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ªÁÖÁýÇѱ¹Æí4261Çì303ÖÁ¾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ªÁÖÁýÇѱ¹Æí4261Çì303ÖÁ¾"

Transcription

1

2

3

4

5

6

7 년(高麗 仁宗 23) 金富軾(1075~1151) 등이 王命을 받아 新羅 高句麗 百濟 삼국의 역사 를 50권 10책으로 편찬한 기전체 정사이다. 本紀 28권, 年表 3권, 志 9권, 列傳 10권으로 구성되 어 있으며, 百濟本紀는 권23부터 권28까지 총6권이다. 12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간본은 현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 후기 2차로 판각되어 1책만이 남아 전하는 誠庵本이다. 1931년 고전간행회,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영인본은 모두 1512년(中宗 7) 제4차로 판각한 中宗壬申本 (正德本)을 저본으로 하였다. 본 자료는 19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譯註 의 원문편을 대본으로 하여 발췌된 百濟 관련기사를 역주하였다. 권23 百濟本紀 1 始祖溫祚王 百濟1)의 시조는 溫祚王2)인데, 그의 아버지는 鄒牟3)이며 혹은 朱蒙이라고도 한다.4) [주 1) 百濟 : 삼국 중 한 나라로 마한의 한 소국인 伯濟國이 성장하여 발전한 나라. 百濟 라는 국호 이외 에 538년 聖王이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 한때 南夫餘로 고친 적이 있었으며, 그밖에 鷹準 帝王韻 ( 紀 卷下, 後王或號南夫餘 或稱鷹準 )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鷹遊 三國遺事 권3 ( 興法篇 皇龍 寺九層塔)와 같은 명칭으로 이해된다. 응준은 매 와 관련있는 용어로서 백제가 馬韓 지역을 영유 하면서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매 관련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서 이같은 국호를 사용한 것이라 한다(趙法鍾, 1989, 百濟 別稱 鷹準考, 韓國史硏究 66). 한편 중국 사서에서는 伯濟 國 三國志 권30 ( 魏書 東夷傳)이라 하여 馬韓을 구성한 54국의 한 소국의 명칭으로 나오다가 4 세기 이후 宋書 단계부터는 百濟 라는 국호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서기 에는 백제를 구다라(ク ダラ)로 훈독하고 있는데,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대에 해당하는 신공황후기부터 백제라는 국호 가 쓰여지고 있다. 백제라는 국호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백제 건국설화에서 보이는 百姓 樂從 說과 百家濟海 說이 있다. 2) 溫祚王 : 백제의 시조로서 재위기간은 B.C.18 A.D.28년이다. 帝王韻紀 卷下에는 殷祚 로 나 온다. 그의 出系에 대해 즉위년조의 본문에서는 주몽과 졸본왕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 어 있으나, 細注에는 주몽과 졸본인 延陀勃의 딸 召西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禮氏 소생 유리가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내려와서 태자가 되자 형 비 류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B.C.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세웠다. 백 제는 온조왕 원년(B.C.18)에 부여족의 族祖인 東明王의 祠堂을 세워 배알하였는데, 삼국사기 백

8 14 제본기에 의하면 전지왕 2년(406)까지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동명묘에서 배알의식을 거행하여 왕 으로서의 권능을 확인받는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 백제는 왕성을 扶餘族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扶餘를 姓으로 하였는데, 중국과의 대외교섭 시에는 단성으로 餘 씨를 사용하였다. 백제는 중국식 왕호 이외에 고유한 칭호로서 於羅瑕 와 吉支 라 는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는 王姓扶餘氏 號於羅瑕 民呼 爲 吉支 夏言王也 妻號於陸 이라 하여 지배층에서는 於羅瑕 로 불리워졌으며, 일반 백성들은 吉支 라는 또다른 칭호가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백제왕을 コニキ シ: 코니키시 日本書紀 권9 ( 神功紀 46년) 및 コキシ: 코키시 ( 日本書紀 권9 神功紀 46년 및 같은 책 권14 雄略紀 23년)로 부른 예를 찾을 수 있다. コ: 코 와 コニ: 코니 는 같은 표기로서 우리말의 큰(大) 을 音寫한 것인데, 이는 건길지의 건 과 통한다. 그리고 吉支 는 キシ: 키시 와 통하며 吉師 와 같이 貴人이나 왕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李丙燾, 1977, 國譯, 을 유문화사, 351쪽). 한편 於羅瑕에 대해 이를 종래 巫歌에 어라아만수 의 어라아에 해당하는 말이 라고 하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351쪽)가 있으나, 於羅瑕의 瑕 는 족장을 의미하는 고구 려나 부여의 加 또는 신라의 干과 계통을 같이 하는 것으로(都守熙, 1994, 백제어연구 Ш, 백제 문화개발연구원, 38 42쪽) 볼 수 있다. 3) 鄒牟 :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다른 이름으로 朱蒙이라고도 하여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 추모라는 표기는 廣開土王陵碑, 牟頭婁墓誌, 신찬성씨록 제3질 右京諸蕃 下 高麗에도 나온 다. 다른 이름으로 鄒蒙 삼국유사 권1 ( 왕력) 中牟 삼국사기 권6 ( 문무왕 10년조 안승의 冊 文) 仲牟 일본서기 권27 ( 천지기 7년) 都慕 속일본기 권40 ( 환무 연력 9년 추7월 신사)로 도 썼다. 중국 사서에는 위서 이후 주몽 으로 표기하였다. 반면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고 구려조의 왕망대 기사에 나오는 고구려 왕 는 漢書 권99 왕망전에 騶 로 되어 있어 추모를 지칭한다. 이 기사는 시기적으로 유리왕대에 해당하는데, 중국측이 전왕대의 사실로 잘못 알고 기 록하였거나(이병도, 1977, 앞의 책, 227쪽), 또는 고구려의 일반적인 왕호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주몽을 東明의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김상기, 1974, 국사상에 나타난 건 국설화의 검토, 동방사논총, 서울대출판부), 중국 사서에는 부여와 고구려 시조를 각각 동명과 주몽으로 구분하여 인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같이 부여 고구려 백제에서 동명이나 주몽에 대한 전설이 공유되어 전해오는 것은 ①동명왕 전설은 원래 부여에 전해오던 것인데 고구려가 이 를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이라는 견해(池內宏, 1951, 高句麗の建國傳說と史上の事實, 滿鮮史硏究上世 1, 吉川弘文館), ②부여 고구려 백제는 같은 夫餘族 계통의 종족으로서 이들 이 각기 분열 이동하면서 원래의 신화를 변형 재생성시켜 갔다고 보는 견해(金哲埈, 1975, 百 濟社會와 그 文化,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등이 있다. 4) 온조는 주몽의 아들 : 고구려 유리왕 즉위를 둘러싼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과 관련하여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집단에게 패배한 비류와 온조집단이 이를 계기로 남하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온 조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사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 시조의 권위를 높이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제적인 부자관계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 몽은] 北扶餘5)에서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6)에 이르렀다. [그 때]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 5) 北扶餘 : B.C.3세기 후반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있었던 국가. 중국측 기록인 論衡 과 三國志 에 인용된 魏略 에는 시조 동명이 북에서부터 이주해 와서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런데 주몽의 출신지를 북부여출자로 본 기록은 5세기대에 쓰여진 광개토왕릉비 와 모두루묘지 이다.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夫餘傳에 의하면 (북)부여의 위치는 서로는 烏桓 鮮卑와 접하 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 결된 것으로 나온다. 부여의 선주문화는 B.C.7~3세기로 비정되는 청동기문화 서단산문화와 관련 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족단이 제2 송화강 중류로 남하하여 길림성을 중심으로 서단산문화를 누리 던 부여 선주민을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세웠는데, 대략 B.C.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중심지인 왕성의 위치는 자치통감 의 기록에 의거하여 전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①현재의 중국 흑룡강성의 農安 長春지역설(池內宏, 1932, 夫餘考, 滿鮮地理歷史硏 究報告 13 ; 日野開三郞, 1946, 扶餘國考, 史淵 34, 1~104쪽) ; 李基白 李基東, 1982, 한 국사강좌 I고대편, 일조각, 75쪽), ②阿勒楚喀 일대설(池內宏, 1951, 扶餘考, 滿鮮史硏究 上 世篇 1에 재수록, 吉川弘文館, 쪽), ③吉林市 지역설(武國勳, 1983, 夫餘王城新探, 黑 龍江文物叢刊 4期 ; 李殿福, 1985, 漢代夫餘文化鄒議, 北方文物 3期 ; 盧泰敦, 1989, 扶餘 의 境域과 그 變遷, 國史館論叢 4) 등이 있다. 최근에는 삼국지 와 후한서 의 기록에 의거하 여 부여는 초기에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松嫩평원 일대로 보는 ③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그 이유 는 동단산 남성자고성을 부여의 중심성으로 보고 길림시 교외에서 발견된 蛟河市의 新街古城址와 福來東古城址를 그 주변의 읍락지역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 후 346년 부여는 백제 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자치통감 기록이 있다. 이때 부여의 왕성에 대 하여 ①현재 農安 부근설(1988, 中國歷史地圖集釋文彙編 東北卷 夫餘, 中央民族學院出版社, 32 쪽 ; 노태돈, 1989, 앞의 글, 35~36쪽), ②西豊縣 城山子山城說(王綿厚, 1990, 東北古代夫餘的興 衰及王城變遷, 遼海文物學刊 2期, 83쪽) 등이 있다. 성산자산성의 경우 한 위 시기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주로 고구려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부여성을 고구려가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주몽의 북부여출자설과는 달리 동부여출자설이 구삼국사 와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북부 여조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동부여는 천제의 아들임을 칭한 解慕漱가 B.C.59년에 해부루를 쫓아내고 동쪽으로 옮겨 세운 나라로 나온다. 그런데 부여가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타격 을 받자 그 지배집단 일부가 북옥저 방면에 피난을 하였다가 3세기 말~4세기 초에 두만강유역에 서 동부여라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런 견해와는 달리 본서 권14 고구려본기 大武神王 5년 조에 나오는 曷思國을 東扶餘로 보는 설(盧重國, 1983, 東扶餘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韓國學論集 10)도 있다. 東扶餘는 高句麗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한 국명이고 반면 길림 방면의 부여는 北扶餘라고 불렀다. 廣開土王陵碑 에 의하면 東夫餘는 鄒牟王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廣開土王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함경남도설(李丙燾, 1976, 夫餘考,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227쪽), ②오늘의 백 두산 부근설(王健群 林東錫 譯, 1985, 廣開土王碑硏究, 역민사), ③두만강 유역설(盧泰敦,

9 16 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 로 삼게 하였다.7)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8)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沸流이며, 둘째 아들은 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 17 에 도착하여 越郡9)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烏干 馬黎 등 열 명의 신하10)와 함께 남쪽으로 갔 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漢山11)에 이르러 負兒嶽12)에 올라가 1989, 앞의 글) 등이 있다.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정립된 시기를 고구려 초기의 왕계 정립과 함께 4세기 후반으로 보고, 반면 동부여출자설은 6세기 중반 이후 양원왕 즉위과정에서 승리한 집권세 력에 의해 제기되어 600년 경 新集 편찬 단계에서 공식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28~52쪽). 이때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동부여출자설로 변개되었 다고 한다. 6) 卒本扶餘 : 주몽을 중심으로 한 부여족의 일파가 卒本지역(현재의 중국 吉林省 桓因지방)에 세운 나라. 삼국유사 권1 紀異篇 고구려조에는 高句麗卽卒本扶餘 라 하여 고구려=졸본부여로 보고 있고, 安鼎福도 주몽이 沸流水에 나라를 세운 후 國號高句麗 亦號卒本扶餘 라 하여 졸본부여를 고구려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東史綱目 1 下 甲申 馬韓). 그러나 본 기사에는 주몽이 졸 본부여로 도망와서 졸본부여의 왕녀와 결혼하였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 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주몽이 난을 피하여 정착한 곳 에 대해 본 기사에는 졸본부여로,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卒本川으로, 三 國遺事 권1 紀異篇 高句麗條에는 卒本州으로, 광개토왕릉비 에는 忽本西城山으로 나온다. 魏 書 권100 열전 고구려전에는 紇升骨城으로 나오는데, 고구려가 처음 이곳에 도읍한 사실을 적은 이래 周書 北史 通典 등이 이를 따르고 있다. 본서와 같이 卒本과 紇升骨城과 卒本을 같은 곳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흘승골성은 북부여가 도읍한 곳으로, 졸본주는 고구려가 도 읍한 곳으로 각각 구분하여 보는 견해(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高句麗)도 있다. 근래에는 흘승골성 은 升紇骨城이 전도된 것이며 졸본은 곧 솔골(卒忽) 또는 승흘골의 異稱이라 하여 음운상의 유사성 을 근거로 양자가 같은 곳이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7, 앞의 책, 217쪽). 졸본의 위치는 현재 의 중국 요령성 渾江(비류수) 상류의 桓因지방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五女山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남아있다. 이 산성은 남북길이 1,000m, 동서길이 300m 가량의 비교적 큰 규모이 다. 또한 부근에는 積石塚 등 고구려의 古墳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이곳이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陳大爲, 1960,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 考古 ). 7) 졸본부여왕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 왕 즉위년조에 細註로 간략히 나온다. 주몽이 졸본부여의 둘째 딸과 결혼한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동해 와서 졸본지역 세력을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공존하다가 이를 흡수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생각 된다. 8) 비류와 온조의 형제관계 :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東明第三子 一云第二子 로 나온다. 삼국유사 에서 제3자라고 한 것은 주몽의 전처의 소생인 孺留(瑠璃)까지를 넣어서 계산한 것이다. 백제의 건 국설화에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혈연상의 형제라기보다는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과 온조를 시조를 하는 집단이 한강하류지역에서 연맹을 형성한 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조형제설화라고 할 수 있다(노중국,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62 63쪽). 9) 越郡 :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越郡을 지명으로 보지 않고 건너편 고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 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1쪽). 10) 10臣 : 온조의 건국을 도왔다는 10臣의 존재에 대하여 ①온조의 가신으로 보는 견해(이종욱, 1977, 백제왕국의 성장, 대구사학 12 13합집, 67쪽), ②온조를 따라온 10개의 친족집단으로 보는 견해(노태돈, 1975, 삼국시대 부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 59쪽), ③위례지역에 선주한 10개 읍락의 토착집단설(노중국, 1988, 앞의 책, 52~53쪽)이 있다. 10신은 백제 건국의 중추적 역할을 한 세력을 말하는데, 온조를 따라온 세력과 선주한 토착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11) 漢山 : 본서 백제본기에 나오는 한산의 위치는 출전 자료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오고 있어 혼란 을 주고 있다. 본 기사에 나오는 한산의 위치는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단행한 온조왕 14 년 정월 이전의 기사로서 서울 삼각산 일대로 비정되는 負兒岳을 포함한 북한산 일대(丁若鏞, 我邦疆域考 3 慰禮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초고왕 26년(371) 백제가 평양성 전투에서 고 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대승을 거둔 직후에 서울을 한산으로 천도한 일이 있어 한산 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다. 한산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백제의 최초 도읍지를 어디로 볼 것이냐에 따라 크게 한강북안설(북한산설)과 한강남안설(남한산성설과 아산 또는 직산설)로 대별 된다. 한강북안설은 삼국유사 기이 2 남부여 전백제조에 인용된 古典記 에서 처음 제기되었는 데, 당시 백제가 팽창하던 시기이므로 대고구려전을 주도하기 위한 북진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북 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는 것이다(이도학, 1992,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 한국상 고사학보 9, 32~33쪽 ; 강인구, 1993, 백제 초기 도성 문제 신고, 한국사연구 81, 15~17쪽 ; 박순발, 2001, 한성백제의 탄생, 서경문화사, 173쪽). 한산 즉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정약용에 의해 제기된 서울 삼각산동록설과 북한산성 일대설(이병도, 1976, 위례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495쪽) 등이 있으나 이를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어서 신뢰성이 없다. 반면 한강 남안설은 고구려의 침공을 염려하여 산성으로 천도하였다고 보았다(이병도, 1976, 앞의 책, 쪽 ; 성주탁, 1983, 한강유역 백제초기 성지연구, 백제연구 14, 132쪽 ; 여호규, 2002,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제와 방어체계, 백제연구 36, 11쪽 등). 한산남안설의 경우 처음에 한 산 이란 명칭이 있다가 후대에 그에 대비하여 북한산 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 하였다(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322쪽). 본서 백제본기에는 371년 漢山移都 기사 이 후부터는 한산 대신에 한성 관련 기사가 등장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 시기부터 백제 도성제

10 18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漢水13)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19 慰禮城(河南慰禮城)15)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十濟16)라 하였 다. 이때가 前漢17) 成帝18) 鴻嘉19) 3년(B.C.18)이었다.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는데, 慰禮城에 돌아와 보니 막혀 있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 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20) 그 후 백성들이 올 때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14)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가 확립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근까지 한산(한성)의 위치를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津 田左右吉, 1913, 百濟慰禮城考, 朝鮮歷史地理 Ⅰ, 南滿洲鐵道株式會社, 43쪽 ; 이병도, 1976, 앞의 책, 503쪽 등)과 송파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 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송파구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신희권, 2003, 백제 한성기 도성제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백제도성의 변 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의 도성은 통칭으로 위례성 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북성 풍납토성과 남성 몽촌토성의 도성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이도학, 1992, 앞의 글, 36~38쪽). 그런데 371년 漢山移都 기사를 군사방어적 성격을 가진 남성(몽촌 토성)으로 옮긴 것으로 이해하고 몽촌토성을 한산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2002, 앞의 글, 14~15쪽). 그리고 이러한 한성의 북성과 남성 도성 구조는 중국 전국시대의 두성인 邯鄲故 城 臨淄故城 燕下都故城과 고구려의 도성체계에서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기섭, 2007, 한성도읍기의 도성과 도시구조,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경문화사, 126~128쪽). 한편 웅진도읍기 동성왕대에 한산성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의 한산성은 한북지역 민호의 사 민으로(문주왕 2년 춘2월) 한때 위례성으로도 불리워졌던 현재 충남 천안시 직산지역( 新增東國 輿地勝覽 권16 稷山縣 建置沿革)으로 비정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12) 負兒嶽 : 현재의 서울 삼각산을 말한다. 조선 영조 21년(1745)에 편찬된 北漢志 山河條 참조. 金正浩, 大東地志 권1 漢城府 山水條에도 三角山 距府北十五里 百濟稱負兒岳 又云橫岳 又云華 山 이라 하여 부아악을 삼각산에 비정하고 있다. 13) 漢水 : 한강으로도 표기된다. 한수의 다른 이름으로는 阿利水( 광개토왕릉비 ), 郁里河(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0년) 등이 있다. 14) 彌鄒忽 : 현재의 仁川을 말한다. 광개토왕릉비 에 고구려가 영락 6년(396)에 백제를 공격하여 공취한 58성 중에 彌鄒城이 이에 해당한다. 본서 권35 잡지 地理 2의 漢州 栗津郡 邵城縣條에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 라 한 기사와 高麗史 권56 志 10 地理 一 楊廣道 仁州條에 仁州本高句麗買召忽 一云彌鄒忽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인천의 文鶴山上에는 沸流城基 城門扉板 沸流井이 남아 있다고 하고(安鼎福, 東史綱目 제1 癸卯 馬韓), 또 文鶴洞에는 彌鄒王陵으로 불리는 유적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鄭永鎬, 1979, 서울지역의 百濟文化, 馬韓百濟文化 3, 87쪽). 15) 한수 남쪽의 慰禮城 : 백제가 한수 이북에서 한수 이남으로 천도한 후의 도읍지로서 河南慰禮城으 로 부른다. 위례성의 명칭 기원에 대해 위례 는 우리 또는 울타리 를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 (丁若鏞, 我邦疆域考 ; 成周鐸, 1984,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 百濟硏究 14), 阿利 水 郁里河의 阿利 郁里가 大 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견해(都守 熙, 1991, 百濟의 國號에 관한 몇 問題, 百濟硏究 22), 왕성 내지는 大城 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왕을 뜻하는 於羅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선, 1982, 한국 고대 국명 지명연 구, 형설출판사, 199쪽) 등이 있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도 성이라는 의미로 두루 사용되었지만 주로 백제의 도성제가 확립되는 371년 이전에 한산이란 명칭 과 함께 혼용되어 나타난다. 이 위례성은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 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都慰禮城 一云蛇川 今稷山 으로,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扶餘 前 百濟條에는 彌鄒忽 仁州 慰禮 今稷山 이라 하여 위례성의 一名이 蛇川임을 전하면서 현재의 충 청남도 천안시 稷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위례성 직산설은 조선후기까지 대체로 받아들여졌으나 丁若鏞은 한강유역설을 주장하면서 이 견해를 부정하였다. 위례성 직산설은 주 11)에서 보듯이 웅진 천도 이후 한성지역 민호를 이곳으로 사민한 사실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과 서울 송파 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주 11) 참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 벽 발굴조사를 통해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 게 되었다(신희권, 2003, 앞의 글). 16) 十濟 :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온조가 나라를 세울 때 10명의 신하가 도왔으므로 나라 이름을 十濟 라고 하였다. 그 후 미추홀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라 왔으므로 百濟로 국명을 고쳤다고 한다. 나라 가 10에서 100으로 커진 사실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후대에 百濟라는 나라 명칭에 부회해 서 만들어진 것으로 국호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백제의 건국세력이 10濟로 표현되듯이 여러 세력 집단의 연합체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 前漢 : 중국 왕조의 하나로 西漢이라고도 한다. 존속 기간은 B.C.202 A.D.8년이다. 高祖 劉邦 이 秦을 멸하고 초패왕 項羽를 패사시킨 다음에 長安에서 제위에 오르고서부터 王莽에게 찬탈되 기까지의 漢을 말한다. 18) 成帝 : 중국 漢나라 제12대 황제. 元帝의 태자. 字는 太孫. 재위기간은 B.C.33 B.C.8년. 19) 鴻嘉 : 前漢 成帝 때의 연호로 B.C.20 A.D.17년까지인데, 홍가 3년은 B.C.18년이다. 20) 비류는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가 위례에 정

11 20 호를 百濟21)로 고쳤다. 그 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22) 扶餘를 21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백제]의 시조는 沸流王24)인데, 그 아버지 優台25) 성씨로 삼았다.23) 는 북부여왕 解扶婁26)의 庶孫이었고, 어머니 召西奴는 卒本 사람 延 勃27)의 딸이었다. 착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각각 미추홀과 위례지역에서 소국을 세운 것이며,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초기에는 비류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는 것은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것을 뜻한다(노중국, 1988, 앞 의 책, 62~65쪽).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에 대해 본 기사에서는 온조왕 즉위년 에 기록하고 있으나, 온조왕대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초창기이므로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한편 본 기사는 후대의 사실을 온조왕대에 소급 부회한 것으로 보고 위례세력 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를 해씨 비류계에서 부여씨 온조계로 왕실이 교체되는 2세기 말의 초고왕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앞의 책, 74 75쪽). 그러나 이 견해는 초기백제 왕계 를 비류계와 온조계로 나누는 구분점이나 개루왕 이전을 해씨로 보는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그 리고 개루왕이 후에 개로왕(근개루왕)과 대응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21)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 백제라는 국호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본 기사에는 百姓樂從 으로 나 오나 隋書 권81 열전 百濟傳에는 百家濟海 因號百濟 라 하여 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는 데서 백 제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것을 전해주고 있다. 이 두 기사는 10濟라는 국호 사용(주 16)을 참조할 것)과 함께 모두 국호에 대한 후대의 덧붙여진 해석이라 할 수 있다. 22) 그 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扶餘에서 같이 나왔다 :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출자가 부여 고구려계 라는 전승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백제 왕실 스스로에 의해 표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 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경쟁관계가 심화됨으로 인해 정치 외교적인 목적이 따라 자신의 출 자를 때로는 부여에, 때로는 고구려에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 운 주몽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자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하지 않고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부여족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의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臣與高句麗源出扶餘 라 한 기사(본 서 권25 백제본기 蓋鹵王 18년조 및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나, 日本書紀 권19 흠명기 14년 조에 성왕의 아들 餘昌(威德王)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에 앞서 今欲早知 與吾可以禮問答者姓 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 率 年二十九矣 라 한 기사, 그리고 538년 백제 성왕이 사비천 도와 함께 국호를 일시적으로 南扶餘로 고친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서울시 송파구 석 촌동과 가락동 일대에 분포하는 적석총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입증해 주는 실물 자료이다. 이처 럼 백제는 직접적으로 고구려에 기원을 두었지만 멀리는 부여에 국가적 기원이 있음을 표방하기 도 하였다. 이는 백제 왕실이 고구려를 의식하여 부여의 정통 적자로서 그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 한 것으로 동명묘 배알 의식을 통해서도 발현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부여 계통임을 입증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중서부지방의 토광묘를 계통적으로 길림의 유수 노하심유적과 남성 자유적 동쪽의 모아산유적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백제의 건국설화 에서 보듯이 그 지배세력의 계통은 단일하지는 않고 여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3) 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 백제 왕실의 성에 대해 본 기사는 부여씨라고 하였는데, 중국과의 대외교 섭에는 단성으로 餘 氏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남부여 전백제조에는 其 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라 하여 解氏설을 전해주고 있다. 부여씨와 해씨가 왕성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해씨는 沸流집단이 칭한 성씨이고, 부여씨는 온조집단이 칭한 성씨인데, 이 두 집단이 연맹장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해씨와 부여씨가 왕성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조집단 이 扶餘氏를 칭하게 된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解氏집단을 대신하여 온조집단이 연맹의 맹주가 되자 자기 집단의 권위를 높이고 扶餘族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노중 국, 1988, 앞의 책, 66 77쪽). 한편 백제의 王姓에는 扶餘氏와 優氏가 있는 것으로 보고 부여씨 는 주몽-온조-초고계의 성씨로, 우씨는 우태-비류-고이계의 성씨로 백제 왕계를 이원적으로 파 악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일지사, 쪽). 24) 시조는 沸流王 : 海東高僧傳 에는 避流 로 나온다. 본 기사에는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여 나 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라고 할 수 있다. 비류 중심의 시조설 화에서 그 조상이 解扶婁로 나오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비류집단의 성은 解氏로 추정된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비류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가 인천의 미추홀에서, 온조는 서울의 한강유역에서 각각 나라를 세운 후 두 집단이 중심이 되어 연맹을 형성 하고 연맹장을 배출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노중국, 1988, 앞의 책, 66~77쪽). 그리고 비류건국 설화가 후대까지 남아 전하게 된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존속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비류세력은 압록강유역에서 주몽으로 대표되는 계루 부세력과 다투던 송양국의 비류국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출자를 渾江[비류수] 유역의 소노부 세 력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백제 왕계에서 비류세력은 주몽-온조계 왕실과 함께 우태-비류-고이 계를 형성하여 優氏를 표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34~137쪽). 25) 優台 : 해부루의 庶孫. 할아버지 해부루의 이름에서 미루어 볼 때 우태의 성은 해씨로 추정된다. 그는 卒本人 延 勃의 딸 召西奴와 결혼하여 沸流와 溫祚를 낳았다고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 이 우태의 실체에 대해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仇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책, 143쪽), 尊長者를 뜻하는 관명이 인명화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于台라는 관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金哲埈, 1975, 高句麗 新羅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 究, 지식산업사) 등이 있다. 백제의 시조로 나오는 온조와 비류가 溫祚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주몽의 아들로, 沸流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 것에 대해 비류를 우태의 아 들로, 온조를 주몽의 아들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 134~143쪽). 한편 본서 권32 잡지 제사 百濟 제사조에는 海東古記 를 인용하면서 始祖優台說도 전하고 있다. 26) 解扶婁 : 동부여를 건국한 왕. 그의 출자에 대해서는 북부여의 시조로서 天帝之子를 자칭한 解慕 漱의 아들이라는 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북부여)도 있고, 壇君과 西河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12 22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 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扶餘에서 23 다. 33) 34) 와 隋書 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北史 용납되지 못하자 前漢 建昭28) 2년(B.C.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東明35)의 후손에 仇台36)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는] 처음에 나라를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37)에 세웠는데, 漢나라 遼東太守 公孫度38)가 나라를 창업하는데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그녀를 총애하고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禮氏29) 아들 孺留30)가 오 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 였다.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그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한낱 혹처럼 답 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 의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浿水31)와 帶水32) 두 강을 건너 彌鄒忽에 이르러 살았 아들이라는 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고구려)도 있다. 원래 북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는 天帝의 계시를 받은 재상 阿蘭弗의 권유에 의해 東海 가의 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三 國遺事 권1 紀異篇 북부여 동부여 및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 참조). 그는 늙도 록 아들이 없다가 鯤淵 부근의 큰 바위 밑에서 金色蝸形의 아이를 얻어 그를 金蛙라 이름을 짓고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동부여 및 본서 권13 동명성왕 즉위년). 27) 延 勃 : 卒本지역 사람으로 졸본지역의 首長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를 주몽이 도망해 왔을 당 시의 卒本扶餘王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490쪽).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그의 딸 召西奴는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28) 建昭 : 前漢의 제10대 황제인 元帝의 연호. B.C.38 B.C.34년. 건소 2년은 B.C.37년이다. 29) 禮氏 :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부인. 고구려 제2대 王인 琉璃를 낳았다. 자세한 것은 본 서 권13 고구려본기 琉璃明王 즉위년 참조. 30) 孺留(B.C.19 A.D.18) : 주몽과 禮氏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주몽이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도망한 이후에 부여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와서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王이 되었다. 본서에는 琉璃 類利 등으로도 표기되었고,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는 瑠璃 累利 로도 표기하였다. 31) 浿水 : 浿河 또는 浿江이라고도 하는데, 그 위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조선 시기의 패수 에 대해서는 ①淸川江說(李丙燾, 1976, 眞番郡考,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②鴨綠江說(丁若 鏞, 我邦疆域考 浿水考), ③遼西지방의 大凌河說(이지린, 1963, 고조선연구 ) 등이 있다. 삼국 시대의 패수는 高麗史 권58 志 12 지리 3 黃州牧 平州條의 平州本高句麗大谷郡(一云多知忽) 又號東陽 有猪淺(一云浿江)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 川條에 猪灘 高麗史云 猪川 一云浿江 按百濟始祖十三年 自慰禮城 移都漢山下 定疆域 北至浿河 若平壤浿河 則在高句麗都城傍 豈得爲百濟之境 所謂浿河 疑則此水 라고 한 기사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 으로서 현재의 禮成江을 말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5쪽). 32) 帶水 : 패수를 예성강으로 보면 대수는 예성강의 남쪽인 임진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 병도, 앞의 책, 355쪽). 33) 北史 : 중국의 正史 二十五史의 하나. 北魏 北齊 北周 隋나라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책. 唐나라 李延壽가 편찬하였는데, 총 100권이다. 34) 隋書 : 隋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正史로서 중국의 二十五史의 하나. 魏徵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636년에 완성하였는데, 총 85권이다. 中宗壬申刊本에 隋 는 缺字이나 본 기사의 인용문이 隋 書 백제전의 기사와 일치하므로 隋 字를 補入하였다. 35) 東明 : 扶餘의 시조로도 나오고(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부여), 고구려의 시조로도 나오고(본 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 백제의 시조로도 나오는 인물. 이처럼 동명이 부여 고구 려 백제의 시조로 나오고 있는 것은 동명이 夫餘族의 族祖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노명호,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참조). 부여의 시조를 동명왕이라 한 것은 후한 王 充이 쓴 論衡 吉驗篇과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魏略 등에 나타나고 있다. 36) 仇台 :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하나. 이 구태의 실체에 대해 ①仇台를 구이 로 읽어 백제의 제8대 古爾王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76쪽)와 ②비류 중심 의 건국설화에 보이는 優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책, 143쪽) 등이 있다. 한편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라 하여 시조 仇台廟에 대한 기 사가 나오는데, 이 仇台廟를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에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 는 彌鄒忽 집단의 종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노명호, 1981, 앞의 글, 68~83쪽). 그러나 온조 설화와 구태설화는 동일 계통의 시조전승이라는 견해(임기환, 1998, 백제시조전승의 형성과 변 천에 관한 고찰, 백제연구 28, 15~17쪽)를 고려하면 구태묘는 온조계 백제 왕실의 종묘에 해 당하는 것으로, 성왕이 사비 천도를 단행한 이후에 체제 정비 과정의 일환으로 구태묘의 예법과 격식을 정비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양기석, 1990, 백제전제왕권성립과정연구, 단 국대박사학위논문, 153~154쪽). 구태묘는 사비시대에 무령왕계를 중심으로 한 왕실내 소가계집 단이 그들 조선을 받드는 제례를 실질적으로 국가 종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3 24 25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39) 마침내 東夷40)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원년(B.C.18) 여름 5월에 東明王廟42)를 세웠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41) 2년(B.C.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靺鞨43)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 37) 帶方故地 : 帶方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대방군은 後漢말 중국의 遼東지역에 웅거하였던 公孫康이 204년경에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설치한 郡으로서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 을 그 治所로 하였다. 이는 沙里院驛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 라는 銘文이 새겨진 塼이 발견된 것에 의해서 입증된다(이기백 이기동, 1982,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72 쪽). 그런데 대방군은 백제가 건국될 당시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대방의 옛 땅 이라 한 것은 백제가 건국된 곳이 대방군의 전신인 옛 진번군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 도, 1977, 앞의 책, 355쪽). 그런데 백제의 또다른 시조로 주장되는 주서 권49 백제전에 나오 는 구태가 건국한 지역이 대방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백제가 고구려와 대방고지에 대한 영 유권 다툼에서 구태의 시조설을 내세워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있으나(이현혜, 1991, 마한 백제국의 형성과 지배집단의 출자, 백제연구 22, 24~25 쪽), 대방고지가 백제지역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박찬규, 2003, 백제 의 시조전승과 출자, 선사와 고대 19, 48쪽) 백제측에서 부여와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 여출자설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정재윤, 2007, 백제 건국의 주체세력과 그 계통, 한성 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경문화사, 55~61쪽). 38) 公孫度 : 중국 後漢末의 사람. 度를 탁 으로 읽는 경우도 있으나 본서에서는 도 로 읽었다. 그 는 요동태수가 되어 190년에 요동군을 遼西와 中遼로 나누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을 칭하였다. 그의 아들 公孫康 손자 公孫淵代에 와서는 요동의 覇者가 되었으나 魏나라 장군 司馬懿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三國志 권8 魏書 公孫度傳 附康 淵傳을 참조할 것. 39) 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구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이 기사는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부여 조에 扶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强 度以扶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에 의거하여 기록된 것 이다. 그런데 公孫度는 2세기말~3세기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원 전후한 시기의 백제 시조와는 생존한 시기가 다르다. 이 기사는 北史 나 隋書 의 편찬자가 백제의 구태를 扶餘의 尉仇台로 誤 認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40) 東夷 : 중국이 주로 동방 지역에 위치한 異民族을 낮추어 일컫던 명칭. 중국 正史에서 사방의 이 민족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으로 부른 것은 三國志 부터이다. 후한대 허신이 지은 說林 에 의하면 東夷의 夷 字를 大 와 弓 의 合字로 보고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東夷라 고 불렀다는 주장이 있다. 동이의 뜻에 대해서는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에 王制云 東方 曰夷 夷者也 言仁而好生 萬物地而出 라 하여 동쪽을 뜻하는 것이다. 夷에는 9種이 있는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가 있다고 한다(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 전 序 참조). 41)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5가지의 설이 있다. ①시조온조설(본서 권 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본문), ②시조 沸流說(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의 細 注), ③시조 優台說(본서 권32 잡지 제사조), ④시조 仇台說(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과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 ⑤太祖 東明=都慕說(본서 권32 제사조 및 續日本紀 권40 延曆 9년 秋7월) 이 그것이다.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 및 시조 구태설을 기록한 본서 백제본기의 찬자는 본서 권32 제사 百濟祭祀條에서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라 하여 시조 동명설을 취 신하고 나머지 설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42) 東明王廟 : 동명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 본서 권32 잡지 제사조에는 백제의 역대 왕들이 동명왕 묘에 배알한 일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지왕 2년(406)을 끝으로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고 있다. 동명왕묘는 한성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김으로 인해 웅진천도 이후에는 그 배알의식이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노명호, 1981, 앞의 글 참 조). 새로 즉위한 백제왕은 즉위초에 동명왕묘 배알 행사를 통해 부여족의 공통 시조인 동명의 권 위를 정통적으로 계승하였음을 천명하는 즉위의례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본서 백제본 기에는 나라를 세운 建國祖인 온조를 모신 사당에 대한 기사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백제가 동명 왕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드린 것은 부여족의 族祖인 동명을 시조묘에 모심으로써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제가 건국시조인 온조의 사당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 단의 종묘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격하시키는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위례 집 단 이래의 종묘를 백제국가의 종묘로 격상시킴도 그만큼 제약을 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명호, 1981, 앞의 글 참조). 한편 東明王廟는 廟堂이 아니고 始祖王陵 등 穀靈信仰의 대상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1983, 2, 平凡社, 295쪽). 43) 靺鞨 :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퉁구스族의 일종. 이 말갈은 중국의 先秦시대에는 肅愼으로, 漢나 라 때에는 婁로, 北魏代에는 勿吉로 불리다가 唐나라 때에 와서는 말갈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말 갈족은 松花江 이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混同江 이남으로 長白山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南北朝시대에 와서 비로소 중국과 교통하였고, 당나라 高祖 武德( ) 이후로는 말갈로 총 칭되었다. 원래 7部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각 추장이 통솔하였으나 당나라 초에 이르러 7부 가운 데 黑水를 중심으로 한 黑水靺鞨과 粟末水를 生活圈域으로 하는 粟末靺鞨의 2部가 강성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말갈은 당나라보다 시대가 앞서기 때문에 당나라 시대의 말갈과 같은 부류로 볼 수 없다. 백제는 건국 초부터 주로 북쪽이나 동북쪽에서 말갈의 빈번한 침 입에 시달려 왔다.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배경도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이었다. 이러 한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지만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말갈과 백제나 신 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은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이해된다. 백제나 신라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계통에

14 26 27 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저 5년(B.C.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사냥하다가 신비 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스러운 사슴(神鹿)46)을 잡았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다고 하여 그를 右輔44)로 삼고 군 6년(B.C.13) 가을 7월 그믐 무오날에 日食47)이 있었다. 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8년(B.C.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 3년(B.C.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넘어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 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지자 돌아갔다. [이에] 왕은 날랜 군사 고 나가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를 뽑아 大斧峴48)까지 쫓아가서 한번에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4년(B.C.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樂浪45)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대해서는 ①예족설(정약용, 말갈고, 여유당전서 등), ②고구려 내의 말갈설(서병국, 1974, 말갈의 한반도 남하, 광운전자공과대학논문집 3), ③영서지역의 토착세력설(문안식, 1996, 영서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 배경, 동국사학 30), ④마한소국설(윤선태, 2001, 마한 의 진왕과 臣 沽國 嶺西濊 지역의 역사적 추이와 관련하여, 백제연구 34, 16쪽) 등이 있다. 이처럼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견해가 구구하지만 대체로 東濊 僞靺鞨 로 파악한 정약용의 견 해를 따르고 있다. 위말갈은 반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중국군현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순차적으 로 받았다가 삼국통일 후 그 자취를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유원재, 1979, 삼국시대 위말갈 고, 사학연구 29, 41쪽). 44) 右輔 : 백제 초기의 관제로 左輔와 함께 설치되었는데, 고구려에도 이 관직이 보인다. 좌 우보에 는 왕족을 비롯한 유력한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전임자가 사망한 후 후임자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 임기는 종신제였다. 이는 국왕을 도와 군사와 행정 업무를 포함한 국정 전반을 총괄하였다. 안 정복은 고구려나 백제의 우보를 훗날의 宰相으로 파악하고 있다( 東史綱目 圖下 官職沿革圖). 그러나 고이왕 27년(260)에 좌 우보를 개편하여 좌평을 두어 국정을 총괄케 하였다. 45) 樂浪 : 중국의 漢나라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B.C.108년에 설치한 4郡 중의 하나. 낙랑군 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쪽)와 이와는 달리 한사군의 위치를 모두 遼東지역에 비정하는 견해(이지린, 1963, 고조선연구 ) 등이 있다. 평안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에 의하면 낙랑군의 郡治는 현재 의 평양지역의 土城里 일대였다고 하며, 遼東지역에 비정하는 견해에 의하면 낙랑군의 중심지는 大凌河 동쪽 1백리 되는 遼河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설치 당시의 낙랑군에 속한 縣은 朝鮮 遂成 등 11개 현이 있었는데, 그 중 朝鮮縣이 首縣으로서 郡治가 되었다. 이 낙랑군은 B.C.82년에 臨 屯郡을 合屬시킴으로써 25縣을 거느린 큰 郡이 되었으나, B.C.8년에 낙랑의 土人 王調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都尉制가 폐지되면서 18縣으로 줄었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 해 멸망되기까지 400여년간 존속하였다. 한편 한반도에는 중국 군현으로서의 낙랑군이 아닌 토 착인이 세운 樂浪國도 있었다. 이 낙랑국은 崔理가 다스렸는데,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에 의해 멸망되었다. 한반도에 두어진 중국 군현의 하나인 樂浪郡에 대해서는 權五重, 1992, 樂浪 郡硏究, 일조각을 참조할 것. 46) 神鹿 : 사슴은 사슴과에 속하는 짐승의 총칭이다. 중국에서는 사슴은 여러 사냥꾼들이 다투어 쫓 아가 잡는 짐승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목적물로서 특히 帝位를 이르기 도 하였다. 부여가 사슴의 뜻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듯이(白鳥庫吉, 1934, 濊貊民族の由來を 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 史學雜誌 45-12) 백제를 비롯한 扶餘族들이 사슴 을 신성히 여겼다. 부여의 중심지인 鹿山 이 만주어에서 사슴을 뜻하는 말인 puhu 와 몽골어에 서 사슴을 뜻하는 pobgo 라는 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려후기 李奎報의 東 明王篇幷序 에 東明西巡時 偶獲雪色 (大鹿曰 ) 倒懸蟹原上 敢自呪而謂天不雨沸流 漂沒其都鄙 我固不汝放 鹿鳴聲甚哀 上徹天之耳 淋雨注七日 若傾淮泗 이라 하여 동명이 사슴을 매 달아 비를 오게 하였다는 설화를 통해서 고구려도 사슴을 신성히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7) 日食 :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가 달에 의하여 가리어지는 현상. 태양의 전부가 가리어지는 皆旣食, 일부가 가리어지는 部分食, 태양의 중앙부만 가리어지 고 그 변두리가 고리모양으로 남는 金環食이 있다. 天變 가운데 가장 중대한 咎徵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식이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일식기사가 무려 26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서 26 삼근왕 2 년(478) 3월 일식기사의 경우 오폴저 일식표와 일치할 정도로 중국측 관측 기록보다 정확한 것으 로 밝혀져서 백제가 독자적으로 일식을 관측하고 기록한 증거로 볼 수 있다(이희덕, 1999, 한국 고대 자연관과 왕도정치, 혜안, 144쪽). 태양의 손상으로 인식하였던 종래의 토속적인 일식관이 고대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다분히 天譴의 성격을 띄고 治者의 권위 확립과 깊은 관련하여 수용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漢書 권26 天文志 제6에 星傳曰 日者德也 月者刑也 故曰日食修德 月食 修刑 이라 하여 일식이 일어나면 천자는 덕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禮記 권61 昏義 제 44에도 是故日食 則天子素服 而修六官之職 蕩天下之陽事 라 하여 천자의 근신을 기록하고 있 다. 48) 大斧峴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대부현은 본서 온조왕 22년 (A.D.4)에 말갈과 전투를 벌인 斧峴, 그리고 斧壤縣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신라 漢州 富平 郡 平康縣)과 같은 곳으로 보고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하고 있다(천관우, 1976, 삼 한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15 28 가을 7월에 馬首城49)을 쌓고 甁山柵50)을 세웠다. 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29 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昆彌川53)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靑木山54)을 의지하며 스스로를 지켰 영토에 다가와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 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날의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청하건대 한번에 싸워서 승부를 결정짓도록 하자. 이에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도리인데, 어찌 감히 이 때문에 화친과 우호를 저버리겠는가? 마땅히 執事51)께서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 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B.C.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馬韓52)에 보냈다. 49) 馬首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마수성은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漢州 堅城郡의 고구려 때 지명인 馬忽郡과 음이 비슷하여 같은 곳으로 볼 때 현재의 경기 도 抱川郡 郡內面에 비정할 수 있다. 그밖에 말갈의 마수성(책) 공격 기사는 다루왕 3년(A.D.30) 과 7년(A.D.34), 그리고 무령왕 3년(503)에도 나오고 있어 본서 무령왕대의 영역 관련 기사가 한성시대의 영역관을 투영한 것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84, 한성말 웅 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23~25쪽). 그러나 이 루트가 말갈의 상시적인 주요 백제 공격로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같은 반복되는 기사라 하여 이를 부정할 근거는 없다. 50) 甁山柵 : 병산책은 마수성과 이웃한 곳이므로 포천 부근으로 비정된다(酒井改藏, 1970, 三國史 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51) 執事 : 여기서는 문맥으로 보아 낙랑태수를 지칭한다. 52) 馬韓 : 진한 변한과 더불어 三韓의 하나. B.C.1세기 이전의 어느 시기부터 A.D.3세기 경까지 한강유역에서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위치하였던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마한을 구성한 國들 로는 伯濟國 目支國 등을 포함하여 54개의 국이었으며, 정치적 성격은 소국연맹체라고 할 수 있 다. B.C.4세기경부터 한반도에 철기가 유입된 이후 B.C.2세기 무렵에는 남한지역에까지 보다 확 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철제 농기구와 공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확 대되고 또한 철제 무기와 도구의 사용으로 인하여 종래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실용성이 적은 儀 器化하였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이제 한국식동검이라 불리는 세형동검 으로, 거친무늬거울은 잔무늬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이러한 문화 변동기에 한반도의 서 북한 지방에는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의 燕나라와 요하를 경계로 맞서고 있을 무렵, 중부 이남지방에는 하나의 문화적 통일성을 가진 辰國이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진국 이 존속했던 B.C.2세기의 중남부지역은 세형동검문화가 발달했던 단계였다. 그런데 B.C.2세기 말엽부터 철기문화의 유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철자원 개발과 철기의 제작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서북한지역의 정치적 변동으로 상당 수의 유이민들이 중부 이남지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동기의 제작과 관리 및 교역 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진국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중부 이남지역 토착사회 전반 에 걸쳐 중요한 정치 문화적 변화가 진행되었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겠지만, 이러한 배경 하에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삼한 중 소국연맹체 대두가 가장 이른 곳은 마한지역이었다. 그 대두 배경으로 한군현의 설치, 대방군의 설치, 위나라의 동방 경략, 백제국의 성장 등을 꼽을 수 있다. 마한지역은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강유역권 아 산만유역권 금강유역권 영산강유역권 등 4개의 문화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박찬규, 1995, 백 제의 마한정복과정 연구, 단국대박사학위논문). 삼한 중 마한을 구성한 國의 규모는 大國은 1萬餘家이고 小國은 數千家였다. 여러 소국의 지배 자 칭호는 대국은 臣智라 하였고, 소국은 邑借라 하였다. 3세기 중엽경까지 이 마한의 맹주는 辰 王으로 불리워졌으며 진왕의 治所는 目支國이었다. 이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稷山설 禮山설 천안설, 전북 益山설, 전남 羅州설 등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3세기대의 주구토광묘가 집중 분포하는 천안 청당동유적 청주 송절동유적 청원 송대리유적 등을 고려해 볼 때 천안-청 주 일대를 광역권으로 하는 직산설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辰韓 條에는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이라 하여 진왕의 지위는 세습되는 것 이 아니라 여러 소국 臣智들의 추대나 선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마한의 성립에 대해 고조선의 準王이 남하하여 마한을 성립시켰다는 견해(이병도, 1976, 三韓問題의 硏究, 韓國古 代史硏究, 박영사)가 있고, 이와는 달리 遼東지역에 있던 北馬韓이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성립 시켰다는 견해(천관우, 1976, 三韓考 제1부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도 있다. 그밖 에 마한의 성립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이현혜,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 천관우, 1989, 古朝鮮 三韓史硏究, 일 조각 ; 권오영, 1996, 삼한의 國 에 대한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 문창로, 2000, 삼한사 회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 등을 참조할 것. 53) 昆彌川 : 현재의 경기도 禮成江으로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20쪽)와 임진강 상류설(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54) 靑木山 : 청목산의 위치에 대해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조에서는 송악산 二 龍의 하나가 靑木이 되었다는 故事와 관련하여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였고, 安 鼎福은 東史綱目 제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조에서 開城 金川 경계의 靑石洞(현재의 경 기도 開豊郡 嶺南面 天摩山)으로 추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永平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李丙燾, 1976, 앞의 책, 355쪽)도 있다.

16 30 31 다. 이에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55)으로 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는 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돌아 곧 물러갔다. 가셨다. 이처럼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 않으니,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11년(B.C.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어제 순행을 나가 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60)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꾀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禿山柵56)과 狗川柵57)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3년(B.C.6) 봄 2월에 왕도에서 늙은 할멈(老 )58)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가을 7월에 漢山61)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 데, 북쪽으로는 浿河62)에 이르고, 남쪽은 熊川63)을 경계로 삼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 고, 동쪽으로는 走壤64)에 이르렀다.65)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59) 번갈아 우리 영토를 침략 55) 烽峴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봉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경 기도 漣川郡 旺澄面 일대설( 大東地志 권3 麻田 및 漣川의 山水), ②개성 청목산 서쪽설(酒井改 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56) 禿山柵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독산책을 경기도 죽산일 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酒井改藏, 1970, 앞의 글), 낙랑의 침입로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없다. 다만 본서 권24 근초고왕 28년(373)조에 나오는 禿山城 기사를 고려해 볼 때 고구 려와의 접경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이 아닐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57) 狗川柵 : 본서 권37 地理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구천책에 대해서는 ①화성일대 설(이병도, 1976, 앞의 책), ②옥천설(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백제가 구천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은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독산책과 마찬가지로 낙랑 또는 고구려와 접경 지대 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이 아닐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58) 老 : 고대사회에서 초기에는 여자 무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뒤에 남자 무당으로 그 역할 이 옮겨진 것으로 보고, 이 노구를 단순히 늙은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 무당이라고 파악하 는 견해도 있다(崔光植, 1981, 所載 老의 성격, 史叢 25). 이는 호랑이 5마리가 성 내로 들어오는 현상과 함께 왕모의 죽음을 예견하는 咎徵으로 제시된 것이다. 59)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 樂浪과 靺鞨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 적으로 낙랑은 백제의 북쪽인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파악되며, 말갈은 함경도에 위 치한 동예를 비롯한 濊族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의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은 國家北有樂浪 東有靺鞨 로 고쳐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병 도, 1976, 앞의 책, 479쪽)가 있는 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정약용은 위의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동쪽의 낙랑은 春川지방의 土酋로 보고 이것이 본서 고구려본기의 최씨 낙랑국이며 춘천맥국설 의 실체라 하였고, 북쪽의 말갈은 東濊로 파악하였다( 疆域考 권1 辰韓考 및 권2 靺鞨考 ; 김택 균, 1985, 춘천맥국설에 관한 연구, 백산학보 30 31합집, 135쪽 ; 김기섭, 1991, 삼국사 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청계사학 8, 17~20쪽). 60) 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 본서 온조왕 즉위년조에 는 온조집단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온조집단이 처음에 한강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뒤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주고 있어 즉위년조의 기사와 상치된다. 이 기사를 取信한다면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한강 북쪽의 하북위례 성에 자리잡았다가 뒤에 하남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겨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 는 주 11) 15)를 참조할 것. 61) 漢山 :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긴 이후에 나오는 한산은 현재의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한 지역을 가리킨다. 한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 11)을 참조할 것. 62) 浿河 : 浿水 浿江이라고도 한다. 패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본 기사의 浿河는 高麗 史 권58 志 12 지리 3 黃州牧 平州條의 猪淺(一云浿江)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川條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 이라 한 기사에 의거할 때 현재의 禮成 江으로 볼 수 있다. 주 31)의 패수를 참조할 것. 이에 대해 패하는 예성강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나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이곳을 평산군의 저탄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문안 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64쪽). 63) 熊川 : 웅천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公州의 錦江설과 경기도 安城郡 安城川설이 있다. 安城川설 은 본 기사의 熊川을 곰내 로 읽고 마한의 맹주국인 目支國이 稷山 성환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또 안성천 유역인 孔道面의 熊川橋가 속칭 고무다리 로 불리우고 있는 점, 안성천 하류에 있는 平澤의 軍勿津(昆池津)이 軍門里津(군문이 나루)으로 불리우고 있는 점 등에 근거하고 있다 (李丙燾, 1976, 앞의 책, 쪽). 한편 본서에 나오는 웅천은 대개 충남 공주지역을 흐르는 금강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충남 공주 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30쪽). 64) 走壤 : 현재의 강원도 春川지방을 말한다. 走壤 走壤城의 다른 이름으로는 烏根乃 首次若 迭 巖城 등이 있다. 춘천의 옛 명칭이 首若州 또는 走壤城이었는데 이는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조에 九月 築國原城 首若州走壤城(一名迭岩城) 이라는 기사에 의해 확인된다. 춘천 일 대에서 주양과 유사한 지명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고적조의 枝內村所 와 대동여지

17 년(B.C.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쳐들어왔다. 이에 왕은 군사를 이끌고 七重河69) 9월에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14년(B.C.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66) 에서 맞아 싸워서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70)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67)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들을 그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牛頭山城71)을 습격하려고 臼谷72)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 15년(B.C.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 아왔다. 지 않았다. 20년(A.D.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는데, 17년(B.C.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68) 여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國母에게 제사를 지냈다. 도 의 枝內山 을 들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 65) 북쪽으로는 浿河 동쪽으로는 走壤에 이르렀다 : 이 기사는 온조왕대의 영역을 가르키는 기 사로서 온조왕 당시 백제의 영역이 북쪽의 浿河(예성강)로부터 남쪽의 熊川(안성천), 서쪽의 大海 (서해), 동쪽의 走壤(춘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이 어느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는가가 문 제이다. 이 문제는 본서 초기기록을 취신하느냐의 여부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초기기록을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대로 온조왕 13년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천 관우, 1976, 앞의 글(下), 쪽), 본서 백제본기 溫祚紀의 영역확장 기사는 후대의 사실이 온조왕대에 부회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3세기 경 古爾王代의 사실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병도, 1977, 앞의 책, 쪽). 백제가 건국한지 얼마 안되어 오늘날의 중부지역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서울 송파구 일대, 남한강과 북한강, 그리고 한탄강유역에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적석묘의 존재 를 통해 2~3세기 경의 사실로 이해하고 있다(권오영, 1986, 초기백제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 찰, 한국사론, 34~54쪽 ; 김성범, 1992, 군사보호구역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 문화재 25, 238쪽 ; 윤근일 김성범, 1994, 연천 삼곳리 백제적석총 발굴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66) 도읍을 옮겼다 :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본서 초기기 록의 연대를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溫祚本紀의 기록대로 온조왕 14년으로 보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쪽). 그러나 초기기록이 후대에 이루어진 사실을 온조대로 소급 부회한 것으 로 보는 입장에서는 하북에서 하남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대해 책계왕~비류왕대로 보는 견해(이 병도, 1977, 앞의 책, 479쪽)와 肖古王代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 앞의 책, 56 58쪽) 등이 있다. 67)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았다 :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3 경기도 楊州 城池條에서 이때 쌓은 성을 楊州城으로 보았는데, 관련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68) 사당을 세우고 國母에게 제사를 지냈다 : 국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모신앙이 백제에서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가 없어 알 수는 없다. 다만 고구려와 신라에도 국모신앙 이 있었음이 다음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東明聖王 14년조에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22년(A.D.4) 가을 8월에 石頭城73)과 高木城74)의 두 성을 쌓았다.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라 하여 神廟를 세워 王母를 제사한 것과 周書 권49 열전 상 高麗條에 又有神廟二所 一曰扶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 祖扶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여 주몽을 낳은 河伯女를 扶餘神으로 서 섬긴 사례에서 고구려에도 국모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新羅에서는 始祖와 始祖妃를 二 聖 으로 표현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본서 권1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2년). 69) 七重河 : 칠중하는 본서 권35 지리지 2 한주의 칠중현 근처에 흐르는 강의 명칭으로 현재의 파주 시 적성면 부근의 임진강을 지칭한다. 이곳에 위치한 七重城은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難隱別이 라고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때 重城縣으로 고쳤으며, 고려초에 적성으로 개칭되었다. 70) [말갈]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 : 백제가 말갈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 고 하는 것은 앞서 神鹿을 잡아 마한에 보낸 것이라든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면서 마한에 천도 사실을 告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백제가 마한에 대해 부용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71) 牛頭山城 : 춘천을 일컫는 牛頭州 牛首州 牛頭郡 등과 연계시켜 현재의 春川지방에 비정된다 (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 이와는 달리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황해도 金川郡 牛峰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이 기사를 주 59의 國家北有樂浪 東有靺鞨 기사와 관련하여 낙랑 부용국인 춘천의 맥국으로 보는 입장에서 낙랑의 우두산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김택균, 1985, 앞의 글, 135쪽). 72) 臼谷 : 정약용은 疆域考 권1 樂浪別考에서 今昭陽江兩水合衿之處有大村 曰牛頭 其裡面有所謂 貊國古墟 此卽古樂浪國之遺墟也 又春川南界水村有曰方牙兀者 譯之以文 卽臼谷也 라 하여 구곡 을 방아골 로 읽어 춘천 남쪽 경계의 水村인 방아올 로 비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경기도 楊州 加平지역의 九谷驛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도 있다. 73) 石頭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석두성은 본서 권27 무 왕 8년(607)에 고구려와 싸운 전투 지점으로 나오는데, 당시 한강유역이 신라의 영유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고구려 때의 지명인 所邑豆縣과 音韻上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일대

18 34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斧峴75)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도적을 만나 한 번에 싸워 격파하고, 포로76)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A.D.6) 가을 7월에 왕이 熊川柵77)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 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78)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텁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 35 25년(A.D.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 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日官79)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께서 우뚝 일어날 조짐이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辰韓80)과 마한을 병탄하려고 마음을 가졌다. 26년(A.D.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마한이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 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 일인가? 왕은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74) 高木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고목성은 본서 권26 무령왕 7년(507)에 말갈이 공격한 루트상에 있는 성으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신라 한주 功成縣의 고 구려 때 지명인 功木達縣과 음운상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漣川邑에 비정할 수 있다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 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20쪽). 75) 斧峴 : 斧峴은 본서 권23 온조왕 22년(A.D.4)에 말갈과 전투를 벌인 斧峴, 그리고 斧壤縣 (본 서 권35 잡지 지리 2 신라 漢州 富平郡 平康縣), 그리고 주 48의 대부현과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하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76) 포로 : 포로는 전쟁에서 사로잡힌 자들로서 生口라고도 하였는데, 대체로 노비가 되었다. 근초고 왕 24년(369)에 백제가 치양성에 침공해 온 고구려군을 공파하고 노획한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분배한 사례가 있다. 이들은 전공의 포상으로 장수와 군사들에게 분배되어 고대사회에서는 노비 공급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生口의 존재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에도 나온다. 77) 熊川柵 : 웅천책은 안성천 일대에 마한과 경계를 짓기 위해 설치한 목책을 말한다. 웅천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주 63)을 참조할 것. 78)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 이 기사는 온조 집단이 처음 마한왕에게 마한지역의 동 북 1백리 땅을 할양 받아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할 때의 사정을 반영해 준다. 이는 다 분히 상징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에 전하는 마한소국 규모에 해 당하는 크기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백제는 마한의 제후국으로 인식될 정도로 일정 기간 마한 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이 기사를 온조왕대의 사실이 아니라 衛滿에게 쫓겨 내려온 고조선의 準王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59, 韓國史 고대편, 진단학회, 쪽), 삼국지 의 진한 성립기사와는 구별되는 것이므로 이를 고조선의 準王 의 남하와 연계시키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79) 日官 : 天文의 변화와 자연의 災異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점치는 사람. 중국의 경우 日官은 曆數 干支를 맡고 天文을 관장하였는데, 天官이라고도 하였다. 春秋左氏傳 桓公 17년 冬十月朔 日 有食之不書 日官失之也 天子有日官 諸侯有日御(日官月御典曆數者)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백 제는 사비천도 후 22부사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천문과 역법 업무를 담당하는 日官部가 있었다. 80) 辰韓 : 진한은 마한 변한과 함께 三韓이라 하였다. 삼국지 권30 魏書 東夷傳 진 변한전에 의 하면 秦人이 망명해 와서 세웠기 때문에 秦韓으로 불리웠다고 전한다. 이 진한은 삼국지 동이 전에 辰韓者 古之辰國 이라 한 것에서 보듯이 진국의 후신이며 그 정치적 성격은 12國으로 구성 된 여러 소국연맹체라고 할 수 있다. 진한연맹체를 구성한 여러 소국은 처음에는 6國이었으나 점 차 분화하여 12國으로 확대되었다. 12국 가운데 大國은 4 5千家로 구성되었고, 小國은 數百家 로 구성되었다. 이 12國은 대체적으로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역에 자리한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12국 가운에 위치비정이 확실한 것은 경북 경주에 자리한 사로국, 경북 울진에 자리한 優由國 등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진한연맹체의 성립의 하한은 삼국지 동이전에 인용된 魏略 에 王莽 地皇 年間(A.D.20 22)에 辰韓 右渠帥 廉斯가 자신의 邑落을 떠나 낙랑군 에 항복하러 갔다는 사실에서 기원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철기와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이 B.C.1세기로 편년되고 있는 사실 등을 참고할 때 성립 의 상한은 B.C.1 2세기로 올라 갈 수 있다. 한편 진한연맹체가 소멸된 시기에 대해 본서 권1 신라본기 혁거세조에는 혁거세 당시에 이미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까지 진한연맹체가 존속한 것으로 나오고 있고, 특히 魏나라 正始 6 7년( ) 경에 辰韓 8國의 분할 문제로 韓과 대 방군이 전쟁을 하여 韓이 패배하고 那奚國 등 수십국이 이탈하였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기술 되어 있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진한연맹체의 소멸은 3세기 중엽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 다. 진한연맹체의 해체과정은 진한의 한 구성체였던 사로국이 성장하여 진한제국을 병합하는 과 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병도, 1976, 三韓問題의 硏究, 앞의 책 ; 李賢惠, 1984, 앞의 책 ;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 천관우, 1989, 앞 의 책 ; 권오영, 1996, 앞의 글 ; 문창로, 2000, 앞의 책 등을 참조할 것.

19 36 37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병합해 훗날의 지 않았다. 어려움을 면하는 편이 더 낫겠다. 27년(A.D.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 어 그 國邑81)을 병합하였다.82) 그러나 圓山城83)과 錦峴城84)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 드디어 멸망하였다.85) 가을 7월에 大豆山城86)을 쌓았다. 28년(A.D.10) 봄 2월에 맏아들 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81) 國邑 : 삼한을 구성한 여러 국들은 몇개의 邑落으로 구성되었다. 이 읍락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세 력이 강하거나 중심기능을 가지는 大邑落을 國邑이라고 하였다(이현혜, 1991, 앞의 책, 쪽). 따라서 이 기사의 국읍은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정치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국읍의 정치적 기능은 여러 읍락들을 통할하는 것이나 3세기 중엽경까지 삼한의 각 國들은 삼국 지 동이전 韓條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拜之禮 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국읍이 읍락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82) 왕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國邑을 병합하였다 : 본서 권23 온조왕대에는 백제의 마한 정복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온조왕대에는 백제의 웅천책 설치 단계(온조왕 24년) 진한과 마한에 대한 정복을 결심하는 단계(온조왕 25년) 백제의 마한정복 의지 천명(온조왕 26 년 7월) 백제의 마한 공격 개시 단계(온조왕 6년 10월) 백제의 마한 유민에 대한 사민책과 멸 망시키는 단계(온조왕 27년 4월) 구마한세력의 대규모 부흥운동과 진압되는 단계(온조왕 34년 10월) 백제의 구마한지역에 대한 새로운 지배책 마련 단계(온조왕 36년 7월 및 8월)로 백제의 마한 정복과 그 지배과정을 단계화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이 일련의 마한 정복 과정이 건국시조인 온조왕대에 집약해서 서술되어 있는데, 사료 비판을 통해 관련 지명 분석과 일본서기 권9 신공 기 49년조 기사와의 일치성을 검토한 결과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의 사실에 온조왕대에 투영되 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G.K.Ledyard, 1975, Galloping along with the horseriders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 No.2, 242쪽 ; 유현용, 1997, 온조왕대 마한정복기사의 재고찰, 사총 46, 25~26쪽). 83) 圓山城 : 본서 권37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원산성 의 위치를 肖古王 24년(190)조에 보이는 新羅西境圓山鄕 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경북 醴泉郡 龍 宮面에 비정할 수 있으나(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龍宮縣 建置沿革), 예천 용궁은 마한 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① 新增東國輿地勝 覽 권33 전라도 珍山縣 古蹟조에 나오는 猿山鄕(在縣東三十里) 기사에 의거하여 충남 진산으 로 보려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28쪽)와 ②圓山을 完山의 異寫로 보아 지금의 전북 全州市에 비정하는 견해(全榮來, 1975, 完山과 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창간호), ③충남 금산 마전리설(1991, 조선전사 3 중세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57쪽) 등이 있다. 그러나 마한 의 목지국을 직산으로 볼 때 금산 마전리설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84) 錦峴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정약용은 錦峴者 或是今羅 州也 故與古沙夫里幷擧也 라 하여 나주로 비정하고 있으나(丁若鏞, 疆域考 권1 馬韓考) 지리적 으로 맞지 않아 취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금현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9 鎭安縣 山川조에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나오는 熊嶺縣의 異寫로 보고 그 위치를 지금의 鎭安郡 富貴面 곰치리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전영래, 1975, 앞의 글) 이 역시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본서 권26 성왕 28년(550)에 고구려 가 포위한 金峴城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다. 이 金峴城의 위치에 대해 ①충남 연기군 전의의 金 城山, 金伊山城說(이병도, 1976, 앞의 책, 57쪽), ②고구려때 今勿奴郡으로 보는 鎭川說(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47쪽) 등이 있으나, 진천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 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온조왕 27년 7월 아산에 대두산성을 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아산과 가까운 연기 전의로 보는 설이 보다 타당하다. 85)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 마한의 멸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취신하 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대로 온조왕 27년으로 보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24~131쪽). 그러나 晉書 권97 열전 마한전에는 太熙 원년(290)에도 마한이 西晉에 견사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기사를 그대로 취신할 수는 없다. 이 기사는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남쪽 방면에 산재한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해 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 럼 이때에 백제에 멸망당한 마한의 실체는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마한세력 전체를 지칭하는 것 이 아니라 한정된 범위인 마한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여러 소국들이 결집된 정치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기사는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목지 국은 魏나라 正始 6 7년( )에 일어난 韓과 帶方郡과의 전쟁에서 韓이 패배하여 그 위상 이 약화되자 백제국의 古爾王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엽경으 로 추정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8, 앞의 책, 85 94쪽 ; 이기동, 1990, 백제국의 성장과 마한병합, 백제논총 2 ; 문창로, 2007, 백제의 건국과 고이왕대의 체제정비, 백제 의 건국과 기원 백제문화사대계 2권,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89~297쪽 등을 참조할 것. 86) 大豆山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 해서는 ①충남 공주나 서천설 및 연기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0쪽 및 132쪽), ②충남 아 산시 음봉면 수한산성설(이기백, 1978,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 9), ③충남 아산 시 영인산성설(유원재, 1992,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등이 있는데, 이곳을 천도 후 해씨세력의 근거지로 보고 있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2~13쪽). 그런데 본서 권23 온조왕 36 년(A.D.18)에 백제가 탕정성을 쌓고 대두산성의 민호를 이곳에 사민시킨 사례에 비추어 보면 온 양과 가까운 아산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

20 38 31년(A.D.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南部와 北部87)로 삼았다. 39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7) 南部와 北部 : 백제 5部의 하나로 그 영역 중 남쪽과 북쪽에 설치한 부의 명칭. 백제 초기의 지방 통치체제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部制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31년부터 비유 왕 2년(428)까지 방위명을 붙인 부에 관한 기사가 모두 13개 나오는데, 거의 고이왕대 이전에 집 중 기록되어 있다. 백제 초기 부제의 구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5부제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 리고 백제 초기의 부는 고유한 명칭을 붙인 족제적인 성격의 부가 지방행정 구획적인 방위명 부 로 변화해 간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의문과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논의의 초점은 백제 초기의 4부에 관한 기록 자체의 신빙성 문제와 부제의 성격에 관 한 문제일 것이다. 부체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방통치체제로 볼 것인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백제 초기의 기록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삼국 초기의 국가적 성격을 새롭게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안의 하나로 모색이 된 것이 部體制論 이었다(노태돈, 1975, 삼국시대 부 에 관한 연구 -성립과 구조를 중심으로, 한국 사론 2 및 2000,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부체제론을 중심으로-, 한국고대 사연구 17). 부체제론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전 단계인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 운영의 성격을 구조론적으로 접근하여 제시된 개념이다. 그런데 부체제에 관한 용어나 개념 정의 문제라든가, 부제의 성립 시기, 부의 편제 대상 지역, 그리고 부의 성격 문제 등에서 논자들 사이 에서 상이한 견해차가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단위정치체인 부체제를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백제 초기의 부제를 지방통치체제의 차원으로 이 해하는 견해가 있다. 박현숙은 백제 초기의 부가 족제적 또는 부족적 성격이 약한 방위부로서 전 국을 단위로 한 초보적인 지방통치구획이었으며 부에 소속되어 있던 재지세력들을 통한 간접통 치가 관철된 것으로 보았다(1990, 백제 초기의 지방통치체제의 연구 - 부 의 성립과 변화과정 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20). 김기섭은 4세기대에 이르러 部-城-村체제가 성립되었는데, 이 때의 부는 행정 편의를 위해 중앙에서 임의로 구획한 행정 군사적 단위로서 전국을 대상으로 편 제한 방위명의 5부체제였다는 것이다(1998, 백제 전기의 부에 관한 시론,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20). 이도학 역시 4세기대에 행정적인 방위명 부로 개편한 것으로 보았으나 백제의 전체 영역에 대한 지방지배방식을 이원적으로 본 점이 다른 논자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관점이다. 즉 금강 이북지역은 군관구적인 部-城-村체제를, 그리고 새로 획득한 금강 이남의 전라도 지역 은 지방거점 통치방식인 담로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았다(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 사). 반면 부체제론을 인정하지 않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에서 부제를 지방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종욱은 초기의 부에 대해서 전국을 인위적으로 구획한 초 보 단계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보고 여러 부를 통할하는 존재인 국왕을 단지 한 부의 장으로 보는 부체제론을 비판하였다(2000, 한국고대의 부와 그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17). 그리고 제가회 의는 국왕의 통제하에 구성된 군신회의체이며, 삼국의 부를 지방행정구역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점차 집권력을 강화시킨 초기백제는 여러 소국들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고 그 수장을 중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A.D.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 어나니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東部와 西部의 두 部88)를 더 설치하였다. 앙귀족으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배자집단이 형성되어 이들이 왕족과 함께 중앙의 部를 형 성하게 되었다. 각 部는 자치권과 독자적인 지배조직을 가졌으나 무역 외교 전쟁 등 국가 전체 와 관련된 문제는 왕의 통제를 받았다. 이 부는 왕권의 강화가 진전되고 일원적인 지배체제가 갖 추어지게 되면서 해체되어 王京의 行政구역으로 전환되었다. 88) 東部와 西部 : 동부와 서부는 각각 백제 5부의 하나이다. 이를 앞서 설치된 남부 북부 및 중앙을 합치면 5部가 된다. 백제 초기 부제의 구성에 대해서는 4부체제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우태, 1993, 백제의 부체제 -신라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백제사의 비교연구, 충남대 백제연구 소), 동서남북의 방위명 부와 중앙을 합쳐서 5부제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부의 명칭에 대해서 는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처럼 족제적인 부에서 방위명 부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처음부터 방위명 부가 실시된 것으로 보는 견해로 대별된다. 그리고 그 변화 시기에 대해서는 고이왕대설 (노중국, 1988, 앞의 책), 근초고왕대설(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5세기 후반 웅진 천도 이후설(노태돈, 앞의 글)이 제기되어 있다. 반면 온조왕대로 보는 긍정론 이외에 수정론의 입장에서 백제 초기부터 방위명 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긍정론의 입장 에서 백제 온조왕 대에 나타나는 4부 성립 기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백제 초기의 부제를 지배 자집단의 단위정치체라는 관점에서 그 편제 대상지역을 지배자 집단의 거주지인 왕도에 국한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또는 전국을 단위로 한 지방통치구획으로서 부제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 해(박현숙, 1990, 앞의 글 및 1997,`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a, 고려대박사학위논문)가 있다. 이 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대체적으로 취신하는 입장에서 입론된 것이지만 후대 사실이 건국 시 조인 온조왕대에 일괄 부회되어 서술된 측면도 있어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반면 수정 론 입장에서 백제 초기의 부에 관한 기록을 수정하여 받아들이고 백제초기 영역의 변화에 따라 지방통치체제의 성격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전반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백제초기부터 방위명 부제가 채용된 배경을 백제국 중심의 연 맹체 단계에서 중앙의 집권력을 강화하려는 내부적 요인과, 또 낙랑과 말갈 등의 외부 침입에 대 비하려는 군사적 목적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박현숙, 1997, 앞의 글 ; 양기석, 2000, 백 제 초기의 부, 한국고대사연구 17). 그 기원은 부여의 전통적인 사방관념을 바탕으로 한군현 인 낙랑에서 실시한 부제를 원용하여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기섭, 1998, 백 제 전기의 부에 관한 시론,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 양기석, 2000, 앞의 글). 그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건국기인 온조왕대로 보는 견해 이외에 수정론 입장에서 백제가 한군현 세력을

21 년(A.D.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周勤이 牛谷城89)을 근거로 삼아 반란을 일으 여름 4월에 가물기 시작하여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 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들이 1천여 집이나 되니, 浿水와 帶水 사이92)가 텅 비어 사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는 사람이 없었다. 90) 36년(A.D.18) 가을 7월에 湯井城 을 쌓고 大豆城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圓山城과 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91)을 쌓았다. 37년(A.D.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 이 맞으면 죽었다. 38년(A.D.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다가 동쪽으로는 走壤93)에 이르렀 고, 북쪽으로는 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 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크게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성장하는 2세기 후반이나(양기석, 2000, 앞의 글, 190쪽) 3세기 중 반 고이왕대(노중국, 1988, 앞의 책 ; 김영심,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 로, 서울대박사학위논문), 또는 백제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김기섭, 2000, 앞의 글 ; 이도학,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로 보는 견해가 각각 제기되고 있다. 백제 초기의 부는 주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군관구적인 지방구획의 성격을 가졌으며, 그밖에 행정적인 측면에서 관직 임명이나 순무활동 및 공물 진상 등과 같은 복속의례적인 정치행 위를 통해서 불철저한 지방 지배를 보완하기 위한 기능도 가졌다. 그러나 고이왕대 이후 종래 부 가 갖고 있었던 군사관련 기능이 신설된 좌장과 좌평에 이관되면서 부의 중요성이 그만큼 약화되 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중앙 집권력의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9) 牛谷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우곡성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23 다루왕 29년(A.D.56), 기루왕 32년(108), 권24 구수왕 16년(229)에 나올 뿐 아니라 우두 성 우산성 등 그와 유사한 지명이 본서에 자주 나오고 있다. 그런데 본서 권32 다루왕 29년 2월 조에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는 기사로 보아 이와는 별개의 성이거나 아니면 후대의 사실이 온조왕대에 부회 서술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다만 말갈의 상시적인 백제 침입 루트상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 동북부 일대로 추정되나 현재의 구체적인 지명 은 알 수 없다. 이 사건을 구마한세력이 외부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부흥운동을 추진한 것으로 보 고 이곳을 본서 권23 온조왕 27년(A.D.9) 항복한 마한의 원산성과 금현성의 주민들을 사민시킨 곳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유현용, 1997, 온조왕대 마한정복기사의 재고찰, 사총 46, 22쪽). 90) 湯井城 : 현재의 충청남도 牙山市(舊 溫陽市)로 그 중심지는 아산시 邑內洞山城으로 비정되고 있 다. 이 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瓦片과 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되었다(유원재, 1992, 百濟 湯井城 硏究, 百濟論叢 3 참조). 91) 古沙夫里城 : 현재의 전라북도 井邑市 古阜面에 위치한다. 고사부리성은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에는 古 夫里郡 으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는 古沙比城 으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古泗 로, 周書 권49 열전 백제조에는 中方 古沙城 으로 각각 나온다. 한편 이 고 사부리성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충청도 禮山縣 驛院條에 古沙院(在縣東十三里) 이라 한 기 사에 보이는 古沙院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하), 쪽). 40년(A.D.22) 가을 9월에 말갈이 述川城94)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斧峴城95)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쌘 기병 200 명에게 명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였다. 41년(A.D.23) 봄 정월에 右輔 乙音이 죽자 북부의 解婁96)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 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97)을 고쳐 92) 浿水와 帶水 사이 : 패수는 예성강, 대수는 임진강을 말하는데, 현재의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고구려로 유망해 간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지 명 비정에 대해서는 주 31)과 32)를 참조할 것. 93) 走壤 : 현재의 강원도 春川지방을 말하는데 주 64)를 참조할 것. 94) 述川城 : 현재의 경기도 驪州郡 興川面 일대로(이병도, 1981,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359 쪽 ; 천관우, 1976, 앞의 책(하) 120쪽) 고려시대에 川寧이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 4 漢州 川郡 조에 川郡 本高句麗述川郡 으로 나온다. 말갈은 肖古王 49년(219)에도 이 述川 지역을 공격해 온 일이 있었다. 95) 斧峴城 : 현재의 평강군 평강면에 비정되는데, 주 48)의 대부현과 주 75)의 부현을 참고할 것. 96) 解婁 : 백제 온조왕대에 扶餘 출신의 인물로 우보에 임명될 정도의 북부지역 실권자였다. 우보의 직에 있던 온조왕의 재종숙부[族父] 乙音이 죽자 우보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다. 97) 慰禮城 : 백제 한성도읍기의 도성을 말한다. 위례성에는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있다. 온조 집단이 고구려지역에서 남하하여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인 위례성이 河北위례성(현재의 서울시 中浪川 일대로 비정됨)이고, 한강 남쪽으로 정치적 중심지를 옮긴 이후의 위례성을 河南위례성이

22 42 지었다. 43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43년(A.D.25) 가을 8월에 왕이 牙山98)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9) 9월에 큰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이니 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 45년(A.D.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102)(A.D.28)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입니다. 겨울 10월에 南沃沮100)의 仇頗解 등 20여 집이 斧壤101)으로 와서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권23 百濟本紀 1 多婁王 라고 한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도성이라는 의미로 두루 사 용되었지만 주로 백제의 도성제가 확립되는 371년 이전에 한산이란 명칭과 함께 혼용되어 나타 난다. 이 위례성은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 해서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과 송파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주 11) 참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 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신희권, 2003, 앞의 글). 위례성에 대해서 는 주 15)를 참조할 것. 98) 牙山 : 본서 권36 잡지 지리 5 熊州 陰峯縣조에 陰峯(一云陰岑)縣 本百濟 牙述縣 으로 나오는데, 아산은 백제때 牙述縣으로 현재의 충남 아산시이다. 99) 큰 기러기[鴻雁] : 기러기 가운데 큰 것을 鴻이라 하고 작은 것을 雁이라고 한다. 詩經 小雅 鴻 之什 鴻 에 鴻于飛 肅肅其羽(大曰鴻 小曰 )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詩經 의 鴻은 周 宣王 이 離散한 백성들을 위로하여 오게 하고 安集한 사실을 기술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전란으로 유 망한 백성들을 鴻이라고도 하였다. 본 기사에서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 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00) 南沃沮 : 옥저는 동옥저라고도 불렸으며, 남과 북에 각각의 중심지가 있어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하였다. 동옥저는 옥저의 총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옥저의 중심세력으로 남옥저라고도 불렸 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 大海에 접해 있으 며, 지형은 동북은 길어 천 리나 되고 북으로는 婁 扶餘와 접하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한다고 하였다. 남옥저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흥 지역이며 동예와의 경계선은 정평 일대였을 것으로 추 정된다. 북옥저의 지리적 위치는 길림 연변지구설, 훈춘설, 백두산 북쪽지역설, 흑룡강성 영안 현 동북지역설, 두만강 남쪽지역설 등으로 다양하다.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지역의 정치집단 은 臨屯의 중요 세력의 하나였다. B.C.108년 한군현으로 편제된 후 이곳에 夫租縣이 설치되었 다. B.C.75년 현토군이 만주 興京 老城 방면으로 이동한 후 낙랑군의 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 A.D.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일시 漢의 侯國으로 봉해졌다가 A.D.56년 고구려 태조왕때 고 구려에게 복속되었다. 동옥저를 구성한 세력 중에서는 不耐 華麗 沃沮 등이 유력하였다. 고구 려에 신속된 후 맥포 어염 해중식물과 미녀들을 공물로 고구려에 바쳤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3세기 중반경 동옥저는 5,000여 호였으며, 언 어나 음식, 의복 가옥 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들은 통일된 세력을 多婁王103)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형성하지 못해 大君長은 없었고 각 邑落별로 渠帥들이 자치적으로 읍락내의 일을 운영해 나갔 다. 옥저인들은 步戰에 능하였고, 혼인풍속으로는 賣買婚的 성격을 가진 민며느리제가 행해졌으 며, 장례는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 커다란 木槨에 넣는 일종의 二次葬을 행하였 는데, 한 집안 사람 모두가 동일한 목곽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남옥저는 처음에는 樂浪郡 東 部都尉의 관할하에 귀속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蓋馬고원을 넘어 진출해 오자 고구려의 지배하에 귀속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 각 읍락 단위로 大人을 고구려의 使者로 삼아 貢 納을 징수하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옥저에 대해서는 三國志 30 魏書 東夷傳 동옥 저전 ; 李丙燾, 1976, 後方行列社會의 扶餘 沃沮 및 東濊,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 金哲 埈, 1975,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등을 참조할 것. 101) 斧壤 : 斧壤은 본서 권23 온조왕 22년(A.D.4)에 말갈과 전투를 벌인 大斧峴 (주 48 참조)과 斧峴 (주 75) 참조)과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하고 있다(천 관우, 1976, 앞의 글(下),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신라 漢州 富平郡 平康縣에 해당한다. 102) 온조왕 46년 : 이는 온조왕의 재위기간인데,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癸卯立 在位四十五年 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1년의 차이는 본서가 卽位年稱元法에 의한 것이고 三國遺事 는 踰年稱元法에 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103) 多婁王(A.D.28~77) : 백제의 제2대 왕. 온조왕의 맏아들. 온조왕 재위 28년(A.D.10)에 태자로 책봉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百濟의 초기 王系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왕계와는 달리 백제를 건국한 두 연맹세력인 溫祚系와 沸流系에 의해 왕실교체가 있었으 며, 후일 온조계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온조계 중심으로 일원화한 것으로 왕실계보를 정리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천관우는 우태-비류-고이계(優氏)와 주몽-온조-초고계(부여씨) 로 나뉘어 두 세력간에 왕실교체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1976, 앞의 글(하), 142~143쪽)가 있다. 또한 백제 초기 왕계 중에서 多婁王-己婁王-盖婁王은 婁 를 공통의 末字를 가지고 있고, 이것 은 沸流系의 시조인 解夫婁의 婁 와 상통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沸流系 왕통으로 파악하고,

23 년에 태자로 삼았고, 46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서 흘우에게 말 10필과 租 500섬을 상으로 2년(A.D.29) 봄 정월에 시조 東明廟에 배알하였다. 주었다. 104) 2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3년(A.D.30) 겨울 10월에 동부의 屹于105)가 말갈과 馬首山106)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4년(A.D.31) 가을 8월에 高木城의 昆優107)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명의 머리 를 베었다. 9월에 왕이 橫岳108) 아래에서 사냥하였는데, 한 쌍의 사슴을 연달아 맞히니 여러 사람들 肖古王-仇首王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왕계를 溫祚系 왕통으로 파악하고 있다(노중국, 1988, 앞 의 책, 65 77쪽). 그러나 이러한 백제 초기 왕계의 다기성을 들어 온조계와 비류계로 상정하여 마치 다른 세력으로의 왕통이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왕실내의 다른 왕계에 의한 세력교체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104) 남쪽 제단(南壇)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 본서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온조왕 때부터 국가제사의 일환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祭天祀地]. 그래서 백제의 제천 사지를 중국 의례의 수용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井上秀雄, 1978, 高句麗 百濟の祭祀儀禮, 古代朝鮮史序說 -王者と宗敎, 東出版寧樂社). 그러나 제천행사는 백제 왕실의 기원인 부여와 고구려에서도 시행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직접 관련시킬 수는 없다. 백제의 제천사지 행사의 특 징은 여러 측면에서 찾아진다. 백제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제사로서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가 동 시에 이루어진 天地合祀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행사가 즉위초에 이루어졌 고 또한 국왕이 친히 제사를 주제한다는 점에서 대내적 갈등 극복과 왕권의 정당화를 도모하려 는 즉위의례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사의 장소는 제사 때마다 새로 건설되는 노천 의 大壇에서 행해졌는데, 그 위치는 왕도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南壇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제 천사지 행사를 전후로 하여 동명왕 제사와 중신 임명, 그리고 大赦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 받는 동시에 국왕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백제 왕실의 제 천사지 행사는 동성왕대를 끝으로 사료상에 보이지 않는데, 사비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와 불교 수용 등에 따라 새로운 사전체계가 마련된 데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제천사지에 대해서는 차용걸, 1978, 백제의 제천사지와 정치체제의 변화, 한국학보 11, 일지사 ; 박승 범, 2003, 한성시대 백제의 국가제사, 선사와 고대 19 ; 최광식, 2006, 백제의 신화와 제 의, 주류성 ; 서영대, 2007, 백제의 천신숭배, 백제의 제의와 종교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 서 13,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등을 참조할 것. 105) 屹于 : 백제 다루왕대의 인물로 동부의 유력한 세력가였다. 말갈의 공격을 馬首山 서쪽에서 격파 하여 큰 상을 받았다. 후에 右輔 解婁가 죽자 우보의 직을 맡았고, 다루왕 10년(A.D.37)에 左輔 직이 신설되면서 최초로 좌보의 직을 맡았다. 106) 馬首山 : 마수산은 본서 권23 다루왕 7년(A.D.34) 9월 말갈이 침입한 馬首城과 관련이 있는 곳 인데, 강원도 금화로 보는 견해(이병도, 1983, 역주 삼국사기(하), 을유문화사, 11쪽)와 포천설 (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다. 그런데 마수산은 마수성(주 49) 참조)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 으로 볼 때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漢州 堅城郡의 고구려 때 지명인 馬忽郡과 음이 비슷하고, 또 한 포천 부근으로 비정되는 병산책(주 50) 참조)이 이웃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경기도 抱 이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6년(A.D.33) 봄 정월에 맏아들 己婁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나라 남쪽의 주 군109)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110) 川郡 郡內面에 비정할 수 있다. 말갈의 마수성(책) 공격 기사는 다루왕 3년(A.D.30)과 7년 (A.D.34), 그리고 무령왕 3년(503)에도 나오고 있어 본서 무령왕대의 영역 관련 기사가 한성시 대의 영역관을 투영한 것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23~25쪽). 그러나 이 루트가 말갈의 상시적인 주요 백제 공격로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같은 반복되는 기사라 하여 이를 부정할 근거는 없다. 107) 高木城의 昆優 : 고목성은 신라 한주 功成縣의 고구려 때 지명인 功木達縣과 음운상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漣川邑에 비정할 수 있다(이병도, 1983, 앞의 책, 356쪽 ; 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20쪽). 곤우는 백제 다루왕대의 인물로 高木城을 기반으로 한 유력한 세력가였다. 그런데 昆을 昆解 라는 複姓이 單姓化된 것으로 보고 백제 仇首王의 후손 가문으로 보는 견해 (노중국, 1994, 百濟의 貴族家門硏究, 大丘史學 48, 5 6쪽)가 있지만, 昆이 성씨인지 이름 인지 분명치 않고, 또 백제 초기부터 왕족이 분지화하여 별도의 성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는 점 은 받아들일 수 없다. 108) 橫岳 : 현재의 서울시 三角山에 비정된다. 본서 권37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 다. 김정호의 大東地志 漢城府 山水條에 三角山距北十五里 百濟稱負兒嶽 又云橫岳 又云山 이라 하여 삼각산을 負兒嶽 또는 橫岳 云山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7년(309)에 이곳에서 田獵을 하고, 11년(402)에 祈雨祭를 지낸 사례에서 미루어 볼 때 橫岳은 漢城시기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神聖之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9) 州 郡 : 州郡은 본래 중국의 지방통치조직의 명칭이다. 郡은 중국의 秦나라 始皇이 천하를 통일 한 후 郡縣制를 실시하면서 시행되었고, 州制는 중국 漢나라 武帝가 元鳳 5년(B.C.106)에 전국 을 13州로 나누고 刺史를 파견하여 감찰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지방통치조직 명칭은 漢城 및 熊津도읍기에는 魯制이고, 泗 도읍기에는 方-郡-城(縣)制였다. 한편 신라는 통일 이전에는 주-군-성(촌)제였는데, 통일 이후 전국을 주-군-현으로 편제하였다. 이에서 미 루어 볼 때 본 기사의 州 郡은 통일신라가 백제지역을 州-郡-縣制로 재편성한 이후의 사실이 소급 부회된 것으로 보인다. 110) 처음으로 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 : 백제는 1세기 무렵부터 진벌인 澤 에 稻田 을 개발한 것

24 46 7년(A.D.34) 봄 2월에 우보 解婁가 죽으니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屹于를 우보로 삼 았다 월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11년(A.D.38) 가을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사사로이 술 빚는 것을 금하였다. 여름 4월에 동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111) 겨울 10월에 동부 서부의 두 部를 순행하며 위무하였는데, 가난하여 제 힘으로 살아갈 가을 9월에 말갈이 馬首城 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2섬을 주었다. 겨울 10월에 또 甁山柵112)을 습격하였다. 21년(A.D.48) 봄 2월에 궁중의 큰 홰나무(槐樹)115)가 저절로 말랐다. 10년(A.D.37) 겨울 10월에 우보 흘우를 左輔113)로 삼고, 북부의 眞會114)를 右輔로 삼았다. 3월에 左輔 屹于가 죽으니 왕이 슬퍼 곡하였다. 28년(A.D.55)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죄수를 살펴 사형할 죄(死罪)도 사면하였다.116)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稻田 이란 수전 즉 논을 가르키는 것이며, 진벌인 澤 은 자연적으로 물 이 고여 있는 소택지로서 배수가 잘 안되어 지하수위가 높고 유기물의 분해가 좋지 않은 자연 저 습지를 뜻한다. 물론 지역의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백제초기에는 자연 저습지 가 논의 개간 대상으로 적합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초기 소택지 주변의 수전경영 은 주로 沼 지류의 하천물이나 배후 습지의 지하수를 간단한 導水시설을 통해 급수하는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방축조는 산간계류를 이용하여 간단한 물길을 파서 계곡 안에 형성된 소규모 경작지에 급수를 하거나, 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池] 沼 저습지를 취수원으로 하 여 수로를 통해 급수하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양기석, 2005, 백제의 경제생활, 주류성, 179~180쪽 참조). 111) 馬首城 : 마수성은 마수산(주 106) 참조)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볼 때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漢州 堅城郡의 고구려 때 지명인 馬忽郡과 음이 비슷하고, 또한 포천 부근으로 비정되는 병산 책(주 50) 참조)이 이웃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경기도 抱川郡 郡內面에 비정할 수 있다. 마수성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주 49)와 111)을 참조할 것. 112) 甁山柵 : 병산책은 마수성과 이웃한 곳이므로 포천 부근으로 비정된다(酒井改藏, 1970, 三國史 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병산책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주 50)을 참조할 것. 113) 左輔 : 백제 초기 軍國政事를 관장한 최고위 직으로서 右輔와 더불어 左 右輔制를 구성하였다. 安鼎福은 이를 후대의 宰相과 같은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安鼎福, 東史綱目 圖下 官職沿革圖 참조). 원래 좌보와 우보직은 漢代의 三輔職에서 연유한 관직이었는데, 고구려의 좌 우보, 신라 의 大輔職에서도 나타나듯이 삼국 초기에 국무와 군사 업무를 관장하던 최고의 중앙관직으로서 여기에 임명된 인물들은 왕족이거나 또는 소국을 통치한 유력한 지방 세력가였음이 밝혀지고 있 다(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24~30쪽). 114) 眞會 : 백제 다루왕대의 인물로 우보의 직에 있었으며, 북부의 유력한 세력가였다. 眞氏는 본래 眞慕氏 眞牟氏 등으로 표기되는 複姓이었는데, 후일 眞氏로 단성화되었다. 진씨세력의 출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진씨세력이 한강유역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한때 한군현 낙랑에 거주했던 것 으로 추정된다(양기석, 2000, 백제 초기의 부, 한국고대사연구 17, 181~182쪽). 평양 정백 동 19호분에서 출토된 耳杯의`眞氏牢a라는 명문이 참고가 된다. 여기서 진씨는 제작자의 성씨 를 나타내는 것인데, 기술직에 종사한 것으로 보아 漢人과 구별되는 토착세력인 것으로 추정된 29년(A.D.56) 봄 2월에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117)을 쌓아 말갈에 대비케 하였다. 36년(A.D.63) 겨울 10월에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娘子谷城118)에 이르렀다. 곧 사신을 신 다. 진씨가 백제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다루왕대부터이다. 이후 진씨세 력은 고이왕의 왕권강화과정에서 활약하여 眞忠과 眞勿이 左將이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比流王대에는 眞義가 內臣佐平이 되었다. 近肖古王대에 와서 진씨 출신의 왕비를 맞이함으로써 이후 阿莘王대까지 眞氏가문은 왕비를 배출하여 한성시기 최고의 귀족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支王의 즉위과정에서 아신왕의 막내동생 禮를 지지하였다가 실패함으로써 태자 전지를 지지 한 解氏세력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115) 홰나무(槐樹) : 콩과에 속하는 闊葉喬木. 한국 각지 및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며, 꽃과 과실은 약용으로 사용하였다. 116)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죄수를 살펴 사형할 죄(死罪)도 사면하였다 : 죄수의 사면은 천재지변과 같은 이상 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소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졌다. 이 기사에서 이때 죽어 마땅한 죄수들도 사면해 준 것은 이해 봄과 여름에 한발이 심하였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117) 牛谷城 : 우곡성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23 다루왕 29년(A.D.56), 기루왕 32년(108), 권24 구수 왕 16년(229)에 나올 뿐 아니라 우두성 우산성 등 그와 유사한 지명이 본서에 자주 나오고 있 다. 우곡성은 말갈의 상시적인 백제 침입 루트상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 동북부 일대로 추정되나 현재의 구체적인 지명은 알 수 없다. 118) 娘子谷城 : 현재의 충북 청주시 일대. 이는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백제 熊川州條에 西原(一云 娘臂城 一云娘子谷) 이라 하고 있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충청도 淸州牧조에 本百濟上縣 (一云娘臂城 一云娘子谷) 이라 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娘臂城에 대해서는 淸原郡 北二面의 娘臂城으로 비정하는 견해(李元根, 1976, 百濟 娘臂城考, 사학지 10)가 있으나 성의 규모나 축조 시기가 맞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6 충청도 淸州條 에서 淸州本百濟上黨(三國史百濟地志云 娘子谷城 一云娘臂城者 皆誤也 娘子谷城 今忠州 娘臂 城 無所考) 라 하여 娘子谷城=淸州설을 부정하고, 娘子谷城=忠州라고 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는

25 48 49 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119) 켰다.123) 37년(A.D.64) 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의 蛙山城120)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 39년(A.D.66)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00명을 남겨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얼 121) 122) 를 옮겨 狗壤城 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일으켜 맞아 쳐서 이를 패주시 마 안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124) 43년(A.D.70)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125) 46년(A.D.73) 여름 5월 그믐 무오날에 일식이 있었다. 데, 진흥왕이 행차하여 우륵을 만난 곳인 낭성에 주목하여 이러한 견해가 나온 것이 아닐까 한 다. 여기서 당시 백제의 진출 방향이 낭자곡성(청주)-와산성(보은)-구양성(옥천) 등 중부 내륙지 방을 통해 소백산맥 방면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청주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19)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 동일한 기사가 본서 권1 신라 본기 脫解尼師今 7년(A.D.63)조에 나온다. 이 기사는 본서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접촉을 최초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중엽경의 신라가 청주지역까지 영역으로 하였을까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본서 신라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신라의 대외관계 기사를 경주세력 관계의 것 과 辰韓族의 것이 단일편년사 속에 정리된 것으로 보고 낭자곡성에서 백제와 접촉을 가진 것은 경주계 세력이 아니라 남하해 내려오는 辰韓族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三 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6 및 1976, 三韓의 國家形成 (상) 참조). 그런데 백제가 청주지역에 처음 진출한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조에 의하면 1세기 중반의 일로 기록되었으나 원삼국기의 유적인 송절동유적의 성격을 검토한 결과 백제가 중서부 지역에 진출하는 3세기 후엽의 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양기석, 2005, 한성백제의 청주지역 지배, 백제 지방세력의 존재양태, 한국학중앙연구원, 245쪽). 백제가 3세기 후엽 이후 청주 지역에 처음 진출하여 청주지역의 재지세력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어 이를 백제 세력권으로 흡수 한 이후 점차 그 영역으로 지배해 나간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봉명동유적과 신봉동유적이 다. 봉명동의 조영세력들은 마한의 전통적 요소를 유지한 채 쇠퇴한 마한국읍세력의 중심체인 目支國을 대신하여 점차 한성백제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중앙색이 농후한 새로운 문화단계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환두대도와 기승마구류의 등장은 봉명동유적 단계의 청동제 대 구와 동탁의 소멸을 뜻하는 것으로서 한성백제에 의한 기마문화 확산과정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봉명동유적의 조영세력이 4세기 이후 백제 중앙세력에 의해 점차 직간접적으로 포섭 내지는 복 속되어 가는 일종의 복속의례적 지배관계를 보여주는 일면으로 이해된다. 120) 蛙山城 : 현재의 충북 報恩 지방에 비정된다(천관우, 1976,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 45 47쪽).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 보은군청이 소재 한 곳을 三山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현재 충혼탑이 있는 남산이 마치 개구 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蛙山이라고 부르고 있다(보은군, 1981, 내고장 전통가꾸기, 125쪽). 121) 狗壤城 : 현재의 충북 槐山지방에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상), 45 47쪽)와 충북 沃川의 狗川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361쪽)가 있으나 보은과의 거리상 접근 성을 고려해 보면 옥천설이 타당하다. 122) 왕은 군사를 보내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 본 기사에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月이 나와 있 지 않으나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8년조에는 백제의 와산성 공격은 秋八月 로, 구양성 47년(A.D.74)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126) 48년(A.D.75) 겨울 10월에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27) 49년(A.D.76) 가을 9월에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128) 50년129)(A.D.77)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을 공격한 것은 冬十月 로 나온다. 이처럼 백제와 신라간에 벌어진 전투는 와산성이나 구양성 과 같은 특정한 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4세기 후반 이후의 전쟁 양상으로 이해된다. 이런 측면에서 기록 그대로 취신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교전 기사를 진한계의 석씨세력이 남하할 때 겪은 역사적 경험을 서술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천관우, 1976, 앞의 글(상), 32쪽), 또 진한제국의 한 세력이 백제와 충돌한 사실을 후에 신라사에 일괄 편입한 결과로 보는 견해(이종 욱, 1982,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10쪽) 등이 있다. 현재로서는 어떤 견해가 보다 타당 한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백제와 신라 두나라가 충북과 경북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면서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배반할 여지가 있는 복속 소국들의 이탈을 억제하면 서 영토확장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서의식, 1991, 신라 상고 초기의 진한제국과 영토확장, 이원순교수정년기념역사학논총, 교학사, 31~33쪽). 123)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일으켜 맞아 쳐서 이를 패주시켰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 해 이사금 8년(A.D.64)조에 보인다. 124)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얼마 안 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 본기 탈해 이사금 10년(A.D.66)조에 보인다. 125)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4년(A.D.70)조에 보 인다. 126)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8년(A.D.74)조에 보 이는데, 군사를 보내 막았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127)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9년 (A.D.75)조에 보인다. 128)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20년(A.D.76) 조에 보이는데, 이때 백제인으로서 와산성에 주둔하였던 200여 명이 모두 신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26 년(A.D.97) 여름 4월에 龍136) 두 마리가 한강에 나타났다. 권23 百濟本紀 1 己婁王 己婁王130)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 지 않았다. 다루왕이 재위 6년에 태자로 삼았고, 50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9년(A.D.85) 봄 정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131) 132) 133) 여름 4월 을사날에 客星 이 紫微星 134) 별자리로 들어갔다. 11년(A.D.87) 가을 8월 그믐 을미날에 일식이 있었다. 13년(A.D.89) 여름 6월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민가를 함몰시키니 죽은 사람이 많 았다. 14년(A.D.90) 봄 3월에 크게 가물어 보리를 거두지 못했다. 여름 6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6년(A.D.92) 여름 6월 초하루 무술날에 일식이 있었다. 135) 17년(A.D.93) 가을 8월에 橫岳 에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129) 다루왕 50년 ; 다루왕의 재위기간이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戊子立 理四十九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三國遺事 가 踰年稱元法을 따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 로 보인다. 130) 己婁王(A.D ) : 백제 제3대 왕. 다루왕의 맏아들로 다루왕 6년(A.D.33)에 태자가 되었 다가 다루왕이 재위 5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131)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파사니사금 8년(A.D.85)조 에 보인다. 132) 客星 : 하늘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손님별. 현대 천문학의 新星 超新星 變光星 등이 이에 해 당한다. 객성이라는 말은 史記 권27 天官書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그 모양 등에 관한 묘사는 없고 다만 國皇 昭明 賊 五殘 司危 獄漢 등 그 종류만 보인다. 이 객성에는 周伯 老子 王蓬絮 國皇 溫星의 다섯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 중 老子星이 출현하면 그 나라는 선이 악이 되고 喜가 怒로 변하는 조짐이 있으며, 周伯星이 보이면 그 나라는 크게 번창하고 蓬絮星이 나타 나면 5곡이 익지 않고 누리떼가 많이 일어나고 가뭄 등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133) 紫微星 : 북두칠성의 동북쪽에 벌려 있는 15개 별 가운데의 하나. 점성술에서 이 별은 천자의 주 성으로서 그의 운명과 관련된다고 한다. 晉書 권11 志 1 天文 上에 紫宮垣十五星 其西蕃七 東 蕃八 在北斗北 一曰紫微 大帝之坐也 天子之常居也 主命主度也 라 한 기사가 참조된다. 134) 客星이 자미성 별자리로 들어갔다 ; 객성이 자미로 들어갔다는 것은 미천한 자가 천자의 거소를 침입함을 말하는 것으로 왕권의 쇠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3년(A.D.99)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우박이 내렸다. 27년(103)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29년(105)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137) 31년(107)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32년(108)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7월에 말갈이 牛谷138)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35년(111) 봄 3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7년(113) 사신을 신라에 보내 禮訪하였다.139) 40년(116) 여름 4월에 황새140)가 도성의 문 위에 집을 지었다. 135) 橫岳 : 현재의 서울시 三角山에 비정된다. 김정호의 大東地志 漢城府 山水條에 의하면 삼각산 을 負兒嶽 橫岳 云山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7년(309)에 이곳에서 田獵을 하고, 11년(402)에 祈雨祭를 지낸 사례에서 미루어 볼 때 橫岳은 漢城시기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神聖之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 108)을 참조할 것. 136) 龍 : 상상적 동물의 하나. 胴部는 뱀과 비슷하며 비늘이 있고 네 개의 발을 가졌으며, 깊은 못이 나 바다에 잠재하고 때로는 자유로 공중을 날아 구름과 비를 몰아 풍운 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유럽 인도 중국 등을 비롯하여 신비적 민속적인 신앙 숭배의 대상이 되고, 불교에서는 四天王 의 하나로, 중국에서는 기린 봉황 거북과 함께 상서로운 四靈으로 불리워졌다. 본서에서 龍은 왕권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왕권의 변화나 왕의 안위와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137)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 본 기사에는 사신을 보낸 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동 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婆娑尼師今 26년(105) 春正月條에 기록되어 있다. 138) 牛谷 : 우곡성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23 다루왕 29년(A.D.56), 기루왕 32년(108), 권24 구수왕 16년(229)에 나올 뿐 아니라 우두성 우산성 등 그와 유사한 지명이 본서에 자주 나오고 있다. 우곡(성)은 말갈의 상시적인 백제 침입 루트상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 동북부 일대로 추정되나 현 재의 구체적인 지명은 알 수 없다. 139) 사신을 신라에 보내 禮訪하였다 : 본 기사에는 사신을 보낸 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권 1 신라본기 祇摩尼師今 2년(113) 3월조에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140) 황새( ) : 白鷺科에 속하는 大白鷺 白鷺 中白鷺의 총칭. 몸빛은 백색, 눈의 주위는 황백색, 긴 부리와 다리는 흑색이다. 해오라기 鷺 白鳥라고도 한다.

27 52 6월에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 한강의 물이 넘쳐서 민가를 떠내려가거나 허물어졌다. 10년(137) 가을 8월 경자날에 熒惑星146)이 南斗147) 별자리를 침범하였다. 가을 7월에 담당 관리(有司)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농토를 보수하게 하였다.141) 38년(165) 봄 정월 그믐 병신날에 일식이 있었다. 49년(125)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글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왕이 겨울 10월에 신라의 阿 148) 53 吉宣149)이 반란을 꾀하다가 일이 탄로나자 도망해 왔다. 신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142) 라 왕(아달라 이사금)이 글을 보내 그를 [돌려 보내주기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 52년(128)143)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라 왕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여러 성이 성벽을 굳게 하여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니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150) <史論> 편찬자는 논하여 말한다. 춘추시대151)에 거북( 僕)152)이 魯나라153)로 도망해 오자, 季 권23 百濟本紀 1 蓋婁王 蓋婁王144)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성품이 공순하고 행실이 단정하였다. 기루가 재위 52 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4년(131) 여름 4월에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5년(132) 봄 2월에 北漢山城145)을 쌓았다 141) 담당 관리(有司)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농토를 보수하게 하였다 : 이 기사는 수해를 입은 낮은 지대에 위치한 논을 보수하도록 한 조치인데, 왕도나 그에 가까운 하천에 침수된 농토를 대상으 로 한 것 같다. 이처럼 백제초기에 수전농업과 관련한 기사는 본서 권23 다루왕 6년, 본서 권24 구수왕 9년과 고이왕 9년에 각각 나오고 있다. 142)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 : 본 기사에는 백제가 사신을 보 낸 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권1 신라본기 祗摩尼師今 14년(125) 추7월조에 동일한 내 용이 보인다. 143) 기루왕 52년 :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丁丑立 理五十五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3년의 차 이가 있다. 이는 두 사서의 원전인 고기류의 기년상 착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44) 蓋婁王( ) : 백제 제4대 왕으로 기루왕의 아들이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蓋鹵王 즉위년 조에 개로왕을 或云近蓋婁 라고 하였는데, 近蓋婁 는 蓋婁 앞에 近 字를 붙인 것이다. 이 는 개로왕과 개루왕과의 친연관계를 표방하여 왕족들을 요직에 중용하는 것과 더불어 왕족들 간 에 계보를 초월한 결속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근초고왕이 초고왕의 후계자임을 천명하여 肖古 系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과 대비된다. 이처럼 개로왕이 蓋婁王의 후계자로 자처한 것은 왕위 계 승에서 초고계와 같은 방계 세력을 포용한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정재윤, 1999, 웅진시대 백제 정치사의 전개와 그 특성,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7쪽). 145) 北漢山城 : 현재의 경기도 高陽市에 위치하는데, 도성 慰禮城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그 러나 이 기사대로 백제가 과연 2세기 전반에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는지는 의문이다.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3 경기도 楊州 古城條에서 百濟蓋婁王 五年 築北漢山者非是 此城始於百濟 時 而非百濟之都城 이라 하여 개루왕 5년의 북한산성 축조설을 부정하고 있다. 比流王 24년 (327)에는 내신좌평 優福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46) 熒惑星 : 火星의 다른 이름으로 災禍 兵亂의 조짐을 나타내는 별이다. 漢書 권26 天文志 제6 에 熒惑曰南方夏火 禮也 禮虧視失 逆夏令 傷火氣 罰見刑獄 熒惑爲亂爲敗 爲疾爲喪 爲飢爲 病 所居之宿國受殃 一曰 熒惑出則有大兵 入則兵散 周還止息 乃爲其死喪 熒惑 天子理 也 故曰 雖有明天子 必視熒惑所在 라 한 기사를 참조된다. 이에 의하면 형옥성은 남방에 있으며 여름을 맡고 불의 정기를 나타낸다. 五常 중 禮에 해당하고 서경 의 洪範五事 중 視에 해당된 다. 예가 없고 視의 왕도가 적중치 못하면 여름의 政令을 거슬러 불의 정기를 손상케 하면서 그 벌이 형혹에 의해 나타난다고 한다. 147) 南斗 : 28宿의 8번째의 별. 小暑節의 中星으로서 남방에 있으며 모두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모양이 斗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자의 수명과 宰相의 爵祿을 주관한다고 한다. 史 記 권27 天官書 제5에 南斗爲廟 其北建星(正義 南斗六星 在南) 이라 한 기사가 참조된다. 148) 阿 : 신라 17관등 중 제6관등. 重阿 에서 4重阿 으로 분화되었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는 6 두품 출신자가 오를 수 있는 상한선의 관등이다. 149) 吉宣 ; 신라 阿達羅尼師今代의 인물로 아찬의 관등을 가졌다.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하였다. 본서 권2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12년조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150) 신라의 阿 吉宣이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12년(165)조에 보이나 본 기사의 연대인 개루왕 28년(155)과는 10년의 차이가 난 다. 그러나 두 기사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151) 춘추시대 : 중국의 周나라 平王이 B.C.700년에 東遷해서부터 晉의 大夫 韓 魏 趙가 독립하기 까지(B.C.403)의 360년간의 시대. 공자가 찬술한 春秋 는 魯의 隱公 원년부터 哀公 14년에 이 르기까지 242년의 역사가 대략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春秋 의 책명을 따서 시대명으로 하였다. 이 시대에는 周나라가 더욱 쇠약하여 그 위력을 잃고 제후는 서로 병탄을 일삼아 전쟁이 끊이지 않은 약육강식의 세태를 이루었다.

28 54 文子154)가 말하였다.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있는 자를 보면 마치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처럼 섬기고, 자기 임금에게 무례한 자를 보면 마치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과 같이 죽이라 하였습니 다. 거복을 보니 착한 데다 뜻을 두지 않고 흉한 짓(凶德)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를 쫓아버린 것입니다. 지금 길선도 간악한 역적인데 백제 왕이 받아들여 숨겨주니 이는 역적을 비호하고 숨 기는 것 이라고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와의 화호를 잃고 백성들을 전쟁에 시달 리게 하였으니 매우 밝지 못하였다. 39년155)(166) 왕이 죽었다. 55 권23 百濟本紀 1 肖古王156) <*또는 素古라고도 하였다.> 蓋婁王의 아들이다. 개루가 재위 3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167) 가을 7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 리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에 신라 왕이 一吉 157) 興宣을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의 여러 성으 로 쳐들어왔다. 신라 왕도 또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이끌고 뒤따랐는데, 순식간에 한 수까지 이르렀다.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앞서 빼앗 았던 것을 돌려주었다.158) 5년(170) 봄 3월 그믐 병인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159) 21년(186) 겨울 10월에 구름은 없이 우뢰만 쳤고, 살별(혜성)160)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152) 거북( 僕) : 춘추시대 國 紀公의 태자인 僕을 말한다. 國은 周나라 武王이 玆輿期를 에 封함으로 성립되었는데, 지금의 중국 山東省 縣에 있었다. 紀公은 태자 僕과 季 를 낳았는데, 계타를 사랑하여 僕을 내쫓고 무례를 많이 행하였다. 이에 僕은 國人의 힘을 빌려 기공을 죽이고 그 財寶를 가지고 도망해 와서 魯나라 宣公에게 바쳤다. 이에 대해서는 춘추좌씨전 文公 18년 에 紀公子生太子僕 又生季 愛季 而黜僕 且多行無禮於國 僕因國人 以弑紀公 以其寶玉 來 奔 納諸宣公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153) 魯나라 : 중국 춘추시대의 列國의 하나. 지금의 山東省 袞州府 曲阜縣에 있었다. 國祖는 周나라 武王의 아우인 周公旦이다. 旦은 무왕을 도운 공으로 曲阜에 봉함을 받았고, 成王은 그의 아들 伯禽을 魯에 봉하였다. 頃公(B.C.249) 때에 초나라의 考烈王에게 망하였다. 詩經 魯頌 之什 魯頌譜 箋에 周公歸政 成王封其元子伯禽於魯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154) 季文子 : 춘추시대 魯나라의 대부인 季孫行父를 말한다. 시호는 文이다. 文公 초에 卿이 되었고, 宣公 魏公 讓公의 相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文公 6년 12년 및 成公 16년 참조). 계문자가 한 말은 春秋左氏傳 문공 18년에 公問其故 季文子使大史克對曰 先大夫臧文仲敎行父事君之禮 行 父奉以周旋 不敢失墜 曰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 之逐 鳥雀也 行父還觀 僕 莫可則也 孝敬忠信爲吉德 盜賊藏姦爲凶德 夫 僕 則其孝敬則弑其君 父矣 則其忠信則竊寶玉矣 其人則盜賊也 其器則姦兆也 保而利之則主藏也 以訓則昏民無則焉 不 度於善而皆在於凶德 是以去之 로 나온다. 한편 역적을 비호하여 숨기는 것[掩賊爲藏] 이라는 말도 春秋左氏傳 文公 18년의 季文子가 한 말인 其先君周公 作誓命曰 毁則爲賊 掩賊爲 藏 竊賄爲盜 盜器爲姦 主藏之名 賴姦之用 爲大凶德 有常無赦 在九刑不忘 에 나온다. 155) 개루왕 39년 :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戊辰立 理三十八年 이라 하여 본 기사보다 1년이 적 다. 三國遺事 는 踰年稱元法을 따랐으므로 실제로는 2년의 차이가 있게 된 셈이다. 이 2년의 차이는 기루왕의 재위년수가 三國遺事 에서는 2년 길게 나온 것과 연관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156) 肖古王( ) : 백제 제5대 왕으로 개루왕의 아들이며 素古라고도 한다. 제13대 近肖古王 이 이름 肖古 앞에 近 字를 붙여 왕명을 삼은 것처럼 초고왕의 후계자임을 천명하여 肖古系의 정통성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9년와 55년조에 나오는 肖古王은 근초고왕 을 가리킨다. 157) 一吉 : 신라 17관등 중 제7관등. 골품제와 연계시켜 볼 때 眞骨이나 6頭品 출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다. 158)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돌려주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14년(167)조에 보이는데 乞和 가 첨가되어 있다. 159) 군사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17년 (170)조에 보인다. 160) 彗星 :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해를 초점으로 하여 가늘고 긴 타원이나 포물선 또는 포물선에 가 까운 쌍곡선의 궤도를 운행하는 천체. 尾星 살별 長星 流星 彗悖라고도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其失次舍以下 進而東北 三月生彗星[正義曰 天彗者 一名 星 本類星 末類彗 小者數寸長 長或竟天 而體無光 假日之光 故夕見則東指 晨見則西指 若日南北 皆隨日光而指 光芒 所及爲災變 見則兵起 陰舊布新 彗所指之處弱也] 長二丈 類彗 退而西北 이라 한 기사가 참조된 다. 혜성은 삼국시대에 있어서 어느 星變 기사보다도 많을 정도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혜 성에 관한 기사를 중국 정사 기록과 비교해 보면 총 30회 기사 중 12회가 중국 사서에서 발견되 지 않는 독자의 기록으로 나타난다. 이는 삼국의 독자적인 관측의 결과로 생각된다. 한대의 동중 서와 유향에 의하면 혜성은 혼란하고 밝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라고 하였다.

29 일 만에 없어졌다. 거짓 퇴각하자 구도가 蛙山까지 추격하여 오므로 우리 군사가 되돌아 쳐서 크게 이겼 22년(187) 여름 5월에 왕도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라버렸다. 다.167) 23년(188)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군사를 내어 신라의 母山城161)을 공격하 26년(191) 가을 9월에 치우기(蚩尤旗)168)가 角169)과 亢170) 별자리에 나타났다. 였다.162) 34년(199)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171) 24년(189) 여름 4월 초하루 병오날에 일식이 있었다. 39년(204) 가을 7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腰車城172)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주 薛夫 가을 7월에 우리 군사가 신라와 狗壤163)에서 싸워 패배하였는데, 죽은 자가 500여 명이 었다.164) 25년(190) 가을 8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서쪽 국경의 圓山鄕165)을 습격하고 나아가 缶 를 죽였다. 신라 왕 奈解173)가 노하여 伊伐 174) 利音175)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의 沙峴城176)을 공격하였다.177) 겨울 10월에 살별(혜성) 東井星178) 별자리에 나타났다. 谷城166)을 포위하였다. 신라 장군 仇道가 기마병 500명을 거느리고 막았다. 우리 군사가 161) 母山城 : 모산성의 위치에 대해서 ①충북 진천군 대모산성설(이병도, 1977, 앞의 책, 25쪽), ② 경북 의성 방면설(천관우, 1989, 앞의 책, 302쪽), ③전북 남원시 운봉설(본서 권27 백제본기 武 王 3년조의 阿莫山城)이 있는데, 당시 백제와 신라간에 전투를 벌인 곳이 와산성(보은)에서 웅곡 (선산) 사이에서 벌어진 점을 고려해 보면 위의 지명은 해당하지 않는다. 현재의 지명은 알 수 없 다. 162)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 동일한 사건이 본서 권2 신라본기 伐休尼師今 5년(188)조에 보이 는데, 命波珍 仇道 出兵拒之 라는 기사가 첨가되어 있다. 163) 狗壤 : 현재의 충북 槐山지방에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상), 45 47쪽)와 충북 沃 川의 狗川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361쪽)가 있으나, 보은과의 거리상 접근성 을 고려해 보면 옥천설이 타당하다. 구양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주 121)을 참조할 것. 164) 신라와 狗壤에서 싸워 죽은 자가 500여 명이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伐休 尼師今 6년(189)조에 나온다. 그러나 三國史節要 에는 이 내용이 초고왕 23년조에 실려 있다. 165) 圓山鄕 : 원산성의 위치를 온조왕 27년(A.D.7)조에 보이는 圓山城 과는 다른 곳으로 보고 경북 醴泉郡 龍宮面에 비정할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龍宮縣 建置沿革). 그밖에 원 산향(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전라도 珍山縣 古蹟조에 나오는 猿山 鄕(在縣東三十里) 기사에 의거하여 충남 진산으로 보려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28 쪽), ②圓山을 完山의 異寫로 보아 지금의 전북 全州市에 비정하는 견해(全榮來, 1975, 完山과 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창간호), ③충남 금산 마전리설(1991, 조선전사 3 중세편, 과학백 과사전종합출판사, 157쪽) 등이 있다. 166) 缶谷城 : 부곡성은 본서 권37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경북 軍威郡 缶溪面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4쪽). 군위군 義興의 영현으로 缶溪縣이 보이고 있다. 167) 신라의 서쪽 국경의 圓山鄕을 습격하고 크게 이겼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伐休尼師今 7년(190)조에 보이는데, 馬兵이 勁騎로 나온다. 168) 치우기(蚩尤旗) ; 치우기는 혜성을 닮아 꼬리의 뒷부분이 굽었고 깃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별이 나타나면 王者가 사방을 정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蚩尤之旗 (晉灼曰 呂氏春秋云 其色黃上白下也) 類彗而後曲 象旗 見則王者征伐四方 이라 한 기사가 참고된다. 169) 角 : 28宿의 하나. 동방에 있는 靑龍의 首星. 刑과 兵을 주관하였다. 晉書 권11 지 1 천문 상에 東方 角二星爲天關 其間天門也 其內天庭也 左角爲天田 爲理 主刑 右角爲將 主兵 이 라 한 기사가 참조된다. 170) 亢 : 28宿의 하나. 동방에 위치하며, 奏事와 獄訟을 맡았다. 晉書 권11 지 1 천문 상에 亢四星 天子之內朝也 總攝天下奏事 聽訟理獄錄功者也 라 한 기사가 참고된다. 171)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奈解尼師今 4년(199)조에 보인다. 172) 腰車城 : 본서 권37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를 尙州의 舊 要濟院으로 비 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173) 奈解 : 신라 제10대 왕으로 재위년수는 이다. 174) 伊伐 : 신라 17관등 중 제1관등. 角干 또는 一伐干이라고도 한다. 175) 利音 : 신라 奈解尼師今代의 장군. 태자 于老와 함께 浦上八國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삼국유사 권5 避隱篇 勿稽子條에는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王命太子捺音將軍一伐等 率兵拒之 라 하여 捺音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176) 沙峴城 : 현재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동여지도 에 나오는 사현에 의거하여 춘 천과 홍천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177) 奈解가 노하여 沙峴城을 공격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奈解尼師今 19년 (214)조에는 사현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다르다. 그런데 나해 이사금 19년 은 214년으로 백제의 초고왕 39년(204)보다 10년의 차이가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단정하기 어렵다.

30 58 40년(205) 가을 7월에 금성(太白星)179)이 달을 범하였다. 43년(208) 가을에 누리(蝗)180)가 생기고 날이 가물어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였으며, 도적 이 많이 일어나자 왕은 그들을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59 겨울 10월에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46년(211) 가을 8월에 나라 남쪽에서 메뚜기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44년(209) 겨울 10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47년(212) 여름 6월 그믐 경인날에 일식이 있었다. 45년(210) 봄 2월에 赤峴城181)과 沙道城182)의 두 성을 쌓고 東部의 민호들을 옮겼다. 48년(213) 가을 7월에 서부인 茴會183)가 흰 사슴을 포획하여 바치니 왕이 상서롭다고 하 여 곡식 100섬을 주었다. 49년184)(214) 가을 9월에 북부의 眞果에게 명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185) 178) 東井 : 28宿의 하나로서 남방에 있었는데 井宿라고도 한다. 水事를 주관하였다. 28宿은 옛날 천 문학에서 하늘을 四宮(四神을 말한다)으로 나누고 각 宮마다 일곱 星宿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남방에 속한 星宿으로는 井 鬼 柳 星 張 翼 軫이 있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東井 爲水事[索隱 元命包云 東井八星 主水衡也] 其西曲星曰鉞 鉞北北河 南南河 火守南北河 兵起 穀不登 故德成衡 觀成潢 傷成鉞 禍成井[集解 晉灼曰 東井主水事 火入一星居其傍 天子且以火敗 故曰禍也] 로 나온다. 179) 금성(太白星) : 태백성은 金星의 다른 이름으로 長庚星이라고도 한다. 사기 권27 천관서 제5 에 察日行以處位[索隱 案 太白晨出東方曰啓明 故察日行以處太白之位也] 太白[索隱 韓詩云 太白 晨出東方爲啓明 昏見西方爲長庚 正義 晉灼云 常以正月甲寅與熒惑 晨出東方 二百四十日而 入 入四十日 又出西方 二百四十日入 入三十五日 而復出東方] 曰西方 秋 日庚 辛 主殺 殺失者 罰 出太白 으로 나온다. 한편 漢書 권26 天文志 제6에는 太白曰西方 秋金 義也 言也 義虧 言失 逆秋令 傷金氣 罰見太白 太白 兵象也 出而高 用兵深吉淺凶 淺吉深凶 行疾 用兵疾吉遲 凶 行遲 用兵遲吉疾凶 이라고 한 기사가 참고된다. 금성이 달을 범했다는 현상은 사기 권27 천관서 제5에 의하면 장군이 誅殺된다고 하여 장군이나 군주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조짐으 로 보고 있다. 180) 누리(蝗) : 飛蝗이라고도 한다.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풀무치와 비슷한 데, 몸길이는 가량이다. 무리지어 하늘을 날아 이동할 때 해가 가리어지고, 그 떼가 앉는 곳에서는 순식 간에 땅 위의 풀이 하나도 없게 된다고 한다. 백제에서 누리의 피해를 본 기사는 초고왕 43년 추, 동 46년 8월, 비류왕 18년 7월, 무령왕 21년 8월 등에 보인다. 누리의 피해는 당시 곡식을 손상케 하여 백성들을 기아로 몰아넣는 심각한 재해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백성들에게 선정 을 베풂으로써 누리 피해를 퇴치하려고 하였다. 181) 赤峴城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인데,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충북 沃川 永春, 충남 韓山 唐津, 경북 開寧 등지에 赤峴의 지명이 보이지만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말갈의 백제 공격로상에 위치하고, 또 구수왕 4년(217) 에 사도성 근처의 목책에 적현성의 군졸을 배치한 것으로 보면 현재의 연천 삭녕읍에서 그리 멀 지 않은 곳으로 추정된다. 182) 沙道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음운상으로 볼 때 신라 漢 州 兎山郡 朔邑縣의 옛 지명인 所邑豆縣 또는 石頭城과 같은 곳으로 비정되는데, 이곳은 현재의 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述川186)까지 이르렀다. 왕이 죽었다. 권24 百濟本紀 2 仇首王187) <*貴須라고도 부른다.> 초고왕의 맏아들이다.188) 키가 7자(尺)이며 위엄과 거동이 빼어 났다. 초고가 재위 49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3년(216)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赤峴城189)을 포위하였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 경기도 漣川郡 朔寧邑에 해당된다. 183) 茴會 : 백제 초고왕대의 인물로서 西部의 유력한 세력가였다. 그가 사슴을 포획하여 바쳤다는 것 은 그의 세력이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茴氏는 苗 수서 권80 ( 열전 45 백제) 또는 통전 ( )로 읽혀져 백제 사비도읍기의 大姓八族의 하나인 氏로 판단된다. 184) 초고왕 49년 :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丙午立 理五十年 이라 하여 1년의 차이가 있다. 185) 石門城 : 석문성은 백제의 접경지역 너머에 있는 말갈 지역인데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곳 을 남양 석문리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酒井改藏, 앞의 책),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186) 述川 : 현재의 경기도 驪州郡 興川面 일대로(이병도, 1981, 앞의 책, 359쪽 ; 천관우, 1976, 앞 의 책(하) 120쪽) 고려시대에 川寧이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 4 漢州 川郡條에 川郡 本高句麗述 川郡 으로 나온다. 말갈이 백제를 공격해 오는 루트상에 있다. 주 94)를 참조할 것. 187) 仇首王 : 백제 제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214~234년이다. 초고왕의 맏아들로 貴須라고도 한다. 제14대 왕인 近仇首王이 이름 仇首 앞에 近 字를 붙여 왕명을 삼은 것처럼 구수왕의 후계자임 을 천명하여 仇首系의 정통성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6년과 56년조 및 같은 책 권19 흠명기 2년조에 나오는 貴須는 모두 근구수왕을 가리킨다. 188) 초고왕의 맏아들이다 :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肖古王之子 로만 나온다.

31 60 61 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추격하였는데, 沙道城190) 아래에서 싸워 萱195)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熊谷196)에서 맞아 싸웠으나 크게 지는 바람에 한 필의 말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을 타고 혼자 도망하였다.197) 4년(217) 봄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 11월 그믐 경신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1년(224) 가을 7월에 신라의 일길찬198) 連珍199)이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烽山200) 아래 5년(218)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獐山城191)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 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201) 고 공격하니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192) 7년(220) 겨울 10월에 왕성 서문에 불이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물리쳤다. 8년(221)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산 40여 곳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가을 8월에 漢水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년(222) 봄 2월에 담당 관리(有司)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193) 3월에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에 왕도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牛頭鎭194)에 들어가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忠 189) 赤峴城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말갈의 백제 공격로상에 위치하고 또 구수왕 4년(217)에 사도 성 근처의 목책에 적현성의 군졸을 배치한 것으로 보면 현재의 연천 삭녕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추정된다. 190) 沙道城 :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옛 지명인 所邑豆縣 또는 石頭城과 같은 곳으로 비정되어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邑에 해당된다. 본서 권23 주 182)를 참조할 것. 191) 獐山城 : 현재의 구체적인 지명은 알 수 없다. 다만 장산성은 본서 권34 지리 1 良州 獐山郡條에 獐山郡 祇味王時 伐取押梁(一作督)置郡 景德王改名 今章山郡 이라 한 기사에 의거하여 경북 慶 山市에 비정되나, 이 시기에 백제가 경산지방까지 공격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는 입장에서 위치미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6쪽). 192) 왕이 군사를 보내 아군이 패배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奈解尼師今 23년 (218) 추7월조에 보이는데 본 기사에는 秋七月 이 빠져 있다. 193) 담당 관리(有司)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 이처럼 백제초기에 수전농업과 관련한 기사는 본서 권23 다루왕 6년, 본서 권24 구수왕 9년과 고이왕 9년에 각각 나오고 있다. 제방 축조를 통해 논의 개간이나 수리기사와 함께 점차 그 기반시설로서 수리관개 시설이 갖추어져 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 牛頭鎭 : 이와 같은 지명으로 牛頭州 (본서 권2 신라본기 奈解尼師今 27년(222)), 牛頭山 新 ( 增東國輿地勝覽 권46 강원도 春川都護府 山川條에 의하면 춘천에서 북쪽으로 13리 지점에 있 음)이 있어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에 비정된다. 그러나 3세기 초 신라의 경역이 춘천에까지 미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에서 예천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牛頭院(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醴泉郡 驛院)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7쪽). 백제 초기 다루왕과 초고 왕대에 백제와 신라가 와산성(보은)에서 부곡(군위 부계)에까지 이르는 교통로를 따라 전투를 벌 인 점을 감안하면 예천 우두원이 보다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기사도 진한제국의 한 세력이 백제와 충돌한 사실을 후에 신라사에 일괄 편입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에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鎭은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조직이다. 그런데 3세기 초인 이 시기에 鎭 이 설치되었다는 것 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95) 忠萱 : 신라 奈解尼師今代의 장군으로 관등은 이벌찬이었는데, 군사업무를 관장하였다. 196) 熊谷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오고 있는데, 현재의 경북 구미시 善 山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7쪽). 한편 본서 권32 잡지 祭祀志에는 신라 4鎭 중의 하나인 北鎭이 熊谷岳이 나오는데, 이곳은 比烈忽郡(현재의 강원도 安邊郡 安邊邑)에 비정되어 본 기사의 熊谷과는 다른 곳으로 볼 수 있다. 197) 신라 장수 忠萱이 혼자 도망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奈解尼師今 27년 (222)조에 보인다. 198) 一吉 : 신라 17관등 중 제7관등. 골품제와 관련시켜 볼 때 眞骨이나 6頭品 출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다. 199) 連珍 : 신라 奈解尼師今代의 장군. 忠萱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鎭主로 좌천되자, 그 뒤 를 이어 伊伐 에 임명되어 군사업무를 관장하였다. 200) 烽山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榮川郡 山川條에 郡 동쪽 15리에 있다는 烽山(현재의 榮州市 伊山面 石浦里 新岩里 일대)에서 미루어 보아 현재의 경북 榮州市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8쪽). 당시 백제와 신라가 와산성(보은)에서 熊谷(선산)에 이르기까지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그 사이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 201) 우리 군사가 이기지 못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奈解尼師今 29년(224)조 에 보이는데, 여기에는 殺獲一千餘級 이 첨가되어 있다.

32 62 겨울 10월에 금성(太白星)202)이 낮에 나타났다. 63 권24 百濟本紀 2 沙伴王205) 14년(227)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자 왕이 東明廟에 가서 빌었더니 곧 비가 내렸다. 16년(229) 겨울 10월에 왕이 寒泉203)에서 사냥하였다. 11월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말갈이 牛谷204)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 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게 하였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 권24 百濟本紀 2 古爾王 고이왕206)은 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다.207)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죽자, 맏아들 沙伴208)이 가 크게 패하였다. 18년(231)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栗)만 해서 참새같이 작은 새들(鳥雀) 이 맞으면 죽었다. 21년(234) 왕이 죽었다. 202) 금성(太白星) : 태백성은 金星의 다른 이름으로 長庚星이라고도 한다. 금성이 달을 범했다는 현 상은 사기 권27 천관서 5에 의하면 장군이 誅殺된다고 하여 장군이나 군주의 죽음으로 연결 되는 조짐이다. 본서 권23 주 179)를 참조할 것. 금성은 태양계의 제2行星으로 궤도경사 이다.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는 최소 , 평균 , 최대 평균궤도 속도는 지구와의 會合周期는 583.9일. 금성은 태양과 달을 제외하면 하 늘 전체에서 가장 밝은 天體이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농업에 필요한 달력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 에 豊穰의 신 이슈타르의 이름을 붙여 숭상하였고, 그리스에서는 美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신 화에는 비너스)로 모셔졌다. 중국에서는 그 빛이 白銀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太白이라고 불 렀다. 지구보다 태양에 가깝고, 태양에서 48 이상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밤중에는 보이지 않고 일몰 후의 서쪽 하늘, 또는 일출 전 동쪽 하늘에 보일 뿐이다. 저녁하늘에 보일 때에는 태 백성, 새벽하늘에 보일 때에는 샛별 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저녁하늘에 보일 때에는 헤스페로스, 새벽하늘에 보일 때에는 헤오스포로스 라고 불렀고, 중국에서는 각각 長庚 啓明 이라 불렀다. G. 갈릴레이가 달과 같이 차고 이지러짐을 발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천문 학에서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으로 전환한 것은 유명하다. 203) 寒泉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오는데, 寒泉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이를 경기도 龍仁市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7쪽). 204) 牛谷 : 우곡성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23 다루왕 29년(A.D.56), 기루왕 32년(108), 권24 구수왕 16년(229)에 나올 뿐 아니라 우두성 우산성 등 그와 유사한 지명이 본서에 자주 나오고 있다. 우곡(성)은 말갈의 상시적인 백제 침입 루트상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 동북부 일대로 추정되나 현재의 구체적인 지명은 알 수 없다. 본서 권23 주 89)와 138)을 참조할 것. 205) 본서에는 사반왕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고이왕 즉위년에 구수왕의 맏아들로서 왕 위를 이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고왕의 동복아우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고 한다. 고이의 왕위계승은 어떤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이해 된다. 주 207) 208)을 참조할 것. 206) 古爾王( ) : 백제의 제8대 왕.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新撰姓氏錄 未定雜姓 河內國에 는 久爾君 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에 대해서는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시조 仇台 를 구이 로 읽어, 이를 고이 와 동일시하여 고이왕을 백제의 실질적인 建國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쪽). 또한 한군현과 싸운 韓의 臣智로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475쪽). 이와는 달리 고이왕은 優台-沸流系로서 優氏를 칭한 집단 이며 온조-초고계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천 관우, 1976, 앞의 글(하), 쪽). 그는 16佐平 16官等制로 집약되는 백제 관제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으며, 뇌물수수를 금지하는 禁錮法을 만들었고, 정사를 논의하는 政廳인 南堂을 설치 운영하였다. 그리고 稷山에 자리한 마한의 맹주국인 目支國을 병합하여 중부지역에서 백 제가 실질적인 영도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207) 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다 : 고이왕을 개루왕의 제2자이고 또한 초고왕의 동복아우(母弟)라고 할 때 그의 연령이 문제가 된다. 즉 고이가 비록 개루왕의 말년인 166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가 즉위한 해가 234년이어서 즉위할 당시의 그의 나이는 68세라는 고령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재위기간이 53년간이어서 사망할 당시의 나이는 적어도 121세가 된다. 이는 상식적으로는 받아 들이기 어렵다. 이후 고이왕계 왕통에 이어 초고왕계로 즉위한 비류왕도 110세 이상 생존한 것 으로 드러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연령 문제는 백제 왕실계보의 성립 및 구조 와 관련하여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金起燮, 1993, 한성시대 백제의 王系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83을 참조). 이처럼 백제 초기 왕의 재위년수 및 생몰년수, 그리고 왕실 계보 문제에 있어서 드러난 불합리한 점을 들어 초기기록에 대한 부정론 내지는 왕실교체론 등 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백제초기의 왕계에서 몇대가 부분적으로 누락되었을 가능성과 그리고 후일 왕실계보 정리과정에서 직계에 가급적 연결시켜 그들 가계의 정통성을 한층 내세우려는 의 도에서 부분적인 계보조작이 생겨날 수도 있다. 또한 왕실교체론은 초고왕계와 고이왕계 양계 의 교립 사실을 건국설화에 나오는 비류와 온조 간의 경쟁적인 설화에다 맞추어 연역적으로 해 석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어떤 분명한 사실에 입각하여 입론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백제 초기

33 64 65 왕위를 이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초고왕의 동복아우(母弟)209) 고이가 3년(236) 겨울 10월에 왕이 서해의 큰 섬211)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 왕위에 올랐다.210) 아 맞혔다. 5년(238) 봄 정월에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212) 2월에 釜山213)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왕계 기록에서 부분적인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하여 제기된 부정론이나 왕실교체 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그 기사 자체를 인정하고 문제점이 드러날 경우 그 기사가 갖는 한계와 역사적 의미를 찾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구수왕의 방계인 고이가 왕위에 즉위하게 된 것은 그의 장자 沙伴이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계의 단절을 막기 위해 비상조치의 일환으로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며 초고왕과는 동모제인 고이가 즉위한 것 으로 볼 수 있다. 고이왕은 당시 8촌 가계 범위 안에 속한 왕족이면서 연장자로서 善射力의 재 능과 현명한 자로 인정되어 비상의 방법으로 사반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닐까 한다 (양기석, 1989, 백제초기의 왕위계승과 왕권의 성격, 호서문화연구 8, 11~13쪽). 208) 沙伴王 : 백제 제7대 왕.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沙泮王 一作沙 로, 같은 책 권2 紀異 篇 南扶餘 前百濟條에는 沙沸王 沙伊王으로 표기되고 있다. 仇首王의 맏아들이다. 삼국유 사 권1 王曆篇에는 第七沙泮王 一作 沙 仇首之子 라고만 나온다.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다 고 하여 고이에 의해 폐위되었다. 209) 초고왕의 동복아우(母弟) : 본 기사의 肖古王母弟 와 삼국유사 권1 王曆篇의 古爾王 肖故之 母弟 에 나오는 母弟 는 본서나 삼국유사 에 나오는 그의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모두 同母弟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본서 권15 고구려본기 태조왕 94년조 細注에 高句麗國祖王高宮 遜 位讓母弟遂成 이라 한 기사와 次大王 즉위년조에 次大王 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라 한 기사 를 참조). 이와는 달리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 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은 초고왕과는 계통을 달리 하는 집단으로 보고 이를 優台-沸流系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그 러나 초기백제의 왕위계승 관계는 증조 8촌까지 가능했던 것을 미루어 보면 고이왕의 즉위를 초 고왕계와 다른 별개의 왕통으로 상정하는 것보다는 동일 왕계 중 일정 가계 범위에 있는 인물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10)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 고이왕의 즉위에 대해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南扶餘 前百濟조에는 又沙沸王(一作沙伊王) 仇首崩嗣位 而幼少不能政 卽廢而立古爾王 或云 至樂初二年己未 乃崩 古 爾方立 으로 나온다. 이 기사에서 樂初는 景初의 誤記이고, 2년은 3년(239)의 誤記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56, 譯註 三國遺事, 동국문화사, 270쪽). 이중 전반부의 기사는 본 기 사 및 삼국유사 권1 王曆篇의 仇首之子 立卽廢 이라고 한 기사와 동일하다. 그러나 或云 이하에 따른다면 사반왕은 6년간 재위하다가 고이에 의해 폐위된 것으로 된다. 앞의 주석 207) 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이의 재위연수와 수명이 지나치게 길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볼 때 후반부 의 기사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기록을 따르든지 간에 고이가 사반 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일치한다. 따라서 고이왕의 즉위를 둘러싸고 당시 백제 왕실에서 는 한 차례 왕위계승분쟁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여름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런 용(黃龍)이 그 문에서 나와 날아갔다.214) 6년(239) 봄 정월에 비가 오지 않다가 여름 5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7년(240)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215) 여름 4월에 眞忠을 左將216)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211) 서해의 큰 섬 : 왕도 위례성을 기준으로 볼 때 강화도에 비정된다. 212)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 중국에서 사용하는 고취는 軍樂을 연주하는 官이나 또는 군사와 관련 된 행사때에 연주하는 음악을 말한다. 管子 兵法에 鼓 所以任也 小異起也 所以進也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이때의 제천사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이왕은 사반왕 이 어려서 정치를 돌보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폐위시키고 왕위에 변칙적으로 올랐다. 따라서 고이왕은 왕위계승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천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 을 선포하는 의미에서 천지 합사의 제례를 성대하게 거행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213) 釜山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釜山은 본서 권35 지리 2 한주 唐恩郡 振威縣조에 振威縣 本高句麗釜山縣 景德王改名 이라고 하여 현재의 경기도 平澤市 振 威面에 비정된다. 한성도읍기에 백제 왕실에서 거행하는 주요 전렵지로는 부산(평택 진위) 이외 에 횡악(북한산) 서해대도(강화도) 狗原(경기도 양주 풍양)이 있었는데, 모두 왕도 근처에 위 치한다. 214)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런 용(黃龍)이 그 문에서 나와 날아갔다 : 용의 출현은 길과 흉 양 면으로 해석이 되는데, 후한 安帝 延光 3년(124) 歷城에 황룡이 출현한 일( 후한서 지 17 오행 5 永康 원년 8월)은 당시 안제가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데에 대한 흉사로 해석된다. 고이왕 대의 황룡 출현은 흉사로 이해되는데, 부산에서의 50일간에 걸친 장기적인 전렵 행사로 보듯이 어떤 대내적 갈등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짐작된다. 215)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 본서 권2 신라본기 助賁尼師今 11년(240)조에는 백제가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216) 左將 : 고이왕대에 설치한 관직으로 군대에 대한 지휘와 관련된 군령권을 관장하였다. 좌장은 최 고의 지휘권을 가진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좌장의 설치로 국왕의 위상이 강화되었고 또한 백제의 군사조직인 5부병에 대한 통솔권이 강화되었다. 종래의 군사권 은 유력귀족들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종신직의 성격을 띠는 左輔와 右輔가 맡았다. 그러나 고이 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권을 왕권 아래로 일원화하는 과정에서 좌장을 설치하였다. 고이왕은

34 66 가을 7월에 石川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는데, 기러기 한 쌍이 냇가에서 날아오르자 67 王遵223)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224)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 왕이 활을 쏘아 모두 맞혔다. 9년(242) 봄 2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쪽의 진펄(南澤)을 개간하여 벼논(稻田)으 로 만들게 하였다.217) 여름 4월에 숙부 質을 右輔로 삼았다. 質은 성품이 충직하고 굳세어 일을 꾀하면 실수 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왕이] 서문으로 나가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0년(243) 봄 정월에 큰 제단(大壇)을 설치하여 하늘과 땅, 산과 내에 제사를 지냈다. 13년(246) 여름에 크게 가물어 보리를 수확하지 못하였다. 가을 8월에 魏나라218)의 幽州刺史219) 관구검( 丘儉)220)이 樂浪太守 劉茂221)와 朔方太守222) 이 좌장에게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종래 좌보와 우보의 군사적 역할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점차 왕권하에 집중하여 나갔으며, 중국 군현의 세력에 대해서도 보다 적 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최초의 좌장은 眞忠이며, 그 뒤를 眞勿이 이었다. 이처럼 좌장 이 설치되면서 眞氏출신 인물들이 이 직을 맡은 것은 고이왕이 세력기반의 확대를 위해 진씨세 력과 연결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에 병관좌평이 설치되면서 외병마사를 관 장함에 따라 좌장의 직능도 분화되었다. 좌장은 군대의 운용과 직결되는 군령권을 담당하였고, 반면 병관좌평은 성의 축조때 감역의 임무를 수행하는 등 군사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백 제의 좌장에 대해서는 강종원, 1999, 백제 좌장의 정치적 성격, 백제연구 29, 27~46쪽 ; 이문기, 2007, 군사조직과 그 운용, 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99~303쪽을 참조할 것. 217)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쪽의 진펄(南澤)을 개간하여 벼논(稻田)으로 만들게 하였다 : 여기서 稻田 이란 수전 즉 논을 가르키는 것이며, 진벌인 澤 은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 있는 소택지로 서 배수가 잘 안되어 지하수위가 높고 유기물의 분해가 좋지 않은 자연 저습지를 뜻한다. 물론 지역의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백제초기에는 자연 저습지가 논의 개간 대상으로 적합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초기 소택지 주변의 수전경영은 주로 소 지류의 하천 물이나 배후 습지의 지하수를 간단한 도수(導水)시설을 통해 급수하는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그 리고 제방축조는 산간계류를 이용하여 간단한 물길을 파서 계곡 안에 형성된 소규모 경작지에 급수를 하거나, 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池 沼 저습지를 취수원으로 하여 수로를 통해 급 수하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양기석, 2005, 앞의 책, 179~180쪽). 본서 권23 주 110)을 참조 할 것. 218) 魏 : 중국 삼국시대에 曹操가 터를 닦고 그 아들 曹丕가 後漢의 獻帝의 양위를 받아 세운 나라로 존속기간은 년이다. 洛陽에 도읍하여 河北의 13州 97郡을 차지하고 蜀나라를 멸하여 河南의 吳와 더불어 천하를 兩分하였다. 그러나 齊王 芳 때에 重臣 司馬昭의 아들 司馬炎이 나라 를 빼앗아 晉을 세움으로써 멸망하였다. 219) 幽州刺史 : 유주를 관할한 장관. 중국 삼국시대 魏나라때 유주의 治所는 현재의 중국 河北省 대 흥현 서남이며, 晉나라때 유주의 치소는 河北省 縣이다. 유주에 대해서는 辭海 幽州 項 및 中國社會科學院 主辦 譚其 主編, 1991, 中國歷史地圖集 三國 西晉時期, 三聯書店 有限公 司, 香港, 13 14쪽을 참조할 것. 刺史는 漢의 武帝가 部刺史를 두고 郡國을 감찰하는 일을 관장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魏晉시대에는 요충지의 州에 두고 都督으로써 刺史를 兼領하게 하였 다. 그러나 행정장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식 위치 없이 관내를 이동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직위 가 군의 太守보다 낮았지만,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신분이 상승하여 한 주의 장관으로 서 군사 민정을 모두 관장하는 군벌을 이루었고, 삼국(魏 吳 蜀)으로 분열하게 되는 단서를 마련하였다. 漢 魏 晉代의 刺史에 대해서는 和田 淸, 1932,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및 쪽을 참조할 것. 남북조시대에는 주가 점차 세분화되어 자사의 권력이 약해졌는 데, 唐나라의 자사는 한 주의 장관이라고는 하지만 주의 면적이 아주 작아 평균 5縣을 관장할 뿐 이었다. 宋나라 때에는 주의 장관이 知州였고, 자사는 실직이 없는 무관의 직함으로 사용되었다. 220) 관구검( 丘儉) : 중국 三國시대 魏나라의 관료. 字는 仲恭. 河東 聞喜人. 아버지의 爵을 이어 平 原侯文學이 되었고, 明帝 때에 尙書郞 荊州刺史가 되었으며, 公孫淵을 토벌한 공로로 安邑侯 에 봉해졌다. 후일 司馬炎이 齊王을 廢하자 明帝의 顧命에 감읍을 받은 그는 군대를 일으켜 司 馬氏의 군사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관구검의 생애에 대해서는 三國志 권 28 魏書 丘儉傳 참조할 것. 221) 劉茂 : 중국 삼국시대 魏나라 사람. 正始 연간에 樂浪태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245년에 관구검 의 지휘를 받아 嶺東의 濊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또 247년에 辰韓 8國의 분할 문제로 馬 韓과의 사이에 충돌이 생겨 韓이 대방군 崎離營을 공격하자 帶方太守 弓遵과 더불어 韓을 공격 하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동이전 한전 참조). 222) 朔方太守 : 삼국지 30 魏書 東夷傳 韓傳에는 帶方으로 나온다. 중국에서 朔方郡은 漢나라 武 帝가 匈奴를 쫓아내고 河南 땅을 손에 넣은 후 설치한 郡으로서, 현재의 綏遠省 境內의 黃河 이 남의 爾多斯의 땅이다. 그러므로 본 기사의 朔方은 帶方으로 고쳐 보아야 한다. 帶方郡은 後漢 末 遼東지역에 웅거한 公孫氏세력이 현재의 황해도 지역에 설치하였으며, 그 治所는 沙里院에 비정된다(이병도, 1976, 帶方郡考,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참조). 223) 王遵 : 삼국지 권30 魏書 東夷傳 韓傳에는 弓遵으로 나온다. 따라서 왕준은 궁준의 誤記로 보아 야 할 것이다. 궁준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247년 辰韓 8國의 분할문제로 마한이 대방 군 崎離營을 공격하자 樂浪太守 劉茂와 함께 韓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韓에 의해 전사하였다. 224)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 : 유주자사 관구검은 242년에 고구려가 요동지 방을 공략하자 244년 고구려 정벌군의 장군이 되어 고구려 동천왕의 방어군을 무찌르고 국내성

35 68 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225)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주 민들을 돌려주었다.226) 69 14년(247) 봄 정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2월에 眞忠을 右輔로 삼고, 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 업무를 맡겼다. 15년(248)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 성들을 진휼하고 또 1년간의 조세(租)227)와 특산물세(調)228)를 면제해 주었다. 을 함락하였으나 동천왕이 피신함으로써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245년에 관구검은 玄 태수 王 를 보내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密友와 紐由의 분전으로 퇴각하였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과 고구려의 대응에 대해서는 본서 권17 동천왕 20년조 참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한 공을 기념한`魏 丘儉紀功碑a가 1906년에 만주 輯安縣 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본서 권 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조와 三國志 권28 魏書 丘儉傳 및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고 구려전에는 위군이 고구려를 칠 때 유무와 궁준의 활동상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무와 궁준 의 활동 기사는 삼국지 권30 동이전 예전에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穢 屬句驪 興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이라 한 기사와 대응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25) 좌장 眞忠을 보내 습격하여 빼앗았다 : 본 기사는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을 때 백 제의 고이왕이 그 틈을 타서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런데 이 사건은 삼국지 권30 魏書 東夷傳 韓傳과는 동일한 사건으로 보이면서도 그 내용이 약 간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삼국지 권30 韓傳에 의하면 위나라가 部從事 吳林으로 하여금 대방 군 관할하에 있는 진한 8국을 떼어 낙랑군에 배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던 중 吏譯의 잘 못으로 오해가 생기고 그것이 臣 沽國을 분격시켰으며 급기야 대방군 공격에 의한 한위 분쟁사 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방군 관할 진한 8국을 낙랑군에 이속하려는 의도가 무엇 이며, 또한 마한 북부에 위치한 臣 沽國이 격분하여 한군현과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지 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이때의 전쟁을 주도한 주체를 백제 古爾王으로 보는 견해(천관 우, 1976, 삼국지 한전의 재검토, 진단학보 41, 32~33쪽), 目支國으로 보는 견해가(노중국, 1987, 馬韓의 成立과 變遷, 馬韓 百濟文化 10, 36~38쪽), 그리고 臣 沽國으로 보는 견해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518쪽)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臣 沽國을 비롯한 마한 북쪽에서 일어났으며, 또한 사건이 일어난 246년과 일치하고 있는 점(池內宏, 1951, 公孫氏の帶方郡設置と曹魏の樂浪 帶方二郡, 滿鮮史硏究 上 第1冊, 吉川弘文館, 247 쪽)에서 백제 고이왕이 주도한 것으로 보고 싶다. 226)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 이 기사는 韓세력과 중국 군현과의 전 쟁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 권30 魏書 東夷傳 韓傳에는 二郡遂滅韓 으로, 같은 책 권4 魏書 三 少帝紀 齊王芳紀에 (正始)七年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韓那奚等數十國 各 率種落降 이라 하여 한세력이 큰 패배를 당한 것으로 나온다. 이 사건은 정시 5년부터 정시 7년 까지 지속되었으며 齊王芳紀에서는 이 사건을 간략히 압축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을 멸망시켰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며, 실제의 내용은 韓那奚 등 수십국이 마한연맹체에서 이탈해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 기사는 246년에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 사건을 주도했던 백제가 빼앗았던 주민들을 돌려보내는 선에서 한군현과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 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16년(249) 봄 정월 갑오날에 금성(太白星)이 달을 범하였다.229) 22년(255) 가을 9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다. 신라의 군사와 槐谷230)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그 장수 翊宗231)을 죽였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烽山城232)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233) 227) 조세(租) : 삼국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확립하고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세제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租는 토지에 부과되는 田租로서 身(丁)에 부과되는 庸(人頭稅), 戶에 부과되는 調(戶稅)와 더불어 조세제도의 핵심을 이루었다. 백제의 租稅에 대해 서는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賦稅以布絹絲麻及米等 量歲豊儉 差等輸之 라 하여 6세기 경 에는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징수하되 조세 품목인 쌀과 공물세 품목인 베 견직물 삼베 등 곡물과 옷감원료를 현물로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백제의 조세제도에 대해서는 양기 석, 1987, 百濟의 稅制, 백제연구 18 및 2005, 앞의 책, 50~60쪽 참조). 228) 특산물세(調) : 戶에 부과되는 戶稅를 말한다. 백제에서는 전세미를 납부하는 조세와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물세를 함께 부담하였다. 백제의 전세(租)와 공물세(調)는 종래 중층적으로 편제되 어 있는 단위 정치체를 단위로 하여 인두수를 수취기준으로 부과하는 일종의 복속 의례적인 성 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와 6세기 성왕대에 이르러 지방 통치조직이 점차 정비됨에 따라 지방관에 의해 행정 단위별로 수취되는 전국적인 규모의 세제를 점차 확립 하게 되었다. 세제와 관련된 재정기구의 설치 운영, 임기 3년인 세무 담당 관리의 임명, 인정 의 항례적인 파악 등의 조치가 취해지면서 개별가호가 수취의 기본단위로 자리 잡게 되었고, 戶 租 수취에는 풍흉에 따른 호등제를 채용함으로써 과세의 형평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백제의 세 제에 대해서는 주 227)을 참조할 것. 229) 금성(太白星)이 달을 범하였다 : 태백성은 金星의 다른 이름으로 長庚星이라고도 한다. 금성이 달을 범했다는 현상은 사기 권27 천관서 제5에 의하면 장군이 誅殺된다고 하여 장군이나 군 주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조짐으로 보고 있다. 본서 권23 주 179)와 앞의 주 202)를 참조할 것. 230) 槐谷 :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현재의 충북 槐山지역에 비정할 수 있으나(이병도, 1977, 國譯 三 國史記, 을유문화사, 368쪽), 당시 두나라 간의 전투가 와산성(보은)~웅곡(선산)에 걸쳐 이루 어지고 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231) 翊宗 : 신라 沾解尼師今代의 장군. 一伐 의 관등에 있었다. 본서 권2 신라본기 沾解尼師今 9년 조 참조. 232) 烽山城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榮川郡 山川條에 郡 동쪽 15리에 있다는 烽山(현재의 榮州市

36 70 24년(257) 봄 정월에 크게 가물어 나무들이 모두 말랐다. 25년(258) 봄에 말갈 추장 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왕은 사자를 후하게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26년(259) 가을 9월에 푸른 자주빛(靑紫色) 구름이 왕궁 동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누 각과 같았다.234) 27년(260) 봄 정월에 內臣佐平235)을 두었는데 왕의 명령을 알리고 보고하는 일(宣納)을 맡았다. 內頭佐平236)은 창고와 재정에 관한 일을 맡고, 內法佐平237)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을 맡고, 衛士佐平238)은 왕궁을 지키는(宿衛) 군사에 관한 일을 맡고, 朝廷佐平239)은 형 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고, 兵官佐平240)은 대외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241) 또 達率242) 伊山面 石浦里 新岩里 일대)에서 미루어 보아 현재의 경북 榮州市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8쪽). 233) 군사를 보내 이기지 못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첨해 이사금 9년(255)조 에 보인다. 234) 푸른 자주빛(靑紫色) 구름이 누각과 같았다 : 이는 상서로운 조짐을 예견하는 慶雲의 일종 으로 이해된다. 경운은 상서로운 구름을 뜻하는데, 구름 같으나 구름이 아니고 연기 같지만 연 기도 아닌 5색이 엉킨 상서로운 구름을 말한다. 235) 內臣佐平 : 백제 6좌평 중의 하나로 王命出納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 내신좌평을 上佐平과 동일 한 것으로 보아 6좌평의 수석좌평으로 보는 견해와(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연 구, 韓國史論 2), 상좌평을 6좌평 위에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鍾旭, 1978, 百濟 의 佐平, 震檀學報 45). 내신좌평에 임명되는 자들은 왕족이거나 왕비를 배출한 가문 출신이 었다고 한다(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236) 內頭佐平 : 백제 6좌평 중의 하나로 창고와 재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237) 內法佐平 : 백제 6좌평 중의 하나로 예법과 의례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본서 권26 백제본 기 동성왕 6년(484)조에는 沙若思가 내법좌평으로서 南齊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나온다. 238) 衛士佐平 : 백제 6좌평 중의 하나로 왕궁 宿衛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8년(486)에 加가 위사좌평에 임명된 사례가 보인다. 239) 朝廷佐平 : 백제 6좌평 중의 하나로 형벌과 감옥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근초고왕대에 왕후 의 친척인 眞淨은 조정좌평으로서 근초고왕 즉위 초년에 권세를 부렸다고 한다(본서 권26 백제 본기 4 근초고왕 즉위년). 240) 兵官佐平 : 백제 6좌평 중의 하나. 본 기사에는 병관좌평이 지방의 군사에 관한 업무만 관장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백제본기 전체를 종합해 보면 병관좌평은 지방의 군사뿐만 아니라 중앙 의 군사에 관한 업무도 관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군사와 관련된 권한은 크게 軍政權과 71 軍令權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병관좌평은 주로 군정 업무를 담당하고, 좌장은 군령권 행사 에 깊이 관여한 것 같다. 병관좌평이 설치되면서 외병마사를 관장함에 따라 좌장의 직능도 분화 되었다. 군정권과 군령권에 대해서는 李文基, 1997, 中古期의 軍令體系와 軍政機構, 新羅兵 制史硏究, 일조각을 참조할 것. 241) 內臣佐平 관한 일을 맡았다 : 고이왕 27년조 기사는 내신좌평 이하 6좌평의 설치와 그 소 관업무 및 6좌평이 16관등 중 제1관등에 해당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동 27년 3월과 28년 2월조에 6좌평에 대한 임명 기사가 나온다. 이에 대해 이 기사 그대로를 신뢰하여 고이왕 대에 6좌평과 16관등이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중국측 사서인 주서 백제전 이후 기사를 근거로 좌평제의 실시 시기와 변화 과정을 수정하여 보고 있 다. 전자의 경우 고이왕 27년(260)부터 6좌평제가 시행되었고, 상좌평 설치 이후 6좌평들이 독 자적인 관부를 거느린 책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성왕 말년에 22관부를 설치하면서 좌 평은 점차 관등화하기 시작하여 무령왕대부터 좌평의 수적 증가와 함께 명예직화한 것으로 보았 다(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및 1990, 백제 사비시대의 중앙정부조직, 백 제연구 21). 그러나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조에는 본 기사와 동일한 내용이 나오고 있고, 3세기 중엽경의 사실을 전해주는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전에는 백제국이 마한연맹체의 한 소국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6좌평의 명칭과 職事는 사비시대에 와서 정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좌평제의 연원은 백제초기의 최고 관등인 좌 우보를 개편하여 설치한 것으로 通典 권185 邊防 1 東夷 上 백제조에는 官有十六品 左率一品 達率二品 이라 하여 좌평을 左率로 표 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여기서 좌평의 별칭인 左率을 통해 좌평이 솔계 관등에서 분화되었 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좌평이란 명칭이 周禮 夏官 司馬의 임무인 掌邦政 以 佐王 平邦國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그 기원을 사비시대 주례주의적 정치이념의 채용과 관련 시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90, 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報 69). 이 러한 좌평제의 직능이 분화하여 6좌평제로 확립된 시기에 대해서는 앞의 고이왕 27년설 이외에 4~5세기설(鬼頭淸明, 1978, 日本律令官制の成立と百濟の官制, 日本古代の社會と經濟 上, 吉川弘文館 ; 김영심, 1997, 한성시대 백제 좌평제의 전개, 서울학연구 8), 6~7세기설(黑田 達也, 1985, 百濟中央官制につぃての一試論 -その源流をめぐって-, 社會科 學硏究 10 ; 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 양기석, 1997, 백제 사비시대의 좌평제연구, 충 북사학 9 ; 문동석, 2001, 4세기 백제의 지배체제와 좌평, 역사와 현실 42) 등 다양한 견해 가 있다. 좌평이 분화하기 시작한 것은 전지왕 4년(408)에 上佐平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사비 시대 전기의 좌평은 정원이 5명이었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상좌평에서 분화된 태(대) 좌평과 상 중 하의 3좌평(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4년), 그리고 일반 좌평으로 구성되어 있었 다. 태(대)좌평은 유력한 대성귀족 출신의 훈신에게 임명된 비상위의 최고 관등이었고, 상 중 하의 3좌평은 귀족회의의 핵심 구성원인 동시에 합의방식에 의한 정책 심의 의결권을 행사하였 으며, 일반 좌평은 사안에 따라 특정 업무를 관장하는 1품의 신분이었다. 좌평은 거의 유력한 대 성귀족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귀족회의나 3좌평 합의제를 통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때로

37 72 73 恩率243) 德率244) 率245) 奈率246) 및 將德247) 施德248) 固德249) 季德250) 對德251) 文督252) 武督253) 佐軍254) 振武255) 克虞256)를 두었다.257) 6좌평은 모두 1품이고, 달솔은 2품, 은 는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3좌평 합의제는 직능 분화와 권력 분산을 통해 상호 견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국왕 직속의 내정관부와 행정관부로 구성된 22관사와 이와 다른 계통의 관직인 좌장 내두 영군 내신 등을 통해 국가 행정 업무를 집행해 나감으로써 왕권 중심의 정 치운영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사비시대 후기에 이르면 좌평제는 중국의 6전체제를 바탕으로 개편되기에 이른다. 무왕 30년대 전후로 한 시기에는 정무를 직능적으로 분담하는 6좌평제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정비 를 보게 되었다. 이때에는 대성귀족 출신의 좌평이 증가함에 따라 특정한 정무를 담당하는 관직 적 성격의 대좌평 상좌평 6좌평이 있어 국왕 권력에 편제된 관료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 다.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집정관인 대좌평과 좌평신분을 대표하는 상좌평은 재상의 역할을 수 행하였고, 관료적 성격의 6좌평은 정무를 여섯으로 분담하여 국가 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정책 심의의결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242) 達率 : 백제 16관등 중 제2관등.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大率 로 되어 있다. 率 系 관등 의 하나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달솔의 정원은 30명이며, 달솔 관등의 소지자는 方 의 장관인 方領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冠은 銀花로 장식하였다. 백제 관등에서 정원이 정해 져 있는 것은 좌평과 달솔뿐이고, 다른 관등은 정원이 없다. 따라서 6명의 좌평과 30명의 달솔 관등은 백제 최고의 귀족들이 가지는 관등이라고 할 수 있다. 243) 恩率 : 백제 16관등 중 제3관등. 率 系 관등의 하나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銀花로 冠을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23년 하4월조에 백제 의 관등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恩率 彌騰利 가 그 첫 기사이다. 244) 德率 : 백제 16관등 중 제4관등. 率 系 관등의 하나이다. 郡의 장인 郡將에 임명될 수 있는 관 등이었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冠은 銀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 다. 245) 率 : 백제 16관등 중 제5관등. 率 系 관등의 하나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冠은 銀 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246) 奈率 : 백제 16관등 중 제6관등. 率 系 관등의 하나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冠은 銀 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247) 將德 : 백제 16관등 중 제7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紫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48) 施德 : 백제 16관등 중 제8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249) 固德 ; 백제 16관등 중 제9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赤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0) 季德 ; 백제 16관등 중 제10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靑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1) 對德 ; 백제 16관등 중 제11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黃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2) 文督 : 백제 16관등 중의 13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黃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3) 武督 : 백제 16관등 중 제14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白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4) 佐軍 : 백제 16관등 중 제14 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白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5) 振武 : 백제 16관등 중 제15 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白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6) 克虞 : 백제 16관등 중 제16 관등.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白帶를 띠며, 정원은 없는 것으 로 나온다. 257) 達率 克虞를 두었다 : 16관등의 구성을 보면 좌평과 率系 5관등, 德系 5관등, 督系 2관등, 좌군 진무 극우라고 하는 3개의 무관계 관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좌평은 귀족회의의 의 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좌평과 달솔만이 각각 6명, 30명으로 정원이 정해져 있는 것 은 이들이 최고귀족회의체를 형성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달솔 이하 나솔까지 어미 가 모두 率 로 끝나고 있는 率 계통의 관등은 率이 帥로 읽히며 족장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족장적 성격의 관등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노중국, 1988, 앞의 책, 101쪽), 오히려 삼국 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전에 나오는 率善 및 魏 晉 兩代에 중국이 四夷의 長에게 내린 印章 의 率善 또는 率衆 이라는 銘文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이기동, 1996, 百濟社會의 地域共同體와 國家勸力, 百濟硏究 26) 있다. 이 솔계 관등은 태수를 뜻하는 連率 에서 비롯 한 것으로 백제가 마한소국을 통합해 나가면서 그 수장층들에게 수여한 것에 기원을 둔 것이다. 將德 이하 대덕까지의 5관등은 德 계통 관등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대덕은 德 계통 관 등이면서도 띠의 색깔은 文督과 같은 것으로 나오므로 다른 德系 관등과는 구별된다. 문독과 무 독은 督 계통 관등이며,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문무를 나타내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런데 帶色에서 문독은 한 등급 높은 대덕과 같은 黃帶를 띠는 반면에 무독은 그보다 등급이 낮 은 좌군 진무 극우와 더불어 白帶를 띠고 있다. 이는 대덕 이상의 관등은 文的인 성격이 강하 므로 문독의 색을 대덕과 같은 것으로 하고, 무독은 武的인 성격이 강하므로 역시 무적 성격의 관등인 좌군 등과 같은 색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좌군 진무 극우는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군사적 성격의 관등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본래 백제국이 馬韓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할 당시 에 수장 아래에 두어졌던 관제였는데, 관등제가 정비되면서 하위의 관등으로 재편제된 것이 아 닐까 한다. 이 16관등의 성립시기에 대해 본 기사는 고이왕 2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6좌평 16 관등제가 고이왕대에 완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학

38 74 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 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75 2월에 명령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紫色) 옷을 입고 은꽃258)(銀花)으로 冠을 장식하 며, 11품 이상은 다홍색(緋色)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였다.259) 16품이었다. 보 45).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에서 미루어 볼 때 3세기 중엽경의 고이왕대에 백제가 16관등 제라는 정연한 관등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백제 관등제에 관한 기사는 진사왕 2년(397)의 달솔 은솔 관등 수여 기사가 처음이다. 그리고 중국사서에는 주서 백제전에 16관등 기사가 초출하고 있으며, 일본서기 권23 계체기 23년 (529) 하4월조에 恩率 彌騰利 기사가 처음 나오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6관등제가 사비시 대에 이르러 비로서 제정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武田幸男, 1989, 六世紀における 朝鮮三國の國家體制,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4, 學生社, 34쪽). 그러나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비시대 이전에 관등제에 관한 기사가 단편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견 해는 성립될 수 없다. 오히려 몇 단계의 정비를 통해 체계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 백제가 고대국가의 틀을 갖춘 고이왕대에 관등제의 기본 골격인 좌평과 솔계 관부가 제정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나온 이후(노태돈, 1977, 삼국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2, 국사편 찬위원회, 174쪽), 이에 대한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위의 사비시대 성립설 이외에 근초 고왕대 솔계 관등과 좌군 진무 극우 등의 관등체계는 구성되었으나, 덕계 관등은 5세기 중반 경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김기섭, 2005,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236~245 쪽). 이와는 달리 약간의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3단계의 성립 과정설을 주장하는 견해가 지배적 이다. 고이왕대에는 좌평 솔계 덕계와 같은 관등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근초고왕대에 率이 5 개로 분화되고 德도 5개로 분화되면서 일원적인 관등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사비시대에 와서 16 관등제라는 정연한 체계가 정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및 1995, 백제의 정치 경제와 사회,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65~168쪽 및 2003, 삼국의 관등제, 강좌 한국고대사 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22~ 130쪽). 3단계 성립설에 대한 다른 견해로는 박현숙, 2005, 백제의 중앙과 지방, 주류성, 122~125쪽 ; 김영심, 1998, 백제 관등제의 성립과 운영, 국사관논총 82, 105~110쪽 및 2007, 백제 중앙지배조직, 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37~43쪽을 참조할 것. 백제의 관등제는 대체로 엄격하게 운영되었으나 사비시대에 이르면 점차 가문의 격에 따라 관등 소지에 제한성이 두고 있다. 대성 8족의 성립과 함께 신분에 따른 관등의 승진에 상한선이 있었던 사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黑齒常之墓誌銘a에 의하면 흑치상지 가문은 대대로 달솔의 관등을 소지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인원수의 제한 규정이나 관등 수여 기준 및 원칙 적용이 다소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657년 의자왕이 왕서자 41인에게 무더기 로 좌평을 수여한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258) 은꽃(銀花)으로 冠을 장식 : 백제의 좌평 및 솔계 관등의 소지자들이 은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한 관을 썼다. 백제 고분에서 銀製冠飾이 출토된 곳으로는 충남 論山 六谷里7호분 石室墳, 부여 능 산리36호 석실 동관과 서관, 부여 염창리Ⅲ-72호 석실분, 扶餘 下黃里 수집품, 전북 南原 尺門 里 석실분, 전남 羅州 興德里 석실분, 나주 복암리3호분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李南 奭, 1995, 百濟 石室墳 硏究, 학연문화사, 쪽 ; 최종규, 1991, 백제 은제관식에 관 한 고찰 -백제공구(Ⅰ), 미술자료 47 ; 박보현, 1999, 은제관식으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에 대한 몇가지 문제, 과기고고연구 5를 참조할 것. 한편 백제의 금동관이 출토된 곳은 전북 익산 笠店里1호 석실분(文化財硏究所, 1989, 益山 笠店里 古墳 발굴조사보고서 ), 전남 나주 新村里 甕棺墳(朝鮮總督府, 1920, 大正六年度 朝鮮 古蹟調査報告, 663쪽)이었으나, 최근 천안 용원리 석곽묘(이남석, 2000, 용원리고분군, 공 주대박물관), 공주 수촌리 토광목곽묘와 4호 석실분(충청남도역사문화원, , 공주 수촌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 ; 이훈, 2006, 공주 수촌리 백제금동관의 고고학적 성 격 ; 박보현, 2006, 백제의 관모와 飾履, 한성에서 웅진으로 특별전기념 학술심포지움, 국 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71~180쪽), 서산 부장리 5호묘(충청남도역사문화원, 2005, 서산 부장리 유적 현장설명회 자료 ; 정광룡 이수희, 2006, 서산 부장리 출토 금동 관모의 보존, 앞의 책, 158~159쪽),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전남대박물관, 2006, 고흥 안동고 분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 ; 임영진, 2006,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출토 금동관의 의의, 앞 의 책, 48~60쪽)에서 새로이 금동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威信財(Perstige Goods)는 제한된 양만이 공급되는 희귀품으로서 그의 생산 소유 분배를 통해 중앙세력이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에는 이러한 금동관과 은 제 관식을 비롯하여 중국 청자 斗 耳飾 子 飾履 大刀 등의 물품을 왕실에서 지방의 유력한 재지세력에게 사여함으로써 독립적인 지방세력을 결속시키거나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 하였다. 259) 6품 이상은 자주색(紫色) 옷을 입고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였다 : 이 기사는 백제의 관 식이나 관색 등 의관제에 대한 규정을 기술하였다. 의관제는 국왕이나 관료들이 공식석상에 나 갈 때 착용하는 복장과 관모에 관한 규정을 정해 놓은 제도였다. 관리들이 품계의 고하와 신분 의 차이에 따라 입은 紫色(1~6품) 緋色(7~11품) 靑色(12~16품)의 관복제를 3色公服制라고 부른다. 이런 측면에서 백제 귀족들이 크게 3계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백 제의 의관제는 관등을 근거로 규정되었으며, 의관제 규정 자체가 신분에 따른 관등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관등제와 신분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은 신라의 골품 제와 관등제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이왕대의 의관제에 대한 기사는 주로 북사 의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39 76 3월에 왕의 동생 優壽260)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28년(261) 봄 정월 초하룻날(初吉)261)에 왕이 소매가 큰 자주색 두루마기(紫大袖袍)와 푸 른색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금꽃(金花)262)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金花飾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 띠(素皮帶)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烏韋履)을 신고263) 南堂264)에 앉아서 정 77 사를 보았다. 2월에 眞可를 내두좌평으로 삼고, 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高壽265)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昆奴266)를 조정좌평으로 삼고, 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267) 29년(26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무릇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贓物의 3배 를 징수하고268)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못 나오도록(禁錮)269) 하였다.270) 주서 백제전과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6세기 전반 사비시대에 와서 제정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32~133쪽). 그러나 사비시대 이전 의관제 실시와 관련을 보여주는 자료는 고분에서 출토된 10점의 은화관식이다. 은화관식은 1품 좌평에 서 6품 나솔까지의 신분이 사용한 관식인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것으로 편년된다. 그 리고 6세기 초의`양직공도a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복식에도 고깔형의 文羅冠 앞에 은화 입식이 꽂혀 있는 점도 참고가 된다. 이런 면을 고려해 보면 백제의 의관제는 일시에 정비된 것이 아니 라 관등제 정비와 관련하여 단계적으로 정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의관제는 공복 의 색을 자 비 청의 3단계로 정하여 구분하고, 다시 대색으로 세분하였으며, 관색도 대색에 준해서 갖추고, 마지막 단계에는 상위 귀족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관식을 정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김영심, 2007, 백제 중앙지배조직, 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백제문화사대계 연구 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0~109쪽). 한편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色 이라 한 기 사와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 群臣絳衣 飾冠以銀 禁民衣絳紫 라 한 기사는 민간에서는 絳紫의 색은 입지 못하도록 하였고 다른 색에 대한 禁制는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백제 후기에 와서 신분제와 관등제의 변화에 따라 의관제도 부분적으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60) 優壽 : 백제 고이왕의 동생으로 최초의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다. 이 우수의 優 성씨로 보아 優 台-沸流系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7쪽). 261) 초하룻날(初吉) : 음력 매월 초하루(朔日)를 말한다. 詩經 小雅 小明에 我征西 至于野 二月初 吉 載離寒暑 傳 初吉朔日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한편 王國維는 兮甲盤跋에서 古者 分一月 之日爲四分 自朔至上弦爲初吉 自上弦至望爲旣生覇 自望至下弦爲旣望 自下弦至晦爲旣死覇 라 하여 朔日에서 上弦의 날까지를 初吉이라 하였다. 262) 금꽃(金花) : 왕의 冠을 장식하기 위해 금으로 만든 꽃. 王冠의 冠飾이 金花였다는 것은 武寧王 陵에서 출토된 金製冠飾에 의해 입증된다. 무령왕의 금제관식은 연화문과 팔메트문양이 부각되 어 있었다. 그 출토 상황으로 볼 때 무령왕의 관은 2점의 금꽃이 착장된 비단으로 된 오라관이 며, 표면에는 작은 유리 구술로 수가 놓아진 것으로 생각된다. 263) 소매가 큰 자주색 두루마기(紫大袖袍)와 검은 가죽신(烏韋履)을 신고 : 이 기사는 왕의 정 장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백제의 국왕은 자색의 대수포(두루마기)에 청금고(바 지)를 입고 금화를 장식한 오라관(관)과 소피대(허리띠), 오위리(신발)를 갖추고 남당에 앉아 정 사에 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 기사에 나오는 왕의 정장한 모습을 고이왕대의 사실로 보는 견 해도 있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이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其王服大袖紫布 靑錦袴 烏 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단계적으로 정비되어 사비시대에 이르러 완성된 사실이 고이왕대에 부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64) 南堂 : 君臣들이 모여 정사를 논의하고 처리 집행하던 일종의 政廳. 초기의 남당은 부족집회소 의 후신으로서 중앙권력이 확립되면서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사무를 총괄한 정청으로 되었 다고 한다. 고이왕이 남당을 설치하고 여기에서 정사를 보았다는 것은 왕과 신하의 석차가 정해 져서 중앙집권체제의 기본틀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이병도, 1976, 古代南堂考, 韓國 古代史硏究, 박영사, 613~642쪽). 이 남당은 신라의 경우 都堂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 는 본서 권2 신라본기 첨해 이사금 3년조에는 秋七月 作南堂於宮南[南堂或云都堂] 이라 한 기 사와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조에 [聖王]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煞 堀坎而埋[一本云 新羅 葬埋明王頭骨 而以禮送餘骨於百濟 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 名此廳曰都堂]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265) 高壽 : 백제 고이왕대에 최초로 위사좌평이 된 인물이다. 그의 성씨가 高氏라는 사실에서 미루 어 볼 때 그는 낙랑이나 대방에서 백제로 이주해 온 한인관료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266) 昆奴 : 백제 고이왕대에 최초로 조정좌평이 된 인물이다. 昆氏는 昆解 라는 複姓이 單姓化되었 으며, 백제 仇首王의 후손 가문으로 보고, 이 곤노를 다루왕 4년(A.D.31)조에 나오는 昆優의 존 재에서 미루어 볼 때 高木城(현재의 경기도 漣川에 비정됨)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94, 百濟의 貴族家門硏究, 大丘史學 48, 5 6쪽). 그러나 昆이 성씨인지 이름인지 분명 치 않고, 또 백제 초기부터 왕족이 분지화하여 별도의 성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는 점은 받아들 일 수 없다. 267)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沾解尼師今 15년(261)조에 보인다. 268) 贓物의 3배를 징수하고 : 동일한 내용이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오기 때문에 본 기 사는 사비시대의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盜者流 其贓兩 倍徵之 라 하여 도적질한 물건에 대해서는 2배를 징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리의 뇌물수뢰죄 와 도적질한 자에 대한 처벌로써 피해보상적 차원의 처벌이다. 주서 백제전 단계에서는 피해 액의 2배를 추징하였으나, 구당서 백제전 단계에서는 3배를 추징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40 78 33년(266)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烽山城271)을 공격하였다. 성주 直宣272)이 힘센 39년(272)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275) 군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치니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273) 45년(278)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를 공격하여 槐谷城276)을 포위하였다.277) 36년(269) 가을 9월에 살별(혜성)이 자미궁(紫微宮)274) 별자리에 나타났다. 50년(283)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278) 79 53년279)(286) 봄 정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280)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처벌의 강도를 보다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69)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못 나오도록(禁錮) : 금고형은 관리의 뇌물수수에 따른 부정에 대한 처벌 로써 뇌물에 대한 3배 배상과 함께 종신토록 관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형인데, 가중처 벌적 형벌이다. 금고형에 대해서는 春秋左氏傳 成公 2년에 及鄭使介反幣而以夏姬行 將奔齊 齊師臣敗曰 吾不處不勝之國 遂奔晉而因至 以臣於晉 晉人使爲邢大夫 子反請以重幣錮之(疏 注禁 錮勿令仕 正義曰 說文云 錮鑄塞也 鐵器穿穴者 鑄鐵以塞之 使不漏 禁人使不得仕官者 其事亦似之 故謂之禁錮 今世猶然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270) 영을 내려 벼슬길에 못 나오도록(禁錮) 하였다 : 이는 백제의 율령에 관한 기사인데, 律은 항구적인 법전, 令은 왕의 敎勅으로 이해된다. 백제 율령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와 함께 晉의 太 始律令을 모체로 하여 계승된 양대의 율령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율령 반포 시 기에 대해서는 ①고이왕대로 보는 견해(이종욱, 1977, 百濟王國의 成長 - 統治體制의 강화와 專制王權의 성립 -, 大丘史學 12 13합집), ②근초고왕대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6, 백제 율령에 대하여, 백제연구 17 ; 박림화, 1994, 백제율령 반포시기에 대한 이고찰, 경대사 론 7 ; 강종원, 2002, 4세기 백제사연구, 서경), ③5세기 후반~6세기 전반경으로 보는 견해 (井上秀雄, 1986, 百濟の律令體制への變遷, 律令制 -中國朝鮮の法と國家, 唐代史硏究會 編)가 있다. 위 기사와 동일한 내용이 신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官人受財及盜者 三倍 追贓 仍終身禁錮 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어 율령체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사비시대의 것을 고이 왕대로 부회된 것으로 볼 수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그러나`무령왕릉묘지 석a에 보이는 율령의 면모에 미루어 볼 때 무령왕대인 6세기 백제사회에서 이미 율령이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해 보면 백제의 울령의 단초적 형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 동진과의 교섭을 통해 태시율령이 수용되어 백제율령의 모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조법종, 2007, 사회규범과 법률, 백제의 사회경제와 과학기술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1, 충청남 도역사문화연구원, 92~97쪽). 271) 烽山城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榮川郡 山川條에 郡 동쪽 15리에 있다는 烽山(현재의 榮州市 伊山面 石浦里 新岩里 일대)에서 미루어 보아 현재의 경북 榮州市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8쪽). 당시 백제와 신라가 와산성(보은)에서 熊谷(선산)에 이르기까지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그 사이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24 주 11)을 참조할 것. 272) 直宣 : 신라 味鄒尼師今代의 장군으로 봉산성의 성주였다. 백제군을 격파한 후 일길찬으로 승진 하였다. 273) 성주 直宣이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味鄒尼師今 5년 (266)조에 나온다. 권24 百濟本紀 2 責稽王281) <*혹은 靑稽라고도 하였다.>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 났다. 고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 274) 자미궁(紫微宮) : 북두칠성의 동북쪽에 벌려 있는 15개 별 가운데의 하나. 점성술에서 이 별은 천자의 주성으로서 그의 운명과 관련된다고 한다. 晉書 권11 志 天文 上에 紫宮垣十五星 其 西蕃七 東蕃八 在北斗北 一曰 紫薇 大帝之坐也 天子之常居也 主命主度也 一曰長垣 一王天營 一 曰旗星 爲蕃衛 備蕃臣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275)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味鄒尼師今 11년(272)조에 보인다. 276) 槐谷城 :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현재의 충북 槐山지역에 비정할 수 있으나(이병도, 1977, 國譯, 을유문화사, 368쪽), 당시 두나라 간의 전투가 와산성(보은)~웅곡(선산)에 걸쳐 이 루어지고 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주 230)을 참조할 것. 277) 군사를 내서 槐谷城을 포위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권2 신라본기 味鄒尼師今 17년(278)조 에 보인다. 그러나 미추 이사금 17년조에는 波珍 正源이 백제군의 침입을 막은 것이 첨가되어 있다. 278)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味鄒尼師今 22년(283)조 에 보인다. 그런데 미추 이사금 22년조에는 冬十月 圍槐谷城 命一吉良質 領兵禦之 라는 내용 이 첨가되어 있다. 279) 53년 : 고이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甲寅立 理五十二年 이라 하여 그의 재위기간은 52년으로 되어 있다. 280)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儒禮尼師今 3년(286) 조에 보인다. 281) 責稽王 : 백제 제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고이왕의 아들로 靑稽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第九責稽王 古爾子 一作靑替 誤 라고 나온다. 이는 責과 靑, 替와 稽가 字形이 비슷한 데서 빚어진 착오로 생각된다.

41 80 81 려가 帶方282)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帶方王283)의 딸 2년(287) 봄 정월에 東明廟에 배알하였다. 寶菓를 맞이하여 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 13년286)(298) 가을 9월에 漢287)이 貊人288)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다가 적의 군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 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284) 285) 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阿且城 과 蛇城 을 수리하여 이에 대비 하였다. 권24 百濟本紀 2 汾西王289) 282) 帶方 : 대방군을 가리킨다. 대방군은 후한말 遼東지역에 웅거하였던 公孫度가 황해도 지방에 세 웠다. 본서 권23 주 37)을 참조할 것. 283) 帶方王 : 본 기사의 帶方王은 帶方太守를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이를 帶方國王으로 보고 대방 국은 南樂浪의 남부인 帶方(현재의 황해도 長湍 및 鳳山 등지)에 호족 張氏가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申采浩, 1972, 朝鮮史硏究, 改訂版 丹齋申采浩全集 상, 형설출판사, 200쪽)도 있다. 284) 阿且城 : 阿旦城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且와 旦의 字形이 비슷한 데서 빚어진 것이다. 아차성 =아차산성은 현재의 서울시 성동구 중곡동의 아차산성을 가리킨다. 현재 이 아차산성은 둘레 약 1,000m의 테뫼식 山城으로 標高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의 한강변 쪽으로 경 사진 산허리의 윗부분을 둘러쌓았으며, 성내에 작은 계곡이 있다. 史蹟 제234호로 지정되어 있 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은 도망갔다가 고구려군에 붙잡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아차산성 주변 아차산 일대에는 1997~98년에 걸쳐 서울대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 었는데, 그 결과 수 백여 점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성벽과 치, 온돌과 집수시설을 갖춘 고구려 관방시설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아차산 일대에는 이러한 보루유적은 대략 6세기 전반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서는 최종택, 1998, 고고학상으로 본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 출과 백제, 백제연구 28, 135~136쪽 및 2002, 몽촌토성내 고구려유적 재고, 한국사학 보 12, 9~40쪽 및 2004, 아차산 고구려보루의 역사적 성격, 향토서울 64, 87~128쪽 및 2004,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한국고대사학회 서울 시정개발연구원, 467~495쪽 및 2006, 남한지역 고구려 토기의 편년연구, 선사와 고대 24 및 2006, 앞의 글, 283~299쪽 등이 참고가 된다. 285) 蛇城 : 이 성은 본서 권25 개로왕대에 대대적으로 수리된 바 있다. 사성의 蛇 의 訓 뱀 과 風 納洞의 풍납 을 바람들이 로 해석하고 이를 연결시켜 현재의 風納洞土城(서울시 松坡區 風納 洞)에 비정하고 있으나(이병도, 1976, 百濟의 蛇城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풍납토성이 발굴조사 결과 백제 왕성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적합지 않다. 그리고 이를 경기도 河南市 渼沙洞 龜山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方東仁, 1974, 風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白山學報 16, 67 69쪽)도 홍수때 한강의 범람을 막고 도성 및 왕릉구역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축성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서울시 江南區 三成洞土城에 비정하는 견해(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일지사, 쪽)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 다. 본서 권25 주 506)을 참조할 것.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거동과 풍채가 영특하고 빼어 났으므로, 왕이 사랑하여 곁(左右)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299) 봄 정월에 東明廟에 배알하였다. 5년(302) 여름 4월에 살별(혜성)이 낮에 나타났다. 7년290)(304)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樂浪의 서쪽 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권24 百濟本紀 2 比流王291)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292)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고, 또 힘이 세어 활 286) 13년 : 책계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丙午立 治十二年 이라 하여 12년으 로 나오며 1년 차이가 있다. 287) 漢 : 이때의 漢은 한반도에 설치되어 있던 중국 군현인 樂浪郡과 帶方郡을 가리킨다. 288) 貊人 : 貊은 본래 濊 韓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주된 구성체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에 는 고구려와 부여 등이 국명을 가지기 전까지는 濊와 貊으로 나타나는데, 貊은 주로 고구려를 가리키고 있다. 본 기사에 보이는 맥은 고구려라기보다는 함경도 이남 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동 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71쪽). 289) 汾西王 : 백제 제1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책계왕의 아들이다. 낙랑을 공격하 다가 도리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당하였다. 290) 7년 : 분서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戊午立 治六年 으로 나오며 1년 차이 가 있다.

42 82 291) 比流王 : 구수왕의 제2자로서 재위기간은 년이다. 사반왕의 동생인데, 분서왕이 피살 된 후 國人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후일 내신좌평 優福의 반란을 평정하여 왕권을 안정시 키고, 眞氏세력과 결합하여 지배기반을 확대하였다. 비류왕의 즉위를 분서왕의 불의의 죽음으 로 인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고이계와 전 직계였던 초고계가 다투다가 초고계가 승리한 것으 로 보고 있다(노중국, 1978, 백제왕실의 남천과 지배세력의 변천, 한국사론 4, 55~56쪽). 한편 본서 권2 신라본기 訖解尼師今 21년(330)조에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라 하여 벽 골지 축조기사가 나오는데, 이 벽골지는 현재의 전북 김제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신라의 흘해왕 이 전북지역까지 진출하여 벽골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1975년에 벽골지 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제방의 밑바닥에서 채취한 탄화된 식물을 시료로 하여 방사성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 저수지는 대략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벽골제는 제 방의 길이가 약 3km, 높이가 약 4.3m, 상변 폭 7.5m, 하변 폭 17.5m에 달하는 대규모의 저수 지였으며, 延人員 322,500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尹武炳, 1976, 金堤 碧骨堤 發掘 報告, 百濟硏究 7). 따라서 신라 홀해니사금(310~356)때 축조되었다는 위 기사는 백제 비류 왕대(304~344)의 사실이 신라에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벽골제의 축조는 백제가 이 시 기에 전국적인 규모로 노동력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수행하였다는 것과 이러한 수리 사업을 통해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시 백제가 김제지역까지 중앙 지배 력을 관철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벽골제 축조사실을 후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전덕재, 2000, 삼국사기 영산강유역의 농경과 사회변동, 지방사와 지방문화 3-1 ; 성정용, 2007, 김제 벽골제의 성격과 축조시기 재론, 한 중 일의 고대 수리시설 비교연구, 계명대출판부), 비 류왕대의 이러한 정치적 기반의 확대와 경제적 성장을 토대로 하여 다음 왕인 근초고왕대의 발 전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92)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 비류왕을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할 때 비류가 구수왕이 죽은 해 에 태어났다고 하더라고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70세이고, 사망 당시의 나이는 111세가 된다. 이 때문에 그의 존재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太田亮, 1928, 日本古代史新硏究, 430~442쪽). 그러나 그의 在位연수나 人壽 등에 설혹 조작과 과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왕실계보의 형 성문제와 연계하여 정리하여야 할 것이며,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李 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7 8쪽). 비류왕과 구수왕을 부자관계로 설정한 것은 계보상의 擬制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왕실 집단 내에서의 가계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따 라서 비류왕은 분서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사반왕을 몰아내고 즉위하였거나 또는 사반왕의 아들을 대신해서 왕위에 올랐을 개연성이 있다(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 연문화사, 69~70쪽). 이처럼 백제 초기 왕의 재위년수 및 생몰년수, 그리고 왕실계보 문제에 있 어서 드러난 불합리한 점을 들어 초기기록에 대한 부정론 내지는 왕실교체론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백제초기의 왕계에서 몇대가 부분적으로 누락되었을 가능성과 그리고 후일 왕실계보 정 리과정에서 직계에 가급적 연결시켜 그들 가계의 정통성을 한층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부분적인 계보조작이 생겨날 수도 있다. 따라서 백제 초기 왕계 기록에서 부분적인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 도 이를 근거로 하여 제기된 부정론이나 왕실교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그 기사 자체 83 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지만 명성이 자자하였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293)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 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 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을 주었다. 여름 4월에 東明廟에 배알하였다. 解仇294)를 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 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왕도의 우물물이 넘치고 그 안에서 검은 용이 나타났다.295) 를 인정하고 문제점이 드러날 경우 그 기사가 갖는 한계와 역사적 의미를 찾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293) [비류가]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 비류가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肖古系 인 비류가 古爾系의 탄압을 피하여 도망 생활을 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유형으로 는 후일 美川王이 된 고구려의 乙弗이 烽上王의 박해를 피해 도망생활을 한 것을 들 수 있다(본 서 권17 고구려본기 美川王 즉위년조 참조). 비류왕의 즉위는 백제의 왕실 계보가 온조 초고왕 계 내에서 직계가 아닌 방계로 이행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汾西王이 죽은 후 민간에 있던 그를 추대한 臣民은 초고계를 지지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비 류왕 9년(312) 병관좌평에 임명된 解仇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을 들 수 있다. 294) 解仇 : 백제 비류왕대의 인물. 비류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공으로 병관좌평 에 임명되어 군사권을 관장하였다. 본 기사의 해구에 대해 본서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2년조에 보이는 병관좌평 解仇와 동일인으로 보고 비류왕대의 해구의 존재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李弘 稙, 1971,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쪽). 그러나 두 기사에 보이는 해구는 동 명이인으로, 시기를 달리한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95) 검은 용이 나타났다 : 용의 출현은 길 흉 양면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길조로 해석된다. 고 이계를 황용에, 초고계를 흑용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노중국, 1983, 해씨와 부여씨의 왕실 교체와 초기백제의 성장,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28~129쪽), 흑용의 대두는 곧 비류 왕의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 확보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강종원, 2002, 4세기 백제사연구, 서경, 116쪽).

43 84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 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 쏘기를 익혔다.296) 85 24년(327) 가을 7월에 구름이 마치 붉은 까마귀가 해를 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보내 토벌 297)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이복동생(庶弟)인 優福 을 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星)298)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299) 하였다.302)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마르더니 가을 7월에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마치 풍랑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300) 11월에 왕이 狗原 301) 북쪽에서 사냥 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296) 궁궐 서쪽에 활쏘기를 익혔다 : 이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 으로 이해된다. 297) 優福 : 백제 비류왕의 異母弟. 우복의 優 를 성씨로 보고 그를 우태-비류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7쪽). 그러나 비류왕이 근초고왕의 아버지이고, 근초고왕의 성이 扶餘氏=餘氏임이 분명하므로, 그의 異母弟인 우복도 부여씨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비 류왕 18년(321)에 내신좌평이 되었다가 24년(327)에 북한산성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 나 실패하였다. 298) 금성(太白星) : 태백성은 金星의 다른 이름으로 長庚星이라고도 한다. 사기 권27 천관서 제5 기사를 참고할 것. 금성이 달을 범했다는 현상은 사기 권27 천관서 제5에 의하면 장군이 誅殺 된다고 하여 장군이나 군주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조짐으로 보고 있다. 지구보다 태양에 가깝고, 태양에서 48 이상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밤중에는 보이지 않고 일몰 후의 서쪽 하늘, 또는 일출 전 동쪽 하늘에 보일 뿐이다. 저녁하늘에 보일 때에는 태백성, 새벽 하늘에 보일 때에는 샛별 이라고 한다. 주 16)을 참조할 것. 299)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 백제에서 누리[蝗]의 피해를 본 기사는 초고왕 43년 추, 동 46년 8월, 비류왕 18년 7월, 무령왕 21년 8월 등에 보인다. 누리의 피해는 당시 곡식을 손상케 하여 백성 들을 기아로 몰아넣는 심각한 재해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풂으로써 누 리 피해를 퇴치하려고 하였다. 본서 권23 주 180)을 참조할 것. 300) 狗原 : 현재 경기도 양주군 풍양에 비정된다(酒井改藏, 1970, 地名考, 朝鮮學報 54, 46쪽). 301) 사냥(田獵) : 고대사회에서 사냥행사는 영토 확인, 순무, 군통수권 확인과 군사 훈련, 종교적 의 식 거행 등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으며, 이를 통해 국왕의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신형식, 1981, 순행을 통해 본 삼국 시대의 왕, 한국학보 25, 36쪽 ; 김영하, 1988, 삼국시대 왕의 통치형태 연구, 고려대박사 학위논문, 57쪽). 한성도읍기의 사냥터로는 西海大島(강화도) 釜山(평택 진위) 橫岳(북한 산) 狗原(경기도 양주 풍양) 등과 같이 왕도 근처에서 사냥을 빈번히 실시하였다. 33년(336) 봄 정월 신사날에 살별(혜성)이 奎星303)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04)(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권24 百濟本紀 2 契王305)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 302) 내신좌평 우복이 토벌하였다 : 비류왕은 고이계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던 우복을 내신좌평 에 임명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류왕의 그러한 의도와는 달리 왕권 의 기반이 미약한 비류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복의 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로 인해 고이계에 일대 타격을 주게 되었다. 303) 奎星 : 28宿의 하나로 안드로메다좌에 해당한다. 白虎七宿의 첫째 星宿로서 열여섯 별로 구성되 었다. 첫 여름에 보이는 衆星으로 文運을 맡아 보았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奎曰 封豕 爲溝瀆[正義 ; 奎苦圭反 十六星 奎天之府庫 一曰天豕 亦曰封豕 主溝瀆 西南大星 所謂 天豕目 占以明爲吉 星不欲團圓 團圓則兵起 暗則臣干命之咎 亦不欲闔無常 常有白衣稱命於山谷 者 ]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304) 41년 : 비류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甲子立 治四十年 으로 나오며 1년 차이가 있다. 305) 契王 : 백제 제1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계왕에 대해서 즉 위년 기사와 흉년 기사밖에 없다. 그러나 본서 권32 잡지 祭祀 高句麗 百濟祀禮에 古記云 溫 祚王二十年春二月 設壇祠天地 三十八年冬十月 多婁王二年春二月 契王二年夏四月 阿莘王

44 86 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비류왕이 재위 87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308) 41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3년306)(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권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307)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二年春正月 支王二年春正月 竝如上行 이라 하여 계왕 2년에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에 제사하 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류왕이 죽은 후 고이계의 계왕이 즉위한 사실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이에 대해 실제 계왕이 재위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계왕 은 근초고왕대에 국사를 편찬하면서 360년마다 국가의 흥운을 맞이한다는 漢나라 楊雄이 찬한 太元經 계통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국 연대를 근초고왕대를 기준으로 360년 이전으로 잡으 면서 뒤에 와서 삽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 업사, 49 50쪽). 반면 계왕이 초고왕에 의하여 살해되었거나 아니면 일시 근초고왕과 양립하 다가 제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권오영, 1995, 백제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6, 국사편 찬위원회, 37쪽). 306) 3년 : 계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甲戌立 理二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시차가 있다. 307) 近肖古王 : 백제 제1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근초고왕의 명칭은 肖古王에 近 字를 앞에 붙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근초고왕이 초고계의 왕통을 이었다고 하는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일본 사서에는 近速古王 新撰姓氏錄 右京 ( 諸蕃 下 百濟) 肖古王 速古王 日本書紀 권9 ( 神功紀 55년 및 권19 흠명기 2년) 照古王 古事記 中卷 ( 應神天王)으로 나 오는데, 모두 근초고왕을 지칭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9 欽明紀 2년조에 聖明王曰 昔我先 祖速古王貴須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라 하여 聖王(聖明王) 이 近肖古王과 近仇首王을 速古王 과 貴須王 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近肖(速)古王 近仇 (貴)須王 이라는 호칭이 생긴 것이 성왕 이후임을 알게 해준다(李根雨, 1994, 일본서기에 인용 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4쪽). 또한 중국 사서인 晉書 권9 帝紀 簡文帝 咸安 2년(372, 근초고왕 27)조에는 餘句 로 나온다. 이 餘句의 餘 는 백제의 王姓인 扶餘의 약칭이고, 句 는 근초고의 古 와 음이 상통하여 붙여진 이름이 다. 중국 사서에 백제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처음이다. 그는 재위 중 고구려와는 옛 대방 지역 의 영유를 둘러싸고 대립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書記 라고 하는 국사를 편찬하여 왕실 중심의 역사체계를 만들었고, 倭에 論語 와 千字文 을 전수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조에는 卽命木羅斤資 沙沙奴 [是二人不可知其姓人 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 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 南加羅 啄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 中 布彌支 半古四邑自然降服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에 대하여 일본 학계의 고전적 연구는 4세기 이래 왜가 한반도 남부에 침입하여 임나 지역에 거점을 만든 다음 이후 200여 년간 임나 및 백제 신라까지 지배하였다는 임나일 본부설의 주요 근거로 주장되기도 하였다(末松保和, 1949,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반면 369년의 가라 7국 평정은 왜에 의한 것이고, 성왕의 회고는 성왕대의 현실을 근초고왕대에 투 영시킨 것으로서 백제와는 무관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池內宏, 1970, 日本上代 史の一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 김태식, 1988, 6세기전반 가야남부제국의 소멸과정고찰, 한국고대사연구 1 ; 연민수, 1996, 일본서기 신공기의 사료비판, 일본학 15). 이와는 달리 이 기사에 나오는 가야를 공격한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보아야 하며, 그 연대는 2周甲 인 하하여 369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우리 학계에서는 지배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이병도, 1976, 近肖古王 拓境考, 한국고대사연구 ; 千寬宇, 1977, 復元 加耶史 중, 문학과 지성 29, 문학과 지성사). 이 견해를 따른다면 이 기사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24년(369)에 가야 제국 을 평정하여 부용적 관계에 두었고, 彌多禮 등 전라도 지역의 세력을 경략하여 영역으로 편입 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08)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 본 기사에는 계왕이 재위 3년만에 죽었기 때문에 근초고왕이 즉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 때문에 근초고왕의 출자를 기록대로 비류왕의 둘째아들로 보지 않 고 다르게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근초고왕의 출자를 부여족에 의한 왕실교대 론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부여족의 일파가 요동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한강유역에 남하하여 그 하류지역의 백제국을 통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稻葉岩吉 外, 1935, 世界歷史大系 11 ; K.J.H.Gardiner, 1969, The Early History of Korea,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Press ; G.K.Ledyard, 1975, Galloping along with the horseriders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 No.2 ; 岡田英弘, 1977, 倭國, 中公新書 ; 이기동, 1981, 백제 왕 실교대론에 대하여, 백제연구 12 ; 김기섭, 1993, 한성시대 백제의 왕계에 대하여, 한국 사연구 83 ; 이도학,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52~72쪽). 그러나 이러한 정복국 가론이나 왕실교대론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와 관련한 기사를 찾을 수 없으며, 이를 입증 해 주는 어떤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계왕이 고이왕에 속 하는 왕이라는 점, 그의 재위 기간이 3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그가 비류왕의 둘째아들이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즉위하였는지에 대해 언급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근초고왕이 肖古王에 近 字 를 붙혀 왕명을 삼아 肖古系임을 강조한 점 등에서 미루어 볼 때 근초고왕은 계왕을 몰아내고

45 년(347) 봄 정월에 하늘과 땅신(地祇)에게 제사를 지냈다. 眞淨을 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 [眞]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309)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할 때 가혹하고 까다 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 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는데,313) 그 사로잡은 포로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1년(366) 봄 3월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예방하였다.310) 겨울 11월에 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314)을 사용하였다. 23년(368) 봄 3월 초하루 정사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필을 26년(371)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주었다.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린 다음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311) 312)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斯由 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雉壤 에 와서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平壤城315) 을 공격하였다.316) 고구려 왕 斯由(고국원왕)가 힘을 다해 싸워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왕위에 올랐을 개연성이 높다.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초고왕과 구수왕을 추억 기념하게 된 것은 왕위계승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왕실내의 여러 가계집단을 의도적으로 통합하려 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09) [眞]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 眞淨이 왕후의 친척이라고 한 사실에서 근초고왕의 妃가 眞氏가 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진씨가문은 아신왕대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여 이른바 眞氏王妃族시대를 열었다(李基白, 1958,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진씨세력이 비류왕대에 들어와서 재등장하게 된 것은 비류왕 24년(327)의 우복의 난 이후의 일이다. 비류 왕 30년(333)에 眞義가 내신좌평에 임명됨으로써 유력한 중앙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근초고와 관련을 맺은 것으로 이해된다. 진정이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은 왕후의 친척이라는 점 외에도 아마도 그가 근초고왕이 즉위하는데 중요한 공을 세우고 반대파들을 제 거한 활동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이후 백제의 정치운영은 한동안 왕족과 왕비족 이 배타적으로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왕족-귀족 연합체제를 유지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310) 사신을 보내 신라를 예방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奈勿尼師今 11년(366)조에 보인다. 이 시기 양국의 관계는 본서 권3 신라본기 奈勿尼師今 18년(373)조에 百濟禿山城主 率 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라 한 기사에 의거할 때 兩國和好 約爲兄弟 로 표현될 정도로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관계는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맺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311) 斯由 : 고구려 고국원왕의 이름. 일명 釗라고 하였다.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梁書 권54 高句驪傳, 翰苑 蕃夷部 高麗條에서는 劉라 하였다. 晉書 권109 載 記 慕容, 魏書 권100 高句麗傳, 資治通鑑 권96 晉紀 顯宗 成帝 中之下 咸康 5년, 본서 권 25 백제본기 蓋鹵王 18년,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釗라 하였다. 312) 雉壤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황해도 白川郡條에 白川郡本高句麗刀臘縣 一云雉嶽城 이라 한 기사에 의거해 볼 때 현재의 황해도 白川郡 白川邑(현재 延白郡 銀川面)에 비정된다. 치 양성은 개성에서 예성강을 건너 황해도 남부지역[대방지역]으로 들어가는 전략적 교두보에 해당 한다. 313) 고구려 군사를 사로잡았는데 : 백제가 고구려와의 치양성 전투에서 거둔 戰果로서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故國原王 39년(369)조에 나온다. 이 치양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 가 황해도 지역에 설치되었던 帶方故地의 영유를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14) 황색 깃발 : 황색은 五色(적 청 백 흑 황)의 하나로 중국에서는 中央 中和 日光 土 君 王의 복색으로 한다. 漢書 권21 상 律曆志 상에 律十有二 陽六爲律 陰六爲呂 一曰黃 鐘 黃鐘 黃者 中之色 君之服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근초고왕이 369년 고구려 평양 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의 큰 전공을 세우고 나서 대대적인 군대 사열을 실시 하면서 깃발의 색을 황색으로 하였다. 황색은 중앙을 의미하는 방위색인 동시에 황제를 상징하 는 색깔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근초고왕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315) 平壤城 : 여기서 평양성은 후에 고구려 3경 중에서 남경에 해당하는 황해도 신원의 남평양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76~183쪽). 남 평양은 현재 신원군 신원읍의 동부와 그 동쪽의 아양리, 월당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이곳 북쪽에는 장수산(745m)이 둘러막고 있고, 동 서 남쪽에는 멸악산과 수양산 줄기가 뻗어 있어 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84년 발굴조사 결과 남평양 도시유적이 10 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4~7세기대의 기와편들이 출토되었다. 그 주변 아양리와 장수산성 앞에 각각 고구려계 토성이 있었다. 또 장수산 일대에는 내외성으로 구성된 둘레 11.5 의 장수산성이 입 보용 산성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 부근에서는 1,000여기의 고구려 돌무덤과 돌칸흙무덤이 분 포하고 있다. 316) 왕이 태자와 함께 平壤城을 공격하였다 : 근초고왕대 백제가 대동강 하류인 황주지역에까 지 진출한 사실이 황주 토성리에서 수습된 백제계 토기를 통해 입증된다(최종택, 1990, 황주출 토 백제토기류, 한국상고사학보 4). 이 토기들은 서울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대략 4세 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친 것으로 파악된다.

46 90 맞아 죽었다.317)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漢山으로 옮겼다.318) 91 27년(372) 봄 정월에 사신을 晉나라319)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8년(373) 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17) 고구려 왕 斯由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1 년(371)조에 나온다. 한편 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18년조에는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라 하여 근구수왕이 고국원왕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梟斬釗首 는 백제측의 과장이라고 할 것이다. 318) 도읍을 漢山으로 옮겼다 : 백제가 369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 로 대승을 거둔 직후에 서울을 한산으로 천도한 일이 있어 한산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 다. 한산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본서 권23 주 11)을 참조할 것. 이와는 달리 삼국유사 권2 紀 異篇 南扶餘 前百濟조에는 古典記 기사를 인용하여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 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 라 하고 있고, 王曆篇에도 第十三近肖古王 辛未 移都北漢山 이 라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이때 北漢城=北漢山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다 르다. 이에 대해 한산북안설[북한산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당시 백제가 팽창하던 시기이므로 대고구려전을 주도하기 위한 북진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북으로 천도를 단행한 것으로 보는 견해 가 있으나(이도학, 1992,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 한국상고사학보 9, 32~33 쪽 ; 강인구, 1993, 백제 초기 도성 문제 신고, 한국사연구 81, 15~17쪽 ; 박순발, 2001, 한성백제의 탄생, 서경문화사, 173쪽), 아직 이를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어서 신뢰성 이 없다. 백제의 만주기원설에 대한 문제점과 비판은 김수태, 2002, 백제의 만주기원설 검토, 백제연구 35, 4~25쪽을 참조할 것. 반면 한강남안설의 입장에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침공 을 염려하여 한산으로 移都를 한 것으로 보고 한강 이북의 북한산성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이병도, 1976, 앞의 책, 쪽 ; 성주탁, 1983, 한강유역 백제초기 성지연구, 백제연구 14, 132쪽 ; 여호규, 2002,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 제와 방어체계, 백제연구 36, 11쪽 등). 한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津田 左右吉, 1913, 百濟慰禮城考, 朝鮮歷史地理 Ⅰ, 南滿洲鐵道株式會社, 43쪽 ; 이병도, 1976, 앞의 책, 503쪽 등)과 송파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 토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송파구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 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신희권, 2003, 백제 한성기 도성제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백제도성 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의 도성은 통칭으로 위례성 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북성 풍납토성과 남성 몽촌토성의 도성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이도 학, 1992, 앞의 글, 36~38쪽). 그리고 371년 漢山移都 기사를 군사방어적 성격을 가진 남성 [몽촌토성]으로 옮긴 것으로 이해하고 몽촌토성을 한산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2002, 앞의 글, 14~15쪽). 한편 원문의 王引軍退 移都漢山 을 王引軍 退移都漢山 으로 끊어 읽고 이를 왕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 한산으로 물러났다. 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17쪽). 이 해석대로라면 근초고왕은 도읍을 옮기지 않은 것으로 된다. 그러나 본서와 삼국유사 에 근 가을 7월에 靑木嶺320)에 성을 쌓았다. 禿山城321)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 났다.322) 30년323)(375)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水谷城324)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325) 초고왕이 비록 일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오고 있으므로 이러한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319) 晉나라 : 東晋을 가리킨다. 317년에 西晉이 前趙에 의해 멸망하자 元帝가 강남의 建康(지금의 남 경)에 도읍하여 성립되었으며, 420년에 宋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근초고왕은 동진 簡文帝로 부터 鎭東將軍 領樂浪太守라는 관작을 제수받았다( 晉書 권9 帝紀 簡文帝 咸安 2년 참조). 중 국 사서에 백제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처음이다. 이제는 伯濟國王으로서 북부 마한연맹의 영 도권을 행사하는 馬韓主 가 아니라 마한 전체를 대표하는 백제왕 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 이다. 372년 백제가 동진과의 첫교섭을 통해 동아시아에 그 공식적인 국가 실체를 드러낸 것으 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320) 靑木嶺 :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0년(B.C.9)조에는 청목산이 나온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條에서는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였고, 安鼎福은 東 史綱目 第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條에서 開城 金川 경계의 靑石洞(현재의 경기도 開豊 郡 嶺南面 天摩山)으로 개성에서 북으로 12km 올라간 금천과의 경계인 청석동으로 보았다. 이 와는 달리 永平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李丙燾, 1976, 앞의 책, 355쪽)도 있다. 본서 권23 주 54)를 참조할 것. 321) 禿山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1년(B.C.8)조에는 禿山柵이 나온다. 독산성 또는 독산책 은 樂浪 高句麗와 접경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방면의 어느 곳으로 생각되나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를 경기도 華城郡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376쪽), 지리상으로 보아 맞지 않는다. 322) 독산성 성주가 신라로 달아났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奈勿尼師今 18년(373) 조에 나온다. 여기에는 백제왕이 독산성주를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내었으나 신라 가 이를 거절하였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323) 30년 : 근초고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丙午立 理二十九年 으로 나와 본 기사와는 1년의 시간차가 있다. 324) 水谷城 : 현재의 황해도 新溪郡 多栗面이다. 신라 한주 永豊郡 檀溪縣의 고구려 때 지명.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한주 檀溪縣조에 本高句麗水谷城縣 景德王改名 今俠溪縣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황해도 新溪縣 古蹟조에 俠溪廢縣 在縣南三十里 本高句麗水谷城縣

47 92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 93 나온 적이 없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옛 기록(古記)326)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을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博士327) 329) 高興328)을 얻어 비로소 書記 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권24 百濟本紀 2 近仇首王330) <*이름을 須라고도 부른다.>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國岡王 斯由(고 국원왕)331)가 친히 쳐들어오니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半乞 壤332)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는데, 고구려 사람 斯紀333)는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왕이 一名買旦忽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325) 고구려가 북쪽 변경 함락시켰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5년(375)조에는 七月 百濟攻水谷城 이라 하여 공격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함락된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326) 옛 기록(古記) : 김부식이 본서를 편찬할 때 기본 원전으로 참조한 책으로 삼국사기 에 인용된 횟수는 16번이다. 東人之文四六 권10에 수록된 進表 에는 故范曄漢書 宋祁唐書 皆有列傳 以詳內略外 不以具載 又其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이라 한 기사에 의거할 때 김 부식은 우리 나라 기록을 古記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기를 고려초에 편찬된 삼국사 를 지칭하는 하나의 사서로 보는 견해가 있다(정구복, 1995, 삼국사기의 원전자료,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5~18쪽). 본서에 보이는 古記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는 李 康來, 1996, 典據論, 민족사를 참조할 것. 327) 博士 : 백제 관제의 하나로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국가적 교육기관의 교수직이었을 것이다. 일 본서기 권10 應神紀 15년조에 박사 王仁이 보이고, 같은 책 권17 繼體紀 7년(513)조에는 五經 박사 段楊爾가, 10년(516)조에는 五經박사 高安茂가, 같은 책 권19 흠명기 14년(553)조에는 醫 박사 易박사 曆박사 등이, 권21 崇峻紀 원년(588)조에는 露盤박사 瓦박사 등이 보인다. 이 에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박사는 유교 경전에 밝은 학자에게 뿐만 아니라 醫 易 등 雜業 및 기 와 등 기술업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자에게도 수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금석문 상에서 는 신라의 경우 법흥왕 11(524)에 세워진`蔚珍鳳坪新羅碑a에 博士가 나온다. 328) 高興 : 백제 근초고왕대의 학자로 書記 를 편찬한 것 외에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출신 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역사서를 편찬할 정도로 유학에 밝고 또 高氏라고 하는 중국식 姓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낙랑이나 대방군 계통의 한인관료일 가능성이 높다. 근초고왕 이 대방지역을 공략할 때 그곳에 거주하던 유교적 소양과 학술 및 기술에 능통한 인재들을 이주 시켜 중앙집권국가의 체제 정비에 크게 활용한 바 있다. 329) 書記 : 백제의 역사책으로 근초고왕대에 박사 高興이 편찬하였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서기 가 편찬된 시기는 백제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 발전을 이루던 시기이다. 따라 서 서기 는 이전의 여러 부족이나 가문의 전승과 역사를 초고계를 중심으로 재정리하여 중앙집 권적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강화된 왕권과 정비된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서기 는 역사서가 아니라 공식적인 문서 기록이 이때부 터 시작되거나 문자 기록이 이때부터 있었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이 서기 는일 본에도 영향을 주어 일본서기 가 편찬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 백 외, 1976, 우리 歷史를 어떻게 볼 것인가, 韓國史大討論 1, 三星文化文庫 88, 11 21쪽 ; 이 기동, 1983, 古代國家의 歷史認識, 韓國史論 6 韓國史의 意識과 敍述, 6 7쪽). 330) 近仇首王 : 백제 제14대 왕. 근초고왕의 장자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근구수왕의 명칭 은 仇首王에 近 字를 앞에 붙혀 만든 것인데, 이는 근초고왕이 초고왕에 近 자를 앞에 붙혀 만 든 것과 함께 肖古-仇首로 이어지는 이른바 肖古系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음을 과시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근구수왕의 이름은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56년조에는 貴須 로, 같은 책 권19 흠명기 2년조에는 貴首王 으로, 신찬성씨록 右京 諸蕃 下에는 近貴須王 으로 나온 다. 그리고 일본의 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七支刀 명문 중의 百濟王世 (子?)奇生聖音 에 나오는 奇生 은 태자 근구수에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百濟七支刀考, 韓國古代史 硏究, 박영사, 쪽). 그의 이름 貴須는 須 로 축약되어 사용된 예가 본서 권25 백제 본기 개로왕 20년조의 臣祖須整旅電邁 라 한 기사에 나온다. 근구수왕은 태자 때부터 고 구려와의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군사권 운용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하였다. 그는 내정에 대해서는 외척인 眞高道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자 신은 병마권과 외교권을 관장하여 고구려와의 전투를 주도해 나갔다. 331) 國岡王 斯由 : 고구려의 제18대 왕인 故國原王의 다른 이름. 본서 권17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즉 위년(231)조에 故國原王 一云國上王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斯由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일명 釗라고 하였다. 369년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 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4 주 311)을 참조할 것. 332) 半乞壤 : 현재의 황해도 白川郡에 비정된다. 半乞을 밝을 로, 壤을 내 로 읽는다면 半乞壤은 밝은 내 가 되어 白川과 통하게 된다. 현재의 白川은 고구려 시기의 雉壤이므로 半乞壤은 치양 의 별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白川이란 지명도 밝은 내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이병도, 1983, 국역 삼국사기(하), 을유문화사, 35쪽). 반걸양전투는 근초고왕 24년조의 치양전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면 반걸양은 치양의 별칭이 되는 셈이다.

48 94 95 타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 고구려로 도망 338) (고려)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 이라고 부른다.339)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태자 하였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가 왕위에 올랐다. 저쪽의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거짓 군사(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2년(376) 왕의 장인 眞高道를 內臣佐平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쳐들어왔다.340)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고는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水 谷城334)의 서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장군 莫古解335)가 간하여 말하였다. 336) 일찍이 道家 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337) 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은데, 어찌 기필코 많은 것을 구합니까? 않다. 태자가 그 말을 옳다고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는 이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 를 수 있을까? 라고 말하였다. 그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마치 말발굽 같아 사람들이 지금 333) 斯紀 : 백제 근초고왕대의 인물. 國用으로 쓰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한 죄로 고구려로 도망갔다 가 되돌아와서 왕자 근구수에게 고구려군의 허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의 군 대를 평양성에서 깨뜨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斯紀의 斯 가 음운상 沙 와 통한다고 하 면 그는 沙氏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성씨인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334) 水谷城 : 현재의 황해도 新溪郡 多栗面이다. 고구려 때의 명칭은 水谷城縣 또는 買旦忽, 신라 때 의 명칭은 檀溪縣, 고려 때의 명칭은 俠溪縣이었다. 앞의 주 324)를 참조할 것. 335) 莫古解 : 근초고왕대 태자 근구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6년조의 莫古와 동일인으로 볼 경우(이홍직, 1987,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355쪽), 그는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백제의 가야 진출과 왜와의 통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확인된다. 일본서기 에 동명이인이 나오고 있는데, 內頭 莫古解 (권15 현종기 3년 是歲), 鼻利莫古 (권19 흠명기 4년 12월), 東城子莫古 (동 15 년 2월)는 莫古라는 공통적인 인명으로 보고 있다. 336) 道家 : 先秦시대에 老莊 일파의 虛無 無爲의 說을 따른 학자의 총칭. 중국에서 유가와 더불어 二大 학파를 이루었다. 道家사상은 老莊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철학사상으로, 자연의 실상을 추 구하고 참지혜를 통해 無爲의 삶을 추구한 사상 경향을 말한다. 한국 고대의 도가사상에 대해서 는 車柱環, 1978, 韓國道敎思想硏究,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를 참조할 것. 337) 만족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 이 말은 老子의 道德經 제44장에 나오는데, 全文은 다 음과 같다.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 殆. 338) 태자의 말발자국 : 이 사적은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황해도 신계지방을 통과하면 서 직접 견문한 바를 채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94, 4세기 정복국가론에 대한 검토, 한국고대사논총 6, 248쪽). 339) 國岡王 斯由(고국원왕)가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 이 기사는 태자 근구수가 고구 려와의 전투에서 탁월한 군사 지휘능력을 발휘하여 큰 전과를 올릴 정도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 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어떤 점에서는 근초고왕보다도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보 여준 영웅적인 무용담을 크게 강조하여 서술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신라의 于老 설화(이기 동, 1986, 우로전설의 세계,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63~201쪽)와 같은 영웅 설 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면에서는 백제의 몇 안되는 영웅설화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장군 막고해의 간언을 듣고 고구려군 추격을 중지한 점, 치양전투에서 승리 후 획득한 고구려군 포로 5천여 명을 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분배한 점 등에서 영웅 설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설화는 본디 황해도 신계 지방에 유포되어 있던 민간전승으로 보이는 데, 이와 유사한 전승이 일본에도 유포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일본서기 권11 인덕기 53년 하5월조에 나오는 田道說話가 바로 이런 근구수 설화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佐伯有淸, 1957, 上毛野氏の性格によせて, 日本歷史 116 참조). 즉 주인공 근구수-田道, 본래 백제인 斯紀잡혀온 신라 군졸, 고구려의 赤旗軍-百衝의 군대로 대응시켜 볼 때 전도설화는 근구수 설화와 같은 모티브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전도설화는 백제계 이주민들에 의해 일본 사회에 도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이러한 근구수의 영웅설화가 크게 부각된 이유는 무엇 일까? 특히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패사시킨 일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에 백제사상 최대의 판도를 갖게 된 일과 함께 당대인은 물론 후대 백제인들에게는 백제의 영광 을 구현한 일로 기억되고 추념될 만한 무용담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이후 백제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받아 한성함락과 같은 일대 난국을 당할 때마다 자연히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에 이룩한 백제의 영광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 라서 후대의 백제인들은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될 때마다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로 회귀 하여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였을 것이다. 백제 성왕이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 백 제와 가야 제국이 子弟 로 표현될 정도로 서로 우호관계를 맺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서 기 권19 흠명기 2년 4월) 가야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데 하나의 명분으로 활용한 일이 참고가 된다. 근구수의 영웅설화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7, 백제 근구수왕의 대외활동과 정치 적 지위 -고구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백제논총 6, 41~46쪽을 참고할 것.

49 96 3년(377)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平壤城341)을 쳤다.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왔다.342) 5년(379) 봄 3월에 사신을 晉나라에 보내 조공하려 하였는데, 그 사신이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에 하루 종일 흙비가 내렸다. 6년(380)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여름 5월에 땅이 갈라져 깊이 5丈, 너비 3丈이나 되었는데, 3일 만에 합쳐졌다. 97 권24 百濟本紀 2 枕流王345)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阿爾夫人346)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에 사신을 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胡僧347) 摩羅難 348) 가 진나라에서 오니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시고 예우하며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349) 2년350)(385) 봄 2월에 漢山에 절을 세우고 1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8년(382) 봄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으므로 왕이 나라의 곡식을 내어 그것을 물러주었다. 10년343)(384) 봄 2월에 햇무리(暈)344)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 혔다.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340)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쳐들어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6년(376)조 에 나온다. 341) 平壤城 : 여기서 평양성은 후에 고구려 3경 중에서 남경에 해당하는 황해도 신원의 남평양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76~183쪽). 남 평양은 현재 신원군 신원읍의 동부와 그 동쪽의 아양리 월당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근 초고왕은 3년(377)에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7 년 동 10월조에 나온다. 앞의 주 315)를 참조할 것. 342)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7년(377) 11월조에 나온 다. 343) 10년 : 근구수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癸亥立 理九年 이라 하여 본 기 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344) 햇무리(暈) : 해나 달의 주위에 때때로 보이는 백색의 둥근 테. 잘 발달하면 內側은 홍색을 띠고 外側은 황색을 띤다. 구름을 이루는 아주 작은 물방울이나 어름알에 광선의 반사와 굴절의 작용 으로 일어나는 광학적 현상이다. 진서 권12 천문조에 의하면, 햇무리는 군주의 도가 밝음을 잃으면 음양이 혼미하고 臣의 음모가 발생한다 고 하여 君道가 失明하거나 不德이 초래하는 하 늘의 견책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백제의 사정을 보면 햇무리가 3중으로 둘러졌고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힌 것은 근구수왕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구징으로 보인다(이희덕, 1999, 앞의 책, 154~155쪽). 이 災異 기사는 중국측 사서에도 기록되지 않는 백제의 독자적인 기록으로 볼 수 있다. 345) 枕流王 : 백제 제1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근구수왕의 장자로 어머니는 阿 부인으로 眞氏출신 여자였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동진으로부터 수용하여 이를 공인하 였다. 346) 阿爾夫人 : 근구수왕의 비. 근구수왕의 장인이 眞高道이라는 사실에서 眞氏출신임을 알 수 있 다. 阿는 阿爾兮 阿尼 등과 같은 말로서 여성을 표시하는 우리의 古語로 생각된다. 梵語에서 女僧을 阿尼라고 부르는데(孫穆의 鷄林類事 에 尼曰阿尼 라 한 기사 및 李弘稙, 1975, 新羅 僧官制와 佛敎政策의 諸問題,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만일 이 阿가 梵語의 차용이 라면 이 阿는 침류왕 때의 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이병도, 1977, 國譯 三國 史記, 378쪽의 주 1). 347) 胡僧 : 胡僧이 어느 지역 출신의 승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摩羅難 란 이름으로 미루어 보 아 印度 승려로 동진에 건너와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이상호, 1960, 삼 국유사, 과학원출판사, 289쪽 주 1). 348) 摩羅難 : 東晉에서 백제로 건너와 불교를 전한 승려이다. 그가 개인 자격으로 왔는지 아니면 동진 국왕의 부탁에 의해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가 백제에 건너오자 침류왕이 宮內로 맞아들여 禮敬을 한 것을 보면 2개월 전에 동진에 파견된 백제의 사자와 동행하여 왔거나 혹은 동진의 사신을 따라 왔을 가능성이 크다. 349)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불교가 이 시기에 공인된 것을 말한다. 동일한 내용이 삼국유 사 권3 興法篇 難闢濟條에 보인다. 다만 삼국유사 에는 佛寺를 창건한 지역에 대해 明年乙酉 創佛寺於新都漢山州 라 하여 본 기사의 漢山을 新都 漢山州로 표기하고 있음이 다르다. 백제는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이념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50) 2년 : 침류왕의 재위 기간이나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는 甲申立 이란 기사만 있고 재위 기간 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50 98 권25 百濟本紀 3 辰斯王351)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침류왕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어 질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었는데,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 352) 다. 2년(386) 봄에 나라 안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지키는 관방을 설치 하였는데, 靑木嶺353)에서부터 북쪽으로는 八坤城354)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 99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왔다.356) 3년(387) 봄 정월에 眞嘉謨를 達率로 삼고 豆知를 恩率로 삼았다. 가을 9월에 말갈과 關彌嶺357)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년(389) 가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358) 6년(390) 가을 7월에 살별(혜성)이 北河 별자리359)에 나타났다. 다.355) 351) 辰斯王 : 백제 제1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침류왕의 동생으로서 뒤이어 즉위한 아신왕(392~405)의 숙부에 해당한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 에 맞서 여러 차례 싸웠으나 패배하여 관미성 등을 상실하였다. 晉書 권9 孝武帝紀 太元 11년 (386)조에는 百濟王世子餘暉 가 보이는데, 太元 11년은 진사왕 3년에 해당되므로 비록 王世 子 라는 표현은 있어도 餘暉는 진사왕에 비정해 볼 수 있다. 352)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 본서 권25 진사왕 즉위년조에는 숙부 진사가 어린 조카를 대신하 여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태자가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수행해 나갈 능력이 없 을 경우에 왕통의 단절을 막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형제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9 神功紀 섭정 65년조에는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 王 이라 하여 진사왕은 어린 조카 아신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여주고 있 다. 진사는 강용하고 총명하였으며 지략 또한 많았던 인물인 점을 고려해 볼 때 형 침류왕이 2 년만에 단명하고 조카 아신이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왕위를 찬탈한 것 으로 판단된다. 진사에 의한 왕위찬탈 배경을 침류왕의 불교공인에 따른 지배세력 사이의 갈등 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노중국, 1983, 앞의 책, 132~133쪽)와 같은 입장에서 침류왕 이 진사에 의해 폐위된 것으로 보는 견해(문안식, 2006, 앞의 책, 168쪽~170쪽)가 있다. 그러 나 침류왕이 재위 2년만에 단명하였고, 또 일본서기 에 분명히 왕자 아신이 연소하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불교 공인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던 사실로 보는 견해는 따르기 어렵다. 353) 靑木嶺 : 개성에서 북으로 12km 올라간 금천과의 경계인 靑石洞(현재의 경기도 開豊郡 嶺南面 天摩山)에 비정된다(安鼎福은 東史綱目 第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 新增東國輿地勝 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조에서는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본서 권23 주 54) 및 권24 주 320)을 참조할 것. 354) 八坤城 : 팔곤성을 마식령산맥의 동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천의 개연산 부근으로 추정한 견해 가 있다(문안식, 2006, 앞의 책, 170~171쪽). 개연산은 멸악산맥(개연산~장산곳)과 마식령산 맥(개연산~풍덕)이 분기되는 곳이다. 355) 나라 안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 진사왕은 고구려 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靑木嶺(개성 청석령)에서 북쪽 변경지역인 八坤城에 이르는 지역과 서 해안의 예성강 하구에 이르는 곳까지 15세 이상의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관방 시설을 설치하 였다. 이곳은 근초고왕 30년(375)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의 북변 水谷城(황해도 신계) 이남 지역이었다. 진사왕 즉위초의 백제 북쪽 경계선은 대략 평산 토산을 잇는 예성강 남안 일대에 걸쳐 있었던 반면 고구려는 신계 금천쪽에 관방을 설치하여 백제와 대치한 것으로 드러났다(오 순제, 1995, 한성 백제사, 집문당, 221쪽). 관방은 장성의 형태가 아니라 마식령산맥의 주요 전략적 요충에 해당하는 고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설치되었다(문안식, 2006, 앞의 책, 170~171쪽). 356)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故國壤王 3년(386)조에 나온다. 357) 關彌嶺 :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여기서 말갈은 평강 이동지방의 동예의 한 지파로 보인다. 이 말갈의 침입은 고구려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58) 왕이 군사를 보내 약탈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6년(389)조 에는 百濟來侵 掠南鄙部落而歸 로 나온다. 359) 北河 별자리 : 雙子座의 세 별을 말하는데, 물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쌍둥이자리 β의 고유명은 Pollux라고 부르는데, 그 대략적인 위치는 赤經 7h 42m, 赤緯 이다. 眼視 등급 1.2등, 스펙트럼형 Ko의 적황색 巨星이며, 표면온도는 약 4,000, 거리는 35광년이다. 매초 약 3km 의 속도로 태양계에서 멀어지고 있다. 쌍둥이자리 α인 카스토르와 더불어 그리스신화의 쌍둥이 의 형상을 이루는데, 한국과 중국에서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합쳐서 北河라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晉書 권11 지 1 天文 상에 天高西一星曰天河 主察山林妖變 南河北河各三星 夾東井 一曰天高 天之關門也 主關梁 南河曰南戍 一曰南宮 一曰權星 主火 北河曰北戍 一曰北宮 一曰陰 門 一曰胡門 一曰衡星 主水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송서 권25 천문 3 효무제 태원 15년 7 월 임신조에는 혜성이 北河戒에 나타나 太微 三台 文昌을 거쳐 북두성에 들어갔는데, 길이 는 19여장이었다. 는 기사가 있다. 이 혜성이 나타났다는 北河戒는 胡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는 곧 兵喪이 있을 것임을 예견하는 조짐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예견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1 100 9월에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쳐서 都坤城360)을 빼앗고 200명을 사 로잡았다.361) 왕이 眞嘉謨를 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1 고 나가서 막지 못해 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이 많이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關彌城368)을 쳐서 빼앗았다.369)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 겨울 10월에 狗原362)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7년(391) 봄 정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으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특이한 화초를 길렀다. 여름 4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의 赤峴城363)을 쳐서 함락시켰다.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의 큰 섬364)에서 사냥하였는데,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아 맞혔다. 8월에 또 橫岳365)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8년366)(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 서 石峴城367)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 360) 都坤城 :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개성에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이천의 개연산 부 근의 요충지로 추정된다. 본서 권6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7년(390)조에는 都押城으로 나온다. 361) 고구려를 쳐서 200명을 사로잡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7년 (390)조에 나온다. 362) 狗原 : 현재 경기도 양주군 풍양에 비정된다(酒井改藏, 1970, 地名考, 朝鮮學報 54, 46쪽). 한성시대에 백제 왕실의 주요 전렵지의 하나였다. 363) 赤峴城 : 현재의 위치는 영평으로 보는 견해(酒井改藏, 1970, 地名考, 朝鮮學報 54), 회양으로 보는 견해(김종권 역, 1963, 삼국사기, 선진문화사, 413쪽)가 있으나, 구체적 위치는 알 수 없다. 364) 서쪽의 큰 섬 : 강화도에 비정된다. 본서 권24 고이왕 3년(236)에도 이곳에서 왕이 전렵 행사를 실시한 바 있다. 365) 橫岳 : 현재의 서울시 三角山에 비정된다. 大東地志 漢城府 山水條에 의하면 삼각산을 負兒 嶽 또는 橫岳 云山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7년(309)에 이곳 에서 田獵을 하고, 11년(402)에 祈雨祭를 지낸 사례에서 미루어 볼 때 橫岳은 漢城시기에 국가 에서 제사를 지내던 神聖之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도읍기에 백제 왕실에서 거행하는 주요 전렵지로는 부산(평택 진위) 이외에 횡악(북한산) 서해대도(강화도) 狗原(경기도 양주 풍 양)이 있었는데 모두 왕도 근처에 위치한다. 366) 8년 : 진사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乙酉立 治七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는 1년의 차이가 난다. 367) 石峴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석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있던 성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27, 高句麗滅亡後遺民叛亂及び唐新羅 關係,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2, 東京帝國大學文學部), ②황해도 곡산 서남 20리로 보는 견 해(김정호, 대동지지 권18 곡산), ③현재의 경기도 開豊郡 靑石洞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國譯, 380쪽) 등이 있다. 석현성은`광개토왕릉비문a의 영락 14년 대방계 전 투에 나오는 石城 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능비문에 連船 이란 구절로 보아 본서 권25 아신 왕조에 나오는 393년 關彌城 전투와 같은 곳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능비문의 영락 14년 전투는 백제가 393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과 석성을 되찾기 위해 왜병과 함 께 수군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인 것으로 이해된다. 368) 關彌城 : 백제의 북방 요충지.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이 관미 성은 광개토왕릉비 에 보이는 閣彌城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광개 토왕 즉위년(391)조에는 其城四面絶 海水環繞 로 나온다. 이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임진 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烏頭山城說(金正浩, 大東地志 권3 교하 성지 ; 윤일녕, 1990, 관미성 위치고, 북악사론 2, 쪽), ②강화 교동도의 華蓋山城說(이병도, 1977, 앞의 책, 380쪽), ③강화도 河陰山城說(신채호, 1982,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전집(상) ; 윤명철, 2003, 고구려 해양사연구, 사계절, 174쪽), ④고양시 중흥동 廢山城說 (한백겸, 東國地理 志, 新羅所倂 形勢 關防 관미성), ⑤白川郡 味浦說(酒井改藏, 1955,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 いて, 朝鮮學報 8, 51쪽), ⑥개성 부근의 關彌嶺說(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 출판사, 174~ 175쪽) ; 이도학, 1990, 백제 관미성에 관한 일고, 가야통신 합집), ⑦개풍군 백마산 부근설(손영종, ,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영역, 력사과 학, 297쪽) 등이 있다. 그런데 391년 전투에서 고구려가 백제의 석현성을 거쳐 관미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있으며, 이듬해에 백제가 左將 眞武를 보내 석현성 등 5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공격한 일에 비추어 볼 때 관미성과 석현성은 거리상 인접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임을 알 수 있다. 관미 성은 사면이 깎아지듯 가파르고 서해에 연한 지역에 있는 수로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조건을 고려해 볼 때 관미성은 예성강 이남의 내륙지역보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오두산성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고구려가 관미성을 확보할 경우 수군을 동원하여 서 해에서 강화도를 거쳐 한강에 이르는 경기만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백제는 이 제 관미성의 상실로 인하여 고구려의 수군으로부터 배후 측면에서 불시에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안보상 취약점을 갖게 된 것이다. 백제가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관미성을 상실함으로써 고 구려로부터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왕도 한성이 군사적 압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까 지 직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백제는 대고구려전에서 관미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할 필요가 생 겼다. 백제는 관미성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393년 좌장 진무가 거느린 1만 명의

52 102 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狗原의 行宮370)에서 죽었다.371) 103 권25 百濟本紀 3 阿莘王372) <*阿芳이라고도 부른다.> 침류왕의 맏아들이다.373) 처음 漢城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장성해서는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다가 8년 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374) 군사를 관미성 수복작전에 투입한 적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369) 고구려가 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즉위년 (391)조에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이라 하여 고구 려군이 7道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만에 함락시킨 것으로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는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광개토왕릉비a에는 관미성이 광개토왕이 永樂 6년(396)에 백제를 쳐 서 함락시킨 58성 중의 하나로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연대 차이는 광개토 왕릉비 에서 광개토왕의 백제정복 업적을 永樂 6년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 로 생각된다. 이는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을 특정한 시기에 집약시켜 그 전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武田幸男, 1979, 高句麗廣開土王紀の對外關係記事, 三上次男 博士頌壽記念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271~273쪽 ; 이기동, 198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 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백제연구 17, 49~52쪽). 370) 行宮 : 왕이 거둥할 때 머무는 곳으로 行在所라고도 한다. 진사왕은 전렵을 좋아하여 구원에 임 시 행궁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371)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 진사왕의 죽음에 대해 일본서기 권10 應神紀 3년조에는 是歲 百濟 辰斯王立之 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 羽田矢代宿 石川宿 木 宿 讓其无禮狀 由 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 等便立阿花爲王而歸 로 나온다. 삼국사기 는 진사왕이 구원 에서 사냥을 하다가 행궁에서 죽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서기 에서는 진사왕 이 살해당한 것으로 서술해 놓고 있다. 일본서기 에서는 진사왕이 살해당한 이유를 즉위 후 왜 천황에게 무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천황이 백제왕의 무례에 대해 일정한 징벌 을 가한다는 서술 태도는 일본서기 의 천황 중심 사관이 반영된 상투적인 것으로서 사실 그대 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다만 진사왕이 피살당하고 이어 阿花王 즉 아신왕이 즉위한 사실 만큼 은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진사왕을 살해하고 아신왕을 옹립한 세력으로는 紀角宿 로 대표되는 목씨세력(紀氏세력을 목씨세력과 관련시켜 보는 견해는 이홍직, 1971,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347쪽 ; 김현구, 1993, 임나일본부 연구, 일조각, 77쪽 참 조)이 관여했던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따라서 진사왕의 죽음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모종의 정변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진사왕이 의문의 죽음을 즉위과정에서의 문제와 재위과정에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통치 행위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강종원, 2002, 앞의 책, 141 쪽). 이처럼 진사왕이 피살된 이유는 관련 사료의 제약으로 알 수 없지만, 관미성 패전에 따른 사후 수습책과 관련하여 지배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년(393) 봄 정월에 東明廟에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眞武375)를 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진무는 왕의 國舅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진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關彌城376)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寡 372) 阿莘王 : 백제 제17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아신의 이름 에 대해 본 기사의 세주와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阿芳 으로, 일본서기 권9 신공기 攝政 65 년 및 같은 책 권10 應神紀 3년조에는 阿花王 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阿華王이 옳을 것 같 다.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내 왜와의 우호를 돈독히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많은 성 촌을 빼앗 기고 大臣과 將士 10여 명을 인질로 보내고 細布 1천 필을 바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373)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阿莘王 一作阿芳 辰斯子 라 하여 본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374) 8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 진사왕의 실정과 고구려에 대한 연이은 패전에 반대하는 일부 귀족 세력들이 진사왕을 구원행궁에서 살해하고 아신왕을 옹립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아신은 숙 부 진사왕의 찬탈로 빼앗긴 왕위를 되찾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아신왕은 내정은 왕족, 군 사권은 진씨 및 사씨세력에게 위임하므로써 상호 견제를 통해 왕권의 안정을 이루려 하였으나, 외척 진씨세력의 독주를 막는데는 실패하였다. 아신왕은 장인 진무를 앞세워 광개토왕의 남정으 로 상실한 예성강유역에 대한 실지 회복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아신왕이 실지 회복을 적극 추 진한 것은 진사왕을 죽이고 즉위한 권력획득의 정당성과 직결된 문제로 볼 수 있다(문안식, 2006, 앞의 책, 181쪽). 아울러 즉위 과정에서 대립과 정치적 갈등을 겪었던 지배세력을 왕권 중심으로 결속시키기 위한 의도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375) 眞武 : 왕의 외척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아신왕 2년에 左將 에 임명된 사례에 주목하여 진무가 진사왕을 살해하는 정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노중국, 1983, 앞의 책, 150쪽). 376) 關彌城 : 앞의 주 368)을 참조할 것.

53 104 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진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치르기로 하였다. 진무 105 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倭國382)과 우호를 맺고383) 태자 支를 볼모로 보냈다.384) 가 몸소 군사들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石峴城 등 5개의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진무는 군량 수 송이 이어지지 않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377) 3년(394) 봄 2월에 맏아들 支378)를 태자로 삼고, 크게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이복동생 (庶弟) 洪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와 水谷城379)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금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4년(395) 봄 2월에 살별(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에 왕이 左將 眞武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談德(광 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웠는데, 우리 군사 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380) 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한수를 건너 靑木嶺381) 밑에서 머물렀는데,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漢山城 377) [진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년(392)조에는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이라 하여 간략히 나온다. 378) 支 : 아신왕의 맏아들로 태자로 책봉된 후 397년 왜국에 인질로 파송되었다가 405년 아신왕 이 죽자 왕위를 잇기 위해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 도중에 동생 설례가 왕위를 찬탈하자 한성인 해충을 중심으로 한 전지 지지파가 설례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379) 水谷城 : 현재의 황해도 新溪郡 多栗面이다. 고구려 때의 명칭은 水谷城縣 또는 買旦忽, 신라 때 의 명칭은 檀溪縣, 고려 때의 명칭은 俠溪縣이었다. 본서 권24 주 324) 및 334)를 참조할 것. 이 전투기사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에 392년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25 백제본기에는 394년 으로 되어 있어 1년 차이가 난다. 380) 고구려 왕 談德이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 패수가 전투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에 394년 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25 백제본기에는 395년이어서 1년 차이가 난다. 381) 靑木嶺 :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靑木山과 연관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條에서는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였고, 安鼎福은 東史綱目 第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條에서 開城 金川 경계의 靑石洞(현재의 경기도 開豊郡 嶺南面 天摩山)으로 개성에서 북으로 12km 올라간 금천과의 경계인 청석동으로 보았다. 이와는 달리 永平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355쪽)도 있다. 본서 권23 주 54) 및 권24 주 321)을 참 조할 것. 382) 倭國 : 삼국지 권30 동이전 倭傳에 의하면 倭는 수십개의 小國으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 漢나라 때에는 100여국이 한나라와 통하였고, 중국 삼국시대의 魏나라와는 30여국이 통하 였다. 이러한 倭聯盟體에서 3세기 중엽경의 맹주국은 邪馬臺國이었다. 이 邪馬臺國의 위치에 대 해서는 奈良지방으로 보는 설과 北九州 지방으로 보는 설이 있다. 5세기대에 와서 宋書 권97 倭傳에 讚-珍-濟-興-武 라고 하는 이른바 왜의 5王이 중국 南朝의 宋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 으로 나온다. 왜와 백제와의 접촉 관계는 日本書紀 권9 신공기 섭정 46년조에서 50년조에 처 음으로 보이는데, 특히 52년조에는 백제가 七枝刀 七子鏡 및 여러 종류의 보물을 왜에 보낸 것 으로 나온다. 이 七枝刀는 현재 일본의 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七支刀와 같은 것으로 보인 다. 그 명문에 의하면 백제의 왕세자 奇生聖音이 倭王에게 百鍊鋼鐵로 만든 七支刀를 하사한 것 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의 왕세자는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구수로 추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百濟七支刀考,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七支刀의 연대와 그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 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李進熙, 1978, 廣開土王陵碑と七支刀, 學生社 ; 佐伯有淸, 1978, 七支刀と廣開土王碑, 吉川弘文館 등을 참조할 것. 이렇게 백제는 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필요시 군사동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광개토 왕릉비a에 倭軍이 고구려와 싸우는 것이 나오는데, 이는 백제의 요청에 따라 파견된 왜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광개토왕능비문a에 보이는 왜병의 실체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는 현재 기존의 大和政權說 이외에 북구주의 왜인설 ①북구주설은 다시 백제계 왜국설(金錫亨, 1966,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297쪽), ②북구주일대의 해적집단설(王健群 임동석 역, 1985, 광개토왕비연구, 역민사, 236쪽), ③북구주 친백제설(천관우, 1980, 광개 토왕릉비문 재론, 전해종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559~561쪽)로 나뉘어진다. 그밖에 ④ 한반도 남부 왜인설(井上秀雄, 1973, 任那日本府と倭, 東出版 寧樂社, 119쪽) 등이 있다. 왜의 실체에 대한 여러 설의 대해서는 연민수, 1998,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95~98쪽 및 2003, 고대한일교류사, 혜안, 145~147쪽을 참조) 등 여러 설이 제기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기내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수장연합설(鈴木靖民, 1988,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68~69 쪽 ; 연민수, 1998, 앞의 책, 95~98쪽 및 2003, 앞의 책, 145~147쪽을 참조) 용병설(金鉉球, 1985,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 吉川弘文館, 47~55쪽 ; 김태식 송계현, 2003, 韓國의 騎 馬民族論,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5~206쪽) 등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출병한 왜세력 문제는 어느 한쪽의 단선적인 이해로만 해명될 수는 없다. 북구주의 왜인설은 당시 일본 열도에 아직 정치적 통일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시각에서 제기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일본열도 내에 권력 중심을 대화정권으로 보고 대화정권의 군사력이 한반도에 대거 출병하여 그 남부지역에 군사지배권을 가질 정도로 보는 시각도 성립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왜 를 북구주 일대의 세력이나 또는 이 일대에 근거를 둔 단순한 해적집단으로만 볼 수 없다. 영락

54 106 10년(400) 작전때 고구려군이 보기 5만 명의 정규군을 동원해서 신라에 침공하던 왜세력을 크 게 공파하고 있는데, 이때의 왜세력을 단순한 해적 수준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용병설은 왜 의 신흥세력이 畿內의 중심세력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야로부터 위세품과 철소재를 수입하 고 김해의 가락국은 가야연맹 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의 군사력을 이용한 것으로 보았다. 즉 대대적인 규모의 왜인 용병과 가야 工人의 교환이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설들은 405년 전지왕과 479년 동성왕 즉위시에 호송 역할을 한 왜인의 존재나 또는 5세기 후반 왜의 5왕이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대송외교를 전개한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단지 북구주지역으로 한정하거나 또는 용병의 차원에서만 설명되 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백제의 선진문물의 공급과 왜의 군사적 협력관계로 이루어진 백제와 왜 의 용병관계는 6세기 이후로 설정할 수 있다(김현구, 1985, 앞의 책, 47~55쪽). 당시 일본열도 는 6세기 이전까지 아직 통일 정권이 수립되지 못하고 각 지역 단위의 수장층이 병립하는 연합 정권시대였다. 예컨대 김해 대성동유적과 일본 河內지방 고분군에서 출토된 외래 유물들을 가야 와 왜 사이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는 점(河村好光, 1995, 海おわたつてき た鏃形碧玉製品, 考古學硏究會40週年記念論集-展望考古學, 考古學硏究會 ; 鈴木靖民, 1995, 加耶の鐵と倭王權, 日本古代國家の展開(上), 思文閣 ; 朴天秀, 2002, 고고자료를 통 해 본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상호작용, 한국고대사연구 27, 91쪽), 현해탄의 중간에 위치한 沖の島 제사유적이 4세기 후반 이후 大和政權과 관련이 있다는 점(1978, 宗像 の島(本文篇), 吉川弘文館), 그리고 前方後圓墳이나 同范鏡의 분유관계 등을 통해 볼 때(小林行雄, 1961, 古 墳時代の硏究, 靑木書店) 당시 畿內의 大和나 河內세력이 중심이 되어 吉備나 큐슈의 중 북부 지역의 서부일본 수장층간의 동맹 연합체제를 이룬 시대로 보는 견해들이 참고된다. 383) 왜국과 우호를 맺고 : 이같은 사실은`광개토왕릉비a에는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으로 나 온다. 왜는 이미 영락 9년(399) 이전에 백제와 모종의 협력관계를 맺고 백제를 도왔던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즉 백제가 고구려의 396년 백제원정 결과 굴복하고 일시적이나마 고구려 세 력권에 歸王 형태로 귀속되었을 때 고구려는 항복의 조건으로 백제가 왜와 단교하는 조건을 내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영락 6년(396) 작전은 고구려가 백제를 주된 정토 대상으로 삼은 작전이 분명하다. 이 작전에는 왜가 직접 출병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작전의 빌미를 제공 할 정도의 왜의 어떤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99년에 백제가 396년의 약속을 어기고 왜병을 끌어들여 신라의 국경지대에 침범한 사실과 고구려가 신라 내물마립간의 구원 요청을 받 아들이고 그 이듬해인 400년에 步騎 5만명을 거느리고 왜병을 任那加羅까지 추격하여 패퇴시 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제와 왜간의 통교 시기는 능비문의 399년이 아니라 397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능비문의 399년은 신묘년 기사나 영락 6년 기사처럼 대백제전의 사실을 특정 시기에 집약해서 서술하는 능비문의 특수한 기술 방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해 보면 397년의 사실로 보인다. 이에 백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이듬해 397년에 왜와 비밀리에 통 교하고 왜의 군사력파견을 요청하기 위한 군사외교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384) 태자 支를 볼모로 보냈다 :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왜국에 인질로 파견한 것은 왜와의 우호관 계를 돈독히 하고, 왜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기 위한 정책에서 나온 조치로 107 생각된다. 한편 일본서기 권10 應神紀 8년조에는 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 禮於貴國 故奪我國枕彌多禮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라 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에서 無禮於貴國 등의 표현은 일본서기 찬자의 윤색과 과장이지 만 왕자 直支[태자 支]가 왜에 파견된 것은 이 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응신기 8년(277)은 연대를 2周甲 인하하여 수정하면 397년이 되는데, 이는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 낸 6년(397)과 연대가 일치한다. 397년 백제는 왜와 긴급하게 교섭을 추진하면서 인질외교를 활용하였다. 백제와 왜 사이에는 아직 군사적 관계를 가질 만큼 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 다. 따라서 백제는 397년 왜와의 교섭에서 왜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정치적 비중이 높은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태자급을 인질로 파견하는 내용의 조건을 제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는 인 질외교를 통해 백제의 비중있는 당국자와 교섭라인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 지할 수 있기 때문에 백제의 제의를 수락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는 또한 종래 가야를 통해 선진 문물을 접하는 데에 따른 한계를 극복하고 백제와 남조로 연결되는 무역루트를 통해 국가형성에 필요한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작용한 것 같다. 백제는 바로 전해에 고구려에 인질을 파견한 경험을 왜에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왜에 청병사로 간 인물이 태자 支였다. 삼국사기 에는 태자 전지를 人質로 파견하였다고 한다. 이후 백제가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왜로부터 군사적 도움이 필요하게 될 때 왕족과 같은 비중있는 인물을 인질외교 형식을 빌어 왜에 파견한 사례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이 백제와 왜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해주는 특징적인 외교방책이라 할 수 있다. 인질외교를 통한 두나라의 관계는 상하 복속관 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백제가 왜에 파견한 인질은 국왕을 대신하는 외교 특사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외교관계에 있어서 상대국에게 절대 신뢰성을 보장해 주기 위한 정치적 담보물을 제공한 다음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협력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자 전지는 아신왕 3년(39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7년에 왜에 파견되었다. 그가 귀환한 것은 아신왕이 죽은 405년이기 때문에 그의 왜에 체재한 기간은 9년이 된다. 그의 파견 목적은 왜국과 結好하기 위해 간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왜의 원병을 얻고 또한 일본열도 내의 친백제 라인을 구축하여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급박해진 백제의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여 궁극적으로는 백제의 국가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삼국시대 인질외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梁起 錫, 1981, 삼국시대 人質의 性格에 대하여, 사학지 15 ; 羅幸柱, 1993, 고대 한일관계에 있 어서의 質의 의미, 건대사학 8을 참조할 것).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유사시에 왜의 원병 을 요청하려는 일종의 청병사인 동시에 왜의 친백제노선을 견지시키기 위한 일종의 특급 외교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태자 전지 파견은 강대국에 대한 복속의 의미를 가진 인 질외교가 아니라 고구려의 남침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의 군사외교의 일환이며, 아울러 왜의 친 백제노선을 유지케 하려는 수신사로서 백제의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백제가 왜에 군사 동원을 요청한 외교적 노력에 힘입어 왜병이 한반도에 출병한 것이 능비문의 영락 9 년과 10년 기사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왜에 대처해 온 신라군의 도움과 중장기병단과 같은 우 월한 군세를 갖고 있었던 고구려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55 108 가을 7월에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7년(398) 봄 2월에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沙豆를 左將으로 삼았다.385) 386) 년(403) 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다.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하였는데, 특별히 두터웠 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390) 3월에 雙峴城 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지며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매우 꺼리어 [정벌을] 곧 중 14년391)(405) 봄 3월에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 같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지하였다. 9월에 왕도 사람들(都人)을 모아 서쪽 돈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8년(399)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 들은 전쟁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니 호구가 줄어들었다. 387) 388) 9년(400) 봄 2월에 살별(혜성)이 奎星 와 婁星 별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11년(402)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서 말랐다. 왕이 친히 橫岳에서 제사지냈더니 곧 비가 왔다. 권25 百濟本紀 3 月典支王392) 393) <*直支라고도 부른다.> 梁書 에는 이름을 映이라고 하였다. 阿莘王의 맏아들이다. 아신왕이 재위 3년째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는 왜국에 볼모로 나갔다. 14년에 왕이 죽 자 왕의 둘째 동생 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설례 ( 禮)394)가 訓解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소리 내어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389)을 구하였다. 385) 沙豆를 左將으로 삼았다 : 沙豆는 사씨세력으로 금강유역 일대에 세력 기반을 가진 신진 재지세 력들을 대고구려전에 동원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사두에게 병권을 맡긴 것은 고 구려와의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진씨세력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386) 雙峴城 : 임진강 건너 장단 북쪽에 위치한 망해산의 쌍령 부근으로 추정된다(문안식, 2006, 앞 의 책, 194~195쪽). 쌍현성의 축조는 고구려군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요충으로 볼 수 있다. 387) 奎星 : 28宿의 하나로 안드로메다좌에 해당한다. 白虎七宿의 첫째 星宿로서 열여섯 별로 구성되 었다. 첫 여름에 보이는 衆星으로 文運을 맡아 보았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5의 기사가 참고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4 주 303)을 참고할 것. 388) 婁星 : 28宿의 하나. 婁星의 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베타 Aries)이다. 白虎七宿의 둘째 星宿로 서 별 셋으로 구성되었다. 사기 권27 天官書에 婁爲聚衆(正義 婁三星爲苑 牧養犧牲以共祭祀 亦曰聚衆 占 動搖則衆兵聚 金火守之 兵起也 라 하였다. 389) 큰 구슬 : 백제는 402년과 409년 왜와 교섭시에 큰 구슬이 예물 품목이었다. 수서 권81 열전 46 왜국조에 의하면 如意寶珠라는 구슬이 왜의 특산품이었다고 한다. 이는 광명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색깔이 푸르고 큰 것은 달걀만한 것이 밤이면 광채가 나서 마치 물고기의 눈 정기와 같다. 고 하였다. 구슬은 칼 동경과 함께 중요한 예물이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지방 수장층에게 사여하거나 또는 국가간의 교섭시에 상징적인 예물로 기능하였다. 390)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實聖尼師今 2년(403)조에 나온다. 391) 14년 : 아신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壬辰立 治十三年 이라 하여 본 기사 와는 1년의 차이가 난다. 392) 支王 : 백제 18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의 이름 에 대해 본 기사의 細注 및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16년조에는 直支 로, 梁書 권54 열전 백 제전에는 映 으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第十八 支王 一作眞支王 名映 으로, 通典 권 180 변방 1 동이 백제전에는 扶餘 으로 나온다. 아신왕 6년(397)년에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 가 부왕이 죽자 9년만에 귀국하여 왕위를 찬탈한 숙부 설례를 지지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전지왕대에는 해씨세력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상좌평을 설치하여 군국정사를 총괄하 게 하였다. 393) 梁書 : 중국 25史 중의 하나. 중국 남조의 梁나라의 역사책이다. 梁書 는 陳나라의 吏部尙書 였던 姚察이 陳나라 大建中(570년대)에 梁 陳 二史를 修撰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 아 들 姚思廉이 아버지의 유언에 의해 唐나라 貞觀 3년(629)부터 그 사업을 계속하여 정관 10년 (636)에 완성하였다. 본기와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56권이다. 394) 설례( 禮) : 아신왕의 막내 동생. 아신왕이 죽은 후 섭정하던 둘째 형 訓解를 죽이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으나 태자 전지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우리나라 자전에는 字의 음 이 혈 과 접 두 가지가 있다. 기존의 번역본 중 북한본은 첩례 로, 이병도본은 설례 로 읽

56 울면서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 호위하며 보냈다.395) [전지가] 국경에 니 아들 久爾辛을 낳았다. 이르자 한성 사람 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2년(406) 봄 정월에 왕이 東明廟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南壇)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왕의 동생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 대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倭人을 머물러 두고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지하며 기다렸더니, 냈으며,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사신을 晉나라397)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解忠을 達率로 삼고 漢城의 租 1천 섬398)을 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396) 왕비는 八須夫人이 3년(407) 봄 2월에 이복동생(庶弟) 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解須399)를 內法佐平으로 었다. 中文大辭典 에 集韻 食列反 音舌 이라 하여 半切이 食列 로 나오는데, 이 食列 은 음 운상 혈 과 상통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설 로 읽어 두었다. 395)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하며 보냈다 : 이 기사는 전지가 즉위하는데 왜군이 일조를 한 것 을 보여준다. 한편 전지가 왜국에서 돌아오는 것과 관련하여 일본서기 권10 應神紀 16년조에 는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 以嗣位 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東韓者 甘 羅城 高難城 爾林城 是也] 로 나온다. 여기서 백제와 왜와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것이 전지를 호송한 왜병 100명의 존재이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9년만에 급거 귀국하는 태자 전지를 안전 하게 백제까지 호송하는 임무였다. 이를 통해서 보면 인질이 귀국할 때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기 위해 호송병을 파견하는 것이 인질외교에서 일종의 관례인 것 같다. 479년 백제 東城王이 왜에 체류하고 있다가 三斤王이 사거한 후 즉위길에 올랐을 때에도 왜병 500명이 호송한 일( 일본서 기 권14 雄略紀 23년 하4월)을 들 수 있다. 이때에 전지를 호송한 왜병 100명이 능비문의 404 년 대방계전투에 참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종욱, 1992, 광개토왕비 및 삼국사기 에 보이 는 倭兵 의 정체, 한국사시민강좌 11, 일조각)가 있다. 그러나 405년 전지왕의 즉위시에 호 송해 온 왜병 100명은 고구려와 전투하기에는 규모도 적었을 뿐 아니라 귀국하는 태자를 안전 하게 호송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바로 고구려와의 전투에 임하는 것은 형편상 어려웠을 것이다. 그 호송원들의 주된 임무가 전지왕의 경호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 견 해는 성립되기 어렵다. 그들은 전지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신변 보호를 위한 경호임무에 전 념하다가 사태가 수습된 후 곧바로 귀국했을 것으로 보인다. 396) 나라 사람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 전지와 설례가 왕위계 승 다툼을 할 때 전지를 지지한 세력은 왕족 餘信과 解須 解丘 解忠의 解氏세력이 중심이 되 었다. 그밖에 전지가 귀국할 때에 동원된 왜군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정치세력으로 목씨 세력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다(文東錫, 1996, 4~5세기 百濟 政治體制의 變動, 한국고대사연 구 9, 217~218쪽). 이에 따르면 목씨세력도 전지 지지파로 분류될 수 있으나 당시 뚜렷한 활 동을 찾을 수는 없다. 반면에 설례를 지지한 세력은 이전까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던 眞氏세 력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진씨세력이 전지왕의 즉위를 계기로 한동안 정계에 등장하고 있지 않 기 때문이다. 진씨세력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의 거듭된 패전을 호도하고 실추된 세력을 만회하 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설례를 옹립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진씨세력은 불리한 사태의 반전을 위 해서는 차기 왕위계승권자로 내정된 전지보다도 다른 왕족을 새로 선택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 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진씨세력에 의한 이러한 의도와 책동은 전지를 지지하는 일부 왕족과 해씨세력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무산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전지왕의 즉위를 둘러싼 왕위계승분쟁 결과 정치의 실권이 진씨세력에서 해씨세력으로 교체되 었다는 점이다. 397) 晉나라 : 여기서의 晉은 東晋( )이다. 동진은 西晉의 愍帝가 漢의 劉曜에게 멸망하자 그 일족인 瑯瑯王 司馬睿(元帝)가 江南의 建業(현재의 南京)에서 즉위하여 세운 나라이다. 서울인 建業이 西晉의 서울인 洛陽의 동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진이라고 한다. 11대 恭帝때에 宋의 武 帝에게 망하였다. 398) 漢城의 租 1천 섬 : 한성인 解忠은 支王을 옹립하는데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공로 로 漢城租를 1천 섬을 지급받았다. 그러면 해충이 전지왕을 옹립한 대가로 지급받은 한성조의 성격은 무엇일까? 解忠은 일정 지역의 토지를 지급받는 식읍이나 사전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대신 한성지역의 租를 받았다. 여기서 조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신라에서 녹봉의 성 격으로 이해되는 歲租와 같은 것(안병우, 1992, 6~7세기의 토지제도, 한국고대사논총 4, 287~289쪽)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보면 해충은 출신지인 한성의 일정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수취권을 수여받은 것이 아니라 한성지역의 국가창고에 보관된 조세 수납미 중에서 1 천석을 해마다 일정 기간 동안 지급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竹旨郞의 고사에 나오는 能節 租( 삼국유사 권2 기이 2 효소왕 죽지랑)는 富山城租의 일부 세곡미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세 조로 분급되던 한성조도 각 지역의 토지에서 징수한 세곡미를 수합하여 한성의 창고에 보관된 곡물을 뜻하며, 그 용도는 國用과 供上 등의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조는 국가에서 징수하고 국가에서 해당자에게 분급한 것으로 이해된다(이경식, 1988, 古代 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 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58쪽). 이는 왕을 옹립한 대가로 토 지 수유주로부터 조세 명목으로 걷어들인 특정지역의 田租 토지현물세 에 대한 권리를 분급해 준 것이며, 후대 녹봉제의 연원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399) 解須 : 백제 전지왕대의 인물로 왕의 姻戚이었다. 전지왕을 옹립한 공으로 內法좌평이 되었으 며, 毗有王대에는 內臣좌평으로 승진을 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57 112 삼고, 解丘400)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데,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401) 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고려)의 4년(408) 봄 정월에 餘信을 上佐平402)으로 삼고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 직은 이로 5년(409)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夜明珠404)를 보내오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113 宰403)와 같다. 11년(415) 여름 5월 갑신에 살별(혜성)이 나타났다. 12년(416) 東晉405)의 安帝406)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使持節407)都督百濟諸軍事408)鎭 400) 解丘 : 전지왕대의 인물로 해수와 함께 왕의 姻戚이었다. 전지왕을 옹립한 공으로 兵官좌평이 되어 병마권을 통괄하였으며, 전지왕 13년(416)에 沙口城을 축조하는 책임을 맡았다. 401) 이복동생(庶弟) 餘信을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 : 이 기사에서 解須와 解丘는 해씨세력으로 서 王의 姻戚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지왕의 왕비인 八須夫人은 解氏 세력 출신자로 볼 수 있 다. 해씨 출신자들이 이처럼 내법좌평 병관좌평과 같은 국가의 주요한 관직을 차지하게 된 것 은 이들이 전지왕의 즉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전지왕의의 즉위를 둘러싼 왕위 계승분쟁 결과 정치의 실권이 진씨세력에서 해씨세력으로 교체된 데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이 로써 5세기 전반의 권력구조는 4세기 후반대와 같이 왕족-왕비족에 의한 귀족연합체제적인 틀 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전지왕대를 기점으로 하여 지배세력이 진씨세력에서 해씨세력으로 집권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전지왕 즉위초에 단행된 인사는 즉위 과정에서 야기된 정 변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논공행상의 성격을 갖고 행해졌지만, 해씨세력이 중요 요직을 독점하 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왜에 9년 동안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기반이 취약한 전지 왕으로서는 해씨세력의 대두를 일정한 선에서 견제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이도학, 1990, 漢城 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百濟論叢 2, 백제문화개발연구원, 290~291쪽). 이러 한 의도에서 왕서제인 여신에게 수석 좌평격인 내신좌평에 임명하여 권력의 한 축을 이루어 왕 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402) 上佐平 : 전지왕 4년(408)에 설치한 수석좌평으로 군국정사를 담당하였고 고려의 宰와 같았 다. 좌평은 본래 率系 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諸率會議]의 의장이었는데 이때 상좌평이 설치 되면서 上佐平 中佐平 下佐平(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 참조)과 일반좌평으로 분화되었 다. 이렇게 분화된 좌평들로 구성된 좌평회의체에서 주요한 국정을 논의 결정할 때 상좌평은 수석좌평으로서 의장의 직을 맡았다. 이 상좌평과 후일 사비시대에 와서 정비된 6좌평과의 관계 에 대해 상좌평을 6좌평 위에 있는 수상직으로 보는 견해(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 학보 45, 39쪽)도 있다. 이 상좌평의 설치에 대해 전지왕을 옹립한 해씨세력 등 실권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 앞의 책, 쪽)가 있으나 일단 귀족세력을 일원적으로 통솔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필 요가 있다. 상좌평은 좌평의 직무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으며, 그 성격은 고려시대의 총재 와 같다고 한 사실에서 신라의 上大等과 비슷하였다. 지금까지 국정 운영이 왕족과 특정한 귀족 세력 간의 연합체제 틀 속에 유지되어 온 만큼 상대적으로 왕권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 해 잇달은 왕위계승 분쟁을 겪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배세력 간에 첨예한 대립과 정치적 갈등 이 표출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전지왕은 특정한 귀족세력 중심의 정치 운영에서 벗어나 왕권 중심의 새로운 체제 구축이 보다 시급한 과제로 대두된 것이다. 그 방안의 하나로 모색된 것이 上佐平의 설치로 나타났다. 이런 의도에서 전지왕 4년(408)에는 내신좌평 여신을 새로 신설된 상좌평에 승진 임명하여 국정을 총괄케 하였다. 상좌평은 군국정사를 총괄하는 재상에 해당되 는 최고위 관직이었다. 상좌평은 국왕을 견제하고 귀족세력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과 상좌평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출범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4세기 후반에 진씨세력과 같은 유력한 귀족세력이 병권을 장악함에 따 라 야기된 왕위계승 분쟁과 대고구려전에서의 열세를 극복하려는 측면에서 강구된 시책이었다. 전지왕은 왕서제 여신을 상좌평에 임명하여 행정권과 병권을 통할케 함으로써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궁극적으로 국왕의 위상을 보다 높이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양기 석, 1982, 百濟 支王代의 政治的 變化, 湖西史學 10, 22쪽). 처음 설치된 상좌평에 전지 왕이 신임하는 왕족 여신이 임명되어 해씨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였다는 점이나, 상좌평이 신라 의 상대등제와 같이 국정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귀족세력을 일원적으로 통솔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주보돈, 1992,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42~56쪽) 그 설치에는 왕권강화의 측면이 보다 고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5세기 백제의 권력구조는 왕족과 왕비족을 기축으로 한 귀족연합체제에서 국왕-상좌평체제로 전환시켜 왕권 강화를 추 구해 나간 것으로 이해된다. 상좌평의 존재는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9년조에도 보인다. 403) 지금(고려)의 宰 : 중국에서 宰는 周代 六官의 長으로서 천자를 보좌하고 百官을 統御하는 역 할을 하였다( 書經 권18 周官에 宰掌邦治 統百官 均四海 라고 한 기사 참조). 고려 시대에는 宰臣(宰相)이 6部判事를 겸하였는데 재신의 班次에 따라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班次第一의 재 신(재상)을 宰 또는 首相이라 하였고, 班次第二의 재상을 2宰 또는 亞相이라 하였다. 門下侍中 은 반차 제일의 재상이면서 判吏部事를 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총재는 판이부사를 겸한 문하시중을 가리키는 것이다(邊太燮, 198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 조각, 79 80쪽). 고려의 宰相은 5宰였다. 이점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76 志 30 百官 1에 宰 相統六部 六部統寺監倉庫 簡以除繁 卑以承尊 省不過五 樞不過七 宰相之職 擧而庶事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404) 夜明珠 : 어두운 밤에도 빛을 낸다고 전해지던 귀중한 보석. 夜光珠 夜光明珠 夜光玉이라고 도 한다. 백제는 402년과 409년 왜와 교섭시에 큰 구슬이 예물 품목이었다. 수서 권81 열전 46 왜국조에 의하면 如意寶珠라는 구슬이 왜의 특산품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왜의 견사는 전지 왕이 왜에 체류한 바 있는 친왜파인데, 영락 17년(407) 작전에 의해 고구려에게 참패를 당한 백 제 전지왕을 위로하기 위한 사행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앞의 주 389)를 참조할 것. 405) 東晉 : 317년에 西晉이 망하자 司馬睿가 南京에 도읍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자세한 것은 앞의 주

58 114 東將軍409)百濟王으로 삼았다.410) 년(417) 봄 정월 초하루 갑술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여름 4월에 가물어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에 동부와 북부 두 部의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沙口城411)을 쌓았 397) 참조. 406) 安帝 : 동진의 제1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德宗. 孝武帝의 장자로서 태 원 12년(387)에 황태자가 되었고 태원 21년(397)에 효무제가 죽자 즉위하였다. 407) 使持節 : 중국에서 節은 使臣이나 將軍이 가진 황제의 信標(兵符 符節)이다. 節을 받는 자의 자 격이나 지위에는 使持節 持節 假節의 3종류가 있었다. 그중 使持節은 가장 높은 것으로서 二 千石 이하를 처형할 수 있는 全權을 가졌다. 宋書 권39 百官 상에 持節都督 無定員 前漢遣使 始有持節 晉世則都督諸軍爲上 監諸軍次之 督諸軍爲下 使持節爲上 持節次之 假節爲下 使持 節得殺二千石以下 持節殺無官位人 若軍事得與使持節同 假節唯軍事得殺犯軍令者 라 하였다. 持 節 제도는 漢代에서 비롯된 것으로, 晉代에는 使持節을 上, 持節을 中, 假節을 下로 삼았다. 이 처럼 將軍이 節을 받는다는 것은 君主로부터 독자적인 권한을 위임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 이것은 장군 권한의 자율성에 연원한 것이라고 한다(金翰奎, 1985,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 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일조각, 쪽). 408) 都督百濟諸軍事 : 백제의 군사권 업무를 統監하는 爵號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州의 刺史는 흔 히 將軍職을 兼領함과 동시에 都督 등의 칭호를 가지고 군사권을 행사하였다. 軍事權上의 上下 관계를 나타내는 加號에는 都督 監 督의 3종류가 있는데 그 중 도독이 가장 높았다. 都督00 諸軍事 는 節을 부여받은 장군이 독자적인 권한으로 統監할 수 있는 군사 관할지구를 규정한 것 이다. 그러므로 都督百濟諸軍事 는 백제지역의 군사를 統監한다는 의미이다. 都督諸州軍事는 南北朝시대라고 하는 중국의 분열시대가 낳은 산물인데, 西晉 이후 都督이 州治의 刺史를 兼領 하였다. 한 도독이 수개의 州를 兼統하기도 하고, 혹은 몇개의 郡을 統監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州의 刺史는 대체로 本州의 都督 持節을 겸임하여 刺史로서 州府를 설치하고 將軍의 職任으로 幕府(都督府)를 개설하였다(金翰奎, 1985, 앞의 책, 쪽). 都督과 刺史와의 관 계에 대해서는 南齊書 권16 백관지에 魏晉世州牧隆重 刺史任重者爲使持節都督 輕者爲持節 督 起漢從帝時 御史中丞馮赦討九江賊 督揚徐二州軍事 晉太康中 都督知軍事 刺史治民 各用 人 惠帝密 乃幷任 非要州則單爲刺史 州朝置別駕 治中 議曹 文學祭酒 諸曹部從事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都督은 군사권을 장악한다는 의미로 漢代에서 비롯되었다. 晉代에는 都督諸軍을 上, 督諸軍을 次, 督諸軍을 下로 삼았는데, 일정 지역의 군통수권을 위임한다는 의미의 加號였다. 이는 魏晉代에 대체로 刺史에게 함께 주어졌는데, 그 책임의 경중에 따라 使持節 都督과 持 節 督으로 나누어 加號되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장군호와 자사 등 작호에 대해서는 坂元義 種, 1978, 古代東アヅアの日本と朝鮮, 吉川弘文館, 301~321쪽 ; 김한규, 1997, 앞의 책, 314~372쪽 ; 김종완, 1995, 中國南北朝史硏究 - 朝貢 交聘關係를 중심으로-, 일조각, 157~170쪽을 참조할 것. 409) 鎭東將軍 : 중국 東晉의 4鎭(鎭東 鎭西 鎭南 鎭北)장군의 하나로 1인을 두었다. 東晋代의 鎭 東장군의 관품은 분명하지 않으나 동진을 이은 宋代에는 3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宋書 권 는데, 병관좌평 解丘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14년(418) 여름에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10필을 보냈다.412) 15년(419) 봄 정월 무술날에 살별(혜성)이 太微星413) 별자리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40 백관 하를 참조할 것. 중국 남북조시대 관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장군직제의 발달이다. 본래 의 군사적 성격보다는 관직의 고하를 표시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 이것이 중국왕조가 책봉 관계를 통해 주변 제국의 수장에게 장군호를 사여하는 외교적 관행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漢代 의 장군직은 종류도 많지 않았고 또한 상설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魏晉代를 거치면서 그 수가 다소 증가되었다. 그러나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상당수의 새로운 장군직이 신설되어 그 수가 급 증하였고, 관제로 정비되어 체계화되었다. 북위와 송은 위서 官氏志와 송서 백관지에 의하 면 각각 100호와 70여호의 각종 장군직이 기재되어 있다. 그 후 더욱 중가되는 추세여서 梁 天 監 7년(508)에는 여러 장군직을 국내용(125호)과 국외용(109호)로 나누어 24班의 품계에 따라 정비하였다. 그 후 梁 大通 3년(529)에는 240호의 장군직으로 개편되었으며, 陳代에는 237호 에 달하였다. 이러한 장군직이 발달하게 된 것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지방의 호족세력을 국가 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한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군호의 수여와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김 한규, 1985, 앞의 책과 김종완, 1995, 앞의 책, 120~121쪽을 참조할 것. 410) 東晉의 安帝가 百濟王으로 삼았다 : 동일한 내용이 송서 권97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411) 沙口城 : 이 성은 병관좌평 解丘의 감독하에 쌓은 것인데, 능비문의 영락 17년 기사에 나오는 沙 溝城과 같은 성으로 볼 때 이곳에서 고구려와 백제간의 큰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위 치는 알 수 없다. 412)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10필을 보냈다 : 전지왕은 왜에 9년간 체류하였던 경험이 있었 기 때문에 아신왕대에 구축한 친왜외교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백제는 왜와의 교섭을 아직 정례화하지는 못하였지만 유사시에 대비하여 예물을 교환하는 등 간 헐적으로 왜와의 교섭을 추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413) 太微星 별자리 : 三垣의 하나로 獅子座의 西端 부근의 10星에 해당한다. 천자의 宮廷, 五帝의 座, 12諸侯의 府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기 권27 天官書에 南宮朱鳥 權衡 衡太微 三光之廷 匡衛十二星[索隱 宋均曰 太微 天帝南宮也 三光 日月五星也 正義 太微宮垣十星 在翼軫地 天子之 宮廷 五帝之坐 十二諸侯之府也 ] 라 한 기사와 晉書 권11 지 1 천문 상에 太微 天子庭也 五帝之坐也 十二諸侯府也 其外蕃 九卿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59 116 16년414)(420)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8년416)(427)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권25 百濟本紀 3 久爾辛王415) 권25 百濟本紀 3 毗有王417)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117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의 庶子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 다418)>용모가 아름답고 말재주가 있어 사람들이 떠받들고 존중히 여겼다. 구이신왕이 죽 414) 16년 : 전지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乙巳立 治十五年 이라 하여 1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는 宋나라가 高祖(武帝) 永初 원년(420)에 전지 왕에게 鎭東大將軍의 작호를 준 것으로, 少帝 景平 二年(424)에는 전지왕이 長史 張威를 보내어 조공한 것으로 나오고, 文帝 元嘉 2년(425)에는 송이 전지왕에게 책봉을 한 기사가 나와 본 기 사와 어긋난다. 한편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25년조에는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이 라 하여 응신 25년(수정연대 414)에 전지왕이 죽은 것으로 나오나, 응신기 39년(수정연대 428) 조에는 百濟直支王遣其妹新齊都媛 以令仕 라 하여 전지왕이 누이 新薺都媛을 왜에 보낸 것으 로 나오고 있는 등 異說이 분분하다. 이처럼 전지왕의 죽음과 구이신왕의 즉위 연대에 관해서는 414년설(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25년) 420년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16년 구이신왕 즉위년) 424년 이후설( 송서 백제전) 428년설(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39년) 등 여러 사서 마다 다르게 서술하고 있어서 그 사실성 여부를 놓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414년설은 木滿致 전승을 토대로 구성된 데에다가 삼국사기 와 송서 백제전에 420년 이후까지 전지왕이 생존 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어 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424년 이후설은 景平 2년 (424)에 餘映(전지왕)이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송서 백제전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에 대해 아 직 전지왕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던 중국측(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있어(이기동, 1974, 중국사서에 보이는 백제왕 牟都에 대하여, 역사학보 62, 24~26 쪽)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428년설은 그 사실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비유왕대의 사실 로 수정해 보는 견해(古川政司, 1981, 5世紀後半の百濟政權と倭 -東城王卽位事情を中心とし て-, 立命館文學 合輯號, 738~739쪽)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지왕에서 구이신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어떤 정변이 확인되지 않는 한 삼국사기 기년에 따라 420년설을 그대로 취신하겠다. 415) 久爾辛王 : 백제 제1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전지왕의 아들이다. 앞의 주석 414)에서 본 것처럼 전지왕의 사망 연대에 대해 각 사서마다 여러 이설이 있으므로 구이신왕의 즉위 연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서에는 구이신왕의 즉위 기사와 훙년 기사밖에 없다. 그러나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25년(수정연대 414)조에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幼年 大倭 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淫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時 娶其 國婦而所生也 以其父功 專於任那 來入我國 往還貴國 承制天朝 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皇聞其暴 召之 라 하여 木滿致가 전횡을 한 기사가 있어 당시의 정치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에 의하면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권신 木滿致가 섭정을 한 왕모와 정을 통하고 권력을 잡아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모는 전비왕의 왕비인 八須 夫人으로 보이는데, 목만치가 왕모와 통정관계를 맺고 그 권위를 배경으로 전횡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국왕을 보좌하는 상좌평에는 왕족 여신이 있었지만 목만치의 전횡을 통 제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데 목만치에 대해서는 475년 웅진 천도때 문주왕을 보필한 木 滿 致와 동일인 여부를 놓고 그 실재성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다소 견해 차이는 있지 만 양자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목만치의 출생 시기를 403년으로 볼 경우 475년 웅진 천도때 역할을 한 목협만치의 연령이 70대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다(김현구 외, 2002,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Ⅰ), 일지사, 177~178쪽). 또 하나는 양 자를 동일인으로 보지만 구이신왕대 목만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수정해 보는 견해가 있다(山尾 幸久, 1978, 任那に關する一試論 -史料の檢討を中心に-, 古代東アヅア史論集 下, 216~219쪽 ; 古川政司, 1981, 앞의 글, 739~742쪽 ; 鈴木靖民, 1981, 木滿致と蘇我氏, 日 本のなかの朝鮮文化 50, 66~69쪽). 반면 이 기사의 연대를 3주갑 인하하여 개로왕 20년(474) 으로 수정해 보는 견해도 있다(이근우, 1994,` 일본서기 에 인용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한 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85~90쪽). 그러나 이 견해를 따를 경우 일본서 기 에 인용된 백제기 기사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성 문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서기 에 인용된 백제기 의 목씨 관련 기사는 목씨의 씨족전승에 근거를 둔 것으로 어느 특정 시기에 집약해서 일괄 정리되어 있어 기년상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구이신왕대라 는 특정한 시기에 권력을 농단한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16) 8년 :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는 庚申立 治七年 이라 하여 1년 차이가 있다. 417) 毗有王 : 백제 제20대 왕. 재위기간은 년.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는 餘毗로 나오 는데, 이는 王의 이름 扶餘毗有를 중국식으로 單綴音化한 것이다. 비유왕은 7년(433)에 신라와 화친하여 이른바 濟羅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압박에 대항하였고, 왜와의 우호관계도 지속하였다. 418) 전지왕의 庶子라고도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비유왕의 출계에 대해 본 기사에는 구 이신왕의 아들설과 전지왕의 아들설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구이신왕의 아들 로 나온다. 그러나 구이신왕이 즉위할 때 연령은 일본서기 에 나이가 어렸다는 기록( 일본서

60 118 자 왕위에 올랐다.419) 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렸다. 2년(428) 봄 2월에 왕이 4부420)를 순행하여 위무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차등 있 421)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게 주었다. 왜국의 사신이 이르렀는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50명이었다. 4년(430) 여름 4월에 송나라 文皇帝424)는 왕이 다시 조공을 받쳤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3년(429) 가을에 사신을 宋나라422)에 보내 조공하였다. 先王 映의 작호로 책봉해 주었다. <*전지왕 12년(416)에 동진이 [전지왕을] 책봉하여 使 겨울 10월에 상좌평 餘信이 죽자 解須를 상좌평으로 삼았다.423) 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으로 삼았다425)> 7년(433)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426) 기 권10 응신기 25년), 그의 재위 년수가 8년에 불과하여 후사를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 그리 고 그의 뒤를 이은 毗有王이 이복형제일 가능성 이 높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대략 16세 정도 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비유를 구이신왕의 아들로 보기보다는 전지왕의 庶 子라는 細注의 기사가 보다 타당할 것이다(이기백,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20 21쪽 ; 이도학, 1984,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6 7쪽). 419) 구이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 구이신왕이 23세로 단명하였다는 점(이도학, 1984, 앞의 글, 7쪽)과 비유왕의 전지왕 서자설을 토대로 하여 비유왕이 모종의 정변을 통해 즉위하였을 가능성 이 제기되기도 한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8쪽 ; 노중국, 1988, 앞의 책, 140쪽 ; 이도 학, 1990, 앞의 글, 295~296쪽). 정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구이신왕이 나이가 어 린 틈을 타서 권신 목만치가 왕모와 간통하고 권력을 농단하는 등 일련의 실정에 반발하여 비유 왕이 정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420) 4部 : 동 서 남 북部의 4部를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4부가 왕도의 행정구역으로서의 4부를 가리키는 것인지 지방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왕도의 행정구역으로서의 4부가 아닐까 한다. 421) 왜국의 사신이 이르렀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 고구려가 427년 평양천도를 통해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재개하고 나서자 먼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인 나라가 백제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동향에 접한 백제는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조치의 하나가 왜와 기존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428년 비유왕의 妹 新齊都媛이 7명의 부녀들을 거느 리고 왜에 파견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39년 춘2월조에는 新齊都媛이 直支 王 즉 전지왕의 妹로 되어 있으나, 應神 39년의 조정년대가 428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삼국사 기 의 전지왕의 사망년대인 420년과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414)를 참조할 것). 397년 고구려에 굴복한 백제가 절박한 상황에서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파견한 이후 이번에 는 왜에 왕녀를 보낸 것이다. 이는 비유왕대에 두나라 간의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서 양국간의 관 계를 보다 발전시킨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양국간에 신뢰구축을 통해 고구려의 남진동향에 대비한 외교책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왜는 그 答禮로 從者 50명을 거느린 대규모의 사절단을 백 제에 보내 백제와 왜 두나라 간의 우호관계가 돈독함을 과시하였다. 422) 宋나라 : 중국 남조의 하나로서 東晉의 權臣 劉裕가 420년에 恭帝로부터 禪位를 받아 세웠다. 建康(현재의 중국 江蘇省의 南京)에 도읍하였고, 479년 權臣 蕭道成에게 망하였다. 劉由가 세웠 기 때문에 劉宋이라고도 한다. 423) 상좌평 餘信이 죽자 解須를 상좌평으로 삼았다 : 이때 해씨세력 解須가 왕족 여신 대신에 상좌 평에 임명된 것은 비유왕 즉위초의 정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해수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이 군 국정사를 총괄하는 상좌평에 임명되어 권력을 다시 장악한 것이다. 해씨세력이 상좌평에 임명 됨으로써 상좌평체제를 통해 행정과 병권을 총괄하여 유력한 귀족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변 질되면서 지배세력 사이의 또다른 갈등을 낳게 되었다. 424) 송나라 文皇帝 : 남조 유송의 제3대 황제로 이름은 義隆이다. 무제의 셋째 아들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425) 동진이 [전지왕을] 책봉하여 삼았다 : 동일한 내용이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426)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 본서 권3 신라본기 訥祇麻立干 17년(433)조에는 百濟 遣使請和 從之 라 하여 신라가 백제의 화친 요청에 따른 것으로 나온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고구려의 남진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백제와 신라에 커다란 위협을 준 사건이었다. 고구려는 북 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당장의 군사적 행동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인 나라는 백제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동향에 접한 백제 비유왕은 그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다각 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백제는 지금까지 적대관계에 있는 신라와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433년 백제는 당시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던 신라에 먼저 和好를 요청하였고, 이듬해 화호의 표시로 良馬 2필과 흰 매를 예물로 신라에 보냈다. 이러한 백제의 적극적인 접근책에 대해 신라 눌지마립간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황금과 명주를 백제에 보냄으로써 나제양국은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로서 나제양국은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동 안의 적대관계를 버리고 화호를 맺게 되었다. 종래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광개토왕릉비a에서 보듯이 신라의 친고구려정책에 대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대립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와서 양국 사이에 우호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은 고구려 장수왕이 16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정책을 보다 강화하자 이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 다. 이 시기에 맺어진 백제와 신라사이의 동맹과 그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김병주, 1984, 羅濟 同盟에 관한 연구, 韓國史硏究 46 ; 양기석, 1994, 5~6세기 전반 신라와 백제의 관계, 신 라문화제학술발표회 논문집 15 ; 정운용, 1994, 5~6세기 신라 고구려 관계의 추이, 신라

61 120 권25 百濟本紀 3 蓋鹵王432) 8년(434) 봄 2월에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좋은 말 2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427) 428) ) 겨울 10월에 신라가 질 좋은 금(良金) 과 밝은 구술(明珠) 로 답례하였다. 14년(440) 여름 4월 초하루 무오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近蓋婁라고도 부른다> 이름이 慶司433)이며, 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 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434) 겨울 10월에 사신을 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1년(447) 여름 5월에 왕궁 남쪽 연못 가운데 불이 났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으며, 밤이 새고 나서야 꺼졌다. 가을 7월에 가물어 곡식이 익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흘러 들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28년(454) 별이 비처럼 떨어졌고, 살별(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2丈 가량 이었다. 가을 8월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쳐 기근이 들었다. 29년430)(455) 봄 3월에 왕이 漢山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에 검은 용이 漢江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해 지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431) 문화제학술발표회 논문집 15 및 1996, 나제동맹기 신라와 백제의 관계, 백산학보 46 및 1996, 5~6세기 신라 대외관계사 연구, 고려대박사학위논문 ; 정재윤, 2001, 웅진시대 백제 와 신라의 관계에 대한 고찰 -나제동맹에 대한 비판적 검토-, 호서고고학 4 5합집 등을 참 조할 것. 427) 질 좋은 금(良金) : 본서 권3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8년(434)조에는 黃金 으로 나온다. 428) 밝은 구술(明珠) : 어두운 밤에도 빛을 낸다고 전해지던 귀중한 보석. 夜光珠 夜光明珠 夜光 玉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389) 404)를 참조할 것. 429) 신라가 질 좋은 금(良金) 답례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8년 (434)조에 나온다. 430) 29년 : 비유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丁卯立 治二十八年 으로 나와 1년 의 차이가 난다. 431) 왕이 죽었다 : 비유왕의 사망을 흑룡의 출현과 관련시켜 서술해 놓은 점이 주목된다. 흑룡의 출 현이 변고를 동반하는 흉조의 조짐으로 볼 때 비유왕은 정변에 의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도학, 1985,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 韓國史硏究 50 51합집, 3~4쪽 ; 노중국, 1988, 앞의 책, 140쪽). 432) 蓋鹵王 : 백제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비유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慶司 이다. 본 기사의 細注에는 왕명이 近蓋婁 로 나오는데, 近蓋婁王 은 蓋婁王에 近 자를 앞에 붙혀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는 초고왕-근초고왕, 구수왕-근구수왕과의 관계처럼 개루왕와 蓋 鹵王(近蓋婁王)과의 친연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近蓋鹵 로,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5년조에는 加須利君[蓋鹵王也] 으로 표기되어 있다. 개로왕은 新羅 및 北魏와 연계하여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첩자 道琳의 말 에 현혹되어 국가 재정을 탕진하였고, 475년에는 그의 실정을 틈타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가 왕 도 漢城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당함에 따라 왕 자신도 포로로 잡혀 阿且城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 였다. 433) 慶司 : 개로왕의 이름으로 본명은 扶餘慶司이다.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과 宋書 권6 孝武 帝紀 大明 元年(457)조에 나오는 餘慶 은 扶餘慶司 를 축약하여 표기한 것이다. 개로왕의 또 다른 이름인 加須利(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5년)는 慶司를 字音으로 표기하였다는 설과 蓋鹵를 자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설이 있다. 434) 왕위를 이었다 : 본 기사에서는 개로왕의 즉위년을 467년이라 하였다. 그런데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년 7월조에는 百濟新撰云 己巳年蓋鹵王立 이라 하여 개로왕의 즉위년을 己巳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연표에 의하면 개로왕 재위기간에는 기사년은 없다. 개로왕 이전의 기사 년은 429년(비유왕 3)이 되고, 개로왕 이후의 기사년은 489년(동성왕 11)이 된다. 따라서 개로 왕이 己巳年에 즉위하였다는 일본서기 의 기사는 취신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기사년에 즉위한 사람은 개로왕이 아니라 비유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 考證 上, 吉川弘文館). 그에 의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2명의 개로왕이 있는데, 그 중 4 대 개루왕의 즉위연대가 128년 戊辰이었고 이를 踰年稱元法으로 보면 다음해인 기사년이 원년 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4대 개루왕의 즉위기사가 백제신찬 에 잘못 기재되어 왕명과 즉위년 이 맞지 않는 혼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따를 경우 삼국사기 의 비유왕 즉 위년(丁卯, 427)과 모순이 생기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개로왕의 즉위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고 모종의 정변에 의해 이루어진 가능성이 제기 되고 있다. 그 근거로 비유왕이 50세를 상회하지 못하고 사망한 점, 비유왕의 사망을 흑룡의 출 현과 관련시켜 서술해 놓은 점(앞의 주 431) 참조), 본서 권25 개로왕이 재위 21년 동안 14년 이 전의 기록이 공백으로 남아있는 점, 그리고 선왕의 陵園이 맨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어 무덤조 차 조영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그 정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 지만, 상좌평체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비유왕과 그 측근세력과 이에 대해 종래의 귀족연

62 122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435) 겨울 10월에 雙峴城436)을 수리하였고, 靑木嶺437)에 큰 목책(大柵)을 설치하여 北漢山城 123 신은 나라를 동쪽 끝에 세웠는데, 승냥이와 이리(豺狼 : 고구려)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제후국(藩屛)440)으로서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441)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 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볍게 부는 이때에 엎드려 생각컨대 황제 폐하께서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 18년(472) 사신을 魏나라438)에 보내 조공하고, 表文를 올려 이렇게 말하였다.439) 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私署)442) 冠軍將軍443) 駙馬都尉444) 합체제를 유지하려는 해씨세력 간에 개로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과 갈등이 야기된 것이 아닐까 한다. 개로와 그 지지 세력인 餘紀 昆支 文周와 같은 왕족들과 목씨세력 등이 결국 정 변을 일으켜 비유왕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458년 유송에서 작위를 받은 인물들은 개로왕을 옹립한 지지세력에 해당하며, 반면 수작자에서 배제된 해씨나 진씨세력은 개 로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435)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57년 (469)조에 나온다. 이 전투는 백제가 그동안의 대고구려전에서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전해에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하여 悉直城(삼척)을 공격한 직후에 일 어난 것으로 보아(본서 권3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1년 춘) 신라에 침공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로왕이 신라의 원병 없이 고구려를 선제공격한 것은 광개토왕 대의 남정으로 상실한 예성강 일대의 고토를 수복하려고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69 년 전투는 그동안 추진해 온 왕권 강화시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나타내어 자신감의 발로인 동시 에 전제정치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었다(김수태, 2000, 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백제사 상의 전쟁, 서경문화사, 226쪽). 436) 雙峴城 : 임진강 건너 장단 북쪽 27리에 위치한 망해산의 쌍령 부근으로 추정된다(문안식, 2006, 앞의 책, 194 ~195쪽 및 2005, 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 사 학연구 78, 63쪽). 쌍현성의 축조는 개성과 연천 방향에서 공격하는 고구려군을 견제할 수 있 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앞의 주 386)을 참조할 것. 437) 靑木嶺 : 개성에서 북으로 12km 올라간 금천과의 경계인 靑石洞(현재의 경기도 開豊郡 嶺南面 天摩山)에 비정된다(安鼎福은 東史綱目 第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 新增東國輿地勝 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조에서는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본서 권23 주 54), 권24 주 320), 권25 주 353)과 381)을 참조할 것. 438) 魏나라 : 중국 南北朝 시대에 鮮卑族의 拓拔珪가 386년에 華北에 세운 나라. 盛樂(현재의 중국 山西省 祁縣)에 도읍하였다. 太武帝대에 와서 五胡十六國으로 분열된 화북지방을 통일하였다. 534년에 東魏와 西魏로 분할되었는데, 동위는 550년에 高洋에게 망하였고, 서위는 556년에 宇 文覺에게 망하였다. 439) 表文를 올렸다 : 表는 문체의 일종으로 사리를 명백히 하여 군주에게 告하는 글을 말한다. 이 표 문의 내용은 위서 권100 열전 88 백제국 延興 2년(472)조에 실려져 있다. 개로왕대 대중국 관계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472년 북위와의 교섭을 벌린 일이다.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 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그동안 남조 국가 일변도로 외교 관계 를 유지해 온 백제의 대중외교에서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백제의 송과의 교섭은 송 의 내부적 혼란으로 인하여 471년을 끝으로 한동안 중단을 하게 되었다. 471년 백제가 송과 교 섭을 중단한 것은 북위에 접근하는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개로왕이 북위에 교섭을 벌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466년 북위 현종이 고구려 장수왕의 왕녀를 후궁으로 삼는 문제( 위서 권 100 열전 88) 때문에 두나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북위의 文明太后 가 顯祖의 후궁을 맞이하기 위해 고구려에 청혼을 하였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부함에 따라 두나 라 사이는 긴장이 고조되었다(노태돈, 2005,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 울 66, 177~178쪽 참조). 개로왕은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혼사 문제로 틈이 벌어지고 때마침 내부 정정 불안으로 송과의 교섭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간파하고 과감히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 서 고구려가 남으로 송과 통하고 북으로 과 통하고 있으며, 또 고구려가 북위의 사신을 고 의로 물에 빠뜨려 죽였으므로 마땅히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가 예상 을 하지 못하게 허를 찔러 북위에 접근한 것이다. 개로왕의 국서에 나타났듯이 백제가 북위와 교섭을 한 목적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의 외교 관계를 차단하는 것과 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440) 제후국(藩屛) : 본래는 울타리라는 뜻인데, 이것이 轉하여 한 지방을 鎭定하여 왕실을 수호하는 諸侯國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441) 대궐(雲闕) : 구름모양처럼 우뚝 솟은 천자의 궁궐을 비유한 말. 442) 사사로이 임명한(私署) : 사사로이 관작을 준다는 뜻으로 중국 왕조에서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 한 관작을 뜻한다. 백제왕이 먼저 자신의 신하들에게 중국의 장군호와 왕 후호를 임시로 수여 한 다음 이를 중국 왕조에 정식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하여 중국 황제로부터 정식 관작을 제수받 는 형식을 취하는 제도를 말한다. 당시 중국 주변제국의 군왕이 남북조국가에게 특정한 관작을 요청할 때 자칭호를 사용하는데, 이를 承制假授 또는 私假制 로 부른다. 주변 제국의 군왕이 중국왕조로부터 관작 제수를 전제로 자칭호를 사용하거나 또는 行 이나 私假 假授 등의 형식을 가진 관작을 임시적으로 임명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坂元義種, 1978, 古代東 アヅアの日本と朝鮮, 吉川弘文館, 277~283쪽과 노중국, 2004, 한성백제의 함락과 수도 이

63 124 弗斯侯445) 長史446) 餘禮와 龍 將軍447) 帶方太守 司馬448) 張茂449)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전, 향토서울 64, 33~38쪽을 참조할 것. 자칭호를 사용하는 사가제는 고구려나 신라에서 발 견된 사례는 없지만, 송과 책봉 관계를 가진 百濟, 倭, 淸水 族 武都王, 羌族 宕昌王 등에서 간 간히 나타나고 있다. 개로왕대 사가제 실시 의도에 대하여 백제 왕권이 쇠약한 상황에서 실권귀 족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왕실의 위상을 유지하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노중국, 2004, 앞의 글, 36~38쪽), 이는 왕권을 중심으로 해서 중신들의 신분적 서열을 체계화하기 위한 왕권강화 측면 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 443) 冠軍將軍 : 중국 남조 宋의 경우 冠軍장군은 3품직이다( 宋書 권40 백관 하 참조). 그러나 魏 書 권113 官氏志에는 관군장군이 보이지 않는다. 관군장군이란 칭호의 유래에 대해서는 宋書 권39 백관 상에 冠軍將軍 楚悔王以宋義爲卿子冠軍 冠軍之名 自此始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444) 駙馬都尉 : 駙馬는 임금의 사위이고 駙馬都尉는 중국에서 魏 晉 이후 公主에게 장가든 자에게 拜授된 직이다. 陳書 권17 袁樞傳에 樞議曰 漢氏初興 列侯尙主 自斯以後 降嬪素族 駙馬 都尉置由漢武 齊職儀曰 凡尙公主 必拜駙馬都尉 魏晉以來 仍爲瞻準 蓋以王姬之重 庶姓之輕 所以假駙馬之位 乃崇於皇女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부마도위의 관품은 북위의 경우 魏書 권113 官氏志에 의하면 從四品 上이고, 주서 말미에 보면 6품관으로 되어 있다. 弗斯侯 餘禮의 관작이 駙馬都尉인 것으로 보아 그는 개로왕의 사위로 보인다. 개로왕 18년(472) 북위에 청병사로 파견된 長史 餘禮는 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 라는 작호를 겸대하고 있는 것 으로 보아 그는 왕족이면서도 개로왕과 통혼관계를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왕족 사이에 근친혼이 행해졌다는 것은 진씨와 해씨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왕비족 운영 방식에 변화를 시사 해 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개로왕대에는 기존의 왕비족이 아닌 새로운 통혼 방식을 통해 지금까지 권력의 한 축으로 국정 운영에 큰 역할을 해왔던 진씨와 해씨세력의 영향 력에서 벗어나 국왕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 왕권 강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을 의 미한다. 445) 弗斯侯 : 백제의 王 侯 太守制의 하나. 이 王 侯의 명칭을 보면 地名을 冠하고 있어 왕 후 와 해당 지명과의 연계성이 보인다. 弗斯 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比斯伐-전주 혹은 夫沙-승주 낙안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六興出版社, 241쪽 ; 坂元義種, 1978, 5世 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 吉川弘文館, 221쪽), ②伐首只-당진 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9, 마한제국 위치시론, 동양학 9, 206~207쪽)가 있을 정도로 견해차가 크지만 전라도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백제왕은 왕 아래에 王이나 侯 를 든 것으로 보아 당시의 백제왕은 대왕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왕이 휘 하에 왕이나 후를 두게 된 시기는 근초고왕대부터로 생각되며, 이것이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것 은 본 기사가 처음이다. 그리고 남제서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冠軍將軍 都將軍 都漢王 寧 朔將軍 面中王 行建威將軍 弗斯侯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등 백제 동성왕이 임명한 많은 125 수의 왕 후 태수 등이 나온다. 왕 후의 성격에 대해 이를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의 장 으로 보는 견해(坂元義種, 1978, 앞의 책 ; 李道學, 1990, 한성후기의 백제의 왕권과 지배체제 의 정비, 백제논총 2,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金英心, 1990, 5 6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 制, 韓國史論 22), 백제의 작호로 보는 견해(梁起錫, 1984, 5세기 백제의 王 侯 太守制에 대하여, 사학연구 38), 爵位的인 分封이라기보다는 對中國 외교에 있어 백제왕의 권위를 높 이기 위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朴賢淑, 1993, 百濟 魯制의 實施와 그 性格, 宋甲鎬교수정년기념논총 ) 등이 있는데, 이는 왕권을 중심으로 해서 중신들의 신분적 서열을 체계화하기 위한 왕권강화 측면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 446) 長史 : 백제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설치하였다. 장사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장군의 幕府에 두어진 상층 관료의 하나였다. 南齊書 권15 백관에 凡公督府置佐 長史 司馬 各一人 諮議參軍 二人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宋의 長史의 관품은 宋書 권40 백관 하에 撫軍以上及持節都 督領護長史司馬 는 6품관으로, 諸軍長史司馬六百石者 는 7品官이었다. 北魏의 경우 公 府 및 諸開府 長史는 從4品 上으로 되어 있다( 魏書 권113 官氏志 참조). 幕府에 두어진 상충부 의 長史 司馬 諮議參軍 등 上佐들은 領郡과 領縣의 수령을 겸임하여 郡縣행정을 장악하였다 (金翰奎, 1985,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 會, 일조각, 쪽).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에 長史 司馬 參軍의 속관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梁書 권54 열전 48 諸夷 고구려). 본 기사와 남제서 권58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長史 및 본서 권27 백제본기 위덕왕 45년조에 나오는 秋九月 王使長史王辯那入隋朝獻 이라 한 기 사 등에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장사는 중국과의 외교관계의 업무에 일시적으로 종사하였던 겸 직관으로 이해된다(坂元義種, 1978, 앞의 책, 396~399쪽). 447) 龍 將軍 : 백제 개로왕이 유송의 장군호를 참작하여 수여한 장군호의 하나. 北魏의 경우 용양 장군의 관품은 3品 上이고, 宋의 경우도 3品官이다. 448) 司馬 : 백제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설치한 관직이다. 중국에서의 사마는 남북조시대에 장군 의 幕府에 두어진 상층 관료의 하나로 주로 군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北魏의 경우 公府 및 諸開 府 司馬의 관품은 從4品 中으로 나온다( 魏書 권113 官氏志). 그리고 宋의 경우 撫軍以上及持 節都督領護長史司馬 는 6품관으로, 諸軍長史司馬六百石者 는 7품관으로 나온다( 송서 권40 백관 하). 幕府에 두어진 司馬는 상층부의 長史 諮議參軍 등 上佐들과 더불어 領郡과 領 縣의 수령을 겸임하여 郡縣행정을 장악하였다(金翰奎, 1997, 앞의 글, 쪽). 449) 張茂 : 백제 개로왕대의 인물. 張氏라는 漢式姓을 가진 것으로 보아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 사 정에 정통한 낙랑 대방계의 한인관료 출신으로 추정된다. 대방태수 장무는 대방지역에 연고를 가진 인물로 추정된다.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한 대방은 이후 요서지역으로 옮아가 고구 려와 계속 대립을 벌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천관우, 1977, 난하하류의 조선 -중국 동방주 군의 치폐와 관련하여-, 사총 21 22합집을 참조할 것. 개로왕 국서에서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할 경우 북연과 낙랑 대방군의 잔여세력도 이에 가세할 것이라 언급한 점에서 이들 세력 이 백제와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김수태, 2000, 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백제사상의 전쟁, 서경문화사, 233쪽). 따라서 대방계 장무의 북위 파견은 북

64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 친히 군사를 이끌고 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할아버지 須(근구수왕)가 성이라도 바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天神)과 땅의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로 잠시 싸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운 끝에 釗의 머리를 베었습니다.453)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 450) 고 해도 길이 여한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旦聞夕沒) 하였습니다. 이 없겠습니다. [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扶餘에서 나왔습니다.451) 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그러나] 풍씨(馮氏)454)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455) 추악한 무 리들(醜類 : 고구려)이 점차 번성해져서456)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 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457) 하였으나, 그 할아버지 쇠(釗 : 고국원왕)452)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며 연 낙랑 대방의 잔여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하기 위해 파견된 것으로 이해된다. 450)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 본 기사는 論語 里仁篇 8章의 子曰朝聞道夕死可矣 를 改書하여 표현한 것이다. 451)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扶餘에서 나왔습니다 :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출자가 부여 고구려계라 는 전승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백제 왕실 스스로에 의해 표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 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경쟁관계가 심화됨으로 인해 정치 외교적인 목적에 따라 자신의 출 자를 때로는 부여에, 때로는 고구려에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 운 주몽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자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하지 않고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 서 나왔다고 한 것은 부여족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의식 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臣與高句麗源出扶餘 라 한 기사 (본서 권25 백제본기 蓋鹵王 18년조 및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나, 日本書紀 권19 흠명기 14년조에 성왕의 아들 餘昌(威德王)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에 앞서 今欲早知 與吾可以禮問 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率 年二十九矣 라 한 기사, 그리고 538년 백제 성왕이 사 비천도와 함께 국호를 일시적으로 南扶餘로 고친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서울시 송파 구 석촌동과 가락동 일대에 분포하는 적석총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입증해 주는 실물 자료이 다. 이처럼 백제는 직접적으로 고구려에 기원을 두었지만 멀리는 부여에 국가적 기원이 있음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는 백제 왕실이 고구려를 의식하여 부여의 정통 적자로서 그 정체성을 강 조하기 위한 것으로 동명묘 배알 의식을 통해서도 발현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부 여 계통임을 입증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중서부지방의 토광묘를 계통적으로 길림의 유수 노하 심유적과 남성자유적 동쪽의 모아산유적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백 제의 건국설화에서 보듯이 그 지배세력의 계통은 단일하지는 않고 여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452) 쇠(釗) : 고구려의 제18대 왕인 故國原王의 다른 이름. 고구려 고국원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일명 斯由라고 하였다. 그는 369년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대해 서는 본서 권24 주 311)을 참조할 것. 453) 저희 할아버지 須가 釗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 고구려의 故國原王이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 우다가 流矢에 맞아 죽은 것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371)조에는 근초고왕이 태자 近仇須와 더불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 기사에는 근구수왕이 고국원왕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평양성 진격을 태자 근구수가 주도한 것을 반영해 준다고 할 것이다. 454) 풍씨(馮氏) : 北燕을 말한다. 北燕은 중국의 5胡 16國시대의 한 나라로 존속기간은 2세 28년간 ( )이다. 407년 시조 馮跋이 後燕의 亂을 틈타서 자립하여 昌黎를 근거로 天王을 칭하 면서 성립되었다. 현재의 중국 요령성 남부와 河北省의 舊永平府의 북부를 영유하였다. 455) 馮氏가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 北燕王 馮弘은 시조 馮跋의 동생으로 430년에 태자 翼을 죽이고 스스로 자립하여 국호를 北燕이라 개칭하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436년에 北 魏 太武帝의 공격을 받게 되자 고구려 장수왕의 도움으로 몸만 겨우 구출되었으나, 결국 장수왕 에 의해서 교만하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본 기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서 권18 고구 려본기 장수왕 24년조를 참조할 것. 456) 추악한 무리들(醜類 : 고구려)이 점차 번성해져서 : 고구려가 풍홍의 망명 이후 점차 번성해졌다 는 것은 북위의 적개심을 일으키려는 백제의 선동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이병도, 1977, 역 주 삼국사기, 389쪽). 457) 원한을 맺고 힘도 고갈되어[財 力竭] : 전쟁으로 인한 財物과 民力의 손실을 말한다. 孫 子 作戰篇에 其用戰也 勝久則鈍兵 挫銳攻城則力屈 久暴師則國力不足 夫鈍兵挫銳 屈力貨 則諸 侯乘其廢而起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 이라 한 기사 참조. 436년 북연의 풍홍이 고구려에 망명 함으로써 고구려가 이후 30여년 동안 백제를 업신여기고 핍박했다고 한다. 고구려와 원수 관계 에 있은지 30여 년이 되었다는 것은 백제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472년을 기준으로 하면 440년 경이 된다. 이 440년이란 시점은 庚辰年에 해당하는데, 개로왕의 국서에서는 북위 사신이 백제 로 건너오다가 난파당했다는 특정한 사건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 것과도 시기적으로 일치한 다. 그런데 본서 권25 비유왕대에는 고구려와의 군사적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가 나오지 않고 있

65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매우 불쌍하게 여기 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 심(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 은 남쪽으로 劉氏463)와 내통하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 시오. 마땅히 제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 이처럼 의지하면서 왕법[王略]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465)은 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丹水466)를 쳐서 벌주었으며, 孟嘗君467)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 않겠습니다. 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체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 )464)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璉(장수왕)은 죄가 지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大臣과 힘센 귀족들 지난 庚辰年468) 이후에 신이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小石山北國469) 바다 가운데서 시 을 죽이고 살해하기를 마지않아,458)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 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써야 할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459)의 군사 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460)을 가지고 있으며, 樂浪의 여러 461) 郡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首丘之心) 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 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이끌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 )462)가 번국으 으며, 당시 고구려가 풍홍의 소환 문제로 인해 북위와의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 로왕이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개로왕이 북위로부터 청병을 하기 위해 대고구려 관계를 다소 과장시킨 측면이 있지만, 어쨌든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진이 적극화 되어 백제의 곤핍을 가져오게 된 계기를 풍홍의 망명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58) 璉(장수왕)은 살해하기를 마지않아 : 이것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왕권에 대 항하는 유력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사는 고구려를 비난하기 위 해 과장된 측면이 있으나, 천도가 갖는 정치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왕권에 반발하는 귀족세력 들이 도태되고 왕권의 전제화가 한층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459) 풍족(馮族) : 고구려로 망명해 온 北燕王 馮弘을 따라온 집단을 말한다. 460)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 : 집에서 기르는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말한다. 461)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首丘之心) : 여우는 죽을 때에 머리를 본래 살던 언덕으로 향한다는 것 이다. 그 뜻이 變轉되어 고향에 歸葬하는 것을 歸正首丘라고 한다. 이 구절은 禮記 권7 檀弓 上에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丘首仁也[正首丘也 [疏] 所以 正首而嚮丘者 丘是狐窟穴 根本之處 雖狼狽而死 意猶嚮此丘 是有仁恩之心也] 라 한 데서 나온 것이다. 462) 외효(嵬 ) : 漢나라 成紀 출신의 사람. 자는 季孟. 王莽末에 西에 웅거하여 西州上將軍이라 자칭하고 劉玄을 받들다가 뒤에 後漢의 光武帝를 섬겼다. 그 후 다시 叛하여 公孫述에게 붙었다 가 광무제의 정벌을 받고 서역으로 도망가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외효는 배반을 잘하는 反覆無 常한 인물을 뜻하게 되었다. 後漢書 권13 열전 公孫述列傳 참조. 463) 劉氏 : 중국 남조의 宋나라를 말하는데, 존속기간은 까지이다. 宋은 東晉의 權臣이었 던 劉裕가 恭帝의 禪讓을 받아 세웠으며, 建康(현재의 중국 江蘇省 南京)에 도읍하였다. 8대 59 년만에 남제에게 망하였다. 劉裕가 세웠기 때문에 劉氏라고 한 것이다. 464) 연연( ) : 柔然이라고 하는 北狄의 일종. 東胡의 苗裔로 姓은 郁久閭氏이라 하였는데, 북위 世祖 太武帝(423~452)가 그의 못난 모양이 벌레와 같다고 해서 그 칭호를 이라 하였다. 처음 拓跋氏에 속하였으나 社崙이 柔然可汗이 되면서 內外蒙古를 統領하였다. 후에 後魏에게 패하고, 이어 突厥에게 멸망당하였다. 魏書 권103 열전 92 傳 참조. 宋 齊때에는 芮芮 로, 周 隋때에는 茹茹 로 불리웠다. 고구려가 한때 연연과 함께 대흥안령 방면의 地豆于를 분할하 려고 시도한 사례( 위서 契丹傳)가 있다. 465) 요임금(唐堯) :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인 堯임금을 말한다. 唐은 堯의 號가 陶唐이기 때문에 唐堯 라 한 것이다. 黃帝의 曾孫인 帝 의 아들이라고 한다. 466) 丹水 : 중국 산동성에 있는 내 이름. 俗稱은 丹河 丹淵 丹江이라고도 한다. 발원지 하나는 昌 樂縣에서 남쪽 方山에서 나오는 東丹水가 있고, 또하나는 臨 縣의 동북에 있는 丹山에서 나오 는 西丹水가 있다. 堯임금이 이 丹水浦에서 苗蠻과 싸워 항복을 받았던 장소이며, 舜이 堯의 아 들 丹朱를 봉했던 곳이기도 하다. 水經注 丹水注에 呂氏春秋曰 堯有丹水之戰 以服南蠻 卽此 水也 라 한 기사 참조. 467) 孟嘗君 ; 중국 전국시대의 인물. 성은 田, 이름은 文이다. 薛땅을 封土로 받아 孟嘗君이 되었다. 중국 전국시대의 齊나라의 宰相으로 있을 때 어진 선비를 招致하여 食客이 3천명에 달하였다. 본 기사는 일찌기 맹상군이 趙나라에 들렀을 때 趙나라 사람이 그를 비웃자 노하여 同行者와 함 께 수백인을 쳐 죽이고 一縣을 멸하였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史記 권75 열전 孟嘗君傳에 孟嘗君過趙 趙平原君客之 趙人聞孟嘗君賢 出視之 皆笑曰 始以薛公爲魁然也 今視之 乃小丈夫 耳 孟嘗君聞之怒 客與俱者下 斫擊殺數百人 遂滅一縣以去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468) 庚辰年 : 440년으로 백제 비유왕 14년이며, 고구려 장수왕 28년이다. 이때 백제가 북위와 교섭

66 체 10여 구를 발견하고 아울러 衣服과 器物, 鞍裝과 굴레(勒) 등을 주워서 살펴보니 사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 니다. 무릇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의 470) 려오던 중 큰 뱀(長蛇 : 고구려) 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자 471) 472)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 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느낍니다. 옛날 宋나라 가 申舟 를 죽이니 楚나 : 고구려 왕)가 황제의 길을 걸터앉아 막게끔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라473) 莊王474)이 맨발로 뛰어나갔고,475)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信陵君476)이 식 이 한가지로 사실을 증험하십시오. 顯祖477)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더욱 두터 이 예후하고, 사자 邵安478)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詔書479)를 내려 을 추진한 일을 말한다. 교섭의 구체상은 알 수 없지만 북위 사신이 백제로 오던 중 고구려의 방 해로 인해 중도에 난파되어 일이 성사가 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유왕이 북위와 교섭을 시도한 것은 개로왕이 보낸 국서에 나타났듯이 436년 북연의 멸망과 풍홍의 신병 인도에 따른 고구려 북위 송 사이의 국제적인 대립과 분쟁 여파가 바로 백제에 미칠 것으로 판단한 것 같 다. 풍홍의 소환을 요구해 온 북위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의 사신 파견을 곧바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469) 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三國志 권30 魏書 동이전 韓傳에 보이는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470) 큰 뱀(長蛇) : 잔인하고 흉악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곧 고구려를 경멸하여 일컬는 표현이다. 이 표문에서는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으로 승냥이와 이리[豺狼] 추악한 무리들 [醜類] 더벅머리 아이[小竪] 등을 사용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멸칭으로 百殘 `광개토왕릉비문a ( )을 사용하였다. 471) 宋나라 : 중국 춘추시대의 12列國의 하나.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를 멸망시킨 후 殷나라 帝乙의 庶長子요 紂王의 庶兄인 微子 啓를 封해서 湯王의 제사를 받들게 한 나라. 商丘에 도읍하였다. 康王 偃에 이르러 왕을 稱하였으나 齊 楚 魏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 지역은 현재의 중국 河 南省 商丘縣 以東에서 江蘇省 銅山縣 以西의 땅에 해당된다. 472) 申舟 : 중국 戰國시대의 楚나라의 大夫. 이름은 文之無畏. 楚莊王의 명을 받아 齊나라에 사신으 로 갔는데, 도중에 宋나라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 14년에 楚子使申舟聘于齊 曰無假道于宋 亦使公子馮聘于晉 不假道于鄭 申舟以孟諸之役惡宋曰鄭昭宋聾 晉使不害我 則必死 王曰殺女我伐之 見犀而行 及宋宋人止之 華元曰過我而不假道鄙我也 鄙我亡也 殺其使者必伐我 伐我亦亡也 亡一也 乃殺之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473) 楚나라 : 중국 춘추시대 五覇의 하나로 戰國시대에 와서 7雄의 하나가 되었다. 武王 이래 25세 500여년간 이어졌는데, 존속기간은 B.C.704 B.C.202년이다. 양쯔강 중류의 땅을 차지하여 湖北省에 도읍하였다. 뒤에 秦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474) 莊王 : 중국 春秋시대 楚나라 왕으로 생몰연대는 B.C 년이다. 이름은 侶이고 成王의 손자이다. 뒤에 晉나라를 격파하고 제후의 覇者가 되었다. 475) 楚나라 莊王이 맨발로 뛰어나갔고 : 申舟가 楚莊王의 명을 받아 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도중에 宋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은 극도로 분노하여 맨발로 걸어 나와 군사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表를 받고 별 탈 없다고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480) 밖 에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가 되 일으켜 송을 쳤다는 故事를 말한다. 春秋左氏傳 宣公 14년에 楚子使申舟聘于齊曰無假道于宋 申舟以孟諸之役惡宋曰鄭昭宋聾 及宋宋人止之 華元曰過我而不假道鄙我也 鄙我亡也 殺其使者必伐我 伐我亦亡也 亡一也 乃殺之 楚子聞之 投袂而起 及於室皇 劒及於寢門之外 車及於 蒲胥之市 秋九月 楚子圍宋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476) 信陵君 : 중국 戰國시대 魏나라 昭王의 公子로 이름은 無忌이다. 생몰연대는 B.C.? 244년. 신 릉군은 그의 封號이다. 食客 3천명을 기른 것으로 유명하다. 사기 권77 열전 魏公子列傳 참조. 477) 顯祖 : 北魏의 獻文帝를 말하는데, 이름은 弘이다. 高祖 孝文帝의 父로서 재위기간은 년까지이다. 魏書 권6 顯祖紀 참조. 그는 471년 8월 스스로 물러나 太上皇帝가 되고 5세에 불 과한 宏(효문제)에게 선위를 하였다. 그는 23세가 되던 476년 죽을 때까지 어린 효문제를 대신 하여 섭정을 하였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낼 때 이를 처리한 북위의 황제는 효문제였다. 따라서 현조를 북위의 효문제로 본 이병도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1976, 역주 삼 국사기, 390쪽). 478) 邵安 : 북위 獻文帝대의 인물. 백제에 使臣으로 파견되었으나 고구려의 방해와 풍랑 때문에 임 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479) 詔書 : 천자의 명령을 기록하는데 사용하는 문체. 처음에는 命 誥誓 라 했으며, 秦代에는 命 을 制 로, 令 을 詔 라 하였다. 480) 먼 곳(五服) : 고대 중국에서 京畿 밖의 지역을 5등급으로 나누어 이를 5服이라 하였다. 5服의 명칭은 甸服 侯服 綏服 要服 荒服이다. 1服은 5백리 지역이다. 따라서 5服의 밖이라 하는 것은 매우 먼 外地를 말한다.

67 고 팔방 끝(八表)481)에서까지 義로움에 귀순하여 [아이를] 업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 경에 찾아와서 사신은 申胥484)의 정성을 겸하니 나라에는 楚나라 越나라485)와 같은 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보 위급함486)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응당 의로움을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 았도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당했지만 진실로 능히 개처럼 쳐야 할 것이다. 다만 고구려는 先朝에 대해 藩國을 칭하면서 조공을 한 지가 義로움에 순응하고 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앞서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지은 잘못이 있었지만, 우리 나라(魏)에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荒服482)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지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어긴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 나도록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벌할 것을 요구하는데, 사정과 기회를 검토해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다. 알 수 없도다. 경이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 그러므로 지난해(往年)487)에 禮488) 등을 보내 平壤으로 보내 그 사유와 정상을 증험하 다. 비슷한 일을 가지고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된다. 經營하고 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빈번히 上奏하여 청원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공략하는 요체는 別旨에 갖추어 있다. 사신(行人)이 그 주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꾸짖을 수가 없었 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듣고 禮 등에게 조서를 내려 돌려보낸다. 만일 이제 다 [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483) 갚으려고 백 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나중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 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황무지 변 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면 의로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자주 침범하며, 先君의 옛 원한을 움에 합당할 것이다. 九夷489)의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건너 살면서 道가 창달되면 藩 481) 팔방 끝(八表) : 아주 먼 곳을 말하는데, 전 세계를 가르키기도 한다. 482) 荒服 : 고대 중국의 五服의 맨 마지막. 王畿로부터 떨어진 것이 2,000리에서 2,500리 사이를 말한다. 왕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化外의 蠻夷를 지칭하기도 한다. 앞의 주 480)을 참조할 것. 483) 先君의 옛 원한을 : 선군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가리키며, 옛 원한이란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 투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해 전사한 사실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4 주 317) 및 331)을 참조할 것. 484) 申胥의 정성 : 春秋시대 楚의 大夫 申包胥를 말한다. 姓은 公孫氏이고 申땅에 封해졌기 때문에 申包胥라고 불렀다. 申胥는 史記 伍子胥列傳에 나오는 伍子胥의 별명이다. 그는 吳나라가 楚 나라에 쳐들어오자 秦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했는데, 담에 의지하여 밤낮으로 哭하였고, 한 모 금의 물도 7일 동안이나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秦이 군대를 발동하여 楚의 위급함을 구하 여 주었다고 하는데, 이를 申胥之誠 이라고 한다. 淮南子 권19 修務訓에 申包胥竭筋力 以赴 嚴敵 伏尸流血 不過一卒之才 不如約身卑辭 求救於諸侯 於是乃糧跣走 跋涉谷行 上山 赴深谿 游 川水 犯津關 獵蒙籠 蹶沙石 蹠達膝 曾繭重 七日七夜 至於秦庭 鶴而不食 晝吟宵哭 面若死灰 顔 色黴黑 涕液交集 以見秦王 曰吳爲脩蛇 蠶食上國 虐始於楚 寡君失社稷 越在草茅 百姓離散 夫婦 男女 不遑啓處 使下臣告急 秦王乃發車千乘 步卒七萬 屬之子虎 踰塞而東 擊吳濁水之上 果大破之 以存楚國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485) 越나라 : 중국 夏나라의 少康의 아들이 會稽에 封함을 받은 곳. 春秋시대 14개 列國 중의 하나로 서 현재의 중국의 浙江省 紹興縣治이다. 姓은 姓이다. 春秋末 吳를 멸하고 江蘇 折江 및 山 東省의 일부를 소유하였으나 후에 楚에 의해 멸망되었다. 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 해 묶는 일(羈 )490)은 옛 典籍에 드러났지만, 矢491)를 바치는 것은 연중 때때로 비었 486) 楚나라 越나라와 같은 위급함 : 楚나라 昭王이 吳나라의 침략을 받아 秦에게 구원을 청하던 일 과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에게 패하여 會稽山에서 항복을 애걸하던 것과 같은 위급한 형세를 말 함. 487) 지난해(往年) : 지난 해는 개로왕이 餘禮 등 백제 사신을 위나라에 보낸 472년을 가리킨다. 조서 와 본문 내용에 나타난 일의 진행 과정에서 차이가 보이고 있다. 488) 禮 : 여기서는 백제가 파견한 부마도위 餘禮를 말한다. 489) 九夷 : 중국이 자기들의 동쪽지방에 거주하는 이민족들을 지칭하는 말.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에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也 言仁而好生 萬物地而出 故天性柔順 夷有九種 曰 夷 于夷 方 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라 하여 그 명칭이 보이고 있다. 490) 속박해 묶는 일(羈 ) : 羈는 마소의 굴레이고, 는 고삐인데, 붙잡아 맨다는 뜻이다. 이것이 轉 하여 다른 나라에 內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491) 호시( 矢) :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 石鏃(石弩)과 한가지로 옛부터 속신의 특산물로서 중국에 보내졌다. 矢의 貢納[矢之貢]이란 周나라 武王이 殷의 桀王을 쳐서 멸망시키자 肅愼이 石弩와 矢 를 보낸 것을 말한다. 國語 魯語 下에 武王時 肅愼氏貢矢石 長尺有咫 이라 한 기사와 후한 서 권85 동이열전에 及武王滅紂 肅愼來獻石矢 라 한 기사 참조.

68 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 漢城을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맞지 않지만,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포위하였다.496) 왕은 성문을 닫아걸고 능히 나가서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들이 군사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 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드높이고 국경밖에 깃발(旌旗)을 달며, 외딴 나 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 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 다. 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 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니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 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수 있으니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알려주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터이니 또 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비단 베(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었으니,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別旨와 내리도다. [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 나] (邵)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璉은 예전에 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492)이 있다고 하면 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邵)安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 절히 책망하였다. 뒤에493) (邵)安 등으로 하여금 東萊494)에서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개로 왕)에게 조서(璽書)495)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邵)安 등이 바닷가 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 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자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으나,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492) 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 :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을 말한다. 앞의 주 483)을 참조할 것. 493) 뒤에 :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는 五年 으로 되어 있다. 北魏의 延興 5년은 475년으로 개 로왕 21년이다. 494) 東萊 : 중국 산동성에 속해 있는 縣의 명칭으로 漢나라 때에 처음으로 두었다. 원래 山東의 登 州 萊州의 땅인데 현재의 중국 山東省 掖縣의 治所이다. 495) 조서(璽書) : 璽는 天子의 도장으로 秦이래 玉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천자만 사용하였다. 唐나 라에서는 寶라고 하였다. 璽書는 秦 漢 이후 封한 곳에 御印을 찍은 천자의 詔書를 말한다. 496) 고구려 왕 巨璉(장수왕)이 漢城을 포위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 왕 63년조에 나온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에 대해서는 개로왕 20년 (474)으로 기록한 자료(본서 권3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7년 추7월), 476년으로 기록한 자료 日本書紀 권14 ( 雄略紀 20)도 있다. 그러나 476년으로 기록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 조에 인용된 百濟記 에는 蓋鹵王乙卯年冬 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이라 하여 乙卯 年(475 : 개로왕 21)으로 되어 있고 또 웅략기 20년조 본문 기사의 원전이 된 점, 그리고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조에는 63년(475)조에도 기록되어 있어 47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사건이 일어난 해를 475년으로 본다면 그 구체적인 발생시점에 대해서도 문제 가 생긴다. 7월설(본서 신라본기) 冬說( 百濟記 ) 9월설(고구려 및 백제본기)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475년으로 기록된 9월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다만 百濟記 의 冬說 은 冬의 첫달인 10월로 볼 경우 9월설과는 어긋나지 않는다. 즉 9월 후반에 고구려의 공격이 시 작되고 10월 초순경에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고구려의 공격이 끝난 직후 웅진천도가 단행된 것 으로 보면 사건 전개상의 모순이 없어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현구 외, 2002, 일본서기 한 국관계기사 연구(Ⅰ), 일지사, 266쪽을 참조할 것. 그런데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기에 앞서 백제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키 위한 대중국 외교를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466년 혼인 문제에 이어 472년 백제의 북위 교섭은 고구려를 크 게 긴장시킨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인해 북위와의 관계에서도 일련의 긴장이 야기되 고 있었다. 더구나 고구려는 470년대 송화강 유역의 阿城 일대의 勿吉과 여러 차례 분쟁을 일으 키고 있었다. 물길은 고구려에 대해 군사적 공세와 함께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압박 하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와 勿吉과 같은 주변의 여러 세력이 연대하여 고구려에 압박해 오기 전에 먼저 백제를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백제의 외교적 고립과 내부 분열의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하였다. 고구려는 북위 와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472년 백제의 북위 교섭으 로 인해 고구려와 북위 두 나라 사이는 한때 긴장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고구려의 노력으로 곧 회복되었다. 고구려는 종전과는 달리 472년부터 매년 2차례씩 사신을 파견하였고 공물도 2배 가 많은 양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기까지 매년 2차례씩 사신 을 파견하고 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고구려는 474년 463년 이래 잠시 중단되었던 송과의 관계를 시도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국가와 등거리외교를 전개하 면서 그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대송외교와 대북위외교의 수위를 조절해 왔던 것이다. 475년 이 후에는 백제와의 외교전이 첨예하게 진행되면서 대북위외교에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전환을 하 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가 472년 이후 대중외교를 강화하고 나선 것은 백제 침공에 앞서 야기될 수 있는 대외 문제에 대해 고구려의 입장을 설득하고 나아가 백제를 국제적으로 고립시

69 136 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 137 하였다. 다.497)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은 나가서 항복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은 있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 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臣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시고 가르쳐 시키신다면 기필코 나니 고구려인들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려고 백제에서 간첩 일을 할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에 승려 道琳498)이 모집에 응하여 말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 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때에 백제 왕 近蓋婁499)가 바둑과 장기500)를 좋 아하였는데,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아뢰었다. 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백제 공격의 준비가 갖추어지고 또한 국 제적 환경이 어느 정도 유리하다고 판단된 475년 2월과 7월에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한 다음 바 로 다음 달인 9월에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497) 고구려인들이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 1997년 풍납토성 발굴조사에서 19개 건물터 가 화재로 인해 일시에 내려앉은 사례에서 보듯이(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 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한신대박물관, , 풍납토성 Ⅲ Ⅳ), 475년 고 구려의 화공책으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한성은 그 기반시설이 대부분 파괴된 그야말로 참혹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498) 道琳 : 고구려 장수왕대의 승려. 백제의 내정을 정탐하고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첩자로 백제 에 들어가 바둑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사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승려가 자국의 이익을 위 해 첩자 노릇을 한 예로는 신라의 居柒夫가 승려의 모습을 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정탐을 한 것 을(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 들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과 함께 백제의 내정을 정탐하고 아울러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간첩을 파견하는 방법을 사 용하였다. 백제를 공격하기에 앞서 백제의 내부 사정을 정확히 탐지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적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전쟁 승리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이에 장수왕은 자원하고 나선 승 려 道琳을 백제의 내정을 정탐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도림이 백제에 건너간 시기는 백제의 북위 교섭 직후인 472년으로 판단된다. 백제로 망명해 온 도림은 國手 수준의 바둑 실력이 있었 기 때문에 개로왕이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할 정도의 上客 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도림이 이렇 게 개로왕에게 쉽게 접근하여 신임을 받게 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된다. 먼저 박제상이 왜 에 인질로 가있던 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왜로 들어갈 때 한 것처럼 도림이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점이다. 도림은 고구려의 일개 승려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 라 장수왕 측근에서 佛事를 관장하던 비중 있는 승려라는 점을 내세웠을 것이다. 이에 개로왕은 망명한 도림을 통해 고구려 내정을 샅샅이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을 것으로 판 단하고 도림을 신임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도림은 망명하기 이전에 개로왕이 바둑을 즐긴다 는 취향을 파악하고 바둑을 통해 개로왕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개로왕이 바둑 내기를 즐 긴다는 것은 삼국사기 도미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로왕이 무엇보다도 불교를 통해 왕권 의 전제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도림과 같은 비중있는 고승을 신임하였음이 쉽게 추측된다. 도 림은 개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그 개혁 방안의 하나로 개로왕에게 대토목공사를 벌릴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바라건대 곁(左右)에서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궁성의 수축, 성곽의 축조, 왕릉의 조영, 한강변 蛇城의 동쪽에 서 崇山의 북쪽에 이르는 치수와 대토목공사에 착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의 힘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대토목공사는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 공 사는 개로왕 집권 말기에 비교적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개로왕 집권 후반기의 실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백제를 고의적으로 파탄에 빠뜨리게 하려는 도림의 활동으로 인하 여 백제는 일대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개로왕의 전제화 시책이 도리어 지배세력 간의 분열이 일어났고, 아울러 재정을 피폐시키고 민심을 악화시켜 백제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 졌다. 그동안 도림은 백제의 상황을 수시로 장수왕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도림은 475년 계획대 로 백제가 대토목공사로 인해 파탄에 빠져있는 것을 확인하자 이때가 백제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백제를 탈출하여 장수왕에게 백제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장수왕 은 도림의 보고를 듣고 475년 백제 공격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499) 近蓋婁 : 개로왕의 一名. 본 기사의 細注에는 왕명이 近蓋婁 로 나오는데, 近蓋婁王 은 蓋婁 王에 近 자를 앞에 붙혀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는 초고왕-근초고왕, 구수왕-근구수왕과의 관 계처럼 개루왕과 蓋鹵王(近蓋婁王)과의 친연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주 432)를 참조할 것. 500) 바둑과 장기(博奕) : 博은 장기와 바둑 고누 등 對局하는 놀이를 말하는데, 局戱라고도 한다. 奕은 圍 로 바둑을 의미한다. 博奕 이라는 용어는 論語 陽貨篇의 子曰飽食終日 無所用心難 矣 不有博者乎 爲之猶賢乎已 에 대한 集註에 正義曰 博說文局戱也 圍謂之 이라 하 고 있다. 博의 古字는 이며 이는 12줄로 되어 있는 局面에서 흑 백 6말로 되어 있는 고누 를 말한다. 는 棋 또는 碁 라고도 쓰며 이는 바둑을 의미하는데, 山海關 이동의 魯 齊 지방에서는 이를 奕 이라고 불렀다. 唐나라 이전의 바둑은 가로 세로 17줄에 289점이었고, 현재는 가로 세로 19줄에 361점이다. 장기는 漢나라 이후의 놀이로서 局戱의 하나이다. 바둑 에 관한 기사로는 본서 권48 열전 都彌傳 (蓋婁王)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라 것과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有投壺樗蒲等雜戱 然尤尙奕 이라 한 것을 들 수 있다.

70 하고 화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郁里河504)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덧널(槨)505)을 만들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 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텁게 베풀 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한가지 기술만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터럭만한 도 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지 알 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바이다. 라고 말 하였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 새 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 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리되지 않았고 궁실도 고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501) 백성의 집들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 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라 고 말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蒸土築城),502) 그 안에는 궁실과 樓閣 臺 503) 등을 지었는데, 웅장 501)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 선왕은 개로왕의 아버지인 毗有王을 말한다. 비 유왕의 무덤이 露地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다는 것은 비유왕의 죽음이 비정상적이었다는 점과 관 련시켜 이해되고 있지만(이도학, 1985,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 韓國 史硏究 50 51합집, 3~4쪽 ; 노중국, 1988, 앞의 책, 140쪽), 빈발하는 한강의 수재로 인해 비 유왕의 능묘가 유골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훼손된 상태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개로왕은 도 림의 건의에 따라 비유왕의 능묘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이를 위해 郁里河(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어 改葬하였다고 한다. 이때 개장한 부왕의 무덤이 봉토석실 분인지 또는 기단식적석총인지는 분명치 않다. 502) 흙을 쪄서 성을 쌓고(蒸土築城) : 이 기사로 보아 백제의 도읍지로 알려진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이 토성인 사실을 입증해 준다. 晉書 권130 赫連勃勃傳에 阿利性尤工巧 然殘忍刻暴 乃 蒸土築城 錐入一寸 卽殺作者 而幷築之 라고 한 기사가 참고가 된다. 赫連勃勃이 蒸土築城 한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愛宕元, 1991, 中國の城郭都市, 中公新書, 97~100쪽과 門田誠一, 2002, 百濟本紀所在の築城用語に對する釋義 - 蒸土 をめぐって-, 鷹陵史學 28, 155쪽을 참고할 것. 여기서 蒸土築城 이란 축성기법은 赫連勃勃이 축성한 統萬城의 조사 에서 그 실체가 밝혀졌다. 이 성은 현재 내몽골자치구에 접한 陝西省 최북단의 반사막에 가까운 지점에 있는데, 흙을 쪄서 성을 쌓아 마치 철벽과 같이 견고하게 축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만 성 성벽의 샘플 조사 결과 蒸土築城 의 기법은 황토 점토 석회의 혼합된 판축토성임이 밝혀 졌다. 즉 석회에 물을 부어 팽창시킨 다음 여기에 황토와 점토 등을 혼합시켜 단단하게 쌓는 방 식이다. 대량의 석회에 물을 부을 때 생기는 열과 수증기를 이용하는 것이 蒸土의 실체다. 개로 왕이 蒸土築城 한 것은 도성으로 비정되는 서울 풍납동토성이다(신희권, 2002, 풍납토성 발 굴조사를 통한 하남위례성 고찰, 향토서울 62). 풍납토성은 현재 남아있는 부분이 둘레 3.5, 높이 11m 이상이 되며 밑면이 43m로 추정되는 거대한 성이다. 이 성을 蒸土하여 축조하는 데에는 많은 인력과 재정이 소요되어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음이 쉽게 짐작이 간다. 503) 臺 : 臺는 흙을 높이 쌓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고, 는 목조로 집 을 지어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尙書 泰書 上 第1의 惟宮室臺 陂池侈服 以殘害 于爾萬姓[注 土高曰臺 有木曰 正義曰 釋宮又云 謂爲之臺 有木者謂之 李巡曰臺積 土爲之 所以觀望也 臺上有屋 謂之 又云 無室曰 四方而高曰臺]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504) 郁里河 : 지금의 한강을 말한다. 한강에 대한 표기로는 본서에는 郁里河 외에 漢水 漢江이 나 오고,`광개토왕릉비a에는 阿利水로 나온다. 郁里河의 郁里 는 阿利와 음이 근사하다. 505) 덧널(槨) : 개로왕은 郁里河(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槨을 만들어 부왕인 비유왕의 뼈를 묻어 改葬하였다고 한다. 이때 개장한 부왕의 무덤이 봉토석실분인지 또는 기단식적석총인지는 분명 치 않다. 본 기사에 보이는 큰 돌을 가져다가 만든 石槨무덤 을 積石塚으로 보아 석촌동 4호분 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 일지사, 179쪽). 한강유역에서 확인된 백제 한성시대의 묘제는 그 전기에는 토광묘와 분구묘가, 그 후기에는 목관토광묘, 적석총, 횡 혈식설실분으로 누뉘어진다. 토광묘는 封土 가까이에 기와나 石片을 한 겹 덮은 것이 특색이다. 可樂洞 3호분은 토광에 목관을 넣고 관 밖에 토기를 부장하였으며, 高句麗系 黑陶壺가 출토되었 다. 積石塚은 한성시대 후기 서울지역에 국한하여 새롭게 등장하는데, 石村洞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1910대까지는 약 66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현재 6기가 남아 있다. 그 중 3호 적석 총은 방단 계단형 적석총으로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괴된 상태이다. 크기는 동서 50.8m이고, 남북 길이 48.4m로 장대한 규모이다. 구조는 지반을 정지한 후 40~50 두께의 진흙을 깔아 다지고 지대석을 놓았으며, 그 외곽에 20 내외를 자갈돌로 깔았다. 그 위에 장대 석이나 절석을 기선에만 한 줄로 배치하였는데, 기단 석렬 내부는 납작한 할석을 사용한 특징이 있다. 출토 유물은 중국 육조시대의 자기편과 금제 영락이 수습되었다. 서울지역에는 처음에 적

71 140 어 부왕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蛇城506) 동쪽에서 崇山507) 북쪽에까지 이 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 141 죽는 것은 이로울게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木 滿致510)와 祖彌桀取511)<*木 512) 과 祖彌513)는 모두 복성514)이다. 隋書 에 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에게 내주었다. 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文周508)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 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509)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석총이 중심 묘제로 사용되지만 4세기 후반경에는 횡혈식 석실분의 초기형이 등장하여 적석총 을 점차 몰아내면서 백제 묘제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적석총이 중앙 지배층 묘제로 오직 한성 도읍지에 국한되어 조영되었지만 4세기 후반부터 횡혈식 석실분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었다. 횡혈식 석실분은 가락동과 방이동 고분군을 들 수 있다. 그밖에 複合墓制로는 葺石封土墳 圍石 封土墳 土壙積石墓 등이 있다(林永珍, 1995, 백제한성시대고분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 사학위논문 참조). 백제의 묘제 변천에 대해서는 이남석, 1995, 백제 석실분 연구, 학연문화 사 및 2002, 백제묘제의 연구, 서경 및 2004, 백제의 무덤이야기, 주류성을 참조할 것. 506) 蛇城 : 사성은 본서 권24 책계왕 즉위년(286)조에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 蛇城備之 라 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단성과 사성을 수리한 기사가 있다. 蛇 의 訓 뱀 과 風納洞의 풍납 을 바람들이 로 해석하고 이를 연결시 켜 현재의 風納洞土城(서울시 松坡區 風納洞)에 비정하고 있으나(이병도, 1976, 百濟의 蛇城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풍납토성이 발굴조사 결과 백제 왕성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적합지 않다. 그리고 이를 경기도 河南市 渼沙洞 龜山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 (方東仁, 1974, 風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白山學報 16, 67 69쪽)도 홍수때 한강의 범람을 막고 도성 및 왕릉구역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축성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적합지 않다. 따라서 서울시 江南區 三成洞土城에 비정하는 견해(이도학,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일지사, 쪽)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본서 권24 주 285)를 참조할 것. 507) 崇山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경기도 河南市 倉隅洞 동남방의 黔丹山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國譯, 393쪽). 508) 아들 文周 : 백제 22대 문주왕의 계보에 대해서는 위의 삼국사기 기록이나 삼국유사 에서도 다 같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한성 침공(475)으로 개로왕의 직계가 단 절되었던 점( 일본서기 14 웅략 20년 冬), 그리고 그가 보임한 상좌평이 왕의 동생에게 수여 된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이기백,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26쪽)을 고려해 보 면 개로의 아들로 보기에 다소 불합리하다. 따라서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모제라고 한 일본서 기 14 웅략 21년 3월조 기사가 오히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509) 社稷 : 社는 본래 토지의 主神이고 稷은 穀神이다. 옛날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社稷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의 存亡을 같이 하였으므로 轉하여 國家(王朝)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510) 木 滿致 : 백제 개로왕대의 인물로 木氏 가문 출신이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 輔臣으로 활약하였다. 이 목협만치를 久爾辛王代에 전권을 휘두른 木滿致(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25년) 와 동일인 여부를 놓고 그 실재성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목만치의 출생 시기를 403년으로 볼 경우 475년 웅진천도때 역할을 한 목협만치의 연령이 70대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김현구 외, 2002,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Ⅰ), 일지사, 177~178 쪽). 또 하나는 양자를 동일인으로 보지만 구이신왕대 목만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수정해 보아 웅진으로 천도한 후 解氏세력에 밀려 倭로 건너가 蘇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山尾幸久, 1978, 任那に關する一試論 -史料の檢討を中心に-, 古代東アヅア史論集 下, 216~219쪽 ; 古川政司, 1981, 앞의 글, 739~742쪽 ; 鈴木靖民, 1981, 木滿致と蘇我氏, 日 本のなかの朝鮮文化 50, 66~69쪽). 반면 이 기사의 연대를 3주갑 인하하여 개로왕 20년(474) 으로 수정해 보는 견해도 있다(이근우, 1994,` 일본서기 에 인용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한 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85~90쪽). 그러나 木滿致와 木 滿致는 다같이 木氏가문 출신이나 同名異人으로서 목만치는 구이신왕대에, 목협만치는 개로왕 문주왕대에 활 동한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39쪽). 목씨세력은 문주와 정치적 입장 을 같이 하는 이유로 해서 상좌평 문주와 문주와 함께 신라에 청병하기 위해 남행하는데 참여하 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목협만치는 문주왕을 옹립하는데 적극 지지한 측근세력으로 볼 수 있다. 511) 祖彌桀取 : 그의 출신이나 행적 및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 수는 없지만 문주 목협만취와 함께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사실에서 문주와 같은 정치적 노선을 가진 측근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다. 512) 木 : 백제의 귀족가문의 姓으로 複姓의 하나. 이 목협씨는 후에 單姓化될 때 가문의 分枝化에 의해 木氏와 氏로 나뉘어졌다.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의 大姓八族의 하나로 서의 木氏와 氏는 木氏의 分枝化를 보여준다. 한편 日本書紀 에는 木 不麻甲背 日本書 ( 紀 권17 繼體紀 10년), 中部德率 木 今敦 日本書紀 권19 ( 欽明紀 13년) 등의 예에서 보듯이 木 를 姓으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과 羅 는 음운이 상통하므로 木 木羅 는 同一 實體에 대한 異表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94, 백제 귀족가문 연구, 대구사학 48을 참조할 것. 목씨세력의 출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그 출자에 대해서는 ①직산설(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55~156쪽 및 1994, 백 제 귀족가문연구, 대구사학 48, 6~9쪽), ②가야계 귀화인설(정재윤, 1999, 앞의 글, 쪽)이 있으나, 최근에는 수촌리고분과 관련하여 공주설(김수태, 2004, 백제의 천도, 한국고

72 142 는 목협을 두개의 姓515)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 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對盧516)인 齊于 再曾桀婁 古爾萬年<*再曾과 古 143 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北城518)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南城519)으로 517) 는모 대사연구, 36쪽)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 3월조 기사에 의거하여 목씨세력은 가야지역에서 세운 공로와 활동으로 인해 웅진지역에 식읍지를 받았던 것으로 이해 하는 견해가 주목된다(노중국, 2004, 한성백제의 몰락과 수도 이전, 향토서울 64, 76~77 쪽). 어쨌든 웅진지역이 목씨세력의 세력 근거지이든 식읍지이든 목씨세력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목씨세력이 웅진지역의 재지세력이면서 중앙귀족으로 활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의 일인 것으로 나타난다. 즉 목만치의 부친인 木羅斤資가 396년 사씨세력으로 보이는 沙沙奴 와 함께 가라 7국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백제의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久爾辛王(420~427)에 들어와서는 木滿致가 전횡을 할 정도로 전지왕대의 왕비족인 해씨세력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풀이된다. 목씨세력은 개로왕 4년(458) 송 에 요청한 수작자 중에서 龍 將軍을 수여받은 沐衿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주와 함께 개로왕의 즉위와 권력 기반 강화에 적극 활동한 측근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목씨세력은 문주와 정치적 입 장을 같이 하는 이유로 해서 상좌평 문주와 친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또한 문주와 함께 신 라에 청병하기 위해 남행하는데 참여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513) 祖彌 : 백제의 複姓의 하나. 이 祖彌는 姐彌文貴 將軍 日本書紀 권17 ( 繼體紀 7년), 姐瑾 南齊書 권58 (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 이 祖彌 姐彌 를 차미 로 읽고 이를 眞의 訓 참 과 관련시켜 眞氏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 店, 쪽), 일본서기 에는 저미씨와 眞牟씨가 서로 다르게 표기된 점으로 보아 진씨와 같은 성씨로 볼 수는 없다(이용빈, 2003, 웅진초기 백제의 왕권과 정치권의 향방, 선사와 고 대 19, 190쪽). 514) 복성 : 성이 두 字 이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單字姓이나 중국 주 변의 민족들은 複姓이 대부분이다( 魏書 권113 官氏志 참조). 백제의 姓도 왕실의 姓인 扶餘氏 나 大姓八族의 하나인 沙宅氏 등에서 보듯이 복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 번하게 되면서 單字姓制를 채용하게 되었다. 扶餘氏가 餘氏로, 沙宅氏가 沙氏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백제의 성씨에 대해서는 李弘稙, 1971, 百濟人名考,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 丘文化社를 참조할 것. 515) 두개의 姓 : 木을 木 氏와 氏로 나누어 본 것을 말한다. 이 목씨와 협씨는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각각 백제의 大姓八族(沙氏 燕氏 解氏 氏 眞氏 國氏 木氏 氏)의 하나 로 나온다. 516) 對盧 : 고구려의 官名. 대로의 명칭은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 처음으로 보이는 데, 有對盧則 不置沛者 有沛者則 不置對盧 라 하여 패자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 沛者와 對盧의 성격에 대해 패자는 고구려 초기에 那部의 최고 유력자에게 주어진 관계이고, 對盧는 방위부의 유력한 大加에게 주어진 관계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林起煥, 1995, 高句麗 集權體制의 成立 過程 硏究,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66 69쪽). 후에 對盧는 大對盧로 격상되어 최고 귀족회의체의 의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구려의 관제에 대해서는 武田幸男, 1978, 高句麗官 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學報 86 ; 임기환, 1995, 앞의 글 참조). 517) 古 : 백제의 複姓의 하나. 日本書紀 권15 顯宗紀 3년조에 古爾解가 보이는데 와 爾 는 상통하는 字이다. 따라서 고이해의 古爾 도 복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18) 北城 : 이 기사에 의할 때 당시 백제의 도성은 北城과 南城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의 왕성에 대해서는 종래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津田左右吉, 1913, 百濟慰禮城考, 朝鮮歷史 地理 Ⅰ, 南滿洲鐵道株式會社, 43쪽 ; 이병도, 1976, 앞의 책, 503쪽 등)과 송파구 일대설로 대 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송 파구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신희권, 2003, 백 제 한성기 도성제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의 도성은 통칭으로 위례성 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북성 풍납토성과 남 성 몽촌토성의 도성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이도학, 1992,`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 한 검토a, 한국상고사학보 9, 36~38쪽). 이러한 한성의 북성과 남성 도성 구조는 중국 전국시 대의 두성인 邯鄲故城 臨淄故城 燕下都故城과 고구려의 도성체계에서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김기섭, 2007, 한성도읍기의 도성과 도시구조,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경문 화사, 126~128쪽). 519) 南城 : 여기서의 남성은 왕이 살고 있던 居城을 말한다. 주 518)에서 언급한 것처럼 北城이 풍납 동토성이고 남성은 夢村土城에 비정된다. 475년 고구려의 한성 함락 이후 한성에 잔류한 고구 려 군대는 군사방어기능을 갖춘 몽촌토성에서 일정 기간 동안 주둔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몽촌토 성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는 廣口長頸四耳壺를 비롯한 모두 15개 기종 343개체에 달하며, 1989년 夢村土城 6차 조사에서는 확인된 m 가량의 범위에서 ㄱ자형의 온돌 고래와 굴 뚝시설, 그리고 적심건물지는 고구려 후기 건축 유적인 集安 東大子遺蹟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밝 혀졌다. 이 유적은 5세기 후반경으로 편년되며, 한강 북안의 보루유적들보다 출토된 토기류의 수량이 훨씬 적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군이 한성 함락 후에도 단기간에 걸쳐 몽촌토성에 주둔하 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몽촌토성의 토기와 고구려 유적은 6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되는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성유적들보다 시기적으로 빠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몽촌토성에는 한성함락 직후부터 많지 않은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 려군은 한성지역의 치안 유지는 물론 남하하는 고구려군의 보급과 업무연락을 담당하던 거점 중 심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도성의 하나인 남성 몽촌토성의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대해서는 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4, 정비 복원을 위한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 서 및 1985,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서 ; 김원용 외, 1987, 몽촌토성 -동북지구발굴보고, 서 울대박물관 및 1988, 몽촌토성 - 동남지구발굴조사보고, 서울대박물관 및 1989, 몽촌토성 -

73 144 옮겨서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史論> 楚나라522) 明王523)이 [ 장수 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이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520) 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萬 年은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간 것이다.521)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145 公 辛524)의 아우 懷가 왕을 죽 平王525)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討罪하는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 526) 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서남지구발굴조사보고, 서울대박물관 등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에는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大軍來攻大城 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라 하여 大城 王城 慰禮가 보인다. 여기에 보이는 大城은 바로 王城이며, 본 기사의 북성과 남성을 합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慰禮는 都城을 지칭하는 말이 다.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구조에 대해서는 김기섭, 1990,`백제전기 도성에 관한 일고찰a, 청 계사학 7, 65쪽 ; 이도학, 1992, 앞의 글, 38쪽 ; 여호규, 2002,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제와 방어체계, 백제연구 36 등을 참조할 것. 520) 阿且城 : 지금의 광진구 중곡동의 阿且山城을 말하는데, 史蹟 제2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24 주석 284) 참조. 阿旦城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且와 旦의 字形이 비슷한 데서 빚어진 것이다. 아단성은 본서 권24 책계왕 즉위년(286)조에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 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 蛇城備之 라 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단성 과 사성을 수리한 기사가 있다. 현재 아차산성(아단성)은 둘레 약 1,000m의 테뫼식 山城으로 標高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의 한강변 쪽으로 경사진 산허리의 윗부분을 둘러쌓 았으며, 성내에는 작은 계곡이 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은 도망갔다가 고구려군에 붙 잡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아차산성 주변 아차산 일대에는 1997~98년에 걸쳐 서울대박 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수 백여 점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성 벽과 치, 온돌과 집수시설을 갖춘 고구려 관방시설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아차산 일대에는 이러 한 보루유적은 대략 6세기 전반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서는 최종택, 1998, 고고 학상으로 본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출과 백제, 백제연구 28, 135~136쪽 및 2002, 몽촌토성 내 고구려유적 재고, 한국사학보 12, 9~40쪽 및 2004, 아차산 고구려보루의 역사적 성 격, 향토서울 64, 87~128쪽 및 2004,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한국고대사학회 서울시정개발연구원, 467~495쪽 및 2006, 남한지역 고구려 토 기의 편년연구, 선사와 고대 24, 283~299쪽 등이 참고가 된다. 521) 걸루와 萬年은 고구려로 도망간 것이다 : 再曾桀婁와 古 萬年은 백제 개로왕대의 사람으 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 사실과 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조에는 원년에서 14년 까지 아무런 기사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개로왕 초기에 정변이 생겨 그 결과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39쪽). 그러나 이들이 어떠한 문제로 개로왕과 대립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개로왕 이 실시한 불교 장려정책과 무리한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桀婁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적병을 인도하여 예전의 임금을 묶고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이르기를 그러면 伍子胥527)가 개로왕과 그 반대세력이 대립하게 된 것은 도림의 건의에 의해서 불교 장려책과 대토목공사가 착수되는 개로왕 18년(472) 이후의 일로 여겨진다(김수태, 2000, 앞의 글, 238~239쪽 ; 노중 국, 2004, 한성백제의 함락과 수도 이전, 향토서울 64, 57쪽). 522) 楚나라 : 중국 춘추시대 五覇의 하나. 전국시대에 와서 戰國 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25 주 473) 참조. 523) 明王 : 춘추시대 楚의 昭王을 말한다. 고려 제4대 왕 光宗의 諱가 昭이기 때문에 이를 避해서 明 王이라 한 것이다. 昭王은 平王의 아들로서 周의 景王 5년(B.C.540)에 즉위해서 27년간 재위하 였다. 524) 운공( 公) 辛 : 隕은 춘추시대에 열국의 하나로 楚에 의해 멸망되었다. 위치는 현재의 중국 湖 北省 安陸縣이다. 隕公 辛은 지방의 제후이다. 525) 平王 : 楚나라의 왕으로 昭王의 아버지이다. 526) 임금이 신하를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 左傳 昭公 14년에 楚令尹子旗有德於王不知度 與養氏比而求無厭 王患之 九月甲午 楚子殺鬪成然而滅養氏之族 使鬪辛居 以無忘舊勳 이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楚의 平王이 成然을 죽이고 그 아들 辛을 隕에 있게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평 왕의 아들 昭王이 蔡 吳에 패하여 隕으로 도망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左傳 定公 4년에 王 寢盜攻之 以戈擊王 王孫由于以背受之中肩 王奔 鍾建負季以從 由于徐蘇而從 이라 한 기사를 참 조할 것. 본 기사는 이때 隕公 辛과 그의 동생 懷가 주고 받은 말을 춘추좌씨전 定公 4년에서 옮긴 것이다. 527) 오자서(伍子胥) : 춘추시대 楚나라의 사람으로 이름은 員이고 子胥는 字이다. 楚나라 平王 때에 太傅가 되었으나 費無忌의 참소로 아버지 奢와 형 尙이 죽임을 당하자 吳나라로 달아나 吳나라 에 정착하였다. 오왕 합려(闔閭)가 父王을 죽이고 즉위하는 것을 도와 그의 신임을 받고 병법가 孫武와 함께 오나라의 국력신장을 위해 힘썼다. 국력이 신장된 오나라는 초나라를 침공해 초나 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켰다. 오자서는 이미 죽어 장사까지 지낸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채찍으로 때려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그 뒤 합려는 中原으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74 ) 에 들어가서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529)은 어떠한가? 하니, 이르기를 楊子法言530) 147 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上佐平533)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 에 이를 평하여 德으로 한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것은 仁과 義로움 일 뿐이니 子胥의 사나움은 운공의 어짊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논한다면 걸루 등 의 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권26 百濟本紀 4 文周王531) <*汶洲로도 쓴다.> 蓋鹵王의 아들이다.532) 처음 毗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 종종 북방으로 군사를 움직였으나 오자서는 배후의 越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합려와 의 견이 맞지 않자 자살했다. 얼마 뒤 오나라는 오자서의 말대로 월에게 멸망당했다. 격렬하고 비 극적인 생애로 인해 오자서는 신격화되어 江南의 여러 곳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國語 吳 語와 史記 권66 伍子胥列傳에 그의 전기가 있고 吳越春秋 越絶書 에는 그에 관한 소설적 기록이 많이 보인다. 또 敦煌의 變文과 元曲 등 俗文學에도 기록이 전한다. 528) 영( ) : 중국 춘추시대 楚나라의 수도로 현재의 중국 湖北省 江陵縣內이다. 역사상 음탕한 곳으 로 유명하다고 한다. 529) 伍子胥 시체에 채찍질한 것 : 伍子胥는 아버지와 형이 모두 楚의 平王에게 죽임을 당하자 敵國 吳나라로 가서 오왕 闔閭에게 채용되어 그 재상이 되고 드디어 초나라를 격파하였다. 이때 오자서는 초의 수도 으로 들어가서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체에 채찍질을 하여 복수를 하였다. 사기 권65 伍子胥열전 참조. 자세한 사항은 앞의 주 527)을 참조할 것. 530) 楊子法言 : 본 기사는 揚子法言 重黎篇의 吳作亂破楚 入鞭尸藉館 皆不由德 에 나온다. 이 책 은 漢나라 揚雄이 지은 책으로 法言 이라고도 한다. 13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목차는 學行 吾子 修身 問道 問神 問明 寡見 五百 先知 重黎 淵驀 君子 孝至로 되어 있다. 揚 雄의 揚 은 본서에는 楊 으로 나오나 漢書 에는 揚 으로 나온다. 揚雄은 漢나라 成都人으로 字는 雲이다. 群書를 博覽하였으나 章句訓를 일삼지 않았으며, 문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道家 의 말을 빌어 유가의 道를 설명하고 또 性善惡混淆說을 주창하여 孟子 筍子의 조화를 시도하였 다. 揚子法言 은 論語 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양웅에 대해서는 漢書 권87 상 揚雄傳 참 조. 531) 文周王 : 백제 제2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 하자 한성에서 왕위에 올라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러나 재위 3년에 兵官좌평 解仇에 의해 피살되었다. 문주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汶洲 (본 기사의 細注 ;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 또는 文明 三國遺事 권1 ( 王曆篇)으로 나온다. 한편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 (前略) 使兼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이라 한 기사에 보이는 백제왕 牟都는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輔國將軍 餘都 와 동일인이며 문주왕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이기동, 1974,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30 33쪽). 문주 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격때 개로왕 직계 자손들이 거의 살해되 었고, 또한 그의 동생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곤지가 왜에 체류하고 있었던 점, 신라의 구 원병이 군사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 그를 옹립한 측근세력의 힘이 컸다는 점 때문에 上佐平에 있던 문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532) 蓋鹵王의 아들이다 : 문주왕의 出自에 대해서는 본 기사와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개로왕의 아 들로 나오고,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조에는 春三月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 汶洲王 救興其國 (汶洲王蓋鹵王母弟也) 라 하여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두 설 가운데 문주가 개로왕대에 上佐平으로 활약하였다는 점과 輔國將軍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이기백,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26쪽 ; 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41쪽 ; 이도학, 1984, 漢城末 熊津時代 百 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8 11쪽). 그밖에 고구려의 한성 침공(475)으로 개로왕의 직 계가 단절되었던 점( 일본서기 14 웅략 20년 冬)을 고려해 보면 개로의 아들로 보기에 다소 불합리하다. 따라서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모제라고 한 일본서기 14 웅략 21년 3월조 기사가 오히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533) 上佐平 : 전지왕 4년(408)에 설치한 수석좌평으로 군국정사를 담당하였고 고려의 宰와 같았 다. 좌평은 본래 率系 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諸率會議]의 의장이었는데, 이때 상좌평이 설 치되면서 上佐平 中佐平 下佐平(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 참조)과 일반좌평으로 분화되 었다. 상좌평은 왕의 동생이나 왕비족 출신이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이기백, 1959, 앞의 글, 26~28쪽). 상좌평의 설치 배경과 성격에 대해서는 본서 권25 주 402)를 참조할 것. 문주가 상좌평에 임명된 시기는 그의 동생으로 征虜將軍과 左賢王에 보임되어( 송서 권97 열전 57 夷 蠻 東夷 백제국)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昆支가 461년 왜에 파견된 시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본서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개로왕이 즉위하였을 때 문주는 이를 보좌하여 벼슬이 상좌평에 이르렀다. 고 했는데, 이를 따를 경우 개로왕 즉위와 함께 상좌평에 임명된 것 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곤지가 458년의 수작자 중 좌현왕으로 서열이 제일 높았기 때문에 문주 에 앞서 상좌평에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연민수, 1998, 5세기 후반 백제와 왜국, 고대 한일관계사, 혜안, 416쪽). 또한 문주가 458년에 輔國將軍에 보임된 점에 주목하여 이때 상좌 평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재윤, 1999, 웅진시대 백제 정치사의 전개와 그 특성, 서 강대 박사학위논문, 57쪽). 그러나 개로왕 4년에는 그의 동생인 곤지가 문주보다 분명 서열이 높았고 또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문주의 상좌평 임명은 다소 어색하다. 이런 점에서 문주가 상좌평에 임명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곤지가 왜에 건너간 개로왕 7년(461) 무렵 으로 추정된다.

75 어 와서 漢城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 은] 성품이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었으나 백성들을 사랑했음으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 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534)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 다. 535) 록 물러갔지만 536) 성은 파괴되고 왕은 이미 죽었으므로 537)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왕 534) 개로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 문주가 신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간 시기에 대해 본 기사와 본서 권6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 9월조에는 475년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본서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조에는 474년(개로왕 20) 가을 7월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 권25 개로왕 21년 추9월조와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475) 9월조에도 기록되어 있어 475년 9 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본기의 기사는 개로왕이 고구려가 공격하기 거의 1 년 전에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군을 요청한 것이 되므로 취신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에 대해 서는 본서 권25 주 496)을 참조할 것. 535)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 이 기사는 고구려의 장수왕을 비롯한 주력부대의 철수를 뜻한 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조의 九月 王帥兵三萬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 慶 虜男女八千而歸 라고 한 기사에서 돌아갔다[歸] 에 주목하여 고구려는 싸움이 끝난 직후 군 대를 모두 귀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병남, 2007, 문주왕의 웅진천도, 웅진도읍기의 백제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33~34쪽). 그러나 고구려 주력부 대가 일단 철수는 하였지만 이후 한성에는 그 잔류부대가 도성 중의 하나인 남성 몽촌토성에 주 둔하고 있었다. 이를 입증해 주는 자료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와 유적이다. 몽촌토 성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는 廣口長頸四耳壺를 비롯한 모두 15개 기종 343개체에 달하며, 1989년 夢村土城 6차 조사에서는 확인된 m 가량의 범위에서 ㄱ자형의 온돌 고래와 굴 뚝시설, 그리고 적심건물지는 고구려 후기 건축 유적인 集安 東大子遺蹟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밝 혀졌다(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4, 정비 복원을 위한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서 및 1985, 몽 촌토성발굴조사보고서 ; 김원용 외, 1987, 몽촌토성 -동북지구발굴보고, 서울대박물관 및 1988, 몽촌토성 -동남지구발굴조사보고, 서울대박물관 및 1989, 몽촌토성 -서남지구발굴 조사보고, 서울대박물관). 따라서 475년 전쟁의 성격이나 또는 몽촌토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존재를 통해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은 일단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백제가 475년 전쟁 이후에도 한강유역을 계속 영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김병남, 2002, 백제 웅진시대의 북방 영역, 백산학보 64, 131~156쪽 및 2003, 백제 동성왕대의 대외 진 출과 영역의 확대, 한국사상과 문화 22, 217~243쪽 및 2004, 백제 웅진천도 초기의 한강 유역 상황, 한국사상과 문화 26, 109~132쪽 및 2007, 앞의 글, 33~34쪽)는 성립될 수 없 다. 536) 성은 파괴되고 왕은 이미 죽었으므로 : 고구려가 백제 왕도를 함락함으로써 백제가 입은 피해에 대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475)조에는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 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라고 하여 8천명의 포로가 고구려에 붙잡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겨울 10월에 도읍을 熊津으로 옮겼다.538) 한편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20년조에는 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百濟記云 蓋鹵王 乙卯年冬 大軍來攻大城 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 라 하여 개로 왕을 비롯하여 大后와 왕자 등도 모두 죽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1997년 풍납토성 발굴조사에 서 19개 건물터가 화재로 인해 일시에 내려앉은 사례에서 보듯이(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 [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475년 고구려의 화공책으로 공격을 받았기 때 문에 한성은 그 기반시설이 대부분 파괴된 그야말로 참혹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537)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가 왕 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도 한성의 함락으로 개로왕과 왕비 및 왕자 등이 모두 고구려군에 의해 피살되어 왕위를 이을 적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신라에 가서 구원병으로 데리 고 온 1만명의 군사는 그의 즉위에 군사적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문주가 이처럼 신라의 구원 병 1만명을 이끌고 폐허화된 한성[북성 풍납토성]에 입성하여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보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문주가 풍납토성 바로 건너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과 대치한 상태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해 문주가 왕위에 즉위한 장소는 폐허가 된 왕도가 아니라 신라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온 뒤에 한성 이남의 군영과 같은 임시 장소에서 즉위했을 것으로 보 는 견해가 있다(최종택, 2007, 웅진도읍기 한강유역의 상황, 웅진도읍기의 백제 백제문화 사대계 연구총서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401쪽). 538) 도읍을 熊津으로 옮겼다 : 문주왕 즉위년(475)부터 성왕이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기까지 웅진시대 63년간의 백제의 왕도. 현재의 충남 公州市이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 에 대해 日本書紀 권14 雄略紀에는 웅략 21년(477 : 文周王 3)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 못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5 주 146)을 참조할 것. 이 웅진은 성왕 16년(536)에 수도가 사 비로 옮겨지면서 백제 5方 중의 하나인 北方으로서 군사상의 거점이 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에는 唐은 웅진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백제고지 지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신라 神文王대에 熊川州로, 景德王 16년(757)에 熊州로 개칭되었다. 수도 웅진의 명칭에 대해 삼국유사 王曆篇 에는 移都熊川 으로,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 魯 如中國之言郡 縣也 라 하여 固麻城으로,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도 其地東極新羅 北接高句麗 南北 九百餘里 治固麻城 其外更有五方 이라 하여 역시 固麻城으로, 그리고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21년조에는 春三月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洲王 (日本舊記云 以久麻那利 賜末多王 蓋是誤也 久麻那利者 任那國下呼利縣之別邑也) 이라 하여 久麻那利로 나온다. 한편 문주왕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 침공으로 인해 일대 국가적 위기에 놓여있는 백제 국가 를 시급히 재건해야 할 당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당면한 압력에서 벗어나

76 150 2년(476) 봄 2월에 大豆山城539)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540)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월에 사신을 宋나라에 보내 조공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여름 4월에 耽羅國541)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恩率로 삼았다. 국가 경영을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여러 가지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먼저 서울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무엇보다도 예상되는 고구려군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장차 백제의 웅비를 펼칠 수 있는 곳을 선정하여 천도하는 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문주왕은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지만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십분 고려하여 지금의 공주지역인 熊津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었다. 이 천 도 과정에는 祖彌桀取와 木 滿致와 같은 귀족들의 큰 도움이 있어서 가능하였다. 지금의 공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볼 때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 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남쪽에는 곡창지대인 너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관방 뿐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공주 수촌리유적에서 보듯이 그 조영 세력이 천도 이전부터 중앙의 백제 왕실로부터 금동관과 금동 신발, 중국제 흑유도기, 환두대도 등과 같은 위세품을 수여받을 정도로 백제 중앙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금강 수계의 지역적 기반을 공고히 유지해 온 것으로 이해된다. 공주 수촌리 유적에 대해서는 이훈, 2003, 공주 수촌리유적, 백제문화 32, 273~285쪽 및 2004, 묘제 를 통해 본 수촌리 유적의 연대와 성격, 백제문화 33, 77~106쪽 ; 강종원 外, 2004, 공주 수촌리유적 개보, 제47회 전국역사학대회 고고학부 발표자료집, 한국고고학회, 65~83쪽 ; 2005, 한성말기 지방지배와 수촌리 백제 고분군, 4~5세기 금강유역의 백제문화와 공주 수촌 리유적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제5회 정기 심포지움, 118쪽을 참조할 것. 이러한 공주지역의 지역 적 기반을 가진 재지세력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웅진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39) 大豆山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동일한 지명이 본서 권23 온조왕 27년(A.D.9)조에도 보이고 있다. 熊津으로 천도한 이후의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두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충남 연기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2쪽), ②충남 아산시 음봉면 수한산성으로 보는 견해(이기백, 1978,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 9, 4쪽), ③충남 아산시 영인산성으로 보는 견해(유원재, 1992,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등이 있는데 이곳을 천도 후 해씨세력의 근거지로 보기도 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2~13쪽).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의 한강 유역 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가 성왕 29년(551) 성왕때의 북진으로 한성고토를 수복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 지리 지 4에 수록되어 있는 漢州(漢山州) 朔州(牛首州) 溟州(何瑟羅州)가 한때 고구려의 영역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 그리고 백제 성왕이 신라와 가야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강유역의 백 제 고토를 수복했다는 日本書紀 권19 흠명기 12년 기사를 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에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한강을 비롯하여 한강 이북의 지명이 다수 나온다. 대두 성도 그러한 城 가운데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신빙성 여부를 놓고 지금까지 대략 부정 론과 긍정론의 두가지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어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먼저 기존 의 부정론을 보강하는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 지명이동설과 무령왕계 왕실의 조작설 등이다. 웅 진천도 후에도 한성시기의 지명을 이치하여 사용한 결과로 보는 견해(今西龍, 1934, 百濟史硏 究, 近澤書店, 126~127쪽 ; 이기백, 1978, 앞의 글, 6~7쪽), 백제 왕실이 한강유역에 대한 전 통적 영유의식에서 웅진기의 지명에다 한성기의 지명을 의도적으로 대입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 로 보는 견해(이도학, 1985, 漢城末 熊津시대 百濟王系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25쪽)가 있다. 반면 기존의 부정론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백제의 한강유역 관련 지명 기록을 그 대로 받아들이자는 긍정론(김영관, 2000, 백제의 웅진천도의 배경과 한성경영, 충북사학 11 12합집, 75~91쪽 ; 임범식, 2002, 5~6세기 한강유역사 재고 : 식민사학의 병폐와 관련하 여, 한성사학 15, 23~35쪽 ; 김병남, 2002, 백제 웅진시대의 북방 영역, 백산학보 64, 131~156쪽 및 2003, 백제 동성왕대의 대외 진출과 영역의 확대, 한국사상과 문화 22, 217~243쪽 및 2004, 백제 웅진천도 초기의 한강유역 상황, 한국사상과 문화 26, 109~132 쪽 및 2007, 앞의 글, 33~34쪽)과 동성 무령왕대의 왕권강화책에 힘입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것으로 보는 한강유역 일시 수복설(천관우, 1976, 앞의 글(상), 115쪽 ; 양기석, 1980, 웅진시대 의 백제지배층연구, 사학지 14, 22~23쪽 및 2005, 5~6세기 백제의 북계 -475~551년 百 濟의 漢江流域 領有問題를 중심으로, 박물관기요 20,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3~51 쪽 ; 박찬규, 1991, 백제 웅진초기 북경문제, 사학지 24, 61쪽 ; 김현숙, 2003, 웅진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 서경) 등이 있다. 이 문제는 백제의 한강유역 탈환시기와도 연관되는 것이므로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540) 한강 이북(漢北) : 한강은 漢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서울의 한강이다. 이 한강은 백제가 웅진 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이미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고구려의 한성 점령으로 인해 한강 이북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두산성에, 그리고 나머지 한성에 거주하였던 주민들은 직산의 사산성(위 례성)에 각각 이주시켜 유력한 귀족세력인 해씨와 진씨세력에 의해 통할케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들 지명이 한때 한산성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대두산성 의 주민들 경우 병관좌평 해구의 반란으로 인해 斗谷으로 다시 사민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직산 사산성만 위례성 또는 한산성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541) 耽羅國 : 현재의 제주도. 본서 권24 백제본기 동성왕 20년조에는 耽牟羅 로, 三國志 권30 魏 書 동이전 한전에는 州湖 로, 魏書 권100 열전 고구려전에는 涉羅 로, 삼국유사 권1 紀異 篇 馬韓條에 인용된 海東安弘記 에는 羅 로 표기되었다. 한편 日本書紀 권9 神功紀 섭정 49년조에 보이는 彌多禮를 탐라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 川弘文館, 47 49쪽). 탐라의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57 지 11 지리 2에 至

77 152 가을 9월에 解仇542)를 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53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昆支544)를 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三斤을 봉하여 태자로 3년(477)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543) 十五代孫 高厚高淸昆弟三人 造舟渡海 至于耽津 蓋新羅盛時也 遂朝新羅 王嘉之 稱長子曰星 主 二子曰王子 季子曰都內 邑號曰耽羅 盖以來時 初泊耽津故也 라 하여 탐라 國主의 아들들이 신 라에 입조할 때 耽津에 최초로 정박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온다. 본 기사는 탐라가 백제와 통교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년 12월조에는 南海中耽羅人初通百 濟國 이라 하여 508년(武寧王 8)에 탐라가 백제에 처음으로 사람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차이가 난다. 이 탐라국은 백제 문주왕 2년(476)에 백제와 처음으로 통교를 하였고, 신 라 문무왕 2년(662)에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고려 태조 21년(938)에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고 려 숙종 10년(1105)에 郡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게 되었다. 이 탐라에는 高 氏 梁氏 夫氏라고 하는 3姓의 개벽설화가 있는데( 고려사 권57 志 11 지리 2), 확실한 연대 는 알 수 없다. 542) 解仇 : 백제 문주왕대의 인물로 대성팔족의 하나인 解氏출신이다. 문주왕대에 兵官佐平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해구를 比流王 9년(312)조에 보이는 병관좌평 解仇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李弘稙, 1971, 百濟人名考, 韓國古代史의 硏究, 쪽), 同名異人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주왕을 죽이고 어린 삼근왕을 세워 軍國政事를 專斷하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해구의 군사 기반은 475년 전투에서 다른 귀족에 비해 군사 기반을 비교적 유지하고 있었으며, 천도 직후에 바로 고구려와의 접경지대인 대두성 에 이주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구가 병관좌평에 보임되는 것은 이러한 해씨세력의 군 사 기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2~13쪽). 문주왕의 군사 기반이 주로 신라 원병에 의존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해구의 군사 기반은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 그리 고 고구려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문주왕의 즉위와 왕권을 뒷받침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 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해구의 병관좌평 임명은 개로왕대에 소외되었던 해씨세력이 475년과 같 은 권력의 공백기를 맞아 정국 운영에 전면에 대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543)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 이 기사에서 왕궁이 웅진 천도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천도 직후에 임시로 사용하던 왕궁을 이때에 와서 규모를 늘려 중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문주왕은 천도 직후의 어려운 여건으로 인하여 임시로 마련한 궁실에서 생활하였 지만 이제 안정을 찾게 되자 궁실을 수축하였던 것이다. 이는 왕실의 위엄을 되찾으려는 의도에 서였을 것이다. 그 후 동성왕 22년(500) 봄에 궁성을 또한차례 중수하였고 그 부속 시설로서 호 사스러운 임류각과 원지를 만들어 왕궁의 위엄을 과시하려 하였다. 성왕 4년(526) 10월에는 웅 진성을 수리한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현재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산성을 왕궁이 있는 왕성 으로 보는 견해(輕部慈恩, 1971, 熊津城考, 百濟遺跡の硏究, 吉川弘文館, 20~22쪽 ; 안승 주 이남석, 1987, 공산성내 추정왕궁지 발굴조사보고서, 공주사범대박물관 및 1990, 공산 성 성지 발굴조사보고서, 공주사범대박물관 및 1992, 공산성 건물지, 공주사범대박물관 ; 유 원재, 1993, 백제 웅진성 연구, 국사관논총 45, 63~66쪽 ; 이남석, 1999, 백제 웅진성인 공산성에 대하여, 마한백제문화 14 및 2002, 웅진시대의 백제고고학, 서경, 33~40쪽 ; 서정석, 2000, 백제 웅진도성의 구조에 대한 일고찰, 백제문화 29, 63~95쪽 및 2002, 백 제의 성곽 -웅진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학연문화사, 55~82쪽)와 공산성 밖에 있어 유사시 에 기능하는 왕궁의 배후성으로 이해하는 견해(김영배, 1965, 공주 백제왕궁 및 임류각지 소 고, 고고미술 6권 3 4호, 53~55쪽 및 1968, 웅천과 사비시대의 왕궁지에 대한 고찰, 백 제문화 2, 13~17쪽 ; 성주탁, 1997, 백제 웅진성 재착,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 백제 연구소, 297~300쪽 ; 박순발, 1996, 백제 도성의 변천과 특징, 정덕기박사회갑기념한국사 학논총, 15~123쪽 ; 김수태, 2001, 웅진성의 변천, 백제문화 30, 148~151쪽)로 나누어져 있다. 이렇게 왕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생기게 된 것은 지금까지 조사된 관련 유적과 유물이 왕궁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 웅진성이 왕성이냐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왕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 처럼 여러 견해가 있지만, 현재 공주시의 公山城으로 추정된다. 공산성은 공주시의 북쪽 금강에 연하여 자리한 둘레 약 2,660m의 包谷式 산성이다. 현재 공주지역에서 왕성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산성 안에서 확인된 백제 유적으로는 그 동쪽 구역에 있는 소규모의 테뫼식의 토성 부분, 추정왕궁지, 臨流閣址, 광복루 옆 광장, 12각 건물 터, 굴립주 건물과 적심 건물, 서문터 옆 건물지, 저장혈, 백제 연못지[池塘] 등이다. 그 중 왕궁 지와 관련된 유적은 다소 미흡하기는 하지만 공산성 내 쌍수정 앞 광장에서 확인된 약 2,500여 평의 범위에 굴립주 건물지와 용수장 시설, 그리고 목곽고 등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공산성 같은 성곽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왕궁도 이곳에 황급하게 조성된 것으로 보 인다. 544) 昆支 : 백제 문주왕의 동생. 내신좌평의 직에 있었으며 그의 아들은 후일 동성왕이 되었다. 곤지 의 표기는 일본측 자료에는 다양하게 나온다.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5년조의 본문에는 軍君 ( 支君) 으로, 웅략기 5년조에 인용된 百濟新撰 에는 琨支君 으로, 권16 武烈紀 4년조에는 混支 로, 新撰姓氏錄 河內諸蕃 飛鳥戶條조에는 琨伎 로, 日本三代實錄 권7 貞觀 5년 8월 조에는 琨支 로, 같은 책 권7 정관 4년 7월조에는 混伎 로 표기되어 있다. 이 昆支의 계보에 대해 본서 文周王본기에는 문주왕의 동생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5년조의 본문과 거기에 인용된 百濟新撰 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新撰姓氏錄 河內諸蕃 飛鳥戶造條에는 毗有王의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이라고 하면(앞의 주 531) 개로왕과 문주왕, 그 리고 곤지는 모두 비유왕의 아들로서 형제관계가 된다(이도학, 1984, 앞의 글, 8 11쪽). 한편 이 곤지를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征虜將軍 左賢王 餘昆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74,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32 33쪽). 곤지는 당시 왕족 중에서는 국내뿐 아니라 왜에서도 상당한 세력 기반을 가진 위치에 있었던

78 154 삼았다.545) 155 5월에 검은 용이 熊津에 나타났다.546)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547) 인물이다.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458년 당시 수작자 11명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은 行征虜 將軍 左賢王에다가 병권을 장악한 개로왕 집권 1기에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곤지 가 왜에 파견된 이유는 고구려의 남진에 대응하여 유사시 왜에 원군을 요청하고, 아울러 곤지를 왕권의 핵심부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정략적으로 추방하려는 개로왕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곤지의 왜 파견을 정략적 추방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연민수, 1998, 5세기 후반 백제와 왜국,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414~417쪽). 반면 곤지가 왜와의 공조를 강화하기 위 해 파견된 것으로 보고 곤지의 정략 추방설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정재윤, 1999, 앞의 글, 27~30쪽 ; 이재석, 2001, 5세기 말 곤지의 도왜 시점과 동기에 대한 재검토, 백제문화 30, 24~29쪽). 곤지가 사절로서 왜에 건너가 17년 동안 체류한 곳은 大和의 관문에 해당하는 河內 의 近飛鳥地方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근비조지방은 하내지방과 대화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이곳에는 곤지의 후손들이 유력한 호족으로 존재하였던 점이나( 新撰姓氏錄 河內國 諸蕃 百濟國), 河內國 安宿郡(현재 大阪府 羽曳野市 飛鳥 1023)에 곤지를 신으로 제사하는 飛鳥 戶神社가 있는 점, 그리고 그 주변 구릉지대에 있는 飛鳥千塚 고분군의 조영세력이 곤지의 후예 인 飛鳥戶造氏인 점 등에서 곤지가 하내 지역에 정착하여 백제계 이주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 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곤지는 왜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단순히 청병사 역할에 국한된 것 이 아니라 백제계 이주민들을 조직화하여 왜 정권에 협력하고 이들의 힘을 이용하여 백제를 구 원하려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정재윤, 1999, 앞의 글, 28~30쪽 ; 이재석, 2001, 5 세기 말 곤지의 도왜 시점과 동기에 대한 재검토, 백제문화 30, 24~29쪽). 그런데 문주왕이 이러한 곤지를 왜에서 불러들여 내신좌평에 임명한 의도는 무엇일까? 내신 좌평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관직으로서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측근이 임명되는 것이 상 례였다. 곤지를 최고위직 상좌평이 아닌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에 임명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의 의도를 가진 조치로 이해된다. 곤지 자신이 당시 유력한 차기 왕위계승자로서의 독 자적인 세력 기반을 갖고서 왕권을 넘볼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을 견제하려는 측면이 있다. 그 리고 문주왕은 곤지에게 태자 책봉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써 앞으로 예상되는 왕위 계승상의 분 란 여지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또한 문주왕은 왕족 중 독자적 세력기반을 가진 곤지를 내세워 날로 비대해져 가는 해구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고, 또한 큰아들 삼근을 차 기 왕위계승권자로서 공인받으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정재윤, 2000, 앞의 글, 17~18쪽). 그러면서도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는 곤지와 해구는 기본적으로 대립 관계를 유 지하고 있었다. 문주왕의 이러한 조치는 왕위계승상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친정체제를 구 축하여 잠재적 위협 세력인 곤지와 권력이 비대해진 해구를 동시에 견제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 지하려는 의도로 판단된다. 왕권의 기반의 취약한 문주왕이 곤지와 해구간의 대립을 교묘히 이 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육책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545) 맏아들 三斤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 삼근을 태자로 책봉한 것은 문주계에 의한 왕위계승을 정당화시켜 왕위계승에 따른 분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475년 고구려의 4년548)(478) 가을 8월에 병관좌평 解仇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법을 어지럽히며 왕 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을 시켜 해치게 하여 마침내 죽었 다.549) 한성 공격때 개로왕의 직계 왕자들은 거의 패사하였지만 문주왕 자신이 방계로 왕위에 오른 이 상 태자의 조기 책봉을 통해 다른 왕족으로부터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 한 조치로 이해된다. 546) 검은 용이 熊津에 나타났다 : 흑룡의 출현이 변고를 동반하는 흉조의 조짐을 뜻하는 것으로 볼 때(이도학, 1985, 앞의 글, 3~4쪽 ; 노중국, 1988, 앞의 책, 140쪽) 곧이어 나오는 내신좌평 곤 지의 예기치 않는 죽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547)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 내신좌평 곤지가 모종의 음모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시사해 준다(이도 학, 1985, 앞의 글, 12~15쪽 ; 노중국, 1988, 앞의 책, 150~152쪽 ; 정재윤, 2000, 앞의 글, 20쪽). 변고를 뜻하는 흑룡이 출현한 이후 두 달여 만에 곤지가 사망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은 문주왕과 곤지, 그리고 해구간의 삼각 구도 속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일어나 결국 곤지의 죽 음으로 귀결된 것으로 보인다. 곤지는 귀국 후 자신의 세력기반을 재건하여 반해구세력 입장에 서 정치적 활동을 강화해 나가자 이로 인해 삼자간의 대립과 긴장관계가 치열하게 전개된 것으 로 보인다. 결국 곤지의 사망을 통해 볼 때 당시 왜에 장기간 체류하였던 곤지 세력이 상대적으 로 힘의 열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곤지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일까? 곤지를 살해한 범 인은 병관좌평 해구임이 자명해진다. 해구는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곤지를 일차적으로 제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는 달리 곤지의 피살을 해구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보 다는 곤지의 대두를 부담스럽게 여긴 문주왕이 관여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용빈, 2003, 웅진초기 백제의 왕권과 정치권의 향방, 선사와 고대 19, 197쪽). 그러나 문주왕의 우유부 단한 성격과 곤지의 내신좌평 임명 기사를 함께 종합해 보면 해구의 단독 범행으로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548) 4년 : 문주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본서 권30 年表 中에 의하면 문주왕은 즉위 3년만에 죽은 것 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문주왕의 피살 시기는 연표의 것 이 옳다고 하면서 본문의 四年 2字는 衍文이고 8월 이하의 귀절은 前年(3년)조에 접속시켜야 한다는 견해(이병도, 1977, 國譯, 397쪽)가 있다. 한편 문주왕의 재위기간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乙卯立 移都熊川 理二年 으로 나와 본 기사와는 2년의 차이가 있다. 三國遺事 는 踰年稱元法을 따랐으므로 실제로는 1년의 차이가 나며, 본 기사를 3년으로 보면 서로 일치한다.

79 156 권26 百濟本紀 4 三斤王550) 157 란을 일으켰다. 왕은 좌평 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 <*壬乞이라고도 부른다.>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문주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이 가 13세였다. 군사와 정치 업무 모두를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551) 552) 2년(478)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燕信 과 함께 무리를 모아 大豆城 을 근거로 하여 반 지 못하였다. [왕은] 다시 德率 眞老553)에게 명령하여 정예 군사 500명을 이끌고 가서 해 구를 공격하여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자(市)에서 목을 베었다.554) 555) <史論> 春秋 의 법에 임금이 시해를 당하였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를 깊 이 책망하여 신하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556) 해구가 문주를 죽이고 그 아들 三斤이 왕위 를 이었는데도 그를 능히 죽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549) 왕이 사냥을 나가 마침내 죽었다 : 곤지의 사망을 계기로 정국은 차츰 경색되어 나갔다. 해 구는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되는 곤지를 일차적으로 제거한 이후 암묵적으로 곤지와의 세력 연합 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고 있던 문주왕을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해구는 일단 곤지를 살해하 였지만 곤지를 지지하는 반해구세력들의 반발에 대해서도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곤지의 사망 이후 문주왕은 실권을 장악한 해구를 더 이상 견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문주왕은 해구의 권력남용에 대해 큰 부담을 느낀 나머지 그 대책의 일환으로 반해구세력과의 연결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해구는 문주왕과 반해구세력과의 연대를 차단하기 위해 문주왕의 제거라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였다. 때마침 문주왕이 수렵을 나갔을 때 해구는 도적을 시켜 문주왕을 살해한 것이다. 수렵은 고대 사회에서 군사 훈련과 통수권의 기능을 가진 국왕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문주왕이 수렵 행사를 통해 곤지의 사망과 병관좌평 해구의 권력 장악에 따 른 사후 대책을 모색하여 해구를 견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550) 三斤王 : 백제 제2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문주왕의 장자로 13세의 어린 나이 에 살해당한 문주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근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세주에는 壬 乞 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三乞王 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에는 文斤王 으 로 나온다. 그러나 양서 권50 열전 백제전에는 삼근왕의 존재는 없고, 동성왕이 문주왕의 뒤 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삼근왕의 단명에 따라 남제에서 그 교체 사실을 알지 못한 데에 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551) 燕信 : 삼근왕대의 인물로 삼근왕대 은솔 관등에 있었다. 백제 大姓 귀족 중의 하나인 신진세력 燕氏출신이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4년조에 奈率 燕比善那 가 보이는데 燕 씨는 복성인 燕比 를 단성으로 축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 燕氏의 세력 근거지는 湯井城(현재의 충남 牙山市 湯井面)으로 비정되는데(이기백, 1976, 앞의 글, 16쪽), 아산시 읍내동에 있는 읍내동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유원재, 1992,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백제문화개발연구원, 67~68쪽). 신진세력 燕信이 해구 진영에 가담하게 된 것은 지역적으로 해씨의 세력기반인 대두 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해씨세력의 경우 웅진 지역에 기반 이 없어 재지세력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반면 연씨세력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서 해씨세력 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두 세력은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웅진 북쪽의 전략적 요충인 아 산지역에 웅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해구가 중앙이 아니라 대 두성으로 옮겨와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은 이러한 군사적 기반을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 한 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에야 두 번이나 큰 군사를 일으켜서 이겼다. 이 른바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으면 단단한 얼음이 되고, 반짝거리는 불똥을 끄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된다고 하는데 그 일이 생기는 것은 점차적인 것이다. 당 552) 大豆城 : 대두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충남 연기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2 쪽), ②충남 아산시 음봉면 수한산성으로 보는 견해(이기백, 1978, 앞의 글, 4쪽), ③충남 아산 시 영인산성으로 보는 견해(유원재, 1992,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등이 있는데, 이 곳을 천도 후 해씨세력의 근거지로 보기도 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2~13쪽). 이에 대해서 는 앞의 주 539)를 참조할 것. 553) 眞老 : 백제 동성왕대의 인물로 덕솔의 관등에 있었다. 삼근왕대에 해구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공로를 세웠고, 동성왕을 옹립하였으며, 병관좌평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554) 웅진 저자(市)에서 목을 베었다 : 저자에서 목을 베는 것을 棄市刑이라고 한다. 기시형은 군중이 보는 데서 형벌을 내려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威爀을 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한다고 한다 (田鳳德, 1968, 新羅律令考, 韓國法制史硏究 참조). 555) 春秋 : 중국의 유교경전으로서 5經의 하나. 중국 周代의 魯나라 연대가를 바탕으로 하여 孔子가 엮었다고 한다. 隱公으로 부터 哀公에 이르기까지의 242년간의 역사서로서 동양 역사 편찬의 모델이 된 책이다. 556) 임금이 시해를 당하였는데도 신하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 이 기사의 내용은 春秋公羊 傳 隱公 11년에 壬辰公薨 何以不書葬 春秋 君弑賊不討 不書葬 以爲無臣子也 子沈子曰 君弑 臣 不討賊 非臣也 不復讐 非子也 葬生子之事也 春秋君弑賊不討 不書葬 以爲不繫乎臣子也 에 나온 다. 그러나 본 사론의 기본틀은 新唐書 권8 穆宗 敬宗 文宗 武宗 宣宗本紀에 贊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其國 以爲無臣子也 憲宗之弑 歷三世而賊猶在 至於文宗 不能明弘志等罪惡 以正國之典刑 僅能殺之而已 是可歎也 穆敬昏童失德 以其在位不久 故天下未至於敗亂 而敬宗卒 及其身 是豈有討賊之志裁 라는 贊文에 나오고 있다. 金富軾은 신당서 의 기존 贊文을 근거로 하여 본 史論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李康來, 1996, 典據論, 민족사, 쪽).

80 158 나라 憲宗557)이 시해되었으나 3대가 지나서야 겨우 그 역적을 죽일 수 있었다.558) 하물며 바 159 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564) 다 모퉁이의 궁벽한 곳에 사는 삼근과 같은 어린아이야 또한 어찌 족히 말할 나위가 있으랴! 3월 초하루 기유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3년559)(479)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가을 9월에 大豆城을 斗谷560)으로 옮겼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권26 百濟本紀 4 東城王561) 이름은 牟大562)<*혹은 摩牟라고도 쓴다.>이며, 문주왕의 동생인 昆支의 아들이다.563) 담 557) 당나라 憲宗 : 唐나라 제11대 황제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順宗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純이다. 宦官에게 시해되었다. 558) 당나라 憲宗이 시해되었으나 그 역적을 죽일 수 있었다 : 당나라 헌종은 宦官에게 시해되 었는데( 신당서 권7 德宗 順宗 憲宗本紀 헌종 15년조의 正月 宦者陳弘志等反 庚子 皇帝崩 年 四十三 이라 한 기사 참조), 이 시해자들은 穆宗과 敬宗을 거쳐 文宗 太和 9년(835) 11월에 와서 左軍中衛 仇士良에 의해 제거된 사실( 舊唐書 권184 宦官 王守澄傳에 於是誰何之卒及御史臺 從人 持兵入宣政殿院 宦官死者甚衆 輦旣入閤門 內官呼萬歲 俄而(仇)士良等率禁兵五百餘人 露刃 出東上閤門 逢人卽殺 이라 한 기사 참조)을 말한다. 그리고 본 기사의 3世는 왕의 代數로 서 穆宗 敬宗 文宗을 말한다. 559) 3년 : 삼근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丁巳立 理二年 으로 나와 본 기사와 는 1년의 차이가 있다. 560) 斗谷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 두곡을 충남 公州의 斗谷驛이나 舒川의 斗谷驛으로 보는 견 해가 있으나(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0쪽),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고 려할 때 차령산맥 이남의 어느 지점일 것 같으나 분명치 않다. 해구의 반란이 진압된 후 그 연루 자와 가족들은 처형당하였고, 아울러 해씨의 세력 근거지였던 대두성 주민들은 이 사건에 연루 되어 斗谷으로 강제 사민당하였다. 561) 東城王 : 백제 제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79~501년이다. 이름은 牟大 또는 摩牟이다. 일본 서기 권14 웅략기 23년조에는 末多王으로 나온다. 웅진천도 후 南齊와 통교를 열었고, 신라에 청혼하여 혼인동맹을 맺었으며, 臨流閣을 세우고 加林城을 축조하였다. 후에 衛士佐平 加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562) 牟大 : 동성왕의 이름. 동성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에는 牟大 摩牟 로, 남제서 권58 열 전 백제전에는 牟大 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牟大 麻帝 餘大 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와 武烈紀 4년조에는 末多王 으로 나온다. 삼국유사 의 餘大 는 왕의 姓인 扶 餘氏와 왕의 이름인 牟大를 略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이병도, 1977, 國譯, 399쪽). 한편 고려사 권57 志 10 지리 2 金馬郡條에 나오는 末通大王을 末多王=東城王으로 보는 견해 도 있으나(이병도, 1976, 薯童說話의 新考察,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받아 들일 수 없다. 563) 昆支의 아들이다 : 동성왕의 출계에 대해 본 기사에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三國遺 事 권1 王曆篇에는 삼근왕의 堂弟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에는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로 나온다. 堂弟 나 곤지의 5子 중 제2자 는 모두 곤지의 아들이라는 데는 동일하 다. 한편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동성왕인 牟大를 牟都의 孫이라 하였고,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牟都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牟都를 문주왕으로 보는 견해를 따른다면 (이기동, 1974, 앞의 글, 30 33쪽) 牟大(東城王)를 牟都(文周王)의 孫이라고 한 남제서 의 기 록은 취신하기 어렵다(이도학, 1984, 漢城末 熊津時代의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11 14쪽). 564)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 동성왕은 재위 3년만에 사망한 삼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데, 문 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과는 사촌 사이였다. 동성왕이 즉위 당시 유 년의 나이에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고(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 하4월), 개로왕 혹은 문주왕의 직계 혈통도 아니었다. 또한 연령상으로 왕위에 가장 근접하였던 인물인 斯麻(무령)가 국내에 머물 고 있었던 상황 하에서 즉위하게 된 배경은 여러 측면에서 검토된다. 이에 대해서는 ①문주왕 직계 의 단절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85, 앞의 글, 16쪽). 문주왕이나 삼근왕의 후예씨족이 新撰姓氏錄 에 등장하지 않으며, 또한 삼근왕이 15세로 사망한 것으로 볼 때 삼근왕의 동생이나 아들의 존재 가능성이 희박한 것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문주계와 곤지계 의 정쟁 결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용빈, 2003, 웅진초기 백제의 왕권과 지배권의 향방, 선사 와 고대 19, 201쪽). 이 견해는 동성왕이 진씨에 의하여 옹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해 씨와 진씨로 대표되는 문주계와 곤지계의 정쟁에서 최종 승리한 곤지계가 곤지의 적손인 동성을 왕 위로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②진씨세력에 의한 동성왕 옹립설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51~152쪽). 해구의 난을 진압하고 병권을 장악한 진씨세력이 국내에서 성장한 사마(무 령)보다 왜에 장기간 체류하여 국내 사정에 어둡고 또한 그의 부친인 곤지가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 에 末多(동성)를 옹립하였다는 것이다. ③木氏세력 옹립설(山尾幸久, 1977, 日本國家の形成,岩 波新書, 35쪽)이 있다. ④왜와의 관련설로서 크게 왜왕에 의한 책봉설, 백제와 왜측의 상호필요설, 왜에 구축된 곤지계 세력 기반설로 구분할 수 있다. 왜왕에 의한 책봉설은 일본서기 의 기술대로 왜왕에 의하여 동성왕이 책봉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鈴木靖民, 1984, 東アゾア諸民族の國家形 成と大和王權, 講座日本歷史 1 原始 古代 1, 東京大學出版會, 203~208쪽). 결국 이는 국제간 의 외교형식상 왜와 백제의 관계가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그밖에 백제와 왜

81 160 4년(482) 봄 정월에 眞老를 兵官佐平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아울러 맡겼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565)이 漢山城566)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00여 집을 사로잡아 돌아 161 갔다. 겨울 10월에 눈이 크게 내려 한 길(一丈) 남짓이나 쌓였다. 5년(483) 봄에 왕이 사냥을 나가 漢山城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고 10일이 지나 돌아왔다. 의 상호 필요설(연민수, 1998,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425~428쪽)이 있다. 백제가 동성왕을 선 택한 것은 친왜국책, 왜국 중시의 외교노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동성왕의 즉위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지만 일본서기 의 동성왕 책립 기사는 8세기 사관의 산물로서 사실 관계로 볼 수 없다는 점, 말다(동성)가 귀국시에 왜병 500명이 호위했더라도 국내에 세력기반 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 4 5세기 백제와 왜의 관계에서 백제가 왜국의 복속국이었음을 보여주 는 증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백제와 신라가 왜에 인질을 보낸 사례를 국가간 상하 복속관계의 표상 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점 등을 미루어 보면 왜왕에 의한 책립설은 성립될 수 없다. 동성왕의 아버지 昆支가 461년 이후 16년 동안 왜에 체류한 것을 감안해 보면 동성왕은 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성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 하4월조의 기술을 그대로 취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즉위과정을 河內地域에 있던 곤지계의 세력기반과 백제 국내의 지지세력, 그리 고 왜의 입장 등을 종합적으로 관련시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남형종, 1993, 백제 동성왕대 지배세력의 동향과 왕권의 안정, 북악사론 3, 12쪽 : 정재윤, 1999, 웅진시대 백제 정 치사의 전개와 그 특성, 서강대박사학위논문, 83~89쪽을 참조할 것. 565) 말갈(靺鞨) :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종족 명칭. 이 말갈은 先秦시대에는 肅愼으로, 漢代에는 揖 婁로, 北魏代에는 勿吉로 불리다가 唐代에 와서 靺鞨로 불리게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 본 기 사에 보이는 말갈은 唐代의 말갈이라고 할 수가 없다. 백제는 건국 초부터 주로 북쪽이나 동북 쪽에서 말갈의 빈번한 침입에 시달려 왔다.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배경도 낙랑과 말갈 의 침입 때문이었다. 이러한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지만 고구려본기 에 나오는 말갈과 백제나 신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은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이해된다. 백제나 신라 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계통에 대해서는 ①예족설(정약용, 말갈고, 여유당전서 등), ②고구려 내의 말갈설(서병국, 1974, 말갈의 한반도 남하, 광운전자공과대학논문집 3), ③영서지역의 토착세력설(문안식, 1996, 영서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 배경, 동국사학 30), ④마한 소국설(윤선태, 2001, 마한의 진왕과 臣 沽國 嶺西濊 지역의 역사적 추이와 관련하여, 백 제연구 34, 16쪽) 등이 있다. 이처럼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東 濊 僞靺鞨 로 파악한 정약용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위말갈은 반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중국군 현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순차적으로 받았다가 삼국통일 후 그 자취를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유원재, 1979, 삼국시대 위말갈고, 사학연구 29, 41쪽).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주 43)을 참조할 것. 566) 漢山城 : 漢城이라고도 한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때의 한산성은 서울 몽촌토성을 가르킨다(여호규, 2002, 앞의 글, 14~15쪽). 그런데 공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아산만에서 영덕을 잇는 지역의 북쪽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본 기사의 한산성을 몽촌토성에 비 정할 수가 없다. 본 기사의 한산성은 옛 한성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한 곳으로 보고, 웅진 천도 이 여름 4월에 熊津 북쪽에서 사냥하여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567) 6년(484) 봄 2월에 왕은 南齊568)의 太祖 蕭道成569)이 고구려 왕 巨璉(장수왕)을 책봉하여 驃騎大將軍570)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表를 올리며 복속(內附)되기를 청 하니 허락을 받았다. 가을 7월에 內法佐平 沙若思571)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하였으나, [沙]若思는 서해 바 후 한성의 백성들을 차령산맥 이남인 직산으로 사민시킨 결과 慰禮城으로 불리워졌던 충남 천안 시 稷山(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 稷山縣 建置沿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백제가 웅진 천도 후 동성왕대에 이르러 한산(성)과 관련이 있는 지명들이 갑자 기 등장하고 있어서 이를 근거로 하여 백제의 한강유역 일시 회복설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539)를 참조할 것. 567) 熊津 북쪽에서 사냥하여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 동성왕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 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는 그 인물평에서 나타났듯이 사냥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서에는 동성왕이 漢山城(동성왕 5) 웅진(동성왕 5 23) 牛鳴谷(동성왕 14) 牛頭城(동성왕 22) 사비(동성왕 차례)로 모두 7회에 걸쳐 사냥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568) 南齊 : 중국 南北朝 시대의 南朝의 하나. 蕭道成이 479년에 南宋 順帝로부터 禪位를 받아 세웠 다. 南京에 도읍하였고 7대 23년만에 梁나라 武帝에게 망하였다. 569) 太祖 蕭道成 : 중국 남북조시대 南齊의 太祖 高皇帝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字는 紹伯 으로 중국 江蘇省 武進사람. 479년에 南宋의 順帝로부터 禪位를 받아 남제를 세웠다. 570) 驃騎大將軍 : 중국 남북조시대의 將軍職의 하나. 宋書 권39 志 29 백관 상에는 漢西京制 大 將軍 驃騎將軍位次丞相 이라 하고 있는데, 관품은 第2品이었다( 송서 권40 지 30 백관 하의 관품표 참조). 고구려 장수왕이 南齊로부터 표기대장군의 책봉을 받은 사실은 본서 권18 고구려 본기 장수왕 68년(480 : 동성왕 2)조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동성왕은 고구려 장수왕이 표기 대장군의 작호를 받은 4년 후에 그 소식을 들은 셈이 된다. 571) 沙若思 : 백제 동성왕대 내법좌평에 임명된 인물. 大姓八族의 하나인 신진세력 沙氏출신의 인 물.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고구려군의 방해로 되돌아 왔다. 사씨세력은 근초고왕대 가 야경영에 참여한 이래 4세기 말 阿莘王代(392~405)에는 沙豆가 左將에 임명되어 대고구려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사씨세력이 중앙정계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대두한 시기는 웅진시대 동성왕대의 일이었다. 동성왕 6년(484) 內法佐平 沙若思가 남제에 파견된 백제 사절단장의 위

82 162 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3월에 사신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572) 가을 7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고, 牛頭城574)을 쌓았다. 8년(486) 봄 2월에 加573)를 衛士佐平으로 삼았다. 163 겨울 10월에 궁궐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10년(488) 魏나라575)가 군사를 보내 쳐들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476) 치에 있었으며, 495년에 남제로부터 行征虜將軍邁羅王에 임명된 沙法名( 남제서 권58 열전 39 동남이 백제국 건무 2년)이 있다. 이처럼 사씨세력은 동성왕대부터 해상활동과 대외전쟁을 통해 좌평급 가문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씨세력의 근거지에 대해서는 ①부여로 보는 견해(홍사준, 1954, 백제 사택지적비에 대하여, 역사학보 6, 256쪽 ; 노중국, 1988, 앞의 책, 166쪽), ②임천 성흥산성설(유원재, 1996, 백제 가림성연구, 백제논총 5, 83~86쪽), ③ 부여부근설(서정석, 2002, 백제의 성곽 -웅진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학연문화사, 118쪽), ④유성설(이도학, 2003, 백제 사비 천도의 재검토, 동국사학 39, 45~46쪽), ⑤서천설(강종 원, 2007, 백제 사씨세력의 중앙귀족화와 재지기반, 백제연구 45, 32~33쪽) 등이 있다. 사 씨세력의 근거지는 사비지역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사비 천도 당시에는 사비도성 안의 대부분 지역이 사람이 거주하여 농경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미개발지역인 배후습지나 소 택지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0, 부여동나성 서나성 발굴조사 약보고 ; 2003, 사비도성 -능산리 및 군수리지점 발굴조사조고서- ; 충청매장문화재연구 원, 2001, 부여가탑리 왕포리유적, 현장설명회자료 ; 박순발, 2002, 웅진 천도 배경과 사 비천도 조성 과정,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63쪽 ;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 1998, 화지산 일대 지표조사 보고서 학술연구총서 제19집). 이런 면을 고 려해 보면 사씨세력의 근거지는 사비도성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해 준다. 사씨세력의 근거지는 동성왕대 사법명이 제수된 邁羅王을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의 邁羅城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서정석, 2002, 앞의 책, 118쪽). 매라는 부여와의 접근성과 해상활동에 유리한 입지조건 등을 고려해 볼 때 현재 충남 보령 남포가 그 후보지의 하나로 비정될 수 있다. 사씨세력은 금강을 통한 해상활동에서 일찍부터 사비지역의 재지세력들과는 일정한 관계를 맺고 친연성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성왕의 사비천도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동성왕대 이후 성장한 정치적 기반을 더욱 넓히려는 계기로 삼으려 하였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사씨세력은 성왕 대부터 백제 말기까지 大佐平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성세를 나타냈던 실세귀족의 위치에 있었다. 572)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마립간 7년(485) 5월조 에 실려있다. 동성왕이 즉위 초부터 한동안 단절되었던 중국 및 신라와의 외교관계 개선에 보다 주력한 이유가 대고구려정책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573) 加 : 백제 동성왕대의 인물로 동성왕 8년(486)에 위사좌평으로 발탁되었다. 氏는 大姓 8族 의 하나인데 이 웅진의 熊 을 표시하는 혹은 웅진을 흐르는 錦江의 별명인 白江의 白 과 관계가 있으므로 웅진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8쪽). 백씨의 세력근거지를 최근 발굴 조사된 공주 수촌리유적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 신발, 환두대도, 중국제 도자기 등 최상위급에 해당되는 위세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 조성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기로 편년되는데, 이 고분을 조성한 세력을 백씨로 비정하는 견 해가 있다(강종원, 2005, 수촌리 백제고분군 조영세력 검토, 백제연구 42, 48~54쪽). 이 氏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신진세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574) 牛頭城 : 牛頭城은 온조왕 18년조에도 보이는데, 이때는 春川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웅진 천도 후 백제가 춘천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웅진천도 이후 우 두성의 위치는 ①부여 부소산성으로 보는 견해(심정보, 1996, 백제 사비도성의 성곽 축조시기 에 대한 고찰, 고고역사학지 11 12합집, 81~82쪽 및 2000, 백제 사비도성의 축조시기에 대하여, 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서경문화사, 95쪽)가 있으나, 1988~1991년 사이에 부여 부소산성 동문지 조사에서 大通 명이 새겨진 기와편이 수습되어 부소산성의 시축시기에 대해 서는 현재까지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527~528년 무렵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 이다. ②한산 건지산성으로 보는 견해( 大東地志 권5 韓山 城池條의 乾止山古城[卽牛頭城 周 三千六十一尺 泉七 池一 古有倉] 百濟 武王 三十三年 改築馬山城 기사 참조)가 있으나 이곳에 서는 백제계 유물이 별로 출토되지 않고 있다, ③청양읍 우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주목된다(양기 석, 2007, 백제의 사비천도와 그 배경,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46쪽). 우산성은 청양읍 북쪽 진산인 우성산에 위치한 테뫼식산성으로 둘레 956m에 달한다. 이곳에서 격자문 승석 문 물결무늬가 시문된 백제계토기가 출토되었다(충청남도, 1991, 문화유적총람(성곽 관아 편), 196~197쪽). 청양 우산성은 공주-우성면-정산-청양에 연결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부여 은산을 거쳐 부여읍이나 임천 성흥산성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요충에 있다. 우두 성은 동성왕 8년(486) 7월에 처음 축조되었고, 그 후 동성왕이 이곳에서 사냥을 실시할 정도로 동성왕대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이었다. 이 성은 백가의 난이 일어나자 무령왕이 한때 주둔하여 백가의 난을 진압하는데 전진 기지로 활용한 바 있는 곳이다. 이때 무령왕이 거 느린 백제군이 웅진에서 사비지역의 가림성에 진격하는 데에는 평탄한 웅진-사비지역의 금강변 코스보다 산간지대가 많아 방어하기에 유리한 우두성(청양 우산성) 코스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575) 魏나라 : 중국 남북조시대의 北朝의 첫 나라로 존속기간은 년이다. 鮮卑族 拓拔珪(道 武帝)가 386년에 현재의 중국 山西省 大同에서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는 盛樂에 도읍하였다가 493년에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손자 太武帝는 五胡十六國으로 분립한 화북을 통일하여 남조 宋 과 대립하였다. 534년에 東魏와 西魏로 나뉘어지면서 멸망하였다. 576) 魏나라 우리에게 패하였다 : 본 기사는 資治通鑑 권136 齊紀 2 世祖武皇帝 上之下 永明 6년(488)조 末尾에 의거한 것이다.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

83 164 11년(489)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나라 남쪽 바닷가의 사람들이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 165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은 나라 서쪽의 泗 581)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燕突582)을 達率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제단을 만들고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11월에 南堂577)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2년(490) 가을 7월에 북부 사람으로 나이 15세578) 이상을 징발하여 沙峴城579)과 耳山城580) 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率衆 襲擊虜軍 大破之 去年庚午 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라 하여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唐나라 許嵩 이 756년경에 撰述한 建康實錄 永明 2년조에는 魏虜征之 大破百濟王弁都 라 하여 魏虜가 백 제를 대파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남제서 권58 백제전의 庚午年 기사는 永明 8년(490: 동성 왕 12)이 되어 자치통감 의 연대와 2년의 차이가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대륙진출설의 유력한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이 기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①북위가 백제의 不修職貢 을 이유로 하여 해로로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 記, 399쪽), ②유목민족인 北魏의 수군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내의 백제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는 입장에서 이 기사는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 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이라 한 기사에 백제가 遼西지역으로 진출하여 晉平郡 晉平縣을 두었 다고 한 것과 더불어 백제가 華北(遼西)지방으로 진출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견해(金庠 基, 1967, 百濟의 遼西經略에 대하여, 白山學報 3 ; 方善柱, 1971,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 白山學報 11집 참조) 등이 있다. 여기서 백제를 공격한 위의 실체에 대해서는 북위로 보는 견해(李明揆, 1983, 백제 대외관계에 관한 일시론, 사학연구 37, 91~92쪽), 고구려로 보는 견해(유원재, 1992, 魏虜의 백제침입 기사, 백제연구 23, 92~94쪽), 북위와 고구려의 연합군으로 보는 견해(박현숙, 2000, 백제 동성왕대 대외정책 변화, 백제연구 32, 96~97 쪽) 등이 있다. 그러나 남제서 백제전에 나오는 匈梨 또는 은 고구려의 멸칭으로서 고 구려를 가르키는 것(유원재, 1995, 中國正史 百濟傳 硏究, 학연문화사, 쪽)으로 보 는 것이 당시의 삼국 관계를 검토해 볼 때 보다 합리적이다. 따라서 동성왕 10년조와 남제서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 기사는 백제와 고구려 간에 전개된 전쟁으로 봐야 할 것 이다. 본서 권26 동성왕대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시기가 494년 495년인 데, 이 기사를 합치면 두나라 사이의 전쟁 횟수는 늘어난다. 577) 南堂 : 본래는 원시집회소로서의 기능을 가졌으나, 뒤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정사를 논의 집행하는 政廳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이 남당은 회의기관과 실무 집행 부서와의 분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의례적인 것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이병도, 1976,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 쪽). 남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24 주 428)을 참조할 것. 578) 나이 15세 : 이 기사는 삼국시대에 築城 등을 위해 국가에서 노동력을 징발할 때 대체적으로 15 세 이상인 자를 동원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편 15세 이상을 동원하는 것은 노동력 을 동원할 때의 연령기준이고, 병역동원 때에는 20세가 기준이었다는 견해도 있다(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79, 조선전사 5 중세편 발해 및 후기신라사, 228쪽). 백제가 노동력 징발을 위 해 호구를 파악하여 관리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1995년 1월 부여 궁남지 유구 조사과정에 서 발견된 백제 木簡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연령에 의한 인구 파악 즉 호구제도의 존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中 小와 같은 어떤 기준에 의해 호구가 편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에 보이는 中口 와 小口 는 중국 북조에서 시행된 율령의 丁中制와 관련 있어 보인 다. 즉 이에 의하면 남녀 모두 3세 이하를 黃, 16세 이하를 小, 20세 이하를 中, 21세 이상을 丁, 60세를 老라고 하여 연령별로 6등급으로 나누어 노동력 자원을 관리하였다. 이는 사비시대의 사실이지만 백제가 서위~북주의 丁中制를 수용하여 6호등제를 실시한 것으로 판단된다(양기석, 2005, 백제의 경제생활, 주류성, 70쪽). 579) 沙峴城 : 현재의 충남 公州市 正安面 廣亭里山城에 비정된다(井上秀雄, 1982, 朝鮮城郭一覽, 朝鮮學報 104, 150쪽). 광정리 산성은 차령을 넘어 공주로 진입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왕도 웅 진 방어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김영심,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5 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4쪽). 580) 耳山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이산성을 충북 증평군 道安面 의 尼聖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閔德植, 1983,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참조) 이곳이 삼국사기 지리지 4에 의하면 고구려 영역이기 때문에 성립되기 어렵다. 한편 耳山城을 현재의 경북 고령군 고령읍의 主山城에 비정하는 견해(井上秀雄 譯註, 1983, 2, 373쪽)도 있으나 고령이 대가야 지역이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다. 동성왕 20년(498) 이전에는 웅진도성과 그 부속 시설의 정비와 함께 왕도 주변에 환상으로 산성을 배치하는 위성방비체제를 구축해 왔다(서정석, 2002, 앞의 책, 100~101쪽). 이 시기에 새로 축조된 牛頭城(청양, 486) 沙峴城(공주 정안, 490) 耳山城(490)은 왕도 웅진을 방어하기 위해 차령을 넘어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요충에 설치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산성도 웅진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81) 泗 : 지금의 충남 扶餘郡이다. 삼국유사 권2 紀異篇 남부여 전백제조에는 泗 로 표기되어 있다. 사비는 성왕이 16년(538)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가 되 었다. 본서 동성왕대 기사에서 왕이 사냥을 한 7차례 중 사비지역에서만 3차례가 행해질 정도로 빈번했을 뿐 아니라 그의 말년인 동성왕 23년(501)에는 웅진과 사비지역을 넘나들면서 사냥을 집중 실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동성왕이 이곳에 자주 전렵을 간 것은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를 물 색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노중국, 1978, 백제왕실의 남천과 지배세력의 변천, 한국사론 4, 93~95쪽 및 1988, 앞의 책, 166쪽 ; 이기백, 1978, 앞의 글, 19쪽 ; 심정 보, 1996, 백제 사비도성의 성곽 축조시기에 대한 고찰, 고고역사학지 11 12합집, 79~80 쪽).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즉 동성왕대의 사냥 대상지가 왕도 웅진을 중심으로

84 년(494)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신라가 薩水586)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13년(491) 여름 6월에 熊川의 물이 불어나서 왕도의 민가 200여 채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고 물러나 犬牙城587)을 지키자 고구려가 이를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 잠겼다. 하여 포위를 풀어주었다.588) 가을 7월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600여 집이나 되었다. 17년(495) 여름 5월 초하루 갑술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가을 8월에 고구려가 雉壤城589)을 포위해 오자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 14년(492) 봄 3월에 눈이 내렸다. 여름 4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에 왕은 牛鳴谷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15년(493)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왕은 伊 583) 比智584)의 딸을 시집보냈다.585) 그 사방 외곽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목적은 왕도 외곽에 대한 안정적 지배를 위해 실시 한 것이기 때문에 사비지역 사냥을 천도와 직접 관련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이도학, 2003, 백제 사비 천도의 재검토, 동국사학 39, 33~35쪽). 그리고 가림성 축조와 백가의 파견은 중 앙귀족세력에 대한 재편성 작업의 일환이었으며, 동성왕대의 웅진교와 성곽 축조는 왕도의 정비 와 웅진성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기 때문에 동성왕대에는 적어도 천도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서정석, 2002, 앞의 책, 128~129쪽 ; 이도학, 2003, 앞의 글, 36쪽). 동성왕 대의 사비지역은 선주 취락이 크게 형성되어 있지 않은 아직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었고, 왕도 인근에서 국왕이 실시하는 주요 사냥터로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비도 준비설은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동성왕이 사비지역에서 사냥행사를 빈번히 실시한 것은 왕권 강화 추진 이라는 정국의 현안문제 해결책 모색과 誓事的 행위가 행해지는 신성한 祭場으로 높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양기석, 2007, 앞의 책, 44~45쪽). 582) 燕突 : 백제 동성왕대의 달솔 관등을 지닌 重臣으로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인 燕氏출신이다. 이 燕氏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신진세력의 하나로서 중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성왕 12 년에 달솔로 임명된 그는 동성왕 19년에 兵官좌평이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동성왕 12년 (490)에 사비 西原에서 사냥을 실시하여 연씨세력 연돌을 달솔에 발탁한 것은 진씨와 같은 구귀 족세력을 견제하여 자신의 친정체제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미를 가진 조치라 할 수 있다. 이 후 동성왕 19년(497)에 실세귀족 眞老가 사거하자 신진세력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아 병권을 장악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연씨세력의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앞의 주 551)을 참조할 것. 583) 伊 : 신라 17관등 중의 제2관등.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마립간 15년조에는 伊伐 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차이가 난다. 584) 比智 : 신라 소지마립간 때의 이찬 관등을 가진 안물. 그의 딸이 백제왕에게 시집간 것에서 미루 어 볼 때 김씨로서 진골출신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외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585)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 知마립간 15년(493)조에 실려 있다. 양국의 결혼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하 압력에 공동으 로 대항하기 위해 毗有王 이래의 濟羅동맹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동맹을 체결한 이후 제라 두나라가 공동으로 고구려를 물리친 사례는 494년 살 수원-견아성 전투, 495년 치양성 전투가 있다. 이 婚姻同盟의 사실을 로맨틱하게 꾸며낸 것이 삼국유사 에 보이는 서동설화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1976, 薯童說話에 대한 新考 察,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薯童說話에 보이는 백제와 신라왕실간의 혼인은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3녀와의 결혼이어서 본 기사에 보이는 혼인과는 구별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586) 薩水 : 薩水原은 본서 권34 잡지 지리 1에 의하면 신라 상주 삼년산군에 속한 薩買縣으로 지금 의 청원 미원일대로 비정된다(양기석, 2001,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 35쪽). 이를 신라때 살매현으로 보고 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 나(이병도, 1977, 國譯, 박영사, 400쪽), 그 주변에는 고대 산성이 없을 뿐 아니라 신라군의 전초기지가 보은 삼년산성에 있다고 보았을 때 교통로상 적당치 않다. 587) 犬牙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이를 경북 문경 서쪽으로 보 는 설(이병도, 1977, 國譯, 400쪽)이 있으나, 당시 고구려와 제라동맹군이 충북 청 원 미원-보은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보은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와 고구려간의 전투가 보은 삼년산성을 모기지로 하여 보은-청원-진천선에서 벌어졌던 점에 비추 어 볼 때 견아성은 보은 내북면 창리의 주성산성이나 보은읍 산성리의 함림산성에 비정될 수 있 다(양기석, 2001, 앞의 글, 35쪽). 588) 왕은 군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어주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麻立 干 16년조와 같은 책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3년조에 나온다. 동성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공 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해 준 것은 15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후 양국 사이의 돈독한 관계 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89) 雉壤城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 치양성은 근초고왕 24년(369)조에 보이는데, 이때의 치양 성은 황해도 白川으로 비정되고 있다(본서 권24 주 312) 참조). 그러나 이 시기에는 황해도 지 역은 이미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본 기사에서 보이는 雉壤城을 배천으로 비정할 수 없 다. 따라서 이 치양성을 음이 유사한 원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당시 원주지역이 고구려의 영 유지역이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다. 오히려 당시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황에 비추어 볼 때 괴산

85 였다. 신라 왕이 장군 德智590)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이내 그만두었다. 물러나 돌아갔다.591) 21년(499)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592) 19년(497) 여름 5월에 兵官佐平 眞老가 죽자 달솔 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여름 6월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率 毗 에게 지키게 하였다. 8월에 왕은 耽羅<*탐라는 곧 耽牟羅이다.>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 594) 595) 려고 武珍州 에 이르렀다. 로서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사람들이 2천 명이었다.596) 겨울 10월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0년(498) 熊津橋를 세웠다. 가을 7월에 沙井城593)을 쌓고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賑恤하여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漢山 사람으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자 22년(500) 봄에 궁궐 동쪽에 臨流閣597)을 세웠는데, 높이가 5丈이었다.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응답을 하지 않았고, 또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걱정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렸다. <史論>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로우며,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품행에는 이롭다.598) 그래서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자기를 겸허하게 하여 정사를 물었고, 얼굴을 부 일대로 추정되지만 그 구체적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는 475년 이후 황해도 배천지역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괴산지역에 이주하면서 한성시대의 지명을 移置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 국, 1997,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1쪽). 590) 德智 : 신라 소지왕대의 장군. 495년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에 침입해 오자 백제의 요청에 따 라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 군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자비마립간 6년(463)에는 揷良城(경 남 梁山)에 침입해 온 왜군을 물리쳤다. 591)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麻立干 17년조와 같은 책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4년조에 보인다. 592) 달솔 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 연돌은 연씨 출신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동성왕 대에 두각을 나타낸 신진귀족의 하나이다. 解仇의 반란을 평정하여 실권을 장악한 진로가 죽은 후 신진세력의 하나인 燕氏출신의 연돌이 병관좌평이 된 것은 동성왕의 정치운영이 漢城에서 남 하해 온 구귀족보다는 금강유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반영해 주 는 것이다(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동성왕은 497년 실세귀족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은 이후 그 후임으로 연돌을 병관좌평에 임명하는 동시에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에 파견하는 등 신진세력에 대한 세력 개편을 단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593) 沙井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沙井 洞으로 비정되고 있다(成周鐸, 1974, 大田地域 古代城址硏究, 百濟硏究 5, 116쪽). 594) 武珍州 : 현재의 광주광역시에 비정된다. 무진주는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武州條에 武州本百 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州 라고 하였듯이 신라 신문왕대의 명칭이고, 武州는 경덕왕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백제 당시의 지명은 본서 권36 잡지 지리 4에 武珍州(一 云奴只) 라 한 기사에 나오는 奴只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웅진도읍기의 백제의 지방통치 조직은 魯制로 운영되고 있어서 아직 州制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무진주는 통일기 신 라의 명칭이 이 시기에로 소급 부회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노중국, 1991, 漢城時代 百濟 의 魯制 실시와 編制 기준, 啓明史學 2). 드럽게 하고서 간언을 받아들였으며, 오히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히 간언할 수 있는 북(敢諫之鼓)599)을 걸어놓고, 비방하는 나무(誹謗之木)600)를 세워 마지않았 595) 왕은 耽羅가 武珍州에 이르렀다 : 동성왕이 무진주에 간 것을 근거로 하여 이때에 와서 전 라도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90, 漢城후기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정비, 百濟論叢 2, 305쪽). 그러나 본 기사는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무 진주에 간 것임으로 무진주는 동성왕 20년 이전에 백제의 영역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무진주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시기는 근초고왕이 현재의 전남지역에 남아 있던 마한 잔여세력 을 정벌한 369년 경으로 보는 것(이병도, 1976, 近肖古王 拓境考,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 타당할 것이다. 596) 漢山 사람으로서 2천 명이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8년조에 보인다. 597) 臨流閣 : 동성왕이 궁궐 서쪽에 세운 閣. 현재의 충남 공주시 公山城內의 동쪽 최고 지대인 光復 樓 서쪽 구릉 아래에 있는 광장 북쪽의 약간 두드러진 곳에서 주춧돌과 流 와 비슷한 글자가 새 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臨流閣址로 추정되고 있다. 임류각지에 대해서는 金永培, 1965, 公州 百濟王宮 및 臨流閣址 小考, 考古美術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 소, 1982, 公山城 을 참조할 것. 598)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품행에는 이롭다 : 이 말은 孔子家語 六本篇과 說苑 正覺篇의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而昌 桀紂以唯唯而亡 이라 한 기사에 나온다. 그리고 史記 권55 留侯世家 25에는 良曰 且忠言逆耳利於行 毒藥苦口利於病 으 로 나온다. 599) 감히 간언할 수 있는 북(敢諫之鼓) : 중국의 堯임금이 조정에 북을 달아서 임금에게 간하려고 하

86 170 다. 지금 牟大王601)은 간하는 글이 올라와도 살펴보지 않고, 또 궁궐 문을 닫아서 이를 막 여름 5월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았다. 莊子602)에 허물을 보고도 고치지 않고, 간언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 7월에 炭峴606)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607) 603) 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모대왕이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고 한다. 8월에 加林城608)을 쌓고 衛士佐平 171 加에게 지키게 하였다. 여름 4월에 牛頭城에서 사냥하였는데, 우박을 만나 그만두었다. 5월에 가물었다. 왕은 근신(左右)들과 더불어 臨流閣에서 연회를 하였는데, 밤새도록 환락을 다하였다. 23년604)(501) 봄 정월에 왕도의 늙은 할멈이 여우가 되어 사라졌다. 호랑이 두 마리가 남 산에서 싸웠는데,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605) 3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는 자로 하여금 이를 쳐서 통하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왔는데, 朝鼓라고도 한다. 敢諫의 북과 뒤에 나오는 誹謗의 나무에 대해 大戴禮 保傳 48에 有誹謗之木 有敢諫之鼓 鼓史誦詩 工誦正 諫 士傳民語 習與智長 故切而不壤 化與心成 故中道若生 是殷周所以長有道也 로 나온다. 그리고 淮南子 主術訓에 堯置敢諫之鼓 舜立誹謗之木 이라 하였고, 後漢書 권54 楊震列傳에 帝發 怒 遂收考詔獄 結以罔上不道 震復上疏救之曰 臣聞堯舜之世 敢鼓謗木 立之於朝 라 하였다. 600) 비방하는 나무(誹謗之木) : 중국의 舜임금이 교량 위에 나무를 세워 정치의 과실을 쓰게 하여 반 성하였다고 하는 고사에서 나왔다. 앞의 주 599)를 참조할 것. 601) 牟大王 : 동성왕의 생시의 이름으로 왕명을 붙인 것이다. 이러한 예로는 聖王(본서 권26 즉위년) 과 근래 부여 陵山里 寺址에서 발견된`창왕명석조사리감명문a에 나오는 昌王(死後 威德王으로 諡號됨)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본서 권26 주 562)를 참조할 것. 602) 莊子 : 중국 戰國時代 楚나라 사상가인 莊子가 지은 책. 장자는 唐나라 玄宗이 天寶 년간에 南華 眞人으로 追號하였으며, 老子와 함께 道家의 祖로 칭해졌다. 생몰년은 B.C 년이다. 그는 10萬言으로 이루어진 莊子 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一名 南華眞經 이라고도 한다. 장 자 의 권수에 대해 漢書 권30 藝文志 10에는 52篇으로, 隋書 권34 志 29 經籍 3 子에는 20 권 16권 30권 등으로 나온다. 현행의 장자 는 內篇 7편, 外篇 15편, 雜篇 21편으로 모두 33 편으로 되어 있다. 603) 허물을 보고도 사납다고 한다 : 본 기사는 莊子 雜篇 漁父 31에 人有八疵 事有四患 所謂四患者 好經大事 變更易常 以掛功名 謂之 事知擅事 侵人自用 謂之貪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狼 人同於己則可 不同於己 雖善不善 謂之矜 此四患也 에 나온다. 604) 23년 : 동성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己未立 理二十六年 으로 나와 3년 의 시차가 있다. 605) 왕도의 늙은 할멈이 잡지 못하였다 : 이 地變 기사는 본서 권23 온조왕 13년 춘2월조에도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온다. 동성왕의 죽음을 미리 암시해 주는 조짐으로 생각된다. 606) 炭峴 : 峴으로도 나온다.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①충청남도 금산군 금산 면 천내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설(大原利武, 1922, 百濟要害地炭峴に就いてa, 朝鮮史講座 朝鮮歷史地理, 88~90쪽), ②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와 서평리와의 사이에 있는 炭峙설(小田省吾, 1927,`上世史a, 朝鮮史大系, 194쪽), ③부여 석성면 正覺里 숫고개설(今西 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266쪽), ④대전 동구와 옥천 군북면 경계의 식장산 마도령 설(이병도, 1977, 역주 삼국사기, 401쪽), ⑤완주군 운주면 薪伏里와 三巨里 사이의 쑥고개설 (홍사준, 1967,`탄현고 -계백의 삼영의 김유신의 삼도-a, 역사학보 35 36, 55~81쪽 ; 전 영래, 1982,`탄현에 관한 연구a, 전북유적조사보고 13, 276~289쪽), ⑥금산군 珍山面 校村 里의 숯고개설(성주탁, 1977, 금산지방성지 조사보고서, 논문집 제4권 제3호,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9쪽) 등이 있다. 607) 炭峴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 : 496년부터는 대내외적 정세 변화에 따라 금강유 역의 요충에다가 성책을 축조하면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이는 신라의 심상치 않는 동향에 대비하고 아울러 영산강유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가야의 신라 접근과 신라의 내부적 성장으로 인해 기존의 제라동맹관계의 변화가 촉발된 것으로 판단된다. 496년 대가야가 신라에 꼬리 길이가 5자나 되는 흰 꿩을 보내 신라에 접근한 것이 그 단서가 된 것 같다. 그동안 신라와 대가야와의 관계는`광개토왕릉비문a에 나타난 400년 경자년 작전, 가 야를 경유하여 일어난 왜의 빈번한 침입, 그리고 가야의 전통적인 친백제정책 등으로 인하여 서 로 적대적이거나 또는 소원한 편이었다. 이런 면에서 496년의 신라와 대가야의 교섭은 매우 이 례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대가야의 대외정책상 변화 계기는 백제 동성왕대의 친신라 정책 추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동성왕 즉위초의 백제가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기조로 하여 대가야와 왜와도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백제와 신라 두나라가 결혼관계 와 군사동맹관계를 통해 제라동맹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가자 대가야는 백제의 친신라정책을 견제할 필요에서 496년 신라에 화호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양기석, 2007, 5世紀 後半 韓半島 情勢와 大加耶,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대가야, 고령군 대가야박물관 계 명대 한국학연구원, 62쪽). 이러한 신라와 대가야의 화호 요청에 대하여 백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496년과 497년에 고구려가 신라의 牛山城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을 때(본서 권3 소지마립간 18년 7월 19년 8월) 종전과는 달리 백제의 신라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신라의 태도 변화에 대응하여 백제는 그 동쪽 변경지역의 요충인 沙井城 炭峴에 각각 성책을 설치하고 여기에 率 毗 와 같은 신진세력을 배치하여 신라에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608) 加林城 : 현재의 충남 扶餘郡 林川面의 聖興山城을 말한다(이병도, 1977, 國譯, 401 쪽). 대동지지 권5 林川 城池條에 聖興山古城[古加林城 周二千七百五尺 井三 舊有倉 이라 한

87 172 겨울 10월에 왕이 泗 의 동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11월에 熊川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는 데, 큰 눈에 막혀 馬浦村609)에서 묵었다. 이에 앞서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 는데, 백가는 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문에 [백가는] 왕을 원망하였는데, 이때에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610) )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었는데, 시호를 東城611)이라 하였다. <* 冊府元龜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南齊613) 建元614) 2년(480)에 백제왕 牟都615)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 니 詔書를 내려 말하였다.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워 은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변경의 蕃國이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분을 지켰으니 곧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 將軍616)을 수여하노라. 기사를 참조할 것. 이 가림성은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으며(본서 권28 백 제본기 의자왕 20년), 나당 전쟁때( )의 격전지였다(본서 권7 신라본기 文武王 년 참조).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할 때 무진주에까지 이르는 루트는 지금의 공주에서 출발하여 부여에서 금강을 건너 익산 - 전주 - 광주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동성왕은 탐라 원정을 통해 금강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교두보로서 사비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 목하였을 것이다. 수륙의 요충으로 사비지역을 공제할 수 있는 지금의 임천에 가림성을 쌓아 영 산강유역으로 통하는 루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가림성은 백제의 영산강유역에 대한 안정적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 교두보로서 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양 기석, 2007, 앞의 책, 48쪽). 609) 馬浦村 : 본서 권37 지리 4의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충남 舒川郡 韓山面의 옛 이 름이 馬山 馬邑인 것에 미루어 볼 때 馬浦村을 서천군 한산면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이병 도, 1977, 國譯, 401쪽) 분명치 않다. 610) [백가는] 왕을 원망하였는데, 왕을 칼로 찔렀다 : 일본서기 권16 武烈紀 4년조에는 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而立嶋王 是爲武寧王 이라 하여 포학한 동성왕을 國人이 제 거한 것으로 나온다. 동성왕을 제거한 國人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를 본 기사와 연계시켜 보면 加를 중심으로 한 동성왕 반대세력이 바로 국인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성왕 말년인 501년에는 측근세력인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주로 파견하였고, 동성왕 자신이 사비지 역에 2차례나 연달아 사냥을 실시하였다. 동성왕이 그만큼 사비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성왕은 병관좌평 연돌을 중용하는 대신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에 파견하는 등 신진세력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 다. 동성왕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백가는 중앙의 요직인 위사좌평직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웅 진지역을 모두 버리고 가림성에 파견되는 것은 자칫하면 정치적 기반을 한꺼번에 잃게 될지 모 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이에 백가는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으나 동성왕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부임지로 떠나가야만 했다. 고뇌에 빠진 백가는 왕의 측근이면서도 결국 자객을 보내 동성 왕을 살해하게 되는데 이것이 동성왕 23년의 거사이다. 그런데 동성왕이 가림성 축조와 사냥 실 시를 통해 사비천도를 준비하였다면 백가의 거사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백가가 가림 성 성주로 파견된 것은 동성왕이 추진하고 있는 사비천도를 주도할 위치를 부여받았음을 뜻한 다. 백가는 사비천도를 주도함으로써 장차 중흥공신으로서 뚜렷한 위상을 갖게 될 절호의 기회 를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가가 도리어 반기를 들고 동성왕을 살해한 점은 어쩌 면 사비천도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611) 東城 : 諡號는 先王의 공덕이나 卿相 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追贈한 이름을 말한다. 이 기사는 백제에서 시호제의 실시를 보여주는 최초의 기사이다. 그러나 武寧王 陵에서 출토된 誌石에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인 斯麻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東城 이라는 시호는 사후 일정한 기간이 지난 성왕대에 무령왕계 왕실의 소가계집단 중심으로 왕실 계보가 정리되는 것과 관련하여 붙혀진 것으로 볼 수 있다(양기석, 1991, 백제 성왕대의 정치개혁과 그 성격 -전제왕권의 성립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 92~93쪽). 612) 冊府元龜 : 중국 北宋의 王欽若 楊億 등이 眞宗의 명을 받들어 1005년에 편집에 착수하여 1013년에 완성한 책으로 모두 1000권으로 이루어졌다. 古代로부터 五代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정치에 관한 사적을 帝王部에서 外臣部에 이르기까지 31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열기하였다. 文 苑英華 太平御覽 등과 더불어 북송조에 편찬한 대표적인 類書(叢書)이다. 뒤이어 나오는 기 사는 冊府元龜 권963 外臣部 封冊에 실려 있다. 613) 南齊 :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의 나라로 존속기간은 년이다. 蕭道成이 宋나라를 멸망 시키고 세웠다. 도읍은 建康(현재의 중국 南京)인데, 7대 24년만에 양나라에게 망하였다. 614) 建元 : 중국 南齊 高帝의 연호로 년까지이다. 615) 牟都 : 문주왕을 말한다. 본서 권26 주 531)을 참조할 것. 송서 권97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行輔國將軍 餘都 의 餘都 는 扶餘牟都 를 축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牟都를 牟大의 異寫로 보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1977, 國譯, 403쪽), 문주왕으 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이기동, 1974, 앞의 글, 30 33쪽). 616)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 使持節의 持節 제도는 漢代에서 비롯된 것이다. 晉代에는 使 持節을 上, 持節을 中, 假節을 下로 삼았는데, 장군이 군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는다는 의미의 加號로 사용되었다. 都督百濟諸軍事는 백제의 군사권 업무를 統監하는 爵號이다. 중국 남북조시 대에 州의 刺史는 흔히 將軍職을 兼領함과 동시에 都督 등의 칭호를 가지고 군사권을 행사하였 다. 軍事權上의 上下관계를 나타내는 加號에는 都督 監 督의 3종류가 있는데, 이 중 도독이 가장 높았다. 都督00諸軍事 는 節을 부여받은 장군이 독자적인 권한으로 統監할 수 있는 군사 관할지구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都督百濟諸軍事 는 백제지역의 군사를 統監한다는 의미

88 또 永明617) 8년(490)에 백제 왕 牟大가 사신을 보내 表를 올렸다. 王의 손자이며,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昆支의 아들622)인데, 그 할아버지를 牟都라고 하지 [남제는] 알자(謁者) 복야(僕射)618) 孫副619)를 보내 모대를 책봉하여 돌아가신 祖父 牟 않았으니 齊書623)에 실린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都620)의 작호를 잇도록 하고 백제왕으로 삼아 말하였다.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받아 精誠이 먼 지역에서도 드러났고, 바다 길이 조용하고 맑아져 조공을 바침에 변함이 없도다. 떳떳한 법전(彛典)에 따라 천명 을 이어가도록 하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 아름다운 위업을 받는 것이니 가히 삼가 권26 百濟本紀 4 武寧王624) 이름이 斯摩625)<*혹은 隆이라고도 한다.>로 牟大王의 둘째 아들626)이다. 키가 여덟 자이 지 않을 수 있으랴.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으로 삼는다. 621) 에는 도모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또 살펴보니 牟大는 蓋鹵 그러나 三韓古記 이다. 鎭東大將軍은 중국 남제 武散階의 하나. 晉나라 때는 鎭東대장군으로서 開府한 자는 位가 公과 같았으며 品秩과 俸賜도 公과 같았다. 齊나라에 와서도 鎭東대장군은 位가 公과 같았으며, 司馬 長史 등의 속관도 公과 같았다( 十通分類總簒 권61 大將軍 職官類 13 諸將 大將軍條 참 조). 魏나라의 관품으로는 진동대장군은 2품이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본서 권25의 주 407) 408) 409)를 참조할 것. 617) 永明 : 중국 南齊의 武帝의 연호로 년까지 사용되었다. 618) 알자(謁者) 복야(僕射) : 南齊에서 관직을 拜授하거나 또는 百官의 班次를 관장하는 업무를 담당 하였던 관직이다. 謁者는 秦나라가 설치하였고 漢이 이어받았는데, 賓贊을 관장하였다. 후한 때 에 謁者僕射를 謁者臺士로 고치고 銅印과 靑綬를 주관하게 하였다. 魏나라는 僕射를 두어 大拜 授 및 百官 班次를 장악하게 하였고, 晉나라 武帝는 복야를 생략하고 알자가 蘭臺를 겸하게 하였 다. 宋나라 武帝는 다시 알자를 설치하여 小拜授 및 百官報章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남제는 宋의 제도를 이어받았다( 十通分類總簒 권52 職官類 4 中書省 通事舍人條 참조). 619) 孫副 : 중국 南齊 高帝때의 인물로 謁者僕射의 직에 있었으며, 백제에 사신으로 왔다. 620) 돌아가신 祖父 牟都 : 牟都의 실체에 대해서는 文周王설 東城王설 등이 있으나 문주왕으로 보 는 것이 타당하다(이기동, 1974, 앞의 글, 30 33쪽).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으로 동성왕의 아 버지인 昆支와는 형제간이다. 그렇다고 하면 본 기사에서 牟都(문주왕)를 동성왕의 祖父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621) 三韓古記 : 古記類의 일종인데, 이것이 특정한 書目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三韓이란 7세 기에 들어서면서 馬韓 辰韓 弁韓이라는 역사적 실체와는 관계없이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이것이 고려시대에도 지속되어 我邦 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참조). 따라서 三韓古記 는 三韓의 古記 로서 특 정한 書目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고기라는 의미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李康來, 1996, 典據論, 민족사, 쪽). 반면 이를 書名으로 본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1983, 2, 373쪽). 622) 牟大는 蓋鹵王의 손자 昆支의 아들 : 본서 권26의 주 532)에서 보듯이 곤지는 개로왕의 동 생이다. 따라서 곤지의 아들인 牟大(동성왕)는 개로왕의 손자가 아니라 조카에 해당한다. 623) 齊書 : 南齊書 를 말한다. 남제서 는 梁나라 蕭子顯이 쓴 중국 남북조시대의 南齊의 歷史書이 다. 本紀 8권, 志 11권, 列傳 40권 등 도합 59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전의 앞부분은 떨어 져 나가 불완전하다. 이 백제전에는 백제의 동성왕이 신하들을 王 侯 太守로 私署한 후 남제 에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冊封해 달라고 하는 國書가 실려 있어 웅진도읍기의 백제의 대중관계, 지배세력의 동향, 그리고 지방제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 고 있다. 624) 武寧王 : 백제 제24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虎寧王 으로 나오는 데 이는 三國遺事 의 찬자가 고려 定宗의 이름인 武를 避諱해서 虎로 고쳐 쓴 것 이다.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 8년(462)에 태어났고, 백제가 웅진 으로 천도할 당시에는 14세였으며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40세였고, 돌아갈 때의 나이는 62세 였다. 즉위초 加의 난을 평정한 후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중국의 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다시 强國이 되었음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무덤은 1971년에 발굴되었는데, 塼으로 축조한 터널형 구조였다. 내부에서는 誌石 金銅冠 裝飾 木棺 石獸 五銖錢을 비롯하여 중 국제 자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墓誌石이 출토되어 백제사연구에 획기를 이루게 되었다. 무령왕릉에 대해서는 문 화재관리국, 1983, 武寧王陵 ; 공주대백제문화연구소 편, 1991, 무령왕릉의 연구현황과 제 문제 ; 충청남도 공주대백제문화연구소 편, 1991, 백제무령왕릉 ; 이남석, 2002, 백제의 고분문화, 서경 ; 권오영, 2005, 무령왕릉, 돌베개 ; 국립공주박물관, 2006, 무령왕릉 학 술대회 등을 참조할 것. 625) 斯摩 : 무령왕의 이름. 무령왕의 이름에 대한 표기는 본 기사에는 斯摩 및 隆 이라 하여 두 가지를 전해주고 있다. 무령왕릉 출토 誌石에는 斯麻 로, 그리고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斯 摩 로,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에 인용된 百濟新撰 에는 斯麻王 또는 嶋王(シマ王) 으 로, 중국측 사서인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과 南史 권79 열전 백제전에는 餘隆 으로 나온 다. 餘隆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南史云名扶餘隆 誤矣 隆乃寶臧之太子 詳見唐史 라 하

89 176 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 모대가 재위 23년에 죽 자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에 좌평 加가 加林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627) 왕은 군사를 이끌고 여 扶餘隆을 무령왕의 이름이라 한 南史 의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隆 이라 는 이름을 백제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기 위한 중국식 이름일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병도, 1977, 國譯, 403쪽). 한편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조에 인용된 百濟 新撰 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琨支가 임신한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다가 섬에서 낳게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嶋王(シマ王)으로 하였다는 출생담이 나온다. 현재 일본 큐슈의 한 작은 섬인 카 카라시마(加唐島)에 무령왕의 탄생지로 전하는 유적이 남아 있다. 嶋의 일본어 시마(シマ)는 斯 麻와 음이 비슷하다. 한편 隅田八幡神社 所藏 人物畵像鏡에 새겨진 명문에 나오는 斯麻念長 을 武寧王(斯摩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蘇鎭轍, 1994, 金石文으로 본 百濟 武寧王의 世界, 원 광대 출판부). 626) 牟大王의 둘째 아들 :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 본 기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이 설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와 같은 국내사서 뿐 아니라 중국사서인 양서 백제전에도 서술되어 있는데, 웅진기 백제의 왕통계보를 거의 부계직자상속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 의 부계직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관에 따라 이 시기의 백제왕계를 일률적으로 기록한 데에 불과 할 뿐이다. 이처럼 개로왕부터 삼근왕까지, 동성왕과 무령왕까지의 왕통계보를 부자상속으로 일관되게 서술해 놓은 것은 개로왕과 문주왕의 관계가 부자관계가 아니고 형제간이었다는 점에 서 이 서술에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조에는 是歲 百 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而立嶋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 除 武寧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今案 嶋王是蓋鹵王之子也 末多王 是琨支王之子也 此曰異母兄 未詳也 라 하여 무령왕은 琨支의 아들로서 末多王(동성왕)의 異母 兄이라고 하는 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武寧王陵誌石a에 의하면 무령왕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40세여서 개로왕 8년(462)에 출생한 셈이 되어 동성왕의 아들로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과는 異母兄弟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 다(이도학, 1984,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54 참조). 627) 좌평 加가 加林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동성왕을 죽인 23년의 정변의 주체를 가 림성주 백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동성왕 정권의 몰락을 이끈 정변에서 가장 큰 쟁 점은 무령왕의 참여 여부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비 경영에 반대한 백가에 의한 피살로 보는 견 해가 있다(유원재, 1996, 百濟 加林城 硏究, 百濟論叢 5, 86쪽). 그리고 동성왕 아들이 유년 이었을 가능성과 정변이 발생한 이후 왕위 적격자로서의 무령왕밖에 없는 것을 들어 자연스럽게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오계화, 2004, 百濟 武寧王의 出自와 王位繼承, 韓國古 代史硏究 32, 11~14쪽). 그러나 이와는 달리 동성왕 23년 거사의 주동세력을 무령왕으로 보거 나 또는 그 배후의 주동 인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무령왕이 백가를 포함한 반 177 왕세력들과 연결을 가지면서 이들로 하여금 동성왕을 제거하게 한 다음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 고 있다(노중국, 1991, 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 百濟文化 21, 13~14쪽). 또하나는 거사를 주도한 세력으로 남래귀족과 왕족들로 보고 이들이 거사를 모의하 고 백가를 끌어들인 것이며, 그 목적이 정권 교체를 위한 쿠데타적인 성격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鄭載潤, 2000, 東城王의 卽位와 政局 運營, 韓國古代史硏究 20, 522~527쪽). 약간의 견 해의 차이는 있지만 무령왕이 동성왕 시해사건에 어떤 형태로든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데에 는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무령왕 주동설은 관련 기록에 의거하는 한 나름대로 입론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다만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하였거나 또는 옹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는 무 리가 있어 보인다. 무령왕은 동성왕이 전제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이복형으로서 경계의 대상 이 되었을 것인데 반해 백가는 가림성으로 좌천되기 전까지는 왕의 측근으로 성세를 나타낸 위 치에 있었기 때문에 양자가 쉽게 결합될 여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해구나 진로가 어린 삼근 왕과 동성왕을 옹립한 사례가 참고 된다. 따라서 당시 40세의 연만한 나이를 가진 무령은 백가 에 의해 기피되었을 것이다. 당시 동성왕의 무도와 폭정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세력들은 지배층 내에서 거사 기회를 엿보며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비타나 백가처럼 세력을 잃은 신진세력들도 있었을 테고, 또한 한동안 정권에 소외되어 집권의 기회를 엿보던 무령왕을 포함 한 일부 왕족들과 구귀족 해씨세력 등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동성왕이 때마침 사 비 서쪽에 사냥을 나갔다가 큰 눈을 만나 馬浦村에 유숙하고 있을 때 인근 가림성에 있던 백가 가 이 틈을 타서 측근을 시켜 왕을 시해한 것이다. 백가가 먼저 사단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백 가는 가림성에 좌천시킨 데에 대한 앙심을 품고 일단 동성왕을 시해하였지만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 준비는 철저하지 못한 것 같다. 백가가 동성왕을 시해하고 난 다음에 정권을 잡기 위 한 일련의 움직임에서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점이 이를 시사해 준다. 동성왕의 사냥 때 수행하 고 있었거나 아니면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동성왕을 보좌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가 자신이 직접 거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측근을 시켜 시해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현장 에서 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 달 12월에 왕도에 가서 죽었는데, 그때 의 행적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동성왕이 죽은 후 바로 무령왕이 즉위하였는데, 백가가 무령왕 을 옹립하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양자간에 정치적인 입장이 너무 달랐을 뿐 아니라 가림성에서 직접 왕도 웅진으로 군대를 몰고 가서 정권을 장악하는 일은 왕도에 있는 동조세력 과의 철저한 협조를 통한 사전 준비가 없는 한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령왕을 옹 립한 세력은 백가보다도 일부 왕족들과 한성에서 내려온 구귀족 해씨세력으로 보인다. 이들은 동성왕이 백가세력에 의해 저격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곧바로 여러 반왕세력들을 규합하 여 무령을 왕으로 옹립하였을 것이다. 일본서기 의 기록처럼 국인들이 무령을 추대하였다는 기 사가 이를 반영해 준다. 무령왕은 왕족들 중에 40세라는 연만한 나이에 있었을 뿐 아니라 용모 가 그림과 같고 성품이 인자하고 관후하여 민심이 잘 귀부하였다. 는 그의 인물평에서 보듯이 인자하고 포용력 있는 인품을 갖고 있어서 어려운 시기에 구심점을 형성하여 왕위에 추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태의 추이를 감안해 볼 때 왕도내에서 백가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백가가 의도한 방향으로 사태는 전개되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백가

90 178 牛頭城628)에 이르러 率 解明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자 왕 은 그의 목을 베어 白江629)에 던져버렸다. <史論> 春秋 에 남의 신하가 된 자는 반역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반역하면 반드시 630) 고 하였다. 죽여야 한다 년(502) 봄에 백성들은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633) 3년(503) 가을 9월에 말갈이 馬首柵634)을 불태우고 高木城635)으로 나아가 공격을 하였다. 加와 같은 흉악한 역적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것인 데, 곧장 죄를 주지 않고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죄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 반란을 꾀한 뒤에야 죽였으니 때가 늦었도다. 겨울 11월에 達率 優永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水谷城631)을 습격하였다.632) 세력에 부담을 느낀 무령왕과 그 지지세력들은 백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 같 다. 이에 친왕세력들은 선왕인 동성왕을 시해한 주범으로 백가를 지목하고 이에 대한 문책에 나 선 것 같다. 이에 궁지에 몰린 백가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형당하고만 것으로 이해된다. 628) 牛頭城 : 웅진천도 이후 우두성의 위치는 ①부여 부소산성으로 보는 견해, ②한산 건지산성으로 보는 견해, ③청양읍 우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두성은 동성왕 8년(486) 7월에 처음 축조 되었고, 그 후 동성왕이 이곳에서 사냥을 실시할 정도로 동성왕대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 진 지역이었다. 그 중 청양읍 우산성이 공주에서 부여로 통하는 지리 교통로상으로 볼 때 보다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양기석, 2007, 백제의 사비천도와 그 배경,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 사, 46쪽). 우두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앞의 주 574)를 참조할 것. 629) 白江 : 현재의 錦江 하류를 말한다. 630) 남의 신하가 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 이 귀절은 春秋公羊傳 昭公 원년에 나온다. 그러나 본 기사의 人臣은 춘추공양전 에는 君親無將 將而必誅焉 이라고 하여 君親으로 되어 있다. 본서의 撰者가 이렇게 君親을 人臣으로 고친 배경에 대해 백가의 일이 君親 의 문제가 아니라 人臣 의 문제이기 때문이든가, 아니면 高麗의 현재적 상황 즉 肅宗이 자기의 조카인 獻 宗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든가, 仁宗의 嗣位를 전후하여 睿宗의 아우들 중 帶方公 大原 公 孝 등이 화를 입었다든가 하는 君親 문제가 미묘하게 얽혀 있던 상황 때문에 君親 으로 直書하지 못하고 人臣 으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추론하는 견해가 있다(李康來, 1996, 앞의 책, 쪽). 631) 水谷城 : 한성 시기의 수곡성은 현재의 황해도 新溪지역에 비정된다. 이와는 달리 이 기사에 보 이는 수곡성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한성시대의 지명을 移置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 다(노중국, 1997,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9쪽).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본서 지리지 4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토가 牙山灣에서 盈德郡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 의거할 때 이 시기의 백제가 황해도 신계까지 진격하였다는 것은 기록 그대 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백제는 남천 이후 대내적 정정 불안으로 인해 한동안 고구려에 대해 수세적이었던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이제부터 공세적인 자세로 전환한 것이다. 무령왕 2년 (502) 11월 달솔 優永이 거느린 5천의 백제군이 고구려의 水谷城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백제의 이러한 자세 변화는 백가의 난을 평정한 이후 전쟁을 통해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 한 조처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정변의 주도 세력이 동성왕 정권에서 소외된 남래귀족 과 왕족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목적에서 무령왕 즉위초부터 고구려와 말갈 에 대해 공세를 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정재윤, 1999, 앞의 글, 129쪽). 의자왕이 즉위초의 정변을 수습한 후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城 등 40여 성을 빼앗은 사례가 이에 해당된 다. 이러한 백제의 공세에 대해 고구려는 주된 공격의 목표를 신라에서 백제로 바꿔 대대적인 반 격에 나섰다. 고구려는 부용세력인 말갈까지 동원하여 백제의 동 북쪽 변경지대인 마수성과 고 목성에 침입하여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무령왕대에 들어와서 주목되는 현상은 백제와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과 그 북쪽인 임진강과 예성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가 웅진천도 후 일시적으로 이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梁起錫, 1990, 百濟 專制王權 成立過程硏究,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43 쪽). 이러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대의 기사를 475~551년까지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 를 신뢰하는 입장에서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고구려본기 문자명 왕대의 기사에서도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고구려본기의 대백제전투 기사가 모두 백제본기에 의 거한 것이 입증되어야만 부정하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백제본기의 다른 기사는 신뢰 하면서도 이 시기의 영역관련 기사만을 부정하는 입장은 엄정한 사료 비판에도 어긋나는 일이 다. 또한 한성이 함락당한 이후 한강유역 일대는 475년의 전쟁으로 파괴되고 민호의 사민으로 거의 도성 기능을 상실한 지역이 되었다. 이곳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소 규모의 고구려군이 성이나 보루성에 주둔하여 치안 유지와 백제 침입에 대비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백제가 다소 불안정하였지만 한강하류유역에 전술적으로 경기병을 동원하여 고구려 및 말갈군과 단기전을 치르는 양상을 다소 과장해서 기록에 남겼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 이다. 632) 達率 優永을 보내 水谷城을 습격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12년(503)조에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가 고구려본기에 문자명왕 12년(503)조에 보이고 있고 또한 문자명왕 11년(502)년조에도 각각 기재되어 있어 고구려본기의 기사보다 2년 빠르게 되어 있다. 결국 두 기사는 같은 해 11월에 벌어진 전투였고,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면에서 공통점 이 있기 때문에 두 기사는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기사는 502년 기사로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난 무령왕의 즉위년은 501년이어서 고구려본 기 기사와는 2년의 차이가 있다. 633)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11년(502) 조에 보인다.

91 180 왕은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를 쳐서 물리쳤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년(512) 여름 4월에 사신을 梁나라642)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고구려가 加弗城643)을 습격하여 빼앗고, 군사를 옮겨 圓山城644)을 깨뜨렸는 6년(506)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서 내와 연못이 말랐다. 백성이 굶주리자 창 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가을 7월에 말갈이 쳐들어와서 高木城을 깨뜨리고 6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년(507) 여름 5월에 高木城의 남쪽에 목책 2개를 세웠고, 또 長嶺城636)을 축조하여 말갈 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高老가 말갈과 함께 漢城637)을 공격하려고 橫岳638) 아래에 진 군하여 주둔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이들을 물리쳤다.639) 10년(510)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놀고먹는 자(游食 者)640)들을 몰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641) 634) 馬首柵 : 백제가 한성도읍기에 보이는 지명으로서 고구려의 馬忽郡(현재의 경기도 抱川郡 郡內 面 지역)으로 비정된다. 이와는 달리 이곳을 아마 백제가 남천 후 한성시대의 지명을 그대로 移 置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97,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 문화연구원, 710쪽). 635) 高木城 : 마수성과 함께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보이는 지명이다. 한성도읍 기의 고목성은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漣川邑이다. 636) 長嶺城 : 고목성과 함께 말갈에 대비하여 쌓았다고 하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백제가 한성에 도 읍할 당시의 장령성은 고목성(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漣川邑)의 남쪽 방면의 어느 지점으로 비정 할 수 있을 것 같다. 637) 漢城 :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의 수도의 명칭. 그러나 수도 한성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한강이북 지역의 지명이 빈번하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옛 왕도 한성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이를 지명이동설에 따라 稷山의 慰禮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638) 橫岳 : 한성시대의 횡악은 서울의 삼각산에 비정된다(본서 권23의 주 108) 참조). 639)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이들을 물리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16 년(507)조에 실려 있다. 640) 놀고먹는 자(游食者) : 농토를 떠나 일하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荀子 成相篇에 臣 下職 莫游食[注 游食 謂不勤於事 素游手也] 라 한 기사 참조. 이와 관련하여 수서 고려전에 나 오는 遊人의 존재가 참고가 된다. 이 遊人의 성격에 대해서는 현재 ①빈민한 사람설(백남운, 1933,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191쪽 ; 강진철, 1979, 한국토지제도사(상), 한국문화사대 계 Ⅳ,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186쪽), ②이종족설(김기흥, 1991,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 구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역사와 비평사, 28~50쪽), ③매음녀설(柳永博, 1987,`高句麗의 稅制와 游女問題a, 斗溪李丙燾博士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 ④樂人설(권주현, 2000,`高句 麗 遊人 考a, 慶北史學 23), ⑤隋末 從軍沒留하여 流客적인 성격을 띤 중국인설(金樂起, 2000,`高句麗의 遊人 에 대하여a, 백산학보 56, 186쪽) 등이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빈 민설은 다소 개념이 모호하지만 대체로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빈궁한 사람들을 지칭한 것 으로 보고 빈민들에게 항구적으로 세제 감면의 혜택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유인은 사전적 인 풀이로 볼 때 놀고 먹는 자 의 뜻을 가진 것으로서, 일정한 생활 기반 없이 사는 자라는 의 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빈민설이 지배적인 견해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641)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 무령왕이 제방을 완비하게 한 조치는 백제의 경 제적 기반을 확충하여 농민들의 재생산 기반을 확보해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는 한강유역 상실 이후 수리관개시설의 확충을 통해 금강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나아가 국가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으로 무령왕은 유민들을 귀농케 하여 이들을 강제로 출신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사회적 안정은 물론 농업노동 력의 확보를 도모하려는 시책을 펴나갔다. 이러한 유망민 쇄환책은 유식자들을 귀농케 하였다는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3년조의 遣使于百濟 括出在任那日本縣邑百濟百姓 浮逃絶貫三四歲者 幷遷百濟附貫 이라 한 流民推刷策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인들이 혼란기에 가야지역에 유망해 갔는데, 이들을 백제로 귀환시켜 농촌으로 돌려보낸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동안 유식하는 부랑민들은 가뭄이나 고된 역역 부담 등으로 인해 농토를 이탈하거나 다른 나 라로 유망해간 부류들이었다. 유민들은 국가의 조세 수취나 역역 징발에 제외되어 있어서 그만 큼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다. 따라서 유식하는 부랑민들을 국내는 물론 멀리 가야지역에까지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벌여 호적을 만들어 연고지나 일정 지역에 거주케 한 것이다. 이러한 유민 들의 귀농 조처는 곧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뜻하는 동시에 조세 징수 및 영역 징발의 수취기반을 확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령왕대의 제방의 축조와 정비 및 유민 대책은 이때에 이르러서 웅 진 천도 이후 야기된 정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거의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음을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91, 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 百濟文化 21, 21~23쪽을 참조할 것. 642) 梁나라 :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의 한 나라로 년까지 존속하였다. 蕭衍이 세웠으며, 4대 56년만에 陳나라에게 망하였다. 643) 加弗城 : 본서 권37 지리 제4의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오는데, 현재 지명은 알 수 없다. 가불성 을 경기 가평으로 보는 견해(김종권, 1963, 완역 삼국사기, 선진문화사, 432쪽)와 옥천으로

92 데, 죽이거나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645) 왕이 용맹스러운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葦川646) 12월에 高祖648)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면서 말하였다. 의 북쪽에서 싸웠다. 고구려 사람들은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만만히 여겨 陣을 치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649)百濟王 餘隆은 해외에서 藩方을 지키며 멀리서 공물 지 않자 왕이 기묘한 계책을 내어 급히 쳐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을 바쳐 그 정성이 이르니 짐은 가상히 여기도다. 마땅히 옛 법을 좇아 이 영예로운 16년(516) 봄 3월 초하루 무진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651) 冊命을 주려 하니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650)이 可하다. 21년(521)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가을 8월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하여 들어간 자가 900집이었다. 22년(522) 가을 9월에 왕이 호산(狐山)의 들652)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3년653)(523) 봄 2월에 왕이 漢城으로 행차하여 좌평 因友와 달솔 沙烏 등에게 명령을 내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당 하여 쇠약해진 지가 여러 해였다. 이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리 647) 고 일컬었다. 고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보는 견해(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372쪽)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644) 圓山城 : 본서 권37 지리 4의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명칭에서 볼 때 圓山鄕이 연결되어 경북 醴泉郡 龍宮面에 비정되고 있다(본서 권23의 주 83) 참조). 그러나 이 시기 예천 용궁은 백 제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① 新增東國輿地 勝覽 권33 전라도 珍山縣 古蹟조에 나오는 猿山鄕(在縣東三十里) 기사에 의거하여 충남 진산 으로 보려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28쪽)와 ②圓山을 完山의 異寫로 보아 지금의 전 북 全州市에 비정하는 견해(全榮來, 1975, 完山과 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창간호), ③충남 금산 마전리설(손영종, 1990, 앞의 글, 372쪽) 등이 있다. 이 시기 원산성이 어느 것인지는 분명 치 않다. 645)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21년(512)조에 보이 는데 虜獲男女一千餘口 가 첨가되어 있다. 646) 葦川 : 본서 권37 지리 4의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오는데, 현재 지명은 알 수 없다. 위천의 위치 에 대해 서산으로 보는 견해(김종권, 1963, 앞의 책, 432쪽)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현재의 위천 은 경상북도 軍威郡을 북서류하여 義城郡을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길이 의 하천인 데, 이 역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전투한 지점으로 보기에는 맞지 않는다. 647)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리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 이 기사는 梁書 권54 열전 백제 전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무령왕은 정치 사회 경제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국가 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다. 고구려와 대등한 전투를 하여 전장을 한강 이북지역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남방 정책도 병행하여 백제에서 이탈한 구 지역을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가야 지역권까지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무령 왕은 여러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국내외적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무령왕은 이제 고 구려와 견줄 정도로 강국이 되었음을 스스로 선언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공표하였다. 이것이 更爲强國 선언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백제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梁職貢圖 백제국조이다. 이에 의하면 곁에 소국으로는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汶 下枕羅 등이 부용하였다. 는 것이다. 이는 무령왕대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 이 아니라 백제가 중국에 한반도 중 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나라임을 강조하여, 신라 등 다른 나라는 백제를 따라 온 부용국으로 인식하고 나선 것이다. 백제 중심의 천하관을 표출한 것이 다. 648) 高祖 : 梁나라 高祖 즉 武帝를 말하는데, 재위기간은 년이다. 649) 鎭東大將軍 : 중국 남북조시대 梁나라의 武散階의 하나로 송의 관품표에 의하면 정2품의 장군직 이다. 본서 권26의 주 616)을 참조할 것. 650) 寧東大將軍 : 중국 남북조시대 梁나라의 무산계의 하나. 梁나라의 武散階는 齊나라의 것을 이어 받았는데, 宋나라의 官品表에 의하면 寧東大將軍의 관품은 정2품이다. 무령왕이 이때 梁나라 高 祖로부터 받은 寧東大將軍이라는 작호는 무령왕릉 誌石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 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작호가 백제의 국내에서 사용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651)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可하다 : 이 기사는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의 기사 를 그대로 轉載한 것이다. 652) 호산(狐山)의 들 : 狐山은 孤山의 잘못으로 추정된다. 孤山은 獨山과 같은 지명으로서 현재의 충 남 禮山郡 禮山邑에 비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의 都督府一十三縣條의 支 尋州의 屬縣중에 馬津縣本孤山 이라 한 기사, 金正浩, 大東地志 권5 禮山條에 本百濟孤山 一云烏山 唐改爲馬津 이라 한 기사,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禮山縣條에 禮山本百濟烏山 新 羅改爲任城 이라 한 기사, 그리고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9年條에 馬津城之役[正月辛丑 高麗卒 衆圍馬津城]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여기서 마진(성)은 孤山=獨山城=禮山에 비정될 수 있다. 653) 23년 :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辛巳立 理二十二年 으로 나온다. 무 령왕이 사망한 시기에 대해 梁書 권54 백제전에는 普通 5년(524)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무령 왕릉 지석과 日本書紀 권17 계체기 17년조에는 52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서의 사망 연대인 523년과 일치한다. 따라서 梁書 의 기록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93 184 려 한강 북쪽 주 군의 백성으로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雙峴城654)을 쌓게 하였다. 3월에 漢城655)으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武寧이라 하였다.656) 185 다. 659)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일컬어 聖王이라 하였다.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浿水660)에 이르렀다.661) 왕은 左將 志忠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2년(524) 梁나라 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662)百濟 王으로 삼았다. 657) 권26 百濟本紀 4 聖王 이름이 明 3년(525) 봄 2월에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663) 658) 이며,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 654) 雙峴城 : 본서 권37 雜志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임진강 건너 장단 북쪽에 위 치한 망해산의 쌍령 부근으로 추정된다(문안식, 2006, 앞의 책, 194~195쪽). 쌍현성의 축조는 고구려군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요충으로 볼 수 있다. 655) 漢城 :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의 수도의 명칭. 그러나 수도 한성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한강이북 지역의 지명이 빈번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옛 왕도 한성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이 를 지명이동설에 따라 稷山의 慰禮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656) 시호를 武寧이라 하였다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생시의 이름인 斯麻王으로 나오고 있 어 무령왕은 死後 3년이 되기까지는 諡號를 받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무령이란 시호 는 3年喪을 치루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이후에 올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武寧 이라는 시호는 사후 일정한 기간이 지난 성왕대에 무령왕계 왕실의 소가계집단 중심으로 왕실 계보가 정리되는 것과 관련하여 붙혀진 것으로 볼 수 있다(양기석, 1991, 백제 성왕대의 정치개혁과 그 성격 -전제왕권의 성립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 92~93쪽). 657) 聖王 : 백제 제2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의 즉위년도에 대 해 본 기사에는 무령왕이 죽은 해(523)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7 繼體 紀 17년(523)조에는 夏五月 百濟國王武寧薨 으로 나오고, 같은 18년(524)조에는 春正月 百濟 太子明卽位 라 하여 524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1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편 에는 第二十六 聖王 名明 虎寧王子 癸巳立 이라 하여 계사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계사년 은 513년으로 武寧王 13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취신할 수 없다. 이 계사년은 523년인 癸卯年 의 잘못일 것이다. 성왕은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고 6좌평 16관등제 등 중앙관제를 정비 하고 또 5方-郡-城(縣)의 구조를 갖는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謙 益이 인도로부터 가지고온 律部를 번역하여 백제 戒律을 확립함으로써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렇게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29년(551)에 신라군 가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으나, 성왕 31년(553)에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에 성왕은 32년(554)에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 사하고 말았다. 성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1, 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 한국고대사연구 4, 75~103쪽을 참조할 것. 658) 明 : 성왕의 이름. 성왕의 이름 표기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 삼국유사 권 1 王曆篇, 梁書 권54 百濟傳,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18년조에는 모두 明 으로 나온다. 그 리고 일본서기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明王 으로, 16년조에는 聖明王 또는 聖王 으로 표 기되어 있다. 이 중 聖王 또는 明王 은 聖明王을 약칭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성왕은 그 인물됨 이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생존시에 특별히 聖王 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왕은 불교를 숭상하여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전륜성왕의 역할에 비의한 데 에서 성왕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59)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 성왕의 이러한 지식과 능력에 대해서는 日本書 紀 권19 흠명기 16년조에 하늘의 도와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며, 명성은 사방팔방에 퍼졌다 (聖王妙達天道地理 名流四表八方). 라고 하여 매우 비범한 인물인 것으로 서술해 놓았다. 660) 浿水 : 浿水 浿江이라고도 한다. 패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본 기사의 浿河는 高麗 史 권58 志 12 지리 3 黃州牧 平州條의 猪淺(一云浿江)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川條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 이라 한 기사에 의거할 때 현재의 禮 成江으로 볼 수 있다. 浿水는 현재의 예성강을 말한다(본서 권23 주석 31)과 62) 참조). 661) 고구려 군사가 浿水에 이르렀다 :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안장왕 5년(523)조에는 遣兵侵百濟 로 나온다. 662) 수동장군(綏東將軍) : 중국 남북조시대 梁나라 武散階의 하나. 그러나 宋書 권39 백관 상에는 綬東將軍이 보이지 않는다. 수동장군은 수서 백관지 상에 四綏[東南西北 擬四平]爲二五班 이 라 하여 平東將軍에 상당하는 군호이다. 성왕이 받은 수동장군호는 역대 백제왕이 받았던 진동 대장군보다 하위에 있다. 663)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 성왕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左將 志 忠을 보내 이를 격퇴하였다. 이 일로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절박함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책의 하나로 525년에는 신라와 수교를 맺어 496년 이래 한동안 소강상태에 있었던 백제 와 신라간의 군사적 공조관계를 부활시켜 고구려의 군사적 공세에 공동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 하였다.

94 186 4년(526) 겨울 10월에 熊津城을 수리하고 沙井柵664)을 세웠다. 10년(531) 가을 7월 초하루 갑진날에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興安(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 12년(534) 봄 3월에 사신을 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668) 경의 穴城665)을 뻬앗았다. [왕은] 좌평 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187 여름 4월 정묘에 형혹성(熒惑星)669)이 南斗星670) 별자리를 침범하였다. 五谷666)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667) 16년(538) 봄에 도읍을 泗 671) <*다른 이름은 所夫里이다.>로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672)라 664) 沙井柵 : 이 사정책은 東城王 16년(494)에 축조된 沙井城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동성왕 20년(498) 7월에 축조된 이후 한솔 비타를 보내 진수케 한 일이 있었다. 沙井柵(沙 井城)은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沙井洞에 비정된다(성주탁, 1976, 新羅三年山郡硏究, 百濟 硏究 7, 152쪽). 665) 穴城 : 穴城은 현재의 강화군에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 2 한주에 의하면 고구려때는 穴口郡 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海口郡으로 고쳤다. 고려때에는 穴華縣이 되었다. 일명 穴口 또 는 甲比古次 로 불리웠다. 이 혈성은 백제가 고구려로 북진하기 위한 군사기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 101~102쪽). 그러나 이 전투는 강화도의 지 리적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해전의 가능성도 있다. 666) 五谷 : 본서 권35 지리 2 한주에 의하면 고구려때는 五谷郡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五關郡 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1 서흥도호부 건치연혁조에는 本高句麗五谷郡 이라 하였 다. 이곳은 현재 황해도 서흥군에 해당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06쪽). 667) 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 구려본기 安臧王 11년(529)조에 나온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권37 지리 4 漢山州에 보이는 고 구려의 王逢縣과 達乙省縣에 대한 유래를 기록한 기사와 관련 있어 보인다. 왕봉현은 현재 경기 도 고양시 행주 내 외동이고 달을성현은 현재의 고양시 관산동에 비정되는데(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와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 기사는 安藏王때(519~530) 고구려군이 고양시 일대에 군사적으로 진출 하는 과정을 모티브로 해서 생성된 설화로 볼 수 있다. 혈성 전투와 왕봉현 관련 기사는 안장왕 때의 일로서 시기가 일치하고 또 혈성과 왕봉현이 서로 인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기사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정이 옳다면 529년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 까 한다. 즉 성왕 7년(529) 10월에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가 대군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백제 에 침공하였는데, 본진은 오곡원(서흥)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가고, 별동부대는 백제의 혈성(강 화)과 왕봉현(고양시 일대)에 각각 진격해 들어가 측면 돌파를 시도하자 이에 좌평 燕謨가 거느 린 백제의 3만 대군은 오곡원에서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529년의 전역에서는 3만에 이르는 백제군이 동원되어 2천여 명의 사상자가 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간의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백제의 완패로 끝 났다. 전투지점이 거의 서울 일원에서 벌어진 만큼 백제는 이 전투로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게 다시 빼앗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529년 전투를 한강유역 영유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 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나는 백제가 529년 전투 패배로 인해 한강유역을 다시 상실하게 되었 다는 견해(1991, 조선전사 3, 158~159쪽)와, 반대로 백제가 고구려 안장왕에게 고양시를 포 함한 6군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보고 이를 551년 성왕대에 다시 탈환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영 관, 2000, 백제의 웅진천도 배경과 한성 경영, 충북사학 11 12합집, 75~91쪽)가 그것이 다. 한편 조선전사 에서는 538년 성왕의 사비 천도를 529년 한강유역 상실에 따른 대응 조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다(1991, 앞의 책, 159쪽). 웅진시대 백제의 한강하류유역 영유문제를 비 판한 글은 김수태, 2006, 백제 성왕대의 변경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44, 125~139쪽을 참조할 것. 668) 사신을 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梁나라 武帝 中大通 6년(534) 에 백제가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온다. 669) 형옥성(熒惑星) : 火星의 다른 이름으로 熒惑星이라고도 한다. 형혹이 나타나면 질병과 기근 또 는 병화가 있다고 한다. 형옥성이 남두성을 침범할 경우에 대해서는 후한서 지 12 천문하조에 의하면 병란의 조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형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한서 천문지 6에 의하면 형옥성은 남방에 있으며 여름을 맡고 불의 정기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五常 중 禮에 해당되고, 서경 의 홍범 5사 중 視에 해당된다. 예가 없고 視의 王道가 적중치 못하면 여 름의 政令이 거슬러 불의 정기를 손상케 하며, 그 벌이 형혹에 의해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처럼 형혹성의 출현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졌으며, 특히 유고정치사상에서 天譴說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희덕, 1999, 한국고대 자연관과 왕도정치, 혜안, 175~176쪽). 670) 南斗星 : 별이름. 남방에 있고 모양이 말[斗]과 비슷하여 南斗라 하였다. 천자의 壽命과 宰相 爵 祿의 位를 주관한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에 南斗爲廟[正義 南斗六星 在南也] 라 한 기 사를 참조할 것. 671) 泗 :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所夫里라고도 한다. 현재의 충남 부여군 扶餘邑이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 聖王條와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夫餘 前百濟條에는 按百濟聖王二十六年 戊午春 移都於泗 國號南夫餘 注曰其地名所夫里 泗 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扶餘之別號也 後至聖王 移都於泗 今夫餘郡 이라 하여 泗 로, 본조에 인용된 古典記 에는 至二十六 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夫餘 로 나온다. 사비 천도의 이유로는 사비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 인 이점, 웅진 천도 이후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인 불안과 왕권의 쇠약, 잇달은 자연재해와 홍수 발생, 협소한 도성 기반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웅진 도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천도 의 성격을 갖고 사비천도를 추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밖에 남방경영의 거점 마련이나(田中俊

95 하였다. 19년(541)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毛詩博士675)와 涅槃676) 18년(540) 가을 9월에 왕은 장군 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牛山城673)을 공격하게 하였 등의 經義677) 및 工匠678)과 畵師679) 등을 청하였더니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680) 으나 이기지 못하였다.674) 明, 1990, 왕도로서 사비성에 대한 예비적 고찰, 백제연구 21, 165쪽), 유교와 불교, 그리고 영토관념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이상세계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김영심, 2006, 백제의 사비도 성 체제정비의 사상적 기반, 백제 사비시대문화의 재조명, 춘추각, 29쪽) 천도의 이유나 배경 에 접근하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사비천도 이유에 대한 일부 측면을 강조하였을 뿐,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검토를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사비지역이 갖는 지리 경제적인 측 면과 백제 왕실이 中興을 이룩하기 위해 성왕이 계획적으로 단행한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사비천 도의 이유와 배경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성왕의 사비천도에 대해서는 양기석, 2007, 백제의 사비천도와 그 배경,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37~64쪽을 참조할 것. 475년 고구려에 의해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피살된 후 황급히 천도한 웅진천도와는 다르다. 성왕은 사비천도를 통해서 여러 분야에 걸친 혁신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 개혁 내용은 16관등제와 22부사제 실 시, 왕도 5부제와 方郡城制의 실시, 五帝神과 仇台廟 祭儀 실시, 시호제 정비와 무령왕계에 의한 왕위계승권 확립, 불교 장려, 그리고 대외관계의 강화 등이었는데, 그 의도가 국왕 중심의 정치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1, 백제 성왕대의 정치개혁 과 그 성격 -전제왕권의 성립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 75~103쪽을 참조할 것. 672) 南扶餘 :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개칭한 국호. 백제 왕실은 蓋鹵王이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라고 한 기사( 魏書 권100 열전 百濟傳)와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 之別種 이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扶餘族의 일파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성왕이 사비천도와 함 께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점에서도 이러한 국가 혁신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백제왕실이 기 원하는 부여계승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무령왕 소가계집단의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귀족세력과의 차별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강종원, 2007, 사비천도의 단행과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 확립, 백제문화사대계 5,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8쪽). 아울러 고구려에 대한 정통성을 내세 워 한성고토의 회복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위해 왕권을 중심으로 힘을 결집시켜 대고구려전을 독려해 나가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그 결과 551년 북진을 통해 한강하류유역의 6군의 땅을 회복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한성고토회복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南扶餘라는 국호 는 천도 후 일시적으로 사용되다가 곧 백제로 복구된 것 같다. 673) 牛山城 : 본서 권37 雜志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우산 이란 명칭은 여러 곳이 있어 위치는 미상이다. 이곳을 남한강 서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고구려가 백제를 측면에서 공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강래, 1994, 삼국의 성립과 영토확장, 한국사 3, 한길사, 214쪽). 고구려의 牛岑縣으로 보아 현재 황해도 금천면 우봉면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김병남, 2003, 백제 성왕대의 북방 영역 변화, 한국사연구 120, 68쪽). 그러나 548년의 獨山城 전 투기사의 마진성을 충남 예산으로 볼 경우 위치적으로 맞지 않아 불합리하다. 674) 왕은 장군 燕會에게 명령하여 이기지 못하였다 :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安原王 10년(540) 조에 秋九月 百濟圍牛山城 王遣精騎五千擊走之 로 나온다. 675) 毛詩博士 : 毛詩 는 중국 最古의 詩集으로서 詩經 (詩傳)을 말한다. 이 詩經 은 중국 漢나라 때의 毛亨 毛長이 箋하였기 때문에 毛詩 라고도 한다. 毛詩博士는 詩經 에 정통한 전문 학자 를 말한다. 백제에 초빙된 모시박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백제는 梁나라로부터 모시 박사를 초빙한 것 외에 陳나라로부터 講禮博士 육후(陸 )를 초빙하였고( 晉書 권33 儒林 鄭灼 傳附 陸 傳), 武寧王은 五經博士 段楊爾와 高安茂를 倭에 파견하였다(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7年 10年). 이러한 사실들은 백제의 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76) 열반(涅槃) : 涅槃經 을 말한다. 涅槃經 에는 小乘과 大乘의 열반경 이 있다. 소승의 열반 경 은 佛陀가 만년에 王舍城을 출발하여 최후를 맞게 된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의 旅程과 그 사적 설법의 모양과 入滅 후의 화장 유골의 분배 등을 기술하고 있다. 대승의 열반경 은 석 가모니불이 入滅하기 전 1주야에 說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사상은 佛身常住 悉有佛性 闡提成佛로 요약된다. 후에 이 열반경은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佛性思想의 보편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사비천도 이후 성왕의 개혁 추진과정에서 열반경 이 중시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와 관 련하여 계율뿐만 아니라 불성도 함께 강조되었다. 열반경 은 석가불신앙과 연결되어 발달하였 다. 열반경 에서 강조하는 전륜사상의 모습이 당시 성행하고 있는 석가불 조성과 연결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석가불신앙은 불교를 통한 왕권의 신성성에 연결된다. 이러한 신성성은 다른 귀 족세력과의 차별성으로 나타나 무령왕 소가계집단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는데 활용되었 다. 백제 사비시대의 열반경 수용에 대해서는 길기태, 2006,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신앙연 구, 서경, 104쪽을 참조할 것. 677) 經義 : 불교 經典의 주석서를 말한다. 성왕이 즉위초부터 추진한 율종의 정비와 대통사의 창건 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비천도의 의도와 배경을 찾을 수 있다(조경철, 2002, 백제 사택지적비에 나타난 불교신앙, 역사와 현실 52, 165쪽). 율종의 정비는 성왕 4년(526) 謙益의 귀국을 계 기로 이루어졌다(채인환, 1983, 겸익의 求律과 백제불교의 계율관, 동국사학 16, 54쪽 ; 김 영태, 1985, 백제불교사상연구, 동국대출판부, 123쪽 ; 조경철, 2005, 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동,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학위논문, 100~101쪽). 彌勒佛光寺事蹟 에 의하면 겸익이 中印度에서 5부율을 갖고 귀국하자 성왕이 그를 興輪寺에 안치시키고 고승 28인과 함께 梵語律 部 72권을 번역케 하고 아울러 曇旭 惠仁 등이 지은 律疏 36권에 친히 서문을 썼다고 한다. 겸 익이 가져온 5부율의 내용이 전하지 않고, 또 彌勒佛光寺事蹟 에 대한 사료적 신빙성에 다소 문제가 있지만 성왕대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율이 강조되고 있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律이란 불신도들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담은 도덕적 요소로서 불교교단을 통제하고

96 년(547) 봄 정월 초하루 기해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게 명령하여 갑옷을 입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가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平成(양원왕)이 濊681)(말갈)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의 獨山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684) 城682)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신라 왕은 장군 朱珍683)에 27년(549) 봄 정월 경신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685) 겨울 10월에 왕은 양나라의 서울(京師)686)에 반란687)이 일어난 줄 모르고 사신을 보내 조 공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城과 대궐이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 端門688) 밖 나아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백제의 계율은 법화신앙이나 열반 신앙 미륵신앙 그리고 효사상과 깊은 관련을 갖고 왕권의 관심과 지지하에 수용되어 백제불교 의 특성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안계현, 1983,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출판부 ; 김두진, 1993, 백제의 미륵신앙과 계율, 백제사의 비교연구, 충남대 백제연구소 ; 近藤浩一, 2005, 백제시기의 효사상 수용과 그 의의, 백제연구 42). 성왕이 전륜성왕으로 자처하며 인 도에서 귀국한 겸익을 맞아 율부를 번역케 하였고,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신율의 서문을 친히 쓴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이처럼 성왕은 계율의 장려를 통해 불교신앙의 사회적 기반을 확 대시키고 불교 교단조직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을 강화하며 나아가 국가적 기강을 확립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72쪽). 겸익이 귀국하여 율부에 대한 역경 사업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인 527년에 성왕은 현재 공주 반죽동에 大通寺를 창건하였는데, 이 는 무령왕계 소집단의 배타적인 聖族관념을 확립시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조경철, 2005, 앞의 글, 77~88쪽). 678) 工匠 : 도구를 사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匠色 또는 匠人이라고도 한다. 백제가 梁으로부터 工匠을 초빙하여 기술을 배운 것은 공주지역에서 출토된 梁官瓦爲師 라는 명문이 있는 塼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679) 畵師 : 畵工을 말한다. 성왕은 倭에 佛像과 佛經을 전해주고(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3년조에 冬十月 百濟聖明王 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 幡盖若干 經論若干卷 別 表讚流通禮拜功德云 이라 한 기사 참조), 또 謙益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律部를 번역하여 百濟戒律을 확립하는 등(李能和, 1977, 朝鮮佛敎通史 상편, 중앙대 한국학연구소, 성왕 31년 조의 彌勒佛光寺事蹟 참조) 불교의 융성과 교단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성왕이 工匠과 畵師 등을 梁으로부터 초빙한 것은 사찰의 건립 및 불상의 장엄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680)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梁書 권54 열전 百濟傳에 累遣使獻方物 兼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幷工匠畵師等 勅幷給之 라 나와 있다. 681) 濊 : 현재의 함경도 지역에 위치하였던 東濊를 말한다. 이때의 濊는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정치체가 아니라 종족으로서의 예족이라 할 것이다. 예(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東濊 僞靺鞨 로 파악한 정약용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위말갈은 반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중국군현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순차적으로 받았다가 삼국 통일 후 그 자취를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유원재, 1979, 삼국시대 위말갈고, 사학연구 29, 41쪽).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주 43) 및 권26 주 565)를 참조할 것. 682) 獨山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獨山은 孤山과 같은 뜻의 지 에서 소리내어 우니, 길을 가다가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侯景689) 명으로서 현재의 충남 禮山郡 禮山邑에 비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의 都督 府一十三縣條의 支尋州의 屬縣중에 馬津縣本孤山 이라 한 기사와 金正浩, 大東地志 권5 禮 山條에도 本百濟孤山 一云烏山 唐改爲馬津 이라 한 기사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禮山縣 條에 禮山本百濟烏山 新羅改爲任城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한편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9 年 條에 馬津城之役[正月辛丑 高麗卒衆圍馬津城] 이라 하여 고구려 군대가 마진성을 포위한 사 건을 전해주고 있다. 흠명 9년은 백제 성왕 26년(548)에 해당되는데, 연대가 동일하고 명칭도 같기 때문에 이 기사는 일본서기 의 마진성 전투기사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漢北 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한강이북지역인 경기도 포천 성산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병남, 2003, 백제 성왕대의 북방 영역 변화, 한국사연구 120, 70쪽). 그러나 성왕 26년 이후 나제동맹군 이 고구려군의 침입에 대하여 차령산맥 일대 충청도 일원에서 공동 작전을 수행한 사실을 고려 해 보면 독산성은 예산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漢北 이란 표기는 한강유역에서 아산으로 移置된 한산의 북쪽지방이란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683) 朱珍 :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해 오자 신라 진흥왕은 그를 파견 하여 백제를 돕도록 하였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548)조에는 朱玲으로 나온다. 684) 주진이 크게 격파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조에 나온다. 685)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현상은 후한서 지 17 오행 5에 의하 면 군주의 無德과 후비가 몰래 왕을 위협하는 사례와 관련을 짓고 있다. 이는 백제 사신이 양나 라에 파견되는 중에 후경의 난을 맞아 수난을 당하는 일을 예시하는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된다. 686) 양나라의 서울(京師) : 현재의 중국 南京의 동남쪽인 江寧이다. 687) 반란 : 양나라 侯景이 548년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688) 端門 : 宮殿의 정문을 말한다. 漢書 권40 張陳王周傳에 公曰 就舍少府 乃奉天子法駕 迎皇帝 代邸 報曰 宮謹除 皇帝入未央宮 有謁者十人 持戟衛端門[師古曰 端門 殿之正門]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689) 侯景 : 중국 남북조시대의 사람. 字는 萬景이고 중국 朔方人[雁門人이라는 설도 있다]이다. 힘이 세고 騎射를 잘하였다. 東魏의 高歡 휘하에서 대장이 되었다가 고환이 죽자 소관 州軍을 이끌고 양나라 武帝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梁 武帝는 그를 河南王으로 삼아 우대하였다. 뒤에 양과 동 위의 국교가 호전되자 양나라를 배반, 강제 모병과 해방노예로써 10만 군사를 만들어 반란을 일

97 192 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의 난이 평정되어서야 바야흐로 나라에 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新州694)를 설치하였다. 돌아올 수 있었다.690) 28년(550) 봄 정월에 왕은 장군 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道薩城691)을 공 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金峴城692)을 포위하였다.693) 으켜 建康(현재의 중국 南京 東南쪽의 江寧)을 포위하고 臺城을 함락시키니 武帝는 울분하여 죽 었다. 侯景은 簡文帝를 옹립하였다가 곧 폐하고 자립하여 漢帝라 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陳覇先 王僧辨에게 토평되고 말았다. 양나라는 이 난으로 사실상 멸망하고 강남지역은 괴멸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며, 589년 隋나라 文帝에 의한 강남 정복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梁書 권56 侯景傳을 참조할 것. 690) 양나라의 서울(京師)에 반란이 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 동일한 내용이 梁書 권54 열전 百濟傳에 실려 있다. 691) 道薩城 :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①음성의 백마령으로 보는 견해(신채 호, 1977, 조선상고사 Ⅰ, 동서문고, 270~272쪽), ②천안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06쪽), ③충북 증평읍의 尼聖山城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頭陀山城 일대로 보는 견해 (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9쪽) 등이 있다. 그런데 천안지역은 고려 태조때 비로소 천안도독부가 설치된 곳이었고, 백제 성왕때 한강하류 지역에 진출하는 데 전략 적 요지이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공취할 경우 백제의 반발이 크게 예상된다. 또한 신라의 화령로 와 추풍령로를 통한 북진이 청주지역을 경유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증평 이성산성설이 보다 설득 력을 가진다(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 호, 371쪽). 692) 金峴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金峴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金城山 金伊山城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06쪽), ②고구 려때 今勿奴郡으로 보아 鎭川지역으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앞의 글, 47쪽) 등이 있으나, 진 천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金城山 城은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금성산(424m)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백제계 토기 편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는데, 증평에서 청원 옥산을 거쳐 금강의 한 지류인 미호천변을 따라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이곳 미호천과 금강이 하류하는 주변 일대에는 청원 문의 방면의 신라계 양성산성, 고구려계 청원 남성골유적, 백제계 석실분과 산성 등이 밀집해 있어서 5~6세기 삼국 간의 첨예한 쟁패지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금현성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 의 金城山城 일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693) 고구려 군사가 金峴城을 포위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陽原王 6년(550)조 에는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 取二城 으로, 같은 책 권4 신라 본기 진흥왕 11년(550)조에는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 兵疲 命伊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 增築 留甲士一千戍之 로 나온다. 이 기사들에는 백제와 고구 려가 싸우는 틈을 타서 신라가 漁父之利로 두 성을 취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694) 新州 : 신라 진흥왕이 553년에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새로이 설치한 州이다. 동일한 내 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眞興王 14년(553)조에는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武力爲軍 主 로 나온다. 이때 설치된 新州는 南川州(현재의 경기도 이천시) 北漢山州(현재의 서울 시) 한산주(현재의 경기도 河南市)로 置廢를 거듭하였다. 신라 진흥왕의 신주 설치 과정은 다 음과 같다. 백제의 성왕은 재위 29년(551)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 라 가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漢城과 平壤을 비롯하여 6郡 을 회복하였고(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 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라 한 기사 참조), 신라는 竹 嶺 以外 高峴 以內의 10郡을 차지하였다(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에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 仇珍大角 比台角 耽知 非西 奴夫波珍 西力夫波珍 比次夫大阿 未珍夫阿 等 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乘勝 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이라 한 기사 참조). 그러나 553년에 진흥왕은 군사를 돌이켜 백제가 점령한 지역마저도 차지하여 여기에 新 州를 두고 阿 武力을 軍主로 삼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551년 나제동맹군의 북진과 552~553년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관한 기록은 사건 전개의 시간이나 지명 등에 대하여 많은 錯綜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김주성, 2000, 성왕의 한강유역 점령과 상실, 백제사상의 전쟁, 서경문화사, 297~307쪽). 551년 북진의 주동 역할 을 한 백제측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지만 일본서기 흠명기에 백제측의 입장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본기에는 거칠부와 혜량의 관계나 죽령 바깥 高峴 이 내의 10군을 공취한 사실 등 주로 신라측 입장이 반영된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관련 기사에 대 한 사료 비판을 통한 한강유역의 확보과정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본서 거칠부열전에 의하면 백제가 평양을 먼저 공취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 에는 이와는 달리 백제가 먼저 한성을 공취하고 난 다음에 평양을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인 들이 한성을 평양으로 혼용하였거나 아니면 백제의 북진의 최종 단계인 평양 점령 사실을 포괄 적으로 기술을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위의 일본서기 기사에 의거해 볼 때 한성과 평양은 확연히 구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은 백제의 舊都임에 틀림없지만 평양을 어디로 보느 냐가 문제가 된다. 본서 권35 지리 2에는 漢陽郡을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비정하고 지금의 楊 州 옛터였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지리지 찬자는 고구려의 북한산군이 평양이라는 일설을 소 개하고 있다. 이 설을 취할 경우 한성과 평양은 한강유역의 좁은 범위에 국한되며 또한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다시 공취할 때 평양이 제외되어 신주의 설치 범위가 한성지역으로 축소되고 만다. 또하나는 평양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보고 황해도 재령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74~187쪽). 이 견해를 따르면 고토를 회복하였

98 194 겨울 10월에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695) 195 하여 죽었다.698) 시호를 聖이라 하였다. 32년696)(554)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려고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 에 狗川697)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亂兵에게 해침을 당 권27 百濟本紀 5 威德王699) 다는 6군의 땅은 본서 무령왕대부터 성왕 7년(529)까지 나타나는 예성강유역과 관련한 지명에 대한 미스테리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찾아진다. 6군의 땅을 남평양 즉 재령설로 이해한다면 경덕왕 21년(762) 浿西지방에 설치한 6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오곡은 서흥, 巖 은 봉산, 한성은 재령, 獐塞는 수안, 池城은 해주, 德谷은 곡산지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平壤 즉 남평양이 故地로 인식된 것은 성왕대 백제인들의 영역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 인다. 성왕은 근초고왕대의 영역관을 회상시켜 한성고토의 실지회복에 대한 염원을 이루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년 추7월). 6성의 땅은 근초고왕대 백제가 고구려와 싸워 획득 한 故地였던 것이다. 이 땅은 무령왕대부터 성왕 7년(529)년까지 한때 백제의 세력권으로 일시 확보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551년 백제가 수복한 고토는 한성과 남평양 즉 신라 경덕왕때의 6군의 땅을 다시 회복한 사실을 의미한다. 성왕대에 551년에 수복한 한강유역을 다시 상실한 것 은 553년의 일이었다. 이때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한 것이다. 본서 거칠부열전에 의하면 신라가 한성만 점령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서기 권 19 흠명 13년 기사에서 평양이 제외된 것은 고구려와의 밀약에 의해 고구려에 양도한 것으로 추 정된다. 고구려는 남평양지역이 왕도 평양성과 지근한 거리에 있어 백제의 침입을 공제할 수 있 는 완충지대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한성은 牛頭方 尼彌方에 해당한다고 구체적인 지 명을 명기하고 있다. 우두방은 황해도 우봉으로, 니미방은 경기도 파주 임진현이나 임강현으로 비정되기 때문에(김현구 외, 2003,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 일지사, 257~258쪽) 이 곳은 신라시대의 북한산주에 해당한다. 553년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으로 백제는 고토회복의 염 원을 실현하지 못한 채 한강 이남지역으로 퇴축되기에 이른다. 웅진시대 백제의 한강하류유역 영유문제를 비판한 글은 김수태, 2006, 백제 성왕대의 변경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 연구 44, 125~139쪽을 참조할 것. 695)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553)조에 娶百濟 王女爲小妃 로 나온다. 성왕이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직후에 왕녀를 진흥왕의 小妃로 보 낸 것은 신라군으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을 반환받기 위한 苦肉策에서 나온 조처로 생각된다(金秉 柱, 1984, 羅濟同盟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 46, 37 39쪽). 그러나 신라와 仇讐 관계에 놓이게 된 이때에 두 왕실간에 혼인이 맺어졌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408쪽).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의 한강하류지역 점령에도 불구하고 신라와의 동맹을 유지하려는 외교적 노력의 하나로 신라와의 혼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1,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역관계변화에 대 한 일고찰, 동방학지 28, 84쪽)가 타당하다. 696) 32년 : 성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癸巳立 理三十一年 으로 나온다. 이름은 昌700)이고 성왕의 맏아들701)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702) 697) 狗川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충남 沃川부근에 비정된 다(이병도, 1977, 國譯, 408쪽). 옥천은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는 管 山城 으로, 권43 열전 김유신전 하에는 古利山 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조에는 函 山 으로 나온다.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1년조에 狗川柵이 나오는데, 이 狗川柵은 황 해도 남부방면으로 추정되어 본 기사와는 다른 곳이다. 현재 옥천군의 군서면과 군북면을 흐르 는 西華川 주변에는 산봉우리를 따라 고대의 많은 성터가 밀집해 있고, 또 전장터와 관련한 지 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성왕이 패사하였다고 전하는 구천이 있는데, 현재 지명은 옥천읍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도는 협곡 구진베루(구전벼루)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정영호, 1976, 김유신의 백제공격로연구, 사학지 6, 55~57쪽 ; 관성동호회, 1984, 옥천향지, 375~377쪽 ; 차용걸 외, 2003, 신라 백제 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옥천군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59쪽). 698) 왕은 신라를 습격하려고 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 이 사건은 성왕이 신라에게 빼 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다가 管山城 전투에서 패하여 왕이 전사 한 것을 말한다. 이 싸움에서 성왕은 신라의 裨將인 三年山郡 高干 都刀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佐平 4명을 비롯하여 3만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管山城 전투에 대해서는 본서 권4 신라 본기 진흥왕 15년조 참조). 한편 日本書紀 에 의하면 성왕은 신라정벌을 불가하다고 말리는 耆 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餘昌과 더불어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管山城을 공격하였다. 이 공 격에서 여창은 久陀牟羅塞를 쌓고 최전방에서 군을 지휘하였다. 성왕은 왕자 여창의 수고를 위 로하기 위해 가다가 이 기밀을 탐지한 신라가 대군을 일으켜 길을 차단하고 공격하여, 성왕은 붙잡혀 죽었고 여창도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다. 성왕을 붙잡아 죽인 자는 佐知村 飼馬奴 苦都 였으며,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北廳 계단 밑에 묻고 나머지 유골은 백제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 다(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 이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전사자가 약 3만명에 이르고, 신라 도 거국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였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일대 會戰이 었으며, 이 싸움에서의 승패는 이후 백제와 신라의 역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盧重國, 1988, 앞의 책, 쪽). 699) 위덕왕 : 백제 제27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昌이다. 1994년 부여 陵山 里에서 발견된`창왕명석조사리감a에 새겨진 銘文에는 昌王으로 나온다. 이는 성왕과 같이 백제 의 왕이 생존시에는 이름으로 불리운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4년

99 196 10월조에 餘昌이 고구려군과 百合野塞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나이가 29살이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그는 성왕 즉위초인 523~525경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왕의 아들 여창은 신라가 濟羅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자 신라 공격을 주장하였고, 성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 군을 일으키자 최선봉에 나가 싸웠다. 그러나 554년 管山城전투에서 백제군이 패배하여 성왕은 전사하였고, 餘昌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왔다. 즉위 후 그는 중국의 남북조에 등거리 외 교를 전개하였고, 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발빠르게 수에 접근하는 외교적 기민성도 발 휘하였다. 위덕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0, 百濟 威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 格, 百濟硏究 21 및 2007, 위덕왕의 즉위와 집권세력의 변화, 사비도읍기의 백제 백제문 화사대계 연구총서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김수태, 2004, 백제 위덕왕의 정치와 외교, 한국인물사연구 2호, 한국인물사연구소, 167쪽 등을 참조할 것. 700) 昌 : 위덕왕의 이름. 위덕왕의 이름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昌 또는 明 으로 나온다. 그러나 明 은 성왕의 이름이므로 이는 착오인 듯하다. 한편 周書 百濟傳과 隋書 百濟傳에 는 昌 으로,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餘昌 으로 나온다. 그리고`창왕명석조사리 감a에는 昌王 으로 나온다. 701) 성왕의 맏아들 : 위덕왕의 계보에 대해 본 기사와 三國遺事 권1 王曆篇 威德王 및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모두 성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周書 백제전에는 隆死子昌 立 이라 하여 위덕왕을 隆(武寧王)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隆은 무령왕이므로 창을 융의 아들 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702)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 본 기사와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 곧바로 여창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 18년(557)조에는 春三月 百濟王子餘昌嗣立 爲威德王 이라 하여 성왕이 전사한 3년 뒤에 왕위 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어 위덕왕의 즉위까지 3년간의 空位시기가 있게 된다. 최근에는 이 견해 를 보다 구체화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백제의 최고 귀족회의체인 政事巖회의에서 위덕왕의 관산성 전투 패전에 따른 책임 문제를 거론하여 위덕왕의 즉위 승인을 부결하였다가 위덕왕의 공식 사과를 받은 557년 3월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주성, 2000, 성왕의 한강유역 점령과 상실, 백제사상의 전쟁, 서경문화사, 315~316쪽). 이와는 달리 위덕왕의 출가수도 문제를 성왕의 유해가 신라로부터 송환되어 능산리 묘역에 안 치되기까지의 성왕의 장례 기간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이때부터 위덕왕이 실질적인 왕위계승 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수태, 2004, 앞의 글, 167쪽). 그러나`창왕명석조사리감a에 새겨진 銘文에는 百濟昌王十三 太歲在丁亥 가 나온다. 이것에 의하면 창왕의 즉위년은 乙亥 年(555) 이 되는데 이는 본서의 연표로는 위덕왕 2년이 된다. 본서의 기년은 卽位年稱元法을 따 르고 있는데, 위 사리감의 명문이 踰年稱元法에 의해 기년을 정한 것이라고 하면 昌王(威德王) 이 실제로 즉위한 해는 본서의 554년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일본서기 의 3 년 空位 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6년 8월조에 의하면 여러 신하와 백성 들이 여창을 가르켜서 君王 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도 위덕왕 자신이 출가수도 문제를 논의하 고 있을 무렵에 이미 국왕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김수태, 2004, 197 원년(554)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熊川城을 공격해 왔으나 패하여 돌 아갔다.703) 6년(559) 여름 5월에 초하루 병진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8년(561)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신라 군사가 나가 쳐서 패 하였는데,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704) 앞의 글, 161~164쪽). 이처럼 554년 관산성에서 성왕이 전사한 후 위덕왕의 즉위과정은 순탄치 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의 향후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점, 이 전쟁에서 성왕과 고위귀족들이 전사하고 위덕왕도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 성 왕의 사후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耆老들이 패전의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하여 위덕왕은 出家修 道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고 하는 점(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 등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바이다. 위덕왕은 성왕의 패사 후 신라 정벌을 반대했던 기로 들의 책임 추궁을 받아 이로 인 해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결국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위덕왕대에는 왕권의 위상이 약화되고 그 반면 귀족세력들의 정치적 발언 권이 증대되어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으로 바뀔 정도의 집권세력 변화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83쪽 ; 김주성, 1991, 사비시대 백제정치사연 구, 전남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64~65쪽 ; 김병남, 2004,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 상황과 대 외 관계, 한국상고사학보 43, 65쪽). 703) 고구려가 패하여 돌아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陽原王 10년조에 나온 다. 관산성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야기된 위덕왕 즉위초의 정정 불안 속에서 위덕왕은 왕권 강 화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행하였다. 위덕왕은 즉위초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성 왕의 패사에 대한 대신라 보복과 성왕의 유해를 신라로부터 송환받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위덕 왕은 즉위초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전을 전개한 사실이 554년 9월 珍城전투( 삼국유사 권1 기이2 진흥왕)이다. 전투 시점으로 보아 성왕의 패사를 대대적으 로 보복하기 위해 신라와 벌린 전투라 할 수 있다. 백제가 성왕의 유해를 돌려받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하나의 압력 수단으로 신라의 진성을 침공한 것으로 이해된다(김수태, 2004, 앞의 글, 166~167쪽). 진성전투가 벌어진 한달 후에 고구려가 백제의 熊川城을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는 위덕왕의 즉위초에 야기된 백제의 정정 불안을 틈타 단행되었지만 백제군의 반격으로 패퇴되었다. 554년 9월 백제의 진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보복으로 고구려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704) 군사를 보내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 에 보인다. 진흥왕 23년은 562년이어서 본 기사의 연대와는 1년의 차이가 난다. 위덕왕은 관산 성 패전 책임에 따른 즉위초의 정통성 시비 문제가 일단락되고, 성왕의 유해가 신라에서 송환된 이후 561년 7월 다시 신라에 대한 보복전에 나섰다. 그 계기가 대가야 구원에 있었다. 신라본기

100 198 14년705)(567) 가을 9월에 사신을 陳나라706)에 보내 조공하였다 년(570) 고씨의 北齊707) 後主708)가 왕을 使持節侍中709)車騎大將軍710)帶方郡公711)百濟王으 로 삼았다.712) 에는 이 기사에 이어 9월에 대가야를 복속시키는 기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 구원 과 관련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보인다(김현구, 1993, 임나일본부연구, 일조각, 144~147쪽). 당시 신라는 가야지역에 적극 진출하여 대가야를 압박하는 형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대가야는 백제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562년 7월 대가야 구원 에 나선 백제는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였으나 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705) 14년 : 위덕왕대에 있어서 재위 14년은 능산리묘역에 성왕의 위업을 기리고 追福을 위해 국가적 인 대규모사업인 능사를 창간하는 일이 완성되는 뜻깊은 시기이다. 이곳에서 발견된`창왕명석 조사리감a명문에 의하면 성왕의 딸인 공주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에 백제 왕권의 상징물인 백제금동대향로와 사리장치를 공양하는 작업이 완료된 것은 위덕왕 14년 (567)이었다. 이 능산리사지의 낙성은 성왕의 패사 이후 성왕의 권위와 위업을 계승하고 위덕왕 집권 1기의 혼란했던 지배질서를 극복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성왕의 위업을 추모하여 성왕의 중흥 사업을 계승한다는 위덕왕의 의지를 대내적으로 천명하는 백제 왕권의 상 징물로 이해된다. 집권 전반기에는 대신라 보복전의 전개와 성왕의 추복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면 위덕왕 14년 이후인 집권 후반기부터는 백제 국가의 존립과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진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백제는 중국왕조인 陳, 北齊, 北周, 隋를 대상으로 하여 백제사상 가장 많은 대외교섭 횟수를 가진 것으 로 나타난다. 위덕왕대의 대중관계의 중요성을 반영해 준다. 이에 대해 양기석, 1990, 百濟 威 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格, 百濟硏究 21 및 2003, 백제 위덕왕대의 대외관계 -대중관 계를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19 ; 박윤선, 2006, 위덕왕대 백제와 남북조의 관계, 역사 와 현실 61, 87~116쪽 및 2007, 위덕왕의 즉위와 집권세력의 변화, 사비도읍기의 백제 백 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등을 참조할 것. 706) 陳나라 : 중국 南北朝시대 南朝 최후의 왕조로 년까지 존속하였다. 시조 陳覇先이 梁 의 侯景의 난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잡고 557년에 梁의 景帝로부터 위를 물려받아 陳이라 일컬었 다. 573년 宣帝때 北齊 北周와 자주 싸웠으나 武王에게 패하여 淮南땅을 모두 잃었으며, 隋의 文帝에 의해 망하였다. 백제가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陳書 권4 廢帝紀 光大 元年(567) 9 월조에 나온다. 백제가 진과 첫 교섭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진으로부터 처음으로 책봉을 받은 562 년의 일이다. 이때 진의 世祖가 백제왕 餘明과 고구려왕 高湯이 陳으로부터 撫東大將軍과 寧東 將軍에 각각 책봉하였다. 이때의 책봉은 백제의 遣使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陳이 신왕조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변제국의 군왕들에게 관작을 수여한 것이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에 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562년은 위덕왕 9년에 해당되고, 또 餘明을 성왕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 순이 생겨 이 기사를 싣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坂元義種, 1978, 百濟史の硏究, 書房, 192 쪽). 백제가 처음으로 진에 사절을 보내 교섭을 가진 것은 567년의 9월의 일이었다. 이는 백제 에 앞서 고구려와 특히 신라가 진에 사절을 보내 교섭을 벌린 일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565년 북제로부터 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된 이후 이듬 해 고구려에 이어 진과 처음으로 교섭을 가진 것이다. 중국 왕조와의 교섭에 신라가 독자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라는 564년 북제와 교섭으로 남북조 외교를 개시하였으나, 570년대 초까지는 거의 진과 교섭을 유지해 왔다. 신라가 주로 진과의 교섭에 매달린 이유는 구 법승의 파견과 불교 문물의 수용 등 불교문화적 측면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자 극을 받은 백제는 567년 9월 陳에 사신을 파견하여 진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한 것으로 볼 수 있 다. 707) 高氏의 北齊 : 중국 南北朝시대의 北朝의 하나인 北齊로 6대 27년만에 北周의 武帝에게 멸망하 였다. 高洋이 東魏의 孝靜帝를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帝位에 올라 (현재의 중국 河北省 邯鄲 磁縣)에 도읍을 하고 국호를 齊라 하였다. 남조의 南齊에 대하여 北齊라고도 하고, 高氏가 건국 하였기 때문에 高齊라고도 한다. 708) 後主 : 북제의 제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溫公 緯를 말한다. 709) 侍中 : 北齊의 관직으로 관품은 正三品이었다( 十通分類總纂 9 職官類 下 北齊職品 참조). 710) 車騎大將軍 : 북제의 장군호의 하나. 본 기사의 車騎大將軍은 北齊書 卷8 後主紀 武平 원년 2 월 癸亥條에는 驃騎大將軍으로 나온다. 官品은 從一品이었다. 711) 帶方郡公 : 다음 帶方郡公의 郡公은 北齊(高齊)의 爵制의 하나이다. 北齊의 爵制는 王公侯伯子男 의 6等爵制였는데, 郡公의 관품은 開國郡公일 경우는 從一品이고, 散郡公일 경우는 正二品이었 다( 十通分類總纂 9 職官類 下 北齊職品 참조). 712) 고씨의 제나라 후주가 백제 왕으로 삼았다 : 백제가 北齊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 을 한 것은 이보다 3년전인 위덕왕 14년(567)이다. 後主가 위덕왕을 책봉한 기사는 北齊書 권 8 後主紀 武平 元年(570) 2월조에 나온다. 그 동안 대내적 체제정비에 전념하고 있었던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빈번한 대중교섭에 자극을 받아 대중관계를 재개하고 나섰던 것이다. 567년 9 월에는 남조 진에, 10월에는 북제에 잇달아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北齊書 卷8 後主紀 3년 天統 3년 10월), 이들 남북조와 직접 교섭을 벌린 것은 백제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뒤늦게 백제가 대중외교에 가세함으로써 이제 삼국은 남북조를 대상으로 불꽃이 튀는 남북조 등거리 외교전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백제는 567년에 북제와 교섭을 가진 이래 이 시기에는 570년 571년 572년에 걸쳐 3차례의 잇달은 교섭을 가졌다. 566년부터 572년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북제 교 섭은 한동안 중단된 데에 반해 백제는 북제와 집중적으로 교류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 중 위덕왕은 570년 북제 後主로부터 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帶方郡公에, 571년에는 使持節都督東靑 州刺史에 각각 두차례에 걸쳐 책봉된 것이다. 이는 백제가 북조로부터 받은 최초의 책봉이면서 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북제는 백제 위덕왕을 帶方郡公으로 책봉하였는데, 564년 신라 진흥왕이 받은 樂浪郡公, 560년 고구려 평원왕이 받은 遼東郡公과 대비된다. 그리고 571

101 200 18년(571) 고씨의 北齊 後主가 또 왕을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713)東靑州刺史714)로 삼았 다 년(572)에 사신을 北齊715)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초하루 경자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24년716)(577) 가을 7월에 사신을 陳나라717)에 보내 조공하였다. 년에는 都督 東靑州刺史를 수여받고 있어 내관직인 侍中에 이어 州 장관인 刺史로 책봉을 받고 있었던 점도 장군호에 겸대하던 기존의 예와 차이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북제가 백제 위덕 왕을 고구려왕과 동등하게 驃騎大將軍으로 책봉한 점, 그리고 남북조국가가 주로 고구려왕에게 전통적으로 수여하였던 동이교위와 낙랑군공을 신라왕에게도 수여한 점에서 고구려에 대한 인 식이 변화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북제는 고구려와 신라왕의 교섭이 중단된 상태에 서 그 공백을 이용하여 접근해 오는 백제에 대하여 두차례에 걸친 책봉을 하는 등 높이 환대를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713)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 : 북제가 백제 위덕왕에게 내린 爵號로 東靑州의 軍事관계를 총괄하는 職을 말한다. 중국에서 군사를 통할하는 데는 都督諸軍事, 監諸軍事, 督諸軍事의 세 종류가 있는 데, 이것은 지위의 고하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동청주의 위치 비정이 문제가 된다. 동진과 宋 梁대에 걸쳐 북청주와 남청주가 설치되었으며, 동청주는 468년 송의 沈文靜이 수여받았던 東靑州刺史를 통해( 宋書 권88 열전 48 沈文秀) 송대에 잠시 설치되었다가 468~469년에 이 지역을 북위에 빼앗김에 따라 鬱州에다 僑置시켜 청주로 삼고 이를 다시 동청주로 나누어 不其 城( 州府의 膠州에 있는 卽墨縣 서남쪽 57리)을 치소로 삼았다. 이어 북제때에는 그 멸망 때까 지 청주 관련기사가 확인되는 반면 동청주 관련기사는 찾아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청주는 설 치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위덕왕이 북제로부터 받은 관작인 使持節都督東靑州 諸軍事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중국 왕조가 주변제국의 군장들에게 책봉체 제를 통해 수여된 관작들은 중국 국내와는 달리 형식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작호에 나타난 관 할 범위는 구체적 지역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지만 때로는 막연한 범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 다. 예컨대 고구려 장수왕이 435년 북위로부터 받은 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 東郡開國公高句麗王( 위서 권100 열전 88 고구려)의 遼海諸軍事의 경우 遼海는 요하와 발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때 이 경우 북위 동쪽을 의미하는 범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호의 측면을 고려해 보면 위덕왕이 북제로부터 수여받았던 동청주는 실재성이 없는 작호로서 청주지 역의 동쪽에 있는 백제를 지칭한 관념적 표현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북제가 위와 같이 백제 위덕 왕에게 실재 동청주지역에 대한 군사지배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백제의 대룩진출설로 이 해하는 견해는 불합리하다. 청주지역은 당시 북제와 진이 대치하고 있었던 변경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백제가 이 지역에 개재될 개연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북제때 동청주와 관 련한 기사가 보이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위에서 보듯이 북제 멸망 때까지 청주는 북제의 영역 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북제가 자국 영토에 인접국이 아닌 황해 건너 멀리 떨어진 백제를 끌어 들여 군사지배권을 위임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譚其 主編, 1991, 中國歷史地圖集 제4책, 65 66쪽의 齊의 地圖에는 山東지역에 靑州와 南靑州가 나오나 東靑州는 보이지 않는 다. 동청주 설치 연혁과 실재성에 대해서는 양기석, 2003, 백제 위덕왕대의 대외관계 -대중관 계를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19, 248~249쪽을 참조할 것. 714) 東靑州刺史 : 東靑州刺史는 동청주를 지배하는 民政官이다. 자사는 본래 管內의 郡縣을 독찰하 고 一州의 행정의 大綱을 장악하며, 지방의 最高司法官廳의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後漢 末 曹操집권시대부터 三國西晉시대로 되면 刺史로서 將軍職을 띠고 병마권을 겸하는 자가 나오 게 되었다. 그 결과 東晉南朝시대로 되면 자사로서 장군직을 띠고 병마를 장악하지 않은 자가 거 의 없었으며, 때로는 二州 이상의 諸軍事를 겸하는 자도 있었다. 刺史가 兵民兩方의 대권을 장악 한 것은 권력의 지방 분산의 의미를 가진다. 자사가 병마를 옹하고 장군직을 띠면 부여된 將軍號 에 따라 某將軍府를 열고 府에 관리를 두었다. 결국 將軍府는 자사의 幕府였다(和田淸, 1942, 支那官制發達史, 쪽 ; 金翰奎, 1985,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일조각 참조). 北齊에서 刺史의 관품은 三等上州刺史는 正 三品, 三等中州자사는 從三品, 三等下州자사는 正四品이었다( 十通分流總纂 9 職官類 下 북제 직품 참조). 그러나 東靑州자사가 어느 관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왕조가 백제왕에게 將 軍號외에 刺史職을 제수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 기사를 토대로 하여 백제가 위덕왕대까지 北中國지역을 지배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方善柱, 1971,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 白山學報 11집, 3~5쪽) 앞의 주 714)에서 본 바와 같이 성립되기 어렵다. 都督과 刺史와의 관 계에 대해서는 南齊書 권16 백관지에 魏晉世州牧隆重 刺史任重者爲使持節都督 輕者爲持節督 起漢從帝時 御史中丞馮赦討九江賊 督揚徐二州軍事 晉太康中 都督知軍事 刺史治民 各用人 惠帝密 乃幷任 非要州則單爲刺史 州朝置別駕 治中 議曹 文學祭酒 諸曹部從事 라 한 기사 를 참조할 것. 715) 北齊 : 중국 남북조시대의 北朝의 하나로 高齊라고도 한다. 앞의 주석 707) 참조. 백제가 이때 北齊에 사신을 보낸 것은 北齊書 권8 後主紀 武平 3년(572) 是歲條에 나온다. 716) 24년 : 위덕왕 24년(577)을 기점으로 백제의 대외관계는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북제를 멸한 북주와 그리고 왜와의 교섭을 벌려 대외관계의 다변화를 모색하였다. 2007년 10월 부여 흥왕사지에서 출토된 사리기를 통해 소위 성왕계의 결속과 죽은 왕자의 추복을 기원하는 흥왕사 를 낙성함으로써 왕권강화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는 중국 남조 陳의 교섭을 개시로 하여 대중외교를 활발하게 벌이는 계기가 된다. 백제사상 한 왕대에 가장 많 은 중국과의 교섭횟수를 가질 정도로 위덕왕의 치세 중에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위덕왕대의 대중관계를 살펴보면 남조인 진과 5차례, 북조인 북제와는 4차례, 북제를 병 합한 북주와는 2차례, 그리고 남북조를 통일한 수와는 4차례 모두 15차례에 걸쳐 교섭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 교섭의 성격은 교빙 9회, 책봉 4회, 進賀 1회, 군사청구 1회인 것으로 나타

102 202 겨울 10월에 신라의 서쪽 변방 주 군을 치자 신라의 伊 世宗718)이 군사를 이끌고 이 를 쳐서 깨뜨렸다.719) 월에 사신을 宇文氏720)의 後周721)에 보내 조공하였다.722) 25년(578) 사신을 宇文氏의 後周에 보내 조공하였다.723) 26년(579) 겨울 10월에 살별(혜성)이 하늘에 뻗쳤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지진이 일어 났다. 난다. 교섭의 목적이 주로 교빙과 책봉 등 정치적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왜와의 관 계를 재개하고 나섰다. 570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왜와 교섭을 청하게 되자 왜는 신라에 이어 백제와 교섭을 재개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575년 2월 백제가 왜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두 나라 간에 국교를 재개한 것이다. 이는 위덕왕의 동생 惠의 파견 이후 20년만의 일이었다. 이에 왜는 그 답례로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냈으며, 이후 나제 양국으로부터 사신이 빈번하게 건너 오게 되었다. 그 후 577년부터 백제는 왜에 불교관련 문물과 기술자를 대거 파견함에 따라 두나 라 관계는 밀접한 교섭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백제는 經論 律師 禪師 呪 師 造佛工 造 寺工 등 주로 불교 문물에 관한 책과 인적 자원을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 에 의하 면 敏達紀(572~585)부터 推古紀(592~628)에 이르는 시기에 백제와 왜의 교섭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교섭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국교 재개(575), 불경과 불교관련 기술자 파견 (577), 日羅의 파견과 왜 국정 자문(583), 受戒法의 왜 전수(587), 백제 사신과 승려 파견(588), 비구니 善信 등이 백제에서 귀환(590), 승려 慧聰의 파견(595), 왕자 阿佐 파견(597), 낙타 나 귀 꿩 양의 제공(599) 등이 그것이다. 이로서 백제는 577년 11월부터는 불경 불상 불사리 등을 비롯한 불교 문물을 전수하고, 또한 승려 및 여러 부문에 걸친 전문 기술자를 왜에 보내 백 제의 선진 문물을 왜에 전수하면서 왜와의 긴밀한 관계가 복원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597년에는 왕자 阿佐를 파견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하는 등 정치적 군사적 관계도 복원되었다. 이처럼 백제 와 왜 사이에 불교문화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양국 모두가 불교를 통하여 새로운 정치 적 변화를 도모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불교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서 국왕 과 귀족의 타협을 통한 새로운 정치 질서 확립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이러한 선 진 문물의 공급을 통해 왜와의 우호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었고, 반면 왜는 중국과의 외교가 단절 된 상태에서 백제를 통한 선진 문화요소를 수용하여 야마토 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 출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717) 陳나라 :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의 하나. 陳覇先이 梁의 景帝로부터 禪讓을 받아 세웠다. 앞의 주석 706) 참조. 백제가 이때 陳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陳書 권5 宣帝紀 太建 9년(577) 추7 월조에 나온다. 718) 世宗 : 신라 眞智王 眞平王代의 장군. 진평왕 원년(579)에 상대등이 된 弩里夫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719) 伊 世宗이 이를 쳐서 깨뜨렸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眞智王 2년조에 命伊 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이라 하여 백제군을 격파한 곳과 참획한 인원수를 구 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577년 10월 백제가 신라 서변 一善郡(선산) 북쪽을 공격하였는데, 561 년 신라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한 이래 16년 만의 일이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伊 世宗이 이 끄는 신라군의 역습을 받아 3,700명의 병력 손실을 가져올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에 신라는 578년 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의 군사적 외교적 공세를 견제하였고, 아울러 일선군 일대 변 경의 요충에다가 관방시설을 구축하여 예상되는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즉 신라는 內利西城 을 축조하여 예상되는 백제의 재침을 막으려 대비하였고, 아울러 그 보복으로 백제의 閼也山城 (익산 낭산)에까지 침입해 들어간 일이 있었다. 백제도 서변 관방상의 요충인 熊峴城 松述城을 쌓아 신라 동쪽 변경의 內利西城과 그 주변의 요충인 蒜山城과 麻知峴城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 단하였다(본서 권4 진지왕 4년 2월). 이 전투는 위덕왕 집권 2기의 대내적 체제 정비와 대중관 계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 놓은 바탕위에서 위덕왕이 신라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720) 宇文氏 : 北周의 시조 宇文覺의 姓을 칭한 것이다. 721) 後周 : 중국 남북조시대의 北朝의 하나로 존속기간은 년이다. 宇文覺이 西魏 恭帝로부 터 禪位를 받아 세웠으며 長安에 도읍하였다. 北齊를 쳐서 북조를 통일하였으며, 남조의 陳나라 도 정벌하려 하였으나 황제가 죽어, 실권은 새 황제의 황후의 아버지인 楊堅(隋文帝)에게 돌아가 결국 망하였다. 宇文氏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宇文周라고도 하고, 또 北周 혹은 後周라고도 한 다. 722) 宇文氏의 後周에 보내 조공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 建德六年 齊滅 昌始遣使獻方物 로 나온다. 建德은 북주 武帝의 연호로 년까지 사용되었다. 건덕 6년 은 577년으로 백제 위덕왕 24년이다. 백제는 577년 11월에 북제를 멸한 北周에 새로이 접근하 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577년 백제의 북주에 사신 파견은 고구려와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는 북 주의 북제 평정을 축하해 주면서 북주의 동향을 탐색하기 위한 사행으로 보인다. 이때는 북주의 武帝가 周禮의 6관제 채용을 통해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며(宮崎市定, 1956, 九品官人法の硏究, 同朋社, 54~58쪽), 이를 바탕으로 북제를 멸하여 화북지방을 통일 한 시기였다. 당시 왕권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백제 위덕왕의 입장에서는 북주의 정치적 경험과 선진 문물이 절실히 요청되었기 때문에 북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북제에 대해 고구려는 단 1회의 교섭을 가졌고 신라는 북주와의 교섭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백제는 577년과 578년에 두 번에 걸쳐 연이어 북주와 교섭을 벌려 대북주 외교에서의 우위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백제가 왕 조교체를 통해 큰 변화가 야기되고 있었던 남북조의 정세와 이에 대처한 고구려와 신라의 동향 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백제 위덕왕대의 세련되고 능숙한 대 외교섭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723) 사신을 宇文氏의 後周에 보내 조공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 宣政元 年 又遣使來獻 으로 나온다. 宣政은 북주 宣帝의 연호로 1년만 사용되었다. 선정 원년은 578년 으로 백제 위덕왕 25년이다.

103 년(581)에 왕이 사신을 隋나라724)에 보내 조공하였다. 隋나라 高祖725)가 조서를 내려 왕 가 돌아가려고 나라의 경계를 지나니, 왕은 필요한 물건을 매우 후하게 주고, 아울러 사 을 開府儀同三司726)帶方郡公727)으로 삼았다. 신을 보내 표를 올려 陳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고조가 [이를] 좋아하며 조서를 728) 29년(58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1년(584) 겨울 11월에 사신을 陳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내려 말하였다.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듣고 멀리서 표를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지극 33년(586)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729) 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을 만나면 곧 상하고 파손되는데, 백제 왕의 마음씨가 순수하고 36년(589)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하였다. 전선 한 척이 耽牟羅國에 떠내려 왔다. 그 배 지극함은 짐이 이미 잘 알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비록 멀다고는 하나 사정이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하여 자주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와 서 서로 상세히 알았으니 지금 이후부터는 매년 별도로 조공할 필요가 없으며, 짐도 724) 隋나라 : 중국 南北朝 시대의 북조의 하나로 존속기간은 년이다. 北周의 외척 楊堅(隋 文帝)이 靜帝의 禪位를 받아 세운 나라. 수도는 大興(현재의 중국 陝西省 西安市)이었다. 589년 에 남조의 陳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여 집권적 大帝國이 되었다. 3대 恭帝에 이르러 唐 의 高祖인 李淵에게 망하였다. 725) 高祖 : 隋文帝를 말하는데,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楊堅이며, 그의 딸은 北周 宣帝 의 황후요 靜帝의 어머니였다. 581년에 靜帝로부터 讓位를 받아 隋를 세웠다. 후에 아들 煬帝에 게 살해되었다. 726) 開府儀同三司 : 중국 隋나라의 문산계. 隋나라 開皇 年間( )의 上開府儀同三司는 從三 品官이었다. 727) 帶方郡公 : 郡公은 隋의 爵制의 하나이다. 隋나라 開皇 年間의 爵制는 國王 郡王 國公 郡 公 縣公 侯 伯 子 男의 9等制였다( 十通分類總纂 8 권50 職官類 歷代王侯封爵 및 권64 職官類 隋官品令 참조). 따라서 위덕왕에게 주어진 帶方郡公은 4等爵이라고 할 수 있다. 581년 수가 건국하자 백제가 먼저 사신을 보내 수의 건국을 축하하며 교섭을 청함에 따라 수 문제는 위덕왕을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에 책봉하였다. 백제가 이렇게 수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고 있는 점은 백제외교의 적극성을 나타낸 것이고 세련된 외교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고구 려도 수에 견사하자 수문제는 평원왕에게 大將軍遼東郡公에 임명하였다. 백제가 받은 上開府儀 同三司은 종3품이고 고구려가 받은 大將軍은 정3품이기 때문에 수는 남북조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백제보다 높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70년 이후 중국왕조는 삼국 왕을 책봉 할 때 고구려는 遼東郡公에, 백제는 帶方郡公으로, 신라는 樂浪郡公을 수여하였다. 728)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백제는 581년의 견사에 이어 582년 수와 두차례의 교섭을 가졌던 반면 고구려는 581년 12월부터 584년 4월까지 수에 무려 7차례나 견사할 정도로 빈번 한 교섭을 가졌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북제를 멸망시킨 수의 등장을 새로운 위협으로 받아들 이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안보상 수에 밀도있는 접근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729) 사신을 陳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584년부터는 백제와 고구려가 남조 진과도 교섭관계를 가 졌다. 백제는 584년과 586년에 남조 진에 견사한 반면 고구려도 585년에 진과 교섭을 벌린 것 이다. 여제 양국은 비록 수와 빈번한 교섭을 가졌지만, 수의 세력 확장에 점차 위협을 느끼면서 그 대응책의 하나로 남조 진과 교섭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730) 또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마땅히 알지어다. 39년(592) 가을 7월 임신 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41년(594) 겨울 11월 계미에 살별(혜성)이 角731) 亢732) 별자리에 나타났다. 45년733)(598) 가을 9월에 왕은 長史734) 王辯那735)를 시켜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 730)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평정한 왕은 마땅히 알지어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실려 있다. 589년 수가 진을 멸망시키자 백제와 고구려는 보다 큰 충격을 받게 되면서 다시 태도를 바꿔 수에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 백제는 때마침 耽牟羅國에 표착해 온 한 戰船 을 수에 송환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사신을 함께 보내 수가 진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런 데 백제에 대한 수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백제는 매년 조공할 필요가 없으며, 수도 백제 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백제는 수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로 인해 한동안 수 의 동태를 관망하면서 교섭을 단절하게 되었다. 이같은 백제의 입장과는 달리 고구려는 수에 대 해 크게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고구려는 진이 멸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를 크게 두려워하면서 군사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수에 대한 拒守策을 강구하였다. 731) 角 : 28宿의 하나. 동방에 위치하였으며, 군사를 주관하였다. 晉書 권11 지 1 천문 상에 東方 角二星爲天關 其間天門也 其內天庭也 左角爲天田 爲理 主刑 右角爲將 主兵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732) 亢 : 28宿의 하나. 동방에 위치하였으며, 奏事와 獄訟을 맡았다. 지금의 乙女座의 일부이다. 晉 書 권11 지 1 천문 상에 亢四星 天子之內朝也 總攝天下奏事 聽訟理獄錄功者也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혜성이 角 亢 별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 군사행동이나 王者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군사행동은 대외전쟁이나 반란 등이 핵심을 이루고, 왕자의 죽음은 왕조의 교체 를 나타내 주는 天譴說의 소산이다(이희덕, 1999, 앞의 책, 170~171쪽). 733) 45년 : 위덕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甲戌立 理四十四年 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104 206 다. 왕은 수나라가 遼東에서 전쟁736)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군 207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威德이라고 하였다. 의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었기 때문에 장수에게 토 벌하여 죄를 줄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高元(영양왕)과 그 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복종 하며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을 할 수가 없다. 27. 惠王738) 이름이 季이고 明王739)의 둘째 아들이다.740) 昌王741)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742) [수나라는] 우리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자못 그 사실을 알아채고 군사로써 국경을 침략하였다.737) 734) 長史 : 중국에서의 長史는 秦代에 邊戍를 맡은 郡의 경우 장관인 郡丞을 長史로 삼아 병마를 관 장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長史는 軍府官이 되었으나 隋代에 와서 郡官이 되었다. 王府 에도 長史가 있어 府事를 처리하였는데, 당의 경우 王府에 속한 장사의 관품은 從4品下이었다. 백제의 경우 長史의 존재는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 및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도 보인 다. 幕府에 두어진 상충부의 長史 司馬 諮議參軍 등 上佐들은 領郡과 領縣의 수령을 겸임하여 郡縣행정을 장악하였다(金翰奎, 1985, 앞의 글, 쪽).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에 長史 司 馬 參軍의 속관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梁書 권54 열전 48 諸夷 고구려). 남제서 권58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長史 및 본서 권27 백제본기 위덕왕 45년조 등에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장사 는 중국과의 외교관계의 업무에 일시적으로 종사하였던 겸직관으로 이해된다(坂元義種, 1978, 앞의 책, 396~399쪽). 신라의 경우 주의 장관인 都督의 屬官으로 나온다(본서 권40 잡지 職官 下 外官). 735) 王辯那 : 위덕왕대의 인물. 왕씨라는 성씨에서 미루어 볼 때 중국계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수에 파견되었을 때 사절단장격에 해당하는 長史의 직에 있었다. 무왕 8년 수에 파견된 佐平 王孝隣 (본서 권27 무왕 8년 3월)과 같은 씨족으로 생각된다. 이들 왕씨세력은 수서 권81 백제전에 나오는 이른바 대성 8족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으나, 최고위인 좌평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위 덕왕과 무왕대에 대중관계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급격히 성장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세력 은 친왕세력으로서 중국어와 중국 사정에 정통하여 위덕왕을 도와 중국 정세의 변동에 민감하게 대처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王辯那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간 시기에 대해 隋書 에는 月이 없다. 본 기사의 九月 은 資治通鑑 권178 隋紀 文帝 開皇 18년 秋九月 조 에 의거한 것이다. 736) 수나라가 遼東에서 전쟁 : 隋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일차적인 관문이 遼東이기 때문에 이를 遼東之役 이라 표현한 것이다. 737) 왕년에 고구려가 국경에 침략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과 본서 권 20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조에 실려 있다. 본 기사와 수서의 기사 사이에는 약간의 出入이 있는 데 隋書 를 기준하여 異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은 위덕왕 45년조 기사에 나오는 것이 다. 往歲爲高麗(往歲高句麗), 厚其使而遣之(厚我使者而還之), 高麗(高句麗), 侵掠其境(侵掠國 境). 738) 惠王 : 백제 제28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성왕의 아들이고 위덕왕의 동생이다. 본 기사에는 이름은 季 로 나오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季 또는 獻王 으로 나온다. 일본 서기 권19 흠명기 16년조에는 惠 로 나온다. 그런데 隋書 권81 열전 百濟傳과 翰苑 百濟 條에는 惠王의 존재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위덕왕 다음에 法王(宣)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혜왕이 단명하여 그의 在位 사실이 중국에 곧 바로 전해지지 않아 누락된 것이 아닐 까 한다. 739) 明王 : 성왕을 말한다. 740) 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 혜왕이 明王(聖王)의 둘째 아들이고 위덕왕의 동생이라는 것은 日本書 紀 欽明紀 16년조에는 百濟王子餘昌遣王子惠[王子惠者威德王之弟也] 라 한 기사에서도 확인 된다. 그런데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혜왕이 위덕왕의 아들로 나오는데, 이는 착오라고 하 여야 할 것이다. 741) 昌王 : 威德王을 말한다. 위덕왕이 생시에 창왕으로 불렸다는 것은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창 왕명석조사리감a명문에 위덕왕이 昌王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에서 확인된다. 742) 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5년조(위덕왕 44)에는 百濟王遣王子阿 佐朝貢 이라 하여 위덕왕이 왕자 아좌를 일본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듬해 위덕왕 이 죽자 왕의 동생인 혜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70세에 가까운 노령이었 다(이도학, 1984,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19쪽). 2007년 10월 에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사리기 명문을 통해 위덕왕이 일본에 사신으로 보 낸 아좌태자 이외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왕자 아좌가 일본으로 파견 된 직후에 위덕왕이 사망하고 노령의 혜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 것은 관산성 패전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실권귀족들의 정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95~196쪽). 그러나 이는 관산성 패전으로 위덕왕대 정치가 대성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이 이루 어졌다는 인식과, 또 위덕왕대 혜의 역할을 홀시한 데에서 나온 견해이다. 혜는 위덕왕의 동생 으로서 蓋鹵王代의 昆支처럼 청병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왜에 파견된 일, 그리고 능사 조영에서 의 역할 등으로 보아 위덕왕대 권력기반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음을 알려준 다. 이러한 혜의 역할과 세력기반이 후에 위덕왕의 여러 왕자를 제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배 경이 되었던 것이다. 위덕왕의 동생 혜의 즉위를 비정상적 측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위덕왕

105 208 2년(599) 왕이 죽었다. 시호를 惠743)라고 하였다 년(600) 봄 정월에 王興寺를 창건하고,748)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크게 가물자 왕은 漆岳寺에 행차하여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744) 28. 法王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올려 法이라 하였다. 이름이 宣745)<*혹은 孝順이라고도 하였다.>이고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죽자 아들 746) 선이 왕위를 이었다.<* 隋書 에는 선을 昌王의 아들 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 29. 武王749) 이름이 璋750)이고 法王의 아들751)이다.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 었으며, 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747) 이나 동생 혜가 이 70이 넘은 고령인 점, 그리고 왜에 청병할 만한 위급한 상황이 아닌 데에도 불구하고 아들 아좌태자를 왜에 보낸 점 등에 미루어 볼 때 혜의 즉위가 모종의 정변에 의해 이 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95~196쪽). 743) 惠 :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6년조에는 百濟王子惠 라 하여 惠를 생존시의 이름으로 기록하 고 있다. 따라서 惠를 諡號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검토를 요한다. 744) 법왕 : 백제 제2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으로 이름은 宣이다. 745) 宣 : 법왕의 이름으로 孝順이라고도 하였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名孝順 又宣 으로, 隋 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餘宣으로 나온다. 746) 昌王의 아들 : 동일한 내용이 翰苑 百濟條에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법왕이 혜왕의 아들이라 는 것은 본 기사 외에 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도 나온다. 따라서 법왕을 창왕(위덕왕)의 아들이 라고 한 중국측 기록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747)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 이는 법왕이 즉위초에 내린 禁殺生令인데, 같은 내용이 삼국유사 권3 흥법 3 法王禁殺條에 나온다. 다만 삼국유사 에서 는 살생을 일체 금지시켰다고 했는데, 원래의 명령에 포함되지 않은 첨가된 구문이었을 가능성 이 높다(김주성, 2001, 백제 법왕과 무왕의 불교정책, 마한백제연구 15, 46~47쪽). 법왕의 금살생령은 梵網經 의 제10경계인 축살생구계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해된다. 범망경 은 5세 기경 중국에서 찬술된 것으로 여러 경론과 계율을 참조하여 만들어진 경전이다. 이는 만약 불자 가 국왕이나 전륜성왕 자리에 나아갈 때에 먼저 보살계를 받아야 하며, 계를 받았으면 孝順心 孝敬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범망경 은 왕권보다 우위에 서서 불법을 설하고 있지만, 다른 면에서 국왕은 이타심을 갖고 백성들을 통치하기 때문에 보살계를 받아 왕권을 합리화시키고 통 치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최원식, 1999, 신라 보살계사상의 성격과 역사 적 의의, 신라보살계사상사연구, 민족사, 256쪽). 이런 측면에서 법왕의 금살생령은 귀족세 력을 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길기태, 2006, 앞의 책, 80~83 쪽). 748) 王興寺를 창건하였고 : 현재의 충남 夫餘郡 窺岩面 新九里 王興寺址에서 王興 2字가 양각된 기와가 발견되어 절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三國遺事 권3 興法篇 法王禁殺條에는 百 濟第二十九主法王 諱宣 明年 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於時都泗城[今扶餘] 始立裁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曆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라 하여 始工은 법왕이 했지만 완성은 무왕대에 이루어졌다는 것과, 왕흥사의 다른 이름이 미륵사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2007년 10월에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굴조사 결과 당시의 왕흥사의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기 록이 나왔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 6행의 음각체로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라고 적혀있다. 위덕왕이 577년 죽은 왕자의 추복을 위해 왕 흥사를 세우고 여기에 사리를 봉안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왕흥사 창건 시기가 본 서 법왕 2년(600)에 축조된 것에서 23년 앞당겨진 위덕왕 24년(577)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일 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왕흥사가 오합사와 함께 3산 5악에 위치하는 것은 이들 사찰이 호국사찰로서 기능하였음을 말해주는 것 이다(김수태, 2000, 백제 법왕대의 불교, 선사와 고대 15, 9~12쪽). 따라서 이 기사는 위덕 왕 24년의 사실로 고쳐져야 하거나 또는 法王代에 들어와서 왕흥사를 중창하기 시작하여 그 규 모와 기능을 확장시켜 나간것으로 이해된다. 749) 武王 : 백제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璋이다. 그런데 三國遺事 권 2 紀異篇 武王條에는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이라 하여 무왕이 武康王으로도 기록 된 것을 전하면서 찬자인 一然은 무강왕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三國遺事 권1 王曆篇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이 武康 으로 나오고 있다. 또 六朝古逸觀世音 應驗記 에는 百濟武廣王遷都 以貞觀 十三年(639) 이라 하여 무광왕이 보인다. 정관 13년은 백제 무왕 40년에 해당되므로 무왕은 무광왕으로도 표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武康王의 康 은 武廣王의 廣 과 字形이나 音韻上에서 통하므로 무강왕=무광왕=무왕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무강왕은 생시의 이름으로 왕을 칭한 것이라 할 것이며, 삼국유 사 의 찬자가 무강왕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750) 璋 : 무왕의 이름.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或云武康 獻丙 或小名一耆篩德 으로, 같은 책 권 2 紀異篇 武王條에서는 武王名璋 이라 하면서 어릴 때 마를 캐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106 출하였다.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죽자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752) 고도 하였다.>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 眞平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 3년(602) 가을 8월에 왕은 군사를 내어 신라의 阿莫城753)<*다른 이름으로는 母山城이라 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754) 신라가 小 城 畏石城 泉山城 甕岑城의 4 성755)을 쌓고 우리 나라 경계 가까이 쳐들어 왔다. 왕이 노하여 佐平 解讐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그 4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장군 乾品756)과 武 薯童 이라 한 것도 전하고 있다. 한편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120 열전 백 제전에는 扶餘璋 으로 나온다. 751) 法王의 아들 : 무왕의 계보에 대해 본 기사와 三國遺事 권2 紀異篇 法王禁殺條,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 翰苑 백제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온다. 이와는 달리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 에는 昌死子璋立 이라 하여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혜왕과 법왕이 잇달아 단명한 데에서 그 즉위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三國遺事 권2 紀異篇 法王禁殺條의 본문 기사와는 달리 細注에 인용된 고기 기사와 武 王條에는 池龍과 貧母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사람의 여인과 비인간적 존재 와의 결연에 의한 이상한 출생을 모티브로 한 설화를 異類交婚說話라 한다. 이처럼 무왕의 출자 에 대해 많은 이설이 있는 것은 무왕의 출생과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 못한 것을 반영 해 준다. 그리고 三國遺事 무왕조에서 무왕의 아버지가 池龍 으로 나오는 것은 그가 왕족출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익산에서 薯童으로 생활하였다는 것은 그가 몰 락한 왕족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752)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죽자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 법왕은 즉위한지 2년만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혜왕의 즉위 과정에서 일어난 모종의 정변과 관련한 것으로 보 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194~197쪽). 무왕의 즉위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 2 무왕조에 실려있는 서동설화에 상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서동은 못에 사는 용과 가난한 홀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마를 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생활할 만큼 어 렵게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서동은 지략을 발휘해서 절세미인인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유혹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인 후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 왕위에 즉위하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 다. 이 설화는 익산의 미륵사 창건과 관련하여 그 이념적 배경이 되는 미륵불국토사상을 상징적 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설화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 동설화를 통해 무왕의 즉위 과정이 순탄치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법왕이 재위 2년만 에 죽은 것과, 또 池龍으로 표현되는 몰락 왕족의 아들인 서동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은 당시 실권귀족들 중심의 정치운영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실권귀족들 이 왕권강화를 도모하던 법왕을 제거하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익산에서 마를 캐며 생 활하며 정치적 기반이 없던 서동을 옹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참조).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의 기록을 신뢰하여 위덕왕 사 후 그의 자손들이 혜왕과 그 지지세력에 의해 제거될 때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고 익산에 구명 도피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문안식, 2006, 앞의 책, 378쪽). 753) 阿莫城 : 현재 남원시 운봉면의 성리산성(곽장근, 1999, 호남 동부지역 석곽묘연구, 서경문화 사, 61쪽)이나 팔랑티 북쪽에 자리잡은 남원 성산리산성(김태식, 1993, 가야연맹사, 일조각, 殷757)이 무리를 이끌고 막아 싸웠다. 해수는 불리하자 군사를 이끌고 泉山758) 서쪽의 큰 진 115쪽)에 비정된다. 이 중 운봉 성리산성은 장수군 번암에서 운봉고원으로 올라가는 백두대간 산줄기 정상부에 위치하면서 치재와 복성이재 등 큰 고갯길이 있는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막산성으로 보고 있다(곽장근, 2005, 웅진기 백제와 가야의 역학관계 연 구, 백제연구 44, 111쪽). 본서 권34 잡지 地理 1 康州 天嶺郡條에는 雲峰縣 本母山縣[或云 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라 하여 母山城으로도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9 운봉현조에 의하면 雲峯縣은 본래 신라 母山縣이다[일명 景德 阿英城 阿莫城이라고도 한 다.] 라고 하였으며, 같은책 산천조 八良峴條에는 荒山의 동쪽 5리에 있다. 바로 경상도 함양군 의 경계이다. 신라와 백제시대로부터 요해로 불리운다. 로 되어 있다. 결국 아막산성은 소백산 맥의 팔랑치를 통해 남강수계로 진출하는데 요충에 자리하고 있다. 754)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에 나오는데, 이 싸움에서 貴山과 項이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왕은 왕권안정을 추구하 면서 신라가 차지한 옛가야지역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신라는 백제가 남원 방면에서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아막산성 등에서 방어하려고 하였다. 이에 백제는 좌평 해수가 거 느린 4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아막산성과 그 주변에 신라가 쌓은 소타를 비롯한 4개의 성을 공격 하였으나 많은 희생을 낸 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처럼 무왕 즉위초에 백제와 신라는 남 원과 장수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755) 小 城 畏石城 泉山城 甕岑城의 4성 : 이 4개 성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 중 泉山 은 남원시 운봉면 황산 일대로 비정된다(전영래, 1985, 백제 남방경역의 변천, 천관우선생환 력기념한국사학논총, 153쪽). 이로 미루어 보면 4개의 성은 운봉의 아막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 로 볼 때 지리산 정령치에서 북으로 뻗어 운봉읍과 아영면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된다(최병운, 1997, 선사시대의 섬진강, 섬진강유역사연구,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64쪽). 756) 乾品 :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에는 波珍 乾品 으로 나온다. 泉山 싸움 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757) 武殷 :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으로 화랑인 貴山의 아버지이다. 아막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의 관 등은 級干이었으나 뒤에 阿干까지 승진하였다(본서 권45 열전 貴山傳 참조). 758) 泉山 : 泉山은 현재 남원시 운봉면 황산 일대로 비정된다(전영래, 1985, 백제 남방경역의 변 천,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53쪽).

107 펄 안으로 물러나 군사를 매복해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서 갑옷 입은 군사 1천 [귀산은]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小將 추항( 項)762)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써 싸우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큰 진펄에 이르자 매복한 군사들이 일어나 급히 공격하였다. 무 다가 죽으니 나머지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 더욱 분발해 우리 군사가 [싸움에서] 패하였 759) 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은의 아들 貴山 이 큰 소 다. 해수는 겨우 죽음을 면하여 말 한 필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763) 리로 말하였다. 6년(605) 봄 2월에 角山城764)을 쌓았다. 내가 일찍이 스승760)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761) 라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 말아야 한다. 가을 8월에 신라가 동쪽 변경을 쳐들어왔다.765) 7년(606) 봄 3월에 왕도에 흙비가 내려(雨土)766) 낮인데도 어두웠다. 겠습니까! 759) 貴山 : 신라 진평왕대의 阿 武殷의 아들로 沙梁部人이다. 신라의 화랑으로서 친구 추항( 項) 과 함께 圓光法師로부터 世俗五戒를 받았다. 후일 백제와의 모산성 전투 때에는 少監으로 출전 하였는데, 臨戰無退의 정신을 발휘하여 전사하였다. 전사 후 그는 奈麻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상세한 것은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을 참조할 것. 760) 스승 : 귀산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쳐 준 圓光법사를 말한다. 원광법사( )는 신라의 고승 으로 성은 박씨, 또는 薛氏이다. 왕경인이며, 진골 출신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경주 안강의 三岐山에 金谷寺를 짓고, 이에서 수도하였다. 진평왕 11년(589)에 陳나라 에 유학하였다. 처음 금릉의 莊嚴寺에 머물면서 成實論 涅槃經 등을 공부한 뒤 吳나라의 虎丘山에 들어가 禪定에 힘쓰고 설법을 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수나라가 통일하자 진나 라 수도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 장안의 흥선사에서 섭론종의 論疏를 공부하였다. 신라 국왕의 요청으로 600년 조빙사 奈麻 諸文과 大舍 橫川을 따라 귀국하여 삼기산에 머물면서 대 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 후 가실사에 머물 때에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평생토록 지킬 계율을 요청하자 세속오계를 가르쳐 주었다. 진평왕 30년(608)에 왕의 요청에 의하여 수나라에 보낼 출사표를 썼다. 황룡사에서 인왕백좌강회를 베풀 때에는 최상석의 자리에 앉았다. 嘉栖寺에서 불교교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계하여 정진할 점찰법을 정기적으로 베풀 기금[寶]을 마련 하였다. 그가 입적한 나이는 99세라는 續高僧傳 권13의 圓光傳의 기록과 88세라는 해동고승 전 권2 圓光傳의 기록이 있는데 후자가 옳은 듯하다. 그의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었다. 저 술로는 如來藏에 대한 몇 권이 있었다 한다( 三國遺事 권4 義解篇 圓光西學條 참조). 761)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 원광법사가 화랑인 귀산에게 준 世俗五戒의 하나인 臨戰無退 를 말한다. 세속오계는 신라 圓光法師가 화랑에게 준 5가지 교훈으로 花郞五 戒라고도 한다. 진평왕 22년(600) 중국 隋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원광에게 貴山 項 두 사람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원광은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 退 殺生有擇 등 5가지 계율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5계는 원광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그 당시 신라인의 시대정신을 원광이 구체적으로 정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속5계는 강 력한 공동체의식과 결합되어 단순히 신라인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랑도 사상 의 구체적 실천덕목을 부각시키고 이념적 체계를 가다듬게 함으로써 화랑도 발전에 결정적 구실 을 하였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762) 추항( 項) : 신라 沙梁部人으로 花郞인 귀산의 친구이다. 귀산과 함께 圓光法師로부터 世俗五 戒를 받았으며, 백제와의 母山城 전투때에는 少監으로 출전하였다가 귀산과 더불어 전사하였다. 전사 후 그는 大舍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 및 권45 귀산전을 참조할 것. 763) 해수는 혼자 돌아왔다 : 백제 장군 해수(解 )가 泉山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크게 패배한 것 을 말한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에는 동일한 내용이 간략하게 나오고, 권45 열전 귀산전에는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이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백 제는 신라 공격을 중단하였다. 764) 角山城 : 본서 권45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각산성을 ①진주로 보 는 견해(김종권, 1963, 앞의 책, 442쪽), ②부여의 청마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1982, 백제 사비도성 연구, 백제연구 13, 36~39쪽), ③임실군 관촌면 오원천의 대리산성 배뫼산 성 방현리산성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신아출판사, 119쪽), ④전북 정읍시 內藏面 葛峴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譯註, 1983,, 382쪽) 등이 있 다.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8년(661)조에 十二日 大軍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 者雖小 失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百濟屯堡 斬獲二千級 라고 하여 각산이란 지명이 나온다. 위 기사에 나오는 신라와 백제군이 전투한 지점이 賓骨壤(태인군 옹동 면 산성리산성)인 것으로 보아 각산은 정읍시 부근으로 보인다. 765) 신라가 동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7년조에 나온다. 766) 흙비가 내려(雨土) : 가벼운 흙이 바람에 날려 비처럼 떨어지는 현상으로, 매년 초봄에 일어나는 黃沙 현상의 일종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기록된 황사 현상은 본서 권2 신라 아달라 왕 21년(174) 봄조의 雨土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본서 기록을 보면 하늘의 신이 화가 나서 비나 눈이 아닌 흙가루를 땅으로 뿌린 것으로 믿어서 먼지현상이 눈앞에 나타나면 왕과 신하들이 몹 시 두려워했다고 적혀있다. 황사로 인한 먼지 현상은 주로 봄에 관측됐지만 겨울에 관측되기도 했다.

108 214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어 기근이 들었다. 8년(607) 봄 3월에 率 燕文進을 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또 佐平 王孝隣767)을 보내 215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772) 9년(608) 봄 3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文林郞773) 裵淸774)이 사신으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煬帝768)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움직 로 왜국에 갔는데,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775) 임을 엿보게 하였다.769) 12년(611) 봄 2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정 여름 5월에 고구려가 松山城770)을 공격해 와서 빼앗지 못하자, [군사를] 石頭城771)으로 벌하려고 하니 왕은 國智牟776)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행군 기일(軍期)을 요청하였다. 양 767) 王孝隣 : 백제 무왕대의 귀족으로 좌평의 직에 있었다. 수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를 칠 것 을 요청하였다. 王氏는 王孝隣이 佐平의 관등에 오르고 있고, 長史 王辯那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는 사실(위덕왕 45: 598)에서 미루어 볼 때 제1급의 귀족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 왕씨세력은 수서 권81 백제전에 나오는 이른바 대성 8족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 으나, 최고위인 좌평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위덕왕과 무왕대에 대중관계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급격히 성장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세력은 친왕세력으로서 중국어와 중국 사정에 정통하 여 위덕왕을 도와 중국 정세의 변동에 민감하게 대처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768) 煬帝 : 중국 隋나라의 제2대 황제로 이름은 廣 또는 英이다. 재위기간은 년이다. 아버 지 文帝를 죽이고 604년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 大運河를 비롯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고, 세 번이나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침입하였다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618년 국내의 반란으로 楊州 別宮에서 살해되었다. 769) 煬帝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 제전에 보이는데, 이 기사에 이어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이 첨가되어 있다. 수서 의 이 귀절은 무왕의 二重外交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 백제의 대수외교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도 백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도 연결 을 꾀하는 양면외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1,`고구려 백 제 신라 사이의 역관계변화에 대한 일고찰a, 동방학지 28, 91쪽 ; 김선욱, 1984,`백제의 수 당관계 소고a, 백제연구 15 ; 김수태, 1991`백제의 멸망과 당a, 백제연구 22 ; 김주성, 1998,`백제 무왕의 치적a, 백제문화 27 ; 여호규, 2002,`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 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a, 역사와 현실 46, 29~30쪽 등을 참조할 것. 그러나 兩端 이라는 용어의 쓰임새를 분석해 볼 때 隋書 백제전에서 주장하는 양단 은 수나라의 주장일 뿐 백제와 고구려가 연화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박윤선, 2006,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숙명여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03~ 105쪽). 이 일이 있은 후 곧바로 고구려가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770) 松山城 : 송악군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개성이나 또는 연천군 전곡읍 서남단에 송산리 로 추정되나 분명치 않다. 그러나 당시 한강유역이 신라의 영유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직 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771) 石頭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이 석두성은 본서 권23 백제 본기 온조왕 22년조에도 보이는데, 漢城 시기의 석두성은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본서 권23 주 71) 참조). 그러나 당시 한강유역이 신라의 영유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772) 고구려가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陽王 18년조에 동일 한 내용이 나온다. 773) 文林郞 : 隋나라의 文散階의 하나. 隋代에는 그 官品을 알 수 없으나 唐나라의 경우는 從9品上 이다. 通典 職官에는 文林郞 隋置散官 蓋取北齊文林官 徵文學之士以充之義 大唐因之 라 되 어 있다. 774) 裵淸 : 중국의 隋나라 煬帝代의 인물로 왜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隋書 권81 倭國傳 에는 文林郞 裵淸 으로,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6년조에는 裵世淸 으로 나온다. 裵淸의 원 래의 이름은 裵世淸이었으나 世 가 당나라 太宗의 이름이기 때문에 후일 避諱하여 裵淸이라 하 였다. 그의 직함에 대해 본 기사와 隋書 에는 文林郞으로,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6년 추8월 조에는 鴻 寺掌客으로 나온다. 775) 文林郞 裵淸이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 隋書 권81 倭國傳에는 明年[大業 4: 譯 註者] 上[煬帝: 譯註者]遣文林郞裵淸使於倭國 으로 나온다. 그런데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6 년조에는 大唐使人裵世淸下客十二人從妹子至於筑紫 妹子臣奏之曰臣參還之時唐帝以書授 臣然經過百濟國之日百濟人探以掠取 라 하여 백제가 裵淸을 수행한 왜국 사신 妹子臣을 수색하여 隋나라가 倭國에 보내는 國書를 약취한 것으로 나온다. 위 일본서기 기사에서 배세 청과 小野臣妹子 일행이 백제를 경유하여 왜에 귀국하였는데, 이를 통해 왜국의 친백제 노선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해 준다. 小野臣妹子가 백제에서 수나라의 국서를 탈취당했다고 보고하 였는데도 왜국이 이를 묵인했다는 기술에서 당시 왜국의 친백제 노선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백제가 실제 수나라의 국서를 탈취하였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당시 왜국이 수나라와의 교섭 에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推古期 후반에 파견되는 3차에 걸친 견수사 일행에 있었다. 이는 왜 국이 수나라로부터 학문승과 유학생을 파견하여 고대국가 체제 확립에 필요한 선진 문물 수입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776) 國智牟 : 611년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백제의 귀족으로 대성 8족의 하나인 국씨 출신이다. 사료에 보이는 국씨로서는 國沙利 일본서기 권9 ( 신공기 62년) 國雖多 (권19 흠명기 4년 12월) 國辨成 (제명기 6년 7월) 등이 나온다. 국씨의 출자를 일본서기 권9 신공기 62년 기

109 216 제는 기뻐서 상을 두터이 더해주고 尙書起部郞777) 席律778)을 보내 와서 왕과 함께 서로 모 여름 4월에 궁궐 남문에 벼락이 쳤다. 의하게 하였다.779) 5월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기었다. 780) 가을 8월에 赤巖城 을 쌓았다. 겨울 10월에 신라의 岑城781)을 포위하여 城主 讚德782)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하였 다.783) 13년(612) 수나라의 6군784)이 遼河785)를 건넜다. 왕은 국경에서 군비를 엄히 하고 말로는 17년(616) 겨울 10월에 達率 217 奇787)에게 명령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母山 城788)을 공격하게 하였다.789) 11월에 왕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9년(618) 신라 장군 邊品790) 등이 岑城791)을 공격해 와서 이를 되찾았는데, 奚論792)이 전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兩端策786)을 썼다. 사에 의거하여 가야계로 보지만 분명치는 않다. 이 국씨를 일본훈이 같은 古爾氏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홍직, 1971,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348~349쪽). 777) 尙書起部郞 : 상서성에 두어진 관직의 하나. 품계는 분명하지 않다. 778) 席律 : 중국 수나라 양제 때의 사람.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다. 779) 席律을 보내 와서 모의하게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과 같은 책 권 3 煬帝紀 上 大業 7년(611) 2월조에도 나온다. 780) 赤巖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 지명은 알 수 없다. 781) 岑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본서 권4 진평왕 33년 10월, 50년 2월 및 권47 열전 奚論傳과 金令胤傳에 나온다. 해론전에는 가잠성주 讚德이 느티나무[槐 樹]를 받고 죽었다고 하여 무열왕이 그곳을 槐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한국정신문 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괴산군) 괴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井上秀雄 역주, 1980, 삼국사기, 118쪽). 이와는 달리 괴산군의 옛 지명인 仍斤內와 가잠이 음운상 통하지 않 아 이를 부정하고 신라 한주 介山郡의 옛 지명인 皆次山郡과 같은 현재의 경기도 安城郡 竹山面 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1997,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 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77쪽). 782) 讚德 : 신라 진평왕대의 가잠성의 성주로 王都 牟梁部 출신이다. 진평왕 33년(611)에 가잠성 현 령이 되었으나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47 열전 奚論傳 참조. 783) 岑城을 포위하여 城主 讚德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3년조와 본서 권47 열전 奚論傳에 나온다. 784) 수나라의 6군 : 隋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공격할 때의 軍의 편제. 6軍은 본래 周대의 군대 편 제인데, 여기서는 수나라 천자의 군대라는 의미이다. 785) 遼河 : 중국 東北區 大興安嶺에서 시작하여 남동으로 흘러 요동만으로 들어가는 강으로 길이는 1,310km이다. 遼水 大遼水라고도 하였다. 786) 왕은 兩端策을 썼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리고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陽王 23년조에 상세히 나온다. 이 시기 백제의 대수외교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면 서도 백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도 연결을 꾀하는 양면외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1,`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역관계변화에 대한 일고찰a, 동 방학지 28, 91쪽 ; 김선욱, 1984,`백제의 수당관계 소고a, 백제연구 15 ; 김수태, 1991,`백 제의 멸망과 당a, 백제연구 22 ; 김주성, 1998,`백제 무왕의 치적a, 백제문화 27 ; 여호규, 2002,`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a, 역사와 현실 46, 29~30쪽 등을 참조할 것. 그러나 兩端 이라는 용어의 쓰임새를 분석해 볼 때 隋書 백제전에 서 주장하는 양단 은 수나라의 주장일 뿐 백제와 고구려가 連和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박윤선, 2006,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숙명여대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103~105쪽). 이 일이 있은 후 곧바로 고구려가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고 있는 사실 이 이를 입증해 준다. 787) 奇 : 백제 무왕때 인물로서 관등은 달솔이었다. 616년에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 다. 氏는 사비시대 대성 8족의 하나에 들어가는 귀족이었다. 788) 母山城 : 阿莫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전북 남원시 운봉면의 성리산성( 곽장근, 1999, 호남 동부지역 석곽묘연구, 서경문화사, 61쪽)이나 팔랑티 북쪽에 자리잡은 남원 성산리산성(김태 식, 1993, 가야연맹사, 일조각, 115쪽)에 비정된다. 이 중 운봉 성리산성은 장수군 번암에서 운봉고원으로 올라가는 백두대간 산줄기 정상부에 위치하면서 치재와 복성이재 등 큰 고갯길이 있는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막산성으로 보고 있다(곽장근, 2005, 웅진 기 백제와 가야의 역학관계 연구, 백제연구 44, 111쪽). 본서 권34 잡지 地理 1 康州 天嶺郡 條에는 雲峰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라 한 기사 참조. 789) 達率 奇에게 공격하게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8년(616)조에 보인다. 790) 邊品 :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0년(618)조에는 이때 邊品이 北漢山 州 軍主의 직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791) 岑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본서 권4 진평왕 33년 10월, 50년 2월 및 권47 열전 奚論傳과 金令胤傳에 나온다. 가잠성을 현재의 충북 괴산으로 보는 견해

110 218 사하였다.793) 219 겨 사신을 보내 와서 [왕을] 책봉하여 帶方郡王800)百濟王으로 삼았다.801) 22년(621) 겨울 10월에 사신을 唐나라794)에 보내 果下馬795)를 바쳤다.796) 797) 798) 24년(623) 가을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늑노현(勒弩縣) 을 쳤다. 가을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신라의 速含城802) 櫻岑城803) 岐岑城804) 烽岑城 旗懸城 冗柵城805) 등 6 25년(624) 봄 정월에 대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高祖799)는 그 성의를 가상히 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806) (井上秀雄, 1980, 삼국사기, 118쪽)와 현재의 경기도 安城郡 竹山面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金泰植, 1997,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 제연구소, 77쪽).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781)을 참조할 것. 792) 奚論 : 신라 왕경 牟梁部 사람으로 가잠성 현령이었던 찬덕의 아들이다. 진평왕 40년(618)에 金 山幢主의 직책으로 邊品을 따라 가잠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해론의 무용담은 본서 권47 열전 해론전에 상세히 나온다. 793) 奚論이 전사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진평왕 40년(618)조에 나온다. 794) 唐나라 : 중국의 왕조의 이름으로 존속 기간은 년이다. 李淵(唐高祖)이 隋나라 恭帝에 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한 때로부터 哀帝가 朱全忠에게 망하기까지 20대 290년간 지속하였 다. 수도는 長安(현재의 중국 陝西省 西安市)이다. 795) 果下馬 : 등에 타고서 과실나무 가지 밑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은 말.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濊條에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臣松之按 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故謂之 果下 見博物志魏都賦] 라 하여 果下馬는 濊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796) 사신을 唐나라에 보내 果下馬를 바쳤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 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나 冊府元龜 권970 外臣部 朝貢 3에는 이 일이 武德 7년(624) 九月 의 일로 나온다. 당나라가 수에 이어 건국되자 가장 먼저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역시 고구려였다. 백제는 신라보다도 더 늦게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고구려는 619년 2월에, 신라는 621년 7월에, 백제는 621년 10월에 각각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에 당나라는 624년 백제와 고구려 신라를 일괄적으로 책봉하였는데, 백제 무왕에게 帶方郡王 百濟王, 고구려의 영류왕에게 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國王, 신라 진평왕에게 柱國樂浪郡王新羅王 을 각각 수여하여 모두 군왕호와 본국왕호가 포함한 책봉호를 수여하였다. 책봉호로 보면 당나 라는 삼국을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797) 늑노현(勒弩縣)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 나오는 城 즉 弩縣의 잘못으로 보면 신라 漢州 槐壤郡의 옛 지명인 仍斤內와 음이 비슷하므로 현재의 충북 槐山郡 槐山邑에 비정할 수 있겠다 (井上秀雄 譯註, 1980, 앞의 책, 384쪽 ; 김태식, 1997, 앞의 글, 77쪽). 798) 신라의 勒弩縣을 쳤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5년(623)조에 나온다. 이 전 투는 백제와 신라 양국이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799) 高祖 : 唐나라를 세운 인물로 재위기간은 9년이다. 이름은 李淵이고 字는 叔德이다. 唐公을 襲 封하고 隋나라에서 벼슬하여 太原留守가 되었다. 마침내 隋나라를 대신하여 帝를 칭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다. 長安에 도읍하고 군웅을 평정하여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800) 帶方郡王 : 郡王은 당나라의 封爵制의 하나로서 종1품이다( 新唐書 권46 志 36 백관 1). 따라 서 帶方郡王도 종1품의 封爵이라 할 수 있다. 570년 이후 중국왕조는 삼국 왕을 책봉할 때 고구 려는 遼東郡公에, 백제는 帶方郡公으로, 신라는 樂浪郡公을 각각 수여하였다. 801) 高祖는 百濟王으로 삼았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 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802) 速含城 : 오늘날의 경남 咸陽郡 함양읍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 1 康州 天嶺郡條에 天嶺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 이라고 하여 신라때 康州 天嶺郡(함양군 함양읍)의 옛 지명이다. 본래는 가야 소국의 하나로서, 弁辰走漕馬國( 三國志 권30 魏書 韓傳) 및 卒麻國 日本書紀 권19 ( 欽明紀 하4월)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803) 앵잠성(櫻岑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경남 咸陽郡 水東面 上栢里 일대(속칭 앵구밭)에 비정된다(김동호, 1972, 함양상백리고분군발굴조 사보고, 동아대박물관). 804) 기잠성(岐岑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신라의 康州 江陽郡 三岐縣으로 보아 현재의 경남 陜川郡 大幷面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全榮來, 1985, 앞의 글, 154쪽). 805) 용책성(冗柵城)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조에는 穴柵城으로 나온다. 본서 권37 잡 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신라 康州 闕城郡의 옛 지명인 闕支郡 으로 보아 현재의 경남 山淸郡 丹城面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全榮來, 1985, 앞의 글, 154쪽). 806) 6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조에 나온다. 이 전투의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47 열전 訥催傳에 보인다. 그리고 舊唐書 권199 상 열 전 백제전에는 武德 7년(624) 기사에 又相與新羅 世爲讐敵 數相侵伐 이라 하여 양국 사이의 잦은 전투를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에서는 榮留王(618~642)이 즉위하여 대외적으로 온건책을 추진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도 한동안 없었다. 이 시 기에 백제는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다. 623년 백제가 신라 勒 弩縣을 습격하였고, 624년에는 速含 櫻岑 岑 烽岑 旗縣 冗柵 등 6城을 함락시켰다. 이 들 지역은 함양 합천 산청 등은 신라의 왕도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들이었다(權悳永, 1997, 古代韓中外交史, 일조각, 189~194쪽 ; 정동준, 2002,`7세기 전반 백제의 대외정책a, 역사 와 현실 46, 54~55쪽). 이러한 백제의 공격에 대해 신라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111 220 26년(625) 겨울 11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21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7년(626)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명광개(明光鎧)807)를 바치고 고구려가 길을 막고 당나라 28년(627) 가을 7월에 왕은 장군 沙乞814)에게 명령하여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빼앗 에 조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였다.808) 고조는 散騎常侍809) 朱子奢810)를 보 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815) 왕은 신라가 침입해 빼앗은 땅을 되찾으려고 크게 군 내 와서 조서를 내려 우리와 고구려가 그 원한을 풀도록 달랬다.811) 대를 일으켜 熊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신라 왕 眞平이 이를 듣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王在城812)을 공격하여 성주 東所를 붙잡아 죽였다.813) 내 위급함을 고하니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816) 가을 8월에 왕의 조카 福信817)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은 [백제가] 신라와 대대 807) 명광개(明光鎧) : 黃漆나무 수액으로 황칠한 갑옷을 발라 광채가 나는 갑옷. 황칠을 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대단히 화려한 금휴개였다고 한다. 명광개는 어깨와 흉갑이 분리된 피박 분리형 갑 옷으로서, 어깨나 허벅지 등의 보호구는 찰갑으로 되어있고 가슴과 등판은 플레이트, 즉 철판으 로 되어있었다. 808) 明光鎧를 바치고 호소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625 년과 626년 에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조공로를 막는다고 당에 호소하였다. 809) 散騎常侍 : 중국의 관제. 秦代에는 散騎와 中常侍를 설치하였는데, 魏 黃初年間( )에 散 騎를 中常侍에 합하여 散騎常侍로 불렀다( 十通分類總纂 8 職官類 上 권51 散騎常侍條 및 十 通分類總纂 9 職官類 下 권54 唐官品條 참조). 隋代에는 散騎常侍를 폐하였으나, 당 태종 정관 원년(627)에 다시 설치하였고, 高宗 顯慶 2년(657)에 左散騎常侍와 右散騎常侍로 나누었다. 관 품은 正3品下이며, 過失을 규찰하고 고문에 대비하였다. 新唐書 권47 지 37 백관 2 門下省條 를 참조할 것. 810) 주자사(朱子奢) : 당 고조대의 인물로 문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蘇州 吳人으로 어려서 春秋左氏 傳 을 익힌 다음 諸子史를 두루 섭렵하여 수 양제 大業연간(605~616)에 관직에 올랐다. 수가 망하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가 당 고조 武德 4년(621)에 조정에 입사하여 종6품상 國子助敎로 임명을 받았다. 626년에는 백제에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와의 화호를 권하였다. 舊唐書 권189 상 열전 朱子奢傳에는 그의 삼국 파견기사로 채워져 있는 반면 新唐書 권198 열전 朱子奢傳에 는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기술되어 있다. 811) 고조는 그 원한을 풀도록 달랬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榮留王(建武王) 9 년조, 같은 책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9년조,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 그리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 그런데 당이 사신을 보내어 백제와 고구려가 원한을 풀 것을 설득 한 시기에 대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高祖代의 일로,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 전에는 太宗貞觀初 詔使者平其怨 이라 하여 태종대의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新唐書 백제전에는 朱子奢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가 당의 조공로를 막고 있다는 것을 보고하자 이에 당은 朱子奢를 파견하여 삼국을 돌며 회유하도록 하였다. 백제에게는 고구 려와의 원한을 풀라고 하고, 신라에게는 고구려와 連和하라고 했으며, 고구려에게는 백제와 신 라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였다. 당나라는 삼국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이고 공평한 자세를 유지하려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812) 王在城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8년(626)조에는 主在城으로 나오는데, 현재의 위치는 미상 이다. 813) 성주 東所를 붙잡아 죽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8년조에 보인다. 814) 沙乞 : 백제 무왕때 장군으로 신라를 공격한 바 있으나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사씨인 것으로 보아 당시 대성 8족의 하나일 정도로 사비시대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815) 왕은 장군 沙乞에게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 왕 49년(627)조에 보인다. 816) 왕은 신라가 침입해 빼앗은 땅을 그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 이 기사가 보여주는 내용은 본 서 신라본기 진평왕 49년조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만 나온다. 817) 福信 : 백제 무왕의 조카로 의자왕과는 4촌간이다. 무왕 28년(627)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 었으며, 장군의 직도 역임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한 저명한 인물이다.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무왕의 조카를 信福 으로 나오고 있으나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조와 본서 의장왕대 기록에는 福信 으로 나오고 있어서 동일인으로 이해된다. 그런데`唐劉仁願紀功碑a 와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조에는 鬼室福信으로 나온다. 따라서 복신의 성은 왕성인 부여씨 대신에 鬼室氏를 칭하고 있다. 흑치상지의 가문이 원래 왕족인 부여씨에서 후에 왕족에서 갈라 져 나와 흑치씨가 된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복신의 가문도 扶餘氏에서 分枝化되어 귀실씨 를 칭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연구, 일조각, 99쪽). 그런데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百濟公條에서 百濟公 因鬼神感化 故鬼室爲氏 라 하여 鬼室氏의 稱 姓 배경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福信의 일족이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姓氏의 유래를 수식하기 위 해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大東地志 5권 충청도 眞岑縣 典故조에는 百濟故將高福 神信 以眞岑城[密岩古城]臨江高險 加兵守之 라 하여 福信을 高福信 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 나 金正浩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복신의 성을 高氏 로 표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복 신의 성은 일본서기 나 신찬성씨록 및`대당평백제국비명a에 의거하여 鬼室氏 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신이 부흥군을 일으켰을 때의 관등은 新撰姓氏錄 권26 齊明紀 6년 9월조에 西部恩率鬼室福信 이라 한 것에서 보듯이 恩率로 나오고,`唐劉仁願紀功碑a에는 率로 나온 다. 복신이 무왕 28년에 당으로 使臣을 가는 등의 활약을 한 후 30여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112 222 로 원수가 되어 서로 빈번히 침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왕이 대대로 군장이 되어 동쪽 번병(東蕃)818)을 위무하고 있다. 바다 귀퉁이(海隅)819) 가 멀고 멀며 바람과 파도가 험하지만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서로 잇따르고, 더욱이 223 왔다.822) 30년(629)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1년(630) 봄 2월에 泗 의 궁궐을 수리하여 고치고, 왕은 熊津城823)으로 행차하였다. [경의] 아름다운 꾀를 생각하니 심히 기쁘고 위로가 되도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寵 여름에 가물어 사비의 공사를 그만두었다. 命)을 받들어 강토에 군림하고 정도를 넓히려고 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며, 배와 가을 7월에 웅진으로부터 돌아왔다.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천성과 천명(性命)에 따라 모두가 어 32년(631)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질고 또한 평안하게 하려 한다. 신라왕 金眞平은 짐의 번국의 신하이며 왕의 이웃 나 33년(632) 봄 정월에 맏아들 義慈를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824) 라인데, 매번 들으니 군사를 보내 정벌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군사를 믿고 2월에 馬川城825)을 고쳐 쌓았다.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은 바라는 바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 가을 7월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쳤으나 이롭지 못하였다.826) 왕은 生草의 벌판827)에서 신과 고구려 신라의 사신을 만나 함께 조칙을 내려 화해하도록 해서 모두 화목하고 자 받아들였다. 왕은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을 모름지기 잊고 짐의 본뜻을 알아서 이웃 나라와의 정을 함께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라. 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따른다고 하였 지만 속으로는 실제로 서로 원수짐이 옛날과 마찬가지였다.820) 29년(628) 봄 2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岑城821)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 관등이 恩率 또는 率밖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의 가문이 좌평이 아닌 솔계 관등에 임명될 정도 의 대성귀족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후 스스 로 佐平 관등을 참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노중국, 1995, 百濟復興軍의 復興戰爭 硏究, 歷史의 再照明, 한림과학원 및 2003, 백제부흥운동사연구, 일조각, 98~101쪽을 참조할 것. 818) 동쪽 번병(東蕃) : 동쪽의 藩國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백제를 지칭한다. 819) 바다 귀퉁이(海隅) : 우리나라를 비하하여 칭하는 말이다. 820) 왕이 대대로 군장이 되어 서로 원수짐이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 이 부분은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다만 문장 중에 글자를 고치거나 생략 또는 덧붙 이기 한 곳도 있다. 舊唐書 기사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은 무왕 37년조 의 기사에 나오는 것이다. 徽猷(嘉猷), 嘉慰(欣慰), 朕自祗承(朕祗承), 高麗新羅使人(高句麗新羅 使人), 璋因遣使(王因遣使). 821) 岑城 : 본서 권47 열전 奚論傳에는 岑城으로 나온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 詳地分에 나온다. 가잠성을 현재의 충북 괴산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1980, 앞의 책, 118쪽)와 현재의 경기도 安城郡 竹山面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1997, 앞의 글, 77쪽). 이에 대해 서는 앞의 주 781)과 791)을 참조할 것. 822) 신라의 岑城을 돌아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0년(628)조에 보 인다. 823) 熊津城 : 부여로 천도하기 이전의 백제의 왕도로 현재의 충남 공주시이다. 웅진은 사비시대 5방 중에 북방에 해당하는 성으로 왕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행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시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을 포위하였을 때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 요한 곳이었다. 824) 맏아들 義慈를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 무왕의 재위기간은 42년간이다. 그런데 무왕은 재위 33년이라고 하는 늦은 시기에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있다. 그 배경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 으나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일본서기 권23 舒明紀 3년조에 三月 百濟義慈王入王子豊 璋爲質 이라는 기사이다. 이 기사의 舒明 3년은 631년으로 무왕 32년에 해당되므로 의자왕은 무왕으로 고쳐 보아야 할 것이며, 豊璋도 무왕의 아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사 에 의거할 때 무왕은 왕자 풍장을 왜에 보낸 이듬해에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한 셈이 된다. 여기에는 아마도 의자의 태자 책봉을 지지하는 세력과 풍장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론된다. 이 과정에서 의자의 경쟁세력인 풍장이 왜에 인질로 추방당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鄭孝雲, 1990, 7世紀代의 朝日關係의 硏究(上) -白 江戰에의 倭軍派遣 動機를 중심으로-, 考古歷史學志 5 6합집, 151~154쪽 ; 김수태, 1992, 百濟 義慈王代의 太子冊封, 百濟硏究 23, 147~151쪽 ; 양기석, 1995, 백제 부여융묘지명 에 대한 검토, 국사관논총 62, 148쪽 및 본서 권28의 주 998)을 참조할 것. 825) 馬川城 : 이 기사 이외에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5년 7월조에 마천성을 수리했다는 가사가 나오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를 옛이름 마산현과 같은 곳으로 보아 현재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422쪽), 분명치 않다. 826)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쳤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 이 내용은 본서 신라본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827) 生草의 벌판(生草原) : 이 기사 이외에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9년 8월조에는 여자 시체가

113 224 사냥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4년(633)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의 西谷城828)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빼앗았다.829) 225 엄하고 화려하였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行香831)을 하였다. 3월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832)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언덕 가장자리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方丈仙山833)에 비기었다. 35년(634) 봄 2월에 王興寺830)가 낙성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 生草津에서 떠올랐다는 기사가 나온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부여 근처의 백마강 변인 듯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828) 西谷城 : 서곡성을 加西谷의 약칭으로 보아 고령 동쪽의 우곡면 일대인 新復縣으로 보는 견해 (전영래, 1985, 백제남방경역의 변천,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55쪽)와 거창군 가조면으로 보는 견해(김태식, 1996, 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 : 교섭과 정복,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 백제연구소, 78쪽)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무왕은 서곡성을 차지하여 거창지역을 장악한 후 낙동강 서변에 진출하여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지역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 고자 하였다. 829) 신라의 西谷城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빼앗았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2년조에는 西邊을 공격한 것으로 나온다. 830) 王興寺 : 백제 왕흥사는 이 기록(634) 이외에 본서 권27 백제본기 법왕 2년(600) 춘정월조에 의 하면 왕흥사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두었다. 는 기록과, 의자왕 26년(660) 6월조에 왕흥사 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는 기록이 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11월 5일조에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 사잠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7일만에 승리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7백명의 머리를 베었다. 는 기 록이 나온다. 그리고 三國遺事 권3 興法篇 法王禁殺條에 創王興寺於時都泗城 始立栽而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란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왕흥사는 사비 시대 후기 백제 왕실에서 운영하던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왕흥사 는 법왕 2년(600)에 창건되어 무왕 37년(634)에 완공되어 왕흥사의 건립에 무려 34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이 걸려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왕흥사지에 대한 2007년도 제8차 발굴조사에 의해서 왕흥사가 위덕왕 24년(577)에 창건되었음이 새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 조사 에서 목탑지의 정확한 규모와 심초석 사리함을 확인하였고, 동서 석축과 남북 석축의 규모 및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목탑 심초부의 사리장엄구 및 옥 금 청동으로 만들어진 각종 진단구,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소조광배 등 백제시대의 와전류 등이 확인되었 다.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전성기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 은 동 사리기가 봉안된 사 리 장엄구 뿐 아니라 위덕왕 당시의 왕흥사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기록도 나왔다. 명문은 사리 함 동체부에 5자 6행의 음각체로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 라고 적혀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의 뜻이다. 이 명문을 통해 위덕왕이 왜에 사신 을 보낸 阿佐太子 이외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하였다. 아울러`창왕명석조 사리감a명문과 함께 백제 왕실에서 신봉된 사리신앙이 왕실의 신성성 확립에 기능하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831) 行香 : 香爐를 쥐고 佛會中을 繞行하는 불교의식을 말한다. 제왕이 行香할 때에는 자신은 輦을 타고 繞行할 뿐이고 타인이 향로를 쥐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는 入朝 焚香 叩 拜하는 것도 행향이라고 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17쪽). 공양 중에 香 공양이 으뜸이다. 부처님은 香 燈 茶 꽃(花) 열매(果)의 다섯 가지 선물 가운데 향을 제일 좋아하는 품목이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극락정토를 香國이라 부르고, 절집 도량을 香界라 하고 수행자들을 香徒로 일컫는다. 832)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 이때 만들어진 못이 別宮의 苑池로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에 있는 宮南池로 추정된다. 이 궁남지의 현재의 면적은 13,772평이나 옛날에는 수면이 3만여 평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규모 때문에 궁남지가 풍류의 장소뿐만 아니라, 적을 막기 위한 外 濠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의 유적을 살펴볼 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곡 선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연못은 자연형의 曲池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궁 남지 동편에는 花枝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그 서쪽 기슭, 즉 궁남지로 면하는 완만한 경사지 에는 대리석으로 바닥으로부터 팔각형으로 쌓아올린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위 일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산재한다. 이 자리는 백제의 사비정궁의 남쪽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이궁터로 추정 되고 있으며, 이것으로 보아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로 꾸며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궁남지 는 백제의 조경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적으로 日本書紀 에는 궁남지의 조경 기술이 일본에 건 너가 日本의 池泉庭園의 원류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1980, 앞의 글, 394쪽). 이 궁남지는 史蹟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래 궁남지를 발굴한 결과 백제 말기의 木簡이 출토 되었다. 833) 방장선산(方丈仙山) : 蓬萊 瀛州와 더불어 三神山의 하나이다. 발해 동쪽에 큰 구학(溝壑)이 있 고 그 가운데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세째 산을 方壺 또는 方丈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옛 설화 에는 삼신산에는 仙人과 不死藥이 있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만들었다고 한다. 궁남지의 섬 은 30여 년 전에도 못의 중앙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이것을 뜬섬이라 고 부르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부터는 토기와 가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었다. 이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판단된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 한 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세 개의 섬, 즉 蓬萊 方丈 瀛州의 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정원의 연못 속에 세 개의 섬을 꾸며 불로장수를 희원했다고 하는데, 궁남지의 방장선산은 이것을 본뜬 것으로서, 이러한 꾸밈

114 226 을 쉬게 하였다. 신라 장군 閼川840)이 군사를 거느리고 엄습해 와서 이를 쳐서 무찔렀다. 37년(636) 봄 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泗 河834)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우소는 큰 돌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막아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져 사로잡혔다.841) [포구의]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奇巖怪石)이 들쭉날쭉 서 있고, 간간이 기이하 6월에 가물었다. 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 가을 8월에 望海樓842)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고 거문고(琴)835)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 차례 춤을 추었다. 당 시 사람들은 그곳을 大王浦라고 불렀다.836) 38년(637) 봄 2월에 왕도에 지진이 일어났다. 3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837) 여름 5월에 장군 于召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500명 을 이끌고 가서 신라의 獨 838) )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철제 갑옷과 조각한 도끼(彫斧)를 바쳤다. 태종이 두 山城 을 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玉門谷 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사졸들 텁게 위로하고 비단 도포(錦袍)와 채색비단 3천段843)을 하사하였다.844) 새의 정원을 神仙庭園이라고 부른다. 834) 泗 河 :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으로 흘러가는 白馬江을 말한다. 835) 거문고(琴) : 거문고에 대해서는 본서 권32 잡지 樂志 참조. 백제의 악기에 대해 舊唐書 권29 志 9 音樂 2에는 箏 笛 桃皮 등의 이름이 보이고,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에는 鼓角 箏 笛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거문고(琴)는 고구려의 음 악에서 쓰인 현악기의 하나이다. 琴은 문자상으로 중국의 七絃琴을 의미하지만, 이는 王山岳이 중국의 七絃琴을 개조하여 만들었다는 玄琴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安岳 3호분, 輯安 17호분, 舞踊塚, 江西大墓, 臺城里 1호분, 通溝 12호분, 長川 1호분, 通溝五 墳 4호묘 같 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악기 연주 그림으로 보아, 4 5세기 당시 고구려에서 쓰인 악기는 중국 의 琴이 아니라 玄琴 또는 그의 원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宋芳松, 1985, 韓國古代音樂史硏 究, 쪽). 836) 大王浦라고 불렀다 : 비슷한 내용이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南夫餘 前百濟條에 보인다. 837) 갑옷 입은 군사 500명 :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처음에 500명이 왔고, 후에 또 1,200명이 왔다가 모두 전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838) 獨山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의 신라측 지명으로 나온다. 이 獨山城은 신라 백제 사이의 전투지역으로서 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에 비정됨)과 같이 병기되 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경북 星州郡 禿用山城으로 비정할 수 있다. 독용산성에 대해서는 대구대학교, 1992, 星州 禿用山城 地表調査報告書 를 참조할 것. 한편 본서 권3 신라본기 奈勿 麻立干 38년(393)조에 보이는 獨山은 현재의 경북 迎日郡 神光面에 있는 獨山에 비정되므로 본 기사의 독산과는 다르다. 839) 玉門谷 : 7세기 전반에 신라와 백제간의 전투가 자주 일어나던 곳으로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 왕 5년조, 같은 책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8년(648) 4월조 및 권41 열전 김유신전 上에도 나온 다. 그 위치에 대해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富山下 女根谷(현재의 경북 경주시 건천읍)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군이 신라 왕도인 경주와 가까운 곳인 여근곡에 와 서 군사를 매복하였다는 것과, 백제 장군 于召가 南山嶺石上에 숨었다고 하는 삼국유사 의 기 록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서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및 열전의 내용을 종합할 때 백제 장군 于召가 獨山城을 치기 위해 옥문곡에 와서 매복해 있었다 하고, 신라 장군 김유신이 大梁 城(현재의 경남 陜川) 밖에서부터 백제군을 유인하여 옥문곡에 복병을 두었다가 크게 격파했다 고 하므로 옥문곡의 위치는 경북 星州와 경남 陜川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밖에 이를 현재의 경남 가야면으로 보는 견해(金泰植, 1997, 앞의 글, 75 82쪽)와 신증동국여 지승람 권28 성주목 산천조의 汝斤乃로 보는 견해(문안식, 2006, 앞의 책, 400쪽)도 있다. 840) 閼川 : 신라 善德女王代의 장군으로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角干 閼川으 로 나온다. 선덕여왕 5년(636) 5월에 장군, 동왕 6년(637) 7월에 대장군이 되었고, 진덕여왕 원 년(647) 2월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眞德王條에는, 그가 진덕 왕대 우지암에서 열린 6명의 귀족회의에서 首席에 앉아 있었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 따르면, 그는 진덕여왕이 죽은 후에 군신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 기도 하였으나,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여 거절하고 庾信과 함께 이찬 春秋를 맞 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고 한다. 841) 우소가 玉門谷에 이르러 사로잡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여왕 5년조와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 보인다. 그런데 선덕여왕지기삼사조에는 富山下果 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竝取殺之 百濟將軍于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有後 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라 하여 백제 군사가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해 왔다가 모두 패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842) 望海樓 : 무왕 35년(634)에 만들었다고 하는 方丈仙山이 있는 宮南池 가에 축조한 樓인 듯하다. 신라의 雁鴨池와 臨海殿은 이것의 모방일 것이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17쪽 ; 李基白, 1986, 望海亭과 臨海殿,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참조). 843) 段 : 중국에서의 度量衡의 단위로 포목 한 필의 반을 말한다. 844) 태종이 하사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런데 冊

115 년(638) 봄 3월에 왕은 嬪과 더불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帶方郡王百濟王 扶餘璋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멀리서 正朔851)을 받고, 보배를 바치 40년(639) 겨울 10월에 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금제 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며 글월을 올려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는데, 갑자기 죽으니 깊이 슬퍼하고 추도한다. 41년(640) 봄 정월에 살별(혜성)이 서북쪽에서 나타났다. 마땅히 일상의 예에 더하여 애도의 영예를 표하노라. 845) 846) [태종이 왕에게] 光祿大夫852)를 추증하고853) 賻儀854)를 두텁게 내렸다. 2월에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國學 에 입학할 것을 요청하였다. 42년(641)847) 봄 3월에 왕이 죽었는데, 시호를 武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고 말하였다. 황제가 玄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外臣848)인 扶餘璋849)이 죽었다. 권28 百濟本紀 6 義慈王855) 武門에서 哀悼式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먼 나라를 위무하는 방법은 총애하여 내리는 칙명(寵命)보다 나은 것이 없고, 죽은 사 850) 람의 최후를 장식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도 막힘이 없는 것이다. 고인이 된(故) 柱國 符元龜 권970 外臣部 朝貢 3 唐太宗 貞觀 11년 12월조에 百濟王夫餘璋遣太子隆來朝幷獻鐵甲 雕斧帝優勞之 라 하여 당에 사신으로 간 사람을 夫餘璋(무왕)의 태자인 隆이라고 하고 있다. 그 러나 본서 무왕 33년조에는 원자인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고 있으므로, 책부원귀 에 보이는 隆 은 무왕의 태자가 아니라 왕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왕의 왕자로 隆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도리어 隆은 의자왕의 태자로 나온다(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4년). 845) 國學 : 본 기사의 국학은 당나라 태종이 자주 국자감에 行幸하였다고 한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국자감을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의 최고교육기관인 國子監은 國子學 太學 四門學 律學 書 學 算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중 국자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文武三品以上子孫若從 二品以上曾孫及勳關二品縣公京官四品帶三品勳封之子 였다( 新唐書 권44 志 34 選擧志 上 참 조). 846) 國學에 입학할 것을 요청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신라본기 선덕여왕 9년조와 新唐書 권 44 志 34 選擧志 上과 資治通鑑 권195 唐紀 16 貞觀 14년(640) 2월조에 보인다. 선덕여왕 9 년조의 기사는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 增築學舍千二百間 增 學生萬三千二百六什員 於是 高句麗 百濟 高昌 吐蕃 亦遣子弟入學 으로 되어 있다. 그 러나 新唐書 에는 唐의 국학에 자제의 입학을 요청한 나라 중에는 신라가 빠져있다. 무왕의 맏아들이다. 씩씩하고 용감하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856) 무왕이 재위 33년 에 태자로 삼았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海東曾子857) 柱國은 明代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勳位가 되었다. 高麗의 경우 상주국은 正二品이었고, 주국은 從二品이었다. 고려사 권77 志 37 百官 2 勳條를 참조할 것. 851) 正朔 : 해의 처음과 달의 처음인 정월 초하루를 뜻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달력을 달리 일컫는 말 이다. 852) 光祿大夫 : 당의 文散階의 하나. 당의 文散階는 모두 29등급으로 되어 있는데, 光祿大夫는 從2 品이었다( 新唐書 권46 志 36 百官 1 吏部). 853) 먼 나라를 위무하는 방법은 光祿大夫를 추증하고 : 동일한 내용이 新唐書 권220 열전 백 제전에 나온다. 854) 賻儀 : 喪家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건으로 香奠 香料라고도 한다. 舊唐書 권199 상 열전 품이고 上柱國은 정2품으로 모두 職事가 없는 명예관이라 하겠다. 중국의 경우 上柱國은 본래 백제전에는 賻物二百段 으로 나온다. 855) 義慈王 : 백제 제31대 왕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재위기간은 년이다. 무왕의 맏아 들로 무왕 33년(632)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 왕대에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는 없고 이 름으로 된 왕호만 남았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海東曾子로까지 칭송을 받 기도 하였지만 말년에 사치와 귀족들의 내분으로 통치체제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또 빈번한 전 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움에 빠졌다. 결국 660년 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였다. 의자왕은 당에 항복을 한 후 태자 왕자 및 대신들 그리고 백 성 1만 2천여 명과 함께 당에 포로로 잡혀가 곧바로 그곳에서 병사했다. 856) 씩씩하고 용감하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도 百濟末 王義慈 乃虎(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로 나온다. 857) 海東曾子 : 海東은 발해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는 이름이다. 曾子는 이름이 曾參이며 字는 子輿이다. 생존기간은 B.C 년까지이다. 중국 春秋시대 魯나라 戰國시대에 楚나라의 벼슬이름으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공신에게 수여하였다. 그 후 上柱國 의 유학자이고 孔子의 제자로서 그를 높혀서 曾子라고 하였다. 그는 효도를 역설하였으며, 공자 847) 42년 : 무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庚申立 理四十一年 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848) 外臣 : 중국은 황제의 통치권내에 있는 신하를 內臣이라 하고, 주변의 이민족의 경우 外臣이라 하였다(栗原朋信, 1978, 上代日本對外關係の硏究, 吉川弘文館, 27~32쪽). 849) 扶餘璋 : 백제 무왕의 이름이다. 850) 柱國 : 勳의 하나. 훈에는 上柱國과 柱國이 있었다. 구당서 권42 직관지에 의하면 柱國은 종2

116 230 라고 불렀다.858) 무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나라] 太宗은 祠部郞中859) 鄭文表860) 를 보내 왕을 책봉하여 柱國861)帶方郡王862)百濟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2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863) 231 2월에 왕은 주 군을 순행하면서 위무하고 죄수를 살펴서 죽을죄(死罪)를 빼고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城 등 40여 성864)을 빼앗았 다.865) 8월에 장군 允忠866)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신라의 大耶城867)을 공격하였다. 성주 의 덕행과 학설을 정통으로 祖述하여 이를 공자의 손자 子思에게 전하였다. 孝經 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海東曾閔 으로 나온다. 한편 扶餘隆墓誌銘 에 는 果斷沈深 聲芳獨 趨藁街而沐化 績著來王 登棘署以開榮 慶流遺胤 으로 나온다. 858)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海東曾子라고 불렀다 : 동일한 내용이 新唐書 권220 열전 백 제전에 나오고,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도 나온다. 앞의 주 856)을 참조할 것. 이 기사에 대하여 의자왕의 유교에 대한 관심 차원에서 이해하는 견해가 있지만(노중국, 1988, 앞의 글, 208~209쪽), 의자왕이 태자로 책봉된 후 왕위계승 과정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왕제들 의 반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 왕족들과의 원활한 유대관계를 맺기 위한 측면으로 보는 견해(김수태, 1992, 백제 의자왕대의 정치 활동, 한국고대사연구 5, 62쪽)가 보다 설득력이 있다. 859) 祠部郞中 : 당나라 禮部 산하의 관청인 祠部에 두어진 관직. 祠祀 享祭 天文 漏刻 國忌 등 의 일을 담당하였으며, 品階는 從5品上이다. 舊唐書 권42 직관 1 從5品上階 및 新唐書 권 45 백관 1 禮部 참조. 860) 鄭文表 :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 의자왕이 즉위하자 책봉사로서 백제에 왔다. 이외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861) 柱國 : 勳의 하나. 훈에는 上柱國과 柱國이 있었다. 구당서 권42 직관지에 의하면 柱國은 종2 품이고 上柱國은 정2품으로 모두 職事가 없는 명예관이라 하겠다. 중국의 경우 上柱國은 본래 戰國시대에 楚나라의 벼슬이름으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공신에게 수여하였다. 그 후 上柱國 柱 國은 明代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勳位가 되었다. 본서 권27 주 850)을 참조할 것. 862) 帶方郡王 : 郡王은 당나라의 封爵制의 하나로서 종1품이다( 新唐書 권46 志 36 백관 1). 따라 서 帶方郡王도 종1품의 封爵이라 할 수 있다. 570년 이후 중국왕조는 삼국 왕을 책봉할 때 고구 려는 遼東郡公에, 백제는 帶方郡公으로, 신라는 樂浪郡公을 각각 수여하였다. 863)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당나라와의 교섭은 즉위초에 당나라의 무왕에 대한 조의 표 시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듬해 정월에도 대당교섭이 이어지고 있는데, 즉위초에 일어난 정변 수습책과 관련있어 보인다. 의자왕 즉위초의 정변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권24 황극기 원 년(642) 2월조에 보이고 있다. 이에 의하면 642년 정월에 모후가 사망하자 동생 왕자의 아들인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의 여동생 4명의 왕족들, 內佐平 岐味를 비롯한 명망 높은 가문 출신 40 여 명이 섬으로 축출된 사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정변은 의자왕이 모후가 죽은 뒤 정적을 제거 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친위정변을 단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정변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 자왕과 기존의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귀족세력간의 갈등과 알력의 산물로 이해된다(노중국, 1988, 앞의 책, 208~209쪽). 그런데 이 정변이 일어난 황극기 원년 기사의 신빙성 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있다. 이는 연개소문 정변 기사와 사택지적의 사망기 사가 문제의 사단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을 황극 2년 즉 의자왕 3년(643)으로 수정해 보 는 견해와 황극기 기사가 아니라 齊明紀 기사로 크게 수정하여 의자왕 15년(655)으로 보는 견해 (이도학, 1997, 일본서기의 백제 의자왕대 정변기사의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11, 410~413 쪽) 등이 있다. 이러한 황극기 원년 기사는 사택지적의 사망과 같은 일부 착오가 있지만 사건 자 체를 다른 시기로 옮겨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생긴다. 황극기 원년 기사 그대로 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측면에서 당과의 교섭이나 주 군의 순행과 죄수사면을 통해 민심 수람 그리고 미후성 등 신라 공격의 일련의 사건들이 즉위초의 정변과 관련하여 자연스럽 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정변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8, 앞의 책, 208~209쪽 ; 奧田尙, 1988, 皇極紀の百濟政變記事について, 追水門學院大學文學部紀要 21 ; 鈴木英夫, 1996, 大和改新直前の倭國と百濟, 古代の倭國と百濟 ; 김수태, 1992, 앞의 글, 63쪽 ; 연민수, 1997, 백제의 대왜외교와 왕족, 백제연구 27, 207쪽 ; 정효운, 1997, 7세기 중엽의 백제 와 왜, 백제연구 27, 224쪽 ; 이도학, 1997, 앞의 책, 410~413쪽 등을 참조할 것. 따라서 이 때 당나라와의 교섭은 반대세력 숙청과 관련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외교적 조치로 이해된다. 864) 미후성( 城) 등 40여 성 : 미후성을 포함한 40여 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서는 지금의 88고속도로 주변에 위치한 신라의 성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1997, 고대국가의 성장과 교통로, 국사관논총 74, 213쪽)와 무왕이 624년에 차지한 함양의 속함성 등 6개의 성으로부터 동쪽인 의령 합천 고령 성산 칠곡 구미 등 낙동강 이서의 대부분 지역으로 이 해하는 견해(김병남, 2001, 백제 영토사연구, 전북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2쪽)가 있다. 이 전쟁은 민심 수습과 함께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고 정변에 따른 귀족들의 불만을 대외적으로 발 산시키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조치라 할 수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209쪽). 865) 왕은 친히 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642)조에는 國西四十餘城 으로 나온다. 그런데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明年 與高麗連和伐新羅 取四十餘城 發兵守之 라 하여 백제가 고구려와 連和한 후 40여성을 공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의 明年은 당 태종 貞觀 16년(642)이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와 連和하여 신라에 압박 을 가한 것은 본권에는 의자왕 3년(643)의 일로 되어 있어 1년의 시차가 있다.

117 品釋868)이 처자869)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에 전달 겨울 11월에 왕은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黨項城872)을 빼앗아 [당나라에] 조공하는 하였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길을 막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보내 공격하니 신라 왕 德曼(선덕여왕)이 당나라에 870)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873) 왕이 그 말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4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은 司農丞874) 相里玄奬875)을 3년(643)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871) 866) 允忠 : 백제 의자왕대의 인물로 신라의 大耶城을 함락시켜 도독 品釋을 죽였다. 이외에 구체적 인 행적은 알 수 없다. 867) 大耶城 : 오늘날의 경남 합천지방을 말한다. 본서 권34 地理 1 康州條에 江陽郡 本大良[一作耶] 州郡 景德王改名 今陜州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본서 권41 열전 金庾信傳 上에는 大梁州로 나온다. 대야성은 육십령과 팔랑티를 넘어 가야지역으로 진출한 백제군을 방어하면서 경남 서부 지역을 통괄하는 전략적 요층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야성과 마주하는 黃江 건너의 합천군 대양 면 정양리의 고소산성과 용주면 성산리의 갈마산성에는 백제의 윤충장군이 대야성을 공격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문안식, 2006, 앞의 책, 407쪽). 868) 品釋 : 김춘추의 사위. 그는 이찬으로서 대야성의 성주[大耶州 都督]로 있다가 백제장군 윤충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幕客인 舍知 黔日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원한 을 산 적이 있었으므로 선덕왕 11년(642)에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자 黔日은 毛尺 등과 백제와 내응하였다. 그래서 城이 함락되고 품석 夫妻도 죽어 유골은 그곳 옥중에 묻혔다. 그 후 김유신 이 진덕여왕 2년(648) 玉門谷 전투에서 크게 이겨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아 이들을 품석 夫妻 의 유골과 맞바꾸어 송환한 바 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조와 같은 책 권41 열전 김 유신전 上 및 같은 책 권47 열전 竹竹傳 참조. 869) 처자 : 대야성 도독 품석의 처에 대해 본서 권41 열전 김유신전 上에는 春秋公女子古陀炤娘從 夫品釋死焉 이라 하여 古陀炤娘 으로 나온다. 870) 윤충은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조와 같은 책 권41 열전 金庾信傳 上에는 간단히 나오나 같은 책 권47 열전 竹竹傳에는 상세히 나온다. 871)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대야성 전투에서 사위 품석 부부의 피살은 김춘추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 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이를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몸소 고구려에 가 도움을 요청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땅의 반환을 전제조건으로 내 세움으로써 김춘추는 아무 성과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원조를 얻기 어렵다고 판 단한 신라는 다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로, 당으로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신라의 모습에서 당시 대야성 전투는 신라의 백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얼마 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872) 黨項城 : 오늘날의 경기도 南陽지방에 비정된다. 중국과 통교하는 데 요충지였다. 新唐書 권 220 백제전에는 黨이 棠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역은 본래 백제지역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 이 한성을 점령하면서 唐城郡이라 하였고, 후일 신라 진흥왕이 이곳을 차지한 후 경덕왕이 唐恩 郡으로 고쳤다. 본서 권35 雜志 地理 2 漢州 唐恩郡條에 唐恩郡 本高句麗唐城郡 景德王改名 今 復故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이 당항성을 남양만에 위치한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의 해발 160m의 구봉산의 唐城에 비정된다. 당성은 둘레 1,200m의 산성으로 서해와 태안반도 일대가 조망되는 요충지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병모 김아관, 1998, 당성 -1차발굴조사보고서 ; 배 기동 박성희, 2001, 당성 -2차발굴조사보고서, 화성군 한양대박물관을 참조할 것. 873) 신라 왕 德曼(선덕여왕)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 제전과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642) 8월조에 보인다. 신라본기에는 백제가 당항성을 공격하려 한 것과 允忠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都督 品釋을 죽인 일을 모두 이해 8월조에 기록하 고 있다. 그러나 백제본기에서는 윤충의 대야성 공격의 연월은 신라본기와 동일하나, 당항성 공 격의 연월은 643년으로 나와 신라본기보다 한해가 늦고 또 月도 백제본기에는 11월로 되어 있 어 신라본기의 8월과 차이가 난다. 이때의 당항성 공격 계획은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와 당 의 교통로의 주요 거점인 당항성을 탈취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사건은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 하고, 그 소식을 들은 의자왕이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미처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이 사 건은 삼국과 당이 모두 연루된 것으로 신라에 의해 주장된 백제와 고구려의 連和說을 신빙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와 같은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변화를 642년에서 643년의 일로 보고 있 는데,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1,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역관계변화에 대한 일고찰a, 동방학지 28, 96쪽 ; 정효운, 1990,`7세기代의 한일관계의 연구(上) -백강구전에의 왜국파 견 동기를 중심으로 -a, 고고역사학지 5 6, 146~147쪽 ; 김수태, 1991, 앞의 글, 162쪽 ; 山 尾幸久, 1992, 7世紀 中葉 東아시아a, 백제연구 23, 179~180쪽 ; 김수태, 2004,`삼국의 외교적 협력과 경쟁 - 7세기 신라와 백제의 외교전을 중심으로 -a, 신라문화 24, 29쪽 등을 참고할 것. 반면 의자왕대 연화설은 신라가 지속적으로 주장한 사실에 불과한 것으로 사실이 아 닌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 文館詞林 唐太宗與百濟義慈王書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연화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려제간의 연화설은 신라가 구원요청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으로부터의 위협을 과장하여 양국이 함께 신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호영, 1982,`麗 濟連和說의 檢討a, 慶熙史學 9 10합집, 30쪽 ; 박윤선, 2006, 앞의 글, 120 ~125쪽을 참조할 것.

118 234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니876) 왕은 표를 보내어 사과하였다. 왕자 隆877)을 태자로 삼고 크게 235 사면하였다.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7개의 성을 빼앗았다.878) 874) 司農丞 : 당나라 九寺 중 하나인 司農寺에 속한 관리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大倉 大苑 農園 및 溫泉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구당서 권44 직관지와 新唐書 권48 百官 3 司農寺에 의하 면 장관인 卿(從三品上) 1인과 少卿(從4品上) 2인, 丞(從六品上) 6인, 主簿(從7品上) 2인 등의 관 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사농승은 司農寺의 실무를 관장하며, 천하의 租를 京都에 운 송하고 검열 납입시켜 國用에 지출하고 百官의 祿을 지급하는 일을 맡았다. 이에 의하면 사농 승의 품계는 종6품상이고 정원은 6명으로 되어 있다. 875) 相里玄奬 : 相里는 複姓이고 이름은 玄奬이다. 그는 643년 9월에 당 태종의 친서를 가지고 본국 을 떠나 다음해인 644 정월에 고구려의 평양에 도착하여 태종의 친서를 전하고 신라 공격을 중 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빼앗긴 땅 500里를 거론하였으므로, 그는 요동이 원래 중국 땅이었음을 상기시켰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장은 644년 2월 乙巳朔 에 귀환하여 태종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그 외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876) 태종은 두 나라를 타이르니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고구려전,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과 고구려전,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3년(644)조, 같은 책 권 21 고구려본기 寶臧王 3년(644)조에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199 상 열전 신라전에는 정관 17년(643)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 한 해가 빠르다. 645년까지 7세기 전반 백제와 당의 관계는 삼국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삼국이 모두 당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이다. 무왕대 백제와 당의 교류는 31회로 같은 기간 고구려 의 28회, 신라의 26회에 비교하여 가장 많은 횟수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백제가 당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은 기본적으로 삼국 가운데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삼국 모두에게 공평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당의 정책은 삼국을 번국으로 이해하는 당의 주변국가에 대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당이 어느 한 나라를 지지하고 다른 나라는 배척하기보다 당의 질서 내에 편입된 국가들을 모두 번국 에 위치시키고, 그들이 그 질서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 당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 계였다. 877) 隆 : 의자왕의 아들. 扶餘隆墓誌銘 에는 公諱隆 字隆 百濟辰朝人也 로 나온다. 의자왕 4 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의자왕 20년(660)에 백제가 멸망한 후 당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 후 그는 唐나라의 以夷制夷 정책에 의해 熊津도독으로 임명되어 돌아와 백제의 유민들을 회유하 고, 신라 문무왕과 就利山에서 盟約을 맺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죽었다. 당나라 高宗 永淳 元年(682)에 그의 묘비가 세워졌으며 현재 中國 河南省 鄭州市 河南博物院 1 층 石刻藝術館에 전시되어 있다. 隆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 黃淸連, 1993,``扶餘隆墓誌a에서 본 唐代 韓中關係a, 百濟史의 比較硏究, 忠南大 百濟硏究所 ; 양기석, 1995,`百濟 扶餘隆 墓誌銘에 대한 檢討a, 國史館論叢 62를 참조할 것. 의자왕의 아들에 대해서는 각 사서에 41명(본서 권28 의자왕 17년 정월)과 13인( 일본서기 권 26 齊明紀 6년 추7월)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름이 전하고 있는 아들은 孝 泰 隆 演 扶餘康 信 등이다. 그 중 태자에 임명된 경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태자를 융 한 명 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1995, 백제 부여융 묘지명에 대한 검토, 국사관논총 62, 140~153 쪽), 태자를 효 한 명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21쪽), 효가 첫 번째 태자였다가 이후 왕비 恩古의 아들 융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는 견해(김수태, 1992, 앞의 글 참조), 그리고 융이 먼저 태자이고 은고의 아들 효로 교체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2004, 백제 의자왕대 의 정치변동에 대한 검토, 동국사학 40, 95~107쪽 ;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 각, 32쪽 ; 장인성, 2005, 해동증자 백제 의자왕, 한국인물사연구 4, 217~219쪽) 등이 있 다. 이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본서 권28 의자왕 4년조에는 태자 隆이, 20년조에는 태자 孝가 나온다. 隆을 태자라고 한 자료로는 본 기사 외에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의 於是 王及太子隆王子泰 라는 기사,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의 太子 隆 小王 孝 라는 기사,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의 故立前太子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라 한 기사, 舊唐書 권109 열전 黑齒常之傳의 時定方執老王及太子隆等 이라 한 기사,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傳의 其王義慈及太子隆 이라 한 기사, 新唐書 권11 열전 蘇定方傳의 王義慈及太子隆 이라 한 기 사,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碑銘a의 其王扶餘義慈及太子隆自外王餘孝 라 한 기사,`唐劉仁願紀功碑a의 執其王扶餘義慈竝太子隆 이라 한 기사,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 년조에 인용된 高麗沙門 道顯이 쓴 日本世記 의 所捉百濟王以下太子隆等諸王子十三人 이라 한 기사 등이다. 반면 태자 孝說을 보여주는 자료는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가 있다. 이 두 설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는 분명히 하기 어렵다. 한편 冊府元龜 권970 外臣部 朝貢 3 당태종 貞觀 11년 12월조에 百濟王扶餘璋遣太子隆來朝 幷獻鐵甲雕斧 帝優勞之 라 하여 부여융이 무왕의 태자로 나온다. 그러나 무왕의 태자는 義慈임이 분명하므로 이는 잘못이라 하 여야 할 것이다. 또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 3 당태종 정관 19년 정월조에 百濟太子扶餘 康信延陀新羅吐谷渾吐蕃契丹火羅葉護沙鉢羅葉護于同娥康國靺鞨等遣使來賀 各貢方物 이라 하 여 太子 扶餘康信이 보인다. 그러나 당태종 貞觀 19년(645)은 의자왕 5년인데, 백제 본기 의자왕 4년조에 의자왕은 왕자 隆을 태자로 삼고 있어서 扶餘康信을 태자로 표현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것이며, 강신은 의자왕의 왕자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점은 文館詞林 에 실 린 唐太宗與百濟義慈王書 (이기백, 1987, 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부록, 일지사 참조)에는 단순히 康信으로만 나오고 있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의 태자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 는 김수태, 1992, 百濟 義慈王代의 太子冊封, 百濟硏究 23 및 2007, 앞의 글, 55~62쪽 ; 이도학, 2004, 앞의 글, 95~107쪽 ; 노중국, 2003, 앞의 책, 32쪽 ; 장인성, 2005, 앞의 글, 217~219쪽 등을 참조할 것. 878) 신라 장군 庾信이 7개의 성을 빼앗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3년 (644)조에 나오는 데 이때의 庾信의 직함은 大將軍으로 되어 있다. 한편 본서 권41 열전 김유신

119 년(645) 여름 5월에 왕은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腰車城885)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 징발하였다879)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7개의 성을 습격하여 빼앗으니880) 신라 다.886) 는 장군 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7년(647) 겨울 10월에 장군 義直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茂山城881) 아 여름 4월에 玉門谷887)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888) 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甘勿城882)과 桐岑城883) 2개의 성을 공격하였다. 신 라 장군 유신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말 한 필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884) 전 상에는 김유신이 이해 9월에 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加兮城 省熱城 同火城 등 7개 성을 공 취한 것으로 나온다. 879) 태종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4년조에는 夏五月 太宗親征高句 麗 王發兵三萬以助之 로 나온다. 880) 왕은 신라의 7개의 성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4 년조,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10개 의 성을 공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 7개의 성을 본서 권41 열전 金庾信傳 上에 나오는 買利浦城等 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421쪽). 그 7성의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선덕여왕 13년(644) 9월에 김유신에게 빼앗겼던 加兮城(고령군 우곡면) 省熱城(의령 군 부림면) 同火城(구미시 인왕동)을 비롯한 7개의 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문안식, 2006, 앞 의 책, 418쪽 참조). 881) 茂山城 : 현재의 전북 茂州郡 茂豊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地理 1 尙州 開寧郡條에 領縣四 茂豊縣 本茂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라 한 기사 참조. 무산성은 금강 상류지역의 전초기지 로서 이곳에서 북쪽으로 충북 영동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나갈 수 있고 또 동쪽으로 김천과 거 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882) 甘勿城 : 현재의 경북 金泉市 禦侮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지리 1 상주 開寧郡條에는 古甘文 小國 領縣四 禦侮縣 本今勿縣[一云陰達] 景德王改名 今因之 로 나온다. 大東地志 慶尙道 金山 古邑條에 禦侮[北三十五里] 新羅阿達羅王 四年 置甘勿縣 一云今勿 一云陰達 景德王 十六 年 改禦侮爲開寧郡領縣] 이라 하였는데, 이 기사의 甘勿=今勿=陰達은 禦侮面에 비정할 수 있 다. 한편 甘文小國을 今勿로 보고 甘勿城을 金泉市 開寧面에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420쪽). 883) 桐岑城 : 현재의 경북 龜尾市 仁義洞에 비정된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주석 322) 참조. 한편 大東地志 慶尙道 金山 沿革條에서는 本新羅桐岑 景德王 16年 改金山爲開寧郡領縣 이라 하 여 현재의 金泉市에 비정하고 있으나, 본서 권34 잡지 지리 1 상주 開寧郡條에는 金山縣 景德 王改州縣名 及今竝因之 라고 되어 있을 뿐 金山이 본래 桐岑이었다는 기사는 없다. 884) 장군 義直이 말 한 필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5 신라본기 眞德王 원 년(647), 같은 책 권41 열전 김유신전 상, 같은 책 권47 열전 丕寧子傳에 보인다. 비령자전에 의 하면 이때 신라는 김유신이 1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싸웠으며, 백제군은 3천여 명이 참수 되었다고 한다. 885) 腰車城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를 경북 尙州市의 舊要濟院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 병도, 1976, 앞의 책, 420쪽). 백제의 요거성 장악으로 인해 그 이북에 있는 보은 삼년산성을 비 롯한 신라군들이 차단당하는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886) 의직이 습격하여 빼앗았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眞德王 2년조에는 백제 장군 의직이 腰車 城 등 10여성을 함락하였으나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에 의해 대패하여 거의 전멸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백 제가 신라의 10여성을 공취한 것만 기록하고 있다. 이 의자왕 8년을 삼국관계에 있어서 외교적 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로 보고 있다(김수태, 2007, 의자왕대 전반기의 대외관계, 백제문화사 대계연구총서 5,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381~387쪽). 즉 백제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은 신 라는 이찬 김춘추를 당에 보내 청병을 요청하자, 이에 당 태종은 신라의 입장을 두둔하였던 점,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때 백제가 소극적이었다는 점, 당의 고구려 공격이 거듭 실패하였던 점, 백제의 국력 성장, 신라의 적극적인 대당외교의 추진 등의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에 따라 당은 고구려보다도 먼저 백제 정벌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외교적 전환이 있었다는 것 이다. 이러한 당의 정책 변화에 대해 백제는 크게 반발하고 신라 공격을 계속하며 당을 멀리하 는 등 결국 당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887) 玉門谷 : 7세기 전반에 신라와 백제간의 전투가 자주 일어나던 곳으로 그 위치에 대해 三國遺 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富山下 女根谷(현재의 경북 경주시 건천읍)이라 하고 있 다. 그러나 백제군이 신라 왕도인 경주와 가까운 곳인 여근곡에 와서 군사를 매복하였다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관련 기사를 검토해 보면 옥문곡의 위치는 경북 星州와 경남 陜川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이를 현재의 경남 가야면으로 보는 견해(金泰植, 1997, 앞의 글, 75 82쪽)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성주목 산천조의 汝斤乃로 보는 견해(문안식, 2006, 앞의 책, 400쪽)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7 주 839)를 참조할 것. 888) 신라 장군 유신이 크게 이겼다 : 본서 권41 열전 김유신전 上에 의하면 이 싸움은 押梁州軍 主가 된 김유신이 大耶城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대야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나게 되었으며, 신라 군이 거짓으로 패하여 玉門谷으로 백제군을 끌어 들인 뒤 복병으로 공격하여 백제 장군 8명을 포로로 잡고 군사 1천 명을 참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120 238 9년(649) 가을 8월에 왕은 左將 殷相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石吐 城889) 등 7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 장군 庾信 陳春890) 天存891) 竹旨892) 등이 893) 이를 맞아 치자, [은상은] 이롭지 못하므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道薩城 아래에 239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894) 겨울 11월에 우뢰가 치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11년(651)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高宗이 조서(璽 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 889) 石吐城 : 석토성의 위치는 현재의 충청북도 鎭川郡 文案山城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閔德植, 1983,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참조), 분명치 않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주석 672) 참조. 삼국 有名未詳地分의 신라측 지명에 나온다. 본서 권5 신라본기, 권28 백제본기 및 권42 金庾信傳에 의하면, 진덕왕 3년(649) 8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石吐城 등 7개의 성을 함락 하였는데, 김유신이 백제군을 크게 격파한 것으로 되어있다. 890) 陳春 : 陳純이라고도 하였는데,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의 眞純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진춘은 진덕여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道薩城 전투에 참가하여 신라의 석토성을 공격해온 백제 장군 殷相의 군대를 대장군 김유신 등과 더불어 물리쳤고, 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河西州 총 관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재상으로 있던 진춘은 문무왕 16년(676) 11월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 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891) 天存 : 신라 진덕여왕대의 장군.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신라의 석토성을 공격해 온 백제 장군 殷相의 군대를 道薩城 전투에서 대장군 김유신 등과 더불어 물리쳤고, 무열왕 7년 (660) 5월 26일에는 이찬으로서 欽純 등과 함께 사비성을 구원하러 갔던 신라의 군사를 거듭 구 원하러 가던 도중에 그만두었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는 貴幢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 을 토벌하고, 이후 居列城 居勿城 沙平城 德安城 등을 공취하였다. 동왕 8년(668) 6월에는 角干으로서 貴幢摠管이 되어 金仁問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군에 참여하고, 동왕 10년(670) 7월 에는 백제 고지를 재점령하는 등 군공을 많이 세웠다. 그는 문무왕 19년(679) 1월에 서불한으로 서 中侍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 892) 竹旨 : 진덕왕대의 重臣인 述宗公의 아들로서 장군을 역임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孝昭 王代 竹旨郞條에서는 竹曼 智官 竹旨郞으로 불렀다. 죽지는 어릴 때는 花郞으로 활동하였고, 품주를 개편하여 만든 執事部의 장관인 中侍에 제일 처음 임명되었으며, 신문왕대에 이르기까지 宰相을 지냈다.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신라의 석토성을 공격해 온 백제 장군 殷相 의 군대를 道薩城 전투에서 대장군 김유신 등과 더불어 물리쳤고, 동왕 5년(651) 2월에는 파진 찬으로서 執事中侍가 되었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貴幢 총관이 된 후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고,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 총관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으며, 백 제 故地 점령 및 동왕 11년(671) 6월의 나당전쟁에서도 군공을 세웠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孝昭王代竹旨郞條에 의하면, 그가 화랑이었을 때 낭도였던 得烏谷이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 `慕竹旨郞歌a가 전해지고 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3년조와 5년조 및 三國遺事 권2 紀 異篇 孝昭王代 竹旨郞조를 참조할 것. 893) 道薩城 :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음성의 백마령으로 보는 견해(신채호, 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되어 경계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땅은 실로 개의 이빨처럼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다. 근래에 와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서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마침내 三韓895)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896)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 로 서로 되풀이되었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불쌍하게 여기 고 민망하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을 하였을 때897)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정성과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 1977, 조선상고사 Ⅰ, 동서문고, 270~272쪽)와 천안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20쪽) 등이 있으나, 충북 증평읍의 尼聖山城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頭陀山城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9쪽) 등이 있다. 그런데 신라의 화령 로와 추풍령로를 통한 북진이 청주지역을 경유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증평 이성산성설이 보다 설 득력을 가진다(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 호, 371쪽).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본서 권26 주 691)을 참고할 것. 894) 왕은 左將 殷相을 보내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 이 내용은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3 년조와 같은 책 권41 열전 김유신전 中에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이 싸움에서 은상이 거느린 백 제군이 크게 패하였는데, 그 결과에 대해 신라본기에는 殺虜將士一百人 斬軍卒八千九百八十級 獲戰馬一萬匹 至若兵仗 不可勝數 라 기록하고 있고, 김유신전 중에는 生獲將軍達率正仲 士卒 一百人 斬佐平殷相 達率自堅等十人及卒一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 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 是 라 기록하고 있다. 895) 三韓 : 삼한은 본래는 馬韓 辰韓 弁韓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馬韓-百濟, 弁韓-高句麗, 辰韓-新羅式으로 三韓과 三國을 대응시키게 되면서 삼한은 점차 삼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 가 바뀌게 되었다. 三韓의 의미가 바뀌게 된 데에 대해서는 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인식의 변천, 韓國史硏究 38을 참조할 것. 896) 칼과 도마(刀俎) : 식칼과 도마를 말하는데, 이는 극히 위험한 상황을 뜻한다. 사기 항우기 참 조. 897)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을 하였을 때 : 본서 권5 신라본기 眞德王 4 년(650)조에는 신라가 金法敏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650년

121 다. 신라 사신 金法敏898)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과 같이 서로 의지하며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어질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하게 되여 士女가 의지할 것이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입니다. 없게 된 것과 비교해서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 머무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法敏이 요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 899) 900) 桓公 은 제 록 내맡길 것이고, 또한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물며 짐은 모든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契丹902)과 여러 藩國들을 시켜 遼河를 건너 나라의 주인으로서 어찌 위기에 처한 藩國을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이 겸병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주고,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903) 구하며, 좋은 계책을 살피고 꾀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齊나라 901) 후의 자리(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다. 12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3년(653)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에 해당되는 본서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9년조에는 고구려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898) 金法敏 :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무열왕의 맏아들로 655년에 태자 로 책봉되었고, 660년에 김유신과 함께 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아버지 무열왕이 죽자 즉위하여 668년에 唐軍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 나 당나라가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으므로 676년에 당군을 축출하여 한반도 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674년에 새로운 曆法을 썼고, 675년에 銅으로 印章을 만들어 百官과 州郡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681년에 문무왕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感恩寺 동쪽 바다 大王岩上에 장사를 지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즉위년조를 참조할 것. 899) 齊나라 : 중국의 周나라 武王이 太公望에게 封하여 준 나라로 현재의 중국 山東省 일대이다. 29 대 739년간 존속하였으며, 戰國시대 초에 그 家臣 田氏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900) 桓公 : 중국 춘추시대 齊나라의 임금으로 재위기간은 42년간이다. 이름은 小白이고 諡號는 桓 이다. 兄 襄公이 무도함에 거( )땅으로 도망을 갔다가 襄公이 시해되자 돌아와 즉위하였다. 포 숙아(鮑叔牙)의 추천에 의해 管仲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으며, 周 왕실을 높이고 제후를 규 합하여 천하를 크게 바로 잡고 재위 기간 중 맹주의 지위를 지켰다. 春秋시대에 桓公은 五覇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史記 권32 齊太公世家 2를 참조할 것. 901) 옛날 齊나라 桓公이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다 : 이 부분은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昔齊桓一諸侯 尙存亡國 으로 되어 있고, 본서 권28 의자왕 11년조에는 昔齊桓列士諸侯 尙存 亡國 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석은 옛날에 제 환공은 오히려 제후에게 땅을 주어가며 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앞뒤의 문맥으로 보아 옛날에 제 환공은 제후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가을 8월에 왕은 倭와 우호를 통하였다.904) 902) 거란(契丹) : 契丹 이란 이름이 중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위서 계단전이다. 이보다 더 오래된 것은 현재 朝陽縣의 동쪽 義縣 부근 萬佛洞에서 발견된 502년 석각에 尉喩契丹員使員 外散騎常侍韓貞 이란 구절에 나온다. 거란은 4세기 이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 목을 하던 부족으로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의 요하 서쪽 진출과 柔然의 침략 위협 등으로 인해 북위의 보호하에 대릉하 동쪽 일대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 중 契丹의 別部인 出伏部 등이 고구 려에 한때 복속되기도 하였다( 遼史 營衛志 부족조). 당대에 들어와 태종은 계단을 지배하기 위해 營州 부근에 松漠都護府를 설치하였다. 10세기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부 족별로 생활을 하면서 이합집산을 하다가 10세기에 와서 酋長 耶律阿保機가 전 부족을 통합하 여 遼나라를 세웠다. 계단 글안 거란으로도 표기된다. 903) 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실려 있으나 약간의 異同이 있다. 이를 舊唐書 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은 삼국사기 의 기록이다. 至如海東三國(海東三國), 自久尋戈(日久築戈), 去 歲王攻(去歲), 奏書(奏言), 競擧兵戈(竟擧干戈), 齊桓列土(齊桓列士), 同年而語矣(同年而語哉). 한편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내용이 축약되어 실려 있다. 904) 왕은 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 본서 백제본기에서 왜와의 접촉기사는 비유왕 2년(428)에 왜국 사 신이 5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백제를 예방한 기사를 끝으로 보이지 않다가 이때 다시 나온다. 의자왕대에 들어와 백제와 왜의 관계는 즉위초부터 653년이 되기까지 한동안 소원한 관계를 유 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의자왕 즉위초의 정변으로 인해 왜로 추방된 왕자 교기(翹岐)를 왜

122 242 15년(655) 봄 2월에 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고 왕궁 남쪽에 望海亭905) 을 세웠다.906) 243 여름 5월에 붉은 말( 馬)이 北岳907)의 烏含寺908)로 들어가 울면서 법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909) 가을 7월에 馬川城910)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911)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金 가 환대하면서( 일본서기 권24 皇極紀 원년) 당시 왜의 집권세력인 蘇我氏 세력이 백제에 대하 여 거리를 두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노중국, 1994, 7世紀 百濟와 倭와의 關係, 國史館論 叢 52, 168~179쪽). 반면 교기를 豊 과 같은 인물로 파악하고 642년 정변에도 불구하고 백 제와 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연민수, 2002, 7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왜국의 대한정책, 신라문화 4, 48~49쪽), 교기와 풍장은 동일한 인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성립되기 어렵다(김수태, 1992, 앞의 글, 참조). 왜는 642년 정변 직후에 단 한차례만 백제에 파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孝德천황이 즉위한 大化연간(645~650)에 들어오면서 백제와 왜 관계는 사실상 단절에 이르게 된다. 당의 고구려 원정이 시작되면서 왜는 일종의 위기위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당과 신라유학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反蘇我氏세력들이 왜의 안보를 위해 백제 고구려보다는 신라 당과 연합하는 것이 국익에 유리하다는 논리를 내 세워 645년 大化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곧 내분이 일어나 中大兄皇子(후에 天智天皇)가 친 백제세력의 지원을 받아 효덕천황 세력을 쿠데타로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655년 천지천황이 즉위하면서 친백제정책으로 선회하여 두나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계 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현구, 1985,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 吉川弘文館, 259~473 쪽을 참조할 것. 이렇게 왜가 645년 이후 왜가 백제 일국외교에서 다국외교로 전환하는 과정에 서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대내적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647년 신라의 김춘추 가 왜로 건너가 왜를 신라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공작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일본서기 권25 효덕기 대화 3년). 이러한 왜의 대외노선을 둘러싼 갈등에도 불구하고 653년 서로간의 외교적 절충을 통해 그동안의 소원한 관계를 불식시키고 다시 화호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때에 맺어 진 왜와의 우호관계는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이 일어났을 때 왜가 원군을 파견하게 된 토대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905) 望海亭 : 무왕 35년(634)에 축조한 宮南池에 세운 정자인 듯하다. 무왕이 37년(635)에 세운 望 海樓를 중창하거나 증축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망해정과 궁남지 望海樓는 신라가 雁鴨池와 臨海殿을 만들 때 착상의 근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17쪽 ; 이기백, 1986, 望海亭과 臨海殿, 신라사상사연구 참조). 906) 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望海亭을 세웠다 : 의자왕대의 정치는 15년을 기점으로 두 시기 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무왕대의 권력기반 강화책을 이어받으면서 전제왕권 을 강화해 나간 시기이며, 15년 이후 후기는 정치를 그르치기 시작한 시기로 보고 있다. 이 시기 부터 의자왕은 전제왕권 확립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으로(이기백, 1982, 신라의 반도통일과 발 해의 건국, 한국사강좌 고대편, 일조각, 291쪽 ; 김주성, 1988,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동향 과 백제멸망, 백제연구 19, 268쪽)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축하여 태자의 정치적 위상을 확립 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망해정을 지어 왕권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이러한 배경 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속에서 태자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877)을 참조할 것. 이 시기의 정치 운영은 왕족 중심의 강력한 친위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이해된다(김수태, 2007, 앞 의 글, 47쪽). 이로 인해 군대부인으로 지칭되는 왕비 은고가 의자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왕족과 달솔 신분층이 대두하였고 대신 좌평 신분의 위상 하락을 가져오게 되면서 백제 멸망을 야기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8, 앞의 책, 212쪽 ; 김주 성, 1988, 앞의 글 ; 김수태, 앞의 글, 43~65쪽 등을 참조할 것. 907) 北岳 : 북악은 5岳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에 북악이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 나 북악의 존재는 백제가 국내의 중요한 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내는 五岳제도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5岳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백, 1974, 新羅 五嶽의 成立과 그 意義, 新羅政治社會史 硏究, 일조각 참조. 908) 烏含寺 : 백제 시대의 사찰로 그 위치는 현재의 충남 保寧郡 藍浦의 聖住寺址로 추정되고 있다.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성주사지를 발굴한 결과 백제시기의 유적층이 확인되었다. 성주사지에 대해서는 東國大學校 博物館, 1974, 佛敎美術 2 -聖住寺址發掘調査特輯- 및 충남대학교, 1994, 保寧聖住寺址 제5차發掘調査約報告書 참조) 909) 붉은 말( 馬)이 며칠 만에 죽었다 : 말이 죽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여주는 것[馬禍]으로 는 비록 3년의 時差는 있지만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4년(658)조에 又西海使小花下阿曇連頰 垂自百濟還言 百濟伐新羅還 時馬自行道於寺金堂 晝夜勿息 唯食草時止[或本云 至庚申年 爲敵所 滅之應也] 라고 한 기사를 들 수 있다. 후한서 지 17 오행 5조에 上亡天子 諸侯相伐 厥妖馬 生人 이라 하여 매우 충격적인 흉조로 풀이하고 당시 혼란에 빠진 후한의 정정과 직결시키고 있 다. 910) 馬川城 : 백제시대의 城. 初築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무왕 33년(632)에 개축하였고, 이때 또 수리 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경남 咸陽郡 馬川面으로 추정되나, 이를 충남 韓山지방으로 추정하는 견 해도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422쪽). 911) 말갈 : 이때의 말갈은 함흥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 집단으로서 그 이전 말갈과는 다른 종족 계통 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문안식, 2003, 한국고대사와 말갈, 혜안, 183~198쪽을 참 조할 것. 그 이전 시기의 말갈은 신라 진흥왕이 옥저지역에 진출하면서 해체당하였고, 이는 후에 고구려가 동북 만주지방에서 이주시킨 다른 계통의 말갈이라고 한다. 이들은 고구려와 문화적으 로 혈연적으로 가까운 별종으로서 예맥 예 말갈로 불리웠다.

123 )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고 하였다. 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함께 음란하고 거칠게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 마시 913) 기를 그치지 않았다. 914) 佐平 成忠 <*혹은 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245 난하고 좁은 길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뒤에야 보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庶子 41명을 佐平으로 삼고, 각각에게 食邑919)을 주었다.920) 화를 내며 그를 옥에 가두었다.915) 이로 인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 에서 굶어 죽었는데( 死),916)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 이 늘 때(時)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군사 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해야 할 것인데, [강의] 상류에 자리 잡고 적을 끌어들인 뒤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 로는 沈峴917)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伎伐浦918) 언덕에 오르지 못하게 하며 그 험 912)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동일한 표현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오며,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서는 표현을 달리하나 같은 내용이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2년(655)조에는 이때 백제가 33성을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13) 왕은 궁녀와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 이는 의자왕의 음란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보여주 는 것이다. 의자왕의 음란과 향락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 大唐平百濟 國碑銘 에는 外棄直臣 內信 婦 刑罰所及 唯在忠良 寵任所加 必先諂倖 이라 되어 있고, 日本 書紀 권26 齊明紀 6년조에는 高麗沙門道顯日本世記曰 或曰 百濟自亡 由君大夫人妖女之 無道 擊奪國柄 誅殺賢良 故召斯禍矣 可不愼歟 라 나와 있다. 의자왕 15년 이후 지배귀족들의 분 열과 대립, 의자왕의 淫荒, 그리고 궁중 내부의 사치와 부패는 백제 사회 내부의 모순을 격화시 켜 결국 백제 멸망에 이르게 하는 대내적 요인이 되었다. 914) 成忠 : 백제 의자왕 때 좌평. 656년 佐平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에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져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단식으로 간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려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 이라고 하였다. 결국 그의 말대로 660년 신 라군은 탄현을 넘어, 唐나라 군대는 기벌포를 지나 사비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興首 階伯과 함께 부여 三忠祠에 배향되었다. 915) 佐平 成忠 그를 옥에 가두었다 : 이들 좌평세력들은 賢良 일본서기 권26 ( 제명기 6년)이 나 忠良 (定林寺址五層石塔의 大唐平百濟國碑銘 )으로 표현이 되었듯이 의자왕 집권 전기의 정치 운영을 주도했던 세력이었는데, 의자왕 15년 이후 왕비 은고가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 타 격을 받으면서 정치적 위상이 저하되었다. 916) 굶어 죽었는데( 死) : 죄인이 옥중에서 飢寒이나 또는 고민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을 말한다. 917) 沈峴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炭峴으로 표기되고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陸路不使過炭峴[一云沈峴 百濟要害之地] 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沈峴은 본 서 잡지 6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침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①충청남도 금산군 금산면 천내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 면 가선리설(大原利武, 1922, 百濟要害地炭峴に就いてa, 朝鮮史講座 朝鮮歷史地理, 88~90 쪽), ②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와 서평리와의 사이에 있는 炭峙설(小田省吾, 1927, 上世史a, 朝 鮮史大系, 194쪽), ③부여 석성면 正覺里 숫고개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國書刊行會, 266쪽), ④대전 동구와 옥천 군북면 경계의 식장산 마도령설(이병도, 1977, 역주 삼국사기, 401쪽), ⑤완주군 운주면 薪伏里와 三巨里 사이의 쑥고개설(홍사준, 1967, 탄현고 -계백의 삼 영의 김유신의 삼도-a, 역사학보 35 36, 55~81쪽 ; 전영래, 1982,`탄현에 관한 연구a, 전 북유적조사보고 13, 276~289쪽), ⑥금산군 珍山面 校村里의 숯고개설(성주탁, 1977, 금산지 방성지 조사보고서, 논문집 제4권 제3호,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9쪽) 등이 있다. 918) 伎伐浦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白江으로 표기되고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 篇 太宗春秋公條에는 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이라고 細注를 붙였고, 또 白 江[卽伎伐浦] 으로 나온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錦江하구인 長項으로 보는 견해 (이병도, 1977, 앞의 책, 422쪽), 東津江 하구로 보는 견해(全榮來, 1976, 周留城 白江 位置比 定에 관한 新硏究, 부안군), 安城川으로 보는 견해(金在鵬, 1980, 全義 周留城 考證 ), 牙山灣 입구로 보는 견해(박성흥, 1990, 周留城考, 洪城郡誌 증보편) 등의 견해가 있다. 백제 부흥 운동군의 거점인 주류성의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기벌포의 위치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660 년 당군은 덕물도에서 백제로 향하였는데, 연안 해로를 이용하여 상륙한 지점이 기벌포였다. 당 군이 상륙한 시점은 진흙탕이어서 빠지므로 다닐 수가 없어서 버드나무로 만든 자리를 펴고 나 서 군사를 내리게 했다 고 한 기록(본서 권42 열전 김유신 중)으로 보아 썰물 때를 맞췄던 것으 로 볼 수 있다. 당군은 이미 상륙에 대비한 장비로 갯벌에서 유용한 버들자리를 준비하는 등 치 밀하게 상륙작전을 준비하였다. 기벌포 즉 白江은 장암 손량 등으로도 불렸으며 只火浦로도 불 렸다. 장암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에 舒川浦營은 고려시대에 長巖津城 이라 한 것으로 보 아 금강 하구의 서천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只火浦 역시 기벌포의 漢字式 표기임은 쉽 게 짐작할 수 있다. 즉 기벌포 지화포 백강 장암 등은 모두 동일한 지명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볼 수 있으며 금강하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관, 2007, 나당연 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 241~244쪽을 참조할 것. 919) 食邑 : 식읍으로 지급된 지역의 토지는 원래 국가나 왕실의 보유지였으나 귀족이나 관리들이 국 가로부터 수취권을 위임받아 행사할 수 있는 점에서 일단 사유지적 성격을 갖는다. 식읍은 뛰어

124 246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어 농작물이 말라죽었다. 19년(659) 봄 2월에 여우 여러 마리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上佐 平921)의 책상 위에 앉았다.922) 247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923) 장수를 보내 신라의 獨山城924)과 桐 岑城925)의 2성을 침범하여 공격하였다.926) 5월에 왕도 서남쪽의 泗 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丈이었다.927)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生草津928)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929)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930)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난 훈공이 있는 왕족이나 척신 공신 등 공로를 세운 고위 귀족들에게 경제적 반대급부로서 지 급한 일종의 경제적 특혜라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중국 周나라의 봉건제도 아래서 왕족과 공신 에게 분봉하던 封土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이 모두 채용하였다. 백제가 식 읍을 지급한 사례로는 본 기사가 있으며, 그밖에 黑齒常之나 階伯의 경우도 식읍을 받았을 것으 로 추정된다. 예컨대`黑齒常之墓誌銘a에서 黑齒常之의 조상이 흑치지역인 지금의 예산 덕산 지역에 봉함을 받았던 사실(유원재, 1999, 백제 흑치씨의 흑치에 대한 검토, 백제문화 28, 2~5쪽)과 계백의 조상이 현재의 고양시 행주인 皆伯縣 지역과 관련 있는 점(노중국, 2000, 백 제의 식읍제에 대한 고찰, 경북사학 23, 65~97쪽) 등을 들 수 있다. 중국 사서인 南齊書 백제전에는 백제 동성왕이 남제 황제에게 국서를 보내어 공로가 있는 백제 중신들에게 관작을 제수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사가 전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邁羅王 中王 이란 작호에서 보듯이 백제의 중신들이 어떤 공로의 대가로 王 侯호를 수여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작호 의 앞에 붙여진 지역 명칭은 아마 작호를 수여받은 사람들의 식읍지역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이러 한 사례를 통해 볼 때 백제의 식읍은 처음에는 일정 지역이 사여되었으나, 武寧王代(501~523) 이후 君號制로 개편되면서 그 수여 방식이 점차 封戶數를 정하여 수여하는 형태로 전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식읍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나 성격은 알 수 없지만, 처음에는 일정한 지역을 식읍으로 수여하였으나, 점차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와 함께 封戶의 수로 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 같다. 식읍의 지배형태는 국가에서 지정한 일정한 지역이든 봉호수이든 간에 해당 지 역민들을 대상으로 전제 租 공물세 調 力役의 부세를 직접 지배하고 수취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김인문이 朴紐의 식읍을 이어받았던 것처럼 그 세습은 원칙상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세습이 되는 경우도 있어서 식읍은 고위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의 한 수단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姜晉哲, 1979, 韓國土地制度史 상, 韓國文化 史大系 Ⅱ, 쪽 ; 李景植, 1988, 古代 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 孫寶基博士 停年紀念韓國史論叢, 지식산업사 ; 노중국, 2000, 앞의 글, 65~97쪽 ; 양기석, 2005, 백제의 경제생활, 주류성, 26~29쪽을 참조할 것. 920) 왕의 庶子 41명을 佐平으로 삼고 食邑을 주었다 : 의자왕의 이러한 조처는 왕족 중심의 친 위세력의 형성을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좌평의 정원이 5~6명으로 엄격히 제한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좌평 41명은 정원의 철폐와 함께 좌평신분의 지위 하락과 달솔 신분의 성장으로 이해된다. 좌평에 임명된 왕서제들이 국가의 공적 소유물을 분배받아 사적 권력의 기 반을 확충한 것으로 풀이된다(노중국, 2000, 앞의 글, 89~90쪽). 921) 上佐平 : 전지왕 4년(408)에 설치한 수석좌평으로 군국정사를 담당하였고 고려의 宰와 같았 다. 좌평은 본래 率系 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諸率會議]의 의장이었는데, 이때 상좌평이 설치 되면서 上佐平 中佐平 下佐平(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 참조)과 일반좌평으로 분화되었 다. 이렇게 분화된 좌평들로 구성된 좌평회의체에서 주요한 국정을 논의 결정할 때 상좌평은 수석좌평으로서 의장의 직을 맡았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5 주 402) 참조. 922) 여우 여러 마리가 上佐平의 책상 위에 앉았다 : 이 災異 기사는 백제 멸망을 미리 예고하는 조짐으로서 당시 상좌평은 大佐平 沙宅千福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김수태, 2007, 앞의 글, 60쪽). 사택천복이 왕비 은고의 영향력하에 대두한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밖에 백제 멸망을 예고하는 재이 기사로는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는 기사를 비 롯하여 여러 현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23)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 이는 鷄禍에 속하는 불길한 조짐을 나타낸 것으로서 오행 설의 羽 之孼와 같은 성격의 이변이다. 후한서 오행 1에서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고 하였 는데, 모두 鷄禍의 변이에 대한 사례로 볼 수 있다. 924) 獨山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의 신라측 지명으로 나온다. 이 獨山城은 신라 백제 사이의 전투지역으로서 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에 비정됨)과 같이 병기되 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경북 星州郡 독용산성(禿用山城)으로 비정할 수 있다. 독용산성에 대해서는 대구대학교, 1992, 星州 禿用山城 地表調査報告書 를 참조할 것. 925) 桐岑城 : 현재의 경북 龜尾市 仁義洞에 비정된다. 백제의 신라 독산성과 동잠성 공격은 신라와 당의 백제 공격을 야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 앞의 주 883)을 참조할 것. 926) 신라의 獨山城과 桐岑城의 2성을 침범하여 공격하였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6년조에는 夏四月 百濟頻犯境 으로 나오나 구체적인 城名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927) 서남쪽의 泗 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丈이었다 : 이는 백제 멸망이 임박한 당시 크고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은 이변 발생을 기록한 것이다. 후한 靈帝 憙平 2년(173) 東萊 海에 큰 고기가 출현하였는데, 이듬해 中山王 暢과 任城王 博이 모두 죽었다는 기록( 후한서 오 행 3)을 들 수 있다. 928) 生草津 :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부여 근처의 백마강변인 듯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 27 무왕 33년(632) 추7월조에 무왕이 생초의 벌판에서 사냥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929) 여자의 시체가 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 이는 백제 멸망이 임박한 당시 사비 도성 근처 생초진에서 여자 시체가 떠오르는 이변 발생을 기록한 것이다.

125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931) 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노루처럼 생긴 개 한 마리가 서쪽에서 泗 河의 언덕으로 오 20년(660) 봄 2월에 왕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 더니 왕궁을 향해 짖었는데,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왕도의 여러 개들이 길가 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泗 河의 물이 붉어져서 마 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어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 932) 치 핏빛과 같았다. 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 여름 4월에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왕도의 저자 사람들이 까 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3자(尺) 가량의 깊이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닭없이 놀라 달아났는데, 마치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여 넘어져 죽은 자가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月新) 933)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과 같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5월에 비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어 닥쳤고 天王寺와 道讓寺 두 절의 탑에 벼락이 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초생달과 다. 또 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 뉘어] 서로 싸웠다.934) 다. 935) 6월에 王興寺 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 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일 겁니다. 930) 홰나무(槐樹) : 콩과의 갈잎큰키나무. 잎은 깃꼴겹잎으로 어긋맞게 나고 나비 모양의 꽃이 피며, 꼬투리가 열리는데, 속에 납작하고 작은 씨가 있다. 나무는 가구재로, 꽃과 꼬투리는 약으로 쓴 다. 槐木 또는 회화나무라고도 부른다. 931) 궁중의 홰나무(槐樹)가 울었는데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 이는 백제 멸망이 임박한 당시 의 불길한 조짐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궁중의 홰나무가 곡하는 것처럼 울고, 또 밤에 귀신이 우 는 이변을 기록한 것이다. 932) 왕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핏빛과 같았다 : 이는 물의 변색을 나타내는 이변 기사로서 백제 멸망을 예시하는 불길한 조짐과 같은 여러 이변이 속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33)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재물을 잃은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 이는 오행설의 羽 之 孼와 같은 성격의 이변 기사로서 백제 멸망을 예시하는 불길한 조짐과 같은 여러 이변이 속출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34) 天王寺와 道讓寺 두 절의 탑에 서로 싸웠다 : 이는 屋自壞에 속하는 이변 기사로서 백제 멸 망을 예시하는 불길한 조짐과 같은 여러 이변이 속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天 王寺 道讓寺 그리고 白石寺의 위치와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935) 王興寺 : 왕흥사는 사비시대 후기 백제 왕실에서 운영하던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왕흥사는 법왕 2년(600)에 창건되어 무왕 37년(634)에 완공되어 왕흥사의 건립 에 무려 34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이 걸려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왕흥사지에 대한 2007년도 제8차 발굴조사에 의해서 발견된 왕흥사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기록에 의거해 볼 때 왕흥사가 위덕왕 24년(577)에 창건되었음이 새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 조사에서 목탑지 의 정확한 규모와 심초석 사리함을 확인하였고, 동서 석축과 남북 석축의 규모 및 성격을 파악 왕이 기뻐하였다.936) [당나라] 高宗이 조서를 내려 左武衛大將軍937) 蘇定方938)을 神丘道行軍大摠管939)으로 삼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명문을 통해 위덕왕이 왜에 사신을 보낸 阿佐太子 이외에 다른 왕자를 두 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하였다. 아울러`창왕명석조사리감a명문과 함께 백제 왕실에서 신봉 된 사리신앙이 왕실의 신성성 확립에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 서 권27의 주 830)을 참고할 것. 936) 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왕이 기뻐하였다 : 이는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 입하기에 앞서 백제 궁중에서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라는 내용을 가진 시요가 나타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백제 멸망의 전주곡을 이룬 것이다. 이는 여러 變異 중에 謠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정이나 세태가 불안할 때에 유언비어와 같이 유행을 하였다. 이러한 백제 멸망을 앞두고 발생 한 여러 변이들은 고기 류를 원전으로 하여 채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937) 左武衛大將軍 : 左武衛는 중국 唐나라의 16衛 중의 하나이며, 궁궐의 宿衛와 五府 및 外府를 통 괄하였다. 左武衛에 설치된 武官으로는 上將軍 1인(종2품), 大將軍 1인(정3품), 將軍 2인(종3품) 이 있었고, 그 아래에 長史 1인(종6품상) 등이 있었다. 新唐書 권49 상 백관 4 상 16衛조 참 조. 의자왕 20년(660)에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총사령관 蘇定方의 관직에 대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衛大將軍으 로 나온다. 그러나`大唐平百濟國碑銘a과 新唐書 권3 본기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에는 左

126 250 左驍衛將軍940) 劉伯英941) 右武衛將軍942) 馮士貴943) 左驍衛將軍944) 龐孝公945)을 거느리고 251 군사 13만명946)을 통솔해 와서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 왕 金春秋를 夷 道行軍摠管947)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함께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城山948)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德物島949)에 武衛大將軍으로 나온다. 본서는 후자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 938) 蘇定方 : 생몰연대는 년으로 향년 76세이다. 이름은 烈, 字는 定方, 중국 기주(冀州) 武邑 사람이다. 그는 15세때 아버지와 함께 도적의 무리들과 싸워 신망을 얻었다. 그 후 당나라 태종 貞觀 初에 匡道府折衝이 되었고, 高宗 때에는 左衛大將軍 程知節을 따라 賀魯 정벌에 참전 하여 공을 세운 뒤 左驍衛大將軍이 되고 邢國公에 봉해졌다. 얼마 후 돌궐지역 정벌에 참여한 공으로 邢州鉅鹿眞邑 5백호의 식읍을 더하여 받았다. 660년 3월에는 나 당연합군 총사령관 으로서 13만의 당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山東半島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으며, 의자왕과 태자 隆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661년 5월 다시 遼東道行軍大摠管이 되어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현존하는 定林寺址五層石塔에 `大唐平百濟國碑銘a을 새겼다. 이 비명에는 백제를 공격할 당시의 소정방의 직함에 대해 元戎 使持節神丘 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左武衛大將軍上柱 國公 으로 나온다. 소정방에 대 해서는 舊唐書 권83 열전 33 蘇定方傳과 新唐書 권11 열전 36 蘇定方傳 및 정림사지오층석 탑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및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58~60쪽을 참 조할 것. 939) 神丘道行軍大摠管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받은 직함.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도 같은 관명이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熊津道大摠管 으 로, 新唐書 권3 本紀 고종 顯慶 5년 3월조에는 神兵道行軍大摠管 으로, 大唐平百濟國碑銘 에는 元戎使持節神丘 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 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 26 齊明紀 6년 7월조에 인용된 高麗沙門 道顯의 日本世記 에는 大將軍蘇定方 으로만 나온다. 神丘道는 唐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정한 攻擊路의 하나이다. 神丘는 燕然山을 높 여 말한 것인데( 文選 권56 封燕然山名條), 燕然山은 외몽골 三音若顔部의 杭愛山의 옛 이름으 로서 後漢의 車騎將軍 竇憲이 永元 원년(89)에 흉노를 북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 後漢書 권 23 列傳 竇融傳附 竇憲傳). 따라서 神丘道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北伐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길을 수식코자 붙인 것으로 보인다. 940) 左驍衛將軍 : 左驍衛는 唐나라의 16衛의 하나. 처음에는 驍騎였지만 隋나라가 左右備身을 左右 驍衛로 고쳤다. 唐나라에 들어와서 驍騎의 騎 자를 제거하고 驍衛府로 하였다. 관장하는 업무 와 인적 구성은 左武衛와 같다(앞의 주석 937) 참조). 左驍衛에 두어진 장군은 2명이었으며, 관 품은 종3품이었다. 舊唐書 권44 직관 3 左右驍衛 및 新唐書 권48 백관 4 상 16衛 참조. 中 宗壬申干本에는 左衛將軍 으로 되어 있는데, 감교본에서는 신라본기에 의거하여 驍 자를 첨 가하여 左驍衛將軍 으로 하였다. 941) 劉伯英 : 열전에 입전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장군. 당시 유백영의 직함은 副大摠管冠軍大將軍 衛將軍上柱國 下博公 `大唐平百濟國碑銘a ( ), 右武衛將軍(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 左驍衛將軍(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高宗 顯慶 5년 ;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으로 각각 다르게 나온다. 942) 右武衛將軍 : 右武衛는 당의 16衛의 하나. 右武衛에 속한 장군은 2명이었으며 관품은 종3품이 었다. 관장하는 업무와 인적 구성에 대해서는 앞의 주석 937)을 참조할 것. 943) 풍사귀(馮士貴) :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 660년에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지휘 한 장군의 하나였다. 이 풍사귀의 직함에 대해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도 右武衛將軍으 로 나온다. 944) 左驍衛將軍 : 좌효위는 당의 16衛 중의 하나. 左驍衛의 장군은 2명이며, 관품은 종3품이다. 관 장업무와 인적 구성 및 연혁은 앞의 주석 937)을 참조할 것. 945) 방효공(龐孝公) :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로 龐孝泰를 말한다.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 할 때 唐軍을 지휘한 장군의 하나였다.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左驍衛將軍 龐孝 泰 로 나온다. 946) 군사 13만 명 : 660년 백제를 공격해 온 당나라 군대의 수.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춘3월조에는 水陸十三萬 伐百濟 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 條에는 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라 하여 구체적인 군사의 숫자와 더불어 이 군대를 싣고 온 배의 수도 기록하고 있다. 947) 夷道行軍摠管 : 660년 당나라 軍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당나라가 신라 무열왕에게 준 직함을 말한다. 동일한 관명이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 나온다. 新唐書 권3 본기 高宗 顯 慶 5년 3월,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현경 5년조에도 나온다. 夷道는 당나라 군대의 백제 공격로의 하나이다. 夷 라는 명칭은 尙書 堯典에 宅 夷曰暘谷 이라 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都督府一十三縣條에는 夷縣이 나온다. 948) 城山 : 현재의 중국 산동성의 山東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하는데(이병도, 1997, 앞의 책, 424 쪽), 현재에도 이곳에 성산과 유사한 城山角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당군이 출발한 지점은 萊州 또는 城山으로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다. 즉 본서 권5에는 萊州로 되어있으나, 같은책 권28과 三國遺事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등에는 모두 城山에서 출발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당군의 출발지가 萊州 또는 城山의 두 곳 중 하나로 되어있으나, 오히려 城山을 萊州의 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萊州에 城山이 있었다는 기록을 史書에서 찾을 수는 없으 나, 현재 산동반도의 동쪽 끝자락에 成山角이라는 곳이 성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성산각은 산 동반도와 백제를 연결하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萊州는 수당시대 이래로 주요한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598년 수나라 文帝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할 때 周

127 252 이르렀다.950)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951) [백제 방면으 로] 나아가게 하였다.952)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 253 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佐平 義直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 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 히 치면 가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당나라(大國)의 후원을 믿는 羅候가 이끄는 水軍이 평양성으로 가기 위해 출발한 곳이었고, 612년과 614년 수 양제의 고구 려 공격할 때 來護兒가 이끈 水軍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645년 張亮이 거느린 당 수군이 500 척의 戰船에 4만여 명을 싣고 고구려 공격에 나선 곳이다. 또한 647년 牛進達이 거느린 1만여 명의 당나라 수군이 출발한 곳이며, 648년 薛萬徹이 거느린 3만여 명의 수군이 출발한 곳이기 도 하다. 이와 같이 萊州가 수와 당의 고구려 원정시에 수군의 출발기지로 사용되었듯이 당의 백제 원정에도 13만 당군의 출발지로 사용되었다. 萊州는 지금의 山東省에 해당하며, 당의 조선 기지가 있던 곳이고, 渤海의 연안에 위치하여 대규모의 수군 전단을 정박시킬 수 있는 곳이었 다. 당시 萊州의 관할구역은 산동반도 동쪽 끝까지 이르렀다. 산동반도 중단 발해만 연안의 登 州(산동성 蓬萊市)는 요동반도로 이어지는 廟島群島와 가까운 곳으로 당과 수의 수군기지가 있 었고, 고구려 원정의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당군은 고구려 출정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산동성 등주의 봉래에 전선을 집결하고 출정을 준비한 후 산동반도 東端의 城山을 거쳐 백제로 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관, 2007, 앞의 글, 235~237쪽을 참조할 것. 949) 德物島 : 현재의 인천광역시 甕津郡에 속해 있는 德積島에 비정된다. 덕적군도는 소야도 문갑 도 굴업도와 같은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이곳 전승에 의하면 당군의 소정방은 덕 적도 남쪽 蘇耶島에 주둔하였으며, 소야도라는 섬이름은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라 하여 붙여졌 다고 전한다(김영관, 1999,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68쪽 및 2007, 앞의 글, 240쪽). 950)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덕물도에 이르렀다 : 이 부분은 新唐書 권111 열전 蘇定方傳, 新唐書 권220 백제전 및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傳에서는 自城山濟海 至熊津口 로 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7월조의 注에는 或本云 今年七月十日 大唐蘇定方率船 師 軍于尾資之津 이라 하여 당나라 軍이 尾資津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尾資津을 錦 江河口 즉 伎伐浦로 보는 견해도 있고, 忠南 保寧郡 熊川面의 彌造浦로 보는 견해도 있다(坂本 太郞 外, 1979, 日本書紀 下, 日本古典文學大系 68, 岩波書店, 345쪽의 頭注 30 참조). 951)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 6월조에는 王與庾信 眞珠 天存等 領兵出京 又命太子與大將軍金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精兵五 萬應之 라 하여 김유신 외에 출정한 장군들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다. 952) [당나라] 高宗이 조서를 내려 나아가게 하였다 : 당나라는 태종이 죽고 이어 즉위한 고종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계속 실패하자 신라의 주장을 받아들여 백제를 먼저 멸망시킨 이후 고구 려를 치는 것으로 한반도 전략을 수정하였다. 그러던 중 659년 4월 신라가 김인문을 보내 백제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곧바로 출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나라가 백제 출병을 결정한 것은 황 산전투에서 전몰한 장춘과 파랑의 현몽을 빌어 당의 파병 소식을 알려준 본서 권5 태종무열왕 6 년 동10월조에 의거해 볼 때 659년 10월의 일로 짐작된다(김영관, 2007, 앞의 글, 230쪽). 당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達率 常永953)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를 시켜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그 형편을 엿보 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면서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 좌평 興首954)는 죄를 짓고 古馬彌 의 출병 소식은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곧바로 신라에 알려지지 않다가 이듬해 660년 3 월에 공식적으로 신라에 통보한 것으로 보인다(이호영, 1997, 신라삼국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 구, 서경문화사, 184쪽). 659년 4월 청병사로 당에 건너간 신라의 사절단이 당의 출병 결정 소 식과 출격 명령을 받아 당의 장안에서 660년 3월에 출발하여 신라로 돌아온 것은 660년 4월경 이었다. 당의 출병계획과 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김영관, 2007, 앞의 글, 229~233쪽을 참고할 것. 953) 常永 :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達率로서 왕에게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속전속결을 반대 하고 나당연합군 중 신라군을 먼저 치기를 건의하였다. 그 후 660년 7월 계백이 거느린 결사대 와 함께 黃山에서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로 잡혔다. 이때 그의 관등은 佐平으로 나오는데, 이것 은 그가 출전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신라군에 항복한 후 660년 11월에 신라 무열왕으로부터 7등급 一吉 의 관등과 摠管의 직을 제수받았다.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참조. 954) 興首 : 백제 의자왕때의 좌평 직에 있다가 간언을 하다가 미움을 사 古馬彌知縣으로 유배를 갔 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왕이 좌평 義直과 달솔 常永 등을 모아 대책회의를 하였으나 의견이 구구하여 결정을 못 내리고 유배 중인 흥수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이에 흥수는

128 知縣955)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혹은 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어찌하면 좋겠느냐? 라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가서 지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앞 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 뒤에서 호응하기로 모의하였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게 하며, 대왕께서는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 굳게 지키면서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白江956)<*혹은 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炭峴957)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다음에 힘을 떨쳐 일어나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 다. 이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백강(기벌포)과 탄현을 막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 말이 채 택되지 않고 결국 대병이 다달아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成忠 階伯과 함께 부여 三忠祠에 배 향되었다. 955) 古馬彌知縣 : 현재의 전남 長興郡에 비정된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武州 寶城郡條에 馬邑縣 本百濟古馬知縣 景德王改名 今遂寧縣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長興都護府조에는 遂寧廢縣이 나오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고마미지현은 현재의 전남 長興郡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충남 舒川郡 華陽面 叩馬里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洪思俊, 1970, 百濟地名考 大王浦와 古馬彌知縣-, 百濟硏究 창간호). 956) 白江 : 현재 금강 하구의 서천지역을 말한다.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熊津口 로,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白江[卽伎伐浦] 으로, 그리고 日本書紀 권27 天智 紀 2년조에는 白村江 등으로 나온다. 그런데 당군이 진입한 백강 즉 기벌포에 대해 종래 백강 과 웅진강을 별개의 곳으로 보고, 백강을 안성천하구의 백석포로 보는 견해(金在鵬, 1981, 全 義 周留城 考證a, 燕岐地區古蹟硏究調査報告書 -全義篇- ), 부안 茁浦로 보는 견해(盧道陽, 1980, 百濟周留城考a, 明知大論文集 12, 明知大學), 부안 東津江으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24, 朝鮮上世史a, 朝鮮史講座 1, 朝鮮總督府 ; 全榮來, 1976, 周留城 白江 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 扶安郡 ; 李鍾學, 2004, 周留城 白江의 位置比定에 관하여a, 軍史 52, 國防 部 軍史編纂硏究所) 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백강과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를 가리키는 것으 로 웅진강구와 동일한 곳이다(김영관, 2007, 앞의 글, 244쪽). 단지 백강은 백제에서 부르던 이 름이고, 웅진강은 당에서 부르던 이름이다(沈正輔, 1988, 中國側史料를 통해 본 白江의 位置問 題a, 震檀學報 66 및 1989, 白江 의 位置에 대하여a, 韓國上古史學報 2 ; 서정석, 2004, 백제 白江의 위치a, 白山學報 69). 또한 웅진강은 지금의 공주 부근을 흐르는 금강에 대한 명 칭이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으로 볼 수 있다(淺川伯敎, 1930, 夫餘 白馬江a, 日本地理大系 12 朝鮮篇, 改造社, 66쪽). 결국 당군이 상륙한 곳은 금강 하구로서 기 벌포, 只火浦, 白江, 장암 등으로 현재의 충남 서천지역에 해당한다. 금강 하구는 성충과 흥수가 이미 백제의 요해처로 지적했듯이 사비도성으로 물길을 따라서 바로 진군할 수 있는 곳이므로, 사비도성으로 진군해야 하는 당군이 굳이 금강 하구를 버려두고 동진강이나 줄포, 더구나 안성 천 입구 등으로 상륙한다는 것은 군사전략상 성립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앞의 주 918) 과 김영관, 2007, 앞의 글, 243~244쪽을 참조할 것.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들을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되 물 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을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되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할 수 없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때를 맞아 군사를 풀 어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 니다. 왕이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 을 듣고 [왕은] 장군 階伯958)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黃山959)에 나아가 신라 군 957) 炭峴 : 沈峴 또는 眞峴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炭峴의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분명치 않다. ①충청남도 금산군 금산면 천내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설(大原利武, 1922, 百濟要害地炭峴に就いてa, 朝鮮史講座 朝鮮歷史地理, 88~90쪽), ②완주군 운주면 삼거리 와 서평리와의 사이에 있는 炭峙설(小田省吾, 1927, 上世史a, 朝鮮史大系, 194쪽), ③부여 석 성면 正覺里 숫고개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266쪽), ④대전 동구와 옥천 군 북면 경계의 식장산 마도령설(이병도, 1977, 역주 삼국사기, 401쪽), ⑤완주군 운주면 薪伏里 와 三巨里 사이의 쑥고개설(홍사준, 1967, 탄현고 -계백의 삼영의 김유신의 삼도-a, 역사학 보 35 36, 55~81쪽 ; 전영래, 1982, 탄현에 관한 연구a, 전북유적조사보고 13, 276~289 쪽), ⑥금산군 珍山面 校村里의 숯고개설(성주탁, 1977, 금산지방성지 조사보고서a, 논문집 제4권 제3호,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9쪽) 등이 있다. 본서 권26의 주 606)과 권28의 주 917)을 참조할 것. 958) 階伯 : 백제 의자왕대의 달솔 관등이었으며, 신라군과 싸울 때에는 장군의 직에 있었다. 660년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成忠 興首와 함께 부여 三忠祠에 배향되었고 그의 무덤은 충남 논산군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에 있으며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본서 권47 열전

129 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사비 꺾여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960) 이에 군사를 모아 熊津江 입구를 막고961) 강변에 군 도]성에 다가서자 왕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成忠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 사를 지키게 하였다. 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서 산에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마침내 태자 孝965)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962)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들은 밀물을 타고 꼬리에 났다.966)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泰967)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 성963)으로 나아가 30리(一舍)964)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階伯傳과 官昌傳에는 階伯으로,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大東地志 부여 寺院條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 ] 이라 하여 階伯은 姓이고 이름은 升이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 기사를 취신하면 階伯은 이름이 아니고 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百濟同姓이라고 한 것은 왕족 부여씨에서 분지되어 나온 한 지파가 階伯이라는 성 을 칭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金周成, 1990,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연구, 전남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이 시기 성씨의 分枝化에 대해서는 노중국,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 -木 (木)氏를 중심으로-, 大丘史學 48 참조. 그리고 계백이 전사한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는 본서 권47 열전 階伯傳 및 官昌傳을 참조할 것. 959) 黃山 : 현재의 충남 논산시 連山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熊州 黃山郡條에는 黃 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 으로 나와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 년 7월조의 注에는 或本云 新羅王春秋智率兵馬 軍于怒受利之山 怒受利山 百濟之東 堺也 라 하여 신라군이 怒受利山에 陣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怒受利山은 본서의 黃山에 해 당된다고 할 수 있다. 960)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 계백도 죽었다 : 계백은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자기의 처자들도 손수 죽여 황산 싸움터로 나아갔다. 그는 신라의 김유신이 거느린 5만의 군사와 내 차 례 싸워서 이겼으나, 결국 나이 어린 신라의 화랑 관창의 분전에 밀려 중과부족으로 패하고 장 렬한 전사를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47 열전 官昌傳과 階伯傳을 참고할 것. 961) 熊津江 입구를 막고 : 당군이 상륙한 곳으로 금강 입구인 기벌포 또는 백강으로 불리운다. 현재 충남 서천의 장항 일대를 말한다. 상세한 것은 앞의 주 956)을 참조할 것. 962) 定方이 왼편 물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 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나오지 않고 資治通鑑 에만 나온다. 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百濟據熊津江口以拒之 定方進擊破之 百濟死者數千人 餘皆潰走 라 하여 이 싸움에서 백제는 수천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당군과 신라군이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바로 사비도성에서 一舍 가량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一舍는 군대가 하루 동안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30리 정도를 가르킨다. 따라서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한 지점은 현재 충남 논산시 강경 부근에 해당한다(田中俊明, 2000, 百濟後期 王都泗 의 防禦體 系, 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서경문화사, 140쪽). 963) 그 도성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眞都城이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본 기사는 新唐書 권111 열전 蘇定方傳의 直趨眞都城 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 方傳에는 直趨眞都 로 되어 있다. 그러나 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直趨其都城 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直趨都城一舍止 라 되 어 있다. 문맥상에서 미루어 볼 때 熊津江口에서 백제 저항군을 격파한 唐나라 군대가 곧 바로 그 사비도성으로 진격해 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勘校本에서는 資治通鑑 의 其都城 을 취 신하여 中宗壬申刊本의 直趨眞都城 을 直趨其都城 으로 고쳤다. 964) 30리(一舍) : 군대가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하는데, 一舍는 30리를 말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25쪽).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현경 5년 8월조에는 未至二十餘里 로 나온다. 965) 태자 孝 : 의자왕의 아들. 효가 태자로 나오는 것은 본 기사뿐이고, 다른 자료에는 모두 隆이 태 자로 나온다. 한편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外王餘孝 로, 舊唐 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小王孝 로 나온다. 그런데 의자왕대 태자에 임명된 경우에 대해 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태자를 隆 한 명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1995, 백제 부여융 묘지명에 대한 검토, 국사관논총 62, 140~153쪽), 태자를 孝 한 명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21쪽), 효가 첫 번째 태자였다가 이후 왕비 恩古의 아들 융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는 견해(김수태, 1992, 앞의 글 참조), 그리고 융이 먼저 태자이고 은고의 아들 효로 교체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2004, 백제 의자왕대의 정치변동에 대한 검토, 동국사학 40, 95~107쪽 ;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32쪽 ; 장인성, 2005, 해동증자 백제 의자왕, 한국인물사연구 4, 217~219쪽) 등이 있다. 본서 권28에 의하면 융은 의자왕 4년 (644)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본 기사에는 효를 태자로 서술하고 있어 차이가 생긴다. 일본서 기 권26 齊明紀 6년 동11월조에 의하면 융은 왕비 은고의 아들이라고 한 점에서 의자왕대에 융 이 태자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효가 태자로 본서에만 기록된 것은 융이 일찍 당에 항복하여 당의 백제고토 지배에 앞장섰기 때문에 큰 아들 효를 태자로 내세운 고기류의 인식 때문에서 비 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하기 어렵지만 세밀한 검토가 필 요하다. 의자왕의 태자에 대해서는 앞의 주 877)과 김수태, 2007, 앞의 글, 55~62쪽을 참조할 것. 966) 태자 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義慈挾太子隆 走北 鄙 라 하여 태자 隆을 데리고 북쪽으로 달아난 것으로 나오고 있어 본 기사와 다르다. 이는 의자

130 258 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文思968)가 왕자 隆969)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께서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 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은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259 孝 왕자 泰 隆 演971) 및 대신과 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京師)972)로 보냈다.973) 나라에는 본래 5部974) 37郡975) 200城976) 76萬戶977)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熊津 馬 [그들은] 마침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 밖으로] 나가자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들에게 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해지자 성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970) 정방이 왕과 태자 왕의 태자를 효나 융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록상의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967) 泰 : 기록상 확인되는 의자왕의 아들은 孝 泰 隆 演 扶餘康信 등이다. 그 중 태는 의자왕의 둘째아들이다. 의자왕의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융과 태 효와 연 형제가 서로 모계가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92, 7世紀 中葉 東亞細亞, 백제연구 22 참조). 968) 태자의 아들 文思 :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嫡孫文思 로,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 전과 같은 책 권111 열전 蘇定方傳에는 義慈孫 으로, 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 월조에는 隆子文思 로 나온다. 이처럼 文思의 아버지가 孝나 隆으로 나오는 것은 의자왕의 태 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기록상의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969) 왕자 隆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4년조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여기서는 왕자로만 나온 다. 본서 찬자는 의자왕 말기의 태자를 효로 보았기 때문에 644년 융의 태자 책봉 기사와는 달 리 서술하였기 때문에 융이 왕자로 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의 주 877)을 참조할 것. 970)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 舊唐書 권83 열전 소정방전에는 其大將 植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餘諸城主皆同送款 이라 기록하고 있고, 新唐書 권111 열전 소정방전 에는 其將 植與義慈降 이라 하고 있다. 이 두 기록에 의하여 大將 植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장 植은 의자왕 항복 당시 달솔급의 熊津方領이었고(본서 권5 신라본 기 무열왕 7년), 구당서 권83 소정방전에 의거하여 熊津方領 植이 웅진성으로 피난 온 의자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군대에 항복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95, 百濟復興軍의 復 興運動 硏究, 歷史의 再照明, 소화, 57쪽 ; 김영관, 2001, 멸망 직후 백제유민의 동향, 전 농사론 7, 58~64쪽). 그런데 2006년에` 植進墓誌銘a이 새로 발견되면서 植의 생애와 활 동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예식은 옛 왕도 熊川(웅진) 출신으로 祖와 父가 무왕대 에 좌평을 역임한 좌평급 가문 출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예식은 달솔급 웅진방령이 아 니며 좌평급 대장직에 있었으며, 또 新唐書 권111 열전 소정방전 기사의 將 을 함께 할 로 해석하고 그가 피신해 온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도학, 2007, 植進묘지명 을 통해 본 백제 氏 가문, 전통문화논총 5, 한국전통문화 학교, 79~80쪽). 그러나 黑齒常之가 달솔로서 風達郡將이 된 예에서 보듯이 백제 말기에는 좌 평이나 달솔 관등의 정원이 철폐되고 또한 좌평 신분의 지위 하락으로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소 지자가 방령을 맡았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예식이 웅진방령일 수도 있다.` 植進묘지명a에 대한 내용 소개에 대해서는 이도학의 앞의 글 이외에 김영관, 2007, 백제유민 예식진 묘지 소 개, 신라사학보 10, 365~380쪽을 참조할 것. 971) 演 : 의자왕의 아들.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으나 구체적인 행적 은 알 수 없다. 972) 당나라 서울(京師) : 당나라의 수도 長安을 말하는데, 현재의 중국 西安이다. 장안은 B.C.202년 한고조가 처음으로 정도한 후 그 뒤를 이는 惠帝(B.C.194~188)때 도성의 축조되었고, 이후 前 趙 前秦 後秦 西魏 북주 隋 唐의 도읍지가 되었다. 973) 정방이 왕과 태자 孝 당나라 서울(京師)로 보냈다 : 본 기사의 인원수는 三國遺事 권1 紀 異篇 태종춘추공조에 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王子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 百七人送京師 라 한 기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포로로 잡아간 숫자는 각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虜義慈及太子隆 小王孝 演 僞將五十八人等 送於京師 라 되어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은 僞將 을 酋長 으 로 표현한 것 외에는 舊唐書 의 내용과 동일하다. 또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定 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 乘船廻唐 으로, 같은 책 권42 열전 김유 신전 中에는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 卒二萬人 으로,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 國碑銘 에는 其王扶餘義慈及太子隆自外王餘孝一十三人幷大首領大佐平沙托千福國辨成以下七 百餘人旣入重 로,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秋7월조에는 十一月一日 爲將軍蘇定方等 所捉百濟王以下太子隆等諸王子十三人 大佐平沙宅千福 國辨成 孫登以下三十七人 幷五十許人 奉進朝堂 으로, 같은 책 齊明紀 6년 동11월조에는 百濟王義慈 其妻恩古 其子隆等 其臣大佐平千 福 國辨成 孫登等凡五十餘人 秋於七月十三日 爲蘇將軍所捉而送 으로 되어 있다. 974) 5部 : 전국을 다섯으로 나눈 사비시대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 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 를 말한다. 백제 말기에 와서 方과 部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5부는 5방과 같은 것이 다. 이 部(方)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軍管區로서 6 10개의 郡을 포괄하였고, 또 小城으로 표현 되는 縣들을 통속하였다. 部(方)의 장은 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는 것 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五部의 중심 치소는 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 및 翰苑 백제조에 인용된 括地志 에 의해 方과 方城의 명칭은 中 方-古沙城, 東方-得安城, 南方-久知下城(卞城), 西方-刀先城(力先城), 北方-熊津城(固麻城)이 다. 이 방성은 대개가 험한 산에 의지하여 돌로 쌓았으며, 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

131 260 고 있었다. 이처럼 백제의 지방통치체제 가운데 가장 진전된 형태로 멸망기까지 존속하였던 제 도는 5방(부)제이다. 이에 관한 사료는 거의 중국사서인 주서 수서 한원 등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그 대체적인 윤곽만을 제시하고 있지만, 부제나 담로제와는 달리 이견의 차이가 심 하지 않다. 다만 5방제의 성립 시기, 방-군-성 사이의 통속 관계, 군장과 도사와 같은 지방관의 성격 문제 등에서 아직 해명되지 않았거나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왕도의 5부제 편제 문 제도 함께 다루어져야 할 연구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5방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서는 담로제와 5방제의 계기적 관계로 설정해 보고 웅진시대로 보 는 견해(김영심, 1997, 6~7세기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지방관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 구 11), 사비천도 전후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 앞의 책 ; 김주성, 1992, 백제 지방통치조 직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재편, 국사관논총 35 ; 정재윤, 1992, 웅진 사비시대 백제의 지방 통치체제, 한국상고사학보 10), 위덕왕대로 보는 견해(박현숙, 1996, 궁남지 출토 목간과 왕도 5부제, 한국사연구 92) 등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 대체적으로 사비천도를 전후로 한 시기에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사비시대에는 일관되게 시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통설로 받 아들여지고 있다. 그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16관등제 22부제 왕도 5부제 등의 중앙통치체제 의 정비와 군사적 측면에서의 지방의 통제력 강화와 수취 기반의 확대를 도모하는 목적에서 상 위의 행정구획으로 5방제를 설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5방제의 통속관계에 대해서는 방-군-성 사이에 철저한 통속관계가 설정되어 있었다는 견해(김주성, 1992, 앞의 글 참조)와 이를 이원화 하여 군정 부문에는 비교적 철저한 통속관계가 이루어졌으나 민정부문에는 방과 군 사이에 직 접적인 통속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 앞의 글 ; 김영심,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박사학위논문)가 있다. 그리고 방-군-성의 통속관계에서 지방관을 方領-郡將(郡令)-城主(道使)로 설정하고 있는데, 지방관의 성격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제기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관련 기사에 대한 해석 을 둘러싸고 方佐와 郡將의 정원, 道使의 성격문제 등이다. 이에 대해서는 今西龍, 1934, 百濟 五方五部考,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 노중국, 1988, 앞의 책 ; 朴賢淑, 1996, 百濟 地方統治 體制 硏究, 고려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충남대 백제연구소편, 1997, 백제의 중앙과 지방 ; 한국상고사학회편, 1998,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 金英心,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5 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박현숙, 2007, 방 군 성 체제로 의 정비,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79~202쪽 등을 참조할 것. 975) 37郡 :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의 하나로 方(部)과 城(縣)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郡은 小城으로 표 현되는 몇 개의 縣들을 통속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郡制는 사비천도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 로 보인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 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에 나오는 6郡 은 성왕대의 郡制 의 실시를 방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郡의 長은 郡將(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또는 郡 令(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이라 하였다. 郡에는 郡將이 3명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군장의 정원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군장이 모든 군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 方 261 韓 東明 金漣 德安의 5개의 都督府978)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 현을 다스리게 하였 에 소속된 6 7~10개의 군 중 중심이 되는 3개의 군에만 군장이 1인씩 존재하였고 나머지는 도 사가 있었다는 견해와 각 군마다 군장 3인이 있었다는 견해(김영심, 1997, 앞의 글 참조)가 있 다. 군장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군정 민정 사법 등 고유한 업무를 분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郡將은 德率의 관등 소지자가 맡는 것이 원칙이지만, 백제 말기에는 정원이 철폐되 고 좌평 신분의 지위 하락으로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맡는 경우도 생겨났다. 黑齒常之가 달솔로 서 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976) 200城 : 백제의 지방통치조직 중 최하의 조직. 翰苑 백제조에 郡縣置道使 라는 기사는 郡 아 래에 縣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縣은 바로 城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城(縣)의 장은 城 主(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 또는 道使( 翰苑 백제)로 불리웠다. 도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한원 백제조에 郡縣治道使 亦名城主 란 기록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사를 군이나 현 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80, 六世紀における 朝鮮三國の國家體制,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4, 學生社 ; 이근우, 1997, 백제의 방군성제 관련 사료에 대한 재검토, 한국 고대의 고고와 역사, 학연문화사)와 도사를 군과 현 으로 분리해 파견된 것으로 보거나(김주성, 1992, 앞의 글 참조), 또는 군과 현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는 군현에 도사가 파견되었다가 점차 현으로 축소 분화되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김수 태, 1997, 百濟의 地方統治와 道使,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 백제연구소)가 있다. 그런 데 지방관이 파견된 성의 수에 대해 본 기사는 200성이라 하고 있지만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 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250현으로, 본서 36 잡지 지리 3에는 104현으로 나오고 있어 일 치하지 않는다. 이 중 본 기사의 200성과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의 250현은 백제 당시의 현의 수의 변동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地理志의 104현은 신 라가 새로운 기준에서 지방통치조직을 편제하면서 축소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977) 76萬戶 : 백제 멸망 당시의 호수. 백제의 戶數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 新 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 通典 권181 邊防 1 百濟條에는 戶76萬 으로 나온다. 그러나 定林 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 으로 나오고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변한 백제조에는 百濟全盛之時 十五萬二千三百戶 로 나오고 있어 기 록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978) 5개의 都督府 :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5개의 도독부이 다. 그 명칭은 熊津 馬韓 東明 金漣 德安都督府로서 그 중 중심이 된 것은 웅진도독부였다. 이 5도독부 중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웅진도독부(현재의 충남 공주시)와 덕안도독부(현재의 충 남 논산시 恩津面)이다. 德安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전주 德殷郡條에는 德 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그러나 백제 멸망 후 곧 각 처에서 부흥군이 봉기함에 따라 웅진도독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도독부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 점은 본서 권37 잡지 지리 6에 5도독부는 보이지 않고 대신 1都督府-7州制만 보

132 262 고,979)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都督 刺史980) 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郞將981) 劉仁願982)에게 명령하여 [사비]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左衛郞將983) 263 王文度984)를 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당] 高宗이 꾸짖고는 용서하였다.985) 왕이 병들어 죽자 金紫光祿 大夫986) 衛尉卿987)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이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5도독부제는 단지 계획상으로 존재하던 圖上의 제도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舊唐書 권83 열전 33 소정방전에는 百濟悉平 分其地爲六州 라 하 여 백제를 평정한 후 그 故地를 6州로 편성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나, 대다수의 사료들 이 5都督府를 둔 것으로 되어 있어 6州로의 편성은 취신하기 어렵다. 5도독부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는 千寬宇, 1979, 馬韓諸國의 位置試論, 東洋學 9를 참조할 것. 그리고 5도독부 가운 데 핵심인 웅진도독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이도학, 1987, 熊津都督府의 支配組織과 對日本政 策, 白山學報 34를 참조할 것. 979) 5개의 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 현을 다스리게 하였고 : 동일한 내용이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凡置五 都督府 三七州 二百五十縣 이라 하여 주와 현의 수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5도독부 제가 폐지된 후 웅진도독부 하에 두어진 州 縣의 수에 대해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도독부조에 는 1도독부-7주-51현으로 나온다. 980) 刺史 : 州의 장관을 말한다. 刺史는 漢의 武帝가 部刺史를 두고 詔條를 받들어 郡國을 감찰하는 일을 관장하게 한데에서 비롯되었다. 魏晉시대에는 요충지의 州에 두고 都督으로써 刺史를 兼 領하게 하였다. 漢 魏 晉대의 刺史에 대해서는 和田淸, 1932,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65 67쪽 및 쪽을 참조할 것. 唐代의 지방통치조직은 州縣制였는데, 주의 장관을 자사 라 하였다.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州縣制라고 하는 당의 지방통치조직을 백제고지에 시행하 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 나오는 1도독부-7 주-51현제이다. 자사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7의 주 714)를 참조할 것. 981) 郞將 :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유인원의 직함을 行左驍衛郞將으로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의 낭장은 좌효위낭장을 말한다. 좌효위에는 左郞將 1명과 右郞將 1명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관품은 분명하지 않으나 五府의 낭장의 관품이 正5品上이어서 그것에 준하 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新唐書 권49 상 백관 4 상 16衛 및 舊唐書 권44 직관 3 武官條를 참조할 것. 982) 劉仁願 : 660년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의 하나. 백제 멸망 후 백제 사비도성을 지키는 최고의 책임을 맡았다. 字는 士元이고, 조음(雕陰) 대빈(大斌) 사람이다. 그의 祖父는 표 기대장군의동삼사로서 개국공이 되었고, 父는 都督左武衛將軍右驍衛大將軍勝夏二州가 될 정도 의 혁혁한 가문 출신이다. 그는 이러한 가문의 훈업으로 홍문관 학생이 된 이후 고구려 정벌 (645), 延陀 정벌(647), 요동 정벌(648), 鐵勒 慰撫(651), 賀魯 정벌(654), 吐谷渾과 吐藩 위무 (659)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어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는데, 그때의 직함이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 의하면 右一軍摠管 宣威將軍行左驍衛郞將上柱國이었다고 한다. 그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소정방을 대신하여 사비 도성의 都護로서 당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그 후 웅진도독부 체제로 개편되었을 때 웅진도독 이 되어 다스리다가 663년에 귀국하였다. 664년 10월에 다시 웅진도독이 되었고, 665년 8월에 유인궤와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회맹하는 의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唐劉仁願紀功碑a가 부여의 扶蘇山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비 는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劉仁願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당서 와 신당서 에 입전되 어 있지 않지만,`唐劉仁願紀功碑a와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3~64쪽을 참 조할 것. 983) 左衛郞將 : 唐의 16衛의 하나인 左衛에 설치된 무관직인데, 관품은 正5品上이다. 앞의 주석 981)을 참조할 것. 984) 王文度 : 그의 행적을 담은 열전에 입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 다. 그는 당 고종 永徽연간(650~655)에 돌궐을 공격하였을 때 소정방의 공로를 시기하고 재물 을 약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르다가 귀환 후에 제명되고 말았다. 660년 8월 백제 부흥군의 공격 으로 사비부성이 곤경에 처해지자 당 고종은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에 파견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에 갔으나 곧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 에는 신라의 三年山城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 서 권28 본 기사에서는 바다를 건너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왕문도의 직함에 대해 본 기사와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衛郞將으로 나오나, 舊唐 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右衛郞將으로, 舊唐書 권84 열전 劉仁軌傳과 본서 권5 신라본 기 무열왕 7년 및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高宗 龍朔 원년 3월조에는 左衛中郞將으로 나오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왕문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열전에 입전되어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 지만, 구당서 권83 열전 소정방, 같은책 권84 열전 유인궤, 같은책 권199 상 열전 백제, 신 당서 권220 열전 백제 그리고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4~65쪽을 참조할 것. 985) 高宗이 꾸짖고는 용서하였다 :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顯慶 5년 11월조에는 十一月 戊 戌朔 上御則天門樓 受百濟 自其王義慈以下 皆釋之 라 나온다. 986) 金紫光祿大夫 : 당의 文散階의 하나이다. 당의 文散階는 29등급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金紫光 祿大夫는 정3품이다. 新唐書 권46 백관 1 吏部條에 凡文官九品 有正有從 自正四品以下 有上 下 爲三十等 凡文散階二十九 正三品曰金紫光祿大夫 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987) 衛尉卿 : 중국 당나라 관제의 하나로 衛尉寺의 장관으로 관품은 종3품이다. 衛尉寺는 器械文物 과 宮門衛屯兵 등을 관장하는 임무를 지녔다. 구당서 권44 職官 3 衛尉寺 및 신당서 권48

133 264 내려 孫皓988)와 陳叔寶989)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하였다. 隆에게는 司稼卿990) 을 제수하였다. 王文度가 바다를 건너다가 죽자991) 劉仁軌992)로 대신하게 하였다. 武王의 조카 福信993)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994) 이때 승려 道琛995)과 함께 周留城996) 百官 3 衛尉寺條를 참조할 것. 988) 孫皓 : 중국 삼국시대에 吳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烏程公(264~280)의 이름. 오나라를 세운 孫權 의 손자로 재위기간은 16년이다. 字는 亢宗 또는 皓宗. 烏程侯로 있다가 孫休의 뒤를 이어 제위 에 올랐다. 晉나라가 수도 建業을 함락하자 항복함으로써 吳나라는 망하였다( 삼국지 권48 吳 書 孫皓 참조). 989) 陳叔寶 : 중국 남조 陳의 마지막 왕인 後主( )의 이름이다. 자는 元秀로 高宗의 嫡長子 이다. 陳 大建 원년(569)에 皇太子가 되었고, 14년(582)에 高宗이 죽자 즉위하였다. 589년 隋나 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됨으로써 陳은 멸망하였다. 990) 司稼卿 : 司稼寺의 장관으로서 관품은 종3품이다. 司稼寺는 창고의 일을 관장한 司農寺를 唐 高 宗 龍朔 2년(662)에 개칭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당서 권44 직관 3 司農寺 및 신당서 권48 백관 3 司農寺조를 참조할 것. 991) 王文道가 바다를 건너다가 죽자 : 이 구절은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 그대로 나온다. 그 러나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왕문도는 三年山城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돌연히 병이 생겨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는 차이가 난다. 992) 劉仁軌 : 생몰연대는 년으로 享年 84세이다. 중국 당나라 太宗~高宗代의 장군. 자는 正則으로 卞州 尉氏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해 독학으로 두루 통달하게 되었 다. 그는 河南道按撫大使 임괴(任 )의 천거로 출사한 이래 당나라 태종 貞觀 15년(641)에 給事 中에 임명되었다. 660년 당 고종이 백제를 공격할 때 수군을 감독 통솔하여 군량을 운송하는 일 을 맡았으나 풍랑을 맞아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 일로 李義府의 참소에 의해 靑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곧 실각당하고 목숨만을 모면한 채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사비성에 진수하고 있던 당군이 위험에 처하자 고종은 유인궤를 발탁하여 檢校帶方州刺 史로 삼고 왕문도를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그 후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후 檢校熊 津都督으로 삼아 당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665년 8월에 유인원과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맹세를 하도록 하고 귀국하였다. 668년에 그는 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이 되 어 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薛仁貴와 함께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에 주둔하여 고구려고토를 지배하였다. 669년 회군한 이후 670년에 농주자사에, 674년에 계림도총관이 되 어 신라에, 이후 吐藩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84 열전 34 유인궤전 ; 新唐書 권108 열전 33 유인궤전 ; 瀧川政次郞, 1984, 劉仁軌傳 上 中 下, 古 代文化 집 ;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0~62쪽을 참조할 것. 993) 福信 : 백제 무왕의 조카나(본서 권27 무왕 28년) 또는 從子(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 ; 본서 265 권28 의자왕 20년)로 나오고 있으나, 무왕의 조카로서 의자왕과는 4촌간이 된다. 도침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무왕 28년(627)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장군의 직도 역임하였다.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무왕의 조카를 信福 으로 나오고 있으나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조와 본서 의장왕대 기록에는 福信 으로 나오고 있어서 동일인으로 이해된다. 그런데`唐劉仁願紀功碑a와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조에는 鬼室福信으로 나온 다. 따라서 복신의 성은 왕성인 부여씨 대신에 鬼室氏를 칭하고 있다. 흑치상지의 가문이 원래 왕족인 부여씨에서 후에 왕족에서 갈라져 나와 흑치씨가 된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복신 의 가문도 扶餘氏에서 分枝化되어 귀실씨를 칭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노중국, 2003, 백제 부흥운동사연구, 일조각, 99쪽). 그런데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百濟公條에서 百濟公 因 鬼神感化 故鬼室爲氏 라 하여 鬼室氏의 稱姓 배경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福信의 일족이 일본으 로 망명한 이후 姓氏의 유래를 수식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大東地志 5권 충청도 眞岑縣 典故조에는 百濟故將高福神信 以眞岑城[密岩古城]臨江高險 加兵守之 라 하여 福信을 高福信 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金正浩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복신의 성을 高氏 로 표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복신의 성은 일본서기 나 신찬성씨록 및`대당평백 제국비명a에 의거하여 鬼室氏 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신이 부흥군을 일으켰을 때의 관 등은 新撰姓氏錄 권26 齊明紀 6년 9월조에 西部恩率鬼室福信 이라 한 것에서 보듯이 恩率로 나오고,`唐劉仁願紀功碑a에는 率로 나온다. 복신이 무왕 28년에 당으로 使臣을 가는 등의 활 약을 한 후 30여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관등이 恩率 또는 率밖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의 가문이 좌평이 아닌 솔계 관등에 임명될 정도의 대성귀족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그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후 스스로 佐平관등을 참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660 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자 승려 도침과 함께 왜에 인질로 간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周留城에서 부흥군을 일으켰다. 그는 霜岑將軍으로 스스로 칭하고 백제 유민들을 모아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내분으로 그는 도침을 죽이고 최고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여 부흥군 을 통솔하다가 그 역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노중국, 1995, 百濟復興軍의 復興戰爭 硏究, 歷史의 再照明, 한림과학원 및 2003, 백제부흥운동사연구, 일조각, 98~101쪽을 참조할 것. 994) 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 동일한 표현이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 나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舊將福信 으로 기록되어 있다. 995) 道琛 : 백제가 망한 후 복신과 더불어 부흥군을 일으켜 지휘한 승려. 出自나 가계는 분명하지 않 으나, 그의 활동에서 미루어 볼 때 당시 승려를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흥 군이 강성할 때에는 領軍將軍을 칭하면서 부흥군의 최고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백제 가 멸망당하자 승군을 중심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복신과 함께 부흥군의 주축을 이룬 것으로 보 인다. 그러나 후에 내분이 일어나 복신에게 주살되었다. 그는 현재 부여 은산별신제에서 土進大 師로 제향되어 온 민속적 숭배의 인물이다(임동권, 1971, 한국민속학론고, 선명문화사, 188쪽 ; 이필영, 2001, 민간신앙의 분석, 부여의 민간신앙, 부여문화원, 392쪽). 도침의 사상과 활 동에 대해서는 成周鐸, 1992, 百濟僧 道琛의 思想的 背景과 復興活動, 湖西史學 19 20합

134 266 집을 참조할 것. 996) 周留城 :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복신과 도침의 중심 거점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여러 견해가 제 기되어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 명칭에 대해서 는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 中에는 豆率城으로,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원년 3월조에는 疎留 城(ソルサシ)으로, 동 12월조에는 州柔(ツヌ)로 나온다.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산설 부 안설 연기설 홍성설 등이 대두되고 있다. 먼저 韓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설은 1913년 津田左右吉(`百濟戰役地理考a, 朝鮮歷史地理 上, 南滿洲鐵道株式會社)이 주창한 이래 池內宏 이 이를 수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이 설을 폐기하였다(池內宏, 1933,`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 唐 羅 日三國の關係a,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제14책 및 1960, 滿鮮鮮史硏究 上世第二 冊). 그 뒤 李丙燾가 한산 乾芝山城이라는 구체적인 위치를 제시한 이래(이병도, 1977, 앞의 책, 426쪽) 대부분 국내학자와 일본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이 설에 대해서는 沈正輔, 1983, 百濟 復興軍의 主要據點에 관한 硏究, 百濟硏究 14집 ; 鄭孝雲, 1995, 古代韓日政治交涉史硏究, 學硏文化社 ; 鬼頭淸明, 1981, 白村江 -東アジアの動亂と日本 -, 敎育社 ; 鈴木治, 1995, 白 村江 - 古代日本の敗戰と藥師寺の謎 -, 學生社 등을 참조할 것. 그러나 최근 한산 건지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결과 고려시대에 축조한 성으로 밝혀졌고(忠淸南道 舒川郡 (財)충청매장문 화재연구원, 1998, 乾芝山城 및 2001, 韓山 乾芝山城 ), 또한 주류성은 백제부흥운동의 남방 의 중심 거점이었기 때문에 한산설은 성립되기 어렵다(沈正輔, 1999,`百濟 周留城考a, 百濟文 化 28,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다음으로 부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부안설은 1924년 小田省吾(`朝鮮上世史a, 朝鮮一般 史, 朝鮮總督府)가 주창한 이래 今西龍이 位金岩山城으로 구체적인 위치를 제시하였고(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安在鴻(1948,`百濟史 總考a, 朝鮮上古史鑑, 民友社)등이 이를 보완 했다. 그 뒤 全榮來(1976, 周留城 白江 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 扶安郡 및 1996, 百濟最後 決戰場의 硏究 - 白村江에서 大野城까지 -, 新亞出版社)와 盧道陽(1980,`百濟周留城考a, 明 知大論文集 12) 李道學(1996,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등이 이 설을 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노중국(2003, 앞의 책, 195~196쪽)과 김영관(2005, 앞의 책, 181쪽) 등에 의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주류성으로 비정되는 부안 位金岩山城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邊 山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토지도 척박하여, 계화도 등에 대한 간척사업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농토가 부족한 서해안의 산악지역이었다. 다음으로 충남 연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주류성이 연기지역에 있었다는 설은 申采浩가 연기 군 남면의 元帥山城에 비정한 이래(申采浩, 1948, 朝鮮上古史(下), 鐘路書院), 金在鵬이 그 설 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元帥山城은 금강 본류와 미호천이 합수머리에 위치하여 산성은 험준하 기는 하나 주변에 넓은 들판을 갖춘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다, 金在鵬은 연기군 전의면의 雲住山 城이라고 주장하였다가(金在鵬, 1981,`全義 周留城考證a, 燕岐地區古蹟硏究調査報告書 - 全 義篇 - ), 연기군 남면의 唐山城이라고 견해를 수정하였다(金在鵬, 1999,`百濟 周留城硏究a, 백제 주류성의 연구현황과 과제, 공주교육대학교 박물관 공주문화원). 그러나 운주산성은 조 사결과 통일신라 이후에 축조된 성으로 판명되었고(公州大學校 博物館, 1997, 燕岐 雲住山城 267 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997)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 扶餘豊998) ; 徐程錫, 2000,`燕岐 雲住山城에 대한 考察 -統一新羅時代 山城의 一例-a, 박물관연보 5, 公州大學校 博物館), 당산성은 백제시대의 토성이기는 하나 원수산성과 같이 금강의 지류인 美 湖川邊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에 넓은 들판을 갖춘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다. 원수산성과 당산성 은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주변에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전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양이 척박한 곳이라는 日本書紀 의 기록과도 부합되지 않는 곳이다(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9,`關 防遺蹟a, 忠南地域의 文化遺蹟 -燕岐郡篇- 12). 연기지역은 웅진의 동북쪽에 위치한 지역으 로 淸州와는 지근거리이며 신라와의 접경지대였다(양기석, 2001,`신라의 청주지역 진출a, 新 羅 西原小京 硏究 ). 이러한 지역에 부흥운동군의 최대거점인 주류성이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특히 백제의 남방지역에 있어야 할 주류성이 동북방에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음으로 충남 홍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주류성 홍성설은 金正浩가 지은 大東地志 권5 忠淸道 洪州 沿革에 本百濟周留城 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朴性興은 洪城郡 長谷面 일대에 걸쳐있는 鶴城山城과 石城이 주류성이라는 주장을 하였다(1994, 洪州 周留城考, 洪城 郡).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결과 백제 沙尸良縣과 관련되는 지역으로 밝혀져 주류성으로 보기는 어렵다(상명여자대학교 박물관 홍성군청, 1995, 洪城郡 長谷面 一帶 山城 地表調査報告書 및 1998, 洪城 石城山城建物址 發掘調査報告書 ). 또한 홍성은 백제의 서북 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任存城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백제 남방의 부흥운동 중심 지인 주류성을 백제 서북방에 위치한 홍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설 이외에도 扶餘 忠化面의 周峰山城으로 보는 견해(輕部慈恩, 1971,`百濟都城及び 百濟末期の戰跡に關する歷史地理的檢討a, 百濟遺跡の硏究, 吉川弘文館)과 全北 金堤郡 水流 面으로 보는 견해(大原利武, 1924,`朝鮮歷史地理a, 朝鮮一般史, 朝鮮總督府) 등이 있으나 周 峰山城의 周峰 과 水流面의 水流 라는 지명과 주류성의 音이 서로 유사한 것을 주요 근거로 하고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忠南 舒川郡 庇比으로 보는 견해(池憲英, 1972,`豆良尹城 에 대하여a, 百濟硏究 3)과 全北 井邑郡 七寶面으로 보는 견해(徐程錫, 2000,`百濟 5方城의 位置에 대한 試考a, 백제문화의 고고학적 연구, 호서고고학회) 등도 있다. 주류성에 대한 연구 사적 검토와 지명 비정에 대해서는 김영관, 2005, 앞의 책, 180~184쪽을 참조할 것. 이처럼 복신과 도침이 부흥군을 일으킨 후 최초의 중심지에 대해 본 기사에는 주류성으로 나 오나`唐劉仁願紀功碑a에는 卽有僞僧道琛 僞汗率鬼室福信 出自巷閭 爲其魁首 招集狂狡 堡據任 存 蜂屯蝟起 彌山滿谷 이라 하여 임존성으로,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9월조에는 西部恩 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北任敍利山] 達率餘自信 據中部久麻怒利成[或本云都都 岐留山] 各營一所 誘聚散卒 이라 하여 任射岐山(任敍利山)으로 나온다. 그 중 당대 자료인`唐劉 仁願紀功碑a의 기록에 의거해 볼 때 복신과 도침은 부흥군을 일으킬 당초에는 임존성을 근거지 로 하였으나, 그 후 중심지를 주류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국측 자료는 주류성 을 처음부터 부흥군의 중심지로 인식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노중국, 2003, 앞의 책, 108쪽). 997) 武王의 조카 福信은 반란을 일으켰다 : 백제 무왕의 조카나(본서 권27 무왕 28년) 또는 從

135 268 子(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 ; 본서 권28 의자왕 20년)로 나오고 있으나, 무왕의 조카로서 의 자왕과는 4촌간이 된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그 멸망(660년 7월 18일) 직후부터 시작되어 지수 신이 최후까지 항거한 임존성이 함락(663년 11월)될 때까지 3년여에 걸쳐 지속되었다. 대체로 그 전개과정에 따라 3기로 구분하여 파악된다. 제1기는 좌평 正武 달솔 餘自進 복신 등이 백 제유민들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660년 8월 2일에서 661년 8월까지로 초기 부흥군이 각처에서 일어나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시기이다. 제2기는 661년 8월 왜에 체류하고 있었던 부여풍이 왕위에 올라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해 조직적으로 전투를 한 시기이다. 이때에 부흥백제국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2003, 앞의 책, 121~130쪽). 제3기는 663년 9월 1일 백강구 전투의 패전과 주류성의 함락 이 후 지수신이 지키던 임존성이 함락되기까지로 부흥군의 최후 항전기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는 노중국, 2003, 앞의 책 및 2004, 부흥백제국의 성립과 몰락, 백제부흥운동사연구, 서경,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79~116쪽 ; 김영관, 2005, 백제부흥운동연구, 서경 ; 심정보, 2007, 부흥군의 봉기와 부흥활동의 전개 및 부흥군 최후의 항전,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6,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등을 참조할 것. 반면에 부흥운동을 663년에 끝난 것으로 보지 않고 672년 정월 신라가 所夫里州 설치와 총관 파견을 통해 백제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도모하기 시기까지 연장해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673년에 마련된 백제 유민에 대한 새로운 차별정책 을 웅진도독부의 백제부흥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2차 부흥운동으로 설 정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도학, 1987,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 보 34 및 1997, 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20~21 70쪽 ; 김수태, 2004, 웅진도독부의 백제 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사연구, 서경,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117~140쪽 등을 참조할 것. 본서에서는 660년 8월 2일부터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초기 부흥운동에 관한 기록은 본서 권5 신라본기 태 종무열왕 7년 8월조를 비롯한 신라본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를 참고할 것. 998) 扶餘豊 : 백제 무왕의 아들로 扶餘豊 豊 餘豊( 구당서 권84 열전 유인궤 ; 신당서 권108 열전 유인궤 ; 본서 권6 문무왕 상 3년 및 권28 의자왕 20년), 餘豊璋 豊璋(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冬11월) 등으로 나온다. 성은 부여씨이고 이름은 풍장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와 본서 에서는 부여풍을 古王子 또는 故王子 로 기록하고 있어 누구의 아들인지에 대해 논란이 제기 되어 있다. 부여풍에 관한 최초의 기사는 일본서기 권23 舒明紀 3년조에는 百濟王義慈入王 子豊璋爲質 라고 하여 부여풍이 의자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부여풍(풍장)이 한 사람이라는 입 장에서 이 기사에 의거하여 부여풍(풍장)을 백제 왕자 翹岐로 보는 견해가 있고(鈴木靖民, 1970, 皇極紀朝鮮關係記事の基礎的硏究, 國史學 82, 23쪽 ; 西本昌弘, 1985, 豊璋と翹岐 -大化改新前夜の倭國と百濟-, ヒストリア 107, 2쪽 ; 연민수, 1997, 백제의 대왜외교와 왕 족, 백제연구 27, 206쪽), 또 의자왕은 무왕의 誤記라 보고 무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정효운, 1990, 7세기대의 한일관계의 연구 -백강구전에의 왜군파견을 중심으로-, 고고역사학지 5 6합집, 151~154쪽 ; 김수태, 1992, 百濟 義慈王代의 太子冊封, 百濟硏究 23, 147~151 쪽 ; 양기석, 1995, 백제 부여융묘지명에 대한 검토, 국사관논총 62, 148쪽)가 있다. 반면 269 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999) 西 北部1000)가 모두 응하자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사비] 都城에 있던 유인원(군)을 포위하였다.1001)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檢校帶方州 부여풍(풍장)을 동명이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94, 7세기 백제와 왜와의 관계, 국사관논총 52, 165쪽). 위 기사의 舒明 3년은 무왕 32년이어서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무 왕이 둘째 아들 풍장을 왜에 보낸 것을 의자왕대의 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권23 서명 3년조와 권25 효덕 백치 원년조에 보이는 풍장은 무왕의 아들이고, 권26 제명기 6년 동10월조의 풍장은 의자왕 아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름이 동일하고 무왕대 이래 로 왜에 체류하고 있는 점에서 양자를 다른 인물로 설정하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의자왕 아 들설은 기록상의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 백제왕 의자를 후대의 추기로 보는 견해와 서명 천황 3년을 오기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왜국에 인질로 가 있던 부여풍이 백제 멸망 후 에 복신 도침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의자왕이 항복한 후 왕을 비롯하여 王 子와 고위귀족 대다수가 당에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적임자가 없었다는 점과 豊 이 왜국에 오랫동안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의 지원을 받기 쉽다는 점, 그리고 국내에서의 그의 기반이 미약하였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생각된다(노중국, 1995, 앞의 글 ; 김영관, 2005, 앞의 책, 125~126쪽). 999) 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 본서 권6 신라본기에는 백제 멸망 후 복신이 부흥군을 일으 켜서 패망하기까지의 사실을 문무왕 3년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복신은 660년 10월에 이어 661년 4월에 왜에 사신을 보내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왜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 여 부여풍을 귀국시켰다. 그의 귀국 시기에 대해 661년 8월설(鬼頭淸明, 1976, 日本古代國家 の形成と東アジア, 校倉書房) 9월설(八木充, 1970, 百濟の役と民衆, 小葉田淳退官紀念國 史論集 ) 662년 정월설(池內宏, 1933, 앞의 책, 416쪽) 등이 있는데, 일본서기 기사에 의거 한 661년 9월설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여풍이 귀국한 시기에 대해 일본 서기 에는 권27 제명기 7년(661) 9월조와 권27 천지기 원년(662) 5월의 두 기사가 기록되어 있 는데, 661년 9월 왜군의 1차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부여풍과 扶餘忠勝 塞城 등이 함께 귀국하 여 백제왕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山尾幸久, 1991, 古代の日朝關係, 書房, 411~412쪽 ; 노 중국, 1994, 앞의 글, 181쪽 ; 정효운, 1995, 고대한일정치교섭사연구, 학연문화사, 172~ 177쪽 ; 김영관, 2005, 앞의 책, 126~127쪽). 풍왕이 즉위함으로써 백제유민들의 역량을 결집 시켜 백제부흥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시켜 나가는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풍왕의 즉위를 부흥백제국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2003, 앞의 책, 121~122쪽). 1000) 西 北部 :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西部皆應 이라 하였고, 北部에 대해서는 언급하 고 않았다. 복신 도침군의 초기의 형세에 대해서`唐劉仁願紀功碑a에는 蜂屯蝟起 彌山滿谷 으로 표현하고 있다. 661년에 들어와 부흥운동군의 사비성에 대한 공세는 더욱 치열해졌다. 처 음 백제의 서부와 북부지역 즉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가 임존성을 거점으로, 여자진이 久麻怒 利城 등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켜 활동한 사실을 말해준다.

136 270 刺史1002)로 기용하고, 王文度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일으켜서 [劉]仁願 고 을 구하게 하였다.1003) 인궤가 기뻐서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 한다. 271 말하고는 당나라의 달력(冊曆)과 廟諱1004)를 요청해 가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1005) 내가 東夷를 평정하여 大唐의 달력(正朔)을 해외에 반포하고자 한다. 유인궤가 군사를 엄하고 정연하게 통솔하면서 연달아 싸우며 전진하니 복신 등이 熊津 江 어구에 목책 2개를 세우고 막았다.1006) 유인궤가 신라 군사와 함께 이를 공격하니 우리 1001) [사비]都城에 있던 유인원(군)을 포위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 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龍朔 원년 3월조에 실려 있다. 그 리고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百濟餘賊入泗 謀掠生降人 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에 실려있는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薛仁貴에게 보낸 國 書에는 賊臣福信 起於江西 聚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摠奪軍資 復攻府城 幾將陷沒 이라 하 고 있다. 부흥군의 1차 사비도성 공격과 포위는 660년 9월~11월에 이루어졌다. 661년 2월에 부흥운동군은 다시 사비도성을 포위하고 공세를 취하였다. 복신과 도침이 거느린 부흥군은 유 인원이 주둔한 사비도성을 공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군을 지원하러 온 신라군을 막는 것이다. 新羅 文武王 11년의 答薛仁貴書에 의하면 福信의 부흥군이 점차 많아져서 江東의 땅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웅진도독부의 唐兵 1천 명이 나가서 치다가 오히려 전멸을 당한 것으로 되 어있다. 이제는 웅진도독부의 서쪽뿐 아니라 금강의 동쪽인 백제의 동부지역마저 부흥운동군 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661년 초에 들어와서는 백제 고토의 남방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부흥운동군의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군의 세력 확대는 사비도성의 유인원이 거느린 留鎭唐兵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유인원은 위기상황 을 타개하기 위해 웅진강구에서 부흥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오히려 패하여 전투에 참가한 1천 명의 당군이 전멸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곤핍한 상황은 660년의 1차 공세와 마찬 가지로 사비성이 장차 함락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함께 사비성의 당군을 다시 고립무원 상 태에 이르게 하였다. 사비성의 留鎭唐軍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신라의 사정도 계속되 는 부흥군 진압과 역질 발생 등으로 인해 쉽게 원병을 보내지 못하였다. 결국 신라는 내부의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發兵할 수밖에 없었다. 1002) 檢校帶方州刺史 : 檢校는 加官의 하나로서 本官의 위에 더하여 그 品級을 승진시키는데 사용하 였다. 檢校에 대해서는 韓 劤, 1966, 勳官檢校考 -그 연원에 기론하여 선초정비과정에 미 침-, 진단학보 29 30합집을 참조할 것. 帶方州는 당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1도독부-7 주-51현체제를 만들었을 때 설치된 7주의 하나이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1都督府 7州條에 의하면 帶方州는 竹軍城(현재의 전남 羅州市 多侍面)을 개편하여 만든 것으로서 6개의 현을 거 느렸다. 刺史는 唐代 州의 장관인데, 그 관품은 上州자사의 경우 종3품, 中州자사는 정4품上, 下州자사는 정4품下이다. 이 당시 유인궤의 직함에 대해 舊唐書 권84 열전 유인궤전과 資 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龍朔 원년 3월조에는 본서와 같이 검교대방주자사로 나오나 舊唐 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대방주자사로만 나온다. 1003)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劉]仁願을 구하게 하였다 : 사비성이 함락당할 경우 백제 정벌이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에 唐에서는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을 구원하기 위해 유인궤 를 파견하게 되었다. 유인궤는 660년 9월 28일 三年山城에서 急逝한 王文度를 대신하여 파견 군사는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갔는데, 물이 가로막고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져 죽거 나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1007) 복신 등은 이에 사비도성의 포위를 풀 고 任存城1008)으로 물러나 지켰으며, 신라 사람들도 군량이 다하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 되었으나, 熊津都督이 아닌 檢校帶方州刺史의 직함을 가지고 웅진도독부로 오게 되었는데, 이 때가 661년 2월경으로 추정된다(심정보, 1987,`百濟故地 帶方州考a, 百濟硏究 18, 21쪽). 1004) 廟諱 : 죽은 천자의 이름. 천자가 죽으면 그 位牌를 太廟에 두었기 때문에 죽은 천자의 이름을 묘휘라고 하였다. 1005) 인궤가 기뻐서 해외에 반포하고자 한다 : 이 내용은 新唐書 권108 열전 劉仁軌傳에 실 려 있다. 그가 靑州의 州司에서 달력과 묘휘를 요청한 것은 이전의 이의부의 무고로 백의종군 을 당한 모욕감과 좌절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로 여겨진다(노중국, 2003, 앞의 책, 61쪽). 1006) 복신 등이 熊津江 어구에 목책 2개를 세우고 막았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동일 한 표현이 보인다. 한편 백제가 세운 柵에 대해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道琛立二壁 熊津江 이라 하여 壁으로 표현하였고,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賊退上泗 南嶺 竪四五柵 이라 하여 4 5책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조에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薛仁貴에게 보낸 국서에는 又於府城側近四處 作城圍守 라 하여 城 으로 표현되어 있다. 1007) 유인궤가 신라 군사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 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실려 있다. 한편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爭梁墮溺者萬 人 으로, 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龍朔 원년 3월조에는 殺溺死者萬餘人 이라 하였고, 본 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무열왕이 직접 거느린 신라군은 泗 南嶺(부여 석성산성) 을 공격하기 전에 爾禮城(논산시 연산)을 공격하여 함락한 후 20여성의 항복을 받았으며, 다시 泗 南嶺을 공격하여 1,500명을 참수하였고, 6일 뒤에는 鷄灘을 건너 王興寺岑城(부여 울성산 성)을 공격하여 함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조에 는 某領兵往赴解圍 四面賊城 竝皆打破 先救其危 復運粮食 이라 표현하고 있다. 유인원의 구 원요청을 받고 새로 부임한 유인궤의 당군은 661년 3월 신라와 합동으로 웅진강구에서 부흥군 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흥군은 사상자 1만여 명의 피해를 입고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1008) 任存城 : 현재의 충남 禮山郡 大興面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에 걸쳐 있는 鳳首山城이다. 이 성 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2,426m로 고대 산성 중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봉수산성

137 다.1009) 이때가 龍朔1010) 원년(661)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듣자하니 당나라와 신라가 약속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 복신은 스스로 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떨쳤 인 다음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 1011) 다. 사람을 보내 유인궤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 1012) 다. 유인궤가 글을 지어 화를 맞는 길과 복을 받는 길을 자세히 말하고 사자를 보내 타일렀 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에 任存 存官 任存官 등이 새 겨진 명문 기와가 수습되어 이 성이 임존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군 충남개발연구 원, 2000, 예산 임존성, 21~26쪽). 반면 예산 봉수산성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고 홍성 군 장곡면 산성리에 있는 학성산성을 임존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정석, 2002, 백제의 성 곽, 학연문화사, 262~283쪽). 임존성은 복신 등이 최초로 거병한 곳이며, 후에 주류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부흥군의 북방 거점지역이 되었다. 663년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흑치상지와 지수신 등이 주도한 3기 부흥군의 거점지역이기도 하다. 資治通鑑 권200 唐紀 고종 용삭 원 년 3월조에 나오는 임존성에 대해 胡三省은 任存城在百濟西部任存山 考異曰 實錄或作任孝城 未知孰是 今從其多者 라 하여 實錄에는 任孝城으로도 표기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日 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9월조에는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北任敍利 山] 이라 하여 任射岐山(任敍利山)으로 표기되고 있다. 1009) 사비도성의 포위를 풀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 의 하면 이때 신라군이 퇴군한 것은 부흥군이 사비성의 포위를 풀기 전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퇴 군은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豆良尹城 전투에서 신라군이 크게 패배하여 퇴각한 것으 로 보아야 할 것이다. 豆良尹城 전투는 661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부흥군과 신라군 사이에 치 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5 신라 태종무열왕 8년, 같은책 권7 신라 문무왕 하11년조의 답설인귀서 등에 전한다. 부흥군의 사비도성 공격으로 구원에 나선 신라군은 두 방 면으로 진격하였다. 하나는 사비성의 북부지역인 두량윤성 방면으로 출동하여 포위당한 사비 도성의 당군을 구원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사비성의 남부지역인 古沙比城 방면에 출동하여 남 부지역에서 활동하는 부흥군을 제압하여 하였다. 두량윤성은 현재 정산의 계봉산성에 비정된 다. 두량윤성 전투는 661년 3월 5일 신라 장군 品日이 거느린 大幢 휘하의 부대와 전투가 벌어 졌다. 신라군이 두량윤성 남쪽에 도착하여 전열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 부흥군이 기습작전을 벌려 신라군을 공격한 것이다. 신라군이 두량윤성에서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본군이 급히 두량윤성으로 이동해 오면서 3월 12일부터 6일간에 걸쳐 양 군 간에 치열한 2차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공방전을 벌인 끝에 부흥군은 산라 본군을 물리 치는데 성공하였다. 1010) 龍朔 : 당나라 고종의 연호(661~663)로 용삭 원년은 661년이다. 1011) 도침은 스스로 領軍將軍이라 일컫고 그 형세가 더욱 떨쳤다 : 부흥군은 661년 3월에 2차 례에 걸쳐 두량윤성에서 신라군을 물리치자 부흥군의 기세는 한껏 고조되었음을 말해 준다. 부 흥군의 주도세력인 도침과 복신이 각각 領軍將軍과 霜岑將軍으로 칭할 정도로 부흥군이 상당히 조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유인궤의 사자를 바깥 객관에 두고 업 신여기면서 대답하였다. 1013) 사자의 관등이 낮다. 나는 바로 한 나라의 대장이니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 [도침은] 서한에 답하지 않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유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 로 유인원과 군사를 합쳐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고종에게] 표를 올려 신라와 세력을 합 하여 도모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1014) 신라 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金欽1015)을 보 1012) 듣자하니 당나라와 신라가 약속하기를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1013) 사자의 관등이 낮다.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1014) 유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도모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 이 내용은 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용삭 3월조에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은 약간 다르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1015) 金欽 :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을 말한다.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 夏4월조에는 王聞軍敗 大驚 遣將軍金純 眞欽 天存 竹旨 濟師救援 이라 하여 김순이 나오고, 본서 권42 열전 김유 신전 중에는 龍朔元年春 又遣伊金純[一作欽春] 眞欽 天存 蘇判竹旨等濟師 라 하여 金純의 다른 이름이 金欽春으로 나온다. 이 두 기사에 보이는 金純=金欽純=金欽春의 활동은 본 기사의 金欽과 일치한다. 따라서 김흠은 김흠춘의 春 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金庾 信의 동생이고 金令胤의 조부이다. 김흠순은 진평왕 때 화랑으로서 인망이 있었으며, 무열왕 7 년(660)에는 대장군 김유신을 따라 장군으로서 백제 정벌군에 참가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아들 盤屈을 잃는 격전 끝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문무왕 초년에는 백제의 나머지 군사를 토벌 하여 內斯只城 居列城 居勿城 등을 함락시켰으며, 동왕 8년(668) 6월에는 각간으로서 대당 총관이 되어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그는 당나라에 謝罪使로 파견 되었다가 돌아왔다.

138 내 군사를 거느리고 유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古泗1016)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豊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 서 이기니 김흠이 葛嶺道1017)로 도망쳐 돌아갔으며,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하지 못하였다.1018) 를 주관할 뿐이었다.1019) 복신 등은 유인원 등이 고립된 성에서 원병이 없자 사자를 보내 위로하여 말하였다. 大使1020)들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보내겠노 1016) 古泗 : 오늘날의 전북 古阜지방을 말한다.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高宗 龍朔 원년 3월조에 도 古泗로 나온다. 그러나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 3월조에는 古沙比城으로,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1都督府-7州조에는 古四州 本古沙夫里 라 나온다. 그런데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熊州 고부군조에는 古阜郡 本百濟古渺夫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이라 하여 고부군을 古渺 夫里郡이라 하고 있는데, 동일 지역이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百濟郡縣名條에는 古沙夫里郡 이라 하고 있으므로 古渺夫里는 古沙夫里로 고쳐야 할 것이다. 따라서 古泗는 백제 당시의 古 沙夫里郡을 약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백제 때 지명. 周 書 권49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의 하나인 中方 古沙城에 해당한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 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古沙夫里 또는 古沙夫村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州治인 平倭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이를 정읍시 영원면 금사동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 가 있다(전영래, 1995, 우금(주류)산성 관련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 소, 111쪽). 1017) 葛嶺道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8년(661)조에 十二日 大軍 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小 失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 百濟屯堡 斬獲二千級 라고 하여 賓骨壤이란 지명이 나온다. 위 기사에 나오는 신라와 백제 부 흥군이 전투한 지점이 賓骨壤(전북 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산성)인 것으로 보아 井邑의 동남쪽 淳昌으로 통하는 峙道(葛峙)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가 주목된다. 무왕대 백제와 신라간에 아막성 등과 같은 가야방면에서 전투한 사례가 참고가 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갈령 도는 신라가 부흥군의 남쪽 거점성인 주류성 방면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신라군에게 군량을 운 송하기 위해 개설한 루트로 보이는데, 합천(대야성)-거창-함양-팔랑티-남원-순창-정읍-고 부-부안(주류성)의 코스로 추정된다. 이와는 달리 충북 永同방면으로 보는 견해(津田左右吉, 1913, 百濟戰役地理考, 朝鮮歷史地理 1), 노령산맥의 馬近里에서 東津江을 따라 泰仁 古 阜에 이르는 코스로 보는 견해(全榮來, 1976, 앞의 글) 등이 있다. 1018) 장수 金欽을 보내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하지 못하였다 : 이 내용은 舊唐書 권199 상 열 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져 있고,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 삭 원년 3월조에 동일한 표현으로 실려 있다. 한편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는 춘3월 에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는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豆良尹城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자 4월 19일 에 군량미 부족으로 퇴각을 하였다. 신라군은 곳곳에서 부흥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퇴각하는 신라의 下州 군대가 賓骨壤(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산성)과 角山(정읍 부근)에서 일진 일퇴의 공 방전을 벌였다. 무열왕은 신라군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金純 眞欽 등으 로 하여금 급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으며, 신라의 敗軍이 加召川에 이르렀다 라.1021) 용삭 2년(662) 7월에 유인원과 유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支羅城1022) 및 尹城1023)과 大山柵1024) 沙井柵1025) 등의 목책을 빼앗았는데, 죽이고 는 소식을 듣고 곧 퇴군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19) 豊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는 동일한 표현으로 되어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 편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원년 3월조에는 福信尋殺道琛 專摠國兵 으로 나온 다. 661년 9월 왜에 체류하고 있던 풍이 돌아와 왕이 되었으나 국내적 기반이 없어 형식적인 존재일 뿐 실권은 도침과 복신의 수중에 있었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시기는 662년 2월 이후 (김영관, 2005, 앞의 책, 220쪽) 또는 662년 7월 이전(노중국, 2003, 앞의 책, 250쪽)으로 추 정되며, 그 이유는 부흥군의 총 군사지휘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로 생각된다. 관련 기록에 의 거해 볼 때 도침이 영군장군으로서 상잠장군인 복신보다 앞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부흥군의 최 고사령관으로 자처한 데에서 갈등과 대립이 생겨난 것으로 이해된다. 1020) 大使 : 大使는 원래 국왕의 명을 받아 대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唐代에는 절도사나 관 찰사 등을 특히 大使라 하였다. 혹은 大使는 일반 관청의 長 혹은 관리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기 도 하였다(圓仁, 入唐求法巡禮行記 권2). 신라사에서 鎭의 장관을 대사라 한 것은 본서 권11 신라본기 문성왕 즉위년 8월조의 장보고에서만 보인다. 1021) 大使들은 전송하여 보내겠노라 : 이 내용은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졌고,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2년(661) 추7월조에 동일 한 표현이 실려 있다. 이는 당군이 물러가면 추격하지 않겠다고 하여 당군의 철병을 유도하는 말 이다. 1022) 支羅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는 支羅城[或云周留城] 이라 하여 支羅城 과 周留城을 같은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성은 백제 부흥군의 중심 거점성으로서 최후로 함락되었기 때문에 지라성을 주류성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지라성은 음운상의 변화 로 보아 迭峴에 비정할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회덕현 산천조에 나오는 迭峴[在 縣東十二里] 에 해당한다. 이 성은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질현성에 비정된다 (심정보, 1983, 앞의 글, 쪽). 이 성은 대전 가양동 더퍼리에서 대전 동구 추동으로

139 276 넘어가는 질티재 북쪽 산위에 위치하는데,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800m이다. 동 쪽으로는 古鳳山城과 마주하고 있으며, 멀리 白骨山城에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犬頭城이 바라 다 보이며, 동남쪽으로 대청호와 대전-옥천간 국도가 보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지라성의 위치 에 대해서는 주류성과 동일시하여 충남 大德郡 珍岑面 대정리와 성북리 사이의 産長산성으로 보는 견해(자헌영, 1972, 앞의 글), 대전광역시 儒城區 儒城山城 방향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 충남 大德郡 珍岑面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29쪽), 충남 淸陽 郡 정산의 鷄鳳山城으로 보는 견해(노도양, 1980, 앞의 글) 등이 있다. 1023) 尹城 : 본문의 支羅城及尹城 을 대부분 지라성 및 윤성 으로 읽고 있으나, 支羅城 과 及尹 城 으로 읽는 견해도 있다. 먼저 지라성 및 윤성으로 읽을 경우 尹城은 본서 권39 잡지 지리 4 百濟郡縣名條에 悅己縣[一云豆陵尹城 一云豆串城 一云尹城] 이라 하여 豆陵尹城 豆串城과 같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윤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군 定山面의 계봉산성에 비 정하는 견해가 있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38쪽 ; 盧道陽, 1980, 앞의 글, 16 19쪽). 계봉산성은 표고 210m인 산정에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560m이다. 이와는 달리 두릉과 주류의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도양, 1980, 앞 의 글, 13쪽). 그러나 663년 나당연합군이 최후로 주류성을 공격할 때 주류성과 두릉윤성이 모 두 나오므로 별개의 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밖에 부안의 도롱이산성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앞의 책, 74~75쪽)와 대전광역시 儒城산성 방면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 48 49쪽 ; 池憲英, 1972, 앞의 글, 18 28쪽), 충남 금산군 鎭岑面 부근으로 보는 견해(이병 도, 1977, 앞의 책, 429쪽)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정산의 두릉윤성이 662년 7월 이후 부흥군 이 장악하고 있었고 또 대전 흑성동산성에 비정되는 지라성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及尹城(위치 미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노중국, 2003, 앞의 책, 237~238 쪽). 1024) 大山柵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 3 熊州 嘉林郡條에 韓山縣 本百濟大山縣 景德王改名 今鴻山縣 이라 하여 홍산이 나오는데, 鴻 은 大 와 의미가 통한다. 따라서 大山은 현재의 충남 부여군 鴻山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 1025) 沙井柵 : 사정책은 662년 2월에 지라성 윤성 대산책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성이 다. 이 성은 본서 권26 백제 동성왕 20년(498)에 처음 사정성을 축조한 이래 같은책 권26 백 제 성왕 4년(526)에 사정책을 축조한 기사가 나오는 것에 미루어 보아 이때 보완을 위해 정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정책은 眞峴城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 창평마을 뒷산의 사정동산성(성주탁, 1974, 대전부근 고대산성고, 백제연구 5, 16쪽 ; 심정보, 1983, 앞의 글, 169~170쪽)에 비정된다. 이 성은 표고 170m의 정상부에 축 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350m이다. 이 성은 서쪽과 남쪽에 柳等川 이 산성을 휘감듯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흑석동산성에, 북쪽으로는 유성산성과 연결되며, 동북쪽 으로는 迭峴城과 연결되어 있는 요충이다. 이 성은 진현성에 비정되는 흑석동산성과는 직선거 리 1.5리 지점에 있고, 또 진산에서 대전을 거쳐 유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 다. 그밖에 사정책의 위치를 대전광역시 儒城區 儒城산성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277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1026) 복신 등은 眞峴城1027)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판자로 만든 성가퀴에 다가섰다가 날이 밝을 무렵에 성 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1028) 유인원이 군 글), 대전광역시 山城洞 沙井里로 보는 견해(池憲英, 1972, 앞의 글) 등이 있다. 1026) 支羅城 및 尹城과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2년조에는 동일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新 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拔支羅城 으로만 표현하고 나머지 성들은 생략하고 있다. 이러 한 기록들에 의거할 때 지라성 이하 城과 柵은 662년 이전에는 백제부흥군의 수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라성 등이 부흥군의 수중에 들어간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조의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薛仁貴에게 보낸 國書에는 至六年 福信徒黨漸多 侵聚江東之地 라 하여 660년에 福信軍이 熊津 동쪽까지에도 진출한 것에서 미루어 볼 때 661 년경이 아닐까 한다. 당군이 662년 7월에 대공세를 펴 지라성을 비롯한 웅진 동쪽의 성들을 부 흥군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신라로부터 군량 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027) 眞峴城 : 진현성에 대한 기록은 위 기록 이외에 구당서 권199 열전 동이 백제 및 같은책 권 84 열전 34 유인궤전, 新唐書 권220 열전 동이 백제 및 같은책 권108 열전 33 유인궤, 자 치통감 권2 당기 16 고종 용삭 2년 추7월 丁巳조 등에 실려 있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웅 주 黃山郡條에 鎭嶺縣 本百濟眞峴縣[眞一作貞] 景德王改名 今鎭岑縣 으로 되어 있고, 백제군 현명조에서도 眞峴縣[一云貞峴] 으로 나오고 있다. 이에 의하면 眞峴은 貞峴으로도 표기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진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주 동쪽의 鎭嶺으로 보는 견해(津田左右吉, 1913, 百濟戰役地理考, 朝鮮歷史地理 上,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儒城산성으로 보는 견해 (池內宏, 1934, 앞의 글), 大德 鎭岑面으로 보는 견해(盧道陽, 1980, 앞의 글) 등이 있으나, 현 재 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의 흑성동산성[일명 密岩山城]으로 보는 견해(심정보, 1983, 앞의 글 ; 지헌영, 1972, 앞의 글)가 설득력이 있다. 金正浩의 大東地志 권5 진잠조에는 鎭岑本鎭 峴 鎭峴城[密岩古城 俗稱美林古城] 라 하여 밀암산성 즉 흑석동산성에 비정하고 있다. 흑석동 산성은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된 內托外築의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540m이다. 이곳은 남쪽을 제외한 3면이 豆磨川으로 돌려 있고,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며, 대전 에서 汗三川里를 거쳐 논산시 연산에 이르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이 길목을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부흥군이 이 성에 웅거한 것은 옹산성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신라의 군량 운송로인 熊津道를 다시 차단하여 웅진부성의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028) 유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과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2년 추7월조에는 표현은 다르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당군의

140 사를 늘려달라고 아뢰어 요청하자 [고종은] 조서를 내려 淄州1029) 靑州1030) 萊州1031) 海 려 하였다. 孫仁師가 중도에서 이를 맞아 쳐서 깨뜨리고는 마침내 유인원의 군사와 합치 州1032)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고 左威衛將軍1033) 孫仁師1034)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니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쳤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의논하 건너 유인원의 군사를 증원케 하였다. 였는데, 어떤 사람은 加林城1037)은 水陸의 요충이니 서로 힘을 합쳐 이를 먼저 치는 것이 이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로지 하면서 扶餘豊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 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잡아 죽이려 고 하였다. 풍이 그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이끌고 복신을 갑자기 습격하여 죽 1035) 였다. 1036) [그리고]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으 기습 공격으로 지라성 등 거점성을 빼앗기자 부흥군의 당군의 군량 차단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662년 8월 부흥군은 험준한 난공불락의 요새 진현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경계가 느 슨한 틈을 타서 당군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성은 함락되고 부흥군은 800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다. 1029) 淄州 : 중국 隋나라 때에 둔 州의 이름. 淄水라는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淄水는 山東省 萊 蕪縣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黃河로 들어간다. 현재의 위치는 중국 山東省 淄州縣이다. 이곳은 春秋시대에는 齊나라에 속하였고, 漢나라 때에는 齊南郡이 되었고, 宋나라 때에는 淸和 郡이 되었다. 1030) 靑州 : 중국 漢나라 때에 처음으로 두었는데, 그 후 여러 차례 置廢를 거듭하였다. 漢나라 때의 治所는 현재의 山東省 臨淄縣이었다. 隋나라때는 靑州를 폐지하였으나 唐나라는 靑州를 다시 두고 北海郡으로 고쳤으나 곧 청주로 복구하였다. 唐代의 靑州는 현재의 중국 山東省 益都縣이 다. 1031) 萊州 : 현재의 山東省 萊州지방이다. 이곳은 옛날은 萊夷의 땅이었고, 春秋시대에는 萊子國이 되었다. 1032) 海州 : 중국 東魏 때에 둔 州 이름. 지금의 江蘇省 東海縣의 남쪽이다. 이곳은 중국 전국시대에 는 楚나라에 속하였고, 秦나라 때는 薛郡이 되었고, 漢나라 때는 東海郡이 되었다. 1033) 左威衛將軍 : 新唐書 권200 열전 백제전에는 右威衛將軍으로 되어 있다. 左威衛將軍은 左威 衛에 설치된 종3품 장군직이다. 左威衛는 唐의 16衛의 하나이며, 隋대에는 左屯衛였으나 당나 라 高宗대에 左威衛로 고쳤다. 그 職掌은 大朝會 때에 黑甲鎧를 입고 弓箭 刀 楯 旗 등을 들고 좌우에서 시위하였다( 구당서 권44 직관 3 左右威衛條 참조). 1034) 孫仁師 : 중국 唐나라 高宗代의 장군. 662년 백제 故地에 주둔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우고 있던 劉仁願을 돕기 위해 구원군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다. 웅진으로 파견될 당시 그의 직함은 좌위위장군이었다. 좌위위장군은 종3품의 장군직이어서 당시 유인원이나 유인궤 보다 관직이 높았다. 따라서 그는 웅진에 주둔한 당군의 최고사령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035) 풍이 그것을 알고 복신을 갑자기 습격하여 죽였다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2년(662) 추7월조에는 동일한 표현이 나오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7 天 智紀 2년 夏五月조에는 糾解仍語福信之罪 百濟王豊璋嫌福信有謀反之心 以革穿掌而縛 時難自決 不知所爲 乃問諸臣曰福信之罪如此焉 可斬而不 王勒健兒 斬而醯首 라고 하여 풍 왕이 복신을 살해한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나오고 있다. 풍왕과 복신은 부흥군 내부의 주도권 을 둘러싸고 대립하였고, 나당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극단으로 치달았다. 복신이 전권을 휘두르 자 풍왕은 이를 점차 시기하게 되었고, 石城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에까지 가서 복신이 모반하 려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에 복신은 풍왕을 제거할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풍왕이 문병하러 오면 잡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풍왕이 오히려 측근세 력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사로잡아 살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사람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하 게 된 것은 풍왕이 662년 12월에 避城(전북 김제시)으로 천도하는 일로 추정된다. 풍왕은 천도 를 통해 장기전을 위한 안정책의 일환으로서 전시체제의 재정비를 위한 것이었지만(정효운, 1991, 앞의 글, 215쪽), 풍왕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반 면 복신은 자신의 세력기반인 주류성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662년 12월 避城 천도, 663년 2월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재천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풍왕과 복신 사이 에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두사람 사이가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663년 2월 복신의 음모를 사전에 눈치챈 풍왕은 복신의 계교를 역으로 이용하여 도리어 그를 사로잡아 살해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2003, 앞의 책, 254~256쪽을 참조할 것. 1036)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豊率親信斬福信 與高麗倭連和 로 표 현되어 있다. 그리고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龍朔 3년(663) 9월조에는 百濟王豊璋 南引倭 人 以拒唐兵 이라 하고 있다.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부흥 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복신을 추종하던 일부 세력들은 풍왕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독자 적인 노선을 유지하거나 또는 당군에 투항하는 일도 생겨났다. 임존성의 沙 相如와 黑齒常之 등이 그 예에 속한다(김영관, 2005, 앞의 책, 227~228쪽). 이러한 부흥군의 내분을 감지한 당 군은 본국에 대대적인 공격을 위해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다. 신라도 內斯只城(유성의 유성산 성)과 居列城(거창군 상림리 거열산성) 德安城(논산시 은진) 전투를 통해 부흥군에게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러한 나당연합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풍왕은 동요하는 부흥군을 안정시키 면서 한편으로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긴급히 요청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게 하였다.

141 및 別將 두상(杜爽)1043)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熊津江1044)에서 白江1045)으로 가 합당하다. 고 하였다. 유인궤가 말하였다. 1038) 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 병법에서는 實을 피하고 虛를 치라 1039) 면 군사를 다치게 할 것이고, 지키면 하릴없이 날짜만 보내게 될 것이다. 周留城 은 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 [도중에] 白江 어귀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우니1046)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붉어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가 모여 있으니 만일 이것을 쳐 이기면 여러 성들은 스스로 항복 1040) 할 것이다. 이에 仁師와 仁願 및 신라 왕 金法敏1041)은 육군을 거느리고1042) 나아갔다. [그리고] 유인궤 1037) 加林城 : 현재의 충남 扶餘郡 林川面의 聖興山城에 비정된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백제군현 명 熊川州條에는 嘉林郡으로 나온다. 성흥산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金正浩, 大東地志 권5 충 청도 林川 城池條에 聖興山古城[古加林城 周二千七百五尺 井三 舊有倉] 이라 하고 있다. 이 가림성은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으며(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나당 전쟁때( )의 격전지였다(본서 권7 신라본기 文武王 11 12년 참조). 이에 대해서 는 본서 권26의 주 608)을 참조할 것. 1038) 병법에서는 實을 피하고 虛를 치라 : 이 기사는 1974, 吳子 孫子 卷六 虛實篇, 中華書局 에 兵之形 避實而擊虛[梅堯臣曰利也 張預曰水趨下則順 兵擊虛則利] 로 나온다. 1039) 周留城 :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복신과 도침의 중심 거점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 명칭에 대해 서는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 中에는 豆率城으로,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원년 3월조에는 疎留城(ソルサシ)으로, 동 12월조에는 州柔(ツヌ)로 나온다.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산 설 부안설 연기설 홍성설 등이 대두되고 있다. 주류성은 부안 位金岩山城으로 추정되는데, 최근에는 노중국(2003, 앞의 책, 195~196쪽)과 김영관(2005, 앞의 책, 181쪽) 등에 의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96)을 참조할 것. 1040)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여러 성들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3년(663) 9월조와 舊唐書 권83 열전 劉仁軌전에는 표현은 다르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이 내 용이 빠져있다. 1041) 金法敏 :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태종무열왕의 원자로서 병부령 에 임명되었으며, 65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에 김유신과 함께 唐軍과 연합하여 백제 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아버지 무열왕이 죽자 즉위하여 668년에 唐軍과 합 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한 반도를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으므로 676년에 당군을 축출하여 한반도 통일을 완수하였다. 그 리고 674년에 새로운 曆法을 썼고, 675년에 銅으로 印章을 만들어 百官과 州郡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681년에 문무왕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感恩寺 동쪽 바다 大王岩上에 장사 를 지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즉위년조와 본서 권28의 주 898)을 참조할 것. 1042) 仁師와 仁願 육군을 거느리고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 5월조에는 문무왕[金法敏] 이 김유신 등 28장군[혹은 30장군이라고도 한다]을 거느리고 진군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 中에는 왕이 金庾信과 天存 竹旨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진군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43) 두상(杜爽) : 당 고종대의 인물로`대당평백제국비명a에 의하면 당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직함 은 행군장사 冀州司馬였다. 660년 백제 정벌의 공으로 그는 유인궤와 함께 그대로 남아 지휘 관으로 활동하였다. 663년 別帥로서 유인궤 부여융과 함께 수군과 군량선을 거느리고 주류성 공격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3년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맹약이 선언하였을 때 참여한 인물이다. 1044) 熊津江 : 현재의 충남 공주시 지역을 흐르는 錦江을 말한다. 그런데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龍朔 3년 9월조에는 自熊津入白江 이라 하여 熊津으로만 나온다. 1045) 白江 : 현재의 충남 부여읍 지역을 흐르는 금강을 말한다.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 秋8월 조에는 白村江으로 나온다. 현재에도 부여군 규암면 아래의 금강을 백강으로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백강은 금강 하구의 서천지역을 말한다. 백강과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를 가리키는 것으 로 웅진강구와 동일한 곳이다(김영관, 2007, 앞의 글, 244쪽). 단지 백강은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웅진강은 당에서 부르던 이름이다(沈正輔, 1988,`中國側史料를 통해 본 白江의 位 置問題a, 震檀學報 66 및 1989,` 白江 의 位置에 대하여a, 韓國上古史學報 2 ; 서정석, 2004,`백제 白江의 위치a, 白山學報 69). 또한 웅진강은 지금의 공주 부근을 흐르는 금강에 대한 명칭이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으로 볼 수 있다(淺川伯敎, 1930,`夫餘白馬江a, 日本地理大系 12 朝鮮篇, 改造社, 66쪽).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56)을 참조할 것. 1046) 白江 어귀에서 왜인을 만나 그 배 400척을 불태우니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 같은 책 권84 열전 유인궤전,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 같은 책 권108 열전 유인궤전,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용삭 3년(663) 9월조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본서 권7 신 라본기 문무왕 11년(671)조에 보이는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薛仁貴에게 보낸 國書에는 此時倭 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 停在白沙 라 하여 구원군으로 나선 왜군의 병선이 1,000척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 추8월조에는 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 列陣於白 村江 戊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라 하여 당 수군의 전 선이 170척이었고, 당군과 왜국과의 1차전에서 왜군이 패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142 282 졌다. 왕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고구려 로 달아났다고 하였다.1047)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扶餘忠勝과 忠志1048) 283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1051) 처음에 黑齒常之1052)가 흩어진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10일 사이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 등이 그의 무리를 이끌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1049) 홀로 지수신(遲受信)1050)만이 어 일본 수군과 백제 부흥군의 패전에 대해서는 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 而相謂之曰 我等 爭先 彼應自退 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 進打大唐堅陣之軍 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 須臾之際 官軍 敗績 赴水溺死者衆 不得廻船 이라 하여 구체적인 작전의 모습도 서술하고 있다. 백강 싸움에서 唐軍은 火攻을 써서 크게 이겼다. 당나라 수군의 화공책에 대해서는 瀧川政次郞, 1984, 劉仁 軌傳 上 中 下, 古代文化 집을 참조할 것. 1047) 왕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 舊唐書 권199 상 열 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3년 9월조에는 百濟王豊脫身奔高句麗 로 나온다. 한편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 추8월조에는 是時百濟王豊璋與數人 乘船逃去高麗 라 하여 배편으로 고구려 로 도망간 것을 전해주고 있다. 1048) 扶餘忠勝과 忠志 : 忠勝은 일본서기 권25 孝德紀 白雉 원년조에는 百濟君豊璋 其弟塞城 忠勝 이라 하여 풍장의 동생으로, 권26 齊明紀 6년조에는 送王子豊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이라 하여 풍장의 숙부로 나온다.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에 주목하여 풍장을 동명이인인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94, 7세기 百濟와 倭와의 관계, 國史館論叢 52집, 쪽). 따라서 풍장을 同名異人으로 보아 孝德紀에 보이는 豊璋은 武王의 아들이고, 齊明紀 에 보이는 豊璋은 의자왕의 아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름이 동일하고 무왕대 이래로 왜에 체 류하고 있는 점에서 양자를 다른 인물로 설정하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의자왕 아들설은 기 록상의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본 기사에 나오는 충승은 무왕의 아들로서 의자왕의 동생으로 볼 수 있다. 忠志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왕자의 신분인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충승의 동생 일 가능성이 크다.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僞王 子 忠勝 忠志 로 되어 있다. 1049) 왕자 扶餘忠勝과 忠志 등이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 부여충승과 충지 등이 왜인과 함께 항복하는 모습에 대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率士女及倭衆竝降 이라 표현 되어 있고,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率殘衆及倭人請命 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에는 率其衆降 이라 하였다. 한편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 中에는 [龍朔 3年]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 降 이라 하여 豆率城[周留城] 싸움에서 백제군과 왜군을 크게 격파하자 백제 및 왜인이 항복하 였다고 하고 있다. 한편 舊唐書 권84 열전 유인궤전에는 僞王子夫餘忠常忠志等率士女及倭 衆幷耽羅國使 一時竝降 이라 하여 탐라 사신이 백제군과 함께 있다가 항복하였다는 다른 내용 을 전해주고 있다. 1050) 지수신(遲受信) : 백제 부흥군 장군중의 한사람. 豊王을 도와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였으며, 풍왕 이 주류성에서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을 간 후 任存城을 근거로 하여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처자 를 버리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1051) 홀로 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 왕 3년 4월조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신라는 임존성을 근거로 한 遲受信을 10월 21일에 공격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이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 다. 그리고 본서 권7 문무왕 11년조의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薛仁貴에게 보낸 國書에는 任存 一城 執迷不降 兩軍倂力 攻打一城 固守拒 不能打得 이라 하여 나당군이 임존성의 지수신군을 쉽게 격파하지 못한 것을 전해주고 있다. 한편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 220 열전 백제전에는 이 사실이 빠져 있고, 舊唐書 권84 열전 劉仁軌전과 新唐書 권108 열전 劉仁軌전에는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1052) 黑齒常之 : 생몰연대는 년이다. 자는 恒元. 성은 부여씨. 아버지는 沙次(또는 沙子). 조부는 德顯(또는 加亥). 증조부는 文大이고 대대로 달솔의 관등을 가졌다. 아들 俊과 세 딸이 있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군을 일으킨 장군의 하나로 西部 출신이다.`黑齒常之墓誌銘a에 의하면 흑치상지 가문은 본래 왕실의 姓인 扶餘氏였으나 그 조상이 黑齒 땅에 봉함을 받은 것 을 계기로 黑齒氏를 칭하게 되었으며, 대대로 達率의 관등을 역임하는 가문이었다. 키가 크고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장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에서 부흥군을 일으켜 복신 도침의 군에 호응하였으나, 663년에 당나라군에 항복하였다. 당군에 항복한 후 그는 임존성을 근거로 끝까지 저항하던 백제부흥군의 장군 지수신을 격파하였고, 당나라에 들어가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활동 사항을 新唐書 권110 열전 흑치상지전에 의거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60년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를 포로로 잡은 후 겁탈이 심하고 젊은 사람을 닥치는 대 로 죽이자 10여인을 데리고 서부로 돌아가 임존성에 책을 세우고 부흥군을 모으니 10일 안에 3만 명이 모여 들었다. 소정방이 이를 공격하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싸워 승리하여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이에 소정방이 백제지역의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664년에 당측의 회유 에 넘어가 折衝都尉에 임명되고 웅진성에 진수하였고, 백제의 연고지를 관장하는 이름만의 관 직을 받고 있었다. 즉 672년에 忠武將軍行帶方州長史가 되었고, 곧 使持節沙泮州諸軍事沙泮州 刺史가 그것이다. 그 후 左領軍將軍 兼 熊津都督府司馬으로 직책이 옮겨지고 浮陽郡開國公에 봉해지고 食邑 2천 호가 주어졌다. 당나라에 들어가 678년에 州道左軍摠管이었던 裵行儉의 副將이 되어 7년간 군공을 세워 684년 중앙의 左武衛大將軍 檢校左羽林軍에 임명되었다. 그 후 突厥과 吐蕃의 공략에 군공을 세워 燕國公에 봉하여졌고, 688년 神武道經略大使 懷遠軍經 略大使가 되었으나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목매 죽었다. 그의 열전은 舊 唐書 권109와 新唐書 권110에 실려 있다. 흑치상지의 묘는 중국 낙양 망산에 699년에 개장

143 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1053) [흑치상지가] 다 께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호응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1057) 유인궤 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1054)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別部將1055) 沙咤相如1056)와 함 가 [상지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도록 하라고는 곧 갑 옷과 무기와 군량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의]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은(野 心)1058)은 믿기 어려운데, 만일 무기와 군량을 준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도와주는 것이다. 되었으며, 이 때 작성된 그의 묘지석(72 71cm)이 1929년 10월에 중국 낙양시 망산에서 출토 되어 그의 아들 黑齒俊의 묘지명과 함께 현재 중국 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舊唐 書 권109 열전과 新唐書 권110 열전에 입전되어 있다.`흑치상지묘지명a에 대해서는 李文 基, 1991, 백제 黑齒常之 부자 묘지명의 검토, 한국학보 64 ; 李道學, 1991, 百濟 黑齒常 之墓誌銘의 검토, 향토문화 6, 향토문화연구회 및 1996,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한 무 장의 비장한 생애에 대한 변명-, 주류성 ; 馬馳, 1997, 舊唐書 黑齒常之傳의 補闕과 考辨,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 백제연구소 편을 참조할 것. 1053)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 660년 백제 멸망 후 부흥군과 나당연 합군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린 곳은 임존성 전투에서였다. 660년 8월 26일 소정방이 직접 군 대를 이끌고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본서 권5 신라 태종무열왕 7년 8월 26일 참조). 부흥군은 임존성에 작고 큰 성책을 만들어 험고한 지세를 이용하여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임존성 공략에 실패한 소정방은 9월 3일 당에 귀환하였다. 임존성에는 사타상여와 흑치상지만 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침과 복신이 거느린 부흥군과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 놓은 합작품이었 다. 1054) [흑치상지가]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 멸망 당시의 백제의 지방행정조직은 5部-37郡200城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200여성을 회복하였다는 것은 백제의 전역을 거의 회복한 셈 인데, 이는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일으킨 초기의 상황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기사는 흑치상지를 비롯한 부흥군의 군세가 가장 盛하였을 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의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薛仁貴에게 보낸 國書에 至 六年 福信徒黨漸多 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 一時摠叛 竝屬福信 은 이때의 상황을 반 영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1055) 別部將 : 이때의 部는 軍部隊라는 의미로서 별부장은 흑치상지의 본부에 대응되는 별도의 부 대 라는 의미를 가진 특별부대의 장수 로 볼 수 있다. 이 別部를 왕도 五部 이외의 특별 部로 서 別都 益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별부장은 別部의 군사를 거느린 장군으로 파악하는 견 해도 있다(金周成, 1992, 百濟 武王의 寺刹建立과 權力强化, 韓國古代史硏究 6, 264쪽). 1056) 사타상여(沙咤相如) : 백제 부흥군 장군의 하나로 백제 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 출신의 인물 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자 별도로 부흥군을 일으켜 당군에 저항을 하 다가 흑치상지군과 합세하여 그의 별부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노중국, 2003, 앞의 책, 97쪽). 이후 복신 도침의 부흥군에 호응하여 부흥군의 북쪽 거점지역으로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663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주류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와 함께 당군에 항복하였다. 舊唐書 권84 열전 유인궤전에는 百濟首領沙咤相如 黑齒常之 로, 新唐書 권108 열전 유인 궤전에는 酋領沙咤相如 黑齒常之 라 하여 부흥군을 일으킬 당시 그의 직함을 首領 酋領으 고 말하였다. 유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사타]상여와 [흑치]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지모 가 있다. 이 기회를 타서 공을 세운다면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평정되었다.1059) 손인사 등이 군대의 위세를 떨치고 돌아가니 [고종은]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무너졌으며, 썩 지 않은 시체가 풀더미처럼 많았다. 유인궤가 비로소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고,1060) 촌락을 정리하고, 관청의 책임자를 임명하고, 도로를 개통하고, 다리를 놓 고, 堤堰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賑 恤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고, 당나라의 사직1061)을 세우고, 달력(正朔)1062)과 廟諱1063)를 로 표현하고 있으나, 백제부흥군을 일으킨 후의 직함은 別部將이었다. 별부장에 대해서는 앞의 주석 1055)를 참조할 것. 1057) 상지가 別部將 沙咤相如와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 백제부흥군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당군에 항복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흑치상지가 663년에 임존성에 근거 하여 저항하고 있던 지수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그의 항복은 白江전투에서 부흥군이 패배하고 난 직후라고 생각된다. 1058)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은(野心) : 이리 새끼는 사람이 길러도 산과 들을 잊지 않고 길들지 않으 며 주인도 해친다 는 데서 나온 말로서, 馴服치 않고 걸핏하면 해치려는 마음을 말한다. 1059)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모두 평정되었다 : 이 내용은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 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져 있고, 舊唐書 권84 열전 劉仁軌전과 新唐書 권 108 열전 劉仁軌전 및 資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용삭 3년 9월조에 실려 있다. 1060) 유인궤가 비로소 명령을 내려 호구를 등록하고 : 당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곧 이어 백제 부흥군이 일어나 백제의 전 지역을 거의 회복할 정도였다. 따라서 당은 부흥군을 궤멸시키기까 지 백제 전역에 걸쳐 호구를 조사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때에 당이 호구를 등록하 게 하였다는 것은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파악하여 둔 호구 자료를 토대로 하여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노명호, 1988, 羅末麗初 親族組織의 變動, 又仁金龍德정년기념사학논총 참조).

144 반포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각기 제 자리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고종(皇帝)이 들어서 신라의 종묘 안에 간직하였다. 맹세한 글은 신라본기에 보인다.1067) 유인원 등이 부여융을 熊津都督1064)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옛 원한을 풀고 유민들을 불러 돌아가니 융은 군사들이 흩어질까 두려워하다가 역시 당나라 서울로 돌아갔다.1068) 돌아오게 하였다. 儀鳳1069) 연간에 융을 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 麟德1065) 2년(665)에 [부여융이] 신라 왕과 더불어 웅진성에서 모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 키게 하고, 또 安東都護府1070)를 新城1071)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 였는데,1066) 유인궤가 맹세의 글을 지었다. [이에] 금가루(金泥)로 쓴 증표(金書鐵契)를 만 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武后1072) 가 그의 손자 敬1073)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 渤海靺鞨1074)에게 분 1061) 사직 : 社는 토지신이고 稷은 穀神으로서 천자와 제후가 제사를 지낸다. 禮記 王制에는 天 子社稷皆大牢 諸侯社稷皆小牢 라 되어 있고, 白虎通 社稷項에는 王者所以有社稷何 爲天下 求福報功 人非土不立 非穀不食 故封土立社 示有土也 穀 五穀之長 故立稷而祭之也 라 하고 있 다. 따라서 옛날에 국가를 세운 자는 반드시 사직을 세웠고, 사직의 존망은 국가의 존망을 나타 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062) 달력(正朔) : 정월 초하루를 말한다. 尙書大傳 略說에 夏以十三月[孟春建寅之月]爲正 以平旦 爲朔 殷以十二月[季冬建丑之月]爲正 以鷄鳴爲朔 周以十一月[仲冬建子之月]爲正 以 夜半爲朔 이라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漢武帝 이후 淸末에 이르기까지 모두 夏의 제도를 따랐다. 正朔을 頒示한다는 것은 중국 황제의 덕화의 영역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1063) 廟諱 : 죽은 황제의 이름. 죽은 황제의 신주를 태묘에 모셨기 때문에 죽은 황제의 이름을 묘휘 라고 한다. 1064) 부여융을 熊津都督 :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고지를 다스리기 위해 5도독부를 두었 다. 그러나 금련 덕안 등 4도독부는 곧 폐지되고 웅진도독부만 남아 당군의 중심 근거지가 되 었다. 웅진도독은 웅진도독부의 장관으로서 백제 고지를 통괄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資 治通鑑 권200 唐紀 16 고종 麟德 원년 동10월조에는 以夫餘隆爲熊津都尉 라 하여 융의 직함 이 웅진도위로 나온다. 그리고 이에 대한 注에도 考異曰 實錄作熊津都督 按時劉仁軌檢校熊津 都督 豈可復以隆爲之 明年實錄稱熊津都尉夫餘隆與金法敏盟 今從之 라 하여 부여융의 직함을 웅진도위로 기록하고 있다. 당은 부흥군을 평정한 후 지배조직을 1都督府-7州-57縣制로 재편 제하였는데, 웅진도독 직속의 현은 13개였다(본서 권37 잡지 지리 4 도독부 13현조 참조). 당 이 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은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065) 麟德 : 당고종의 연호로 년까지이다. 1066) 麟德 2년(665)에 [부여융이] 백마를 잡아 맹세하였는데 : 인덕 2년은 665년이다. 이 기사 는 이 해에 유인궤가 주선하여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 扶餘隆이 맹세한 것을 보여준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5년(665)조에는 熊津 就利山에서 맹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扶餘隆과 신 라 문무왕과의 1차 맹세는 문무왕 4년(664)에 있었고, 문무왕 5년(665)에는 2차 맹세가 있었 다. 한편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新羅別記云 文虎王卽位五年乙丑 秋八月庚 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 作壇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血爲文而盟曰 이라 하여 新羅別記 를 이용하여 부여융과 문무왕과의 맹세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新 羅別記 는 고기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1067) 맹세한 글은 신라본기에 보인다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5년(665)조에 文武王과 扶餘隆이 맹약한 盟文이 나온다. 그리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도 동일한 盟文이 실려 있다. 1068) 융은 당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 扶餘隆이 당으로 돌아간 시기는 신라 문무왕 5년(665)이 다. 扶餘隆이 웅진도독의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당으로 돌아간 것은 신라의 압력 때문에 현 실적으로 백제 고지를 통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조에는 隆懼 新羅 尋歸京師 로 나온다. 1069) 儀鳳 : 당나라 高宗의 연호로 년까지이다. 1070) 安東都護府 :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故地와 백제 故地를 통괄하기 위해 평양에 둔 관청. 上都護府에 해당했는데, 그 장관은 都護라 하였다. 都護의 임무는 諸蕃의 慰撫 征討 敍功 罰過 등이었다. 후에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옛 遼東城(현재의 중국 遼寧省 遼陽 市)으로 옮겼으며, 다시 新城 平州 遼西로 옮겼다가 756년 이후 폐지되었다( 新唐書 권39 地理志 安東上都護府, 같은책 권43 下 河北道, 같은책 권49 下 百官志 上都護府 참조). 1071) 新城 : 현재의 중국 遼寧城 撫順市 高爾山城이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新城으로 옮긴 해는 677 년(신라 문무왕 17)이다. 안동도호부는 치소를 遼東城(현재의 중국 遼寧省 遼陽市)으로 옮겼는 데, 677년 다시 新城(현재의 중국 遼寧省 撫順市)으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高句麗의 亡國主 寶 臧을 遼東都督 朝鮮王으로 삼은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고구려 유민들의 계속적인 부흥 운동의 결과라 할 수 있는데(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그들의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1072) 武后 : 唐의 則天武后를 말한다. 고종의 妃. 무후는 684년 고종이 죽고 아들 中宗이 즉위하자 곧 中宗을 폐하고 武氏의 五廟를 세웠으며, 689년에는 국호를 周로 고치고 帝를 칭하였다. 그러 나 710년에 皇后 韋氏가 臨淄王 隆基[뒤에 玄宗이 됨]에게 주멸됨으로써 周室은 끝나고 말았다. 1073) 敬 : 의자왕의 태자인 扶餘隆의 손자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조부 의자왕의 뒤를 이어 帶方 郡王에 임명되었다. 1074) 渤海靺鞨 : 이 문장은 渤海 와 靺鞨 로 보거나, 渤海靺鞨 로 볼 수 있다. 구당서 권199 하 열전에는 靺鞨傳 과 渤海靺鞨傳 이 있다. 발해말갈은 大祚榮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어 곧 渤

145 288 할되어1075)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1076) 라 <史論> 신라 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 1083) `金庾信碑a 와 朴居勿1081)이 짓고 姚克一1082)이 쓴`三郞寺碑文a 에 보인다.> 고구려 역 라고 한다<* 晉書 載記에 보인다>.1085) 시 高辛氏1084)의 후예이므로 성을 高氏라고 했다. 고 했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臣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보니 그 전승이 오래 되어 그 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小昊 金天氏1077)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으며<*신라의 國子博士1078) 薛因宣1079)이 지은 海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문장은 渤海靺鞨 로 붙여 읽고 渤海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의 遺將인 대조영이 699년에 동모산(중국 吉林省 敦 化)에 세운 나라이다. 처음에는 국호를 震(振)國이라 하였다가 뒤에 발해로 고쳤다. 대조영의 出自에 대해 구당서 권199 하 열전 발해말갈전에는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라 하여 고구려 족이라 하고 있으나, 신당서 권219 열전 발해전에는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라 하 여 粟末靺鞨族이라 하고 있어 차이가 난다. 본서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6년(790)조와 헌덕왕 4년(812)조에는 발해를 北國으로 표현하고 있다. 발해에 대해서는 주영헌, 1971, 발해문화, 사회과학출판사 ; 박시형 저 송기호 해제, 발해사, 이론과 실천 ; 王承禮 저 宋基豪 역, 1987, 발해의 역사,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 林相先 편역, 1990, 渤海史의 理解, 신서원 ; 방학봉, 1991, 발해문화연구, 이론과 실천 ; 宋基豪, 1995, 渤海政治史硏究, 일조 각 ; 韓圭哲, 1994, 渤海의 對外關係史, 신서원 등을 참조할 것. 1075) 신라 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 동일한 내용이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보이고, 비슷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 발해는 699년에 중국 길림성 돈화에서 고구 려의 遺將인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다. 때문에 발해가 한반도 남부의 백제땅을 신라와 더불어 분할하였다는 것은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 =발해에게 분할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에 있던 百濟 故地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唐이 扶餘隆 을 세워 만든 임시정권이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발해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 은 通典 권185 邊防 1 東夷 상 백제조에 其舊地沒於新羅 城傍餘衆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夫餘崇 竟不敢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夫餘氏君長遂絶 이라 한 기사에 의해서 입증이 된다. 1076)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 이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9 년조와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 나온다. 1077) 小昊金天氏 : 중국의 전설상의 帝로서 소호(少 )라고도 쓴다. 黃帝의 아들로서 이름을 摯라 하 였다. 太昊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少昊라고 하였다고 하며, 金德의 왕이기 때문에 金天氏라고 도 한다. 그리고 窮桑에 居하였기 때문에 窮桑氏라고도 하며, 靑陽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靑 陽氏라고도 하며, 雲陽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雲陽氏라고도 하였다. 曲阜에 도읍을 정하였고, 재위기간은 84년이었다고 한다( 辭海 少昊항 참조). 1078) 國子博士 :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한 박사. 본서 권38 잡지 職官 上 國學條에 의하면 신라 최 고의 교육기간으로 국학이 있었다. 이 국학은 신문왕 2년에 설치되었고, 경덕왕대에 와서 大學 監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면서 국자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국자박사의 존재에서 미루어 볼 때 신라는 下代에 와서 大學監을 國子監으로 개칭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국자감제는 당나 라의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국자감은 國子學 太學 四門學 律學 書學 算學으로 구성되었고, 敎官으로 國子박사 太學박사 助敎 등을 두었다( 구당서 권48 백관 3 국자감 및 신당서 권44 직관 3 국자감 참조). 고려시대에는 高麗史 권76 志 35 百官 1 成 均館條에 成均館掌儒學敎誨之任 成宗置國子監 有國子司業博士 助敎 大學博士 助敎 四 門博士 助敎 라 한 것에서 보듯이 성종대에 국자감이 설치되었다. 1079) 薛因宣 : 생몰년 미상이다. 국자박사의 직에 있었으며, 김유신비문을 지었다. 薛氏라는 姓氏에 서 미루어 보아 6두품 신분 출신이었던 것 같다. 1080) 金庾信碑 : 김유신의 一代記와 공적을 적은 碑로 보이는데,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1081) 朴居勿 : 생몰년 미상. 신라 景文王代를 전후하여 문장가로서 활약하였다. 宿衛學生으로 唐나 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시험인 賓貢科에 급제한 것 같다. 귀국한 후에는 翰林臺 崇文臺 등 주로 文翰機構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신라 景文王 12년(872)에 新 羅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를 찬술하였는데, 이 당시 그의 관직은 侍讀右軍大監兼省公이었다. 박거물에 대해서는 黃壽永編, 1974, 韓國金石遺文, 일지사 및 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 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일조각을 참조할 것. 1082) 姚克一 :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서예가. 본서 권48 열전 金生傳에는 姚克一者 仕至侍中兼 侍讀學士 筆力 勁 得歐陽率更法 雖不及金生 亦奇品也 라 하여 당나라 구양순의 체를 습득하 였으며, 필력이 힘찼다고 하고 있다. 그는 景文王 12년(872) 8월 14일에 만들어진 전남 谷城의 `大安寺寂忍禪師塔碑文a을 썼으며, 당시의 관직은 中舍人이었다. 또 3개월 뒤인 11월 25일에 완성된 新羅黃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를 썼는데, 이때의 관직은 崇文臺郞兼春宮中事省이었 다. 이외에 그는 박거물이 찬한`三郞寺碑文a을 썼고,`興德王陵碑文a도 쓴 듯하다. 이에 대해 서는 李基東, 1980, 앞의 글을 참조할 것. 1083) 三郞寺碑文 : 三郞寺는 경북 경주시 성건동 西川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 건되었다. 三郞寺라는 절 이름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세 사람의 화랑과 관련있는 듯하나 화 랑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5 感通篇 景興遇聖條에는 神文王대에 國老였던 景興이 이 절에 住錫한 것으로 나온다.`三郞寺碑a는 삼랑사의 創建緣起를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현 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1084) 高辛氏 : 중국의 전설상의 帝로 黃帝의 曾孫이다. 頊을 도왔으며, 처음 辛땅에 봉함을 받았고 뒤에 帝位에 올랐기 때문에 高辛氏라 칭하게 되었다. 에 도읍하였으며 재위는 70년이었다고 한다( 辭海 高辛氏 항 및 帝 항 참조).

146 ) 古史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다. 고 하였으며, 또 秦 삼국의 선조가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 그 나라를 향유함이 이렇게 장 1089) 고 하였으니, 나라1087) 漢나라1088)의 난리 때에 중국인이 海東으로 많이 도망해 왔다. 구하였으나, 백제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행하는 일이 道에 어긋남이 많았으며,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는 계속 화호하여 [신라를] 침략하며, 이익을 따르고 편의에 좇아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鎭을 빼앗아 갔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잘 1085) 晉書 載記에 보인다 : 본 기사는 晉書 권 124 載記 24 慕容雲條에 慕容雲 字子雨 寶之養 子也 祖父高和 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으로 나온다. 그리고 본서 권18 고 구려본기 광개토왕 17년조에도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 報之 雲祖父高和 句驪之支屬 自云 高 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이라고 나오고 있다. 晉書 載記와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高陽氏의 後裔 로 되어 있는데 비해 본 기사에서 高辛氏의 後裔 라고 한 것은 찬자의 改筆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86)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다 : 이 기사는 백제 왕실과 고구려 왕실의 근원이 같 은 것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및 권25 개로왕 20년조와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출자가 부여 고구려계 라는 전승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백제 왕실 스스로에 의해 표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 된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경쟁관계가 심화됨으로 인해 정치 외교적인 목적이 따라 자신의 출자를 때로는 부여에, 때로는 고구려에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자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하지 않고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 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부여족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의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臣與高句麗源出扶餘 라 한 기사(본서 권25 백제본기 蓋鹵王 18년조 및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나, 日本書紀 권19 흠 명기 14년조에 성왕의 아들 餘昌(威德王)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에 앞서 今欲早知 與吾可 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 率 年二十九矣 라 한 기사, 그리고 538년 백제 성왕이 사비천도와 함께 국호를 일시적으로 南扶餘로 고친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서 울시 송파구 석촌동과 가락동 일대에 분포하는 적석총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입증해 주는 실 물 자료이다. 이처럼 백제는 직접적으로 고구려에 기원을 두었지만 멀리는 부여에 국가적 기원 이 있음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는 백제 왕실이 고구려를 의식하여 부여의 정통 적자로서 그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동명묘 배알 의식을 통해서도 발현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 로 백제가 부여 계통임을 입증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중서부지방의 토광묘를 계통적으로 길림 의 유수 노하심유적과 남성자유적 동쪽의 모아산유적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 이다. 다만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보듯이 그 지배세력의 계통은 단일하지는 않고 여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087) 秦나라 :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한 나라로 존속기간은 B.C 년이다. 시조 非子 때에 周 의 孝王으로부터 秦(현재의 중국 甘肅지역)을 받았고, 襄公 때(B.C.77) 비로소 諸侯가 되고, 莊 襄王 때에 周나라를 멸하였으며, 秦王 政(始皇帝)에 이르러 韓 趙 魏 楚 燕 齊의 순으로 6國을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3세 16년만에 漢 高祖에게 멸망당하였다. 1088) 漢나라 : 高祖 劉邦이 세운 나라로 존속기간은 B.C.202 A.D.8년까지이다. 前後漢 합쳐 ) 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 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도록 하였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명령을 어기 어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그 망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도다. 여년에 걸쳐 중국에 군림하였다. 前漢(西漢이라고도 함)은 B.C.202년에 유방이 項羽를 이기 고 長安에 도읍하였다. 그러나 15대째 이르러 王莽에게 찬탈을 당하여 멸망하였다. 後漢(東漢 이라고도 함)은 A.D.25년에 光武帝가 漢을 부흥시켜 洛陽에 도읍하여 후한을 세웠다. 그러나 黃巾의 난을 계기로 쇠퇴하여 220년에 魏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존속기간은 A.D 년이다. 1089) 秦나라 漢나라의 난리 때에 중국인이 海東으로 많이 도망해 왔다 : 이는 秦나라가 망하고 漢 나라가 일어나는 혼란한 시기에 중국에서 발생한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유망해 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秦末 漢初에 중국 유망민들이 우리나라로 온 것에 대해 三國志 권30 위서 동이전 濊傳에는 陳勝等起 天下反秦 燕齊趙民 避地朝鮮數萬口 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韓傳 所引 魏略 에는 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같 은 책 辰弁韓傳에는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으로 기록되어 있다. 1090)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 : 이 문장은 春秋左傳 隱公 6年 5月 條의 五月庚申 鄭伯侵陳 大獲 往歲 鄭伯請成于陳 陳侯不許 五父諫曰 親仁善隣 國之寶也 君其 許鄭 에 나온다.

147 292 大摠管으로 삼아,6) 左驍衛將軍7) 劉伯英8)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9)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 권5 新羅本紀 5 太宗 武烈王 7년(660) 봄 정월에 上大等 金剛1)이 죽었으므로 伊 293 金庾信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당 고종이 左武衛大將軍2) 蘇定方3)을 神丘道行軍大摠管4)으로 삼고 金仁問5)을 副 1) 金剛 : 무열왕 2년(655)에 伊 으로서 上大等이 되었다가 동왕 7년(660) 정월에 죽었다. 그 외의 다른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 左武衛大將軍 : 당나라 중앙군제의 하나인 左武衛를 총괄하는 정3품의 武官職이다. 左武衛는 중국 唐나라의 16衛 중의 하나이며, 궁궐의 宿衛와 五府 및 外府를 통괄하였다. 左武衛에 설치된 武官으 로는 上將軍 1인(종2품), 大將軍 1인(정3품), 將軍 2인(종3품)이 있었고, 그 아래에 長史 1인(종6품 상) 등이 있었다. 新唐書 권49 상 백관 4 상 16衛조 참조. 의자왕 20년(660)에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총사령관 蘇定方의 관직에 대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 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衛大將軍으로 나온다. 그러나`大唐平百濟國碑銘a과 新唐 書 권3 본기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에는 左武衛大將軍으로 나온다. 본서는 후자의 기록을 옮 긴 것이다. 3) 蘇定方 : 생몰연대는 년으로 향년 76세이다. 이름은 烈, 字는 定方, 중국 기주(冀州) 武 邑 사람이다. 660년 3월에는 나 당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3만의 당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山東 半島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으며, 의자왕과 태자 隆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661년 5월 다시 遼東道行軍大摠管이 되어 신라군과 함께 고 구려의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백제 를 멸망시킨 후 현존하는 定林寺址五層石塔에`大唐平百濟國碑銘a을 새겼다. 이 비명에는 백제를 공격할 당시의 소정방의 직함에 대해 元戎使持節神丘 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左武衛大將 軍上柱 國公 으로 나온다. 소정방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83 열전 33 蘇定方傳과 新唐書 권 11 열전 36 蘇定方傳 및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및 노중국, 2003, 백제 부흥운동사, 일조각, 58~60쪽, 본서 권28의 주 938)을 참조할 것. 4) 神丘道行軍大摠管 : 神丘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임시 관직 이다. 神丘는 燕然山을 높여 말한 것인데( 文選 권56 封燕然山名條), 燕然山은 외몽골 三音若顔 部의 杭愛山의 옛 이름으로서 後漢의 車騎將軍 竇憲이 永元 원년(89)에 흉노를 북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 後漢書 권23 列傳 竇融傳附 竇憲傳). 따라서 神丘道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北 伐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길을 수식하고자 붙인 것으로 보인다.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 傳과 같은 책 권199 신라전에는 熊津道大摠管 이라 하였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 수록된 都 督府의 13縣 중에 神丘縣이 있는데, 이는 당나라가 백제고지에 설치하고자 했던 웅진도독부에서 사비성 부근지역을 개편한 이름인 듯하다. 한편 摠管은 군사를 지휘 감독하는 관직으로 주로 北 周 및 隋 唐代에 사용되었다. 5) 金仁問 :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은 진덕여왕 5년(651)에 파진찬으로서 23세의 나이로 처음 게 하였다. 또 칙명으로 [무열]왕을 夷道行軍摠管10)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 眞珠11) 天存12)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 입당한 이후 전후 7차례에 걸쳐 견당사로 파견되었다. 무열왕 7년(660)에 神丘道副大摠管이 되어 당나라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멸망시켜 그 공으로 角干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문무왕 원년 (661)과 동왕 8년(668)에는 신라의 고구려 정벌군을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문무왕 8년에 李勣 을 따라 입당한 이후 나당간 정치적 알력의 와중에서 김인문은 親唐的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고국 에 돌아오지 못하고 줄곧 당에 머물다가 효소왕 3년(694)에 66세의 나이로 당나라 長安에서 죽은 후 유해만이 송환되어 신라의 西原 아래에 묻혔다(본서 권44 열전 金仁問傳 참조). 6) 副大摠管으로 삼아 : 김인문을 副大摠管으로 삼은 사실은 중국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권44 열전 金仁問傳에 의하면, 당시에 당 고종이 그 곳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을 불러 백제지역 도 로의 險易와 거취의 편의를 묻자 인문이 매우 상세하게 대답하였으므로, 고종이 기뻐서 그를 神丘 道副大摠管을 제수하여 칙명으로 軍中에 나아가게 했다고 한다. 7) 左驍衛將軍 : 당나라 중앙관제의 하나인 左驍衛에 속한 종3품의 武官職이다. 左驍衛는 唐나라의 16衛의 하나. 처음에는 驍騎였지만 隋나라가 左右備身을 左右驍衛로 고쳤다. 唐나라에 들어와서 驍騎의 騎 자를 제거하고 驍衛府로 하였다. 관장하는 업무와 인적 구성은 左武衛와 같다(본서 권 28의 주 937) 참조). 左驍衛에 두어진 장군은 2명이었으며, 관품은 종3품이었다. 舊唐書 권44 직관 3 左右驍衛 및 新唐書 권48 백관 4 상 16衛 참조. 中宗壬申干本에는 左衛將軍 으로 되어 있는데, 감교본에서는 신라본기에 의거하여 驍 자를 첨가하여 左驍衛將軍 으로 하였다. 8) 劉伯英 :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소정방과 함께 당나라 군사를 인솔하고 온 당 나라 장수. 冊府元龜 권986 외신부 征討 顯慶 5년 3월조에는 좌효위장군 유백영 다음에 右武衛 將軍 풍사홰(馮士 )와 左驍衛將軍 龐孝泰가 기재되어 있다. 新唐書 권220 백제전에도 이 세 사 람의 이름이 나오나 유백영의 관직이 左衛將軍으로 되어 있고 풍사홰가 馮士貴로 되어 있다. 9) 수군과 육군 13만 명 : 舊唐書 권199 신라전과 資治通鑑 권200 顯慶 5년 3월조에는 水陸十 萬 이라 하였고, 그 외 중국측의 다른 기록에는 군대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본서 권 28 백제본기와 같은 책 권42 열전 金庾信傳(中) 및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소정 방이 거느리고 온 군사의 수를 13만 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특히 태종춘추공조의 세주에는 鄕 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人 船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라 하였다. 10) 夷道行軍摠管 : 夷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사령관이라는 뜻의 임시 관직이다. 夷는 書 經 堯典篇과 後漢書 권85 東夷傳 序文 등에 나오는 것으로서, 산동반도의 萊夷를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동쪽 방면의 九夷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말한다. 본서 권37 잡지 지 리(4)에 수록된 熊津都督府의 13縣 중에 夷縣이 있다.

148 294 여 6월 18일에 南川停13)에 행차했다. 소정방은 萊州14)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리에 이 어져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6월 21일에 왕이 태자 法敏15)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德物島16)에 가서 정방을 맞 295 이하였다.17)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백제 義慈의 도성18)을 격파 하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말을 들으시면 11) 眞珠 : 선덕왕 8년(639) 2월에 사찬으로서 북소경의 사신이 되어 그곳을 지켰으며, 무열왕 6년 (659) 8월에 아찬으로서 兵部令이 되었다. 또 동왕 7년(660) 5월에 庾信 天存 등과 함께 백제정 벌군을 지휘하였고, 문무왕 원년(661) 7월에는 고구려 원정군에 소속되어 金仁問 欽突과 함께 大幢將軍으로서 참여했다. 그러나 본서 권5 문무왕 2년(662) 8월에 진주는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 아 나라일을 소홀히 하였다는 죄목으로 南川州摠管 眞欽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8년 후인 문무왕 10년(670) 12월에 모반한 藪世를 토벌한 사람이 대아찬 眞珠였다고 한다. 문무 왕 2년에 진주가 처형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藪世를 토벌한 대아찬 진주와는 同名異人일 것 이다. 그러나 진주의 아들 風訓이 문무왕 15년에 자기 아버지가 본국에서 죽음을 당한 것을 원망 하여 唐軍의 鄕導가 되어 신라를 쳐들어왔다고 하므로, 문무왕 2년의 진주 처형기사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12) 天存 :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무열왕 7년(660) 5월 26 일에는 이찬으로서 欽純 등과 함께 사비성을 구원하러 갔던 신라의 군사를 거듭 구원하러 가던 도 중에 그만두었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는 貴幢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고 이후 居列城 居勿城 沙平城 德安城 등을 공취하였다. 동왕 8년(668) 6월에는 角干으로서 貴幢摠管 이 되어 金仁問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군에 참여하고, 동왕 10년(670) 7월에는 백제 고지를 재점 령하는 등 군공이 많았다. 문무왕 19년(679) 1월에 그는 서불한으로서 中侍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 13) 南川停 : 신라 지방군제인 10停의 하나로서, 南川州 즉 현재의 경기도 利川市에 있던 부대이다. 남천정의 군관직으로는 騎兵을 거느린 隊大監 1인, 少監 2인, 大尺 2인과 三千幢主 6인, 三千監 6 인이 있었다(본서 권40 잡지 직관(下) 武官條 참조). 14) 萊州 : 현재의 중국 山東省 掖縣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본래는 東萊郡이었던 것을 唐初에 萊州 로 고치고 河南道에 소속시켰다. 舊唐書 권83 및 新唐書 권111 열전 蘇定方傳, 新唐書 권 220 백제전 및 본서 권28 백제본기, 三國遺事 에는 소정방군의 출발지를 城山 이라 하였고, 資治通鑑 권200 顯慶 5년 8월조와 冊府元龜 권986 征討 현경 5년(660) 8월조에는 이를 成 山 이라 하였다. 城山 은 成山 의 잘못인데, 成山은 현재의 중국 山東省 榮成縣 동쪽 30리 지점 의 작은 半島로서 해운교통의 요충지이다. 측천무후 如意 원년(692)에 萊州에서 登州가 분리되기 전에 成山은 萊州에 속해 있었다. 15) 法敏 :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태종무열왕의 원자로서 병부령에 임 명되었으며, 65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에 김유신과 함께 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아버지 무열왕이 죽자 즉위하여 668년에 唐軍과 합세하여 고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수신 채( 食)19) 불이 나게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 의 군대 형세가 매우 강성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品日20)과 欽春21)<*春을 혹은 純으로도 썼다.>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 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으므로 676년에 당군을 축출하여 한반도 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674년에 새 로운 曆法을 썼고, 675년에 銅으로 印章을 만들어 百官과 州郡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681년에 문 무왕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感恩寺 동쪽 바다 大王岩上에 장사를 지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즉위년조와 본서 권28의 주 898) 및 1041)을 참조할 것. 16) 德物島 : 현재의 경기만 인천광역시 덕적면의 德積島이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 에서는 德勿島로 표기하였다. 덕적군도는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와 같은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이곳 전승에 의하면 당군의 소정방은 덕적도 남쪽 蘇耶島에 주둔하였으며, 소야도라 는 섬이름은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김영관, 1999,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68쪽 및 2007, 앞의 글, 240쪽). 17) 정방을 맞이하였다 :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 의하면, 이때 파진찬 김인문이 唐將 소정방 등과 함께 德物島에 와서 먼저 從者 文泉을 보내 도착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 왕이 태자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18) 義慈의 도성 : 義慈는 곧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지칭하는데, 당시의 도성은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의 부소산성을 말한다. 의자왕에 대하여서는 본서 권28 주석 855) 참조. 19)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수신 채( 食) :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급히 서둘러 일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春秋左氏傳 文公 7년조에 訓卒利兵 馬 食 潛師夜起 라는 말이 있다. 20) 品日 : 태종 무열왕 7년(660) 7월에 대장군 김유신을 따라 장군으로서 백제 정벌군에 참가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자기 아들인 화랑 官昌을 잃는 격전 끝에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고, 동왕 8년 (661)에는 이찬으로서 大幢將軍이 되어 사비성 구원에 출전하였다. 문무왕 초년에는 上州摠管이 되어 백제 雨述城, 고구려 突沙城 등을 함락시켰고, 동왕 8년(668)에는 貴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원정군에 참가하였으며, 동왕 10년(670)에는 文忠 등과 함께 백제의 옛 땅 63개 성을 재점령하는

149 296 을 이끌고 여기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今突城22)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黃山 벌판23)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階伯24)이 군사를 거느 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297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 살이지만 의지와 기백이 제법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 서 능히 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 빠지게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에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들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 들어갔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盤屈25)에게 말하였다. 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 급한 경우를 보고 목숨을 바치면 忠과 孝 두 가지 모두를 보존하는 것이다. 반굴이, 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官狀26)<*또는 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서 돌아가도록 놓아주었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다. 계백이 등의 활약을 하였다. 21) 欽春 : 欽純이라고도 하였는데, 金庾信의 동생이고 金令胤의 조부이다. 김흠순은 진평왕 때 화랑 으로서 인망이 있었으며, 무열왕 7년(660)에는 대장군 김유신을 따라 장군으로서 백제 정벌군에 참가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아들 盤屈을 잃는 격전 끝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문무왕 초년에는 백제의 나머지 군사를 토벌하여 內斯只城 居列城 居勿城 등을 함락시켰으며, 동왕 8년(668) 6 월에는 각간으로서 대당 총관이 되어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그는 당 나라에 謝罪使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1015)를 참조할 것. 22) 今突城 : 현재의 경북 상주시 모서면 白華山古城으로 비정되고 있다(鄭永鎬, 1972, 金庾信의 百 濟攻擊路 硏究, 史學志 69).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는 大王行至沙羅之停 이라 하였 다. 沙羅停과 今突城이 동일지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3) 黃山 벌판 : 현재의 충남 논산군 연산면 天護山 開泰寺 주변의 들판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36 잡 지 지리(3) 熊州條에 의하면, 黃山郡은 본래 黃等也山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8 連山縣 山川條에, 黃山은 天護山이라고도 하며 縣 동쪽 5리에 있다고 하고, 이어서 신라 김유신 군사와 백제 계백 군사가 싸운 곳이라 설명하였다. 24) 階伯 : 본서 권47 열전 계백전에는 階伯 으로 되어 있으며, 당시 관등은 達率이었다고 한다. 그 는 백제 말년에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5만 군사를 방어하다가 전사하였 다. 본서 권47 열전 階伯傳 및 권28 주 958)을 참조할 것. 25) 盤屈 : 신라의 王京 沙梁部 사람으로 김흠순(춘)의 아들이고, 金令胤의 아버지이다. 태종 대왕 7 년(660) 백제 정벌에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하여 아버지 명에 따라 용감하게 전사하여 사기 를 진작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의 그의 활약상은 본서 권47 열전 金令胤傳에 자세하다. 26) 官狀 : 년. 신라의 진골 출신 화랑으로 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 품일의 아들로 본서 권47 열전에는 官昌 으로 표기하였다. 16세에 660년 백제 전투에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흠 순의 아들 반굴이 전사하자 그는 황산벌 전투에 副將으로 출전하여 두 번이나 돌진하여 용감히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드니 피가 흘러 옷소매를 적셨다. 그는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나라를) 위하여 능히 죽었으니 다행이 다. 三軍27)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 제의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忠常28)과 常永29)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 싸우다가 죽었다. 후에 왕이 그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그 집에 絹布와 양곡 등을 보냈다고 한다. 본서 권47 열전 官昌傳 참조. 27) 三軍 : 김유신이 거느린 5만의 백제원정군은 좌군 중군 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탄현을 넘어 백 제 3영을 향해 진격하였다. 신라군이 한 부대는 진산에서 벌곡 대덕리 한삼천리를 지나 황산벌 로 진입하였고, 또 한 부대는 운주 방향에서 황산으로 진입하였고, 중군은 진산에서 벌곡 금천 리-웅치재-산직리를 지나 황산벌과 모촌리 방향으로 진공하여 백제의 계백이 거느린 3영과 마 주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성주탁, 2000, 황산벌 전적지의 역사적 성격, 논산 황산벌 전 적지, 충남대 백제연구소, 5~9쪽을 참조할 것. 28) 忠常 : 백제 의자왕 7년(648)에 백제 장군 8인과 品釋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자는 신라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왕에게 간언한 바 있다. 무열왕 7년(660)에 신라에 사로잡혀 신라의 일길찬 관등을 받고 총관이 되었고, 동왕 8년(661) 2월에는 아찬으로서 大幢將軍 品日을 도와 사비성 구원에 참 가하였으며, 같은해인 문무왕 원년 7월에는 上州 摠管이 되었다.

150 298 다. 이 날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伎伐浦30)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31) 정방은 유신 등이 32)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督軍 金文穎 <*穎을 또는 永으로도 썼다.>을 軍門 299 에서 목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 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수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 29) 常永 :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達率로서 왕에게 나당연합군 중 신라군을 먼저 치기를 건의한 바 있다. 그 후 660년 7월 계백이 거느린 결사대와 함께 黃山에서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로 잡혔 다. 이때 그의 관등은 佐平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출전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을 보여주 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신라군에 항복한 후 660년 11월에 신라 무열왕으로부터 7등급 一吉 의 관등과 摠管의 직을 제수받았다. 30) 伎伐浦 : 白江 熊津江 只火浦 장암 등으로 불리우는 錦江의 입구를 말하는데, 현재의 충남 舒 川郡 長項邑 長岩洞에 있던 포구이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서는 伎伐浦의 細注 에 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이라 하였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 舒川郡 關防條의 舒川浦營 細注에는 在郡南二十六里 水軍萬戶一人 高麗時稱長岩鎭 이라 하였다. 한편 기벌포 즉 熊津江口에서의 전투상황은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新唐書 권220 백제전, 資治 通鑑 권200 顯慶 5년조, 冊府元龜 권986 외신부 征討 현경 5년 8월조 등에 실려 있다. 그 중 冊府元龜 권986 征討 현경 5년(660) 8월조의 기사가 가장 상세하다. 즉 백제는 금강 입구에서 당나라 군대를 막고자 하였으나, 소정방 등이 이미 그곳을 건너 산에 올라 진을 치고 있는 상태에 서 이들과 전투를 벌였다. 그 사이에 당나라 전함이 잇달아 상륙해 오자 백제는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 되었으므로 나머지는 크게 무너졌다고 한다. 금강 하구인 기벌포는 성충과 흥수가 이 미 백제의 요해처로 지적했듯이 사비도성으로 물길을 따라서 바로 진군할 수 있는 곳이므로, 사 비도성으로 진군해야 하는 당군이 굳이 금강 하구를 버려두고 동진강이나 줄포, 더구나 안성천 입구 등으로 상륙한다는 것은 군사전략상 성립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 주 918) 및 956)과 김영관, 2007, 앞의 글, 243~244쪽을 참조할 것. 31)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군대가 정확히 언제 唐軍의 진영 에 이르렀는지 분명치 않으나, 신라군과 唐軍의 회합 약속 기일이 7월 10일이었고 나당연합군의 전투개시는 7월 12일이었으므로, 그 도착한 시기는 대략 7월 11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당시에 唐 軍의 진영이 어디에 머물러 있었는지에 대하여서도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新唐書 권220 백제전과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및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백제 도 성에서 一舍(30里)쯤 되는 곳이었다 하고 資治通鑑 권200과 冊府元龜 권986에는 도성에서 20餘里였다고 함으로, 그 지점은 대략 현재 충남 논산시 강경 부근에 해당한다(田中俊明, 2000, 百濟後期 王都泗 의 防禦體系, 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서경문화사, 140쪽). 32) 김문영(金文穎) : 文穎을 文永이라고도 하였다. 문영은 이후 문무왕 원년(661)에 首若州摠管이 되 었고, 동왕 8년(668)에는 대아찬으로서 卑列城州行軍摠管이 되어 蛇川城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 게 격파하였다. 그리고 동왕 10년(670)에 軍官과 함께 백제고지 12성을 재점령하는 등의 전공을 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右將 董寶亮이 그의 발등을 밟으며( 足) 말하기를,33)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고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묻지 않고]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34)가 佐平 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철수시 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나라와 신라군이 의자왕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하여 所夫里 벌판35)으로 나아가 는데,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36)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일제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또 上佐平37)을 시켜 고기로 쓸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이찬으로서 왕의 婚禮를 주선하였고,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이 되었다. 33) 그의 발등을 밟으며( 足) 말하기를 : 足附耳 의 준말로서, 남의 발을 밟아 일깨우고 귓속말로 남몰래 귀띔해서 주의를 준다는 뜻이다. 이는 張良이 漢나라 高祖의 발을 밟고 귓속말을 했다는 故事에서 유래한다. 34) 백제 왕자 : 백제 의자왕에게는 孝 泰 隆 演 豊 등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 어느 왕자가 좌 평 覺伽를 보내어 군대 철수를 빌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三國史節要 에서는 이를 백제왕자 隆이 라 하였다. 35) 所夫里 벌판 : 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이다. 본 서 권27 백제본기 성왕 16년(538)조에 移都於泗 라 하였고 그 細注에 一名所夫里 라 하였으 며, 같은 책 권36 잡지 지리(3) 熊州 扶餘郡條에 本百濟所夫里郡 이라 하였다. 36)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와 三國史節要 에 따르면, 신라와 당의 군대가 합세하여 진을 치고 있을 때 홀연히 새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 날아다녀서 占을 쳐보니 元帥가 다칠 것이라 하였으므로,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소정방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인심에 순응하여 不仁者를 치는데, 무엇이 상서롭지 못하랴 하며, 칼을 뽑아 그 새를 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37) 上佐平 : 전지왕 4년(408)에 설치한 수석좌평으로 군국정사를 담당하였고 고려의 宰와 같았다. 좌평은 본래 率系 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諸率會議]의 의장이었는데, 이때 상좌평이 설치되면 서 上佐平 中佐平 下佐平(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 참조)과 일반좌평으로 분화되었다.

151 300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이를] 물리쳤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13일에 의자왕이 좌우 측근을 거느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熊津城38)에 몸을 보전하였 40) 41)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43)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사람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39) ) 고, 의자왕의 아들 隆 은 大佐平 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왕이 태자44)와 熊津方領45)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 이렇게 분화된 좌평들로 구성된 좌평회의체에서 주요한 국정을 논의 결정할 때 상좌평은 수석 좌평으로서 의장의 직을 맡았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5의 주 402) 및 권28의 주 921) 을 참조할 것. 당시 상좌평을 大佐平 沙宅千福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김수태, 2007, 앞의 글, 60쪽), 분명치 않다. 38) 熊津城 : 백제 성왕이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기 이전의 수도로서, 현재의 충남 공주시이다. 사비 시대에는 5방 중에서 북방성에 해당한다. 39) 의자왕이 좌우 측근을 데리고 몸을 보전하였고 : 新唐書 권220 백제전, 資治通鑑 권 200 顯慶 5년조, 冊府元龜 권986 외신부 征討,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이 때 의자왕이 태자 隆을 데리고 北境으로 달아났다고 하였으나,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와 三國史節要 에는 의자왕이 태자 孝와 함께 北邊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는 의자왕의 태 자를 효나 융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록상의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40) 隆 :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다. 新唐書 권220 백제전, 資治通鑑 권200 顯慶 5년, 冊府 元龜 권986 외신부 征討條, 唐平百濟國碑銘 등에는 그를 의자왕의 태자라 하였으나, 본서 권 28 의자왕대 기사에서는 孝가 태자로 나온다. 융은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4년조에는 태자 로 책봉되었는데, 여기서는 왕자로만 나온다. 본서 찬자는 의자왕 말기의 태자를 효로 보았기 때 문에 644년 융의 태자 책봉 기사와는 달리 서술하였기 때문에 융이 왕자로 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877)을 참조할 것. 그는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의자 왕 20년(660)에 백제가 멸망한 후 당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 후 그는 唐나라의 以夷制夷 정책에 의해 熊津도독으로 임명되어 돌아와 백제의 유민들을 회유하고, 신라 문무왕과 就利山에서 盟約 을 맺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당나라 高宗 永淳 元 年(682)에 그의 묘비가 세워졌으며, 현재 中國 河南省 鄭州市 河南博物院 1층 石刻藝術館에 전시 되어 있다. 隆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 黃淸連, 1993, ``扶餘隆墓誌a에서 본 唐代 韓中關係a, 百濟史의 比較硏究, 忠南大 百濟硏究所 ; 양기석, 1995,`百濟 扶餘隆 墓誌銘에 대한 檢討a, 國史館論叢 62를 참조할 것. 41) 大佐平 : 좌평회의의 의장이었던 上佐平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상좌평과는 별개 의 존재로 보인다. 660년 당에 항복할 때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秋7월조에 의하면 대좌평 은 沙宅千福 國辨成 沙宅孫登 이하 37인 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3인의 존재가 보이고 또 그들은 백제 신료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라의 김유신이 수여받은 태대각간의 존재에서 미루어 볼 수 있듯이 외형상 상 중 하의 3좌평을 통할하는 위치에 있는 비상위의 최상위 신분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대성귀족 출신의 원훈대신을 임명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6, 백제 사비시대의 좌평제 연구, 충북사학 9, 10쪽을 참조할 것. 그리 고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 에는 其王扶餘義慈及太子隆自外王餘孝一十 三人幷大首領大佐平沙托千福國辨成以下七百餘人旣入重 로,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秋7월조에는 十一月一日 爲將軍蘇定方等所捉百濟王以下太子隆等諸王子十三人 大佐平沙宅千 福 國辨成 孫登以下三十七人 幷五十許人 奉進朝堂 으로, 같은 책 齊明紀 6년 동11월조에는 百 濟王義慈 其妻恩古 其子隆等 其臣大佐平千福 國辨成 孫登等凡五十餘人 秋於七月十三日 爲蘇 將軍所捉而送 으로 되어 있다. 42) 의자왕의 아들 隆은 나와 항복하였다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 의하면, 의자 왕과 태자 孝가 웅진으로 도망간 후 소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왕의 次子 泰가 자립하여 왕이 되어 성을 굳게 지켰다. 이에 태자의 아들 文思와 왕자 隆이 뒷일을 걱정하여 밧줄에 매달려 성 밖으로 나가자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는데, 泰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43)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 이 사건은 선덕왕 11년(642)에 백제가 大耶城을 함락하고, 항복한 大耶州 都督 金品釋과 그의 아내 古 炤娘 즉 김법민의 누이를 살해한 일을 가 리킨다. 품석은 이찬으로서 대야성의 성주[大耶州 都督]로 있다가 백제장군 允忠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幕客인 舍知 黔日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원한을 산 적이 있 었으므로 선덕왕 11년(642)에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자 黔日은 毛尺 등과 백제와 내응하였다. 그래서 城이 함락되고 품석 夫妻도 죽어 유골은 그곳 옥중에 묻혔다. 그 후 김유신이 진덕여왕 2 년(648) 玉門谷 전투에서 크게 이겨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아 이들을 품석 夫妻의 유골과 맞바 꾸어 송환한 바 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조와 같은 책 권41 열전 김유신전 上 및 같 은 책 권47 열전 竹竹傳 참조. 44) 의자왕이 태자 : 본서 권28에서는 의자왕의 태자로 맏아들 扶餘孝로 기록하였으나, 舊唐書 권 83 열전 소정방전에는 其大將 植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餘諸城主皆同送款 이라 하여 태자 융 으로 기록하여 차이가 난다. 이는 의자왕의 태자를 효나 융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록상의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45) 熊津方領 : 백제 五方의 하나인 熊津城을 다스리던 우두머리 관직. 백제는 수도 이외의 지역을 5

152 하였다. [무열]왕이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 성을 웅거하고 또 佐平 正武50)가 무리를 모아 豆尸原嶽51)에 진을 치고서 당과 신라인을 노 러 弟監 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승전 보고(露布)를 하였다. 략질하였다. 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무열]왕과 정방 및 여러 장수들 26일에 任存52)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 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 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毛尺46)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 47) 성의 黔日 과 공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그를]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붙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함께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앴 기 때문에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 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은 南岑48)과 貞峴49) 등의 方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그 중에서 웅진성은 北方에 해당한다. 5방에는 각기 方領 1인이 있 었는데 達率이 이를 맡았으며, 方에는 1,200인 이하 700인 이상의 군사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 편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傳에 의하면, 백제의 大將 植이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해 왔다고 하였으므로 植은 당시 의자왕이 피신해 있던 熊津城의 方領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970)을 참조할 것. 46) 毛尺 : 선덕왕 11년(642)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군에 내응했던 신라 사람이다. 앞의 주 43)을 참조할 것. 47) 黔日 : 선덕왕 11년(642) 당시 대야주 도독의 幕客으로서 관등은 舍知였다. 검일은 아름다운 아내 를 도독 김품석에게 빼앗긴 것에 원한을 품고 그 앙갚음으로 백제군에 내응하여 대야성의 창고에 불을 질러 대야성이 함락되게 하였다. 그 후 백제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와서 잡힌 것이다(본서 권 47 열전 竹竹傳 참조). 48) 南岑 : 부여 금성산이나 석성산성에 비정된다. 49) 貞峴(城) : 眞峴城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熊州 黃山郡 鎭嶺縣(대전광역시 유성구 남단)의 백제 때 지명이다. 진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주 동쪽의 鎭嶺으로 보는 견해(津田左右吉, 1913, 百濟 戰役地理考, 朝鮮歷史地理 上,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儒城산성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 大德 鎭岑面으로 보는 견해(盧道陽, 1980, 앞의 글) 등이 있으나,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의 흑성동산성[일명 密岩山城]으로 보는 견해(심정보, 1983, 앞의 글 ; 지헌영, 1972, 앞의 글)가 설득력이 있다. 金正浩의 大東地志 권5 진잠조에는 鎭岑本鎭峴 鎭峴城[密岩古城 俗稱美 林古城] 라 하여 밀암산성 즉 흑석동산성에 비정하고 있다. 흑석동산성은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된 內托外築의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540m이다. 이곳은 남쪽을 제외한 3 면이 豆磨川으로 돌려 있고,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며, 대전에서 汗三川里를 거쳐 논산시 연산에 이르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이 길목을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부흥군이 이 성에 웅거한 것은 옹산성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신라의 군량 운송로인 熊津道를 다시 차단하여 웅진부성의 당 군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50) 正武 : 백제부흥군이 처음 봉기할 때 두시원악을 근거로 하여 거병한 좌평급 인물이다. 그가 거병 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나당군이 사비도성에서 전승 축하연을 벌인 660년 8월 2일에서 임존성 을 공격한 8월 26일 이전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정무는 같은 시기에 나오는 좌평 貴智와 같은 인물로 추정되는 達率 正珍 일본서기 권26 ( 제명기 6년 동10월)가 좌평 正福 (본서 권42 열 전 김유신 전)을 정무와 같은 성씨로 보고 이들이 대성팔족에 버금가는 가문으로 파악하는 견해 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2003, 앞의 책, 88~90쪽을 참고할 것. 그런데 두시원악은 군현 급 정도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좌평급이 이것의 지방관으로 보임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정무는 두시원악이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곳에 낙향하여 거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51) 豆尸原嶽 : 현재의 전북 무주군 부남면 일대로 추정된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3) 全州 進禮郡條 에 伊城縣 本百濟豆尸伊縣 景德王改名 今富利縣 이라 하였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錦山郡 古跡條에는 富利廢縣이 郡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고 한다(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6쪽), 이와는 달리 두시원악의 두시원 이 우리 말로 돌원 과 뜻이 통하여 두릉(량)윤성과 같은 곳으로 보고 충남 정산 계봉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심정보, 1984, 백제 두릉윤성에 대하여, 대전 개방대논문집 1 참조). 52) 任存 : 현재의 충남 禮山郡 大興面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에 걸쳐 있는 鳳首山城이다. 이 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2,426m로 고대 산성 중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봉수산성에 대 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에 任存 存官 任存官 등이 새겨진 명 문 기와가 수습되어 이 성이 임존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군 충남개발연구원, 2000, 예산 임존성, 21~26쪽). 반면 예산 봉수산성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고 홍성군 장곡면 산 성리에 있는 학성산성을 임존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정석, 2002, 백제의 성곽, 학연문화 사, 262~283쪽). 임존성은 복신 등이 최초로 거병한 곳이며, 후에 주류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부흥군의 북방 거점지역이 되었다. 663년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흑치상지와 지수신 등이 주도한 3기 부흥군의 거점지역이기도 하다. 資治通鑑 권200 唐紀 고종 용삭 원년 3월조에 나오는 임 존성에 대해 胡三省은 任存城在百濟西部任存山 考異曰 實錄或作任孝城 未知孰是 今從其多者 라

153 304 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이를 깨뜨렸다.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 9월 3일에 郞將53) 劉仁願54)이 군사 1만 명으로써 사비성55)에 남아 지켰는데, 왕자 仁泰 가沙 56) 日原, 級 305 吉那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 왕 57) 려고 하였으므로 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 적이 물러가 사비 성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서 모여 틈을 엿보아가며 성 및 왕족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에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 읍을 노략질하니, 백제인 중에 배반하여 이에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당나라 다.58) 김인문과 沙 황제가 左衛中郞將60) 王文度61)를 보내 熊津都督62)으로 삼았다. 儒敦,59) 大奈麻 中知 등이 그와 함께 갔다. 28일에 [왕문도가] 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 하여 實錄에는 任孝城으로도 표기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9 월조에는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北任敍利山] 이라 하여 任射岐山(任敍 利山)으로 표기되고 있다. 53) 郞將 : 당나라 중앙군대의 무관직으로서 관품은 正5品上이다. 당나라 중앙관제인 16衛에는 각기 左右郞將 1인씩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中郞將이 없을 때 그의 숙위직무를 대리하였다. 定林寺址 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유인원의 직함을 行左驍衛郞將으로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의 낭장은 좌효위낭장을 말한다. 좌효위에는 左郞將 1명과 右郞將 1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54) 劉仁願 : 중국의 조음(雕陰) 대빈(大斌) 사람으로 字는 士元이었다. 일찍이 고구려와 薛延陀 등의 정벌에 참여하였고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정벌하고 郞將으로서 사비성을 진수하였으 며, 얼마 후 그는 백제의 遺臣인 福信 道琛에게 에워싸여 고전하였으나, 龍朔 원년(661)에 劉仁 軌와 신라군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하였다. 용삭 3년(663)에는 웅진성의 留鎭郞將으로서 유인궤 와 함께 부여풍 및 일본의 백제 응원군 安倍比羅夫 등을 白江口에서 토멸하여 右威衛將軍 魯城縣 公을 제수받았으며, 麟德 원년(664)과 2년(665)의 두 차례에 걸쳐 唐의 勅使로서 신라와 백제의 화친 서맹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乾封 2년(667) 李世勣 고구려 원정 때 기약일에 늦었기 때 문에 본국에 소환되어 다음해에 유배되었다. 55) 사비성 :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곳으로서,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이다. 56) 日原 : 문무왕 7년(660)에 당으로부터 雲麾將軍에 임명되었고, 동왕 8년의 고구려 토벌시에는 아 찬으로서 계금당( 衿幢) 총관이 되었다. 57)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서는 소정방이 王과 太子 孝, 王子 泰 隆 演 및 大臣 將士 88인과 百姓 12,807인을 당나라 수도로 붙잡아 갔다고 하였고,`唐平百濟國碑a와`唐劉仁願紀功碑a에는 왕과 왕자 외에 좌평 달솔 등 700여 명을 붙잡아 갔다고 한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 6년 7월조에는 50여 명, 그리고 舊唐書 권199 백제전 및 新唐書 권220 백제전에는 왕과 왕자 외에 酋長 58명을 사로잡아 갔다고 한다. 58) 당나라로 돌아갔다 :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이후에 金庾信 仁問 良圖 등을 회유하 여 附唐勢力으로 삼으려 하고 또 백제 정벌군으로써 신라까지 침략하려고 도모하였으나, 유신 등 이 응하지 않고 또한 신라군이 당군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돌아 갔다고 한다.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 자세하다. 59) 儒敦 : 무열왕 7년에 사찬으로서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에 갔다가, 문무왕 원년(661) 6월에 당 고 종의 칙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 후 동왕 10년(670) 7월에는 대아찬으로서 熊津都督府에 가서 화친을 청하였다. 60) 左衛中郞將 : 당나라 중앙군제의 하나인 左衛에 속한 正4品下의 무관직이다. 61) 王文度 : 그의 행적을 담은 열전에 입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는 당 고종 永徽연간(650~655)에 돌궐을 공격하였을 때 소정방의 공로를 시기하고 재물을 약 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르다가 귀환 후에 제명되고 말았다. 660년 8월 백제 부흥군의 공격으로 사 비부성이 곤경에 처해지자 당 고종은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에 파견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 느리고 웅진에 갔으나 곧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신라의 三年山城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서 권28 본 기사 에서는 바다를 건너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왕문도의 직함에 대해 본 기사와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衛郞將으로 나오나,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右衛郞將으로, 舊唐書 권84 열전 劉仁軌傳과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 및 資 治通鑑 권200 唐紀 16 高宗 龍朔 원년 3월조에는 左衛中郞將으로 나오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왕문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열전에 입전되어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구당서 권83 열 전 소정방, 같은책 권84 열전 유인궤, 같은책 권199 상 열전 백제,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 그 리고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4~65쪽을 참조할 것. 62) 熊津都督 : 당나라가 백제 故地에 설치했던 웅진도독부의 장관이다. 初代 웅진도독이었던 王文度 가 부임하여 곧바로 죽고 난 후, 백제 부흥군의 반격에 휘말려 웅진도독부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으므로 도독이 없었다. 그 후 백제 부흥운동이 진정된 664년에 당에 잡혀갔던 扶餘隆이 熊津 都督이 되어 귀국하였다. 665년에는 당나라의 강요에 의해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의 화 친 서맹이 있어 백제지역에서 신라군은 일단 철수하였으나, 당나라의 백제고지 지배에 대한 괴뢰 노릇을 하던 부여융은 그 후 언제인지 신라를 두려워하여 당나라로 되돌아갔다. 결국 문무왕 10 년(670)에서 동왕 11년(671)에 걸쳐 신라가 백제 고지를 점령하고 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웅진 도독부는 없어졌다. 676년경에 당나라 고종이 부여융을 다시 熊津都督 帶方郡王으로 임명하여 신라에 대한 백제의 반감을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부여융은 끝내 웅진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154 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왕에게 주려고 로 삼고 軍師70) 豆迭을 高干71)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儒史知 未知活 寶弘伊 屑儒 등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그를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이 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63) 는데, 佐平 忠常과 常永, 達率 自簡72)에게는 一吉 禮城 을 쳤다. 18일에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 73) 의 관등을 주어 총관의 직을 맡겼고, 74) 恩率 武守에게는 大奈麻 의 관등을 주어 대감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仁守에게는 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 5백 명을 목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七重城64)을 침공하여 軍主 匹夫65)가 전사하였다. 66) 67) 5일에 왕이 鷄灘 을 건너 王興寺岑城 을 공격하여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였는데,68) 63) 衿卒69) 宣服을 급찬으 禮城 : 현재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던 성으로 추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87쪽). 초 기에 일어난 부흥군의 거점성 중의 하나이다. 이 성은 660년 10월 9일 신라 무열왕이 거느린 군 대의 공격을 받아 18일에 함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연산현 산천조에, 兜率山[在縣 東十五里 有古城基] 라 하여 두솔산에 伊里城있다고 전하는데, 이리성은 이례성과 음이 유사하여 이곳이 이례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64) 七重城 : 현재의 임진강 남쪽의 경기도 파주시 積城面 감악산 주변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칠중성 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었으나 진흥왕대에 신라가 탈취하였다. 그러나 무열왕 7년(660) 11월에 고 구려에게 빼앗겼다가 문무왕 7년(767)에 신라가 재차 이를 공취하였다. 그 후 나당전쟁의 와중에 서 동왕 15년(675) 2월에 당의 劉仁軌에게 일시 빼앗겼으나, 그 해 9월 당나라 군사와의 買肖城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다시 이를 회복하여 그 곳에서 唐兵을 몰아내었다. 신라 中代 이후 小祀 중에 하나인 鉗岳(七重城) 이 바로 이곳이며,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1 積城縣 祀廟條에 신라에 서 당나라 장수 薛仁貴를 紺岳山神으로 삼았다는 전승이 실려 있다. 65) 匹夫 : 필부는 王京 沙梁部 사람으로 아찬 尊臺의 아들이다. 그는 무열왕 7년(660) 10월에 고구 려군이 칠중성을 포위하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20여일 동안 힘써 싸우다가 죽어 급찬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한편 신라본기의 본문에서 그를 軍主라 하였으나, 군주는 州의 장관이므로 필부를 군주라 한 것은 잘못이다. 본서 권47 열전 匹夫傳에서는 그를 縣令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서 권47 열전 匹夫傳 참조. 66) 鷄灘 : 문헌상으로 그 위치를 추정하기 어려우나, 大東輿地圖 에 의하면 계룡산에서 흘러나와 鎭岑의 서남쪽으로 흘러가는 작은 하천을 灘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현재의 대전광역시 유 성구 남단(舊 충남 대덕군 진잠면) 서남쪽의 하천 이름이 아닌가 한다. 67) 王興寺岑城 : 이 성은 부여군 규암면 신리의 울성산성에 비정된다. 왕흥사지 배후 상정에 축조된 소규모의 테뫼식 산성이다. 토축으로 쌓은 이 산성의 둘레는 약 350m이다. 이 성은 초기 부흥군 의 주둔지였다가 신라에 공격을 받아 함락된 성이다. 68)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였는데 :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 따르면, 이때 무열왕은 김유신에게 大 角干이라는 非常位 주었다고 한다. 69) 계금졸( 衿卒) : 신라 중앙군제의 하나인 계금당( 衿幢)에 속한 군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부 대의 휘장에 그물처럼 무늬를 새긴 부대로 보인다(李仁哲,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350쪽). 군관은 隊大監(領騎兵)-弟監-監舍知-少監(領騎兵)-火尺(領騎兵)과 三千幢主-三千監으로 이루 어졌다. 이 군관들은 주로 기병을 거느리고 있어서 기병중심의 부대라고 할 수 있다. 태종 무열왕 원년(654)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본 계금당의 군관에는 본서 권5 태종 무열왕 7년(660)조에 보이 는 계금졸( 衿卒)이 보이지 않는다. 70) 軍師 : 신라 군제의 하나인 軍師幢의 하급무관직이다. 사료상에 나타나는 군사로는 여기서의 豆 迭 외에도 문무왕대에 軍師 述川, 南韓山人 北渠, 斧壤人 仇杞, 假軍師 比列忽人 世活 등이 있다. 그리고 신라 하대의 금석문인`菁州蓮池寺鐘銘a에도 寶淸 軍師와 龍年 軍師가 보인다. 이들 軍師 는 7세기 초에 설치된 軍師幢의 지휘관인 軍師幢主 아래에서 자기 출신의 촌락민으로 조직된 부 대를 통솔하는 하급무관직이라 하겠다(朱甫敦, 1988, 新羅 中古期의 郡司와 村主, 韓國古代史 硏究 1, 51 52쪽). 한편 軍師는 지방의 유력자로서 지방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직책 혹 은 村主가 戰時에 군단을 편성하여 참전할 때 가지는 임시직이라는 견해도 있다(木村誠, 1976, 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17 20쪽). 71) 高干 : 신라 外位의 제3관등으로, 그 지위는 京位의 제9관등인 級 에 해당한다. 이 고간은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라 한 기사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 무왕 8년(668)조의 論功行賞 기록에 假軍師比列忽世活 平壤少城戰 功第一 授位高干 이라 한 기 사에 보인다. 72) 自簡 : 의자왕대 달솔의 관등을 가지고 있던 백제인으로, 이때 무열왕으로부터 일길찬의 관등을 받은 후 문무왕 원년(661) 7월에는 下州 총관이 되어 백제유민들과의 甕山城 전투에 참여하였다. 73) 一吉 : 신라 제17관등 중 제7관등. 본서 권38 기사의 세주에는 일길찬의 다른 표기로 乙吉干 이 나온다. 한편`迎日冷水里新羅碑a에는 壹干支로,`蔚珍鳳坪新羅碑a에는 一吉干支로,`蔚州川 前里書石 原銘a에는 壹吉干支로,`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에는 一吉干으로, 梁書 권54 열전 신 라전에는 壹古(旱)支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乙吉干으로 나온다. 이 一吉 =一吉干支는 통일기에 와서 外位가 경위에 흡수될 때 외위의 最高位인 嶽干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었다. 74) 大奈麻 : 17관등 중의 10번째 관등이다. 大奈(乃)末 혹은 韓奈麻라고도 하였다. 대나마는 5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重大奈麻에서 9重大奈麻까지의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155 308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을 맡게 하였다. 였으며, 309 文忠82)을 上州將軍83)으로 삼고 아찬 眞王84)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義服85)을 下州將軍86)으로, 무홀(武 )과 旭川을 南川大監87)으로, 文品을 誓幢將軍88)으로, 8년(661)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다.75) [이에] 왕이 伊 76) 大幢將軍 으로 삼고 77) 78) 文王, 大阿 79) 80) 良圖, 阿 81) 品日을 忠常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 奈 의 현재 음은 내 와 나 가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重母音이 없었으므로 나 로 읽는 것이 당 시의 발음과 가깝다고 하겠다. 한편`蔚珍鳳坪新羅碑a에는 太奈麻로,`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a및`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a에는 大奈末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 전에는 大奈摩干으로, 聖德王 5년(706)에 조성된`皇福寺金銅舍利函記a에는 韓奈麻로, 일본서 기 권28 천무기 2년조와 10조에는 韓奈末 大那麻로,`新羅白紙墨書華嚴經寫經a에는 韓奈麻로 표기되어 있다. 이 大奈麻는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奈麻에서 분화 격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런데`皇福寺金銅舍利函記a에 太韓奈麻 阿摸 라 하여 太韓奈麻=太大奈麻가 보이고 있다. 이는 대나마가 신라 하대에 태대나마로까지 분화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5) 사비성을 공격해 왔다 : 백제의 왕족 福信과 승려 道琛이 백제 부흥군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탈환 하고자 포위 공격한 것을 말한다. 이때 당나라에서는 劉仁軌를 檢校帶方州刺史로 기용하여 王 文度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병을 일으켜 사비성을 구원케 하였다. 76) 大幢將軍 : 신라 6停 군단의 하나인 大幢을 지휘하는 최고 군관직. 대당은 國都에 배치된 중심 군 단인데, 이를 맡은 장군은 4인이었고 그 관등은 진골 上堂에서 上臣까지였다. 大幢은 신라 왕도 에 배치된 왕도 수비의 핵심군단인데, 진흥왕 5년(554)에 설치하였다. 幢은 원래 깃발을 의미하 는데, 여기서는 군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외에 신라에서 幢은 毛의 의미로 사용 되기도 하고( 三國遺事 권4 義解 5 元曉不羈條의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참 조), 官名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본서 권39 職官 中의 古官家典 幢[一云稽知] 참조). 대당이 배 치된 곳에 대해서는 王都 부근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327 쪽), 왕경 주위의 6畿停에 배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쪽), 6畿停에는 京餘甲幢을 비롯한 法幢軍團이 배치되고 행군시에는 여기에 배치되었던 병력이 대당의 기간병력으로 동원된 것으로 보는 견해(李仁哲,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일지사, 쪽) 등이 있다(무관조의 23軍號項 참조). 한편 북한본에서는 본문의 掌大幢 을 관직명 으로 보고 있는데(고전연구실, 1959, 삼국사기 하, 과학원출판사, 268쪽) 이는 대당을 관장하 는 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77) 잡찬( ) : 신라 17관등 중의 3번째 관등인데, 干 判 蘇判이라고도 하였다. 蘇判은`聖住 寺朗慧和尙塔碑a에도 武州都督 蘇判 鎰 이라 하여 보인다. 한편 梁書 권54 열전 신라전에는 齊旱支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迎干으로 나온다. 迎은 의 誤記가 아닐까 한다. 78) 文王 : 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아들로 文明夫人 소생이다. 문왕은 무열왕 3년에 이찬으로서 재차 입당하였고 동왕 5년(658)에 中侍에 임명되었으며 삼국 통일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문무 왕 5년(665) 2월에 죽었다. 문왕의 이름을 舊唐書 권199 신라전에서는 文正, 三國史節要 와 東國通鑑 에서는 文汪 으로 표기하였다. 79) 大阿 : 신라 17관등 중의 5번째 관등으로 大阿干支 大阿干 大閼粲, 韓粲이라고도 한다. 대아 찬 이상의 관등은 진골만이 가질 수 있었고, 대아찬 이상의 服色은 자주색이었다. 대아찬의 다른 표기로는`蔚珍鳳坪新羅碑a와`丹陽新羅赤城碑a에는 大阿干支로,`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a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a및`上元二年銘 川前里書石題銘a에는 大阿干으로, 隋書 권81 신라 전에는 大阿尺干으로,`聖住寺朗慧和尙塔碑a와`鳳巖寺智證大師塔碑a에는 韓粲으로 나온다. 大 阿干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阿干에서 분화 격상된 것으로 생각된다. 80) 良圖 : 무열왕 문무왕대의 진골귀족으로, 문장가로서 유명하였고 6차례 遣唐使로 입당하여 당 시 김인문과 함께 신라의 對唐外交를 주도하였다. 또한 그는 무열왕 말년의 백제정벌 및 사비성 구원 때 대아찬으로서 장군이 되어 참여하였고, 문무왕 2년(662)에는 김유신 김인문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여 당나라의 소정방군에 전달하였다. 나당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문무 왕 9년에 謝罪使 金欽純과 함께 파진찬으로서 당나라에 갔다가 억류되어 그 곳에서 獄死하였다. 한편 三國遺事 권5 神呪篇 密本催邪條에, 양도가 어렸을 때 병에 걸린 것을 密本法師가 法力으 로 치유해 주었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81) 阿 : 신라 17관등 중의 6번째 관등으로 阿干支 阿干 阿尺干 閼粲이라고도 하였다. 이 관등 은 6두품이 승진할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重阿 에서 4重阿 까지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찬은 阿干支-阿干-阿 -阿干의 순서로 시대에 따라 표기가 변천되었다(權悳永, 1991, 新羅官等 阿 奈麻에 대한 考察, 國史館論叢 21, 36 49쪽). 82) 文忠 : 무열왕 2년(655)에 파진찬으로서 중시에 임명되었다가 동왕 5년(658) 정월에 이찬으로 승 진하였으며 동왕 8년(661) 2월에는 잡찬으로서 上州將軍이 되어 사비성 구원길에 나선 적이 있 다. 그리고 그는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각간으로서 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군에 참 여하였고, 동왕 10년(670) 7월에는 백제 故地를 재점령하는데 참가하였다. 83) 上州將軍 : 신라 6停 군단의 하나인 上州停을 지휘하는 최고군관직이다. 上州停은 지금의 경북 상주시에 있던 군단인데, 장군은 4명이 배속되어 있었고 그들은 관등이 진골 上堂에서 上臣까지 인 자로 임명하였다. 上州停은 상주의 州治에 두어진 부대로 오늘날 경북 尙州市이다. 상주정이 설치된 시기는 진흥왕 13년(552)년이었다. 84) 眞王 : 무열왕 8년(661) 2월에 아찬 관등이었을 때 上州 장군 文忠의 보좌관으로서 사비성 구원 에 나섰으며, 문무왕 11년(671)에는 所夫里州 도독이 되었다. 85) 義服 : 義福 또는 宜福과 동일인으로, 무열왕 8년(661)에 아찬으로서 下州將軍이 되어 백제 부흥 군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을 때 사비성을 구원한 적이 있었다. 문무왕 원년(661)에 上州 총관이 되

156 310 義光89)을 郞幢將軍90)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 품일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豆良尹城91)<*尹을 또 311 는 伊로도 썼다.>남쪽에서 군영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진영이 정돈되지 못 한 것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생각지도 않게 치니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古沙比城92)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 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는데, 大幢과 었고, 동 8년(668)에는 파진찬으로서 誓幢將軍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이른바 立功 軍將 으로서 당나라에 갔던 적이 있으며, 돌아와서는 上將軍이 되어 石門 帶方 방면에서 당나라 군사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86) 下州將軍 : 신라 6停 군단의 하나인 下州停을 지휘하는 최고군관직이다. 下州停은 처음에 현재의 경남 창녕에 있었으나 무열왕 8년 당시에는 현재의 경북 경산시에 있었다가, 신문왕 5년(685)에 完山停으로 바뀌었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6년(555)조에 比斯伐에 完山州를 두었다고 되 어 있다. 그러나 본서 권34 지리 1 良州 火王郡조에는 진흥왕 16년에 州를 두고 이름을 下州라고 하였다고 하여 州의 명칭이 다르다. 그런데 진흥왕 22년(561)에 만들어진`창녕신라진흥왕척경 비a에 比子伐軍主 比子伐停助人 下州行使大等 등이 보이고 있어 진흥왕 16년에 두어진 州의 명칭은 하주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주정은 하주의 주치에 둔 정이다.`창녕신라진흥 왕척경비a에 比子伐停으로 나오는 것은 비자벌이 하주의 治所이기 때문에 치소의 명칭으로 停名 을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87) 南川大監 : 신라 南川停을 지휘하는 고급군관직으로 남천정은 현재의 경기도 利川市에 있었다. 남천정에는 隊大監 1인이 있었는데, 그는 騎兵을 영솔하였으며 그 관등은 나마에서 아찬까지였 다. 남천정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광역주정과 주치정을 구분하는 견해에서는 廣域州停은 新州 停(진흥 14) 南川停(무열 8) 漢山停(문무 4)으로, 州治停은 漢城停(진흥 14) 北漢山停(진 흥 18) 南川停(진흥 29) 北漢山停(진평 26) 南川停(무열 8) 漢山停(문무 4)으로 변화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일조각, 쪽). 88) 誓幢將軍 : 신라 9誓幢 가운데 하나인 綠衿誓幢의 최고군관직. 본서 권40 잡지 직관(下)에 의하 면, 서당은 진평왕 5년(583)에 처음 설치되었고 동왕 35년(613)에 녹금서당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나, 문무왕 8년(668)까지 서당의 이름이 나타난다. 녹금서당에는 2명의 장군이 배속되어 있었 다. 신라의 군단 명칭. 진평왕 5년(583)에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진평왕 35년(613)에 종래의 誓 幢을 綠衿誓幢으로 개칭하였다. 89) 義光 : 무열왕 8년(661) 2월에 郞幢 장군이 되었고, 같은해인 문무왕 원년 7월에 郞幢 총관이 되 었다고 한다. 90) 郞幢將軍 : 신라 9서당 중 紫衿誓幢의 전신인 郞幢을 지휘하는 최고군관직이다. 낭당은 진평왕 47년(625)에 설치되었으며, 문무왕 17년(677)에 紫衿誓幢으로 개편되었다. 자금서당에는 2명의 장군이 배속되어 있었다. 91) 豆良尹城 : 豆良伊城 豆陵尹城 豆串城 尹城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의 충남 청양군 定山面 지 역이다. 본래는 백제의 悅己縣이었다가 뒤에 熊州 부여군 悅城縣이 되었다. 본서 권39 잡지 지리 4 百濟郡縣名條에 悅己縣[一云豆陵尹城 一云豆串城 一云尹城] 이라 하여 尹城 豆串城과 같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량윤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군 定山面의 계봉산성에 비정하 誓幢이 먼저 가고 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다. 賓骨壤93)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上州와 郞幢은 角山94)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는 견해가 있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38쪽 ; 盧道陽, 1980, 앞의 글, 16 19쪽). 계봉산 성은 표고 210m인 산정에 테뫼식의 석축산선으로 성의 둘레는 560m이다. 이와는 달리 두릉과 주류의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도양, 1980, 앞의 글, 13 쪽). 그러나 663년 나당연합군이 최후로 주류성을 공격할 때 주류성과 두릉윤성이 모두 나오므로 별개의 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밖에 부안의 도롱이산성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앞의 책, 74~75쪽)와 대전광역시 儒城산성 방면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 48 49쪽 ; 池憲 英, 1972, 앞의 글, 18 28쪽), 충남 금산군 鎭岑面 부근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29쪽) 등이 있다. 92) 古沙比城 : 古沙城 또는 古沙夫里城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의 전북 정읍시 古阜面이다. 신라 全 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백제 때 지명. 周書 권49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의 하나인 中方 古沙城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古沙夫里 또는 古沙夫村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州治인 平倭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자치통감 권200 당기 16 용삭 원년조에는 古泗로 나오는데, 이를 정읍시 영원면 금사동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전영래, 1995, 우금(주류)산성 관련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11쪽). 93) 賓骨壤 : 현재의 전북 태인군 옹동면 지역이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3) 全州 大山郡條에 斌城縣 本百濟賓屈縣 景德王改名 今仁義縣 이라 하여 백제때 빈굴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때 빈성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의현이었다. 이곳을 전북 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의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전영래, 1997, 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신아출판사, 81~82쪽). 94) 角山 : 현재의 전북 정읍시 부근의 지명인 듯하나 구체적인 위치는 미상이다. 본서 권37 잡지 지 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백제측 지명으로서 角山城이 있고,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6년 2월 조에 角山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각산성을 ①진주로 보는 견해(김종권, 1963, 앞의 책, 442 쪽), ②부여의 청마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1982, 백제 사비도성 연구, 백제연구 13, 36~39쪽), ③임실군 관촌면 오원천의 대리산성 배뫼산성 방현리산성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신아출판사, 119쪽), ④전북 정읍시 內藏面 葛峴으로 보는 견해

157 들어가 2천 명을 목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金純95) 眞欽96) 抛車100)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니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城主 大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加尸兮津97)에 이르러서 舍101) 冬陀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군대가 물러나 加召川98)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 하고, 또 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 움에서 패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이 있게 하였다. 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 마소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弩砲102)를 설치하여 막았 5월 9일<*또는 11일이라고도 하였다.>에 고구려 장군 惱音信이 말갈 장군 生偕와 함께 다. 이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 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 군사를 합하여 述川城99)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으로 옮겨가 공격하는데, 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 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 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103)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井上秀雄 譯註, 1983,, 382쪽) 등이 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8년(661) 조에 백제부흥군과 신라군이 빈골양(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산성)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그 인근에 있는 각산은 정읍시 부근으로 보인다. 95) 金純 : 金純이 당시 파진찬이었던 竹旨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고,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中) 龍 朔 원년(661) 봄조에 眞欽 天存 竹旨 등의 앞에 이찬 欽純이 나와 있는 점 등으로 보아, 金純은 欽純의 오기로 보인다. 한편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이후 백제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 가운데 신라 장수 金欽이 보이는데, 김흠 역시 김흠순과 동일인이다. 欽純은 欽春이라고도 했는 데, 그는 金庾信의 동생이고 金令胤의 조부이다. 김흠순은 진평왕 때 화랑으로서 인망이 있었으 며, 무열왕 7년(660)에는 대장군 김유신을 따라 장군으로서 백제 정벌군에 참가하여 황산벌 전투 에서 아들 盤屈을 잃는 격전 끝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문무왕 초년에는 백제의 나머지 군사 를 토벌하여 內斯只城 居列城 居勿城 등을 함락시켰으며, 동왕 8년(668) 6월에는 각간으로서 대당 총관이 되어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그는 당나라에 謝罪使로 파 견되었다가 돌아왔다. 96) 眞欽 :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中)의 기사로 보아 무열왕 8년(661) 당시 眞欽의 관등은 이찬이 었다. 문무왕 원년 7월에 下州摠管이 되었으나, 동왕 2년(662) 8월에 南川州摠管으로 있으면서 나라일에 태만하다고 하여 처형당하였다. 97) 加尸兮津 :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군 牛谷面 桃津里 나루로 비정된다. 신라 康州 高靈郡 新復縣(고 령군 우곡면)의 옛 지명. 이 기사 이외에 본서 권41 金庾信傳 上에도 加兮城 및 加兮津이 나오는 데, 모두 신라의 進軍路와 관련되는 기사이므로, 이곳이 군사적 요지임을 알 수 있다. 日本書紀 권19 欽明 5년(544) 3월조에도 신라가 가야의 荷山을 치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荷山은 곧 高靈郡 牛谷面 浦洞里 소재의 나즈막한 산인 하미 에 비정되어, 加尸兮津 또는 加兮津은 이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서 권21 寶臧王 4년 5월조의 加尸城 및 권37 有名未詳地分의 加尸城과는 다 른 곳이다. 98) 加召川 : 현재의 경남 거창군 加祚面의 加川으로 비정된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 康州 居昌郡 條에 咸陰縣本加召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라 하였다. 99) 述川城 :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 興川面으로 비정된다. 백제의 온조왕 40년에 말갈이 술천성을 쳐 들어 왔다 하고, 초고왕 40년에 말갈이 勁騎로 述川까지 쳐들어 온 적이 있었다. 신라 漢州 川 왕이 동타천을 칭찬하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로 올려주었다. 押督州를 大耶에 옮기고104) 아찬 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 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었고, 金馬郡105)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步가 郡(여주군 흥천면)의 고구려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省知買 또는 首知買라고도 나온다. 100) 抛車 : 돌을 날려 적을 공격하는데 쓰이던 무기로 霹靂車라고도 하였다. 新唐書 권220 고려전 에 의하면,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입시에 당의 李勣이 抛車로써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였는 데, 큰 돌이 300보나 날아갔다고 한다. 101) 大舍 : 신라 17관등 중의 12번째 관등. 大舍帝 大舍第 韓舍라고도 하였다. 이 관등은 4두품이 승진할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대사 이하의 복색은 黃色이었다. 한편`永川菁堤碑丙辰銘a에는 大舍第로,`蔚州川前里書石 原銘a에는 大舍帝智로,`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 `磨雲嶺新羅眞興 王巡狩碑a및`南山新城碑a에는 大舍로, 聖德王 5년(706)에 조성된`皇福寺金銅舍利函記a에는 韓舍로 표기되어 있다. 이 대사는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舍知(小舍)에서 분화 격상된 것으로 생각되며, 4두품 출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었다. 102) 弩砲 : 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연속해서 쏠 수 있도록 만든 큰 활의 일종이다. 103) 갑자기 큰 별이 벼락이 쳤으므로 :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 따르면, 유신은 고구려 군이 北漢山城을 포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人力이 이미 다하였으니 蔭助를 빌어야 하겠다. 하고 佛寺에 나가 단을 설치하고 기도하였더니, 마침 天變이 있자 모두 말하기를 지극한 정성이 하 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 김유신 이 星浮山에 단을 쌓고 神術을 닦아 큰 항아리만한 광채나는 물건을 북쪽으로 날려보내 적을 분 쇄했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다. 104) 押督州를 大耶에 옮기고 : 선덕왕 11년(642)에 대야성이 함락된 후 신라는 낙동강 서쪽의 땅을 백제에게 빼앗겼으나, 백제 정벌 이후 그 땅을 우선 회복하고 이때 大耶州를 다시 설치한 것이다. 105) 金馬郡 : 현재의 전북 익산시 金馬面 지역이다.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고려

158 되었다.106) 왕이 죽었다. 시호를 武烈이라 하고, 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107) 廟號를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라 하였다. 대왕이 우선 사람을 [백제의 남은 적들에게] 보내 타 올려 太宗108)이라 하였다. 고종이 [무열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 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하였다. 9월 19일에 대왕이 熊峴停112)에 나아가 여러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놓고 몸소 가서 훈계 하였다. 25일에 군사를 내보내어 옹산성을 에워쌌다. 권6 新羅本紀 6 文武王 上 즉위년(660) 顯慶 5년(660)에 태종이 당나라 장수 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 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원년(661) 8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始飴谷停109)에 이르러 머물렀다. 사자가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베어 죽이고 드디어 항복시켰다. 전 공을 논하여, 각간과 이찬으로서 총관인 사람에게는 검을 주고,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 로서 총관인 사람에게는 창(戟)113)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등 한 등급씩을 올려 주 었다. 熊峴城114)을 쌓았다. 와서110) 아뢰기를 백제의 남은 적들이 甕山城111)에 웅거하여 길을 막고 있으므로 앞으로 가 全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충혜왕이 益州로 높였으며, 조선 태종이 益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106) 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었고 다섯 步가 되었다 : 이는 변이 현상 중에 물의 변색을 나타 낸 것으로 무열왕의 죽음을 예시하는 조짐으로 여겨진다. 107) 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哀公寺 동쪽에 장사 지내고 碑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서악동 仙桃山의 동남쪽 계곡 능남부락에 무열 왕릉이 있다. 무열왕릉의 내부구조는 횡혈식석실분일 가능성이 많으며, 봉토의 주위에 護石을 돌리고 비석을 세웠으나, 지금 비석은 없어지고 龜部와 이수만 남아 있다. 신라 왕릉에 비를 세 운 것은 당의 영향으로서, 무열왕릉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金元龍, 1984, 古墳文化, 歷史都 市 慶州, 열화당, 269쪽). 108) 太宗 : 무열왕 김춘추의 廟號로,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신문왕 때에 당 고종이 太宗이라는 이름은 자기 부친의 廟號이므로 이를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신라왕이 국서 를 보내어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훌륭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 이라 봉한 것이다. 라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109) 시이곡정(始飴谷停) :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는 661년에 문무왕이 머물렀던 곳을 南川 停이라 하였으므로, 始飴谷停을 南川停 곧 현재의 경기도 利川市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시이곡정을 현재의 경북 구미시 仁義洞(舊 漆谷郡 仁同面)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1980, 1, 176쪽). 신라는 진흥왕 29년(568)에 신주를 혁파하고 南川州를 설치 하였다. 110) 사자가 와서 : 원문에서는 使來告曰 이라 하여 使 자 앞에 두 글자가 결락되어 있다. 그런 데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는 有司報曰 로 되어 있고, 三國史節要 에는 時有告者曰 로 되어 있어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111) 甕山城 : 이 성은 이때에 우술성과 함께 신라군에게 함락된 성이기 때문에 우술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비정된다. 옹산성의 위치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尼山縣 성곽조에 의거하 여 魯山城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50, 앞의 글, 128~135쪽)와 현재의 대전광역시 회덕면 鷄足 山城이나(심정보, 1983, 앞의 글, 166~167쪽) 회덕산성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2003, 앞의 책, 202쪽)도 있다. 그러나 계족산성에서 雨述 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옹산성이 아니다.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中)에는 瓮山城이라 하였다. 661년 7월 17일에 문무 왕이 몸소 고구려 원정길에 오르면 대장군 김유신을 비롯한 24명의 장군으로 구성된 대군단을 편성하여 8월에 시이곡정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전위대의 사자가 와서 옹산성에 적이 웅거하고 있어서 진격하는 것이 불가하며 또한 웅진부성이 고립무원에 빠져 위태로운 사정을 알리게 되었 다. 따라서 옹산성은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옹 산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웅진성과 평양성으로 군량을 운송하는 웅진도를 개통할 수 있게 되었다. 112) 熊峴停 : 현재의 대전광역시 大德區 지역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91쪽). 113) 창(戟) : 끝이 좌우로 갈라진 창. 극(戟 ; 갈래창)은 矛 戈와 함께 고전적인 창 종류 중에 하나이 다. 극은 矛와 戈를 합쳐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戈는 남북조 시대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 지만, 戟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사용한 무기이다. 삼국지에도 나오는 유명한 방천화극은 戟의 한 종류이지만, 전형적인 극과는 다소 다른 새로운 형식의 극이라고 할 수 있다. 矛와 戈는 고대 한 국에서 많이 사용된데 반하여 戟은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B.C.2~3세 기로 추정되는 평양 석암리와 황해도 황주 순천리에서 각 1점식이 출토된 바 있을 뿐이다. 114) 熊峴城 : 대전 방면에서 웅진으로 연결되는 요충에 설치한 성으로 보이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59 316 상주 총관 품일이 一牟山郡115) 태수116) 大幢과 沙尸山郡117) 태수 哲川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雨述城118)을 쳐서 1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백제의 達率 助服과 恩率 波伽가 무 119) 리와 함께 모의하여 항복하였으므로 조복에게 級 의 관등을 주고 古 耶郡 태수로 삼 317 았으며, 파가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고 아울러 토지와 집 옷 등을 내려주었다.120) 2년(662) 2월 (중략) 耽羅國121) 우두머리 佐平 徒冬音律<*또는 津으로도 썼다.>이 항복해 왔다. 탐라는 武德122) 이래로 백제에 신속해 있었기 때문에 좌평을 관직 호칭으로 삼았는 데, 이때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3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해당 관청에 명 115) 一牟山郡 : 현재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으로 비정되는데, 경덕왕대에 燕山郡으로 개명되었다. 116) 태수 : 각 郡의 장관직. 관등이 舍知에서 重阿 까지인 관등 소지자로 임명하였다. 大와 太는 서 로 통하는 글자로 大守 로도 표기하였다. 郡은 본서 권4 신라본기 智證麻立干 6년조에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다. 장관의 명칭은 무엇인지 명기가 없지만`昌寧眞興王拓境碑a의 軍主幢主道使 라는 명문에 미루어 볼 때 처음에는 幢主였을 가능성이 크며(李鐘旭, 1974, 南山新城碑를 통해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a, 歷史學報 64), 통일 이후 태수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금석문에서 郡이 보이는 것은`창녕진 흥왕척경비a에 于抽悉直河西阿郡 이 가장 빠르며,`南山新城碑a제1비 제2비 제9비와`明活 山城作城碑a에도 郡이 보인다. 117) 沙尸山郡 : 본서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474)조에 沙尸城 축성 기사가 나오고, 본 기사 에서는 沙尸山郡太守로 나오는데, 三國史節要 (권9)에서는 尸 를 戶 로 표기하였다. 이를 백 제의 沙尸良縣으로 보아 현재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신라 소지마립간때 에 이곳이 신라의 영유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성립되기 어렵다. 본 기사로 보아 신라군이 우술성 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청원 문의로 비정되는 일모산군 태수가 참전하고 있 는 것으로 볼 때 인근의 옥천지역으로 추정된다. 118) 雨述城 : 현재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1동의 계족산성으로 비정되는데, 경덕왕대에 比豊郡으 로 고려시대에는 회덕군으로 개칭되었다. 최근의 계족산성발굴조사에서 雨述 등의 명문이 새 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술성임을 알게 되었다(충남대박물관 대전광역시, 1998, 계족 산성 발굴조사약보고, 8~9쪽). 계족산성은 표고 399m의 산정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으 로 둘레 약 1,037m.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2~6m,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9.9m 정도이다. 성의 동 서 남쪽에 나비 4m의 門址가 있고 길이 110, 너비 75, 높이 63 의 직사각형 우물터가 있는데, 그 아래로 약 1m의 수로가 있다. 상봉에 봉수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 으며, 건물지와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문의-청주를 거쳐 북상하는 진로를 감시할 수 있 으며 보은-옥천-회덕-유성-공주로 이르는 웅진도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산성 안에서는 단각고배를 비롯하여 장경호 단경소호 완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대체적 으로 6세기 중반에서 8세기대에 이르는 것으로 편년된다. 이와는 달리 대덕구 읍내동 수척골의 토축산성인 연축동산성을 우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심정보, 1991, 앞의 글, ~167쪽 ; 대전공업대학 향토문화연구소 대전직할시, 1992, 계족산성, 60~61쪽). 119) 古 耶郡 : 현재의 안동시 일대를 말한다.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군을 설치했다가 경덕 왕 16년(757)에 尙州 古昌郡으로 개칭하고, 직령현 일계현 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후삼 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8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內斯只城123)에 모여 나쁜 짓을 행하므로 欽純 등 19명의 장 군을 보내 [이를] 토벌하여 깨뜨렸다. 국시대에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지가 되었던 이 일대는 이 고을 호족인 金宣平 金幸 張吉 등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승리한 공으로 태조 23년(940)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후에 永嘉郡으로 강등되고, 성종 14년(995) 행정구역 개편 때 吉州로 승격되었다. 120) 조복에게 級 의 관등를 주고 토지와 집 옷 등을 내려주었다 : 본서 권40 잡지 직관(下) 外官條에 의하면, 文武王 13년에 옛 백제 관리들에게 백제의 관등에 준하여 신라의 京位를 주었 는데, 達率에게는 대나마를 주었고 恩率에게는 나마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助服과 波伽에게 파격적으로 급찬의 관등을 준 것은 통일 전쟁기에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우대조치로 생각된다. 조복과 파가의 전후 행적은 미상이다. 121) 耽羅國 : 현재의 濟州島로 耽牟羅國 涉羅國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처음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제에 臣屬하였으나 백제가 멸망하자 662년부터는 신라에 복속하였다. 신라말에 신라의 복속 에서 벗어나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고, 고려 중 기에 이르러서는 耽羅郡(縣)으로 재편되었다. 122) 武德 : 백제에는 武德王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의 무덕을 威德 의 誤記로 보기도 하고(이병도, 1977, 앞의 책, 92쪽), 혹은 唐의 武德 年間( )에 재위했던 백제왕으로 보기도 한다(井 上秀雄 譯註, 1980, 앞의 책, 198쪽). 그러나 본서 권26 백제본기에 의하면 탐라가 백제에 처음 으로 臣屬한 年代를 문주왕 2년(476)이라 하였으나,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년 12월조에는 武寧王 8년(508)에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와 통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武德은 武寧 의 잘못이 아닐까 한다. 123) 內斯只城 : 현재의 대전광역시 儒城區 월평동에 있는 유성산성에 비정된다. 내사지성은 奴斯只 城으로 불리우는데, 백제시대의 노사지현이 신라 경덕왕때에 유성현으로 개칭된 이래 현재까지 유성으로 불렀다. 이 산성은 표고 137.8m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돌린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둘 레는 710m이고 외벽의 높이는 4.3m, 상부 폭은 2.2m이다. 이 성은 서쪽으로 甲川에 임하고 경사가 급한 곳으로 대전-공주 간의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160 318 3년(663)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居列城124)을 쳐서 빼앗고, 700여 명 319 餘豊132)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郞將 劉仁願133)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의 머리를 베었다. 또 居勿城125)과 沙平城126)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또 德安城127)을 공격 하여 1,070명의 머리를 베었다. 여름 4월에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왕을 鷄林州大都督128)으로 삼았 다. 5월에 靈廟寺129)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福信130)과 승려 道琛131)이 옛 왕자 扶 124) 居列城 : 현재의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의 거열산성에 비정되는데, 居烈城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康州 居昌郡(거창군 거창읍)의 옛 지명. 居 라고도 한다. 거창 지역은 본래 가야의 居烈國 이었다가 신라 진흥왕 23년(562)을 전후하여 신라에게 병합되었고, 642년의 大耶城 전투 이후 백제에게 병합되었다. 문무왕 3년(663) 2월에 欽純과 天存이 백제의 居列城을 빼앗고, 同 5년 (665) 경에 신라가 이곳에 居列州를 설치하고 同 13년에는 居烈州 萬興寺山城을 쌓았으며, 신문 왕 5년(685)에 州治를 菁州로 옮기면서 居烈郡이 되었다. 경덕왕때 거창군으로 개칭되어 고려에 이어졌다. 125) 居勿城 :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7년조의 己汶 과 한원 에 인용된 括地志 의 基汶, 양직 공도 에 나타난 上己汶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남원이나(전영래, 1996, 앞의 책, 119쪽) 전북 장수군 蟠巖面 일대로 비정된다(井上秀雄 譯註, 1980, 앞의 책, 180쪽). 126) 沙平城 : 사평성은 居勿城과 德安城 가까이에 위치했음이 틀림없으므로 현재의 전북 임실군 신 평면으로 비정할 수 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123쪽).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熊州條에 나오는 新平縣 곧 현재의 충남 당진군 신평면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譯註, 1980, 앞 의 책, 180쪽)와 백제때의 삽평군으로 보아 현재의 순천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앞의 책, 119쪽)가 있으나 신라군의 진군 방향과 맞지 않아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127) 德安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충남 논산시 가 야곡면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당이 백제의 옛 땅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德安都督府가 있던 곳인데, 문무왕 3년(663) 당시에 이미 이 지역은 백제 부흥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 곳에 德安都督府를 설치 하였다고 하였다. 득안성은 본래 백제 德近支 또는 德近郡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德殷郡(충남 논산시 가야곡면)이 되었다. 128) 鷄林州大都督 : 鷄林 곧 신라 땅을 다스리는 대도독이라는 뜻이다. 도독은 중국의 魏代 이래 각 州의 군사 및 민사를 통할하던 관직인데, 총관이라고도 하였다. 唐代에는 이웃 나라를 정벌한 후 그곳에 都督府를 설치하고 기미주의 형태로 통치하였다. 도독부는 통치지역의 크기에 따라 大 中 下都督府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舊唐書 권199 신라전, 新唐書 권220 신라전, 唐會要 권95 신라전, 冊府元龜 권964 외신부 封冊 條 등에도 실려 있다. 129) 靈廟寺 : 현재의 경북 경주시 성건동에 있던 절로, 지금은 당시의 주춧돌 등 석재만이 남아 있 다. 선덕왕대의 승려 良志가 영묘사의 丈六三尊 天王像과 殿塔의 기와를 만들고 현판을 썼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영묘사는 신라왕실에서 중시되어 水災 또는 旱災가 있을 때 그 절 의 남쪽 靑淵에서 五星祭를 올렸으며, 靈廟寺成典이 따로 있어서 上堂 靑位 史 등의 관리를 두어 운영하였다. 영묘사에 대한 기사는 본서 제사지 직관지 및 신라본기 문무왕 성덕왕조 등 에 나타나며, 영묘사의 불상제작에 관련된 설화가 三國遺事 권4 義解篇 良志使錫과 塔像篇 靈 妙寺丈六條에 실려 있다. 130) 福信 : 백제 무왕의 조카나(본서 권27 무왕 28년) 또는 從子(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 ; 본서 권28 의자왕 20년)로 나오고 있으나, 무왕의 조카로서 의자왕과는 4촌간이 된다. 무왕 28년 (627)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장군의 직도 역임하였다. 日本書紀 권26 齊明 6년 9월조에서는 西部達率 鬼室福信 이라 하였고,`唐劉仁願紀功碑a에는 率鬼室福信 이라 하였 다. 그는 백제가 망하자 扶餘豊을 왕으로 세우고 도침 등과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霜 岑將軍으로 스스로 칭하고 백제 유민들을 모아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내분으로 그는 도침을 죽 이고 최고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여 부흥군을 통솔하다가 그 역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고 말았 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노중국, 1995, 百濟復興軍의 復興戰爭 硏究a, 歷史의 再照明, 한림과학원 및 2003, 백제부흥운동사연구, 일조각, 98~101쪽을 참조할 것. 본서 권28 주석 993)을 참조할 것. 131) 道琛 : 백제가 망한 후 복신과 함께 부흥군을 일으켜 지휘한 승려이다. 出自나 가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활동에서 미루어 볼 때 당시 승려를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 흥군이 강성할 때에는 領軍將軍을 칭하면서 부흥군의 최고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백 제가 멸망당하자 승군을 중심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복신과 함께 부흥군의 주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에 내분이 일어나 복신에게 주살되었다. 본서 권28 주석 995)를 참조할 것. 도 침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는 成周鐸, 1992, 百濟僧 道琛의 思想的 背景과 復興活動a, 湖西史 學 19 20합집을 참조할 것. 132) 扶餘豊 : 日本書紀 권23 및 권26에는 이름을 豊璋 이라 하였다. 부여풍에 관한 최초의 기사 는 일본서기 권23 舒明紀 3년조에는 百濟王義慈入王子豊璋爲質 라고 하여 부여풍이 의자왕 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의자왕은 무왕의 誤記라 보고 무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정효운, 1990, 7세기대의 한일관계의 연구 -백강구전에의 왜군파견을 중심으로-a, 고고역사학지 5 6합집, 151~154쪽 ; 김수태, 1992, 百濟 義慈王代의 太子冊封a, 百濟硏究 23, 147~151 쪽 ; 양기석, 1995, 백제 부여융묘지명에 대한 검토a, 국사관논총 62, 148쪽)가 있다. 반면 부여풍(풍장)을 동명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1994, 7세기 백제와 왜와의 관계a, 국 사관논총 52, 165쪽). 백제 무왕 23년(631)에 일본에 파견되어 있다가 백제 멸망 후 福信과 道 琛 등이 부흥운동을 꾀할 때 처자 및 숙부 忠勝 등과 함께 일본군 5천 명을 이끌고 귀국하여 왕

161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劉仁軌134)에게 檢校帶方州刺使135)를 겸작케 하여 이전의 도독 王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군사를 합하여 잠 文度136)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138) [당 황제가] 조칙으로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 右威衛將軍139) 孫仁師140)를 보내 군사 40만141)을 거느리고 德物島142)에 이르렀다가 웅진부 고 물러가 任存城137)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 이 되었다. 그러나 663년 白江에서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전세가 불리하자 고구 려로 망명하였다. 본서 권28 주석 998)을 참조할 것. 133) 劉仁願 : 660년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의 하나. 백제 멸망 후 백제 사비도성을 지키는 최고의 책임을 맡았다. 字는 士元이고, 조음(雕陰) 대빈(大斌) 사람이다. 그가 백제를 멸 망시킨 후 소정방을 대신하여 사비도성의 都護로서 당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그 후 웅진도독 부 체제로 개편되었을 때 웅진도독이 되어 다스리다가 663년에 귀국하였다. 664년 10월에 다시 웅진도독이 되었고, 665년 8월에 유인궤와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회맹하는 의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唐劉仁願紀功碑a가 부여의 扶蘇山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비는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劉仁願의 행적에 대해서 는 구당서 와 신당서 에 입전되어 있지 않지만,`唐劉仁願紀功碑a와 노중국, 2003, 백제부 흥운동사, 일조각, 63~64쪽을 참조할 것.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982)를 참조할 것. 134) 劉仁軌 : 생몰연대는 년으로 享年 84세이다. 중국 당나라 太宗~高宗代의 장군. 자는 正則으로 卞州 尉氏 사람이다.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후 檢校熊津都督으로 삼아 당군을 지휘하 게 되었다. 665년 8월에 유인원과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맹세를 하도록 하 고 귀국하였다. 668년에 그는 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이 되어 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 시킨 뒤 薛仁貴와 함께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에 주둔하여 고구려고토를 지배하였다. 이 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992)를 참조할 것. 135) 檢校帶方州刺使 :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남부지역에 帶方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는 204년경에 낙랑군의 남쪽에 설치한 대방군의 명칭을 차용한 것이다. 그 중심지는 전북 남원 혹은 장흥으로 비정된다. 당나라의 刺史는 州의 장관인데, 官品은 정4품하에서 종3품이었다. 136) 王文度 : 그의 행적을 담은 열전에 입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 다. 그는 당 고종 永徽연간(650~655)에 돌궐을 공격하였을 때 소정방의 공로를 시기하고 재물 을 약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르다가 귀환 후에 제명되고 말았다. 660년 8월 백제 부흥군의 공격 으로 사비부성이 곤경에 처해지자 당 고종은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에 파견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에 갔으나 곧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 에는 신라의 三年山城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서 권28 본 기사에서는 바다를 건너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있어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984)를 참조할 것. 137) 任存城 : 현재의 충남 禮山郡 大興面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에 걸쳐 있는 鳳首山城이다. 이 성 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2,426m로 고대 산성 중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봉수산성 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에 任存 存官 任存官 등이 새겨 진 명문 기와가 수습되어 이 성이 임존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군 충남개발연구원, 2000, 예산 임존성, 21~26쪽). 백제멸망 후 임존성은 복신 등이 최초로 거병한 곳이며, 후에 주류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부흥군의 북방 거점지역이 되었다. 663년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흑 치상지와 지수신 등이 주도한 3기 부흥군의 거점지역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1008)을 참조할 것. 138) 유인궤는 유인원과 군사를 합하여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 劉仁軌의 군사요청에 대하 여 당 조정에서는 그 곳에서 철수하여 신라에 들어가 신라의 도움을 받던지, 그것이 여의치 않으 면 당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실세를 만회하려는 유인궤는 당이 장차 한 반도를 장악함에 있어서 백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속 머물러 지켰다고 한다( 舊唐書 권84 및 新唐書 권108 劉仁軌傳 참조). 139) 右威衛將軍 : 隋代에 설치한 屯威將軍을 당의 龍朔 2년(662)에 개칭한 무관직으로 좌 우위위장 군이 있었다( 通典 권28 직관 10). 舊唐書 권199 백제전과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8년 조에는 손인사를 左威衛將軍 이라 하였으나 新唐書 권108 劉仁軌傳, 같은 책 권220 백제전, 資治通鑑 권200 龍朔 2년 7월조 등에는 본문에서처럼 右威衛將軍 이라 하였다. 140) 孫仁師 : 중국 唐나라 高宗代의 장군. 662년 백제 故地에 주둔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우고 있던 劉仁願을 돕기 위해 구원군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다. 웅진으로 파견될 당시 그의 직함은 좌위위장군이었다. 좌위위장군은 종3품의 장군직이어서 당시 유인원이나 유인궤보 다 관질이 높았다. 따라서 그는 웅진에 주둔한 당군의 최고사령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141) 군사 40만 : 舊唐書 권199 백제전, 新唐書 권220 백제전, 資治通鑑 권200 龍朔 2년 7월 조에는 당시 孫仁師가 이끌고 온 당나라 군사는 淄州 靑州 萊州 海州의 사람 7,000명이었다 고 한다. 142) 德物島 : 현재의 인천광역시 甕津郡에 속해 있는 德積島에 비정된다. 덕적군도는 소야도 문갑 도 굴업도와 같은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이곳 전승에 의하면 당군의 소정방은 덕적 도 남쪽 蘇耶島에 주둔하였으며, 소야도라는 섬이름은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김영관, 1999,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a, STRTEGY21, 한국 해양전략연구소, 168쪽 및 2007, 앞의 글, 240쪽).

162 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豆陵尹城143)<*陵을 또는 良으로도 썼다.>과 周留城144) 등 여러 간 김인문, 이찬 천존과 당나라 칙사 유인원이 백제 扶餘隆과 함께 웅진에서 맹약을 맺었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145) 왕자 忠勝과 忠志146) 등 다.150) 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遲受信147)만은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3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도독이 군사를 일으켜 쳐서 깨뜨렸다.151)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 148) 이켜 舌利停 <*舌을 또는 后로도 썼다.>에 왔다. 전공을 따져 상을 차등 있게 주고 죄수 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4년(664) 2월에 해당 관청에 명하여 여러 왕의 陵園에 백성 20호씩을 이주시켰다.149) 각 5년(665) 가을 8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就利山152)에서 맹 약을 맺었다. 일찍이 백제는 扶餘璋(무왕) 때부터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우리 영토를 자 주 침범하였으므로, 우리나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구원을 청한 것이 길에 이어졌다.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군대가 돌아가자 남은 무리들이 또 다시 반란 을 일으켰다. 왕은 鎭守使 유인원 유인궤 등과 함께 여러 해 동안 경략하여 점차 평정이 되었다. 당 고종이 부여융에게 조칙을 내려, 귀국하여 남은 무리를 무마하고 우리나라와 143) 豆陵尹城 : 豆良尹城 豆良伊城 豆串城 尹城이라고도 하였는데,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 (中)에서는 豆率城이라 하였다. 현재의 충남 청양군 定山面 계봉산성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今 西龍, 1934, 百濟史硏究, 38쪽 ; 盧道陽, 1980, 앞의 글, 16 19쪽).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 28의 주 1023)을 참조할 것. 144) 周留城 :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복신과 도침의 중심 거점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여러 견해가 제 기되어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 명칭에 대해서 는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 中에는 豆率城으로,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원년 3월조에는 疎留 城(ソルサシ)으로, 동 12월조에는 州柔(ツヌ)로 나온다.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산설 부 안설 연기설 홍성설 등이 대두되고 있다. 주류성은 부안 位金岩山城으로 추정되는데, 최근에 는 노중국(2003, 앞의 책, 195~196쪽)과 김영관(2005, 앞의 책, 181쪽) 등에 의해 점차 설득력 을 얻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96)을 참조할 것. 145)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 扶餘豊은 이때 고구려로 달아났다가 고구려 멸망시 당군에게 붙 잡혀 중국의 嶺南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資治通鑑 권201 總章 원년 10월). 146) 忠勝과 忠志 : 무왕의 아들로서 의자왕의 동생으로 볼 수 있다. 백제 멸망 전에 일본에 가 있었 는데, 백제가 망하자 부여풍과 함께 귀국하여 백제 부흥운동에 참여하였다. 忠志의 실체는 분명 하지 않으나, 왕자의 신분인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충승의 동생일 가능성이 크다.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僞王子 忠勝 忠志 로 되어 있다. 147) 遲受信 : 백제 부흥군 장군중의 한사람. 豊王을 도와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였으며, 풍왕이 주류성 에서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을 간 후 任存城을 근거로 하여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148) 舌利停 : 현재의 충남 서천군에 있는 靈鷲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94쪽). 149) 여러 왕의 陵園에 백성 20호씩을 이주시켰다 : 왕릉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하여 별도의 民戶를 지정한 守墓人制는 繼世思想과 祖上崇拜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대에 널리 시행되던 제도이 다(趙仁成, 1988, 廣開土王陵碑를 통해본 高句麗의 守墓制a, 韓國史市民講座 3, 쪽). 수묘인제는 우리나라에서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시행되고 있었다.`廣開土王陵碑a 에서 守墓人 烟戶 330호를 지정했다고 한 것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150) 각간 김인문 웅진에서 맹약을 맺었다 : 이것은 신라와 백제의 1차 盟約으로, 문무왕 11년에 유인원에게 보낸 문무왕의 답서에는 麟德 元年(665, 문무왕 5)에 熊嶺에서 壇을 쌓고 맹약을 맺 었다고 하여 연대와 장소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羅濟間의 1차 맹약은 당의 강압에 못이겨 맺은 것으로 실질적인 성과는 의심스럽다. 다음해에 문무왕이 직접 참석하여 부여융과 제2차 맹약을 맺었다. 151) 백제의 남은 적들이 군사를 일으켜 쳐서 깨뜨렸다 : 임존성이 함락되자 백제 유민들의 항거 는 일단 평정된 것으로 보인다. 손인사는 유인원과 함께 당으로 돌아가고 유인궤가 웅진부성에 남아 군사들을 통솔하여 진영을 지키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백제 유민들의 의한 항거가 계속되 었는데, 이것이 그 중 한 사례에 해당한다. 본서 권43 열전 金庾信傳(下)에 의하면, 이때 웅진도 독이 자기 소관의 병력으로 사비성의 반란군을 공격하였으나 여러 날 안개가 끼어 싸움의 성과 를 거둘 수 없었다. 김유신의 음밀한 계책에 의하여 마침내 그들을 토벌했다고 한다. 웅진부성의 군대만으로 백제 유민들의 항거를 진압할 수 없어서 신라군의 도움을 받아 토평하고 잇는 것으 로 보아 그만큼 백제 유민들의 저항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152) 就利山 : 취리산의 위치에 대하여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公州 고적조에 就利山在州北六里 라 하였으므로 현재의 충남 공주시 금강 북안의 우성면 연미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연 미산 정상에는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壇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취리산을 대전광역시 동구와 대덕구에 걸쳐 있는 질티고개[迭峴]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163 화친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르러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 진도독으로 삼아 자기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 옛 땅을 보전하게 하니, 신라에 고 내와 골짜기 신에게 제사지낸 후 그 피를 마셨다. 그 맹세문(盟文)153)은 다음과 같다. 의지하고 기대어 길이 우방으로 삼을 것이다. 각기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풀어버리고 지난날 백제의 앞 임금(의자왕)이 반역과 순종의 이치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웃나라 154) 화친을 맺고 각각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藩國으로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 사신 右威衛將軍 魯城縣公156) 유인원을 보내 친히 참석하여 권유하고 천자의 뜻을 선 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함과 포악함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겁탈하고 포하니, [두 나라는] 혼인을 약속하고 맹세를 거듭하며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처음 성을 도륙하여 거의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잡지 못 부터 끝까지 함께 친목해야 하고 재앙을 서로 나누고 어려움을 서로 도와 恩誼를 형제 하는 것을 딱하게 여기시고 죄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 처럼 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어기지 말 것이며, 이미 맹 좋게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그 지리의 험준함과 길이 먼 것을 믿고서 천자 세한 뒤에는 다함께 변함없이 절조를 지켜야 한다. 만약 맹세를 저바리고 뜻을 달리하 의 가르침을 오만하게 업신여겼다.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삼가 죄를 묻고 정벌을 단행 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밝으신 신이 굽어 살펴보시고 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나가는 곳마다 한 번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온갖 재앙을 내리셔서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져 후 궁궐을 늪으로 만들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후세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손이 없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금가루(金泥)로 쓴 증표(金書鐵券)157)를 종묘에 간직 뽑아 후손들에 가르침을 보였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배 해 두고 자손 만대에 감히 어기거나 범하거나 하지 말지어다. 신이시여, 이 말을 들으 반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것을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시고 제물을 받으시고 복을 내려 주소서! 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였고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였다. 것을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155) 함은, 옛 책에 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전 백제 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 이것은 유인궤가 지은 글이다. 피를 마신 다음 희생과 예물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그 글을 우리 종묘에 간직해 두었다. 이때에 인궤는 우리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네 나라의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 泰山의 제사에 참석하였다.158) 왕자 政明159) 153) 맹세문(盟文) : 맹세문은 舊唐書 권199 백제전, 天地瑞祥志 권20, 冊府元龜 권981 외신부 盟誓條 등에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天地瑞祥志 에 실려 있는 맹문이 가장 자세하고 원형에 가 깝다. 본서에 실려 있는 맹세문은 서문이 생략되고 본문에 누락이 있는 舊唐書 의 것을 따르고 있다. 154) 지난날 백제의 앞 임금(의자왕)이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였다 : 의자왕이 태자 때에는 부 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海東曾子 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왕 실 안에서 불화가 있어 화목하지 못하였다. 즉 日本書紀 권24 皇極 2년조에 의하면, 642년에 손아래 왕자의 아들 翹岐와 이복 형제 자매의 딸 4명, 내좌평 岐味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 였으며 만년에는 궁중 안에서 郡大夫人이 권세를 장악하여 많은 종실 귀족을 죽였다고 한다. 한 편 신라의 소지왕은 동왕 15년에 백제의 청혼에 응하여 이찬 比智의 딸을 백제에 시집보낸 일이 있었으므로, 백제는 신라와 인척관계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신라와 불화한 것이 곧 인척간에 화 목하지 못한 것이라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95쪽 ; 井上秀雄 譯註, 1980, 앞의 책, 200쪽) 이 문제와 직접 관련시키기는 어렵다. 155) 大司稼正卿 : 司稼는 당나라 9寺 가운데 하나인 司農寺를 662년에 바꾼 이름이고 正卿은 이 관 서의 장관인 卿을 역시 같은 해에 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670년에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 었다. 그리고 大 는 수식어로 보인다. 司農寺는 나라의 농업과 倉穀, 그리고 관리의 녹봉 지출 등을 관장하던 관청인데, 장관인 卿의 관품은 종3품상이었다. 156) 魯城縣公 : 唐代의 봉작으로는 國王 郡王 國公 郡公 開國郡公 縣公 開國侯 伯 子 등 9등급이 있었는데, 縣公은 6번째이다( 通典 권19 직관 1 封爵). 157) 금가루(金泥)로 쓴 증표(金書鐵券) : 漢나라 고조가 공신을 봉하는 데 사용한 符節로, 鐵券 혹은 金券이라고도 하였다. 기와 모양으로 되어 표면에는 이력과 공적 등을 새기고 안쪽에는 면죄 등 의 특권을 기록하였으며 글자는 모두 금으로 상감(象嵌)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양분하여 하나는 공신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황실에 보관하여 징표로 삼았다고 한다. 158) 인궤는 우리 사신과 泰山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 舊唐書 권84 및 新唐書 권108 劉仁軌 傳, 資治通鑑 권201 麟德 2년 8월조, 唐會要 권95 신라전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泰山에서의 封禪儀式은 666년 정월에 행하여졌는데, 이때 신라에서는 김인문이 유인궤와 함께 입당하여 의식에 참여하였고, 고구려에서는 태자 福男을 보내어 泰山의 제사에 참여시켰다. 159) 政明 :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의 이름이다. 신문왕은 신라의 제31대 왕으로 재위기 간은 년이다. 문무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政明이다. 신문왕은 원년에 일어난 金欽突 난

164 326 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6년(666) 여름 4월에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여 당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8년(668) [11월] 6일에 문무 관료를 거느리고 선조의 사당에 배알하고 다음과 같이 아뢰 었다. 삼가 조상들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게 죄를 묻고 원흉들을 처단하니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 시여 들으소서! 327 辜)161)를 입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생하는 사람들은 아직 새롭게 시 작할 은택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니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 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중략) 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10년(670) 봄 정월에 [당나라]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162) 良圖163)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결국은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 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儒敦164)을 웅진도독 부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이를 따르지 않았음으로, 司馬 軍165)을 보내 9년(669) 2월 21일에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침공하여 잠시도 편안 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은 들판에 그대로 쌓였고 몸과 머리는 서로 떨어져 먼 곳에 뒹굴게 되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해를 당함을 불쌍히 여겨 왕(千 乘)160)의 귀하신 몸을 생각지 않으시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황제를 보고 친히 군사를 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깊이 맺혔던 원수를 갚으며 백성들의 가냘픈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 다. [선왕께서]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 인이 평정을 이루시려던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었고 사방이 조용하고 편안해졌다.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 람들에게는 이미 모두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혼령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 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울어주던 은혜(泣 의 진압과 다음해의 國學 설치, 그리고 중앙 관부와 지방제도의 정비 및 五廟制의 제정 등을 통 하여 중대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萬波息笛條에 의하면 신문왕은 681 년 7월 7일에 즉위했다고 한다. 160) 왕(千乘) : 戰時에 戰車 1천 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신라왕을 의미한다. 전차 1대에는 甲士 3명, 步兵 72명, 車士 2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본문에서 천승의 몸으 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갔다는 것은 진덕왕 초에 김춘추가 아들 文王과 함께 입당한 사실을 말 한다. 그러나 당시 김춘추는 아직 千乘의 지위 곧 신라왕에 즉위하기 전이었다. 161)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울어주던 은혜(泣辜) : 說苑 의 禹出見罪人 下車問而泣之 라는 말에 연원한다. 162)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 :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에 수록된 문무왕의 答 薛仁貴書 의하면, 흠순은 이 해 7월에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재구획하라는 칙서를 가지고 돌아 왔다고 한다. 163) 良圖 : 무열왕 문무왕대의 진골귀족으로, 문장가로서 유명하였고 6차례 遣唐使로 입당하여 당 시 김인문과 함께 신라의 對唐外交를 주도하였다. 또한 그는 무열왕 말년의 백제 정벌 및 사비성 구원 때 대아찬으로서 장군이 되어 참여하였고, 문무왕 2년(662)에는 김유신 김인문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여 당나라의 소정방군에 전달하였다. 나당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문무 왕 9년에 謝罪使 金欽純과 함께 파진찬으로서 당나라에 갔다가 억류되어 그 곳에서 獄死하였다. 한편 三國遺事 권5 神呪篇 密本催邪條에 양도가 어렸을 때 병에 걸린 것을 密本法師가 法力으 로 치유해 주었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164) 儒敦 : 무열왕 7년에 사찬으로서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에 갔다가 문무왕 원년(661) 6월에 당 고 종의 칙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 후 동왕 10년(670) 7월에는 대아찬으로서 熊津都督府에 가 서 화친을 청하였다. 165) 司馬 軍 : 문무왕 10년에 신라에 억류되었다가 동왕 12년 9월에 兵船郞將 鉗耳大侯 등의 당나 라 병사들과 함께 풀려났다. 한편 日本書紀 권27 天智 4년(665) 9월조에 唐使 劉德高 등과 함 께 일본에 갔던 百濟 軍과 동일인이다. 그런데 2006년 중국 西安에서` 植進墓誌銘a이 새로 발견되면서 植의 생애와 활동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지석은 방형으로 가로 58.5cm, 세 로 58.5cm, 두께 13cm로 界線을 그어 구획하고 전문 18행, 1행 18자, 총 288자를 해서체로 음 각하였다. 이에 의하면 植은 옛 왕도 熊川(웅진) 출신으로 祖와 父가 무왕대에 좌평을 역임한 좌평급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웅진방령으로서 사비 도성을 떠나 북방성인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과 함께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후 그는 664년

165 328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軍을 붙잡아 두어 돌려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166) 중신 義官167) 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7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의 머 329 권17 新羅本紀 7 文武王 下 11년(671) 봄 정월에 이찬 禮元170)을 中侍171)로 삼았다.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幢主172) 夫果173)가 죽었다. 말갈 군사가 쳐들어와 舌口城174)을 포 리를 베었으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 의관 달관 흥 원 등은 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용서하여 관 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倉吉于 일(一)에게 각각 급찬의 관등을 주고 租를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12월에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취하고 그쪽으로 가려다가168)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眞珠를 보내169) 목을 베었다. 무렵에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웅진도독부의 백제계 관료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 다. 670년 7월에 신라에 들어가 정탐을 하다가 인질로 억류된 적이 있었고, 또한 671년 6월 신 라와 당군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때에도 웅진도독부의 사마 軍( 植)이 관여된 바 있었다. 672년 9월에는 신라 사신과 함께 당에 건너갔다가 죽은 시기는 58세인 672년 5월 25일이었고, 672년 11월 21일에 장안 서남쪽 高陽原(현재의 중국 서안시 장안현 郭杜鎭)에 묻히게 되었다. ` 植進묘지명a에 대한 내용 소개에 대해서는 이도학, 2007, 寔植進묘지명 을 통해 본 백 제 氏 가문a, 전통문화논총 5, 66~89쪽 ; 김영관, 2007, 백제유민 예식진 묘지 소개a, 신 라사학보 10, 365~380쪽을 참조할 것. 166) 문충 : 무열왕 2년(655)에 파진찬으로서 중시에 임명되었다가 동왕 5년(658) 정월에 이찬으로 승진하였으며 동왕 8년(661) 2월에는 잡찬으로서 上州將軍이 되어 사비성 구원길에 나선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각간으로서 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군 에 참여하였고, 동왕 10년(670) 7월에는 백제 故地를 재점령하는데 참가하였다. 167) 義官 : 원성왕의 曾祖父인 義寬과 동일인이다. 義官의 딸은 보덕왕 안승의 처가 되었다. 168)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취하고 그쪽으로 가려다가 : 원본에는 取百濟 國適彼 라 하여 가운데 6글자가 빠져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수세(藪世)가 백제의 땅 혹은 사람을 취한 후에 신라를 배반하려 한 듯하다. 169) 대아찬 眞珠를 보내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 8월조에 의하면, 大幢 총관 眞珠와 南川州 총관 眞欽이 병을 핑계로 나라일을 소홀히 한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8년 이 지난 문무왕 10년에 진주는 대아찬으로서 藪世를 제거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同名異人인지 혹은 본서 찬자의 두찬인지 알 수 없다. 170) 禮元 : 이를 문무왕의 아우인 愷元의 誤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基白, 1974, 新羅政治社會史 硏究, 일조각, 162쪽). 개원(愷元)은 태종 무열왕의 막내 아들로 文明夫人 소생이다. 개원은 문 무왕 7년(667) 7월에 대아찬으로서 장군이 되었고,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대당 총관이 되어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신문왕 3년(683) 5월 7일에는 이찬으로서 조카인 왕의 재혼 에 관여하였고, 효소왕 4년(695) 정월에 상대등이 되었다. 719년에 金志誠의 발원으로 조성된 甘山寺 彌勒菩薩像과 阿彌陀如來像의 銘文에도 國主大王 곧 성덕왕과 愷元의 이름이 보인다. 한 편 개원은 무열왕 2년에 이찬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그 이후의 그의 관등은 문무왕 7년과 8년에 대아찬으로 표기되어 관등이 오히려 강등되어 있다가 그 후 신문왕 3년에 가서야 비로소 이찬이 라 하였다. 그 사이에 실제로 지경의 관등이 강등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개원을 이찬이라 한 무열왕 2년조는 阿 의 오기가 아닐까 한다. 171) 中侍 : 執事省의 장관인 중시는 진덕왕 5년(651)의 설치 당시부터 사용되어 오던 명칭이었는데, 경덕왕 6년(747)에 이르러 侍中으로 개칭되었다. 中侍에 최초로 임명된 사람은 竹旨였다(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여왕 5년 2월). 정원은 1명인데, 이는 兵部 禮部 倉部 등 다른 관부의 장관 이 대개 2명인 것과는 대조된다. 中侍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법제적으로는 대아찬 이상이 원 칙이나 진골 출신인 경우 阿 관등도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波珍 으로서 중시에 임명된 경 우가 대다수였다. 그런데 중시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이 다른 중요 관부의 장관인 令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집사부의 중요 임무가 機密사무를 관장하는 일, 그리고 중시의 임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3년이 원칙이었다는 점으로 미루 어 볼 때 중시는 귀족 전체의 통솔자이기보다는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중대에 와서 중시를 통하여 성장한 신귀족세력은 중대말에 가서는 점차 왕권에 제약을 가하 는 요소로까지 발전해 갔다. 中侍에 대해서는 李基白, 1974,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 社會史硏究 를 참조할 것. 172) 幢主 : 신라 중고기부터 있던 지방 관직이다. 중고기의 당주는 지방관이면서 동시에 군사지휘관 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당주는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지방관이라 하겠다. 이 러한 성격의 幢主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중엽에 건립된`丹陽新羅赤城碑a이다. 진평왕대 이후 지방행정과 군단조직이 점차 분화되면서 당주의 군사적 기능은 중앙군단으로 이양되어 새 로운 군단의 명칭을 사용한 당주가 만들어지고, 지방행정관으로서의 기능은 郡太守로 이양되었 다(이종욱, 1974,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 歷史學報 64 ; 朱甫暾, 1979, 新羅中古의 地方統治組織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23 참조).

166 330 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차 물러가려 하자, 군사를 내어 쳐서 300여 명을 머리를 베 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眞功 아찬 331 나라 果毅179)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가을 7월 26일에 당나라 총관 薛仁貴180)가 琳潤法師181)를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甕浦175)를 지키게 하였다. 흰 물고기가 [원문 10자 결락] 뛰 行軍摠管 薛仁貴는 신라 왕께 글월을 보냅니다. 맑은 바람 만리 길, 큰 바다 삼천리 길 어들었는데, 한 치(寸)였다. 에 황제의 명령을 받고 결정할 일이 있어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께서는] 바르 6월에 장군 竹旨176)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加林城177)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지 못한 마음을 조금 움직여서 변경의 성들에 무력을 쓴다고 하니, [이는] 仲由의 한마디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石城178)에서 싸워 5천 3백 명을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 말182)을 저버린 것이요, 侯生의 한번 승락183)을 잃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형은 역적의 173) 夫果 :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이다. 신라 王京 沙梁部 사람으로 奈麻 聚福의 맏아들이다. 夫果 驟徒 逼實의 3형제는 백제 및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문무왕 11년(671)에 백제 부흥군과 熊津에서 싸울 때 幢主로서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그 공으로 아우 驟 徒 逼實과 함께 沙 에 추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47 열전 驟徒傳을 참조할 것. 174) 舌口城 : 현재의 함경남도 安邊郡 瑞谷面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井上秀雄 譯註, 1980, 1, 205쪽), 분명치 않다. 175) 옹포(甕浦) :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176) 竹旨 : 진덕왕대의 重臣인 述宗公의 아들로서 장군을 역임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孝昭 王代 竹旨郞條에서는 竹曼 智官 竹旨郞으로 불렀다. 죽지는 어릴 때는 花郞으로 활동하였고, 품주를 개편하여 만든 執事部의 장관인 中侍에 제일 처음 임명되었으며, 신문왕대에 이르기까지 宰相을 지냈다.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신라의 석토성을 공격해 온 백제 장군 殷相 의 군대를 道薩城 전투에서 대장군 김유신 등과 더불어 물리쳤고, 동왕 5년(651) 2월에는 파진 찬으로서 執事中侍가 되었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貴幢 총관이 된 후 백제 부흥군을 토 벌하였고,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 총관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으며, 백제 故地 점령 및 동왕 11년(671) 6월의 나당전쟁에서도 군공을 세웠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孝 昭王代竹旨郞條에 의하면, 그가 화랑이었을 때 낭도였던 得烏谷이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 `慕竹旨郞歌a가 전해지고 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3년조와 5년조 및 三國遺事 권2 紀 異篇 孝昭王代 竹旨郞조를 참조할 것. 177) 加林城 : 현재의 충남 부여군 林川面 군하리에 있는 聖興山城에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1977, 國譯, 401쪽). 대동지지 권5 林川 城池條에 聖興山古城[古加林城 周二千七百五尺 井三 舊有倉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이 산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약 800m 이고 성벽 높이는 약 3~4m로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가림성은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중심지 의 하나가 되었으며(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나당 전쟁때( )의 격전지였다 (본서 권7 신라본기 文武王 11 12년 참조).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23년조에 의하면, 501 년 8월에 가림성을 쌓고 衛士佐平 加를 성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 성은 백제의 남천 후 왕 도의 서남방 방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요충이었다. 178) 石城 : 현재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 있는 석성산성에 비정되고 있다(文化財管理局 編, 1976, 文化財大觀 -史蹟篇 下- ; 尹武炳 成周鐸, 1977, 百濟山城의 新類型, 百濟硏究 8 ; 충청남도, 1991, 문화유적총람(성곽 관아편), 139~140쪽 참조). 이 성은 표고 약 200m의 파진산 지맥에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주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이곳은 백제때 珍惡山縣으로 서 신라 熊州 扶餘郡 石山縣이었다가 고려 초에 石城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公州(공주 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가 공민왕때 扶餘監務가 와서 겸임하였고, 공양왕 때 다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尼山(논산시 노성면)과 합쳐서 尼城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으며, 고종때 郡으로 고쳤다. 179) 果毅 : 唐代 折衝府의 副官으로 果毅都尉라 하였으며 궁궐의 宿衛와 資材의 조달을 맡았다. 관품 은 종5품 종6품이었다. 隋代에는 果毅郞將이라 불렀다. 180) 薛仁貴 : 생몰연대는 년이다. 원래 이름은 禮이고 緯州 龍門 사람이다. 농민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唐 太宗代에 군대의 모집에 자원하여 공을 세워 右領軍中郞將이 되었다. 뒤에 九姓突厥을 天山에서 격파하였다. 乾封( ) 初 고구려 침략에 참여하여 右 威衛大將軍兼安東都護에 임명되었고 平壤郡公으로 봉해졌다. 舊唐書 권83 및 新唐書 권111 열전 薛仁貴傳을 참조할 것. 181) 琳潤法師 : 문무왕 11년에 薛仁貴가 문무왕에게 보낸 서신의 말미에서 임윤법사를 王所部僧琳 潤 이라 한 점으로 보아, 그는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던 西學 求法僧이었던 것으로 판단 된다. 182) 仲由의 한마디 말 : 仲由는 孔子의 제자로서 字는 子路이다. 한마디 말 은 論語 顔淵篇에 한 마디 말로 송사를 판단할 자는 由이다(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란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한마디 말로 獄事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말은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183) 侯生의 한번 승낙 : 후생은 중국 전국시대의 숨은 선비인 후영(侯 )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는 나이 70세에 大梁城 동쪽 문인 夷門의 수문장으로 있다가 위나라의 公子 信陵君의 신임을 받다 가 그의 客이 되었다. 후일 진나라가 조나라의 서울을 포위하였을 때 신릉군이 이를 구원하기 위 해 출전하였는데, 후영은 그 승리할 수 있는 계략을 일러주고 그 계략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자살을 하였다. 여기서 후생의 한번 승낙이라는 것은 신릉군의 문객이 된 것을 승낙함으로써 죽 음을 바쳐 신의를 지켰다는 고사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기 권77 魏公子列傳을 참조할 것.

167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어184) 꽃과 꽃받침(花 )185)의 그늘이 크게 벌어지고 서 대왕이 답서에서 일러 말하였다. 로 그리워하는 달이 헛되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면 실로 한숨과 선왕께서 貞觀 22년(648)에 入朝하여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을 때 이르기를 내가 지금 고려(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186) 先王 開府 께서는 한 나라의 다스림을 궁리하시고 나라 안 각 지역의 일들로 밤잠을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매번 침략을 받아 편안할 날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려(고구려)의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玉帛)190)와 사람들은 나도 충분히 노략질을 경계하였는데, 나라 안 천리 땅 곳곳에서 전쟁이 있어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때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에 뽕잎을 따지 못하고 농사짓는 농부는 밭 갈 시기를 잃었습니다. [이에 선왕께서는] 나 길이 편안토록 하겠다. 고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기일을 정해 주셨습 187) 188) 이가 예순(耳順) 이 거의 되어 해가 저무는 것 같은 만년(楡景) 임에도 불구하고 배타 니다. 신라 백성들이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동원되기를 고 바다 건너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멀리 陽侯189)의 험한 풍파를 건너 마음을 중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文帝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 국 땅에 쏟았습니다. 천자가 계신 대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신라의] 외롭고 약함을 모 서 제위에 오르셔서(踐祚)191)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으셨는데, 인자한 베푸심을 자주 입 두 진술하였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명확하게 말하여 마음속에 있는 것은 모두 어 지난날보다 정도가 더하였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드러내니 듣는 사람이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중략) 달게 되니(懷金拖紫)192)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일이오라 몸이 바스러지고 삼엄한 싸움 중에도 사신은 다니는 법이니, 이제 왕의 신하 승려 琳潤을 시켜 서신을 가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부리시는데 쓸모가 되기를 바랬으며, 간과 뇌를 땅에 발라서라도 져가게 하여 한두 가지 생각을 폅니다. (肝腦塗原)193)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顯慶 5년(660)에 이르러 聖上께서는 先王194)의 뜻이 마저 이루어지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 남겨둔 사업을 이루고자 하여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하여 수군을 크 184)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어 : 여기서 형은 문무왕을, 아우는 김인문을 가 르킨다. 185) 꽃과 꽃받침(花 ) : 화악(花 )은 곧 華鄂 으로 詩經 小雅篇 常 의 常 之華 鄂不 凡今 之人 莫如兄弟 란 싯귀에서 온 말로써 형제간의 우애를 꽃과 꽃받침의 떨어질 수 없는 사이에 비유한 말이다. 186) 開府 : 여기에서의 開府는 武烈王이 즉위 초에 唐 고종으로부터 받은 開府儀同三司新羅王의 약 칭으로 곧 무열왕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원년을 참조할 것. 187) 예순(耳順) : 論語 爲政篇의 六十而耳順 에서 나온 말로 60세를 의미한다. 김춘추가 唐에 건 너간 때는 眞德女王 원년(647) 혹은 동왕 2년 겨울이었다. 그런데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 春秋公條에 의하면, 그는 661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음으로 입당시 그의 나이는 45세 혹은 46 세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본서에서 60세에 가까운 나이라는 것과 차이가 있다. 188) 해가 저무는 것 같은 만년(楡景) :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 온 것을 말한다. 淮南子 의 日西垂景在樹端 謂之桑楡 에서 나온 말이다. 189) 陽侯 : 중국 고대 전설에서의 파도의 神이다. 淮南子 覽冥訓의 武王伐紂 渡于孟津 陽侯之波 逆流而擊 의 문장이 있는데, 高誘가 注하기를 陽侯는 陵陽國의 제후인데, 그 나라가 물가에 있 어 물에 빠져 죽어 神이 되었다. 그 神이 큰 파도를 일으켜 재해를 준다. 고 하였다. 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끄실 수 없 었으나,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셔서 억지로 국경까지 나가 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대군 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가 서로 호응하고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아갔습 190) 보배(玉帛) : 옛날에 제후들이 會盟하거나 朝聘할 때 가지고 간 예물로, 玉 은 圭璋에 속하는 것 이고, 帛 은 束帛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 고대의 귀중한 물건이다. 191) 제위에 오르셔서(踐祚) : 옛날 궁전에는 중간 계단이 없고 東西 양쪽 계단만 있었는데, 祚階 즉 동쪽 계단은 天子의 位인 까닭에 새로운 임금이 처음 등극하는 것을 踐祚라 하였다( 禮記 曲禮 下). 192) 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니(懷金拖紫) :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무왕 자신과 金仁問 金文王 등이 당에 들어가 고위 관작을 받았음을 말한다. 193) 간과 뇌를 땅에 발라서라도(肝腦塗原) : 肝과 腦가 흩어져 땅에 칠해진다는 것은 전쟁의 처참한 상황 혹은 장렬한 죽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충성심을 표현하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194) 先王 : 여기에 나오는 선왕은 무열왕을 말한다.

168 니다. 수군이 겨우 白江 어구195)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적의 큰 부대를 격파하고 양 [현경] 6년(661)에 이르러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 군이 같이 [백제] 왕도에 도착하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을 마친 후에는 앗았으므로, 웅진의 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공격하러 갔다가 적에게 격파를 선왕께서는 大摠管 蘇定方과 함께 상의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싸움에 패한 이후 웅진에서 군사를 청함이 196) 역시 아우 仁泰 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당 밤낮 계속되었는데, 때마침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 나라] 대군이 돌아간 후 賊臣 福信이 [웅진]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으나 [그들의] 애타게 청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周留城198)을 포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 위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달려와 공격함으로 [우리 고 다시 [熊津]府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는] 많은 군사와 말을 잃고 이득 없이 돌아오게 되니, 남쪽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 곳에 성을 쌓고 에워싸 지키니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 제가 군사를 반하여 복신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웅진부성을 에워싸니 이 때문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 에 웅진으로 가는 길이 바로 끊겨서 성안에는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 곧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그들의 곤경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서로 바꿔 잡 197) 아먹는 일 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6월에 이르러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의식은 겨우 끝났으나 상복을 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구원 요청에] 응하여 군사가 [웅진으로] 달려갈 수 없었는데, 황제의 칙명 을 내려 군사를 북쪽199)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含資道摠管 劉德敏 등이 와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나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195) 白江 어구 : 현재의 충남 부여읍 지역을 흐르는 금강을 말한다.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 秋 8월조에는 白村江으로 나온다. 현재에도 부여군 규암면 아래의 금강을 백강으로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백강은 금강 하구의 서천지역을 말한다. 백강과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를 가리키는 것으 로 웅진강구와 동일한 곳이다(김영관, 2007, 앞의 글, 244쪽). 단지 백강은 백제에서 부르던 이 름이고, 웅진강은 당에서 부르던 이름이다(沈正輔, 1988,`中國側史料를 통해 본 白江의 位置問 題a, 震檀學報 66 및 1989,``白江a의 位置에 대하여a, 韓國上古史學報 2 ; 서정석, 2004, `백제 白江의 위치a, 白山學報 69). 또한 웅진강은 지금의 공주 부근을 흐르는 금강에 대한 명 칭이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으로 볼 수 있다(淺川伯敎, 1930,`夫餘 白馬江a, 日本地理大系 12 朝鮮篇, 改造社, 66쪽).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56)을 참조할 것. 196) 仁泰 : 태종 무열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무열왕의 자녀를 거론하고 있는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仁泰는 무열왕 2년 (655)에 각간이 되었고, 동왕 7년(660) 9월 3일에는 당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린 劉仁願과 함 께 왕자로서 신라군 7천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지켰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이찬으 로서 卑列道摠管이 되어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고, 그 해 9월 21일에는 李勣이 당나라로 회 군할 때 이른바 立功軍將 으로서 義福 藪世 天光 興元 등과 함께 당에 들어갔다가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197) 자식을 서로 바꿔 잡아먹는 일 : 몹시 굶주리는 상황을 형용하는 말로, 春秋左氏傳 宣公 15년 조에 易子而食 析骸而炊之 라 하여 사람이 차마 자기 자식은 잡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바 보내와 웅진부성이 고립되어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이 저와 상의 하였는데, 제가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 어질까 염려가 됩니다. 만약 웅진의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곧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유총관이 마침내 저와 함께 동행하여 먼저 甕山城200)을 쳐서 곧 옹산을 함락시키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의 길을 통하게 꾸어 먹고 시체의 뼈를 장작 대신 땐다고 하였다. 198) 周留城 :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복신과 도침의 중심 거점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여러 견해가 제 기되어 알 수 없다.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산설 부안설 연기설 홍성설 등이 대두되고 있다. 주류성은 부안 位金岩山城으로 추정되는데, 최근에는 노중국(2003, 앞의 책, 195~196쪽) 과 김영관(2005, 앞의 책, 181쪽) 등에 의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 은 본서 권28의 주 996)을 참조할 것. 199) 북쪽 : 고구려를 말하다. 200) 甕山城 : 이 성은 이때에 우술성과 함께 신라군에게 함락된 성이기 때문에 우술성에서 그리 멀 지 않은 곳으로 비정된다. 옹산성의 위치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尼山縣 성곽조에 의 거하여 魯山城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50, 앞의 글, 128~135쪽)와 현재의 대전광역시 회덕면

169 336 하였습니다. 337 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군량을 보낸다면 황제 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자라 의 명을 어기게 될까 염려가 되고, 만약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양식이 곧 떨 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다 써버려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늙고 약한 자를 시켜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웅진의 중국 군사는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 남아 지키던 중 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 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헤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 들은 도중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00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 으므로 신라에서는 백성들에게 할당하여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熊津都護202) 다. 유인원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늘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 龍朔 2년(662) 정월에 이르러 유총관은 신라의 兩河道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하였는데, 그 때마다 항상 신라가 구원하여 풀어주었습니다.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눈보라가 치고 날씨가 몹시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 이하 군사 모두는 뼈와 가죽은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다는 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였고 신라 군사도 양식이 다 떨어졌으므로 역시 군사를 돌 다. 중국의 은혜가 비록 끝이 없다고 하지만 신라에서 충성을 바친 것 또한 가엽게 여길 렸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하여 길에서 죽은 사람을 이루 만한 것입니다.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瓠瀘河201)에 이르렀을 때 고려(고구려) 군사가 막 뒤를 용삭 3년(663)에 이르러 총관 孫仁師203)가 군사를 거느리고 府城을 구원하러 왔을 때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 신라 군사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倭의 수군 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 이 백제를 도우러 와,204) 왜의 배 1천 척은 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하였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마자 적의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부성에서 자주 곡식을 요 청하였는데, 전후로 보낸 것이 수만 섬에 달하였습니다. 남으로는 웅진으로 [식량을] 나 鷄足山城이나(심정보, 1983, 앞의 글, 166~167쪽) 회덕산성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2003, 앞의 책, 202쪽)도 있다. 그러나 계족산성에서 雨述 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 아 옹산성이 아니다.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中)에는 瓮山城이라 하였다. 201) 瓠瀘河 : 현재의 경기도 坡州市 지역을 흐르는 임진강으로 비정된다.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 (中)에는 瓢河, 문무왕의`答薛仁貴書a에는 瓠瀘河 로 되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동일 河川이 다. 옛날에 임진강의 이름은 호로하 표하 라고 불리우며, 삼국시대에는 상당히 중요한 전략 적 요점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임진강 하류 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을 이루는데,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 어서 건널 수 있으며, 이곳에서부터 임진강 하류 쪽으로는 강폭이 넓고 강심이 깊어진다. 이곳에 는 고구려가 쌓은 호로고로성이 있다. 202) 熊津都護 : 당은 백제의 왕도였던 사비를 점령한 후 그 사비성에 나당의 점령군 17,000명을 주 둔시켜 백제부흥군과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은 사비성을 점령하고 그 지역을 국호를 붙여 백제부라고 지칭하였다. 따라서 당은 웅진의 도독부 이외에 사비성에도 당의 진영을 설치하고 있었다(김영관, 2004, 백제부흥운동의 성세와 당군의 대응, 한국고대사연구 35, 172쪽 ; 양종국, 2004, 백제멸망의 진실, 주류성, 140쪽). 그런데 본 기사와`유인원기공비a에 의하면 유인원의 관직을 都護 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도호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방향숙, 1994,`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a,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 學論叢(上), 일조각을 참조할 것. 203) 孫仁師 : 중국 唐나라 高宗代의 장군. 662년 백제 故地에 주둔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우고 있던 劉仁願을 돕기 위해 구원군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다. 웅진으로 파견될 당시 그의 직함은 좌위위장군이었다. 좌위위장군은 종3품의 장군직이어서 당시 유인원이나 유인궤보 다 관직이 높았다. 따라서 그는 웅진에 주둔한 당군의 최고사령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204) 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 : 日本書紀 권27 天智 2년 8월조에 의하면, 이때 백제를 도우 러 왔던 왜의 수군은 廬原君臣 등 1만 명이었다고 한다.

170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들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就利山208)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을 상대로 피를 마시고 언덕의 진지를 깨뜨리니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져 드디어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을 두고 맹세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 205)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任存城 하나만이 헛되이 고 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기 생업을 꾸려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중략) 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으 總章 원년(668)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 나, 그들이 굳게 지키고 반항하였으므로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 나라 안에 감추고는 번번 때 杜大夫206)가 칙명에 의거하면 백제 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 이 찾아도 끝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소식을 통하여 들으니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 으니,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 서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백성들 고 말하였습니다. 신라가 생각하기에,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이후에 서로 함께 會盟 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였습니다. 또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하라고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고 또 백 漢城都督 朴都儒에게 시집보내고 그와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 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한이 없고 이랬다 저랬다 종잡을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맹약 (州)의 땅을 습격하기로 하였으나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의 머리를 베었기 때문에 음 207) 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 걱정이 생길까 염려되어 맹약 맺는 일 을 중지할 것을 [황제에게] 아뢰어 청하였습니다. 모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咸亨 원년(670) 6월에 이르러 고려(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들을 모두 죽였 麟德 원년(664)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려(고구려)가 이미 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회맹한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는(彼此)209)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이 비록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 도리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 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모여 계 획을 세우자.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司馬210) 205) 任存城 : 현재의 충남 禮山郡 大興面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에 걸쳐 있는 鳳首山城이다. 이 성 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2,426m로 고대 산성 중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봉수산성 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에 任存 存官 任存官 등이 새겨 진 명문 기와가 수습되어 이 성이 임존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군 충남개발연구원, 2000, 예산 임존성, 21~26쪽). 임존성은 복신 등이 최초로 거병한 곳이며, 후에 주류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부흥군의 북방 거점지역이 되었다. 663년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흑치상지와 지 수신 등이 주도한 3기 부흥군의 거점지역이기도 하다. 206) 杜大夫 : 663년에 劉仁軌와 함께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했던 당의 장수 두상(杜爽)을 가리킨 다. 당 고종대의 인물로`대당평백제국비명a에 의하면 당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직함은 행군장 사 冀州司馬였다. 660년 백제 정벌의 공으로 그는 유인궤와 함께 그대로 남아 지휘관으로 활동 하였다. 663년 別帥로서 유인궤 부여융과 함께 수군과 군량선을 거느리고 주류성 공격에 참여 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3년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맹약이 선언하였을 때 참여한 인물이 다. 207) 배꼽을 깨물 : 배꼽을 깨문다는 것은 하려고 하여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후회하여도 이를 수 없 다는 뜻이다. 軍211)이 여기에 와서 함께 의논하면 208) 就利山 : 취리산의 위치에 대하여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公州 고적조에 就利山在州北六里 라 하였으므로 현재의 충남 공주시 금강 북안의 우성면 연미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연미산 정상에는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壇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취리산을 대전광역 시 동구와 대덕구에 걸쳐 있는 질티고개[迭峴]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209) 그쪽과 우리는(彼此) : 신라와 백제를 말한다. 210) 司馬 : 漢代에 大將軍營에 5部를 두고 部마다 軍司馬 1인을 두었다. 魏晉시대 이후에 사마는 장 군의 아래 있으면서 1府의 일을 총괄하고 군사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唐代에는 도독부 와 州의 속관이었는데, 관품은 從6品下에서 從4品下까지였다. 본서에서 말하는 百濟의 司馬 는 아마 웅진도독부에 소속된 司馬였을 것이다. 211) 軍 : 문무왕 10년에 신라에 억류되었다가 동왕 12년 9월에 兵船郞將 鉗耳大侯 등의 당나라 병 사들과 함께 풀려났다. 한편 日本書紀 권27 天智 4년(665) 9월조에 唐使 劉德高 등과 함께 일 본에 갔던 百濟 軍은 植과 동일인이다. 그런데 2006년 중국 西安에서` 植進墓誌銘a이 새

171 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이후에 피차 서로 의심할까 염려가 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 본다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는 터이니 백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인을 서로 바꾸어서 볼모로 삼자 고 하였으므로, 곧 金儒敦과 [웅진부성]의 백제 主簿 首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 彌長貴 등을 보내 웅진부로 가서 볼모를 교환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 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근심을 없앨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록 볼모의 교환을 승낙하였지만 [웅진]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으고 그 성 아래 도착 하면 밤에는 곧 나와서 공격을 하곤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런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 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는 바람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金欽純212)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 고 돌아와 전하기를 지도를 살펴보고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 213) 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반역하였다. 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당나라] 고관(貴臣)의 뜻을 잃었고 후에는 백제의 참소 3 4 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 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 한 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 니다. 이와 같은 참소가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 래서 모두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도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략) 니다. 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太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당하더니(指 之驅馳)214) [이제 와서는] 들에 짐승이 없어지자 요리사에게 쫓기는 [사냥개의] 신세(烹宰 로 발견되면서 植의 생애와 활동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지석에 의하면 植은 옛 왕도 熊川(웅진) 출신으로 祖와 父가 무왕대에 좌평을 역임한 좌평급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660년 7 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웅진방령으로서 사비도성을 떠나 북방성인 웅진성으로 피신 한 의자왕과 함께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후 그는 664년 무렵에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였 을 때 웅진도독부의 백제계 관료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670년 7월에 신라에 들어가 정탐을 하다가 인질로 억류된 적이 있었고, 또한 671년 6월 신라와 당군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때에도 웅진도독부의 사마 軍( 植)이 관여된 바 있었다. 672년 9월에는 신라 사신과 함께 당에 건너 갔다가 죽은 시기는 58세인 672년 5월 25일이었고, 672년 11월 21일에 장안 서남쪽 高陽原(현 재의 중국 서안시 장안현 郭杜鎭)에 묻히게 되었다.` 植進묘지명a에 대한 내용 소개에 대해서 는 이도학, 2007, 寔植進묘지명 을 통해 본 백제 氏 가문, 전통문화논총 5, 66~89쪽 ; 김영관, 2007, 백제유민 예식진 묘지 소개, 신라사학보 10, 365~380쪽을 참조할 것. 212) 金欽純 :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金欽純의 다른 이름으로는 金欽 金純 金欽春 등으로도 나온다. 그는 金庾信의 동생이고 金令胤의 조부이다. 김흠순은 진평왕 때 화랑으로서 인망이 있 었으며, 무열왕 7년(660)에는 대장군 김유신을 따라 장군으로서 백제 정벌군에 참가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아들 盤屈을 잃는 격전 끝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문무왕 초년에는 백제의 나머지 군사를 토벌하여 內斯只城 居列城 居勿城 등을 함락시켰으며, 동왕 8년(668) 6월에는 각간으 로서 대당 총관이 되어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그는 당나라에 謝罪使 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213) 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太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고 태산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아는 史記 권18 高祖功臣侯者 年表에 封爵之 誓曰 使河如帶 泰山若礪 에서 나온 말로 서로의 맹세가 영원하다는 뜻이다. 之侵逼)215)가 된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雍齒의 賞216)을 받고 중국을 위하여 죽 은 신라는 丁公의 죽음217)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비록 그 빛을 비춰주지 않으나 해바 214) [사냥개처럼]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당하더니(指 之驅馳) : 指 은 發 指示 의 준말인데, 은 縱과 같은 의미이다. 즉 사냥꾼이 개를 풀어 놓아 짐승을 잡는다는 뜻으로, 전쟁을 지휘하여 싸우게 하는 일에 비유된다. 史記 권53 蕭相國世家에 夫獵 追殺獸兎者狗也 而發 指示獸處 者人也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당나라의 지휘를 받아 개가 짐승을 쫓듯 힘껏 달려서 적국을 멸망시킨 신라의 공로를 형용한 것이다. 215) 요리사에게 쫓기는 [사냥개의] 신세(烹宰之侵逼) : 烹宰 는 짐승을 삶아 요리한다는 뜻으로, 천 하를 통일한 후 공신들이 필요치 않을 때에는 그들을 잡아 죽인다는 비유이다. 漢 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후 韓信의 처지를 가리켜 立功成名身死亡 野獸已盡獵狗烹 이라고 충고한 대목을 전거 로 하고 있다( 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여기서는 공이 있는 신라가 공을 이룬 후 이롭지 못한 침해를 받는다는 뜻이다. 216) 雍齒의 賞 : 雍齒는 처음 漢나라 高祖와 함께 의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끝내는 한 高祖의 미 움을 사서 배반하고 떠났다. 그 후 다시 돌아왔는데, 한 고조가 즉위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논 공행상에서 제외될까 염려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고조는 장량의 말에 따라 가장 미워하 던 雍齒를 봉하여 십방후로 삼으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옹치도 侯가 되었으 니 우리는 걱정이 없다. 라고 하며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한다( 史記 권55 留侯世家). 217) 丁公의 죽음 : 季布의 母弟인 丁公은 項羽의 장수로서 일찍이 한 고조 劉邦을 彭城의 서쪽으로

172 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중략) 바라 司馬 法聰223)과 군사 170명을 돌려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리셔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 臣 아무개는 죽을죄를 짓고 삼가 아룁니다. 옛날에 신의 처지가 위급함이 거꾸로 매달 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 金法敏이 아룁니다. 린 것 같았을 때 멀리서 건져주신 은혜를 입어 겨우 죽을 것을 면하였으니, 몸이 가루가 218) 219) 所夫里州 를 설치하고 아찬 眞王 을 도독으로 삼았다. 12년(672)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古省城220)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에 백제의 加林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9월에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다. 왕은 지난번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청하여 우리를 쳤을 때, 사정이 급 박하여 황제께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으로부 터 죄를 얻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原川과 나마 邊山을 보내 붙잡아 두었던 [당나라] 兵船郞將 鉗耳大侯, 萊州 司馬 王藝,221) 本烈州 長史222) 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曾山 되고 뼈가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가 되고 먼지가 된다 하여도 어찌 자애로우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읍니까? 그러나 원한이 깊은 백제는 우리나라 가까이까지 침입하면서 황제의 군사를 끌어들여 신을 죽이고 치욕을 갚 으려 하였습니다. 신은 파멸의 처지에 놓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 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 런 일의 내용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형벌을 받아 죽게 된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염려하여 삼가 일의 사정 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잠깐 귀를 기울여 들으셔서 근본 이유를 명확히 살펴주십시오. 신은 前代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았으나 근래에 백제 때문에 두 번이나 조공을 빠뜨려서 마 침내는 황제의 조정으로 하여금 조서를 내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 추격하여 막다른 곳까지 이르렀다. 이때 고조가 돌아보며 어찌 이리도 곤욕을 주는가. 하자 丁 公은 군사를 거두고 물러갔다. 후에 漢이 천하를 통일한 후 丁公이 고조를 찾아가자 고조는 즉시 그를 참형에 처하고 그의 시체를 군중에 돌리면서, 丁公은 항우의 신하로서 매우 불충하였다. 항우가 천하를 잃게 한 것은 바로 이 丁公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史記 권100 季布列傳). 이는 곧 생명의 은인에게 해를 입힌 것을 말한다. 218) 所夫里州 :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이다. 문무왕 6년(666)에 州를 폐지하고 郡으로 고쳤다.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泗 라고도 나온다. 본래는 백제 所夫里郡이었는데, 16년(538) 봄에 수도를 熊津에서 泗 즉 所夫里로 옮기고 南扶餘라고 칭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이를 함락시켰고,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泗 州(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 6년(686)에 郡으로 고쳤다. 219) 眞王 : 무열왕 8년(661) 2월에 아찬으로서 사비성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격퇴하기 위한 전 투에 참가한 眞王과 동일인이다. 문무왕 11년(671)에는 所夫里州 도독이 되었다. 220) 古省城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8 扶餘縣 山川條에 古省津卽泗 河 在扶蘇山下 라 하였으므 로 古省城은 곧 泗 城이라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119쪽). 221) 萊州 司馬 王藝 : 萊州는 현재의 중국 山東省 掖縣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본래는 東萊郡이었 던 것을 唐初에 萊州로 고치고 河南道에 소속시켰다. 한편 萊州는 中州였으므로 왕예는 6品上의 司馬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王藝의 행적은 알 수 없다. 222) 本烈州 長史 : 本烈州와 王益에 관하여서는 자세하지 않다. 長史는 당대 도독부와 州에 소속되 어 있던 正6品上 從3品에 걸쳐 있던 지방관직이다. 으니, 신의 죄는 죽어도 오히려 남음이 있어 南山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다 기록할 수 없고 褒斜224)의 수풀로도 신을 처벌할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저희 종묘와 사 직을 헐어 늪과 연못으로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사정을 듣고 판단을 내려주 신다면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신의 관을 옆에 놓고 진흙 묻은 머리225)도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삼가 형벌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 컨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 같으셔서 포용의 빛을 구석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하여 동식물 모두 양육의 은혜를 입었으며 살리기 좋아하는 덕은 곤충 223) 曾山 司馬 法聰 : 日本書紀 권27 天智 6년(667) 11월조에, 백제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웅 진도독부 熊山縣令 上柱國 司馬 法聰 등을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말하는 曾 山司馬 법총은 신라에 붙잡히기 전에 熊山縣令과 웅진도독부 사마로서 일본에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曾山은 熊山 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 224) 포야(褒斜) : 중국 陜西省 終南山에 있는 계곡으로, 四川과 陜西와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즉 이 계곡의 남쪽 입구를 褒 라 하고 북쪽 입구를 斜 라 하였다. 225) 진흙 묻은 머리 : 머리를 진흙땅에 숙이고서 사죄를 구한다는 뜻이다.

173 344 에게까지 멀리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물고기와 날짐승에까지 이르렀습 니다. 만일 복종하면 놓아주는 용서를 내리시고 허리와 머리를 온전하게 해주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산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 히 마음속의 품은 바를 말씀드리며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345 격해 왔다. 15년(675) 2월에 (중략) [신라는]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原川 등을 보내 글월을 올려 사죄하고 엎드려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머리를 조아리 고 또 조아리며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13년(673) 겨울에 (중략) 처음으로 外司正226)을 두었는데, 州에 두 사람 郡에 한 사람으로 하였다. 일찌기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으나 이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 14년(674) 봄 정월에 (중략)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右驍衛員外大將軍 臨海郡公 金仁問이 당의 서울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227) 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 으로 삼고, 衛尉卿228) 李弼, 右領軍大將軍 李謹行229)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 226) 外司正 : 지방관의 감찰을 맡은 관직으로, 본서 권40 잡지 직관(下) 外官條에 의하면 정원은 133명이었고 관등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신라는 중앙관료들을 감찰하는 司正府와 宮中內僚들 을 감찰하는 內司正典을 두었다. 그리고 지방통치조직이 정비되면서 지방관의 수가 증가하게 되 자 이들을 효율적으로 감독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外司正을 설치하였다. 이 외사정은 본 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673)조에 始置外司正 州二人 郡一人 이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문무왕 13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외사정 133명은 9州에 각 2명씩 18명과 115郡에 각 1명씩 115 명을 합한 수와 일치한다. 그렇다고 하면 외사정은 주와 군에만 파견되었고, 현에는 파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현에 외사정이 파견되지 않은 것은 현이 주나 군에 영속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감찰은 주와 군이 담당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외사정에 대해서는 李基東, 1989, 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한국학연구원을 참조할 것. 227) 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 左庶子는 당나라 東宮官衙인 太子左春坊의 최고 관직으로 정원은 2인 이고 관품은 正4品上이었다. 舊唐書 권84 열전 劉仁軌傳에 의하면, 그는 總章 3년(670)에 左 庶子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228) 衛尉卿 : 당나라 9寺 중의 하나인 衛尉寺의 최고 관직으로, 정원은 1인이고 관품은 從3品이었 다. 229) 李謹行 : 靺鞨人으로 突地稽의 아들이다. 李 姓은 아버지 突地稽 때 唐朝로부터 賜姓된 것이 다. 吐蕃을 물리친 공을 세웠다. 뒤에 燕國公으로 봉해졌고, 죽은 후 乾陵(唐 高宗의 陵)에 陪葬 되었다( 新唐書 권110 李謹行傳).

174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져서 지금까지 900년이 되었다. 고 한 것은 잘못이 권29 年表 上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였다. 箕子1)가 周나라 왕실에서 책봉을 받고 衛滿이 漢나 다.> 라 초기에 왕호를 참칭한 때부터, 연대는 아득히 멀지만 문헌이 소략하여 실로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이 솥발처럼 대치한 때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햇수가 무척 많았 다. 신라는 56왕 992년이었고, 고구려는 28왕 705년이었고, 백제는 31왕 678년이다. 2)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상고할 수 있으므로 삼국의 연표를 만든다. <*당나라의 賈言忠 이 1) 箕子 : 箕子는 微子 比干과 더불어 중국 殷代의 三仁이라 불리우는 인물로서, 殷末에 紂王이 無道 함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미친 사람 행세를 하였다는 인물이다(또는 紂王에 의해 갇혔다고도 한 다.). 그런데 사기 宋微子 世家條나 尙書大傳 등 前漢代의 문헌에서부터는 箕子가 朝鮮으로 망 명하였고, 武王은 그를 朝鮮에 封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箕子東來說 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이 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阿斯達 에 돌아와 숨어지내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제왕운기 下 東國君王開國年代條에서 기자 조선을 後朝鮮이라 하고, 이 왕조가 41대 928년 동안 지속되다가 準王 때에 멸망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자동래설은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 볼 때 그 사실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다만 기자전설의 의미를 고조선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왕실의 교체 가능성이나 아니면 기자를 祖先으로 내세우는 동 이족의 한 족단이 이동하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韓氏朝鮮說(이병도, 1076, 기자조 선 의 정체와 소위 箕子八條敎 에 대한 신고찰,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47~56쪽)이나 濊貊 朝鮮說(김정배, 1986, 한국 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등이 제시되었고, 또 이를 箕子族 또는 箕子國의 이동을 반영하는 사실로 해석하려는 입장도 등장하였다(천관우, 1974, 箕 子考, 東方學志 15 ; 朴光用, 1980, 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변천, 韓國史論 6, 서울대 참 조). 이와는 달리 기자조선에 대한 실재성을 믿고 B.C.1천년 이전부터 만주의 남부지역을 거쳐 서 북한지역에 이르는 고조선의 역사가 전개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대두되었다. 1973~1977년에 중국 大凌河 중상류유역인 遼寧省 喀左縣 일대에서 箕侯 孤竹 명문이 있는 靑銅禮器가 출토되어 이를 기자조선과 고죽국의 실재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형구, 1991, 대릉하유역의 殷末周初 청동기문화와 기자 및 기자조선, 한국상고사학보 5를 참조할 것. 이 견해는 孤竹國을 기자조선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唐의 裵矩의 설이 문제가 있으며, 또 孤 竹 이라는 명문 자체의 해독상 문제점, 그리고 箕侯 명 청동예기가 대릉하유역 이외에 산둥반도 의 烟台市 등지에서도 츨토되고 있는 점 등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다. 최근에 기자동래설에 관한 기 록들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보다는 殷 왕조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여러 지역에 箕 侯 가 존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합리적이다. 2) 賈言忠 : 당나라 洛陽 사람으로, 高宗 때 監察御史, 吏部員外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 정벌군을 냈을 때 군량을 담당하였다. 정벌군이 遼東에서 회군하였을 때, 그는 고종에게 요 新 羅 高 句 麗 始祖朴赫居世居西干 百 濟 中 國 前漢孝宣帝詢十七年 甲子 卽位元年 五鳳元年 從此至眞德爲聖骨 西曆 B.C.57 乙丑 二 二 56 丙寅 三 三 55 丁卯 四 四 54 戊辰 五 甘露元年 53 己四 六 二 52 庚五 七 三 51 辛未 八 四 50 壬申 九 黃龍元年 49 癸酉 十 孝元帝奭初元元年 48 甲戌 十日 二 47 乙亥 十二 三 46 丙子 十三 四 45 丁丑 十四 五 44 戊寅 十五 永光元年 43 己卯 十六 二 42 庚辰 十七 三 41 辛四 十八 四 40 壬五 十九 五 39 癸未 二十 建昭元年 38 二 37 始祖東明聖王 甲申 二十一 姓高氏諱朱蒙 卽位元年 동의 山川地勢를 그려서 바치고, 요동을 평정한 상황을 진술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 書 권190 中 列傳 140 中 賈曾傳 및 新唐書 권119 列傳 44을 참조할 것.

175 348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乙酉 二十二 二 三 36 甲辰 四十一 三 二 四 17 丙戌 二十三 三 四 35 乙四 四十二 四 三 永始元年 16 丁亥 二十四 四 五 34 丙五 四十三 五 四 二 15 戊子 二十五 五 竟寧元年 成 帝 33 丁未 四十四 六 五 三 14 己丑 二十六 六 建始元年 32 戊申 四十五 七 六 四 13 庚寅 二十七 七 二 31 己酉 四十六 八 七 元延元年 12 辛卯 二十八 八 三 30 庚戌 四十七 九 八 二 11 壬辰 二十九 九 四 29 辛亥 四十八 十 九 三 10 癸四 三十 十 河平元年 28 壬子 四十九 十一 十 四 9 甲五 三十一 十一 二 27 癸丑 五十 十二 十一 綏和元年 8 乙未 三十二 十二 三 26 甲寅 五十一 十三 十二 二 孝哀帝欣 7 丙申 三十三 十三 四 25 乙卯 五十二 十四 十三 建平元年 6 丁酉 三十四 十四 陽朔元年 24 丙辰 五十三 十五 十四 二 5 戊戌 三十五 十五 二 23 丁巳 五十四 十六 十五 三 4 己亥 三十六 十六 三 22 戊午 五十五 十七 十六 四 3 庚子 三十七 十七 四 21 己未 五十六 十八 十七 元壽元年 2 辛丑 三十八 十八 鴻嘉元年 20 庚申 五十七 十九 十八 辛酉 五十八 二十 十九 元始元年 壬戌 五十九 二十一 二十 二 2 癸亥 六十 二十二 二十一 三 3 二十三 二十二 四 4 二十四 二十三 五 5 十九 壬寅 三十九 東明王升遐 二 瑠璃明王類利 19 卽位元年 3) 癸卯 四十 二 시조 溫祚王 즉위 元年 三 18 二 孝平帝 1 A.D.1 六十一 甲子 始祖赫居世薨 南解次次雄卽位元年 乙丑 二 3) 溫祚王 : 백제의 시조로서 재위기간은 B.C.18 A.D.28년이다. 帝王韻紀 卷下에는 殷祚 로 나 온다. 그의 出系에 대해 즉위년조의 본문에서는 주몽과 졸본왕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 어 있으나, 細注에는 주몽과 졸본인 延陀勃의 딸 召西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禮氏 소생 유리가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내려와서 태자가 되자 형 비 류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B.C.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세웠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 또는 둘째라고도 한다. 癸卯年(B.C.18)에 즉위하 여 45년간 왕위에 있었다. 慰禮城에 도읍하였으니 또는 蛇川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稷山이다. 丙辰 (B.C.5)에 漢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廣州이다. 로 기록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3의 주 2)를 참조할 것. 孺子 丙寅 三 二十五 二十四 王莽 6 居攝元年 丁卯 四 二十六 二十五 戊辰 五 二十七 二十十一 己巳 六 二十八 二十七 二 三 初始元年 新室 始建國元年

176 350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庚午 七 二十九 二十八 二 10 己丑 六 十二 二 五 29 辛未 八 三十 二十九 三 11 庚寅 七 十三 三 六 30 壬申 九 三十一 三十 四 12 辛卯 八 十四 四 七 31 癸酉 十 三十二 三十一 五 13 壬辰 九 十五 五 八 32 甲戌 十一 三十三 三十二 天鳳元年 14 癸巳 十 十六 六 九 33 乙亥 十二 三十四 三十三 二 15 甲午 十一 十七 七 十 34 丙子 十三 三十五 三十四 三 16 乙未 十二 十八 八 十一 35 丁丑 十四 三十六 三十五 四 17 丙申 十三 十九 九 十二 36 丁酉 十四 二十 十 十三 37 戊戌 十五 二十一 十一 十四 38 己亥 十六 二十二 十二 十五 39 庚子 十七 二十三 十三 十六 40 三十七 戊寅 十五 瑠璃明王薨 大武神王無恤 三十六 五 18 卽位元年 351 己卯 十六 三 三十七 六 19 辛丑 十八 二十四 十四 十七 41 庚辰 十七 三 三十八 地皇元年 20 壬寅 十九 二十五 十五 十八 42 辛巳 十八 四 三十九 二 21 癸卯 二十 二十六 十六 十九 43 壬午 十九 五 四十 三 22 四 癸未 二十 六 四十一 劉聖公 23 更始元年 年 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1년의 차이는 본서가 卽位年稱元法에 의한 것이고 三國遺事 二十一 甲申 南解次次雄薨 는 踰年稱元法에 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七 四十二 二 24 儒理尼師今卽位元年 5) 多婁王 : 백제의 제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A.D.28~77년이다. 온조왕의 맏아들로서 온조왕 재위 28년(A.D.10)에 태자로 책봉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百濟의 초기 王系는 後漢光武帝秀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왕계와는 달리 백제를 건국한 두 연맹세력인 溫祚系와 沸流系에 의해 乙酉 二 八 四十三 丙戌 三 九 四十四 二 26 왕실계보를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우태-비류-고이계(優氏)와 주몽-온조-초고계 丁亥 四 十 四十五 三 27 (부여씨)로 나뉘어 두 세력간에 왕실교체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42~143 建武元年 25 四十六 쪽)가 있다. 또한 백제 초기 왕계 중에서 多婁王-己婁王-盖婁王은 婁 를 공통의 末字를 가지고 4) 戊子 五 十一 溫祚王이 죽고 5) 왕실교체가 있었으며, 후일 온조계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온조계 중심으로 일원화한 것으로 多婁王 이 즉위 四 28 한 원년이다. 있고, 이것은 沸流系의 시조인 解夫婁의 婁 와 상통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沸流系 왕통으로 파 악하고, 肖古王-仇首王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왕계를 溫祚系 왕통으로 파악하고 있다(노중국, 1988, 앞의 책, 65 77쪽). 그러나 이러한 백제 초기 왕계의 다기성을 들어 온조계와 비류계로 상 정하여 마치 다른 세력으로의 왕통이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왕실내의 다른 왕계에 의한 세력교체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는, 온조왕의 둘째 아들 4) 온조왕이 죽고 : 온조왕의 재위기간은 46년인데,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癸卯立 在位四十五 이다. 戊子年(A.D.28)에 즉위하여 49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177 352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二十七 甲辰 二十一 大武神王薨 閔中王解色朱 十七 二十 44 卽位元年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丁卯 十一 十五 四十 十 67 戊辰 十二 十六 四十一 十一 68 己巳 十三 十七 四十二 十二 69 庚午 十四 十八 四十三 十三 70 乙巳 二十二 二 十八 二十一 45 辛未 十五 十九 四十四 十四 71 丙午 二十三 三 十九 二十二 46 壬申 十六 二十 四十五 十五 72 丁未 二十四 四 二十 二十三 47 癸酉 十七 二十一 四十六 十六 73 甲戌 十八 二十二 四十七 十七 74 乙亥 十九 二十三 四十八 丙子 二十 二十四 四十九 五 閔中王薨 戊申 二十五 慕本王解憂 二十一 二十四 48 卽位元年 己酉 二十六 二 二十二 二十五 49 庚戌 二十七 三 二十三 二十六 50 辛亥 二十八 四 二十四 二十七 51 壬子 二十九 五 二十五 二十八 52 慕本王薨 國祖王宮 二十六 二十九 53 建初元年 76 丁丑 二十一 二十五 多婁王이 죽고6) 己婁王7)이 즉 二 77 戊寅 二十二 二十六 二 三 78 己卯 二十三 二十七 三 四 79 二十八 四 五 80 辛巳 二 二十九 五 六 81 壬午 三 三十 六 七 82 癸未 四 三十一 七 八 83 甲申 五 三十二 八 元和元年 84 乙酉 六 三十三 九 二 85 二十四 甲寅 三十一 二 二十七 三十 54 乙卯 三十二 三 二十八 三十一 55 丙辰 三十三 四 二十九 建武中元元年 56 三十四 五 75 위한 원년이다. 卽位元年 丁巳 儒理尼師今薨 孝章皇帝 五十 六 癸丑 三十 十八 353 三十 脫解尼師今卽位元年 二 孝明帝莊 57 戊午 二 六 三十一 永平元年 58 己未 三 七 三十二 二 59 庚申 四 八 三十三 三 60 辛酉 五 九 三十四 四 61 壬戌 六 十 三十五 五 62 癸亥 七 十一 三十六 六 63 甲子 八 十二 三十七 七 64 乙丑 九 十三 三十八 八 65 丙寅 十 十四 三十九 九 66 庚辰 脫解尼師今薨 婆娑尼師今卽位元年 6) 多婁王이 죽고 : 다루왕의 재위 기간이 50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戊子立 理四十九 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三國遺事 가 踰年稱元法을 따랐기 때문 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7) 己婁王 : 백제 제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A.D 년이다. 다루왕의 맏아들로 다루왕 6년 (A.D.33)에 태자가 되었다가 다루왕이 재위 5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 는, 다루왕의 아들이다. 丁丑年(A.D.77)에 즉위하여 51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178 354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丙戌 七 三十四 十 三 86 甲寅 三 六十二 三十八 元初元年 114 丁亥 八 三十五 十一 章和元年 87 乙卯 四 六十三 三十九 二 115 戊子 九 三十六 十二 丙辰 五 六十四 四十 三 116 丁巳 六 六十五 四十一 四 117 己丑 十 三十七 十三 永元元年 89 戊午 七 六十六 四十二 五 118 庚寅 十一 三十八 十四 二 90 己未 八 六十七 四十三 六 119 辛卯 十二 三十九 十五 三 91 庚申 九 六十八 四十四 永寧元年 120 壬辰 十三 四十 十六 四 92 辛酉 十 六十九 四十五 建光元年 121 癸巳 十四 四十一 十七 五 93 壬戌 十一 七十 四十六 延光元年 122 甲午 十五 四十二 十八 六 94 癸亥 十二 七十一 四十七 二 123 乙未 十六 四十三 十九 七 95 甲子 十三 七十二 四十八 三 124 丙申 十七 四十四 二十 八 96 乙丑 十四 七十三 四十九 孝順帝保 125 丁酉 十八 四十五 二十一 九 97 丙寅 十五 七十四 五十 永建元年 126 戊戌 十九 四十六 二十二 十 98 丁卯 十六 七十五 五十一 二 127 己亥 二十 四十七 二十三 十一 99 庚子 二十一 四十八 二十四 十二 100 辛丑 二十二 四十九 二十五 十三 101 三 128 壬寅 二十三 五十 二十六 十四 102 癸卯 二十四 五十一 二十七 十五 103 己巳 十八 七十七 二 四 129 甲辰 二十五 五十二 二十八 十六 104 庚午 十九 七十八 三 五 130 乙巳 二十六 五十三 二十九 丙午 二十七 五十四 三十 丁未 二十八 五十五 三十一 永初元年 107 戊申 二十九 五十六 三十二 二 108 己酉 三十 五十七 三十三 三 109 庚戌 三十一 五十八 三十四 四 110 辛亥 三十二 五十九 三十五 五 111 六十 三十六 六 112 六十一 三十七 七 113 二 孝和皇帝肇 元興元年 孝 帝隆 延平元年 孝安帝祐 祗摩尼師今卽位元年 癸丑 二 五十二 戊辰 十七 七十六 己婁王이 죽고8) 蓋婁王9)이 즉위 한 원년이다. 105 三十三 壬子 婆娑尼師今薨 355 8) 己婁王이 죽고 : 기루왕의 재위 기간이 52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丁丑立 理五十五 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3년의 차이가 있다. 이는 두 사서의 원전인 고기류의 기년상 착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9) 蓋婁王 : 백제 제4대 왕으로 기루왕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년이다. 본서 권24 백제본 기 蓋鹵王 즉위년조에 개로왕을 或云近蓋婁 라고 하였는데, 近蓋婁 는 蓋婁 앞에 近 字를 붙 인 것이다. 이는 개로왕과 개루왕과의 친연관계를 표방하여 왕족들을 요직에 중용하는 것과 더불 어 왕족들 간에 계보를 초월한 결속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근초고왕이 초고왕의 후계자임을 천명 하여 肖古系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과 대비된다. 이처럼 개로왕이 蓋婁王의 후계자로 자처한 것은 왕위 계승에서 초고계와 같은 방계 세력을 포용한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정재윤, 1999, 웅진 시대 백제 정치사의 전개와 그 특성,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7쪽).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는, 기루왕의 아들이다. 戊辰年(128)에 즉위하여 38년간 다스렸다. 로 기록하였다.

179 356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辛未 二十 七十九 四 六 131 壬申 二十一 八十 五 陽嘉元年 132 六 二 133 癸酉 二十二 八十一 二十三 甲戌 祗摩尼師今薨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二十一 甲午 逸聖尼師今薨 九 二十七 二 154 乙未 二 十 二十八 永嘉元年 155 丙申 三 十一 二十九 二 156 阿達羅尼師今 卽位元年 八十二 七 三 134 逸聖尼師今卽位元年 乙亥 二 八十三 八 四 135 丁酉 四 十二 三十 三 157 丙子 三 八十四 九 永和元年 136 戊戌 五 十三 三十一 延熹元年 158 丁丑 四 八十五 十 二 137 己亥 六 十四 三十二 二 159 戊寅 五 八十六 十一 三 138 庚子 七 十五 三十三 三 160 己卯 六 八十七 十二 四 139 辛丑 八 十六 三十四 四 161 庚辰 七 八十八 十三 五 140 壬寅 九 十七 三十五 五 162 辛巳 八 八十九 十四 六 141 癸卯 十 十八 三十六 六 163 壬午 九 九十 十五 漢安元年 142 甲辰 十一 十九 三十七 七 164 癸未 十 九十一 十六 二 143 甲申 十一 九十二 十七 次大王三月 薨 三十八 八 165 乙酉 十二 九十三 十八 九 166 建康元年 孝沖帝炳 永嘉元年 孝質帝纘 144 二十 國祖王三月 薨 乙巳 十二 新大王伯固卽 145 位元年 三十九 蓋婁王 九十四 國祖王遜位 丙戌 十三 357 退居後宮 十九 本初元年 孝桓帝志 146 丙午 十三 二 이 죽고10) 肖古 王11)이 즉위한 원년이다. 次大王遂成 卽位元年 丁亥 十四 二 二十 建和元年 147 戊子 十五 三 二十一 二 148 己丑 十六 四 二十二 三 149 庚寅 十七 五 二十三 和平元年 150 辛卯 十八 六 二十四 元嘉元年 151 壬辰 十九 七 二十五 二 152 癸巳 二十 八 二十六 永興元年 ) 蓋婁王이 죽고 :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戊辰立 理三十八年 이라 하여 본 기사보다 오히려 1 년이 적다. 三國遺事 는 踰年稱元法을 따랐으므로 실제로는 2년의 차이가 있게 된 셈이다. 이 2 년의 차이는 기루왕의 재위년수가 三國遺事 에서는 2년 길게 나온 것과 관련이 있다. 11) 肖古王 : 백제 제5대 왕으로 개루왕의 아들이며 素古라고도 한다. 재위 기간은 년이다. 제13대 近肖古王이 이름 肖古 앞에 近 字를 붙여 왕명을 삼은 것처럼 초고왕의 후계자임을 천명 하여 肖古系의 정통성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9년와 55년조에 나오는 肖古王 은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는, 또는 素古라고도 한다. 개루왕의 아들이 다. 丙午年(166)에 즉위하여 50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180

181 360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乙未 二十 十九 二 二十 215 丙申 二十一 二十 三 二十一 216 丁酉 二十二 二十一 四 二十二 217 戊戌 二十三 二十二 五 二十三 218 己亥 二十四 二十三 六 二十四 219 延康元年 庚子 二十五 二十四 七 魏文帝曹丕 220 二 辛丑 二十六 二十五 八 成都 戊申 三十三 221 高 句 麗 二 己酉 三十四 三 九 吳大帝孫權都武昌 癸卯 二十八 二十七 十 蜀後主禪立 223 改元建興 甲辰 二十九 二十八 十一 五 224 乙巳 三十 二十九 十二 六 225 丙午 三十一 三十 十三 七 明皇帝叡 226 三十一 丁未 三十二 山上王薨 東川王憂位居 十四 太和元年 227 卽位元年 12) 肖古王이 죽고 : 초고왕의 재위 기간이 49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丙午立 理五十年 이라 하여 1년의 차이가 있다. 13) 仇首王 : 백제 제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년이다. 초고왕의 맏아들로 貴須라고도 한다. 제14대 왕인 近仇首王이 이름 仇首 앞에 近 字를 붙여 왕명을 삼은 것처럼 구수왕의 후계자임을 천명하여 仇首系의 정통성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6년과 56년조 및 같은 책 권19 흠명기 2년조에 나오는 貴須는 모두 근구수왕을 가리킨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는, 또 는 貴須라고도 한다. 초고왕의 아들이다. 甲午年(214)에 즉위하여 21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十六 吳改元黃龍 229 十七 四 230 辛亥 二 五 十八 五 231 壬子 三 六 十九 癸丑 四 七 二十 八 二十一 仇首王 이 죽고14) 맏아 들 沙伴王15)이 왕위를 이었으 二 나, 어려서 폐위 를 당하여 古 王16)이 즉위한 원년이다. 助賁尼師今卽位元年 甲寅 五 四 228 四 222 建元黃武自此三國分矣 二 西曆 三十五 三 二十六 十五 中 國 遷都建業 建元章武 壬寅 二十七 百 濟 三 庚戌 奈解尼師今薨 黃初元年 蜀先主劉備卽帝位於 新 羅 361 六 吳改元嘉禾 靑龍元年 ) 仇首王이 죽고 : 구수왕의 재위 기간이 21년인데, 본서와 삼국유사 권1 王曆篇의 기록이 일치하 고 있다. 15) 沙伴王 : 백제 제7대 왕으로 仇首王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沙泮王 一作沙 로,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扶餘 前百濟條에는 沙沸王 沙伊王으로 표기되고 있다. 삼국유 사 권1 王曆篇에는 第七沙泮王 一作 沙 仇首之子 立卽廢 라고만 나온다. 본서에는 사반왕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고이왕 즉위년에 구수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고왕의 동복아우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고이의 왕위계승 은 어떤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이해된다. 16) 古爾王 : 백제의 제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년이다.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新撰姓氏 錄 未定雜姓 河內國에는 久爾君 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에는, 초고왕의 同 母弟이다. 甲寅年(234)에 즉위하여 52년간 다스렸다. 어린 사반왕을 폐한 후 왕위에 올랐다. 로 되어 있다. 고이왕에 대해서는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시조 仇台 를 구이 로 읽어, 이를 고이 와 동일시하여 고이왕을 백제의 실질적인 建國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82 362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乙卯 六 九 二 三 235 丙辰 七 十 三 四 236 丁巳 八 十一 四 景初元年 237 戊午 九 十二 五 己未 十 十三 六 三 齊王芳 239 庚申 十一 十四 七 正始元年 240 辛酉 十二 十五 八 二 241 壬戌 十三 十六 九 三 242 癸亥 十四 十七 十 四 243 甲子 十五 十八 十一 五 244 乙丑 十六 十九 十二 六 245 丙寅 十七 十 十三 七 246 二 蜀改元延熙 吳改元赤烏 238 十八 丁卯 助賁尼師今薨 十一 十四 八 247 沾解尼師今卽位元年 二十二 戊辰 二 東川王薨 中川王然弗 十五 九 248 卽位元年 己巳 三 二 十六 嘉平元年 249 庚午 四 三 十七 二 250 辛未 五 四 十八 三 吳改元太元 251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四 壬申 六 五 十九 吳會稽王亮立 252 改元建興 癸酉 七 六 二十 五 253 六 甲戌 八 七 二十一 高貴鄕公 254 正元元年 乙亥 九 八 二十二 丙子 十 九 二十三 二 甘露元年 吳改元太平 三 丁丑 十一 十 二十四 蜀改元景耀 257 吳主休立改元永安 戊寅 十二 十一 二十五 四 258 己卯 十三 十二 二十六 五 259 庚辰 十四 十三 二十七 十四 二十八 二 261 十五 二十九 三 262 辛巳 壬午 十五 沾解尼師今薨 味鄒尼師今 卽位元年 陳留王奐 景元元年 260 四 癸未 二 十六 三十 蜀改元炎興 十月降於魏 263 蜀二主四十三年 咸熙元年 1976, 앞의 책, 쪽). 또한 한군현과 싸운 韓의 臣智로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앞 의 책, 475쪽). 이와는 달리 고이왕은 優台-沸流系로서 優氏를 칭한 집단이며 온조-초고계를 대 신하여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쪽). 그는 16佐平 16官等制로 집약되는 백제 관제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으며, 뇌물수 수를 금지하는 禁錮法을 만들었고, 정사를 논의하는 政廳인 南堂을 설치 운영하였다. 그리고 稷山 에 자리한 마한의 맹주국인 目支國을 병합하여 중부지역에서 백제가 실질적인 영도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甲申 三 十七 三十一 吳主孫皓立 264 改元元興 二 乙酉 四 十八 三十二 魏禪于晉 西晉世祖武皇帝炎 泰始元年

183 364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二 西曆 丙戌 五 十九 三十三 丁亥 六 二十 三十四 三 267 戊子 七 二十一 三十五 四 268 己丑 八 二十二 三十六 吳改元寶鼎 五 吳改元建衡 新 羅 高 句 麗 中川王薨 西川王藥盧 中 國 西曆 二十三 甲辰 味鄒尼師今薨 十五 五十一 五 284 十六 五十二 六 285 죽고17) 責稽王18)이 七 286 儒禮尼師今卽位元年 乙巳 二 五十三 古 王이 丙午 三 十七 二十三 庚寅 九 百 濟 365 즉위한 원년이다. 二十七 六 270 卽位元年 辛卯 十 二 二十八 壬辰 十一 三 二十九 癸巳 十二 四 四十 九 273 甲午 十三 五 四十一 十 274 七 丁未 四 十八 二 八 287 戊申 五 十九 三 九 288 己酉 六 二十 四 十 八 吳改元鳳凰 272 太熙元年 庚戌 七 二十一 五 孝惠帝衷 290 永熙元年 辛亥 八 二十二 六 永平元年 291 元康元年 二十三 西川王薨 壬子 九 烽上王相夫 七 二 292 卽位元年 권30 年表 中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晉 咸寧元年 西曆 乙未 味鄒尼師今 十四 西川王 六 古 王 四十二 丙申 十五 七 四十三 二 吳改元天璽 276 丁酉 十六 八 四十四 三 吳改元天紀 277 戊戌 十七 九 四十五 四 278 己亥 十八 十 四十六 五 279 吳改元天冊 275 太康元年 庚子 十九 十一 四十七 吳主降於晉 280 吳四主五十九年 辛丑 二十 十二 四十八 二 281 壬寅 二十一 十三 四十九 三 282 癸卯 二十二 十四 五十 四 283 癸丑 十 二 八 三 293 甲寅 十一 三 九 四 294 乙卯 十二 四 十 五 295 丙辰 十三 五 十一 六 296 丁巳 十四 六 十二 七 297 죽고 汾西王20)이 八 ) 十三 責稽王 이 十五 戊午 儒禮尼師今薨 基臨尼師今卽位元年 七 즉위한 원년이다. 17) 古 王이 죽고 : 본서 고이왕의 재위 기간이 53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甲寅立 理五 十二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18) 責稽王 : 백제 제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고이왕의 아들로 靑稽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고이왕의 아들이다. 靑替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丙午年(286)에 즉 위하여 12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이는 責과 靑, 替와 稽가 字形이 비슷한 데서 빚어진 착오 로 생각된다.

184 366 新 羅 己未 二 高 句 麗 八 百 濟 中 國 二 九 西曆 299 烽上王薨 美川王乙弗 三 永康元年 300 卽位元年 辛酉 四 二 四 永寧元年 301 壬戌 五 三 五 太安元年 302 癸亥 六 四 六 二 303 七 21) 甲子 七 五 汾西王이 죽고 22) 比流王 이 즉 위한 원년이다. 永安元年 建武元年 高 句 麗 百 濟 西曆 十一 七 四 310 辛未 二 十二 八 五 311 壬申 三 十三 九 六 312 癸酉 四 十四 十 甲戌 五 十五 十一 二 314 乙亥 六 十六 十二 三 315 訖解尼師今卽位元年 孝愍皇帝 建興元年 313 四 304 永興元年 中 國 十三 庚午 基臨尼師今薨 九 庚申 三 新 羅 丙子 七 十七 十三 前趙劉曜陷長安愍帝 明年爲劉聰所殺 316 乙丑 八 六 二 丙寅 九 七 三 丁卯 十 八 四 永嘉元年 307 戊辰 十一 九 五 二 308 戊寅 九 十九 十五 太興元年 318 己巳 十二 十 六 三 309 己卯 十 二十 十六 二 319 庚辰 十一 二十一 十七 三 320 辛巳 十二 二十二 十八 四 321 壬午 十三 二十三 十九 永昌元年 322 癸未 十四 二十四 二十 甲申 十五 二十五 二十一 乙酉 十六 二十六 二十二 丙戌 十七 二十七 二十三 咸和元年 326 丁亥 十八 二十八 二十四 二 327 戊子 十九 二十九 二十五 三 328 己丑 二十 三十 二十六 四 329 庚寅 二十一 三十一 二十七 五 330 二 光熙元年 孝懷帝熾 西晉四主五十二年 ) 責稽王이 죽고 : 본서 책계왕의 재위 기간은 13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丙午立 理十 二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20) 汾西王 : 백제 제1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책계왕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책계왕의 아들이다. 무오년(298)에 즉위하여 6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낙랑 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당하였다. 21) 汾西王이 죽고 : 본서 분서왕의 재위기간은 7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戊午立 治六 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 차이가 있다. 22) 比流王 : 구수왕의 제2자로서 재위기간은 년이다. 사반왕의 동생인데, 분서왕이 피살 된 후 國人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구수왕의 둘째 아들로서 사 반왕의 동생이다. 갑자년(304)에 즉위하여 40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후일 내신좌평 優福 의 반란을 평정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眞氏세력과 결합하여 지배기반을 확대하였다. 비류왕의 즉위를 분서왕의 불의의 죽음으로 인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고이계와 전 직계였던 초고계가 다 투다가 초고계가 승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노중국, 1978, 백제왕실의 남천과 지배세력의 변천, 한국사론 4, 55~56쪽). 五 丁丑 八 十八 十四 東晉中宗元皇帝睿 317 建武元年 肅宗皇帝紹 永寧元年 二 三 顯宗皇帝衍

185 368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三十二 辛卯 二十二 美川王薨 故國原王斯由 新 羅 乙巳 三十六 二十八 六 高 句 麗 十五 二 中 國 西曆 永和元年 345 二 346 三 331 丙午 三十七 卽位元年 百 濟 十六 契王이 죽고25) 近肖 古王26)이 즉위한 원 壬辰 二十三 二 二十九 七 332 癸巳 二十四 三 三十 八 333 丁未 三十八 十七 二 三 347 甲午 二十五 四 三十一 九 334 戊申 三十九 十八 三 四 348 乙未 二十六 五 三十二 咸康元年 335 己酉 四十 十九 四 五 349 丙申 二十七 六 三十三 二 336 庚戌 四十一 二十 五 六 350 丁酉 二十八 七 三十四 三 337 辛亥 四十二 二十一 六 七 351 戊戌 二十九 八 三十五 四 338 任子 四十三 二十二 七 八 352 己亥 三十 九 三十六 五 339 庚子 三十一 十 三十七 六 340 辛丑 三十二 十一 三十八 七 341 八 壬寅 三十三 十二 三十九 癸卯 三十四 十三 四十 十四 四十一 比流王이 죽 二 고23) 契王24)이 孝宗穆皇帝 즉위한 원년 이다. 甲辰 三十五 康皇帝岳 建元元年 ) 比流王이 죽고 : 본서 비류왕의 재위 기간은 41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甲子立 治四 十年 으로 나오며 1년 차이가 있다. 24) 契王 : 백제 제1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갑진년(344)에 즉위하여 2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계왕에 대해서 즉위년 기사와 흉년 기사밖에 없다. 그러나 본서 권32 잡지 祭祀 高句麗 百濟祀禮에는 계왕 2년에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에 제사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류왕이 죽은 후 고이계의 계왕이 즉위한 사실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이에 대해 실제 계왕이 재위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계왕은 근초고왕대에 국사를 편찬하면서 360년마다 국가의 흥 운을 맞이한다는 漢나라 楊雄이 찬한 太元經 계통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국 연대를 근초고왕 대를 기준으로 360년 이전으로 잡으면서 뒤에 와서 삽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金哲埈, 369 년이다.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49 50쪽). 반면 계왕이 초고왕에 의하여 살해되었거나 아니면 일시 근초고왕과 양립하다가 재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권오영, 1995, 백제의 성 립과 발전,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37쪽). 25) 契王이 죽고 : 본서 계왕의 재위 기간은 3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甲戌立 理二年 이 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시차가 있다. 26) 近肖古王 : 백제 제1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비류 왕의 둘째 아들이다. 丙午年(346)에 즉위하여 29년간 다스렸다. 辛未年(371)에 도읍을 北漢山으 로 옮겼다. 로 되어 있다. 근초고왕의 명칭은 肖古王에 近 字를 앞에 붙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근 초고왕이 초고계의 왕통을 이었다고 하는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일본 사서에는 近速古王 新撰姓氏錄 右京 ( 諸蕃 下 百濟) 肖古王 速古王 日本書紀 권9 ( 神功紀 55년 및 권19 흠 명기 2년) 照古王 古事記 中卷 ( 應神天王)으로 나오는데, 모두 근초고왕을 지칭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9 欽明紀 2년조에 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貴須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 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라 하여 聖王(聖明王)이 近肖古王과 近仇首王을 速古王 과 貴須 王 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近肖(速)古王 近仇(貴)須王 이라는 호칭이 생긴 것이 성왕 이후임 을 알게 해준다(李根雨, 1994,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4쪽). 또한 중국사서인 晉書 권9 帝紀 簡文帝 咸安 2년(372, 근 초고왕 27)조에는 餘句 로 나온다. 이 餘句의 餘 는 백제의 王姓인 扶餘의 약칭이고, 句 는 근 초고의 古 와 음이 상통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사서에 백제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처음 이다. 그는 재위 중 고구려와는 옛 대방 지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대립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書記 라고 하는 국사를 편찬하여 왕실 중심의 역사 체계를 만들었고, 倭에 論語 와 千字文 을 전수해 주기도 하였다.

186 370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癸丑 四十四 二十三 八 九 353 丙子 二十一 六 二 太元元年 376 甲寅 四十五 二十四 九 十 354 丁丑 二十二 七 三 二 377 乙卯 四十六 二十五 十 十一 355 戊寅 二十三 八 四 三 378 己卯 二十四 九 五 四 379 庚辰 二十五 十 六 五 380 辛巳 二十六 十一 七 六 381 四十七 丙辰 訖解尼師今薨 二十六 十一 十二 356 奈勿尼師今卽位元年 丁巳 二 二十七 十二 升平元年 357 壬午 二十七 十二 八 七 382 戊午 三 二十八 十三 二 358 癸未 二十八 十三 九 八 383 己未 四 二十九 十四 三 359 四十 十 庚申 五 三十 十五 四 360 小獸林王薨 近仇首王이 죽고29) 九 384 五 辛酉 六 三十一 十六 任戌 七 三十二 十七 隆和元年 362 癸亥 八 三十三 十八 興寧元年 363 甲子 九 三十四 十九 二 364 乙丑 十 三十五 二十 三 廢帝海西公 365 丙寅 十一 三十六 二十一 太和元年 366 丁卯 十二 三十七 二十二 二 467 戊辰 十三 三十八 二十三 三 368 己巳 十四 三十九 二十四 四 369 庚午 十五 四十 二十五 五 370 哀皇帝丕 361 四十一 辛未 十六 古國原王薨 小獸林王丘夫 二十六 簡文皇帝 咸安元年 371 卽位元年 任申 十七 二 二十七 二 372 孝武皇帝曜 373 癸酉 十八 三 二十八 寧康元年 甲戌 十九 四 二十九 二 374 五 三十 近肖古王이 죽고27) 近仇首 三 王28)이 즉위한 원년이다. 375 乙亥 二十 甲申 二十九 故國壤王伊連 枕流王30)이 즉위한 卽位元年 371 원년이다. 27) 近肖古王이 죽고 : 본서 근초고왕의 재위 기간은 30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丙午立 理二十九年 으로 나와 본 기사와는 1년의 시간차가 있다. 28) 近仇首王 : 백제 제14대 왕으로, 근초고왕의 장자이며, 재위기간은 년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乙亥年(375)에 즉위하여 9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근구수왕의 명칭은 仇首王에 近 字를 앞에 붙혀 만든 것인데, 이는 근초고왕이 초고왕에 近 자 를 앞에 붙혀 만든 것과 함께 肖古-仇首로 이어지는 이른바 肖古系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음 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근구수왕의 이름은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56년조에는 貴 須 로, 같은 책 권19 흠명기 2년조에는 貴首王 으로, 신찬성씨록 右京 諸蕃 下에는 近貴須 王 으로 나온다. 그리고 일본의 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七支刀 명문 중의 百濟王世 (子?)奇 生聖音 에 나오는 奇生 은 태자 근구수에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百濟七支刀考,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그의 이름 貴須는 須 로 축약되어 사용된 예가 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0년조의 臣祖須整旅電邁 라 한 기사에 나온다. 근구수왕은 태자 때부터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군사권 운용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 도 계속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하였다. 그는 내정에 대해서는 외척인 眞高道에게 정사를 위임하 고 자신은 병마권과 외교권을 관장하여 고구려와의 전투를 주도해 나갔다. 29) 近仇首王이 죽고 : 본서 근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10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癸亥立 理九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30) 枕流王 : 백제 제1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근구수왕의 장자로 어머니는 阿 부 인으로 眞氏출신 여자였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근구수왕의 아들이다. 甲申年(384)에 즉위하였다. 로 되어 있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동진으로부터 수용하여 이를 공인하였다.

187 372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二 乙酉 三十 二 枕流王이 죽고 31) 32) 辰斯王 이 즉위한 十 385 원년이다.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癸巳 三十八 二 二 十八 393 甲午 三十九 三 三 十九 394 乙未 四十 四 四 二十 395 丙申 四十一 五 五 二十一 396 丙戌 三十一 三 二 十一 386 丁亥 三十二 四 三 十二 387 丁酉 四十二 六 六 隆安元年 397 戊子 三十三 五 四 十三 388 戊戌 四十三 七 七 二 398 己丑 三十四 六 五 十四 389 己亥 四十四 八 八 三 399 庚寅 三十五 七 六 十五 390 庚子 四十五 九 九 四 400 辛卯 三十六 八 七 十六 391 辛丑 四十六 十 十 五 401 九 八 十一 十一 元興元年 402 癸卯 二 十二 十二 二 403 甲辰 三 十三 十三 三 404 義熙元年 405 壬辰 三十七 古國壤王薨 四十七 辰斯王이 죽고 34) 33) 廣開土王談德 阿莘王 이 즉위한 卽位元年 安皇帝諱德宗 373 十七 392 원년이다. 壬寅 奈勿尼師今薨 實聖尼師今卽位元年 十四 31) 枕流王이 죽고 : 본서 근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2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甲申立 이란 기사만 있고 재위 기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32) 辰斯王 : 백제 제1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침류왕의 동생으로서 뒤이어 즉위한 아신왕(392~405)의 숙부에 해당한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침류왕의 동생이다. 乙酉年(385)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에 맞서 여러 차례 싸웠으나 패배하여 관미성 등을 상실하였다. 晉書 권9 孝武帝紀 太 元 11년(386)조에는 百濟王世子餘暉 가 보이는데 太元 11년은 진사왕 3년에 해당되므로 비록 王世子 라는 표현은 있어도 餘暉는 진사왕에 비정해 볼 수 있다. 33) 辰斯王이 죽고 : 본서 진사왕의 재위 기간은 8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乙酉立 理七 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34) 阿莘王 : 백제 제17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 권 1 王曆篇에는, 또는 阿芳이라고도 한다. 진사왕의 아들이다. 壬辰年(392)에 즉위하여 13년간 다 스렸다. 라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신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세주와 삼국유사 王曆篇 에는 阿芳 으로, 일본서기 권9 신공기 攝政 65년 및 같은 책 권10 應神紀 3년조에는 阿花王 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阿華王이 옳을 것 같다.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내 왜와의 우호를 돈독히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많은 성 촌을 빼앗기고 大臣과 將士 10여 명을 인질로 보내고 細布 1천 필을 바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乙巳 四 十四 阿莘王이 죽고35) 支王36)이 즉위한 원 년이다. 丙午 五 十五 二 二 406 丁未 六 十六 三 三 ) 阿莘王이 죽고 : 본서 아신왕의 재위 기간은 14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壬辰立 治十 三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36) 支王 : 백제 18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또는 眞支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映이고, 아신왕의 아들이다. 乙巳年(405)에 즉 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전지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細注 및 日本書紀 권 10 應神紀 16년조에는 直支 로,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映 으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第十八支王 一作眞支王 名映 으로, 通典 권180 변방 1 동이 백제전에는 扶餘 으로 나온다. 아신왕 6년(397)년에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가 부왕이 죽자 9년만에 귀국하여 왕위를 찬탈한 숙 부 설례를 지지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전지왕대에는 해씨세력이 실권을 장악하였 으며, 상좌평을 설치하여 군국정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188 374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戊申 七 十七 四 四 408 己酉 八 十八 五 五 409 庚戌 九 十九 六 六 410 辛亥 十 二十 七 七 411 壬子 十一 二十一 八 八 412 二十二 癸丑 十二 廣開土王薨 新 羅 九 百 濟 辛酉 五 九 二 壬戌 六 十 三 癸亥 七 十一 四 十二 五 413 長壽王巨連卽位元年 甲寅 十三 二 十 十 414 乙卯 十四 三 十一 十一 415 丙辰 十五 四 十二 十二 416 五 十三 十三 417 六 十四 十四 恭帝德文 418 中 國 二 三 少帝義符 景平元年 西曆 二 甲子 八 九 高 句 麗 375 太宗文皇帝義隆 424 元嘉元年 乙丑 九 十三 六 二 425 丙寅 十 十四 七 三 426 十六 丁巳 實聖尼師今薨 訥祗麻立干卽位元年 戊午 二 元熙元年禪於宋 己未 三 七 十五 東晉十二主百四年 419 西秦改元建弘 庚申 四 37) 八 十六 支王이 죽고37) 宋 高 祖 武 帝 劉 久 爾 辛 王 38)이 裕 즉위한 원년이 永初元年 다. 420 支王이 죽고 : 본서 전지왕의 재위 기간은 16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乙巳立 治十 五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그런데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는 宋나라가 高 祖(武帝) 永初 원년(420)에 전지왕에게 鎭東大將軍의 작호를 준 것으로, 少帝 景平 二年(424)에 는 전지왕이 長史 張威를 보내어 조공한 것으로 나오고, 文帝 元嘉 2년(425)에는 송이 전지왕에 게 책봉을 한 기사가 나와 본 기사와 어긋난다. 한편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25년조에는 百濟 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이라 하여 응신 25년(수정연대 414)에 전지왕이 죽은 것으로 나오 나, 응신기 39년(수정연대 428)조에는 百濟直支王遣其妹新齊都媛 以令仕 라 하여 전지왕이 누 이 新薺都媛을 왜에 보낸 것으로 나오고 있는 등 異說이 분분하다. 이처럼 전지왕의 죽음과 구이 신왕의 즉위 연대에 관해서는 414년설(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25년) 420년설( 삼국사기 백 제본기 전지왕 16년 구이신왕 즉위년) 424년 이후설( 송서 백제전) 428년설( 일본서기 권 10 응신기 39년) 등 여러 사서마다 다르게 서술하고 있어서 그 사실성 여부를 놓고 논란이 제기 되고 있다. 414년설은 木滿致 전승을 토대로 구성된 데에다가 삼국사기 와 송서 백제전에 420년 이후까지 전지왕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어 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424년 이후설은 景平 2년(424)에 餘映(전지왕)이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송서 백제전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에 대해 아직 전지왕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던 중국측(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이기동, 1974, 중국사서에 보이는 백제왕 牟都에 대하여, 역 사학보 62, 24~26쪽)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428년설은 그 사실성에 의문이 제기되 어 비유왕대의 사실로 수정해보는 견해(古川政司, 1981, 5世紀後半の百濟政權と倭 -東城王卽位 事情を中心として-, 立命館文學 合輯號, 738~739쪽)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지 왕에서 구이신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어떤 정변이 확인되지 않는 한 삼국사기 기년에 따라 420년설을 그대로 취신하겠다. 38) 久爾辛王 : 백제 제1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전지왕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 1 王曆篇에는, 진지왕의 아들이다. 庚申年(420)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앞 의 주석 37)에서 본 것처럼 전지왕의 사망 연대에 대해 각 사서마다 여러 이설이 있으므로 구이신 왕의 즉위 연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서에는 구이신왕의 즉위 기사와 훙년 기사밖에 없다. 그 러나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25년(수정연대 414)조에는 木滿致가 전횡을 한 기사가 있어 당시 의 정치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에 의하면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 하자 권신 木滿致가 섭정을 한 왕모와 정을 통하고 권력을 잡아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했다는 것 이다. 여기서 왕모는 전지왕의 왕비인 八須夫人으로 보이는데, 목만치가 왕모와 통정관계를 맺고 그 권위를 배경으로 전횡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89 376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八 39) 丁卯 十一 十五 久爾辛王이 죽고 40) 毗有王 이 즉위 四 427 한 원년이다. 新 羅 高 句 麗 中 國 西曆 戊子 三十二 三十六 二十二 二十五 448 己丑 三十三 三十七 二十三 二十六 449 庚寅 三十四 三十八 二十四 二十七 450 辛卯 三十五 三十九 二十五 二十八 451 壬辰 三十六 四十 二十六 二十九 452 戊辰 十二 十六 二 五 428 己巳 十三 十七 三 六 429 庚午 十四 十八 四 七 430 辛未 十五 十九 五 八 431 任申 十六 二十 六 九 432 癸酉 十七 二十一 七 十 433 甲戌 十八 二十二 八 十一 434 乙亥 十九 二十三 九 十二 435 丙子 二十 二十四 十 十三 436 丁丑 二十一 二十五 十一 十四 437 丙申 四十 四十四 戊寅 二十二 二十六 十二 十五 438 丁酉 四十一 四十五 己卯 二十三 二十七 十三 十六 439 庚辰 二十四 二十八 十四 十七 440 辛巳 二十五 二十九 十五 十八 441 壬午 二十六 三十 十六 十九 442 癸未 二十七 三十一 十七 二十 443 甲申 二十八 三十二 十八 二十一 444 乙酉 二十九 三十三 十九 二十二 445 丙戌 三十 三十四 二十 二十三 446 丁亥 三十一 三十五 二十一 二十四 ) 久 辛王이 죽고 : 본서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은 8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庚申立 治 七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40) 毗有王 : 백제 제2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구이 신왕의 아들이다. 丁卯年(427)에 즉위하여 28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宋書 권97 열전 백 제전에는 餘毗로 나오는데, 이는 王의 이름 扶餘毗有를 중국식으로 單綴音化한 것이다. 비유왕은 7년(433)에 신라와 화친하여 이른바 濟羅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압박에 대항하였고, 왜와의 우호 관계도 지속하였다. 百 濟 377 三十 癸巳 三十七 四十一 二十七 元凶邵大初元年 453 世祖孝武皇帝駿 甲午 三十八 四十二 二十八 孝建元年 454 二 455 二 三 456 三 大明元年 457 二十九 乙未 三十九 四十三 毗有王이 죽고41) 盖鹵王42) 慶司43)가 즉위한 원년이다. 41) 毗有王이 죽고 : 본서 비유왕의 재위 기간은 29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丁卯立 治二 十八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42) 蓋鹵王 : 백제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비유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慶司이 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또는 近蓋鹵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慶司이다. 乙未年(455)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본 기사의 細注에는 왕명이 近蓋婁 로 나오는데 近 蓋婁王 은 蓋婁王에 近 자를 앞에 붙혀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는 초고왕-근초고왕, 구수왕-근 구수왕과의 관계처럼 개루왕와 蓋鹵王(近蓋婁王)과의 친연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 國遺事 王曆篇에는 近蓋鹵 로,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5년조에는 加須利君(蓋鹵王也) 으로 표기되어 있다. 개로왕은 新羅 및 北魏와 연계하여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첩자 道琳의 말에 현혹되어 국가 재정을 탕진하였고, 475년에는 그의 실정을 틈 타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가 왕도 漢城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당함에 따라 왕 자신도 포로로 잡혀 阿且城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43) 慶司 : 개로왕의 이름으로 본명은 扶餘慶司이다.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과 宋書 권6 孝武帝 紀 大明 元年(457)조에 나오는 餘慶 은 扶餘慶司 를 축약하여 표기한 것이다. 개로왕의 또다른 이름인 加須利(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5년)가 慶司를 字音으로 표기하였다는 설과 蓋鹵를 자음 으로 표기하였다는 설이 있다.

190 378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四十二 戊戌 訥祗麻立干薨 丙辰 十九 四十六 四 二 己亥 二 四十七 五 三 459 庚子 三 四十八 六 四 460 辛丑 四 四十九 七 五 461 壬寅 五 五十 八 六 462 癸卯 六 五十一 九 七 463 甲辰 七 五十二 十 八 前廢帝子業 464 永光元年 五十三 十一 景和元年 太宗明皇帝彧 465 泰始元年 丙午 九 五十四 十二 二 466 丁未 十 五十五 十三 三 467 戊申 十一 五十六 十四 四 468 己酉 十二 五十七 十五 五 469 庚戌 十三 五十八 十六 六 470 辛亥 十四 五十九 十七 七 471 壬子 十五 六十 十八 癸丑 十六 六十一 十九 元徽元年 473 甲寅 十七 六十二 二十 二 474 三 475 泰豫元年 後廢帝昱 472 二十一 乙卯 十八 六十三 盖鹵王이 죽고44) 文周王45)이 즉위 高 句 麗 六十四 한 원년이다. 44) 盖鹵王이 죽고 : 본서 비유왕의 재위 기간은 21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乙未立 治二 十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45) 文周王 : 백제 제2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개로왕의 동생이며, 곤지의 형이다. 百 濟 二 三 458 慈悲麻立干卽位元年 乙巳 八 新 羅 丁巳 二十 六十五 文周王이 죽고46) 三斤王47)이 즉위 한 원년이다. 中 國 四 379 西曆 476 五 順皇帝準 477 昇明元年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또는 文明이라고도 한다. 개로왕의 아들이다. 乙卯年(475)에 즉위 하여 도읍을 熊川(공주)으로 옮겼다. 2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 을 당하자 한성에서 왕위에 올라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러나 재위 3년에 兵官좌평 解仇에 의해 피살되었다. 문주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汶洲 (본 기사의 細注 ;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 년) 또는 文明 三國遺事 권1 ( 王曆篇)으로 나온다. 한편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 (前略) 使兼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이라 한 기사에 보이는 백제왕 牟都는 宋書 권 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輔國將軍 餘都 와 동일인이며 문주왕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기 동, 1974,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30 33쪽). 한편 문주왕 의 出自에 대해서는 본서 기사와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日本書 紀 권14 雄略紀 21년조에는 春三月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洲王 救興其國 [汶洲王蓋鹵王母弟也] 라 하여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두 설 가운데 문주가 개로왕 대에 上佐平으로 활약하였다는 점과 輔國將軍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개로 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이기백,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26쪽 ; 천관 우, 1976, 앞의 글(하), 141쪽 ; 이도학, 1984,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 究 45, 8 11쪽). 그밖에 고구려의 한성 침공(475)으로 개로왕의 직계가 단절되었던 점( 일본 서기 14 웅략 20년 冬)을 고려해 보면 개로의 아들로 보기에 다소 불합리하다. 따라서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모제라고 한 일본서기 14 웅략 21년 3월조 기사가 오히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6) 文周王이 죽고 : 본서 문주왕의 재위 기간은 4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 권30 年表 中에 의 하면 문주왕은 즉위 3년만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문제에 대 해 문주왕의 피살 시기는 연표의 것이 옳다고 하면서 본문의 四年 2字는 衍文이고 8월 이하의 귀절은 前年(3년)조에 접속시켜야 한다는 견해(이병도, 1977, 國譯, 397쪽)가 있다. 한편 문주왕의 재위기간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乙卯立 移都熊川 理二年 으로 나와 본 기사와는 2년의 차이가 있다. 三國遺事 는 踰年稱元法을 따랐으므로 실제로는 1년의 차이가 나 며, 본 기사를 3년으로 보면 서로 일치한다. 47) 三斤王 : 백제 제2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또는 三乞王이라고도 하였다. 문주왕의 아들이다. 丁巳年(477)에 즉위하여 2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문주왕의 장자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살해당한 문주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근왕

191 380 新 羅 戊午 二十一 高 句 麗 六十六 中 國 二 二 三 二十二 己未 慈悲麻立干薨 百 濟 炤知麻立干卽位元年 478 三 48) 六十七 西曆 三斤王이 죽고 49) 南齊太祖高皇帝 50) 東城王 牟大 가 道成 479 즉위한 원년이다. 建元元年 庚申 二 六十八 二 二 480 辛酉 三 六十九 三 三 481 四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七十六 十 六 488 己巳 十一 七十七 十一 七 489 庚午 十二 七十八 十二 八 490 辛未 十三 七十九 長壽王薨 十三 九 491 十 492 癸酉 十五 文咨明王羅雲 卽位元年 二 十四 十五 482 十一 廢帝鬱林王 壬戌 四 七十 四 癸亥 五 七十一 五 永明元年 483 甲子 六 七十二 六 二 484 乙丑 七 七十三 七 三 485 高宗明皇帝鸞 丙寅 八 七十四 八 四 486 建武元年 丁卯 九 七十五 九 五 487 世祖武皇帝順 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세주에는 壬乞 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三乞王 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에는 文斤王 으로 나온다. 그러나 梁書 권50 열전 백제전에는 삼근왕의 존재는 없고, 동성왕이 문주왕의 뒤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삼근왕의 단명에 따라 남제에 서 그 교체 사실을 알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8) 三斤王이 죽고 : 본서 삼근왕의 재위 기간은 3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丁巳立 理二 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1년의 시차가 있다. 49) 東城王 : 백제 제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79~501년이다. 이름은 牟大 또는 摩牟이다. 삼국유 사 권1 王曆篇에는, 이름은 牟大로 또는 麻帝 또는 餘大라고도 하였다. 삼근왕의 堂弟이다. 己 未年(479)에 즉위하여 22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조에는 末 多王으로 나온다. 웅진천도 후 南齊와 통교를 열었고, 신라에 청혼하여 혼인동맹을 맺었으며, 臨 流閣을 세우고 加林城을 축조하였다. 후에 衛士佐平 加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50) 牟大 : 동성왕의 이름. 동성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에는 牟大 摩牟 로, 남제서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牟大 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牟大 麻帝 餘大 로, 日本書紀 권14 雄略 紀 23년조와 武烈紀 4년조에는 末多王 으로 나온다. 삼국유사 의 餘大 는 왕의 姓인 扶餘氏와 왕의 이름인 牟大를 略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99쪽). 한편 고려사 권 57 志 10 지리 2 金馬郡條에 나오는 末通大王을 末多王=東城王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76, 薯童說話의 新考察,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무왕으로 보는 것이 지배 적이다. 西曆 戊辰 十 任申 十四 隆昌元年廢帝海 陵王昭文 甲戌 十六 三 十六 延興元年 494 乙亥 十七 四 十七 二 495 丙子 十八 五 十八 三 496 丁丑 十九 六 十九 四 497 戊寅 二十 七 二十 己卯 二十一 八 二十一 永元元年 499 九 二十二 二 500 永泰元年 廢帝寶卷 498 二十二 庚辰 炤知麻立干薨 智證麻立干卽位元年 二十三 辛巳 二 十 東城王이 죽고51) 武寧王52) 斯摩53)가 즉위한 원년이다. 三 和帝寶融 501 中興元年 51) 東城王이 죽고 : 본서 동성왕의 재위 기간은 23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己未立 理二 十六年 이라 하여 본 기사와 3년의 시차가 있다. 그런데 正德本 과 晩松本 등에는 理二十六 年 으로 되어 있으나 리상호본 과 權相老本 등에는 理二十二年 로 되어 있어 六 이 二 의 刊誤로 보인다. 52) 武寧王 : 백제 제24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虎寧王으

192 382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二 壬午 三 十一 二 梁高祖武皇帝衍 502 天監元年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丙戌 七 十五 六 五 506 丁亥 八 十六 七 六 507 戊子 九 十七 八 七 508 癸未 四 十二 三 二 503 己丑 十 十八 九 八 509 甲申 五 十三 四 三 504 庚寅 十一 十九 十 九 510 乙酉 六 十四 五 四 505 辛卯 十二 二十 十一 十 511 壬辰 十三 二十一 十二 十一 512 癸巳 十四 二十二 十三 十二 513 二十三 十四 十三 514 乙未 二 二十四 十五 十四 515 丙申 三 二十五 十六 十五 516 丁酉 四 二十六 十七 十六 517 戊戌 五 二十七 十八 十七 518 十九 十八 519 로 나오는데, 이는 三國遺事 의 찬자가 고려 定宗의 이름인 武를 避諱해서 虎로 고쳐 쓴 것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이름은 斯摩인데, 곧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辛巳年(501)에 즉위 하여 22년간 다스렸다. 南史 에는 이름을 扶餘隆 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隆은 곧 義慈王의 태 자이다. 唐史 에 상세히 보인다. 로 되어 있다.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 로왕 8년(462)에 태어났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할 당시에는 14세였으며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40세였고, 돌아갈 때의 나이는 62세였다. 즉위초 加의 난을 평정한 후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 였고, 중국의 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다시 强國이 되었음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무덤 은 1971년에 발굴되었는데, 塼으로 축조한 터널형 구조였다. 내부에서는 誌石 金銅冠 裝飾 木 棺 石獸 五銖錢을 비롯하여 중국제 자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 무령왕릉은 도굴되 지 않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墓誌石이 출토되어 백제사연구에 획기를 이루게 되 었다. 무령왕릉에 대해서는 문화재관리국, 1983, 武寧王陵 ; 공주대백제문화연구소 편, 1991, 무령왕릉의 연구현황과 제문제 ; 충청남도 공주대백제문화연구소 편, 1991, 백제무령왕릉 ; 이남석, 2002, 백제의 고분문화, 서경 ; 권오영, 2005, 무령왕릉, 돌베개 ; 국립공주박물관, 2006, 무령왕릉 학술대회 등을 참조할 것. 53) 斯摩 : 무령왕의 이름. 무령왕의 이름에 대한 표기는 본 기사에는 斯摩 및 隆 이라 하여 두 가 지를 전해주고 있다. 무령왕릉 출토 誌石에는 斯麻 로, 그리고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斯摩 로,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에 인용된 百濟新撰 에는 斯麻王 또는 嶋王(シマ王) 으로, 중국 측 사서인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과 南史 권79 열전 백제전에는 餘隆 으로 나온다. 餘隆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南史云名扶餘隆 誤矣 隆乃寶臧之太子 詳見唐史 라 하여 扶餘隆을 무령왕의 이름이라 한 南史 의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隆 이라는 이름을 백제 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기 위한 중국식 이름일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03쪽). 한편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조에 인용된 百濟新撰 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琨支가 임신한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다가 섬에서 낳게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嶋王(シマ王) 으로 하였다는 출생담이 나온다. 현재 일본 큐슈의 한 작은 섬인 카카라시마(加唐島)에 무령왕의 탄생지로 전하는 유적이 남아 있다. 嶋의 일본어 시마(シマ)는 斯麻와 음이 비슷하다. 한편 隅田 八幡神社 所藏 人物畵像鏡에 새겨진 명문에 나오는 斯麻念長 을 武寧王(斯摩王)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蘇鎭轍, 1994, 金石文으로 본 百濟 武寧王의 世界, 원광대 출판부). 383 十五 甲午 智證麻立干薨 法興王原宗卽位元年 二十八 己亥 六 文咨明王薨 安藏王興安卽位元年 庚子 七 二 二十 普通元年 520 辛丑 八 三 二十一 二 521 壬寅 九 四 二十二 三 522 四 523 二十三 癸卯 十 五 武寧王이 죽고54) 聖王 55) 明 56) 이 즉위한 원년이다. 54) 武寧王이 죽고 : 본서 무령왕의 재위 기간은 23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辛巳立 理二 十二年 이라 하여 본서와는 1년 차이가 있다. 무령왕이 사망한 시기에 대해 梁書 권54 백제전 에는 普通 5년(524)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 지석과 日本書紀 권17 계체기 17년조에는 52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서의 사망연대인 523년과 일치한다. 따라서 梁書 의 기록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55) 聖王 : 백제 제2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무령왕의 아들이다. 성왕의 즉위년도에

193 384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甲辰 十一 六 二 五 524 癸丑 二十 三 十一 五 533 乙巳 十二 七 三 六 525 甲寅 二十一 四 十二 六 534 丙午 十三 八 四 七 526 乙卯 二十二 五 十三 大同元年 535 丁未 十四 九 五 大通元年 527 戊申 十五 十 六 二 528 六 十四 二 536 己酉 十六 十一 七 中大通元年 529 丁巳 二十四 七 十五 三 537 庚戌 十七 十二 八 二 530 戊午 二十五 八 十六 四 538 己未 二十六 九 十七 五 539 十 十八 六 540 辛酉 二 十一 十九 七 541 壬戌 三 十二 二十 八 542 癸亥 四 十三 二十一 九 543 甲子 五 十四 二十二 十 544 二十三 十一 545 十三 辛亥 十八 安藏王薨 安原王寶延卽 九 三 二 庚申 十 四 532 대해 본 기사에는 무령왕이 죽은 해(523)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7 繼體 紀 17년(523)조에는 夏五月 百濟國王武寧薨 으로 나오고, 같은 18년(524)조에는 春正月 百濟 太子明卽位 라 하여 524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1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편에 는 第二十六 聖王 名明 虎寧王子 癸巳立 이라 하여 계사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계사년은 513년으로 武寧王 13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취신할 수 없다. 이 계사년은 523년인 癸卯年의 잘 못일 것이다. 성왕은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고 6좌평 16관등제 등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또 5方-郡-城(縣)의 구조를 갖는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謙益이 인도 로부터 가지고 온 律部를 번역하여 백제 戒律을 확립함으로써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렇게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29년(551)에 신라군 가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강 하류의 6군을 회 복하였으나, 성왕 31년(553)에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성왕은 32년(554)에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 다. 성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1, 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 한국고대사 연구 4, 75~103쪽을 참조할 것. 56) 明 : 성왕의 이름. 성왕의 이름 표기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 삼국유사 권1 王曆篇, 梁書 권54 百濟傳,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18년조에는 모두 明 으로 나온다. 그리고 일본서기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明王 으로, 16년조에는 聖明王 또는 聖王 으로 표기되 어 있다. 이중 聖王 또는 明王 은 聖明王을 약칭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성왕은 그 인물됨이 지 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생존시에 특별히 聖王이라 불 렀다고 한다. 성왕은 불교를 숭상하여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전륜성왕의 역할에 비의한 데에서 성 왕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二十三 始稱建元元年 二十七 531 位元年 壬子 十九 丙辰 法興王薨 眞興王 麥宗卽位 元年 十五 乙丑 六 安原王薨 陽原王平成卽位元年 丙寅 七 二 二十四 中大同元年 546 丁卯 八 三 二十五 太淸元年 547 戊辰 九 四 二十六 二 548 己巳 十 五 二十七 庚午 十一 六 二十八 三 太宗簡文皇帝網 太寶元年 二 辛未 十二 改元開國 七 二十九 豫章王棟天正元年 僞漢侯景帝太始元 551 年世祖孝元帝繹 任申 十三 八 三十 承聖元年 552 癸酉 十四 九 三十一 二

194 386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三十二 甲戌 十五 十 聖王이 죽고 德王 威 三 59) 昌 이 즉 敬黃帝方智 554 己卯 二十 위한 원년이다. 十一 二 正陽侯天成元年 555 紹泰元年 丙子 十七 十二 三 太平元年 556 陳高祖武皇帝覇 丁丑 十八 十三 四 先 557 永定元年 戊寅 十九 十四 五 中 國 西曆 陽原王薨 平原王陽成卽 六 三 世祖文皇帝 559 位元年 四 乙亥 十六 百 濟 十五 57) 58) 高 句 麗 二 558 庚辰 二十一 二 七 天嘉元年 560 辛巳 二十二 三 八 二 561 壬午 二十三 四 九 三 562 癸未 二十四 五 十 四 563 甲申 二十五 六 十一 五 564 乙酉 二十六 七 十二 六 565 丙戌 二十七 八 十三 丁亥 二十八 九 十四 十 十五 己丑 三十 十一 十一 十六 569 庚寅 三十一 十二 十二 十七 570 辛卯 三十二 十三 十三 十八 571 十四 十四 十九 572 癸巳 三十四 十五 十五 二十 573 甲午 三十五 十六 十六 二十一 574 乙未 三十六 十七 十七 二十二 575 十八 十八 二十三 576 丁酉 二 十九 十九 二十四 577 戊戌 三 二十 二十 二十五 578 二十一 二十一 二十六 579 二十二 二十二 二十七 580 戊子 57) 聖王이 죽고 : 본서 성왕의 재위 기간은 32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癸巳立 理三十一 年 이라 하여 본서와 1년의 시차가 있다. 58) 威德王 : 백제 제27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昌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 篇에는, 이름은 昌 또는 明이다. 甲戌年(554)에 즉위하여 44년간 다스렸다. 로 되어 있다 년 부여 陵山里에서 발견된`창왕명석조사리감a과 2007년에 발견된`창왕명사리기a에 새겨진 銘 文에는 昌王으로 나온다. 이는 성왕과 같이 백제의 왕이 생존시에는 이름으로 불리운 것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4년 10월조에 餘昌이 고구려군과 百合野塞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나이가 29살이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그는 성왕 즉위초인 523~525경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왕의 아들 여창은 신라가 濟羅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자 신라 공격을 주장하였고, 성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군을 일으키자 최선봉에 나가 싸웠다. 그러나 554년 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군이 패배하여 성왕은 전사하였고, 餘昌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왔다. 즉위 후 그는 중국의 남북조에 등거리 외교를 전개하였고, 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발빠르게 수에 접근하는 외교적 기민성도 발휘하였다. 위덕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0, 百濟 威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格, 百濟硏究 21 및 2007, 위덕왕의 즉위와 집권세력의 변화, 사비도읍기의 백제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김수태, 2004, 백 제 위덕왕의 정치와 외교, 한국인물사연구 2호, 한국인물사연구소, 167쪽 등을 참조할 것. 59) 昌 : 위덕왕의 이름. 위덕왕의 이름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昌 또는 明 으로 나온다. 그러나 明 은 성왕의 이름이므로 이는 착오인 듯하다. 한편 周書 百濟傳과 隋書 百濟傳에는 昌 으로,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餘昌 으로 나온다. 그리고`창왕명석조사리감a과 `창왕명사리기a에는 昌王 으로 나온다. 壬辰 二十九 改元大昌 三十三 改元鴻濟 天康元年 廢帝伯宗 光大元年 二 高宗孝宣皇帝頊 三十七 丙申 眞興王薨 眞智王金輪卽位元年 四 己亥 眞智王薨 眞平王白淨卽位元年 庚子 二 387

195 388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新 羅 高 句 麗 十三 辛丑 三 二十三 二十八 隋高祖文皇帝楊堅 581 壬寅 四 二十四 二十九 癸卯 五 二十五 三十 至德元年 583 二十六 三十一 二 584 乙巳 七 二十七 三十二 三 585 丙午 八 二十八 三十三 四 586 丁未 九 二十九 三十四 禎明元年 587 戊申 十 三十 三十五 二 588 己酉 十一 三十一 三十六 甲辰 六 改元建福 庚戌 十二 後主叔寶 三 陳氏滅 三十二 平原王薨 陽王元卽位 三十七 隋開皇十年 590 辛亥 十三 元年 壬子 十四 二 三十八 十一 591 癸丑 十五 三 三十九 十二 592 甲寅 十六 四 四十 十三 593 乙卯 十七 五 四十一 十四 594 丙辰 十八 六 四十二 十五 595 丁巳 十九 七 四十三 十六 596 八 四十四 十七 597 十八 598 十九 599 四十五 戊午 二十 九 威德王이 죽고60) 惠王61) 季62)가 즉 위한 원년이다. 二 己未 二十一 十 惠王이 죽고63) 法 王64) 宣65)이 즉위 한 원년이다. 中 國 西曆 二 開皇元年 十四 百 濟 389 庚申 二十二 十一 法王이 죽고66) 武 王67) 璋68)이 즉위 二十 600 한 원년이다. 60) 威德王이 죽고 : 본서 위덕왕의 재위 기간은 45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甲戌立 理四 十四年 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61) 惠王 : 백제 제28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성왕의 아들이고 위덕왕의 동생이다. 본 기사에는 이름은 季 로 나오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季 또는 獻王 으로 나온다. 일본서 기 권19 흠명기 16년조에는 惠 로 나온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이름은 季로 또는 獻王 이라고도 한다. 위덕왕의 아들이다. 戊午年(598)에 즉위하였다. 로 되어 있다. 그런데 隋書 권 81 열전 百濟傳과 翰苑 百濟條에는 惠王의 존재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위덕왕 다음에 法王(宣) 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혜왕이 단명하여 그의 在位 사실이 중국에 곧 바로 전해 지지 않아 누락된 것이 아닐까 한다. 62) 季 : 혜왕의 이름이다. 본 기사에는 이름은 季 로 나오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季 또는 獻 王 으로 나오고,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6년조에는 惠 로 되어 있다. 63) 惠王이 죽고 : 본서 혜왕의 재위 기간은 2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戊午立 으로만 되 어 있다. 64) 法王 : 백제 제2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宣이다. 65) 宣 : 법왕의 이름으로, 孝順이라고도 하였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名孝順 又宣 으로, 隋 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餘宣으로 나온다. 66) 法王이 죽고 : 본서 법왕의 재위 기간은 2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己未立 으로만 되 어 있다. 67) 武王 : 백제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이름은 璋이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 에는, 또는 武康 또는 獻丙이라고도 하였다. 또 어릴 때의 이름은 一耆篩德이라고도 한다. 경신 년(600)에 즉위하여 41년간 다스렸다. 로 나온다. 그런데 三國遺事 권2 紀異篇 武王條에는 武 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이라 하여 무왕이 武康王으로도 기록된 것을 전하면서 찬자인 一然은 무강왕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三國遺事 권1 王曆篇 무왕 조에는 무왕의 이름이 武康 으로 나오고 있다. 또 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 에는 百濟武廣王遷 都 以貞觀 十三年(639) 이라 하여 무광왕이 보인다. 정관 13년은 백제 무왕 40년에 해당되므로 무왕은 무광왕으로도 표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武康王의 康 은 武廣王 의 廣 과 字形이나 音韻上에서 통하므로 무강왕=무광왕=무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무강왕은 생시의 이름으로 왕을 칭한 것이라 할 것이며, 삼국유사 의 찬자가 무강왕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196 390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辛酉 二十三 十二 二 仁壽元年 601 壬戌 二十四 十三 三 二 602 癸亥 二十五 十四 四 三 603 甲子 二十六 十五 五 乙丑 二十七 十六 六 大業元年 丙寅 二十八 十七 七 丁卯 二十九 十八 戊辰 三十 十九 四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二十九 戊寅 四十 陽王薨 十九 榮留王建武卽位元年 中 國 唐高祖神堯皇帝淵 武德元年 西曆 618 己卯 四十一 二 二十 二 619 庚辰 四十二 三 二十一 三 辛巳 四十三 四 二十二 四 621 二 606 壬午 四十四 五 二十三 五 622 八 三 607 癸未 四十五 六 二十四 六 623 九 四 608 甲申 四十六 七 二十五 七 624 乙酉 四十七 八 二十六 八 625 煬皇帝廣 604 九 丙戌 四十八 권31 年表 下 新 羅 己巳 三十一 九 二十七 太宗文武大聖皇帝 626 世民 高 句 麗 二十 百 濟 中 國 十 五 西曆 609 丁亥 四十九 十 二十八 貞觀元年 627 戊子 五十 十一 二十九 二 628 己丑 五十一 十二 三十 三 629 眞平王 陽王 武王 隋大業 庚寅 五十二 十三 三十一 四 630 庚午 三十二 二十一 十一 六 610 辛卯 五十三 十四 三十二 五 631 辛未 三十三 二十二 十二 七 611 五十四 任申 三十四 二十三 十三 八 612 十五 三十三 六 632 癸酉 三十五 二十四 十四 九 613 甲戌 三十六 二十五 十五 十 614 癸巳 二 十六 三十四 七 633 乙亥 三十七 二十六 十六 十一 615 甲午 三 改元仁平 十七 三十五 八 634 丙子 三十八 二十七 十七 十二 616 乙未 四 十八 三十六 九 635 丙申 五 十九 三十七 十 636 丁酉 六 二十 三十八 十一 637 戊戌 七 二十一 三十九 十二 638 己亥 八 二十二 四十 十三 639 庚子 九 二十三 四十一 十四 640 十五 641 十三 丁丑 三十九 二十八 十八 恭皇帝 617 義寧元年 68) 璋 : 무왕의 이름.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或云武康 獻丙 或小名一耆篩德 으로, 같은 책 권2 紀異篇 武王條에서는 武王名璋 이라 하면서 어릴 때 마를 캐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薯童 이라 한 것도 전하고 있다. 한편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120 열전 백 제전에는 扶餘璋 으로 나온다. 壬辰 眞平王薨 善德王德曼卽位元年 四十二 辛丑 十 二十四 武王이 죽고69) 義 慈王70)이 즉위한 원년이다. 391

197 392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二十五 壬寅 十一 榮留王薨 二 十六 642 寶藏王卽位元年 新 羅 高 句 麗 百 濟 中 國 西曆 乙卯 二 十四 十五 六 655 丙辰 三 十五 十六 顯慶元年 656 丁巳 四 十六 十七 二 657 癸卯 十二 二 三 十七 643 丙辰 三 十五 十六 顯慶元年 656 甲辰 十三 三 四 十八 644 丁巳 四 十六 十七 二 657 乙巳 十四 四 五 十九 645 戊午 五 十七 十八 三 658 丙午 十五 五 六 二十 646 己未 六 十八 十九 四 659 과 함께 백제를 치니 五 660 十六 丁未 善德王薨 二十 六 七 二十一 眞德勝曼王卽位元年 戊申 二 庚申 七 七 八 八 九 九 十 辛亥 五 十 十一 二 651 壬子 六 十一 十二 三 652 癸丑 七 十二 十三 四 653 改元太和 己酉 三 庚戌 四 始行中國正朔 唐將 蘇定方이 신라인 647 二十二 二十三 高宗大聖孝皇帝治 永徽元年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648 백제는 31왕으로 678 년만에 멸망하였다 八 眞德王薨 甲寅 太宗王春秋卽位元年 十三 十九 後百濟 甄萱이 왕 壬子 六 景福元年 892 二 二 893 甲寅 八 三 乾寧元年 894 乙卯 九 四 二 895 丙辰 十 五 三 896 六 四 897 戊午 二 七 光化元年 898 己未 三 八 二 899 庚申 四 九 三 900 으로 자칭하였다. 七 癸丑 知中國改年號 十四 五 654 從此已下眞骨 69) 武王이 죽고 : 본서 무왕의 재위 기간은 42년인데,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庚申立 理四十一 年 으로 되있어 본서와 1년의 차이가 있다. 70) 義慈王 : 백제 제31대 왕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재위기간은 년이다. 무왕의 맏아 들로 무왕 33년(632)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삼국유사 권1 王曆篇에는, 무왕의 아들이다. 辛丑 年(641)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 로 나온다. 이 왕대에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는 없 고 이름으로 된 왕호만 남았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海東曾子로까지 칭송을 받기도 하였지만, 말년에 사치와 귀족들의 내분으로 통치체제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또 빈번한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움에 빠졌다. 결국 660년 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였다. 의자왕은 당에 항복을 한 후 태자 왕자 및 대신들, 그리고 백성 1만 2천여 명과 함께 당에 포로로 잡혀가 곧바로 그곳에서 병사했다. 爲景福二年 十一 丁巳 眞聖王禪位太子薨于後宮 393 孝恭王嶢卽位元年 辛酉 五 弓裔自稱王 十 天復元年 901 壬戌 六 二 十一 二 902 癸亥 七 三 十二 三 903

198

199 396 권32 雜志 1 祭祀 樂 제사1) 고구려 백제의 제사 의례는 분명치 않다. 다만 古記 및 중국 사서에 실려 있는 것을 상 고하여 적어둘 뿐이다. (중략) 冊府元龜 2)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네 철의 가운데 달(四仲之月)3)에 왕이 하늘4)과 五帝의 신5)에게 제사를 1) 제사 : 백제는 다른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여러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는 왕권의 정통성을 확인시키고 또한 국가의 위신을 과신하는 수단에서였다. 백제의 국가제사로서 기록상 확인되는 것이 祭天祀地, 동명묘와 국모에 대한 제사, 五帝神 제사, 산천에 대한 제사 등이 있었다. 이러한 국가제사는 국가의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백제의 국가제사에 대 한 연구로는 차용걸, 1978,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 韓國學報 11, 일지사 ; 井上秀 雄, 1978, 古代朝鮮史序說 -王者と宗敎-, 東出版寧樂社 ; 김두진, 1999, 한국고대의 건국신화 와 제의, 일조각 ; 박승범, 2003, 한성시대 백제의 국가제사, 선사와 고대 19 ; 서영대, 2000, 백제의 오제신앙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20, 서경문화사 ; 노중국, 2004, 백제 제 의체계 정비와 그 변화, 계명사학 15 ; 최광식, 2006, 백제의 신화와 제의, 주류성 등을 참조 할 것. 2) 冊府元龜 : 중국 송나라 眞宗 景德 2년(1005)에 王欽若 揚億 등이 칙명을 받아 찬술하기 시작하 여 大中祥符 6년(1013)에 완성한 당시 최대의 역사 백과전서이다. 전체 31部 1,000권으로 되어 있 는데, 太平御覽 太平廣記 文苑英華 와 함께 宋代 4大 部書로 칭하여진다. 古代로부터 五代 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정치에 관한 사적을 帝王部에서 外臣部에 이르기까지 31개 부문으로 분류 列記하였다. 3) 네 철의 가운데 달(四仲之月) : 四季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가운뎃 달, 즉 음력 월 을 말한다. 이는 禮記 祭統篇에 무릇 제사는 四時에 지낸다고 한 四時 와 같은 것이다. 네 계절 [四時]은 春夏秋冬의 四季를 가리킨다. 禮記 祭統篇에, 凡祭有四時 春祭曰 夏祭曰 秋祭曰嘗 冬祭曰烝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四時의 제사는 각 계절의 가운뎃 달, 즉 春二月, 夏 五月, 秋八月, 冬十一月에 지냈다. 그러나 본서 백제본기의 天地祭祀 관련 기사에는 봄 정월에 제 사지낸 것이 7회, 봄 2월과 겨울 10월에 제사를 지낸 것이 각 2회로 나타나서, 四仲之月에 제사를 지낸다는 중국 계통 기록과 차이가 난다(車勇杰, 1978, 앞의 글, 2 5쪽). 4) 祭天 : 한국 고대의 천신은 전지전능한 우주 만물의 주재자로서 끊임없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점 에서 생명력을 가진 신앙 대상이었다. 그리고 가족과 부하를 거느린 인격신으로 기능해 왔다. 한국 고대의 천신은 시조와 혈연적 관계에 있으며 시조계보의 연장선상의 정점에 천신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여 권력 정당화의 논리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경우 왕조의 시조는 有德者로서 天에 의해 397 선택되어 천명을 받아 왕조를 개창한다는 점에서 의제적인 관계를 가진 것과는 다른 점을 보여주 고 있다. 또한 한국 고대의 제천의례는 시조와 천신이 혈통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오로지 천신만을 위한 제사라기보다 조상의례적인 성격을 겸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제천의례를 거행함 으로써 왕권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제에서는 국가제사의 일환으로 시조 온조왕대부터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음이[祭天祀地] 본서 백제본기를 통해 모두 11건이 확 인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郊祀와 같은 것으로 보고 중국 제사의례를 수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井上秀雄, 1978, 高句麗 百濟の祭祀儀禮, 古代朝鮮史序說 -王者と宗敎, 東出版寧樂 社), 여러 점에서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백제에서는 중국의 天地合祀와 分祀가 시기마다 달리 나타난 것과는 달리 국가 제사로서 시종 하늘에 대한 제사와 땅에 대한 제사가 함께 거행되는 천지 합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행사가 즉위초에 이루어졌고 또한 국왕이 친히 제사를 주 제한다는 점에서 대내적 갈등 극복과 왕권의 정당화를 도모하려는 즉위의례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사의 장소는 제사 때마다 새로 건설되는 노천의 大壇에서 행해졌는데, 그 위치는 왕 도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南壇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제천사지 행사를 전후로 하여 동명왕 제사 와 중신 임명, 그리고 大赦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받는 동시에 국왕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 립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백제 왕실의 제천사지 행사는 동성왕대를 끝으로 사료상에 보이지 않는데 사비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와 불교 수용 등에 따라 새로운 사전체계가 마련된 데에 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제천사지에 대해서는 차용걸, 1978, 백제의 제천사지와 정치 체제의 변화, 한국학보 11, 일지사 ; 서영대, 2000, 백제의 오제신앙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 연구 20, 서경문화사 및 2007, 백제의 천신숭배, 백제의 제의와 종교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 서 13,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35~154쪽 등을 참조할 것. 5) 五帝의 신 : 四郊 및 明堂의 五方에 있는 다섯 명의 天帝를 말한다. 五帝는 중국의 제례에 나오는 다섯 神으로서, 周禮 地官篇 大司徒條와 같은 책 天官篇 大宰條의 祀五帝 의 해석을 둘러싸고, ①鄭玄(127~200)의 天帝說, 즉 東方靑帝 南方赤帝 中央黃帝 西方白帝 北方黑帝를 가리킨다 는 설과, ②王肅(195~256)의 人帝說, 즉 少昊金天氏 頊頊高陽氏 帝 高辛氏 唐堯 虞舜을 가 리킨다는 설이 있다. 중국 국가 제사의 변천에 대해서는 金子修一, 1979, 魏晉より隋唐に至る郊 祀 宗廟の制度について, 史學雜誌 88-10, 22~63쪽 및 1996, 北魏における郊祀 宗廟の祭 祀について, 山梨大學敎育學部硏究報告 47, 11~22쪽을 참조할 것. 백제의 오제신앙은 天과 함 께 4仲月에 제사를 하는 점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중국의 예법을 수용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 지석에서 나타난 복상 기간이 정현설에 따라 27개월이었던 점, 그리고 講禮博士 陸 가 양나라로부터 건너왔던 점 등이 이를 입증해 준다. 육후는 백제의 파견 요 청에 따라 양으로부터 건너 온 시기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540~550년대 전반기로 추측되는 성왕 대(523~554) 후반기로 볼 수 있다(이기동, 1990, 백제국의 정치이념에 대한 일고찰 -특히 주례 주의적 정치이념과 관련하여-, 진단학보 69, 177쪽 ; 조경철, 2000, 백제 성왕대 유불정치이 념 -육후와 겸익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5, 서문문화사, 13쪽). 육후는 崔靈恩이 주석한 三禮義宗 을 어려서부터 익혔으며, 진나라에서 尙書祠部郞中을 역임한 祭禮의 전문가였다. 백제 는 538년 사비천도를 단행하여 새로운 국가체제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그 일환으로 祀典의 개편이

200 398 7) 지낸다. 그 시조 仇台의 廟6)를 나라의 도성에 세우고 일년에 네 번 제사지냈다. 고 399 8) 하였다. <* 海東古記 를 살펴보니 어떤 곳은 시조가 東明 이라 하고 어떤 곳은 시 조가 優台 라 하였으며, 北史 및 隋書 는 모두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어 帶方에 9) 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시조가 仇台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서 나라를 세웠다.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사전의 개편은 바로 백제의 국가제사의 변화를 뜻하는데, 천신(天과 五 帝) 地祗(三山 五岳) 人鬼(仇台廟)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러한 사전 개편으로 인해 전통적인 제천사지는 동성왕 2년(489) 1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사 비천도를 전후로 하여 전통적인 天地合祭를 하늘과 오제에 대한 제천으로 대체함으로써 왕권 강화 를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영대, 2007, 백제의 천신숭배, 백제의 제의와 종교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3,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54~184쪽 등을 참조할 것. 6) 仇台의 廟 : 仇台를 主神으로 모신 백제왕실의 사당을 말한다. 동명묘 배알기사는 전지왕 2년 (406)을 끝으로 사서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웅진 남천 이후에 등장하는 구태묘와는 별개의 존재 로 볼 수 있다. 백제측의 자료에는 시조 仇台라는 인물과 仇台廟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 으나, 중국측의 史書인 周書 隋書 北史 의 百濟傳과 冊府元龜 外臣部 土風 百濟國條에는 이 관계 기사가 나타나며, 그 중에서도 隋書 北史 冊府元龜 에는 仇台廟가 백제의 도성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구태의 실체에 대해 ①仇台를 구이 로 읽어 백제의 제8대 古爾王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76쪽) ②비류 중심의 건 국설화에 보이는 優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 143쪽), ③구태를 수장이란 일반 명사로 보는 견해(김철준, 1975,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30쪽) 등이 있다. 한편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라 하여 시조 仇台廟에 대한 기사가 나 온다. 이 仇台廟를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에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 단의 종묘로 파악하는 견해(노명호, 1981, 앞의 글, 68~83쪽)와 온조설화와 구태설화는 동일 계통 의 시조전승이라는 견해(임기환, 1998, 백제시조전승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백제연구 28, 15~17쪽)가 있으나 그 생성 배경이나 양자를 병립시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구태묘의 대두는 고구려와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백제의 또다른 시조로 주장되는 주서 권49 백제전에 나오는 구태가 건국한 지역이 대방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백제가 고구려와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 다툼에서 구태의 시조설을 내세워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현혜, 1991, 마한 백제국 의 형성과 지배집단의 출자, 백제연구 22, 24~25쪽), 대방고지가 백제지역을 지칭하는 포괄적 인 표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박찬규, 2003, 백제의 시조전승과 출자, 선사와 고대 19, 48쪽) 백제측에서 부여와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여출자설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정재윤, 2007, 백제 건국의 주체세력과 그 계통,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경문화사, 55~61쪽). 그 리고 구태묘의 성격에 대해서는 온조계 백제 왕실의 종묘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왕이 사비 천도를 단행한 이후에 체제 정비 과정의 일환으로 구태묘의 예법과 격식을 정비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양기석, 1990, 백제전제왕권성립과정연구, 단국대박사학위논문, 153~154쪽). 구태묘 는 사비시대에 무령왕계를 중심으로 한 왕실내 소가계집단이 그들 조선을 받드는 제례를 실질적으 로 국가 종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동명이 시조임은 그 사적이 명백하며, 그 나머지의 것은 믿을 수 없다.10)> 11) 에 이르기를, 古記 온조왕 20년(A.D.2) 봄 2월에 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냈으며,12) 38년 7) 백제는 매년 네 번 제사지냈다 : 이 귀절은 冊府元龜 권959 外臣部 土風 百濟國條에서 발췌 인용한 것으로서, 원문과 꼭 같다. 다만 冊府元龜 의 해당인용구 말미에는 仇台爲遼東太守公孫 度之壻 라는 細注가 붙어 있다. 책부원귀 의 이 인용구는 隋書 권81 東夷傳 百濟傳의 것과 字句 가 그대로 일치하며, 周書 권49 異域傳 百濟傳과 北史 권94 列傳 百濟傳에도 같은 내용이 字 句만 약간 달리 표현되어 있다. 또한 翰苑 蕃夷部 百濟條, 奉仇台之祠 귀절의 細注에 인용된 括地志 에도 百濟城立其祖仇台廟 四時祠之也 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매년 구태묘 제사를 4번 지냈다는 것은 四季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가운뎃 달, 즉 음력 월에 실시한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3)을 참조할 것. 8) 海東古記 : 海東 즉 우리나라의 古記 를 말한다. 海東古記 의 海東 은 중국에 대한 우리 삼국 또는 당대 고려를 지칭하는 관행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고, 古記 는 중국사서에 대응하는 국내 고 유 자료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李康來, 1989, 와 古記, 龍鳳論叢 1718, 전남대 인문과학연구소, 89쪽). 9)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어 帶方에서 나라를 세웠다 : 이 귀절은 北史 권94 列傳 百濟傳과 隋 書 권81 東夷傳 百濟傳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것으로, 隋書 에는 東明之後有仇台者 篤於仁信 始 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이라고 하였고 北史 의 기사 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구태가 나라를 세웠다는 대방군은 後漢말 중국의 遼東지역에 웅거하였던 公孫康이 204년경에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설치한 郡으로서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을 그 治所로 하였다. 그런데 대방군은 백제가 건국될 당시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대방의 옛 땅 이 라 한 것은 백제가 건국된 곳이 대방군의 전신인 옛 진번군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5쪽). 그러나 구태시조설은 앞의 주 3)에서 보듯이 당시 고구려와 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10) 海東古記 를 살펴보니 믿을 수 없다 : 여기에 나타난 撰者의 자료 이용 태도는 古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例이다. 이 외에도 삼국사기 찬자는 각 本紀와 雜志의 여러 군데에서 古記와 중국측 기록과의 상위에 대하여 거의 완전히 古記의 견해를 취하고 중국측 자료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李康來, 1989, 앞의 글, 100쪽). 11) 古記 : 본서 祭祀志에 수록된 古記의 인용 내용과 본서 百濟本紀의 제사 관련 사항 사이에는 약

201 400 (A.D.20) 겨울 10월,13) 다루왕 2년(A.D.29) 봄 2월,14) 고이왕 5년(238) 봄 정월,15) 위와 같이 행하였다. 다루왕 2년(A.D.29) 봄 정월에는 시조 東明의 廟22)에 배알하 년(243) 봄 정월,16) 14년(247) 봄 정월,17) 근초고왕 2년(347) 봄 정월,18) 아신왕 2년 (393) 봄 정월,19) 전지왕 2년(406) 봄 정월,20) 牟大王 11년(489) 겨울 10월21)에도 모두 간의 차이가 있다. 즉 古記에 있는 契王 2년조의 기사가 백제본기에는 해당 년월조 자체가 없는 반면에 본기에서 확인되는 溫祚王 원년과 17년의 東明王廟 및 國母廟 설치 기사, 仇首王 14년과 比 流王 9년의 東明廟 제사, 比流王 10년의 天地 제사 등의 관계 기록은 古記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12) 온조왕 20년 천지에 제사를 지냈으며 : 본서 권23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본기의 것이 좀더 자세하여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이라고 하였으므로, 古記 의 이 문장은 본기의 것을 축약한 듯하다. 이때의 제사에는 건물 안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노천 의 大壇에서 행해졌다. 대단은 규모면에서 컸을 뿐 아니라 왕도의 남쪽에서 행해진 南郊였음을 알 수 있다. 禮記 王制篇에 의하면 天子는 天地에 제사지내고 諸侯는 社稷에 제사를 지낸다. 고 하였는데, 백제는 독자적으로 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예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 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祭天地 라 함은 天神=太陽神과 水神=地母神에 대한 祭儀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노명호,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61쪽). 13) 38년(A.D.20) 겨울 10월 : 본서 권23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王築大 壇 祠天地 라고 하여 字句만 약간 달리 표기되어 있다. 대단은 상설의 제단이 아니라 제사에 앞서 축조된 제단에서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 다루왕 2년(A.D.29) 봄 2월 : 본서 권23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王祀 天地於南壇 이라고 하여 壇의 방위명이 추가되었으며, 이는 같은 해 정월의 東明廟 배알에 이어 서 행해진 것이다. 여기서의 南壇이란 郊祀 즉 祭天處인 宮城 南郊에 세워진 壇으로 대단이 남단 을 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5) 고이왕 5년(238) 봄 정월 : 본서 권24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祭天地 用鼓吹 라고 하여 천지제사에 음악을 연주하는 등 절차를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6) 10년(243) 봄 정월 : 본서 권24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設大壇 祀天 地山川 이라 하여 山川에 대한 제사가 추가되어 있다. 17) 14년(247) 봄 정월 : 본서 권24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祭天地於南 壇 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古記의 인용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앞의 백제본기 比流王 10년(313) 봄 정월조에 祀天地於南郊 王親割牲 이라 하여, 천지 제사에서 王이 친히 희생 짐승을 잡았다는 기사가 있다. 18) 근초고왕 2년(347) 봄 정월 : 본서 권24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祭天 地神祇 拜眞淨爲朝廷佐平 이라고 하여 천지 제사 이후 佐平 임명을 행하고 있다. 제단의 건립은 상설적인 것이 아니라 제장의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 설치되었다. 이는 국가 질서를 주기 적으로 갱신함으로써 국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중신 임명이나 大赦免이 이루어지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19)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 본서 권25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謁東明 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라고 하여 동명묘 제사와 천지 제사를 연이어 하고 아울러 左將 임명을 행하고 있다. 20) 전지왕 2년(406) 봄 정월 : 본서 권25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王謁東 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라고 하여 동명묘 제사와 천지 제사를 함께 하고 대사면 조치를 행하고 있다. 21) 牟大王 11년(489) 겨울 10월 : 본서 권26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王設 壇 祭天地 라고 하여 祠 와 祭 의 字句 차이가 있을 뿐이다. 牟大王은 東城王의 생전의 이름으 로서 본서 권26 백제본기 武寧王 즉위조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후로 백제의 天地에 대한 제사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백제가 사비시대 이후 중국의 제례를 받아들여 매년 정기적으로 天 五帝에 대한 제사를 행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앞의 주 4)와 5)를 참조 할 것. 22) 東明의 廟 : 東明을 제사지내던 백제의 始祖廟이다. 동명묘 배알의식은 본서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부터 전지왕 2년(406)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본서 권32 제사지에는 온조왕 원년, 구 수왕 14년, 비류왕 9년의 가사가 누락되어 있는 반면 백제본기에는 제사지의 계왕 2년 기사가 빠 져 있다. 백제 왕의 동명묘 배알은 즉위 다음해에 행해지는 것을 볼 때 즉위의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명은 부여 고구려의 시조인 동시에 백제의 시조로 인식되었다. 온조왕은 바로 동명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늘의 아들인 셈이 된다. 따라서 동명묘를 세워 동명을 제사한다 는 것은 백제 왕권의 원천인 동명을 통해 하늘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백제 왕은 동명묘 와 천지제사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보장받는 다음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하게 되는데, 이것 이 중심 임명과 대사면 등으로 나타났다. 동명묘 배알이 전지왕 2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것은 백제가 고구려에 한강유역을 상실하면서 동명묘에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盧明鎬, 1981, 앞의 글, 45 46쪽),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 다. 이에 대해 개로왕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왕권강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더 이 상 시조묘의 親祀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절차가 필요치 않게 된 것으로 보 는 견해와(문동석, 1996, 4~5세기 百濟 政治體制의 變動, 한국고대사연구 9, 226~227쪽) 고구려의 동명 숭배 강화에 대한 반작용이나 혹은 백제 시조신에 대한 개념 변화(정재윤, 2007, 백제 건국의 주체세력과 그 계통,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 송파구 송파문화원, 56~57쪽) 등을 내세워 위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 溫祚王 원년(B.C.18) 여름 5월 조에 立東明王廟 의 기사가 나오고, 같은 왕 17년(B.C.2) 여름 4월조에 立廟以祀國母 라는 기 사가 나오는데, 제사지에 인용된 古記 에는 모두 누락되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온조왕대에 동명묘를 세운 기사를 부정하고 후대의 관념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재윤, 2007, 앞의 글, 56쪽).

202 고,23) 책계왕 2년(287) 봄 정월,24) 분서왕 2년(299) 봄 정월,25) 계왕 2년(345) 여름 4 백제의 음악은 中宗31) 때에 工人32)들이 죽고 흩어졌다가, 開元33) 중에 岐王範34)이 太 월,26) 아신왕 2년(393) 봄 정월,27) 전지왕 2년(406) 봄 정월28)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 常卿35)이 되자 다시 아뢰어 그를 설치하였다. 그래서 음악과 재주가 많이 빠졌다. 춤 하였다. 라고 하였다. 추는 자는 2명이고, 자주색 큰 소매옷과 치마 저고리에 章甫冠36)을 쓰고 가죽신(皮 樂 履)을 신었다. 음악 중 남은 것은 쟁(箏),37) 피리(笛),38) 복숭아나무 껍질로 만든 피리 백제 음악(百濟樂)29) 30) 通典 에 이르기를, 23) 다루왕 2년 東明의 廟에 배알하고 : 본서 권23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 는데, 字句도 그대로 일치하며, 그 뒤에 천지 제사에 대한 기사가 이어진다. 한편 본서 권24 백제 본기 仇首王 14년(227) 여름 4월조에 大旱 王祈東明廟 乃雨 라고 하여 동명묘 제사의 권능을 보 이는 기사가 있는데, 역시 제사지에 인용된 古記에는 누락되었다. 24) 책계왕 2년(287) 봄 정월 : 본서 권24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謁東明 廟 라고만 하여 始祖 의 두 字가 생략되었으며, 이후의 본기 해당 기사는 모두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25) 분서왕 2년(299) 봄 정월 : 본서 권24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 같은 기사가 나온다. 또한 같은 책 比流王 9년(312) 여름 4월조에 謁東明廟 拜解仇爲兵官佐平 이라고 하여 동명묘 제사와 그에 이은 좌평 임명 기사가 나오는데, 제사지에 인용된 古記 의 기록에서는 누락되었다. 26) 계왕 2년(345) 여름 4월 : 계왕 2년(345) 여름 4월 契王 때에 동명묘를 배알한 기사는 본서 백제 본기에도 없고 여기에만 나온다. 27)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 본서 권25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도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이어 서 천지 제사에 대한 기사가 추가되어 있다. 28) 전지왕 2년(406) 봄 정월 : 본서 권25 백제본기의 해당 년월조에도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이어 서 천지 제사에 대한 기사가 추가되어 있다. 이후 시기에는 백제의 동명묘 제사에 대한 기사가 나 오지 않는다. 29) 백제 음악(百濟樂) : 백제의 음악에 대해서는 국내 사료에 거의 전하는 것이 없고 중국측 사료에 지극히 소략한 기사만 나온다. 우선 隋書 권81 東夷傳, 北史 권94 열전의 百濟傳에 나오는 악기들은 백제 본토에서 연주되던 것들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通典 권146 樂 四方樂 東夷二國 및 舊唐書 권29 音樂志 百濟樂條에 나오는 음악 기사는 백제의 멸망 이후 당나라에서 외롭게 百濟樂의 전통을 이어가던 백제 음악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하겠다(宋芳松, 1985, 韓國古代音樂史硏究, 일지사, 184쪽). 한편 고고학자료에 보이는 백제악기로는 1977년 7월 광주신창동유적에서 츨토된 현악기(길이 77.2, 너비 28.2 ), ~1995.6월 대전월평 동 유적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羊耳頭(길이 9.6, 폭 27.8, 두께 1.4 ),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대향로에 보이는 5종의 백제악기인 阮咸 長笛 북 거문고 排簫, 연기 비암사의`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a에 부조된 7종의 백제악기(長笛 排簫 橫笛 笙 거문 고 당비파 腰鼓 등이 있다. 30) 通典 : 당나라의 杜佑(735~812)가 편찬한 200권의 서적이다. 상고부터 天寶연간(742~756)에 이르는 여러 제도를 연혁적으로 통관하여 만든 것으로 약 30년이 걸려 801년에 완성하였다. 유 지기의 아들 유질이 開元말에 만든 政典 35권을 보충하기 위해 저술하였다. 食貨 選擧 職 官 禮 樂 兵 刑 州郡 邊防의 8부에 걸쳐 正史의 志의 항목을 통사적으로 총술한 類書의 체제를 취하였다. 이 책은 通志 文獻通考 와 함께 三通이라고 불리운다. 31) 中宗 : 唐나라 高宗을 이어서 684~710년까지 재위한 네번째 황제. 高宗의 일곱째 아들이고, 이 름은 李顯이다. 32) 工人 :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33) 開元 : 당나라 여섯번째 황제인 玄宗( )의 年號로 713~741년까지 8년간 사용되었다. 34) 岐王範 : 당나라 睿宗의 넷째 아들이고, 玄宗의 동생이다. 本名은 隆範인데, 후에 玄宗의 이름을 避諱하여 단지 範으로 칭하였다. 처음에는 鄭王 衛王 등으로 봉해졌다가 睿宗이 즉위한 후 岐王 으로 봉해져서 太常卿 兼左羽林大將軍의 직위에 올랐다. 그는 학문과 서적을 좋아하고 문장 잘 하는 선비를 아껴서, 여러 선비들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교유하여 시와 음악을 서로 화답하였으 며, 또한 서화와 고적을 많이 수집한 것으로 당대에 널리 알려졌다. 당 玄宗 開元 14년(726)에 죽 어서 惠文太子로 추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95 列傳 睿宗諸子 惠文太子範條를 참조 할 것. 35) 太常卿 : 唐나라 때 종묘의식을 관장한 地祇官의 명칭이다. 漢나라 때 秦의 奉常을 太常이라고 고 친 이후에 쓰인 관직명으로, 北齊 때 太常寺가 설치되었고, 卿 小卿 각 1명씩을 두어 종묘의식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36) 章甫冠 : 殷나라 때 사용한 冠의 이름이다. 孔子가 이 冠을 썼으므로 유학자의 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37) 쟁(箏) : 중국의 대표적인 고대 악기의 하나로서 12줄의 현악기이며, 일명 小瑟라고 한다. 쟁은 원 래 5줄이고 대나무 몸통으로 제조되어 그 모양이 筑과 비슷했으나, 秦始皇 때 蒙恬이 12줄로 고 쳐 瑟 모양으로 개조했고 대나무 대신에 나무로 제조하였다가, 唐代 이후에 13줄로 개조되었다. 쟁은 우리 나라의 가야금이나 일본의 고토(こと)처럼 12絃 또는 13絃이면서 줄마다 움직이는 줄 기둥을 받친 것이 특징이나, 몸통의 尾端이 뒤로 구부러지고 머리편을 고이는 발과 아랫 편을 고 이는 雲足이 있는 점이 가야금과 다르다(張師勛, 1986, 韓國樂器大觀, 서울대출판부, 58쪽 ;

203 404 (桃皮 ),39) 공후( 41) )40)였다. 이로 보아 악기의 유형이 중국(內地)과 많이 같았 다.42)고 하였다. 405 北史 에 이르기를, 북(鼓),43) 角,44) 공후( 47) ), 쟁(箏), 우( ),45) 지( ),46) 적(笛)의 음악이 있다. 고하 였다. 宋芳松, 1985, 앞의 책, 174쪽 및 207쪽). 38) 피리(笛) : 백제의 음악에서 사용된 관악기의 하나로서, 橫笛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笛이 어 떤 종류의 관악기인지 확실치 않지만, 세로로 잡고 부는 縱笛이라기보다는 가로로 잡고 부는 橫 笛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 건너간 네 명의 百濟樂師 중에 橫笛師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宋 芳松, 1985, 앞의 책, 쪽). 橫笛은 고구려의 음악에서 쓰인 관악기의 하나로서, 가로로 부는 笛 橫笛은 隋書 北史 通典 등의 高句麗傳에 기록된 橫吹나 일본에 전하는 高麗笛 과 같은 계통의 관악기로서, 오늘날의 젓대[大 ]처럼 가로로 잡고 부는 笛의 일종이다. 陳暘의 樂書 에 전하는 大 小橫吹의 설명으로 보아 橫吹는 서역계 관악기임이 분명하다. 고구려의 橫 吹 또는 橫笛은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三竹 중의 大 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고구려의 횡적이 집안 제17호분과 長川 1호분의 벽화에 나타난 사실을 볼 때, 이 관악기가 5 세기경에 이미 서역에서 중국 북쪽을 거쳐 고구려에 수용되었다고 생각된다(宋芳松, 1984, 長川 1號墳의 音樂史學的 점검, 한국학보 35, 일지사, 11 13쪽). 39) 복숭아나무 껍질로 만든 피리(桃皮 ) : 관악기의 하나로서, 복숭아나무나 앵두나무의 껍질로 만든 피리. 陳暘의 樂書 에 전하는 桃皮피리의 그림에 의하면, 여섯 指孔이 管의 앞에 뚫려있고 현행 피리처럼 혀가 管의 끝에 있는데, 고구려나 백제의 것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40) 공후( ) : 백제의 음악에서 사용된 현악기의 하나로서, 竪의 일종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百濟 琴(クダラコト)이라고 일컫는 日本 正倉院 所臧의 공후나 陳暘의 樂書 에 의거해 볼 때, 백제의 공후는 앗시리아의 하프처럼 둥근 ㄱ 字形의 몸통 끝과 아랫 부분에 달린 가로 막대기 사이에 23줄을 걸어서 만든 현악기로서, 고구려의 竪 와 같은 계통의 악기이다. 竪 는 고구려의 음악에서 쓰인 현악기의 하나로서, 일명 胡 또는 擘 라고 부른다. 수공후는 앗시리아의 하프(Harp)처럼 생긴 23絃의 악기이며, 이를 가슴에 끼고 양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 수 공후는 고대 이집트 그리이스 등지에서 유행하던 것이 그 후 페르시아 인도에 전하고, 여기서 東西로 전파되어 東流한 것은, 西傳한 것은 하프로 불리우며 변천하였다(張師勛, 1986, 앞 의 책, 99쪽). 수공후는 당나라의 十部伎 소재 악기로 보아 고구려를 비롯한 중국 대륙과 중앙아 시아의 도시국가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현악기였다(岸邊成雄, 1982, 古代シルクロ-ドの音樂, 105쪽). 41) 백제의 음악은 였다 : 이 귀절은 通典 권146 樂 四方樂 東夷二國條에 실려있다. 通 典 의 원사료에서 다음에 나오는 歌 字가 본서 인용문에서는 생략되었다. 42) 악기의 유형이 중국(內地)과 많이 같았다 : 이 文句는 通典 樂篇이나 舊唐書 音樂志의 원사료 에 보이지 않으므로, 본서 찬자가 樂志를 편찬할 때 덧붙인 문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內地 라는 용어는 本國 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의 內地는 中國 을 가리킨다. 권33 雜志 2 色服 車騎 器用 屋舍 색복48) 고구려 백제의 의복 제도는 상고할 수 없으니, 지금은 다만 중국 역대 사서에 보이는 43) 북(鼓) : 백제의 음악에서 사용된 타악기의 하나로서, 어떤 종류의 북인지는 미상이다. 여기서의 鼓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주악용으로 흔히 쓰인 腰鼓일 수도 있고, 鼓吹儀仗用의 큰 북 종류일 수 도 있다. 44) 角 : 백제의 음악에서 사용된 관악기의 하나로서, 뿔나팔인 듯하다. 백제의 角이 어떤 종류의 악 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명칭상으로 보아 뿔로 만든 관악기의 일종이라고 짐작된다. 백제의 角 은 江西大墓, 大安里 1號墳, 德興里古墳 등의 고구려 벽화 고분에 보이는 角처럼 둥근 모양으로 생겼고, 그것은 鼓吹의 편성이나 軍隊의 신호용으로 북과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宋芳 松, 1983, 앞의 책, 164쪽 및 185쪽). 45) 우( ) : 백제에서 사용된 관악기의 하나. 는 바가지 몸통 위에 가는 대나무 管 여러 개를 차례 로 꼽아서 만든 笙의 일종인 관악기이다. 笙은 대나무 管의 숫자나 몸통의 크기에 따라서 여러 명 칭으로 구분되는데, 백제의 는 이러한 笙의 여러 종류 중에 하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笙은 중 국 고구려 서역 등지에서 널리 쓰였는데, 백제는 그 중에서 중국 남조를 통하여 를 수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46) 지( ) : 백제의 음악에서 사용된 관악기의 하나로서, 橫笛의 일종이다. 대나무로 만든 악기의 하 나로 는 지( ) 字의 俗字로서 통상 을 생략하고 쓴다. 백제의 가 어떤 종류의 관악기 인지 확실치 않으나, 陳暘의 樂書 에 여러 종류의 가 圖說되어 있는데, 그 공통점은 橫笛類의 관악기라는 점과 고구려 義笛이나 현행 아악기 의 자( ) 와 같은 吹口가 없다는 점이다. 의취 적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음악에서 쓰인 관악기의 하나로서, 義 가 달린 笛이다. 이러한 가 당 나라 十部伎 중에서 오직 淸樂에서만 쓰인 것으로 보아, 백제의 (지)는 중국 남조를 통하여 수 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47) 북(鼓), 角,, 箏,,, 笛의 음악이 있다 : 이 귀절은 北史 권94 列傳 百濟傳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48) 색복 : 백제의 의생활에 관한 자료는 중국 정사의 백제전이나 국내의 삼국사기 등이 참고가 되 며, 그밖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나 백제대향로나 양직공도 속의 백제국사신도, 고고

204 ) 隋書 에 이르기를, 것을 적어둔다. (중략) 49) 에 이르기를, 北史 백제는 左平부터 장덕까지는 자주색 띠를 두르고, 시덕은 검은 띠, 고덕은 붉은 띠, 백제의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조정의 절을 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에는 그 관의 50) 계덕은 푸른 띠, 대덕 이하는 모두 노란 띠, 문독부터 극우까지는 모두 흰 띠를 두른 양옆에 날개를 덧붙이는데, 전쟁 때에는 붙이지 않는다. 奈率 이상 은 관에 은꽃(銀 54) 고 하였 다. 冠을 쓰는 규정은 모두 같은데, 다만 나솔 이상은 은꽃으로 장식한다. 花)51)으로 장식하고, 將德은 자주색 띠, 施德은 검은 띠, 固德은 붉은 띠, 季德은 푸른 다. 52) 고 하였 띠, 對德 文督은 모두 노란 띠, 武督부터 剋虞까지는 모두 흰 띠를 두른다. 다. 학자료 등이 있다. 백제는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27년(260) 2월에 공복제도가 제정된 것으 로 나오나 관련 기사 내용이 주서 나 구당서 백제전의 것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고 있어 신빙성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공복제도는 백제의 지배체제가 정비되는 사비시대의 일로 여겨지 며, 그 내용은 冠飾과 帶 및 옷의 색에 대한 것만 규정하여 단순하지만 신분에 의해 구분을 정하 였음을 알 수 있다. 49) 北史 : 중국의 正史 25史의 하나. 北魏 北齊 北周 隋나라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다. 唐나라 李延壽가 편찬하였는데, 총 100권이다. 50) 奈率 이상 : 中宗壬申刊本 에서는 奈率已下 라고 하였으나, 北史 권94 百濟傳의 원 문에는 奈率六品已上 冠飾銀花 라고 하였고, 鑄字本 에도 奈率已上 으로 되어 있으 므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51) 은꽃(銀花) : 백제의 좌평(제1품)부터 나솔(제6품)까지의 관인의 관모에 붙이던 銀製 꽃 모양의 장 식. 백제의 좌평 및 솔계 관등의 소지자들이 은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한 관을 썼음. 백제 고분에 서 銀製冠飾이 출토된 곳으로는 충남 論山 六谷里7호분 石室墳, 부여 능산리36호 석실 동관과 서 관, 부여 염창리Ⅲ-72호 석실분, 扶餘 下黃里 수집품, 전북 南原 尺門里 석실분, 전남 羅州 興德 里 석실분, 나주 복암리3호분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李南奭, 1995, 百濟 石室墳 硏究, 학연문화사, 쪽 ; 최종규, 1991, 백제 은제관식에 관한 고찰 -백제공구(Ⅰ), 미술자 료 47 ; 박보현, 1999, 은제관식으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에 대한 몇가지 문제, 과기고고연구 5를 참조할 것. 52) 백제의 의복은 흰 띠를 두른다 : 이 귀절은 北史 권94 列傳 東夷 百濟傳에서 발췌하여 요 약한 것이다. 북사 백제전의 원문은 官有十六品 左平五人一品 達率三十人二品 恩率三品 德率 四品 杆率五品 奈率六品已上 冠飾銀花 將德七品 紫帶 施德八品 帶 固德九品 赤帶 季德十品 靑帶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皆黃帶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剋虞十六品 皆白帶 (中略) 其 飮食衣服 與高麗略同 若朝拜祭祀 其冠兩廂加翅 戎事則不 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서 색복지의 문 장은 이를 줄이기도 하고 문장 순서를 바꾸기도 하여 기재한 것이다. 55) 에 이르기를, 唐書 백제의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두루마기에 푸른 비단(靑錦) 바지를 입고, 검은 비단 53) 隋書 : 隋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正史로서 중국의 25史의 하나. 魏徵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636년에 완성하였는데, 총 85권이다. 54) 백제는 左平부터 은꽃으로 장식한다 : 이 귀절은 隋書 권81 列傳 東夷 百濟傳에서 발췌 요 약한 것이다. 수서 백제전의 복식 관계 문장은 북사 백제전의 것과 같은 계통의 원사료를 이 용한 것이나, 좀더 문장을 압축한 것이다. 본서 색복지의 인용문은 수서 백제전의 것과 거의 같 으나, 원문의 官有十六品 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杆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 를 自 左平至將德 服紫帶 로 줄이고, 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皆用白帶 를 自文督至剋虞 皆白帶 로 요약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4의 주 258)을 참조할 것. 한편 백제의 금동관이 출토된 곳은 전북 익산 笠店里1호 석실분(文化財硏究所, 1989, 益山 笠店里 古墳 발굴 조사보고서 ), 전남 나주 新村里 甕棺墳(朝鮮總督府, 1920, 大正六年度 朝鮮古蹟調査報告, 663쪽)이었으나, 최근 천안 용원리 석곽묘(이남석, 2000, 용원리고분군, 공주대박물관), 공주 수촌리 토광목곽묘와 4호 석실분(충청남도역사문화원, , 공주 수촌리 유적 발굴조 사 지도위원회 자료 ; 이훈, 2006, 공주 수촌리 백제금동관의 고고학적 성격 ; 박보현, 2006, 백제의 관모와 飾履, 한성에서 웅진으로 특별전기념 학술심포지움,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 도역사문화연구원, 171~180쪽), 서산 부장리 5호묘(충청남도역사문화원, 2005, 서산 부장리 유적 현장설명회 자료 ; 정광룡 이수희, 2006, 서산 부장리 출토 금동관모의 보존, 앞의 책, 158~159쪽),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전남대박물관, 2006, 고흥 안동고분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 ; 임영진, 2006,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출토 금동관의 의의, 앞의 책, 48~60쪽)에서 새 로이 금동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威信財(Perstige Goods)는 제한된 양만이 공급되는 희귀품으로서 그의 생산 소유 분배를 통해 중앙세력이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 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에는 이러한 금동관과 은제 관식을 비롯하여 중국 청 자 斗 耳飾 子 飾履 大刀 등의 물품을 왕실에서 지방의 유력한 재지세력에게 사여함으 로써 독립적인 지방세력을 결속시키거나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55) 唐書 : 여기서 唐書 는 正史로서 중국의 25史의 하나인 新唐書 를 말한다. 송기(宋祁)는 중국 북송때의 官人 학자로 안주 안륙현(현재의 중국 湖北省 安陸縣) 출신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한림 학사 한림학사승지를 지냈다. 구양수와 함께 新唐書 를 편찬하였는데, 그는 열전 150권을 집

205 408 (烏羅) 관에 금꽃(金花)56)으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57) 관리는 모두 다홍색으로 옷을 입고,58)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며, 서민은 다홍색이나 자주색의 59) 옷을 입지 못한다. 고 하였다. 60) 에 이르기를, 通典 백제의 의복은, 남자옷은 대략 고려(고구려)와 같고, 부인옷은 두루마기(袍)와 비슷 61) 고 하였다. 하나 소매가 조금 크다. 필하였고, 大樂圖 2권을 찬했다. 또한 그는 문집 100권을 남겼다( 宋史 권284 열전 宋祁 참 조). 新唐書 는 舊唐書 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새로 편찬한 것으로 1060년에 완성되었다. 本紀 10권, 志 50권, 表 15권, 列傳 150권으로 되어 있다. 56) 금꽃(金花) : 백제의 왕의 관모에 붙이던 金製 꽃 모양의 장식. 백제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왕 관모의 金花는 납작한 金板에 구멍을 뚫어 火焰形의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서 한 쌍으로 되어 있으며, 왕비의 것으로도 그와 비슷한 金花 한 쌍이 있다. 57) 백제의 왕은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 舊唐書 의 인용문에 나오는 백제왕의 복식은, 본서 권 24 백제본기 古爾王 28년 정월조에 나오는 고이왕의 南堂聽事 당시의 복식과 똑같다. 다만 구당 서 의 大袖紫袍 가 고이왕조에 紫大袖袍 로 표기되고, 烏羅冠 金花爲飾 이 金花飾烏羅冠 으 로 표기된 차이가 있을 뿐이다. 58) 관리는 모두 다홍색으로 옷을 입고 : 구당서 의 인용문에는 백제 관인의 복색을 모두 다홍색이 라고 하였으나, 본서 권24 백제본기 古爾王 27년 2월조에는 6품 이상은 자주색, 11품 이상은 다 홍색[緋], 16품 이상은 청색으로 구별을 두었다고 하여 구당서 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59) 백제의 왕은 자주색의 옷을 입지 못한다 : 이 귀절은 舊唐書 권199 上 列傳 東夷 百濟傳에 서 발췌한 것으로서, 원문과 꼭 같다. 新唐書 백제전의 것도 거의 같으나 다만 문장 배열과 용 어 표기에서 구당서 의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60) 通典 : 당나라의 杜佑(735~812)가 편찬한 200권의 서적이다. 상고부터 天寶연간(742~756)에 이르는 여러 제도를 연혁적으로 통관하여 만든 것으로 약 30년이 걸려 801년에 완성하였다. 유 지기의 아들 유질이 開元말에 만든 政典 35권을 보충하기 위해 저술하였다. 食貨 選擧 職 官 禮 樂 兵 刑 州郡 邊防의 8부에 걸쳐 正史의 志의 항목을 통사적으로 총술한 類書의 체제를 취하였다. 이 책은 通志 文獻通考 와 함께 三通이라고 불리운다. 61) 백제의 의복은 소매가 조금 크다 : 이 귀절은 通典 권185 邊防 東夷 上 百濟傳에서 발췌한 것이다. 통전 백제전의 이 문장 앞에 나오는 백제 관복 관계 문장은 북사 백제전의 것을 그대 로 인용한 것이며, 본서에서는 이를 생략하였다. 통전 백제전의 원사료에는 其衣服 男子略同 於高麗 와 婦人衣似袍而袖微大 의 사이에 拜謁之禮 以兩手據地爲敬 의 문구가 들어있으나, 본 서에서는 이를 빼고 의복 관계 기사만을 발췌하였다. 409 권34 雜志 3 地理 1 63) 신라 강역의 경계는 옛날의 전하는 기록이 같지 않다. 杜佑62)의 通典 에서는 다음과 같 이 기록하였다. 그 선조는 본래 辰韓64) 종족이고, 그 나라는 百濟 고구려(高麗)65) 두 나라의 동남쪽 66) 에 있으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다. 68) 69) 劉煦67)의 唐書 에서는, 동쪽과 남쪽이 모두 큰 바다로 막혔다. 하고, 宋祁70)의 新 62) 杜佑 : 중국 당나라 사람( ). 京兆 萬年(陝西省 長安縣)의 사람으로서, 杜希望의 아들이 다. 父蔭에 의하여 濟南郡參軍이 되어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며, 工部郞中 戶部侍郞判度 淮南 節度使 司徒同平章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通典 200권, 理道要訣 10권 등이 있 다. 63) 通典 : 당나라의 杜佑(735~812)가 편찬한 200권의 서적이다. 상고부터 天寶연간(742~756)에 이르는 여러 제도를 연혁적으로 통관하여 만든 것으로 약 30년이 걸려 801년에 완성하였다. 유 지기의 아들 유질이 開元말에 만든 政典 35권을 보충하기 위해 저술하였다. 食貨 選擧 職 官 禮 樂 兵 刑 州郡 邊防의 8부에 걸쳐 正史의 志의 항목을 통사적으로 총술한 類書의 체제를 취하였다. 이 책은 通志 文獻通考 와 함께 三通이라고 불리운다. 64) 辰韓 : 1 3세기 무렵에 한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三韓 중의 하나. 그 위치는 대체로 낙동강 동안 의 경상도 지방으로 비정된다. 辰韓은 不斯國 등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후에 경주의 斯盧國(新羅)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65) 고구려(高麗) : 본서의 원문에는 高麗 라고 되어 있으나, 高句麗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隋 唐 이후의 중국측 사료에서 고구려를 高麗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장수왕 초년에 국명을 高麗로 개칭한 결과라는 견해가 있다(鄭求福, 1992,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 湖西史學 19 20합집). 66) 그 선조는 본래 辰韓 종족이고 접해 있었다 : 이 문장은 通典 권185 邊防門 新羅傳에서 발 췌한 것이다. 다만 본서 인용 부분에는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卽其一也[初曰新盧 宋時曰 新羅 或曰斯羅] 의 文句가 생략되었다. 또한 원문의 其國在百濟東南五百餘里[亦在高麗東南 兼有 漢時樂浪郡之北] 의 내용을 본서에서는 其國在百濟高麗二國東南 으로 줄여서 썼다. 67) 유후(劉煦) : 중국 五代 後晋의 宰相( )으로 유구(劉 ) 라고도 쓴다. 鉢州 歸義(河北省 易縣)의 사람으로서, 劉因의 아들이다. 後唐에 벼슬하여 中書侍郞에 임명된 후 監修國史를 겸하 고, 後晋에 벼슬하여 司空平章事監修國史를 맡다가 죽었다. 舊唐書 는 劉煦가 칙명을 받고 편찬 한 책이다. 68) 唐書 : 여기서 唐書 는 유후 등이 편찬한 구당서 를 가르킨다. 69) 동쪽과 남쪽이 모두 큰 바다로 막혔다 : 이 문장은 舊唐書 권199 上 列傳 149 新羅國傳에서 발

206 ) 書 에서는 동남쪽은 日本72)이고, 서쪽은 백제이고, 북쪽은 고구려(高麗)이며, 남쪽은 80) 신라의 崔致遠78)은 마한은 고구려(高麗)이고, 卞韓79)은 백제이며, 진한은 신라이다. 라 73) 고 하였다. 바다에 접하였다. 고 말하였다. 이 여러 설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중략) 74) 75) 賈耽 의 四夷述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76) 처음에는 고구려 백제와 영토의 경계가 개의 이빨처럼 들죽날죽하여, 혹은 서로 화친 77) 진한은 馬韓 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에 다달으고, 북쪽은 濊 와 접하였다. 하고 혹은 서로 침략을 하다가, 후에 당나라(大唐)와 함께 두 나라를 쳐서 멸하고 그 토지 를 평정한 다음 드디어 9州81)를 설치하였다. 본국(신라) 경계 안에 세 州를 설치하였으니, 췌한 것이다. 다만 원문의 東及南方 을 본서에서는 東南 으로 줄여서 썼다. 70) 宋祁 : 중국 北宋의 관료( )로 安州 安陸(湖北省 安陸縣)의 출신이다. 天聖( ) 初에 進士에 급제한 후, 復州軍事推官 翰林學士 郡牧使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新唐書 列傳 150권과 大樂圖 2권을 편찬하였으며, 文集 100권이 있다. 71) 新書 : 新唐書 를 가리킨다. 앞에서 舊唐書 를 唐書 라고 하였으므로 新唐書 를 新書로 약 칭한 것이다. 72) 日本 : 일본열도에 성립되었던 고대 왕국의 국호. 일본열도의 고대 왕조는 중국의 漢書 에서 隋 書 까지의 사서에서 倭國 이라고 지칭되었으나, 고대국가의 완성 과정에서 스스로 日本 을 국 호로 표방하였다. 日本 을 국호로 처음 사용한 예는 645년 大和改新 이후 孝德의 勅에 보이나, 8세기 초의 日本書紀 이후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듯하다. 본서 권6 신라본기 文武王 10년(670) 조에 倭國이 국명을 日本으로 고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본의 首都는 奈良에 있다가, 8세기말에 平安京(京都)으로 옮겼고, 明治維新 직후에 東京으로 옮겼으니, 新唐書 당시의 일본 수도는 奈 良 또는 京都였다. 73) 동남쪽은 日本이고 접하였다 : 이 문장은 新唐書 권220 東夷列傳 145 新羅傳에서 발췌한 것이다. 다만 원문의 南濱海 와 北高麗 의 위치를 본서에서는 서로 바꾸어 썼다. 74) 賈耽 : 중국 唐나라 滄州 南皮(河北省 滄南縣) 출신이다. 751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지방 및 중앙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晩年에는 同中書門下平章事 左僕射의 지위에 있었다. 그 는 지리학을 좋아하여 娘右山南圖 吐蕃黃河錄 海內華夷圖 古今郡國道縣四夷述 등을 저술하였다. 75) 四夷述 : 古今郡國道縣四夷述 40卷의 略稱. 四夷述 은 唐의 賈耽이 801년에 지은 책으로서, 중국 및 주변 지역의 지도인 海內華夷圖 에 대응하는 地誌이다. 華夷圖 와 四夷述 은 지금 전 하지 않는다. 다만 新唐書 地理志의 末尾에 付載된 交通路는 四夷述 의 皇華四達記를 요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76) 馬韓 : 1 3세기 무렵에 한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三韓 중의 하나. 그 위치는 대체로 京畿 忠淸 全羅道 일대로 비정된다. 馬韓은 目支國 등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후에 伯濟國(百濟) 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77) 濊 : 상고시대 한반도 동해안지역에 존속했던 종족들의 정치체로서 東濊 라고도 하며, 그 위치 는 대체로 함경도 일부 지역과 강원도 일대로 비정된다. 이 지역은 衛滿朝鮮에 속하였다가 그 멸 망과 함께 漢郡縣으로 편제되었으나, 後漢末 이래 대부분 高句麗에 예속되었다. 濊는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에 독립적인 정치체가 아니라 종족으로서의 예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東濊 僞靺鞨 로 파악한 정약용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위말갈은 반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중국군현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순차적으로 받 았다가 삼국통일 후 그 자취를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유원재, 1979, 삼국시대 위말갈고, 사학연구 29, 41쪽).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주 43) 및 권26 주 565)를 참조할 것. 78) 崔致遠 : 신라 말기의 유학자(857?). 字는 孤雲, 諡號는 文昌侯이며, 경주 沙梁部 사람으로서 六頭品 출신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12살 때(景文王 8, 868) 唐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을 익혀 18세 가 되던 경문왕 14년(874)에 賓貢科에 합격하고 宣州 漂水縣尉가 되었다가 황소의 난에 高騈의 從事官이 되어 討黃巢檄 을 지어 문명을 천하에 날렸다. 28세 때(憲康王 11, 885)에 귀국하여 다음 해 중국에서 고병의 막부에서 지었던 글을 정리하여 桂苑筆耕 20권을 왕에게 바쳤고, 또 한 왕명에 의하여`大崇福寺碑文a의 명문을 지었다. 大山(전북 정읍시 칠보면)太守 天嶺郡(경남 함양군)太守 富城(충남 서산시)太守를 지내다가 진성여왕 7년(893)에 賀正使로 당에 다녀왔고, 眞聖女王 8년(894)에 시무 10조를 올린 바 있다. 이를 왕이 가납하여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주었 으나 그의 요구는 당시에 거의 실시되지 못한 듯하다. 42세가 되던 효공왕 2년(898)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합천 가야산에 그의 형인 승 賢俊 및 定玄師와 道友를 맺고 지내다가 죽 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중국에서 지은 시문집은 桂苑筆耕 20권 등과 국내에서 지은 글은 文 集 30권으로 편집되었다. 현존하는 저술은 오직 桂苑筆耕 20권과 法藏和尙傳 1권, 四山碑 銘 뿐이다. 그는 儒 佛 道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文昌侯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국자감과 향교의 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46의 주 158)을 참조할 것. 79) 卞韓 : 1 3세기 무렵에 한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三韓 중의 하나로 弁韓 弁辰 이라고도 하 며, 그 위치는 대체로 낙동강 西岸의 慶尙道 지방으로 비정된다. 변한은 彌離彌凍國 등 12개의 소 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후에 김해의 狗邪國(加耶)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이루었다. 80) 마한은 고구려(高麗)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 이 문장은 崔致遠文集 소재`上太師侍中狀a 의 序頭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며, 그 글은 그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것으로서, 본서 권46 崔致遠傳에 그 全文이 실려 있다. 삼한의 위치를 삼국과 대비하면서 馬韓 卞韓 辰韓을 각 각 高句麗 百濟 新羅와 동일시한 것은 崔致遠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7세기 후반 이래 신라인들의 辰韓 중심 三韓一統意識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나라 지식인들의 삼한 및 삼국에 대한 인식은 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쪽 ;

207 서울(王城) 동북쪽의 唐恩浦路82)에 해당하는 곳을 尙州83)라 하고, 서울 남쪽을 良州84)라 라고 하였다.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 안에 3주를 설치하였으니, 서쪽으로부터 첫째를 漢 하고, 서쪽을 康州85)라고 하였다. 옛 백제국 경계 안에 세 주를 설치하였으니, 백제의 옛 州91)라 하고, 다음 동쪽을 朔州92)라 하고, 또 다음 동쪽을 溟州93)라고 하였다. (후략) 성86) 북쪽의 熊津口87)를 熊州88)라 하고, 다음 서남쪽을 全州89)라 하고, 다음 남쪽을 武州90) 양기석, 1995, 百濟 扶餘隆墓誌銘에 대한 檢討, 국사관논총 62, 153~156쪽을 참조할 것. 81) 9주 : 신라 지방의 상급 행정구획 단위로서, 尙州 康州 良州 溟州 漢州 朔州 熊州 武 州 全州의 9개의 州를 말한다. 신라의 州制는 智證王 6년(505)에 悉直州를 설치함으로써 시작 되었으며, 그 이후 신라의 영토 팽창에 따라 沙伐州(525) 新州(553) 등이 증설되었다가, 삼국 통일을 마무리한 후 神文王 5년(685)에서 7년(687)에 걸쳐 完山州를 신설하고 居列州 泗 州 發羅州 一善州 등의 州治를 이동함으로써 9州의 지방 제도가 완성되었으며, 景德王 16년(757) 에는 9州의 명칭을 漢式으로 변경하였다. 州 장관의 명칭은 軍主에서 摠管을 거쳐 都督으로 바뀌 었으며, 각 州에는 9 27個郡(평균 13개군)과 25 46個縣(평균 33개군)이 영속되어 있었다. 82) 唐恩浦路 : 신라 수도 慶州에서 唐恩浦(현재 京畿道 華城郡 南陽面)로 가는 길을 말한다. 唐恩浦 는 唐恩郡 唐城郡 唐城鎭 또는 黨項城이라고도 하며, 신라의 對中國 交通路로서 중요한 역할 을 하였다. 본서 권4 신라본기 善德王 11년(642) 8월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黨項城을 빼앗아 歸唐之路 를 끊으려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지역은 본래 백제지역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점령하면서 唐城郡이라 하였고, 후일 신라 진흥왕이 이곳을 차지한 후 경덕왕이 唐恩郡으로 고쳤다. 이 당은포(당항성)를 남양만에 위치한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의 해발 160m의 구봉산의 唐城에 비정된다. 당성은 둘레 1,200m의 산성으로 서해와 태안반도 일대가 조망되는 요충지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병모 김아관, 1998, 당성 -1차발굴조사보고서 ; 배기동 박성 희, 2001, 당성 -2차발굴조사보고서, 화성군 한양대박물관을 참조할 것. 83) 尙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舊新羅 加耶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慶北 尙州市. 上 州는 원래 상주에 설치된 군사적 행정구역으로서 신라 진평왕 36년(614)에 尙州에서 선산으로 옮 겼다. 84) 良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新羅 加耶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慶南 梁山市이 다. 문무왕 5년(665)에 上州 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揷良州를 설치한 것이었다. 신문왕 7년에 성 을 쌓았는데, 둘레가 1,260보였다. 경덕왕때 이름을 良州로 고쳤으며, 고려때의 梁州이다. 領縣 이 하나가 있는데, 姸陽縣은 본래 居知火縣이었는데,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때도 그대 로 썼다. 85) 康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新羅 加耶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慶南 晉州市이 다. 신문왕 5년(685)에 居 州를 나누어 菁州를 설치하였는데, 경덕왕때 康州로 이름을 고쳤다. 고 려때의 晉州이다. 高麗史 地理志에서 혜공왕이 康州를 다시 菁州로 고쳤다고 하였으나, 본서 권9 신라본기에 의하면, 惠恭王 景明王 景哀王 敬順王代에 걸쳐 康州가 지명으로 쓰였다. 다만 본 서 권10 신라본기 소성왕 원년(799)과 헌덕왕 14년(822)조에는 菁州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86) 백제의 옛 城 : 백제의 마지막 首都인 泗 城(扶餘)을 가리킨다. 백제의 옛 수도는 처음에 慰禮城 즉 漢城(서울)이었다가, 文周王 원년(485)에 熊津(公州)으로 천도하였으며, 聖王 16년(538)에 다 시 泗 城(부여)으로 천도하였다. 87) 熊津口 : 白江 熊津江 只火浦 伎伐浦 장암 등으로 불리우는 錦江의 입구를 말하는데, 현재 의 충남 舒川郡 長項邑 長岩洞에 있던 포구이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서는 伎 伐浦의 細注에 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이라 하였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 舒川郡 關防條의 舒川浦營 細注에는 在郡南二十六里 水軍萬戶一人 高麗時稱長岩鎭 이라 하였다. 한편 기벌포 즉 熊津江口에서의 전투상황은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新唐書 권220 백제 전, 資治通鑑 권200 顯慶 5년조, 冊府元龜 권986 외신부 征討 현경 5년 8월조 등에 실려 있 다. 88) 熊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백제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忠南 公州市이다. 본 래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 당나라 高宗이 蘇定方을 보내 평정하고 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신문왕이 熊川州로 고치고 都督을 두었다. 경덕왕 16 년(757)에 이름을 熊州로 고쳤으며, 고려때 이후의 公州이다. 89) 全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백제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全北 全州市이다. 본 래 백제 完山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에 州로 삼았고, 26년(565)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 5년(685)에 다시 完山州를 설치하였고,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전주로 고쳤다. 고려때 이후 에도 전주의 명칭을 그대로 썼다. 90) 武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백제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光州광역시이다. 본래 백제의 땅이었는데, 신문왕 6년(686)에 武珍州로 삼았다. 경덕왕때 武州로 고쳤으며, 고려때 이 후의 光州이다. 91) 漢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고구려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京畿道 서울특별시 송파구 강동구, 하남시, 광주시 일원을 말한다. 본래 고구려 漢山郡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빼앗 았다. 경덕왕이 漢州로 고쳤으며, 고려때의 廣州이다. 92) 朔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고구려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江原道 春川市이다. 선덕왕 6년(637)에 牛首州로 삼고 軍主를 두었다가 문무왕 13년(673)에 首若州를 설치하였다. 경덕왕때 朔州로 고쳤으며, 고려때 春州이다. 93) 溟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고구려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江原道 江陵市이다. 본래 고구려 河西良 또는 何瑟羅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선덕왕 때에 小京을 설 치하고 仕臣을 두었다. 태종무열왕 5년(658)에 하슬라 땅이 말갈에 연접하였다고 하여, 소경을 폐지하고 州로 삼아 軍主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溟州로 고쳤으며, 고려때에 도 이어지고 있다.

208 414 縣98)은 본래 고구려 買谷縣99)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어디인지 권35 雜志 4 地理 2 알 수 없다. 玉馬縣100)은 본래 고구려 古斯馬縣101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 朔州94) (중략) 95) ) 奈靈郡 은 본래 백제 나이군(奈已郡) 이었는데, [신라] 파사왕이 [이를] 빼앗았다. 경 (고려)의 奉化縣102)이다. 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剛州97)다. 이 군에 속한현(領縣)이 둘이었다. 善谷 권36 雜志 5 地理 3 94) 朔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옛 고구려 지역에 설치된 것이며, 州治는 현재의 江原道 春川市이다. 선덕왕 6년(637)에 牛首州로 삼고 軍主를 두었다가 문무왕 13년(673)에 首若州를 설치하였다. 경덕왕때 朔州로 고쳤으며, 고려때 春州이다. 95) 奈靈郡 : 신라 朔州(춘천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慶尙北道 榮州市이다. 본래 백제의 奈 已郡이었는데, 신라의 파사왕때 이를 점령하였고, 경덕왕때 奈靈郡으로 고쳤다. 고려 고종 46년 (1259)에 衛社功臣 金仁俊의 일로 知榮州事로 승격하였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榮州로 고쳤 다. 96) 나이군(奈已郡) : 신라 朔州 奈靈郡(영주시)의 고구려 때 지명. 혹은 날이군(捺已郡)이라고도 한 다. 다만 본서 권35 지리지 2, 즉 新羅志 에는 奈靈郡本百濟奈已郡 이라고 하여 나이군이 본 래 백제의 지명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권37 지리지(4)에는 百濟志 의 말미에 朔州 奈靈郡의 옛 이름인 奈已郡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이군이 파사왕때 신라 영역이 되었다는 기사가 본서 신라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 등 후대의 지리서에는 본서의 本 百濟奈已郡 을 本高句麗奈已郡 으로 고쳐 읽고 있으나 어떤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 다. 奈已郡 문제에 대해서는 이강래, 1996, 新羅奈已郡考, 신라문화 13에서 사료적 검토가 이루어졌다. 이는 5세기 후반 이후 한주 삭주 명주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본서 지리 지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 을 본서 지리지 찬자의 두찬에서 찾고 있다. 그 하나는 편자가 백제본기에서 백제 멸망시 37郡이라는 자료를 보고 이 郡數에 맞추기 위하여 조작을 행한 것이라는 견해(井上秀 雄, 1974, 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90쪽)와 또는 新羅志 의 기사는 편찬자의 착오이며, 百濟志 의 편찬자는 이를 보고 나이군이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오인하여 武珍州條의 말미에 붙인 것이라는 견해(노중국, 1995, 의 百濟 地理 關係 記事 檢討, 의 原典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쪽)가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왜 奈已郡이 선택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재검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본서 권45 朴堤上傳에 나오는 신라 눌지왕대의 故事에 利伊村干 波老의 이름이 보이는데, 여기서 利伊村은 奈已郡으로 비정된다. 三國遺事 권3 塔像篇 洛山二大聖條에 世達寺의 莊舍가 溟州 股李郡에 있었다고 나오는데, 細注에서 股李 郡이 溟州 股城郡의 본명인 股生郡(영월군 영월읍)과 牛首州 股靈郡의 본명인 股已郡의 둘 중에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97) 剛州 : 신라 朔州 奈靈郡(영주시)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奈靈郡을 고려 성종때 剛州團練使로 고쳤 熊州 熊州103)는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 당나라 高宗이 蘇定方을 보내 이를 평정하고 熊 津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신문왕이 熊川州104) 다가 현종때 吉州(안동시)의 屬郡이 되었다. 인종때 다시 順安縣令으로 고쳤고, 고종때 知榮州事 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때 榮川郡으로 개칭되었으며, 세조때 順興(영주시 순흥면)의 동쪽 일부 를 떼어내 郡에 속하게 하였으나, 숙종때 본래대로 환원되었다. 한편 高麗史 권57 地理志 順安 縣條에 의하면, 剛州는 仁宗 21년(1143)에 이름을 順安縣으로 고쳤으나, 본서 지리지에는 그 고 치기 이전의 이름이 그대로 나온다. 이는 본서의 편찬 시기를 추정케 하는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 이다. 98) 善谷縣 : 신라 朔州 奈靈郡(영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慶尙北道 安東市 陶山面 東部里 및 禮安面 일대이다. 본래는 고구려 買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때 善谷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태조때 禮安郡으로 승격되었다가 현종때 吉州(안동시)의 屬郡이 되었다. 우왕이 郡으로 복 구하고, 또 州로 승격하였으며, 공양왕때 監務가 설치되었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쳤으며, 고종때 郡으로 승격되었다. 99) 買谷縣 : 신라 朔州 奈靈郡 善谷縣(안동시 도산면)의 고구려 때 지명이다. 100) 玉馬縣 : 신라 朔州 奈靈郡(영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慶尙北道 奉化郡 奉化邑이다. 이 는 고구려 古斯馬縣이었는데, 경덕왕때 옥마현으로 고쳤으며, 고려때 奉化縣이 되었다. 101) 古斯馬縣 : 신라 朔州 奈靈郡 玉馬縣(봉화군 봉화읍)의 고구려 때 지명이다. 102) 奉化縣 : 신라 朔州 奈靈郡 玉馬縣(봉화군 봉화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고려때 玉馬縣을 奉化 縣으로 고쳤고, 현종때 安東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공양왕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 을 두었으며, 고종때 郡으로 승격되었다. 103) 熊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公州市인데, 신문왕때 熊川州로 고치고 都督을 둔 것을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熊州로 고쳤다. 104) 熊川州 : 신라 熊州(공주시)의 옛 지명으로, 다른 명칭으로는 熊津 또는 熊川이라 하였다. 文周 王 원년(475) 이후 백제의 수도가 되어 固麻城이라고 하였으며, 聖王 16년(538)에 泗 城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5方 중의 하나인 北方 熊津城으로 되었다. 신라와 唐나라의 연합군이 660년에

209 416 로 고치고 都督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熊州로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公 417 西原京으로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淸州112)이다. 州105)이다. 領縣이 둘이다. 尼山縣106)은 본래 백제 熱也山縣107)으로, 경덕왕이 [尼山으로] 大麓郡113)은 본래 백제 大木岳郡114)으로, 경덕왕이 [大麓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하였다. 淸音縣108)은 본래 백제 伐音支縣109)으로, 려)의 木州115)이다. 영현이 둘이다. 순치현(馴雉縣)116)은 본래 백제 甘買縣117)으로, 경덕왕 경덕왕이 [淸音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新豊縣110)이다. 西原京111)은 신문왕 5년(685)에 처음으로 西原小京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이 이름을 백제를 멸한 후 唐이 熊津都督府로 삼았는데, 신라가 文武王 11년(671)에 이를 빼앗아 熊川郡으 로 삼았다. 신문왕 6년(686)에 웅천주를 설치하였다. 105) 公州 : 신라 熊州(공주시)의 고려시대 지명. 熊州를 고려 태조때 公州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때 牧을 두었다가 다시 節度使를 두고 安節軍으로 칭하였다. 현종때 節度使를 폐지하고 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충혜왕때 牧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仁祖때 公山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복구되었다. 현종 영조 정조때 각각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복구될 정도로 읍격 조 정이 빈번하였다. 고종때에는 郡으로 개편되었다. 106) 尼山縣 : 신라 熊州(공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魯城面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公州의 屬縣이 된 후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石城(부여군 석성면) 과 합하여 尼城縣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을 둔 후 노성으로 고쳤다. 인조가 燕山 (청원군 문의면) 恩津(논산시 은진면)을 합하여 恩山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平川驛 서쪽에 설치 하였고, 효종때 각기 복구되었다. 영조가 다시 尼城이라고 칭하였다. 정조가 魯城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고종 32년(1895)에 郡으로 승격하여 공주부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는 군을 폐하고 논 산군에 병합하였다. 107) 熱也山縣 : 신라 熊州 尼山縣(논산시 노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08) 淸音縣 : 신라 熊州(공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公州市 新豊面이다. 109) 伐音支縣 : 신라 熊州 淸音縣(공주시 신풍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武夫縣이라고 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伐音村을 東明州 소속의 富林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있는 伐音城은 이곳으로 비정된 다. 110) 新豊縣 : 신라 熊州 淸音縣(공주시 신풍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淸音縣을 고려 초에 新豊縣으 로 이름을 고쳐서 그대로 公州에 속하게 하였는데, 조선도 그대로 이어졌다. 111) 西原京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州市와 청원군 일대이다. 본 래는 백제 上黨縣(일명 娘臂城 臂城 娘子谷)이었다. 다만 본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및 김유 신전 등에서 신라 진평왕 51년(629)에 신라가 빼앗았다는 高句麗 東邊 娘臂城을 현재의 청주 일 원으로 비정하고 있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7세기 신라가 한강유역을 영유하고 있었던 사 실을 감안해 보면 문제의 낭비성을 청주 일원으로 비정하기에는 불합리한 점이 발견된다. 629년 의 낭비성의 위치에 대하여 ①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의 해발 255m의 낭비성으로 보는 견해(이원 근, 1981, 백제낭비성고, 사학지 10, 7~38쪽), ②파주군 적성면 구읍리의 칠중성으로 보는 견해(김윤우, 1987, 낭비성과 낭자곡성, 사학지 21, 275~284쪽), ③고구려때 臂城郡이었던 경기도 포천군의 반월산성으로 보는 견해(서영일, 1995, 고구려 낭비성고, 사학지 28, 17~37쪽) 등이 있다. 청원의 낭비성은 규모가 너무 협소하고 또 고구려계 유물이 나오지 않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낭비성을 한강유역 일대에서 찾는 것이 진평왕대의 신라와 고 구려 간의 정세로 보아 합리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본서 권8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문왕 9 년(689)에 西原京城을 쌓았고, 권47 裂起傳에는 軍師 仇近이 金庾信의 셋째 아들인 元貞公을 따 라 西原述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西原述城은 서원소경과 관련이 깊다. 그 위치에 대해 ①상당산성 남문 앞 사면에서 발견된 사량부명이 새겨진 기와의 존재를 들어 상당산성을 치소로 보는 견해(이재준, 1981, 사탁부명 평와에 대한 고찰, 서원학보 2, 83쪽), ②당산토성설(박태 우, 1987,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백제연구 18, 65쪽), ③우암산토성설(충북 대 호서문화연구소, 1993, 청주시 역사유적, 25쪽 ; 양기석 강민식, 2000, 신라 서원경성의 위치와 운용, 충북사학 11 12합집, 133~134쪽), ④청주읍성설(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3, 앞의 책, 34쪽) 등이 제시되고 있다. 상당산성은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 후기로 편년되고 있어서(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7, 상당산성 -서장대 및 남문의 유적지 조사보고-, 75쪽), 서원소경성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112) 淸州 : 신라 熊州 西原京(청주시)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고려 태조때 淸州로 이름을 고쳤다. 성종 때 牧을 두었다가 節度使를 두고 全節軍이라 이름하였다. 현종때 安撫使를 폐지하고 牧으로 삼 았다. 조선 세종때 觀察使로 하여금 判牧使를 겸임케 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취소하였다. 효종때 縣으로 강등되었고, 현종때 복구되었다. 숙종때 또다시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복구되었다. 영조때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西原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복구되었다. 정조때에 마찬가지 였으며, 고종때에는 郡으로 개편되었다. 113) 大麓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天安市 木川面이다. 114) 大木岳郡 :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현재의 충남 天安市 木川面 南 化里에 백제시대의 토성이 그 치소로 추정된다(尹武炳, 1984, 木川土城, 충남대 박물관). 115) 木州 :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고려가 大麓郡을 木州로 고쳐서 淸州(청주시)의 屬郡으로 삼았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木川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16) 순치현(馴雉縣) :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天安市 豊歲面이다.

210 이 [순치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豊歲縣118)이다. 金池縣119)은 본래 백제 仇知縣120) 郡의 이름을 고치면서 지금(고려)까지도 모두 그대로 쓴다. 翰山縣125)은 본래 백제 大山縣126) 으로, 경덕왕이 [金池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全義縣121)이다. 으로, 경덕왕이 [翰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鴻山縣127)이다. 를 嘉 로 고쳤는데. 지금(고 嘉林郡122)은 본래 백제 加林郡123)으로, 경덕왕이 [단지] 加 西林郡128)은 본래 백제 舌林郡129)으로, 경덕왕이 [西林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려)도 그대로 하였다. 영현이 둘이다. 馬山縣124)은 본래 백제의 縣이었는데, 경덕왕이 州 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藍浦縣130)은 본래 백제 寺浦縣131)으로, 경덕왕이 [藍浦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庇仁縣132)은 본래 백제 比衆縣133)으로, 경덕 117) 甘買縣 : 신라 熊州 大麓郡 馴雉縣(천안시 풍세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일명 川이라고도 한다. 다른 기록에는 其買縣, 또는 林川이라고도 나온다. 118) 豊歲縣 : 신라 熊州 大麓郡 馴雉縣(천안시 풍세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馴雉縣을 고려 초에 豊 歲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天安府(천안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119) 金池縣 :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燕岐郡 全義面 이다. 120) 仇知縣 : 신라 熊州 大麓郡 金池縣(연기군 전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知縣을 東明州 소속의 久遲縣으로 고치려 한 적 이 있었다. 현재의 충남 燕岐郡 全義面 邑內里土城은 백제 때의 치소로 추정된다(成周鐸, 1986, 百濟城址와 文獻資料 -大木岳郡 甘買縣 仇知縣을 중심으로-, 百濟硏究 17, 102쪽). 121) 全義縣 : 신라 熊州 大麓郡 金池縣(연기군 전의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金池縣을 고려가 全義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淸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때 監務를 두었다가 縣監으로 고쳤으 며, 뒤에 燕岐를 합하여 全岐縣이라고 하였다가 각기 복구되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22) 嘉林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으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林川面이다. 고려 성종때 林州刺史로 고쳤고, 현종때 嘉林縣令으로 고쳤다. 충숙왕때 知林州事로 승격되었으며, 조선 태 조때 府로 승격되었다. 태종때 복구하였다가 다시 府로 높였으며, 뒤에 다시 복구되어 林川郡으 로 이름을 고쳤다. 123) 加林郡 :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加林城은 부여군 임천면 동쪽의 聖興山城으로서 백제 왕도 사비성 남단의 주요 수비성이었다. 가림성은 加林城水陸之衝, 加 林險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삼국사기 권28 (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唐 龍朔 2년 7월)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왕도 사비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수륙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 다. 백제 동성왕 때에는 衛士佐平 加의 반란 근거지이기도 하였고, 백제 멸망 이후에는 부흥군 의 근거지이기도 하였으며, 나당 전쟁 당시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권17 林川 郡 城郭條에 聖興山城의 존재가 보이는데, 둘레 2,705尺, 높이 13尺의 石築이 있다고 한다. 본 서 제사지에 의하면, 신라는 후에 加林城을 小祀의 하나로 삼을 정도로 국가 중요 제사지이기도 하였다. 124) 馬山縣 :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韓山面 이다. 고려도 원래 이름을 그대로 쓰다가 뒤에 韓山縣으로 고쳐서 嘉林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 종때 監務를 두고 鴻山(부여군 홍산면)을 겸임케 하였고, 뒤에 知韓州事로 높였다. 조선 태종때 韓山郡으로 고쳤다. 이를 본서 권27 무왕 33년(632) 2월과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5년 7월조에 나오는 馬川城과 같은 것으로 보고 현재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422쪽), 분명치 않다. 125) 翰山縣 :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鴻山面 이다. 126) 大山縣 : 신라 熊州 加林郡 翰山縣(부여군 홍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27) 鴻山縣 : 신라 熊州 加林郡 翰山縣(부여군 홍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翰山縣을 고려 초에 鴻 山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嘉林縣의 屬縣이 되었다가, 명종때 韓山(서천군 한산면)監務가 와서 겸 임하였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28) 西林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舒川邑이다. 고려 현종때 嘉林縣(부여군 임천면)의 屬郡이 되었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충숙왕때 知西州事로 승 격되었다가, 조선 태종때 舒川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129) 舌林郡 :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南陽郡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11월조에 신라가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인 豆陵尹 城 周留城 등을 항복시키고 舌利停에 이르러 論功行賞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舌利停은 곧 舌林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細注에 의하면 이를 혹은 后利停으로도 하였다. 130) 藍浦縣 :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保寧市 藍浦面 陽基里 일대이다. 고려 현종때 嘉林縣(부여군 임천면)의 屬縣이 되었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우왕 때 왜구로 인하여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공양왕이 새로이 鎭城을 설치하고 유망 민들을 불러 모았다. 조선 태조때 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다. 세조때 鎭을 혁파하고 縣監을 두었 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東國輿地勝覽 에서 藍浦縣 남쪽 15리에 옛 藍浦縣의 터가 있다 고 하였으니, 신라 및 고려시대의 藍浦縣址는 현재의 보령시 남포면 陽基里 일대에 해당하는 듯 하다. 131) 寺浦縣 : 신라 熊州 西林郡 藍浦縣(보령시 남포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32) 庇仁縣 :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庇仁面 이다. 고려 현종때 嘉林縣(부여군 임천면)의 屬縣이 되었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으며,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133) 比衆縣 : 신라 熊州 西林郡 庇仁縣(서천군 비인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211 420 왕이 [庇仁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421 (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唐津縣143)은 본래 백제 伐首只縣144)으로, 경덕왕이 伊山郡134)은 본래 백제 馬尸山郡135)으로, 경덕왕이 [伊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唐津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餘邑縣145)은 본래 백제 餘村縣146)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目牛縣136)은 본래 백제 牛見縣137)으로, 경덕왕이 [目牛 으로, 경덕왕이 [餘邑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餘美縣147)이다. 新平縣148)은 본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今武縣138)은 본래 백제 今勿 래 백제 沙平縣149)으로, 경덕왕이 [新平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縣139)으로, 경덕왕이 [今武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德豊縣140)이다. 혜성군( 城郡)141)은 본래 백제 扶餘郡150)은 본래 백제 所夫里郡151)으로, 당나라 장수 蘇定方과 金庾信이 이를 평정하고, 郡142)으로, 경덕왕이 [ 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都督府 직속의 賓汶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으며, 빈문현은 본래 比勿이었으므로, 比勿은 比衆의 異稱인 듯하다. 134) 伊山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德山面이다. 고려가 洪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5년에 德豊縣과 합하 여 德山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同 13년에 縣監으로 삼았다. 그 후 태종 16년에 伊山에 있던 都節 制使營을 海美縣으로 옮기고, 伊山舊營을 德山縣 治所로 삼았다. 헌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35) 馬尸山郡 :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36) 目牛縣 :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洪城郡 葛山面 雲谷里 일대인 듯하다. 고려가 高丘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때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이 되었다. 洪州 서쪽 30리에 있었다고 하니, 里數로 따져 보아 현재의 갈산면 운곡리 일대에 해당 한다. 137) 牛見縣 : 신라 熊州 伊山郡 目牛縣(홍성군 갈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38) 今武縣 :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古德面 인 듯하다. 139) 今勿縣 : 신라 熊州 伊山郡 今武縣(예산군 고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今勿縣을 支 州 소속의 己汶縣으로 고치려 한 적 이 있었다. 140) 德豊縣 : 신라 熊州 伊山郡 今武縣(예산군 고덕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今武縣을 고려가 德豊 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때 洪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이 되었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으 며, 조선 태종때 伊山縣(예산군 덕산면)과 합쳐 德山縣으로 고쳤다. 德豊縣의 위치는 명확치 않 으나, 東國輿地勝覽 德山縣 古跡條의 今治 북쪽 13리에 있었다는 古德山 이 古德豊 의 誤記 이거나, 또는 治所를 伊山舊營으로 옮기기 전의 德山治所가 德豊에 있었다면, 고려 德豊縣의 치 소 위치는 현재의 禮山郡 古德面에 해당한다. 141) 혜성군( 城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唐津郡 沔川面이다. 고려 현종때 運州(홍성읍)의 屬郡이 되었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충렬왕때 知沔州事로 승격되 었으며, 조선 태종때 沔川郡으로 고쳤다. 142) 혜군( 郡) : 신라 熊州 城郡(당진군 면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43) 唐津縣 : 신라 熊州 城郡(당진군 면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唐津郡 唐津邑 이다. 고려 현종때 運州(홍성읍)의 屬縣이 되었으며, 예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 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44) 伐首只縣 : 신라 熊州 城郡 唐津縣(당진군 당진읍)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夫只郡 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夫首只를 支 州에 소속된 子來縣으로 고치려고 하였다고 하니, 夫首只는 伐首只 또는 夫只의 다른 호칭 인 듯하다. 145) 餘邑縣 : 신라 熊州 城郡(당진군 면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瑞山市 雲山面 餘美里 일대이다. 146) 餘村縣 : 신라 熊州 城郡 餘邑縣(서산시 운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47) 餘美縣 : 신라 熊州 城郡 餘邑縣(서산시 운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餘邑縣을 고려 초에 餘 美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때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이 되었다. 예종때 監務를 두었다 가, 조선 태종때 貞海縣(서산시 해미면)과 합쳐 海美縣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貞海를 치소로 삼았 다. 東國輿地勝覽 에서 옛 餘美縣은 海美縣 북쪽 30리에 있었다고 하니, 고려시대 餘美縣의 위 치는 瑞山市 雲山面 北端의 餘美里 일대에 해당한다. 148) 新平縣 : 신라 熊州 城郡(당진군 면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唐津郡 新平面 이다. 고려 현종때 運州(홍성읍)의 屬縣이 되었다. 洪州 북쪽 90리에 있어서, 沔川郡(당진군 면 천면) 東村을 넘어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당진군 신평면에 해당한다. 149) 沙平縣 : 신라 熊州 城郡 新平縣(당진군 신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다만 권6 문무왕 3년 (663) 2월조에 백제부흥군과 전투를 벌인 居勿城과 연칭된 沙平城은 지리상으로 볼 때 차이가 있어 다른 곳을 가리킨다. 150) 扶餘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扶餘邑이다. 고려 현종때 公州의 屬郡이 되었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51) 所夫里郡 :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泗 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백 제 所夫里郡이었는데, 16년(538) 봄에 수도를 熊津에서 泗 즉 所夫里로 옮기고 南扶餘라고 칭 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이를 함락시켰고,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泗 州(또는 所夫里州)를 설 치하였다. 신문왕 6년(686)에 郡으로 고쳤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 聖王條와 같은 책 권2 紀異

212 422 문무왕 12년(672)에 摠管을 두었다. 경덕왕이 [扶餘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423 경덕왕이 [悅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定山縣157)이다.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石山縣152)은 본래 백제 珍惡山縣153)으로, 경덕왕이 [石山으 任城郡158)은 본래 백제 任存城159)으로, 경덕왕이 [任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石城縣154)이다. 悅城縣155)은 본래 백제 悅己縣156)으로, 의 大興郡160)이다. 영현이 둘이다. 靑正縣161)은 본래 백제 古良夫里縣162)으로, 경덕왕이 [靑 正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靑陽縣163)이다. 孤山縣164)은 본래 백제 烏山縣165)으 篇 南夫餘 前百濟條에는 按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 國號南夫餘 注曰其 地名所夫里 泗 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扶餘之別號也 後至聖王 移都於泗 今夫餘郡 이라 하여 泗 로, 본조에 인용된 古典記 에는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夫餘 로 나온다. 152) 石山縣 :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石城面 이다.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 6월조에 신라장군 竹旨 등이 加林城의 禾穀을 짓밟 고 唐兵과 石城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石城은 石山縣으로 현재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 있는 석성산성에 비정되고 있다(文化財管理局 編, 1976, 文化財大觀 -史蹟篇 下- ; 尹武炳 成周鐸, 1977, 百濟山城의 新類型, 百濟硏究 8 ; 충청남도, 1991, 문화유적총람(성곽 관아편), 139~140쪽 참조). 이 성은 표고 약 200m의 파진산 지맥에 축조 한 복합식 산성으로 주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이곳은 백제때 珍惡山縣으로서 신라 熊州 扶餘 郡 石山縣이었다가 고려 초에 石城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 았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가 공민왕때 扶餘監務가 와서 겸임하였고, 공양왕때 다시 監務를 두 었다. 조선 태종때 尼山(논산시 노성면)과 합쳐서 尼城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 으로 삼았으며, 고종때 郡으로 고쳤다. 153) 珍惡山縣 : 신라 熊州 扶餘郡 石山縣(부여군 석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54) 石城縣 : 신라 熊州 扶餘郡 石山縣(부여군 석성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石山縣을 고려 초에 石 城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때 公州(공주시)의 屬縣이 되었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취소하였다. 공민왕때 扶餘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고, 공양왕때 다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때 尼山(논산시 노성면)과 합쳐서 尼城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다. 고 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55) 悅城縣 :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靑陽郡 定山面 이다. 156) 悅己縣 : 신라 熊州 扶餘郡 悅城縣(청양군 정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본서 권39 잡지 지리 4 百濟郡縣名條에 悅己縣[一云豆陵尹城 一云豆串城 一云尹城] 이라 하여 豆良尹城 豆陵尹城 또 는 豆串城 또는 尹城으로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 에 따르면 이곳을 都督府 직속의 尹城縣이라고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豆良伊城 등으로 불리우 는 悅己縣은 뒤에 熊州 부여군 悅城縣이 되었다. 이 두량윤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군 定 山面의 계봉산성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38쪽 ; 盧道陽, 1980, 앞의 글, 16 19쪽). 계봉산성은 표고 210m인 산정에 테뫼식의 석축산선으로 성의 둘레는 560m이다. 이와는 달리 두릉과 주류의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도양, 1980, 앞의 글, 13쪽). 그러나 663년 나당연합군이 최후로 주류성을 공격할 때 주 류성과 두릉윤성이 모두 나오므로 별개의 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밖에 부안의 도롱이산성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앞의 책, 74~75쪽)와 대전광역시 儒城산성 방면으로 보는 견해(池內 宏, 1934, 앞의 글, 48 49쪽 ; 池憲英, 1972, 앞의 글, 18 28쪽),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의 豆良尹城=豆良伊城을 현재의 錦山郡 富利面으로 보고, 문무왕 3년조의 豆陵尹城=豆良 尹城을 舒川郡 麒山面 永慕里山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429쪽), 근 거가 분명치 않다. 157) 定山縣 : 신라 熊州 扶餘郡 悅城縣(청양군 정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悅城縣을 고려 초에 定 山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현종때 公州(공주시)의 屬縣이 되었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58) 任城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大興面이다. 159) 任存城 :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今州라고도 나온 다. 현재의 충남 禮山郡 大興面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에 걸쳐 있는 鳳首山城이다. 이 성은 테 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2,426m로 고대 산성 중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봉수산성에 대 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에 任存 存官 任存官 등이 새겨진 명 문 기와가 수습되어 이 성이 임존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군 충남개발연구원, 2000, 예산 임존성, 21~26쪽). 임존성은 복신 등이 최초로 거병한 곳이며, 후에 주류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부흥군의 북방 거점지역이 되었다. 663년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흑치상지와 지수신 등 이 주도한 3기 부흥군의 거점지역이기도 하다. 160) 大興郡 :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任城郡을 고려 초에 大興郡으 로 고쳤고, 현종때 運州(홍성읍)의 屬郡이 되었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때 縣監으 로 고쳤다가, 숙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61) 靑正縣 :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靑陽郡 靑陽邑 이다. 中宗壬申刊本 삼국사기 와 三國史節要 에는 靑正縣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 地理志 와 東國輿地勝覽 에는 靑武縣이라고 하였으니, 본서의 正 字는 武 에 대한 避諱 缺筆字를 오 인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162) 古良夫里縣 : 신라 熊州 任城郡 靑正縣(청양군 청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의하면 이를 都督府 직속의 麟德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163) 靑陽縣 : 신라 熊州 任城郡 靑正縣(청양군 청양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靑正縣을 고려 초에 靑

213 424 로, 경덕왕이 [孤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禮山縣166)이다. 黃山郡167)은 본래 백제 黃等也山郡168)으로, 경덕왕이 [黃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고려)의 連山縣169)이다. 영현이 둘이다. 鎭嶺縣170)은 본래 백제 眞峴縣171)<*眞은 貞이라고 425 도 썼다.>으로, 경덕왕이 [鎭嶺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鎭岑縣172)이다. 珍同 縣173)은 본래 백제의 縣이었는데, 경덕왕이 州郡의 이름을 고치면서 지금(고려)까지도 모 두 그대로 쓴다. 比豊郡174)은 본래 백제 雨述郡175)으로, 경덕왕이 [比豊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陽縣으로 고쳤다. 현종때 天安府의 屬縣이 되었고, 뒤에 洪州(홍성군 홍성읍)에 이속시켰다. 조 선 태조때 監務를 두었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다. 현종때 定山(청양군 정산면)에 합하였다가 뒤에 다시 분리시켜 縣을 설치하였으며,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64) 孤山縣 :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禮山邑 이다. 본서 권 26 백제본기 무령왕 22년(522) 가을 9월에 狐山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다는 기사 의 狐山을 孤山을 같은 곳으로 볼 수 있다. 孤山은 본서 권26 성왕 26년(548)조의 獨山城이나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9年조의 馬津城과는 같은 예산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서 권37 잡지 地理 4의 都督府一十三縣條의 支尋州의 屬縣중에 馬津縣本孤山 이라 한 기사, 金正浩, 大東地志 권5 禮山條에 本百濟孤山 一云烏山 唐改爲馬津 이라 한 기사, 新增東國輿 地勝覽 권20 禮山縣條에 禮山本百濟烏山 新羅改爲任城 이라 한 기사, 그리고 日本書紀 권 19 欽明紀 9年條에 馬津城之役[正月辛丑 高麗卒衆圍馬津城]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그런데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石山(부여군 석성면) 馬山(서천군 한산면) 孤 山 沙平(당진군 신평면)의 4縣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경덕왕이 孤山縣으로 이름을 고 쳤다는 지리지의 기록과 어긋난다. 165) 烏山縣 : 신라 熊州 任城郡 孤山縣(예산군 예산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孤山을 支 州 소속의 馬津縣으로 고친 적이 있었 다. 다만 마진현의 본래 지명이 孤山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산은 烏山의 異稱으로 쓰이기도 하 였다. 또한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 2월조의 百濟 獨山城이나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9 년 4월조의 馬津城은 모두 이곳의 다른 명칭이다. 166) 禮山縣 : 신라 熊州 任城郡 孤山縣(예산군 예산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孤山縣을 고려 태조때 禮山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현종때 天安府의 屬縣이 되었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고쳤다. 167) 黃山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連山面이다. 168) 黃等也山郡 :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5 무열왕 7년(660) 10월 9일조에 왕이 太子와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禮城을 쳐서 함락시키니 백제의 20여 城이 다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禮城은 이 근처의 성으로(이병도, 1977, 앞의 책, 87쪽) 초기 에 일어난 부흥군의 거점성 중의 하나이다. 이 성은 660년 10월 9일 신라 무열왕이 거느린 군대 의 공격을 받아 18일에 함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연산현 산천조에, 兜率山[在縣東 十五里 有古城基]라 하여 두솔산에 伊里城이 있다고 전하는데, 이리성은 이례성과 음이 유사하 여 이곳이 이례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169) 連山縣 :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黃山郡을 고려 초에 連山郡으 로 고쳤다. 현종때 公州의 屬郡이 되었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으며, 인조때 尼城(논산시 노성면) 恩津(논산시 은진면)과 합하여 한 縣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나 누어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70) 鎭嶺縣 :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大田廣域市 儒城區 南端 校村洞 일대이다. 171) 眞峴縣 : 신라 熊州 黃山郡 鎭嶺縣(대전광역시 서구 구진잠지역)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 에는 貞峴縣이라고도 나온다. 眞峴城은 지라성 대산책 사정책 등과 함께 662년 7월경에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성이다. 이 성은 강에 임해 높고 험하다(臨江高險). 고 기록될 정도의 군사 적 요충지였다. 이는 신라 경덕왕때 진령현으로, 고려때에는 진잠현으로 개칭되었다. 진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 여러 견해가 있지만,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의 흑성동산성[일명 密岩 山城]으로 보는 견해(심정보, 1983, 앞의 글 ; 지헌영, 1972, 앞의 글)가 설득력이 있다. 金正浩 의 大東地志 권5 진잠조에는 鎭岑本鎭峴 鎭峴城[密岩古城 俗稱美林古城] 라 하여 밀암산성 즉 흑석동산성에 비정하고 있다. 흑석동산성은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된 內托外 築의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540m이다. 이곳은 남쪽을 제외한 3면이 豆磨川으로 돌려 있 고,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며, 대전에서 汗三川里를 거쳐 논산시 연산에 이르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이 길목을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부흥군이 이 성에 웅거한 것은 옹산성전투에서 패 배한 이후 신라의 군량 운송로인 熊津道를 다시 차단하여 웅진부성의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72) 鎭岑縣 : 신라 熊州 黃山郡 鎭嶺縣(대전광역시 유성구 남단)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鎭嶺縣을 고 려 초에 鎭岑縣으로 고쳤다. 현종때 公州(공주시)의 屬縣이 되었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 종때 縣監으로 고쳤으며,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東國輿地勝覽 鎭岑縣條에 龍頭川이 縣北 3리에 있고 鄕校가 縣 남쪽 2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大田廣域市 儒城區 南端의 校村洞 大井洞 龍溪洞 일대(舊 大德郡 鎭岑面)에 해당한다. 173) 珍同縣 :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郡 珍山面 이다. 다른 기록에는 珍洞縣이라고도 나온다. 고려가 이름을 그대로 두고 進禮縣(금산군 금산읍) 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때 高山(완주군 고산면)監務가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조때 知珍州 事로 승격되었고, 태종때 珍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174) 比豊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大田廣域市 大德區 懷德驛 남쪽 邑內 洞 일대이다.

214 426 의 懷德郡176)이다. 영현이 둘이다. 儒城縣177)은 본래 백제 奴斯只縣178)으로, 경덕왕이 [儒城 427 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赤鳥縣179)은 본래 백제 所比浦縣180)으 로, 경덕왕이 [赤鳥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德津縣181)이다. 潔城郡182)은 본래 백제 結已郡183)으로, 경덕왕이 [潔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175) 雨述郡 : 신라 熊州 比豊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朽淺이라고 도 나온다. 우술성은 661년 6월 신라가 당의 고구려 공격을 돕기 위해 대군을 일으킬 때 진군래 가던 길목에 위치한 성이다.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은 신라군과 대결하여 많은 희생 을 냈던 곳이다. 이는 신라 경덕왕때 比豊郡으로, 고려때에는 회덕군으로 개칭된 곳으로, 현재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1동의 계족산성으로 비정된다. 최근의 계족산성발굴조사에서 雨述 등 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술성임을 알게 되었다(충남대박물관 대전광역시, 1998, 계족산성 발굴조사약보고, 8~9쪽). 계족산성은 표고 399m의 산정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 둘레 약 1,037m.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2~6m,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의 높 이는 9.9m 정도이다. 성의 동 서 남쪽에 너비 4m의 門址가 있고 길이 110, 너비 75, 높 이 63 의 직사각형 우물터가 있는데, 그 아래로 약 1m의 수로가 있다. 상봉에 봉수터로 추정되 는 곳이 있으며, 건물지와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문의-청주를 거쳐 북상하는 진로를 감 시할 수 있으며 보은-옥천-회덕-유성-공주로 이르는 웅진도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 이다. 산성 안에서는 단각고배를 비롯하여 장경호 단경소호 완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는 데, 대체적으로 6세기 중반에서 8세기대에 이르는 것으로 편년된다. 이와는 달리 대덕구 읍내동 수척골의 토축산성인 연축동산성을 우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심정보, 1991, 앞의 글, 156쪽 및 165~167쪽 ; 대전공업대학 향토문화연구소 대전직할시, 1992, 계족산성, 60~61 쪽). 176) 懷德郡 : 신라 熊州 比豊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고려 초에 懷德郡으로 이 름을 고쳤고, 현종때 公州의 屬郡이 되었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 쳤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東國輿地勝覽 懷德縣 山川條에 迭峴 즉 현재의 절고개가 縣 東 1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懷德郡의 위치는 현재의 大田廣域市 大德區 懷德驛 남쪽 邑內洞 松村洞 일대에 해당한다. 177) 儒城縣 : 신라 熊州 比豊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大田廣域市 儒城區 溫泉洞 일대이다. 고려가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조선이 이를 이었다. 東國輿地勝 覽 에 儒城縣은 公州 동쪽 54리에 있었으나, 옛 儒城은 儒城縣 동쪽 4리 廣道院 옆에 있어서, 客 舍 鄕校 倉庫터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옛 儒城은 곧 현재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溫泉 洞 일대에 해당한다. 178) 奴斯只縣 : 신라 熊州 比豊郡 儒城縣(대전광역시 유성구 온천동)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 에는 奴叱只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 8월조에 內斯只城이라고 나온다. 이 성은 662년 8월에 신라 장군 흠순 등에 의해 함락당한 곳이다. 이곳은 현재의 대전 광역시 儒城區 월평동에 있는 유성산성에 비정된다. 내사지성은 奴斯只城으로 불리우는데, 백제 시대의 노사지현이 신라 경덕왕때에 유성현으로 개칭된 이래 현재까지 유성으로 불렀다. 이 산 성은 표고 137.8m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돌린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710m이고 외벽의 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新邑縣184)은 본래 백제 新村縣185)으로, 경덕왕이 [新邑으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保寧縣186)이다. 新良縣187)은 본래 백제 沙尸良縣188)으 높이는 4.3m, 상부 폭은 2.2m이다. 이 성은 서쪽으로 甲川에 임하고 경사가 급한 곳으로 대 전-공주 간의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179) 赤鳥縣 : 신라 熊州 比豊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燕岐郡 錦 南面 柑城里 일대이다. 180) 所比浦縣 : 신라 熊州 比豊郡 赤鳥縣(연기군 금남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81) 德津縣 : 신라 熊州 比豊郡 赤鳥縣(연기군 금남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赤鳥縣을 고려가 德津 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조선이 이를 그대로 이었다. 公州 동 쪽 50리에 있었다는 東國輿地勝覽 의 기록 및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燕岐郡 錦 南面 柑城里 일대에 해당한다. 182) 潔城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洪城郡 結城面이다. 고려 현종때 運州(홍성읍)의 屬郡이 되었으며, 명종때 結城郡으로 이름을 고치고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으며, 영조가 保寧(보령시 주포면)에 합했다가 뒤에 복구하여 縣으로 삼았 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83) 結已郡 :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84) 新邑縣 :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保寧市 周浦面 保寧里(面所) 일대이다. 185) 新村縣 : 신라 熊州 潔城郡 新邑縣(보령시 주포면)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沙村이라 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이곳을 都督府 직속의 散昆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신촌현의 治所로는 현재의 충남 保寧市 周浦面 鳳堂 里 鳳堂城(=古南山城)과 주포면 保寧里(面所) 동쪽 鎭堂山에 있는 唐山城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6세기 전반까지는 봉당산성이었다가, 그 이후에는 당산성으로 옮겼으리라는 견해가 있다(成周 鐸, 1985, 百濟 新村縣 治所의 位置 比定에 관한 硏究, 百濟論叢 1, 145쪽). 186) 保寧縣 : 신라 熊州 潔城郡 新邑縣(보령시 주포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新邑縣을 고려 초에 保 寧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때 運州(홍성읍)의 屬縣이 되었다. 예종때 監務를 두었으며, 조 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다. 효종때 府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縣으로 강등되었다. 고종때 郡 으로 개편되었다. 東國輿地勝覽 保寧縣 山川條에 地乙峴 즉 질고개가 縣東 5리에 있고 大川이 縣南 24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조선시대의 保寧縣 治所는 현재의 保寧市 周浦面 保寧里(面所) 保寧邑城에 해당한다.

215 428 로, 경덕왕이 [新良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여양현(黎陽縣)189)이다. 燕山郡190)은 본래 백제 一牟山郡191)으로, 경덕왕이 [燕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429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燕岐縣192)은 본래 백제 豆仍只縣193)으로, 경덕왕이 [燕 岐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昧谷縣194)은 본래 백제 未谷縣195)으로, 경덕왕이 [昧谷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懷仁縣196)이다. 富城郡197)은 본래 백제 基郡198)으로, 경덕왕이 [富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187) 新良縣 :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洪城郡 長谷面 廣城里 일대이다. 188) 沙尸良縣 :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홍성군 장곡면)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沙羅라 고도 나온다. 본서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474)조에 沙尸城 축성 기사가 나오고,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9월 27일 기사에서는 沙尸山郡太守 哲川 등이 나오는데, 그 沙 尸城 및 沙尸山郡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 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1쪽), 신라 소지마립간때에 이곳이 신라의 영유지역이 아니기 때 문에 성립되기 어렵다. 본 기사로 보아 신라군이 우술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청원 문의로 비정되는 일모산군 태수가 참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인근의 옥천지역으로 추 정된다. 189) 여양현(黎陽縣) :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홍성군 장곡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고려가 黎陽縣 으로 고치고 監務를 두었다. 현종때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이 되었으며, 洪州 남쪽 37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洪城郡 長谷面 廣城里에 해당한다. 190) 燕山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原郡 文義面이다. 고려가 淸州의 屬郡으로 삼았고,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고종때 文義로 이름을 고치고 縣令으로 승격시 켰다. 충렬왕때 嘉林(부여군 임천면)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뒤에 복구되었다. 조선 선조때 淸州에 병합되었고, 광해군때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때 淸州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고, 뒤 에 郡으로 개편되었다. 현재의 청원군 문의면 文山里 일대에 해당한다. 191) 一牟山郡 :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신라가 백제에 이어서 一牟城 (문의지역)에 진출한 것은 자비마립간 17년(474)이었다. 청원 문의 지역의 성곽으로는 德留里의 九龍山山城, 米川里의 壤城山城 文德里의 將軍峰山城(성재산성) 등이 있고, 신라계의 미천리고 분군과 上長里古墳群 등이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474년 신라가 쌓은 一牟城과 관련이 있는 산성은 미천리의 양성산성[一牟山城, 또는 燕山城]이다. 양성산성은 양성산(378m)과 계곡을 둘 러쌓은 土石築의 산성으로 둘레는 845.5m이다. 이곳에서 신라계의 토기와 기와편, 고려시대의 토기와 자기편, 조선시대의 백자편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 항쟁기와 후삼국시대에 요충지로서 기능하였다. 이 성과 관련하여 미천리고분군이 주목된다. 미천리유적은 산록 능선 정상부를 따 라 분포한 고분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1991년에 9기, 1992년에 5기 등 모두 14기의 신라 석곽묘가 발굴 조사되었다. 신라계의 수혈식 석곽묘에서 대부장경호 고배 단경호 등의 토기 류와 철제 무기류 및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 를 통해 백제가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남천할 무렵에 신라가 이 지역을 영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근에 바로 475년 이후 고구려가 남천하던 백제를 쫓아 금강유역을 공제하기 위해 설치한 남성골 유적이 있을 정도로 삼국이 대치하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蘇泰縣199)은 본래 백제 省大 (兮)縣200)으로, 경덕왕이 [蘇泰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 합집, 366~370쪽을 참조할 것. 192) 燕岐縣 :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燕岐郡 南面 燕 岐里 일대이다. 고려 현종때 淸州(청주시)의 屬縣이 되었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고, 뒤에 木州 (천안시 목천면)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종때 이를 나누어 監務를 두었고, 뒤에 全 義(연기군 전의면)에 병합시켜 全岐라고 칭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縣監을 두었다. 숙종때 文義(청 원군 문의면)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縣으로 삼았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193) 豆仍只縣 : 신라 熊州 燕山郡 燕岐縣(연기군 남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194) 昧谷縣 :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報恩郡 懷北面 이다. 195) 未谷縣 : 신라 熊州 燕山郡 昧谷縣(보은군 회북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世宗實錄 권149 地理 志 懷仁條에 未谷城이 나오고, 東國輿地勝覽 권16 懷仁縣條에는 昧谷山이 縣 동쪽 1리에 있고 昧谷山城은 석축으로서 1,152尺이었다고 나온다. 현재의 위치는 報恩郡 懷北面 富壽里이며, 지 표로부터 70m 정도(해발 187m)의 독립구릉에 1차 축조의 土石城 300m, 2차 증축의 石城 6 700m의 규모이며, 군데 군데 석축이 남아 있고 그 안에서 백제 토기와 고신라 토기편이 발견되 었다(成周鐸 車勇杰, 1987, 百濟未谷縣과 昧谷山城의 歷史地理的 管見, 三佛金元龍敎授停 年退任紀念論叢Ⅱ, 쪽). 196) 懷仁縣 : 신라 熊州 燕山郡 昧谷縣(보은군 회북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昧谷縣을 고려 초에 懷 仁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때 淸州(청주시)의 屬縣이 되었다. 뒤에 懷德(대전광역시 대덕구) 兼任官으로 삼았으며, 우왕때 따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삼았으며, 고종때 郡으 로 개편되었다. 197) 富城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瑞山市이다. 고려 인종때 縣令으로 고쳤으며, 명종때 官號를 없앴다. 충렬왕때 瑞山으로 이름을 고치고 知郡事로 승격되 었다가 뒤에 瑞州牧으로 높였다. 충선왕때 瑞寧府로 강등되었고 뒤에 또 知瑞州事로 낮추었다. 조선 태종때 다시 瑞山郡으로 고쳤으며, 숙종 영조 정조때에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구 될 정도로 읍격의 변화가 빈번하였다. 198) 基郡 :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백제 때 지명이다. 199) 蘇泰縣 :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泰安郡 泰安邑이다. 고

216 430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地育縣201)은 본래 백제 知六縣202)으로, 경덕왕이 [地育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北谷縣203)이다. 湯井郡204)은 본래 백제의 郡이었는데, 문무왕 11년, 당나라 咸亨 2년(671)에 州로 삼고 摠管을 두었다가, 함형 12년(681)에 주를 폐지하고 [湯井]郡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 을] 그대로 썼는데, 지금(고려)의 溫水郡205)이다. 영현이 둘이다. 陰峯縣206)<*또는 陰岑이 207) 라고도 한다.>은 본래 백제 牙述縣 으로, 경덕왕이 [陰峯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208) 209) 210) (고려)의 牙州 이다. 기량현(祁梁縣) 은 본래 백제 屈直縣 으로, 경덕왕이 [祁梁으로] 려 현종때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이 되었으며, 충렬왕때 泰安으로 이름을 고치고 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그대로 이었다. 본서 신라본기 애장왕 8년(804)조에 蘇大縣이라고 나온다. 200) 省大 ([兮])縣 : 신라 熊州 富城郡 蘇泰縣(태안군 태안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201) 地育縣 :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瑞山市 地谷面이다. 202) 知六縣 : 신라 熊州 富城郡 地育縣(서산시 지곡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知留를 都督府 支 州 소속의 平夷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知留는 곧 知六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203) 北谷縣 : 신라 熊州 富城郡 地育縣(서산시 지곡면)의 고려시대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地谷縣 이라고 나온다. 고려가 地谷縣(또는 北谷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그대로 富城郡(서산시)에 속하 게 두었다. 조선이 그대로 이었다. 204) 湯井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舊 溫陽市)이다. 현 재의 아산시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2km 떨어진 읍내동에는 조선시대의 溫陽鄕校와 溫州衙門 이 있고, 읍내동 뒷산의 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瓦片이나 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되었으므로, 湯 井城은 아산시 邑內洞山城에 비정된다(兪元載, 1992, 百濟 湯井城 硏究, 百濟論叢 3, 百濟 文化開發硏究院, 67 68쪽). 205) 溫水郡 : 신라 熊州 湯井郡(아산시)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湯井郡을 고려 초에 溫水郡으로 이름 을 고쳤으며, 현종때 天安府의 屬郡이 되었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때 新昌에 합 쳐서 溫昌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뒤에 나누어 溫水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세종이 온천에 간 것 이 계기가 되어 溫陽으로 이름을 고치고 郡으로 승격되었다. 206) 陰峯縣 : 신라 熊州 湯井郡(아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 靈仁面 牙山里 인데, 다른 기록에는 陰岑縣이라고도 하였다. 207) 牙述縣 : 신라 熊州 湯井郡 陰峯縣(아산시 영인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08) 牙州 : 신라 熊州 湯井郡 陰峯縣(아산시 영인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陰峯縣을 고려 초에 仁州 로 고쳤는데, 성종때 刺史를 두었고, 목종때 이를 폐지하였다. 현종때 天安府의 屬縣이 되었으 며, 뒤에 牙州로 이름을 고치고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牙山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監을 두 었다. 세조때 縣을 없앴다가 뒤에 복구하였으며,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東國輿地勝覽 에 431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新昌縣211)이다. 全州 全州212)는 본래 백제 完山213)으로, 진흥왕 16년(555)에 州로 삼았고, 26년(565)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 5년(685)에 다시 完山州214)를 설치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全州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杜城縣215)은 본래 백제 豆伊縣216)으로, 경덕왕이 [杜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伊城縣217)이다. 金溝 의하면 高勇山이 牙山縣北 12리에 있고 연암산( 巖山)이 縣東 19리에 있다고 하므로, 牙山縣의 治所는 현재의 牙山市 靈仁面 牙山里(面所)에 있었다. 209) 기량현(祁梁縣) : 신라 熊州 湯井郡(아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 新昌面 邑內里이다. 210) 屈直縣 : 신라 熊州 湯井郡 祁梁縣(아산시 신창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屈旨縣이 라고도 나온다. 211) 新昌縣 : 신라 熊州 湯井郡 祁梁縣(아산시 신창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祁梁縣을 고려 초에 新 昌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때 天安府의 屬縣이 되었다. 공양왕때 萬戶兼監務를 두었으며, 조 선 태조때 萬戶를 생략하였다. 태종때 溫水(아산시)에 합하여 溫昌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牙山市 新昌面 邑內里(舊 新 昌)에 해당한다. 212) 全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全州市이다. 신라 말에 후백제 甄萱이 이곳에 도 읍을 정하였으나, 고려 太祖가 이를 멸하고 安南都護府로 이름을 고쳤다가 同 23년(940)에 다시 全州로 이름을 고쳤다. 顯宗때 全州牧이 되었는데, 고려 말에 完山府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 太 宗때 全州府로 다시 이름을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213) 完山 : 신라 全州(전주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比斯伐 또는 比自火라고도 나온 다. 214) 完山州 : 신라 全州(전주시)의 옛 지명이다. 본서 권40 직관지 무관조에 신라 六停의 하나로서 完山停이 나오며, 본래는 下州停이었는데 신문왕 5년에 폐지하고 完山停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6년(555) 및 26년조(565)에 比斯伐에 完山州를 置廢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직관지 및 지리지의 기록과 같이 경남 창녕에 있었던 下州의 잘못으로 보 아야 한다(李康來, 1987, 百濟 比斯伐 考, 崔永禧先生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探求堂). 215) 杜城縣 :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伊西面 伊城里 일대이 다. 216) 豆伊縣 : 신라 全州 杜城縣(완주군 이서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往武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豆尸를 都督府 魯山

217 縣218)은 본래 백제 仇知只山縣219)으로, 경덕왕이 [金溝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음으로 小京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南原小京을 설치하였는데, 지금(고려)의 그대로 쓴다. 高山縣220)은 본래 백제의 縣이었는데, 경덕왕이 州郡의 이름을 고치면서 지 南原府223)이다. 금(고려)까지도 [모두] 그대로 쓴다. 南原小京221)은 본래 백제 古龍郡222)으로, 신라가 이를 병합하여, 신문왕 5년(685)에 처 大山郡224)은 본래 백제 大尸山郡225)으로, 경덕왕이 [大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려)의 泰山郡226)이다. 영현이 셋이다. 井邑縣227)은 본래 백제 井村228)으로, 경덕왕이 [井邑 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빈성현(斌城縣)229)은 본래 백제 賓屈縣230) 州(익산시 함라면) 소속의 淳遲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는데, 두시는 두이현의 다른 호칭이었 던 듯하다. 217) 伊城縣 : 신라 全州 杜城縣(완주군 이서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杜城縣을 고려가 伊城縣으로 이름을 고쳐 그대로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全州 서쪽 25리에 있었다. 218) 金溝縣 :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金溝面이다. 본래는 백 제 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때 金溝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의종때 縣令으로 승 격되었다. 조선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19) 仇知只山縣 : 신라 全州 金溝縣(김제시 금구면)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仇智山縣이 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知只山을 東明州 소속의 唐山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220) 高山縣 :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高山面인데, 다른 기록 에는 難等良이라고도 나온다. 고려 현종때 全州의 屬縣이 되었으며, 뒤에 監務를 두고 珍同(금 산군 진산면)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조때 다시 나누었고,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때 郡으 로 개편되었다. 221) 南原小京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南原市이다. 신문왕 11년 (691)에 南原城을 쌓았다. 남원소경은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과 함께 설치되었다. 여기에 는 여러 주 군에서 사민된 민호들이 채워지게 되었는데, 대개 구고구려 유민일 것으로 생각된 다. 남원소경이 설치되기 바로 전해에(684) 金馬渚(익산)에 있던 고구려 유민인 大文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평되자 이들을 남쪽 주 군으로 사민시켰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이 기사와 관련시 켜 볼 때 사민대상은 금마저에 있던 고구려 유민으로 보이며, 사민 대상지역은 바로 남원소경으 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라 하대에 음악가로 활동했던 玉寶高가 고구려계 악사로부터 玄琴을 배 웠다든지, 法鏡大師와 진감선사(眞鑒禪師) 등의 出自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남원 소경에는 고구 려 유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임병태, 1967, 신라소경고, 역사학보 35 36합집, 90~92쪽). 반란자를 포함한 일반 주 군의 민호를 사민시킨 남원소경의 경우는 왕경의 貴戚子 弟와 6부 호민을 사민시켜 만든 국원소경과는 그 비중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이어 691년에 는 남원소경성이 축조됨으로서 이곳도 소경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남원지역은 신라 5通의 하 나인 海南通 루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井上秀雄, 1974, 新羅王畿の構成, 新羅 史基礎硏究, 東出版, 403~404쪽), 경주에서 양산 창령 합천 거창을 거쳐 소백산맥의 영로 인 육십령이나 八良峙를 넘어 남원에 이르고 여기서 광주와 나주로 연결되는 武州街道上에 위치 한 요지다. 이곳은 노령산맥 지리산계 및 마이산계로 둘러쌓인 준평원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 으며, 섬진강 수맥이 이곳을 관류하고 있어서 남원읍 주변에 펼쳐있는 可防平野와 金池平野는 高原性 운봉평야와 함께 곡창지대로 알려져 있다. 남원은 백제때의 古龍郡이었는데, 영산강 유 역의 거점지역인 武州(광주)와 發羅(나주)를 견제하고 취약한 지방 통치력을 보완하기 위해 이곳 에 소경을 설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2001, 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 93~94쪽을 참조할 것. 222) 古龍郡 : 신라 全州 南原小京(남원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南原이라고도 나온다. 223) 南原府 : 신라 全州 南原小京(남원시)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南原小京을 고려 태조때 이름을 그 대로 두고 府로 고쳤다. 충선왕때 帶方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南原郡으로 고쳤다. 공민왕때 다시 府로 높였으며, 태종때 都護府로 고쳤다. 영조때 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南原府로 복구 되었으며,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24) 大山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七寶面이다. 본서 권3 신라본기 訥祗麻立干 36년(452)조에 大山郡에서 嘉禾를 바쳤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곳이 당시 신라의 영유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기사로 보인다. 225) 大尸山郡 :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大尸山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의 帶山縣으로 고 치려 한 적이 있었다. 226) 泰山郡 :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太山郡이라고 도 나온다. 泰山郡을 고려가 古阜郡의 屬郡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고 仁義縣을 겸임케 하였다. 현종때 다시 이를 나누었고, 공민왕때 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때 또 仁義를 합하 여 泰仁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치소를 居山驛(정읍시 태인면)으로 옮겼다. 옛 泰山은 泰仁縣 동 쪽 20리에 있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里數로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옛 泰山郡은 현재의 井邑市 七寶面 面所인 詩山里 일대에 해당한다. 227) 井邑縣 :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이다. 고 려가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쳤고, 고종때 郡으로 개편하였다. 228) 井村 : 신라 全州 大山郡 井邑縣(정읍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井村縣이라고도 나 온다.

218 으로, 경덕왕이 [빈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仁義縣231)이다. 野西縣232)은 본 은 본래 백제 皆火縣238)으로, 경덕왕이 [扶寧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래 백제 也西伊縣233)으로, 경덕왕이 [野西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巨野縣234)이다. 쓴다. 喜安縣239)은 본래 백제 欣良買縣240)으로, 경덕왕이 [喜安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 을 보라]夫里郡236)으로, 古阜郡235)은 본래 백제 古 [ 자는 沙로 써야하는데 동국여지승람 금(고려)의 保安縣241)이다. 尙質縣242)은 본래 백제 상칠현(上柒縣)243)으로, 경덕왕이 [尙質 경덕왕이 [古阜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扶寧縣237)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進禮郡244)은 본래 백제 進仍乙郡245)으로, 경덕왕이 [進禮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 셋이다. 伊城縣246)은 본래 백제 豆尸伊縣247)으로, 경덕왕이 [伊城 229) 빈성현(斌城縣) :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淨雨面이다. 230) 賓屈縣 : 신라 全州 大山郡 斌城縣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賦城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661) 4월조에 나오는 賓骨壤은 곧 賓屈縣의 異稱인 듯하다. 빈골 양은 현재의 전북 태인군 옹동면 지역이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3) 全州 大山郡條에 斌城縣本 百濟賓屈縣 景德王改名 今仁義縣 이라 하여 백제때 빈굴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때 빈성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의현이었다. 이곳을 전북 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의 산성으로 보 는 견해가 있다(전영래, 1997, 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신아출판사, 81~82쪽). 231) 仁義縣 : 신라 全州 大山郡 斌城縣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빈성현(斌城縣)을 고려가 仁義縣으로 이름을 고쳐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고 泰山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다. 현종때 이를 나누어 監務 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때 泰山과 합하여 泰仁縣(정읍시 태인면)에 넣었으며, 仁義廢縣은 그 서 쪽 10리에 있었다. 里數로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옛 仁義縣은 현재의 정읍시 淨雨面 面所인 水金里 일대에 해당한다. 232) 野西縣 :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雙龍里(面所)이다. 233) 也西伊縣 : 신라 全州 大山郡 野西縣(김제시 금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34) 巨野縣 : 신라 全州 大山郡 野西縣(김제시 금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野西縣을 고려가 巨野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뒤에 金堤縣에 속하게 하였고, 뒤에 또 金溝縣 (김제시 금구면)에 내속시켰으며, 金溝縣 남쪽 15리에 있었다. 里數로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옛 巨野縣은 현재의 金堤市 金山面 雙龍里(面所) 일대에 해당한다. 235) 古阜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古阜面이다. 고려 태조때 영주(瀛州)로 고치고 觀察使를 두었으며, 광종이 安南都護府로 고쳤다. 현종이 다시 古 阜郡으로 고쳤고, 충렬왕이 靈光郡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뒤에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이 그대로 이었다. 236) 古 (沙)夫里郡 :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周書 권49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의 하나인 中方 古沙城이었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古沙夫里 또는 古沙夫村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州治인 平倭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237) 扶寧縣 :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扶安郡 扶安邑 이다. 고려가 그대로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監務를 두고 保安縣을 겸임케 하였다. 우왕때 두 縣 모두 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때 保安을 다시 扶寧에 합쳐서 扶安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이듬해에 兵馬使兼判事로 삼았다. 세종때 僉節制使로 고쳤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 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38) 皆火縣 : 신라 全州 古阜郡 扶寧縣(부안군 부안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239) 喜安縣 :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扶安郡 保安面 이다. 240) 欣良買縣 : 신라 全州 古阜郡 喜安縣(부안군 보안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41) 保安縣 : 신라 全州 古阜郡 喜安縣(부안군 보안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喜安縣을 고려가 保安 縣으로 이름을 고쳐 그대로 古阜郡에 속하게 두었다. 뒤에 扶寧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다가, 우왕 이 따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扶寧에 합쳐 넣으면서 扶安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242) 尙質縣 :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興德面 이다. 고려가 그대로 古阜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章德縣(또는 昌德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監務를 두되 高敞을 겸임케 하였다. 충선왕이 興德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조선 태조때 이를 다시 나누었고, 뒤에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43) 상칠현(上柒縣) : 신라 全州 古阜郡 尙質縣(고창군 흥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 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上杜를 都督府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 의 佐贊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으니, 上杜는 上柒의 異稱일 가능성이 높다. 244) 進禮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郡 錦山邑이다. 고려가 縣令으로 강등시켰다가, 충렬왕때 知錦州事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종때 錦山郡으로 고쳤다. 한 편 권12 신라본기 및 권50 견훤전의 신라 경명왕 4년(920)조에 나오는 進禮城을 이곳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文柄憲, 1976, 後百濟의 興亡考, 百濟文化 1, 3쪽), 이 성은 金海郡 進禮面 新 安里 松亭里에 걸쳐 있는 토성, 즉 進禮山城을 가리킨다(金侖禹, 1989, 新羅末의 仇史城과 進 禮城考, 史學志 22, 쪽). 이를 淸道邑 오리산성(古 烏禮山城)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 다(이병도, 1977, 앞의 책, 203쪽). 245) 進仍乙郡 :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進乃郡이라고 도 나온다.

219 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富利縣248)이다. 淸渠縣249)은 본래 백제 勿居縣250)으 이름을 [市津으로]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량현(礪良縣)259)은 본래 백제 로, 경덕왕이 [淸渠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丹川縣251)은 본래 백 只良肖縣260)으로, 경덕왕이 [礪良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雲梯 제 赤川縣252)으로, 경덕왕이 [丹川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朱溪縣253)이다. 縣261)은 본래 백제 只伐只縣262)으로, 경덕왕이 [雲梯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 德殷郡254)은 본래 백제 德近郡255)으로, 경덕왕이 [德殷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대로 쓴다. 려)의 德恩郡256)이다. 영현이 셋이다. 市津縣257)은 본래 백제 加知奈縣258)으로, 경덕왕이 臨陂郡263)은 본래 백제 시산현(屎山郡)264)으로, 경덕왕이 [臨陂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 246) 伊城縣 :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茂朱郡 富南面 이다. 247) 豆尸伊縣 : 신라 全州 進禮郡 伊城縣(무주군 부남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富尸伊 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660) 8월 2일조에 나오는 豆尸原嶽은 이곳 을 가리키는 듯하다. 248) 富利縣 : 신라 全州 進禮郡 伊城縣(무주군 부남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伊城縣을 고려가 富利 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뒤에 다시 錦州(금산군 금산읍)에 속하게 하였으 며, 錦山郡 동남 60리에 있었다. 里數를 따지고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郡 富里面은 이름이 같으나 거리가 있고, 위치상 全羅北道 茂朱郡 富南面에 해당한다. 249) 淸渠縣 :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鎭安郡 龍潭面 이다. 고려 충선왕이 龍潭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令으로 삼았는데, 조선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 었다. 250) 勿居縣 : 신라 全州 進禮郡 淸渠縣(진안군 용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51) 丹川縣 :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茂朱郡 茂朱邑 이다. 252) 赤川縣 : 신라 全州 進禮郡 丹川縣(무주군 무주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253) 朱溪縣 : 신라 全州 進禮郡 丹川縣(무주군 무주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丹川縣을 고려가 朱溪 縣으로 고쳐 그대로 進禮縣(금산읍)에 속하게 하였다. 명종이 茂豊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 고, 공양왕이 茂豊에 병합시켰다. 조선 태종이 茂朱縣으로 이름을 고쳐 縣監을 두고 朱溪를 治 所로 삼았다. 현종이 錦山郡 安城 橫川의 두 面을 떼어내 병합시키고 府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54) 德殷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恩津面이다. 255) 德近郡 :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은진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周書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 의 하나인 東方 得安城이었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 곳에 德安都督府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는 德安 城이라고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 總章 2년(669)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 르면 德近支를 都督府 직속의 得安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이곳은 본래 백제 德近支 또 는 德近郡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德殷郡(충남 논산시 은진면)이 되었다. 256) 德恩郡 :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은진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德殷郡을 고려 초에 德恩郡으 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때 公州의 屬郡이 되었다가, 조선 태조때 市津縣과 합하여 德恩監務로 삼았고, 세종때 恩津縣(논산시 은진면)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監으로 삼았으며, 이때 옛 德恩은 縣 동남쪽 12리에 있었다. 인조때 尼城 連山과 합쳐서 한 縣으로 삼았고, 효종때 복구되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里數로 따져 볼 때, 고려시대의 德恩郡은 현재의 論山市 恩津面 六 谷里 일대에 해당한다. 257) 市津縣 :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은진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이다. 고 려 현종때 公州의 屬縣이 되었다가, 조선 태조때 德恩縣과 합하여 德恩監務로 삼았고, 세종때 恩津縣(논산시 은진면)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監으로 삼았는데, 이때 옛 市津縣의 치소는 皇華山 서남쪽에 있었다. 東國輿地勝覽 에 皇華山은 恩津縣(논산시 은진면)의 서쪽 10리에 있다고 하 였고, 大東輿地圖 에 옛 市津縣의 위치를 恩津의 서북쪽으로 표기하였으니, 현재의 論山市 일 대에 해당한다. 258) 加知奈縣 : 신라 全州 德殷郡 市津縣(논산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加乙乃 또는 薪浦라고도 나온다. 259) 여량면(礪良縣) :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은진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礪山面인데, 다른 기록에는 여양현(礪陽縣)이라고도 나온다. 고려 현종때 全州의 屬縣이 되었다 가, 공양왕때 監務를 두고 朗山縣(익산시 낭산면)을 겸임시켰다. 조선 정종때 이름을 礪山縣이 라고 고쳤고, 세종때 郡으로 승격되었다. 숙종때 府로 승격되었고,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60) 只良肖縣 : 신라 全州 德殷郡 礪良縣(익산시 여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61) 雲梯縣 :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가야곡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華山 面 雲梯里 일대이다. 고려가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고, 조선 태조때 高山縣(완주군 고산면)에 속 하게 하였다. 262) 只伐只縣 : 신라 全州 德殷郡 雲梯縣(완주군 화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共伐共 縣이라고도 나온다. 263) 臨陂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臨陂面이다. 고려가 縣令으로 강등시켰으며, 조선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64) 시산군(屎山郡) :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陂山, 또 는 文, 또는 所島, 또는 失鳥出이라고도 나온다.

220 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咸悅縣265)은 본래 백제 甘勿阿縣266)으로, 경덕왕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평고현(平皐縣)275)은 본래 백제 首冬山縣276) 이 [咸悅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沃溝縣267)은 본래 백제 馬西良縣268) 으로, 경덕왕이 [平皐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利城縣277)은 본래 으로, 경덕왕이 [沃溝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澮尾縣269)은 본래 백제 乃利阿縣278)으로, 경덕왕이 [利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백제 夫夫里縣270)으로, 경덕왕이 [澮尾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武邑縣279)은 본래 백제 武斤村縣280)으로, 경덕왕이 [武邑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金堤郡271)은 본래 백제 碧骨縣272)으로, 경덕왕이 [金堤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넷이다. 萬頃縣273)은 본래 백제 豆乃山縣274)으로, 경덕왕이 [萬頃으 려)의 富潤縣281)이다. 淳化郡282)<*淳은 渟이라고도 쓴다.>은 본래 백제 道實郡283)으로, 경덕왕이 [淳化로] 이름 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淳昌縣284)이다. 영현이 둘이다. 적성현( 城縣)285)은 본래 백제 265) 咸悅縣 :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咸羅面 이다.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이 되었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龍安(익산시 용안 면)에 합쳐서 安悅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복구하여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 었다. 東國輿地勝覽 咸悅縣 山川條에 咸羅山이 縣 서쪽 2리에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고려 조선시대의 咸悅縣의 治所는 현재의 咸悅邑이 아니라 咸羅面 面所인 咸悅里 일대에 해당한다. 266) 甘勿阿縣 : 신라 全州 臨陂郡 咸悅縣(익산시 함라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甘勿阿를 都督府 魯山州 州治인 魯山縣으로 고치 려 했던 적이 있었다. 267) 沃溝縣 :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沃溝邑 이다. 고려가 그대로 臨陂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鎭을 두고 兵馬使兼縣事로 삼았으 며, 세종이 僉節制使로 삼았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68) 馬西良縣 : 신라 全州 臨陂郡 沃溝縣(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麻斯良을 都督府 소속의 歸化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麻斯良은 馬西良의 異稱일 가능성이 있다. 269) 회미현(澮尾縣) :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澮縣面인데, 일명 連江이라고도 하였다. 고려가 그대로 臨陂縣의 屬縣으로 두었다가, 조선 태종 때 沃溝縣에 속하게 하였다. 270) 夫夫里縣 : 신라 全州 臨陂郡 澮尾縣(군산시 회현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71) 金堤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이다. 고려 초에 全 州의 屬郡이 되었다가, 인종때 縣令을 두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72) 碧骨縣 :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碧骨郡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骨을 古四州(정읍시 고부 면) 소속의 城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273) 萬頃縣 :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萬頃面이다. 고 려가 臨陂縣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예종때 監務를 두었고, 뒤에 縣令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광 해군때 金堤에 합쳤다가 뒤에 全州에 합쳤다. 인조때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274) 豆乃山縣 : 신라 全州 金堤郡 萬頃縣(김제시 만경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豆奈只를 都督府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의 淳牟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는데, 豆奈只는 豆乃山의 異稱인 듯하다. 275) 평고현(平皐縣) :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龍池面 이다.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이 되었고, 뒤에 金堤縣에 다시 속하게 하였다. 平皐廢縣은 金堤郡 동쪽 25리에 있었는데, 大東輿地圖 의 표시로 보아, 현재의 金堤市 龍池面 일대에 해당한다. 276) 首冬山縣 : 신라 全州 金堤郡 平皐縣(김제시 용지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77) 利城縣 :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靑蝦面이다. 고 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利城廢縣은 全州 서쪽 75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 의 표기 와 비교해 보아, 현재의 金堤市 靑蝦面 面所인 東之山里(古名 童子浦) 일대에 해당한다. 278) 乃利阿縣 : 신라 全州 金堤郡 利城縣(김제시 청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79) 武邑縣 :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聖德面이다. 280) 武斤村縣 : 신라 全州 金堤郡 武邑縣(김제시 성덕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武斤縣 이라고도 나온다. 281) 富潤縣 : 신라 全州 金堤郡 武邑縣(김제시 성덕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武邑縣을 고려가 富潤 縣으로 이름을 고쳐 臨陂縣의 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萬頃縣에 속하게 하였다. 富潤廢縣은 萬頃 縣 남쪽 13리에 있었는데, 里數를 따지고 大東輿地圖 의 方面 표기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金 堤市 聖德面 石洞里(面所) 일대에 해당하는 듯하다. 282) 淳化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淳昌郡 淳昌邑인데, 다른 기록에는 渟化郡이라고도 나온다. 283) 道實郡 :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284) 淳昌縣 :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淳化郡을 고려가 淳昌縣으로 고쳐서 南原府의 屬郡이 되었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고, 충숙왕때 郡으로 승격되었다. 285) 적성현( 城縣) :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淳昌郡 赤城面인데, 다른 기록에는 赤城이라고도 나온다. 고려 초에 南原府의 屬縣이 되었고, 뒤에 淳

221 역평현(礫坪縣)286)으로, 경덕왕이 [ 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로, 경덕왕이 [野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朗山縣295)이다. 우주현(紆洲縣)296) 구고현(九皐縣)287)은 본래 백제 돌평현( 坪縣)288)으로, 경덕왕이 [九皐로] 이름을 고쳤는 은 본래 백제 우소저현(于召渚縣)297)으로, 경덕왕이 [紆洲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의 우주(紆州)298)이다. 金馬郡289)은 본래 백제 金馬渚郡290)으로, 경덕왕이 [金馬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벽계군(壁谿郡)299)은 본래 백제 伯伊郡300)<*伊는 海라고도 썼다.>으로, 경덕왕이 [壁谿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沃野縣291)은 본래 백제 所力只縣292)으로, 경덕왕이 [沃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長溪縣301)이다. 영현이 둘이다. 鎭安縣302)은 본래 백제 野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野山縣293)은 본래 백제 閼也山縣294)으 難珍阿縣303)으로, 경덕왕이 [鎭安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高澤縣304) 昌郡에 속하게 되었다. 286) 역평현(礫坪縣) : 신라 全州 淳化郡 城縣(순창군 적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87) 구고현(九皐縣) :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任實郡 靑雄面 九皐里 일대이다. 고려 초에 南原府의 屬縣이 되었다가, 공민왕때 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조때 任實縣에 속하게 되었다. 288) 돌평현( 坪縣) : 신라 全州 淳化郡 坪縣(임실군 청웅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沃坪이라고도 나온다. 289) 金馬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金馬面이다. 고려가 全州의 屬郡으로 삼았다가 충혜왕이 益州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때 益山郡으로 이름을 고쳤 다. 290) 金馬渚郡 :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古朝鮮 準王이 이곳으로 도망 와서 馬韓을 세웠다는 전승이 있어서, 龍華山 위에 남아 있는 石築의 山城을 속칭 箕準城이라고 부른다.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4년(684)조에 報德國王 安勝의 族子 大文 및 悉伏 등이 모반 하므로 진압하고 그곳을 金馬郡으로 칭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291) 沃野縣 :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舊 裡里 市)이다.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이 되었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全州에 속하게 하였다. 全州 서북 70리에 있었는데,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익산시(구 裡里市) 일대인 듯하다. 292) 所力只縣 : 신라 全州 金馬郡 沃野縣(익산시)의 백제 때 지명이다. 293) 野山縣 :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朗山面 이다. 294) 閼也山縣 : 신라 全州 金馬郡 野山縣(익산시 낭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 지왕 3년(578)조에 與百濟閼也山城 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일설에서는 여기서의 與 를 擧 의 잘못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의 알야산성을 침공한 것으로 보았다(이병도, 1977, 앞의 글, 63쪽). 이와는 달리 이 기사를 백제 멸망 이후 百濟復興軍과 신라 사이의 전투 기사로 보는 견해 도 있다(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27쪽). 295) 朗山縣 : 신라 全州 金馬郡 野山縣(익산시 낭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野山縣을 고려가 朗山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때 礪良(익산시 여산면)監務가 와서 겸임 토록 하였다. 조선 정종때 礪良 朗山 두 縣의 이름을 따서 礪山縣이라고 고쳤고, 세종때 郡으 로 승격되었다. 296) 우주현(紆洲縣) :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鳳東邑 長久里 일대이다. 297) 우소저현(于召渚縣) : 신라 全州 金馬郡 紆洲縣(완주군 봉동읍 장구리)의 백제 때 지명이다. 298) 우주(紆州) : 신라 全州 金馬郡 紆洲縣(완주군 봉동읍 장구리)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다른 기록 에는 汚州라고도 나온다. 紆洲縣을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이 되었는데, 紆州廢縣은 全州 북쪽 50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 의 표기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完州郡 鳳東邑에서 서북쪽으로 멀 리 떨어진 長久里 일대에 해당하는 듯하다. 299) 벽계군(壁谿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長水郡 溪內面이 다. 300) 伯伊郡 :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伯海郡이라고도 나온다. 301) 長溪縣 :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壁谿郡을 고려때 長溪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南原府의 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長水縣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溪內面 面所인 長溪里 일대에 해당한다. 302) 鎭安縣 :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鎭安郡 鎭安邑 이다.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삼았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03) 難珍阿縣 : 신라 全州 壁谿郡 鎭安縣(진안군 진안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月良이 라고도 나온다. 다른 기록에는 難知可縣이라고도 나오며, 三國史節要 권12 宣德王 4년(783) 조에는 難知可郡으로 표기되어 있다. 304) 高澤縣 :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長水郡 長水邑 이다.

222 442 은 본래 백제 雨坪縣305)으로, 경덕왕이 [高澤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長水縣306) 이다. 443 武州 武州313)는 본래 백제의 땅이었는데, 신문왕 6년(686)에 武珍州314)로 삼았다. 경덕왕이 武 任實郡307)은 본래 백제의 郡이었는데, 경덕왕이 州郡의 이름을 고치면서 지금(고려)까지 州로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光州315)이다. 영현이 셋이다. 玄雄縣316)은 본래 백제 未冬夫 도 모두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馬靈縣308)은 본래 백제 馬突縣309)으로, 경덕왕이 [馬 里縣317)으로, 경덕왕이 [玄雄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南平郡318)이다. 龍山縣319) 靈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靑雄縣310)은 본래 백제 居斯勿縣311) 으로, 경덕왕이 [靑雄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居寧縣312)이다. 305) 雨坪縣 : 신라 全州 壁谿郡 高澤縣(장수군 장수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306) 長水縣 : 신라 全州 壁谿郡 高澤縣(장수군 장수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高澤縣을 고려 초에 長 水縣으로 이름을 고쳐 南原府의 屬縣이 되었다. 공양왕때 長溪(장수군 계내면)를 겸임케 하였는 데, 조선 태조때 다시 이를 나누어 長水縣으로 삼고 長溪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때 縣監으 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07) 任實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任實郡 任實邑이다. 고려가 南原府의 屬郡으로 삼았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08) 馬靈縣 : 신라 全州 任實郡(임실군 임실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鎭安郡 馬靈面 이다.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鎭安監務로 하여금 와서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 종때 그대로 鎭安縣에 소속시켰다. 309) 馬突縣 : 신라 全州 任實郡 馬靈縣(진안군 마령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馬珍 또 는 馬等良이라고도 나온다. 310) 靑雄縣 : 신라 全州 任實郡(임실군 임실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長水郡 蟠巖面 이다. 다만 그 지명인 蟠岩은 한자 발음상으로 서릴 (반) 의 반암 이어야 하는데, 그 지역 분들 이 대개 번암 이라고 말하고, 또 국립지리원이 심사하여 발행한 한글판 한국도로지도 (1996, 중앙지도문화사)에도 번암면 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른다. 311) 居斯勿縣 : 신라 全州 任實郡 靑雄縣(장수군 번암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 무왕 3년(663) 2월조에 나오는 居勿城은 이곳에 비정된다. 본서 권40 직관지 下 武官條에 신라 十停의 하나로서 居斯勿停이 나온다. 한편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 획서에 따르면 支 州 소속 隆化縣의 본래 지명이 居斯勿이었다고 하는데, 州治인 예산 방면과 는 너무 떨어져 있어서 이곳과는 다른 곳인 듯하다. 312) 居寧縣 : 신라 全州 任實郡 靑雄縣(장수군 번암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巨寧이 라고도 나온다. 靑雄縣을 고려가 居寧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別號는 寧城이다. 居寧廢縣이 南原府 동북쪽 50리에 있었다는 東國輿地勝覽 의 里數를 따지고 大東 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長水郡 蟠巖面 일대에 해당한다. 313) 武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光州廣域市 東區 일대인데, 고려 太祖가 光州로 이름을 고 쳤다. 314) 武珍州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옛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奴只라고도 나온다. 무진주 는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武州條에 武州本百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 州 라고 하였듯이 신라 신문왕대의 명칭이고, 武州는 경덕왕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백제 당시의 지명은 본서 권36 잡지 지리 4에 武珍州(一云奴只) 라 한 기사에 나오는 奴只로 보아야 할 것 이다. 그리고 웅진도읍기의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魯制로 운영되고 있어서 아직 州制가 만들 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무진주는 통일기 신라의 명칭이 이 시기에로 소급 부회된 것으로 보아 야 할 것이다(노중국, 1991, 漢城時代 百濟의 魯制 실시와 編制기준, 啓明史學 2). 그리고 신라의 무진주 설치 기사에 대하여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發羅州를 郡으 로 삼고 武珍郡을 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권7 문무왕 18년(678) 4월조에 이미 阿 天訓 을 武珍州都督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어서, 武珍州의 성립 연대상의 차이가 있다. 315) 光州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武州를 고려 태조때 光州로 이름을 고 쳤다. 성종때 刺史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더 낮추어 海陽縣令으로 삼았다. 고종때 知翼州事로 승 격되었고, 뒤에 武珍州로 높였다. 충선왕때 化平府로 강등되었고, 공민왕때 茂珍府로 고쳤다가 다시 光州牧으로 고쳤다. 조선 세종때 茂珍郡으로 강등된 것을 문종때 복구되었다. 성종때 光山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燕山君때 다시 州로 승격되었다. 인조때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다시 승격되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16) 玄雄縣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南平面이다. 317) 未冬夫里縣 : 신라 武州 玄雄縣(나주시 남평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본서 권40 직관지 下 武官 條에 신라 十停의 하나로서 未多夫里停이 나온다. 318) 南平郡 : 신라 武州 玄雄縣(나주시 남평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永平이라고도 나온다. 玄雄縣을 고려가 南平으로 이름을 고치고 郡으로 삼아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고, 공양왕때 和順(화순군 화순읍)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조때 따로 監務를 두었고, 뒤에 例에 따라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19) 龍山縣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伏龍洞 일 대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都督府 직속의 龍山 縣은 본래 古麻山이었다고 하였다. 다만 본래의 명칭이 다르고, 都督府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 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관련시키기 어렵다.

223 은 본래 백제 伏龍縣320)으로, 경덕왕이 [龍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은 예전대 老縣331)으로, 경덕왕이 [兆陽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강원현(薑 로 [명칭을] 회복하였다. 기양현(祁陽縣)321)은 본래 백제 屈支縣322)으로, 경덕왕이 [祁陽으 原縣)332)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 縣)333)으로, 경덕왕이 [薑原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昌平縣323)이다. (고려)의 荳原縣334)이다. 栢舟縣335)은 본래 백제 比史縣336)으로, 경덕왕이 [栢舟로] 이름을 分嶺郡324)은 본래 백제 분차군(分嵯郡)325)으로, 경덕왕이 [分嶺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泰江縣337)이다. 지금(고려)의 樂安郡326)이다. 영현이 넷이다. 忠烈縣327)은 본래 백제 助助禮縣328)으로, 경 寶城郡338)은 본래 백제 伏忽郡339)으로, 경덕왕이 [寶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덕왕이 [忠烈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南陽縣329)이다. 兆陽縣330)은 본래 백제 冬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넷이다. 代勞縣340)은 본래 백제 馬斯良縣341)으로, 경덕왕이 [代 勞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會寧縣342)이다. 季水縣343)은 본래 백제 季川縣344)으 320) 伏龍縣 : 신라 武州 龍山縣(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룡동)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盃龍 이라고도 나온다. 龍山縣을 고려가 다시 伏龍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羅州 북쪽 30리에 있었다.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서쪽 伏龍山 동남 방면의 伏龍洞 일대에 해당한다. 321) 기양현(祁陽縣)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潭陽郡 昌平 面이다. 322) 屈支縣 : 신라 武州 祁陽縣(담양군 창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23) 昌平縣 : 신라 武州 祁陽縣(담양군 창평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鳴平이라고도 나온다. 祁陽縣을 고려가 昌平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縣令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때 長平 甲鄕 勸農使를 겸하게 하였으며, 조선 성종때 縣을 혁파하고 光州 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복구시켰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24) 分嶺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順天市 樂安面이다. 325) 분차군(分嵯郡)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夫沙 또 는 分沙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 신라본기 나물왕 21년(376)조에 夫沙郡이 一角鹿을 바쳤다고 하였는데, 당시 이곳이 신라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곳으로 봐야 한다. 326) 樂安郡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陽岳이라고도 나온다. 分嶺郡을 고려가 樂安郡으로 이름을 고쳐서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때 監務를 두 었고, 뒤에 다시 郡으로 고쳤다. 조선 중종때 縣으로 강등시켰다가 뒤에 郡으로 복구되었다. 명 종때 縣으로 강등되었고, 선조때 다시 복구되었다. 327) 忠烈縣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高興郡 南陽面 이다. 328) 助助禮縣 : 신라 武州 分嶺郡 忠烈縣(고흥군 남양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29) 南陽縣 : 신라 武州 分嶺郡 忠烈縣(고흥군 남양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忠烈縣을 고려가 南陽 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세종때 興陽縣(고흥군 고흥읍)에 속하게 하였다. 330) 兆陽縣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得粮面 兆陽里 일대이다. 고려가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조선 태조때 高興縣에 속하게 하였고, 세종때 다시 환속시켰다. 331) 冬老縣 : 신라 武州 分嶺郡 兆陽縣(보성군 득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32) 강원현(薑原縣)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高興郡 豆原面이다. 333) 두힐현(豆 縣) :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신라 武州 錦山 郡 會津縣(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도 豆 縣이어서, 백제 豆 縣은 두 곳이 있었다. 334) 荳原縣 :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薑原縣을 고려가 荳原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인종때 監務를 두었고, 뒤에 長興府(장흥읍) 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때 興陽縣(고흥군 고흥읍)에 속하게 하였다. 335) 栢舟縣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高興郡 東江面 大江里 일대이다. 336) 比史縣 : 신라 武州 分嶺郡 栢舟縣(고흥군 동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37) 泰江縣 : 신라 武州 分嶺郡 栢舟縣(고흥군 동강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栢舟縣을 고려가 泰江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세종때 興陽縣(고흥군 고흥읍)에 속하게 하였으며, 泰江廢縣은 興陽縣 북쪽 70리에 있었다. 현재의 高興郡 東江面 大江里 일대에 해당한 다. 338) 寶城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寶城邑이 다. 고려 성종때 貝州刺史로 고쳤으며, 뒤에 다시 寶城郡으로 고쳤다. 339) 伏忽郡 :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340) 代勞縣 :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會泉面 會寧里 일대이다. 341) 馬斯良縣 : 신라 武州 寶城郡 代勞縣(보성군 회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都督府 직속의 歸化縣은 본래 麻斯良이라고 하였 다. 다만 都督府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곳으로 봐야 한 다.

224 로, 경덕왕이 [季水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長澤縣345)이다. 오아현(烏兒縣)346) 려)의 潭陽郡354)이다. 영현이 둘이다. 玉菓縣355)은 본래 백제 菓支縣356)으로, 경덕왕이 [玉 은 본래 백제 烏次縣347)으로, 경덕왕이 [烏兒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定安縣348) 菓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栗原縣357)은 본래 백제 栗支縣358)으로, 이다. 馬邑縣349)은 본래 백제 古馬 知縣350)으로, 경덕왕이 [馬邑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경덕왕이 [栗原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原栗縣359)이다. 지금(고려)의 遂寧縣351)이다. 秋成郡352)은 본래 백제 秋子兮郡353)으로, 경덕왕이 [秋成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靈巖郡360)은 본래 백제 月奈郡361)으로, 경덕왕이 [靈巖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도 그대로 쓴다. 潘南郡362)은 본래 백제 半奈夫里縣363)으로, 경덕왕이 [潘南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野老縣364)은 본래 백제 阿老谷縣365)으로, 경덕왕이 342) 會寧縣 : 신라 武州 寶城郡 代勞縣(보성군 회천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代勞縣을 고려가 會寧 縣으로 이름을 고쳐 長興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현재의 寶城郡 會泉面 會寧里 일대에 해당한다. 343) 季水縣 :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興郡 長平面 이다. 344) 季川縣 : 신라 武州 寶城郡 季水縣(장흥군 장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45) 長澤縣 : 신라 武州 寶城郡 季水縣(장흥군 장평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季水縣을 고려가 長澤 縣으로 이름을 고쳐 長興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長澤廢縣은 長興府 동북쪽 41리에 있었다. 346) 烏兒縣 :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興郡 大德邑 이다. 347) 烏次縣 : 신라 武州 寶城郡 烏兒縣(장흥군 대덕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348) 定安縣 : 신라 武州 寶城郡 烏兒縣(장흥군 대덕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烏兒縣을 고려가 定安 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인종때 長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府로 승격시 켰다. 원종때 懷州로 이름을 고치고 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때 다시 長興府로 고쳤으며, 뒤 에 왜구로 인하여 內地로 옮겼다. 조선 태조때 遂寧縣의 中寧山에 축성을 하고 治所로 삼았다. 태종때 都護府로 고치고 이듬해에 치소를 遂寧縣의 옛터로 옮겼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東國輿地勝覽 의 기록으로는 옛 定安縣의 위치를 알기 어려우나, 大東輿地圖 의 표기에 따르 면 옛 長興은 天冠山 남쪽의 大德邑에 해당한다. 349) 馬邑縣 :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興郡 長興邑 이다. 350) 古馬 知縣 : 신라 武州 寶城郡 馬邑縣(장흥군 장흥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古馬 知縣의 는 中宗壬申刊本과 鑄字本에는 로 나오고 있으나 모두 의 訛字이므로 수정하였다. 본서 권37 지리지 百濟條에는 古馬彌知縣으로 나오고, 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7년(825)조에는 馬彌 知縣이라고 하였다. 351) 遂寧縣 : 신라 武州 寶城郡 馬邑縣(장흥군 장흥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馬邑縣을 고려가 遂寧 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長興府에 내속시켰다. 조선때 府治를 遂寧으로 옮겼다. 352) 秋成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潭陽郡 潭陽邑이 다. 353) 秋子兮郡 :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秋子兮를 都督府 分嵯州 소속의 皐西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354) 潭陽郡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秋成郡을 고려 성종때 潭州都 團練使로 삼았다가, 뒤에 潭陽郡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明宗때 監務를 두었 다가, 조선 태조때 郡으로 고쳤다. 정종때 府로 높였고, 태종때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영조때 두 번이나 縣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府로 복구시켰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55) 玉菓縣 :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谷城郡 玉果面 이다. 고려 초에 寶城郡의 屬縣이 되었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쳤으며,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56) 菓支縣 : 신라 武州 秋成郡 玉菓縣(곡성군 옥과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菓兮 또 는 果支 또는 果兮라고도 나온다. 357) 栗原縣 :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潭陽郡 金城面 原栗里 일대이다. 358) 栗支縣 : 신라 武州 秋成郡 栗原縣(담양군 금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59) 原栗縣 : 신라 武州 秋成郡 栗原縣(담양군 금성면)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현재의 潭陽郡 金城面 原栗里 일대에 해당한다. 360) 靈巖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岩郡 靈岩邑이 다. 고려 성종때 朗州安南都護府로 고쳤고, 현종때 다시 낮추어 靈巖郡으로 삼았다. 361) 月奈郡 : 신라 武州 靈巖郡(영암군 영암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362) 潘南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潘南面이 다. 고려 초에 縣으로 낮추어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다. 363) 半奈夫里縣 :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半奈夫里를 都督府 帶方州(나주시 다시면) 소속의 半那 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225 [野老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安老縣366)다. 곤미현(昆湄縣)367)은 본래 백제 古彌 덕왕이 [珍原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森溪縣374)은 본래 백제 所 縣368)으로, 경덕왕이 [昆湄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非兮縣375)으로, 경덕왕이 [森溪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갑성군(岬城郡)369)은 본래 백제 古尸伊縣370)으로, 경덕왕이 [岬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武靈郡376)은 본래 백제 武尸伊郡377)으로, 경덕왕이 [武靈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지금(고려)의 長城郡371)이다. 영현이 둘이다. 珍原縣372)은 본래 백제 丘斯珍兮縣373)으로, 경 려)의 靈光郡378)이다. 영현이 셋이다. 長沙縣379)은 본래 백제 上老縣380)으로, 경덕왕이 [長 沙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高敞縣381)은 본래 백제 毛良夫里縣382) 364) 野老縣 :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巖郡 金井面 安老里 일대이다. 365) 阿老谷縣 : 신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영암군 금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阿老谷은 東明州(공주시) 鹵辛縣의 본명과 이름 이 같다. 그러나 공주시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곳으로 봐야 한다. 366) 安老縣 : 신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영암군 금정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野老縣을 고려가 安老 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다. 현재의 영암군 금정면 安老里 일대에 해당한다. 367) 곤미현(昆湄縣) :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巖郡 鶴山面이다. 다만 본서에서 昆湄縣을 潘南郡의 領縣이라고 한 것과 달리, 高麗史 地理志나 東國輿地勝覽 에서는 이를 靈巖郡의 領縣이라고 하였다. 고려가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조선도 그대로 이었는데, 昆湄廢縣은 靈巖郡 서쪽 30리에 있었다. 이곳의 현재 위치를 영암군 美岩面에 비정한 견해가 있고(이병도, 1977, 앞의 책 참조), 또한 里數를 따져 보고 大東輿地 圖 의 지형과 비교해 볼 때 중심지는 그 옆의 鶴山面으로 보는 견해도(정구복 외, 1997, 앞의 책, 337쪽) 있다. 368) 古彌縣 : 신라 武州 潘南郡 昆湄縣(영암군 학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枯彌縣이 라고도 하였다. 369) 갑성군(岬城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城郡 北一面이다. 370) 古尸伊縣 :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71) 長城郡 :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岬城郡을 고려가 長城郡으로 이름을 고쳐 靈光郡의 屬郡으로 삼았고,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쳤다. 선조 때 長城과 珍原을 합쳐서 한 邑으로 만들고 聖子山 아래(장성군 장성읍)로 치소를 옮겼는데, 옛 長城은 새로운 치소 북쪽 20리에 있었다. 효종때 府로 승격시켰고,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里數로 따져 보아, 조선 중기 이전의 長城郡의 위치는 현재의 장성군 北一面에 해당한다. 372) 珍原縣 :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城郡 珍原面 珍原里 일대이다. 고려가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고,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 쳤다가 선조때 長城에 합쳐 넣었는데, 珍原廢縣은 長城郡治(장성읍) 남쪽 20리에 있었다. 373) 丘斯珍兮縣 : 신라 武州 岬城郡 珍原縣(장성군 진원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斯珍兮를 都督府 分嵯州 소속의 貴旦縣으로 고 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仇斯珍兮는 丘斯珍兮의 異稱인 듯하다. 또한 周書 권49 百濟傳에 나 오는 5방성 중의 하나인 南方 久知下城을 이곳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1997, 앞의 책, 337쪽). 374) 森溪縣 :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城郡 森溪面 이다. 고려가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중종때 社倉을 설치한 것이다. 현재의 長城郡 森 溪面 面所인 社倉里 일대에 해당한다. 375) 所非兮縣 : 신라 武州 岬城郡 森溪縣(장성군 삼계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所乙夫 라고도 나온다. 376) 武靈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光郡 靈光邑이 다. 377) 武尸伊郡 : 신라 武州 武靈郡武(영광군 영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선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尸伊城 또는 尸伊村을 沙泮州 州治인 牟支縣으로 고 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여기서 尸伊村의 는 中宗壬申刊本 에는 號의 略字처럼 쓰여져 있고, 鑄字本에는 아예 號 로 되어 있다. 그러나 뒤에 漢式으로 고친 이름을 보아 이는 무 의 音을 가진 字인 듯하니, 武 의 古略字인 (무) 를 잘못 판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78) 靈光郡 :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武靈郡을 고려가 靈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 인조와 영조때에는 각각 縣으로 되었다가, 뒤에 郡으로 복구시켰다. 고종 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79) 長沙縣 :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上下面 下長里이다. 고려가 그대로 두었다가 뒤에 監務를 두고 茂松縣(고창군 성송면)을 겸임케 하였 다. 조선 태종때 茂松과 합쳐서 茂長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鎭을 두어 兵馬使로 하여금 縣事를 겸임케 하였다. 세종때 兵馬使를 고쳐서 僉節制使로 삼았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옛 長沙는 茂長縣 북쪽 20리에 있었고, 石城 터가 남아 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고창군 상 하면 將軍山城 아래 下長里 일대에 해당한다. 380) 上老縣 : 신라 武州 武靈郡 長沙縣(고창군 상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上老를 都督府 沙泮州(영광군 영광읍) 소속의 佐魯 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381) 高敞縣 :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高敞邑

226 으로, 경덕왕이 [高敞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茂松縣383)은 본래 금(고려)의 光陽縣393)이다. 廬山縣394)은 본래 백제 突山縣395)으로, 경덕왕이 [廬山으로] 이 백제 松彌知縣384)으로, 경덕왕이 [茂松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385) 386) 昇平郡 은 본래 백제 감평군( 平郡) 으로, 경덕왕이 [昇平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谷城郡396)은 본래 백제 欲乃郡397)으로, 경덕왕이 [谷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또는 昇州387)라고도 한다.>. 영현이 셋이다. 海邑縣388)은 본래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富有縣398)은 본래 백제 둔지현(遁支縣)399)으로, 경덕왕 백제 猿村縣389)으로, 경덕왕이 [海邑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麗水縣390)이다. 이 [富有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求禮縣400)은 본래 백제 仇次禮縣401) 희양현(晞陽縣)391)은 본래 백제 馬老縣392)으로, 경덕왕이 [晞陽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 으로, 경덕왕이 [求禮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同福縣402)은 본래 이다. 고려가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尙質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종때 두 縣에 각기 監務를 두고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82) 毛良夫里縣 : 신라 武州 武靈郡 高敞縣(고창군 고창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毛良夫里를 都督府 沙泮州(영광군 영광읍) 소속 의 無割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383) 茂松縣 :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星松面 茂松里 일대인데, 고려가 그대로 두었다. 조선 태종때 長沙(고창군 상하면)와 합쳐서 茂長縣으 로 이름을 고치고 鎭을 두어 兵馬使로 하여금 縣事를 겸임케 하였다. 세종때 兵馬使를 고쳐서 僉節制使로 삼았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는데, 옛 茂松은 茂長縣 남쪽 20리에 있었다. 384) 松彌知縣 : 신라 武州 武靈郡 茂松縣(고창군 성송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385) 昇平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順天市이다. 386) 감평군( 平郡) :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武平 또는 沙平 이라고도 나온다. 387) 昇州 :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昇平郡을 고려 성종때 昇州袞海軍節度 使로 삼았고, 정종때 다시 昇平郡으로 고쳤다. 충선왕때 이를 높여서 昇州牧으로 고쳤다가 順天 府로 이름을 고쳐 강등시켰다. 조선 태종때 都護府로 고쳤다가, 효종때 縣으로 강등시켰으며, 얼마 뒤에 府로 복구시켰다. 정조때 縣으로 낮추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때 郡으 로 개편되었다. 388) 海邑縣 :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麗水市이다. 389) 猿村縣 : 신라 武州 昇平郡 海邑縣(여수시)의 백제 때 지명이다. 390) 麗水縣 : 신라 武州 昇平郡 海邑縣(여수시)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海邑縣을 고려가 麗水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충정왕때 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조때 다시 順天府에 속하게 하였는데, 麗水廢 縣은 順天府 동쪽 60리에 있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91) 희양현(晞陽縣) :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光陽市 光陽邑 이다. 392) 馬老縣 : 신라 武州 昇平郡 晞陽縣(광양시 광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393) 光陽縣 : 신라 武州 昇平郡 晞陽縣(광양시 광양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晞陽縣을 고려가 光陽 縣으로 이름을 고쳐 그대로 順天府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 監으로 고쳤다. 선조때 順天에 넣었다가 얼마 뒤에 복구시켜 縣으로 삼았다. 고종때 郡으로 개 편되었다. 394) 廬山縣 :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麗川郡 突山邑이다. 고 려가 옛날 이름인 突山縣을 회복하여 그대로 昇平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성종때 鎭을 설치 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95) 突山縣 : 신라 武州 昇平郡 廬山縣(여천군 돌산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突山鄕이 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12 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 4월조에 康州所管의 突山等 四鄕이 고려 太祖에게 귀부하였다고 하였다. 396) 谷城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谷城郡 谷城邑이 다. 고려 초에 羅州의 屬郡이 되었고,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선조가 南原에 합해 넣었고, 광해군때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397) 欲乃郡 :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398) 富有縣 :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順天市 住岩面 이다. 고려 초에 順天府의 屬縣이 되었는데, 富有廢縣은 順天府 북쪽 60리에 있었다. 大東輿地 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순천시 주암면 일대에 해당한다. 399) 둔지현(遁支縣) : 신라 武州 谷城郡 富有縣(순천시 주암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00) 求禮縣 :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求禮郡 求禮邑 이다. 고려 초에 南原府의 屬縣이 되었다가, 인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縣監으로 고쳤 다가, 燕山君때 이를 폐지하여 部曲으로 삼아 南原에 속하게 하였다. 중종때 다시 縣으로 삼았 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01) 仇次禮縣 : 신라 武州 谷城郡 求禮縣(구례군 구례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402) 同福縣 :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和順郡 同福面 이다. 고려 초에 寶城郡의 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승격시켜 監務로 삼았다. 조선 태조때 和順監 務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때 和順에 합쳐서 福順이라고 개칭하였다가, 뒤에 각기 복구시켜 縣監

227 452 백제 豆夫只縣403)으로, 경덕왕이 [同福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453 의 羅州牧414)이다. 영현이 셋이다. 會津縣415)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 縣)416)으로, 경덕왕이 陵城郡404)은 본래 백제 爾陵夫里郡405)으로, 경덕왕이 [陵城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會津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鐵冶縣417)은 본래 백제 實於山縣418) (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다. 富里縣406)은 본래 백제 波夫里郡407)으로, 경덕왕이 으로, 경덕왕이 [鐵冶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황현(艅 縣)419) [富里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福城縣408)이다. 여미현(汝湄縣)409)은 본래 백제 은 본래 백제 水川縣420)으로, 경덕왕이 [艅 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仍利阿縣410)으로, 경덕왕이 [汝湄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和順縣411)이다. 錦山郡412)은 본래 백제 發羅郡413)으로, 경덕왕이 [錦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으로 삼았다. 효종때 和順에 합쳐 넣었고, 현종때 복구되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03) 豆夫只縣 : 신라 武州 谷城郡 同福縣(화순군 동복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04) 陵城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和順郡 綾州面이 다. 고려 초에 羅州의 屬郡이 되었다가, 인종때 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종때 和順縣을 합쳐서 順 成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각기 복구되었다. 인조때 綾州로 이름을 고치면서 州로 승격시켰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05) 爾陵夫里郡 :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竹樹夫里 또 는 仁夫里라고도 나온다. 406) 富里縣 :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福內面 이다. 407) 波夫里郡 : 신라 武州 陵城郡 富里縣(보성군 복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08) 福城縣 : 신라 武州 陵城郡 富里縣(보성군 복내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富利縣을 고려가 福城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는데, 福城廢縣은 寶城郡 북쪽 30리에 있었다. 409) 여미현(汝湄縣) :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和順郡 和順邑이다. 410) 仍利阿縣 : 신라 武州 陵城郡 汝湄縣(화순군 화순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汝濱 또는 海濱이라고도 나온다. 411) 和順縣 : 신라 武州 陵城郡 汝湄縣(화순군 화순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汝湄縣을 고려가 和順 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다시 綾城縣(화순군 능주면)에 속하게 하였 다. 공양왕때 監務를 두고 南平縣(나주시 남평면)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조때 두 縣으로 나누 고 同福(화순군 동복면)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다. 태종때 同福을 폐지하고 本縣에 합쳐 넣어 和順監務라고 칭하였다가 福順으로 개칭되었으며, 뒤에 다시 同福을 떼어내고 本縣을 綾城에 합 쳐 넣어 順成이라고 하였다가, 얼마 뒤 예전처럼 복구시켜 縣監으로 삼았다. 선조때 이를 綾城에 합쳐 넣었고, 광해군때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12) 錦山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로, 다른 기록에는 錦城이라고도 나온다. 413) 發羅郡 :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通義라고도 나온다. 본 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巴老彌를 都督府 帶方州(나주 시 다시면) 소속의 布賢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는데, 巴老彌는 發羅의 異稱인 듯하다.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發羅州를 郡으로 삼고 대신 武珍郡을 州로 삼았다고 하 였다. 그 앞의 發羅州의 설치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나 당전쟁 중 신라가 百濟故地를 완전히 장악한 문무왕 12년(672)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414) 羅州牧 :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錦山郡을 신라 말에 甄萱이 후백제의 영역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弓裔가 王建에게 명하여 이를 쳐서 빼앗고 羅州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성종때 節度使를 두고 鎭海軍이라고 칭하였다. 현종때 契丹軍을 피해 와서 머무르다가 환 도한 적이 있고, 뒤에 牧으로 승격시켰다. 조선 인조때 錦城縣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州로 승격 시켰으며, 영조때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15) 會津縣 :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多侍面이다. 고 려 초에 그대로 羅州牧의 屬縣이 되었는데, 會津廢縣은 羅州 서쪽 15리에 있었다. 里數로 따져 보아, 현재의 羅州邑 서쪽 多侍面에 해당한다. 고려말 우왕초에 정도전이 나주목 회진현 居平部 曲에 3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한 바 있다. 416) 두힐현(豆 縣) : 신라 武州 錦山郡 會津縣(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 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이곳 豆 또는 竹軍城을 帶方州 州治인 竹 軍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한편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백제 때 지 명도 같은 豆 縣이어서, 백제 豆 縣은 두 곳이 있었다. 417) 鐵冶縣 :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鳳凰面 鐵川里 일대이다. 고려도 그대로 이었다가, 뒤에 綾城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때 南平縣(나주시 남평면)에 속하게 하였는데, 鐵冶廢縣은 南平縣 남쪽 30리에 있었다. 418) 實於山縣 : 신라 武州 錦山郡 鐵冶縣(나주시 봉황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19) 여황현(艅 縣) :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雲水 洞 일대이다. 고려 초에 그대로 羅州牧의 屬縣이 되었는데, 艅 廢縣은 羅州 북쪽 40리에 있었 다. 大東輿地圖 와 비교할 때,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서쪽 魚登山 기슭의 雲水洞 일대에 해 당한다. 420) 水川縣 : 신라 武州 錦山郡 艅 縣(광주광역시 광산구 운수동)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 는 水入伊라고도 나온다.

228 454 쓴다. 455 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陽武郡421)은 본래 백제 道武郡422)으로, 경덕왕이 [道武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務安郡434)은 본래 백제 勿阿兮郡435)으로, 경덕왕이 [務安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 道康郡423)이다. 영현이 넷이다. 固<*同이라고도 쓴다.>安縣424)은 본래 백제 古西伊縣425)으 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넷이다. 咸豊縣436)은 본래 백제 屈乃縣437)으로, 경덕왕이 [咸豊 로, 경덕왕이 [固安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竹山縣426)이다. 耽津縣427)은 본래 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多岐縣438)은 본래 백제 多只縣439)으로, 백제 冬音縣428)으로, 경덕왕이 [耽津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침 경덕왕이 [多岐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牟平縣440)이다. 海際縣441)은 본래 백제 명현(浸溟縣)429)은 본래 백제 새금현(塞琴縣)430)으로, 경덕왕이 [浸溟으로] 이름을 고쳤는 데, 지금(고려)의 海南縣431)이다. 黃原縣432)은 본래 백제 黃述縣433)으로, 경덕왕이 [黃原으 421) 陽武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康津郡 兵營面이다. 422) 道武郡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23) 道康郡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陽武郡을 고려가 道康郡으로 이름을 고쳐서 靈巖郡의 屬郡으로 삼았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兵馬節度使營 을 道康縣의 옛 치소로 옮기면서 이를 耽津縣과 합쳐서 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耽津을 치소 로 삼았다. 세종때 道康의 松溪로 옮겼고, 성종때 다시 耽津의 옛 치소로 옮겼는데, 道康廢縣은 康津 북쪽 27리에 있었다. 424) 固(同)安縣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海南郡 馬 山面인데, 다른 기록에는 同安縣이라고도 나온다. 425) 古西伊縣 : 신라 武州 陽武郡 固安縣(해남군 마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26) 竹山縣 : 신라 武州 陽武郡 固安縣(해남군 마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固安縣을 고려가 竹山 縣으로 이름을 고쳐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때 海南縣에 속하게 하였는데, 竹山廢縣은 海南縣 북쪽 10리에 있었다. 427) 耽津縣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康津郡 康津邑 이다. 고려가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長興府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때 兵馬節度 使營을 道康縣의 옛 치소로 옮기면서 이를 耽津縣에 합쳐서 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耽津을 치소로 삼았다. 세종때 道康의 松溪로 옮겼으며, 성종때 다시 耽津의 옛 치소로 옮겼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28) 冬音縣 : 신라 武州 陽武郡 耽津縣(강진군 강진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429) 침명현(浸溟縣)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海南郡 縣山面 古縣里 일대인데, 다른 기록에는 投濱이라고도 나온다. 430) 새금현(塞琴縣) : 신라 武州 陽武郡 浸溟縣(해남군 현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投濱이라고도 나온다. 431) 海南縣 : 신라 武州 陽武郡 浸溟縣(해남군 현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浸溟縣을 고려가 海南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때 珍島縣에 합쳐서 海珍縣으로 이 름을 고치고 邑治를 靈巖 屬縣 玉山(해남군 삼산면) 지역(해남읍)으로 옮겼고, 세종때 다시 이를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옛 海南은 頭輪山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고려의 海南縣은 현재 頭輪山 서남쪽의 縣山面 古縣里에 해당한다. 432) 黃原縣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海南郡 黃山面 이다. 고려가 靈巖郡의 屬郡으로 삼았고, 뒤에 海南縣에 속하게 하였는데, 黃原廢縣은 縣 서쪽 15리에 있었다. 433) 黃述縣 : 신라 武州 陽武郡 黃原縣(해남군 황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34) 務安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務安郡 務安邑이 다. 務安郡을 고려 혜종때 勿良郡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성종때 다시 務安郡으로 복구시키고 羅 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때 監務를 두었고, 공양왕때 城山 極浦 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때 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뒤에 府로 승격되었으며, 光武때 다시 郡으로 개편되었다. 435) 勿阿兮郡 :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436) 咸豊縣 :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咸平郡 咸平邑 이다. 고려가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명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牟平縣과 합쳐 서 咸平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종때 郡으로 개편되었다. 437) 屈乃縣 : 신라 武州 務安郡 咸豊縣(함평군 함평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屈奈를 都督府 帶方州(나주시 다시면) 소속의 軍那 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는데, 屈奈는 屈乃의 異稱인 듯하다. 438) 多岐縣 :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文平面 이다. 439) 多只縣 : 신라 武州 務安郡 多岐縣(나주시 문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沙泮州 多支縣이 있고 그 본명이 夫只였다고 되어 있는데, 夫只는 多只의 다른 명칭인 것 같다. 440) 牟平縣 : 신라 武州 務安郡 多岐縣(나주시 문평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多岐縣을 고려가 牟平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때 咸豊과 합쳐서 咸平縣으로 이름 을 고치고 縣治를 咸豊에 두었는데, 옛 牟平은 縣 동쪽 30리에 있었다. 441) 海際縣 :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務安郡 海際面

229 道際縣442)으로, 경덕왕이 [海際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珍島縣443) 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다. 갈도현(碣島縣)453)은 본래 백제 阿老縣454)으로, 경덕왕이 은 본래 백제 因珍島郡444)으로, 경덕왕이 [珍島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碣島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六昌縣455)이다. 鹽海縣456)은 본래 백제 古祿只縣457) 쓴다. 으로, 경덕왕이 [鹽海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임치현(臨淄縣)458)이다. 安波縣459) 뇌산군(牢山郡)445)은 본래 백제 徒山縣446)으로, 경덕왕이 [牢山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嘉興縣447)이다. 영현이 하나다. 첨탐현(瞻耽縣)448)은 본래 백제 買仇里縣449) 은 본래 백제 居知山縣460)<*居는 屈이라고도 쓴다.>으로, 경덕왕이 [安波로] 이름을 고쳤 는데, 지금(고려)의 長山縣461)이다. 으로, 경덕왕이 [瞻耽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의 臨淮縣450)이다. 壓海郡451)은 본래 백제 阿次山縣452)으로, 경덕왕이 [壓海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고려) 이다. 고려때 靈光郡의 屬縣이 되었는데, 조선 태조때 咸豊縣(함평군 함평읍)에 속하게 하였다. 442) 道際縣 : 신라 武州 務安郡 海際縣(무안군 해제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陰海 또 는 大峯이라고도 나온다. 443) 珍島縣 :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珍島郡 古郡面 이다. 고려가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縣令을 두었다. 충정왕때 倭寇로 인하여 內地인 昆湄縣(영암군 학산면)으로 옮겼다. 조선 태종때 海南縣에 합쳐서 海珍郡으로 삼았다. 세종때 다시 이를 나누어 각기 복구시켰다. 옛 珍島城은 今治 동북쪽 15리에 있었다는 東國輿地勝覽 珍島郡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이후의 珍島縣은 현재의 珍島邑에 있었고, 고려 이전의 珍島縣 은 현재의 珍島郡 古郡面에 해당한다. 444) 因珍島郡 : 신라 武州 務安郡 珍島縣(진도군 고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45) 牢山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珍島郡 郡內面이다. 446) 徒山縣 :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猿山이라고도 나 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帶方州(나주시 다시 면) 徒山縣이 있고 그 본명이 抽山이었다고 한다. 447) 嘉興縣 :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뇌산군(牢山郡)을 고려가 嘉興 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珍島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東國輿地勝覽 에서 嘉興廢縣은 珍島郡 북쪽 10리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珍島郡 郡內面에 해당한다. 448) 첨탐현(瞻耽縣) :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珍島郡 臨淮面이다. 449) 買仇里縣 : 신라 武州 牢山郡 瞻耽縣(진도군 임회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50) 臨淮縣 : 신라 武州 牢山郡 瞻耽縣(진도군 임회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瞻耽縣을 고려가 臨淮 縣으로 이름을 고쳐 珍島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451) 壓海郡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新安郡 押海面 押 海島로, 다른 기록에는 押海라고도 나온다. 고려 초에 羅州의 屬郡이 되었다가, 뒤에 靈光郡에 속하게 되었으며, 다시 羅州에 내속되었다. 본래 바다 안의 섬이었는데, 왜구로 인하여 내륙으로 옮겨 그대로 縣으로 삼았다. 壓海廢縣은 羅州 남쪽 40리에 있었다. 東國輿地勝覽 에 기록된 조 선 초기 廢縣의 위치는 대략 羅州市 潘南面 新北面 일대에 해당하나, 고려 후기에 옮기기 이전 의 壓海郡 위치는 현재의 목포시 서쪽에 인접한 押海島에 해당한다. 452) 阿次山縣 :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 百濟條에서 는 阿次山郡이라고 되어 있다. 453) 갈도현(碣島縣) :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光郡 郡南面 南昌里 일대이다. 454) 阿老縣 : 신라 武州 壓海郡 碣島縣(영광군 군남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何老 또 는 谷野 또는 葛草縣 또는 加位라고도 나온다. 455) 六昌縣 : 신라 武州 壓海郡 碣島縣(영광군 군남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碣島縣을 고려가 六昌 縣(또는 陸昌縣)으로 이름을 고쳐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는데, 陸昌鄕은 靈光郡 남쪽 25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 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靈光郡 郡南面 南昌里 일대에 해당한다. 456) 鹽海縣 :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光郡 白岫邑 芝山里 및 鹽山面 일대이다. 457) 古祿只縣 : 신라 武州 壓海郡 鹽海縣(영광군 백수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開要라 고도 나온다. 458) 임치현(臨淄縣) : 신라 武州 壓海郡 鹽海縣(영광군 백수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鹽海縣을 고려 가 臨淄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는데, 臨淄廢縣은 郡 서쪽 26리에 있었다. 서남쪽 30리 지점인 鹽山面이 지명의 유사성이 있으나, 大東輿地圖 의 표기에 따라 그 중심지 를 靈光郡 白岫面 芝山里 일대에 비정해 둔다. 459) 安波縣 :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新安郡 長山面 長山島이다. 460) 居知山縣 : 신라 武州 壓海郡 安波縣(신안군 장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屈知山 縣 또는 安陵이라고도 나온다. 461) 長山縣 : 신라 武州 壓海郡 安波縣(신안군 장산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安波縣을 고려가 長山 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다. 본래는 섬이었는데, 뒤에 倭寇로 인하여 터전을 잃고 내륙으로 옮겼는데, 長山廢縣은 羅州 남쪽 20리에 있었다. 東國輿地勝覽 에 기록된 조선 초기 廢縣의 위치는 대략 羅州市 細枝面 일대에 해당하나, 고려 이전 長山縣 및 安波縣의 위치는

230 458 권37 雜志 6 地理 4 高句麗 百濟 ) 다시 五方城469)이 있다. 百濟 462)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後漢書 464) 三韓463)은 무릇 78국이었는데, 百濟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465) 北史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를 경계로 하며, 북쪽은 漢江466)에 닿는다. 그 서울(都)은 居拔城467)인데, 또는 固麻城468)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현재의 新安郡 長山面 長山島였다. 462) 後漢書 : 중국 南朝 宋의 范曄( )이 편찬한 後漢의 역사책으로, 本紀 10권, 列傳 80 권으로 구성되었다. 범엽은 원래 志 10권을 포함한 저술을 계획하였으나, 叛逆에 연루되어 마치 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志는 완성하지 못하였다. 현전하는 後漢書 의 志는 後人이 司馬彪의 續漢書 에서 보충한 것이다. 463) 三韓 : 1 3세기 무렵에 한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馬韓 辰韓 弁韓의 총칭이다. 삼한에는 78개 소국이 존재했으며, 이들 전체가 하나의 통솔권 아래 있었던 것은 아니나, 마한 目支國의 辰王 은 삼한 전체 소국에 대한 명목상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다. 그 안에서 삼한은 각기 여러 소국들 로 나뉘었는데, 馬韓은 경기 충청 전라도 일대에 54국, 辰韓은 낙동강 동안의 경상도 지방에 12국, 弁韓은 낙동강 서안의 경상도 지방에 12국을 포괄하는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삼한은 3 세기 후반 이후 百濟國과 新羅國이 성장하여 주변 소국에 대한 정복 사업을 진행하면서 서서히 해체 소멸되어 갔다. 삼한의 주요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이현혜,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일조 각 ; 김정배, 1986, 한국 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 천관우, 1989, 고조선사 삼한사연구, 일조각 ; 최종규, 1995, 삼한고고학연구, 서경문화사 ; 권오영, 1996, 삼한의 國 에 대한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 문창로, 2000, 삼한시대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 등 을 참고할 것. 464) 三韓은 百濟는 그 중의 한 나라였다 : 이 문장은 後漢書 권85 東夷列傳 韓傳에서 발췌하 여 인용한 것이다. 다만 그 원문에는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中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서에서는 앞부분을 三韓 의 한 단어로 줄이고, 伯濟 를 百濟 로 고쳐서 기재하였다. 465) 北史 : 중국의 正史 25史의 하나로, 北魏 北齊 北周 隋나라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 다. 唐나라 李延壽가 편찬하였는데, 총 100권이다. 466) 漢江 : 현재의 서울特別市를 관통해 흐르는 漢江을 가리킨다. 467) 居拔城 : 隋書 및 北史 에 기록된 백제의 도성으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扶餘邑을 가르 킨다. 본서에 기록된 사비성이라는 이름의 다른 호칭인 듯하다. 468) 固麻城 : 梁書 南史 및 周書 北史 에 기록된 백제의 도성으로서, 양서 남사 의 것 은 현재의 忠淸南道 公州市를 가리키고, 주서 북사 의 것은 부여군 부여읍을 가리키는 듯하 다. 왜냐하면 梁書 南史 에서는 웅진시대의 수도 固麻城 및 지방의 22담로제에 대해 언급 하는데 비해, 周書 에서는 수도 固麻城 및 지방의 五方制를 언급하면서 北方 熊津城이 따로 나 오기 때문이다. 다만 北史 에서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이라고 한 것은 隋書 와 周書 를 섞어서 기록한 것이다. 469) 五方城 : 백제가 사비시대에 지방의 중심지에 설정한 다섯 城을 말한다. 五方制에 대한 기록은 周書 百濟傳에 처음 나오며, 北史 百濟傳에서는 隋書 와 비교하여 이를 좀 더 보완하였다. 五方은 수도 이외의 곳에 있으며, 中方 古沙城, 東方 得安城, 南方 久知下城(장성군 진원면 : 古 名 仇斯珍兮), 西方 刀先城, 北方 熊津城의 5성이 있었다. 중방 고사성은 최근 고부 구읍성 발굴 조사를 통해 上部上巷 이 새겨진 인각와가 출토되고, 성곽 또한 초축이 백제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서(전북문화재연구원, 2005, 고부 구읍성 2차발굴조사위원회 현장설명 자료집 및 2006, 고부 구읍성 3차 발굴조사 1차 지도위원회 현장설명자료집 참조), 현재의 고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방 득안성은 현재의 논산시 은진면으로 비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은진조에 백제시대 은진의 명칭을 德近郡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논산과 은진 일대에 논산 모촌리 고분군, 논산 육곡리 고분군, 논산 표정리 고분군 등 백제 사비 시대의 최대 수혈식 설실분과 횡혈식 석실분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특히 매화산성 주변에서는 백제 말기의 횡혈식 석실분 12기가 조사되었는데, 그 중 7호분 에서 은제화형관식이 출토되어 피장자가 奈率 이상의 고위 신분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서는 안승주 이남석, 1993, 논산모촌리백제고분군 발굴조사보고서 (Ⅰ)(Ⅱ), 백제문화개발연 구원 및 1988, 논산육곡리백제고분 발굴보고서,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서성훈 신광섭, 1984, 표정리 백제폐고분조사, 중도 Ⅴ 등을 참조할 것. 그리고 北方 熊津城은 현재의 공주 지역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南方 久知下城과 西方 刀先城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어 논란 중이다. 南方 久知下城은 음운학적 고찰을 통해 전북의 金溝로 보는 견해 (今西龍, 1934, 百濟五方五部考,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292쪽), 전남 求禮로 보는 견해(末 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전남 장성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참 조), 전북 남원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88, 전북지방의 백제성, 백제의 국가발전과 성곽 4 쪽 ; 김영심, 1977, 백제 지방통치체제연구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02쪽), 광주로 보는 견해(박현숙, 2007, 지방제도, 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백제문화사대 계 연구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92쪽) 등이 있다. 西方 刀先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 산과 당진 또는 예산과 대흥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 1989, 고조선사 삼한사연구, 일조각, 388쪽), 전남 나주와 영암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88, 앞의 글, 4쪽), 보령으로 보는 견해(김영심, 1997, 앞의 글, 104쪽) 등이 있는데, 임존성

231 ) 通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高麗)와 떨어져 있으며, 서쪽은 큰 472) 바다를 경계로 삼는다. 473) 舊唐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부여의 別種으로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越州474)에 이르 이 있는 예산 대흥설이 지배적이다. 자치통감 권200 당기 16 고종 용삭 원년 및 본서 권37 잡 지 6 지리 4 고구려 백제조 등의 기록을 참조할 것. 한편 5방에는 각기 方領 1인이 있고, 方에 는 10郡이 있으며, 각 郡에는 郡將이 있었다. 方은 병사 1,200인 이하 700인 이상을 통괄하였 다. 470) 백제의 동쪽으로 五方城이 있었다 : 이 문장은 北史 권94 列傳 百濟傳에서 발췌한 것이 다. 북사 의 원문에서는 其國東極新羅 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 百餘里.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 이라고 되어 있다. 본서는 여기서 앞부분의 其國 대신 百濟 를 넣고, 句麗 를 뺐으며, 處小海南 대신에 北際漢江 이라고 고쳤다. 또 한 중간 부분의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를 삭제하였고, 뒷부분의 亦曰 을 又云 으로 고쳤으며, 五方 뒤에 城 字를 추가해 넣었다. 대체로 편찬자가 인용에 편리하도록 고친 것이 라 하겠으나, 백제의 북쪽 변경에 대하여 北史 의 찬자가 處小海南 이라고 한 것을 본서의 찬 자가 北際漢江 으로 고친 것은 모종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여기서 小海가 西海 의 牙山灣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북사 에서는 백제가 충청 이남의 公州 扶餘로 천도한 이후의 영역을 지적한 데 비하여, 본서에서는 이를 천도하기 이전 漢江 이남을 영유한 시대의 영역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개작은 백제 영역에 대한 본서 찬자의 인식을 보여 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471) 通典 : 당나라의 杜佑(735~812)가 편찬한 200권의 서적이다. 상고부터 天寶연간(742~756) 에 이르는 여러 제도를 연혁적으로 통관하여 만든 것으로 약 30년이 걸려 801년에 완성하였다. 유지기의 아들 유질이 開元 말에 만든 政典 35권을 보충하기 위해 저술하였다. 食貨 選擧 職官 禮 樂 兵 刑 州郡 邊防의 8부에 걸쳐 正史의 志의 항목을 통사적으로 총술한 類書 의 체제를 취하였다. 이 책은 通志 文獻通考 와 함께 三通이라고 불리운다. 472) 백제는 남쪽으로 경계로 삼는다 : 이 문장은 通典 권185 邊防 東夷 上 百濟傳에서 발췌 한 것이다. 그 원문에는 南接新羅 北拒高麗千餘里 西限大海 處小海之南 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서에서는 맨 앞에 百濟 를 넣고, 중간에서 千餘里 를 빼고, 뒤의 處海之南 을 생략하였다. 473) 舊唐書 : 중국 당나라의 正史로 25사의 하나이다. 紀傳體의 역사서로서 중국 五代 後晉의 劉 가 착수하여 高祖 天福 5년(940)에 張昭遠이 총 200권으로 완성하였다. 474) 越州 : 수나라가 중국 남방 浙江省 방면에 설치한 州의 이름으로서, 州治는 현재의 중국 浙江省 紹興縣이다. 461 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倭475)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高麗)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476) 곳은 동 서의 두 성이 있다. 477) 新唐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있으며, 북쪽은 고 478) 구려(高麗)이다. 475) 倭 : 한국이나 중국의 기록에서 日本人 및 日本國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7세기 후반에 이르러 日本 이라고 개칭하기까지는, 일본인 스스로도 한국이나 중국과 통교할 때 倭 라고 칭하였다. 확실한 기록으로서는 漢書 地理志에 樂浪海中 倭人百餘國 의 존재가 처음 나오니, 한 무제의 낙랑군 설치 이후에 처음으로 왜의 존재가 알려진 듯하다. 倭 는 일본에서 야마도(ヤマト) 라 고 읽는데,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倭人傳에 나오는 女王의 治所인 邪馬臺國의 위치, 즉 3 세기 당시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南九州의 大隅國 薩摩地方으로 보는 설, 北九州의 肥後國 菊池 郡 山門鄕이나 筑後國 山門郡 일대로 보는 설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北九州 일대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 후 일본의 세력 중심지가 九州에서 大和로 옮겨간 시점에 대해서는 ①3세기말로 보는 설, ②4세기말로 보는 설, ③5세기말 내지 6세기 전반으로 보는 설, ④7세기 전반으로 보 는 설, ⑤처음부터 大和지방이 중심이었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일본 내에서는 前方 後圓墳의 출현과 관련하여 3세기 말이나 4세기 말로 보는 설이 유력하며, 宋書 권97 倭國傳 의 倭五王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본 大和 또는 河內 지방의 왕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舊唐書 권199 상 열전에는 倭國傳과 日本國傳의 두 전기가 개설되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476) 그 왕이 거처하는 두 성이 있다 : 이 문장은 舊唐書 권199 상 列傳 東夷 百濟傳 서두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원문에는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 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이라 고 되어 있다. 본서는 여기서 밑줄 친 부분을 생략하였다. 뜻이 통할 정도로 최소한의 글자를 남 기고 나머지를 생략하였는데, 백제가 小海(아산만)의 남쪽에 있다는 귀절과 고구려와는 바다를 통해야 닿을 수 있다는 귀절을 제외한 것은, 백제 영역의 북쪽 끝에 대한 찬자의 인식에 의한 것 이라고 하겠다. 477) 新唐書 : 正史로서 중국의 25史의 하나로서, 송기(宋祁) 등이 편찬하였다. 舊唐書 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새로 편찬한 것으로 1060년에 완성되었다. 本紀 10권, 志 50권, 表 15권, 列傳 150권으로 되어 있다. 478) 백제의 서쪽 경계는 북쪽은 고구려이다 : 이 문장은 新唐書 권220 東夷列傳 百濟傳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원문에는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라고 되어 있는데, 본서에는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로 고쳤다. 여기서 본서의 찬자가 皆踰海 를 北 高麗 의 앞으로 돌린 것은, 백제가 북쪽의 고구려와 육지로 접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하다.

232 ) 古典記 를 살펴보니, 東明王의 셋째 아들 溫祚가 前漢 鴻嘉 3년 癸卯(B.C.18)에 卒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南平壤482)을 빼앗고 漢城에 도읍하여 105년을 지냈다. 本扶餘480)에서 慰禮城481)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컫었다. [그 후] 389년이 지나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서울을 熊川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에 이르러 서 울을 所夫里483)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南扶餘484)라고 하였다.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479) 古典記 : 편찬 당시에 있었던 우리 나라의 옛 기록인 古記 의 일종이다. 고전기 는 본서에 건국 시조, 수도의 변천, 그리고 지리 관련 기사 등을 서술할 때 인용하였다. 이에 관 한 기사를 본 백제의 건국 기사는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대 건국 기사 본문과는 내용이나 用字法 상으로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반면, 비류를 시조로 하는 古記 의 전승 기사와는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 멸망 해인 唐 顯慶 5년을 의자왕 20년으로 하는 즉위년칭원법으 로 되어 있지만, 유년칭원법으로 되어 있는 古記 와는 다르다. 그리고 지리 관련 기사를 검토 해 볼 때 고전기 가 백제본기의 지명 관련 기사에서는 세주로 활용된 반면 본서 지리 4의 백제 주군현명을 정리할 때에는 저본 자료로 활용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고전기 를 삼국사 기 편찬자가 구삼국사 와 古記 를 이용해서 백제의 건국이나 천도 기사를 정리했던 일종의 초고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高寬敏, 1996, 原典的硏究, 雄山閣, 29~34쪽). 반 면 고전기 는 우리나라 옛 자료라는 의미를 가진 고기류에 속하는 동시에 特定書目으로서의 성 격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1995, 삼국사기 의 백제 지리관련 기사의 검토,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58~163쪽). 한편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南扶 餘 前百濟條에도 古典記 가 인용되어 있는데, 그 인용 내용은 본서 지리지의 것과 거의 같으 면서도 약간 추가된 글자들이 있어서, 三國遺事 찬자가 삼국사기 에 인용된 고전기 를 보고 이를 보다 충실히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480) 卒本扶餘 : 고구려의 초기 국호. 졸본은 고구려 초기의 수도로서, 현재의 중국 遼寧省 桓仁 지방 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五女山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남아있다. 이 산성은 남북 길이 1,000m, 동서길이 300m 가량의 비교적 큰 규모이다. 또한 부근에는 積石塚 등 고구려의 古墳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이곳이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陳大爲,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 考古 ). 졸본부여에 대해서는 본서 권23의 주 6) 을 참조할 것. 481) 慰禮城 : 백제 초기의 수도로서, 현재의 서울特別市 松坡區 夢村土城과 風納洞土城을 말한다. 原本의 騎 는 禮 의 古字이다. 위례성 명칭의 기원에 대해 위례 는 우리 또는 울타리 를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丁若鏞, 我邦疆域考 ; 成周鐸, 1984,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 百濟硏究 14), 阿利水 郁里河의 阿利 郁里가 大 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기원하 였다고 보는 견해(都守熙, 1991, 百濟의 國號에 관한 몇 問題, 百濟硏究 22), 왕성 내지는 大城 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왕을 뜻하는 於羅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선, 1982, 한국 고대 국명 지명연구, 형설출판사, 199쪽) 등이 있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이란 명 칭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도성이라는 의미로 두루 사용되었지만 주로 백제의 도성제가 확립되는 371년 이전에 한산이란 명칭과 함께 혼용되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위례성은 河南慰禮城을 가 리키고 있으나, 그 이전에 고구려에서 내려왔을 때 잠깐 머물렀다는 河北慰禮城을 따로 구분하 기도 한다.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稷山으로 보는 설과 서울의 한강 북쪽 지역으 로 보는 설로 양립되는데, 후자를 좀 더 세분하면 ①三角山東麓 漢陽古邑으로 보는 설, ②北漢山 城으로 보는 설, ③道峰區 彌阿洞 牛耳洞 방면으로 보는 설, ④鍾路區 洗劒亭 일대로 보는 설, ⑤中浪川 유역으로 보는 설 등이 있다. 하북위례성에 대해서는 대략 한강 북쪽으로 보는 것이 보 통이나, 별다른 증거 없이 신화의 내용으로 짐작하는 정도이므로 더 이상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廣州 지역으로 보는 설과 서울시 江南 지역 으로 보는 설로 양립되는데, 전자에는 ①廣州 일대로 보는 견해, ②廣州 南漢山城으로 보는 견 해, ③京畿道 河南市 春宮洞(옛 廣州郡 西部面 春宮里) 일대로 보는 견해, ④하남시 二聖山城으 로 보는 견해 등이 있고, 후자에는 ①松坡區 風納洞土城으로 보는 견해, ②松坡區 夢村土城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최근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송파 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신희권, 2003, 앞의 글 참조). 482) 南平壤 : 남평양을 본서 권35 지리 2의 漢陽郡, 즉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비정하고 지금의 楊 州 옛터로 비정하고 있다. 즉 현재 서울특별시의 江北 북한산이나 중량천 일대로 보는 견해(본 서 권23의 주 11)을 참조)도 있다. 이와는 달리 고구려 3京 중에서 남경에 해당하는 황해도 신원 의 남평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76~183쪽). 남평양은 현재 신원군 신원읍의 동부와 그 동쪽의 아양리 월당리를 중심으로 하 는 지역이다. 이곳 북쪽에는 장수산(745m)이 둘러막고 있고, 동 서 남쪽에는 멸악산과 수양 산 줄기가 뻗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84년 발굴조사 결과 남평양 도시 유적이 10 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4~7세기대의 기와편들이 출토되었다. 그 주변 아양리와 장수산성 앞에 각각 고구려계 토성이 있었다. 또 장수산 일대에는 내외성으로 구성된 둘레 11.5 의 장수산성이 입보용 산성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 부근에서는 1,000여기의 고구려 돌무덤 과 돌칸흙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고구려의 남진 여하에 따라 남평양의 위치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483) 所夫里 :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이다. 문무왕 6년(666)에 州를 폐지하고 郡으로 고쳤다. 신 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泗 라고도 나온다. 본래는 백제 所夫里郡이었는데, 16년(538) 봄에 수도를 熊津에서 泗 즉 所夫里로 옮기고 南扶餘라고 칭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이를 함락시켰고,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泗 州(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 6년(686)에 郡으로 고쳤다. 484) 南扶餘 : 백제 성왕이 所夫里(현재의 충남 扶餘)로 도읍을 옮겼을 때 표방한 국호로 백제 사비시

233 년을 지냈다. 당나라 顯慶 5년(660) 즉 의자왕 재위 20년째에 이르러, 신라의 [金]庾 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역 및 신라의 옛 땅과 함께 9州로 삼았 信이 당나라 蘇定方과 함께 와서 이를 평정하였다. 다. 485) 486) 옛날에는 5部 가 있어서 37郡, 200城, 76만 戶 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당나라가 그 땅을 나누어 熊津 馬韓 東明 등 5都督府487)를 설치하고 나서, 그 우두머리(酋長)를 도 독부 刺史488)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아울러서 熊州 全州 武州 대 국호의 異稱이다. 485) 5部 : 전국을 다섯으로 나눈 사비시대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 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 를 말한다. 백제 말기에 와서 方과 部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5부는 5방과 같은 것이 다. 이 部(方)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軍管區로서 6 10개의 郡을 포괄하였고, 또 小城으로 표현 되는 縣들을 통속하였다. 部(方)의 장은 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는 것 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五部의 중심 치소는 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 및 翰苑 백제조에 인용된 括地志 에 의해 方과 方城의 명칭은 中 方-古沙城, 東方-得安城, 南方-久知下城(卞城), 西方-刀先城(力先城), 北方-熊津城(固麻城)이 다. 이 방성은 대개가 험한 산에 의지하여 돌로 쌓았으며, 1, 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 고 있었다. 한편 사비시대에 도성 畿內를 지역 구분하여 5부를 설치하였다. 王都五部制에 대한 기록은 周書 에 처음 보이며, 隋書 에서는 더욱 체계화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都下 즉 畿內 에는 萬家가 있어서, 이를 上部 前部 中部 下部 後部의 5부로 나누었다. 部는 500인의 병 사를 통괄하였으며, 각 部에는 5巷이 있어서 士人이 거주하였다. 이에 대한 성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74)를 참조할 것. 486) 37郡, 200城, 76만 戶 : 멸망 전 백제의 행정 지역과 인구가 이런 정도였다고 하는 것은 舊唐 書 의 기록을 전재한 것이다. 다만`唐平百濟國碑銘a에는 5都督, 37州, 250縣, 戶 24萬, 人口 620萬으로 되어 있어서, 戶數上에 차이가 있다. 당시의 部(都督, 여기서는 方) 郡(州) 城(縣) 의 숫자는 실제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戶와 人口의 수는 정확치 않다. 백제 멸망기 의 국세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74~977)을 참조할 것. 487) 熊津 馬韓 東明 등 5都督府 : 당나라가 660년 백제를 멸한 직후에 설치한 5개의 도독부를 가 르킨다. 그러나 이 기사의 原典인 舊唐書 권199 상 百濟傳에 右衛郞將 王文度를 熊津都督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총괄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기사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웅진도독부만 설치되었던 듯하다.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웅진 마한 東明 외에 金漣 德安 도독부의 이름이 나온다. 웅진도독부가 현재의 公州市라는 것과 덕안도독부가 5方城 중의 하나인 東方 得 安城(논산시 은진면)이라는 것외에, 다른 도독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5도독부는 웅진도독 부 외에는 계획상으로만 설치되었던 듯하며, 얼마 안 있어 본서 권37 지리지 말미의 성명 未詳 의 都督府 및 東明州 등 7州 체제로 전환하려한 듯하나, 그 또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978)을 참조할 것. 熊川州<*또는 熊津이라고도 한다.>489) 熱也山縣.490) 伐音支縣.491) 西原492)<*또는 낭비성(娘 臂城)493) 또는 娘子谷494)이라고도 한다.> 大木岳郡.495) 其買縣496)<*또는 林川497)이라고도 한 488) 刺史 : 州의 장관을 말한다. 刺史는 漢의 武帝가 部刺史를 두고 詔條를 받들어 郡國을 감찰하는 일을 관장하게 한데에서 비롯되었다. 魏晉시대에는 요충지의 州에 두고 都督으로써 刺史를 兼 領하게 하였다. 漢 魏 晉대의 刺史에 대해서는 和田 淸, 1932,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및 쪽을 참조할 것. 唐代의 지방통치조직은 州縣制였는데, 주의 장관을 자사라 하였다.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州縣制라고 하는 당의 지방통치조직을 백제고지에 시행하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 나오는 1도독부-7주-51 현제이다. 자사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7의 주 714)를 참조할 것. 489) 熊川州<*또는 熊津이라고도 한다.> : 본서 권37 지리 4에 나오는 웅천주 전주 무주조의 군현 수는 모두 147개인데, 그 중 백제본기에 나오는 지명과 일치하는 것은 湯井城 등 몇 개에 지나 지 않는다. 그것은 주로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나오고 있으며, 본서 권37 지리 4에서는 三國有名 未詳地名條에 대부분 나오고 있다. 이는 백제본기와 지리지 편찬자가 서로 달랐을 뿐 아니라 그 들이 참고한 자료도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리지 편찬자들은 신라 삼국통 일 직후 신문왕대에 만들어진 저본자료를 토대로 하여 지리지를 만들고 백제본기에 나오는 지명 중 군현 명칭과 일치하지 않는 지명들은 모두 三國有名未詳地名으로 간주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 고 있다. 이때 지리지 찬자들이 저본으로 활용한 자료는 고전기 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細註 로 나오는 지명은 백제본기에 보이는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웅천주란 신문왕대의 개편된 행정구역 명칭으로 고전기 를 저본으로 한 것이고, 熊津이란 명칭은 백제본기의 것을 그 세주 로 처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95, 앞의 글, 148~150쪽을 참조할 것. 여기서는 대부분 본서 권36 지리 3에 나오는 지명들이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본서 권36 지리 3을 참조하 고, 다만 명칭상의 차이가 나는 부분이나 특기할 사항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겠다. 490) 熱也山縣 : 신라 熊州 尼山縣(논산시 노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491) 伐音支縣 : 신라 熊州 淸音縣(공주시 신풍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武夫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伐音村을 東明州 소 속의 富林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있는 伐音城은 이곳으로 비정된다. 492) 西原京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州市와 청원군 일대이다(본 서 권36의 주 111) 참조). 493) 娘臂城 : 백제 西原(청주시)의 다른 호칭의 하나. 娘 은 原本에서 缺刻되었으나 三國史節要 卷9 唐顯慶 9年條에 의거해서 보충해 넣었다. 494) 娘子谷 : 백제 西原(청주시)의 다른 호칭의 하나. 娘 은 原本에서 缺刻이나 三國史節要 卷9

234 다.> 仇知縣.498) 加林郡.499) 馬山縣.500) 大山縣.501) 舌林郡.502) 寺浦縣.503) 比衆縣.504) 馬尸山 <*또는 泗 513) 라고도 한다.> 珍惡山縣.514) 悅己縣515)<*또는 豆陵尹城516) 또는 豆串城517) 또 郡.505) 牛見縣.506) 今勿縣.507) 혜군( 郡).508) 伐首只縣.509) 餘村縣.510) 沙平縣.511) 所夫里郡512) 는 尹城518)이라고도 한다.> 任存城.519) 古良夫里縣.520) 烏山縣.521) 黃等也山郡.522) 眞峴縣523) <*또는 貞峴이라고도 한다.> 珍洞縣.524) 雨述郡.525) 奴斯只縣.526) 所比浦縣.527) 結已郡.528) 新村縣.529) 沙尸良縣.530) 一牟山郡.531) 豆仍只縣.532) 未谷縣.533) 基郡.534) 省大兮縣.535) 知六 唐顯慶 9年條에 의거해서 보충해 넣었다. 495) 大木岳郡 :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현재의 충남 天安市 木川面 南化里에 백제시대의 토성이 그 치소로 추정된다(尹武炳, 1984, 木川土城, 충남대 박물관). 496) 其買縣 : 본서 권36 지리지 소재 신라 熊州 大麓郡 馴雉縣(천원군 풍세면)의 백제 때 지명인 甘 買縣과 차이가 난다. 三國史節要 권9 의자왕 20년 멸망 기록 細注에 의거해 볼 때 甘買縣 이 옳은 듯하다. 497) 林川 : 백제 甘買縣(천원군 풍세면)의 다른 호칭이다. 498) 仇知縣 : 신라 熊州 大麓郡 金池縣(연기군 전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 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知縣을 東明州 소속의 久遲縣으로 고치려 한 적 이 있었다. 현재의 충남 燕岐郡 全義面 邑內里土城은 백제 때의 치소로 추정된다(成周鐸, 1986, 百濟城址와 文獻資料 -大木岳郡 甘買縣 仇知縣을 중심으로-, 百濟硏究 17, 102쪽). 499)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加林城은 부여군 임천면 동쪽의 聖興山 城으로서 백제 왕도 사비성 남단의 주요 수비성이었다(본서 권36의 주 123) 참조). 500) 馬山縣 :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韓山面 이다(본서 권36의 주 124) 참조). 501) 大山縣 : 신라 熊州 加林郡 翰山縣(부여군 홍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02) 舌林郡 :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南陽郡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129) 참조). 503) 寺浦縣 : 신라 熊州 西林郡 藍浦縣(보령시 남포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04) 比衆縣 : 신라 熊州 西林郡 庇仁縣(서천군 비인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33) 참 조). 505) 馬尸山郡 :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06) 牛見縣 : 신라 熊州 伊山郡 目牛縣(홍성군 갈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07) 今勿縣 : 신라 熊州 伊山郡 今武縣(예산군 고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39) 참 조). 508) 혜군( 郡) : 신라 熊州 城郡(당진군 면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09) 伐首只縣 : 신라 熊州 城郡 唐津縣(당진군 당진읍)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夫只郡 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144) 참조). 510) 餘村縣 : 신라 熊州 城郡 餘邑縣(서산시 운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11) 沙平縣 : 신라 熊州 城郡 新平縣(당진군 신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49) 참 조). 512) 所夫里郡 :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泗 라고도 부른다(본서 권36 의 주 151) 참조). 513) 泗 : 백제 所夫里郡(부여군 부여읍)의 다른 호칭이다. 514) 珍惡山縣 : 신라 熊州 扶餘郡 石山縣(부여군 석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15) 悅城縣 :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靑陽郡 定山面 이다. 516) 豆陵尹城 : 백제 悅己縣(청양군 정산면)의 다른 호칭이다(본서 권36의 주 156) 참조). 517) 豆串城 : 백제 悅己縣(청양군 정산면)의 다른 호칭이다(본서 권36의 주 156) 참조). 518) 尹城 : 백제 悅己縣(청양군 정산면)의 다른 호칭이다(본서 권36의 주 156) 참조). 519) 任存城 :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今州라고도 나온 다(본서 권36의 주 159) 참조). 520) 古良夫里縣 : 신라 熊州 任城郡 靑正縣(청양군 청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62) 참조). 521) 烏山縣 : 신라 熊州 任城郡 孤山縣(예산군 예산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65) 참 조). 522) 黃等也山郡 :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68) 참조). 523) 眞峴縣 : 신라 熊州 黃山郡 鎭嶺縣(대전광역시 서구 구진잠지역)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 의 주 171) 참조). 524) 珍洞縣 : 백제 珍同縣(금산군 진산면)의 다른 호칭이다. 525) 雨述郡 : 신라 熊州 比豊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朽淺이라고 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175) 참조). 526) 奴斯只縣 : 신라 熊州 比豊郡 儒城縣(대전광역시 유성구 온천동)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 에는 奴叱只縣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178) 참조). 527) 所比浦縣 : 신라 熊州 比豊郡 赤鳥縣(연기군 금남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28) 結已郡 :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29) 新村縣 : 신라 熊州 潔城郡 新邑縣(보령시 주포면)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沙村이라 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185) 참조). 530) 沙尸良縣 :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홍성군 장곡면)의 백제 때 지명인데, 다른 기록에는 沙羅라 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188) 참조). 531) 一牟山郡 :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91) 참조).

235 468 縣.536) 湯井郡.537) 牙述縣.538) 屈旨縣539)<*또는 屈直이라고도 한다.> 는 進仍乙이라고도 한다.> 豆尸伊縣557)<*또는 富尸伊558)라고도 한다.> 勿居縣.559) 赤川縣.560) 完山540)<*또는 比斯伐541) 또는 比自火542)라고도 한다.> 豆伊縣543)<*또는 往武544)라고도 한다.> 545) 仇智山縣. 546) 高山縣. 547) ) 南原 <*또는 古龍郡이라고도 한다.> 大尸山郡. 549) 井村縣. 賓屈 德近郡.561) 加知奈縣562)<*또는 加乙乃563)라고도 한다.> 只良肖縣.564) 共伐共縣.565) 시산군(屎山 郡)566)<*또는 흔문( 文)567)이라고도 한다.> 甘勿阿縣.568) 馬西良縣.569) 夫夫里縣.570) 碧骨郡.571) 縣.550) 也西伊縣.551) 古沙夫里郡.552) 皆火縣.553) 欣良買縣.554) 상칠현(上柒縣).555) 進乃郡556)<*또 532) 豆仍只縣 : 신라 熊州 燕山郡 燕岐縣(연기군 남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33) 未谷縣 : 신라 熊州 燕山郡 昧谷縣(보은군 회북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195) 참 조). 534) 基郡 :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백제 때 지명이다. 535) 省大兮縣 : 신라 熊州 富城郡 蘇泰縣(태안군 태안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中宗壬申刊本 삼국사 기 권36 지리지 소재 신라 熊州 富城郡 蘇泰縣(태안군 태안읍)의 백제 때 지명인 省大 縣과 차이가 난다. 高麗史 地理志와 東國輿地勝覽 과 비교해 볼 때 이곳의 표기가 맞다. 536) 知六縣 : 신라 熊州 富城郡 地育縣(서산시 지곡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02) 참 조). 537) 湯井郡 :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舊 溫陽市)이다(본 서 권36의 주 204) 참조). 538) 牙述縣 : 신라 熊州 湯井郡 陰峯縣(아산시 영인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39) 屈旨縣 : 백제 屈直縣(아산시 신창면)의 다른 호칭이다. 540) 全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全州市이다(본서 권36의 주 212) 참조). 541) 比斯伐 : 백제 完山(전주시)의 다른 호칭이라고 하나, 여기서의 比斯伐은 신라 良州 火王郡(창녕 군 창녕읍)의 옛 지명인 比斯伐과 혼동된 듯하다. 542) 比自火 : 백제 完山(전주시)의 다른 호칭이라고 하나, 이것도 신라 良州 火王郡(창녕군 창녕읍) 의 옛 지명인 比自火와 혼동된 듯하다. 543) 豆伊縣 : 신라 全州 杜城縣(완주군 이서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往武縣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216) 참조). 544) 往武 : 백제 豆伊縣(완주군 이서면)의 다른 호칭이다. 545) 仇智山縣 : 백제 仇知只山縣(김제시 금구면)의 다른 호칭이다. 546) 高山縣 :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高山面인데, 다른 기록 에는 難等良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220) 참조). 547) 南原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南原市이다(본서 권36의 주 221) 참조). 548) 大尸山郡 :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25) 참조). 549) 井村縣 : 신라 全州 大山郡 井邑縣(정읍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井村으로도 나온 다. 550) 賓屈縣 : 신라 全州 大山郡 斌城縣(정읍시 정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賦城縣이 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230) 참조). 551) 也西伊縣 : 신라 全州 大山郡 野西縣(김제시 금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52) 古沙夫里郡 : 中宗壬申刊本 삼국사기 권36 지리지 소재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백제 때 지명인 古 夫里郡과 차이가 난다. 三國史節要 高麗史 東國輿地勝覽 등의 기 록과 비교해 볼 때, 이곳의 표기가 옳은 듯하다. 553) 皆火縣 : 신라 全州 古阜郡 扶寧縣(부안군 부안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554) 欣良買縣 : 신라 全州 古阜郡 喜安縣(부안군 보안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55) 상칠현(上柒縣) : 신라 全州 古阜郡 尙質縣(고창군 흥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43) 참조). 556) 進乃郡 : 백제 進仍乙郡(금산군 금산읍)의 다른 호칭이다. 557) 豆尸伊縣 : 신라 全州 進禮郡 伊城縣(무주군 부남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富尸伊 縣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247) 참조). 558) 富尸伊 : 백제 豆尸伊縣(무주군 부남면)의 다른 호칭이다. 559) 勿居縣 : 신라 全州 進禮郡 淸渠縣(진안군 용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60) 赤川縣 : 신라 全州 進禮郡 丹川縣(무주군 무주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561) 德近郡 :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은진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周書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 의 하나인 東方 得安城이었다(본서 권36의 주 255) 참조). 562) 加知奈縣 : 신라 全州 德殷郡 市津縣(논산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加乙乃 또는 薪浦라고도 나온다. 563) 加乙乃 : 백제 加知奈縣(논산시 논산읍)의 다른 호칭이다. 564) 只良肖縣 : 신라 全州 德殷郡 礪良縣(익산시 여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65) 共伐共縣 : 백제 只伐只縣(완주군 화산면)의 다른 호칭이다. 三國史節要 권9 백제 멸망 기사에 는 共伐只縣 으로 나온다. 高麗史 나 東國輿地勝覽 등과 비교해 볼 때, 只伐只縣이 맞는 듯 하다. 566) 시산군(屎山郡) :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陂山, 또 는 文, 또는 所島, 또는 失鳥出이라고도 나온다. 567) 흔문( 文) : 백제 屎山郡(군산시 임피면)의 다른 호칭이다. 568) 甘勿阿縣 : 신라 全州 臨陂郡 咸悅縣(익산시 함라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66) 참조). 569) 馬西良縣 : 신라 全州 臨陂郡 沃溝縣(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68)

236 豆乃山縣.572) 首冬山縣.573) 乃利阿縣.574) 武斤縣.575) 道實郡.576) 역평현(礫坪縣).577) 돌평현( 武珍州589)<*또는 奴只590)라고도 한다.> 未冬夫里縣.591) 伏龍縣.592) 屈支縣.593) 분차군(分嵯 坪縣).578) 金馬渚郡.579) 所力只縣.580) 閼也山縣.581) 우소저현(于召渚縣).582) 伯海郡583)<*또는 郡)594)<*또는 夫沙595)라고도 한다.> 助助禮縣.596) 冬老縣.597) 두힐현(豆 縣).598) 比史縣.599) 伯伊라고도 한다.> 難珍阿縣.584) 雨坪縣.585) 任實郡.586) 馬突縣587)<*또는 馬珍이라고도 한 伏忽郡.600) 馬斯良縣.601) 季川縣.602) 烏次縣.603) 古馬彌知縣.604) 秋子兮郡.605) 菓支縣606)<*또 다.> 居斯勿縣.588) 는 과혜(菓兮)607)라고도 한다.> 栗支縣.608) 月奈郡.609) 半奈夫里縣.610) 阿老谷縣.611) 古彌 참조). 570) 夫夫里縣 : 신라 全州 臨陂郡 澮尾縣(군산시 회현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71) 碧骨郡 : 백제 碧骨縣(김제시)의 다른 호칭이다. 572) 豆乃山縣 : 신라 全州 金堤郡 萬頃縣(김제시 만경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74) 참조). 573) 首冬山縣 : 신라 全州 金堤郡 平皐縣(김제시 용지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74) 乃利阿縣 : 신라 全州 金堤郡 利城縣(김제시 청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75) 武斤縣 : 신라 全州 金堤郡 武邑縣(김제시 성덕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武斤村縣 이라고도 나온다. 576) 道實郡 :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577) 역평현(礫坪縣) : 신라 全州 淳化郡 城縣(순창군 적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78) 돌평현( 坪縣) : 신라 全州 淳化郡 坪縣(임실군 청웅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沃坪이라고도 나온다. 579) 金馬渚郡 :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90) 참조). 580) 所力只縣 : 신라 全州 金馬郡 沃野縣(익산시)의 백제 때 지명이다. 581) 閼也山縣 : 신라 全州 金馬郡 野山縣(익산시 낭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294) 참조). 582) 우소저현(于召渚縣) : 신라 全州 金馬郡 紆洲縣(완주군 봉동읍 장구리)의 백제 때 지명이다. 583) 伯海郡 :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伯伊郡이라고도 나온다. 584) 難珍阿縣 : 신라 全州 壁谿郡 鎭安縣(진안군 진안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月良이 라고도 나온다. 다른 기록에는 難知可縣이라고도 나오며, 三國史節要 권12 宣德王 4년(783) 조에는 難知可郡으로 표기되어 있다. 585) 雨坪縣 : 신라 全州 壁谿郡 高澤縣(장수군 장수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586) 任實郡 :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任實郡 任實邑이다. 본서 권36의 주 307) 참조. 587) 馬突縣 : 신라 全州 任實郡 馬靈縣(진안군 마령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馬珍 또 는 馬等良이라고도 나온다. 588) 居斯勿縣 : 신라 全州 任實郡 靑雄縣(장수군 번암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89) 武珍州 :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옛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奴只라고도 나온다(본서 권 36의 주 314) 참조). 590) 奴只 : 백제 武珍州(광주광역시 동구)의 다른 호칭이다. 591) 未冬夫里縣 : 신라 武州 玄雄縣(나주시 남평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본서 권40 직관지 下 武官 條에 신라 十停의 하나로서 未多夫里停이 나온다. 592) 伏龍縣 : 신라 武州 龍山縣(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룡동)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盃龍 이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320) 참조). 593) 屈支縣 : 신라 武州 祁陽縣(담양군 창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94) 분차군(分嵯郡) :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夫沙 또 는 分沙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325) 참조). 595) 夫沙 : 백제 分嵯郡(순천군 낙안면)의 다른 호칭이다. 596) 助助禮縣 : 신라 武州 分嶺郡 忠烈縣(고흥군 남양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97) 冬老縣 : 신라 武州 分嶺郡 兆陽縣(보성군 득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598) 두힐현(豆 縣) :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신라 武州 錦山 郡 會津縣(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도 豆 縣이어서, 백제 豆 縣은 두 곳이 있었다. 599) 比史縣 : 신라 武州 分嶺郡 栢舟縣(고흥군 동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00) 伏忽郡 :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01) 馬斯良縣 : 신라 武州 寶城郡 代勞縣(보성군 회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41) 참조). 602) 季川縣 : 신라 武州 寶城郡 季水縣(장흥군 장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03) 烏次縣 : 신라 武州 寶城郡 烏兒縣(장흥군 대덕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04) 古馬彌知縣 : 신라 武州 寶城郡 馬邑縣(장흥군 장흥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50) 참조). 605) 秋子兮郡 :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06) 菓支縣 : 신라 武州 秋成郡 玉菓縣(곡성군 옥과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菓兮 또 는 果支 또는 果兮라고도 나온다. 607) 과혜(菓兮) : 백제 菓支縣(곡성군 옥과면)의 다른 호칭이다. 608) 栗支縣 : 신라 武州 秋成郡 栗原縣(담양군 금성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09) 月奈郡 : 신라 武州 靈巖郡(영암군 영암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237 縣.612) 古尸伊縣.613) 丘斯珍兮縣.614) 所非兮縣.615) 武尸伊郡.616) 上老縣.617) 毛良夫里縣.618) 松 다.> 發羅郡.635) 두힐현(豆 縣).636) 實於山縣.637) 水川縣638)<*또는 水入伊639)라고도 한다.> 彌知縣.619) 감평군( 平郡)620)<*또는 武平621)이라고도 한다.> 猿村縣.622) 馬老縣.623) 突山 道武郡.640) 古西伊縣.641) 冬音縣.642) 새금현(塞琴縣)643)<*또는 投濱644)이라고도 한다.> 黃述 縣.624) 欲乃郡.625) 둔지현(遁支縣).626) 仇次禮縣.627) 豆夫只縣.628) 爾陵夫里郡629)<*또는 竹樹 縣.645) 勿阿兮郡.646) 屈乃縣.647) 多只縣.648) 道際縣649)<*또는 陰海650)라고도 한다.> 因珍島郡651) 夫里630) 또는 仁夫里631)라고도 한다.> 波夫里郡.632) 仍利阿縣633)<*또는 海濱634)이라고도 한 <*바다의 섬이다.> 徒山縣652)<*바다의 섬이다. 혹은 猿山653)이라고도 한다.> 買仇里縣654) 610) 半奈夫里縣 :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63) 참조). 611) 阿老谷縣 : 신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영암군 금정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65) 참조). 612) 古彌縣 : 신라 武州 潘南郡 昆湄縣(영암군 학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枯彌縣이 라고도 하였다. 613) 古尸伊縣 :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14) 丘斯珍兮縣 : 신라 武州 岬城郡 珍原縣(장성군 진원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73) 참조). 615) 所非兮縣 : 신라 武州 岬城郡 森溪縣(장성군 삼계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所乙夫 라고도 나온다. 616) 武尸伊郡 : 신라 武州 武靈郡武(영광군 영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77) 참조). 617) 上老縣 : 신라 武州 武靈郡 長沙縣(고창군 상하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80) 참조). 618) 毛良夫里縣 : 신라 武州 武靈郡 高敞縣(고창군 고창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382) 참조). 619) 松彌知縣 : 신라 武州 武靈郡 茂松縣(고창군 성송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0) 감평군( 平郡) :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武平 또는 沙平 이라고도 나온다. 621) 武平 : 백제 平郡(순천시)의 다른 호칭이다. 622) 猿村縣 : 신라 武州 昇平郡 海邑縣(여수시)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3) 馬老縣 : 신라 武州 昇平郡 晞陽縣(광양시 광양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4) 突山縣 : 신라 武州 昇平郡 廬山縣(여천군 돌산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突山鄕이 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395) 참조). 625) 欲乃郡 :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6) 둔지현(遁支縣) : 신라 武州 谷城郡 富有縣(순천시 주암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7) 仇次禮縣 : 신라 武州 谷城郡 求禮縣(구례군 구례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8) 豆夫只縣 : 신라 武州 谷城郡 同福縣(화순군 동복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29) 爾陵夫里郡 :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竹樹夫里 또 는 仁夫里라고도 나온다. 630) 竹樹夫里 : 백제 爾陵夫里郡(화순군 능주면)의 다른 호칭이다. 631) 仁夫里 : 백제 爾陵夫里郡(화순군 능주면)의 다른 호칭이다. 632) 波夫里郡 : 신라 武州 陵城郡 富里縣(보성군 복내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33) 仍利阿縣 : 신라 武州 陵城郡 汝湄縣(화순군 화순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汝濱 또는 海濱이라고도 나온다. 634) 海濱 : 백제 仍利阿縣(화순군 화순읍)의 다른 호칭이다. 635) 發羅郡 :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通義라고도 나온다(본서 권36의 주 413) 참조). 636) 두힐현(豆 縣) : 신라 武州 錦山郡 會津縣(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416) 참조). 637) 實於山縣 : 신라 武州 錦山郡 鐵冶縣(나주시 봉황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38) 水川縣 : 신라 武州 錦山郡 艅 縣(광주광역시 광산구 운수동)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 는 水入伊라고도 나온다. 639) 水入伊 : 백제 水川縣(광주광역시 광산구 운수동)의 다른 호칭이다. 640) 道武郡 :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41) 古西伊縣 : 신라 武州 陽武郡 固安縣(해남군 마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42) 冬音縣 : 신라 武州 陽武郡 耽津縣(강진군 강진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43) 새금현(塞琴縣) : 신라 武州 陽武郡 浸溟縣(해남군 현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投濱이라고도 나온다. 644) 投濱 : 백제 塞琴縣(해남군 현산면 고현리)의 다른 호칭이다. 645) 黃述縣 : 신라 武州 陽武郡 黃原縣(해남군 황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46) 勿阿兮郡 :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 647) 屈乃縣 : 신라 武州 務安郡 咸豊縣(함평군 함평읍)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437) 참 조). 648) 多只縣 : 신라 武州 務安郡 多岐縣(나주시 문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본서 권36의 주 439) 참 조). 649) 道際縣 : 신라 武州 務安郡 海際縣(무안군 해제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陰海 또 는 大峯이라고도 나온다. 650) 陰海 : 백제 道際縣(무안군 해제면)의 다른 호칭이다. 651) 因珍島郡 : 신라 武州 務安郡 珍島縣(진도군 고군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238 <*바다의 섬이다.> 阿次山郡.655) 葛草縣656) <*또는 何老657) 또는 谷野658)라고도 한다.> 古祿 위의 백제 州郡縣은 모두 147개소664)였는데, 그것을 신라에서 고친 이름과 지금(고려)의 只縣659)<*또는 開要660)라고도 한다.> 居知山縣661) <*또는 安陵662)이라고도 한다.> 奈已 이름은 新羅志에 보인다. 663) 郡. 삼국에서 이름만 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三國有名未詳地分]665) (전략) 慰禮城,666) 腰車城,667) 槐谷城,668) 근노성( 652) 徒山縣 :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猿山이라고도 나 온다(본서 권36의 주 446) 참조). 653) 猿山 : 백제 徒山縣(진도군 군내면)의 다른 호칭이다. 654) 買仇里縣 : 신라 武州 牢山郡 瞻耽縣(진도군 임회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655) 阿次山郡 : 백제 阿次山縣(신안군 압해면)의 다른 호칭이다. 656) 葛草縣 : 백제 阿老縣(영광군 군남면 남창리)의 다른 호칭이다. 657) 何老 : 백제 阿老縣(영광군 군남면 남창리)의 다른 호칭이다. 658) 谷野 : 백제 阿老縣(영광군 군남면 남창리)의 다른 호칭이다. 659) 古祿只縣 : 신라 武州 壓海郡 鹽海縣(영광군 백수읍)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開要라 고도 나온다. 660) 開要 : 백제 古祿只縣(영광군 백수면 지산리)의 다른 호칭이다. 661) 居知山縣 : 신라 武州 壓海郡 安波縣(신안군 장산면)의 백제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屈知山 縣 또는 安陵이라고도 나온다. 662) 安陵 : 백제 居知山縣(신안군 장산면)의 다른 호칭이다. 663) 나이군(奈已郡) : 신라 朔州 奈靈郡(영주시)의 고구려 때 지명. 혹은 날이군(捺已郡)이라고도 한 다. 다만 본서 권35 지리지 2, 즉 新羅志 에는 奈靈郡本百濟奈已郡 이라고 하여 나이군이 본 래 백제의 지명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권37 지리지 4에는 百濟志의 말미에 朔州 奈靈郡의 옛 이 름인 奈已郡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이군이 파사왕때 신라 영역이 되었다는 기사가 본서 신라본 기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 등 후대의 지리서에는 본서의 本百 濟奈已郡 을 本高句麗奈已郡 으로 고쳐 읽고 있으나 어떤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奈已郡 문제에 대해서는 이강래, 1996, 新羅奈已郡考, 신라문화 13에서 사료적 검토가 이루 어졌다. 이는 5세기 후반 이후 한주 삭주 명주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본서 지리지 기 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본 서 지리지 찬자의 두찬에서 찾고 있다. 그 하나는 편자가 백제본기에서 백제 멸망시 37郡이라는 자료를 보고 이 郡數에 맞추기 위하여 조작을 행한 것이라는 견해(井上秀雄, 1974, 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90쪽)와 또는 新羅志의 기사는 편찬 자의 착오이며, 百濟志의 편찬자는 이를 보고 나이군이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오인하 여 武珍州條의 말미에 붙인 것이라는 견해(노중국, 1995, 의 百濟 地理關係 記事 檢 討, 의 原典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쪽)가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왜 奈已郡이 선택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재검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城),669) 가잠 664) 백제 州郡縣은 모두 147개소 : 본서 권36 지리지 소재 신라 熊州 全州 武州의 州郡縣數는 3 州, 2京, 38郡, 103縣으로서 總 146개소이다. 본서 권37 지리지 百濟志는 권36에다가 高句麗 志에서 생략되었던 朔州 奈已郡(영주시) 하나가 추가되어, 결과적으로 신라의 熊 全 武 3州의 총계보다 1개소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665) 삼국에서 이름만 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三國有名未詳地分] : 본서의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보이는 삼국시대 지명은 대략 358개가 나온다. 그 중 백제본기에 나오는 지명은 온조왕 8년조 의 大斧峴 등 50여 개, 그리고 백제의 대외관계상에 나타난 지명 일부만 나오고 있다. 이는 백제 본기와 지리지 편찬자가 서로 달랐을 뿐 아니라 그들이 참고한 자료도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95, 앞의 글, 148~150쪽을 참조할 것. 여기서는 백제본기에 나오는 지명과 백제의 대외 관계상에 나오는 지명만을 대상으로 현재의 지명을 살펴보겠다. 이 에 대해 井上秀雄, 1974,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01~110쪽의 도표와 高寬敏, 1996, 三 國史記 原典的硏究, 雄山閣, 163~173쪽의 도표를 참조하였다. 666) 慰禮城 : 백제 한성시대의 왕도로서 현재의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를 가르킨다. 위례성 명칭의 기원에 대해 위례 는 우리 또는 울타리 를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丁若鏞, 我邦疆域考 ; 成周鐸, 1984,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 百濟硏究 14), 阿利水 郁里河 의 阿利 郁里가 大 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견해(都守熙, 1991, 百濟의 國號에 관한 몇 問題, 百濟硏究 22), 왕성 내지는 大城 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왕 을 뜻하는 於羅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선, 1982, 한국 고대 국명 지명연구, 형 설출판사, 199쪽) 등이 있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도성이 라는 의미로 두루 사용되었지만 주로 백제의 도성제가 확립되는 371년 이전에 한산이란 명칭과 함께 혼용되어 나타난다.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었는데, 1997~1999년 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 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신희권, 2003, 앞의 글). 667) 腰車城 : 본서 신라본기 및 백제본기에 의하면, 나해 이사금 19년(214) 7월, 진덕왕 2년(648) 3 월, 의자왕 8년 3월조에 백제와 신라 사이의 腰車城 전투 기사가 나온다. 이를 충북 보은군 懷南 面 扮谷 혹은 경북 상주시의 舊要濟院 자리에 비정하기도 하나(이병도, 1977, 앞의 책, 27쪽) 분 명치 않다. 668) 槐谷城 : 본서 권2 신라본기 및 권24 백제본기에 의하면, 첨해 이사금 9년(255)에 백제의 침공 을 받아 신라 일벌찬 翊宗이 槐谷 서쪽에서 지키다가 죽었으며, 미추 이사금 17년(278) 22년

239 476 성( 岑城),670) 477 項城,671) 石吐城,672) 阿旦城,673) 甘勿城,674) 桐岑城,675) 西谷 城,676) 小 城,677) 畏石城,678) 泉山城,679) 雍岑城,680) 부곡성(缶谷城),681) 西單城,682) (283)에 백제가 槐谷城을 침공하자 신라가 사람을 보내 막았다고 하였다.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현재의 충북 槐山지역에 비정할 수 있으나(이병도, 1977, 國譯, 을유문화사, 368 쪽), 당시 두나라 간의 전투가 와산성(보은)~웅곡(선산)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던 점을 고려해 보 면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669) 근노성( 城)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5년(622) 10월조 및 권27 백제본기 무왕 24년 (623) 가을조에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침습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같은 곳인 듯하다. 근노 성( 城) 즉 늑노현( 弩縣)의 잘못으로 보면 신라 漢州 槐壤郡의 옛 지명인 仍斤內 와 음이 비슷하므로 현재의 충북 槐山郡 槐山邑에 비정할 수 있겠다(井上秀雄 譯註, 1980, 앞의 책, 384 쪽 ; 김태식, 1997,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 교 백제연구소, 77쪽). 670) 가잠성( 岑城) : 본서 권4 신라본기 및 권27 백제본기에 의하면, 진평왕 33년(611) 10월에 백 제가 신라의 가잠성을 빼앗았고, 진평왕 40년(618), 무왕 19년에는 신라가 백제의 가잠성을 빼 앗았으며, 진평왕 50년(628) 2월에 백제가 가잠성을 에워싸자 신라가 물리쳤다고 하였다. 권47 열전 奚論傳에 가잠성에서의 讚德 奚論 父子 무용담이 전한다. 괴산 일대에 가잠성주 讚德이 느티나무[槐樹]를 받고 죽었다고 하여 무열왕이 그 지명을 槐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전하나(井 上秀雄, 1980, 삼국사기, 118쪽), 믿기 어렵다. 지명 발음상으로 볼 때, 가잠성은 신라 漢州 介山郡(안성군 죽산면)의 옛 지명인 皆次山郡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김태식, 1997, 앞의 글, 77쪽).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7의 주 781)을 참조할 것. 671) 項城 : 본서 권5 신라본기에 의하면, 善德王 11년(642) 8월에 백제가 고구려와 공모하여 신라 의 黨項城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3년(642) 11월조에 이를 그만두었다 는 기사가 나온다. 오늘날의 경기도 南陽지방에 비정된다. 중국과 통교하는 데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본래 백제 땅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점령하면서 唐城郡이라 하였고, 후일 신 라 진흥왕이 이곳을 차지한 후 경덕왕이 唐恩郡으로 고쳤다. 이 당항성을 남양만에 위치한 화성 군 서신면 상안리의 해발 160m의 구봉산의 唐城에 비정된다. 당성은 둘레 1,200m의 산성으로 서해와 태안반도 일대가 조망되는 요충지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병모 김아관, 1998, 당성 -1 차발굴조사보고서 ; 배기동 박성희, 2001, 당성 -2차발굴조사보고서, 화성군 한양대박물 관을 참조할 것. 672) 石吐城 : 삼국 有名未詳地分의 신라측 지명. 본서 권5 신라본기, 권28 백제본기 및 권42 金庾信 傳에 의하면, 진덕왕 3년(649) 8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石吐城 등 7성을 함락하였는데, 김유신 이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석토성을 현재의 충청북도 鎭川郡 文案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閔德植, 1983,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분명치 않다. 673) 阿旦城 : 阿旦城이라는 이름은 여러 군데 있었던 듯하다. 본서 권24 25 백제본기에 의하면, 책 계왕 원년(286)조의 阿旦城 축성 기사와 개로왕 21년(475) 9월조의 개로왕 처형 기사가 있는 데, 이 아단성은 서울시 城東區 中谷洞의 阿且山城을 가리킨다. 한편 본서 권45 열전에서, 고구 려 영양왕 때에 고구려 장군 溫達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阿旦城은 신라 溟州 奈城郡 子春縣 (단양군 영춘면)의 옛 지명인 乙阿旦城(일명 溫達山城)을 가리킨다. 그러나 有名未詳地分의 아 단성은 신라 문무왕 대의 지명 기사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권6 7 신라본기 및 권43 金庾信傳 소재 문무왕 7년(667) 10월 2일조의 阿珍含城 또는 15년(675) 9월 29일조의 阿達城을 가리키 는 듯하며, 이 阿珍含城=阿達城은 신라 漢州 兎山郡 安峽縣(이천군 안협면)의 옛 지명인 阿珍押 縣과 같은 곳이다. 674) 甘勿城 :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647) 10월조에 甘勿城에서 김유신이 백제군을 물리친 기사가 나온다. 현재의 경북 金泉市 禦侮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지리 1 상주 開寧郡條에는 古甘文小國 領縣四 禦侮縣 本今勿縣[一云陰達] 景德王改名 今因之 로 나온다. 甘文小國을 今勿로 보고, 甘勿城을 신라 尙州 開寧郡의 옛 國名인 甘文小國이 있었던 金泉市 開寧面에 비정 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20쪽). 675) 桐岑城 :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647) 10월조에 桐岑城에서 김유신이 백제군을 물리친 기사가 나온다. 金庾信傳에서는 同火城이라고도 하였다.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9년(659) 4월 조에, 백제가 신라 獨山城과 桐岑城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 권34 지리지 신라 康州 星山郡 壽 同縣(구미시 인의동, 옛 칠곡군 인동면)의 옛 지명인 斯同火縣과 같은 곳이다. 676) 西谷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34년(633) 8월조에 백제가 신라의 西谷城을 쳐서 13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서곡성을 加西谷의 약칭으로 보아 고령 동쪽의 우곡면 일대인 新復縣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85, 앞의 글, 155쪽)와 거창군 가조면으로 보는 견해(김태식, 1996, 백제 의 가야지역 관계사 : 교섭과 정복,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 백제연구소, 78쪽)가 있으 나, 분명치 않다. 백제 무왕은 서곡성을 차지하여 거창지역을 장악한 후 낙동강 서변에 진출하 여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지역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677) 小 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3년(602) 8월조에, 신라가 阿莫山城(남원시 아영면)에서 백 제의 공격을 막아낸 후, 小 畏石 泉山 甕岑의 네 城을 쌓고 백제 국경을 침범해 왔다고 하 였다. 그 중 泉山은 남원시 운봉면 황산 일대로 비정된다(전영래, 1985, 백제 남방경역의 변 천,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53쪽). 이로 미루어 보면 4개의 성은 운봉의 아막성 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지리산 정령치에서 북으로 뻗어 운봉읍과 아영면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최병운, 1997, 선사시대의 섬진강, 섬진강유역사연 구,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64쪽). 678) 畏石城 : 위치를 알 수 없다. 679) 泉山城 : 현재 전북 남원군 운봉읍 동북쪽 16리의 荒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全榮來, 1985, 앞 의 글, 153쪽). 680) 雍岑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3년(602) 8월조에 甕岑城으로 나온다. 그 위치를 알 수 없 다. 앞의 주 678)을 참조할 것. 681) 부곡성(缶谷城) : 본서 권2 신라본기 및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벌휴 이사금 7년(190) 8월에

240 미후성([ ] 城),683) 앵잠성(櫻岑城),684) 岐岑城,685) 旗懸城,686) 穴柵城,687) 蛙山城,688) 狗壤,689) 沙峴,690) 熊谷,691) 牛山城,692) 道薩城,693) 大斧峴,694) 馬首城,695) 甁山柵,696) 백제가 신라 서쪽 변경의 圓山鄕과 缶谷城을 에워쌌다고 하였다.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2년 (928) 10월조에는, 甄萱이 부곡성을 쳐서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부곡성은 현재의 경상북도 군위 군 부계면(고려시대 缶溪縣)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25쪽). 군위군 義興의 영현으 로 缶溪縣이 보이고 있다. 682) 西單城 : 본서 권32 제사지 신라 小祀의 하나인 西多山(현재의 西大山)과 음이 비슷하니, 이곳에 비정하고 싶다. 현재의 충청남도 錦山郡 秋富面 郡北面에 걸쳐 있는 西大山을 가르킨다. 683) [미]후성([ ] 城) : [ ] 의 는 원래 빈 칸이나, 백제본기의 기사에 의거하여 보완하였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년(642) 7월조에 왕이 친히 신라의 城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 다는 기사가 있으며, 권5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642)조에서는 國西四十餘城 이라고만 하였 다. 미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88고속도로 주변에 위치한 신라의 성으로 보는 견해(이도 학, 1997, 고대국가의 성장과 교통로, 국사관논총 74, 213쪽)와 무왕이 624년에 차지한 함 양의 속함성 등 6개의 성으로부터 동쪽인 의령 합천 고령 성산 칠곡 구미 등 낙동강 이서 의 대부분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김병남, 2001, 백제 영토사연구, 전북대 박사학위논문, 192쪽)가 있다. 684) 앵잠성(櫻岑城) : 본서 권4 신라본기 및 권27 백제본기에 의하면, 진평왕 46년(624), 무왕 25년 10월에 백제군이 신라 速含(함양군 함양읍) 櫻岑 岐岑 烽岑 旗懸 穴柵의 6城을 포위하였 으며, 그 중에 速含 岐岑 穴柵의 3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권47 訥崔傳에 더 자세한 내용 이 전한다. 앵잠성은 현재의 경상남도 咸陽郡 水東面 上栢里 일대(속칭 앵구밭)에 비정되며, 5 세기대 가야 고분이 발견된 바 있다(金東鎬, 1972, 咸陽上栢里古墳群發掘調査報告, 東亞大學 校博物館 참조). 685) 岐岑城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조 및 권27 백제본기 무왕 25년 10월조에서는 岐岑城 이라고 나온다.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를 신라 康州 江陽郡 三岐縣으로 본 견해 가 있으니(全榮來, 1985, 앞의 글, 154쪽), 그 위치는 현재의 경남 陜川郡 大幷面이다. 686) 旗懸城 : 본서 권4 신라본기와 권27 백제본기 및 권47 訥崔傳에 의하면, 진평왕 46년(624) 10 월에 백제군이 신라 速含(함양군 함양읍) 旗懸 等 6城을 포위하였으나, 그 중에서 旗懸城은 함 락되지 않았다. 東國輿地勝覽 권39 雲峯縣 山川條에 箕峴이 縣北 20리에 있다고 하였다. 만 일 그것이라면 현재의 전북 南原市 山東面 大基里 月席里 일대에 해당하나, 분명치 않다. 687) 穴柵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25년(624) 동 10월조에는 冗柵 으로 나온다. 이를 신라 康 州 闕城郡(산청군 단성면)의 옛 지명인 闕支郡과 같은 곳으로 이를 신라 康州 闕城郡의 옛 지명 인 闕支郡으로 보아 현재의 경남 山淸郡 丹城面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全榮來, 1985, 앞의 글, 154쪽). 688) 蛙山城 : 현재의 충청북도 報恩郡 報恩邑이다(천관우, 1976,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 45 47쪽).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대에 그 8년(A.D.64) 10월조부터 신라와 백제 가 와산성을 놓고 네 차례에 걸쳐 각축을 벌이는 기사가 나온다. 권23 백제본기 다루왕대에도 해당 기사가 나온다. 東國輿地勝覽 권16 報恩縣 山川條에 의하면, 縣內에 蛙山이 있다고 하였 다. 현재 보은군청이 소재한 곳을 三山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현재 충혼 탑이 있는 남산이 마치 개구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蛙山이라고 부르고 있다(보은군, 1981, 내고 장 전통가꾸기, 125쪽). 689) 狗壤 : 본서 권1 2 신라본기 및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탈해 이사금 8년(A.D.64), 다루왕 37년 10월에 백제가 狗壤城을 치므로 신라가 騎兵 3천 명으로 막았으며, 벌휴 이사금 6년(189), 초고왕 24년 7월에는 신라의 仇道가 백제와 狗壤에서 싸워 이겼다고 하였다. 구양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충북 괴산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상), 45 47쪽)와 충북 沃川의 狗川 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24쪽 ; 井上秀雄 역주, 1980,, 平凡社, 43쪽)가 있으나, 보은(와산성)과의 거리상 접근성을 고려해 보면 옥천설이 타당하다. 690) 沙峴 : 본서 권2 신라본기 및 권23 26 백제본기에 의하면, 나해 이사금 19년(214) 7월에 신라 가 백제를 쳐서 沙峴城을 깨뜨렸으며, 동성왕 12년(490) 7월에 北部人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沙峴城을 쌓았다. 沙峴城을 충남 公州郡 正安面 廣亭里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井上秀 雄, 1982, 朝鮮城郭一覽, 朝鮮學報 104, 150쪽). 광정리 산성은 차령을 넘어 공주로 진입하 는 통로로서 왕도 웅진성을 지키기 위한 요충이라 할 수 있다. 691) 熊谷 : 본서 권2 신라본기 및 권24 백제본기에 의하면, 나해 이사금 27년(222) 10월에 백제가 牛頭州(춘천시)에 침입하므로 신라 忠宣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다가 熊谷에서 패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경북 구미시 善山에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7쪽). 이때 백제가 우두주(진)에 침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를 춘천으로 볼 경우 3세기 초 신라의 경역이 춘천에까지 미친 것으 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에서 예천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牛頭院(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醴泉 郡 驛院)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7쪽). 그리고 본서 권32 잡지 祭祀 志에는 신라 4鎭 중의 하나인 北鎭이 熊谷岳이 나오는데, 이곳은 比烈忽郡(현재의 강원도 安邊 郡 安邊邑)에 비정되어 본 기사의 熊谷과는 다른 곳으로 볼 수 있다. 692) 牛山城 : 본서 권19 고구려본기와 권26 백제본기에 의하면, 안원왕 10년(539), 성왕 18년 9월 에 백제가 고구려의 牛山城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東國輿地勝覽 권19 靑陽縣 古跡條에 牛山城이 있고, 그 위치는 현재의 청양군 청양읍으로 비정되지만, 고구려의 우산성과 같은 곳인 지는 알 수 없다. 삼국 有名未詳地分 신라측 지명에도 牛山城이 있고, 신라 우산성을 고구려가 문자명왕 6년(497)에 빼앗았다고 하였으나, 그 동일 여부를 알 수 없다. 이초럼 우산 이란 명 칭은 여러 곳이 있어 위치는 미상이다. 이곳을 남한강 서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고구려가 백제를 측면에서 공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강래, 1994, 삼국의 성립과 영토확장, 한국사 3, 한길사, 214쪽). 고구려의 牛岑縣으로 보아 현재 황해도 금천면 우봉면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김병남, 2003, 백제 성왕대의 북방 영역 변화, 한국사연구 120, 68쪽). 그러나 548년의 獨山城 전투기사의 마진성을 충남 예산으로 볼 경우 위치적으로 맞지 않아 불합리하 다.

241 480 烽峴,697) 禿山柵,698) 狗川柵,699) 走壤城,700) 石頭城,701) 高木城,702) 圓山城,703) 錦峴城,704) 693) 道薩城 : 본서 권4 5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1년(550) 정월에 신라의 異斯夫가 고구려의 道薩城을 빼앗았으며, 진덕왕 3년(649) 8월에 백제가 石吐城 등 7성을 함락시켰을 때 신라 김 유신이 道薩城 아래 진을 치고 이를 물리쳤다. 위와 같은 기사가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권26 28 백제본기 및 권42 金庾信傳, 권44 異斯夫傳의 해당년조에도 나온다. 도살성은 권35 신라 漢 州 黑壤郡 都西縣(괴산군 도안면)의 옛 지명인 道西縣의 다른 호칭이다. 천안의 옛 이름인 東西 兜率 또는 兜率 이 道薩과 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이를 현재의 충남 天安市로 비정하는 견해 (이병도, 1977, 앞의 책, 57쪽)도 있으나, 天安府는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행정 구역을 개설한 곳이므로 타당치 않은 듯하다. 신라의 화령로와 추풍령로를 통한 북진이 청주지역을 경유한 점 을 고려해 볼 때 증평 이성산성설이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 출, 문화사학 호, 371쪽). 694) 大斧峴 : 본서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8년(B.C.11) 2월조에 慰禮城을 포위하였던 靺鞨 賊을 왕이 大斧峴까지 쫓아가 싸워 이겼고, 22년 9월에 왕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斧峴 동쪽에 서 말갈을 격파하였으며, 40년 11월에 말갈이 斧峴城을 엄습하므로 왕이 기병 2백을 시켜 막았 다고 하였다. 부현의 발음으로 보아, 권35 지리지 신라 漢州 富平郡 廣平縣(평강군 평강면)의 고 구려 때 지명인 斧壤縣과 같은 곳을 가리킨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본서 권3 신라본기 나물 이사금기에 나오는 吐含山 방면의 斧峴은 다른 곳이다. 695) 馬首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8년(B.C.11) 7월에 낙랑에 대비하여 馬首城과 甁山柵을 세우고, 다루왕 3년 10월에 東部의 屹于가 靺鞨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겼으며, 7 년 9월에는 말갈의 공격으로 마수성이 함락되었다. 또한 권26 백제본기 무령왕 3년 9월조에는 말갈이 馬首柵을 태우고 高木城(연천군 연천읍)으로 진군하였다고 되어 있다. 마수성은 신라 漢 州 堅城郡(포천군 군내면)의 고구려 때 지명인 馬忽郡과 음이 비슷하여 현재의 경기도 抱川郡 郡內面에 비정할 수 있다. 696) 甁山柵 : 삼국 有名未詳地分의 백제측 지명. 본서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8년(B.C.11) 7월에 낙랑에 대비하여 馬首城(포천군 군내면)과 병산책을 세우고, 同 11년 4월과 다루왕 7년 (A.D.34) 10월에는 백제가 병산책에서 말갈의 침공을 막아냈다고 하였다. 병산책은 마수성과 이 웃한 곳이므로 포천 부근으로 비정되나(酒井改藏, 1970, の地名考, 朝鮮學報 54), 구체적인 지명은 알 수 없다. 삼국 有名未詳地分 신라측 지명의 甁山과는 서로 다른 곳이다. 697) 烽峴 :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0년(B.C.9) 10월조에 백제군이 말갈과 昆彌川에서 싸우다 패하여 靑木山에 들어갔는데,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烽峴으로 나아가 이를 구하였다고 되어 있 다. 大東地志 권3 麻田 및 漣川의 山水條에서는 이를 麻田 북 20리 朔寧路, 또는 漣川 서북 25리 長湍界라고 하였다. 현재의 京畿道 漣川郡 旺澄面 일대인 듯하나, 古山子의 비정이 맞는지 는 확실치 않다. 그밖에 개성 청목산 서쪽설(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말갈의 공격로 에서 벗어나 있어 맞지 않는다 ) 禿山柵 : 본서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11년(B.C.8) 7월에 禿山柵과 狗川柵을 세워 낙 랑의 통로를 막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전인 4월에 낙랑이 보낸 말갈에 의해 甁山柵이 파괴되 었기 때문인 듯하다. 본서 권3 신라본기 나물 이사금 18년,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8년(373) 7월조에는 禿山城이 나온다. 禿山柵 또는 禿山城을 경기도 죽산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酒井 改藏, 1970, 앞의 글), 낙랑의 침입로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 낙랑 고구려와 백 제의 접경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방면의 땅인 듯하다. 699) 狗川柵 : ①화성일대설(이병도, 1977, 앞의 책), ②옥천설(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백제가 구천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은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독산책과 마찬가지로 낙랑 또 는 고구려와 접경 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권26 성왕 32년조에 왕이 신라군에게 붙들려 시해당한 狗川(현재 沃川 방면)과는 다른 곳이다. 700) 走壤城 : 현재의 강원도 春川市의 鳳山古城 迭巖城이라고도 한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8월조에 백제 강역의 동쪽 끝이 走壤에 이른다고 하였고, 동 38년 2월조에는 왕이 그 곳까 지 巡撫하였다 한다. 또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 9월조에 首若州(춘천시) 走壤城 축성 기사 가 나온다. 춘천 일대에서 주양과 유사한 지명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고적조의 枝內 村所 와 대동여지도 의 枝內山 을 들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 701) 石頭城 :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朔寧里 일대.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22년(A.D.4) 8 월조에 석두성과 高木城(연천군 연천읍)의 축성 기사가 나오며, 권27 무왕 8년(607) 5월조 및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18년 5월조에는 고구려가 석두성을 쳐서 남녀 3천을 사로잡아 돌아갔 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석두성은 본서 권27 무왕 8년(607)에 고구려와 싸운 전투 지점으로 나 오는데, 당시 한강유역이 신라의 영유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 리가 있어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고구려 때 지명인 所邑豆縣과 音韻 上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702) 高木城 : 본서 권23 26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22년(B.C.4) 8월에 石頭城과 高木城을 쌓 았고, 다루왕 4년(B.C.31) 8월에 고목성의 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또한 무령왕 3년 (503)에 말갈이 馬首柵을 태우고 고목성으로 진군한 것을 격퇴하였고, 6년 7월에는 말갈에 의 해 고목성이 함락되었으며, 7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柵을 세우고 長嶺城을 쌓아 말갈에 대 비하였다. 신라 漢州 鐵城郡 功成縣(연천군 연천읍)의 고구려 때 지명인 功木達縣과 발음이 비 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漣川邑에 비정할 수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 천관 우, 1976, 앞의 책(下), 120쪽). 703) 圓山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26년(B.C.8) 10월조에 馬韓을 쳐서 그 國邑을 아울렀는 데, 다만 圓山城과 錦峴城은 항복하지 않았으며, 그 이듬해 4월에 항복을 받아 그 두 성의 백성 을 漢山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동 36년 8월에는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정 읍시 고부면)을 쌓았다고 하였다. 또한 본서 권26 무령왕 12년(512) 9월과 권19 고구려본기 문 자명왕 21년 9월조에는, 고구려가 加弗城을 빼앗고 군사를 옮겨 圓山城을 깨뜨렸으므로,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葦川 북에서 설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肖古王 24년(190) 조에 보이는 新羅西境圓山鄕 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경북 醴泉郡 龍宮面에 비정할 수 있으나

242 482 大豆山城,705) 牛谷城,706) 橫岳,707) 犬牙城,708) 赤峴城,709) 沙道城,710) 德安城,711) 寒泉,712) 釜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 경상도 龍宮縣 建置沿革), 예천 용궁은 마한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 지 않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전라도 珍山縣 古蹟조에 나오는 猿山鄕(在縣東三十里) 기사에 의거하여 충남 진산으로 보려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28쪽), ②圓山을 完山의 異寫로 보아 지금의 전북 全州市에 비정하는 견해 (全榮來, 1975, 完山과 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창간호), ③충남 금산 마전리설(1991, 조선 전사 3 중세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57쪽) 등이 있다. 그러나 마한의 목지국을 직산으로 볼 때 금산 마전리설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704) 錦峴城 : 圓山城과 마찬가지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정약용은 錦峴者 或是今羅州也 故與古沙 夫里幷擧也 라 하여 나주로 비정하고 있으나(丁若鏞, 疆域考 권1 馬韓考) 지리적으로 맞지 않 아 취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금현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9 鎭安縣 山川조에 나오는 熊嶺 縣의 異寫로 보고 그 위치를 지금의 鎭安郡 富貴面 곰치리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전영래, 1975, 앞의 글), 이 역시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본서 권26 성왕 28년(550)에 고구려가 포위 한 金峴城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다. 이 金峴城의 위치에 대해 ①충남 연기군 전의의 金城山 金伊山城說(이병도, 1977, 앞의 책, 57쪽), ②고구려때 今勿奴郡으로 보는 鎭川說(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47쪽) 등이 있으나, 진천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 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온조왕 27년 7월 아산에 대두산성을 축조하고 있는 것으 로 보면 아산과 가까운 연기 전의로 보는 설이 보다 옳은 듯하다. 705) 大豆山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27년(A.D.9) 7월조에 대두산성을 쌓았고, 同 36년 7월 조에 湯井城(아산시 읍내동)을 쌓아 대두성의 民戶를 나누어 거주시켰다고 하였다. 또한 권26 문주왕 2년(476) 2월조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漢江 이북의 民戶를 이주시켰고, 삼근왕 2년 (478) 봄에 佐平 解仇가 대두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었으며, 3년 9월에 대두 성을 斗谷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충남 공주나 서천설 및 연기설 (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0쪽 및 132쪽), ②충남 아산시 음봉면 수한산성설(이기백, 1978,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 9), ③충남 아산시 영인산성설(유원재, 1992,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등이 있는데 이곳을 천도 후 해씨세력의 근거지로 보고 있다(이기 백, 1978, 앞의 글, 12~13쪽). 706) 牛谷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34년(A.D.16) 10월에 馬韓의 옛 장군 周勤이 우곡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여의치 않아 자결하였고, 다루왕 29년(A.D.56) 2월에 東 部에 명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에 대비케 하였으며, 기루왕 32년(108) 7월에 말갈이 牛谷에 들 어와 사람들을 약탈해 갔다고 하였다. 말갈의 상시적인 백제 침입 루트상에 있기 때문에 경기 도 동북부 일대로 추정되나 현재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권3 신라본기 눌지 마립 간 3년(419) 4월조에 牛谷에서 물이 솟아났다는 곳과는 이름이 같아도 서로 다른 곳인 듯하다. 707) 橫岳 : 본서 권23 백제본기 다루왕 4년(B.C.31) 9월조에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을 하였고, 기 루왕 17년 8월조(A.D.93)에는 큰 돌 5개가 횡악에 일시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권25 진사 483 왕 7년(391) 8월조에 왕이 횡악 서쪽에서 사냥을 하였고, 아신왕 11년(402) 여름에는 크게 가물 어서 왕이 횡악에 제사지냈더니 비가 왔다고 하였다. 본서 권26 무령왕 7년(507) 10월조에 고 구려 장수 高老가 말갈과 함께 漢城을 치려고 횡악 아래 진군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물리쳤다 고 하였다. 김정호의 大東地志 漢城府 山水條에서는 三角山距北十五里 百濟稱負兒嶽 又云橫 岳 又云擧山 이라 하여, 현재의 서울특별시 三角山에 비정하는 견해가 옳은 듯하다. 이와는 달 리 음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강원도 橫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 왕 7년(309)에 이곳에서 田獵을 하고, 11년(402)에 祈雨祭를 지낸 사례에서 미루어 볼 때 橫岳 은 漢城시기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神聖之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708) 犬牙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16년(494) 7월조,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년 7월조, 권3 소지 마립간 16년 7월조에 의하면, 고구려와 신라가 薩水原에서 싸우다가 신라가 밀려서 견 아성에 들어갔는데, 백제군이 이를 구원하여 포위를 풀게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薩水原 이 본서 권34 지리지 신라 尙州 三年郡 淸川縣(괴산군 청천면)의 옛 지명인 薩買縣과 같은 곳이 므로, 견아성도 그 부근일 것이다. 이를 경북 문경 서쪽으로 보는 설(이병도, 1977, 앞의 책, 400쪽)이 있으나, 당시 고구려와 제라동맹군이 충북 청원 미원-보은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 던 점을 고려하면 보은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와 고구려간의 전투가 보은 삼년산성을 모기 지로 하여 보은-청원-진천선에서 벌어졌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견아성은 보은 내북면 창리의 주 성산성이나 보은읍 산성리의 함림산성에 비정될 수 있다(양기석, 2001, 앞의 글, 35쪽). 이를 경북 尙州市 화북면 견훤산성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 성은 후삼국기에 사용된 것으로 조 사되어 맞지 않는다. 709) 赤峴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45년(215) 2월조에 赤峴城과 沙道城을 쌓고 東部의 民戶 를 그곳으로 옮겼다. 권24 구수왕 3년(210) 8월조에 말갈이 赤峴城을 공격하다가 물러나는 것 을 왕이 기병으로 추격하여 沙道城 아래에서 격파하였으며, 4년 2월조에는 사도성 옆에 두 柵을 세우고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또한 권25 진사왕 7년(391) 4월에는 말갈이 북 변 적현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에 의하면 충북 沃川 永春, 충남 韓山 唐 津, 경북 開寧, 경남 星州 居昌 昌寧 등지에 赤峴의 지명이 나오나,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 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말갈의 백제 공격로상에 위치하고, 또 구수왕 4년(217)에 사도성 근처의 목책에 적현성의 군졸을 배치한 것으로 보면 현재의 연천 삭녕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으로 추정된다. 710) 沙道城 :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옛 지명인 所邑豆縣 또는 石頭城과 같은 곳으로 비정되어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邑에 해당된다. 말갈의 백제 공격로상에 위치하고, 또 이 성 근처의 목책에 적현성의 군졸을 배치한 것으로 보면 두 성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옛 지명 所邑豆縣(연천군 삭녕면) 또는 石頭城과 같은 곳인 듯하다. 본서 권2 신라본기 및 권45 열전에 나오는 沙道城과는 서로 다른 곳이다. 711) 德安城 : 현재의 충남 논산시 은진면에 해당한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欽純과 天存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居列城(거창)을 빼앗고, 居勿城(장수군 번암면)과 沙平城 (임실군 신평면)을 빼앗고, 또 덕안성을 쳐서 이겼다고 하였다.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은진면)

243 山,713) 石川,714) 狗原,715) 八押城,716) 關彌城,717) 石峴城,718) 雙峴城,719) 沙口城,720) 斗谷,721) 耳山 城,722) 牛鳴谷,723) 沙井城,724) 馬浦村,725) 長嶺城,726) 加弗城,727) 葦川,728) 狐山,729) 穴城,730) 獨 의 백제 때 지명인 德近郡에 해당한다. 周書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의 하나인 東方 得安城이 었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 곳에 德安都督府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본서 권37 지리지 總章 2년(669)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 에 따르면 德近支를 都督府 직속의 得安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이곳은 본래 백제 德近支 또는 德近郡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德殷郡이 되었다. 712) 寒泉 : 본서 권24 백제본기 구수왕 16년(229) 10월조에 왕이 한천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경기도 龍仁市가 아닐까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67쪽). 713) 釜山 :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5년(238) 2월조에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 왔다고 하였다. 釜山은 본서 권35 지리 2 한주 唐恩郡 振威縣조에 振威縣 本高句麗釜山縣 景德 王改名 이라고 하여 현재의 경기도 平澤市 振威面에 비정된다. 한성도읍기에 백제 왕실에서 거 행하는 주요 전렵지로는 부산(평택 진위) 이외에 횡악(북한산) 서해대도(강화도) 狗原(경기도 양주 풍양)이 있었는데 모두 왕도 근처에 위치한다. 714) 石川 :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7년(240) 7월조에 석천에서 군대를 사열할 때 한 쌍의 기러 기가 물 위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왕이 쏘아 모두 맞혔다고 하였다.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715) 狗原 : 본서 권24 백제본기 비류왕 22년(325) 11월조에 왕이 구원 북쪽에서 사냥을 하여 사슴을 잡았다고 하였다. 권25 진사왕 6년 10월조와 8년 10월조에도 구원에서의 사냥 기사가 있고, 11 월에 狗原 行宮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현재 경기도 양주군 풍양에 비정된다(酒井改藏, 1970, 地名考, 朝鮮學報 54, 46쪽). 716) 八押城 :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2년(386) 봄조에 關防을 설치하였는데, 靑木嶺에서 시작하 여 北은 八坤城에, 西는 바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다만 八押城 이 옳은지, 八坤城 이 옳은지 는 알 수 없다. 팔곤성을 마식령산맥의 동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천의 개연산 부근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문안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170~171쪽). 개연산은 멸악산맥(개연 산~장산곳)과 마식령산맥(개연산~풍덕)이 분기되는 곳이다. 717) 關彌城 : 현재의 京畿道 坡州市 炭縣面 城洞里 烏頭山城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 사왕 3년(387) 9월조에 말갈과 관미성에서 싸워 패하였고, 아신왕 2년(393) 8월조에 고구려로 부터 관미성을 회복하려고 공격하다가 실패하였다고 나온다.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391) 10월조에도 같은 기사가 나온다. 이 관미성은`광개토왕릉비a에 보이는 閣彌城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임진강과 한강의 합류되는 烏頭山城說(金正浩, 大東地志 권3, 교하 성지 ; 윤일녕, 1990, 관미성위치고, 북악사론 2, 쪽), ②강 화 교동도의 華蓋山城說(이병도, 1977, 앞의 책, 380쪽), ③강화도 河陰山城說(신채호, 1982,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전집(상) ; 운명철, 2003, 고구려 해양사연구, 사계절, 174쪽), ④ 고양시 중흥동 廢山城說 (한백겸, 東國地理志, 新羅所倂 形勢 關防 관미성), ⑤白川郡 味浦 說(酒井改藏, 1955,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 朝鮮學報 8, 51쪽), ⑥개성 부근의 關彌嶺 說(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출판사, 174~175쪽) ; 이도학, 1990, 백제 관미성 에 관한 일고, 가야통신 합집), ⑦개풍군 백마산 부근설(손영종, 1982, 광개토왕릉 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영역, 력사과학 297쪽) 등이 있다. 그런데 391년 전투에서 고구려 가 백제의 석현성을 거쳐 관미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있으며, 이듬해에 백제가 左將 眞 武를 보내 석현성 등 5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공격한 일에 비추어 볼 때 관미성과 석현 성은 거리상 인접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임을 알 수 있다. 관미성은 사면이 깎아지듯 가파르고 서 해에 연한 지역에 있는 수로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조건을 고려해 볼 때 관미성은 예성강 이남의 내륙지역보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오두산성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718) 石峴城 :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8년(392) 7월조에 고구려왕 談德이 병사 4만을 거느리고 와서 북변의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고, 漢水 이북의 여러 부락도 많이 함락되었으며, 아 신왕 2년 8월조에 석현 등 5성을 회복하려고 관미성을 쳤으나 실패하였다고 나온다. 또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5) 9월 29일조에 당군이 석현성을 치므로 縣令 仙伯과 悉毛 등이 힘써 싸우다가 모두 죽었다고 하였다. 석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있던 성으 로 보는 견해(池內宏, 1927, 高句麗滅亡後遺民叛亂及び唐新羅關係,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2, 東京帝國大學文學部), ②황해도 곡산 서남 20리로 보는 견해(김정호, 대동지지 권18 곡 산), ③현재의 경기도 開豊郡 靑石洞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國譯, 380쪽) 등 이 있다. 석현성은`광개토왕릉비문a의 영락 14년 대방계 전투에 나오는 石城 과 같은 곳으로 추정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719) 雙峴城 : 본서 권25 백제본기에 의하면, 아신왕 7년(398) 3월에 쌍현성을 쌓았고, 개로왕 15년 10월에 쌍현성을 수리하고 靑木嶺에 큰 柵을 설치하여 北漢山城의 사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으 며, 무령왕 23년(523) 2월에는 왕이 漢城에 가서 漢水以北 州郡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 았다고 하였다. 임진강 건너 장단 북쪽에 위치한 망해산의 쌍령 부근으로 추정된다(문안식, 2006, 앞의 책, 194~195쪽). 쌍현성의 축조는 고구려군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요충으 로 볼 수 있다. 720) 沙口城 : 본서 권25 전지왕 13년(417) 7월조에 병관좌평 解丘의 감독하에 동부 북부의 사람들 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능비문의 영락 17년 기사에 나오는 沙溝城과 같은 성 으로 볼 때 이곳에서 고구려와 백제간의 큰 전투가 벌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721) 斗谷 : 본서 권26 백제본기 삼근왕 3년(479) 9월조에 大豆城을 두곡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현재 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 두곡을 충남 公州의 斗谷驛이나 舒川의 斗谷驛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0쪽),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차 령산맥 이남의 어느 지점일 것 같으나 분명치 않다. 722) 耳山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12년(490) 7월조에 北部人을 징발하여 沙峴城과 耳山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673) 9월조에 耳山城의 축조 기사가 나

244 486 온다. 東國輿地勝覽 권29 高靈縣 山川條에 里山 在縣西二里 鎭山 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慶尙北道 高靈郡 高靈邑 池山里 主山山城이다(井上秀雄 역주, 1983, 2, 373쪽). 본 서 권26 동성왕 12년(489) 추7월 기사에서는 沙峴城과 함께 이산성을 축조한 기사가 보이고 있 다. 이곳을 충북 증평군 道安面의 尼聖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閔德植, 1983, 高句麗 道 西縣城考, 史學硏究 36 참조), 이곳이 삼국사기 지리지 4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 영역이기 때문에 성립되기 어렵다. 동성왕 20년(498) 이전에는 웅진도성과 그 부속 시설의 정비와 함께 왕도 주변에 환상으로 산성을 배치하는 위성방비체제를 구축해 왔다(서정석, 2002, 앞의 책, 100~101쪽). 이 시기에 새로 축조된 牛頭城(청양, 486) 沙峴城(공주 정안, 490) 耳山城 (490)은 왕도 웅진을 방어하기 위해 차령을 넘어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요충에 설치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산성도 웅진 부근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723) 牛鳴谷 :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14년(492) 10월조에 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여 사슴을 친 히 쏘았다고 하였다.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0년 4월조와 권20 고구려본 기 영양왕 19년 4월조에 나오는 牛鳴山城과는 다른 곳이다. 724) 沙井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20년(498)조에 熊津橋의 수리와 함께 사정성의 축성 기사 가 나오며, 성왕 4년(526) 10월조에 熊津城의 수리와 함께 沙井柵 설치 기사가 나온다. 또한 권 28 백제 멸망 후 龍朔 2년(662) 7월조에, 劉仁願 등이 웅진 동쪽에서 福信의 무리를 크게 깨뜨 리고 支羅城과 尹城(청양군 정산면) 大山柵 沙井柵 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현재의 대전광 역시 중구 沙井洞으로 비정되고 있다(成周鐸, 1974, 大田地域 古代城址硏究, 百濟硏究 5, 116쪽). 725) 馬浦村 :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23년 11월조에 왕이 泗 (부여군 부여읍) 서쪽 들에서 사 냥을 하다가 큰 눈에 막혀 마포촌에 머물다가, 加林城(부여군 임천면)의 성주 加에 의해 죽임 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 熊州 嘉林郡 馬山縣(서천군 한산면)은 백제 때 이름도 마산현이 고, 위치상으로 보아 부여읍의 서남쪽이면서 임천면과 가까우므로, 이곳을 마포촌에 비정을 하 고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글, 401쪽) 분명치 않다. 726) 長嶺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무령왕 7년(507) 5월조에, 高木城(연천군 연천읍) 남쪽에 두 柵을 세우고 또 長嶺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권1 신라본기 일성 이사금 4년 6 년 7년조에 말갈이 습격한 곳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경기도 북단 연천군의 남쪽 방 면의 어느 지점인 듯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신라본기에 나오는 長嶺鎭(경주시 동쪽) 과는 다르다. 727) 加弗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무령왕 12년(512) 9월조와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1년 9월조 에, 고구려가 加弗城을 쳐서 빼앗고 군사를 옮겨 圓山城을 깨뜨렸으므로, 왕이 기병 3천을 거느 리고 葦川 북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불성을 경기 가평으로 보는 견해(김종 권, 1963, 완역 삼국사기, 선진문화사, 432쪽)와 옥천으로 보는 견해(손영종, 1990, 고구려 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372쪽)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728) 葦川 : 위의 加弗城과 함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위천의 위치에 대해 서산으로 보는 견해(김종 권, 1963, 앞의 책, 432쪽)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현재의 위천은 경상북도 軍威郡을 북서류하 487 山城,731) 金峴城,732) 角山城,733) 松山城,734) 적암성(赤 城),735) 生草原,736) 馬川城,737) 침현( 여 義城郡을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길이 의 하천인데, 이 역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 에 전투한 지점으로 보기에는 맞지 않는다. 729) 狐山 : 본서 권26 백제본기 무령왕 22년(522) 9월조에 왕이 狐山原에서 사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본기의 狐山城(위치 미상)과는 다른 곳이다. 狐山은 孤山의 잘못으로 추정된다. 孤山 은 獨山과 같은 지명으로서 현재의 충남 禮山郡 禮山邑에 비정된다. 730) 穴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성왕 7년(529) 10월조에 의하면, 고구려 안장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 리고 북쪽 변경의 穴城을 함락하였으며, 성왕이 좌평 燕謨에게 명하여 步騎 3만을 거느리고 五 谷原에서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권3 12 신라본 기에 의하면 실성 이사금 14년(415) 7월에 왕이 穴城原에서 크게 사열했다고 하였고, 헌강왕 5 년(879) 11월에 왕이 혈성원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하였으며, 경순왕 5년 2월에 왕이 고려 태조 를 혈성까지 나가 전송했다고 하였으니, 이 穴城은 권32 제사지 신라 大祀 三山의 하나인 穴禮 와 같은 곳으로, 현재 경상북도 慶州市 북부의 魚來山이며, 백제본기의 것과는 다른 곳이다. 여 기서 穴城은 현재의 강화군에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 2 한주에 의하면 고구려때는 穴口郡이 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海口郡으로 고쳤다. 고려때에는 穴華縣이 되었다. 일명 穴口 또는 甲比古次 로 불리웠다. 이 혈성은 백제가 고구려로 북진하기 위한 군사기지로 이용되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 101~102쪽). 그러나 성왕 7년(529) 10월조의 전 투는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해전의 가능성도 있다. 731) 獨山城 : 삼국 有名未詳地分의 백제측 지명으로서, 현재의 충청남도 禮山郡 禮山邑이다. 본서에 나타나는 獨山城은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곳 있었던 듯하니, 百濟 獨山城 또는 漢北 獨山城과 新羅 獨山城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권4 신라본기와 권26 백제본기 등에 의하면, 진흥왕 9년 2월 조, 양원왕 4년 정월조, 성왕 26년(548) 정월조에 나오는 百濟 獨山城은 고구려와 濊人이 군사 를 거느리고 이를 치자 신라가 원병을 보내 주었다는 곳으로서 고구려 백제 접경지대의 땅이 다. 이는 日本書紀 권19 欽明 9년(548) 4월조의 馬津城과 같은 곳으로서, 馬津縣은 백제 멸망 후에 당나라가 설치한 支 州의 屬縣으로서 본래 孤山이었데, 孤山 또는 烏山은 통일신라 熊州 任城郡 孤山縣이니, 현재의 위치는 예산군 예산읍이다. 이와는 달리 성왕 26년조 기사에서 漢 北 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한강 이북지역인 경기도 포천 성산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병남, 2003, 백제 성왕대의 북방 영역 변화, 한국사연구 120, 70쪽). 그러나 성왕 26년 이후 나제동맹군이 고구려군의 침입에 대하여 차령산맥 일대 충청도 일원에서 공동 작전 을 수행한 사실을 고려해 보면 독산성은 예산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漢北 이란 표기는 한 강유역에서 아산으로 移置된 한산의 북쪽지방이란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732) 金峴城 : 본서 권26 백제본기 성왕 28년 3월조,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6년 3월조, 권4 신라 본기 진흥왕 11년 3월조 및 권44 異斯夫傳에 의하면, 백제 장군 達己가 고구려의 道薩城(괴산군 도안면)을 빼앗고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았는데,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들을 쳐 두 성 을 빼앗아 증축하였다고 한다. 金峴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충남 연기군 전의의 金城山 金伊山

245 488 峴)738) 眞都城,739) 葛嶺,740) 支羅城741)<*혹은 周留城742)이라고도 하였다.>, 大山柵,743) 城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06쪽), ②고구려때 今勿奴郡으로 보아 鎭川지역으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앞의 글, 47쪽) 등이 있으나, 진천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 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金城山城은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길목에 위 치한 금성산(424m)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백제계 토기편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는데, 증평에 서 청원 옥산을 거쳐 금강의 한 지류인 미호천변을 따라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이곳 미호천과 금강이 하류하는 주변 일대에는 청원 문의 방면의 신라계 양성산성, 고구려계 청원 남성골유적, 백제계 석실분과 산성 등이 밀집해 있어서 5~6세기 삼국간의 첨예한 쟁패지역이었음을 보여주 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금현성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金城山城 일대로 보는 것이 합리적 이지 않을까 한다. 733) 角山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6년(605) 2월조에 각산성의 축성 기록이 있다.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 4월 19일조에 의하면, 古沙比城(정읍시 고부면) 밖에 주둔하던 신라 대군이 회군할 때, 뒤에 쳐진 下州軍이 賓骨壤(전북 태안군 몽동면)에서 백제군에게 대패하였으며, 上州朗幢은 角山에서 적을 만나 이기고 백제군 진중으로 들어가 2천여 급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각산성 을 ①진주로 보는 견해(김종권, 1963, 앞의 책, 442쪽), ②부여의 청마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 (성주탁, 1982, 백제 사비도성 연구, 백제연구 13, 36~39쪽), ③임실군 관촌면 오원천의 대 리산성 배뫼산성 방현리산성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1996, 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신아출 판사, 119쪽), ④전북 정읍시 內藏面 葛峴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譯註, 1983,, 382쪽) 등이 있다. 그러나 위의 태종 무열왕 8년(661)조에 의거해 볼 때 신라와 백제군이 전투 한 지점이 賓骨壤(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산성)인 것으로 보아 각산은 정읍시 부근으로 보인다. 734) 松山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8년(607) 5월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18년 5월조에 의 하면, 고구려가 백제 송산성을 치다가 함락되지 않자, 옮겨서 石頭城(연천군 삭녕면)을 쳐서 남 녀 3천을 잡아 돌아갔다고 한다. 명칭상으로 볼 때 송악군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개성 이나 또는 연천군 전곡읍 서남단에 송산리로 추정되나 분명치 않다. 그러나 당시 한강유역이 신 라의 영유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사료 비판이 필요 하다. 735) 적암성(赤 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12년(611) 8월조에 적암성의 축성 기사가 나온다.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736) 生草原 : 본서 권27 무왕 33년(632) 7월조에 왕이 生草原에서 사냥을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권28 의자왕 19년(659) 8월조에는 여자 시체가 生草津에서 떠올랐다는 기사가 나온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부여 인근의 백마강변인 듯하나, 위치를 알 수 없다. 737) 馬川城 :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33년(632) 2월조에 마천성을 개축하였고, 권28 의자왕 15년 7월조에 마천성을 또 수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곳을 충남 舒川郡 韓山面 지방(古名 馬山 縣)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422쪽), 분명치 않다. 738) 침현( 峴) : 炭峴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23년(501) 7월조에 炭峴에 목 489 책을 설치하였고, 권28 의자왕 16년(656) 3월조에 좌평 成忠은 육로에서 침현을 막아야 한다 고 上書하였으며, 20년(660) 6월조에 좌평 興首는 炭峴(혹은 침현)의 방비를 언급하였다. 이 침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①충청남도 금산군 금산면 천내리와 충청북도 영동 군 양산면 가선리설(大原利武, 1922, 百濟要害地炭峴に就いてa, 朝鮮史講座 朝鮮歷史地 理, 88~90쪽), ②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와 서평리와의 사이에 있는 炭峙설(小田省吾, 1927, `上世史a, 朝鮮史大系, 194쪽), ③부여 석성면 正覺里 숫고개설(今西龍, 1934, 百濟史硏 究, 近澤書店, 266쪽), ④대전 동구와 옥천 군북면 경계의 식장산 마도령설(이병도, 1977, 역 주 삼국사기, 401쪽), ⑤완주군 운주면 薪伏里와 三巨里 사이의 쑥고개설(홍사준, 1967,`탄 현고 -계백의 삼영의 김유신의 삼도-a, 역사학보 35 36, 55~81쪽 ; 전영래, 1982,`탄현 에 관한 연구a, 전북유적조사보고 13, 276~289쪽), ⑥금산군 珍山面 校村里의 숯고개설(성 주탁, 1977, 금산지방성지 조사보고서a, 논문집 제4권 제3호,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9쪽) 등이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馬道嶺으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한 듯하나, 확실치는 않다. 739) 眞都城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定方將步騎 直趨眞都城 一舍止 라고 되어 있고, 新唐書 百濟傳에도 眞都城 으로 나오나, 資治通鑑 에는 其都城 으로 되어 있 다. 문맥상에서 미루어 볼 때 熊津江口에서 백제 저항군을 격파한 唐나라 군대가 곧 바로 그 사 비도성으로 진격해 간 것으로 판단된다.따라서 이를 지명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740) 葛嶺 : 본서 권28 백제본기 용삭 원년(661) 3월조에 의하면, 신라 장군 金欽이 백제 부흥군에게 몰린 熊津都督府를 구원하기 위해 가다가, 古泗(정읍시 고부면)에서 福信의 요격을 받고 패하여 葛嶺道로부터 도망쳐 돌아왔다고 한다. 661년 3월에 신라와 백제 부흥군이 전투한 지점이 賓骨 壤(전북 태인군 옹동면 산성리산성)인 것으로 보아 井邑의 동남쪽 淳昌으로 통하는 峙道(葛峙) 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하여 무왕대 백제와 신라간에 아막 성 등과 같은 가야방면에서 전투한 사례가 참고가 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갈령도는 신라가 부 흥군의 남쪽 거점성인 주류성 방면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신라군에게 군량을 운송하기 위해 개 설한 루트로 보이는데, 합천(대야성)-거창-함양-팔랑티-남원-순창-정읍-고부-부안(주류성) 의 코스로 추정된다. 이와는 달리 충북 永同방면으로 보는 견해(津田左右吉, 1913, 百濟戰役地 理考, 朝鮮歷史地理 1), 노령산맥의 馬近里에서 東津江을 따라 泰仁 古阜에 이르는 코스로 보는 견해(全榮來, 1976, 앞의 글) 등이 있다. 741) 支羅城 : 본서 권28 백제본기 용삭 2년(662) 7월조에, 당나라 장군 劉仁願, 劉仁軌 등이 熊津 동쪽에서 福信의 나머지 무리를 크게 깨뜨리고 支羅城과 尹城 大山柵 沙井柵 등을 함락시켰 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통해서 본다면, 지라성을 공주 동쪽의 어느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 만 본서 권37 지리지의 細注에서 周留城과 같은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성은 백제 부흥군의 중심 거점성으로서 최후로 함락되었기 때문에 지라성을 주류성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 다. 지라성은 음운상의 변화로 보아 迭峴에 비정할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회덕현 산천조에 나오는 迭峴[在縣東十二里] 에 해당한다. 이 성은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질현성에 비정된다(심정보, 1983, 앞의 글, 쪽). 이 성은 대전 가양동 더퍼리에 서 대전 동구 추동으로 넘어가는 질티재 북쪽 산위에 위치하는데,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

246 490 郁里河,744) 崇山,745) 海濱島,746) 風達郡,747) (후략). 491 都督府748) 13縣 우이현( 夷縣).749) 는 약 800m이다. 동쪽으로는 古鳳山城과 마주하고 있으며, 멀리 白骨山城과 연결된다. 북쪽으 로는 犬頭城이 내려다 보이며, 동남쪽으로 대청호와 대전-옥천간 국도가 보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지라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류성과 동일시하여 충남 大德郡 珍岑面 대정리와 성북리 사 이의 産長산성으로 보는 견해(자헌영, 1972, 앞의 글), 대전광역시 儒城區 儒城山城 방향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4, 앞의 글), 충남 大德郡 珍岑面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29쪽), 충남 淸陽郡 정산의 鷄鳳山城으로 보는 견해(노도양, 1980, 앞의 글) 등이 있다. 742) 周留城 :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복신과 도침의 중심 거점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여러 견해가 제 기되어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 명칭에 대해서 는 본서 권42 열전 金庾信傳 中에는 豆率城으로,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원년 3월조에는 疎留 城(ソルサシ)으로, 동 12월조에는 州柔(ツヌ)로 나온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 용삭 2년(662) 7월조, 권6 문무왕 3년(663) 5월조, 권7 문무왕 11년 7월 26일조의 薛仁 貴에 대한 答書 등에 周留城의 백제 부흥군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그에 따르면,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왕족 福信이 道琛 扶餘豊과 함께 周留城에서 부흥군을 일으켰으며, 661년에 신라군이 熊 津의 唐兵을 돕기 위해 주류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였다. 663년에 羅唐聯合軍의 공격으로 白江口 의 倭船들이 무너지자, 주류성은 실망하여 결국 항복하였다. 日本書紀 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 부흥군은 주류성이 산이 험하고 계곡이 좁아 방어에는 유리하나 논밭 경작할 장소가 멀리 떨어 져 있어서 오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避城으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周留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산설(이병도, 1977, 앞의 책, 426쪽) 부안설(1934, 白江考,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연기설(申采浩, 1948, 朝鮮上古史(下), 鍾路書院) 홍성설(金正浩, 大東地志 권5 洪州 城池) 등이 대두되고 있다. 주류성은 부안 位金岩山城으로 추정되는데, 최 근에는 노중국(2003, 앞의 책, 195~196쪽)과 김영관(2005, 앞의 책, 181쪽) 등에 의해 점차 설 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8의 주 996)을 참조할 것. 743) 大山柵 : 본서 권28 백제본기 용삭 2년(662) 7월조에, 당나라 장군 劉仁願 劉仁軌 등이 熊津 동쪽에서 福信의 나머지 무리를 크게 깨뜨리고 支羅城과 尹城 大山柵 沙井柵 등을 함락시켰 다고 하였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熊州 加林郡 翰山縣(부여군 홍산면)의 백제 때 지명인 大山 縣과 같은 곳으로, 현재의 충남 扶餘郡 서쪽의 鴻山面에 해당한다. 744) 郁里河 : 현재의 漢江을 가리킨다. 한강에 대한 표기로는 본서에는 郁里河 외에 漢水 漢江이 나오고,`광개토왕릉비a에는 阿利水로 나온다. 郁里河의 郁里 는 阿利와 음이 근사하다. 原本 과 鑄字本 삼국사기 의 郁里阿 는 郁里河 의 誤刻인 듯하므로 고쳤다. 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 9월조에 의하면, 郁里河에서 큰 돌을 캐다가 槨을 만들어 父王의 뼈를 개장하 고, 강 연변을 따라 둑을 쌓되 蛇城 동쪽에서 시작하여 崇山 북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745) 崇山 : 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 9월조에 의하면, 郁里河의 강 연변을 따라 둑을 쌓되 蛇城 동쪽에서 시작하여 崇山 북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 위치는 현재의 경기도 河南市 倉隅洞 동남방의 黔丹山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93쪽). 神丘縣.750) 746) 海濱島 : 백제 仍利阿縣(화순군 화순읍)의 다른 호칭에 海濱이 있으나, 그곳은 섬이 아니므로 다 른 곳이다. 747) 風達郡 : 본서 권44 黑齒常之傳에 의하면, 그는 백제 西部 출신의 達率로서 風達郡將을 겸하였 다고 한다.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발음상으로 백제의 發羅郡과 유사하여 현재의 전 남 나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 화연구원, 714쪽), 그의 세력 기반이자 부흥군의 거점 지역인 임존성에서 거병한 것으로 보면 임존성 부근으로 봐야 할 것이다. 748) 都督府 :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 그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로서, 백제의 옛 왕도인 사비도성 에 설치한 백제고토에 대한 지배기구이다(末松保和, 1935, 百濟の故地に置かれた唐の州縣に ついて, 靑丘學叢 19 및 1965, 靑丘史草 1, 쪽). 유인원이 사비도성에 진수하여 熊津 馬韓 東明 金漣 德安의 5도독부를 두고 그 예하에 주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백제유 민들 중에서 이에 협조하는 유력자들을 선발하여 都督 刺史 縣令으로 삼아 주현을 다스리도 록 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자 留鎭唐軍의 지배 범위는 사비 성과 웅진성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영역에 그치었다. 따라서 5도독부체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 하고 663년 就利山 誓盟 이후 1도독부 7주 51현으로 편제되었다. 이것이 웅진도독부가 통치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지배 범위라 할 수 있다. 이 체제가 유지된 시기는 대략 664년에서 신라가 백 제고지를 완전히 차지하는 문무왕 11년(671)까지였다(천관우, 197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217~218쪽). 그런데 본서 지리 4 도독부 주 현조를 보면 도독부 예하의 우이현, 신구현, 매라현과 7주 중 동명주 지심주 노산주 및 분차주 관하의 군지현은 그 연혁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간단한 연혁을 기재하고 있다. 이것은 당에 의해 편제된 것이지만 그 간단한 연 혁을 기재한 지명은 백제 당시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노중국, 1995, 삼 국사기 의 백제 지리관계 기사 검토, 삼국사기 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66~168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5도독부의 위치와 성격, 그리고 조직과 지배 방식에 대해서는 千寬宇, 1979, 馬韓諸國의 位置試論, 東洋學 9 ; 이도학, 1987, 熊津都督府의 支配組織과 對日本政策, 白山學報 34 ; 방향숙, 1994,`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 李基白先生古 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일조각 등을 참조할 것. 749) 우이현( 夷縣) : 都督府 직속 13현 중에 맨 처음 나열된 것으로 보아, 백제의 옛 수도였던 사비 성(충남 부여군 부여읍)을 개칭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에 당 고종은 新羅 太宗武烈王을 夷道行軍總管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 夷는 書經 堯典篇과 後漢書 권85 東夷傳 序文 등에 나오는 것으로서, 산동반도의 萊夷를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동 쪽 방면의 九夷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말한다.

247 492 尹城縣751)은 본래 悅己이다. 邁羅縣.759) 麟德縣752)은 본래 古良夫里이다. 甘蓋縣760)은 본래 古莫夫里이다. 散昆縣753)은 본래 新村이다. 奈西縣은 본래 奈西兮이다. 754) 安遠縣 은 본래 仇尸波知이다. 得安縣761)은 본래 德近支762)이다. 賓汶縣755)은 본래 比勿756)이다. 龍山縣763)은 본래 古麻山764)이다. 493 歸化縣757)은 본래 麻斯良758)이다. 750) 神丘縣 : 부여읍 부근인 듯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에, 당 고종은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했다. 神丘 는 燕然山을 높여 말 한 것인데( 文選 권56 封燕然山銘 참조), 연연산은 외몽고 三音若顔部의 杭愛山의 옛 이름으로 서, 後漢의 車騎將軍 竇憲이 永元 원년(89)에 흉노[北單于]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에까지 출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神丘道 神丘縣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북벌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을 수식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751) 尹城縣 : 본래 백제 悅己縣이었고, 다른 기록에는 豆陵尹城 豆良尹城 豆良伊城 또는 豆串城 또는 尹城이라고도 나온다. 백제의 悅己縣은 뒤에 신라 熊州 부여군 悅城縣(충남 청양군 정산면) 이 되었다. 이 두량윤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군 定山面의 계봉산성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38쪽 ; 盧道陽, 1980, 앞의 글, 16 19쪽). 본서 권36의 주 156) 참조. 752) 麟德縣 : 麟德은 원래 唐 高宗의 네번째 年號( )로서, 扶餘隆과 金仁問 사이의 1차 화친 誓盟과 문무왕과의 2차 誓盟이 이 기간 중에 있었다. 본래 백제 古良夫里縣이었고, 뒤에 신라 熊州 任城郡 靑正縣(충남 청양군 청양읍)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62) 163) 참조. 753) 散昆縣 : 본래 백제 沙村 또는 新村縣이었고, 뒤에 신라 熊州 潔城郡 新邑縣(충남 보령시 주포 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85) 186) 참조. 754) 安遠縣 : 백제때 仇尸波知를 고친 것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755) 賓汶縣 : 본래 백제 比勿 또는 比衆縣이었고, 뒤에 신라 熊州 西林郡 庇仁縣(충남 서천군 비인 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32) 133) 참조. 756) 比勿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 賓汶縣(충남 서천군 비인면)의 본래 지명. 비물은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比衆縣의 다른 호칭으로서, 比勿 은 지명의 音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고 比衆 의 무리 衆 字는 訓을 빌어 쓴 것이다. 본서 권36의 주 132) 133) 참조. 757) 歸化縣 : 백제때 麻斯良으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沃溝邑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36의 주 267) 268) 참조. 758) 麻斯良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 歸化縣의 백제때 지명이다. 본서 권36 지 리지 신라 武州 寶城郡 代勞縣(전남 보성군 회천면)의 백제 때 지명인 馬斯良縣과 지명이 비슷 하나, 都督府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신라 全州 臨陂郡 沃溝縣(전북 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때 지명인 馬西良縣의 對譯으로 봐 야 한다. 본서 권36의 주 267) 268) 참조. 759) 邁羅縣 : 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馬韓小國 중의 하나인 萬盧國의 후세 이름으로 보아, 현재 의 충남 保寧市 藍浦面에 비정한 견해(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265쪽), ② 南 齊書 百濟傳에 전하는 백제왕 牟大의 上表文에 邁盧王이라는 爵號가 전하는데, 이를 전북 군산 시 옥구읍(옛 지명 馬西良縣) 또는 전남 보성군 회천면(옛 지명 馬斯良縣)으로 비정하는 견해(末 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 천관우, 198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고조선사 삼한사연구, 일조각, 381쪽) 등이 있다.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邁羅城이 나오는 데, 부여 인근 지역으로 여겨진다. 매라는 부여와의 접근성과 해상활동에 유리한 입지조건 등을 고려해 볼 때 현재 충남 보령 남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곳을 사씨세력의 근거지로 보는 견 해도 있다(서정석, 2002, 앞의 책, 118쪽). 760) 甘蓋縣 : 백제때 지명은 古莫夫里였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를 馬韓小國의 하나인 監奚卑 離國으로 보아, 현재의 충남 洪城郡 金馬面(舊名 大甘介面)에 비정한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571쪽), 분명치 않다. 761) 得安縣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 곳에 德安都督府 를 설치한 것이다. 득안현은 본래 백제 德近支 또는 德近郡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德殷郡(충남 논산시 은진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54) 255) 참조. 762) 德近支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德近郡(충남 논산시 은진면)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254) 255) 참조. 763) 龍山縣 : 백제때 지명은 古麻山이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武州 龍 山縣(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룡동)과 이름이 같으나, 다른 곳이다. 764) 古麻山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 龍山縣(위치 미상)의 백제때 지명이다. 增補文獻備考 에서는 藍浦縣(충남 보령시 남포면)의 백제 때 지명인 馬山 또는 그곳에 있는 九 龍山의 이름과 비교하기도 하고, 혹자는 嘉林郡 馬山縣(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또한 이를 金馬渚(전북 익산시 금마면)의 지칭으로 본 견해도 있고, 조선시대의 忠淸水軍 節度使營(보령시 오천면)을 고마水營이라고 하여, 그 곳에 비정한 견해가 있으나, 모두 분명치 않다.

248 494 東明州765) 4현 馬津縣777)은 본래 孤山이다. 熊津縣766)은 본래 熊津村767)이다. 子來縣778)은 본래 夫首只779)이다. 鹵辛縣768)은 본래 阿老谷769)이다. 解禮縣780)은 본래 皆利伊이다. 久遲縣770)은 본래 仇知이다. 古魯縣781)은 본래 古麻只782)이다. 富林縣771)은 본래 伐音村772)이다. 平夷縣783)은 본래 知留784)이다. 지심주( )773) 9현 495 산호현(珊瑚縣)785)은 본래 사호살(沙好薩)786)이다. 己汶縣774)은 본래 今勿이었다. 지심현(支 縣)775)은 본래 只 村776)이다. 765) 東明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州의 하나 이다. 동명주는 州治인 熊津縣(충남 공주시)을 포함하여 4현을 영속시켰다. 766) 熊津縣 : 당나라 都督府 東明州의 치소였던 듯하다. 웅진현은 원래 백제의 固麻城 또는 熊津城 또 는 熊津村이었고, 뒤에 신라 熊州(충남 공주시)가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03), 104), 105) 참조. 767) 熊津村 : 본서 신라 및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 熊津城(충남 공주시)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 36의 주 103) 104) 105) 참조. 768) 鹵辛縣 : 백제때 阿老谷으로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769) 阿老谷 :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전남 영암군 금정면)의 백제 때 지명인 阿 老谷縣과 이름이 같으나, 공주시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는다. 770) 久遲縣 : 본래 백제 仇知縣이고, 뒤에 신라 熊州 大麓郡 金池縣(충남 연기군 전의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19) 120) 참조. 771) 富林縣 : 백제때 伐音村으로 伐音支縣(충남 공주시 신풍면)과 같은 곳이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 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전남 영암군 금정면)의 백제 때 지명인 阿老谷縣과 이름이 같으나, 공주 시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는다. 본서 권36의 주 108) 109) 110) 참조. 772) 伐音村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伐音支縣(충남 공주시 신풍면)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108) 109), 110) 참조. 773) 지심주(支 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 州의 하나이다. 지심주는 州治인 支 縣(충남 예산군 대흥면)을 포함하여 9현을 영속시켰다. 774) 己汶縣 : 본래 백제 今勿縣이었고, 뒤에 신라 熊州 伊山郡 今武縣(충남 예산군 고덕면)이 되었 다. 본서 권36의 주 139) 140) 참조. 775) 支 縣 : 당나라 都督府 支 州의 治所로 추정된다. 지심현은 본래 백제 只 村 또는 任存城이 었고, 뒤에 신라 熊州 任城郡(충남 예산군 대흥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59) 160) 참조. 776) 只 村 :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에 나오는 馬韓의 일국인 支侵國이나, 日本書紀 권10 應 神 8년조에 인용된 百濟記 에 나오는 支侵과 같은 곳으로서, 支 州의 치소였다는 입지적 중요 성으로 보아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任存城(충남 예산군 대흥면)이 가장 유력하다. 이를 洪州(충남 홍성군 홍성읍)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별다른 근거는 없으며, 홍성읍은 신라시대 에 郡治나 縣治가 없다가 신라 말 고려 초에 새로이 지방 중심으로 대두된 곳이다. 본서 권36의 주 159) 160) 참조. 777) 馬津縣 : 본래 백제 烏山縣이었고, 뒤에 신라의 熊州 任城郡 孤山縣(충남 예산군 예산읍)이 되었 다. 다만 마진현의 본래 지명이 孤山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산은 烏山의 다른 호칭으로 쓰이 기도 한 듯하다. 또한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548) 2월조의 百濟 獨山城이나 일본서기 권19 欽明 9년(548) 4월조의 馬津城은 모두 같은 해의 같은 사건이 일어난 지명을 지칭한 것으 로서, 마진현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164) 165) 참조. 778) 子來縣 : 백제때 夫首只 또는 伐首只縣로, 뒤에 신라 熊州 城郡 唐津縣(충남 당진군 당진읍)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41) 142) 참조. 779) 夫首只 : 신라 熊州 城郡 唐津縣(충남 당진군 당진읍)의 백제 때 지명인 伐首只縣 또는 夫只郡 의 다른 호칭인 듯하다. 본서 권36의 주 141) 142) 참조. 780) 解禮縣 : 백제때 皆利伊로,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781) 古魯縣 : 백제때 古麻只로,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782) 古麻只 : 고마지를 백제 任存城(충남 예산군 대흥면)의 다른 호칭인 今州와 동일시하면서, 그에 인접한 현재 홍성군의 金馬面 이라는 이름과 비교한 견해가 있으나(鮎貝房之進, 雜攷 2 上, 44쪽), 분명치 않다.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783) 平夷縣 : 본래 백제 知留 또는 知六縣이었고, 뒤에 신라 熊州 富城郡 地育縣(충남 서산시 지곡 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02) 203) 참조. 784) 知留 : 지류는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知六縣(충남 서산군 지곡면)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202) 203) 참조. 785) 산호현(珊瑚縣) : 본래 백제 沙好薩 또는 沙尸良縣으로, 뒤에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충남 홍 성군 장곡면 광성리)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188) 189) 참조. 786) 사호살(沙好薩)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충남 홍성군 장곡면)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6의 주 188) 189) 참조.

249 496 융화현(隆化縣)787)은 본래 거사물(居斯勿)이었다. 魯山州788) 6현 789) 魯山縣 은 본래 甘勿阿이다. 790) 唐山縣 은 본래 仇知只山이다. 791) 淳遲縣 은 본래 豆尸(565)이다. 支牟縣은 본래 只馬馬知이다. 497 古四州794)는 본래 古沙夫里로서 5縣 平倭縣795)은 본래 古沙夫村796)이다. 帶山縣797)은 본래 大尸山이다. 城縣798)은 본래 骨이다. 佐贊縣799)은 본래 上杜800)이다. 淳牟縣801)은 본래 豆奈只802)이다. 烏 縣은 본래 馬知沙이다. 沙泮州803)는 본래 무시이성( )804)으로서 4현 阿錯縣792)은 본래 源村793)이다. 牟支縣805)은 본래 무시이촌( 尸伊村)806)이다. 787) 隆化縣 : 백제때 본래 지명이 居斯勿로,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全州 任實郡 靑雄縣(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옛 지명인 居斯勿縣과 같아 이곳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支 州(충남 예산군 대 흥면)와 영속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맞지 않다. 오히려 東國輿地勝覽 권20 大興縣 古跡條 에 나오는 居邊所의 옛 호칭이 居叱勿所인 것으로 보아, 이곳이 융화현으로 비정하기에 합리적 이다. 거변소가 대흥현 동쪽 21리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新陽面 일대에 해당된다. 융화현에 대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백제나 신라 때의 행정 구역명이 전하지 않는다. 788) 魯山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州의 하나 이다. 노산주는 州治인 魯山縣(전북 익산시 함라면)을 포함하여 6현을 영속시켰다. 789) 魯山縣 : 당나라 都督府 魯山州의 治所로 추정된다. 본래 백제 甘勿阿縣이고, 뒤에 신라 全州 臨 陂郡 咸悅縣(전북 익산시 함라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66) 참조. 790) 唐山縣 : 본래 백제 仇知只山縣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金溝縣(전북 김제시 금구면)이 되었다. 본 서 권36의 주 218) 219) 참조. 791) 淳遲縣 : 본래 백제 豆尸 또는 豆伊縣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杜城縣(전북 완주군 이서면)이 되었 다. 본서 권36의 주 215) 216) 참조. 792) 阿錯縣 : 옛 지명은 源村이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전하는 백제왕 牟大의 上表文에 建威將軍 八中侯 餘古에게 行寧朔將軍 阿錯王이라는 작호를 임시로 제수하였다 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阿錯에 대해서는 신안군 압해면(옛 지명 阿次山郡)으로 비정한 견 해가 있다(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곳의 아차현은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 라북도 일대이기 때문에 신안군 압해면(옛 지명 阿次山郡)으로 보기에는 거리상 맞지 않는다. 793) 源村 : 원촌이 신라 全州의 古名인 完山의 다른 호칭이라고 볼 수 있다면, 현재의 전북 전주시에 비정할 수 있다. 신라 武州 昇平郡 海邑縣(여수시)의 백제 때 지명인 猿村縣과 명칭이 같으나 거 리상 맞지 않는다. 794) 古四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州의 하나 이다. 고사주는 州治인 平倭縣(전북 정읍시 고부면)을 포함하여 5현을 영속시켰다. 795) 平倭縣 : 당나라 都督府 古四州의 治所로 추정된다. 본래 백제 古沙城, 古沙夫村, 古沙夫里郡이 었고, 뒤에 신라 全州 古阜郡(전북 정읍시 고부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35) 236) 참조. 796) 古沙夫村 : 본서 권36 및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古沙夫里郡(전북 정읍시 고부면)의 다른 호 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235) 236) 참조. 797) 帶山縣 : 본래 백제 大尸山郡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大山郡(전북 정읍시 칠보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25) 226) 참조. 798) 城縣 : 본래 백제 碧骨縣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金堤郡(전북 김제시)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71) 272) 참조. 799) 佐贊縣 : 본래 백제 上杜 또는 上柒縣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古阜郡 尙質縣(전북 고창군 흥덕면) 이 되었다. 800) 上杜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上柒縣(전북 고창군 흥덕면)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 36의 주 243) 참조. 801) 淳牟縣 : 본래 백제 豆奈只 또는 豆乃山縣이었고, 뒤에 신라 全州 金堤郡 萬頃縣(전북 김제시 만 경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273) 274) 참조. 802) 豆奈只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豆乃山縣(전북 김제시 만경면)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273) 274) 참조. 803) 沙泮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州의 하나 이다. 사반주는 州治인 牟支縣(전북 영광군 영광읍)을 포함하여 4현을 영속시켰다. 804) 무시이성( 尸伊城) : 中宗壬申刊本 삼국사기 와 三國史節要 에는 로 되어 있으나, 이는 號 의 略字가 아니라, 武 의 古字인 (무) 를 잘못 판각한 것이다. 무시이성은 본서 권36 지 리지에 나오는 백제 武尸伊郡(전북 영광군 영광읍)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377) 378) 참조.

250 498 無割縣807)은 본래 毛良夫里이다. 半那縣817)은 본래 半奈夫里이다. 佐魯縣808)은 본래 上老이다. 竹軍縣818)은 본래 두힐(豆 )이다. 多支縣809)은 본래 夫只이다. 布賢縣819)은 본래 巴老彌820)이다. 帶方州810)는 본래 竹軍城811)으로서 6현 分嵯州821)는 본래 波知城822)으로서 4현 至留縣812)은 본래 知留이다. 貴旦縣823)은 본래 仇斯珍兮824)이다. 499 軍那縣813)은 본래 屈奈814)이다. 徒山縣815)은 본래 抽山816)이다. 805) 牟支縣 : 당나라 都督府 沙泮州의 治所로 추정된다. 모지현은 본래 백제 尸伊城, 尸伊村 또 는 武尸伊郡이었고, 뒤에 신라 武州 武靈郡(전북 영광군 영광읍)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377) 378) 참조. 806) 무시이촌( 尸伊村) : 中宗壬申刊本 삼국사기 와 三國史節要 의 는 武 의 古字인 (무) 를 잘못 판각한 것이다. 무시이촌은 尸伊城과 마찬가지로, 본서 권36 지리지 武州條에 나 오는 백제 武尸伊郡(영광군 영광읍)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377) 378) 참조. 807) 無割縣 : 본래 백제 毛良夫里縣이고, 뒤에 신라 武州 武靈郡 高敞縣(전북 고창군 고창읍)이 되었 다. 본서 권36의 주 381) 382) 참조. 808) 佐魯縣 : 본래 백제 上老縣이고, 뒤에 신라 武州 武靈郡 長沙縣(전북 고창군 상하면)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380) 참조. 809) 多支縣 : 본래 지명은 夫只였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신라 武州 務安郡 多岐縣(전남 나주시 문평면)의 백제 때 지명이 多只縣이었는데, 거리상 맞지 않는다. 810) 帶方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州의 하나 이다. 대방주는 州治인 竹軍縣(전남 나주시 다시면)을 포함하여 6현을 영속시켰다. 811) 竹軍城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신라 武州 錦山郡 會津縣(전남 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인 豆 縣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416) 참조. 812) 至留縣 : 본래의 지명은 知留였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 본명인 知留는 都督府 支 州 平 夷縣(충남 서산시 지곡면)의 본래 지명과 같으나, 거리상 맞지 않는다. 813) 軍那縣 : 본래 백제 屈奈 또는 屈乃縣이었고, 뒤에 신라 武州 務安郡 咸豊縣(전남 함평군 함평 읍)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436) 437) 참조. 814) 屈奈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屈乃縣(전남 함평군 함평읍)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 36의 주 436) 437) 참조. 815) 徒山縣 : 본래 백제때 지명은 抽山이었다. 徒山縣은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武州 牢山郡의 백제 때 지명인 徒山縣(전남 진도군 군내면)과 지명이 같다. 增補文獻備考 에서는 음운 비교를 통해 이를 진도 방면으로 보았고, 이를 추종한 견해도 있다(末松保和, 1935, 百濟の故地に置かれた 唐の州縣について, 靑丘學叢 19). 본서 권36의 주 445) 446) 참조. 816) 抽山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徒山縣(전남 진도군 군내면)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 36의 주 445) 446) 참조. 817) 半那縣 : 본래 백제 半奈夫里縣이고, 뒤에 신라 武州 潘南郡(전남 나주시 반남면)이 되었다. 본 서 권36의 주 362) 363) 참조. 818) 竹軍縣 : 당나라 都督府 帶方州의 治所로 추정된다. 죽군현은 본래 백제 豆 縣이고, 뒤에 신라 武州 錦山郡 會津縣(전남 나주시 다시면)이 되었다. 죽군현을 高興郡 豆原面에 비정한 견해도 있 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572쪽), 이는 잘못이다. 죽군현의 본래 지명인 豆 縣은 현재의 나 주시 다시면과 고흥군 두원면의 두 군데 있는데, 대방주 6현의 지역이 모두 나주 함평 방면이 므로, 여기서의 두힐은 그에 가까운 나주시 다시면의 두힐로 봐야 한다. 본서 권36의 주 415) 416) 참조. 819) 布賢縣 : 본래 백제 巴老彌 또는 發羅郡으로서, 뒤에 신라 武州 錦山郡(전남 나주시)이 되었다. 본서 권36의 주 413) 414) 참조. 820) 巴老彌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發羅郡(전남 나주시)의 다른 호칭이다. 본서 권36의 주 413) 414) 참조. 821) 分嵯州 :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都督府(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소속된 7州의 하나 이다. 분차주는 州治인 軍支縣(전남 담양군 금성면)을 포함하여 4현을 영속시켰다. 이 분차주를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分嵯郡(전남 순천시 낙안면)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으나, 당 나라가 고친 지명이 아니라 본명인 波知城과 음운 비교를 하는 것이 마땅하며, 분차군의 위치는 담양 장성 방면과는 거리상 맞지 않는다. 822) 波知城 :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栗支縣(전남 담양군 금성면)의 다른 호칭으로서, 波 知 는 지명의 音을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고 栗支 의 밤 栗 字는 訓을 빌어 쓴 것이다. 또한 뒤에 나오는 軍支縣의 본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파지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23) 貴旦縣 : 본래 백제 丘斯珍兮縣이고, 뒤에 신라 武州 岬城郡 珍原縣(전남 장성군 진원면)이 되었 다. 본서 권36의 주 372) 373) 참조. 824) 仇斯珍兮 : 仇 斯珍兮는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丘 斯珍兮縣(전남 장성군 진원면)의 다른 借字에 의한 표기이다. 본서 권36의 주 372) 373) 참조.

251 500 首原縣825)은 본래 買省坪이다. 501 것으로서 非常의 관등이었다. 고서현(皐西縣)826)은 본래 秋子兮이다. 軍支縣827) 권40 雜志 9 職官 下 권38 雜志 7 職官 上 武官 9誓幢830)은, 첫째는 綠衿誓幢831)이다. 진평왕 5년(583)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832) 다만 大角干828)<*혹은 大舒發翰이라고도 하였다.>은 태종왕 7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공 로를 논의하여 대장군 김유신에게 대각간을 수여하였다.829) 앞의 17관등 위에 이를 더한 825) 首原縣 : 본래 백제때 買省坪으로,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826) 고서현(皐西縣) : 본래 백제 秋子兮郡이고, 뒤에 신라 武州 秋成郡(전남 담양군 담양읍)이 되었 다. 본서 권36의 주 353) 354) 참조. 827) 軍支縣 당나라 都督府 分嵯州의 治所로 추정된다. 군지현은 본래 백제 波知城 또는 栗支縣이었 고, 뒤에 신라 武州 秋成郡 栗原縣(전남 담양군 금성면)이 되었다. 東國輿地勝覽 권39 潭陽都 護府 古跡條에 金城山古城이 나오는데, 군지 와도 음운 비교가 가능하다. 다만, 軍那縣의 古名 이 屈奈이듯이 軍支縣의 古名은 屈支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이를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武州 祁陽縣(전남 담양군 창평면)의 백제 때 지명인 屈支縣과 같은 곳으로 본 견해도 있다(末松保和, 1935, 百濟の故地に置かれた唐の州縣について, 靑丘學叢 19). 본서 권36의 주 358) 359) 참조. 828) 大角干 : 신라 17관등체계를 넘어서 있는 非常位의 특별한 관등. 角干에서 분화하여 격상된 것 으로 大角 大一伐干으로도 표기되었다. 신라는 법흥왕대에 17관등제를 완성하였는데, 이후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고, 고구려 백제와 대규모의 전쟁을 되풀이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위 귀 족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공을 세우게 되자 이들을 예우해 주기 위해서 대각간이라는 비상위의 특별 관등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대각간이 만들어지게 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561년에 세워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에 나오는 屈 智 大一伐干이 보이고, 이 屈 智는 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에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 比台角 耽知 未珍夫阿 等 八將軍 이라 한 기사에 나오는 仇珍 大角 과 동일 인물이라 할 수 있다. 辛未年은 진흥왕 12년 (551)이므로 대각간은 늦어도 551년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석문상에 서의 대각간은 혜공왕 7년(771)에 완성된`聖德大王神鐘銘a에 檢校使兵部令兼殿中令司馭府令 修城府令監四天王寺府令兼檢校眞智大王寺使上相大角干臣金邕 이라 한 기사에서 그 존재를 확 인할 수 있다. 829) 태종왕 7년(660)에 김유신에게 대각간을 수여하였다 :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660)조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전공을 세운 신료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한 기록이 나온다. 그 러나 이 기록에는 김유신에게 대각간을 수여하였다는 기사는 없다. 830) 9誓幢 : 통일 이후 왕도에 배치된 9개의 부대로, 부대의 칭호에 誓幢 이 붙어 있는 것이 공통이 다. 誓幢 의 의미에 대해 號令을 받은 군대 즉 王에 직속하는 군대 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349쪽), 新幢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4,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35쪽) 등이 있다. 9서당의 군관은 將軍-大官大監-隊大監(領步 兵 領騎兵)-弟監-監舍知-少監(領步兵 領騎兵)-火尺(領步兵 領騎兵)으로 이루어졌는데, 소 속 군관의 기능에서 미루어 볼 때 보병부대와 기병부대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 하에 軍師幢 大匠尺幢 步騎幢 著衿騎幢 黑衣長槍末步幢 등이 지원부대로 배치되어 있었 다. 9서당은 옷깃색깔[衿色]에 의하여 구별되는 획일적인 부대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획일성은 통일 이전의 귀족적 전통을 극복하고 국왕에 직속된 부대였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9서당은 통일 후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군사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李基白 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 1(고대편), 일조각, 342쪽). 이 9서당은 新羅民으로 구성된 것이 3 개, 高句麗民으로 구성된 것이 1개, 百濟民으로 구성된 것이 2개, 報德城民으로 구성된 것이 2 개, 靺鞨民으로 구성된 것이 1개이다. 나라별로 부대 편성이 엄격히 지켜졌는데, 신라인 부대는 군관과 병졸이 모두 신라인으로 편성되었고, 이국인 부대는 군관과 병졸이 모두 해당 국인으로 편성되었지만 복수의 군관 가운데 신라출신의 군관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국인 병 졸들은 대개 삼국 통일과정에서 획득한 포로들과 투항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 부대의 병 졸이 신라인을 비롯하여 高句麗民 百濟民 報德國民 靺鞨民으로 구성된 것에서 볼 때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유민에 대한 화합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부대로 볼 수 있다. 서당이 라는 군부대가 처음 설치된 것은 진평왕 5년(583)인데, 誓幢은 진평왕 35년(613)에 종래의 誓 幢을 綠衿서당으로 개칭한 것에서 시작되며, 효소왕 2년(693)에 長槍幢을 緋衿서당으로 개칭하 면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9서당이 대부분 이국인 포로들로 편성되어 있어서 자연적인 결원을 충 원하지 못하여 점차 축소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831) 綠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라인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진평왕 35년(613)에 종래의 誓幢을 개 칭하여 만든 것으로 옷깃색깔[衿色]이 綠衿이기 때문에 녹금서당이라고 불렀다. 832) 진평왕 5년(583)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년조에는 녹금서당 설

252 誓幢833)이라 하였다가, 35년(613)에 녹금서당으로 고쳤다.834) 衿835)의 색깔은 綠紫였다. 둘 靺鞨國사람844)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衿의 색깔은 黑赤이었다. 일곱째는 碧衿誓幢845)이 째는 紫衿誓幢836)이다. 진평왕 47년(625)에 처음으로 郞幢837)을 설치하였다가838) 문무왕 다. 신문왕 6년(686)에 報德城사람846)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衿의 색깔은 碧黃이었다. 여 17년(677)에 자금서당으로 고쳤다. 衿의 색깔은 紫綠이었다. 셋째는 白衿誓幢839)이다. 문 덟째는 赤衿誓幢847)이었다. 신문왕 6년(686)에 또 보덕성사람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衿의 무왕 12년(672)에 百濟사람으로 幢을 만들었는데, 衿의 색깔은 白靑이었다. 넷째는 緋衿 색깔은 赤黑이었다. 아홉째는 靑衿誓幢848)이다. 신문왕 7년(687)에 백제의 잔여민(百濟殘 誓幢840)이었다. 문무왕 12년(672)에 처음으로 長槍幢841)을 설치하였다가 孝昭王 2년(693) 民)849)으로 幢을 만들었는데, 衿의 색깔은 靑白이었다. 에 비금서당으로 고쳤다. 다섯째는 黃衿誓幢842)이다. 신문왕 3년(683)에 高句麗사람으로 幢을 만들었는데, 衿의 색깔은 黃赤이다. 여섯째는 黑衿誓幢843)이다. 신문왕 3년(682)에 치의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833) 誓幢 : 진평왕 5년(583)에 설치한 군부대의 명칭으로 진평왕 35년에 녹금서당으로 개칭되었다. 834) 35년(613)에 녹금서당으로 고쳤다 : 이 기사에 따르면 종래의 서당이 진평왕 35년에 와서 녹금 서당으로 개칭되었으므로 이때부터 서당은 없어진 셈이다. 그러나 誓幢摠管에 임명된 사례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조에 眞福이, 그리고 문무왕 8년(668)조에는 波珍 宜福 과 阿 天光이 있으며, 誓幢幢主 金遁山은 고구려 평양성 전투에서 공로를 세워 沙 으로 승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진평왕 5년(583)에 설치된 서당은 문무왕 8년(668)까지는 그 냥 서당으로 불리웠으며, 서당이 녹금서당으로 개칭된 것은 白衿誓幢이 설치된 문무왕 12년 (672)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562쪽). 835) 衿 : 새의 무늬를 짜서 장수와 군사의 옷에 붙혀 부대를 구별하는데 사용한 휘장으로 오늘날의 부대 徽章이나 부대 마크에 해당된다. 836) 紫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라인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문무왕 17년(677)에 종래의 낭당을 자 금서당으로 고쳤는데, 금색은 紫衿이었다. 837) 郞幢 : 진평왕 47년(625)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이 낭당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 (661) 7월조에 以金庾信爲大將軍 義光爲郞幢摠管 이라는 기록에 나온다. 838) 郞幢을 설치하였다가 : 본서 권4 진평왕 47년조에는 낭당 설치 기사가 없다. 839) 白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문무왕 12년(672)에 백제 유민으로 편성하였다. 금색은 白衿이었다. 840) 緋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라인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효소왕 2년(693)에 종래의 長槍幢을 개편하여 만들었다. 841) 長槍幢 : 문무왕 12년(672)에 만들어진 군부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장창을 주무기로 하는 부대로 보인다. 본서 권43 열전 김유신전 下에는 이 장창당이 對唐전쟁에 참여한 것이 보인다. 842) 黃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문왕 3년(683)에 고구려유민으로 편성하여 만든 부대이다. 금색 은 黃衿이었다. 843) 黑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문왕 3년(683)에 靺鞨國사람으로 편성한 부대이다. 금색은 黑衿 外官 백제인의 관등(百濟人位) 문무왕 13년(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서울과 지방의 벼 이었다. 844) 靺鞨國사람 :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으로서 신라의 對唐전쟁이 끝난 뒤에 신라에 복속 한 족속을 말한다. 한편 문무왕 15년(675)에 買肖城과 七重城 싸움에서 말갈족 출신의 李謹行이 唐軍의 安東鎭撫使로서 참전하였는데, 이들은 唐軍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던 말갈족이 이 전쟁에 서 패배하여 신라의 포로로 된 자들이거나 잔류한 자들이 아닐까 추론하는 견해(末松保和, 1954, 앞의 책, 355쪽)도 있다. 845) 碧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문왕 6년(686) 보덕성사람들로 편성한 부대이다. 衿의 색깔은 碧 黃이었다. 846) 報德城사람 :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大兄 劍牟岑은 고구려 잔민들을 수습하여 남하하다가 고구려 왕족 安勝을 맞아들여 왕을 삼고 신라에 來降하였다. 신라는 對唐전쟁의 일 환으로 안승을 金馬渚에 안치하고 報德國王으로 삼았다. 그 후 신문왕 3년에 안승을 서울로 불 러 올려 蘇判의 관등을 주어 보덕국을 없애자, 신문왕 4년(684)에 안승의 족자 大文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평정되고 보덕성사람들은 남원으로 옮겨졌다. 대문의 반란이 일어난 후 2년 뒤에 만들어진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에 편입된 보덕성사람들은 이때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 유민인 보덕국사람들을 말한다. 안승이 보덕국왕으로 나오는 것은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20년조에 보인다. 847) 赤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문왕 6년(686)에 보덕성사람들로 편성하였다. 衿의 색깔은 赤黑 이었다. 848) 靑衿誓幢 : 9서당의 하나로 신문왕 7년(687)에 백제 유민들로 편성하였다. 衿의 색깔은 靑白이 었다. 849) 백제의 잔여민(百濟殘民) : 백제가 멸망한 후 福信과 道琛 등이 부흥군을 일으켜 나당군에 저항 하였다. 이 부흥군이 궤멸된 후에는 의자왕의 아들인 夫餘隆이 당의 후원을 받아 웅진도독이 되 어 백제유민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부여융은 신라의 압력에 의해 유민들을 제대로 관장하지 못하고 당에 들어가고 말았으며, 신라는 마침내 백제의 전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본 기사의 百濟殘民들은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있을 당시의 백제유민들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53 504 슬을 주었다.850) 그 관등의 序次는 본국에서의 벼슬에 견주었다. 京官인 大奈麻851)는 본국 의 達率이고, 奈麻852)는 본국의 恩率이며, 大舍853)는 본국의 德率이다. 舍知854)는 본국의 率이고, 幢855)은 본국의 奈率이며, 大烏856)는 본국의 將德이었다. 外官인 貴干857)은 본국 의 達率이고, 選干858)은 본국의 恩率이며, 上干859)은 본국의 德率이었다. 干860)은 본국의 505 率이고, 一伐861)은 본국의 奈率이며, 一尺862)은 본국의 將德이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되고 기록이 애매하기 때문에 상세히 다 알 수 없었 다. 지금 다만 古記 및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으로서 [직관]志를 만들었다. (중략) 863) 에 이르기를, 北史 백제의 관등은 16品이 있었다. 左平864)은 5명865)으로 1품이고, 達率866)은 30명867)으로 2품 850) 문무왕 13년(673)에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주었다 : 문무왕 13년은 신라가 百濟故地를 점 령하고 있던 唐軍과 당군의 보호하에서 웅진도독으로 활약하고 있던 扶餘隆의 세력을 몰아내고 백제 故地 전역을 다 차지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백제유민들에게 본국에서의 지위를 고 려하여 신라 관등을 수여한 것은 이들에 대한 회유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851) 大奈麻 : 신라 17관등 중의 10번째 관등으로 大奈(乃)末 혹은 韓奈麻라고도 하였다. 대나마는 5 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重大奈麻에서 9重大奈麻까지의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852) 奈麻 : 신라 17관등 중의 11번째 관등으로 奈(乃)末, 那末이라고도 하였다. 나마와 대나마의 복 색은 푸른색이었고, 나마에는 重奈麻에서 7重奈麻까지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마의 표기는 奈麻-奈(乃)末-奈麻-奈(乃)末의 순서로 시기에 따라 표기가 변천되었다(權悳永, 1991, 國史館論叢 21, 36 49쪽). 853) 大舍 : 신라 17관등 중의 12번째 관등으로 大舍帝, 大舍第, 韓舍라고도 하였다. 이 관등은 4두품 이 승진할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대사 이하의 복색은 黃色이었다. 854) 舍知 : 신라 17관등 중의 13번째 관등으로 小舍라고도 한다. 한편`蔚珍鳳坪新羅碑a에는 小舍帝 智로,`永川菁堤碑丙辰銘a에는 小舍第로,`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와`南山新城碑a에는 小舍로 표기되어 있다. 이 小舍의 舍 의 훈은 마을 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小舍 大舍 奈麻 大奈 麻를 말(Mar) 系 관등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三池賢一, 1971, 新羅官位制度 下 駒澤史 學, 19 21쪽). 855) 幢 : 幢은 관직으로 뿐만 아니라 관등으로도 사용되기도 하고, 軍部隊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 다. 여기서는 경위 14번째인 吉次가 幢이라는 이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라의 외위제 정비와 전개과정에 대한 최근 연구로는 하일식, 2006, 신라 집권관료제 연구, 혜안, 209~219쪽을 참조할 것. 856) 大烏 : 신라 17관등 중의 15번째 관등으로 大烏第, 大烏知(之)라고도 하였다. 857) 貴干 : 지방민에게만 주어지던 신라 外位 11관등 중의 제4관등이다. 진지왕 3년(578)에 세워진 `戊戌塢作碑a, 진평왕 13년의`南山新城碑a, 그리고 日本書紀 권29 天武 2년 윤 6월조 등에 貴干의 사용례가 보인다. 858) 選干 : 신라 외위의 제5등급으로 撰干이라고도 한다. 이 선간은 借訓表記로 보이는데, 뽑힌 干 의 뜻을 가졌다(徐毅植, 1994, 新羅上代 干 層의 形成 分化와 重位制, 서울대대학원 박사학 위논문, 51쪽). 859) 上干 : 신라 외위의 제6등급으로 중앙의 제12관등인 大舍에 비견된다. 860) 干 : 신라 외위의 제7등급이다.`蔚珍鳳坪新羅碑a에는 나오는 下干支 는 上干 에 대응되므로 干은 下干 이 축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干은 翰 韓 邯 등으로도 표기되며, 족장 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干 이상의 외위는 모두 족장으로서의 干을 分化 格上시켜 만든 것 이라 할 수 있다. 861) 一伐 : 신라 외위의 제8등급으로`울진봉평신라비a에 그 존재가 보인다. 862) 一尺 : 一伐[외위 8위]과 彼日[외위 10위] 사이에 있는 신라 외위 제9등급으로 15번째인 大烏[경 위 15위]에 준하는 관등이다. 본서 권40 직관 하 외관 외위조에는 一尺視大烏 가 빠져 있으나 본 기사에는 一尺이 들어있다. 이러한 차이는 계통이 다른 사료에 근거하여 서술하였기 때문으 로 생각된다. 863) 北史 : 중국의 正史 25史의 하나. 北魏 北齊 北周 隋나라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 다. 唐나라 李延壽가 편찬하였는데, 총 100권이다. 864) 左平 : 백제의 16관등제에서 제1관등으로 通典 권185 변방 1 동이 상 백제조에는 左率 로 나 온다. 여기서 좌평의 별칭인 左率을 통해 좌평이 솔계 관등에서 분화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좌평이란 명칭이 周禮 夏官 司馬의 임무인 掌邦政 以佐王 平邦國 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보고 그 기원을 사비시대 주례주의적 정치이념의 채용과 관련시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기동, 1990, 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報 69). 고이왕대에 초기에 군국 정사를 관장하였던 좌 우보를 개편하여 만들었다. 貴族會議體=諸率會議體의 의장의 기능을 하 였다. 사비시대에 와서 6좌평으로 분화되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4의 주 235)를 참조할 것. 865) 5명 :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과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 나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6명의 좌평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좌평의 정원이 5명에서 6명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사비시대 전기의 좌평은 정원이 5명이었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상좌평에서 분화된 태(대)좌평과 상 중 하의 3좌평(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4년), 그 리고 일반 좌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대)좌평은 유력한 대성귀족 출신의 훈신에게 임명된 비상위의 최고 관등이었고, 상 중 하의 3좌평은 귀족회의의 핵심 구성원인 동시에 합의방식 에 의한 정책 심의 의결권을 행사하였으며, 일반 좌평은 사안에 따라 특정 업무를 관장하는 1품

254 506 이다. 恩率868)은 3품이고, 德率869)은 4품이며, 507 率870)은 5품이고, 奈率871)은 6품872)이다. 將 품이다. 文督878)은 12품이고, 武督879)은 13품이다. 佐軍880)은 14품이고, 振武881)는 15품이 德873)은 7품이고, 施德874)은 8품이며, 固德875)은 9품이고, 季德876)은 10품이며, 對德877)은 11 며, 剋虞882)는 16품이다.883) 은솔 이하의 관등에는 정해진 인원이 없다.884) 각각 部司885)를 의 신분이었다. 한편 사비시대 후기에 이르면 좌평제는 중국의 6전체제를 바탕으로 개편되기에 이른다. 무왕 30년대 전후로 한 시기에는 정무를 직능적으로 분담하는 6좌평제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정비를 보게 되었다. 이때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집정관인 대좌평과 좌평신분을 대표하는 상좌평은 재상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관료적 성격의 6좌평은 정무를 여섯으로 분담하 여 국가 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정책 심의의결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黑 田達也, 1985, 百濟中央官制につぃての一試論 -その源流をめぐって-, 社會科 學硏究 10 ; 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 양기석, 1997, 백제 사비시대의 좌평제연구, 충 북사학 9 ; 문동석, 2001, 4세기 백제의 지배체제와 좌평, 역사와 현실 42) 등을 참조할 것. 866) 達率 : 백제 16관등 제2관등. 수서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大率로도 표기되었다. 銀으로 만든 꽃으로 冠을 장식하였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달솔의 정원은 30명이며, 달솔 관등의 소지자는 方의 장관인 方領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백제 관등에서 정원이 정해져 있는 것은 좌평과 달솔뿐이고, 다른 관등은 정원이 없다. 따라서 6명의 좌평과 30명의 달솔 관등은 백제의 최고의 귀족들이 가지는 관등이라고 할 수 있다. 867) 30명 :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도 달솔의 정원이 30명으로 나온다. 868) 恩率 : 백제 16관등 중 제3관등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銀花로 冠을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23년 하4월조에 백제의 관등명이 본격적 으로 등장하는데, 恩率 彌騰利 가 그 첫 기사이다. 869) 德率 : 백제 16관등 중 제4관등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銀花로 冠을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870) 率 : 백제 16관등 중 제5관등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銀花로 冠을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871) 奈率 : 백제 16관등 중 제6관등이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銀花로 冠을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872) 6품 : 北史 권98 열전 백제전에는 나솔은 6품 바로 다음에 已上冠飾銀花 가 있는데 여기서 는 생략되었다. 873) 將德 : 백제 16관등 중 제7관등으로 德系 관등의 하나이다. 874) 施德 : 백제 16관등 중 제8관등으로 德系 관등의 하나이다. 875) 固德 : 백제 16관등 중 제9관등으로 德系 관등의 하나이다. 876) 季德 : 백제 16관등 중 제10관등으로 德系 관등의 하나이다. 877) 對德 : 백제 16관등 중 제11관등으로 德系 관등의 하나이다. 878) 文督 : 백제 16관등 중 제12관등으로 督系 관등의 하나이다. 879) 武督 : 백제 16관등 중 제13관등으로 督系 관등의 하나이다. 880) 佐軍 : 백제 16관등 중 제14관등이다. 881) 振武 : 백제 16관등 중 제15관등이다. 882) 剋虞 : 백제 16관등 중 제16관등이다. 883) 左平은 16품이다 : 동일한 내용이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과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조에도 나온다. 16관등의 구성을 보면 좌평과 率系 5관등, 德系 5관등, 督系 2관등, 좌군 진무 극우라고 하는 3개의 무관계 관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좌평은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의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좌평과 달솔만이 각각 6명 30명으로 정원이 정해져 있는 것은 이들 이 최고귀족회의체를 형성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將德 이하 대덕까지의 5관등은 德 계통 관등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대덕은 德 계통 관등이면서도 띠의 색깔은 文督과 같은 것으로 나오므로 다른 德系 관등과는 구별된다. 문독과 무독은 督 계통 관등이며, 명칭 에서 미루어 볼 때 문무를 나타내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帶色에서 문독은 한 등급 높은 대덕과 같은 黃帶를 띠는 반면에 무독은 그보다 등급이 낮은 좌군 진무 극우와 더불어 白帶를 띠고 있다. 이는 대덕 이상의 관등은 文的인 성격이 강하므로 문독의 색을 대덕과 같은 것으로 하고, 무독은 武的인 성격이 강하므로 역시 무적 성격의 관등인 좌군 등과 같은 색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좌군 진무 극우는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군사적 성격의 관등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본래 백제국이 馬韓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할 당시에 수장 아래에 두어졌던 관제였 는데, 관등제가 정비되면서 하위의 관등으로 재편제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16관등의 성립시기 에 대해 본 기사는 고이왕 27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지 동이전에서 미루어 볼 때 3세기 중엽경의 고이왕대에 백제가 16관등제라는 정연한 관등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3단계의 성립 과정설을 주장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이왕대에는 좌평 솔계 덕계와 같은 관등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근초고왕대에 率이 5개로 분화되고 德도 5개로 분화되면서 일원적인 관등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사비시대에 와서 16관등 제라는 정연한 체계가 정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8, 앞의 책, 쪽 및 1995, 백제의 정치 경제와 사회,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65~168쪽 ; 2003, 삼국의 관등제, 강좌 한국고대사 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22~130쪽). 3단계 성 립설에 대한 다른 견해로는 박현숙, 2005, 백제의 중앙과 지방, 주류성, 122~125쪽과 김영 심, 1998, 백제 관등제의 성립과 운영, 국사관논총 82, 105~110쪽 및 2007, 백제 중앙지 배조직, 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37~43쪽을 참조할 것.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4의 주 257)을 참조할 것.

255 508 두어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맡았다. 內官886)으로는 前內部,887) 穀內部,888) 內 部,889) 外 509 部,890) 馬部,891) 刀部,892) 功德部,893) 藥部,894) 木部,895) 法部,896) 後宮部897)가 있다. 外官898)으 로는 司軍部,899) 司徒部,900) 司空部,901) 司寇部,902) 點口部,903) 外舍部,904) 綢部,905) 日官部,906) 884) 은솔 이하의 관등에는 정해진 인원이 없다 :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 다. 885) 部司 : 백제에서 관청을 지칭하는 말이다. 部司를 部 와 司 로 나누어 보는 견해도 있으나(노 중국, 1988, 앞의 책, 227~228쪽), 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청을 나타내는 일반 적인 용어로 생각된다. 22부제에 관한 기사는 주서 권49 열전 41 이역 상 백제, 북사 권94 열전 82 백제, 한원 권30 번이부 백제 소인 括地志 에 전하고 있는데,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주서 에는 22부, 북사 에는 20부, 한원 에는 18부명이 기록되어 있고 또 편찬 시기도 6세기 중후반~7세기 전반의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차이가 있다. 22부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동성왕 말년설(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47쪽), 무령왕 21년 이후설(김주 성, 1990,`사비시대백제정치사연구a, 전남대박사학위논문, 62쪽), 성왕대설(양기석, 1991, 백 제 성왕대의 정치개혁과 그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4, 89~92쪽), 위덕왕대설(鬼頭淸明, 1978, 日本律令官制の成立と百濟の官制, 日本古代の社會と經濟 上, 吉川弘文館, 198~199 쪽 ; 黑田達也, 1985, 百濟中央官制につぃての一試論 -その源流をめぐって-, 社會科 學硏 究 10, 30~39쪽)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성왕대에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육후가 백제에서 활동한 541~552년경에 실시된 것으로 보는 견해(조경철, 2000, 백제 성왕대 유불정치이념 -육후와 겸익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5, 13~14쪽)도 이 견해를 보강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성왕대에 일시적으로 확립되었다기보다는 신라의 경우처럼 단계적으로 증치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성왕대에 22부를 설치한 의도는 최고의 귀족회의체인 좌 평회의를 약화시키고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22 부제는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의 수(12개)가 외관(10개)보다 많고, 그 長吏는 3년마다 교체 되는 등 성왕의 국정 장악을 뒷받침하려는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 고 22부의 각 부서별 직능에 대해서는 명기가 없어 알 수 없지만 그 명칭으로 미루어 그 직능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정리한 것은 김영심, 2007, 백제 중앙지배조 직, 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89~96 쪽을 참조할 것. 886) 內官 : 궁중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을 말한다. 887) 前內部 : 왕명 출납과 국왕 近侍의 기능을 가진 관청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전내부와 다른 내관 소속의 부서왕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전내부가 외관 10부까지 장악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주성, 1995,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개편,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89~90쪽)와 전내부를 수석관부로 보고 그에 소속된 내관 부서는 국왕의 측근 에서 왕실과 궁정업무를 나누어 맡는 세분화된 운영방식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이문기, 2005, 사비시대 백제 전내부체제의 운영과 변화, 백제연구 42 참조) 등이 있다. 이와는 달 리 전내부가 내외관을 총괄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중국 황제체제하에 서 운영되는 내조와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김영심, 2007, 앞의 글, 94 쪽). 888) 穀內部 : 명칭에서 미루어 보아 御供에 필요한 곡물의 조달과 전국에 산재한 왕실 御料地의 경 작과 관리의 업무를 관장한 관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穀部와 肉部로 나온다. 주서 권49 백제전에는 백제의 官府는 內官 12부, 外官 10부로 이루어진 22部 制라고 하고 있는데 북사 에는 內官은 11부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곡내부는 곡부와 육부를 합쳐서 곡내부로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최근에는 주서 의 내관 肉部를 內部로 보고 이 내부가 왕실을 총괄한 것으로 보는 견해(정동준, 2006, 백제 22부사 성립기의 내관 외 관, 한국고대사연구 42, 199~200쪽)가 있으나, 열거 순서로 보아 육부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889) 內 部 : 북사 권94 열전 백제전과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內掠部로 나온다. 경( )은 그 뜻이 庾 倉과 통하므로 내경부는 왕실의 內倉을 관리하는 관청이라 할 수 있다. 890) 外 部 : 북사 권94 열전 백제전과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外掠部로 나온다.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외경부는 왕실의 外倉을 관리하는 관청이라 할 수 있다. 891) 馬部 : 御馬를 관리하는 관청으로 생각된다. 892) 刀部 : 刀劍의 제작과 관리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893) 功德部 : 왕실의 願刹 등 불교관계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894) 藥部 : 왕실의 醫療 및 製藥을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895) 木部 : 왕실의 토목 건축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896) 法部 : 왕실의 儀禮관계 및 法律 관계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897) 後宮部 : 後宮과 관련되는 업무를 관장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898) 外官 : 일반 庶政을 담당한 관청을 말한다. 899) 司軍部 : 군사업무를 담당한 관청을 말한다. 周禮 에서 그 명칭을 따온 것으로 周禮 에는 司馬 로 나온다. 백제에서는 이 司馬를 司軍으로 改書한 것이다. 사마의 직장에 대해서는 주례 夏 官 司馬 疏에 司馬共掌邦政 政可以平諸侯 正天下 故曰統六師 平邦國 이라 한 기사 및 立夏官 司馬 使帥其屬 以掌邦政 以佐王 平邦國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900) 司徒部 : 교육 의례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周禮 에서 그 명칭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司 徒의 職掌에 대해서는 주례 地官 司徒에 乃立地官司徒 師帥其屬 而掌邦敎 以佐王 安擾邦國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901) 司空部 : 토목 건축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司空의 職掌의 掌邦土 屬四民 時地利 하는 것 이다. 書經 周官 및 禮記 王制편을 참조할 것. 902) 司寇部 : 형벌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周禮 에서 그 명칭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司寇의 職

256 市部907)가 있다.908) 長吏909)는 3년에 한번 교대하였다. 도성 안(都下)에는 方910)을 두고 [방 이 있어서 士와 백성들이 살았으며, 部는 군사 500명을 거느렸다. 5方에는 각각 方領913) 은] 각각 5부911)로 나누었는데, 上部 前部 中部 下部 後部라고 하였다. 部에는 5巷912) 이 1명 있는데, 달솔로 이를 삼고, 方佐914)가 [그를] 보좌하였다. 방에는 10郡915)이 있고, 掌에 대해서는 주례 秋官 司寇에 乃立秋官司寇 使帥其屬 而掌邦禁 以佐王 平邦國 이라 한 기 사를 참조할 것. 903) 點口部 :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호구파악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부여 궁남지에 서 출토된 목간에는 중구(中口) 와 소구(小口) 와 같이 사비시대 호구를 파악하는데 쓰여졌을 용어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백제에서는 연령에 의한 인구 파악 즉 호구제도가 실시 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中 小라는 어떤 기준에 의해 호구가 몇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백제 멸망시 백제의 국세를 5부 37군 200성 76만호로 언급한 기 사를 통해서도 백제가 점구부와 같은 부서를 통해 항례적으로 호구수를 파악하여 일반백성들을 일정한 수취자원으로 편성하여 활용하였음이 쉽게 짐작된다. 904) 外舍部 : 관리의 인사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905) 綢部 : 織物의 제조 및 貢物의 출납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906) 日官部 : 천문과 점술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생각된다. 북사 南本에는 日宮部로 되어 있다. 907) 市部 : 市場과 流通의 업무를 관장한 관청으로 보인다.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都市部로 나온다. 908) 外官으로는 市部가 있다 : 외관 10部 가운데 司軍部 司徒部 司空部 司寇部는 중국의 周禮 에서 나온 것이다. 그 중 司軍部는 周禮 에서는 司馬로 나온다. 백제가 이처럼 22부제의 주요 명칭을 중국의 주례 에서 따온 것을 북주(556~581)의 영향으로 이해하여 왔으나(鬼頭淸 明, 1978, 日本律令官制の成立と百濟の官制, 日本古代の社會と經濟 上, 吉川弘文館, 198~199쪽 ; 黑田達也, 1985, 百濟中央官制につぃての一試論 -その源流をめぐって-, 社 會科 學硏究 10, 32~35쪽), 주례 6관제는 중국 관제의 기본 골격이기 때문에 굳이 북주와 관련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909) 長吏 : 22部의 장관을 의미한다.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長史로, 翰苑 백제조에는 宰官 長으로 나온다. 22부의 장관 임명에 임기제를 적용함으로써 국왕의 관리임용권 행사를 통해 국 왕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2부의 장은 좌평제와 연관하여 볼 때 前內部는 內臣佐平 에, 內 部는 內頭佐平에, 司軍部는 兵官佐平에 대응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武田幸男, 1980, 六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學生社 참 조). 그러나 22부를 총괄하는 최상의 관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 관청은 좌평의 지배를 받 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국왕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10) 方 :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이 표현은 없고 대신 都下有萬家 分爲五部 와 5부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왕도의 행정구획은 方이 아니라 5부로 기록한 주서 의 기록 을 따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911) 각각 5부 :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에는 分爲五部 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본 기사는 分 을 各 으로 改書한 것이다. 5부의 명칭은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上部 前部 中部 下 部 後部로 나온다. 각 部는 다시 5巷으로 나뉘어졌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 각 部의 장의 명칭은 알 수 없지만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한원 백제조에 王所都城內 又爲五 都(部) 皆建(達)率領之 라 한 기사 참조). 이 5부는 사비도읍기에 왕도를 구획한 행정구역이었으 며, 군관구적 성격도 지녔다. 따라서 각 부에는 500명의 군사가 배속되어 수도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였다( 북사 권94 열전 백제전에 部統兵五百人 이라 한 기사 참조). 912) 5巷 : 部의 하부 단위로 그 명칭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목간자료와 명 문이 새겨진 인각와 등의 자료를 통해 사비도성에는 部-巷체제를 갖춘 5부제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1995년 부여 궁남지에서 발굴된 백제 木簡에 中部後巷 이 보이고 있어 巷의 명칭도 上 前 中 下 後巷으로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궁남지 출토 목간에 대해서는 崔孟植 金容民, 1995, 扶餘 宮南池內部 發掘調査槪報, 韓國上古史學報 20 ; 朴賢淑, 1996, 宮南池 出土 木簡과 王都 5部制, 韓國史硏究 92를 참조할 것. 913) 方領 : 中宗壬申刊本은 方鎭 이라 하였으나 북사 권94 열전 백제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5方은 전국을 다섯으로 나눈 사비시대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 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 部를 말한다. 백제 말기에 와서 方과 部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5부라고도 불리웠다. 이 部(方)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軍管區로서 6 10개의 郡을 포괄하였고, 또 小城으로 표현되는 縣들을 통속하였다. 部(方)의 장은 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는 것이 원 칙이었다. 이러한 五部의 중심 치소는 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 및 翰苑 백제조에 인용된 括地志 에 의해 方과 方城의 명칭은 中方-古沙 城, 東方-得安城, 南方-久知下城(卞城), 西方-刀先城(力先城), 北方-熊津城(固麻城)이다. 이 방 성은 대개가 험한 산에 의지하여 돌로 쌓았으며, 1, 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 다. 방령의 존재는 본서 권5 신라본기 太宗武烈王 7년조에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이라 한 기사와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조에 以十二月九日 遣攻斯羅 臣先 遣東方領物部莫哥武連 領其方軍士 攻函山城 이라 한 기사에 나온다. 백제의 5방에 대해서 는 본서 권28의 주 974)를 참조할 것. 914) 方佐 : 방의 장관인 방령을 보좌하는 관직이다. 915) 10郡 : 隋書 백제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翰苑 백제조에는 每方管郡 多者至 十 小者六七 이라 하여 방이 관할하는 군의 수가 많으면 10郡, 적으면 6 7郡임을 보여준다. 이 는 北史 및 隋書 의 내용과 차이가 난다. 郡은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의 하나로 方(部)과 城(縣)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郡은 小城으로 표현되는 몇 개의 縣들을 통속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郡制 는 사비천도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 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

257 군에 將916)이 3명 있는데, 덕솔로917) 이를 삼았으며, 군사 1,100명 이하 700명 이상을 통 恩率이며, 다음은 德率이고, 다음은 918) 고 하였다.919) 솔하였다. 은 施德이며, 다음은 固德이고, 다음은 季德이며, 다음은 對德이다. 다음은 文督이고, 다 920) 隋書 에 이르기를, 率이며, 다음은 奈率이다. 다음은 將德이고, 다음 음은 武督이며, 다음은 佐軍이다. 다음은 振武이고, 다음은 剋虞이다. 5方에는 각각 方領 921) 백제의 관등에는 16품이 있었는데, 長은 左平이라 하였다. 다음은 大率 이고, 다음은 922) 1명이 있었고, 方佐가 [이를] 보좌하였다. 방에는 10郡이 있고, 군에는 將이 있었다. 고 하였다. 復故地 에 나오는 6郡 은 성왕대의 郡制의 실시를 방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16) 군에 將 : 周書 백제전에는 郡將으로 나온다. 군의 장관이다.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郡의 군사 권도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5년조에는 군의 장관이 郡令(領)으로 나온다. 郡에는 郡將이 3명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군장의 정원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군장이 모든 군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 方에 소속된 6 7~10개의 군 중 중심 이 되는 3개의 군에만 군장이 1인씩 존재하였고 나머지는 도사가 있었다는 견해와, 각 군마다 군장 3인이 있었다는 견해(김영심, 1997, 앞의 글 참조)가 있다. 군장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군 정 민정 사법 등 고유한 업무를 분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郡將은 德率의 관등 소지 자가 맡는 것이 원칙이지만, 백제 말기에는 정원이 철폐되고 좌평 신분의 지위 하락으로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맡는 경우도 생겨났다. 黑齒常之가 달솔로서 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917) 군에 將 덕솔로 : 군장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도 德率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한원 백제조에는 郡將皆恩率爲之 라 하여 郡將에 임명될 수 있는 자의 관등이 恩率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백제에서 관직과 관등이 1 대 1의 대응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1관등-복수관등제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군장을 맡을 수 있는 相當관등은 덕솔에서 은솔까지였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한편 본서 권44 열전 흑치상지전에는 黑齒常之 本百濟人 爲達率兼風達郡將 이 라 하여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도 군장의 직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達率은 방령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인데 흑치상지가 달솔로서 군장이 되었다는 것은 백제 말기에 와서 달솔의 정원이 철폐되고 좌평 신분의 지위 하락으로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맡을 정도로 달솔 관등의 수적 증가에 따른 현 상으로 볼 수 있다. 918) 군사 1,100명 이하 700명 이상을 통솔하였다 : 본 기록만으로는 1, 명의 군대를 통할 하는 주체가 方領인지 郡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方統兵一 千二百人以下 七百人以上 으로 나오고, 翰苑 백제조에는 其諸方之城 皆憑山險爲之 亦有累石 者 其兵多者千人 小者七八百人 으로 나오고 있어 이 군대는 방령이 통할한 군대라 할 수 있다. 919) 백제의 관등은 16品이 700명 이상을 통솔하였다 : 이 내용은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920) 隋書 : 隋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正史로서 중국의 25史의 하나. 魏徵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636 년에 완성하였는데, 총 85권이다. 921) 大率 :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16년조와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및 북사 권94 열전 백 923) 에 이르기를, 唐書 백제가 설치한 內官으로, 內臣佐平924)은 왕명 출납(宣納)의 일을 맡고, 內頭佐平925)은 창 고와 재정에 관한 일을 맡았다. 內法佐平926)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을 맡고, 衛士佐平927) 은 왕궁을 지키는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朝廷佐平928)은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 930) 고 하였다. 고, 兵官佐平929)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제전에는 達率로 나온다. 922) 백제의 관등에는 군에는 將이 있었다 : 본 내용은 수서 권81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923) 唐書 :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舊唐書 와 新唐書 가 있다. 여기서는 그 내용으로 볼 때 구당서 를 가르킨다. 구당서 는 중국 五代 後晉의 劉 가 착수하여 高祖 天福 5년(940)에 張昭遠이 총 200권으로 완성하였다. 924) 內臣佐平 : 백제 6좌평의 하나로 수석좌평에 해당한다. 이 내신좌평을 上佐平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6좌평의 수석좌평으로 보는 견해와(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연구, 韓國史 論 2), 상좌평을 6좌평 위에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鍾旭, 1978, 百濟의 佐平, 震檀學報 45). 내신좌평에 임명되는 자들은 왕족이거나 왕비를 배출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 다(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925) 內頭佐平 : 백제 6좌평의 하나. 재정관계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926) 內法佐平 : 백제 6좌평의 하나. 의례 관계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927) 衛士佐平 : 백제 6좌평의 하나. 왕궁숙위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928) 朝廷佐平 ; 백제 6좌평의 하나. 형벌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929) 兵官佐平 : 백제 6좌평의 하나로 군사관계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본 기사에는 병관좌평이 지방 의 군사에 관한 업무만 관장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백제본기 전체를 종합해 보면 병관좌평은 지방의 군사뿐만 아니라 중앙의 군사에 관한 업무도 관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군사와 관련된 권한은 크게 軍政權과 軍令權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병관좌평은 주로 군정 업무를 담당하고 좌장은 군령권 행사에 깊이 관여한 것 같다. 병관좌평이 설치되면서 외병마사를 관장 함에 따라 좌장의 직능도 분화되었다. 군정권과 군령권에 대해서는 李文基, 1997, 中古期의 軍 令體系와 軍政機構, 新羅兵制史硏究, 일조각을 참조할 것. 930) 백제가 설치한 內官으로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 본 기사는 舊唐書 권199 상

258 514 이상은 중국의 역대 사서에 보인다. 左輔,931) 右輔,932) 左將,933) 上佐平,934) 北門頭935) 이상은 本國古記 에 보인다.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조에 나온다. 고 이왕 27년조 기사는 내신좌평 이하 6좌평의 설치와 그 소관업무 및 6좌평이 16관등 중 제1관등 에 해당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동 27년 3월과 28년 2월조에 6좌평에 대하 임명 기 사가 나온다. 이에 대해 이 기사 그대로를 신뢰하여 고이왕대에 6좌평과 16관등이 설치된 것으 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중국측 사서인 주서 백제전 이후 기사를 근거로 좌평제의 실시 시기와 변화 과정을 수정하여 보고 있다. 전자의 경우 고이왕 27년(260) 부터 6좌평제가 시행되었고, 상좌평 설치 이후 6좌평들이 독자적인 관부를 거느린 책임자가 되 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성왕 말년에 22관부를 설치하면서 좌평은 점차 관등화하기 시작하여 무 령왕대부터 좌평의 수적 증가와 함께 명예직화한 것으로 보았다(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및 1990, 백제 사비시대의 중앙정부조직, 백제연구 21). 그러나 구당서 권 199상 열전 백제조에는 본 기사와 동일한 내용이 나오고 있고, 3세기 중엽경의 사실을 전해주 는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전에는 백제국이 마한연맹체의 한 소국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 에 6좌평의 명칭과 職事는 정비과정을 거쳐 사비시대에 와서 정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31) 左輔 ; 백제 초기 軍國政事를 관장한 최고위 직으로서 右輔와 더불어 左 右輔制를 구성하였다. 安鼎福은 이를 후대의 宰相과 같은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安鼎福, 東史綱目 圖下 官職沿革圖 참조). 원래 좌보와 우보직은 漢代의 三輔職에서 연유한 관직이었는데, 고구려의 좌 우보, 신라 의 大輔職에서도 나타나듯이 삼국 초기에 국무와 군사 업무를 관장하던 최고의 중앙관직으로서 여기에 임명된 인물들은 왕족이거나 또는 소국을 통치한 유력한 지방 세력가였음이 밝혀지고 있 다(이종욱, 1978,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24~30쪽). 932) 右輔 : 백제 초기의 관제로 左輔와 함께 설치되었는데, 고구려에도 이 관직이 보인다. 좌 우보 에는 왕족을 비롯한 유력한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전임자가 사망한 후 후임자가 임명되었기 때 문에 그 임기는 종신제였다. 이는 국왕을 도와 군사와 행정 업무를 포함한 국정 전반을 총괄하 였다. 안정복은 고구려나 백제의 우보를 훗날의 宰相으로 파악하고 있다( 東史綱目 圖下 官職 沿革圖). 그러나 고이왕 27년(260)에 좌 우보를 개편하여 좌평을 두어 국정을 총괄케 하였다. 933) 左將 : 고이왕대에 설치한 관직으로 군대에 대한 지휘와 관련된 군령권을 관장하였다. 좌장은 최고의 지휘권을 가진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좌장의 설치로 국왕의 위상이 강화되었고 또한 백제의 군사조직인 5부병에 대한 통솔권이 강화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4의 주 216)을 참조할 것. 934) 上佐平 : 전지왕 4년(408)에 설치한 수석좌평으로 군국정사를 담당한 고려시대의 재상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25의 주 402)를 참조할 것. 935) 北門頭 : 구체적인 기능이나 성격은 알 수 없다. 515 권44 列傳 4 黑齒1)常之2)는 백제 西部 사람3)으로서, 키가 일곱 척이 넘었고 날쌔고 용감하며 지략이 1) 黑齒 :`흑치상지묘지명a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본디 왕실의 성인 부여씨였지만 흑치지역에 분봉되 었기 때문에 흑치라는 성씨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대로 달솔 관들을 역임한 가문인 것 으로 밝혀졌다. 부여씨 왕성 출신이 분지화하여 달솔 가문으로 강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흑치의 위치에 대해서는 흑치를 인체구조상의 검은 이 로 보고 흑치국이 있었다는 필리핀 방면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96,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한 무장의 비장한 생애에 대한 변 명-, 주류성, 51~52쪽). 그러나 흑치는 백제의 지명을 음사한 것으로 볼 때 흑치 즉 검은 내 는 黑壤과 통하니 이는 곧 충남 예산군 덕산 일대로 비정될 수 있다(유원재, 1999, 백제 흑치씨의 흑 치에 대한 검토, 백제문화 28, 2~5쪽). 2) 黑齒常之 : 생몰연대는 이다. 자는 恒元. 성은 부여씨. 아버지는 沙次(또는 沙子). 조부는 德顯(또는 加亥). 증조부는 文大이고 대대로 달솔의 관등을 가졌다. 아들 俊과 세 딸이 있었다. 백 제가 멸망한 후 부흥군을 일으킨 장군의 하나로 西部 출신이다.`黑齒常之墓誌銘a에 의하면 흑치 상지 가문은 본래 왕실의 姓인 扶餘氏였으나 그 조상이 黑齒 땅에 봉함을 받은 것을 계기로 黑齒氏 를 칭하게 되었으며, 대대로 達率의 관등을 역임하는 가문이었다. 키가 크고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장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에서 부흥군을 일으켜 복신 도침의 군에 호응하였으나, 663년에 당나라군에 항복하였다. 당군에 항복한 후 그는 임존성을 근거로 끝까지 저항하던 백제부 흥군의 장군 지수신을 격파하였고, 당나라에 들어가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활동 사항을 新唐 書 권110 열전 흑치상지전에 의거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60년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를 포로로 잡은 후 겁탈이 심하고 젊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자 10여인을 데리고 서부로 돌아가 임 존성에 책을 세우고 부흥군을 모으니 10일 안에 3만 명이 모여 들었다. 소정방이 이를 공격하자 결 사대를 조직하여 싸워 승리하여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이에 소정방이 백제지역의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664년에 당측의 회유에 넘어가 折衝都尉에 임명되고 웅진성에 진수하였고, 백 제의 연고지를 관장하는 이름만의 관직을 받고 있었다. 즉 672년에 忠武將軍行帶方州長史가 되었 고, 곧 使持節沙泮州諸軍事沙泮州刺史가 그것이다. 그 후 左領軍將軍 兼 熊津都督府司馬으로 직책 이 옮겨지고 浮陽郡開國公에 봉해지고 食邑 2천 호가 주어졌다. 당나라에 들어가 678년에 州道 左軍摠管이었던 裵行儉의 副將이 되어 7년간 군공을 세워 684년 중앙의 左武衛大將軍 檢校左羽林 軍에 임명되었다. 그 후 突厥과 吐蕃의 공략에 군공을 세워 燕國公에 봉하여졌고, 688년 神武道經 略大使, 懷遠軍經略大使가 되었으나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목매 죽었다. 그 의 열전은 舊唐書 권109와 新唐書 권110에 실려 있다. 흑치상지의 묘는 중국 낙양 망산에 699 년에 개장되었으며, 이 때 작성된 그의 묘지석(72 71 )이 1929년 10월에 중국 낙양시 망산에서 출토되어 그의 아들 黑齒俊의 묘지명과 함께 현재 중국 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舊唐 書 권109 열전과 新唐書 권110 열전에 입전되어 있다.`흑치상지묘지명a에 대해서는 李文基,

259 있었다. 백제의 달솔4)이 되어 風達郡5)의 郡將6)을 겸하였는데, 군장은 당나라의 刺史7)와 다.8) 그런데 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자 [흑치]상지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할 때 [黑齒]常之가 거느린 무리들과 함께 항복하였 두려워하여 左右의 우두머리(酋長)9) 10여인과 함께 달아났다. 잡혔다가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任存山10)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니, 열흘이 채 안 지나 몰려 온 사람들이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상지가] 마침 1991, 백제 黑齒常之 부자 묘지명의 검토, 한국학보 64 ; 李道學, 1991, 百濟 黑齒常之墓誌銘 의 검토, 향토문화 6, 향토문화연구회 및 1996, 앞의 책 ; 馬馳, 1997, 舊唐書 黑齒常之傳의 補闕과 考辨,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 백제연구소 편을 참조할 것. 3) 백제 西部 사람 : 이 서부에 대해서는 왕도 행정조직의 하나인 서부를 말한다. 흑치상지가 2품인 달솔 가문에 속하는 귀족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왕도에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궁 남지에서 발견된 목간에서 西部後巷 이란 기록이 참고가 된다. 따라서 흑치상지는 왕도 사비도성 의 서부 출신자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왕도의 행정구역에는 서부가 없고 또 그의 세력 근거지가 임존성(현재의 예산 대흥)이었던 점을 들어 5방 중의 하나인 서방 출신으로 보는 견 해가 있으나(이도학, 1991, 백제 흑치상지묘지명의 검토, 우리문화 34, 45쪽 ; 김영심, 1997, 6-7세기 백제의 지방통치체제 -지방관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11 참조), 받아들일 수 없다. 4) 달솔 : 백제시대의 관등. 16관등의 하나로서 2품 관등으로 정원은 30인이었다.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冠은 銀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수서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大率로도 표기되었다. 銀으로 만든 꽃으로 冠을 장식하였다. 5) 風達郡 : 현재의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다. 본서 잡지 제6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 어 있다. 그러나 발음상으로 백제의 發羅郡과 유사하여 현재의 전남 나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 나(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14쪽), 그의 세력 기반 이자 부흥군의 거점 지역인 임존성에서 거병한 것으로 보면 임존성 부근으로 봐야 할 것이다. 6) 郡將 : 군의 행정 및 군사를 담당한 장관. 본서 권40 직관지에 方 아래 郡이 있고 책임자는 將 이 라고 한 기록의 실예이다. 郡將은 당나라의 刺史와 같다고 한 점에서 군의 행정책임을 맡은 자로 이해된다. 郡의 長은 郡將(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또는 郡令(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이라 하였다. 郡에는 郡將이 3명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군장의 정원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 러 견해가 있다. 군장이 모든 군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 方에 소속된 6 7~10개의 군 중 중심이 되 는 3개의 군에만 군장이 1인씩 존재하였고 나머지는 도사가 있었다는 견해와, 각 군마다 군장 3인 이 있었다는 견해(김영심, 1997, 앞의 글 참조)가 있다. 군장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군정 민정 사법 등 고유한 업무를 분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郡將은 德率의 관등 소지자가 맡는 것 이 원칙이지만, 백제 말기에는 정원이 철폐되고 좌평 신분의 지위 하락으로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맡는 경우도 생겨났다. 黑齒常之가 달솔로서 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7) 刺史 : 당나라 때의 州의 행정을 담당한 長官. 州는 당고조의 武德 원년(618)에 수나라의 종래 郡을 州로 개칭하고 郡의 太守를 刺史로 개칭하였다. 玄宗 天寶 원년(742)에 州를 郡으로 刺史를 太守로 바꾸었다가 上元 원년(760)에 옛 제도로 복구되었다. 주에는 상 중 하 3등급으로 구분되었는데, 내 200여 성을 수복하였다. 龍朔 연간11)에 고종이 사신을 보내 항복하라고 타이르자, [이 에 상지는] 劉仁軌12)에게로 가서 항복하였다.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13) 左領軍員外將軍洋 상급 州의 刺史는 종3품직이었고 중급 주의 자사는 정4품상, 하급 주의 刺史는 정4품하의 관직이 었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44 職官志 3 및 新唐書 권49 下 百官志 4 外官 및 같은 책 권 37 지리지 1을 참조할 것. 8) 소정방이 백제를 무리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 흑치상지는 660년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였을 때 일단 당에 항복하는 대열에 합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구당서 권109 열전 흑치상지, 자치통감 권200 당기 고종 용삭 3년 9월조에는 蘇定方方克百濟 常之帥所部隨衆降 으로 나온다. 9) 左右의 우두머리(酋長) : 左右酋長 은 풍달군의 토착세력으로 여겨진다(김주성, 1990, 백제 사비 시대 정치사연구, 전남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78쪽). 10) 任存山 : 현재의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의 봉수산. 靑丘圖 에 임존 古城이 봉수산 북쪽에 표기되 어 있다. 경덕왕 때에 임존군이 설치되었으며, 임존성의 유적은 사적 제90호로 지정되었다. 舊 唐書 권84 劉仁軌傳에는 백제 부흥군의 道琛이 劉仁願의 군대를 포위하였다가 유인궤의 공격을 받자 임존성으로 물러났고, 주류성이 함락된 후에도 遲受信이 임존성에서 끝까지 항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舊唐書 권109 黑齒常之傳에는 방어시설을 하였다는 기록( 築柵而自固 )이 더 기록되어 있다. 임존성은 부흥군의 금강 북쪽 거점지역으로서 초기에는 흑치상지가 도침 복신 등과 함께 이곳에서 거병하여 사비도성의 당군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11) 龍朔 연간 : 龍朔은 당나라 고종대의 연호로 년간 사용되었다. 12) 劉仁軌 : 생몰연대는 년으로 享年 84세이다. 중국 당나라 太宗~高宗代의 장군. 자는 正則으로 卞州 尉氏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해 독학으로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그는 河南道按撫大使 임괴(任 )의 천거로 출사한 이래 당나라 태종 貞觀 15년(641)에 給事中에 임명되었다. 660년 당 고종이 백제를 공격할 때 수군을 감독 통솔하여 군량을 운송하는 일을 맡 았으나 풍랑을 맞아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 일로 李義府의 참소에 의해 靑州刺史로 좌천되 었다가 곧 실각당하고 목숨만을 모면한 채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사비성을 진수하고 있던 당군이 위험에 처하자 고종은 유인궤를 발탁하여 檢校帶方州刺史로 삼 고 왕문도를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그 후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후 檢校熊津都督으로 삼아 당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665년 8월에 유인원과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260 州刺史14)가 되어 여러 번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워 벼슬과 특별한 상을 받았다. 오 지와 함께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보벽은 혼자 진격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전군 랜 후15)에 燕然道大摠管16)이 되어, 李多祚17) 등과 함께 突厥을 쳐서 격파하였다. 左監門衛 을 상실하였다. 보벽은 옥졸 관리(獄吏)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였고, 상지도 연좌되어 18) 19) 中郞將 찬보벽( 寶璧) 이 끝까지 [돌궐을]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자 조서를 내려 상 공적이 없어지게 되었다. 마침 周興20) 등이, 그가 鷹揚將軍21) 趙懷節22)의 반란에 참여하였 다고 모함하였으므로, [그는]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교수형을 당하였다.23)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은의로 대하였다. 그가 타던 말을 병사가 매질을 하 맹세를 하도록 하고 귀국하였다. 668년에 그는 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이 되어 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薛仁貴와 함께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에 주둔하여 고구려고토를 지 배하였다. 669년 회군한 이후 670년에 농주자사에, 674년에 계림도총관이 되어 신라에, 이후 吐 藩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84 열전 34 유인궤전, 新唐書 권108 열전 33 유인궤전, 瀧川政次郞, 1984, 劉仁軌傳 上 中 下 古代文化 집 ;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0~62쪽을 참조할 것. 13) 당나라에 들어가 : 그는 孫仁師가 663년 주류성에 항거하고 있었던 부흥군을 토평하고 당에 귀국 을 할 때 부여융과 함께 입당한 것을 말한다. 14) 洋州刺史 : 沙洋州刺史의 잘못임이`흑치상지묘지명a을 통하여 밝혀졌다. 洋州는 중국 陝西省 西 鄕縣이다. 15) 오랜 후 : 舊唐書 권109 黑齒常之傳에는 이 시기가 垂拱 3년(687)으로 기록되어 있다. 16) 燕然道大摠管 : 燕然은 돌궐족이 살고 있던 지역으로 현재 중국 綬遠烏剌特旗의 서북지방이다. 대총관이란 총지휘관이라는 용어임으로 연연지방을 공격할 때의 대총관이란 뜻이고, 本道에 있을 경우에는 大都督이라고 칭하였다. 이 지역을 당나라 태종대에 정복한 후 燕然大都護府를 설치하 였다. 이 기사에는 흑치상지의 관력이 많이 축약되어 서술되어 있는데, 이를`흑치상지묘지명a에 의거하여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永隆 2년(681)에 靑海에 있는 토번의 찬파를 토벌함으로써 左鷹揚衛大將軍燕然道副大摠管이 되었다. 垂拱 연간(685~688)에는 燕國公 食邑 三千戶에 봉해 졌으며, 곧 右武衛大將軍神武道經略大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돌궐이 침입해 오자 흑치상지는 이 를 물리쳤고, 이어 垂拱 3년(687)에는 懷遠郡經略大使가 되어 李多祚, 王九言과 함께 다시 돌궐 토벌에 나섰다. 일차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연합작전을 펴기로 한 찬보벽이 공을 탐내어 홀로 무 리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크게 패함에 따라 찬보벽은 죽음을 당하고 흑치상지는 이에 대한 책임의 일단을 졌다. 17) 이다조(李多祚) : 당나라의 장수로 말갈추장의 후손이다. 용감하고 민첩하며 활을 잘 쏘았다. 군 공으로 羽林衛大將軍에 올랐다. 中宗이 복위하자 遼陽郡王에 봉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109 및 新唐書 권110 李多祚傳을 참조할 것. 18) 左監門衛中郞將 : 監門衛는 漢, 魏나라 때에 城門校尉였는데, 당 고종 龍朔 2년(662)년에 監門衛 로 개칭되었다. 이는 都城門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고 좌우의 두 부대가 있었다. 中郞將은 각 衛 에 4명이 있었고 정4품下의 직이었다. 19) 찬보벽( 寶璧) : 당나라 사람으로 黑齒常之의 부하이다. 돌궐을 칠 때에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 상의도 하지 않고 적을 얕보고 치다가 전군을 잃고 자신도 죽었다. 新唐舊 와 舊唐書 의 흑치상 였을 때, 어떤 사람24)이 그 사람에게 죄를 주라고 청하자 어찌 사사로운 말 때문에 관병 을 때릴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 상을 받았으나 [받은 상품을] 부하들 에게 나누어 주어 남은 재물이 없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 다.25) 지전에는 姓이 찬( )으로 쓰였으나 성암본과 중종임신간본의 에는 성은 탈락되어 있 어 감교원문편에서 추가한 것이다. 북한번역본 이재호본 신호열본에서는 모두 寶璧 으로 번 역하였다. 20) 周興 : 당나라의 酷吏로 수천 명을 마구 죽였다. 그의 傳記가 新唐書 권209 酷吏列傳에 실려 있다. 21) 鷹揚將軍 : 당나라 부병제에서 중앙에 16위가 있었고 驃騎府와 車騎府의 두 군단이 있었는데, 이 두 부에는 장군이 두어져 통솔하였다. 표기장군을 한 때 응양장군이라 개칭하였다. 新唐書 권 50 兵志 참조. 22) 趙懷節 : 당나라 고종~중종대의 장군. 간신인 주흥으로부터 반란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처형되 었다는 기록과 그의 관직은 資治通鑑 권204 永昌 원년(689)조에는 흑치상지와 반란을 꾀한 사 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右武衛大將軍 이라는 직함을 쓰고 있어 그의 직함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舊唐書 新唐書 흑치상지의 열전에서는 모두 右鷹揚將軍 이라고 쓰고 있다. 그에 대 하여는 본 기록이외에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23) 교수형을 당하였다 : 이는 新唐書 권110 흑치상지전의 投死 라 한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舊 唐書 권109 열전과 資治通鑑 권204에는 스스로 목매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4) 어떤 사람 : 舊唐書 권109 흑치상지전에는 副使 牛師奬 등이 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5)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 본서에 수록된 흑치상지전 은 주로 新唐書 권110 黑齒常之傳의 내용을 약간 줄여 전재한 것이다.

261 520 권47 列傳 7 階伯26)은 백제인으로서, 벼슬하여 達率이 되었다. 당나라의 顯慶 5년 庚申(660 : 백제 의자왕 20)에 고종이 소정방을 神丘道大摠管27)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 라와 함께 백제를 칠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막으며 말하였다. 한 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521 를 맞아 싸우려 할 때 뭇 사람에게 맹서하였다. 옛날 句踐30)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 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마침내 각자 힘을 다하여 싸워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내니 이에 신라 군사가 물러났 다. 이처럼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네 번이나 하다가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다.31) 내 아내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마침내 가족을 모두 죽였다. 황산의 벌판28)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29) 신라의 군사 26) 階伯 : 백제 의자왕대의 달솔 관등이었으며, 신라군과 싸울 때에는 장군의 직에 있었다. 660년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成 忠 興首와 함께 부여 三忠祠에 배향되었고, 그의 무덤은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 에 있으며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본서 권47 열전 階伯傳과 官昌傳 에는 階伯으로,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大東地 志 부여 寺院條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 ] 이라 하여 階伯은 姓이고 이름은 升이었음을 전 해주고 있다. 이 기사를 취신하면 階伯은 이름이 아니고 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百濟同姓이 라고 한 것은 왕족 부여씨에서 분지되어 나온 한 지파가 階伯이라는 성을 칭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주성, 1990,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연구, 전남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이 시기 성씨의 分枝化에 대해서는 노중국,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 -木 (木)氏를 중심으로-, 大丘史學 48 참조. 그리고 계백이 전사한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는 본서 권 47 열 전 階伯傳 및 官昌傳을 참조할 것. 27) 神丘道行軍大摠管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받은 직함. 新唐書 권220 열전 백 제전에도 같은 관명이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熊津道大摠管 으로, 新唐書 권3 本紀 고종 顯慶 5년 3월조에는 神兵道行軍大摠管 으로, 大唐平百濟國碑銘 에는 元戎使持節神丘 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 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 明紀 6년 7월조에 인용된 高麗沙門 道顯의 日本世記 에는 大將軍蘇定方 으로만 나온다. 神丘 道는 唐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정한 攻擊路의 하나이다. 28) 황산의 벌판 : 현재의 충남 논산시 連山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熊州 黃山郡條에 는 黃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 으로 나와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 紀 6년 7월조의 注에는 或本云 新羅王春秋智率兵馬 軍于怒受利之山 怒受利山 百濟之 東堺也 라 하여 신라군이 怒受利山에 陣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怒受利山은 본서의 黃山에 해 당된다고 할 수 있다. 29) 황산의 벌판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三營을 설치하고 김유신 이 이끄는 5만의 대군을 기다렸다. 계백이 설치한 3영에 대해서는 산직리산성(장골산성), 웅치산 성(곰치산성), 황령산성으로 보는 견해(홍사준, 1976, 탄현고, 역사학보 35 36합집, 77~78 쪽)와 계룡산 줄기인 황령산성에 좌군, 산직리산성에 중군, 모촌리산성에 우군을 각각 배치한 것 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성주탁, 2000, 황산벌 전적지의 역사적 성격, 논산 황산벌 전적지, 충 남대 백제연구소 논산시, 5~9쪽). 그리고 관등으로 미루어 볼 때 상영이나 충상이 최고사령관 이었으며(김수태, 2000, 7세기대 동아시아상의 황산벌 전투, 논산 황산벌 전적지, 충남대 백 제연구소 논산시, 42쪽), 3영의 營寨도 계백 상영 충상의 영채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문기, 1998, 사비시대 백제의 군사조직과 운용, 백제연구 28, 283쪽). 30) 句踐 : 생몰연대는?~B.C.465이다. 中國 春秋時代 末期 越나라의 王(B.C.496~465). 아버지 允 常이 죽자 북쪽의 吳王 합려(闔廬)는 越나라를 치다가 도리어 패사하였다. 합려의 아들 夫差는 부 친의 복수를 위해 월나라를 부초(夫椒)에서 격파하였는데, 구천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會稽山 에 들어가 자신은 부차의 신하가 되고 그의 처는 첩이 되어 항복할 것을 빌었다. 구천은 부차로부 터 용서를 받고 귀국하자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범여(范 )와 함께 20년 동안 부국강병에 힘 쓰면서 오나라에 보복을 준비해 왔다. B.C.473년 부차가 제후왕의 會盟을 위해 없는 틈을 타서 오나라를 습격하니 부차는 패하여 자살함으로써 오나라는 멸망하였다. 후에 월나라는 세력이 더 욱 강성해져 齊 秦나라와 회맹하여 周王으로서 方伯의 칭호를 받고 覇王이라 칭하게 되었다. 31)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네 번이나 하다가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다 : 계백은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자기의 처자들도 손수 죽여 황산 싸움터로 나아갔다. 그는 신라의 김유신이 거느린 5만의 군사와 네 차례 싸워서 이겼으나, 결국 나이 어린 신라의 화랑 관창의 분전에 밀려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47 열전 官昌傳과 階伯傳을 참고할 것. 산직리산성 아래 신라군과 네 번 싸워서 모두 승리했다고 전해오는 勝敵골이 있다(성주탁, 2000, 앞의 글, 14 쪽).

262 522 권48 列傳 8 都彌32)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호적에 편입된 하찮은 백성(編戶小民)이었지만,33) 자못 523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쁘며, 또한 절조있게 행동을 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았다. 蓋婁王34)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더불어 말하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정조가 굳고 행실이 깨끗한 것을 우선으로 삼지만, 만약 으슥 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니, [도미가] 대답하였다. 32) 都彌 : 백제 개로왕 때의 일반 백성이다. 본서 열전에는 3명의 백제인이 입전되어 있는데, 도미전 이 그 중의 하나이다. 階伯이나 黑齒常之전은 명신 명장들의 충의로운 무용담을 소개하고 있는 반면, 도미전은 군주의 인덕과 부녀의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도미전에 나오는 도미이야기는 안 으로 의리를 아는 도미와 아름다운 용모와 정절 또한 높은 도미부인이 개로왕의 갖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정절과 부부의 신의를 지켜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정절이 높은 도미 부인에 초점을 두면서 잔인무도한 개로왕과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개로왕의 실 정을 戒鑑한다는 입장에서 이 설화가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본서 권25 백제 개 로왕 28년조에 나오는 고구려의 간첩 道琳 기사와 시대적 배경이나 중심 인물이 개로왕으로 동일 하다는 점, 그리고 개로왕의 무능과 어리석음을 폭로함으로써 백제가 한성을 상실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기록이 동일한 사서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85, 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위계승과 왕권의 성격, 한국사연구 50 51합집, 7쪽 ; 2007, 삼국사기 도림 기사 검토를 통해 본 백제 개로왕대 정치 상황, 선사와 고대 27, 35~39쪽). 도미설화는 도림 기사와 함께 개로왕의 실정을 고발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 원전을 한산주도독을 역임한 김대문의 漢山記 로 보고 있다(이도학, 1985, 앞의 글, 7쪽). 도미 설화는 이른 시기의 官奪民女型 說話의 예에 속하는데, 최근까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널리 유포되어 내려 온 민간전승이다. 고려사 권71 지 25 악 2 삼국속악 백제조에는 도미전과 유사한 설화가 실려 있다. 즉 미모의 한 여인이 지리산에 살고 있었는데, 미모에 탐을 내고 궁인을 삼으려는 백제왕의 요구에 대해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지었다는`지리산가a도 도미이야기의 지역적인 분화 형태로 이해된다. 도미전의 구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열녀의 귀감으로 평가되면서 경기도 광주목의 전 승(洪敬謨(1774~1851)의 重訂南漢誌 등 참조) 으로 정리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1924년 鄭春洙 (1875~1951)가 開闢 에서 도미부인을 충남의 열녀로 소개하였고, 1937년 朴鍾和가 文章 에 아랑의 정조 라는 제목으로 각색을 하면서 서울뿐만 아니라 충남 보령과 진해 등지에까지 널리 확대되었다(최운식, 1996, 도미설화의 전승 양상, 고문화 49, 154~160쪽). 도미전에 대한 주요 연구는 양기석, 1986, 삼국사기 도미열전 소고, 이원순교수화갑기면 사학논총, 교학사 ; 이도학, 1985, 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위계승과 왕권의 성격, 한국사연구 50 51합집, 7 쪽 및 2007, 삼국사기 도림 기사 검토를 통해 본 백제 개로왕대 정치 상황, 선사와 고대 27, 35~39쪽 ; 박대재, 2007, 삼국사기 도미전의 세계 -2세기 백제사회의 계층분화와 관련 하여-, 선사와 고대 27, 233~235쪽 등을 참조할 것. 33) 비록 호적에 편입된 하찮은 백성(編戶小民)이었지만 : 도미의 사회적 지위인 편호소민은 대체로 일반적인 양인 농민으로 비정된다. 편호소민을 일반 소경리 자유농민으로 보는 견해(박시형, 1961, 조선토지제도사(상), 과학출판사 ; 1998, 한국사와 토지(상), 영인본, 신서원, 123쪽) 무릇 사람의 정이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 다 하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도미에게 일을 시켜 잡아두고는 가까운 신하 한 명을 시켜 거짓으로 왕의 의복을 입고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하였다. 사람을 시켜 왕이 오셨 다고 먼저 알리고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걸어서[博]35) 이겼다. 내 일 [너를] 들여 궁인으로 삼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네 몸은 내것이다. 가 있다. 독립적인 자기 경리를 갖고 있는 양인농민으로 인정수에 따라 편호된 세대를 말하며, 또 한 국가권력에 직접 귀속되어 조세 공물 부역 등의 일정한 수취의무가 부과되어 있는 국가의 공민으로 볼 수 있다(양기석, 1986, 앞의 글, 10~11쪽). 34) 蓋婁王 : 백제 개루왕의 재위년대는 128~166년이다. 도미설화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기록대 로 2세기경의 개루왕대로 보는 견해(김대재, 2007, 앞의 글, 242쪽)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점에 서 21대 개로왕대(455~475)로 봐야 할 것이다. 개루왕 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대방군이 있어 곧 바로 갈 수 없다는 점(이병도, 1977, 앞의 책, 707쪽), 개로왕이 近蓋婁로 불리워져 개루 왕과 이름이 같다는 점, 본서 권25 백제 개로왕 21년 추9월에 나오는 도림 기사와 같이 개로왕의 실정을 계감하려는 모티브가 같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1986, 앞의 글, 4~5쪽 ; 이도학, 2007, 앞의 글, 34~35쪽을 참조할 것. 35) 내기를 걸어서[博] : 본서 권25 백제 개로왕 21년 추9월조에 의하면 개로왕은 장기나 바둑 내기 를 좋아했던 것으로 나온다. 즉 도림 기사의 好博奕 과 권48 도미전의 博得之 기사가 이에 해 당한다. 博은 장기와 바둑, 고누 등 對局하는 놀이를 말하는데, 局戱라고도 한다. 奕은 圍 로 바 둑을 의미한다. 博의 古字는 이며 이는 12줄로 되어 있는 局面에서 흑 백 6말로 되어 있는 고누를 말한다. 는 棋 또는 碁 라고도 쓰며 이는 바둑을 의미하는데, 山海關 이동의 魯 齊 지방에서는 이를 奕 이라고 불렀다. 唐나라 이전의 바둑은 가로 세로 17줄에 289점이었고, 현재는 가로 세로 19줄에 361점이다. 장기는 漢나라 이후의 놀이로서 局戱의 하나이다. 바둑에 관한 기사로는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有投壺樗蒲等雜戱 然尤尙奕 이라 한 것을 들 수 있 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5의 주 500)을 참조할 것.

263 524 드디어 난행을 하려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 국왕께서는 헛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 525 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蒜山38) 아래에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다. 옷 과 음식을 구걸하며 구차히 살다가 나그네로 일생을 마쳤다. 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십시오.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겠습니다. 물러나 계집 종(婢子)36) 하나를 어지럽게 꾸며서 바쳤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왕을 속인 죄를 씌워 처벌하여 두 눈알을 빼고는 사람을 시켜 끌어 내 작은 배에 태우고 강에 띄웠다. 그리고 나서 그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음행을 하고 자 하니, 부인이 말하였다. 지금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 며 왕을 모시는 일이라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청컨대 다른 날을 기다려 목욕을 한 다음에 오겠습니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이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 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자 문득 배 한 척이 나타나 물결을 따라 이르렀으므로 [이 배 를] 타고 泉城島37)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 풀뿌리를 캐어 씹어 먹 36) 계집 종(婢子) : 도미가 婢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해서 는 대체로 부농에 가까운 자영농민으로 보고 있는데(양기석, 1986, 앞의 글, 14~15쪽), 이를 보 다 구체화하여 자영농민보다 상층민인 일반민으로서 사노비를 보유한 富家에 해당하는 존재(조 법종, 1996, 삼국시대 민 백성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검토, 백제문화 25, 100~101쪽)로 보 거나 또는 자영소농민과 富家 사이의 양면성을 지닌 존재로 보기도 한다(김대재, 2007, 앞의 글, 245쪽). 37) 泉城島 : 현재 어디에 있는 어떤 섬인지 확실하지 않다. 도미부인이 천성도에 이르기 전에 탈출했 던 강어귀에 대해서는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도미나루에 비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곳은 경 기도 광주시 동부면 倉隅里 앞 팔당으로 가는 팔당나루가 都彌의 눈을 빼서 던진 도미나루에 해 당한다. 이곳은 渡迷津 新增東國輿地勝覽 권6 ( 廣州牧 山川), 斗尾遷 또는 斗尾院 (洪敬謨 (1774~1851)의 重訂南漢誌 ), 斗尾津 대동지지 廣州府 ( 津渡) 등의 여러 명칭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廣津 石島(구리시 토평리) 渡迷津 龍津(楊根) 黔丹山(광주시)으 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자 한성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요해처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천성도는 渡迷津에서 조금 떨어진 한강에 있는 섬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조동일, 1987, 說話篇, 韓 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974쪽). 이와는 달리 도미부부가 해로를 통 해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보고 천성도를 한강과 임진강이 교차하는 파주시의 一眉島나 烏島城 (烏頭城)으로 보는 견해(도수희, 1999, 도미전 의 천성도 에 대하여, 한국지명연구, 이회, 325~329쪽 ; 김윤우, 2003, 도미사화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 경기향토사학 8, 349~352 쪽)가 있으나, 도미 부부가 아직 고구려에 도착하지 않았고, 이를 기록대로 개루왕대로 보면 성립 하기 어렵다. 38) 蒜山 : 본서 권35 잡지 지리2의 朔州 井泉郡의 領縣인 山縣이 나오고 있다. 산산현은 고구려때 買尸達이었다가 신라 경덕왕때 산산현으로 개칭되었는데,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시 일대에 비정 된다. 그런데 원산은 도미설화의 활동 무대인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 도미부부가 해로를 통해 고구려에 건너갔다는 점, 그리고 산산이란 지명이 함남 원산 이외에 함경도 덕원, 평 안도 상원, 전라도 화순, 경상도 김해, 황해도 봉산 등 여러 곳에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김대재, 2007, 앞의 글, 239~240쪽).

264 526 권41 列傳 1 金庾信 上 527 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 왕5)과 그 장수 네 사람6)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金庾信1)은 왕경인2)이었다. (중략) [그의] 祖父 武力3)은 新州道行軍摠官4)이 되 1) 金庾信 : 생몰연대는 년이다. 선덕왕 및 태종 무열왕대의 장군으로 金官加耶國 김수로왕 의 12세손이다. 祖父는 武力, 아버지는 舒玄, 어머니는 立宗葛文王의 아들 肅訖宗의 딸 萬明夫人이 다. 庾信은 中宗壬申刊本 三國遺事 권1 王曆 太宗武烈王條에서 庾立 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仲和三年銘金銅圓套(883)에서는 옛날에 裕神角干 으로 기록한 바 있는데, 이는 동일 인물의 다른 표기로 생각된다. 그의 가문은 금관가야가 법흥왕 19년(532)에 신라에 병합된 뒤 진골에 편입되었다. 그의 형제에는 동생 欽純[또는 欽春이라고도 한다]과 누이 寶姬와 文姬가 있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庾信). 부인은 첫부인의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재취 부인이 태종 무열왕의 세째딸인 智炤夫人이다( 三國遺事 에서는 財買夫人이라 칭하였다). 아들 5 형제(三光 元述 元貞 長耳 元望)와 딸 4명을 두었으며, 庶子 軍勝을 두었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595)에 萬奴郡(현재의 충북 진천읍 상계리)에서 출생하였고, 15세에 花郞 이 되었으며, 35세 때에 中幢의 幢主로 발탁되어 군공을 쌓기 시작하여 이후 많은 전공을 세웠으 며, 선덕여왕대에는 백제와의 많은 전투에 전념하여 집에 들릴 겨를조차 없었다. 선덕왕 말년 바담 (毗曇)의 난을 진압하여 진덕왕을 즉위시킴에 공이 있었고, 매부인 태종이 즉위하면서 삼국통일의 계획이 그와 태종에 의하여 착실히 추진되었다. 태종 7년(660)에는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는 데에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여 각간의 지위에 오르고 상대등이 되었다. 문무왕 원년 661년에는 평양 근 처에 도착한 소정방 군대의 요청에 의하여 군량을 고구려의 강역을 거쳐 수송하는 임무를 성공적 으로 수행하였다.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는 작전에는 본서 권6 신라본기에서는 大幢大摠管으로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열전의 기록에는 노쇠하고 병이 들어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열전 기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문무왕 13년(673)에 79세로 죽자 왕은 비단 1,000필과 租 2,000석을 주어 상사에 쓰게 하고 비를 세우게 하는 한편 수 묘인을 두어 그의 묘를 지키게 하였다. 42대 興德王 때에는 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묘는 현재 경주시 충효동에 있으며 사적 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김유신묘는 경주시 서악동의 태 종 무열왕묘소 옆의 각간묘로 칭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69, 金庾信墓考, 金 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참조). 본서의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金庾信 1인에 할애하고 있고, 열전 의 서두에 쓴 점에서 본서 편찬자의 관심의 정도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열전의 기초 자료는 그의 玄孫 金長淸이 쓴 行錄 10권과 김유신 비문 등이었다. 2) 왕경인 : 신라의 지방인과 구별하는 뜻으로 왕도에 살고 있는 경주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530년대 이후 신라는 6부의 지배세력에게 京位를, 지방의 지배세력에게 外位를 수여하는 2원적 관등제를 운영하여 왕경 6부인과 지방민을 차별하였다. 이때 왕경 6부의 세력은 지방민을 통치하는 지배자 집단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왕경 6부 지배층은 그들을 편제하는 기본 원리로서 17관등제와 신분제 즉 골품제를 들 수 있다. 6부체제 단계의 핵심 지배세력은 530년대 이후에 진골귀족 신분 으로 전화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17관등제와 신 분제를 운영하였다. 왕경인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전덕재, 2002,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 민, 태학사, 207~334쪽을 참조할 것. 김유신 가문은 경주 6부 중 沙喙部人이었음이`丹陽新羅赤 城碑a를 통하여 밝혀졌다. 왕경인은 京位를 가질 수 있었고, 골품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武田幸男, 1965, 新羅の骨品體制社會, 歷史學硏究 299, 10 12쪽 ; 李文基, 1981, 金石文資料를 통하 여 본 新羅의 六部, 歷史敎育論集 2, 쪽). 3) 武力 : 김유신의 祖父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金仇亥의 막내 아들이다. 법흥왕 19년(532) 신라 에 투항하여 진골신분이 되었다. 진흥왕 12년(551)경 단양 적성전투에 참여하였고, 동왕 14년 (553)에는 新州가 설치되자 6등급 阿 으로 그 軍主에 임용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管山城(충북 옥 천) 전투에 新州의 군대를 이끌고 참여하여 백제 성왕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이를 사로잡아 죽였 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 에는 茂力 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同音異字의 표기이고, 김유신조에서는 虎力 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고려 혜종의 이름인 武 자의 음을 避諱하기 위 하여 달리 쓴 것이다.`단양신라적성비a `황초령진흥왕순수비a `마운령진흥왕순수비a등에는 力 으로 기록되어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2, 63쪽). 三國 遺事 에는 그의 관등을 伊干으로 기록하고 있다. 仇衡(衝)王과 김무력의 관계에 대하여는 가락국 기 世系나 본서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는 모두 부자 관계(차남 혹은 삼남)로 되어 있 으나, 가락국기 首露王廟에 대한 기사에는 仇衝王 이후의 계보가 仇衝王 - 世宗 - 率友公 - 庶 云으로 되어 있어 김무력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가락국기 世系에 의하면 世宗은 茂力(金武 力)의 형이며, 庶云은 김무력의 子인 金舒玄이다. 이에 대하여 이 계보가 가야의 멸망 후 시조 首露 墓의 司祭者를 기록한 것으로, 구형왕이 죽은 뒤 그 장남인 세종이 뒤를 이었으나, 다시 그가 죽은 뒤에는 그 아우인 김무력이 뒤를 이어 率友(支)公이라 불려진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率友公이 金 國公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村上四男, 1961, 金官國の世系と率支 公, 朝鮮學報 21 22합집 및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쪽 ; 李基東 李基 白, 1982, 韓國史講座 -古代篇, 쪽을 참조할 것. 4) 新州道行軍摠官 : 新州는 신라가 진흥왕 14년(553)에 한강 하류지역을 백제로부터 탈취한 후에 설 치한 주이다. 道는 이 지역 또는 방면을 뜻하며, 행군은 출정군대를 뜻한다. 총관은 총지휘관이라 는 의미다. 총관은 당나라 군사의 편제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5) 백제 왕 :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잡혀 죽은 백제 聖王을 가리킨다. 성왕은 후방에 머무 르면서 최선봉으로 久陀牟羅의 보루성에까지 진출해 있는 왕자 餘昌(위덕왕)을 위로하기 위해 친 위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였다. 성왕이 보병과 기병 50여기를 이끌고 오다가 관산성 부근 狗 川(옥천읍 구진베루)에서 신라의 복병을 만나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조 기사를 참조할 것. 6) 그 장수 네 사람 :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과 함께 패사한 좌평 4명을 가르킨다.

265 528 베었다.7) (중략) 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선덕대왕 11년8) 壬寅(642)에 백제가 大梁州9)를 격파하였을 때, 春秋公10)의 딸 古 炤娘11) 12) ) 14) 이 남편 品釋 과 함께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 말하였다. 나와 공은 한 몸이고15) 나라의 팔다리 격으로 되어 있다. 지금 내가 만약 저 곳(고구 려)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유신이 말하였다. 7)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는 士卒 29,600명으로 달리 기록 되어 있다. 8) 선덕대왕 11년 : 仁平 9년(641)이다. 본서 권31 연표 하를 보면 동왕 3년에 仁平으로 개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의 연호가 사용된 기간 중 김유신 열전에서 이 연대만을 연호를 쓰지 않고 왕 의 재위 연대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진덕왕 4년(650)부 터이다. 9) 大梁州 :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 8월조의 기록에는 大耶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康州 江陽郡(합천군 합천읍)의 옛 지명으로 본서 신라본기 및 金庾信傳 竹竹傳 등에는 大耶城, 大耶州, 大耶郡 및 大梁城, 大梁州 등으로 나온다. 본래는 가야 소국의 하나로서, 日本書紀 의 多羅國에 해당한다. 그 중심지에 대해서는 陜川郡 陜川邑 龍洲面 일대로 보는 설과, 陜川郡 雙冊面 일대로 보는 설이 있다. 대가야 멸망 후 진흥왕 26년(565)에 신라가 합천 지역에 大耶州를 설치하였으며, 선덕왕 11년(642)에 이곳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그 후 백제 멸망 직후인 무열왕 8년(661)에 신라는 다시 大耶州를 설치하였다가, 문무왕 5년(665) 경에 州治가 居列州로 옮겨가면서 大良州郡으로 강 등되었다. 大耶城은 삼국통일기 및 후삼국기에 신라와 백제 사이의 요충이며 격전지였다. 10) 春秋公 : 太宗武烈王의 이름에 붙인 존칭. 三國遺事 권1 紀異篇에서도 太宗春秋公 으로 명기 하고 있다. 三國遺事 와 본서에서 김유신을 庾信公 또는 公 으로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예 라 할 수 있다. 11) 古 炤娘 : 김춘추 딸의 이름으로 남편은 品釋이다.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될 때에 남편과 함께 죽었다. 12) 品釋 : 태종 무열왕의 사위.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 8월조에 관등이 伊 으로 기록 되어 있다. 大耶州 都督으로 재직하던 중 幕客인 舍知 黔日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원한을 산 적이 있었으므로 선덕왕 11년(642)에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할 때 黔日은 毛尺 등과 백제와 내응하였 다. 城이 함락되고 품석 夫妻도 죽어 유골은 그곳 옥중에 묻혔다. 그 후 김유신이 진덕여왕 2년 (648) 玉門谷 전투에서 크게 이겨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아 이들을 품석 夫妻의 유골과 맞바꾸 어 송환한 바 있다. 13) 古 炤娘이 남편 品釋과 함께 따라 죽었다 : 본서 권47 열전 竹竹傳에는 대야성의 함락기사가 상 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품석이 먼저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자살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한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년(642)조에서는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백제장군 允 忠이 죽였다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14)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조의 기록에는 춘추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아버릴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 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중략) [선덕왕 11] 유신은 押梁州 軍主16)가 되었다가 13년에 蘇判17)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삼아18)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加兮城19) 省熱城20) 同火 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고 하여 딸을 잃은 김춘추의 심경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15) 나와 공은 한 몸이고 : 이는 매부 처남 간의 사이를 가깝게 표현한 것이다. 16) 押梁州 軍主 : 押梁을 押督 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의 경북 경산시 지역이다. 선덕여왕 11년 (642) 8월에 大耶州가 백제에게 함락된 후 그 州治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무열왕 8년(661)에 州 治를 大耶로 다시 옮김으로써 압량주는 폐지되고 다시 押梁郡으로 되었다. 軍主는 州의 군사 및 행정의 최고 책임자이다. 신라에서 군주란 원래 군대의 최고위 통솔자로서, 3 4세기 경부터는 將軍이란 칭호와 병용되기도 하였지만, 지증왕 때부터 주로 州의 장관을 지칭하는 용어로서만 사 용되었다. 특히 중고기 이후 신라가 정복활동을 통하여 점차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州 는 행정 단위라기보다 오히려 각 지방의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州長官인 軍主는 治民보다 대규모 州軍의 지휘에 주력하였다. 삼국통일 후에는 北朝와 隋 唐 관제의 영향을 받아 摠管 都督 등의 명칭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軍主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軍主 摠管 都督 등의 직위는 모두 眞骨 신분이 독점하였다. 17) 蘇判 :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으로 잡판( 判) 혹은 잡찬( )이라고도 하였다. 梁書 권 54 열전 신라에는 齊旱支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에는 迎干으로 나온다. 迎은 의 誤記로 보 인다. 18) 상장군으로 삼아 :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3년(644)조에는 大將軍 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266 530 城21)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로 말미암아 加兮津22)을 열었다. 장군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니 유신은 명령을 받자마자 말에 올라 자기 처자를 만나 을사년(선덕왕 14년 : 645) 정월에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쳐들어와서 23) 24) ) 우리 買利浦城 을 공격한다는 封人 의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을 上州 지 않고, 백제 군대를 맞받아 쳐서 쫓아냈는데,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3월에 왕궁에 돌아와 복명하고26)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 군사가 국경에 주 둔하여 많은 군사로 우리를 치려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시오! 라고 있다. 19) 加兮城 : 신라 康州 高靈郡 新復縣의 옛 지명으로 현재의 경북 고령군 우곡면이다. 본서 권5 무열 왕 8년(661) 4월 19일조에 加尸兮津의 이름이 나오고, 권41 金庾信傳 上에도 加兮城 및 加兮津이 나오는데, 모두 신라의 進軍路와 관련되는 기사이므로, 그곳이 군사적 要路임을 알 수 있다. 日 本書紀 권19 欽明 5년(544) 3월조에도 신라가 가야의 荷山을 치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荷山은 곧 高靈郡 牛谷面 浦洞里 소재의 나즈막한 산인 하미 에 비정되어, 加尸兮津 또는 加兮津 은 이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서 권21 寶臧王 4년 5월조의 加尸城 및 권37 有名未詳地分의 加尸 城과는 다른 곳이다. 20) 省熱城 :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로 추정된다. 성열은 본서 권34 잡지 지리 1의 江陽郡 宜桑縣의 옛 지명인 辛爾縣과 같은 곳이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년 4월 및 동 5년 11월조의 나오는 후기가야연맹의 한 세력인 斯二岐國 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1993, 가야 연맹사, 일조각, 291~292쪽을 참조할 것. 본서 권32 잡지 악지 악조에 우륵을 省熱縣人이라 하 였다. 21) 同火城 : 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 일대(舊 漆谷郡 仁同面)이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 1의 星山 郡 壽同縣의 옛 지명이 斯同火이다. 이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 10월조에 보이는 桐岑 城, 본서 권34 지리지 신라 康州 星山郡 壽同縣(구미시 인의동, 옛 칠곡군 인동면)의 옛 지명인 斯同火縣 과 같은 곳이다. 22) 加兮津 :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高靈縣 開山江 加勿倉津인 듯하다. 이는 현재의 경북 高 靈郡 牛谷面 桃津洞일대로 추정된다. 고령 방면에서 낙동강을 건너 대구지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포구이다. 23) 買利浦城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靈山縣 山川條에 買浦津이 있는데, 이는 縣南 23里 지점에 있다고 한다. 大東輿地圖 에 나와 있는 買浦의 위치로 보아 買利浦城은 지금의 南海大橋가 지나 는 咸安郡 漆西面 龍城里 부근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 다(김태식, 1997,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忠南大百濟硏 究所, 65쪽). 24) 封人 : 국경을 수비하는 관리를 말한다. 25) 上州 : 신라가 경주 일원에서 벗어나 영토를 현재의 경상도 지역인 서북 서남지역으로 확장하면 서 서북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진흥왕대에 上州와 下州를 설치하였다.`창녕신라진흥왕척 경비a에서는 상주와 하주의 행정책임자로 行使大等의 직이 보이고 있다. 문무왕 5년 上 下州를 나누어 삽량주를 만들 때까지 그 명칭은 존속한 듯하다. 上州의 治所는 지금의 경북 尙州이다. 하니 유신은 또 집에 들르지 않고 군대를 훈련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이 때 그 가족들은 모두 문밖에 나와서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유신이 자기 집 앞을 지 나면서 돌아다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 이르러 말을 세우게 하고 사람을 시켜 집에 가서 라 미음(漿水)27)을 가져오게 하여 들이키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 고 하였다.28) 이에 많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우 리들이 일가 침척과 떨어지는 것을 어찌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고 하였다. 유신이 국경에 이르니 백제 사람들이 우리 군사의 방비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그 만 물러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벼슬과 상을 더하여 주었다. (중략) [진덕(여)왕 원년]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茂山城29) 甘勿城30) 桐岑城31) 등 세 성을 공격 26) 왕궁에 돌아와 복명하고 :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4년(645)조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 27) 미음(漿水) : 이를 북한본에서는 슝늉 으로 번역하였고, 이재호본과 신호열본에서는 장수, 이 병도본에서는 장물 로 번역하였다. 28) 유신이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 라고 하였다 : 이는 본 열전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29) 茂山城 : 현재의 전북 茂州郡 茂豊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地理 1 尙州 開寧郡條에 領縣四 茂豊縣 本茂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라 한 기사 참조. 무산성은 금강 상류지역의 전초기지 로서 이곳에서 북쪽으로 충북 영동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나갈 수 있고 또 동쪽으로 김천과 거 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30) 甘勿城 : 현재의 경북 金泉市 禦侮面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지리 1 상주 開寧郡條에는 古甘文 小國 領縣四 禦侮縣 本今勿縣[一云陰達] 景德王改名 今因之 로 나온다. 大東地志 慶尙道 金山 古邑條에 禦侮[北三十五里] 新羅阿達羅王 四年 置甘勿縣 一云今勿 一云陰達 景德王 十六年 改禦侮爲開寧郡領縣 이라 하였데, 이 기사의 甘勿=今勿=陰達은 禦侮面에 비정할 수 있다. 한편 甘文小國을 今勿로 보고 甘勿城을 金泉市 開寧面에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20쪽). 31) 桐岑城 : 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 일대(舊 漆谷郡 仁同面)로 同火城과 같은 곳이다. 이에 대해

267 하여 포위하자 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을 합쳐 1만 명을 거느리고 이를 막게 이때 유신은 압량주 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 하였으나 고전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丕寧子32)에게 오늘의 사세가 급박하다! 자네 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비령자가 절을 하고는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서 한바탕 전투를 해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적진에 달려갔다. 그의 아들 擧眞과 그 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집종(家奴)33) 合節이 그를 따라서 적의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 에서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34) 진덕왕 太和 원년 戊申(648)에 춘추는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 백성들이 한 번 쓸 만하다고 생각하여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일을 꾸밀 만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싸움에서 패한 보복을 해야 합니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 떻게 하겠소? 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묻기를,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 전쟁의 승부는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 람됨이 어떠한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유신은 비록 약간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입니다. 그러므로 주(紂)36)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과 덕이 떠나서 周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 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37) 이제 우리 백성은 뜻 까? 라고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구나!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 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35) 서는 앞의 주 21)을 참조할 것. 32) 비령자(丕寧子) : 신라 선덕여왕~진덕여왕대의 장수. 백제와의 茂山城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본 서 권47 열전에 그의 열전이 입전되어 있다. 진덕왕 원년(647) 백제군이 茂山城 甘勿城 桐岑 城 등 개령지방을 공격해 오자 김유신은 1만 군사로써 대항하였으나 군의 사기가 떨어져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이때 김유신은 비령자에게 사기 진작을 위해 힘쓰라고 하자 용감하게 싸워 전사 하고 그의 아들 거진도 따라 죽고 그의 종 합절까지도 죽었다. 이에 분격한 군사들은 용감히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비령자는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의 낭도였던 것 같다. 북한본에서는 비령자 로, 이재호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비녕자 로 표기하였다. 이희승편의 국어대사전 과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사전 에는 비령자 로 표기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33) 그 집종(家奴) : 후대의 私奴을 뜻한다. 본서 권47 열전 丕寧子傳에서는 奴 로 표현하고 있다. 34) 진덕왕 太和 원년 : 태화는 신라 진덕왕대의 연호. 본서 권5 신라본기에서는 진덕왕 원년(647)에 개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본서의 권31 연표 하와 三國遺事 왕력에서는 眞德王 2년(648)에 개원한 것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본 열전에서는 태화 원년이 무신년으 로 기록하여 진덕왕 2년의 개원설을 따르고 있으며 신라본기의 서술이 잘못인 듯하다. 이 연호는 진덕왕 4년(650)에 중국 연호인 永徽를 공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폐지되었다. 35) 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 이 때(648) 唐 太宗은 金春秋의 요청에 대해 겉으로 허락하였을 뿐이고, 蘇定方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蘇定方에게 출동령을 내린 것은 다음 高宗 顯慶 5년(660)이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21쪽). 본서 권5 신 라본기 진덕왕 2년(648)에서는 군사출동의 약속을 받았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정방에 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당나라는 태종이 죽고 이어 즉위한 고종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계속 실패하자 신라의 주장을 받아들여 백제를 먼저 멸망시킨 이후 고구려를 치는 것으로 한반도 전략을 수정하였다. 그러던 중 659년 4 월 신라가 김인문을 보내 백제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곧바로 출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나라가 백제 출병을 결정한 것은 황산전투에서 전몰한 장춘과 파랑의 현몽을 빌어 당의 파병 소식을 알 려준 본서 권5 태종무열왕 6년 동10월조에 의거해 볼 때 659년 10월의 일로 짐작된다(김영관, 2007, 앞의 글, 230쪽). 당의 출병 소식은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곧바로 신라에 알려지지 않다가 이듬해 660년 3월에 공식적으로 신라에 통보한 것으로 보인다(이호영, 1997, 신라삼국 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구, 서경문화사, 184쪽). 659년 4월 청병사로 당에 건너간 신라의 사절 단이 당의 출병 결정 소식과 출격 명령을 받아 당의 장안에서 660년 3월에 출발하여 신라로 돌아 온 것은 660년 4월경이었다. 당의 출병계획과 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김영관, 2007, 앞의 글, 229~233쪽을 참고할 것. 36) 주(紂) : 폭군으로 유명한 殷나라 마지막 왕. 帝乙의 아들로 말재주가 뛰어났고, 듣고 봄이 매우 민첩하였으며, 재주와 힘이 보통이 아니어서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정도이었다. 지식은 능히 간함을 거절할 수 있을 정도였고, 말은 자기의 잘못을 꾸며댈 수 있었다. 음탕한 음악을 좋아하고 부인을 사랑하여 달기( 己)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 유락비용에 썼고, 사치에 빠져 백성이 원망하고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자 불에 지지는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 다. 이에 대해서는 史記 권3 殷本紀를 참조할 것. 37) 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 書經 泰誓篇에 周나라 武 王이 殷의 紂는 億兆의 사람이 있으나 그들은 離心離德이요, 나는 亂臣 10人이 있는데, 마음을

268 534 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나위가 없습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大梁城38) 바깥에 이르니 백제가 이에 맞서 대항하였다. 유신은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玉門 39) 535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佐平 仲常<*또는 忠常이라고도 쓴다.>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여기에]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 谷 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유신을 얕보고 대군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 다. 만약 신라인이 신의를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은 를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저들에 게 있고, 옳음은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수가 1천 명(級)40)에 달하였다. 이에 사신을 백제 장군에게 보내 말하였다. 41)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의 軍主 품석 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지금도]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에 해로울 것이 없으며, 티끌 하나가 쌓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우리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 43) 라고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 인다고 하여 큰 산에 보탤 것이 없는 법이다. 고 있다. 나는 여우나 표범이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42)을 생각하 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嶽城44) 등 12성을 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너희들은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어 산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유신을]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하였다. 다시 적의 영토에 들어 가 進禮45) 등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춘추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한다. 라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의 亂 자는 어지러움을 다스린다는 뜻 이다. 이른바 난신 10인은 周公旦 召公奭 太公望 畢公 榮公 太顚 夭 散先生 南宮 适 邑姜으로 전해진다. 38) 大梁城 : 현재의 경북 합천군에 있던 성.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조에는 大耶城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9)를 참조할 것. 39) 玉門谷 : 이는 전후의 전투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경북 합천군 伽倻面 舊源里 지역으로 비 정된다(김태식, 1996, 앞의 글, 79쪽). 三國遺事 권1 紀異篇의 善德王知幾三事條에 나오는 女 根谷은 본서의 옥문곡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는데, 본서 권5 선덕왕 5년(636)의 신라의 장군 閼 川과 弼呑이 백제의 장군 于召를 격파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의 경주시 건천면의 옥문곡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적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에서의 전투는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8년(648) 4월조에 나오고 있다. 40)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 : 秦나라에서 적병 1명의 머리를 잘라오면 벼슬 한 등 급을 올려 준 데에서 級 이 목을 벤 자의 숫자라는 뜻이 유래하였다. 斬首數級 이라고 한 용례 가 그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사용된 級 자 만을 가지고 모두 참수하였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斬獲 은 斬首 와 生獲 을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41) 軍主 품석 : 軍主는 주의 장관.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 당시의 관등은 이찬이었다. 품석은 大耶州 城 군주로 선덕왕 11년(642) 8월 백제의 침입을 받았을 때 처자와 함께 항복하였는데 백제 장군 允忠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왕도(부여)에 가져갔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12)와 13)을 참조할 것. 42) 여우나 표범이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 : 원문은 狐豹首丘山 으로 여기서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심정을 말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에 樂樂其所 自生 禮不忘其本 古文人有言曰 狐死正首丘仁也 라 하였다. 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을 만나 말하기를,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라고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 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유골 을 자기 고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 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 43)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 큰 산에 보탤 것이 없는 법이다 : 이는 김유신이 처음으로 말한 격언인 듯하다. 44) 嶽城 : 현재의 지명은 알 수 없다. 45) 進禮 : 백제때 進仍乙郡이었다가 신라때에는 全州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 郡 錦山邑이다. 고려때 縣이었다가 충렬왕때 知錦州事로 승격되었으며 조선 태종때 錦山郡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본서 권12 신라본기 경명왕 4년조에 나오는 進禮城은 지금의 경남 김해지방이 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金海都護府 古跡 참조). 나말의 진례성에 대해서는 池內宏, 1917, 新羅末の進禮城に就いて, 東洋學報 7과 金侖禹, 1989, 新羅末의 仇史城과 進禮城考, 史學 誌 22를 참조할 것. 이와는 달리 이를 淸道邑 오리산성(古 烏禮山城)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 병도, 1977, 앞의 책, 203쪽).

269 536 은] 三軍을 다섯 방면으로 나누어 적군을 쳤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 권42 列傳 2 金庾信 中 [太和] 2년(648)46) 가을 8월 백제 장군 殷相47)이 石吐城48)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왔다. 왕 49) 50) ) 은 유신과 竹旨 陳春 天存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이를 나가 막게 하였다. [유신 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흘린 피가 내를 이루어 공이(杵)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유신은] 道薩城52) 아래에 진을 치고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잘 먹여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물새가 동쪽으로 날아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군과 병사들 이 이것을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는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 46) [太和] 2년 : 원문에는 太和 가 없으나 앞 권에 太和 元年 기사가 나오므로 추가하였다. 이병도 는 여기의 2년은 진덕왕 2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3년의 誤記가 아니면 진덕왕 즉위 익년에 고친 太和 연호의 2년으로써 한 것이 아닌가 추찰된다. 고 하였다(1977, 앞의 책, 625 쪽). 진덕왕은 즉위 2년에 太和로 개원하였기 때문에 태화 2년은 진덕왕 3년에 해당한다. 이 해 의 전쟁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모두 같은 해인 649년(진덕왕 3년, 의자왕 9년)조에 기술 되어 있어 본 열전과 일치하고 있다. 이재호본에서는 [진덕왕] 2년(648)으로 오역하였고, 북한본 과 신호열본에서는 다른 언급이 없이 2년 가을로 번역하였다. 47) 殷相 : 백제 의자왕 때의 장군. 그의 직책은 본서 권42의 뒷 기사에서 佐平 은상 등의 머리를 베 었다고 하였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3년(649) 8월조 및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9년 8월조 참조. 그러나 백제본기에는 左將으로 나오고 있어 그의 직명은 백제본기가 사료적 신뢰성이 높다 고 할 수 있다. 48) 石吐城 : 석토성의 위치는 현재의 충청북도 鎭川郡 文案山城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閔德植, 1983,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참조), 분명치 않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주석 778) 참조. 삼국 有名未詳地分의 신라측 지명에 나온다. 본서 권5 신라본기, 권28 백제본기 및 권42 金庾信傳에 의하면, 진덕왕 3년(649) 8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石吐城 등 7개의 성을 함락하 였는데, 김유신이 백제군을 크게 격파한 것으로 되어있다. 49) 竹旨 : 신라통일기의 진골 출신 장군으로 삼국유사 에는 竹曼 또는 智官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진평왕 말년 경에 화랑으로 활약하였다. 진덕왕 3년(649) 침입해 온 백제군을 대장군 김유 신과 함께 도살성 전투에서 크게 파하였다. 진덕왕 5년(651) 2월 파진찬으로 집사부 초대 중시에 임명되었고, 문무왕 원년(661) 백제 잔당의 소탕작전에 참여하였고, 고구려 원정시에는 김유신을 도와 天存 天品과 함께 貴幢摠管이 되어 활약하였다. 동왕 8년(668)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는 京 停總管이 되었고, 동왕 10년(670) 백제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671)에는 당군을 가 림성 전투에서 격파한 바 있다. 효소왕 때에 그의 낭도였던 得烏가 부역에서 구해준 화랑 죽지의 은덕을 사모하여 지은 향가 慕竹旨郞歌가 삼국유사 에 전하고 있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孝 昭王代 竹旨郞 참조). 50) 陳春 : 신라의 진골 장군으로 陳純이라고도 하였고,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의 眞純과 동일인인 것으로 보인다. 진춘은 진덕여왕 3년(649) 8월에 김유신 휘하의 장군으로서 道薩城 전투에 참여 하여 백제의 장군 殷相의 공격을 막아냈고, 眞純은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는 河西州 총관 이 되어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으며, 陳春(또는 陳純이라고도 한다)은 동왕 8년(668) 6월 21일 에는 京停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다시 참여하였다. 재상으로 있던 陳純은 문무왕 16년(676) 다 고 생각하고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금일 반드시 백제인이 간첩으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 고 누구냐고 묻지도 말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군중에 전령을 돌렸다.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도착한 다음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 다! 간첩이 이 말을 듣고 돌아가서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가 증원되는 줄 알고 의혹과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일시에 용감히 공격하여 크게 이 겼다. 장군 達率 正仲과 병사 100명을 서로잡고 좌평 은상, 달솔 自堅 등 10명과 병사 8,980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말 1만 마리와 투구 1천 8백 벌, 기타 이와 비슷한 숫자의 군 11월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고 한 점에서 이 때 나이가 이미 70세가 넘은 것을 알 수 있다. 51) 天存 : 신라의 진골 출신의 장군이다. 진덕왕 3년(649)에 石吐城전투에서 백제군의 격파에 전공 을 세웠고, 태종 무열왕 7년(660) 소정방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왕을 모시고 南川停에 갔으 며, 문무왕 원년(661) 7월 동왕 3년(663) 2월에 김유신의 동생 欽純과 함께 居列城(현재의 경남 거창)을 쳐서 전공을 세웠다. 다음 해 2월에는 이찬으로서 김인문과 함께 웅진에서 부여융과 맹약 을 체결하였다. 동왕 6년(666)에는 자기의 아들 漢林을 김유신의 아들 三光과 함께 인질로 당나 라에 보내어 숙위케 하였다. 동왕 8년(668) 6월 고구려 정벌시에는 각간으로서 죽지와 함께 귀당 총관이 되었고, 동왕 19년(679) 정월에 중시가 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 52) 道薩城 :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음성의 백마령으로 보는 견해(신채호, 1977, 조선상고사 Ⅰ, 동서문고, 270~272쪽)와 천안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20쪽), 충북 증평읍의 尼聖山城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頭陀山城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9쪽) 등이 있다. 그런데 신라의 화령로와 추풍령로 를 통한 북진이 청주지역을 경유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증평 이성산성설이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 호, 371쪽). 이에 대한 상세한 설 명은 본서 권26 주 691)을 참고할 것.

270 사 기재들을 노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항복해 오는 백제의 좌평 正福과 병사 1천 명을 子57)의 집 종이 되었다. 그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성실하게 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 만나자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하였다. [유신이] 왕경(경주)에 이르니 지 않았다. 임자가 불쌍히 여기고 의심치 않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도망 대왕이 성문까지 나와 맞았고, 위로함이 극진하였다. (중략) 쳐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하니 유신은 조미갑이 충직하여 쓸 만한 인물인 것 53) 永徽 6년 乙卯(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刀比川城 을 공격하여 함락 을 알고 그에게 말하였다. 시켰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히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 내가 들으니 임자가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하고 있다고 하니 내가 그와 함께 어떤 일을 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자주 나타났다. 유신이 왕에게 고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이것을 말해다 하기를, 오! 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桀과 紂보다 심하니 이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여야 할 때입니다. 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級 54) 租未坤55)이 夫山縣令56)이 되었다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서 좌평 任 그가 답하기를, 공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친히 시키는 일이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고 하였다. 드디어 [그가]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아뢰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 아야 하므로 집을 나가 수십 일간 놀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이 주 53) 刀比川城 :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성으로 본서 권34 잡지 지리 1 尙州 永同郡 陽山縣의 옛 이름인 助比川縣 이나 본서 권47 열전 金歆運傳에 나오는 助川城 의 명칭과 같은 지명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永同郡 陽山面 가곡리에 있는 飛鳳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1973, 조천 성의 위치에 대하여, 백제연구 4, 충남대백제연구소)와 같은 면의 大王山城(일명 大陽山城)으 로 보는 견해(鄭永鎬, 1972, 百濟助川城考, 百濟硏究 3)가 있다. 이곳은 소백산맥의 추풍령을 넘어 금강 상류를 따라 부여로 갈 수 있는 요충지이다. 신라 尙州 永同郡 陽山縣(영동군 양산면) 의 옛 지명. 본서 권47 驟徒傳 金歆運傳에 武烈王 당시의 신라 백제간 助川城 전투에 대한 기 사가 나온다. 54) 級 : 신라 17관등제에서 제9관등으로 급찬의 다른 표기로 級伐 及伏干 등이 나온다. 한편 `迎日冷水里新羅碑a와`蔚珍鳳坪新羅碑a및`蔚州川前里書石 追銘a에는 居伐干支로, 梁書 권54 열전 신라전에는 奇貝旱支로,`丹陽新羅赤城碑a에는 及干支로,`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에는 及 尺干으로,`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a와`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a에는 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及伏干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2년조에는 級伐干으로, 같은 책 권26 齊 明紀 원년조에는 及 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 아찬에서 급벌찬까지의 관등은 緋 色의 公服을 입었으며, 진골이나 6두품 출신자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 55) 租未坤 : 중종임신간본과 주자본의 에는 土甲 으로 되어 있다. 이 글자는 자전에 없 는 글자이나 음은 갑 으로 추정하였다.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압(押)으로 이재호본에는 곤 (坤)으로 번역하였다. 자형으로 보면 곤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고유명사임으로 그대로 판독하고 음은 갑 으로 읽었다. 56) 夫山縣令 : 夫山縣은 음으로 보아 釜山縣과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釜山縣은 현재의 평택시 振威 面이다. 본서 권37 주석 713) 참조. 이와는 달리 이병도는 지금의 鎭海 부근으로 추정하였다(이 병도, 1977, 앞의 책, 625쪽). 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갑이 틈을 타서 보고하였다. 저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신라에 갔 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저를 타일러 님께 가서 아뢰도록 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우 리 나라가 망하면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임자가 [이 말을]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미갑은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나와서 처벌만을 기다렸다. 수개월 후에 임자가 불러 묻기를 네가 저번에 말한 유신 의 말이 무엇이었느냐? 하기에 조미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대답 57) 任子 : 백제 의자왕대의 좌평으로서 김유신과 내통한 인물이다. 임자가 이처럼 김유신과 내통하 게 된 것은 의자왕 15년 이후 의자왕이 총애한 군대부인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좌평세력 들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온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성충이나 흥수 등 좌평세력들이 투 옥이나 유배되는 사례에서 보듯이 좌평 임자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백제 조정 의 내부 사정이 조미갑(곤) 등을 통해 신라에 전해 졌고 이것이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김수태, 2007, 의자왕 말기의 정치상황,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6,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48~54쪽을 참조할 것.

271 하였다. 임자가 말하기를 네가 전한 바를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나의 뜻을] 건너 德物島64)에 도착하였고, 먼저 부하 文泉65)을 보내 [원군이 온다는 것을] 알려왔다. 아뢰어도 좋다. 고 하였다. [조미갑은]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서 [김유신에게] 보고하였 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 眞珠66) 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67) 100척으로 군사를 싣고 가 다. 겸하여 [백제의] 국내외의 일을 낱낱이 말해 주었는데, 이에 [유신은] 백제를 병합할 서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닷 58) 모의를 더욱 급하게 서둘렀다. 태종대왕 7년 庚申(660) 여름 6월59)에 대왕은 태자 法敏60)과 함께 백제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南川61)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러 갔던 波珍 길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서울 사비성에서 만나자. 고 하였다. 태자가 돌아와서 대왕에게 [이 말을] 고하니 [대왕은] 장수와 병사를 거느리고 떠나서 沙 羅의 停68)에 이르렀다. 金仁問62)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 劉伯英63)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58) 백제를 병합할 모의를 더욱 급하게 서둘렀다 : 이것은 김유신 개인 차원이 아니라 신라 정부 차원 에서 계획된 심리전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李萬烈, 1973, 三國, 한국사대계 제2권, 삼진사, 242쪽). 59) 태종대왕 7년 庚申(660) 여름 6월 : 이는 태종 무열왕이 남천정에 도착한 때이고 정확한 날짜는 6월 18일이다. 본서 권5 신라본기에는 3월부터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 동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 이 보이고 있다. 60) 法敏 :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이름이다. 무열왕의 맏아들로 태종 2년(655) 3월에 태 자로 책봉되었고 태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660년에 김유신과 함께 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한 구체적 인 것은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즉위년 및 권28의 주 898)을 참조할 것. 61) 南川 : 현재의 경기도 利川市의 신라때 이름이다. 南川州는 진흥왕 29년(568) 10월에 北漢山州를 폐하고 설치되었으며, 진평왕 26년(604) 7월에 南川州를 폐하고 다시 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남 천정은 신라 지방군제인 10停의 하나로서, 南川州에 있던 부대이다. 남천정의 군관직으로는 騎兵 을 거느린 隊大監 1인, 少監 2인, 大尺 2인과 三千幢主 6인, 三千監 6인이 있었다. 62) 金仁問 :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당나라에 숙위학생으로 가서 당군을 끌어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김인문은 진덕여왕 5년(651)에 파진찬으로서 23세의 나이로 처음 입당한 이후 전후 7차례에 걸쳐 견당사로 파견되었다. 무열왕 7년(660)에 神丘道副大摠管이 되어 당나라 대 군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멸망시켜 그 공으로 角干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문무왕 원년(661)과 동왕 8년(668)에는 신라의 고구려 정벌군을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문무왕 8년에 李勣을 따라 입당한 이후 나당간 정치적 알력의 와중에서 김인문은 親唐的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고국에 돌아 오지 못하고 줄곧 당에 머물다가 효소왕 3년(694)에 66세의 나이로 당나라 長安에서 죽은 후 유 해만이 송환되어 신라의 西原 아래에 묻혔다. 본서 권44 열전 金仁問傳 참조. 63) 劉伯英 :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 휘하에서 백제 침공과 동년 12월에는 平壤道行軍摠管으로 고구 려 침공에 출정하였다.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는 백제 침공 때의 그의 직위를 모두 左驍衛將軍 으로 기록하고 있다. 新唐書 권3 高宗本紀에서는 左驍衛將軍, 같은 책 권220 東夷傳 百濟條 에서는 左衛將軍 으로 기록하고 있고, 資治通鑑 에는 左驍衛將軍 으로 기록하고 있다. 64) 德物島 : 현재의 인천광역시 甕津郡에 속해 있는 德積島에 비정된다. 덕적군도는 소야도 문갑 도 굴업도와 같은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이곳 전승에 의하면 당군의 소정방은 덕적 도 남쪽 蘇耶島에 주둔하였으며, 소야도라는 섬이름은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김영관, 1999,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TEGY21, 한국 해양전략연구소, 168쪽 및 2007, 앞의 글, 240쪽). 65) 文泉 : 태종 무열왕대의 인물로 대감의 벼슬에 있었다. 당에 건너가 있었다가 소정방을 따라 고구 려 원정에 참여하여 소정방의 서신을 왕에게 전하고 문무왕의 서신도 다시 소정방에게 서신을 전 하였다. 66) 眞珠 : 신라 7세기의 진골 장군으로 성은 김씨였다. 선덕왕 8년 사찬으로서 北原小京(현재의 강 원도 원주)의 仕臣이 되었고, 태종 무열왕 6년(659)에는 아찬으로서 兵部令이 되었다. 곧 이어 백 제 정벌군에 김유신과 함께 참여하였다. 문무왕 원년(661) 7월 고구려정벌 때에는 대장군 김유신 휘하에서 김인문과 김흠돌과 함께 大幢摠管이 되어 참전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 (662) 8월조에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眞欽은 병을 핑계 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일족까지 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 15년(675) 그의 아들인 숙위학생 風訓은 아버지의 죽음을 원망하여 설인귀가 신라에 쳐들어올 때에 향도가 되어 반역행위를 하였다. 그런데 眞珠는 문무왕 10년(670)에 대아찬으로 반역을 한성주 총관 藪 世의 머리를 베었다고 하였으니 이 眞珠는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본서 문무왕 2년 진주의 사형기 사가 동왕 12년 기사의 두찬인지 확실하지 않다. 67) 큰 배 :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조에는 兵船 으로 쓰여 있다. 68) 沙羅의 停 : 沙羅가 현재의 위치는 어디인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 군대가 덕물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남천정에까지 갔다가 당군과 약속을 하고 5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격파하게 할 때에 내려와 今突城에 머물렀다(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조 참조). 停이라는 군단이 있는 지역이라면 남천정과 사벌정에 해당할 것이다. 본 열전의 이 기사는 대단 히 간략히 서술되었으므로 사라의 정의 구체적 위치를 알 수는 없지만 문맥으로 보아 사벌정의 금돌성이 아닐까 한다. 금돌성은 현재의 경북 상주시 인동면 수봉리 백화산의 석성에 비정된다 (鄭永鎬, 1969, 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 단국대 박물관 ; 鄭永鎬, 1972, 金庾信의 百濟 攻擊

272 장군 소정방과 김인문 등은 바다가를 따라 伎伐浦69)로 들어갔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인 것처럼 그 옷을 입혀서 만약 반란을 일 져 갈 수 없으므로 이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진군시켜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 으키게 하면 당나라 군대가 반드시 [이를] 칠 것이니 이 때를 틈타 [당나라 군사와] 싸 하여 백제를 쳐서 멸하였다. 이 전쟁에서 유신의 공이 많았으므로 당나라 황제가 이를 듣 우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고 하니, 유신은 이 말이 취할 만하니 이를 그대로 70) 고 사신을 보내 포상하고 칭찬하였다. 장군 정방이 유신 인문 良圖 세 사람에게 말하 였다. 나는 황제로부터 현지의 일을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지금 얻은 백제 의 땅을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여 그 공로에 보답하고자 하니 그대 들 생각은 어떤가? 유신이 대답하기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하여 적을 멸하여 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 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하니 유신이 말하였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이니 어찌 어려움을 당 하여 스스로를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당나라 사람이 간첩을 통하여 우리의 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백제 왕과 신료 93 대장군께서 황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임금의 소망에 따라 우리나라의 원수 인, 병사 2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9월 3일에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 劉 를 갚아준데에 대하여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仁願71) 등을 남겨 두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윽고 정방이 포로를 황제에게 바치니 데, 우리들만이 홀로 하사를 받아 스스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의리상 할 수 없다. 하 천자가 위로하면서 어찌 내친 김에 왜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정방이 말 고는 받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미 백제를 멸하고, 사비의 언덕에 주둔하면서 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 몰래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군신을 불러 대책 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형처럼 섬기고 있으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 을 물었다. 多美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72) 고 하였다. 었습니다. 龍朔73) 원년(문무왕 원년: 661) 봄에 왕은, 백제의 남은 세력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 문에 이를 멸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고는 이찬 品日74)과 蘇判 文王,75) 대아찬 양도 등을 路 硏究, 史學志 6 참조). 이와는 달리 금돌성을 충북 괴산으로 추정한 설도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627쪽) 백화산 일대에 관련 설화와 유적이 남아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69) 伎伐浦 : 현재의 충남 舒川郡 長項邑 長岩洞일대이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 나 오는 技伐浦 의 細註에 助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이라고 하여 只火浦의 다른 표기임을 알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 舒川郡 關防條에 舒川浦營 의 細註에 在郡南二十六里 水 軍萬戶一人 高麗時 稱長岩鎭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종임신간본 에는 依伐浦 로 되어 있고, 이병도본에서는 技伐浦 로 판독하였고, 이재호본에서는 伎伐浦 로, 북한본에서는 의벌포 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918)과 김영관, 2007, 앞의 글, 243~244쪽을 참조할 것. 70) 良圖 : 7세기의 신라 진골 출신 장군으로 관등이 대아찬에 이르렀다. 숙위학생으로 당나라에 유 학하여 중국말에 능통하였다. 신라와의 연락관계로 당나라에 여섯 번이나 건너갔었다. 문무왕 원 년(661) 백제 부흥군 공격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동년 12월 중국말을 잘함으로써 평양에 온 소정방에게 식량을 운반하는 장군으로 출정하였다. 소정방이 당으로 돌아가자 해로로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귀환하였다. 중국 장안에서 죽었다. 본서 권44 열전 김인문전에 附傳되어 있 다. 71) 劉仁願 : 당나라의 장군. 중국 조음(雕陰) 대빈(大斌) 출신이다. 대대로 무장직을 지냈다. 홍문관 학생을 거쳐 태종의 발탁을 받아 근시직인 內供奉에 올랐다 년의 고구려 침략에 참여 하여 그 전공으로 인하여 黎陽縣開國公에 봉해졌다. 660년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백제에 공격군의 장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의장왕 등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에 돌 아갈 때에 郞將으로서 웅진도독부를 맡아 관할하였다. 충남 부여박물관에`唐劉仁願紀功碑a가 전 하고 있다. 劉仁願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당서 와 신당서 에 입전되어 있지 않지만, 본서 권28 의 주 982) 및`唐劉仁願紀功碑a와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3~64쪽을 참조 할 것. 72)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 이는 唐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舊唐書 권3 高宗本紀 上에 責而宥之 했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위 표현은 통일 이후의 윤색으로, 바로 당시의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李昊榮, 1981, 新羅 三 國統一에 관한 再檢討, 史學志 15, 28쪽). 73) 龍朔 : 당나라 高宗 때의 연호로 661년부터 663년까지 3년간 사용되었다.

273 장군으로 삼아 [백제로]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이찬 欽純<* 있으므로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으로 진군시켜 北漢山城78)을 또는 欽春이라고도 쓴다.>76) 眞欽 天存 蘇判 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돕게 하였다. [이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그 서쪽에,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이 수십 일에 이르니 77) 때에] 고구려와 말갈 이 신라의 정예 군사가 모두 백제 땅에 가 있으니, 나라 안이 비어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오니 적들이 어리둥절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이전에 유신 은 적이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74) 品日 : 7세기의 신라 장군으로 화랑 관창의 아버지이다. 진골 출신으로 관등은 이찬에 이르렀다. 그는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에 김유신 김흠춘과 함께 좌장군으로 참전하였다. 황산벌 전투에 서 신라군이 백제 계백장군에 의하여 진공이 좌절되어 신라군사의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에 아들 인 어린 官昌을 전투에 내보내 장렬하게 전사하게 하였다. 태종 무열왕 8년(661) 2월에 백제의 남은 군사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그는 大幢將軍으로 출정하였으나 3월 5일 豆良尹城(충 남 청양군 정산면) 전투에서 패퇴하였다. 그 해 7월에는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上州總管으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다. 동년 9월 27일에는 백제의 남은 세력을 雨述城(충 남 대전광역시 대덕구)을 공격하여 1천 명의 머리를 베었고, 문무왕 4년(664) 7월에는 고구려의 돌사성을 쳐서 함락시켰고 동왕 8년(668)에는 귀당총관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공격에 참전하였 다. 75) 文王 : 태종 무열왕의 셋째 아들. 진덕왕 2년(648)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나라에 조공사로 다녀왔 는데, 이때에 당나라에서 左武衛將軍의 벼슬을 받았다. 태종 무열왕 2년(655) 3월에 맏형 법민이 태자가 될 때에 이찬이 되었다. 동왕 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5년에는 中侍職에 임용 되었다. 동왕 8년(661) 2월 백제의 유민이 사비성을 공격해오자 이를 공격하는 전투에 文王 은 大幢將軍 品日의 副將으로 참전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관등은 잘못 기록된 것 같다. 문무왕 5 년(665)에 죽으니 왕자의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76) 欽純 : 7세기 신라의 장군으로 金庾信의 동생이며 欽春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화랑이 되었는데, 인덕과 신의가 있어 크게 존경을 받았다. 태종 무열왕 7년(660) 백제의 공격에 장군으로 참여하 였다.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 계백의 저지에 막혀 신라군이 사기를 잃었을 때 아들 盤屈을 불러 용 맹을 보이라고 권유하여 나가 싸우다가 죽게 하였다. 이어 좌장군 품일도 그의 어린 아들 관창을 전사하게 하여 신라 군대의 사기를 앙양시켜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문무왕 2년(662) 8월에 18명 의 장군을 통솔하여 內斯只城(대전광역시 유성구)에 남아 항거하는 백제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663년 2월에는 장군 天存과 함께 居列城(경남 거창)의 백제 군사를 공격하여 700명의 머리를 베 었다. 이어서 居勿城(전북 장수군 번암면) 沙平城(전북 임실군 신평면)을 함락시키고, 德安城(충 남 논산군 은진면)을 공격하여 1,070명의 머리를 베었다. 문무왕 8년(668) 6월 고구려정벌에서 그는 각간으로서 참전하였고, 곧 이어 나당 전투가 벌어지자 669년 5월 이 문제를 무마하기 위하 여 파진찬 양도와 함께 당나라에 갔다가 양도는 감금되고 그는 다음해 정월에 귀국 길에 올라 7 월에 신라에 돌아왔다. 77) 말갈 :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퉁구스族의 일종. 이 말갈은 중국의 先秦시대에는 肅愼으로, 漢나 라 때에는 婁로, 北魏代에는 勿吉로 불리다가 唐나라 때에 와서는 말갈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말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 하면서 절에 나아가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때마침 하늘의 변괴가 있었는데, 모두들 지극한 지성에 감동된 결과라고 하였 다. (중략)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서 출병 기일을 알리는 동 시에 출병하여 함께 [고구려를] 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文訓79) 등을 인솔하고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南川州80)에 이르렀을 때 갈족은 松花江 이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混同江 이남으로 長白山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南北朝시대에 와서 비로소 중국과 교통하였고, 당나라 高祖 武德( ) 이후로는 말갈로 총 칭되었다. 원래 7部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각 추장이 통솔하였으나 당나라 초에 이르러 7부 가운 데 黑水를 중심으로 한 黑水靺鞨과 粟末水를 生活圈域으로 하는 粟末靺鞨의 2部가 강성하였다. 말갈(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東濊 僞靺鞨 로 파악한 정약용의 견해 를 따르고 있다. 위말갈은 반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중국 군현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순차적으로 받았다가 삼국통일 후 그 자취를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유원재, 1979, 삼국시대 위말갈고, 사학연구 29, 41쪽).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주 43) 및 권26 주 565)를 참조할 것. 78) 北漢山城 : 이는 당시 신라의 최북방 요새지였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지역으로 비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조 肅宗 때 축성한 것으로 삼국시대 북한산성 의 북쪽에 해당한다(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95쪽). 79) 文訓 : 신라의 진골 출신으로 문무왕 원년(661)에 河西州摠管이 되었고, 다음 해에 中侍職을 맡았 다. 문무왕 5년(665)에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7년(667)에 죽었다. 그러나 동왕 8년조에 나오는 귀당총관 잡찬 文訓이나 동왕 15년(675)에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와 군대와 싸운 기록은 同名異人이거나 기록상의 잘못인지 분명치 않다. 80) 南川州 : 신라가 현재의 경기도 이천 일대에 설치한 州. 진흥왕 29년(568) 10월에 북한산주를 폐 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남천주는 진평왕 26년(604)에 폐지되고 북한산주가 설치되었다가 그 후 문무왕 원년(661) 이전에 다시 북한산주가 폐지되고 남천주가 설치되었다. 남천주가 언제 폐 지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남천주 기사는 문무왕 2년 8월에 마지막으로 나오고 태종 무열

274 주둔하고 있던(鎭守)81)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鞋浦82)에 이르러 하 자에게는 상을 줄 것이오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지금 너희들은 홀로 외로 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83) 그때 담당 관청이 보고하기를, 운 성을 지켜 어찌하고는 것이냐?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차라리 성에서 나와서 앞길에 백제의 잔적이 瓮山城84)에 모여 있어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전진할 수 없습니 다 고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진격시켜 [옹산]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大國(당군)의 토벌을 받게 된 것이다. 명령을 따르는 항복하느니만 못하다. [이렇게 하면] 목숨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부귀를 누리는 것보 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다. 적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비록 조그만 성이지만 군사와 식량이 모두 넉넉하며, 장수와 병졸이 의롭고 용기가 있으 니 차라리 죽도록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고 하니, 유신이 웃으 며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새와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경 우를 두고 이른 말이로구나! 하고는 이에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공격하였다. 대왕은 왕 5년(658)부터 한산주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한편 문무왕 8년(668)에 漢城州라는 기록도 나오 고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의 답서 중에서는 667년 기사에 한성주의 기록이 보임으로써 문무왕 2년 이후 동왕 7년 사이에 남천주가 폐지되고 漢城州 또는 漢山州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81) 주둔하고 있던(鎭守) : 북한본 이재호본 신호열본에서는 鎭守를 관직처럼 번역하였고, 이병도 본에서만 진수하던 으로 번역하였다. 당시 유인원의 직함은 都護兼知留鎭 이었음을`劉仁願紀 功碑a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본서 권28 龍朔 2년 7월조에서도 仁願 仁軌等大破福信餘衆 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 大山 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라고 하여 주둔하여 지켰다는 뜻 으로 사용하고 있다. 82) 혜포(鞋浦) : 유인원이 거느린 당군이 해로를 통해 남천주로 북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기도 이천 부근의 한 포구로 생각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83) 행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8월조에서는 대왕이 諸將을 영솔하고 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문장에 有司의 급보에 의하면 前路에 백제군이 甕山城(현재의 대전광역시 회덕산성)에 웅거하고 있다 고 하였으므로, 왕과 유신의 군대가 아직 南川州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유인원의 군대도 남천주에 주둔하였다는 표현도 그 사실성이 의심스럽다. 다만 始飴谷停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유인원도 이 때 南川停에 온 것이 아니라 始飴谷停에 와서 신라군과 같이 행군하였던 것 같 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29쪽). 이는 金庾信行錄 의 찬자가 잘못 기술한 것으 로 생각된다. 신라군이 옹산성을 지나간 점으로 보아 웅진에서 유인원 군대와 만나기로 약속하였 던 듯하다. 84) 瓮山城 : 이 성은 이때에 우술성(대전광역시 회덕산성)과 함께 신라군에게 함락된 성이기 때문에 우술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비정된다. 옹산성의 위치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尼 山縣 성곽조에 의거하여 魯山城으로 보는 견해(池內宏, 1950, 앞의 글, 128~135쪽)와, 현재의 대전광역시 회덕면 鷄足山城이나(심정보, 1983, 앞의 글, 166~167쪽) 회덕산성으로 보는 견해 (노중국, 2003, 앞의 책, 202쪽)도 있다. 그러나 계족산성에서 雨述 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옹산성이 아니다. 본서 권6 문무왕 원년 8월조에는 甕山城으로 나온다. 이 에 대한 상세한 것은 본서 권6의 주 111)을 참조할 것.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공 격하여 창끝과 칼날을 무릅쓰고 [돌진하였다]. 9월 27일에 성을 함락하자 적의 장수를 잡아 처형하고 그 백성들은 놓아주었다. 공을 논하여 장수와 병사들에게 상을 주었고85) 유인원도 역시 비단을 차등이 있게 나누어 주었 다. 이에 [유신은]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먹인 후 당나라 군사가 와 있는 곳에 가 서 이와 합세하려 하였다. 대왕은 이에 앞서 大監86) 文泉을 보내 蘇장군에게 서신을 보냈 더니 [문천]이 이 무렵 돌아와서 보고하고 또 [소]정방의 말을 전하였다. 내가 화제의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를 건너 적을 치러 배로 해안에 이른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대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으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어 위 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조처하여 주십시오! 대왕이 뭇 신하에게, 어찌하면 좋을꼬? 하고 물으니, 다 같이 말하기를, 적의 경계 내 에 깊이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는 것은 형편상 될 수가 없다. 고 하였다. 대왕은 [이를] 걱 정하면서 한탄을 하였다. 유신이 앞에 나아가 대답하였다. 85) 공을 논하여 장수와 병사에게 상을 주었고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9월 27일조에 의하면 각간 이찬급의 총관에게는 劍이, 대아찬 이상의 총관에게는 창이 주어지고 그 이하에게는 1품이 진급되었다. 86) 大監 : 장군직 아래에 두어진 무관직으로 나마로부터 아찬의 관등급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중 종임신간본 및 주자본 에는 太監 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40 직관조와 三國史節 要 에 의거하여 교감하였다. 그러나 기왕의 국역본에서는 모두 태감 으로 번역하였다.

275 신이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국가의 일을 비록 둔하고 있던 유인원과 군사를 합세하여93) 8월 13일에 豆率城에 이르렀다. 백제 군사와 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이 늙은 신하가 절의를 다하여 군사가 함께 출전하므로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니94) 백제와 왜군이 모조리 야 할 때입니다. 마땅히 적국에 가서 蘇 장군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군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역이 나뉘어 있어 일찍이 전쟁한 일 대왕이 자리 앞에 나아가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공의 어진 보필을 얻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구나. 만약 이번 일이 뜻한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공의 공덕을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중략) 87) 龍朔 3년 계해(문무왕 3: 663)에 백제의 여러 성이 몰래 나라의 부흥을 꾀하여 그 장 88) 수들이 89) 90) 豆率城 에 웅거하며 왜에 군사를 청하여 원조를 받으니 대왕이 친히 유신 인문 天存 竹旨 등 장군91)들을 인솔하고 7월 17일에 정벌에 나서 熊津州92)에 이르러 주 이 없고 단지 우호관계를 맺어 사신을 서로 교환하여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금일 백 제와 죄악을 함께하여 우리 나라를 도모하는가? 지금 너희 군졸들은 나의 손아귀 속 에 들어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겠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의 국왕에게 [이 말을] 전 하라! 그리고 너희는 가고 싶은대로 가라! 군대를 나누어 공격하니 여러 성이 항복하였으나 오직 任存城95)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게다가 식량이 많아 30일을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96) 군사가 피곤하 여 싸움을 싫어하였으므로 대왕이 말하기를, 87) 龍朔 : 龍朔은 당나라 고종대의 연호로 661부터 663년까지 사용되었다. 88) 백제의 여러 성이 몰래 부흥을 꾀하여 그 장수들이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에는 백제 의 옛 장수 福信과 승려 道琛이 왕자 扶餘豊을 세워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89) 豆率城 : 솔의 발음이 률 (邦音), Lu(中國音)인 것으로 보아, 豆率이 周留와 음이 비슷하다고 하 여 周留城으로 추측되고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31쪽). 또한 김유신전에 나오는 전후의 내 용으로 보아도 주류성의 기록인 듯하다. 주류성은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복신과 도침의 중심 거 점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알 수 없다. 그 명칭에 대해서는 豆率城 周留城 이외에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원년 3월조에는 疎留城(ソルサシ)으로, 동 12월조에는 州柔(ツ ヌ)로 나온다.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산설 부안설 연기설 홍성설 등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에는 노중국(2003, 앞의 책, 195~196쪽)과 김영관(2005, 앞의 책, 181쪽) 등에 의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주류성으로 비정되는 부안 位金岩山城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邊山 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토지도 척박하여, 계화도 등에 대한 간척사업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농 토가 부족한 서해안의 산악지역이었다. 주류성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와 지명 비정에 대해서는 김 영관, 2005, 앞의 책, 180~184쪽을 참조할 것. 90) 왜에 군사를 청하여 후원을 삼으니 : 왜병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6 신라본기에는 왜에 관한 기사 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나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의 부흥관련기사에는 왜인이 4차 례 전투에서 패배하고 400척의 병선이 불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1) 대왕이 친히 유신, 인문, 天存, 竹旨 등 장군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5월조 기사에 서는 28장군, 또는 30장군을 인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92) 熊津州 : 현재의 충남 공주시 지역. 신라 熊州(공주시)의 옛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熊津이라고 도 나온다. 본래 백제의 熊川이었는데, 文周王 원년(475) 이후 백제의 수도가 되어 固麻城이라고 하였으며, 聖王 16년(538)에 泗 城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5方 중의 하나인 北方 熊津城으로 되었 다. 신라와 唐나라의 연합군이 660년에 백제를 멸한 후 唐이 熊津都督府로 삼았는데, 신라가 文 지금 비록 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아도 다른 모든 성들은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武王 11년(671)에 이를 빼앗아 熊川郡으로 삼았다. 神文王 6년(686)에 熊川州를 설치하였다. 93) 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 말미의 부흥관련 기사에서는 당나라 에서 내원하여 온 孫仁師의 군대와 유인원의 군대를 웅진에서 합쳐 육로로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수군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내려가서 주류성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 에는 이 부분의 서술이 약간 소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94) 백제인과 왜인이 아군이 힘껏 싸워 크게 이겼다 : 본서 권6 신라본기에서는 왜군에 대한 언 급이 보이지 않고 다만 문무왕 11년 설인귀의 편지에 대한 답서 안에서 왜병 1천 척이 백강에 주 둔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의 말미 부흥관련 기사에는 왜병 을 네 차례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95) 任存城 :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에 걸쳐 있는 鳳首山城으로 임존성은 백제 멸망 직후부터 663년 말까지 백제부흥군의 금강 북쪽의 주 근거지였다. 본서 권36 지리지 熊州條에 任城郡 本百濟任存城 景德王改名 今大興郡 이라고 쓰여 있다. 봉수산성은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2,426m로 고대 산성 중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봉수산성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에 任存 存官 任存官 등이 새겨진 명문 기와가 수 습되어 이 성이 임존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군 충남개발연구원, 2000, 예산 임존 성, 21~26쪽). 96) 오직 任存城만은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조와 권28 백 제본기 의자왕 21년조의 부흥군 활동기록에는 任存城에는 遲受信이 저항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76 수 없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에 서울에 와서97) 유신에게 토 유신의 祖父 武力 角干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아 쳐서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지 500결을 내려주고 다른 장병에게 상을 차등이 있게 내려주었다. 네 사람 및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다.103) 또 그의 아버지 서현은 良州104) 摠管이 되어 여러 번 백제와 싸워서 그 예봉을 꺾어 우리의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변방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짓고 누에를 쳤으며, 군신은 국가의 일에 권43 列傳 3 金庾信 下 麟德98) 원년 甲子(문무왕 4 : 664)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또 사비성에 모여 반란 을 일으켰다. 熊州都督이 자기 소관의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안개 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싸울 수가 없었다. [도독이] 伯山을 보내 [그 사연을] 고하니, 유신이 은밀한 모책99)을 주어 이기게 하였다. (중략) 문무대왕이 이미 英公100)과 함께 평양을 격파한 다음, 南漢州101)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 에게 말하였다. 옛날 백제의 明 王(성왕)이 古利山102)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97) 11월 20일에 서울에 와서 :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조에는 11월 4일 군사를 돌렸다 하니 충남 예산에서 경주까지 16일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98) 麟德 : 唐 高宗의 연호 의 2년간 사용되었다. 99) 은밀한 모책 : 김유신의 지혜가 출중함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수식된 문장인 듯하다. 100) 英公 : 英國公 李勣을 말한다. 당나라의 장수로 河北省 離狐人이며, 자는 懋功이다. 본래의 이름 은 世勣인데, 당 태종의 이름인 世民의 世 字를 피하기 위하여 勣 이라고만 하였다. 중국 하북 성 출신으로 원래 성은 徐씨였다. 隋末에 李密의 밑에 있다가 武德 初年(620)에 당에 귀순하였 고, 그 후 당나라 고종의 신임을 얻어 高祖는 純臣이라 칭하고 黎州(현재의 중국 泗川省) 漢源縣 을 摠管하게 하고 英國公에 봉하고 皇姓인 李姓을 하사하였다 년까지 당태종을 따라 돌궐 정벌에 참여하였고,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입시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서 참여한 이래 乾封 원년(667) 80세의 노장으로 요동대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 다. 이에 대해서는 新唐書 권98 열전 18 및 舊唐書 권67 열전 17 李勣傳을 참조할 것. 101) 南漢州 : 漢山州를 지칭한다. 치소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었다. 이는 신라본기에는 보이지 않는 명칭이다. 102) 古利山 : 현재의 충북 沃川지방을 기르키는데,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는 管山 城으로 나온다. 옥천은 본서에는 管山城 이나 또는 古利山 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 년조에는 函山 으로 각각 나온다. 관산성의 管 이 고리라는 훈으로 인해 고리산으로 부른 것 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옥천군의 군서면과 군북면을 흐르는 西華川 주변에는 산봉우리를 따라 고 골몰하는(宵 )105) 근심을 없게 하였다.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 하여 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 적이 많았다. 만일 公의 한 집안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 지 알 수 없다. 그의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참으로 대왕의 말씀과 같습니다. 고 하였다. 이에 [유신에게] 太大舒發翰106) 의 직위와 식읍 500호를 주었으며, 이어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궐에 오르는 데에 있어서 몸을 굽히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 려 주었다. 대의 많은 성터가 밀집해 있고, 또 전장터와 관련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성왕이 패 사하였다고 전하는 狗川이 있는데, 현재 지명은 옥천읍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도는 협 곡 구진베루(구전벼루)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정영호, 1976, 김유신의 백제공격로연구, 사 학지 6, 55~57쪽 ; 관성동호회, 1984, 옥천향지, 375~377쪽 ; 차용걸 외, 2003, 신라 백 제 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옥천군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59쪽). 103) 옛날 백제의 明 王(성왕)이 그 침입을 좌절시켰다 : 한강하류유역을 빼앗긴 백제 성왕이 554년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관산성에서 패사한 일을 가르킨다. 104) 良州 :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慶尙南道 梁山市이다. 양주는 문무왕 5년(665)에 上州 下 州의 땅을 분할하여 良州를 설치하였다가 경덕왕때 이름을 良州로 고쳤다. 105) 골몰하는(宵 ) : 宵衣 食의 준말. 임금이 정치에 골몰하여 여가가 없음을 뜻한다. 106) 太大舒發翰 : 대각간 위에 설치한 非常位의 관등으로 太大角干이라고도 한다. 태대각간의 존재 는 삼국유사 권3 塔像篇 百栗寺條에 封郞爲大角干[羅之 宰爵名] 父大玄阿 爲太大角干 母 龍寶夫人爲沙梁部鏡井宮主 安常師爲大統 이라 한 기사에도 나온다. 태대각간이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본서 권33 잡지 색복조에는 法興王制 自太大角干至大阿 紫衣 阿 至級 緋 衣 牙笏 이라 한 기사에 태대각간이 나오지만 법흥왕대에 태대각간이 성립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태대각간은 대각간이 설치된 진흥왕 12년(551) 이후 진평왕대로 추정된다. 진평왕 44년(622)에 內省私臣을 설치하였는데, 그에 사당하는 관등은 衿荷에서 太大角干까지였 다(본서 권39 잡지 직관 중 내성). 진평왕대는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도 심하였고, 位和府나 調 府令 등 여러 官府들이 설치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대각간보다 상위의 비상위인 태대각간이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277 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平壤115)을 격파 권44 列傳 4 居柒夫107)<*혹은 荒宗이라고도 한다.>는 성이 金氏이며 奈勿王의 5대손이다. (중 하였으므로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高峴116) 이내의 10개 군을 취하였 략) 12년 辛未(진흥왕 12 : 551)에 왕이 거칠부와 大角 111) 112) 잡찬 非西, 파진찬 奴夫, 파진찬 西力夫, 108) 仇珍,109) 각찬 比台, 잡찬 耽知,110) 113) 대아찬 比次夫, 114) 아찬 未珍夫 등 여덟 장군 107) 居柒夫 : 진흥왕 때의 장군으로 신라 6부의 啄部 출신이다. 또다른 이름인 荒宗은 훈독한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단양신라적성비a와`창령진흥왕척경비a의 居七夫智,`마운령진흥왕 순수비a의 居 夫,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3년조의 久遲布禮 가 동일인이다. 나물왕의 5 세손으로 각간 仍宿의 손자이며, 소지왕의 장인인 이찬 勿力의 아들이다. 일찍이 중이 되어 고구 려에 몰래 들어가 惠亮法師의 강의를 듣고 특별한 교분을 맺고 돌아왔으며, 진흥왕 6년(545)에 는 왕명을 받아 여러 文士들을 모아 國史 를 편찬하였고 波珍 으로 승진하였다. 진흥왕 12년 (551)에는 백제와 제휴하여 죽령 이북의 10여 군을 탈취한 공을 세웠다. 진지왕 원년(576)에는 이찬 관등으로 上大等이 되었다가 579년에 78세로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44 열전 居柒 夫傳을 참조할 것. 본서 거칠부전의 진흥왕 12년 辛未年에 10개 군 공취 기사는 본서 백제본기 에 나오지 않는 기사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 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라 한 기사와 함께 551년 북진 기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108) 大角 : 大角干의 별칭. 신라 17관등 위에 非常位로 설치된 大角干의 다른 이름이다. 角 은 角 干과 같이 1등급인 이벌찬의 별칭이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대각간은 무열왕 7년 (660)에 김유신이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로 그에게 처음 주었던 관등이라 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昌寧 眞興王拓境碑a에 大一伐干 의 명칭이 보이고, 본서 권 44 열전 居柒 夫傳에 진흥왕 12년의 관련기사 가운데 大角 仇珍이 등장하며 신라본기에서도 무열왕 2년 (655)에 이미 김유신을 大角 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대각간은 늦어도 진흥왕대에 만들어진 관등이라 하겠다. 109) 仇珍 : 561년에 세워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에 나오는 屈 智과 같은 인물인데, 그 당시 관 등이 561년과 같은 大一伐干 즉 대각찬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0) 耽知 : 진흥왕 12년에 거칠부 등과 함께 竹嶺 이북의 10개 군을 빼앗았을 때에 참여한 장군으로, 그 때의 관등은 잡찬이었다. 동왕 15년(554)에 이찬으로서 管山城 전투에 참여하였다. 한편`丹 陽新羅赤城碑a에 보이는 豆彌智를 眈知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武田幸男, 1979, 眞興 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 93, 13쪽). 111) 奴夫 :`단양신라적성비a에서 나오는 內 夫智로서 그때의 관등이 제5위인 大阿干支이었는데, 진흥왕 12년(551) 당시의 관등이 제4위인 파진찬으로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西力夫 比 次夫의 경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죽령 이북 진출이 진흥왕 12년 이전에 이루 어진 것인지 아니면 본서 거칠부전에서는 551년의 전공으로 승진된 관등을 명기한 데에서 기인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112) 西力夫 :`단양신라적성비a에서 나오는 西夫叱智로서 그때의 관등이 제5위인 大阿干支이었는데, 진흥왕 12년(551) 당시의 관등이 제4위인 파진찬으로서 차이가 있다. 113) 比次夫 :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 啄部 출신으로 관등은 대아찬에 이르렀다.`丹陽新羅赤城碑a의 阿干 比次夫 와 동일인물인 듯하다.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고구려 땅 10개 군을 탈취하였다.`丹陽新羅赤城碑a에 그의 관등이 제6위인 아찬으로 나오고 있 어 차이가 있다. 114) 여덟 장군 : 진흥왕 12년(551)에 거칠부와 함께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을 점령한 장군들을 말한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에 보이고 있는 장군은 탐지, 비차부 뿐이고 다른 장군의 명칭은 이곳에만 보이고 있다. 이들 중`단양신라적성비a에서 확인되는 인물에는 奴夫[비문에는 內 夫智] 比次夫 西力夫[비문에는 西夫叱智]의 세 사람뿐이다. 115) 平壤 : 본서 거칠부열전에 의하면 백제가 평양을 먼저 공취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 에 는 이와는 달리 백제가 먼저 한성을 공취하고 난 다음에 평양을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 인들이 한성을 평양으로 혼용하였거나 아니면 백제의 북진의 최종 단계인 평양 점령 사실을 포 괄적으로 기술을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위의 일본서기 기사에 의거해 볼 때 한성과 평양은 확연히 구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은 백제의 舊都임에 틀림없지만 평양을 어디로 보느 냐가 문제가 된다. 본서 권35 지리 2에는 漢陽郡을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비정하고 지금의 楊 州 옛터였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지리지 찬자는 고구려의 북한산군이 평양이라는 일설을 소 개하고 있다. 이에 의거하여 평양 즉 南平壤을 현재의 北漢山城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44쪽). 이 설을 취할 경우 한성과 평양은 한강유역의 좁은 범위에 국한되며, 또 한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다시 공취할 때 평양이 제외되어 신주의 설치 범위가 한성지역으로 축소되고 만다. 또하나는 평양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보고 황해도 재령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74~187쪽). 이 견해를 따르면 고토를 회 복하였다는 6군의 땅은 본서 무령왕대부터 성왕 7년(529)까지 나타나는 예성강유역과 관련한 지명에 대한 미스테리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찾아진다. 이에 대한 성세한 것은 본서 권26의 주 694)를 참조할 것. 116) 高峴 : 高峴은 철원 북쪽의 황해도 谷山에 있는 고개로 추정되나(1995, 海東地圖 하, 서울대학 교 규장각 영인본, 82쪽), 확실치 않다. 高峴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谷山郡 山川條에 나오 는 高達山으로 생각되며 이 산은 郡東五十里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鐵嶺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1977, 앞의 책, 644쪽), 죽령 이북의 10군을 생각할 때 철령은 위치상으

278 554 다. 이때 혜량법사117)가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길거리로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 례로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전일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게 되니 어떻게 은혜를 보답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니 법사가 대답하였다. 555 異斯夫121)<*혹은 苔宗이라고도 하였다.>는 성이 김씨122)요, 奈勿王의 4대손이다. (중략) 진흥왕 재위 11년(550), 즉 大寶123)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道薩城124)을 함락시키고 고구 려는 백제의 金峴城125)을 함락시켰다. 왕이 두 나라 군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져서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서 왕을 뵙게 하니, 왕이 법사를 僧統118)으로 삼았 119) 120) 다. 이때 비로소 百座講會 와 八關의 법 이 시작되었다. 로 적당치 않다. 117) 惠亮法師 : 고구려의 승려. 고구려에서 정치가 혼미에 빠지자 거칠부가 고구려에 밀정으로 갔을 때 혜량은 신라에 귀부할 결심을 하고 약속하였다는 일화가 본전에 보이고 있다. 그가 어느 곳의 사찰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칠부가 죽령 이북을 점령하였을 때에 그를 다 시 만난 점으로 보아 현재의 경기도 이남 충북 이북의 어느 절에 머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는 진흥왕 12년(551)에 신라에 귀화하여 거칠부의 천거에 의하여 寺主[國統]가 되었다. 그는 신 라에서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최초로 주관하였다. 118) 僧統 : 신라 최고의 僧職으로 國統 혹은 寺主라 하였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惠亮이 처음으로 승통에 임명되었다. 직관지에는 寺主[國統]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 事 권4 義解篇 慈藏定律條에 慈藏을 大國統으로 삼은 후 승려와 관련되는 일체의 일을 僧統에 게 맡겨 주관하게 하였다고 한 사실 등에서 미루어 볼 때 僧統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통 에 대한 자료는 삼국유사 권3 興法篇 原宗興法條에 國統惠隆 과`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a 의 前國統僧惠興 이 있다. 119) 百座講會 : 많은 승려를 모아 놓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불경을 읽는 법회. 百高座講 會라고도 하고 또는 仁王會 혹은 仁王道場이라고도 한다. 이는 국왕이 반드시 시주가 되어 국가 의 안태를 기원한다. 仁王道場은 설법되는 불경이 仁王經 임을 지칭한 말이다. 仁王般若經 護國品에서는 갖가지 재난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는 국왕이 이 경을 하루에 두 번씩 외 워야한다고 쓰여 있다. 특히 이 법회를 열 때에는 반드시 불상과 보살상 나한상을 100개씩 모 시는 한편, 100명의 법사를 청하여 강경하도록 하되, 그 100명의 법사들이 각각 높은 사자좌에 앉도록 하고, 그 앞에 100개의 등불을 밝히고, 100가지 향불을 피우며, 100가지 색깔의 꽃을 뿌 려 三寶를 공양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진흥왕 12년(551)에 혜량법사에 의하여 백 좌강회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120) 八關의 법 : 불교의 八關齋를 지칭하는데, 불교의 八關齋戒와 고유신앙이 결합된 종교의식으로 팔관회라고도 칭한다. 팔관재의 계율은 在家信徒들이 하루낮 하루밤 동안 지키는 계율로, 8關은 살생 도둑질 淫行 등 8가지의 죄를 금한다는 뜻이고 齋는 오전 중에 한 끼만 먹고서 마음의 不淨을 맑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신라의 팔관회는 전통적인 祭天儀禮를 승화 포섭한 불교행 사로 부처, 보살 梵天 8部大衆을 공양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이 행사의 직접적 목적은 허공에 떠 돌아다니는 전몰장병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법회는 진흥왕 12(551) 혜량법사에 의하 여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진흥왕 33년(572) 10월 20일에 전몰장병을 위하여 外寺에서 7일 동안 개최한 바 있다. 121) 異斯夫 :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이며 정치가이기도 하다. 나물왕의 4대손이며 탁부 출신이다. 또 다른 이름인 苔宗 은 이사부를 訓讀한 것이다.`丹陽新羅赤城碑a에는 伊史夫 (관등 伊干支), 三國遺事 에는 伊宗, 日本書紀 권17 繼體紀에는 伊叱夫 智 로 표기되어 있다. 智證王 5 년(505) 悉直州가 설치되자 그 州의 軍主로 임명되었고, 동왕 13년(512) 伊 으로서 何瑟羅州 軍主가 되었을 때에 于山國을 정복하였으며, 眞興王 2년(541)에 兵部令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엄무를 담당하였다. 동왕 6년(545)에는 이찬으로서 국사의 편찬을 건의하였고, 동왕 11년 (550)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지친 틈을 타서 고구려의 道薩城과 백제의 金峴城을 빼앗 아 두 성을 증축하였으며, 동왕 23년(562)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斯多含과 함께 5만의 기병 을 인솔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122) 김씨 : 三國遺事 권1 紀異篇 智哲路王條에는 異斯夫를 朴伊宗이라 하여 박씨로 하였는데, 이 런 예는 提上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異斯夫는 내물왕의 4대손이므로 김씨임이 분명하다는 설 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45쪽).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성이 사용되지 않았다. 후에 성이 사용되면서 성을 追記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123) 大寶 : 梁 簡文帝代의 연호로 년 2년간 사용되었다. 大寶 원년은 550년이다. 124) 道薩城 :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①음성의 백마령으로 보는 견해(신채 호, 1977, 조선상고사 Ⅰ, 동서문고, 270~272쪽), ②천안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06쪽), ③충북 증평읍의 尼聖山城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頭陀山城 일대로 보는 견해 (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9쪽) 등이 있다. 그런데 천안지역은 고려 태조때 비로소 천안도독부가 설치된 곳이었고, 백제 성왕때 한강하류 지역에 진출하는 데 전략 적 요지이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공취할 경우 백제의 반발이 크게 예상된다. 또한 신라의 화령로 와 추풍령로를 통한 북진이 청주지역을 경유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증평 이성산성설이 보다 설득 력을 가진다(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 호, 371쪽). 125) 金峴城 :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金峴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279 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쳐서 두개의 성126)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甲士127)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를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 곳과 가는 길이 어디가 좋은가를 묻자,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하고 돌아가니 이사부가 [이를]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制書130)를 내리어 [인문을] 神丘道 副大摠管에 임명하고 軍中에 나갈 것을 명하였다. 金仁問128)은 字는 仁壽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중략) 신라가 여러 차례 백제의 침공을 받자,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그 수치를 씻으려고 숙위하러 가는 인문을 통하여 군사를 청하게 하였는데, 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神丘道大摠管129)으로 임명 드디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德物島에 이르렀는데,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 진주 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에 군사를 싣고 맞이하게 하였다. [당군이] 熊津口에 이 르니, 적군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그 도성 에 들어가 멸하였다.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孝, 왕자 泰 등을 포로로 잡고 당으로 돌아갔 다. 대왕이 인문의 이룬 공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각간으로 높여주 었다. 그 후 곧 [인문은]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중략) 충남 연기군 전의의 金城山, 金伊山城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406쪽), ②고구려 때 今勿奴郡으로 보아 鎭川지역으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앞의 글, 47쪽) 등이 있으나, 진천 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金城山城 은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금성산(424m)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백제계 토기편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는데, 증평에서 청원 옥산을 거쳐 금강의 한 지류인 미호천변을 따라 연결 되는 통로가 있다. 이곳 미호천과 금강이 하류하는 주변 일대에는 청원 문의 방면의 신라계 양성 산성, 고구려계 청원 남성골유적, 백제계 석실분과 산성 등이 밀집해 있어서 5~6세기 삼국간의 첨예한 쟁패지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금현성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金 城山城 일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126) 두개의 성 : 도살성과 금현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를 또 다른 고구려의 2개의 성으로 보고`단 양신라적성비a에 나오는 赤城과 高頭林城으로 보고 있는 견해가 있으나(朱甫暾, 1984, 丹陽赤 城碑의 再檢討, 경북사학 7, 40 41쪽), 문맥으로 보아 앞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가르키는 것 으로 봐야 한다. 127) 甲士 : 무장한 군사 즉 精兵을 말한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1년(550)년조에는 군사 1천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128) 金仁問 : 무열왕의 둘째 아들. 자는 仁壽. 어려서부터 유가서는 물론 장자 노자 불서 를 많이 섭렵하였다. 특히 隷書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향악을 잘 하였다. 김인 문은 진덕여왕 5년(651)에 파진찬으로서 23세의 나이로 처음 입당한 이후 전후 7차례에 걸쳐 견 당사로 파견되었다. 무열왕 7년(660)에 神丘道副大摠管이 되어 당나라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백 제를 멸망시켜 그 공으로 角干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문무왕 원년(661)과 동왕 8년(668)에는 신 라의 고구려 정벌군을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문무왕 8년에 李勣을 따라 입당한 이후 나당간 정치적 알력의 와중에서 김인문은 親唐的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줄곧 당 에 머물다가 효소왕 3년(694)에 66세의 나이로 당나라 長安에서 죽은 후 유해만이 송환되어 신 라의 西原 아래에 묻혔다. 129) 神丘道大摠管 : 神丘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임시 관직이 다. 神丘는 燕然山을 높여 말한 것인데( 文選 권56, 封燕然山名), 燕然山은 외몽골 三音若顔部 上元(73) 원년(문무왕 13: 673)에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 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劉仁軌131)를 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의 杭愛山의 옛 이름으로서 後漢의 車騎將軍 竇憲이 永元 원년(89)에 흉노를 북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 後漢書 권23, 列傳 竇融傳附 竇憲傳). 따라서 神丘道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北伐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길을 수식하고자 붙인 것으로 보인다. 舊唐書 권83 열전 蘇 定方傳과 같은 책 권199 신라전에는 熊津道大摠管 이라 하였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 수 록된 都督府의 13縣 중에 神丘縣이 있는데, 이는 당나라가 백제고지에 설치하고자 했던 웅진도 독부에서 사비성 부근지역을 개편한 이름인 듯하다. 한편 摠管은 군사를 지휘 감독하는 관직으 로 주로 北周 및 隋 唐代에 사용되었다. 130) 制書 : 制는 황제의 말이고, 書는 그 말을 쓴 것으로 황제의 명령을 뜻한다. 詔勅의 한 가지이다. 131) 劉仁軌 : 생몰연대는 년으로 享年 84세이다. 중국 당나라 太宗~高宗代의 장군. 자는 正則으로 卞州 尉氏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해 독학으로 두루 통달하게 되었 다. 그는 河南道按撫大使 임괴(任 )의 천거로 출사한 이래 당나라 태종 貞觀 15년(641)에 給事 中에 임명되었다. 660년 당 고종이 백제를 공격할 때 수군을 감독 통솔하여 군량을 운송하는 일 을 맡았으나 풍랑을 맞아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 일로 李義府의 참소에 의해 靑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곧 실각당하고 목숨만을 모면한 채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사비성을 진수하고 있던 당군이 위험에 처하자 고종은 유인궤를 발탁하여 檢校帶方州刺 史로 삼고 왕문도를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그 후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후 檢校熊津 都督으로 삼아 당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665년 8월에 유인원과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 리산에서 맹세를 하도록 하고 귀국하였다. 668년에 그는 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이 되어 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薛仁貴와 함께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에 주둔하여 고 구려고토를 지배하였다. 669년 회군한 이후 670년에 농주자사에, 674년에 계림도총관이 되어

280 558 군사를 일으켜 와서 치고, 詔書로써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때 인문은 右驍衛 員外大 將軍 臨海郡公132)으로 당나라 수도에 있었는데, 그를 세워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시켜 형 133) 134) 을 대신케 하고자 鷄林州大都督 開府儀同三司 에 봉하였다. 인문이 간곡히 사퇴하였 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여 드디어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왕이 사절을 보내 공물 559 권45 列傳 5 昔于老135)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水老의 아들136)이라고도 하였다>. (중략) 을 바치며 또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인문도 중도에서 [당나 라로] 돌아가 전의 관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신라에, 이후 吐藩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84 열전 34 유인궤전, 新唐書 권108 열전 33 유인궤전, 瀧川政次郞, 1984, 劉仁軌傳 上 中 下, 古代 文化 집 ;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0~62쪽을 참조할 것. 132) 右驍衛 員外大將軍 臨海郡公 : 우효위는 당나라 16위 중의 하나인 부대 명칭이고, 원외대장군 은 정원이 비상설의 대장군 직이었다. 김인문에게 고구려 멸망의 공로로 당나라에서 봉해준 작 호이다. 133) 鷄林州大都督 開府儀同三司 : 이 책봉기사의 원문 뒷부분의 新羅王 3자가 더 있었다고 판단된 다. 계림주는 신라를 의미하며 開府 는 開建府署의 뜻으로 漢代에 三公[司馬 司徒 司空]들만 이 설치할 수 있던 독자적 관부였으나, 후대에는 군벌 장군들도 이를 갖게 되어 보통 外方의 군 사 실력자들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儀同三司 는 三司[三公]과 동등한 지위의 大將軍[文官은 光 祿大夫 이상]들에게 수여한 작위인데, 隋 唐代에는 실직 없는 명칭만 남게 되었다. 개부의동삼 사라는 직은 당나라 종1품의 文散官 벼슬로서, 儀制가 三公과 같다는 뜻의 명칭이다. 신라에서 는 진덕왕이 처음으로 이 벼슬을 받았고, 그 후 무열왕, 문무왕, 김인문, 성덕왕 등이 이 직함을 당으로부터 받았다. 고구려의 장수왕 문자왕 평원왕 영양왕도 각기 宋 梁 後周 隋로부 터 같은 벼슬을 받았다. 이는 신라 문무왕의 책봉을 취소하고 당시 당의 서울에서 숙위하던 김인 문을 형식적으로 신라 왕에 임명하면서 당이 수여한 관작이다. 134) 이때 인문은 鷄林州大都督 開府儀同三司에 봉하였다 : 이 기사는 신당서 권220 열전 145 동이 신라전의 기사를 옮긴 것으로 당시 당의 서울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을 형식적으로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를 침입한 것을 기록하였다. 당의 문무왕에 대한 관작의 삭탈은 책봉의 승인 을 취소한다는 뜻이지만 신라에 있어서는 정치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인문을 신 라 왕으로 삼은 것은 그가 친당파 인물로서 당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 한 당의 움직임에 대해 신라는 형식적으로나마 사죄사를 파견함으로써 김인문은 중도에 당에 돌 아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문무왕은 여전히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당군을 공격하여 실질적인 삼국통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35) 昔于老 : 신라의 왕족으로 장군을 역임하였다. 奈解尼師今의 아들, 또는 각간 水老의 아들이라고 도 한다. 訖解王의 아버지로 부인은 助賁王의 딸 命元夫人이다. 다른 이름으로 于老音이라고도 한다( 三國遺事 王曆 乞解尼叱今). 나해 이사금 14년(209)에 浦上 8국이 가라를 침입하여 그 왕자가 구원을 요청해 오자 이찬 利音과 함께 6部의 군사를 이끌고 이를 섬멸하고 포로가 된 6 천 명을 빼앗아 되돌려 주었으며, 조분 이사금 2년(231)에는 이찬으로서 감문국을 토벌하여 郡 으로 삼게 하였다. 동왕 4년(233)에는 왜인이 쳐들어 왔을 때에 沙道에서 火攻法으로 왜의 전함 을 불태우고 섬멸시켰다. 동왕 15년(244)에는 서불한이 되어 군사의 일을 담당하였고, 다음해에 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해 오자 나가 막았으나 패배하여 馬頭柵에까지 후퇴하여 지켰고, 왜국 사신에게 희롱하는 말을 하여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죽은 해를 본서 권2 신라본 기에서는 첨해왕 3년(249)이라 하였고, 본 열전에서는 동왕 7년(253)이라고 적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로의 出自를 신라본기에서는 나해왕의 태자라고 하였으나, 열전에서는 단순히 나해왕의 아 들 혹은 각간 水老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三國遺事 王曆에서는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 다. 이처럼 기록에 따라서 우로의 출자가 다르게 기술된 것은, 우로는 원래는 나해왕의 둘째 아 들이었는데, 맏아들인 奈音[일명 利音]이 나해왕 25년에 죽자 그를 이어 태자가 되었던 데에 기 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서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조에 보이는 동왕의 왕자 利音[일 명 奈音]의 관력이 우로보다 훨씬 앞서고 있어, 아무래도 利音을 太子, 우로를 次子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또한 석우로의 연대는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우로의 아들 흘해는 열전에 우 로가 죽을 때에 걷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고 하였고, 신라본기 흘해왕조에서도 즉위시에 나이가 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흘해왕의 즉위 연대인 310년은 우로가 죽었다고 하는 249년 또는 253년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신라의 世系가 후에 조작된 근 거로서 신라의 초기 편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근거로 삼는 견해도 있다(金光洙, 1973, 新 羅 上古世系의 再構成 試圖, 東洋學 3, 372쪽). 우로전설은 본 열전과 신라본기에 각기 실려 있으나 열전의 기사는 본기의 그것을 재록 집성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본기에 보이는 기사 내 용이 열전에서는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우로전설에 대하여 본래 동해안의 于柚村 지역에 퍼져 있던 설화이었는데, 신라의 왕족의 영웅신화로 변개 확대되어 정리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기동, 1985, 于老傳說의 世界, 한국고대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83~201쪽). 우로 설화 는 일본서기 권9 신공 섭정 전기 12월조에 실려 있는데, 이 기년을 조정하면 320년이 되어 본 서 기록과 차이가 있다. 136) 水老의 아들 : 이는 우로가 왕자가 아니라는 다른 기록을 전한 것이다.

281 560 沾解王137)이 재위하였을 때 沙梁伐國138)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갑자기 배반하여 백 제에 붙으므로,139)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나라를] 토벌하여 멸하였다.140) 朴堤上141) <*또는 毛末142)이라고도 하였다.>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세손이다. 할아버지는 阿道 葛文王143)이고, 아버지는 파진찬 勿品144)이다. (중략) 제상이 돌아다보며 내가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볼 것이 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고는 곧바로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배반하여 도망해 온 자와 같 이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백제 사람으로서 전에 왜에 들어간 자가 신라가 고구려 와 더불어 왕의 나라를 도모하려고 한다고 참소하였으므로, 왜국이 드디어 군사를 보내 137) 沾解王 : 신라의 제12대 임금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理解 尼叱今 이라 하고 세주에 解 라 하였다. 骨正의 둘째 아들로 조분왕을 이어서 즉위하였다. 이 왕대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고, 南堂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138) 沙梁伐國 : 현재의 경북 尙州市로 沙伐國으로도 칭해졌다. 尙州(상주시)의 옛 국명이며 辰韓 소 국의 하나이다. 東國輿地勝覽 권28 尙州牧 古跡條에 의하면 屛風山 아래 沙伐國古城(상주시 屛城洞)이 있고, 성 옆에 있는 구릉을 사람들이 沙伐王陵이라고 전한다고 하였다. 139) 沙梁伐國이 전에 배반하여 백제에 붙으므로 : 신라와 백제는 3세기 경까지만 해도 중국인 들에게 진한과 마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되었다. 그 당시 진한과 마한은 형식적으로는 辰王에 속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각 소국들이 독자성을 갖고 분립해 있었다. 그리고 진한과 마한 은 대략 지역적 구분이 있었으나 획정된 경계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주에 있 었던 사량벌국의 경우도 형식적으로 신라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향배를 달리하여 백제에 귀부할 정도로 독자성을 유지한 소국이었음을 반영해 준다. 140) [석]우로가 (그 나라를) 토벌하여 멸하였다 : 沾解王으로부터 2대 뒤인 儒禮王 14년경에도 청도에 있던 伊西古國이 金城을 來侵하였다는 것을 들어 이를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65쪽). 3세기 중엽에 신라가 우로를 보내 사량벌국을 정 벌하고 州로 편제하였다는 기사(본서 권34 잡지 3 지리 1 상주)는 신라인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서의식, 1991, 신라 상고 초기의 진한제국과 영토확장, 이원순교수정년기념역사학 논총, 교학사, 22~27쪽). 그 이후에도 사량벌국은 한동안 현재의 상주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세기 후반대에 가서 신라가 사벌국을 병합한 것으로 수정 하여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동, 1985, 앞의 글, 192쪽). 141) 朴堤上 : 신라 눌지왕 대의 충신으로 이름은 毛末이라고도 한다.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 금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阿道 葛文王이고 아버지는 파진찬 勿品이다. 三國遺事 에서는 성 을 김씨라 하여 본서와 다른 기록을 보이고 있으나 후대에 들어와서 성씨관념이 발달하면서 그 의 모계나 부계의 성에 따라 성을 박 또는 김이라고 한 것 같다(김의규, 1979, 신라 모계제 사회 설에 대한 검토, 한국사연구 23, 53쪽). 박제상은 揷粱州干이었는데, 나마의 지위로서 눌지 마립간 2년(418) 고구려에 가서 왕의 동생인 卜好[일명 寶海]를 데리고 왔으며, 또한 왜에 인질 로 간 왕자 未斯欣[일명 美海]을 도망쳐 오게 하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왜에서 절의를 굽히 지 않아 불에 태운 후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대아찬에 추증되었다. 이와 같은 설화가 三國遺 事 권1 紀異篇 奈勿王 金堤上조에도 실려 있다. 그가 삽량주간이었다는 점에서 양산지방에 세 력근거를 둔 자방세력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용선, 1979, 박제상소고, 全海宗박사화갑기념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케 하였다.145)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巡邏軍을 사로잡 史學論叢, 일조각, 609~610쪽). 142) 毛末 : 堤上의 이름. 日本書紀 권7에는 毛麻利叱智(叱智는 존칭)라 하였다. 毛末 毛麻利 는 堤上과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毛의 訓은 톨 토 털 로, 현대어의 둑 독 (堤 堰) 에 당하고, 末 麻利는 上 首의 語인 마리 라고 해석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665쪽). 143) 阿道葛文王 :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박제상의 할아버지이다. 신라 제7대 逸聖尼師今代( )를 전후하여 생존하였다. 그는 일성 이사금 15년(148)에 葛文王에 봉해졌다. 갈문왕은 왕의 친인척에게 봉하여진 것이며,`영일냉수리비a의 至都盧葛文王 의 존재로 보아 생전에도 봉하 여졌을 뿐 아니라 왕위계승권도 있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한편 일성 이사금의 父로 비정하는 견 해도 있다(이기백, 1973,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9 11쪽 및 1974, 신라정치사 회사연구, 일조각, 10 11쪽). 박아도의 생존연대는 그대로 믿을 수 없어도, 그의 孫으로 되어 있는 박제상이 활약하던 제19대 눌지 마립간시대( )와는 너무도 큰 시간적 차이를 보이 고 있다. 따라서 박제상의 祖가 아도갈문왕이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용선, 1979, 앞의 글, 605쪽). 144) 勿品 : 박제상의 아버지로 관등은 파진찬이라 하였으나 그 아들 박제상이 받은 관등이 제11위인 나마였으며, 사후 추증받은 관등인 대아찬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를 믿을 수 없으며, 따라서 박제상의 가계에 대한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용선, 1979, 앞의 글). 145) 신라가 고구려와 순회 정찰케 하였다 :`광개토왕릉비a에 보듯이 400년 전쟁은 고구려와 왜가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을 치른 사례가 된다. 이 전쟁이 끝난 직후 백제와 신라가 왜를 우군 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신라는 앞으로 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왜와 관 계개선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왜도 399년과 400년에 걸쳐 신라 침공작전에 참전해 보았지만 크게 참패당한 채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종래 적대적이었던 신라와의 관계 개선에 응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에 국가간의 신뢰의 상징인 인질을 요청하였고 이에 신라 는 402년 내물왕자 未斯欣을 파견하는 조치로 화답하였다. 이러한 왜의 인질요청은 397년 백제 로부터 얻은 경험에서였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왜를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국가간의 신뢰의 표상인 인질파견을 통한 외교전을 벌인 것이다. 신라의 인질외교는 대내적으로 석씨계의

282 아 죽였으므로, 왜왕은 이에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기었다. 또한 신라왕이 未斯欣과 제 ( 項)152)도 함께 少監153)의 관직으로 전선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泉山154)의 못가로 물러 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제상을 정말 배반한 자로 여기었다. (후략) 가 군대를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올 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 갈고리로 貴山(89)은 沙梁部 사람이다. (중략) 진평왕 建福146) 19년 壬戌(진평왕 24년: 602)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147) 阿莫 城148) <*莫자는 暮로도 썼다.>을 포위하니, 왕이 장군 파진간 乾品149) 武梨屈 伊梨伐, 급 간 武殷150) 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는데, 貴山151)과 추항 [무은을]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다달아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 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며 적 수십 인을 격살하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태워 보낸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 르며 힘껏 싸우니 모든 군사가 [이것을] 보고 용감히 공격하였다. 적의 넘어진 시체가 들 판에 가득하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도 온몸에 창에 찔려 세력 배경을 가진 實聖王이 경쟁세력인 김씨세력을 정략적으로 왜에 추방하려는 측면도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대왜 군사동맹을 약화시켜 왜를 친신라노선으로 선회시키려는 외교 전략 에서였다. 이러한 신라의 의도는 왜가 순라군 파견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의 정세를 실제 정탐함 에 따라 성공하지 못하였고 신라 왕자 未斯欣은 한동안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2005, 5세기 백제와 왜의 관계, 왜 5왕 문제와 한일관계 한일관계사연구논집 2, 경 인문화사, 60~61쪽을 참조할 것. 146) 建福 : 신라 진평왕대의 연호로 진평왕 6년(584)부터 선덕왕 2년(633)까지 사용되었다. 147)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 이 기록은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602)조와 본서 권27 백 제본기 무왕 3년(602)조에 다 같이 수록되어 있으나, 백제본기의 기록이 보다 상세하다. 백제본 기에 의하면 이때 백제는 佐平 해수(解讐)가 步騎 4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진격했다고 하였다. 148) 阿莫城 : 현재 남원시 운봉면의 성리산성(1979, 곽장근, 1999, 호남 동부지역 석곽묘연구, 서 경문화사, 61쪽)이나 팔랑티 북쪽에 자리잡은 남원 성산리산성(김태식, 1993, 가야연맹사, 일 조각, 115쪽)에 비정된다. 이 중 운봉 성리산성은 장수군 번암에서 운봉고원으로 올라가는 백두 대간 산줄기 정상부에 위치하면서 치재와 복성이재 등 큰 고갯길이 있는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 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막산성으로 보고 있다(곽장근, 2005, 웅진기 백제와 가야의 역학관계 연구, 백제연구 44, 111쪽). 본서 권34 잡지 地理 1 康州 天嶺郡條에는 雲峰縣 本母山縣[或 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라 하여 母山城으로도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9 운봉현조에 의하면 雲峯縣은 본래 신라 母山縣이다[일명 景德, 阿英城, 阿莫城이라고도 한 다]. 라고 하였으며, 같은책 산천조 八良峴條에는 荒山의 동쪽 5리에 있다. 바로 경상도 함양군 의 경계이다. 신라와 백제시대로부터 요해로 불리운다. 로 되어 있다. 결국 아막산성은 소백산 맥의 팔랑치를 통해 남강수계로 진출하는데 요충에 자리하고 있다. 149) 乾品 : 신라 진평왕대의 진골 출신 장군으로 그에 대한 행적을 알려져 있지 않다. 진평왕 24년 백제군과 아막성 전투에서의 파진찬의 관등으로 신라측의 主將이었다. 150) 武殷 :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으로 화랑인 貴山의 아버지이다. 아막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의 관등 은 級干이었으나 뒤에 阿干까지 승진하였다. 무은에 대해서는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을 참조할 것. 돌아오는 도중에서 죽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阿那의 들판155)에서 [군사들을] 맞으 면서 시체 앞에 나가 통곡하고 禮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귀산에게는 관등 奈麻156) 151) 貴山 : 신라 진평왕대의 阿 武殷의 아들로 沙梁部人이다. 신라의 화랑으로서 친구 추항( 項) 과 함께 圓光法師로부터 世俗五戒를 받았다. 후일 백제와의 모산성 전투 때에는 少監으로 출전 하였는데, 臨戰無退의 정신을 발휘하여 전사하였다. 전사 후 그는 奈麻의 관등을 추증을 받았다. 상세한 것은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을 참조할 것. 152) 추항( 項) : 신라 沙梁部人으로 花郞인 귀산의 친구이다. 귀산과 함께 圓光法師로부터 世俗五戒 를 받았으며, 백제와의 母山城 전투때에는 少監으로 출전하였다가 귀산과 더불어 전사하였다. 전사 후 그는 大舍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 및 권45 귀산전을 참조할 것. 153) 少監 : 大監을 보좌하는 무관직이다. 이 중 屬大官 은 大官大監의 지휘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는 少監은 각각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는 隊大監 예하의 군관으로 생각된다. 본서 권45 열전 貴山전에는 귀산이 少監으로서 大監인 아버지 武殷을 따라 출전한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소감에는 大監의 자제나 혹은 같은 部의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가 임명 되었다는 견해도 있고(井上秀雄, 1974,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쪽), 이와는 달리 평 상시에는 편제상으로만 존재하다가 비상시에 군부대에 배속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李文基, 1997, 신라병제사연구, 일조각, 335~336쪽) 있다. 154) 泉山 : 泉山은 현재 남원시 운봉면 황산 일대로 비정된다(전영래, 1985, 백제 남방경역의 변 천,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53쪽). 155) 阿那의 들판 : 현재 경주시 서악동의 하평들로 추정되나 분명치 않다. 156) 奈麻 : 신라 17관등 중의 11번째 관등으로 奈(乃)末, 那末이라고도 하였다. 나마와 대나마의 복 색은 푸른색이었고, 나마에는 重奈麻에서 7重奈麻까지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마의

283 564 를, 추항에게는 大舍157)를 각각 추증하였다. 565 의 문집159)에는 太師160) 侍中161)에게 올린 편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 다. 마한은 고구려(高麗),162) 변한은 백제,163)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164) 고구려와 백제 권46 列傳 6 崔致遠158)의 자는 孤雲<*또는 海雲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서울 沙梁部 사람이다. (중략)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언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표기는 奈麻-奈(乃)末-奈麻-奈(乃)末의 순서로 시기에 따라 표기가 변천되었다(權悳永, 1991, 國史館論叢 21, 36 49쪽). 157) 大舍 : 신라 17관등 중의 12번째 관등. 大舍帝, 大舍第, 韓舍라고도 하였다. 이 관등은 4두품이 승진할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대사 이하의 복색은 黃色이었다. 이 대사는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舍知(小舍)에서 분화 격상된 것으로 생각되며, 4두품 출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 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5의 주 101)을 참조할 것. 158) 崔致遠 : 857?. 신라말기의 6두품의 대학자로 자는 孤雲, 또는 海雲이다. 아버지는 肩逸이며 형 중에 승려 賢俊과 定玄師가 있었다. 경주에서 태어나 12살 때(景文王 8년, 868) 唐나라에 유 학하여 학문을 익혀 18세가 되던 경문왕 14년(874)에 賓貢科에 합격하고 宣州 漂水縣尉가 되었 다가 황소의 난에 高騈의 從事官이 되어 討黃巢檄 을 지어 문명을 천하에 날렸다. 28세 때(憲 康王 11년, 885)에 귀국하여 다음 해 중국에서 고병의 막부에서 지었던 글을 정리하여 桂苑筆 耕 20권을 왕에게 바쳤고, 또한 왕명에 의하여`大崇福寺碑文a의 명문을 지었다. 大山(전북 정 읍시 칠보면)太守, 天嶺郡(경남 함양군)太守, 富城(충남 서산시)太守를 지내다가 진성여왕 7년 (893)에 賀正使로 당에 다녀왔고, 眞聖女王 8년(894)에 시무 10조를 올린 바 있다. 이를 왕이 가납하여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그의 요구는 당시에 거의 실시되지 못한 듯하다. 42세 가 되던 효공왕 2년(898)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합천 가야산에 그의 형인 승 賢俊 및 定玄師와 道友를 맺고 지내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의 국내활동은 908년`新羅壽昌郡護國城 八角燈樓記a를 지었다는 기록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가 언제 죽었는가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이설이 분분하다. 그의 문집으로는 중국에서 지은 시문집은 桂苑筆耕 20권, 中山覆 集 5권, 今體詩 1권, 五言七言今體詩 1권, 雜詩賦 1권, 四六集 1권이 있었고 국내에 서 지은 글은 文集 30권으로 편집되었다. 역사서로 帝王年代曆 을 지었으나 현전하지 않으 며, 불교관계 저술로는 浮石尊者傳 1권, 法藏和尙傳 1권, 釋利貞傳, 釋順應傳, 四山碑 銘 등이 있었다. 이 중 오직 桂苑筆耕 20권과 法藏和尙傳 1권, 四山碑銘 만이 현전한다. 그는 儒 佛 道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文昌侯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국자감과 향교의 文廟에 배향되었다. 159) 문집 : 이는 30권으로 김부식이 본서 편찬에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0) 太師 : 당나라 三師인 正一品의 太師, 太傅, 太保 職의 하나로서 일정한 관부에 소속되지 않고 천자의 자문에 응하는 정1품의 관직이다. 태사는 원래 周代 三公에서 비롯된 최고위 관으로서 천자를 知育 교육을 담당한 천자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晉代 이후 三公의 칭호는 三師로 개칭되 어 영예직으로 바뀌었지만 제1품관으로서 역대 최고위의 현관으로 대우를 받았다. 161) 侍中 : 당나라 문하시중 직을 말한다. 시중은 원래 漢代에 시종직이었는데, 황제의 수레와 옷 등 을 담당하는 겸직관이었다. 魏晉代 이후에는 문하성의 대신을 시중이라 하여 재상직에 속하였 다. 隋代에는 門下省侍內 또는 納言으로 칭하였고, 唐代에는 中書省의 中書令을 左相으로 불렀 고 시중을 右相으로 불렀다. 구당서 권42 지 22 직관 1에 의하면 관질은 정3품이다. 曹魏代 이후 門下는 中書와 함께 황제의 측근 비서기관으로서 그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다. 그 중 문하는 황제를 보필하는 측근기구로서 侍中, 散騎常侍, 給事中 등의 관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황 제의 고문에 응하거나 간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북조 이후 문하는 가문을 배경으로 귀족적 인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황제를 충고하는 자문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 당대에 이르러 문하는 종래 황제의 개인 비서기관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중앙행정의 중추기구로서 발전하게 되 면서 3성의 하나로 국가 정책을 심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대 문하성에는 封駁이라는 거부 권이 있어서 중서성에서 입안된 국가 정책을 거부하여 중서성에 뒤돌려 보내는 권한을 행사하였 다. 이로써 당대의 황제권이 문벌귀족들에 의해 제약을 받는 정치 운영을 하게 되었다. 162) 마한은 고구려(高麗) : 고구려가 마한 땅에서 일어난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서술한 것으로 당나 라 지식인들의 우리나라 삼한 삼국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와는 달리 보장왕의 손 자인 高震의 묘지명에는, 부여의 貴種이며 진한의 令族이다. 라고 하여 고구려를 삼한 중 한 나 라인 진한 땅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63) 변한은 백제 : 백제가 변한 땅에서 일어난 것을 잘못 인식하여 서술한 것으로 당나라 지식인들의 우리나라 삼한 삼국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와는 달리`扶餘隆墓誌銘a에서는 그의 출자를 百濟 辰朝人 이라 하였고, 본문 중에 백제를 兩貊 馬韓 帶方 桂樓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百濟 辰朝人 이라 한 것은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辰 國 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때 백제가 마한고지에서 일어난 것을 삼한 전체로 통칭하여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양기석, 1995, 百濟 扶餘隆墓誌銘에 대한 檢討, 국사관논총 62, 153~156쪽을 참조할 것. 164) 마한은 고구려 신라가 되었습니다 : 이는 당나라의 지식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삼국 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당나라 사람들이 삼국을 삼한으로 통

284 가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서 남으로는 吳 越의 나라165)를 침입하였고, 북 나라 황제가 통제하지 못하여 요동을 정벌하였고, 貞觀 연간169)에 우리 당나라 태종 황제 으로는 幽州166)의 燕과 齊, 魯나라167)를 휘어잡아 중국의 큰 좀(巨 )이 되었습니다.168) 수 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170) 바다를 건너 천벌을 집행하니171) 고구려가 그 위세를 두 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文皇172)께서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173) 이때 우리 무열 대왕께서 지극한 정성(犬馬)174)을 다하여 한 지방의 전란을 평정하는 데에 도움을 청하여 칭하여 부르는 사례가 있다.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즈음하여 의자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三 韓之域 五郡之境 이라고 표현한 것(이기백 편, 1987,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 일지사, 299~302쪽), 기세가 삼한을 제압하고 명성은 5부에 우뚝 솟았다. 라고 한 고구려`泉南生墓 誌銘a등에서 삼국을 삼한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는 당나라 사람들이 삼국을 종족적 지역적으로 총괄하여 삼한으로 일컫는 것이다(노태돈, 1982,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 천, 한국사연구 38, 132쪽). 이는 삼한이 옛 진국 땅이었다는 후한서 동이전 한조의 서술 과, 그리고 백제가 삼한의 하나인 마한 땅에서 일어났다는 삼국지 동이전 한조 등의 서술을 바 탕으로 형성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당나라 지식인들의 삼한 삼국 인식이 어떤 체계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인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양기석, 1995, 앞의 글, 153~156쪽). 최치원의 이러한 삼한 삼국의 잘못된 인식도 당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서술은 삼한과 삼국의 관계에 대한 국내의 최초의 설이다. 조선 초기의 權近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고구려, 진한은 신라라는 설을 주장하였고, 17세기의 韓百 謙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가야, 진한은 신라라는 설을 제창하여 그 이후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 이 되었다. 그러나 千寬宇는 삼한족의 이동설을 들어 마한이 고구려 지역에 살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삼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천관우, 1976, 삼한의 성립과정, 사학연 구 26 참조). 165) 吳, 越의 나라 : 吳는 현재의 중국 강소성 지역이고 越은 현재의 절강성 지역에 있던 춘추전국시 대의 나라 이름이다. 두나라가 모두 양쯔강 하류의 남쪽지역에 해당한다. 166) 幽州 : 중국 漢代 12州의 하나로 현재 河北省 順天 永平 및 遼寧省 錦州 일대이다. 유주는 舜이 冀州 동북의 땅을 나누어 설치하였다고 하며, 周 漢 西晉 後魏 唐 등이 모두 이곳에 州를 설치하였으나, 五代 말에 遼의 땅이 되었다. 유주의 치소는 西晋代를 제외하고는 거의 (河北省 大興縣 서남, 현재의 북경)에 있었으며, 漢代에는 代郡 上谷郡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玄 郡 樂浪郡 등이 이에 속하였다. 167) 燕과 齊, 魯나라 : 燕은 유주에 속한 현재의 북경 일대이고, 齊는 산둥반도 일대에 있었던 나라 를 말하며, 魯는 산두안도 서남쪽에 존재했던 나라 이름이다. 168)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의 큰 좀(巨 )이 되었습니다 :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땅을 좀이 갈아 먹는 것처럼 중국을 늘 괴롭히는 존재였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백제가 강남의 오월지방, 그리고 산둥지방과 화북의 유주 지방을 장악했다는 이른바 대륙진출설 을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위 기록을 종합해 보면 북쪽이 요하 유역과 발해만을 낀 중국의 동북부 해안지대와 산둥반도 일대, 그리고 양쯔강 하류 이남지역에 이르는 지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침 략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기사에 의하면 백제가 요서지역 뿐 아니라 산둥반도에서 양쯔강 이남에 이르는 중국 동부해안지대에도 진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최치원의 이러한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 과 같이 악한 짓을 계속하므로 무열왕이 입조하여 그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 종 황제 顯慶 5년(태종 무열왕 7: 660)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사와 범선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크게 격파하고 이어 그 땅에 부여도독부175)를 설치하고 유 민들을 불러 안착시키고 중국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는데, 성향이 서로 달라 자주 주장은 외교문서를 통해 수사적 과장과 왜곡이 들어갈 개연성은 높지만 당시 당나라와 신라 지 식인들 사이에 이러한 인식이 일정하게 공유하고 있었음을 반영해 준다. 백제의 대륙진출설에 대해서는 이 기록 이외에 중국 사서인 宋書 남제서 양서 백제전과 같은 주로 남조계 사 서에서 전하고 있다. 그밖에 양직공도, 통전, 진서 권109 載記 모용황, 자치통감 등에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어서 그 신빙성 여부에 대해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채 호, 1948,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 김세익, 1967, 중국 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 여, 력사과학 호 ; 김상기, 1967,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하여, 백산학보 3 ; 유 원재, 1989, 百濟略有遼西 기사의 분석, 백제연구 20 ; 김기섭, 1997, 백제의 요서경략 설 재검토, 한국 고대의 고고와 역사, 학연문화사 ; 여호규, 2001,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 토, 진단학보 91 ; 강종훈, 2003, 4세기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 구 30 등을 참조할 것. 169) 貞觀 연간 : 정관은 당태종대의 연호로 이는 당태종 19년 즉 보장왕 4년(645)을 뜻한다. 170) 6개 부대를 거느리고 : 정관 18년 11월 10만 군대를 징집하여 출동하였다( 舊唐書 권3 本紀 3 太宗 下). 171) 천벌을 집행하니 : 토벌한다는 뜻이다. 172) 文皇 : 당 태종의 시호인 文武大聖大廣孝皇帝를 약칭하여 文皇帝라고도 한다. 173)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중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 것이 다. 태종은 6월부터 9월까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돌아갔으며 친정을 후회하였다. 이 때 살아 돌아간 당나라 군사는 7만에 불과하였다. 174) 지극한 정성(犬馬) :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개와 말을 가르킨다는 뜻으로 임금이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노력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175) 부여도독부 : 이는 熊津都督府의 誤記로서 웅진도독부의 부성이 현재의 부여에 있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명칭을 붙혀 이야기한 것 같다.

285 568 반란을 일으키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중국의 河南으로 옮겼습니다.176) (후략) 569 시켜182) 가잠성을 공격하여 100여 일이 지나자 진평왕은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 하주 新州의 군사로써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드디어 [원병이] 도착하여 백제인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되돌아가니 찬덕이 분개하고 한탄하여 군사들에게 말하 권47 列傳 7 奚論177)은 牟梁178)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讚德179)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를 가져 당 시에 명망이 높았다. 建福180) 27년 庚午年(진평왕 32 : 610)에 진평대왕이 그를 선발하여 가잠성( 岑城)181) 현령으로 삼았다. 이듬해 신미년(611)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군을 출동 였다. 세 주의 군대와 장수들이 적의 강한 것을 보고 진격하지 않았으며, 성이 위태로운 것 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의리가 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리 있게 죽는 것이 낫겠다. 이에 격앙되어 군사들을 격려하여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였는데, 양식과 물 이 다하자 시신을 먹고 오줌을 마시기까지 하며 힘껏 싸워 게을리 하지 않았다. 봄 정월 176) 河南으로 옮겼습니다 : 백제 유민 중 12,807명을 잡아다 장안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 고, 669년에 고구려 유민 3만 명을 江淮, 山南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新唐書 권145 동이전 高 麗傳에 보이고 있어 백제의 유민도 이 지방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177) 奚論 : 신라 진평왕대의 무관으로 경주 牟梁部 출신이다. 아버지는 縣令 讚德이다. 岑城 전투 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음덕으로 20여 세에 大奈麻에 올랐다. 진평왕 40년(618) 해론은 金山幢 主에 임명되어 한산주 도독 邊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아버지가 가 잠성에서 전사한 사실을 상기하고는 백제군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왕은 이를 듣고 감복하여 그 가족에게 후하게 상을 베풀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長歌를 지 어 조문하였다. 178) 牟梁 : 漸梁部 혹은 岑喙部(`蔚珍 鳳坪新羅碑a)라고도 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西兄山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長福部로 개 칭되었다. 179) 讚德 : 신라 진평왕 때의 지방관으로 경주 牟梁部 출신이다. 진평왕 32년(610)에 岑城 縣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백제 무왕이 대군을 동원하여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여 100일간의 치 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구원병이 구원하러 왔으나, 백제군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 다. 612년 정월 무기가 다하고 힘이 다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 하다가 백제군과 싸워 전사하였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가 모두 항복하였다. 그의 아들 奚論 또한 뒷날 가잠성에서 용감히 싸우 다 전사하였다. 180) 建福 : 진평왕 6년(584)에 개원하여 선덕왕 2년(633)까지 사용된 신라의 연호. 181) 가잠성( 岑城) : 7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 사이의 쟁탈의 요충지로서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 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본서 권4 진평왕 33년 10월, 50년 2월 및 권47 열전 奚論傳과 金令胤傳에 나온다. 해론전에는 가잠성주 讚德이 느티나무[槐樹]를 받고 죽었다고 하여 무열왕 이 그곳을 槐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 백과사전 괴산군), 괴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井上秀雄 역주, 1984, 삼국사기, 118쪽). 이와 는 달리 괴산군의 옛 지명인 仍斤內와 가잠이 음운상 통하지 않아 이를 부정하고 신라 한주 介山 이 되자 사람들이 이미 지쳐버렸고, 성이 장차 함락하게 되어 사태를 다시 회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외쳤다. 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 하게 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 사람들을 모조리 물어 죽여 이 성을 되 찾게 하겠다! 그리고는 팔뚝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뜨며 달려가 느티나무에 부딪혀 죽었다. 이에 성 이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해론은 나이가 20여 세 때 아버지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건복 35년(진평왕 40: 618) 戊寅에 왕이 해론을 金山183) 幢主184)에 임명하였는데, 한산주185) 도독 邊品186)과 함께 군사 郡의 옛 지명인 皆次山郡과 같은 현재의 경기도 安城郡 竹山面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1997,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77쪽). 이 위치를 시사해 주는 자료는 본권에 실린 金令胤傳에 보덕국(익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구려의 殘賊 悉伏을 칠 때에 가잠성 남쪽 7리에 진을 쳤다는 기사이다. 182) 백제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 본서 권28 백제본기 義慈王 7년조에는 백제 장군 義直이 步騎 3천 명을 이끌고 침입하였다고 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183) 金山 : 尙州 開寧郡의 金山縣으로 현재의 경북 김천시 지역이다. 신라 尙州 開寧郡(김천시 개령 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고려 현종때 京山府(성주군 성주읍)의 屬縣이 되었으며, 공양왕때 監務 를 두었다. 조선 정종때 金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84) 幢主 : 신라 중고기부터 있던 지방 관직이다. 중고기의 당주는 지방관이면서 동시에 군단장으로 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지방관이라 하겠다. 이러한 성격의

286 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백제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이곳으로 오 는 熄川이라고도 한다.>는 팔힘( 力)이 남보다 세었고 몸이 가볍고도 민첩하였다. 사산 니 해론 등이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병사들이 서로 교전을 벌이게 되자 해론이 여러 현의 경계가 백제의 땅과 엇물려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침입과 공격이 없는 달이 없었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다. 심나가 출전할 적마다 그를 대항할 강한 군사가 없었다. 仁平192) 연간에 백성군에서 옛날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시었는데, 나도 지금 이곳에서 백제사람들과 군사를 내어 백제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였는데, 백제가 정예부대를 내어 [이를] 급히 치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어야 할 날이다. 하고는 드디어 단검을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니 우리 군대가 어지럽게 물러났다. 심나만이 홀로 서서 칼을 빼들고 눈을 부릅뜨며 크게 가 여러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왕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 가족을 매 소리를 지르면서 수십여 명의 머리를 베어 죽이니 적들이 두려워서 감히 당해내지 못하 187) 우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長歌 를 지 고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달아났다. 백제사람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날으는 장 어 [그를] 조문하였다. 수 라고 불렀고, 이어 서로 말하기를 심나가 아직 살아 있으니 白城을 가까이 하지 말 素那188)<*또는 金川189)이라고 한다.>는 白城郡190) 蛇山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沈那191)<*또 라. 고 하였다. 소나는 용감하고 호걸스러워 아버지의 풍채를 닮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漢州 도독 都儒193)公이 대왕194)에게 청하여 소나를 阿達城195)으로 옮기어 북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幢主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중엽에 건립된`丹陽新羅赤城碑a이다. 진평왕대 이후 지방행 정과 군단조직이 점차 분화되면서 당주의 군사적 기능은 중앙군단으로 이양되어 새로운 군단의 명칭을 사용한 당주가 만들어지고, 지방행정관으로서의 기능은 郡太守로 이양되었다(李鍾旭, 1974,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 歷史學報 64 ; 朱甫暾, 1979, 新羅中 古의 地方統治組織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23 참조). 185) 한산주 :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0년조에는 北漢山州 로 기록되었는데, 본기의 기록이 정 확하다고 판단된다. 186) 邊品 : 신라 진평왕 때의 장수. 진평왕 40년(618)에 변품은 北漢山州의 軍主로서 군사를 크게 일 으켜 동왕 33년(611)에 백제에 빼앗긴 岑城을 회복하였다. 187) 長歌 : 말의 뜻으로 풀이하면 긴 노래이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장송곡이라 할 수 있다. 188) 素那 : 신라 문무왕 때의 무관으로 일명 金川이라고도 한다. 白城郡 蛇山(현재의 충남 천안시 직 산면) 출신으로 沈那의 아들이다. 그는 백제가 망한 뒤 북쪽 변경의 阿達城에 배치되었다. 문무 왕 15년(675) 봄에 아달성의 태수 漢宣이 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 밖의 밭에 나가 삼을 심게 하 였는데, 말갈이 미리 이를 알고 빈 성을 갑자기 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이때 소나가 신라에 심 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잡찬에 추증 되었다. 189) 金川 : 素那의 다른 이름으로 이를 훈독하면 쇠나 로서 素那에 대한 한자식 표현이다. 190) 白城郡 : 현재의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이다. 고구려의 奈兮忽이었으며, 경덕왕 때에 백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조에 안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1) 沈那 : 신라 선덕왕 때의 무관으로 白城郡 蛇山 출신이며, 熄川이라고도 하였다. 북한 고전연구 실 번역본, 이재호본, 신호열본에서 모두 심나 로 읽었다. 본서의 원문에서 或云煌川 으로 주 를 붙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煌 자로 판독되었다. 趙炳舜 소장본에는 熄 자에 가까운 자로 되어 있다. 熄 은 심(沈) 자의 다른 표현이며, 川 은 훈독하여 나 로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는 힘이 남보다 세고 몸이 가볍고도 민첩하였다. 현재의 충남 천안시 직산지역은 7세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있었다. 이를 심나가 막아내곤 하였다. 仁平年間 ( )에 신라에서 白城郡(현재의 경기도 안성군)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변방 고을을 빼 앗았는데, 백제의 정예군사가 와서 반격을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물러났으나 그만이 홀로 적 수 십 명을 대적하니 백제군이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백제인들이 그를 신라의 날으는 장수[飛將] 라고 불렀다고 한다. 192) 仁平 : 선덕여왕 때의 연호로 동왕 3년(634)에 개원하였다. 그러므로 仁平년간은 634년으로부 터 신라에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 전인 647까지 사용되었다. 193) 都儒 : 성은 朴씨이며, 이름이 都儒이다. 7세기의 신라의 진골귀족 출신으로 한성주 도독을 지냈 다. 문무왕 8년(668) 6월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아찬으로서 아찬 龍長과 함께 漢城州行軍摠管 이 되어 출전하였고, 백제의 부녀자와 결혼하였는데, 백제 잔민들이 신라 병기를 훔치려는 모의 에 연루되어 참형을 받았다(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26일 大王報云書 참조). 194) 대왕 : 문무대왕을 가르킨다. 195) 阿達城 : 신라 漢州 兎山郡 安峽縣(이천군 안협면)의 옛지명인 阿珍押縣과 같은 곳으로 이해된 다. 신라 漢州 兎山郡(금천군 토산면)의 領縣으로서, 현재의 江原道 伊川郡 安峽面(북한 鐵原郡 鐵原邑)이다. 고려 현종때 東州(철원읍)의 屬縣이 되었고, 예종때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때 京 畿道 朔寧郡(연천군 삭녕면)에 합하여 安朔郡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 다. 세종때 江原道에 예속시켰다가 고종때 郡으로 고쳤다. 이는 본서 권6 7 신라본기 및 권43 열전 김유신전의 문무왕 7년(667) 10월 2일조의 阿珍含城과도 같은 곳으로 생각한다.

287 572 (후략) 驟徒196)는 沙梁 사람으로 奈麻 聚福의 아들이다. 기록에 그의 성이 전하지 않는다.197) 그 의 형제가 셋이었는데, 맏이는 夫果요,198) 가운데가 취도(驟徒)이고, 막내는 핍실(逼實)199) 이었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道玉이라는 이름으로 實際寺200)에 머물고 있었다. 태종 대왕 때 백제가 助川城201)에 쳐들어오자202)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싸움이 결 573 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도옥은 그 무리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로서 上等은 학업(道)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고, 그 다음은 도의 작용을 일으켜 남을 이롭게 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는데, 나는 외 형만이 승려(桑門)일 뿐이고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착한 일이 없으니, 차라리 군대에 들 어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 승복(法衣)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驟徒로 고쳤는데, 그 뜻은 급히 달려 가서 무리(徒)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 三千幢203)에 속하기를 청하여 드디 어 군대를 따라 전선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어울리자 창과 긴 칼을 가지고 [적 196) 취도(驟徒) : 7세기의 신라 경주인으로 나마 聚福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 었다. 법명은 道玉이었고 實際寺에 머물렀다. 백제와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그는 승복을 벗고 三 千幢에 들어가 태종대왕 때에 助川城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형 夫果, 동생 逼實을 격분시켜 세 사람이 모두 통일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197) 성이 전하지 않는다 : 어떤 성을 사용하였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98) 夫果 :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으로 경주 沙梁部 출신이며, 奈麻 聚福의 맏아들이다. 문무왕 11년 (671)에 백제부흥군과 熊津에서 싸울 때 幢主로서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논공서 열이 제일 높았다. 아우 驟徒 逼實과 함께 沙 에 추증되었다. 199) 핍실(逼實) : 신라 신문왕 때의 군관으로 경주 沙梁部 출신이며, 奈麻 聚福의 셋째 아들이다. 핍 실의 두 형인 夫果와 聚徒는 앞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684년에 안승의 族子 大文 (또는 悉伏)과 고구려 유민들이 보덕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군사를 일으켜 핍실을 貴 幢弟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는 떠날 때에 아내에게 두 형의 공적을 헛되게 하지 않겠 다고 하면서 자신도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홀로 나가 분전하여 고구려군 수십 인을 죽이고는 전사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신문왕은 이들 형제의 용맹에 탄복하여 이들에게 모 두 沙 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200) 實際寺 : 경주 주위에 있었던 사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三國遺事 권5 避隱篇 迎如師 條에 一然이 살았던 때까지 國師房으로 불리어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201) 助川城 :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성으로 본서 권34 잡지 지리 1 尙州 永同郡 陽山縣의 옛 이 름인 助比川縣 이나 본서 권47 열전 金歆運傳에 나오는 助川城 의 명칭과 같은 지명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永同郡 陽山面 가곡리에 있는 飛鳳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1973, 조 천성의 위치에 대하여, 백제연구 4, 충남대백제연구소)와 같은 면의 大王山城(일명 大陽山城) 으로 보는 견해(鄭永鎬, 1972, 百濟助川城考, 百濟硏究 3)가 있다. 이곳은 소백산맥의 추풍 령을 넘어 금강 상류를 따라 부여로 갈 수 있는 요충지이다. 신라 尙州 永同郡 陽山縣(영동군 양 산면)의 옛 지명. 본서 권47 驟徒傳 金歆運傳에 武烈王 당시의 신라 백제간 助川城 전투에 대 한 기사가 나온다. 202) 태종대왕 때 백제가 쳐들어오자 : 이는 태종 무열왕 2년(655)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 라의 서북변 33성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쟁을 말한다(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2년조, 권 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군 여러 사람을 죽인 다음 [자신도] 죽었다. 그 후 咸亨 2년 辛未(문무왕 11: 671)에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백제 변방의 벼를 28 백제본기 의자왕 15년조, 본서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22년조). 이는 신라가 최대의 위기 로서 태종 무열왕은 이를 당에 보고하고 구원병을 얻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203) 三千幢 : 10停의 다른 이름. 문무왕대에 설치된 新三千幢 이라는 군사조직의 별칭으로 外三 千 이라는 군호가 보이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삼천당은 內三千幢 즉 중앙에 주둔한 군사조직 이라고 할 수 있다. 삼천당의 성격에 대해서는 왕경인 출신 병졸집단으로 구성된 중앙 군사조직 의 하나이며 국왕 직속의 군사력으로 파악하는 견해(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일조각, 쪽), 군관과 병졸이 모두 경위를 가진 것을 근거로 왕경인 출신의 부대로 보면서 자원 하여 종군한 僧兵으로 이루어진 지원부대로 보는 견해(이인철,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일 지사, 쪽)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가 타당할 것 같다. 삼천당의 군관은 幢主-監-卒로 구성되었으며, 보병부대였다. 삼천당과 10정과의 관계에 대해 본 기사를 그대로 취신하여 10정 을 10개의 삼천당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지만(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366쪽), 원래는 별도의 부대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정과 삼천당을 별개의 부대로 파 악하는 견해를 보면 진흥왕 5년(554)에 설립된 것은 삼천당이며, 10정은 삼국통일 후에 기병부 대의 필요성에서 창설된 것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4,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쪽), 10정은 隊大監-少監-火尺으로 편성된 군사조직이고, 삼천당은 幢主-監-卒로 편성된 군사조직으로 본 견해(李仁哲, 1991, 新羅의 群臣會議와 宰相制度, 한국학보 65, 쪽) 등이 있다. 한편 삼천당은 진흥왕 5년(544)에 창설된 것이고 문무왕대를 전후한 시기의 대 대적인 군제 재편성 과정에서 10개의 삼천당 곧 10정 군단으로 변화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文基, 1997, 앞의 책, 쪽). 삼천당과 관련성을 가지는 新三千幢(外三千幢)이 문 무왕 12년(672)에 설치되고 있는 점에 의하면 삼천당이 10정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문무왕 12년 이후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삼천당에 대한 사례로는 본서 권47 열전 驟徒傳에 본 기사와 `高仙寺誓幢和上碑文a에 音里火三千幢主 라는 기록을 들 수 있다.

288 짓밟고 드디어 웅진의 남쪽에서 백제 사람들과 싸웠는데, 그때 [취도의 형] 부과가 당주 구원하도록 하였다. [원군이] 이미 도착하였으나, 백제 군사의 陣勢가 당당함을 보고 그 로서 전사하니 논공서열이 제일 높았다. (후략)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며(盤桓) 진격하지 못하였다. 어느 사람이 건의 訥崔204)는 사량 사람으로 대나마 都非의 아들이다. 진평왕 建福 41년 甲申(진평왕 46: 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군대를 일으켜 내침하였는데, [그들은] 군사를 나누어 速 하였다. 대왕께서 5군을 여러 장군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 兵家 含205) 앵잠(櫻岑)206) 妓岑207) 烽岑 旗懸208) 용책(冗柵)209) 등 6개의 성을 포위 공격하였 다.210) 왕이 上州211) 下州212) 貴幢213) 法幢214) 誓幢215) 등 5개의 군부대에게 명하여 가서 204) 눌최(訥崔) : 대나마 都非의 아들로 신라 진평왕 때의 무관이다. 백제와의 함양지역의 전투에서 홀로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205) 速含 : 오늘날의 경남 咸陽郡 함양읍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 1 康州 天嶺郡條에 天嶺 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 이라고 하여 신라때 康州 天嶺郡(함양군 함양읍)의 옛 지명이 다. 본래는 가야 소국의 하나로서, 弁辰走漕馬國( 三國志 권30 魏書 韓傳) 및 卒麻國( 日本書 紀 권19 欽明紀 하4월)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206) 앵잠(櫻岑) : 현재의 경남 咸陽郡 水東面 上栢里 일대(속칭 앵구밭)에 비정된다(김동호, 1972, 함양상백리고분군발굴조사보고, 동아대박물관). 207) 妓岑 : 이를 신라의 康州 江陽郡 三岐縣으로 보아 현재의 경남 陜川郡 大幷面으로 비정한 견해 가 있다(全榮來, 1985, 앞의 글, 154쪽). 208) 旗懸 : 현재의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箕峴으로 추정된다. 209) 용책(冗柵) : 중종임신간본과 성암본의 에는 冗 (용) 자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4 신 라본기 진평왕 36년조 및 삼국사절요 의 기사에는 혈책(穴柵)으로 되어 있다. 모든 번역본에서 이를 용책 으로 읽었다. 이를 신라 康州 闕城郡의 옛 지명인 闕支郡으로 보아 현재의 경남 山 淸郡 丹城面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全榮來, 1985, 앞의 글, 154쪽). 210) 백제가 6개의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 조에 나온다. 그리고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武德 7년(624) 기사에 又相與新羅 世 爲讐敵 數相侵伐 이라 하여 양국 사이의 잦은 전투를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에서는 榮留王( )이 즉위하여 대외적으로 온건책을 추진함에 따라 백제와 신 라에 대한 공격도 한동안 없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다. 623년 백제가 신라 勒弩縣을 습격하였고, 624년에는 速含 櫻岑 岑 烽 岑 旗縣 冗柵 등 6城을 함락시켰다. 이들 지역은 함양 합천 산청 등은 신라의 왕도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들이었다(權悳永, 1997, 古代韓中外交史, 일조각, 189~194쪽 ; 정동준, 2002, `7세기 전반 백제의 대외정책a, 역사와 현실 46, 54~55쪽). 이러한 백제의 공격에 대해 신라 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211) 上州 : 이때의 上州는 지금의 경북 善山에 州治가 있었다. 上州는 원래 상주에 설치된 군사적 행 정구역으로서 신라 진평왕 36년(614)에 尙州에서 선산으로 옮겼다. 212) 下州 : 이때의 下州의 州治는 진흥왕 26년(565)에 경남 昌寧에서 陜川으로 옮겼다. 213) 貴幢 : 大幢과 함께 6停 중 가장 큰 부대로, 본서 권40 잡지 직관(下) 무관조에 의하면, 진흥왕 13년에 설치한 上州停을 文武王 13년에 귀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 기사에서 처럼 文武王 13년 이전에 이미 귀당의 명칭이 보일 뿐만 아니라 상주 총관 또한 따로 보이고 있 으므로, 귀당과 上州停은 별개의 부대로 출발하였다가 文武王 13년에 하나로 통합된 것이 아닌 가 생각된다(末松保和, 1954, 新羅幢停考,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 李成市, 1979, 新 羅六停の再檢討, 朝鮮學報 92 참조). 214) 法幢 : 신라시대의 부대명으로 6세기 초에 창설되어 7세기 중엽 신라 군제가 재편성될 때까지 유력한 군단으로 활약하였다. 이 법당은 23軍號에는 나오지 않는다. 본서 권47 訥催열전에 법 당이 보이고 있어 법당의 설치는 진평왕 46년(624) 이전의 어느 시기로 생각된다. 이 법당이 설 치된 시기는 법흥왕대이며, 이러한 명칭은 국법의 수호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 (武田幸男, 1984, 中古新羅の軍事的基盤-法幢軍團とその展開-, 西嶋定生還曆紀念アジアに おける國家と農民, 쪽)가 있다. 법당이 관칭된 군관을 법당군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군관조직은 法幢主-法幢監-法幢火尺 계통과 法幢頭上-法幢 主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이 법당의 존속시기에 대해서는 중고기의 郡이나 城 村에 배치되었다가 삼국통일을 계기로 쇠퇴하였다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84, 앞의 글, 쪽), 村落文書에 餘子와 法私가 보 이고 또 원성왕 14년(798)에 세워진`永川菁堤碑貞元銘a에 法工夫가 보이고 있는 사실에 근거 하여 통일기에 와서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 편성되었다고 보는 견해(李仁哲, 1993, 新羅政治 制度史, 일지사, 쪽) 등이 있다. 한편 法幢 이 冠해진 군관이 배속된 부대를 法幢軍 團 으로 보고 여기에는 百官幢 軍師幢 師子衿幢 京餘甲幢 小京餘甲幢 外餘甲幢 餘甲 幢 弩幢 雲梯幢 衝幢 石投幢 등이 속한 것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4, 앞의 책, 쪽 ; 武田幸男, 1984, 앞의 글, 쪽 ; 李仁哲, 1991, 앞의 책, 쪽)도 있다. 그러나 軍官구성이 동일하다고 하여 성격이나 기능이 다른 부대를 하나의 軍團으로 묶는 것은 재 고되어야 할 것이다. 215) 誓幢 : 신라의 군단 명칭으로 진평왕 5년(583)에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誓幢 의 의미에 대해 號令을 받은 군대 즉 王에 직속하는 군대 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 諸問題, 東洋文庫, 349쪽), 新幢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4,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35쪽) 등이 있다. 진평왕 35년(613)에 종래의 誓幢을 綠衿誓幢으로 개칭하였다.

289 의 말에 승리가 판단되면 진격하고, 어려울 것 같으면 후퇴하라. 고 하였으니 지금 純이라고도 한다.220)>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仁德이 깊고 信義가 두터워 여러 사 우리는 강한 적이 앞에 있는데, 좋은 계략을 쓰지 않고 바로 나아갔다가 만일 뜻대로 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서는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재상( 宰)으로 삼았다. 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윗사람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들에게는 어질고 관대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 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명을 받고 출동하였으므 이라 칭하였다. 태종대왕 7년 庚申(660)에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 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보다 앞서 국가에서 奴珍 등 여섯 성을 쌓으려고 하였으 제를 치게 하였을 때 흠춘이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거느리 나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드디어 그곳에 성을 다 쌓고 돌아왔다. 이에 백제의 침공이 고 [당나라 군사에] 호응하였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 더욱 급박해져서 속함 기잠 혈책의 세 성이 함락되거나 또는 항복하였다. 눌최가 [남 은] 세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 여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봄철의 따뜻한 날씨에는 모든 초목이 번성하지만 겨울(歲寒)이 되어서는 오직 소나 무와 잣나무만이 [홀로 남아 있다가] 나중에 시드는 것이다.216)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 하는 군사가 없어서 날로 더욱 위급해 간다. 이때야말로 지조와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 절개를 다하여 이름을 날릴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군사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였다. 감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 때 군사들은 거의 다 죽고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구차히 [죽음을] 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눌최에게 한 종(奴) 이 있었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느 사람이 일찍이 [눌최에게] 말하기를, 小人이 특이한 재주를 가지면 해롭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이 종을 마땅히 멀리하 라! 고 하였다. 그러나 눌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에 성이 함락되고 적이 들어 오자 그 종은 활을 당기어 화살을 끼워 눌최의 앞에서 쏘는데,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다가 어느 적군 한 명이 뒤로 가서 도끼로 눌최 를 쳐서 쓰러뜨리니 종이 돌아서서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 고 비통해 하며 눌최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金令胤217)은 沙梁 사람으로 級 218) 盤屈219)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欽春<*또는 欽 216) 겨울(歲寒)이 되어서는 나중에 시드는 것이다 : 아는 논어 子罕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217) 金令胤 : 통일신라 신문왕 때의 장군으로 경주 沙梁部 출신이다. 김유신의 동생인 欽春의 손자 이며, 盤屈의 아들이다. 신문왕 4년(684) 11월에 안승의 조카뻘[族子]되는 장군 悉伏(일명 大文) 이 金馬渚에 있으면서 고구려 유민들과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는 전투에 黃衿誓幢의 步 騎監으로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실복이 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지 구전을 펴자는 의견에 따라 함께 출전한 다른 장수들은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홀로 적진 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신문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고 반굴과 영윤 부자를 칭송하고 벼슬과 상을 후하게 추증하였다. 218) 級 : 신라의 17관등 중 제9관등으로 다른 표기로는 級伐 及伏干이 나온다. 한편`迎日冷水 里新羅碑a와`蔚珍鳳坪新羅碑a및`蔚州川前里書石 追銘a에는 居伐干支로, 梁書 권54 열전 신 라전에는 奇貝旱支로,`丹陽新羅赤城碑a에는 及干支로,`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a에는 及尺干으 로,`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a와`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a에는 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及伏干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2년조에는 級伐干으로, 같은 책 권26 齊明紀 원년조에는 及 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 아찬에서 급벌찬까지의 관등은 緋色의 公服을 입었으며, 진골이나 6두품 출신자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 219) 盤屈 : 김흠춘의 아들. 태종 대왕 7년(660) 백제 정벌에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하여 아버지 명에 따라 용감하게 전사하여 사기를 진작하였다. 220) 欽春 : 신라의 진골 장군으로 欽純이라고도 한다. 열전에서는 주로 흠춘이라고 썼고, 본기에서 는 주로 흠순이라고 썼다. 아버지는 서현이며 김유신의 동생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었다. 660년 황산벌 싸움에서 신라군은 네 번이나 싸워 패하여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흠춘은 아들 반굴에게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바쳐 충효를 다하라 하여 아들을 전사하게 하였다. 이어 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도 나가 싸워 죽으니 신라 군대가 분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661 년에는 평양에 와 있는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하기 위하여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영역을 통과하 여 식량을 전달하였고, 662년부터 663까지에는 內斯只城(현재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居列城 (현재의 경남 거창), 沙平城(현재의 전북 임실군 신평면), 德安城(현재의 충남 논산군 은진면)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전쟁에서는 김인문과 함께 신라군을 이 끄는 총대장으로서 고구려의 격멸에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669년에는 파진찬 양도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양도는 감옥에 갇히고, 그는 다음해에 환국하였다.

290 578 이 불리하여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였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孝가 제일 중요하다. 위급 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를 함께 이루는 것이다. 반굴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후략) 官昌<*또는 官狀이라고도 한다.221)>은 신라 장군 品日222)의 아들로 모습이 우아하였으 며, 소년 시기에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 때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 하였다. 大監223)인 어느 사람이 태종대왕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당나라 顯慶 5년 庚申 (태종무열왕 7: 660)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 으로 삼았다. 黃山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을 때 그 아버지 품일이 말하 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다.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579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관창이 그렇습니다. 하고는 곧 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들고 적진에 곧바로 달려 들어가 여러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 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에게 사로잡혔다. 산 채로 백제의 元帥 계백의 앞 에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 보고 그가 어리고 용기가 있는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다. 소년이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에 있어서랴! 하 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진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머리를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 이 깊이 한스러운 일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하고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후에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 장에 매어 보내었다. [아버지]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쳐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 기를, 내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나라 일에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고 하였다. 三軍224)이 이를 보고 격분하여 뜻을 [굳게] 세운 다음에 북을 요란하게 치고 함 성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관창에게] 급찬의 직위를 주고 221) 官昌 : 신라의 진골 출신 화랑으로 官狀이라고도 한다.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16세 에 660년 백제 전투에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흠순의 아들 반굴이 전사하자 두 번이나 혼자 돌진하였다가 죽었다. 222) 品日 : 신라의 진골 출신의 장군으로 관창의 아버지이다. 무열왕 7년(660)에 左將軍인 그는 김 유신, 김흠순과 함께 5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할 때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싸 워 네차례나 패배하자 아들인 16세의 관창에게 용기를 보일 것을 권유하여 죽게함으로써 신라 군대의 사기를 격앙시켜 백제 공멸에 큰 공을 세웠다. 661년 2월 사비성의 잔적을 칠 때에는 大 幢將軍으로서 출정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그는 忠常, 義服과 함께 上州摠管으로 대장군 김유신 휘하에서 고구려 공격에 출정하였으며, 문무왕 4년(664) 7월에는 일선 한산 등 2州의 병을 이 끌고 고구려 突沙城을 격파하였고, 668년 6월 21일에는 귀당 총관으로 고구려 공멸에 참여하였 다. 670년에는 당군이 지배하고 있는 웅진도독부 하의 63성을 탈취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 223) 大監 : 신라에서 軍事업무를 관장하는 병부의 차관직 또는 장군 아래의 무관직이다. 병부령과 함께 무관에 대한 인사, 병력의 징발, 城郭 烽燧 部隊 배치 등에 관한 사항에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이인철, 1993, 앞의 책, 31쪽). 경덕왕 때 일시 侍郞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다시 복구되었다. 大監이란 직명은 중앙의 중요 軍團인 6停의 부지휘관으로 나온다. 병부의 차 관직을 군지휘관의 성격을 지니는 大監으로 한 것은 병부가 군사관계의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금석문에서 兵部大監은 경문왕 12년(872)에 조성된`皇龍寺九層木 塔刹柱本記a에 上堂 前兵部大監阿干臣金李臣 이라 한 기사에 보인다.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었고, 그 집에 당나라 비단 30필, 20승포 30필과 곡식 100섬 을 [부의로] 내려 주었다. 金歆運225)은 奈密王226)의 8세손이고, 아버지는 잡찬 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文努 224) 三軍 : 김유신이 거느린 5만의 백제원정군은 좌군 중군 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탄현을 넘어 백제 3영을 향해 진격하였다. 신라군이 한 부대는 진산에서 벌곡 대덕리 한삼천리를 지나 황산 벌로 진입하였고, 또 한 부대는 운주 방향에서 황산으로 진입하였고, 중군은 진산에서 벌곡 금 천리-웅치재-산직리를 지나 황산벌과 모촌리 방향으로 진공하여 백제의 계백이 거느린 3영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성주탁, 2000, 황산벌 전적지의 역사적 성격, 논산 황산벌 전적지, 충남대 백제연구소, 5~9쪽을 참조할 것. 225) 金欽運 : 7세기 신라 진골 출신의 장군으로 나물왕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達福이며, 화랑 文奴의 낭도이다.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고, 신문왕의 장인이다. 태종 무열왕 2년(655) 고구려와 백제가 33성을 빼앗자 충북 영동군 조천성 전투에서 郞幢大監으로 참전하여 병사와 고락을 함 께 하였다. 백제 땅 양산 밑에서 진을 치고 조천성을 공략하려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 하자 大舍 詮知가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싸우다가 끝내 大監 穢破 小

291 의 門下에 다녔는데, 당시의 화랑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 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할 것인가? 하고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 다 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격려하여 그와 같이 되려는 모 던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흠운이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습을 보였다. [이에] 동문의 승려 轉密이 말하기를, 몇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이에 대감 穢破와 少監 狄得이 서로 함께 전사하였다.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永徽 6년(무 步騎 당주 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신라]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 그는 귀한 신분에 권세가 당당하여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는 처지에 있는 데도 오히려 절 겨 이를 치기로 계획하고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郞幢227)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개를 지켜 죽었는데,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더라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집안에서 자지 않고 바람에 빗질을 하고 비에 목욕하면서(風梳雨沐), 군사들과 달고 쓴 손해가 되지 않는 데에 있어서랴! 하고 드디어 적진에 들어가 서너 명을 죽이고 [자기도] 228) 백제 땅에 당도하여 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助川城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을, 보용나와 적 공격하려 할 때 백제사람들이 밤을 틈타서 민첩하게 달려와 새벽녘에 성루에 올라 따라 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양산가229)를 지어 들어오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엎어지고 자빠지며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이 [우리의] 애도하였다. (후략) 것(甘苦)을 같이 하였다. 혼란을 틈타서 급하게 공격하니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들었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타 고 창을 잡고 대적하니 大舍 詮知가 달래어 말하였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하여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貴骨)으로서 대왕의 사위(半子)인데, 만약 적군의 손에 죽으면 백제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우리들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丕寧子230)는 출신지역과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丁未(647) 백제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茂山231) 甘勿232) 桐岑 등의 城을 공격해 오자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 느리고 막았는데, 백제 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하고 이기지 못하니 사기가 떨어지고 힘 이 지쳤다. 유신은 비령자가 힘써 싸워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 말하기 를, 날씨가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지는 것233)을 알 수 있다. 오늘의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결심]하였으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매한 監 狄得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사람들은 陽山歌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제7관 등인 일길찬에 추증되었다. 신문왕 3년에 그의 작은 딸이 왕비가 되어 효소왕을 낳았다. 226) 奈密王 : 신라 17대 왕인 나물왕. 본서 권3의 신라본기에서는 奈勿尼師今으로 기록하고 그 註에 서 奈勿 一云 那密 이라고 적고 있고 三國遺事 에서도 那密王 으로 적고 있는데, 奈密 과 那密 은 같은 음을 다른 자로 표기한 것이다. 227) 郞幢 : 신라의 부대 명칭.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낭당은 진평왕 47년(625)에 설치되었으며, 문무왕 17년(677)에 紫衿誓幢으로 개편되었다. 자금서당에는 2명의 장군이 배속 되어 있었다. 228) 바람에 빗질을 하고 비에 목욕하면서(風梳雨沐), 군사들과 달고 쓴 것(甘苦)을 같이 하였다 : 비 바람을 맞으며 다닐 정도로 매우 바쁜 상황을 말하며, 병졸과 함께 고락을 함께 하였다는 뜻이 다. 229) 양산가 : 조천성에서 전사한 김흠운의 죽음을 애도하여 읊은 노래. 이는 조선조 많은 문인들의 海東樂府體 詩의 소재가 되어 왔다. 230) 비령자(丕寧子) : 신라 진덕왕대의 무관으로 진덕왕 원년(647년) 백제군이 茂山城 甘勿城 桐 岑城 등을 공격해오자 김유신은 1만 군사로써 대항하였으나 군의 사기가 떨어져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이때 김유신은 비령자에게 사기 진작을 위해 힘쓰라고 하자 용감하게 싸워 전사하고 아 들 거진도 따라 죽고 그의 종 합절까지도 함께 백제와 싸우다 죽었다. 이에 분격한 군사들은 용 감히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비령자는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의 낭도였던 것 같다. 북한본에서 는 비령자 로 이재호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비녕자 로 표기하였다. 이희승편의 국어대사전 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는 비령자 로 표기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231) 茂山城 :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에 있었던 성.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尙州 開寧郡의 영현인 茂豊縣이었고 본래의 명칭은 茂山縣이었다. 232) 甘勿城 : 현재의 경북 김천시 金泉市 禦侮面에 비정된다. 이와는 달리 甘文小國을 今勿로 보고 甘勿城을 金泉市 開寧面에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420쪽). 233) 날씨가 늦게 지는 것(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 論語 子罕篇에 나오는 문구이다.

292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자네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특출한 계책을 내어 여러 흘리면서 예를 갖추어 反知山에 [세 사람]을 합장하고 처자의 9족237)에게 은혜로운 상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하고는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은근히 뜻을 비치니 비령 후하게 내려주었다. 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수많은 사람 중에 일을 오직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비령자가] 나가 면서 종 合節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분(知己)을 위하여 죽을 것이 다. 나의 아들 擧眞234)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장렬한 뜻이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 으려 할 것이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으면 집사람들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서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곧장 말을 채찍질하며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진하여 몇 사람을 쳐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거진이 [이를] 바라보고 나가려고 하니 합절이 말하기를,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합절로 하여금 낭군(阿郞)과 함께 집에 돌아가서 부인을 편 안하게 위로하라! 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버지 명을 거역하고 어머님의 자애를 버 린다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 하고는 말고삐를 잡고서 놓지 않았다. [이에]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면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쳐서 끊고 적진 중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죽었다. 合節235)이 말하기를, 竹竹238)은 대야주 사람이며, 아버지 학열( 熱)은 撰干239)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에 舍知가 되어 대야성 도독 金品釋의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壬寅(백제 의자왕 2: 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240) 와서 그 성을 공격하였 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幕客인 舍知 黔日의 아내가 얼굴이 이쁜 것을 보고 이를 빼 앗았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검일이] 백제군에 내응하여 그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소란하고 두려워하여 [성을] 굳게 지켜내지 못할 것 같았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西川<*또는 沙 祗之那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가 윤 충에게 말하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고 하니 윤충이 말 하기를, 만약 그렇게 하여 그대와 약속한대로 하지 않는다면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다! 고하 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 밖으로 나가려 하였는데, 죽죽이 말리며 말하기를,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 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 하고는 또한 나가 싸우다가 죽 나의 私天236)이 무너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었다. 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감격하여 다투어 나가니 가는 곳마다 적의 기세 를 꺾고 진을 함락하며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머리 3천여 급을 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신을 거두고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곡을 매우 슬피 하였다. 대왕이 듣고 눈물을 234) 擧眞 : 비령자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함께 죽으려 할 것이라고 하여 그의 奴인 합절에게 죽지 않게 만류하여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아버지가 죽는 것 을 보고 합절이 만류하였으나 칼로 합절의 팔을 끊고 달려가 싸우다가 죽었다. 235) 合節 : 비령자의 奴로 비령자와 그 아들 거진이 죽자 함께 따라 싸우다가 죽었다. 국왕은 세 사 람을 反知山에 합장으로 묻게 하였다. 236) 私天 : 주인[上典]을 가르킨다. 237) 9족 : 친인척의 가까운 모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3종형제까지의 친족으로 본 견해도 있으나(이 병도, 1977, 앞의 책, 695쪽) 이는 조선시대적인 후대의 개념이다. 238) 竹竹 : 신라의 大耶州(경북 합천) 사람. 지방의 촌주세력인 撰干 熱의 아들이다. 선덕왕 때에 舍知가 되어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보좌를 맡았다. 성주 품석이 막객인 사지 검일의 아내를 겁 탈하여 이에 원한을 품은 그가 백제군과 내통하여 창고가 불태워져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품 석이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백제 장군의 말을 믿고 이에 따르려 하자 그는 出城을 반대하였다. 품석은 성문을 나가는 신라 군대가 백제의 복병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살하자 홀로 대야 성을 사수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왕이 죽죽에게 級 을 추증하고 그 처자를 王都로 옮겨 살게 하였다. 239) 撰干 : 外位 11관등 중 제5관등으로서 중앙의 나마에 해당하는 위계이다. 240)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년(642)조에서는 백제 장군 允忠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93 584 니다. 쥐처럼 쫓기고 숨어가면서 살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 585 서 태어났다246)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 (중략) 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고 하였으나, 품석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문을 열어 군 사들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는 복병을 발하여 모두 다 죽였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 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241) 죽죽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舍知 龍石이 죽죽에게 말하 기를,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고 하니, [죽죽이]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을 지어 준 것은 나 로 하여금 추운 겨울(歲寒)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 지언정 굽히지 않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라고 하였 다. 마침내 힘써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242)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 게 슬퍼하여 죽죽에게는 급찬을, 용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내려주고, 그 처자에게도 상을 내리고 서울로 옮겨 살게 하였다. 권49 列傳 9 蓋蘇文243)<*또는 蓋金이라고도 하였다.244)>은 성은 淵氏245)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물속에 241) 품석이 [이 말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 본서 권28 백제본기 義慈王 2년(642)조에는 品釋이 妻子와 함께 성을 나와 항복하자 백제 장군 允忠이 모두 죽여 그 머리를 잘라 王都(扶餘) 에 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242) 성이 함락되자 : 본서 28 백제본기 의자왕 2년조에 이 전쟁의 결과 품석과 처자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냈고, 남녀 1천 명을 생포하여 서쪽의 주 현에 분거시켰다고 기록하였다. 243) 蓋蘇文 : 고구려말의 재상 겸 무장이다. 성은 淵으로 중국사서에는 泉 또는 錢 으로 나온다. 본서의 원문에서 성을 泉 씨로 기록한 것은 당 고조 李淵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함에서였다. 이 름은 蓋金 또는 盖金이라고도 하였다. 日本書紀 권24 황극기 원년 2월조에는 伊梨柯須彌 로 나온다. 할아버지는 子遊, 아버지는 大祚로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그의 출신지는 東部 또는 西 部라는 두 기록이 있다. 아버지의 관직을 승계하려 할 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세력의 강성함과 그의 무단적 기질을 염려하여 반대하자 이들에게 간절히 호소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천리 장성을 쌓는 책임자가 되는 등 그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영류왕과 대신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를 미리 알아채고 영류왕 25년(642)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열병식 을 한다고 모이게 한 다음에 정변을 일으켜 반대한 귀족들을 죽이고 왕궁에 들어가 왕을 살해하 였다. 그리고 나서 왕의 아우 寶藏王을 세우고 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당나라 로부터 도교를 수용하는 등 당나라에 대하여 친선책을 펴기도 하였으나, 당에 대한 강경책을 펴 당나라의 침입을 유발시켰다. 그가 죽은 해는 보장왕 25년(666)으로 고구려본기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日本書紀 에는 이보다 3년 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泉男生墓誌銘a에 의하 면 그가 32세 때에 막리지를 승습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졸년은 665년으로 이해된다. 본 열 전 기록은 고구려본기의 자료와 신당서 구당서 고려전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정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李弘稙, 1956,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 李丙燾華甲紀念論叢 (1971, 韓 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 李乃沃, 1983,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 歷史學報 합집 ; 盧泰敦, 1989, 淵蓋蘇文과 金春秋, 韓國史市民講座 5 등을 참조할 것. 244) 또는 蓋金이라고도 하였다 : 盖金으로도 기록되나 盖 는 蓋 의 俗字이다.`泉男生墓誌銘a에 아버지는 蓋金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三國遺事 권3 興法篇 寶臧奉老 普德移庵條에 인용된 高麗古記 에 의거한 듯하나 개소문의 소문을 음독하여 金(쇠)으로 고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 가 있다( 海東繹史 권67 인물고 개소문조의 韓鎭書 按文). 개금에 대해서는 이홍직, 1971, 앞 의 책, 295~298쪽을 참조할 것. 245) 淵氏 : 중국측 기록에는 泉氏 新唐書 ( 舊唐書 資治通鑑 泉男生墓誌銘a,`泉獻誠墓誌 銘a, 와 錢氏 舊唐書 권199 ( 高麗傳)로 나와 있다. 그런데 安鼎福과 韓鎭書는 그 의 동생이 淨土로 나오고 있으며( 新唐書 권220 高麗傳 乾封 元年), 또한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6년조에 淵淨土로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래의 성을 淵氏라고 하였고, 唐 高祖 李 淵의 이름을 피하여 泉으로 표기하였다고 보았다( 東史綱目 附卷上 考異篇 泉蓋蘇文, 海東繹 史 권67 인물고 개소문조의 韓鎭書 按文). 三國遺事 권3 興法篇 寶藏奉老 普德移菴條에 인용 된 高麗古記 에서는 자칭하여 성을 蓋氏, 이름을 金이라 하였다고 한다. 同書의 같은 조 神誌 秘詞 의 서문 인용된 蘇文은 職名이라는 설은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李弘稙, 1971, 앞의 책, 296~297쪽). 이와는 달리 淵蓋 또는 泉蓋가 성씨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64, 韓國史大觀, 보문각, 85쪽). 246) 물속에서 태어났다 : 이는 新唐書 권220 高麗傳에 보이는 기록이다.`泉男生墓誌銘a에 나오 는 遠系出於泉 旣托神以 祉 遂因生以命族 이란 구절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물과 관련된 설화 는 동북아시아 지방의 고대의 설화로 공통적인 것이다. 이와 다른 출생설화로 수 양제가 쳐들어 왔다가 패전하고 돌아갈 때 그의 신하 羊皿이 죽어서 고구려 총신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 다고 서원하고 죽어서 태어난 자로 盖를 성으로 하였다 한다( 三國遺事 권3 興法篇 寶藏奉老 普德移庵條의 又按唐書云 條 및 又按高麗古記云 條 참조). 이러한 설화는 중국측에서 고구려

294 586 당나라 태종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오로지 한다. 는 소리를 듣고 치고자 하니 長孫無忌247)가 말하기를, 소문이 자기의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의 토벌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그 지킬 준비를 취 587 신라(인)251)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백제가 공격하여 [우리의] 40여 성을 빼앗아 갔고, 다시 고구려와 군대를 합쳐서 입조하 는 길을 막으려 하므로252) 저희 나라(小國)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출병시켰으니, 엎드려 하고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짐짓 참고 있다가 그가 스스로 마음을 놓고 더욱 그 악 253) 고 하였다. 빌건대 당나라 군사(天兵)의 구원을 바랍니다. 을 저지른 후에 나라를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황제가 이에 따랐다.248) 이에 태종은 司農丞254) 相里玄奬255)에게 명하여 황제의 옥새를 찍은 글을 가지고 가서 [고 소문이 왕에게 아뢰기를, 듣건대 중국에서는 [유불도] 삼교가 나란히 함께 행해지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 직 도교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청컨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구하십시오! 라고 하 였다. 왕이 드디어 표를 올려 청하니 당나라에서 道士 叔達249) 등 8인을 보내고 아울러 도덕경 을 보내 주었다. 이에 [왕이] 불교의 절을 빼앗아 거주하게 하였다.250) 마침 그때 가 멸망한 후에 만들어져 유포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홍직, 1971, 앞의 책, 291~295쪽을 참조할 것. 247) 長孫無忌 : 당나라 초기의 공신으로 하남 낙양 출신이며, 자는 輔機이다. 선대는 北魏의 拓跋氏 였는데, 長孫氏로 성을 고쳤다. 당 고조를 도와 공을 세워 上黨縣公에 봉하여졌고, 당 태종의 즉 위에 공을 세웠다. 태종과는 황후의 오빠로서 또 어려서의 친구로서 좋은 계책을 항상 곧게 진 언하였고, 그 공로를 포상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齊國公에 봉하여졌다가 趙國公으로 改封되었다. 태종이 임종 시에 자신이 천하를 얻은 것은 無忌의 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 이 武后를 立妃하는 데에 반대한 것 때문에 그 후 참소를 받아 관작봉호가 삭탈되었다. 이에 대 해서는 舊唐書 권65 長孫無忌傳 및 新唐書 권105 長孫无忌傳을 참조할 것. 248) 황제가 이에 따랐다 :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건의에 따라 고구려 침략을 미루고 고구려왕을 책 봉하였고, 도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1 고구려본기 보장왕 2년(643) 윤6 월 기사를 참조할 것. 249) 叔達 : 당 태종이 보장왕 2년(643)에 고구려에 보낸 도사인데, 구체적인 행적을 밝혀지지 않았 다. 三國遺事 권3 興法篇 寶臧奉老 普德移庵條에는 敍達 로 기록하였다. 250) 당나라에서 道士 叔達 등 8인 거주하게 하였다 : 본서 권21 고구려본기에는 도교를 청한 일이 보장왕 2년(643) 3월 기사로 기록하여 당에서의 고구려 보장왕을 책봉한 것보다 먼저 있 었던 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본 열전에서는 이를 바꿔 기록하고 있고 또한 도교를 청하자고 한 내용이 보다 상세하다. 고구려에 도교가 들어 온 것은 榮留王 7년(624)이었다. 이때에 당나라에 서는 道士를 보내 天尊像과 道法을 전해주고 老子 를 講하니 왕과 국인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데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용한 이유로는 외교적으로 친당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는 점, 국내 산천에 제사를 올리려는 점 등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당나라의 도교가 전제 정치 에 필요하였다는 점, 당시에 유포된 도참설의 배격을 위한 목적 등이 지적되고 있다(이내옥, 1983, 앞의 글 참조). 도교의 수용은 친국왕적인 불교계의 반발을 가져왔으니 普德和尙의 백제 로의 탈출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51) 신라[인] :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조에 비슷한 내용이 전하고 있으나, 이는 그 다 음해의 기사가 잘못 기술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에 누가 사신으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252) 입조하는 길을 막으려 하므로 :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8월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黨項城을 빼앗아 歸唐之路를 끊으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53) 백제가 공격하여 구원을 바랍니다 :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642) 8월조에 보인다. 신라본기에는 백제가 당항성을 공격하려 한 것과 允忠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都督 品釋을 죽인 일을 모두 이해 8월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 나 백제본기에서는 윤충의 대야성 공격의 연월은 신라본기와 동일하나, 당항성 공격의 연월은 643년으로 나와 신라본기보다 한해가 늦고 또 月도 백제본기에는 11월로 되어 있어 신라본기의 8월과 차이가 난다. 이때의 당항성 공격 계획은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와 당의 교통로의 주 요 거점인 당항성을 탈취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사건은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고, 그 소식 을 들은 의자왕이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미처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삼국과 당 이 모두 연루된 것으로 신라에 의해 주장된 백제와 고구려의 連和說을 신빙하는 견해가 지배적 이다. 반면에 신라가 구원요청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으로부터의 위협을 과장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8의 주 873)을 참조할 것. 254) 司農丞 : 당나라 九寺 중 하나인 司農寺에 속한 관리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大倉 大苑 農園 및 溫泉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구당서 권44 직관지와 新唐書 권48 百官 3 司農寺에 의하 면 장관인 卿(從三品上) 1인과 少卿(從4品上) 2인, 丞(從六品上) 6인, 主簿(從7品上) 2인 등의 관 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사농승은 司農寺의 실무를 관장하며, 천하의 租를 京都에 운 송하고 검열 납입시켜 國用에 지출하고 百官의 祿을 지급하는 일을 맡았다. 이에 의하면 사농 승의 품계는 종6품상이고 정원은 6명으로 되어 있다. 255) 相里玄奬 : 相里는 複姓이고 이름은 玄奬이다. 그는 643년 9월에 당 태종의 친서를 가지고 본국 을 떠나 다음해인 644 정월에 고구려의 평양에 도착하여 태종의 친서를 전하고 신라 공격을 중 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빼앗긴 땅 500里를 거론하였으므로, 그는 요동이 원래 중국 땅이었음을 상기시켰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장은 644년 2월 乙巳朔 에 귀환하여 태종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그 외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295 588 구려]왕에게 명하기를, 신라는 우리에게 예물로서 경의를 표하는(委質)256) 나라로서 조공을 한 해도 거르지 않 고 계속 하고 있는데,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둬라!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 면 내년에 군대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치겠다. 고 하였다. 양기석(충북대학교) 256) 예물로서 경의를 표하는(委質) : 이는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3년조에서는 委命國家로 기록 되어 있다. 委質이라고 하면 저당을 맡기었다는 뜻으로 신의를 지킨다는 뜻이다. 三國遺事

296 三國遺事 591 三 國 遺 事 高麗의 승려 一然(1206~1289)이 1281년(忠烈王 7)에 편찬한 史書이다. 전체 5권 2책으로 되 어 있으며, 권과는 별도로 王歷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 등 9편목이 있다. 王歷은 간략한 연표이며, 紀異篇은 古朝鮮으로부터 後三國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 로 서술하였는데, 1 2권으로 되어 있다. 興法篇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塔像篇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義解篇에는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神呪篇에는 신라의 밀교적 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感通篇에는 신앙의 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避隱篇에는 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孝善篇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 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권1 王歷1) 제1대 온조왕2) 동명왕의 셋째 아들 또는 둘째3)라고도 한다. 계묘년(B.C.18)에 즉위하여 45년간 왕위에 있었다. 慰禮城4)에 도읍하였으니 또는 蛇川5)이라고도 하 였다. 지금의 稷山이다.6) 병진(B.C.5)에 漢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1) 王歷 : 삼국유사 에서의 왕력은 일종의 연대기적 성격을 갖는다. 그 내용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통일신라 후고려 후백제 각 왕의 이름, 재위 기간, 왕비의 이름, 부모의 이름, 특별한 사 건 등을 기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경우는 왕의 재위기간과 왕명의 異稱 등만 기록하고 있고 특별한 사건의 기록은 매우 드문 편이다. 2) 온조왕 : 백제 제1대 왕. 재위 기간 B.C.18~A.D.28. 이승휴의 제왕운기 에는 殷祚로 나온다. 삼국사기 에는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인 鄒牟 또는 朱蒙이고, 어머니는 卒本扶餘王의 둘째 딸, 趙郡의 여자, 졸본인 延陀勃의 딸 召西奴로 나온다. 3) 셋째 아들 또는 둘째 : 온조는 주몽과 졸본부여 왕녀 사이에서는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주 몽이 북부여에서 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까지 합치면 셋째 아들이 된다. 4) 慰禮城 : 백제 건국 당시의 도읍지. 위례성의 명칭은 우리 울타리 라는 뜻을 가진 위리 에서 나 왔다는 견해도 있고 왕을 뜻하는 於羅瑕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5) 蛇川 : 경기도 직산에 사산성이 있는데 蛇川과 연관된다. 그러나 사산성을 발굴한 결과 백제시대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성주탁 차용길, 1994, 직산 사산성, 백제문화개발연구원). 6) 지금의 직산이다. : 위례성을 직산으로 보는 것은 이 기사가 처음이다. 조선시대의 자료에는 직산의 온조왕 사당을 남한산성으로 옮긴 것으로 나오고 있어 조선후기까지는 온조의 위례성이 직산에 있

297 592 三國遺事 廣州이다.7) 제8대 고이왕20) 초고왕의 동모제이다.21) 갑인년(234)에 즉위하여22) 52년간 다스렸다.23) 제2대 다루왕8) 온조왕의 둘째 아들이다.9) 무자년(A.D.28)에 즉위하여 49년간 다스렸다. 10) ) 제3대 기루왕 다루왕의 아들이다. 정축년(A.D.77)에 즉위하여 51년간 다스렸다. 12) 제4대 개루왕 기루왕의 아들이다. 무진년(128)에 즉위하여 38년간 다스렸다. 어린 사반왕을 폐한 후 왕위에 올랐다. 24) 제9대 책계왕 고이왕의 아들이다. 靑替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병오년(286)에 즉위하여 12년간 다스렸다. 제5대 초고왕13) 또는 素古라고도 한다. 개루왕의 아들이다. 병오년(166)에 즉위하여 50 년간 다스렸다.14) 제6대 구수왕15) 또는 貴須라고도 한다. 초고왕의 아들이다.16) 갑오년(214)에 즉위하여 21 년간 다스렸다. 제7대 사반왕17) 또는 沙 라고도 한다. 구수왕의 아들이다.18)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다.19) 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이 한강유역설을 주장하면서 위례성=직산설은 부정되었고, 직산은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위치한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 연구, 박영사 참조). 7) 병진년에 지금의 廣州이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 의하면 온조는 처 음에 하북위례성에 정착하였다가 뒤에 하남위례성으로 옮긴 것으로 나온다.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랑천설 임진강설 종로구설 등이 있다(정복구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3, 한국정 신문화연구원). 근래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발굴되고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주거지 제의시설과 더불어 다량의 중국제 전문도기와 청자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서울시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을 아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위례성은 남성과 북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치상에 서 볼 때 풍납토성은 북성에, 몽촌토성은 남성에 해당된다. 8) 다루왕 : 백제의 2대 왕. 재위 A.D.28~A.D.77. 9) 온조왕의 둘째 아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다루왕 즉위년조에는 溫祚王의 元子 라고 하였다. 10) 기루왕 : 백제의 제 3대 왕. 재위 A.D.77~ ) 다루왕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다루왕 즉위년조에는 多婁王의 元子 라고 하였다. 12) 개루왕 : 백제의 제 4대 왕. 재위 128~ ) 초고왕 : 백제의 제 5대 왕. 재위 166~214. 본서 고이왕조에는 肖故로 표기되어 있다. 14) 50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초고왕조에는 재위 49년(166~214)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가 난다. 15) 구수왕 : 백제의 제6대 왕. 재위 214~ ) 초고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즉위년조에는 肖古王의 長子 라고 하였다. 17) 사반왕 : 백제의 제7대 왕. 재위 234.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는 沙伴 으로, 삼국유사 권 2 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에는 沙沸王 또는 沙伊王 으로 나온다. 18) 구수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즉위년조에는 仇首王의 長子 라고 하였다. 19)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다.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권2 기 이 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에는 사반왕이 어려서 정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폐위되었다고 한다. 20) 고이왕 : 백제의 제8대 왕. 재위 234~286. 고이왕의 출계에 대해서는 肖古王母弟 를 초고왕 어 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고, 온조와는 다른 優台-沸流의 왕통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천관우, 1995, 古朝鮮史. 三韓史 硏究, 일조각). 그러나 삼국사기 에 나오는 모제는 대개 동모제를 말하므로 고이왕은 초고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초고왕과 고이왕은 주몽-온 조계로서 직계와 방계로 보아야 한다(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주서 와 수서 백제전에 나오는 始祖仇台廟 의 仇台 를 구이 로 읽고 고이 와 음이 비슷하므로 양자를 동일 인으로 파악하여 고이를 실질적인 백제건국자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6, 한국고대 사연구, 박영사). 고이왕은 즉위 후 종래의 좌보와 우보를 합하여 귀족회의 의장인 좌평을 설치 하고, 좌장을 설치하여 군사권을 왕권 하에 일원화하였다. 또 246년에는 마한의 목지국이 중심이 되어 대방군과 싸울 때 군대를 보내 낙랑군의 변경을 공격하여 변민을 포로로 잡아 오기도 하였 다. 한편 삼국사기 에는 고이왕대에 6좌평 16관등제로 완비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사비시대 의 사실이 여기에 소급하여 기록된 것이고 실제는 좌평의 설치와 관등제의 토대가 놓여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1) 초고왕의 동모제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즉위년조에는 蓋婁王의 둘째 아들 로 나온 다. 삼국사기 에 나오는 母弟의 용례를 살펴보면 모두 동모제를 말하므로 여기서는 모제를 동모 제로 해석하였다. 22) 갑인년(234)에 즉위하여 : 본서 권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에는 樂初=景初 2년(238)에 즉위하 였다고 하고 있다. 23) 52년간 다스렸다. : 초고왕의 동모제인 고이가 초고왕 말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죽었을 때의 나이는 74세가 된다. 그런데 초고왕의 재위 기간이 49년이므로 이때 고이가 태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고이가 초고왕의 즉위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나이는 123세나 된다. 이는 현 실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이다. 따라서 고이왕의 생존연대와 계보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 이에 대 한 상세한 검토는 김기섭, 2000, 근초고왕과 백제, 학연문화사 참조. 24) 책계왕 : 백제의 제9대 왕. 재위 286~298.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책계왕 즉위년조에는 靑 稽 로도 표기되고 있다. 이는 靑과 責, 替와 稽의 字形이 유사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왕비는 帶方 王의 딸 寶菓이다. 漢과 貊人의 공격을 막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298 594 三國遺事 제10대 분서왕25) 책계왕의 아들이다.26) 무오년(298)에 즉위하여 6년간 다스렸다. 제14대 근구수왕34)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을해년(375)에 즉위하여 9년간 다스렸다. 제11대 비류왕27) 구수왕의 둘째 아들로서 사반왕의 동생28)이다. 갑자년(304)에 즉위하여 제15대 침류왕35) 근구수왕의 아들이다.36) 갑신년(384)에 즉위하였다.37) 40년간 다스렸다.29) 제12대 계왕30)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갑진년(344)에 즉위하여 2년간 다스렸다.31) 제13대 근초고왕32)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병오년(346)에 즉위하여 29년간 다스렸다. 595 제16대 진사왕38) 침류왕의 동생이다.39) 을유년(385)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40) 제17대 아신왕41) 또는 阿芳42)이라고도 한다. 진사왕의 아들이다.43) 임진년(392)에 즉위하 여 13년간 다스렸다. 신미년(371)에 도읍을 北漢山으로 옮겼다.33) 25) 분서왕 : 백제 제10대 왕. 재위 298~304.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26) 책계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분서왕 즉위년조에는 責稽王의 長子 라고 하였다. 27) 비류왕 : 백제의 제11대 왕. 재위 304~344.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비류왕 즉위년조에는 오 랫동안 민간에 살고 있다가 분서왕의 아들 계가 어리므로 신민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된 것으로 나 온다. 28) 구수왕의 둘째 사반왕의 동생 : 仇首王은 234년까지 재위하였고, 비류왕은 그 보다 70년 뒤 인 304년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비류가 구수왕 말년인 234년에 태어났 다고 하더라도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71세 이상이 되며 사망할 당시의 나이는 112세가 된다. 따 라서 비류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과 생존연대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김 기섭, 2000, 앞의 책 참조. 29) 40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연표와 백제본기에는 41년으로 나온다. 30) 계왕 : 백제의 제 12대 왕. 재위 344~346. 삼국사기 권32 제사조에는 계왕 2년에 제단을 설치 하여 천지에 제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은 그가 다음 왕인 근초고왕 세력 에게 제거된 결과로 볼 수 있다. 31) 2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연표와 백제본기에는 재위 기간이 3년으로 나온다. 32) 근초고왕 : 백제 제13대 왕. 재위 346~375. 晉書 에는 餘句로 나온다. 餘는 백제의 왕성인 扶餘 를 단자 성으로 축약한 것이고 句는 이름 근초고를 단자 이름으로 축약한 것이다. 古事記 에는 照古王으로, 日本書記 에는 肖古王으로, 新饌姓氏錄 에는 速古王 또는 近束古王으로 나온다. 근 초고의 이름은 초고 에 근 자를 붙인 것으로서 자신의 계보가 초고왕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다. 동시에 근 자는 大 큰 이라는 뜻도 있어 대왕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왕비는 진씨 출신이다.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七支刀를 만들어 왜에 보내주었고 박사 고흥은 서기 라는 역사서 를 편찬하였으며 박사 王仁은 논어 와 천자문 을 왜에 전해주었다. 369년에 가야지역으로 진출 하여 가야세력을 영향권 안에 넣었고, 영산강 유역으로 진격하여 심미다례 등을 격파하여 영역으 로 확보하였다. 이로써 마한 세력은 백제에 편입되었다. 33) 도읍을 北漢山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에는 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 되어 있다. 肖古王이 도읍을 옮긴 배경은 이 해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故國 原王을 전사시킨 후 고구려의 보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으므로 고구려와 인접한 북한산으 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서의 북한산은 漢山 즉 南漢山으로 고쳐보아야 할 것이다. 34) 근구수왕 : 백제의 제14대 왕. 재위 375~384.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는 須 라고도 하였다. 위서 백제전에는 須로, 日本書紀 에는 貴須 또는 貴首 로, 新饌姓 氏錄 에는 近仇首 로 표기되어 있다. 須 는 貴須 의 貴 를 생략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편 칠 지도에 나오는 百濟王世子奇生聲音 에서 奇生 은 왕세자의 이름일 가능성이 크므로 근구수왕 에 비정할 수 있다. 왕비는 진씨 출신이다. 371년에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 시키고 황해도 신계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35) 침류왕 : 백제의 15대 왕. 동진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를 맞이하여 불교를 공인하고 한산에 절을 세웠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침류왕 즉위년조에 어머니는 阿 夫人으로 나온다. 阿 는 梵 語에서 여승을 뜻하는 阿尼 의 차용으로 보고 침류왕대의 불교공인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추정 된다(李丙燾, 1983, 역주 삼국사기 하, 乙酉文化社). 36) 근구수왕의 아들이다. : [史]에는 近仇首王의 長子 라고 하였다. 37) 즉위하였다 : 침류왕의 재위 기간은 본 왕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침류왕조에 의하면 재위 기간은 2년이다. 38) 진사왕 : 백제의 제16대 왕. 재위 385~392. 晉書 9 孝武帝紀 太元 11年條에는 夏四月 以百濟 王世子餘暉爲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 이라 하여 餘暉 로 나온다. 삼국사기 에는 枕流王이 죽자 태자인 阿莘의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辰斯가 즉위하였다고 나오나 日本書記 권9 神功紀 65年條에는 태자 阿華의 나이가 어려 辰斯가 왕위를 빼앗았다고 되어 있다. 궁궐안에 못을 파고 신선이 사는 산을 만들어 奇禽異草를 기르는 등 도교에 심취하였다. 39) 침류왕의 동생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즉위년조에는 近仇首王의 둘째 아들이며 枕 流王의 동생 이라고 하였다. 40) 7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연표와 백제본기에는 재위 8년으로 나온다. 辰斯王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 에는 狗原 行宮에서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日本書記 에는 국인이 진사 왕을 제거하고 침류왕의 태자 阿華를 옹립한 것으로 나온다. 41) 아신왕 : 백제의 제17대 왕. 재위 392~405.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아신왕 즉위년조에는 한 성 별궁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온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58성 700촌을 빼앗기고 대신과 장사 10여명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다. 왕비는 진씨 출신이다. 42) 阿芳 :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8년조에는 阿花 라고 하였다.

299 596 三國遺事 제18대 전지왕44) 또는 眞支王45)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映이고46), 아신왕의 아들이다.47) 을 사년(405)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제19대 구이신왕48) 진지왕의 아들이다.49) 경신년(420)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50) 제20대 비유왕51) 구이신왕의 아들이다.52) 정묘년(427)에 즉위하여 28년간 다스렸다. 제21대 개로왕53) 또는 근개로왕54)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慶司55)이다. 을미년(455)에 즉위 597 하여 20년간 다스렸다. 제22대 문주왕56) 또는 文明57)이라고도 한다. 개로왕의 아들이다.58) 을묘년(475)에 즉위하 여 도읍을 熊川59)으로 옮겼다. 2년간 다스렸다.60) 제23대 삼근왕61) 또는 三乞王62)이라고도 하였다. 문주왕의 아들이다.63) 정사년(477)에 즉 위하여 2년간 다스렸다. 제24대 동성왕64) 이름은 牟大로 또는 麻帝65) 또는 餘大66)라고도 하였다. 삼근왕의 堂弟이 43) 진사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아신왕 즉위년조에는 枕流王의 맏아들 로 나온다. 진사왕은 아신의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아신을 진사왕의 아들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44) 전지왕 : 백제의 제18대 왕. 재위 405~420. 왕비는 八須夫人으로 아들 久 辛을 낳았다. 아신왕 6년에 태자의 몸으로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왜국에 인질로 갔다.`광개토대왕비문a에는 전지가 왜에 간 것을 百殘違誓 與倭和通 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신왕이 죽자 해씨 세력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상좌평을 설치하고 군국정사를 맡겼다. 45) 眞支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전지왕 즉위년조와 일본서기 응신기 25년조에는 直支 라고 하였다. 46) 이름은 映 : 양서 백제전에는 餘映으로, 통전 변방에는 扶餘 으로 나온다. 餘는 부여씨의 약 칭이다. 47) 아신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전지왕 즉위년조에는 阿莘의 원자 라고 하였다. 48) 구이신왕 : 백제의 제 19대 왕. 재위 420~427.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25년조에는 왕모와 결 탁한 목만치가 전횡을 한 것으로 나온다. 49) 전지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구이신왕 즉위년조에는 支王의 長子 라고 하였다. 50) 7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구이신왕조에는 재위 기간이 8년으로 나온다. 51) 비유왕 : 백제의 제20대 왕. 재위 427~455. 송서 백제전에는 餘毗로 나온다. 52) 구이신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비유왕 즉위년조의 본문에는 구이신왕의 장자 로, 세주에는 支王의 庶子 라고 하였다. 구이신왕이 전지왕의 즉위년에 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즉 위할 당시의 나이는 13세 정도이고 죽을 때의 나이는 21세 정도이다. 이는 일본서기 권10 응신 기 25년조에 즉위할 당시 왕은 幼年이었다고 하는 것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비유왕은 구이신 왕의 장자라기보다는 전지왕의 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지왕의 부인 팔수부인은 전지 왕이 왜에 인질로 있을 때 맞은 부인으로서 전지왕과 함께 귀국한 후 구이신왕을 낳은 것으로 보 인다. 한편 전지왕은 즉위 후 해씨 가문 출신녀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므로 비유왕은 해씨 출신녀 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기섭, 2005,`5세기 백제와 왜의 교 류a, 왜 5왕과 한일관계 한일관계연구논집 2, 경인문화사 참조. 53) 개로왕 : 백제의 제 21대 왕. 재위 455~475.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즉위년조에는 비유왕의 장자 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의 꾀임에 빠져 대토목공사를 일으켜 재 정을 탕진하였다. 또 472년에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 다.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왕도는 함락되고 왕은 아차성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54) 근개로왕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즉위년조에는 近蓋婁 라고 하였다. 개로왕의 이름 을 近蓋婁 또는 近蓋盧 라고 한 것은 4대왕 개루왕과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 다. 한편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5년조에는 加須利君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55) 慶司 : 위서 백제전에는 餘慶으로 나온다. 여경은 扶餘慶司의 성과 이름을 한자씩 축약하여 표 현한 것이다. 56) 문주왕 : 백제의 제 22대 왕. 재위 475~ 년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전사하고 왕도 한 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57) 文明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즉위년조에는 汶州 라 하였고, 일본서기 권21 웅략 기 21년조에는 汶洲 로 나온다. 송서 백제전의 보국장군 餘都는 문주왕에 비정된다. 58) 개로왕의 아들이다 : 일본서기 권21 웅략기 21년조에는 개로왕의 동모제로 나온다. 문주가 왕 이 되기 전에 상좌평의 지위에 있었던 것에서 미루어 보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기백, 1959,`백제 왕위계승고a, 역사학보 11, 역사학회). 59) 熊川 : 본서 권2 기이 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에도 熊川으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즉위년조에는 熊津 으로 나온다. 오늘날의 충남 공주시이다. 60) 2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기에는 즉위 4년인 478년에 병관좌평 해구에 게 시해된 것으로, 삼국사기 권30 연표 중과 삼국사절요 에는 즉위 3년인 477년에 죽은 것으 로 나와 차이가 난다. 61) 삼근왕 : 백제의 제23대 왕. 재위 477~479. 일본서기 권21 웅략기 23년조에는 文斤王 으로 표기되어 있다. 62) 三乞王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삼근왕 즉위년조에는 壬乞 이라고 하였다. 63) 문주왕의 아들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에는 文周王의 長子 라고 하였다. 64) 동성왕 : 백제의 제24대 왕. 재위 479~501. 일본서기 권16 무열기 4년조에는 末多王 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 성왕 즉위년조에는 아버지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로 나오고,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조에 는 곤지의 둘째 아들로서 幼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금강유역권의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한성에서 내려온 구귀족과 세력균형을 이루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65) 麻帝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즉위년조에는 摩牟 라고 하였다.

300 598 三國遺事 다.67) 기미년(479)에 즉위하여 22년간 다스렸다.68) 제25대 무령왕69) 이름은 斯摩인데70) 곧 동성왕의 둘째 아들71)이다. 신사년(501)에 즉위하 제26대 성왕77) 이름은 明 ) 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다. 계묘년(523)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렸다.79) 무오년(538)에 도읍을 泗 80) 로 옮기고 南扶餘81)라고 불렀다. 72) 에는 이름을 扶餘隆 이라 했으나 잘못이 여 22년간 다스렸다. 南史 76) 에 상세히 보인다. 다.73) 隆은 곧 의자왕74)의 태자이다.75) 唐史 66) 餘大 : 동성왕의 본 이름은 扶餘牟大인데 이를 줄여서 餘大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67) 삼근왕의 堂弟이다 : 堂弟는 4촌을 말한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즉위년조에 동성왕 은 文周王의 동생 昆支의 아들 이라고 하였으므로 삼근과 동성은 4촌이 된다. 68) 22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연표와 백제본기에는 재위 23년으로 나온다. 동성왕은 재위 23년 인 501년에 가림성주 加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69) 무령왕 : 백제의 제 25대 왕. 재위 501~523. 본문은 虎寧王인데 고려 정종의 이름인 武를 避諱 한 것이다.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았다.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발 굴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墓誌石에도 영동대장군으로 나온다.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시 강국 이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70) 斯摩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조에는 이름은 斯摩<*또는 隆> 라고 하였다. 三國史節要 에는 餘隆 으로 나온다. 일본서기 권16 무열기 4년조에는 무령왕이 왜로 가는 길 에 角羅嶋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嶋王 또는 斯麻王으로 불렸다고 나온다. 斯麻는 嶋에 대한 일 본어의 음표기이다. 71) 동성왕의 둘째 아들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조에는 牟大王의 둘째 아들 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16 무열기 4년조에는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과는 異母兄弟로도 나온다.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5년조에는 개로왕이 자신의 아이를 밴 부인을 왜로 가는 동생 昆支君(軍 君)에 내려 주었는데 왜로 가는 길에 무령왕은 각라도에서 출생하였다고 나온다. 무령왕릉에서 출 토된 묘지석에 의하면 무령왕은 62세에 사망하였으므로 461년(개로왕 7)에 출생하였고 즉위할 당 시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런데 동성왕은 유년에 즉위하여 23년간 재위하였는데 즉위할 당시의 나 이는 20세 이전이므로 죽었을 때의 나이는 무령왕보다 어렸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무령왕은 동 성왕의 둘째 아들이 아니라 동성왕의 이모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君은 왕자에 왕제 등에 게 내려준 禮遇적 稱號이다. 곤지군은 斯我君 등과 더불어 백제가 君號制를 실시한 것을 보여준다. 72) 南史 : 중국 남조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본기 10권 열전 70권으로 되어 있다. 李延壽가 아버지 李大師의 유지를 받들어 북조의 역사를 다룬 北史 와 함께 완성하였다. 73) 扶餘隆 잘못이다 : 백제에는 시기를 달리하여 동명이인의 사례가 다수 보인다. 따라서 무령 왕의 이름이 융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릴 때의 이름은 사마이고 성년이 되면 서 융이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74) 의자왕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삼국유사 에는 寶藏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75) 태자이다 : 부여융은 의자왕 4년(64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76) 唐史 : 당나라 역사책이라는 의미인데 구체적으로는 구당서 와 신당서 를 말한다. 여기에는 의자왕의 아들 융이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 77) 성왕 : 백제의 제26대 왕. 재위 523~554.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혜왕 즉위년조에는 明王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년 5년 12년조에는 聖明王으로, 15년조에는 明王으로도 나오고 있다. 성왕이란 존호는 불교의 전륜성왕에서 따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태, 1990, 삼국시대불교신앙연구, 불광출판사, 143~144쪽 ; 조경철, 2005,`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 동a,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성왕조에는 지식이 영매하 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했다. 고 한다. 또 일본서기 에는 天道地理에 통달해 이름이 사방으로 퍼졌다. 는 기사가 있다. 16년(538)에 계획적으로 사비성으로 천도를 단행한 후 국 호를 南扶餘 라고 하여 부여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중앙통치조직으로는 5좌평 16관등제를 정비 하고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이루어진 22부제를 실시하였다. 수도는 上部 前部 中部 下部 後部라고 하는 5部와 그 아래에 항을 두는 5부-5항제를 실시하고, 지방에는 전국을 5方으로 나누 고 그 아래에 군과 현을 두는 방 군-성제를 실시하였다. 양나라와 빈번히 교류를 하여 毛詩博士와 講禮博士 工匠 畵師 등을 초빙해와서 예제 질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西部姬氏達率 怒唎 斯致契 등을 보내 불교를 전수하고, 醫博士 易博士 등을 파견하여 일본고대문화의 수준을 높였다. 신라와는 동맹관계를 맺어 남하하는 고구려를 공동으로 저지하였다. 551년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 가야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일단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신라에게 빼앗겼다. 이에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 으나 관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는 아들 여창을 위문하러 가다가 구천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 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와 신라와의 우호관계는 깨어지고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갔다. 78) 明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성왕 즉위년조와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에는 明 이라고 하였다. 79) 31년간 다스렸다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성왕기에는 재위 기간이 32년으로 나온다.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잡혀 비명에 죽었다. 80) 泗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성왕 16년조에는 泗 <*一名所夫里> 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충청도 부여현 건치연혁에는 百濟所夫里郡(一云泗 ) 로, 군명조에는 泗 ( 或作 ) 라 하고 있다. 성왕이 16년(538)에 웅진성에서 이곳으로 천 도하였다. 사비천도는 동성왕 대에 추진되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성왕이 즉위 후 아버지 무령왕대에 다져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기반의 확대 등에 힘입어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때 천 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은 사비지역에 기반을 둔 沙氏세력이었다. 신라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수도 사비 지역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고, 경덕왕대에 부여군으로 개칭되었다. 81) 南扶餘 :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일시적으로 고친 국호.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것은 부여족의 정통성을 남쪽의 백제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동시에 금강유역으로 수도 가 옮겨짐에 따라 백제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보여주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목적이 있었

301 600 三國遺事 제27대 위덕왕82) 이름은 高 또는 明이다.83) 갑술년(554)에 즉위하여 44년간 다스렸다.84) 제28대 혜왕85) 이름은 季로 또는 獻王이라고도 한다. 위덕왕의 아들이다.86) 무오년(598) 에 즉위하였다. 제29대 법왕87) 이름은 孝順 또는 宣이다. 혜왕의 아들이다.88) 기미년(599)에 즉위 했다. 601 제30대 무왕89) 또는 武康90) 또는 獻丙이라고도 하였다. 또 어릴 때의 이름은 一耆篩德이 라고도 한다.91) 경신년(600)에 즉위하여 41년간 다스렸다. 제31대 의자왕92) 무왕의 아들이다.93) 신축년(641)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94) 경신년(660)에 나라가 없어졌다.95) 온조왕 계묘년(B.C.18)로부터 경신년 (660)에 이르기까지 678년간이다. 던 것으로 보인다. 82) 위덕왕 : 백제의 제 27대 왕. 재위 554~598.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조에 의하면 즉위 당 시의 나이는 30세였다. 따라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8년조에는 557 년에 위덕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어 3년간 空位 시기가 있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부 여 능산리폐사지에서 출토된 昌王銘 화강석제 舍利龕에는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丁亥 라 하고 있어 즉위년은 555년이 된다. 성왕이 554년에 죽은 후 즉위한 위덕왕은 유년칭원법에 따라 이듬 해를 원년으로 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일본서기 에 보이는 3년간의 공위 시기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창은 554년 관산성에서 신라와 대결할 때 백제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하였지만 대패하였 다. 즉위 후 패전에 대한 책임때문에 왕권이 약화되었다. 창왕명사리감 명문에 의하면 왕은 567 년에 부왕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산리에 陵寺를 창건하였고,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명 문에 의하면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세우고 목탑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83) 이름은 高 또는 明이다 : 이러한 이름은 본서에만 나온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위덕왕 즉위년 조에는 昌 이라고 하였고, 창왕명사리감에 昌王으로, 2007년에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에는 百濟王昌으로 나온다. 따라서 창왕은 생시의 왕명이고 위덕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 84) 44년 : 삼국사기 에는 재위 45년으로 나온다. 85) 혜왕 : 백제의 제28대 왕. 재위 598~599.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혜왕기에 의하면 재위 기간 은 2년이다. 위덕왕이 죽었을 당시 나이가 75세였으므로 혜왕도 즉위할 당시 70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86) 위덕왕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혜왕 즉위년조에는 明王의 둘째 아들 로, 일본 서기 권19 欽明紀 16年條에는 왕자 혜는 위덕왕의 동생 으로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볼 때 惠王 을 威德王의 아들이라고 한 왕력의 기사는 잘못이다. 수서 와 한원 에는 惠王에 대한 기록이 보 이지 않는다. 87) 법왕 : 백제의 제29대 왕. 재위 599~600. 본 왕력에는 법왕의 재위 기간은 나오지 않는데 삼국 사기 권27 백제본기 법왕기에 의하면 재위 기간은 2년이다. 2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은 실권 귀 족과의 갈등속에서 빚어진 정치적 희생의 결과로 보인다. 재위중 살생금지령을 내려 민가에서 기 르는 매를 놓아주고 고기잡이 도구를 불살랐다. 88) 혜왕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법왕 즉위년조에는 惠王의 長子 로 나온다. 수 서 와 한원 에는 昌王의 아들 이라고 하고 있는데 잘못이다. 89) 무왕 : 백제의 제30대 왕. 재위 600~641. 삼국사기 연표와 백제본기에는 재위기간을 42년으 로 나온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권3 흥법 3 法王禁殺조, 수 서 한원 등에는 法王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북사 는 昌死子璋立 이라고 하여 창왕=위덕왕 의 아들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 2 무왕조에는 貧女가 경사 남쪽의 못 가에서 池龍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은 것으로 나온다. 무왕의 출계에 대해 이설이 많은 것은 그의 출계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池龍은 왕족을 의미하므로 무왕의 아버지는 왕족이 다. 그렇지만 그가 마를 캐며 생활하였다는 것은 몰락왕족 출신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다. 익산 경영을 추진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고 익산 왕궁리에 왕궁을 세웠으며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전륜성왕을 자처하였다. 90) 武康 : 삼국유사 권2 기이 2 무왕조에는 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이라 하여 무강은 잘못 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 에는 武廣王으로 나온다. 武康의 康 은 寧 과 통하므로 武康王 은 武寧王 (501~523)의 異寫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69, 원문겸 역주 삼국유사, 동국문화사). 그러나 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 에 나오는 武廣王의 廣은 글자의 모양이나 음이 康과 비슷하므로 무왕=무강왕=무왕으로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3에 는 무강왕이 인심을 얻어 마한을 세웠다든가 익산의 쌍릉에 대해 고려사 를 인용하여 後朝鮮武 康王과 왕비의 능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강왕을 고조선과 연계시키거나 준왕으로 보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一云百濟武王 小名薯童 末通卽薯童之轉 이라 하여 武康의 俗號 末通과 武王의 小名 薯童을 음이 상통하는 것으로 보고 무왕과 무강왕을 동일시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91) 獻丙 一耆篩德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즉위년조에는 璋으로 나온다. 구당서 백제전과 신당서 백제전에는 扶餘璋으로 나온다. 92) 의자왕 : 백제의 제31대 마지막 왕. 재위 641~660. 해동의 증자로 불리었다. 즉위 초에 반대세력 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또 미후성 등 40여성을 함락하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 락함으로서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4년(644)에는 왕자 융을 태자로 삼고 16년(653)에는 왜국과 화 호 관계를 맺었다. 또 고구려와 연계하여 신라의 30여성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년(656) 이후부터 황음한 생활에 빠져들고 왕의 총애를 받은 왕비 은고가 권세를 휘두르면서 성충과 같은 直臣들이 쫓겨나 정치 질서가 허물어졌다. 말년에는 태자를 융에서 효로 바꾸기도 하였다. 93) 무왕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즉위년조에는 武王의 元子 라고 하였다. 94) 20년간 다스렸다 : 의자왕은 660년에 항복한 후 당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당에서 죽었다. 무덤은 북망산의 孫晧와 陳叔寶 무덤 곁에 있다고 한다. 95) 나라가 없어졌다 :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의자왕은 임시로 피난하였던 웅진성에서

302 602 三國遺事 603 世)104)가 우뚝 일어나니, 이에 백제가 金馬山105)에 나라를 세웠다. 고 하였다.106) 崔致遠107)은 권1 紀異 2 馬韓 魏志96)에 魏滿97)이 조선을 치자 조선왕 準98)은 궁인과 측근의 신하(宮人左右)를 거느리고 101) 고 하였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韓의 땅99)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100)이라 하였다. 102) 103) 다. 甄萱 이 [고려] 太祖 에게 올린 글에는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박혁거세(赫 나와 8월 2일에 사비성에서 降服禮를 행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96) 魏志 : 중국 西晉의 陳壽(238~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를 다르게 표현한 것. 위지는 총 30 권으로 본기 4권 열전 26권이다. 이 가운데 제30권에 선비오환동이전이 수록되어 있다. 97) 魏滿 : 사기 조선전에는 滿으로,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전에는 衛滿으로, 본서 권1 기이 魏滿朝鮮條에는 魏滿으로 나온다. 위만은 한나라 燕國의 사람으로 연왕 盧菅이 흉노로 도망간 사 건을 계기로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준왕은 그를 박사에 봉하고 100리의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그 후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것을 핑계로 준왕을 공격하여 새로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사기 조선전에는 그가 망명할 당시 호복을 입고 상투를 틀었다고 하고 있어 그의 출자를 동이족 계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98) 조선왕 準 : 고조선의 마지막 왕. 생몰년 미상. 아버지는 否王이다.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에 게 박사의 칭호를 주고 100리의 땅을 봉해 주었지만 B.C.198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99) 韓의 땅 : 준왕이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 고려사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전북 익산 으로 나온다. 100) 마한 : 마한 진한 변한으로 이루어진 삼한의 하나.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의하면 마한은 한 반도의 서부인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위치하였고 50여 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였다. 대국은 1만여 가이고 소국은 수천가였으며, 각 국의 우두머리[主帥 將帥]는 臣智나 邑借를 칭하 였다.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은 목지국이었고 맹주는 진왕을 칭하였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광주, 충남 공주설, 서울설, 충남 직산설, 인천설, 충남 예산설, 직산에 있다가 뒤에 광주 로 이동했다고 보는 설, 금강유역설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마한은 27년(A.D.9) 백 제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과 진서 동이전에는 3세기 후반에 마 한이 조위와 충돌하거나 서진과 교섭한 기사가 나오고 있어서 백제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 렵다. 101) 마한이라고 하였다 : 준왕은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는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이라 하여 韓地에서 韓王을 칭한 것으로 나오고 후한서 동이전 한전에는 馬韓을 공파하고 馬 韓王이 되었다고 나온다. 본 기사는 후한서 의 기사를 따른 것이다. 102) 甄萱 : 후백제를 건국한 왕. 재위기간 892~935. 본성은 이씨.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나오기도 하고 무진주 출신으로 나오기도 한다. 아버지는 아자개. 신라 말에 서남지역을 지키는 하급 장교 로 근무하다가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진성여왕 6년(892)에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무 진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자 효공왕 4년(900)에 완산(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충돌하면서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합천) 등 10여 성을 빼앗았고, 927년에 신라 왕경을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웠다. 그 후 고려를 세운 왕건의 군대를 공산에서 크게 격파하여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였지만 929년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대패하여 밀리기 시작하여 934년에는 웅진(지금의 공주) 이북의 30 여 성이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다가 맏아들 신검에게 쫓겨 나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그 후 몰래 도망하여 왕건에게 항복하여 尙父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936년 고려의 공격으로 후백제가 멸망하자 등창이 발생하여 연산에서 죽었다. 103) 太祖 : 고려 태조 왕건. 재위기간 918~943년. 이름은 왕건, 자는 약천, 송악(개성) 출신이다. 시 호는 신성이며 능은 현령이다. 개성의 왕건릉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청동제 상이 출토되었다.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이고 어머니는 한씨이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벌어참성 성주가 되었고, 898년에는 정기대감으로, 900년에 아찬의 관등을 받았다. 903년에 금성(지금 의 나주) 등 10여 군을 빼앗은 공으로 아찬이 되었고, 906년 상주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 고, 909년 해군대장군이 되었으며, 913년에 파진찬이 되었다.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 과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이듬해 에 철원에서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즉위 후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고 호족의 딸 들과 결혼하거나 왕씨 성을 하사해 주기도 하였으며 민심 수습을 위해 취민유도를 표방하였다. 기인제도 사심관제도 등을 시행하였다. 공산전투에서 견훤군에 대패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지 만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935년에 신라 경 순왕이 귀순해 왔고, 936년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정계 1권과 계백료서 8편을 발표하였고, 죽기 전인 943년에`훈요십조a를 남겨 후세의 왕들이 귀 감을 삼도록 하였다. 104) 박혁거세 : 신라 시조. 재위기간은 B.C.57~A.D.4년. 알에서 태어났는데 알을 박이라 하였으므 ㅂ 로 성을 박씨로 하였다고 한다. 혁거세는 순수한 우리말 불구내(발간뉘)의 한역어로 光明理世의 ㄹ ㅂ 의미를 갖는다. 赫은 ㄹ 발, 거세는 거서간의 거서에 해당된다(양주동, 1957, 고가연구, 박문출판 사). 105) 金馬山 : 전라남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산. 익산의 鎭山인 乾子山과 龍華山(彌勒山) 중의 하나 로 추정된다. 106) 옛날 세웠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견훤전에는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 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百濟開國金馬山 으로 나온다. 107) 崔致遠 :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인. 857~? 왕경 沙梁部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孤雲 海雲이 다. 고려 현종 때 文昌侯라는 諡號를 받았다. 868년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7년만에 18세의 나이 로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76년에 율 수현위로 임명되었다. 879년에 高騈이 諸道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황소의 난을 토벌하였을 때

303 604 三國遺事 )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 ] [신라]<*본기에 의하 115) 四夷111) 九夷112) 九韓113) 穢貊114) 周禮 職方氏116)는 사이를 관장하였다. 구맥이라는 면, 신라가 먼저 갑자(B.C.57)에 일어나고 고구려는 그 후 갑신(B.C.37)에 일어났는데 117) 에는 溟州118)는 옛날의 穢國119)인데, 농부 것은 동이의 종족으로, 곧 구이이다. 三國史 이렇게 [고구려가 먼저 일어났다고] 말한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 명왕109)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아울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더러 금마산을 인정하여 마한이 백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馬邑山110)이 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종사관이 되어 表章 書啓를 작성하였다. 880년에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승무랑전중시어사재 공봉에 임명되고 비금어대를 하사받았다. 881년에 지은 討黃巢檄文으로 이름을 날렸다. 885년 에 귀국하여 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史가 되었고, 대산 천령 부성태수 등을 역임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6)에 하정사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도적이 들끓어 가지 못했다. 895년(진성여왕 8)에 시무10조를 올려 아찬의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6두품출신으로 출신성분 의 제약을 받자 관직을 그만두고 가야산에 들어가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46 열전 에 실려 있다. 저술로는 四六集 桂苑筆耕集 이 있고, 금석문으로는`四山碑銘a등이 있다. 108)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 삼한과 삼국과의 대응관계에 대해 최치원은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로 보았다. 그러나 한치윤이 海東繹史 에서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 한-가야로 대응시켰는데 이것이 통설화되었다. 109) 동명왕 : 고구려의 시조. 재위기간 B.C.37~B.C.19. 이름은 朱蒙 鄒牟 象解 中牟 都牟 등으 로 나온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에 실린 동명신화와`광개토대왕비문a 에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유화로 나온다. 동부여의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 형제들의 핍박을 피해 烏 伊 摩離 陜父 등과 함께 도망하여 忽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다른 일설에 는 주몽이 졸본부여로 도망와서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고 졸본부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 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주몽이 졸본지역으로 도망왔을 때 졸본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두었지만 우태가 죽어 과부로 지내 다가 주몽과 결혼하였다. 주몽은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온조와 비류를 친 자식처럼 여겼다고 한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주몽은 B.C.36년에 비류국의 송양왕을 굴복시켰고, B.C.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지었으며, B.C.35년에 는 행인국을, B.C.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킨 것으로 나온다. B.C.19년 아들 북부여의 예씨 부 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죽은 후 용산에 장사되었다. 동명성 왕이라는 시호는 고구려 후기 영양왕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110) 馬邑山 : 평양의 서남방에 있는 산으로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당나라 장군 蘇定方이 먼저 이곳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마읍산을 마한의 명칭유래와 관련시키고 있으나 확 실하지는 않다. 111) 四夷 : 고대 중국에서 주위에 있는 이민족을 낮추어 일컫는 말. 四裔라고도 하였다. 東夷 西 戎 南蠻 北狄을 말한다(김상기, 1984, 동방사논총 ). 중국 정사에 주변 민족을 사이로 표현한 것은 삼국지 와 후한서 부터 나온다. 따라서 중국에서 四夷의 관념은 후한 대부터 생겨난 것이 라 할 수 있다. 112) 九夷 :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75에는 東方을 夷라 하고 夷에는 9종이 있는데 犬夷 于夷 方 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라고 나온다. 따라서 구이는 중국에서 보았을 때 동방 의 여러 異種族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하후씨 태강 때에 중국과 충돌하였으며, 걸왕 때에는 중국으로 침략해 들어갔다가 주공 때에 평정되었다. 그 후 강왕 때에 다시 강성해지자 주나라는 徐偃王에게 이들에 대한 통제를 맡겼다. 113) 九韓 : 삼국유사 권4 탑상제 4 황룡사구층탑조에 인용되어 있는 海東安弘記 에는 신라 선덕 여왕대에 九韓이 침략해 오자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의 각 층은 각각의 나라에 대 응시키고 있는데 1층은 日本, 2층은 中華, 3층은 吳越, 4층은 托羅, 5층은 鷹遊, 6층은 靺鞨, 7 층은 丹國, 8층은 女狄, 9층은 濊貊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구한은 신라가 접촉한 여러 나라와 종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14) 穢貊 : 穢는 사기 에는 穢, 한서 에는 穢, 또는, 삼국지 에는 濊로 되어 있다. 현재는 일반 적으로 濊라 쓴다.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중남부 일대에 살았던 우리나라 고대 종족의 한 갈래이 다. 예의 주 분포지역은 부여가 자리잡은 만주의 농안, 장춘지역, 영동 7현이 위치한 함경도 지 역, 예국이 자리잡은 강릉지역, 晋率善濊伯長印 이 출토된 영일군 지역 등이다. 맥의 주 분포지 역은 小水貊 大水貊이 자리잡은 압록강 송화강유역일대와 맥국이 자리잡은 강원도 춘천지역 등이다. 예와 맥의 상호 관계와 종족 계통에 대해 예맥을 예와 맥의 연칭으로 보아 고대 중국 동 북지방과 한반도에 거주하던 종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견해도 있지만`광개토대왕비문a에 예 가 나오고 또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이나 부여전에 예와 맥이 별개로 나오고 있어 양자는 나 누어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와 맥은 韓에 비해 기본적으로 공통점이 많지만 맥은 부여 고구려 주민의 주류를 이루었고, 예는 예국 주민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서기 에서는 고구려를 (고마)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맥과 통한다. 115) 周禮 : 周官 이라고도 한다. 周代의 官制를 기술한 책으로 周公 旦이 찬하였다. 6篇 360官인 데 후한의 鄭康成이 注를 달고 당의 賈公彦이 疏를 지었다. 116) 職方氏 : 周代의 관직 이름. 주례 의 夏官 소속. 天下 九州의 지도를 장악하고 사방의 공물을 취 하였다. 117) 三國史 : 삼국사기 를 말한다. 삼국사기 를 삼국사 로 지칭한 용례는 삼국유사 와 세종실 록 지리지에도 보인다(정구복, 1993, 고려초기의 삼국사편찬에 관한 일고, 국사관논총 45). 이와는 달리 이 삼국사 를 大覺國師文集 에 나오는 海東三國史 나 이규보의 東明王篇

304 ) 가 밭을 갈다가 穢王의 인장을 얻어 바쳤다. 고 하였다. 또 春州121)는 옛날의 牛首州122) 123) 로서 옛 맥국이다. 라고 하였다. 또는 오늘날의 朔州124)는 바로 맥국인데 혹은 平壤城 三國遺事 ) 6은 索家,130) 7은 東屠,131) 8은 倭人, 9는 天鄙132)이다. 라고 하였다. 海東安弘記 에는 구한은 1은 일본,134) 2는 중화,135) 3은 오월,136) 4는 羅,137) 5는 鷹遊,138) 6은 말갈,139) 7은 125) 126) 라고 하였다. 淮南子 의 주에는 동방의 오랑캐는 9종이다. 라고 하 이 맥국이다. 127) 에는 구이는 1은 玄, 2는 樂浪, 3은 高麗, 4는 滿飾,128) 5는 鳧臾,129) 였다. 論語正義 에 나오는 舊三國史 또는 삼국유사 에 나오는 前三國史 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 다. 이에 대해서는 이강래. 1996, 典據論, 민족사 참조. 118) 溟州 : 지금의 강릉이다. 강릉은 본래 고구려의 河西良인데 신라의 영역이 된 후 지증왕대에는 하슬라주라 하였고, 창녕신라 진흥왕척경비에는 河西阿로 나온다. 선덕왕 때에 소경을 설치하 고 장관으로 사신을 두었다. 그 후 태종왕 5년(657)에 이 지역이 말갈과 인접하여 있었기 때문 에 소경을 폐지하고 하슬라주를 설치한 후 장관으로 군주를 두었다. 통일 이후 경덕왕 16년 (757)에 명주로 고쳤으며 고려 때도 명주라고 불렀다. 119) 穢國 : 삼국사기 권35 잡지 4 지리 2 명주조에 賈耽古今郡國志云 今新羅北界溟州 蓋濊之古國 前史以扶餘爲濊地 蓋誤 로 나온다. 이에 의하면 예국은 강원도 강릉 지방에 근거한 국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예는 그 위치가 함흥지방에 비정됨으로 강릉의 예국 과 구별된다. 120) 穢王의 도장 :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6년 춘2월조에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 之 로 나온다. 121) 春州 : 지금의 춘천, 고려 태조 23년에 춘주로 개칭하였다. 122) 牛首州 : 지금의 춘천. 춘천의 옛 명칭은 처음에는 走壤이라 하였는데 신라 선덕여왕 6년(637) 에 우수주로 하고 군주를 두었다. 문무왕 13년(673)에는 수약주라 하였고, 경덕왕 때에 삭주라 하였다. 123) 맥국 : 춘천 지역에 자리한 국의 명칭. 삼국사기 권35 잡지 4 지리지 2 삭주조에 賈眈古今郡 國志云 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蓋今新羅北朔州 라 한 기사 참조. 124) 朔州 : 지금의 춘천. 경덕왕 대에 종래의 수약주를 삭주로 고쳤고 고려시대에는 춘주라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의 삭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이다. 125) 平壤城이 맥국이다 : 평양성을 맥국이라 한 것은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성이고 고구려가 맥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에서 연역해서 나온 것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75 구려전에 句驪一 名貊耳 有別種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 所謂貊弓是也 라 한 기사에 의하면 고구려는 맥족에 의 해 세워진 나라임을 알 수 있다.`쌍계사진감선사탑비명a에는 고구려를 驪貊 으로 표기하고 있다. 126) 淮南子 : 前漢시대에 淮南王 劉安이 撰한 책. 原名은 淮南鴻烈 이며 20권이다. 後漢의 高誘 가 注를 달았다. 127) 論語正義 : 논어 에 魏의 何晏이 注를, 宋의 邢昺이 疏를 달았으며 20권으로 되어 있다. 128) 滿飾 : 論語正義 와 爾雅 李巡의 주에 九夷의 하나로 나온다. 129) 鳧臾 : 夫餘와 음이 비슷해 부여의 다른 표기로 보고 있다. 130) 索家 : 이아 이순의 주에 색가를 구이의 하나로 나온다. 131) 東屠 : 논어정의 와 이아 이순의 주에 구이의 하나로 나온다. 132) 天鄙 : 논어정의 와 이아 이순의 주에 구이의 하나로 나온다. 133) 海東安弘記 : 안홍은 安含이라고도 하였다. 생몰년은 579~64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평왕 37년(615)에 불법을 구하기 위해 隋에 유학했다. 저서로는 동도성립기 가 있다. 이에 의하면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비록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어 구한이 침로하므로 용궁 남쪽에 황룡사 구 층탑을 세우면 인국의 재난이 진정된다고 나온다. 해동고승전 에 이 책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원문과 후대의 해석문이 섞여 있어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해동안홍기 는 안홍의 전기라는 뜻 인지, 아니면 안홍의 저술인 東都成立記 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134) 일본 : 일본서기 에는 일본이라는 국명이 4세기에 나오지만 중국 사서에는 4세기 이후 6세기 까지 왜로 나온다.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시기는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조에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이라 한 기사에 의하면 670년이라 할 수 있다. 구당 서 동이전 왜국전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135) 중화 : 중국이 천하의 중앙에 위치하며 문화도 가장 발달하였다는 선민의식에서 자신을 높여 부 른 말. 그에 따라 주변 민족을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고 하였다. 중화 라는 말은 삼국지 촉지 5 제갈량전에 보인다. 136) 오월 : 吳와 越은 중국 춘추시대에는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나라였고, 錢 가 907년에 건국한 오월은 5대 10국의 하나이다. 그러나 둘 다 안홍이 생존한 시기와는 맞지 않다. 그런데 전국시대 에 오와 월은 황하 유역의 中原人에 의해 蠻族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여기서의 오월은 남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37) 羅 : 지금의 제주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주도의 명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州湖國으 로, 북사 백제전에는 耽牟羅로, 수서 백제전에는 聃牟羅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1 년(499)과 일본서기 계체기에는 耽羅로, 수서 고구려전에는 羅로 표기되고 있다. 138) 鷹遊 : 제왕운기 에 의하면 백제의 다른 이름으로 鷹準이 나온다. 응유와 응준의 공통점은 鷹이 다. 따라서 응유는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39) 말갈 : 先秦시대에는 숙신으로, 3세기경에는 읍루로, 5세기 경에는 물길로, 7세기에 와서 말갈 로 표기되었고, 그후 여진으로도 불리웠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초기에 백제가 말 갈과 싸운 것으로 나온다. 이 말갈은 함경도 지역에 자리한 예족을 가리키므로 僞靺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통일기 신라는 신문왕 3년(683)에 말갈국민으로 9서당의 하나인 黑衿誓幢을 만들 었고, 또 통일전쟁이 한창 전개되는 시기에 말갈출신의 이근행이 말갈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본 기사의 말갈은 함경도 지역에 위치한 여

305 608 三國遺事 丹國,140) 8은 여진,141) 9는 예맥이다. 라고 하였다. 609 권1 紀異 2 卞韓 百濟<*또한 남부여149)라고도 하니, 즉 사비성이다.> 신라 시조인 赫居世 왕이 즉위한 지 19년 임오(B.C.39)에 卞韓150) 사람이 나라를 바쳐 권1 紀異 2 南帶方 152) 와 舊唐書 에는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고 하였다. 항복해왔다.151) 新唐書 曹魏142)때 처음으로 南帶方郡143)을 두었다. <*지금의 남원부144)이다.> 그 까닭으로 [남대 145) 146) 방이라] 하였다. 대방의 남쪽 바다 천리를 瀚海 라고 하였다. <*후한의 건안 후한서 에는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고 하였 연간에 다. 최치원은 변한은 백제이다. 라고 하였다. [백제]본기를 살펴보면, 온조가 일어난 것 마한 남쪽 황무지 를 대방군 으로 삼으니 왜와 한이 드디어 [여기에]속하였다는 것이 은 [한나라 성제]鴻嘉 4년 갑진(B.C.17)153)에 있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의 시대보다 40여 이것이다.> 년 뒤인데, 唐書 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고 한 것은 온조의 계통이 동명 147) 148) 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서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아울러 대치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을 뿐이고, 도읍한 곳이 낙랑 진족과는 별개로 만주 지역에 위치하였던 말갈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문안식, 2003, 한국고대사와 말갈, 혜안 참조). 140) 丹國 : 거란을 말한다. 거란은 글안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몽고족의 한 분파로 4세기 이후 시 라무렌강 유역에 살면서 突厥 回屹 高句麗 中國에 차례로 소속되었다. 907년에 중국 북부 에 大契丹國(遼)을 건설했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가 격퇴되었다. 141) 여진 : 중국 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종족. 선진시대에는 肅愼으로, 3세기 경에는 婁로, 5세기에 는 勿吉로, 7세기에는 靺鞨로 불리웠다. 11세기 후반에 와서 完顔部의 추장 阿骨打가 나와 종족 을 통합해 遼를 물리치고 金을 건설하였다. 142) 曹魏 : 중국 삼국시대에 조조가 세운 魏를 말한다. 남북조시대의 북조의 하나인 後魏=北魏와 구 분하기 위해 사용한 이름. 존속기간은 220~265년. 143) 南帶方郡 : 본 기사에만 나오는 이름이다. 조위 때는 대방군은 두었지만 남대방군은 두지 않았 다. 남대방이라는 명칭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장수 劉 仁軌를 대방주자사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부조에는 유인궤와 관련되는 지명이 나온다. 144) 남원부 : 백제시대에는 고룡군이었다. 신라에 병합된 후 신문왕 3년(683)에 소경을 두었다. 景 德王 16년(757)에 南原小京이라고 하였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남원부라고 하였다. 145) 瀚海 : 大海라는 의미로서 대마도와 북구주 사이의 바다이다. 삼국지 동이전 왜인전에 至對 馬國 又南渡一海千餘里 名曰瀚海 至一大國 이라 한 기사가 나온다. 146) 건안 : 중국 後漢 獻帝의 연호. 196년에서 219년까지 사용되었다. 147) 마한 남쪽 황무지 :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전에는 둔유현 이남의 황지로 나온다. 148) 대방군 : 후한 헌제 건안(196~219)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지를 개척하여 설치하였다. 이러한 황무지는 낙랑군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간 결과로서 생 겨난 것으로 보인다. 의 북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九龍山을 멋대로 하여 또한 卞那山154)이라고 하기 때문에 고구려를 변한이라 한 것은 대체적으로 잘못이다. 마땅히 옛날 현자(古賢)155) 149) 남부여 : 백제 聖王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명이다. 150) 卞韓 : 삼한의 하나. 弁辰 弁韓으로도 표기된다.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이서, 지리산 이동에 위치하였으며 12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였다. 이중 김해의 구야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함안의 안야국(안라국)도 중요한 국의 하나였다. 이 변한은 4세기 초에 와서 가야연맹체로 전환 되었다. 151) 시조 혁거세 항복해 왔다 :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19년 춘정월조에 卞韓以國來降 이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人 자가 빠져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진변한 전에는 변한은 3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삼국사기 혁거세왕조에 변한이 항복하여 멸망하였다고 한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152) 변한의 후예 낙랑 땅에 있다 : 낙랑은 낙랑군을 말한다. 낙랑군은 오늘날 평양을 치소로 한 중국 군현의 하나이고, 변한은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이서, 지리산 이동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변한의 후예가 낙랑 땅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153) 鴻嘉 4년 갑진 : 鴻嘉는 후한 成帝의 연호(B.C.20~B.C.17)로서 4년은 B.C.17년이다. 삼국사 기 권23 백제본기 백제시조 온조왕 즉위년조에는 前漢成帝鴻嘉三年(B.C.18) 이라 하여 본문 과 1년 차이가 난다. 154) 九龍山 卞那山 : 평양의 동북에 있는 지금의 대성산을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양 산천조 참조). 155) 옛날의 현자(古賢) : 여기서는 최치원을 말한다. 삼한과 삼국의 관계에 대해 최치원은 마한-고구 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로 파악하고 있다. 본서에서 고현의 말이 옳다고 한 것은 일연이 최치 원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306 610 三國遺事 의 말이 옳다고 할 것이다. 백제 전성 시기에는 15만 2천 3백 호였다.156) 611 용맹하며 담력과 기개가 있었다.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에게 우애로웠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海東의 曾子164)라 불렀다. 貞觀165) 15년 신축년(641)에 즉위하였다. [후에 왕이] 권1 紀異 2 眞興王 주색에 빠져 정치는 황폐하게 되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166) 佐平167)<*백제의 爵名이 (전략) 承聖157) 3년(554) 9월에 백제의 군사가 珍城158)에 침입해 와서 남여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략질해 붙잡아 갔다.159) 이보다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대를 합하여 고구려 를 치려고 모의하였다.160)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있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으랴. 하고는 이 말을 161) 고구려에 통보하였다. 고구려가 그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우호를 통하였다. 백제가 이 를 원망하여 쳐들어 온 것이다. 다.> 成忠이 극진하게 간언을 하였지만 듣지 않고 옥중에 가두었다. [성충이] 굶주려 죽게 되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바라건데 한 마디 말 을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대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 같습 니다. 무릇 군대를 부릴 때는 지리를 살펴서 택하여야 하는데 상류에 자리 잡아 적을 맞 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면 육로는 炭峴168)<* 沈峴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요충지이다.>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伎伐浦<*바 로長 또는 孫梁이다. 只火浦 또는 白江169)이라고도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 권1 紀異 2 太宗春秋公 (전략)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인 義慈162)는 바로 虎王163)=武王의 맏아들이었다. 웅걸차고 156) 15만 2천 3백호 : 백제의 인구에 대해 구당서 백제전과 신당서 백제전 및 삼국사기 권37 잡지 6 지리 4 백제조에는 37군 200성 76만호 로 나온다. 그러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a에는 24만호에 620만구로 나온다. 따라서 본서의 十五萬二千三百戶 가 어 느 때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정림사지오층석탑의 24만호는 各齊編 戶 된 것이므로 본서의 15만 2천 3백호도 편호된 호로 보아야 할 것이다. 157) 承聖 : 남조 양나라 元帝의 연호. 552~555년까지 사용되었다. 158) 珍城 :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於珍城이라 하여도 역시 위치는 알 수 없다. 충남 금산군 진산 면(백제의 珍同縣)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59) 承聖 3년 붙잡아 갔다 : 다른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160) 백제는 모의하였다 : 551년에 백제가 신라 및 가야와 합세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한 고구려 를 공격하여 백제는 6군을, 신라는 죽령 이북에서 고현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 이 기사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기세를 타서 고구려를 더욱 밀어붙이려고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61) 고구려가 우호를 통하였다 :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한 것은 553년이다. 그리고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3년(552) 5월조에 高麗與新羅通和幷勢 謀滅臣國 與任那 라 한 기사에서 미루어 볼 때 고구려가 신라와 우호를 맺은 것은 551년 9월 이후 552년 5월 이전의 어느 시기라고 할 수 있다(노중국, 2006,`5~6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고구려 의 한강유역 점령과 상실을 중심으로-a, 북방사논총 11호, 고구려연구재단). 162) 義慈 : 백제 마지막 왕. 재위 기간은 641~660년. 무왕의 맏아들. 해동증자로도 불렸다. 163) 虎王 : 무왕을 말한다. 고려 정종의 이름 武를 피휘하여 호왕이라 한 것이다. 재위기간 600~641년. 이름은 璋 一耆篩德 獻丙 등으로도 표기되었다(주 88) 참조). 164) 曾子 : 공자의 제자. 이름은 參이고 자는 子輿이다.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한 인물로 유명하여 孝經 을 저술하였다. 165) 貞觀 : 당나라 태종의 연호. 627~649년까지 사용되었다. 166) 주색에 빠져 위태롭게 되었다. : 의자왕의 음란과 향락적인 생활에 대해 정림사지오층석탑 에 새겨진`대당평백제국비명a에는 外棄直臣 內信妖婦 刑罰所及 唯在忠良 寵任所加 必先陷倖 이라 되어 있고 일본서기 권26 제명기 6년조에는 高麗沙門道顯日本世記曰 或曰 百濟自 亡 由君大夫人妖女之無道 擊奪國柄 誅殺賢良 故召斯禍矣 可不愼歟 라 나온다. 167) 佐平 : 백제 16관등제에서 제1관등. 직무 분담에 따라 내신좌병 내두좌평 내법좌평 조정좌 평 위사좌평 병관좌평으로 나누어졌다. 168) 炭峴 : 沈峴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백제의 요충지.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 리로 보는 견해, 웅남 옥전의 마도령으로 보는 견해, 충남 석성면 정각리의 숯 고개로 비정하는 견해, 대전 동쪽의 식장산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성주탁, 1990,`백제 탄현 소고a, 백제논 총 2집 참조). 여기서는 진산의 숯 고개로 비정하는 견해를 따른다. 169) 伎伐浦 白江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白江으로 나온다. 금강 하구 의 다른 이름. 장암이란 명칭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장암진성을 설치하였는데 이 鎭城 앞에 거대한 바위산(長巖) 두개가 자리하고 있다. 지화 포는 기벌포의 다른 표기로서 只와 伎, 火와 伐은 음운상 서로 대응된다. 그러나 기벌포와 孫梁 의 음운상의 대응은 분명하지 않다. 백강은 사비지역에 흘러가는 금강에 대한 다른 표기이다. 이 기벌포=백강은 동진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6년조에 所夫里

307 612 三國遺事 613 하고 좁은 곳에 근거하여 막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가히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 이 큰 물결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야생 사슴과 같은 큰 개가 있어 서쪽으 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살펴보지 않았다. 다.170) 로부터 사비강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다가 별안간 곧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 171) 172) 4년(659) 기미에 백제 烏會寺 <*또한 烏合寺라고도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었다. 성안의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얼마 만에 흩어졌다. 귀신 밤낮 여섯 번 절을 돌고 다녔다. 2월에 여우 떼들이 의자왕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궁궐 안에 들어와 크게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하고는 땅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다. 5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하니 깊이 3척 정도에서 월에 泗 <*부여의 강 이름이다.> 언덕에 큰 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으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글자가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 바뀌이고 신라는 초 며 이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 궁궐 안의 槐木이 사람이 통곡하는 것처럼 울었 승달과 같다. 고 하였다. 왕이 뜻을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바뀌라는 것은 찼 現慶 173) 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 위에서 울었다. 다는 것입니다. 차면 이지러집니다.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지 [현경] 5년(660) 경신 봄 2월에 왕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가에 작은 고기들 않으면 점차 차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죽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둥근 이 나와서 죽었는데 백성들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하였다. 사비강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 달 바뀌라는 것은 성하다는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생각건 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왕도의 저자 사람들이 무고히 놀라서 달아 대 우리나라는 성하여지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질 것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175) 났는데 마치 붙잡으러 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이 하여 놀라 엎어져 죽은 자가 백여 명이 태종은 백제국에서 괴변이 많다는 것을 듣고 5년(660) 경신에 인문을 당에 사신으로 보 되었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6월에 王興寺174) 승려 모두가 보니 배 돛 내 군대를 요청하였다. 고종은 左虎衛大將軍176)荊國公蘇定方을 神丘道行軍摠管177)으로 삼 州 伎伐浦 가 나오고 있고 소부리주는 신라가 부여에 설치한 것이므로 이 기벌포는 금강 하구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170) 충신은 죽어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6 년조에 나온다. 171) 現慶 : 당 고종의 연호인 顯慶의 다른 표기. 顯慶 연호는 656~660년까지 사용되었다. 172) 烏會寺 :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에 세워진 백제의 사찰. 오합사라고도 하였다. 신라 문성왕 (839~859)대에 낭혜화상 無染(801~888)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고 성주사라고 하였다. 성주사 는 신라 9山禪門의 하나이다. 오합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김수태, 1998,`오합사a, 성주사, 보 령시 충남대박물관 참조. 173) 백제 오합사 길 위에서 울었다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9년조 에 나온다. 174) 王興寺 :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 세워진 백제의 절. 이 절은 사비강에 임하였고 채색이 매우 장려 하였다고 한다. 1934년 부여군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王興 銘이 찍혀진 기와편이 수습 신고되 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도`王興a 銘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이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석축유구와 함께 백제시대 사찰가람인 목탑 회랑 부속건물지 석축 등을 확인하였다. 2007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8차 조사에서는 사역 중심부에 해당하는 목탑지와 그 남쪽에 위치한 석축에 대한 조사 작업을 실시하였다. 목탑지는 동 서 회랑지에서 19m, 동서석축에서 북쪽으로 18m 떨어져 위치하며 중층기단으로 구축되었 는데 하층기단의 규모는 약14m, 상층기단의 규모는 약13.2m이다. 심초석은 목탑지 정중앙에 위 치하며 그 크기는 의 장방형으로 잔존기단토 상면에서 약 50 아래에 위치한다. 심 초석의 남쪽 중앙 끝단에는 장방형의 사리공 내부에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고 그 남쪽변에 다량 의 진단구가 매납되어 있었다. 목탑지 심초석 사리공 내부에서 청동제사리함(지름 7.5, 높이 8 )이 확인 되었고 은제사리병(외병, 지름 4.4, 높이 6.8 )과 금제사리병(내병, 지름1.5, 높 이4.6 )이 안에 들어있는 사리구가 확인되었다. 청동제 사리함 동체 전면부에는 5자6행의 음각 으로`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a 이라는 명문이 새겨 져 있었다.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의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되어 당시 공예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 절은 법왕 2년(600)에 창건을 시작하 여 무왕 35년(634)에 완공한 것으로 나오나 청동제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에는 百濟王昌=위덕왕 이 577년에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왕흥사는 왕실의 원찰이 되며 창건 연 대도 삼국사기 의 기사와 달라 이 절의 창건 연대와 창건 목적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이 다. 이에 대해서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8, 부여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의 의미 참조. 175) 5년 경신 왕이 기뻐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 나온다. 176) 左虎衛將軍 : 본래는 左武衛將軍인데 고려 혜종의 휘인 武를 避諱하여 호를 사용한 것이다. 좌무 위는 당나라 16위 중의 하나로서 궁궐의 숙위와 五府 및 外府를 통괄하였다. 좌무위에 설치된 무 관으로는 상장군(종2품) 1인, 대장군(종3품) 1인, 장군(종3품) 2인이 있었다( 신당서 권49 상 백관 4 상 16위 참조).

308 614 三國遺事 615 아 左衛將軍178) 劉伯英 字는 仁遠과 左虎衛將軍 馮士貴와 左驍衛將軍179) 龐孝公180) 등을 거 다. 좌평 義直185)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가 멀리 바다를 건너 왔는데 물 느리고 13만의 군대를181) 통솔하여 정벌해 왔다.<*鄕記에는 군사가 12만2천7백11인이고 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신라인은 대국(당)의 지원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 군선은 1천9백 척이었다. 고 하였는데 唐史에는 상세히 말하고 있지 않다.> 신라왕 金春 는데 만약 당나라 군대가 이롭지 못함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세게 나 秋를 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도록 하였다.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까닭으로 먼저 당나라 군대와 결전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알겠습니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城山182)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의 德勿島183)에 이르렀다. 신 다. 라고 하였다. 달솔 常永186)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멀리서 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184) 왔으므로 속히 싸우고자 할 것이므로 그 銳鋒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신라인은 여러 번 의자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싸울 것인지 지킬 것인지의 계책을 물었 우리 군대에게 패배를 당하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군대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서 군사 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의 군대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하여 그 예기 177) 神丘道行軍摠管 : 소정방이 백제 정벌에 나섰을 때의 직함. 신당서 백제전에도 같은 관명이 나 온다. 구당서 소정방전에는 熊津道大摠管으로, 신당서 소정방전과 자치통감 당기 16에는 神丘道行軍大摠官으로,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使持節神丘 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左武衛 大將軍上柱國邢國公으로 나온다. 178) 左衛將軍 : 이 유백영이 맡은 이 직책은 자치통감 당기 16의 내용과 같다. 그가 백제를 정벌할 당시의 직책에 대해 구당서 백제전에는 左衛將軍으로, 신당서 백제전에는 右武衛將軍으로,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와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에는 左驍衛將軍으로, `大唐平百濟國碑銘a에는 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나온다. 179) 左驍衛將軍 : 좌효위는 당나라 16위의 하나. 처음에는 驍騎였는데 수나라가 左右驍衛로 고쳤고, 당나라에 들어와 騎자를 제거하고 驍衛府라 하였다. 장군은 2명인데 관품은 종3품이다. 180) 龐孝公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에도 龐孝公으로 나온다. 신당서 백제전에 는 龐孝泰로 나온다. 181) 13만의 군대 : 백제를 공격한 당나라 군대의 규모에 대해 구당서 신라전과 자치통감 당기에 는 수륙 10만으로 나오고, 본서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와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에는 13만으로 나온다. 182) 城山 : 현재의 중국 산동반도 동쪽 끝자락에 城山角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소정방이 군대를 거느리고 출발한 지점에 대해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萊州로 나오지만 다른 사서에는 모두 성산으로 나온다. 183) 德勿島 : 오늘날의 서해의 德積島이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德物島로 나온다. 덕적도는 인천 연안부두 남서쪽 8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은 36평방km이다. 비조봉의 높이는 292m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수원의 屬郡이 되었고, 仁州로 來屬된 후 다시 남양부에 소속되었고, 조선 성종 17년(1486)에 인천도호부에 移屬되었다. 184) 김유신을 보내 나아가게 하였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6월조에는 又 命太子與大將軍金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精兵五萬應之 라 하여 김유신 외에 태자와 품일 흠 춘 등의 장군 이름이 나온다. 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봐서 함께 싸우면 군대를 온전히 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머뭇거리며 누구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 좌평 興首는 죄를 지어 古馬 知縣187)에 유배가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 물어 말 188) 하기를 일이 급하다. 어찌할꼬. 하니 흥수가 말하기를 대체로 좌평 성충의 말과 같다. 고 하였다.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귀양 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 즉 기벌포이다.>에 들어오게 하여 물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189)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으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 좁은 길을 경유하여 말을 나란히 할 수 없게 함과 같지 못합 185) 義直 : 백제의 장군. 의자왕 7년(647)에는 보기 3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감물성 동잠성을 공격 하였고, 8년(658)에는 신라의 서쪽 경계의 腰車城 등 11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86) 常永 : 백제의 장군. 나당군이 공격해 오자 속전속결을 반대하였다. 처음에는 달솔이었으나 출전 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하였다.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패한 후 忠常 등 20여명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고 신라는 그에게 일길찬의 관등을 주었다. 187) 古馬 知縣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에는 古馬彌知縣으로 나온다. 古馬彌知 縣은 전남 장흥군 장흥읍 일대이다.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마읍현으로 고쳐 보성군의 영현 으로 하였고, 고려 태조는 23년(940)에 수령현으로 고쳤다. 이를 충남 서천군 화양면 일대로 보 는 견해도 있다(홍사준, 1970,`백제지명고-대왕포와 고마미지현-a, 백제연구 창간호). 188) 좌평 성충의 말과 같다 : 이는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6년조에 성충이 臣嘗觀時察 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 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라고 한 말을 말한다. 189) 배를 나란히[方舟] : 배 두척이 나란히 간다는 말. 莊子 에 方舟而濟於河 가 나온다.

309 616 三國遺事 617 니다. 이때에 군대를 풀어서 공격하면 새장 속의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습니다. 라 아 막았지만 또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나라 군대가 승리를 타서 도 고 하였다. 왕이 옳다. 고 하였다. 성에 들이닥치니 왕은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해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또 [의자왕은]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것을 듣고 장군 偕 伯190을 보내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黃山191)으로 나와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네 번 싸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다. 고 하면서 태자 隆194)과 <*혹은 孝라고도 하는데 잘못이 다.> 함께 북쪽 변방195)으로 달아나니 소정방이 도성을 에워쌌다. 워 모두 승리하였지만 군사의 수가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偕伯은 죽었다. [신 왕의 둘째 아들 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文思가 라와 당나라는] 진군하여 군대를 합하여 나루 어구192)로 나아가 강가에 군대를 주둔하였 왕 泰에게 말하기를 왕이 태자와 함께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다. 홀연히 어떤 새가 소정방의 영채 위를 빙빙 돌면서 날았다. [소정방이] 사람으로 하여 만약 당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하고는 좌우의 사 금 점을 치게 하니 말하기를 반드시 元帥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소정방은 람들을 거느리고 줄을 타고 성을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따랐다. 태는 멈추게 할 수 없었 두려워하며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 하였다. 김유신이 정방에게 말하기를 어찌 다. 소정방이 군사들로 하여금 성가퀴(堞)를 일으키게 하여 당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였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한 것으로써 천시를 어기려 하느냐.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종하 다. 태는 궁하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목숨을 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여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함에 이르렀는데 어찌 상스럽지 못함이 있을 것이냐. 하면서 이 貞福은 여러 장수와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演 에 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어 찢어서 자리 앞에 떨어뜨렸다. 이에 정방이 왼편 언덕으 및 대신과 將士 88명, 백성 1만2천8백7인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196) 로 나와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서 싸우니 백제군이 대패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조수를 타 그 나라는 본래 5部197) 37郡198) 200城199) 76만戶가 있었다. 이에 이르러 [당은] 熊津 고 배와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북치며 떠들면서 나아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 느리고 곧장 도성으로 나아가 一舍쯤 되는 곳에193) 머무르니 도성 안에서는 군대를 다 모 190) 偕伯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에는 伯, 권47 열전 7에는 階伯으로 표기되 고 있다. 대동지지 부여군 寺院조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 이라 하여 階伯은 성이고 이름이 升임을 전해준다. 이에 의하면 계백은 이름이 아니라 성이 되며 백제동성은 백제왕실의 성인 부 여씨를 말한다. 부여씨인 그가 계백씨를 칭하게 된 것은 그의 가문이 어느 시기에 부여씨에서 분 지하여 나와 계백이라는 별도의 성을 칭한 결과이다. 계백이라는 성은 백제의 개백현(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을 그의 조상이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노 중국, 2000,`백제의 식읍제에 대한 일고찰a, 경북사학 23, 경북사학회 참조. 191) 黃山 : 오늘날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비정된다. 일본서기 권26 제명기 6년 7월조에 或本云 新羅王金春秋智率兵馬 軍于怒受利之山 怒受利山 百濟之東堺也 라 한 노수리산이 황산에 해당된다. 192) 나루 어구[津口]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 熊津口로 나온다. 웅진구는 백강 구로 오늘날 금강 하구를 말한다. 193) 一舍쯤 되는 곳 : 舍는 군사를 행군할 때 거리 단위인데 1사는 30리를 말한다. 자치통감 권 200 당기 16 고종 현경 5년 8월조에는 未至二十餘里 로 나온다. 이로 미루어 당나라 군대가 머문 곳은 강경 부근일 가능성이 크다(김영관, 2007,`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a, 백제 와 금강 학술발표회 발표요지문). 194) 태자 隆 孝 : 융은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중국 사서와 일본서기 에도 융 이 의자왕의 태자로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에는 효가 태자로 나온 다. 효를 태자로 인정한다면 의자왕이 말년에 태자를 융에서 효로 바꾼 것이 된다.`대당평백제국비명a 에는 융은 태자로, 효는 外王으로 나오고 구당서 권190 상 열전 백제전에는 효는 小王으로 나온다. 195) 북쪽 변방 : 웅진성을 말한다. 196) 소정방은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숫자는 사서마다 약간씩 다르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테종무열왕 7년조에는 왕 왕족 신료 93명과 백성 1만2천명으로, 권42 열전 김유신 중에는 왕과 신료 93인과 졸 2만명으로, 구당서 권199 상 백제전에는 58명 으로, 일본서기 26 제명기 6년조에는 왕 왕자 대신 등 50여 명으로 나온다. 197) 5部 : 전국을 다섯으로 나눈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이며 五方 과 같다. 그러나 부여능산리폐사지에서`六?2五方a이 묵서된 목간이 나왔다. 이 六部에 대해 別 都인 익산을 別部로 보고 사비도성의 五部와 함께 六部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주성, 2007,`무 왕의 권력강화와 익산경영a, 사비도읍기의 백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참조). 198) 37郡 : 방(부)과 현 사이에 위치하는 백제 지방통치조직. 장은 郡將 또는 郡令이라 하였는데 3인 이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백제에서 郡制의 실시는 삼국사기 권44 열전 4 거칠부전의 竹嶺以 外高峴以內十郡 이라는 표현,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의 六郡之地 라는 표현과 흠명기 4년조의 郡令 이라는 표현 등에서 확인된다. 199) 200城 : 백제 지방통치조직 가운데 최하의 조직. 한원 백제조에는 郡縣置道使 라는 기사는

310 618 馬韓 東明 金蓮 德安 등 5도독부200)를 나누어 두고 우두머리(渠帥)들을 뽑아 都督과 三國遺事 619 寶207)의 묘 곁에 묻도록 하고 아울러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208) (중략) 刺史201)를 삼아 다스리게 하고, 낭장 劉仁願202)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좌위 209) 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文虎王210) 즉위 5년(665) 을축 가을 8월 경자 新羅別記 낭장 王文度203)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남은 무리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로 에 왕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 행차하여 假王211) 扶餘隆을 만나 단을 만들고 백 잡은 자들을 보이니 황제가 책망한 후 용서해 주었다. 왕이 병들어 죽자 金紫光祿大夫204) 마를 잡아 맹세를 하였다. 먼저 천신과 산천의 靈에게 제사를 드린 연후에 피를 마시고 衛尉卿205)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장례에 갈 수 있도록 하고 조서를 내려 孫皓206)와 陳叔 ( 血)212) 글을 지어 맹세해 말하기를 지난날 백제의 先王이 順逆에 어두워 이웃과의 우 호를 돈독히 하지 않고, 親姻과 화목하지 않고,213) 고구려와 결탁하며,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폭함을 행하고, 신라 땅을 침략하여 깎아먹으면서 읍과 성을 깨뜨려 거의 편안한 군 아래에 현이 있었음을 보여주므로 현은 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성)의 장관은 도사 또는 성주라 하였다. 성(현)의 수에 대해`대당평백제국비명a 에는 250현으로, 삼국사기 권36 잡지 지리 3에는 104현으로 나온다. 200) 5도독부 :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고지에 설치한 당의 지배조직. 이중 위치 비정이 가능한 곳은 웅진도독부는 공주시이고, 덕안도독부는 논산시이다. 마한도독부에 대해서는 전북 고부로 보는 견해와 전남 강진이나 해남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동명도독부에 대해서는 전남 대 흥으로 보는 견해와 전북 남원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5도독부체제는 백제 멸망 후 곧이어 부흥 군이 일어나 사비도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한편 구당서 권83 열 전 33 소정방전에는 百濟悉平 分其地爲六州 라 하여 백제 고지를 6주로 편성한 것으로 나온다. 201) 都督과 刺史 : 도독은 도독부의 장관이고 자사는 주의 장관이다.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5도독 부를 두고 도독부 아래에는 州와 縣을 두었다. 이는 이 시기 당의 지방통치조직이 주현제였기 때 문에 그것에 맞추어 새로 편제한 것이다. 도독과 자사에 재지 유력자를 선발하려고 한 것은 以夷 制夷 정책의 일환에서 나온 것이다. 202) 劉仁願 : 당나라 장군. 생몰연대 미상. 자는 士元이고 雕陰縣인이다. 660년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우이도행군대총관으로 참전하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소정방을 대신하여 泗 府城의 도호 로서 당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웅진도독부체제로 개편되면서 웅진도독이 되었다. 663년에 귀 국하였다가 664년에 다시 웅진도독으로 왔으며 665년 8월에 유인궤와 함께 취리산에서 신라문 무왕과 부여융이 회맹하는 의식을 주관하였다. 그가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 당유인 원기공비가는 부여 부소산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203) 王文度 : 당나라 장군. 생몰연대 미상. 당은 660년 당시 백제를 멸망시킨 후 부흥군의 공격에 사비부성이 위험에 빠지자 왕문도는 웅진도독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의 직책은 좌위중랑장 또는 좌위낭장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바다를 건너다가 죽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조무열왕 7년조에는 그가 무열왕이 머물고 있던 삼년산성으로 가서 물건을 전 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죽었다고 나온다. 204) 金紫光祿大夫 : 당나라 문산계의 하나. 당의 문산계는 29등급으로 되어있는데 金紫光祿大夫는 정3품이다. 205) 衛尉卿 : 衛尉寺의 장관으로 정3품이다. 衛尉寺는 기계문물과 궁문위둔병 등을 관장하였다. 신 당서 권48 백제관 3 衛尉寺조 참조. 날이 없었다. 천자는 하나의 생물이라도 제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害毒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빈번히 사신(行人)214)들에게 명령을 내려 화호하도록 曉諭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험함을 등에 업고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하늘의 법칙(天經)215)을 모독 하였다.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삼가 弔伐(征伐)216)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 206) 孫皓 : 중국의 삼국시대 吳나라의 마지막 왕인 歸命侯의 이름. 재위 264~280년. 孫權의 손자이 다. 280년에 晋에 항복한 후 낙양으로 송치되었다가 죽었다. 207) 陳叔寶 : 남조 陳의 마지막 왕인 後主의 이름. 재위기간은 583~589년. 589년 수에 항복하였다. 208) 병들어 죽자 비를 세우게 하였다 : 현재까지 의자왕의 무덤과 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9) 新羅別記 : 찬자가 누구이며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210) 文虎王 : 문무왕을 말한다. 고려 정종의 이름 武를 피휘한 것이다. 211) 假王 : 임시로 왕이 되는 것. 당나라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으므로 가왕이라 한 것이다.`흑치상지묘지명 에는 蘇定方平其國 其主扶餘隆 俱入朝 라 하여 부여융이 主 로 표현되고 있다. 212) 피를 마시고( 血) : 옛날 맹세를 할 때 그 표시로 개나 돼지 말 등을 죽여 그 피를 입에 바르거 나 희생물의 피를 마시는 것. 史記 平原君전에 王當 血而定從 이라 한 기사 참조. 213) 親姻과 화목하지 않고 : 의자왕이 처음에는 해동증자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부모에게 효도하 고 형제와 우애스러웠지만 후일 왕실 안에 불화가 생겨 화목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209쪽),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자주 싸운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14) 사신(行人) : 朝覲 聘問을 맡아 보던 관명. 215) 하늘의 법칙(天經) : 天道 또는 天則.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常理로서 天經地義라고도 한다. 216) 弔伐 : 弔問伐罪를 말한다. 조문은 포학한 군주에게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위문하는 것이고 벌죄 는 포학한 죄를 저지른 군주를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311 620 三國遺事 621 번 싸워 크게 평정하였다.217) 진실로 궁택을 못으로 만들어 후손들을 경계하고, 근원을 막 만대로 혹 감히 범함이 없도록 하라. 신은 들으시고 흠향하고 복을 내리소서. 맹세를 마 고 뿌리를 뽑아 후세에게 교훈을 내릴 것이지만 약한 것을 품고 반란을 치는 것은 선왕의 친 후 폐백을 단의 북쪽(壬地)에 묻고 맹서문은 大廟=宗廟에 갈무리하였다. 맹세문은 곧 아름다운 법이고,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옛 선현의 규범이며, 일은 의 글을 살펴보니 소정방은 의자왕 및 帶方都督227) 劉仁軌228)가 지었다229) <*위의 唐史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지난날의 책에 전해오므로 그 까닭으로 전 백제왕218) 아들 융 등을 서울로 보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부여왕 융과 만났다고 하니 당나라 황제 司稼正卿219)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지키게 하고 옛 땅(桑梓)220)을 가 융을 용서하고 보내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을230) 알 수 있다. 그 까닭으로 맹세문에 분 보존하도록 하고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與國)221)이 되도록 하여 각각 오랜 감정을 없 명히 말하였으니 이로써 증거가 된다.> (중략). 222) 百濟古記 에 이렇게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 魯城縣公 劉仁願을 파견하여 친히 가서 권하고 효유하여 황제의 뜻을 갖추어 선포하니 에 닿아 있었다. 서로 전해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더불어 난을 면할 수 없음을 [그대들은]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세로서 신칙하여 희생물을 잡아 피를 마시고 함께 시작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는 과 끝을 돈독히 하며 재난을 나누고 환난을 구휼하여 은혜는 형제와 같이 하며 삼가 황제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러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까닭으로 세속에서는 墮死岩231)이 애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여 삼가 조명을 받들어 길이 번국이 되라. 곧 사신 右威衛將軍 223) 의 명(綸音)224)을 받들어 감히 실추하지 말지며 맹세를 마친 후 함께 절의(歲寒)225)를 지키 라. 만약 배신하여 덕을 해치고 군대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면 신명께서 살펴보아 백 가지 재앙을 내리어 자손들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은 후손이 없어지며 제사도 없어 져서 남김이 없을 것이다. 그 까닭으로 金書鐵契226)를 만들어 종묘에 갈무리해 두고 자손 217) 한번 싸워 크게 평정하였다[一戎大定] : 戎은 戎衣 즉 戰服이다. 일융은 융의를 한번 입고 천하를 평정하였음을 말한다. 尙書 武成篇의 一戎衣天下大定 에서 나온 말이다. 218) 백제왕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5년조에는 백제로만 나온다. 219) 司稼正卿 : 司稼는 당나라 9寺 가운데 하나. 662년에 司農寺를 司稼로 개칭하면서 장관도 卿에 서 正卿으로 고쳤다. 220) 옛 땅(桑梓) : 고향을 말한다. 옛날에 담 밑에 桑과 梓 두 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주어 생계의 자 료로 쓰게 하였으므로 자손이 이것을 보면 부모를 생각하고 공경하는 뜻을 가졌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시경 에 維桑與梓 必恭敬止 참조. 221) 우방(與國) : 서로 친선하는 나라. 맹자 에 我能爲君約與國 戰必克 참조. 222) 右威衛將軍 : 天地祥瑞志 에는 上主國이 첨가되어 있다. 223) 魯城縣公 : 당나라 봉작에는 國王 郡王 國公 郡公 開國郡公 縣公 開國侯 伯 子 등 9 등급이 있었다. 현공은 6번째의 봉작이다( 통전 권19 직관 1 봉작조 참조). 224) 황제의 명(綸音) : 군주가 아래 사람에게 내리는 말. 군주의 말은 본래 실과 같이 가늘지만 이것 이 하달될 때는 벼리처럼 굵어진다는 뜻이다. 225) 절의(歲寒) : 변하지 않는 節操. 논어 에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참조. 226) 金書鐵契 : 金書鐵券이라고도 한다. 철판에 글자를 새겨 금으로 칠한 것.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평정한 후 공신을 봉할 때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철판에 글자를 새겨 금으로 칠한 문서를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와 모양으로 되어 표면에 이력과 공적을 새기고 안쪽에는 면죄 등의 특권 을 기록한 후 양분하여 하나는 공신에게 주고 하나는 황실에 보관하여 징표로 삼았다. 格古要 論 에 始作鐵券 其內鏤字 以金塗之 故名曰金書鐵券 참조. 227) 帶方都督 : 이 시기 유인궤의 지위는 웅진도독이었다. 따라서 대방도독은 잘못이다. 228) 劉仁軌 : 당나라 장군. 州 사람으로 자는 正則. 당고종 때 給事中이 되었다. 659년에 청주자사 로서 백제를 공격할 때 군량 수송의 책임을 맡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여 白衣從軍하게 되었다.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당고종은 그를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아 왕문도 를 대신하여 당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661년 당고종이 철군 명령을 내렸지만 돌아가고자 하 는 군사들을 설득하여 그대로 지키겠다고 남아 마침내 부흥군을 진압하고 검교웅진도독이 되었 다. 668년 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으로 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薛仁貴와 더불 어 평양을 진수하였다. 그는 문장을 잘 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229) 맹세문 : 유인궤가 지은 맹세문은 구당서 권199 백제전, 천지상서지 권20, 책부원구 권 981 외신부 맹세조 등에 실려 있다. 이중 천지상서지 에 실려 있는 맹세문이 가장 자세하고 원 형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는 권덕영, 1999,`천지상서지 편찬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a, 백산학 보 52호 참조. 230) 부여왕 융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 :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태자 부여융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후 백제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압박을 가해오자 유인궤는 백제 유민을 위무하기 위 한 방편으로 부여융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부여융을 웅진도 독부로 보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참조. 231) 墮死岩 : 부여 부소산 북쪽 백마강 언덕 약 100m의 단애를 말한다. 낙화암이라고도 한다. 이 바 위면에 落花岩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에 세운 百花亭이 있다.

312 622 三國遺事 623 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속설의 잘못된 것이고 다만 궁인들이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의자는 240) 니 백제 성왕239) 16년 무오(538)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 라고 당에서 죽었으니 당사에 명문이 있다. (중략). 하였다. 注에서는 그 지명은 소부리이고, 사비241)는 지금의 古省津242)이며, 소부리는 부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평정하고 이미 돌아간 후 신라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백 제의 남은 적들을 추격하여 체포하게 하고 漢山城232)에 둔치고 머물렀다. (후략). 여의 별호이다. 라고 하였다. 이상은 注이다.243) 245) 또 量田帳籍244)을 살펴보니 소부리군 田丁柱貼 이라고 하였다. 지금 부여군이라고 말한 것은 옛날의 이름을 복구한 것이다. 백제왕의 성이 扶氏246)이므로 그렇게 불렀다. 혹 권1 紀異 2 長春郞 罷郞<* 라고도 쓴다.> 233) (전략) 처음에 [신라군이] 백제 군대와 黃山 전투에서 싸울 때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 에서 죽었다. 후에 백제를 토벌할 때234) 꿈에 태종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신들은 이전에 나라를 위해 죽어 백골이 되었습니다. 대저 나라를 지키고자 하여 군대를 따라와 행하기 를 게을리 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다른 사람의 뒤로 은 餘州라고 일컬은 것은 군의 서쪽의 資福寺 高座247)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그 수 라고 하였다. 또 놓은 글에 統和248) 15년 정유(997) 5월 일에 餘州功德大寺249) 繡帳이다. 옛날 하남에 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그림과 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임 주는 지금의 佳林郡250)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後漢書 에 삼한은 무릇 78국이고, 백제는 바로 그 중 한 나라이 백제 지리지251)에는 235) 라고 하였다. 쫓겨났습니다. 원하건 데 왕께서 우리들에게 조그마한 힘을 보태주소서. 대왕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두 영혼을 위해 불경을 강설하게 하였는데 하루 동안 牟山亭 236) 에서 하였다. 또 한산주에 壯義寺 를 세워 명복을 비는 자원으로 하였다. 권2 紀異 2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이미 위에서 나왔다>237) 扶餘郡은 前百濟238)의 왕도인데, 혹은 所夫里郡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사기 를 살펴보 232) 漢山城 : 북한산성을 말한다. 233) 黃山 : 오늘날의 충남 연산 지방이다. 234) 백제를 토벌할 때 : 660년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 행동을 하였을 때를 말한다. 235) 신들은 힘을 보태주소서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6년조에는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 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懃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 滅 로 나온다. 236) 壯義寺 : 서울 종로구 신영동 일대로서 彰義門 밖에 있었던 절.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 열왕조에는 莊義寺로,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7년조에는 平壤今楊州 太祖祭?1義寺 祭文 이라 하여 庄義寺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불우조에는 藏義寺로 표기되어 있다. 지 금은?1義寺幢竿支柱(보물 235호) 1기가 있다. 237) 이미 위에서 나왔다 : 본서 권1 기이 1에 북부여조가 나온 것을 말한다. 238) 前百濟 : 백제를 말한다. 통일신라 말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239) 성왕 : 재위 523~554년. 무령왕의 아들로 이름은 明. 양서 백제전에는 明으로, 일본서기 에는 明王 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본서 앞의 주 77) 참조). 240) 남부여 : 백제 성왕이 16년(538)에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칭한 국호.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80) 참조. 241) 사비 : 백제의 세 번째 도읍지로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이다. 소부리라고도 하였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에는 泗 로 나온다. 242) 古省津 : 부여의 扶蘇山 아래 白馬江에 있던 포구(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군 산천조 참조). 243) 이상은 注이다 : 이 구절은 내용에서 미루어 볼 때 注로 들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본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연의 제자 無極이 이상은 주이다. 를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244) 量田帳籍 : 토지대장을 말한다. 이를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내용에서 미루어 볼 때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245) 田丁柱貼 : 租 庸 調 등을 부과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 관청의 기둥에 붙여 놓았기 때문에 이 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246) 扶氏 : 백제 왕실의 성인 扶餘氏를 줄여 부른 것. 扶餘氏는 餘氏로도 축약되었다. 247) 資福寺 高座 : 資福寺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우는 절이다. 造飽寺 또는 願刹이라고 도 한다. 高座는 고승의 설법을 위해 절의 강당에 설치하는 높은 대좌이다. 248) 統和 : 중국 遼 聖宗의 연호로서 983~1011년까지 사용하였다. 249) 餘州功德大寺 : 지금의 부여 무량사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현재 무량사에는 5층 석탑 석 등 당간지주 등 고려시대 국보급 유물이 남아 있다. 250) 佳林郡 :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이다.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이곳에 加林城을 축조하여 위사좌평 백가로 진수하게 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嘉林郡이었고, 고려 成宗 때에는 林州刺史를 두었다. 251) 백제 지리지 : 삼국사기 권37 잡지 6 지리 4 백제조를 말한다.

313 624 三國遺事 ) 다. 라고 하였다.252) 北史 에는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를 하였고, 서남쪽으로 262) 신당서 에는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와 경계하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대해에 막혔으며, 북쪽으로 한강과 만났다. 그 郡254)을 居拔城255) 또는 固麻城256)이라고도 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라고 하였다. 國史 본기263)에는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 고 하였다. 하였으며, 그 밖에 5개의 方城257)이 있다. 아버지는 鄒牟王 또는 朱蒙264)이라고 하였는데,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265)에 이 258) 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에 이르고, 서쪽으로 通典 르렀다. 부여주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 는 대해로 막혔다 고 하였다. 닌 것을 알고 둘째 딸로 처를 삼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주의 왕이 돌아가니 259) 에는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구당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고 하고 다음은 온조(溫祚) 260) 越州 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이 거 라고 하였다.266) 후에 [그들은] 태자267)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261) 고 하였다. 처하는 곳에는 동서로 두 성이 있다. (烏干) 마려(馬黎)268) 등 1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 중에 따르는 자 가 많았다. 마침내 한산269)에 이르러 負兒岳270)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252) 後漢書 에 있다고 하였다 : 같은 내용이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75 한전에 나온다. 253) 北史 : 중국 당나라의 李延壽가 16년에 걸쳐서 편찬한 사서. 위 북제 주 수 등 북조의 242 년 동안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서 본기 12권, 열전 88권 총 1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54) 郡 : 북사 권94 열전 82에는 都로 나오고 또 본서가 인용한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都로 나온 다. 따라서 본문의 郡은 都로 고쳐야 한다. 255) 居拔城 : 수서 권81 열전 46 동이 백제전에 나온다. 거발성은 음운상에서 볼 때 큰 성 이라는 의미이다. 256) 固麻城 : 주서 권49 열전 41 異域 상 백제전에 나온다, 주서 에는 왕도는 固麻城으로, 北方 城은 熊津城으로 나온다. 고마 는 マ 참 검의 뜻이 있으므로(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ㅁ 박영사), 고마성은 신성한 성 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왕도를 고마성으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57) 5개의 方城 : 백제는 사비로 천도한 후 전국을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으로 나누 었다. 각 방의 중심 치소를 방성이라 하였다. 중방성은 古沙城(현재의 전북 고부), 동방성은 得 安城(충남 은진), 남방성은 久知下城(위치 미상), 서방성은 刀先城(충남 예산), 북방은 熊津城(충 남 공주)이었다. 258) 通典 : 唐의 杜佑(735~812)가 중국의 법령제도를 기록한 백과전서적 성격의 책. 모두 200권 으로 편성되었다. 식화 선거 직관 예 악 병형 주군 변방의 8문으로 나누고 각 문은 약 간의 세목으로 나누었다. 259) 구당서 : 후진의 劉煦가 945년에 당의 건국(618)에서 멸망(907)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편찬 한 책.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으로 총 200권이다. 본래의 이름은 당서 였는데 송대 의 구양수 등이 편찬한 신당서 와 구분하기 위해 구당서 라 부른다. 260) 越州 : 중국 양자강 하류지방. 越國의 영토였다. 고대부터 자기생산으로 유명하다. 黑潮해류를 타면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남해안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261) 동서로 두 성 : 동성과 서성을 말한다. 동성을 의자왕이 놀았다고 하는 논산의 황화산성으로 비 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홍재선, 1983,`논산 황화산성고a, 고문화 23, 한국대학 바닷가에 살기를 바라니 10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박물관협회 참조 262) 신당서 : 송대에 구양수 숭기 등이 구당서 의 내용이 長慶(821~824) 이후로 내용이 잡다하고 사실을 감추거나 겹치는 부분과 잘못된 곳이 많다고 하여 새로 편찬한 당나라 역사서로서 1060 년에 완성하였다. 263) 國史 본기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본기를 말한다. 264) 鄒牟王 또는 朱蒙 : 고구려 시조의 이름. 추모나 주몽 이외에 中牟 都牟 象解 등으로도 표기 되었다. 본서 앞의 주 109) 참조. 265) 졸본부여 : 졸본은`광개토대왕비문a에는 홀본으로, 위서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나오는 데 오늘날 중국의 요령성 환인현 환인진 동북쪽에 위치한 오녀산성에 비정된다. 졸본부여는 이 곳에서 성립한 나라이름이다. 그러나 건국주와 건국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료가 없다. 266) 큰 아들 비류 온조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에는 두 가지 시조건국설 화가 수록되어 있다. 시조 온조 중심의 설화는 본문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시조 비류 중심의 설 화에서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연타발의 딸 소서노 사이에 비류와 온조가 출생하였고, 우태 가 죽은 후 소서노는 과부로 지내다가 북부여에서 도망해온 주몽과 결혼하여 국가를 세우는데 큰 힘을 보탰기 때문에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대했다고 한다. 267) 태자 : 琉璃를 말한다. 그는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예씨 부인에게서 태어났으며 아버 지를 찾아오자 주몽은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는 후에 고구려의 제2대 유리명왕이 되었다. 268) 烏干 馬黎 :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해 올 때 동행한 烏伊 摩離와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69) 한산 : 한산은 본래 남한산을 말한다. 그러나 온조집단이 처음 정착한 곳이 하북위례성이라고 하면 이 한산은 북한산으로 고쳐보아야 한다. 270) 負兒岳 : 오늘날 서울시 삼각산을 말한다.

314 626 三國遺事 627 띠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온조왕] 14년 병진(B.C.5)에 대해에 막혔으니, 그 천험과 地利는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하는 것이 또한 는 도읍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겼다.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279) 咸安280) 원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고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271)에 돌아가 (371)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281)을 차지하고 도읍을 北漢城<*지금의 양주>으로 옮겼 살았다. 온조는 河南慰禮城272)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고 국호를 十濟273)라 다.282) 105년을 지나 22대 文周王283)이 즉위한 元徽284) 3년 을묘(475)에 이르러 도읍을 웅 고 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274) 3년(B.C.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 천<*지금의 공주>로 옮겼다. 63년을 지나 26대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 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은 도읍이 안정되고 인민이 편안한 것을 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31대 의자왕285)에 이르기까지 1백 20년을 지냈다. 당나라 보고 마침내 부끄럽고 후회되어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귀속하였 顯慶 5년,286) 곧 의자왕 재위 20년에 이르러 신라의 김유신287)이 소정방288)과 함께 이를 토 다. 후에 올 때 백성들이 기뻐하였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世系는 고구려와 더 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으므로 解로써 성씨를 삼았다.275) 후에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 사비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仁州276)이고 위례는 지금의 稷山277)이다. 278) 를 살펴보니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묘(B.C.18)에 졸본 古典記 271) 미추홀 : 오늘날의 인천으로 문학산 부근에 비정된다. 삼국사기 권35 잡지 4 지리 2 한주 율 진군조에 邵城縣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慶原 買召一作 鄒) 라 한 기사 참 조. 문학산 부근에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가 다수 분포되어 있고, 청동기유물도 부근에서 출토 된 적이 있다. 또 문학동에는 미추왕릉으로 불리는 유적도 있다고 한다(정영호, 1979,`서울지 역의 백제문화a, 마한백제문화 3집, 마한백제문화연구소). 동사강목 에는 문학산 위에 沸流 城基 城門扉板 沸流井 등이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광개토대왕비문a에는 고구려가 백 제를 공격하여 함락한 58성의 하나로 미추성이 나온다. 272) 河南慰禮城 :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 일대를 말한다. 273) 十濟 : 온조가 위례성에 정착하여 세운 나라의 최초의 국호. 274) 鴻佳 : 중국 前漢 成帝의 연호. B.C.20~B.C.17년까지 사용하였다. 275) 解로써 성씨를 삼았다 : 백제의 왕성씨에 관해서는 扶餘氏說과 解氏說이 있다. 안정복은 동사 강목 에서 온조를 解溫祚로 보았다. 이와는 달리 비류집단은 해부루의 후손으로 나오므로 해씨 를 칭하였고, 온조집단은 주몽을 시조로 하면서 부여씨를 칭하였는데 처음에는 비류의 해씨 집 단이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였다가 뒤에 온조의 부여씨 집단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면서 두개의 왕성이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276) 仁州 : 고려시대 지명으로 지금 인천이다. 고려 인종은 慶源郡이 인덕왕후의 고향이라고 하여 인주로 승격시켰다. 277) 위례는 지금의 稷山 : 위례성의 위치를 직산으로 보는 것은 본 기사가 처음이다. 그러나 다산이 위례성을 한강유역으로 비정하면서 온조가 자리한 곳은 한강유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본서 앞의 주 7) 참조. 278) 古典記 : 여기에만 나오는 책명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279) 근초고왕 : 백제의 제13대 왕. 재위 346~375. 比流王의 아들이다. 古事記 에는 照古王, 일본 서기 에는 肖古王으로, 신찬성씨록 에는 근속고왕으로 표기되어 있다(본서 앞의 주 31) 참조). 280) 咸安 : 중국 東晋의 簡文帝의 연호(371~372). 281) 남평양 :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권37 지리 4 백제조에 나온다. 남평양의 위치에 대해 황해도 의 하성 부근의 장수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박진욱, 1990~2,`안악3호분의 주인공에 대하여a, 조선고고연구 ). 그러나 본서에 남평양을 楊州라고 세주를 달고 있기 때문에 양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82) 도읍을 北漢城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에는 王引軍退 移都漢 山 으로 나온다. 고구려와의 대립적인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보다 가까운 북한산 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다. 따라서 삼국사기 의 기사처럼 한산 즉, 남한산성 으로 옮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83) 文周王 : 백제의 제22대 왕. 재위 475~477년.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즉위년조에는 蓋鹵 王의 아들로 나오나 일본서기 권14 웅략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온다(본서 앞의 주 58) 참조). 284) 元徽 : 남조 宋 後廢帝의 연호(473~476). 285) 의자왕 : 생몰연대 미상. 백제의 제31대 왕. 재위 641~660년. 武王의 장자로 무왕 33년(632)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孝友가 깊어 海東曾子라는 칭송을 들었다(본서 앞의 주 92) 참조). 286) 현경 : 당 고종의 현호. 현경 5년은 660년이다. 287) 김유신 : 595~673년. 향년 79세.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 왕이며, 할아버지는 武力, 아버지는 舒玄, 어머니는 萬明夫人이다.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 출 신으로 신라 왕족의 金氏와 구별하여 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 라 이름하였다. 34세 때(629) 고구려 낭비성 공격에 공을 세웠다. 644년에 蘇判이 되었고, 647 년에는 김춘추와 함께 비담의 난을 평정하여 실권을 잡게 되었다. 654년에 진덕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 알천을 섭정으로 하였지만 김춘추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660년 정월에 는 상대등이 되었고,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 년 고구려 원정 때 大摠管이 되었으나 풍병이 들어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울에 남아 국내 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태대각간이 되었다. 그가 죽자 문무왕은 성대한

315 628 三國遺事 벌하여 평정하였다. 백제국은 옛날에 5부가 있었고 37군 2백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통 치하였다. 당나라는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 金蓮 德安 등 5도독부289)를 나누어 두고, 곧 그 추장을 도독부자사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아우르고 웅주 전 290) 291) 292) 하였다. 또 군 안에는 3개의 산이 있어 日山 吳山 浮山295)이라고 한다. 국가가 전성했을 때에 는 각각 신인이 그 위에 살면서 날아서 서로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이있 또 사비하의 기슭에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인이 앉을 만하였다. 백제왕이 王興寺296) 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논의할 때 마땅히 뽑아야 할 사람의 이름을 3 4명 써서 함에 에 가서 예불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였는데 그 돌이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놓아두었다가 그 얼마 후에 가져다 보고 이름 위에 인장 자국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돌石297)으로 이름하였다. 고 하였다. 또 虎 寺 에는 政事 주 무주 의 세 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293) 629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또 泗 河의 강변에 바위 하나가 있다.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서 고기와 용을 낚아내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어앉은 자국이 있다. 그 까닭으로 龍岩294)이라 이름 또 사비하의 양 언덕은 그림병풍과 같아서 백제왕이 매번 놀고 잔치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지금도 이를 일컬어 大王浦298)라 하였다. 또 시조 온조는 바로 동명의 셋째 아들로서299) 몸이 크고 성품이 효도와 우애가 있었으 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또 다루왕300)은 관대하고 후덕하여(寬厚)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또 沙 王301)<*또는 沙伊王이라고도 쓴다.>은 仇首가 돌아가자 왕위를 이었으나 의장을 갖추어 金山原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흥덕왕 때에 興武 대왕으로 추봉되었다. 288) 소정방 : 592(수문제 개왕 12)~667년(당고종 건봉 2). 향년 76세이다. 본래 이름은 蘇烈이고 자가 定方인데 자로서 행세하게 되어 소정방으로 불리었다. 정관 초에 광도부절충이 되고, 650 년에 좌위훈일부중랑장으로 좌위대장군 정지절을 따라 賀魯를 정벌할 때 전군총관이 되었다. 651년에는 행군대총관으로 다시 하로를 정벌하여 좌효위대장군 형국공에 봉해지고 형주거록진 읍 오백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660년에는 13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신라군과 합 세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이때 그의 직함은 使持節神丘 夷馬韓熊津等一十四都大摠管左武威 大將軍上柱國邢國公으로 나온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정림사지오층석탑에`大唐平百濟國碑銘a 이라는 題銘으로 자신의 업적을 새겨놓았다. 289) 5도둑부 : 웅진도독부는 공주에, 덕안도독부는 충남 은진에 비정된다. 그러나 동명 마한 금련 도독부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당이 백제 고지에 도독부를 5개 설치한 것은 백제가 전국을 5 방으로 나누어 통치한 것에 대응해서 취한 조처로 보인다. 본서 앞의 주 200) 참조. 290) 전주 : 지금의 전북 전주시. 백제 시기에는 완산이었고,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로 되었 다. 비사벌로도 불린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진흥왕 16년(555)에 완산주를 두었다가 26년 (565)에 폐지한 것으로 나오는데 진흥왕 시기의 완산은 신라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진흥왕이 설치한 완산주는 창녕에 설치한 비사벌주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경덕왕대에 전주로 개 명하였고 고려 태조 때 전주라 하였다. 291) 무주 : 지금의 광주광역시. 백제 시기에는 무주였는데 신라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로 하였 다. 경덕왕 때 무주로 되었고 고려 태조 때 광주로 개명되었다. 292) 虎 寺 : 백제시대의 사찰,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에 사지가 있다. 293) 政事 :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天政臺로 나온다. 294) 龍岩 : 신증동국지여지승람 에는 그 바위를 釣龍臺라 하고 있다.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으므로 즉시 폐하고, 古爾王302)을 세웠다. 혹은 樂初 2년303) 기미 에 [사비왕이] 돌아가자 고이왕이 곧 왕위에 올랐다고도 한다. 295) 日山 吳山 浮山 : 일산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내의 금성산으로, 오산은 부여읍 염창리의 오석 산으로, 부산은 부여읍 규암면 백마강 남쪽 강변에 있는 부산으로 비정된다(유원재, 1994,`사 비시대의 삼산숭배a, 백제의 종교와 사회,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이를 삼산이라 한다. 삼산 은 산천제의 체계의 하나로서 대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삼산, 중사는 오악 사해 사독 사진 에, 소사는 여타 중요한 산에 제사를 드렸다. 이 삼산은 백제에 산천제의체계가 마련되어 있었 음을 보여준다. 296) 王興寺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백마강 서안에 있던 절(본서 앞의 주 173) 참조). 297) 石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낙화암에서 물이 순류로 흘러가는 곳에 있는 바위. 신증동국여지승 람 권18 부여군 고적조에는 自溫臺로 나온다. 298) 大王浦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의 서북록 백마강에 있던 나루터. 299) 셋째 아들 : 주몽의 첫째 부인인 예씨에게서 낳은 유리까지를 넣어 셋째 아들이라 하였다. 300) 다루왕 : 백제의 제2대 왕. 재위 28~76. 溫祚王의 아들. 나라의 남쪽 州郡에서 밭벼농사를 시 작했으며, 북쪽 말갈의 침략저지에 노력하였다. 301) 沙 王 : 백제의 제7대 왕. 재위 234(본서 앞의 주 17) 참조). 302) 古爾王 : 백제의 제8대 왕. 재위 234~286. 초고왕의 동생. 제6대 구수왕이 사망 후 사반왕이 어려서 즉위했으나 곧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본서 앞의 주 20) 참조). 303) 樂初 2년 : 연대에서 미루어 볼 대 樂初는 景初로 고쳐보아야 한다. 경초는 중국 魏 明帝의 연호 (237~239). 낙초 2년을 3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316 630 三國遺事 권2 紀異 2 武王<*古本은 武康304)이라고 썼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305)의 이름은 璋이다. 어머니는 과부로 살면서 서울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마로써 마을의 뭇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그 를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뭇 아이들을 꼬여 부르게 하였다. 노래는 이렇다. 서306)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307) 어렸을 때 이름은 서동308)이었는데 도량이 선화공주님은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이 그 까닭으 몰래 짝 맞추어 두고 로 [서동이라] 이름을 지었다.309) 서동의 방을 310) 311) [그는] 신라 진평왕 의 셋째 공주 善花<*善化라고도 쓴다.> 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듣 631 밤에 알을 안고 간다312) 동요가 서울에 두루 퍼져 대궐(宮禁)에까지 달하니, 백관이 임금께 극렬하게 간하여 공 304) 武康 : 무왕의 다른 이름.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第三十 武王 或云武康 獻丙 이라 나온다(본 서 앞의 주 89) 참조). 305) 무왕 : 백제의 제30대 왕. 재위 600~641. 삼국사기 에는 風儀英偉하고, 志氣豪傑한 인물로 나온다. 법왕이 즉위 이듬해에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본서 앞의 주 88) 참조). 306) 못 가에 집을 짓고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3 익산군 산천조에는 馬龍池 在五金寺南百餘步 世 傳 薯童大王母築室處 라 나온다. 이에 근거하여 무왕의 어머니가 집을 지은 못 가를 마룡지로 보 는 견해도 있다(김삼룡, 1977, 익산문화권의 연구 ). 그러나 이때의 京師는 부여이므로 南池는 부여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최상수, 1958, 한국민간전설집, 통문관 참조). 307) [장을] 낳았다 : 무왕의 출계에 대해 삼국사기 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고 삼국유사 권3 흥법 제3 법왕금살조에도 百濟第二十九法王 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라 하여 법왕과 무 왕을 부자관계로 명기하고 있다. 이는 본 기사와는 다르다. 백제의 왕 가운데 계보관계가 이처 럼 다르게 나오는 것은 무왕이 유일하다. 그가 과부와 지룡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 를 법왕의 아들로 보기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가 지룡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그가 왕족임을 보여준다(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참조). 반면에 池龍을 왕이 되기 전의 法王으로, 潛龍시절 여인과 관계하여 비공식으로 두게 된 아들을 薯童, 상대한 戀人을 서 동의 어머니로서 궁궐 주변(池邊)에 살았던 과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최래옥, 1986,`서동 의 정체a,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참조). 308) 어렸을 때 이름 : 본서 권1 왕력에는 무왕의 어릴 때의 이름을 一耆篩德 이라고 하였다. 309) [서동이라] 이름을 지었다 : 서동을 마동 맛동 말통으로 보고 이는 무왕의 이름이 아니라 동성 왕의 이름인 牟大 末多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83, 국역삼국사기 참조). 310) 진평왕 : 신라 26대 왕. 재위기간 579~632년. 이름은 白淨이고 아버지는 동륜태자이다. 삼촌인 진지대왕이 재위 4년(579)에 폐위되자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서동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新羅 眞平王 은 조작된 것이고 실상은 비처마립간[소지왕]으로 고쳐보고 있다 (이병도, 1977, 국역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참조). 311) 셋째 공주 善花 : 삼국사기 에는 진평왕의 딸로 맏딸 선덕여왕과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의 부인인 만명부인이 나오나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다. 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바야흐로 떠나려고 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고 가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이 하는 곳으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고, 장차 모시고 호위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뜻하지 아니하게 믿고 기뻐하였다. 이로 인해 수행해 가다가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 뒤에 서동 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살 아갈 계책을 도모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무엇이요? 라고 하였다. 공 주는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서동이 라고 하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진흙처럼 쌓아 놓았소.313) 다. 공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바로 천하의 진귀한 보물입니다. 그 대가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라고 하니, 서동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두고, 龍華山314) 師子寺315)에 있는 知命법사316)에게 가서 금을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가 말하기를 내 312) 선화공주님은 안고 간다 : 본 서동요의 해석은 김완진, 1981, 향가해독법연구, 서울대학 교 출판부를 따랐다. 313) 황금을 쌓아 놓았소 : 이는 서동이 즉위 후 금광을 적극적으로 개발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 로 볼 수 있다. 314) 龍華山 : 익산 북쪽에 있는 산으로 彌勒山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서 琵琶形銅劍과 중국 전국시대 의 동검인 桃氏劍이 출토된 바 있고, 五金山에서는 粗紋鏡과 細形銅劍이 출토된 바 있다. 315) 師子寺 : 龍華山上에 있던 암자로, 知命法師가 주석했던 곳이다. 현재에도 사자사라는 암자가 있 는데 발굴 결과 아직 백제시대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316) 知命법사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조와 해동고승전 권2 석지명조에 보이는 신라승

317 632 三國遺事 633 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다.322) 지금도 그 절이 남아있다.<* 삼국사 에는 그를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함께 사자사 앞에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날라다 두었다. 는 홀어미의 아들이라고 전하니 알 수 없다.> 진평왕은 그 신이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왕께 이르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소원하 는 바입니다. 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못을 메울 일 을 물으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317) 이에 彌勒三 國 會318)를 法像으로 삼고 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319) 절 이름을 彌勒寺320)<* 321) 史 에는 王興寺 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장인들을 보내 이를 도왔 권3 興法 3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열다(難 闢濟) 百濟本紀323)에 이르기를 제15대<*僧傳324)에는 14대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침류왕 즉위년(384) 갑신<*동진 孝武帝325) 太元 9년이다.>에 호승 摩羅難陀가 晉나라에서 오자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경배하였다. 명년(385) 을유에 새 수도326) 漢 山州에 절을 창건하고 10명을 승려로 삼았다. 이것이 백제에서 불교의 시작이다. 또 아 고 신왕327)은 즉위한 해인 태원 17년(392) 2월에 교서를 내려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 하였다.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어린 학생(童學)이라 한다.<*그의 신이한 자취는 승전에 상 세히 보인다.> 찬하니 智明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성기, 1989,`서동요에 대한 시고a, 송하이종출박사화 갑기념논문집, 태학사 ; 김복순, 1992,`삼국의 첩보전과 승려a, 가산 이지관스님 화갑기념논 총 참조). 그러나 백제승 知命을 이름의 讀音이 같다는 사실만으로 신라승 智明과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이며 同名異人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17)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 미륵사지를 발굴한 결과 절터가 처음에는 저습지인 것이 확인되었 다. 이는 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318) 彌勒三會 : 미륵은 미래에 석존의 佛位를 잇는 보살이다. 본서 주 433) 참조. 319) 전 탑 낭무 세 곳에 세우고 : 미륵사지를 발굴한 결과 중앙의 목탑과 금당, 동쪽의 석탑 과 금당, 서쪽의 석탑과 금당으로 이루어진 삼원가람임이 확인되었다. 이는 본서의 기사가 정확 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320) 彌勒寺 : 미륵사지는 현재 전북 익산시 금마면 가양리에 있는 백제시대 절.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문화재연구소 미륵사지발굴조사단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발굴조 사와 병행하여 1985년부터는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구에 대한 정화작업이 연차적으로 이루어졌 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것 중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람배치가 3원 병 립형태라는 특이한 점이다. 이는 삼국유사 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다. 둘째, 동탑지 주변에서 출토된 노반석과 탑재석들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석탑이 본래 9층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셋째, 미륵사의 창건시기가 백제 무왕대이고 폐사시기는 조선중기를 전후한 시기임을 밝힐 수가 있었다. 넷째, 미륵사와 관련하여 주변에서 조사된 가마 공방지 등을 통하여 사원경제 또는 사 원과 관계되는 생활문화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다섯째, 못이 확인되어 못을 메워 절을 세웠다는 문헌기록이 정확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동탑(9층)이 복원되었다. 321) 王興寺 : 부여군 규암면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절(본서 앞의 주 174) 참조). 322) 장인들을 도왔다 : 삼국사기 에 의하면 무왕대에 백제는 신라를 자주 공격한 것으로 나온 다. 그래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거나 미륵사를 지을 때 진평왕이 기술자를 보내 돕도록 한 것도 신빙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이 나 군사적 대립 와중에도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행해지기도 하므로 진평왕이 장인들을 보낸 것 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23) 百濟本紀 :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를 말한다. 324) 僧傳 : 고려 승려 覺訓이 쓴 海東高僧傳 을 말한다. 해동고승전 은 五冠山 靈通寺 주지였던 각훈이 왕명을 받아 저술한 책으로 삼국의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고승들의 行跡記이다. 저술 연대는 권1의 流通一之一에 自順道入高句麗至今七百四十四年矣 란 기록에 근거하여 고려 고 종 2년(1215)으로 추정되고 있다. 全帙 중 첫머리의 2권 1책(필사본)만 전하는데 권1에는 順道 失名僧 義淵 曇始 摩羅難陀 阿道 玄彰 法空 法雲이, 권2에는 覺德 智明 圓光 安 含 阿離耶跋摩 慧業 慧輪 玄恪 玄遊 玄大梵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두에는 釋譜와 佛敎東來의 기록도 있다. 325) 孝武帝 : 동진의 제9대왕. 재위기간은 376~397년까지이다. 326) 새 수도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에 王引軍退 移都漢山 이 나온다. 이 기 사는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한산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 기사의 新都는 근초고왕대에 옮긴 한산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27) 아신왕 : 백제 제17대 왕. 재위 기간은 392~404년까지이다. 일본서기 에는 阿花王으로 표기 되고 있다. 침류왕의 아들이다. 침류왕이 죽은 후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그후 아신은 진사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318 634 권3 興法 3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法王禁殺) 三國遺事 635 권5 避隱 8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惠現求靜) 백제 제29대 임금 법왕328)은 이름이 宣인데 혹은 孝順이라고도 하였다. 開皇329) 19년 승려 惠現337)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마음을 수고로이 하고 뜻을 오로지 하 (599) 기미에 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 여 蓮莖338)을 염송하는 것을 업으로 하였다. [佛神]에게 빌어 복을 청함에 신령스러운 응 종류는 모두 풀어주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류 등은 불태워 일체 살생을 금지하였 답이 자못 많았다. 겸하여 三論339)을 공부하여 수도(染指)340)를 시작하니 신명에 통하였 다.330) 이듬해(600) 경신에 30명을 승려로 삼고 왕흥사331)를 당시의 수도 사비성에 창건하 다. 처음에는 북부341) 修德寺342)에 머물렀는데 무리가 있으면 강론을 하고 없으면 염송하 였는데332)<*지금의 부여이다.>처음 기반만 세우고는 돌아가셨다. 무왕이 왕통을 이어 아 였다. 멀리 사방에서 그 풍모를 흠모하여 온 사람이 많아 문 밖에는 신이 가득하였다. 차 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이 집을 지었는데 30여년(數紀)을333) 지나 완성하였다.334) 그 절을 츰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드디어 강남의 達拏山343)으로 가서 살았다. 산은 높고 바위는 험 또한 미륵사라고 하였다.335) [그 절은] 산을 뒤로 하고 물에 임하였고 꽃과 나무가 수려하 하여 왕래가 힘들고 드물었다. 여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왕은 매번 배를 띄우게 하여 강을 따라 절로 들어가 혜현은 조용히 앉아 世念을 잊기를 구하며 산중에서 죽었다. 같이 공부하던 사람이 시 그 풍경의 장려함을 감상하였다.<* 古記 에 실린 것과는 약간 다르다. 무왕은 바로 가난 체를 운반하여 석실 속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그 유해를 다 씹어 먹고 오직 뼈와 혀만 남 한 어머니와 池龍이 교통하여 탄생하였는데 어릴 때 이름은 薯 라고 하였고 즉위 후 시 겼다. 寒暑가 3번 돌아와도 혀는 여전히 붉고 연하였다. 그 후 바야흐로 변하여 붉고 단 호를 무왕이라 하였다. 처음에 왕비와 함께 이 절을 세웠다.336)> 찬한다. 328) 법왕 : 백제 제29대왕. 혜왕의 맏아들. 재위 기간은 599~600년이다. 329) 開皇 : 수나라 문제의 연호. 581~600까지 사용되었다. 330)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지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법왕 즉위년조 에 나온다. 살생금지 등의 조처는 이 시기의 신앙이 계율을 강조하는 미륵상생신앙이 널리 행해 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길기태, 2006,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신앙연구, 서경문화사 참조). 331) 왕흥사 : 부여군 규암면에 자리한 백제의 사찰(본서 앞의 주 174) 참조). 332) 30명을 승려로 수도 사비성에 창건하였는데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법왕 2년조에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는 왕흥사가 사비성에 세워졌다는 기사는 없다. 333) 30여년(數紀) : 數는 3을 말하고 紀는 12년을 말하므로 數紀는 30여년이 된다. 334) 완성하였다 :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35년조에 春二月 王興寺成 이 나오므로 이 절의 완공 시기는 634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07년에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사리함에 새겨 진 명문에는 百濟王昌=위덕왕이 577년에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세운 것으로 나오고 있어 창건 연대와 창건 목적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335) 그 절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 미륵사는 무왕이 익산에 세운 절이므로 왕흥사와는 별도의 절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흥사를 미륵사라고 하는 설은 왕흥사가 미륵불을 모신 절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336) 무왕은 이 절을 세웠다 : 익산의 미륵사 창건을 말한다(본서 앞의 주 320) 참조). 337) 惠現 : 백제 승려. 570~627년. 법화경을 염송하였고 삼론을 공부하여 신통의 경지에 이르렀다. 혜현은 중국에 유학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당대에 만들어진 續高僧傳 에 입전되었다. 338) 蓮莖 : 妙法蓮華經(法華經)을 말한다. 339) 三論 : 삼론종을 성립시킨 3가지 論著. 삼론은 인도의 龍樹가 지은 中論 十二門論과 그의 제가 提婆(데바)가 지은 百論을 말한다. 모두 구마라즙이 번역하였다. 삼론종은 이 삼론을 주요경전 으로 삼아 성립된 종파로서 구마라즙을 종조로 하였는데 수나라 때 嘉祥 大師 吉藏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또 고구려의 僧朗은 중국에서 삼론학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삼론종의 성립에 토대를 놓았다. 또 고구려의 惠灌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고, 백제에도 惠現이 삼론에 정통하였다 (길기태, 2006,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신앙연구, 서경문화사 참조). 340) 수도(染指) : 손으로 찍어 맛본다는 뜻으로서 수도를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341) 북부 : 북부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왕도 안을 다섯으로 구분한 행정구역의 하나 이고 둘째는 전국을 다섯으로 구분한 지방통치조직의 하나로서 북방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이다. 342) 修德寺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위치한 백제의 절. 백제 말에 崇濟法師가 창건하 고 고려 공민왕 때 懶翁화상이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智命법사 가 창건하고 신라의 원효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本寺이다. 343) 達拏山 : 전라북도 高山 또는 珍山 부근의 산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69, 역주 겸 원문 삼국 유사, 동국문화사), 제주도의 達羅山으로 보는 견해(홍사준, 1973,`수덕사와 백석사a, 백제연 구 4집), 영암 월출산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319 636 三國遺事 637 단한 것이 돌과 같았다. 도인이나 속인이 이를 공경하여 석탑에 갈무리하였다. [혜현의] (전략) 이상에 의거하면 본기352)와 본비353)의 두 설은 서로 어긋나 같지 않음이 이와 같 세속의 나이는 58세였으니 즉 정관344) 초년이었다. 혜현은 당나라에 공부하러 가지 않고 354) 및 삼국본사는 모두 고구려와 다. 이를 한번 試論해 본다. 양나라 당나라 두 고승전 조용히 물러나 생을 마쳤는데 그 이름이 중국에도 알려져 전기345)를 만들었는데 당나라에 백제 두 나라의 불교의 시작은 진말 태원 연간이라고 실려 있으니 이도법사가 소수림왕 서도 그 명성이 드러났다. 갑술(374)에 고구려에 도착한 것은 분명하므로 이 전은 틀리지 않았다.(하략) 또 고구려 승려 波若346)은 중국 天台山347)에 들어가 智者348)의 敎觀349)을 받았는데 신이함 으로써 山中에 알려지다가 죽었다. 唐僧傳350)에 또한 실려 있고 자못 영이함과 모범됨이 권3 興法 3 원종355)이 불교를 일으키고<*눌지왕대와 떨어지는 것이 100여 많았다. 년이다.>염촉이 순교하다(原宗興法<*距訥祗世一百餘年>厭 滅身 ) 찬한다. 351) 鹿尾 에 경을 전하니 한바탕 권태롭고 지난 해 맑은 독경 소리 구름에 의지해 감추었다. 신라본기에 법흥대왕 즉위 14년(527)에 소신인 이차돈이 불법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곧 蕭梁356) 普通 8년(527) 정미년에357) 西竺358)의 達摩359)가 金陵360)에 온 해이 다.(중략) 또 大通361) 원년(527) 정미에 양나라 황제362)를 위해 웅천주363)에 절을 세우고 이 청사에 높은 이름 멀리 전해졌고 죽은 후의 붉은 연화에 혀바닥은 향기를 띠었네 권3 興法 3 아도<*我道라고도 쓰고 또는 阿頭라고도 한다.>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놓다(阿道基羅) 344) 정관 : 당나라 태종의 연호. 627~649년까지 사용되었다. 345) 傳記 : 속고승전 을 말한다. 346) 波若 : 고구려의 승려. 생몰연대는 561~613년이다.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종의 개산조인 천태지 자의 법맥을 이었다. 347) 天台山 : 중국 浙江省 天台縣 북쪽에 있는 산. 陳 大建 7년(573)에 智 가 이곳에 수선사를 창건하 여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이곳에 세워진 유명한 사원으로는 國淸寺 高明寺 등이 있다. 348) 智者 : 중국 천태종의 개산조인 天台智者를 말한다. 생몰연대는 538~597년이다. 수 開皇 11년 (591)에 양제가 그에게 보살계를 받고 智者라는 호를 내림으로써 智者大師로 불리게 되었다. 349) 敎觀 : 敎相과 觀心을 말한다. 교상은 석가 일대의 교법을 자기의 宗義에 따라 분별 판단하는 것 이고, 관심은 자기 종의에서 내세운 진리를 관념하는 것을 말한다(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1982, 한국불교대사전 1, 보련각). 350) 唐僧傳 : 당나라 때 만들어진 속고승전 을 말한다. 351) 鹿尾 : 번뇌 세계에서 三車(鹿車 牛車 羊車) 가운데 최상인 鹿車로 인도한다는 뜻(이병도, 1969, 원문 겸 역주 삼국유사, 동국문화사, 453쪽). 352) 본기 :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말한다. 이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5년조이다. 353) 本碑 : 신라시대에 金用行이 찬한`我道和尙碑a를 말한다. 354) 두 고승전 : 양나라 때의 고승전 과 당나라 때의 속고승전 을 말한다. 양고승전 은 불교가 중 국에 전래된 후한 명제 때부터 양나라 무제 천감 18년(519)에 이르기까지의 고승 257명과 그밖의 승려 200여명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내용은 譯經 義解 神異 習禪 明律 亡身 誦經 興福 經師 唱導로 되어 있다. 속고승전 은 梁나라 초에서 당나라초의 승려들의 전기로서 30권이다. 355) 원종 : 법흥왕(514~540)의 이름. 법흥은 불교를 공인한 이후에 붙여진 왕호인데 이 칭호는 울 주천전리서석 乙卯銘에 성법흥대왕이 나오므로 늦어도 을묘년인 535년(법흥왕 22)에는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의 이름은 524년에 세워진`울진봉평신라비a에는 牟卽智로, 양서 권 54 열전 48 諸夷 신라전에는 募秦으로 나오는데 이는 신라 고유의 표기라고 할 수 있다. 원종은 모즉지=모진을 한자식으로 아화한 명칭으로 보인다. 356) 蕭梁 :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 왕조의 하나인 양나라. 소자현이 세웠기 때문에 소량이라 하였다. 357) 普通 정미년에 : 양나라 무제의 연호. 520~526년까지 사용하였다. 정미년은 527년으로 대통 원년이 된다. 따라서 보통 8년은 대통 원년으로 고쳐보아야 한다. 358) 西竺 : 인도를 말한다. 359) 達摩 : 인도 불교의 28대 조사이고 중국 선종의 初祖. 보디다르마(중국어 菩提達摩)의 음역으로 보통 달마라고 줄여 말한다. 520년 중국 廣州에 도착하여 梁 武帝를 만났고 그 후 少林寺의 동 굴에서 9년 面壁坐禪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행의 방법으로 禪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선종이라 한다. 360) 金陵 : 양나라의 수도. 지금의 남경이다. 361) 大通 : 양나라 무제의 연호. 527~528년까지 사용하였다.

320 638 三國遺事 639 름을 대통사364)라 하였다.<*웅천은 곧 공주인데 이때에 신라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365) 를 신봉하였다. 당나라 고조372)가 이를 듣고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373)을 보내 와서 도덕 그러나 정미년은 아닌 것 같고 중대통366) 원년(529) 기유년에 창건한 것이다. 흥륜사367)를 경을 강하였다. 왕이 나라 사람들과 들으니 곧 제27대 영류왕374) 즉위 7년으로 무덕 7년 처음으로 창건하던 정미년에 다른 군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갑신년이다. 다음 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를 구하니 당나 라 황제<*당나라 고조를 말한다.>가 허락하였다.375) 보장왕376)이 즉위함에<*정관 16년 임 권3 興法 3 보장왕이 도교를 받들자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寶藏奉老 普德 인년이다.>또한 삼교를 함께 흥륭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총애를 받는 재상 개소문377)이 移庵) 왕을 달래어 유교와 불교가 아울러 성하지만 도교(黃冠)378)는 성하지 못하므로 특별히 사 368) 369) 370) 고려본기에 고구려 말기인 무덕 과 정관 371) 사이에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오두미교 362) 양나라 황제 : 梁武帝(502~549)를 말한다. 好佛의 군주인 양무제는 52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527년에 同泰寺를 완성하였다. 大通이란 연호는 동태사의 同泰를 역순으로 한 것이다(조경철, 2006,`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동a,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363) 웅천주 : 지금의 충남 공주시이다. 백제의 수도로서 웅진이라 하였는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웅천주로 고쳤다. 364) 대통사 : 충남 공주시 반죽동에 위치한 절. 현재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대통이라 새겨 진 명문기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대통사의 위치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조사 에서는 아직 백제 당시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365) 웅천은 신라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 대통 원년(527)에 웅천은 백제의 수도였다. 따라서 이때 웅천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대통사를 세운 사람은 백제의 성왕으로 고쳐 보아야 한다. 366) 중대통 : 양나라 무제의 연호. 529~536까지 사용하였다. 367) 흥륜사 : 신라 최초의 伽藍. 그 寺址는 사적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흥왕은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이 순교하자 그를 위하여 천경림의 나무를 베다가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절은 544년(진흥왕 5) 2월에 완공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大王興輪寺 라 하였다. 본서 권4 탑상 4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조에 의하면 흥륜사의 주불은 미륵불이었다. 368) 고려본기 :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7년조에는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 尙書沈叔安 策王爲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 之 만 나와 있고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라는 구절은 없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 고 려본기를 구삼국사 고구려본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강래. 1996, 典據論, 민족사 참조 369) 무덕 : 당 고조의 연호. 618~626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370) 정관 : 당 태종의 연호. 627~649년에 사용되었다. 371) 오두미교 : 도교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 후한 말에 장도릉이 촉의 명확산에 들어가 선술을 닦고 노자로부터 비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14편의 책을 저술하고 도교를 만들었다. 符水 禁呪의 법으 신을 당에 보내 도교를 구하도록 하였다.379) 로 병을 치료한다고 하여 민중을 끌어 모았으며 쌀 다섯 말을 내면 생계가 安樂한다고 하면서 희 사하게 하였기 때문에 오두미교라 한다. 372) 당나라 고조 : 당왕조의 개창자. 재위기간 618~626년. 본명은 이연. 617년에 수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수양제가 강도(揚州)에서 고립되자 그곳의 호족들을 결집하여 거병하였고, 돌궐의 도움 을 받아 장안을 점령하고 양제의 손자 侑를 恭帝로 옹립하였다. 이듬해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라 연호를 무덕이라 하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 626년에 둘째 아들 이세민에게 위 를 물려주었다. 373) 천존상 : 도교에서는 노자를 太上老君 眞君 등으로 부르는데 그 모습을 조각한 것을 天尊像이 라 한다. 374) 영류왕 : 고구려 제27대 왕. 재위기간 618~642년. 이름은 建武 또는 建成이라 하였다. 영양왕 의 이복동생으로 왕위에 올랐다. 375) 다음해에 허락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8년조에 王遣 人入唐求學佛老敎法 帝許之 로 나온다. 376) 보장왕 : 고구려 제28대왕. 재위 642~668년. 이름은 藏 臧 寶藏 寶臧으로 표기되고 있다. 영류왕의 동생 大陽王의 아들이다. 나라를 잃은 왕이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자 당에 잡혀가 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677년 당은 고구려유민을 회유하기 위 해 그를 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 여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州로 유배되었다. 682년 경에 사망한 후 衛 尉卿에 추증되었다. 377) 개소문 : 연개소문. 蓋金 盖金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조에는 伊梨柯須彌로 나온 다. 성은 연씨인데 중국측 기록에 泉氏로 나오는 것은 당고조의 이름 淵을 避諱하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의 동부대인 가문 출신. 수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여러 大人들과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하 자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동생의 아들 보장을 옹립한 후 전권을 장악하였으 며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지위는 아들 남생에게 이어졌다. 378) 도교(黃冠) : 도사들이 쓰는 관인데 여기서는 도교를 말한다. 379) 보장왕이 즉위함에 도교를 구하도록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321 640 三國遺事 641 이때 보덕화상380)은 반룡사381)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좌도382)가 정도에 필적하여 나라가 大安392) 8년 신미에 佑世僧統393)이 고대산 경복사의 날아온 방장에 도착하여 보덕성사의 위태로울 것을 괴로워하여 누차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에 신력으로 절(方 진용을 예배하였다. 시가 있는데 열반방등교394)는 우리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 운운 丈)383)을 날려 남으로 완산주384)<*지금 전주이다.> 고대산385)으로 옮겨 거하였으니 즉 영 하고 애석하도다 방장을 날려 온 후 동명의 고국이 위태로웠다. 라 하였다. 발문에 고구 386) 387) 2년 정묘(667) 3월 3일이라 하였 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하여 불법을 믿지 않으므로 우리 스승이 방장을 날려 남으로 이 산 다.> 얼마 있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총장388) 원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계 에 이르렀다. 후에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에 나타나 사람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 나라 산해 보면 경술년과 떨어진지가 19년이다.> 지금 경복사389)에 날아온 방장이 이것이다. 가 패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고 하였다. 모든 것이 국사와 같다. 나머지는 모두 본전과 휘 원년 경술(650) 6월이다.<*또 본전에는 건봉 390) 라고 하였다.> 이상은 국사의 내용이다. 眞樂公이 391) 당에 시를 남겼고 문렬공 이 전기 를 지어 세상에 행하였다.(중략) 승전에 실려 있다. 보덕법사에게는 고제가 11명 있었다. 무상화상과 제사 김취 등은 금동사395)를 창건하였 고, 적멸과 의율 두 법사는 구진사396)를 창건하였고, 지수는 대승사397)를 창건하였고, 일 승과 심정 대원 등은 대원사398)를 창건하였고, 수정은 유마사399)를 창건하였고, 사대와 계 보장왕 2년 3월조에 나온다. 380) 보덕화상 : 고구려 보장왕대의 승려. 자는 法智. 龍岡縣에서 태어났다. 원효와 의상이 그에게서 열반경 등의 강경을 들었다고 한다(노용필, 1989, 보덕의 사상과 활동, 한국상고사학보 2집). 381) 반룡사 :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절. 382) 左道 : 부정한 도. 邪道 邪敎를 말한다. 383) 方丈 : 維摩거사의 거실이 四方一仗인 것에 연유하여 사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384) 완산주 : 오늘날의 전주시를 말한다. 통일이후 신라의 구주의 하나였다. 백제 당시에는 완산이 라 하였다. 385) 고대산 :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산.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高達山으로 나온다. 386) 영휘 : 당 고종의 연호. 650~655년에 사용하였다. 387) 건봉 : 당 고종의 연호. 666~667년에 사용하였다. 388) 총장 : 당 고종의 연호. 668~669년에 사용하였다. 389) 경복사 :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고달산에 있는 절. 원효와 의상이 이곳 보덕화상에게서 열 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고 한다. 390) 眞樂公 : 고려 李資玄(1061~1125)의 시호. 이자현의 본관은 인주이고 호는 息庵 淸平居士 希夷 子이다. 아버지는 李, 할아버지는 李資淵이다. 108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관직을 버리고 춘 천의 청평산에 들어가 아버지가 세운 普賢院을 文殊院으로 고치고 당과 암자를 지어 생활하였다. 391) 문렬공 : 고려 김부식(1061~1151)의 시호. 김부식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雷川이다. 신라왕실 의 후예로서 아버지는 金覲이다. 22세가 되던 해인 109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초임직으로 안서 대도부의 사록참군사가 되었다. 그후 直翰林에 발탁되어 20여년간 문한직에 종사하였다 년에 妙淸이 난을 일으켰을 때 判兵部事였던 김부식은 토벌군 원수가 되어 묘청난을 진압하고 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 判尙書李部事 監修國史의 직에 임명되 었다. 1142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김부식은 집에서 삼국사기 를 편찬하여 1145년(인 종 23) 12월에 바쳤다. 육 등은 중대400)를 창건하였고, 개원화상은 개원사401)를 창건하였고, 명덕402)은 燕口寺403) 를 창건하였다. 개심과 보명은 또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392) 大安 : 중국 요나라 道宗의 연호. 1085~1094년까지 사용하였다. 393) 佑世僧統 : 고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僧號.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이름은, 1065년에 경덕국사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1067년에 우세라는 호와 승통의 직책을 받았다. 1085년에 송으로 유학을 가서 1086년에 귀국한 후 왕흥사의 주지가 된 후 천태교학을 정리하였 고, 여기에서 고려속장경 을 간행하였다. 1097년에 국청사가 완공되자 1대 주지가 된 후 천태 종을 改立하였다. 입적 후 大覺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394) 方等 : 대승경전의 총칭. 방정 평등의 뜻이다. 395) 금동사 : 평안남도 안주군 오도산에 있는 절. 396) 구진사 : 전라북도 임실군에 있는 절 397) 대승사 :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에 있는 절. 398) 대원사 : 전라북도 전주 무악산에 있는 절. 399) 유마사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산에 있는 절. 400) 중대 : 전라북도 진안군 성산에 있는 절. 401) 개원사 : 충청북도 단양군 금수산에 있던 절. 402) 명덕 : 보덕의 11제자 중의 한 사람. 그의 이름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권23 南行月日記에 弟子明德曰 全州高達山 是安住不動之地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 弟子開戶出見 卽堂已移於高達 山 距盤龍一千餘里也 라는 기사에 보인다. 403) 燕口寺 : 전주 부근에 있었던 절로 추정된다.

322 642 三國遺事 643 회409)를 베풀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능히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를 위해 경 권3 塔像 4 皇龍寺九層塔 신라 제27대 선덕왕404)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서쪽(당나라)으로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법을 주는 것에 감응하였다<*자세한 것은 본전에 보인다.> (중략)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 가를 지나가는데 홀연히 신인이 나와서 묻기를 어찌하여 이곳에 이르렀느냐. 하니 자장이 답하여 말하기를 보리405)를 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신이 예배하고 또 묻기를 너희 나라는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 하니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406)과 연접하고 남쪽으로 왜인과 접하였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고 이웃의 도적이 횡행하니 이것이 백성 의 걱정입니다. 하였다. 신인이 이르기를 지금 너희 나라를 여자로 왕을 삼았기 때문 고 기410) 남쪽 언덕에 한 정사를 지어 내 복을 빌어주면 내 또한 그 덕에 보답할 것이다. 하였다. 말을 마치자 옥을 받들어 바치고는 홀연히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사중 기에는 종남산411) 원향선가412)가 있는 곳에서 탑을 세우는 연유를 받았다고 한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당나라 황제가 주는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군신들에게 의논하니 뭇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에 공장을 청한 연후에야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 백제에 청하니 이름을 阿非知413)라고 하는 장인이 명령을 받고 와서 목 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414) 용춘415)<*용수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관하였는데 거느린 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그 까닭으로 이웃나라가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 하니 자장이 묻기를 돌아가면 장차 어떤 이익이 되겠습니 407) 까. 하니 신이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룡은 바로 내 맏아들이다. 범왕 의 명령을 받 아와서 이 절을 지키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 구층탑을 절 안에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 복하고 九韓408)이 와서 조공할 것이며 왕업이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탑을 세운 후 팔관 404) 선덕왕 : 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6년. 신라 최초의 여성 왕이다. 아버지 진평왕과 어머 니 마야부인 김씨 사이의 맏딸이다. 이름은 덕만이며 남편은 본서 왕력에 陰葛文王으로 나온 다. 진평왕이 죽었을 때 성골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聖祖皇姑라는 칭호를 받았다. 선덕여왕과 관련한 일화로는 知幾三事가 있다. 知幾三事는 나비 없이 그려진 모란꽃을 보고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모란꽃 이야기, 겨울에 玉門池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백제군이 옥문곡에 숨어 있는 것으로 해석한 옥문곡 이야기, 자신을 도리천에 묻어 달라 는 이야기를 말한다. 405) 菩提 : 범어 Bodhi의 音寫. 불교 최고의 이상인 佛陀, 正覺의 지혜 406) 말갈 : 6 7세기경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북부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 중국사서의 경우 말갈이 라는 명칭은 北齊書 武成帝 河淸 2년(563)에 처음 나온다. 삼국사기 는 東明聖王 원년 (B.C.37)부터 말갈이 나오고 있는데 삼국사기 의 말갈은 僞靺鞨로서 동해안 일대 및 한강북부 지역의 예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407) 범왕 : 色界 初選天의 天主. 梵天王(Brahma)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올 때 마다 제일 먼저 설 법을 청한다고 한다. 408) 九韓 : 九夷 九貊처럼 9종의 이민족을 말한다. 신라가 알고 있던 당시의 여러 나라들을 낮추어 부른 것이다. 황룡사찰주본기에는 海東諸國 으로 나온다. 409) 팔관회 : 八關齋戒. 불교의 계율로는 五戒 十戒 具足戒 등이 있으나 팔관회는 속인이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이 8계를 받고 齋戒하는 법회를 말한다. 신라에서는 진흥왕대에 고구려 승려 惠亮 법사가 신라로 망명해 와서 僧統이 되어 百座講會와 八關會를 실시한 것이 처음이다. 410) 경기 : 원래 京 은 천자가 도읍한 京師 를 뜻하고, 畿 는 천자의 거주지인 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 을 의미했으나 점차 왕도의 외곽지역 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되었 다. 경기 라는 말은 당나라시대에 왕도의 주변지역을 京縣(赤縣)과 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데서 기원한다. 신라에서는 6畿停이 있었는데 대당을 비롯한 왕도의 수비군단이 배치되었다. 411) 종남산 : 당의 장안(서안) 남쪽 약 20km 지점에 있는 산. 속고승전 24 釋慈藏전과 본서 황룡 사찰주본기에는 南山이라 나온다. 412) 원향선사 연유를 받았다 : 황룡사찰주본기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欲歸本國 丁辭南山圓香禪師 禪師謂曰 吾以觀心 觀公之國 皇龍寺建九層 堵波 海東諸國 渾降汝國 云云 413) 阿非知 : 백제의 장인. 황룡사찰주본기에는 乃命監君伊干龍樹 大匠 濟 非等 率小匠二百人 造斯塔焉 으로 나온다. 따라서 아비지의 知는 인명 말미에 붙는 존칭이라 할 수 있다. 백제에서 부른 이름은 아비였는데 신라에서 존칭어미 知 를 붙여 아비지라 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신 라보다 일찍 많은 목탑을 만들었고 미륵사의 중원의 목탑과 같은 거대한 목탑도 만들었기 때문 에 목탑을 만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조탑공 조사공 등 탑이나 사 찰을 만드는 기술자를 왜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414) 이간 : 신라 제17관등 중 제2관등. 伊 伊尺 으로도 표기되었다. 415) 용춘<용수> : 생몰년 미상. 진지왕의 아들이며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知道夫人 박 씨이고,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 김씨이다. 진지왕은 재위 4년 만인 579년에 폐위당하였 다. 진평왕 즉위 이후 동륜태자의 직계존비속이 성골로 격상되면서 용춘은 진골로 남게 되었다. 태종 무열왕은 654년에 아버지를 文興大王으로 추봉하였고 신문왕 7년(687)에 오묘제가 실시 되면서 종묘에 배향되었다. 삼국유사 에는 文興葛文王으로 나온다. 용춘은 황룡사 구층탑의 총

323 644 三國遺事 645 소장은 2백명이 되었다. 처음 찰주416)를 세우는 날 장인은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堂主 彌勒像428) 앞에 나아가 서원을 발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우리 대성429)께서 화랑으로 꿈꾸었다. 장인은 마음에 의심을 품고 일손을 멈추었는데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캄캄 화하시어 세상에 출현하여430) 제가 항상 거룩하신 모습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 한 속에 한 노 승려와 한 장사가 금전문(금당 문)에서 나와 곧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은 날로 독실하 장사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장인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세우기를 마쳤다. 였다. 어느 날 꿈에 어떤 승려가 말하기를 너가 웅천주431)<*지금의 공주이다.>수원사432) (중략) 또 해동의 명현인 안홍417)이 찬한 동도성립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 제27 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侵勞하였다. 만약 용궁418)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재난을 가히 진압할 수 있다. 제1층은 일본이 419) 420) 421) 422) 고, 제2층은 중화 이고, 제3층은 오월 이고, 제4층은 탁라 이고, 제5층은 응유 이고, 제6층은 말갈이고, 제7층은 단국423)이고, 제8층은 여적424)이고, 제9층은 예맥425)이다. 권3 塔像 4 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 (전략) 진지왕426) 대에 흥륜사427)에 승려 진자<*혹은 정자라고도 한다.>가 있었는데 매번 감독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이 44년(622)에 大宮 梁宮 沙梁宮의 三宮의 私臣을 합쳐 內省私臣을 두었을 때 초대 내성사신에 임명되었다. 416) 찰주 : 목탑의 중심기둥 417) 안홍 : 생몰연대 미상. 중국에 유학가서 능가경 승만경 등을 가져왔으며 동도성립기 를 지었다. 그를 흥륜사 10聖의 한 사람인 안함(578~640)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안함 은 601년에 칙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렀다. 귀국 후 그는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종원, 1998, 신라 최초의 고승들, 민족사 참조 418) 용궁 : 반월성의 왕궁을 말한다. 419) 중화 : 북중국을 말한다. 420) 오월 : 남중국을 말한다. 421) 탁라 : 耽羅. 제주도를 말한다. 본서 권1 기이 마한조에는 羅로,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는 州 胡 나온다. 422) 응유 : 백제를 말한다. 제왕운기에는 백제 국호의 이칭으로 鷹準이 나온다. 423) 단국 : 거란을 말한다. 424) 여적 : 여진을 말한다. 425) 예맥 : 예와 맥을 합한 말. 여기서는 고구려를 말한다. 426) 진지왕 : 신라제 25대 왕. 재위기간은 576~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 맏아들 동륜태자 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4년에 政亂淫荒 하다 하여 폐위되었다. 427) 흥륜사 : 신라 최초의 伽藍으로 경주시 사정동에 위치하였다, 본서 앞의 주 367) 참조 428) 堂主 彌勒像 : 당주는 절의 본존불을 말한다. 따라서 흥륜사의 본존불은 미륵불이 된다. 흥륜사 가 신라 최초의 사찰이고 여기에 미륵불이 주불로 모셔졌다는 것은 불교 공인에 즈음하여 신라 에 미륵신앙이 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가 최초의 가람인 흥륜사에 미륵불을 주불 로 모신 것은 백제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미륵불광사사적기a에 의하면 백제 성왕은 중인도 에 유학을 갔던 겸익이 526년에 梵文오부율을 가지고 오자 그를 흥륜사에 안치하고 율부를 번 역, 주석하게 하고 친히 서문을 썼다고 한다. 미륵신앙은 계율을 강조하고 있고 흥륜사라는 절 이 미륵불광사와 관련성이 있으므로 백제 흥륜사의 주불은 미륵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백제와 신라는 濟羅동맹을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신라 법흥왕이 8년(521)에 양나라에 사신 을 보낼 때 백제의 사신이 통역을 해주며 인도한 것에서 보듯이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 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의 미륵신앙이 신라에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 2000,`신라와 백제의 교섭과 교류 - 6, 7세기를 중심으로-a, 신라문화 합 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참조. 429) 대성 : 일반적으로 대성은 석가모니를 말하기도 하고 덕이 높은 보살을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는 미륵불을 말하다. 430) 대성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 이는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김유신 의 낭도를 용화향도라고 한 것과 화랑 죽지랑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있는 것과 궤도를 같이 한다. 이러한 형태의 미륵신앙은 신라화된 미륵신앙 이라 할 수 있고(장지훈, 1997, 한국 고대의 미륵신앙연구, 집문당), 화랑에 미륵신앙이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원화의 후신으로서의 화랑의 토착적인 성격은 점차 소멸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정운용, 1998,`신라 화랑제 형성 과 인재 선발a,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9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431) 웅천주 : 지금의 충남 공주시. 신라 웅주의 옛 지명. 백제 시기에는 웅진이었는데 문주왕이 475 년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웅진성 또는 고마성이라 하였다. 성왕이 538년에 사비로 천도 를 한 후 이곳은 북방 웅진성이 되었다.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한 후 이곳에 웅진도독부를 두 었고, 신라가 백제의 영역을 차지한 후 671년에 웅천군으로 하였다가 686년에 웅천주를 설치하 였다. 432) 수원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공주목 불우조에는 월성산에 있다고 하고 있는데 지금의 공 주시 옥룡동 월성산에 있었던 사찰이다. 이곳은 속칭 수원골로 오랫동안 백제의 수원사지로 알 려져 와서 충청남도 기념물 제36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1년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백제

324 646 三國遺事 647 에 가면 미륵선화433)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자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 살고 있고 명감이 많다고 하니 어찌 그 곳으로 돌아가 살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진자 하며 그 절을 찾아 열흘 일정을 가는데 한 걸음마다 한번씩 예배를 하였다. 그 절에 이르 가 그 말을 좇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령이 노인으로 변하여435) 나와 맞으며 말하기를 이 니 문 밖에 한 복스럽고도 섬세한 도령이 있어 고운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 곳에 이르러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답하여 말하기를 미륵선화를 보고자 할 따름입니 로 인도하여 객실로 영접하였다. 진자가 한편으로 올라가면서 한편으로 읍하면서 말하기 다.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지난번 수원사의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436) 다 를 그대는 평소 잘 모르는데 어찌 대접함이 이렇게 은근한가. 하니 낭이 말하기를 내 시 와서 무엇을 구하는가. 라고 하였다. 진자가 듣고 놀라 땀을 흘리며 본사로 달려서 돌 또한 서울 사람이다. 스님께서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를 드릴 뿐입니다. 라고 아왔다.(후략)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낭은 문밖으로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우연이겠지 하면서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 절의 승려들과 더불어 지난날의 꿈과 오 게 된 뜻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잠시 말석에라도 몸을 붙여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 데 어떻습니까. 하였다. 그 절의 승려들은 그 정황을 허황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 은근 434) 한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千山 이 있는데 자고로 현인과 철인이 유물이 출토되지 않고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시대의 기와들이 출토되어 백제시대의 사지와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수원사지가 자리한 인근 지역의 불교유적 현황을 볼 때 백제시대 수원사의 탐색은 보다 범위를 확대하여 볼 필요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공주대학교 박물관, 1999, 수원사지 참조. 433) 미륵선화 : 미륵은 친구를 뜻하는 범어 Mitra에서 파생한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중국에서 는 慈氏 慈尊으로 번역하였다. 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 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授記를 받은 뒤 兜率天에 올라 가 현재 天人들을 위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에 있기 때 문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入滅한 뒤 56억7000만 년이 되는 때에 이 사바세 계에 태어나서 華林園 안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 였다. 이러한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먼 미래를 생각하 며 명상에 잠겨 있는 자세가 곧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삼국시대에 이 미륵 반가사유상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을 신앙하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 을 때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하는 신앙을 미륵상생신앙이라 하고,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여 중생을 구제해 주기를 염원하며 수행하는 미륵신앙을 미륵하생신앙이라 한다. 선화는 화랑의 별칭으로 무교와의 습합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미륵선화란 불교적 색채의 미륵과 토착적 성격의 선화가 합쳐진 巫佛융화적인 명칭이라 할 수 있다(김호성, 1998, `불교경전이 말하는 미륵사상a, 동국사상 29집 참조). 434) 千山 : 천산의 위치에 대해 千의 음이 즈믄 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공주시의 舟尾山 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천산에 있던 산신령이 진자에게 미륵선화의 위치를 소개하 는 모습은 천불이 중생을 도솔천으로 안내해 미륵을 친견할 수 있도록 하는 법화경의 내용과 관 권5 感通 7 경흥이 성인을 만나다(景興遇聖) 신문왕437)대 대덕 경흥438)은 성이 수씨439)이고 웅천주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삼장에 두루 통달하니(遊刃)440) 명망이 일시에 높았다. 개요441) 원년(681)에 문무왕442)이 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길기태, 2007,`水源寺 彌勒信仰의 性格a 참조. 435) 산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 山神靈이 老人으로 변하는 것은 웅진지역에 산신신앙이 행해지고 있 었음을 보여준다. 백제의 산신신앙은 아신왕이 가뭄이 심하게 들자 횡악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든가, 사비도성에 일산 오산 부산이라는 삼산이 있고 여기에 사는 신인 조석으로 왕래하였다 고 한 사실 등에서 확인된다. 436) 수원사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 신라 승려 진자사가 공주 수원사로 미륵선화를 만나러 갔다 는 것은 백제에서는 이미 미륵신앙이 공주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437) 신문왕 : 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년. 문무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政明이다. 신문왕은 원 년에 일어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그 다음 해에 국학을 설치하고 또 오묘제를 정비하는 등 전제왕권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본서에는 이 왕대에 온갖 재난을 잠재우는 만파식적이라는 피리 가 만들어진 것으로 나온다. 438) 경흥 : 생몰연대 미상. 그의 행적은 삼랑사비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이 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저술로는 현존하는 것은 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 미륵소경 1권, 금광명최승 왕경략찬 5권 등이 있다. 웅천주 출신이라는 사실과 681년에 문무왕이 유언으로 국사를 삼도 록 하였다는 사실 등에서 미루어 볼 때 그는 본래 백제인이었지만 신라에 들어와 크게 활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439) 수씨 : 백제 대성팔족에는 보이지 않는 성씨이다. 字形이 유사한 것에 근거하여 대성팔족의 하 나인 목씨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440) 통달하니(遊刃) : 장자 養生訓에 나오는 遊刃有餘地 의 준말로 고기를 저미는 칼을 자유자재 로 놀린다는 뜻이다. 일을 처리하는데 여유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325 648 세상을 떠나려 함에 신문왕에게 뒷일을 부탁하여 말하기를 경흥 법사는 국사443)가 될 만 하니 내 명령을 잊지 말라. 고 하였다. 신문왕은 즉위하자 굽혀 국로444)로 삼고 삼랑사445) 에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들기를 한 달이나 되었다. 노중국(계명대학교) 碑 文 441) 개요 : 당 고종의 연호. 681~682년에 사용하였다. 442) 문무왕 : 신라 제30대 왕. 재위기간은 661~681년이다. 443) 국사 : 국가의 師表가 되는 고승에게 내리는 칭호. 중국에서는 北齊의 天保 1년(550)에 法常이 국사가 된 것이 그 시초이다. 신라에서 최고의 승려에 대한 칭호는 진흥왕대에는 국통이었고 이 국통은 진평왕대에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무왕이 유조로 경흥을 국사로 삼으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볼 때 신라에서의 국사제도는 진평왕에서 문무왕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444) 국로 : 불교계의 가장 원로로서 왕의 자문에 응하거나 불교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 고승을 말한 다. 국사와 국로와의 관계에 대해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김영태, 1987,`신라의 관음신앙a, 신라불교연구, 민족문화사), 국사보다 국로가 높은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69, 원문 겸 역주 삼국유사, 동국문화사), 국사보다 국로가 낮은 것으로 보는 견해(김남윤, 1984,`신라 중 대 법상종의 성립과 신앙a, 한국사론 a11 ; 한태식, 1991,`경흥의 생애에 관한 재고찰a, 불교 학보 28) 등이 있다. 曲을 曲盡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높은 것이 되지만 굽혀 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낮은 것이 된다. 국로가 국사보다 낮다고 하면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국로로 낮추어 임명한 것은 그가 백제 출신이라는 것이 일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445) 삼랑사 : 신라 진평왕 9년(597)에 창건된 절. 경주시 성건동 서천 옆에 절터가 있고 보물 제127 호인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당간지주의 높이는 3.66m이다. 삼랑사비문은 朴 居勿이 찬하고 姚克一 썼는데 현재 파편만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 라본기 헌강왕 9년(883)조에는 왕이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 한수를 짓게 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326 碑文 651 碑 文 金石文의 내용은 한국고대사연구소가 편집하고 가락국사적개발원에서 1992년에 발행한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의 내용을 대본으로 하여 발췌하였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1) 甲2)寅年3) 正月 9일 柰4)祇城5)의 사택지적6)은 몸이 세월과 함께 쉽게 가버리고, 다시 돌 아오기 어려움을 슬프게 여기노라. 이에 금을 뚫어 진귀한 堂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 1) 砂宅智積碑 : 이 비는 1948년 미술사학자 홍사준 황수영에 의해 충남 부여군 扶餘邑 官北里 옛 익생병원 도로변에 방치되어 있던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돌무더기는 1937년 日帝가 부 여읍 부소산 남쪽 기슭, 현재 삼충사가 있는 곳에 神宮을 세우기 위해 신궁 진입도로를 포장하려 고 부여군 각지에서 모아온 돌들로서, 일제가 패망한 이후 공사가 중단되고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발견된 비는 완전하지 않은 비편으로 현존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이다. 양질 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의 罫線을 구획하고 그 안에 글자를 음각하였다. 1행마다 14자인데, 현재 4행 56자가 판독된다. 각 행의 문장이 서로 이어지고, 또 비의 우측면 상부 원 안에는 음각한 봉 황문에 붉은 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어, 비의 우측 4행까지는 온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중 국 六朝風의 四六騈麗 문장이며 서체는 웅건한 歐陽詢體로, 문장이나 자체 모두 세련되었다. 비 에는 사택지적 이란 인물이 나날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며, 불교에 귀의하여 금당과 보탑을 건 립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洪思俊, 1954,`百濟 砂宅智積碑에 대하여a, 歷史學報 6). 따 라서 사택지적비는 백제 모사찰의 事蹟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 비를 통해 백제 귀족 들의 성씨 문제, 백제 귀족들의 지역기반, 백제의 불교와 사상 등에 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 다. 역주에 서영대, 1992,`砂宅智積碑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 甲 : 甲 자는 비의 해당부분이 깨어졌지만, 甲 의 田 좌측부와 하단부의 획이 일부 남아있어, 甲 으로 충분히 추독할 수 있다. 3) 甲寅年 : 비의 건립연대이다. 비를 세운 사택지적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의자왕대의 인물이라는 점 에서, 이 갑인년은 654년(의자왕 14)으로 추정된다. 翰苑 에 인용된 括地志 에는 백제에서 紀 年은 별도의 年號가 없고, 단지 六甲으로 순서를 삼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사택지적비도 갑인년이 라고만 되어 있어 이러한 기록에 부합된다. 현재 웅진~사비기의 백제 금석문에서는 紀年에 모두

327 652 배로운 塔을 세웠다. 우뚝 솟은 그 자애로운 위용은 神光을 토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높디높은 그 자비로운 모습(貌)7)은 聖明을 머금고 碑文 653 당이 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비(唐平濟碑)8) 大唐이 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한 碑銘. 顯慶 5년9) 庚申 8月 15일에 세우다. 洛州 河南의 權懷素가 쓰다. 六十甲子를 사용하는 사례밖에 없다. 4) 柰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297쪽에는 奈 로 판독되어 있으나, 실제 비문이나 탁본으 대저 天子가 萬國 제후의 朝會를 받고 모든 백성을 지배하는 까닭은 海外를 바르게 해 서 나라의 기강을 세웠고, 또 천하의 중심에10) 자리를 잡아 토지를 넓혀, 七德을11) 멀리 오 로 볼 때, 柰 가 분명하다. 5) 柰祇城 : 내기성은 사택지적이 은퇴한 지역, 사찰을 건립한 지역이라기보다는, 사택지적의 출신지 로서 백제의 귀족집안인 사택씨의 지역기반이었다고 생각된다. 사택지적비가 부여읍 근처에서 수 집된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내기성은 부여읍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에 내기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부여읍 서쪽 30리의 부여군 恩山面 內地里 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洪思俊,`百濟 砂宅智積碑에 대하여a, 256쪽). 6) 사택지적 : 이 비를 세운 사람으로, 사택은 姓氏, 지적은 이름이다. 砂宅氏는 백제의 八姓大族 의 하나인 沙氏와 같은 것으로, 沙宅 또는 沙 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李弘稙, 1971,`百濟人名 考a,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334~339쪽). 그런데 智積이란 이름은 日本書紀 권24 皇 極 원년(642, 의자왕 2) 2월 戊子條와 7월 乙亥條에도 보인다. 전자는 백제 사신이 와서 전년 11월 에 大佐平 智積이 죽었음을 전하는 것이고, 후자는 백제에서 사신으로 온 大佐平 智積 등을 극진히 대접했다는 기록이다. 내용상 서로 모순되므로, 일본서기 에 기록된 지적은 서로 동명이인이거 나, 아니면 전 후의 기록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택지적과 대좌평 지적을 동 일인물로 본다면, 사택지적은 갑인년(654)까지는 살아있었기 때문에, 전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택지적비의 문장이나 서체로 볼 때 사택지적은 7세기대의 인물이 분명하므로, 일본서 기 의 지적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사택지적비를 이용해 일본서기 관련 구절의 편년을 재조정하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奧田尙, 1988,`皇極紀の百濟政變記事についてa, 文學 部紀要 21, 追手門學院大學 ; 이도학, 1997,`일본서기의 백제 의자왕대 정변 기사의 검토a, 한 국고대사연구 11, 406~410쪽). 결국 일본서기 에 의거할 때, 사택지적은 의자왕 때 활약한 인물 로, 관직이 대좌평(=상좌평)에까지 올랐던 백제의 최고 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사택지적이 자신 의 사찰과 보탑 사적비 등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대귀족으로서의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한편 지적이라는 이름을 법화경 의 智積보살에 의거해 작명한 것으로 보고, 당시 백제 에 법화경 신앙이 유행하였다고 추론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조경철, 1999,`백제의 지배세력과 법 화사상a, 한국사상사학 12). 7) 貌 : 비문에 이 글자는 +艮 으로 되어 있다. 이를 懇 으로 판독하는 설과 貌 로 판독하는 설 이 있다. 이 글자가 懇 과 통하는 글자인 동시에, 東魏 隋代의 금석문에서는 貌 를 이렇게도 썼 기 때문이다(佐野光一 編, 金石異體字典, 雄山閣, 362쪽). 문장의 對句로도 모두 가능하지만, 여 기에서는 貌(모습)으로 번역하였다. 8) 唐平濟碑 : 이 비문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東南里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제1층 탑신석 四面 에 새겨져 있다. 비석을 따로 세우지 않고, 기존 석탑의 탑신부를 이용해 비문을 새겼다는 점에서,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297쪽에는 唐平濟碑 로 칭하였지만, 唐平濟碑文 이라고 부 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비문이 舊扶餘郡衙의 敷地內에서 발견된 石槽에 도 새겨져 있다(본서의`百濟 石槽 刻字a를 참조바람). 이로 인해 어느 것이 原本이고 어느 것이 複 刻인가, 아니면 原 비석은 따로 있고 두 가지 모두 복각인가, 더 나아가 소위 정림사지석탑이 이 碑 銘을 새기기 위해서 세워진 것인가, 아니면 전부터 있었던 탑을 이용해서 거기에 비명을 새긴 것인 가 하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비문 속에 刊玆寶刹 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탑 을 이용해 비문을 새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정림사지는 백제 사비도성의 중앙부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국가사찰이었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사찰의 성격 때문에 당이 백제를 멸망한 사실을 정림사의 석탑에 기록한 것이라고 추정된다(이병호, 2002,`백제 사비도성의 조영과정a, 한국사 론 47 ; 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주류성, 191~204쪽). 한편`百濟石槽刻 字a도 백제 왕궁 내의 기존 석조물을 이용해 당평백제비문 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이 새겨 져 있는 塔身은 높이 136.4cm, 폭 218.2cm이다. 제1면은 24행, 제2면은 29행, 제3면은 28행, 제 4면은 36행 등 총 117행이며 각 행은 16자 또는 18자인데, 字徑은 4.5cm로 楷書體이다. 그러나 題額인 大唐平百濟國碑銘 8자는 2행의 篆書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도 顯慶五年歲在庚申八 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 과 洛州河南權懷素書 라는 건립연대와 書者의 이름을 밝힌 2행의 篆書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소정방 등 백제정벌 장군들의 紀功碑로 볼 수 있으며, 唐 高 宗이 신라 무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泗 城을 함락시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문장은 四六 騈驪體이고, 비문에 의하면 陵州長史 判兵曹 賀遂亮이 지었다. 書體는 楷書로 唐調에 六朝의 書風 이 가미되어 있다. 역주에 김영심, 1992,`唐平濟碑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 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9) 顯慶 5년 : 현경 5년은 신라 무열왕 7년(660)이다. 10) 천하의 중심 : 원문에는 中 으로 되어 있다. 은 천자가 다스리던 畿內를 의미하므로, 中은 천하의 중심이다. 11) 七德 : 훌륭한 武에 필요한 일곱 가지 덕을 말한다. 곧 禁暴 兵 保大 定功 安民 和衆 豊

328 654 碑文 655 랑캐의 땅에까지 휘날리고, 五兵으로12) 변방을 고요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質과 文 무가 다 없어지고 울부짖는 사슴도 고요해져, 丹鼎도27) 전하지 않고 方書도28) 기록되지 이13) 서로 다르고, 걷는 것과 달리는 것이 분명히 달라, 揖讓과14) 受終에15) 비교해 전쟁과16) 않음에랴. 17) 革命은 모두 헛되이 武勇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요, 싸움을 거두지 않은 것이지만, 凶 준동하는 이 오랑캐는29) 바다를 믿고 목숨을 훔치고, 요해처에30) 숨어 만리에 떨어져 있 水에서18) 재앙을 일으킨 九 이19) 마침내 주륙되고, 洞庭에서20) 역모를 꾀한 三苗가21) 이 다며, 지세가 험함을 믿고 감히 天倫을 어지럽혔다. 동쪽으로 친한 이웃을 치고,31) 중국의 미 주살되었음도 알아야 한다. 詔勅을 어기며, 북쪽으로는 逆 와32) 연계되어, 멀리 梟聲에 응하였도다. 하물며 밖으로 이에 천년을 본보기로 삼고, 萬古를 생각하노라. 높이 출세해서 漢을 대신해, 司馬 벼 슬로 조정을 이었고, 임무는 鑿門을 중히 여기고, 예절은 推 을 높이 여겼다. 馬伏波는22) 23) 交 (趾)에서 내 24) 銅柱에 공을 새겼고, 竇車騎는 25) 燕然에서 돌에 공을 기록했으나, 마침 海의 奔鯨을 뒤집어엎거나 狼山의 封豕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26) 하물며 산의 나 곧은 신하를 버리고,33)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34)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한테만 형 벌이 미치고,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들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標梅에 원망을 품고 軸에 슬픔을 머금는다. 우리 황제께서는 體二해서 높은 자리에 있으시며, 세 가지 일에 통달하신 것이35) 매우 뛰어나시며, 聖賢의 相을 지녀 경사스러움을 만들고 貴人의 相을 지녀 빛을 발하셨다. 五 瑞을 揖하고, 百神을 조회하고, 만물을 신묘하게 해서 六辯을 꾀하여 서북쪽에서는 하늘 財 등이다. 12) 五兵 : 다섯 가지 무기를 말하는데, 이에는 戈 戟 酋矛 夷矛 또는 弓 矛 戈 戟 또 는 刀 劍 矛 戟 矢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이를 五戎이라 하기도 한다. 13) 質과 文 : 論語 의 文質彬彬 에서 따온 말로 質은 안으로 감춘 본질이고, 文은 밖으로 드러난 외 형을 말한다. 史記 에도 君子有過則謝以質 小人有過則謝以文 이라 하였다. 14) 揖讓: : 천자의 지위를 禪讓하는 행위. 15) 受終 : 前王이 자연사한 후에 왕위를 계승한다는 뜻이다. 書經 舜典에 正月上日 受終於文祖 라 는 용례가 있다. 16) 전쟁 : 원문의 干戈는 전쟁에 쓰는 兵仗器의 총칭으로 여기서는 전쟁을 은유하였다. 17) 革命 : 이전의 통치자를 무너뜨리고, 새 통치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18) 凶水 :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는 뜻이나, 川名으로도 사용된다. 凶水는 安徽省 阜陽縣 潁水로 흘 러들어간다. 19) 九 : 水火의 귀신으로 사람을 해친다고 한다. 20) 洞庭 : 湖南省의 경계에 있는 중국 제일의 淡水湖인 동정호를 말한다. 戰國策 의 魏策篇에는 昔者 三苗之居 左有彭 之波 右有洞庭之水 라 하여, 동정호를 삼묘의 거주지로 언급하고 있다. 21) 三苗 : 堯舜시대 남방의 오랑캐로 四凶의 하나이다. 22) 馬伏波 : 後漢의 馬援을 말한다. 그는 建武年間 交 를 평정하고 銅柱를 세워 공을 표시했다. 23) 交 : 중국 한나라 때의 郡名이다. 지금의 월남 북부 하노이 지방을 가리킨다. 24) 竇車騎 : 後漢의 竇憲을 말한다. 그의 妹가 皇后가 되어 車騎將軍에 배수되었다. 融의 증손이며 字는 伯度이다. 흉노 單于를 大破하여 大將軍이 되었고, 황제의 명으로 班固가 그의 공을 기리는 碑를 찬술해 燕然山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竇氏의 一族이 조정에서 득세하여 교만해지자, 황제 는 竇憲의 印을 몰수하고 자살하게 했다( 後漢書 竇憲傳). 25) 燕然 : 현재 외몽고 三音 諾顔部의 杭愛山이 바로 옛 燕然山이다. 의 기둥을 바르게 하고 동남쪽에서는 地紐를 돌리셨다. 대저 龍圖를36) 진열하고 鳳紀를37) 모으며, 金鏡을 매달고 玉燭을38) 가지런히 하셨도다. 수레바퀴의 웅덩이에 빠진 물고기를 구해주고, 기울어진 새집에서 위태로운 새알을 건져 주시듯이, [백제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저 흉포한 무리를 분히 여겨, 비록 친히 弔民罰罪하지는 않았지만39) 우선 뛰어난 26) 마침내 없었다 : 공훈을 세운 이후 모두 오만과 탐욕을 억제하지 못하였음을 은유한 것이다. 27) 丹鼎 : 道家에서 丹藥을 넣어두는 솥단지를 말한다. 28) 方書 : 方術, 즉 方士의 術法, 長生不死의 法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29) 卉服 : 풀로 만든 옷으로 蠻夷의 복장을 말하며, 여기에서는 백제를 은유한 표현이다. 30) 襟帶 : 깃은 목을 두르고 띠는 허리를 두른다는 뜻으로 산천이 둘러싼 요해처를 의미한다. 31) 동쪽으로 치고 :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일을 은유한 표현이다. 32) 逆 : 도덕에 일그러진 일을 하는 고약한 놈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고구려를 은유한 표현이다. 33) 신하를 버리고 : 의자왕이 좌평 성충과 흥수를 귀양보내 결국 죽게 한 일을 말한다. 34) 계집을 믿고 : 의자왕이 君大夫人을 총애하여 정치를 그르친 일을 말한다. 35) 세 가지 일에 통달(通三) : 사람을 가려 뽑고, 백성의 뜻을 좇으며, 시대에 따르는 세가지 일에 통 달함을 말한다. 36) 龍圖 : 河圖를 말한다. 하도를 龍馬가 업고 나왔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37) 鳳紀 : 帝王과 관계된 기록을 말한다. 38) 玉燭 : 사철의 기후가 고르고 날씨가 화창하여 日月이 환히 비치는 일. 39) 弔民罰罪 :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죄있는 자를 징벌한다는 뜻. 즉 포악한 임금을 토벌하여 백성을 구제함을 의미한다.

329 656 碑文 장군들에게 명하셨도다. 657 고 행하지 않아도 法度에 들어맞았다. 흰 구름을 거느리고도 모두 맑고 시원했으며, 푸른 使持節 神丘40) 夷41) 馬韓 熊津 等 十四道 大摠管 左武衛大將軍 上柱國 邢國公 蘇 定方은 曾城에서 멀리 構陷을 당하고 委水에서 긴 파란을 일으켰다. 뛰어난 계책은 武帳 42) 에서 들어맞고 빼어난 기개는 文昌에 드러났으니, 衛 을 능가하면서도 따라잡지 않으 소나무와 더불어서 고고함을 다투면서도 멀리 앞사람보다 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 러워함이 있었다. 副大摠管 冠軍大將軍 衛將軍 上柱國 下博公 劉伯英은 위로는 風雲으 며, 彭韓을43) 굽어보면서도 높게 여긴다. 趙雲은44) 一身의 담력으로 용맹이 三軍의 으뜸 로 정치를 할 만한48) 재주를 가졌고 將相의 그릇을 품었다. 말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이 되었고, 關羽는45) 萬人을 대적할 만한 능력으로 명성이 百代에 떨쳤다. 자기 목숨을 행동은 군대의 법칙이 되었으며, 말씀(詞)은 布帛을 따뜻하게 하고 향기는 연꽃과 난초의 버리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가지고 날아오는 화살을 무릅쓰면서 더욱 더 견고해졌고 향을 내었으며, 공적은 旗常에 드러나고 조화로움은 鍾의 音律에49) 맞았다. 晩年의 절개 목숨을 가벼이 하고 義를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앞장을 섰어도 빼앗기 어려웠다. 마음은 보다 平生의 절개를 중히 여기고 짧은 시간보다 1척이나 되는 옥을 가벼이 여기며 매우 얼음처럼 맑은 거울에 드러나 귀신도 그 형상을 감출 수 없고, 바탕은 절개를 지니는데 높은 공적도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겨 平策縱策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힘써 바람과 서리도 그 색깔을 고칠 수 없었다. 병사들을 길러 변방 오랑캐를 慰撫함에 46) 47) 副大摠管 使持節 州諸軍事 州刺史 上柱國 安夷公 董寶德은 는 드날릴 것에 뜻을 이르러서는 四知로서 삼가고, 三惑을 없애 氷泉을 고요하게 해서 깨끗함을 드러내고, 두고 걸출함은 뛰어나게 설 것을 도모했으며, 재주는 병법에 능통하고 계책은 後 를 움 서리 맞은 잣나무를 품고서 정절을 굳게 하니, 말하지 않아도 詩經 書經 에 부합하 직였다. 眞梅하여 능히 중국 군인들의 목마름을 그치게 하고,50) 수고롭지 않고도 솜 옷을 채워 마침내 중국 병졸의 추위를 잊게 했다. 副大摠管 佐領軍將軍 金仁問은 氣量이 온화하고 아담하며, 器局과 識見이 침착하고 굳 40) 神丘 : 당이 백제를 치면서 作名한 새로운 지명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지만(노중국, 1988,`통일 기 신라의 百濟故地支配a, 한국고대사연구 1, 140~141쪽), 사비도성의 서쪽에 있었던 백제의 城名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주류성, 209~212 쪽) 41) 夷 : 당이 백제를 치면서 作名한 새로운 지명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지만(노중국, 1988,`통일기 신라의 百濟故地支配a, 140~141쪽), 사비도성의 동쪽에 있었던 백제의 城名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209~212쪽) 42) 衛 : 衛靑과 去病을 말한다. 모두 前漢 武帝 때에 흉노를 쳐서 용맹을 날린 장군들이다. 43) 彭韓 : 前漢 창업의 무장이었던 彭越과 韓信을 말한다. 팽월은 山東 昌邑 사람으로 처음엔 項羽 밑에 있었으나 뒤에 漢 高祖를 쫓아 楚를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므로 梁王으로 被封되었다. 한 신은 趙 燕 齊 등의 나라를 차례로 공략하여 천하통일의 기초를 확립하여, 역시 韓王으로 被封 되었다. 44) 趙雲 : 삼국시대 蜀漢의 武將이었다. 字는 子龍. 劉備가 曹操에게 패주할 때 그의 처자를 무사히 구출하였다. 대담하고 전략에 뛰어나기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45) 關羽 : 조운과 함께 촉한의 名將이다. 字는 雲長. 張飛와 더불어 유비와 도원결의하였다. 후에 荊 州의 싸움에서 呂蒙에게 패해 피살되었다. 46) 四知 : 비밀은 은폐할 수 없다는 말로, 後漢의 楊震이 東萊太守로 있을 때 천거한 王密이 뇌물을 가져왔는데, 天 地 我 彼가 알고 있다 하여 물리쳤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47) 三惑 : 酒 色 財의 유혹을 말한다. 세어서 소인배의 자잘한 행위는 없고 군자의 고매한 풍모만 있었으며, 그의 武는 싸우지 않고도 드러났으며 文 또한 부드럽고 원대했다. 行軍長史 中書舍人 梁行儀는 구름 꾸미개로 빼어남을 드러내고 해 거울로 빛을 드날리 며, 풍모는 搢紳을 한 것보다51) 뛰어나고, 道는 雅俗을 빛내어 거울은 許郭보다52) 맑고, 덕망은 荀裴보다53) 중하였다. 분별을 잘해 배움의 바다에서 九流를54) 잡아당기고, 문장의 48) 정치를 할 만한 : 원문의 廊廟는 나라의 정치를 하는 正殿, 즉 廟堂을 의미한다. 49) 鍾의 音律 : 원문의 鍾律은 鐘의 音律을 의미한다. 漢書 京房傳 好鍾律 知音聲 의 예가 있다. 50) 止渴之計: 위나라 武帝가 목마른 군사들에게 前方에 매화나무 숲이 있으니 그곳까지 가면 갈증을 풀 수있다고 호령하고 전진하게 한 故事로 臨機應變의 계책, 方便의 뜻으로 쓰임. 51) 搢紳 : 笏을 朝服의 大帶에 꽂은 것으로, 곧 衣冠 束帶를 한다는 것으로 貴顯한 사람의 모습을 가 리킨다. 52) 許郭 : 후한의 許 와 郭泰를 말한다. 許 는 후한 말기의 은둔 학자로 字는 子將. 鄕黨의 인물을 평론하기 좋아했는데 당시 曹操를 보고 너는 평시의 姦賊, 亂世의 姦雄 이라고 평한 것으로 유 명하다. 이들을 淸談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53) 荀裴 : 荀은 荀彧(荀郁)으로 추정된다. 순욱은 후한인으로 字는 文若, 諡는 敬. 효렴으로 천거되어

330 658 碑文 조리는 빼어나 글 잘하는 사람에서 七澤을55) 가리웠다. 太傅의 심오한 계책으로도 그의 말고삐 잡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杜鎭南의 원대한 계략으로도 그의 수레바퀴를 붙들 56) 659 짖으면 바람과 천둥이 소리를 끊는다. 夷道副摠管 右武候 中郞將 上柱國 曺繼叔은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여 일찌기 어렵 수 없었도다. 잠시 鳳池에 있으면서 鯨壑을 깨끗하게 하였다. 고 험한 것을 맛본 것이 廉頗의62) 强飯과는63) 차이가 있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는 늙은 신 邢國公은 秘策을 움직이고 용감하고 굳세게 행동하여, 陰羽는 偃月의 계획을 열고 陽文 하의 뜻은 매한가지다. 은 샛별의 기운을 머금었다. 龍圖와 豹鈐은 반드시 情源에 드러내고 玄女와57) 黃公은 神 用에 모두 모였다. 行軍長史 岐州司馬 杜爽은 바탕은 아름다운 봉우리를 빛내고 향기는 계수나무 밭에 흐 른다.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밟아 西海에서 뛰어난 말을 달리며, 구름을 밀치고 물을 쳐 그러나 하늘 끝까지 개미처럼 모여들고 땅을 빙 둘러 벌떼처럼 날아드는 오랑캐(백제) 南海에서 굳센 깃촉을 잡으니 驥足의 능력을64) 이미 펼쳐 鳳池를 가히 빼앗을 만하다. 는 벌레가 모래를 머금은 것과 유사하고 큰 뱀이 안개를 토해내는 것과 비슷하여 營을 서 右一軍摠管 宣威將軍 行左驍衛郞將 上柱國 劉仁願은 효성스러운 바탕에 국가에 충성하 로 합치면 豺狼이 길에 꽉 차고 陳을 맺으면 梟 이 산에 꽉 차 있도다! 이 때문에 흉악한 니 집에서 비롯해 나라를 이루었도다. 일찌기 周孔의 가르침을 듣고, 나중에는 孫吳의 병 무리들은 이 궁벽지고 험한 곳을 지키고서는, 매달린 줄이 장차 끊어져서 대단히 세차게 서를 익혔으며 이미 英勇한 재주를 띠고 아울러 文吏의 道를 겸하였다. 떨어지고, 쌓아올린 바둑돌이 위태로워 九鼎에 눌리게 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이때 가을 풀이 시들어 산은 쓸쓸해지고, 차가운 바람이 일어 추운 기운이 심해지며, 邢國公은 聖旨를 받들어 따르고 斑條를 위임받아 金이 조(粟)와 같이 많아도 엿보지 않 고, 말이 양과 같이 순해도 조용하지 않게 하였다. 빠른 걸음과 재빨리 지나가는 번개가 다투어 일어나니, 군사를 모으기 위한 북을 다투어 右武衛中郞將 金良圖, 左一軍摠管 使持節 沂州刺史 上柱國 馬延卿은 모두 굳은 마음을 친다. 豊隆에게 명하여 맨 뒤에 서게 하고 列缺에게 앞장서게 하니, 간사한 기운과 요망 품고 각기 매가 새를 잡듯이 맹위를 떨치고자 힘써 三河의 굳센 군사를 끼고 六郡의 지체 58) 한 기운은 칼과 창으로 쓸어버리고 높은 담과 가파른 성가퀴는 衝棚으로 부숴버렸다. 있는 집안의 장교들을 지휘했다. 左將軍 摠管 右屯衛郞將 上柱國 祝阿師와 右一軍摠管 使持節 淄州刺史 上柱國 于元嗣 邢國公은 위로 뛰어난 계략을 받들고 아래로 節度를 오로지 하여 혹은 中權으로 군대 는 關河(요새)의59) 지역을 차지하였다. 재주는 文武를 아울렀으며 山西의60) 장엄한 기운 를 함락시키기도 하고 혹은 後勁으로 선봉이 되게 해서65) 하늘에서 나타나 땅으로 사라지 을 끼고, 冀北의61) 뜬 구름을 타고서 호흡을 하면 강과 바다가 파도를 멈추고 소리내어 꾸 는 기이함으로 천번 만번 변화하며, 멀리까지 이르고 깊은 데까지 끌어당기는 기묘함으 로 번개같이 일어나고 바람처럼 가서 星紀가 미처 옮겨지기도 전에 훌륭한 명성이 길에 가득 찼다. 曹操의 奮武司馬로 되어 軍國의 일을 모두 자문했다. 후에 萬歲亭侯로 봉해졌는데 당시 사람들이 荀令君으로 불렀다. 54) 九流 : 漢代의 아홉 학파. 곧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家 農家 등을 말한다. 55) 七澤 : 雲夢 등 7개의 沼澤으로 湖北省 지역에 있다. 56) 鳳地 : 鳳凰池. 唐나라의 中書省에 있는 못으로 중서성의 별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57) 玄女 : 중국 上古 때의 女神의 이름으로 황제에게 六壬과 遁甲法을 가르쳤다 한다. 58) 衝棚 : 적의 城을 돌파하는 望樓가 있는 攻城用 무기를 말한다. 59) 關河: 函谷關과 黃河. 60) 山西 : 중국 동북부의 省.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황토층 고원지대로 산지 고원 분지를 형 성하고 있다. 61) 冀北 : 冀州의 북방으로 말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62) 廉頗 (B.C ) : 전국시대 趙나라의 名將이다. 藺相如와 함께 刎頸之交를 맺고 함께 조나 라를 흥성하게 하였다. 63) 强飯 : 억지로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먹는 행위를 말한다. 64) 驥足 : 준마의 발이란 뜻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의 비유. 65) 中權으로 後勁으로 : 中權은 中軍을 말한다. 上 中 下 三軍의 중앙의 군대로 主將이 거느 리는 精銳한 군대이다. 한편 後勁은 後備의 精兵을 말한다. 결국 中權後勁은 三軍 가운데 中軍은 主將이 있는 군대로서 權謀를 쓰고 後軍은 精兵을 모은 군대로서 용감히 싸우는 강한 군대임을 자부한 것이다.

331 660 碑文 邢國公은 仁을 베푸는 것을 부채를 펼치듯이 쉽게 하고, 병사에 대한 자애로움은 投 661 현울림은 卓魯의 명성보다73) 높도다. 보다66) 심하였다. 명령을 거스르는 자는 秋霜과 같은 위엄으로 숙청하고, 귀순하는 자는 무릇 5都督 37州 250縣을 설치하고, 戶 24만,74) 口 620만을 각각 編戶하여 정리하니, 春露와 같은 은택으로 적셔 주었다. 한 번 군대를 일으켜 九種을 평정하고 두 번 승전해 모든 오랑캐의 풍속이 바뀌어졌다. 대저 東觀에75) 책으로 남기고 南宮에76) 기록하는 것은 서 三韓을 평정하여 劉弘의67) 간단한 글을 내리니 천성이 덕을 우러르고, 魯連의68) 飛箭 그 선행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彛鼎에77) 새기고 景鍾에78) 새기는 것은 그 功을 나타내기 을 쏘니 萬里가 은혜를 머금었다. 위함이다. 그 王 扶餘義慈 및 太子 隆 그 외 王69) 餘孝70) 등 13인, 아울러 大首領 大佐平 沙 千福, 陵州長史 判兵曹 賀遂亮이 외람되이 용렬한 재주를 가지고 잘못 文翰을 맡아 배움은 國辯成 이하 700 여인과 함께 이미 깊숙한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았다. 말에 俎豆를 가벼이 여기고, 기운은 風雲을 중히 여기면서도 직책은 將軍이라 불리워 廉頗의 서 내려 牛車를 타고, 공훈을 기록하고, 종묘에 올렸다. 列에 들기를 원하고, 벼슬은 博士라 칭해져 賈誼와79) 함께 우열을 다투기를 바란다. 쇠약 이제 사나운 풍습을 바꾸어서 현묘한 꾀에 젖게끔 하였으니 면류관을 벗고 휘장을 걷 한 용모라 하지 않고 오히려 장엄한 절개를 품어 海外에서 무기를 들고 근소한 것이라도 음에는 먼저 충성되고 정성된 사람을 택하고, 생선을 삶고 비단을 만듦에는 반드시 현량 한 사람을 선택해야 무릇 剖符하게 된다.71) 그의 공적은 黃보다72) 뛰어나고, 거문고의 66) 投 : 옛날 良將이 한 동이의 술을 내에 흘려서 衆士에게 마시게 해 은혜를 베풀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부하를 위로한 것을 은유한 것이다. 67) 劉弘 : 晉나라 사람으로 字는 和季, 諡는 元으로 少時에 武帝와 함께 永安里에 거하였으며 侍中과 荊州의 도독이 되어 오로지 江漢을 다스렸다. 68) 魯連 : 전국시대 齊의 辯士인 魯仲連을 말한다. 高節한 선비로서 趙나라 平原君을 說伏하여 秦나 라를 皇帝로 섬기지 못하게 하였다. 69) 王(子) : 餘孝에 대해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小王 孝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비문의 王 餘孝 에서 王 은 王子 나 小王 의 뜻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다고 생각된다. 백제 의자왕이 太王(황제)으로 그 하에 小王들을 거느린 권력구조가 존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70) 太子 隆과 王(子) 餘孝 :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太子가 孝, 次子가 泰, 제 3왕자가 隆으로 되어 있다. 唐兵이 육박해옴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북변으로 도망하고 차자 인 태가 왕이 되어서 성을 지키다가 소정방의 군대가 들이닥치니 泰가 항복을 하고, 의자왕과 태 자 孝도 모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정방이 왕 및 태자 孝, 왕자 泰 隆 演 및 大臣 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기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의자왕 말기에 태자 자리는 부여효로 바뀌었는데, 백제 안의 이러한 변화가 이 웃 나라들에게는 그대로 전해지지 않아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제외한 여타의 국외 사서에는 부 여융이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 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96~304쪽). 그러나 효에 대해 자료에 따라 태자 소왕 왕자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의 권력구조를 포함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검토가 요망된다. 71) 剖符 : 옛날에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符節을 양분하여 반쪽은 제후한테 주고 반쪽은 보관하였다 가 후일의 信標로 삼았다. 72) 黃 : 한나라의 循吏인 遂와 黃覇를 말한다. 遂는 한나라 山陽 사람으로 字는 少卿. 宣帝 때 에 발해태수가 되어 농사를 권장하니 모두 槍 劍을 팔아서 소를 사게 되어 民生이 부유해져서 境內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73) 卓魯 : 卓은 卓文君을 지칭한다. 卓文君은 한나라 蜀郡 臨 의 부호 卓王孫의 딸이다. 文君이 과 부가 되어 집에 와 있을 때 司馬相如가 문군의 부친 탁왕손의 초청으로 그 집의 잔치에 가서 거문 고를 타며 음율을 좋아하는 문군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문군이 거문고 소리에 반하여 집을 빠져 나와 成都에 있는 司馬相如의 집으로 가서 아내가 되었다. 후에 사마상여가 茂陵의 여자를 첩으 로 삼으려는 것을 보고, 질투하여 白頭 을 짓고서 自絶하려 하자 사마상여가 마침내 생각을 거 두었다 한다. 74) 5都督 37州 250縣 :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百濟國에 본래 5部 37郡 200城 76萬戶가 있었는데 이때에 그 지역을 나누어 熊津 馬韓 東明 金漣 德安의 5都督府를 설치 하고 각기 州縣을 통할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어, 여기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75) 東觀 : 궁중의 書庫를 말한다. 76) 南宮 : 당나라의 官制로 禮部를 말한다. 77) 彛鼎 : 宗廟에서 神酒를 따라두는 鐘鼎으로 옛날 공로가 있는 신하의 이름을 이 祭器에 새겨서 오 래도록 전하게 했다. 78) 景鍾 : 景鐘과 같으며, 大鐘을 말한다. 曹植의`求自試表a에 功銘著於景鐘 名稱垂於竹帛 라는 구절이 있다. 79) 賈誼: 전한 文帝 때의 문신으로 洛陽 사람. 문제 때 博士에서 太中大夫가 되었으며, 뒤에 長沙王 의 太傅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梁王의 太傅가 되었다. 저서에 新書 賈長沙集 등이 있는데 `治安策a `過秦論a등의 글이 가장 유명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賈太傅, 또는 나이 어린 천재 라 하여 賈生이라 불렀다. 33세에 요절하였다.

332 662 碑文 663 본받기를 바라고, 여섯 번 敵庭에 실려가고 아홉번 달아나다가 잡혀 궁벽해서 돌아와 설 굳센 五營과 밝고 밝은 三令으로, 우러러서는 廟略을 펴고, 굽어서는 軍政을 가지런히 때도 뜻은 居中하여80) 치우치지 않고자 한다. 이에 남은 할 말을 안 하고 삼가 직필을 휘 하여 바람은 풀잎이 시들 때보다 엄하고, 태양은 강물이 맑을 때보다 차도다. 서리같이 81) 둘러 다만 성사된 일만을 쓰고 浮華는 취하지 않아 저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되어도 천 매서운 창은 밤에 움직이고 구름그린 깃발은 새벽에 빛나 재잘거리며 前軍을 찌르고 큰 지가 영구한 것과 같이 하고 모래톱이 우거진 섬으로 바뀌어도 日月과 더불어 길이 매달 소리치며 後備의 精兵을 잡아당기니 크고 교활한 놈이 머리를 바치고, 체포되어 주살될 리게 하고자 한다. 놈이 목숨을 청한다. 그 銘에 이르기를, 위엄과 은혜가 하여 변방 모퉁이가 이미 평정되고, 궁중의 아름드리나무도 베지 아득히 먼 옛날, 아득한 그 처음에 人倫은 아직 혼돈하여 어두웠으나, 천지자연의 이치는 못하게 하니, 甘棠의 사랑을 읊게 되리라.86) 花臺가 달을 바라보니 貝殿이 공중에 떠있고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겨울에 보금자리를 지었다가 여름에는 방랑하며 메추라기가 집이 그림을 새긴 鍾이 밤에 울리니 맑고 맑은 깨끗함이 새벽에 통한다. 이 寶刹(탑)을 깎아 기 없는 것처럼 居所가 일정치 않았다. 혹은 사냥, 혹은 고기잡이도 하니 청정한 근원이 이 록하니, 天關을 막아 영원히 견고하고, 地軸을 가로질러 무궁하기를! 미 지나갔고 큰 道가 빠져 없어졌다. 이에 三皇五帝에 미쳐 대대로 한 주인으로 이어지지 않고 禪讓을 한 것은 唐堯 虞舜 이요, 革命을 한 것은 湯王 武王이니 위로는 七政을82) 가지런히 하고 아래로는 九州를 고르게 하며, 여러 번 무기를 소란케 하여 이에 천하를 맑게 하였으되 아직 西掖도 적시 지도 못했으니 어찌 東戶에까지 미치겠는가? 아! 우리 황제께서는 道가 높고 푸른 하늘에 화합하고 榮譽는 千古에 거울이 되어 뭇 왕을 통합하니, 멀고 먼 변방과 아득히 먼 오랑캐의 땅이 모두 正朔을 받들고, 아울러 封 정림사지 오층석탑 미석에 새긴 글(定林寺址 五層石塔 楣石刻字)87) <서측> 內給事88) 上 長 通 道 89) 衝上柱 國 爲 衝 疆을83) 參預하였다. 준동하는 이 오랑캐만이 홀로 三光을 막고서 은혜를 베푼 나라에 배반을 하고 水鄕을 침범하니, 하늘이 飛將을 내리자 표범과 龍과 같은 병사들도 성하게 되었다. 활은 달그림 자를 머금었고 칼은 별빛을 움직인다. 용맹스런 군대 백만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같 이 드날려 蟠木을84) 베고, 마침내 扶桑(백제)을85) 베어버렸다. 얼음이 여름 해에 녹아버리 고 잎이 가을서리에 부서지는 것 같았다. 80) 居中 : 중간에 있어 치우치지 아니함. 81) 浮華 : 천박하고 화려함. 겉만 꾸미고 성실하지 아니함을 말한다. 82) 七政 : 해 달과 火 水 木 金 土의 다섯 별. 그 운행이 節度가 있어 국가의 政事와 비슷하므 로 이로서 비유한 것이다. 83) 封彊 : 제후에게 땅을 분봉함을 의미한다. 84) 蟠木 : 몸이 휘감겨진 복숭아 나무라는 뜻으로 동쪽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85) 扶桑 :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神木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86) 甘棠: 甘棠之愛, 즉 백성이 施政者의 덕을 앙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의 召公의 善政에 감격 하여 백성들이 그가 일찌기 쉬었던 팥배나무를 소중히 여겼다는 詩經 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87) 定林寺址 五層石塔 楣石刻字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사지 석탑의`大唐平百濟國碑銘a을 새긴 석탑 제1층의 楣石部에 새겨진 銘文을 말한다.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00쪽에는`唐 平濟碑a와 구분하여 별도의 금석문처럼`定林寺址 五層石塔 楣石刻字a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원 래는`唐平濟碑a건립에 관여한 관인들을 기록한 비의 陰記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따 라서 이 명문의 작성연대도`唐平濟碑a와 마찬가지로 顯慶 5년(660)으로 추정된다. 서체는 해서 체이며 字徑은 3.6cm이다. 현재 동남 양측은 판독불명이며, 서측과 북측만이 남아 있다. 서측과 북측은 각각 32행으로 1행은 3자씩인데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극히 적다. 역주에 김영심, 1992,`定林寺址 五層石塔 楣石刻字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을 크게 참고하였다. 88) 內給事 : 唐代의 官名으로 궁중에서 皇后의 命을 맡고 后의 출입에 前驅가 되었다. 89) 上柱國 : 전국시대에 이미 大功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 관명으로 戰國策 에 등장하며, 隋唐 이후 明代까지 勳官 最高位의 자로 사용되었고, 이 관명 아래 次位로 柱國 을 두었다.

333 664 碑文 서 나라의 기강을 세웠고, 또 천하의 중심에92) 자리를 잡아 토지를 넓혀, 七德을93) 멀리 長 君恪 長 665 府 오랑캐의 땅에까지 휘날리고, 五兵으로94) 변방을 고요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質과 文 이95) 서로 다르고, 걷는 것과 달리는 것이 분명히 달라, 揖讓과96) 受終에97) 비교해 전쟁과98) 州府 同 革命은99) 모두 헛되이 武勇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요, 싸움을 거두지 않은 것이지만, 凶 <북측> 水에서100) 재앙을 일으킨 九 이101) 마침내 주륙되고, 洞庭에서102) 역모를 꾀한 三苗가103) 이미 주살되었음도 알아야 한다. 州司馬90) 李 州司 陰 曹 曹司 農 曹 鎧 鎧 府兵 州司 李思約 曹李 師 백제 석조에 새긴 글(百濟 石槽 刻字)91) 대저 天子가 萬國 제후의 朝會를 받고 모든 백성을 지배하는 까닭은 海外를 바르게 해 90) 州司馬 : 司馬는 地方廳의 屬僚名으로 隋代에는 각 州의 刺史(장관)와 都護府都護(장관)의 屬官으 로 설치되었고, 唐代에는 都督府의 도독(장관)과 도호부의 도호의 속관으로서 사마의 관직이 설 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中唐시기에 節度使 제도가 생기자 그 속관으로서 行軍司馬의 관직도 설치 되었다. 州司馬는 각 州의 속관으로 설치된 관직을 말한다. 91) 百濟 石槽 刻子 :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의 圓形 石槽 주위에 새긴 銘文을 말 한다. 舊扶餘郡衙의 敷地內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원래 백제 궁궐 내에 있었던 석조였다고 생 각된다. 명문의 내용은`唐平濟碑a의 전반부와 완전히 똑같아,`唐平濟碑a를 새길 때 백제 궁궐에 있던 석조에도 동일한 비문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석조의 外口徑은 1.65m, 전체 높이 는 1.6m이며 명문은 字徑 3.9cm의 楷書이다. 총 22행이며 1행은 11자씩으로 되어 있다. 자행으 로 볼 때,`唐平濟碑a의 전반부인 原夫皇王~ 軸銜悲 까지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제18행 제19자인 東伐親 近違 `당평제비a ( 의 제15행 제4자에 해당)까지가 판독이 가능 하다. 명문을 새긴 연대는`唐平濟碑a와 마찬가지로 신라 무열왕 7년(660)으로 추정된다. 역주에 김영심, 1992,`唐平濟銘 石槽刻字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 고하였다. 이에 천년을 본보기로 삼고, 萬古를 생각하노라. 높이 출세해서 漢을 대신해, 司馬 벼슬 로 조정을 이었고, 임무는 鑿門을 중히 여기고, 예절은 推 을 높이 여겼다. 馬伏波는104) 交 (趾)에서105) 銅柱에 공을 새겼고, 竇車騎는106) 燕然에서107) 돌에 공을 기록했으나, 마침 92) 천하의 중심 : 원문에는 中 으로 되어 있다. 은 천자가 다스리던 畿內를 의미하므로, 中은 천하의 중심이다. 93) 七德 : 훌륭한 武에 필요한 일곱 가지 덕을 말한다. 곧 禁暴 兵 保大 定功 安民 和衆 豊 財 등이다. 94) 五兵 : 다섯 가지 무기를 말하는데, 이에는 戈 戟 酋矛 夷矛 또는 弓 矛 戈 戟 또 는 刀 劍 矛 戟 矢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이를 五戎이라 하기도 한다. 95) 質과 文 : 論語 의 文質彬彬 에서 따온 말로 質은 안으로 감춘 본질이고, 文은 밖으로 드러난 외형을 말한다. 史記 에도 君子有過則謝以質 小人有過則謝以文 이라 하였다. 96) 揖讓: : 천자의 지위를 禪讓하는 행위. 97) 受終 : 前王이 자연사한 후에 왕위를 계승한다는 뜻이다. 書經 舜典에 正月上日 受終於文祖 라 는 용례가 있다. 98) 전쟁 : 원문의 干戈는 전쟁에 쓰는 兵仗器의 총칭으로 여기서는 전쟁을 은유하였다. 99) 革命 : 이전의 통치자를 무너뜨리고, 새 통치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100) 凶水 :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는 뜻이나, 川名으로도 사용된다. 凶水는 安徽省 阜陽縣 潁水로 흘 러들어간다. 101) 九 : 水火의 귀신으로 사람을 해친다고 한다. 102) 洞庭 : 湖南省의 경계에 있는 중국 제일의 淡水湖인 동정호를 말한다. 戰國策 의 魏策篇에는 昔者 三苗之居 左有彭 之波 右有洞庭之水 라 하여, 동정호를 삼묘의 거주지로 언급하고 있다. 103) 三苗 : 堯舜시대 남방의 오랑캐로 四凶의 하나이다. 104) 馬伏波 : 後漢의 馬援을 말한다. 그는 建武年間 交 를 평정하고 銅柱를 세워 공을 표시했다. 105) 交 : 중국 한나라 때의 郡名이다. 지금의 월남 북부 하노이 지방을 가리킨다. 106) 竇車騎 : 後漢의 竇憲을 말한다. 그의 妹가 皇后가 되어 車騎將軍에 배수되었다. 融의 증손이며 字는 伯度이다. 흉노 單于를 大破하여 大將軍이 되었고, 황제의 명으로 班固가 그의 공을 기리는

334 666 내 海의 奔鯨을 뒤집어엎거나 狼山의 封豕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108) 하물며 산의 나 碑文 때는 장수의 공을 기다린다 하였다. 方叔과 邵虎는115) 周에서 하고, 衛靑과 667 去病 무가 다 없어지고 울부짖는 사슴도 고요해져, 丹鼎도109) 전하지 않고 方書도110) 기록되지 은116) 漢을 강하게 하여 符節을 빨리 전할 수 있게 했다. 그 능히 이들을 계승하여 읊조릴 않음에랴. 수 있는 자는 아마도 劉將軍이 아니겠는가! 111) 준동하는 이 오랑캐는 112) 바다를 믿고 목숨을 훔치고, 요해처에 숨어 만리에 떨어져 있다며, 지세가 험함을 믿고 감히 天倫을 어지럽혔다. 동쪽으로 친한 이웃을 치고,113) 중 君의 이름은 仁願이고 字는 士元이며 雕陰 大斌 출신이다. 土開家(집안을 일으켜?) 가 東國에 깃발을 세우고, 茅土를 分封받아117) 물려주니 王孫이 北疆에서 節을 잡게 되었다. 三楚가118) 그 옷차림을 장하게 여기고, 六郡이119) 그 관직을 칭송하니, 후손과 일 국의 詔勅을 어기며 (이하 판독불능) 가 종족의 내력을 대략 말할 수 있다. 114) 당나라 유인원의 기공비(唐 劉仁願紀功碑) 무릇 듣건대 용이 천상에서 뛰놀 때는 반드시 風雲의 힘에 의지하고, 성인이 運을 받을 高祖 는 散騎常侍 寧東將軍 徐州大中正 彭城穆公이다. 魏나라 왕실이 기강이 없어 져 爾朱가120) 전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東京(洛陽)이 망하여 없어지고 서쪽으로 옮긴 때를 당해 천자의 수레를 받들어 모시고 關內로 옮겨 살았다. 얼마 있다가 鎭北大將軍 持 節 都督 河北諸軍事 綬州刺史를 제수받고 관직으로 말미암아 食邑을 받고 대대로 거기에 서 살아 碑를 찬술해 燕然山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竇氏의 一族이 조정에서 득세하여 교만해지자, 황제 는 竇憲의 印을 몰수하고 자살하게 했다( 後漢書 竇憲傳). 107) 燕然 : 현재 외몽고 三音 諾顔部의 杭愛山이 바로 옛 燕然山이다. 108) 마침내 없었다 : 공훈을 세운 이후 모두 오만과 탐욕을 억제하지 못하였음을 은유한 것이다. 109) 丹鼎 : 道家에서 丹藥을 넣어두는 솥단지를 말한다. 110) 方書 : 方術, 즉 方士의 術法, 長生不死의 法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111) 卉服 : 풀로 만든 옷으로 蠻夷의 복장을 말하며, 여기에서는 백제를 은유한 표현이다. 112) 襟帶 : 깃은 목을 두르고 띠는 허리를 두른다는 뜻으로 산천이 둘러싼 요해처를 의미한다. 113) 동쪽으로 치고 :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일을 은유한 표현이다. 114) 唐 劉仁願紀功碑 : 원래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官北里에 소재한 扶蘇山의 山城內에 있었지만, 현 재 국립부여박물관 外庭에 이전 전시하고 있다. 碑身 위에 首가 있고 龜趺를 갖춘 비였지만, 일찌기 무너져 비신 왼쪽 부분이 세로로 갈라졌다. 또 귀부의 소재 또한 묘연하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灰白色 斑條(얼룩무늬)가 있다. 비신의 높이는 237.9cm, 두께 30.9cm이며 이수는 높이 113.6cm, 폭 133.3cm로 매우 웅장하고 힘차다. 碑文은 字徑 2.4cm의 楷書이며 題額은 자경 6cm의 篆書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오른쪽 과반만 남아 있고, 파손정도가 매우 심하다. 총 34행이고 1행은 대체로 69자로 추정된다. 현재 제20행까지는 거의 판독이 가능하나 제21행은 18자 정도가 판독이 되며 22행부터는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문의 내용은 唐의 장군 劉仁 願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泗 城에 주둔해서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진정시킨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撰者와 書者 모두 不明인데, 大東金石書 에는 유인원의 書로 되어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唐 高宗 龍朔 3년(신라 문무왕 3년, 663)으로 유인원이 扶餘豊을 평정한 해에 해당한다. 역주에 김영심, 1992,`唐 劉仁願紀功碑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鼓 之하여 북쪽 지역의 望族이 되었다. 曾祖 平은 鎭北大將軍 朔方郡守 綬州刺史 上開府儀同三司로서 봉작을 이어받아 彭城郡 開國公이 되었다. 祖 懿周는 驃騎大將軍 儀同三司로 隋나라의 使持節 綬州諸軍事 綬州摠管 州刺史 郡開國公이다. 父 大俱는 唐나라의 使持節 同 綬二州摠管 24州諸軍事 綬州刺史이다. 얼마 후 都督 左 武衛將軍 右驍衛大將軍 勝 夏二州道行軍摠管 冠軍大將軍 鎭北大將軍 上柱國으로 승진 하였고, 따로 彭城郡開國公으로 봉해졌다. 모두 계수나무 향기와 난꽃 향내가 있었고 쇠처럼 곧고 옥처럼 윤이 났으며 명성이 커 다란 나무보다 높고 명예도 문인들 사이에 자자하니, 인품이 높은 최고의 집안을 여기에 서 보겠노라. 115) 方叔과 邵虎 : 周 宣王 때 賢臣들로 荊蠻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16) 衛靑과 去病 : 漢 武帝 때 武將들로 흉노를 정벌하는 공훈을 세웠다. 117) 分茅 : 茅土를 分封하는 것으로 제후로 봉하는 일을 말한다. 118) 三楚 : 西楚 東楚 南楚를 가리키는데, 양자강 이남 지역을 말한다. 119) 六郡 : 漢의 西 天水 安定 北地 上郡 西河 등 6개의 郡을 말한다. 120) 爾朱 : 後魏의 爾朱榮을 말하는 듯함. 明帝가 죽은 후 莊帝를 세우고 天柱大將軍이 되어 威權을 마음대로 휘두르다가 주살되었다.

335 668 碑文 君은 河基에서 도량을 받고, 嶽瀆에서 정기를 받아 도량이 믿음직스럽고 효성과 공경이 나날이 몸에 쌓여갔다. 운명이 창성한 때를 만났고 좋은 임금을 만났으며 몸을 삼가고 이 121) 이었다. 이러한 공훈에 대해 천자가 내린 물건이 乘馬 1疋과 124) 치에 환하니, 운을 열어 넓고 너른 천하를 밝게 다스렸다 隻인데 모두 천자를 시종하는 125) 호위병으로서 弓 2張, 큰 화살 특별히 더 포상을 받은 것이다. 요 성스럽고 영묘하시며, 文武를 모두 갖추셔서 천지와 사방(六合)을 병탄 동에서 돌아온 뒤 그간 누차의 戰功으로 上柱國에 특별히 임명되고 따로 黎陽縣開國公으 하고 멀리 변방(八荒)을 석권하였다. 널리 여러 재주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의 자리를 로 봉해졌고, 또 右武衛 鳳鳴府의 左果毅都衛로 임명되어 北門長上의 날랜 기병을 총괄 편하게 하였으며, 뛰어난 사람은 더욱 뛰어나게 하고 어두운 사람도 밝은 사람으로 반드 하였다. 太宗文皇帝는 정관 21년(647) 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어 英國公 李勣을 따라 薛延陀를126) 경략하고 아 시 도달하게 하셨다. 君은 땅의 음덕으로 풍요로워졌고, 가문의 공훈을 이어받으니, 아름다운 소문과 기림 이 뭇사람들의 의견과 합치되었다. 집안을 일으키어 弘文館學生이 되었고 右親衛 로 승진하였다. 완력은 健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 일찌기 왕을 수행해 노닐 때 맨손으로 사나운 짐승을 사로잡았다. 태종이 출중함에 깊이 감탄하여 특별히 상 을 더 내리고 곧 은혜로운 조서를 내려 闕內에 들어와 內供奉을 맡게 했다. 貞觀 19년(645) 태종이 친히 六軍을122) 거느리고 멀고 험한 곳을 순행하니 제후(千乘)들 이 우뢰처럼 격동하고, 萬騎가 구름처럼 모여 울러 車鼻를127) 맞아들였으며 九姓鐵勒도128) 안무하였다. 돌아와 右武衛郞將을 제수받고 예전과 같이 內供奉도 맡았다. 정관 22년(648) 또 大摠管에 임명되어 요동을 경략하려다가 다른 公的인 일로 참가하 지 못하였다. 그 해에 다시 右武衛 神通府의 左果毅都慰를 제수받았다. 정관 23년(649) 태종이 승하하자 종묘 사직은 하루라도 임금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황태자가 居喪中에 즉위하니,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정치는 새롭다. 고한것 다 모였으나, 고려(고구려)의 賊臣 蓋蘇文만이 홀로 딴 마음을 품고서 망명한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간사한 사람들을 맞이하여, 그 君長을 옥에 가두고 병사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개미같은 많은 무리를 거 느리고 감히 천자의 군대에 대항하였다. 황제께서 대단히 화가 나시어 삼가 弔民伐罪를123) 행하시니 군대의 날카로운 기세가 이 르는 곳마다 마치 를 깨뜨리는 것 같았다. 遼東 蓋牟 등 10城을 파하고, 新城 安地 등 3城에 주둔하여 그 대장 高延壽 高惠眞을 사로잡고 그 군사 16만을 포로로 잡았다. 君도 몸소 전장에 참여하여 손수 천자의 수레를 끌며, 척후병이 되기도 하고 後軍이 되 기도 하며, 매번 진을 칠 때마다 먼저 나아가 강하고 견고한 성을 꺾고 함락시키기를 썩 은 나무를 꺾어 부러뜨리는 것과 같이 쉽게 하였다. 싸움에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은 것이 121) 太宗文皇帝 : 당 태종 이세민을 말한다. 122) 六軍 : 天子의 군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어휘다. 123) 弔民罰罪 :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죄를 벌한다는 뜻으로, 포학한 임금을 토벌하여 백성을 구제한다 는 말이다. 124) 供奉 : 천자 옆에서 시종하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125) 御仗 : 천자의 儀仗을 말한다. 즉 천자가 거동할 때의 호위병으로 이해된다. 126) 薛延陀 : 흉노의 別種으로 勅勒(鐵勒)諸部의 하나이다. 그 선조는 薛部와 延陀部로 나뉘어져 있 어 모두 철륵에 속했으나 후에 薛이 延陀를 滅하고 薛延陀라 불려졌다. 唐初 燕末山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夷男이 지배하던 시기에 서돌궐에 복속되어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다시 돌궐의 혼란에 편승해서 回紇 등과 반란을 일으켜 돌궐 군대를 격파하고 나라를 세우고서는 俟斤彛男을 세워 眞珠毘伽可汗이라고 불렀다. 毘伽가 죽자 국내가 혼란해졌으며 貞觀 20년에 이르러 唐에 멸망당했다. 127) 車鼻 : 車鼻可汗을 말한다. 그는 당 태종 때 西突厥의 可汗으로 姓은 阿史那, 名은 斛勃이다. 원 래 金山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가 利可汗이 패망한 후 大可汗으로 추대되었으나 薛延陀의 可汗 에 복속되었다. 후에 舊地로 돌아와서 군사를 일으켜 葛邏祿 結骨을 따랐다. 태종에게 입조하 고자 하니 태종이 雲麾將軍 韓華를 보내 영입케 했는데, 이를 묵살하자 태종이 노하여 貞觀 23 년 高 品을 보내서 回紇 僕骨 등과 함께 쳐서 마침내 金山에서 사로잡았다. 고종에게 용서를 받 아 左武衛將軍을 제수받고 長安에 머물렀다( 舊唐書 권194 상 및 新唐書 권215 상). 128) 九姓鐵勒 : 鐵勒은 종족명으로 그 선조는 흉노의 후예이다. 종족의 종류가 가장 많아 回紇 薛延 陀 諸部도 모두 그 종족이며 勅勒이라고도 한다. 九姓은 唐代에 있어서 回紇(위구르)의 9개의 姓, 즉 藥羅葛 胡 葛 羅勿 貊歌息訖 阿勿 葛隆 斛 素 藥勿葛 奚耶勿 등을 말하 는데, 九姓鐵勒이라 하면 철륵 제부 중 이들 回紇族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336 670 碑文 671 과 같았다. 君은 천자의 지혜로움에 은혜를 입었고, 재주와 명민함으로 起用되었는데, 상 그러나 옛날 周武王이 은나라를 평정할 때 商奄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한나라가 복을 마치기도 전에 또 현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서역을 평정할 때 勒에서132) 포위당하였으니, 이는 남아있는 나쁜 풍습이 아직 없어지 永徽 2년(651) 다시 鐵勒에 들어가 위무하였는데, 조칙에 따라 행동하였다. 적의 예봉 지 않고 오랜 습속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蠻貊의 풍속은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 을 꺾음에 결단성이 있고 굳세며, 강하고 현명함이 지휘를 감당할 만한 자로 간택되어 때 키기는 어렵다. 하물며 북방의 도망한 賊들이야 원래부터 따르지 않았으니 이미 雕戈를 에 맞춰 처분되었다. 맛보았다. 동쪽으로 錦纜을133) 보내고, 서쪽으로도 재앙의 조짐이 일어났다. 강성해지자 君은 經略을 명받고 자주 요동을 다녀와 영휘 5년(654)에 蔥山道行軍大摠管을 제수받 고 盧國公 程知節을 따라 賀魯를 토벌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洛陽으로 천자의 행차 率 鬼室福信이 그들이다. 閭巷 출신이 우두머리가 되어, 사납고 교활한 사람을 불러 모아 任存城에 성채를 쌓고 웅거하 였다.134) 이들은 벌떼처럼 모여 있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산곡에 가득 찼다. 남의 이름 를 좇았다. 顯慶 元年(656) 左驍衛郞將으로 관직이 바뀌고, 그 2년(657) 조서에 응하여 문무에 뛰 어난 관리를 천거하였으며 세 관등을 특진하였다. 후에 鐵勒에 가서 다시 이들을 위무하 을 빌리고 지위를 훔쳐 모두 將軍이라135) 칭하였다. 지방의 城邑을 모두 무너뜨리고 점차 中部(중심지역, 사비와 웅진)로 들어가 우물을 메 우고 나무를 베며, 집들을 무너뜨리고 태워버렸다. 지나는 곳마다 잔학하게 살해하고 멸 였다. 129) 현경 4년(659)에는 吐谷渾 (660)에 이들은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곧 가짜 승려 道琛, 가짜 130) 및 吐藩에 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다스렸다. 현경 5년 夷道行軍大摠管을131) 제수받고, 邢國公 蘇定方을 따라 백제를 완전히 평정하고 그 왕 扶餘義慈와 아울러 太子 隆 및 佐平 達率 이하 700 여인을 사로잡았으며, 그외 首領 古魯都, 奉武, 扶餘生受, 延 普羅 등은 모두 唐軍에 참여시켜 공을 세우고 귀 순하니, 혹은 대궐에 들이고, 혹은 망시켜 거의 살아남은 백성이 없었다. 흉악한 위세가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위협 당해 복종하였다. 이에 성책을 벌여놓고 군영을 세워, 머물러 놀고 있던 군대를 포위 공격해서 雲梯로136) 굽어보고, 地道로137) 환히 들여다보았다. 던져진 돌과 날아다니는 화살이 별똥처럼 비처 에 들이니, 그 지역 전체 遺民들이 예전과 같이 편안히 여겼다. 관직을 설치해 직분을 나누어 각기 맡은 바가 있게 하였다. 이에 君을 都 護 겸 知留鎭으로 삼았다. 新羅王 金春秋 또한 어린 아들 金泰를 보내어 함께 城을 굳게 지키게 하니, 비록 오랑캐와 중국의 다름이 있고 어른과 아이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나, 君이 마음 편하게 접대해주니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功業이 능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129) 吐谷渾 : 鮮卑의 支族이다. 唐代에는 淸海 부근에 부락을 이루고 살다가 당에 예속되었다가 나중 에 吐藩에 병합 당하였다. 130) 吐藩 : 지금의 티벳을 말한다. 국왕 棄宗 弄贊이 印度와 통하고 또 당나라 태종과 우호관계를 맺 어 양국의 文物을 채용하였으므로 세력이 날로 성하여졌다. 당나라 이후 점점 쇠하여져서 청나 라 세종 이래 중국의 蕃屬國이 되었다. 131) 夷道行軍大摠管 : 삼국사기 에는 당나라 소정방에게 신구도행군대총관, 신라왕 김춘추에게 우이도행군총관이 제수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본 비문과 차이가 난다. 유인원이 소정방과 동급의 우이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될 수는 없기 때문에, 과장된 것이라 생각된다. 132) 勒 : 한대에 新疆城에 있던, 서역 36국 중의 하나이다. 133) 錦纜 : 錦纜牙檣의 줄인 말로, 비단 닻줄과 상아의 돛대를 가진 隋 양제의 호화스러운 船遊를 가 리킨다. 134) 강성해지자 웅거하였다 :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武王의 從子 福信이 일 찍이 병사를 데리고, 승려 道琛과 함께 周留城에서 반기를 들고, 古王子 扶餘豊을 맞이하였다. 그는 일찍이 倭國에 人質로 가있었던 자인데,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중략) 福信 등은 곧 都 城의 포위를 풀고 任存城으로 물러나 지켰다. 라고 하여 주류성에서 일어나 사비도성을 포위했 다가 임존성(大興)으로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齊明紀 6년 9월 계묘조에는 西部의 恩率 鬼室福信이 크게 發憤하여 任射岐山(임존성)에 의거하고, 達率 餘自信은 中部의 久 麻怒利城에 의거하여 반기를 들었는데, 각 군영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들였다. 라고 되어 있 다.`唐 劉仁願紀功碑a 에는 처음부터 임존성에 웅거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어, 日本書紀 의 기록 이 보다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35) 將軍 : 에 의거하면 도침은 領軍將軍, 복신은 霜岑將軍이라 칭했다 한다. 136) 雲梯 : 높은 곳에 걸쳐 올라가는 攻城用의 사닥다리를 말한다. 137) 地道 : 성내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땅 속으로 굴을 파서 만든 길. 즉 지하도 따위를 말한다.

337 672 碑文 럼 쏟아졌다. 밤낮으로 계속해서 싸우고 아침저녁으로 세력을 믿고 침범하였다. 스스로 일컫기를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하면서도, 하였다. 적들에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하게 안심하는 척하였고, 더불어 창검을 가지고 다투지 않 고,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를 준비해 정예의 병력을 키웠다. 오랜 세월을 견디어 673 아아, 옛날 天龍寺란141) 절은 北齊 때에 비로소 터를 잡았고, 隋나라 말기에 쇠락하였도 다. 대체로 불교 교리는 고요한 곳을 찾게 되어 있어, 이 산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 다. 이로 인해 감실이 수천, 수만을 이루어 산 절벽을 따라 가득히 널려 있다. 그리고 건 물도 증수됨에 따라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142) 무릇 산봉우리는 높이 솟아 붉은 듯 푸른 듯 아침노을을 머금었고, 떨기나무들이 우거 내어, 나쁜 적들이 힘이 다하고 기운이 쇠해지기를 기다렸다. 를 구축하고 진 곳에 샘물이 용솟음치고 있다. 혹 새나 짐승 소리 들리면 이에 화답하여 그 소리가 온 틈을 타고 때를 기다려 문을 뚫고 굴을 파고, 병사를 풀어서 엄습케 하였다 (이하 판 골짜기에 시끄럽게 가득 차니, 參과 虛 같은 별자리들의 수려함을 보는 듯하다. 비록 승 독불능) 려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절이 황폐해지고 적막하게 되었지만, 덕을 심는 데에 힘쓰 君이 [이에] 몰래 간첩을 보내서 그 병사들이 게을러진 때를 엿보아 는 사람들이 멀고 험한 길을 오르내렸으니, 허송세월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순 장군의 공덕기(珣將軍功德記)138) 139) 大唐 勿部將軍의 140) 郭謙光이 功德記. 글을 짓고 쓰다. 138) 珣將軍功德記 : 기존에는 이 비 주인공의 姓氏 부분을 판독할 수 없어 그냥 이름인 珣만을 따와 `순장군공덕기a라고 불렀다(송기호, 1992,`珣將軍功德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 사회연구소, 577쪽). 이로 인해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03쪽에도`순장군공덕기a 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그러나 최근 상태가 보다 양호한 탁본(李裕群ㆍ李剛, 2003,`天龍山石 窟a, 科學出版社, 171쪽)에 의거하여, 순장군의 성이 勿部 임이 새롭게 밝혀졌다(윤용구, 2003,`중국 출토의 韓國古代 遺民資料 몇 가지a, 한국고대사연구 32, 310~315쪽). 비문에 의하면 순장군은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망명한 黑齒常之의 사위였다. 이 비는 중국 山西省 太原市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天龍山 석굴 제21굴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탁본으로 볼 때 비의 크기는 높이 98cm, 너비 64cm이다. 이 비는 707년 10월 18일에 세운 것인데, 郭謙光 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題額은 篆書體이고 나머지는 隷書體로 되어 있다. 역주에 송기호, 1992,`珣將軍功德記a를 크게 참고하였다. 139) 勿部將軍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03쪽에는 部將軍 으로 되어 있다. 勿部氏는 비문에 東海 한 가문의 출신 으로 기록되어 있어, 古代日本의 物部(모노노베) 집안일 가능성 이 제기되고 있다. 모노노베씨는 백제멸망 이전부터 倭系 백제관료로 활동한 바 있고, 또 백제부 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풍왕과 함께 건너왔을 가능성도 있다(윤용구, 2003,`중국 출토의 韓國古 代 遺民資料 몇 가지a, 315쪽).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순장군의 부인이 백제 멸망후 당으로 망명한 黑齒常之의 中女라는 점에서, 순장군 집안이 백제멸망 이전부터 왜계 백제관료로 활동하 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라면 순장군이 흑치상지 집안의 사 위가 될 가능성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大唐의 天兵中軍143) 副使 右金吾衛將軍144) 上柱國 遵化郡145) 開國公146) 勿部珣은147) 본래 일본(東海)의148) 한 가문으로 선조의 공덕으로 대대로 벼슬을 하였지만, 마치 虞나라는 망하여 연말의 臘日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宮之奇가149) 가족을 이끌고 140) 郭謙光 : 開元 6년(718)에 國子博士를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舊唐書 권102 无量傳 참조). 141) 天龍寺 : 중국 山西省 가운데에 있는 太原市의 남서쪽 天龍山에 있던 절로, 北齊 皇建 원년(560) 에 세워졌다. 142) 북제 때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 山西通誌 에도 천룡사가 북제 때인 560년에 절이 세웠 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곳 석굴에는 수나라 말기에서 8세기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조각품들 이 희소하며, 순장군이 이곳에 이르러 불상 조각의 후원자가 되면서, 천룡사가 중흥기를 맞이하 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송기호, 1992,`珣將軍功德記a, 578쪽). 143) 天兵中軍 : 太原府의 성 안에 두었던 군대로서 開元 11년(723)에 폐지되었다( 新唐書 권39 지 리지 太原府條 참조). 144) 右金吾衛將軍 : 右金吾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이다. 將軍은 大將軍 다음의 지위로서 종3품에 해당한다. 145) 遵化郡 : 당시에 遵化란 이름을 가진 지명은 현재의 廣東省 靈山縣의 서남쪽에 두었던 遵化縣 밖 에 없다. 이 현은 당시에 嶺南道 欽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舊唐書 권40 嶺南道 欽州 참조). 146) 開國公 : 郡公은 당나라 때의 封爵으로 정2품에 해당한다. 147) 勿部珣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03쪽에는 部珣 으로 되어 있다. 148) 東海: 日本을 가리킨다. 149) 宮之奇 : 춘추시대 虞나라의 大夫였다. 晉나라가 다른 나라를 치기 위에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 고 했을 때에 허락하지 말도록 간청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듣지 않자 가족을 이끌고 西山으로 도 망하였다. 결국 3년 뒤에 진나라가 우나라를 멸망시켰다( 左傳 僖公 5년조 참조).

338 674 碑文 떠나버린 것과 같이 고국(백제)을 떠나 당나라로 들어왔다. 천자는 이들을 어루만져 分封 675 많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니, 마치 由余가150) 처음 중국에 이르렀을 때 받았던 대우와 같았다. 그는 중앙과 지방 遵化郡 開國公 珣은 자질이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웠으며, 의롭고 용맹스러웠다. 나라 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곧고 근면하였기 때문에 빨리 승진하였다. 天兵軍이 있는 일에 힘써 몸이 야위었으나, 자신을 돌보는 데에는 힘쓰지 않았다. 德을 세워 힘써 행하 곳은 중요한 요해처인데, 그는 이곳에서 中軍을 보좌하기에 이르렀다. 고, 윗사람을 모실 때에는 예의와 공손함으로 행하였다. 변방을 이미 조용하게 만들어 사 神龍 2년(706) 3월에 아내(內子)인 樂浪郡夫人151) 黑齒氏 즉 大將軍 燕國公의152) 둘째 따 람들 역시 평안하게 되었다. 봄에 크게 수렵을 행할 즈음에도 3乘을159) 살폈다. 그런즉, 님과 함께 높은 언덕을 오르고 커다란 산골짜기를 건넜고, 구덩이에 빠졌다 나오기도 하 본업에 종사하여 공을 세운 것이 이에 무성하였고 또한 빛났으니, 장군의 아름다운 덕을 고 나무줄기와 덩굴을 잡아당기기도 하였으며, 힘들면 거듭 휴식을 취하면서 마침내 이 어찌 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樂石(비석)에160) 새겨 그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노라. 청정한 사원에 이르게 되었다. 接足禮를153) 마치고 한 쪽으로 물러 나와서, 두루 올려다보 그 辭는 다음과 같다. 면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광경에 감탄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동시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밝은 덕을 갈고 닦아 마침내 이를 곳을 알았고, 충성스럽고 신의 있으며 효성스럽고 공 선한 마음이 일어나니, 널리 은혜를 베풀 것을 서약하여 財와 富를 바치게 되었다. 돌아가신 천자와154) 살아 있는 姻戚들을 받들기 위하여 삼가 三世佛像과155) 여러 聖賢들 의 상을 만들었으니, 156) 相과 157) 百福莊嚴相을 158) 조각하여, 아주 좋은 인연을 쌓음으로 경스러워 네 가지 덕을 갖추었도다. 衛服에서161) 군대를 총괄하니 변방(要荒)이162) 고요하 였고, 인연을 따라 깨달음에 나아가고자 163) 大唐 景龍 元年(707) 丁未( 首)年 에 귀의하였도다. 10月 18日 壬午日에 세우다. ]部選 宣德郞164) 昕. 써 往生하는 데에 두루 바탕이 되고자 하였다. 신룡 3년 8월에 이르러 이제 功德이 끝나 [맏아들 게 되었으니, 무릇 공덕을 쌓은 사람이 있는 데에도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덕이 둘째 아들 吏部選165) 上柱國 셋째 아들 上.. [넷째 아들 ] 兵部選166) 仲容. 150) 由余 : 춘추시대 사람으로 원래 戎의 신하로서 秦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穆公에게 당시에 중원이 어지러웠던데 비해 융적이 잘 다스려졌던 원인에 대해 강론하였다. 나중에 진나라로 들어가 목 공에게 중용되어 西戎을 정벌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史記 권5 및 권110 참조). 151) 樂浪郡夫人 : 흑치상지의 둘째 따님이 夫人의 칭호를 얻은 것은 순장군이 3품 이상의 지위에 올 랐기 때문이다( 唐六典 권2 司封郞中). 152) 大將軍 燕公 :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망명한 黑齒常之를 말한다. 그는 聖曆 원년(698)에 복권되어 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되고 燕國公으로 복구되었다(본서의`黑齒常之 墓誌銘a을 참조바람). 153) 接足禮 : 고대 인도 예법의 하나. 두 손을 펴서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다리를 잡고 여기에 자신의 머리를 숙여 갖다 붙이듯이 하는 예배. 154) 先尊 : 앞에 두 자 정도 칸을 비우고 있으므로 先代의 천자를 가리킨다. 155) 三世佛像: 迦葉佛(과거불) 석가모니불(현세불) 미륵불(미래불)을 의미한다. 156) 衆相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03쪽에는 相 으로 되어 있다. 157) 百福莊嚴 : 百福莊嚴相으로서, 부처의 32상 하나 하나에 100가지 福德이 갖추어져 있는 것을 이 른다. 158) 三世佛像 조각하여 : 순장군 부부가 707년에 헌납한 불상들은 Marylin M. Rhie의 견해 에 따른다면 천룡산 제21굴에 보존되어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고 한다(Marylin M. Rhie 著 文 明大譯, 1980,`天龍山 第21石窟과 唐代碑銘의 硏究a, 佛敎美術 5). 159) 三乘 : 사람들을 각기 능력과 소질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사물에 비유한 것으로, 聲聞乘 緣覺乘 菩薩乘의 三乘을 말한다. 160) 樂石 : 원래 악기를 만드는 데에 사용하는 돌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이 山의 刻石에 이 말 을 사용함으로써 후세에는 碑碣을 지칭하는 말로 되었다. 161) 衛服 : 周나라 때에 王畿를 사방 1,000리로 하고, 그 주위를 500리 단위로 1畿(服)를 삼아 9畿까 지 설정하였는데, 衛服은 다섯 번째를 가리킨다. 服은 천자에게 복종한다는 뜻이다. 162) 要荒 : 要服과 荒服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킨다. 163) 首: 원래 별자리 이름인데, 옛 甲子에 의하면 未를 가리킨다. 164) 部選 宣德郞 : 宣德郞은 정7품하에 해당하는 文散階이다. 따라서 部選은 吏部選으로 추정된 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7쪽). 165) 吏部選 : 吏部에서 치루는 임용시험인 전전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아니면 전선을 거쳤으나 아직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종의 관함과도 같은 것이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7쪽). 166) 兵部選: 兵部에서 치루는 임용시험인 전전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아니면 전선을 거쳤으나 아직

339 676 公의 사위( ) 天(兵中)軍 摠管 珍義.167) 碑文 677 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물의 신)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는데, 태 어나면서부터 聖스러움이 있었다.171) [5자 불명] 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168) 아! 옛날 始祖 鄒牟王이169) 나라를 창업하였다. [王은] 北夫餘에서170) 출생했으니, 天帝 奄利大水를172) 지나가게 되었다. 王이 나룻가에 임하여, 나는 天帝의 아들이며 河伯의 따 님을 어머니로 둔 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워 올려라 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응하여,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 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 여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 沸流谷 忽本173) 서쪽 山上에 城을174) 쌓고 都邑을 세웠다. 王이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종의 관함과도 같은 것이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7쪽). 167) 珍義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03쪽에는 [彌]義 로 되어 있다. 한편 이 비에는 아 내를 일컬어 內子 라고 표기하였고, 말미에는 珣장군의 아들과 사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중국의 다른 비문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라고 한다(송기호, 1992,`珣將 軍功德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578쪽). 168) 廣開土王陵碑 : 이 능비는 중국 吉林省 集安縣 太王鄕 九華里 大碑街에 소재하며, 고구려 장수왕 3년(414)에 세워졌다. 비석은 凝灰岩인데, 별로 많이 가공치 않아 청동기시대 선돌의 전통을 계 승한 측면이 있다. 높이는 6.39m이며, 사면에 모두 명문이 있는데, 각 면의 너비는 제1면(동남 방향)이 1.48m, 제2면(서남방향)이 1.35m, 제3면(서북방향)이 2.00m, 제4면(동북방향)이 1.46m이다. 비면은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후 이끼와 넝쿨을 제거키 위해 지른 불에 의해 크 게 손상을 입었다. 비면엔 세로로 행을 구분하기 위한 罫線이 있고, 글자는 모두 1,775자로 여겨 진다. 이중 150여자가 판독 불능 상태이다. 비문의 書體는 隷書이다. 그러면서도 草 楷의 各體 가 부분부분 반영되어 混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字形은 正方形인데, 크기는 균등하지 않지만 대체로 14~15cm 정도이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고구려국의 건국신화 및 鄒牟王 儒留王 大朱留王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그 17世孫인 광개토왕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였다.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 일대에 행해진 勳績을 기술하였다. 셋째 부분에는 陵碑의 守護를 위한 守墓人의 숫자와 그 출신지 및 그에 관계된 法令을 새겨 놓았다.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비문의 성격을 勳績碑 神道碑 또는 守墓碑 등으로 규정하는 등 說이 분분하다. 능비의 보호를 위해 1928년 목조 碑閣을 세웠는데, 그것을 허물고 다시 1983년 새로 碑閣을 세웠다. 능비의 내용 자체에 대해 먼저 본격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은 일본측이었다. 1880년 청에 파견된 일본 육군의 스파이 酒勾景信 중위가 集安지역으로부터 능비의 雙鉤加墨本 을 가지고 1883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어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비문에 관한 연구를 비밀리 에 진행하여, 1889년 그 결과를 세상에 공포하였다(亞細亞協會編, 1889, 會餘錄 5). 그 뒤 일 본인 학자들에 의해 辛卯年條를 중심으로 한 고대한일관계사가 집중적으로 연구되어 이른바 任 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강조되었다. 우리 학인들의 능비에 대한 거론은, 1910 년대에 申采浩의 현지답사와 간략한 언급이 있다. 그 뒤 1930년대 말에 鄭寅普가 辛卯年條의 기 사를 일본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渡海破 의 主語를 고구려로 보아 재해석하였다(鄭寅普, 1995,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a, 百樂濬博士還曆紀念國學論叢 ). 한편 水谷悌二郞은 능비의 판독을 정밀히 한`好太王碑考a를 발표하였다(水谷悌二郞, 1959,`好太王碑考a, 書品 100) 그 뒤 60년대 중반 북한학계에서 鄭寅普의 학설을 계승한 박시형의 능비에 관한 연구서가 발표되 었다(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이는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는 김석형의 초기조일관계사 와 함께 능비에 대한 再論을 촉발하였다. 특히 이진희의 비 문조작설이 발표되면서 이런 면은 더욱 증폭되었다(李進熙, 1972, 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 弘文館). 이후 능비의 발견 경위, 각종 현전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 비문 조작여부, 판독상의 문 제, 비문 해석상의 문제 등등 능비에 관한 여러 측면이 재론되게 되었고, 그리고 현장답사와 능 비의 재조사, 각종 원석 탁본에 대한 검토 등이 행해졌다. 역주에 노태돈, 1992,`廣開土王陵 碑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169) 鄒牟王: 鄒牟는 사료에 따라 朱蒙 中牟 都慕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170) 北夫餘 : 에는 東扶餘 로 되어 있어 차이가 난다. 한편`牟頭婁墓誌a에서도 北夫 餘 라고 하여, 적어도 5세기 초반까지 고구려에서는 건국시조가 북부여에서 출생한 것으로 공식 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1) 始祖 있었다 : 고구려 건국설화는 부여족이 공유하고 있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서술에 있어선 각 전승마다 차이가 있다. 건국시조의 탄생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論衡 魏略 後漢書 에 보이는 동명신화에는 天氣와 離國王侍婢 사이에서 扶 餘王 東明이 탄생한다. 이를 능비 `모두루묘지a 魏書 등에는 日光(日月, 天帝)과 河伯女 사 이에서 高句麗王 鄒牟가 태어난 것으로 변형되었다. 한편 舊三國史 에는 天帝의 아들 解慕漱와 河伯女 사이에서 朱蒙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天帝를 대신하는 인격신인 해모수가 등장하고 있어 가장 늦게 만들어진 신화의 형태로 짐작된다. 172) 奄利大水 : 論衡 과 魏略 後漢書 등에선 부여 시조 東明이 물고기와 자라 등의 도움을 받 아 건넜다는 강의 이름을 각각 奄 水 施掩水 淹 水 등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梁書 에서 는 淹滯水라 하였다. 이들 江名은 글자형이 비슷하여 轉寫 과정에서 혼동되었던 것으로 여겨진 다. 한편 魏書 에서는 一大水 로만 기술하여 구체적인 강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에 선 淹滯水라고 되어 있다. 173) 沸流谷 忽本 : 에는 沸流水 유역의 卒本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渾江( 佳江)이나 그 지류인 富爾河 유역의 桓仁縣 일대로 비정된다. 삼국사기 에는 이 일대를 卒本扶餘라고도 했다

340 678 碑文 679 인간세상의 王位를 싫어하여, [천제가] 黃龍을 보내어 내려가 王을 맞이하게 하였다. 이 이라 하였다. 王의 恩澤이 하늘에까지 미쳤고 武威는 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에 王은 忽本 동쪽 산등성이에서 龍의 머리를 디디고 하늘로 올라갔다.175) 遺命을 이어받 없애니, 백성들은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였다.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했으며, 오 176) 은 世子인 儒留王은 177) 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 그 業을 계승하여 발전 시켰다. 17世孫에178)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179) 18세에 등극하여 왕호를 永樂大王 곡도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180) 왕은 39세 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甲寅年 9月 29日 乙酉에181) 옮겨 山陵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勳績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노라.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稗麗가182) [3자 불명: 고구려에 대해 좋지 않은 행동을 하므로] 永樂 5年 乙未에183) 王이 고 전한다. 홀본 또는 졸본은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로서 고구려 후기까지 王이 親行하여 직접 始 祖廟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174) 서쪽 山上에 城 : 魏書 와 에선 紇升骨城이라 하였다. 이 城을 현재 桓仁縣 소재지의 동북쪽 8km에 있는 五女山城으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175) 하늘로 올라갔다 : 李奎報의 東明王篇 에 인용된 舊三國史 에는, 王이 升天한 후 다시 내려오 지 않자, 太子가 왕이 남긴 옥으로 된 채칙을 龍山에 장사지냈다. 고 되어 있다. 176) 儒留王 : 엔 이름을 類利 또는 孺留 또는 琉璃明王이라 하였다. 三國遺事 王曆에선 累利라고도 하였다. 魏書 엔 주몽의 아들이 閭達이고 손자가 如栗이라 하였으며, 如栗의 아들 莫來 때에 夫餘를 征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北史 에선 주몽의 아들로서 閭達과 如栗이 있 었고, 주몽의 사후에 如栗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如栗의 아들인 莫來 때에 부여를 병탄했다고 하였다. 傳承 간에 차이를 보이는데, 능비의 系譜는 와 같다. 177) 大朱留王 : 엔 大武神王 혹은 大解朱留王이라 하였고, 이름은 無恤로서 이 왕대에 부 여를 정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事 王曆에선 대무신왕 無恤의 다른 이름은 味留라고 도 한다고 되어있는데, 味留는 朱留의 刊誤일 가능성이 있다. 178) 17世孫 :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시조 주몽으로부터 광개토왕은 혈연적 代數는 13世 밖에 되지 않는다. 능비에서 17世孫이라 했을 때, 어느 王을 기점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계산한 것인지, 또 고구려본기의 王代數에 약간의 누락이 있었는지(채희국, 1988,`광개토왕릉비문의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a, 력사과학 ) 등 많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 다. 후자에 의거해 고구려의 건국 기원을 의 그것보다 훨씬 소급하는 견해도 제기되 었다(손영종, 1990,`고구려 건국기년에 대한 재검토a, 력사과학 ). 한편 大朱留王을 기준으로 하여 王代數를 世數로 치면, 광개토왕은 대주류왕의 17세손이 된다. 179)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國 上은 삼국사기 에 國原으로 표기되기도 하는 王의 葬地를, 또 廣開土境과 平安은 王의 治績을 나타낸 표현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왕의 시호법을 알 수 있다. 한편 광개토왕릉에 제사지낼 때 祭器로 사용되었다가 신라에서 온 사절단에 사여된 경주 호우총 출토`壺 銘a에는 國 上廣開土地好太王 으로 표기되어 있고, 또 같은 시기의`牟頭婁墓誌a엔 國 上大開土地好太聖王 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세 자료에 보이는 이러한 표기상 의 차이로 볼 때, 당시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은 音讀된 것이 아니라, 釋讀되었음을 알 수 있 고, 현재로는 가장 최고의 釋讀表記 사례라고 생각된다.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富山184) 負山을 지나 鹽水가에185) 이르러 그 3개의 部洛 600~700營을186) 격파하니, 노획한 소 말 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180) 昊天不弔 : 이 文句는`牟頭婁墓誌a에서도 광개토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181) 甲寅年 9月 29日 乙酉 : 29日 乙酉는 晉曆과 일치한다. 물론 같은 시기에 쓰여진 덕흥리고분 前 室 북벽에 쓰여져 있는`幽州刺史鎭墓誌銘a에 永樂十八年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 는 晉曆보다 하루 늦어 차이가 나지만, 같은 무덤의 연도 서쪽벽에 다음해 이 무덤의 문을 폐쇄 하였음을 기술한 墨書銘에는 太歲在己酉 二月二日辛酉 로 晉曆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晉曆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 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05쪽). 182) 稗麗 : 이를 晉書 東夷傳에 稗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里 領戶三萬 라고 한 稗離國으로 보 고 그 위치를 치치하르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李丙燾, 1976,`廣開土王의 雄略a, 韓國古代史硏 究, 박영사, 387쪽 ; 千寬宇, 1979,`廣開土王陵碑再論a,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521 쪽)이 있으나, 魏書 契丹傳에서 전하는 거란족의 八部 중의 하나인 匹 部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154쪽). 광개토왕 원년에 北伐契丹 虜男 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하였다고 했고, 그에 앞서 소수림왕 8년 9월에 契丹犯 北邊 陷八部落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려는 거란의 종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183) 永樂 5年 乙未 : 이 해는 서력으로 395年인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乙未年은 광개 토왕 4년이 되어 양자간 紀年上에 一年의 차이가 난다. 184) 富山 : 2세기말 고구려가 요동태수 公孫度와 협력하여 富山의 賊을 격파한 바 있는데( 三國志 高句麗傳), 바로 그 부산이라고 생각된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185) 鹽水 : 이를 小遼水로 비정하는 설(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158쪽), 太子河 上流로 보는 설(王健群 林東錫 譯, 1985, 廣開土王碑硏究, 역민사, 300쪽), 요하 상류 시라무렝하 유역에 있는 鹽湖인 廣濟湖 일대로 비정하는 설(徐榮洙, 1988,`廣開土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a (下), 歷史學報 119) 등이 있다. 186) 營 : 거란인들의 가옥인 천막(帳)들로 구성된 소규모 集落을 지칭한 것이다.

341 680 이에 王의 가마를 돌려 襄平道를187) 지나 東으로 碑文 城 力城188) 北豊189) 五備 로 오면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단성,194) 고리성,195) 서 나라의 영토를 시찰하고, 또 수렵도 하면서 돌아왔다. 190) 百殘(백제)과 新羅는 옛날부터 [高句麗의] 屬民으로서 朝貢을 해왔다.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196) 고모야라성, 혈 그런데 倭가 라성, 전성, 어리성, 191) 성, 돈발성, 辛卯年(391)에 건너와 百殘을 破하고, 新羅 [2字缺] 臣民으로 삼았다. 永樂 6년 (396) 丙申에 왕이 친히 軍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192) [우리] 군이 [3字 불명]하여 성, 두노성, 비 197) 리성, 미추성, 사조성, 아 성, 198) 야리성, 이야 태산한성, 소가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 성, 임성, 노성, 삼양성, 증 성, 187) 襄平道 : 遼陽의 옛지명이 襄平이다. 양평도는 뒤의 北豊 등의 위치를 보아, 양평의 북쪽에서부 터 서남쪽으로 요동반도를 따라 나있던 길로 여겨진다. 이로 보아 당시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석 권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88) 力城 : 晉書 地理志에 遼東國(郡과 같음)의 8개 속현 중 하나로 전한다. 위치는 미상이다. 189) 北豊 : 북풍의 위치를 讀史方輿紀要 에선 奉天府 즉 지금의 沈陽 서북방으로 비정하였다. 그런 데 북풍은 3세기 때 魏 요동군 속현의 하나였으며, 240년 요동군의 汶縣과 北豊縣의 流民이 발 해만을 건너 산동반도로 건너감에 그곳에 (齊郡) 新汶縣과 南豊縣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汶縣이 지금의 蓋縣 지역으로 여겨지니, 이 汶縣의 流民과 함께 渡海해갔다고 하면 北豊縣도 蓋縣에 인 접한 요동반도 서쪽 斜面에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190)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이 句節은 고구려측의 과장이다.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상을 지속하였고, 371년에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한 때 고구려에 대하여 우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가 371년과 382년 고구려측의 도움을 받아 前秦에 사신 을 보내는 등 이 무렵 백제에 대응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맺어졌다. 이어 광개 토왕대에는 신라의 내물왕이 實聖을 人質로 보내게 되었고, 이후 상당 기간 고구려에 종속적인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유의되는 사실은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속민 으로서 마 땅히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포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담은 고구려 지배층의 天下觀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盧泰敦, 1988,`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a, 韓國史論 23). 191) 倭가 臣民으로 삼았다. : 이 句節의 해석과 관련하여 크게 네 종류의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첫째는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 였다. 고 보았다(日本學界의 通說, 王健群). 둘째는,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오자, (고구려가) 바 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 았다. 고 보았다(정인보 박시형). 셋째는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또는 浿水) 를 건너 백제 신라(또는 加羅)를 격파하여 臣民으로 삼았다. 고 보았다(김석형), 넷째는 왜를 (고구려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破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 신라 를 침공하여 臣民으로 삼았다. (鄭杜熙, 1979,`廣開土王陵碑文 辛卯年記事의 再檢討a, 歷史學 報 82)고 보았다. 이 외에 이 句節의 판독을 다르게 하여, 그 뜻을 새기거나, 이 구절이 일제의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造作되었닥고 보는 견해 등이 더 있다(李進熙). 192)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광개토왕 본기에 의하면, 원년 7월에 고구려군이 백제의 10 성, 각미성,193) 모로성, 미사성, 681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199) 윤노성, 관 노성, 구천성 등을 攻取하고, 그 國城(도성)을 하였 개성을 공격하였고, 10월에는 백제 關彌城을 함락시켰으며, 2년 8월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남부 에 침입하였고, 3년 7월에는 來侵한 백제군을 광개토왕이 친히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해 격 퇴한 후 8월에 남부 국경지대에 7개의 성을 쌓았다. 4년 8월에는 광개토왕이 浿水 가에서 백제 군에 대승하여 8천여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백제 阿莘王 본기에도 그러한 사실들이 기술되어 있다. 에서 전하는 그러한 기사들은 紀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능비의 영락 6 년 백잔국 토벌과 유관한 것으로 이해된다. 193) 각미성 : 閣彌城은 광개토왕본기 원년 10월에 고구려군이 함락시켰다는 백제의 북쪽 重鎭인 關彌城과 동일한 성으로 추정된다. 백제본기에선 아신왕 2년(393) 8월에 관미성을 탈환 키 위해 백제 장수 眞武가 1만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성공치 못했다고 하였다. 관미성 즉 능비의 각미성은 대략 예성강 하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174~176쪽). 194) 아단성 : 阿旦城은 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 으로 비정된다. 195) 고리성 : 古利城은 고구려때의 古名이 骨衣奴인 豊壤城(楊州 屬縣)으로 비정되기도 한다(李丙燾, 1976,`廣開土王의 雄略a, 381쪽). 196) 구모성 : 勾牟城은 連川(古名 工木達)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李丙燾, 1976,`廣開土王의 雄 略a, 382쪽). 197) 미추성 : 彌鄒城은 백제건국설화에서 온조의 형인 沸流가 자리잡았다는 彌鄒와 같은 곳으로서, 대개 仁川地域으로 추정된다( 地理志 2 漢州 邵城縣條). 198) 야리성 : 也利城은 지금의 長湍의 고구려 때의 이름인 耶耶城 혹은 夜牙城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 측하기도 한다(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178쪽). 한편 勾牟耶羅城을 長湍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병도, 1976,`廣開土王의 雄略a, 382쪽). 199) 고모루성 : 古牟婁城은`中原高句麗碑a에 나오는 古牟婁城守事 의 古牟婁城과 동일지명이다.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지만, 남한강 유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 볼 때 당시 고구려군의 원정방 식은 한성백제를 직접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영서길(춘천-원주-충주)로 우회하여, 다시 남한강을 통해 그 하류의 한성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42 682 碑文 683 다. 百殘이 우리의 義로움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200) 순수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 건너 精銳兵을 보내어 그 국성을 공격하였다. [百殘軍이 소굴로 돌아가니 ] 곧 그 국 차 城池를 파괴하고 (고구려왕)의 奴客을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합니다.205) 이에 왕께 歸依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主(백제왕)가 困逼해져, 男女 生口 1천명과 細布 천필을 바쳤 하여 명을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사 201) 다. 왕에게 무릎 꿇고, 이제부터 영원히 奴客이 되겠다. 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태왕 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은 [그의] 미혹된 잘못을 은혜로서 赦免하고, 순종해 온 그의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영락] 10년(400) 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게 하였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大臣 10인을 데리고 군대를 돌려 수도로 개선 다. 男居城을 거쳐 新羅城(國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206) [고구려] 官軍이 하였다. 바야흐로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다. [2자 불명]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207) [영락] 8년(398) 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帛愼(息愼)202) 土谷을 觀察 巡視하 從拔城에 이르니 城이 곧 귀의하고 항복하였다. 羅人을 安置하여 戍兵케 하였다.208) 였으며, 이로 인해 쉽게 莫 羅城 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인을 초략해 잡아왔다. 이 이후 로 [帛愼은] 朝貢을 하고 [고구려의] 命을 받았다.203) 永樂 9年(399) 己亥에 百殘이 盟誓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204) [이에] 왕이 평양으로 200) 아리수 : 阿利水는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에 보이는 郁里河와 통하는 것으로서, 한강 을 가리킨다. 201) 노객: 奴客의 원뜻은 私屬民이나 奴隷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능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모두루묘지a에도 중급 귀족인 모두루가 스스로를 낮추어 왕의 奴客이라고 칭하고 있어 비교된다. 또 陵碑에서도 신라왕이 광개토왕에 대해 자신을 奴客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로 볼 때, 이러한 奴客은 노예라기보다는 임금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어 칭한 표현이 분명하다. 당시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복종을 인격적 예속체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2) 帛愼(息愼) : 이를 帛愼으로 판독하여 백제의 북쪽 경계에 가까운 경기도 북부지역이나 강원도 의 동예의 땅으로 비정하거나(津田左右吉, 1913,`好太王征服地域考a, 朝鮮歷史地理 第一冊 ; 王健群 등), 또는 신라 쪽의 지역으로 비정해 對新羅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1940,`廣 開土王陵碑に就てa, 朝鮮古史の硏究 ; 徐榮洙 등). 한편 이를 息愼을 판독하고, 이를 肅愼에 대한 공략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1979,`廣開土王陵碑再論a, 538쪽). 西川王 11年(280)條에 肅愼部落을 복속시킨 기사가 보인다. 203) 명을 받았다. : 원문의 論事 를 번역한 것이다. 이 논사를 판결을 내렸다는 뜻으로 보아, 朝貢 論事 를 帛愼이 조공을 바치도록 고구려가 결정해 주었다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고(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183쪽), 또 論事 를 政事와 軍事에 관한 보고를 하는 행위로 보아, 백 신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였다고 풀이하는 견해(武田幸男, 1989, 高句 麗史と東アジア, 117~119쪽)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論事 를 명령을 듣는다는 의미로 朝貢聽 命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한 견해를 따랐다(王健群, 1985, 廣開土王碑硏究, 304쪽). 204) 倭와 화통하였다. : 阿莘王 6年(397) 5월에 왕이 倭와 結好하여 太子 支를 人質 로 보내었고 7월에 漢水 남쪽에서 크게 閱兵式을 거행하였다. 고 되어 있다. 또 동왕 7년 8월에 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漢山 北柵에 나아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삼국사기 의 기 사는 이 무렵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倭와 연결하면서 군사를 일으켰음을 전해주어, 능 비의 기사와 통하는 바가 있다. 205) 奴客을 삼으려 합니다. : 능비의 以奴客爲民 은 신라왕인 저 奴客은 고구려왕인 당신의 백성이 되어 있으므로 라는 뜻으로 흔히 해석되거나(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187쪽 ; 千 寬宇, 1979`廣開土王陵碑再論a, 540쪽), 奴客을 백제왕으로 보아 (이전부터 고구려왕의) 奴客 (이었던 백제왕)을 (왜의) 民으로 삼으려 한다. 는 뜻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지만(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142쪽), 이 구절은 신라측이 당면한 급박한 어려움을 고하는 내 용으로서 奴客은 고구려왕에 대해 신라인을 노객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왜가 고구려왕 당신의 奴客인 신라왕을 왜의 民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곧 왜가 쳐들어 왔으니, 급히 구원해달라 는 뜻으로 이해하는 견해가(노태돈, 1992,`廣開土王陵碑a, 27쪽) 옳다고 생각된다. 206) 男居城을 거쳐 가득하였다. : 이 句節을 男居城에서부터 신라 王都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 공간에 왜가 가득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지만(王健群, 1985, 廣開土王碑硏究, 307~309쪽), 從男居城 을 으로 나아가(就) 라는 經由한다는 뜻으로 풀이한 견해 를(노태돈, 1992`廣開土王陵碑a, 27쪽) 따랐다. 207) 任那加羅 : 金海의 金官加耶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194쪽), 高 靈의 대가야와 금관가야 둘 다 가능하다고 단정을 유보하는 입장도 있다(千寬宇, 1979`廣開土 王陵碑再論a, 540쪽). 任那 라는 말은 의 强首傳에 그가 원래 任那加良人 이라 한 데서도 보이고, 또`眞鏡大師碑a에 그가 新金氏인데 김유신의 후손으로 그의 祖先이 任那王族 이었다고 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용례로 본다면 임나가라 는 김해의 금관가야 일 가능성 이 높다고 생각된다. 208) 羅人을 戍兵케 하였다. : 능비의 安羅人戍兵 을 安羅人의 戍兵 으로 해석하여, 安羅를 가야의 여러 소국 중에 하나인 阿羅 또는 阿耶라고도 표기되는 경남 咸安地域에 있었던 안라국

343 684 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이하 72字 중 거의 대부분이 不明).209) 碑文 685 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羅人을 安置하여 戍兵케 하였다. 옛날에는 신라 寐錦이210) 몸소 와서 [고구려왕의] 명을 [영락] 17년(407) 丁未에 왕이 명령하여 보군과 마군 5만명을 [9자 불명]215) 파견하였 들었던 적은 없었는데, [이제 왜구를 격퇴해 신라를 구원해주니]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다. 군사가 서로 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이 萬여 벌이 께 직접 신라 매금이 와서 하며 朝貢하였다. 며, 그 밖에 군수물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 돌아오면서 沙溝城216) [영락] 14년(404) 甲辰에 倭가 [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帶方 지역에211) 침입하여, [5자 婁城 住城 城 城을 破하였다. 불명]212) 石城(을 공격하고), 連船(배들을 정박하여 묶어두었는데) [3자 불명] 이에 왕이 [영락] 20년(410) 庚戌 동부여는217) 옛적에 추모왕의 屬民이었는데,218) 중간에 배반하 직접213)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3자 불명] 군사들이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 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餘城(동부 214) 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여 패배하였다. [왜구를] 참 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 安 을 安置하다는 동사로 보아 (新)羅人을 배치하여 지키게(戍 兵) 하였다. 로 풀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王健群, 1985, 廣開土王碑硏究, 308~309쪽). 후 자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209) 72字 不明 : 이 부분 중 王健群은 3면 1행 하단 39 40번째의 字를 殘倭로 판독하고 2행 첫째자를 逃로 보아, 殘倭潰逃 로 읽었다. 이를 王健群은 倭의 잔여무리가 무너져 도망갔다. 로 풀이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판독에 따르면서도 이때의 殘 을 百殘으로 보아, 百殘과 倭가 함께 潰逃하였다고 풀이하여, 영락 10년의 전투에 왜와 함께 백제군이 참가하였다는 새로운 견 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김유철, 1986,`고구려의 광개토왕능비에 나타난 왜의 성격a, 력사과 학 117 ; 延敏洙, 1987,`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倭關係 記事의 檢討a, 東國史學 21).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任那加羅 지역에서의 전투를 서술하였다고 생각되며, 그 중간과 마지 막에 安羅人戍兵 이 2번이나 거듭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군(과 신라군 연합군)이 임나가 라 지역으로 약진하면서, 점령지에 신라인을 안치해 술병케 한 사실을 기록한 부분으로 추정된다. 210) 寐錦 : 종래 신라의 왕호였던 이사금 또는 마립간 에 해당하는 異稱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 적이었는데, 최근 고구려가 신라에 내린 칭호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김병곤, 2006, `新羅 王號 寐錦 의 由來와 性格a, 史學硏究 84). 211) 帶方 지역 : 과거 대방군(황해도 일대)이 있었던 지역을 고구려에서 계속해서 帶方界 로 부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12) 5자 불명 : 이 부분에 대해 王健群은 和通殘兵 으로 판독하여, 왜가 대방 지역을 수군으로 습격 하고, 백제는 육군으로 북상하여 서로 연합한 작전으로 보았다. 213) 왕이 직접 : 率 字가 확인됨으로 그 위의 不明의 두자를 王躬 으로 추독할 수 있다. 이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을 王幢 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매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a, 28쪽). 214) 왕의 군대 : 능비에 王幢 을 해석한 것이다. 幢은 깃발이라는 뜻인데, 군대의 단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사례가 많다. 신라에서도 군대 단위의 명칭으로 사용했고, 당시 몽고고원의 柔然 여의 왕성)에219)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9자 불명 : 항복하였다]. 에서도 그러하였다( 魏書 柔然傳). 215) 9자 불명 : 영락 17년 정미에 벌어진 전투의 대상국에 대해, 後燕戰(千寬宇), 倭兵(申采浩, 朝鮮 上古史, 210쪽) 또는 任那와 이를 후원하는 倭兵(李丙燾)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제기되어 있지 만, 이 해의 전투 중 격파된 城의 하나로 능비에 기록되어 있는 沙溝城 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對百濟戰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이다. 216) 沙溝城 : 이를 백제본기 전지왕 13년(417)에 東北 二部의 민을 동원해 쌓았다고 전 하는 沙口城 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손영종, 1986, 앞의 책 ; 延敏洙). 즉 이해의 작 전을 對百濟戰으로 보는 것이다. 217) 동부여 : 동부여에 대해선, 이를 東濊로 보는 설과 285년 모용씨의 공격으로 부여의 수도가 함 락되자 부여의 일부세력이 동으로 두만강 유역에 피난을 가서 정착하다가 점차 독자적 세력을 변모한 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陵碑의 동부여는 285년 이후 두만강 하류유역에 자리 잡았던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여겨지며, 이로 인해 고구려측에서는 원래의 夫餘나 그 지역 을 北夫餘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盧泰敦, 1989,`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a, 國史館論叢 4). 218) 屬民이었는데 : 동부여가 추모왕의 예속민이었다는 것은 史實을 기술한 것은 아니다. 원래 부여 족의 일파였던 동부여인이 부여출신의 고구려 시조 추모왕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종족 出自 의 同源性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 修辭的 표현일 뿐이다(노태돈, 1992,`廣開土王陵碑a, 28~29쪽). 219) 餘城 : 夫餘城의 준말이라고 생각되며, 동부여의 도성으로 이해된다. 餘城은 고구려에 병합된 뒤 柵城으로 불려졌다. 435년 고구려를 방문하였던 북위의 사신이었던 李傲가 당시 고구려의 영토 가 동으로 柵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柵城이 곧 陵碑에 기록된 餘城이다. 柵城은 三國志 北沃沮傳에서 나오는 置溝婁 이다. 餘城이란 마치 신라의 왕도를 新羅城이라고 하였듯이 동부 여의 王都라는 뜻으로 陵碑의 作者가 쓴 것이며, 당시의 실제 명칭은 置溝婁나 柵城이라 하였을 것이다(盧泰敦, 1989,`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a). 柵城은 오늘날의 훈춘시 외곽의 八連城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八連城에선 발해시대의 유물만 출토되어 나오므로 이곳은 발해의 東京 龍原府

344 686 碑文 왕의 은혜가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하여 돌아왔다. 이때 왕 敦城의227) 民은 4家가 모두 간연으로 삼는다. 의 교화를 사모하여 따라온 자는 味仇婁220)鴨盧,221) 卑斯麻鴨盧, 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222) 鴨盧였다. 무릇 攻破한 城이 64개, 村이 1400개였다. 守墓人223) 烟戶(의 그 本籍과 戶數는 다음과 같다.)224) 賣句余225) 민은 國烟이 2家, 看烟이 3家이다. 東海賈는226)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이다. 687 碑利城의228) 2가는 국연으로 삼는다. 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家이다. 連의 2家는 간연으로 삼는다. 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이다. 梁谷 2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梁城229) 2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柵城府) 자리이고, 고구려시대의 柵城은 팔련성 부근 5里 지점에 있는 고구려성인 溫特赫部城 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엄장록 정영진, 1989,`연변지구의 중요한 고구려성에 대한 고찰-고구 려 책성(柵城)을 겸하여 논함a, 연변대학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 220) 味仇婁 : 지명으로 이해된다. 혹 味仇婁는 三國志 丘儉傳에 나오는 북옥저의 買溝婁와 같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노태돈, 1992,`廣開土王陵碑a, 29쪽). 221) 鴨盧 : 동부여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과 같은 존재의 칭호로 이해하여, 加나 干과 같은 의미 를 지닌 칭호로 보는 견해(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207쪽), 또 鴨盧를 이동 가능한 취락 으로 여기는 견해(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65쪽) 등이 있다. 222) 64城 1400村 : 이를 광개토왕 一代에 걸쳐 攻破한 城村의 합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지 만, 이를 東夫餘戰의 戰果를 보는 입장도 있다(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207쪽 ; 孔錫龜, 1990,`廣開土王陵碑의 東夫餘에 대한 考察a, 韓國史硏究 70). 223) 守墓人 : 무덤을 청소하고, 제사 등의 행사에 사역되었던 守墓戶는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확인된 다. 에 의하면, 新大王 15년(179) 國相 明臨答夫가 죽자 국가에서 그를 禮葬하고 守 墓戶 20家를 두었다고 하며, 陵碑에도 광개토왕 이전의 왕들 무덤에도 수묘호를 두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224) 烟戶 : 家戶를 烟(煙) 으로 표기한 사례는 중국측 자료에는 사례가 없고,`신라단양적성비a `신라촌락문서a그리고 고대일본의 호적자료에서만 확인된다. 이는 신라와 고대일본의 호적 편 찬에 고구려율령의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윤선태, 2000,`신라 통일기 왕실의 촌락지배-신라 고문서와 목간의 분석을 중심으로-a,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따라서 능비 의 수묘인 연호는 당시 고구려율령과 호적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25) 賣句余 : 대무신왕 13년(30)조에 보이는 賣句谷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朴 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217쪽). 226) 東海賈 : 고구려본기 太祖王 55년(107)조에 나오는 東海谷과 같은 지역으로 보는 견 해(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217쪽), 또 이를 동해안의 商賈集團 또는 賤民商戶를 지칭한 다고 보는 견해(王健群, 1985, 廣開土王碑硏究, 212쪽 ;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 ア, 79쪽) 등이 있다. 安夫連의 22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改谷의 3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新城의230) 3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南蘇城의231) 1가는 국연으로 삼는다. 새로 [略取해] 온 韓 穢(의 守墓人 烟戶는 다음과 같다.)232) 227) 敦城 : 고구려 멸망 직전의 상황을 전하는 이른바 鴨 以北 未降十一城 중의 하나로 기록된 新城州 本仇次忽 或云 敦城 에서 동일한 성명이 확인된다. 228) 碑利城 : 昌寧碑에 나오는 碑利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 의 碑利城과 같은 곳으로서 比列忽 즉 현 재의 함경남도 안변으로 비정된다. 229) 梁谷과 梁城 : 梁水인 지금의 太子河의 상류지역에 있었던 지명으로 추정된다. 230) 新城 : 지금의 撫順 북쪽에 있는 高爾山城으로 비정된다. 231) 南蘇城 : 蘇子河와 渾河 합류지점의 살이호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손영종, 1986,`광개토왕 능비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영역a, 력사과학 118). 翰苑 에 인용된 高麗記 에선 남소성이 新城北十里山上也 라고 되어 있다. 232) 새로 (略取해) 온 韓 穢 : 濊系의 族屬들은 원래 부여 고구려 옥저 지역에 거주하였고, 이들 은 동해안을 따라 경북 북부 일대까지, 또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임진강, 한강 하류 일대 및 북한 강과 남한강의 중상류 일대로 남하해 갔다. 백제가 성장한 경기도 북부 일대에는 이미 선주 토 착세력인 韓系의 족속이 정착해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이들 韓 濊系의 족속이 혼 유되는 형태로 국가체가 성장하였다고 생각된다. 三國志 韓傳에도 중국 郡縣과 길항관계에 있 던 그 남단의 세력을 韓 濊로 묘사하고 있다.`광개토왕릉비a에 경기도 북부 지역 일대의 복속 민을 新來韓穢 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상황이 후대까지 지속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윤선태, 2001,`馬韓의 辰王과 臣 沽國a, 百濟硏究 34).

345 688 碑文 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이다. 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이다. 牟婁城의 2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이다. 豆比鴨岑의 韓 5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이다. 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이다. 求底의 韓 1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味城의 6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舍 城의 韓穢는233) 국연 3가, 간연 21가이다. 就咨城의 5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穰城의 24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이다. 散那城의 1가는 국연으로 삼는다. 客賢의 韓 1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那旦城의 1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阿旦城과 雜珍城 합하여 10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勾牟城의 1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巴奴城의 韓 9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於利城의 8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比利城의 3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細城의 3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牟水城의 3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689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敎를 내려 말하기를, 先祖의 王들은 다만 遠 幹 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이다. 近에 사는 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고 청소를 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나는 이 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이다. 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뒤235) 나의 무덤을 편안히 也利城의 3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지키는 자들은, 내가 몸소 다니며 略取해 온 韓人과 穢人들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고 청 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이다. 소하게 하라. 고 하셨다. 왕의 말씀(言敎)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敎令과 같이 韓과 穢의 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이다. 220家를 취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이 [수묘의] 法則을 알지 못하는 것이 걱 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이다. 정되어, 다시 舊民 110家를 취하였다. 합하여 新 舊236)의 수묘호는 國烟이 30家이고 看 百殘南居의 韓은234)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이다. 烟이 300家로서 都合 330家이다.237) 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으로 삼는다. 233) 舍 城의 韓穢 : 이로 볼 때 사조성 지역에는 한족과 예족 두 종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고 생 각된다. 234) 百殘南居의 韓 : 이 南居 를 영락 10년조에 나오는 男居城 과 同音異寫의 지명으로 보고 고구 려성인 男居城과 구별하기 위해 百殘(백제)의 南居라고 표현하였다는 견해가 있다(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221쪽). 한편 南居가 지명이 아니라 훈독되어, 백제 (수도) 남쪽에 거주 하였던 韓 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50쪽). 그러나 수묘인조의 다른 용례로 보아 백제남거는 고유지명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235) 죽은 뒤 : 능비의 萬年之後 를 해석한 것이다. 이 경우 萬年은 皇帝와 조응하는 어휘라는 점에 서 당시 고구려왕의 자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236) 新 舊 : 新民은 광개토왕대에 공략하였던 韓 穢를 말하며, 舊民은 광개토왕 재위 전에 고구려 의 영역에 살았던 주민을 의미한다. 新民과 舊民의 비율은 2:1이다. 237) 수묘호는 330家이다 : 國烟과 看烟의 비율은 1:10이다. 그래서 國烟 1戶와 看烟 10戶가 1 組가 되어 守墓役을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박시형, 1966, 광개토왕 릉비, 226쪽). 또 舊民과 新民의 비율이 1:2인 점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舊民 1組(11호)와 新 民 2組(22호)로 이루어진 33戶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 공동으로 직역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본

346 690 上祖와 先王들 이래로 능묘에 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烟戶들이 헷갈리게 碑文 691 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守墓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되었다. 오직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만이 진실로 先祖王들을 위해 墓에 碑를 세우고238) 그 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은239) 지금이후 다시는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어도 또한 함부로 살 수 없다.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수묘인을] 판 자는 형벌을 받 부여융 묘지명(扶餘隆 墓誌銘)240) 公은 이름이 隆이고, 字도 隆이다. 백제 辰朝人이다.241) 원래 [선조는 河伯의] 자손이었 다.242) 처음 나라를 열어 동방에서 영웅으로 일컬었고, 한 지역을 차지하여 천 년 동안 이 어내려 왔다. 어질고 후덕함이 풍속을 이루어 漢나라 역사에서 빛을 발하였고,243) 충성스 견해도 있다(趙仁成, 1988,`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守墓制a, 韓國史市民講座 3). 이상의 두 견해는 모두 직역수행 단위에서 國烟이 책임자의 위치에 있고, 看烟을 그 보조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국연과 간연을 이러한 주종관계로 보지 않고, 국연만이 수묘역에 종사하는 연호를 가리키고, 간연은 예비 국연으로 미래에 충원되는 연호를 가리킨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김락기, 2006,`고구려 수묘인의 구분과 입역방식-광개토왕비 수묘인 연호 조를 중심으로-a, 한국고대사연구 41). 238) 墓에 碑를 세우고 : 이는 비문의 墓上立碑 를 해석한 것인데, 즉 비를 墓域上에 세웠다는 뜻이 다. 이를 무덤 위에 비를 세웠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方起東 林至德,`集安洞溝兩座樹 立石碑的高句麗古墳a, 考古與文物 ; 方起東, 1988,`千秋墓 太王陵 將軍塚a, 好太王 陵碑と高句麗遺跡, 267~273쪽). 이들은 山城下 1411호묘와 禹山下 1080호묘 측면에서 발견 된 石碑 형상의 석물이 원래 봉분상에 있었던 것이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 물에는 문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이때 비를 先代王들의 무덤 각각에 모두 세운 것으 로 보지 않고, 광개토왕비만을 세웠고, 수묘인 연호 330가도 광개토왕릉만이 아니라 선왕묘의 수묘인까지를 모두 포함한 숫자로 보는 견해가 있어(金賢淑, 1989,`廣開土王碑를 통해본 高句 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a, 韓國史硏究 65, 14~15쪽) 참고된다. 239) 수묘인 : 守墓人의 신분에 대해, 우선 이들이 매매대상이 되고 전쟁포로였으므로 그 신분을 노 예로 보는 설이 있다(白南雲, 1933, 朝鮮社會經濟史, 218쪽 ; 王健群, 1985, 廣開土王碑硏 究, 209쪽). 이에 대해, 守墓人이 家를 유지하며 일정 한도의 自己經理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軍役을 면제받은 대신에 守墓役을 졌던 일반 농민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金錫亨, 1957, 조 선 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과학원출판사 ; 임기환, 1994,`광개토왕비의 국연(國烟)과 간 연(看烟) 4 5세기 고구려 대민편제의 일례 a, 역사와 현실 13). 또한 수묘인은 국역을 지 는 비자유민이었지만 노예는 아니었고, 國烟과 看烟의 관계는 戶首와 奉足의 관계라고 보는 견 해도 있다(朴時亨, 1966, 광개토왕릉비, 226쪽). 후자의 두 견해는 수묘인을 國 上에 番上立 役한 일반농민으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수묘인들은 국내성의 國 上에 집단 거주하며 노 예는 아니나 일반 良人보다는 신분이 낮은 국가에 의해 사민된 복속민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 (金賢淑, 1989,`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a, 24~34쪽). 수묘역은 초 기의 공납적 지배를 극복하고 중앙권력이 개별 인호(人戶)를 직접 지배하는 단계에 성립한 국역 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럽고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을 날리니 晋나라 책 속에서 밝게 빛이 났다. 할아버지는 璋244)으로 백제 국왕이었는데, 온화하고 겸손하여 맑고 빼어났으며, 도량과 학문에는 따를 자가 없었다. 貞觀 연간(627~649)에 당 태종이 詔를 내려 開府儀同三 司 柱國 帶方郡王을 수여하였다.245) 240) 扶餘隆 墓誌銘 : 이 묘지는 1920년 중국 河南省 洛陽의 北邙에서 출토되었고, 현재 河南 開封圖 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의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58cm이다. 글자는 가로 세로의 罫線 으로 사각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새겼다. 1행 27자씩 26행으로 전부 669자이다. 묘지명에 撰者와 書者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부여융은 백제 義慈王의 아들로, 그의 행적은 舊唐書 新唐書 日本書紀 `唐平百濟碑a `唐 劉仁願紀功碑a등에 단편적으로 보인 다(이 책의`唐平百濟碑a,`唐 劉仁願紀功a등을 참조바람). 이 묘지가 발견되어 기존의 문헌에 누락되었던 것을 보충하고,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역주에 송기호, 1992,`扶 餘隆 墓誌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41) 辰朝人 : 이 辰朝人을 백제 이전에 존재하였던 辰國人으로 이해하고, 백제인들의 진국 계승 관 념을 엿볼 수 있다고 이해한 견해가 있다(송기호, 1992,`扶餘隆 墓誌銘a, 546쪽). 242) [河伯의] 자손 : 본 묘지의 마지막 銘에 부여융을 河孫 이라 하였던 것에 의거하여, 묘지 첫머 리에 기록된 판독불명의 孫 을 河孫으로 추독한 견해가 있다. 이 경우 河孫은 河伯의 자손 (또는 외손) 이란 뜻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온조가 朱蒙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의 백제건국 신화와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송기호, 1992,`扶餘隆 墓誌銘a, 546쪽). 또 본 묘지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합하여 兩貊 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당시 唐 人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同族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43) 처음 나라를 빛을 발하였고 : 이 구절의 대체적인 문맥으로 보아, 백제를 부여족이 세운 국 가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44) 璋 : 백제 30대 武王(재위 600~641)의 이름이다. 245) 貞觀연간 수여하였다 : 舊唐書 권1 高祖本紀에는 武德 7년(624) 정월 己酉日에 무왕을 帶方郡王으로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같은 책 권199 상 백제전에는 무덕 7년에 帶方郡王

347 692 碑文 693 아버지는 義慈로서 顯慶 연간(656~660)에 당 고종이 金紫光祿大夫, 衛尉卿을 수여하였 책이 잠깐 사이에 나왔다. 顯慶 연간(656~660)에 황제의 군대가 백제를 정벌하였으니, 다.246)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 藁街로247) 달려와 [황제 공은 멀리 天人을 거울삼아 거역과 순종을 잘 분별하였다. 훌륭한 학덕을 받들어 신명을 248) 의] 교화를 받으니, 그 업적이 쌓여 후세의 왕들에게 나타났다. 또 大理寺에 올라 영화 바쳤고, 오랑캐의 풍속을 버리고 어진 데로 돌아갔으니, 後夫의 재앙을 없앴고, 선인들이 를 얻으니, 그 경사스러움이 후손에게 전해졌다. 미혹에 빠진 잘못을 고칠 수 있었다.252) 공의 정성이 천자에 계속 알려져 포상이 거듭 내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三 려졌으니, 마침내 그 지위는 卿의 반열에253) 오르게 되었다. 영광은 藩國을 꿰뚫게 되었 韓을 덮었고, 그 이름이 兩貊(백제와 고구려)에 드날렸다.249) 효성스러움으로써 본성을 이 다. 그러나 馬韓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遼海 바닷가에 루었고, 신중함으로써 몸을 닦았다. 선한 것을 택하여 행하였고, 의로운 것을 들으면 능 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쳤으며, 丸山 지역에서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254) 이에 히 이를 본받았다. 그러하니 呂蒙과 衛 를250) 스승으로 삼지 않았어도 그 학문의 부 황제가 크게 노하여 천자의 군대가 위엄을 발하였다. 上將들은 지휘의 깃발을 옹위하였 족함을 부끄러워하였고, 孫武와 吳起의251)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여섯 가지 기묘한 계 고, 정예의 中軍은 軍律을 받들었다. 이들을 병탄하고 무찌르는 꾀는 비록 조정의 계책을 따르는 것이지만 백성을 위무하는 방책은 인덕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에 공을 熊津都督 으로 삼고 百濟郡公에 봉하였다. 이어 熊津道摠管 겸 馬韓道安撫大使로 삼았다. 공은 신 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고 하였으며, 新唐書 권220 백제전에도 무덕 연간에 帶方郡王 百濟 王으로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다. 비문에서 貞觀 연간에 책봉하였다는 것은 의자왕의 책봉과 착 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246) 金紫光祿大夫 衛尉卿 : 舊唐書 권3 太宗本紀 下에는 貞觀 15년(641) 5월 丙子日에 의자왕이 무왕의 뒤를 이어 帶方郡王에 책봉되었다고 하였고, 같은 책 백제전에는 柱國 帶方郡王 百濟 王으로 봉하여졌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 묘지명에서는 이를 생략하고 660년 낙양에서 사망한 뒤에 추증된 관작만을 기록하였다. 247) 藁街 : 街라고도 하며, 漢나라 때 長安城 南門 안의 거리 이름이다. 주변국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있는 거처에서 묵도록 하였던 것에서 기원하여, 당에서도 외국인의 거주지를 일컫는 상 징어가 되었다. 248) 大理寺 : 본 묘지명에 棘署 로 되어 있다. 棘寺라고도 하며, 중앙의 최고 심판기관으로 貴人의 범죄를 다루었던 大理寺를 말한다. 249) 어려서부터 드날렸다 : 묘지명에 부여융은 고종 永淳 원년(682)에 68세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는 무왕 16년(615)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舊唐書 권3 太宗本 紀 貞觀 11년(637)에 백제 무왕이 보낸 사신으로 太子 隆 이 확인된다. 그러나 당시에 백제의 태자는 義慈였기 때문에, 이 자료를 부여융의 행적으로 보는 데에는 논란이 있다(양기석, 1995, `백제 부여융 묘지명에 대한 검토a, 국사관논총 62, 139쪽 ; 黃淸連, 2000,` 부여융묘지 에 서 본 唐代 韓中관계a, 백제사의 비교연구, 서경문화사, 280~281쪽). 250) 呂蒙과 衛 : 여몽(178~220)은 字가 子明으로, 삼국시대 汝南 富陂人이다. 周瑜 등과 함께 赤 壁에서 曹操를 대파하였고, 孫權의 권유로 역사서 병서를 많이 읽어 학식에도 뛰어났다( 三國 志 권54 여몽전). 그리고 衛 는 字가 伯儒로서, 삼국시대 魏나라 河東 安邑人이다. 어려서부 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三國志 권21 衛 傳). 251) 孫武와 吳起 : 모두 兵法家로 유명하며, 그들의 저서로는 각각 孫子 와 吳子 가 있다. 의와 용감성을 일찍부터 길러왔고, 위엄과 포용력이 본디부터 충만하였으니, 읍락들을 불러 회유하매 흘린 것을 소중하게 줍듯이 하였고, 간악한 무리를 섬멸하매255) 뜨거운 물 에 눈녹듯이 하였다. 이윽고 천자의 밝은 조서를 받들어 신라와 脩好를 맺었다.256) 또 이 252) 잘못을 고칠 수 있었다 : 660년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효를 데리고 웅진성 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부여융은 사비성에 남아 있다가 대좌평 사택천복 등과 함께 나당연합군 에 항복하였다. 같은 해 9월 당에 끌려가 11월에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치룬 후 사면되었다. 253) 卿의 반열 : 660년 부여융은 당으로부터 司農卿(司稼正卿)을 제수받았다. 그런데 新唐書 권 220 백제전에는 司稼正卿으로 되어 있지만, 舊唐書 권5에는 그의 직함이 司農卿으로 되어 있 다. 司農卿은 당나라 9寺의 하나로 나라의 곡물창고와 비축에 관한 政令을 담당하는 司農寺의 장관을 말한다. 사농시는 龍朔 2년(662)에 司稼寺로 개칭되고, 卿은 正卿으로 바뀌었다가 咸亨 원년(670)에 다시 사농시로 바뀌었다. 따라서 애초 부여융이 받은 벼슬은 司農卿이 옳다(송기 호, 1992,`扶餘隆 墓誌銘a, 549쪽). 254) 馬韓 세력을 규합하였다 : 백제 유민 福信과 道琛 등이 周留城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을 벌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255) 熊津都督으로 섬멸하매 : 부여융은 663년 손인사가 이끄는 당의 증원군과 함께 웅진도독 의 신분으로 백제에 돌아왔고, 유인궤를 따라 수군과 보급선을 이끌고 백제부흥군과 왜의 연합 군을 격파하였다. 256) 신라와 脩好를 맺었다 : 664년 말에 당은 유인원의 중재 아래 熊嶺에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의 김인문이 최초로 맹약을 맺었다. 이어 665년 8월에는 다시 熊津城 就利山에서 신라 문무왕 과 화친을 맺게 하였다. 이때 유인궤가 작성한 맹약문에는, 당이 백제를 평정하였지만, 聖人의

348 694 碑文 695 어 크나큰 은혜를 입어 東岳에서257) 천자를 陪覲하게 되었다.258) 공훈을 여러 차례 쌓아 총 그를 輔國大將軍으로 추증하고 諡號를 내렸다. 애하는 칙명이 날로 융성해졌으니, 太常卿으로 벼슬을 옮겼고, 帶方郡王에 봉해졌다.259) 공은 굳세고 성실한 지조를 세웠고, 신중하고 정직한 몸가짐을 지녔으며, 고상한 정취에 공은 임금을 섬기매 온 힘을 다하였고, 절개를 지키매 사사로움을 잊었으니, 누누이 정성 홀로 이르렀고, 원대한 도량으로 아무 속박도 받지 않았다. 文詞를 고상하게 좋아하였고 260) 자신의 經籍을 더욱 탐하였으니, 현명한 사람을 사모하되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아름다움을 사양할 것이고, 한나라 왕조에 견주면 金日 가261) 자신의 덕을 부끄러워할 명성에 대해서는 마치 떠도는 티끌에 견주었다. 그러나 하늘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세상에 것이다. 비록 인정을 두터이 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언제나 삼가려 하 남겨두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여기에 모두 슬퍼하노라. 永淳 원년(682) 壬午年 12(11)월 였으나, 병환이 생겨 침술과 약도 효험이 없었다. 배가 계곡에 잠기어 옮겨지듯이 세상을 24일 癸酉(癸丑)日에263) 洛陽 北茫 淸善里에 장례를 치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 떠나게 되었다. 이 때 공의 나이는 68세로서 私第에서 사망하였다.262) 이에 조정에서는 다. 有司로서 직임을 맡아 감히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스러움을 바쳐 마침내 宿衛할 수 있게 되었다. 秦나라 황실에 비교하면 由余가 바다 한 귀퉁이에서 일족을 여니, 河伯의 자손으로서 상서로움을 드러냈고, 나라 기틀을 우뚝 세우니 국운이 멀리 이어져 내려왔도다. 興亡繼絶의 뜻을 받들어, 신라와 서로 이웃나라가 되는 화친을 맺도록 하였다. 고 되어 있다. 257) 東岳 : 중국 5嶽의 하나로 동쪽의 鎭山인 泰山을 가리킨다. 258) 곧이어 천자를 陪覲하게 되었다 : 665년 8월 유인궤는 백제 신라 탐라 왜의 使者를 데 리고 당으로 귀국하였는데, 이때 부여융도 함께 당으로 돌아갔다. 이는 666년 정월에 泰山에서 거행될 封禪儀式 때문이었다. 이 봉선의식에는 돌궐 신라 고구려 왜 등에서 파견한 사절들을 비롯해 부여융도 참여하였다. 동악(태산)에서 천자를 배근한 것은 바로 이 봉선의식을 말하는 것 이다. 봉선의식이 끝난 후 부여융은 다시 백제 고토로 귀환하여 웅진도독의 역할을 수행하였다(黃 淸連, 2000,` 부여융묘지 에서 본 唐代 韓中관계a, 304쪽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 유민a,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7)-백제유민들의 활동,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84쪽). 259) 太常卿 봉해졌다 : 舊唐書 권199 상 백제전에 의하면 당에서 儀鳳 2년(677)에 부여융을 光祿大夫 太常員外卿 兼熊津都督 帶方郡王으로 임명하고 백제 옛 땅으로 돌아가 유민을 안 무하도록 하였으나, 신라가 이미 차지하고 있어서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260) 由余 : 춘추시대에 戎族의 신하로서 秦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穆公에게 당시에 중원이 어지러 웠던 반면에 융족은 잘 다스려졌던 원인에 대해 강론하였다. 나중에 진나라로 들어가 목공에게 중용되어 西戎을 정벌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史記 권5 및 권110 참조). 261) 金日 : 金日 (B.C.134~86)는 원래 흉노 休屠王의 태자였는데, 한나라에 투항하여 武帝에게 중용되었다( 漢書 권68 金日 傳). 262) 私第에서 사망하였다 : 이를 일반적으로 부여융이 洛陽에서 죽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송기호, 1992,`부여융 묘지명a, 545쪽 ; 黃淸連, 2000,` 부여융묘지 에서 본 唐代 韓中관계a, 310~315쪽). 부여융은 677년 2월 웅진도독에 임명되었는데, 新唐書 백제전이나 資治通鑑 에서는 이때 부여융이 백제 유민을 安集하려 하였으나 신라 세력이 워낙 강성하여 백제 옛 땅으 로 들어가지 못하고 高麗之境 에 머물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부여융이 의탁한 고려(고 구려)는 요동의 안동도호부를 가리킨다. 676년 2월 당은 안동도호부를 遼東故城으로 옮기면서, 웅진도독부도 요동의 建安故城으로 옮겼다. 따라서 묘지명에 부여융이 죽은 私第는 요동의 建安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하고 대대로 이어받은 國業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은덕이 264) 에 水 흘러넘쳤고 위엄이 帶方에 발하였구나. 조상들이 쌓은 선행이 외롭지 않아 영민한 후손들이 줄을 이었으니, 곧고 성실한 마음을 꼭 지켰고, 충성스럽고 용감한 마음을 항상 가졌도다. 나라를 위해 몸바쳐 자신의 몸은 가벼이 여겼고, 나라 걱정에 집안일을 잊고 의로움을 중 시하였으니, 王會篇에265) 기록된 법을 준수하여 마침내 천자의 은총을 받게 되었구나. 처음에 桂婁가 어지러워지고, 遼河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어린 백성들을 이끌어 천자의 위광에 의지하였도다. 신의를 법도로 삼고, 어진 것을 도리로 삼아, 변방의 요새에서 교화를 펼쳤고, 云云山과 故城에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 낙양의 망산으로 歸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263) 12(11)월 24일 癸酉(癸丑)日 : 묘지명에는 12월 24일 癸酉 라고 되어 있지만, 연월일에 일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永淳 원년 12월 초하루는 己未이고, 11월 초하루가 庚寅이므로 12월은 11월의 잘못이다. 또한 12월 24일은 壬午이고 11월 24일은 癸丑인 것으로 보아 癸酉는 癸丑의 잘못이다(송기호, 1992,`부여융 묘지명a, 549쪽). 264) 水 : 論衡 과 魏略 後漢書 등에선 부여 시조 東明이 물고기와 자라 등의 도움을 받아 건 넜다는 강의 이름을 각각 奄 水 施掩水 淹 水 등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梁書 에서는 淹滯水라 하였다. 이들 江名은 글자형이 비슷하여 轉寫 과정에서 혼동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65) 王會篇 : 逸周書 의 篇名이다. 周公이 洛邑을 만든 뒤 제후들을 크게 불러모았다. 이 때 朝儀와 貢禮를 제정하여 王會篇에 기록하게 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349 696 碑文 697 亭亭山에서266) 천자를 모셨구나. 府君 墓誌文 및 序文. 封爵으로는 5等爵을 뛰어넘었고,267) 班列로는 9卿에 동참하여,268) 천자를 삼가 받들었고,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신하로서 절조를 엄숙히 지켰도다. 쓰일 수 있는 것은 軍律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 그러나 南山은 견고하지 못하였고, 흐르는 물이 갑자기 모여 내를 이루듯 세월이 흘러 러한 운수에 응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密 갔으니, 감히 銘旌에 의탁하여 삼가 크나큰 공적을 밝혀두노라. 大唐의 故人인 光祿大夫,269) 行太常卿,270) 使持節,271) 熊津都督, 帶方郡王 扶餘君의 墓誌 272) 이다. 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 墓誌銘)273) 大周274)의 故人 左武威衛大將軍275) 檢校左羽林軍276) 贈左玉鈐衛大將軍277) 燕國公278) 黑齒 266) 云云山과 亭亭山 : 황제들이 제사를 지냈던 곳인데( 史記 권28 封禪書), 여기서는 당 고종의 태 산 봉선의식에 부여융이 참여한 것을 말한다. 267) 五等爵을 뛰어넘었고 : 公 侯 佰 子 男의 5단계 封爵을 말하는데, 이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帶方郡王에 봉해진 것을 지칭한다. 268) 班列로는 9卿에 동참하여 : 아홉 사람의 장관. 여기서는 9寺(시)의 하나인 太常寺의 장관이 된 것을 지칭한다. 269) 光祿大夫 : 당나라의 文散官으로 종2품에 해당한다. 270) 行太常卿 : 太常卿은 太常寺의 장관으로, 태상시는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던 곳이다. 行은 行守 法에 의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품계가 관직보다 높을 경우 관직 앞에 行 을 붙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守 를 붙였다. 여기에서는 태상경이 정3품인 데에 비하여 광록대부는 종2품에 해당 하므로 태상경이란 관직 앞에 行자를 붙이게 된 것이다. 271) 使持節 : 唐 武德(618~626) 초기에 변방의 요충지에 總管을 두어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그에게 使持節이란 칭호를 덧붙였으니, 대체로 한나라 때의 刺史에 해당한다고 한다( 新唐書 권49 하 百官志 外官 都督府에 대한 註를 참조 바람). 272) 大唐 墓誌 : 이 묘지는 이 표제어 부분이 앞에 있지 않고 뒤에 붙어 있어 특이하다. 273) 黑齒常之 墓誌銘 : 이 묘지는 1929년 10월 중국 河南省 洛陽의 北邙에서 그의 아들 黑齒俊 묘지 와 함께 출토되었다. 지금은 南京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묘지는 李希泌, 1986, 曲石精廬 藏唐墓誌, 齊魯書社에 소개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크기는 72 71cm이다. 행마 다 41자씩 전체 41행에 걸쳐 1604자가 새겨져 있다. 撰者와 書者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 만, 묘지 내용으로 볼 때 찬자는 흑치상지와 함께 군대생활을 하면서 그를 흠모하였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글씨는 歐陽詢體의 단정한 楷書이며, 묘지가 측천무후 즉위기(690~705)에 작성되었 기 때문에, 측천무후자도 기록되어 있다.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은 이미 舊唐書 와 新唐書 의 列傳 및 의 열전에 실려 있지만, 이 묘지가 발견되어 흑치상지에 관한 문헌의 闕漏 를 더욱 많이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묘지명에는 흑치상지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이야기는 완전히 빠져있는데, 이는 그의 전력에 누가 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기 때문 이다. 흑치상지는 630년에 태어나서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 고, 660년부터 663년까지는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하였다. 663년 항복하여 당으로 들어간 뒤에 는 당에서 관료 생활을 하였다. 664년부터 이듬해까지 웅진성에 돌아와 유민을 안무하였고, 신 라의 압박에 의해 다시 당으로 돌아간 뒤에는 677년 경까지 요동의 建安故城으로 옮긴 웅진도 독부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후 서역 지방에서 吐蕃과 突厥을 물리치는 데 크게 공을 세우 고, 徐敬業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에도 일조하여 燕國公에 봉해진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689년 10월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지의 내용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그의 선조가 원 래 扶餘氏였는데 黑齒 지역을 봉작으로 받아 흑치를 성씨로 삼았다는 대목이다. 이러한 흑치 성 씨의 유래를 문자 그대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적인 윤색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두 번째는 백제 귀족들의 학문적 소양이다. 흑치상지는 어렸을 때부터 春秋左氏傳 漢書 史 記 論語 등을 교재로 삼아 공부하였다. 한편 이 묘지와 그의 아들 黑齒俊의 묘지는 서로 자 기 조상들의 이름과 관직 부분에 차이가 있다(이 책의`黑齒俊 墓誌銘a을 참조바람). 역주에 송 기호, 1992,`黑齒常之 墓誌銘a, 역주한국고대사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 고하였다. 274) 大周 : 則天武后가 세운 周(690~705)나라를 가리킨다. 이 비가 만들어진 것이 699년이므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으로 이 비문에는 武后가 만든 글자들도 기록되어 있다. 275) 左武威衛大將軍 : 左武威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이다. 16위는 황제가 직접 통솔하였던 중앙군 이다. 左武威衛는 684년에 左驍衛를 개칭한 것으로 705년에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에는 대장군이 최고의 직책으로서 정3품에 해당한다. 대장군 위에 上將軍을 둔 것은 貞 元 2년(786) 이후다. 276) 左羽林軍 : 당나라 6軍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加官의 형태로 左羽林軍大將軍에 봉해진 것을 의미한다. 277) 贈左玉鈐衛大將軍 : 左玉鈐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이다. 원래 左領軍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 칭으로 바뀌었다. 이후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贈은 사망한 뒤에 추증된 것을 의미한다. 278) 燕國公 : 당나라 封爵의 하나로서, 국공은 종1품에 해당한다.

350 698 碑文 山에서279)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은280)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야 한탄이 없 다. 699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다. 가벼이 여기는 것 은 기호품과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깊은 마 府君은 이름이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281) 282) 그 가문은 대대로 達率을 역임 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 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兵部尙書와 같으며,283)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 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 다.284) 증조부는 이름이 文大이고, 할아버지는 德顯이며, 아버지는 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하였다. 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氏로 삼았다. 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 285) 달솔에 이르렀다. 나이 어려 소학교에서 공부할 적에도 이미 春秋左氏傳 및 班固의 漢書 와 司馬遷의 史記 를 읽었다. 이에 탄식하여 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 다 하였으니,286)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 279) 密山 : 玉이 나는 곳. 여기서는 山海經 西山經에 기록된 옥이 난다는 峯山을 가리킨다. 280) 金聲 : 金聲玉振의 준말. 8音을 합주할 때에 금으로 만든 鐘을 쳐서 시작하고, 옥으로 만든 磬을 쳐서 끝맺었다는 뜻이다. 이는 공자가 사물을 집대성한 것을 칭찬하는 말이기도 하며, 智德을 겸비한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281) 黑齒 : 백제의 지명이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불명이다. 이도학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비정하기 도 하였으나(李道學, 1991,`百濟 黑齒常之墓誌銘의 檢討a, 우리文化 8월호), 백제 영역 안의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 흑치에 봉해졌다는 것은 백제에서 봉건제가 시행되었던 사실을 보여준 다기보다는 이 지역이 그의 세력 근거지였음을 의미할 것이다(송기호, 1992,`흑치상지 묘지 명a, 560쪽). 282) 봉해졌기 때문에 氏로 삼았다 : 이 묘지에 의하면 흑치상지의 선조는 원래 扶餘氏였는데 흑치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흑치씨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구절의 흑치씨의 유래를 문 자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흑치 지방의 유력 세력이었다가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면서 부여씨 의 일파로 윤색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앞으로 검토의 여지가 있다. 283) 兵部尙書와 같으며 : 이 묘지명과 달리 舊唐書 흑치상지 열전에는, 達率 겸 郡將이 되었는데, 중국의 刺史와 같다. 라고 되어 있고, 新唐書 흑치상지 열전에는, 達率 겸 風達郡將이 되었 다. 라고 되어 있다. 흑치상지 열전은 新唐書 의 기록과 같다. 이로 볼 때 이 묘지 명에 달솔이 병부상서와 같다고 표현한 것은 과장이 분명하다. 284) 達率 해당한다 : 묘지에 의하면 흑치상지 가문은 대대로 達率이 되었고, 그도 20살이 안되 어 달솔이 되었다. 이로써 가문의 지위에 따라 신분과 관등이 계승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이에 의거하여 제1관등인 佐平과 제2관등인 達率 사이에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적 한계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송기호, 1992,`흑치상지 묘지명a, 556쪽). 285) 할아버지는 이르렀다 : 이 묘지명과 달리`黑齒俊 墓誌銘a에는, 흑치상지 할아버지의 이름 이 加亥로서 본국에서 刺史를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沙子로서 본국에서 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고 되어 있어 인명과 관직에 차이가 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 책`黑齒俊 墓誌銘a의 해당부 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가! 라고 말하였다. 20세가 안되어 家門의 신분에 따라 達率을 받았다. 唐 顯慶(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邢國公 蘇定方을 보내 그 나라를 평정하자,287) 그 임 금(실제는 태자) 扶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다. 당에서는 이들을 萬年縣에288) 예속시 켰다. 麟德(664~665) 초년에 人望을 얻어 折衝都尉를289) 제수받고 熊津城에 鎭守하니 수많 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290) 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忠武將軍 行帶方州長史를291) 286) 左丘明이 하였으니 : 論語 公冶長에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란 구절이 나온다. 287) 평정하자 : 이 이후 흑치상지의 백제부흥군 활동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660년 의자왕이 항복할 때 흑치상지도 함께 항복하였지만, 나당연합군이 노략질하고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는 것 을 보고 임존성을 거점으로 백제부흥운동의 일으켰다. 이후 주류성이 함락된 663년 9월 別部將 沙 相如와 함께 당군에 항복하였고, 오히려 당군의 선봉이 되어 임존성의 백제부흥군을 궤멸시 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資治通鑑 권201 高宗 龍朔 3年 9月). 288) 萬年縣 : 당나라 京兆府 京兆郡의 領縣이다. 지금의 西安市 남쪽에 해당한다. 원래 수나라의 大 興縣이었으나 당 武德 원년(618)에 만년현으로 개칭하였다( 舊唐書 권38 지리지 참조). 한편, 舊唐書 권4에 의하면 麟德 원년(664) 8월에 만년현에 죄수를 내려주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때 흑치상지가 이곳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89) 折衝都尉 : 16衛에 소속되어 있었던 府兵은 內府와 外府로 나뉘어 있었는데, 외부가 절충부에 해당한다. 절충도위는 절충부의 규모에 따라 달라서 정4품상에서 정5품하에 이르렀다. 新唐 書 권49 상 百官志 諸衛折衝都尉府 참조. 290) 麟德 기뻐하였다 : 이 묘지명에는 麟德初 로 되어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664년 부여융이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백제로 돌아올 때 흑치상지도 함께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이도학,

351 700 碑文 701 더하였다. 얼마 안 있어 使持節, 沙泮州292)諸軍事, 沙泮州刺史로 승진하고 上柱國을293) 제 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 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 수받았다. 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 [부군은]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 294) 짊을 추구하여 간사함을 기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상주 겸 熊津都督府司馬로 승 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없애는 데에도 어긋남이 없었 진시켰고, 浮陽郡295) 開國公과 食邑 2천호를 더하여 봉하였다. 이때 좋은 평판으로 物望 다. 또한 五校의298) 커다란 벼리였고, 三軍의 으뜸가는 본보기가 되어, 병사들은 감히 그 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 날로 높아졌다. 마침 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蘭河에서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 아랫사람이라고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高宗이 매번 그 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左領軍將軍 296)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河道經略副使로 삼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있었다. 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이 있는 士君子로 대우하였다. [부군은] 西道(靑海 지방)에 있을 때 큰 공훈을 세웠다. 이때 中書令 李敬玄이299) 河源道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힘으로는 능히 經略大使였는데, 모든 군사들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그러나] 水軍大使, 尙書 劉審禮가 무거운 [성문의] 빗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나297)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혜로는 이미 패하여 죽자,300)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로움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 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하였고,301) [이로 인해] 左 武衛將軍으로 승진하였고,302) 이후 이경현을 대신하여 大使가 되었다.303) 이는 그에 대한 1996,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80~181쪽). 한편 이 구절은 묘지명의 鎭熊津城大 爲士衆所悅 을 해석한 것인데, 이러한 해석과 달리 鎭熊津城大 를 職名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88쪽). 291) 帶方州 : 본래 백제의 竹軍城으로 당이 백제 옛 땅에 설치한 7개 州의 하나이다( 권 37 참조). 292) 沙泮州 : 본래 백제의 尸伊城으로 당이 백제 옛 땅에 설치한 7개 주의 하나이다( 권 37 참조). 293) 上柱國 : 당나라 勳官으로서 제1급에 해당한다. 294) 左領軍將軍 : 당 16衛의 하나인 左領軍衛의 將軍을 말한다. 좌령군장군은 漢族에게 수여되기도 하였지만, 당에 투항한 흑치상지와 같은 이민족 수령에게 종종 수여된 군직이었다. 당시 흑치상 지는 좌령군의 員外將軍 을 수여받았다(劉琴麗, 2006, 唐代武官選任制度初探, 社會科學文 獻出版社, 188~189쪽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88쪽). 295) 浮陽郡 : 河北道 滄州의 속현인 淸池縣의 옛 이름이다. 원래 漢나라 때에 浮陽縣을 두어 渤海郡 의 治所로 삼았었으나 수나라 때에 청지현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하북성 滄州市 동남쪽 4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296) 마침 벌어져 : 고종 儀鳳 3년(678) 9월에 지금의 티벳과 靑海 지역의 吐蕃이 당을 침공하 였고, 河道行軍大總管 中書令 李敬玄과 工部尙書 右衛大將軍 劉審禮를 따라 흑치상지도 함께 출격하였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89쪽). 297) 翹關 : 성문의 빗장을 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힘이 센 것을 비유한다. 측천무후 때에는 武科 시험 과목의 하나였다( 新唐書 권44 選擧志 上 참조). 298) 五校 : 5敎로서 5倫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299) 李敬玄(615~682) : 儀鳳 원년(676)에 劉仁軌를 대신하여 中書令이 되었다. 儀鳳 3년(678)에 吐 蕃이 쳐들어오자 高宗이 그를 河道行軍大總管 겸 安撫大使로 삼아 토번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해 이 일로 좌천되었다( 舊唐書 및 新唐書 이경현 열전 참조). 그런데 이 묘지에서는 河源道經略大使로 적혀 있다. 300) 劉審禮 죽자 : 당시 副將 劉審禮는 前軍을 거느리고 깊숙이 들어가 濠所란 곳에 주둔해 있 다가 공격을 받았지만, 대총관 이경현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 구원하지 못해 사로잡혀 죽었다(정 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89쪽). 301) 부군이 극복하였고 : 대총관 이경현은 유심례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달아 나 州 서남쪽에 위치한 승풍령이란 고갯마루에 주둔하였다. 토번군이 높은 산언덕에 주둔하며 압박을 가하자 겨우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黑齒常之가 홀로 500인의 결사대를 이끌 고 야밤을 틈타 적의 군영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토번군은 어지럽게 흩어지고 장수 跋地設은 병 사들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에 이경현은 남은 군사들을 겨우 수습하여 무사히 선주로 귀환할 수 있었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89~290쪽). 302) 左武衛將軍으로 승진하였고 : 고종은 흑치상지의 계략에 탄복하여 儀鳳 3년(678) 9월 좌무위장 군 檢校 左羽林軍을 제수해주고 금 500냥과 비단 500필을 하사하여 河源軍副使에 임명해주었 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90쪽). 左武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로, 將軍은 大將軍 다음의 지위로서 종3품에 해당한다. 303) 大使가 되었다 : 고종 永隆 원년(680) 7월에 토번의 贊婆와 素和貴 등이 3만 군대를 이끌고 하

352 702 碑文 703 미친 도적으로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 않았고, 徐敬業은309)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 풍문에 따른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도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304) 經書를 베개 삼았고, 祭遵과 305)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다.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부군은] 남쪽으로 淮陰과 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 사를310) 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쪘다.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도 사라 이에 천자가 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 졌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 상하고 밝아,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추구하였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 306) 리하여 左鷹揚衛大將軍 燕然道副大摠管으로 벼슬을 옮겼다. 307) 垂拱(685~688) 말년에 天命이 바야흐로 바뀌려 하였다. 도다!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는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다. 더욱이 여러 차 308) [그러나] 突厥의 骨卒祿은 원을 공격하기 위해 靑海 지역의 良非川에 주둔하였다. 흑치상지는 정예기병 3천을 거느리고 적 의 군영을 야습하여 수급 2천을 베고 양과 말 수만 마리를 빼앗았고, 찬파 등은 單騎로 달아났 다. 고종은 흑치상지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인정하여 河源軍經略大使에 임명하였다. 이후 흑치상 지는 주변에 봉수 70여 곳을 설치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둔전 5천여 頃을 개간하여 매년 5백여 만 石을 수확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하원군의 군사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러한 면은 흑치상지가 탁월한 전투능력뿐 아니라 군대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재능까지 두루 갖추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고종 개요 원년(681) 5월에 찬파 등이 다시 양비천 일대에 주둔하였는 데, 이번에도 흑치상지가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 기습하여 격파하고 군량까지 빼앗아 돌아왔다. 흑치상지가 하원군에서 근무하던 7년(678~684) 동안 토번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여 감히 변방 의 우환이 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흑치상지는 684년 좌무위대장군을 제수받았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90쪽). 304) 祭遵(?~33) : 後漢人으로 어려서부터 經書를 좋아하였다. 光武帝를 따라 河北을 평정하여 이 공으로 征虜將軍이 되었다. 그는 전쟁 중이라도 俎豆 즉 祭器를 잊지 않을 정도로 禮儀를 중시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권20 祭遵傳 참조). 305) 杜預(222~284) : 西晉 杜陵人으로, 박학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는 太康 원년(280) 정월에 吳 의 江陵을 공격할 적에 8백 명의 기습 군대를 보내어 밤에 강을 건너게 한 뒤, 樂鄕을 습격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巴山에 불을 질러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 晋書 권34 두예전 참조). 306) 左鷹揚衛大將軍 : 고종 개요 원년(681) 5월에 찬파 등이 다시 양비천 일대에 주둔하였는데, 이 번에도 흑치상지가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 기습하여 격파하고 군량까지 빼앗아 돌아왔다. 흑치 상지가 하원군에서 근무하던 7년(678~684) 동안 토번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여 감히 변방의 우 환이 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흑치상지는 684년 左鷹揚衛大將軍을 제수받았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90쪽). 묘지명의 左鷹揚衛 는 당나라 16衛의 하나로서 원 래 左武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대 장군은 정3품이다. 307) 垂拱 바뀌려 하였다 : 683년 12월에 高宗이 죽고 中宗이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2월에 측천 무후가 중종을 폐위하고 전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서 천명이 장차 바뀌려 하였다는 것은 아마 이 를 지칭하는 것 같다. 308) 骨卒祿(?~693) : 骨 祿 또는 骨篤祿이라고도 한다. 東突厥의 可汗으로서 당나라를 자주 침범 하였고 거란 九姓鐵勒 등을 공격하였다. 垂拱 3년(687)에 골졸록이 공격해오자 흑치상지가 이 를 물리쳤다. 그가 죽은 뒤에 동생 默 이 왕이 되었다( 舊唐書 권194 상 돌궐전 및 新唐書 권215 상 돌궐전 참조). 309) 徐敬業(?~684) : 원래 李敬業으로 李勣의 손자이다. 光宅 원년(684) 9월에 柳州司馬로 좌천되 자 揚州에서 난을 일으켜 측천무후에 대항하였으다. 이후 세력을 크게 떨쳐 무리가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측천무후는 左玉鈐衛大將軍 李孝逸을 揚州道大總管에 임명하여 30만 대군을 이 끌고 그를 격파하도록 하였고, 그의 조상들의 관작을 삭탈하여 본래의 성인 徐씨로 되돌렸다. 이때 左鷹揚衛大將軍 흑치상지를 江南道大總管에 임명하여 江南 지방의 군사를 이끌고 이효일 을 돕도록 하였다. 결국 서경업은 패하여 海陵 부근으로 도망하였으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 다.( 舊唐書 권67 이경업전 및 新唐書 권93 이경업전 참조). 이후 무측천은 酷吏들을 기용하 여 공포정치를 행하였는데, 훗날 흑치상지가 몰락하는 것도 이 혹리들 때문이었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91쪽). 310) 오랑캐 군사를 : 묘지명의 頭 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頭는 7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이름으로 오랑캐와 獄事를 상징한다. 별이 마치 뛰는 것처럼 요동을 치면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일 어날 징조라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西宮 참조). 682년에 부활한 북방의 돌궐은 계속해서 당의 변경을 위협하였고, 686년에 당의 북변을 침공하였다. 무측천은 좌응양위대장군 흑치상지 에게 막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기병 200여 기를 이끌고 돌격해 돌궐병 3천명을 격파하였다. 해가 지자 돌궐의 대군이 야습하였다. 흑치상지는 부하들에게 몰래 나무를 벌목하여 군영 안에 불을 피워 烽燧와 같게 하였다. 때마침 동남쪽에서 큰 바람이 일어나고 돌궐병은 당의 구원병이 호응한다고 여겨 놀라 밤중에 달아났다. 이 공으로 흑치상지는 燕國公과 食邑 3천호에 봉해졌다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91쪽).

353 704 碑文 705 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가히 [옛 관직에] 兼하여 國公(燕國 을 총괄하여 공훈을 떨쳤도다. [그런데] 지난번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公)311)과 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또 [옛 관직을] 고쳐 右武威衛大將軍 神武道經略大 갇혀 심문을 받았고,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의심받았던 죄는 제대로 판 使를 제수하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 고 하였다. 별되지 못하였었는데,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 없어, 이에 [부군은]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 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없도다. 마땅히 분 들을 전멸시킴으로써,312) 오랑캐는 더 이상 남쪽에서 말을 목축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더욱 총애한 북쪽으로 가야하는 중국 사신들의 원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靈州와 夏州는313) 요충지로서 다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들고자 하노라. 이에 左玉鈐衛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다 大將軍으로 추증함이 옳으며, 아울러 勳과 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노라. 그 아들 游擊將 시 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 하였다. 軍316) 行蘭州廣武鎭將 上柱國 俊은 어려서부터 집안을 각별히 하였고, 누차 진실한 충성 [그러나] 마침내 재앙이 여러 惡에서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 을 드러냈으며, 위급함과 죽음도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 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 다. 의당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이에 右豹韜衛 다. 이에 下獄되었다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 고 하였다. 翊府左郞將을317) 제수함이 마땅하며, 勳과 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 고, 애처로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나이 60세였다. 아아, 聖曆 2년(699) 壹月318) 22日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燕國公의 아들 俊이 맏아들 俊은314)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 아버지를 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 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에 필요한 휘 다. 또 오랑캐의 땅에서 [그들과 싸워]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여, 천자의 使節로 투신하였 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 고, 자못 빈번히 충성스러움을 드러내 여러 번 공명을 떨쳤다. 서 살피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邙山의 남쪽, 官道의 북쪽에 받 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응어리져 있었던 부분을 이제야 [천자가] 바르게 살피시고, 制를 내려 말하기를, 故人이 된 左武威衛大將軍 檢校 左羽林衛315) 上柱國 燕國公 黑齒常 之는 일찍이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軍陳에서 영예를 두루 쌓았으며, 누차 군대의 軍律 311) [옛 관직에] 兼하여 國公 : 묘지명의 兼國公 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이 兼을 誤寫로 보아 燕 國公으로 추독하는 견해도 있다(송기호, 1992,`흑치상지 묘지명a, 562쪽). 312) 전멸시킴으로써 : 687년 2월 돌궐의 일테리쉬 카간(즉 쿠틀룩)과 阿史德元珍(즉 톤유쿡)이 유주 의 창평을 침략하자, 무측천은 이번에도 좌응양위대장군 흑치상지에게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같은 해 7월 쿠틀룩과 톤유쿡이 朔州를 침구하자 무측천이 흑치상지를 燕然道大總管에 임명하고 말갈 추장이었던 좌응양위대장군 李多祚와 王九彦을 부총관에 임명하여 출전하게 하 였다. 흑치상지가 이끄는 당군이 황화퇴에서 돌궐병을 대파하고 계속하여 40여 리를 추구하자, 돌궐은 고비사막 이북으로 흩어져 달아났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292쪽). 313) 靈州와 夏州 : 모두 西安 북쪽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다. 314) 맏아들 俊 : 黑齒俊을 말한다. 그에 대해서는 이 책의`흑치준 묘지명a을 참조바람. 315) 檢校左羽林衛 : 묘지명의 표제에는 檢校左羽林軍으로 되어 있으므로, 衛자는 軍의 잘못이다. 316) 游擊將軍 : 당의 제도에서 종5품하의 무산관이다. 317) 右豹韜衛翊府左郞將 : 右豹韜衛에 소속되었던 府兵의 하나인 翊府의 左郞將을 의미한다. 右豹韜 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로서 원래 右威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 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에는 親府 1, 勳府 2, 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을 맡 고 있었고 그 아래에 좌 우의 郞將이 있었으니, 좌 우 낭장은 정5품상에 해당하였다. 318) 壹月 : 전통시대에는 1월을 正月 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묘지명에는 壹月 로 기록되 어 있다. 당시 唐에서는 則天武后가 새롭게 周를 세우고 曆도 周曆을 채택하여, 永昌 元年(689) 11月(子月)을 載初元年 正月로, 12월을 臘月로, 다음해 正月을 壹月(一月)로 변경하였다. 이후 무측천이 몰각하는 久視 元年(700) 10월까지의 기간 동안, 기존의 11月은 正月로, 12월은 臘月 로, 正月은 一月로 변경하였다( 舊唐書 권6 本紀 6 則天武后 載初 元年 및 久視 元年). 이 기간 에 작성된 중국의 古文書에도 하나같이 기존의 正月은 모두 一月 이나 壹月 로 기록되어 있다 (윤선태, 2000,`신라 통일기 왕실의 촌락지배-신라 고문서와 목간의 분석을 중심으로-a, 서울 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2쪽). 이 묘지명의 壹月 표기도 그와 관련된 것이며, 이를 통해 이 묘지가 699년 2월 17일 移葬할 무렵에 만들어졌음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354 706 들어 移葬하였다. 이는 예에 맞는 것이다. 생각해보건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 간 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 碑文 707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손 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321)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參 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五岳을322) 말하는 사람은 天台山이323)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한다. 四瀆324) 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 을 바라보는 사람도 雲洲에325)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삼가 듣건대 金日 는326)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百里奚327)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 다.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노라. 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을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다 아니할 것인가. 아예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마치 봄바람 불어오듯이 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 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328) 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 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 그를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 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 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 많은 사람도 그로 인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사용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 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319) 인하여 느린 말이 그가 멀리 [뒤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는 마음이 바르고 재간이 있었고, 나는 듯이 글을 쓰니 쌍벽을320)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도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 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 만 본받을 바가 아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라 할만하다.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319) 빠른 말 : 묘지명의 는 중국 북방에서 난다는 빠른 말을 말한다. 320) 쌍벽 : 묘지명의 雙璧은 원래 한 쌍의 구슬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 킨다. 北魏 때에 陸暐가 동생 恭之와 함께 유명하였는데, 洛陽令 賈楨이 그 형제를 보고 탄복하 여 내가 늙어서 다시 쌍벽을 보게 되었다. 고 하였다( 魏書 권40 陸凱傳 참조). 321) 부인 마치겠는가 : 則天武后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으나, 집 안에 서 죽지 않고 밖에서 의롭게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묘지가 만들어진 699년은 아직도 측천무후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로 그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송기호, 1992,`흑치상지 묘지명a, 562쪽). 322) 五岳(五嶽) : 중국에서 국가의 鎭으로 존숭된 5개의 명산. 천자가 이곳에 순행하기도 하고 제사 도 지냈다. 당나라 때의 5악은 東嶽 岱山, 南嶽 衡山, 中嶽 嵩山, 西嶽 華山, 北嶽 恒山이었다 舊唐書 권24 ( 禮儀志 참조). 323) 天台山 : 중국 浙江省 天台縣에 있는 天台山. 천태종의 발상지이다. 324) 四瀆 : 4개의 큰 강으로 역시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나라 때의 4독은 東瀆 大淮, 南 瀆 大江, 西瀆 大河, 北瀆 大濟였다( 舊唐書 권24 禮儀志 참조). 325) 雲洲 : 중국 江西省에 있는 섬 이름이다. 明一統志 에 의하면 당나라 賈崇이 虔州刺史로 부임 하여 이곳에 배를 타고 갔을 때 5색 구름이 섬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326) 金日 (기원전 134~86) : 원래 흉노 休屠王의 태자였는데 한나라에 투항하여 武帝에게 중용되 었다( 漢書 권68 김일제 열전 참조). 327) 百里奚 :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 百里奚를 이른다. 百里溪라고도 한다. 원래 虞人이었는데 나중 에 秦 穆公이 그가 현명한 것을 알고 중용하였다. 由余등과 함께 목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었다 史記 권5 ( 秦本紀 참조). 328) 소리와 광채가 이루었도다 : 左傳 桓公 2년조에 夫德儉而有度 登降有數 文物以紀之 聲 明以發之 以臨照百官 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文物의 文은 옷의 문양을 가리키고, 物은 옷에 오색으로 그려 놓은 물건 그림을 가리킨다. 또 聲明의 聲은 방울과 같은 소리로 임금

355 708 碑文 709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을 가린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 公의 이름은 俊이니, 즉 唐나라 左領軍衛大將軍 燕國公의332) 아들이다. [그 조상들은] 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 에서 그 아름다움 바닷가 땅에 서로 나뉘어져 나라를 이루었는데, 玄虛가333) 지은`海賦a 리로다. 에서도 을 볼 수 있다. 늪지가 많은 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칭하매, 太沖이334) 지은`三都賦a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리에 걸쳐 公과 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그 소중함을 얻을 수 있다.335) 먼 백제의 땅에서 種落을 이루며 번창하였고, 중국에 들어 이미 떨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와서도 누차 벼슬을 하였구나.336)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니 해와 달을 그린 깃발에 그의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명성이 걸렸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니 연대순으로 적은 역사책에 그의 덕이 기록되었 일도 있구나.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 속에는 빛이 사 도다.337) 라지게 되었구나. 증조부는 이름이 加亥로서 본국에서 刺史를 역임하였고,338) 할아버지는 沙子로서 본국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四海가 그의 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 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 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흑치준 묘지명(黑齒俊 墓誌銘)329) 大唐의 故人 右金吾衛 守翊府中郞將330) 上柱國331) 黑齒府君 墓誌銘 및 序文. 의 德音을 나타낸 것을 가리키고, 明은 해와 달을 그려 하늘의 광명을 나타낸 것을 가리킨다. 329) 黑齒俊 墓誌銘 : 이 묘지는 黑齒常之의 묘지와 함께 출토되었다(이 책의`흑치상지 묘지명a을 참조바람). 묘지에는 가로와 세로의 罫線을 넣었고, 행마다 26자씩 전체 26행으로 모두 642자 이다. 탁본의 상태로 볼 때 묘지의 크기는 길이 53cm, 너비 52cm이다. 글씨체는 楷書이다. 이 묘지에는 글을 지은 사람과 글을 쓴 사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黑齒常之 墓誌銘a과 비교해보 면 그의 家系 조상들의 人名과 職名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異名同人이라고 생각 된다. 흑지준의 생애에 대한 별도의 문헌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묘지명은 백제유민 들의 활동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흑치준은 676년 당에서 흑치상지의 맏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흑치상지의 나이는 47세였다. 이는 흑치상지의 백제 및 당에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한편`흑치상지 묘지명a에는 맏아들 (흑치)준이 어 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또 오랑캐의 땅에서 (그들과 싸워)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여, 천자의 使節로 투신하였고, 자못 빈번히 충성스러움을 드러내 여러 번 공명을 떨쳤다. 는 흑치준의 활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이 책의`흑치상지 묘지명a을 참조바람),`흑치준 묘지명a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역주에는 송기호, 1992,`黑齒俊 墓誌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330) 右金吾衛 守翊府中郞將 : 右金吾衛에 소속되었던 府兵의 하나인 翊府의 中郞將을 의미한다. 右 金吾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이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 에는 親府 1, 勳府 2, 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 을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4품하에 해당하였다. 守는 行守法에 의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품계가 관직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守 자를 붙였다. 331) 上柱國 : 당나라 때 제일 높은 勳官이다. 332) 左領軍衛大將軍 燕國公: 黑齒常之를 말한다. 이 책의`흑치상지 묘지명a을 참조바람. 333) 玄虛 : 西晋 廣川人인 木華의 字이다. 그는 일찍이 楊駿府의 主簿가 되었고, 문장이 아주 미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文選 권12에 海賦 1편이 실려 있다. 334) 太沖 : 晋나라 臨淄人인 左思의 字이다. 그는 용모나 언변이 뛰어나지 못하였으나 문장은 아주 훌륭하였다고 한다. 처음에`齊都賦a를 1년만에 지었다가 다시`三都賦a를 10년만에 지었는데, 사람들이 서로 베끼려고 하여 낙양에서 종이가 귀하게 되었다고 한다( 晉書 권92 左思傳 및 文選 권4 5 6 三都賦 참조). 335) 바닷가 땅에 얻을 수 있다 : 이 구절은 아마도 흑치준의 집안의 민족성(ethnicity)을 표현 한 대목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백제나 그 이전 마한의 여러 소국들에 대한 묘사로 이해된다. 이 러한 묘지명의 내용으로 볼 때, 흑치준은 당에서 태어났지만, 흑치씨의 淵源인 백제에 대한 민 족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336) 種落을 하였구나 ; 이 구절은 백제에서 흑치씨 집안의 위상과 번창, 그리고 이후 당에 항복 한 黑齒常之의 활동을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337) 공을 기록되었도다 : 이 구절은 흑치준 그 자신에 대한 평가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338) 증조부는 역임하였고 :`黑齒常之 墓誌銘a에는 이름이 德顯이고 官이 達率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어, 흑치준 묘지명과 차이가 있다. 이름이 서로 다른 것은 아마도 한자 표기로 보아 德顯이 중국식 이름이고 加亥는 백제식 이름인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송기호, 1992,`흑치준 묘지명a, 569쪽).

356 710 碑文 711 에서 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339) 이들은 모두 빼어난 荊山의340) 玉과 같았고, 蔚浦에서 진 리면서 즐겼다. 이런 까닭으로 먼 異域에서 공을 세우려는345) 원대한 계획을 품었으며, 군 주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해 뜨는 동방에서 출세한 집안으로, 풍속을 교화하여 크게 대의 進退 攻守를 자유자재로 하는346) 기묘한 기술이 뛰어났다. 행하였도다. 머나먼 하늘 끝에서 仙署를 어루만지니 臺가 때맞추어 질서가 잡혔다. 아버지는 常之로서, 당나라의 左武衛大將軍 上柱國 燕國公이 되었고, 左領軍衛大將軍 스무 살의 나이에 別奏로서347) 梁王348)을 따라 西道로 종군하였다.349) 이에 軍功을 세워 游擊將軍에350) 제수되었고, 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351)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右金吾衛翊府 에 추증되었다. 그의 재주는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그의 행동은 훌륭한 씨 족들 중에서도 빛이 났다. 공훈은 천지를 덮었으니 仲孺와341) 같이 장군을 맡았었고, 포상 은 山河에 무성하였으니 邵奭과342) 같이 燕國에 봉해졌었다. 죽어서도 능히 그러하였으니 그를 기려 추증함에 영예가 가득하였다. 公은 장군의 가문에서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武略을 품었다. 陶謙처럼343) 어려서 놀 때에는 깃발을 펼치면서 놀았고, 李廣처럼344)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軍陣을 그 339) 할아버지는 역임하였다 :`흑치상지 묘지명a에는 이름이 沙次이고 관이 達率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어, 흑치준 묘지명과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표기상의 차이에 불 과할 뿐 異名同人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흑치씨 조상들이 역임한 벼슬에 대해서도`黑齒常之 墓誌銘a에서 모두 達率을 역임하였고, 중국의 兵部尙書와 같다고 하였으나,`黑齒俊 墓誌銘a에 서는 증조부는 刺史, 할아버지는 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제의 관 직 관등 그리고 양자의 관계 등에 대해 기존의 기록과는 다른 점들이 보이므로 장차 검토되어 야 할 문제이다(송기호, 1992,`흑치준 묘지명a, 569쪽). 340) 荊山 : 卞和가 玉을 얻은 곳이라고 하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형산의 옥 은 이 곳에서 나온 옥을 이르지만, 전하여 賢良한 사람, 곧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341) 仲孺 : 漢나라 潁陰人 灌夫(?~B.C.131)의 字이다. 그는 吳 楚의 7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 버지와 함께 종군하였는데, 아버지가 전사하자 군법에 따라 喪歸하지 않고 吳나라 군대를 무찔 러 원수를 갚았다. 이 공으로 中郞將에 임명되었다( 史記 권107 관부전 및 漢書 권52 관부전 참조). 342) 邵奭 : 邵公 召公 召康公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奭이고 시호는 康이다. 일찍이 武王을 도와 商을 멸망시켰다. 그의 아들이 燕國에 봉해졌었기 때문에 그는 명목상 연국의 시조가 되었다. 343) 陶謙(132~194) : 後漢 말기 丹陽人으로 字는 恭祖이다. 吳書 에 의하면, 14살 때에 비단을 꿰 매서 幡을 만들고 竹馬를 타고 놀았는데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고 한다( 後漢書 권73 도겸전 및 三國志 권8 도겸전 참조. 특히 삼국지 의 도겸에 관한 註를 참조 바람). 344) 李廣(?~B.C.119) : 전한 시대의 名將. 文帝 때에 흉노를 쳐서 공을 세웠고, 景帝 武帝 때에도 흉노가 그를 무서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가리켜 飛將軍 이라 불렀다. 그는 상을 받 으면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고, 다른 사람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활을 잘 쏘 았다. 또한 어눌하여 말을 적게 하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땅에 그림을 그려 軍陣을 만 들고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史記 권109 이광전 및 漢書 권54 이광전 참조). 345) 異域에서 세우려는 : 묘지명의 燕鳥 을 해석한 것이다. 이는 燕 虎頸 또는 燕 虎頭와 같 은 의미로, 후한 班超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張騫과 같이 먼 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封侯가 되는 相을 가리킨다. 346) 進退 하는 : 묘지명의 猿臂을 해석한 것이다. 이는 猿臂之勢를 이르는 것으로, 군대의 진 퇴 공수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을 가리킨다. 347) 別奏 : 별주는 각 軍 鎭의 大使와 副使 이하 관원이 人과 함께 두는 使人을 말한다. 대사 등 이 개인적 친분에 따라 임용한다( 唐六典 권5 兵部郞中). 즉 고위 군장의 전속 비서와 같은 존 재이다. 별주에는 관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었지만, 이후 공훈으로 游擊將軍에 제 수된 것으로 보아 별주였을 당시 흑치준은 이미 관품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종 開元 년 간에는 별주 출신이 절도사에까지 오르는 예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별주가 출세의 통 로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3~314쪽). 348) 梁王 : 이 시기에 양왕에 봉해졌던 인물은 측천무후의 조카였던 武三思(?~707)밖에 없으므로 舊唐書 권183 ( 무삼사전 및 新唐書 권206 무삼사전 참조), 이 묘지명의 양왕은 그를 가리킨 다고 이해한 견해가 있다(송기호, 1992,`흑치준 묘지명a, 572~573쪽). 그런데 흑치준이 20세 가 된 해는 무측천 證聖 원년(695)이지만, 이 해에 무삼사가 출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다. 그 대신 같은 해 正月 王孝傑이 朔方軍行軍總管에 임명되어 동돌궐과 싸우기 위해 출전하였 고, 7월에는 肅邊道行軍大總管에 임명되어 토번과 싸웠던 것이 보인다. 반면 양왕 무삼사의 경 우에는 다음 해인 만세통천 원년(696) 7월에 楡關道按撫大使에 임명되어 거란인 이진충의 반란 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서방으로는 왕효걸을 따라 진출하였거나, 아 니면 그 다음해 무삼사를 따라 이진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도학, 1996, 백제 흑치상지 평전, 253쪽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2~313 쪽). 349) 스무 살 종군하였다 :`흑치상지 묘지명a에 맏아들 (흑치)준이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 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또 오랑캐의 땅에서 (그들과 싸워) 목숨 바칠 것 을 맹세하여, 천자의 使節로 투신하였고, 자못 빈번히 충성스러움을 드러내 여러 번 공명을 떨 쳤다. 는 대목이 있는데(이 책의`흑치상지 묘지명a을 참조바람), 아마도 이 구절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57 712 碑文 中郞將 上柱國으로352) 자리를 옮겼다. 713 이 돌아가게 되니 조정에 있는 사람이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슬퍼하고 아깝게 여 높이 구름에 잇닿아 있는 누각을 밟았고, 고개 숙여 가을의 수렵 놀이를 따랐다. 晉나 라 때의 아름다운 담비 꼬리를 꽂았고,353) 漢나라 때의 수레와 의복을354) 엄숙히 갖추었 355) 겼다. 그런즉 神龍 2년 景午年357) 8월, 초하루 壬寅(壬申)日,358) 13일에 北邙山 언덕에 장 례를 치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西漢의 金日 와 같은 영광을 향유하고 楚나라의 슬픈 상여꾼 노래 소리 길 따라 이어지고 周나라의 퉁소 소리 길게 빼는 가운 자 하였으나, 어찌 重病이356) 닥칠 줄 알았겠는가! 얼마 뒤 북망산에 오르는 대열을 따르 데, 무덤 속 광중을 문득 열어 관을 넣고 급히 닫기에 이르렀구나. 땅을 높여 봉토 쌓기를 게 되었으니, 神龍 2년(706) 5월 23일에 병환으로 洛陽縣 從善坊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이미 끝내고, 무덤가에 심은 비취색 잣나무가 바야흐로 푸른데, 이제 나이가 31세였다. 하고자 하니, 비석의 글자가 마치 황금에 새긴 것과 같기를 바라노라. 명문을 다음과 같 다. 바야흐로 7대에 걸쳐 경사스러움을 전하여 아아! 슬프도다. 온 장안에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온 나라가 병들어 초췌하듯 하였도 玉에 餘恨을 기록 이 짓는다. 다. 생각건대, 공은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맹렬하였으며, 재능과 도량이 크고 깊었다. 비 아아, 堯 임금은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니, 頹當이359) 쓰이게 되었고 록 더할 나위없는 최상의 공을 세웠고, 힘들여 싸우면서 전장에서 고생하였지만, 불운하 侯가360) 벼슬을 얻었구나. 西戎의 외로운 이고 東夷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 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제후에 봉해지지도 못하였다. 갑자기 현량한 사람 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여기에 그의 조그마한 착한 일들을 기록해두노라. 이 것이 첫째이다. 착한 일을 기록함은 무엇을 이름인가? 갓을 쓰고 갓끈을 매게 되니, 충성스러움으로 업 350) 游擊將軍 : 당의 제도에서 종5품하의 무산관이다. 351) 右豹韜衛翊府左郞將 : 右豹韜衛에 소속되었던 府兵의 하나인 翊府의 左郞將을 의미한다. 右豹韜 衛는 당나라 16衛의 하나로서, 원래 右威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에는 親府 1, 勳府 2, 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을 맡 고 있었고, 그 아래에 좌 우의 郞將이 있었으니, 이들은 정5품상에 해당하였다.`黑齒常之 묘 지명a에 의하면, 이 관직은 聖曆 원년(698) 아버지 흑치상지에 대한 누명이 벗겨진 복권조치와 함께 무측천에 의해 제수된 것으로 制書에 기록되어 있다. 352) 右金吾衛翊府中郞將 上柱國 : 右金吾衛翊府中郞將은 정4품하의 무관직이고, 上柱國은 2품의 후 관이다. 353) 담비 꼬리 : 漢나라 때 侍中 常侍의 冠에 담비 꼬리를 꽂고, 금으로 만든 장식을 달고, 또 매미 를 붙여 장식을 하였다. 따라서 담비 꼬리를 꽂았다는 말은 흑치준이 높은 지위에 올랐음을 은 유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354) 수레와 의복 : 수레와 의복은 천자가 공신에게 내려주는 물품들이다. 355) 7대에 전하여 : 前漢의 金日 가 武帝 때에 侍中 駙馬都尉 光祿大夫를 역임하였는데, 그 후손들도 7대에 걸쳐 모두 內侍의 近臣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후대에는 여러 대에 걸쳐 顯貴해 진 것을 찬양하는 문구로 자주 사용되었다. 356) 重病 : 묘지명의 二 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二 는 질병 병마를 가리킨다. 춘추시대 晉나 라 景公이 꿈속에서 질병이 두 아이로 변하여 심장과 명치 사이에 숨은 것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전하여 침이나 약으로 고치지 못할 중병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적을 이루었고,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을 떨쳤도다.361) 미쁘구나! 아버지여, 맑고 곧은 심성 을 가지는데 겸손히 힘썼도다. 효성스럽구나! 아들이여, 아버지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 았구나. 이것이 둘째이다. 그 명성이란 무엇인가? 장군 가문에서 무장의 덕을 이어받았고, 성 밖에서 장군으로서의362) 357) 景午年 : 丙午年을 가리킨다. 左傳 昭公 17년조에 의하면, 丙과 午가 모두 火에 해당하므로 병 오의 간지를 가진 때에 火氣가 가장 勝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이를 피하기 위하여 景午로 바꾸 어 쓴 것이라고 한다(龐朴,` 五月丙午 與 正月丁亥 a, 文物 을 참조 바람). 한편 이와 는 달리 당의 高祖인 李淵의 아버지 이름이 李昞이어서 이를 避諱하기 위해 丙을 景으로 고쳐 썼다는 견해도 있다. 358) 壬寅(壬申)日 : 706년 8월 초하루는 壬寅이 아니고 壬申이다. 임인이 초하루인 때는 7월과 9월 이다. 달이 잘못되었던지 날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359) 頹當 : 漢 7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장군이 되었던 사람이다. 360) 侯 : 漢 무제 때 金日 를 이른다. 侯는 莽何羅를 토벌한 공으로 내린 작호이다( 漢書 권68 김일제 열전 참조). 361) 이름을 떨쳤도다 : 묘지명에는 楊名 으로 되어 있지만, 문맥으로 보면 揚名 이 옳다고 생각된 다. 아마도 誤寫인 것 같다.

358 714 명을 받들어, 異域에서 공을 세웠도다. 재앙과 반란을 능히 평정하였고, 난리를 피운 적 들을 깨끗이 쓸어버렸으니, 編鍾 소리는 그의 현명함을 기리는 것이고, 그에게 내려준 수 레와 의복은 그의 덕을 드러내는 것이로다. 이것이 셋째이다. 碑文 715 아울러 쓴 序文이다. 君의 諱는 元慶이다. 그 선조는 黃帝의 종족이며, 扶餘와 가까운 族類였다. 옛날 伯氏 와 仲氏로 혈족이 갈라져,367) 海東(東表)을 다스리면서(位居) 형제가 함께 정치하였다. 마 수레와 의복이란 무엇인가? 金吾衛에서 가장 많이 받았으니, 아름답도다! 大夫여, 천자 침내 이 나라가 韓을 신하로 삼았는데,368) [난원경의 선조가] 백성을 다스리는 어려움(難) 의 총애를 이처럼 받았구나. 높이 누각은 구름에 잇대었고, 관에 꽂은 화려한 담비 꼬리 에 을 절묘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難을369) 姓으로 삼았다. 공자(孔丘)가`舜典a 는 거듭 빛났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하여 그 즐거움을 여기에서 누릴 뿐 아니라, 그 응보로 序를 쓰면서 이른바 여러 어려움으로 차례로 그를 시험하였다. 는370) 것이 바로 그 뜻이 경사가 부디 자손에게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이것이 넷째이다. 다. 경사스러움이 이어지지 못해 갑자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여기 대들보가 무너 졌는데도 저기 푸르른 것이 하늘이로다.363) 쑥이 더부룩하게 자란 무덤에는 상여꾼의 노 래 소리 구슬프고, 소나무 심은 무덤길에는 퉁소 소리 울리는데, 밝은 날에 한 번 묻히니, 蒿里(무덤)364) 속에서 영원히 머물 것이로다. 이것이 다섯째이다. 난원경 묘지명(難元慶 墓誌銘)365) 唐나라의 돌아가신 宣威將軍366) 左衛 汾州 淸勝府 折衝都尉 上柱國 難君 墓誌의 銘과 362) 성 밖 장군으로서의 : 묘지명의 分 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는 성 밖이라는 뜻이지만, 外之任 즉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장군의 직책을 가리킨다. 古代에 성 안은 천자가 다스리 고, 성 밖은 장군이 통제하였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권102 馮唐傳에 曰 以內者 寡人 制之 以外者 將軍制之 란 말이 나온다. 363) 저기 하늘이로다 : 묘지명의 彼蒼天者天 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이 구절은 蒼天曷有 極 에서 따온 말인데, 이는 하늘은 반드시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내 리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 364) 蒿里 : 泰山 남쪽의 산 이름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와서 머문다는 곳으로 무덤을 가리키 기도 한다. 365) 難元慶 墓誌銘 : 이 묘지는 1960년 中國 河南省 魯山縣 張店鄕 張飛溝村에서 출토되어 魯山縣 文化館에 收藏되어 있었다. 묘지는 세로 56cm, 가로 56cm, 두께 9cm의 정방형의 靑石에 구양 순체의 단정한 楷書로 正書되어 있으며, 모두 29행으로 1행 당 30자가 새겨져 있다(中國文物硏 究所 河南省文物硏究所(編), 1994, 新中國出土墓誌 河南(壹)上, 文物出版社, 231쪽). 황제를 높이기 위해 띄어쓰기한 부분인 平闕을 제외하면 실제 새겨진 총 글자수는 836자이다. 탁본으 로 볼 때 상 하단에 약간의 훼손이 있으며, 자획이 명확하지 못해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도 있 다. 그리고 원래 이 묘지에는 뚜껑돌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氏家族姓氏,居地考a西安 學術大會 發表文). 한편 난원경 묘지의 찬술시기는 開元 22년(743) 11월 3일이다. 즉 개원 11년(723) 6월 11일에 주인공인 난원경이 61세로 사망하였고, 10년 후인 개원 22년(743) 5월 18일에 부인인 甘氏도 죽어 汝州 魯山縣 東 北原에 合葬을 하게 되었는데, 부인 감씨의 장례일보다 하루 전인 개원 22년(743) 11월 3일에 묘지가 작성되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唐代 墓誌 일반의 그것을 준수하고 있 으며, 撰者와 書者는 미상이다. 이 묘지에는 百濟라는 國名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難氏 가 扶餘 계통임을 밝히고 있고, 후술하지만 삼국사기 의 백제건국신화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 어 있다는 점, 또 그의 선조들이 達率의 관등과 唐의 백제 故地支配와 관련된 관직을 역임했던 점 등으로 보아, 난원경의 出自는 백제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李文基, 2000,`百濟 遺民 難元 慶 墓誌의 紹介a, 경북사학 23). 366) 宣威將軍 : 선위장군은 종4품상의 무산관이다. 367) 伯氏와 갈라져 : 묘지명의 伯仲枝分 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뒤의 兄弟와 대구를 이루 고 있기 때문에 伯仲 은 형제로, 枝分 은 혈족이 갈라진 것으로 보아야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368) 옛날 삼았는데 : 兄弟가 갈라져 다스리다가 결국 韓을 신하로 삼았다는 이 구절은 三國史 記 溫祚王本紀에 기록된 卒本扶餘에서 남하한 沸流와 溫祚 형제가 百濟를 건국하고 결국 馬韓 을 정복했다는 神話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면,`난원경 묘지명a의 이 구절은 삼국사기 에 채록된 백제건국신화의 생성 시점이 백제 당시로 올라갈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난원경 묘지명a에 백제건국 신화가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당으로 망명한 백제 귀족들의 경우 2세대에까지 민족성 (ethnicity)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369) 難 : 韓致奫의 海東繹史 에도 중국문헌에서 확인되는 우리의 歷代 성씨들을 조사하여, 百濟의 姓으로 왕족인 夫餘氏와 眞氏 沙氏 氏 解氏 木氏 燕氏 國氏 氏 등의 大姓八族을 비롯해, 黑齒氏 沙 氏 難氏 등을 열거하고 있다. 특히 難氏는 急就篇姓氏注 에서 인용하였 는데( 海東繹史 권 31 官氏志 2 氏族), 宋代 王應麟의 姓氏急就篇 卷上에서 관련기사가 확인 된다(李文基,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359 716 高祖인371) 는 遼 지역에서372) 벼슬하여 達率의 官이 되었으니, 이는 지금의 宗正卿과 같 碑文 717 을 잘 닦고 문장은 광대하여 국가와 집안에서 모두 현달하였다. 다. 祖父인 汗은 入唐하여373) 熊津州都督府長史가 되었다. 아버지 武는 中大夫로 使持節 君은 어려서376) 총명하고 민첩하여 정밀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윽고 遊擊將軍377) 行 支 州374)諸軍事 守支 州刺史가 되었다가, 忠武將軍 行右衛翊府中郞將으로375) 승진하였 檀州 白檀府378) 右果毅379)을 제수 받았고, 直中書省으로380) 차출되었다. 비록 무관직(雄衛)을381) 다. [조상들은] 모두 어질고 밝으며 식견이 뛰어났고, 정사에는 로 유명하였으며, 덕 담당하였지만, 항상 文軒(문장)에도382) 밝았다.383) 얼마 뒤에 夏州 寧朔府384) 左果毅都尉로385) 370) 여러 어려운 시험하였다 : 虞舜이 庶人이었을 때, 堯는 그가 총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장차 그로 하여금 帝位를 잇게 하고자 하여 하기 어려운 여러 일을 시켜 일일이 시험하였다( 尙書 제 3 舜典 제2 참조). 371) 高祖 : 이 부분의 판독에 대해서는 종래 高祖 라는 견해와(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 難氏家族姓氏,居地考a), 曾祖 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특히 후자는 이 부분의 글자가 高 가 되면 난원경의 가문 내력에서 高祖 다음에 祖가 되어 曾祖가 생략된 문제가 발생하고, 唐代 묘지명의 가문 내력에 일반적으로 曾祖-祖-父가 기록되었다는 점에 기초해, 이 글자를 曾 으 로 추독하였다(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그러나 中國文物硏究所 河南 省文物硏究所(編), 新中國出土墓誌 河南(壹)上, 231쪽에 실린 탁본사진을 보면 이 글자는 상단 부가 훼손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렵지만, 남아있는 하단부의 획은 이 분명하기 때문에, 曾 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으며, 오히려 자획상으로는 高 가 보다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372) 遼 지역 : 묘지명에 仕遼 로 되어 있는데, 이를 기존에는 遼 지역에서 벼슬하여 로 풀이하여 백제의 요서점령이나 백제와 북조의 전투와 연관시켜 해석하거나(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氏家族姓氏,居地考a), 遼를 海東의 이칭으로 이해하고 백제에서 벼슬살이 한 것으로 해 석한 견해가 있다(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373) 入唐하여 : 입당하여 熊津州都督府長史가 되었다는 점에서, 난원경 할아버지 난한의 입당 시기 는 백제가 멸망당한 직후인 660년 9월 義慈王과 여러 王子, 大臣과 將士, 일반 백성 등 약 1만 3 천명이 당의 포로가 되어 입당했던 시점이거나, 그보다 3년 후인 663년 9월 백제부흥군의 무장 항쟁이 실패로 끝난 후 항복한 黑齒常之 사타상여 부여충승 등 부흥운동에 참여했다가 당에 투항했던 존재들이 입당했던 시점으로 좁혀볼 수 있다. 난원경 묘지에 난한이 부흥운동에 참여 했던 관련기록이 없다는 점에 기초해 난한이 660년 9월 백제 멸망 직후 의장왕 등과 함께 포로 로 당에 끌려갔던 것으로 추론하는 견해도 있지만(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 介a),`흑치상지 묘지명a에도 그가 백제부흥운동에 관여하였던 일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 백제에서 난원경 집안의 정치적 위 상은 그 조상의 官歷으로 볼 때, 흑치상지 집안과 매우 유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374) 支 州 : 당이 백제 옛 땅에 설치한 7개 州의 하나로, 9개 縣을 영현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三國 史記 권37 참조). 375) 忠武將軍 行右衛翊府中郞將 : 충무장군은 정4품상의 무산관이고, 우위는 당의 수도에 설치되었 던 16위의 하나이며, 중랑장은 중견간부급의 군장직이다. 376) 어려서 : 묘지명에 의하면 난원경은 開元 11년(723) 6월 28일에 61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므로, 사망 연대에서 역산하면 그의 출생 시점은 백제 멸망 후 약 3년간 지속되어 온 백제의 부흥운동 이 종말을 고하였던 시기인 663년(龍朔 3) 무렵임을 알 수 있다. 단 출생지가 백제인지 혹은 祖 父 혹은 父를 따라 당에 들어와 당에서 태어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청소년기를 당에서 보낸 것은 확실해 보인다(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377) 游擊將軍 : 유격장군이 종5품 하의 武散階인 점을 고려하면 이 관직이 난원경의 初仕職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378) 檀州 白檀府 : 단주(지금의 북경 동북지역)에 설치되었던 折衝府 중 하나이다. 현재 北京 密雲縣 東北 지역이다(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氏家族姓氏,居地考a). 379) 右果毅 : 우과의는 절충부의 수장인 折衝都尉 바로 밑의 무관으로 보다 정확한 명칭은 折衝果毅 이다. 절충부의 등급에 따라 종5품하, 정6품상, 종6품하 등 세 종류의 관품이 있었다(張沛, 2003, 唐折衝府彙考, 三秦出版社, 214쪽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07쪽). 380) 直中書省 : 중서성의 直官을 말한다. 直 은 정규 관원이 아니면서 다른 관청에 差遣되었을 경 우에 칭해지는 직함이다. 당대 내관(중앙관)의 정원은 무관을 포함하여 모두 2,621인이지만, 그 5분의 1에 해당하는 465인이 직관이었다. 당조가 직관제도를 운영한 이유는 경력과 출신에 구 애받지 않고 기술인 등 재능있는 인재를 자유롭게 기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다른 관 부에서 임시로 차출한 직관이 적지 않았다(李錦繡, 1998,`唐代直官制a, 唐代制度史略論稿 中, 國政法大學出版社, 46쪽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08쪽). 따라서 난원 경은 단주 백단부 우과의의 직함 갖고 있는 채로 중서성 직관에 임시로 차출되었을 알 수 있다 (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당시 중서성 직관의 일은 ①明法(법률에 밝은 자), ②能書(글씨를 잘 쓰는 자), ③裝制勅(황제의 제칙을 표구하는 기술자), ④飜書譯語(번역과 통역을 잘하는 자), ⑤乘驛(병법 등 武才에 능한 무관) 등이었기 때문에(李錦繡, 1998,`唐代直 官制a, 唐代制度史略論稿, 中國政法大學出版社, 13~16쪽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 제유민a, 308쪽), 난원경은 적어도 이 5가지 일 중의 하나에 능통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81) 雄衛 : 당나라의 16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하여 무관의 직을 말한다. 382) 文軒 : 이는 文獻 으로 볼 수도 있고, 또 軒 은 수레이므로, 文의 모범, 즉 문장을 잘 지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한편 이를 直中書省의 일과 연관시켜 본다면, 이를 能書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383) 文軒에 밝았다 : 난원경과 같은 무관이 당의 핵심 정치기구인 중서성 직관으로 복무하는 것이

360 718 碑文 옮기고, 直中書省內供奉으로386) 차출되었다. 사를 돌려 [京師로] 들어왔다. 星樓에서 크게 연회를 열었다. 천자는 祿이 [난원경의] 능 변방에 외적의 침입이 여러 번 발생하고, 봉화가 자주 올라 때때로 백성을 놀라게 했는 데, 君은 이미 일처리를 잘해두었다. 면밀히 계획하고 일찍이 군사의 기율(師律)도 參酌 387) 하였다. 文乃 軍 弓旌 重하였다. 388) 緩急을 조절하고 [병사들을] 어 루만지는 것을 중요시하고, 방패와 창은 도리어 수레에 실어두었다. 마침내 朔方軍389) 總管에 제수되었다. 君은 황명을 받들어390) 기이한 계책을 세워 391) 에서 392) 九姓을 토벌하여 719 오랑캐를 섬멸하였으니, 三軍은 편안히 무사히 개선하여 군 력에 대한 대가로 부족하다고 여겨, 특별히 紫金魚袋와 옷 한 벌 그리고 비단(物) 100필 을 하사하였다. 변방에 羌戎氏가 하자, 河西의 오랑캐가 도망하거늘,393) 君으로 하여금394) 초무하거나 정벌하게 하니, 소나기가 모여 내리듯이 항복하여 포로들이 소매를 잡고 이끌고 나왔다. 內庭에서 잔치를 열어 공을 기리고 특별히 노비 6명, 말 10필, 비단 100필을 하사하고, 또 宣威將軍을 제수하고, 汾州 淸勝府 折衝都尉로 [승진시켜] 옮기게 하였다. 勳은 각각 전과 같게 하였다. 군은 성품(植性)이 온순 공손하였고,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묘지에 특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난원경이 文人的 素養도 충분히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384) 夏州 寧朔府 : 하주에 설치된 절충부는 영삭부 순화부 등 2개의 절충부가 있었다. 385) 左果毅都尉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0쪽에는 果懿 로 판독되어 있으나, 실제 탁 본으로 볼 때, 果毅 가 분명하다. 386) 直中書省內供奉 : 공봉이란 황제 주변에 대기하며 시봉하는 것을 말하며, 중서성과 문하성의 관 원과 어사대의 상급 관원은 거의 공봉관에 속하였다( 唐六典 권2 吏部郞中). 따라서 난원경은 하주 영삭부 좌과의도위에 임명되면서, 동시에 파견의 형식으로 중서성 직내공봉에 임명되어 황 제의 근신으로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직중서성에서 더욱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 국 당조가 난원경의 재능을 크게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0쪽). 387) 文乃 重하였다 :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묘지의 훼손이 심하다. 文乃 重까지는 따로 해 석하지 않는다. 388) 緩急을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0쪽에는 媛 으로 되어 있지만, 묘지에는 緩 으 로 되어 있다. 이를 완급을 조절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389) 朔方軍 : 삭방군은 하주 朔方縣(하주의 치소가 있었던 지금의 靖邊 동북의 白城子)에 설치되었 으며, 唐初에 河東道에 설치하였던 朔方經略軍 또는 후에 朔方行軍大總管의 변신인 朔方 藩鎭과 는 다르다(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氏家族姓氏,居地考a;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1쪽). 390) 황명을 받들어 : 묘지에는 命 으로 되어 있지만, 편의적으로 황명을 받들어 로 해석하였다. 391) 에서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0쪽에는 九姓族 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묘지 에는 九姓於 로 되어 있어,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392) 九姓을 토벌하여 : 이때 九姓의 토벌은 당에 귀부하여 河曲에서 살고 있던 九姓鐵勒部落이 현종 開元 4년(716) 8월에 반란을 일으켰던 사건을 말한다(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氏家 族姓氏,居地考a; 이문기, 2000,`百濟 遺民 難元慶 墓誌의 紹介a, 510쪽 ; 정병준, 2007,`당 神과395) 道德이 관직과 慶賞에 부족함이 없었다. 항상 강직하고 깨끗하기를 생각하였고, 局量이 官位에 설 수 없고 능력이 때를 구제할 수 없을까를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엄숙하여 위엄이 있었고 눈동자는 [반 듯이] 고정되었으며, 사람들이 이롭게 여기는 바이고 은혜롭게 생각하니, 영원할 진저! 그러나 積善은 드러나지 않고, 두 기둥 사이에서 設奠하는 꿈은 죽음을 재촉하였네.396) 염 교 위의 아침 이슬은 쉬이 사라지고,397) 영혼은 어두운 무덤(夜臺) 속으로 거두어지도다! 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1쪽). 이 반란은 같은 해 10월 朔方軍大總管 薛訥과 幷州刺史 王晙 등 에 의해 진압되었다( 자치통감 권211 개원 4년 8월 및 10월). 393) 변방에 도망하거늘 : 開元 9년(721) 3월 蘭池州의 소그드인인 康特賓이 같은 降戶들과 함 께 반란을 일으켜 부근의 六胡州를 모두 휩쓸었던 사건을 말한다. 이 반란은 같은 해 7월 王毛 仲 王晙 張說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氏家族姓氏,居地考a ; 정병준, 2007,`당에서 활동한 백제유민a, 311쪽). 394) 君으로 하여금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0쪽에는 軍 으로되어 있지만, 묘지에 는 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395) 神 : 이는 精神으로 추정된다. 396) 두 기둥 재촉하였네 : 묘지명의 奠楹 은 孔子가 돌아가시기 전에 두 기둥 사이에서 設奠 하는 꿈을 꾸었던 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禮記 에 孔子가 말 하기를, 내가 어제 밤 꿈에 두 기둥 사이에 設奠하는 꿈을 꾸었는데, 明王이 나오지 않으시니 천하에 그 누가 능히 나를 宗主로 삼겠는가? 나는 아마도 곧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개 병 에 걸린 지 7일이 되자 돌아가셨다( 禮記 檀弓 상 참조). 397) 염교 사라지고 : 묘지의 露稀朝 를 이렇게 해석하였다. 人命이 아침에 염교(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 위의 이슬처럼 쉽게 사라진다. 는 의미로 흔히 輓詞나 輓歌에 주로 쓰이

361 720 碑文 開元 11년 6월 28일 汝州 龍興縣의 私第에서 돌아가셨다. 춘추가 61세였다. 부인은 丹徒縣君 左玉鈴衛大將軍 甘羅의 長女이다. 아름다움은 꽃 봉우리가 피어오른 듯하고, 부드럽고 여유로움은 아리따운 자태를 도우네. 마치 柳花가 물에 뜨고 하늘에 나 는 듯하구나! 琴瑟을 내려놓으면 冊篇에 題辭를 쓰고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여 비단 실로 군자의 배필이 되어 그 집안을 올바르게 하였다. 禮는 梁鴻의 아내보다398) 훌륭하고 어 짊은 班女를399) 뛰어넘었다. 그러나 장엄한 누각이 갑자기 가려지고 아름다운 달이 하니, 開元 22년 5월 18일 汝州 魯山縣의 사저에서 돌아가셨다. 춘추가 67세였다. 가 망극하여 하늘에 울부짖으니 애통함이 깊이400) 땅을 울리네. 마음을 도려 내고 가슴을 두드려 담장이 무너지는 것 같네! 奧401) 大唐 開元 22년 11월 4일 汝州 魯山 縣 東北 쪽의 언덕에 합장하였으니, 예에 맞도다. 402) 아! 슬프다. 모두 있네.406) 이에 다음과 같이 銘을 지었네. 검은 하늘(玄)과 누른 땅(黃)이 처음으로 나누어지자 집안(家)과 나라(邦)가 드디어 흥 기하였고, 사방이 우뚝 솟자 만물이 빚어지도다. 이것이 그 하나이다. 達率公이 영화로운 관직에 오르니, 遼陽에 기틀 잡은 귀한 집안이라네.407) 德이 크신 將 軍은408) 汾州의 折衝都尉가 되셨네. 이것이 그 둘이다. 무늬를 놓았다. 아들 721 기개는 千古에 빛나고 명예는 三韓에서 중하였으며, 자손은 효도로 봉양하였고, 오직409) 色難으로410) 공손하였네. 이것이 그 셋이다. 나라의 바탕이(國籍)이 뛰어나고 신령스러워 나라가 견고하고 편안하게 되자, 君이 절 개를 지켜 간악한 변방(邊亭)을 깨끗이 제거하였네. 이것이 그 넷이다. 군세를 떨치고 돌아오기를 배고프듯이 하고, 흉적(凶)을 쳐부수기를 목마르듯이 하여,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여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네. 이것이 그 다섯이다. 403) 날카로운 검이 쌍으로 날아다녔어도 紀功碑(沈碑)는 물에 모두 잠겼 개선하여 황제가 연회를 내리시자 함께 연못 위의 鴛鴦을 희롱하였고411), 賞賜가 비록 고, 殷 가 순식간에 부딪쳐도, 위험한 순간들을 이겨냈던(揮日)404) 교외의405) 무덤 속에 많았지만 은혜에 보답함도 적지 않았네. 이것이 그 여섯이다. 는 말로 전용되어 죽음 을 뜻한다. 398) 梁鴻의 아내 : 묘지명의 梁妻 는 梁鴻의 아내 孟光를 말한다. 그녀의 예절과 현명함은 後漢書 逸民傳 梁鴻 열전을 참조하기 바람. 399) 班女 : 班固의 여동생 班昭를 가리킨다. 반고가 漢書 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뛰어난 재주로 학문의 세계도 넓었던 그녀가 이를 이어 완성하였다. 후에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女誡 등을 저술하였다. 400) 깊이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心 으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深 으 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401) 奧 : 기존의 판독에 奧 로 되어 있지만, 이러한 용례가 없고, 연역하여 어머니 라고 할 수도 있 지만 문리가 부드럽지 못하다. 奧 는 아마도 의 誤字로 의미 없는 발어사가 아닌가 추정된 다. 탁본으로 볼 때도 가 아닌가 생각된다. 402) 아! 슬프다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嗚呼 가 있으며, 이 구절을 이렇게 첨가해 해석한 것이다. 403) 沈碑 : 晉書 杜預傳에 의하면, 杜預가 후세를 위하여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였는데, 늘 높은 언덕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계곡은 구릉이 된다. 고 하며 두 개의 비석을 만들어 그 공적을 기 록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는 萬山의 아래에 묻고 하나는 峴山의 위에 세워 놓고는 어찌 뒤에 구릉 과 계곡이 되지 않을 줄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후로 沈碑 는 紀功碑를 가리키게 되었다. 404) 揮日 : 이는 揮戈回日의 준말이다. 淮南子 覽冥訓 에 魯 陽公이 韓과 싸워 전투가 한창이었는 데, 해가 저물었다. 이에 창을 잡고 지휘하자, 해가 이 때문에 90리나 되돌아왔다. 고 하는 故事 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이는 위험한 국면을 힘써 만회한다. 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405) 교외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效 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郊 로되 어 있으므로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406) 날카로운 있네 : 이 구절은 난원경이 뛰어난 공적을 세웠지만, 덧없이 돌아가셨음을 묘사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407) 達率公 집안이라네 : 이 구절에 주목하여, 난원경의 고조부 가 仕遼 하였다는 구절을 실 제로 遼陽 지역에서 달솔이 되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馬馳, 2000,` 難元慶墓誌 簡介及難 氏家族姓氏,居地考a ). 그러나 이 구절의 앞은 고조부에 대한 것이지만, 뒤는 祖父 汗이 唐에 망명하 여 웅진도독부가 僑置된 建安故城의 鼎貴가 되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408) 덕이 크신 將軍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萬德將軍 으로 되어 있으나, 묘 지명에는 德邁將軍 으로 되어 있다. 將軍은 바로 難元慶을 지칭한다. 409) 오직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惟 로 되어 있지만, 묘지명에는 維 로되 어 있다. 물론 그 뜻은 惟 와 같다. 410) 色難 : 색난은 얼굴빛을 좋게 하기가 어렵다는 뜻인데, 전하여 부모님 앞에서 항상 얼굴빛을 좋게 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411) 희롱하였고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陪爲鴛沼 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 는 爲 가 아니라 嬉 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362 722 해와 달이 거꾸로 걸리자 금과 옥을 모두 버리고412) 애통하게도 冠帶와 紫色 印綬를 하 시고서413) 영원히 黃泉에 묻혔네. 이것이 그 일곱이다. 지애비가 높아지고 지어미가 귀해지자 난새가 숨고 봉황이 분주히 떠났으며, 기둥 사이 에 차려 놓은 奠이 철거되자 소나무 아래에 영혼이 묻혔네. 이것이 그 여덟이다. 君子가 사는 곳이자 賢人이 사는 동리 魯陽은 창을 휘둘러 唐의 堯 임금이 제사를 세 우신 고장이나니, 이것이 그 아홉이다. 안개와 구름으로 모두가 어두워지고 산과 개울에 모두 석양이 지자, 문득 맑은 바람이 그리워 감히 검은 빗돌에다 명문을 남기노라. 이것이 그 열이다. 開元 22년 歲次 甲戌 11월414) 戊午朔415) 3일 庚申에 쓰다. 윤선태(동국대학교) 412) 버리고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損 으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捐 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413) 冠帶와 하시고서 : 묘지명의 痛纓紫綬 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이는 관직에 재직하는 도중에 죽었다. 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414) 11월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十日月 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十一 月 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415) 戊午朔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1쪽에는 戌午朔 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戊 午朔 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고쳐 해석하였다. 金 文

363 金文 725 金 文 칠지도의 명문(七支刀銘)1) <앞면> 泰和 4年2) 5月 16日 丙午日의 한낮(五月十六日丙午正陽)에 3) 백번이나 단련한 철(百練 1) 七支刀銘 : 칠지도는 현재 日本 奈良縣 天理市 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는데, 刀身에 여섯 개의 가 지가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한 칼이다. 길이는 74.9cm인데, 刀身이 65cm이고, 나머지는 칼자루 부 분이다. 도신 좌우에 3개씩의 支(枝)刃이 칼 끝부분을 향해 서로 어긋나게 튀어나와 있다. 이 지인 이 모두 6개여서, 도신의 銘文에 기록된 七支刀 라는 글자가 판독되기 전까지 石上神宮에서 六 叉 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어오고 있었다. 이 6개의 지인과 도신까지 합하면 7개의 지인이 되며, 七支刀 는 이러한 형태를 보고 명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도신의 표면과 이면에 金象嵌의 명 문이 있다. 이 명문은 1873년 石上神宮의 宮司였던 菅政友에 의해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 이 명문에 대한 판독은 그동안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수차례 이루어졌지만 異見이 분분하였다. 그 런데 최근에 村山正雄가 편저한 石上神宮七支刀銘文圖錄 (1996, 吉川弘文館)이 발간되면서, 거기 에 실려 있는 엑스선사진을 통해 보다 정확한 판독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2004년에는 奈良國立博 物館에서`七支刀와 石上神宮의 神寶a라는 特別展이 열려 七支刀 실물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명문 은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가 금상감으로 새겨져 있다. 녹과 상감된 금의 剝落으로 인 해 글자의 판독이 매우 어려운 상태이며, 확실한 자는 20여자에 불과하다. 특히 표면 末端部의 네 글자는 전혀 알아볼 수 없다. 書體는 4~5세기 石刻에 보이는 楷書에 가깝지만, 글자 중에는 2~3 세기의 石文에 자주 나타나는, 八分體 의 隷書나 行書體의 글자가 섞여 있다. 명문의 앞면에는 제 작시기와 제작방법, 그리고 刀名과 吉祥句, 제작자가 기록되어 있고, 그 뒷면에는 百濟 王世子 奇 生이 倭王 旨를 위해 이 칼을 주니 後世에 傳示하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간 칼의 제작 시기 나 百濟와 倭의 국제적 位相을 둘러싸고, 百濟가 七支刀를 倭王에게 獻上했다는 견해(百濟獻上說), 百濟가 오히려 倭王에게 下賜했다는 견해(百濟下賜說) 등 한ㆍ일의 연구자들 사이에 커다란 의견충 돌이 있었다. 역주에는 김영심, 1992,`七支刀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 泰和 4년 : 이 칼의 제작연도를 알려주는 명문인데, 판독상의 異見이 많아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 애초 泰始(泰初) 4년(268년)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星野恒, 1892,`七枝刀考a, 史學雜 誌 37 ; 菅政友, 1907,`大和國石上神宮寶庫所藏七支刀a, 菅政友全集 雜稿 1), 福山敏男과 榧本 杜人 등의 정밀한 판독이 있은 이후 東晋 泰和 4년(369)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福山敏男, 1951,`石上神宮の七支刀a, 美術硏究 158 ; 榧本杜人, 1952,`石上神宮の七支刀と其銘文a, 朝 鮮學報 3). 그러나 태화 4년이라는 판독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이 연호가 과연 어느 나라, 어느 시

364 726 金文 )로4) 七支刀를5)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兵害를 물리칠 수 있으니 侯 王께 바치기에 알맞다. 가 만들었다. 727 <뒷면> 先世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은 없었다. 百濟 王世(子) 奇生의6) 聖스러운 音(명령)으로 [聖音],7) 이에 倭王 旨를8) 위하여 만들었다. 後世에 傳示하라.9) 기의 연호이냐에 따라 논의가 분분하다. 김석형은 泰和는 중국에 없는 연호이고 일본에서는 7세기 에나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백제의 연호일 수밖에 없으며, 태화 4년은 5세기의 어느 해일 것이 라고 추정하였다(金錫亨, 1966, 初期朝日關係硏究 ). 이후 대부분의 한국인 연구자들은 고구려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예도 있기 때문에 백제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日本書 紀 神功紀 七枝刀 기사와 관련시켜 近肖古王代 372년으로 보거나(李丙燾, 1974,`百濟七支刀 考a, 震檀學報 38 ; 1976, 韓國古代史硏究 ), 뒤의 5月16日 日辰에 부합되는 연대를 찾는 과정 에서 408년(전지왕 4)으로 보는 입장이 제기되었다(손영종, 1983,`백제 7지도의 명문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a(1), 역사과학 1983~4). 한편 이진희는 표면의 侯王 이라는 명문을 백 제의 王 侯제도의 성립과 관련시켜 이를 북위의 太和 4년(480)에 비정하고 있다(李進熙, 1980, 廣開土王碑と七支刀 ). 한편 劉宋의 泰始 4년(468)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宮崎市定, 1972,`七支 刀銘文試釋a, 東方學 64). 3) 五月十六日丙午正陽 : 금상감이 떨어져 나가 명문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月 十 日 丙午正陽 은 분명한데 月 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六, 五, 四, 正月說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六 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시되다가 福山敏男의 판독 이후 대체로 五 로 읽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를 十[一]月 두 글자로 읽는 완전히 새로운 판독안이 제기되었다(木村誠, 1999,`百濟史料とし て七支刀銘文a, 古代朝鮮の國家と社會, 吉川弘文館, 370쪽). 十 日 에 해당하는 부분 또한 종 래 十一 로 읽혀 오다가 현재는 대부분 十六 으로 읽고 있다. 날짜와 日辰이 불일치하는 것에 대 해 대부분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丙午日은 作鑄의 吉日로서 표현되고 있을 뿐이며 실제의 日辰일 필요는 없다고 보아 앞의 연호와는 전혀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丙午라는 日辰이 단순한 吉 祥句가 아니라 실제 日辰이라고 판단하여 앞 연호와 관련시키는 연구도 있다. 길상구로 보는 입장 에서는 漢 三國 晉代의 鏡 劍 帶鉤 등의 명문에서 五月丙午 가 상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5월 병오일은 금속기를 만들기 위한 불을 취함에 盛夏(5월)의 丙午日(丙은 火의 兄, 午는 正南)이 가장 적합한 날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5월 병오에 器를 모두 주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五月丙午 를 일종의 길상구로 만들어 그러한 사상을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正陽은 日中과 같은 의미로 태 양이 정남방에 높이 떠오르는 시각인 낮 12시. 하루 중 火氣가 가장 성한 시간을 말한다(김영심, 1992,`七支刀銘a, 178쪽). 4) 百練 : 이 구절에 근거하여 칠지도의 제작방법을 鍛造 로 이해해 왔는데, 칠지도 모조품 제작시 칠지도의 본체와 날이 있는 가지(枝刃) 사이가 너무 좁아서 단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鑄造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鑄造鐵에서는 녹이 층을 이루어 일어나는 데 반해 鍛 造鐵은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점이나 칠지도 枝刃과 몸체 연결 부분 등을 볼 때 단조일 가 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金昌鎬, 1989,`百濟 七支刀 銘文의 再檢討a, 歷史敎育論集 13 14). 5) 七支刀 : 七支 라는 말의 뜻, 칠지도의 성격에 대해서 독특한 견해를 제시한 藪田은 칠지도는 七 政刀로 七政은 七星, 즉 日 月 五星이라고 보았다(藪田嘉一郞, 1961,`七支刀銘考釋 釋文篇a, 日本上古史硏究 5~6). 上田도 이 견해를 지지하여 칠지도는 邪刀的 성격의 呪刀라고 규정지 었다(上田正昭, 1971,`石上神宮と七支刀a, 日本なかの朝鮮文化 9). 또 칠지도는 실용의 무기가 아니라 七子鏡과 함께 聖器 呪具 종류라고 한 견해나(三品彰英, 1962,`石上神宮の七支刀a, 日 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 칠지도의 형태를 볼 때, 儀器的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 다. 한편 漢譯佛典에 칠지라는 용어가 다양하게 보이는 것에 착안해 七覺支, 즉 깨달음을 얻는 7가 지 사항 또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돕는 7가지의 수행방식이거나 身體와 口舌의 7가지의 罪過 가 아닐까 추정을 하고서 칠지도의 제작은 불교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본 견해도 있다(村山正雄, 1979,`<七支刀>銘字一考 - 榧本論文批判を中心としてa, 朝鮮歷史論集 上). 그러나 이에 대해 칠지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신앙과도 관계가 깊은 것으로 村山이 지적한 두번째의 칠지는 불교 보다도 도교에서 말하는 身體 口舌의 7罪業, 즉 殺生 偸盜 邪淫 등 신체동작으로서 나타나는 3 가지의 죄과와 妄語 綺語 惡口 兩舌 등 언어표현으로서 나타나는 4가지의 죄과라고 보기도 한 다(山尾幸久, 1989, 古代の日朝關係, 書房). 6) 王世子奇生 : 이때 王은 近肖古王, 世子는 그의 子인 貴須로서 奇生聖音 전체가 貴須王의 이름이라 고 보는 견해와(西田長男, 1956,`石上神宮の七支刀の銘文a, 日本古典の史的硏究 ), 奇生은 貴 須 仇首의 通音借이고 聖音은 敬稱的인 의미의 セシム(왕자)를 의미하는 敬語로 사용되었다는 설 이 있다(三品彰英, 1962,`石上神宮の七支刀a). 7) 聖音 : 栗原朋信은 태화 4년을 동진의 태화 4년으로 보고 榧本의 奇生聖晉 이라는 판독에 의거하 여 聖晉을 東晋으로 이해하고, 백제와 왜의 교섭을 매개했던 동진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설정하였 다. 동진이 백제의 宗主國 입장에서 백제를 시켜 왜에게 七支刀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栗原朋信, 1966,`七支刀銘文についての一解釋a, 日本歷史 216). 한편 聖音 을 佛敎나(村山正雄, 1979`< 七支刀>銘字一考 - 榧本論文批判を中心としてa), 道敎와(山尾幸久, 1989, 古代の日朝關係 ) 관 련시켜서 살펴보고자 한 새로운 시각도 있다. 8) 倭王 旨 : 이를 倭王替(旨) 로 읽어 倭의 五王 중 讚일 것이라고 보고 이를 應神天皇에 비정한 견 해가 있다(西田長男, 1956,`石上神宮の七支刀の銘文a). 또 倭王旨 를 왜왕의 뜻 으로 해석하여 왜왕의 명령 내지 희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봄으로써 백제헌상설을 뒷받침하는 견해도 있다(福山 敏男, 1951,`石上神宮の七支刀a). 한편 旨造 는 精製(정교하게 만들다) 巧造(교묘하게 만들다) 의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 제기되어 주목된다. 이는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는 평등한 것으로 칠지도 는 하사품도 헌상품도 아닌, 백제에서 왜국에 보내준 贈品이라는 입장이 근저에 깔려있다. 한편 칠 지도 앞면의 명문은 당시 鏡銘 刀銘 일반에 공통된 常用語句의 連綴에 불과하고, 뒷면의 명문은 이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서 실질적 내용, 즉 濟 倭 兩王 通交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는

365 728 부록 : 隅田八幡神社의 畵像鏡의 명문(隅田八幡畵像鏡銘)10) 金文 729 며, 開中費直과 穢人인 今州利15) 2人 등을 보내어, 白上의16) 구리(同)17) 200旱을18) 취해, 癸未年11) 8月 日十大王年男弟王이12) 意柴沙加宮에13) 계실 때, 斯麻가14) 長壽를 염원하 주장도 제기되었다(神保公子, 1973,`七支刀硏究の步みa, 日本歷史 301 ; 神保公子, 1975,`七 支刀の解釋をめぐってa, 史學雜誌 84~11). 9) 後世傳示 : 칠지도가 헌상품이냐 하사품이냐에 따라 해석이 희망형, 명령형으로 나뉜다. 백제 헌상 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후세에 전하여 보이기를 바랍니다 라는 의미로 보고, 백제 또는 동진하 사설의 입장에서는 제왕이 신하에게 훈시하는 관례적 용어로 下行文書 양식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것은 단지 기념으로 한다 는 정형구로 금석문의 길상구 상 용구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하행문서 양식이라고 하거나 하사설의 근거로 삼기는 곤란 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佐伯有淸, 1977, 七支刀と廣開土王碑 ; 山尾幸久, 1989, 古代の日朝 關係 ). 10) 隅田八幡畵像鏡銘 : 이 거울은 일본 和歌山縣 橋本市에 있는 隅田八幡神社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 인데, 현재는 동경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江戶 시대부터 紀伊續風土記 에 소개되어 일부 사람들에겐 이미 알려졌지만, 1914년 高橋健自가 거울의 명문을 학계에 소개하면서(高橋健自, 1914,`在銘最古日本鏡a, 考古學雜誌 5~1),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김은숙, 1993,`隅田八 幡鏡의 명문을 둘러싼 제논의a, 한국고대사논총 5, 327~328쪽). 거울의 직경은 19.8cm이고, 거울의 표면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樂人의 무리와 함께 東王父ㆍ西王母의 像을 부조하였는데, 중 국 後漢代 人物畵像鏡의 형식을 모방한 倣製鏡이다. 銘文은 內緣外側의 銘帶에 있는데, 전체 48 자이며, 각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또 뒤집혀진 反轉文字나 결획된 글자, 音通字로 쓴 글 자도 확인된다. 문장은 한자음을 차용하여 쓴 일본식 속한문이며, 거울의 제작연대는 명문에 기 록된 계미년에 근거하여 433년, 503년, 563년으로 보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이 거울의 제작지를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본으로 보고 있으나, 일부 백제를 제작지로 보는 견해도 있고(乙益 重隆, 1965,`隅田八幡神社畵像鏡銘文の一解釋a, 考古學硏究 11~4), 또 명문 중의 斯麻 를 무 녕왕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연구자들이 많기 때문에(李進熙, 1982,`古代韓日關係史硏究와 武寧 王陵a, 百濟硏究 특집호 ; 金在鵬, 1988,`武寧王과 隅田八幡畵像鏡a, 손보기박사정년기념한 국사학논총 ; 蘇鎭轍, 1991,`日本國 國寶 隅田八幡神社 소장 人物畵像鏡의 銘文을 보고a, 百濟 論叢 3, 백제문화개발연구원),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2쪽에 백제 金文 資料의 부 록으로 이 자료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2쪽의 명문은 齋 藤忠, 原始美術, 東京, 小學館의 판독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역주에는 김영심, 1992,`隅田八 幡畵像鏡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11) 癸未年 : 이 거울의 제작연대이다. 隅田八幡畵像鏡은 後漢代 人物畵像鏡의 형식을 모방한 倣製鏡 이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의 거울이 일본에 수입된 4세기 후반이 이 거울 제작의 상한연대라고 할 수 있다. 계미년의 연대추정은 日十大王年男弟王 에 보이는 大王 또는 男弟王을 누구로 보느냐 에 따라 433년, 503년, 563년 등으로 나눠진다. 이 중 503년설은 男弟王을 繼體天皇으로 보며, 563년설은 大王을 欽明天皇, 男弟王을 즉위전의 敏達天皇으로 보고 意柴沙加宮을 敏達天皇의 皇 后 廣姬의 忍坂宮으로 설명한다(김은숙, 1993,`隅田八幡鏡의 명문을 둘러싼 제논의a, 364쪽). 12) 日十大王年男弟王 : 이를 어떻게 끊어 읽는냐에 따라 해석에 큰 차이가 난다. 대체로 ① 10日(日 十을 도치시켜서) 大王의 해(年)에 男弟王이, ② 日十(曰十)大王의 해에 男弟王이, ③ 日十大王 인 年과 男弟王이, ④ 日十大王ㆍ年ㆍ男弟王이 등 네 가지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과 ② 의 경우 계미년은 男弟王이 意柴沙加宮에 있을 때로 당시의 대왕은 男弟王이 된다. ③은 年을 日 十大王의 이름으로 해석한 것으로 대왕과 남제왕이 함께 意柴沙加宮에 있었던 것이 된다. 이 경우 大王과 男弟王에 대한 비정은 매우 다양하며, 그에 따라 거울의 제작연대도 433년, 503년, 563 년 등으로 나눠진다. 특히 소진철은 大王을 武寧王, 男弟王을 繼體天皇으로 본다(蘇鎭轍, 1991, `日本國 國寶 隅田八幡神社 소장 人物畵像鏡의 銘文을 보고a). ④는 日十大王ㆍ年ㆍ男弟王이 모 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보기 때문에, 男弟王은 계미년에 大王으로서 意柴沙加宮에 있었다고 해석 한다. 특히 男弟王은 이를 고유명사로 보아 繼體天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대왕의 男弟 또는 次男에 해당하는 보통명사로 보는 견해 등으로 갈라진다(김은숙, 1993,`隅田八幡鏡의 명문 을 둘러싼 제논의a, 347쪽). 13) 意柴沙加宮 :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音假名으로 보아 オシサカ 로 읽고, 大和의 지명인 忍 坂 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김은숙, 1993,`隅田八幡鏡의 명문을 둘러싼 제논의a, 345쪽). 14) 斯麻 : 日本書紀 神功紀의 斯麻宿 (西田長南, 1953~54,`隅田八幡神社の畵像鏡の銘文a, 大倉山論集 2~3), 또는 武寧王 (乙益重隆, 1965,`隅田八幡神社畵像鏡銘文の一解釋a; 李進 熙, 1982,`古代韓日關係史硏究와 武寧王陵a; 金在鵬, 1988,`武寧王과 隅田八幡畵像鏡a; 蘇鎭 轍, 1991,`日本國 國寶 隅田八幡神社 소장 人物畵像鏡의 銘文을 보고a)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15) 開中費直과 今州利 : 福山敏男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 거울을 제작한 開中費直과 今州利을 백제계 도래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開中을 カフチ로, 費直을 후의 카바네 直과 같은 것으로 보아 開中費直을 백제계 도래인으로 알려진 河內直 과 동일한 사람으로 보았다.(福山敏男, 1934,`江田發掘大刀及び隅田八幡神社鏡の製作年代についてa, 考古學雜誌 24~1 ; 김은숙, 1993,`隅田八幡鏡의 명문을 둘러싼 제논의a, 343쪽). 16) 白上 : 주석이 많이 들어간 上品의 銅을 말한다고 생각된다(김은숙, 1993,`隅田八幡鏡의 명문을 둘러싼 제논의a, 357쪽). 17) 同 : 명문에는 同이나 문맥상으로 볼 때 銅의 音通字라고 생각된다. 18) 旱 : 무게 단위인 貫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和田萃, 1991,`畵像鏡の銘文をよむa, 大系日本 の歷史 2, 小學館). 1관은 3.75kg이므로 200관은 750kg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貫이 중량단위로 사용된 것은 무로마치시대 이후였다. 따라서 이는 긴 물건을 세는 단위로 이해되며, 200旱은 동판 200개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藪田嘉一郞, 1955,`隅田八幡神社藏鏡畵像鏡銘

366 730 金文 이 거울(竟)을19) 만들었다. 731 번역 : 庚子年(520, 무녕왕 20) 2월에 多利가24) 만들었다. 大夫人의25) 것(分)으로26) 230 무령왕릉 출토 은팔찌의 명문(武寧王陵 出土 銀釧銘)20) 21) 22) 23) 원문 : 庚子年二月多利作 大夫人分 二百 主 耳 主(銖)이다(耳). 무령왕릉 출토 동경의 명문(武寧王陵 出土 銅鏡銘)27) 원문 : 尙方作竟眞大好 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飢食棗28) 壽如金石兮 考a, 史迹と美術 250 ; 김은숙, 1993,`隅田八幡鏡의 명문을 둘러싼 제논의a, 358쪽). 19) 竟 : 명문에는 竟이나 문맥상으로 볼 대 鏡의 音通字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20) 武寧王陵 出土 銀釧銘 : 이 명문자료는 1971년 7월 충남 공주 宋山里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부장 품의 하나이다. 玄室 內部의 왕비쪽 冠飾의 下端에서 북쪽으로 35cm 되는 위치에서 쌍방거리 5cm를 두고 金釧과 함께 출토되었다. 右腕에 金釧, 左腕에 有銘銀釧 각 1쌍씩이 겹쳐 나왔는데 이는 梁山 夫婦塚에서 부인이 우 좌완에 각각 금 은천을 끼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은천의 外 徑은 8cm이고, 內徑 6cm인데, 幅은 1cm이다. 단면이 반원형인 은띠의 표면에 혀를 길게 내민, 발톱 3개를 가진 蟠龍 두 마리를 陽刻하고, 팔목에 닿는 內面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겨 돌려 놓았다. 팔찌의 內側에 명문이 1行으로 楷書陰刻으로 周回되어 있다. 명문에 의해 520년(무녕왕 20) 왕비가 돌아가기 6년 전에 王妃用으로 만들어진 팔찌임을 알 수 있다. 명문의 字徑은 0.7cm 이다. 역주에 김영심, 1992,`武寧王陵 出土 銀釧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 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1) 庚子年二月多利作 : 庚子年二月多利作 의 어순을 국어적인 것으로 보고 庚子年 2月에 多利가 지었다 로 해석하여 百濟에도 吏讀文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南豊鉉, 2000, 吏讀硏究, 太學社, 32). 22) 主 :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은제팔찌들의 실질적인 무게가 각각 g과 g인 것과 燕 나라에서는 무게단위명인 銖를 朱로도 표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이 자료에 나타난 主가 朱 (銖)와 같은 音을 나타내기 때문에 단위명으로 借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朴興秀, 1999, 韓 中 度量衡 制度史, 성균관대학교출판부, 508쪽). 즉 斯麻王 王妃 은팔찌 銘에 보이는 主가 銖(朱)와 같은 무게단위로 볼 수 있고, 실제의 무게도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 한편 은팔찌의 무게 단위를 主 가 아니라, 主耳 로 보는 견해도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37쪽). 한편 主 를 등불(등잔의 불) 을 뜻하는 글자로 三國遺事 권1 古朝鮮條의 檀君神話 내용에 나오는 靈艾一炷 蒜二十枚 의 炷 자와 같이 단위명을 나타내는 명사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김영심, 1992,`武寧王陵 出土 銀釧銘a, 185쪽). 23) 耳 : 최근 이 명문을 이두문으로 파악하고, 문장의 끝에 있는 耳 를 문장 종결사로 해석한 견 해가 제기되어 있다. 耳 가 문장 종결사로 사용된 용례는 迎日冷水里碑 에서도 확인된다(정 재영, 2003,`백제의 문자생활a, 구결연구 11, 113쪽). 24) 多利 : 일본의 法隆寺 삼존불을 만든 止利(도리)와 이름이 유사해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日本書 紀 에 止利가 원래 鞍工이었다고 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止利는 이 多利가 속한 백제의 工匠 집 안에서 派出한 자의 후손인 가능성도 있다(김영심, 1992,`武寧王陵 出土 銀釧銘a, 185쪽). 이름 번역 : 尙方에서29) 만든 거울 참으로 좋구나. 하늘에 계신 仙人들이 늙지 않고, 목마르 면 玉泉의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듯이, [이 거울을 보는 사람도] 생명 이 쇠와 돌과 같으리(영원하리라)! 을 알 수 있는 삼국시대 예술가 중 最古의 인물이다. 25) 大夫人 : 大夫人 은 피장자인 王妃를 지칭하는 말로 추정된다. 新羅 황남대총(98호) 北墳에서 출 토된 은제 허리띠에 새겨진 夫人帶 나, 와 三國遺事 의 王曆에서 新羅 王母와 王妃 의 호칭으로 夫人을 사용한 예, 蔚州川前里書石 등에 보이는 夫人 등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백 제나 신라에서는 夫人이라는 어휘는 王妃나 王母 또는 최상류층의 혼인한 여자를 호칭할 때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大夫人이 王妃의 별칭으로 쓰였다고 생각된다(정재영, 2003, `백제의 문자생활a, 114쪽). 26) 分 : 판독이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 分 은 몫 의 의미로 쓰인 듯하다. 한편 이 글자를 字形上 永 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정재영, 2003,`백제의 문자생활a, 114쪽). 27) 武寧王陵 出土 銅鏡銘 : 무녕왕릉 玄室 내부 왕의 넘어진 足座 북부에서 背文部를 위로 한 채 발 견되었다. 후한대에 유행한 鏡式의 하나인 方格規矩鏡의 문양을 본떠 만들어졌으나, 漢鏡의 문 양 뿐 아니라 거기에 별개의 새로운 走獸文을 양각한 새로운 鏡背文이라 할 수 있다. 문양의 주 제는 대체로 네 마리의 짐승과 이들을 사냥하는 신선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신선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가까워 삼각 하의만 입은 채 양손에 칼(또는 창)을 들고 있다. 內區 주위에 는 銘文帶가 있는데 이 명문은 漢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선사상을 나타낸 것이며, 外區에는 鋸齒文帶와 複線波文帶가 있고 그 外周는 素文으로 끝나는데 이 부분의 단면은 약간 삼각형을 이루고 융기되어 있다. 거울의 전체 직경은 17.8cm이고 거울의 두께는 0.7cm이다. 역주에 김 영심, 1992,`武寧王陵 出土 銅鏡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8) 渴飮玉泉飢食棗 : 이와 동일한 문구를 가진 獸帶鏡이 일본 群馬縣 高崎市의 觀音塚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日本書紀 神功紀 52년조의 七子鏡을 동경의 七乳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백제가 중국에서 이러한 鏡을 수입해서 그 일부를 일본에 보낸 것이라고 추정한 견해 도 제기되었다( 口隆康, 1972,`武寧王陵出土鏡と七子鏡a, 史林 55~4). 29) 尙方 : 漢代에 설치한 官名으로 少府의 屬官이다. 天子의 御物을 만들고 또 그것을 보관하는 일을

367 732 `甲 乙a墨書 武寧王陵 出土 王妃 베개30) `一百 三a 銘 武寧王陵 出土 銀製花形裝飾31) 金文 733 익산 출토 동경(益山 出土 銅鏡)33) 원문 : 家人民息 胡羌 34) 滅天下復 風雨 번역 : 국가는 자주 경사롭고, 인민은 편안하리라. 오랑캐(胡羌)가35) 모두 멸해져 천하 `大吉a銘 銅鐸32) 가 회복되며, 비바람이 [절기에 제대로 맞아 오곡이 잘 익으리라].36) 윤선태(동국대학교) 맡았다. 上方이라고도 한다( 漢書 百官公卿表 참조 ; 김영심, 1992,`武寧王陵 出土 銅鏡銘a, 186쪽). 30) 武寧王陵 出土 王妃 베개 墨書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2쪽에 金文 으로 소개되 어 있으나 잘못 정리된 것이다. 무령왕비의 베개는 잘 다듬은 나무토막을 U자형으로 만든 다음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 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만들었다. 거북등무늬 안에는 흰색, 붉은 색, 검은색 안료로 飛天 새 魚龍 연꽃 忍冬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좌, 우 윗부분에는 봉황으로 보이는 두 마리 나무새를 마주보게 붙여놓았다.`甲a과`乙a이라는 먹글씨(墨書)는 베개 좌우에 있는 이 나무새 의 밑에 각각 써져 있다. 글자의 크기는 3cm 정도로 비슷하다. 두 글자는 서로 대각선상으로 정 반대방향으로 써져 있다. 필체는 행서체로 王妃의 誌石에 새겨진 서체와 일맥상통한다 이 먹글 씨의 의미는 글씨 위에 올려진 두 마리 새의 암 수 성구별 혹은 왕비의 장례의식과 관련하여 좌 우를 가리키는 방위 개념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 자, 87쪽). 31)`一百 三a銘 武寧王陵 出土 銀製花形裝飾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2쪽에는`一百 a銘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의 명문은`一百 三a으로 판독된다. 이 은제 꽃모양 장식은 반 구체 주위에 8개의 꽃잎이 배치된 형상으로 꽃잎과 꽃잎 사이에 구멍이 뚫려서 다른 물체에 부착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름 6.5cm이다. 목관 주위에 흩어진 상태로 수습되었던 점으로 보아, 무령왕릉의 목관에 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명문은 아마도 전체 제작수량을 표기한 것 이 아닌가 생각된다(권오영, 2005, 무령왕릉-고대 동아시아문명 교류사의 빛, 돌베개, 203~204쪽). 32)`大吉a銘 銅鐸 : 이 유물은 청주 봉명동에서 출토된 청동방울이다. 크기는 높이 7cm이고 충북대 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大吉 은 크게 吉하라 는 뜻의 吉祥句이다. 한성백제기 도읍인 서울지역에만 집중된 문자관련 유물과는 별개로 변방에서 발견된 명문유물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유물은 금강유역의 한 소국 집단이 낙랑 또는 대방군과의 교섭과정에서 교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들어와 이 유물을 遼寧省 北漂縣 출토의`大吉利宜牛馬a銘 銅鐸과 비교하여 한성 백제와 모용선비와의 대외교류를 언급한 연구도 나와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 자, 113쪽). 33) 益山 出土 銅鏡 : 이 거울은 전북 益山郡 三箕面 蓮洞里의 胎峯寺에서 발견되어 1957년 10월 4일 부여 박물관이 입수 소장하고 있다. 內區의 거의 절반과 周緣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거울의 直徑 은 14.4cm, 가장자리의 두께는 1cm로 內區의 문양은 神獸文이다. 즉 를 사이에 두고 盤龍이 相對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 이 신수문의 바깥쪽에 명문을 배치하였는데, 현재 13자만 남아 있다. 한강 이남에서 出土例가 드문 古鏡인데 중국의 六朝鏡이라 보기도 하고, 後漢代 전반(대략 기원 2세기경) 중국에서 주조된 盤龍鏡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한 내용의 명문을 가진 것으로 평 양 석암리 출토의 靑盖作盤龍鏡, 太康三年鏡 (東晉 武帝 3, 282), 일본 守屋孝藏 소장의 龍氏 作盤龍鏡 등이 있다. 역주에 김영심, 1992,`益山 出土 銅鏡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 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34) : 이 글자의 판독은 洪思俊, 1960,`全北 益山出土 六朝鏡a, 考古美術 1~1에 의거한 것이다. 靑盖作盤龍鏡, 太康三年鏡, 龍氏作盤龍鏡 에 모두 殄 으로 되어 있는데, 같은 의미의 글자 라고 볼 수 있다(梅原末治, 1964,`益山出土の龍氏作盤龍鏡a, 考古美術 5~3). 35) 胡羌 : 胡는 중국의 북부에 살던 종족. 羌은 중국 서방에 살던 종족을 말한다(김영심, 1992,`益 山 出土 銅鏡a, 455쪽). 여기에서는 오랑캐를 대표하는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36) 국가는 익으리라 : 평양 석암리 출토의 靑盖作盤龍鏡 에 보이는 원문, 즉 靑盖作竟四夷服 多賀國家人民息 胡羌殄滅天下服 風雨時節五穀 官位尊顯家緣食 長保二親得天力 樂兮 을 토대로 익산 출토 동경 명문의 파손된 전후를 복원해서 해석한 것이다.

368

369 石文 737 石 文 무령왕 묘지석(武寧王 墓誌石)1) <앞면> 寧東大將軍인2) 百濟 斯麻王은3) 나이가 62세로,4) 癸卯年(523) 5월5) [이 달은 丙戌일이 1) 武寧王 墓誌石 : 1971년 무령왕릉 羨道部 중앙에 있는 鎭墓獸 앞의 동쪽편에서 서쪽편의 王妃 誌石 과 함께 나란히 발견되었다. 왕의 지석은 청회색의 閃錄岩製의 長方形 平板磨石으로 중앙 약간 윗 쪽에 徑 1.1cm의 구멍이 있다. 묘지석의 크기는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5cm이다. 표면에 는 5~6cm 넓이의 陰刻 縱線으로 7행간을 만들어 6행까지는 52자의 명문을 음각으로 새겨넣고 마 지막 1행은 글자인지 부호인지를 새겨놓았다. 行間은 5~5.3cm이고 字徑은 2.5cm이며 필치는 六 朝體의 영향을 받았다. 裏面은 方位圖 겸 陵域圖(地積圖)로서 서쪽의 일변은 생략되어 그 자리에는 선만 내려긋고 방위 干支를 刻入하지 않았다. 즉 周緣에 陰線을 돌리고 陰線에 걸쳐서 十干, 十二 支의 글자가 음각되었으나 申 庚 酉 辛 戌 의 5字分이 缺字되었다. 방위 간지를 새긴 이면 글자의 크기는 지름 1.5cm이다. 왕과 왕비 兩 誌石의 관계를 보면, 대체로 왕 지석 이면과 왕비 지 석 이면은 모두 왕의 장례 때 이미 작성된, 연쇄관계를 가진 것으로 필체도 동일하다. 이를 현실 연 도 중간에 놓아두었다가 왕비 합장 때 왕비 지석 전면에 왕비에 관한 기사를 追刻한 것이라 생각된 다. 이 유물의 성격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墓誌의 體裁를 갖추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소략하지 만 王名 享年 崩御日字 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 묘지석의 立志如左 라는 문구의 志 자가 誌 와 통용된다는 점에서 誌石으로 간주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묘지석은 우리나라에선 가 장 오래된 것으로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학술적 의의 를 갖고 있다. 역주에는 김영심, 1992,`武寧王 誌石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 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 寧東大將軍 : 무령왕 21년(梁 普通 2) 梁에 使節을 보냈을 때 武帝로부터 받은 使持節都督百濟諸 軍事寧東大將軍 梁書 列傳 ( 諸夷 百濟條)의 略稱이다. 에 나오는 行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百濟王 의 칭호를 먼저 받았다가 梁과 우의를 지킨 공으로 이 작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 다(김영심, 1992,`武寧王 誌石a, 151쪽). 3) 斯麻王 : 에 무령왕의 諱가 斯摩 라고 되어 있고, 日本書紀 에도 斯麻 로 되어 있어, 이 묘지의 주인공은 무령왕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麻와 摩로 서로 다른 것은 借音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 諡號인 武寧을 사용하지 않고 왕의 諱를 붙여 斯麻王이라 한 까닭은 무령왕이라는 시 호가 장례 직후까지 바쳐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백제의 시호제가 성왕대가 아닌 그 이후에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한편 사마왕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당시에는 아직까지 왕의 이름을 避諱 하는 풍습이 없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70 738 초하루인데] 壬辰일인 7日에 돌아가셨다(崩).6) 乙巳年(525) 8月 [이 달은 癸酉일이 초하 루인데] 甲申일인 12日에 이르러7) [殯을 끝내고] 편안히 葬禮하여(安 ), 大墓에 올려 뫼 4) 62세 : 에는 왕의 享年이 기록되지 않다. 그러나 묘지에 卒年인 523년에 왕의 享年이 62세로 되어 있고, 日本書紀 에 雄略天皇 5년(461) 6월 1일 무령왕이 탄생하였다는 기록이 서로 정확히 연결된다는 점에서, 무령왕의 生年은 461년이라고 생각된다. 이로 볼 때 당시 백제에서는 태어나서 1년이 지나야 1살로 계산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묘지석의 발견으로 무령왕은 三國史 記 기록에 從伯叔으로 되어 있는 三斤王보다도 나이가 두 살 많았고, 또 왕위에 오를 때 벌써 40 세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의 무령왕 계보처럼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었을 가능 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5) 癸卯年 5월 : 백제 무령왕 23년(523)으로 왕의 崩御年月이 기록과 완벽히 일치한다. 梁書 諸夷傳 百濟條에는 崩年이 양 무제 보통 5년(524)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이 묘 지의 발견으로 삼국사기 편년의 정확성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6) 崩 :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天子에 한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백제에서 崩 자를 사용했 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왕의 죽음을 崩이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제의 帝國意識, 天 下觀 등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7) 甲申日 12日 : 왕의 붕어 年月日은 癸卯年(523) 5월 7일인데 安葬 年月日은 乙巳年(525) 8월 12일 로 3년(만 27개월)의 간격이 있다. 이는 고구려의 例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제에서도 死後 3년 동안 屋內 또는 다른 곳에 시신을 殯하였다가 吉日을 택하여 陵墓에 安葬하는 葬制가 있었음을 의미한 다. 왕비의 지석 중에도 왕비가 돌아가신지 27개월 후에 改葬還大墓 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개장 이라는 어구도 居喪(3년: 만 27개월) 기간은 殯所에 해당하는 假埋葬을 했다가 3년상을 마친 뒤에 大墓, 즉 정식 왕릉으로 이장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김영심, 1992,`武寧王 誌石a, 152쪽). 또 공주 정지산 발굴로 밝혀졌지만, 성왕은 이 정지산에 무령왕과 왕비의 殯殿을 설치하고 3년상에 맞 추어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옮겨 묻었을 가능성이 높다(국립공주박물관, 1999, 정지산 ). 周書 에도 백제의 3년상을 언급하고 있고, 隋書 엔 백제의 상제가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는데, 고구려는 殯을 치르고 3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하여 매장하였다. 한편 周書 異域傳 百濟條와 隋書 東夷傳 百濟條에 백제에서는 宋의 元嘉曆을 채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묘지석의 연월일 표기를 통해 백제에서는 劉宋 文帝 元嘉 20년(423)에 제정된 원가력이 전래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이은성, 1984,`무령왕릉의 지석과 元嘉曆法a, 동방학지 43). 8) 登冠大墓 : 登冠은 고유명사인 지명. 安 는 안장과 같은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大墓에 올 려 뫼신다 는 의미로 이해된다(李丙燾, 1972,`百濟 武寧王陵 出土 誌石에 대하여a, 學術院論文 集 人文社會科學篇 11 ; 1976, 韓國古代史硏究 ). 9) 志 : 志 는 誌 와 통한다. 또는 文記, 文券 등 기록류를 총칭하므로 立志는 立券의 뜻도 있다. 10) : 立志如左 다음에 판독이 어려운 모호한 글자가 한 자 더 있다. 이를 穴이나 으로 읽는 견해 도 있으나, 중국 六朝의 買地券에서 종종 보이는 도교와 관련된 부적같은 기호일 가능성도 배제 石文 시었다.8) 墓誌를 세운 뜻은(立志),9) 이와 같다(如左) ) <뒷면>11) 未 亥 丁 壬 午 子 丙 癸 巳 戊 己 丑 辰 乙 卯 甲 寅 무령왕비 묘지석(武寧王妃 墓誌石)12) <앞면> 丙午年(526) 12月에13) 百濟國의 王大妃가14) 天壽를 다하셨다(壽終).15) [삼년]喪을 서쪽의 할 수 없다(권오영, 2004, 무령왕릉-고대동아시아 문명교류사의 빛, 92쪽). 한편 이를 印으로 읽고 불교적인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을 새긴 것으로, 백제인들의 생사관과 관련된 保證印으 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영욱, 2003,`백제 이두에 대하여a, 구결연구 11, 131쪽). 11) 武寧王 墓誌石 뒷면 : 왕 지석의 뒷면은 가장자리 안쪽을 따라 직선을 새기고 그 선위에 방향을 가 리키는 十干, 十二支를 새겼다. 이들 중 동 남 북쪽을 가리키는 세변에는 17개의 간지가 새겨져 있 고 나머지 서쪽부분에는 비어져 있다. 申 庚 酉 辛 戌 5개의 간지가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비워진 서쪽 부분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또 이 부분은 왕릉의 입구 쪽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그리 고 지석의 중앙에서 위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지름 1.1cm 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를 方位表 또 는 方位圖 겸 陵域圖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3면만을 기입하고 상부인 서쪽 방위는 기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첫째 가운데에 뚫린 구멍을 사방의 중앙으로 정할 경우 石材 자체가 정방형이 아 니고 또 구멍을 위쪽으로 치우쳐서 뚫었기 때문에 서쪽의 방위 표시는 비워두었다는 견해와 둘째 卜筮관계 혹은 陰陽方位思想에 의해 일부가 절단되었다는 견해가 있다(김영심, 1992,`武寧王 誌 石a, 152쪽). 한편 최근 이를 매지권과 일부로로 이해하고, 무령왕릉과 빈전의 위치가 공산성(왕 궁)을 중심으로 할 때 모두 서쪽에 해당되며, 무령왕과 왕비의 묘지에 기록된 申地, 酉地와도 일치 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권오영, 2004, 무령왕릉-고대동아시아 문명교류사의 빛, 90쪽). 12) 武寧王妃 墓誌石 : 무령왕릉 연도 중앙에서 왕의 지석과 함께 나란히 출토되었다. 크기는 세로

371 740 石文 땅[酉地]에서16) 마치고 己酉年(529) 2月 [이 달은 癸未일이 초하루인데] 甲午일인 12일에 다시 大墓로 돌아와 葬禮를 치렀다(改葬).17) 묘지를 세운 뜻은(立志), 이와 같다(如左). 741 乙巳年(525) 8月 12日21)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22) 앞 件의 돈으로 土王, 土伯, 土父 母, 二千石秩의 上下의 여러 官吏들에게23) 문의하여24) 西南쪽의 땅(申地)을25) 買入해서 墓 를 만들었다. 이에 買地券(券)을 만들어 證明으로 삼는다. [이 件은] 律令에 따르지 않는 <뒷면>18) 19) 20) 돈 1萬文, 이 1件(右一件)은 35cm, 가로 41.5cm, 두께 4.7cm이다. 앞면에는 上下에 陰刻橫線을 치고 그 사이에 陰刻 縱線으 로 2.7~2.9cm 간격으로 13행을 만들어서 우측 제1행에서 4행에 걸쳐 41자의 왕비 묘지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字徑 2cm이다. 뒷면은 買地券 본문으로서 陰刻 縱線으로 4.3~4.8cm 폭의 行間 을 만들고 우측부터 총 6행 5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字徑은 2~3cm이다. 왕의 지석 앞 뒷 면과 왕비 지석의 뒷면이 523년에 먼저 書刻되었고, 왕비 지석의 앞면은 왕비 死後인 526년에 追 刻되었다. 글자의 크기는 무령왕 묘지나 매지권보다 작고 書者 역시 다르다. 역주에 김영심, 1992,`武寧王妃 誌石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13) 병오년 12월 : 무령왕비가 죽은 年月에 해당하는데 왕의 것에 비해 日字 干支 享受 등이 생략 되어 있다. 14) 왕대비 : 무령왕비가 당시 국왕인 聖王의 母后이기 때문에 성왕의 입장에서 붙인 칭호이다. 왕의 처를 王妃, 그 어머니 또는 前王의 妃를 王大妃라 한 것은 중국의 제도에 따른 칭호이다. 15) 壽終 : 天命대로 살다가 죽었다는 뜻으로 王 지석의 崩과 같은 의미이다. 16) 酉地 : 正西方에 해당되며 매지권 본문에 나오는, 大墓가 있는 申地와는 매우 근접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빈전이 있던 酉地는 공주 정지산 유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왕은 이 정지산에 무 령왕과 왕비의 殯殿을 설치하고 3년상에 맞추어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옮겨 묻었을 가능성이 높다(국립공주박물관, 1999, 정지산 ). 17) 改葬 : 빈전에서 시신을 옮겨와 정식으로 大墓에 장례를 치렀다는 의미이다. 18) 武寧王妃 墓誌石 뒷면 : 武寧王妃 墓誌石 뒷면에는 買地券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묘소를 만 들 때 통용되는 화폐 古錢 지전 등을 함께 넣고 그 돈으로 地神에게 묘소를 매입하는 형식을 밟 고 그 증서에 해당하는 문서도 작성하였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後漢이나 東 吳의 매지권에는 토지 소유자, 면적과 가격, 증인 등 비교적 사실적인 내용이 기재되었다. 그런데 시기가 내려가면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면서 구체성을 잃고 상투적인 표현으로 바뀌는데, 무령왕 릉의 매지권도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매지권은 우리나라 최초의 것인데, 신에게 묘의 안 호를 기원하고 묘지 소유권을 확인하는 매매계약문서인 매지권이라고 보는 견해와 이 앞면에 왕 호, 사망일자 등이 있기 때문에 지석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명문의 書者나 제작 경위로 볼 때 무령왕 입관시 만들어진 매지권으로 왕의 지석과 함께 널길 중간에 매납되었다가 왕 비가 죽은 뒤인 529년 왕비를 합장하면서 매지권의 다른 면에 왕비에 관한 墓誌를 추각한 것으로 보인다(김영심, 1992,`武寧王妃 誌石a, 156쪽). 19) 文 : 원래는 周圓方孔의 돈이라는 뜻으로서 동전 錢面에 새긴 문자 또는 그림을 가리키지만, 동전 다.26) 갯수의 단위로 전용되었다. 여기서도 枚 의 뜻으로 쓰인 것이며 一万文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 미의 상징적 수치이다. 20) 右一件 : 右一件에 대해서는 왕 지석 後面의 方位陵域圖 1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右圖面內의 토 지 1건에 대한 代金이 錢一万文 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2,`百濟 武 寧王陵 出土 誌石에 대하여a). 일반적인 문서에서 右 라는 것이 이상의 사실 을 나타낼 때 쓰 는 표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바는 陵域圖일지 모르나 전체적인 내용상 다음과 같은 내용(사정)을 갖는 地價 錢 1만문 의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김영심, 1992,`武寧王妃 誌石a, 155~156쪽). 21) 을사년 8월 12일 : 文券(계약서) 작성 일자로 왕의 葬日과 일치된 年月日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왕 지석과 동시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朔日의 간지 癸酉와 當日의 간지 甲申을 생략한 것은 이미 왕의 지석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22) 사마왕 : 묘지의 買主에 해당. 23) 土王~二千石 : 地下에도 地上과 마찬가지로 王府와 百官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그들에게 토지 매매의 성립을 문의하는 것으로 토지의 賣主인 이들의 성격을 보면 土王은 전체의 토지신, 土伯 은 그 지역의 토지신이다. 土父母는 다른 例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墓域을 지배하는 토지신 또는 地靈인 듯하며 上下衆官 二千石은 漢代 地方長官의 俸祿이 이천석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冥 府에서 벼슬살이한 二千石秩의 여러 지방관을 의미한다(김영심, 1992,`武寧王妃 誌石a, 156쪽). 24) 詢 : 이를 訟(재산문제에 대한 訴訟의 의미), 諭(혹은 [請] 土地神들을 불러 )로 보기도 하나 중국 의 例 등을 볼 때 詢, 즉 토지신들에게 물어 의 의미가 더 통한다고 하겠다(李丙燾, 1972,`百濟 武寧王陵 出土 誌石에 대하여a). 25) 申地 : 서남 방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웅진왕성의 위치를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무령 왕릉의 위치가 백제 王城을 중심으로 정한 방위일 것이므로 왕성은 그 반대편인 北東位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이 이쪽 방향이다. 26) 不從律令 : 중국 漢 魏 六朝시대 도교에서 呪語의 末句에 사용하는 急急如律令, 有天帝(敎 如)律令, 有天地敎如律令, 他如天帝律令, 有私約如律令 과 같이 神의 勅書로 全文을 맺는 것이다. 중국의 墓券에 쓰인 것은 대체로 天帝 또는 天地의 敎命인 律令과 같이 (즉 그대로) 한 다 는 것의 약칭인데 무령왕릉의 不從律令 은 다른 例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에는 그간 다음의 세가지가 통용되었다. ① 이 율령을 天帝의 율령으로 보아 모든 것을 지배 하는 율령도 이 묘소에 관한 한 미치지 못한다, 곧 묘역에 관한 聖域化 선언으로 他如天帝律令

372 742 창왕명 석조 사리감( `昌王a 銘 石造 舍利龕)27) 石文 743 百濟 昌王(위덕왕)28) 13년 丁亥年에29) 妹兄公主30)가 舍利를 供養하였다. 명문이 있는 풍자연(銘文風字硯)31) (이 묘지에 관한 墓券에 따르고 그 밖의 것은 천제의 율령에 따른다)과 같은 내용일 것이며, 묘역 에 대한 것은 아무 율령에도 구속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② 이 율령을 중국의 천제 또는 천지의 율령과는 다른 世間의 율령으로 보아 세간의 法令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즉 이 묘지 매매는 死 人과 神 사이에 맺는 超人間的 계약이므로 俗世의 인간 상대의 現行 律令에는 쫓지 않는다는 의 미이다. ③ 매매문서의 단서조항, 즉 地神을 대표하는 土王과 인간을 대표하는 王이 계약했다는 점에서 立券爲明해 놓은 이상 이를 어길 경우의 단서조항으로서 지신들이 屍身을 침범하거나 死 者의 後孫을 해치는 등의 매매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율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간주하여 不從律令罪로 처벌한다는 뜻이다(김영심, 1992,`武寧王妃 誌石a, 156쪽). 그런데 학계에 알려지 지 않은 중국 자료 중 南京 西善橋 양나라 보국장군의 무덤에서 발굴된 매지권에 不從侯(律?)令 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무덤은 구조적으로 무령왕릉과 시기적으로도 아주 근접해 있기 때문에, 백제만의 고유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양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표현으로 이해된다(권 오영, 2004, 무령왕릉-고대동아시아 문명교류사의 빛, 93쪽). 27) 昌王銘 石造 舍利龕 : 1995년 부여 陵山里寺址 중앙 목탑터의 심초석 위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국보 288호이다. 능산리사지는 백제시대의 절터로서 부여읍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을 통해 계단식 논 지역의 북쪽 부분에서 중문 목탑 금당 강당 등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한 절터가 발굴 되었다. 이 절터에서는 사리감 외에도 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도 출토되어 학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리감의 높이는 74cm이고 화강암으 로 만들었으며, 윗면이 둥글고 아랫면은 네모나게 되어 있어 마치 우체통처럼 생겼다. 감실은 높 이 45cm, 너비 25.3cm, 깊이 25.5cm의 크기로 파놓았고, 감실 외면에 뚜껑을 덮기 위해 마련 된 뚜껑턱의 깊이가 4cm여서, 실제로 舍利莊嚴具를 넣기 위한 공간은 깊이 21cm 정도이다. 명 문은 감실 입구의 좌우 양면에 각각 10자씩 전체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隷書風이 강한 南北朝時 代의 楷書 로 公州 武寧王陵 誌石과 서체가 비슷하다(정재영, 2003,`백제의 문자 생활a, 구결 연구 11, 98쪽). 명문에는 昌王(위덕왕) 13년 丁亥年(567)에 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하였다. 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명문으로 볼 때 백제의 왕릉묘역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 인근에 위치한 능산리사지는 昌王과 妹兄公主의 아버지였던 聖王의 冥福을 빌기 위해 세운 王室願刹이 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이로 인해 발굴자들도 능산리사지를 陵寺 로 명명하였다. 한편 글씨가 남아있는 감실의 바깥 아랫면에도 판독이 불가능한 일부 글자획이 남아있고, 또 사 리감의 뒷면에는 전면의 감실과 비슷한 크기로 파다가 만 미완성된 감실이 있다. 이 사리감 유물 은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여 능사의 창건연대나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치의 변천 과정을 규명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28) 昌王 : 백제 제27대 왕인 威德王(524?~598, 재위 554~598)을 말한다. 에 위덕왕의 이름이 昌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리함의 명문으로 볼 때 당시 백제에서는 왕이 생존해 있을 원문 : 孝七 七孝 때 거리낌 없이 왕의 이름을 직접 왕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 르지 않는 중국식 예법이 당시에는 아직 백제에 들어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왕호법 은 6세기 신라왕의 호칭에서도 확인되어 양국 간에 유사성이 엿보인다. 창왕의 출생연도는 삼국 사기 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4년(553)에 당시 창왕이 29세 였다 고 기록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전술한`武寧王 墓誌石a에 기록되어 있는 무령왕의 임종 시 나 이와 日本書紀 의 무령왕 출생연도 등으로 볼 때, 백제에서는 태어나고 1년 후부터 1살로 계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계산하면 창왕의 출생연도는 524년이 된다. 한편 2007년 10월 부여 왕흥사지 목탑의 심초석 아래에서 丁酉年(577) 2월 15일 백제왕 昌이 죽은 王子를 위 해 탑을 세웠다. 본래 舍利는 2매였으나 묻을 때 神異한 조화로 3매가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 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a) 는 명문이 기록된`昌王a銘 靑銅舍利外函 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은 기존의 문헌자료와 달리 왕흥사가 이미 위덕왕대에 창건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昌王a銘 石造 舍利龕과 함께 창왕 시대의 불교와 정치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29) 昌王 13년 丁亥 : 丁亥年은 567년인데, 삼국사기 의 위덕왕(창왕) 13년은 566년이어서 1년의 차 가 있다. 삼국사기 에서는 百濟王의 재위 햇수를 卽位年稱元法으로 계산했지만, 이 사리감 명문 으로 볼 때 실제로 당시 백제에서는 踰年稱元法으로 재위 햇수를 계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의 발견을 기대해본다. 한편 日本書紀 에 의거하여, 聖王이 554 년 戰死한 뒤 창왕은 自責으로 승려가 되려고 하는 등,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고, 557년 3월 이 되어서야 겨우 즉위하게 되었다는 三年空位說 이 한때 제기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사리감 의 명문을 통해, 창왕은 삼국사기 의 기록대로 성왕 전사 직후 곧바로 즉위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30) 妹兄公主 : 글자의 뜻으로 볼 때 창왕의 손위 누이를 표현한 백제식 어휘라고 생각된다. 혹 聖王 의 큰딸(長女)일지도 모른다. 31) 銘文風字硯 : 부여 관북리 왕궁지유적에서 1988년 발굴시 출토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풍자연이 다. 風字硯 이란 風字처럼 한쪽이 벌어지면서 가장자리가 트인 형태의 벼루를 말하며 중국에서 는 당나라 때 널리 사용되었다. 이 벼루도 신라시대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명문은 벼루 의 뒷면에 있으며 현재 4행 7자만 남아있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집문당, 326쪽).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에는 남

373 744 李吉 光 石文 745 `上 a 銘 標石34) 원문 : 上 前 自此以 표석(標石) 32) `前部a 銘 標石33) 번역 : 上 와 前 여기서부터( [담당구역]은 35) 自此以) [어디까지 이다]. 아있는 명문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단부가 파손되어 각 행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마지막 4행은 다른 행들과 간격이 다르다. 명문은 매우 가늘게 새겨져 있 고, 상단부의 파손으로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동일한 글자가 반복되고 있어 글자를 연습 한 習書가 아닐까 생각된다. 벼루의 현존 너비는 11.7cm이다. 32) 標石 : 이 유물들은 충남 부여읍 동남리 향교 동쪽 논 가운데 있던 것을 1925년에 발견하여,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이전 보관하고 있다. 표석은 전체 2개인데, 그 중 하나는 높이 34.5cm인 사다 리꼴 화강암의 한 면을 다듬고, 거기에 약 9cm 크기로 세로로`前部a라는 두 글자를 새긴 것이 다. 다른 하나는 세로 20cm, 가로 44cm의 화강암 한 면에 3행으로`上 前 / 自此以/ a 로 판독되는 명문을 새긴 것인데, 크기나 字徑(4cm )이 모두 앞의`전부a명 표석보다 작다. 이 유 물들은 백제 사비도성 내에서 발견된 다른 部銘의 초석 와편 와당 등과 함께 사비도성의 5부제 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 유물들의 발견 위치와 명문에 기초하 여 이들을 서로 연결해 백제가 도성 내에 각 部의 境界標識로 세웠던 標石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에 의거하여 上 는 향교의 동쪽, 前 는 향교의 남쪽으로 비 정하는 견해도 피력된 바 있다(田中俊明, 1990,`王都로서의 泗 城에 대한 豫備的 考察a, 百濟 硏究 21, 189쪽). 그러나 최근 이 표석이 발견된 동남리 부여향교 근처가 원래 이 표석이 놓여 있던 위치가 아니라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원래는 이 돌들은 사비나성의 성벽 돌이었는데, 도로 포장을 위해 나성의 성벽 돌을 깨뜨려 쓰게 되면서 발견된 위치로 옮겨지게 되 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표석들은 뒷부분이 성벽 돌처럼 삼각형의 쇄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도 성 내부의 도로에 세웠다기보다는 성벽 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이 유물 은 新羅의`南山新城碑a처럼 도성의 각 部에 할당해서 나성을 축조 또는 보수한 후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상부와 전부가 담당했던 지역을 명문으로 표시해놓은 표석이 된다(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a, 한국고대사연구 48, 252쪽). 기존 입장에 대 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33)`前部a銘 標石 : 명문을 首 로 판독하는 견해도 있지만(洪思俊, 1971,`百濟城址硏究a, 百濟 硏究 2), 前部 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34)`上 a銘 標石 :`前部a銘 標石은 금성산 서남쪽, 현재의 청소년 수련관 부근에서 발견되었고, `上 a銘 標石은 정림사지 북서쪽, 현재의 시장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자는 그 용도를 윤선태(동국대학교) 달리 볼 여지도 있지만, 특히 후자의`상부a명 표석은 나성의 석재와 동일하여 나성 축조의 담당 구역을 분담한 표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 한 몇 가지 재검토a, 252~255쪽). 35) : 이를 川 으로 판독한 견해도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20쪽).

374

375 佛像銘 749 佛像銘 癸未銘 金銅三尊佛立像1) 癸未年2) 11월 1일에 寶華가3) 돌아가신 아버지(父) 趙 人을4) 위하여 만들다. 甲寅銘 釋迦像 光背5) 甲寅年6) 3월 26일에 [석가불] 弟子 1) 癸未銘 金銅三尊佛立像 : 이 불상은 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불(국보 72호)이다. 높이는 17.5cm이고 출토지는 미상이다. 光背 하나에 施無畏 與願印의 본존불과 협시보살을 함께 배치한 一光三尊佛 형식인데, 광배의 뒷면에 2행 17자로 된 명문이 있다. 내용을 보면 寶華라는 인물이 亡 父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백제로 보는 견해와 고 구려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진다. 본존불의 옷 모양이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고 있어 고구려불상이 확실한`延嘉七年銘 金銅如來立像a과 공통점이 많다. 이로 인해 고구려불이란 견해가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延嘉七年銘 金銅如來立像a과 달리 중국에서 6세기부터 유행하였던 일광삼존의 형식을 하고 있고, 불상의 얼굴에도 살이 많이 붙고 미소도 훨씬 명랑해보이기 때문에, 연가불 계통이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수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文明大, 1980, 韓國彫刻史, 悅話堂, 111쪽). 역주에 서영대, 1992,`癸未銘 金銅三尊佛立像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 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 癸未年 : 불상의 제작연대인데, 563년설(고구려 平原王 5, 백제 威德王 10)과 이보다 한 갑자 내린 623년설(백제 무왕 24)이 제기되어 있다(황수영, 1974, 불탑과 불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49 쪽). 전자는 이 불상 광배의 문양이`景四年辛卯銘金銅三尊佛立像a과`延嘉七年銘金銅光背a의 중 간 형식이므로, 불상의 제작도 이 두 불상 사이로 보고 있다(金元龍, 1980, 韓國美術史, 汎文社, 72쪽).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延嘉七年銘金銅光背a와 가까운 563년설이 더 타당한 것 같 다(서영대, 1992,`癸未銘 金銅三尊佛立像a, 162쪽). 3) 寶華 : 불상 제작의 발원자이다. 이름으로 볼 때 여자라고 생각된다. 4) 趙 人 : 이 불상 외에도 백제불상으로 소개되고 있는`鄭智遠銘佛a에서 趙思 가 기록되어 있어, 백제에 趙 姓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趙姓이 문헌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이 불상의 발원자인 寶華와 그 아버지 趙 人은 중국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불상은 매우 작아 사 람이 소지하고 다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5) 甲寅銘 釋迦像 光背 : 이 불상은 일본 法隆寺에서 國立東京博物館에 헌납한 소위 48體佛이라고 하

376 750 王延孫이7) 현세(現在)의 父母를 위하여 佛像銘 751 속히 淨土에 나서 佛을 보고 法을 듣게 하소서.12) 금동석가상 1軀를 공경히 만드니, 바라건대 부모가 이 공덕을 빌어 現身이8) 편안하고, 태어나는 세상마다9) 三途를10) 거치지 않고 八難을11) 멀리 떠나, 甲申銘 金銅釋迦像 光背13) 甲申年에14) [보시하여] 釋加像을 만드니 諸佛을 만나서 는 飛鳥奈良時代의 金銅佛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는 舟形의 광배만 남아 있는데, 광배에 남아있는 구멍과 촉으로 볼 때 원래는 대좌와 본존 및 협시보살이 있는 一光三尊佛 형식이었다고 추정된다. 이 광배 등에 해서체로 7행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王延孫이 현재 부모의 정토왕생 을 위하여 석가불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일본에서 제작되었다는 보는 견해도 있지 만, 대체로 우리 삼국시대의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상이 남아있지 않아 삼국 중 어디 에서 제작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연손이란 이름으로 미루어 고구려나 백제의 불상일 가 능성이 크다. 또 제작연대는 594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역주에 서영대, 1992,`甲寅銘 釋 迦像 光背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6) 甲寅年 : 불상의 제작연대인 이 갑인년에 대해서는 594년설과 654년설이 제기되어 있지만, 전자 의 설이 유력하다. 그 이유는 비천상이 있는 광배의 형식이 북위의 正光 5년(524)명 금동불상의 광 배와 매우 흡사하고, 또 명문에 보이는 生生世世 見佛聞法 과 같은 표현이`建興五年丙辰銘 金銅光背a나`景四年辛卯銘 金銅三尊佛立像a등처럼 6세기 중국 불상의 造像記에 많이 보이고 있 기 때문이다(서영대, 1992,`甲寅銘 釋迦像 光背a, 164쪽). 7) 王延孫 : 불상 제작을 발원한 사람이다. 왕씨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모두 확인되며, 낙랑 대방계 출신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는 王高德( 海東高僧傳 ) 王山岳( 樂志) 등이 현달하였고, 백제에서는 王辯那( 威德王 45년 9월조)나 倭에 千字文 을 전한 王仁의 존재가 확인된다. 8) 現身 : 이승에서의 몸을 말한다. 9) 태어나는 세상마다 : 원문의 生生世世 을 번역한 것이다. 이 표현은`建興五年丙辰銘 金銅光背a 와`景四年辛卯銘 金銅三尊佛立像a에도 공통적으로 보이는데, 이에 기초하여 이 광배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熊谷宣夫, 1960,`甲寅年 王延孫造光背考a, 美術硏 究 209, 5쪽). 10) 三途 : 三惡道라고도 한다. 악업의 결과 태어나게 되는 火途(지옥) 刀途(餓鬼) 血途(畜生)의 세 계를 가리킨다. 11) 八難 :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불법을 듣지 못하는 여덟 가지의 難處를 말한다. 즉 地獄 畜生 餓 鬼 長壽天(장수를 누리면서 구도심을 일으키지 않음), 邊地 盲聾 世智弁聰 佛前佛後 를 말한다. 이 중 처음 셋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법을 들을 수 없고, 다음의 둘은 즐거움이 너무 많아서 법을 듣지 못하고, 世智弁聰은 世俗智에 뛰어나 불법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서영대, 1992,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鄭智遠銘 金銅三尊佛立像15) 鄭智遠이16) 죽은 아내(亡妻) 趙思를17) 위하여 `甲寅銘 釋迦像 光背a, 164쪽). 12) 佛을 보고 法을 듣게 하소서 : 원문의 見佛聞法 을 번역한 것이다. 이 구절 역시 조상명에 보이 는 관용구로서, 北魏에서 唐代에 제작된 조상명에서 확인된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値佛聞法 도 있는데, 이것은 특히 東魏代(534~550)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은 이 광배의 제 작연대를 생각함에 많은 시사를 준다(熊谷宣夫, 1960,`甲寅年 王延孫造光背考a, 10~13쪽). 13) 甲申銘 金銅釋迦像 光背 : 이 불상은 1920년대 중반 藤谷宗順이란 일본인이 대구의 골동품상으로 부터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높이는 1寸 8分으로, 施無畏 與願印의 여래가 방형 대좌 위에 結跏趺 坐하고 있는 모습이며, 여래의 뒤에는 舟形光背가 있다. 명문은 광배 뒤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 데, 1행은 5자로 추측되지만 광배 좌우가 파손되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榧本杜人, 1933,`有 銘佛像の一資料a, 博物館報 5). 한편 黃壽永에 의하면, 부여박물관에 京城 藤谷宗順 소장품으 로, 부여군 恩山面 角岱里에서 출토된 甲辰年 造釋迦像 每[世]値諸佛 離苦得樂 이란 명문을 가진 불상의 사진이 있다고 한다(黃壽永, 1976,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241쪽). 소장자가 같고 명문 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같은 불상으로 볼 수 있지만, 제작연대나 발견경위가 서로 달라 면밀한 검 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역주에 서영대, 1992,`甲申銘 金銅釋迦像 光背a, 역주한국고대금석 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14) 甲申年 : 불상의 제작연대를 가리키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불상을 백제의 것으로 보고, 武王 25년(624)에 제작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으나(熊谷宣夫, 1960,`甲寅年 王延孫造光 背考a, 5쪽),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서영대, 1992,`甲申 銘 金銅釋迦像 光背a, 166쪽). 15) 鄭智遠銘 金銅三尊佛立像 : 이 불상은 1919년 부여 부소산성 送月臺(지금의 泗 樓)에서 출토된 높이 8.5cm의 금동불상(보물 196호)이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舟形光背에 施

377 752 金像을18) 공경히 만드니, 빨리 三塗를19) 떠나게 해주소서. 佛像銘 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23) <Ⅰ面: 向左側面> 24) `何多宜藏法師a銘 光背20) 753 癸酉年 4월 15일에 兮25) 乃末이26) 솔선하여 발원하고 삼가 공경히 [만들 何多宜21)藏法師 `卍a銘 石佛坐像22) 卍 無畏 與願印의 본존 입상과 두 협시보살이 한 데 붙어서 주조된 一光三尊佛 형식인데, 광배 뒷면 에 3행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내용을 보면, 鄭智遠이란 인물이 죽은 부인의 내세를 위해 이 불 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출토지점이 명확해 백제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양식상으로는 고구려계통의`景四年辛卯銘 金銅三尊佛a과 거의 유사하여, 570년 경 나제동맹이 와해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文明大, 1987,`美術篇a,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160쪽). 역주에 서영대, 1992,`鄭智遠銘 金銅三尊佛立像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16) 鄭智遠 : 이 불상 조성의 발원자이다. 이 불상을 백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鄭智遠 이란 이름이 순한문식이며, 또 지금까지 백제의 성씨에서 鄭氏 趙氏(부인의 성)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중국에서 제작되어 백제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17) 趙思 : 정지원의 부인 이름이다. 趙思敬까지를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중국의 造像銘에 敬造 란 말이 흔히 보이므로(塚本善隆, 1969, 支那佛敎史硏究(北魏篇), 淸水弘文堂, 443~409 쪽), 이 경우도 趙思까지를 이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서영대, 1992,`鄭智遠銘 金銅三尊佛立 像a, 167쪽). 18) 金像 : 불상이 금색이라 이렇게도 표현한다. 19) 三塗 : 앞서 검토한`甲寅銘 釋迦像 光背a에는 三途로 되어 있다. 삼도는 三惡道라고도 하는데, 악업의 결과 태어나게 되는 火塗(지옥) 刀塗(아귀) 血塗(축생)의 세계를 가리킨다. 20)`何多宜藏法師a銘 光背 : 이 광배는 1991년 부소산성 동문지와 주변 성벽 발굴조사 때 성벽 안쪽 의 百濟 舊地表 床面에서 출토되었다. 광배의 재질은 금동인데, 별도의 문양이 없는 광배 뒷면에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명문을 새겼다(金容民, 1996,`扶蘇山城 東門址 出土 金銅光背a, 美 術資料 57).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1) 宜 : 金容民, 1996,`扶蘇山城 東門址 出土 金銅光背a의 도판 설명에는 宣 으로 되어 있지만, 宜 로 판독된다. 한편 宜藏은 法師의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22)`卍a銘 石佛坐像 : 이 불상은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납석제의 불상으로 禪定印을 하고 있 다. 명문은 이 불상의 U자형의 상의 안쪽 가슴에 새겨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 1999, 특별전 백 제, 193쪽). 이 불상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3) 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 : 이 석상은 石佛碑像 으로도 불리며, 백제멸망 후 연기지역의 백제 유민들에 의해 문무왕 13년(673)에 제작되었다. 이 석상은 忠南 燕岐郡 全東面 多方里(사방골)의 碑巖寺에`己丑銘 阿彌陀佛像a과 함께 전승되어 오다가 1960년 학계에 최초로 보고되었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이관 보관되고 있고, 국보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상은 높이 43cm이고, 前面의 폭은 26.7cm, 側面의 폭은 17cm이다. 원래는 屋蓋와 座臺를 따로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 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佛碑像의 중앙부 몸돌에 해당되는 부분만 남아있다. 석상의 각 면은 모두 불상과 무늬로 가득 차 있지만, 前面의 하단과 兩側面 後面 등 4면의 빈공간에 빽빽이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글자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쉽지 않으나, 석상을 조성한 시점과 관련된 인물들의 人名 등은 확인된다. 조성연대는 석상의 양측면에 보이는 癸酉年 이란 간지와 인명의 관등 표기 그리고 석상의 형태 및 세부양식으로 볼 때, 673년(文武王 13)으로 추정된다. 명문에는 신라의 관등명인 乃末 大舍 등과 함께 백제의 관등명인 達率 이 함께 보이고 있어,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으로 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석상이 조성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명문 자료는 이 지 역의 백제 유력세력이 전란이 수습된 후 신라로부터 관등을 수여받고 신라 지배층에 편입되어 가 는 과정을 전해주고 있어, 신라의 백제고지에 대한 지배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 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또 명문에는 五十人 등이 香徒를 조직해 불상의 조성에 참 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대의 香徒 사례로도 귀중한 측면을 갖고 있다. 명문의 연결 순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向左側에서부터 시작하여 後面으로 하나의 내용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며, 다시 向右側으로부터 正面까지 또 하나의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 적이다. 그러나 向左側과 後面은 별무리 없이 연결되지만, 向右側과 前面은 명문의 양식이 약간 달라 혹시 다른 내용이 기록된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이 석상의 명문을 크게 내용상 세 개로 나누어본다. 역주에 김정숙, 1992,`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 역주한국고대 금석문Ⅱ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24) : 이 석상의 向右側面이나`癸酉銘 三尊千佛碑像a의 예로 보아 歲次 혹은 歲在 로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김정숙, 1992,`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 25) 兮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17쪽에는 이 빠져있지만, 탁본상 향좌측면 1행 하단 에 끝에 한 글자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6) 乃末: 신라의 京位 17관등 중 제11등이다. 백제 멸망 후 신라는 백제 관등소지자에게 그에 해당하

378 754 어]27) 彌次乃 佛像銘 28), 正 乃末, 牟氏 29) 등 50인 知識30)과 함께 國王 大臣 및 <Ⅱ面: 後面> 七世父母31)와 모든 영혼을 위하여 발원하여 삼가 절을 지었다. 上次 乃末과 三久知 乃末, 兎 大舍가 원했다. 知識들 명단(記). 大舍가 원했고, 夫信 大舍가 [원했다]. 32) 33) 達率 身次가 원했고, 眞武 大舍 가 원했고, 大舍가 원했다. 大 大乃末이 원했고, 惠信師가34) [원했다]. 林 久 大舍가 원했다. 夫 乃末이 원했다. 乃末이 원했다. 惠明法師가 [원했고], 는 신라 외위를 내렸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신라의 지방민을 포함해 백제 고구려 공히 모 두 신라의 경위로 통일하였다( 권40 職官 下 外官). 이 석상의 명문은 이를 증명하는 좋은 사례이다. 에 의하면, 乃末은 백제에서 달솔보다 아래인 恩率(제3관등)의 관등을 지녔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되어 있다. 27) [만들어] : 명문의 글자를 읽기 어렵지만 造 자로 추측된다(김정숙, 1992,`癸酉銘 阿彌陀三尊四 面石像a). 28) 彌次乃 :`癸酉銘 三尊千佛碑像a에 의거하여 종래에는 彌次乃를 지명이나 향도 이름으로 이해 하였다. 그러나 이 석상의 탁본으로 볼 때 彌次(인명) 乃末(관등)로 판독되기 때문에`癸酉銘 三尊 千佛碑像a도 彌次 乃末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된다(윤선태, 2005,`신라 중대말~하대초의 지방사 회와 불교신앙결사a, 신라문화 26). 29) 牟氏 : 기존에는 全氏 로 읽었지만, 탁본으로 볼 때 牟氏가 분명하며, 백제 능산리사지 출토 사면목간에도 백제인명으로 牟氏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牟氏 다음은 종래 三으로 읽었지만, 大 舍를 한글자로 쓴 신라식 造字라고 생각되며, 이는 牟氏의 관등으로`癸酉銘 三尊千佛碑像a에도 牟氏의 官等은 大舍로 되어 있다(윤선태, 2005,`신라 중대말~하대초의 지방사회와 불교신앙결 사a). 30) 知識 : 번뇌를 버리고 正法을 안다는 의미로, 佛僧이나 佛敎徒를 가리키는 말이다. 31) 七世父母 :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전생의 일곱 世代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혈연적으로 7 세대의 조상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석상이 조성된 시기를 전후하여 造像記에 七世父母에 대한 기원이 자주 나온다. 후술하는`癸酉銘 三尊千佛碑像a에서 사례를 상술하였다. 32) 達率 : 백제 16관등 중 제2관등이다. 이 석상 명문의 인명표기방식은`癸酉銘 三尊千佛碑像a의 명문과 같이 人名-官等名 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達率身次 만은 官等名이 앞에 기록되어 있 다. 이를 達率이 백제의 관등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乃末 이나 大舍 등 신라 관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앞에 백제 관등인 達率을 소지한 자를 제일 먼저 기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이 지역의 제일 유력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백제 멸망 이후 신라로부터 새로운 외위와 경위 관등을 받았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 제 관인으로서의 자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33) 大舍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2등이다. 한편 권40 職官 下를 보면, 大舍는 백제에서 德率(제4관등)의 관등을 지녔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되어 있다. 755 道師가 [원했다]. <Ⅲ面: 向右側面> 歲(次) (癸酉)年35) 4월 15일에 여러 를 위하여 삼가 이 돌로 諸佛(菩薩)36)을 만들었다. 道作公37)이 원했고, 使眞公이 [원했고],38) 가 원했다. <Ⅳ面: 正面> 牟氏 述況 二兮 한마음으로 阿彌陀佛像과 觀音大世至像을 삼가 만 들었다. 원컨대 삼가 만든 이 石佛像이 內外 十方과39) 內外十六(을 비추소서). 癸酉銘 三尊千佛碑像40) 歲在 癸酉年 4월 15일에 香徒는41) 釋迦42) 및 여러 불보살의 상을 만들었다. 돌에 기록하 34) 惠信師 : 뒤에 나오는 惠明法師 道師 등과 함께 승려이다. 35) 歲 年 : 干支가 보이지 않지만, 날짜가 向左側面과 같음을 보아 같은 해로 추정해 볼 수 있 다. 36) 菩薩 : 向右側面 Ⅲ행의 제3~4자는 문맥상 菩薩 로 추정된다. 37) 道作公 : 뒤에 나오는 使眞公과 함께 人名으로 보인다. 관직명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冷水里 碑a나`鳳坪碑a `昌寧碑a등에도 公 으로 끝나는 인명이 다수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아 인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造像事業에 관여한 인물이지만 京位는 없었던 듯하다(김 정숙, 1992,`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 38) 使眞公 : 마지막의 자는 앞뒤의 예로 보아 願 일 가능성이 크다. 39) 十方 : 동 서 남 북 동북 동남 서남 서북 상 하의 열 군데를 시방세계라고 한다. 온천 지 무수한 세계라는 의미이다. 40) 癸酉銘 三尊千佛碑像 : 이 佛碑像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흑회색 석비상이다. 이 불

379 756 비상은 본래 충남 燕岐郡 鳥致院邑 근교의 瑞光庵에 있었던 것으로, 그 곳 主持의 말에 의하면 조 치원 읍내 도랑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높이는 약 91cm, 폭은 하부에서 20cm, 상부에 서 47.5cm이고, 두께는 하부에서 15cm, 상부에서 14.5cm이다. 파손이 심하고 특히 오른편이 많이 훼손되었다. 석상의 前面은 9단으로 나뉘어 각 단마다 22구의 불상이 있고, 兩側面은 14단 으로 나뉘어 각 단에 7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後面에는 16단에 각 단 21구씩 小如來坐像이 양 각되었다. 또 蓋石이 있는데, 상하 2단의 장방형 돌로서 碑像에 맞도록 홈이 파여져 있고, 하단 주위로 장막이 늘어졌다. 길이와 너비는 하층이 33 64cm이고, 상층이 21 46cm이며, 높이는 18.5cm이다. 개석에도 상하 2단의 四面에 각 1단, 屋裏에 2단씩 작은 불상이 비신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양각되어 있다. 그리고 상단 좌우와 중앙 전후 등 여섯 군데에 方孔이 있는데, 이곳에 장신구가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우끝의 구멍은 영락을 걸었던 자리로 생각된다. 이 小佛像 들은 千佛을 표현한 것으로, 사면 모두에 틈을 남기지 않고 불상을 배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온 예이다. 이 삼존상에는 좌우에 각 4행씩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상하의 길이는 21cm 쯤 되며, 약 2.5cm 간격으로 줄을 내리그어 行間을 구획하였다. 글자의 크기는 약 1.12cm 가량이다. 이 석상의 명문에는`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과 같이 癸酉年四月十五日 이라는 간지와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양자의 조성과정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佛像의 樣式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선 석상의 조각 수법이 매우 유사하다. 이 석상의 전면 상부 중앙에 삼존상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는데, 특히 삼존의 양식이`癸酉銘 阿彌陀 三尊四面石像a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이 석상의 三尊은 모두 頭光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차이나 는 점이다. 높이 21.5cm인 本尊은 方座에 結跏趺坐를 하고 있는데, 무릎밑과 하단에 蓮華座가 있고, 그 사이는 裳懸座의 양식으로 새겼다. 본존의 通肩衣나 앞에서 X자로 교차되는 天衣 등을 보아`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과 거의 동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文武王 13년(673)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불상의 조성자 역시`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과 동일 인명들이 보이고 있어 같은 香徒 조직이거나 거기에서 분파된 향도 조직이라고 생각된다(윤선태, 2005,`신라 중대말~하대초의 지방사회와 불교신앙결사a). 역주에 김정숙, 1992,`癸酉銘 三尊千佛碑像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Ⅱ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고하였다. 41) 香徒 : 기존의 판독에서는 Ⅰ행 마지막 글자를 香 으로 추정해 왔는데, 명문의 다른 香 자와는 차이가 난다. 해석이 매끄럽지는 않으나 자형만으로는 者 자일 가능성도 있다. 香徒란 信仰結社 의 徒衆을 의미한다(김정숙, 1992,`癸酉銘 三尊千佛碑像a). 42) 釋迦 : Ⅱ행 제2~3자에 대해 판독의 차이가 심한데, 이를 釋迦 라고 읽는 사람들(黃壽永, 1976, 韓國金石遺文 ; 趙東元, 1981, 韓國金石文大系 忠淸北道篇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 古代篇)과 라고 읽는 사람들(秦弘燮, 1961,`燕岐의 三尊千佛碑像a, 考古美術 2-9 ; 李 蘭暎, 1968, 韓國金石文追補 )로 나뉜다. 여기서는 黃壽永의 판독에 의거해 판독문을 만들었다. Ⅱ행 제2자는 실제로 글자 형태가 와 흡사하다. 이로 인해 陀 또는 [阿] [陀] 로 읽는 견해도 있다(김정숙, 1992,`癸酉銘 三尊千佛碑像a). 佛像銘 757 니 이것은 國王,43) 大臣 및 七世父母,44) 法界의 衆生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香徒 [참여자] 명단(名) 彌次 乃(末),45) 牟氏46) 大舍, 上生 小舍,47) 小舍, 그리고 仁次 大舍, 宣 大舍, 贊不 小舍, 武使 小舍, 등 二百五十人이다. 윤선태(동국대학교) 43) 國王 : 國主라고도 읽힐 여지가 있다(김정숙, 1992,`癸酉銘 三尊千佛碑像a). 44) 七世父母 :`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에도 나온다. 고구려 불상으로 알려진`大和十三年銘 石 佛像a에도 七世父母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윈시경전의 하나인 中阿含經 과 雜阿含經 에는 아 버지쪽이나 어머니쪽 모두가 7세대에 걸쳐 혈통이 순수하다. 는 귀절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七世父母는 원래 진정한 바라문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던 듯하다. 그러나 위의 조상기에 자주 등 장하는 七世父母는 굳이 가문의 우수성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선조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 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겠다(김정숙, 1992,`癸酉銘 三尊千佛碑像a). 45) 彌次乃(末) : 기존에는 彌次乃로만 읽어 향도의 이름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癸酉銘 阿彌陀三尊 四面石像a에는 분명히 彌次乃(末)로 판독된다(윤선태, 2005,`신라 중대말~하대초의 지방사회와 불교신앙결사a). 46) 牟氏: 기존에는 眞牟氏로 판독하였으나, 첫글자 眞은 彌次乃(末)의 마지막 末을 잘못 판독한 것으 로 생각된다(윤선태, 2005,`신라 중대말~하대초의 지방사회와 불교신앙결사a). 47) 小舍: 기존에는 대체로 大舍로 판독하였지만, 자획만 보면 小舍 일 가능성이 더 크다. 기존에는 이다음에 다시 大舍가 나오고 있어, 小舍로 볼 경우에는 관등의 서열이 맞지 않아 기왕의 연구에 서 大舍로 파악했지만,`癸酉銘 阿彌陀三尊四面石像a의 명단에도 관등순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일 정한 그룹핑이 엿보인다. 따라서 관등순서에 구애된 판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380

381 瓦 塼 土器 銘文 761 瓦 塼 土器 銘文 서울지역 출토 기와 벽돌 토기의 銘文(서울 地域 出土 瓦 塼 土器銘)1) `直a銘 塼2) `井a銘 壺3) 1) 서울지역 출토 기와 벽돌 토기의 명문 : 이 명문자료들은 1999년 9월부터 2000년 5월까지 한 신대학교 박물관에서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 내 경당지구 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할 때 출토된 유물들이다. 1980년대 이후 학계에서는 백제의 초기 도성인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 비정하였지 만, 1997년 이후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통설에 대한 재검 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풍납토성은 성의 규모(아래 너비 43m, 높이 11m로 추정),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 유구나 유물의 양과 질적 수준 등에서 몽촌토성보다 우월하다. 특히 풍납토성 내에서는 공 공건물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와와 벽돌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경당지구 유적의 층위는 크게 상 중 하의 세 개층으로 세분되는데 상층에는 각종 폐기장, 주거지, 9호 대형 수혈 유구, 옹관묘 등이 분포하 며, 중층에는 주거지, 44호 건물지, 대소형의 저장공, 용도 미상의 각종 수혈이 분포한다. 하층에 서는 주거지, 溝, 용도 미상의 수혈 등이 검출되었는데 중도식 무문토기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명 문자료는 9호 대형 수혈 유구와 101호 폐기장에서 출토되었다(권오영, 2001,`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조사의 성과-9호, 44호, 101호, 196호 유구를 중심으로-a, 풍납토성의 발굴과 그 성과 한 밭대학교 개교 74주년기념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37~47쪽). 2)`直a銘 塼 : 이 명문자료는 101호 폐기장에서 출토되었다. 이 폐기장은 평면이 마름모꼴에 가까운 부정형의 수혈이며, 폐기 행위가 수차례 반복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폐기장에서는 견부에 다양 한 문양을 시문한 대옹 난형호 완 등 일상 생활용기가 다량 출토되었으며, 각종 동물뼈, 五銖錢, `直a銘 塼 등이 출토되었다. 이 폐기장은`井a이나`大夫a가 새겨진 壺들이 출토된 9호 대형 수혈 에 선행하는 유구이며, 9호 유구가 한성이 함락되는 475년의 시점과 연관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 에, 101호 폐기장은 그보다 앞서는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 사이에 해당하는 유구로 추정된다 (권오영, 2001,`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조사의 성과-9호, 44호, 101호, 196호 유구를 중심으로-a, 43쪽). 벽돌에 새겨진 直 은 혹 步道에서 벽돌이 놓일 위치를 미리 지정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 닐까 생각된다. 3)`井a銘 壺 : 이 명문자료는 9호 대형 수혈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구는 길이 1350, 폭 520, 깊이 300 이상의 장타원형 수혈로서 층위상 최상층에 해당된다. 내부는 수차에 걸쳐 퇴적이 이루어졌는데, 아래로 내려가면서 유물의 출토양상이 비교적 정연하고 상층은 각종 유물이 쓸려

382 762 `大夫a銘 壺4) 瓦 塼 土器 銘文 763 `大通a銘 瓦7) `西穴寺a銘 瓦8) 공주지역 출토 기와 벽돌의 명문(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 1) 기와의 명문(瓦銘) `三寶a銘 瓦9) `官a銘 瓦10) `流a銘 瓦片5) `熊川(熊)a銘 瓦6) 들어간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명문토기가 출토되는 층에서는 말의 하악골을 비롯한 유체가 넓게 퍼져 있다. 이 유구에서는 한성기 백제토기의 모든 기종이 출토되었으나, 고배(113개체) 삼족기 (60개체) 뚜껑(217개체) 등 소기종이 주류를 이룬다. 특징적인 사항은 고배와 삼족기에서 인위적 인 타격흔이 구연과 대각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흑색마연토기의 비중도 높은 편인데, 특히 장식성이 강한 대형 뚜껑류와 광구호 등이 주목되는 유물이다. 한편 표면을 마연한 직구단경 호 중`大夫a와`井a자가 각서된 명문자료가 확인되었다. 9호 유구는 일반 폐기장보다 그 규모가 월등히 크다. 인위적으로 파손한 소형 기종의 토기들이 대부분 완형으로 접합된다는 점, 명문토기 가 2점 존재하는 점, 다량의 말뼈가 나온 점 등을 함께 고려할 때 특수한 성격의 유구로 제사와 관 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후 제사기능이 종료된 후에 주변의 유물들이 쓸려 들어왔 거나 폐기장으로 전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권오영, 2001,`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조사의 성 과-9호, 44호, 101호, 196호 유구를 중심으로-a, 40~41쪽). 토기에 새겨진`井a은 고구려, 신라 는 물론이고 고대일본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던 기호이다. 그 의미에 대해 주술적 邪符號로 이해 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김창석, 2004,`한성기 백제의 국가제사 체계와 변화 양상a, 서울학 연구 22). 4)`大夫a銘 壺 : 이 명문자료는`井a이 새겨진 壺와 함께 9호 대형 수혈 유구에서 출토되었다.`大 夫a는 이곳에서 벌어진 祭祀를 주재했던 인물의 職名이었다고 생각된다. 대부라는 관직명은 국내 의 史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이번에 실물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의 지배구조 연구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문동석, 2002,`풍남토성 출토 大夫 銘에 대하여a, 百濟硏究 36). 5)`流a銘 瓦片 : 이 기와편은 공주의 公山城을 비롯해 金鶴洞의 폐사지 등에서 수습되었다. 명문은 암키와의 표면에 右書로 陽刻印되었으며 字徑은 2.5 이다. 胎土는 細美하고 견고하게 소성되었으 며 색조는 灰黑色이다. 두께는 1.5 이다. 에 나오는 臨流閣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 소편, 191쪽). 6)`熊川(熊)a銘 瓦 : 이 기와는 공주의 公山城을 비롯해 무령왕릉이 있는 艇止山 등에서 수습되었다. 모두 수키와 등에 右書로 陽刻印되었으며 字體는 유려하고 세련미가 있다. 字徑은 모두 3.0 이며 두께는 1.8 이다. 태토는 세미 정선되었고 견고하게 소성되었으며 색조는 灰白色이다. 백제 시기 공주의 지명이 에는 熊津, 三國遺事 에는 熊川 으로 되어 있으며 통일신라 신문왕 때 熊川州, 경덕왕 때 熊州로 불리웠던 것으로 보아 웅천이 공주의 古地名임은 분명하나 이 명문와 의 확실한 조성 시기는 추정이 불가능하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1쪽). 7)`大通a銘 瓦 : 이 기와는 공주 班竹洞의 大通寺址에서 출토되었다(經部慈恩, 1946, 百濟美術 寶 雲舍). 瓦面을 凹형으로 一段 낮게 圓形으로 형성하고 그 안에 字徑 1.5 크기로 右書 刻印했으며 字體는 매우 고졸하다. 세미한 태토에 견고하게 소성되었고 색조는 회흑색이다(김영심, 1992,`公 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2쪽). 한편 대통사는 삼국유사 (興法 原宗興法厭觸滅身)에 근거해 대 부분의 연구자가 백제의 성왕이 527년 중국의 양무제를 위해서 웅천주(현 공주)에 지은 절로 봐왔 다. 그런데 최근 법화경 의 전륜성왕이 아들 대통불을 예배한 교설에 근거하여 전륜성왕을 자처 한 백제의 성왕이 아들 위덕왕과 돌아간 부왕 무령왕을 위하여 525년 왕실원찰로 지었다는 견해가 새롭게 제기되었다(조경철, 2002,`백제 성왕대 대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a, 국사관논총 98). 또 대통사의 위치에 대해선 사비천도의 일환으로 부여 용정리에 사찰을 조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조원창, 2003,`백제 웅진기 부여 용정리 하층 사원의 성격a, 한국상고사학보 42). 현재 대통사 지로 추정되는 공주시 반죽동 당간지주 인근에서는 백제시대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남석 서정석, 2000, 大通寺址, 공주대박물관). 8)`西穴寺a銘 瓦 : 이 기와는 공주 熊津洞 西穴山(望月山)의 동편 中腹에 위치한 서혈사에서 출토되 었다. 암키와 등에 縱線帶의 長方形 廓을 연속으로 만들고 그 안에 左縱書로 양각하여 가득 채웠 다. 태토는 세미하며 소성도는 良質에 속하고 화재로 인해 색조는 회갈색이다. 字徑은 3.5 이다 (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2쪽). 9)`三寶a銘 瓦 : 이 기와 역시 공주 熊津洞 서혈사지에서 수습되었다. 암키와에 左書로 陽刻印되었 으며 자경은 3.5 이다. 태토는 세미하며 견고하게 소성되었고 색조는 회흑색에 가까운 편이다. 삼보는 佛寶 法寶 僧寶를 가리키는 것으로 불교사원의 건축용재로서 매우 적격한 명문와인 듯 하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2쪽). 10)`官a銘 瓦 : 이 기와는 공주의 公山城 등에서 수습되었다. 모두 수키와 등에 각인한 것으로 태토 는 세미하고 견고하게 소성되었으며 색조는 회색이다. 字徑은 각각 3.5, 3.0, 2.5 이다. 이 들 명문와가 공산성을 중심으로 한 건물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아 宮室이나 官衙 建物用材가 아니 었을까 생각된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2쪽).

383 764 瓦 塼 土器 銘文 `中方a銘 塼16) 2) 벽돌의 명문(塼銘) `大方a銘 塼17) `士 壬辰年作a銘 塼11) `急使a銘 塼18) 원문 : 士 壬辰年作 12) ) 번역 : [瓦博]士가 壬辰年(512)에 만들다. `中a銘 塼19) `仗大a銘 塼20) `梁官品爲師矣a銘 塼14) 원문 : 梁官品爲師矣 번역 : 梁나라의 官品15) [벽돌]을 [제작의] 모범(師)으로 삼았다. 11)`士 壬辰年作a銘 塼 : 무령왕릉의 羨道 閉鎖塼에서 上端이 부러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長邊에 예 리한 공구로 陰刻하여 右縱書되었는데 字徑 은 3.0 이다. 태토는 세미하고 견고하게 소성되었으 며 색조는 회색이다. 破片塼으로서 잔존 길이는 15, 두께는 4 이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2쪽). 12) (瓦博)士 : 士 글자의 앞부분이 파손되어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나, 이 士는 벽돌을 제작한 자의 이름이거나 혹 백제 工人 職名 중의 하나인 瓦博士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百濟의 文字, 51쪽). 13) 壬辰年 : 임진년이라는 명문은 무령왕릉 築造用塼의 제작연대 고증에 절대연대로 활용되고 있다. 이 壬辰年은 무령왕 붕어 13년 전인 512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2쪽). 14)`梁官品爲師矣a銘 塼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0쪽에는 `梁官瓦爲師矣a銘 塼 이 라는 題名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이 벽돌의 명문은`梁官品爲師矣a로 판독되기 때문에, 본 역주 집 에서는 題名을`梁官品爲師矣a銘 塼으로 수정하였다. 이 벽돌은 송산리 6호분(壁畵 塼築墳)의 閉鎖用塼에서 수습된 것이다. 長邊의 一側面에 예리한 공구를 가지고 草書로 右書 陰刻하였는데 자경은 3.2 이다. 태토는 세미하고 견고하게 소성되었으며 색조는 회색이다. 장변의 길이는 30.0 이고 短邊의 無紋面의 길이는 13.5, 紋樣面의 길이는 10.0 이며 두께는 4.0 이다(김 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3쪽). 15) 官品 : 이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官瓦 (朴容塡, 1973,`公州出土의 百濟 瓦 塼에 關한 硏究a, 百濟文化 6) 또는 官品 (經部慈恩, 1946, 百濟美術 寶雲舍)으로 판독하고 官窯製品 의 의미 로 이해하는 견해가 이미 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글자는 官品 으로 판독되며, 명문의 전체 뜻 은 梁의 官營 工房의 塼 製品을 모범으로 삼았다. 라고 생각된다. 이는 당시 백제의 와박사(기와 는 물론 벽돌까지도 제작한 사람)들이 백제 벽돌의 기술적, 형태적 계통을 중국의 梁나라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 벽돌 短邊의 一側面에는 八葉蓮華文이 施文되어 있는데, 이는 무령왕 릉에 사용된 연화문전과 동일하며 塼平面의 繩蓆文도 동일하다. 따라서 송산리 6호분에 사용된 塼의 제작시기와 무령왕릉에 사용된 塼의 제작 시기가 같았다고 볼 수 있으며, 송산리 6호분의 羨 道와 玄室構築塼에서는 연화문전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명문전이 본래 王 陵 築造用塼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3 쪽). 16)`中方a銘 塼 : 이러한 명문이 기록된 벽돌은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에서 공히 출토된 바 있다. 우선 송산리 6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長 短邊에 각각 斜格紋과 中方 이란 문자를 右書로 陽刻하 였다. 장변의 有紋側보다는 無紋長邊側이 넓은 사다리꼴 모양의 전으로 연도와 현실 천장의 arch 形面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다. 태토는 세미하고 소성도는 양질에 속하며 색조는 회갈색이다. 명 문의 字徑은 1.5 이며, 장변 길이 33.0, 단변 길이 16.5, 두께 4.5 이다. 한편 무령왕릉에 서는 2곳에서 수습되었다. 하나는 현실 벽면에 설치된 燈龕 下部의 살창에 사용되었다. 이 벽돌의 장변에 中方 이란 문자를 右書로 양각하였는데 字徑은 1.5 이다. 태토는 세미하고 견고하게 소 성되었으며 색조는 회색이다. 장변 길이는 33.0, 단변 길이는 16.5, 두께는 4.0 이다. 나머 지 다른 하나는 무령왕릉의 현실 西壁面 최하단, 즉 基礎積에 사용된 것으로, 단변에 中方 이란 문자를 양각시켰다. 장변 길이 33.0, 단변 길이 16.5, 두께 4.5 이다(김영심, 1992,`公州 地域 出土 瓦 塼銘a, 193쪽). 17)`大方a銘 塼 : 이 벽돌은 무령왕릉의 현실내 棺臺 구축에 사용된 것으로 장변에 大方 문자를 양 각시켰다. 실측치는 장변 길이 33.0, 단변 길이 16.5, 두께 4.0 이다(김영심, 1992,`公州 地域 出土 瓦 塼銘a, 194쪽). 18)`急使a銘 塼 : 이 벽돌은 무령왕릉의 현실 南壁 arch天井 부분에 사용된 것으로 횡단면이 사다리 꼴로 되어 있다. 장변엔 斜格紋이 있고, 단변엔 左書로 急使 가 양각되어 있다. 字俓은 2.5 이 다. 태토는 세미하고 견고하게 소성되었으며 색조는 회흑색이다. 실측치는 장변 길이 35.0, 단 변 길이 15, 두께는 문양면 3.0, 무문면 5.5 이다(김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4쪽). 19)`中a銘 塼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瓦 塼 土器銘文 (320~324쪽)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急使a銘 塼과 동일한 형식, 즉 장변엔 斜格紋이 있고, 단변엔 左書로 中 이 양각 되어 있는`中a銘 塼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52쪽). 20)`仗大a銘 塼 : 이 벽돌 역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으며, 명문을`使大a로 읽는 견해도 있다(김 영심, 1992,`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 194쪽).`中方a銘 塼이 묘실의 수직벽에서,`大方a銘

384 766 부여지역 출토 기와 벽돌 토기의 명문 및 기타(扶餘地域 出土 瓦 塼 土器銘, 其他) 1) 기와의 명문(瓦銘)21) (1) 印刻銘文22) 瓦 塼 土器 銘文 767 `左 乙瓦a銘 印刻瓦23) `上 甲瓦a銘 印刻瓦24) `上 乙瓦a銘 印刻瓦25) `首 甲瓦a銘 印刻瓦26) `下 甲瓦a銘 印刻瓦27) `下 乙瓦a銘 印刻瓦28) 塼이 바닥에서,`急使a銘 塼가 아치형 천장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仗大a 銘 塼도 무덤 내의 특정한 사용 부위를 지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53쪽). 21) 瓦銘 : 기와의 명문은 그 표현방법에 따라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문자 가 각인된 印章을 가지고 기와에 찍어 문자를 표현한 印刻銘文 이 있다. 둘째, 기와의 등문양을 내기 위해 만든 타날판에 문자를 새겨서, 이를 가지고 기와의 등면에 두드려 표현한 打出銘文 이 있다. 셋째, 기와의 태토가 완전히 굳기 전에 대칼과 같은 예리한 도구를 이용해 직접 문자를 쓴 針線銘文 이 있다. 넷째, 막새기와에 문양을 찍는 范型 자체에 문자를 새겨 표현한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로, 완성된 기와의 등이나 안쪽에 먹으로 직접 문자를 쓴 墨書 등이 있다.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부여지역 출토 瓦 塼 土器銘, 기타 중 瓦銘(321~322 쪽) 하에는 세부 항목이 설정되어 있지 않지만, 본 역주집 에서는 부여에서 인각와들이 집중적 으로 출토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와의 명문을 크게 印刻銘文과 기타 명문으로 새롭게 세 분하여 보았다. 22) 印刻銘文 : 印刻瓦의 명문에는 문헌기록에서 이미 확인된 都城의 五部조직을 비롯하여, 인각와 출토유적의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 干支들, 그리고 기와의 생산과 공급시스템 등을 이해할 수 있 는 문자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3,200점이 넘게 보고되었다. 인각와에 새겨진 문자가 아주 간략하고 불분명하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 미진한 상태지만, 본 역주에서는 최근 백 제의 인각와를 종합하여 출토지역의 분포양상, 형태, 편년의 특징 등을 통해 인각와의 출현과 변 천과정을 상세히 검토한 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공주대학교 대학원 사학 과 석사학위논문을 크게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우선 인각와의 지역적 출토양상을 살펴보면, 공주 의 공산성, 부여의 부소산성과 관북리유적,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등에서 전체 인각와 의 96% 정도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인각와는 웅진 사비기의 중앙권력과 밀접하 게 연관된 집단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기와의 제작과정과 연관 지어 보면, 인각 와는 특별한 기와에 찍었던 것이 아니고, 일반 평기와를 제작할 때 일정 분량 단위 별로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장 찍음에 일정한 규칙성이 확인되며, 부여와 익산의 인각와에 찍힌 도장이 똑 같다는 점으로 볼 때, 한정된 인원이 생산년도, 공급집단 등을 표시하기 위해 찍었음을 알 수 있 다. 결국 인각와는 백제에서 대량생산체제로 돌입한 기와의 생산과 공급을 관리, 통제하기 위해 탄생하였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印刻瓦의 제작시기를 살펴보면, 聖王 이후 6세기 대에 출현하여 소수 사용되다가, 기와의 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다종다양해지는 武王과 義慈王 대인 7세기 `右 乙瓦a銘 印刻瓦29) 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인각와의 출현과 발달은 백제왕권의 강화에 따른 대규모 토 목건설공사의 증가와 기와의 수요증대에 따른 대량생산체제의 돌입과 맥을 같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23)`左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東南里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존에`左 乙瓦a銘으로 소개 되었고(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4쪽),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도 동일한 題名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 제의 명문은`上 乙瓦a라고 생각된다. 24)`上 甲瓦a명 印刻瓦 : 이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는 소개되어 있 지 않지만, 관북리 왕궁지유적(충남대학교 박물관 충청남도, 1985, 부여관북리백제유적발굴보 고(Ⅰ) ; 충남대학교 박물관 충청남도, 1999, 扶餘官北里 百濟遺蹟 發掘報告 Ⅱ) 및 부소산성 에서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쪽). 25)`上 乙瓦a명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관북리 왕궁지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고(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쪽), 기타 부여읍 가탑리의 폐사지에서도 출토가 보고 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 1989,`가탑리폐사지 명문유물a, 특별전, 백제의 와전 ). 26)`首 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기존에`首 甲瓦a銘으로 소개되었고(김영심, 1992,`扶餘 地域 出土 瓦 塼銘a, 195쪽),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도 동일한 題名으로 소 개되어 있지만, 실제의 명문은`前 甲瓦a로 판독된다. 27)`下 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부소산성 사비루광장 남동쪽 건물지에서 출토된 것(1991), 사비루 주변의 성벽에서 출토(1996)된 것 등이 있다. 28)`下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관북리 왕궁지유적에서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 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쪽). 29)`右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기존에`右 乙瓦a銘으로 소개되었고(김영심, 1992,`扶餘 地域 出土 瓦 塼銘a, 195쪽),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도 동일한 題名으로 소 개되어 있지만, 실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현재까지 이러한 명문 인각와의 사례가 보고된 것 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上 乙瓦a또는`下 乙瓦a의 오독이거나, 후술하는 부소산성에서 출토 된`右城甲瓦a銘 印刻瓦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385 768 瓦 塼 土器 銘文 `前 甲瓦a銘 印刻瓦30) `後 甲瓦a銘 印刻瓦37) `前 乙瓦a銘 印刻瓦31) `後 乙瓦a銘 印刻瓦38) `申 甲瓦a銘 印刻瓦32) `浚 乙瓦a銘39) 印刻瓦40) `中 乙瓦a銘 印刻瓦33) `葛那城丁巳瓦a銘41) 印刻瓦 `右寺乙瓦a銘 印刻瓦34) `甲申乙瓦a銘 印刻瓦42) 769 `右城甲瓦a銘 印刻瓦35) `寺下乙瓦a銘 印刻瓦36) 30)`前 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관북리 왕궁지 유적 및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서편 및 동편 출토품(1984), 부소산성 추정 동문지와 동문지 북편 출토품(1988~89), 부소산성 군장터 주변의 성벽 출토품(1994) 등이 있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집문당, 334쪽 및 336쪽). 31)`前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관북리 왕궁지 및 능산리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쪽). 32)`申 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관북리 왕궁지, 부소산성, 능산리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다(沈 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쪽). 이를`中 甲瓦a와 동일한 것으로 보면(李タ ウン, 1999,`百濟五部銘印刻瓦についてa, 古文化談叢 43, 九州古文化硏究會), 백제 도성 5부 명의 갑와, 을와가 모두 출토된 셈이 된다. 33)`中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 `中 乙 a銘 瓦 라는 題名으로 소개되어 있지만,`中 乙瓦a가 분명하기 때문에, 본 역주집 에서는 題名을 수정하였다. 한편 이 인각와는`申 甲瓦a銘 印刻瓦와 마찬가지로 관북리 왕궁지, 부소산성, 능 산리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쪽), 두 인각와 사이에 상관성이 엿보인다. 한편 이 인각와는 쌍북리유적에서 출토가 보고되었다(충남대 학교 박물관 부여군청, 1982, 부여쌍북리유적발굴조사보고서 ). 34)`右寺乙瓦a銘 印刻瓦 : 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82쪽에 그러한 명문의 인각와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실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35)`右城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부소산성 추정 동문지와 동문지 북편(1988~89년)에서 출토 되었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35쪽). 한편 이 인각와의 사진자료가 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82쪽에 소개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36)`寺下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 부여 출토 인각 와로 소개되어 있지만, 현재로는 부여에서 출토된 바가 없다. 이 인각와는 익산 왕궁리와 미륵사 지에서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한편 이 인각와의 사 진자료가 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82쪽에 소개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37)`後 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는 소개되어 있 지 않지만, 부소산성 남문지 및 주변 성벽(1986, 1987년) 등에서 출토되었다(노명호 전덕재 윤 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35쪽). 38)`後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는 소개되어 있 지 않지만, 관북리 왕궁지와 부소산성 등에서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 한 硏究a, 14쪽). 39)`浚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기존에`浚 乙瓦a銘으로 소개되었고(김영심, 1992,`扶餘 地域 出土 瓦 塼銘a, 195쪽),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도 `浚 乙瓦a銘 瓦 로 소개되어 있지만, 이러한 명문의 인각와는 보고된 바가 없다. 아마도 전술한`後 乙瓦a銘 印 刻瓦를 오독한 것으로 생각된다. 40)`上 甲瓦a銘 `浚 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들은 명문으로 기록된 지역이 기와의 所要 處라기 보다는, 기와를 제작 공급한 자의 측면에서 공급자(기술자 집단포함) 혹은 기증자(物主) 를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백제 도성의 5부를 기록한 인각와는 갑와와 을와로 크게 나누 어지는데, 갑와는 양각, 을와는 음각되어 있다(李タウン, 1999,`百濟五部銘印刻瓦についてa, 古 文化談叢 43, 九州古文化硏究會, 111~113쪽 ; 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48 쪽). 따라서 같은 部 내에서도 기와의 제작, 공급, 사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별도의 조직적 구 분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부명 인각와에 대한 정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41)`葛那城丁巳瓦a銘 : 이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에 `葛耶城丁巳瓦a 印刻瓦 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의 명문은 葛那城 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본 역주집 에서 는 題名을 수정하였다. 이 인각와는 부여읍 쌍북리의 현 부여교육청과 그 구내에 백제시대 사찰지 로 추정되어오던 유적지에서 1982년에 출토되었다. 동일한 인각와가 논산 황화산성에서도 발견 되었다고 한다(국립청주박물관, 2000, 한국 고대의 문자와 기호유물 ). 명문 중 丁巳(597 또는 657년)는 제작연대를, 갈나성은 제작지(공급처)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명문자료가 발견된 논산 황화산성을 갈나성으로 보고, 명문의`갈나성a을 所要處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강 종원 최병화, 2007,`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의 성격a, 그리운 것들은 땅 속에 있다, 국립 부여박물관 특별전도록, 176쪽). 42)`甲申乙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기존에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甲申乙瓦a銘 瓦 로 소개되었 고(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195쪽),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쪽

386 770 `丁巳a銘 印刻瓦43) `刀下a銘 印刻瓦44) `毛a,`已肋a銘 印刻瓦(井洞里 窯址)45) `已刀a銘 印刻瓦(井洞里 窯址)46) `已刀a,`已止a,`已肋a,`成止a,`成肋a,`寅a,`午斯a,`未斯a,`年止a,`申肋a,`辰a,`已 瓦 塼 土器 銘文 771 `大通a銘 印刻瓦48) (2) 기타 기와의 명문 `阿尼城a銘 瓦片49) `戊辰當 a銘 瓦50) 毛a등 印刻瓦(往津里 窯址)47) 에도 `甲申乙瓦a銘 瓦 로 소개되어 있지만, 이러한 명문의 인각와는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바가 없다. 아마도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전술한`申 甲瓦a銘 印刻瓦를 오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43)`丁巳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관북리 왕궁지 유적, 구아리 유적(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충청 남도, 1993,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 발굴조사보고서 ; 국립청주박물관, 2000, 고대 기호와 문 자유물 ) 및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서편 및 동편(1984), 天王寺址 등에서 출토가 보고된 바 있다 (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48쪽). 丁巳年은 위덕왕 44년(597) 또는 의자왕 17년(657)에 비정된다. 둥근 음 양각선이 각각 나타나 있고, 그 안에 양각의 丁巳銘을 상하로 압인했다. 44)`刀下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는 부여읍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圓形의 윤곽을 凹線으로 만들고 그 내부에 刀下 두 글자를 음각하였다. 刀 자는 部 자의 略體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은 가 생각된다(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195쪽). 한편 관북리 왕궁지 유적과 부소 산성 등에서도 출토되었는데, 부소산성 서문지에서 출토된 3점 가운데 1점은 우서체이고, 나머지 는 좌서체로 되어 있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 제도의 제문제, 334쪽). 45)`毛a,`已肋a銘 印刻瓦 : 井洞里 窯址 銘文瓦 B지구에서는 7세기로 추정되는`毛a,`已肋a銘 암 키와가 출토되었다(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196쪽). 46)`已刀a銘 印刻瓦 : 井洞里 窯址 銘文瓦 C지구에서는 7세기로 추정되는`已刀a銘 수키와가 출토 되었다(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196쪽). 47)`已刀a `已毛a등 印刻瓦 : 往津里 窯址는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의 금강 서북안과 야산에 분 포하고 있다. 이 가마터는 행정구역 상으로는 청양에 속하나 부여읍 북편의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지역군으로는 부여에 포함할 수 있다. 왕진리 요지는 1971년에 6기가 조사되었는데, 모두 풍화암반을 파고 조성한 登窯로 보고되었다. 아직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정확한 수량은 확인할 수 없지만, 已刀 已止 已肋 成止 成肋 寅 午斯 未斯 年止 申肋 辰 已毛 등의 명문이 있는 인각와가 출토되었다(김성구, 1990,`부여의 百濟窯址와 출토유 물에 대하여a, 백제연구 21, 220~221쪽). 이러한 명문의 인각와들이 부소산성, 금성산, 쌍북 리 및 관북리 왕궁지, 구아리, 미륵사지 등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인각와의 수급관계를 밝 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196쪽). 이 곳에서 출토된 인각와는 두 개의 인각부가 표현된 것들인데, 하나는 제작년도의 간지를, 다른 하 나는 공급집단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歸屬印의 성격을 띤 것이라 할 수 있다(이병호, 2004,`기와 조각에서 찾아낸 백제문화, 印刻瓦a,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75쪽 ; 沈相 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46쪽). 48)`大通a銘 印刻瓦 : 이 자료는 부소산성 추정 동문지(1988~89년) 출토유물인데(최무장, 1991, `부소산성 추정 동문지 발굴약보a, 백제연구 11, 131쪽), 앞서 역주한 공주 대통사지에서 발견 된`大通a銘 瓦와 같은 제품이다. 종래 부소산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선 동성왕대 무령왕대 성왕 대 등으로 견해가 분분했는데,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이`대통a명 인각와의 편년을 양나라 대통 연간인 527~529년으로 봄에 따라, 부소산성의 축조시기도 대통연간을 전후해서 축조되었다는 견해로 수렴되고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0, 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국립문화재연구 소개소 10주년기념학술대회발표요지문). 이`대통a명 인각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1~322쪽의 부여 출토 기와 명문 속에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백제시대 기와 연구의 편년기준 으로 사용되고 있고(이병호, 2001,`백제 사비도성의 운영과 계획a,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학위논 문, 10쪽), 백제의 인각와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기 때문 에, 본 역주집 에서는 새롭게 추가하였다. 49)`阿尼城a銘 瓦片 : 이 기와편은 일제시대에 현재의 부여여고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阿 尼 의 의미에 대하여 在城 또는 內城 의 의미로 파악하여(田中俊明, 1990,`王都로서의 泗 城에 대한 豫備的 考察a, 百濟硏究 21), 왕이 거처하는 성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으나, 본 명 문와의 연대에 대해서는 백제시기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194쪽). 이와 관련하여 1994년 부 소산성 군창터 주변 성벽에서도`阿尼城造a라는 완전한 명문을 가진 기와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이 기와는 암키와로서 회갈색연질계이며, 문양은 車輪文과 魚骨文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문 이다. 차륜문은 통일신라 하반기경에 출현하여 고려말까지 꾸준하게 사용된 기와문양이다.`阿尼 城a명문 기와가 출토된 층위는 성벽 자체가 나말여초에 初築된 것이다. 성벽에서 반출된 유물 등 을 근거로 기와의 제작 시기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기와의 하부처리와 명문의 타날시 형 성된 도구의 편평한 타날 흔적을 감안하면, 기와의 제작시기는 통일신라시대에 보다 가깝다고 여 겨진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7, 부소산성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 노명호 전덕재 윤선 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41쪽). 50)`戊辰當 a銘 瓦 : 이 명문자료는 부여읍 雙北里에서 출토되었으며, 戊辰年은 동성왕 10년

387 772 瓦 塼 土器 銘文 `大唐a銘 瓦51) `紮a銘 瓦57) `王興a銘 瓦52) `大王夫王a銘 瓦當58) `天王a銘 瓦53) `二百八a銘 瓦54) `八六a銘,55)`三百a銘 瓦56) (488), 성왕 26년(548), 무왕 20년(608) 중의 하나일 것으로 기존에 소개되었지만(김영심, 1992,`扶餘地域 出土 瓦 塼銘a, 195쪽), 백제시대 기와라기보다는 정림사지와 부소산성 등지 에서 출토된 고려시대`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a명문기와의 잔편(戊辰/當草)으로 추정된 다. 51)`大唐a銘 瓦 : 이 명문자료는 부소산성 군창터와 그 주변(1992~93) 및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수막새이다. 명문은 해서로서 큼직하게 세로로 중심부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주연부 안쪽을 따 라 굵은 형태로 만들어진 한 줄의 連珠文 또는 인동문이 있다(충남대학교 박물관 부여군청, 1982, 부여쌍북리유적발굴조사보고서 ; 국립청주박물관, 2000, 한국 고대의 문자와 기호유 물 ). 52)`王興a銘 瓦 : 이 명문자료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 49번지에 위치한 왕흥사지에서 발견되었다. 사역 내에는 많은 석재와 와편이 산포해 있었는데, 그 중에`王興a이라는 명문의 기와가 수습 보 고되었다. 이 기와는 고려 이후의 어골문계통의 것으로 보여 백제기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된 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47 ~348쪽). 백제기와는 아니지만, 백제 왕흥사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유물 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였고, 목탑지에 서`昌王a銘 舍利具가 출토되어 왕흥사의 창건과정에 대한 새로운 논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53)`天王a銘 瓦 : 이 기와는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금성산 서남록에 위치한 금성산 백제 와적지기단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금성산은 부여 시가지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표고 121m의 산으로 요 지, 사지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이 건물지는 1944년에 일본인에 의하여 조 사가 실시된 것으로 수습된 유물이 다수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에`天王a銘 기와가 있다. 이에 이곳을 후술하는 구아리유적과 함께 傳天王寺 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굴조사 는 1989년 8월 20일부터 10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 1992, 부여 금성산 백제 와적지기단 건물지 발굴조사보고 ; 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 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30~331쪽). 54)`二百八a銘 瓦 : 이 명문기와는 부여 정암리 요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와 외면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숫자를 새긴 것이다. 이 숫자들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기와 제작시 제작 수량을 표시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0쪽) ) 벽돌의 銘文(塼銘)59) `大方a銘 塼60) 55)`八六a銘 : 이 명문기와는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되었다. 명문이 사각형 테두리 내에 八과 六이 상하로 쓰여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1쪽). 그러나 아래의 六은 方 으로 판 독될 수 있어, 口 안에 八과 方을 상하로 쓴 나라 國, 즉 측천무후의 글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 기와의 제작시기가 백제가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인가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56)`三百a銘 瓦 : 이 명문기와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2쪽에 부여 출토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명문은 기와 외면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 용해 숫자를 새겼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기와 제작시 제작 수량을 표시한 것일 가능성 도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1쪽). 57)`紮a銘 瓦 : 이 명문기와는 부소산성 추정 동문지와 동문지 북편에서 출토되었다(1988~89). 백 제나 통일신라 초반 경의 기와로 볼 수도 있다. 기와 등쪽에 위 아래로 여러 글자를 쓴 것 같으나, 현재는`紮a을 쓴 잔편만이 남아있고, 그 상하의 글자 획들은 무슨 글자인지 판독하기 어렵다(노 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40쪽). 이 명문기와의 사진이 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5쪽에 소개되어 있어 참고가 된 다. 58)`大王夫王a銘 瓦當 : 이 명문자료는 부여 구아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명문은`大王天王a으 로도 판독할 수 있다. 이 유적은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64~65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는데, 1944 년 경찰서 신축과정에서`天王a銘 수막새, 연화문 수막새편이 출토되어서 일본인들이 조사한 바 있고, 천왕사터로 인식되었다. 1992년 9월경 새롭게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이 사찰은 백제가 멸 망하면서 동시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 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27~328쪽). 한편 명문은 연꽃무늬 수막새의 팔엽 중 사엽에 각 1자씩`大a,`王a,`王a,`夫(天)a를 양각하였다.`대a `왕a `왕a은 글자가 서로 이어져 있으 나`부(천)a은 이들과 대칭되는 곳에 양각되어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3 쪽). 구아리 폐사지의 기와에 이처럼`王a자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寺址는 국왕과 밀접히 관 련된 국가사찰 내지 왕실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59) 塼銘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扶餘地域 出土 瓦 塼 土器銘文 기타 (321~322쪽) 에는 塼銘 유물들이 별도 항목 없이, 瓦銘에 포함되어 있다. 본 역주집 에서는 塼銘 자료를 분리 하고 塼銘 항목을 새롭게 추가하였다. 60)`大方a銘 塼 : 井洞里 窯址 A지구에서 출토된`大方a銘 塼은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연도와 무령

388 774 `中方a銘 塼61) 3) 토기의 銘文(土器銘) 62) `增a銘 土器 `北舍a銘 印刻土器63) `小上a銘 土器64) 瓦 塼 土器 銘文 775 `舍a,`大a,`月卄a銘 土器67) `係文作元 a銘 土器68) `人a,`前a,`舍a,`令暉a銘 土器69) 4) 기타 명문70) `一斤a銘 石製鎔范71) `七a,`八a,`人a銘 土器65) `軍門a銘 土器66) 왕릉을 축조한 墓塼과 동일한 벽돌로, 웅진시기 塼의 제작과 수급실태를 알려주는 자료로 매우 중요하다(김성구, 1990,`부여의 百濟窯址와 출토유물에 대하여a, 218~220쪽). 본 역주집의`公 州地域 出土 瓦 塼銘a을 참조바람. 61)`中方a銘 塼 : 전술한`大方a銘 塼과 마찬가지로 井洞里 窯址 A지구에서 출토되었다. 이 벽돌은 長 短邊에 각각 斜格紋과 中方 이란 문자를 右書로 陽刻하였다. 본 역주집의`公州地域 出土 瓦 塼銘a을 참조바람. 62)`增a銘 土器 : 이 토기는 부여 용정리 백제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1997, 특별 전, 한국고대의 토기 ). 명문은 높이 22.5 인 연질 시루의 구연부 조금 아래에 유려한 서체로 `增a자가 새겨져 있다. 토기 바깥 면은 종평행 타날 되었는데, 글자는 무늬를 타날한 후 새겼다. 그 의미는 이 토기가 시루(甑) 임을 알려주려는 것으로(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60쪽), 명문의 增이 당시에는 甑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63)`北舍a銘 印刻土器 : 이 토기는 관북리 왕궁지 유적 및 부소산성에서 출토되었다. 명문은 凹面으 로 된 지름 1.6 정도의 원형 내부에 右書로 양각되어 있다. 관북리 유물은 구경부에, 부소산성 유물은 구경부 가까운 어깨 부분에 인각되었다. 北舍가 어떤 건물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명칭으로 보아 어떤 공공기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54~55 쪽). 64)`小上a銘 土器 : 이 토기는 부여 관북리 왕궁지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높이 52.6 의 아래 위 가 뚫린 원통형으로 몸체의 아래와 위에 각 4개씩의 띠모양 손잡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위로 올 라가면서 조금씩 지름이 좁아지며, 아가리는 다시 그 위에 다른 것을 끼워 올릴 수 있도록 단을 만들어놓았다.`小上a은 그 단의 조금 아래에 세로로 새겨져 있으며, 작은 구멍이 위에 해당한 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56쪽). 65)`七a,`八a,`人a銘 土器 : 이 토기들은 부여 관북리 왕궁지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에 사용한 그릇 중 상품에 해당하는 회색계 有蓋臺附 들이다. 이 사발들은 크기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간혹`칠a,`팔a,`인a등의 글씨가 몸통의 아래 부분에 음각되어 있다. 이는 그릇의 크기 나 쓰임새를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57쪽). 66)`軍門a銘 土器 : 이 토기는 부여 정암리 요지 B지구에서 출토된 대부완이다. 명문은 완의 바깥 바닥에 예리한 도구로`군문a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군문이 군영의 입구 또는 군대를 비유한 말 일 수 있기 때문에,`군문a이란 軍需用임을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 제의 문자, 59쪽). 67)`舍a,`大a,`月卄a銘 土器 : 이 토기들은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大a는 납작바닥의 외면에,`舍a는 납작바닥의 내면에`月卄a은 항아리의 외면에 새겨져 있다.`舍a는 부여 궁남지 유적에서도 발굴 보고된 것이 있다. 한편`月卄a은 아래와 위가 파손되었으나, 윗부분에 글씨의 일부인 一 획이 확인되어, 1~3월 20일 즉 날짜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61쪽). 이 날짜는 생산 연월일의 일부 글자일 가능성이 있다. 68)`係文作元 a銘 土器 : 이 토기는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사비시대에 널리 쓰인 항 아리(높이 80 )의 구연부 아래에 비교적 큰 글씨로`係文作元 a이 음각되어 있다. 마지막 글자 는 瓦+天 으로 쓰여 있는데(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62쪽), 백제의 助字일 가능 성이 매우 높다. 명문은 係文이 元 을 만들었다 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러한 해석으로 미루어 볼 때 瓦+天 라는 글자는 토기의 특정 종류, 즉 비교적 큰 항아리, 예를 들어 瓮 과 비슷한 뜻 을 지닌 글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69)`人a,`前a,`舍a,`令暉a銘 土器 : 이 토기들은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人a은 납작바 닥토기 외면에,`前a은 납작바닥토기 내면에,`令暉a는 토기 외면에 새겨져 있다. 한편`舍a는 납 작토기 내면에 새겨져 있는데, 글씨의 한쪽이 파괴되어 정확히 판독하기 어려우나, 쌍북리나 궁 남지 유적 출토의 동일 예로 보아`舍a로 생각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63 쪽). 글씨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令暉a는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에 기록된 승려이름인 慧暉 와 연관지어볼 때(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주류성), 승 려이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의 소유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70) 기타 명문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扶餘地域 出土 土器銘(322쪽)에는 이 항목에 들 어갈 수 없는 명문자료들이 함께 뒤섞여 있다. 본 역주집 에서는 이 명문자료를 분리하여 기타 명문 이라는 새로운 항목 하에 정리하였다. 71)`一斤a銘 石製鎔范 : 이 유물은 부여 구아리유적 북편 우물지 바닥에서 수습된 것과 부여 가탑리 유적에서 출토된 2종류가 있다. 구아리 용범은 직사각형 납작한 활석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용범

389 776 瓦 塼 土器 銘文 `下部思利利a銘 土器72) 777 `己丑a銘 印刻瓦75) `丁巳a銘 印刻瓦76)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기와, 토기의 銘文(益山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 73) 1) 기와의 명문(瓦銘) 74) `甲申a銘 印刻瓦 거푸집 자체의 내부 단면은 사다리꼴인데, 바깥 크기는 가로 5.2, 세로 9.2 이고, 깊이 0.6 아래의 안쪽 크기는 가로 4.3, 세로 8.4 로 경사지게 도려냈다. 한편 명문은 내부 평탄한 면에 둥근 음각선으로 원을 새긴 후 그 안에`一斤a이 左書되어 있다. 이 명문에서 윗쪽으로 1.2 되는 상단지점에 주구가 마련되어 있는데 주구의 상단폭은 4.1, 하부의 좁은 곳은 폭 1.0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용범의 뒷면에도 금속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그어 생긴`大王天 下a라는 명문이 확인된다. 또 그 주변에도 판독하기 어렵지만, 여러 글자가 난잡하게 새겨져 있 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28 쪽). 한편 가탑리 용범은 셰일 계통의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다. 거푸집의 윗면은 가로 5.4 세 로 9.7, 아랫면은 가로 4.5 세로 8.8 깊이 0.7 로, 역시 몸돌에서 경사지게 도려냈다. 명문은 거푸집 내면 중앙부 조금 위에 비교적 작은 글씨로`一斤a을 右書로 새겨놓았다. 구아리에서 출토 한`일근a명 거푸집과 형태 및 크기에서 매우 유사하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23쪽). 72)`下部思利利a銘 土器 : 이 명문 토기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322쪽에 扶餘地域 出土 土器로 분류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경남 합천 저포리 e지구 제4-1호분 봉토에서 출토되었 다 (채상식, 1989,`합천 저포리 4호분 출토 토기의 명문a, 가야 2). 이 토기는 출토위치로 보 아 아마도 장례의례용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명문은 단경호의 외반된 구연 윗면에 행서풍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 중의`下部a는 部名,`思利利a는 人名이라고 생각된다. 이 토기를 대가야 계통의 6세기 중엽경 작품으로 추정하여, 銘文의 下部 를 가야의 部制로 보는 견해도 있 지만(이문기, 1992,`합천 저포리 출토 토기 명문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Ⅱ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당시 가야가 백제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下部 思利利는 백제에서 파견된 관료나 기술 자일 가능성도 있다(김태식, 2000,`가야연맹체의 부체제 성립여부에 대한 소론a, 한국고대사 연구 17, 294쪽). 이 경우`下部a는 백제 5부 중의 하나가 되며, 당시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이 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73) 瓦銘 : 미륵사지 전체 사역에서 약 5천점에 가까운 명문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백제시대부터 조 선 중기인 16세기 기년이 있는 명문까지 확인되고 있는데, 이들은 미륵사의 존속기간 및 폐사된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印刻銘文瓦에는 기와 공급자와 제작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백제시대에 제작되어 미륵사의 창건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 편 打出銘文瓦는 미륵사라는 특정 절명이 있는 것, 연호가 있는 것, 미륵사가 있는 지역인 金馬渚 `丁亥a銘 印刻瓦77) `乙丑a銘78) 印刻瓦79) `中[部]a銘 印刻瓦80) 라는 명칭이 있는 것, 사원 내에 있는 건물의 명칭으로 생각되는 것 등으로 나눠진다. 연호가 있 는 것 가운데는`太平興國a(宋의 연호nl로 976~983년에 해당)銘이 가장 빠르고 그 외의 연호는 고려 말기 연대에 속해 타출명문와의 제작시기는 대부분은 고려 말,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마지 막으로 針線銘文瓦는 출토수가 수점에 불과하고 주로 연호를 기록하였다. 역주에는 김영심, 1992,`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a,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을 크게 참 고하였다. 74)`甲申a銘 印刻瓦 : 모두 암키와로 원형의 음각면에 양각으로 甲申 이라는 명문이 左 右로 자 리하고 있다. 胎土는 정선된 점토이며 硬質이다. 기와 두께는 1.5 내외인데 연대는 武王 25년 (624)으로 추정되고 있다. 75)`己丑a銘 印刻瓦 : 모두 암키와이다. 무왕 30년(629)으로 추정되고 있다. 76)`丁巳a銘 印刻瓦 : 모두 암키와이다. 명문은 직경 3.2 내외의 원형 인각 내에 2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위쪽에 있는 丁 자는 아래쪽의 巳 자에 비해 크기가 작다. 定林寺址와 傳天王寺址에서 도`丁巳a銘 인각와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丁巳年은 사비기에 위덕왕 44년(597)과 의자왕 17년 (657)이 있는데, 미륵사 창건은 무왕대이므로 정사년은 의자왕 17년이라고 생각된다. 이 기와를 통해 의자왕대에 미륵사의 보수나 중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7)`丁亥a銘 印刻瓦 : 모두 암키와이다. 線文이 타날되어 있는 와면에 명문이 인각되어 있다. 직경 4.0 내외의 원형 음각면이 있고 그 안쪽에 양각선이 돌려져 있으며 명문이 그 양각선 안에 위 에서 아래로 양각되어 있다. 기와두께는 1.7 ~2.0 이며 연대는 무왕 28년(627)으로 추정된다. 78)`乙丑a銘 印刻瓦 : 乙丑은 무왕 6년(605)과 665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며, 605년으로 볼 경 우 무왕 즉위 초기부터 미륵사 창건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665년의 경우는 백제 멸망 이후라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된다. 79)`甲申a `乙丑a銘 印刻瓦 : 이상의 간지명 인각와는 전체 인각와의 15%를 차지한다. 기와의 제작연도를 알려주는 자료로 이들 간지는 대체로 미륵사를 창건했던 무왕의 재위 기간 (600~641)에 해당되며, 창건과정과 보수시점 등을 알려준다. 한편 앞서 언급한 乙丑(605) 甲申 (624) 丁亥(627) 己丑(649) 丁巳(657) 외에도`壬戌a (602)이 찍힌 인각와도 출토된 바 있다(노 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73쪽). 80)`中[部]a銘 印刻瓦 : 가는 사선문이 타날된 등에 인각되어 있다. 명문은 직경 2.7 의 원형 음각 면 내부에 도드라지게 양각되어 있다. 기와 두께는 1.6 ~2.2 이며 암키와에서만 볼 수 있고 태

390 778 `[中]部a銘 印刻瓦81) 瓦 塼 土器 銘文 779 2) 토기의 銘文(土器銘)84) `下部a銘 印刻瓦82) `大中十二年 彌力寺a銘 土器片85) `上 乙瓦a銘 印刻瓦 `方a銘 土器片86) `中 乙瓦a銘 印刻瓦 `[存]那[部]a銘 土器片87) `下 甲瓦a銘 印刻瓦 `下 乙瓦a銘 印刻瓦 `申 甲瓦a銘 印刻瓦83) 토는 정선된 점토가 대부분이다. 전체 21점 중 와질이 11점이고 경질 연질이 각각 5점이다. 는 소개가 김영심, 1992,`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a, 189쪽에 있지만,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마도`中 乙瓦a의 파편이 아닌가 생각된다.`中 乙瓦a銘 印刻瓦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81)`[中]部a銘 印刻瓦 : 13점이 수습되었으며 모두 암키와이다. 인각은 직경 2.2 ~2.5 의 타원 형에 가까운 원형으로 음각면이 안쪽에 마련되어 명문이 좌 우로 양각되어 있다. 기와 두께는 1.6 ~2.3 이며 1.7 ~2.0 사이가 많다. 태토는 정선된 점토이며 경질 연질 와질이 비슷 한 수를 차지한다. 는 소개가 김영심, 1992,`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a, 189쪽에 있지만, 실물 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마도`中 乙瓦a銘 印刻瓦의 파편이 아닌가 생각된다.`中 乙瓦a銘 印刻瓦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82)`下部a銘 印刻瓦 : 4점의 암키와에 인각되어 있다. 선문을 타날한 직경 2.7 의 원형 인각을 압 인하여 음각면을 만들고 그 음각면 내에 명문을 양각하였는데 글자는 좌 우로 배치되어 있다. 우측 명문은 변으로서 部 자의 약자하고 좌측은 乙 자를 뒤집은 형태인데 下 자로 상정한 다. 태토는 정선된 점토이며 연질 와질이 반씩이다. 두께는 1.8 내외이다. 는 소개가 김영심, 1992,`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a, 189쪽에 있지만,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마도`下 乙 瓦a銘 印刻瓦의 파편이 아닌가 생각된다.`下 乙瓦a銘 印刻瓦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 (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83)`上 乙瓦a `申 甲瓦a銘 印刻瓦 : 이 인각와들은 명문으로 기록된 지역에서 기와를 사용 하기 위해 만들었다기보다는, 기와를 제작 공급한 자의 측면에서 제작 및 공급자(기술자 집단) 혹 은 기증지역(物主)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백제 도성의 5부를 기록한 인각와는 갑와와 을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갑와는 양각, 을와는 음각되어 있다(李タウン, 1999,`百濟五部銘印 刻瓦についてa, 古文化談叢 43, 九州古文化硏究會, 111~113쪽 ; 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 瓦에 관한 硏究a, 48쪽). 따라서 같은 部 내에서도 기와의 제작, 공급, 사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에 별도의 조직적 구분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申 甲瓦a를`中 甲瓦a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李タウン, 1999,`百濟五部銘印刻瓦についてa), 이를 인정한다면 현 재 백제 도성 5부명의 갑와, 을와가 모두 출토된 셈이 된다. 5부명 인각와에 대한 정밀한 재검토 익산 왕궁리 왕궁평성 출토 기와의 명문(益山 王宮里 王宮坪城 出土 銘文瓦)88) `上 乙瓦a,89)`中 乙瓦a,90)`前 乙瓦a,91)`下 乙瓦a銘92) 印刻瓦 가 필요하다. 84) 土器銘 : 30여점의 명문토기편이 東院 北回廊址 北東側 배수로 내부와 東院 승방지에서 집중적 으로 수습되었다. 그러나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3쪽에 소개된 토기 명문 자료 중 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도 뒤섞여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85)`大中十二年 彌力寺a銘 土器片 : 토기편에 5행에 걸쳐 명문이 확인되는데, 전체를 소개하면,`大 中十二年 / 勒寺./ 節 / 丁坐 / 史 文 a이다. 명문 중의 大中 12년 은 858년(헌안왕 2)에 해당되며, 丁坐, 史 등의 職名은 三綱 또는 外職으로 추정된다(노명호 전 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76쪽). 신라 하대 익산지역의 동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86)`方a銘 土器片 : 동원 북회랑지 북동측 배수로 내부에서 출토되었으며 평평한 形 토기편 바닥 에 方 자가 음각되어 있다(김영심, 1992,`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a, 190~191쪽). 87)`[存]那[部]a銘 土器片 :`方a명 토기편과 동일지역에서 출토되었다. 기복부 일부가 남아 있는 토 기편에 위에서 아래로 가늘게 음각되었다(김영심, 1992,`彌勒寺址 出土 瓦 土器銘a, 191쪽). 88) 益山 王宮里 王宮坪城 出土 銘文瓦 : 왕궁리 유적은 익산 왕궁면의 낮은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백제 후기 무왕대의 천도설이 제기되면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아온 유적지이다. 이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 이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내부의 5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사찰영역을 비롯해 연차적인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유적 외곽에는 장방형의 담장이 둘러싸 고 있고, 담장 내부의 남쪽에 백제시대의 거대한 건물지와 동서석축이, 서북쪽에는 공방지, 동북 쪽에는 백제 정원시설 등이 발굴되었다. 유적의 사용시기는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인접한 미륵사지와 유사하며, 백제 사비기 무왕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500여점의 인각와를 비롯해 많은 명문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2, 왕궁리유적발굴중간보고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7, 王宮里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등). 89)`上 乙瓦a: 왕궁리 추정 강당지에서 출토된 인각와이다. 그런데 왕궁리 유적에서는`上 甲瓦a 는 발굴되지 않았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90)`中 乙瓦a: 암키와인데, 명문은 하나의 원안에 위 아래 2행으로 압인되어 있다. 추정 금당지

391 780 瓦 塼 土器 銘文 `申 甲瓦a銘 印刻瓦93) `下疋如伊a銘 瓦99) `右寺乙瓦a,`右城甲瓦a,`寺下乙瓦a銘 印刻瓦94) `風道使前a銘 瓦100) 781 `首府a,95)`官a銘 印刻瓦96) `官寺a,`官宮寺a銘 瓦97) `三百a銘 瓦98) 에서 출토된 인각와이다.`申 甲瓦a를 중부갑와 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면, 왕궁리 유적에서는 중부는 갑와와 을와가 모두 출토되었다고 할 수 있다. 91)`前 乙瓦a: 암키와인데. 명문은 원안에 세로로 앞에`前 a, 뒤에`乙瓦a2행으로 압인되어 있 다.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3쪽에는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왕궁리 유적에서는`前 乙瓦a도 출토된 바 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92)`下 乙瓦a: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3쪽에는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왕궁리 유적 에서는`下 乙瓦a외에`下 甲瓦a도 출토된 바 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 究a, 17쪽). 93)`申 甲瓦a銘 印刻瓦 : 이러한 명문의 인각와는 부여 관북리 왕궁지, 부소산성, 정림사지, 익산 의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현재 申 를 中部와 동일시 하는 견해도 있지만, 백제 도성 에 기존의 5부 외에 申 가 하나 더 있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94)`右寺乙瓦a,`右城甲瓦a,`寺下乙瓦a銘 印刻瓦 : 이러한 명문을 가진 인각와는 부소산성에서 1~2 점이 출토된 것을 제외하면, 전부 익산지역에서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4~17쪽). 이 명문들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부명과 마찬가지로 기와의 공 급, 기증자와 관련된 문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95)`首府a: 세로로 긴 장방형의 음각면 내에 2글자를 상하로 압인하였다. 동일한 인각와가 부소산 성 군장터에서도 발견되었다. 전술한`北舍a명처럼 首府는 관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나, 공급 처인지 수요처를 표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4쪽). 96)`官a銘 印刻瓦 : 이 명문으로 볼 때 익산 王宮里 유적 내에 백제의 官衙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외에도 백제 사비도성의 유적들에서도 출토되는, 目次, 午-止 寅 未-斯 등의 인각 와들도 많이 출토되었다(沈相六, 2005,`百濟時代 印刻瓦에 관한 硏究a, 17쪽). 이는 익산 왕궁 리 유적이 사비기에 부여의 도성에 버금가는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97)`官寺a,`官宮寺a銘 瓦 : 왕궁리 유적의 추정 금당지에서 출토되었다. 수키와와 암키와 모두 발 견되었는데,`大官官寺a또는`大官宮寺a등의 명문와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모두 타출명문이다. 도드라진 굵은 線으로 구획된 장방형 안에 다시 細線으로 내곽선을 두르고 중앙에 3자씩 양각으 로 압인되었다. 백제시대 기와라기보다는 고려시대 기와일 가능성이 크다(노명호 전덕재 윤선 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84~385쪽). 98)`三百a銘 瓦 : 암키와의 작은 파편으로 등면에 예리한 도구로 기와가 마르기 전에 새겼다. 百 아 백령산성 출토 기와의 명문(栢嶺山城 出土 銘文瓦)101) `丙a銘 印刻瓦102) 래는 파손되어 명문이 더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71쪽 에 사진이 실려있어 참고가 된다. 99)`何疋如伊a銘 瓦 : 왕궁리 유적 추정 강당지 하층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너비가 좁은 기와 끝단 의 가장자리에 인접하여 4자의 명문이 세로로 음각되어 있다. 윗부분은 결실되어 명문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한편 疋 은 실물로 볼 때 也 로 판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노명호 전 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384쪽). 100)`風道使前a銘 瓦 : 암키와 파편으로 명문은 무문의 등면에 음각되어 있다. 명문은 기와의 단축 방향과 평행하게 내려 썼다.`前a이하는 결실되어 더 이상의 글자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실제 유물조사 결과`使a가`徒a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백제시대 기와라기보다는 고려시대 것으로 생각된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 제, 386쪽). 이를 백제 기와의 명문으로 보고,` 風(지역)의 道使, 前a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a, 한국고대사연구 48, 252쪽). 101) 栢嶺山城 出土 銘文瓦 : 금산 백령산성은 둘레 207m의 석축 산성으로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 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동쪽 경계를 방어하던 중요한 방어시설로 생각된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결과 남문과 북문, 치, 보도시설, 구들시설, 목곽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성 내부에서 다 량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특히 성 내부의 한 가운데서는 홍성 신금성이나 대전 월평 동산성, 공주 공산성, 부여 관북리유적 등지에서 확인된 바 있는 목곽 시설이 발굴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출토유물은 기와 토기 철기 목기 등 다양한 유물이 있으며, 7세기를 중심 연대로 한다. 기와 중에는 원형과 방형으로 명문이 찍힌 인각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한편 목곽시 설 내부에 충전된 회색점토의 퇴적층에서 기와편, 토기편 등과 함께 다수의 목재편이 출토되었 다. 목곽시설 북동쪽 바닥층 가까이에서 발견된 목재류 중에는 墨書가 있는 이형 목제품이 확인 되었다. 이 목제품은 두께 0.8 로 얇고 폭 13, 길이 23 의 크기로 배머리 모양과 같다. 대부 분의 글씨는 지워지고 일부분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한다(강종원 최병화, 2007,`금산 백 령산성 출토 명문와의 성격a, 170~174쪽).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해 목제품의 명문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02)`丙a銘 印刻瓦 : 시굴 및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수 확인되었다. 수키와와 암키와에서 모두 확인 된다. 명문의 자체나 크기 등으로 보아 같은 印章으로 찍은 것이라 생각된다. 인각와는 주로 부 여 도성유적과 익산 왕궁리, 미륵사지 등지에서 출토되었고, 산성유적으로는 금산의 탄현산성,

392 782 瓦 塼 土器 銘文 `栗峴 丙辰瓦a銘 印刻瓦103) 원문 : 上水瓦作五十九 `耳淳辛 丁巳瓦a銘 印刻瓦104) 夫瓦九十五 105) `耳淳辛 戊午瓦a銘 印刻瓦 106) `上 a銘 瓦 783 作[人]那魯城移[文] 번역 : 上水瓦는 五十九, 夫瓦는108) 九十五(개)를 만들었다. `上水瓦作五 a銘 瓦107) 作[人]은 那魯城의 移[支]이다. 고부 구읍성 출토 기와의 명문(古阜舊邑城 出土 銘文瓦)109) 익산의 저토성, 하동 고소성, 고부 구읍성 등에서만 확인되었다(강종원 최병화, 2007,`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의 성격a, 175쪽). 103)`栗峴 丙辰瓦a銘 印刻瓦 : 이 명문자료는 대부분 목곽시설 안에서 출토되었다. 율현 다음에 기호가 있어, 이를`栗峴峴 丙辰瓦a로 판독하는 견해도 있다(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 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a, 249쪽). 한편 율현을 기와의 所要處로 보고, 율현을 백령산성이 위치한 고개의 이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강종원 최병화, 2007,`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 문와의 성격a, 175쪽). 丙辰은 기와의 제작연대인데, 596년(위덕왕 43) 또는 656년(의자왕 16) 이라고 생각된다. 104)`耳淳辛 丁巳瓦a銘 印刻瓦 : 이 명문자료는 백령산성 조사지역 대부분에서 출토되었다. 耳淳 辛 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갈나성 정사와a나 앞서 검토한`율현 병진와a의 사례로 볼 때 지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혹 기와 제작자의 이름일 수도 있다(강종원 최병화, 2007,`금 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의 성격a, 176쪽). 丁巳는 597년(위덕왕 44), 또는 657년(의자왕 17)이 라고 생각된다. 105)`耳淳辛 戊午瓦a銘 印刻瓦 : 이 명문자료는 백령산성에 대한 시굴 및 발굴과정에서 다수 출토되 었다. 戊午는 598년(위덕왕 45), 또는 658년(의자왕 18)이라고 생각된다. 앞서 검토한 丙辰, 丁 巳, 戊午까지 합하면, 이 지역 시설의 축조를 위해 3년간 연이어 계속적으로 기와가 제작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丙辰, 丁巳 戊午의 해를 신라공격에 무방비태세였던 의자왕 말년이 아니라, 위덕왕대의 對新羅 攻擊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강종원 최병화, 2007,`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의 성격a, 178~180쪽). 이 경우 백령산성도 위덕왕대에 축조 하였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기와의 제작시점에 대해서는`葛那城 丁巳瓦a나`丁巳a명 인각와 등과 함께 보다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06)`上 a銘 瓦 : 이 기와는 목곽시설이 위치한 지역의 표토층에서 출토되었는데, 모두 2점이 수습 되었다. 무문의 평기와인데, 명문은 인장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기와가 완전히 건조되기 전에 예리한 도구로 새긴 것이다. 5부명이 부여나 익산지역이 아닌 지방의 거점산성에서 출토되었다 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a, 250~251쪽). 107)`上水瓦作五 a銘 瓦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4쪽에는 題名이`上水風作土 a銘 瓦로 되어 있지만, 실제의 명문은`上水瓦作五 a로 판독되기 때문에, 본 역주 집 에는 題名을 수정하였다. 이 명문자료는 백령산성 목곽시설에서 출토된 암키와인데, 2편으로 `上 a銘 印刻瓦 깨져있다. 기와의 등이나 측면 등 3부분에 글자가 음각되어 있지만, 기와의 등쪽에 새겨진 명문 을 제외한 나머지 두 곳은 판독하기가 매우 어렵다. 현재까지 출토된 기와 명문 중에서는 가장 길고 내용도 다각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명문은 上水瓦 59개를 만들고, 夫 瓦 95개를 만들었다. 만든 사람은 那魯城의 移支이다 로 해석된다. 나노성에서 제작된 기와가 금산 백령산성에 공급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a, 251쪽), 다른 한편으로는 나노성이 금산 백령산성을 가리키는 지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명문 기와는 백제 기와의 제작 공급체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108) 上水瓦와 夫瓦 : 夫瓦 앞에 一 이라는 글자가 한 글자 더 있어, 一夫瓦 로 판독하는 견해도 있 지만(강종원 최병화, 2007,`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의 성격a, 176쪽), 이 부분은 글자가 아니라 기와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누린 자국이라고 생각된다. 上水瓦나 夫瓦는 기와의 특정 종 류를 가리키는 백제어휘일 가능성이 높다. 上水瓦는 물이 흘러내려가는 기와로 암키와(또는 上 水道用으로 사용한 筒瓦)를, 夫瓦는 오늘날처럼 수키와를 가리키는 용어일 수도 있겠다. 109) 古阜舊邑城 出土 銘文瓦 : 이 명문자료들은 고부읍성 북문지의 성토층 상면에서 백제시대 유물 들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특히`上 上巷a銘이 좌서로 찍힌 장방형 인각와편은 5부명 인각와중 에서도 최초로 巷 까지 표기되어 있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전북문화재연구원, 2005, 고 부 구읍성 2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및 지도위원회의자료, 6쪽). 북문지 성토층의 목주공 연대 가 510년으로 추정되어 웅진말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전북문화재연구원, 2007, 전북 고부 구읍성Ⅰ, 80~83쪽),`상부상항a명 인각와의 인장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어 7세기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김영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 토a, 248쪽). 중앙 상부상항 에서 제작해 지방에 제공한 것인지, 상부상항에서 기술자 를 파 견하여 제작하거나 또는 상부상항의 기진 으로 제작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효율 성으로 보아 중앙에서 공인을 파견하여 지방의 공인들을 훈련시켜 제작하고 검수 내지 품질 보 증의 의미로 도장을 찍어주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아니면 고부지역은 중방성으로

393 784 瓦 塼 土器 銘文 `上 上巷a銘 印刻瓦 `上 甲瓦a銘 印刻瓦 `上 乙瓦a銘 印刻瓦 전주 동고산성 출토 기와의 명문(全州 東固山城 出土 銘文瓦)110) 785 나주 복암리 출토 명문자료(羅州 伏岩里 出土 銘文資料)114) `鷹( ) a墨書 綠釉托盞115) `卍a字 朱書 蓋杯116) 윤선태(동국대학교) 111) `中方a銘 筒瓦片 원문 : 中方近 보령 성주사지 출토 기와의 명문(保寧 聖住寺址 出土 銘文瓦)112) `十a,`丁a銘 瓦113) 비정되는 都會地이므로 중방성 지역에도 5부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도 있다(김영 심, 2007,`백제의 지방통치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a, 256~257쪽). 110) 全州 東固山城 出土 銘文瓦 : 동고산성은 전북 전주시 교동에 위치한 산성으로서 예전부터 후백 제 견훤의 왕궁지로 알려져 왔다. 이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9년 9월 1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진 행되었다(한국고고학연구회 전주시립박물관, 1980, 전주 동고산성 개괄조사보고 ). 111)`中方a銘 筒瓦片 : 이 명문자료는 흑색 와질 筒瓦인데, 그 배면에 타날된 불규칙한 화문양지문 내에 左書로`中方近 a를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양각해놓았다.`中方a의 자체는 뚜렷하나 치 졸하다. 그 다음 글자는`近a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다음은 무슨 글자인지 판독하기가 어렵고, 전체 명문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명백하지 않다. 이 유물은 백제시대의 筒瓦라기보다는 고려시대 의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중세 지 방제도의 제문제, 388쪽). 112) 保寧 聖住寺址 出土 銘文瓦 : 성주사는 신라말에 성립한 九山禪門 중의 하나로, 경내에는 유명한 `聖住寺朗慧和尙白月 光塔碑a(국보 제8호)를 비롯하여 五層石塔(보물 제19호), 中央三層石塔 (보물 제20호), 西三層石塔(보물 제47호) 등이 남아 있다. 동국대박물관에서 1968년과 1974년 2회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고, 이후 1991년부터 6차에 걸쳐 충남대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 하였다. 이 6회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성주사의 가람배치를 확인하였고, 이후의 가람 변천을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특히 충남대의 발굴을 통해 성주사보다 이른 시 기에 조성된 백제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는 성주사의 전신이 烏合寺라는 성주사비의 기록 과 부합된다. 그러나 백제시대의 오합사 이후 聖住寺로 寺名을 바꾸는 847년 이전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는 토기자료는 그 양이 극히 빈약하여 이 무렵 이 사찰의 사세가 그다지 번창하지 못했음 을 짐작할 수 있다(충남대학교 박물관, 1998, 聖住寺 ). 113)`十a,`丁a銘 瓦 : 수키와의 등에`十a,`丁a등이 뾰족한 도구로 새겨져 있다(충남대학교 박물 관, 1998, 聖住寺 ). 114) 羅州 伏岩里 出土 銘文資料 : 현재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일대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 하며, 그 가운데 3호분은 하나의 분구 내에 옹관묘 수혈식석곽 횡혈식석실 횡구식석실 등 매우 다양한 묘제가 있는 함께 있는 고분이다. 특히 96석실의 경우 석실 안에 옹관이 매납되어 있어서 백제와의 관련성이 매우 큰 유구이다. 羅州 伏岩里 出土 銘文資料는 모두 3호분에서 출 토된 것이다(국립광주박물관, 1998, 영산강의 고대문화 ). 115)`鷹( ) a墨書 綠釉托盞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4쪽에는 題名이 墨書銘 綠釉 托盞 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銘 이란 어휘는 金石文에 鑄造되거나 刻書된 銘文을 말할 때 사용되고, 墨書된 것은 銘이란 말없이 그냥 墨書 라고 표현한다. 이에 본 역주집 에서 는 題名을 수정하였다. 이 명문자료는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접시모양 탁의 아래 면 중앙부에 鷹( ) 으로 추정되는 묵서가 쓰여있다. 이를 백제를 지칭했던 명칭인 응준 응 유 등과 관련하여 설명하기도 한다(국립부여박물관, 2003, 백제의 문자, 64~65쪽). 116)`卍a字 朱書 蓋杯 : 이 명문자료는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개배 뚜껑의 윗면과 접 시의 아랫면에`卍a자가 붉은 글씨로 쓰여있다.`卍a은 경사스러운 일과 많은 덕행을 행한다는 吉祥萬德을 뜻한다. 죽은 자에 대한 불교적 의미의 기원이 담긴 것으로 추측된다(국립광주박물 관, 1998, 영산강의 고대문화 ; 노명호 전덕재 윤선태 윤경진 임기환, 2004, 한국 고대 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405~406쪽).

394

395 木 簡 木 789 簡 木簡의 내용은 2004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韓國의 古代木簡 을 대본으로 하여 발췌하였다. 목간(木簡)1) 부여 능산리 사지 출토 목간(扶餘 陵山里 寺址 出土 木簡)2) 1) 木簡 :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5~331쪽에 소개된 목간자료들은 2004년 국립창원문 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의 고대목간 을 대본으로 발췌한 것이다. 그러나 본 역주집 에서는 그 이후 발굴된 귀중한 백제목간들도 함께 추가하여 소개하였다. 한편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 國篇- 의 목간자료 題名에는 항상 墨書銘木簡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銘 이란 어휘는 金石文에 鑄造되거나 刻書된 銘文을 말할 때 사용되고, 목간에 기록된 문자는 墨書 또는 刻書 로 표현하기 때문에 墨書銘木簡 은 적절한 題名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본 역주집 에 서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題名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되, 墨書木簡 이라고 銘 만을 제외한 題名으로 약간 수정하였다. 또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5~331쪽에는 목간자료의 다양한 판독안이 제시되어 있다. 본 역주집 에서는 그것 과 다른 역주자의 판독안을 제시하여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판독안들과 대조하면서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목간자료는 묵서내용과 목간형태를 함께 제시할 때 독자들이 그 용도와 의 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본고의 목간 판독문에 사용한 기호의 범례는 다음과 같다. (파손), (구멍), (목간 좌우 V자형 缺入部), (글자수를 알지만 판독불능인 경우), (글 자수도 모르고 판독불능인 경우), 이탤릭체 (異筆), 윤곽체 (刻書), (天地逆書) 2) 扶餘 陵山里 寺址 出土 木簡 :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제434호)는 사비시대의 사찰유적으로, 사비 도성의 외곽성인 東羅城의 第3門址와 陵山里古墳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93년부터 2002년까 지 8차에 걸쳐 이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백제문화권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의 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능산리사지는 中門 木塔 金堂 講堂을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하고, 그 주 위를 回廊으로 둘러싼 一塔一金堂 양식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사지에서는 1993년에 工房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바깥에서 龍鳳金銅大香爐 가 출토되어 일반인들의 큰 반향 을 불러일으켰다(國立扶餘博物館 扶餘郡, 2000, 陵寺 扶餘陵山里寺址發掘調査進展報告書 ). 이러한 사역 내부에 대한 조사성과를 토대로 착수된 2000~2001년의 6 7차 조사에서는 능사의 중문지 남쪽부분 중 서석교와 동석교 사이를 발굴하였다. 이 조사에서는 능사의 중문 남쪽에 있을 수 있는 연못이나 도로유구 등을 확인하고자 하였는데 조사과정에서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배수시

396 790 `天 a刻墨書木簡3) 木 簡 판독안 (1면) 无奉義4) 道 설과 집수시설 그리고 수리시설로서의 목책열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그 내에서 토기편 기와편 를 비롯해 상당량의 목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목재유물 중에는 목제빗 목제수저 등 목재로 만든 일상 생활용품도 있었지만, 30여점의 백제시대 목간이 출토되어 특히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목간들은 주로 서배수로 인접구역에서 노출된 V자형 남북방향 도랑(溝) 내부와 제2배수시설에서 출토되었다. 배수로의 내부에서 목간이 출토된 위치는 지표 하 150~170cm의 유기물퇴적층이다 (國立扶餘博物館 扶餘郡, 2000, 부여 능산리사지 6차 발굴조사 지도위원 자료 ; 國立扶餘博物 館 扶餘郡, 2001, 부여 능산리사지 7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a). 한편 2002년의 8차 조사 에서는 사면목간 1점이 추가로 발굴되었고, 목간이 출토된 배수로와 능사와의 관련성이 집중적으 로 조사되었다(國立扶餘博物館 扶餘郡, 2002, 부여 능산리사지 8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 료a).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은 현재 공개된 것만도 24점이 넘으며, 백제목간으로는 단일유 적에서 가장 많은 출토점수를 자랑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최초로 목간을 재사용하기 위해서, 또는 목간의 잘못 쓴 글자를 정정하기 위해서, 기존의 묵서를 삭도로 깎아낸 목간부스러기 까지 출토 되었다. 이러한 능산리목간에는 종래 문헌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寶憙寺 子基寺 등의 백제 사찰과, 大升 小升 등의 백제 度量衡制, 그리고 백제의 관료제와 문서행정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각종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목간의 작성시점도 현재 발굴된 백제목간 중 가장 오래 된 6세기 중반이어서,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 야기 주류성, 98~101쪽). 3)`天 a刻墨書木簡 : 이 목간은 6차 조사 때 능사에서 최초로 발굴된 목간군 속에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男根 모양을 하고 있어, 발굴초기부터 男根形木簡 으로 불리며 話題가 되었 다. 이 목간은 이러한 형태상의 특징으로 인해 주술적인 성격의 목간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 되었고(박중환, 2002, 韓國 古代木簡의 形態的 特性a, 國立公州博物館紀要 2), 이후 묵서내용 에 대한 판독을 통해 그 용도를 백제 사비도성의 道祭 에 사용된 神物로 추정한 견해가 연이어 제 기되었다(尹善泰, 2004, 扶餘 陵山里 出土 百濟木簡의 再檢討a, 東國史學 40 ; 平川南, 2005, 古代における道の祭祀 道祖神信仰の源流を求めてa, やまなしの道祖神祭り, 山梨縣博物館). 이 목간은 길이는 22.6cm, 두께는 2.5cm이다. 각 면 순서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4, 한국 의 고대목간 에 소개된 것을 따랐다. 제1면을 정면으로 하면, 2면은 그 좌측면, 3면은 그 후면, 4 면은 그 우측면이 된다. 단면은 원형에 가까운 圓柱狀이며, 自然木에 약간의 표면가공만을 가해 다 듬었다. 목간의 상부는 분명 男根 모양을 의도하고 만들었는데, 道神이 남근으로 상징되는 이유는 陰陽五行과 관련된 것으로 陽物 을 대표하는 남근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陰濕한 역병과 흉재의 기운을 몰아내려고 한 것이다. 백제의 道祭에서 神物로 사용된 이 남근형목간은 형태나 용도가 모 두 후대 조선시대의 장승 과 맥이 닿아있다. 장승은 境界의 聖標로서, 외부로부터의 凶災를 막는 거리祭 때 세우며, 지역에 따라서는 목제의 장승 대신에 남근석이 신주로 모셔지기도 한다. 또 경주 안압지에서는 20cm 정도의 장승형 신라 木像이 2점 출토되었다. 이 목상은 크기만 작을 뿐, 얼굴의 표정, 제작법, 하단부가 尖形인 점 등 후대의 장승과 표현기법과 형태가 완전히 일치한다. 791 (2면) 立立立6) 追 (3면) 无奉 (4면) 5) 7) 天 徒 十六 역주 (1면) 받들 뜻이 없다.8) 道神인 이 일어섰다! 일어섰다! 일어섰다!9) 결국 한반도에서는 백제 능산리 남근형목간에서 신라의 소형 장승형 목상, 후대 조선의 거대한 목 제 장승으로 이어지는 도로 제사와 그 神物의 계보관계를 상정해볼 수 있다. 4) 无奉義 : 1면의 이 글자들과 3면의 글자는 모두 刻書로 새겨져 있다. 한편 墨書는 각서의 여백이나 측면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각서보다는 부차적이며, 추기적인 성격의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즉 각 서와 묵서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었고, 각서가 먼저 기록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제1면의 첫 글자 인 无 는 각서한 뒤에 다시 일부 획을 깎아내 지우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5) : 平川南, 2005, 古代における道の祭祀 道祖神信仰の源流を求めてa에서는 이 글자를 緣 으 로 판독하였다. 그러나 緣 이라면 彖 부분의 상단이 가 아니라 명확히 旦 으로 되어 있어 문제가 있다. 이 글자는 오른쪽 변, 왼쪽에 을 쓴 인데, 부분이 日 아래에 豕 을 쓴 異體字로 되어있다. 勿 부분이 특이한 이 이체자는 아직 楷書가 완비되지 않았던, 隋唐 이전 의 서체에 나타나는 특징이다(손환일, 2004, 함안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서체에 대한 고찰a, 한 국의 고대목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384~385쪽). 6) 道 立立立 : 기존에는 이를 道 立十二 로 읽어 7자가 묵서되어 있는 것으로 판독하였지만, 적외선사진으로 볼 때 5자가 분명하다. 7) 天 : 이 글자는 각서인데, 다른 각서들과 달리 특이하게도 글자가 天地逆으로 거꾸로 새겨져 있다. 8) 받들 뜻이 없다 : 고대사회에서는 하늘에 대한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接神을 시도하는 逆 說의 呪術 이 쉽게 확인된다. 이규보의 동명왕편 에 인용된 구삼국사 의 주몽신화에 의하면, 주 몽은 부여족이 신성시한 接神者인 사슴 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하늘을 자극해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고 했다. 남근형목간에 기록된 하늘을 받들지 않겠다. 는 刻書도 신을 무시하는 듯한 역 설적인 문투를 통해, 신이 자극을 받아 오히려 빨리 출현해주기를 바라는 백제인의 의지가 담긴 주 술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9) 道神 일어섰다! : 은 說文解字 와 初學記 등에 道上祭 로 정의되어 있고, 廣韻 陽韻 에는 道神 으로, 禮記 郊特牲에는 나쁜 귀신을 쫓아내는 儺禮儀式을 의미하는 글자로 나온다. 결국 1면의 묵서 道 立立立 은 道의 神인 이 일어섰다! 는 의미로 해석되며, 立 을 세 번 연 속 쓴 것은 감탄을 겸한 강조법이라고 생각된다. 백제의 道祭도 신라의 大道祭나 고대일본의 道饗

397 792 (2면) 木 簡 역주 를 몰아냈다. 10) (3면) 받들 (뜻이) 없다. 天이여! (굽어 살피소서) (4면) (참여한) 徒는 十六명이다. `寶憙寺a墨書木簡11) 四月七日 寶憙寺14) (소속의 승려) 智眞, 乘 (참석함) 15) 소금 2석을 (참석 답례품으로) 보냄. `子基寺a墨書木簡16) 판독안 판독안 四月七日 寶憙寺 793 智眞 乘 12) 送 二石13) 祭처럼 도성의 사방 입구나 외곽 도로에서 道神께 폐백을 올려, 도성으로 들어오는 온갖 부정한 것 들, 예를 들어 역병과 같은 전염병이나 국가재난 등에 대처하기 위해 거행한 국가의례가 아니었을 까 생각된다. 또 백제 도로 제사의 祭場 역시 신라나 고대일본처럼 도성으로 들어오는 동서남북 사 방의 도로와 관련된 곳이었다고 추측된다. 남근형목간이 출토된 능산리사지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비도성의 외곽인 東羅城의 제3문지와 능산리고분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대일본에 서 道饗祭가 열렸던 도성 사방 외곽의 도로와 동질적인 성격을 지닌 곳이라고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23~126쪽). 10) 天이여! (굽어 살피소서) : 제3면의 天 이 天地逆으로 거꾸로 새겨져 있는 것은 마치 현재 중국 에서 입춘 때 福 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써서 복 이 하늘에서 빨리 자신에게 떨어지라고 주술적 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天 이 빨리 출현해주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書寫法이 아닌가 생각된 다. 고대일본에서도 액땜을 하는 大 儀式用 목간 중에 藥 이라는 글자를 천지역으로 거꾸로 쓴 목간이 발굴된 바 있다(和田萃, 1995, 日本古代の儀禮と祭祀 信仰(中), 書房, 360쪽). 이 역 시 하늘이 빨리 병을 치유하는 藥 을 내려주십사 기원하는 뜻으로 그렇게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소망의 결과로 제1면에 道神인 이 일어섰다. 는 표현이 묵서되었고, 이어 제2면에는 사악한 鬼魅가 추방(追 )되었다. 는 제사의 효험을, 그리고 마지막 제4면의 숫자는 의례에 참석 또는 준비한 사람들의 수를 표현하였다고 해석하고 싶다. 11)`寶憙寺a墨書木簡 : 이 목간은 하단부가 파손되어 상부 일부만이 남아있다. 두께가 0.3cm 정도 로 얇다. 묵서내용을 보면 앞면에는 四月七日 이라는 날짜, 寶憙寺 라는 사찰명, 그리고 그 소 속 승려들로 생각되는 智眞 乘 등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4월 8일 석탄일 의례참 가 승려명단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東野治之, 2001, 木簡으로 본 韓日 古代文化a, 충남대 백제학교육연구단 제5회 해외전문가 초청강좌 발표요지문, 2쪽). 한편 뒷면에는 과 그 수량 二石 을 보냈다(送). 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뒷면은 앞면 글자와 書寫方向이 서로 반대 이며, 또 異筆이라고 생각된다. 이 목간의 원형은 세장형의 기본형목간일 수도 있지만, 출석명단 중의 하나이고, 裏面의 묵서가 서사방향이 서로 반대라는 점에서, 편철용의 구멍이 하단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子基寺 12) : 남아있는 묵흔으로 볼 때 使 일 가능성이 있다. 13) 二石 : 기존에는 이를 一石으로 판독하였지만, 이 목간 뒷면에 기록된 계량단위인 石이 가로획 一 을 생략한 채로 표기된 것으로 보고 二石으로 판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近藤浩一, 2004, 扶餘 陵山里 羅城築造 木簡의 硏究a, 百濟硏究 39, 88쪽 주11). 함안성산산성목간 을 비롯해 신라 의 고문서 목간 금석문 등에는 모두 돌 石과 계량단위의 石을 구별해, 돌 石은 온전히 쓰지만 계량단위의 石은 가로획 一을 생략한 채로 표기하였다. 이는 고려 조선에도 계승되었다(河日植, 1996, 昌寧 仁陽寺碑文의 硏究a, 韓國史硏究 95, 27~28쪽 ; 尹善泰, 1999, 咸安 城山山城 出土 新羅木簡의 用途a, 震檀學報 88, 18쪽) 그런데 위 목간의 二石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기록 되어 있다. 추후 백제 문자자료에서 동일한 사례들이 증가한다면 더욱 명확해지겠지만, 이러한 표 기법의 淵源이 백제로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신라의 문자생활에 끼친 백제의 영향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14) 寶憙寺 : 이 목간을 통해 寶憙寺가 백제 사찰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그동안 중국승려의 저술로 알려져 있던 慧均의 大乘四論玄義記 가 백제승려의 저술로 봐야한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 다(최연식, 2007, 백제찬술문헌으로서의 大乘四論玄義記 a, 한국사연구 136). 15) 소금 보냄 : 석탄일 의례 후 참석한 승려들에게(아마도 소속사찰인 보희사에) 답례로 보낸 소금 2석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장차의 출납장부 정리를 위해 앞면과 연결시킨 추가 메 모라고 생각된다. 16)`子基寺a墨書木簡 : 이 목간은 길이 7.8cm로서 매우 작지만,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다. 목간의 상단 양쪽에 V字형 결입부가 파여 있어, 어딘가에 매달기 위해 만든 부찰형목간임을 알 수 있다. 묵서된 내용은 앞면에 子基寺 라는 사찰명이 읽히며, 그 이면에도 묵흔이 있는 것 같지만, 판독 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 목간은 형태가 부찰형목간이라는 점에서, 그 용도는 子基寺 에서 물품 에 매달아 목간 출토지점으로 보낸 경우, 아니면 목간 출토지점에서 자기사 와 관련하여 제작하 였을 경우, 이 두 가지 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어떤 것이든 이 목간은 사람과 물 품의 이동이나 창고정리를 위한 꼬리표목간 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목간을 통해 능 산리사지와 자기사 사이에 인적 또는 물적인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98 794 木 簡 `奈率a墨書木簡17) 795 德干? 판독안 18) 奈率 加困白加之恩 慧明19) 解 `對德a墨書木簡20) `三貴a墨書木簡22) 판독안 三貴 판독안 五辛 城下部對德 加鹵 `德干a墨書木簡21) 爲資丁 丁 至丈 牟母 至久 女貴 貴 久 文 판독안 乙乙乙/ 乙乙乙/ 乙乙乙/ 乙乙乙/ 乙乙乙/ 乙乙乙/ 乙乙乙/ 17)`奈率a墨書木簡 : 이 목간은 상단 가운데에 구멍이 있으며, 완형이다. 목간의 크기는 cm이며,`對德a墨書木簡과 크기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목간에는 상단에 구멍이 있고, 뒷 면에도 묵서가 있는 등 차이도 있다. 한편 삭도로 깎아낸 흔적과 異筆의 追記도 있어 처음의 의도 와는 다른 용도로 轉用된 것 같다. 또`對德a墨書木簡에는 對德 加鹵의 본적지인 城下部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목간은 奈率이라는 관등명으로 바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에 도 큰 차이가 있다. 加困 慧明 등은 인명이 아닐까 생각되며, 특히 후자는 漢化된 승려의 인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용현, 2007,`목간a,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12)-백제의 문화와 생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91쪽). 刀 18) 加困白加之恩 : 이를 加姐白리之息 으로 판독하는 견해도 있다(이용현, 2007,`목간a, 백제문 刀刀 화사대계 연구총서(12)-백제의 문화와 생활, 291쪽). 19) 明 : 종래 朋으로 판독하였지만, 明으로 읽는 견해도 있다(이용현, 2007,`목간a, 백제문화사대 계 연구총서(12)-백제의 문화와 생활, 291쪽). 이 글자는 朋처럼 보이나 이성산성 출토 사면목간 에서도 확인되는 明의 異體일 가능성이 높다. 20)`對德a墨書木簡 : 이 목간은 세장형이며, 완형이다. 한 면에만 묵서가 있고, 길이는 24.5cm이 다. 기존의 판독에서는 첫 글자를 韓 으로 읽기도 하였는데, 이 글자의 좌변은 현재 묵서가 불분 명하다. 소속 지명( 城下部) 관등(對德) 인명( 加鹵)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나성 대문을 통과할 때 사용된 관인의 신분증명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21)`德干a墨書木簡 : 이 목간은 상 하단이 대부분 파손되어 형태나 묵서내용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德이 對德 등과 같은 백제 관등의 어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德/干 로 끊어 이를 관등명과 인명을 나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이용현, 2007,`목간a,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2)-백제의 문화와 생활, 290쪽). 한편 뒷면의 資丁 은 고대일본에서 귀족에게 지급한 從者인 資人 과 연결 지어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近藤浩一, 2004,`扶餘 陵山里 羅城築造 木簡의 硏究a, 百濟硏究 39 ; 近藤浩一, 2005,`扶餘陵山里出土木簡と泗 都城關聯施設a, 東アジア の古代文化 110, 35쪽). 22)`三貴a墨書木簡 : 이 목간의 크기는 cm인데, 완형은 아니며, 그 좌변에 縱으로 잘라낸 廢棄行程이 엿보인다. 따라서 원래의 폭은 1.8cm보다 넓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앞면 의 상단 오른쪽은 의도적으로 모를 죽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은 잘려져 나간 앞면 상단 왼쪽에도 대칭적으로 모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목간의 앞면에는 상단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횡으 로 罫線을 그어 구획하고, 三貴 貴 女貴 등의 어휘들이 나열되어 있다. 반복되고 있는 貴 라는 표현은 姐彌文貴 를 비롯하여 尹貴 貴文 久貴 三貴 貴智처럼 日本書紀 에 등장하 는 백제인 이름으로 빈번히 확인된다는 점에서, 인명이라고 생각된다(近藤浩一, 2004,`扶餘 陵 山里 羅城築造 木簡의 硏究a, 103쪽). 한편 至丈 至久 久 등으로 판독한 부분을 기존에는 각 각 至女, 至父, 兄父로 읽어 친족관계호칭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목간의 적외선사진으로 볼 때, 이를 친족관계호칭으로 판독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앞면에 나열된 어휘는 모두 인명 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이 목간의 용도와 관련하여서는 우선 목간의 폭이 넓고, 상단 좌우의 모를 죽인 圭頭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목간의 뒷면에 乙 과 같은 형태의 반복적인 부호가 전면을 채운 묵서가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러한 형태나 서사방식은 符籍, 呪 符 목간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朴仲煥, 2002, 扶餘 陵山里發掘 木簡 豫報, 韓國古代史硏 究 28). 따라서 규두형태의 목간에 괘선을 긋고 여러 인명을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이 목간 은 제사의례에 사용된 위패가 아닌가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50~152쪽). 이 경우 이 목간 좌변의 의도적인 폐기행정은 의례의 마지막 절차였을지도 모른다.

399 796 `六ア五方a墨書木簡23) 木 簡 판독안 宿世結業同生一處是 非相問上拜 白 來 書亦從此法爲之凡六ア五方 行色24)也凡作形 中 具 797 慧暉 前27) 역주 역주 慧暉28) 앞(前).29) 書 또한 이 法에 따라 한다. 무릇 六ア五方25) 前生에서 맺은 因緣으로 이 세상에 함께 태어났습니다. 是非를 서로 묻고자 공경히 절 色을 칠한다. 무릇 형태를 만드는 데에는 하오니, 사뢰러 오십시오.30) `宿世 a墨書木簡26) 판독안 23)`六ア五方a墨書木簡 : 이 목간은 상 하단이 결실되었는데, 내용상 단순한 習書는 아니고, 문서 목간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凡六ア五方 과 凡作形 은 문투나 문맥상 각각 문장의 시작부분 이 분명하며, 이러한 문투는 율령의 法條文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목간의 묵서 역 시 어떤 사항들을 凡 으로 시작되는 書式을 활용해 條目條目 서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近藤浩 一, 2004,`扶餘 陵山里 羅城築造 木簡의 硏究a). 이 목간은 그 묵서의 六ア五方 으로 인해 백제 의 행정제도인 五部五方制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그러나 현존 묵서내용만으로는 육 부오방을 백제의 행정구역인 오부오방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24) 色 : 이 글자는 종래 之 또는 色 등으로 읽혔으나, 色의 초서체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박중환, 2007,`백제 금석문 연구a, 전남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21~129쪽). 25) 六ア五方 : 이를 백제의 행정구역인 5부 5방제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되었 다(박중환, 2007,`백제 금석문 연구a, 116~120쪽 ; 近藤浩一, 2004,`扶餘 陵山里 羅城築造 木 簡의 硏究a, 114~125쪽). 최근에는 백제의 기존 5부에 別部를 더하여 6부가 성립하였다는 견해 도 발표되었다(김주성, 2007,`백제 무왕의 즉위과정과 익산a, 마한 백제문화 17, 218쪽). 그 러나 문헌자료에 일관되게 보이는 백제 5부 5방제를 무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행정구역 명칭으로 보지 않고, 불교와 도교적 세계를 아우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영 심, 2007,`신출 문자자료로 본 백제의 5부 5방제, 신출토 목간의 향연-한국목간학회 제2회 학술대회, 66쪽). 이 목간의 묵서내용 중 行色 이나 作形 등의 어휘에 주목할 때, 이 묵서의 此法 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을 의미하며, 그것을 조목별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이 해된다. 이 경우 六ア五方 은 어떤 제작물의 細部 부분을 지칭하는 어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 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55~156쪽). 26)`宿世 a墨書木簡 : 이 목간은 길이 12.7cm, 너비 3.0cm, 두께 1.1cm로 다른 목간에 비해 넓고 두꺼워 木牘이라고 말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이 목간은 종래 백제의 詩歌가 기록되어 있 는 목간으로 소개되었지만(김영욱, 2003,`武寧王 誌石과 木簡 속의 百濟 詩歌a제28회 구결학 회 전국학술대회 발표 논문집), 裏面의 慧暉 前 묵서가 논외로 취급된 문제가 있다. 이 이면의 묵서를 고려한다면, 이 목간은 누군가가 慧暉에게 보낸 書簡이라고 추정된다(윤선태, 2007, 목 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48~149쪽). 27) 慧暉 前 : 기존에는 慧暉 와 前 사이에 한 글자가 더 있는 것으로 판독하였으나, 국립창원문화 재연구소, 2004, 한국의 고대목간, 313번 목간의 적외선사진으로 볼 때, 묵흔은 있으나 글자의 일부 획으로 느껴져 혹 誤字를 書刀로 깎아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8) 慧暉 : 이 목간을 서간을 받은 혜휘 는 목간의 폐기과정을 고려할 때, 목간출토지점에 거주하였 던 인물이라고 추정된다. 陵山里寺址 출토 목간에는 인명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奈率 對德 등 관등을 가진 俗人들은 모두 漢化되지 않은 토속적인 인명인데 비해, 僧侶 이름은 모두 한화된 인명이라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혜휘는 서간의 내용으로나, 작명방식으로나 승려일 가능성이 매 우 높다고 생각된다. 29) 앞(前) : 이 목간에 보이는 누구 앞(前) 이라는 서간 형식은 월성해자 신라목간의 某足下白 형 식의 문서투식이나 고대일본의 某前白(申) 형식 문서투식의 직접적인 연원이었을 가능성이 높 다고 생각된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某前白(申) 형식의 문서목간이 중국 六朝時代의 書狀 내지 는 문서형식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한반도를 경유하여 유입되었다는 견해가 피력된 바 있다(東 野治之, 1983,`木簡に現われた 某の前に申す という形式の文書について, 日本古代木簡の硏 究, 書房). 30) 慧暉 오십시오 :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4, 한국의 고대목간 에는 慧暉 前 이 기록된 부분을 裏面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묵서내용상 이 이면이 오히려 이 목간의 앞면이 되며, 宿世 이하 는 편지내용 부분으로 이면이 된다. 따라서 역주문은 이러한 순서대로 수정하여 번역하였 다. 이 묵서내용을 四言四句體의 百濟詩歌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이 노래는 民謠 風의 가요로 백제인의 인생관과 불교적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고 한다. 또 이 시가가 우리말 어순 으로 창작되었다는 점도 백제이두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김 영욱, 2003,`武寧王 誌石과 木簡 속의 百濟 詩歌a).

400 798 木 簡 `梨田a墨書木簡31) 판독안 三月十二日梨田三 之 淸靑靑靑用 ` 用 a墨書木簡32) 판독안 六日 799 竹山六 四 `大大a墨書 木簡부스러기36) 판독안 大大貳 `再拜a墨書木簡37) 三月仲 內上 판독안 역주 三月에 仲 33) 안에 둔 上 (의 꼬리표목간)34) 35) `竹山a墨書木簡 판독안 31)`梨田a墨書木簡 : 이 목간은 상 하단은 파손되지 않았지만, 좌측면과 우측면에 의도적으로 목간 의 일부를 잘라낸 폐기흔적이 뚜렷이 확인된다. 이 목간은 細長形으로 길이가 27.3cm인데, 능산 리 사지 출토 목간 중에는 사면목간 다음으로 장대하다. 이 목간은 애초 三月十二日梨田三 등이 기록된 帳簿木簡이었는데, 용도가 다한 후 하단부를 삭도로 깎아낸 뒤 습서목간으로 재활용하고 좌 우측면을 잘라낸 뒤 폐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부 부분과 습서 부분이 異筆인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런데 三月十二日梨田三 으로 볼 때, 이 목간의 작성주체는 梨田 이라는 생산 처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고, 그것을 관리한 주체였음이 분명하다. 32)` 內a墨書木簡 : 이 목간은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9쪽에 `木市山a墨書銘木簡 으 로 소개되어 있지만, 木市山 이라고 판독한 글자는 內 라고 생각된다. 이 목간은 상단부 좌우 측에 V자형의 결입부가 있는 부찰형목간이고, 三月仲 內上 이 묵서되어 있는데, 8세기 신라 안압지의 창고 물품정리용 꼬리표목간의 서식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목간도 백제에서 창고의 물 품정리를 위해 제작한 꼬리표목간이라고 생각된다. 33) 仲 : 이 목간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공히 을 창고를 뜻하는 글자로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신라에서는 등급이나 위치를 나타내는 中 에는 반드시 仲 을 사용해 구분했는데, 이러한 문자사용방식도 이 목간의 仲 으로 볼 때 백 제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더 많은 관련 자료의 출토를 기대해본다. 34) 三月에 仲 안에 둔 上 : 이러한 목간의 서식은 8세기 신라 안압지의 창고 물품정리용 꼬리표 목간에서 확인되는 [월일+창고위치+물품] 등의 기재양식과 동일하다. 이 목간을 통해 백제에서 는 이미 6세기에 물품의 창고보관과 정리를 위해 꼬리표목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이 목간의 출토지점 인근에 창고시설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35)`竹山a墨書木簡 : 이 목간은 앞서 검토한`梨田a墨書木簡과 서식이 동일하고, 좌우를 종으로 폐 기한 방식도 똑같아,`梨田a墨書木簡과 마찬가지로 장부목간이라고 생각된다. 이 목간의 竹山 은 그 아래의 六 이라는 수량으로 볼 때, 단순한 山名이라기보다는 대나무를 생산하는 대나무 밭 을 의미하며, 六은 이 목간의 작성주체들이 관할했던 대나무밭의 數라고 생각된다.`梨田a墨 書木簡과`竹山a墨書木簡 등으로 볼 때,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의 작성주체는 배밭이나 대나무밭 등 무언가를 생산하던 農場이나 山林 등을 관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36)`大大a墨書 木簡부스러기 : 이 목간자료는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29쪽에 `大a `家a `貳a묵서명나무껍질 이라는 題名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나무껍질이 아니라 大 大 등을 습서한 목간을 깎은 부스러기이다. 이에 본 역주집 에서는 `大大a墨書 木簡부스러 기 로 題名을 수정하였다. 목간은 이미 쓴 묵서를 削刀로 깎아내 정정하거나, 재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존에 써놓은 묵서를 삭도로 깎아내면, 문자가 있는 목간부스러기가 발생 폐기된 다. 중국학계에서는 이 부스러기를 木市 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削屑 이라고 한다. 모두 목간을 깎은 부스러기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목간부스러기는 비록 원래의 목간에서 분리 파편 화된 것이지만, 역시 귀중한 문자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대일본의 경우 부찰목간은 재생해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폐기하며, 문서목간의 경우 문서의 誤用을 막기 위해, 삭도로 묵서 를 깎아 여러 번 재사용한다. 이로 인해 목간부스러기는 주로 문서목간이나 글자연습용 목간의 묵서를 깎아낸 것이 많다. 37)`再拜a墨書木簡 : 남근형목간 근처에서 함께 발굴된 목간으로,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목간자료(325~331쪽)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목간의 형태와 사진은 국립창원문화재연구 소, 2004, 한국의 고대목간, 309번 목간을 참조 바란다. 이 목간은 상 하단이 결실되어 그 전 모를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死 再拜 등의 묵서내용만으로도 죽은 자(死者) 를 위한 儀禮 와 관련된 목간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목간은 남근형목간과 동일지점에서 출토되었고, 再拜 는 의례절차에 등장할 수 있는 어휘이므로, 혹 백제 道祭의 의례절차를 기록한 笏記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물론 죽은 자 의 不淨을 京外로 내모는 大 儀式과 관련된 목간일 수도 있겠 다. 이 목간 역시`남근형목간a 과 마찬가지로, 이들 목간이 출토된 지점이 의례와 관련된 공간이

401 800 七 再拜 木 簡 801 升一, 三日에 食米四斗 死 (2면) 五日에 食米 三斗大升(一),47) 六日에 食(米) 三斗 大(升)二, 七日에 食(米) 三斗 大升 二, 九日에 食米 四斗 大(升 얼마)48) 38) `支藥兒食米記a墨書木簡 (3면) 판독안 49) 道使인 次와50) 如逢, (小)吏51)인 猪耳는52) 그 몸이 검은 것 같다.53) 道使인 復 (1면)支藥兒食米記 初日食四斗 二日食米四斗小升一 三日食米四斗 (2면)五日食米三斗大升39) 六日食三斗大二 七日食三斗大升二 九日食米四斗大 40) (3면) 道使 次如逢小吏猪 耳其身者如黑也 道使復 牟氏 彈耶方 牟 42) 41) 43) 耶 (4면) 又十二石又十二石又十二石十二石又十二石又十二石又十二石 역주 (1면) 支藥兒의44) 食米에45) 대한 記(錄簿).46) 初(一)日에 食(米) 四斗, 二日에 食米 四斗 小 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렬하게 암시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32~133 쪽). 38)`支藥兒食米記a墨書木簡 : 능산리사지에 대한 8차 조사에서 발굴된 목간으로, 百濟史資料原文 集(Ⅰ)-韓國篇- 의 목간자료(325~331쪽)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 목간은 매우 공들여 다듬 은 단면 사각형의 막대 형태를 하고 있다. 아쉽게도 하단이 파손되었다. 2007년 1월 한국목간학 회 주체 국제학술대회에서 국립부여박물관 이병호 학예사가 이 목간의 적외선사진을 공개하였 다. 이 목간의 현존 길이는 44cm이고 각 면의 폭은 2cm 정도다. 종래 이 목간은 道使에게 食米 를 지급한 사실을 기록한 帳簿로 해석되었다(近藤浩一, 2004,`扶餘 陵山里 羅城築造 木簡의 硏 究, 百濟硏究 39). 그러나 이 목간은 내용상 제1~2면 제3면 제4면 으로 각각 나누어 지며, 이 중 제1~2면 은 支藥兒食米記 로 命名해도 좋을 백제 어느 관청의 장부가 분명하고, 제3면 은 이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또 다른 장부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묵서내용으로 볼 때 이 사면목간은 최종 장부정리를 위한 기초 메모장으로 사용되었던 목간이었다고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34~135쪽). 39) 升 : 이 升 바로 아래에 이 목간의 폐기과정에서 부러뜨릴 때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가로로 금 이 간 파손부위가 있다. 이곳에 一 과 같은 글자가 묵서되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40) 猪 : 목간 자체에는 +者 로 묵서되어 있지만, 猪와 동일한 의미의 글자라고 생각된다. 41) : 글자가 또렷하지만, 弓변인지 변인지 판단이 어렵다. 혹 後 가 아닌가 생각된다. 42) 牟氏와 牟 : 細字로 표현한 牟氏 와 牟 는 行을 분할해서 쓴 割註形式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牟 의 는 글자가 또렷하지만, 木변인지 示변인지 판단이 어렵다. 43) : 이 역시 글자는 또렷하지만 판독이 어렵다. 혹 가 아닌가 모르겠다. 44) 支藥兒 : 고대일본의 延喜式 에도 嘗藥小兒 客作兒 造酒兒 등 接尾語로 兒 가 붙는 국 가의 여러 잡무를 수행했던, 최말단의 사역인이 확인된다. 백제의 지약아 는 그 이름으로 볼 때, 藥材를 지급하는 일을 담당했던 使役人 이라고 추정된다. 45) 食米 : 백제에서 官僚나 使役人에게 지급했던 日給 의 명칭이라고 생각된다. 46) 支藥兒의 食米에 대한 記(錄簿) : 지약아 는 식미를 받은 사역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支藥 兒食米記a는 支藥兒에게 준 食米의 기록부(장부) 라고 풀이할 수 있다. 47) 小升과 大升 : 六日 의 三斗大二 는 七日 의 三斗大升二 와 동일한 의미의 略記라고 생각된 다. 또 九日 의 四斗大 역시 그 이하가 파손되었지만, 다른 일별 기록과 마찬가지로 四斗大 (升) 의 의미로 이해된다. 결국 이 목간에 기록된 大 와 小 는 모두 大升 小升 의 略記라고 생각되며, 중국 漢代의 大半升, 少半升의 量制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위 목간의 大升 小 升 아래에 一 또는 二 가 附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漢代의 대 소의 半升制처럼 일정한 목 적 하에 백제에서도 大升과 小升의 量器를 별도로 만들어 일반적인 1되(升)짜리 됫박과 함께 倂用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食米의 양이 많은 순으로 나열하면, 四斗大(9일), 四斗小升 一(2일), 四斗(1일), 三斗大升二(6일, 7일), 三斗大升(5일)으로 나타난다. 일별로 식미의 양이 달 랐던 것은 식미를 받은 지약아 의 인원수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일보다 2일에 小升 一 이 증가하였는데, 이 증가한 量이 지약아의 인별 식미 日當과 비례하는 수치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억측해본다면 인원이 늘어날 때마다 소승1, 대승1, 대승2, 1두(斗)로 증가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되며, 대승2가 1두보다는 분명히 작아야 하므로, 대승1은 5승보다 반드시 작아 야 한다. 결과적으로 소승은 2升器이며, 대승은 4升器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추론에 의거하면, 인별로 一日에 2승씩 지급되었고, 날마다 지급된 식미량은 각각 40승(1일), 42승(2일), 34승(5 일), 38승(6일, 7일), 44승(9일)으로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미를 받은 지약아의 인원수는 날 마다 일정하지 않았고, 많은 날엔 22인, 적은 날엔 17인의 지약아에게 식미가 지급되었다고 생각 된다. 48) (1면) (2면) :`지약아식미기a는 日別로 의도적으로 띄어쓰기하여 단락을 구분하였다. 제1면 의 하단에 三日 이라는 기록이 있고, 제2면에서 五日 六日 七日 기록이 연속되고 있기 때문에, 1면 하단의 파손부분에 四日 에 관한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의거한다면, 목간의 원래 길이는 60~70cm 정도였고, 현재 그 2/3정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몇 月 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 목간을 기초자료로 하여 그 달치의 전체 장부가 새롭게 작성되었다고 추정된다.

402 802 49) : 3면 첫 글자의 좌변은 분명 食 의 상단부 획이 일부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이병호, 2007,`부여 능산리 출토 목간의 성격, 한국고대목간과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문화교류 한국 목간학회 제1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 그런데 그 우변에 또 다른 묵흔이 더 남아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 역시 食의 상단부 획처럼 보인다. 이러한 묵흔의 상태로 볼 때, 3면 첫 글자는 時差를 달리해 같은 자리에 중첩적으로 여러 번 서사되었던 食 의 묵흔이 분명하다. 따 라서 이 목간에는 매우 여러 번 기존 묵서를 깎아내고, 또 다시 書寫하는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루 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면목간의 상단부 마구리 부분이 그 아래보다 두께가 훨씬 더 두꺼운 것도, 그 아래 부분에 쓰여 있던 기존 묵서를 여러 차례 깎아내었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닌가 생 각된다. 결국 이 사면목간은 백제에서 최종 장부를 정리하기에 앞서 사면목간을 중간 정리용 메 모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또 그러한 메모의 기능이 다한 뒤, 예를 들어 최종 장부에 메모를 옮 겨 정리한 뒤에는, 기존의 묵서를 깎아내고 다시 또 다른 내용의 중간 정리용 메모장으로 여러 차 례 재활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윤선태, 2007,`백제의 문서행정과 목간, 한국고대사연 구 48). 50) 次와 牟氏 : 道使 뒤의 次 나 彈耶方 다음의 牟氏 등은`癸酉銘阿彌陀三尊佛碑像(673)a과 `癸酉銘三尊千佛碑像(673)a에 등장하는 牟氏 彌次 身次 上次 등의 百濟遺民들과 이름이 같 거나, 인명어미가 동일하다는 점에서(尹善泰, 2005,`新羅 中代末~下代初의 地方社會와 佛敎信 仰結社, 新羅文化 26, 125~127쪽), 모두 인명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道使 復 도 직함과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추론되며, 小吏 猪耳 도 직함과 인명으로 여겨진다. 51) (小)吏 : 이 글자는 목간에서 두 글자가 아니라 좌우로 붙어 한 글자처럼 되어있다. 이에 대해 백 제의 造字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244쪽), 이와 는 달리 削刀로 깎아낸 글자와 그 위에 새롭게 쓴 글자가 중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새롭게 발표 되었다(이병호, 2007,`부여 능산리 출토 목간의 성격a). 특히 제3면의 첫 번째 글자의 일부 획이 食 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小升 의 小 와 같은 글자가 삭도로 깎인 후에도 묵흔이 남게 된 것 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小)吏 로 번역하였다. 52) 猪耳 : 이 猪耳에 기초하여 6세기 백제인들이 신라보다 앞서 한자의 훈과 음을 빌려 우리말을 기 록하는 釋讀表記法을 개발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小吏의 이름인 猪耳 의 耳 를 말음표 기로 이해하고, 猪耳 가 도치 로 釋讀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金永旭, 2007, 古代 韓國木簡에 보이는 釋讀表記에 대하여, 한국고대목간과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문화교류 한국 목간학회 제1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 53) 그 몸이 같다 : 其身者如黑也 다음에 의도적인 띄어쓰기가 있어, 앞 뒤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종지부의 성격을 지닌 띄어쓰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언어학자 이누카이 다 카시가 신라 어순으로 한자를 나열한`임신서기석a의 분석을 통해 이미 지적한 바 있다(犬飼隆, 2006,`日本語を文字で書く, 列島の古代史(ひと もの こと)-言語と文字-, 岩波書店, 40 쪽). 따라서 이 백제 사면목간의 문장 역시 한문이 아니라, 한자를 빌어 백제 어순으로 표현한 것 이라고 생각된다. 또 백제의 이러한 문자표기법이 신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木 簡, 彈耶方의54) 牟氏와 牟, (그리고) 803 耶(지역의 누구는 어떠어떠하다).55) (4면) 또 十二石, 또 十二石, 또 十二石, 十二石, 또 十二石, 또 十二石, 또 十二石.56) 54) 彈耶方 : 탄야방의 方 은 백제에서 지방행정단위로 기능했던 五方制의 方 을 떠올리게 한다. 이 경우 탄야방은 지명이고 부기된 牟氏 등은 그곳에 籍을 둔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5방제 는 백제 전역을 동 서 남 북 중으로 나눈 광역의 행정구역이라는 점에서 탄야방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와 관련하여 欽明天皇 13년(552)에, 백제가 漢城과 平壤을 포기하고, 신라가 한성 에 入居하였는데, 지금 신라의 牛頭方과 尼彌方이다. 라고 되어 있는 日本書紀 의 기사가 주목 된다. 물론 이 기사에는 우두방 과 니미방 이 신라의 지명으로 되어 있지만, 신라에서는 方制 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위 목간의 탄야방 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두 방 과 니미방 은 신라 자체에서 命名한 지명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우두방과 니미방을 이때 신라 가 점령했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의거한다면, 백제에서는 6세 기 중반에 광역행정구획인 5방제 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方 이라는 지방행정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위 니혼쇼기 의 기사를 바탕으로 백제 방제의 시원을 5세기말 단 계로 소급한 견해가 학계에 제기되어 있는데(金英心, 1997,`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a,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87~88쪽), 능산리 사면목간의 발견으로 그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55) (3면) : 1~2면은 서두에 장부명칭이 있고,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1~2면은 이 사면목간을 메모장 으로 사용했던 관인의 최후 메모라고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3면은 장부명칭이 없다는 점에서, 애초 3면의 앞에 3면 메모의 장부명칭이 있었고, 그 부분이 현존 1~2면의 묵서로 인해 깎여져 나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경우 1면 支 앞에 형태의 묵흔도(이병호, 2007,`부여 능산 리 출토 목간의 성격a), 현존 3면과 연결되는 묵흔일 수 있다. 56) (4면) : 4면은 나머지 1~3면과 서사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고, 又十二石 이라는 간단한 문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1~3면을 기록한 후 이 목간을 폐기하기 전에, 누군가가 사 용하지 않은 4면 을 습서용, 즉 글자 연습용으로 재활용한 뒤, 폐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03 804 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扶餘 宮南池 出土 木簡)57) `西ア後巷a墨書木簡58) 59) 판독안 (전면) 西十丁 ア夷 (후면) 西ア後巷 巳達巳斯丁 依活 丁 歸人中口四 小口二 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 57) 扶餘 宮南池 出土 木簡 : 부여 궁남지 유적 (사적 제135호)은 부여읍 남쪽의 동남리 117번지 일 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기의 宮苑池 유적이다. 百濟本紀 武王 35년(634)에 궁의 남 쪽에 연못, 즉 宮南池를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어, 이 명칭을 따와 이 연못의 이름으로 삼았다. 궁남지의 동쪽 일대는 花枝山을 배경으로 건설된 사비시대의 別宮址로 전해지고 있다. 인근에 대 리석을 八角形으로 짜 올린 御井이라 불리는 유구나 백제의 기와편 礎石 등이 남아 있다. 따라 서 현 궁남지는 화지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백제 별궁지의 연못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1990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모두 9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굴 을 통해 궁남지에서는 묵서있는 목간 3점이 출토되었다. 주로 인공수로와 목조저수조에 퇴적된 개흙층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목간 상단에 구멍이 뚫린 부찰형 목간에는 백제 사비도성의 행정구 역인 五部五巷制 丁中制 에 입각한 연령등급제, 歸人 部夷 등과 같은 신분제, 邁羅城 등의 지방제도, 水田과 토지단위 등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있다. 그동안 백제율령은 자료부족으로 연 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으나, 이 목간의 발견으로 인해 백제율령의 구체적인 내용과 제도적 연원 을 추적하는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궁남지에서는 사면목간에 文 과 也 라는 글자를 여 러 번 쓴 습서용목간 도 발견되었다. 58)`西ア後巷a墨書木簡 : 이 목간은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宮苑) 유적인 궁남지에서 백제시대의 수 로 및 목조시설물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1995년에 출토되었다. 목간의 가운데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구멍으로 인해 묵서가 훼손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미리 목간에 구멍을 뚫어놓고 묵서한 것으로 추론된다. 묵서내용으로 볼 때 이 구멍은 동일한 형태의 일련 목간을 편철하기 위해 뚫은 것으로 이해된다. 목간의 제작연대는 목간에 기록된 丁中制 의 연령등급제로 볼 때 7세기라고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173쪽). 이 목간은 후면에 사비도성내 행정구역 명칭인 西ア後巷 이 기록되어 있어 일찍부터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최맹식 김용민, 1995,`부여궁남지내부발굴조사개보, 한국상고사학보 20 ; 박현숙, 1996,`궁남지출 토 백제목간과 왕도오부제, 한국사연구 92). 59) 판독안 : 이 목간의 묵서는 발굴보고서에서 대부분 정확히 판독하였지만(이용현, 1999,`부여 궁 남지 출토 목간의 연대와 성격, 궁남지발굴조사보고서 ), 전면의 두 번째 글자만은 十 으로 정 정하였다. 木 簡 805 역주 (전면)60) 西(部戶籍에서 발췌한 것 중) 10번째61) (목간). 丁과 部夷62) (후면)63) 西部後巷(에 사는)64) 巳達巳斯는 丁이며, 依活 도 丁임. (이들의 신분은) 歸人으로65) [가호 내에] 中口는 4명, 小口는 2명임.66) 60) (전면) : 전면의 묵서를 西十, 丁, ア夷 로 끊어 읽으면, 후면의 묵서내용와 서로 조응하고 있다 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전면의 西 는 후면의 西部, 전면의 丁 은 후면의 丁 2인, 전면의 部夷 는 이를 部에 거주하는 夷 로 해석할 수 있다면, 후면의 歸人, 즉 歸化한 夷人 에 조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용현, 1999,`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의 연대와 성격a, 334~336쪽). 따라서 전면의 묵서는 후면의 묵서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표지라고 생각된다. 61) 西 10번째 : 궁남지목간은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점에서 임시적인 메모라기보다는 이러한 형식의 여러 목간들을 철하여 그것만으로 새로운 장부를 구성하기 위해 제작하였을 가능 성이 매우 높다. 이 경우 十 은 그러한 문서목간들의 순서와 관련된 일련번호로 이해된다. 이에 목간 전면의 西十 은 西(部) 호적에서 발췌된 十 번째 목간을 지칭하는 간략한 표현으로 해석 하였다. 두루마리 형식의 종이문서는 전체 내용을 집적해놓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필요한 부분만 을 검색해보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마치 녹음테이프에서 필요한 부분을 골라 듣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이로 인해 고대일본에서도 종이문서의 발췌용으로 목간이 널리 활용되었다(東 野治之, 1983, 日本古代木簡の硏究, 書房, 7쪽). 62) 部夷 : 唐令의 경우 歸化人은 호적에 일차적으로 귀화인 신분으로 등재된 뒤, 給復期間(면세기 간)이 지난 뒤라야 公民이 된다. 그 이전까지는 어디까지나 夷人이었다(石見淸裕, 1998, 唐の北 方問題と國際秩序, 汲古書院, 135쪽). 그런데 이 궁남지목간에서도 歸人 을 部夷 즉 도성의 部에 거주하는 夷人으로 표현하고 있어, 唐令의 조문과 조응하고 있다. 당시 백제에 당의 정중제 와 귀화인제도가 수용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3) (후면) : 이 목간의 후면에는 西部後巷에 사는 巳達巳斯, 依活 등 丁 2명과 그 외 中口 4명, 小口 2명이 집계되어 있다. 丁 中 小의 연령등급제를 염두에 둔다면, 이들 8명은 단일 한 戶를 구성한 사람들로 생각되며, 歸人은 이들 전체에 해당되는 신분표시라고 생각된다. 한편 中口 4인과 小口 2인 등 6인만을 歸人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용현, 1999,`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의 연대와 성격a, 334~336쪽). 64) 西部後巷 : 중국측 자료에 보이는 백제 都城의 5부 5항제가 이 목간을 통해 사실로 증명되었다. 65) 歸人 : 귀인은 蕃夷에서 中華로 歸化한 사람, 즉 歸化人 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된 백제의 어휘였 다고 생각된다. 66) 丁 中 小 : 중국 晋武帝의 泰始令 에서 정한 丁 次丁制의 연령등급제는 5호16국시대와 남북 조시대에 대체로 유지되다가 西魏를 시작으로 隋唐 시대를 경과하면서 丁 위의 연령에 설정되었 던 次丁은 사라지고 丁과 그 아래의 (次丁에게만 수취를 부과하는 제도로 바뀌게 된다. 이때 정

404 806 木 簡 邁羅城의67) 法利源(에 소재한) 水田 5形(을 경작한다). `文也a墨書木簡68) 十 二月十一月兵 記 판독안 역주 (1면) 文 文 文 文 文 文 文 (2면) 中方向 807 文 文也 中方으로 간 [것들을 정리한 장부].72) 十(一月)73) 二月에서 十一月까지 兵(器)를 [分] 한 記(錄簿)74) (3면) (4면) 부여 관북리 출토 목간(扶餘 官北里 出土 木簡)69) `中方a墨書木簡70) 판독안71) 아래의 차정은 연령등급 명칭이 中男 으로 바뀌는데, 이를 앞시대의 丁 次丁制와 구분하여 丁 中制라고 부른다(高敏, 1987,`魏晋南北朝 役制度雜攷, 魏晋南北朝社會經濟史探討, 人民出 版社, 339쪽). 이 목간에 기록된 당시 백제의 연령등급제는 명확히 丁中制 에 해당되며, 이는 신 라와 달리 백제가 이미 7세기에 중국의 정중제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67) 邁羅城 : 매라성은 사비도성에 설치된 도독부 소속 13현 중의 하나이고, 사비도성의 서부후항에 거주한 이들이 매라성의 토지를 경작하였다는 점에서, 매라성은 사비도성 인근에 위치해있었다 고 생각된다. 68)`文也a墨書木簡 : 2000년도 궁남지 북편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으로, 百濟史 資料原文集(Ⅰ)-韓國篇- 의 목간자료(325~331쪽)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 목간은 단면 사 각형으로 약간 휘어있으며 아래 부분이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목간의 윗부분은 파손되었 다. 네 면에 모두 글자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두 면에서 보다 또렷하다. 文 也 등을 반복 적으로 기록한 습서목간이라고 생각된다(김재홍, 2001, 부여 궁남지유적 출토 목간과 그 의의, 궁남지Ⅱ,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432~433쪽). 69) 扶餘 官北里 出土 木簡 : 부여 관북리 유적 (사적 제428호)은 부소산 남록 끝자락에 위치하며, 泗批時代의 王宮址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7차에 걸쳐 충남대학교 박 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에는 2001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립부여문화재 연구소에서 연차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유적에서는 백제시대의 정면 7칸, 측면 4 칸의 대규모 건물지, 蓮池, 도로시설, 하수도, 築臺 등을 비롯하여, 工房시설, 竪穴遺構, 곡물이나 과일 등을 저장했던 창고시설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구들은 이 유적이 왕궁의 부속시설이 있었던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관북리 목간은 정교한 護岸石築을 갖춘 蓮池 에서 모두 출토되었다. 이 연지의 규모는 동서 10m, 남북 6.2m, 깊이 0.75~1.15m이며, 내부의 퇴적 층은 크게 하부의 황갈색토층과 흑회색점질토층, 그리고 상부의 흑갈색토층으로 구성되어 있었 다. 연지 내부에 퇴적된 세 토층 모두에서 백제목간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상부의 두 층에서는 목 간뿐만 아니라 다량의 백제토기와 기와편,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자(尺), 목제인형다리, 바구니 등 다른 有機遺物도 상당량 수습되었다(忠南大博物館, 1985, 扶餘官北里百濟遺蹟發掘報告(1), 9~10쪽). 관북리 출토 목간은 형태나 묵서내용으로 볼 때, 문서표지용 꼬리표목간이나 왕궁의 출 입증명을 위해 휴대하던 符信用 목간으로 이해된다. 70)`中方a墨書木簡 : 이 목간은 百濟史資料原文集(Ⅰ)-韓國篇-, 331쪽에 `中 a墨書銘木簡 으 로 소개되어 있지만, 실제의 묵서명문은 中方 이기 때문에 題名을 수정하였다. 이 목간은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충남대 발굴조사 때 남겨둔 蓮池 내의 발굴용 둑을 해체조사하면서 가장 늦게 발굴한 것으로(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3, 2003年報, 35~36쪽), 이때 백제 陶硯도 함 께 공반 출토되었다. 이 목간은 두께가 2m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데, 아쉽게도 하단부가 파손되었다. 이 목간은 목간 상단 모서리의 모를 죽여 반원형의 弧를 공들 여 만들고,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구멍 한쪽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목간의 형태적 특징과 묵서내 용으로 볼 때 문서표지용 꼬리표목간으로 추정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 기, 167~172쪽). 71) 판독안 : 中方向 은 大字로 쓰여 있고, 그 아래에 2행의 割註形式으로 十 의 細字 附記 가 있는데, 이 細字의 부기가 끝나지 않아 그 뒷면으로 이어져 細字로 다시 二月十一月兵 記 가 묵서되었다고 추정된다. 72) 中方으로 간 (것들을 정리한 장부) : 大字로 쓴 中方向 은 細字로 부기된 장부들을 포괄, 대표 하는 성격을 지닌 어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병여기 등의 장부를 작성한 주체 내지는 장부에 기 록된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이 경우 中方 은 백제의 광역행정단위인 5방의 하나로 볼 여지가 충 분하다. 73) 十(一月) : 2행의 할주형식으로 된 細字의 첫 글자는 十 이 분명하다. 十 아래는 一 또는 二 일 가능성이 있고, 이를 전면의 十一月 과 조응시켜본다면, 후면의 十 이하의 내용은 장부 를 최종 정리한 월 일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겠다. 74) 二月에서 記(錄簿) : 二月十一月 은 2월에서 11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병여기 장부를

405 808 木 簡 ` 夷a墨書木簡75) 판독안 809 익산 미륵사지 출토 목간(益山 彌勒寺址 出土 木簡)79) 판독안 76) 夷 [烙印] (1면) 央(光?)以山五月二日 (2면) 新台 善 역주 夷77)(소속 관인의 궁궐) [출입증명] 78) [信符 발급처] 伽 (3면) (4면) 毛 長 모두 정리해놓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앞서 검토한 능산리 사면목간의 支藥兒食米記 처럼 이 목간에도 장부를 記 로 표현하고 있는 공통점이 확인된다. 75)` 夷a墨書木簡 : 이 목간은 2001년 이후 부문연(扶文硏)에서 연지의 서쪽편을 새롭게 발굴할 때 출토되었는데(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2, 2002年報, 82~90쪽), 百濟史資料原文集 (Ⅰ)-韓國篇- 의 목간자료(325~331쪽)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 목간은 파손되지 않은 완형 으로 크기는 cm이다. 상단부는 타원형이고, 상단부 중앙에 부찰임을 알 수 있는 구멍이 있다. 하단부에도 약간 모를 죽였다. 목간의 형태와 낙인, 그리고 목간의 출토지 등에 주 목할 때, 이 관북리 목간은 사비왕궁에서 夷 라는 관청에 궁궐출입용으로 나누어주었던 信符 였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信符가 매년 바뀌었듯이, 이 백제의 信符도 용도가 폐기된 뒤 연지 에 버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208쪽). 76) 烙印 : 목간의 전면에는 상단에 꽉 차게 두 글자가 大字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아래 하단에는 묵 서가 아닌 특별한 문양(또는 글자)의 烙印 이 찍혀 있다. 77) 夷 : 夷는 夷道行軍總管 등 백제를 침공한 羅唐聯合軍의 軍團名稱 속에 보이며, 또 就利 山會盟 후 熊津都督인 夫餘隆이 관할했던, 都督府 하의 13개현 중 첫머리에 기록된 夷縣 과 神丘縣 이라는 지명들 속에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제왕권은 사비도성의 동서에 각각 동쪽과 서쪽의 끝을 상징하는 夷와 神丘라는 지명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이를 통해 사비도성 을 천하를 통섭하는 세계의 중심공간으로 표상하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당은 이러한 성격의 신구성과 우이성을 백제침공로의 군단명칭으로 삼아, 이에 대한 점령이 곧 백제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라는 이미지 효과를 노렸다고 볼 수 있다. 舊唐書 百濟傳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 제왕이 거처한 동서의 兩城 이 바로 이 우이성과 신구성이 아닐까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 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209~212쪽). 78) 夷 (信符 발급처) : 조선시대에는 한성부나 경기감영 등 외부 여러 관청 소속 관인들의 원 할한 궁궐출입을 위해 중앙에서 만들어 배포했던 符信用牌札인 信符 에 낙인을 찍었다. 이 궁궐 출입용 信符의 모양은 네모난 것, 둥근 것 등 다양하며 매년 바꾸었다. 궁궐의 入直 당상관이 매 년 통상적인 定數에 의하여 직접 감독하여 낙인한 후 궁 밖의 각 관청에 나누어 주었다. 크기는 3 윤선태(동국대학교) 촌 내지 4촌 정도였다. 이 信符의 전면에는 篆字로 信符 라는 글자와 그 해의 干支 를 낙인하 며, 후면에는 관청이름 을 새겼다( 大典會通 卷4 兵典 符信 ; 增補文獻備考 卷112 兵考4 符 信). 이러한 낙인이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출입용 信符의 사례로 볼 때, 夷 라는 지명 아래에 烙印 을 찍은 관북리 목간도 그와 동일한 용도로 사용된 궁궐출입을 위한 부신용 목간이 아닐까 생각된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208쪽). 79) 益山 彌勒寺址 出土 木簡 : 이 목간은 미륵사지 서연못지 남측 호안 외부의 뻘층 상층에서 조사한 인골편과 함께 출토되었다. 목간의 길이는 17.5cm이고, 단면 4각형으로 각면의 폭은 대체로 3.8~4.6cm 정도이다. 목간의 상 하단이 모두 파손되었다. 수종은 소나무이다(文化財管理局 文 化財硏究所, 1989, 彌勒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6, 미륵사 유적발굴조사보고서Ⅱ ). 발굴보고서에서는 목간의 출토 층위를 상세히 소개하지 않아, 신라목간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06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More information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More information

한국사 문제1급

한국사 문제1급 1 2. 1. 3. 2 4. 5. 6. 7. 8. 3 9. 10. 11. 12. 4 13. 다음 중에서 고려 시대 문화재를 모두 고른 것은? [2점] 15. 다음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는 제도 운영, 국왕 및 왕실 구성원 명칭, 국가 의례에서 실질적인 황제국을 지 향하였다. ①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More information

¼øÃ¢Áö¿ª°úÇÐÀÚ¿ø

¼øÃ¢Áö¿ª°úÇÐÀÚ¿ø 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More information

나하나로 5호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More information

¹ßÇ¥¿äÁö229-286

¹ßÇ¥¿äÁö229-286 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More information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More information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More information

01¸é¼öÁ¤

01¸é¼öÁ¤ 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More information

º´¹«Ã»Ã¥-»ç³ªÀÌ·Î

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More information

1. 2. 3. 4. 5.

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More information

³»Áö_10-6

³»Áö_10-6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More information

<5BB0EDB3ADB5B55D32303131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28322920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3031292D3135B9AEC7D72E687770>

<5BB0EDB3ADB5B55D32303131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28322920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3031292D3135B9AEC7D72E687770> 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More information

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More information

0000³»ÁöÀμâ

0000³»ÁöÀμâ Autumn 2005 No.53 AUTUMN 2005 vol.53 14 28 06 22 우리고장의 역사기행 어진 곳에 있다. 위폐는 국사공배선생(國師公裵先 生) 으로 되어 있으며 현판 역시 려조(麗朝)라고 하 여야 될 것을 라조(羅朝)라고 표기되어 있다. (려조 는 고려를 나타내고, 라조는 신라를

More information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More information

- 2 -

- 2 - -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More information

152*220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More information

11+12¿ùÈ£-ÃÖÁ¾

11+12¿ùÈ£-ÃÖÁ¾ 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2007:11+12 2007:11+12 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Theme Contents 04 Biz & Tech 14 People & Tech 30 Fun & Tech 44 06 2007 : 11+12 07 08 2007 : 11+12

More information

ITFGc03ÖÁ¾š

ITFGc03ÖÁ¾š 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More information

*074-081pb61۲õðÀÚÀ̳ʸ

*074-081pb61۲õðÀÚÀ̳ʸ 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More information

단양군지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More information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More information

1362È£ 1¸é

1362È£ 1¸é www.ex-police.or.kr 2 3 4 5 6 7 시도 경우회 소식 2008年 4月 10日 木曜日 제1362호 전국 지역회 총회 일제 개최 전남영광 경우회 경북구미 경우회 서울양천 경우회 경남마산중부 경우회 경북예천 경우회 서울동대문 경우회 충남연기 경우회 충남예산 경우회 충남홍성 경우회 대전둔산 경우회 충북제천 경우회 서울수서 경우회 부산 참전경찰회(부산진)

More information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More information

ÃѼŁ1-ÃÖÁ¾Ãâ·Â¿ë2

ÃѼŁ1-ÃÖÁ¾Ãâ·Â¿ë2 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More information

041~084 ¹®È�Çö»óÀбâ

041~084 ¹®È�Çö»óÀбâ 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More information

¹é¹üȸº¸ 24È£ Ãâ·Â

¹é¹üȸº¸ 24È£ Ãâ·Â 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More information

(중등용1)1~27

(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More information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VOL.13 No.4 2011 08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CONTENTS XXXXXX XXXXXX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3 XXXXXXXXXXXXXXX XXXXXXXXXXXXXX 4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5 6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More information

성인지통계

성인지통계 2015 광주 성인지 통계 브리프 - 안전 및 환경 Safety and Environment - 광주여성 사회안전에 대한 불안감 2012년 46.8% 2014년 59.1% 전반적 사회안전도 는 여성과 남성 모두 전국 최하위 사회안전에 대한 인식 - 2014년 광주여성의 사회안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범죄위험 으로부터 불안하 다고 인식하는 비율이 76.2%로

More information

(012~031)223교과(교)2-1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More information

....pdf..

....pdf.. 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More information

178È£pdf

178È£pdf 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More information

741034.hwp

741034.hwp 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More information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2005.6.9 5: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개 지역지식재산센터 를 통해 발명가와 중소기업들에게 기술개발에서 선진국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More information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at the factors which influence the apartment price are

More information

문화재이야기part2

문화재이야기part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More information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More information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More information

DocHdl2OnPREPRESStmpTarget

DocHdl2OnPREPRESStmpTarget 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More information

소식지수정본-1

소식지수정본-1 2010. 7 통권2호 2 CONTENTS Korea Oceanographic & Hydrographic Association 2010. 7 2010년 한마음 워크숍 개최 원장님께서 손수 명찰을 달아주시면서 직원들과 더욱 친숙하게~~ 워크숍 시작! 친근하고 정감있는 말씀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격려하여 주시는 원장님... 제12차 SNPWG 회의에 참석 _ 전자항해서지

More information

골성의위치는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지역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따르면, 고기( 古記 ) 를인용하면서주몽이나라를세운졸본지역이 흘승골성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따라서중국 23사 ( 史 ) 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에서위사 ( 僞史 ) 와진사

골성의위치는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지역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따르면, 고기( 古記 ) 를인용하면서주몽이나라를세운졸본지역이 흘승골성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따라서중국 23사 ( 史 ) 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에서위사 ( 僞史 ) 와진사 천제 ( 天帝 ) 해모수의흘승골성 ( 訖升骨城 ) 에 관한연구 김진경 국립부경대학교겸임교수 차례 I. 들어가는글 II. 그간의선행연구의문제점 III. 위사 ( 僞史 ) 와진사 ( 眞史 ) 의분별 IV. 고대지명의올바른위치 1. 부여성 2. 졸본부여 ( 고구려 ) 3. 요 ( 遼 ) 남경 ( 南京, 연경 ) 과동경 ( 東京, 고구려요동성 ) 4. 흘승골성 [

More information

화보 끝없는,, 끝나지 끝나지 않는 않는 즐거움 끝없는 얼음벌판 인제빙어축제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 지류와 내린천의 관문인 소양호, 눈 덮인 내설악의 환상적인 경관을 배경으로 은빛 빙어를 주제로 펼쳐 지는 축제가 있다. 바로 인제빙어축제이다. 인제빙어축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 민국 대표축제이다. 10회 축제기간 동안 방문객 100만 명 돌파(2007년 기준,

More information

쌍백합23호3

쌍백합23호3 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More information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GM작물실용화사업단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GM작물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김욱 박사 1. 조사목적 GM 작물 관련 인식조사는 사회과학자들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GM 작물 관련 인식 추이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조사설계 2.1.

More information

지발홍보책_도비라목차_0125

지발홍보책_도비라목차_0125 남북교류 접경벨트 서 해 안 동 해 안 내륙벨트 신 산 업 벨 트 에 너 지 관 광 벨 트 남해안 선벨트 Contents Part I. 14 Part II. 36 44 50 56 62 68 86 96 104 110 116 122 128 134 144 152 162 168 178 184 190 196 204 Part I. 218 226 234 240 254 266

More information

0001³»Áö

0001³»Áö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9 80 81

More information

지도학발달06-7/8/9장

지도학발달06-7/8/9장 3 1 7 17 95101G 421d 221 2 3 4 1971 34 12 1804 1866 1972 31866 4 1 5 33 1866 3 6 31866 3 1803 1877 1804 1866 2 02333 318 4 51 633 3 6 2022 222 31866 1955 1931 3 916 7 1925 1925 10 9 1862 65 8 7 2 1931

More information

<표 1-2-1> 시군별 성별 외국인 주민등록인구 (2009-2010) (단위 : 명, %) 구분 2009년 2010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전국 870,636 384,830 485,806 126 918,

<표 1-2-1> 시군별 성별 외국인 주민등록인구 (2009-2010) (단위 : 명, %) 구분 2009년 2010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전국 870,636 384,830 485,806 126 918, 시군별 성별 총인구 및 성비 (2012-2013) (단위 : 명, %) 구분 2012 2013 한국인(계) 한국인(여) 한국인(남) 성비 한국인(계) 한국인(여) 한국인(남) 성비 전국 50,948,272 25,444,212 25,504,060 100.2 51,141,463 25,553,127 25,588,336 100.1 경상북도 2,698,353

More information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More information

03 ¸ñÂ÷

03 ¸ñÂ÷ 양 희은 강 석우의 커버스토리 인기코너 남자는 왜 여자는 왜 를 이끌어 가고 있는 김용석, 오숙희 씨. 2007 06 I 여성시대가 흐르는 곳 I 04 >>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의 소순임 씨를 찾아서 I 창 가 스 튜 디 오 I 08 >> 여성시대의 남자 김용석, 여성시대의 여자 오숙희 I 편 지 I 14 >> 아이들의 용돈 외 I 여성시대 가족을

More information

2003report250-12.hwp

2003report250-12.hwp 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More information

141018_m

141018_m 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More information

ÀÚ¿øºÀ»ç-2010°¡À»°Ü¿ï-3

ÀÚ¿øºÀ»ç-2010°¡À»°Ü¿ï-3 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More information

¿¬±¸ÃѼ�9±ÇÃÖÁ¾

¿¬±¸ÃѼ�9±ÇÃÖÁ¾ 13 25 25 51 70 88 88 102 123 132 141 141 170 197 197 206 218 234 241 241 250 253 257 258 269 279 281 293 314 339 339 345 359 369 376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5 26 27 28 29 30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More information

#7단원 1(252~269)교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More information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More information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More information

ad-200400012.hwp

ad-200400012.hwp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연구요약 표 주제 및 연도별 여성유권자 연구 현황 표 출마한 여성후보 인지시기 투표후보여성

More information

?151) [2점] 으로 옳은 것은 옛날에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삼위 태백 니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만 하므로 [弘益人間],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 다스리게 하였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령스러운 박

?151) [2점] 으로 옳은 것은 옛날에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삼위 태백 니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만 하므로 [弘益人間],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 다스리게 하였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령스러운 박 ① ② ③ ④ ⑤ 149. (가) (다)에 들어갈 구절과 그에 대한 해석이 옳게 짝지어진 것 은?149) [3점](359) 고조선에는 법으로 금하는 여덟 가지 항목이 있었 사람을 죽인 자는 (가).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나). 도둑질한 자는 (다). 비록 용서를 받아도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여 결혼할 상대를 구하기 어렵 한서 147. 다음 수업

More information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으로 조 각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빙하기가 끝나 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 시기에는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하고, 이전보다 작은 잔석기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으로 조 각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빙하기가 끝나 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 시기에는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하고, 이전보다 작은 잔석기를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 선사 문화의 발전 출제 포인트 핵심 정리 구석기 시대의 주요 유적지(연천 전곡리)를 알아두자. 신석기 시대의 주요 유물, 특히 토기를 청동기 시대와 구분하여 알아두자.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구분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도구 경제 활동 뗀석기, 뼈도구 사냥, 채집, 고기잡이 간석기(돌보습, 돌괭이, 돌삽,

More information

하늘사랑 03월할거

하늘사랑 03월할거 WORLD BEST 365 _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03 하늘사랑 www.kma.go.kr Vol.345 2010. March 하늘사랑 은 기상청 소식을 전하는 월간 정책지입니다. 하늘사랑 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 홈페이지(www.kma.go.kr)의 지식과 소통 간행물 하늘사랑 클릭! 기상이변의 예측과

More information

- I - - II -

- I - - II - - I - - II - PAGE - III - - IV - - V - - VI - - 1 - ~ ~ - 2 - - 3 - - 4 - - 5 - for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δ - 18 - - 19 - - 20 - - 21 - - 22 -

More information

HWP Document

HWP Document key point 제2편 선사시대와 국가의 형성 19 01 + 출제유형 및 핵심 포인트 역사 상황 및 쟁점의 인식 (가)에 들어갈 자료로 적절한 것은? [3점] ① ④ ② ③ ⑤ 제시된 자료는 선사 시대 문화 축제에 대한 포스터이다. 선사 시대 의 유적지와 유물을 연결하는 문제이다. 경기 연천 전곡리에서는 주 먹도끼가 출토되었다. ① (X) 독무덤은 시신,

More information

untitled

untitled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2) 2호 주거지 주거지는 해발 58.6m의 조사지역 중앙부 북쪽에 3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는 현 지표층인 흑갈색사질점토층(10YR 2/3)을 제거하자 상면에 소토와 목탄이

More information

<B9CEBCBCC1F828C8AFB0E6B1B3C0B0292E687770>

<B9CEBCBCC1F828C8AFB0E6B1B3C0B0292E687770> iv v vi vii viii ix x 1 2 3 4 5 6 경제적 요구 생산성 경쟁력 고객만족 수익성제고 경제성장 고용증대 외부여건의 변화: 범지구적 환경문제의 심화 국내외 환경규제의 강화 소비자의 의식 변화 환경비용의 증대 환경단체의 압력 환경이미지의 중요성 증대 환경적 요구 자원절약 오염예방 폐기물저감 환경복구 삶의 질 향상 생태계 보전 전통적 경영 경제성과

More information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More information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More information

( )탐스런해설OK

( )탐스런해설OK EBS 01 01 01 01.. 01 01 01 03 04 05 06 07 08 09 10 2 03 카라코람 70 100 산맥톈산 산맥 히말라야 산맥 알타이산맥 고비사막타클라마칸사막 티베트고원 윈구이고원 랴오허강황허강양쯔강 130 150 침엽수림사막, 사막관목대열대우림건조스텝열대낙엽수림고원 70 100 130 온대혼합림 대싱안링 산맥 산맥야블로노비 환 태 평

More information

1220½É¹Ì¾Èâ27È£º»¹®

1220½É¹Ì¾Èâ27È£º»¹® CONTENTS 1220심미안창27호본문 1904.1.29 4:51 페이지3 CTP175아트지 3인3색 문화이야기 광주브랜드 브랜드: 이것은 주문呪文이 아니다 이향준_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연구원, 재단 운영위원 도시 브랜드 는 시민생활의 총체적 이미지에서 힘을 얻는다 도시의 트랜드 -옛길의 향기와 문화, 예술 조덕진_ 무등일보 아트플러스 편집장, 재단

More information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More information

연구노트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More information

%±¹¹®AR

%±¹¹®AR 2004 CONTENTS 03 04 06 14 21 27 34 40 06 07 08 09 10 11 12 13 14 15 16 17 Historical Dictionary of North Korea Auf den Spuren der Ostbarbaren Czech-Korean Dictionary 18 19 Transforming Korean Politics:

More information

(연합뉴스) 마이더스

(연합뉴스) 마이더스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2012. 04 Vol. 98 Cover Story April 2012 _ Vol. 98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www.yonhapmidas.co.kr Contents... 14 16 20 24 28 32 Hot News 36 Cover Story 46 50 54 56 60

More information

기본소득문답2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More information

2015년9월도서관웹용

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More information

표지안 0731

표지안 0731 32 33 특집 Ⅰ 공유도시, 공유경제 _ 도시정부와 공유경제 2. 도시정부는 공유경제의 발전에 있어 주요한 역할 수행 도시정부 자체적인 공유경제 서비스 제공의 대표적인 사례 : 공유 자전거 전세계 공유자전거 지도 Bike Share Map 8) < 서울의 공유 자전거 서비스 > 서울특별시 공공자전거 : 여의도, 상암동 일대에서 운영중 - 2010년

More information

2ÀåÀÛ¾÷

2ÀåÀÛ¾÷ 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More information

2013 국토조사연감 075 전국 대기오염도(SO2) 0.020 0.018 1995년 대기오염도(SO2) (ppm) 0.018 0.016 0.014 0.012 0.010 0.008 0.007 0.006 0.006 2010년 2012년 0.004 0.002 0.000 1

2013 국토조사연감 075 전국 대기오염도(SO2) 0.020 0.018 1995년 대기오염도(SO2) (ppm) 0.018 0.016 0.014 0.012 0.010 0.008 0.007 0.006 0.006 2010년 2012년 0.004 0.002 0.000 1 제1장 국토조사 개요 제2장 주요 국토지표 제3장 주요 통계자료 요약 제4장 부록 074 SECTION 6. 환경과 방재 대기오염도(SO2, 아황산가스) 제 2장 주요 국토지표 지표명 대기오염도(SO2) 개념(산정식) 단 위 대기 중 이산화황의 농도 ppm 제공연도 1990~2012 공간단위 시도, 시군구 자료출처 환경부 대기오염도현황 대기오염물질 중 아황산가스의

More information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More information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More information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84 85 86 87 88 89 1 12 1 1 2 + + + 11=60 9 19 21 + + + 19 17 13 11=60 + 5 7 + 5 + 10 + 8 + 4+ 6 + 3=48 1 2 90 1 13 1 91 2 3 14 1 2 92 4 1 2 15 2 3 4 93 1 5 2 6 1 2 1 16 6 5 94 1 1 22 33 55 1 2 3 4 5 6

More information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1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상현고등학교 2 1 28 유 훈 2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6 24 정 찬 3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8 3 김 헌 4 [1]2018개방실험-학생2기[

More information

**09콘텐츠산업백서_1 2

**09콘텐츠산업백서_1 2 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More information

5권심층-양화1리-1~172

5권심층-양화1리-1~172 526 527 528 529 530 531 532 332 333 332 사갑 제례 음식준비 334 335 333 진설 334 사갑제례 335 음복 8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제사에 참여했던 가족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고인의 부인은 제사에 참여한 이 들에게 제사 음식과 반찬거리(깻잎 등)를 골고루 싸 주었고 마을에 거주하는, 제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More information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4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 등을 수행하여 인니전력 이다. 공사(PLN)를 비롯한 인니

More information

120~151역사지도서3

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More information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2017. 6. 22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구위원송대성박사前 ) 세종연구소소장방효복예 ) 중장前 ) 국방대학교총장남성욱박사고려대행정전문대학원장이원우박사前

More information

071115-2

071115-2 Copyright eyesurfer. All rights reserved.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04면 종합 -9-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내일신문] 17면 산업/무역 - 11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37면 인물 - 16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동아일보]

More information

10월추천dvd

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More information

CONTENTS 2011 SPRG Vol

CONTENTS 2011 SPRG Vol 11-1311153-000111-08 ISSN 1976-5754 2011 SPRG + Vol.14 Tel _ 042.481.6393 Fax _ 042.481.6371 www.archives.go.kr CONTENTS 2011 SPRG Vol.14 7 4 8 16 76 104 112 122 53 58 66 131 130 11 80 77 Column 4 5 Column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