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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역사와 성곽 이기봉(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 - 목 차 - I. 전통문명과 성곽 1. 전통문명과 국가 2. 전통문명의 갈등구조와 전쟁 3. 방어를 위한 시설, 성곽의 유형과 규모 4. 도시와 성곽의 관계 II. 한국의 고대 국가와 성곽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통치 1) 역사 2) 문명 전파론적 의의 2. 토착인 국가의 형성과 성장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영향 2) 북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3) 중남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3. 3국의 경쟁과 통일신라의 성립 1) 역사 2) 통치 체제 4. 한국 고대의 성곽과 특징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도시와 성곽 2) 고구려의 도시와 성곽 (1) 수도와 성곽 (2) 지방도시와 성곽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3) 중남부 지역의 도시와 성곽 (1) 수도와 성곽 1 신라 2 백제 (2) 지방도시와 성곽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III. 한국 근세의 국가와 성곽 1. 후삼국의 경쟁과 고려의 건국 1) 역사 2) 통치 체제 2. 고려의 번영과 멸망 그리고 조선 1) 역사 2) 통치 체제 3. 한국 근세의 성곽과 특징 1) 수도와 성곽 (1) 후삼국시대 (2) 고려와 조선 4. 지방도시와 성곽 1) 후삼국시대부터 고려후기까지 2) 고려말부터 조선전기까지 3)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I. 전통문명과 성곽 1. 전통문명과 국가 인류는 짧게는 몇 백만 년, 길게는 약 천만 년 전에 유인원 계통 중 유일하게 육식 위주 의 독자적인 종으로 분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여러 단계를 거쳐 약 5만 년 전에 현 생 인류로 진화하였고, 사냥감이 살고 있는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살고 있는 유일 - 1 -

2 한 유인원 계통이 되었다. 하나의 종으로 분화된 후 인류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이동하는 생 활을 하였는데, 약 1만년에서 8천년 전 사이에 일부 지역에서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 위주의 농업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이란 새로운 삶터를 형성하였다. 이후 8천년과 4천년 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지역 등을 중심으로 집약농업의 발달을 기초로 한 잉여 생산 능력의 현저한 향상과 함께 문명이 발생하면서 도시 란 새로운 삶터를 만들어냈 다. 이러한 문명의 발생은 잉여 생산물을 둘러싼 지배-피지배의 관계 즉, 주로 마을에 살면서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피지배 신분과 이들을 지배하는 지배 신분의 발생을 의미한다. 지배 신분은 잉여 생산물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인 권력을 매개로 피지배 신분을 지배하는데, 효과적인 방어와 체계적인 통치를 위해 마을과는 다른 삶터인 도시를 세워 거 주했다. 그림-1 하나의 도시가 다수의 마을을 지배하는 도시국가 문명과 동시에 탄생한 전통도시는 생산의 공간인 수많은 마을을 지배하는 거점이며, 권력 을 매개로 마을의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여 소비하는 기생의 공간이었다. 마을이 생산의 효 율을 위해 입지와 구조가 결정되는 반면 전통도시는 마을을 체계적으로 통치하고 권력을 효 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원리에 의해 입지와 구조가 결정된다. 따라서 도시는 처음부터 계 획적으로 정해지며, 노골적인 물리적 도전에 대한 방어와 장기적 번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상징이 이루어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그리스 문명 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대부분의 문명 초창기에는 수많은 마을과 하나의 지배 도시가 세트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도시 국가 하나만 고립되게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러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일정 한 지역 체계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으로,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림-2 다수의 독립적인 도시국가 지역 체계 첫째, 우세한 도시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채 모든 도시국가가 상대적으로 평등한 지역 체 계를 이룰 수 있다. 둘째, 하나의 도시국가가 상대적으로 우세하면서 다른 도시국가를 아우 르는 도시국가 연합 체계를 이룰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여러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체 - 2 -

3 계는 쉽게 깨지지 않는 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도시국가가 지나치게 힘이 세져 자신 들의 도시국가가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합종연횡을 통해 서로 견제하기 때문이다. 그림-3 도시국가 연합 체계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생겨 통일되거나, 강력한 외부 세력 이 침입하여 정복함에 따라 영역국가로 변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어떤 이유 때문에 형성되 었건 영역국가는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정점으로 하고 지방도시가 하위 계 층의 지배 거점이 되어 수많은 마을을 지배하는 통치 체계를 이룬다. 그리고 영역국가의 규 모에 따라 2단계, 3단계, 4단계 등 다양한 단계의 통치 체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림-4 영역국가의 규모에 따른 단계별 통치 체계 그렇다고 지방도시가 항상 수도에 거주하는 왕의 직접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상당한 자율성을 지닌 간접 지배를 받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영역국가의 형태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지방관의 파견을 통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직접 지배가 이루어지는 중 앙집권적 영역국가가 있다. 둘째, 지방에 대한 통치는 지방 세력 자체에게 맡기면서 세금 납부나 군대의 차출 등 중앙에 대한 의무만 충실히 수행하게 하고 외교권을 통제하는 지방 분권적 영역국가가 있다

4 그림-5 지방분권적 영역국가 체계 그림-6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체계 영역국가도 내부의 갈등이나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다시 여러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 도시국가보다는 큰 작은 영역국가로 분열되기도 하는 등 전통 문명 의 국가 체계는 지역과 시대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띨 수 있다. 또한 모든 국가 체 계는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어 어떤 국가 체계가 더 우월하다고 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전 통시대의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발전론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를 범하 기 쉽다.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농업혁명이나 전통문명의 성과는 교류와 갈등을 통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농업기술의 혁신이 일어남에 따라 집약 농업이 가능한 기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문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록 후대에 일어난 문명이기 때문에 최초 라는 수 식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일정한 수준에 다다르면 최초의 문명과 후대의 문명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 서로 고립되었던 문명권이 교류 충돌하면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나는 것은 세계사가 잘 보 여주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장거리 국제무역에서 번영한 일부의 상업도시를 제외하면 거 의 대부분의 전통문명이 농업에서 나오는 잉여 생산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산업혁명에 의해 생산의 성격이 강화된 근대도시가 탄생하기 이전, 생산 공간인 수많은 마을을 지배하 는 거점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의 성격이 도시 사이에 맺고 있는 체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전통문명의 갈등구조와 전쟁 수렵채집단계의 인류 집단 사이에도 생존을 위해 충돌이 발생했고, 심한 경우 다른 집단 을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우연적인 소규모의 충돌에 지나지 않았는 데, 원래 집단의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의도적인 충돌로 - 4 -

5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나 마을이 형성된 후에도 집약 농업으로 진입하기 전에는 마을 사이의 충돌이 의도적인 대규모의 형태를 띠지는 않았 다. 하지만 집약 농경에 의한 잉여 생산과 장기 저장이 가능해지면서 도시에 의한 마을의 지 배가 이루어지고 국가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의도적인 대규모의 충돌 가능성이 항상적으로 잠재해 있게 되었다.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수렵채집사회 단계나 원시농경 단계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전투나 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과거의 역사가 잘 증명해주 고 있다. 규모나 형태가 어떠하든 전통문명의 국가는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 다양한 물리적 이데올 로기적 장치를 만들어 놓았지만 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건국-번영-멸망의 과정을 반복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단지 인류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을 방어하거나 빼앗기 위해, 또는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근본 바탕 에는 문명 자체가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갈등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림-7 전통문명의 갈등구조 첫째, 지배-피지배의 관계 속에 잠재한 갈등구조를 들 수 있다. 지배 신분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와 권력을 매개로 피지배 신분이 만들어낸 잉여 생산물을 수취 저장하며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와 같은 관계를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것, 또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데올 로기적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 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배 신분이나 피지배 신문 모두 이 를 당연하게 인식 수용한다. 그리고 군사적 행정적 여러 수단을 통해 잉여 생산물에 대한 수 취를 체계적으로 이루어낸다. 하지만 잉여 생산물에 대한 수취가 항상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때로는 기후적 재 앙으로 인해 잉여 생산물 자체가 적게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 신분의 생존을 위협 - 5 -

6 할 정도로 수취를 강제하려 할 수 있다. 때로는 지배 신분 내의 혼란과 갈등으로 인해 군사 적 행정적 체계의 합리성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피지배 신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과도한 수취가 이루어질 수 있다. 피지배 신분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게 될 때 지배 신분에게 저항하여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은 현상이었다. 하지만 피지배 신분 스스로 지배 신분을 정복하 여 평등 사회를 만든 적이 없고, 새로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기존 체제를 무너뜨렸다고 하더 라도 새로운 지배-피지배 관계의 창출로 결말이 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문명을 가 능하게 했던 지배-피지배의 관계 자체 속에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전투나 전쟁으로 비 화되는 갈등구조가 잠재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둘째, 최고 권력을 둘러싼 지배 신분 사이에 잠재한 갈등구조를 들 수 있다. 문명과 함께 발생한 지배 신분 역시 개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지 배 신분의 집단 내부에는 최고 권력자인 왕을 정점으로 피지배 신분으로부터 잉여 생산물을 직접 수취하는 최하위 지배 신분까지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는 계층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 었다. 이들 사이에는 엄격한 질서가 존재했지만 더 많은 권력, 더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기 위한 지속적인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최고 권력인 왕권을 둘러 싼 갈등과 암투는 왕실 내부에 항상적으로 존재했다. 왕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왕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 드물지 않게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은 세계 문명 대부분의 지역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또한 왕권을 잇기 위해 왕의 아들들 사이 에 갈등과 암투가 늘 존재했으며, 결국엔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 역시 세계의 문명사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 아니었다. 왕실의 권위 자체가 흔들릴 경우 왕실 외부의 권력자로부터의 도전이 나타났던 것 역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중앙 권력의 내부에 있던 권력자일 수도 있고, 중앙으로부 터 멀리 떨어진 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권력자일 수도 있다. 이들은 기존의 왕권에 도전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란의 형태를 띠며, 성공할 경우 기존의 왕조와 경쟁하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아예 기존의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열기도 한다. 셋째,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국가 사이의 갈등구조를 들 수 있다. 문명이 일어났던 어느 지역도 국가가 한 개만 존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규모가 어떠하든 여러 개의 국가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경쟁하는 시스템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럴 경 우 국가 사이의 서열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갈등이 벌어진다. 심하면 하나의 국가가 다른 국가를 멸망시켜 통합시키기 위한 전쟁으로 비화되는 현상 역시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국가는 피지배 신분에 대한 지배 신분의 지배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국가와 국가 사이의 갈등 과정에서 하나의 공동운명체적 단위로 기능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국가 내부의 지배-피지배의 갈등이나 권력자들 사 이의 갈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국가의 총력을 동원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특히 약탈전의 양상을 띨 경우 공동운명체적 단위로서 국가의 기능은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한쪽 국가의 힘이 현저하게 약하여 결국엔 멸망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면 내부에 잠재하고 있던 지배-피지배의 갈등구조나 권력자들 사이의 갈등구조가 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 강한 외부 적의 출현과 이에 대한 미흡한 대처는 국가 권력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 며, 이는 내부의 반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외부 적과의 직접적인 전쟁 에서 패하여 멸망하는 국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부의 반란이나 기타의 갈등이 먼저 - 6 -

7 일어나 외부의 적과 심한 전쟁을 겪지 않고 멸망하는 국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문명 자체의 갈등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하였 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 세 가지 중 하나의 갈등구조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몇 가지의 갈등구조가 중첩되어 설명되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전쟁의 이유와 진행 과정을 이해 설명하려 할 경우 갈등구조의 여러 형태를 고려해야만 한다. 하지 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변수를 고려하기 보다는 좀 더 큰 틀 속에서 원인의 가중치, 선후 문제 등을 체계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3. 방어를 위한 시설, 성곽의 유형과 규모 전통문명은 잉여 생산물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인 권력을 중심으로 세 개의 기본적 갈등구 조를 갖고 있고, 이것은 일정한 조건 속에서 언제든 전쟁의 형태로 비화되곤 하였다. 그렇 다고 전통시대 내내 전쟁이 계속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다. 전체적 으로 볼 때 전통시대 내내 전쟁기간보다는 평화기간이 훨씬 길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 중의 하나다. 어떠한 국가도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 나아가 더 큰 권력을 획득하여 실제로 오랜 기간 안정되게 행사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존재했다. 기존의 세력이든, 새로운 세력이든 전쟁은 권력의 행사, 나아가 더 큰 권력의 획득이 방해받을 때 취해지는 최후의 방법일 뿐 이다. 권력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행사에 좋은 조건은 갈등구조가 힘의 불균형 상태에 있 는 전쟁기가 아니라 균형 상태에 있는 평화기이다. 이런 측면에서 어떠한 전쟁도 힘의 균형 상태인 평화 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우며 나타났던 것이 아이러니컬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군사적 물리력을 동원하여 갈등구조의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권력의 장기적인 행사는 갈등구조의 상대방으로부터 지속적인 방어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해진다. 따라서 어떠한 권력도 공격과 방어 두 측면을 늘 염두 에 두고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 권력의 행사를 지속시 키기 위해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설 중의 하나가 바로 성곽이다. 성곽은 전쟁시기에는 뛰어난 군사적 물리력을 갖춘 상대방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 권력을 보호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긴 평화시기에도 상대방의 공격 을 일상적으로 감시 통제할 수 있게 함으로써 권력을 보호 유지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따라 서 성곽의 유형과 규모에 대한 이해는 실제의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적 통제와 잠재적인 방어시설로 인식되는 평화시기의 기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실제 전투에서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조건은 적은 힘을 들이 면서도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성곽의 형태와 규모가 가장 방어력이 좋은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나의 형태를 절대화시켜서는 안 된다. 첫째, 지형과 성곽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산이나 언덕, 절벽 지형이 거의 없는 평지에 성곽을 축조할 경우 최소 10m 이상의 높은 성벽과 20m 이상의 물웅덩이인 해자( 垓 字 )를 건설해야 방어력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성 벽을 공격하는 적을 좌우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성곽보다 바깥으로 튀어나가게 만 든 치( 雉 ),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좌우에서 협공할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옹성( 甕 城 ), 적의 화살이나 총포 발사에 몸을 숨기며 공격할 수 있는 성가퀴( 女 墻 ) 등 다양한 시설을 개발한 - 7 -

8 다. 하지만 평지 성곽은 아무리 높게 쌓아도 밖에서 성벽보다 더 높은 것을 쌓거나 만들어서 공격당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만약 산이나 언덕, 절벽 지형이 있을 경우 이를 적극 활용하여 성벽을 쌓으면 주위에 더 높은 지형을 만들기가 어려워 방어력이 배가될 수 있다. 또한 산성이나 언덕, 절벽 지형의 요새성은 지형의 경사도를 이용하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 가 4-5m만 되어도, 그리고 해자를 만들지 않아도 높은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적은 힘을 들이면서도 높은 방어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완전 평지 지역의 문명이 아니라 면 세계 다수의 문명지역에서 일반화된 성곽 형태다. 둘째, 전투의 규모와 성곽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성곽이 크면 좋을 것처럼 생각되는 경향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곽은 큰데 지킬 수 있는 병사가 적으면 방어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성곽은 작은데 지킬 수 있는 병사나 함께 들어온 주민이 너무 많으면 이 역시 방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 라서 성곽의 크기가 전쟁, 그 중에서 실제 전투의 규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역사의 상 식에 해당된다. 만약 중소규모의 단기전이 많이 벌어지면 그에 맞춰 중소규모의 성곽을 축조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도시국가의 경우 피지배 신분에 대한 일상적 통제와 반란에 대한 효과적 방어를 목적으로 성곽을 만드는데, 이때의 전투규모는 클 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시국가에 세 워진 성곽은 규모가 작은 경향이 있는데, 독립적인 도시국가 사이의 전투 역시 규모가 크지 않아 성곽의 규모를 크게 만드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1) 반면 대형 장기전의 전투가 자주 벌어지면 중단기전용의 중소규모 성곽은 무용지물이 되 며, 대형 성곽 위주로 재편되게 된다. 이러한 전투는 지배-피지배나 지배 신분 내에서의 갈 등구조에서는 거의 나타나기 힘들며, 국가와 국가의 전쟁에서 주로 나타난다. 특히 강한 군 사력을 가진 대규모의 외적이 쳐들어올 경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군사적으로 현저하게 힘이 약한 쪽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보급품을 조달해야만 하는 적의 약점을 이용 한 대형 성곽 위주의 장기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지형과 규모란 두 가지의 요소가 어떻게 고려되는 지를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실제 성곽의 방어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 가 따로따로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실제로는 중소형의 평지성, 중소형의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 대형의 평지성, 대형의 산성 등 다양한 유형의 성곽이 설정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도시와 성곽의 관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성곽의 유형과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도 시와 성곽의 관계다. 많은 문명권에서 도시 속에 성곽이 공존하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나타 났지만 도시 속에 성곽이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문명권 또 는 국가 내에서도 도시와 성곽의 관계가 다른 경우도 있다. 따라서 도시와 성곽의 관계에 1) 때로는 여러 도시국가가 합종연횡하면서 영역국가로 가기 위한 큰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천하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는 작은 성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공성전이 아니라 두 편으로 갈라진 군대가 들판 등에서 대규모의 단기전으로 승부를 가르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성곽의 규모는 가끔 나타날 수 있는 전투가 아니라 잠재적이든, 실제든 자주 나타날 수 있는 전투의 양상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9 대해 하나의 유형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 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도시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물리적 방어력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을 갖추어야 하는 핵심 공간이었다. 전통문명에서 국가 권력의 획득과 행사를 위해 군사적 물리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거나 방 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전통시대의 역사 속에서 내외적 도 전을 물리칠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력을 갖추지 않고 오랫동안 번영한 국가를 찾는 것은 쉽 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군사적 물리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가를 유지한 경우 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실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존속한 유명무실한 국가였을 뿐이 다. 이렇게 국가 권력의 번영을 위해 군사적 물리력이 중요함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큼 중요하게 여겨야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역사 속에는 강한 군사적 물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한 국가도 꽤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 근본 이유는 권력을 자연스러운 것으 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상징체계를 개발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상 징체계에 의해 권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어떤 권력도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며, 아무리 강한 군사적 물리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번영하기 어렵다. 이러한 군사적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적 상징체계는 제도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구체화되어 야 하며, 그 핵심에는 국가 통치의 거점인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도시는 문명의 탄생과 함께 지배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의 번영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도시는 입지와 구조 및 상징 등 거의 전 부분에 걸 쳐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기도 했다. 그런데 국가 권력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군사적 물리력의 공간적 표현인 성곽과 이데올로 기적 상징 경관의 조영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도시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그 렇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세련된 논리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을 조영할 경우 군 사적 물리력의 공간적 표현인 성곽의 요소가 상당히 약화되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이 상대적으로 약하면서 성곽의 요소가 상대 적으로 강한 도시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둘째, 개별 도시와 성곽의 관계는 국가 전체의 방어 시스템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떠한 전통문명권에서도 도시는 수많은 마을에 대한 국가의 지배 거점이었다. 하지만 도 시와 도시의 관계에까지 관점을 넓히면 국가와 개별 도시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독립적인 도시국가가 병존하는 형태일 수도 있고, 도시국가 연합 형태일 수도 있 으며, 지방분권적 영역국가 형태일 수도 있고,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형태일 수도 있다. 또한 영역국가일지라도 2단계, 3단계, 4단계 등 다양한 도시체계를 갖출 수 있다. 이 중 도시국가에서는 국가의 지배 거점인 도시가 하나이고 자체적인 방어력을 스스로 가 져야 하기 때문에 도시에 성곽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영역국가, 그 중에서도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일 경우 개별 도시는 국가 전체의 방어 시스템에 따라 자체적인 방어력 을 가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단계가 많은 도시체계를 갖춘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일 경우 가장 하위의 도시는 보다 상위의 도시나 중앙에서 방어력을 대신해줄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력을 갖추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높이진다. 국가 전체의 방어 시스템은 내부의 반란이나 분열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도 설정 될 수 있다. 특히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갖춘 대규모의 외적이 장기적으로 침입하거나 침입이 - 9 -

10 예상될 경우의 효과적인 방어 시스템은 국가 내부의 통치 체계 형성이라는 목적만으로는 이 룰 수 없다. 예를 들어 3단계의 도시체계를 이룬 영역국가에서 최하위의 도시가 포괄하던 영역 속의 인구만으로는 대규모 외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럴 경우 여러 개의 최하위 도시가 포괄하던 영역의 인구를 하나로 모아 방어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효과적이 다. 따라서 최하위의 도시를 건설할 때 처음부터 성곽을 갖추지 않고 한 단계 위의 도시에 대형 성곽을 갖춰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대규모 외적에 대한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도시 자체가 아니라 도시 외부에 대형 성곽 을 갖추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도시는 국가의 장기적 번영을 위해 물리적 방어력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을 갖추어야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 중 후자의 것에 더 초점을 맞추면 물리적 방어에 유리하지 못한 곳에 도시가 건설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도시 외부의 지형에 대형 성곽을 축조하여 대규모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방식 을 취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성곽이 없는 도시 또는 방어력이 높지 않은 성곽으로 둘러싸 인 도시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지금까지 도시와 성곽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하며 도시에 성곽이 없을 수 있 는, 또는 도시에 방어력이 높지 않은 성곽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런 가능성은 물리적 방어력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의 조영에 집중할수록,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일수록, 대규모의 외적이 장기적으로 침입할 위험성이 상존할수록 높아진다. 전통 문명의 도시 중 성곽이 없는 경우보다는 있는 경우가 훨씬 대세를 이루어 왔다. 그렇다고 하여 성곽이 없는 도시나 방어력이 높지 않은 성곽이 있는 도시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 해서는 안 된다. II. 한국의 고대 국가와 성곽 1. 고조선 2) 과 한나라 군현의 통치 1) 역사 한국 최초의 문명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고조선에 대해 삼국유사 의 고조선 왕검조선 ( 古 朝 鮮 王 儉 朝 鮮 ) 3)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단군의 할아버지는 환인( 桓 因 )이란 하느님이며, 아버지인 환웅( 桓 雄 )은 하느님의 명 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내려왔다. 둘째, 아버지인 환웅은 인간 세상의 모든 현 상을 주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내려와 세상을 교화( 敎 化 )하였다. 셋째, 환웅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호랑이와 곰에게 쑥과 마늘 20개만 먹으며 어두운 동굴에서 버티라는 어려운 과 2) 한국에서는 전통시대의 마지막 국가였던 조선(1392~1910)과 구분하기 위해 옛날의 조선 이란 뜻의 고조선 ( 古 朝 鮮 )이라 부르는데, 본 글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한다. 3) 이 책은 1281년~1283년 사이에 일연( 一 然, )이 편찬하였으며, 고조선에 대한 내용에는 551년에 서 559년 사이에 완성된 중국측의 위서( 魏 書 ) 와 지금은 전하지 않는 한국측의 고기( 古 記 ) 가 인용되어 있다

11 제를 부여하였고 그것을 통과하여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넷째, 기원전 2,333년에 조선을 건국하였고 이후 1,500년 동안 살다가 1,908세에 죽었다. 건국 과정을 하늘과의 관련을 통해 은유적 신화로 묘사하는 것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난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고, 고조선의 단군 신화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건국신화를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은유적 내용에 대한 해석이 필요 하다. 삼국유사 의 위만조선( 魏 滿 朝 鮮 )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 첫째, 여러 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경쟁하던 기원전 430년부터 기원전 221년 사이 연( 燕 ) 나라가 최전성기 때 5) 진번과 고조선을 침략시켜 복속 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둘째, 연나 라 출신 위만( 衛 滿 )이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80년 사이에 세력을 키워 고조선의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이 되어 진번과 임둔 등을 복속하여 영토를 넓히는 과정이 간략하게 나 온다. 셋째, 위만의 손자 우거( 右 渠 ) 왕 때인 기원전 109년과 108년 사이에 고조선과 한나 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결국 고조선이 멸망당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지( 三 國 志 ) 6) 의 위서(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 7) 의 한( 韓 ) 부분에는 위만이 몰아낸 고조선의 왕이 준왕( 準 王 )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한( 韓 ) 지역에 거주하면서 한왕( 韓 王 )이라 스스로 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같은 부분에 위 ( 魏 ) 나라의 어환( 魚 豢 )이 280년에서 289년 사이에 편찬한 위략( 偉 略 ) 의 내용이 주기로 들어가 있는데, 준왕의 아버지인 부( 否 )도 조선의 왕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 ( 韓 ) 앞에 기록된 예( 濊 ) 부분에는 기원전 1,046년경의 인물이었던 기자( 箕 子 )가 조선에 가 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교화한 후 40여 세대를 지나 준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기원전 2,333년의 건국을 믿지 않더 라도 준왕이 고조선의 왕이었던 기원전 194년에서 180년경으로부터 훨씬 이전부터 국가를 형성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8) 그리고 진( 秦 ) 나라에 한( 漢 ) 나라가 재통일한 기원전 202년 이후에도 약 100년 동안이나 경쟁하며 존재했다. 사기 조선열전 에 묘사된 한나라와의 전쟁 모습에는 고조선의 국력과 대략적인 모 습을 추정할 수는 있는 내용이 나온다. 기원전 109년 가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한 군사의 수는 5만 명이었고, 왕검성에 처음 도착한 병사 수는 7천명이나 되었 다. 그리고 우거왕은 왕검성을 나와 7천명의 한나라 병사를 패퇴시키는 등 상당히 효과적으 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한나라의 포위 공격에도 몇 달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한나라의 공격에 내분이 발생하여 항복하는 무리가 생기고 우거왕이 피살되기도 했지만 기원전 108년 여름에 들어서도 고조선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계속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내분에 의해 결국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진번( 眞 蕃 ) 임둔( 臨 屯 ) 낙랑( 樂 浪 ) 현 도( 玄 菟 ) 등 한나라의 4개 군( 郡 )이 설치되었다. 4) 이 기록에는 반고( 班 固, 32~92)가 완성한 중국측 한서( 漢 書 ) 의 조선전( 朝 鮮 傳 ) 내용도 인용하고 있는 데, 기원전 91년경 사마천( 司 馬 遷 )이 편찬한 중국측 사기( 史 記 ) 의 조선열전( 朝 鮮 列 傳 ) 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5) 기원전 331년-기원전 279년 6) 진나라( 晋, 265~316)의 진수( 陳 壽, 233~297)가 중국의 삼국시대(220~265)에 대한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7) 동이전( 東 夷 傳 )은 중국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오랑캐에 대한 기록 이란 뜻이다. 8) 제( 齊 )나라 환공( 桓 公, 재위: BC 685~BC 643) 때의 인물인 관중( 管 仲 )이 편찬했다는 관자( 管 子 ) 23권에 발조선( 發 朝 鮮 ) 과의 교역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 제나라로부터의 거리가 8천리이고 조공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나와 이 때 이미 고조선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2 한나라의 4개 군 중 하나였던 낙랑군은 최초의 설치 때 11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고,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기까지 400년 이상 존재했다. 그러나 그 동쪽에 있으면서 15 개의 현( 縣 )을 거느렸던 임둔군은 설치된 지 30년이 되지 않은 기원전 82년에 혁파되어 현 도군에 합해진다. 낙랑군의 남쪽에 있던 진번군 역시 15개의 현을 거느렸는데, 임둔군과 같 은 시기에 혁파되면서 낙랑군에 합해졌다. 9) 출처: 위키백과 홈페이지( 그림-8 낙랑군 대방군과 토착인 국가(200년대) 10) 기원전 75년에는 낙랑군의 북쪽에 있던 현도군이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더 서북쪽으 로 옮겨 갔다. 같은 해에 낙랑군이 옛 진번군의 15개 현 중 7개의 현에 남부도위( 南 部 都 尉 ) 를, 옛 임둔군의 15개 현 중 7개의 현에도 동부도위( 東 部 都 尉 )를 두어 직접 통치하면서 원 래의 11개 현을 합해 총 25개의 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기원후 1세기에는 토착세력의 국가 인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해 현도군이 더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3개의 현으로 재편되었다. 토착세력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낙랑군에서는 본국의 혼란기인 기원후 23년에 토착인인 왕조( 王 調 )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자립한다. 기원후 30년에 한나라의 왕준( 王 遵 )에 의해 다시 통치력이 회복되지만 낙랑군은 동부도위에 대한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동옥저( 東 沃 沮 )와 예 ( 濊 )의 토착세력을 우두머리로 삼아 간접 통치를 시행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11) 동옥저와 예 지역은 한나라 군현의 직접통치 간접통치 독자적인 도시국가에 가까운 간 접통치의 순서로 변하였고, 끝까지 왕( 大 君 長 )은 없었다. 다만 한나라 때 이래로 후( 侯 ) 읍군 ( 邑 君 ) 삼로( 三 老 )의 관직이 있었는데, 낙랑군의 직접 간접 통치를 받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영역국가로 변하지 못하고 반 자치적인 도시국가의 수준에 머무르다 고구려 등에 게 정복당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안정적 통치를 유지하던 후한은 147년으로부터 189년 사이에 지방 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184년에 요동군을 중심 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공손탁( 公 孫 度 )이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된 다. 196년에서 220년 사이에는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 公 孫 康 )이 낙랑군의 남부도위를 혁파 하고 독자적인 대방군( 帶 方 郡 )을 설치하여 다스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38년에 위( 魏 ) 나라 12) 가 공손탁의 손자인 공손연( 公 孫 淵 )을 멸 망시키고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의 통치권을 넘겨받는다. 이어 진( 晋 ) 나라 13) 가 위나라를 멸 망시키고 3개 군의 통치권을 갖는다. 하지만 311년 흉노족이 진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켜 혼 란에 빠트리게 되고,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완전히 축출된다. 마지막 남은 현도군도 400년대 초에 고구려에 의해 정복된다. 14) 9) 후한서 위서 동이전 예( 濊 ) 10) 이 그림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주류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와 다르게 보는 비주류의 견해도 있다. 11) 후한서 위서 동이전 예( 濊 ) 12) 220년~265년 13) 265년~316년 14) 호구수의 규모에 대해 한서 지리지( 地 理 志 )에는 낙랑군이 62,812호 406,748명으로, 현도군이 45,006호 221,845명으로, 후한서 군국지( 郡 國 志 )에는 낙랑군이 61,492호 257,050명으로, 현도군이 1,594호 43,

13 2) 문명 전파론적 의의 전통문명의 탄생은 곧 도시의 탄생이고, 나아가 국가의 탄생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통문 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록과 유적 등에 나타난 도시와 국가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분석 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록과 유적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 고, 문명의 특징을 체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고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과 기록은 아주 작은데, 이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어떤 시대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또한 기록의 주체가 다른 중국측의 문헌과 한국측의 문헌 내용 사이에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요소가 있어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증폭되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쉽게 줄어들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관점이 더 옳으냐가 아니라 기록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문명사적 큰 흐름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구대륙에서 최초의 전통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네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 적으로 발생했다. 이후 이들 지역의 문명이 주변 지역과 갈등과 경쟁, 나아가 민족의 이동 과 전파를 통해 차츰 퍼져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정 수준의 문명에 도달하면 어느 지 역이든 최초 문명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상당히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세계 문 명사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문명 전파론적 관점에서 한국 고대의 역사 에 대한 기록을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군현에 대해 중앙 조직이나 지방 통치체제, 나아가 도시 구조를 언급 할 수 있을 만큼의 역사 자료나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나라의 군현만 보면 군-현 2단계의 통치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학자들 사 이에서 주로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구체적 위치와 고조선의 건국 시기 및 중심지의 이동 경향 등이다. 대체로 주류 견해는 평안남도의 평양 부근이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이자 한나라 낙랑군의 중심지였다고 보고 있다. 본 글에서도 평양 부근 중심설을 그대로 따르고 싶다. 하지만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지 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한반도와 만주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고조선과 한나라 의 군현 모두 황화문명과 연결된 서쪽으로부터, 특히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서북쪽으로부 터 왔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어느 시기에도 한반도의 북부 지역은 남부 지역보다 인구밀도가 훨 씬 낮았다.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이 더 높은 문명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대 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전통문명에서의 인구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농사짓기 좋은 기후 조건이고, 이런 측면에서 겨울이 상대적으 로 긴 한반도의 북부 지역은 남부 지역에 비해 결코 좋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 의 문명 국가가 남부 지역이 아닌 북부 지역, 나아가 한반도 서북쪽의 만주 지역이라는 점 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는 민족의 이동에 의한 것이든, 전쟁과 전투를 통한 정복에 의한 것이든, 나아가 경제 적 문화적 교류에 의한 것이든 문명의 전파론적 관점을 벗어나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다.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통치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통치 체제나 도시 등을 구체적 으로 연구할 수는 없지만 두 시기가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충격을 가해 새로운 문명 명으로 나온다

14 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겠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외부세력이 군사적 정복을 통해 직접 통치할 경 우 다수의 토착세력과 소수의 외부세력 사이에 갈등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세계문명의 어느 지역에서든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세력의 완전한 융합을 통해 하나로 합해지면서 사라질 수도 있고, 더욱 증폭되어 결국엔 외부세력이 축출 되거나 동화되면서 토착세력이 다시 정치권력을 회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외부세력이 축출되는 경우라도 정복되기 전과 축출된 후의 토착세력의 상황이 같 을 수 없다는 것도 세계문명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높은 문명을 갖고 있던 국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문명지역을 정복할 경우 토착세력에게 많은 변화 를 가져다주는 것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했다. 기원전 771년에서 기원전 221까지 황하문명 지역에서 나타났던 여러 세력 사이의 갈등 과 전쟁, 기원전 2세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고조선에서 급격한 변화와 한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고조선의 멸망과 한나라 군현의 설치는 고조선 지역뿐 아니라 주 변 지역의 토착세력에게도 상당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토착세력의 국가인 고구려에 의해 설치된 지 약 420년만인 313년에 축출되기까지 이어진 한나라 군현과 주변 토착세력과의 교류와 갈등 관계 역시 한국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였다. 2. 토착인 국가의 형성과 성장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영향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다음 해에 4개의 군( 郡 )을 설치하여 직접 통 치를 실현하지만 후대 동이( 東 夷 )라 기록된 모든 민족이 사는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못했 다. 일반적으로 문명 지역의 국가가 정복하는 지역은 대부분 문명 지역이다. 비문명 지역의 사회 조직 자체가 정복하여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고조선 주변 지 역의 문명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팽창을 추구했던 한나라가 정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고 아주 저급한 수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된 후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켰다거나 고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가 남쪽의 진국( 辰 國 )과 한나라 사이의 교역을 막았다는 내용이 있어 문명 수준을 갖춘 국가가 생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이란 강력한 국가를 멸망시킨 한나라가 정복을 통한 직접 통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은 문명 수준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 는 어렵다. 어쨌든 한나라의 군현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당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한나라가 고조선 을 멸망시킨 후 직접 통치한 지역, 독립적이면서 외교적 군사적 관계를 통해 평화와 대결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간 지역 등 2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토착 세력과의 갈 등으로 인해 한나라가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간접 통치를 시행한 지역도 나타나 크게 3개 의 유형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당시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조선과 한나라라는 높은 문명을 가진 국가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기존보다 한 차원 높은 문명으로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게 할 수는 가능성을 높인다.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한반 도 중남부 지역의 경우 고조선과 한나라가 장악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비해 농사

15 짓기에 기후적으로 더 유리한 곳이라는 점이다. 농업생산성의 증가,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인구의 증가는 새로운 문명 수준으로 나아가는데 충분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다음으로 황화 문명 지역의 혼란 과정에서, 위만이 고조선의 왕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한 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유민이 직접 유입되면서 단순한 접촉이 나 교류에 의한 문화 전파보다 더 빠른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삼국지 위서 (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의 한( 韓 ) 부분에는 한반도의 서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히 많은 인구의 유입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첫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 準 王 )이 측근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 韓 ) 지역으로 내려와 한왕( 韓 王 )이라 칭했으며, 준왕의 후손이 끊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준왕에 대한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둘째, 진한의 노인들이 진( 秦 ) 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 ( 韓 國 )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다 고 말한다. 한국측의 역사책인 삼국사기 15) 신라본기 에도 신라가 건국되는 기원전 57년 이전 에 조선의 유민들이 현재의 경주시 부근에 내려와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6개의 촌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6개의 촌이 신라 건국의 핵심 세력이 되는데, 이것은 신라의 건국조차도 북쪽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충격의 여파, 그 중에서도 직접적인 인구의 유입에 의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 북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한나라 군현의 직접 또는 간접 통치를 받던 지역은 독립적인 토착인 지역을 크게 남북으 로 둘로 나누어놓았다. 그리고 두 지역은 서로 유형이 다른 충격의 반응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 북쪽에 있던 만주 지역은 황화문명을 끊임없 이 괴롭힌 북방의 유목민족, 중국의 분열시기에 동북의 강자였던 연나라, 통일 제국 한나라 가 설치한 요동군 등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던 지역이다. 따라서 고조선에 설치되었던 한나라 군현과의 관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강한 세력과의 접촉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높은 문명의 국가가 출현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부여( 夫 餘 )의 왕자였던 주몽( 朱 蒙 ) 이 스물두 살에 현재의 요령성( 遼 寧 省 ) 환인( 桓 仁 ) 지역의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주몽의 아버지인 금와와 할아버지인 해부루도 모두 부여의 왕이었기 때문에 부여는 기원전 100년 전후에는 이미 건국되어 있었던 셈이 된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 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주변 소국을 정복한다. 16) 고구려를 건국했던 기원전 37년에 비류국을 평화적으로 합병했으며, 이어 기원전 32년에 행인국을, 기원전 28년에 북옥저를, 기원전 14년에 양맥을, 기원후 26년에 개마국과 구다국 을, 56년에 동옥저를, 72년에 조나를, 74년에 주나를 정복했다. 이렇게 정복한 모든 지역을 지속적으로 통치했는지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 으로 꽤 넓은 지역을 정복하여 영역국가로 변모했음은 분명하다. 15) 1145년 김부식의 주도로 한국측과 중국측의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되었다. 16) 중국측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의 고구려 부분에도 전체적인 흐름이 비슷하게 기 록되어 있다. 첫째, 신나라(9~23) 때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며, 고구려왕의 칭호를 고쳐 하구려후( 下 句 麗 侯 )로 했다. 둘째, 32년에는 한나라의 무제가 고구려왕의 칭호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셋째, 32년 이후에 는 지속적으로 왕이란 표현이 나오며, 한나라이 군현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음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넷째, 정확한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나라의 직접 간접 통치를 받았던 옥저와 동예까지 복속시켰다

16 고구려의 영토 팽창은 주변의 강한 세력과 자주 충돌하며 지속적인 전투를 벌이게 만들었 다. 기원전 37년에서 331년까지 고구려가 다른 지역을 침략한 경우가 25번이나 기록되어 있지만 침략 당한 경우도 11번이나 된다. 그 중 동이족이 아닌 한나라나 북방 유목민족과 벌인 전투가 30번이나 된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투 기록에서 주목되는 특징은 대규모인 경 우가 많았으며, 국가의 사활이 걸릴 정도였던 경우도 꽤 된다는 점이다.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21년과 22년에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하여 부여를 정벌하러 나섰지만 대패하였다. 28년에 는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수도였던 위나암성까지 수십일 동안 포위하였 는데, 고구려가 잘 방어하여 물리쳤다. 172년에 한나라가 대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대대 적으로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가 성( 城 )을 지키는 장기전을 구사하여 이를 물리쳤다. 246년 에는 위( 魏 )나라의 관구검( 毌 丘 儉 )이 1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고구려측에서 는 2만명을 동원하여 이에 대항하였지만 대패하여 수도까지 함락 당하고 왕은 남옥저까지 도망가는 수모를 당했다.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였다. 고구려 주변에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양맥 개마국 구다국 동옥저 조나 주나 등으로 이름 붙 은 도시국가 수준의 나라가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 지역의 민족은 중국측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동이족이기 때문에 서쪽으로부터 시작된 충격의 여파가 이 지역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약 10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부여 숙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이족 지역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강력한 국가와도 지속적으로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고 구려는 도시국가나 도시국가 연합체계 단계를 별로 거치지 않고 단기간에 영역국가 체계를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이렇게 영역국가 체계를 빠르게 이루어낸 이유는 단지 고구려라는 국가 내부만 의 문제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세운 군현뿐만 아니 라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로 변하면서 만주의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강력한 세력들과 끊임없이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위치적 상황 조건이 중요하다. 대규모 전쟁까지도 불사하며 경쟁하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영역국가의 체계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영역국가 내부의 도시 체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3) 중남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다수의 강한 세력과 경쟁했던 고구려와 달리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위치적 조건 때문에 낙랑군 대방군과만 주로 교류 경쟁하면서 새로운 문명국가로 성장해 나갔다. 중국측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한반도 중남부를 한( 韓 )으로 지칭하면서, 크게 마한( 馬 韓 ) 진한( 辰 韓 ) 변한( 弁 韓 )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마한은 서쪽에 있었으며, 54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동쪽에 서로 뒤섞여 살면서 각각 12개씩 24개의 나라가 있었다. 모두 합하면 78개의 나라가 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나라마다 최고의 통치자와 관료 조직이 있어 크든 작든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갖춘 도시국가였다. 둘째,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호수 편차가 상당히 커서 소수의 큰 나라 와 다수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 셋째, 마한의 진왕은 월지국( 月 支 國 ) 또는 목지 17) 마한의 전체 호수는 10여만 호이며, 큰 나라는 만여 가( 家 ), 작은 나라는 수천 가( 家 )였다. 10여만을 넓게 잡 아서 10만에서 15만 사이로 볼 때 54개의 나라로 나누면 평균적으로 한 나라마다 1,852호에서 2,778호밖에

17 국( 目 支 國 )을 통치하면서도 마한 전체를 대표하며, 진한의 12개 나라를 아우르는 진왕( 辰 王 ) 이 있었다. 다만 변한만은 전체를 아우르는 왕이 없이 각 나라의 왕만 존재했다. 18) 결국 마한과 진한 지역은 전체를 영도하는 우월한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도시국가 연합 체 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변한 지역은 전체를 영도하는 우월한 도시국가가 없이 독립적인 도 시국가 지역 체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측의 기록인 삼국사기 는 중국측의 기록인 삼국지 에 78개 나라의 하나로 기 록된 신라와 백제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백제는 기원전 18 년에 건국하였고, 두 국가는 기원후 64년부터 국경을 맞대고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인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국가가 일찍부터 영역국가였던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인 데, 신라의 영토 팽창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신라는 102년에 음죽벌국과 실직곡국 및 압독국을 정복하는데, 그 원인은 음즙벌국과 실 직곡국 사이에 있었던 영토 분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복당한 실직곡국이 2년 후인 104 년에, 압독국이 42년 후인 14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다. 108년에는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침략하여 정벌하며, 185년에는 소문국을, 232년에는 감문국을 정복한다. 그리고 236년에는 소문국이나 감문국보다 신라에 가까이 있던 골벌국을 정복한다. 19) 결국 신라는 감문국을 정복하는 232년과 골벌국을 정복하는 236년경까지도 진한지역을 완전히 아우르는 영역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시까지도 우월한 도시국가의 입장에 서 나머지 도시국가들을 영도하는 도시국가 연합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 리적이다. 또한 신라가 기원후 64년부터 백제와 벌였던 것으로 기록된 수많은 전투도 영역 국가 신라가 아니라 도시국가 연합체계를 이끄는 우월한 도시국가 신라의 입장에서 이루어 졌던 것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백제는 건국된 지 20여년이 지난 기원후 8년에서 15년 사이에 마한을 정복한 것으로 기 록되어 있으며, 그 밖의 도시국가에 대한 정복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통 해 기원후 15년부터 백제가 마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영역국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 측의 기록인 삼국지 에 마한에 54국이 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또한 151년과 189년 사이에 있었던 낙랑군 대방군과의 구체적인 전투 상황에 대 한 묘사에서도 백제가 아니라 한( 韓 )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마한의 54개 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영역국가였다 기보다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마한의 54개 전체 또는 그 상당수의 도시국가 연합 체계를 이 끄는 우월한 도시국가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고 백제가 작은 도시국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째, 마한의 54국 중 만여 가의 큰 나라도 있었는데 백제가 가장 큰 나라 였을 수밖에 없다. 둘째, 여러 차례에 걸쳐 낙랑군 대방군과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던 한( 韓 ) 안 된다. 그런데 큰 나라는 만여 가라고 했으니 큰 나라가 5개만 되어도 전체 호수의 50%에서 33%를 차지 한다. 따라서 만여 가를 넘는 소수의 큰 나라와 1-2천가 안팎의 다수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변한과 진한을 합한 전체 호수의 규모는 4-5만 호이며, 작은 나라는 4-5천가, 작은 나라는 6-7 백가로 나온다. 4만에서 5만을 24국으로 나누면 평균적으로 한 나라마다 1,667호에서 2,083호이다. 만약 4-5천가나 되는 큰 나라가 5개만 되어도 이미 전체 호수의 50%나 되기 때문에 소수의 큰 나라와 6-7백가 안팎의 많은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 진( 晋 )나라( )의 역사를 편찬한 진서( 晋 書 ) 동이열전의 마한 부분에는 277년에서 290년까지 6차 례에 걸쳐 그 왕( 主 )이 사신을 보냈으며, 진한 부분에도 280년에서 286년까지 3차례에 걸쳐 그 왕( 王 )이 사 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 정복 기록은 아니지만 297년에는 신라와 아주 가까운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에 있었던 이서고국 즉, 이미 정 복당했던 이서국의 후예들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까지 공격하여 거의 성공할 뻔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8 은 마한을 지칭하는데 20), 그 때 마한의 지도적인 도시국가 역시 백제일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는 마한의 백제와 진한의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변한 지역에 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진한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인 가야와 신 라의 전투 기록이 94년에서 116년 사이에 6번이나 나타나며, 대규모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 다. 또한 209년에는 변한 내에서 가라( 加 羅 )란 나라와 8개의 나라 사이에 있었던 세력 다툼 때문에 가라의 요청을 받은 신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하는 내용도 나온다. 따라서 삼 국사기 의 신라 기록만으로도 변한 지역에 여러 도시국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진한 지역에 대한 가장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삼국유사 의 오가야( 五 伽 耶 )에는 총 6개 의 가야 이름과 당시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이 6개의 가야는 마지막까지 남은 진한 지역 의 도시국가로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변한 12개의 나라가 서로 경쟁하면서 최종적으로 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변한 지역은 마한이나 진한 지역처럼 우월적인 도시국 가를 중심으로 도시국가 연합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다수의 독립적인 도시국가 지역 체계 를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3국의 경쟁과 통일신라의 성립 1) 역사 311년 흉노족이 진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켜 혼란에 빠트리게 되고, 이를 이용하여 고구려 는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군과 대방군을 완전히 정복한다.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 남부 에서 외부세력의 통치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새롭게 성장한 3개의 토착인 국가인 신라 고 구려 백제가 완전한 영역국가로 성장하여 서로 국경을 맞대며 경쟁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 지역에서도 589년 수나라 21) 가 통일을 이룰 때까지 약 360년간의 분열기가 이어진 다.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은 중국 지역의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족과 일본의 왜( 倭 )를 포함한 다수의 국가와 합종연횡의 외교전을 펼치면서 치열한 경쟁과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한국에서는 300년 이후부터 500년대 후반까지 삼국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대를 가장 공세적인 국가의 입장에서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눈다. 첫 번째 시기는 300년대 후반 백제가 고구려에 공세적이었던 시기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했지만 모용외( 慕 容 廆 )와 그의 아들 모용황( 慕 容 皝 )이 세 운 전연( 前 燕 ) 22) 과의 대결에서 패하여 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342년에는 모용황의 군대 5만5천명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남녀 5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였다. 369년에서 377년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 각각 3만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투가 세 번 에 걸쳐 벌어지는데, 두 번이나 백제가 대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왕이 화살에 맞아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300년대 말부터 500년대 전반까지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에 공세적이 었던 시기다. 300년대 말 고구려는 후연( 後 燕 ) 23) 과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요동 지역을 모두 20) 진한 변한과 낙랑군 대방군의 사이에는 마한 예의 넓은 지역이 자리 잡고 있어 진한 변한이 낙랑군 대방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21) 수( 隋 ), 581년-618년 22) 337년-370년 23) 384년-409년

19 차지했으며, 거란까지 정벌하기도 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까지 압박하였으며, 상 당히 넓은 땅을 빼앗았다. 400년대 중반부터는 남쪽을 주로 공략하기 시작하여 454년에 신 라의 실직주성을 빼앗았고, 475년에는 병력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을 뿐 만 아니라 왕까지 죽였다. 494년에는 북쪽에 있던 부여가 항복해 왔으며, 이후 신라와 백제 에 대한 공세를 지속했다. 세 번째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공세적이었던 시기다. 400년대까지 계속된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해 신라와 백제가 연합을 맺어 잘 막아냄으 로써 500년대 전반기는 어느 국가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서로 공방전만 벌이는 힘의 균형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550년부터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에 공세를 펴기 시작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았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격전을 치르는 틈을 타서 한강 유 역 전체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의 남쪽 지역까지 공격한다. 554년 백제는 신라 의 배신에 보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왕이 사망하는 패배를 당한다. 이후 세 나라 모두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서로 공방전만 벌이는 힘의 균형 상태에 들어간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600년대 후반까지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통 일신라가 성립되는 시기이다. 수나라와 이어 등장한 당나라 24) 는 중국 통일의 기세를 몰아 대외 팽창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만주와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세 나라의 경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고구려는 남쪽에 전력을 투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수나라는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한 1 차 원정을 감행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한다. 이어 612년에 113만 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2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으며, 30만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역시 실패한다. 이후 613년과 614년에 3차 4차 원정을 시도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다.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 역시 대외 팽창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로 인해 고구려에 대한 침략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644년과 645년 2년에 걸쳐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1차 고구려 원정을 시행하여 많은 성을 함락시키지만 안시성( 安 市 城 ) 싸움에서 성 공하지 못하여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장기전 전략을 구사하면서 655년과 659년에도 중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한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남쪽에 전력을 쏟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 자 백제의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이루어진다. 가장 큰 공격은 642년에 일어났는데, 신라의 서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는 데, 전반적으로 백제가 우세하였다. 655년에도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30여 성 을 함락시키기도 하여 신라는 국가적인 위기감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결국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 위기 를 모면하고 공세적인 상황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660년 당나라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대군이 연합하여 동서에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 약 4년에 걸친 백 제의 부흥운동을 무력화시키고 백제를 영원히 멸망시켰다.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는 661년과 662년에 약 44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 24) 당( 唐 ), 618년-907년

20 한 2차 정벌을 시도하였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나 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오랫동안 공격을 받은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667년에 시작된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3차 원정에 견디지 못하고 668년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 면서 왕이 항복하였다. 이후 약 5년에 걸친 고구려의 부흥운동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은 당나라와 신라가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 나라의 대외 팽창은 그 영향권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실행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도 예 외가 아니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멸망시킨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의 도 독부를,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를 비롯한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세워 직접 통치권의 안으로 편입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충돌 위기 상황에서 670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군 등 2만명을 동원하여 압록 강을 건너 당나라 군대를 선제 공격하였다. 이어 백제 지역에 주둔하던 당나라의 군대와 그 지휘를 받던 백제군도 함께 공격하였으며, 671년에는 백제 지역 거의 대부분을 신라가 차 지하게 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671년부터 반격을 시작하였으며, 673년까지는 신라군이 패 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675년에 당나라의 육군 20만면이 신라군에게 패하고, 676년 에는 당나라의 수군이 신라 수군에게 패배하면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현재의 평안남도 대동강에서 함경남도 원산에 이르는 선의 남쪽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후부터 한국 역사에서는 통일신라라 부른다. 2) 통치 체제 고구려는 멸망할 때 5부( 部 ) 176성( 城 ) 69만여 호( 戶 )였다는 기록이 있다. 25) 이것에 입각 해 보면 고구려는 수도-부-성의 3단계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 킨 후 그 지역에 9도독부( 都 督 府 )-42주( 州 )-100현( 縣 )과 평양에 안동도호부( 安 東 都 護 府 )를 두어 통치하려 하였다. 26)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으려 했다면 고구려는 4단계의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에는 60여 성( 城 )에 주와 현을 두었는데, 대성( 大 城 )에는 욕살( 褥 薩 ) 1명을, 나머지 성( 城 )에는 도사( 道 使 ) 또는 처려근지( 處 閭 近 支 )를 두어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다. 27) 여기에 입각해 보면 고구려는 수도-대성-성의 3단계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에 욕살이 파견된 대성, 도사( 道 使 ) 또는 처려근지( 處 閭 近 支 )가 파견된 성( 城 ), 가라달( 可 邏 達 )이 파견 된 소성( 小 城 )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8) 여기에 입각해 보면 고구려는 수도-대성-성-소 성의 4단계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백제는 5부( 部 )-37군( 郡 )-200성( 城 )-76만호( 戶 )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9) 이것에 입각 해 보면 백제는 수도-부-군-성의 4단계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 킨 후 5도독부-주-현을 두고 웅진의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통치하려 하였다. 당나라가 백 제의 옛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으려 했다면 백제는 4단계의 통치 체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 25) 삼국사기 권 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고구려 26) 삼국사기 권 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 /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27)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 신당서( 新 唐 書 ) 동이열전 고구려 28) 한원( 翰 苑 ) 고려조( 高 麗 ) 29)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9년(660)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백제

21 로 볼 수 있다. 그림-9 고구려와 백제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또 백제에 5방( 方 )이 있고, 각 방마다 10군( 郡 )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30) 여기서 5방은 지방행정의 최고 단위이기 때문에 수도-방-군의 3단계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 된다. 이 기록에는 방에는 백제의 16관등 중 2위에 해당되는 달솔( 達 率 ) 1명을 방령( 方 領 )으로 파 견하였고, 군에는 제4위에 해당되는 덕솔( 德 率 ) 3명씩을 파견하였다고도 되어 있다. 그렇다 면 백제는 방 5개와 군 50개 등 총 55개의 도시에 지방관을 파견했던 것이 된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270년 가까이 번영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기 록을 남겼다. 신라는 400년대 중반까지 지방에 대해 간접통치를 실행하다가 후반기부터 지 방관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어 505에년 수도-주( 州 )-군( 郡 )-현( 縣 )의 4단계 통치 체계를 공 식적으로 갖추면서 주에 군주( 軍 主 )를 파견한다. 31) 다만 이 때 모든 단위에 지방관을 파견 한 것은 아니며 점차적으로 확산시켜 나간다. 514년에는 중앙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면 서 지방 통치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소경( 小 京 )을 처음으로 설치한다. 32) 영역국가로서 신라의 통치체제가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인 759년(경덕왕 18)이다.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수도-주-군-현의 4단계 통치체제를 완성하며, 북원경 중원경 서원경 남원경 김해소경 등 5개의 소경을 갖춘다. 33) 주( 州 )에는 도독( 都 督 )-주조( 州 助 )-장사( 長 史 )를 파견하여 조직을 장악하게 했으며, 소경 ( 小 京 )에는 사신( 使 臣 )-사대사( 仕 大 舍 )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군( 郡 )에는 태수( 太 守 )를 파견 하였고, 현( 縣 )에는 등급에 따라 현령( 縣 令 )과 소수( 少 守 )를 파견하였다. 이외에도 주와 군의 통치를 감시 감독하기 위해 외사정( 外 司 正 )을 두었는데, 주에 2명씩 그리고 군에는 1명씩 파 견하였다. 신라의 지방통치체제는 수도-9주-117군-293현과 5소경 등 총 424개나 되었다. 30) 북사( 北 史 ) 열전 백제 31)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6년(505) 32)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15년(514) 33)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雜 誌 ) 제3 지리 신라

22 그림-10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신라의 통치 체제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지방 세력을 철저하게 차별하는 중앙집권 적 영역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34) 첫째,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수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출신들만 이 신분제로 편제될 수 있었다. 지방 출신자들은 골품제 가 아닌 다른 신분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지방 출신으로 가장 높은 외진촌주( 外 眞 村 主 )가 골품제의 5두품 대우밖에 받지 못했다. 둘째,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개인의 지위를 표시한 관등제가 운영되었는데, 600년대 중반 까지 수도 출신자는 17등의 경위( 京 位 )로, 지방 출신자는 11등의 외위( 外 位 )로 구분되어 있 었다. 뿐만 아니라 외위 중 가장 높은 것이 경위의 7등과 비슷했으며, 외위를 가진 자는 중 앙에서 임명하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600년대 후반에 경위와 외위의 구분이 사라지 고 경위로 일원화 되었지만 지방 출신자가 가질 수 있는 관등은 8등까지였다. 셋째, 모든 관직마다 맡을 수 있는 관등이 정해져 있었는데, 지방 출신자는 중상위 관직 에 임명될 수 없었다. 지방관직만 예를 들어도 주의 도독, 소경의 사신, 군의 태수는 지방 출신자들이 거의 임명될 수 없었다. 넷째, 신라에서는 성인이 될 남자들을 모아 집단적으로 교육 훈련하여 미래 인재의 풀을 만드는 화랑도( 花 郞 徒 )란 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이곳에는 골품제의 신분을 얻을 수 있는 수 도 출신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화랑도에서 형성된 인적 관계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 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관직의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지방 출신자들이 참여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지역적 차별을 의미했다. 신라에서 이렇게 지방 세력을 철저하게 차별하는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의 통치 체제가 만 들어진 이유는 신라의 영토 팽창 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원 전후에 진한 지역에는 12개 이상의 작은 도시국가가 병존해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신라였다. 200년대 중반까지 신라는 진한 지역의 모든 도시국가를, 500년대 중반경 변한 지역의 모든 도시국가까지 정 복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자발적으로 항복해온 일부를 제외하면 도시국가 시절의 신라 지배층 과 정복된 도시국가 지역의 지배층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정복의 주체 세력과 정복 된 지역의 세력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은 세계 문명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이며, 이 점에서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많은 도시국가를 정복하여 영역국가로 성장했 던 신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34) 이기봉, 2007,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1장, 푸른역사

23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두 나라의 지배층을 포섭할 때도 신라 출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35) 이 역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 복한 것이기 때문에 정복된 두 나라 출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이다. 또한 일부를 제외하면 두 나라 출신 모두 수도 출신자가 아닌 지방 출신자로서 대우 받았을 뿐이다. 4. 한국 고대의 성곽과 특징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도시와 성곽 고조선과 한사군은 모두 문명국가였기 때문에 도시와 성곽을 건설했음이 분명하다. 하지 만 기록도 극히 적게 남아 있고 유적 역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대략적인 흐름의 입장에 서만 살펴볼 수밖에 없다. 사기 와 한서 의 조선전에는 비록 수도인 왕검성( 王 儉 城 ) 하나밖에 나오지 않지만 한나라와의 전쟁 모습 속에서 고조선의 성곽에 대해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109년 가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한 군사의 수는 5만 명이었고, 왕검성 에 처음 도착한 병사 수는 7천명이었다. 우거왕은 왕검성을 나와 7천명의 한나라 병사를 패 퇴시키는 등 상당히 효과적으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한나라의 포위 공격에도 몇 달 동안 함 락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한나라의 공격에 내분이 발생하여 항복하는 무리가 생기고 우거왕 이 피살되기도 했지만 기원전 108년 여름에도 고조선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계속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내분에 의해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하게 되었다.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아직 합 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36) 또한 왕검성의 정확한 유적도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사기 와 한서 의 기록에 나타난 왕검성에 대한 기록만으로도 방어력이 상당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1년 정도의 대규모 장기전에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성이었다는 점을 확 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왕검성은 지형을 이용한 대형산성이나 요새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년의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식량뿐만 아니라 물도 풍 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 의 동옥저 부분에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현도군을 설치할 때 중심 지로 삼았던 옥저성( 沃 沮 城 )이 나온다. 또한 낙랑군의 동부도위를 설치할 때 불내성( 不 耐 城 ) 에 중심지를 두었으며, 118년에는 고구려가 예맥( 濊 貊 )과 함께 현도군의 화려성( 華 麗 城 )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의 군국지( 郡 國 志 )에는 낙랑군이 18성( 城 )으 로, 현도군이 6성( 城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의 중심지는 모두 성곽을 갖춘 도시였 다. 하지만 기록에 나오는 옥저성 불내성 화려성을 포함하여 낙랑군 군현의 중심지 중 구체 적인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진 곳은 없다. 다만 일제시대부터 낙랑군 대방군과 관련된 유물이 35) 삼국사기 권 제40 잡지 제9 외관 36) 위만 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 크게 첫째, 만주의 요동이나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설 둘째, 북 한의 평안도 평양 부근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 중 두 번째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정확한 유적의 발 굴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24 대량으로 출토되어 낙랑군의 중심도시였던 것으로 이해되는 낙랑토성과 대방군의 중심도시 였던 것으로 이해되는 지탑리토성 등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11 낙랑토성의 위치 낙랑토성은 현재의 북한 평양특별시 낙랑구역 토성동에 있는데, 동서와 남북 각각 약 660m와 700m로 이루어진 둘레 약 2,500m의 대형 성곽이다. 성곽 안에는 최고 높이가 해 발 23m인 언덕밖에 없어 거의 평지성에 가까우며, 북쪽으로는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대동강과 바로 접해 있다. 지탑리토성은 현재의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에 있는 데, 둘레 약 2,000m의 대형 성곽이다. 거의 평지성에 가까우며, 남쪽과 서쪽으로 자연 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서흥강과 접해 있다. 그밖에 낙랑군이나 대방군의 토성으로 추정되는 성 들도 평지나 낮은 언덕에 축조되어 있다. 2) 고구려의 도시와 성곽 37) (1) 수도와 성곽 삼국사기 지리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졸본천( 卒 本 川 )에 수도를 정하여 건 국되었지만 성곽을 쌓지는 않았다. 처음에 수도를 정한 곳이 홀승골성( 紇 升 骨 城 )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기원전 4년에 이르러서야 성곽을 축조한 곳이다. 기원후 2년에는 수도를 위나암성으로도 불렀던 국내성으로 옮겼으며, 427년에 평양으로 다시 옮긴다. 마지막으로 586년에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668년에 멸망한다. 현재 졸본천에 있던 홀승골성이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록과 고분 및 발굴 결과를 토대로 중국의 요녕성( 遼 寧 省 ) 환인현( 桓 仁 縣 )에 있는 오녀산성 ( 五 女 山 城 )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째의 수도였던 국내성(또는 위나암성)은 중국의 길림성( 吉 林 省 ) 집안현( 輯 安 縣 ) 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에는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 산성( 丸 都 山 城 ) 38) 이 있다. 세 번째의 수도였던 평양성은 북한의 평양특별시 대성구 대성동 지역에 있었으며, 평지성인 안학궁과 산성인 대성산성이 있다. 네 번째 수도였던 장안성은 북한의 평양특별시 시내에 있는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호구수를 비롯하여 고구려 수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도시의 규모나 내부 구조를 상세하게 알기는 힘들다. 다만 성곽의 흔적은 남아 있기 때문에 도시와 성곽의 관계 에 대해서만큼은 큰 틀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이를 위해 고구려의 수도에 있던 성곽을 대략 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7) 한국 고대의 성곽에 대해 가장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곳은 수도이기 때문에 성곽 연구의 다수가 수도의 성 곽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의 성곽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한국 고대 성곽의 일반적 인 특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도와 지방도시는 상하 계층 질서 속에서 분명히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어 서로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 따라서 수도와 지방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난 성곽의 형태는 서 로 분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산성자산성( 山 城 子 山 城 )으로도 불린다

25 출처: 서길수, 1994, 고구려 성, 한국방송공사, 25쪽 그림-12 오녀산성 평면도와 전경 첫 번째의 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오녀산성은 해발 800m의 오녀산에 있다. 남 서 북쪽으로 평균 200m에 이르는 높은 자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동쪽에만 약 1,100m의 성벽을 쌓았다. 성곽의 정상에는 남북 1,000m, 동서 300m에 이르는 평탄지가 있어 왕궁 등 중요 시설이 들어서기에 알맞다. 자연 절벽과 성벽을 모두 합하면 둘레 약 8,000m나 되는 초대형 산성이며, 바로 아래쪽에 평지성인 하고성자성( 下 古 城 子 城 )이 있었 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다. 39) 출처: 서길수, 1994, 고구려 성, 한국방송공사, 64쪽 그림-13 환도산성과 국내성 두 번째의 수도였던 환도산성은 가장 높은 곳이 해발 676m인 환도산의 정상으로부터 통 구하( 通 溝 河 )란 하천까지 이어진 산줄기 위에 축조된 포곡식의 산성이다. 하천 변의 절벽 등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둘레 6,951m의 초대형 산성이다. 환도산성으로부 터 동남쪽 2.5km 지점에는 궁성 역할을 했던 국내성이 있는데, 사각형에 가까운 둘레 39) 서길수, 1994, 고구려 성, 한국방송공사, 24-25쪽

26 2,686미터의 대형 평지성이다. 그림-14 대성산성과 안학궁 세 번째의 수도였던 북한 평양시 대성구 대성동 지역에 있는 대성산성은 해발 270m의 을지봉을 중심으로 6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다. 중요 부분에는 2중 3중의 겹성을 쌓았고, 성곽의 둘레는 7,076m에 이르는 초대형 산성이다. 대성산성 남쪽에 는 궁성 역할을 했던 둘레 2,488m의 대형 평지성인 안학궁성이 있다. 출처: 최무장, 1995, 고구려고고학 I, 민음사 / 임기환, 2003, 고구려 도성제의 변천, 한국의 도성-도성 조영의 전통,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24쪽에서 재인용. 그림-15 고구려의 장안성 네 번째의 수도인 장안성은 북한 평양시 시내에 있는 평양성으로 이전과 달리 산성과 평 지성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된 내성 중성 외성 북성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 성 곽의 총 길이는 23,000m이며, 이 중 내부에 건설된 성벽을 제외하면 성곽의 둘레는 17,000m로 도시 전체를 감싸는 나성( 羅 城 )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때는 평양성 이 북성, 내성, 외성+내성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중 낮은 산이나 높은 언덕이라 고 할 수 있는 지역에 왕궁과 중요 관청이 들어선 내성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내성만으로 도 둘레 6,000m 안팎의 초대형 산성이 된다. 외성+중성은 거의 완전 평지에 들어서 있으 며,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2) 지방도시와 성곽 고구려의 지방도시와 성곽에 대한 정보로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멸망할 때 5부 176성 69만여호였다는 기록, 60여 성에 주와 현을 두었는데, 대성( 大 城 )에는 욕살 1명을, 나머지 성( 城 )에는 도사 또는 처려근지를 두어 다스렸다는 기록, 욕살이 파견된 대성, 도사 또는 처 려근지가 파견된 성, 가라달이 파견된 소성이 있었다는 기록 등 세 가지가 있다. 이런 기록에 입각하여 첫째, 고구려는 성곽을 중심으로 지방 행정단위를 편제하여 다스렸 기 때문에 지방도시와 성곽이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둘째, 성곽의 규모가 대성- [중]성-소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셋째, 멸망할 때 지방 행정단위의 총 숫자는 176성 이상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성곽이 많았음은 삼국사기 의 고구려본기, 구당서 와 신당서 등의 여러 전투 과정에 대한 묘사 속에 상당히 많은 성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의 고구려 백제 부분에는 압록수 이북에서 아직 항복하지 아니한 11성, 항복한 11성, 도망한 7성, 공취한 3성 등 32개의 성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부 분에 고구려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의 9주에 편입된 164개의 고을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성( 城 ) 또는 고구려에서 성을 의미했던 홀( 忽 )이 고을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이 35 개나 발견된다. 또한 759년에 완성된 통일신라의 행정단위에 포함된 고구려 때의 고을 이 름에는 성( 城 )이나 홀( 忽 )이 더 많이 발견된다

27 이러한 성곽 중 현재까지 남한 지역에서 조사된 것 대부분은 첫째, 장천현성( 長 淺 城 縣 )과 마전천현( 麻 田 淺 縣 )의 통치성이었던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처럼 10m 이상의 절벽 지형을 이 용한 요새성이 일부 있지만 생활면으로부터 200m 이하의 높이에 건설된 테뫼식 산성이 대 부분이다. 둘째, 거의 모든 산성이 고을의 거의 중심에 있고, 높지 않으면서도 고을 대부분 의 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셋째, 크기는 둘레 1,000m와 2,000 사이의 중형과 1,000m 미만 의 소형이 비슷한 숫자의 분포를 보인다. 이는 비록 2,000m 이상의 대형산성이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고구려의 지방 통치체제였던 대성-중성-소성의 기본 흐름과 크게 어긋나지 는 않는다. 그림-16 고구려 마전천현의 당포성 그림-17 고구려의 마홀( 馬 忽 )인 포천의 반월산성 현재 여러 연구 및 조사를 종합해 볼 때 중국에 속한 요녕성과 길림성에는 개의 고구려성이 있다고 조사되었다. 그 중 요녕성의 것 87개만을 기준으로 할 때 둘레 2,000m 가 넘는 대형이 27곳, 1, m 사이의 중형이 17곳, 200-1,000m의 소형이 37곳인 데, 대부분 산성이다. 40) 이와 같은 성곽 규모의 분포는 고구려가 대성-중성-소성 중심의 지 방도시를 기초로 전국을 통치해 나갔다는 문헌 기록의 내용과 상당히 부합한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고구려에는 2,000m가 넘는 대형산성이 요녕성의 고구 려 산성 87개 중 약 31%인 27곳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비율로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요녕성에 있는 대형산성의 숫자만으로도 한반도 중 남부 지역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둘레 2,000m 이상의 것을 모두 대형으로 분류했지만 3,000m 이상의 초대형 산성도 꽤 있다는 점이다. 둘레 8,000m의 오녀산성과 6,951m의 환도산성 및 7,076m의 대성산성은 원래 수도와 관련되어 축조된 초대형 산성이지만 천도가 이루어지고 나서부터는 지방 통치의 거점성으로 바뀐다.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고구려의 초대형 산성은 이 두 개에 한정되지 않는다. 요녕성 장하현( 莊 河 縣 )에 있는 성산산성( 城 山 山 城 )의 앞성은 둘레 2,898m이고, 뒷성은 약 5,000m이다. 요녕성 보란점시( 普 蘭 店 市 )에 있는 산성인 오고성( 吳 姑 城 )은 둘레 약 5,000m 이고, 당나라 태종의 1차 침입 때 격전을 치렀음에도 함락되지 않은 안시성으로 알려진 요 녕성 해성시( 海 城 市 )의 영성자산성( 英 城 子 山 城 )은 둘레 약 4,000m이다. 요녕성 봉성시( 鳳 城 市 )에 있는 봉황산성( 鳳 凰 山 城 )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바위 지형을 제외한 일부만 성벽을 축 조했지만 총 둘레가 15,000m나 된다. 41) 북한에도 고구려의 초대형 산성이 일부 알려지고 있다.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에 있는 황룡산성( 黃 龍 山 城 )은 둘레 약 6,600m이고, 황해남도 신원군에 있는 장수산성( 長 壽 山 城 )은 둘레 약 10,500m이다. 40) 서길수, 1994, 앞의 책, 12-15쪽 41) 서길수, 1994, 앞의책

28 그림-18 초대형 산성인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 이러한 대형 산성 그 중에서도 초대형 산성은 중소규모의 단기전이나 일상적인 통치의 효 율성을 높이기 위한 성곽이 아니다. 중소규모의 단기전을 고려했다면 중형이나 소형의 산성 이 더 적합하며,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황화문명 지역처럼 평지성이 더 유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산성과 초대형 산성을 축조한 것은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해석하기 어렵다.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한족의 국가든 이민족의 국가든 황화문명권을 장악했던 국가의 팽창과 함께 확산된 중국 적 도시나 성곽은 기본적으로 평지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으며, 실제로도 수도와 지방을 막론하고 대다수의 도시가 평지성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수도에서는 평 지성+산성 또는 평지성+절벽 지형의 요새성의 도시가, 지방에서는 산성이나 절벽 지형의 요새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가 건설되었다. 따라서 도시나 성곽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적인 것 과 고구려적인 것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많다. 고구려는 건국되는 그 순간부터 때로는 무력 대결을 통해, 때로는 평화적 관계를 통해 황 화문명권의 국가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성장했다. 이런 상황 조건 속에서라면 고구려가 황화문명권의 국가에서 건설한 이상적인 도시와 성곽을 모방했을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인 데, 먼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 있었던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살펴보기 로 하자.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이 수도와 지방도시 에서 나타난다는 점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지만 좀더 세부적으로 들 어가면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고구려 지역에서는 초대형 산성이 상당히 많이 건설되었던 반면에 신라 지역에서는 4개만 발견되며, 백제 지역에서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대형 산성의 전체 숫자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에서는 최소 30개를 넘었던 반면에 백제와 신 라 지역은 모두 합해도 10개 정도에 불과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 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첫째, 고구려는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의 위협을 항상적으로 받았다. 고구려는 건국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문명국가를 이루었던 한나라의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뿐만 아니라 이미 왕국을 이루었던 부여와도 치열한 전투나 전쟁을 벌이면서 성장해 나갔 다. 그리고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요동 지역을 장악한 위 진의 요동군이나 북방 유목민 족 계통의 강한 세력과 대규모의 공방전을 벌였다. 또한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을 멸망시키고 요동 지역뿐만 아니라 부여와 한반도의 중부를 차지한 이후에도 수나라 당나라와 여러 차례 에 걸친 대규모의 전쟁을 수시로 경험하였다. 이렇게 강한 세력과의 공방전 속에서 고구려가 상대적으로 힘이 셀 때는 공격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약할 때는 대규모 침공을 받을 수밖에 없 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실제로 국가의 존폐가 걸릴 정도로 심한 침략을 받은 적이 한 두 번

29 이 아니다. 결국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이 항상적으로 내재해 있는 조건 속에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은 고구려에게 국가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일이었고, 도시와 성곽의 건설에서 고려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총력전을 벌일 수 있는 대 형 성곽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또한 산지가 많은 지형적 조건 속에서 평지성보다 더 높은 한 방어력을 갖고 있는 산성을 택할 수밖에 없다. 42) 중국적 도시와 달리 수도에 초대형 산 성을 항상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대형 산성과 초대형 산성이 많았던 것을 이런 배 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43) 둘째, 고구려는 작은 국가로 출발하여 많은 지역을 정복한 거대한 영역국가로 성장했다. 거대한 이라는 수식어는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적절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 다. 만약 수나라나 당나라처럼 중국 대륙을 통일한 국가를 기준으로 삼으면 고구려는 거대 한 국가였다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고구려가 건국될 당시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으면 최전 성기 때의 고구려는 분명 거대한 국가라 말할 수 있다. 거대한 국가라는 용어는 원래 고구 려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수많은 지역을 정복했다는 정복국가의 성격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정복했던 지역은 그곳이 높은 문명국가의 체계를 이루었든, 상대적으로 낮은 국 가나 준국가의 체계를 이루었든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따라서 정복의 주체인 고구려에 의해 피정복민의 입장에 서는 것이며, 고구려는 정복민의 입장에서 피정복 민을 다스리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더 강한 세력과의 대결 과정에서 정복된 지역의 독자 적인 정체성이 사라지거나 약화된 곳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곳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 분히 존재한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 경향이 멈춘 500년대 중반 이후 국가적 통합성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이루 어질 때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갈등 관계가 쉽게 사라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지방을 통치할 때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실제로 분출되지 않더라도 도시와 성곽의 건설에 고려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된다. 고구려 지방 통치의 다수가 중소형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 중심의 도시를 기초로 하 여 이루어진 것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내재한 갈등 관계, 심하게 말하면 반란을 일으 킬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 이외의 다른 요인을 찾기 어렵다. 42) 초대형산성은 첫째, 장기전을 위해 꼭 필요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수원( 水 源 )을 갖고 있고 둘째, 대규모의 병사와 주민이 함께 들어가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크며 셋째, 절벽이나 경사도가 높은 지형 및 자 연 하천을 적절하게 이용하였기 때문에 축조와 유지 및 보수에 비용과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넷째, 주변에 더 높은 지형이 없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평지성보다 유리하다. 43) 주례 고공기와 당나라의 장안( 長 安 ) 등에 나타나는 중국식의 도시와 성곽은 기하학적 원리를 통한 권위 표현이 1차적인 요인이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2차적으로 방어의 문제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중국 식의 수도는 구체적으로는 모두 똑같지 않지만 기하학적 대칭을 중요하게 여기는 형식을 구현하기 위해 거의 완전한 평지에 건설되었다. 그 결과 수도에 적용된 성곽은 최소한의 방어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성이든 궁성이 든 10-14m에 이르는 높은 높이로 만들어야 했으며, 치와 옹성 및 해자를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방어 시설을 개발하여 적용하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수도는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에 대한 방어가 1차적인 요인이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2차적으로 여러 가지 원리를 통한 권위 표현의 문제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고구 려의 수도 역시 구체적으로는 모두 똑같지 않지만 장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초대형 산성을 건 설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수도에서는 기하학적 원리를 이용한 권위 표현 을 위해 평지에 대형의 궁성을 건설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네 번째의 수도에서는 방어와 권위 표현을 동시 에 실현할 수 있는 곳에 궁성을 축조하면서 기하학적 원리를 통한 권위 표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30 3) 중남부 지역의 도시와 성곽 신라와 백제 모두 고구려와 300년 이상 국경을 맞대고 경쟁했던 독자적인 국가였기 때문 에 따로 분리하여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첫째, 낙랑군 남쪽에서 여러 도시국 가가 경쟁하던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영역국가로 성장했으며 둘째, 도시와 성곽이라는 측면에 서는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두 국 가에서 나타난 도시와 성곽의 유사성은 통일신라로 이어지며, 이후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제공한다. (1) 수도와 성곽 1 신라 신라는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시내를 중심으로 건국된 이후 한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았 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의하며 기원전 37년에 궁성인 금성( 金 城 )을 축조하는데, 이후 금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수도의 성곽 중 가장 많이 기록되지만 500년을 끝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금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 는 101년에 금성 동남쪽에 월성을 축조했다 44) 는 기록밖에 없는데, 현재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금성 다음으로 기록된 궁성은 101년에 금성 동남쪽에 축조했다는 월성인데, 현재도 존재 하기 때문에 신라 수도의 성곽에 대한 중요한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487년에서 488년 사 이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는 주로 해자를 건설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어 45) 기본 형태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월성은 둘레 1,841m의 중형 성곽으로 완전 평지성은 아니 다. 자연 하천인 남천을 해자로 이용하였으며, 약간 높은 언덕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아 방 어력을 높였다. 상당히 무너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성벽의 높이가 10-18m에 이를 정도로 높다. 그림-19 신라수도의 성곽 월성 다음으로 기론된 성곽은 현재의 명활산성으로 405년에 왜( 倭 )가 명활산성을 공격했 으며, 431년에도 왜가 포위 공격했다. 473년에는 명활산성을 수리하여 475년에 왕이 옮겨 살았으며, 488년에는 왕이 월성으로 옮겨갔다. 554년에 수축하였고, 593년에는 3,000보로 개축하였다. 삼국사기 지리 1 신라에는 명활성이 1,906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경 주 동쪽에 남아 있는 성곽은 해발 265m의 명활산 정상을 둘러싼 둘레 약 6,000m의 초대 형 산성이다. 원래 토성이었다가 나중에 확대하여 석성으로 바꾸었다. 593년에 명활산성과 함께 2,000보로 개축하였다가 673년에 증축하였다는 서형산성도 있 다. 경주시내 서쪽 해발 380.9m의 선도산 정상을 둘러싼 현재의 선도산성으로 약 2,900m 의 대형 산성이다. 591년에 2,854보로 쌓고, 673년에 증축한 남산성도 있는데, 경주 시내 44) 삼국사기 지리 1 신라 45) 김낙중, 1998, 신라월성의 성격과 변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31 남쪽의 남산 북쪽 산봉우리를 둘러싼 둘레 약 3,750m의 초대형 산성이다.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은 경주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해발 668m의 정상을 둘러싼 둘레 약 7,300m의 초대형 산성이다. 이밖에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경주시내 남쪽에 남산토성과 도당산토성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명활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 1 신라에 금성 월성과 함께 후대의 왕성 중 하나로 기록된 만월 성은 둘레가 1,838보라고 하나 현재 유적이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2 백제 삼국사기 지리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위례성( 慰 禮 城 )에 수도를 정하여 건국되었고, 376년에 한성( 漢 城 )으로 수도를 옮겼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자 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 시내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536년에는 현재의 충 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인 사비(또는 소부리)로 옮긴 후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 로 인해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위례성과 한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연구자들의 견해 차이가 존 재한다. 다만 백제의 고분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획득된 유물 등을 통해 일반적으로 현재 의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지역이 오랫동안 백제의 수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림-20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몽촌토성은 높은 언덕 위에 쌓은 둘레 2,700m의 대형 토성으로, 남아 있는 성벽은 6-7m 이지만 자연지형까지 합하면 10m가 훨씬 넘는 높이이다. 약간의 언덕 지형을 이용했지만 평지성에 아주 가까운 형태이며, 인공적인 해자를 둘렀을 뿐만 아니라 자연 하천의 일부도 해자로 이용하였다. 풍납토성은 둘레 3,740m에 이르는 초대형의 토성으로 높이는 낮으면 8m, 높으면 15m 정도로 알려졌다. 한강변과 연결되어 있을 정도로 거의 완전 평지에 축조 된 평지성이며, 북쪽의 한강을 자연 해자로 삼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림-21 공산성과 공주시내 475년에 옮겨간 현재의 공주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웅진성으로 기록된 공산성 이 남아 있다. 해발 110m의 공산 정상으로부터 북쪽의 금강으로 뻗은 골짜기를 둘러싼 둘 레 2,450m의 포곡식 대형 산성이다. 백제 때는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바꾸었다. 궁궐이 있었으며, 북쪽의 금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 다

32 그림-22 부소산성과 부여읍내 536년에 옮겨간 현재의 부여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사비성으로 기록된 부소산 성이 남아 있다. 해발 106m의 부소산 정상의 작은 테뫼식 산성과 북쪽의 금강으로 형성된 작은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 결합된 둘레 2,200m의 대형 산성이다. 토성으로 이루 어져 있으며, 웅진성과 마찬가지로 북쪽의 금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산성 남쪽의 평지에는 도시를 둘러싼 둘레 약 8,000m에 이르는 토축의 초대형 나성( 羅 城 ) 이 있었던 것으로 발굴되었다. 46) 다만 나성이 도시 전체를 두른 것은 아닌데, 서쪽과 남쪽 의 금강 변에는 축조되지 않았다. (2) 지방도시와 성곽 백제의 지방도시와 성곽에 대한 기록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5부-37군-200성-76 만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47) 이것에 입각하면 백제에서는 멸망할 당시에 최소한 지방의 마지막 행정단위 200개가 성으로 편제되어 통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에는 5방( 方 )이 있으니 중방( 中 方 )은 고사성( 古 沙 城 ), 동방( 東 方 )은 득안성( 得 安 城 ), 남 방( 南 方 )은 구지하성( 久 知 下 城 ), 서방( 西 方 )은 도선성( 刀 先 城 ), 북방( 北 方 )은 웅진성( 熊 津 城 ) 이라는 기록이 있다. 48) 여기서 5방은 지방의 최고 행정 단위로 5부-37군-200성에서의 5부 다. 그런데 5방의 이름 모두 모두 성( 城 )으로 끝나 성곽을 중심으로 통치가 이루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5방인 5부와 200성 사이에 있는 군 역시 성곽을 중심으로 통치되 던 행정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 5방의 성 중 하나로 나오는 고사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기원후 18년에 쌓은 것으로 기록된 고사부리성( 古 沙 夫 里 城 )으로, 조선시대 전라도 고부군의 백제 때 이름이다.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해발 132m의 성황산 정상을 둘러싼 둘레 1,050m의 테뫼식 중형 석축 산성이다. 생활면으로부터 100m 조금 넘는 높이에 있지만 옛 고부군 지역의 대부분이 한눈에 보이며,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방어력이 높다. 그리고 5방의 성중 또 하나로 나오는 웅진성은 536년 사비로 옮기기 전까지 백제의 수도였던 현재의 공 산성이다. 그림-23 정읍군 고분면 고부리의 고사부리성 414년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58성( 城 ) 700촌( 村 )을 획 득하고 백제왕( 百 殘 主 )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 다. 49) 그리고 그 앞쪽에는 58성의 이름이 일부 지워진 것을 제외한 채 모두 나열되어 있다. 이를 통해 첫째, 백제가 성곽을 중심으로 지방 행정단위를 통치했으며 둘째, 고구려의 광개 46) 주서( 周 書 ) 이역열전( 異 域 列 傳 ) 백제에는 백제의 수도에 1만호가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7)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9년(660)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백제 48) 주서 이역열전 백제 49)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1권, 3-35쪽

33 토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58성-700촌으로, 다시 말해 1개의 성이 평균 약 12개의 촌을 통치하는 구조로 편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대해서는 성곽이 지방 행정단위를 통치하는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거나 전체의 성 곽 수를 짐작할 수 있도록 간명하게 기록해 놓은 문헌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삼국사 기 신라본기 에는 고구려본기 나 백제본기 에 비해 훨씬 많은 성곽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 삼국사기 세종실록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을 참고 할 때 고을의 이름과 동일한 성의 이름을 꽤 찾아낼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표-1인데, 그 속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표-1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나타난 성( 城 )과 고을의 이름이 같은 사례 번호 연도 출현 상황 성곽 이름 759년의 이름 일제시대 위치 축조 달벌성( 達 伐 城 ) 대구현 경남 대구군 왜인 침입 삽량성( 歃 良 城 ) 양주 경남 양산군 고구려 말갈 습격 실직성( 悉 直 城 삼척군 강원 삼척군 축조 삼년산성( 三 年 山 城 ) 삼년군 충북 보은군 축조 일모성( 一 牟 城 ) 연산군 충북 청원군 문의면 축조 답달성( 沓 達 城 ) 화령군 경북 상주시 화서면 왕 행차 비열성( 比 列 城 ) 삭정군 함남 안변군 축조 구벌성( 仇 伐 城 ) 고구현 경북 의성군 점곡면 486 수축 삼년성( 三 年 城 ) 삼년군 충북 보은군 수축 굴산성( 屈 山 城 ) 기산현 충북 옥천군 청산면 축조 도나성( 刀 那 城 ) 도안현 경북 상주군 모서면 축조 파리송( 波 里 城 ) 파리현 삼척군 원덕면 축조 미실성( 彌 實 城 ) 의창현 영일군 흥해면 축조 골화성( 骨 火 城 ) 임천현 경북 영천군 백제 가량 침입 관산성( 管 山 城 ) 관성군 충복 옥천군 주 설치 비사벌( 比 斯 伐 ) 화왕군 경남 창녕군 주 설치 비열홀주( 比 列 忽 州 ) 삭정군 함남 안변군 주 설치 달홀주( 達 忽 州 ) 고성군 강원 고성군 백제 침입 아막성( 阿 莫 城 ) 운봉현 전남 남원군 운봉면 고구려 침입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 한양군 경기 양주군 백제 침입 속함( 速 含 ) 천령군 경남 함양군 고구려 침입 칠중성( 七 重 城 ) 중성현 경기 파주군 적성면 당항성( 党 項 城 ) 당성군 경기 수원군 서신면 백제 침입 대야성( 大 耶 城 ) 강양군 경남 합천군 백제 침입 무산성( 茂 山 城 ) 무풍현 전북 무주군 무풍면 축조 장산성( 獐 山 城 ) 장산군 경북 경산군 660 고구려 침입 칠중성( 七 重 城 ) 중성현 경기 파주군 적성면 고구려 말갈 침입 술천성( 述 川 城,) 소천군 경기 여주군 대시면 661 고구려 말갈 침입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 북한산군 경기도 양주군 신라 공격 거열성( 居 列 城 ) 거창군 경남 거창군 후퇴 백성( 白 城 ) 백성군 경기 안성군 증축 사열산성( 沙 熱 山 城 ) 청풍현 충북 제천군 청풍면 축조 국원성( 國 原 城 ) 중원경 충북 충주군 축조 소문성( 召 文 城 ) 문소군 경북 의성군 축조 주양성( 走 壤 城 ) 삭주 강원 춘천군 거란 말갈 침입 동자성( 童 子 城 ) 동성현 경기 김포군 하성면

34 거란 말갈 침입 대양성( 大 楊 城 ) 대양군 경기 부천군 부평면 675 당 침입 칠중성( 七 重 城 ) 중성현 경기 파주군 적성면 첫째, 성( 城 ) 이름이 주로 전투와 관련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에 접경지대의 것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구벌성( 仇 伐 城 ) 골화성( 骨 火 城 ) 장산성( 獐 山 城 ) 소문성( 召 文 城 )과 같이 그렇지 않 은 것도 있다. 이는 신라의 성곽이 전투가 벌어지는 접경지대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곳에 도 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성( 城 )의 이름이 그대로 고을의 이름이 된다는 것은 성( 城 )의 상징성이 그만큼 컸다 는 의미다. 이는 성( 城 )이 단순히 군사 방어용을 넘어 고을 통치의 중심 역할도 했음을 보 여준다. 셋째, 759년 정비된 행정구역의 측면에서 볼 때 주-군-현뿐만 아니라 소경에도 성이 있 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신라에서는 지방의 모든 행정단위가 성( 城 )을 중심으로 통치되어 나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고구려와 백제 모두 성곽을 중심으로 지방의 행정단위를 통치했다는 점 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신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까지의 지표 조사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총괄해 볼 때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삼국 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확인된 평지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산의 정 상을 둘러싼 테뫼식의 산성,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은 아주 풍부하게 남아 있다. 표-2 박성현이 살펴본 한주 군현성의 현황 고을 이름 현재 위치 성곽 이름 성내 최고 해발고도(m) 형태 둘레(m) 해수면 생활면 한 주 하남 이성산성 포곡식 1,660 황무현 이천 설봉산성 테뫼식 1,079 거서현 용인 노고성 테뫼식 660 소천현 여주 파사성 테뫼식 1,200 황효현 여주 신지리성지 테뫼식 빈양현 양근 신원리성지 테뫼식 543 개산군 안성 죽주산성 혼합식 1,332 음죽현 이천 설성산성 테뫼식 1,095 백성군 안성 비봉산성 혼합식 714 적성현 안성 무한성 혼합식 680 사산현 천안 사산성 혼합식 750 수성군 화성 독산성 테뫼식 1,400 당은군 화성 당성 호합식 1,248 차성현 평택 자미산성 혼합식 582 진위현 평택 무봉산성 테뫼식 320 율진군 과천 곡양현 서울 호암산성 테뫼식 1,250 공암현 서울 양천고성지 75 테뫼식 소성현 인천 문학산성 테뫼식 577 장구군 (안산) (군자산성) (198) (테뫼식) 장제군 인천 계양산성 테뫼식 1,160 수성현 김포 수안산성 테뫼식

35 김포현 김포 북성산성 테뫼식 동성현 김포 동성산고성 테뫼식 분진현 (김포) 한양군 서울 아차산성 포곡식 1,038 황양현 남양주 퇴뫼산성 테뫼식 625 우왕현 고양 행주산성 테뫼식 1,000 내소군 양주 양주산성 테뫼식 1,400 중성현 파주 칠중성 테뫼식 700 파평현 (파주) 교하군 파주 오두산성 테뫼식 1,200 봉성현 파주 봉서산성 테뫼식 600 고봉현 고양 고봉산성 테뫼식 견성군 포천 반월산성 테뫼식 1080 사천현 포천 대전리산성 테뫼식 700 동음현 포천 성동리산성 테뫼식 401 * ( ) 안은 필자가 삽입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을의 통치 중심이 산성에 있었다는 견해가 1990년대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헌기록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발 굴 결과를 토대로 상당히 넓은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2001년 박성현에 의해 처 음으로 이루어졌다. 50) 그의 연구는 759년에 확정된 한주( 漢 州 ) 중 발굴조사가 가장 많이 이 루어진 남한의 경기도와 서울 지역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 중 강화도와 옹진군을 제외하고 충청남도의 사산현 1개를 포함한 총 37개 고을의 군현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시기는 500년 대 중반부터 800년대까지를 분석하였는데, 대상 지역 안에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 았다. 그림-24 황무현의 설봉산성과 소천현의 파사성 및 당은군의 당성 그림-25 장제군의 계양산성과 내소군의 양주산성 및 중성현의 칠중성 그가 말하는 군현성 은 군사적 방어나 거점 기지뿐만 아니라 일상적 통치성 으로도 기능 했다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표-2이다. 이들 산성의 형식은 대부분 테뫼식 인데, 포곡식이나 혼합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후대의 포곡식 산성에 비하면 테뫼식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가장 큰 것이 한주의 1,665m, 가장 작은 것은 진위현의 320m인데, 성의 크기는 대체적 으로 주-군-현의 순서대로 되어 있다. 크기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가장 큰 것이 라 하여도 고구려나 조선시대의 초대형 산성 입장에서 보면 대형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즉, 가장 큰 것도 중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이며, 생활면으로부터의 높이는 가장 높은 것이 290m이며, 대부분 200m 이하이다. 또한 대부분 고을의 중심부에 위치하 50) 박성현, 2001, 新 羅 郡 縣 城 과 그 성격 - 6-8세기 漢 州 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36 며, 고을 대부분의 지역이 한눈에 조망된다. 심봉근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기초로 하여 경상도 남해안을 대상으로 성곽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출간하였는데, 51) 성곽의 내용을 자세하게 수록했기 때문에 사례의 수가 많지는 않 다. 그 중에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을의 통치성으로 진해 구산성지, 밀양 추화산성, 사천 성황당산성, 거제 폐왕성지와 다대산성지 등 총 5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정리 하면 표-3과 같다. 표-3 심봉근이 살펴본 고대의 통치성 고을 이름 현재 위치 성곽 이름 성내 최고 해발고도(m) 해수면 생활면 형태 둘레(m) 완포향 52) 창원시 구산성 테뫼식 350 밀성군 밀양시 추화산성 테뫼식 1,430 사수현 사천시 성황당산성 테뫼식 1,109 거제군 거제시 폐왕성 테뫼식 550 남수현 거제시 다대산성 테뫼식 395 앞의 표를 보면 5개의 고을 통치성이 모두 테뫼식이며, 가장 큰 것은 추화산성의 1,430m 이고 가장 작은 것은 완포향의 350m다. 생활면으로의 높이는 m에 걸쳐 있으며, 대체적으로 고을의 가운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한눈에 조망된다. 따라서 박성현이 경기도와 서울을 대상으로 분석한 것과 거의 동일한 결과다. 그림-26 밀양의 추화산성과 사천의 성황당산성 조선시대의 지리지에는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전기의 고을 이름과 동일한 이름의 성곽이 다수 존재하는데, 이들은 모두 통치성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박성현이 연구했던 사 례 중에도 죽주산성 사산성 당성 계양산성 수안산성 동성산고성 행주산성 칠중성 고봉산성 등이 그런 경우이며, 심봉근의 연구에 나오는 5개의 성곽 중 추화산성도 마찬가지다. 삼국사 기 신라본기 에 430년 축조된 것으로 기록된 삼년산성은 고을의 이름과 같을 뿐만 아 니라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삼년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또한 261년에 축조한 것으 로 기록된 달벌성도 고을의 이름과 같은 성곽 중의 하나인데, 현재도 거의 동일한 이름인 달성으로 부르고 있다. 그림-27 보은의 삼년산성과 대구의 달성 지금까지 살펴본 백제와 신라 및 통일신라 통치성의 특징을 바탕으로 지리지의 기록, 고 51) 심봉근, 1995, 韓 國 南 海 沿 岸 城 址 의 考 古 學 的 硏 究, 학연문화사 52) 통일신라시대 향 부곡

37 고학적 유물 발굴의 조사 결과, 산성 유적의 위치 정보 등을 살펴보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 면 동일한 유형의 성곽을 대부분 찾을 수 있다.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남도 진주의 진주성은 자연 절벽을 이용한 소형 요새성이고, 산청의 남산성은 조선시 대 중심지의 바로 남쪽에 있는 소형의 테뫼식 산성이며, 단성의 백마산성은 조선초의 중심 지 바로 건너편에 있는 100m 이상의 절벽 위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충청북도에서 유 명한 산성인 단양의 적성은 조선시대의 중심지 바로 뒷산에 있는 테뫼식의 중형산성이고. 영춘의 온달산성 역시 조선시대의 중심지에서 아주 가까운 테뫼식의 소형 산성이다. 충청남 도의 서천에 있는 남산성은 조선초기 서천읍성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중심지가 있었던 테뫼 식의 소형 산성이고, 청양에 있는 우산성 역시 조선시대 중심지의 바로 북쪽에 있는 테뫼식 의 중형 산성이다. 그림-28 단성의 백마산성과 단양의 적성 및 서천의 남산성 이들 지방의 통치성 중 2,000m를 넘어가는 대형산성은 충청남도 예산에 있던 옛 대흥군 의 통치성인 둘레 2,450m의 임존성 정도에 불과하다. 이 성은 백제 부흥군의 중심성 역할 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상대적으로 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임존성을 제외하면 2,000m를 넘어가는 대형 산성의 통치성이 조사된 바가 없다. 다만 통치성이 아니면서 초대형 산성인 곳으로 672년에 축조된 경기도 광주시 의 남한사성 이전에 있었던 주장성이 있는데, 둘레가 7,545m나 되는 초대형 산성이었다.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신라와 백제 지역의 성곽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고 려해야 한다. 첫째, 서로 접촉하며 충돌할 수 있는 강한 세력이 한나라의 낙랑군이나 대방군 정도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벌인 기록도 별로 나오지 않는다. 둘째,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과 같은 많은 도시국가가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공 존했던 조건 속에서 세력을 넓혀 나간 후 영역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도시국가끼 리, 또는 도시국가 연합체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대규모 장기전이 아니라 중소규모의 중단기전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셋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통합되어 300년 이상 경쟁을 벌였지만 어떠한 나라도 단독으로 다른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세 나라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시기에도 대규모의 침입과 그것에 대한 장기 저항전의 상황은 나타나기 힘들었고, 또 실제 로 그런 일은 없었다. 넷째, 신라와 백제 모두 많은 도시국가를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정복하면서 영역국가 를 이루었기 때문에 지방도시의 경우 정복-피정복의 갈등 관계가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 다. 이와 같은 상황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신라가 수도 출신자와 지 방출 신자를 차별했기 때문에 지속되었다. 신라 왕성 중의 하나였던 월성은 도시국가 시기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평 지에 있는 둘레 1,841m의 중형 크기의 성곽이지만 하천과 지형 및 높은 성벽을 이용하여

38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 반대로 대규모의 장기전에는 규모가 너무 작아 적합하지 않다. 비록 진한 변한지역에서는 신라의 월성 이외에 도시국가의 성곽 유적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다른 도시국가 역시 월성처럼 중소규모의 단 기전에 강한 성곽의 형태를 가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00년을 전후하여 신라가 확실한 영역국가를 이룬 이후 전투의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300년대와 400년대는 왜( 倭 )가 수도까지 공격하여 월성이나 명활성을 포위 공격하는 일이 꽤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규모가 작고 평지에 있는 월성만으로는 방어하 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였고, 그 결과 403년 431년에 왜의 포위 공격의 대상이 된 대형의 명활산성을 축조하여 활용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에 비하면 이러한 전투도 대규모의 장기전 양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중소규모의 중단 기전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 초기의 수도에 있는 둘레 2,7000m의 몽촌토성과 둘레 3,740m의 풍납토성 역시 도 시국가 시기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두 성 모두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평지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장기전으로 대항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주변에 초대형 산성이나 대형 산성이 발견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두 성 모두 중소규모의 단기전이 일반화된 상황 속에서 축조 유 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75년 고구려의 대규모 공격에 백제의 수도가 쉽게 함락된 것은 중소규모의 단기전을 대 비하여 축조한 성곽이었던 점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같은 해 수도를 옮긴 웅진성이 비록 초대형은 아니지만 2,450m의 대형 산성이 된 이유가 고구려의 대규모 공격에 수도가 쉽게 함락된 경험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536년 수도를 옮긴 사비성의 부소산성 역시 둘레 2,200m의 대형 산성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와 백제 나아가 통일신라는 중 소형의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 중심의 도시를 기초로 지방을 통치해 나갔다. 이는 첫째, 수많은 도시국가가 경영했던 성곽의 전통 을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며 둘째, 지방 출신자에 대한 차별 때문에 나타난 갈등 관계가 지 방 통치에서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했으며 셋째, 그 결과 영역국가로 성장한 후 더 작은 단 위로 지방 행정구역을 나눌 때도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강한 성곽 중심의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와 백제 지역에서는 둘레 3,000m를 넘는 초대형 산성이 아주 적은 숫자만 발견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신라 수도의 주변에 있는 둘레 6,000m의 명활산성과 둘레 7,300m의 부산성 및 둘레 3,750m의 남산성, 그리고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둘레 약 7,545m의 주장성 4개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 지역에 초대형 산성이 많이 축조된 것 과 대조되는 현상으로 신라와 백제 지역에선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을 대비할 필요성이 적었음을 보여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4개의 성이 축조된 시기를 살펴보자. 가장 큰 주장성은 672년에 축조되고, 그 다음으로 큰 부산성은 663년에 축조된다. 남산 성은 591년에 신축되었다가 673년에 증축되며, 3,000m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제외된 2,900m의 서형산성도 593년에 개축되었다가 673년에 증축된다. 663년에서 673년 사이는 당나라와 대규모 전면전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가 현실화되는 시기다. 따라서 신라 지역에 서 초대형 산성이 축조되어 남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당나라의 대규모 장기 침입에 대 한 방어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시기로 들 수 있는 것이 남산성 서형산성이 개축되는 591년 593년인데, 554년

39 에 수축했던 명활산성도 593년에 개축된다. 554년에서 593년 사이는 신라가 550년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동시에 받던 시기다. 따라서 수세로 몰릴 경우 수도까지 공격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던 상황이다. 신라에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초대형 산성 또는 대형 산성을 수도 주변에 배치하게 된 것이다. III. 한국 근세의 국가와 성곽 1. 후삼국의 경쟁과 고려의 건국 1) 역사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 당나라와의 대규모 전면전 을 승리로 이끈 이후 약 220여 년간 번영하다가 890년대부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외적의 침입과 정복에 의해 멸망하지 않더라도 세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어떠한 국가도 건국기-번영기-쇠퇴기를 거쳐 결국은 멸망했다. 따라서 통일신라가 220여 년간의 번영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단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로서는 통일신라의 쇠퇴 이후 어떠 한 상황이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통일신라 체제가 갖고 있던 특 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모순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통일신라는 지방 출신자에 대한 차별과 수도 출신자 53) 에 대한 우대를 바탕으로 모 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철저한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하였다. 이는 작은 도시 국가였던 신라가 진한과 변한지역의 많은 도시국가, 나아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 려를 정복 통합하면서 나타난 성격이다. 정복 세력이 정복된 세력을 차별하는 구도는 세계사 속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역시 특이한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통일신라에서 차별받던 지방 출신자들은 통치체제가 강고할 때는 그것을 수용하여 적응하려 하지만 흔들린다면 언제라도 차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수도 출신자를 우대하던 신분제인 골품제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 사이에 관직의 획득이나 승진을 비롯하여 사회 정치적 모든 측면에서 엄격한 구별을 전제로 운영되 었다. 이에 따라 국가 최고의 관직에는 진골만 올라갈 수 있었고, 6두품은 2류 지배층으로 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6두품 역시 통치체제가 강고할 때는 그것을 수용하여 적응 하려 하지만 흔들릴 경우 신분적 차별로부터 벗어나 최고 신분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를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다. 셋째, 국가의 중요 사안에 대해 왕 단독이 아니라 다수의 귀족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일 을 처리하는 전통이 강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된 작은 도시국가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으 로 그리스 도시국가의 민주정치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사 속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의사결정체제다. 이런 전통은 귀족연합체제적 성격을 강화시켜 왕의 절대 권력 과 장자 상속제 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왕위 계승권자의 범위가 넓어져 왕 53) 수도 출신자 중에서 진골과 6두품 계통만 성( 姓 )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5두품 이하의 수도 출신자뿐만 아니라 지방 출신자 누구도 성( 姓 )을 사용할 수 없었다

40 위 계승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여러 세력이 경쟁함으로써 지속적인 내부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표-4 통일신라의 왕위 계승 구분 왕명 재위기간 제30대 문무왕 661~681 제31대 신문왕 681~692 제32대 효소왕 692~702 제33대 성덕왕 702~737 제34대 효성왕 737~742 제35대 경덕왕 742~765 제36대 혜공왕 765~780 제37대 선덕왕 780~785 제38대 원성왕 785~798 제39대 소성왕 798~800 제40대 애장왕 800~809 제41대 헌덕왕 809~826 제42대 흥덕왕 826~836 제43대 희강왕 836~838 제44대 민애왕 838~839 제45대 신무왕 839 제46대 문성왕 839~857 제47대 헌안왕 857~861 제48대 경문왕 861~875 제49대 헌강왕 875~886 제50대 정강왕 886~887 제51대 진성왕 887~897 제52대 효공왕 897~912 제53대 신덕왕 912~917 제54대 경명왕 917~924 제55대 경애왕 924~927 제56대 경순왕 927~935 통일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힘이 강할 때에는 지방 세력의 반란 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제35대 경덕왕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갈등이 강화되면서 진골 귀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큰 경우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768년 김대공의 난과 96각간( 角 干 )의 반란 속에서 제36대 혜공왕이 살해되었다. 822년에 는 왕위 계승 경쟁에서 실패한 김헌창이 9주 중의 하나인 웅천주에서 국호를 장안( 長 安 ), 연호를 경운( 慶 雲 )이라 하여 반란을 일으켜 많은 지역을 장악했다가 실패하였다. 838년에는 제44대 민애왕이 제43대 희강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839년에는 제45대 신무왕 역시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장보고( 張 保 皐 )가 전라남도 완도의 청해진( 淸 海 鎭 )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커지자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여 846년 봄에 그를 살해하고 청해진을 혁파하였다. 이 외에도 왕위 계승이 적자에게 이루어지 않은 경우는 더 많은데, 그 결과 제36대 혜공 왕부터 신라가 멸망하는 제56대 경순왕까지 170년 동안 21명의 왕이 있었다. 평균 재위 기 간이 9.5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재위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는 왕도 4명이나 되었다. 이와

41 같은 내분이 지속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치도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제51대 진성왕 ( ) 때인 889년부터 지방 세력과 중앙 정치에 불만을 품은 6두품을 중심으로 본격 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후 주-군-현과 소경의 통치성을 장악한 수많은 지방 호족( 豪 族 )들 은 상호 경쟁하였고, 그 결과 영토가 축소된 신라와 새로 일어난 후백제 및 후고려의 세 국 가로 정립되면서 본격적인 후삼국시대가 된다. 현재의 전라남도 지역에 파견된 무장이었던 견훤( 甄 萱, )은 892년에 여러 성을 공략하고 9주 중의 하나인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는다. 이어 900년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인 완산주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후백제를 건국한다. 승려였던 궁예( 弓 裔,?-918)는 891년에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에 있던 죽주의 호족 기훤 의 부하로 있다가 892년에는 현재의 강원도에 있던 북원경( 北 原 京 )의 호족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이어 독자적인 군사력을 키워 898년에 양길을 물리쳤고, 901년에 현재의 경기도 개성을 수도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고친 후 현재의 강 원도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친다. 현재의 북한 개성특별시 지역의 호족이었던 왕건은 895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이후 903년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는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 지역을 점령하 는 등 많은 공을 세운다. 이에 힘입어 913년에 왕 다음으로 높은 시중이 되었고, 918년에 는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후 919년에 수도를 개성으로 옮긴다. 후삼국의 경쟁은 세 나라의 힘의 강약에 따라 수많은 호족들의 이합집산을 가져왔고, 결 국에는 후백제와 후고구려 마진 태봉 고려의 2파전으로 진행되었다. 후백제는 927년에 신라 의 수도를 점령하여 제55대 경애왕을 죽이고 제56대 경순왕을 세웠으며 현재의 대구광역시 에서 왕건이 친히 이끌던 5천명의 고려군을 거의 몰살시키는 등 우위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930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지역에서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백제군 8천 여명 이 사망하는 대패를 겪은 후 고려가 확실한 우위에 서게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가 고려에 자진하여 항복하였고,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을 계기로 고려에 투항하였다. 이어 936년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지역의 일리천에서 왕건의 고려군 8만7천 여명과 신검의 후백제군 이 마지막 대전투를 벌였는데, 고려군이 승리하여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후삼국시대가 끝나 고 고려시대로 접어든다. 2) 통치 체제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의 지방 출신자에 대한 차별, 강한 중앙집권제, 골품제에서 진골 귀족의 독점 체제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방 출신자나 골품제에서의 6두품 등 통일신라의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상당수의 세력들이 주-군-현과 소경을 장악하면 서 호족( 豪 族 )으로 성장했다. 이들 호족은 수도가 아닌 지방의 일정 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통치권을 장악한 세력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강한 중앙집권제를 당연히 거부하였고, 이는 후백제나 고려의 영향권 아래 편입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경쟁은 각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 세력들을 얼마나 확보하느 냐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호족 세력들은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 나타나는 힘의 강약을 잘 파악한 후 어느 쪽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갈 것인지를 끊임없이 판단하며 선택했다. 승리자 의 편에 서는 것이 결국엔 자신들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보전하고 그 지위를 자손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왕건은 호족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독자적인 통치권까지 빼앗는

42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호족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포섭하는 연합의 방식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각 지역의 호적과 결혼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둘째, 신라에서 진골과 6두품 귀 족만 사용할 수 있던 성씨를 호족들이 사용하는 현상을 적극 활용하여 왕이 직접 성씨를 내 려주는 사성( 賜 姓 ) 정책도 실행하였다. 셋째, 각 지역 호족들의 충성도나 힘의 크기에 따라 호족의 관등과 고을의 이름을 바꾸어 견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림-29 고려 초기의 통치체제 후삼국시대의 이러한 흐름은 고려의 통치 체제를 규정짓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936년 후백제와의 대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지만 왕건은 지방관 을 직접 파견하여 다스리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대신 각 지역의 호족들을 견제 감시하기 위한 몇몇 장치들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 사심관제도( 事 審 官 制 度 )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항복해 오자 그를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된 제도로,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자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호족의 통치를 감시 통제하였다. 54) 둘째, 기인제도( 其 人 制 度 )는 지방 호족의 자제가 중앙에 올라와 일정 기간을 거주하면서 중앙 기관에 복무하거나 기타 자기 고을의 통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야 출신 지역에서의 신분적 특권을 인정하는 인질 제도였다. 55) 고려에서 처음으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으로부터 46년이 지난 982년이었다. 하지만 이 때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은 12목( 牧 )에 불과하였으며, 그 권 한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수많은 고을을 감시 통제하는 역할로 제한되어 있었다. 2. 고려의 번영과 멸망 그리고 조선 1) 역사 고려는 918년에 건국되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조선이 건국되는 1392년까지 474년 동안 멸망하지 않고 왕조를 유지하면서 번영했다. 하지만 내적 정변이 많이 일어났 을 뿐만 아니라 거란 몽골 왜구 등의 외적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후삼국시대에 생겨난 고려적 특징이 조금씩 변해갔으며, 고려가 멸망할 즈음에는 54) 고려사 권75 지29 사심관 55) 고려사 권75 지29 기인

43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나라로 변모해 있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고려의 첫 번째 시련은 거란의 대규모 침입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916년에 건국된 거란의 요 56) 나라는 926년 발해( 渤 海 ) 57) 를 멸망시키면서 고려와 국 경을 접하게 되었다. 993년에 요나라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송과 연합하고 있는 고려에 대 한 1차 침략을 감행하는데, 서로 협상을 벌여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와 사대 관 계를 맺는 대신 압록강 이남의 땅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는 합의를 이뤄내고 물러간다. 이 어 1010년에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략을 감행하여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시켰으며, 1018년에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략을 감행하여 수도인 개경까지 이르렀지만 함락시 키지는 못하고 크게 패하여 돌아갔다. 이후 고려는 150년 이상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하였는데, 1126년의 이자 겸의 난 과 1135년의 묘청의 난 이 일어났지만 정부군에 의해 모두 진압되면서 고려의 통 치체제 자체를 흔들지는 못했다. 1170년 무신의 난 이 일어나 1270년까지 약 100년 동안 무신들이 왕을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을 만큼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왕조를 멸망 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지는 못했다. 내부적으로 권력의 주체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 났지만 통치체제라는 큰 틀에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려에게 가장 큰 시련이 닥쳤을 뿐만 아니라 변화 역시 컸던 시기는 1231년부터 1351 년경까지 약 120여 년 동안 지속된 세계 최강의 몽골 침입과 원나라의 간섭기였다. 몽골의 1차 침략은 1231년에 시작되었는데, 수도인 개경까지 포위했다가 강화를 맺고 물 러갔다. 하지만 고려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며 장기 항전의 태세를 취하자 1232년에 2차 로 침략하였는데, 경기도 용인의 처인성에서 몽골의 대장 살리타이가 사망하자 물러났다. 1235년 3차로 침략을 하여 4년간 고려의 전국을 황폐화 시켰으며, 1239년에 고려 왕의 입 조( 入 朝 )를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1251년 고려왕이 입조를 하지 않자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요구하며 4차 로 침략하였는데, 고려 왕자의 항복 표시로 물러갔다. 1254년 고려 왕이 직접 입조할 것과 수도를 개성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며 다시 5차로 침략하여 고려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 1255년에 6차 침략을, 1257년에 7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려는 1259년에 최종적인 항복을 하였고, 1270년에 완전 항복의 표시로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옮겼다. 39년 간 지속된 몽골의 침략은 고려의 국토 전체를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체 제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이후 80여 년간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 나라의 복속국이 되어 왕의 교체까지도 원나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원 간섭기를 겪게 된 다. 또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원나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곽의 축조나 군군사력의 증강 등은 전혀 이룰 수가 없었다. 원나라의 군사력에 고려의 운명을 맡겼는데, 한편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이룬 몽골 제국의 우산 아래 상대적인 평화기를 보냈다. 1350년대에 일어난 한족의 대대적인 반란과 1368년 명나라의 건국으로 원나라가 북쪽으 로 쫓겨 가자 고려에서도 대대적인 반원 정책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 던 구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갈등이 강하게 진행되고, 외부로부터는 홍건적과 왜구의 지 속적인 침략을 받는다. 홍건적은 1350년대 원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한족의 반란군으로 그 일부가 원나 56) 요( 遼 ), 916년-1125년 57) 698년-926년

44 라의 군대에 쫓겨 1357년에 고려를 침공하여 서경까지 점령하였다가 패퇴하였다. 1361년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쫓긴 홍건적 일부가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였으며, 수도인 개성까 지 함락시켜 고려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기까지 하였다. 1362년 고려군 20만명의 반격을 받 아 홍건적은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하였다. 왜구는 일본의 큐슈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둔 해적인데, 일본 국내의 혼란을 틈타 중국과 조선의 해안을 노략질하였다. 1200년대 중반부터 왜구의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고려의 해안 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부터이다. 특히 1374년에서 1388년 사이에 가 장 심했는데, 이 시기 기록에 나타난 것만 378회나 되었다. 왜구는 평안도에서 함경도까지 거의 모든 해안을 노략질 하였으며, 심할 경우 경상도 전라 도 충청도뿐만 아니라 강원도와 경기도의 내륙까지도 침략하였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 바로 남쪽의 강화도와 교동도에서도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었으며, 규모는 몇 십 명의 소규모로부 터 500척과 1만 명 이상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까지 다양하였다. 왜구와의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훨씬 많을 정도로 왜구의 전투 력은 강했고, 그만큼 피해도 막심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원 간섭기 동안 약화된 방어체 제가 있는데, 군사력 자체뿐만 아니라 산성 등의 성곽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왜구의 침략 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58)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의 방어 대책이 견고해지면서 왜구에 대한 토벌 작전이 성공 을 거두기 시작한다. 육지에서는 1376년에 최영이 충청도의 홍산에서, 1780년에는 이성계 가 전라도 운봉의 황산에서 대규모의 왜구를 물리쳤다. 바다에서는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하 는 대포를 제작하여 1380년에 금강 하구에서 왜구 500척을 전멸시켰다. 1388년에는 박위 가 전선 100척을 동원하여 쓰시마를 정벌하였으며, 1419년 이종무가 전선 220척과 1만7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쓰시마를 정벌하면서 왜구의 약탈은 거의 없게 되었다. 1350년대부터 나타난 반원정책, 홍건적과 왜구의 지속적인 침략에 대한 방어 과정 속에 서 신진 사대부란 문신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새로운 무장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로 힘을 결합하여 개혁을 주도하였는데, 고려를 개혁하여 새로운 고려를 만들어야 한다는 세력과 아 예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야 한다는 세력 2개로 나누어져 경쟁하였다. 1388년 명나라와의 충돌 과정에서 새로운 왕조를 열어야 한다는 세력이 정권을 잡았고, 이 들에 의해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이 건국된다. 조선은 건국 이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몇 번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국가체제를 뒤흔들 만큼의 큰 내란이나 대규모 외적의 침입 없이 약 200년간의 평화시대를 구가하였다. 하지 만 1592년 일본 전국시대( 戰 國 時 代 )의 분열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 信 秀 吉 )의 20만 대군에 의해 침략을 받아 수도가 20일 만에 함락당하고 왕이 명나라와의 국경선에 있는 의 주까지 피난 가는 등의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 1년도 되지 않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의해 밀려난 일본군과 5년 동안 소강상태 를 유지하다가 1597년 다시 대규모 침략을 받아 남부 지방의 다수가 점령되기도 하였다.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조명 연합군의 공세에 의해 일본군이 물러감으로써 8 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조선이 입은 피해는 엄청나게 컸는데, 이 전쟁을 조선에 서는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재건의 길을 걸었지만 만주에서 건국한 청나라 59) 의 침략을 또 받 58) 최종석, 2007, 고려시대 治 所 城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쪽 59) 만주의 여진족은 1616년에 후금( 後 金 )을 세웠고, 1636년에 대청( 大 淸 )으로 국호를 바꾼다. 이 글에서는 한국

45 게 된다. 1627년 후금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관계를 파괴하고자 3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 선을 1차로 침략하여 평안도를 점령하였는데,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으로 물러갔다. 하지만 조선이 계속 명나라와의 연합 관계를 유지하며 청나라와 결사 항전의 자 세를 유지하자 1636년에 청나라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대한 2차 침략을 감행한 다. 그 결과 10일도 채 되지 않아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조선의 임금 은 45일 만에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한 후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는다. 청나라는 1644년 내란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지역을 장악한 후 반란을 진압하고 중국대 륙을 완전히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 팽창 정책을 지속한다. 조선은 청나라와 사대관 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초기에는 복수를 하고자 내부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1600년대 후반부터는 청나라의 현실적인 힘의 우위를 수용하여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후 서구와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200년 이상 동안 국가 체제를 뒤흔들 만한 반란이나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구가한다. 2) 통치 체제 고려에서 지방관이 처음 파견된 것은 983년인데, 현재의 경기도에 양주( 楊 州 ) 광주( 廣 州 ), 현재의 충청남북도에 충주( 忠 州 ) 청주( 淸 州 ) 공주( 公 州 ), 현재의 경상남북도에 진주( 晋 州 ) 상 주( 尙 州 ) 현재의 전라남북도에 전주( 全 州 ) 나주( 羅 州 ) 승주( 昇 州 ), 현재의 황해도에 해주( 海 州 ) 황주( 黃 州 ) 등 총 12개의 고을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이 수도-12목-고을 3단계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지만 다만 세 번째 단계의 고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 의 직접 통치는 2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고려적 지방 통치 체제가 완성된 것은 1018년으로 가장 큰 단위로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교주도 서해도 등 일반 행정 중심의 오도( 五 道 )와 북계 동계 등 군사 중심의 양계( 兩 界 ) 즉, 전국을 7개로 나누었다. 그 밑으로 여러 고을을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 主 縣 )과 지방관이 파 견되지 않은 속현( 屬 縣 )으로 나누었으며, 속현은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의 감시와 통제를 받 았다. 이에 따라 고려는 전국이 수도-오도양계-주현-속현이라는 4단계의 체제로 정비되었다. 하지만 첫째, 네 번째 단계의 속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고 둘째, 오도에 파견된 안 찰사와 양계에 파견된 병마사가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을 직접 지휘 감독하기보다는 단지 감 시하는 역할에 머물렀기 때문에 중앙의 직접 통치는 수도-주현의 2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 볼 수 있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의 수가 116개였던 반면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404개였다. 따라서 전체 520개의 고을 중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의 비율은 23.3%에 불과하 였다. 그리고 지방관의 지위도 높지 않아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이라 하여도 호족들의 통치 를 감시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따라서 고려 전반기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지방 호족의 통치권이 상당히 강했던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에서 일반화된 이름인 청나라로 통일한다

46 그림-30 고려 전기의 통치체제 고려 중반기인 1102년 24개의 고을에, 1108년에 41개의 고을에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속 현의 수가 줄기 시작했고, 무신의 난 이 일어난 직후인 1172년에 대거 53개의 고을에 지방 관을 파견하였다. 이후 꾸준하게 지방관을 파견하여 고려 말까지는 총 170개의 속현에 지 방관을 보내 주현으로 만들었으며, 대신 속현의 수는 160개로 줄어들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속현에 지속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1413년에는 당시까지 지방 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의 독자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주현의 땅으로 만드는 조치가 취해졌 다. 60) 주현의 중심지에서 먼 일부의 속현이 140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기도 했지만 1500년 대를 지나면서 속현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그림-31 조선의 통치체제 또한 지방관의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고을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도 강화되었는데, 1413년 고을에 파견된 지방관 중 가장 낮은 감무( 監 務 )의 지위를 한 단계 높은 현감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인 조치다. 61) 그리고 1414년 전국을 8도로 재정비한 후 그곳에 파견된 최 고 지방관인 관찰사 62) 의 지위를 대폭 강화시켜 고을의 지방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 권한 60) 이수건, 1989,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61) 이수건, 1989, 앞의 책 62) 조선전기에는 관찰사가 주재하는 고을이 정해져 있지 않아 각 고을을 순방하다가 1600년대에 들어서 영구 상주하는 감영( 監 營 )이 만들어진다. 이 때부터 관찰사는 도 전체의 책임자임과 동시에 감영이 소재한 고을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였다

47 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한 완전한 중앙집권체제의 국 가가 되었으며, 수도-감영-고을의 3단계 통치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는 1895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까지 큰 틀이 바뀌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3. 한국 근세의 성곽과 특징 1) 수도와 성곽 (1) 후삼국시대 통일신라의 혼란과 후삼국의 정립 및 치열한 경쟁은 수도의 건설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후삼국의 주역이었던 견훤 궁예 왕건은 지방 차별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한 신라와 는 전혀 다른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고, 그러한 희망을 수도의 건설에 상징적으로 표현하였 다. 첫째, 900년에 현재의 전주인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기존의 도 시를 토대로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나갔다. 통일신라시대 지방도시는 주-군-현과 소경을 막 론하고 고을 대부분의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9주의 하나였던 완산주 역시 해발 306m인 현재의 승암산 정상 을 둘러싼 둘레 1,588m의 테뫼식 산성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견훤은 이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수도로 삼았다. 63) 현재 이 산성을 동고산성이라 부르고 있으며, 완산주의 또 다른 이름인 전주성( 全 州 城 )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백제 때 궁전의 유적으로 판단되는 대규모 건물터 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규모나 구체적 구조 등을 알 수 있는 유적에 대한 발굴이 아 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림-32 동고산성과 왕궁터 둘째, 901년 현재의 개성을 수도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이미 896년부터 왕건 에게 수도의 건설을 명한다. 왕건은 당시 사찰 등에서 유행하던 풍수의 원리를 이용하여 북 쪽의 송악산(489m)을 시작으로 하천이 빠져나가는 동남쪽을 제외하면 사방이 거의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 지형에 성곽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 때 둘레 2,170m의 궁성과 둘레 4,700m의 왕성 64) 이 축조되었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분지형의 산과 산줄기를 주산, 좌청룡, 우백호, 안산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출처: 개성전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33 고려 수도 개성의 도시구조와 성곽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사방이 모두 경사도가 심해 방어력이 뛰어난 분지 지형이 아니라 63) 전영래, 2001, 후백제와 전주,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전북전토문화연구소, 주류성, 11-50쪽 64) 왕성은 958년에 황성( 皇 城 )으로 개칭되었다

48 남쪽과 동남쪽이 지나치게 낮아 높은 성곽이나 해자를 두르지 않으면 방어력이 상당히 떨어 지는 분지 지형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곽의 높이가 높아야 9.5m이고 5m도 안되 는 곳이 많으며 해자를 두르지도 않아 실제로 강한 적의 집중 공격을 받았을 때 수도 성곽 의 방어력은 거의 없게 된다.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수도 성곽의 방어력이 아주 낮은, 심하게 말하면 강한 적의 공격 에 거의 방어력이 없는 경우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방어력이란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도 개성은 분명 특이한데, 그것은 도시 건설의 책임자였던 왕건이 물리적 방어력보다 는 왕이 하늘의 권위와 연결된 최고의 존재라는 풍수적 권위 표현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신라 말 사찰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풍수는 지기( 地 氣 )가 풍부한 좋은 땅을 찾는다는 논리 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권위 있는 땅을 찾는 사상이었다. 세계 대다수의 수도에서는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고 웅장한 궁궐을 지어 자연 최고의 존재인 하늘의 권위가 왕의 권 위와 연결된다는 2단계의 표현 방법을 구사하였다. 반면에 개성에서는 하늘=산=궁궐의 일 체화된 상징 경관의 구성을 통해 자연 최고의 존재인 하늘의 권위가 산을 매개로 하여 왕의 권위와 연결된다는 3단계의 표현 방법을 적용하였다. 이 방법에서 궁궐은 시각적으로 하늘 과 맞닿은 산과 일체화된 존재가 되기 위해 산 밑에 자리하게 되며, 크기도 상대적으로 작 아진다. 65) 셋째,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개성을 수도로 잡았던 궁예는 904년에 현재의 철원으로 수 도를 옮긴다. 철원은 한국의 내륙에서 가장 평지가 넓은 지역 중의 하나이고, 궁예가 세운 궁궐과 도시는 이러한 철원 평야의 거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사방이 거의 산 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 지형에 자리 잡은 개성과 전혀 다르며, 또한 산성을 중심으로 도 시를 건설한 후백제의 수도와도 공통점이 거의 없다. 궁예의 철원 수도는 현재의 비무장지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충분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인공위성에 잡힌 도성의 흔적을 토대로 볼 때 둘레가 궁성 1,800m, 내성 7,700m, 외성 11,700-12,500m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3중성 형태로 보고 있 다. 또한 궁성이 거의 완전 평지의 사각형 도시 북쪽 정 중앙에 있을 뿐만 아니라 궁성-내 성-외성의 남문을 잇는 직선의 주작대로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66) 그림-34 궁예의 철원 수도와 성곽 이는 중국적 도시처럼 평지에서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고 웅장한 왕궁을 지어 하늘의 권위가 왕의 권위와 연결된다는 2단계적 권위 표현 방식의 형태를 띤 것이다. 성벽의 높이 나 해자에 대한 확실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잠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거의 완전 평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산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후백제의 수도에 비해서는 군사적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 918년 태봉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919년에 자신이 주도하여 만든 개 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다. 이는 궁예가 지향한 국가에 대한 부정이며, 궁예가 수도에 표 현하고자 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65) 이기봉, 2008, 조선의 도시, 권위와 상징의 공간, 새문사, 쪽 66)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 : 지표조사 보고서, 35-37쪽

49 후삼국시대는 기존 통일신라의 수도에 세 개가 더 만들어져 총 4개의 수도가 있게 되었 고, 도시의 구체적인 입지나 구조 및 권위 표현의 방법에서 4개의 수도 사이에 공통점이 별 로 없었다. 이는 첫째, 지방 출신자를 철저히 차별했던 통일신라와는 다른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전반적인 분위기가 수도의 건설에서도 나타난 것이고 둘째, 견훤 궁예 왕건 사이의 경 쟁이 군사적 공격과 방어뿐만 아니라 이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도의 건설에서도 나타 났음을 보여준다. (2) 고려와 조선 후삼국시대는 왕건의 고려군 8만7천명과 신검의 후백제군이 경상북도의 구미시 지역에서 마지막 대전투를 벌이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후삼국시대의 한 나라였던 고려를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로 만들었고, 후백제와 신라의 수도는 수도의 지위를 상실한다. 고려는 922년부터 개경(개성)과 서경(평양) 등 2개의 수도 체제를, 987년에 동경(경주)을 합해 1년에 네 달씩 왕이 돌아가며 정사를 보아야 한다는 관념을 표현한 3개의 수도 체제 를 만들었다. 1067년에는 남경(서울)을 설치하면서 개경-서경-남경의 새로운 세 개의 수도 체제가 형성된다. 하지만 서경과 남경으로 왕이 옮겨가서 정사를 본 횟수가 적고 기간이 짧 으며 동경으로는 왕이 옮겨 정사를 본 적이 없어 실질적인 수도로는 개경이 유일했다고 보 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몽골의 침입에 대한 장기 항전을 위해 1232년에 수도를 옮겼던 강 화도는 1270년에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기까지 39년 동안 유일한 수도의 역할을 하였 다. 후삼국시대 개성에는 궁성과 왕성 2개가 축조되어 있었는데,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가 황 폐화되자 1,009년에서 1,029년 사이에 둘레 23,000m의 외성이 축조된다. 고려 말에는 외 성이 너무 커서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1391년부터 2년에 걸쳐 11,200m의 내성이 축 조된다. 이와 같은 외성과 내성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지형이 낮은 곳의 성벽을 여전히 높게 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자 역시 만들지 않아 강한 외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은 약했 다. 그리고 실제로 대규모 외적의 침입 때 수도를 방어한 적이 없다. 고려의 수도를 이해할 때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후삼국의 통일과 함께 고려의 수 도 개성의 조영과 권위 표현에 핵심적 논리 역할을 했던 풍수가 이제 왕과 관련된 공간의 권위를 표현하는 유일한 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에서는 천도 논의가 다른 왕조에 비 해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1135년의 묘청의 난 처럼 천도 논의를 이데올로 기적 토대로 일으킨 한 반란도 있었는데, 항상 풍수 논리가 개입되어 있었다. 또한 1067년 에 신설된 남경과 1232년에 옮겨간 강화도의 수도 역시 개성과 비슷한 지형에 비슷한 구조 로 만들어졌는데, 모두 풍수에 기초하여 도시의 위치가 정해지고 구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 다. 그림-35 고려의 강화 수도와 성곽 이렇듯 고려에서는 수도와 관련된 모든 논의의 사상적 기초가 풍수였기 때문에 이를 수 도와 관련된 풍수 라는 의미의 국도풍수 라고 지칭한다. 67) 이러한 국도풍수의 영향력은 고

50 려시대분만 아니라 조선의 건국 직후에도 거의 절대적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후삼국시대처럼 여러 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오랫동안 경쟁하다 통일된 것 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던 이성계가 지지 세력의 추대를 통해 고려 왕으로부터 양위( 讓 位 ) 하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왕조의 핏줄을 의미하는 성( 城 )만 바꾸었다는 의미로 역성혁명( 易 姓 革 命 ) 이라고 부른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비롯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한 세력 모두 원래는 고려의 신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고려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계승을 통해 여러 반대 세력을 통합시 켜야 하는 절묘한 딜레마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바로 수도를 옮기 는 것이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곧바로 고려시대의 남경이었던 한양(서울)으로의 천도를 명령하지만 여러 반대에 부딪혀 새로운 수도 후보지를 물색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후보지 의 적합성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최초로 옮기고 싶어 했던 한양으로의 천 도가 1394년에 이루어진다. 왕실의 내분으로 1399년에 개경으로 잠시 환도했다가 1405년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조선시대 내내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 재의 대한민국 수도로까지 이어진다. 한양으로의 천도는 개성에 뿌리를 두고 있던 고려와의 단절을 통해 새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한편으로는 고려에서 수도의 권위를 결정했던 풍수를 수도의 위치 선 정, 왕궁의 입지, 도로의 구조 등 도시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논리로 이용했다. 이는 고 려와의 단절을 시도하면서도 고려적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단절과 계승의 절묘한 딜레마를 잘 극복하한 사례가 된다. 출처: 여지도 도성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36 조선의 수도 한양의 궁궐과 간선도로망 및 성곽 그림-37 경복궁 창덕궁 종묘에서 하늘=산=경복궁의 3단계적 상징 경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에 적용된 풍수 역시 하늘=산=왕궁의 일체화된 3단계의 상징 경관 을 통해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왕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절묘하게 만들어냈다. 이를 위해 산과 산줄기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 지형을 선택하여 둘레 17,000m의 성곽을 축조하 였으며, 왕궁을 주산인 북악산 아래에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지형은 고려의 수도 개성과 마찬가지로 산지와 평지가 동시에 공존하게 되어 평지에 높은 성벽과 해자를 건설하지 않으 면 강한 적의 공격에 취약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는 평지나 낮은 언덕 위에도 10m 이상의 높은 성벽이나 해자를 건설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강한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아주 취약한 수도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산을 하늘과 왕궁의 상징성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타나난 현상이다. 실제로 1592년에 일본군 20만이 대대적으로 침략한 임진왜란, 1637년에 청나라의 10만 대군이 침략한 병자호란 어느 시기에도 수도를 방어한 적이 없다. 수도의 성 곽이 대규모 외적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조선 성곽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 소 중의 하나이다. 67) 이병도, 1980, 고려시대의 연구 : 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 아세아문화사

51 4. 지방도시와 성곽 1) 후삼국시대부터 고려후기까지 890년대부터 시작된 통일신라의 혼란은 각 지역의 호족들이 봉기하여 독자적인 세력화를 꾀하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이들은 성주( 城 主 )나 장군( 將 軍 )을 자칭하면서 대부분 통일신라 때의 통치성을 장악하여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68) 그리고 서로 경쟁하면서 세력권의 확산 에 노력한 결과 900년경이 되면 영토가 축소된 신라와 후백제 및 후고구려라는 세 개의 국 가로 정립되었다. 이후 936년에 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세 나라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 데, 이 시기에 성곽과 관련하여 나타난 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후삼국시대 대부분의 시기 동안 삼국, 그중에서도 고려 69) 와 후백제는 상대방을 단 숨에 정복할 만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했다. 각 지역의 호족들은 이러한 유동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체적인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으며, 이 때문에 통치성은 호족에게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둘째, 대부분의 전투가 두 나라의 세력권을 확장시키기 위한 중소 규모의 단기전 양상으 로 진행되었다. 상대적으로 적의 공격이 강할 때는 중앙군이 파견되어 함께 방어했지만 그 렇지 않을 경우 호족의 전투력만으로 방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중소 규모의 단 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갖고 있는 통치성의 가치는 부정될 수 없었으며, 새로 축조되는 성곽 역시 통치성의 형태와 유사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후삼국시대 동안 중소 규모의 단기전에 강한 중소형 산성이나 절 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이 가장 일반적이었으며, 대규모 장기전을 위한 초대형 산성은 이 용되지도 새로 축조되지도 않았다. 대신 후삼국의 통일을 위한 고려와 후백제의 결전은 성 곽이 없는 곳에서 양측 모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세 번에 걸쳐 일전을 벌이는 형태로 나타났다. 927년 현재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기슭에서 고려군 5천명 거의 대부분이 몰살되는 대규모 의 팔공산 전투가 있었고, 930년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지역에서 후백제군 8천여 명 이 전사하는 대규모의 고창 전투가 있었다. 드디어 936년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지 역에서 고려군 8만7천여 명과 후백제의 대군이 마지막 혈전을 벌였던 대규모의 일리천 전 투가 있었으며, 여기서 고려군이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고려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지 않고 호족의 통치권 을 인정하면서 중앙정부에서는 이를 감시 통제 하는 간접 통치를 이어간다. 이런 상황 속에 서 호족은 통치성을 중심으로 자기의 세력권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고을 통치의 구심점이었 던 통치성의 상징성을 강화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통치성 안에 세워진 성황사와 그곳에서 이루어진 성황제로서 후삼국시대 이후 고을을 상징하는 인물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고을 전 체의 축제 형식으로 제사를 치렀다. 70) 983년 12개의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여 1018년에는 116개의 고을로 늘어났 다. 이어 1102년에 24개, 1108년에 41개, 1172년에 53개 등 지방관을 파견하는 고을의 수를 꾸준히 늘리면서 고려 말에는 전체의 65%를 넘어서게 되었다. 초창기의 지방관은 호 68) 최종석, 2000, 나말여초 성주, 장군 의 대두와 변동추이,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69) 고려는 후고구려-마진-태봉을 거쳐 918년에 확정된 이름이지만 서술의 편의를 위해 고려로 통일한다. 70) 최종석, 2005, 조선 초기 성황사의 입지와 치소, 동방학지 131, 37-87쪽

52 족의 통치를 감시 통제하는 역할을 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직접 통치의 성격이 강화되었고 이에 따라 호족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지방관의 파견과 직접 통치의 강화는 통치성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방관의 파견은 고을에 지방관과 호족이란 2중 권력의 상황을 만들어 놓았으며, 두 권력은 지방 자치 또는 간접 통치의 상징이었던 통치성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통치성은 호족 에게는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상징적 공간인 반면 중앙 권력에게는 직접 통치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상징적 공간일 뿐이었다. 따라서 지방관 파견에 의한 직접 통치의 성격이 강화될수록 통치성의 위상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와 같은 경향은 큰 흐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 정확히 몇 년인지를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치성의 상징성에 큰 손상을 입힌 사건이 고려에서 발생하였다. 고려 전기에 국가 자체 의 존망에 가장 큰 위협을 가했던 것은 993년 1010년 1018년에 발생한 요나라 대군의 침입 이었다. 각각 80만 40만 10만의 대군을 동원하였으며, 2차 침입 때는 수도 개성을 함락시키 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려군 역시 대규모의 정부군을 동원하여 직접 맞섬으로써 이를 물리 쳤기 때문에 국가 체제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으며, 호족의 거점이었던 통치성의 위상에도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1231년부터 1257년까지 7차에 걸쳐 일어난 몽골의 대규모 장기 침략은 고려 전체를 황 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통치성의 위상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71) 고려 정부 군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가 몽골군과의 직접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대신 내륙의 각 고을 에 지휘관을 파견하면서 기본적으로는 고을 스스로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 과정에 서 중소규모의 단기전을 위해 축조되었던 통치성의 단점이 속속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첫째, 몽골군은 군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살육 약탈하는 초토화 작전을 구사하였는 데, 통치성은 일반 백성까지 모두 들어가 방어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둘째, 통치성은 중소규 모의 단기전에 대비하여 축조 운영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테뫼식의 중소형 성곽의 형태였는 데, 이는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 등의 요소가 부족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에는 일부의 통치성에서 몽골군을 잘 막아내기도 했지만 72) 침략이 장기화되면서 한계가 드러나 통치성은 대부분 포기되게 된다. 대신 수전 ( 水 戰 )에 약한 몽골군의 특성을 이용하여 섬에 피난하거나 산 속 깊은 곳에 대형산성 또는 초대형 산성을 축조하여 피난하는 등의 방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한다. 이런 과정에서 고을을 지켜주는 상징 공간으로서 통치성의 위상은 현저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몽골의 침략 기간 동안 고려 곳곳에는 대형 또는 초대형 산성이 축조된다. 하지만 첫째, 너무 급하게 쌓았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해 쉽게 허물어졌고 둘째, 몽골군과의 직접적인 전 투가 아니라 피난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공간으로부터 너무 먼 곳에 축조 되었으며 셋째, 일반 백성까지 포괄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커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쓸모 없는 성이 되고 말아 관리 운영될 수 없었다. 73) 출처: 유재춘, 2003, 앞의 책, 379쪽 그림-38 몽골 침입 때 축조된 원주의 영원산성 71) 최종석, 2007, 앞의 논문, 쪽 72) 대표적인 곳이 경기도 용인의 처인성, 경기도 안성의 죽주성, 경기도 광주의 광주성, 충청도 충주의 충주성 등이다. 73) 유재춘, 2003, 한국 중세축성사 연구, 경인문화사, 11-91쪽

53 1259년 몽골에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1270년에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옮긴 이후 원나라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던 약 80년간의 원 간섭기에 통치성의 위상은 더욱 약화된 다. 74) 원나라는 고려가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방어력을 높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의 모든 성에 대한 관리와 운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통치성 역시 황폐화 되었고, 고을을 지켜주고 호족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시켜주는 모태로서의 상징적 위 상 역시 급격히 약화되었다. 2) 고려말부터 조선전기까지 1357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대규모 침입이 있었고, 두 번째 침입 때는 수 도가 함락되고 왕이 남쪽으로 피난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만 홍건적의 침입에 대한 고려 군의 대응이 2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전면전이었기 때문에 통치성을 포함한 여러 성에 농 성하는 장기전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홍건적의 침입이 고려의 성곽에 대해 미 친 영향은 별로 없었는데, 1350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왜구의 침입은 좀 다른 결과를 가 져왔다. 왜구의 침입은 대중소의 다양한 규모로 이루어졌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침입이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고려 정부군의 대처가 쉽지 않았다. 최영 이성계 최무선 등 이 이끄는 고려 정부군이 왜구를 크게 물리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의 전투에서 고려 정부 군이 패하거나 밀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몽골 침략기에 약화되기 시작한 통치성의 위상은 원나라 간섭기 동안 거의 쓸모없 을 정도로 황폐화 되었다. 원래 통치성은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강한 방어력을 갖고 있었지 만 상징적 위상이 약화되고 실질적으로도 황폐화 되면서 왜구의 침입 때는 거의 활용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몽골 침입기에 많이 만들어진 대형 또는 초대형 피난성이 이용된 것도 아니었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해적인 왜구의 침입 목적이 점령하여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약탈하 는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왜구에 맞서 싸우기보 다는 약탈할 수 있는 물자를 모두 없애버리고 내륙으로 피난을 가서 왜구가 물러가기를 기 다리는 소극적인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결과 해안가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고, 고려의 중앙 정부에서는 지방관을 파 견하여 각 고을이 스스로 방어하고 재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 상도의 해안가와 내륙의 큰 고을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형의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의 통치성이나 대형 초대형 산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읍성( 邑 城 )이라 부르고 있으며, 각 고을의 중심 도시를 둘러싼 형태로 축조되었다. 표-6 고려말 이후 축조된 경상도의 읍성 74) 최종석, 2007, 앞의 논문, 쪽

54 최초의 읍성은 1368년에 축조된 경상도의 청하읍성이며, 1378년에서 1423년 사이에 경 상도에서만 20개의 읍성이 새로 축조되었다. 이들 읍성의 특징은 첫째, 주로 산성이었던 통 치성과 달리 평지나 약간 높은 언덕에 축조되었으며 둘째, 규모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소형 이거나 중형으로 다양했으며 셋째, 성벽의 높이는 5m 안팎의 것이 일반적이었고 넷째, 해 자 등의 2중 방어 시설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림-39 경상도 해안가의 읍성 : 영해 청하 흥해 읍성도 성곽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방어력을 고려하여 축조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평지 나 약간 높은 언덕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벽의 높이가 5m 안팎밖에 되지 않고 해자 등의 2중 방어 시설이 없기 때문에 읍성은 실제의 전투에서 방어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 다. 그리고 읍성에서 왜구를 방어하여 성공했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읍성 의 방어력이 시험대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림-40 경상도 내륙의 읍성 : 상주 경주 1380년대에서 1410년대까지 고려와 조선 정부에서 왜구의 방어를 위한 성곽으로 읍성과 산성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있었는데, 대부분 산성을 선택하는 것 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에도 읍성의 방어력에 대해서는 별로 신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55 이에 따라 산성이며 통치성이었던 경상도 김해의 분산성, 충청도 서산과 면천의 서산산성 면 천산성 등이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수축되었고, 김해의 분산성에서는 왜구와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효과적인 방어를 하기도 했다. 그림-41 충청도 면천의 몽산성과 면천읍성 이렇게 방어력이 현저하게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읍성이 왜 경상도의 해안과 내륙의 큰 고 을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축조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첫째,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한 적도 있지만 중규모나 소규모의 약탈 수 준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둘째, 왜구에 대한 고려와 조선의 대처 능력이 향상되면서 실제 전 투에서 왜구의 전투력이 압도적이지 않은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셋째, 단지 실제 방 어에서의 효과보다는 지방관이 백성들을 보호하려 노력한다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중요하 게 여겼던 점 등이 읍성의 축조에 일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중심으로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축조되던 읍성은 1420년대 를 지나면서 국가가 주도하여 축조하기 시작한다. 1410년대까지 왜구의 방어에서 상대적으 로 우위를 점했던 산성중심론은 급격히 사라지고 읍성중심론이 대세를 차지한다. 또한 중앙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감독관이 읍성의 위치 선정을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서 직접 관여한 다. 이에 따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해안뿐만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등 여진족과 직 접적으로 대치하며 전투를 벌이던 지역까지 확장되어 읍성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한다. 왜 실제 전투에서 방어력이 높은 산성중심론에서 갑자기 방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읍 성중심론으로 옮겨갔는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 만 첫째, 고려와 조선 정부의 대대적인 반격에 의해 1420년대에 이르면 왜구의 침입 자체 가 거의 없어져 실제 전투에서의 방어력이 중요해지지 않게 되었고 둘째, 중앙 정부에서 백 성들을 보호하려 노력한다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들의 삶터에서 먼 산성보다 가까운 읍성이 더 유리했다는 점 등이 읍성의 빠른 확산에 일조했을 것으로 보 인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1420년대 이후에 축조된 읍성 거의 대부분이 풍수 논리를 가장 중요한 사상적 토대로 만들어진 수도 한양을 모델로 하여 최대한 비슷해지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첫째, 고을이라는 공간 범위 속에서 선택되어야 했기 때문에 둘째, 기존 중심 지의 역사적 관성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인 한양만큼 전형적인 풍수 지형을 찾아 이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20년대 이후에 축조된 읍성은 자연 지형 이 전형적인 풍수 지형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산이나 숲의 인위적 인 조성이나 상징적 이름 부여와 같은 방식으로 풍수적으로 완벽한 읍성을 만들려고 노력하 였다. 그림-42 한양을 닮은 낙안읍성의 입지와 하늘=산=동헌의 상징 경관

56 그 결과 첫째, 실제 전투에서 방어력이 떨어지기 쉬운 산이나 산 밑에 읍성이 만들어졌고 둘째, 이러한 방어력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10m가 넘는 높은 성벽 이나 넓은 해자 등이 건설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1420년대 이전뿐만 아니라 이후에 축조된 읍성도 실제 전투에서의 방어력은 아주 낮을 수밖에 없다. 또한 내륙 고을이나 국경에서 먼 경기도와 황해도 등의 해안가 고을에 있었던 지방도시 대부분에는 읍성이 축조되지도 않았 다. 대신 1420년대 이후에 축조된 읍성과 마찬가지로 풍수적 완성도를 위해 주로 산이나 산줄기 밑에 도시가 건설되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산이나 숲의 인위적인 조성이나 상징적 이름 부여와 같은 방식으로 풍수적으로 완벽한 지방도시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림-43 진주의 읍치와 비보숲의 분포 3)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1400년대에 들어서면서 왜구의 침입이 거의 사라지고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의 국제질서가 안정적인 체제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만주의 여진족과 벌인 중소규모의 국경 전투를 제외하면 대규모의 외침을 당하지 않은 평화의 시기를 보낸다. 따라서 수도와 지방도시에 건설된 성곽은 실제 전투의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고, 방어력에서의 문제점 역시 부각되지 않았다. 75) 또한 대규모 장기 전에 유리한 대형산성이나 초대형산성뿐만 아니라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발휘 했던 통치성까지 완전히 관심 밖의 존재가 되었다. 1592년 4월 14일과 15일 일본군 선발대 1만8천 명이 부산진성과 동래의 읍성을 공격하 여 하루도 되지 않아 함락시키고, 이후 총 20만 명의 일본군이 북진을 계속한다. 이 때 경 상도 해안과 내륙의 큰 고을에 있던 읍성 어느 곳에서도 일본군을 방어하지 않았으며, 수도 였던 한양의 성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읍성과 한양의 성곽 모두 대규모 전투에 대한 방어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통치성이 새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고려 중반기까지 경상도 진주의 통치성 역할을 했던 진주성을 더 확장시켜 쌓은 후 조선 의 군인과 민간인 약 3천 명이 1592년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진행된 일본군 약 2만 명 의 공격을 막아내어 승리했다. 그리고 1593년 2월 고려 중반기까지 경기도 행주의 통치성 역할을 했던 행주산성에서 조선군 2천8백여 명이 일본군 약 3만명의 공격을 막아내어 승리 했다. 두 전투의 승리로 통치성이 주목받기 시작하여 경기도 수원의 통치성이었던 독산성, 경기도 천령의 통치성이었던 파사성, 경기도 파주의 통치성이었던 봉서산성, 경상도 인동의 통치성이었던 천생산성 등을 수축하여 중요 방어처로 삼기도 하였다. 그림-44 진주의 진주성 75) 경상도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89년에 의령읍성, 1591년에 청도 삼가 영천 영산의 읍성을 쌓아 대비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대규모의 직접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읍성의 방어력이 있을 것으로 판단 한 좋은 사례이다

57 그림-45 행주산성 1597년에 다시 재개된 격렬한 전투가 1598년 조명연합군의 공세와 일본의 통치자 토요 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토로 후퇴하면서 8년 동안 지속되었던 대규모의 긴 전쟁이 끝났다. 이후 1600년 일본 내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내전을 승리로 이끈 토쿠카와 이에야스( 德 川 家 康 )의 정권이 내정에 힘쓰면서 대외 침략을 추구하지 않자 조선에서 대규 모 전쟁의 발발 가능성이 약화되었고, 통치성에 대한 관심 역시 약화되었다. 하지만 조선, 명나라, 일본이 참전했던 임진왜란의 대규모 국제전 속에서 상대적으로 힘을 키운 만주의 여진족이 1616년 청나라를 건국하면서 다시 대규모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명나라까지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자 노력했던 청나라는 배후에서 명나라와 연 합하고 있던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이어 1623년에 조선에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 의 균형 외교를 추구하던 정권이 무너지고 명나라로 치우친 외교를 추구하는 정권이 들어서 자 청나라의 대규모 침략 가능성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대규모 장기전을 통해 침략에 대응하려는 정책을 수립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몽골의 침입 때 끝까지 함락 시키지 못했던 강화도로의 천도와 초대형 산성을 수축 또는 축조하여 대규모 장기전에 대비 하려 하였다. 1624년부터 1626년까지 신라 때 당나라와의 대규모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했던 둘레 7,545m의 초대형 산성인 일장성을 고쳐 남한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1626년에 경기도 광주의 중심도시를 남한산성 안으로 옮겨 일상적인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면서 대규모의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청나라는 1627년의 3만 대군에 이어 1636년에는 10만 대군 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10일도 되지 않아 수도를 함락시켰다. 조선에서는 원래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여 장기전을 수행할 계획이었지만 청나라 대군의 너무 빠른 남하로 왕 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장기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서의 대규모 항전은 준비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군대의 뛰어난 전투 기술로 인해 지원군까지 패배하여 고립되면서 결국 45일 만에 성을 나와 항복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대군도 직접적인 공격을 통해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 문에 남한산성의 경험은 대규모 장기전에 대한 초대형 산성의 높은 방어력을 적극적으로 이 해하고 주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사대하였지만 언제든 발발할 지 모르는 대규모 장기전에 대비하여 초대형 산성을 곳곳에 수축 축조하면서 대규모 장기전 에 알맞은 방어체제를 구축한다. 이 중 3,000m의 이상의 초대형 산성을 도별로 정리하면 표-7과 같다. 표-7 임진왜란 이후 초축되거나 개축된 대형 초대형 산성 위치 산성 이름 둘레(m) 최고 높이(m) 연도 참조 광주 남한산성 7, 행궁, 광주 고을 설치 경기도 개성 대흥산성 10, 고양 북한산성 12, 행궁 충청도 청주 상당산성 4, 전라도 무주 적상산성 5,600 1,

58 장성 입암산성 5, 단양 금성산성 6, 전주 위봉산성 16, 장흥 수인산성 6, 경 칠곡 가산산성 10, 칠곡 고을 설치 경상도 선산 금오산성 3, 성주 독용산성 7, 동래 금정산성 17, 서흥 대현산성 7, 재령 장수산성 7, 경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 6, 문화 구월산성 5, 경 봉산 정방산성 12, 용강 황룡산성 6, 평안도 자산 자모산성 5, 경 자산 고을 잠시 설치 영변 철옹산성 14, 영변 고을 설치 합계 21개 표-7에는 총 21개의 초대형 산성만 정리되어 있지만 2,000-3,000m 사이의 대형 산성 도 꽤 있었다. 또한 1,000-2,000m 사이의 중형산성도 많지는 않지만 장기 항전의 중심지 로서 선택되어 관리된 곳이 있다. 이러한 산성 중 일부는 고대의 통치성이거나 고구려의 초 대형 산성이었으며, 그리고 다수는 몽골 침입기에 축조했던 것을 정교하게 수축한 것이며, 처음으로 축조한 것도 있다. 평상시에는 산성 주변의 여러 고을의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고 있다가 대규모 외적의 침략이 발생하면 여러 고을의 병력과 백성이 들어가 장기 항전할 수 있도록 관리되었다. 출처: 해동지도 (1730년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46 중요 대형 초대형 산성이 표시된 경기도의 고지도 출처: 해동지도 (1730년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47 중요 대형 초대형 산성이 표시된 전라도의 고지도 출처: 해동지도 (1730년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48 중요 대형 초대형 산성이 표시된 경상도의 고지도 출처: 해동지도 (1730년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49 중요 대형 초대형 산성이 표시된 황해도의 고지도 출처: 해동지도 (1730년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50 중요 대형 초대형 산성이 표시된 평안도의 고지도 그림-51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59 그림-52 경기도 고양의 북한산성 그림-53 경기도 개성의 대흥산성 그림-54 전라도 장성의 입암산성 그림-55 전라도 담양의 금성산성 그림-56 전라도 전주의 위봉산성 그림-57 전라도 장흥의 수인산성 그림-58 경상도 칠곡의 가산산성 그림-59 경상도 선산의 금오산성 그림-60 경상도 성주의 독용산성 그림-61 황해도 서흥의 대현산성

60 그림-62 황해도 문화의 구월산성 그림-63 황해도 황주의 정방산성 그림-64 평안도 자산의 자모산성 그림-65 평안도 영변의 철옹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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