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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례 / Contents 입교 및 운영 안내 1 교육일정 3 답사일정 5 서울 한양도성과 문_홍순민 7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_고연희 21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백제 금동용봉향로_최응천 29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_장남원 41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_서윤경 49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_홍대한 59 김홍도의 풍속화첩_조인수 95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_임영애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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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입교 및 운영 안내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입교 및 운영 안내 운영개요 연수과정명 :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주 제 : 걸작의 탄생 기 간 : 2012년 8월 5일(월)~9일(금) (5일간, 10:00~17:00) 연수 학점 : 직무연수 2학점(30시간) 수강 인원 : 인천관내 초 중등교원 80명 장 소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석남홀(대강당) 강의 구성 : 30시간(이론강좌 18시간, 현장답사 및 실습 12시간) 운영방침 수료자격 : 총 연수시간의 90%(27시간) 이상 출석자에 한하여 수료증을 수여 하고, 그 미만의 경우와 1일이라도 결석하는 연수자는 수료증 수여 불가(예외 없음) 이수결과는 소속 교육청 및 학교에 통보 매일 3회(입실시, 점심시간 후, 퇴실시) 자필 출결 확인 입교안내 연수대상자는 8월 5일(월) 09:20까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1층 석남홀 앞 데스크 접수 (09:30~10:00 개강식 및 오리엔테이션) 준비물 : 필기도구(강의교재 제공) 기타사항 접수시 배부해드린 패찰은 항시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중에는 반드시 휴대폰 전원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대강당은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취식은 로비 휴게의자 및 야외공간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중식은 별도로 제공되지 않습니다.(도시락 혹은 박물관 주변 식당 이용) 데스크에 비치된 주소록의 인적사항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문의처 : 전시교육과 교원연수 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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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육일정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교육일정 주 제 : 걸작의 탄생 기 간 : 2013년 8월 5일 ~ 8월 9일 장 소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석남홀 일자 시간 주제 강사 비고 09:30~10:00 개강식 - 10:00~12:00 서울 한양도성과 문 홍순민(명지대학교) 이론강의 8.5 (월) 12:00~13:00 점심식사 8.6 (화) 8.7 (수) 8.8 (목) 8.9 (금) 13:00~15:00 15:00~17:00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백제 금동용봉향로- 고연희(이화여자대학교) 이론강의 최응천(동국대학교) 이론강의 10:00~12:00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장남원(이화여자대학교) 이론강의 12:00~13:00 점심식사 13:00~15:00 15:00~17:00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서윤경(한국미술연구소) 이론강의 홍대한(숙명여자대학교) 이론강의 10:00~12:00 선사인의 타임캡슐, 바위그림 장석호(동북아역사재단) 이론강의 12:00~13:00 점심식사 13:00~15:00 김홍도의 풍속화첩 조인수(한국예술종합학교) 이론강의 15:00~17:00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임영애(경주대학교) 이론강의 09:00~18:00 현장답사 담당자 현장실습 10:00~12:00 전시실 교육 12:00~13:00 점심식사 유물해설사 (박물관 자원봉사자) 13:00~15:00 체험실습 체험교사 (박물관 자원봉사자) 15:00~15:30 종강식 - 각 강의는 (50분 수업, 10분 휴식) 2회로 구성됩니다. 현장실습 현장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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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답사일정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답사일정 답사일시 : 2013년 8월 8일(목), 09:00~17:30 집결장소 : 문학경기장 동문(문학경기장역 2번 출구) 집결시간 : 09:00 답사일정(A차) 09:00 출결 확인 및 패찰 배부 후 승차 09:10~10:30 이동 10:30~12:30 리움 12:30~13:00 이동 13:00~14:00 점심식사 14:00~16:00 국립중앙박물관 16:00 출결 확인 후 이동 16:00~17:30 해산(문학경기장) 세부일정은 교통사정 등으로 인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 비 물 : 편한 복장, 모자, 필기구, 간식 및 물, 개인상비약 등 차 량 : A차(01~40), B차(41~80) 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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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 한양도성과 문 홍 순 민 (명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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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울 한양도성과 문 9 서울 한양도성과 문 목 차 1. 서울 도성의 위상과 변천 2. 도성문의 구성과 의식체계 3. 도성의 축조와 변천 1. 서울 도성의 위상과 변천 도성( 都 城 )은 서울이다. 서울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였다. 도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가리키지만, 그 뜻을 넘어 서울 자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 서울은 좁게는 도성 안을 가리켰다. 하지만 도성 외부로 약 10리에 이르는 지역은 성저십리( 城 底 十 里 )라 하여 서울의 외곽을 이루는 구역이었다. 북으로는 대체로 북 한산 자락, 동으로는 중량천, 남과 서로는 한강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도성은 좁은 범위의 수도이자 왕도인 서울을 지키는 군사 시설이었다. 하지만 도 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적은 별로 없었다.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당시에도 도성 이 군사적 기능을 한 바는 별로 없다. 도성은 평상시에는 성안 분 들과 성밖 것 들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밤에는 통행을 금지시키는 시설이 되기도 하였다. 도성은 서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태조 3년 11월 도평의사사에서 태조에게 올린 글에 도성의 개념과 위상이 잘 드 러나 있다. 종묘는 조종( 祖 宗 )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나라의 존 엄을 보이고 정령( 政 令 )을 내는 것이며, 성곽( 城 郭 )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명( 天 命 )을 받아 국통( 國 統 )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 양으로 서울을 정하였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입니다. ( 都 評 議 使 司 狀 申 寢 廟 所 以 奉 祖 宗 而 崇 孝 敬 宮 闕 所 以 示 尊 嚴 而 出 政 令

1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城 郭 所 以 嚴 內 外 而 固 邦 國 此 皆 有 國 家 者 所 當 先 也 恭 惟 殿 下 受 命 啓 統 俯 從 輿 望 以 定 都 于 漢 陽 萬 世 無 疆 之 業 實 基 於 此 ) 태조실록 권 6, 태조 3년 11월 3일(기해) 도성은 주산( 主 山 )인 북쪽의 백악산( 白 岳 山 )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좌청룡 ( 左 靑 龍 )인 동쪽의 타락산( 駝 酪 山 ) 안산( 案 山 )인 남쪽의 목멱산( 木 覓 山 ) 우백호( 右 白 虎 )인 서쪽의 인왕산( 仁 王 山 )으로 이어지는 내사산( 內 四 山 )의 능선을 따라 쌓여 있었고, 그 총 연장은 18km쯤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능선의 최고점을 따라 쌓은 것이 아니라 바깥쪽 경사면으로 조금 내려 쌓았다. 방어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성은 석성이다. 맨 밑부분에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돌로 성벽을 쌓고 성벽 위에 추가로 여장( 女 牆, 성가퀴)을 만들었다. 성돌은 쌓은 시기에 따라 돌의 재질과 크기, 다듬은 모양이 서로 다르다. 맨 처음 태조 연간에 쌓은 돌들은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은 채 쌓아서 각 돌의 크기가 크고 거칠다. 세종 때 성을 고치면서 새로 쌓은 돌들은 크기가 한 변이 약 15~20cm 정 도로 작으며, 모서리를 둥글게 궁굴렸다. 세종 때 돌들은 대체로 검게 변색이 되었다. 따라서 성벽 전체의 느낌이 고색이 나면서 부드럽다. 숙종 연간에 도성을 크게 고쳤는데, 이 때 쌓은 돌들은 네 명이 들어야 할 정도로 크며, 면을 평면으로, 변을 직선으로 다듬었다. 돌들을 수평으로 선을 맞추지 않고 높고 낮게 쌓으면서 모서리를 깎아서 귀를 맞추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규격 적이다. 숙종대 이후에 쌓은 부분은 대체로 숙종대 것과 비슷하다. 태조 연간 도성을 설계하면서 백악산 정상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600척( 尺 ) 단위로 구역을 설정하여, 각 구역마다 천자문으로 번호, 곧 자호( 字 號 )를 매겼다. 구역은 모두 97로서 천자문의 첫 글자 천( 天 )에서 시작하여 조( 弔 )에서 끝난다. 각 시기에 성을 쌓을 때 전국에서 민정( 民 丁 )을 징발하였는데, 군현 단위로 쌓을 부분을 지정하였고, 성을 쌓은 다음에는 그 군현이 쌓은 구역이 시작하는 곳에 군 현의 명칭을 새겨 놓았다. 이는 그 부분이 무너지면 그 군현에 책임을 묻기 위한 조처였다. 태조대의 도별 담당 구역은 다음과 같다. 동북면(함흥 이남) : 天 ~ 日 (9 字 ) 강원도 : 月 ~ 寒 (8자) 경상도 : 來 ~ 珍 (41자) 전라도 : 李 ~ 龍 (15자) 서북면(안주 이남) : 師 ~ 弔 (24자)

16 서울 한양도성과 문 11 세종 4년에 도성을 다시 고쳐 지을 때도 태조대와 같이 天 ~ 弔 97자로 구분하 였다. 도별, 군현별 담당 구역을 정하여 주었고, 그 담당 구역을 표기한 각자가 남아 있다. 숙종 연간을 전후하여 쌓은 부분에는 중국 연호, 간지, 수축에 관계한 인명을 새겼다. 2. 도성문의 구성과 의식체계 도성에는 네 대문과 네 소문, 그리고 이름없는 암문( 暗 門 )들이 있어 안팎을 통하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네 대문은 남쪽의 숭례문( 崇 5 門 ), 서쪽의 돈의문( 敦 義 門 ), 북 쪽의 숙정문( 肅 靖 門 ), 동쪽의 흥인문( 興 仁 門 )이며, 네 소문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의 소의문( 昭 義 門 )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대문을 건너뛰어서 창의문( 彰 義 門 ), 혜 화문( 惠 化 門 ), 광희문( 光 熙 門 )이다. 암문은 큰 도로가 이어지지 않는 산지에 적병의 눈에 띄지 않고 드나들기 위해서 만든 문들이다. [소의문] 소의문( 昭 義 門 )은 남대문(숭례문)과 서대문(돈의문) 사이에 있던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의문은 석축에 홍예문이 하나 나 있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가 있는 일반적인 도 성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한강의 용산, 마포, 서강 등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소의 문은 서쪽으로 나가는 장례 행렬이 나가는 문이었고, 문 밖 가까운 위치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소의문 안쪽 정동 일대에 서양 외교 공관이 들어 서면서 서양인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점차 문 바깥쪽으로 확장되었다. [돈의문] 돈의문( 敦 義 門 )은 도성의 서대문이다. 도성에서 한강변의 마포, 서강, 양화진 등의 포구와 무악재를 넘어 개성 평양 의주로 이어지는 서북로로 나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1899년 5월 전차가 개통되기 이전의 돈의문은 육축과 문루 그리고 좌우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다. 단, 성벽 위의 여장은 모서리가 일부 마멸되어 있다. 문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숭례문에 비해서 좁은 중로( 中 路 ) 규모인데,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으나 대체로 문 좌우의 초가 건물들이 침범하여 좁고 다소 무질서한 모습을 하고 있다. 1899년 5월 청량리에서 경교를 잇는 첫 전차 노선이 돈의문을 통과하였다. 그에

1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따라 돈의문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 좌우변의 가가들이 철거되어 도로는 넓어지고 그 양쪽 변에 기와집들이 질서 있게 드러났다. [창의문] 창의문( 彰 義 門 )은 혹은 자하문( 紫 霞 門 )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의 서북 소문이다. 창의문을 나서면 세검정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가거나, 홍지문( 弘 智 門 )을 나서 모래 내를 따라 서북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연결된다. 창의문 밖은 풍광이 좋은 곳으로서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혜화문] 혜화문( 惠 化 門 )은 도성의 동북방에 있는 소문으로서 강원도와 함경도로 나가는 길이 열리는 문이다. 내륙으로 통하는 문이었던 만큼 강으로 통하는 서쪽의 문들에 비해서 통행량은 적었다. 전차가 닿지도 않아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흥인문] 흥인문( 興 仁 門 )은 도성의 동대문이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문밖에 반원형으로 둘 러싼 옹성( 甕 城 )이 있고,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2층으로 되어 있어 개성 있는 외관을 갖추고 있다. 동쪽으로 나가는 대로의 출발점이며 성안으로는 운종가가 이어져 도성 가로망의 동서 중심축을 이룬다. 1899년 전차 개통시 전차 선로가 문을 통과하게 되었으며, 흥인문 안 바로 남쪽에 전기 발전소와 전차 차고가 있어 새로운 문물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광희문] 광희문( 光 熙 門 )은 도성의 동남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두모포 등 동남쪽 한강변에 포구가 발달하면서 통행량이 많아지고, 이름도 한강과 통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수 구문( 水 口 門 )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문으로 장례행렬이 나가고, 늘 시신이 쌓여 있어 시구문( 屍 口 門 )이라는 명칭은 일본인들이 악의적으로 강조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을 검색하면 屍 口 門 은 나오지 않는다. [숭례문]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은 여러 문들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정문이다. 그 외형도 가장 크고 화려하였다. 흥인문과 숭례문만 문루의 지붕이 중층이어서 다른 문들과 쉽게 구별된다. 또 숭례문은 편액의 글씨가 직서( 直 書 ) - 위에서 아래로 쓰여져 있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18 서울 한양도성과 문 13 <숭례문의 위치와 기능>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들어오면 약간 굽은 길이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청계천의 광통교를 지나 운종가와 만난다. 이 길은 운종가와 같은 폭으로서 대로인데 별도의 도로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길은 도성을 들어와 서울 중심가로 향하는 대표적인 길이다. 숭례문은 도성의 남대문이지만 그 위치가 정남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까 닭은 우선 정남에 목멱산이 있어서 비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쪽이 아닌 서 쪽으로 비킨 까닭은 서쪽 한강변에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노량진 등 바닷배가 정박하는 포구가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포구에 집결하는 물산을 도성 안으로 유통 하는 데 서쪽의 물동량이 많기 때문에 숭례문, 소의문, 돈의문이 가까운 거리에 밀 집하게 되었다. <숭례문의 훼손과 변질> 숭례문에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진 때는 1907년 고종을 강제로 황제위에서 퇴위 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올려 일제가 마음대로 조종하기 시작한 융희( 隆 熙 ) 연간이다. 1907년 10월 통감( 統 監 )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는 후일 대정( 大 正 ) 천황이 되는 당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 嘉 仁 ]를 초청한다. 다음 사진은 요시히토와 그를 맞이한 영친왕 그리고 기라성 같은 일제 관료들과 그들에 빌붙은 친일파 관료들이 경회루 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가운데 작은 아이가 영친왕, 오른쪽의 카이젤 수염을 기른 청년이 요시히토, 보기에 앞줄 맨 오른편에 보이는 흰 수염 기른 자가 이토 히로부미, 요시히토의 오른쪽에 있는 이마 벗겨진 자가 이완용이다.

1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요시히토가 더럽고 누추한 숭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례문의 좌우 도성 가운데 서쪽 부분을 헐어 도로를 내었고, 이듬해에는 동쪽 부분도 헐어 내었다. 이로써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는 천덕 꾸러기가 되었다.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헐려 없어지고 주위는 일본식 축대로 마감 되어 문의 지면이 주위 도로면보다 높아졌다. 문 주위로 넓은 길이 나고 전차 선로는 홍예문으로 통과하지 않고 주위 도로로 이동하였다.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헐려 없어지고 주위는 일본식 축대로 마감되어 문의 지면이 주위 도로면보다 높아졌다. 문 주위로 넓은 길이 나고 전차 선로는 홍예문으로 통 과하지 않고 주위 도로로 이동하였다. 사람들은 홍예문으로 통과하기도 하고 주위 도로로 통과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 것은 1907년 10월 일본 가인( 嘉 仁 ) 황태자의 방한을 기화로 숭례문 좌우의 도성을 헐어 없앴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을 식민지 도시로 만들어가는 일제의 본격적인 개조 사업의 출발이었다. 1950년에서 53년까지 서울에 폭탄과 포탄 총알이 빗발치는 그 혹독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숭례문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자기를 지켰다. 1956년에는 전쟁으로 망가진 곳을 보수하고, 1962년에는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새로운 부재를 끼워넣은 중수 공사를 하였다. 이렇듯 숭례문은 태조대 창건 이래 늘 같은 모습을 유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체가 모두, 때로는 부분 부분 고치고 바뀌어 왔다. 근대 일제 식민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는 좌우 성벽이 잘려나가 문 아닌 문이 되어 버렸고, 그 뒤로 현대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는 더욱 초라해져 보이고 골병이 들어갔다. 그렇게 길 가운데 홀로 남아 있는 숭례문을 인도와 연결하여 주변에 공원을 조성한 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숭례문을 개방한 때가 2005년 5월 27일이었다. <숭례문의 죽음과 부활>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던 숭례문이 불탔다. 서기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경 토지 보상을 적게 받아 불만이 쌓였다는 노인이 불을 질렀다. 처음에는 연기가 나고 소방차들이 오고 물을 쏘고 하니 저러다가 불길을 잡겠지 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물길은 애먼 기와 지붕에만 쏟아질 뿐 정작 불길이 번지는 내부로는 가 닿지 못한 채 애간장만 태웠다. 불길은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봐라 쏟아붓는 물길을 비웃으며 마 음껏 기승을 부리다가 11일 새벽 2시쯤 불구름 한 번 크게 일구더니 제풀에 잦아 들었다. 여러 매체들은 처음에는 사다리로 2층 누각에 올라가 시너를 뿌리로 일회용 라이 터로 불을 붙였다 고 전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참 모호하고 부정확한 표현

20 서울 한양도성과 문 15 이다. 우선, 누각( 樓 閣 ) 이라는 표현부터가 문제가 있다. 전통 건축에서 2층으로 되어 있을 경우, 1층은 각이라고 하고 2층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 누라고 한다. 누각 이라면 그 1층과 2층을 합쳐서 부르는 표현이 된다. 2층 누각 이라면 1층은 다른 것이고 2층이 누각인데 그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누각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2층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숭례문은 문이다. 도성 성벽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낸 것이다. 그 홍예문 주 위의 성벽은 안팎이 모두 장대석 석축으로 쌓여 있고, 좀 먼 부분은 네 귀가 궁글 려진, 다시 말해서 동글게 모가 깎인 사고석으로 쌓여 있다. 좀 동그란 사고석은 세종 때 쌓은 것이다. 홍예문 주위의 석축 부분은 육축( 陸 築 )이라고 한다. 그 육축 위에 목조 건축물을 지었으므로 이를 문루( 門 樓 )라고 하는 것이다. 문루가 없다고 도성의 문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석축에 나 있는 홍예문에 문짝이 달려 있어 열고 닫기 때문이다. 서소문인 소의문이나 동소문인 혜화문 등은 조선시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문루가 없었다. 그러나 문루가 있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은 것은 당연하다. 우선 기능상 문루는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 將 臺 )나 회의소, 그리고 군졸들의 파수 초소로 쓰인다. 또 그러한 실제적 군사적 기능 이외에 의장 기능도 갖는다.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이름이 붙은 여덟 문 가운데 문루가 2층으로 된 것은 숭 례문과 흥인문 둘 뿐이고 다른 문들은 문루가 단층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불에 탄 것은 바로 그 문루이고, 발화 지점은 문루 가운데 2층이라는 것이다. <숭례문의 가치> 숭례문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 있는가? 나는 숭례문이 거기 오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데 가장 큰 가치가 있다고 본다. 조선 태조대 이후 온갖 풍파 곡절을 다 겪으면서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도성의 대문 가운데서도 제1의 문 이었다. 주위에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숭례문은 작아 보이고, 낡아 보 이게 되었다. 더 이상 서울 장안에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오그라들었다. 그렇지만 숭례문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서울의 얼굴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되고, 돌아왔을 때 반가움의 눈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표상이었다. 그렇게 우리 마음 저 깊은 데 자리 잡고 있는 고향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2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3. 도성의 축조와 변천 도성을 축조하는 공사는 1396(태조 5)년 1월 9일 개기( 開 基 ),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착공하였다. 성문 공사는 별개의 공사가 아니라 자연히 도성 공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므로 숭례문의 착공일도 이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9월 24일 도성을 쌓는 일이 끝나 동원되었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이 무렵 도성의 여덟 문에 월단( 月 團 ), 곧 육축과 누합( 樓 閤 ), 다시 말해서 문루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최종 완공은 아니고 기본 골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문의 이름도 지어졌는데, 숭례문은 정남에 있는 문으로서, 속칭 남대문이라고 하였다. 태조실록 1398(태조 7)년 2월 8일조에 도성의 남문, 곧 숭례문이 완공되어 태 조가 가서 보았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숭례문이 최종 완공되어 오늘날로 치자면 임금의 참석하에 준공식을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시 공사는 일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 이후 봄까지 농한기에만 하는 것이므로 두 해 겨울에 걸쳐 이루 어진 것이다. 4월 26일 정도전( 鄭 道 傳 )이 서울의 위치, 도성 및 궁궐, 관아, 저자 주택, 그리고 사방의 풍광 등 여덟 경치를 읊은 팔경시( 八 景 詩 )를 지어 바쳤다. 정 도전은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경복궁 주요 전각의 이름도 지었다. 이로 보건대 인의 예지신( 仁 義 禮 智 信 ) 유교의 오상( 五 常 ) 개념을 적용한,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 문들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조실록 권 8, 태조 4 年 (1395) 윤9월 10일( 辛 未 ) 임금이 도성( 都 城 )의 터를 순시하여 보았다. 上 巡 觀 都 城 基 태조실록 권 8, 태조 4년(1395) 윤9월 13일( 甲 戌 ) 처음으로 도성조축도감( 都 城 造 築 都 監 )을 설치하여 판사, 부판사, 사( 使 ), 부사( 副 使 ), 판관, 녹사 등을 두었다.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甲 戌 / 始 立 都 城 造 築 都 監 置 判 事 副 判 事 使 副 使 判 官 錄 事 命 判 三 司 事 鄭 道 傳 定 城 基 태조실록 권 9, 태조 5년(1396) 1월 9일( 戊 辰 ) 경상, 전라, 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安 州 )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 咸 州 ) 이남의 민정 ( 民 丁 )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터를 정한 데다가 자호( 字 號 )를 나누어 정하였다. 백악( 白 岳 )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천( 天 ) 자부터 붙

22 서울 한양도성과 문 17 여서 백악의 서쪽에서 마무리하여 조( 弔 ) 자까지 붙였다. 서쪽 산 석령( 石 嶺 )까지 아울러서 땅의 척수가 모두 5만 9천 5백 척( 尺 )이다. 6백 척마다 한 자호( 字 號 )를 붙였으니 모두 97자( 字 )이다. 한 자호를 6호( 號 )로 나누고 두 자호마다 역사를 감독 할 판사( 判 事 ), 부판사( 副 判 事 ) 각 1원( 員 )씩, 사( 使 ) 부사( 副 使 ) 판관( 判 官 ) 중에서 12원( 員 )을 두었다. 각 도 주군( 州 郡 )의 민호( 民 戶 )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 天 ) 자로부터 일( 日 ) 자까지는 동북면, 월( 月 ) 자에서 한( 寒 ) 자까지는 강원도, 내( 來 ) 자에서 진( 珍 ) 자까지는 경상도, 이( 李 ) 에서 용( 龍 ) 자까지는 전라도, 사( 師 ) 자에서 조( 弔 ) 자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심히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하였다. 戊 辰 / 徵 慶 尙 全 羅 江 原 道 及 西 北 面 安 州 以 南 東 北 面 咸 州 以 南 民 丁 十 一 萬 八 千 七 十 有 奇 始 築 都 城 旣 度 城 基 分 定 字 號 始 自 白 岳 之 東 起 天 字 終 于 白 岳 之 西 止 弔 字 幷 西 山 石 嶺 得 地 凡 五 萬 九 千 五 百 尺 每 六 百 尺 爲 一 字 號 凡 九 十 七 字 每 一 字 分 六 號 每 二 字 置 監 役 判 事 副 判 事 各 一 員 使 副 使 判 官 中 十 二 員 計 各 道 州 郡 民 戶 多 少 自 天 字 止 日 字 東 北 面 月 字 止 寒 字 江 原 道 來 字 止 珍 字 慶 尙 道 李 字 止 龍 字 全 羅 道 師 字 止 弔 字 西 北 面 督 役 者 不 分 日 夜 上 以 寒 甚 禁 夜 役 참고 : 천자문 天 地 玄 黃 宇 宙 洪 荒 日 月 盈 仄 辰 宿 列 張 寒 來 暑 往 秋 收 冬 藏 閏 餘 成 歲 律 呂 調 陽 雲 騰 致 雨 露 結 爲 霜 金 生 麗 水 玉 出 崑 岡 劍 號 巨 闕 珠 稱 夜 光 果 珍 李 柰 菜 重 芥 薑 海 鹹 河 淡 鱗 潛 羽 翔 龍 師 火 帝 鳥 官 人 皇 始 制 文 字 乃 服 衣 裳 推 位 讓 國 有 虞 陶 唐 弔 民 伐 罪 태조실록 권 9, 태조 5년(1396) 1월 9일( 戊 辰 ) 도성( 都 城 )을 개기( 開 基 )하였으므로 백악( 白 岳 )과 5방( 方 )의 신( 神 )에게 치제( 致 祭 ) 하였다. 以 都 城 開 基, 致 祭 白 岳 及 五 方 之 神 태조실록 권 9, 태조 5년(1396) 2월 28일( 丙 辰 ) 성 쌓는 역부들을 돌려보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 石 城 )을 쌓았는데, 높 이가 15척이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 土 城 )을 쌓 았는데, 아래의 폭이 24척, 위의 폭이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 었다. 수구( 水 口 )에는 구름다리[ 雲 梯 ]를 쌓고 그 양쪽에다 석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6척, 길이가 1천 50척이다. 동대문( 東 大 門 )은 그 주위 지세가 우묵하고 낮으므로

2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린 다음에 성을 쌓았으므로, 그 공력이 다른 곳보다 배나 들었다. 丙 辰 / 放 築 城 役 城 基 高 嶮 處 築 石 城 高 十 五 尺 長 一 萬 九 千 二 百 尺 平 山 築 土 城 下 廣 二 十 四 尺 上 廣 十 八 尺 高 二 十 五 尺 長 四 萬 三 百 尺 水 口 築 雲 梯 兩 傍 築 石 城 高 十 六 尺 長 一 千 五 十 尺 東 大 門 以 其 地 洿 下 排 橛 疊 石 而 後 城 之 故 其 功 倍 他 태조실록 권 10, 태조 5년(1396) 9월 24일( 己 卯 ) 성 쌓는 역사가 끝났다. 정부( 丁 )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 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 石 城 )으로 쌓았다. 간간( 間 間 )이 토성( 土 城 )의 운제 ( 雲 梯 )가 빗물의 충격을 받아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았다. 또 운제( 雲 梯 ) 한 곳을 더 두어서 수세( 水 勢 )를 나누게 하였다. 석성( 石 城 )으로 낮은 곳을 덧쌓았다. 또 각문( 各 門 )의 월단 누합( 月 團 樓 閤 )을 지었다. 정북( 正 北 )은 숙청문( 肅 淸 門 )이다. 동북( 東 北 )은 홍화문( 弘 化 門 )이니 속칭 동소문( 東 小 門 )이라 한다. 정동( 正 東 )은 흥인문 ( 興 仁 門 )이니 속칭 동대문( 東 大 門 )이라 한다. 동남( 東 南 )은 광희문( 光 熙 門 )이니 속칭 수구문( 水 口 門 )이라 한다. 정남( 正 南 )은 숭례문( 崇 5 門 )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한다. 소북( 小 北 )은 소덕문( 昭 德 門 )이니, 속칭 서소문( 西 小 門 )이라 한다. 정서( 正 西 )는 돈의문 ( 敦 義 門 )이다. 서북( 西 北 )은 창의문( 彰 義 門 )이라 하였다. 築 城 役 訖 放 丁 其 春 節 所 築 有 因 水 湧 頹 圯 者 以 石 城 築 之 間 以 土 城 雲 梯 爲 雨 水 所 衝 以 致 圯 毁 處 復 築 之 又 置 雲 梯 一 所 以 分 水 勢 石 城 有 低 下 者 加 築 之 又 作 各 門 月 團 樓 閤 正 北 曰 肅 淸 門 東 北 曰 弘 化 門 俗 稱 東 小 門 正 東 曰 興 仁 門 俗 稱 東 大 門 東 南 曰 光 熙 門 俗 稱 水 口 門 正 南 曰 崇 5 門 俗 稱 南 大 門 小 北 曰 昭 德 門 俗 稱 西 小 門 正 西 曰 敦 義 門 西 北 曰 彰 義 門 태조실록 권 13, 태조 7년(1398) 2월 8일( 乙 酉 ) 도성( 都 城 )의 남문( 南 門 )이 이루어졌으므로, 임금이 가서 보았다. 乙 酉 / 都 城 南 門 成 上 往 觀 之 1398(태조 7)년 2월 8일에 도성의 남문, 곧 숭례문이 완공되어 태조가 가서 보 았다는 것은 육축 위의 문루까지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1422(세종 4)년에는 도성 가운데 토성( 土 城 )으로 된 부분을 석성( 石 城 )으로 바꾸는 공사를 했다. 이때는 숭례문은 태조대 모습 그대로 있었다. 1447(세종 29)년 8월, 당시 좌참찬

24 서울 한양도성과 문 19 정분( 鄭 苯 )이 담당하여 도성의 숭례문 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낮은 지 대를 돋우고 홍예문을 내고 문루를 건축하는 큰 공사였다. 이 공사는 1448(세종 30)년 3월 17일 상량( 上 樑 )을 하고, 5월에 준공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말년의 공 사로 숭례문은 태조대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보수 정도가 아니라 실제 로는 중건( 重 建 )이었다. 세종실록 권 117, 세종 29년(1447) 8월 30일(기축) 숭례문( 崇 5 門 )을 새로 짓는데 좌참찬( 左 參 贊 ) 정분( 鄭 苯 ) 등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분( 苯 )이 오로지 토목( 土 木 )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 ( 營 繕 )하는 일이 서로 이어지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 新 作 崇 5 門 命 左 參 贊 鄭 苯 等 監 督 其 役 苯 專 以 土 木 之 事 爲 己 任 營 繕 相 繼, 先 意 承 迎, 財 力 匱 竭 세종실록 1447년(세종 29) 8월 30일에 숭례문을 새로 짓는 일을 당시 좌참찬인 정분( 鄭 苯 )에게 맡겼다는 기사로 보아서 이 무렵에 숭례문을 새로 짓는 공사를 준비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권 118, 세종 29년(1447) 11월 12일(신축)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때가 바야흐로 추워서 얼음이 얼으니, 숭례문( 崇 5 門 )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정지하고자 하나, 다만 두렵건대 개춘( 開 春 )이 되면 질역( 疾 疫 )이 성행할 것이므로 감히 못한다. 장차 정부 ( 政 )에 의논하겠다. 공사가 진행 중이나 겨울 추위로 어려움을 겪다. 세종실록 권 120, 세종 30년(1448) 5월 12일(병신) 세자( 世 子 )가 의정 하연( 河 演 ) 황보인( 皇 甫 仁 ), 찬성 박종우( 朴 從 愚 ) 김종서( 金 宗 瑞 ), 참찬 정분( 鄭 苯 ) 정갑손( 鄭 甲 孫 )을 인견하고 종서( 宗 瑞 )의 상서( 上 書 )한 조건을 의논하 는데, 임금의 뜻을 전하기를, 일곱째, 흥작( 興 作 )하는 일은 차츰차츰 제거하였고, 또 지금 남대문( 南 大 門 )의 일도 이미 끝이 났다. 파하지 않은 일을 또 일체 정지하여 파하려 하니, 경 등은 하나하나 상의( 商 議 )하여 아뢰라 하니... 世 子 引 見 議 政 河 演 皇 甫 仁 贊 成 朴 從 愚 金 宗 瑞 參 贊 鄭 苯 鄭 甲 孫 議 宗 瑞 上 書 條 件 傳 上 旨 曰... 其 七, 興 作 之 事, 稍 稍 除 去 且 今 南 大 門 之 役, 已 告 畢 矣 1448년(세조 30) 5월 12일에는 숭례문 공사가 이미 끝나 있다.

2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1479(성종 10)년에도 숭례문을 크게 보수하는 공사를 벌여, 4월 2일에 입주( 立 柱 ) 기둥을 세우고 5월에 준공하였다. 기둥을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부분적으로만 손을 본 것이 아니라 크게 고치는 공사, 곧 중수( 重 修 )였던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 가운데서도 무너지거나 불에 타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런데, 굳이 뒤집어 생각해 보자면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이때 숭례문은 무너졌거나 아니면 크게 망가졌어야 한다. 도성과 도성의 문들은 외적의 침입을 막 아내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그런데 그 외적이 서울까지 침범하는 상황에서도 멀쩡히 있었다는 것은 기실 자랑거리가 못된다. 숭례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버리고 도주한 당시의 임금과 관료들, 장졸들에게 할 말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 도성을 크게 고쳤고, 그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서 손을 보았기에 숭례문도 필요에 따라서 고쳤을 것이므로 부분적으로는 모습이 바뀌었겠지만, 아무튼 크게 보자면 숭례문은 조선 후기에서 말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제자리 제 모습을 지켜왔다.

26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고 연 희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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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23 정선( 鄭 敾, 1676~1759)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목 차 1. <금강전도>에 대하여 2. <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정선의 진경산수화( 眞 景 山 水 畵 )는 대개 문인들이 유람한 공간과 거주한 공간을 그 리고 있다. 대표작을 꼽자면, 유람공간의 그림으로는 <금강전도( 金 剛 全 圖 )>, 거주공 간의 그림으로는 <인왕제색도( 仁 王 霽 色 圖 )>이다. 금강산은 조선후기 문사들에게 최 고의 절경으로 선정되어 가보기가 열망되던 곳이었다. 정선이 그린 수없이 많은 금 강산도 가운데 금강산의 전모를 웅걸차게 담아 그린 <금강전도>는 정선 금강산도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인왕산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의 명당주거지로 인정되어 권세가가 들어서던 곳이고 정선이 늘그막에 저택을 마련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인 왕산 일대의 기운과 수려함을 잘 표현한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그린 한양그림 중 으뜸이다.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는 정선 개인의 득의작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수준의 국보급 작품들이다. 특히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관동의 금강산과 서울의 인왕산 등 대표적 명산( 名 山 )으로 드러낸 조선 시대 회화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두 점 산수화가 점한 한국회화사에서의 우뚝한 위 상은 영원히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본 강의는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의 회화적 우수성을 살피고 이들 작품의 제작 배경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 두 점의 거작은 뛰어난 작품성과 민족사적 의미를 동 시에 가진다는 점에서, 여러 연구자들이 주목하였고 그들 나름의 해석을 펼쳤다. 이에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함으로써 이 두 작품에 대한 다각적 이해를 돕고자 한다.

2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1. <금강전도>에 대하여 <금강전도>, 1734년, 종이에 수묵담채, cm,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217호 먼저 <금강전도>를 소개하겠다. 그림을 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한 눈에 보이 도록 그려져 있다. 세로 130cm의 제법 큰 화면의 중심에 커다란 산의 덩어리가 위치 하였는데 그 크기는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면을 채운 금강산 모든 바위 봉우 리에는 필선이 기운차게 베풀어져 있다. 또한 이 거대한 산덩어리는 구름 속에 그 모습만 드러난 듯 바다에 표류하는 듯 그 주변이 하늘색과 흰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금강전도>의 화면은 전반적으로 강렬하고도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게 된다. 화면의 왼편을 보면, 金 剛 全 圖, 謙 齋 라는 그림제목과 화가이름(호)가 선명하게 적혀있고, 謙 齋 라 적은 아래 謙 齋 라는 백문방인(글씨가 하얗게 드러나는 사각형태의 도장)이 찍혀있다. 화면의 오른쪽을 보면 긴 글이 적혀 있다. 번역하여 소개하면, 일만 이천 봉우리 드러낸 뼈를 뉘라서 뜻으로써 참모습을 그려내리( 寫 眞 ). 뭇향기는 동해 끝 해 솟는 나뭇가지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도다. 바위봉우리는 몇 송이 부용( 芙 蓉 )인 양 하얀 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 무가 현모한 도의 문을 가렸구나. 설령 내가 발로 직접 밟아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니 그 어찌 베개 아래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 라 하여 그 당시 일반적으로 거론되던 금강산의 기상과 아름다움 및 실경산수그림의 효용성( 臥 遊 )을 말하였다. 이 글 아래에 작고 단정하게 적힌 네 글자는 甲 寅 冬 題 (갑인년 1734년 겨울에 쓰다)이다. 곧, 정선 59세 겨울 이전에 그려진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 글은 정선이 쓴 글이 아니다. 이 작품의 구성법, 필묵법, 그리고 금강산이 그림의 주제로 각광받은 시대적 배경 등은 모두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끄는 요소들이었다.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 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우리 문화의 내재적 자생적 발전론을 기대하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명( 明 )이 몰락하고 청( 淸 )이 중국을 제패하고 치욕의 정묘호란까지 치르면서 조선의 문사들은 스스로 중국문명을 계승하노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자 하였다. 이를 조선중화사상( 朝 鮮 中 華 思 想, 청오랑캐가 중국땅을 차지하였으니 중화문명은 조선이 계승한다는 사상)이라 부 른다. 조선중화라는 것은 고려로부터 있어온 소중화( 小 中 華 ) 개념을 반영하여 조선 후기에 대두된 개념이다. 조선시대 전 중기에는 중국의 산수라 할 수 있을 듯한 비 실경의 산수가 그려지다가 조선후기에 조선의 실경이 산수화의 주제가 된 것은 조선

30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25 중화사상이 태동한 때문이라는 것이 해석자들의 주장이다. 조선중화사상 아래 기존의 성리학은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되었고, <금강전도>는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제작 되었다. 조선이 중심이 되었기에 조선국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며, 금강산은 음 양조화의 태극문양을 보이는데 성리학적 사유를 반영한 구성이라고 해석된다. 즉 조선중화사상과 조선성리학을 정선이 잘 소화하여 이러한 걸작을 낳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화의 교류실제와 문화사적 관점에 입각한 해석이다. 금강산에 관심을 가지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문사들의 문화생활은 중국으로부터 입수된 중국 기행문학과 이를 그린 명산도계열의 영향을 반영한다. 안동김씨일문(김창협 김창흡 중심)을 중심으로 금강산 유람이 열병처럼 번졌으며 천기 ( 天 機, 하늘의 기밀)의 획 득과 표현을 내세우며 좋은 시를 얻고자 한다며 여행을 일삼았다. 정선은 이들의 후원을 받았고 이들이 여행한 곳들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당시 중국에서 입수된 중국명산도 시리즈물의 명산( 名 山 ) 표 현의 공식을 활용하고 있다. 정선은 그들이 다닌 곳을 중심으로 금강산의 전도와 세부도를 수없이 반복하여 그렸다. 그들의 요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는 그가 그린 금강산 세부도(유람자들이 집중적으로 방문하는 곳을 그린 그림)의 집합체로 내용을 채우고 중국식 명산표현의 공식을 활용하여 그 려진 그림이라는 점이다. 금강전도는 금강산 전체를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이러한 금강산 구성법은 정선 금강산도를 독창적으로 만들도록 하였고 그의 개인적 기량이 더하여져 우수한 작품이 탄생하였다. 2. <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cm,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를 보면 화면을 압도하는 시커먼 먹 표현의 바위봉우리 아래로 하얀 연운이 뭉실거리며 피어오르고 그 아래로 소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는 장관이 인상적인 화면이다. 화면을 가득 메운 산이 장중하고, 특히 화면의 아래 위로 처리된 검은 먹칠의 과감하고 힘찬 붓질이 독특하게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화면 중 하단은 부드러운 흰 연운이 감싸면서 그림의 운치를 감돌게 하는데 연운 끝자 락에 저택의 지붕만이 활짝 올라간 요소가 조합되어 그림의 오묘한 운치가 감돌게 된다.

3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화면의 오른편 위에 仁 王 霽 色 謙 齋 (인왕의 날이 개다 겸재)라는 글이 적혀있고, 그 아래 謙 齋 라는 백문방인과 元 伯 이라는 주문방인(글씨가 붉게 드러나는 사각형 태의 도색)이 찍혀있고, 그 다음 줄에는 辛 未 潤 月 上 浣 (신미 윤월 상완)이라 적혀 있다. 1751년 음력 윤 5월 상순에 그렸다는 뜻이다. 정선이 이를 그린 때는 76세 여름이다. 노년의 자신감 넘치는 붓질임을 알 수 있다. <인왕제색도>는 훗날 18세기 후반기에 심환지(정조대의 영의정)에게 입수되었다. 심환지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시 한 수를 적어 붙여두어 전하고 있었다. 그 내 용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삼각산 봄 구름비 보내니 넉넉하고, 만 그루 소나무 푸른 빛이 그윽한 집을 둘렀구나. 주인옹은 반드시 깊은 장막에 앉아 홀로 하도( 河 圖 )와 낙서( 洛 書 )를 완상하시리 이다. 이 그림의 가장 주된 특성은 실경의 흰색 암봉을 시커멓게 처리한 점이다. 만약 이 검은 바위가 필선으로 그려졌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명작 <인왕제색도>는 없었을 것이다. 정선은 무슨 이유로 바위를 시커멓게 그렸으며, 도대체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그림일까. 인왕산만을 주제로 그렸을 리는 만무하다. 심환지의 제발시도 말해주듯이 인왕산 아래 번듯한 지붕의 주인공의 저택과 그 배경의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즉 누구의 집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연구자들의 해설은 이러한 점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시커먼 바위에 대하여는, 비온 뒤의 젖은 바위라는 해설과 인왕산의 기운을 표현 하려고 한 표현법이라는 두 가지 해설이 있다. 霽 色 (제색)이란 그림 제목이 비온 뒤 갠 산을 표현하고 있으니, 아직 젖은 바위라고 보는 것도 자연스럽고도 흥미로운 해석이다. 실제로 해가 나면 눈부시게 흰빛이던 인왕산 암벽은 날 흐리고 비가 오면 우중충한 색으로 변하면서 묘한 기운을 발하기 때문이다. 한편 기운의 표현이라는 해석은 인왕산의 문화사적 해석이 반영된 것이다. 인왕산은 무학대사가 경복궁의 주산으로 삼아야 할 산이라고 할 만큼 한양에서 기운이 좋은 산으로 공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왕산 아래로 권력가가 운집하였고 인왕산 기운 아래서 명사가 난 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옛 지도의 인왕산 봉우리는 시커멓게 그려졌다. 정선이 그린 인왕산 계곡의 바위들도 날씨에 관계없이 검은 먹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울러 정선이 바위를 검게 칠한 기법은 당시 유입되어 있는 청대 초기의 중국명산도 판화집 (특히, 명말청초에 판화도 제작에 기여가 컸던 소운종( 簫 雲 從 )의 태평산수도( 太 平 山 水 圖 ) )의 표현기법이 활용되었다는 점이 실증적 관점의 예로 제시되어 있는 이 론이다. <인왕제색도>에 오른편 아래 자리한 집은 누구의 집일까. 이는 그림의 주제와 결부 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정선의 벗 이병연의 집이라는 하나의 해석이 오래되

32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27 었고, 이후 정선 자신의 집이라는 해석이 새로 나와 있다. 두 해석 모두 여러 정황을 종합한 추정이다. 이병연설은 그림이 그려진 때가 정선과 교유하며 그림과 시로 쌍 벽으로 칭송된 장본인 이병연(1671~1751)의 타계 며칠 전이었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평생지기가 곧 죽어가는 데 이러한 대작을 그린 이유라면 그림으로 쾌유를 비는 화 가의 마음으로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는 것이 이러한 해석을 하는 연구자들의 주장 이다. 이병연의 저택은 육상궁 뒤편에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조선중화주의와 조선성리학을 소화하여 그림을 그린 정선의 거대한 위상을 돋보이게 해준다. 그 말 년의 최고작이 벗의 죽음 앞에 바쳐진 그림이라는 사실은 매우 감동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편 이 그림이 정선 자신의 집을 그렸다는 주장은 벗이 죽어가는데 정 선은 그의 자부심 표현으로 대작을 그렸다고 들린다. 그러나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다. 정선은 인왕산 아래 동네 순화방 인왕동(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로 이사 하여 60대 무렵부터 거주지 주위의 한양경관을 그리면서 화풍 확립의 전성기를 맞 는다. 정선은 1745년 1월, 5년 동안의 양천현령에서 물러난 후 그 동안 그림으로 번 돈으로 솟을 대문을 증축하여 집을 짓고, 이황과 송시열의 필적이 있는 외조부 댁 소장의 주자서절요서( 朱 子 書 節 要 序 )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이황과 송시열의 유거 처와 함께 외조부의 풍계유택과 자신의 인곡정사( 仁 谷 精 舍 )를 그려 합철함으로써 벌열가에 비해 차별되었던 명문의식을 드높게 표명한 바 있다. <인왕제색도>의 집이 정선의 집이라는 해석은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이 제작되었을 것이라 보는 해석이다. 실제로 이병연에 대한 정선의 입장에 대하여는 분명한 기록이 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앞서 소개한 심환지의 글에서 주인옹이 하서와 낙도를 감상한다는 구절은 이 집주인이 정선 자신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정선에 대한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정선의 특징 중 하나가 음양설에 밝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그림 속 두 갈래 폭포 중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 아래로 집이 위치한 점은 정 선의 주택 부근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해석의 타당성이 높아진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누구의 집을 그린 것이든, 그 집이 인왕산의 기운 아래 자리잡고 있다는 내 용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즉 이 그림은 인왕산의 표현에 그림의 무게축이 옮겨가 있고, 바로 이 점에 감상의 초점도 놓여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두 작품과 연관하여 참고해 볼만 한 서적으로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참고문헌>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그림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안휘준 정양모 외, 한국의 미,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 회화 공예

34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백제 금동용봉향로- 최 응 천 (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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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1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 목 차 1. 머리말 2. 부여 능산리 절터 3. 백제 금동용봉향로 4. 금동용봉향로를 통해 본 백제인의 사상 1. 머리말 향이란 산스크리트어인 간다(Gandha)를 번역한 것으로서 원래 고온다습한 인도 에서 악취를 없애고 실내의 습기를 제거하고자 쓰이던 것이었다. 이것이 점차 수행 자들이 지니던 필수품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고 불교의 성립과 함께 부처님 앞에 올리는 공양물로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향을 담고 피우기 위한 향로는 불교가 전래 되기 앞서 기원전 무렵인 중국 한대( 漢 代 )에 이미 청동기로 박산향로( 博 山 香?)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박산향로가 전래된 사실을 옛 낙랑지역에서 발견 된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만 향로의 본격적인 제작과 사용은 역시 불교의 전 래와 함께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쌍영총( 雙 楹 塚 ) 고분 벽화 행렬도에 보이는 머리에 인 향로의 모습이나 단석산 신선사( 斷 石 山 神 仙 寺 )의 마애상 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잡고 공양하는 조각 등을 통해 삼국시대 후반쯤 부터는 이미 향로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원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대( 漢 代, B.C. 06~A.D. 219)에 만들어진 당대 도가사상의 상징물이었던 박산향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금동 대향로는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향로 중에 세밀한 형태나 구성, 크기, 조각기술 등의 여러 면에서 가장 월등한 최고의 걸작이다. 일반적으로 몸체 상단부분의 중첩된 산 봉우리 조각과 몸체 하단부의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 承 般 ), 다리 받침의 3단 구성으로 이루어진 중국 박산향로는 전한( 前 漢 )시대에 화려한 조각품으로 거듭난 후 후한( 後 漢 )

3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이후에는 점차 도식화되어 간다. 중국 한대에 제작된 뚜껑 달린 항아리의 뚜껑부분 조각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비교하여 저부조이면서 금 상감 기법이라는 다른 방식으 로 주조되었으나 산과 능선의 묘사, 능선 가장자리에 새겨진 도식적인 직선 무늬, 우에서 좌로 표현된 동선 및 시선 처리가 상당히 유사하다. 이와 같은 저부조 형식 의 조각은 한대에 나타나는 공통된 형상이다. 반면, 서한 중산왕국의 유승 묘( 劉 勝 墓 )에서 출토된 고부조의 박산로는 전체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와 가장 유사한 예로 알려져 있다. 중국 남조(420~589)묘의 화상전에서도 백제금동대향로와 유사한 향로 들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중국 중부 하남성 등주에 위치한 5세기 후반경의 남조 묘 벽돌에 새겨진 향로는 용이 똬리를 튼 모양의 받침이 매우 독특하다. 뚜껑 부분의 봉황과 산악의 표현을 비롯한 세부묘사가 도상적으로 매우 흡사하며 산악 부분에 동 식물과 인물 등의 세부 묘사들이 표현되었는지 여부는 분명치는 않지만 유사한 도상들이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세기 중~후반경의 중국 강소성 상주 척 가산 남조 묘의 벽돌에 묘사된 향로는 꼭대기의 봉황이 유난히 강조된 듯 보이고 산악의 표현이 다소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조각되었다. 따라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원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중국의 화상전이나 벽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롭다. 2. 부여 능산리 절터 538년 지역적으로 협소하였던 웅진( 熊 津 )을 떠나 부여( 扶 餘 )로 천도하게 된 백제는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123년 동안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는 등 불교문화가 더욱 융성해 지면서 많은 사찰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그에 따르는 탑, 불상 등의 불교조상이 활발히 이 루어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사리기( 舍 利 器 )와 범종( 梵 鐘 ), 향로( 香?) 등의 불교금속 공예품도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불교공예품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탑 안에 봉안시키기 위한 사리를 보호하거나 장엄하기 위한 사리기였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사리장엄에 관해서는 588 년에 백제에서 승려와 불사리를 보냈다는 일본서기( 日 本 書 紀 ) 의 기록이나 구아리 ( 舊 衙 里 ) 폐사지( 廢 寺 址 )에서 출토된 목탑 심초석( 心 礎 石 ) 중앙부에 뚫려진 사리공을 통해 이 시기에 사리공양( 舍 利 供 養 )과 함께 사리장엄구( 舍 利 莊 嚴 具 )가 제작되었음을 추측하여 왔다. 그러나 부여 능산리 목탑지 아래의 심초석 위에서 567년에 제작된 화강석제 사리감( 舍 利 龕 )이 출토됨에 따라 6세기 중엽경에 이미 사리장엄과 제작이

38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3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용봉향로( 金 銅 龍 鳳 香?)는 백제 금속공예의 탁월함을 여실히 입증해 준 작품으 로서 놀라우리만치 완벽한 조형성과 함께 당시 백제인이 지녔던 수준 높은 종교사 상과 정신세계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데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92년부터 95년까지 4차에 걸쳐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된 부여 능산리 유적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절터로서 아래로부터 중문, 목탑, 금당, 강당( 中 門, 木 塔, 金 堂, 講 堂 )의 순서로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시대 초기 가람( 伽 藍 ) 구조를 하고 있음이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었다. 이 절터는 사비도성( 泗 沘 都 城 )의 외 곽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 羅 城 )의 바깥쪽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고 발굴조사 시 공방지( 工 房 址 )로 추정되었던 제 3,4 건물지와 같은 공방이 회랑( 回 廊 )이 지나가는 자리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사찰은 건립 당시부터 단순한 불교사원이 아닌 능산리 고분군의 원찰( 願 刹 ) 혹은 능사( 陵 寺 )로 추정되고 있다. 3. 백제 금동용봉향로 이 향로는 1993년 10월 부여 능산리 사지의 회랑 부근에 위치한 제 3건물지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그 높이가 64cm에 이르는 대작으로서 아래로부터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노신( 爐 身 )의 하부 받침을 물고 있는 대부( 臺 部 )와 불륨있는 앙련( 仰 蓮 )의 중첩 연판( 蓮 瓣 )으로 구성된 노신부( 爐 身 部 ), 그리고 박산( 博 山 )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된 개부( 蓋 部 )의 3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뚜껑의 정상에는 날개를 활짝 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 不 A 長 生 )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 三 神 山, 蓬 萊 方 丈 瀛 洲 山 을 일컫음)을 상징적으로 표 현한 것으로 믿어진다. 한대( 漢 代 )의 박산향로에는 삼신산에 살며 불로장생한다는 신선들이나 동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때로는 신선들의 세계와 당시 생활 풍속 등이 묘사되기도 한다. 동물들은 실재하는 동물 이외에 주로 상상의 동물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상상의 동물들은 임금이 선정( 善 政 )을 베풀 때 나타난다는 용, 봉황, 기린( 龍, 鳳 凰, 麒 麟 ) 등의 상서로운 동물이 많이 표현된다. 그 가운데 봉황은 주로 향로의 정상에 두게 된다.

3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능산리 출토의 금동향로 역시 이와 같은 중국 박산로( 博 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나 하부의 승반( 承 盤 )과 간주( 竿 柱 )를 대신하여 머리를 들어 노신의 받침을 물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대부를 구성한 점이 자못 이채롭다. 유사한 구성을 지닌 중국 향로로는 중국 상해박물관( 上 海 博 物 館 )에 소장된 후한( 後 漢 ) 초기의 금동향로를 들 수 있는데, 특히 개부 정상에 한 마리의 봉황을 배치한 모습이라던가 승반 없이 몸 체를 휘감은 용의 몸체로 대부를 삼고 있는 형태가 매우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진 중국 향로는 박산형의 개부를 제외하고는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나팔형 간주, 접시 모양의 넓은 승반으로 구성된 보다 단순한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아울러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도자기를 재료로 하는 향로가 제작되기도 하며 박산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와 형태만이 잔존하는 추상화된 작품이 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능산리 출토 금동향로의 대부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 곡진 몸체의 후미( 後 尾 )와 그곳에서 뻗어나온 구름 모양의 갈기를 투각 장식하여 받침으로 삼았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 뒤까지 길게 뻗어 있고 길게 찢어진 입 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용의 입 안에 물려진 짧은 간주 위로는 노신의 하부 받침을 연결시켰다. 이처럼 용이 물고 있는 형태로 연결시킨 모습은 신라의 금관총( 金 冠 塚 ) 출토의 초두( 鐎 斗 )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의장이다. 간주에서 연결된 기둥은 노부의 둥근 내저면( 內 底 面 ) 안 으로 약간 솟아올라 그 끝단에 별도의 고리로 끼워 고정시켰다. 한편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의 외측면은 잎이 넓은 앙련( 仰 蓮 )으로 3단의 층단을 두어 중첩 장식되었는데,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 부분에는 평행사선문을 음각하여 연잎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백제 특유의 유려한 연판은 무령왕릉( 武 寧 王 陵 ) 출토의 은제 잔탁( 盞 托 )이나 부여 외리( 外 里 )에서 출토된 문양전( 文 樣 塼 )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생 동감 넘치게 표현되고 있다. 층단을 이룬 연판은 동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이 가장 폭이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제일 하 단의 연판에는 2줄의 음각선으로 복엽( 複 葉 )을 묘사하고 있다. 그 위에 붙은 각각의 연판 안으로 물고기, 신조( 神 鳥 ), 신수( 神 獸 )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진 양각으로 장 식하였으며 제일 상단의 연판과 연판 사이의 노신 여백 면에도 연판의 부조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동물상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서로 대칭을 이루며 반대편에 배치된 고개를 뒤로 돌린 학처럼 생긴 새와 물고기의 경우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지니고 있어 같은 문양판이 반복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물뿐이 아니라 상단 연판의 한 면에는 요고( 腰 鼓 )를 연주하는 모습의 주악천인상( 奏 樂 天 人 像 )과 그

40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5 아래의 오른쪽 연판에도 동물을 타고 있는 듯한 1구의 인물상이 장식되었다. 따라서 이 노신면에는 두 마리의 새를 중첩 표현한 연판 상단의 여백면을 포함하여 도합 23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지만 수중생물과 날짐승 등을 특정한 규칙에 의해 배열한 것 같지는 않다. 노신의 상단 연판 위에는 1단의 문양띠를 두어 유려한 당초문을 음각시켰으며 그 위로 직립 구연의 턱을 만들어 박산형의 뚜껑을 끼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개부의 하단 구연부에도 동일한 문양대를 배치하여 이 두 문양대가 서로 맞닿도록 구성한 배려를 볼 수 있다. 노신 상부에 얹혀진 개부는 74개의 산과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그 능선에는 1단의 문양대를 배치하여 내면에 집선문( 集 線 文 )을 장식하였다. 이 산봉우리와 계곡 사이 에는 각종의 진금기수( 珍 禽 寄 獸 )와 인물상이 드라마틱하게 고부조( 高 浮 彫 )로 묘사되어 있는데, 6그루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하여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도 보인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 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산중을 거닐거나 나무 밑에서 참선을 하는 인물, 낚시를 하거나 말을 타고 수렵하는 인물상 등 도합 16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과 동물들은 거의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다리의 동물들은 앞발을 들어 앞으로 전진하는 운동감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으며 기마인물상의 경우 말의 목과 사람의 시선은 오른쪽(뒤편)으로 돌 리고 있으나 왼쪽으로 달리는 자세이다. 기사( 騎 士 )가 머리를 돌려 조류나 맹수를 향해 화살을 쏘는 파르티아식 활쏘기는 중국에서는 한대부터 출현하는 문양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후한시대 금착수렵문 동통에 표현된 수렵문은 다소 복잡한 구성을 띄고 있으나, 단조로운 선들로 산 능 선을 표현한 부분 및 힘차게 달리는 말과 무사의 역동적인 모습, 사슴, 호랑이 등의 동물과 새들의 생생한 묘사는 한대 양식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용, 연꽃과 더불어 신선세계, 혹은 불상이나 보살상이 함께 표현된 도상은 중앙아 시아에서 자주 애용된 소재이다. 특히 용의 입김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도상은 중국 산동성 청주시 용흥사( 龍 興 寺 ) 소장의 불상의 대좌 조각과 상당히 흡사하다. 또한 꿈틀대고 있는 용과 신선세계가 함께 표현된 도상은 5세기 후반 북위시대에 조성된 산서성 운강석굴 제10굴 전실 입구 조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산봉우리 사이로 사슴, 사자 등의 동물들과 새들이 용을 중심으로 상단부와 하단부 양쪽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각되어 있다. 나름대로 다양한 방향으로 동물들의 움직이는

4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려 하였으나 백제금동대향로에 표현된 동물들 보다 긴장 감이 떨어진다. 한편 뚜껑에 뚫린 연기 구멍은 중단에 4개와 상단부에 4개를 둥글게 돌아가며 포 치하였는데, 이들 모두 솟아오른 산악의 뒤편에 가려져 정면에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렇지만 구멍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그 외연을 투박하게 처리한 금속의 타격흔적을 볼 수 있어 주조 후에 다시 구멍을 뚫은 것으로 추측된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주악천인상이 각각 5가지의 악기( 琴, 阮 咸, 鼓, 縱 笛, 簫 )를 연주하고 있는데, 소발( 素 髮 )로 깎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묶여 있으며 통견( 通 肩 )의 도포자락과 악기마다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완함 1), 종적, 배소 등의 악기는 서역의 벽화(키질석굴[3~9세기], 운강석굴 [460~524년])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 중앙아시아의 영향이 명확히 드러난다. 여기서 거문고로 논의되고 있는 형태가 독특한 악기는 5~6세기경의 남조 벽돌무덤의 벽면에 새겨진 죽림칠현( 竹 林 七 賢 ) 2) 과 영계기 에서 혜강이 들고 있는 악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유행하던 거문고 형식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표 현된 북은 남방계 항아리북으로 논의되고 있으나 유사한 도상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용, 연꽃, 악사가 3단 구조로 함께 등장하는 화면 구성은 고구려 장천 1호분 청룡보살 비천 기악도와 673년경에 제작된 국립청주박물관 소장의 계유명( 癸 酉 銘 ) 아미타불비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미타불비상의 양쪽 측면에 용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마치 용의 입김으로 인해 연꽃잎이 생성하듯 묘사가 되어 있으며 그 위에 광 배를 하고 있는 신선들이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용과 연 꽃의 생성, 그리고 악사들의 소재를 이용한 화면 구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악사와 악사 사이에 솟아 있는 5봉우리의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응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들은 모두 날개를 접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상부의 봉황을 응시한 측면관의 모습인 반면 그 가운데 유독 1 마리의 새만은 고개를 위로 쳐들어 봉황의 후면을 올려보는 후면관으로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즉 이 새가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봉황의 후면에 해당되도록 구성하였다는 1) 완함이라는 명칭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이었던 완함이 비파를 잘 연주해서 유래된 용어이고, 완함이 비파를 계량하여 만든 것이 루안이라는 중국 악기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월금이라고 부른다. 2) 죽림칠현은 위나라가 후한왕실을 찬탈하고 정치적 전환기에 자신만의 시대를 진지하게 살아간 당 대의 전위적 지식인들로 노장사상을 계승하고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청담인( 淸 談 人 )이 었다. 도교가 유행하면서 그들이 도교적 의미를 지닌 종교 우상으로 승화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42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7 것은 봉황과 개부가 주조 당시부터 움직이지 않게 접합된 점으로 미루어 이곳을 처음 부터 의도적으로 후면에 배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덧붙여 이 새를 중심으로 그 아래 부분에는 기마인물상과 함께 유일하게 도철문( 饕 餮 文 )이 새겨진 점도 주목 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 그 반대편에는 봉황의 정면부와 양쪽으로 비켜져 고개를 돌린 동일한 모습의 2마리 새 사이로 완함( 阮 咸 )을 연주하는 주악상이 배치되고 그 아래로 낚시하는 신선이 장식되어 있는 방향이 처음부터 정면을 이루도록 구성된 것이라 하겠다. 개부의 정상에는 보주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한 마리의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가슴 윗부분에는 연기가 나올 수 있도록 2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음이 주목된다. 머리 위로 솟은 벼슬과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 예리한 눈, 그리고 턱 아래 붙은 보 주와 활짝 편 날개 뒤로 치솟아 있는 환상적인 긴 꼬리 등 봉황의 자태를 그 어느 작품보다 가장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이 향로에 보이는 전체적인 구성에서 간취되는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음양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 수중동물, 즉 음의 대표적인 용을 받침으로 하여 그 위의 노신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수중생물이나 물과 관련된 동물을 연판 안에 배치 하였으며 상부의 뚜껑 부분에는 산악과 나무 등과 함께 지상의 동물 및 인물상, 신선 등을 등장시키고 천상계( 天 上 界 )인 정상에는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있음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금동향로는 금속공예로서의 탁월한 주조기술뿐 아니라 당시 백제인이 지녔던 수준 높은 종교사상과 정신세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4. 금동용봉향로를 통해 본 백제인의 사상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제가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한성시대( 漢 城 時 代 )인 384년의 일이지만 이 시기에 해당하는 불교유적이나 유물은 현재까지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웅진 이후의 불교 유물도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시기 백제미술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무령왕릉의 발굴품들로서 비록 525년의 하한을 지닌 왕실 부장품이라는 피장자의 신분상 특성을 지닌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 수준 높았던 백제인의 미의식과 예 술관, 나아가 종교적, 사상적 측면을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4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기록상으로만 볼 때 6세기 전~중엽의 활발하였던 불교관계의 내용에 비해 실제적 으로 백제 불교미술과 그 조상활동은 6세기 중엽을 지나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즉 창왕명 석조 사리감이 만들어졌던 567년은 이 유물이 출토된 자리가 목탑지 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에 이르면 정림사지를 비롯한 부여 지방에 많은 절들이 조영되고 그에 따른 탑과 불상의 제작이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사리장엄의 본격적인 의궤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불교신앙의 교리적인 측면이 크게 부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시대가 조금 내려와 태안( 泰 安 )과 서산 ( 西 山 )의 마애불( 磨 崖 佛 )을 비롯하여 예산 사면석불( 禮 山 四 面 石 佛 )과 같은 불교조 각이 융성을 이루게 되는 등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 사이는 백제 불교미술의 극성기인 동시에 사상적으로도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향로는 불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노신의 바깥부분에 장식 된 연판문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구성원리나 세부 표현에서는 오히려 도교적 성격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즉 이 향로는 음양으로 대표되는 용과 봉황의 구성, 노신 외면의 박산( 博 山 )마다 표현된 각종의 인물상과 가상의 동물은 물론이고 낚시하는 장면과 수렵의 인물상, 도철문 등은 불교와 상반되는 도교적 요 소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산악과 동물의 모습은 이미 고구려 고분벽 화의 표현에 널리 찾아볼 수 있는 모티브인 동시에 특히 기마인물상이나 수렵의 장면 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거의 일맥상통한다. 백제의 경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제 탁잔에 장식된 산악과 용의 모습을 통해 이미 도교적 요소가 잠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송산리( 宋 山 里 ) 6호 전축분( 塼 築 墳 )이나 능산리 동하총( 陵 山 里 東 下 塚 )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 四 神 圖 ) 등을 통해 백제에서도 도교의 영향이 미술과 사상 전반에 걸쳐 매우 넓게 확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백제는 종교적으로 삼국 중 유일하게 불교나 유교, 도교 같은 사상 및 문화를 자유 롭게 수용하였다. 백제에는 4세기 중엽 장생불사( 長 生 不 死 ) 사상과 방술( 方 術 ) 등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634년 궁궐 남쪽에 연못 조성 시 못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 方 丈 仙 山 )을 섬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위태로운 정세와 계속되는 왕 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불로불사의 신선에 대한 동경과 추구를 염원했던 당시 백제 지식인층의 도교사상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흥법 보장봉노 보덕이암 조( 興 法 寶 藏 奉 老 普 德 移 庵 條 )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보장왕 ( 寶 藏 王 )이 삼교( 三 敎 )를 병흥( 倂 興 )하려 하고 연개소문( 淵 蓋 蘇 文 )이 도교( 道 敎 )를 구하자 하매 반룡사( 盤 龍 寺 )에 있던 고구려의 중 보덕화상( 普 德 和 尙 )이 여러 번 이를 막고자 간하다가 650년에 신통력으로 방장( 方 丈 )을 날려 완산주( 完 山 州, 지금의 全

44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9 州 )의 고대산( 孤 大 山 )으로 옮겼으며 결국 불교가 쇠하고 도교가 융성함에 따라 고구 려가 패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이 기록이 시사하듯 삼국시대 후반 7세기에는 불교보다 도교가 크게 득세하였고 이러한 고구려의 사상적 변화는 백제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은 백제에 서도 불교사원에까지 도교적 요소가 가미된 산경문전( 山 景 文 塼 ) 등이 제작될 수 있 었으며 나아가 백제 금속공예의 진수로 평가받기에 마땅한 금동용봉향로가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므로 이 금동용봉향로는 노장사상과 산 해경( 山 海 經 )에 등장하는 동물과 신선 등 도교를 밑바탕에 둔 백제 도교가 가장 극 성하였던 시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제작시기는 능산리 절터의 창건 시기이며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6세기 중~후반을 지나 산경( 山 景 )과 귀형 문전( 鬼 形 文 塼 )이 제작되었던 7세기 전반과 그다지 오랜 차이가 없는 7세기 전~중엽 쯤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동대향로가 제작된 시기는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예술적으로 최고의 관인들을 초빙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 했던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안한 왕권의 지속과 귀족 세력 간의 내부 권력 다툼으로 불행하게 죽은 선왕들의 불로장생과 극락왕생을 소망하는 백제왕들의 간 곡한 기원과 소망이 당대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향로로 탄생된 것이다. 이후 이 향 로는 왕실의 능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례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백제 멸망과 동시에 장구한 세월, 땅속에 묻히게 되었고 다시금 이 세상에 출현함으로써 잃어버린 백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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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고려의 영원한 초상( 肖 像 ), 운학문( 雲 鶴 紋 ) 청자( 靑 瓷 ) 장 남 원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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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43 고려의 영원한 초상( 肖 像 ), 운학문( 雲 鶴 紋 ) 청자( 靑 瓷 ) 1) 목 차 1. 국보 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2. 고려의 운학, 상서로움의 표시 3. 조선으로 계승된 운학문 4. 조선의 문인들이 본 운학문 청자 5. 영원한 고려의 초상으로 고려의 청자는 국가가 안정됨으로써 당시 중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도자 산업사 에서 점차 뚜렷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10세기 중엽 수도 개경 인근의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본격적으로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했고, 이후 전라도 강 진이 요업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11~12세기에는 청자의 기술과 조형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 북방의 요업 기술과 장식 기법이 유입되면서 고려는 짧은 시간에 자기( 瓷 器 ) 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기술력을 향상시켰다. 12세기경에 이르면 그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미 생활 용기로 자리 잡은 청자는 오래전 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도기( 陶 器 )나 금속기의 형태와 기능상의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 陶 瓷 )만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나가게 되었다. 청자에 운학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절정의 시기부터이다. 음각이나 양각, 상감 같은 여러 기법으로 완, 발( 鉢 ), 접시, 병, 합( 盒 ) 등을 운학문으로 장식했다. 이 가운데 특히 운학문이 그려진 매병( 梅 甁 )에서는 고려청자 절정기의 면모가 두루 보인다. 1) 본 글은 2013년 네이버캐스트에 게재되었던 원고임. =134&contents_id=24561#cbox_module

4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1. 국보 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지금 전하는 고려의 청자 운학문 매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제68호 매병이다. 작고 나지막한 반구형( 盤 口 形 )의 짧은 구연( 口 緣, 입의 가장자리)은 둥글게 부푼 팽만한 몸체와 대조를 이루면서 탱탱한 긴장감을 준다. 몸체 아래쪽으로는 날씬한 곡선을 그리며 잘록하게 좁아졌다가 벌어져, 강하게 팽창된 어깨와 대조를 이루면서 위엄을 더해준다. 자토( 赭 土, 검은 흙)와 백토( 白 土 )를 사용하여 몸 전체에 운학문을 상감 했는데, 목 아래에는 백상감으로 두 줄 원문( 圓 文 )을 두르고 그에 잇대어 여의두( 如 意 頭 ) 무늬를 돌렸 으며, 병의 바닥 쪽에는 흑백상감으로 두 겹 연잎 [ 蓮 瓣 ] 무늬를 넣어 장식하였다. 동체( 胴 體 ) 전면에 펼쳐진 운학문은 원( 圓 ) 안쪽과 그 바깥 바탕에 사진1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 13 각각 그려졌는데, 간격과 배치가 일정하여 매우 세기, 높이 42.1cm, 간송미술관 소장. 장식적이다. 원은 두 겹으로 안쪽은 검은색, 바깥 국보 제68호 쪽은 흰색으로 메워 상감하고, 어깨에서 몸체 아래까지 모두 6단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이 6단은 한 단에 7개씩, 총 42개의 원형 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형 창 안에는 하늘로 비상( 飛 上 )하는 학과 구름을, 그 바깥에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학을 구름과 함께 새겨 넣어, 학의 움직임이 서로 사방으로 교차하는 형상이다. 자칫 평면적이고 단조로울 수 있는 기면( 器 面 )을 효과적 배치로 확장시켜 깊이감과 아울러 입체감까지 더했다. 이처럼 정밀하게 계산된 듯한 문양의 구성과 배치는 고려의 또 다른 공예 기법인 나전칠기( 螺 鈿 漆 器 )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한 장식에 머물지 않고 팽창감과 안정된 비례를 준 기법에서 고려인의 치밀함과 재기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도자기에서 몸체를 파내어 다른 색 흙을 메워 넣는 기법인 상감( 象 嵌 )은 이미 중국 당나라(7~9세기) 때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흙을 사용하여 상감한 것은 고려만의 특기였다. 다른 성질의 흙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상감 기법은 빚는 과정에서도 까다롭지만, 흙마다 수축 팽창률이 서로 달라 불에 굽

50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45 고 식히는 동안 기면이 파이거나 튀어나와 완제품을 얻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은 얕은 상감으로 요변( 窯 變 )을 최대한 줄이는 기 법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2. 고려의 운학, 상서로움의 표시 구름과 학은 무슨 의미였을까? 왜 그들은 도자기에 구름과 학을 저토록 자주 그려 넣었을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구름과 학은 길상( 吉 祥 )을 상징한다. 일부 중국 회 화에 나타나는 학 그림은 고려청자의 운학문 장식과 매우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휘종( 徽 宗, 1082~1135) 등이 그렸다고 하는 서학도( 瑞 鶴 圖 ) 가 그렇다. 1112년 정월 어느 날 갑자기 황도 변경( 卞 京 )의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학들이 무리지어 궁전 위로 날아들어 한참 동안 머물자, 휘종은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서학도>에는 궁정 지붕 위로 열여덟 마리의 학이 여러 모습으로 날고, 두 마리는 지붕 양끝에 앉아 있다. 다른 배경 없이 구름 위로 날고 있는 학들 가운데, 날개를 펼치고 다리를 수평으로 쭉 뻗어 나는 모습은, 고려청자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학과 비교된다. 하늘을 나는 학은 중국 고대 부터 선정( 善 政 )의 상징으로 활용되어왔기에, 중국 송 황실도 이를 통해 의장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선학( 仙 鶴 )의 이미지는 상서( 祥 瑞 )로움으로 가시화되었다. 구름 사이를 나는 운학과는 다르지만 하북성 선화( 宣 化 ) 지역에서는 요( 遼 )나라 시대 무덤이 여러 기 발굴되었다. 거란의 상류층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무덤들이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엽에 조성된 이 무덤 벽화들에는 그들의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학( 鶴 )이 그려져 있다. 장광정 묘(1093), 장문조 묘(1093) 등에는 물풀과 붉은 꽃 사이로 노니는 학이 그려졌고, 6호 묘 후실 서남 벽화에는 물풀과 꽃 사이에서 부리로 땅을 쪼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장세고 묘(1117)에는 병풍 같은 화면에 꽃과 새들이 있는데, 그중 학은 괴석이나 꽃 등과 함께 그려졌다. 물론 요대( 遼 代 ) 벽화에 그려진 다양한 자세의 학들과, 여백이 넓은 화면 위에 구름과 학으로 이루 어진 고려청자의 운학문을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그러나 11세기 전반기에 매장이 이루어진 요나라의 진국( 陳 國 )공주와 부마 합장묘 전실( 前 室 ) 동벽과 서벽 상단에는 각각 운학문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고, 최근 발굴 성과가 알려진 요령성( 遼 寧 省 ) 서 북부 부신( 阜 新 )의 몽골 자치현 관산( 關 山 ) 지역의 요대 무덤에서도 선명하고 상세 한 운학문이 문의 윗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운학문이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이 밖에 송 원대 도자기, 남송대 금속기 등에서도 운학문 장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동안 고려의 맑은 하늘과 고려인의 고운 심성에 종종 비유되곤 했던 청자 운학문은 다른 무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 속에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 도자기에서 구름과 학이 어우러진 운학문을 찾기는 어렵다. 송대 자주요( 磁 州 窯 )에서는 장식 문양의 하나로 학 그림이 사용되기는 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거나, 물가에 학이 서 있는 장면이 도자기, 베개 등에서 보이기는 하나 그 수가 많지 않다. 송대 요주요( 耀 州 蓔 ) 청자완에는 각화( 刻 畵 ) 기법으로 입에 무엇인 가를 물고 있는 쌍학이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흔히 발견되는 무늬가 아니다. 더구나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함조문( 銜 鳥 文 ) 혹은 색조문( 咋 鳥 文 )과 관 련이 있을 수도 있다. 중국 송대 이래 학에 대한 상징이 굳건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에 학 무늬가 즐겨 사용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직접 적으로 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느 일정 시기에 중국에서 회화나 도안 등으로 전래된 운학의 이미지가 고려를 통해 굳건히 그리고 널리 자리 잡게 된 것 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운학이 청자에 빈번하게 그려진 점은 고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 조선으로 계승된 운학문 그래서였을까? 운학문은 흥미롭게도 조선 초까지도 청자의 장식 소재로 애용되었다. 상감 운학문은 일일이 조각하는 방법 외에도, 학이나 구름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찍고 그 부위를 메우는 인화( 印 花 ) 기법 위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보니 바람 위로 꼬리를 끌며 풍성하게 나는 구름은 그저 동글동글한 구슬더미나 빗방울처럼 바뀌었고, 하늘을 가르는 학의 수려한 날개와 늘씬한 다리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변해갔다. 전성기 운학문에서 볼 수 있는 치밀한 조각 솜씨나 사실적 세부 표현은 생략되거나 점차 무뎌졌다. 하지만 상감 장식이 중요한 문양으로 비중 있게 취급된 것은 여전 했다. 조선왕실의 백자 위주 사용 정책으로 청자는 급속한 변화를 맞지만, 가마터나 생활 유적 등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소량이 지만 청자가 제작되었고, 때로는 외국산 청자들이 수입되기도 했다. 조선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관심을 표현한 글이나 수장의 자료는 대체로 18세기 이후의 역사서와 문집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이후로 증가한다.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 고려청자는 격조 있고 깊이 있는 고급 물건, 혹은 사사로움이 끼

52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47 어들 수 없는 진품 등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고려 사적이 기록된 역사 서나 문집 같은 텍스트를 통한 이해와, 전해지는 실물에의 경험이 합해져 일정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지 싶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서적과 문물이 급속히 전래 되는 조선후기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고려 관련 기록들에 관심이 촉발되어 고려청자의 이미지가 확고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4. 조선의 문인들이 본 운학문 청자 조선의 기록에서 우리는 고려의 운학문 청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조선후기 성 해응( 成 海 應, 1760~1839)의 문집인 연경재 전집( 硏 經 齋 全 集 ) 에는 고려말의 유 학자 안향( 安 珦, 1243~1306)의 개성 옛 집터에서 얻게 된 한 말들이의 청자 항아 리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성해응은 1788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후 각종 편찬 사업에 종사한 인물로, 당시 그와 교유한 사람들 가운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같은 북학파 인사들이 있었다.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 포천에 머물며 연구와 저술을 지속하였는데, 이 기간에 정조의 명에 따라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성해응이 이 항아리의 용도와 크기 등을 서술하며 의례용기로서 쓰임이 법도와 격 식에 맞다고도 했다. 흥미롭게도 성해응이 기록한 이 청자 항아리에 대한 세세한 형상은 조선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화동옥삼편( 華 東 玉 糝 編 ) 고려기( 高 麗 器 ) 에 나타나 있다. 또 항아리를 빌려간 신위( 申 緯 )도 그 내용을 글로 남겼다. 결국 고려말 안향의 집에 있었던 운학문 청자 항아리는 나중에 심상규( 沈 象 奎 )의 집에 전세되어 보관되어왔으며, 이를 다시 자하 ( 紫 霞 ) 신위가 8년이나 가져다 쓰고 되돌려주었는데, 이유원이 그것을 본 것이다. 심상규와 성해응, 이유원, 신위가 함께 살아 있던 기간은 1814년부터 1838년 사이 이고, 특히 1845년에 죽은 신위가 8년간 지니다 심상규에게 돌려주었다면, 19세기 전반에 일어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항아리의 문양을 설명하면서 여섯 마리 학과 열여덟 송이의 구름으로 장식되었다고 하니 운학문이 그려진 매병을 설명하는 내용이라 추정된다. 현전하는 유물들 가운데 이와 비슷한 사례를 살펴보면,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운학문 매병이나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운학문 매병 등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이 그중 가장 비슷하다. 임하필기 벽려신지( 薜 荔 新 志 ) 에는 일본 사람들은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값을 아끼지 않는다. ( ) 옛 무덤을 파고들어 가다가 왕릉에서 옥대( 玉 帶 )를 발굴

5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하고 또 운학( 雲 鶴 )이 그려진 자기 반상기 한 벌을 발굴하였는데, 값이 700금( 金 )이나 되었다 라는 대목도 나온다. 운학문 자기를 발굴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갑신년( 甲 申 年 )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 것과 그의 문집이 출간된 시기를 가늠하면 19세기 전반기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학문 청 자가 이미 일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5. 영원한 고려의 초상으로 근대기에 청자 수집의 열풍이 불었고,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68호 매병도 그때 세상에 알려졌다. 이 매병이 주인을 찾게 된 것은 1935년, 간송( 澗 松 ) 전형필( 全 鎣 弼, 1906~1962)이 30세 때의 일이다. 야마모토에 의한 최우의 무덤 도굴로 세상에 나오게 된 이 매병은 고려청자 거간으로 유명했던 스즈키 다케오( 鈴 木 武 雄 ), 대구의 수집가 신창재( 愼 昌 宰 )를 거쳐 다시 경성의 골동품상 마에다 마치로( 前 田 才 一 郞 )에 게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골동상인 신보기조( 新 保 喜 三 )에 의해 간송에게 이 매병이 소개된 것이다. 명품을 알아본 간송은 망설임 없이 2만 원(당시 경성의 8칸짜리 기 와집 20채 값, 현재 서울의 집값을 평균 3억이라 한다면 그 20배 정도로 추정)을 지불하고 소장하게 되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망국 과 도굴과 전란의 고단한 세월을 견딘 끝에 세상의 빛을 받은 것이다.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고려식 청자는 끊임없이 재현되었다. 특히 일본 자본으로 세워진 한양고려소( 漢 陽 高 麗 燒 ), 삼화고려소( 三 和 高 麗 燒 ) 등 청자 재현 공장에서 운학문이 새겨진 상품들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한국인으로 개성에서 공방을 연 도공 황인춘( 黃 仁 春, )이 운학문 상감 청자 제품을 만들어내면서 그 전 통은 현대로 이어졌다.

54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서 윤 경 (한국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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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51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목 차 1. 서론 2. 고구려 고분유형과 전개과정 3.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 및 시대적 특징 4. 고구려 회화의 미적 특질 및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5. 결론 1. 서론 고구려 고분벽화는 4 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 회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동아시아 최대의 벽화고분군을 이룬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은 중국 집안과 환인지역의 38기와, 북한 평양과 안악지역의 82기 등 총 120기에 이른다. 1) 고분벽화에는 고분 주인의 초상화, 인물화, 산수화, 수렵도, 행렬도, 기타 생활풍속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들과 불교와 신선사상을 포함한 도교 등 종교사상과 관련된 도상, 그리고 천계, 천상을 표현하는 신화적 존재 및 상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에 고분벽화는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현실적인 고증자료로, 또한 인생관, 우주관 및 내세관을 비롯한 상장관념과 예제문화의 산물로 다뤄졌다. 더욱이 동아시아 고대 회화사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시기 타 지역에서 전개되던 회화의 양상과 비견해 높은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와 위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고구려 전반의 고분유형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구조와 회화의 제재 및 시대적인 특징 등을 유추해본다. 아울러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한 미적 특질과 고분벽화에 반영된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논의하고자 한다. 1) 정호섭, 高 句 麗 古 墳 의 造 營 과 祭 儀, 서경문화사(2011), pp. 104~116 참조.

5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2. 고구려 고분유형과 전개과정 고구려 고분은 중국 집안지역과 북한 등지에 총 13,000여 기에 달하고 있다. 이 러한 고구려의 고분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 積 石 塚 )과, 굴식 돌방무덤에 흙을 덮은 봉토무덤( 石 室 封 土 墳 )으로 분류된다. 돌무지무덤은 다시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또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구분된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고유의 묘제로, 고구려의 전 중기를 대표하며,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 독로강 및 대동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압록강 유역의 중국 길 림성 집안지역에는 1만 여기 이상의 돌무지무덤이 확인되었다. 대형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은 장군총으로 대표되는데,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계단을 쌓아 7층을 올렸다. 밑바닥은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는 34m, 높이는 13m이다. 사각형의 한 면에는 각기 큰 돌을 4개씩 모두 16개의 호석을 기대어 놓았다. 쌓아 올린 장대석들은 모두 1,100여 개에 달하며, 무덤의 내부는 석실로 축조되었다. 이러한 대형의 기단식 돌 무지무덤은 입지나 규모, 여러 가지 묘역 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왕릉급이거나 최상위 지배층의 고분으로 평가된다. 굴식 돌방무덤에 흙을 덮은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평양지역에서 출현하였으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에서 동일하게 지배층의 주된 묘제로 축조되고 있다. 지상이나 반지하에 연도가 딸린 돌방( 石 室 )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있는데( 封 土 ), 주로 횡혈식 구조로 이루어져 도굴을 많이 당했지만, 내부의 묘실에 벽화가 남겨져 고분벽화의 기본적인 무덤 구조를 이룬다. 이들 벽화고분은 중국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은 묘제로 동양의 보편적인 사상인 천원 지방( 天 圓 地 方 )의 원리에 입각해 천정부는 하늘을 상징하여 고임돌을 응용한 둥근 궁륭형으로, 현실은 방형으로 이루어졌다. 굴식 돌방무덤은 묘실의 구조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뉘는데, 다실분, 이실분, 단실분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다실분으로는 안악3호분, 요동성총 등이 대표적이다. 이실분은 전실과 현실로 구성된 고분이 기본형이며, 장천1호분, 덕흥리고분,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등이 대표적이다. 단실분은 연도에 독립된 현실이 있는 형태로 통구 사신총, 오회분 4,5호묘, 수산리벽화분, 개마총,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 다수의 벽화 고분 등이 해당된다.

58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 및 시대적 특징 고구려 고분벽화는 회화의 주제를 통해서 시기별 전개과정을 나누어볼 수 있다. 2) 일반적으로 초기-중기-후기로 구분되는데, 초기는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 묘주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한 실내생활의 제재와 행렬도, 배례도 등 행사 및 생전의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그림이 그려졌다. 중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인물과 생활풍속의 장면에, 불교의 전파 이후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연화화생도, 예불도 등 불교적 주제의 내용과 연꽃 장식무늬, 천상을 표현하는 별자리, 도교적 성격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진 사신도( 四 神 圖 )가 독자적으로 혹은 뒤섞여 그 려진 시기이다. 후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으로, 도교사상의 주제인 사신도가 사실상 벽화의 유일한 주제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보이는 고 분벽화 가운데 대표적인 고분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은 묵서 기록에 의해 영화( 永 和 ) 13년 (357)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어 기년명이 있는 벽화고분의 가장 이른 예로 주목된다. 또한 묵서에는 동수( 冬 壽 ) 라는 인물이 69세의 나이로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주인공에 대해 학계에서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석실봉토벽화고분으로, 널길과 앞방, 좌우 곁방, 널방 그리고 널방을 ㄱ 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회랑으로 구성된 다실묘로 구성되었는데, 천장과 각 방의 벽면은 인물과 풍속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벽화들로 채워졌다. 그 가운데 무덤주인공 부부의 모습과 웅장하고 생동감있게 표현된 행렬도는 초기 고분벽화의 대표적인 회화로 알 려졌다. 이밖에도 방앗간, 우물, 부엌, 고깃간, 차고, 외양간, 마구간, 의장대열 등의 벽화는 4세기 중반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발견된 덕흥리 벽화고분은 벽화의 상태가 양호하고, 다양한 화면구성 그리고 영락( 永 樂 ) 18년(408)을 포함한 600여 자의 명문이 전해져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벽화무덤이다. 연도와 전실, 현실이 갖추어진 이실묘로 구성되었으며, 천정부는 높은 궁륭평행고임식으로 마무리되었다. 무덤의 앞칸에는 무덤주인인 진( 鎭 )의 초상화와 정사도, 유주 13군의 태수 배례도, 행렬도, 막부관리도 등이 있으며, 전실과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의 서벽에는 묘주행차도가, 2) 고구려 고분벽화에 관한 주요 논고는 김용준, 고구려고분벽화연구 (1958); 김원룡, 한국벽화고분 (1980); 강현숙, 高 句 麗 古 墳 硏 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1999); 손수호, 고구려고분연구 (2001); 전호태, 고구려고분벽화연구 (2000); 정호섭, 高 句 麗 古 墳 의 造 營 과 祭 儀,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9) 등을 참조. 사진자료는 조선유적유물도감간행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990) 참조.

5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동벽에는 우차를 탄 부인의 행차도가 호화스럽게 묘사되었다. 현실로 들어서면 북 벽에 무덤주인의 또 다른 초상화를 만날 수 있는데, 주인의 오른편에 비어있는 공 간은 주인의 부인을 위한 자리로 추정된다. 천정부에는 수렵도와 해, 달, 별, 견우와 직녀, 신선, 옥녀, 상서로운 짐승 등 천상의 존재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특히 수 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기마무사들이 말을 타고 사냥하는 박진감 있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인물과 생활풍속을 주제로 하면서 불교계와 도교계의 주 제와 장식문양이 점차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중기로 접어드는데, 대표적인 고분은 평양지역의 약수리고분, 쌍영총, 수산리고분, 감신총 등이 있으며, 집안지역의 각저총, 무용총, 장천1호분 등을 들 수 있다. 평양지역의 약수리고분은 연도와 전실, 전실 옆에 동서의 감실과 현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정은 궁륭형의 삼각고임식이다. 벽화는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초기의 예로서, 인물풍속도에는 주인공의 생전의 중요한 생활장면을 그린 대형의 수렵도와 행렬도가 있다. 그 밖에도 별자리, 구름무늬 등 풍부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내세관과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쌍영 총은 대표적인 중기 벽화고분으로 말각조정의 천정구조에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진 무덤 구조이다. 전실과 현실 사이에 독특하게 두 개의 팔각기둥이 있어 쌍영총이라 일컫는다. 벽화의 내용은 묘주부부상, 생활풍속에 사신도가 함께 그려졌고, 불교적 소재의 연화문, 화염문, 공양행렬도 등은 당시의 불교계가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수 산리고분은 연도가 있는 단실묘이다. 벽화는 묘주상과 행렬도 및 기예도 등이 그려 졌으며 입구인 연도에는 수문장을 배치하였다. 벽화는 힘이 있으면서도 간결한 고 구려 화풍을 잘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우아한 기법으로 인물상을 표 현하고 있는데, 특히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우아한 복장의 여성상은 일본 다카마츠 고분[ 高 松 塚 ]의 여인도와 유사하여 양국의 교류를 짐작케 한다. 집안지역의 각저총은 유명한 씨름도가 있는 무덤으로 각저총이란 명칭도 이 그림 에서 유래했다. 무덤 구조는 전실과 현실 두 칸이며, 특히 전실과 현실의 벽면에 가 지가 우거진 거대한 나무들은 당시 수목의 표현을 잘 보여준다. 벽화 내용은 장막이 드리워진 실내를 배경으로 묘주 부부의 생활도가 있으며, 현실 남벽에 씨름 장면을 표현했는데 당시 씨름 행사는 고구려의 인기있는 운동종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장례의식이었다고 한다. 무용총은 각저총과 나란히 축조되었으며, 이실묘의 구조이다. 벽화는 승려로 보이는 손님을 접대하는 묘주생활도, 말 탄 인물들이 질주하며 사냥 하는 장면을 표현한 수렵도, 가무를 즐기는 연회의 장면이 대표되는데, 화면 전체에 운동감과 긴박감이 실감나게 표현된 수렵도와 흥겨운 춤사위와 연주가 흐르는 무용

60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55 도는 고구려 벽화의 백미로 꼽힌다. 장천1호분은 연화를 비롯한 각종 무늬와 가무, 씨름, 출행, 곡예, 사냥장면 등 다채로운 생활상, 수렵도, 비천과 보살, 불상 예배도, 사신도, 문지기상 등 다양한 제재의 장면들이 표현되어 고구려 문화와 풍속을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 중 유일한 예불도는 선정인( 禪 定 印 )의 수인 ( 手 印 )에 양옆에 사자가 있는 대좌 위에 앉아있는 불상을 표현하고 있어 초기 불상의 형식을 알려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후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시기로, 벽화는 다듬어진 돌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 평양지역의 강서대 묘와 강서중묘, 집안지역의 통구사신총, 오회분 4,5호묘가 대표된다. 강서대묘는 고구려 후기벽화를 대표하는 고분으로, 화강암으로 올려진 묘실 위에 석회와 진흙을 번갈아 다져 봉분을 올렸다. 묘실 네 벽에는 뛰어난 상상력과 유연 하고 힘찬 필치로 사신도가 표현되었다. 통구 사신총은 다양한 장식문양과 천상세계의 각종 선인들을 표현하였으며, 묘실은 사신도가 주제로 그려져 후기의 회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오회분 4,5호묘는 말각조정의 단실묘로,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이 서로 흡사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4호묘 네 벽면의 주제는 사신이며, 천정 에는 해와 달, 별자리 외에 해신과 달신을 비롯해 불의 신, 농사의 신, 대장장이 신, 수레바퀴의 신, 숫돌의 신 등 여러 종류의 문명신과 악기를 다루는 천인들이 등장 한다. 화면 전체는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으며, 환상적인 천상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4. 고구려 회화의 미적 특질 및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고구려 고분벽화는 4세기경부터 7세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고대사회의 여러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벽화의 내용은 묘주를 포함한 인물과 생활풍속 가운데 묘주의 공적, 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장면과 풍요로움이 사후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주제들을 표현하였다. 또한 영혼의 승천으로 내세의 영생을 구했던 사후관과 세계 관이 천상의 각종 선인과 불교계의 주제 및 장식문양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벽화는 주로 무덤 안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특히 고구려 특유의 강한 기상과 국제적 감각을 발휘한 힘차면서도 활달한 화풍이 단연 돋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묘주상은 고대 동아시아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특질을

6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보인다. 후한 말기부터 고분벽화의 핵심 제재로 등장한 묘주상은 대부분 장막 안의 평상 위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단독 좌상으로 그려졌으며, 엄숙하거나 근엄한 신 상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주변의 시립한 인물들은 주인공에 비해 작게 묘사되어 고대 인물화 특유의 위계묘사법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게 표현되어 대상 인물을 닮게 나타내는 초상화의 특성은 아직 발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벽화 초기의 회화양식은 주로 중국 동북지역 요양지방의 전통과 결부되어 논의되고 있다. 또한 대규모의 행렬도 형식은 후한시대 고분에서 자주 표현되던 것으로 중국 화북지역, 산동지역과의 영향관계가 간취된다. 중국 지역 과의 영향관계 이외에,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산악문과 수목문 등의 산수 화적인 모티프, 특히 고구려에서 발전하게 되는 수렵장면 등은 초기부터 활기찬 묘 사를 보여주고 있어 고구려의 기질을 잘 나타낸다. 중기 이후 표현되는 생활풍속계의 장면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인물과 복식 및 활 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이 비교적 길거나 턱이 둥글게 생긴 용모, 점무늬의 좌임 ( 左 袵 ) 저고리와 바지 및 색동 주름치마, 새 깃털을 꽂은 관모 등은 고구려 고유의 복식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의 공식적인 기마행렬도 대신 소규모의 병렬식 출행도가 등장하고, 풍속 장면도 무용도, 씨름도 등 내용이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졌다. 연화 화생상과 비천, 불상을 예배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등 불교적인 모티프가 증가하기도 한다. 말을 타고 달리며 뒤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파르티안샷( 安 息 騎 射 法 )으로 사냥 하는 모습, 악무상과 함께 갖가지 묘기로 곡예하는 백희잡기, 눈이 깊고 코가 우뚝 한 특징의 심목고비상( 深 目 高 鼻 像 ) 서역인 모습 등은 고구려의 문화가 한반도 안에 안주하던 것이 아니라, 서역까지도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후기의 선인상은 도교의 대두로 다양하게 다루어졌는데, 해와 달을 머리 위로 든 복희와 여와형의 남신과 여신을 비롯하여 불의 신 축융이나 야장신, 제륜신과 같은 신화 속의 선인들이 우아하고 세련되게 묘사되었다. 특히 후기 벽화의 대표적인 주 제인 사신도는 뱀과 거북이 서로 휘감으며 팽팽하게 긴장하는 움직임을 연출하기도 하며, 백호와 청룡을 묘사함에 주변의 율동적인 운기문들을 어우러지게 표현하여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벽화장면을 통해 고구려의 세련되고 정 교한 예술수준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유려하고 역동감이 넘치는 고구려의 힘찬 기상을 확인할 수 있다.

62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결론 고구려가 동아시아 고대문화를 선도하였음은 동시기 타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 한강 유역에 분포하는 백제의 적석총이나 신라 영역에서 확인되는 벽화고분과 석실 축조방법 및 각종 부장품 등은 고구려의 고분에서 선도적인 양식을 찾을 수 있어 삼국 문화에서의 고구려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일본의 아 스카시대 고분 문화에 끼친 영향은 벽화분에서 언급된다. 일본의 다카마츠벽화분에 묘사된 여인의 긴 주름치마는 수산리벽화분이나 쌍영총벽화분의 주름치마와 비슷하게 묘사되었고, 키토라벽화분의 사신은 고구려의 사신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북위시대의 벽화고분에서도 고구려의 벽 화양식과 비슷한 회화가 간취되어,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관계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즉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 동아시아의 사회와 문화의 제양상을 말해주는 실 증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에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당 위성을 확인하게 되며,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 구조사를 지속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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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 홍 대 한 (숙명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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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61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 목 차 1. 石 塔 造 成 4를 통해 본 건립목적 2. 附 元 勢 力 에 의한 석탑건립 3. 고려석탑의 유형과 양식 4. 경천사 십층석탑과 라마양식 석탑건립 5. 경천사 십층석탑과 문화재 보호 1. 石 塔 造 成 記 를 통해 본 건립목적 삼국과 통일신라 석탑건립은 처음 국가중심으로 시작해, 왕실, 승려 등으로 분화가 이루어졌다. 고려석탑은 조성기를 통해 통일신라 보다 건립세력이 다양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692년 최초의 원탑인 황복사 삼층석탑이 건립된 이래 9세기 초까지 왕실 중심의 원탑건립이 지속되는 반면, 9세기 중엽에 이르면 원탑건립이 감소하면서, 국가태평 기원이 중심 내용을 차지하게 된다. 표 1은 고려시대 석탑의 조성 기록을 건립목적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왕위계승문 제로 인한 중앙정부 혼란, 거란의 침략에 따른 위협과 民 의 피해, 원 간섭기간 새롭게 나타난 원 황실 추복을 위한 석탑건립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석탑은 부처의 묘탑이라는 종교적 기능 외에도, 부처에 의탁해 현실의 고통과 혼란을 극복하려던 목적에 따라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분 명칭 제작시기 비고 Ⅰ 중앙 정부 혼란기 佛 國 寺 三 層 石 塔 墨 書 紙 片 948년( 靖 宗 4), 1013년( 顯 宗 15) 重 修 4, 形 止 4 金 山 寺 五 層 石 塔 979년( 景 宗 4) ~ 982년( 成 宗 1) 金 山 寺 重 創 4 芝 峴 里 三 層 石 塔 991년( 成 宗 10) 국가태평 統 和 銘 安 城 長 命 寺 石 塔 誌 997년( 成 宗 16) 국태민안, 香 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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