길지 않아 구천( 九 泉 )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지극히 원통한 한은 내가 죽은 후에 저 학도들을 누가 교육할까 함이오. 1903년 3월 19일 위대한 선각적 여성교육자이며 여성운동가인 김양현당은 자신을 거두어 장례 지내줄 피붙이 하나 없음은 근심하지 아니하고 오직 못다한 여성 교육만을 탄식하면서 영면( 永 眠 )하였다. 순헌황귀비 엄비(1854~1911) 진명 숙명 양정학교 세워 구국 순헌황귀비 엄비( 純 獻 皇 貴 妃 嚴 妃 )는 고종황제의 계비로 구한 말 폭풍우 앞에 촛불과 같은 이 나라 이 겨레를 계몽과 교육을 통해 구하려 한 여성 선구자의 한 사람이다. 통칭 엄상궁, 엄비로도 불리는 엄황귀비의 본관은 영월이다. 1854년(철종 5년) 음력 6월 6일 증찬정( 贈 贊 政 ) 엄진삼( 嚴 鎭 三 )의 2남 2녀 가운데 장녀로 출생했다. 8세가 되던 해에 경복궁에 입궐하여 후에 명성왕후 민비를 모시는 시위 상궁이 되었다. 이때 고종의 승은( 承 恩 )을 입었는데 이를 안 민비의 미움을 사서 일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94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 이후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아관파천을 할 때 다시 궁인이 되어 고종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정치적 음모 속에서 인간적 고독을 달래면서 엄상궁을 가까이 했다. 엄상궁은 1897년 음력 9월 44세 때 영친왕( 英 親 王 ) 은( 垠 )을 낳았다. 이에 엄상궁은 경선당( 慶 善 堂 )의 당호를 받았고 이어서 선영( 善 英 )이라는 이름을 받고, 내명부의 종1품 직인 귀인( 貴 人 )에 봉직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 8월 3일 순빈( 淳 嬪 )이 되고, 뒤이어 1901년 10월 14일 순비( 淳 妃 )에 봉해지고 다시 1903년 12월 25일 내명부의 가장 높은 자리인 황귀비( 皇 貴 妃 )라는 칭호를 받으며 경선궁( 慶 善 宮 )에 거처하게 되었다. 엄비의 선구적 업적, 근대 민족여학교의 설립 19세기말 조선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제도의 모순이 깊어가는 가운데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민중들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이 격화되는 국가의 위기상황을 타개하려는 위정척사 계열의 움직임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개화파 계열의 활동이었다. 특히 당시 계몽적인 역할을 하던 독립신문 은 정부에 대하여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큰 시대적 조류 속에서 새로운 여성관이 대두되고 근대적인 여성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엄비 역시 서양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여성들을 계몽하자는 입장에서 한국여성의 손으로 한국여성의 교육의 장을 창설한 민족사학의 선구자였다.
95 구한말 우리나라 근대 여학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1886년의 이화학당을 비롯하여 정신여학교, 호수돈여학교, 숭의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교사들의 손으로 서울 평양 동래 원산 개성 목포 공주 등지에 창설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우국지사들은 교육의 진흥을 통해 구국의 길을 열고자 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학교를 시작할 때부터 자극을 받아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여학교를 설립할 기회를 찾고 있던 엄비는 1906년 4월에 진명( 進 明 )여학교를, 5월에는 숙명( 淑 明 )여학교의 전신인 명신( 明 信 )여학교를 창설하고 이어 양정의숙( 養 正 義 塾 )을 설립했다. 1906년 52세 되던 해에 당시 자주 만나던 정경부인( 貞 敬 夫 人 ) 이정숙( 李 貞 淑 )을 비롯한 몇몇 고관 부인들과 여학교 창립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살림의 구체적인 일은 친정 조카인 춘정( 春 庭 ) 엄주익( 嚴 柱 益 )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1906년 4월 24일자 매일신보 를 보면 "엄황귀비가 학교를 일으키다. : 엄귀비 정하께옵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심히 우려하사 육군참장( 陸 軍 參 將 ) 엄주익씨 제( 第 )에 여학교를 세워 여자 교육을 발달코자 할실세 동씨( 同 氏 )로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시니." 라는 기사가 보인다. 당시 군부참모장이었던 친정 조카 엄익주에게 함평에 있는 국유지 논 40만 평과 자신의 내탕금으로 사두었던 개성의 논 33만 평 그리고 이천의 58만 평, 광양의 35만 평의 옥답을 내놓아 재단을 만들었다. 진명여학교를 세울 때는 군부총장이던 친정 사촌동생 엄준원을 시켜 경선궁 소속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 전답 임야 등 1,118,154평과 부천의 토지 775,242평, 자하골의 1천평 대지와 기와집 1채를 재단으로 제공케 했다. 이런 엄비를 가리켜 당시 궁중에서는 도량이 넓고 두뇌가 명석하며 성품이 활달한 여걸이라고 일컬었다. 사재를 들여 일시에 양정 진명 명신 세학교를 설립한 구국의 큰 뜻을 세운데서 엄비가 보통 여성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신여학교는 창립 5주년에 다시 재단을 확대하여 숙명여학교라 개칭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세 학교를 양반학교 또는 세 오누이 학교라고 불렀다. 초기 설립 취지는 진명은 서양식 교육을, 숙명은 일본의 학습원과 같은 귀족 여학교를, 그리고 양정은 한국 전통을 계승하는 여성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보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진명, 숙명여학교 세워 재정지원 진명 숙명 두 여학교는 기숙사를 만들어 일체의 비용과 학용품을 학교에서 부담해 주었다. 학생들은 토요일에는 집으로 갔다가 월요일에 돌아왔으며, 궁궐의 경축일에는 궁궐에서 내린 정찬을 받았다. 1906년 7월 18일자 만세보 에 의하면 "귀족학원( 貴 族 學 員 )에 감사하다: 황귀비 전하께서 귀족여학원( 貴 族 女 學 員 )에게 은애하심을 특별히 내리시어 창덕궁 내 옥류천( 玉 流 泉 )에 가서 더위를 씻으라 처분 하사 당일 식료품을 특별히 내려주실 것이더라." 라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 1907년 2월 21일 황성신문 에도 "황귀비 전하 장학( 獎 學 ) : 황귀비 전하는 명신귀족여학교 학도 등의 수학하는 정황을 매차 하문하시고 그 진취됨으로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는데 금번 세시( 歲 時 )에는 특별히 오백환금( 五 百 金 )으로서 학교 직원 일동과 하인 등에 상으로 내려주시고 학원( 學 員 ) 등에게는 장학금을 후사하셨다더라." 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엄황귀비는 해마다 세찬으로 1인당 무명 1필과 일금 6백냥씩을 하사했다. 또 엄비는 궁내의 내인들도 숙명여학교에 입학하여 통학하게 해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엄황귀비는 교지 ( 校 地 )와 교사( 校 舍 )를 내어준 외에도 창립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다달이 일정한 액수의 운영비를 조달하다가 1907년 5월 기본 재산으로 영친왕궁 소속 전답을 넘겨 주었다. 그러나 이 전답의 소유권이 탁지부( 度 支 部 )로 회수되는 등 곡절을 겪은 끝에 본교로 되돌아 왔기 때문에 한때 학교 재정에 곤란이 있기도 했다. 엄황귀비는 학교 일을 맡긴 뒤에도 학교 발전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다. 이 외에도 1907년 11월 22일자 황성신문 에는 '엊그제 태황제 폐하(고종황제)께서 안동( 安 洞 )으로 납실 때에 명신여학생들이 그 곳에서 맞아 절을 하니까 엄귀비께서 그 학생들에게 지필( 紙 筆 )에 보태라고 돈 기십환을 하사하셨다' 는 기사도 보인다. 엄황귀비가 세운 양정, 진명, 숙명학교는 우리나라 근대 민족교육의 산실로써 오늘날까지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
96 아들과 나라를 잃은 한( 恨 ) 품고 세상을 떠나 그러나 엄황귀비에게도 인간적으로 많은 시련이 있었다. 황태자인 순종에게 왕자가 없었으므로 순종의 등극괴 함께 엄비의 아들인 영친왕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잡은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양위케 하고 1907년 12월 11세의 어린 영친왕을 일본 동경으로 유학시킨다는 명목을 붙여 강제로 데리고 갔고 1910년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의 황족 방자( 方 子 )와 강제 결혼을 시켰다. 영친왕은 해방된 뒤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바랐으나 정치적 사정으로 자유당 때까지는 돌아오지 못하다가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후 돌아왔으나 이미 병이 위중한 상태였다. 강제로 아들과 생이별을 당한 엄황귀비는 나라와 아들을 잃은 망국의 왕비로서 아들을 그리워하며 철천지한을 품고 58세가 되던 1911년 음력 6월 25일 덕수궁 낭조당( 郎 祚 堂 )에서 눈을 감았다. 8월 2일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영전( 靈 前 )은 덕안궁( 德 安 宮 )이라 하여 함녕전( 咸 寧 殿 ) 옆에 설치했다. 8월 4일. '순헌귀비( 淳 獻 貴 妃 )'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같은 날 오후 2시 숙명고등여학교와 진명여학교의 발기로 한성 내의 여러 여학교가 연합하여 '순헌귀비' 에 대한 추도회를 신문로 밖 독립관에서 열었다. 윤희순(1860~1935) 여성 의병 노래지어 항일투쟁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 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안사람 의병가'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고 독립하려는 운동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운동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의병투쟁은 주로 지방 유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추진 전개되었다. 구국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는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였으나, 의병 투쟁은 죽음을 무릅쓰는 무력 투쟁이므로 여성의 참여는 불가한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의병의 지도자는 완고한 유생들이 주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데서 여성의 참여는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같은 그룻된 선입견으로 역사를 보고 해석한 우리에게, 윤희순의 항일구국적 생애는 여성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윤희순은 나라가 기우는 비상시국에 처하여 여성들이 전통적인 안사람 일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의병을 일으킨 시아버지를 따라 때로는 남장 의병 이 되기도 하고, 또 "왜놈 잡는데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안방 여인들에게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여중군자( 女 中 君 子 )이다. 집안 전체가 의병 투쟁에 참여 윤희순은 1861년에 서울에서 윤익상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순하고 언행이 엄절하
97 여 어른스러움이 있었다. 16세에 유제원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시아버지는 외당 유흥석이다. 외당은 을미의병(1895) 당시 유중악 유중락 등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 일본에 부역한 춘천부 관찰사 조인승을 사형에 처하는 등, 의병작전을 전개한 인물이다. 시아버지 외당이 의병 전쟁터에 나가자, 윤희순은 자신도 의병에 나갈 것을 간청하였다. 외당은 며느리 윤희순에게 전쟁터는 여자가 갈 곳이 아니라면서 조상을 잘 받들고 자손을 충성되게 기를 것을 당부하였다. 그녀는 살아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는 시아버님을 눈물로 전송하고는 곧바로 산에 올라가 단을 쌓고 시아버님의 승전을 매일 간구하기를 일년을 계속하였다. 또한 윤희순은 타처의 의병들이 마을에 당도하면 식사 준비를 손수하여 주고, 마을 부인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돕도록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구국의 의리에 남녀의 구별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의식이 투철하여 구국 참여에 대한 철저한 남녀 평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왜장에게 경고문을 보내 국모 시해의 죄를 극렬히 책망하고, '안사람 의병가' 등의 구국적 여성의병 노래를 지어 각 가정 부인들에게 돌리면서 토적( 討 賊 )을 위해 궐기할 것을 읍소( 泣 訴 )하였다. 또 의병을 소탕하려는 관군에게도 '병정노래,' '병정가'등을 지어 보내어 동족상잔의 부당성을 효유( 曉 諭 )하였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애국으로 뭉쳤으니 고혼이 된들 무엇이 무서우랴
98 의로 죽는 것은 대장부의 도리거늘 죽음으로 뭉쳤으니 죽음으로 충신되자 우리 나라 좀벌레같은 놈들아 어데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 좇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 하니 내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하지 마라 우리 의병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 우리 의병들은 죽어서라도 너희에게 복수를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우리 군인을 괴롭히지 마라 원수 오랑캐야 우리 의병은 죽음을 각오한 충신들이므로 기어이 오랑캐 왜군을 이길 것이다. 왜병과 연합한 관군을 가르켜 좀벌레라고 하였으나 그 좀벌레도 내 나라 사람이므로 의병들이 왜군을 잡아 죽이려다가 우리 관군을 죽이게 될 것까지를 염려하였다. 이 병정노래는 일본군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의병의 절대적 승리를 굳건히 믿게 하려는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여자 의병 모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민종식, 최익현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고 1907년 해아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이어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격렬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외당은 유중악 등 집안 어른들과 향리 동지들과 더불어 의병 600여명을 규합하여 춘천 가정리에서 훈련을 하였다. 이때 윤희순도 여자 의병 3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 세탁을 맡아 하고 동리 남녀 노유를 모아 쇠똥과 찰흙 등을 섞어서 화승총에 쓸 화약을 만들고, 의병 훈련을 받는 등 의병투쟁장에 직접 참여, 활약하였다. 외당은 주길리( 珠 吉 理 )전투에서 부상한 후 치료를 받고 다시 의병을 조직하고자 패잔 의병과 청년들을 새로 모으는 중 1910년의 국치( 國 恥 )의 민족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외당은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면서 그녀의 남편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윤희순도 가사가 정리되는 대로 떠나려 하였는데, 왜경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어린 아들을 매질하면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행방을 캐어 물었다. 그때 윤희순은 당당한 태도로,
99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일 하시는 시아버님을 죽게 알려줄 줄 아느냐? 만번 죽어도 말못하겠다." 고 하였다. 왜경도 그의 의기에 눌리고 감화되어 그대로 돌아갔다. 이것으로 보아도 구국을 위한 그녀의 용기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의 뒤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외당은 1913년에 국권 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15년에는 시숙 유인석이 사망하고, 또 같은 해 10월 2일에는 남편이 왜경에게 잡혀 심한 고초 끝에 순사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그러나 윤희순의 구국 의지와 활동은 꺾이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장례를 손수 지내고, 곧 '의병군가', '부인의병가' 등을 지어 동분서주하면서 동지를 모아 병영을 도우며, 한편으로는 부인들도 병마 혼련을 하여 의거에 투신, 왜군 병영을 습격하기가 부지기수였다. 애국투쟁 전하고자 '일생록' 저술 그녀의 눈부신 활약은 독립군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왜병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왜경의 야습( 夜 襲 )을 받아 체포된 큰아들( 敦 相 )이 왜병의 고문으로 1935년 7월 19일 사망하고
100 말았다. 3대에 걸친 의병활동을 뒷받침하고 또 스스로 참여했던 그녀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선대의 이 의로운 애국정신을 자자손손에게 가르쳐야 함을 절실히 깨닫고 자신의 일생록 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 말미에,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 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고 하는 충효의 교훈을 남기었다. 1935년 8월 1일, 75세를 일기로 험난하며 위대한 일생을 마치었다. 그녀는 봉천성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묻히었다가 고국에 되돌아와 국군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충성된 의기를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다시 1990년에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박에스터(1876~1910) 사회봉사에 몸바친 여자 의학박사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공한 여의사는 언제 등장했으며 누구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구한말에 활동하였던 박( 朴 )에스터였다. 박에스터의 본성은 김씨였고, 본명은 점동( 點 童 )이었다. 세례명은 김에스터였고,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박에스터는 서울 정동에서 아버지 김홍택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입학 박에스터는 선교사인 아펜셀러의 잡무를 맡으면서 일찍이 서구사상에 접했던 아버지 덕분에 1886년 11월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로 설립된 이화학당에 입학을 하게 되었 고, 그 해 정동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고 에스터라는 세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달리 재능이 뛰어났던 박에스터는 특히 영어에 능숙하여 보구여관의 의사이자 이화학당의 교사로 취임한 홀 부인의 영어 통역을 맡게 되었다. 보구여관( 保 救 女 館 )은 1887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의료 선교사 스크랜튼이 당시 한국 사회에서 소위 남녀유별이라 하여 여성들이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여성들과 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하기 위해 만든 병원으로 이화학당 구내에 설치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에 명성황후가 보구여관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보구여관이 현재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홀 부인과의 만남은 박에스터의 생애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 홀 부인은 철저하게 폐쇄적인
101 생활을 강요당해 온 한국 여성들의 진료를 위해서는 여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임을 간파하고, 박에스터에게 의학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박에스터는 그때부터 보구여관에서 의료 보조원으로 일하며 기초적인 의료 기술을 습득하였고,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했다. 미국 유학, 최초의 의학전문의 자격 획득 1894년 5월 닥터 홀 내외가 평양 선교기지 개척 담당자가 되어 평양 유일의 병원인 광혜원( 廣 惠 院 )을 설립하자 박에스터도 함께 평양으로 갔다. 당시 청일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닥터 홀 내외와 박에스터는 의료활동으로 수많은 부상자를 간호하며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박에스터는 홀 부인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나 "만리 타국에 처녀 혼자 내보낼 수 없다" 는 부모님의 의사를 존중하여 박유산과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1895년 도미( 渡 美 )하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박에스터는 1895년 2월 뉴욕의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 9월부터 뉴욕시 유아병원에 들어가 생활비를 벌면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6년 10월 박에스터는 발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즈 홈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하였다. 유학 생활 중 아내의 장래를 위해 농장 일을 하며 박에스터의 의학공부를 뒷바라지하던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였으나, 박에스터는 역경을 딛고 1900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한국 여성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M.D.)를 획득하였다. 귀국하여 간호학교 설립 등 의료사업 벌여 1900년 11월 귀국한 박에스터는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의 정식 파송을 받고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여성들이 남녀유별의 내외법에 젖어 남자 의사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여의사인 박에스터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서울 정동의 보구여관에서 헌신적으로 진료활동을 펼치던 박에스터는 1903년경 콜레라가 유행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구석진 촌락까지 환자를 찾아다니며 무료 순회 진료를 하였다. 그리고 무지한 국민들의 위생 계몽을 위해 곳곳에서 위생 강연을 실시하며 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활약하였다. 1903년 박에스터는 홀 부인이 의료사업을 벌이고 있던 평양의 광혜원으로 옮겨 의료활동을 펼쳤다. 이 무렵 박에스터는 놀랍게도 10개월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하며, 특히 당시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외과 수술 실력을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고 여길 정도였다. 의사로서 명성을 쌓은 박에스터는 우리나라 최초로 장애자들을 위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홀 부인이 세운 맹아학교의 교사로 힘썼다. 또한 홀 부인과 함께 장차 한국 의료계를 짊어질 여성 의료 인력의 보급을 위해 간호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활발한 의료활동, 사회사업 외에도 박에스터는 항상 여성의 계몽과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박에스터 스스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서 활동하며 여성의 훌륭한 능력을 입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연을 통해 한국의 장래를 위해 무엇보다 여자 교육이 급선무임을 주장하며 여성 계몽 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의료 활동과 함께 선교 활동을 펼치며 기독교의 보급에 힘썼다. 이러한 박에스터의 업적을 찬양하고 격려하자는 의미에서 선교사 아펜셀러 및 언더우드와 윤치호, 김필순 등 사회유지의 발기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박에스터를 비롯하여 구미 5개국에서 유학했던 윤정원, 한국 여성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B.A.)학위를 받은 하란사 등과 함께 1909년 4웜 28일 관민( 官 民 )합동으로 경복궁에서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관계의 다수 인사, 사회 유지, 각 여성단체 및 종교단체의 내외빈객 7천 8백명이 모인 대성황 속에서 박에스터는 하란사와 함께 여성교육협회와 여성기획협회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표창장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서 의료 사업, 계몽 활동, 선교 활동, 사회 사업 등 한국의 계몽과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한 박에스터는 고된 생활로 얻은 폐결핵으로 1910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지만 여성의료에 최초의 횃불을 밝힌 박에스터의 역할은 이 땅에서 소외받은 여성들에게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준 값진 역사적 업적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 부 록 저자 소개 (가나다순) 강영경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102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음. 논문으로는 '한국 고대사회의 여성-삼국시대 여성의 사회활동과 그 지위를 중심으로-' ( 숙대사론 12 13합집, 1992년), '한국 고대의 시( 市 )와 정( 井 )에 대한 일연구( 一 硏 究 ) -시장의 기원과 관련하여-' ( 원우총론, 1954년)등이 있음 권순형 안성산업대와 강릉대 강사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음. 논문으로는 '고려시대 혼인제도 연구' (박사학위 논문). '고려시대 간비( 姦 非 ) 연구' ( 여성학 논집 11집, 1994년)등이 있음. 박용목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애서 박사학위를 받음.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국여성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1998년에는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지식산업사, 1996년) 로 치암학술상을 수상함. 주요 저서로는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연구 (한국정신문학연구원, 1984년), 이조여성사 (한국일보사, 1976년)등이 있으며, 그 외 한국여성사 관련 논문이 다수 있음. 박재희 소설가,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이수자 1989년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부문에 춤추는 가얏고 가 당선된 이후 더러운 사랑, 학춤, 흥타령, 바람의 말씀, 비를 기다리며, 해돋이, 백학 등 다수의 작품이 있음. 신영숙 한국여성사회사 연구자 이화여대, 한양대학 등에서 강사 역임, 서울여자대학교를 나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음. 논문으로는 '일제하 한국여성사회사연구' (박사학위 논문, 1989년),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 ( 역사학보 150집, 1996년)등이 있음. 이배용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화사학연구소 소장 이화여대 사학과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93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여성연구원장을 역임함.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구한말 열강의 광산이권 획득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 논문, 1984년), 한국 근대광업침탈사 연구 (일조각. 1989년),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이대출판부, 1997년)외 다수가 있음. 1997년부터 여성신문 에 '조선시대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연재하고 있음.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함. 논문으로는 '조선초기 종법의 수용과 여성지위의 변화' (박사학위 논문, 1995년)가 있음. 한희숙 숙명야자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음. 논문으로는 '조선초기의 잡류층( 雜 類 層 )에 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16세기 임꺽정난의 성격' ( 한국사연구 89, 1995년), '중종대의 도적의 활동과 그 특징' ( 역사학보 157, 1999년), '조선시대 여성사 관련 연구의 현황과 과제' ( 박영식 교수 회갑기념논총 1992), '양반사회와 여성의 지위' ( 한국사시민강좌 15, 1994년) 등이 있음. 허미자 전 성신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인문과학대학 학장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저서로는 한국시문학연구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82년), 허난설헌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84년), 조선조여류시문집(1-4권)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91년), 한국여성문학연구 (태학사, 1997년) 등 다수가 있음.
10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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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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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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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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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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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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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한국사 문제1급
1 2. 1. 3. 2 4. 5. 6. 7. 8. 3 9. 10. 11. 12. 4 13. 다음 중에서 고려 시대 문화재를 모두 고른 것은? [2점] 15. 다음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는 제도 운영, 국왕 및 왕실 구성원 명칭, 국가 의례에서 실질적인 황제국을 지 향하였다. ①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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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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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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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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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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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성은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므로 성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청소년기에 형성된 성가치관은 평생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 성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성과 건강 단원에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피임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성매매와 성폭력의 폐해, 인공임신 중절 수술의 부작용 등을 알아봄으로써 학생 스스로 잘못된 성문화를
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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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연구보고서 220-10 대학평생교육원의 운영 방안 한국여성개발원 발 간 사 연구요약 Ⅰ. 연구목적 Ⅱ. 대학평생교육원의 변화 및 외국의 성인지적 접근 Ⅲ. 대학평생교육원의 성 분석틀 Ⅳ. 국내 대학평생교육원 현황 및 프로그램 분석 Ⅴ. 조사결과 Ⅵ. 결론 및 정책 제언 1. 결론 2. 대학평생교육원의 성인지적 운영을 위한 정책 및 전략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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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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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email protected]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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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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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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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288-5854 Print ISSN 2289-0009 online DIGITAL POST KOREA POST MAGAZINE 2016. APRIL VOL. 687 04 DIGITAL POST 2016. 4 AprilVOL. 687 04 08 04 08 10 13 13 14 16 16 28 34 46 22 28 34 38 42 46 50 54 56
학부모신문203호@@
02 05 06 08 11 12 2 203 2008.07.05 2008.07.05 203 3 4 203 2008.07.05 2008.07.05 203 5 6 203 2008.07.05 2008.07.05 203 7 8 지부 지회 이렇게 했어요 203호 2008.07.05 미친소 미친교육 촛불은 여전히 건재하다! 우리 학부모들은 근 2달여를 촛불 들고 거리로
(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표지-결혼과가정 2012.10.23 3:59 PM 페이지1 태산아이인쇄그룹(국) 2261-2488 2540DPI 175LPI James W. Knox 시리즈 성령의 열매 James W. Knox 지음 김영균 옮김 도서출판 킹제임스 신국판 352쪽 값 12,000원 성경적 종말론 James W. Knox 지음 김영균 옮김 도서출판 킹제임스 신국판 220쪽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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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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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82-대한신경학0201
www.neuro.or.kr 2010 1 Vol. 82 www.neuro.or.kr 01 5 January 2010 2007 Newsletter of THE KOREAN NEUROLOGICAL ASSOCIATION 2010 NO.82 2010.JANUARY C o n t e n t s 04 05 06 10 13 17 18 20 22 25 28 32 33 36
5권심층-양화1리-1~172
526 527 528 529 530 531 532 332 333 332 사갑 제례 음식준비 334 335 333 진설 334 사갑제례 335 음복 8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제사에 참여했던 가족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고인의 부인은 제사에 참여한 이 들에게 제사 음식과 반찬거리(깻잎 등)를 골고루 싸 주었고 마을에 거주하는, 제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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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상징물 1. 광진구 마크 녹음이 가득한 아차산과 한강에 비친 아차산의 음영을 나타내는 두 삼각형, 광진 나루를 보여주는 돛단배로 이루어져 있다. 광진구의 유구한 역사와 미래를 나타내 는 백색과 한강의 깨끗한 환경을 상징하는 청색을 바탕으로 광진구의 힘찬 도약과 화합을 상징한다. 2. 새 - 까치 3. 나무 - 느티나무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모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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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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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캥거루는 껑충껑충 뛰지를 못하고, 여우는 신경질이 많아졌어요. 동물 친구들이 모두 모두 이상해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멧돼지네 가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염소 의사 선생님은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상수리나무 숲에는 어떤 비법이 숨겨져 있는 지 우리 함께 숲으로 가볼까요? 이 동화책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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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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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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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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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CONTENTS 2011 SPRG Vol
11-1311153-000111-08 ISSN 1976-5754 2011 SPRG + Vol.14 Tel _ 042.481.6393 Fax _ 042.481.6371 www.archives.go.kr CONTENTS 2011 SPRG Vol.14 7 4 8 16 76 104 112 122 53 58 66 131 130 11 80 77 Column 4 5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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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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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Global 한국 팝음악, 즉 K-POP이 일본 내 한류 열풍의 선봉에 나섰다. 인기 걸그룹 카라가 도쿄 아카사카의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데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_ 이태문 통신원 또다시 열도 뒤흔드는 한류 이번엔 K-POP 인베이전 아이돌 그룹 대활약 일본인의 일상에 뿌리내린 실세 한류 일 본에서 한류 열풍이 다시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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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2002report hwp
2002 연구보고서 220-11 초 중등교육과정의성인지적개편을위한양성평등교육내용개발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양성평등교육내용개발진 연구요약 1. 연구목적 2. 연구방법 3. 7 차교육과정및교과서내용분석 가. 도덕과 나. 사회과 다. 실과 / 기술 가정과 4. 각교과별양성평등교육내용개발가. 도덕과 나. 사회과 다. 실과 / 기술 가정과 5. 결론 목 차 Ⅰ 서론
문화재이야기part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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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2005.6.9 5: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개 지역지식재산센터 를 통해 발명가와 중소기업들에게 기술개발에서 선진국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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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해오름summer2009
2009 안압지 상설공연 www.phmbc.co.kr 석유 한방울 나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경제와 자연을 지켜주는 에너지- 대한민국엔 원자력이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1%였지만 전기요금 상승률은 불과 10%대였습니다. 바로 경제적인 에너지 원자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산업의 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연간 1억톤의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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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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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2010.05 내지 뒷
VISION 2015 R D Global Leader 2 0 1 0 5 163 vol_ 163 KAERI MAGAZINE 2 0 1 0 M A Y C O N T E N T S 2010 +05 KAERI MAGAZINE 04 18 28 42 02 04 06 08 10 11 12 14 16 18 20 22 24 26 28 32 34 36 37 38 40 44 46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쌍백합23호3
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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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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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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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Winter 02 08 10 News 14 Article Report 42 NARS Report 60 NARS Report Review 68 World Report 84 Column 94 Serial 116 2011 Winter 11 www.nars.go.kr 01 02 w w w. n a r s. g o. k r 03 04 01 02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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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01정책백서목차(1~18)
발간사 2008년 2월, 발전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범한 새 정부는 문화정책의 목표를 품격 있는 문화국가 로 설정하고, 그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한편 권한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효율의 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 삶과 풍요로움을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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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umn 2005 No.53 AUTUMN 2005 vol.53 14 28 06 22 우리고장의 역사기행 어진 곳에 있다. 위폐는 국사공배선생(國師公裵先 生) 으로 되어 있으며 현판 역시 려조(麗朝)라고 하 여야 될 것을 라조(羅朝)라고 표기되어 있다. (려조 는 고려를 나타내고, 라조는 신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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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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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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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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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vii 요 약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 동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정책은 기존의 정책 방향과 내용을 유지 변화시키면서 정책을 계승 완료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 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과 조직,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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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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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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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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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B553003-000001-08 함께하자! 대한민국! Summer COVER STORY Contents www.pcnc.go.kr facebook.com/pcnc11 instagram.com/pcnc_official youtube.com/pcnctv cover story communication people culture news & epilogu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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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5 86 87 88 89 1 12 1 1 2 + + + 11=60 9 19 21 + + + 19 17 13 11=60 + 5 7 + 5 + 10 + 8 + 4+ 6 + 3=48 1 2 90 1 13 1 91 2 3 14 1 2 92 4 1 2 15 2 3 4 93 1 5 2 6 1 2 1 16 6 5 94 1 1 22 33 55 1 2 3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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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2007:11+12 2007:11+12 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Theme Contents 04 Biz & Tech 14 People & Tech 30 Fun & Tech 44 06 2007 : 11+12 07 08 2007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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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산업훈장 포장 국무총리표창 삼성토탈주식회사 09 SK하이닉스(주) 93 (주)이건창호 15 한국전자통신연구원 100 현대중공업(주) 20 KT 106 두산중공업 주식회사 24 (사)전국주부교실 대구지사부 111 한국전력공사 30 (주)부-스타 36 [단체] (주)터보맥스 115 [단체] 강원도청 119 [단체] 현대오일뱅크(주) 124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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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Telecom Corporate Philanthropy 2003 SK Telecom Corporate Philanthropy 2003 2003 2 SK Telecom SK Telecom Corporate Philanthropy 3 4 SK Telecom 5 6 SK Telecom 7 Visual Identity Concept 8 SK Telecom Pri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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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학회지 2004;25:721-739 비만은 심혈관 질환, 고혈압 및 당뇨병에 각각 위험요인이고 다양한 내과적, 심리적 장애와 연관이 있는 질병이다. 체중감소는 비만한 사람들에 있어 이런 위험을 감소시키고 이들 병발 질환을 호전시킨다고 알려져 있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을 호전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지지하는 연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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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 Vol. SUMMER Vol. WINTER 2015. vol 53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4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5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프로그램 세계문화유산 걷기대회 Walk Together 탐방길곳곳에서기다리고있는조별미션활동! 남한산성 탐방길에는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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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읽는 우리 과학 교사용 지도서 자연 6-1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Ⅱ) STS 프로그램이 중학생 과학에 관련된 태도에 미치는 효과 관찰 분류 측정훈련이 초등학생의 과학 탐구 능력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 국민학교 아동의 과학 탐구능력과 태도 향상을 위한 실 험자료의 적용 과학사 신론 중 고등학생의 과학에 대한 태도 연구 과학사를 이용한 수업이 중학생의 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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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vol.124 Cover Story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 vol.124 www.fsb.or.kr 201511 + 12 201511 + 12 Contentsvol.124 www.fsb.or.kr 002 026 034 002 004 006 008 012 014 016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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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