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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년(高麗 仁宗 23) 金富軾(1075~1151) 등이 王命을 받아 新羅 高句麗 百濟 삼국의 역사 를 50권 10책으로 편찬한 기전체 정사이다. 本紀 28권, 年表 3권, 志 9권, 列傳 10권으로 구성되 어 있으며, 百濟本紀는 권23부터 권28까지 총6권이다. 12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간본은 현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 후기 2차로 판각되어 1책만이 남아 전하는 誠庵本이다. 1931년 고전간행회,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영인본은 모두 1512년(中宗 7) 제4차로 판각한 中宗壬申本 (正德本)을 저본으로 하였다. 본 자료는 19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譯註 의 원문편을 대본으로 하여 발췌된 百濟 관련기사를 역주하였다. 권23 百濟本紀 1 始祖溫祚王 百濟1)의 시조는 溫祚王2)인데, 그의 아버지는 鄒牟3)이며 혹은 朱蒙이라고도 한다.4) [주 1) 百濟 : 삼국 중 한 나라로 마한의 한 소국인 伯濟國이 성장하여 발전한 나라. 百濟 라는 국호 이외 에 538년 聖王이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 한때 南夫餘로 고친 적이 있었으며, 그밖에 鷹準 帝王韻 ( 紀 卷下, 後王或號南夫餘 或稱鷹準 )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鷹遊 三國遺事 권3 ( 興法篇 皇龍 寺九層塔)와 같은 명칭으로 이해된다. 응준은 매 와 관련있는 용어로서 백제가 馬韓 지역을 영유 하면서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매 관련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서 이같은 국호를 사용한 것이라 한다(趙法鍾, 1989, 百濟 別稱 鷹準考, 韓國史硏究 66). 한편 중국 사서에서는 伯濟 國 三國志 권30 ( 魏書 東夷傳)이라 하여 馬韓을 구성한 54국의 한 소국의 명칭으로 나오다가 4 세기 이후 宋書 단계부터는 百濟 라는 국호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서기 에는 백제를 구다라(ク ダラ)로 훈독하고 있는데,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대에 해당하는 신공황후기부터 백제라는 국호 가 쓰여지고 있다. 백제라는 국호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백제 건국설화에서 보이는 百姓 樂從 說과 百家濟海 說이 있다. 2) 溫祚王 : 백제의 시조로서 재위기간은 B.C.18 A.D.28년이다. 帝王韻紀 卷下에는 殷祚 로 나 온다. 그의 出系에 대해 즉위년조의 본문에서는 주몽과 졸본왕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 어 있으나, 細注에는 주몽과 졸본인 延陀勃의 딸 召西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禮氏 소생 유리가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내려와서 태자가 되자 형 비 류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B.C.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세웠다. 백 제는 온조왕 원년(B.C.18)에 부여족의 族祖인 東明王의 祠堂을 세워 배알하였는데, 삼국사기 백

8 14 제본기에 의하면 전지왕 2년(406)까지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동명묘에서 배알의식을 거행하여 왕 으로서의 권능을 확인받는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 백제는 왕성을 扶餘族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扶餘를 姓으로 하였는데, 중국과의 대외교섭 시에는 단성으로 餘 씨를 사용하였다. 백제는 중국식 왕호 이외에 고유한 칭호로서 於羅瑕 와 吉支 라 는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는 王姓扶餘氏 號於羅瑕 民呼 爲 吉支 夏言王也 妻號於陸 이라 하여 지배층에서는 於羅瑕 로 불리워졌으며, 일반 백성들은 吉支 라는 또다른 칭호가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백제왕을 コニキ シ: 코니키시 日本書紀 권9 ( 神功紀 46년) 및 コキシ: 코키시 ( 日本書紀 권9 神功紀 46년 및 같은 책 권14 雄略紀 23년)로 부른 예를 찾을 수 있다. コ: 코 와 コニ: 코니 는 같은 표기로서 우리말의 큰(大) 을 音寫한 것인데, 이는 건길지의 건 과 통한다. 그리고 吉支 는 キシ: 키시 와 통하며 吉師 와 같이 貴人이나 왕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李丙燾, 1977, 國譯, 을 유문화사, 351쪽). 한편 於羅瑕에 대해 이를 종래 巫歌에 어라아만수 의 어라아에 해당하는 말이 라고 하는 견해(이병도, 1977, 앞의 책, 351쪽)가 있으나, 於羅瑕의 瑕 는 족장을 의미하는 고구 려나 부여의 加 또는 신라의 干과 계통을 같이 하는 것으로(都守熙, 1994, 백제어연구 Ш, 백제 문화개발연구원, 38 42쪽) 볼 수 있다. 3) 鄒牟 :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다른 이름으로 朱蒙이라고도 하여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 추모라는 표기는 廣開土王陵碑, 牟頭婁墓誌, 신찬성씨록 제3질 右京諸蕃 下 高麗에도 나온 다. 다른 이름으로 鄒蒙 삼국유사 권1 ( 왕력) 中牟 삼국사기 권6 ( 문무왕 10년조 안승의 冊 文) 仲牟 일본서기 권27 ( 천지기 7년) 都慕 속일본기 권40 ( 환무 연력 9년 추7월 신사)로 도 썼다. 중국 사서에는 위서 이후 주몽 으로 표기하였다. 반면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고 구려조의 왕망대 기사에 나오는 고구려 왕 는 漢書 권99 왕망전에 騶 로 되어 있어 추모를 지칭한다. 이 기사는 시기적으로 유리왕대에 해당하는데, 중국측이 전왕대의 사실로 잘못 알고 기 록하였거나(이병도, 1977, 앞의 책, 227쪽), 또는 고구려의 일반적인 왕호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주몽을 東明의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김상기, 1974, 국사상에 나타난 건 국설화의 검토, 동방사논총, 서울대출판부), 중국 사서에는 부여와 고구려 시조를 각각 동명과 주몽으로 구분하여 인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같이 부여 고구려 백제에서 동명이나 주몽에 대한 전설이 공유되어 전해오는 것은 ①동명왕 전설은 원래 부여에 전해오던 것인데 고구려가 이 를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이라는 견해(池內宏, 1951, 高句麗の建國傳說と史上の事實, 滿鮮史硏究上世 1, 吉川弘文館), ②부여 고구려 백제는 같은 夫餘族 계통의 종족으로서 이들 이 각기 분열 이동하면서 원래의 신화를 변형 재생성시켜 갔다고 보는 견해(金哲埈, 1975, 百 濟社會와 그 文化,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등이 있다. 4) 온조는 주몽의 아들 : 고구려 유리왕 즉위를 둘러싼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과 관련하여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집단에게 패배한 비류와 온조집단이 이를 계기로 남하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온 조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사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 시조의 권위를 높이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제적인 부자관계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 몽은] 北扶餘5)에서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6)에 이르렀다. [그 때]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 5) 北扶餘 : B.C.3세기 후반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있었던 국가. 중국측 기록인 論衡 과 三國志 에 인용된 魏略 에는 시조 동명이 북에서부터 이주해 와서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런데 주몽의 출신지를 북부여출자로 본 기록은 5세기대에 쓰여진 광개토왕릉비 와 모두루묘지 이다.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夫餘傳에 의하면 (북)부여의 위치는 서로는 烏桓 鮮卑와 접하 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 결된 것으로 나온다. 부여의 선주문화는 B.C.7~3세기로 비정되는 청동기문화 서단산문화와 관련 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족단이 제2 송화강 중류로 남하하여 길림성을 중심으로 서단산문화를 누리 던 부여 선주민을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세웠는데, 대략 B.C.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중심지인 왕성의 위치는 자치통감 의 기록에 의거하여 전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①현재의 중국 흑룡강성의 農安 長春지역설(池內宏, 1932, 夫餘考, 滿鮮地理歷史硏 究報告 13 ; 日野開三郞, 1946, 扶餘國考, 史淵 34, 1~104쪽) ; 李基白 李基東, 1982, 한 국사강좌 I고대편, 일조각, 75쪽), ②阿勒楚喀 일대설(池內宏, 1951, 扶餘考, 滿鮮史硏究 上 世篇 1에 재수록, 吉川弘文館, 쪽), ③吉林市 지역설(武國勳, 1983, 夫餘王城新探, 黑 龍江文物叢刊 4期 ; 李殿福, 1985, 漢代夫餘文化鄒議, 北方文物 3期 ; 盧泰敦, 1989, 扶餘 의 境域과 그 變遷, 國史館論叢 4) 등이 있다. 최근에는 삼국지 와 후한서 의 기록에 의거하 여 부여는 초기에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松嫩평원 일대로 보는 ③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그 이유 는 동단산 남성자고성을 부여의 중심성으로 보고 길림시 교외에서 발견된 蛟河市의 新街古城址와 福來東古城址를 그 주변의 읍락지역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 후 346년 부여는 백제 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자치통감 기록이 있다. 이때 부여의 왕성에 대 하여 ①현재 農安 부근설(1988, 中國歷史地圖集釋文彙編 東北卷 夫餘, 中央民族學院出版社, 32 쪽 ; 노태돈, 1989, 앞의 글, 35~36쪽), ②西豊縣 城山子山城說(王綿厚, 1990, 東北古代夫餘的興 衰及王城變遷, 遼海文物學刊 2期, 83쪽) 등이 있다. 성산자산성의 경우 한 위 시기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주로 고구려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부여성을 고구려가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주몽의 북부여출자설과는 달리 동부여출자설이 구삼국사 와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북부 여조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동부여는 천제의 아들임을 칭한 解慕漱가 B.C.59년에 해부루를 쫓아내고 동쪽으로 옮겨 세운 나라로 나온다. 그런데 부여가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타격 을 받자 그 지배집단 일부가 북옥저 방면에 피난을 하였다가 3세기 말~4세기 초에 두만강유역에 서 동부여라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런 견해와는 달리 본서 권14 고구려본기 大武神王 5년 조에 나오는 曷思國을 東扶餘로 보는 설(盧重國, 1983, 東扶餘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韓國學論集 10)도 있다. 東扶餘는 高句麗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한 국명이고 반면 길림 방면의 부여는 北扶餘라고 불렀다. 廣開土王陵碑 에 의하면 東夫餘는 鄒牟王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廣開土王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함경남도설(李丙燾, 1976, 夫餘考,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227쪽), ②오늘의 백 두산 부근설(王健群 林東錫 譯, 1985, 廣開土王碑硏究, 역민사), ③두만강 유역설(盧泰敦,

9 16 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 로 삼게 하였다.7)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8)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沸流이며, 둘째 아들은 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 17 에 도착하여 越郡9)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烏干 馬黎 등 열 명의 신하10)와 함께 남쪽으로 갔 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漢山11)에 이르러 負兒嶽12)에 올라가 1989, 앞의 글) 등이 있다.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정립된 시기를 고구려 초기의 왕계 정립과 함께 4세기 후반으로 보고, 반면 동부여출자설은 6세기 중반 이후 양원왕 즉위과정에서 승리한 집권세 력에 의해 제기되어 600년 경 新集 편찬 단계에서 공식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28~52쪽). 이때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동부여출자설로 변개되었 다고 한다. 6) 卒本扶餘 : 주몽을 중심으로 한 부여족의 일파가 卒本지역(현재의 중국 吉林省 桓因지방)에 세운 나라. 삼국유사 권1 紀異篇 고구려조에는 高句麗卽卒本扶餘 라 하여 고구려=졸본부여로 보고 있고, 安鼎福도 주몽이 沸流水에 나라를 세운 후 國號高句麗 亦號卒本扶餘 라 하여 졸본부여를 고구려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東史綱目 1 下 甲申 馬韓). 그러나 본 기사에는 주몽이 졸 본부여로 도망와서 졸본부여의 왕녀와 결혼하였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 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주몽이 난을 피하여 정착한 곳 에 대해 본 기사에는 졸본부여로,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卒本川으로, 三 國遺事 권1 紀異篇 高句麗條에는 卒本州으로, 광개토왕릉비 에는 忽本西城山으로 나온다. 魏 書 권100 열전 고구려전에는 紇升骨城으로 나오는데, 고구려가 처음 이곳에 도읍한 사실을 적은 이래 周書 北史 通典 등이 이를 따르고 있다. 본서와 같이 卒本과 紇升骨城과 卒本을 같은 곳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흘승골성은 북부여가 도읍한 곳으로, 졸본주는 고구려가 도 읍한 곳으로 각각 구분하여 보는 견해(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高句麗)도 있다. 근래에는 흘승골성 은 升紇骨城이 전도된 것이며 졸본은 곧 솔골(卒忽) 또는 승흘골의 異稱이라 하여 음운상의 유사성 을 근거로 양자가 같은 곳이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7, 앞의 책, 217쪽). 졸본의 위치는 현재 의 중국 요령성 渾江(비류수) 상류의 桓因지방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五女山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남아있다. 이 산성은 남북길이 1,000m, 동서길이 300m 가량의 비교적 큰 규모이 다. 또한 부근에는 積石塚 등 고구려의 古墳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이곳이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陳大爲, 1960,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 考古 ). 7) 졸본부여왕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 왕 즉위년조에 細註로 간략히 나온다. 주몽이 졸본부여의 둘째 딸과 결혼한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동해 와서 졸본지역 세력을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공존하다가 이를 흡수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생각 된다. 8) 비류와 온조의 형제관계 :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東明第三子 一云第二子 로 나온다. 삼국유사 에서 제3자라고 한 것은 주몽의 전처의 소생인 孺留(瑠璃)까지를 넣어서 계산한 것이다. 백제의 건 국설화에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혈연상의 형제라기보다는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과 온조를 시조를 하는 집단이 한강하류지역에서 연맹을 형성한 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조형제설화라고 할 수 있다(노중국,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62 63쪽). 9) 越郡 :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越郡을 지명으로 보지 않고 건너편 고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 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1쪽). 10) 10臣 : 온조의 건국을 도왔다는 10臣의 존재에 대하여 ①온조의 가신으로 보는 견해(이종욱, 1977, 백제왕국의 성장, 대구사학 12 13합집, 67쪽), ②온조를 따라온 10개의 친족집단으로 보는 견해(노태돈, 1975, 삼국시대 부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 59쪽), ③위례지역에 선주한 10개 읍락의 토착집단설(노중국, 1988, 앞의 책, 52~53쪽)이 있다. 10신은 백제 건국의 중추적 역할을 한 세력을 말하는데, 온조를 따라온 세력과 선주한 토착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11) 漢山 : 본서 백제본기에 나오는 한산의 위치는 출전 자료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오고 있어 혼란 을 주고 있다. 본 기사에 나오는 한산의 위치는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단행한 온조왕 14 년 정월 이전의 기사로서 서울 삼각산 일대로 비정되는 負兒岳을 포함한 북한산 일대(丁若鏞, 我邦疆域考 3 慰禮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초고왕 26년(371) 백제가 평양성 전투에서 고 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대승을 거둔 직후에 서울을 한산으로 천도한 일이 있어 한산 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다. 한산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백제의 최초 도읍지를 어디로 볼 것이냐에 따라 크게 한강북안설(북한산설)과 한강남안설(남한산성설과 아산 또는 직산설)로 대별 된다. 한강북안설은 삼국유사 기이 2 남부여 전백제조에 인용된 古典記 에서 처음 제기되었는 데, 당시 백제가 팽창하던 시기이므로 대고구려전을 주도하기 위한 북진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북 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는 것이다(이도학, 1992,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 한국상 고사학보 9, 32~33쪽 ; 강인구, 1993, 백제 초기 도성 문제 신고, 한국사연구 81, 15~17쪽 ; 박순발, 2001, 한성백제의 탄생, 서경문화사, 173쪽). 한산 즉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정약용에 의해 제기된 서울 삼각산동록설과 북한산성 일대설(이병도, 1976, 위례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495쪽) 등이 있으나 이를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어서 신뢰성이 없다. 반면 한강 남안설은 고구려의 침공을 염려하여 산성으로 천도하였다고 보았다(이병도, 1976, 앞의 책, 쪽 ; 성주탁, 1983, 한강유역 백제초기 성지연구, 백제연구 14, 132쪽 ; 여호규, 2002,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제와 방어체계, 백제연구 36, 11쪽 등). 한산남안설의 경우 처음에 한 산 이란 명칭이 있다가 후대에 그에 대비하여 북한산 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 하였다(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322쪽). 본서 백제본기에는 371년 漢山移都 기사 이 후부터는 한산 대신에 한성 관련 기사가 등장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 시기부터 백제 도성제

10 18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漢水13)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19 慰禮城(河南慰禮城)15)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十濟16)라 하였 다. 이때가 前漢17) 成帝18) 鴻嘉19) 3년(B.C.18)이었다.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는데, 慰禮城에 돌아와 보니 막혀 있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 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20) 그 후 백성들이 올 때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14)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가 확립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근까지 한산(한성)의 위치를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津 田左右吉, 1913, 百濟慰禮城考, 朝鮮歷史地理 Ⅰ, 南滿洲鐵道株式會社, 43쪽 ; 이병도, 1976, 앞의 책, 503쪽 등)과 송파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 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송파구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신희권, 2003, 백제 한성기 도성제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백제도성의 변 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의 도성은 통칭으로 위례성 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북성 풍납토성과 남성 몽촌토성의 도성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이도학, 1992, 앞의 글, 36~38쪽). 그런데 371년 漢山移都 기사를 군사방어적 성격을 가진 남성(몽촌 토성)으로 옮긴 것으로 이해하고 몽촌토성을 한산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2002, 앞의 글, 14~15쪽). 그리고 이러한 한성의 북성과 남성 도성 구조는 중국 전국시대의 두성인 邯鄲故 城 臨淄故城 燕下都故城과 고구려의 도성체계에서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기섭, 2007, 한성도읍기의 도성과 도시구조,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경문화사, 126~128쪽). 한편 웅진도읍기 동성왕대에 한산성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의 한산성은 한북지역 민호의 사 민으로(문주왕 2년 춘2월) 한때 위례성으로도 불리워졌던 현재 충남 천안시 직산지역( 新增東國 輿地勝覽 권16 稷山縣 建置沿革)으로 비정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12) 負兒嶽 : 현재의 서울 삼각산을 말한다. 조선 영조 21년(1745)에 편찬된 北漢志 山河條 참조. 金正浩, 大東地志 권1 漢城府 山水條에도 三角山 距府北十五里 百濟稱負兒岳 又云橫岳 又云華 山 이라 하여 부아악을 삼각산에 비정하고 있다. 13) 漢水 : 한강으로도 표기된다. 한수의 다른 이름으로는 阿利水( 광개토왕릉비 ), 郁里河(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0년) 등이 있다. 14) 彌鄒忽 : 현재의 仁川을 말한다. 광개토왕릉비 에 고구려가 영락 6년(396)에 백제를 공격하여 공취한 58성 중에 彌鄒城이 이에 해당한다. 본서 권35 잡지 地理 2의 漢州 栗津郡 邵城縣條에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 라 한 기사와 高麗史 권56 志 10 地理 一 楊廣道 仁州條에 仁州本高句麗買召忽 一云彌鄒忽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인천의 文鶴山上에는 沸流城基 城門扉板 沸流井이 남아 있다고 하고(安鼎福, 東史綱目 제1 癸卯 馬韓), 또 文鶴洞에는 彌鄒王陵으로 불리는 유적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鄭永鎬, 1979, 서울지역의 百濟文化, 馬韓百濟文化 3, 87쪽). 15) 한수 남쪽의 慰禮城 : 백제가 한수 이북에서 한수 이남으로 천도한 후의 도읍지로서 河南慰禮城으 로 부른다. 위례성의 명칭 기원에 대해 위례 는 우리 또는 울타리 를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 (丁若鏞, 我邦疆域考 ; 成周鐸, 1984,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 百濟硏究 14), 阿利 水 郁里河의 阿利 郁里가 大 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견해(都守 熙, 1991, 百濟의 國號에 관한 몇 問題, 百濟硏究 22), 왕성 내지는 大城 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왕을 뜻하는 於羅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선, 1982, 한국 고대 국명 지명연 구, 형설출판사, 199쪽) 등이 있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도 성이라는 의미로 두루 사용되었지만 주로 백제의 도성제가 확립되는 371년 이전에 한산이란 명칭 과 함께 혼용되어 나타난다. 이 위례성은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 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都慰禮城 一云蛇川 今稷山 으로,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扶餘 前 百濟條에는 彌鄒忽 仁州 慰禮 今稷山 이라 하여 위례성의 一名이 蛇川임을 전하면서 현재의 충 청남도 천안시 稷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위례성 직산설은 조선후기까지 대체로 받아들여졌으나 丁若鏞은 한강유역설을 주장하면서 이 견해를 부정하였다. 위례성 직산설은 주 11)에서 보듯이 웅진 천도 이후 한성지역 민호를 이곳으로 사민한 사실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5쪽).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과 서울 송파 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주 11) 참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 벽 발굴조사를 통해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 게 되었다(신희권, 2003, 앞의 글). 16) 十濟 :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온조가 나라를 세울 때 10명의 신하가 도왔으므로 나라 이름을 十濟 라고 하였다. 그 후 미추홀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라 왔으므로 百濟로 국명을 고쳤다고 한다. 나라 가 10에서 100으로 커진 사실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후대에 百濟라는 나라 명칭에 부회해 서 만들어진 것으로 국호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백제의 건국세력이 10濟로 표현되듯이 여러 세력 집단의 연합체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 前漢 : 중국 왕조의 하나로 西漢이라고도 한다. 존속 기간은 B.C.202 A.D.8년이다. 高祖 劉邦 이 秦을 멸하고 초패왕 項羽를 패사시킨 다음에 長安에서 제위에 오르고서부터 王莽에게 찬탈되 기까지의 漢을 말한다. 18) 成帝 : 중국 漢나라 제12대 황제. 元帝의 태자. 字는 太孫. 재위기간은 B.C.33 B.C.8년. 19) 鴻嘉 : 前漢 成帝 때의 연호로 B.C.20 A.D.17년까지인데, 홍가 3년은 B.C.18년이다. 20) 비류는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가 위례에 정

11 20 호를 百濟21)로 고쳤다. 그 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22) 扶餘를 21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백제]의 시조는 沸流王24)인데, 그 아버지 優台25) 성씨로 삼았다.23) 는 북부여왕 解扶婁26)의 庶孫이었고, 어머니 召西奴는 卒本 사람 延 勃27)의 딸이었다. 착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각각 미추홀과 위례지역에서 소국을 세운 것이며,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초기에는 비류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는 것은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것을 뜻한다(노중국, 1988, 앞 의 책, 62~65쪽).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에 대해 본 기사에서는 온조왕 즉위년 에 기록하고 있으나, 온조왕대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초창기이므로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한편 본 기사는 후대의 사실을 온조왕대에 소급 부회한 것으로 보고 위례세력 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를 해씨 비류계에서 부여씨 온조계로 왕실이 교체되는 2세기 말의 초고왕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앞의 책, 74 75쪽). 그러나 이 견해는 초기백제 왕계 를 비류계와 온조계로 나누는 구분점이나 개루왕 이전을 해씨로 보는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그 리고 개루왕이 후에 개로왕(근개루왕)과 대응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21)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 백제라는 국호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본 기사에는 百姓樂從 으로 나 오나 隋書 권81 열전 百濟傳에는 百家濟海 因號百濟 라 하여 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는 데서 백 제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것을 전해주고 있다. 이 두 기사는 10濟라는 국호 사용(주 16)을 참조할 것)과 함께 모두 국호에 대한 후대의 덧붙여진 해석이라 할 수 있다. 22) 그 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扶餘에서 같이 나왔다 :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출자가 부여 고구려계 라는 전승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백제 왕실 스스로에 의해 표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 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경쟁관계가 심화됨으로 인해 정치 외교적인 목적이 따라 자신의 출 자를 때로는 부여에, 때로는 고구려에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 운 주몽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자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하지 않고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부여족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의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臣與高句麗源出扶餘 라 한 기사(본 서 권25 백제본기 蓋鹵王 18년조 및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나, 日本書紀 권19 흠명기 14년 조에 성왕의 아들 餘昌(威德王)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에 앞서 今欲早知 與吾可以禮問答者姓 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 率 年二十九矣 라 한 기사, 그리고 538년 백제 성왕이 사비천 도와 함께 국호를 일시적으로 南扶餘로 고친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서울시 송파구 석 촌동과 가락동 일대에 분포하는 적석총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입증해 주는 실물 자료이다. 이처 럼 백제는 직접적으로 고구려에 기원을 두었지만 멀리는 부여에 국가적 기원이 있음을 표방하기 도 하였다. 이는 백제 왕실이 고구려를 의식하여 부여의 정통 적자로서 그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 한 것으로 동명묘 배알 의식을 통해서도 발현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부여 계통임을 입증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중서부지방의 토광묘를 계통적으로 길림의 유수 노하심유적과 남성 자유적 동쪽의 모아산유적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백제의 건국설화 에서 보듯이 그 지배세력의 계통은 단일하지는 않고 여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3) 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 백제 왕실의 성에 대해 본 기사는 부여씨라고 하였는데, 중국과의 대외교 섭에는 단성으로 餘 氏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남부여 전백제조에는 其 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라 하여 解氏설을 전해주고 있다. 부여씨와 해씨가 왕성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해씨는 沸流집단이 칭한 성씨이고, 부여씨는 온조집단이 칭한 성씨인데, 이 두 집단이 연맹장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해씨와 부여씨가 왕성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조집단 이 扶餘氏를 칭하게 된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解氏집단을 대신하여 온조집단이 연맹의 맹주가 되자 자기 집단의 권위를 높이고 扶餘族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노중 국, 1988, 앞의 책, 66 77쪽). 한편 백제의 王姓에는 扶餘氏와 優氏가 있는 것으로 보고 부여씨 는 주몽-온조-초고계의 성씨로, 우씨는 우태-비류-고이계의 성씨로 백제 왕계를 이원적으로 파 악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일지사, 쪽). 24) 시조는 沸流王 : 海東高僧傳 에는 避流 로 나온다. 본 기사에는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여 나 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라고 할 수 있다. 비류 중심의 시조설 화에서 그 조상이 解扶婁로 나오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비류집단의 성은 解氏로 추정된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비류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가 인천의 미추홀에서, 온조는 서울의 한강유역에서 각각 나라를 세운 후 두 집단이 중심이 되어 연맹을 형성 하고 연맹장을 배출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노중국, 1988, 앞의 책, 66~77쪽). 그리고 비류건국 설화가 후대까지 남아 전하게 된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존속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비류세력은 압록강유역에서 주몽으로 대표되는 계루 부세력과 다투던 송양국의 비류국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출자를 渾江[비류수] 유역의 소노부 세 력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백제 왕계에서 비류세력은 주몽-온조계 왕실과 함께 우태-비류-고이 계를 형성하여 優氏를 표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34~137쪽). 25) 優台 : 해부루의 庶孫. 할아버지 해부루의 이름에서 미루어 볼 때 우태의 성은 해씨로 추정된다. 그는 卒本人 延 勃의 딸 召西奴와 결혼하여 沸流와 溫祚를 낳았다고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 이 우태의 실체에 대해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仇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책, 143쪽), 尊長者를 뜻하는 관명이 인명화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于台라는 관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金哲埈, 1975, 高句麗 新羅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 究, 지식산업사) 등이 있다. 백제의 시조로 나오는 온조와 비류가 溫祚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주몽의 아들로, 沸流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 것에 대해 비류를 우태의 아 들로, 온조를 주몽의 아들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 134~143쪽). 한편 본서 권32 잡지 제사 百濟 제사조에는 海東古記 를 인용하면서 始祖優台說도 전하고 있다. 26) 解扶婁 : 동부여를 건국한 왕. 그의 출자에 대해서는 북부여의 시조로서 天帝之子를 자칭한 解慕 漱의 아들이라는 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북부여)도 있고, 壇君과 西河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12 22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 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扶餘에서 23 다. 33) 34) 와 隋書 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北史 용납되지 못하자 前漢 建昭28) 2년(B.C.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東明35)의 후손에 仇台36)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는] 처음에 나라를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37)에 세웠는데, 漢나라 遼東太守 公孫度38)가 나라를 창업하는데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그녀를 총애하고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禮氏29) 아들 孺留30)가 오 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 였다.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그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한낱 혹처럼 답 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 의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浿水31)와 帶水32) 두 강을 건너 彌鄒忽에 이르러 살았 아들이라는 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고구려)도 있다. 원래 북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는 天帝의 계시를 받은 재상 阿蘭弗의 권유에 의해 東海 가의 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三 國遺事 권1 紀異篇 북부여 동부여 및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 참조). 그는 늙도 록 아들이 없다가 鯤淵 부근의 큰 바위 밑에서 金色蝸形의 아이를 얻어 그를 金蛙라 이름을 짓고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동부여 및 본서 권13 동명성왕 즉위년). 27) 延 勃 : 卒本지역 사람으로 졸본지역의 首長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를 주몽이 도망해 왔을 당 시의 卒本扶餘王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6, 앞의 책, 490쪽).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그의 딸 召西奴는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28) 建昭 : 前漢의 제10대 황제인 元帝의 연호. B.C.38 B.C.34년. 건소 2년은 B.C.37년이다. 29) 禮氏 :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부인. 고구려 제2대 王인 琉璃를 낳았다. 자세한 것은 본 서 권13 고구려본기 琉璃明王 즉위년 참조. 30) 孺留(B.C.19 A.D.18) : 주몽과 禮氏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주몽이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도망한 이후에 부여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와서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王이 되었다. 본서에는 琉璃 類利 등으로도 표기되었고,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는 瑠璃 累利 로도 표기하였다. 31) 浿水 : 浿河 또는 浿江이라고도 하는데, 그 위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조선 시기의 패수 에 대해서는 ①淸川江說(李丙燾, 1976, 眞番郡考,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②鴨綠江說(丁若 鏞, 我邦疆域考 浿水考), ③遼西지방의 大凌河說(이지린, 1963, 고조선연구 ) 등이 있다. 삼국 시대의 패수는 高麗史 권58 志 12 지리 3 黃州牧 平州條의 平州本高句麗大谷郡(一云多知忽) 又號東陽 有猪淺(一云浿江)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 川條에 猪灘 高麗史云 猪川 一云浿江 按百濟始祖十三年 自慰禮城 移都漢山下 定疆域 北至浿河 若平壤浿河 則在高句麗都城傍 豈得爲百濟之境 所謂浿河 疑則此水 라고 한 기사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 으로서 현재의 禮成江을 말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5쪽). 32) 帶水 : 패수를 예성강으로 보면 대수는 예성강의 남쪽인 임진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 병도, 앞의 책, 355쪽). 33) 北史 : 중국의 正史 二十五史의 하나. 北魏 北齊 北周 隋나라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책. 唐나라 李延壽가 편찬하였는데, 총 100권이다. 34) 隋書 : 隋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正史로서 중국의 二十五史의 하나. 魏徵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636년에 완성하였는데, 총 85권이다. 中宗壬申刊本에 隋 는 缺字이나 본 기사의 인용문이 隋 書 백제전의 기사와 일치하므로 隋 字를 補入하였다. 35) 東明 : 扶餘의 시조로도 나오고(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부여), 고구려의 시조로도 나오고(본 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 백제의 시조로도 나오는 인물. 이처럼 동명이 부여 고구 려 백제의 시조로 나오고 있는 것은 동명이 夫餘族의 族祖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노명호,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참조). 부여의 시조를 동명왕이라 한 것은 후한 王 充이 쓴 論衡 吉驗篇과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魏略 등에 나타나고 있다. 36) 仇台 :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하나. 이 구태의 실체에 대해 ①仇台를 구이 로 읽어 백제의 제8대 古爾王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476쪽)와 ②비류 중심 의 건국설화에 보이는 優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책, 143쪽) 등이 있다. 한편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라 하여 시조 仇台廟에 대한 기 사가 나오는데, 이 仇台廟를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에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 는 彌鄒忽 집단의 종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노명호, 1981, 앞의 글, 68~83쪽). 그러나 온조 설화와 구태설화는 동일 계통의 시조전승이라는 견해(임기환, 1998, 백제시조전승의 형성과 변 천에 관한 고찰, 백제연구 28, 15~17쪽)를 고려하면 구태묘는 온조계 백제 왕실의 종묘에 해 당하는 것으로, 성왕이 사비 천도를 단행한 이후에 체제 정비 과정의 일환으로 구태묘의 예법과 격식을 정비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양기석, 1990, 백제전제왕권성립과정연구, 단 국대박사학위논문, 153~154쪽). 구태묘는 사비시대에 무령왕계를 중심으로 한 왕실내 소가계집 단이 그들 조선을 받드는 제례를 실질적으로 국가 종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3 24 25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39) 마침내 東夷40)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원년(B.C.18) 여름 5월에 東明王廟42)를 세웠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41) 2년(B.C.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靺鞨43)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 37) 帶方故地 : 帶方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대방군은 後漢말 중국의 遼東지역에 웅거하였던 公孫康이 204년경에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설치한 郡으로서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 을 그 治所로 하였다. 이는 沙里院驛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 라는 銘文이 새겨진 塼이 발견된 것에 의해서 입증된다(이기백 이기동, 1982,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72 쪽). 그런데 대방군은 백제가 건국될 당시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대방의 옛 땅 이라 한 것은 백제가 건국된 곳이 대방군의 전신인 옛 진번군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 도, 1977, 앞의 책, 355쪽). 그런데 백제의 또다른 시조로 주장되는 주서 권49 백제전에 나오 는 구태가 건국한 지역이 대방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백제가 고구려와 대방고지에 대한 영 유권 다툼에서 구태의 시조설을 내세워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있으나(이현혜, 1991, 마한 백제국의 형성과 지배집단의 출자, 백제연구 22, 24~25 쪽), 대방고지가 백제지역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박찬규, 2003, 백제 의 시조전승과 출자, 선사와 고대 19, 48쪽) 백제측에서 부여와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 여출자설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정재윤, 2007, 백제 건국의 주체세력과 그 계통, 한성 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경문화사, 55~61쪽). 38) 公孫度 : 중국 後漢末의 사람. 度를 탁 으로 읽는 경우도 있으나 본서에서는 도 로 읽었다. 그 는 요동태수가 되어 190년에 요동군을 遼西와 中遼로 나누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을 칭하였다. 그의 아들 公孫康 손자 公孫淵代에 와서는 요동의 覇者가 되었으나 魏나라 장군 司馬懿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三國志 권8 魏書 公孫度傳 附康 淵傳을 참조할 것. 39) 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구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이 기사는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부여 조에 扶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强 度以扶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에 의거하여 기록된 것 이다. 그런데 公孫度는 2세기말~3세기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원 전후한 시기의 백제 시조와는 생존한 시기가 다르다. 이 기사는 北史 나 隋書 의 편찬자가 백제의 구태를 扶餘의 尉仇台로 誤 認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쪽). 40) 東夷 : 중국이 주로 동방 지역에 위치한 異民族을 낮추어 일컫던 명칭. 중국 正史에서 사방의 이 민족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으로 부른 것은 三國志 부터이다. 후한대 허신이 지은 說林 에 의하면 東夷의 夷 字를 大 와 弓 의 合字로 보고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東夷라 고 불렀다는 주장이 있다. 동이의 뜻에 대해서는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에 王制云 東方 曰夷 夷者也 言仁而好生 萬物地而出 라 하여 동쪽을 뜻하는 것이다. 夷에는 9種이 있는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가 있다고 한다(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 전 序 참조). 41)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5가지의 설이 있다. ①시조온조설(본서 권 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본문), ②시조 沸流說(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의 細 注), ③시조 優台說(본서 권32 잡지 제사조), ④시조 仇台說(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과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 ⑤太祖 東明=都慕說(본서 권32 제사조 및 續日本紀 권40 延曆 9년 秋7월) 이 그것이다.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 및 시조 구태설을 기록한 본서 백제본기의 찬자는 본서 권32 제사 百濟祭祀條에서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라 하여 시조 동명설을 취 신하고 나머지 설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42) 東明王廟 : 동명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 본서 권32 잡지 제사조에는 백제의 역대 왕들이 동명왕 묘에 배알한 일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지왕 2년(406)을 끝으로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고 있다. 동명왕묘는 한성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김으로 인해 웅진천도 이후에는 그 배알의식이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노명호, 1981, 앞의 글 참 조). 새로 즉위한 백제왕은 즉위초에 동명왕묘 배알 행사를 통해 부여족의 공통 시조인 동명의 권 위를 정통적으로 계승하였음을 천명하는 즉위의례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본서 백제본 기에는 나라를 세운 建國祖인 온조를 모신 사당에 대한 기사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백제가 동명 왕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드린 것은 부여족의 族祖인 동명을 시조묘에 모심으로써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제가 건국시조인 온조의 사당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 단의 종묘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격하시키는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위례 집 단 이래의 종묘를 백제국가의 종묘로 격상시킴도 그만큼 제약을 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명호, 1981, 앞의 글 참조). 한편 東明王廟는 廟堂이 아니고 始祖王陵 등 穀靈信仰의 대상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1983, 2, 平凡社, 295쪽). 43) 靺鞨 :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퉁구스族의 일종. 이 말갈은 중국의 先秦시대에는 肅愼으로, 漢나 라 때에는 婁로, 北魏代에는 勿吉로 불리다가 唐나라 때에 와서는 말갈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말 갈족은 松花江 이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混同江 이남으로 長白山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南北朝시대에 와서 비로소 중국과 교통하였고, 당나라 高祖 武德( ) 이후로는 말갈로 총 칭되었다. 원래 7部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각 추장이 통솔하였으나 당나라 초에 이르러 7부 가운 데 黑水를 중심으로 한 黑水靺鞨과 粟末水를 生活圈域으로 하는 粟末靺鞨의 2部가 강성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말갈은 당나라보다 시대가 앞서기 때문에 당나라 시대의 말갈과 같은 부류로 볼 수 없다. 백제는 건국 초부터 주로 북쪽이나 동북쪽에서 말갈의 빈번한 침 입에 시달려 왔다.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배경도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이었다. 이러 한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지만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말갈과 백제나 신 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은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이해된다. 백제나 신라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계통에

14 26 27 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저 5년(B.C.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사냥하다가 신비 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스러운 사슴(神鹿)46)을 잡았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다고 하여 그를 右輔44)로 삼고 군 6년(B.C.13) 가을 7월 그믐 무오날에 日食47)이 있었다. 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8년(B.C.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 3년(B.C.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넘어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 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지자 돌아갔다. [이에] 왕은 날랜 군사 고 나가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를 뽑아 大斧峴48)까지 쫓아가서 한번에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4년(B.C.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樂浪45)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대해서는 ①예족설(정약용, 말갈고, 여유당전서 등), ②고구려 내의 말갈설(서병국, 1974, 말갈의 한반도 남하, 광운전자공과대학논문집 3), ③영서지역의 토착세력설(문안식, 1996, 영서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 배경, 동국사학 30), ④마한소국설(윤선태, 2001, 마한 의 진왕과 臣 沽國 嶺西濊 지역의 역사적 추이와 관련하여, 백제연구 34, 16쪽) 등이 있다. 이처럼 말갈의 실체에 대해서는 견해가 구구하지만 대체로 東濊 僞靺鞨 로 파악한 정약용의 견 해를 따르고 있다. 위말갈은 반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중국군현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순차적으 로 받았다가 삼국통일 후 그 자취를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유원재, 1979, 삼국시대 위말갈 고, 사학연구 29, 41쪽). 44) 右輔 : 백제 초기의 관제로 左輔와 함께 설치되었는데, 고구려에도 이 관직이 보인다. 좌 우보에 는 왕족을 비롯한 유력한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전임자가 사망한 후 후임자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 임기는 종신제였다. 이는 국왕을 도와 군사와 행정 업무를 포함한 국정 전반을 총괄하였다. 안 정복은 고구려나 백제의 우보를 훗날의 宰相으로 파악하고 있다( 東史綱目 圖下 官職沿革圖). 그러나 고이왕 27년(260)에 좌 우보를 개편하여 좌평을 두어 국정을 총괄케 하였다. 45) 樂浪 : 중국의 漢나라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B.C.108년에 설치한 4郡 중의 하나. 낙랑군 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이병도, 1976, 앞의 책, 쪽)와 이와는 달리 한사군의 위치를 모두 遼東지역에 비정하는 견해(이지린, 1963, 고조선연구 ) 등이 있다. 평안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에 의하면 낙랑군의 郡治는 현재 의 평양지역의 土城里 일대였다고 하며, 遼東지역에 비정하는 견해에 의하면 낙랑군의 중심지는 大凌河 동쪽 1백리 되는 遼河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설치 당시의 낙랑군에 속한 縣은 朝鮮 遂成 등 11개 현이 있었는데, 그 중 朝鮮縣이 首縣으로서 郡治가 되었다. 이 낙랑군은 B.C.82년에 臨 屯郡을 合屬시킴으로써 25縣을 거느린 큰 郡이 되었으나, B.C.8년에 낙랑의 土人 王調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都尉制가 폐지되면서 18縣으로 줄었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 해 멸망되기까지 400여년간 존속하였다. 한편 한반도에는 중국 군현으로서의 낙랑군이 아닌 토 착인이 세운 樂浪國도 있었다. 이 낙랑국은 崔理가 다스렸는데,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에 의해 멸망되었다. 한반도에 두어진 중국 군현의 하나인 樂浪郡에 대해서는 權五重, 1992, 樂浪 郡硏究, 일조각을 참조할 것. 46) 神鹿 : 사슴은 사슴과에 속하는 짐승의 총칭이다. 중국에서는 사슴은 여러 사냥꾼들이 다투어 쫓 아가 잡는 짐승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목적물로서 특히 帝位를 이르기 도 하였다. 부여가 사슴의 뜻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듯이(白鳥庫吉, 1934, 濊貊民族の由來を 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 史學雜誌 45-12) 백제를 비롯한 扶餘族들이 사슴 을 신성히 여겼다. 부여의 중심지인 鹿山 이 만주어에서 사슴을 뜻하는 말인 puhu 와 몽골어에 서 사슴을 뜻하는 pobgo 라는 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려후기 李奎報의 東 明王篇幷序 에 東明西巡時 偶獲雪色 (大鹿曰 ) 倒懸蟹原上 敢自呪而謂天不雨沸流 漂沒其都鄙 我固不汝放 鹿鳴聲甚哀 上徹天之耳 淋雨注七日 若傾淮泗 이라 하여 동명이 사슴을 매 달아 비를 오게 하였다는 설화를 통해서 고구려도 사슴을 신성히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7) 日食 :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가 달에 의하여 가리어지는 현상. 태양의 전부가 가리어지는 皆旣食, 일부가 가리어지는 部分食, 태양의 중앙부만 가리어지 고 그 변두리가 고리모양으로 남는 金環食이 있다. 天變 가운데 가장 중대한 咎徵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식이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일식기사가 무려 26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서 26 삼근왕 2 년(478) 3월 일식기사의 경우 오폴저 일식표와 일치할 정도로 중국측 관측 기록보다 정확한 것으 로 밝혀져서 백제가 독자적으로 일식을 관측하고 기록한 증거로 볼 수 있다(이희덕, 1999, 한국 고대 자연관과 왕도정치, 혜안, 144쪽). 태양의 손상으로 인식하였던 종래의 토속적인 일식관이 고대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다분히 天譴의 성격을 띄고 治者의 권위 확립과 깊은 관련하여 수용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漢書 권26 天文志 제6에 星傳曰 日者德也 月者刑也 故曰日食修德 月食 修刑 이라 하여 일식이 일어나면 천자는 덕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禮記 권61 昏義 제 44에도 是故日食 則天子素服 而修六官之職 蕩天下之陽事 라 하여 천자의 근신을 기록하고 있 다. 48) 大斧峴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대부현은 본서 온조왕 22년 (A.D.4)에 말갈과 전투를 벌인 斧峴, 그리고 斧壤縣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신라 漢州 富平 郡 平康縣)과 같은 곳으로 보고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하고 있다(천관우, 1976, 삼 한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15 28 가을 7월에 馬首城49)을 쌓고 甁山柵50)을 세웠다. 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29 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昆彌川53)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靑木山54)을 의지하며 스스로를 지켰 영토에 다가와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 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날의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청하건대 한번에 싸워서 승부를 결정짓도록 하자. 이에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도리인데, 어찌 감히 이 때문에 화친과 우호를 저버리겠는가? 마땅히 執事51)께서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 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B.C.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馬韓52)에 보냈다. 49) 馬首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마수성은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漢州 堅城郡의 고구려 때 지명인 馬忽郡과 음이 비슷하여 같은 곳으로 볼 때 현재의 경기 도 抱川郡 郡內面에 비정할 수 있다. 그밖에 말갈의 마수성(책) 공격 기사는 다루왕 3년(A.D.30) 과 7년(A.D.34), 그리고 무령왕 3년(503)에도 나오고 있어 본서 무령왕대의 영역 관련 기사가 한성시대의 영역관을 투영한 것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84, 한성말 웅 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23~25쪽). 그러나 이 루트가 말갈의 상시적인 주요 백제 공격로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같은 반복되는 기사라 하여 이를 부정할 근거는 없다. 50) 甁山柵 : 병산책은 마수성과 이웃한 곳이므로 포천 부근으로 비정된다(酒井改藏, 1970, 三國史 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51) 執事 : 여기서는 문맥으로 보아 낙랑태수를 지칭한다. 52) 馬韓 : 진한 변한과 더불어 三韓의 하나. B.C.1세기 이전의 어느 시기부터 A.D.3세기 경까지 한강유역에서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위치하였던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마한을 구성한 國들 로는 伯濟國 目支國 등을 포함하여 54개의 국이었으며, 정치적 성격은 소국연맹체라고 할 수 있 다. B.C.4세기경부터 한반도에 철기가 유입된 이후 B.C.2세기 무렵에는 남한지역에까지 보다 확 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철제 농기구와 공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확 대되고 또한 철제 무기와 도구의 사용으로 인하여 종래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실용성이 적은 儀 器化하였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이제 한국식동검이라 불리는 세형동검 으로, 거친무늬거울은 잔무늬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이러한 문화 변동기에 한반도의 서 북한 지방에는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의 燕나라와 요하를 경계로 맞서고 있을 무렵, 중부 이남지방에는 하나의 문화적 통일성을 가진 辰國이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진국 이 존속했던 B.C.2세기의 중남부지역은 세형동검문화가 발달했던 단계였다. 그런데 B.C.2세기 말엽부터 철기문화의 유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철자원 개발과 철기의 제작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서북한지역의 정치적 변동으로 상당 수의 유이민들이 중부 이남지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동기의 제작과 관리 및 교역 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진국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중부 이남지역 토착사회 전반 에 걸쳐 중요한 정치 문화적 변화가 진행되었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겠지만, 이러한 배경 하에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삼한 중 소국연맹체 대두가 가장 이른 곳은 마한지역이었다. 그 대두 배경으로 한군현의 설치, 대방군의 설치, 위나라의 동방 경략, 백제국의 성장 등을 꼽을 수 있다. 마한지역은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강유역권 아 산만유역권 금강유역권 영산강유역권 등 4개의 문화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박찬규, 1995, 백 제의 마한정복과정 연구, 단국대박사학위논문). 삼한 중 마한을 구성한 國의 규모는 大國은 1萬餘家이고 小國은 數千家였다. 여러 소국의 지배 자 칭호는 대국은 臣智라 하였고, 소국은 邑借라 하였다. 3세기 중엽경까지 이 마한의 맹주는 辰 王으로 불리워졌으며 진왕의 治所는 目支國이었다. 이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稷山설 禮山설 천안설, 전북 益山설, 전남 羅州설 등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3세기대의 주구토광묘가 집중 분포하는 천안 청당동유적 청주 송절동유적 청원 송대리유적 등을 고려해 볼 때 천안-청 주 일대를 광역권으로 하는 직산설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辰韓 條에는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이라 하여 진왕의 지위는 세습되는 것 이 아니라 여러 소국 臣智들의 추대나 선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마한의 성립에 대해 고조선의 準王이 남하하여 마한을 성립시켰다는 견해(이병도, 1976, 三韓問題의 硏究, 韓國古 代史硏究, 박영사)가 있고, 이와는 달리 遼東지역에 있던 北馬韓이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성립 시켰다는 견해(천관우, 1976, 三韓考 제1부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도 있다. 그밖 에 마한의 성립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이현혜,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 천관우, 1989, 古朝鮮 三韓史硏究, 일 조각 ; 권오영, 1996, 삼한의 國 에 대한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 문창로, 2000, 삼한사 회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 등을 참조할 것. 53) 昆彌川 : 현재의 경기도 禮成江으로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20쪽)와 임진강 상류설(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54) 靑木山 : 청목산의 위치에 대해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조에서는 송악산 二 龍의 하나가 靑木이 되었다는 故事와 관련하여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였고, 安 鼎福은 東史綱目 제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조에서 開城 金川 경계의 靑石洞(현재의 경 기도 開豊郡 嶺南面 天摩山)으로 추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永平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李丙燾, 1976, 앞의 책, 355쪽)도 있다.

16 30 31 다. 이에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55)으로 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는 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돌아 곧 물러갔다. 가셨다. 이처럼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 않으니,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11년(B.C.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어제 순행을 나가 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60)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꾀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禿山柵56)과 狗川柵57)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3년(B.C.6) 봄 2월에 왕도에서 늙은 할멈(老 )58)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가을 7월에 漢山61)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 데, 북쪽으로는 浿河62)에 이르고, 남쪽은 熊川63)을 경계로 삼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 고, 동쪽으로는 走壤64)에 이르렀다.65)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59) 번갈아 우리 영토를 침략 55) 烽峴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봉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경 기도 漣川郡 旺澄面 일대설( 大東地志 권3 麻田 및 漣川의 山水), ②개성 청목산 서쪽설(酒井改 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56) 禿山柵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독산책을 경기도 죽산일 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酒井改藏, 1970, 앞의 글), 낙랑의 침입로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없다. 다만 본서 권24 근초고왕 28년(373)조에 나오는 禿山城 기사를 고려해 볼 때 고구 려와의 접경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이 아닐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57) 狗川柵 : 본서 권37 地理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구천책에 대해서는 ①화성일대 설(이병도, 1976, 앞의 책), ②옥천설(酒井改藏, 1970, 앞의 글)이 있으나, 백제가 구천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은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독산책과 마찬가지로 낙랑 또는 고구려와 접경 지대 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이 아닐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58) 老 : 고대사회에서 초기에는 여자 무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뒤에 남자 무당으로 그 역할 이 옮겨진 것으로 보고, 이 노구를 단순히 늙은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 무당이라고 파악하 는 견해도 있다(崔光植, 1981, 所載 老의 성격, 史叢 25). 이는 호랑이 5마리가 성 내로 들어오는 현상과 함께 왕모의 죽음을 예견하는 咎徵으로 제시된 것이다. 59)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 樂浪과 靺鞨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 적으로 낙랑은 백제의 북쪽인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파악되며, 말갈은 함경도에 위 치한 동예를 비롯한 濊族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의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은 國家北有樂浪 東有靺鞨 로 고쳐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병 도, 1976, 앞의 책, 479쪽)가 있는 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정약용은 위의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동쪽의 낙랑은 春川지방의 土酋로 보고 이것이 본서 고구려본기의 최씨 낙랑국이며 춘천맥국설 의 실체라 하였고, 북쪽의 말갈은 東濊로 파악하였다( 疆域考 권1 辰韓考 및 권2 靺鞨考 ; 김택 균, 1985, 춘천맥국설에 관한 연구, 백산학보 30 31합집, 135쪽 ; 김기섭, 1991, 삼국사 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청계사학 8, 17~20쪽). 60) 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 본서 온조왕 즉위년조에 는 온조집단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온조집단이 처음에 한강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뒤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주고 있어 즉위년조의 기사와 상치된다. 이 기사를 取信한다면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한강 북쪽의 하북위례 성에 자리잡았다가 뒤에 하남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겨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 는 주 11) 15)를 참조할 것. 61) 漢山 :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긴 이후에 나오는 한산은 현재의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한 지역을 가리킨다. 한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 11)을 참조할 것. 62) 浿河 : 浿水 浿江이라고도 한다. 패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본 기사의 浿河는 高麗 史 권58 志 12 지리 3 黃州牧 平州條의 猪淺(一云浿江) 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川條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 이라 한 기사에 의거할 때 현재의 禮成 江으로 볼 수 있다. 주 31)의 패수를 참조할 것. 이에 대해 패하는 예성강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나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이곳을 평산군의 저탄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문안 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64쪽). 63) 熊川 : 웅천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公州의 錦江설과 경기도 安城郡 安城川설이 있다. 安城川설 은 본 기사의 熊川을 곰내 로 읽고 마한의 맹주국인 目支國이 稷山 성환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또 안성천 유역인 孔道面의 熊川橋가 속칭 고무다리 로 불리우고 있는 점, 안성천 하류에 있는 平澤의 軍勿津(昆池津)이 軍門里津(군문이 나루)으로 불리우고 있는 점 등에 근거하고 있다 (李丙燾, 1976, 앞의 책, 쪽). 한편 본서에 나오는 웅천은 대개 충남 공주지역을 흐르는 금강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충남 공주 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30쪽). 64) 走壤 : 현재의 강원도 春川지방을 말한다. 走壤 走壤城의 다른 이름으로는 烏根乃 首次若 迭 巖城 등이 있다. 춘천의 옛 명칭이 首若州 또는 走壤城이었는데 이는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조에 九月 築國原城 首若州走壤城(一名迭岩城) 이라는 기사에 의해 확인된다. 춘천 일 대에서 주양과 유사한 지명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고적조의 枝內村所 와 대동여지

17 년(B.C.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쳐들어왔다. 이에 왕은 군사를 이끌고 七重河69) 9월에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14년(B.C.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66) 에서 맞아 싸워서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70)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67)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들을 그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牛頭山城71)을 습격하려고 臼谷72)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 15년(B.C.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 아왔다. 지 않았다. 20년(A.D.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는데, 17년(B.C.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68) 여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國母에게 제사를 지냈다. 도 의 枝內山 을 들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 65) 북쪽으로는 浿河 동쪽으로는 走壤에 이르렀다 : 이 기사는 온조왕대의 영역을 가르키는 기 사로서 온조왕 당시 백제의 영역이 북쪽의 浿河(예성강)로부터 남쪽의 熊川(안성천), 서쪽의 大海 (서해), 동쪽의 走壤(춘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이 어느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는가가 문 제이다. 이 문제는 본서 초기기록을 취신하느냐의 여부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초기기록을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대로 온조왕 13년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천 관우, 1976, 앞의 글(下), 쪽), 본서 백제본기 溫祚紀의 영역확장 기사는 후대의 사실이 온조왕대에 부회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3세기 경 古爾王代의 사실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병도, 1977, 앞의 책, 쪽). 백제가 건국한지 얼마 안되어 오늘날의 중부지역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서울 송파구 일대, 남한강과 북한강, 그리고 한탄강유역에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적석묘의 존재 를 통해 2~3세기 경의 사실로 이해하고 있다(권오영, 1986, 초기백제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 찰, 한국사론, 34~54쪽 ; 김성범, 1992, 군사보호구역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 문화재 25, 238쪽 ; 윤근일 김성범, 1994, 연천 삼곳리 백제적석총 발굴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66) 도읍을 옮겼다 :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본서 초기기 록의 연대를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溫祚本紀의 기록대로 온조왕 14년으로 보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쪽). 그러나 초기기록이 후대에 이루어진 사실을 온조대로 소급 부회한 것으 로 보는 입장에서는 하북에서 하남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대해 책계왕~비류왕대로 보는 견해(이 병도, 1977, 앞의 책, 479쪽)와 肖古王代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 앞의 책, 56 58쪽) 등이 있다. 67)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았다 :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3 경기도 楊州 城池條에서 이때 쌓은 성을 楊州城으로 보았는데, 관련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68) 사당을 세우고 國母에게 제사를 지냈다 : 국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모신앙이 백제에서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가 없어 알 수는 없다. 다만 고구려와 신라에도 국모신앙 이 있었음이 다음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東明聖王 14년조에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22년(A.D.4) 가을 8월에 石頭城73)과 高木城74)의 두 성을 쌓았다.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라 하여 神廟를 세워 王母를 제사한 것과 周書 권49 열전 상 高麗條에 又有神廟二所 一曰扶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 祖扶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여 주몽을 낳은 河伯女를 扶餘神으로 서 섬긴 사례에서 고구려에도 국모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新羅에서는 始祖와 始祖妃를 二 聖 으로 표현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본서 권1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2년). 69) 七重河 : 칠중하는 본서 권35 지리지 2 한주의 칠중현 근처에 흐르는 강의 명칭으로 현재의 파주 시 적성면 부근의 임진강을 지칭한다. 이곳에 위치한 七重城은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難隱別이 라고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때 重城縣으로 고쳤으며, 고려초에 적성으로 개칭되었다. 70) [말갈]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 : 백제가 말갈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 고 하는 것은 앞서 神鹿을 잡아 마한에 보낸 것이라든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면서 마한에 천도 사실을 告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백제가 마한에 대해 부용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71) 牛頭山城 : 춘천을 일컫는 牛頭州 牛首州 牛頭郡 등과 연계시켜 현재의 春川지방에 비정된다 (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 이와는 달리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황해도 金川郡 牛峰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이 기사를 주 59의 國家北有樂浪 東有靺鞨 기사와 관련하여 낙랑 부용국인 춘천의 맥국으로 보는 입장에서 낙랑의 우두산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김택균, 1985, 앞의 글, 135쪽). 72) 臼谷 : 정약용은 疆域考 권1 樂浪別考에서 今昭陽江兩水合衿之處有大村 曰牛頭 其裡面有所謂 貊國古墟 此卽古樂浪國之遺墟也 又春川南界水村有曰方牙兀者 譯之以文 卽臼谷也 라 하여 구곡 을 방아골 로 읽어 춘천 남쪽 경계의 水村인 방아올 로 비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경기도 楊州 加平지역의 九谷驛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쪽)도 있다. 73) 石頭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석두성은 본서 권27 무 왕 8년(607)에 고구려와 싸운 전투 지점으로 나오는데, 당시 한강유역이 신라의 영유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고구려 때의 지명인 所邑豆縣과 音韻上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일대

18 34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斧峴75)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도적을 만나 한 번에 싸워 격파하고, 포로76)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A.D.6) 가을 7월에 왕이 熊川柵77)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 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78)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텁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 35 25년(A.D.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 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日官79)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께서 우뚝 일어날 조짐이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辰韓80)과 마한을 병탄하려고 마음을 가졌다. 26년(A.D.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마한이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 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 일인가? 왕은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74) 高木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고목성은 본서 권26 무령왕 7년(507)에 말갈이 공격한 루트상에 있는 성으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신라 한주 功成縣의 고 구려 때 지명인 功木達縣과 음운상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漣川邑에 비정할 수 있다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 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20쪽). 75) 斧峴 : 斧峴은 본서 권23 온조왕 22년(A.D.4)에 말갈과 전투를 벌인 斧峴, 그리고 斧壤縣 (본 서 권35 잡지 지리 2 신라 漢州 富平郡 平康縣), 그리고 주 48의 대부현과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하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글(下),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76) 포로 : 포로는 전쟁에서 사로잡힌 자들로서 生口라고도 하였는데, 대체로 노비가 되었다. 근초고 왕 24년(369)에 백제가 치양성에 침공해 온 고구려군을 공파하고 노획한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분배한 사례가 있다. 이들은 전공의 포상으로 장수와 군사들에게 분배되어 고대사회에서는 노비 공급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生口의 존재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에도 나온다. 77) 熊川柵 : 웅천책은 안성천 일대에 마한과 경계를 짓기 위해 설치한 목책을 말한다. 웅천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주 63)을 참조할 것. 78)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 이 기사는 온조 집단이 처음 마한왕에게 마한지역의 동 북 1백리 땅을 할양 받아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할 때의 사정을 반영해 준다. 이는 다 분히 상징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에 전하는 마한소국 규모에 해 당하는 크기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백제는 마한의 제후국으로 인식될 정도로 일정 기간 마한 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이 기사를 온조왕대의 사실이 아니라 衛滿에게 쫓겨 내려온 고조선의 準王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병도, 1959, 韓國史 고대편, 진단학회, 쪽), 삼국지 의 진한 성립기사와는 구별되는 것이므로 이를 고조선의 準王 의 남하와 연계시키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79) 日官 : 天文의 변화와 자연의 災異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점치는 사람. 중국의 경우 日官은 曆數 干支를 맡고 天文을 관장하였는데, 天官이라고도 하였다. 春秋左氏傳 桓公 17년 冬十月朔 日 有食之不書 日官失之也 天子有日官 諸侯有日御(日官月御典曆數者) 라고 한 기사를 참조할 것. 백 제는 사비천도 후 22부사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천문과 역법 업무를 담당하는 日官部가 있었다. 80) 辰韓 : 진한은 마한 변한과 함께 三韓이라 하였다. 삼국지 권30 魏書 東夷傳 진 변한전에 의 하면 秦人이 망명해 와서 세웠기 때문에 秦韓으로 불리웠다고 전한다. 이 진한은 삼국지 동이 전에 辰韓者 古之辰國 이라 한 것에서 보듯이 진국의 후신이며 그 정치적 성격은 12國으로 구성 된 여러 소국연맹체라고 할 수 있다. 진한연맹체를 구성한 여러 소국은 처음에는 6國이었으나 점 차 분화하여 12國으로 확대되었다. 12국 가운데 大國은 4 5千家로 구성되었고, 小國은 數百家 로 구성되었다. 이 12國은 대체적으로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역에 자리한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12국 가운에 위치비정이 확실한 것은 경북 경주에 자리한 사로국, 경북 울진에 자리한 優由國 등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진한연맹체의 성립의 하한은 삼국지 동이전에 인용된 魏略 에 王莽 地皇 年間(A.D.20 22)에 辰韓 右渠帥 廉斯가 자신의 邑落을 떠나 낙랑군 에 항복하러 갔다는 사실에서 기원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철기와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이 B.C.1세기로 편년되고 있는 사실 등을 참고할 때 성립 의 상한은 B.C.1 2세기로 올라 갈 수 있다. 한편 진한연맹체가 소멸된 시기에 대해 본서 권1 신라본기 혁거세조에는 혁거세 당시에 이미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까지 진한연맹체가 존속한 것으로 나오고 있고, 특히 魏나라 正始 6 7년( ) 경에 辰韓 8國의 분할 문제로 韓과 대 방군이 전쟁을 하여 韓이 패배하고 那奚國 등 수십국이 이탈하였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기술 되어 있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진한연맹체의 소멸은 3세기 중엽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 다. 진한연맹체의 해체과정은 진한의 한 구성체였던 사로국이 성장하여 진한제국을 병합하는 과 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병도, 1976, 三韓問題의 硏究, 앞의 책 ; 李賢惠, 1984, 앞의 책 ;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출판부 ; 천관우, 1989, 앞 의 책 ; 권오영, 1996, 앞의 글 ; 문창로, 2000, 앞의 책 등을 참조할 것.

19 36 37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병합해 훗날의 지 않았다. 어려움을 면하는 편이 더 낫겠다. 27년(A.D.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 어 그 國邑81)을 병합하였다.82) 그러나 圓山城83)과 錦峴城84)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 드디어 멸망하였다.85) 가을 7월에 大豆山城86)을 쌓았다. 28년(A.D.10) 봄 2월에 맏아들 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81) 國邑 : 삼한을 구성한 여러 국들은 몇개의 邑落으로 구성되었다. 이 읍락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세 력이 강하거나 중심기능을 가지는 大邑落을 國邑이라고 하였다(이현혜, 1991, 앞의 책, 쪽). 따라서 이 기사의 국읍은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정치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국읍의 정치적 기능은 여러 읍락들을 통할하는 것이나 3세기 중엽경까지 삼한의 각 國들은 삼국 지 동이전 韓條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拜之禮 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국읍이 읍락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82) 왕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國邑을 병합하였다 : 본서 권23 온조왕대에는 백제의 마한 정복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온조왕대에는 백제의 웅천책 설치 단계(온조왕 24년) 진한과 마한에 대한 정복을 결심하는 단계(온조왕 25년) 백제의 마한정복 의지 천명(온조왕 26 년 7월) 백제의 마한 공격 개시 단계(온조왕 6년 10월) 백제의 마한 유민에 대한 사민책과 멸 망시키는 단계(온조왕 27년 4월) 구마한세력의 대규모 부흥운동과 진압되는 단계(온조왕 34년 10월) 백제의 구마한지역에 대한 새로운 지배책 마련 단계(온조왕 36년 7월 및 8월)로 백제의 마한 정복과 그 지배과정을 단계화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이 일련의 마한 정복 과정이 건국시조인 온조왕대에 집약해서 서술되어 있는데, 사료 비판을 통해 관련 지명 분석과 일본서기 권9 신공 기 49년조 기사와의 일치성을 검토한 결과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의 사실에 온조왕대에 투영되 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G.K.Ledyard, 1975, Galloping along with the horseriders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 No.2, 242쪽 ; 유현용, 1997, 온조왕대 마한정복기사의 재고찰, 사총 46, 25~26쪽). 83) 圓山城 : 본서 권37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원산성 의 위치를 肖古王 24년(190)조에 보이는 新羅西境圓山鄕 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경북 醴泉郡 龍 宮面에 비정할 수 있으나(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龍宮縣 建置沿革), 예천 용궁은 마한 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① 新增東國輿地勝 覽 권33 전라도 珍山縣 古蹟조에 나오는 猿山鄕(在縣東三十里) 기사에 의거하여 충남 진산으 로 보려는 견해(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28쪽)와 ②圓山을 完山의 異寫로 보아 지금의 전북 全州市에 비정하는 견해(全榮來, 1975, 完山과 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창간호), ③충남 금산 마전리설(1991, 조선전사 3 중세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57쪽) 등이 있다. 그러나 마한 의 목지국을 직산으로 볼 때 금산 마전리설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84) 錦峴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정약용은 錦峴者 或是今羅 州也 故與古沙夫里幷擧也 라 하여 나주로 비정하고 있으나(丁若鏞, 疆域考 권1 馬韓考) 지리적 으로 맞지 않아 취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금현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9 鎭安縣 山川조에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나오는 熊嶺縣의 異寫로 보고 그 위치를 지금의 鎭安郡 富貴面 곰치리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전영래, 1975, 앞의 글) 이 역시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본서 권26 성왕 28년(550)에 고구려 가 포위한 金峴城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다. 이 金峴城의 위치에 대해 ①충남 연기군 전의의 金 城山, 金伊山城說(이병도, 1976, 앞의 책, 57쪽), ②고구려때 今勿奴郡으로 보는 鎭川說(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47쪽) 등이 있으나, 진천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 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온조왕 27년 7월 아산에 대두산성을 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아산과 가까운 연기 전의로 보는 설이 보다 타당하다. 85)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 마한의 멸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취신하 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대로 온조왕 27년으로 보고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下), 124~131쪽). 그러나 晉書 권97 열전 마한전에는 太熙 원년(290)에도 마한이 西晉에 견사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기사를 그대로 취신할 수는 없다. 이 기사는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남쪽 방면에 산재한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해 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 럼 이때에 백제에 멸망당한 마한의 실체는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마한세력 전체를 지칭하는 것 이 아니라 한정된 범위인 마한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여러 소국들이 결집된 정치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기사는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목지 국은 魏나라 正始 6 7년( )에 일어난 韓과 帶方郡과의 전쟁에서 韓이 패배하여 그 위상 이 약화되자 백제국의 古爾王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엽경으 로 추정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노중국, 1988, 앞의 책, 85 94쪽 ; 이기동, 1990, 백제국의 성장과 마한병합, 백제논총 2 ; 문창로, 2007, 백제의 건국과 고이왕대의 체제정비, 백제 의 건국과 기원 백제문화사대계 2권,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89~297쪽 등을 참조할 것. 86) 大豆山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 해서는 ①충남 공주나 서천설 및 연기설(천관우, 1976, 앞의 글(하), 130쪽 및 132쪽), ②충남 아 산시 음봉면 수한산성설(이기백, 1978,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 9), ③충남 아산 시 영인산성설(유원재, 1992,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등이 있는데, 이곳을 천도 후 해씨세력의 근거지로 보고 있다(이기백, 1978, 앞의 글, 12~13쪽). 그런데 본서 권23 온조왕 36 년(A.D.18)에 백제가 탕정성을 쌓고 대두산성의 민호를 이곳에 사민시킨 사례에 비추어 보면 온 양과 가까운 아산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

20 38 31년(A.D.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南部와 北部87)로 삼았다. 39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7) 南部와 北部 : 백제 5部의 하나로 그 영역 중 남쪽과 북쪽에 설치한 부의 명칭. 백제 초기의 지방 통치체제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部制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31년부터 비유 왕 2년(428)까지 방위명을 붙인 부에 관한 기사가 모두 13개 나오는데, 거의 고이왕대 이전에 집 중 기록되어 있다. 백제 초기 부제의 구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5부제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 리고 백제 초기의 부는 고유한 명칭을 붙인 족제적인 성격의 부가 지방행정 구획적인 방위명 부 로 변화해 간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의문과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논의의 초점은 백제 초기의 4부에 관한 기록 자체의 신빙성 문제와 부제의 성격에 관 한 문제일 것이다. 부체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방통치체제로 볼 것인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백제 초기의 기록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삼국 초기의 국가적 성격을 새롭게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안의 하나로 모색이 된 것이 部體制論 이었다(노태돈, 1975, 삼국시대 부 에 관한 연구 -성립과 구조를 중심으로, 한국 사론 2 및 2000,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부체제론을 중심으로-, 한국고대 사연구 17). 부체제론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전 단계인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 운영의 성격을 구조론적으로 접근하여 제시된 개념이다. 그런데 부체제에 관한 용어나 개념 정의 문제라든가, 부제의 성립 시기, 부의 편제 대상 지역, 그리고 부의 성격 문제 등에서 논자들 사이 에서 상이한 견해차가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단위정치체인 부체제를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백제 초기의 부제를 지방통치체제의 차원으로 이 해하는 견해가 있다. 박현숙은 백제 초기의 부가 족제적 또는 부족적 성격이 약한 방위부로서 전 국을 단위로 한 초보적인 지방통치구획이었으며 부에 소속되어 있던 재지세력들을 통한 간접통 치가 관철된 것으로 보았다(1990, 백제 초기의 지방통치체제의 연구 - 부 의 성립과 변화과정 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20). 김기섭은 4세기대에 이르러 部-城-村체제가 성립되었는데, 이 때의 부는 행정 편의를 위해 중앙에서 임의로 구획한 행정 군사적 단위로서 전국을 대상으로 편 제한 방위명의 5부체제였다는 것이다(1998, 백제 전기의 부에 관한 시론,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20). 이도학 역시 4세기대에 행정적인 방위명 부로 개편한 것으로 보았으나 백제의 전체 영역에 대한 지방지배방식을 이원적으로 본 점이 다른 논자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관점이다. 즉 금강 이북지역은 군관구적인 部-城-村체제를, 그리고 새로 획득한 금강 이남의 전라도 지역 은 지방거점 통치방식인 담로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았다(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 사). 반면 부체제론을 인정하지 않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에서 부제를 지방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종욱은 초기의 부에 대해서 전국을 인위적으로 구획한 초 보 단계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보고 여러 부를 통할하는 존재인 국왕을 단지 한 부의 장으로 보는 부체제론을 비판하였다(2000, 한국고대의 부와 그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17). 그리고 제가회 의는 국왕의 통제하에 구성된 군신회의체이며, 삼국의 부를 지방행정구역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점차 집권력을 강화시킨 초기백제는 여러 소국들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고 그 수장을 중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A.D.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 어나니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東部와 西部의 두 部88)를 더 설치하였다. 앙귀족으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배자집단이 형성되어 이들이 왕족과 함께 중앙의 部를 형 성하게 되었다. 각 部는 자치권과 독자적인 지배조직을 가졌으나 무역 외교 전쟁 등 국가 전체 와 관련된 문제는 왕의 통제를 받았다. 이 부는 왕권의 강화가 진전되고 일원적인 지배체제가 갖 추어지게 되면서 해체되어 王京의 行政구역으로 전환되었다. 88) 東部와 西部 : 동부와 서부는 각각 백제 5부의 하나이다. 이를 앞서 설치된 남부 북부 및 중앙을 합치면 5部가 된다. 백제 초기 부제의 구성에 대해서는 4부체제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이우태, 1993, 백제의 부체제 -신라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백제사의 비교연구, 충남대 백제연구 소), 동서남북의 방위명 부와 중앙을 합쳐서 5부제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부의 명칭에 대해서 는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처럼 족제적인 부에서 방위명 부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처음부터 방위명 부가 실시된 것으로 보는 견해로 대별된다. 그리고 그 변화 시기에 대해서는 고이왕대설 (노중국, 1988, 앞의 책), 근초고왕대설(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5세기 후반 웅진 천도 이후설(노태돈, 앞의 글)이 제기되어 있다. 반면 온조왕대로 보는 긍정론 이외에 수정론의 입장에서 백제 초기부터 방위명 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긍정론의 입장 에서 백제 온조왕 대에 나타나는 4부 성립 기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백제 초기의 부제를 지배 자집단의 단위정치체라는 관점에서 그 편제 대상지역을 지배자 집단의 거주지인 왕도에 국한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또는 전국을 단위로 한 지방통치구획으로서 부제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 해(박현숙, 1990, 앞의 글 및 1997,`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a, 고려대박사학위논문)가 있다. 이 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대체적으로 취신하는 입장에서 입론된 것이지만 후대 사실이 건국 시 조인 온조왕대에 일괄 부회되어 서술된 측면도 있어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반면 수정 론 입장에서 백제 초기의 부에 관한 기록을 수정하여 받아들이고 백제초기 영역의 변화에 따라 지방통치체제의 성격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전반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백제초기부터 방위명 부제가 채용된 배경을 백제국 중심의 연 맹체 단계에서 중앙의 집권력을 강화하려는 내부적 요인과, 또 낙랑과 말갈 등의 외부 침입에 대 비하려는 군사적 목적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박현숙, 1997, 앞의 글 ; 양기석, 2000, 백 제 초기의 부, 한국고대사연구 17). 그 기원은 부여의 전통적인 사방관념을 바탕으로 한군현 인 낙랑에서 실시한 부제를 원용하여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기섭, 1998, 백 제 전기의 부에 관한 시론,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 양기석, 2000, 앞의 글). 그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건국기인 온조왕대로 보는 견해 이외에 수정론 입장에서 백제가 한군현 세력을

21 년(A.D.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周勤이 牛谷城89)을 근거로 삼아 반란을 일으 여름 4월에 가물기 시작하여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 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들이 1천여 집이나 되니, 浿水와 帶水 사이92)가 텅 비어 사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는 사람이 없었다. 90) 36년(A.D.18) 가을 7월에 湯井城 을 쌓고 大豆城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圓山城과 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91)을 쌓았다. 37년(A.D.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 이 맞으면 죽었다. 38년(A.D.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다가 동쪽으로는 走壤93)에 이르렀 고, 북쪽으로는 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 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크게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성장하는 2세기 후반이나(양기석, 2000, 앞의 글, 190쪽) 3세기 중 반 고이왕대(노중국, 1988, 앞의 책 ; 김영심,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 로, 서울대박사학위논문), 또는 백제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김기섭, 2000, 앞의 글 ; 이도학,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로 보는 견해가 각각 제기되고 있다. 백제 초기의 부는 주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군관구적인 지방구획의 성격을 가졌으며, 그밖에 행정적인 측면에서 관직 임명이나 순무활동 및 공물 진상 등과 같은 복속의례적인 정치행 위를 통해서 불철저한 지방 지배를 보완하기 위한 기능도 가졌다. 그러나 고이왕대 이후 종래 부 가 갖고 있었던 군사관련 기능이 신설된 좌장과 좌평에 이관되면서 부의 중요성이 그만큼 약화되 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중앙 집권력의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9) 牛谷城 : 본서 권37 잡지 地理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우곡성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23 다루왕 29년(A.D.56), 기루왕 32년(108), 권24 구수왕 16년(229)에 나올 뿐 아니라 우두 성 우산성 등 그와 유사한 지명이 본서에 자주 나오고 있다. 그런데 본서 권32 다루왕 29년 2월 조에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는 기사로 보아 이와는 별개의 성이거나 아니면 후대의 사실이 온조왕대에 부회 서술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다만 말갈의 상시적인 백제 침입 루트상에 있기 때문에 경기도 동북부 일대로 추정되나 현재의 구체적인 지명 은 알 수 없다. 이 사건을 구마한세력이 외부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부흥운동을 추진한 것으로 보 고 이곳을 본서 권23 온조왕 27년(A.D.9) 항복한 마한의 원산성과 금현성의 주민들을 사민시킨 곳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유현용, 1997, 온조왕대 마한정복기사의 재고찰, 사총 46, 22쪽). 90) 湯井城 : 현재의 충청남도 牙山市(舊 溫陽市)로 그 중심지는 아산시 邑內洞山城으로 비정되고 있 다. 이 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瓦片과 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되었다(유원재, 1992, 百濟 湯井城 硏究, 百濟論叢 3 참조). 91) 古沙夫里城 : 현재의 전라북도 井邑市 古阜面에 위치한다. 고사부리성은 본서 권36 잡지 지리 3 에는 古 夫里郡 으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는 古沙比城 으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古泗 로, 周書 권49 열전 백제조에는 中方 古沙城 으로 각각 나온다. 한편 이 고 사부리성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충청도 禮山縣 驛院條에 古沙院(在縣東十三里) 이라 한 기 사에 보이는 古沙院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앞의 책(하), 쪽). 40년(A.D.22) 가을 9월에 말갈이 述川城94)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斧峴城95)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쌘 기병 200 명에게 명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였다. 41년(A.D.23) 봄 정월에 右輔 乙音이 죽자 북부의 解婁96)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 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97)을 고쳐 92) 浿水와 帶水 사이 : 패수는 예성강, 대수는 임진강을 말하는데, 현재의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고구려로 유망해 간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지 명 비정에 대해서는 주 31)과 32)를 참조할 것. 93) 走壤 : 현재의 강원도 春川지방을 말하는데 주 64)를 참조할 것. 94) 述川城 : 현재의 경기도 驪州郡 興川面 일대로(이병도, 1981,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359 쪽 ; 천관우, 1976, 앞의 책(하) 120쪽) 고려시대에 川寧이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 4 漢州 川郡 조에 川郡 本高句麗述川郡 으로 나온다. 말갈은 肖古王 49년(219)에도 이 述川 지역을 공격해 온 일이 있었다. 95) 斧峴城 : 현재의 평강군 평강면에 비정되는데, 주 48)의 대부현과 주 75)의 부현을 참고할 것. 96) 解婁 : 백제 온조왕대에 扶餘 출신의 인물로 우보에 임명될 정도의 북부지역 실권자였다. 우보의 직에 있던 온조왕의 재종숙부[族父] 乙音이 죽자 우보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다. 97) 慰禮城 : 백제 한성도읍기의 도성을 말한다. 위례성에는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있다. 온조 집단이 고구려지역에서 남하하여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인 위례성이 河北위례성(현재의 서울시 中浪川 일대로 비정됨)이고, 한강 남쪽으로 정치적 중심지를 옮긴 이후의 위례성을 河南위례성이

22 42 지었다. 43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43년(A.D.25) 가을 8월에 왕이 牙山98)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9) 9월에 큰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이니 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 45년(A.D.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102)(A.D.28)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입니다. 겨울 10월에 南沃沮100)의 仇頗解 등 20여 집이 斧壤101)으로 와서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권23 百濟本紀 1 多婁王 라고 한다. 본서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도성이라는 의미로 두루 사 용되었지만 주로 백제의 도성제가 확립되는 371년 이전에 한산이란 명칭과 함께 혼용되어 나타 난다. 이 위례성은 본서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 해서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설과 송파구 일대설로 대별하여 논의되어 왔는데(주 11) 참조), 1997~1999년의 서울 풍납토성 내부 및 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 가 백제 한성도읍기의 왕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신희권, 2003, 앞의 글). 위례성에 대해서 는 주 15)를 참조할 것. 98) 牙山 : 본서 권36 잡지 지리 5 熊州 陰峯縣조에 陰峯(一云陰岑)縣 本百濟 牙述縣 으로 나오는데, 아산은 백제때 牙述縣으로 현재의 충남 아산시이다. 99) 큰 기러기[鴻雁] : 기러기 가운데 큰 것을 鴻이라 하고 작은 것을 雁이라고 한다. 詩經 小雅 鴻 之什 鴻 에 鴻于飛 肅肅其羽(大曰鴻 小曰 ) 이라 한 기사를 참조할 것. 詩經 의 鴻은 周 宣王 이 離散한 백성들을 위로하여 오게 하고 安集한 사실을 기술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전란으로 유 망한 백성들을 鴻이라고도 하였다. 본 기사에서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 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00) 南沃沮 : 옥저는 동옥저라고도 불렸으며, 남과 북에 각각의 중심지가 있어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하였다. 동옥저는 옥저의 총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옥저의 중심세력으로 남옥저라고도 불렸 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 大海에 접해 있으 며, 지형은 동북은 길어 천 리나 되고 북으로는 婁 扶餘와 접하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한다고 하였다. 남옥저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흥 지역이며 동예와의 경계선은 정평 일대였을 것으로 추 정된다. 북옥저의 지리적 위치는 길림 연변지구설, 훈춘설, 백두산 북쪽지역설, 흑룡강성 영안 현 동북지역설, 두만강 남쪽지역설 등으로 다양하다.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지역의 정치집단 은 臨屯의 중요 세력의 하나였다. B.C.108년 한군현으로 편제된 후 이곳에 夫租縣이 설치되었 다. B.C.75년 현토군이 만주 興京 老城 방면으로 이동한 후 낙랑군의 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 A.D.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일시 漢의 侯國으로 봉해졌다가 A.D.56년 고구려 태조왕때 고 구려에게 복속되었다. 동옥저를 구성한 세력 중에서는 不耐 華麗 沃沮 등이 유력하였다. 고구 려에 신속된 후 맥포 어염 해중식물과 미녀들을 공물로 고구려에 바쳤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3세기 중반경 동옥저는 5,000여 호였으며, 언 어나 음식, 의복 가옥 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들은 통일된 세력을 多婁王103)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형성하지 못해 大君長은 없었고 각 邑落별로 渠帥들이 자치적으로 읍락내의 일을 운영해 나갔 다. 옥저인들은 步戰에 능하였고, 혼인풍속으로는 賣買婚的 성격을 가진 민며느리제가 행해졌으 며, 장례는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 커다란 木槨에 넣는 일종의 二次葬을 행하였 는데, 한 집안 사람 모두가 동일한 목곽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남옥저는 처음에는 樂浪郡 東 部都尉의 관할하에 귀속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蓋馬고원을 넘어 진출해 오자 고구려의 지배하에 귀속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 각 읍락 단위로 大人을 고구려의 使者로 삼아 貢 納을 징수하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옥저에 대해서는 三國志 30 魏書 東夷傳 동옥 저전 ; 李丙燾, 1976, 後方行列社會의 扶餘 沃沮 및 東濊,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 金哲 埈, 1975,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등을 참조할 것. 101) 斧壤 : 斧壤은 본서 권23 온조왕 22년(A.D.4)에 말갈과 전투를 벌인 大斧峴 (주 48 참조)과 斧峴 (주 75) 참조)과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하고 있다(천 관우, 1976, 앞의 글(下), 118~120쪽 ; 이병도, 1977, 앞의 책, 356쪽). 본서 권35 잡지 지리 2 신라 漢州 富平郡 平康縣에 해당한다. 102) 온조왕 46년 : 이는 온조왕의 재위기간인데, 三國遺事 권1 王曆篇에는 癸卯立 在位四十五年 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1년의 차이는 본서가 卽位年稱元法에 의한 것이고 三國遺事 는 踰年稱元法에 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103) 多婁王(A.D.28~77) : 백제의 제2대 왕. 온조왕의 맏아들. 온조왕 재위 28년(A.D.10)에 태자로 책봉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百濟의 초기 王系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왕계와는 달리 백제를 건국한 두 연맹세력인 溫祚系와 沸流系에 의해 왕실교체가 있었으 며, 후일 온조계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온조계 중심으로 일원화한 것으로 왕실계보를 정리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천관우는 우태-비류-고이계(優氏)와 주몽-온조-초고계(부여씨) 로 나뉘어 두 세력간에 왕실교체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1976, 앞의 글(하), 142~143쪽)가 있다. 또한 백제 초기 왕계 중에서 多婁王-己婁王-盖婁王은 婁 를 공통의 末字를 가지고 있고, 이것 은 沸流系의 시조인 解夫婁의 婁 와 상통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沸流系 왕통으로 파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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