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 士 學 位 論 文 許 氏 五 文 章 家 의 文 學 的 背 景 과 活 動 에 關 한 硏 究 指 導 敎 授 金 鎭 英 慶 熙 大 學 校 大 學 院 國 語 國 文 學 科 郭 貞 禮 2011 年 2 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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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博 士 學 位 論 文 許 氏 五 文 章 家 의 文 學 的 背 景 과 活 動 에 關 한 硏 究 指 導 敎 授 金 鎭 英 慶 熙 大 學 校 大 學 院 國 語 國 文 學 科 郭 貞 禮 2011 年 2 月 日

3 博 士 學 位 論 文 許 氏 五 文 章 家 의 文 學 的 背 景 과 活 動 에 關 한 硏 究 指 導 敎 授 金 鎭 英 慶 熙 大 學 校 大 學 院 國 語 國 文 學 科 郭 貞 禮 2011 年 2 月 日

4 許 氏 五 文 章 家 의 文 學 的 背 景 과 活 動 에 關 한 硏 究 指 導 敎 授 金 鎭 英 이 論 文 을 博 士 學 位 論 文 으로 提 出 함 慶 熙 大 學 校 大 學 院 國 語 國 文 學 科 古 典 文 學 專 攻 郭 貞 禮 2011 年 2 月 日

5 郭貞禮의 文學 博士學位 論文을 認准 함 主審敎授 (印) 副審敎授 (印) 副審敎授 (印) 副審敎授 (印) 副審敎授 (印) 慶熙大學校 大學院 2011年 2月

6 目 次 Ⅰ. 序論 1. 硏究 目的 1 2. 硏究史 檢討 3 3. 硏究 對象 및 範圍 8 Ⅱ. 許曄 學統의 形成과 展開 1. 許曄 學問의 淵源 11 1) 長吟亭 羅湜 : 道德的 實踐의 指向 13 2) 松厓 李畬와 慕齋 金安國 : 博學 과 實用 의 風貌 19 3) 尹鼎叔과 灘叟 李延慶 : 學問的 柔軟性의 獲得 25 4) 花潭 徐敬德 : 獨創的 思惟의 方式 學脈의 繼承과 交遊 樣相 45 1) 許曄 : 人脈의 構築과 擴大 45 2) 許筬 許篈 : 先代의 理念 및 學脈의 繼承 57 3) 許筠 : 家學的 傳統의 收用과 變形 67 Ⅲ. 思惟의 開放性 및 文化的 自尊感의 具現 1. 許筬 : 氣一元論者의 認識 72 1) 箕田圖說後語 에 나타난 朝鮮 後期 實學思想의 萌芽 72 2) 文化交流의 側面에서 본 朝鮮儒學의 海外 傳播 83 3) 委巷文學의 胎動과 三角山 僧伽寺 詩會 의 意義 許篈 : 正學 과 異端, 그 思惟의 境界面 131 1) 海東野言, 思想的 指向의 探究 131

7 2) 朝天記 에 드러난 陽明學 辨斥의 眞義 許蘭雪軒 : 女性, 少數者로서의 글쓰기 165 1) 蘭雪軒에게 있어서의 正體性 問題 165 2) 蘭雪軒 文學의 硏究, 女性主義的 視覺에 대한 反省 許筠 : 多讀 과 博學 의 追求 192 1) 嗜好 로서의 藝術 文學 思想 192 2) 許筠의 天主敎 收入說 에 關한 檢討 211 Ⅳ. 家庭 內 文藝意識의 成長과 그 變因 1. 士林 遺風의 繼承과 道學에의 指向 文藝意識의 覺醒과 天才性의 發顯 文藝的 傳統의 樹立과 深化 255 Ⅴ. 結論 281 참고문헌 287 abstract 299

8 Ⅰ. 序論 1. 硏究 目的 우리 문학사에서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 연간(宣祖年間)은 이른바 목릉성 세(穆陵盛世) 1)라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문운(文運)의 절정을 이룩한 시기였다. 그 가운데에는 한 가문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문화적 토 양 아래 각자의 재능을 펼침으로써 시대의 일가(一家)를 이루는 일도 적지 않았 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양천(陽川) 허씨 가문의 허엽(許曄)과 그 자녀들이다. 부친 허엽을 비롯, 그의 세 아들 성(筬) 봉(篈) 균(筠)과 딸 난설헌(蘭雪軒) 은 후대인들에 의해 허씨오문장가(許氏五文章家) 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다방면 에 걸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는데, 허균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를 이렇게 드러낸 바 있다. 우리 선대부(先大夫)의 문장과 학문, 절행(節行)은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되 었다. 백형(伯兄)은 경전(經典)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중형(仲兄)은 박학(博學)하고 문장이 매우 고고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청장(淸壯) 준려(峻麗)하여 개원(開元)ㆍ대력(大曆) 연간의 사 람들보다 뛰어났고,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천신사부(薦紳士夫)들이 모두 칭 찬한다. (중략) 나도 우리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 문예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참여되고, 중국 사람들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중략) 그리하여 당시에 문헌(文獻)하는 집으로서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첫째로 꼽았다. 옛적에 유 효작(劉孝綽) 일가의 부자 자매가 함께 문장에 능하였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 기를 허(許) 사(史)의 부귀와 왕(王)ㆍ사(謝)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 문헌에 는 미치지 못한다 고 하였는데,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한다.2) 1) 목릉(穆陵) 은 선조의 능호로 목릉성세(穆陵盛世) 라는 명칭은 선조조의 문화적 치적(治 積)을 기려 붙여진 것인데 당대의 인물인 김귀영(金貴榮) 오건(吳健) 박순(朴淳) 및 후대 문인들의 문집, 실록의 기록 등에는 거의 모두가 목릉성제(穆陵盛際) 는 용어를 쓰 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2) 許筠, 惺所覆瓿稿 卷24, 說部3, 惺翁識小錄下, 我家門之文章學問節行 我家先大夫文 章學問節行 推重於士林 而伯兄傳經訓 文章亦簡重 仲兄博學 爲文章甚高古 近代罕比 姊氏 詩尤淸壯峻麗 其高出於開元 大曆 名播中州 薦紳士皆傳賞之 (중략) 雖不肖亦不墜家業 叨 竊名於談藝之士 中國人亦頗稱之 (중략) 當時文獻之家 必以余門爲最云 昔劉孝綽一家父子 - 1 -

9 위에 서술한 허균의 글이 아니더라도 이들 집안의 명성이 국내외에 전해진 사 실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에는 허 엽의 세 아들 성 봉 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 김성립(金誠立)이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가 가문들 가운데 가장 치성(熾盛)하다. 고 하였다 3)는 기록이 전해지며, 후대의 박지원(朴趾源)이 찬(撰)한 동의보감(東醫寶鑑) 의 서문에도 상고하건대 조선 사람들은 애초부터 문자를 알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허(許)는 그 중의 세족(世族)이어서 만력(萬曆) 때 봉ㆍ성ㆍ균 등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누이동생 경번(景樊)의 재명(才名)은 그 오빠들보다 더욱 더 뛰어났으니 (이들이) 구변(九邊)의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걸출한 자들이었던 것 이다 4)라는 글귀가 남아 있어 이들 가문의 문명(文名)이 당파와 시대를 초월해 널리 전해진 사실을 알게 한다. 이 밖에, 명말(明末)의 전겸익(錢謙益)이 찬한 열조시집(列朝詩集) 에 허균 이 두 형 허봉 허성과 더불어 문장으로 동해(東海)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허균 이 더욱 민첩하였던바 한 번 본 글은 잊어버리지 않고 시문을 모두 암송하였다. 허경번(許景樊)은 그의 누이동생이다 5)라는 언급이 있는 것이나, 이들의 시문이 명시산(明詩刪) 명시종(明詩綜) 황화집(皇華集) 정지거시화(靜志居 詩話) 등에 두루 수록되어 있는6) 것은 이들의 명성이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진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본 연구는 인물 개개인의 문학적 성취가 아닌, 허엽 일문(一門) 전체의 집단적 성과와 그것을 낳게 한 배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이 활동했던 명종~광해군 집권기는 사림 세력의 성장을 바탕으로 붕당 정 치가 실현되었고,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시련이 지나간 역사적 격변 기였다. 그런 가운데 당시 조선의 학계에는 주자성리학의 이론 탐구에만 매몰되 姊妹俱能文 嘗自詑以爲許史富貴 王謝蟬冕 皆不及渠家文獻也 不肖亦云 3) 宣祖修正實錄 卷14, 13年(1580) 庚辰 2月 1日, 三子筬篈筠 女壻禹性傳金誠立 皆以文 士登朝 論議相高 故世稱許氏爲黨家最盛 4) 朴趾源, 熱河日記, 口外異聞, 東醫寶鑑 按朝鮮俗 素知文字喜讀書 許又世族 萬曆間篈 筬筠兄弟三仁 俱以文鳴 女弟景樊才名復出厥兄之右 九邊諸國最爲傑出者也 5) 韓致奫, 海東繹史 卷69, 人物考3, 本朝 許筠與二兄篈筬 以文鳴東海 而均又敏捷 一覽 不忘 詩文皆能闇誦 景樊其妹也 허난설헌을 허균의 누이라고 소개한 것은 전겸익의 착 각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6) 成百曉 譯註, 陽川世稿, 양천허씨대종회, 2000, p

10 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모색하는 데 전력했던 일단의 지성(知性)들이 존재했던 사실이 확인되는데,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으로 대 표되는 이들 집단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 어느 한 분야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 한 분야의 학문을 포용 절충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 같은 변화의 중심에서 화담의 학통을 계승한 허엽과 그 자녀들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고착되지 않은 다양하고 유연한 사유체계를 획득하였으며, 이를 바탕으 로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여기에는 (형님들은) 어려서 유미암(柳眉巖) 선생에게 사사하였지만 가정의 훈도(訓導)에서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 7)는 허균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 가학(家學) 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 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본고는 허엽 일문의 학통과 그로 인해 형성된 가학 및 인 물들의 사상적 특질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인물들이 지닌 사유의 방식이 당대의 문학 및 사상계 전반에 걸쳐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개개인의 구 체적 활동을 통해 살펴 볼 것이며, 그들의 노력이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문화 변동에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했는지를 밝히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또한 저술보다는 이학(理學) 에 치중했던 선대(先代)의 기풍이 여러 인물들을 거치며 어떻게 변모되어 갔는지 그 양상을 분석하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허엽 일문이 문예로서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는 가인들의 특별한 자질 외 에도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변인(變因)을 밝히는 과정을 통 해 조선 중기 문예의식의 정립과 그 특질을 어느 정도 구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 같은 노력이 소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허엽 일문의 구성원들이 단지 뛰어난 문사로서만이 아닌,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 했던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새로이 주목받을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硏究史 檢討 허엽 일문의 학문과 문예에 관해서는 상당한 연구 성과가 집적되어 있으나, 7) 許筬, 岳麓集, 墓碣銘(金世濂 撰) 少師柳眉巖 得於家庭之訓最多 - 3 -

11 그 대부분이 허균과 난설헌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부 친 허엽이 당대의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고 사림에게 있어 한 가문의 학문적인 전수는 부자(父子) 형제 구생(舅甥) 등 가학(家學)이 중심이 되었 다8)는 사실을 상기할 때, 여타의 인물과 관련한 논의들이 인물 각자의 문학적 사상적 특질을 구명(究明)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허씨오문장가 라 칭하는 허엽 일문의 5인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끌었 던 인물은 역시 허균이다. 허균의 문학에 관한 본격적 논의는 홍길동전(洪吉童 傳) 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1957년 최초의 논문9)이 발표된 이래 현재까지 약 180여 편의 학위 논문이 나올 정도로 홍길동전 은 학계의 집중적 인 조명을 받았다. 홍길동전 으로부터 촉발된 허균 문학에의 관심은 점차 전(傳) 문학과 문학 사상10), 시(詩)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는데, 이 같은 사실은 허균의 문학적 역량이 남달랐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여러 분야에 대한 총체적 연구가 이루어져 야 할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11) 허균의 시에 관한 초기 연구는 주로 그의 시 의식(詩意識)에 초점을 맞추어 8) 李樹健, 嶺南士林派의 形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p.7 9) 홍길동전 및 허균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는 1957년에 나온 손순규의 홍길동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다. 10) 허균의 사상에 대한 논의 대부분이 도교(道敎)와의 관련 하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문규는 1986년의 박사 논문에서 허균의 전(傳)이 도교적 사고 의 일면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도교사상을 드러내고자 이 작품 들을 쓴 것은 아니다 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일사소설(逸士小說)에 나오는 신선 역시 신선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아와 세계의 심각한 대결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된 것 이라는 조동일의 견해에 대해 지지의 입장을 밝혔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도 허균과 도교사상과의 관련성에 집중하는 연구는 꾸준히 양산되고 있다. 허균과 도교사상 과의 관련성을 논한 주요 업적들은 다음과 같다. 최삼룡, 韓國 傳奇小說의 道仙思想 연구 : 김시습과 허균의 소설을 중심으로, 고 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1 박영호, 許筠 文學 硏究 : 道敎思想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 문, 1992 손길원, 古小說에 나타난 道仙思想 硏究,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8 심동복, 허균의 도교사상에 대한 연구 : <홍길동전>과 그의 한문소설을 중심으로, 고소설연구 4집, 한국고소설학회, 1998 강민경, 大自由를 향한 逸脫, 許筠 遊仙文學 小考, 도교문화연구 21집, 한국도교 문화학회, ) 이문규, 許筠 散文文學 硏究, 삼지원, 1986, p

12 전체적인 특질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허경진이 허균의 시 전체 구 조를 현실에 대한 불화와 그 극복 으로 보고 현존하는 허균의 시들이 그의 현 실 극복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한 반면,12) 안병학 황위주 등은 허균이 현실에 참여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실제의 현실 사이에서 심적 고뇌를 겪은 사실에 주목하고 이로 인해 방황하는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 그 시작(詩作)이라 설명하였다.13)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래에는 시작에 드러난 도교 불 교 풍속 등의 요소에 천착하거나 사행시(使行詩) 등에 집중한 연구들이 다수 생산됨으로써, 허균 시의 연구는 종합적 흐름에서 벗어나 점차 세분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14) 홍길동전 이나 전(傳) 문학 등 어느 일면에 국한된 지엽적 연구에서 벗어나 허균의 산문 전반을 논한 것으로는 이문규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15) 이문규는 허균의 산문 작품들이 거의 모두가 사회 고발 내지는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으 며, 그 성격은 기(記) 에서 전(傳), 다시 홍길동전 으로 이행되어 가며 더욱 뚜렷해진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허균의 산문에서 현실 비판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문학이 자기 시대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허균의 의식이 표현된 것이며, 그가 삶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 주기 위해 산문의 창작에 힘쓴 것이라는 견해도 아울러 피력하였다. 이문규의 논의 이후 일각에서는 허균 산문의 종합적인 특질 규명에 힘을 기울 인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기 나 간독(簡牘) 등의 잡저(雜著)에 관심을 표명하 는 등 연구의 방향이 다각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최근의 학계에서는 작가나 작품과 관련한 일반적 연구에서 벗어나 시 비 평가 또는 시선자(詩選者)로서의 허균의 모습에 주목하거나 그의 문학 이론 및 문장론, 명대(明代) 문학과의 관계16)로까지 관심의 폭을 넓히고 있는데, 이미 축 12) 허경진, 許筠 詩 硏究,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안병학, 許筠의 文學論과 內在的 超越,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79 황위주, 許筠詩 硏究 : 作品 世界의 變貌와 그 意味를 中心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게 데에는 허균 시의 분량이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2005년에 발굴된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에 수록된 것까 지 합산하면 허균의 시는 약 1000여 수에 달하는데, 이로 인해 선학들의 상당한 업적 에도 불구하고 허균 시의 전체적인 특질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5) 이문규, 許筠 散文文學의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6 정교주, 許筠文學 硏究 : 文學觀과 散文 作品의 갈래별 特性을 中心으로, 성신여자 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3 적된 연구 성과가 상당한 양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미제(未濟)로 남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은 허균 문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허경진 이문규의 논의를 기점으로 허균 문 학에 관한 다양한 탐색들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물들을 종합 정리 하는 작업이 오랜 기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허균과는 비교가 될 수 없으나, 허난설헌에 관련된 연구 역시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다. 1960년 허난설헌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17)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 지 약 50여 편의 학위 논문 및 관련 저작들이 발표되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허미자의 업적을 들 수 있다. 그는 1980년의 박사 논문에서 난설헌의 시에 나타난 물 과 공기 의 이미지를 그녀의 의식 세계와 관련 지어 설명하였으 며,18) 1984년의 저서 허난설헌 연구 에서는 난설헌의 문집 및 작품, 비평에 대 한 자료들을 종합 정리하여 난설헌 연구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19) 이숙희와 김명희 역시 원전(原典)에 입각, 난설헌의 시 세계를 총체적으로 규 명함으로써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위로 끌어 올렸다.20) 16) 허균과 명대(明代) 문학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 활발히 진행되었는 데, 현재까지의 주요 연구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신용철, 明淸 思想史의 成果와 課題 : 이탁오의 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명청사 연구 19집, 명청사학회, 2003 박현규, 許筠이 도입한 李贄 著書, 중국어문학 46집, 영남중국어문학회, 2005 우상렬 임향란, 李贄與許筠比較論, 중국학연구 41집, 중국학연구회, 2007 강명관, 안쪽과 바깥쪽, 소명출판, 2007 강명관,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2007 이병순, 前後七子에 대한 許筠의 인식, 한문학논집 27권, 근역한문학회, 2008 최영준 김춘희, 陽明學 志向者에게 보이는 狂 의식 考察, 양명학 21호, 한국양 명학회, 2008 안나미, 17세기초 公安派 문인과 조선 문인의 교유 : 丘坦과 許筠, 李廷龜의 관계 양 상, 한문학보 20권, 우리한문학회, ) 허난설헌에 관한 최초의 학위 논문은 장연숙의 허란설헌의 시에 관한 연구 (이화여 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60)이다. 18) 허미자, 韓國 女流 詩文學 硏究 : 意識의 物質 象徵과 內面性을 中心으로, 단국대학 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허미자, 허난설헌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 허난설헌의 시문학에 대한 종합적 연구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이숙희, 허난설헌의 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7 김명희, 許蘭雪軒 詩文學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7 장인애, 허난설헌의 시문학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4 최근 난설헌 문학의 연구 동향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에서21) 도교사 상과의 관련성 연구,22) 국내외 여성작가와의 비교 등으로 다각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그간 선학들에 의해 계속되어 온 난설헌 시의 기층 의식이나 이미지 등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데에 기인한 현상으로 판단된다. 허엽 허성 허봉의 경우에는 그 대단한 재명(才名)에도 불구, 별다른 연구 성과를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을 자아내는데, 그나마 1990년대 들어 소수의 연 구자들이 허봉의 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써 위안을 삼을 뿐이다.23) 하 지만 그마저도 전체 시작(詩作)을 주제별로 분류하거나 시와 작가의 삶을 관련 지어 설명하는 인상비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허봉의 또 다른 저 작인 조천기(朝天記) 해동야언(海東野言) 에 관련한 연구24) 역시 초기의 논의에서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좀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고 하 21) 22) 23) 24) 한성금, 許蘭雪軒 漢詩의 美學, 조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허난설헌 시를 분석한 연구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차옥덕, 許蘭雪軒에 나타난 페미니스트 의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 논문, 1986 유임순, 허난설헌 시에 나타난 페미니즘 의식 연구, 공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4 난설헌 문학을 도교와 관련지어 논한 것으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김명희, 許蘭雪軒의 <遊仙詞> 硏究, 한국문학연구 5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 구소, 1982 서재남, 許蘭雪軒과 그의 詩 硏究 : 神仙思想을 中心으로, 숭전대학교 대학원 석 사학위 논문, 1984 곽선희, 許蘭雪軒의 遊仙詞 考察,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0 정상균, 허난설헌의 <夢遊廣桑山詩> 연구, 고시가연구 8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1 조연숙, 허난설헌의 <宮詞> 연구, 한중인문학연구 27집, 한중인문학회, 2009 허봉의 시문학에 관한 연구의 전체 목록은 다음과 같다. 손회문, 荷谷 許篈의 漢詩 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2 김지연, 荷谷 許篈의 漢詩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6 송은정, 荷谷의 詩 世界, 동방한문학 12집, 동방한문학회, 1996 오현주, 荷谷 許篈 詩 硏究,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박수천, 하곡 허봉의 시문학, 한국한시작가연구 7집, 한국한시학회, 2002 허봉의 朝天記 및 海東野言 과 관련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한매, 허봉 <朝天記>의 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김동진, 허봉의 大明使行과 陽明學 辨斥, 문화사학 21호, 한국문화사학회, 2004 최강현, 허하곡의 <조천록>을 살핌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을 중심으로, 한 국사상과 문화 22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최이돈, <海東野言>에 보이는 허봉의 當代史 인식, 한국문화 15집,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5 겠다. 허성의 문학에 대한 연구로는 졸고(拙稿) 악록(岳麓) 허성의 한시 연구 25)가 유일하며, 사상적 측면에서는 그의 사상적 특질을 퇴계 문인 김성일(金誠一)과 대비해 설명한 김정신의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26) 허엽의 경우에는 그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은 탓에 관련 연구 역시 전무한 실정이지만 허엽이 그 자녀들에 게 끼친 영향이 실로 막대함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연구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허엽 일문의 사상과 문학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허균과 난 설헌, 양인(兩人)에게만 극도로 치우친 감이 있다. 물론 이들의 문학적 역량이 그 누구보다 탁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학이 형성된 배경과 사상적 연원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보조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던 주변 인물들에 게까지 관심의 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이 계층의식보다는 학파(學 派)나 문파(門派)에 따라 움직였던 사림의 일원이었음을 생각할 때,27) 허엽 일문 의 가학적(家學的) 특질을 살피는 작업은 다양한 사유체계를 모색하고 그를 현 실 속에서 실천하는 데 전념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전모를 밝히는 일과도 상당 부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3. 硏究 對象 및 範圍 본고에서는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로의 이행(移行)을 준비하던 조선 지 식인들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는 화담의 고제(高弟) 중 하나인 초당 허엽의 가문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다양한 지적 탐색을 통해 형 성된 허엽의 학문이 독특한 가학(家學)을 이뤄 그 자녀들에게 온전히 전수된 것 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대개 사림의 학문은 그 가정적인 학문의 전통이 기초가 되고 거기에 혈연적인 관계나 지연(地緣) 상의 유대가 얽혀 있는 것이 보통임을 25) 拙稿, 岳麓 許筬의 漢詩 硏究,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 金貞信, 16세기 성리학 이해와 현실 인식 - 對日外交를 둘러싼 許筬과 金誠一의 갈등 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13집, 2000, 조선시대사학회 27) 이종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 p

16 생각할 때, 허엽의 학문적 특질을 추출해 내는 작업은 그 자녀들의 문예나 사상 을 연구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인물들의 저작 및 관련 활동에 드러나는 가학의 특질을 구명(究明)하는 데 초점을 두어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활동 의 개념이 문예의 방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정치 문화의 전 영역을 포괄하 는 것이란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처럼 논의의 범위를 확대하게 된 데에는 잔존 하는 자료의 질과 양이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였으며, 문 예 자료만으로 인물 각자의 성향을 밝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 문이다. Ⅱ장에서는 먼저 허엽의 복잡한 사승(師承) 관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허엽은 서경덕 이외에 5~6명의 인물들로부터 학문을 전해 받았는데, 이렇듯 복잡한 허 엽의 수학 내력은 허엽 한 사람의 사상적 편력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진지한 고민을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가문의 가학이 형성되고 전수된 양상을 살펴보는 일은 임진 왜란을 전후한 조선 사상계의 변화를 구명하는 작업으로서 또 다른 의의를 지닌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허엽의 학문이 가학을 형성, 그 자녀들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 려진 바이나 그 대부분의 논의가 구체적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내린 피상적 결 론이었다는 점에서 보완이 요구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문헌 자료를 통해 드러난 인물들의 인적 교유 및 학맥의 계승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허엽의 학통이 실제로 그 자녀들에게 이어졌던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인물 개개인에 내재된 사상적 특질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발현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먼저 허엽의 맏아들 허성이 지은 기전도설후어(箕田圖說後語) 를 분석하여 이미 그로부터 조선 후기 실학 의 기본 논점과 문제의식이 싹트고 있었음을 증 명하고, 허성이 1590년의 사행 당시 일본의 선승(禪僧)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 窩]와 교유하며 그에게 조선 유학을 전했던 일에 관해서도 논의를 전개할 것이 다. 다음으로는 허성이 젊은 시절 참여했던 시회(詩會)의 기록인 승가수창록(僧 伽酬唱錄) 을 고찰, 이 시회가 후대 위항시사(委巷詩社) 의 원형이 될 수도 있 음을 밝히고자 하며 특히 유희경(劉希慶)이 주도한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 와 - 9 -

17 의 관련성에 초점을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허봉의 경우에는 그의 저작들에 드러난 사유적 특질에 중점을 두어 연구를 진 행할 것이다. 먼저 허봉이 편찬한 야사서 해동야언 을 살펴보고 이 책에 드러 난 그의 사상적 지향에 관해 논할 것이며, 1574년의 사행록인 조천기 의 분석 을 통해 허봉이 사행 당시 펼쳤던 양명학 변척의 배경과 그 진의(眞義)를 찾아 보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난설헌의 경우에는 그녀의 글쓰기 행위가 갖는 의미 자체를 밝히는 일에 집 중하여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우선 조선조 사대부 여성으로서 난설헌이 겪어 야 했던 정체성 의 혼란에 주목하고, 그것이 그녀의 문학 행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또 지나치게 여성성 을 강조하는 쪽으로만 편향되었 던 그간의 연구 방법을 반성하고, 이를 토대로 난설헌 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 을 제시하려 한다. 허엽 일문의 학문적 특질은 박학 및 개방성 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같은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인물이 바로 허균이다. 본고에서는 예술, 문학, 사상 전반에 걸친 허균의 폭넓은 관심을 살펴보고 그의 맹렬한 지적 호기심이 가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허균의 천주 교 수입 논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 볼 것이다. 이어 Ⅳ장에서는 이들 가문 내에서 문예에 관한 의식이 정립되고 확산되어 간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허엽은 기묘사림의 유풍을 이어 저술보다는 경학의 연 구에 전력하였는데, 자녀들 대에 이르면 그 양상이 조금씩 달리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훗날 이들이 허씨오문장가 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을 만큼 세상에 서 문재(文才)를 인정받게 된 데에는 각자의 재능 및 기질, 개인의 경험, 당대 문단의 변화 및 교유 관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던 바, 그 각각 의 변인(變因)을 살핌으로써 허엽에서 허균에 이르는 가정 내 문예의식의 변모 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여러 작업들은 허엽 일문이 지녔던 사유의 개방성 및 문화적 자존감의 전모를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생존했던 당시 에는 사림 세력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유체계의 모색 및 그 실천에 주력하려는 일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는데, 허엽 일문에게서 성리학 이해에 있어 어느 한 분 야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포용 절충하려 했던 새로운 지식 인들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8 Ⅱ. 許曄 學統의 形成과 展開 1. 許曄 學問의 淵源 허엽(許曄 : 1517(중종12)~1580(선조13))의 호는 초당(草堂), 자는 태휘(太 輝)로 군자감 부봉사(軍資監副奉事)28)를 지낸 허한(許澣)과 창녕 성씨(昌寧 成 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허엽의 증조부인 허창(許菖)의 관직이 신계현령 (新溪縣令)과 정육품 전적(典籍)에 머물렀고 조부인 허담(許聃)이 금화사 별제 (禁火司 別提)29)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선대에는 비교 적 가세가 한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엽은 24세이던 중종 36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명종 1년(1546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成均館) 전적ㆍ직강(直講),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의 좌랑(佐郞) 및 정랑(正郞),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헌부(司憲府) 장령(掌 令)과 집의(執義) 등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 17년(1562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나 이 해 가을, 야대(夜對)에서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주장하고 구수담(具壽聃)을 사사(賜 死)한 잘못을 논한 일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명종 22년(1567 년)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에게 죄를 줄 것과 이황(李滉)을 극진한 예(禮)로써 부를 것을 주청하였고, 학행(學行)이 있는 서얼 (庶孼) 박형(朴泂)에게 녹(祿)을 주도록 청해 윤허를 받기도 했다. 이듬해인 1568년(선조1)에는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시 1년 뒤에는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이황과 조식에게 한조(漢朝)의 고사(古事)에 따라 세미(歲米)를 지급하고 장리(長吏)가 때때로 존문(存問)하며 제생(諸生)이 28) 군자감(軍資監) 은 조선시대 군량미 등 군수품의 저장 관리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으로 부봉사(副奉事) 는 정9품의 말직(末職)이었다. 29) 금화사(禁火司) 의 원명(原名)은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로, 이는 조선시대 궁성 도성(都城)의 수축(修築)과 궁궐 관청 시내 민가의 소화(消火)를 관장하던 관청이 었다. 별제(別提) 의 직급은 장부를 조사하던 정(正) 종(從) 6품의 관직으로서, 원래 는 무록관(無祿官 : 조선시대 녹봉(祿俸) 없이 전지(田地)만 지급 받은 관원)이지만 360일을 근무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허엽의 조부인 허담의 과거 급제에 관한 기록은 국조방목(國朝榜目) 을 포함한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지만, 노수신이 찬한 허엽의 신도비(神道碑) 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9 가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道)를 배울 것을 청하였다. 허엽은 이후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내며 사습(士習)을 크게 혁신하 였으며, 1575년(선조8)의 동서분당 당시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領袖)가 됨 으로써 그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선조 12년(1579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백 성의 교화에 힘을 쓴 바 한 달도 안 되어 군읍(郡邑)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이듬 해 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던 중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64세를 일기 로 졸(卒)하였다. 그는 사후에 화담서원(花潭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초당 집(草堂集) 이 전한다.30) 허엽은 3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錄選)되었고, 아홉 번이나 성균관을 맡아 개연(慨然)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자임(自任)하고 선(善)을 붙들고 악(惡)을 막았으며 폐지되고 실추된 것들을 일 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31) 그는 중종반정의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된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의 딸과 혼인하여 맏아들 악록(岳麓) 허성(許筬)과 두 딸(박순원 (朴舜元)과 우성전(禹性傳)의 처(妻)32)을 낳았다. 후에 첫 부인과 사별하고 다시 예조참판(禮曹參判)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얻어 2남 1녀를 얻었는데, 이 들이 바로 당대의 재인(才人)으로 이름이 높았던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난설 30) 허엽의 생애에 관한 내용은 양천허씨세고(陽川許氏世稿) 와 한국문집총간 초당집 (草堂集) 의 해제를 참고했다. 31) 陽川許氏世稿, p.255, 九領太學 慨然以作人自任 扶善遏惡 起廢墜 32) 허엽의 맏사위 박순원(朴舜元)의 자는 응초(應初),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그는 송월 당(松月堂) 호원(好元)의 아우이다. 1567년(명종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음사(蔭仕)로 관직에 진출, 동몽교관(童蒙敎官)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및 안 성, 덕산, 고성 등지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후 평양서윤(平壤庶尹)과 안산군수, 영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6년(선조29) 덕산 현감을 지낼 당시 이몽학(李夢鶴)의 난 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봉해졌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 직(贈職)되었다. 둘째 사위 우성전(禹性傳)의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 으로 그는 이황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 봉 교(奉敎) 수찬(修撰) 등을 지냈으며 1583년 응교(應敎)에 오르고, 사인(舍人)을 역 임하였다. 우성전은 후에 남인(南人)의 거두(巨頭)가 되었으나 1591년 서인 정철(鄭 澈)이 물러날 당시, 북인의 책동으로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강화에 들어가 김천일 (金千鎰) 등과 함께 도처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의병장으 로서 활동을 계속하여 퇴각하는 왜군을 의령까지 추격하였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 증되었다. 저서에 역설(易說) 이기설(理氣說) 계갑일록(癸甲日錄) 등이 있다

20 헌(蘭雪軒) 초희(楚姬), 교산(蛟山) 허균(許筠) 남매이다. 허엽의 학풍과 사상이 그의 세 아들, 성 봉 균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고 허균 역시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家庭)에서 나왔다 는 언급을 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그 자녀들에 대한 부친 허엽의 영향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그 자녀들의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논하 기 위해서는 부친 허엽의 학통을 세밀히 검토하고 그 특질을 추출하는 작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 長吟亭 羅湜 : 道德的 實踐의 指向 허엽의 지기(知己)였던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은 허엽의 신도비명(神道碑 銘) 에서 그의 학문적 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공(公)은 기상과 도량이 일찍 이루어져 7~8세에 효도와 공경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다.(중략) 하루는 홀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에 학문이 어둡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논하여 이르는 바는 볼 만 한 것이 많았다. 정자와 주자 이후로 학문이 밝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얻 은 바가 도리어 한(漢) 당(唐)만 못한 것은 어찌 스스로 터득함과 남의 말을 얻 어 들은 것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하고 인(因)하여 나식(羅湜) 공에게 질문하였 다. 또한 공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이 인종(仁宗)에게 심경부주(心經 附註) 를 강(講)하도록 권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찾아 읽고 놀라워하며 학문 의 바른 길을 찾았고, 진천(鎭川)의 이여(李畬) 선생이 수학(數學)에 정통하며 주 역(周易) 에 이해가 깊다는 말을 듣고 다시 나아가 전수 받았다. (허엽 공은) 후에 화담 서경덕 선생에게 사사했는데 (화담이) 위독해지자 원리기(原理氣) 등 여섯 편의 논문을 공에게 구술해 전하게 했다.33) 위의 기록은 허엽이 점차 정주학(程朱學) 일변도로 고착되어 가는 당대의 학 33) 許曄, 草堂集, 附錄, 神道碑銘 公之器宇夙成 七八歲 孝友絶人 (중략) 一日忽喟然 嘆曰 程朱未出 學非不晦 論人所到 多有可觀 程朱以後 學非不明 其所樹立 反下漢 唐 豈自得與聞見有異也與 因質之羅公湜 聞晦齋李先生勸仁廟講心經附註 索而讀之 怳有蹊徑 可尋 鎭川李先生畬精數學 尤邃於易 復進受 後事文康于花潭 疾革 口占原理氣等六篇遺公 (이 같은 내용은 정구(鄭逑)가 찬한 허엽의 행장(行狀) 에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21 풍에 대해 회의를 가졌으며, 이를 자득(自得)의 묘(妙) 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음 을 보여 준다. 또한 윗글에 나타난 허엽의 사승 관계를 상고해 보면 그의 학문 과 사상의 연원이 개혁 사림파의 전통에 잇닿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엽의 스승들 중 최초로 언급된 나식(羅湜 : 1498(연산군4) 1546(명종2))34) 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화자로서 사림의 계보를 잇는 인물인데,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명종대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지만 실제로는 사림에 대한 훈구파 의 공격으로서 기묘사화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이었다. 조선조 새로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등장한 유학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림 을 중심으로 한 도학 정신이 정통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있었던 무오(戊午) 갑자(甲子)의 두 사화와 뒤 이어 일어난 기묘사화 을사사 화를 거치면서 사림은 크게 위축되었고, 성현의 책이 오히려 화란(禍亂)의 씨앗 으로 인정되어 기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학자들은 사림파들이 위기지 학(爲己之學)을 위한 기본적인 율신서(律身書)로서 중시하던 소학(小學) 이나 성리학 입문서로서의 근사록(近思錄) 등을 감추어 두고 읽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침잠하려는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다.35)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허엽이 나식을 찾아가 학문을 전수 받게 된 계 기는 그 아들 허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禍)를 당한 후로는 인가(人家)에서는 소학 과 근사록 을 말하기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에 장음(長吟) 나식(羅湜)에게서 배웠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이 슬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그것을)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 공(羅公)에게 가서 보이니, 공이 깜짝 놀라면서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 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전현(前賢)들의 불운을 슬퍼하였 34) 을사사화(1545) 당시 화를 입은 인물들의 전기를 모은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에는 다 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나식(羅湜)의 자는 정원(正原)인데, 호협하고 의(義)를 좋아하였 다.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을사년의 화가 일어나자 이휘(李徽)의 공사(供辭)에 연루되어 장형(杖刑)에 처해지고, 흥양(興陽)에 귀양 가 안치(安置)되었다 1670년에 간행된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에도 본관은 비안(比安) 안정현 (安定縣)이고 자는 정원(正源)이며 자호를 장음정(長吟亭)이라 했다. 자질과 성품이 빼어났 으며 절세의 천재로서 시가 담박하고 예스러웠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먼 변방으로 귀양 갔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35) 한국사상사연구회 編著, 朝鮮儒學의 學派들, 예문서원, 1996, p

22 다. 선친께서 이를 배우기를 청하니, 나공이 매우 칭찬하고는 소학 과 근사록 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36) 나식은 전고대방(典故大方) 에 조광조의 문인으로 이름이 올라 있고 동유사 우록(東儒師友錄) 에는 조광조와 윤정숙(尹鼎叔)에게 사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37) 나식의 스승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김종직(金宗直)과 김굉필 (金宏弼)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의 도통(道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특히 소학 과 근사록 을 중시하였다. 김굉필 조광조 김안국 이황 등 소위 도학파들은 인격 형성을 위한 도덕 적 실천 규범을 소학 에서 찾았으며, 이 책을 학문적 연마에 선행하는 일상생 활의 실천적 행동 규범에 대한 기본 과목으로 인식하였다. 또 근사록 은 주자 가 정리한 송대(宋代) 도학의 교과서적 저술로서 정암 도학사상의 원리적 배경 이 되기도 했다.38) 따라서 허엽이 정암의 문하에서 수학한 나식으로부터 이 책 들을 사사(師事)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사림의 도학적 이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직접적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39) 실제로 허엽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기묘사림 들의 철학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현실 정치에 반영하고자 하 는 노력을 평생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묘사림들은 16세기 초반의 조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는 권력의 도덕화가 필요하고 그것이 집권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40) 공맹(孔孟)의 사상과 도를 정치, 경제나 백성의 교화에 실 제로 현실(現實)시키는41) 실천적 유학을 지향했다. 그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조 36) 許筠, 惺所覆瓿藁 卷23, 惺翁識小錄 中, 己卯士禍後人家諱言小學近思錄 己卯士類 敗後 人家諱言小學 近思錄 一切禁子弟不學 先人少日受學於羅長吟湜 曾見外家廢龕中有 小學四卷 蠹毀散亂 展看則知其學者之不可不讀 袖初卷詣羅公 公驚曰 你安得此鬼朴來耶 因流涕悼前賢之厄死 先人因請學 羅公甚嗟賞之 遂敎小學及近思錄 然勿令人知之 37) 한국학문헌연구소, 典故大方, 아세아문화사, 1975, p.190 朴世采 編, 東儒師友錄, 韓國敎會史硏究所, 불함문화사, 1977, p.11 참조 38) 李相星,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심산, 2003, pp.102~103 참조 39) 明宗實錄 卷8, 3年(1548) 6月 25日條 기사에서도 허엽과 나식에 대한 언급이 발견 된다. 허엽이 지금 정언(正言)으로 체임(遞任)되었는데, 엽(曄)은 일찍이 나식의 고 제(高弟)로서 당시에 명사로 알려졌다(許曄今遞 正言曄 嘗以羅湜之高弟 見稱於時) 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허엽과 나식이 일시적으로 종유(從遊)한 관계가 아니라 진 정한 사제(師弟)의 관계로 공인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40) 정호훈, 16 7세기 <警民編> 刊行의 推移와 그 性格, 韓國思想史學 26輯, 한국사 상사학회, 2006, pp.121~

23 광조 등은 향약(鄕約)을 중시하고 온 나라에 시행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는데, 이 들은 향약을 행하는 고을에서는 양민을 강압하여 천인으로 만들고 관채(官債)의 납부를 막는 일들은 보지 못하였다 42)고 하며 향약의 시행을 통해서만이 공권 (公權)의 정상적 작동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43) 하지만 기묘사림들의 이 같은 시도는 사화로 인해 중지되었고 모든 성과는 혁파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약 50여 년 후인 1572년, 당시 대사간이었던 허엽은 선조에게 향약 을 설치하자는 주청을 올렸지만 이는 우활(迂闊)하여 세속을 소란하게 할 뿐이 라고 하여 거부당했고,44) 1573년과 1574년에도 거듭 향약의 시행을 시도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허엽은 어떤 정치 이념과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향약의 설치를 적극 주장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실록 의 기록 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1574년, 선조가 향약의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했다가 기한(飢寒)에 허 덕이는 백성에게 억지로 권하여 예를 행하게 할 수는 없다 는 이이의 권고로 논 의를 중지시킨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허엽과 이이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촉발되었는데 민생(民生)이 극도로 곤궁한데도 향약을 시행한다면 과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순화시켜 태평 시대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가? 라는 이이의 질 문에 대하여 허엽은 그렇다. 고 답했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예속(禮 俗)을 제대로 이룬 경우가 있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지금 세상 사람은 선한 자가 많고 선하지 않은 자는 적기 때문에 향약을 시행할 수가 있다. 고 대 답하였다.45) 41) 玄相允, 朝鮮儒學史, 민중서관, 1977, p.47 42) 中宗實錄 卷34, 13年(1518) 9月 5日(壬寅) 行鄕約之邑 如壓良爲賤 拒扞官債之納 如此等事 皆已未見 43) 정호훈, 앞의 논문, p ) 宣祖修正實錄 卷6, 5年(1572) 10月 1日(甲寅) 大司諫許曄 請設鄕約 上以爲 迂闊駭 俗 不聽 45) 宣祖修正實錄 卷8, 7年(1574) 2月 1日(丙午) 以鄕約事 議于大臣 大臣獻議可否不一 上命停之 (중략) 珥曰 公意以爲 民生雖極困瘁 若行鄕約 則果能化民成俗 治升大猷乎 曄 曰 然 (중략) 珥曰 公之治家 奚待上命 自古民墜塗炭 而有能成禮俗者乎 父子雖至親 若 不念飢寒 日撻而勸學 必至相離 況百姓乎 曄曰 今世之人 善者多 不善者少 故可行鄕約 정구(鄭逑)가 찬한 허엽의 행장 에는 이와 관련하여 팔도 군읍의 사민(士民)에게 향약을 시행할 것을 상(上)에게 권하여 상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조정의 여론이 합치되지 못했으므로 향약을 끝내 시행하지 못했다.(又勸上行鄕約於八道郡邑士 民 上許之 未幾 朝論不合 鄕約遂不行) 는 기록이 전해진다

24 그런데 허엽의 이 같은 생각은 도덕으로 교화하는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감 동시키고 마음의 감동은 사람들을 선한 데로 인도할 수 있다 고 한 정암의 주장 과 서로 통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천하의 도(道)를 함께 함으로써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인도하 고, 천하의 마음으로 함께 함으로써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감화시키면 천하의 마음도 내 마음의 정당함에 감화되어 감히 그 바름에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인도하여 나의 도(道)로 이끌면 천하의 사람들은 내 도의 위 대함을 좋게 여겨 감히 선(善)한 데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46) 전술(前述)한 바 정암의 도덕적 교화에 대한 견해는, 그 동안 폐조(廢朝)의 폭 력 정치에 시달려 온 인민들의 삶을 위무(慰撫)하고 윤리적인 풍토를 조성하여 사습(士習)과 민풍(民風)이 선(善)을 지향하도록 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제였 다. 그가 우리 향촌 사회에서 최초로 시행했던 향약 은 바로 이러한 도덕교화론 의 강력하고 현실적인 측면에 주목한 구체적 실천 사례라 할 수 있는데,47) 허엽 은 이 같은 정암의 사상을 계승하여 세도(世道)의 승강(升降)에는 천명이 있는 것 이므로48) 올바른 도덕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키고 교화하면 더 이상의 정치는 필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를 향약을 통해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비록 그 같은 시도가 결실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관찰사로 부임한 영남 지방에서 경민편(警民篇) 49)과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수천 권을 인쇄하 46) 趙光祖, 靜菴集 卷2, 對策, 謁聖試策 以共天下之道 道與我爲一之人 以共天下之心 感與我爲一之心 感之而化其心 則天下之心 化於吾心之正 莫取不一於正 導之而導於吾道 則天下之人 善於吾道之大 莫敢不歸於善 47) 이상성, 앞의 책, p ) 宣祖修正實錄 卷8, 7年(1574) 2月 1日(丙午) 世道升降 有命存焉 奈何 49) 경민편(警民篇) 은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인 김정국(金正國)이 1519년(중종14), 황 해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 향촌 사회에 사는 민(民)들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범죄 를 저지를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조성하지 못하도록 계도(啓導)할 목적으로 만든 책 인데, 김정국이 기묘사림 의 일원이었던 만큼 이 책 또한 16세기 기묘사림 의 정치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민편 의 재간행은 1579년 경상도 관찰 사로 부임한 허엽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1656년(효종7) 이후원(李厚源)에 의해 다 시 한 번 개간(改刊)되었다. 김정국이 편찬한 경민편 이 민간에 널리 보급되지 못 했는데도 허엽이 어떻게 이 책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김안국과 의 사승 관계 등을 감안할 때 이전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5 여 배포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문묘(文廟)를 참배하고 유생들에게 학문하는 방 법을 써 보이는 등 백성들의 교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결국 이러 한 여러 사실들은, 허엽은 개혁 사림파의 전통을 계승한 인물 50)이라는 평가가 정당한 것임을 확인케 한다. 개인적으로도 허엽은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 의 서문을 쓰는 등51) 나식과의 공고한 사제 관계를 과시했다. 이 글에서 그는 나는 선생의 마을에서 나고 자라 어린 시절부터 직접 그 모습을 뵈었다. (나식이) 윤정숙 선생을 좇아 배웠는데 민기(閔箕) 종성령(鍾城令) 이구(李球) 이항(李恒) 등이 함께 그 문하에서 덕 행과 학문을 닦아 모두 대유(大儒)가 되었다 52)고 술회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허엽이 나식과 같은 마을에 살아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던 사실과 나 식이 조광조와 윤정숙의 문하에서 수학한 내력 등이 확인된다. 허엽은 또 모재(慕齋 : 金安國) 선생이 물러나 여강(驪江)에 은거할 때, 항상 문인들에게 나모(羅某)를 만나 보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 꼭 그를 만나 보라고 권했다 든가 (나식) 선생이 서화담을 만나 보길 원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 탄식하곤 했다. 가정(嘉靖) 병신년(丙申年, 중종31) 가을, 화담 이 강원(姜源)의 집에 와 머물렀을 때 내가 그를 위하여 선생을 만나러 갔다. 두 번째 갔을 때 격한 논쟁이 벌어져 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화담이 사례로 부채 에 시 두 편을 써 주었다 53)와 같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나식이 뒤에 서술할 허엽의 또 다른 스승들과 종유한 기록이어서 흥미롭다 하겠다. 허엽, 경민편 간행과 관련해서는 정호훈의 앞 논문을 참조함 50) 신병주, 花潭學과 近畿士林의 思想, 국학연구 7집, 한국국학진흥원, 2005, p.56 51) 나식의 시문(詩文)은 저자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기 때문에 거의 산일 (散逸)되었다. 그의 사후(死後) 30여 년이 지난 뒤 전라도 관찰사 심방숙(沈方叔)이 이우 춘(李遇春)이 소장하던 나식의 시 50여 수를 얻어 이를 간행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그 문인 허엽에게 서(序) 를 부탁하였다. 허엽은 자신이 수습한 시 수십 편을 보태고 서 (序) 를 붙여 1578년,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 를 간행하였다. 이 초간본은 현재 전해지 지 않는다. 52) 羅湜, 長吟亭遺稿, 序 曄生長先生之閭 自童稚時 親接儀容 (중략) 初從尹鼎鼎叔先 生學 與閔右相箕宗室鍾城令球李一齋恒 考德問業於其門 皆得爲大儒 이는 나식이 조광 조 뿐 아니라 윤정숙에게도 사사했다는 동유사우록 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53) 羅湜, 위의 글, 先生欲見徐花潭而不得 發於言嘆 嘉靖丙申秋 花潭來寓姜源家 曄爲之見 之 再往極論 夜分乃罷 玩花潭謝扇詩二篇

26 2) 松厓 李畬와 慕齋 金安國 : 博學 과 實用 의 風貌 허균의 성옹지소록 에는 허엽의 또 다른 사승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여(李畬)와 김안국(金安國)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 나의 선친은 소시(少時)에 교리(校理) 이여에게서 주역 을 배웠다. 여(畬)는 진 천인(鎭川人)으로 그의 형 치(菑)와 함께 성리학에 밝았다. (중략) 치(菑)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博士)로 죽었는데, 진천의 유사(儒士)들이 두 분을 위하여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에는 매번 제사를 주선하 여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곳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의 풍속 도 좋으니 이는 모두 이 교리의 교화이다. 54) 이여(李畬 : 1503~1544)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추(有秋), 호는 송애 (松厓)이며 이색(李穡)의 후손이고, 진사 이인로(李仁老)의 아들이다. 그는 김안 국의 문인으로 1531년(중종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正言) 지평(持 平) 등을 역임하였다. 관리로 재직하는 중에도 학문에 전심(專心)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정통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고,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김안국을 대 신해 문학(文學)55)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유학을 강론하기도 했다. 실록 에 여(畬)는 성리학에 뜻을 두고 영리(榮利)를 좋아하지 않아 마음이 담박(淡泊)하였다 56)거나 역학에 정통하여 터득한 것이 매우 높았으므로 진강 (進講)할 때에는 깊은 뜻을 분석하고 예(例)를 끌어대어 비교하면서 반드시 덕 (德)을 진취하게 하려고 정성을 다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57)는 기록들이 남 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학문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54) 許筠, 惺所覆瓿藁 卷23, 惺翁識小錄 中, 李畬與兄菑俱明理學 先君少日問易於李校理 畬 畬鎭川人也 與其兄菑 俱明理學 (중략) 菑以博士不顯而卒 鎭川儒士爲立書院祀之 先君 在日 每經紀不輟 至今士子聯擢科第 鄕風亦淑 皆校理之化也 55) 문학(文學) 은 조선시대 정6품~정5품의 벼슬로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 다. 56) 中宗實錄 卷93, 35年(1540 庚子) 8月 23日(壬午) 畬有志於性理之學 不慕榮利 泊如 也 57) 中宗實錄 卷101, 39年(1544 甲辰) 1月 15日(甲寅) 精於易學 所得甚高 故進講之際 分析蘊奧 引援譬喩 期於進德 至誠不怠

27 있다. 보통은 허엽 일가가 주역 에 밝았던 까닭을 서경덕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설 명하지만, 허엽이 생전 이여가 제향(祭享)된 진천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매번 제사를 주선했던 것이나 허균이 직접 이여의 찬(贊) 을 지었던 사실 등은 허엽 의 학문에 끼친 이여의 공(功)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허균은 교리(校理) 이여의 찬[李校理畬贊] 을 통해 내가 일찍이 사신 (史臣)이 되어 여러 도서관에 간직된 귀중 문서를 참고해 보았으나 선생의 사적 은 전혀 볼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패관(稗官)ㆍ장고가(掌故家)까지 찾아보았 으나 역시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고 전하면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선생에게 주역 을 물은 적이 있었으므로 어렸을 적에 집안에서 들은 이야기가 이와 같았다. 그런데 너무 오래 지나면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를 위해 찬을 짓는다 58)고 하여 특별한 저술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즉, 이 글은 이여에 관한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탓에 허균이 어린 시절 아버지 허엽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문헌에 도 언급될 만큼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던 허균의 저작임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의 신빙성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더해 허균이 직접 이여의 사적을 찾고 자 시도했던 사실은 허엽의 가인들이 부친과 이여의 사승 관계를 분명히 인정하 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포착된 이여의 학문 세계가 상당 부분 서경덕의 학문적 경향과 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格致大學 대학(大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 배우고 誠明中庸 중용(中庸)에서 성(誠)을 밝혔는데 公也學之 공(公)은 이를 배우면서 曾武思蹤 증자(曾子) 자사(子思) 법(法) 받았네 三聖之易 복희(伏羲) 문왕(文王) 공자(孔子)의 주역 爻象吉凶 효(爻)와 상(象)과 길(吉)과 흉(凶)을 公也明之 공(公)은 다 밝히면서 師頤師雍 정이(程頤) 소옹(邵雍)을 스승 삼았네59) 58) 許筠, 惺所覆瓿藁 卷14, 文部11, 李校理畬贊 臣嘗忝史臣 考諸石室祕文 先生之事 不少槪見 旁求於稗官掌故家 亦別無著 先臣嘗質易於先生 故少日聞於家庭者如是 恐其久而 失傳 爲之贊而紀之

28 여타의 관련 기록이나 저술이 남아 있지 않아 상세한 사실을 알 수는 없으나 윗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여의 학문 세계를 추론해 보면, 그의 역학은 정이의 의리학(義理學)과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을 절충하는 경향을 띠었을 것으로 생 각된다.60) 전술한 허엽의 신도비명 에도 이여가 수학에 정통하며 주역 에 이 해가 깊다 는 언급이 있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여와 서경덕의 학문적 지향이 일면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여가 이 같은 학문 적 성향을 갖게 된 데에는 그 스승인 김안국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으로 짐작된 다. 김안국(金安國 : 1478(성종9)~1543(중종38))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 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며 김굉필의 문인으로 사림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 다. 그는 1501년(연산군7) 생원진사시에 합격했고,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乙 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내다가 1507 년 다시 문과 중시(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평 장령 대사간 공조 판서 등을 거쳤으며 151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안국은 관찰사 시절, 교화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기에 힘썼고 그 방안으로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를 간행하여 여러 고을에 배포하는 등 여씨향약 보급에 가장 많은 공적을 쌓았다.61) 하지만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성리학 의 실천적 입장을 중시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이후 1537년에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안국은 단지 이념으로서만이 아닌, 실천적 학문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중시 했지만 조광조의 경우와 같은 급격한 정치 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으 며, 학문의 실용성을 중시하여 천문 병법 등에 해박하였고 닥나무를 이용해 종 이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하였다. 59) 許筠, 위의 글 60) 소옹(邵雍) 은 북송(北宋)의 학자로 도가사상의 영향 하에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 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그는 음(陰) 양(陽) 강(剛) 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삼아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개진하였다. 61) 여씨향약(呂氏鄕約) 은 11세기 초, 중국 북송대에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등 4 인이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해 만든 자치 규약으로서, 소학(小學) 에 수록되어 있 기 때문에 소학 의 보급과 더불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씨향약 보급과 관련 한 내용은 한국사 28권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2003) 을 참조했다

29 이언적(李彦迪)은 그의 학문에 대해 모재는 박학(博學)하지만 존양(存養)의 공력은 적었다 고 평했으며 이식(李植) 역시 모재는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였지 만 수약(守約)의 공부는 적은 듯하다 62)고 언급하였다. 실록 에서도 김안국은 박학하여 계고(稽古)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선비들을 교훈했다 63)거나 중종조 의 명신 김안국은 박학 계고하고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선을 좋아하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해 정신과 힘을 쏟았다 64)는 류(類)의 기사들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모재의 학문이 성리학 일변으로 흐르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박학 풍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안국은 천품이 강직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전고(典故)를 환히 알고 시 무(時務)에 익숙히 달통하였으며, 성격이 치밀하고 주도하여 일에 빈틈이 없었 다. 산경(山經) 지지(地誌) 유편(幽編) 비록(秘錄) 음양(陰陽) 의(醫) 불(佛)의 책까지도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며, 한때의 사대 표주(事大表奏)와 교린서찰(交隣書札)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65)는 사평(史評) 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양한 영역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모재가 이렇듯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성리학의 이 론 탐구보다는 그 실천에 주력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66) 그의 학문에 개방적이 고 절충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는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며, 전고 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별로 공력을 기울이지 않았 다 67)는 윤근수(尹根壽)의 전언이나, 앞서 존양의 공력은 적었다, 수약의 공부 는 적은 듯하다 고 했던 이언적과 이식의 언급은 모재가 성리학에 전심(專心)하 지 않고 박학에 힘을 쏟았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여 또한 개방적 면모를 지닌 김안국의 문인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학문 적 성향 역시 사변적 원리적 측면에만 머무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런 62) 張志淵 著 李民樹 譯, 朝鮮儒敎淵源, 명문당, 2009, p.74 63) 宣祖實錄 卷8, 7年(1574 甲戌) 2月 1日(丙午) 金安國博學稽古 好善訓士 64) 宣祖實錄 卷8, 7年(1574 甲戌) 4月 23日(丁卯) 希春曰 中廟朝名臣金安國 博學稽古 愛人好善 盡心國事 畢精竭力 65) 中宗實錄 卷7, 33年(1538 戊戌) 7月 25日(丙申) 安國天資剛毅 學問精博 曉暢典故 練達時務 綜緻 周密於事無所遺 至於山經, 地誌 幽編 秘錄 陰陽醫佛之書 無不究極其理 一時事大表奏交隣書札 皆出其手 66) 신병주, 南冥學派와 花潭學派 硏究, 일지사, 2000, p ) 尹根壽, 月汀漫筆 一時之論 以慕齋樂善愛士 博通典故 而至於學問之功 不甚着工云

30 측면에서 허엽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여의 스승인 김안국으로부터 허엽이 직접 학문을 배운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허엽은 전고대방 에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68) 동유사우록 에는 서경덕과 김 안국, 윤정숙의 문인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데,69) 허엽이 김안국에게 사사한 사실 은 그 아들 허균의 문집 속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는데 선친이 젊어서 모재에게 배웠고 모 재의 스승은 허백(虛白) 성현(成俔)으로 그는 형인 간(侃) 및 괴애(乖崖) 김수온 (金守溫)에게 배웠는데, 이 두 분은 모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제자요, 유 공(柳公)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 이색(李穡))의 마음에 들었던 문인(門人)이었 다.70) 조정암(趙靜庵)이 화를 당한 뒤로 이(理) 와 성(性) 을 궁구하는 성리학에 대하 여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모재만이 여강(驪江 :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 를 만날 때마다 성현의 일을 인용하여 논설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회재(李 晦齋)는 영남(嶺南)에서 여강을 오가며 반드시 질문하고 변란(辨難)하였으며, 퇴계 도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할 때, 공의 집에 들러 비로소 성리학의 연원에 대해 들었다. 모재는 이처럼 두 분을 계도한 공이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어린 시절, 모재에게 배웠으므로 이 사실을 두루 알고 있었다. 대개 공은 평소 문장가로 칭송을 받았고 성품 또한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문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71) 허엽이 어떤 경로로 모재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는 모 재의 외가가 양천 허씨라는 사실과 상당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안국 의 모친은 영월군수를 지낸 허지(許芝)의 따님으로, 그녀는 조선조 명의(名醫) 68) 典故大方, p.191, 196 참조 69) 東儒師友錄, p.16 참조 70) 許筠, 惺所覆瓿藁 卷10, 文部7, 答李生書 而先大夫少學於慕齋 齋慕之師成虛白俔 學 於其兄侃及金乖崖守溫 二公皆柳泰齋之弟子 柳公是文靖公得意門人 71) 許筠, 위의 책, 卷23, 惺翁識小錄 中, 慕齋說性理淵源 方靜庵被禍之後 人無敢言窮理 盡性之學 獨慕齋退居呂江 逢士人則輒引聖賢事業 論說不怠 李晦齋自嶺南往來 必質問辨難 而退溪赴丹陽日 亦過公廬 始聞性理淵源 幕齋之於二公 有啓益之功 而人不之知也 先大夫 少學於慕齋 備知之 蓋公素以文章得譽 而性且不威 世唯以文人視之故也

31 허준(許浚)의 조부인 허곤(許琨)의 큰누이이기도 하다. 즉, 허지는 모재의 외조 부이자 허준의 증조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모재는 양천 허씨 문인 68인의 시를 합편(合編)한 양천허씨 세고(陽川許氏世稿) 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허엽과 허준이 10촌지간이며 허 준의 평생 후원자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유희춘(柳希春)이 허엽의 아들 성과 봉의 스승이자 모재의 문인이라는 사실은 허엽과 김안국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허엽은 후에 김안국의 장남인 김유부(金有孚)와 동서지간이 되 었으며72) 김안국의 사후, 그의 차남 김여부(金汝孚)의 부탁으로 모재집(慕齋 集) 의 교정을 보고 발문을 짓기도 했다.73) 모재 역시 허엽의 또 다른 스승인 화담 서경덕과 돈독한 우의를 쌓는 등 허엽과의 관계를 다각도로 지속해 나갔 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허엽은 집안끼리의 관계에 힘입어 일찍이 모재 의 문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나식에게 소학 과 근사록 을, 이 여에게서는 주역 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몇몇 단서들이 허엽이 찬한 이여의 행장 에 보 인다. (이여 선생이) 일가의 형뻘이었던 생원 나식 선생과 훈도(訓導) 송경(宋 瓊)을 벗으로 삼고 매번 송경을 풍류를 아는 호걸이라 칭했다 74)는 구절이 그 것인데 이를 통해 나식과 이여가 인척지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글에 는 나식이 먼저 조광조에게 사사하고 이후 윤정숙에게 학문을 배운 사실과75) 허엽이 이여에게 역학을 배우게 된 계기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내가 같은 마을에서 살며 늘 (나식 선생을) 좇아 학문을 배웠는데 (선생이) 항상 72)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은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딸을 김안국 의 장남 김유부(金有孚)에게 출가시켰고 막내딸을 허엽에게 시집보냈다. 73) 한국문집총간 해제 참조 : 김안국의 시문은 가장(家藏)되어 오다가 유희춘이 저자의 아 들 김재부(金在孚)에게서 얻어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저자의 문인 허충길(許忠吉)이 영천(榮川) 군수로 부임하여 감사(監司) 노진(盧禛)과 김계휘(金繼輝)의 도움을 받아 1574년(선조7), 영천에서 판각하였다. 이것을 저자의 관향(貫鄕)인 의성(義 城)에서 현령(縣令) 노종원(盧從元)이 개간(開刊)하고 그 판각을 의성서원(義城書院)에 보관하였다. 이 초간본은 아들 김여부(金汝孚)의 부탁으로 허엽이 교정을 보고 발(跋) 을 지었으며, 또한 유희춘이 서문 을 지어 권(卷) 수미(首尾)에 각각 붙인 바 있다. 74) 許曄, 草堂集, 行狀, 李文學先生行狀號松厓 與族兄生員 羅湜正源 訓導宋瓊公瑾爲友 每稱宋瓊爲風流人豪 75) 許曄, 위의 글, 正源號長吟亭 少受業趙靜菴先生之門 長而師尹鼎

32 한수(韓脩)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이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 다. (이여는) 안정되고 담박하여 시주(詩酒) 이외의 것은 일삼지 않으니 진실로 배 우는 자의 스승이라 할 만하다. 하고 나로 하여금 (이여 선생에게) 역학을 배울 것 을 권했다. (중략) 드디어 나아가 주역 을 배울 것을 청하여 역학계몽(易學啓 蒙) 과 주역 을 모두 마쳤다. 지금 향하여 나아갈 곳을 알게 되고 장차 역학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은 모두 나식 선생이 베풀어 주신 바다. 선생이 지은 역학범수 설(易數範數說) 을 예전에 듣고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을) 취합(聚合)하지 못하여 산실되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76) 위의 글에는 허엽이 스승 나식의 권유로 이여를 찾아가 역학을 배우게 된 사 실과 자신이 학문의 방향성을 찾고 역학에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을 스승 나식의 공로로 돌리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역학범수설 운운(云云)하는 글귀를 통해 이여 뿐 아니라 그의 족형(族兄)인 나식 역시 역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인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尹鼎叔과 灘叟 李延慶 : 學問的 柔軟性의 獲得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또 하나 있는데 그는 전고대방 에 조광조 와 더불어 나식의 스승으로 기록되어 있는 윤정숙(尹鼎叔)이다. 우리가 그에게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동유사우록 에서 서경덕 외에 허엽과 윤 정숙의 사승 관계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77) 윤정숙의 본명은 윤정(尹鼎 : 1490(성종20)~1536(중종31))으로 본관은 파평 (坡平), 자는 정숙(鼎叔)이다. 그의 형인 윤내(尹鼐)가 성종의 여덟째 딸인 경휘 옹주(慶徽翁主)와 혼인하여 영원군(鈴原君)에 봉해진 사실을 참고할 때 윤정은 비교적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78) 그러나 그는 과거에 뜻을 76) 許曄, 위의 글, 曄居一閈中 常從而學焉 每說與韓修及曄曰 爾輩當師有秋 恬靜淡泊 無詩 酒外事 眞學者師也 勸曄學易于先生 (중략) 遂就請學易 易學啓蒙及元經 皆得卒業 至今知 向方 將有得於易學 長吟亭之賜也 先生所著易數範數說 舊聞有之 而無聚集 至於散亡 惜哉 77) 동유사우록, p.16 참조 78) 이긍익(李肯翊)이 편찬한 연려실기술 卷6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에는 경 휘옹주의 남편이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

33 두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주역 만 읽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그의 의(義)를 가상 히 여겨 의금부도사에 임명하려고 하자 절로 피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평생 을 은사(隱士)로 살아가며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79) 허엽이 윤정에게 사사한 사실을 스스로 밝힌 적은 없으나, 문집인 초당집 에 윤정에 관한 기록을 남겨 두고 있다. 윤정숙의 이름은 정(鼎) 으로 파평 사람이며 인품이 고상하다. 학문을 처음 시작 할 때에는 아직 바로 선 바가 바가 없었으나 (그 뜻을) 이루고자 힘써 연마하고 밤에 잠도 자지 않기를 삼 년 만에 스스로 호연지기가 생겼다. 나식 선생과 종성 령(鍾城令) 이구(李球) 민기(閔箕) 이항(李恒) 등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 로 삼았다. 또 연방(蓮坊 : 이구의 호)은 윤정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화담의 문하 에서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80) 관련 자료가 소략한 탓에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동유사우록 의 기록 이나 여러 정황들을 참조할 때 허엽이 윤정으로부터 직접 사사했을 가능성은 충 분하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전고대방 과 유교연원록 등에 윤정과 서경덕이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허엽의 학문이 윤정과 서경덕을 거슬러 이연경과 직접 연관되었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연경(1484(성종15)~1548(명종3))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 는 탄수(灘叟) 용탄자(龍灘子)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세좌(世佐)의 손자 이다. 그의 조부 이세좌는 갑자사화 때 윤비(尹妃)의 폐위를 극간하지 않고 형방 승지(刑房承旨)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자진(自盡)의 명을 받고 자 결하였는데, 이연경 역시 이 일에 연좌되어 섬에 유배되었다. 그는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18년 방환(放還)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하여 원사인자손(寃死人子孫) 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 조지서사지(造紙署司 다. 79) 윤정이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한 탓에 그에 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실록 에 윤내의 아우 윤정(尹鼎)과 윤자(尹鼒)가 모두 학식이 있었다(有弟二人曰鼎曰鼒 皆有學 識) 는 언급이 있다. ( 明宗實錄 卷13, 7年(1552 壬子) 3月 22日(甲辰) 기사 참조) 80) 許曄, 草堂集 附錄, 摭錄 尹鼎叔名鼎 坡平人 人品甚高 始學 未有所立 礪志成就 通 夕不寐 如是三年 浩然之氣自生 正源羅湜叔玉鍾城令球 號蓮坊 景說閔箕恒之 李恒 號一齋 皆師尊之 又曰 蓮坊受業尹鼎 卒業於花潭

34 紙) 공조좌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다. 이연경은 조광조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므로 이로 인해 기묘사화에 연루, 축 출될 뻔하였으나 중종이 친히 찬인록(竄人錄) 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버려 화 를 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관한 기록은 지금도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이 교리로 있을 때, 한번은 중종이 야대(夜對)에 나왔 다. 아뢰는 자가 지금 태평을 이룩하려면 모름지기 당대에 제일가는 사람을 발탁 하여 정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니, 이연경이 앞으로 나와 이는 조광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광조가 진실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지금 사람을 쓰는 데 있 어서는 경력이 많아지고 인망(人望)이 흡족해지기를 기다린 뒤라야 큰 책임을 맡 길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광조가 그 소문을 듣고 달려가 이연경을 보 고 울면서 감사를 표했다. 뒤에 사화가 일어나자 남곤ㆍ이빈(李蘋) 등이 귀양 보낼 사람의 성명을 적어서 보고했는데, 이연경의 이름이 첫머리에 있었다. 상(上)이 붓 으로 (그 이름을) 지우며 전교하기를 이연경은 내가 그 사람됨을 아니 귀양 보내 지 말라. 고 하였다.81) 위의 기록은 이연경이 조광조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그가 신진 사 림의 한 축으로서 정암의 개혁에 힘을 실어 주었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연경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82) 사림의 주력 사업이었 던 향약의 실시에 앞장서 중종에게 직접 향약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83) 여타의 81) 李廷馨, 東閣雜記 下, 本朝璿源寶錄 2, 李灘叟延慶爲校理 中廟嘗御夜對 有啓者 方今 欲致太平 須擢相當代第一人 延慶進曰 是指趙光祖也 光祖誠賢矣 然今之用人 須踐歷多人 望洽 然後可授以大任 光祖聞之 馳見延慶 泣謝之 及黨禍作 南衮李蘋等 錄啓流竄人姓名 延慶爲之首 御筆抹去 且敎曰 廷慶予知其爲人 其勿竄, 허엽이 편찬한 전언왕행록(前 言往行錄) 과 이황의 퇴계집(退溪集),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82) 趙光祖, 靜菴集 卷5, 靜菴先生續集附錄, 門生錄 참조 83) 中宗實錄 卷36, 14年(1519 己卯) 7月 26日(丁巳) 불시에 소대(召對)에 나갔다. 상 이 이르기를 향약이 백성을 교화하기에는 제일이니 사람들이 모두 향당(鄕黨) 안에서 (이를) 익히고 착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야 함을 알게 된다면, 어찌 교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힘써 하도록 함이 가하다. 하니 시강관 이연경이 아뢰기를 신이 외방 에 있으면서 보니까 과연 향약이 풍속을 바르게 개선하였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디 착 한 것이어서 착한 일로써 지도하면 저절로 교화되기 쉬운 것이니, 만일 선량한 사람을

35 기묘사림들과 동일한 정치적 행보를 이어 갔다. 그는 훗날, 조광조가 사사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장지(葬地)에 가 제(祭)를 올리는 등84) 끝까지 신의를 지켰으 며,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충주로 낙향, 이자(李耔)와 더불어 평생을 은거하였는데 이때에 김안국 성수침(成守琛) 이황 조식 등과 교유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기묘사림들은 경전에 대한 강론을 중시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보 다는 마음을 함양 성찰하는 존덕성(存德性) 공부에 치중했던 경향이 있었고 중 종대에 김안국의 건의로 상산집(象山集) 이 간행되기도 했음85)을 생각할 때, 그들의 학문은 정주학을 기저로 하되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기묘사화 이후 이연경과 이자, 김세필 등이 충주에 머무르며 학문을 논 하였는데 이들은 사화로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던 기묘사림들의 학문을 후대에 전승시킨 주역들 중 하나이므로 이연경의 학문적 성향 역시 기묘사림들의 그것 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유고(遺稿)가 모두 산실된 까닭으로 이연경의 학풍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문인이자 사위인 노수신의 학문이나 관련 기록 등을 통해 그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소재 노수신은 17세에 이연경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후 장인이자 스승인 이연경으로부터 소학 등 심성을 수양하는 학문을 배웠 으며 열여섯 해 동안이나 그 문하에 있었다. 이연경의 학문과 사상은 소재의 학 얻어 약정(約正)을 삼는다면 족히 습속(習俗)을 변경시켜 사람들이 모두 선(善)에 나아가 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충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청주(淸州)에 있으니 충주와 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충청도에서 향약을 행하는 것이 다른 도(道)보다 낫고 충주가 도내에서도 제일인데 당초 약정(約正)이 되었던 사람이 교리(校理) 이연경으로, 이 사람 이 약정이 되어 지도하고 거느렸기 때문에 제일이란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 다. (御不時召對 上曰 鄕約 於化民爲最 人皆知習於鄕黨之中 而不爲不善之事 則其於敎化 之補 豈不大哉 使勉力爲之可也 侍講官李延慶曰 臣在外方 見鄕約 果速於善俗矣 人性本善 以善事指導之 則自爾昜化 若得善人 以爲約正 則足以變習俗 而人皆樂趨於善矣 韓忠曰 臣 家在淸州 與忠州相距不遠 忠淸一道鄕約 勝於他道 而忠州爲最於道內 其初爲約者 乃校理 李延慶也 此人爲約正 以導率之 故稱最焉) 84) 李肯翊, 燃藜室記述, 中宗朝 古事本末, 己卯士禍 소 수레로 관을 용인(龍仁)으로 옮 겨다가 이듬해 봄, 선산인 심곡리(深谷里)에 장사 지냈다. 성수종(成守琮), 홍봉세(洪奉 世), 이충건(李忠楗) 등이 장사(葬事)에 달려 왔고, 이연경 또한 와서 제사 지내고 잔을 드리며 서로 붙들고 크게 통곡한 후에 돌아갔다. (以牛車返櫬于龍仁 明春葬于先壠 成守 琮洪奉世李忠楗等赴葬 李延慶亦來會祀獻相携長慟而返) 85) 신향림, 16C 전반 陽明學의 전래와 수용에 관한 고찰 - 金世弼 洪仁祐 盧守愼의 양명학 수용을 중심으로, 퇴계학보 18집, 퇴계학연구원, 2005, pp.188~

36 문과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어 소재 역시 공리공론적인 학문보다 실천궁행 (實踐躬行)하는 삶의 지혜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스승에 대한 정 또한 각별하여 이연경과 자신의 관계를 주자와 주자의 사위인 황간(黃幹)에 빗대어 의(義)는 주자의 사위 황간보다 무겁다[義重幹甥朱] 라고 읊을 정도였다.86) 선사(先師) 탄수 선생이 (이언적) 선생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發)하지 않은 때에 관하여 논하시고 나에게 그 상세한 전말을 말씀해 주셨다. 나는 내심으 로 이것은 자공(子貢)이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니, 아아! 지극하도다. 라고 하며 감 탄하였다.87) 노수신은 젊은 날, 스승 이연경으로부터 그가 이언적과 더불어 미발(未發)의 기상에 대하여 논한 토론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 노수신은 스승의 말을 듣고 이 것이 바로 자공이 들을 수 없었던 성(性)과 천도(天道)에 관한 가르침임을 알고 감탄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은 노수신이 스승의 영향을 받아 미발의 심체(心體)가 바로 본성이자 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 다.88) 소재의 이러한 생각은 후에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1559)과 곤지기발(困 知記跋) (1560) 등의 저술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이는 나흠순(羅欽順)이 지은 곤 지기(困知記) 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나흠순은 도심(道心) 은 미발(未發)의 체 (體) 로서 성(性) 이며 인심(人心) 은 이발(已發)의 용(用) 으로서 정(情) 이라고 하여 인심도심체용설(人心道心體用說) 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이기 합일지묘(理氣合一之妙) 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정주(程朱)의 설과 는 사뭇 다른 것으로서, 정주의 설에서는 도심 이나 인심 을 모두 정(情)으로 보기 때문에 순선순리(純善純理)의 도심 역시 성 이 아니고 정 이라 설명한다. 그런데 나흠순은 도심 을 정 으로 보지 않고 성 으로 간주하여 마침내 도심 을 체 라고 하는 데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의 견해는 출발점에서부터 정주의 설과는 그 전제를 달리하였던 것이다.89) 86) 황구하, 蘇齋 盧守愼의 心學, 陽明學 10輯, 한국양명학회, 2003, p ) 盧守愼, 穌齋集 卷7, 晦齋先生集序 旣而 先師灘叟先生與先生論喜怒哀樂未發 爲予 道其詳 予又 竊自嘆曰 此子貢所以不可得而聞 嗚呼已矣 88) 신향림, 위의 논문, pp.202~203 89) 최영성, 韓國儒學通史 上, 심산출판사, 2006, p

37 실록 에서는 이와 관련해, 노수신이 나흠순의 곤지기 를 추존하였으며 인심 (人心) 도심(道心) 집중(執中) 등의 설(說)을 자기 나름대로 지어 주자의 견 해에 이론을 제기하자, 이황이 그르다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자 학 뿐 아니라 육학(陸學)의 종지(宗旨)를 참작하여 사용했음도 함께 전하고 있 다.90) 이렇듯 노수신의 사상적 경향이 다소 이단적이며 개방적이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스승인 이연경의 사상 역시 개방적인 성향을 띠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 히 이연경의 미발(未發) 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노수신의 사상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연경은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승려 문원(文遠)과 가깝게 지내며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고, 사위 강유선(康維善)에게 그를 직접 찾아가 담론을 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결국 한 시대의 유종(儒宗)으로 평가 받았던 이연경과 노수신의 사상이 전승 되지 못하고 주자학 일변도의 조선 후기 학계와 정계에서 그 이름이 점점 잊혀 지게 된 것은 그들이 주자학을 지향하면서도 상산학이나 불교 등 소위 이단 에 대해 학문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91) 그런 맥락에서 이연경의 문인인 서경덕과 윤정의 학문적 성향을 재고(再考)하 면 일련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 일례로 서경덕의 문인 집단인 화담학파가 주자 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노장사상이나 양명학 등 다양한 사상에 경도된 모습 을 보였으며,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을 가졌다92)는 연구 결과를 상기한다면 이 같은 생각이 결코 억측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같은 학풍이 윤정과 서경덕을 통해 허엽에게 이어지고 다시 그의 아들들에게로 계승되어 조 선 중기 사상사의 일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설명 역시 타당한 것이라 생각된 다.93) 90) 宣祖修正實錄 卷24, 23年(1590 庚寅) 4月 1日(壬申) 其學初甚精博 儒林之望 先於李 滉 及在海島 推尊羅欽順困知記 改著人心道心執中等說 立異於朱訓 李滉非之 蓋我國道學 至李滉出而大明 而守愼獨參用陸學宗旨 後人或慕嚮稱述焉 여기서의 육학(陸學) 은 육 구연(陸九淵)의 학문, 일명 상산학(象山學)을 지칭한다. 91) 권오영, 灘叟 李延慶의 性理學的 삶과 思想, 朝鮮時代 廣州 李氏의 삶과 學問, 서 울역사박물관 外, 2007, pp ) 신병주, 앞의 책, p.216, 조선 유학의 학파들, p.130 참조 93) 이연경의 문인들과 허엽 일가가 대를 이어 친분을 이어 간 사실은 이들의 사상적 정 치적 노선이 근접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연경의 사위인 노수신과 허엽은 평생 동안 우의(友誼)를 나눈 지기(知己)였으며, 이연경의 외손이자 노수신의 문인이었던 심희수(沈喜壽)는 허엽 일가의 인근에 거주하면서 허성, 허봉 형제와 절친한 관계를 유

38 허엽의 수학기인 16세기 초 중반, 사림의 핵심 세력이었던 김안국과 조광조 등은 소학 의 학습과 향약의 보급을 통해 새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에 토대를 둔 지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김안국은 소학 과 주자증손여씨 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 등의 보급 및 정속(正俗) 의 간행을 통해 당시의 풍 속을 성리학적 예속(禮俗)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이들은 또한 이륜행실도 (二倫行實圖) 의 간행을 통해 장유(長幼)의 질서와 붕우(朋友)의 신의를 중시하 는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였다.94)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성장한 허엽은 사림의 주요 일원이었던 김안국과, 조광조의 문인 나식에게 사사함으로써 기묘사림의 개혁사상을 직접 수용할 수 있었다. 특히나 김안국은 서경덕에 버금갈 정도로 허엽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예를 들면 김안국은 관직에 머무는 동안 성균관 유생들과 교류하며 학 문적 연대를 깊이 하였고 학생의 천거를 통해 사림파 인물들을 등용하였으며, 지 방의 관찰사로 나갈 때마다 향촌의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향촌 내 사림 세력의 지배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서 향약의 보급과 향교 교육을 강화하였는 데,95) 이는 후일에 보인 허엽의 행보와 거의 근사(近似)한 것이어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허엽은 실천 을 중시했던 기묘사림과 마찬가지로 향약의 전면 실시를 주장하는 등 인민의 교화에 앞장섰고, 사습의 혁신을 위해 경학(經學)의 중요성 을 역설하였다. 또한 마음으로 선류(善類)를 보호하려 애썼고 평생 동안 경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96)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훌륭한 인재를 기 르는 데 있어 적임자라는97) 평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지함과 동시에 서경덕의 문인인 강문우(姜文佑)에게 사사한 사실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이연경의 문인인 종성령 이구 또한 허엽과 함께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다. 94) 권오영, 앞의 논문 p ) 조선 유학의 학파들 p.95 96) 宣祖修訂實錄 卷14, 13年(1580 庚辰) 2月 1日(辛未) 동지중추부사 허엽이 졸(卒)하 였다. 허엽의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젊어서 화담 서경덕을 따라 배웠고 노수신과 벗하였으므로 사류(士類)로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가정(嘉靖) 병오년, 문과 에 등제하여 즉시 간원(諫院)에 들어갔다. 그는 일시의 원칙 없는 논의에 대해 비록 의 사를 달리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 선류(善類)를 보호하려고 하여 일에 따라 구제 한 점에 있어서는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경훈(經訓)을 독실히 좋아하여 늙도 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이 점에 대해 훌륭하게 여겼다. (同知中樞府事許曄 卒 曄字太輝 號草堂 少從花潭徐敬德學 與盧守愼爲友 以士類著名 登嘉靖丙午文科 卽入諫 院 其於一時橫議 雖不敢作異 心護善類 隨事救正 有足稱者 (중략) 然篤好經訓 至老不懈 世以此賢之)

39 그는 또한 민본(民本)사상과 위민(爲民)사상에 근거하여 언로(言路)와 공론(公 論)을 중시했던98) 기묘사림을 본받아 직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렇듯 시세 와 타협하지 않는 허엽의 태도는 그의 전정(前程)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정도 였다.99) 여기에 그의 또 다른 스승인 윤정과 서경덕 역시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이연 경의 문인이라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허엽의 사상적 기반이 기묘사림의 학통에 이어져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97) 宣祖實錄 卷196, 39年(1606 丙午) 2月 12日(辛亥) 기묘년과 을사년 사이에 큰 사화 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선비들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나 다행히도 성상께서 즉 위하시어 이황이 소명을 받들고 오게 되었습니다.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이 강론을 같 이 하지는 못하였으나 송연(竦然)히 긍식(矜式)하는 데가 있어서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르고 신명처럼 믿었으므로 사습이 크게 혁신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격앙되었습니다. 거기다 허엽 유희춘 기대승 등의 무리가 뒤를 이어 대사성이 되어 교도하였으므로 그 뒤 얼마 안 되어 사습이 점점 혁신되었습니다. (己卯乙巳年間 大禍繼出 士氣摧沮 而 幸賴聖上卽祚 李滉承召而來 館學諸生, 雖不得相與講論 而竦然有所矜式 仰之如山斗 信之 如神明 故 士習丕變 人皆激昻 而如許曄柳希春奇大升之輩 相繼爲大司成 而導迪之矣 厥 後未幾 士習漸變) 仁祖實錄 卷2, 1年(1623 癸亥) 5月 11日(庚子) 지사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선비를 기르는 책임은 전적으로 대사성에게 달려 있으니, 반드시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훌륭한 인재를 기를 수 있습니다. 선(先)왕조 때에는 오직 허엽과 구봉 령(具鳳齡)이 적임자였습니다. 지금 자리가 비어 있으니 작질(爵秩)에 구애받지 마시고 반드시 적임자를 얻는 데 힘을 기울이소서. (知事申欽曰 養士之責 專在於大司成 必得其 人 然後可以正士習 養賢才也 在先朝 惟許曄 具鳳齡, 能稱其任 今方有闕 請毋拘爵秩 必 以得人爲務) 98) 趙光祖, 靜菴集 卷,2 司諫院請罷兩司啓一 언로가 통하는 것과 막히는 것은 국가에 가장 긴요하다. 언로가 통할 때는 나라가 다스려져서 편안하며, 막힐 때는 어지러워져서 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언로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한다. 위로는 공경(公卿)으로 부터, 아래로는 여항(閭巷)과 시정(市政)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말을 할 수 있 어야 한다. (言路之通塞 最關於國家 通則治安 塞則亂亡 故人君務廣言路 上自公卿百執事 下至閭巷市井之民 俾皆得言) 99) 다음 실록 의 기사에 그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明宗實錄 卷30, 19年(1564 甲子) 7月 20日(庚申) 허엽은 마음을 세움이 조심스러웠 고 올바랐다. 지난날 승지로 경연에 입시하여 기묘년간의 사람들을 구제해 줄 것을 아뢰 었는데 언론이 간절하고 곧았으나 상께서 달갑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직(內職)에 머 물러 있지 못하고 외직(外職)을 구해 지방에 보직되었으나 또 이양(李樑) 등에게 밉보여 파직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서임되었다. (許曄爲慶州府尹 立心近正 頃爲承旨 入侍經 席 申救己卯之人 言論切直 上厭聞之 不得留內 求出補外 又爲奸臣李樑等所忤見罷 未久復 敍 )

40 4) 花潭 徐敬德 : 獨創的 思惟의 方式 허엽의 학문은 나식 김안국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의 복잡한 사승 관계 속 에서 형성되었지만, 그들 중 허엽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화담 서경 덕이다. 허균이 나의 선친께서는 화담 선생에게서 가장 오래 배웠다 고 증언한 것이나,100) 실록에 소재한 기록들은 허엽과 화담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했는지를 보여 준다.101) 앞에서 인용한 노수신의 글에는 허엽이 여러 스승들을 거친 뒤 가장 마지막에 야 서경덕에게 사사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들이 서로를 만나 사제의 관계를 맺 게 된 계기는 초당집 의 기록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올해 2월, 내가 관서(關西)에서 돌아오는 도중 옛 도읍인 개성에 들러 화담 서 선생을 찾아뵈었다. 정유(丁酉, 1537) 무술(戊戌, 1538) 연간에 선생이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오셨으므로 나는 일찍이 숙소에서 (선생을) 두 번 만나 뵌 적이 있었 다. 이때에 나는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게 되어 거듭 절하며 가르침을 청했고, 선 생은 도(道)에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일러 주셨다. (당시) 나는 우둔하여 그 말씀하신 바를 깨닫지 못하였고, 물러나와서까지 그것 100) 許筠, 惺所覆瓿稿 卷23, 說部2, 惺翁識小錄 中, 徐花潭六日不食而無飢乏之色 先大 夫學於花潭先生最久 101) 허엽과 화담 서경덕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실록 의 기사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明宗實錄 卷14, 8年(1553 癸丑) 5月 25日(庚午) 허엽(許曄)을 홍문관 교리에 임명하였 다. 허엽은 일찍이 화담 처사(花潭 處士) 서경덕(徐敬德)에게 수학하여 얻은 바가 꽤 있 었다. (曄嘗學於花潭處士徐敬德 頗有所得) 明宗實錄 卷28, 17年(1562 壬戌) 1月 25日 (庚戌) 허엽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 셔 학문과 조행(操行)에 볼 만한 점이 있었다. 처음에 서경덕을 따라 배우던 자가 매우 많았으나 서경덕이 죽자 모두들 배반하고 떠났는데 오직 허엽과 박순(朴淳)만이 변치 않 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담의 제자를 말할 때에는 이 두 사람으로 으뜸을 삼는다.(曄 師事花潭徐敬德 學問操行 有可觀者 初從敬德學者甚衆 敬德卒 無一人不叛去 惟曄與朴淳 不變 故至今稱花潭弟子者 以二人爲首) 明宗實錄 卷29, 18年(1563 癸亥) 8月 17日 (癸亥) 삼척 부사 허엽 일찍이 화담 서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대략 학문의 길을 알아서 언제나 옛사람을 사모하는 뜻이 간절 했다. (三陟府使許曄 曾遊於花潭徐先生之門 粗知爲 學之方 常切慕古之志 宣祖修正實錄 卷14, 13年(1580 庚辰) 2月 1日(辛未) 동지중추부사 허엽이 졸하였다. 허엽의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젊어서 화담 서경덕을 따라 배웠고 노수 신과 벗하였으므로 사류로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朔辛未 同知中樞府事許曄卒 曄字太 輝 號草堂 少從花潭徐敬德學 與盧守愼爲友 以士類著名)

41 을 생각하였으나 역시 깨닫지 못했으며, 아무리 골몰하여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인간의 타고난 천성은 민멸(泯滅)하지 않는 것에 있으므로 3~4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선생이 말씀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한 잔의 물에 물 한 모금을 더한 것과 같았으니 나의 기쁨을 알 만하다. 만일 다시 선생을 뵙게 된다면 장차 얕은 깨달음을 바로잡을 수 있을 듯하여 다시 만나 뵙길 청하였고 이 번에 가게 된 것이다. 선생을 따라 하루를 기다려 그날 밤, (선생에게) 나아갔다. 선생은 말에서 떨어 져 팔을 다치고 상처를 입었는데도 좌정(坐定)한 채 몇 마디를 나에게 물었다. 전 에 한양에 있을 때 두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 네. 만난 지가 오래 되었는데 혹 깨달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시니 나는 머리를 숙이고 답하여 깨달은 바가 없음에 용서를 구하고 명덕(明德)에 관해 묻기를 청하 였다. (하략)102) 위의 글은 허엽이 노수신에게 지어 보낸 것으로서 글의 말미에 그 날짜가 가 정(嘉靖) 계묘(癸卯) 3월 로 표기되어 있는데, 계묘년 은 1543년(중종38)이다. 이 글에는 당시 허엽이 관서 지방을 돌아보고 귀향하는 길에 개성에 들러 화담 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아마도 이때로부터 화담과 허엽 간의 사승 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허엽이 화담으로부터 원리기 등을 구술해 전해 받은 것이 화담의 몰년(沒年)인 1546년의 일이었으므로, 허엽이 실 제 화담의 문하에서 수학한 기간은 대략 4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허엽의 화담에 대한 존숭은 실로 대단한 수준이어서 명종은 허엽에 대해 화 담을 높이는 사람은 극존하고 낮추어 보는 사람은 악평을 한다. 고 힐난할 정도 였고, 퇴계 역시 스승의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지 않고 극존(極尊)한 다. 는 평을 글에 남기기도 했다.103) 허엽은 화담의 사후에도 그의 추숭(追崇)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으며, 화담의 학문이 오직 횡거(橫渠)에게서 나왔다고 논평한 이이와 심각하게 대립하는 등104) 끝까지 화담에 대한 경모의 자세를 잃 102) 許曄, 앞의 책, 序, 送盧寡悔序 歲仲春余之自關西還也 道由開州舊都 投謁于徐可久先 生 丁酉戊戌間先生之赴擧於國都也 余嘗兩得見于舍館 於時也 余始有志於學 再拜而請敎 先生語之以進道之方 余尙蒙昧 莫悟其所謂也 退而思之 亦未得焉 雖汩沒間斷 不知其紀極 而秉彝之天 有不盡泯滅者 經過三四年後 始怳然似有得夫先生所詔之旨 杯潦之量 勺水加之 其私喜可知也 如得更見于先生 則將撥正其鄙得而請益焉 是行也 隨尊長 不擅留一日 當夜 而進 先生以墜馬傷肱新瘡坐定數語 問之曰 曩在國都 兩度接話 吾尙不忘 隔面亦云久矣 若 所得幾何 曄伏而唯唯 謝無有所得 請問明德 (하략) 103) 황광욱, 화담 서경덕의 철학사상, 심산, 2003, p.14 참조

42 지 않았다. 이렇듯 허엽은 때로 지나치다는 평을 들을 만큼 화담 문인으로서의 자기 존재 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였는데,105) 이러한 허엽의 태도는 화담이 그의 삶에 있어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닌 존재인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허엽이 죽은 뒤 화담을 모신 화곡서원(花谷書院)에 함께 배향된 사실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하 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에서는 화담 서경덕의 생애와 학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故) 처사(處士) 서경덕을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하였다. 경덕은 개성(開城) 사 람인데 가세가 외롭고 한미하였으며 농사를 생업으로 하였는데 몹시 가난하였다. 경덕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고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 령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올랐으나, 곧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다시는 응시하 지 않았다. 화담(花潭) 곁에 집을 짓고 도의(道義) 공부에 마음을 쏟았는데, 그의 104)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故事本末, 中宗朝遺逸 명종조에 호조 좌랑을 증직했고 선조조에 더 증직할 것을 청했는데 박순ㆍ허엽은 그 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 의논을 더욱 힘써 주장했다. 이때에 임금이 이르기를 경덕이 저술한 책을 내가 가져다가 본 즉 몸을 수양하는 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 러면 이것은 수리학(數理學)이 아닌가? 그 공부가 의심할 점이 많다. 하니 이이가 아뢰 기를 경덕의 학문은 횡거(橫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의 저술한 글이 성현의 뜻에 꼭 맞는지는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조예가 심원하여 스스로 터득 한 묘리가 많으니 문자나 언어의 학문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명하여 우의 정을 증직했고, 시호를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석담일기 허엽이 매양 공을 존경해서, 기자(箕子)의 정통을 이을 만하다. 하였는데, 이이가 경 덕의 학문이 횡거에게서 나왔다고 논했다는 것을 듣고 허엽이 이이를 책망하여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깊이 근심하는 바이다. 만일 화담의 학문이 소강절ㆍ장횡거ㆍ정 자ㆍ주자를 겸했다고 하면 옳을 것이니, 그대가 전심하여 10여 년 글을 읽은 뒤에라야 화담의 지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만일 내가 글을 더 오래 읽으면 읽을수록 공의 의견과 반대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보다 먼저 허엽이 이황에 게 화담은 횡거에게 비할 만합니다. 라고 하니 이황이 화담이 지은 글 중 무엇을 횡 거의 정몽(正蒙) 에 비할 것이며 무슨 글을 횡거의 동서명(東西銘) 에 비할 수 있는 가? 하였다. 이에 허엽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히 과장하 였으니 알지 못하고 망녕되게 말한 것이었다. 석담일기 105) 李植, 澤堂集 別集 卷15, 雜著, 追錄 허초당(許草堂)은 화담을 너무나 지나치게 앞세워 주장하곤 하였으므로 퇴계가 항상 그의 집착하는 병통을 지적하였다. (草堂主張 花潭太過 退溪常病其執滯)

43 학문은 오로지 궁리(窮理)ㆍ격물(格物)을 일삼아서 혹은 여러 날 묵묵히 앉아 있기 도 하였다. 그가 궁리 공부를 하는 데 있어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려면 천(天) 자 를 벽에 써 놓고 연구하였고 이미 궁구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써 놓고 차분 히 생각하고 힘써 연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여러 해를 이와 같이 하여 자 신도 모르게 환히 꿰뚫은 뒤에 독서하여 터득한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 그러나 후세 사람이 나의 말을 따르면 나와 같은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대부분 횡거(橫渠)의 학설을 주장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와는 약 간 달랐으나 마음에 자득(自得)하여 만족스럽게 스스로 즐기며 세상의 시비(是非) ㆍ득실(得失)ㆍ영욕(榮辱)에는 털끝만큼도 개의하지 않았으며 집에 먹을 것이 자주 떨어져도 태연스럽게 지냈다.106) 위의 글에는 화담의 학문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각과 평가가 드러나 있다. 화 담의 공부 방식은 대개 자득(自得) 이란 말로 압축되는데, 이는 화담 자신이 자 득 을 강조한 것과 이이가 화담의 학문을 일러 스스로 터득한 맛이 많다 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107) 많은 이들이 화담의 학문을 평가함에 있어 스스로 얻어냈기 때문에 독창적이다 라거나 도통(道統)과 다르거나 그에 근거하 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이다 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08) 실제로 이이가 그가 저술한 것이 성현의 설과 꼭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고 하면서도 세상의 이른바 학자라는 자들은 성현의 말만을 모방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 얻는 것이 거의 없지만, 경덕은 깊이 사색하고 독자적인 조예를 가져 스스 106) 國朝寶鑑 卷2, 宣祖朝3, 8년(乙亥, 1575) 107) 李珥, 栗谷全書 卷10, 書, 答成浩原 요사이 정암(整菴)ㆍ퇴계(退溪)ㆍ화담(花潭) 세 선생의 설을 보니 정암이 최고고 퇴계가 다음이며 화담이 또 그 다음인데, 그 중 정 암과 화담은 스스로 터득한 맛이 많고, 퇴계는 본받은 맛이 많습니다. (중략) 화담은 총 명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묵직함이 부족하며 그 독서와 궁리가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자기의 의사를 많이 썼습니다. (중략) 화담은 하나의 기가 오래 존재하여 가는 것도 지 나가지 않고, 오는 것도 잇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화담이 기 를 보고 이(理) 로 아 는 병통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간에 화담의 견해는 스스로 터득한 것입니다. (近觀整菴 退溪 花潭三先生之說 整菴最高 退溪次之 花潭又次之 就中整 菴花潭 多自得之味 退溪多依樣之味 (중략) 花潭則聰明過人 而厚重不足 其讀書窮理 不拘 文字 而多用意思 (중략) 而花潭則以爲一氣長存 往者不過 來者不續 此花潭所以有認氣爲理 之病也 雖然 偏全閒 花潭是自得之見也) 108) 황광욱, 앞의 책, p.133 참조

44 로 터득한 묘리가 많으므로 언어나 문자만을 힘쓰는 학문은 아니다 라고 높이 평 가했던 것은 화담의 학문을 바라보는 당대의 이중적 시각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109) 이렇듯 화담 학문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자득 은 학문의 이해에 있어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바탕이 되는 만큼, 그의 학문에서 나타나는 개 방적이고 탄력적인 측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110) 이는 즉, 화담의 철학에 주 자 철학 뿐 아니라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그리고 일부나마 도가적 경향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화담 철학의 다양한 면모는 퇴계의 철학이 정주 학을 정통으로 하여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한 것과는 대조적이며, 그런 연장 선에서 퇴계와 율곡이 화담 철학을 비판했던 중요한 근거 중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111) 다음의 글을 보자. 또한 질문하기를 허공(許公) 엽은 자기 스스로 학문을 담당한다고 생각하십니 까? 하니 스스로 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했다. 박여룡(朴汝龍)이 질문하기를 그의 학문은 원류(源流)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화담은 물건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비록 마땅하지 못한 공궤(供饋)라도 받 고 주는 자가 없으면 여러 날을 굶고 앉았더라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 은 선도(禪道)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허엽이 배워 온 바입니다. 라고 답 하였다.112) 율곡과 그 문인들 간의 문답에서 알 수 있듯, 율곡은 화담의 학문이 선적(禪 的) 인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같은 경향이 그의 문인들에게 서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후대인들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아, 김인후(金麟厚) 는 화담의 설이 돈오(頓悟)의 첩경(捷徑)으로 빠질까 염려했다 113)고 하며 유수 원(柳壽垣) 역시 화담의 학문에 노자나 장자의 기미가 스며 있어 후대인들이 다 109) 國朝寶鑑, 앞의 글 110) 신병주, 南冥學派와 花潭學派 硏究, 일지사, 2000, p ) 황광욱, 앞의 책, pp.15~16 112) 李珥, 앞의 책, 卷31, 語錄 上 又問 許公曄 自以爲擔當學問乎 曰 自以爲擔當矣 汝 龍問其學無乃有源流乎 曰 花潭 有與者則雖不宜之饋 皆受 無與者則飢坐累日 亦不求於人 此似禪道 是許之所從來也 113) 宋時烈, 宋子大全 卷154, 碑, 河西金先生神道碑銘 於花潭則慮其弊流於頓悟之捷徑

45 시는 전처럼 숭상하지 않게 되었다 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14)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화담의 학문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인물 은 퇴계 이황이었다. 그는 문인들과 주고받은 글을 통해서 화담의 학문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내가 어리석고 고루하며 소견이 막혀서 성현을 독실히 믿고 본분에 개진한 말씀 을 따르기만 할 뿐 화담처럼 기기묘묘한 곳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험 삼아 화담의 설을 가지고 성현의 설을 헤아려 보니 하나도 부합하는 곳이 없었다. 매양 생각하건대, 화담이 일생 동안 이 일에 힘을 쏟아 스스로 심오한 이치를 궁구하고 현묘함을 극진히 하였다 고 여겼지만, 결국 이(理) 란 글자를 투철하게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비록 죽을힘을 다하여 기이한 것을 말하고 묘한 것을 말하였으나 거칠고 얕은 형기(形器) 한쪽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그런 데도 그 문하의 사람들은 그릇된 것을 굳게 지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115) 화담의 소견은 자못 정밀하지 못하여 그가 저술한 여러 논설을 보면 한 편도 병 통 없는 것이 없으니, 주신 글에서 거론한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의 문 인들이 추존한 것은 너무도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지난해에 남시보(南時甫)의 편 지를 받았는데 허태휘(許太輝)가 화담을 진백사(陳白沙)에게 비할 수 있다고 하는 데 이 말이 어떠합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대답한 것을 지금 자세히는 기억할 수 없지만, 대개 백사는 선도(禪道)에 빠졌다 하나 그 인품이 참으로 높은데, 화 담의 학문은 허탄하고 잡스러워 백사에게 미치지 못할 듯하다. 고 말하였습니다. 시보가 그 편지를 받고 태휘에게 보이니 태휘가 한 차례 편지를 보내와 힐문하였 는데, 도리어 전에 백사에게 비기던 말은 숨긴 채 그의 학문을 늘어놓고는 끝에 가서 횡거(橫渠)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고 하였습니다.116) 114) 柳壽垣, 迂書 卷10, 論變通規制利害 화담ㆍ남명ㆍ대곡(大谷 : 成運)ㆍ송당(松堂 : 朴英) 등의 경우를 보면, 이들이 당초 지나치게 유명했던 것도 우리나라의 풍속이 거친 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유학의 규모와 문로(門路)가 퇴계 이후 보다 명백하여지자 후 인들 또한 그들에게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기미가 스며 있는 것을 알고는 다시 전 처럼 숭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以花潭南冥大谷松堂諸人言之 當初得名之過重 亦由於國 俗鹵莽之致 儒學規模門路 自退溪後 亦旣明白 則人亦知其爲老莊氣味 傍門別傳 不復慕尙 如前矣) 115) 李滉, 退溪集 卷41, 雜著, 非理氣爲一物辯證 滉愚陋滯見 但知篤信聖賢 依本分平 鋪說話 不能覰到花潭奇乎奇妙乎妙處 然嘗試以花潭說 揆諸聖賢說 無一符合處 每謂花潭 一生用力於此事 自謂窮深極妙 而終見得理字不透 所以雖拚死力談奇說妙 未免落在形器粗 淺一邊了 爲可惜也 而其門下諸人 堅守其誤 誠所未諭

46 화담공의 소견을 생각해 보면, 기수(氣數) 한쪽 길로만 너무 치우쳐 있습니다. 그의 설은 이(理) 를 기(氣) 로 인식함을 면치 못하였으며, 또한 기 를 가리켜 이 라고 한 것도 있는 까닭에, 지금 여러분도 더러는 그 설에 익숙해져서 반드시 기 를 고금(古今)에 걸쳐 항상 존재하고 소멸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 러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불가(佛家)의 견해에 빠지게 되므로, 여러분은 참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117) 윗글에 보이는 퇴계의 견해는 후대인들이 화담의 학문을 비판함에 있어 중요 한 논지가 되었던 것으로서 그 논의의 핵심은 화담의 학문이 성현(聖賢)의 종지 (宗旨)와 부합되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서경덕의 성리설은 장재의 기론(氣論)을 따르는 것으로, 주자의 이기론을 따르 는 이황의 입장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즉, 이황이 우주의 근원을 이(理) 로 보는 데 비하여 서경덕은 기(氣) 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이 와 기 의 관계 에 있어 이황이 이 둘을 이원적으로 보고 이 가 기 에 앞선 존재라는 점[理先氣 後]과 이 가 근본이며 기 가 말임[理本氣末]을 명백히 한 데 비하여, 서경덕은 이 와 기 를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이 가 기 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즉 이황의 이 가 기 를 주재하고 명령하는 존재인 데 비하여, 서경덕의 이 는 기 작용의 법칙을 의미했던 것이다.118) 퇴계는 화담의 설에 대하여 그가 이 와 기 를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기 를 가리켜 이 라고 한 것도 있다면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데, 퇴계의 이 같은 태 도는 주자의 이론을 학문의 종지로 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 라 할 수 있다. 화담의 기론은 실재에서나 논리에서나 이(理)없는 기(氣) 혹은 기 없는 이 를 상정하지 않는 이기원불리(理氣元不離) 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주자는 논리적인 면에서 기가 있기 위한 전제로서의 이 를 상정하고 있지 만, 화담은 이 를 별도로 말하지 않고 담연무형(湛然無形)의 태허(太虛) 를 말 116) 李滉, 위의 책, 卷25, 書, 答鄭子中講目 花潭所見 殊未精密 觀其所著諸說 無一篇無 病痛 不但如來喩所擧者爲然也 而其諸門人推尊 太不近情 去年 得南時甫書云 許太輝謂花 潭可比白沙 此言何如 滉所答 今不記其詳 大槩謂白沙雖溺禪 其人品實高 花潭之學 誕而雜 恐不及白沙云云 時甫得書 以示太輝 太輝有一書來相詰 反諱其向日比白沙之說 而盛言其學 其末 有與橫渠何異之云 117) 李滉, 위의 책, 卷14, 書, 答南時甫 因思花潭公所見 於氣數一邊路熟 其爲說未免認理 爲氣 亦或有指氣爲理者 故今諸子亦或狃於其說 必欲以氣爲亘古今常存不滅之物 不知不覺 之頃 已陷於釋氏之見 諸公固爲非矣 118) 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 8, 한길사, 1994, p

47 한다. 따라서 이존적(理尊的) 이기관(理氣觀)을 견지하는 퇴계의 입장에서 볼 때, 화담의 이러한 관점은 분명 이기일물(理氣一物)의 혐의가 있다고 비판할 여 지가 있는 것이다.119) 그러나 무엇보다도 퇴계를 긴장하게 했던 것은 화담의 학설에 이단으로 경도 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화담은 세계에 있어 절대적 선험적 존재로서 의 기 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학문에는 다양한 사상이 개입될 여지가 충 분하였다. 화담의 문인들에게서 도가나 불가, 의학, 산술 등의 잡학적 성향이 발 견되는 것이나 양명학에 대해 관심을 보인 학자들이 나타난 것은 아마도 이 같 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화담의 학문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는 그의 학문이 수리 혹은 상수학(象數學) 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다. 퇴계는 화담의 학문이 기수(氣數) 한쪽 길로만 너 무 치우쳐 있다 는 지적을 한 바 있고,120) 선조 역시 그의 학문에 대해 기수에 대한 것이 많고 수신(修身)에 관한 내용이 없으니 이는 수학(數學)인 듯하다 는 언급을 남긴 것 등으로 미루어 화담의 학문을 바라보는 당대인들의 시각이 거의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화담과 관련한 기록들에서 소옹 이나 장재 에 관한 언급이 거의 빠 지지 않는 것 역시 화담의 학문이 갖는 특성을 잘 보여 준다. 먼저 소옹은 모든 만사만물이 소위 '심(心)에서 생긴다고 인식하였는데, 여기서의 심 은 선천 존재 의 절대 정신으로 혹은 일(一) 이라고도 한다. 이 일 은 이(二) 를 낳는데, 그 이 는 보이지도 않고 형질(形質)도 없는 신(神)이며, 그 신은 다시 수(數)를 낳 게 된다. 소옹은 바로 이 수로써 과거와 현실 세계의 만사만물을 설명할 수 있 을 뿐 아니라, 미래 세계의 치란흥쇠(治亂興衰) 및 인사(人事)의 길흉화복을 추 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그의 철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상수학이며, 이 에 따라 소옹은 허다한 자연 현상을 모두 그의 상수이론 체계에 끌어들였다.121) 장재는 송대 최초로 기일원(氣一元) 의 철학 사상을 전개하여, 우주의 만유(萬 有)가 기 의 집산(集散)에 따라 생멸(生滅) 변화하는 것이며 이기(理氣)의 본 체는 태허(太虛)로서, 태허가 곧 기 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불교와 노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주역 의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여 모 119) 황광욱, 앞의 책, p ) 李滉, 앞의 책, 권14, 書, 答南時甫 因思花潭公所見 於氣數一邊路熟 121) 이돈주, 邵雍의 <皇極經世聲音唱和圖>와 宋代漢字音, 국어학 43집, 국어학회, 2004, p

48 든 이학을 버리고 주역 과 중용(中庸) 에 따라 송대 유학의 기초를 세웠다. 서경덕이 이러한 소옹이나 장재 등과 자주 비교된 데에는 그가, 이(理) 를 중심 으로 하여 인간의 도덕적 규범을 확립하고 이 를 토대로 자연과 사회를 해석하 는 것이 주요한 흐름으로 대두되었던 시기에 기 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였다 는 것과 성리학 이해에 있어 특히 주역 을 중시했던 것이 큰 이유가 되었 다.122) 서경덕은 역학에 크게 입각하여 이기(理氣)의 논변 및 심성(心性)의 분석과 원회(元會)의 수(數)에 통관(通貫)하지 않음이 없었다. 123)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주역 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후대의 신흠이 그의 학문에 관해 논한 다음의 글 은 역학과 관련한 서경덕의 명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본디 역학이 발전되지 않아 유선(儒先) 중의 그 누구도 핵심을 계발 시킨 이가 없었으며, 비록 (그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저 글 뜻과 같 은 부분적인 것을 해설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화담은 혼자 멀리 강 절(康節 : 소옹)을 이어 곧바로 그를 엿보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정말로 세상에 드 문 호걸이라 할 만하다 124) 서경덕의 주역 에 대한 관심은 먼저 복재(復齋) 라는 그의 호와 가구(可久) 라는 자에서 잘 나타난다. 복재(復齋) 는 주역 의 복괘(復卦)에서, 가구(可久) 는 주역, 계사전(繫辭傳) 에 나오는 친근함이 있으면 오래 갈 수 있고, 공로 가 있으면 커질 수 있다[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이를 통해 서경덕이 얼마나 주역 에 심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125) 그런데 주역 의 논리 자체가 변화와 이상을 추구하는 변혁의 논리를 내포하 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주역 은 현상 세계의 실상을 체계적으 로 표현하고 해석하기 위한 방식에서 우주 만물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어떤 원 리나 법칙을 발견하려고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이런 관점에서 팔괘(八卦)가 122) 신병주, 앞의 책, p.195 참조 123) 徐敬德, 花潭集, 重刊序 花潭徐先生 (중략) 迺大着力立脚於易學 理氣之辨 心性之 分 元會之數 無不通貫 124) 申欽, 象村集 卷55, 先天窺管 花潭徐氏名敬德 字可久 開城府人 系出唐城 我國素 無易學 雖儒先亦無能啓發關鍵者 所論述 只文義之末爾 花潭獨能遠紹康節 直闚門戶 可謂 不世之人豪矣 此解 是我國諸儒所未發也 125) 신병주, 앞의 책, p

49 성립되며 그것을 통하여 우주 내의 변화와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즉 주역 이 괘효(卦爻) 라는 철학적 부호 체계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 변 화와 현상을 말하고 그것을 유비적(類比的)으로 적용하여 천하의 복잡한 상태 들 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126) 또 주역 의 내용 중, 수를 극진히 헤아려 드디어 천하의 상을 정립하니, 천 하의 지극한 변화에 이르지 않으면 누구와 능히 이것을 하리오[極其數 遂定天下 之象 非天下之變 其孰能與於此] 라는 표현에서도 주역 이 능히 변화의 논리를 중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사실들은 주역 이 무엇보다 변화의 논 리를 강조하고 현실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시되었던 학문 체계임을 보여주 는 것으로 16세기 초, 조선의 학계에서 주역 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던 것은 당 시 사회에서 변화와 다양성을 모색하고자 했던 지식인 계층이 광범위하게 형성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127)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주역 에 관심을 가진 사실은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 되나 실록 에 근세의 역학은 서경덕 이후로는 전함이 없다 128)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서경덕은 당대 주역 의 이해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런 까 닭으로 그 문인들 역시 역학에 관한 한 상당한 명성을 지닌 이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박지화 박민헌 민순 이지함 등을 들 수 있다. 박지화129)와 박민헌130)은 화담에게 직접 주역 을 사사한 사실이 문헌 기록에 전하며, 민순 역시 주역 의 이치에 깊어131) 그에게 수학한 한백겸 홍이상 역시 주역 에 정통하다는 평을 들었다132). 이지함은 상수학과 복서(卜筮)로써 세상에 126) 정병석, <周易>의 觀 -세계와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의 기점으로서의 觀, 哲學, 한국철학회, 2003, p.9 127) 신병주, 앞의 책, pp.198~199 참조 128) 宣祖實錄 卷59, 28年(1595 乙未) 1月 8日(辛巳) 近世易學 自徐敬德後 絶無傳焉 129) 許穆, 眉叟記言, 記言別集 卷26, 遺事, 朴守庵事 朴枝華先生字君實 別號守庵 受易 於花潭 好修鍊之術 130) 申欽, 앞의 책, 卷25, 墓誌銘, 贈領議政韓公墓誌銘 聞朴參判民獻從徐花潭學易 乃詣 受業 探索精微 多所發明 朴公亟稱之 131)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18, 宣祖朝故事本末, 宣祖朝儒賢 閔純字景初號杏村驪興人 (중략) 後謁徐花潭聞主靜之說深味之名 其齋曰習靜 深於易理 辛卯卒年七十三 132) 광해군일기 卷92, 7年(1615 乙卯) 7月 3日(戊申) 전 참의 한백겸(韓百謙)이 졸하였 다. (중략) 어려서 행촌(杏村) 민순(閔純)에게 사사했는데, 역학(易學)에 정미하였고 예서 (禮書)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천거로 벼슬길에 나왔으며, 선묘(宣廟) 때 일찍이 중외의 유신(儒臣)들을 불러 모아 주역전의(周易傳義) 의 이동(異同)을 교정하게 하였는 데, 백겸은 홍가신(洪可臣) 정구(鄭逑)와 함께 그 선발에 뽑혔다. (前參議韓百謙卒

50 널리 알려져 세간에서는 그를 소옹에 비견해 해외(海外)의 요부(堯夫) 133)라 부 를 정도였으며, 서경덕의 고제인 박순 역시 화담 선생에게서 수학하여 성리(性 理)의 설(說)을 들었고 주역 에는 더욱 조예가 깊었다 134)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화담 문인들 대부분이 주역 에 깊이 침잠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허엽의 경우 역시, 그가 화담을 만나기 전 이여에게서 주역 을 배웠던 것이 나 나의 선친께서는 화담 선생에게 가장 오래 배웠다 135)는 허균의 전언 등을 생각할 때, 앞에 언급한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허엽의 아들 허성이 경연에서 선조와 더불어 자주 주역 을 자주 강(講)했던 일과 선조 대에 설치된 주역교정청(周易校正廳)의 당상(堂上)직을 맡았던 것도 이 같은 추 측을 뒷받침해 준다. 허봉과 허균의 경우에는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그들 의 저작에 주역 과 관련한 내용들이 상당수 눈에 띄는 것이나 이들 형제가 박 학 으로 유명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 형제의 주역 에 대한 이해 또한 부형 에 필적할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136) 서경덕은 이렇듯 주역 에 대한 이해를 발판으로 천문에도 상당한 식견을 지 녔던 사실이 확인되는데,137) 허엽과 허성 부자(父子) 역시 천문에 밝았던 사실이 (중략) 少師閔杏村純 精於易學 尤致力於禮書 以薦入仕 宣廟嘗命聚中外儒臣 校周易傳義 同異 百謙與洪可臣 鄭逑 同與其選) 133) 權尙夏, 寒水齋集 卷28, 墓碣, 正言李公 禎億 墓碣銘 近世土亭先生亦海外之堯夫 也 134) 李恒福, 白沙集 卷4 下, 行狀,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 藝文 館 春秋館 觀象監事朴公行狀 公早知爲學之方 受學於花潭先生 得聞性理之說 尤邃於易 135) 許筠, 앞의 책, 卷23, 說部2, 惺翁識小錄 中, 徐花潭六日不食而無飢乏之色 先大夫學 於花潭先生最久 136) 허봉은 당대 최고의 수재 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32세의 젊은 나이 에 조정을 떠나 유배길에 올랐고, 38세에 객사했다. 허균 역시 뛰어난 재주에도 불과하 고 잦은 파직으로 향촌에 은거하거나 외직에 나가 있는 기간이 길었으며, 종내에는 역모 에 연루되는 등, 두 사람 모두 그 파란 많은 생애로 인해 학문적 성취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얻기가 어려웠다. 137)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에서 동국 제일의 인재를 다음과 같이 품정(品定)하고 있다. 퇴계(退溪)의 덕(德), 읍취헌(挹翠軒) 박공(朴公) 은(誾)의 시(詩), 간이(簡易) 최립 (崔岦)의 문(文),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경륜(經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의 도략(韜略),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절의(節義), 남이(南怡)의 무용(武勇), 화담 (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천문(天文), 박연(朴堧)의 악학(樂學), 황공도(黃公圖)의 총명(聰 明),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의 예학(禮學), 정북창(鄭北窓)의 선술(仙術), 흥령(興嶺)의 산술(算術),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필법(筆法),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풍채 (風采), 규암(圭庵) 송미수(宋眉叟)의 효행(孝行) 등이다

51 문헌에 엿보인다. 실록 의 기록 중, 명종이 을묘(乙卯)년 3월에 일전(日躔 : 해 가 제자리에 드는 것)이 없으니 관상감(觀象監) 및 천문을 아는 문신에게 물어 보라고 전교하자 승정원에서 허엽과 김안국의 아들 김여부에게 이를 물었다는 것이나138) 선조 18년, 관상감이 우림성(羽林星)에 나타난 별에 망기(芒氣)가 있 는 듯하여 변이(變異)가 비상(非常)하니 허성 등으로 하여금 살피게 할 것을 주 청한139) 일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선조 25년, 당시 홍문관 교리로 있던 허성에 게 관상감140) 교수(觀象監敎授)의 자리를 겸직토록 한 것141) 또한 이 같은 사실 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여러 사실들은 화담의 학문이 허엽 뿐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입증한다. 화담의 이기일원론 은 허엽 일가의 학문에 절충성과 개방성이 나타나는 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으며, 유난히 결집력이 강 했던 화담의 인맥은 그들의 정치적 기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훗날 허엽의 아들들이 부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담을 추숭하는 일에 적극 나섰던 것은 이들에게 있어 화담이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확 인케 하는 것으로, 허봉과 허균이 자신의 저서에서 화담에 관한 내용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나 허봉이 1574년 사행의 중도에 개성에 들러 화담서원을 방문하고 화담의 묘를 참배했던 것이나 화담의 서자 서응봉(徐應鳳)을 만났던 사실은142) 허엽 일가와 화담과의 관계를 시사해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38) 明宗實錄 卷17, 9年(1554 甲寅) 11月 22日(己未) 傳于政院曰 今觀乙卯年曆日 則三 月無日躔 觀象監及知天文文臣 問而啓之 政院啓曰 乙卯年三月無日躔事 問于觀象監及知天 文文臣 許曄金汝孚 於天文僅識其糟粕云 139) 宣祖實錄 卷19卷, 18年(1585 乙酉) 9月 24日(辛卯) 辛卯 觀象監啓曰 昨日夜一更 有星見於羽林星 似有芒氣 變異非常 別定成泳宋言愼許筬 兼敎官尹皡 本監官員 依前例 輪 還直宿 候察何如 傳曰 允 140) 관상감(觀象監) 은 조선시대 천문 지리학(地理) 역수(曆數 : 책력)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관상감 교수(敎授)의 직(職)은 천문학교수 (天文學敎授)와 지리학교수(地理學敎授)의 두 자리로 나뉘어 있으며 모두 종6품에 속하 는 관직이다. 141) 宣祖實錄 卷31卷, 25年(1592 壬辰) 10月 13日(己亥) (전략) 許筬兼觀象監敎授 142) 許篈, 朝天記 甲戌(1574년) 5월 14일조, 過江錄附 10월 29일조 기사 참조

52 2. 學脈의 繼承과 交遊 樣相 앞에서 허엽이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는 한편, 김안국과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원칙만을 고집 하지 않고 사세(事勢)에 따라 대응하는 기일원론자 의 사고를 보이고 있음을 살 펴보았다. 이 같은 허엽의 학풍이 가학(家學)을 통해 그의 자녀들에게 계승된 것은 어느 정도 공인된 사실인데, 그간의 논의 대부분이 충분한 증빙 자료 없이, 그저 연구 자의 인상(印象) 에 의거해 내린 결론이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재고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즉, 허엽의 학풍이 그 자녀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로 인 해 형성된 가학의 특질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증할 수 있는 자 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허엽과 그 자녀들의 학맥 및 인적 교유를 통해 허엽의 학통이 가인들에게 계승되어 가학을 이룬 사실과 허균 이 가정에서 받은 훈도가 가장 컸다 고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 다. 1) 許曄 : 人脈의 構築과 擴大 허엽의 아들들이 부친의 학맥을 잇고 있으며 그 사상적 궤적 또한 유사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친 허엽의 교유 양상을 살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허엽은 스승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술이부작(述而不作) 의 원칙에 입각,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단지 그의 문집인 초당집 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초당집 에 수록된 인사들의 명단에 근거, 간략하게나마 그 관련 내용을 검토 한 결과 허엽의 교유 집단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즉, 서경덕의 문인 집단과 기묘사화 이후 은거를 택한 기타 재야사림 계열 의 인물들, 그리고 이황의 문인들이다. 문헌 자료가 많지 않은 탓에 실제와는 다 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허엽의 사상적 지향을 유추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으로 생각된다. 실록 에 허엽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과 조행(操行)에 볼 만한

53 점이 있었다. 처음에 서경덕을 따라 배우던 자가 매우 많았으나 서경덕이 죽자 모두들 배반하고 떠났는데 오직 허엽과 박순만이 변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도 화담의 제자를 말할 때에는 이 두 사람을 으뜸으로 삼는다 143)는 언급이 있 을 만큼 화담은 허엽에게 있어 특별한 영향을 끼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런 까 닭으로 허엽은 서경덕의 사후에도 다양한 계층의 화담 문인들 및 그 영향 하에 있는 인물들과 교유를 지속하였는데, 박지화(朴枝華) 홍가신(洪可臣) 최립 (崔岦) 등이 이에 포함된다. 먼저 박지화는 서경덕의 문하에서 가장 오래 수학했고 소득도 많았다고 알려 진144) 인물로 비록 서얼이었으나 박학한 데다 문장을 잘 지었으며, 이학(理學)의 명성까지 얻었다.145) 그는 서경덕의 문인 중에서도 특히나 도가적 성향이 강했 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이나 유몽인 (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한 무외(韓無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등에 그 이인적(異人的) 면모가 수록되 어 있다.146) 한미한 서출(庶出)인 탓에 그 가계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는 소략 하나 허엽과는 동년배로 서경덕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실이 여러 문헌을 통 해 확인되며, 훗날 허엽의 장례에서 만사(輓詞)를 지은 사실 등으로 미루어 허엽 과의 교분이 평생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가신과 서경덕의 관계는 다음 실록 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전 좌통례(左通禮) 민순(閔純)이 졸(卒)하였다. (중략) 그의 학문은 서경덕에게서 얻었고 윤리가 천부적으로 독실하며 효성이 매우 극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 에는 효행으로 소문이 났다가 종내에는 유학(儒學)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문 인 홍가신은 주자가 이연평(李延平)을 기린 말을 인용, 주자께서 연평 선생은 온 화하고 겸손하며 정성스럽고 후덕하여 주위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있어도 그분의 한계를 볼 수 없으니 참으로 대단한 군자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선생의 덕행 과 서로 부합된다 고 하였다.147) 143) 明宗實錄 卷28, 17年(1562 壬戌) 1月 25日(庚戌) 許曄 師事花潭徐敬德 學問操行 有可觀者 初從敬德學者甚衆 敬德卒 無一人不叛去 惟曄與朴淳不變 故至今稱花潭弟子者 以二人爲首 144) 車天輅, 五山說林草藁 朴守菴枝華 受業最久 所得亦多 145) 李植, 澤堂集 別集, 卷15, 追錄 朴枝華庶人也 博學能文章 亦有理學之名 146) 신병주, 南冥學派와 花潭學派 硏究, 일지사, 2000, p ) 宣祖修正實錄 卷25, 24年(1591 辛卯) 10月 1日(癸巳) 前左通禮閔純卒 (중략) 其

54 홍가신은 서경덕의 고제 중 하나인 민순에게 수학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뛰어 난 재주를 지녀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 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그 문장이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 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 기 와 이 가 순환되는 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고 음양으로 조화 분리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동조했다. 홍가신은 정치 적으로도 동인(東人)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148) 허엽과는 여러 모로 같은 행보 를 보인 인물이라 할 만하다. 최립의 경우에는 그 부친 최자양(崔自陽)이 서경덕에게 수학한 사실이 동유 사우록 과 전고대방 에 보임으로써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확인된다. 그의 서경 덕에 대한 존숭은 여러 편의 시작(詩作)을 통해 확인되는데 그 중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149) 不及先生世 선생의 시대에 태어나 직접 뵙지 못한 채 徒聞孔鑄顔 공자가 안자(顔子)를 가르쳤단 말이나 그저 들었으니 源頭來活水 끊임없이 퐁퐁 솟아 흘러내리는 샘물이요 仰止有高山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높은 멧봉우리로세 忽若函丈下 홀연히 지금 선생의 강석(講席)에 나아온 듯 怡然方寸間 가슴속에 나도 몰래 희열(喜悅)이 느껴지네 更期花發日 다시 기약하노니 꽃들이 활짝 피는 그날 生意見斑斑 성대히 발동하는 생의(生意)를 확인하리라 學得於徐敬德 而倫理天篤 事親至孝 始以孝聞 卒以儒學顯 門人洪可臣引朱子讚李延平之 言曰 溫謙慤厚 人與之處 久而不見其涯 蔚然君子人也 此言與其德行相符云 148) 李珥, 石潭日記 下卷, 萬曆六年戊寅 홍가신으로 사헌부 지평을 삼았다. 홍가신은 자못 남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조원(趙瑗)과 젊었을 때부터의 벗이었는데, 조원이 이조 좌랑이 되어 사정(私情)을 따르는 허물이 있고 경솔하여 인망이 없었으므로 홍가신 이 조원에게 말하기를 공(公)을 섬기려면 사(私)를 돌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군은 실수가 많으니 내가 사정(私情)을 따른다고 탄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조원을 논박하여 체직케 하게 하니 공론이 통쾌하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홍가신은 동인이라 지 목하고 조원은 서인이라 지목하였기 때문에 말을 만드는 사람들이 동인이 서인과 화합 하지 못하고 공격하여 이런 꼴이 되었다. 고 하였다. 정철 역시 평정시키지 못했다. (以 洪可臣爲司憲府持平 可臣頗有風力 與趙瑗爲少年友 而瑗爲吏曹佐郞 有循私之說 且瑗輕 躁非人望 故可臣先謂瑗曰 公事則不顧私 君多所失 我不可循情不劾 乃駁瑗遞職 公論稱快 而可臣則人目爲東人 瑗則人目爲西人 故造言者多謂 東人與西不協 故攻擊而至此 鄭澈亦 不能平矣) 149) 崔岦, 簡易集 卷7, 松都錄 花潭 次五山韻 二首 中 두 번째 首

55 위의 시는 최립이 차천로(車天輅)와 더불어 서경덕의 은거지였던 화담을 방문 한 감회를 읊은 것인데, 차천로의 부친인 차식(車軾) 역시 개성 출신으로 10세 무렵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 사실이 전해진다.150) 이로써 화담 문인들 간의 교유가 대(代)를 이어 계속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서경 덕의 문하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대거 배출된 사실을 공자가 안회(顔回)를 길러 낸 것에 비유하고 화담의 존재를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높은 멧봉우리 라 일 컫고 있는데, 이를 통해 화담에 대한 그의 경모(敬慕)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를 짐작할 수 있다. 최립은 이십여 세 연상인 허엽을 스승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는데, 허엽이 영남 관찰사로 부임할 당시 그 사람됨에 위무(威武)와 용맹의 요소가 부족하다 는 세 간의 비판에 대하여 선생이 그 지방에 한 번 나가도록 조정에서 중하게 배려한 이유는 선생이 진정한 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며 선생으로 말하면, 스스로 새롭게 하여 백성을 새롭게 하는 학문을 가졌으며, 경연(經筵)에서 오래도록 임 금을 모시면서 성업(聖業)을 이루도록 인도하는 한편 정치로써 은택을 베푸는 본원(本源)을 밝히도록 보좌해 왔으니, 저 영남 지방에서 임금의 뜻을 선양하고 베푸는 관리 중 이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교화의 흐름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 것 이라며 적극 변호하기도 했다.151) 서경덕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여, 전대(前代)의 학설을 널리 흡 수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간략히 개진하는 술이부작 의 방식을 추구했고, 그 문 인들 역시 스승과 마찬가지로 저술에 전념하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사항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화담의 문인들은 그 스승을 치켜세우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152) 라는 비난이 일 정도로 스승에 대한 존숭이 강했으며, 훗날 남명의 문인들과 합 류, 북인(北人) 세력을 형성할 만큼 결집력이 강했던 이들이었으니만큼 그 돈독 150) 姜斅錫 編, 大東奇聞 中宗朝, 車軾夢見定宗 車軾延安人 字敬淑號瀛齋 十歲通詩書 受業于花潭徐敬德 151) 崔岦, 앞의 책, 卷3, 序, 送許草堂先生觀察嶺南序 人有疑者曰 先生宜在朝夕獻替之 地 上雖重南治 不宜內之顧輕 且或者先生所少威猛也固以疑子之言 而言又讐也奚 (중략) 夫重先生一出者 不以其儒乎 (중략) 況先生以自新新民之學 侍於帷幄之久 啓沃乎聖功 本 源乎治澤 而嶺徼之間 布宣之吏 有所不稱也 則安得毋出以導夫流之所未達者乎 152) 李滉, 退溪集, 言行錄 5, 일찍이 말하기를 화담의 문인들은 그 스승을 치켜세우 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심지어는 횡거(橫渠)에게까지 비교하기도 한다. 만일 그 저술이 없었다면 참고할 수가 없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화담은 그 저술에 병통 없는 말이 하나도 없으니, 그 인간과 학문을 이로도 알 수 있다. 하였 다. <禹性傳>

56 한 유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화담학파 외에 허엽이 교유한 또 다른 집단은 사화의 피화자이거나 사화로 인 해 산림에 은거하게 된 재야사림 계열의 인물들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다음 조헌 (趙憲)의 논의를 참고할 만하다. 오직 사화가 혹심하였기 때문에 기미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를 조심하였습 니다. 성수침(成守琛)은 기묘의 화란이 있을 것을 알고 성시(城市)에 숨었고, 성운 (成運)은 동기간의 슬픔을 당하고 보은(報恩)에 숨었으며 이황은 동기가 화를 입은 것을 상심하여 예안(禮安)으로 물러갔습니다. 임억령(林億齡)은 아우 백령(百齡)이 어진 이를 해치는 것을 보고 놀라 외지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또한 서경 덕이 화담에 은둔한 것과 김인후가 벼슬에 뜻을 끊은 것, 조식 이항이 바닷가에 숨어서 살았던 것 등은 모두 을사년의 사화가 격분시킨 것입니다. 정지운(鄭之雲)은 김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자기 스승이 큰 죄망에 빠질 뻔 했던 것을 경계로 삼아 술로 세월을 보내며 이름을 감추었고, 성제원(成悌元)은 직 접 송인수의 변(變)을 보고 낮은 관직을 전전하며 해학으로 일생을 보냈으며, 이지 함(李之菡)은 안명세(安命世)의 처형을 보고 해도(海島)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미치 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습니다.153)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허엽은 김안국과 그의 문인 이여에게 수학했으며, 조광 조의 문인 나식 및 이연경에게 수학한 윤정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김안국과 나 식, 이연경은 사화의 직 간접적인 피해자들로 그 중 나식은 을사사화에 연루,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허엽의 학문과 정치적 입장은 학맥을 통해 얻어진 기묘사 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화담 문인 외의 여타 기묘사림 및 그 문인들과 활발히 종유한 사실이 확인된다. 화담 문인들과 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집단은 남명의 문인들로, 허엽의 스승인 서경덕과 조식이 종유한 사실이 문헌의 기록을 통해 발견되는데,154) 훗 153) 宣祖修正實錄 卷20, 19年(1586 丙戌) 10月 1日(壬戌) 惟其士禍之甚酷 故識微之士 咸謹於出處 成守琛知有己卯之難 而隱於城市 成運身遇鴒原之慟 而藏於報恩 李滉心傷同 氣之被禍 而退居禮安 林億齡駭見百齡之戕賢 而棲遲外服 又如徐敬德之遯于花潭 金麟厚 之絶意名宦 曺植 李恒之幽栖海隅 莫非乙巳之禍 有以激之也 鄭之雲學於安國 而懲其師 幾陷大網 韜名麴糵 ;成悌元身覩宋麟壽之遭慘 則婆娑末班 恢諧終保 李之菡目見安命世之 赴市 則周遊海島 佯狂逃世 154) 宋時烈, 宋子大全 卷172, 墓碣銘, 大谷成先生墓碣銘 성운(成運)선생의 친구는 조 남명(曺南冥)ㆍ서화담(徐花潭)ㆍ李土亭(李之菡) 같은 이들로서 다 세상에 드문 명현(名

57 날 남명이나 화담의 문인들이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대거 희생된 것은 이들 두 집단의 사상적 지향이 유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기축옥사 의 중심인물인 정여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자성리학의 의리론에 얽매이지 않 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며 이를 적극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155) 남명 문인들 중 허엽과 남다른 교분을 나누었던 인물로는 정구(鄭逑)를 들 수 있다. 그는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하다가 후 대에 퇴계의 문인으로 자정(自定)했지만, 학문 경향은 오히려 남명의 그것을 계 승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또한 심경(心經) 등의 성리설에 대해서는 퇴계의 영 향을 크게 받았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 역사(歷史) 의학(醫學) 복서(卜筮) 풍수지리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남명이 추구했던 박학 의 전통을 계승하였 다.156) 정구와 허엽이 교유한 깊이는 그가 허엽의 행장 을 찬(撰)한 사실만으로 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이항은 박영(朴英)의 문인으로 그 학문의 상당 부분이 스승인 박영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박영은 무인(武人) 출신이나 그 학문의 조예가 정밀한 경지에 이르러 주역 의 이치에 깊었고 또한 남의 말과 기색을 잘 살폈으며, 천문ㆍ지 리ㆍ성명(性命)ㆍ산수(算數)에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형(刑 : 기묘사 화)을 받은 후에는 의학 서적을 널리 보아 경험방(經驗方) ㆍ 활인신방(活人新 方) 등의 책을 저술한 157)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황이 그의 학문에 대 賢)들이었고, 남명과는 더욱 막역한 사이였다. (중략) 동주(東洲 : 成悌元)가 보은 현감 (報恩縣監)으로 있을 때 남명ㆍ토정ㆍ화담이 모두 먼 곳에서 찾아와 밤을 새워가며 얘기 하고 놀았는데, 상국 이준경(李浚慶)이 그 소식을 듣고 필시 덕성(德星)이 하늘에 나타 나고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先生所友曹南冥徐花潭李土亭 皆間世名賢 先生與南冥 最爲莫逆交 (중략) 東洲嘗宰報恩 南冥土亭花潭皆遠至 爲對床連夜語 李相國浚慶聞之曰 應有德星見於天矣 然先生論一時人物) 155) 한국역사연구회 著, 모반의 역사, 세종서적, 2001, p ) 신병주, 앞의 책 p ) 朴東亮, 寄齋雜記 2, 歷朝舊聞二, 中宗 公之學 造詣精微之域 邃於易理 又善察言觀 色 天文地理 性命算數 無不通會 自被刑之後 博觀醫書 著經驗方活人新方等書 行于世 박영이 의술에 뛰어났던 사실은 여타의 문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國朝寶鑑 卷19, 中宗朝 2, 13年(戊寅, 1518)에 박영(朴英)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중략) 신통할 만큼 의술(醫術)에 밝아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以朴英爲同 副承旨 (중략) 妙鮮醫術 全活甚衆) 權鼇, 海東雜錄 6, 權撥 공이 도승지가 되어 내의제조(內醫提調)를 예겸(例兼)하였는 데 공이 아뢰기를 승지 박영이 의약(醫藥)에 밝으니 의원제조(醫阮提調)를 시키시기 바 랍니다. 하고 사양하여 그 직위에 거하지 않았다.(公爲都承旨 例兼內醫提調公啓曰 承

58 해 선가(禪家)의 기미를 띠고 있다고 기롱한 158) 것이나 후대에 이르러 학문에 노자나 장자의 기미가 스며 있다 159)는 비판을 받은 사실 등은 박영의 학문에 소위 말하는 이단 의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박학풍 이나 노장 에 의 경도는 화담이나 남명의 문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경향 이 남명이나 화담의 문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당대의 사림형 인물들에 게서 두루 발견되는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영의 문인인 이항 역시 스승과 마찬가지로 무예에 뜻을 두었다가 나이 30이 넘어 비로소 깨달아 학문을 하여 대학(大學) 을 읽었으며, 나이가 이미 많았는 데도 다른 책을 널리 보면 정력이 분산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오로지 대학 을 탐구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아, 미묘한 것을 깊이 통달하기를 목표로 삼 았다. 그의 학문이 글을 널리 배우지 아니하고 먼저 간요(簡要)한 것부터 취하였 기 때문에 의리에는 혹 투명하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이를 결점으로 여기는 자 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60) 이항은 '이'와 '기'를 하나로 보아 '이'의 근원성과 실재성을 부정하고 '이'를 '기' 와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주기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 었다고 할 수 있다.161) 이러한 그의 이기일원론은 노수신 김인후 기대승(奇大 升) 등과의 논변으로 이어졌으며 퇴계에 의해 애당초 번거로움을 참고 세심하게 은미한 뜻을 정미하게 연구하지 않고 다만 태극도설(太極圖說) 에서 하나의 영 상만을 대략 보고는 몇 구절의 서론(緖論)을 주워 서둘러 고집하여 정견(定見)으 旨朴英通醫藥 請授醫院提調辭不居) 158) 正祖大王, 弘齋全書 卷171, 日得錄11, 人物 1 松堂起身弓馬 見幾而作 讀書于洛東 江濱 卒能變化氣質 爲世巨儒 李文純雖譏其帶得禪味 從古武臣中如松堂者 未聞其人 豈不 奇哉 且如冶川石溪等諸人 皆是松堂門下 成就後學之功 亦豈可少之也 159) 柳壽垣, 迂書 卷10, 論變通規制利害 화담(花潭)ㆍ남명(南冥)ㆍ대곡(大谷)ㆍ송당(松 堂) 등의 경우를 본다면, 이들이 당초에 지나치게 유명했던 것도 우리나라 풍속이 단순 하고 거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유학(儒學)의 규모와 문로(門路)가 퇴계(退溪) 이후 로부터 또한 명백하여지자, 후인들도 그들에게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기미가 스며 있는 것을 알고는 다시는 전처럼 숭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以花潭南冥大谷松堂諸人言 之 當初得名之過重 亦由於國俗鹵莽之致 儒學規模門路 自退溪後 亦旣明白 則人亦知其爲 老莊氣味 傍門別傳 不復慕尙如前矣) 160) 李廷馨, 東閣雜記, 本朝璿源寶錄 2, 李一齋恒 長于漢師 少習弓馬 豪勇 人人莫與之 敵 年踰三十 始悟爲學 乃讀大學 退居于泰仁 自以年紀已多 若泛觀他書 恐分精力 只就大 學上 俯讀仰思 爲終身事業 期於洞貫微妙 (중략) 恒之學 不博而先約 其於義理 或有不透 處 人有病之者 161) 한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 8, 한길사, 1994, p

59 로 삼고는 천하의 도리가 이러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으니, 이미 학문을 하는 자가 아니다 162)라는 격한 비판을 받을 만큼 당대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런 이항에게 허엽이 학문적 가르침을 구했던 사실은 퇴계집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허초당(許草堂)이 성(性)이 먼저 동하는지 심(心)이 먼저 동하는지에 대하여 물 으니 일재옹(一齋翁)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심ㆍ성과 이ㆍ기는 혼연한 일체인 데, 옛날 학문하는 사람들이 혹은 나누어 말하기도 하고 선후를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대개 본체로부터 논하면 이 가 기 보다 앞서고 용공(用工)으로부터 논하면 기 가 이 보다 앞섭니다. 송인수 ㆍ이언적의 설은 분명 이것을 뒤섞어 말 하여 사람들이 선후의 분별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학문이 빼어나되 정밀 하지 못한 병통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하략)163) 위의 인용문을 통해 허엽이 이항의 심성론 에 관심을 보인 사실이 확인되는 데, 허엽은 이항에 대하여 언행이 독실하여 마침내 이행(異行)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사서(四書)를 그 모범으로 세워 천 번을 읽음 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164)라고 하며 높이 평가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언적과의 교분 역시 주목되는 부분이다. 허엽은 유희춘과 더불어 회재집(晦齋集) 의 발문을 지었으며 1574년에는 이언적을 배향하기 위 해 창건된 경주(慶州) 옥산서원(玉山書院)의 기(記) 를 짓고 서원의 여러 건물에 직접 이름을 붙이는 등 이언적의 사후까지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이언적은 허엽이 교유했던 대부분의 인물들처럼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 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左讚成) 판의금부사 (判義禁府事)의 중요 직책을 맡아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는 평소 문호(門戶)를 세워 강학(講 162) 李滉, 退溪集 卷16, 書3,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旣不能細心耐煩 硏精微密 只就圖說上略見一箇影象 掇取數句緖論 遽執以爲定見 謂天下道理不過如此 已非善爲學者 163) 李滉, 위의 책, 卷29, 書, 答金而精 許草堂問性先動心先動 一齋翁答曰 心性與理氣 渾是一物 而古人爲學者 或分而言之 或先後言之 蓋自本體以論之 理先於氣 自用工以論之 氣先於理 夫宋麟壽李彦迪之說 想必因此而混言 使人莫知先後之分 其爲學問 未免擇焉而 不精之病耳 164) 許曄, 草堂集, 詩, 輓李一齋 慥慥不須崖異行 平平自到聖賢津 階除四子宏規立 誦 讀千番至訓新

60 學)한 일이 없었으므로 문도(門徒)가 배출되지 못했으나, 나중에 퇴계 이황에 의 해 그 학문적 위상이 알려지게 되었다.165) 퇴계는 회재집 을 보았는데 그 학문의 바름과 그 터득함의 깊이가 거의 근 세의 제일이었다 고 술회하며 이언적의 학문은 매우 바르고 그가 지은 문장은 모두 가슴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이치가 밝고 의리가 발라 바로 그대 로 하늘이 만든 것이니 조예가 깊지 않고서야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라고 경 탄해 마지않았다.166) 이렇듯 조선 주자성리학의 길을 연 이언적에 대한 허엽의 경모는 그의 이황에 대한 존숭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비록 허엽의 학문이 다양한 사 상을 모색하고 그것들을 수용 절충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 종지는 어디까지나 정통 도학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엽이 이언적의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허엽의 신도비명 과 행장 에 서 찾아볼 수 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인종에게 심경부주(心經附註) 를 강 (講)하도록 권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찾아 읽고 놀라워하며 학문의 바른 길 을 찾았다 는 언급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허엽에게 이언적과 관련한 사실을 일러 준 인물은 허엽의 스승 중 하나인 이여(李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묘(仁廟 : 훗날의 인종(仁宗))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유학에 밝은 궁료 (宮僚 : 세자시강원에 속한 보덕(輔德) 이하의 모든 관료들을 지칭)를 정밀히 골 라 선발했다. 이때에 주역 을 강(講)하기 위해 (이여) 선생을 문학의 자리에 불러 들였다. 회재 선생은 빈객(賓客 :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정이품 벼슬)이 되고 유미암(柳眉巖)은 사서(司書 : 세자시강원에 속한 정육품 벼슬)가 되었는데 함께 서연(書筵 :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들어 인묘가 지극히 정밀한 질문을 하였을 때 빼어난 답변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회재 선생과 (이여) 선생이 연이어 대답하며 그 상세한 내막을 모두 펼쳐 보였다.167) 165) 최영성, 韓國儒學通史 上, 심산출판사, 2006, p ) 李滉, 앞의 책, 言行錄 5, 人物 論評 近見晦齋集 其所學之正 所得之深 殆近世爲最 也 (중략) 則近代晦齋之學甚正 觀其所著文字 皆自胸中流出 理明義正 渾然天成 非所造 之深 能如是乎 167) 許曄, 앞의 책, 行狀, 李文學先生行狀 仁廟在東宮 聖學高明極選宮僚 時將講易 先生 以文學被召 李晦齋先生方爲賓客 柳眉巖爲司書 晦齋與先生 俱入書筵 則仁廟必極問精 竗 辨驚人 晦齋與先生 互相敷對 展盡底蘊

61 이언적은 그의 나이 49세 때인 1539년(중종34) 12월, 병조참판 겸 세자우부빈 객(世子右副賓客)으로 임명되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이여도 세자시강원에서 문 학의 직(職)을 맡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허엽은 이여를 통해 이언적의 학문 세계를 접하고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었을 것이 며, 그렇게 시작된 교분이 대를 이어 이언적의 유일한 혈족인 서손(庶孫) 이준 (李浚)으로까지 이어졌음이 초당집 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허엽은 이준에게 이제 그대의 기질이 밝고 빼어난 것은 진실로 가풍에 의한 것이니 만약 학문에 뜻을 두어 그 길로 나간다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68)라고 독려하는 등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로써 이언적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관은 이중호(李仲虎)에게 사사했는데, 이중호는 유우(柳藕)의 문인이다. 서경덕과 교분을 유지한 인물 중에는 유우의 문인이 많았으며169) 유우의 학풍 역시 서경덕과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호는 후에 기축옥사에 연 루돼 죽음을 맞은 이발(李潑) 이길(李洁)의 부친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서 손(庶孫)이다. 화담의 문인록 에 그 이름이 올라있진 않지만 이식(李植)이 가실 (可實) 박민헌(朴民獻), 사암(思菴) 박순(朴淳), 초당(草堂) 허엽(許曄), 습정(習 靜) 민순(閔純), 풍후(風后) 이중호(李仲虎), 척약(惕若) 김근공(金謹恭), 종성령 (鍾城令) 등은 모두 화담의 문인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자들 170)이라 언급한 사실 과 서경덕이 공과 함께 예(禮)를 강론하다가 따를 수 없다고 탄복했다 171)는 등 의 기록들을 참조할 때, 이중호가 서경덕에게 직접 사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며 이발 형제가 화담 문인인 민순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 역시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관은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으로, 젊었을 때 이중호와 사귀어 산당(山堂)에 서 글을 읽으며 10년 동안 공부했는데 이중호가 먼저 학문을 이루고 식견이 높 아져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고 전해진다.172) 허엽은 (이관이) 처음에 고을의 선 168) 許曄, 위의 책, 說, 送李浚說 今見汝之氣質明秀 眞有乃家風 苟志於學 其進道也 固 不難矣 169) 신병주, 앞의 책, p ) 李植, 澤堂集 別集 卷15, 雜著, 追錄 朴可實民獻 朴思菴淳 許草堂燁 閔習靜純 李 仲虎風后 金惕若謹恭 鍾城令 皆其門人表表者 171) 李肯翊, 練藜室記述 卷9, 仁宗朝古事本末, 李仲虎 徐敬德與公講禮 歎不可及 172) 李肯翊, 위의 책, 順天君 琯 順天君琯 世宗大王玄孫 少時友履素齋李仲虎讀書山堂功 苦十年 仲虎學就高明乃事之以師

62 비 이헌인(李憲仁) 윤기(尹紀)와 벗을 삼았는데 윤기가 죽자 와서 곡하며 심히 슬퍼했다. 내가 처음 (그를) 보고 공경하게 되었다 고 밝히고 있다.173) 그런데 이 관의 젊은 시절 벗이었던 윤기가 이른바 명종대 대윤(大尹)의 거두인 윤임(尹任) 의 조카라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윤임은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로 인해 세 아들과 함께 사사되었는데, 앞에서 언급한 윤기의 죽음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허엽은, 세상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사화의 피화자인 벗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관의 모습에서 일종의 동류의식 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볼 때, 이는 허엽의 의식 저변에 사림으로서의 정 체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로서 주목할 만하다. 이 외에도 허엽은 이연경 김안국의 문인들과 가깝게 교유하였는데 이는 그 의 사승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허엽은 어린 시절 김안국 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훗날 모재집 의 교정을 보고 발문을 짓는 등 공고한 사제 관계를 유지했는데, 허엽이 모재의 문인 유희춘에게 두 아들 성(筬)과 봉 (篈)의 훈육을 맡긴 것 역시 그러한 관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송인수(宋麟壽)는 김안국의 문인이자 성제원의 처남이며, 신흠의 외조부이다. 그는 동문수학한 유희춘 백인걸(白仁傑) 등과 교유하였으며, 1545년, 을사사화 당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의 자리에 있다가 파직 당한 뒤 청주에서 사사(賜 死)되었다. 훗날 그 아우 송기수(宋麒壽)의 딸이 난설헌의 시모(媤母)가 됨으로 써 송인수와 허엽은 인척지간이 되었는데, 규암집(圭菴集) 에 남아 있는 다음 허엽의 글은 이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송인수(宋麟壽) 성제원(成悌元) 정렴(鄭磏) 선생은 모두 우리 동방 유림의 거벽(巨擘)인데 저는 (선생들) 가까이에서 몸소 가르침을 받은 바 있어 항상 사모 하고 우러러 보는 어른들입니다.174) 위의 글은 성수익(成壽益)이 송인수 성제원 정렴 3인의 유고(遺稿)를 모아 찬(撰)한 삼현주옥집(三賢珠玉集) 의 발문 일부로서, 본문의 엽소친자(曄所親 炙) 라는 글귀를 통해서 허엽이 이들을 가까이서 접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위에 173) 許曄, 앞의 책, 墓碣銘, 明善大夫 順川都正墓碣銘 初與里中儒李憲仁尹紀友 尹紀之 逝 來哭甚哀 余始見而敬之 174) 宋麟壽, 圭菴集, 附錄, 三賢珠玉集跋 圭菴宋先生 東洲成先生 北囱鄭先生 皆吾東 方儒林巨擘 而曄所親炙 居常景仰之丈也

63 언급된 세 사람은 생전에 밀접한 교분을 나누었던 사이로 송인수와 성제원은 인 척간이며, 성제원과 허엽의 스승 서경덕은 여러 차례 만나 친분을 나눈 사이이 다. 또한 송인수는 사화의 직접적 피화자이며, 정렴과 성제원은 잦은 사화로 선 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은사(隱士)로 살아간 인물이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허엽이 추구한 사상적 노선에 상당 부분 합치되 는 것으로서 송인수의 외손인 신흠과의 인연 역시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연경 문인들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한데, 특히 이연경의 사위이자 문인이었던 노수신과의 관계는 더욱 특별해 보인다. 허엽과 노수신은 연배도 비슷한데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든 것 은 노수신의 유배 중 허엽이 보여 준 태도였다. 노수신이 을사사화 때 죄인으로 몰려 진도(珍島)와 괴산(槐山) 등지로 20여 년 간 유배 생활을 하는 중에도 허 엽은 변함없이 그를 옛정으로 대했다. 후에 노수신이 관직에 복귀한 후 선조에게 허엽을 천거한 것도 두 사람 사이의 이런 인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175) 노수신 은 허엽이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는데, 허봉이 이이를 탄핵한 일로 갑산으로 유배 갔을 때 그의 석방을 선조에게 주청한 이도 바로 노 수신이었다. 또한 구(舊)사림의 거두(巨頭)이자 이연경의 종제(從弟)인 이준경, 이연경의 외손인 심희수와도 대를 이어 특별한 교분을 나눈 사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됨으로써 두 가문의 남다른 인연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허엽은 인맥의 중추를 이루는 화담학파 이외에도 기묘사림의 도통을 이은 재야사림 계열의 인물들과도 평생 동안 지속적인 교분을 유지함으로써, 자 신의 사상적 지향점을 확고히 하고 정치적 기반을 수립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이황에 대한 존숭을 강력히 표명한 사실은 주목되는 부분인데, 이 황이 허엽의 스승인 서경덕의 학문을 강한 논조로 비판하며 허엽과 여러 차례 논변을 벌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황은 서경덕의 학문이 명의 학자 진헌장(陳獻章)에 비길 만하다는 허엽의 주장에 대해 화담은 자질이 소박한 것 같으나 실상은 허망하고, 학문이 고상한 것 같으나 실상은 잡박(雜駁)하며, 그가 이기(理氣)를 논한 부분 역시 들쭉날쭉 연달아 꼬여 전혀 분명하지가 않다. 근원이 되는 곳이 이러하니 그 아래의 학문 이 어떻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그의 시문(詩文)도 어떤 것은 좋으나 좋지 못한 것도 많다 176)고 하며 혹평하였다. 175) 이종호,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역사의 아침, 2008, p

64 또 다른 글에서도 화담의 소견은 자못 정밀하지 못하여 그가 저술한 여러 논 설을 보면 한 편도 병통 없는 것이 없으니 (나에게) 준 글에서 거론한 것만 그 런 것이 아니며, 그의 문인들이 (화담을) 추존(推尊)한 것도 너무 실정에 맞지 않는 일 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며, 허엽에 대해서도 태휘는 사람이 좋기는 하지만 원래 결점을 많이 갖고 있는 인물 이라 평가하기도 했다.177) 이 같은 이황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허엽은 선조에게 공경을 다하고 예를 극 진히 해서 이황을 스승으로 삼으라 178)고 주청했고 그 아들들과 더불어 이황에 게 학문을 물었으며, 이황의 도산기(陶山記) 발문과 만시(輓詩), 제문을 짓는 등 후학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비록 그 사상적 지향에는 다소 상이한 바가 있 으나 퇴계를 조선 유학의 종주(宗主)로 인정하고 받드는 허엽의 태도는 그의 영 향 하에 있는 인물들, 특히 동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허엽의 아들들이 이황의 문인들과 밀착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허엽은 화담 문인들을 주축으로 재야사림 계열의 학통을 이은 인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후에 이황의 문인들과도 교분을 맺음으로써 그 인맥을 넓혀 나갔다. 허엽의 교유 양상은 그의 학통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와 친분을 쌓은 대다수의 인물들이 주자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노장이나 불교 등의 이단적 사상에 관심을 보이고 잡학적 성향이 강했다는 사실은 허엽의 학문이 어디에 근원한 것인지를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2) 許筬 許篈 : 先代의 理念 및 學脈의 繼承 허엽의 세 아들 중 그 인맥의 양상이 부친 허엽과 가장 근사한 인물은 허성이 다. 이는 세 살 아래의 아우 허봉이 동인의 중심인물로 일찌감치 정치의 제일선 176) 李滉, 앞의 책, 卷14, 書, 答南時甫 花潭 其質似朴而實誕 其學似高而實駁 其論理氣 處 出入連累 全不分曉 原頭處如此 下學處 可以類推 其詩文 好處好 不好處亦多 177) 李滉, 앞의 책, 卷25, 書4, 答鄭子中講目 花潭所見 殊未精密 觀其所著諸說 無一篇 無病痛 不但如來喩所擧者爲然也 而其諸門人推尊 太不近情 (중략) 太輝雖好人 固多有病 痛 178) 宣祖實錄 卷1, 卽位年(1567 丁卯) 10月 16日(丁酉) 許曄啓曰 自古帝王 得賢師爲學 然後事業超出 李滉有病而歸 上若致敬盡禮 欲以爲師 則可至矣 上從之 以敎書 特召李滉

65 에 나선 데 비해 그의 출사(出仕)가 늦었던 것과 당색(黨色)이 상대적으로 약했 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허성은 1568년(선조1), 생원시에 합격하 였으나 대과 합격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 36세 때인 1583년이 되어서야 별시 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할 수 있었다. 반면 일찍부터 그 재주로 이름 을 날리던 허봉은 22세이던 1572년(선조5)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에 급 제, 출사함으로써 오랫동안 야인(野人)으로 머물러 있던 형 허성과는 다른 행보 를 보이게 된다. 허성이 년 사이에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에서 여러 계층의 문인들과 어울려 시를 수창하고 교분을 나눈 사실이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데179) 이 시기 동인(同人) 집단의 구성원 대다수가 화담 및 그 제자들에게 수학 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허엽 세대의 교유가 그 문인 및 자제들을 통해 다음 세 대까지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또 악록집 에 보이는 화담 계열의 인물들은 서기(徐起) 우복룡(禹伏龍) 유희경(劉希慶) 홍이상(洪履祥) 김창일(金昌一) 홍인우(洪仁祐) 한백겸 (韓百謙) 한준겸(韓浚謙) 한여필(韓汝弼) 홍경신(洪慶信) 등으로 그들은 모 두 화담에게 직접 사사했거나 화담의 문인들에게 수학했던 전력(前歷)이 있으며 이 중 서기 우복룡 유희경 홍이상 등은 앞서 언급한 삼각산 승가사 시회의 수창자이기도 하다.180) 먼저 서기는 허성보다 25세나 연상으로 천노(賤奴) 출신이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후에 방면되었으며, 화담의 문인록 에도 그 이름이 올라 있다. 그에 대한 대강의 사실은 다음 글로써 알 수 있다. 박지화(朴枝華)는 서인(庶人)으로 박학한 데다 문장을 잘 지었으며, 또 이학(理 學)의 이름도 얻었다. 그리고 서기(徐起)는 천인(賤人)인데 경술(經術)에 밝아 제자 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산수(山水) 사이에 노닐기를 좋아하여 명산 (名山)에 숨어 살았는데, 모두가 화담 문제(門弟)의 부류였다. 그런데 이들 또한 꽤나 괴이한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박지화는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고 서 179) 許筬, 岳麓集, 附錄, 與許知事書 萬曆甲戌秋 判書筬洪判書履祥禹監司伏龍李參判 順慶石校理涵徐孤靑起 二員忘其名 讀性理大全于僧迦寺二十餘日 讀書之暇 相與唱和 篇 什各十餘首 時劉希慶亦隨往 亦多奉和 各自書于一冊 名曰甲戌僧迦酬唱集 付于寺僧 亂後 洪參判爲江華府使時 僧來納書冊 卽傳示于許判書禹監司諸公 諸公各有序記 爲一古蹟 180) 삼각산 승가사 시회 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그 의의가 크다고 판단되므로 4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66 기는 앞일을 아는 술법을 지녔다고 말하고들 있으니, 화담의 풍도(風度)를 들은 자 의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181) 홍인우 역시 화담의 문인으로, 그에 대해서는 몸을 다스리고 행동을 절제하여 한결같이 소학 을 높였으며 경(經)의 뜻을 강론함에 변석(辨釋)이 정밀하고 밝 았다. 선생이 일찍이 책을 많이 보고 학문에 뜻을 둔 사람 가운데 가히 함께 앞으로 나아갈 사람은 오직 홍모(洪某) 한 사람 뿐이다. 라고 하였다 182)는 기록 이 전해진다. 남언경(南彦經)은 홍인우의 매부로서 홍인우가 18세 때 허엽의 집을 방문했다 가 그곳에서 남언경의 눈에 띄어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 과정에서 양명학을 수용하는 데 가장 적극 적이었던 인물들이다. 홍인우 남언경과 허엽의 관계는 특히나 첫 부인과 사별 한 허성이 남언경의 형, 남언순(南彦純)의 딸을 재취(再娶)로 맞음으로써 더욱 돈독하게 이어졌는데, 허성이 홍인우의 문집 치재유고(恥齋遺稿) 의 서문을 쓰 게 된 역시 이 같은 인연에 기인한 것이다. 유희경은 화담의 제자인 박순에게 시를 배웠으며 남언경에게도 사사했는데, 허 균이 자신의 저서에 유희경이란 자는 천예(賤隷)인데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 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 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183)는 기록을 남기는 등 허엽 일가와 친분을 나눈 사실이 두루 확인된다. 허성이 교유한 인물 중에는 유독 민순의 문인들이 많은데 우복룡 홍이상 한백겸 한준겸 한여필 등이 그들이다. 홍경신의 경우에는 직접적 사승 관계 가 확인되지 않지만 그 형인 홍가신(洪可臣)이 민순의 문인임을 감안할 때 그 역시 민순에게 사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우복룡이 화담의 계보에 속하게 된 데에는 가학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 로 보이는데, 문헌에는 그의 종증조부(從曾祖父)가 서경덕과 벗으로 지내며 자주 181) 李植, 앞의 책, 追錄 朴枝華庶人也 博學能文章 亦有理學之名 徐起賤人也 明經授徒 兩人好遊山水 隱於名山 皆花潭門弟之流 而亦頗好怪 故世以朴爲仙去 徐爲有前知之術 聞 花潭之風者 大槩如斯 182) 徐敬德, 花潭集 卷4, 附錄, 門人錄 洪仁祐 字應吉 號恥齋 唐城人 生員 律身制行 一遵小學 講論經義 辨釋精明 先生嘗云 多閱志學之人 可與進步者 惟洪某一人 有文集 183) 許筠, 惺所覆瓿藁 卷25, 說部4, 惺叟詩話 劉希慶者 本賤隷也 爲人淸愼 事主忠事 親孝 大夫士多愛之 能詩甚純熟

67 왕래하였고 김안국과도 친한 사이였다는 기록이 전한다.184) 또, 홍이상은 광해군 대 서경덕이 거주하던 화담에 서원을 만들어 제자 박순 허엽 민순을 함께 배 향하는 등 화담의 추존에 적극 앞장섰던 인물이다. 한백겸 한준겸 형제가 민순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 것은 조부인 한여필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음 한백겸의 글은 허엽 일가와 이들 집안 간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생각건대 당시는 전란 중이었으며, 가장(家狀)을 많이 갖추지 못한데다 (조부께 서) 일의 대략을 기록하는 일을 그치고 만년에 향촌에 은거함으로써 (사실들이) 누 락되어 오로지 증거할 만한 것이 없었고, 이로 인해 장차 자손에게 보일만한 것이 없으니 나는 심히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상서(尙書) 허공언(許功彦)이 어린 시 절부터 우리와 함께 어울려 놀고 일찍이 선산(先山)에도 왕래하여 우리 집안의 문 벌과 세계(世系)를 상세히 알고 있으니 나아가 빠진 기록들을 좇아 구하여 묘표(墓 表)에서 누락되었던 것들을 채워 넣고자 하였다.185) 위의 글에는 허성과 한백겸 형제가 어린 시절부터 친밀하게 지냈던 사실이 드 러난다. 그들은 서로 집안의 내력을 상세히 알 정도로 깊은 교분을 나누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가학적 전통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즉, 서 경덕 김안국의 벗인 한여필과 그들의 제자인 허엽의 관계를 상상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기 때문인데, 허성이 훗날 기자(箕子)의 정전제(井田制)가 평양에 유적 으로 남아있음을 그림으로 증명한 한백겸의 기전도(箕田圖) 에 찬동, 기전도설 후어(箕田圖說後語) 를 지은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민순의 문인은 아니지만 김창일 역시 또 다른 화담 문인 김근공(金謹恭)에게 수학하였으며, 우복룡 홍이상 한백겸 등 일군의 인물들과 남다른 우의를 쌓 은 사실이 문헌을 통해 드러난다.186) 184) 趙翼, 浦渚集 卷23, 雜著11, 禹處士傳 所友善徐花潭及崔猿亭壽峸 兩人常來往 (중 략) 處士亦與己卯人金慕齋相善云 今禹牧使伏龍 亦其從曾孫也 185) 韓百謙, 久菴遺稿 下, 行狀, 先祖通訓大夫行文川郡守贈議政府領議政府君行狀 而 顧其時方在干戈搶攘之中 家狀多未備 以致作者敍事大略 至於晩年居鄕一節 專闕焉無徵 將無以示子孫 余甚歉然 許尙書功彦令公 自少與吾輩遊 且嘗往來桑鄕 知吾家世甚詳 欲從 而追求隧中之誌 以補墓表之闕 186) 許穆, 眉叟記言, 記言別集 卷20, 丘墓文, 木翁宋先生墓碣銘 친구로 지내던 사람은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 시정(寺正) 권용중(權用中), 참 판(參判) 홍이상(洪履祥), 덕신공(德信公)의 아들인 취병(翠屛) 김창일(金昌一), 죽간

68 이 외에도 허성이 을사사화의 피화자인 정희등(鄭希登)의 묘갈명(墓碣銘) 을 지은 것이나 이황을 존숭하고 유성룡(柳成龍) 정사성(鄭士誠) 이경중(李敬 中) 윤근수(尹根壽) 등 이황의 문인들과 두루 교유한 사실은 그의 정신적 지향 이 부친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윤근수는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로서 비록 그 당색은 다르지만 1573년, 서경덕 의 관작을 높여 다시 증직해 달라는 내용의 계(啓)를 선조에게 올렸고, 서경유수 (西京留守) 시절 화담 문인 마희경(馬羲慶)의 재주를 아껴 그와 종유한 사실 등 으로 미루어 다소간의 사상적 합치점이 발견된다고 하겠다. 이준경과 노수신, 심 희수 등 이연경 문인들과의 교유가 대를 이어 밀접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허봉의 경우는 그가 해배(解配) 이후 각지를 떠돌다 객사한데다 병화(兵禍)까 지 겹쳐 많은 자료들이 산실되었다.187) 특히나 서간이나 제문 등의 기타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사실을 알기에 어려운 점이 있으며, 단지 하곡집(荷谷集) 에 실린 글들을 참고하여 그 대강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허성 허봉 형제의 나이차는 3살에 지나지 않지만 문집을 통해 살펴본 교유 의 양상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앞서 언급 했듯, 허봉이 22세의 이른 나이에 출사한 반면 허성의 대과 급제가 너무 늦었던 것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한 예로 허성의 지기(知己)이자 삼각산 승가사에서 함께 시를 수창했던 홍이상은 31세(1579년)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 했으며, 우복룡 또한 1573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 있다 가 36세(1582년)에 유일(遺逸)로 천거, 환로(宦路)에 들어섰는데 이 같은 사실은 허성의 교유 집단이 허봉과 달랐던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늦은 출사에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竹磵) 강복성(康復誠), 동계(東溪) 우복룡(禹伏龍), 유수(留守) 허잠(許潛) 같은 이들로 도학(道學)이나 현능(賢能)으로 모두 당시에 알려진 인물들이다. 처음에 만전공(晩全公) 과 함께 행촌 선생(幸村先生 : 민순)을 사사하면서 옛 성현의 학문으로 서로 추앙하였다 한다. (所與友者 如韓久庵百謙 洪晩全可臣 權寺正用中 洪參判履祥 德信公子 金翠屛昌 一 康竹磵復誠 禹東溪伏龍 許留守潛 或以道學 或以賢能 皆時之聞人 初與晩全公 共師事 幸村先生 以古人之學 相推許云) 187) 許篈, 荷谷集, 荷谷先生詩鈔補遺, 跋(許筠 撰) 평생에 지은 글들이 아주 많았으나 병화(兵禍)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 책에 모아진 것들은 나의 기억에서 나온 것들이니 어 찌 다만 태산과 터럭 하나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平生論述甚富 而失於兵燹 此編之輯 乃出於筠之臆記 奚啻泰山一毫芒也)

69 허봉은 그 재주가 세상에 보기 드물 188) 정도의 재사(才士)로 이름을 날렸으 며 그 학문과 문재(文才)가 미래의 대제학감이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였는데,189) 출사 이후 부친 허엽의 뒤를 이어 동인의 젊은 기수로 크게 활약하였다. 허봉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그가 비록 당시에 명성은 높았지만 낮은 관 리였는데도 고관(高官)의 연회에서 술잔을 멈추고 기다리게 할 정도였다고 전해 진다.190) 이 같은 허봉의 행보로 인해 그의 인맥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화려하 며 정치적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특징을 지닌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들로는 동인의 거물들인 김효원 유성룡 정언신(鄭彦 信)을 들 수 있다. 김효원은 명종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뒤에 척신계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동서분 당의 직접적 원인 제공자 중 하나로서, 사간(司諫)으로 재직 당시 대사간이었던 허엽을 도와 박순을 공격하는 등 허엽 일가의 정치적 행보에 동조했으며, 조식과 이황에게 사사하여 사상적인 면에 있어서도 허엽 일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경향을 띄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전란 중에 상처(喪妻)한 허균이 김효원의 딸에 게 장가들고 허봉이 다시 그 딸을 김효원의 아들에게 출가시킴으로써 그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된다. 유성룡과 허엽 일가의 친분은 여러 저술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허균이 유 성룡에게 하곡집 서문을 부탁하면서 가형(家兄)에 대하여 가장 깊이 아시는 분으로는 노사(老師)만한 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분의 글에 서문을 지을 분 으로 노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191)라고 언급한 것이나 지인에게 서 애(西厓) 정승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 192)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에서 관계의 188) 柳成龍, 西厓集 別集 卷4, 跋, 跋蘭雪軒集 余友許美叔有曠世奇才 不幸早亡 189) 李睟光, 芝峯類說 卷4, 學士 예문(藝文) 응교(應敎)는 반드시 장래에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으로 겸임시킨다. 평시에 있어서는 김귀영(金貴榮) 노수신(盧守愼) 강사필 (姜士弼) 이산해(李山海) 신응시(辛應時) 유성룡(柳成龍) 허봉(許篈) 등이 궐원(闕 員)이 생긴 때에 제수하였으나, 허봉 이후부터는 항상 결원(缺員)으로 두고 보충하지 않 았다. 임진(壬辰) 이후로는 오직 이호민(李好閔) 이외에는 절대로 겸임한 자가 없었다. 아마 그 선임(選任)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藝文應敎必以將來主文者兼之 在平 時金貴榮盧守愼姜士弼李山海辛應時柳成龍許篈隨闕除 授自許篈後常闕 而不補任辰以後唯 李好閔外絶無兼帶者 盖重其選也 ) 190) 成大中, 靑城雜記 卷3, 醒言 참조 191) 許筠, 앞의 책 卷20, 文部17, 尺牘上, 上西厓相 乙巳二月 知家兄最深 莫老師若也 世間敍其文者 捨老師伊誰 192) 許筠, 위의 책, 卷21, 文部18, 尺牘下, 與林子昇 庚子二月 어떤 이에게 들으니 자네

70 밀접함을 엿볼 수 있다. 유성룡이 허봉의 대명사행록(對明使行錄)인 조천기 (朝天記) 의 서문 과 지(識) 를 작성한 사실도 이 같은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이다. 정언신 역시 동인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기축옥사 이후 정철 등 서인으로 부터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 후에 사사(賜死) 의 하교가 내렸으나 감형되어 갑산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는데,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 에는 허균과 정언신의 아들 정협(鄭協)이 교분을 나눈 사실 이 확인되어 흥미롭다. 허봉이 교유한 인사들의 많은 수가 이황의 문인들이었다는 점은 그가 정치적 사상적으로 부친 허엽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형인 허성이 오랜 기간 산림에 머무르며 화담 문인, 특히 민순과 같은 재야 은사의 문인들과 종유하는 동안 허봉은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 부친의 영 도 아래 자신의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황의 문인들이 동서분당 이후 동인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권력 투쟁에 돌입할 당시 동인은 이황을, 서인은 이이를 그 종주로 삼았던 까닭인 데,193) 허봉의 문집에서 화담 계열의 인사보다 이황 문인들의 이름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반면 하곡집 에는 허봉이 이이 이덕형(李德馨) 최경창(崔慶昌) 등 일세(一世)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당 색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이른바 계미 삼찬(癸未三竄) 의 일에 연루되어 정치 인생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해배 후에도 도성에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다 3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은 인 물이다. 그렇다면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정말 허봉은 이이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 고 그를 배척했던 것일까? 하곡집 을 검토한 결과, 허봉이 비록 그 정치적인 입장으로 인해 이이를 공격했지만 실상 한편으로는 이이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 서애(西厓)를 헐뜯고 설서(說書) 벼슬을 얻었다고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무척 분노하였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小人)을 헐뜯고서 벼슬을 얻는다 해도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서애 정승을 헐뜯으면 되겠는가. (人言君訾 西厓而得說書 吾聞之甚忿其言也 西厓賢相 不可訾 訾小人而得官 亦非美事 矧西厓相乎) 193) 이덕일 外, 韓國의 敎養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3, p

71 그 한 예로 1574년, 사행길에 오른 허봉이 당시 병으로 인해 파주(坡州) 율곡 (栗谷)에 머물고 있던 이이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이이는 허봉에게 자신 이 군왕(君王)을 위해 편찬한 성학집요(聖學輯要) 초본을 보여 주었는데 허봉 은 그 가운데서 입지를 의론한 대목[立志處]의 말뜻이 극히 정중하여 배우는 이 [學者]의 병통이 되는 곳을 잘 맞추었으므로 그 글의 전부를 베끼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며, 이 책에 대해 임금에게는 약석(藥石)이 될 만하고 공부하는 이에게 는 길이 되며 모범이 될 것이니 반드시 완미(玩味)하며 반복하여야 할 것 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허봉은 이이의 궁핍한 처지를 목도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글로 표현하였 으며194) 꿈에서 이이를 만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는 등,195)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이 또한 나이는 어리나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허봉을 아꼈 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1583년 자신을 배척한 일로 허봉과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慨)가 유배를 떠나자 도성에 들어와 선조에게 이렇게 주청하였다. 이이가 대답하기를 박근원 송응개는 진실로 간사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허봉 은 연소하여 경망스럽지만 그 재주가 애석하며 간사한 자는 아닙니다. 이 세 사람 이 견책을 너무 심하게 받았으므로 같이 죄를 지은 사람들이 모두 불안하게 여깁 니다. 관전(寬典)을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무리들의 죄는 내가 이미 결정한 것이니 경은 굳이 말하지 말라. 고 하였다.196) 박근원 송응개와 달리 허봉은 나이 어리고 경망하여 실수한 것뿐이지 간사한 사람은 아니며, 그 재주가 애석하다고 말하는 이이의 태도에서 허봉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을 엿볼 수 있다. 이이는 허봉 역시 당쟁의 희생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봉 역시 동인의 대표로서 서인의 예봉(銳鋒)을 꺾고자 이 194) 許篈, 朝天記 上, 1574年(甲戌) 5月 13日條, 其中論立志處一款 語意極精 切中學者 之病 余請錄其全文 (중략) 叔獻此文 可爲人君之藥石而學子之軌範 所當玩味而反復者也 (중략) 大抵叔獻之來此 本欲廣闢田園 完聚宗族 以爲同居之計 而事不如意 家業伶仃 饘 粥不繼 誠可憐憫 195) 許篈, 위의 책, 9月 1日條, 새벽녘 꿈에 이숙헌(李叔獻)을 만나 얘기를 하였는데 매우 흡족하였으며 이숙헌이 동리(凍梨)를 꺼내 와 마주앉아 먹었다. (曉來夢見李叔獻 談話頗 洽 叔獻出凍梨對食) 196) 宣祖修正實錄 卷17, 16年(1583 癸未) 10月 1日(己酉) 珥對曰 朴謹元宋應漑固邪人 也 許篈則年少輕妄 其才華可惜 非邪人也 此三人 得譴太重 同罪之人 皆不自安 須從寬典 上曰 此輩之罪 予已定之 卿不須言也

72 이를 공격한 것일 뿐 사적인 감정은 없었을 것이다. 만일 허균에게 절대적인 영 향을 끼쳤던 허봉이 이이에게 악감정이나 원한을 품고 있었다면 허균이 이이를 좋게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97) 그렇게 볼 때 허균이 이이가 밝은 식견과 넓은 아량을 지닌 인물이니 문묘에 배향할 만하다 198)는 의견을 피력하 는 등 이이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던 것은, 허봉과 이이의 관계 악화가 정세 의 변화로 인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허봉이 허엽 허성과 마찬가지로 노수신 심희수 이준경 등 이연경의 문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지속했던 것이나 을사사화의 피화자인 기준(奇遵)의 조 시(弔詩) 를 지은 사실 등은, 그의 사상적 토대가 부형(父兄)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허봉의 교유 대상은 정계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가 한편 으로는 승려 및 불우한 처지의 방외형 인물들과 두루 교분을 나눈 사실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된다. 허씨 형제들이 임제(林悌)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사실 은 성소부부고 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허균은 임자순(林子順)은 시명(詩名)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치켜세우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용황도(朔 雪龍荒道) 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199) 또 허봉이 이달(李達)과 종유하며 아우 허균으로 하여금 그에게 시를 배우도록 명했던 것200)이나 사명당(四溟堂)과의 교분이 그의 시 수 천 수(首)를 보관할 정도로 두터웠던 것201)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7) 김태형, 心理學者, 正祖의 마음을 分析하다, 역사의 아침, 2009 p ) 許筠, 앞의 책, 권11, 文部8, 學論 얼마 전에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 향하였다. 당시 의논하던 사람들은 다섯 분 이외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 고 했는데 이 것은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중략) 또 야은(野隱) 길재(吉再) 같은 충성심으로 우탁(禹 倬)ㆍ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직접 전해 받았고, 서화담(徐花潭)이 초일(超逸)한 경지를 혼자 터득한 것이나 이율곡(李栗谷)의 밝은 식견과 큰 아량을 어찌 후중함이 적어 취할 게 없다고 하며 전혀 거론하지 않는 것인가? 더러는 (이들을) 헐뜯는 사람도 있으니 이 것 또한 사심(私心)과 거짓의 해악이다. (頃者祠所謂五賢矣 議者曰 五人外不可祀也 是大 可笑也 賢者豈有定額 而必以五耶 (중략) 且如冶隱之忠而親傳禹 鄭之統 花潭之超詣自得 栗谷之朗源 夫豈鮮腆無可取 而略不擧議 或有訾謷之者 玆亦私爲之害也) 199) 許筠, 위의 책, 卷25, 說部4, 惺叟詩話, 林悌有詩名 林子順有詩名 吾二兄嘗推許之 其朔雪龍荒道一章 可肩盛唐云 嘗言往一寺有僧軸 題詩曰 竊食東華舊學官 盆山雖好可盤 桓 十年夢繞毗盧頂 一枕松風夜夜寒 詞甚脫洒 沒其名號 不知爲何人作也 固有遺才 而人 未識者 200) 許筠, 위의 책, 卷5, 文部2, 序, 蓀谷集序 나는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옹(翁)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아는 데 힘입은 바 있다. (不佞少日以仲兄命 問詩於翁 賴識塗向)

73 그런데 이와 더불어 그 형 허성이 미천한 신분의 서기 유희경 백대붕 등을 특히 사랑하고 아꼈던 것은 이들 형제에게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은 계층 의 인물들과 교유하던 화담 문인들의 개방적 성향202)이 나타남을 보여 주는 것 으로, 그 상당 부분이 부친 허엽의 영향에 힘입은 것으로 판단된다. 초당집 에서는 상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지만 허엽이 다양한 신분의 인물 들과 진심을 다해 교유한 사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그가 서얼 출신의 박 형(朴泂)과 벗을 삼고 선조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녹질(祿秩)을 주도록 청했 던 것은203)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이 자신의 집안과 화가 이흥효(李興孝) 일가의 인연에 관해 기록한 다음의 글 역시 참고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화가로는 이씨가(李氏家)를 꼽는다. 이씨는 4대를 내려오면 서 그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순군(仲順君)이 가장 출중하다. 그 설색(設色)이 뛰어났고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하였다. 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는 중순군을 환쟁이로 대접하지 않았으므로 거리낌 없이 문하에 출입하였다. 나는 중형(仲兄)에게 중순이 어떤 사람이기에 아버님께서 저토록 후하게 대접하십니 까? 하고 물으니 (중형이) 그 사람은 아름다운 선비이다. 독서하기 좋아하고 옛 현인을 사모하며, 시를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을 이해하며 속이 탁 트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특별히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므로 내가 그를 선망하게 되 었다. 군의 조카 이정(李楨)과 나는 나이 차도 잊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204) 201) 許筠, 위의 책, 卷26, 附錄2, 序, 四溟集序 이번에 그 문도 혜구(惠球)가 사(師)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사부(師父)가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公)의 중씨(仲氏)에게 보관되어 있다가 병화(兵火)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泰山)과 터럭 하나의 차이라 할 것입니다. 202) 화담의 문하에서 허엽과 함께 종유한 인물들 중 박지화 이중호 강문우(姜文佑)는 서얼이고 서기(徐起)는 노비 출신이었으며, 황원손(黃元孫)은 개성의 시장 상인이었다. 203) 宣祖修正實錄 卷1, 卽位年(1567 丁卯) 10月 5日(丙戌) 허엽이 또 아뢰기를 사인 (士人) 박형(朴泂)이 소학 을 가르치는데 학도가 수백 명이라고 합니다. 전번에 그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거되어 보임되었다가 고시(考試)에 나가지 않아 파출(罷黜)을 당 했습니다. 바라건대 전조(前朝)에서 이중호 장윤(張崙)에게 하던 예(例)에 따라 그에게 녹질(祿秩)을 주십시오. 하니, 상이 따랐다. 박형은 서얼로서 벼슬길이 막히자 집에 있 으면서 초학도(初學徒)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쳤는데 가르치는 과정이 매우 엄격하여 사 대부 자제들이 모두 그 문하를 거쳤고, 조사(朝士)들도 그에게 가 배우는 자들이 많았 다. 그는 몸가짐을 예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노수신 허엽이 모두 그와 벗하였다. (許曄又啓 士人朴泂以小學爲敎 學徒常數百人 前者薦補童蒙敎官 以不就考試見罷 請依前 朝李仲虎張崙例 畀以祿秩 從之 泂以庶孽 不通仕路 居家以經書 敎誨初學之徒 程科精嚴 士大夫子弟 無不出其門 朝士亦多從學者 泂律己以禮 盧守愼許曄皆與之友)

74 위의 인용문에 보이듯 중순군을 환쟁이로 대접하지 않았다 는 허균의 언급은 허엽이 다른 인물들과 교제함에 있어 무엇을 중시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허 엽은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인품과 학식을 갖춘 인물들을 문하에 받아들였으 며 그들을 존중하여 특별히 대접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허봉과 허균이 사명당 유 정(惟政)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간 것 역시 허엽과 유정의 스승 휴정(休靜)의 인 연에 기인했던 것205)임을 감안한다면 허엽이 여러 각도에서 그 자녀들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허엽의 아들들은 부친의 학맥 및 정치적 노선을 따라 화담 이황의 문인들과 밀접히 교유하는 한편, 신분이 미천한 인물들에게도 그 문호를 개방하 여 적극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허봉이 해동야언(海東野言) 에서 어숙권 (魚叔權) 조신(曺伸) 등 서자 출신의 서술도 적극 이용하는 포용성을 보여 준 것이나, 허균이 홍길동전 에서 서얼이 차별 받는 현실을 지적하고 서얼의 우수 한 능력을 강조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206) 3) 許筠 : 家學的 傳統의 收用과 變形 허균의 경우에는 두 형들에 비해 그 양상이 달리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그 같은 현상이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허균과 그 형들 간의 나이차를 들 수 있는데, 허균이 백형(伯兄) 허성보다는 무려 21세 아래이며 중형(仲兄) 허봉 과도 18세의 나이차가 난다는 사실은 허균의 주변 인물들이 형들의 경우와 달라 204) 許筠, 앞의 책, 卷16, 文部13, 碣, 贈工曹判書行大護軍李君墓碣銘 自國朝名善畫者 推李家 李氏擅譽四代 而仲順君最著 其設色傳神尤工 山水亦當行 吾先子待仲順不以畫師 出入門下無間 僕問仲兄曰 仲順何狀而先子待之厚 曰 之人雅士 喜讀書 慕古耽詩 解琴棋 意豁如不纓世 故待之異 固也 僕已艶之 君猶子楨 與僕忘年分驩甚 205) 許筠, 위의 책, 卷26, 附錄2, 序, 淸虛堂集序 청허(淸虛)는 나의 선친께서 집우(執友 : 뜻을 같이한 벗)와 같이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書札) 사이에서 보아 왔다. (중 략) 그리고는 이에 선대(先代)의 세의(世誼)를 감념(感念)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 고, 그 사법(師法)의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老師)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 록해 보낸다. (吾先㜽視淸虛猶執友 不肖指少日蓋嘗於簡札覩之矣 (중략) 是歟感念先故 不 敢固辭 因敘其師法相傳之迹 而略迹師之梗槩) 206) 신병주, 앞의 책, p.214 참조

75 질 충분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두 형들이 주로 중앙에서 요직을 거친 반면, 허균은 파직 당해 향촌에 은거해 있거나 외직으로 나가 있던 기간이 길었 으므로 교유한 인사도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해 허균이 그 나이 열 두 살 때 부친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가 형들에 비해 부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 로울 수 있었을 충분한 가능성을 내포한다.207) 허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중형 허봉이었으나 그마저도 허균이 열여섯 되던 해 유배를 떠나 객사하 고 마니, 실상은 가학의 전통을 고수하는 데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인물이 허균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균의 성소부부고 에는 그 부형들의 영향으로 보이는 상 당수 인물들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다. 그 대표적 인물 중 하나는 최립 으로, 다음의 시에는 그가 허엽 일가와 인연을 맺게 된 전모가 드러나 있다. 가 일송(一松)에게 수답(酬答)한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다(次和 酬一松韻二首) 久矣草堂仰 오래 전부터 초당을 앙모(仰慕)하다가 因之荷谷知 이로 인해 하곡을 알게 되었는데 景先復自發 경선이 또 자진해 나를 찾아 주니 玄度每堪思 현도의 풍도를 언제나 생각하리이다 腹有五千卷 뱃속에 간직한 건 오천 권의 서책뿐 餘無些子兒 다른 것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으니 淡交從若水 물처럼 담담하게 사귀어 가노라면 贏得起予詩 이 몸의 시흥(詩興)도 한껏 일어나리이다208) 207) 허균은 말년의 기록인 을병조천록 을 통해 부친을 추억하는 자신의 심정을 여러 차 례 밝히고 있는데 그 중 두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二月初一日 是宣考昇遐之日 初四日 先子揖館之日 客中連逢君父忌宸 涕泣以賦 둘째 수 (十二嚴親背 내 나이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童年慟藐孤 어린 시절 가슴 아픈 고아 가 되었네, 永違遺命奉 오랜 기간 유명을 받들지 못하고, 長廢過庭趨 자라면서 아버지의 가르침 못 받았네, 祀事蘋緊阻 변변치 못한 제수 그마저 못 올리니, 哀情雨露濡 큰 은혜 입은 마음 슬픔에 늘 젖네, 平生風木恨 평생에 부모님께 효도 못함 한이 되니, 反哺哭林 鳥 수풀 속 새들도 반포하며 통곡하네) 病中記懷追敍平生 첫째 수 (譾薄堪悲十二孤 박복하여 12세에 아버지를 여의니, 聞詩無 復過庭趨 아버지께 시 배울 기회 다시는 못 가졌네, 半生落拓荒先訓 반평생 역경 빠져 선훈을 못 지키고, 慙愧官叨上大夫 부끄럽게 벼슬 탐해 대부까지 올랐다네) 208) 崔笠, 簡易集 卷7, 麻浦錄, 次和 酬一松韻二首 中 두 번째 首 - 여기서의 경선 (景先) 은 당(唐)의 문신으로 장구령(張九齡) 등과 함께 제고(制誥)를 담당했던 허경선

76 위의 시에는 최립이 먼저 허엽의 문하에 출입하다 허봉을 알게 된 것과, 연소 한 허균이 먼저 최립을 찾아와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 사실이 드러나 있다. 허균 이 1607년 최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 여 공의 시를 낮게 여기는데 이는 (그들이) 너무나 무지한 탓 이며 나는 공의 시(詩)를 문(文)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긴다 209)고 하며 그의 재주를 극찬한 것이 나, 1609년 이사홍(李士洪)에게 편지를 보내 최립의 아들을 숙천(肅川) 고을에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한 일210) 등을 볼 때 이들이 평생에 걸쳐 두터운 친분을 쌓 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준겸에게 부친 서간들에서는 그를 대하는 허균의 허물없는 태도와 애 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으며,211) 한호(韓濩)와의 잦은 만남의 흔적들 역시 저서 곳곳에 남아 있어 그 친밀함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허균은 특히 한호에 대해 우리 중씨(仲氏)께서 공과 막역한 교우였던 까닭에 나도 알게 되어 바로 종자기 (鍾子期)와 백아(伯牙)처럼 되었다 고 밝히고 있어 한호와의 인연이 형인 허봉에 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한다.212) 성소부부고 에는 큰형 허성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던 홍가신 홍경신 형제와 의 교분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조관기행(漕官紀行) 에는 1601년 전운판관(轉 運判官)의 직을 제수 받고 조운(漕運)을 감독하러 삼창(三倉)에 내려간 허균이 당시 아산(牙山)에 머물러 있던 홍가신을 두 차례나 방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 으며,213) 홍경신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홍가신의 아우이자 홍경신의 중형인 옥 (許景先)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허균을 비유하는 말로 썼다. 는 아마도 허균을 가리 키는 문자인 듯한데 허균이 역적으로 복주(伏誅)된 점을 감안해서 뒷날 혐의를 피하려 삭제한 것으로 여겨진다.(한국문집총간 해제 참조) 209) 許筠, 앞의 책, 卷20, 文部17, 尺牘上, 與崔簡易 丁未三月 世人不知文者 悞卑公詩 此太聵聵 公文雖悍杰 亦從班椽 昌黎中來也 詩則本無師承 自刱爲格 意淵語桀 非切摩聲 律 採掇花卉者所可企及 吾以公詩爲勝於文 未知公印可否 210) 許筠, 위의 책, 卷20, 文部17, 尺牘上, 奉李滄海 己酉九月 簡易兒郞 卽公之所知也 西京有肅川之約 浼筠覵時以懇 卽見邸報 敢以通申 閤下豈負心人哉 玆敢潦白 211) 許筠, 위의 책, 卷20, 文部17, 尺牘上, 與韓柳川 辛丑八月 이란 제하(題下)의 글 두 편을 참조 212) 許筠, 위의 책, 卷15, 文部12, 祭文, 祭韓石峯文 惟我仲氏 交公莫逆 仍辱綰帶 卽爲 鍾伯 213) 許筠, 위의 책, 卷18, 文部15, 紀行上, 漕官紀行 7월 13일(壬寅) 동지(同知) 홍가신 (洪可臣)을 농막으로 찾아뵈었다. 서로 만나 즐거움이 지극하여 종일토록 모시고 이야기 를 하니 가슴이 상쾌해지며 비루한 생각이 싹 가시는 듯하였다. (壬寅 往拜洪同知可臣 于莊舍 相見驩甚 終日陪語 覺胸中蕭爽 鄙萌斗消矣), 8월 26일(乙酉) 간옹(艮翁) 댁에

77 과현감(玉果懸監) 홍민신(洪敏臣)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214)이 두 통이나 포함 되어 있어 허엽 일가가 홍가신의 집안과 두루 교유한 사실이 확인된다. 또 허균은 심희수 유근 유성룡 윤근수 정구 이덕형 이항복 이호 민 박동량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널리 교제하였는데, 여기에는 허균 자신 의 뛰어난 문학적 재질 외에도 그 부형으로부터 전해 받은 가정의 인맥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허균이 교유한 인물 중에는 허봉의 시우(詩 友)인 양대박(梁大撲)의 아들 양경우(梁慶遇)와 윤근수의 조카 윤훤(尹暄), 허엽 의 친구인 윤국형(尹國馨)의 아들 윤의립(尹毅立), 정언신의 아들 정협 등이 포 함되어 있어 가계(家系)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허균이 문벌 있는 가문의 자제로서 권필(權韠) 조위한(趙緯韓) 임숙영(任 叔英) 등 불우한 처지의 문사(文士)들과 주로 교제하고 서류(庶流)들과 어울렸던 것 또한 그 자신의 기질이나 평탄치 못한 환로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가풍의 영 향을 받았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 스승 없이 가정의 훈 도 아래 자라난 허균이 그 부형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 실이다. 그런즉, 부친과 형들이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과 사귀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허균에게 있어 상대의 처지나 신분 따위는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보면 당시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허균의 교유 관계 역시 그 부형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며, 단지 검속성(檢束性)이 적은 허균의 성격 탓에 그것이 더 두드러져 보였을 뿐이라는 설명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허엽의 학문과 사상이 다양한 학맥을 통해 그 아들들에게 전해졌음이 전술한 내용을 통해 드러난다. 지적 호기심과 열의가 남달랐던 허엽은 각기 다른 계통의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학문을 섭 렵했고 그 과정을 통해 주자성리학을 종지로 하면서도 여타의 학문을 절충 수 용해 독특한 학풍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가학(家學)을 형 성, 부친 허엽으로부터 동년배인 허성 허봉을 거쳐 마침내는 허균에게까지 이 어졌는데, 허성 허봉 형제가 부친의 학맥과 정치적 이념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 실천에 주력한 반면 허균의 경우에는 그 양상이 다소 달리 나타나는 것을 볼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간옹은 홍공(洪公)의 호이다. (乙酉 拜艮翁于寓舍 艮翁卽洪公 之號也) 214) 許筠, 위의 책, 卷20, 文部17, 尺牘上, 與洪鹿門 丁未十二月 與洪鹿門 戊申正月 참조

78 수 있다. 그러나 허균 역시 가학을 통해 성장한 만큼 그 행적 곳곳에서 부형들과 유사 한 사상적 궤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의 학문과 저술에 보이는 박학의 면모 및 자유로운 사고, 경직된 질서의 거부 등 다수의 특징 역시 가정의 훈도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부친 허엽의 사상적 편력은 다양한 사유체계를 모색하 고 이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려 했던 기일원론자의 의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 같은 특질이 훗날, 그 자녀들의 저술 및 활동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 나게 되기 때문이다

79 Ⅲ. 思惟의 開放性 및 文化的 自尊感의 具現 1. 許筬 : 氣一元論者的 認識 1) 箕田圖說後語 에 나타난 朝鮮後期 實學思想의 萌芽 앞에서 허엽의 여러 자녀들 중, 그 부친과 가장 유사한 성향을 띠는 인물은 맏아들 허성임을 살펴보았다. 그는 대외적으로 이학(理學) 을 자처하였으나,215) 실상은 화담 계열의 문인들과 밀접히 교유하며 화담을 추존하는 일에 앞장섰고, 주자성리학의 원칙을 무조건 고수하기보다는 현실 상황을 중시하는 기일원론자 의 태도를 보인 것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허성이 임진왜란 직전 사신을 보 내어 적국의 형편을 정탐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선조에게 개진한 것이나 1590년의 일본 사행 당시, 이황의 제자 김성일과 매 사안마다 이견을 보이며 팽 팽히 대립했던 일 등은 그가 성리학에서 말하는 정도(正道) 보다는 권도(權道) 에 입각해 사고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허성의 탄력적 개방적인 사유방식은 그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촉발된 일본과 의 국교 재개 논의에 있어 줄곧 화친을 주장함으로써 사림들의 탄핵을 받았던 사실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216) 그는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백성을 위하여 굽 215) 光海君日記 卷56, 4年(1612 壬子) 8月 9日(庚午) 筬 曄之子也 與異母弟篈筠俱有名 筬以理學自名 216) 宣祖實錄 卷106, 31年(1598 戊戌) 11月 19日(庚子) 사간원이 서계(書啓)하기를 이른바 간사한 무리와 그 심복들은 김수(金晬) 허성(許筬) 정경세(鄭經世) 최관(崔 瓘) 김순명(金順命) 조정립(趙正立) 등이고, 이른바 군현(群賢)과 정사(正士)는 화친의 의론에 따르지 않고 공론을 부지하다가 그들에게 배척당한 자들입니다. 라고 하니, 알았 다고 답하였다. (司諫院書啓曰 所謂陰邪之黨 腹心之人 金睟許筬鄭經世崔瓘金順命趙正立 之輩 所謂群賢正士 凡不附和議 抶植公論 爲其所擯斥者 皆其人也答曰 知道) 宣祖實錄 卷109, 32年(1599 己亥) 2月 11日(辛酉) 노직(盧稷)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철(李鐵)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허성(許筬)을 사림(士林)을 모해하고 화의(和議)를 찬성하여 마침내 남북(南北)의 화를 빚어냈으니 이른바 당신의 나라에 해를 끼친다 는 것은 이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삼았다. (以盧稷爲大司成 李鐵 爲戶曹參議 許筬 傾軋士林 贊成和議 遂釀南北之禍 所謂凶于爾國者 非斯人歟 爲永興府 使) - 이 같은 기사들을 통해 당시 허성이 줄곧 화친을 주장함으로써 조정대신들의 비 난을 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80 히기로 할 것 같으면 모든 선악에 대한 말은 따질 것이 없이 잡다한 이유는 털 어 버리십시오. 오로지 대의(大義)를 가지고 특별히 통신(通信)을 허락하여 한 번에 마치면, 재차 수고로이 행역(行役)하여 재력(財力)을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사는 즐거움을 얻도록 한다면, 천지 귀신도 성인(聖人)의 어지심에 묵묵히 감동할 것이며 서북쪽의 방비에 전 력할 수 있는 등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217)라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즉, 일본에 대한 원한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한 번 통신사를 보내어 두 나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백성의 안녕(安寧)과 국방의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 면 이는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허성의 이러한 생각이 단지 당론을 따른 때문만이 아닌, 그 자신의 확 고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다음의 시에서도 그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일본으로 떠나는 정정랑을 배웅하며(送丁正郞赴日東) 禦戎無上策 오랑캐 막을 상책이 없으니 和好亦其中 화친을 맺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本出覊縻計 본래 기미(覊縻)의 계획에서 나왔으니 何須較擋工 어찌 단순히 방어하는 것에 견주겠는가 事應仍舊得 일은 마땅히 옛 일에 의거해야 하나 機或過謨窮 지나친 꾀로써 기회를 다했네 尙賴皇靈大 이제 황령(皇靈)의 큰 힘에 의지해 長驅駕浪風 오래오래 말을 달려 풍랑을 헤쳐 나가리 위 시는 허성의 나이 59세 때인 1606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제목에 언급 되어 있는 정정랑(丁正郞) 은 정호관(丁好寬)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호 관은 1606년,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경섬(慶暹)과 함께 서장관의 직 을 맡아 일본으로 파견된218) 인물이다. 실록 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본을 217) 宣祖實錄 卷199, 39年(1606 丙午 5月 17日(甲申) 臣愚以爲 業已爲生靈屈 其他善惡 之言 皆不足相爭 擺落細故 但持大義 特許通信 一着便畢 不必再勞行役 虛費財力 而使億 萬吾民 得保其生生之樂 則天地鬼神 亦將默感於聖人之仁 而西北防備 亦應有專力之益 伏 惟上裁 218) 宣祖修正實錄 卷40, 39年(1606 丙午) 12月 1日 朔乙未 遣回答使呂祐吉 慶暹 書狀

81 통치하던 미나모토 이에야스(源家康,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개명) 가 통신사 파견을 여러 번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사행의 명칭 붙이는 것을 어렵게 여겨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에야스가 다시 서계(書 契)를 보내 굳이 청하므로 드디어 회답이란 이름 하에 이들을 파견하였는데, 사 람들이 모두 나라의 원수를 갚지도 못한 상태에서 먼저 통신사를 허락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다 21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에 드러난 허성의 태도는 일본과의 통신을 극력 반대하던 세간 의 여론과는 사뭇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실제로 동년(同年) 4월, 선조 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로 2품 이상의 관원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옛날 의 왕자(王者)들이 어찌 융적(戎狄)이 추하다는 것을 몰랐겠는가마는 문왕(文王) 이 곤이(昆夷)에 대해, 또 한 문제(漢文帝)가 흉노(匈奴)에 대해 뜻을 굽혀 화친 을 허락하면서도 이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오로지 생령(生靈)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 이라고 전제하면서 지금의 사세를 옛일로 헤아려 보건대, 종국에 가서는 한 번 화친을 해야 할 것 이라고 결론지었다.220) 뿐만 아니라 히 데요시가 비록 무도(無道)하다 하더라도 이는 이에야쓰가 일찍이 섬겼던 자인데, 곧 바로 그 이름을 들어 나무라고 배척하여 적이라 논한다면 수길의 여당(餘黨) 뿐 아니라 이에야쓰의 입장에서도 타당하다고 생각지 않을 것 이니 이를 잘 살 펴 처리하고 말을 부드럽게 하면서 사실을 밝혀야 할 것 221)이라고 주장하는 등 官丁好寬等入日本 219) 宣祖修正實錄 卷40, 39年(1606 丙午) 12月 1日(乙未) 朔乙未遣回答使呂祐吉慶暹書 狀官丁好寬等入日本 家康累請信使 而朝議難其名 久不許 至是 家康致書固請 遂以回答爲 名而遣之 人皆以國讐未復 徑許信使爲非 회답사 와 관련한 당시의 여론 악화는 일사 기문(逸史記聞) 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 寬) 등이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일본에 가게 되자, 참판 윤안성(尹安性)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使名回答去何之 회답사라 이름 하여 어디로 간단 말인가, 此日 和親意未知 오늘의 이 화친 의의를 모르겠네, 試向漢江江上望 한강에 머리 돌려 강가를 바라보라, 二陵松栢不生枝 두 능의 송백 가지 돋지도 않았네 이 시는 장안에 전송되 어 식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遣呂祐吉 慶暹 丁好寬 爲回答使如日本 參判尹安性 作詩送 之曰 使名回答去何之 此日和親意未知 試向漢江江上望 二陵松柏不生枝 此作傳誦於洛下 而爲識者所歎賞) 220) 宣祖實錄 卷198, 39年(1606 丙午) 4月 5日(癸卯) 許筬議 (중략) 今之事勢以古料之 末稍 則亦須一和 (중략) 古之王者 豈不知戎狄之可醜 文王之昆夷 漢文之匈奴 皆屈意許和 而不以爲恥者 徒以爲生靈也 聖敎隱惻含生 擧皆骨醉仁德 只此一言 可以祈天永命 臣不敢 贅 221) 宣祖實錄 卷199, 39年(1606 丙午) 5月 17日(甲申) 然而秀吉雖無道 旣是家康之所嘗 承事者 直斥其名 而論之以賊 則非特秀吉之餘黨 家康見之 亦不妥當 此則似當審處 而遜

82 철저한 현실론자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허성은 위의 시를 통해 일본과 화친을 맺고자 하는 것은 단지 자존심을 버리 고 적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오랑캐의 위협에서 구하고자 하는 일시의 계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무력을 동원해 적과 싸우 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당시로서는 현명한 방법이 못 된다. 따라서 화친하는 척하며 적을 견제하는, 이 른바 기미책(覊縻策) 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222) 윗글에 보이는 기미(覊縻) 란 단어는 원래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가리키는 말로서 후에 견제 의 의미로 확대되었고, 이것이 한대(漢代) 이후의 중국에서는 주변의 이민족에 대한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대저 이적(夷狄)이란 사방의 이기(異氣)로서, 오만무례하여 조수(鳥獸)와 다를 바 없다. 만약 중국과 잡거(雜居)한다면 천기(天氣)를 착란하고 선인(善人)을 욕되 게 할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성왕(聖王)의 제도는 기미(覊縻)하되 끊지 않을 뿐 이다.223) 위의 글을 참조해 보면 기미 정책의 의미는 결국 기미하되 끊지는 않을 뿐 이다(覊縻不絶而耳) 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미 는 국가 간의 관계를 소나 말을 고삐로 견제하듯이 하는 것을 의미하고, 부절 (不絶) 이란 국가 간의 관계를 사자(使者)의 왕래를 통해 끊지 않으며, 이이(而 耳) 란 그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의 적극적 조취란 군사적 공세에 의한 정복이라든지 주변국을 군현에 편입하는 것, 또는 관리를 파견하여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224) 그리고 이러한 기미정책은 조선조에 들어와 대마도를 포함한 왜(倭)나 유구(琉 球), 여진(女眞) 등을 회유하기 위한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일 본의 경우를 예로 들면 조선인들은 공식적인 외교문서에는 그 국호를 일본 으로 표기하였지만 통상은 왜(倭), 왜국, 왜인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 其辭 不沒其實可也 222) 拙稿, 앞의 논문, pp.42~43 참조 223) 後漢書 卷25, 夫成狄者 四方之異氣也 蹲夷踞肆 與鳥獸無別 若雜居中國 則錯亂天氣 汗辱善人 是以聖王之制 覊縻不絶而耳 224) 孫承喆, 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 지성의 샘, 1994, pp. 34~

83 이었다. 여기서의 왜 는 문화의 저열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왜구 의 소굴 로 인식되던 일본의 일반적 이미지 외에도 당대 지식인들의 화이관(華夷 觀)에 입각한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이 큰 영향을 미친 탓이었다.225)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과 일본은 교린(交隣) 관계조차 더 이상 이 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조선 사회에는 이에야스의 강화(講和) 요청에 대해 처음부터 거부적인 분위기가 넓게 퍼져 있었다. 전란 이후,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나 통교(通交)를 원치 않게 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이 전란의 적대국이었으므로 전쟁의 참화나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어 불구대천(不俱戴天) 의 원수로 표현될 만큼 적대 감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본 과의 강화보다는 오히려 원한을 갚는다는 차원에서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건의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들끓는 민심의 한편에서는, 국내적으로 민심의 안정 및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被虜人)의 쇄환(刷還) 문제 등의 정치적 현안을 해결하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 및 후금(後金)의 팽창으로 인한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226) 이 같은 논란 속에 서 허성이 많은 이들의 비난을 감수한 채 일본과의 화친을 적극 주장했던 사실 은 명분을 앞세운 공리공론보다는 실리를 우선시했던 그의 현실관과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227) 공자가 군자는 그릇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고 하여 사 유의 고착을 경계했던 것처럼228) 원칙만을 고수하지 않고 사세(事勢)에 따라 대 응했던 조선 중기 지식인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성의 기일원론자 적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 주는 또 다른 예로는 기전도설 후어(箕田圖說後語) 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백겸(韓百謙)의 기전도(箕田圖) 에 붙인 해설이다. 민순의 문인이자 허성의 친우인 한백겸은 1607년, 기자가 시 행했다고 전해지는 정전(井田) 의 유적이 평양에 실제로 있음을 그림으로써 입 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전도 이며, 허성 또한 기전도설후어 를 지어 한백 겸의 기전설 에 대해 찬동의 입장을 밝혔다. 한백겸은 정미년(丁未年, 1607) 가을, 동생 유천공(柳川公 : 韓浚謙)이 평안 도 관찰사가 되자 나도 부모님을 살피기 위해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225) 226) 227) 228) 하우봉, 朝鮮時代 韓國人의 日本認識, 혜안, 2006, pp.28~29 손승철, 위의 책, p.153 拙稿, 岳麓 許筬의 漢詩 硏究,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3, pp.42~43 강세순, 孔子의 現實觀, 東洋哲學硏究 45輯, 동양철학연구회, 2006, p

84 처음으로 기자 정전의 옛 제도를 보게 되니 밭 사이의 길들이 모두 가지런히 남 아 있어 문란해진 곳이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한 기자의 정전제도는 맹자가 논한 정(井) 자의 제도와 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중 함구(含毬)와 정 양(正陽) 두 문 사이의 구획이 가장 분명한데 그 양식이 모두 전(田) 자 모양으 로 되어 있고, 전(田)은 네 구획으로 되어 있는데 구(區)는 각각 70무(畝)씩 229) 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한백겸의 설명은 맹자 에 전하는, 은대(殷代)의 분배 토지가 70무라 는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였으므로230) 당대 식자층들에게 있어 기자가 은의 제도 를 실제로 조선에 시행했음을 입증하는 구체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정 전의 제도는 선유(先儒)들이 상세히 논하였으나 그 설들은 모두 맹자를 조종(祖 宗)으로 삼은 까닭에 주나라의 제도에 관해서는 아주 자세하면서도 하(夏)와 은 (殷)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231)며 주자가 설명한 정전제 에 관해 의혹을 제 기하고 있는 것은 특징적인 부분이라 할 만하다. 주자가 논한 조법(助法) 또한 억측(臆測)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서로 비교하여 살피고 고증할 만한 설이 없으니 그것이 과연 당시에 제작한 뜻에 다 합치되는지 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따라서 (그) 지식으로는 당시 제도를 만든 뜻에 모두 합 당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으니 옛 것을 좋아하는 선비가 이를 병통으로 여겼던 것 이다.232) 주자가 말한 조법 은 정전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법에 대해 알기 위해서 는 먼저 정전법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주자는 상인(商人: 殷人)들이 처음으로 정전법을 행했다고 보았는데 그는 은인칠십이조(殷人七十而助) 의 구 절을 예로 들어 이들이 정전제의 원리에 의해 70무씩 총 9구역을 구획해 관리했 다고 주장했다. 또한 상인들의 정전 구획은 1구역 당 70무를 기준으로 하여 총 630무로 구성되었고 9구역의 중심에 공전(公田)을 둔 채 주변 8가구에 1구역씩 229) 韓百謙, 久菴遺稿 上, 雜著, 箕田遺制說 其田形畝法 與今孟子所論井字之制 有不同 者焉 其中含毬 正陽兩門之間 區畫最爲分明 其制皆爲田字形 田有四區 區皆七十畝 230) 한국사상사연구회 編著,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p ) 韓百謙, 앞의 글, 井田之制 先儒論之詳矣 然其說皆以孟子爲祖宗 故特詳於周室之制 而 於夏殷則有未徵焉 232) 韓百謙, 앞의 글, 朱子之論助法 亦出於推測臆料 而未有參互考證之說 則其果悉合於當 時制作之意 有不可得以知者 好古之士 蓋竊病焉

85 나누어 분배했으며, 공전은 농민의 노동력을 빌려 경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 민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외에 사전(私田)에서는 별도의 조세를 거두지 않았다는 점이 정전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법의 설명을 통해 확인되는 중요한 사실 은 공전의 존재와 그것을 주변의 8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한다는 점인데, 이때 공 전과 주변 8가구의 사전은 정방형(正方形)의 정(井)자 모양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233) 그러나 한백겸은 자신이 목격한 평양의 기자 정전은 정자형(井字形) 이 아닌 전자형(田字形) 으로 주자의 설명과는 다르며 이러한 오류가 생긴 까닭은 주자 가 은의 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섣부른 추측을 보탠 때문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그는 은(殷)과 주(周)의 정전 제도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전자형(田字形) 의 토지 구획에서는 그 존재에 대한 해명이 쉽지 않 은 공전(公田) 과 여사(廬舍) 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공전(公田)과 여사(廬舍)의 제도에 대해서 비록 상고(詳考)할 수는 없으나, 토지 를 구분 지은 것이 이미 정(井)자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니 맹자가 이른바 가운 데에 공전(公田)이 있고 여덟 집에서 모두 1백 묘의 사전(私田)을 받는다 고 한 제 도와는 이미 거리가 먼 것이다. 생각건대 은나라 때에 비록 들판에서 토지를 나누 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여사(廬舍)가 반드시 토지 곁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며 혹 촌락이나 성읍에 모여 살았을 것이다. 공전 역시 한쪽 귀퉁이에 모여 있었지 반드시 사전 한가운데 끼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234)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한백겸은 평양의 기자전을 은전(殷田)에서 연유하는 정 전(井田)으로 이해하여 주자의 토지론에 학문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최초의 인물 이 되었으며, 정전에 관한 그의 이론은 뒤이은 조선 후기 토지 개혁론의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한백겸의 기전설 에 대해 혹자(或者)는 사대주 의에 찌든 조선 유학자의 지나친 기자 존숭 이라 비판하거나 그 이론적 오류를 낱낱이 파헤쳐235) 그 가치를 절하하기도 했지만,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233) 최윤오, 조선시기 토지개혁론의 원리와 공법(貢法) 조법(助法) 철법(徹法), 실학 사상연구 32집, 역사실학회, 2007, pp.476~ ) 韓百謙, 앞의 글, 其公田廬舍之制 雖不得考 然其制田旣非井字之形 則孟子所謂中有公 田 八家皆私百畝之制 已逕庭矣 意者 殷之時雖受田於野 而其廬舍未必在田傍 或皆聚居村 落城邑之中 其公田亦都在一隅之地 未必介在私田之中 235) 한백겸의 기전설 은 후대의 정약용(丁若鏞) 안정복(安鼎福) 등이 그 논리의 진위(眞

86 것은 기자 정전의 실재 여부가 아닌, 그러한 주장의 이면에 숨은 날카로운 현 실 비판의 논리일 것이다. 즉,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가던 현실을 개탄하고 균등한 토지 소 유의 이상사회를 꿈꾸던 한백겸이 평양 도성 밖의 토지 구획을 기전의 유제 (遺制)로 오인(誤認)하게 된 것인데,236)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등 후대 의 실학자들이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며 그의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 을 반복 인용한 것은 정전제 담론에 내포된 개혁의 논리에 주목했기 때문이 었다. 조선을 건국한 개혁론자들은 과전법(科田法) 체제를 통한 세율과 수조권으 로 여말(麗末)의 농업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토지의 수조율을 결 당 1/10로 하고 모든 전토는 공전으로 파악하여 국가가 수조하도록 하였으며, 양반 관료에게 분급(分給)하는 과전지의 대상을 경기(京畿)로 국한하고 그 외 전국 토지의 조세는 국가 재정으로 통합한다는 원칙을 확정하였다.237) 조선 초의 집권 세력들이 이렇듯 토지의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당대 사회에 있어 토지의 정치 경제적 위상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토지 국유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개인의 토 지 소유 및 소작 제도가 보편화 되는 등 새로운 사회 문제가 대두된다면 국가 는 현행 토지 제도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국가 입장에서도 지주 에 의한 대토지 겸병은 집권 체제 유지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농민의 몰락을 수반함으로써 유교 이념의 실현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238) 이렇듯 과전법을 통해 농민 소유지[民田]에 대한 과중한 수탈을 금지하고 국 가의 수조권을 확보하고자 했던239) 건국 초의 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증여나 세습을 통해 개인에 대한 수조권 분여지가 증가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 하게 되었으며, 결국 조정은 1466년(세조12), 과전을 중지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僞)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바 있으며, 북한의 최희림은 최근의 발굴 결과, 한백겸이 말 한 평양의 기자 정전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오인(誤認)에서 비롯된 것이 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최희림, 고구려 평양성 평양 : 사회과학출판사, 1978) 참조 236) 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 9, 탐구당, 1994, p ) 이범직, 이상과 열정, 조선역사 쿠북, 2007, pp.68~69 참조 238) 이동현, 朝鮮時代의 土地改革思想 - 均田制와 閭田制를 中心으로, 한국지적정보학 회지 4호, 한국지적정보학회, 2002, p ) 김태영, 朝鮮前期 土地制度史硏究 : 科田法體制 지식산업사, 1983, p

87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제(職田制)를 도입하게 되었다. 새로이 시행된 직전제는 양반귀족층의 토지 겸병을 막기 위해 과전의 수조를 국가가 일괄징수, 관리들에게 4분기로 나누어 지급하는 제도인데 국가의 세출(歲 出)이 매년 증가하여 녹봉액까지 잠식하게 되자 1534년 이후엔 흐지부지되었고, 종내에는 관료들이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지경이 되자 종래의 토지 겸병 이 다시 재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240)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들어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자 사전의 잔재인 과전법을 혁파하고 지주전호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15세기 주자성리학자들의 사 회 개혁론은 이제 구태의연한 것이 되고 토지의 균등 분배를 주장하는 균전론 (均田論)이 새로운 개혁 이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균전론은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나누어 공전 사전의 형태로 분배하는 주대의 정전제가 현실에서 시행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전체 토지를 인구수로 나눈 후 결(結) 단위로 똑같 이 분배하여 그 수입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자는 급진적인 이론이었는 데,241) 이러한 균전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 바로 한백겸의 기전론 이었 다. 이렇게 볼 때 한백겸이 직접적으로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 만, 그는 정전제를 이상으로 여기면서도 토지 개혁은 오직 대란(大亂) 후에만 가 능하며 현재는 그 시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주자의 토지개혁난행설(土地改革 難行說) 에 이의를 표명했으며, 나아가 조선 후기 지주전호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농민을 중심으로 한 반(反)주자적 토지개혁론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 다.242) 그런데 허성이 이 같은 한백겸의 논의에 찬동, 기전도설후어(箕田圖說後語) 를 지었던 사실은 그의 사상적 맥락이 실학의 선구 로 평가 받는 한백겸의 그것 과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허성은 (한백겸이) 그곳의 면적을 측량하여 조사하고 경계와 논밭 사이의 길 을 좇아 무법(畝法)243)으로써 그것을 개관하니, 오십에는 남음이 있고 백 무에는 240) 朴時亨, 한국토지제도사, 평양 : 과학원출판사, 1961, pp.133~ ) 지두환, 16세기 시대적 과제와 율곡의 대응, 한국사상과 문화 43집, 한국사상문 화학회, 2008, pp.140~ )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기전론(箕田論) 項 참조 243) 무법(畝法) 은 주공(周公)이 처음 제정한 것으로 전답의 넓이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 하였다. 원래는 6척(尺) 사방이 1보(步), 백 보가 1무였는데, 진(秦)나라 이후에는 2백

88 부족했으며 칠십 무 정도의 전(田)이 있었다 면서 무릇 칠십 무를 경작하고 조 법(助法)을 쓰는 것은 은나라 사람의 공통된 법칙인데, 이때에 주(周)의 법이 천 하에 급히 퍼지지 못해 은실(殷室)의 옛 신하인 기자를 해동(海東)에 봉하여 은 의 사람으로써 은의 법을 행하게 한 곳이 여기이다. 그러한즉 칠십 무의 밭이 어찌 기자가 우리 동방에 직접 전한 법이 아니겠는가? 244)라고 하여 한백겸이 제기한 기자 정전의 실재를 인정하였다. 그는 또한 한백겸이 그린 기전도 를 정밀히 연구, 한백겸이 해결하지 못한 공전과 여사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기전 론에 대한 논의를 더욱 구체화시켰는데245),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9무(畝)의 큰 길 안에 70무의 밭 64구(區)를 방정하게 배열해 놓은 것이 주역 의 방위도(方位圖) 모양과 같았다. 8구로 된 줄이 여덟이니, 그 한 줄 8구 중에 서 한 구를 내어 공전(公田)으로 삼고 그 나머지 7구는 일곱 집이 각기 하나씩을 받아 사전(私田)으로 하며, 그 공전 중 일곱 집이 각기 3무씩을 받아 집을 지으니 이 21무를 제하면 남은 것이 49무이다. 이를 일곱 집이 나누어 공동으로 경작하는 것이 각기 7무씩으로 사전 70무를 더하면 10분의 1이 된다. 9무의 길 안쪽은 곧 그 제도 전체를 법(法)으로 보인 것이요, 작은 길 3무의 안은 그것을 흩어 놓은 모 양이니 그 법제와 통하는 것이다. 반드시 네 구로써 한 방(方)을 삼는 것은 대개 그 둘을 합하면 여덟이 되므로 비록 열(列)을 지어 줄을 만들지 않아도 역시 8구 가 한 줄이 되기 때문이니, 어찌 아무 뜻도 없이 여덟로도 하고 넷으로도 했겠는 가? 주(周)의 한 정(井) 9구와 은(殷)의 한 줄 8구는 그 뜻이 같은 것이다.246) 허성은 위의 설명을 통해 (모든 것이) 잘 들어맞아 남는 것이 없으니 비록 명 문(明文)이 없더라도 그 제도는 너무나 명백한 것 이라고 전제하면서, 주(周)의 정전과 은(殷)의 정전이 같지 않아 보이는 연유를 도량형(度量衡)의 차이로써 해 명하였다. 또 주(周)의 제도에서는 공전이 백 무인데 여기서 여사 이십 무를 제 40보를 1무로 하기도 하였다. 244) 許筬, 岳麓集 卷2, 序, 箕田圖說後語 至於丈量之 仍其徑界 逐其阡陌 以畝法槪之 五十而有餘 百畝而不足 乃七十畝之田也 夫七十而助 乃殷人之通法也 是時 周法未遽遍及 於天下 而箕子以殷室遺老 受封於海東 以殷人行殷法 乃其所也 然則七十畝田 豈非箕子之 親傳法於我東者耶 245)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기전론(箕田論) 項 246) 許筬, 앞의 책, 箕田圖說後語 九畝路之內 乃其制之全體而示之法也 小路三畝之中 乃 其散樣而通其制也 必以四區爲一方段者 蓋合其二則爲八 雖不列而行之 而亦八區一行之意 豈無意義而爲之八爲之四哉 周之一井九區 殷之一行八區 其義一也

89 하면 그 나머지는 팔십 무로, 여덟 집이 이를 나누면 각기 십 무씩 돌아가니 또 한 십 분의 일이 된다. 비록 조철(助徹)이 같지 않아 많고 적음이 있다 하더라도 십분의 일이 되는 것은 부절(符節)처럼 합치되며, 제도가 변하여 간략해졌지만 (은의 제도와) 근사(近似)하니 주의 전제(田制) 또한 상(商)의 제도에서 연유한 것 247)이라는 견해를 적극 피력하였다. 나아가 그는 주자 같은 성인도 은전을 증험할 길이 없었으니 주의 제도로써 추측하여 (그 대강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면서 주자가 말하기를 상나라 사람 에게서 정전의 제도가 처음 비롯되었다고 함에 이는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하는 데, (이 같은 논의가) 어떤 책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고 하였지만, 이 전(田)이 애초에 기자로부터 나왔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고 하여 주자의 토지 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는 등, 한백겸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렇듯 허성은 기전의 실체를 긍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정전제 원리에 의한 토지 제도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했으며, 동시에 정전의 실재나 토지 제도의 전면 개혁에는 부정적이었던 주자의 토지론에 간접적인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다. 조선 후기 경제 및 개혁의 핵심 문제가 토지 제도였고, 이후 토지 문제를 둘러 싼 학 계의 동향이 주자적 입장과 반(反)주자적 입장으로 분립(分立)해 나갔던 사실을 생각할 때 양란(兩亂) 이후 허성에게서 이미 실학의 기본 논점과 문제의식이 싹 트고 있었던248) 사실이 확인된다. 또, 기전에 대한 한백겸의 문제의식이 정전제 가 실재했던 제도임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정전제의 이념, 즉 경자유전(耕者有 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제도 개혁의 역사적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 데 있었음249)을 생각할 때, 그에 동조한 허성 역시 한백겸과 마찬가지로 그 사 상적 기저에 진보적 개혁 의식이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정치적 입 장이 대체로 동인계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러한 토지개혁론은 역시 이 당색(동인 남인)의 인물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발전되어 나갔던 것이다.250) 이에 더하여 원칙 보다는 상황 을 중시하고 정도(正道) 보다는 권도(權道) 에 247) 許筬, 위의 글, 且以周制言之 公田百畝 計除廬舍二十畝 其餘八十畝 八家分之 則各得 十畝 通私田百畝 亦爲什之一 雖有多寡助徹之不同 而其爲什一 若合符節 制變亦略相近 所 謂周田 亦安知非因此商制 248) 金貞信, 16세기말 성리학 이해와 현실인식 : 對日外交를 둘러싼 許筬과 金誠一의 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13집, 조선시대사학회, 2000, p ) 金貞信, 위의 논문, p ) 金容燮, 朝鮮後期 農業史硏究 Ⅱ, 일조각, 1995, p

90 입각해 사고했던 허성의 사유적 특성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국가적 위기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는데, 후대 실학자들 다수에게서 이 같은 사상적 경향이 두루 발견 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한 예로 유형원이나 이익에게서 나타나는 정치적 현실주의는 무엇보다 변통(變通 : 임기응변(臨機應變)) 이라는 상황주의 적 성격에서 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퇴계를 중심으로 한 정통 주 자학파가 주장했던, 이른바 통치자의 수신(修身)과 그에 따른 피치자(被治者)의 교화 라는 주자학 일존주의적(一尊主義的) 태도나 도덕에 의한 통치 양식이 아니 라, 현실의 상황을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적합한 방 책을 제도 개혁을 통하여 강구하려 했던 것이다.251) 2) 文化 交流의 側面에서 본 朝鮮儒學의 海外 傳播* 허엽의 맏아들 허성은 1583년, 출사한 이래 극심한 당쟁과 환란 속에서도 무 려 30년 동안이나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의 주모자로 이이를 탄핵하다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고 서 른여덟의 나이로 객사(客死)한 아우 봉(篈)이나, 정이품 형조판서와 좌참찬의 자 리에까지 올랐으나 이이첨(李爾瞻)과의 정쟁(政爭)에서 패배함으로써 역모의 수 괴라는 오명을 쓰고 처형당한 균(筠)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허엽 일문의 성향에 관한 그간의 논의들은 대체로 비슷한 맥락에서 전개되었는데, 이복동생들이 타고난 방외적(方外的) 기질로 인해 평생 현실과 부조화하며 파란의 일생을 살아간 반면 허성은 뛰어난 현실 감각과 능란 한 처세를 지닌 관료형 인물의 전형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즉 허엽과 장남인 성, 맏사위인 우성전(禹性傳)은 도학파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차남인 봉 과 균, 딸 난설헌 등은 사장(詞章)에 전념하여 가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 이252)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물들의 관계 및 성향 * 본 항(項)의 내용은 2010년 語文硏究 (한국어문회 刊) 38권 3호에 게재했던 필자의 논문 岳麓 許筬과 에도(江戶) 儒學의 勃興 을 수정 보완한 것임 251) 전정희, 實學思想의 政治的 現實主義와 思想的 系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6집 2 호,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5, p ) 朱昇澤(1996) 朝鮮中期 道學派와 詞章派의 對立樣相, 退溪學 8집, 안동대 퇴계학연구소,

91 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린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허성의 어머니인 한씨(韓氏)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생인 봉과의 나이 차가 3살밖에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 니와 사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계모 슬하에서 자란 허성과 이복동생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동복(同腹)인 삼남매의 경우 동기간의 우애가 남달랐다는 것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쉽게 확인되나, 이복 (異腹)인 허성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소부부고 소재 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들 형제의 관계가 세간의 생각과 달리 소원하 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253) 또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느냐가 개인의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노선을 결정하 던 당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동일한 토양에서 성장한 이들 형제 사이에서 아무 런 사상적 학문적 일치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맏형인 허성은 도학파고 아우들인 봉과 균은 사장에 전념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인물들의 일면만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 성급한 주장이므로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일례로, 허성이 기자정전을 상수학의 논리로 설명한 한백겸의 기전설 에 적극 253) 허균과 이복형제들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許筠, 惺所覆瓿稿 卷18, 文部15, 漕官紀行 8월 29일 직산(稷山)에서 형님을 맞았다. 원 임자중(林子中)과 진천 현감(鎭川縣監) 임 희지(林羲之)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녘에 형님이 도착하였다. 헤어진 지 3년 만에 만나 매우 기뻤다. 한 이불을 덮고 잤다.(戊子 迓兄于稷山 主倅林子中 鎭川縣監任 羲之來話 夕兄至別三年矣相見喜甚同被而宿) 9월 7일 삼례(參禮)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妓樂)과 잡희(雜 戲)로 반마장이나 나와 맞이했다. (중략) 나는 큰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합격해 서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한스럽다. 고 농담을 하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동헌에서 형님을 뵈었다. 중동헌(中東軒)을 비워 나의 숙소로 하였다.(乙未 午飯于參禮 入州 判官出伎樂雜戲于半程以迓 (중략) 余笑語長姪曰 恨不以此行爲君折桂來也 渠亦捧腹 遂省兄于軒 空中東軒爲我館焉) 11월 3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형님께서 큰 잔치를 마련하여 축하해 주셨다.(庚寅 乃余 初度 家兄大設席以慶之) 11월 9일 형님이 송별연을 마련해 주셨다. (乙丑 兄設離筵) 11월 18일 큰누님과 자형(姊兄) 사어(司禦) 박순원(朴舜元)을 사탄(槎灘)으로 찾아뵈었 다.(甲戌 見長姊及姊兄朴司禦舜元于槎灘) - 같은 책 卷7, 文部7, 書, 奉上家兄書, 卷10 文部 7, 書, 答長姪書 등 참조

92 찬동하여 기전도설후어 를 썼던 사실은 그 가치관이 아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 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명분을 앞세운 공리공론보다는 실 리를 우선시했던 그의 현실관과 세계관이 잘 드러나는데,254) 이 같은 맥락의 행 적들이 앞선 1590년의 사행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동행한 부사(副使) 김성일이 철저한 화이론적(華夷論的) 시각으로 일본을 바 라본 것에 비해 허성은 현실 상황 그 자체를 중시함으로써 사사건건 충돌이 빚 어졌던 일이 그것이다. 이는 그의 인식 바탕에 일본의 실제에 나아가 그들이 오 랑캐이면 오랑캐인대로, 그들에게 도(道)가 없으면 없는 대로 그들의 현실을 인 정해야 한다는 생각, 즉 절대적이고 선험적(先驗的)인 도덕률[理]로써 현상 자체 를 적극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기일원론자(氣一元論者)의 사고가 전제되어 있었 기 때문이었다. 즉, 명분보다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세(事勢)에 따라 그때그때에 알맞은 논리로써 대처해 나갈 것을 주장하는 허성의 생각은 권 도(權道)를 중시하는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던 것이다.255)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허성을 포함한 그 형제들이 가학(家學)을 통해 부친 허엽과 유사한 학문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실제로 허엽의 학풍과 사상이 허성 허봉 허균의 세 아들에 의해 계승되었다는256) 것이 정설이고 허 균 역시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다 는 언급을 한 사실 등으로 미 루어 볼 때, 허엽의 자녀들이 부친의 학통을 이어 김굉필 - 김종직 - 조광조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道統)을 근간으로 하고, 여기 다시 김안국과 서경덕의 영 향을 더해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와 학문적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허성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유방식은 사람들과의 교유에 있 어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허균의 다음 기록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우리 큰형은 친구 사귐을 조심하여 그 수효가 적었는데, 유독 신공(申公)만은 좋 아하여 서로 사귀었다. 공이 과거를 보러 가지 않아 비난이 자자하였고 그를 비방 하는 사람들은 공과 사귀는 사람까지 비방하였는데 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더욱 다정하였다.257) 254) 拙稿, 岳麓 許筬의 漢詩 硏究,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3, pp ) 金貞信, 앞의 논문, pp 참조. 256) 신병주, 花潭學과 近畿士林의 思想, 國學硏究 7집, 한국국학진흥원, 2005, p

93 위의 글을 참고해 보면 허성은 사람을 사귀는 데 무척이나 신중했지만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사귐을 평생 지속했고. 상대의 신분이나 지위보다는 그가 가진 천성이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그가 젊은 시절, 천인 출신인 유 희경(劉希慶) 서기(徐起) 등과 함께 시를 수창하고, 전함사(典艦司)의 노비였던 백대붕(白大鵬)의 시재(詩才)를 아껴 일본 사행에 함께 데려간 사실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런데 이렇듯 외적인 조건에 함몰되지 않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 는 허성의 개방적인 태도는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던 바, 훗날 일본 내 에도[江 戶] 유학의 발흥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허성이 1590년 적국의 형세 정탐을 위해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과 더불어 일본 사행을 다녀온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인데, 그가 사행 중 일본 유학 의 비조(鼻祖)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교유한 사실은 실로 주목할 만하다. 허성과 세이카의 교유에 관한 최초의 연구는 아베 요시오[阿部吉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명저(名著) 일본주자학과 조선(日本朱子學と朝鮮) (1965)에 서 허성과 세이카가 만나게 된 계기와 그들의 만남이 가져온 성과에 관해 논하였 으며, 그 말미에 양인(兩人)의 수창시(酬唱詩) 및 허성이 세이카를 위해 쓴 것으 로 알려진 시립자설(柴立子說) 의 원문(原文)을 첨부하였다. 국내에서는 1975년 에 나온 김태준의 논의258)가 유일한 것으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내용이 수창시 약간을 수록하고 아베 요시오의 저서 일부를 번역 소개하는 데 그쳐 더 이상의 논의로는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필자는 본 항에서 기왕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허성과 세이카의 교유가 양국의 문화 교류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당대 지식인들의 다양한 사상적 실험이 조선의 학계,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 전반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소략하 게나마 밝힐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1590년(선조23) 3월 6일, 통신사 일행은 국서와 예물을 받들고 일본국왕사라 칭하는 대마도주 소우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함께 한양을 출발, 7월 21일 교토 [京都]의 다이토쿠지[大德寺]로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당시 오다와라성[小田原 257) 許筠, 惺所覆瓿稿 卷17, 文部14, 墓誌, 成均生員申公墓誌銘 吾伯兄少許可 愼交游 獨好與申公相從 時議方訾公 不許赴選擧 謗者竝謗交者 而兄不爲動 固已艶矣 258) 金泰俊, 日本 新儒學의 成立과 朝鮮學者 : 壬亂前期의 朝鮮文化의 對日影響을 中心 하여 ( 明大 論文集 8輯, 명지대학교, 1975)가 그것이다

94 城]의 호조 씨[北條氏]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 일행은 11월이 되어서 야 주라쿠다이[聚樂第]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할 수 있 었다. 히데요시와의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들 에게 어느 날, 한 젊은 승려가 방문을 청하였는데, 그가 바로 일본 유학의 개조 (開祖)라 일컬어지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였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이름은 슈쿠[肅], 자는 렌부[斂夫]이며 조상 대대로 식읍 (食邑)을 소유했던 반슈[播州] 세가와[細河邑]에서 출생했다.259) 세이카의 집안 은 원래 장원(莊園)을 소유한 구(舊)귀족으로 중세의 와카산케[和歌三家] 중 하 나인 레이제이케[冷泉家]에 속한 가문이었으며, 그는 후지와라 사다이에[藤原定 家]260)의 11대 손이었다. 세이카는 칠팔 세 무렵 스님이 법화경(法華經) 과 반 야심경(般若心經) 읊는 것을 듣고 모두 따라 외워 사람들에게 신동이라 불릴 만 큼 두뇌가 명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출가한 이후에는 숀[蕣] 이라는 법명 을 사용했다. 18세 되던 1578년, 부친의 성(城)이 적군의 급습을 받아 함락되고 아버지와 형이 죽음을 당하자 그는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숙부가 주지로 있던 교토의 쇼코쿠지[相國寺]261)로 피신해 그곳에서 선승(禪僧)이 되었고, 불교와 유 학을 배웠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전대에 수입된 주자학이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했는데, 이에 공헌한 인물들 중 하나가 고잔[五山 : 禪佛敎의 官寺]의 선승 들이었다. 원래 고잔 문학은 선승들에게 선학(禪學)을 이해시켜 종국에는 선학에 귀의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가마쿠라[鎌倉] 시대 중기부터 1500년대(무 로마치 시대 말기)까지 일본의 주자학은 유불일치(儒佛一致)라는 형태를 유지한 채 주로 불교를 통해서 유교가 이해되었고, 유교는 불교에 예속된 형태로 머물러 있었다.262) 그러므로 선승들에게 있어 유학은 교양으로써 꼭 갖추어야 하는 덕 259)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생애 및 활동에 관한 내용은 藤原惺窩集 (小系夏治郞 太田兵三郞 共編. 國民精神文化硏究所, 1938)과 日本朱子學と朝鮮 (阿部吉雄, 東京 大學 出版會, 1965)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외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保坂 祐二, 김영사, 2007) 등을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260) 후지와라 사다이에[藤原定家 : ]는 일본 중세의 와카(和歌) 시인이며 후 지와라 데이카라고도 한다. 일본 중세의 가장 위대한 궁정 시인의 한 사람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 있는 와카 이론가이자 비평가이다. 261) 쇼코쿠지[相國寺]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고코마쓰[後小松] 천황의 칙명을 받아 약 10년에 걸쳐 1392년에 완성한 임제종(臨濟宗) 의 사찰이다. 교토 5대 사찰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선종의 중심지로서 많 은 고승(高僧)을 배출하여 무로마치 시대의 선(禪)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95 목 중 하나였다. 세이카 역시 유학으로써 불도에 입문한다[儒而入佛] 는 생각에 따라 글을 짓 는 데 힘썼고 불교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여러 책들을 읽었는데, 후에 다지마 [但馬] 다케다성[竹田城]의 성주(城主)였던 아카마스 히로미치[赤松廣通]263)의 후원을 받아 그 수준이 날로 향상되었다. 쇼코쿠지 묘주인[妙壽院]의 숀슈소[蕣首座]로서 비록 불서(佛書)를 읽어야 했 으나 그 뜻은 항상 유학에 있었다. 고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전하고 있는데,264) 그런 세이카가 다이토쿠지에 머물고 있던 통신사 일행을 만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덴쇼[天正] 18년(1590년) 경인년(庚寅年)에 조선의 사신 통정대부(通政大夫) 황 윤길 김성일 허잠지(許箴之)265)가 찾아와 공물을 바쳤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이 그들을 무라사키노[紫野]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 머물게 하라고 명했다. 선 생(세이카)이 가서 세 사신을 접견해 서로 필담을 나누고 또 시를 수창했다. 이때 선생은 자호(自號)를 시립자(柴立子)라 했는데 허잠지가 선생을 위해 ( 柴立 의 의 262) 成海俊, 日本 朱子學의 傳來와 受容, 南冥學硏究 15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3, pp ) 아카마스 히로미치[赤松廣通 : ]는 학문을 좋아한 일본의 다이묘[戰國大 名]로 덴쇼 13년[天正十三年 : 1585]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다지마 다케다성[但馬 竹田城]을 하사 받았다. 히로미치는 훗날 세이카와 함께 임진왜란 중 포로로 끌려간 강 항(姜沆)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유교식 의례와 학문을 전수 받았으며, 강항의 귀 국 시에 여비를 마련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264) 小系夏治郞 太田兵三郞 共編(1938), 藤原惺窩集 上, 東京 : 國民精神文化硏究所, p.6, 行狀 所謂儒而入佛也 先生從事筆硏 其所出自可知矣 博學禪敎 兼見群書 (중략) 其 所居曰 妙壽院 後歸播見赤松氏 赤松氏善遇之 故從赤松氏遊于洛于伏見之間 先生雖讀佛書 志在儒學 265) 허잠지(許箴之) 는 허성(許筬) 의 오기(誤記)이다. 수창한 시들에는 그 작자가 허성의 호인 산전(山前) 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하야시 라잔이 세이카의 행장(行狀) 을 찬(撰)하 는 과정에서 허성의 이름을 잘못 기록하는 바람에 후대 문헌들이나 심지어 국내 저서들 에까지 잘못 쓰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라잔이 세이카의 행장 에서 허성의 이름을 모 두 許箴之 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표기상의 실수는 아닌 듯하다.) 아베 요시오교 수가 1965년, 일본주자학과 조선(日本朱子學と朝鮮) 을 출간하면서 이를 지적해 바로 잡았으나, 본고에 인용한 네델란드 라이든 대학 W. J. Boot의 논문 퇴계학과 일본 에 서 허성의 이름을 허잠(許箴) 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나, 강재언이 조선통신사와 일본 견문록 을 발간하면서 일본에서는 허성을 허잠지(許箴之) 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 는 잘못(P.281) 이라는 언급을 한 것 등으로 미루어 지금까지도 오류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6 미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써 주었다.266) 덴쇼[天正] 18년(30세) 조선의 통신사인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 성 등이 일본을 방문했다. 우연히 통신사가 대덕사에서 숙박하고 있었으므로 세이 카(당시에는 승(僧) 숀[蕣]이라 칭했다)가 자주 대덕사를 방문해 시문(詩文)을 주고 받았다. 이 때 주고받은 시문 몇 편이 세이카의 문집(藤原惺窩集) 안에 수록되 어 있다. 그리고 세이카의 아들[藤原爲經]이 편찬한 세이카 선생 문집(惺窩先生 文集) 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더하고 있다. 위경이 살피기를, 덴쇼 경인년에 조선국 사신 황윤길 김성일 허잠지가 와서 공물을 바쳤다. 선생이 고로간[鴻臚館]에 나아가 그들을 접견하여 필담을 나누고 시로써 화답하였다. 학봉(鶴峯 : 김성일) 오산(五山 : 차천로) 산전(山前 : 허 성) 대붕(大鵬 : 백대붕)과 누군지 모르는 몇이 있었다.267) 위의 글을 통해 세이카가 다이토쿠지에 있는 사신들을 찾아가 먼저 만남을 청 한 사실과 이들이 만난 자리에 황윤길과 김성일, 압물관(押物官)의 직책을 맡아 통신사를 수행했던 차천로와 천노(賤奴) 출신인 백대붕까지 함께 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실제로 세이카의 문집에는 통신사 일행과의 증답시(贈答詩)들이 다수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세이카의 시뿐 아니라 함께 시를 수창했던 조선 문인들의 작품까지 수록되어 있어 당시 세이카가 만난 조선인들이 여러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268) 이렇듯 세이카가 만난 인물이 허성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유독 허성만이 일본 유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아베 요시오는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266) 藤原惺窩集, 앞의 글, 天正十八年庚寅 朝鮮國使通政大夫黃允吉金誠一許箴之來貢 豊 臣秀吉公命館之紫野大德寺 先生往見三使 互爲筆語 且酬和詩 時先生自號柴立子 許箴之爲 之說以呈焉 267) 阿部吉雄, 日本朱子學と朝鮮 東京 : 東京大學 出版會, 1965 p.42, 天正十八年(三十 歲), 朝鮮の通信士, 正使黃允吉 副使金誠一 書狀官許筬等が日本を訪れた たまたま 通信士は大德寺に宿泊していたので, 惺窩(當時は僧蕣と稱す)は, しばしば大德寺を訪ねて 詩文の贈答をなした この贈答の詩文數篇が 藤原惺窩集 の中に收められている そして 藤原爲經編 惺窩先生文集 には, 次 のような注記を添えている 爲經按, 天正庚寅, 朝 鮮國使黃允吉 金誠一 許箴之來貢 先生就鴻臚館見之, 筆語酬答 而鶴峯 五山 山前 大鵬者 未審爲誰某 268) 藤原惺窩集 에는 贈五山 贈鶴峰 疊韻答大鵬 贈松堂 을 제목으로 한 세이카의 시 4수 외에도, 차천로의 시(이 책에는 그 이름이 五山 謝天路 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次蕣上人見示韻 과 백대붕의 시 次贈柴立子 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세이카가 통신사 일행 모두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된다. ( 藤原惺窩集, pp.42~43, p.95, pp.289~290 참 조)

97 藤原惺窩集 을 보면, 세이카와 허산전(許山前)의 증답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것을 보면 특히 흉금(胸襟)을 열게 된 경위나 세이카가 감복한 모습을 알 수 있다. (중략) 이것(두 사람의 증답시)을 살펴보면 처음 세이카가 국화를 가지고 가서 여기 시 한 수를 덧붙여 허산전을 방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허산전이 점차 서로 만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기쁨을 띠는 상태로까지 마음을 허락하 게 되어 급기야는 새벽 무렵, 얼굴을 씻기 전부터 옷을 걸치고 함께 새로운 시구 (詩句)를 구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또 술을 마시고 저녁까지 청담(淸談)을 주고받아 (헤어질 때는) 진심으로 이별을 슬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이카 역시 한 번 웃고 술잔을 드니 그 은혜가 가볍지 않다 고 하여 시와 학문을 가르쳐 준 은혜에 대해 감사했다.269)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이카가 처음 국화에 시 한 수를 더해 허성을 방문했 던 사실은 다음의 시작(詩作)에 드러난다. 국화에 시를 더해 산전에게 주다[菊花副詩贈山前] 悠然採菊見南山 국화꽃 따며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니 千載淵明對暮顔 천 년 전의 도연명이 저녁 빛에 마주 하네 不隔異邦霜下色 이방의 서릿빛은 다르지 않으니 歲寒節操伴淸閑 세한고절은 한 가지로 맑고도 깨끗하구나 당시는 음력 8월 초순이었으므로 추국(秋菊)의 시절로서는 이른 감이 없지 않 으나, 도연명(陶淵明)과 관련하여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이 제재로 많이 채용 되던 에도 시대에 있어 나라를 달리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에 사용할 만한 소재 임이 확실하다.270) 이 같은 세이카의 선창(先唱)에 대해 허성은 다음의 시로써 269) 阿部吉雄, 위의 책, p.51 52, 藤原惺窩集 を見れば, 惺窩, 許山前の贈答の詩が數首 のせられている それを見れば, 二人が特に胸襟を開くようになつた經緯や, 惺窩が心腹し た樣子を知ることができる (중략) これによって見れば, 初め惺窩は菊花を携え一詩を副 えて許山前を訪ねたのであるが, 許山前は次第に 相逢ふて覺えず自ら顔を歡ばしむ 狀態 にまで心を許す仲とな, さらに 淸晨洗はず枕前の顔, 衣を披いて共にもとむ新詩句 とい ううちとけた仲にまでなり, あるいは酒を汲み夕刻まで淸話を交わし, 心から離別を惜しむ ようになっ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 これに對して惺窩も 一笑して杯を擧ぐ恩輕から ず と, その詩恩學恩を謝し 270) 金泰俊, 日本 新儒學의 成立과 朝鮮學者 : 壬亂前期의 朝鮮文化의 對日影響을 中心 하여, 明大 論文集 8輯, 명지대학교, 1975, p 이 작품은 도연명(陶淵明)의 음

98 화답하였다. 시립자가 국화를 준 것에 대한 사례로 원운(原韻)을 사용해 운치 있는 시 한 구를 덧붙이다[謝柴立子贈菊花 副以淸詩一絶 仍用元韻] 每見黃花憶故山 국화꽃 바라보며 매양 고향을 생각하니 旅遊偏覺損朱顔 한갓된 그리움 나그네 얼굴을 상하게 하네 逢君更起東籬興 그대를 만나 다시 동리(東籬)의 흥 일으키니 政是浮生半日閑 덧없는 인생 한나절의 한정(閑情)을 다스려 보리라 낯선 이국에서, 그것도 문화적 수준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았던 일본 땅에서 도연명의 시구를 차용해 시를 읊는 젊은 선승을 만난 허성의 반가움은 실로 남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이카가 사용한 산(山), 안(顔), 한(閑) 의 운자 (韻字)를 그대로 사용하고 도연명의 원시(原詩)에서 취재(取材)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시우(詩友)를 만나게 된 감회를 노래했는데, 이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계속해 첩운(疊韻)하여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간의 우의를 다지게 된다. 산전의 시에 첩운하여 주다[疊韻贈山前]271) 四品友朋共一山 산 속에서 벗과 함께 술 한 잔을 나누고 淸談何幸對君顔 그대 얼굴 대하여 청담을 나누니 어인 행운인고 野生唯願相隨去 미천한 내가 오직 당신과 서로 따르길 원하니 哦句讀書消我閑 글귀 읊조리고 책을 읽으며 나의 한정(閑情) 없애려 하네 주(飮酒) 의 일부에서 시재(詩材)를 차용(借用)한 것이 확실한데 그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採菊東籬下(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 꽃 따며), 悠然見南山(유연히 남산을 바라보 네), 山氣日夕佳(산 기운은 저녁노을에 더욱 아름다운데), 飛鳥相與還(새들은 짝지어 둥 지로 돌아가네) 271) 원문의 四品友朋 에서 四品 은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제(濟)나라 순우곤(淳于髡)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제나라 위왕(威王)이 그에게 어떻게 마시는 술이 세상에서 제 일 맛있는 술인가? 라고 물었을 때 순우곤이 술도 벼슬처럼 품작(品爵)이 있다 고 대답 하고 1품부터 9품까지의 순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 중 4품은 사랑채에서 지인(知 人)과 마주하며 마시는 술 이며, 따라서 四品友朋 이란 사랑채에서 마주하여 술을 마시 는 친구 의 뜻으로 볼 수 있겠다. 또 3句의 野生 은 미천한 출신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선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로 쓰였다

99 다시 시립자에게 첩운(疊韻)하여 화답하다[和次柴立子再疊韻] 一炷淸香對博山 한 심지 향불을 돋우고 박산272)을 마주하여 相逢不覺自歡顔 그대를 만나니 나도 몰래 기쁜 얼굴 하게 되네 僑窓若得長如此 타향의 하루 이리도 긴데 何用天涯別索閑 이역만리의 한정(閑情)을 어찌 다스릴까 시립자의 운에 다시 삼첩(三疊)하여 화답하다[三疊柴立韻索和] 剝喙驚聞響振山 새소리에 온 산 울려 놀라 일어나니 淸晨不洗枕前顔 맑은 첫새벽 얼굴도 씻지 못했는데 披衣共覔新詩句 옷을 떨쳐입고 새로운 시구(詩句)를 구하네 自笑幽期未是閑 저절로 미소 지으니 저녁에도 한정(閑情)을 다 하지 못하누나 위에 인용한 三疊柴立韻索和 에는 두 사람의 만남이 일회에 그치지 않고 상 당 기간 지속되었던 사실이 드러나 있는데, 유학에 뜻을 두었다고는 하나 아직 그 소양(素養)이 부족했던 세이카가 조선 학자들과의 교유에 대단히 적극적이었 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이른 새벽부터 허성을 찾아와 시를 구하고 담론을 청하였으며, 밤늦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 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 유 학을 인정하고 경모하는 세이카의 태도273)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 인들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에도 시대 이후 조선에 대한 멸시감이 사람들의 뇌리에 확대되는 가운데서도 유학자, 특히 주자학자들의 조선 관민(官 民)에 대한 존경과 호의는 변하지 않았던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272) '박산향로(博山香爐)'의 준말로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박산(博山) 의 모양을 본 떠 만든 향로를 이른다. 273) 세이카가 중국과 조선에 가고자 했으나 건강 문제와 전란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음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姜沆, 睡隱集, 看羊錄, 賊中聞見錄 아깝도다. 내가 대당(明)에서 태어나지 않고 또한 조선에서 태어나지도 못 하고, 일본에 서 이때에 태어났으니 신묘년 3월, 사쓰마[薩摩]로 내려와 큰 배를 따라 대당(明)으로 건너가려 했는데 폐질을 앓고 있어 교토로 돌아갔다. 병이 다소 낫는 것을 기다려 조선 으로 건너가고 싶었으나 계속해 병력(兵力)이 주둔하고 있어 두려워 들어갈 수 없었다. 끝내 바다를 건너지 못하였으니 상국(上國)을 관광하지 못하는 것 역시 운명이겠지. (惜 乎 吾不能生大唐 又不得生朝鮮 而生日本此時也 吾於辛卯年三月下薩摩 隨海舶欲渡大唐 而患瘵疾還京 待病少愈 欲渡朝鮮 而繼有師旅 恐不相容 故遂不敢越海 其不得觀光上國亦 命也)

100 조선 유학을 드높인 퇴계의 존재 및 동학자(同學者)로서의 친근감과 향상심(向 上心)에274)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렵, 세이카의 모습에서 그 전초(前哨) 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허성과 세이카는 재회한 자리에서도 운을 바꾸어 수창을 계속했다. 시립자의 방문에 감사하여 시를 선사하다[謝柴立子見訪 仍以詩投贈] 空谷跫音意未輕 빈 골짜기 찾는 발자국 소리 그 뜻은 가볍지 아니하며 一場淸話更關情 한 바탕 이야기는 다시금 정을 잇는구나 預愁他日相思處 훗날 그리워할 일을 미리부터 근심하니 雲海無因寄遠聲 먼 곳 소식 전할 수 없는 것은 넓은 바다 때문이리. 허성은 세이카가 이른 새벽부터 자신을 찾아온 것이 단순한 사교의 목적 때문 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점차 세이카의 학문적 열의에 감화되었으 며, 학문하는 선비로서의 동질성을 세이카에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별을 미 리부터 근심하는 허성의 시구에 다소의 과장이 없진 않겠지만, 세이카에 대한 그 의 호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산전의 시에 차운하여 시로써 보이다[次韻山前以詩見示] 一笑擧杯恩不輕 한 번 웃고 술잔을 드니 은혜는 가볍지 않고 雅筵官燭慰吾情 술자리의 관촉은 나의 정을 위로하네 淸談未了天云暮 청아한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날은 저물고 且緩樓鐘數杵聲 누각의 종소리 느리게 또 울리누나 세이카 역시 국적을 초월해 자신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허성에 대한 고마움 과 어느덧 날이 저물어 자리를 파해야만 하는 아쉬움을 차운시(次韻詩)에 담아 내었다. 세이카가 살았던 에도 시대는 근세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일본 한문학의 전성기로서 전대 고잔 문학의 주체가 승려들이었던 데 비하여 에도 문학은 대체 로 유학자라 일컬어지는 일종의 새로운 직업인에 의해 연구되고 창작되었다는 274) 三宅英利 著 金世民 外 譯, 朝鮮通信士와 日本, 지성의 샘, 1996, p

101 특색이 있다. 유학자는 비교적 자유로이 연구할 수 있었으며, 학문과 동시에 문 학에서 동시에 재능을 발휘하는 자는 명예와 지위를 얻고 일반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에 이르면 무예를 가지고 입신(立身)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이 되고 학문이 출세의 첩경(捷徑)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에도 시대 문운(文 運)의 개척자가 바로 후지와라 세이카이며275), 위에 인용된 시작(詩作)들은 문학 인(文學人) 세이카의 초기작들로서 그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허성이 세이카를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립자설(柴立子說) 이다. 아베 요시오는 일본 주자학과 조선(日本朱子學と朝 鮮) 에 이 시립자설 을 전문(全文)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기(附記)하고 있 다. 장문(長文)에 관계없이 이것을 전문 인용한 것은 조선에서는 이 글이 아마 산실 (散失)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주자학파의 철학(日本朱子 學派の哲學) 에서는 이 柴立子說(시립자설) 을 세이카의 작(作)으로 잘못 기록해 그가 유불일치(儒彿一致)의 사상을 지녔다는 증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립자 설 은 세이카의 작이 아니며 오히려 그를 유학(儒學)으로 향하게 한 한 번의 계기 가 되었던 허산전(許山前)의 작이다. 허산전은 이퇴계(李退溪) 문하 삼걸(三傑) 중 하나인 유희춘(柳希春)의 고제(高弟)276)인 만큼 유학의 이해도 깊고 문장도 교묘 했다. 유학의 교양이 아직 부족했던 세이카의 감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 다.277) 275) 猪口篤志 著, 심경호 한예원 譯, 日本漢文學史, 소명출판사, 2000, pp 참조. 276) 유희춘(柳希春)이 퇴계의 영향을 받았던 것을 분명한 사실이나 실상 그는 김안국의 문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아베 요시오가 유희춘을 일컬어 퇴계 문하 삼걸 중 하나라 칭한 것은 허성과 퇴계와의 관련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기술(記述)로 보인다. 277) 阿部吉雄, 앞의 책, pp.50~51, 長文であるのにかかわらず, これを全文引用したのは, 朝鮮はこの文は恐らく亡佚していると思われるからである のみならず, 日本朱子學派の 哲學 では, この 柴立子說 を誤って惺窩の自作とし, 彼が儒彿一致のような思想を持っ た證據としているからである 柴立子說 は惺窩の作ではなく, むしろ彼を儒學に向わせる 一つの機緣となったもので, 許山前の作である 許山前は, 李退溪門下三傑の一人, 柳希春 の高足であるだけに儒學の理解も深く, 文章もたくみであった 儒學の敎養のまだ乏し かった惺窩の感動は, 推して知るべきであろう

102 아베 요시오가 언급했듯, 조선의 어떤 문헌에서도 시립자설 은 찾아볼 수 없 다. 허성의 문집인 악록집 에도 역시 이 글은 물론, 세이카에 관한 어떠한 언급 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이는 그의 사후(死後) 6년 뒤인 1618년(광해군10)에 발 생한 허균의 역모 사건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문 은 몰락하고 일가의 모든 관작(官爵)이 삭탈되었는데, 이러한 멸문지화의 위기 속에서 가인(家人)들이 유고(遺稿)를 수습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허성과 세이 카의 수창시나 시립자설 역시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 며, 그로 인해 조선에서는 전해지지 못 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이 시립자설 이 그간 에도 유학의 개조(開祖)인 세이카의 사상을 설명하고 입증하는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사실이 전술 (前述)한 인용문을 통해 확인된다. 하지만 아베 요시오가 이 글을 자신의 저서에 수록한 이유가 단지 이 뿐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진짜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음 이 다음의 글에 드러난다. 세이카와 허산전은 (서로에게) 상당히 경도되어 친구가 되었으며 (세이카가) 조 선에 가고 싶다고 바라기까지 했던 것이 엿보인다. 전국난리(戰國亂離)의 세상과 자신을 체험한 젊은 청년승 세이카에게 평화로운 조선과 중국의 유교 문화가 동경 의 대상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서 기술한 허산전의 시립자설 이 세이카의 마음에 상당히 큰 감동을 주었다고 추측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허 산전 일행과의 만남에서 그의 사상 전환의 제일보(第一步)를 만났다고 상상하는 것도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며 (세이카가) 恩不輕[은혜가 가볍지 않다] 고 했던 것도 그것을 실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278) 아베 요시오는 시립자설 이 후지와라 세이카의 사상을 전향시킨 결정적 계기 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허성의 유교적 가르침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마침내 는 불가를 떠나 정통 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는 그 증거로써 278) 阿部吉雄, 앞의 책, pp.52~53, 惺窩は許山前には, よほど傾倒し, お伴をして朝鮮に渡 りたいとまで願ったことがうかがわれる 戰國亂離の世を身をもって體驗してきた若い靑 年僧惺窩には, 平和な朝鮮や中國の儒敎文化は憧憬の的であったちがいない このように考 えると, 先に述べた許山前の 柴立子說 は, 惺窩の心によほど大きな感動を與えたと臆測 しても, まちがいではあるまいと思われる 許山前一行との出會いは, 彼の思想轉換の第一 步であったと想像するのも, あながち根據のないことではなく, 恩不輕 といったのも, そ の實感で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

103 다음의 일화를 제시하고 있다. 통신사 일행이 다녀간 다음 해인 1591년,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 : 도요 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로 후에 관백(關白)이 됨]가 고잔의 시승(詩僧)들 을 쇼코쿠지에 집합시켜 시연구(詩聯句)의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세이카가 첫 번 째에는 출석하였으나 두 번째는 출석을 거절하여 히데츠쿠와 고잔 승려들의 반 감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베 요시오는 이것 역시 세이카가 허산전과 만난 후에 마음이 움직인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 완곡히 표현하고 있으나 실상은 세이카를 개종(改宗) 시킨 것이 바로 허성이라는 강한 믿음을 곳곳에 피력하고 있다.279) 위에 서술한 일화는 하야시 라잔이 찬한 세이카의 행장 에서도 통신사 일행과의 만남 바로 뒷부분에 실려 있어280) 세이카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음을 증명하는 최초의 사건 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세이카가 후에 임진 왜란 중 포로로 끌려간 강항(姜沆)을 만나 그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승복을 벗고 에도 신유학을 창도하게 된 근본이 이미 허성과의 교제에서 이루어졌다 281)고 한 아베 요시오의 주장이 신빙성 있는 것이라면,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시립자 설 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립자설 의 시립(柴立) 은 세이카의 호로서 장자(莊子), 달생(達生) 편 의 시립기중앙(柴立其中央) 에 근거한 것인데,282) 세이카가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런 명호(名號)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정신적 지향이 불교보다는 유학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허성은 먼저 글의 서두에, 자신이 이 글을 쓰게 된 까닭 이 세이카의 요청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만력(萬曆) 경인(庚寅)년 가을에 나는 통신사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사행을 279) 阿部吉雄, 위의 책, p.53 天正十九年(三十一歲), 豊臣秀次は五山の詩僧を相國寺に集 め詩聯句の會を催した 惺窩は一度は出席したが, 二度目には出席を强くこばんで, 秀次や 五山の僧反感を買った このことも, 彼が許山前と會った後の心の動きと關係があるかも知 れない 280) 藤原惺窩集, 앞의 글, 十九年辛卯 博陸侯豊臣秀次令長老周保 聚五山詩僧於相國寺 題詩聯句 先生初一會 而後不復赴 衆强之不肯 或諉秀次旨 而詰先生 281) 金泰俊, 앞의 논문, p ) 이는 孔子가 말한 無入而藏 無出而陽 柴立其中央 에서 연유한 것으로 내면에만 몰 입하지도 말고 외부로 나타내지도 말고 마른 나무 같이 가운데에 서서 때에 순응해야 한다 는 의미이다

104 오게 되었다. (교토) 기타야마[北山] 시노[紫野]에 있는 다이도쿠지[大德寺]에 머물 며 관백(關白)이 히가시야마[東山]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름은 순 (蕣), 호는 시립(柴立)이라고 하는 승려가 시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 시를 읽고 그 사람을 보니 마음은 깊고 몸은 깨끗하여 시에 인품이 나타나 있었다. 내가 이미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어 잠시 술을 따라주고 시를 창화(唱和)해 보냈다. 얼마 후, 그가 다시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는 시립 이라고 하는데 스스로 시립 이라 한 것은 장자(莊子)의 무심(無心) 으로부터 세워진 의미입니다. 나를 위해서 이 설(說)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을) 훗날 당신의 모습이라 여기면 비록 헤어진 후에도 여기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그대의 설명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책을 펴지 않아도 (그 앎이) 어찌 얕 은 것일 뿐이겠습니까?283) 이 부분에 대해 아베 요시오는 다음과 같이 주석(註釋)하고 있다. 한번 오른쪽 글(原漢文)을 읽어 본다면 세이카가 허산전의 학식을 상당히 존경 하고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以爲他日面目 운운한 것은 홋날 당신의 모 습을 추억할 기념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況貧道因子說而有發焉 其耿耿於心目間 者 又不待書之披也 夫豈淺淺而已哉 라 한 것은 선승다운 표현으로 하물며 당신 의 설명에 의해 계발(啓發)되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될 수 있다면 이미 불립 문자(不立文字)로 된 경전도 이미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중대한 일이니 옳고 그름을 가르쳐 주길 바란다 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284) 허성이 세이카를 위해 지은 시들 중 하나인 산인(山人) 시립자가 시축(詩軸) 283) 藤原惺窩集 p.287, 柴立子說 贈蕣上人(惺窩初爲僧 名宗蕣 居相國寺) 萬曆庚寅秋 余以書狀奉通信命 使於日本國寓諸北山紫野之大德寺 以待關白東山之征 一日山人有蕣其名 柴立其號 贄詩以來叩 讀其詩審其人 沖然其中灑然其外 而又發於詩者如其人焉 余已心愛之 以其新也姑酌之酒和之詩而送之 旣數目 又跫然而至曰 貧道以柴立 自號柴立 蒙蔣之說無心 而立之 固是其義也 盍爲我演其說以貽諸俺 以爲他日面目 雖別後猶在是也 況貧道因子說而 有發焉 其耿耿於心目間者 又不待書之披也 夫豈淺淺而已哉 284) 阿部吉雄, 앞의 책, p.47, 原漢文(後出)を, 一應右のように讀むことができるとすると, 惺窩はよほど許山前の學識を尊敬していたことが明らかである 他日の面目となす と いうのは, 他日のあなたのお姿, 形見と考えるという意味かと思う 況貧道因子說而有發 焉 其耿耿於心目間者 又不待書之披也 夫豈淺淺而已哉 というのは, 禪僧らしい表現で, ましてや, あなたの說によって啓發され, 悟りの境地に達することができたなら, もはや不 立文字で經典も無用となろう とずれば重大なことで是非お敎を願いたい という意味に とれる

105 을 가지고 왔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답을 안 할 수 없으니 이에 원운을 따라 서툴게 짓는다[山人柴立子袖詩見訪 遠客之幸不可無答 玆依元韻拾拙] 의 말미 에 중추망(中秋望) 이라는 날짜가 남아 있고, 시립자설 에서는 만력경인양월지 회(萬曆庚寅陽月之晦) 라는 글귀가 발견되니285) 이로써 두 사람의 교유 기간이 적어도 두 달을 넘긴 사실이 새롭게 확인된다. 또, 만남 직후인 11월 7일에 통신사 일행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고 답 서를 받은 후 곧바로 귀국길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시립자설 이야말로 양인(兩人)이 주고받은 이별의 정표이자 추억의 기념물 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 하지만 조선의 학자를 통해 참된 유학의 도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만큼 세이카는 허성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기념물 그 이상을 원했을 것이며, 허 성 역시 그 같은 바람에 답하여 세이카의 명호인 시립 을 이용, 유학의 도에 관 한 한 편의 글을 짓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시립자설 의 본격적인 내용은 불교에 대한 완곡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일찍이 불교의 설을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을) 마음에 맡겨 구속받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닦지 않고 일상사를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하면서도 이것들을 모두 부처의 묘용(妙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스스로) 선다는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286) 흔히들 불교를 심학(心學) 이라 이르는 바, 이러한 불교의 교리를 압축해 보여 주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란 말이다. 이는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 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 이라는 뜻으로, 곧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불 교의 논리에 대하여 당시의 유학자들은 유교와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주된 논점은 불교가 공적(空寂)에 빠진 허무의 가르침 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공적의 자각(自 285) 仲秋 는 음력 8월을 말하고 望 은 보름을 가리키니 위에 언급한 시는 추석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陽月 은 음력 10월이며 晦日 은 달의 마지막 날, 즉 그믐을 말한다. 286) 藤原惺窩集, 柴立子說 雖然余嘗見佛者之說 曰 任心自在 莫作觀行 行住坐臥 任意 縱橫 總是佛之妙用 然則何事於立 而亦何用固哉

106 覺)으로서의 공적지(空寂知) 또는 그 공적지 에 이르려는 지관(止觀) 이나 무 심(無心) 의 수행 등을 비현실적인 공부 방법이라고 비판하며,287) 불교를 논척했 는데, 허성 역시 이 글에서 다른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심원(心原)의 탐구에만 치중해 수신(修身)을 소홀히 여기는 불교의 비논리적 비이성적 측면을 지적하 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교 자체의 독자적 가치까지 부정하고 있 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승(佛僧)의 신분에 자족(自足)하지 않고 유학에 뜻을 두게 된 세이카를 조금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대가 장차 공(空) 을 넘고 무상(無相) 에 들어 말에 올라타 조계(曹溪)를 따라 위로는 염화미소(拈華微笑)와 계합(契合)하고 관행(觀行)의 기량에 교착(膠着)하여 묘용(妙用)의 바람을 버리지 못하고 한 구석에 얽매어 있으면서도 자호(自號)를 시립(柴立) 이라 부르는 것은 본시 무엇 때문입니까?288) 그러면서 세이카를 위해 유가(儒家)의 논리를 동원, 뜻을 세우는 것[立志] 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나는 불도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유가의 설(說)로 설명하겠습니다. 공자(孔子)는 함께 설 수 있다[可與立] 고 했고, 맹자는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한다[先立其大 者] 고 했습니다. 대저 도를 닦는 사람은 서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고, 그 몸을 수양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 실로 도에 입문하는 길이지만 도는 넓고도 넓으니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하겠습니 까? 뜻을 세워 방향을 정하고 (이에) 입각해 그 기초를 굳건히 하면 이것이 진실 로 도에 입문하는 큰 법칙이 될 것입니다.289) 허성은 위의 글을 통해 도(道)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입지(立志) 와 입각(立 脚) 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입지 란 뜻을 세우는 것 을 말하며 입각 은 어떤 사실이나 주장에 근거를 두어 그 입장에 서는 것 을 287) 한자경, 韓國哲學의 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p ) 藤原惺窩集, 앞의 글, 上人方將超空空入無相 而跨馬駒沿曹溪 以上契於拈花之一笑 而膠於觀行之伎倆 不彼妙用之希 而甘滯一隅 自號曰柴立 是固何哉 289) 藤原惺窩集, 위의 글, 佛氏之道吾未之學 請以吾家之說明之 孔子曰 可與立 孟子曰 先立其大者 夫適道者未始不由於立 欲養其躰 當先立其大者 是固入道之路脉 而道之浩浩 何處下手 立志以定其向 立脚以固其基 是實入道之大方

107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학문적 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기초적 수련의 과정을 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거울의 맑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벽돌을) 가는 자의 공(功) 이라고 비유하면서 이른 바 말 이 떨어지기 무섭게 깨달음을 얻는 자는 모두 내가 말한 입지, 입각 의 공력 (功力)을 진실로 오래도록 쌓았을 것이며, 저들의 말이 내 마음의 여러 생각에 마주 닿아 깨우침의 실마리 또한 공교롭게 마주치게 되니 자립(自立) 의 공은 진실로 속일 수 없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290) 또한 어떤 일에 있어서 갑자기 이 루어지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必有事焉 而勿正] 고 한 맹자의 말과 배우되 완고해서는 안 된다[學則不固]) 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입지 의 방법으로는 무심 을, (학문의) 유연함 을 위해서는 입각 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291) 이어 허성은 이국땅에서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만나게 된 세이카에게 동학자 로서의 진심 어린 당부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대가 무심(無心)으로써 능히 세운 뜻을 충족시키고 진실로 입각하는 데 에 이르게 되어 훗날에도 변함없이 (그) 근본을 밝히게 된다면 언젠가 위로 여여 (如如) 의 본체를 증험하고 넉넉히 삼매지경(三昧之境) 에 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그리하여 일상사가 잡(雜)되지 않고 마음이 곧고 평안하고 한가로우며, 화 락(和樂) 담박(淡泊)하면 전날의 이른바 신통묘용(新通妙用) 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으며, 시립(柴立) 이라는 두 글자는 다만 생선과 게를 잡는 통발이나 올무와 같을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292) 결국 허성은 마지막까지 입지 와 입각 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세이카에게 선유(先儒)들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그의 학문적 지향점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 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이로써 허성으로부터 자기의 명호설(名號說)에 연관된 290) 藤原惺窩集, 위의 글, 磨甎固非作鏡之道 而其所以獲鏡之明者 亦固磨者之功也 夫所 謂言下領悟者 非彼之言徒使吾悟 皆吾立志立脚之功眞積力久 而彼之言適觸吾心之憤悱也 啓發之緣亦應相値 而自立之功固不可誣也 291) 藤原惺窩集, 위의 글, 故孟子曰 必有事焉 而勿正 孔子曰 學則不固 然則無心者豈非 立志之方 而固者是立脚之則乎 292) 藤原惺窩集, 위의 글, 吾子誠能由無心以充所立之志, 致刻固以達所立之脚 他日上證如 如之躰 而優入三昧之境 則行住坐臥 純一直心 安閑恬靜 虛融淡泊 向之所謂神通妙用者 將 於是乎在 而柴立二字特爲魚蠏之筌蹄 豈不快活也哉

108 유교론을 기념품으로 받게 된 세이카의 마음 역시 상당히 움직였을 것이며,293) 바로 그 순간, 사상적 전향의 제일보가 시작된 것이라고 아베 요시오는 주장하고 있다. 시립자설 에 관한 아베 요시오의 또 다른 견해는 허성이 이 글의 이면에 노 장과 불교에 대한 비판을 교묘히 감추어 두고 있다는 것이다. 허산전이 이 시립자설 의 안에 유교사상을 가지고 시립 의 의미를 교묘히 설명 하면서, 유교와 노불(老佛)이 단절된 것이며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돌려서 말했다. 말하자면 엄격하게 노불 비판의 저의(底意)를 감추고 유교 본래의 입장을 기술한 것이다.294) 그는 허성이 유불일치의 사상적 전통 아래 성장해 온 세이카에게, 유교와 노 불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불교에 기반을 둔 채 유학적 소양을 더하려 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은근히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아베 요시오가 이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된 데에는 위의 인용문 및 시립자설 의 다음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 공자는 (추구하는) 도(道)가 같지 않는 자와는 함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하셨고 맹자는 능히 양묵(楊墨)295)을 막는 말을 하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 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대 석씨(釋氏)의 무리와 우리 성인의 무리는 서로 배척 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도리어 도가 같지 않은 사람과 의논을 한다면 성인의 계 293) 阿部吉雄, 앞의 책, p.47, このような自己の名號說にちなむ儒敎論を形見として贈られ たのであるから, よほど心を動かされるものがあったと想像される 294) 阿部吉雄, 위의 책 p.47 しかも許山前は, この 柴立子說 の中で, たくみに儒敎思想 をもって柴立の意味を說明しながら, 儒敎と老佛の斷じて相容れないことを循循として述 べ 295) 양묵(楊墨) 은 양주(楊朱) 와 묵적(墨翟) 을 가리키는 것이다. 먼저 양주 는 중국 전 국시대(戰國時代)의 학자로 자기 혼자만이 쾌락(快樂)하면 좋다는 위아설(爲我說), 즉 이 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지나침을 거부하고 자연주의를 옹호하였는데 이 것은 노자사상(老子思想)의 일단을 발전시킨 주장이었다. 묵적 역시 양주 와 동(同)시 대의 학자로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 리임에 비하여 그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였 다. 맹자는 양주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충만하였다 고 하여 그 이단성(異端性)을 지적하였으며, 양묵 의 도를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를 행할 수 없다 고 말한 바 있다

109 율을 범하여 스스로 이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남에게 글을 주는 것은 인자(仁者)의 일이라. 나의 말이 진실로 그대의 도를 깨우치게 하지는 못할 것이나 겨우 훗날 모습을 (기억하기에는) 족할 것이며 또한 한유(韓愈)가 스님에게 옷을 벗어 준 뜻과 같을 것이니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296) 앞에서 허성은 일상사의 모든 것을 마음 에 기준하여 설명하는 불교의 비이성 적 비논리적 측면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또한, 불교나 양주(楊朱), 묵적(墨 翟)의 설(說)을 따르는 자들과는 그 추구하는 도가 달라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세이카를 위해 글을 쓰는 것 역시 성인의 계율을 어기는 이 단적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 글에서 논한, 불교가 현 실과 단절된 허무 라는 지적은 조선조 내내 되풀이되어 왔던 주장이고, 양묵에 대한 비판 역시 맹자297)에서 비롯된 뿌리 깊은 것으로서, 이는 정주학적 입장을 견지해 온 당대 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그 런 측면에서 본다면, 허성이 시립자설 의 이면에 노불에 대한 비판을 감춰 두 었다고 한 아베 요시오의 지적에는 별반 특별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새롭게 주목해야 할 것은 유불(儒彿)에 있어 깨달음의 과정에 대해 언급한 다음 부분이다.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의 도가 지향하는 바는 비록 다르나 그 용력(用力)의 공 (功)은 다르지 않으니 진실함을 쌓아가기를 오래도록 힘쓰면 자연히 하루아침에 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 유가에선 지지(知至) 라 이르고 불가 에서는 계오(契悟) 라 이릅니다.298) 허성은 유불의 도는 그 근원이 같지 않지만, 진적역구(眞積力久) 의 방법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양자(兩者)가 다르지 않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296) 藤原惺窩集, 위의 글, 噫 孔子曰 道不同不相爲謀 孟子曰 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 子釋氏之流 而我聖人之徒 方當距之之不暇 而反爲道不同者謀焉 無乃犯聖人之戒 而自陷於 異端之歸乎 然贈人以言仁者之事 而吾之言固不能發明於子之道 僅足爲他日面目之資, 則亦 韓子留衣之意而已也 庸何傷乎 297) 鄭道傳, 三峰集 卷5, 佛氏雜辨, 闢異端之辨 에 대강이 나타나 있다. 298) 藤原惺窩集, 위의 글, 儒釋之道所造雖異 用力之功亦應不殊 至於眞積力久 造一朝豁 然之境 則吾儒之所謂知至 而佛者之所謂契悟也

110 즉, 불교와 유학이 목표에 있어서는 양립할 수 없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보다 유 사한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서술한 이단적 사상, 특히 불교를 겨냥한 허성의 주된 비판은 선행하는 어떤 훈련을 받지 않고 경험하는 돈오(頓悟) 와 같은 개념이 터무니없는 생각이 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돈오 의 가능성을 믿는 극단적인 파와 그런 견해 들을 지지하지 않는 불교 신자들 사이를 가른 이와 같은 구분이 유학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99) 그렇기 때문에 여타의 유학자들처럼 불 교를 무조건 폄하하거나 그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각각에서 말하는 지지(知至) 와 계오(契悟) 가 절대적 깨달음의 경지 를 이르는 다른 표현이지 결코 상이(相 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은연중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만약 허성이 세이카를 개종시키기 위해 시립자설 을 썼다고 주장한다면 그가 단지 각(覺) 에 이르는 방법에만 관심을 갖고 있을 뿐, 불교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진부한 반대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참 으로 인상적 300)이라는 W. J. Boot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허성이 의도한 것이 정말 세이카의 사상적 전향이었다면 그는 좀 더 강력하게 불교를 비판하고, 유불이 결코 합치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세이카에게 납득시켰 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교에 대한 허성의 비판은 지극히 온건하고 일반적인 수 준에 그쳤으며, 오히려 각자가 추구하는 도는 서로 다르지만 그 도에 이르는 과 정은 다르지 않다며 불교와 유학을 동일선상에서 논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허성 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앞에서 유심(唯心) 의 논리를 비판한 사실이나 글의 말 미에서 불교를 가리켜 이단 운운했던 것과는 상치(相値)되는 것이라 할 수 있 으며, 불씨(佛氏)의 설은 인연과 과보(果報)를 논하는 것에 불과하며, 허무를 종 (宗)으로 삼아 인사(人事)를 폐기한 것 301)이라고 비난을 일삼던 당대 유자들의 입장과는 크게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허성의 인식과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대답은 앞에서 논한 그의 사유체계 및 그것을 형성시킨 당대의 상황과 관련해 설명될 299) W. J. Boot, 退溪學과 日本, 退溪學報 31집, 退溪學硏究院, 1981, pp.448~449 네델란드 라이든대학의 Boot 교수가 쓴 이 논문 역시 藤原惺窩集 등의 기록과 마 찬가지로 허성의 이름을 許箴 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300) W. J. Boot, 위의 논문, p ) 鄭道傳, 앞의 책, 卷5, 佛氏雜辨, 佛氏禪敎之辨 佛氏之說 其初不過論因緣果報 以誑 誘愚民耳 雖以虛無爲宗 廢棄人事

111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이래 계속된 사회 변동의 연장선 위에서 외란(外亂)으로 촉발된 위기 상황은 학문 사상적으로 정통 주자학에 대한 반(反)주자학적 학풍을 형성시켰 다. 이때의 반주자학이란 다름 아닌 실학을 이른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자학적 사유 주자학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사세와 권도 를 중시하는 경험적 실제적 접근 방식을 지니고 민생안정과 부국강병, 적극적 인 대외정책에 힘쓸 것을 주장했던 허성의 태도는 이 시기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한편으로 새로운 사유체계가 모색되고 있었던 상황, 즉 주자학적 학풍과 함께 비 주자학적 학풍이 공존하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 다.302) 또 허성이 부친 허엽의 영향을 매개로 하여 서경덕과 김안국의 학통을 계승한 사실 역시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판단된다. 허엽의 스승인 서경덕은 유 불 도 삼교(三敎)에 포용성을 보였으나, 유교를 최상에 놓고 불교와 도교를 그 다음 으로 인식하는 유자(儒者)의 기본적인 입장은 지켰다. 하지만 그는 성리학을 주 (主)로 하면서도 불교나 노장사상 등을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포용 흡수하 려는 태도를 보였으며,303) 김안국 역시 당시의 일반적 학자들과는 달리 성리학 자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천문 지리 불서(佛書) 음양서(陰陽書) 의서(醫 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하였다는 특징을 지닌다. 결국 서경덕과 김안국의 절충적 포용적 성향이 허엽을 거쳐 그 아들들에게 계승됨으로써, 이들 역시 전대의 스승들처럼 절대적 선험적 진리로써 현상을 규정하지 않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학풍을 지니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정도(正 道) 보다는 권도(權道) 에 입각해 현실 문제를 처리하고, 추구하는 도가 같지 않으므로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 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왜국(倭國)의 일개 선승과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어 학문을 논했던 허성의 행동은 바로 이와 같 은 배경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허성이 처음부터 세이카의 사상적 전향을 목적으로 시립자설 을 썼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의도했건, 의도 하지 않았건 종내에는 세이카가 스스로 승복을 벗고 본격적인 유학의 길로 들어 섰다는 사실이다. 세이카는 1598년, 임란(壬亂) 포로였던 강항을 만나 퇴계의 정 302) 金貞信, 앞의 논문, p ) 신병주, 앞의 책, p.210~

112 통 학문을 접한 뒤, 1600년에는 유복(儒服)을 입고 조선본(朝鮮本) 유교 서적을 손에 든 채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에게 나아가 주자학을 강의했다.이후 그 의 문하에서 하야시 라잔 마쓰나가 세키고[松永尺五] 호리 교안[堀杏庵]과 같 은 뛰어난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어 학파를 형성하게 됨으로써 세이카는 마침내 일본 주자학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허성과의 만남이 세이카의 사상적 전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아베 요시 오의 지적에 다소의 과장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세이카가 허성으로부터 감화되 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국적이나 신 분으로써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 허성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가 장차 에도 유학의 발흥이라는 대단한 결과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일본 내 조선유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아베 요시오가 日本朱子學と朝鮮 에서 허성과 세이카의 만남과 시립자설 에 관해 상세히 다루었던 것은 그가 바로 이 같은 점에 주목했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세이카가 에도 신유학을 창시하고 일본유학의 개조(開祖)가 된 데에 조선 유학자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 일 양국의 문화사에서 갖는 의 미는 특별하다. 특히나 허성의 경우는 포로 신분이었던 강항과는 달리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세이카와 교유하였고, 그것이 단순한 의례(儀禮)의 차원이 아닌, 진 정성(眞情性) 을 담보로 한 만남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 다. 3) 委巷文學의 胎動과 三角山 僧伽寺 詩會 의 意義* 앞에서 허엽 일문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학행과 재주가 뛰어난 인물들과 널리 교유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 같은 태도는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하여 재주를 넉넉히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 지는 않는다 고 한 허균의 입장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304) 사람을 생래적 조건으 * 본 항(項)의 내용은 2005년 語文硏究 (한국어문회 刊) 33권 4호에 게재했던 필자의 논문 <僧伽酬唱錄>과 委巷詩社의 淵源 을 수정 보완한 것임. 304) 許筠, 앞의 책, 卷11, 文部8, 論, 遺才論 天之生才 原爲一代之用 而其生之也 不以貴 望而豐其賦 不以側陋而嗇其稟

113 로 규정하지 않는 개방적 태도가 허엽 일문의 중요한 가학적 특징 중 하나였음 을 보여 준다. 그런데 허엽 일가의 이 같은 면모가 조선조 문학사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발견되어 눈길을 끈다. 이는 허엽의 맏아들이자 허균의 백형인 허성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후대 위항문학의 태동과 직접 연결되며 임진 왜란을 전후한 시기, 문학 담당층의 확대 현상을 구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손 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조선 후기 위항시사(委巷詩社)의 연원(淵源)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 급되는 것은 유희경(劉希慶)을 주축으로 결성된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이다. 침 류대의 초기 시사 활동은 풍월향도(風月香徒) 시인, 특히 백대붕(白大鵬)과의 관 계 속에서 형성되었는데, 비록 그 활동 형태가 후대 시사 와는 달리 분산적 고 립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들 시인의 작품이 이수광 허균 홍만종(洪萬 宗)과 같은 당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한시 비평사에 거론되기 시작했 다305)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침류대시사는 다양한 계층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대로 갈수록 사대부 인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며, 참여 인물들의 대부분이 화담 학파와 맥이 닿거나 유사성이 있음이 증명된 바 있다.306) 그런데 침류대의 주인으로 위항인 집단과 사대부들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던 유희경이 일찍부터 사대부 주최의 시회(詩會) 에 참석, 시를 수창하고 여러 형태의 교류를 나누었음을 보여주는 문헌 자료가 있어 흥미롭다.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를 배경으로 1575년 시작된 이 시회는 1581년, 그 성과를 결집해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 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는 촌은집 에 미수록된 유희경의 시 4수가 실려 있어 세간에 알려지지 않 은 그의 젊은 시절 행적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17세기 초, 침류대시사를 구축해 위항인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유희경이란 인물이 침류대시사의 본격적 활동 시기보다 40여 년 전에 형성된 승가사시회의 수창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두 동인(同人) 집단의 인적 구성과 사상적 흐름이 동일한 맥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어두기에 충분하며, 승가사시회 가 풍월향도 나 침류대시사 305) 문희순, 朝鮮中期 枕流臺詩社의 形成과 展開, 語文硏究 37輯, 한국어문회, 2001, p ) 高英津,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서울 침류대 학사의 활동과 의의, 서울학연구 3집, 1994 참조

114 결성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승가사시회와 침류대시사와의 관련성을 찾아보고, 이를 바탕 으로 승가수창록 의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는 일은 조선 후기 한시사의 기술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작업이라 판단된다. 또한, 이를 통해 16세기 중 후반 평민들의 한문학 참여 과정에서 나타난 사대부들의 의식 변모와 그것을 가능 케 한 배경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도서번호 : 奎15468) 승가수창록 은 1575년(선조8)부 터 삼각산 승가사307)에서 여러 문인들이 모여 수창했던 시를 모아놓은 필사본으 로 각종 체(體)의 시 300여 수가 실려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참여 시인 및 기(寄) 증시자(贈詩者) 16인의 자(字)와 이름을 소개한 명단이 있고, 뒤에는 이 책을 처음 간행한 홍이상이 1582년(선조15)에 쓴 제(題 )와, 당시를 회상하며 쓴 주최자 4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이것을 임진왜란 후인 1606년에 다시 중간(重刊)하면서 우복룡이 쓴 제 도 함께 실려 있다.308) 기록에 의하면 이 시 회는 10년이 넘게 지속되었는데, 그 결과물인 승가수창록 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수창자들의 출사 이전 교유 관계와 시적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귀 중한 자료로서, 승가수창록 소재의 작품들이 수창자들의 개인 문집에 거의 수 록되어 있지 않음을 감안할 때에 더욱 그러하다.309)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은 모임의 주(主)무대였던 북한산 주변의 승경(勝景)과 그 에 의해 촉발된 감흥을 읊은 것, 시우(詩友)들과 이별하는 아쉬움을 노래한 것들 이 대부분이며, 많은 시들이 분운(分韻), 혹은 연구(聯句)한 것들이고 차운(次韻) 이나 다른 사람의 자(字)를 써서 지은 것들이 많아 시회에서 수창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310) 대개 연구시(聯句詩)는 대부분이 공동작으로서 시회를 통하여 각자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공동의 인식으로 묶어낸 것들이 많아 시사(詩社)의 활동에서는 307) 승가사는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 동쪽에 있는 사찰로 756년(신라 경덕왕15)에 낭 적사의 승려 수태(秀台)가 창건한 절이다. 당(唐) 고종(高宗) 때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 을 가르쳤던 승가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308) 승가수창록 의 일반적 서지 사항은 규장각 장서의 해제(解題)를 참조했다. 309) 악록집(岳麓集) 에만 허성의 일부 시들이 중복 수록되어 있을 뿐, 여타 수창자의 문 집에서는 승가수창록 소재의 작품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310) 규장각 장본 승가수창록 해제 참조

115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311) 승가수창록 에도 밤에 앉아 연구 를 짓다 [夜坐聯句], 비가 그친 뒤[霽後], 공언의 미자(微字) 운(韻)을 빌려 씀[次功 彦微字韻] 등 다수의 연구시가 수록되어 있어 이들 모임이 단순한 유흥을 위한 것이 아닌, 문예의 창작과 수용이라는 공동의 목적 하에 결성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1581년(선조14)에 지은 홍이상의 제 에는 을해(乙亥) 봄, 승가사에 모여 일창 일수(一唱一酬)한 것을 모아 엮어서 남에게 빌려 주었는데, 이제야 그것을 돌려 받아 보게 되었다. 옛적에 놀던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보니 마치 머리를 돌리고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같은데 벌써 7년이나 지났다. 312)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 1598년에 우복룡이 이 책을 중간(重刊)하며 쓴 제 에서는 승가사에서 옛적 에 놀던 때가 이미 24년이나 지났다. 그때에 여러 공(公)들이 읊조리던 흔적들을 책으로 엮어 그 이름을 승가수창록 이라 했는데, 최근의 변란(變亂) 후에 어느 곳에 흩어졌는지를 알지 못해 항상 마음으로 슬퍼하였다. 그러다가 뜻밖에 지금 그것을 홀연히 얻어 두세 번을 읽으니 (그때의 일이) 마치 눈 속의 일처럼 완연 하다 313)고 언급하면서 이 책이 전해진 과정과 그에 얽힌 감회를 서술하고 있다. 이 밖에 삼각산 승가사시회와 승가수창록 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조속(趙 涑)의 조창강수록(趙滄江手錄)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만력(萬曆) 갑술년(甲戌年, 1574) 가을, 판서(判書) 허성 홍이상 감사(監司) 우복룡 참판(參判) 이순경(李順慶) 교리(校理) 석함(石涵) 고청(孤靑) 서기(徐 起),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두 사람이 승가사에서 이십여 일 동안 성리대 전(性理大全) 을 통독(通讀)하였는데, 책 읽는 사이사이 서로 시를 창화(唱和)하여 각기 십여 수의 시를 지었다. 이때에 유희경(劉希慶)도 (이곳에) 따라 와서 (여러 사람의) 시구에 화답했다. 각자가 쓴 것을 책으로 엮어 이름을 갑술승가수창집(甲 戌僧伽酬唱集) 이라 하고 절의 중에게 맡겨 놓았다. 전란이 끝난 후, 홍참판이 강 화부사(江華府使)가 되었을 때 중이 찾아와 서책(書冊)을 바쳤다. 이에 (홍판서가) 허판서 우감사 등 여러 공(公)들에게 전하여 보게 하니 여러 공들이 옛 책을 위 311) 千柄植, 朝鮮後期委巷詩社硏究, 국학자료원, 1991, p ) 僧伽酬唱錄, 洪履祥君瑞識 乙亥春聯棲僧伽寺一唱一酬 積而成秩 被人傳借 今時見 還覽閱之餘 追念舊遊若轉頭而屈指 今已七經年矣 313) 僧伽酬唱錄, 禹伏龍題 僧伽舊遊條然已經二十有四歲 (중략) 其時有諸公吟詠手跡一 帙 名之曰僧伽酬唱集 近日經變之後 未知散落於何處 常爲慨 然今忽得之於意外 披翫再三 宛然如眼中事

116 하여 서기(序記) 를 지었다.314) 홍이상의 제 에서는 승가사시회의 활동 시기를 1575년(乙亥, 선조8) 봄이라 밝히고 있는데 비해, 조속의 조창강수록 에서는 1574년(甲戌) 가을로 기록하고 있어 양자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이상이 제 를 지은 시기가 수 창한 때로부터 7년여가 지난 1581년임을 감안한다면, 둘 중 어느 하나의 기억에 착오가 생겼거나 그 기간이 1574년 가을부터 1575년 봄에 걸쳐 있었을 가능성 이 크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속의 기록을 통해 이들이 애초에 성리대전 을 읽기 위해서 승가사에 모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를 수창했고 후에 그 성과를 결 집, 책으로 엮어 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승가사시회의 참여자들은 당시 지은 시들의 격조가 높지 못하여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작품을 엮어 책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시언지(詩言志) 라 하였으니 그 시를 보면 족히 그 뜻의 미악(美惡)을 알 수 있다. 지금 승가수창(僧伽酬唱) 약간 수(首)를 다행히 얻어 이십 년 후 다시 보니 풍영(諷詠)의 여(餘)가 쇠하여 그 뜻이 이러하니 운격(韻格) 의 높지 않음과 지취(志趣)의 맑지 않음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지금에 이르러 마음 에 부끄러워 다시는 눈앞에 펼치고자 하지 않았다. (중략) 당시의 시들이 경치를 즐기는 데에만 힘을 다하고, 낭만(浪漫)만을 추구하여 이별과 회인(懷人)만을 읊어 사지(辭志)에 어긋난다. (중략) 만일 이로 인하여 깨달아 옛 흔적을 고치는데 아낌 이 없은즉, 이 편(篇)들을 남겨 실로 징계하고, 감발(感發)의 시초를 이룰 만하 다.315) 우복룡은 젊은 날, 자신들이 지었던 시가 그리운 마음과 경치의 아름다움만을 314) 許筬, 岳麓集 附錄, 與許知事書 萬曆甲戌秋 許判書筬洪判書履祥禹監司伏龍李參判 順慶石校理涵徐孤靑起 又二員忘其名 通讀性理大全于僧迦寺二十餘日 讀書之暇 相與唱和 篇什各十餘首 時劉希慶亦隨往 亦多奉和 各自書于一冊 名曰甲戌僧迦酬唱集 付于寺僧 亂 後洪參判爲江華府使時 僧來納書冊 卽傳示于許判書禹監司諸公 諸公各有序記 爲一古蹟 出 趙滄江手錄 315) 僧伽酬唱錄, 禹伏龍題 古人曰詩言志 然則其詩足以知其志之美惡也 今者僧伽酬唱若 干首幸得重閱於二十年之後 諷詠之餘夷攷其志 是何韻格之不高志趣之汚下 乃至於是也忸泥 乎心不欲再卦於眼 (중략) 窮遊選勝則殆於浪漫送別懷人則淫於辭志 (중략) 若因玆愓悟毋吝 於改轍 則是篇之存實懲創感發之權輿

117 노래하였고 그 운격이나 지취에 있어 뛰어난 것이 없지만 후인(後人)들이 이 책 을 하나의 경계로 삼아 잘못을 고칠 만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1575년 당시 허성은 28세, 홍이상은 27세, 우복룡이 29세로 모두가 출사 전이었다는 사실과, 그들 대부분이 시보다는 경서와 문장에 재질을 보인 인물들이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우복룡의 이 같은 언급이 지나친 겸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승가수창록 의 문학사적 가치는 수록된 작품이 아닌, 그 외의 요소를 통해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즉, 앞에서 언급한 동인(同人) 집단의 다 양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먼저 이 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작품 수록자 이름 許筬 (1548~1612) 신분 특기 사항 초당 허엽의 맏아들, 자는 功彦 山前 양반 호는 岳麓, 本貫은 陽川 徐起 賤人 (1523~1591) (후에 放免) 洪履祥 (1549~1615) 禹伏龍 (1547~1613) 石涵 (1538~?) 자는 待可, 호는 孤靑樵老 龜堂 본관은 利川 자는 君瑞 元禮 호는 慕堂, 양반 初名은 麟祥이나 후에 개명, 본관은 豊山 양반 자는 見吉, 호는 懼庵 東溪, 본관은 丹陽 양반 자는 養初, 본관은 廣州 원문에 李公名未詳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而敬(?) 國朝榜目 에 李而慶이 李順慶으로 개명했 양반 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래의 이순 경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李順慶 (1549~?) 자는 善應, 順慶은 개명한 것으로 原名은 양반 而慶으로 추정, 본관은 完山 劉希慶 賤人 (1545~1636) (후에 신분상승) 자는 應吉, 호는 村隱, 본관은 江華

118 2. 기타 참여자 이름 신분 月梧(字) 양반(?) 洪鸞祥 양반 晦父(字) 양반 許信仲 양반 沈喜壽 양반 戒元 僧 印暎 僧 益浩 僧 특기 사항 성명 미상 자는 仲瑞, 홍이상의 아우 원문에 姓名未詳 柳西坰字晦夫 惑恐是耶 라 기록되어 있는데 西坰은 柳根의 號이다. 원문에 名未詳恐是岳麓族黨 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허성의 친척인 듯하다. 자는 佰懼, 호는 一松 혹은 水雷累人, 본관은 靑松 休靜의 제자 休靜의 제자 印英의 誤記일 가능성이 있다. 명단에 실린 사람들 중 허성, 홍이상, 우복룡은 당대 명문의 사대부 문인들로 모임의 주최자이며, 서기(徐起)는 천인 출신으로 다른 수창자들보다 이십 세 이 상 연배가 위였다. 승가수창록 에는 이들 네 사람 외에 석함, 이경의 시가 주로 실려 있으며 당대 천출(賤出) 시인으로 문명을 날린 유희경의 시 4수, 이순경의 시 3수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 외 이름이 언급된 심희수는 명유 이연경의 외손이자 노수신의 처조카이며, 자(字)만 실린 월오, 중서, 회부와 허신중 역시 모두 사대부 계층에 속하는 인물 로 여겨진다. 계원, 인영, 익호는 원문에 명승(名僧)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계원은 휴정의 제자임이 확인되며, 인영과 익호 역시 휴정의 문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작품은 수창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차운시의 원운자(原韻者) 혹은 증(贈) 기시자(寄詩者)로서 시의 제목들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시회가 천인 출신의 시인 및 승려 계 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수창자의 한 사람인 서기는 심충겸(沈忠 謙) 심열(沈悅) 부자(父子)의 가노(家奴)로 사회적 지위가 극히 한미하였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후에 방면되었으며, 뛰어난 학문행의(學問行誼)로 진신학자(搢

119 紳學者)들에게 추앙을 받았던 인물인데,316) 서기의 행장 에는 그가 유학에 뜻을 두게 된 계기에 관한 내용이 전해진다. (그가) 자라 학문에 뜻을 두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진력(盡力), 자득(自得)하여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불교를 더욱 좋아하였다. (그런데) 토정(土亭) 이 선생을 만 나 학문의 요체(要諦)를 듣고 문득 깨우쳐 말하기를 나의 도(道)는 여기에 있다 하고, 그 배우던 것을 모두 폐기(廢棄)한 채 (새로이) 배움을 시작하였다.317) 제자백가의 설이나 불교에 심취해 있던 서기가 유학에 전심하게 된 것은 이지 함(李之函)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이지함을 만나 유학 의 요체에 대해 듣게 되었고 이에 감동해 학문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서기는 이지함의 가르침에 너무나도 심취하여 토정(土亭)은 보령(保寧)에 있고 자신은 홍주(洪州 : 지금의 홍성(洪城))에 있어 그 거리가 이십여 리나 떨 어져 있었음에도 (그 길을) 매일 같이 걸어 왕래하였고 추위와 더위, 풍우(風雨) 가 심해도 (그 일을) 폐(廢)하지 않기를, 삼 년을 하루 같이 할 정도였다고 전해 진다.318) 이렇듯 일생을 학문과 강학(講學)에만 전념했던 서기는 노비라는 신분 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들 사이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훗날, 그가 공주 (公州)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배향된 사실은 그의 학문이 일가(一家)를 이루었 음을 당대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을 의미한다.319) 서기는 박지화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들은 모두 이인(異人)의 풍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관해 이식은 이들 또한 괴이한 일을 꽤나 좋아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박지화는 신선이 되어 갔다고 말하고, 서기는 앞일을 아는 술법을 지녔다고들 말한다 고 기록하면서 그 말미에 화담의 풍도(風度)를 들은 자의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 는 의견을 덧붙이고 있어, 서기가 화담의 문 제(門弟)였던 사실과 화담 계열의 문인들이 대체로 도선적(道仙的) 경향을 띄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서기가 화담에게 직접 수학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는데, 윤봉구(尹 316) 具滋均, 朝鮮平民文學史, 민학사, 1974, p ) 徐起, 孤靑遺稿 附錄, 行狀 稍長 能自劬學 肆力於百家諸書 自得深造 尤好釋氏 弱 冠 見土亭李先生 略聞爲學大要 飜然悟曰 吾道在是 盡棄其學而學焉 318) 徐起, 위의 책, 時土亭在保寧 先生所居洪州二十許里 日日徒步往從 不以寒暑風雨或廢 三數年如一日 319) 이영화, 朝鮮時代, 朝鮮사람들 가람기획, 1998, p

120 鳳九)는 서기의 행장 을 찬하면서 택당(澤堂) 이공(李公)은 선생이 경서(經書) 에 밝아 제자를 가르친 것이 화담으로부터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 는데, 그것은 선생이 어려서부터 사승(師承)이 없이 공부했기 때문이 아니겠는 가? 320)라고 하여 이식과는 상반된 견해를 드러내었다.321) 그러나 서기가 화담에게 직접 수학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 학문의 상당 부분이 화담과 합치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이지함 외에 이 지함의 추천으로 만난 이중호에게도 학문을 배웠는데, 이지함과 이중호가 모두 화담의 문인들이라는 사실은 서기의 사상이 상당 부분 화담의 학문에 기반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 한 예로 서기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지함은 주역, 천문, 풍수지리, 상법(商法), 술수(術數), 예언(豫言) 등 제가잡술(諸家雜術)에 달통한 인물로 그 가 가진 박학의 경향은 화담 문인들의 대표적 특징이기도 한데, 서기가 젊은 시 절 제자백가의 설이나 선학(禪學)에 심취했던 것이나 세간에서 서기에 대해 이 르기를 앞일을 아는 술법을 지닌 자 라고 했던 일들은 그가 유학을 종지(宗旨) 로 하면서도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대해 수용적 절충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음 을 의미한다. 서기가 역학(易學)에 뛰어나 천상(天象) 지리(地理) 인사(人事) 의 변화에 통달하였으며 스스로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어 천지도수(天地度 數)와 일월행도(日月行道)를 살피기도 하였다 322)는 기록 역시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성을 포함한 여러 문인들이 삼각산 승가사에서 시회를 열 당시 서기의 나이 는 53세로, 이 무렵엔 이미 그의 재명(才名)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서기가 이지함에게 수학한 뒤 전국 각지를 떠돌다 계룡산(鷄龍 山) 아래 공암(孔岩)에 정착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승가수창 320) 徐起, 앞의 책, 行狀 澤堂李公以爲先生明經授徒 得於花潭者多 其以先生少無師承究 索 故以此言之耶 321) 서기(徐起)의 저술은 그가 죽은 다음 해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거의 유실되었 는데 홍계희(洪啓禧)가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유시(遺詩) 몇 수와 여러 선생들이 기록한 글 몇 편을 수집, 경현록(景賢錄) 과 정문헌실기(鄭文獻實記) 의 예(例)에 따라 편집해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홍계희가 체임(遞任)될 무렵인 1750년, 서기의 5대손 행원 (行遠)의 요청으로 공주에서 100여본을 활자로 간행하였다. 이로써 서기의 생존 시기와 고청유고(孤靑遺稿) 의 편찬 연대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322) 徐起, 앞의 책, 行狀 以至天象地理人事之變 靡不究極 又作璿璣玉衡 以準天地度數日 月行道 絲毫不差 先生嘗策杖出遊

121 록 의 편찬자가 수창자 명단에서 유희경을 천인이라 밝힌 반면 서기의 출신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노비에서 방면된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학 자로서의 명성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성의 다음 시에서 그와 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 대 가 (待可) 학 장 (學長)과 이 별 하 며 주 다 [別贈待可學長] 我愛公山翁 내가 공산(公山)의 옹(翁)을 사모하였는데 名聲千仞鳳 명성이 높이 나는 봉황과 같았네 十年紫雲峯 십 년을 자운봉(紫雲峯)에서 高棲究聖統 높은 곳에 깃들어 성통(聖統)을 궁구(窮究)하였네 城中一相見 도성(都城)에서 서로 만나게 되니 雲樹勞魂夢 그리움이 꿈속의 혼을 괴롭히누나323) (하략) 위의 시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서기의 명성이 크게 회자(膾炙)되었 던 사실과 허성 역시 그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이 밖에 서 기가 10년 이상 도봉산의 자운봉에 머물면서 학문을 연마한 것과 삼각산에서 허 성 일행과 만나 시를 수답하고 학문을 강(講)한 사실도 나타나 있는데,324)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서기의 뛰어난 인품과 학문적 수준이 그의 미천한 신분을 상쇄 (相殺)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당시 사대부 사회의 일반적 여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와 함께 수창자 명단에 올라 있는 유희경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다. 유희 경은 일생을 상가역부(喪家役夫)로 살다간 천인이었으나 허균의 성수시화(惺叟 詩話) 에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소개될 정도로 일세에 문명을 떨 쳤다.325) 유몽인이 찬한 유희경의 전(傳) 에는 그에 대해 서울의 한미한 사람으 323) 許筬, 岳麓集 卷1, 詩, 別贈待可學長 324) 許筬, 위의 詩, 淸詩答鏗訇 高論聽錯綜 探奇杖或扶 矋遠目因縱 325) 許筠, 惺所覆瓿藁 券25, 說部4, 惺叟詩話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예(賤隷)이 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 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 (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 임억령(林億齡))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은 성(星) 자 운에 차(次)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 슬 따르고 竹葉朝傾露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松梢曉掛星 라 하니 양송천(梁 松川 : 양응정(梁應鼎))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劉希慶者 本賤隷也 爲人淸愼 事主

122 로 특별히 배운 바는 없으나 오로지 시(詩)와 예(禮)에 힘썼다 고 밝히고 있는 데,326) 실상 유희경은 천한 출신임에도 당대의 명망 있는 학자들에게 두루 사사 한 독특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먼저 유희경은 화담의 문인이자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 널리 알려진 남언경 (南彦經)을 만나 그로부터 예학을 배웠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당시 남언경은 부친 남치욱(南致勗)의 상(喪)을 당해 선영(先塋)인 수락산에 자주 왕래하였는 데, 열세 살 먹은 소년이 부친상을 당하자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매일 곡읍(哭 泣)하며 추운 날씨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아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후에 남언경은 사람을 시켜 소년을 불러오게 했는데 소년 의 의연한 모습에 감명을 받아 그에게 두터운 옷을 주었으며, 인근 암자의 스님 을 시켜 아비의 무덤 곁에 토우(土宇)를 짓게 하고 죽을 쑤어 먹도록 하였다. 뿐 만 아니라 상이 끝난 뒤에는 소년을 자신의 문하에 들여 예학(禮學)을 배우도록 했는데, 그가 바로 유희경이었다.327) 유희경은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文公家禮)를 전수받아 훗날 치상(治喪)으로 써 이름을 떨쳤는데, 그 명성은 국상(國喪)에 자문을 구하고 사대부들이 상(喪) 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집례(執禮)를 청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328) 본디 유희경 은 천인 신분으로 서울에 살면서 평생 공상(工商)에 종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 들에게 상(喪) 장례(葬禮) 전반의 예법을 조언하고 장례 절차를 도맡아 처리하 는 일로 생계를 꾸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관해서는 유몽인의 다음 글을 참 고할 만하다. 촌은이 젊었을 때부터 예(禮)를 좋아했으므로 예를 안다고 하여 사대부가에서는 忠事親孝 大夫士多愛之 能詩甚純熟 小日 從林葛川薰 在光州登石川墅 押其樓題星字曰 竹 葉朝傾露 松梢曉掛星 梁松川見而亟稱之) 326) 劉希慶, 村隱集 卷2, 附錄, 傳(柳夢寅 撰) 劉生名希慶 號村隱 長安寒微人也 無手 業 所事惟詩禮 327) 劉希慶, 위의 책, 卷2, 附錄, 行錄(南鶴鳴 撰) 十三 喪考 將窆于外氏塋近地 淸原尉韓 公墓奴 怙勢驅逐 君呈狀憲府 憲官憐君單弱 刑淸原奴 仍令合力造墓 君仍廬墓 哭泣每日 終夕危坐 間又躬負土爲階級 唯朔望 歸奠几筵 仍覲母氏 一州無不稱道 東崗南先生彦經 往 來水落山先壠 聞而異之 來見 憫其寒苦 乃以麻滓厚織者俗號三丁遺之 又令望月菴僧 作土 宇于墓側 煮粥勸之 俾得依接 服闋 敎之以禮文 自此名士大夫與東崗遊者 莫不招見嘉歎 328) 劉希慶, 위의 책, 卷2, 附錄, 墓誌銘(洪世泰 撰) 甞從南東崗彦經 受文公家禮 尤明於 喪制 博攷典禮 以究極古今之變 遂以善治喪名 國喪議用質殺 而無能知其制者 乃召公裁用 而下至士大夫之喪 必請以執禮 仰其口手而定

123 치상(治喪)할 때 그를 불러 물었다. 임진란 이후에는 세태가 예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상을 당한 자들이 그를 불러 상복을 만들게 했다. 촌은이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칠십까지도 상가(喪家) 역부(役夫)가 되었으므 로 그를 아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실제로 당시 유희경의 명성은 대단했던 모양으로, 서울 장안에 양예수(楊禮 壽)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간다 329)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양예수는 선조대 어의(御醫)를 지냈던 인물로서, 이는 사람이 죽었으니 의원인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장사를 치르기 위해 대접 을 받으며 앞문으로 들어간다 는 의미였다. 이 말은 치상 전문가로서 유희경이 누린 대단한 명예를 보여주는 한편, 그 삶의 역정이 노역(勞役)으로 점철된 고단 한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런 반면 남언경과의 조우는 유희경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치상 을 위해 사대부가에 드나들던 그가 자연스럽게 사대부 계층과 교유하며 마침내 는 시적 재능을 인정받게 된 것이 그것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쌓은 화려한 인맥이야말로 훗날 유희경의 삶을 반전시키는 강력한 추진(推進) 장치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그를 아끼고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는 박순과 허성을 들 수 있다. 박순(朴淳)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당시(唐詩)에 명성이 있었던 인물인데, 영의 정까지 지낸 박순이 유희경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유희경이 독서당(讀書 堂)을 출입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독서당은 당시 학문 연구와 도서관 의 기능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는데 천인이었던 유희경이 어떻게 이곳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며, 그저 꽤 이른 시절부터 유희경이 독서당을 드나들며 그곳의 젊은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곳에서 유희경은 박순의 눈에 띄었고, 그에게 당시를 사사한 이 후 그 재능이 일취월장했다고 전해진다.330) 박순이 유희경과 사승 관계를 맺고 그의 시적 재능을 계발하는 데 일조했다 면, 유희경보다 세 살 연하의 허성은 평생 친구처럼 그를 보살피고 아껴 주었던 329) 劉希慶, 위의 책, 行錄 以禮學見稱 士大夫之喪 必請以執禮 時爲之諺曰 楊禮壽從後 門出 劉希慶從前門入 330) 劉希慶, 위의 책, 傳 始遊東湖讀書堂 見名官佳什 和其韻 相國思菴公朴淳大嘉賞 之 仍敎以唐詩 俾成其才

124 인물이다. 개방적인 허씨 집안의 분위기를 보여주듯 허성과 유희경의 신분을 초 월한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으며, 그러한 관계가 허성의 아우들인 허봉 허균으 로까지 이어진 사실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된다.331) 허성과 유희경 간의 최초의 교유는 승가수창록 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편자(編者)는 시회의 수창자를 소개하면서 유희경은 천인이므로 직접 이름을 쓰며 감히 자(字)는 쓸 수 없다 332)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각각의 시작(詩 作)에 수창자의 자 를 기록하면서도 유희경이 지은 한시 4수의 하단에는 자궐 (字闕) 이라 표기하여 신분에 의한 차별 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 한 태도 한편으로는, 당시 사대부들이 유희경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 인 것을 알 수 있는데 허성의 다음 시에 그 같은 점이 잘 나타난다. 유희경이 와서 함께 비봉에 오르다[劉希慶來 共登碑峰] 蕭寺逢詩伴 소사(蕭寺)에서 시 친구를 만나 褰衣上碧峰 옷자락 걷은 채 비봉에 오르네 縈紆過雲棧 휘돌아 높은 산길을 지나니 迢遞聽風鍾 멀리 바람결에 종소리 들리네 日落湖光白 해는 떨어져 호수의 빛은 희고 烟生壑影重 안개 피어나 골짜기 그림자 짙구나 東山千古意 동산에 천고의 뜻 두었더니 今夕盪吾胸 오늘 저녁에야 내 가슴이 후련하구나 위의 시에서 허성은 유희경에 대해 시반(詩伴) 이라 일컫고 있다. 이는 즉, 허 성이 유희경을 신분상의 상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문학 활동에 있어서의 동반자 내지 협력자로 보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허성의 이 같 은 태도는 한문학의 문호를 하층민에게 개방하는 데 있어 기존의 상층 계급이 기여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흔히들 숙종대 이후 위항시인들이 등장, 시사를 이루고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의 하나로 양반 사대부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꼽는데, 실제로 오랫동 331) 劉希慶, 위의 책, 傳 名儒許筬 愛之特甚 當其使日本也 欲與白大鵬洎生偕 生以養 老辭 獨以大鵬行 332) 僧伽酬唱錄, 集中字號辨釋 劉希慶賤者 故直書姓名 不敢字

125 안 양반의 전유물로 생각되어 온 한문학 분야에 새로운 문학 담당층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사대부 계층의 용인 내지 이해가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런데 이러한 현상이 그간의 설명처럼 17세기 중 후반에야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전대(前代)로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승가수창록 의 존재가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각산 승가사 시회는 최초의 위항시사로 일컬어지는 풍월향도 나 침류 대시사 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임진왜란을 전후한 평민 문학의 발흥에는 이렇듯 사대부들의 의식 변모에 따른 암묵적(暗黙的) 지지가 일찍부터 그 바탕을 이루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할 만하다. 이런 여러 사실들을 종합할 때, 1575년 무렵 허성 홍이상 우복룡 등을 중심 으로 결성되었던 삼각산 승가사 시회는 문학을 매개로 계층을 초월한 동질성을 보여주었으며, 이 같은 인식의 변화는 후대에 나타난 위항 문학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시회를 주최한 것은 사대부들이었지만, 이 들 사대부들이 천인이나 승려 계층의 참여를 허용하고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 를 보냄으로써 한문학 작자층의 확대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장기간에 걸친 시회의 흔적들을 엮어 승가수창록 이라는 집단적 성 과물을 창출함으로써 후대 시사의 활동에 하나의 전범을 남긴 점도 지적할 만하 다.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시사의 결성은 유희경을 주축으로 한 침류대시 사 에서 그 연원을 찾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부터, 유희경이 백 대붕 등의 무리와 수계(修禊)하여 풍월향도 라는 모임을 조직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조선 중기 시사 의 결성과 그 전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중심에 위치한 유희경의 이전 행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된다. 이식은 촌은집 발문(跋文)에서 국조(國朝)에 시(詩)가 매우 발달하여 위로는 사대부들 가운데 우수한 작가가 많았다 고 전제하면서 아래로는 평민들과 말단 서리(胥吏)들이 지은 작품까지 모두 갱장(鏗鏘)해 성운(聲韻)을 잃지 않고 있으 니 그들이 바로 촌은과 백대붕 같은 무리들이다. 당시 그들을 풍월향도 라고 불 렀는데, 향도(香徒) 라는 것은 서류(庶流)들이 수계한 것을 이름이다. 그들에 대 해 학사와 선생들도 예를 갖추어 대하면서 간혹 같이 시를 짓기도 하였으니 아

126 름다운 삼대(三代)의 풍요(風謠)가 아니겠는가? 33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거하면 풍월향도 를 결성한 목적은 친목 도모와 아울러 정기 또 는 비정기적으로 시회를 개최하기 위해서였으며, 그 결성 시기는 백대붕이 임진 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전사했음을 감안할 때, 늦어도 선조 25년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할 때 유희경은 1592년 이전, 하위 계층에 속한 인물들과 함께 풍월향도 를 조직 운영하다 전란과 전후 복구로 인해 오랜 공 백기를 가졌을 것이며 그 후, 이전에 인정받은 시명(詩名)을 바탕으로 사류(士 類)들과 접촉해 풍월향도와는 성격이 다른 침류대로 옮겨가게 되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334) 그렇다면 유희경은 어떤 동기로 풍월향도 나 침류대시사 와 같은 모임을 조직 해 활동하게 되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희경은 상례에 밝았기 때문에 일생을 상가역부로 곤 궁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로 인해 사대부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 었다. 실례로 촌은집 에 수록된 증답시들을 살펴보면 유희경이 미천한 신분에 도 불구하고 사대부 계층과 폭넓게 교류한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유희경과 오랜 시간에 걸쳐 밀접한 관계를 지속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허 성이다. 전술(前述)한 승가수창록 소재의 시작에서 허성이 유희경을 시반(詩伴) 이 라 일컫고 있음을 보았거니와 유몽인이 입전(立傳)한 유희경의 전 에도 그에 대 한 허성의 관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명유(名儒) 허성이 유희경을 유달리 많이 사랑하였는데, 일본으로 사행 가게 되 자 백대붕과 더불어 그를 데려가고자 하였다. 유희경이 어버이를 봉양해야함으로 사양하니 홀로 대붕만 가게 되었다.335) 승가사 시회가 시작된 것이 1575년경이고, 허성이 서장관의 직책을 맡아 일본 333) 劉希慶, 村隱集, 跋(李植 撰) 下至齊民小胥 野鵲之吟 沙鶴之句 擧皆鏗鏘 不失聲韻 卽如劉翁與白大鵬輩是已 當時號爲風月香徒 香徒者庶流修禊之名 學士先生降禮接之 往往 酬唱相問 靄乎三代風謠之遺 噫何其盛歟 334) 차용주, 韓國委巷文學作家硏究, 경인문화사, 2003, pp ) 劉希慶, 위의 책, 卷2, 附錄, 傳, 名儒許筬 愛之特甚 當其使日本也 欲與白大鵬泊生偕 生以養老辭 獨以大鵬行

127 사행길에 오른 것이 1590년이었으므로 이 기록은 허성과 유희경 간의 관계 가 얼마나 오랫동안 긴밀하게 지속되었는지를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세간 에는 유희경과 백대붕 등이 허성의 아우인 허균과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뒷날 허균이 이들과 교분을 쌓게 된 데에는 백형 허성의 영 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성과 유희경이 시를 수창한 1575년 당시, 허성의 나이는 28세, 유희경은 31세로 이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서로 의 존재를 알고 교류했을 가능성이 크며, 허성보다 20세나 연하로 당시 8 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균이 후에 성장하여 유희경과 교류하게 된 것 역시 맏형 허성에 힘입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유희경의 침류대 는 대체로 1612년을 전후해 시사로서의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336) 1612년은 유희경이 만 67세 되던 해로서 그의 문집인 촌은집 에는 1612년 이후의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풍월향 도 를 포함한 이전 시기의 작품들은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아마도 촌은집 이 그 후손들에 의해 간행될 당시 신분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모 종의 편집 의도가 개입된 때문으로 추정되며,337) 그로 인해 침류대 시절 이 전 유희경의 행보와 인맥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기가 어렵다는 한계를 지닌 다. 따라서 유희경과 당대 문사(文士)들의 구체적 교류 형태는 촌은집 권3을 참 조해 살펴 볼 수밖에 없는데, 이 책에 드러난 이른바 침류대 학사 는 같은 시기 에 등장한 사대부 문학 동인(同人)338)들에 비해 인적 구성이 복잡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까닭은 인조반정과 유희경의 신분 상승을 기점으 로 침류대의 동인 역시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339) 또, 수창시(酬唱詩) 와 수 창시속록(酬唱詩續錄) 에 참여한 인사들의 경우 대부분 문명이 높고 관직에 있 었던 인물들이었으므로, 이들이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336) 침류대시사 의 활동 시기와 인적 구성은 촌은집 卷3의 내용을 통해 찾아볼 수 있 는데, 권3은 酬唱詩 와 酬唱詩續錄, 寧國洞林莊圖題詠 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337) 문희순, 朝鮮中期 枕流臺學士의 形成과 展開, 어문연구 37집, 한국어문회, 2001, p ) 노수신(盧守愼), 정사룡(鄭士龍), 황정욱(黃廷彧)의 호소지(湖蘇芝), 이달(李達), 백광 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의 삼당시인 三唐詩人, 송익필(宋翼弼), 최립(崔笠), 이산해(李 山海), 이순인(李純仁) 등의 무이동 팔문장(武夷洞 八文章), 정철(鄭澈), 서익(徐益)을 포 함한 삼청동 이십팔수(三淸洞 二十八宿) 등이 당대에 활동한 사대부 모임들이다. 339) 허경진, 風月香徒와 白大鵬, 목원어문학 5輯, 목원대 국어교육과, 1985, p

128 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여러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유희경이 직접 찾아가서 시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해진다.340) 결국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침류대시사 에 참여했던 인물 집단의 성격 규명을 위해서는 그 대상을 시사 결성 초기의 인물로 한정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그간의 연구에 의하면 침류대 학사들의 학풍 형성에 화담 서경덕의 학문이 영향을 주었음을 밝히는 연구 성과가 나왔는데341) 인물들의 성 향 및 학맥 사승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 된다. 우선 침류대시사를 결성한 유희경은 천류 출신으로 박순, 남언경과 사승 관계 에 있는데342) 박순은 일찍이 그의 시를 보고 깊이 칭찬하고는 당시(唐詩)를 가 르쳐 재주를 이루게 하였다고 하며, 남언경은 유희경에게 예학을 가르치고 후대 까지 교분을 유지하여 남언경의 종자(從子) 남발(南撥)이 유희경의 상(喪) 때 부 물(賻物)을 가져오기도 했다.343) 그런데 유희경이 사사한 박순은 송도유수(松都留守)로 있던 부친 박우(朴祐) 와 함께 선대로부터 화담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민순 허엽과 함께 서경덕의 고 제(高弟)로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 허엽과 함께 서경덕을 우의정으로 추증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서경덕의 문묘종사를 청하기도 했다. 또한 선조에 게 서경덕의 궁리용공(窮理用功) 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으며, 사후에는 화담서원 (花潭書院)에 배향되는 등 서경덕과의 공고한 사제 관계를 내외에 과시하였 다.344) 또, 남언경은 14~5세 무렵부터 화담 및 화담의 문인에게 수학하였으며, 화담에 게 사사하지는 않았지만 화담 문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학문적 토론을 일 삼았던 홍인우(洪仁祐)와 혼인을 통한 결연을 맺게 된다. 그런데 남언경과 홍인 우가 만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이 허엽이라는 사실은, 남언경이 홍인우를 알기 이전부터 이미 화담학파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45) 340) 차용주, 앞의 책 p ) 韓永愚, 李睟光의 學問과 思想, 韓國文化 13輯, 高英津, 16세기 후 반~17세기 전반 서울 침류대학사의 활동과 의의, 서울학연구 3, 1994 등이 그간의 대표적 연구 성과들이다. 342) 劉希慶, 앞의 책, 卷2, 附錄, 墓表(金昌翕 撰) 少學唐詩於思菴朴公 受禮說於東岡南 公 343) 신병주, 南冥學派와 花潭學派 硏究, 일지사, 2000, p ) 신병주, 위의 책, pp

129 이렇듯 천인 출신의 유희경이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제하며 시문(詩文)으로 인 정받게 된 데에는 그 자신의 문학적 능력 외에도, 스승인 남언경이나 박순을 통 해 형성된 인맥을 적극 활용했을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그 한 예로 침류대 시절 이전부터 친분이 확인되는 차천로(車天輅)와의 관계를 들 수 있는데, 차천 로의 부친 차식(車軾)은 1682년(숙종8) 박세채가 편찬한 동유사우록 과 1924년 강효석이 엮은 전고대방 에 모두 화담의 문인으로 올라 있는 인물로서, 이 책 들에는 차식 차천로 부자가 함께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이 드러난 다.346) 또 유희경과의 교유 사실이 확인되는 홍성민(洪聖民) 역시 전고대방 에 화담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허성과 허균은 화담의 고제인 초당 허엽의 아 들들이다. 이렇게 볼 때, 유희경이 화담의 문인들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 지했으며 침류대 학사의 주류가 화담의 학맥과 잇닿아 있다는 그간의 지적은 타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침류대시사 의 인맥을 보다 정밀히 살펴보기 위해 그 결성 초기의 것으로 보 이는 수창시 의 인적 구성을 분석하면 일련의 사실들이 보다 분명히 드러남을 볼 수 있다.347) 번호 이름 沈長源 (1531~1607) 辛應時 (1532~1585) 柳永吉 (1538~1601) 李達 (1539~1612?) 자, 호 사승 및 가족 관계 허엽의 처조카, 허균 형제의 姨從, 자 景混 詩賦로써 京鄕에 文名을 떨침 자 君望, 호 白麓 白仁傑의 문하, 成渾 李珥와 교유 자 德純, 호 月蓬 柳永慶의 兄 자 益之, 호 蓀谷 鄭士龍, 朴淳에게 시를 배움, 崔慶昌 白 光勳 林悌 許篈 梁大樸 高敬命과 교유, 허균의 스승 345) 황광욱 화담 서경덕의 철학 사상, 심산문화, 2003, pp ) 신병주, 앞의 책, pp.227~231 차식(車軾)은 화담집 의 문인록에도 그 이름이 소 개되어 있다. 이 책에는 차식의 자는 경숙(敬叔), 호는 이재(頤齋)로 연안(延安) 사람이 며 문과로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두루 꿰뚫었 다. 또 시문(詩文)을 아름답게 지을 줄 알아 같은 무리들 중에서 뛰어났다(車軾 字敬叔 號頤齋 延安人 文科 官至郡守 受學於先生 貫穿經史 又能美詞翰 絶異倫類) 고 기록되어 있다. 347) 수창시 수록 인물 도표는 문희순의 정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130 金玄成 (1542~1621) 劉希慶 (1545~1636) 洪千璟 (1553~?) 車天輅 (1556~1615) 洪慶臣 (1557~1621) 曹友仁 (1561~1625) 李睟光 (1563~1628) 李廷龜 (1564~1635) 申欽 (1566~1628) 成汝學 (? -?) 梁慶遇 (1568~?) 權鞸 (1569~1612) 李潤雨 (1559~1634) 李春元 (1571~1634) 李安訥 (1571~1637) 任叔英 자 餘慶, 호 南窓 선비 서화가, 허균과 교유 자 應吉, 호 村隱 침류대의 주인, 南彦經 朴淳의 문인 자 群玉, 奇大升 李珥 高敬命에게 사사 호 盤恒堂 자 復元, 호 五山 徐敬德의 문인 자 德公, 호 鹿門 洪可臣의 아우, 허성 형제들과 교유 자 汝益, 호 梅湖 자 潤卿, 호 芝峯 曹植의 문인, 허균의 同壻 자 聖徵, 호 月沙 尹根壽의 문인 宋麟壽 李齊閔에게 사사, 송인수의 外 자 敬叔, 호 象村 孫 成汝信의 아우. 曹植의 문인, 자 學顔, 호 鶴泉 金玄成의 姪壻 자 子漸, 호 霽湖 梁大撲의 子 자 汝章, 호 石洲 鄭澈의 문인, 許筠 李安訥 등과 교유 자 茂伯, 호 石潭 李珥 鄭逑에게 사사 자 元吉, 호 九畹 洪至誠 朴淳에게 사사 자 子敏, 호 東岳 자 茂淑, 호 疎 (1576~1623) 金蓍國 庵 자 景徵, 호 東 (1577~1655) 李植 村 자 汝固, 호 澤 (1584~1647) 鄭百昌 堂 자 德餘, 호 玄 (1588~1635) 申翊聖 谷 자 君奭, (1588~1644) 호 樂全堂 李植의 從叔, 鄭澈의 문인, 尹根壽 李好閔 權畢 許筠 등과 교유 李山海의 사위, 권필 이안눌 허균 등과 교유 申欽의 子. 宣祖의 駙馬

131 25 26 李敏求 자 子時, 호 (1589~1670) 李善復 東洲 자 伯善, 호 (1575~1621) 北村 27 坡陰 28 瓊海 29 市潛 30 漁適 李睟光의 子 원전에는 字만 기록되어 있는데, 吳健의 문인 柳仲龍(1558~1635)으로 추정됨 먼저 침류대의 주인 유희경과 이달(李達), 이춘원(李春元)은 박순에게 직접 사 사했으며, 심장원(沈長源)은 허엽의 처조카이다. 차천로 역시 그 부친과 함께 서 경덕의 문하에서 직접 수학한 사실이 확인된다. 홍경신(洪慶臣)의 경우에는 직접 적 사승 관계가 확인되진 않으나 형인 홍가신(洪可臣)이 민순의 문인임을 감안 할 때, 그의 학맥에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광해군대에 민순 의 제자였던 한백겸, 홍가신, 홍이상 등이 사상계의 일단을 형성하면서, 서경덕 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양경우(梁慶遇) 역시 수학한 내력은 확인되지 않으나 부친인 양대박(梁大撲)이 허봉 이달의 친우였고, 양대박 사후 그의 유고(遺稿)를 1591년, 당시 전주부윤 (全州府尹)으로 있던 남언경이 빌려가 임진왜란 때 분실했다는 기록348)이나, 양 대박의 문집인 청계집(淸溪集) 의 서문을 허균이 쓴 사실 등으로 미루어 양대 박 양경우 부자가 화담 문인들과 상당히 밀접하게 교유했음을 알 수 있다. 신흠(申欽)의 외조부로서 그의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송인수와, 신응시 (辛應時)의 스승 백인걸(白仁傑)은 모두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들인데, 김안국은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은 학자이면서도 관념적인 원리 추구에 얽매이 지 않은 개방적이고 실천적인 학풍을 보였다는 점에서 서경덕과의 유사점을 발 견할 수 있다. 실제로 김안국이 화담에게 부채를 선사하고 화담이 이에 대한 답 시를 쓴 것이나, 1540년 김안국이 화담을 후릉참봉으로 천거한 사실 등을 통해 양인(兩人)간의 교류가 여러 차례 있었음이 입증된다.349) 또 동유사우록 에는 348) 한국문집총간 淸溪集 해제 참조

132 김안국의 문인으로 유희춘 정종영(鄭宗榮) 홍덕연(洪德演) 허충길(許忠吉) 등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는데, 홍덕연은 화담과 가까웠던 홍인우의 부친이며, 허 충길은 홍인우의 벗으로서 화담의 문하에 자주 드나들었던 사실이 확인된다.350) 여기에 허엽의 아들들인 허성 허봉이 어린 시절 유희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 까지 더해짐으로써 서경덕과 김안국의 문인들이 서로 간에 활발히 교통(交通)했 던 것과 학문적 성향에 있어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안국과 송인수의 문하에 있었던 신흠은 성리학 이외에 불교와 도교, 심지어 는 당대 이단으로 배척받던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렇듯 학문 연구에 있어서의 박학적 경향은 화담 학파의 대표적 특 징 중 하나이다. 그는 역학, 그 중에서도 소옹의 상수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서 경덕을 소옹의 역학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이해한 인물로 높이 평가 하였으며, 자작(自作)인 선천규관(先天窺管) 에서 서경덕의 학설을 여러 곳에서 인용할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351) 관심을 끄는 것은 조식의 학통에 속하는 인물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이다. 이수광(李睟光) 이민구(李敏求) 부자와 성여학(成汝學)이 이에 속하며, 오건(吳健)의 문인 유중룡(柳仲龍)과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한 이윤우(李潤 雨) 역시 같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남명 학파와 화담 학파에 속하 는 인물들이 오랜 시간 두터운 교분을 유지한 흔적은 여러 문헌을 통해 쉽게 발 견할 수 있는데, 이는 남명과 화담이 당대에 처사의 입지를 지킨 현실비판자였으 며,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절충하면서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탄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수창시집 보다 후대에 편찬된 수창시속록 의 경우엔 그 구성원의 성격이 보 다 다원화되어 있어 일관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화담의 문인인 홍성 민(洪性民)의 형 홍천민(洪天民)과 그의 아들 홍서봉(洪瑞鳳)이 이 집단에 포함 되어 있으며 민순의 문인으로 주역 해석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한백겸(韓百 謙)의 문인 여이징(呂爾徵)과, 한백겸의 아우 한준겸(韓浚謙), 아들 한흥일(韓興 一)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어 침류대 와 화담 학파 사이의 관련 계보가 끊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유희경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던 이른바 침류대시 349) 이종호, 花潭 徐敬德, 일지사, 1998, P 화담집 의 謝金相國 惠扇 二首 등 이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350) 신병주, 앞의 책, PP ) 고영진, 앞의 논문, P

133 사 는 성립 초기 서경덕의 학맥을 이은 인사들의 사승(師承) 및 혈연관계를 중심 으로 구축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주변 정세가 급변하자 동인(同人) 집단의 성격 역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침류대시사 에 참여한 초기 인사들의 대부분이 화담 학파와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침류대시사 의 본격적 활동 시기보다 무려 40여 년 이나 앞서 형성된 삼각산 승가사시회 에서도 그 수창 집단의 성격이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승가수창록 첫 장에 기재된 참여자 명단 중 성명 미상이거나, 승려를 제외 한 나머지 인물들의 수학 내력, 가족 관계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師承 및 가족 관계 이름 許筬 許曄의 子, 柳希春의 문인 (1548~1612) 徐起 徐敬德의 문인 (1523~1591) 洪履祥 閔純의 문인 (1549~1615) 禹伏龍 閔純의 문인 (1547~1613) 石涵之 (1538~?) 李順慶 (1549~?) 劉希慶 南彦經 朴淳에게 사사 (1545~1636) 黃廷彧의 문인 원문엔 字만 기록되어 있 柳根 (1549~1627) 음 許信仲 許筬의 친척으로 추정됨 沈喜壽 李延慶 盧守愼 姜文佑에게 사사, (1548~1622) 盧守愼의 처조카 먼저 주최자의 하나인 허성은 유희경과 평생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인 물로, 아우들과 함께 부친 허엽의 학풍과 사상을 계승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는

134 파란의 일생을 살았던 이복아우들과는 달리, 합리적인 처세를 통해 평탄한 환로 (宦路)를 걸으며 평생을 전형적 관인(官人)으로서 살아 간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허성이 보여 준 세계 에 대한 개방적인 태 도는 그 아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계 층의 인물과 교류했던 아우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천류(賤流) 및 승려 계층과 어울리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던 사실이 여러 자료들에 엿보인다. 허성이 유 희경에게 보인 각별한 관심은 앞에서도 살펴보았거니와 그 문집인 악록집 에도 유희경과 관련된 두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이 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케 한다.352) 그런데 이들의 사이가 이렇듯 막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희경의 촌은집 에서 허성과 그 형제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침 류대 활동이 본격화될 무렵인 1612년에 허성이 사망한 것과 그로부터 4년 뒤, 허균이 역모 혐의로 참수되면서 멸문(滅門)의 위기에 몰린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허균의 일로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허씨 일가와 친분을 나눈 흔적들을 모조리 삭제하였는데,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추구 하던 유희경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창자의 한 사람인 서기는 서경덕의 문인으로 비록 사노(私奴) 출신이지만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역시 화담의 제자로서 도가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던 이지함, 박지화와 절친했다고 알려진 당대의 석학(碩學)이 었다. 홍이상과 우복룡은 둘 다 민순의 문인인데, 그 중 홍이상은 개성유수로 있던 1609년(광해군 원년), 서경덕 사후 63년 만에 사당을 건립하여 박순 민순 허 엽을 그곳에 배향하였으며 우복룡은 1582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등용되었으 며 스승인 민순의 뒤를 이어 서경덕의 처사적 입지를 계승한 대표적 인물로 알 려져 있다. 화담의 학풍이 고위 관료에게 전파된 사례는 광해군대에 우의정을 지낸 심희 수(沈喜壽)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이 서경덕의 문인인 강문우 (姜文佑)353)에게서 배웠음을 말하고,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스승에게 배운 일도 352) 허성의 악록집 에 유희경이 와 함께 비봉에 오르다( 劉希慶來共登碑峰 ), 희경의 시에 차운하여 주다( 次贈希慶 ) 라는 제(題)의 시, 두 수가 전한다. 353) 강문우(姜文佑)는 동유사우록 과 전고대방 에 모두 화담의 문인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데, 서얼 출신이며 퇴계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바가 있다. 화담집 에는 강문우의

135 없이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궁극에 이르러서는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며 조금 도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힘쓰고 매진한 것은 귀신도 감동시킬 만하다 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354) 심희수는 침류대시첩 에서도 그 성명이 발견되고 있으며 문집인 일송집(一松集) 에서는 침류대 학사의 일원인 신흠, 임숙영, 이경전, 유 근, 이수광, 이산해 등과 다양한 친분을 나눈 사실이 확인되는데, 여기서 이산해 (李山海)는 화담 문인 이지함의 조카요, 이경전(李慶全)은 이산해의 아들로서 이 들 역시 화담의 학맥에 간접적으로 연결됨을 볼 수 있다. 또한 심희수의 문집에 는 허성의 아우 허봉이 계미삼찬 의 주모자로 이이를 탄핵하다 갑산으로 유배를 떠날 때 쓴 시( 懷許荷谷謫居 )나 허성의 제문( 祭許判書岳麓文 )을 포함한 많 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어 그와 허엽 일문 사이에 평생에 걸친 돈독한 교류가 있 었음을 보여 준다. 유근(柳根)은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으로 화담의 학맥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지만 그의 문집인 서경집(西坰集) 을 살펴 본 결과, 우복룡 홍이상 심희수 등 승가수창록 소재 문인들과 지속적인 교분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신흠 이 자는 여익(汝益)으로 진주(晉州) 사람이다. 문과로 교리(校理)를 지냈으나 서류(庶流)였 다. 일찍이 화담에서 선생을 배알하였다.(姜文佑 字汝翼 晉州人 文科校理 乃庶類也 嘗 謁先生于潭上)'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유사(遺事) 에도 강문우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 다. 354) 신병주, 앞의 책 p.238 이 같은 기록은 윤국형(尹國馨)의 갑진만록(甲辰漫錄) 에 서 찾아볼 수 있다. (우상 심희수는, 신이 어려서부터 죽은 교리 강문우(姜文佑)에게 구 두(口讀)를 배웠는데, 문우는 일찍이 자기의 스승 화담 서경덕의 도덕과 학문에 탄복하 여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마음이 고명(高明)하며 실로 열심히 노력하여 천 지를 두루 보는 깊은 식견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도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 데, 당시에 어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차차 장성하여 선생과 장 자(長子)들이 이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되었는데, 모두 효제충신(孝悌忠 信)하고 청명 순수(淸明純粹)하며,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의 연구에 철저히 노력하여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고, 굳건히 힘써 신명(神明)에 감통(感通)하며, 높은 덕과 넓은 업적이 독실하고 빛이 났다 고 하였습니다. 또한 화담집(花潭集) 중 원리기(原理氣) 등의 여러 설을 보면, 깊이 들어가 자득(自得)한 묘리는 전현(前賢)이 밝히지 못한 것들을 밝혀 사문(斯文)에 끼친 공이 크므로, 우리나라 유생들이 지금에 이 르기까지 오래도록 태산과 북두칠성을 받들듯 한 것은 마땅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하 략) 右相沈喜壽則曰 臣少從故校理姜文佑習口讀 文佑嘗歎服其師花潭徐敬德之道德學問曰 天資超邁 玩心高明 實有鞭霆歷覽無際之邃見云 臣今亦懵無知識 況於其時 豈能省其爲何 許人也 比壯稍得聞於先生長者之論及斯人 皆以爲孝悌忠信 淸明純粹 不由師傅 慨然自奮 學務窮格 一物不遺 堅苦刻厲 感通神明 崇德廣業 篤實光輝 觀於本集中原理氣等諸說 爲 深造自得之妙 發前賢之未發 及其有功於斯文大矣 宜乎海隅章甫之徒 宗仰若山斗 至此而 久也)

136 수광 등 화담 학문의 영향 하에 있는 인물들과 두루 교유한 사실이 발견된다. 특히 유근은 서경덕 - 민순의 학통을 계승한 한백겸의 만사(輓詞)를 짓기도 했 는데,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상당 부분 화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하면 승가수창록 명단에 올라있는 인사들은 서기를 제외하고 비슷한 연 배의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모임이 처음 시작된 1575년경에는 그들 대부분이 아직 출사 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승가수창록 은 관련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출사 전의 문인들이 한 자리에 어울려 함께 시를 수창하며 문학적 소양과 정치적 안목을 쌓았던 삼각산 승가사시회 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참여자들의 대다수가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우 리가 승가사시회의 성향을 규명하는 데 많은 부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 각된다. 화담 학파의 인맥은 여타의 학맥에 비해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데, 학 계에서는 그 연원을 화담의 학문이 갖는 다양성과 개방성에서 찾는다. 신분에 구 애 없이 제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궁리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자유롭게 연구했던 화담의 학풍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355) 화담 사상에서는 기(氣) 가 모이고 흩어짐에 의해 만물이 생겨나고 없어진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존재하는 만물의 차이는 기 가 어떻게 모였는가에 의해 결정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화담 사상의 핵심은 서로 다른 기 들 사이의 분화 와 교섭, 그리고 그 결과 형성된 차이와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에 놓여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화담과 그 문인들이 생각하는 신분과 성별의 차이란 차별이나 등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분법적 대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356) 화담 의 계보를 이은 허성 홍이상 우복룡 등이, 비록 방면되긴 했으나 근본이 사 노(私奴) 출신이었던 서기나 수창자 명단에 천자(賤者) 로 기록될 만큼 신분이 미천했던 유희경 등과 신분을 초월해 교류한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흔히들 침류대시사 의 의의를 논할 때 이 시사 가 조선시대 위항문학 내지 여 항시사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설명을 하곤 한다. 또 침류대시사가 위항인들 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당대의 사대부들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상을 보 임으로써 후대에 등장한 위항시사보다 더욱 신축적인 대응을 보이는 것에 주목 355) 신병주, 앞의 책, p ) 오세근, 朝鮮 儒敎의 氣論에 의한 페미니즘 논의의 지평 확대 가능성에 대한 연구 화담 서경덕의 사상을 중심으로, 동양사회사상 3輯, 동양사회사상학회, 2000, pp

137 한다.357) 그러나 한문학에 있어 평민층을 하나의 작가군으로 인정하고 포섭하려 는 움직임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1575년에 시작된 삼각산 승가사시회 를 엿볼 수 있다. 승가사시회 는 침류대시사 의 본격적 활동 시기보다 무려 40여 년 이상을 앞 선 것으로, 그 집단 구성원의 다양성은 16세기 중반 이후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 로 시작된 사상적 변모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문학 분야에 문학 담당층의 확대 현상이 나타난 데에는 신분 제약을 뛰어넘고자 하는 평민들의 각성은 물론, 그들을 새로운 작가층으로 인정하고 포 용하려는 사대부들의 의식 변화가 동반되었던 것이다. 또, 승가사시회의 참여자 인 허성 심희수 홍이상358) 등이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 후대에 고관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의식 변화가 사대부 사회의 하부(下 部)를 중심으로 나타난 지엽적인 현상이 아니었다는 점도 새롭게 확인할 수 있 다. 아울러 그 중심에 실천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지닌 화담의 문인들이 포진되 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하다. 승가사 시회가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그것이 17세기 중엽 본격화된 서민 문 학 성장의 단초(端初)로서, 위항시사의 태동 시기를 훨씬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 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사상적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화담의 문인들에 의해 하위 계층의 한문학 참여 기회가 확대되었고, 그들에 의해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았던 유희경이 매개가 되어 위항인들이 대거 참여한 침류대시사가 결성되 었다. 침류대시사는 위항인과 사대부들이 함께 참여한 공동시사(共同詩社)라 할 수 있지만 그 결성과 활동의 중심이 주로 위항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위항시사로서의 의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359) 이러한 흐름이 후에 유희경 의 제자인 최기남(崔奇男)을 중심으로 한 삼청동시사(三淸洞詩社) 로 연결되고, 다시 최기남의 제자인 임준원(林俊元)과 최기남의 아들 최승태(崔承太), 제자인 최대립(崔大立) 등이 홍세태(洪世泰), 정래교(鄭來僑) 등과 함께 결성한 낙사시 사(洛社詩社) 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위항문학의 시기를 맞게 된다는 점에서 하 357) 문희순, 앞의 논문, p ) 허성은 후에 이조(吏曹) 예조판서(禮曹判書)의 지위에 올랐으며, 선조의 8남인 의창 군(義昌君)의 장인이기도 하다. 심희수는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從弟)이자 노수신의 처족(妻族)으로서 선조 광해군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홍이상은 대사간(大司諫) 형 조판서(刑曹參判)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했다. 359) 천병식, 조선후기 위항시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1, p

138 나의 계보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전의 사대부 시회들이 결사(結社)의 기록은 있으나 그 흔적의 대부분 이 산일(散逸)된 데 비해, 승가사시회 는 승가수창록 이라는 집단적 결과물을 창출함으로써 후대 시사에 하나의 전범을 남겼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침류대 시사 와 삼청동시사 의 성과물인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 육가잡영(六家雜 詠) 등이 모두 시회의 성과를 결집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삼각산 승가사 시회 가 침류대시사 및 후대 시사들에 미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許篈 : 正學 과 異端, 그 思惟의 境界面 (1) 海東野言 : 思想的 指向의 探究 허엽의 둘째 아들인 허봉(許篈 : 1551(명종6)~1588(선조21))은 절대시재(絶 代詩才) 360)를 지녔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문명을 떨쳤던 인물 중 하나인데, 많은 이들이 그에 관해 재주가 뛰어났으며 경서와 사서(史書)에 폭넓 은 지식이 있었고 문장도 잘 지었다 361)라든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시 사(詩詞)가 아름다워 한 시대가 재자(才子)로 추대하였다 362)는 등의 기록을 남 기고 있는 것으로써 그 재능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568년(선조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72년, 22세의 연소한 나이로 문 360) 梁慶遇, 霽湖集 卷9, 詩話, 許篈有絶代詩才 荷谷許典翰篈 以能詩大有名 不幸而夭 其詩播在人口者 絶少 余不得見其累篇 近鄭學士畸窩弘溟 謂余曰 曾聞張內翰 維 論東方人 詩曰 爾來文人才子中 荷谷之詩爲最云 余以爲張內翰必有所見 求得荷谷遺稿一卷 常手把貪 翫 眞絶代詩才也 調格之高 同景樊堂 而無虛誕之病 厥弟筠雖贍裕不竭 格律甚卑 不可同日 道也 양대박(梁大撲)의 아들 양경우는 대를 이어 허엽 일가와 교유했는데, 그는 위의 글에서 난설헌의 시에는 허탄(虛誕)의 병이 있고 허균의 시는 율격이 높지 못하다고 평 한 반면, 허봉에 대해서는 절대시재(絶代詩才)를 지녀 시의 격조(格調)가 높다 며 극찬 하였다. 361) 柳成龍, 雲巖雜錄 篈字美叔 曄之子也 有俊才 而性輕脫 博洽書史能文章 362) 宣祖修正實錄 卷19, 18年(1585 乙酉) 6月 1日(庚子) 篈聰穎强記 詩詞艶麗 一代推 爲才子

139 과에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김효원(金孝元) 김우옹(金 宇顒) 등과 더불어 호당(湖當)에 녹선, 사가독서의 영예를 누렸고 다시 1574년 에는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의 사대부들과 주자 (朱子)와 육구연(陸九淵)에 대해 논란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탄탄대로를 달리던 허봉은 1583년에 있었던 이른바 계미삼찬(癸未三 竄) 의 일에 연루되어 인생의 내리막길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허봉이 박근원 (朴謹元) 송응개(宋應慨) 등과 함께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이(李珥)를 탄핵하다 가 마침내는 갑산(甲山)으로 유배되고 만 사건이었다. 그는 1585년, 영의정 노수 신의 주선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끝내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 생활 을 거듭하다가 1588년, 금강산 인근의 금화역(金化驛)에서 병사함으로써 38년간 의 짧고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허봉은 22세에 출사한 이후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부친 허엽을 이어 동인(東人)의 중심인물로도 활약했는데, 그런 까닭으로 계미년 이전의 행적에서 는 특기할 만한 여러 사실들이 발견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허봉이 부 친과 마찬가지로 언로(言路)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묘사림의 사상에 학문적 기반을 두었던 허엽은 소학 과 근사록 을 중시하고 향약의 보급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으며 조광조의 신원(伸寃) 및 문묘 배향에 앞장서는 등, 사림 정신의 실천과 선양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바쳤는데, 그 런 허엽이 어느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바른 언로의 확립 이었 다. 당시의 사림들은, 조광조가 군주와 대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간관(諫官) 의 중 요성을 언급하면서 언로가 통하는 것과 막히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 니 언로가 통하면 다스려서 편안해질 것이요, 막히면 어지러워질 것 이라고 말한 것에 근거하여,363) 군주와 신하 간의 소통을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즉, 군주는 신하가 의로운 간언을 하면 들어야 하고, 그 간언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신하를 징벌해선 안 되므로, 종국에는 이러한 군 신 간의 윤리를 통하여 신하의 간쟁(諫諍)과 언로가 보장될 수 있다고364) 보았 던 것이다. 언로 의 중요성에 대한 허엽의 신념은 어느 누구보다 확고했던 것으로 보이는 363) 김용욱, 韓國政治論, 오름, 2004, p.9 364) 한국사 편찬위원회, 韓國史 8, 한길사, 1994, p

140 데, (허엽이) 금상(今上)의 조정에서 간장(諫長) 관장(館長)을 지내면서 직언을 잘하였지만 일의 실정에는 절실하지 못했으므로 상(上)이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 았다 는 실록 의 언급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 을 것이다. 위의 기록은 허엽이 지나친 직언으로 인해 군주와 마찰을 빚는 일이 잦았으며 그로 인해 인사(人事)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사실을 암시하고 있 는데, 그 아들인 허봉 역시 부친과 상당히 유사한 성향을 지녔던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윤국형(尹國馨)의 문소만록(聞韶漫錄) 의 내용을 참고할 만 하다. 내가 오랫동안 옥당(玉堂)의 동료로 있으면서 보건대, (허봉은) 용모와 행동이 청일(淸逸)하고 의론(議論)이 초월하여 그 예리한 비판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리 하여 그를 아는 자들은 그의 비상한 격조를 사랑하였고,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가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으며 심한 자는 그 흠을 꼬집 어 배척하기도 하였다. (중략) 모든 소차(疏箚)를 올리는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계미년 가을에 한 대신을 여지없이 배척하는 상 소가 들어오자 그 대신이 이는 필시 허 전한(許典翰)이 지은 것 이라 여기고 사 람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365) 위의 인용문은 허봉이 의론을 숨기지 못하고 공론화하는 일이 잦았으며, 이로 인해 여러 사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사실을 보여 준다. 그의 연보(年 譜) 에도 이득이 될 만한 일을 보아도 (뜻)을 고집하여 흔들리지 않았으며 비록 천만인이 불러도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선 을 좋아하고 악 을 미워하였으며 그 천성에서 나온 강개(慷慨)로써 일을 논했다. 비록 임금의 앞이라도 굴하지 않 았으며, 임금이 싫은 안색을 해도 관계치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직언하였다 366) 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허봉이 그 부친과 마찬가지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임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1577년에 있었던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시조묘(始祖墓) 제향 논란은 군신 간에 있어 극도의 대립과 긴장을 불러 온 일대의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365) 尹國馨, 聞韶漫錄 余久與作玉堂僚 觀其容止淸逸 論議超銳 不能自韜其鋒芒 知之者愛 其非常調 不知者或病其太露 而甚者則至摘訾而加斥焉 (중략) 凡有疏箚 無問大小 皆出其手 癸未秋間 斥論一大臣無餘力 其大臣以爲 此必許典翰所製 使人探之 果然 366) 許篈, 荷谷集, 年譜 於事見得是則執而不撓 雖千萬人麾之 不可易 好善嫉惡 出其天 性 忼慨論事 雖在上前無所屈 有時犯顔强諫

141 이는 당시의 군왕 선조가 중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조모인 창빈 안씨의 신주(神 主)를 대궐 안 사당으로 모시려고 하자 허봉이 나서 극력 반대한 것에서 비롯되 었는데, 그는 주상께서는 이미 적(嫡)에 압존(壓尊)되었으므로 안빈(安嬪)을 가 리켜 아조(我祖) 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더군다나 안빈은 첩모(妾母)이므 로 다만 사실(私室)에서 제사하는 것이 합당하며 시조묘에는 들어갈 수 없다 고 하며 그 부당함을 적극 개진하였다. 이에 선조는 매우 진노하여 안빈은 조모이 니 아조 라 한다 해서 해될 것이 무엇이냐? 면서 허봉을 질타하였고 결국에는 좌의정 홍섬(洪暹)이 수습에 나서 허봉은 연소하여 옛 글만 읽었을 뿐 일을 경 험하지 못해 정도에 지나친 의론을 제기한 것이니, 임금은 모두 포용하여 마음속 으로만 정도에 지나치다 여겨야지 이처럼 꺾어 눌러서는 안 된다 고 충고할 정도 였다.367)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은 1610년, 허성이 첩모 운운하며 공빈(恭嬪) 김씨의 추 숭을 반대하여 광해군의 미움을 샀던 일368)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서, 허엽의 가 인들에게 원칙을 중시하며 임금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을 행하는 일면이 공통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여러 신하들의 재능을 논평하면서 신식(申湜)은 옹졸(壅拙)하고 허성(許筬)은 고집이 세다. 369) 367) 宣祖實錄 卷11, 10年(1577 丁丑) 5月 11日(戊戌) 許篈進啓曰 名不正 則言不順 而 至於民無措手足 今者稱大院君廟曰 家廟 此何名也 國家安有家廟 只令稱大院君廟 或稱私 親廟也 殿下稱安嬪爲我祖 甚非也 雖大院君在 亦壓於嫡 而不敢母其母 況殿下入承大統 安 敢稱祖乎 且大院君 以諸侯別子 爲百世不遷之廟 安嬪是妾母 只合祭之私室 不可入始祖之 廟 (중략) 上厲聲曰 許篈敢獨爲許多說話 古人云 不以辭害義 安嬪是祖母 雖曰我祖 何害 (중략) 左相洪暹曰 年少之人 只讀古書 不曾經事 生出過當之論 自上皆當包容 只於心裏 以 爲過當而已 不可摧抑之如此也 如此 則恐皆不敢達懷也 368) 허성은 1610년(광해군2),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 공빈(恭嬪) 김씨를 추숭하려는 움직 임을 보이자 상소를 올려 적극 반대하였다. 그는 광해군에게 첩모(妾母)를 높여 황후라 칭하였으니 이는 엄한 아버지와 짝을 만드는 것이 의리에 해(害)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 한 것 이며 시경(詩經) 에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 고 이른 것처럼, 그 생모 를 높이려고 아버지를 천하게 만드는 것 은 모두가 통탄해 마지않을 일이라 직언하였 고,1) 이로 인해 추숭을 반대하는 이론(異論)이 촉발되자 광해군은 허성의 관작을 삭탈하 여 성문 밖으로 내쫓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난 1612 년, 최유원(崔有源)이 올린 상소로 인해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허성이라는 사실 이 알려졌고 그로 인해 복권되었다.( 海君君日記 卷26, 2年(1610 庚戌) 3月 14日(庚 寅) 然尊妾母而稱后 不知與嚴父作配之爲害義 春秋傳 曰 徒欲崇貴其所生 而不虞賤其父 又曰 卑其父則無本 是言誠可痛也 <詩>曰 有扁斯石 履之卑兮 履石而自卑其身 詩人猶以爲 刺禮失 而至於卑其父 則是可忍乎) 369) 李睟光, 芝峯類說 卷3, 君道部, 用人 上曰 湜也拙 筬也固執 湜卽申湜 筬卽許筬

142 라는 말을 한 것이나 허엽이 대간이 한 말은 시비(是非)를 따지지 말고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고집하여 편벽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 역시,370) 이 들이 자신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임금과 맞서서도 절대 뜻을 꺾지 않았던 사실과 대간의 언론 활동이야말로 국가의 사활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라 고 믿었던 사림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허봉이 기묘사림의 유풍(遺風)을 계승한 사실은 또 다른 문헌 자료들에서도 입증된다. 그 한 예로 허봉이 1570년에 퇴계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읽을 때 심성(心性) 공부를 위한 근사록 소학 심경 대학 등 몇 권의 책에 침잠하여 이치를 환하게 통한 다음, 다른 여러 가지 책을 읽어 박학(博學) 의 공부를 이루는 것이 어떠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 사실이 확인된다.371) 그런데 허봉이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바탕에는 기묘사림에 대한 추존 의식 이 크게 자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른바 기묘사림들은 정치적 공세 이외에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확산을 위해 부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 의(至治主義) 로 상징되는 왕도(王道)정치 의 표방이다. 당시 인간의 도덕적 가 치를 무엇보다 중시한 성리학은 사림에게 있어 학문적 지향점이 될 뿐만 아니라 부패한 훈구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도덕적 무기로 이용되었는데, 그 중 심경 은 인간의 심성 수양에 관한 경구를 한 데 모아놓은 것으로서 사림들은 일찍부 터 심경 의 의의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경연 과목으로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 다.372) 또한, 소학 은 주자가 대학 을 배우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로 설정하 여 수기치인(修己治人) 및 천하를 다스리는 과정의 하나로 제시했던 것으로서, 이러한 점을 인식한 사림들은 당시의 학문 풍토를 일신하고 기존 체제를 바꾸기 위한 출발점으로 소학 을 매우 중시하였다.373) 근사록 역시 소학 못지않게 370) 宣祖修正實錄 卷8, 7年(1574 甲戌) 7月 1日(癸酉) 양사가 논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 을 이유로 인피(引避)하자, 부제학 허엽 등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의 말은 옳든 그르든 간에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략) 그 당시 허엽 등의 논조는 대간이 한 말은 시비를 따지지 말고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편벽된 논의가 그와 같 았다. (兩司以議不同引避 副提學許曄等啓曰 臺諫之言 是非間不可沮抑 (중략) 其時許曄等 之論以爲 臺諫出言 當勿論是非 而伸之爲當 當時論議 偏僻類是) 371) 李滉, 退溪集 卷33, 書5, 答許美叔篈 凡讀書者 必也博觀經書 無所不讀 以洽其聞 見 然後反就於約乎 抑篈之意 以爲必以近思或小學或心經或大學書 必就數書之中將一書 沈 潛看過 讀此之時 不敢輒及他書 必待此一書首尾貫通 稍有所得 然後致博學之功則何如 無 乃流於徑約乎 372) 박성순, 선비의 배반, 고즈윈, 2004, p

143 당대에 중시되었던 책인데 이 책은 원래 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이 성리학을 배 우는 초(初)학자를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주자 이전 성리학 연구에 기여했던 주 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의 학문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근사록 은 성리학의 이념과 체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하여 사림들에 의해 필독서로 간주되었으며, 조광조 또한 성현의 도통을 계승하 고 태평성대를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책을 개혁 정책의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374) 이런 여러 사실을 감안할 때, 허봉이 근사록 소학 심경 등의 책을 성리학 연구의 기본서로 여기고 이에 침잠하고자 했던 사실은 그의 내면 깊숙이 사림 의식이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에 다름 아니라 생각된다. 허봉이 이렇듯 사림의 도통 의식에 영향 받았음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그의 편저(編著) 해동야언(海東野言) 이다. 해동야언 은 조선 태조로부터 제 13대 명종에 이르는 사이의 야사(野史) 기언(奇言) 이사(異事) 등을 기록한 것으로 전근대(前近代) 사서(史書)들의 특징인 전(前) 왕조 역사의 정리 라는 기 본 틀에서 벗어나 당대사(當代史)를 다루었으며, 기왕에 나온 여러 종류의 단편 적인 서술들을 역사서적인 체계로 정리한 최초의 야사로서의 의의를 갖는 책이 다.375) 허봉에 의한 해동야언 의 편찬은 과거사 뿐 아니라 당대의 역사에서도 교훈 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376)에 입각한 당대사의 필요성과 관찬사서(官撰史書)와 는 또 다른 시각의 역사 서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원래 야사 는 관찬사서의 부족을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하였지만, 후에 사림들이 사초 (史草)가 발단이 되어 여러 차례 사화를 겪게 되면서 후대인들은 더 이상 이 둘 을 보충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게 되었다. 즉, 사림들이 사화를 거치며 관찬사서 인 실록 의 공정함을 의심하게 되자 또 다른 시각으로 서술된 새로운 사서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377) 373) 역사문제연구소, 失敗한 改革의 歷史, 역사비평사, 1997, p ) 위의 책, p ) 최이돈, <海東野言>에 보이는 當代史 認識, 韓國文化 15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1994, p ) 許篈, 海東野言, 後序 고려 이전으로는 본래부터 있었던 믿을만한 사적(史蹟)이 세상에 전해졌는데 본조(本朝)도 이백 년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전의 말들과 지난 일들에 서 배울 것이 없겠는가? (麗代以上 固有信史之傳世 而至代本朝二百年中 豈無前言往行之 可識) 참조

144 해동야언 은 허봉이 이이를 탄핵한 일로 갑산에 귀양 갔다가 2년 후에 풀려 나 백운산 인천 춘천 등지를 방랑할 때 편찬된 것으로, 권1에 태조 태종 세종기, 권2에 세종 문종 노산군 세조 예종 성종기 및 무오당적(戊午黨 籍) 무오사화사적(戊午士禍事跡) 유자광전(柳子光傳), 권3에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인용된 책은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등 17종이고, 많은 인물들과 관련한 사실을 연대순 으로 인용 정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참고로 삼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378) 비록 서명이 누락된 기사가 적지 않고 2권의 후반부는 편차와 무관하게 <무오 당적> <무오사화사적> 등 6편이 끼어 있으며, 중복된 조항이 더러 있는 등 다 소의 혼잡이 있다 하더라도 다만 일사유문(逸事遺文)만을 집성한 것이 아닌, 다 양하고 풍부한 사료들을 참고하기 쉽게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야사류에 비해 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379) 그런데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 보이는 다음 글귀는 해동야언 편찬의 목적 과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히 나타내 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수옹(睡翁 : 송시열의 부친 송갑조(宋甲祚)380)를 말함)공이 기묘록(己卯錄) 과 해동야언 등을 손수 등초(謄抄)하여 주며 정암(靜菴)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 다. 고 말씀하셨다.381) 위의 일화는 송시열이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의 일을 회고한 것으로서, 당시 사림들에게 기묘록 과 해동야언 이 어떤 위상을 지닌 책이었는지를 분명히 보 여 준다. 윗글에 언급된 기묘록 은 1638년(인조16), 김육(金堉)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를 모아 간행한 것으로서, 사화와 관련한 피화자들의 행위 와 그 정당성을 기화자(起禍者)인 훈구파의 대립적 지점에서 서술한 목적의식적 377) 최이돈, 앞의 논문, pp 참조 378) 최범서, 野史로 보는 조선 역사, 가람기획, 2003, P.9 379) 네이버 고전문학사전, 권영민 편 - '작품해설' 정보, 해동야언(海東野言) 항목 380) 송갑조(宋甲祚 : 1574~1628)는 우암(尤庵) 송시열의 부친이자 송시열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최립의 문인이다. 그는 1617년(광해군9)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는 인목대비를 혼자 배알하였다가 유적(儒籍)에 서 삭제되는 등 강개한 성품을 지닌 선비로 알려져 있다. 381) 宋時烈, 宋子大全, 附錄 卷2, 年譜 睡翁公復手抄己卯錄 海東野言等書以授曰 靜菴 不可不學

145 인 기록이다.382) 이에 따라 송갑조가 정암(靜菴)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면서 기묘록 과 해동야언 을 동시에 언급한 사실은 당대인들이 이 두 책의 내용을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허봉은 해동야언 을 통해 사화의 피화자인 조광조(趙光祖) 김정(金 淨) 김안국(金安國) 기준(奇遵) 이항(李恒) 송인수(宋麟壽) 등의 행적을 상세히 소개하였으며 사화를 중심으로 야기된 간신들의 만행과 모략상을 구체적 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중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광조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조부자(趙夫子)는 집을 다스리고 행동하는 것이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학문을 독실하게 하여 심한 더위에도 꿇어앉아 의관을 정제하였으며 아침부터 저 녁까지, 초저녁부터 삼경까지 똑바로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아침에 일찍 일 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는 것은 아무리 여름이 덥고 밤이 짧다 하여도 조금의 변함이 없었다. 비록 그의 학문이 정주(程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차이 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일을 계획하고 시험하려 하다가 갑자기 불행한 일을 당하였으니 당시의 일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으랴.383) 위의 글은 해동야언 의 편자(編者) 허봉이 어떠한 기준으로 저작들을 선별하 였으며, 그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한다. 또, 이 책 에 편차(編次)의 연대와 관계없는 <무오당적> <무오사화> <유자광전> 등이 끼어 있는 사실 역시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것들이다. 즉, 허봉은 해동 야언 을 통해 사화의 피화자들을 옹호하고 당시에도 여전히 잔존해 있던 훈구척 신 세력에 대한 척결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공론에 입각한 정치 운영을 중시하여 그 방안으로 언론의 기능을 강조하였는데, 언관 뿐 아니라 일반 관료 및 재야사림까지 언로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 력하였으며 나아가 민심의 동향까지도 공론으로 수용해야 할 것으로 이해하였 다.384) 382) 장영희, 16世紀 筆記의 一考察 : <己卯錄>과 <龍泉談寂記>, 민족문학사연구, 민 족문학사학회, 2004, p ) 許篈, 앞의 책, 卷3, 中宗3 趙夫子居家行己 不愧古人 爲學篤實 危坐積熟 衣冠必端 正 自朝而暮 自初昏而三更 兀然不動 淸曉早起盥櫛 雖夏熱短宵不少變 想其學問不及程朱 亦不遠 但設施粗試 遽至不幸 當時之事 可忍言哉 384) 최이돈, 앞의 논문, p

146 사림을 평가하는 연장선에서 허봉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유일(遺逸)에 대해서 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종직 조광조에 대한 서술이 한 조목에 불과한 데 비하여 남효원(南孝元) 서경덕 등을 각각 네 조목씩 기록한 것은 그들에 대 한 허봉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허봉은 재야사림들을 시무책(時務 策)을 올리는 등의 정치적 행위를 하는 정치세력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벼슬하지 않 고 안빈(安貧)하는 한거(閑居)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385) 불교나 노장(老莊) 과 관련한 내용들도 여과 없이 수록하는 등 특유의 개방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김시습과 관련한 다음 기록은 허봉의 그 같은 성향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시습이 드디어 세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된 뒤로부터는 이름 을 설잠(雪岑)이라 고치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방외(方外)에 놀면서 미친 듯 시를 읊고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했다. 그는 세상을 피해서 불가(佛家) 로 들어갔지만 그 법을 숭상하여 지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를 미친 중으로 지목했다. (중략) 여러 비구들은 그를 신사(神師)로 추대하여 모든 것을 복 종하고 섬기기를 자못 근실히 하였다.386) 흔히들 허봉이 유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상향을 찾기 시작한 시기를 정치적 좌절을 겪은 이후부터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즉, 허봉이 유배를 계기로 불교 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좌절로 인해 탈속(脫俗)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고 보는 입장인데,387) 그러나 그 시련이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2년이 채 안 되 는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급격한 사상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설명에는 무언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허봉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 최이돈 역 시 허봉이 유배 이전에는 주자학에 경도되었지만, 유배 이후로는 탈(脫)주자학 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고 주장하면서 허봉이 서산(西山)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과 교유한 시기를 1585년 이후로 추정했는데,388) 이 같은 주장이 오류임을 알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허균이 휴정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序) 서문을 통해 청허(淸虛)는 나의 385) 최이돈, 앞의 논문, p ) 許篈, 海東野言 卷2, 遂擺落科臼 祝髮爲僧 改名雪岑 與南秋江爲方外遊 狂吟放浪 玩 弄一世 逃世於禪 不奉其法 世以狂僧目之 (중략) 諸比丘推以爲神師 服事頗謹 387) 宋垠姃, 荷谷 許篈의 詩世界, 東方漢文學, 동방한문학회 12輯, 1996, p ) 최이돈, 앞의 논문, p.241 참조

147 선친께서 집우(執友)로 여겼고, 나도 일찍이 젊었을 때부터 서찰을 통해 그를 보 아 왔다 389)고 밝힌 것이 그것이다. 이 기록은 이들 집안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과의 교유가 일찍이 부친 허엽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사실을 입증한다. 휴정이 훗 날, 평생 해 온 당(唐)나라 화가 오도현(吳道玄)의 <풍간상(豐干像)>을 허균에게 물려준 것390)이나 휴정과 그 제자 유정(惟政)의 입적 후, 그 문도들의 부탁으로 허균이 비문과 문집 서문 등을 썼던 사실 등391)은 허엽과 휴정의 인연이 대를 이어 지속된 경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허균이 허봉을 통해 처음 유정을 만난 것은 1586년이었지만,392) 유정이 휴정의 문하에서 수도를 마치고 다시 봉은사(奉恩寺)로 돌아온 것이 1579년이었 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허봉과 유정이 계미년 이전부터 교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 생각된다. 1580년대, 봉은사 주위에서는 삼당시인을 중심으로 한 강호시사 (江湖詩社) 가 자주 모임을 가졌는데, 그들과 친구였던 허봉이 이 모임에 자주 드나든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393) 당시 봉은사에는 성연(性衍) 운수(雲水) 지문(志文) 보운(寶雲) 등 시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아 여러 문인들과 더불어 시 389) 許筠, 앞의 책, 卷26, 序, 淸虛堂集序 吾先㜽視淸虛猶執友 不肖 少日蓋嘗於簡札覩 之矣 본문의 집우(執友) 는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말로서, '뜻이 서로 통하는 막역 (莫逆)한 벗'을 지칭한다. 390) 許筠, 앞의 책, 卷13, 文部10, 題跋, 題豐干像帖後 옛날 향산(香山)에 오도자(吳道 子)가 그렸다는 풍간(豐干)의 상(像)이 있어 승가(僧家)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 문을 듣고 내가 그것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얻지 못하였다. 서산대사가 죽을 때에 그의 제자 원준(元俊)에게 말하기를 교산(蛟山)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하였지만 내가 숨 겼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므로 아무에게나 간직하게 할 수는 없다. 옹(翁)은 본디 선기(禪機 : 불교의 진리)를 아는 분이니 가져다주도록 해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香山舊有吳道子所畫豐干像 僧家寶之 余求之 百方不可得 西山老師 休靜 臨化 語其徒元後曰 蛟山每欲此畫 吾靳之 此至寶 不可令匪人 守之 翁素曉禪機 可持以餉 不及百年 當返吾家) 391) 이이화, 許筠, 한길사, 1997, p ) 許筠, 앞의 책, 卷26, 序, 四溟集序 지난 병술(丙戌)년 여름, 내가 중형(仲兄)을 모 시고 봉은사 아래에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중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 서 읍(揖)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니 말은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종봉(鍾峯) 유정 사(惟政師)라 하였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선모(羨慕)하게 되었다. 밤이 되어 매당(梅堂) 에 들어 유숙할 때 그 시(詩)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 고(淸高)하였다. 중형이 거듭 칭찬하면서, 당(唐)의 아홉 고승의 것과 동렬(同列)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연소하여 그 묘처(妙處)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내심 간직하여 쉬 잊지 못하였다. 393) 김용관, 許筠 - 길에서 살며 사랑하다 죽다, 부글북스, 2009, p

148 를 주고받기도 했는데394) 허엽의 문집에 지문 에게 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395) 이들 부자가 함께 사찰을 출입하며 불가(佛家)의 인물들과 어울렸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특히나 허봉과 사명당의 우의(友誼)는 사명당의 시 수천 수를 허봉이 자신의 집에 소장할 만큼 깊었고, 허봉이 젊은 나이에 객사하자 사명당이 오대산에서 내조(來弔)하여 슬피 곡하며 처절한 슬픔을 담아 만시(輓詩)를 지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인연으로 허균은 사명당 사후, 그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 尊者)라는 시호(諡號)를 지어 올리기도 했으니, 이를 통해 사명당과 허봉의 사귐 이 얼마나 깊고 진실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허성이 젊은 시절, 휴정의 제자인 계원(戒元) 인영(印暎)과 어울려 시를 수창했던 것이나 허봉이 휴정에게 보낸 글에서 항상 대사와 선친이 맺은 인연을 생각한다 396)는 언급을 했던 일 등은 이들 집안이 휴정 유정으로 이어 지는 법맥의 승려들과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당한 친분을 쌓았던 사실을 보여 주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비(非)유교적 사상에 대한 허봉의 관심과 이해는 그가 서경덕의 학맥 과 연결되어 있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사화 이후 산림에 은거한 재 야사림들을 중심으로 도불(道佛)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것은 그간의 연구에 서도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이는 즉, 도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는 성리학의 심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으로서 후에 사림들이 사화와 당쟁의 와중 에서 피해를 입으며 한거(閑居)의 관점에서 다시금 확대된 것인데,397) 부친의 학 문을 그대로 전수 받은 허봉 형제들의 관심이 성리학 외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던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허봉이 해동야언 을 편찬했던 까닭은 명망 있는 사림 중 하나였던 부친의 뒤 를 이어 사림의 도통의식을 표방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김종직 조광조 등 사림의 핵심 인물들 뿐 아니라 서경덕 조식 등의 재야사림과 김시습 남효 394) 李鍾默, 朝鮮의 文化空間 2, 휴머니스트, 2006, p ) 許曄, 草堂集, 詩 贈志文上人 3수가 있다. 이 시는 허균이 국조시산(國朝詩刪) 에 뽑아 수록한 것으로, 권필이 정리(情理)가 으뜸의 경지에 이르렀다 고 평가했던 것으 로 전해진다. 그 첫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志文惠瓊徒 지문은 혜경의 문도(門徒) 인데, 惠瓊吾故人 혜경은 내 벗이라네, 惠瓊老而病 혜경이 늙고 병드니, 志文事如親 지문이 부모처럼 섬기는구나) 396) 許篈, 앞의 책, 荷谷先生雜著補遺, 書, 贈西山帖 每念吾師結契先子 397) 최이돈, 위의 논문, p

149 원 등 방외의 인물들과 관련된 사실까지 모두 수록하는 포용성을 보였으며, 불교 나 노장 등 이단적 사상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결국 해동야 언 은 사림의 일원으로서 허봉이 지향하는 바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줌과 동시에, 그가 지닌 사상의 개방성과 자국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으로 그 누구 보다 다양한 사상적 탐색을 거쳤던 허엽의 실험은 그 자녀들 대에 이르러 소기 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그 자녀들 역시 변화하는 세계에 적극적으로 반응 하여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지식인상(像) 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朝天記 에 드러난 陽明學 辨斥의 眞義 허봉은 1574년(선조7),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서장관이 되어 대명 사행(對明使行) 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그는 18세에 생원시 장원을 하고 22세 에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73년에는 호당(湖堂)에 녹선(錄選)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는 등 그 문명을 두루 떨치는 중이었다. 그렇다 해도 24세의 연소한 나이였던 허봉을 굳이 사신단의 실무를 담당하는 서장관의 직 (職)에 발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유성룡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 급하고 있다. 미숙(美叔)은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이미 천하의 책을 모두 읽어 문학(文學)과 사장(詞章)으로 조정에 명성이 있었고 또한 중국 땅을 밟아 천하의 기관(奇觀)을 모두 보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 사신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자 여러 사람을 대하여 가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전관(銓官)이 그를 추천하여 보내게 되었으니 그의 뜻이 이미 얕지가 않았던 것이다.398) 위의 글에는 1574년의 사행이 허봉의 자원(自願)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이 드 러나 있다. 유년 시기부터 한자를 배워 당시 학문의 근간인 유교의 경전과 고전 398) 許篈, 朝天記 序(柳成龍 撰), 美叔年甫弱冠 已能盡讀天下書 以文學詞章 有聲於朝 著 又欲足履中國之界 以盡天下之奇觀 聞朝廷選使介 對衆有願行語 銓官擧而遣之 則其志 向已非淺矣

150 을 터득하였고, 그 속에 담긴 원리와 덕목을 지침으로 삼아 생활해 온 조선조 문인에게 있어 학문의 본고장인 중국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399) 허봉 역시 내 일찍이 멀리 가 보고자 하는 뜻을 지녔는데 다행히도 왕사(王事)로 인하여 그 숙원을 풀었다 400)고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문화를 직접 체득하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사행에 자원한 동기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간의 선행 연구자들은 허봉이 서장관을 자청한 주된 목적이 명의 사 대부들과 주(朱) 왕(王)의 변(辨) 을 논란하고자 했던 것이며, 이는 명경(明京) 에서 문묘를 배알하고 그 배향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포폄(褒貶)을 표명한 것 이나, 가는 곳마다 양명(陽明)을 종사하는 부당성과 양명학의 이단성을 논했던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401)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 같은 견해는 유성룡이 조 천기(朝天記) 서문을 통해 허봉이 정학서원(正學書院)과 태학관(太學館)을 찾 아 홀로 정대(正大)한 주장을 부르짖으며 뭇사람들의 말에 대항하되 동요되지 않고 꺾이지도 아니한 것은 더욱 존경할 만한 일 이라고 치하한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당대의 정세를 고려할 때 일면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허봉의 대명사행에서 양명학 변척(辨斥) 활동은 어떠한 의의를 갖는 것일까? 이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변척 논의가 이루어진 배경과 그 성격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봉이 활동하던 16세기 중 후반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인해 조선의 사상계 가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 시기였다. 양명학의 전래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논란 이 있었으나 오종일이 1521년(중종16)에 눌재 박상(訥齋 朴祥)과 십청헌 김세필 (十淸軒 金世弼)이 양명의 전습록(傳習錄) 을 시로 화답하며 변척했던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그 시기가 중국에 있어서 전습록 의 초간 시기인 명(明) 무종(武 宗) 13년(1518)과 불과 3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을 밝혀내었는데, 이로써 양명 학이 조선에 도입된 시기와 중국에서 전습록 이 간행된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02) 399) 韓梅, 許篈 <朝天記>의 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p ) 許篈, 앞의 책, 後叙 余宿抱遠遊之志 竊幸因王事 以償其願 401) 尹南漢, 朝天記 解題 민족문화추진회 編, 국역 연행록선집 Ⅰ, 1977, p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1, 2003, 국사편찬위원회, pp.294~295 참조 이종 호는 저서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에서 양명학의 유입 시기를 전습 록 이 수입된 1521년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이유로 첫째, 유

151 양명학은 상산 육구연(象山 陸九淵 : 1139~1192)의 학문과 더불어 육왕학 (陸王學) 이라고 일컬어지거니와 양명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사상적 선하(先河) 를 이룬 상산학(象山學)과 궤적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는데,403) 상산학의 창시 자인 육구연의 주된 논의는 마음이 곧 천리[心卽理] 라는 것으로서, 이는 주자가 말한 (인간의) 본성이 곧 천리[性卽理] 라는 주장과 대치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 의 깊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이 마음 을 기반으로 하여 학문을 가르치려 했는 데, 육구연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마음의 신령함과 이 이(理) 의 밝음은 결코 외부 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마음에 내재하는 인(仁) 을 보존하여 그 본래 의 빛을 훼손하지 않고 진정으로 주인이 된다면, 외부 사물에 의해 동요하지 않 고 잘못된 이론에 유혹되지 않으므로 한결같은 행동을 지향할 수 있다. 따라서 주자가 그토록 중시한 격물(格物) 의 개념 역시 그에게 있어선 결국 마음 공부 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404) 상산학 역시 중종 연간을 전후해 조선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517년 (중종 27)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한효원(韓效元)이 원자(元子)를 교양하는 글을 올리면서 육구연의 말을 인용한 것405)이나 1542년(중종37) 예조 판서 김안 국이 인쇄할 만한 책을 건의하면서 상산집(象山集) 이 비록 주자와 취지가 다 르기는 하지만 심성(心性)의 학문은 이에 따라 강명(講明)할 수 있으니, 학자가 정자(程子)와 주자의 가르침을 숭상하는 데에 이 문집을 참고하면 유익함이 있 을 것 406)이라고 말한 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상산학과 양명학이 전래된 16세기는 중종반정으로 인해 정권이 교체되 성룡이 書陽明集後 에서 양명의 글 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전습록 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던 것과 둘째, 최초의 양명학 비판이 1566년 퇴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바, 유 입에서 비판까지의 공백이 너무 길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웠다. 403) 위의 책, p ) 楠本正繼 著, 김병화 이혜경 譯, 宋明儒學思想史, 예문서원, 2005, pp.431~433 참 조 405) 中宗實錄 卷27, 12年(1517 丁丑) 1月 19日(乙未) 홍문관 부제학 한효원 등이 원자 (元子)를 교양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중략) 상산(象山) 육씨(陸氏)가 이르기를 그 의 학문을 논함이 그 스승을 논함만 같지 못하나, 스승을 얻고서도 마음을 비우고 자신 을 맡기지 않는다면 또한 스승을 허물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弘文館副提 學韓效元等上敎養元子書 其書曰 (중략) 象山陸氏曰 論學 不如論師 得師而不能虛心委己 則又不可以罪師) 406) 中宗實錄 卷98, 37년(1542 壬寅) 5월 7일(丁亥) 象山集 宋朝巨儒陸九淵所著 先生 與朱子一時 專心於尊德性 往復辨論 雖與朱子異趣 心性之學 因得以講明 學者崇尙程朱之 敎 參考此集 則不無有益

152 면서 사림의 새 정치 이념이 실험되었으며, 국제적으로는 조선과 명, 일본이 전 쟁을 벌이던 격변의 시기였다. 왕수인에 의해 창도된 양명학은 바로 이런 시기에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양명학은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 이 처 음 발간된 직후 바로 조선에 알려진 듯하며 1558년에는 양명집(陽明集) 이 수 입되기에 이른다.407) 즉, 양명학이 막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16세기 전반부터 조선의 학자들은 그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408) 특히 양명학 수입 초창기에 훈구 세력과 정쟁을 벌이던 사림파들은 주자학의 말폐를 질타하고 나선 양명학의 의도에 대해서 공감했으며, 양명학자들과 자신들 이 문제의식에 있어 공유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409) 이들은 지나치게 이론 화 사변화(思辨化) 되어 현실의 문제 해결에는 취약점을 보였던 성리학의 대안 으로 양명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결과 양명학은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 기에 유리했던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탄력성을 보인 서경덕이나 조식 계통의 학자, 불우한 처지에 있던 종실이나 서얼 출신의 학자들 에게 일부 수용되었으며,410) 후에 명의 서책(書冊) 유입 및 양명학자들의 사행 (使行) 등이 더해지면서 빠른 속도로 조선의 사상계에 침투되기에 이른다.411) 407) 조선에 양명집 이 수입된 계기는 유성룡의 서애집 권18, 書陽明集後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양명의 문집(으로 말하면) 내가 17세에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었는 데, 마침 사은사 심통원(沈通源)이 연경에서 돌아왔으나 대간이 점검하지 않았음을 탄핵 하여 파직 당하게 되었다. 압록강 가에 짐바리를 내버리고 갔는데, 짐 보따리에 이 문집 이 있었다. 당시에 아직 양명의 글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내가 그것을 보 고 기뻐서 곧 아버님에게 말씀드리고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끼게 하여 상자 속에 간직한 지가 어언 35년이 되었다.( 右陽明文集 余年十七 趨庭義州 適謝恩使沈通源自燕 京回 臺劾不檢罷 棄重于鴨綠江邊而去 行橐中有此集 時陽明之文未及東來 余見之而喜 遂 白諸先君 令州吏善寫者謄出 旣而藏篋笥中 忽忽三十有五年 ) 408) 金太年, 16세기 조선성리학자들의 양명학 비판 연구, 韓國思想史學 19집, 한국 사상사학회, 2000, pp.154~ ) 金太年, 위의 논문, p.164~ ) 尹南漢, 朝鮮時代 陽明學硏究, 집문당, 1974, p ) 그 대표적 인물이 1567년, 명(明) 융경제(隆慶帝)의 등극을 통보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다. 이들은 육구연의 학문을 계승하여 心卽理 를 주장했던 인물들로 방문 중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을 만났으나 학문의 계통이 달라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수 없었다. 宣祖修正實錄 卷1, 즉위년(1567, 丁卯) 7월 17 일庚午) 기사에는 두 사신은 또 학문을 좋아하여 우리나라의 문장을 보기를 원하였고, 또 우리나라에도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하는 이가 있는가 물었다. 그 사실이 알려 지자 상이 예조에 명하여 선정신(先正臣) 10여 명의 성명을 적어 보이게 하였다. 위시 량이 그 중 이언적의 저서(著書)를 보자고 하여 이황(李滉)이 그의 논태극서(論太極 書) 를 보여 주었는데 위시량이 그것이 옳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위시량이 육학

153 그러나 두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사림은 위축되었고 여기에 명종대 보우(普 雨)의 불교 부흥 운동까지 더해지면서 조선의 학계에 위기감이 고조되자, 급기야 는 도학을 수호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성리학자들의 고심은 결국 이 황을 선봉으로 한 이단변척(異端辨斥)과 심성논쟁(心性論爭)으로 귀결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양명학 역시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라는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본래 사문(斯文) 은 공맹(孔孟)의 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문난적 이란 공 맹 유학의 도(道)를 어지럽히는 학문이나 학파 또는 학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 러나 조선조에 양명학을 사문난적 이라 칭한 것은 공맹 유학에 대한 것이 아니 라 주자학, 다시 말해 당시의 신분적 봉건계급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에서 였다. 양명학은 본래 공맹 유학의 민본(民本) 정신, 즉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역 성(易姓) 혁명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사상으로서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 도덕성, 창의성, 역동성을 중시하였고 인간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더불어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사민(四民) 평등설을 주장하 는 등 여러 모로 근대지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조에 양명학은 절대왕권의 권력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임과 동시에 막강한 봉건계급체제의 질서 를 위해 이용된 주자학, 즉 관학(官學)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 다.412) 이렇게 많은 유자들이 도학의 위기를 절감하는 가운데, 퇴계 이황은 1566년 (명종 21),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 을 지어 양명학 배척을 공식화하였다. 그 는 모든 심학(心學) 계의 학문을 상산학과 연결된 선학(禪學)으로 보고 그 대표 로 왕수인을 지목하였는데, 퇴계가 양명학을 바라본 시각이 어떠했는지는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난다. 이 말은 말단(末端)을 추구하는 학자들이 헛되이 구이지학(口耳之學)만을 일삼 는 폐단에 절실히 맞는다. 그러나 이 폐단을 구하자고 억지로 파고들어 지행합일 (知行合一)의 논의를 만들었으니 이에 대해 아주 세밀히 변론하였지만, 말이 교묘 해질수록 뜻은 더욱 멀어지는 것은 어째서인가?413) (陸學)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주자(朱子)와는 논의를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兩使好學 求見東國文章 又問 東國亦有心孔 孟心者乎 事聞 命禮曹 抄示先正臣十 餘人姓名 魏求見李彦迪著書 李滉示以 論太極書 不以爲可 蓋魏爲陸學 與朱子異論也) 412) 金吉洛, 韓國의 象山學과 陽明學, 청계, 2004, pp.59~60 413) 李滉, 退溪集 卷41, 雜著, 傳習錄論辨 此言切中末學徒事口耳之弊 然欲救此弊 而 强鑿爲知行合一之論 此段雖極細辯說 言愈巧而意愈遠 何也

154 이는 이황이 중국 사상사에서 심학이 등장한 이유와 그 논의의 쟁점, 그리고 그 귀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실천적 측면에서 주자학이 갖는 한계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중국 사상계 의 탈(脫)주자학적 움직임이 조선에서도 실현될 가능성을 예측하고 그것을 미연 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414) 이렇듯 이황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적극 배척한 것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 해 사화 및 정권 교체가 거듭되면서 통치자의 도덕성 문제가 새로운 정치적 과 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조선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 그가 치자(治者)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 바 도학정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켰던 까닭에 이후 조선은 안정된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치 현실에서 위정자(爲政者)의 수신(修身)을 통한 도학정치의 확립 이라는 주자학적 정치의식이 성숙되어 가던 시기, 양명학이 전 래됨으로써 주자학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려는 양명학은 주자학자들의 반대에 직 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퇴계에 의해 변척되기에 이른 것이다.415) 이러한 퇴계의 심학 양명학 비판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광범하였 는데, 사실상 퇴계는 양명학이 조선 사회에 수용된 초기에 그 근본적 문제를 철 저하게 비판하여 양명학 및 심학의 성장 확산을 그 근원에서부터 막는 역할을 수행하였다.416) 이후 퇴계의 문도들은 퇴계를 일컬어 도학이 와전되는 잘못을 깊이 우려하여 사이비(似而非)를 극력 배척, 백사(白沙)가 불선(佛禪)으로 흐른 것과 양명이 괴벽한 데로 치우친 것을 통렬히 논박하여 발본색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설(邪說)을 억누르고 정학(正學)을 부식(扶植)시킨 공이 실로 우리 동 방의 고정(考亭)이라 할 만하다 417)고 치하하며, 저마다 변척의 제일선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양명이 송나라 말기에 문장의 뜻이나 새기는 폐단을 구제하려 오로지 본심만 일삼을 것을 설파하였으나, 그 말류(末流)의 폐단이 도리어 문장의 뜻을 414) 정도원, 退溪 李滉과 16世紀 儒學, 문사철, 2010, pp.74~75 415) 송석준, 조선조 양명학의 수용과 연구 현황, 陽明學 23輯, 한국양명학회, 2004, p ) 금장태, 退溪門下의 陽明學 이해와 비판, 陽明學 2輯, 한국양명학회, 1998, P ) 宣祖實錄 卷10, 9年(1576 丙子) 4月 24日(丁亥) 若其深懼調傳之失 力排似是之非 白沙流禪 陽明之頗僻 無不極論痛斥 以爲拔本塞源之地 則抑邪扶正之功 實我東方之考亭也

155 새기는 것보다 심함을 알지 못하였다 418)고 하면서 왕양명은 오로지 양지(良志) 를 극진히 발휘하는 것을 학(學)으로 삼고 도리어 주자의 이론이 지리하고 밖으 로 달린다고 반박하니, 이야말로 석씨(釋氏)의 설 419)이라고 비난하였는데, 이는 실상 양명의 설이 말학(末學)들의 구이지학(口耳之學)만 일삼는 폐단에 딱 들어 맞기는 하나 이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억지로 천착(穿鑿)하여 지행합일 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낸 것 이며 사사물물(事事物物)을 일체 쓸어 없애고 모두 본심에 끌어들여 뒤섞어 말하려 하니 이것이 석씨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때로 조금씩 석씨를 공격하는 말을 하여 자기 학문이 석씨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스 스로 밝히고 있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 420)이라 공박한 퇴계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퇴계 문인들이 벌인 양명학 변척의 대표적인 예로는 1566년, 윤근수(尹根壽) 가 명인(明人) 육광조(陸光祖)를 대상으로 펼친 이른바 주륙논변(朱陸論辨 을 들 수 있다. 주륙논변 의 부록에는 이황과 유희춘이 직접 이 글을 읽었다는 언급이 더해져 있는데 특히 이황은 전일 윤자고(尹子固)의 문답과 위시량(魏時 亮)의 제설(諸說)에서 육상산과 선학이 천하를 무너뜨림이 이와 같음을 보고 깊 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 가는 사람은 많아도 사람들을 만나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경우는 거의 없다. 그대는 능히 수백 명의 사람을 만날 것이니 이런 정론(正論)을 발하여 그들의 미혹함을 점검하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421)라고 하여 당시 사행을 앞두고 있던 유성룡에게 윤근 수와 마찬가지로 중국 학자를 만나 논변을 벌여 볼 것을 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22) 418) 柳成龍, 앞의 책, 雜著, 王陽明 陽明欲救宋末文義之弊 而專爲本心之說 不知其流弊 反有甚於文義也 419) 柳成龍, 위의 책, 雜著, 王陽明以良知爲學 王陽明專以致良知爲學 而反詆朱子之論爲 支離外馳 正釋氏之說也 420) 李滉, 退溪集 卷41, 雜著, 傳習錄論辨 陽明徒患外物之爲心累 不知民彝物則眞至之 理 卽吾心本具之理 講學窮理 正所以明本心之體 達本心之用 顧乃欲事事物物一切掃除 皆 攬入本心衮說了 此與釋氏之見何異 而時出言稍攻釋氏 以自明其學之不出於釋氏 是不亦自 欺以誣人乎 421) 李滉, 위의 책, 卷31, 書, 答柳而見, 揆前日尹子固問答及魏時亮諸說 陸禪懷襄於天下 乃如是 令人浩歎不已 然入燕者數多 能遇此等人 作此等話頭者亦無幾 公能遇數百諸生 發 此正論 略點檢其迷 422) 우응순, 月汀 尹根壽와 明人 陸光祖의 朱陸論爭 朱陸論難을 중심으로, 대동문화 연구 37輯,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0, p

156 이로 미루어 볼 때, 윤근수가 사행 중 명인들과 양명학을 논척한 사실이 당대 조선의 학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을지는 충분히 예상하고 남음이 있 다. 특히나 서인 윤근수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동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입지를 강화하고 이황의 문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동인이야말로 조선 유학의 도통을 직 접 계승했다는 사실을 새로이 표명할 필요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 같은 사명을 위해 발탁된 인물이 바로 허봉이었다. 허봉은 동인의 영수인 허엽의 아들이었고 재주가 뛰어나 한 시대가 재자(才子)로 추대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이이의 뒤 를 이어 조선 학계의 종주(宗主)가 될 만한 인물로 기대를 모으던 중이었다.423) 여기에 의론(議論)이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을 숨기지 못하는424) 성품까지 더해 져 이단 변척의 중임(重任)을 맡기기에는 그 이상의 적임자가 없었을 것으로 생 각된다. 1574년의 사행은 5월 11일에 발정(發程), 11월 3일에 귀국함으로써 약 6개월 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조천기 의 기록을 참조하면 그 기간 동안 허봉이 명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양명학 변척 활동을 벌인 것은 모두 네 차례였다.425) 허봉은 명에 가기 전부터 이미 명에서 양명학이 흥기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국내 여행 단계에서 율곡을 방문하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를 지참해 가는 등 양 423) 宣祖修正實錄 卷19, 18년(1585 乙酉) 6월 1일(庚子) 허봉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 았으며 시사(詩詞)가 아름다웠으므로 한 시대가 재자(才子)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당 시 사람들이 종주(宗主)로 여기며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이이를 잃었지만 미숙(美叔)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허봉 역시 자신만만하게 스스로 앞장서 이이 를 공격하다가 패망에 이르니,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篈聰穎强記 詩詞艶麗 一代推爲才子 故時人宗之 曰 吾儕雖失李珥 有美叔在 何損焉 篈亦傲然自當立幟 攻珥 以至於敗 談者惜之) 424) 尹國馨, 聞韶漫錄 許篈美叔 草堂先生之第二子也 聰敏穎達 出人等夷 十歲前才華已發 名聞藉藉 (중략) 余久與作玉堂僚 觀其容止淸逸 論議超銳 不能自韜其鋒芒 知之者愛其非常 調 不知者或病其太露 而甚者則至摘訾而加斥焉 425) 허봉은 조천기, 후서 를 통해 여행길에 지나는 곳마다 그 산천의 웅장함과 인물 의 번창함을 보고 항상 이를 눈에 두고 마음에 간직하여 옛 일을 참고하고 오늘에 비추 면서 간독(簡牘)으로 갖추어 고리에 넣어 두었는데, 오랜 뒤에 꺼내었더니 이미 쌓여서 책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왕래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겨우 그 형상에 방불한 것만을 기록했을 뿐, 자세한 곡절은 모두 잊어버렸던 것이다.(途所經過 其山川之鉅麗 人物之繁 殖 恒有以存諸目而藏諸心 參之古而驗之今 具簡牘置篋笥 久乃發之 則已積成卷帙 而顧以 跋涉之餘 僅記其形模彷佛 而纖微曲折 盡忘之矣)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허봉이 여정의 그때그때 적어둔 것을 나중에 그대로 묶어 책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허봉의 변척 활동은 명(明)의 인사(人士)들을 만날 때마다 반복해서 행해졌을 것이나 촉박한 여 정 탓에 모두를 세세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157 명학과 부딪힐 준비를 미리 해 두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 도착했을 때 양명학 의 풍미(風靡) 정도는 그의 상상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이었다.426) 이에 충격을 받은 허봉은 6월 25일 요동(遼東)의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 그곳에서 만난 하성시(賀盛時) 성수(盛壽) 형제와 위자강(魏自强) 여충화(呂沖和) 등을 대상 으로 양명학에 대한 논변을 시작하게 된다. 하성시 등이 양명의 학문은 공맹(孔孟)을 종주로 하였으므로 사특한 주장으로 도를 해치는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문장과 공업(功業)에 볼 만한 것이 있 어 근세의 종주가 되었으므로 공자의 사당에 배향한 것 427)이라고 설명하자 허 봉은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왕수인(王守仁)이란 사람은 육씨(陸氏)의 여론(餘論)을 주워 모아서 공공연하고 방자하게 헐뜯고 다시 대학장구(大學章句) 를 정하면서, 그 말이 참으로 나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라면 비록 그 말이 공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나는 감히 믿 을 수 없다 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어느 곳인들 이 르지 않겠소? 왕수인이 만약 삼대 이전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말을 조작하고 백성 을 어지럽게 한 죄를 받았을 것입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소인(小仁)은 대인(大人) 의 말을 멸시한다 고 하였는데, 그것은 왕수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대저 왕수인 의 학문은 본래 석씨(釋氏)에게서 나왔으며, 머리를 고치고 얼굴을 바꿈으로써 그 속임수를 꾸민 것이었으니, 그의 거짓을 명철한 이가 보게 된다면 마땅히 스스로 드러날 것인데, 여러 군자(君子)들이 이를 깊이 상고하지 못한 것뿐입니다.428) 왕수인은 근본 존재인 마음 과 그것의 혼일적(混一的) 성격을 얘기함으로써 지루하고 외적인 추구를 일삼는 세속적 유가의 학문이나 그런 일로 분주한 주자 학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사회 국가의 구체적 생활에 입각한 윤 리도덕을 말함으로써 불교와 도가의 공허한 학문, 특히 선학(禪學)을 압박하려고 시도했다.4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즉리(心卽理) 를 주장하며 그 본체를 양지 426) 韓梅, 앞의 논문 p ) 許篈, 朝天記 甲戌年(1574) 6月 26日條 本朝陽明老先生 學宗孔孟 非邪說害道者 比 且文章功業 俱有可觀 爲近世所宗 已從祀孔廟矣 公之所聞 意昔者僞學之說惑之也 428) 許篈, 위의 책, 獨王守仁者 掇拾陸氏之餘 公肆謗詆 更定大學章句 其言至曰 苟不合 於吾 則雖其言之出於孔子 吾不敢以爲信然也 推得此心 何所不至 守仁若生於三代之前 則必服造言亂民之誅矣 孔子曰 小人者 侮大人之言 其守仁之謂歟 夫守仁之學 本出於釋 改頭換面 以文其詐 明者見之 當自敗露 諸君子特未深考之耳 429) 楠本正繼 著, 김병화 이혜경 譯, 앞의 책, p

158 (良知) 의 논리로 설명하는 그의 학설은 자국 뿐 아니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서 까지 선학 이라는 공격을 받아 온 바 있었다. 또한 퇴계 이래 다양한 사상적 모 색을 끝내고 주자학 일변도로 경화(硬化)되어 가던 조선의 학계는 중국 내 양명 학의 성행을 유학의 위기 로 규정하고 이를 근심하던 상황이었다. 허봉 역시 위의 글에서 앙명학이 정주(程朱)의 설을 부정하고 공자의 권위까 지 위협하는 사설(邪說) 이며 불교의 교리에 근접한 것 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 는데, 그는 왕수인이 논하고 저술한 것은 내가 모두 낱낱이 정하게 살피고 자세 히 연구하였으므로 범연(泛然)하게 전하여 들은 데 비할 바가 아니다. 라고430) 주장했지만 실상 이는 허봉 개인의 견해가 아닌, 이황의 설을 종지로 따르던 당 대 조선 학계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특히나 허봉이 이후의 변척 활동에서 참으로 나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라면 비록 그 말이 공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 도 나는 감히 믿을 수 없다 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당 시의 조선 학자들이 양명학을 정학(正學) 이 아닌 위학(僞學) 으로 규정한 이유 가 무엇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허봉의 논변에도 불구하고 명인(明人)들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그 는 옛적에 도가 같지 아니하면 서로 의논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나는 주자의 문[朱門]을 높이고 그대들은 왕학(王學)을 즐겨 그대는 달마다 그것을 열심히 하 고 나는 날마다 이것을 연구할 것이니 끝내 (의견이) 꼭 같아지기를 바랄 수 없 다 431)며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마침내는 이렇게 탄식하게 된다. 이로써 보건대, (그들은) 오늘의 천하에 다시 주자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설 (邪說)이 횡류(橫流)하고 금수(禽獸)가 사람을 핍박하여 이륜(彛倫)이 장차 멸절 (滅絶)되고 국가가 장차 멸망의 지경에 이를 것이니, 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중략) 심지어 종사(從祀)의 대열에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니 성묘(聖廟)를 모독함 이 큰 것이다.432) 위에 언급한 사설횡류 금수핍인(邪說橫流 禽獸逼人) 은 맹자 에 보이는 것 430) 許篈, 위의 글, 守仁之所論著 僕皆一一精察而細核 非泛然傳聞之比也 431) 許篈, 위의 글, 古云 道不同 不相爲謀 我宗朱門 君耽王學 爾月斯邁 吾日斯征 終無可 望於必同也 432) 許篈, 위의 글, 由此觀之 則今之天下 不復知有朱子矣 邪說橫流 禽獸逼人 彝倫將至於 滅絶 國家將至於淪亡 此非細故也 (중략) 至以躋於從祀之列 其汙衊聖廟大矣

159 으로, 이는 요순(堯舜)이 나타나기 전이나 주(紂)의 시대, 혹은 공자가 춘추 를 편찬하고, 맹자가 묵자(墨子)나 양주(楊朱)와 같은 이단자를 바로잡은 때와 같은 시기에 시대의 혼란을 탄식하고 남을 이단자로 배격할 때 자주 사용되던 말이다. 불교 육구연 왕양명을 공격하는 진건(陳建)의 학부통변(學蔀通辨) 433)에 이 러한 말이 흔히 보이며, 통상 중국인들이 그 시대와 세인(世人)을 탄식하며 배격 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434) 이로 미루어 볼 때, 허봉은 양명학이 만연한 당대의 기풍을 말세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정주학의 권위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여 급 기야는 공자와 양명이 나란히 종묘에 배향되기에 이른 현실을 심히 개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천기 에 나타난 허봉의 두 번째 양명학 논척은 8월 2일, 길에서 만난 국자 감생(國子監生) 섭본 자립435)(葉本 子立)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변척 논리 역시 하성시 등에게 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양명이 논하고 저술한 것은 천 마디 만 마디가 현묘(玄妙)하고 기괴한 말 이거나 장황하고 우렁차고 번쩍이는[震輝] 변론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는 홀로 깨우쳤다고 여겼으며 급기야는 만약 내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비록 그 말 이 공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나는 감히 믿지 않겠다. 고 하는 데에 이르렀으 니 그의 졸박(猝迫)하고 강려(强戾)한 태도는 극히 심한 것 이라436) 운을 뗀 뒤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 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대체로 이른바 양지(良知) 라 하는 것은 곧 천리본연(天理本然)의 정묘한 것을 이르니, 억지로 만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사람마다 모두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그 어른을 공경할 줄 안다면, 무릇 학문을 하는 이가 양지를 놓아 버리고 따로 찾거 나 검토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면 기질(氣質)과 물욕(物欲) 433) 학부통변(學蔀通辨) 은 명(明)의 성리학자 진건(陳建)이 불교, 육상산 왕양명의 학 문을 이단(異端)으로 인식하고 이를 배척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 전편에서는 주자와 육상산이 초기에는 일치하였으나 만년에는 차이가 났다는 것을 밝혔고 후편에서는 상산 이 겉으로는 유가(儒家)이나 실제로는 불가(佛家)임을 주장했다. 속편에서는 불학(佛學) 이 그럴듯해 보이나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종편에서는 성현의 정학(正學) 은 함부로 논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434) 夫馬進 著, 정태섭 外 譯, 燕行使와 通信使, 新書院, 2008, p ) 자립(子立) 은 섭본의 자(字)이다. 436) 許篈, 앞의 책, 甲戌年(1574) 8月 2日條 陽明之所論著 篈嘗略窺其一二矣 千言萬語 無 非玄妙奇怪之談 張皇震耀之辨 自以爲獨得焉 至曰 如其不合於吾意 則雖其言之出於孔子 吾不敢以爲信然 此其猝迫强戾之態極矣

160 이 서로를 가리고, 침입하여 천리본연함 이 어두워지는 까닭에, 성현들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반드시 공경[居敬]으로써 근본을 세우고 격물(格物)로써 앎을 이룬 뒤에야 인륜을 밝히고 성학(聖學)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양명의 주 장과 같이 한다면 이는 사물을 버리고 서책을 없애고서 우뚝이 홀로 앉아 그 만분 의 일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양명의 학문 이 석씨(釋氏)의 무리가 되는 소이(所以)이니 교훈으로 삼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 다.437) 주자가 논한 공부 방법의 핵심은 격물치지(格物致知) 이다. 주자가 말한 격 물 은 즉물이궁기리(卽物而窮其理), 즉 사(事) 와 물(物) 에 직면하여 그 사물 이 지니고 있는 일정한 이(理) 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치지(致知) 는 즉물궁 리 를 통해 나의 지(知) 를 점진적으로 확장하고 궁극에 이르게 함으로써 내 마 음의 본체를 온전히 하고 또한 그 기능을 크게 활용함을 이른다.438) 그런데 양 명은 이 같은 주자의 설에 반대, 맹자의 양지 와 시비지심(是非之心) 으로서의 지(知) 의 개념을 빌려와 대학(大學) 의 치지 를 해석하고 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이른바 치양지설 을 제출했던 것이다.439) 왕수인은 양지 가 환경이나 교육과 관계없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의식과 정감 의 통일체로서 선험성과 보편성을 띠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이 같은 관점에 입 각, 그 학문의 방향을 외적 세계에 대한 지식 추구, 즉 격물로부터 내적 양지에 대한 확충으로 돌리고 이를 다시 지행합일로써 실천에 옮겨야 지(知) 가 완성된 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왕수인의 견해는 실상 외물(外物) 의 탐구를 중시하는 주자의 입장에 정면 대치되는 것으로서, 앞서 인용한 허봉의 양명학 비판 역시 이를 지적한 것이었다. 이러한 허봉의 논의에 대해 섭본 등은 양명의 학문이 선(禪)에 가깝다고 한 것은 그가 양지 만을 말하고 양능(良能) 을 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탓 인데 양지는 곧 체(體) 이고 양능은 곧 용(用) 이므로, 체 가 서지 않았는데 437) 許篈, 위의 책, 夫所謂良知云者 乃天理本然之妙也 有不待强作 而人皆知愛其親敬其長 則凡爲學捨良知 別無尋討處矣 但人之生也 氣質物欲 迭蔽交攻 而天理之本然者晦 故聖賢 敎人 必也居敬以立其本 格物以致其知 然後可以明人倫而成聖學也 今如陽明之說 則是棄事 物 廢書冊 兀然獨坐 蘄其有得於萬一也 烏有是理哉 此陽明之學所以爲釋氏之流而不可以爲 訓者也 438) 朴連洙, 陽明學의 理解, 陽明學과 韓國 陽明學, 집문당, 1999, p ) 朴連洙, 위의 책, p

161 용 이 저절로 행해질 수는 없는 일 이며 만일 양명의 학문이 선 이라면 심신(身 心)과 사물(事物)이 밖으로 향하여 텅 비고 고요한 데[空寂]로 흐르게 될 것인 데, 양명은 입신하여 공을 세운 일이 많으므로 선 과는 다르다 440)며 강력히 반 발하였다. 이에 허봉은 육구연이 돈오(頓悟)와 경약(徑約)의 주장을 하자 주자가 이를 심히 배척하였는데, 이제 양명이 육구연에 근본하고도 이를 경서로써 꾸몄 으며 기이하고 험악한 것을 더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양명을 배척하여 이단이라 고 하는 이유 441)라 공언하며 대화를 종결하게 된다. 전술한 두 번의 논변이 허봉과 견해를 달리 하는 양명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변척 활동이었다면, 뒤의 두 번은 그와 동일한 학문적 입장을 취하는 주자학자들 과의 만남이었다. 허봉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양명학은 위학(僞學)이며, 진정 한 의미의 성학(聖學) 은 오로지 주자학뿐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하기에 이른다. 섭본을 만난 다음 날인 8월 3일, 허봉은 섬서(陝西)의 거인(擧人)442) 왕지부를 만나 어떤 성현을 존중하고 숭배하는가 를 물었다. 그가 공맹과 정주의 도를 숭 상한다 고 답변하자 허봉은 다시 육구연과 왕양명의 학문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왕지부가 육구연은 선교(禪敎)이고 왕양명은 위학(僞學) 이라 단언하였음에 허봉 이 다시 양지설 의 옳고 그름을 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지부는 양지설 은 한 군데로만 치우치는 것이니 위학이며, 요즘에 와서 종사(從祀)를 청하는 이 가 많은 것은 한갓 양명의 제자가 조정에 많이 있는 까닭에 그 스승을 높이고자 한 때문이고 조정의 의론은 이를 옳게 여기지 아니했다 고 설명했다. 왕지부와의 대화를 마친 허봉은 너무도 흡족한 마음에 글의 말미를 빌어 자신 의 소회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은 사람마다 모두 왕씨(王氏)의 학문을 추앙하여 천고의 비밀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왕지부만이 홀로 이를 배척하고 있으니, 광란하는 물결 속에 선 지주 (砥柱)라고 이를 만하다. 내가 수천 리를 와 비로소 이런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다 행한 일이 아니겠는가?443) 440) 許篈, 앞의 책, 本曰 承敎諭陽明之學爲近於禪者 以其獨言良知而未及於良能故也 良知 卽體 良能卽用 豈不以體立而用自行乎 若禪則外身心事物 而流於空寂矣 陽明亦建有許多事 功可見 要識陽明 441) 許篈, 위의 책, 昔者 江西陸子靜曾有頓悟徑約之說 朱子深排之 不遺餘力 若陽明之論 則本諸江西而文之以經書 又加奇險者也 (중략) 此所以斥陽明爲異端 而不容有小避 伏望珍 砭可否 442) 옛날 중국에서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에게 수여되었던 자격을 이른다

162 허봉 등이 중국을 여행한 1574년 무렵은 양명학이 일세를 풍미하는 추세에 놓여 있을 때였다. 이러한 학문과 문화의 새로운 조류는 매년 몇 번이나 서울과 북경을 왕복하던 연행사의 보고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허봉이 자원하여 연행사에 참가한 것 역시 그를 통해 중국 지식인들이 정말로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어느 정도 신봉하고 있는가를 직접 확인해 보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444) 그렇게 맞닥뜨린 중국의 현실 은 예상보다 훨씬 참담하여 허봉은 가는 곳마다 선비들이 서로 따라서 현혹되어 만인의 입에서 한 가지의 말이 나오는 현실을 직접 목도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당대의 현실을 사도(斯道)가 이미 쇠하여 다시는 지탱할 수 없는 지경 445)에 이 른 것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 밖에 허봉은 8월 20일, 양수중(楊守中)이라는 사람을 만나 다시 왕양명의 학문에 대해 물었는데, 그가 양명은 단지 양지만을 말하였으니 위학이다 라고 대답하자 그럼에도 양명을 높이는 이가 많은 것과 종사(從祀)에까지 이르게 된 까닭은 무엇이냐 고 반문하였다. 양수중은 그것은 천하의 통론(通論)이 아니며 양명을 종사하자는 의론 역시 아직 정해지지 아니한 것 446)이라고 답변하며 앞 서 허봉이 만났던 왕지부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앞선 네 차례의 논변 과정을 살펴보면, 허봉이 사행 도중 만난 명의 학자들에 게 매번 동일한 맥락의 질문을 던지고 상대방의 태도를 보아 그 대응을 달리했 던 것이 드러난다. 명인들을 대상으로 그가 펼쳤던 주장의 논지는 첫째, 격물 을 통한 수련의 방법을 무시한 채 양지 만을 중시하는 양명의 설은 공맹의 도가 아 닌 석씨 의 설에 가까운 것 이며 둘째, 양명학은 정학(正學)이 아닌 위학이고 443) 許篈, 앞의 책, 方今人人皆推王氏之學 以爲得千古之祕 而之符獨排之 可謂狂流之砥柱 也 余行數千里 始得此人 豈非幸哉 444) 夫馬進 著, 정태섭 外 譯, 앞의 책, p ) 許篈, 앞의 책, 甲戌年(1574) 6月 26日條, 그런데 선비 된 자로서 따라서 서로 현혹 되어 만 사람의 입에서 한 가지의 말이 나오니, 비록 사특한 것을 물리치고 올바른 것 을 높이는 의논을 석ㆍ조(石趙) 두 분처럼 하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모두 시행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종사(從祀)의 대열에 제사 지내니, 성묘(聖廟)를 모독함이 큰 것이다. 슬 프다! 사도(斯道)가 이미 쇠하여 다시는 지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오늘날을 위하는 계 책으로 장차 어찌 해야 하겠는가? (而爲儒者轉相眩惑 萬口一談 雖有闢邪崇正之論如石 趙兩公者 皆不獲施行 至以躋於從祀之列 其汙衊聖廟大矣 嗚呼 此道已衰 無復可支吾者 爲 今之計 將如何哉) 446) 許篈, 위의 책, 甲戌年(1574) 8月 20日條, 余問守中曰 王陽明之學何如 曰 陽明單說良 知 正是僞學 余曰 然則今日何以推崇陽明者衆 至欲擧從祀之典乎 守中及二三監生不記姓名 者答曰 此亦非天下之通論 南人皆尊陽明 而北人則排斥之 故從祀之議 今尙未定也

163 사문(斯文)의 도를 해치는 이단이므로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런 데 허봉이 조천기 에 기록된 4회의 논변 과정에서 동일한 주장과 논리를 일관 되게 고수하고 있는 사실은 그의 변척 활동이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되고 계산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허봉이 앞서 하성시 일행과 만나 왕수인이 논하고 저술한 것은 내가 모두 낱 낱이 정하게 살피고 자세히 연구하였으므로 범연하게 전하여 들은 데 비할 바가 아니다 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사행 전, 명 학계의 동향과 양명학의 기본서 들을 철저히 분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천기 에는 양명이 주신호(朱宸濠)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수인의 제자 유양정(劉養正)이 신호의 심복이 되었고, 신호가 사로잡힌 후에 사람들이 배 가운데서 양정의 수간(手簡)을 얻은 사실까 지 파악하여 논척의 근거로 삼았던 일이 드러나 있다. 그는 또한 북경에서 돌아 온 친구로부터 양명학을 변척하는 어사(御使) 석군가(石君檟)와 조공사성(趙公思 誠) 등의 제본(諸本)을 받아 보았으며 일찍이 설문청(薛文淸)의 독서록(讀書錄) 까지 구해 읽는 등, 변척 활동을 준비하는 데 모든 전력을 다 하였다. 그렇다면 허봉이 양명학 변척에 이렇듯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여기에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해 논변을 펼친 이황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평생의 소원이 주자를 배우는 것 447)이라 고 말할 만큼 시종일관 유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했던 허봉이 이황의 뜻에 따라 충실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순수한 학문적 목적 외에도, 정치 활동으로서의 의미가 중대하게 나타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허봉은 동서분당의 진행 과정에서 양명학에 대해 보다 우호적 수용적 태도를 보였던 서인의 학풍에 반격을 가함으로써 동인의 영수를 자임(自任)하고자 했으며, 대명사행에서 양명학 변척 활동을 전개함으로 써 동인들에게 이데올로기적 선명성과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448) 그러면 허봉은 과연 어느 정도나 양명학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가 사행을 떠나기 전, 양명학에 대한 지식과 정보 수집을 위해 애썼음은 조천기 의 여러 기록들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정작 허봉이 양명학 변척을 위해 동원한 논리들은 이황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었을 뿐,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것은 447) 許篈, 앞의 책, 甲戌年(1574) 8月 2日條, 篈平生所願 欲學朱子 而未之有得 448) 金東珍, 許篈의 對明使行과 陽明學 辨斥, 文化史學 21호, 한국문화사학회, 2004, p

164 아니었다. 이황을 포함한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양명학 그 자체로 이 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선(先)이해된 주자학 이라는 인식틀을 가지고 양명학 을 나름대로 재구성해 놓고 이를 비판했는데, 이러한 선입관은 양명학을 주자학 과 완전히 다른 체계라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양명학을 주자학의 한 분파로 인식하고 이를 주자학의 논리틀 속에서 이해하려 하다 보니 여러 오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449)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양명학에 대한 이황의 논리 역시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비록 나이는 연소하지만 당대의 재사(才士)로 군림하던 허봉 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선유(先儒)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에는 무언 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 첫째는 양명학에 관한 허봉의 지식수준이 별반 높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그가 약관에 이미 천하의 책을 모두 읽었다 하더라도 사행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4세에 불과했다. 또한 당시 조선에 양명학 서적이 수입 유통되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 수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어 접촉이 쉽지 않았으며, 설사 양명학 서적을 접했다 하더라도 전습록 과 같은 기본서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허봉이 양명학의 논리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양명학에 대한 논리적 기반이 취약했던 허봉이 스승인 이황의 논리를 무비 판적으로 수용, 논척의 잣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봉 자신이 양명학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노선과 조선 유학계의 논의를 따라 개인적 견해를 표명하 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허봉을 포함한 그의 가인(家人)들은 지적 호기심이 강하 고 박학의 경향을 띠었던 인물들이므로 새롭게 대두된 양명학에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허봉이 주자학에 대한 의지를 강력히 천명한 사 실은 인정되나 그 역시 부친이나 다른 형제들처럼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지 녔던 흔적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이 같은 성향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로 퇴계 집 과 연려실기술 등에 수록된 다음의 글을 들 수 있다. 449) 金太年, 앞의 논문, p

165 허 하곡(許荷谷) 봉(篈)이 문순공(文純公) 이황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 당이 중이 되었으니 족히 볼 것이 없다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일절(一節)이 실로 중용(中庸)의 도에는 부합하진 않으나 처신은 청(淸)에 맞고 폐인 노릇한 것은 권도(權)에 맞다[身中淸廢中權]고 보이니 이는 어떠합니 까? 라고 하였다. (이황이) 대답하기를 매월(梅月)은 일종의 이인(異人)으로 색은 (索隱)ㆍ행괴(行怪)에 가까운데, 만난 시대가 마침 그러하여서 높은 절개를 이룬 것뿐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와 금오신화(金鰲新話) 같은 것을 보면 높 고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듯하다. 하였다.450) 윗글은 1570년에 있었던 허봉과 이황 간의 문답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동 일한 대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인식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황은 김시습이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유자의 길을 버리고 승려의 신분으로 돌아선 것과 저술들이 괴이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이인(異人)으로 규 정하였으며 그 절개 역시 시세에 부합하여 저절로 얻어진 것이라 폄하하였는데, 여기에서 특히 이황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김시습의 행적이나 금오신화 등 의 저작 등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완세불공(玩世不恭), 다시 말해 방외인적 성격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51) 반면 당시 스무 살이었던 허봉은,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한 것을 청절(淸 節)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 판단하였고 그것이 비록 정도(正道)는 아니나 권도 (權道)에는 부합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어, 원칙보다는 현실에 입각해 사고하는 독특한 사유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양명학에 대한 허봉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균 의 행적을 통해 그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허균이 18세나 위인 중 형 허봉에게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로, 허균에게서 자 주 발견되는 이단적 사고와 검속성(鈐束性) 부족한 행동들은 허봉의 경우와 유 사한 바가 있다.452) 당대인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았던 허균의 돌출된 행동들은 450) 李肯翊, 燃藜室記述 端宗朝古事本末 殉難諸臣 許荷谷篈問於文純公李滉曰 世人以 梅月堂之被緇爲不足觀 在篈之意以爲 梅月遯世一節 固未合於中庸之道 然而身中淸廢中權 如此看則何如 答曰 梅月別是一種異人 近於索隱行怪 而所値之世適然 遂成其高節耳 觀其 與柳襄陽書金鰲新話之類 恐不可以高見遠識許之也 451) 정길수, 韓國 古典 長篇小說의 形成 過程, 돌베개, 2005, p ) 한 예로 김장생(金長生)이 찬(撰)한 이이의 행장 에는 허엽이 경상 감사가 되어 병이 몹시 위중하였다. 그 아들 허봉이 응교(應敎)로서 사직서를 내고 그 아버지를 뵈러 가서 는 기생을 끼고 놀기만 하다가 병간호를 잘 하지 않아 허엽이 결국 죽고 말았다 는 언

166 상당 부분 그 기질적 특성에 연유했을 것이나 그에게 있어 아버지나 스승과도 같았던 허봉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허균은 성소부부고 의 곳곳에 양명학에 관한 언급들을 남겨 두고 있는데, 그 중 지사산으로 돌아가는 이나옹을 전송한 서[送李懶翁還枳柤山序] 라는 제하(題 下)의 글을 참고할 만하다. 나는 어린 시절 일찍부터 옛날의 문장 잘하는 사람을 사모하여 책이라고는 들여 다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찬란하고 보배롭고 크고 아름다운 구경 또한 넉넉 히 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동파(東坡)가 능엄경(楞嚴經 을 읽고 난 후 해외(海外) 의 문(文)이 더욱 지극히 높고 묘하여졌고, 근세의 왕수인 당순지(唐順之)의 글 도 모두 불경으로 말미암아 깨우친 바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아름답다 여 기어 자주 상문(桑門 : 불가)의 선비를 따라 소위 불교의 경전을 구하여 읽어보니, 그 달견은 과연 도랑이 패어지고 하수가 무너지는 듯했으며 그 뜻을 놀리고 말을 부리는 것은 나는 용이 구름을 탄 듯 아득하여 도무지 형상(形象)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그 글은 귀신같은 것이었다.453) 윗글에서 허균은 자신이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중국 문인들의 사례를 본 받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 坡)와 명대의 왕양명(王陽明) 당순지(唐順之)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왕양명과 더불어 그 이름이 언급된 당순지는 명나라 초기, 의고파(擬古派)의 전성기에 문학의 시대성을 인식하고 글에 있어 정감의 표출(表出)을 중시하였으 며, 왕기(王畿)454)의 학문을 이어받아 양명학자로도 널리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급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여색(女色)을 가까이하고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허봉 이 젊어서부터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황달에 걸리고, 시고 차가운 것을 지나치게 먹어 한담(寒痰)의 증세를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허봉의 기질이나 심리적 특성에 아우 허균과 일면 유사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53) 許筠, 惺所覆瓿藁 卷4, 文部1, 送李懶翁還枳柤山序 余少日 嘗慕古之爲文章者 於 書無所不窺 其瑰瑋鉅麗之觀 亦已富矣 及聞東坡讀楞嚴而海外文尤極高妙 近世陽明 王守 仁 荊川 唐順之 之文 皆因內典 有所覺悟 心竊艶之 亟從桑門士求所爲佛說契經者讀之 其 達見果若峽決而河潰 其措意命辭 若飛龍乘雲 杳冥莫可形象 眞鬼神於文者哉 454) 왕기(王畿)의 호는 용계, 이름은 기(畿), 자는 여중(汝中)이며 저장성(浙江省) 산인 (山陰) 사람이다. 1523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왕양명에게 사사하여 전서산(錢緖山)과 병칭되는 양명 문하의 준재(俊才)가 되었다. 이렇다 할 관직에 나가지도 않고 스승의 사후에도 사설(師說)의 강구(講究)와 보급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증자오(自證自悟)를 중

167 그렇게 볼 때 허균이 왕양명과 당순지의 글이 불경에 힘입은 바 크다는 말을 듣고 불경을 구해 읽었다 는 말을 한 것은 그가 이미 양명학 관련 저술들을 접 하고 있었던 것과 양명학에 상당한 호감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고백한 것임에 다름 아니라 생각된다. 그 밖에 허균이 한정록(閑情錄) 을 편찬하면서 여기에 왕양명의 글귀를 발췌 수록했던 것455)이나 학산초담 에서 명의 십대가(十代 家)에 관해 논하며 양명과 당순지의 글을 품평한456) 사실 역시, 그가 양명학 관 련 저술을 섭렵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예라 할 수 있다. 이들 형제의 나이차로 인해 허균의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허봉의 사행 시기보 다 훨씬 뒤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학문적 성향과 기질에 있어 허균과 많은 유사 점을 보이는 허봉이 양명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 다. 그렇게 본다면 왕수인이 논하고 저술한 것은 내가 모두 낱낱이 정하게 살피 고 자세히 연구하였다 는 허봉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어 쩌면 허봉은 사행 중 있을 변척 활동을 위해 양명학 서적을 탐독했던 것이 아니 라, 새로운 사상에 대한 지적 열의와 순수한 호기심으로 이미 그 이전부터 양명 학을 연구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가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초기의 양명학 수용자로 알려진 홍 인우 남언경과의 관계이다. 홍인우와 남언경은 화담의 문인들인데, 이들은 1553년경 양명학에 처음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인우는 부친인 홍덕연 (洪德演)의 영향으로 화담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허엽과 박순을 포 함한 화담 문하의 명류(名流)들과 교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엽과 홍인우 는 함께 지내며 학문을 토론할 정도로 두터운 교분을 유지했으며, 이들의 친분은 후대까지 이어져 허성은 홍인우의 문집 치재유고(恥齋遺稿) 의 서문을 쓰기도 시하였고 반드시 사설에 충실하지만은 않아서 정통파인 전서산의 학통에 비해 좌파로 불렸으나, 그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455) 許筠, 앞의 책, 閑情錄 卷11, 名訓 왕양명이 말하였다. 일분(一分)의 인욕(人欲)을 덜면 일분의 천리(天理)를 얻는다. 사자수언(四字粹言) (王陽明曰 感得一分人慾? 得一分天理) 456) 許筠, 위의 책, 卷26, 鶴山樵談 명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十大家) 는 공동(崆峒) 이헌길(李獻吉)ㆍ양명(陽明) 왕백안(王伯安)ㆍ형천(荊川) 당응덕(唐應德) ㆍ좨주(祭酒) 왕윤령(王允寧)ㆍ안찰(按察) 왕신중(王愼中)ㆍ심양(潯陽) 동분(董玢)ㆍ녹문 (鹿門) 모곤(茅坤)ㆍ창명(滄溟) 이반룡(李攀龍)ㆍ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ㆍ남명(南溟) 왕도곤(汪道昆)인데 (중략) 백안(伯安)은 문(文)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 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였고, 형천(荊川)은 전아순실(典雅純實)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168 했다. 그의 일록초(日錄抄) 에는 홍인우가 양명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화담 문하의 학인들과 이에 대한 토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화담 문 인들의 상당수가 양명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457) 또한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 일컬어지는 남언경은 14~15세 무렵부터 화담 및 화담의 문인에게 수학하였고 19세에 허엽의 집에서 홍인우를 처음 대면하고 난 뒤 바로 그의 매부(妹夫)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홍인우와 더불어 심학(心學) 공부를 계속하였다.458) 실록 에는 선조가 종친인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를 대면한 이후 유성룡에게 이요와 양명학에 관해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 다. 유성룡은 양명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뒤 지금 사람으로 남언경에 게서 배운 자들 또한 양명을 많이 숭상한다 는 말을 덧붙였는데,459) 이를 통해 남언경의 문하에 출입한 인물들이 여럿이었으며 이들이 일군의 학파를 형성하기 까지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화담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허엽이 양명학에 심취한 홍인우 남언경과 가까이 교유하였고 이러한 관계가 후대까지 지속되어 그 아들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남언경의 존재는 특히나 중요한 의미를 지 닌 것으로 생각된다. 457) 신병주, 南冥學派와 花潭學派, 일지사, 2000, pp.254~256 참조 458) 신병주, 위의 책, p ) 宣祖實錄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경안령(慶安令)을 알고 있는가? 하니 (중략) 성룡 이 아뢰기를 그의 학문은 남언경을 존신(尊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략) 그가 자신이 배운 것을 다 말하였는데 왕양명(王陽明)의 글과 석씨(釋氏)의 글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의병(義兵)에 종사했었다고도 하였다. 사람이란 본디 알 수 없 는 법이니 혹시 쓸 만한 사람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가 읽었다는 책은 다 헛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중략) 성룡이 아뢰기를 장사 지내기를 예로써 하고 제사 지내 기를 예로써 하는 것은 다 효(孝)의 도로서 각각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어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양명도 어릴 적에 책을 한 글자도 읽지 않고 다만 양지(良知) 만을 이루고자 하였다면 매사를 어찌 두루 알겠습니까? 또 양명이 전대의 글을 읽지 않 았다고 한다면 전대의 일을 어떻게 자세히 알겠습니까? 지금 사람으로 남언경에게서 배 운 자도 또한 양명을 많이 숭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의 학문을 하는 것이 전 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였다.(上曰 領相嘗知慶安令乎 (중략) 成龍曰 其學 尊信南彦經矣 上曰 (중략) 且渠極陳所學 而如王陽明書釋氏書 無不知之云矣 且言從 事義兵 人固不可知 或是可爲之人乎 成龍曰 所讀之書 皆是虛矣 (중략) 成龍曰 葬之以禮 祭之以禮 皆是孝之道 而各有攸主 豈可如是言之 如陽明 少時不讀一字 而但欲致良知 每事 豈能周知乎 使陽明 不讀前代書 前代之事 何以詳識乎 今人學於彦經者 亦多尙陽明矣 上曰 爲其學 亦愈於專不學者矣)

169 허엽의 맏아들인 허성은 이헌국(李憲國)의 딸과 혼인하였다가 사별하고 후에 남언순(南彥純)의 딸로써 재취(再娶)하였는데, 남언순은 남언경의 형이다. 허엽 일가와 남언경이 사돈의 관계로 맺어지게 된 것이다. 부친 허엽으로 인해 남언경 과는 면식이 있었을 허성 허봉 형제가 새로이 인척이 된 남언경에게서 어떤 식 으로든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추측에 힘을 보 태는 것이 촌은 유희경과의 관계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허성과 유희경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 평생에 걸친 우의를 나눈 사실이 확인되는데 유희경이 남언경과 사승 관계에 있는 인물이라 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즉, 남언경이 조카사위인 허성에게 자신의 제자 유 희경을 소개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허성을 매개로 하여 그 아우들과 유희경 이 교유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논의들을 종합해 볼 때 허봉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양명학 에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양명학에 대한 독자적 견해 역시 어느 수준까지는 정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왜 허봉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견해 는 모두 숨긴 채 퇴계의 주장만을 내세웠던 것일까? 만일 조천기 에 나타난 양 명학에 대한 비판이 허봉의 진의(眞意)가 아니었다면 변척 활동을 통해 그가 얻 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쯤에서 필자는 허봉이 공적(公的)인 입장과 무관하게, 순수한 개인적인 의도 로 변척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허봉이 조선 유학의 학문적 성과를 유학의 종주인 중국에 과시할 목적으로 사행에 자원했을 수도 있 다는 것이다. 허봉과 그 형제들은 부친 허엽의 영향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며 자국의 문화 수준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히 컸던 것 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글에 그 일면이 드러난다. 선대부(先大夫)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고사(古事) 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 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東國通鑑) 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황 조사(黃詔使)가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관반(館伴)인 정 임당(鄭林塘) 상공(相公)에게 고려와 신우(辛禑) 부자의 내력을 묻자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우리 중형(仲兄)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대부의 높은 견식(見識)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170 아, 재주가 임당(林塘)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에 곤욕을 당했으 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460) 동국통감(東國通鑑) 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아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엮은 사서(史書)이다. 그런데 허엽이 그 아들 들에게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의 역사서를 읽도록 명했다는 것은 그의 역사의식 에 보다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자국(自國)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을 알고 있었고, 그런 관점에서 자녀들을 훈육하고자 했던 것이다. 허엽의 행적에 관한 자료가 소략한 탓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 나 그의 이 같은 교육 방식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허균의 저작 곳곳에는 우리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이 가득하며 허봉 또한 조선조 야사의 전형이 된 해동야언 을 편찬하는 등 남다른 면모를 과시했 는데, 이 같은 사실은 위와 같은 일화를 마음에 새겨 두고 어린 시절부터 우리 역사서를 읽었으며 우리 역사 기록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던 허균 및 그 형제들이 부친 허엽의 뒤를 이어 뚜렷한 역사의식 주체의식을 지니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461) 이렇듯 우리 역사에 밝았던 이들 형제가 자국의 문화에 대해 남다른 자부를 가졌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허균이 명의 사신들을 통해 조선의 시문(詩文)을 수출했던 일은 그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의 문예나 학문의 수준이 중국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같은 생각을 바 탕으로 자국의 우월한 문화적 수준을 대외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허봉이 사행 중, 양명학 변척 활동을 통해 조선유학의 기본 입장을 지속적으로 천명한 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양명학에 침윤(浸潤)되어 정주학 이 위기를 맞고 있던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아직도 도학의 권위가 굳건하다는 것과 비록 우리나라가 한쪽에 치우친 조그만 땅이라 하더라도, 또한 사문(斯文) 의 성대함에 참여할 만한 462) 곳이라는 것을 유학의 본산지인 중국 땅에 널리 460) 許筠, 앞의 책, 卷26, 鶴山樵談 先大夫嘗曰 我國人專攻古事 不識本國事蹟 甚非務 本之道 故二兄及僕皆讀東國通鑑 少時以爲可讀之書甚多 奚必讀是 及聞黃詔使到太平館 問館伴鄭林塘相公以高麗及辛禑父子本末 上公舌呿不能對 仲兄入對之云 始知先大夫之高 見 出常人萬萬也 噫 才如林塘尙且困於酬對 爲擯相者可不知本國之事乎 461) 이문규, 허균 문학의 실상과 전망, 새문사, 2005, p.412 참조

171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허봉이 명나라 말기의 현실을 목도(目睹)하고 이를 탄식하면서 특히 사습(士 習)의 퇴락과 태학(太學)의 문란함을 상세히 기술한 것 역시 위에 언급한 사실 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국자감을 방문한 후 대저 태학은 본래 선(善)을 배우는 곳이요 한갓 형식만 갖추는 곳이 아니다. (중략) 스승 된 이는 자리만 차지하고 강론하지 않으며 제자 되는 이는 흩어져서 거리에서 살고, 좨주 (祭酒)와 사업(司業)들은 큰 벼슬에 오를 것만 생각하며, 감생과 세공(歲貢)들은 일명(一命 : 처음으로 임관되는 것)을 얻는 것을 영화로 삼고 예의와 염치가 무 엇인지를 알지 못하여 학교가 무너지고 타락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인재(人材)가 옛적과 같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463)라고 한탄했던 이면에는, 조선이야말로 말세(末世)에 이른 중국의 뒤를 이어 유학의 종주가 될 만하다는 자긍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허엽이 1560년부터 성균관 대사성의 직을 오랫동안 수행 하여, 그 업적이 태학을 아홉 번 맡았는데 개연(慨然)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자임하여 선 을 붙들고 악 을 막았으며 폐지되고 실추된 것들을 일으켰다 는 평 가를 받았던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 본 허봉에게 있어 중국과 조선 사상계의 현실은 극명한 대비로 다가왔을 것이며, 양명학에 대 한 그의 개인적 견해와 상관없이 주자학에 대한 존숭을 굳건히 견지한 조선의 사풍(士風)은 조선의 유학, 나아가 문화 전반의 수준을 제고(提高)하기 위한 강 력한 무기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462) 許篈, 앞의 책, 甲戌年(1574) 8月 2日條, 故雖以我國偏小之壤 而亦得與於斯文之盛也 463) 許篈, 위의 책, 8月 20日條, 抑大學本爲首善之地 非徒文具爲也 今見廟宇深密 檜柏森 蔚 堂齋靚潔 地位幽闃 眞可爲師生講道之所 而爲師者倚席不講 爲弟子者散處閭閻 祭酒司 業 以驟陞大官爲念 監生 歲貢 以得添一命爲榮 慢不知禮義廉恥之爲何事 學校之廢墜至於 斯 宜乎人才之不古若也

172 3. 許蘭雪軒 : 女性, 少數者로서의 글쓰기 (1) 蘭雪軒에게 있어서의 正體性 問題 사회적인 의미에서 소수자(少數者) 의 개념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소수자 유형의 다양성이 소수자는 수적(數的)으로 적기 때문에 소수자인가?, 아니면 질적(質的)으로 차별을 당하기 때문에 소수자인가? 라는 근본적 문제를 야기하 기 때문이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수적 소수자 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구의 비율을 중시 하는 것으로 대상을 통계적인 관점과 수적인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반면 질 적인 관점에서의 소수자 는 자신들의 육체적 문화적 특성 때문에 사회로부터 불평등한 대우를 받거나, 집단으로 차별을 당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는 그 사회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누리는 지배 집단과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불이익을 당하는 하위 집단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전제하 는 것으로서, 소수자로 편견과 차별을 당한다는 것은 곧 사회생활에의 완전한 참 여가 불가능하다는 것, 즉 배제를 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464) 단순히 수적 측면에서만 보면 전체의 여성 집단은 소수자가 될 수 없다. 하 지만 그간 여성들이 자신의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하고 늘상 타자(他者) 로만 취 급되어 왔고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들은 분명 소수자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전 세계의 수다(數多)한 문학 작 품 속에서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 내지 소수자 의 알레고리로 포착되고 있 으며 그 같은 사적(史的) 전통은 현재까지도 여전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같은 사실은 아직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너무나 많은 여성들, 여성적인 것들 이 억압당하고 있는 것을 봄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제약이 완화되었다고 하여 여성들의 차별적 지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 우 리 시대가 근본적으로 가부장 제도와 가부장적 사고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성역할 분담이란 근대적 생산 구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필연적으로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 464) Gittler. Joseph B, Understanding Minority Groups New York : John Wiley Sons Inc, 1956, p 주성수,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아르케, 2007, p.225 에서 재인용

173 문이다.465) 그렇게 볼 때, 난설헌이 생존했던 조선조의 여성들은 분명히 소수자 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야 된다. 성별 문화가 남녀 간의 성역할 구분, 여성다움과 남성다 움의 규범, 양성(兩性) 간의 차등적인 권력과 권위 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 라면,466) 조선조야말로 그 같은 문화가 형성 강화되어 종내에는 이념의 형태로 고착되어 간 시기였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성리학적 윤리관 의 영향을 받기에 이른다. 조선 초의 비교적 자유로웠던 생활 습속이 사라지고 일상생활과 풍속에서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구속과 제약이 따르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국가에서는 소학 삼강행실도 여씨향약 등의 보급을 통해 성리학 적 규제를 구체화하였는데 이 책들은 신체의 일상적 통제 및 강요된 이념의 실 천, 가족 내부의 가부장제 질서의 정립, 향촌 내부에서의 이념과 자율적 실천 등 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467) 여성에 대한 교육 역시 풍교(風敎)의 근본을 질 서에 순응하는 유순함에 두고 각종 규제를 가하였는데, 그 준거로 삼았던 것이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 이었다. 내훈 에서는 남녀를 수평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차별성을 강조하여 존비(尊 卑) 의 관계로 파악하였는데, 이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남성의 종속 적 존재로 격하시켰으며 경순(敬淳) 청종(聽從) 곡종(曲從)만을 여성의 덕목 인 양 강조하기에 이르렀다.468) 그 결과, 대개의 조선 여성은 호적상의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으며,469) 그저 주식(酒食) 차리기와 옷 짓기, 물 긷기와 절구질만 할 줄 알면 족하다 하여 문자조차 가르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해진 난설헌의 시작(詩作) 활동은 그 출발에서 부터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읽는 행위와 달리 쓰는 행위는 자신의 의식을 465) 안미현, 여성적 글쓰기의 특성과 가능성, 사고와 표현 2집, 한국 사고와 표현학 회, 2007, p ) 이영자,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여성과 남성, 나남, 2000, p ) 김명희 외, 조선시대 여성문학과 사상, 이회, 2003, pp.20~21 468) 육완정, 昭惠王后의 <內訓>이 강조하는 女性像 이화어문학회, 우리 문학의 여성 성 남성성(고전문학편), 월인, 2001, pp.185~186 참조 469) 이능화(李能和)는 1927년의 저서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김상억 譯, 동문선, 1990) p.297에서 조선 여자는 호적상에 이름이 없고 다만 양반일 경우에는 모갑(某 甲)의 처(妻) 모씨(某氏) 라고 적으며 평민과 서얼일 경우면 모갑(某甲)의 처(妻) 모조이 (某召吏) 라고 적는다. 고 기록하고 있다

174 표현하고 담론을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힘을 지니는데, 그 로 인해 사회적 약자나 주변자는 문자 생활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의 여성 역시 독서자(reader)일 수는 있어도 서술자(writer)일 수는 없었으며, 그 같은 사실은 남성 지식인들이 여성의 글쓰기 행위를 비난한 여러 언급을 통해서 도 쉽게 확인된다.470) 난설헌의 경우 그녀를 향한 당대 식자(識者)층의 비난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 되는데, 그 처음은 다음의 예문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난공이 귀국(貴國) 허봉의 누이 경번당(景樊堂)이 시를 잘하여 중국시선(中國 詩選) 에 들어 있다. 고 하여, 내가 침자(針子)일을 하고 난 나머지 시간에 서사 (書史)를 통하고 여계(女誡)를 복습하며 행실을 닦고, 규방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부녀의 일이다. 그러니 문조(文藻)를 수식하고 시로써 이름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정도(正道)는 아니다. 라고 답했다.471) 대체로 규중 부인이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그 이름이나 자를 본국에서도 나타내지 못하는 바, 난설(蘭雪) 의 호 하나로도 분에 넘치거늘 하물며 그 이름을 경번 으 로 잘못 알고 군데군데 기록하여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일이 되었으니, 이 어찌 후 세 규중(閨中)의 재녀(才女)들이 의당 경계해야 할 거울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 가.472) 난설헌과 관련한 홍대용 박지원의 기사는 여성에 관한 당대인들의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고 견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북학파(北學派)의 인사들로서 공리적 문물에 관심을 기울여 이 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였으며, 새로운 문물의 활용과 실천에 천착하는 등 시 종일관 진보적 성향을 견지한 인물들이다.473) 그런 그들이 난설헌의 시작 행위 470) 정용화,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6, p ) 洪大容, 湛軒書 外集, 卷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貴國景樊堂許葑之妹 以能詩入於 中國詩選 余曰 女工之餘 傍通書史 服習女誡 行修閨範 是乃婦女事 若修飾文藻以詩得名 終非正道 472) 朴趾源, 熱河日記, 避暑錄 太約閨中吟咏 本非美事 而以外國一女子 芳播中州 可謂 顯矣 然吾東婦人 未甞以名與字見於本國 則蘭雪之號 一猶過矣 况乃認名景樊 在在見錄 千 載難洗 可不爲有才思閨彥之炯鑑也哉

175 를 정도(正道) 가 아닌, 분에 넘치는 일 로 매도하고 그 가치를 폄훼하는 데 앞 장섰던 사실은 새롭게 등장한 한 여류시인의 존재가 당대 문단에 가져다 준 당 혹감과 충격의 정도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난설헌에 대한 또 다른 비난들 역시, 이 같은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혹자들은 난설헌이 남편을 둔 규중 부인의 몸으로서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연모해 경번당 이란 자호를 지었다고 비판하였으며,474) 그녀의 시에는 원망하는 마음이 많고 음탕한 구석이 있다고 절하하기도 하였다.475)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난설헌의 평판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은 그녀의 시작(詩 作)들에 가해진 표절과 위작(僞作)의 혐의였는데, 당대의 신흠 이수광으로부터 비롯된 표절의 의혹은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화두 (話頭) 중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신흠은 난설헌의 시는 어느 시편을 보아도 놀랄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지만, 시집에 실려 있는 것 중 유선시(游仙詩) 같은 것들은 태반이 옛 사람의 시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이라고 논평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남동생 허균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편을 표절하여 슬쩍 끼워 넣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 말 473) 박지훈, 中國과 韓國, 서해문집, 2005, p.102 참조 474) 이 문제에 관해 헌종대의 이규경(李圭景)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세속에, 허씨가 부군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에 인간에서 빨리 김성립과 사별하고 지하에 가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人間願別金誠立 地下長隨杜牧之] 라는 시를 짓고 이어 호를 경번당이 라 하였으니, 이는 번천(樊川 : 두목)을 사모한 것이다 라고 전해진다. 우산(虞山) 전겸익 (錢謙益)의 열조시선(列朝詩選) 어양(漁洋) 왕사진(王士禛)의 별재집(別裁集) 주 죽타(朱竹坨)의 명시종(明詩綜) 과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서당(西堂) 우동(尤侗)의 서당잡조(西堂雜俎) 역시 허씨를 경번당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천하의 모두가 허씨를 경번당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허씨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의 선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숱하게 변론하였다. (중략) 신돈복(辛敦復)의 학산한언 (鶴山閑言) 에 난설헌이 경번당 이라 자호한 것에 대해 세상에서는 두번천(杜樊川)을 사모한 때문이라 하는데, 이 어찌 규중의 부녀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당나라 때 선녀 번고(樊姑)가 있었는데 호는 운교부인(雲翹夫人)으로, 한(漢)나라 때 상우령(上虞令) 이었던 선군(先君) 유강(劉綱)의 아내였다. 그녀는 선격(仙格)이 매우 높고 여선(女仙)들 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이름이 열선전(列仙傳) 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난설헌이 흠모하 여 경번당이라 칭한 것이다. 라는 글을 보고 나서야 무릎을 치며 통쾌하게 여겼다. 이 어찌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씻어 줄 단안(斷案)이 아니겠는가? (李圭景, 五洲衍文長箋 散稿, 經史篇 5, 論史類 2, 人物, 景樊堂辨證說 ) 475) 난설헌의 시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대표적 인물로는 이수광을 들 수 있다. 이 수광은 난설헌이 평생에 부부 사이의 의가 좋지 않아서 원망하고 생각하는 작품이 많으 며 그녀의 시 채련곡(采蓮曲) 과 다른 한 편의 시가 유탕(流蕩)에 가깝기 때문에 시집 속에 싣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李睟光 芝峰類說 卷14, 文章部 7, 閨秀詩 )

176 이 그럴 듯하다 476)는 의견까지 보태, 난설헌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편의 상당수 가 애당초 허균에 의해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수광의 평가는 더욱 가혹하여, 난설헌의 시 대다수가 잘 알려지지 않은 중 국의 옛 시를 훔쳐 쓴 것이라 단언하며 그 구체적 증거들을 함께 제시하였다. 그는 난설헌의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 가 명나라 사람의 시를 가져다 점 화(點化)한 것이며 유선사(遊仙詞) 가운데 두 편은 당나라 조당(曹唐)의 시이 고, 송궁인입도(送宮人入道) 역시 명나라 당진(唐震)의 시를 표절한 것이라 주 장하였다.477) 이수광은 또 다른 글에서도 제(齊)나라의 중 보월(寶月)이 고객사(估客詞) 를 지어 말하기를 "낭군이 십 리 길을 떠나는데 나는 9리까지 따라가 송별하네. 내 머리 위의 비녀를 빼어 낭군에게 주어서 노자로 쓰게 하려네[郞作十里行 儂 作九里送 拔儂頭上釵 與郞資路用]"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 난설헌의 시집을 보니 전문(全文)을 훔쳐 쓰고 있다. 웃을 만한 일이다 478)라는 글귀를 남기는 등 저서의 곳곳에서 난설헌의 작품이 위작임에 틀림없다는 강한 확신을 피력하였으 며, 난설헌의 인척인 홍경신과 허적(許嫡)이 난설헌의 시는 2, 3편을 제외하고 는 모두 위작이며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 역시 허균과 이재영(李再榮)이 함께 찬술한 것 이라는 말을 늘상 했었다는 말을 부기(附記), 자신의 주장에 신 빙성을 더하고 있다.479) 이렇듯 신흠 이수광에 의해 제기된 난설헌 시의 표절 논란은 후대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었으며480) 급기야는 난설헌시집 에 수록된 작품 476) 申欽, 象村集 卷60, 晴窓軟談下 許草堂之女金正字誠立之妻 自號景樊堂 詩集刊行 于世 篇篇警絶 所傳廣寒殿上樑文 瑰麗淸健 有似四傑之作 而但集中所載 如游仙詩 太半古 人全篇 嘗見其近體二句 新粧滿面猶看鏡 殘夢關心懶下樓 此乃古人詩 或言其男弟筠剽竊世 間未見詩篇竄入 以揚其名云 近之矣 477) 李睟光 芝峰類說 卷14, 文章部 7, 閨秀詩 참조 478) 李睟光 위의 책, 卷14, 文章部 7, 旁流詩 479) 李睟光 芝峰類說 卷14, 文章部 7, 閨秀詩 참조 홍경신(洪慶臣)은 홍가신(洪可 臣)의 아우이다. 난설헌의 큰오빠인 허성이 자신의 딸을 홍가신의 아들에게 출가시킴으 로써 두 집안은 사돈 관계가 되었다. 이에 한 집안 사람 이라는 말을 사용한 듯하다. 480) 난설헌의 작품과 관련한 표절 시비의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金時讓, 涪溪記聞 어떤 사람들이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 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종성으로 귀양을 와 명시고취(明詩鼓吹) 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瑤琴振雪春雲暖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구름 따사롭고, 環珮鳴風夜月寒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달이 차가워라 라고 한 율

177 의 상당 부분이 허균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의심 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와서는 정민이 난설헌의 유선사 와 조당의 소(小)유선시 를 대조, 동일한 구절 을 찾아 도표화하였고481) 박현규는 난설헌의 시들을 중국의 전당시(全唐詩) 수록 작품들과 비교하여 조사 대상의 대다수가 중국의 시를 베꼈거나 그러한 흔 적이 농후한 것으로 결론짓는 등,482) 한동안 잠잠했던 난설헌 시의 표절 논란이 다시금 점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표절설 에 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허경진의 논의를 들 수 있다. 허경진은 난설헌이 글을 써봐야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여성의 신분임을 들어 그녀에게 표절을 시도할 구체적 동기 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한시 교육의 바탕이 암기에 있었음을 감 안할 때 작가 난설헌이나 편자(編者) 허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도 모 르게 몇 자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효(效) 자가 붙은 작품들이나 악부체 (樂府體) 시의 경우, 그 특성상 선대 시인들의 작품과 상당 부분 글자가 겹칠 수 시의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 에 실려 있는 영락(永樂)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과 같았다. 이에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 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或言其多剽竊他作 而余固不信也 及余謫鍾城 求得明詩鼓吹于人 則許集中瑤琴振雪春雲暖 環佩鳴風夜月寒 一律八句載在鼓吹 乃永樂詩 人吳世忠之作也 余於是始信或者之言 嗚呼取華人之作 而欲瞞華人之目 是何異盜人之物 而 還賣於其人乎) -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 嬰處雜稿1, 瑣雅 허난설헌은 옛사람의 말만 전용(全用)한 것이 많아 유감스럽다. (蘭雪 全用古人語者多 是可恨也) - 明詩綜 와자(陳臥子)가 이르기를, (중략) 내가 허경번의 시에 대해 편장(篇章)과 구법 (句法)을 보건대, 완연히 가정칠자(嘉靖七子)의 체재인바, 응당 풍교(風敎)가 거기까지 미쳐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부합되기가 이와 같으니, 가짜라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 海東繹史 卷70, 人物考4, 后妃 名媛 中官, 許妹氏 유여시(柳如是)가 말하기를, (중략) 오자어(吳子魚)의 조선시선(朝鮮詩選) 에 유선곡(遊 仙曲) 은 300수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자신이 직접 쓴 81수를 얻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본떠서 지은 것이며, 본조(本朝) 사람인 마호란(馬 浩瀾)의 유선사(遊仙詞)로서 서호지여(西湖志餘) 에 나오는 것들도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외에 새상곡(塞上曲), 양류지사(楊柳枝詞), 죽지사(竹枝詞) 같은 제목의 시들도 모두 그렇다. 이 어찌 계림(鷄林)으로 흘러 들어간 중국의 시편(詩篇)을 허매씨가 옥갑 (玉匣) 속에 깊숙이 보관해 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는 원작자를 숨기고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 列朝詩集 ) 481) 정민, 韓國 漢詩와 道敎, 국문학과 도교, 한국고전문학회 편, 태학사, 1998 참조 482) 박현규, 허난설헌 시 작품의 표절 실체, 한국한시연구 8집, 한국학시학회, 2000 참조

178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울러 언급하였다.483) 박현규에 앞서 표절 가능성을 제기했던 정민 역시 한시는 운자가 같으면 표 현에 제한이 오므로 같은 운을 여러 번 쓰거나 같은 자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우동(偶同)'이라 이른다 고 전제하면서 전체적인 작품성이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늘날의 잣대로 표절이니 베끼기니 하는 선정적 논의를 하는 일 은 바람직하지 않다 는 견해를 밝혀 앞서의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양상을 보였다.484) 또한 홍인숙은 2003년의 논문에서 박현규가 난설헌의 다른 시들과 함께 유 선사 역시 심각한 표절의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가 표절의 근거로 제시한 기준은 단지 동일한 글자 수의 통계일 뿐이며, 그것이 구성하는 87수 전체의 시적 맥락이나 시적 의경의 변화를 살피고 있지는 않다 고 하여 박 현규의 기계적 분석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485) 그런데 이렇듯 난설헌에 대한 극단적 상찬(賞讚)과 혹평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은 한 예외적인 여성 작가에 대하여 작가 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여성 으로서 의 정체성을 강조하여 바라보고자 하는 문학사적 평가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486)으로 이해해야 한다. 난설헌은 재사(才士)로 소문난 초당의 집안에서도 으 뜸가는 신선의 재주를 가졌고 487) 그 시는 근대의 규수들 가운데 제일 이라는 평을 얻었지만488) 여성, 그 중에서도 양반 사족의 일원이라는 생래적(生來的) 조 건은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고 마침내는 역사의 이면에서 끊임없는 논란 의 주인공으로 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설헌은 왜 당대 여성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여 세간의 비 난을 살 수밖에 없었을까? 시의 전편에 흐르듯 유려하고 따뜻한 감성을 가진 그 녀가 왜 사임당 신씨처럼 살지 못하고, 팔자 기박한 재녀(才女)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가 문득 궁금해진다. 483) 허경진, 허난설헌의 생애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 인문학보 31집, 강 릉대 인문학연구소, 2006, pp.139~140 참조 484) <한겨레신문> 2003년 5월 3일 기사 참조 485) 홍인숙, 난설헌이라는 소문 에 접근하기,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7집, 한국고전여 성문학회, 2003, p ) 홍인숙, 위의 논문, p ) 黃玹, 梅泉集 卷4, 詩, 丁未稿, 讀國朝諸家詩 三株寶樹草堂門 第一仙才屬景樊 料 得塵寰難久住 芙蓉凄帶月霜痕 488) 李圭景, 앞의 책, 景樊堂辨證說,

179 에밀 안거른(Emil Angehrn)은 인간의 정체성 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수 적(數的) 정체성 질적(質的) 정체성 나-정체성의 개념이 그것이다. 먼저 외적 시각에서의 수적 정체성 은 물리적 지시나 주어 표현에 의해 규정되며, 시(時) 공적(空的)으로 위치 지어진 개인의 개별성 및 유일성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질 적 정체성 은 사회적 혹은 전통적으로 주어진 역할의 수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 는 구체적 행위나 역할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실천적 입장 표명을 통해 구체화 되며, 나-정체성 은 인간에게 놓인 다양한 정체성의 내적 통합 및 사회적 시 간적으로 구성된 자기관계의 구조나 형식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거른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 정체성에 대해 수용과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는 외에도, 자기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역할 정체성들의 통합을 위해 각각 의 역할 정체성을 갈등하지 않는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또, 다양한 정체성을 자 신의 정체성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갈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만든 삶의 방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 게 된다. 이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안거른은 실천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 와 다른 개인의 정체성(타자와 다름)이 아니라 개인의 내적 통일성(자기 내적으 로 다르지 않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489) 결국 완전한 의미에서의 정체성 이란 개인의 이상과 행동 및 사회적 역할을 통합할 수 있는 자아의 기능 을 이르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만일 안거른이 말한 수적 정체성 의 개념이 타자로부터의 구분된 개인 및 그 자신의 내적 동일성 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난설헌은 분명히 수적 정체성 획득 에 성공한 인물이다. 그녀는 여자는 재능 없는 것이 미덕 이라 믿었던 시대에 살면서 오직 시재(詩才) 하나로 이름을 세상에 알렸으며, 마침내는 조선조를 대 표하는 시인이자 우리나라 여성문학의 선구로 자리매김하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 문이다. 난설헌의 이 같은 면모는 제도나 관습에 의해 타자화 된 나머지 자신의 삶에 있어서조차 주체성을 지니지 못했던 당대 여성들의 모습과는 선명히 구분 되는 것이며, 그녀의 문학 행위 역시 타자 로부터 분리된 자기 존재의 각인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문학은 대개 자아와 타자, 인간과 세 계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dialogue)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므로 어떤 식으로든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하거나 타자를 향해 가려는 열망 속에서 탄생하게 되는 데,490)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확신 없이는 그 성취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89) 이현재, 여성주의적 정체성 개념, 여이연, 2008, pp.122~125 참조

180 그러나 한 개인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정체성 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내적 동 일성 을 유지 하는 외에도, 그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의 역할 기대 란 문화적 제도적으로 혹은 우리가 접촉하는 개인들이 다른 개인의 지위에 대하여 요구하게 되는 기 대 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인간관계의 국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학습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491) 앞서 언급한 질적 정체성 은 바로 이 역할 기대 및 역 할 학습 의 과정을 통해 수립되는 것으로서, 난설헌의 경우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던 보인다. 일반적으로 조선조 여성들에게는 봉사와 희생, 인내심과 너그러움, 순종과 복 종, 질투하지 말 것, 남자보다 똑똑함을 나타내지 말 것 등의 덕목이 요구되었으 며, 전통적인 여성 의 이미지 역시 희생, 양보, 인내, 수동성, 순종으로 요약되었 다.492) 또한 이 시대 여성의 자기정체성은 모성(母性), 특히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생물학적 모성으로 규정되어 모성의 역할에 충실한 여성은 칭송되는 반면 모성의 역할에서 벗어난 여성은 철저히 부정되는 양상을 띠었는데,493) 여성으로 태어난 난설헌이 당대 사회에 의해 요구받았던 역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 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조선조의 가부장적 이념 속에서 사회가 바라는 좋은 여자는 유순한 여자 였으 며 유순한 여자만이 현모양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현모양처 라 는 말 속에는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나 는 제외된 채 오직 모(母) 와 처(妻) 의 역할만이 포함되며, 여성은 남편 또는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도 록 기대될 뿐이었다.494) 이에 따라 여성에 대한 교육 역시, 유교적 가족규범과 예절의 습득 및 부덕(婦德)을 함양하는 데 그쳤으며 지식에 대한 교육은 원천적 으로 배제되었다. 즉, 여성의 지식 및 문예 능력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재무용론(女才無用論) 의 본질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유일한 덕목으로 정절 을 상정한 뒤 그것을 수호하는 데 방해가 되는 예능 및 학습 능 490) 임동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코나투스, 2005, p ) 김정호, 新敎育社會學, MJ미디어, 2004, pp.167~168 참조 492) 여성학 교재 편찬위원회 편, 여성학의 이론과 실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1, p ) 김명희, 허부인 난설헌, 시 새로 읽기, 이회, 2002, p.448 저자는 그 극단적인 예로서 난설헌과 신사임당의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494) 박혜란, 삶의 여성학, 또하나의문화, 1997, p

181 력은 배타시한 채 오직 가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 습득만을 허용함으로써, 여 성을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키고 그 신체를 부계(父系) 가족에게 귀속시키 기 위함이었다.495) 그렇게 볼 때, 난설헌이 다수의 시를 창작하고 그것을 국내외에 유통시켜 시 인으로서의 명성을 획득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 금기를 깨뜨린 일대의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난설헌은 단지 시를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공적(公的) 영역에까지 확장시켜 사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품었던 공적 영역에 대한 도전적 욕망이 시를 통해 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더불어 난설헌의 시에 보이는 파격적인 성애(性愛)의식496) 역시 남권 (男權) 중심의 사회 질서에서 벗어난 일탈적 행위 로 간주될 만하다. 우리 역사 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주체적으로 확보하려는 여성들의 행위가 기존 세력에 대한 위협이자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그로 인해 여성들이 억압을 당 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성적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작품 속에 드러낸 난 설헌의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환영 받을 수 없었던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조의 수많은 저작들은 난설헌에 관해 재주 있는 시인으로서의 모 습만을 전하고 있을 뿐, 현숙(賢淑)하고 어진 여성의 이미지는 일절 남겨 놓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앞서 서술한 여러 이유 외에도 결혼 생활의 파탄, 시집살이의 고통, 비극적 요절로 특징 지워지는 그녀의 불행한 삶 및 무자(無 子) 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는데, 난설헌이 사대부가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서 끝내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은 모성을 여성의 제일 요건으로 삼 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심각한 결함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497) 일반적으로 한 개인은 전통적 사회적으로 주어진 질적 정체성에 자신의 입장 을 표명함으로써 자신의 생애를 만들어 나가는데, 이러한 입장 표명은 개인의 내 용적(수적)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은 주어진 질적 정체성을 문제 로 삼고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내적 동일성의 구조와 관련되며, 개인의 유 일성 역시 개인의 타자 부정이 아닌, 질적 정체성의 형성 능력이나 형식적 통합 495) 이화여자대학교 중국여성사 著, 중국 여성, 신화에서 혁명까지, 서해문집, 2005, p ) 최혜진, 허난설헌, 욕망의 시학, 여성문학연구 10호, 한국여성문학학회, 2003, pp.305~311 참조 497) 김명희, 앞의 책, p

182 과 같은 자율적 활동을 통해 실현되게 된다.498) 그런데 전술한 여러 사실들은 난설헌이 자신에 대한 사회의 역할 기대 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질 적 정체성 획득에도 실패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난설헌은 대개의 여성들과는 달리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경험을 통해 집단으 로서의 조선 여성 과는 구분되는, 개인으로서의 내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이는 애초부터 사족의 여성 인 그녀가 지향할 할 바가 아니었다. 그 녀의 남다른 재능과 주체의식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기대와 끊임없이 불 화(不和)하였고, 종국에는 상충하는 두 자아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에릭슨(Erik Erikson)이 정의한 자아정체성 의 개념과499) 정 체성을 정의하는 다양한 공간들에 주목하고, 인간이 다양한 공간들과 연관을 맺 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 균열이라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고 한 프레이(P. freuy) 와 하우슬러(Haußler)의 경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설명들은 한 개인 에게 주어진 내적 외적 규범들이 서로 모순될 경우 혼돈과 행위 불가능에 빠질 수 있으며, 하나의 정의 공간에 위치한 개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정체 성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 이를 통해 자기분열의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기 때문이다.500) 만일 난설헌이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적 충동 및 욕구들과 외부의 압력 및 유혹, 도덕적 구속들을 조정하고 통합할 수 있었더라면 그녀의 삶 역시 세계와 부조화하고 균형을 잃는 일 따위는 없었 을 것이다. 난설헌의 시에서 발견되는 분열 과 모순 역시, 자율적 개별성 과 자신을 종속시키는 현재의 지위 사이에서 갈등하고 표류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 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질적 정체성 획득에 실패한 것일 까? 난설헌은 여성은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던 시대에 태어나 난설헌 이라는 당호와 초희 라는 이름, 경번 이라는 자까지 지닐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인물이 었다. 그녀는 개방적인 집안에 태어나 당대의 석학인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랐고, 아우인 균과 더불어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특히 498) 이현재, 앞의 책, p ) 자아정체성은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개정 되는 자신에 대한 현실감을 말한다. 심성보, 인생교육론, 서현, 2007, p ) 이현재, 앞의 책, p.115 참조

183 나 작은오빠인 허봉은 난설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직접 난설헌에게 글을 가르쳤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글을 배울 때 가장 필요한 책과 붓을 구해 주면서 격려한 사실은 허봉의 문집을 통해 확인된 다. 누이에게 붓을 보내며[送筆妹氏] 仙曹舊賜文房友 선계에서 예전에 내려준 글방의 벗을 奉寄秋閨玩景餘 깊은 가을, 규중에 보내 경치를 그리게 하리라 應向梧桐描月色 오동나무 바라보며 달빛도 그려 보고 肯隨燈火注蟲魚 등불 따라다니며 벌레나 물고기도 그려 보거라501) 위의 시는 허봉이 난설헌의 예술적 재주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하는 데 크 게 기여했던 사실을 보여 준다.502) 허균의 성소부부고 에는 중형 허봉이 일찍 부터 경번의 재주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이태백(李太白)과 이장길 (李長吉)의 유음(遺音)이다 칭찬했다 는 기록이 전하는데,503) 이를 통해 허봉이 난설헌의 재질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 문예의 수준이 단순한 여기(餘技) 의 수 준이 아님을 인정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누이에 대한 허봉의 애정과 관심은 1582년, 명나라 문인 소보(邵寶)가 편찬한 두율(杜律) 을 난설헌에게 선물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두율(杜律) 은 허봉이 1574년의 사행 당시 그곳 학자 왕지부에게 선물로 받아 8년간이나 소장했던 것 으로, 훗날 이를 다시 제본하여 난설헌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 두율(杜律) 1책은 문단공(文端公) 소보(邵寶)가 가려 뽑은 것으로, 우집(虞 集)의 주(註)에 비하면 더욱 간명하여 읽을 만하다. (중략) 내가 이 책을 책 상자 속에 보물처럼 간직한 지 벌써 몇 해가 되었다. 이제 아름답게 묶어서 네게 한번 보이노니,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504) 501) 許篈, 荷谷集, 荷谷先生詩鈔補遺, 詩, 送筆妹氏 502) 許米子, 허난설헌,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 pp.46~47 503) 許筠, 앞의 책, 卷26, 附錄1, 鶴山樵談 仲氏嘗曰 景樊之才 不可學而能也 大都太白長 吉之遺音也 504) 許篈, 앞의 책, 荷谷先生雜著補遺, 跋, 題杜律卷後 奉呈妹氏蘭雪軒 杜律一冊 邵文端

184 허균은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 고 온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 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505)고 기록하고 있다. 허봉이 사가독서 를 한 것은 그의 나이 23세 때인 1573년의 일인데, 바로 이 무렵을 기점으로 하 여 시적 세계의 변모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 이듬해인 1574년에 는 사행을 통해 중국의 문인, 학자들과 직접 접촉할 기회까지 얻었으므로 그 같 은 변화는 더욱 증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송시(宋詩)를 버리고 학당(學唐)의 길을 택한 허봉은 명나라에서 구해 온 두 율 을 통해 두보의 시를 터득했을 것이며, 자신의 그 같은 체험을 누이에게도 알려 주고자 했던 듯하다. 이 글에서 허봉이 누이에게 열심히 권한다 는 표현을 쓴 것은 두보의 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누이의 뛰어난 재주 라면 두보의 소리를 다시 되살릴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사실들은 난설헌의 재주를 알아주고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 로 계발해 준 허봉이 있었기에 난설헌이 시와 그림,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이룰 수 있었다 506)는 일각의 견해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확인케 한다. 반면에 난설헌의 불행 이 정말로 그녀의 남다른 재주와 강한 자의식에 기인한 것이라면, 허봉을 포함한 그 일족들은 그 불행을 조장했거나 방조했다는 혐의에 서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집단과 분리된 개인으로서, 혹은 예술가로서 난설헌 이 획득한 내적 정체성은 분명 가정의 풍토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 기에는 물론 누이의 일탈 을 적극 권장한 허봉에게 1차적 책임이 있겠지만, 그 외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 역시 공조(共助)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 한 예로 인조대의 임상원(任相元)은 교거쇄편(郊居瑣編) 을 통해 난설헌 이 특히 태평광기(太平廣記) 를 즐겨 읽었다 고 증언했는데,507) 이는 허균과 관 련한 다음의 기록과 상당 부분 합치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하겠다. 公寶所鈔 比虞註尤簡明可讀 (중략) 余寶藏巾箱有年 今輟奉玉 汝一覽 其無負余勤厚之意 俾少陵希聲復發於班氏之手可矣 505) 許筠, 앞의 책, 卷26, 附錄1, 鶴山樵談 仲氏詩初學同派 故典實穩熟 及選湖堂 熟讀唐 詩品彙 詩始淸健 506) 허경진, 허난설헌 남매의 문학적 교유, 조선-한국언어문학연구 3집,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회 편, 중국민족출판사, 2006, p.129 허미자, 앞의 책, p.49에서 재인 용 507) 허미자, 앞의 책, p

185 일찍이 듣건대, 초당 허엽이 작은아들 허균을 사랑하여 유소년 시절, 옥구슬을 갖 고 놀기 좋아하는 것으로 꾀어 글을 읽도록 했다. 겨우 문리가 통하자 또 태평광 기 및 방외(方外) 괴탄(怪誕)한 서적을 읽혔다. 허균이 성장하여 비록 재주는 풍 부했으나 성격이 편벽되고 요망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마침내는 반역을 일으 키려다 죽음에 이르고 문호를 뒤엎어, 죽은 뒤의 화가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 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초당이 자식 교육을 그르쳐 능히 자기의 자손을 보 전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형륙(刑戮)을 면하지 못했다. 고들 하였다.508) 태평광기 는 송나라 이전, 고대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중국의 설화집으로서 신 선, 귀신, 요괴 등 지괴(志怪) 소설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려조에 유입된 것 으로 알려진 태평광기 는 조선조에 이르러 원본 외에 축약본( 태평광기상절(大 平廣記詳節) )과 번역본(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등이 유통되면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유몽인이 우리나라 문인들은 모두 태평 광기 를 읽었다 고 전할 만큼 식자층으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끈 반면, 일각에서는 허황된 패관잡서(稗官雜書) 라 하여 경계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허균이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통해 태평광기 및 그와 유사한 성향의 서적들을 접하였고 그로 인해 경박한 품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세간의 비난은, 허엽 일문의 사상적 경향이 보통의 유자 집단과는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한 예로 이식의 경우에는 잡가(雜家)의 소설로 태평광기 와 같은 따위는 간혹 남녀의 풍요가 있어 살펴보고 채집할 만하지만 그 밖의 허황하고 기괴한 말들은 그저 한가로움을 깨뜨리고 졸음을 그치게 할 뿐, 족히 참다운 도리를 어지럽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학문에 뜻을 둔 자는 여기에다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509)고 하여 태평광기 를 파한(破閑)의 도구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그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대체로 정통주자 학에 제일의 가치를 부여했던 도학자형 문인들에게는 이 책은 호감을 줄 수 없었 던 것이다. 반면 문예 취향이 강했던 일부의 인사들이 사행을 위해 북경을 왕래하며 만명 (晩明)의 이른바 당판(唐板) 서적들에 관심을 보인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 대표 508) 鄭侙, 愚川集 - 이종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 p.235에서 재 인용 509) 李植, 澤堂集, 澤堂先生別集 卷15, 雜著, 散錄 雜家小說太平廣記之類 間有男女風 謠 尙可觀採 其他荒怪之說 聊以破閒止睡 不足亂眞 但有志於學者 不可費日力於此也

186 적 인물로는 허균과 유몽인 이수광이 있다. 이수광은 저서 지봉유설 에서 당 시 명나라의 학술과 문예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명대의 주요 사상가나 문학가의 저작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수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의 그 누구도 허균처럼 만명소품(晩明小品)이나 패사(稗史) 소설에 친밀감과 깊은 애 정을 보이진 않았다. 17세기 초, 허균은 태평광기 와 같은 잡서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내용들을 일부 담아 한정록 을 엮어 내기도 했던 것이다.510) 그런데 허균보다 6살 연상인 난설헌 또한 태평광기 를 탐독했으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은, 그녀 역시 다른 남자 형제들처럼 부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부친 허엽이 딸의 재능을 직접 후원하고 격려한 흔적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언급 또한 찾아볼 수 없으니, 이는 적어도 난설헌의 문학 행위에 대해 암묵적인 동조 의 의사를 표명한 것으 로 이해된다. 결국 당대의 규범을 벗어난 딸의 행동을 방조하고 어린 자녀들이 기담(奇談) 괴서(怪書)를 읽도록 허용한 부친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난설헌의 천재성은 발현되지 못했을 것이며, 그녀의 삶 또한 파란으로 점철되지 않았을 것 이다. 이렇게 보면 난설헌의 문학은 그간의 연구자들이 말했듯 여성적 억압의 반 작용으로 생성된 것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천성과 집안의 분위기가 어울려 만들어 진 것이라 설명하는 것이 옳을 듯하며,511) 여기에는 부친 허엽과 남자 형제들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난설헌에게 있어 어머니 는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였을까? 난설헌 남매의 어머니 강릉 김씨는 예조참판을 지낸 김광철(金光轍)의 딸로서 상처(喪 妻)한 허엽의 계실(繼室)로 들어와 봉 난설헌 균의 3남매를 낳았다. 허엽이 64세 되던 1580년에 세상을 떠난 데 비해, 김씨 부인은 1601년(선조34년)까지 생존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자녀들의 저작에서 모친에 관한 내용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512)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를 통해 부친의 소소한 행적들을 전하는 데 힘썼던 허균조차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며, 허봉이나 난설헌 역시 문인들의 시에서 흔히 510) 이종호, 앞의 책, pp.235~236 참조 511) 박혜숙, 허난설헌,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p.13 참조 512) 성소부부고 卷7, 애일당기(愛日堂記) 에는 허균이 임진왜란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강릉에 피란 가서 폐허가 된 애일당을 수리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또 같은 책, 권10, 답이생서(答李生書) 에 나는 열두 살 때에 엄친을 여의었으므로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 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독책(督責)을 더해주지 않았다 는 언급이 있다

187 보이는 사친(思親) 의 흔적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허균은 모친의 상을 당했는데도 명기(名妓)에게 혹하여 분상(奔喪)하지 않았다 513)는 비난을 받 기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그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의혹을 품을 만하다. 실제로 한 심리학자는 몇 가지의 근거를 들어 이들 삼남매와 어머니 간의 관 계가 좋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양육이 건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먼저 허균이 경망스럽다 는 비난을 자주 받았던 것이나 이들 남매에게서 공통적으로 감정이나 충동을 통제하는 능력의 결함이 발견되는 것은 생애 초기의 양육이 부적절했던 탓이라 고 설명하였다. 또한 난설헌 삼남매의 처 연하고 곡절 많은 인생은 이들이 어머니인 강릉 김씨에게서 안식처를 구하지 못 했기 때문이라 해명하며 생의 위기에 처한 난설헌이 친정어머니가 아닌, 오빠 허 봉에게서 위안을 구했던 사실을 하나의 근거로 삼았다.514) 위 저서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들 삼남매의 인생 에서 그 어머니가 차지하는 위상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같은 사 실은 난설헌 남매가 심리적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는 좌초한 사실과도 상 당 부분 연관되는 것으로서, 난설헌의 경우에는 그 외상이 더욱 심각했을 가능성 이 크다. 여성 정체성의 형성은 모녀의 유대감에 의존하는515) 경우가 일반적이 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여성은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아이들의 관계를 연 맥시키고, 관계적 자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생물학적인 어머 니가 되지 않는 경우라도 여성으로서 맺게 되는 어머니와의 유대와 공감은 그것 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계적 자아로서의 여성 정체성에 주요한 기반이 된 다. 왜냐하면 여성이 성장하며 사회화되는 과정이 모든 여성을 잠재적 모성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관점과 규범의 보이지 않는 강제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주요한 초점은 여성이 모성 경험을 어떻게 인식해 가고, 그것을 자신과의 연관성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 가느냐 하 는 것이다.516) 그렇게 보면 김씨 부인 역시 난설헌의 불행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 513) 宣祖實錄 卷178, 37년(1604 甲辰) 9월 6일(癸丑) 許筠爲遂安郡守 爲人憸邪 且無 行檢 曾往江陵地 惑於名妓 其母死於原州 亦不奔喪 514) 김태형,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역사의 아침, 2009, pp.217~226 참조 515) J. Kristeva 著, 김열규 外 譯, 페미니즘과 문학, 문예출판사, 1992, p ) 조형, 여성주의 가치와 모성 리더십,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p

188 된다. 그녀는 어린 난설헌에게 조선조의 사대부 여성 이라는 지위에 걸맞는 역 할 기대 를 정확히 인식시켰어야만 했다. 그리 했더라면 적어도 성인이 된 난설 헌이 자신의 내면에 위치한 자율적 개별성 과 타율적 여성 존재 사이에서 방황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둘 중 어떤 하나에 자신을 온전히 맞추지 못하여 고통을 겪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난설헌의 불행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비범한 재능을 타고 태어난 자기 자신과, 그 재능을 사회적 요구에 맞게 통제하고 조화 시킬 수 있도록 지도하지 못한 부형(父兄)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蘭雪軒 文學 硏究, 女性主義的 視覺에 對한 反省 만일 우리가 전통 사회의 여성 문학을 소수 집단 문학에 넣을 수 있다면, 그 것은 숫자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역학 관계의 문제와 관련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의 문학이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구도 속에서 주류 집단의 지배적 문화 로부터 배제되거나 차별 받는 집단의 문학 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나 조선조 여성의 한시 창작은 남성 중심의 한문 유교 문화가 지배했던 당시로서 는 매우 특이하고 희귀한 것이었으므로 수적 차원으로 보더라도 소수 집단의 문 학임이 분명하다.517)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허난설헌은 우리 문학사에서 더없이 특별한 존재이다. 당대 여성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 시적 세 계에 있어서도 여타 여성 작가들과의 그것과는 다른, 분명한 차별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가 여성에 대해 다양한 세계의 경험 및 분방한 자기표현을 허용치 않았던 탓에 대개의 여성 시들은 협착하게 규격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 던 반면,518) 난설헌의 시만은 규방시 라 일컬어지는 당대 여성 시의 시제(詩題) 에서 벗어나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광범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어519) 일반의 여 성 시와는 뚜렷이 변별된다. 517) 김흥규, 회, 2006, 518) 유종호, 519) 김성남, 소수집단 문학과 한국 문학사의 전망, 고전문학연구 29輯, 한국고전문학 p.7 참조 시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5, p.201 참조 허난설헌 시 연구, 소명출판, 2002, p.17 참조

1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설헌의 문학이 여전히 문학사의 외방(外方)에 머물러 있 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녀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진 위(眞僞) 를 의심받고 있으며, 난설헌의 존재 역시 남성 중심의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 시인 중 하나로 가끔씩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여성이 소수자이고 그 문학 역시 소수집단의 문학으로 칭할 수 있다면, 조선조 여성을 대표하는 난설헌의 문학 또한 새롭고 긍정적인 시각에서 읽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소수 집단 문학으로서의 여성 문학이 소수자로서 여성의 정 체성을 확인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지배 집단의 문학, 즉 주류적 문학과는 다 른 문학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해석하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520) 여성의 글쓰기 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남성의 글쓰기 는 이성적 논리적 형태를 띠며 이는 후에 보편적인 글쓰기로 정형화되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지배적인 남성적 글쓰기의 규범을 무반성적 으로 수납하게 된다.521) 그런데 이 같은 글쓰기는 전통과 권위에 의거한 것으로 서 그 대부분이 역사에서 인정한 주류 담론에 근거하고 있는 탓에, 지나치게 독 창적이거나 개성적인 글은 오히려 이단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에 반해, 자체적인 역사를 갖지 못한 여성의 글쓰기는 의지하고 기댈 전거 가 많지 않다. 권위를 담보해 주는 전거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 같은 사실로 인해 여성의 글쓰기는 흔히 비정통적이고 비체계적인 글쓰기로 폄하되기도 하지 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개 성적이고 창조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여성의 글쓰기가 굳이 독점적이고 배타적 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수자로서의 여성은 오히려 부차적 인 것을 포용하며 자신 속에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 그들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몸의 논리, 감각의 논리를 배제하지 않는 까닭에 그 속에는 서로 다른 것 들, 서로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데,522) 난설헌의 시에서 나타나는 다 양성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기왕의 많은 연구자들이 난설헌의 문학에 대해 여성 해방의 신호탄 523)이자 520) 김경미, 소수자 문학으로서의 고전 여성문학의 성격과 그 의미, 고전문학연구 29 輯, 한국고전문학회, 2006, p ) 장석주, 풍경의 탄생, 인디북, 2005, p ) 안미현, 앞의 논문, pp.69~70 참조 523) 장진의 허난설헌론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79)과 차옥덕의 허난설 헌 작품에 나타난 페미니스트 의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0 남자들에 대한 경쟁의식과 반항 의식의 소산 524)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이 같 은 견해는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고 생각된다. 김태준(金台俊)이 조선한문학사 를 저술하면서 난설헌은 조선이라는 소천지 에 더구나 여성으로 태어난 것과 그 중에도 가장 박색인 김성립의 처가 된 것을 평생의 삼한(三恨)으로 생각하며, 더욱 김성립의 원유(遠遊)로 인하야 금슬이 화 해치 못함을 슬피 여겨 원사(怨詞)의 작이 많았다 525)는 언급을 한 이래로, 삼 한 이라는 말이 마치 난설헌의 의식 세계 전모를 대변하는 말인 양 잘못 인식되 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난설헌과 허균 중 어느 누구도 그 같은 발언을 남긴 적 이 없고 고래(古來)의 어느 문헌에서도 그 같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난설헌을 바라보는 그간의 시각 자체에 선입견이 개재되어 있었을 가 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31년, 김태준이 펴낸 조선한문학사 는 한국 한문학을 역사적 체계 아래 서 술한 첫 번째 노작(勞作)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지만, 일제 강 점기라는 열악한 조건에서 저술된 관계로 오탈자가 무수히 많고 인용된 문헌 역 시 전거(典據)가 분명하지 않은 등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526) 또한 김태 준이 일찍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 대부분의 저작들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 의 관점에 맞춰 집필한 사실 역시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한문학사 가 작가의 민족의식 및 반봉건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것 이라면,527) 여성문학 과 관련한 논의 또한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전 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김태준이 말한 난설헌의 삼한 은 뚜렷한 전거 없이 연구자의 주 관적 판단에 의거해 결론을 내린 인상이 역력하다.528) 그는 난설헌의 불행이 조 1986) 등 많은 연구들에서 이 같은 견해가 도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24) 金用淑, 허난설헌의 꿈과 눈물, 淑大學報 11호, 1958, p.223 허미자, 앞의 책, p.236에서 재인용 525) 김태준 著, 최영성 校註, 조선한문학사, 심산, 2003, p ) 심지어는 조선한문학사 가 발간된 1931년 당시, 김태준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했다. 527) 네이버 고전문학사전, 권영민 편 - '작품해설' 정보, 朝鮮漢文學史 項目 참조 528) 김태준이 언급한 난설헌의 삼한(三恨) 중 유사한 전거가 확인되는 것은 박색인 김 성립의 처가 된 것을 한으로 여겼다 는 세 번째 항목이다. 김태준이 참고했을 것으로 추 정되는 문헌과 언구(言句)들은 다음과 같다.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63, 天涯知己書, 筆談 난공 : 귀국의 경번당(景樊堂)은 허봉 의 누이동생으로 시에 능해서 그 이름이 중국의 시선(詩選)에 실렸으니, 어찌 다행한 일 이 아니겠습니까?

191 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성 으로 태어난 탓이라고 하여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였으며, 그 한편에 남편의 원유로 인해 금슬이 화해치 못함을 슬피 여겨 원사의 작이 많았다 는 언급을 더함으로써 은연중 남성 문학사 가(文學史家)로서의 편향된 입장을 드러내었다.529) 이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후의 많은 여성 연구자들은 김태준의 논의를 근거로 삼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난설헌의 위상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 다. 이 같은 시도는 주로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성장해 온 여성운동과 페미니 즘 문학 비평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는데530) 그 결과, 난설헌은 예속과 굴종의 시대에 살면서도 당시 여성에게는 철저히 제한되어 있던 학문과 창작활동을 통 해 여성적 삶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 여성성의 비극을 극 복하였으며, 개인적 정한(情恨)에서 나아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여성 의식을 표 출했던 선각적인 페미니스트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531) 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 다. 이 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저 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蘭公曰 貴國景樊堂許篈之妹 以能詩名 入中國選詩中 豈 非幸歟 湛軒曰 此婦人 詩則高矣 其德行遠不及其詩 其夫金誠立 才貌不揚 乃有詩曰 人間 願別金誠立 地下長從杜牧之 卽此可見其人 蘭公曰 佳人伴拙夫 安得無怨) 박지원, 熱河日記, 太學留館錄 8월 9일(乙卯) 허씨가 김성립에게 시집갔었는데 김성 립의 얼굴이 오종종하게 못생겼으므로, 벗들이 그를 놀리어 그 아내가 두번천(杜樊川)을 연모한다 하여 조롱한 것입니다. 대개 규중(閨中)의 음영(吟詠)이 본시 아름답지 못한 일 인데, 더욱이 두번천을 연모한다고 유전(流傳)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許 氏嫁金誠立 而誠立 貌寢 其友 謔誠立 其妻 景樊川也 閨中吟咏 元非美事 而以景樊流傳 豈不寃哉) 529) 난설헌 시의 상당 부분이 원사(怨詞) 라는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난설헌의 전체 시 213수 가운데는 유선시 가 128수를 차지하는데 이 작품들을 원사 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며, 자탄(自歎) 이나 애상(哀想)'의 정조를 드러낸 시들 역시 남 편에 대한 원망 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성격을 원사 로 규 정짓기에는 다소의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530) 학술단체협의회 著,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현재와 미래, 푸른 숲, 1998, p ) 유임순, 허난설헌 시에 나타난 페미니즘 의식 연구, 공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4, pp.74~75 참조 난설헌의 문학을 여성학적 관점으로 해석한 대부분의 논문에서는 거의 모두가 위와 유사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하나의 예로, 김종순은 자신의 논문( 허난설헌 문학과 생(生)에 대한 페미니즘 연구 : 닫힌 사 회에서의 자아를 찾아서 (한성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5)에서 난설헌이 체 제의 부조리를 깨닫고 같은 인간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성 을 인식한 뛰어난 여성이었지만, 당시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지탱해 나갈 의지마저 빼앗았으므로 철저한 유교적 가부장제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고 언급하고

192 그렇다면 난설헌이 시를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신을 타자 화하려는 세계에 대해 저항의 의지를 표출했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같은 논리에는 다소의 비약이 있 다고 판단된다. 물론 난설헌이 여성으로서의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그로 인해 심 리적 갈등과 방황을 겪었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그녀가 당시의 유교적 가부장제를 여성에 대한 억압 의 기제(機制) 로 파악하고, 이에 대해 저항을 시도했다 는 류(類)의 설명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532) 일반적으로, 페미니스트 비평의 적절한 과제는 언어에 대한 여성의 접근 방식, 즉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유용한 어휘의 범위, 언어 표현을 창출하는 이념적이 고 문화적인 결정 요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인식된다. 문제는 언어가 여성의 의식을 표현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것에 있지 않고, 여성들이 언어의 풍부 한 자원의 사용을 거절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며 완곡어법 또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도록 강요당해 왔다는 데 있으며,533) 이런 우회하여 말하기 가 사회적 약 자의 전형적인 말하기 방식 중 하나534)라는 데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선행 연구자들은 아마도 난설헌의 작품에서 표층적 의 미 이상의 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었을 것이며, 결국에는 난 설헌이 사회의 비주류인 여성으로서 제도권 문학인 한시를 창작하고 유포시켰다 는 점에 착안, 아녀자로 태어나 남존여비 관습이 사방에서 짓누르는 시대적 환 경에 저항하다가 힘에 겨워 죽어간 슬픈 여성의 대표자535) 로 그 존재를 각인하 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난설헌의 작품을 분석했던 그간의 연구자들은 난 설헌의 시에 보이는 작가적 태도를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 으로 규정하고, 사 실의 입증을 위해 몇 가지의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있다. 532) 허균 허난설헌 연구의 권위자 중 하나인 장정룡은 난설헌의 시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허난설헌은 유선사 를 통해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자주의식과 평 등사상을 선계 에 의탁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동시에 남성 중심적 봉건적 예교 사상에 문 필로써 저항한 것으로 판단된다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새문사, 2007, p ) J. Kristeva 著, 김열규 外 譯, 앞의 책, p ) 박무영, 여성화자 한시를 통해 본 역설적 남성성 이화어문학회, 우리 문학의 여성성 남성성(고전문학편), 월인, 2001, p ) 김현룡, 허균,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4, p

193 같다. 먼저 난설헌의 시에서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정한 (情恨)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여성의 존재 가치가 몰각된 당시 사회에서 자신 의 자아를 보존 확인하고자 하는 주체적 자아의식 과 '여성으로서의 자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애환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 의식의 영역이 이웃 과 사회로 확장되어 형상화되었다는 점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 내용이 다분히 관념적이며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한정된 주제만을 다루 던 보통의 여류 시인들과는 달리 대(對)사회적 관심과 발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 서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인식되었다.536) 이 외에도, 난설헌이 허봉 이달의 영향을 받아 풍유 로써 지배층의 비리와 사회적 모순을 지적했다거나537) 사회 정치 전쟁 등 사회의식을 나타낸 작품 들을 통해, 성(性) 역할 구분 철폐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이슈인 공적 (公的) 영역에의 여성 참여 의식을 표출했다는 등538)의 여러 의견이 도출되어 난설헌 문학에 대한 여성학적 접근의 성과를 가시화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 같은 연구 성과의 이면에 성급한 연역(演繹)의 오류 가 내 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연역 이란, 논의의 전제가 되는 다른 진술에서부터 연역하여 결론을 얻어 내는 추론의 방식을 말한다. 이 논의는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참이 아닐 수 없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결 론은 전제에서 언급된 것 이상을 말할 수 없으며, 단지 전제에 암시적으로 포함 된 어떤 결과를 명료하게 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전제에 싸여 있는 결론을 펴서 내놓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539) 어쩌면 그간의 많은 연구자들은 논의의 출발에서부터 난설헌은 당시로서는 거 의 유일한 현실 저항적 성향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라는 명제를 테제화(These化)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난설헌의 출새곡(出塞曲) 입새곡 (入塞曲) 등을 우국시나 전쟁류로 파악하거나,540) 소년행(少年行) 등의 작품 536) 유임순, 앞의 논문, p.84 참조 537) 한성금, 허난설헌 한시의 미학, 조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p.87~94 참조 538) 차옥덕, 앞의 논문, pp.111~ ) 한스 라이젠바하 저, 전두하 역, 과학철학의 형성, 선학사, 2002, p ) 이 같은 견해는 이연신( 허난설헌의 한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4 을 환락을 좇는 남성들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541) 더불어 난설헌의 궁사(宮詞) 20수를 궁녀의 입장에서 읊 은 것으로 해석하여 그 내면에 궁녀들의 원망 및 궁전 생활의 비애, 더 나아가 조선의 봉건 체제의 불합리성을 비꼬는 풍자 가 깃들어 있다는 설명을 이끌어 내기도 했으니,542) 이는 애초부터 난설헌에 내면에 위치한 창작의 동인(動因)을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 으로 규정하고, 논의 전체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 연구자 들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난설헌 연구의 올바른 방향 정립을 위해서는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개별 연구들의 성과를 점검하고 기존의 연구 방법 및 목적, 전제 등을 비판적 반성적인 입장에서 고찰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 된다. 난설헌의 문학을 작가의 여성성 에만 의존하여 해명하려는 현재의 방식으 로는 더 이상의 발전된 논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이 제기된 소수자 문학 에의 관심은 난설헌 문학의 연구가 나아가야 할 또 다른 방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여성문학을 단순히 여 성 만의 문학으로 보지 말고 소수자 문학의 일부로 취급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먼저 이경하는 2004년의 박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기고 있다. 1978)과 김상남( 허난설헌의 한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1)의 논 문에서 처음 제기되었는데, 허미자는 저서 허난설헌 을 통해 이들의 논리가 갖는 오류 에 대해 지적하였다. 그는 난설헌의 시에서 나타나는 출새곡(出塞曲) 입새곡(入塞曲) 등의 작품은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악부의 제목과 제재를 따라 지어 본 것이지, 우 국시 전쟁류라고까지는 볼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p.232 참조) 또한 이숙희는 난 설헌이 여인으로서 변방 수자리 간 병사의 고뇌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두고 국경의 분 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변방 갑산에 귀양 간 오빠 허봉의 영향 때문 인 듯하다고 언급하였다. (이숙희, 허난설헌 시론, 새문사, 1987, p.108) 2000년에 나 온 김지숙의 논문( 허난설헌 한시 연구 : 시의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강원대학교 교육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역시 이숙희의 논의를 따라 이들 작품을 전쟁시의 입장에서 분 석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허미자의 견해에 대해 지지의 입장을 표명한다. 541) 김종순, 앞의 논문, p.69 김명희는 소년행 류의 작품이 당시에는 누구나 즐겨 썼 던 제재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굳이 남편인 김성립과 연관 짓지 말고 젊은이들에게 주는 당부의 시 라는 공통의 심상을 노래한 것으로 보는 편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 다. ( 김명희, 허부인 난설헌 시, 새로 읽기, 이회, 2002, p.15 참조) 542) 한성금, 앞의 논문, p.101 참조 궁사 는 중국시의 한 체(體)로서, 궁정 내부의 비사 (秘事) 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읊은 것이다. 이 시체는 당나 라 왕건(王建)으로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부분이 궁 중에 있는 궁녀를 소재로 삼아 창작되므로 원망 의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따라서 난설헌이 궁사(宮詞) 를 통해 조선의 봉건 체제의 불합리성을 풍자 했 다는 지적은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판단된다

195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서 여성 문학 전통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 다. 하나는 소수의 훌륭한 여성 작가 문학을 선발하여 자국 문학사의 위대한 전 통 속에 자리매김하는 정전화(正典化)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여성성 개념 을 중심으로 진행된 여성 문학 특질론이다. 여성 문학의 정전화 작업은 여성 문학 사 서술의 초기 단계에서 특히 두드러졌는데, 현실적 측면에서 그 의의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수 없다. 그러나 정전 또는 고전이란 이름이 내포하는 문학성 에 대 한 전제에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다수의 여성 문학 전통을 소외시키고 그 다양성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여성 문학 특질론은 다분히 본질론적 전제를 암 시하는 여성성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성성 에 대한 해석 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성 문학에 관한 논의를 비역사화 하는 위험을 내포하 고 있다. 정전화 작업과 마찬가지로 특질론 역시, 여성 문학 전통의 이질성과 다양 성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많았다.543) 이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젠더 권력 관계의 해명을 핵심 과제 로 삼는 여성 어문 생활사 서술을 제안하였는데, 이는 여성의 어문 활동 및 여 성 담론의 역사를 젠더 권력 관계의 변화와 지속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다. 또한 여기에, 여성 문학사는 여성의 문학 활동의 역사인 동시에 여성 담론의 역사인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덧붙이면서 어문 생활 의 개념이 여성의 어문 활동과 여성 담론을 효과적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544) 그보다 앞서 신경숙은 문학에 있어서의 여성 개념을 소수 집단 전체의 특성 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개진하였다. 그는 현재의 고전 여성 문학 연구가 고유성 을 지양하고 다양성 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 다고 강조하며, 우리가 그간 여성적 관점 을 표방해 오면서도 작품을 다루는 실 제에 있어서는 상이성을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하나의 보편 만을 인정하며, 이 하나를 중심으로 질서 지우려는 가부장주의적 태도 를 여성문학 연구에서도 사용해 온 것에 대해 자성을 촉구하였다.545) 이 같은 관점에서, 글의 논지를 집약하고 있는 다음 부분은 여러 모로 우리에 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543) 이경하, 여성 문학사 서술의 문제점과 해결 방향,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 문, 2004, p ) 이경하, 앞의 논문, pp.145~146 참조 545) 신경숙, 고전시가와 여성,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0, p.317 참조

196 오늘날 여성이 남성과 더불어 문학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 학적 상황이 새로이 규정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그간 배제되어 온 문학 주체자로 서의 여성의 적극적인 관점이 요청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배제된 공동 체 내부의 소외자 의 시각이지, 여성 이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학사는 모든 소외자, 배제된 자의 시각과 경험을 포함하여 다시 서술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 주의적 시각이 끊임없이 다른 소외 계층, 주변부 사람, 제3세계, 유색 인종, 자연에 눈을 돌리고 나아가 이들과 연대코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시각은 여성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경험이 상이하다 는 것 에서 출발한다. 모든 부류의 문학하는 주체, 문학 내용의 포괄성을 위해 새로운 주 제, 새로운 대상을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이를 배제시키고 형성된 기존의 문학사 정의들은 다양한 공동체들을 위해서는 분명 너무 협소한 개념 규정들이기 때문이 다. 이렇게 볼 때 여성주의적 시각은 기존 문학사를 단순히 보충 하는 것이 아니 다.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새로운 중심지로부터 재조직하려는 것이 다.546) 일반적으로 다수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의 소수자들은 척도의 강요 속에 사는 동시에, 그 척도에서 벗어난 삶을 창안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항상, 이미 척도로 주어진 것들과 대립하고 척도의 형태로 작용하는 다수자의 권력과 잠재적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며 그 척도와 권력이 삶의 방식 자체와 관련된 것인 한, 가장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조차도 그러한 대립과 충돌의 성분을 내포하 고 있다. 이에 따라 소수자의 표현 형식인 소수자 문학 은 가장 사적이고 내면 적인 것을 다룰 때조차도 항상 정치적인547) 것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에 더하여 문학에 있어서의 근대성 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소수자 집단에 속한 작가 라는 사실은 우리 문학사에서 소수자 문학이 지니는 의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소수자 문학은 단지 지배 계층에 의해 차별 받고 억압당한 사람들의 저항 이나 한풀이 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 닌, 토인비(Toynbee)가 말한 창조적 소수자 들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해되어야 하며548) 그간 문학사 기술에 있어 소수자의 문학을 홀대해 온 우리의 546) 신경숙, 위의 논문, p ) 고미숙 著, 들뢰즈와 문학 기계, 소명출판, 2002, p )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문명의 성장을 야기하는 창조적 행위를, 프랑스 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에서 묘사한 위대한 신비가의 영혼 상태(정

197 태도 역시 통렬한 반성이 요구된다. 소수자 문학이야말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지나간 기존 문학사의 흐름이나 담론체계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여 도구화된 이성적 담론에 의해 억 압된 진실 및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표현하였고, 그를 통해 우리 문학사의 새로 운 지평을 여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중심부와 주변 부, 지배적 영역과 소외된 영역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편차, 긴장 등의 문제를 살 피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영역이다.549) 우리 문학사에 있어 여성의 문학 은 다른 소수 집단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작 품의 수량이나 소재적 측면에 있어 일정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 서 여성 문학 연구에 있어 여성으로서의 독자성 을 강조하는 현재의 입장은 수 정되어야 마땅하며, 만일 그 같은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여성 문학은 앞으 로도 문학사의 주변자 위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여성 문학이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자기 정립 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층 위에 놓인 여타 소수 집단 문학과의 연대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 신경숙의 논의는 모든 사람의 경험은 상이하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즉, 모든 부류의 작가, 새롭고 다양한 대상 과 주제들을 인정하고 포용함으로써 기존의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소수자들의 공헌을 새로이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경미 역시 소수자 문학의 관점에서 고전 여성 문학 작품을 이해하려고 시도 하였고 그 결과, 고전 여성 문학이 주류적인 흐름에서 배제된 주변적 위치에 있 으면서 기존의 장르 위계 바깥에서 창작되어 새로운 미학을 드러냄으로써 전복 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소수자 문학 연구가 지금까지 이루어 져 온 것과 같은 방식의 주류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하나의 문학사 가 아니라, 지에서 운동으로 막 도약하려는 상태) 에 비유한다. 삶의 타성에 젖은 한 사회 집단 속 에서 어떤 소수는 마치 저 위대한 신비가의 황홀경처럼 타성을 깨고 돌진하려는 창조적 의지로써 반응하게 되는데, 바로 이런 창조적 소수자들에 의해 문명은 도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도전과 반응의 과정 속에서 문명이 확실한 상태로 발전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도전은 외부, 즉 자연 환경이나 문명 밖의 인간들보다는 내부로부터 제기된다. 이에 그 사회의 가치는 비물질적, 영적 가치로 전환되어, 기술력이나 지리적 확장이 아 니라 자기 결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문명 진보의 척도가 된다. ( 김우창, 103 人의 현대 사상, 민음사, 2003, p.607 참조) 549) 김흥규, 앞의 논문, p

198 다양한 소수 집단이 주체가 된 문학사들 의 기술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력히 주 장하였다.550)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여러 쟁점들은 그간의 연구자들이 간과하고 지나친 난설헌 문학의 본질 에 대해 새로운 해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개인 과 사회, 그 대척적 극점(極点)에서 난설헌의 문학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에 무리가 있 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가지의 관점에 입각, 난설헌의 문학을 설명해 왔다. 그 하 나는 생애사적 차원에서 그 문학의 특질을 검토, 눈물 과 정한 으로 그 특질을 규정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당대에 소외된 여성 이라는 측면에 주목 하여, 그 작품들 역시 당시의 사회 제도 가부장제 이념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뭇 달라 보이는 이 두 가지의 견해가 궁극 에는 여성성 의 강조라는 하나의 입장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문학 연구에 있어 여성주의적 시각은 여성 을 기준으로 삼고 새로운 해 석을 통해 문학사를 보다 새로이 인식하는 데에 기여하지만, 지나친 여성성 의 강조는 때로 문학사의 전반에서 여성 을 분리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 문학으로의 난설헌 연구는 새로운 논의를 여는 출발점 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수자의 글쓰기가 논리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중 시하고 의도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를 선호하여 많은 부차적 요소들을 배제 시키고 부정하고 차별화하며 때로는 왜곡시키는 데 비해, 소수자의 글쓰기는 보 다 자기결단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요소, 혹은 자체적이고 유희적인 속성을 지닌다 는 특징이 있다. 이는 즉, 소수자의 글쓰기가 하나의 결론 도출을 위해 많은 주 변적인 것들을 배제시키거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위계질서에 따라 모든 것을 차별화하는 것이 아닌, 포용적이고 열린 글쓰기를 지향함551)을 의미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난설헌의 글쓰기 역시, 남성 사회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 저항적 행위라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사유(思惟)들을 열린 시각으로 포용,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녀는 소수자인 여성 이었고 그로 인해 제도 적 글쓰기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설헌의 시 속에 주체적 인 나와 타자화 된 나, 이성과 감각, 남성성과 여성성, 현실과 꿈 등 온갖 상반되는 것들이 공존하고 당시에는 금기로 여겨졌던 성적 담론이 표출되고 있 550) 김경미, 앞의 논문, pp.62~63 551) 안미현, 앞의 논문, pp.69~70 참조

199 는 것 역시 난설헌의 문학, 나아가 여성 문학이 지니는 소수자 적 특성에 기인 한 것으로 판단된다. 소수자의 글쓰기는 특정 이데올로기나 가치에 묶이거나 안주하지 않고 자유롭 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 낸다.552) 많은 여성 시인들 중 난설헌의 작품에서 유독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의식이 성리학에 의해 경화(硬化)되지 않았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대의 사대부 여성 시인들이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서 자신을 형상화하려 힘쓴 데 비해, 난설헌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분열된 자아의 모든 국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 었으며 종국에는 여성 으로서의 모든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4. 許筠 : 多讀과 博學 의 追求 1) 嗜好 로서의 文學 藝術 思想 조선의 역사에서 허균만큼 박학(博學)한 인물은 찾기 어렵다. 스스로도 나는 젊었을 때, 일찍이 문장을 잘했던 사람들을 사모하여 책이라곤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553)라고 고백하였던 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적 호기심과 지식의 방대함은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것이었다. 실록에 (허균은)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모든 서적을 박람(博覽)하여 글을 잘 지었다.554) 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나, 이항복이 허균의 문고에 붙일 서문을 찬하면서 지금 허군은 삼교(三敎)를 비롯하여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통관(洞 觀)했고 더욱이 축어(笁語)를 독실히 믿으며, 시를 가지고 외관(外觀)을 장식했 다 555)는 언급을 한 것 등은 허균이 지닌 박학적 면모를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중앙의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허균이 유불도 552) 안미현, 앞의 논문, p ) 許筠, 앞의 책, 卷4, 文部1, 送李懶翁還枳柤山序 余少日嘗慕古之爲文章者 於書無所 不窺 554) 宣祖實錄, 卷105, 31年(1598 戊戌) 10月 13日(乙丑) 許筠 賦性聰慧 博通群書 長 於詞章 但爲人輕妄 無足觀者 555) 李恒福, 白沙集 卷2, 叙, 惺所雜稿序 今許君洞觀三敎 以及百家 尤信笁語 緣餙以詩

200 삼교와 제자백가를 융회관통할 정도의 상당한 독서광이었고, 독실한 불교 신앙인 이었으며 탁월한 시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556) 허균의 학문에 대해 살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 고 있다는 점이다. 유학은 물론이고 불교와 도교, 시와 문장, 잡록과 소설류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이 뻗치지 않은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렇듯 학문적 잡식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학문 경향은 어디에 근원한 것일까?557) 이 는 아마도 허균의 책에 대한 탐닉이나 수집벽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허 균이 지은 다음의 시구를 보자. 동상(東廂)에 머물러 짓다[寓東廂作] 平生坐書淫 평생에 서음으로 이름났으니 五車行輒隨 오거서(五車書)는 언제고 따라다니리 發篋揷滿架 상자 열어 서가에 가득 꽂으니 披讀以自嬉 펴 읽으며 스스로 기뻐한다오 558) 위의 글에서 허균은 자신이 평생에 서음(書淫) 으로 이름이 났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의 서음 이란 독서 또는 장서(藏書)에 탐미(耽味)하는 벽성(癖性) 을 의미하는 것으로, 허균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서음 이라 지칭한 것은 그 독 서의 질적 양적 수준이 자부할 만한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중국에서 수입된 막대한 분량의 책들은 조선의 서적 문 화 및 지식계에, 그리고 종국에는 조선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 통해 대륙의 지식은 끊임없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왔으며, 책깨나 읽는다는 혹은 학문을 한다는 지식인들은 고전이 된 중국의 서적이나 당대에 수입된(혹은 당대 에 중국에서 출판된) 중국의 서적들을 지속적으로 섭렵했다.559)이러한 사회 분위 기 속에서 허균이 유독 특별한 독서가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의 가풍 및 학문 적 취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중형인 허봉 또한 나이 겨우 556) 이종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 p ) 김풍기, 허균의 문화적 토대와 독서 경향, 강원인문논총 14집, 강원대 인문과학 연구소, 2005, pp.28~29 558) 허균, 惺所覆瓿稿 卷2, 詩部2, 眞珠稿, 寓東廂作 559) 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p.19 참조

201 약관에 이미 천하의 책을 모두 읽었다 560)는 평을 얻었던 사실은 허균이 보인 독서광 으로서의 면모가 가정으로부터 형성되었을 충분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 다. 아마도 허균은 당대의 재사(才士)로 군림한 부형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많 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고 훗날에는 장인이 소장하던 천여 권의 책까지 두루 섭 렵했던 것으로 보이는데,561) 그에게 있어 독서 란 모든 논의를 하나의 결론으로 만 집결시키려는 중앙집권적 독서 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 과 모험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며 그를 통해 사상적 자유로움은 물론 한정(閑情) 을 즐길 계기까지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562) 도서 구입과 관련한 다음의 기록은 책에 대한 허균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를 잘 보여 준다. 유인길(柳仁吉)의 임기가 만료되자 명삼(明蔘) 32냥을 내게 넘겨주며 이는 공 납하고 남은 것인데 돌아가는 짐에 누를 남길 수 없으니 그대가 약용(藥用)에 충 당하라. 고 하기에 나는 감히 사사로이 쓸 수는 없으니 이 고을의 학자들과 같 이 쓰고 싶소. 하고 상자에 담아 서울로 돌아왔다. 마침 사신으로 가게 되니 그 것으로써 육경(六經) 사자(四子) 성리대전(性理大典) 좌전(左傳) 국 어(國語) 사기(史記) 문선(文選) 이백(李白), 두보(杜甫), 구양수(歐陽 脩)의 문집 사륙(四六) 통감(通鑑) 등의 책을 연시(燕市)에서 구해 가지고 돌아와 이를 노새에 실어 그 고을 향교로 보냈다.563) 위의 글에는 책을 대하는 허균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이 얻은 삼으로 책을 구입, 이를 사적으로 소장하려 하지 않고, 고을의 선비들에게 빌려 주어 종내에는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뜻을 피력한 560) 許篈, 朝天記, 序(柳成龍 撰) 美叔年甫弱冠 已能盡讀天下書 561) 許筠, 앞의 책, 卷7, 文部4, 記, 盤谷書院記 나의 장인 직장공(直長公)은 거기에 집 을 짓고 사셨는데, 이름을 반곡서원(盤谷書院)이라 했다. (중략) 만년에 이 서원을 짓고 도서 1천 권을 진열한 뒤 그 안에서 노닐면서 시를 짓고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余外舅 直長公舍居之 名曰盤谷書院 (중략) 晩年構此院 陳圖書千卷 槃博其中 作詩以自娛) 562) 김풍기, 앞의 논문, p.37 참조 563) 許筠, 앞의 책, 卷6, 文部3, 記, 湖墅藏書閣記 瓜滿回也 以明蔘三十二兩付不佞曰 此 貢羨也 不欲累歸橐子 其充藥籠之用 不佞曰 不敢私也 願與邑學子共之 笥而歸都下 因朝价 之行 購得六經四子性理左國 史記 文選 李杜韓歐文集 四六通鑑等書於燕市而來 以騾馱送 于府校

202 것이다.564) 이 같은 사실은 허균이 책 의 역할과 유용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도서를 구입한 목적 역시 단순한 소장(所藏) 에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또한 허균이 한정록(閑情錄) 을 편찬하면서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의 사 행을 통해 4천 여 권이나 되는 서적들을 수입한 사실 역시,565) 허균이 지닌 지 적 욕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시대 문인 과 지식인들의 독서 대상은 중국의 책들이었으나 명과 조선이 건국된 이후 대륙 과의 왕래가 공식적인 사신 편으로 제한되었던 까닭에, 허균은 일생 세 차례의 사행을 통해 막대한 양의 책들을 사 들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허균의 삶에서 책이란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일 을 겪었을 때도 책만이 위로가 되었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책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의 다양한 독서 편력은 시문 창작에도 영향을 주어, 허균은 그 누 구보다도 당대 중국의 문단에 대해 민감하게 촉수를 뻗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최근 중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문인이 누구인지, 그의 글이나 문집을 얻어 볼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만큼 중국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던 것이다.566) 그런데 이처럼 박학 계고(稽古)했던 허균을 우리는 학자 로 기억하지 않는 다. 그는 단지 불세출의 문인이자 예술가로 기억될 뿐이다. 당대의 천재였던 허 균은 왜 학자 가 되지 못 한 것일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학자의 개념을 자 기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보유한 사람 으로 한정한다면, 허균은 애초부터 그 자 질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자기 자신을 유자(儒者) 라 자부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이론적 틀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 든 현상에 주목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허균의 입장 에서는 문학이나 예술, 심지어는 사상조차도 그저 흥미로운 놀이이자 기호(嗜 好) 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허균이 지나치게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사습을 어지럽힌 564) 許筠, 앞의 책, 湖墅藏書閣記 不佞就湖上別墅 空一閣藏之 邑諸生若要借讀 就讀訖還 藏之 如公擇山房故事 庶以成柳侯興學養才之意 565) 許筠, 앞의 책, 閑情錄卷首, 閒情錄序, 凡例 참조 566) 김풍기, 조선의 이단아 허균 - 새 문화의 타는 목마름, 만 권 책으로 달랬다, 월간 중앙 2004년 9월호

203 다는 세간의 비난 역시 일종의 오해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허균이 불교에 대해 보였던 호감은 어떤 성질의 것이었을까? 이 같은 문제에 관 해서는 다음 허균의 글을 참고할 만하다. 국가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 것은 옳으나, 사람이 신불(神 佛)에게 복을 비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위로는 바른 학문[正學]을 높여 선비의 습 속을 맑게 하고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은 결국 같은 것이다. 이 절의 중수(重修)를 처음 대원부인(大院夫人)이 시작하여 의 인왕후(懿仁王后)가 마치셨으니 전하를 향한 두 분의 정성이 모두 지극하다 할 것 이며, 전하께서도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결연히 그 역사(役事)를 끝마치시어 선부 인(先夫人)의 뜻을 이루고 왕비의 소원을 마무리하셨으니, 이 어찌 전대(前代)의 왕이 이교(異敎)를 숭상하여 국력을 소비하고 탑묘(塔廟)를 높이 세워 국운의 장구 (長久)를 빌다가 드디어는 혼란과 망함을 초래한 것과 같은 것으로 논할 수 있겠 는가?567) 위의 글은 허균이 1602년에 지은 도솔원(兜率院) 미타전(彌陀殿)의 비문(碑 文) 중 일부로, 그는 이 글에서 절의 유래 및 왕궁의 원찰(願刹)이 된 내력, 절 을 새로 중수하게 된 사연 등을 소개하면서 그 말미에 자신의 불교관을 덧붙이 고 있다. 허균은 윗글에서 유학과 불교를 같이 놓고 보았는데 이는 즉, 지배층에 서는 유학을 높이고 백성들에게는 불교를 권장하는 것이 바른 정치에 도움이 되 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불교 신앙인의 자세라기보다는 정치인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것이지만, 당시는 유교가 국가의 기본 체제였던 만큼 이러한 글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568) 결국 이 글은 허균이 1607년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의 직에서 물러날 당시 중요한 빌미를 제공하는 등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당시 사헌부에 서 올린 상소문을 보면 허균이 유가의 자제로서 도리어 이교(異敎)에 빠져 승복 을 입고 예불을 외고 있으니, 몸은 조정에 의탁하고 있어도 사실은 하나의 567) 許筠, 앞의 책, 卷16, 文部13, 碑, 重修兜率院彌陀殿碑 余曰 國家闢異端 不崇釋敎是 矣 而人之祈福於神佛 亦一道也 使崇正學 以淑士習於上 而以佛之緣果禍福 警人心於下 則 其爲治均矣 此院之修 初出於大院夫人 而懿仁后終之 其向殿下之誠 俱可謂至矣 而殿下不 攣於拘見 斷然終其事 以成先志 以卒后之願 是豈與前代人主尊尙異敎 費國力崇建塔廟 以 祈久長 而卒召亂亡者 同日而語哉 568) 허경진, 許筠 評傳 돌베개, 2002, p

204 중 569)이라고 격렬히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허균 자신은 나는 불교를 좋아하며 비록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 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부처의 무리[釋徒] 라570) 고백하는 한편, 자신은 불교를 업(業)으로 삼는 자가 아니며 신봉하지도 않는다는 이중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선교(仙敎)와 불교 두 가지는 우리 유가에서는 말하지 않는 바요. 나는 마땅히 스스로 성명(誠明)의 학(學)을 다함으로써 치평(治平)의 사업을 실행할 따름이지 반드시 떠들어대면서 억지로 시비를 가려 배척할 것은 없소. 나는 일찍이 불교에 아첨했다 하여 탄핵을 입은 적이 있지만, 내 어찌 불교를 업으로 삼는 자가 될 수 있겠소. 다만 비방하지 않은 것에 불과한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는 까닭이지 요.571) 나는 불교를 믿지는 않네. 그 글을 좋아하여 읽으면서 한가한 시간을 메울 뿐이 네. 몇 천호(千戶) 정도의 고을을 얻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데 어찌 부처가 되기를 도모한단 말인가. 이건 전혀 그렇지가 않네. 그러나 권력에 아부하여 떠들어대기만 을 잘하는 무식한 소인배들에 비한다면야 사실 조금은 낫다고 할 것이네.572) 위의 글은 불교와 도교 등 소위 이단을 대하는 허균의 마음가짐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본 입장이 오직 유자의 도 에 있음을 천명하면 서 자신은 단지 이단을 비방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을 뿐, 업(業)으로 삼은 적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허균은 또한 불서에서 성(性 )과 심(心) 을 논한 것이 비 록 이치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이는 진실로 유교와는 상반되는 것이며, 그 환견 (幻見)과 공설(空說)은 갖가지로 천리(天理)에 위배되는 것 573)이라고 하여, 불교 569) 宣祖實錄 卷211, 40年(1607 丁未) 5月 6日(戊辰) 三陟府使許筠 以儒家子弟 反入異 敎 服緇禮佛 掛珠誦經 則托跡朝紳 而眞一僧徒也 570) 許筠, 앞의 책, 卷5, 文部2, 序, 送釋海眼還山序 海眼 竺敎人也 吾亦好竺敎 (중략) 則雖不髡不伽梨 而眼及余同是釋徒也 571) 許筠, 앞의 책, 卷6, 文部3, 記, 酒吃翁夢記 仙釋二家 吾儒所不道者 吾當自盡誠明 之學 以措治平之業而已 不必呶呶強與辨斥之也 余嘗以佞佛見抨 余豈業佛者也 不過不謗而 已 572) 許筠, 앞의 책, 卷21, 文部18, 尺牘下, 與林子昇 僕非佞佛也 喜其文而讀之 以敵閑也 圖數千戶郡 尙不能得 迺圖作佛耶 是甚不然 然比諸無稽小子只工附炎談議者 則果稍優矣 573) 許筠, 앞의 책, 卷4, 文部1, 序, 送李懶翁還枳柤山序 則所謂佛子書論性論心 雖曰近

205 의 심학(心學)을 반대하고 주자의 이학(理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 다.574) 그런데 이는 서경덕이 노씨(老氏)가 허무 를 말하고 불씨(佛氏)가 적멸(寂 滅) 을 말하는 그것은 이기의 근원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찌 도를 깨달을 수 있 겠는가? 575)라고 하며 노불을 비판했던 것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즉, 서경덕이 유(有) 와 실(實) 을 강조하는 기본체론(氣本體論)의 입장에서 무(無) 를 배제하여 도교와 불교의 공무(空無)로서의 본체를 비판한 것 이나,576) 주자는 뭇 성인(聖人)을 이어받아 밝혔고 본말을 끝까지 탐구하였으므 로, 그 학문에 힘써 몰두하여 뜻을 구하고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에도 오직 주 자가 보여준 바대로 해야 한다 577)고 말한 것에 크게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서경덕은 자신의 학문이 유학을 종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 표방 하였음에도, 그의 학문이 퇴계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은연중 불가의 견 해를 띤 것 578)으로 공격을 받았던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실제로 서 경덕은 유 불 도 삼교에 포용성을 보였으나, 유교를 최상에 놓고 불교와 도 교를 그 다음으로 인식하는 유자의 기본 입장은 지켰다.579) 이렇듯 삼교회통적 理 而寔與吾敎每每相反 其幻見空說 種種背於天理 574) 이종호, 朝鮮의 文人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 p ) 徐敬德, 花潭集 卷2, 雜著, 太虛說 老氏言虛無 佛氏言寂滅 是不識理氣之源 又烏 得知道 576) 금장태, 韓國儒學과 理氣哲學, 예문서원, 2000, p ) 徐敬德, 앞의 책, 卷2, 雜著, 朴頤正字詞 幷序 朱子紹述群聖 搜極源委 (중략) 務潛其 學 以求其志 一動一靜 惟朱是視 578) 李滉, 退溪集, 卷14, 書2, 答南時甫 화담은 참으로 있다고 여겨서, 그 물체가 모 이면 사람이 되고 그 물체가 흩어지면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없어졌다 하지만, 영원히 소 멸되지는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불가(佛家)의 대윤회설(大輪廻說)과 무엇이 다릅니 까? (而花潭則以爲眞有 其物聚則爲人 物散則在空虛 迭成迭壞 而此物終古不滅 此與一箇 大輪迴之說何擇歟), 答南時甫 어찌 얼음과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하며 한 번 가고 한 번 돌아오는 것이 수레바퀴가 빙글빙글 돈다는 설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인하여 화담공의 소견을 생각해 보면, 기수(氣數) 한쪽 길로만 너무 치우쳐 있습니다. 그의 설은 이(理) 를 기(氣) 로 인식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또한 기 를 가리켜 이 라고 했는데도 지금 여러분들은 더러 그 설에 익숙해져서, 반드시 기를 고금(古今)에 걸쳐 항상 존재하고 소 멸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러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불가(佛家)의 견해에 빠지게 되니, 여러분은 참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豈可與氷水凝釋 一往一 回 如輪之周轉之說 比而同之哉 因思花潭公所見 於氣數一邊路熟 其爲說未免認理爲氣 亦 或有指氣爲理者 故今諸子亦或狃於其說 必欲以氣爲亘古今常存不滅之物 不知不覺之頃 已 陷於釋氏之見 諸公固爲非矣) 579) 신병주, 南冥學派와 花潭學派 硏究, 일지사, 2000, p.210 大東野乘 卷5, 車天

206 (三敎會通的)인 사상 경향을 보이는 학자들의 일반적 양상은 서경덕의 경우와 같이 성리학을 주(主)로 하면서도 불교나 노장 등의 사상을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포용, 흡수하려는 것이었다.580) 그렇게 볼 때 반드시 떠들어대면서 억지로 시비를 가려 배척할 필요를 느끼 지 못해 그저 불교를 비방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고 한 허균의 변명은 성리학 과 이단적 사상을 절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 한 화담 문인들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부형(父兄)들의 불교에 대한 태도 역시 허균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된다. 허엽이 사문(斯文)의 숙덕(宿德) 581)이라는 평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 고 승려 휴정과 평생의 우의를 쌓았던 것이나 허봉이 휴정의 제자 유정(惟政)과 교유하며 그의 시 수천 수를 집에 보관할582) 정도로 서로를 아꼈던 일 등이 이 를 증명한다. 허봉의 문집에서는 유정 이외에도 여러 승려들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들에게 증답한 시가 삼십 여 수 이상 남아 있어 그 교유의 폭을 짐작 케 한다.583) 또한 허성이 출사 이전에 휴정의 제자인 계원(戒元) 인영(印英) 등과 어울려 시를 수창했던 일과 1590년(선조23)의 대일사행(對日使行) 당시 일 본의 선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위해 써 준 시립자설(柴立子說) 에서 불교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고 불교와 유학이 목표에 있어서는 양립할 수 없지 만 방법에 있어서는 보다 유사한 점이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사실 등은 허균의 불교584)에 대한 관심이 결코 우연하게 시작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 輅, 五山說林草藁 先生嘗曰 天下有三道 儒最上 佛次之 仙又次之 學之亦然 580) 신병주, 위의 책, p ) 李德泂, 竹窓閑話 許草堂曄斯文宿德 582) 許筠, 앞의 책, 卷26, 附錄2, 序, 四溟集序 우리 사부(師父)가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公)의 중씨(仲氏)에게 보관되어 있다가 병화(兵火)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泰山)에 비해 호망(毫芒 : 미세한 털끝과 까끄라기)과 같은 격차입니다. 583) 허봉은 명승(名僧) 무위자(無爲者)와도 밀접하게 교유했는데 이는 허균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許筠, 앞의 책, 鶴山樵談 무위자(無爲者) 천연(天然)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 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智異山) 성모(聖母) 음사(淫 祠)가 대중을 미혹케 한 것을 분히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이 용사천연전(勇 士天然傳) 을 지었는데, 양송천(梁松川)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題)하였다. 張拳 一碎峯頭石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魍魎無憑白晝啼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양봉래(楊蓬萊)ㆍ박사암(朴思庵)과 나의 중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 다. 천연이 시를 조금 알아 우리 중형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하략)

207 다. 또한, 전술한 여러 사실들은 허균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학문이나 사상의 차 원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그가 일찍이 저녁 마다 여러 교(敎)의 경전을 읽고 익혔던 것은 내 마음 머무를 곳이 없었던 까 닭 585)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허균은 불교를 통해 그저 마음을 달랬을 뿐이었 다. 하지만 검속성이 부족한 성품 탓에 그것을 감추지 못하였고, 종국에는 세간 의 비난을 한 몸에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허엽의 일문들에게 있어 음악과 미술 등 예술에 대한 관심 역시, 앞서 서술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에는 초당 허엽이 음(音)을 잘 알고 거문고도 잘 탔는데, 초당의 외손이자 내 고조모(高祖母)의 조 고(祖考)인 박종현(朴宗賢)이 초당으로부터 거문고를 전수받아 악(樂)에 있어서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특히 거문고에 정통하였다 586)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 이로써 허엽의 음악에 대한 조예가 남달랐던 사실과 그가 단지 이론에만 밝 았던 것이 아닌, 악기 연주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허봉과 허균 역시 음악과 관련한 기사들을 여러 문헌에 남겨 두고 있어, 부친 허엽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대를 이어 전해진 사실을 알게 한다. 우리나라의 풍악(風樂)은 가곡이 음란하고 외설되며 소리가 슬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춤의 진퇴(進退)하는 것은 경박하고 촉급하여 똑바로 볼 수가 없 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또한 이를 즐겨 보며 밤낮을 다하여도 싫증을 아 584) 許筠, 앞의 책, 卷2, 詩部二, 眞珠稿, 聞罷官作 夕讀修多敎 因無所住心 周妻猶未遣 何肉更難禁 已分靑雲隔寧 白簡侵 人生且安命 歸夢尙祗林 585) 許筠, 앞의 책, 卷2, 眞珠稿, 聞罷官作 夕讀修多敎 因無所住心 周妻猶未遣 何肉更難 禁 已分靑雲隔 寧愁白簡侵 人生且安命 歸夢尙祗林 586)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補遺, 蓬萊琴事蹟 朴僉知宗賢 高祖妣朴夫人祖考也 公 卽許草堂曄之外孫 草堂知音善鼓琴 公常在傍潛聽 草堂嘗自外而入 室中有琴聲 音韻淸高 竊聽良久 開戶視之 則乃外孫僉知公 時年九歲也 草堂大奇之 因盡傳其所學 僉知公以天才 之高 得草堂之所授 遂於樂無所不通而最精於琴 박종현은 허엽의 맏사위 박순원(朴舜 元)의 아들인데, 허경진은 저서 악인 열전(樂人列傳) (한길사, 2005)에서 양천 허씨 족보에는 그 이름이 박종현 이 아닌 박현종(朴賢宗) 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 다. 또 박종현이 일찍이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과 거문고 친구가 되어 친히 지냈다. 는 홍대용의 언급에 대해, 양사언은 허엽과 동갑인데 허엽의 외손자가 양사언과 친구였 다는 사실은 어색하며, 아마도 허엽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주석(註釋) 하고 있다

208 니 내니 홀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그런 소위로써 신과 인간을 조화시키고 위와 아 래의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 우리 장헌왕 (莊憲王 : 세종대왕)께서는 거서(秬黍)와 경석(磬石)을 얻어서 예(禮)를 정하고 악 (樂)을 만드셨으나 이를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초창기에는 완성하시지를 못하였다. 강정왕(康靖王 : 성종)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성현(成俔)과 유자광(柳子光) 등에 게 명하여 뒤를 이어 완성하게 하고 이를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았는데, 지금 전하는 바 악학궤범(樂學軌範) 이 그것이다. 예약(禮樂)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성인(聖人)을 기다려야 하는 까닭에 송대(宋代)의 호원(胡瑗) 범진(范鎭) 같은 현 인도 오히려 그 요령을 터득하지 못 했는데, 하물며 유자광 같이 간사하고 음흉한 자가 천지의 조화를 더불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의당 잘못을 이어받고 와전되었던 것을 되밟았으니, 우리 동방 천백 년의 수치가 된 것이다. (중략) 나는 삼대(三代) 의 경계(經界)가 고르던 것을 생각하며 말세에는 부역(賦役)이 무거운 것을 걱정하 려니 슬퍼서 창연하였다. 아아! 누가 이를 바로 잡을 수 있으랴!587) 위의 인용문은 1574년 명나라 사행 길에 오른 허봉이 평양에 들러 감사가 베 푼 연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느낀 바를 정리해 남긴 것이다. 참고할 만한 사료가 전무함에도, 허봉은 세종이 아악(雅樂)을 정리했던 것이나 성종대에 악학궤범 이 편찬된 과정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남다름을 보여 주고 있다. 허봉은 당시 조선의 음악이 악기(樂記) 에서 말하는 망국지음(亡國之音) 588)의 요소를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하며 이를 통해 말세에 이른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데, 글의 말미에 그 누가 이를 바로 할 수 있 으랴! 라고 하여 조선의 음악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그것을 바로잡 아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589) 587) 許篈, 朝天記 上, 甲戌五月, 二十三日丙申 我國之樂 歌曲淫褻 聲音哀楚 使人心悲 傷 而其舞蹈進退之節 輕浮急促 不可正視 世之人方且以爲歡喜 而觀之窮晝夜不厭 亦獨何 心哉 以若所爲 求以和神人秩上下 不亦異乎 昔我莊憲王得秬黍與磬石 定禮作樂 而奉承者 無其人 草創未完 逮于康靖王朝 命成俔 柳子光等踵而成之 以爲永式 今所傳樂學軌範是也 禮樂之興 必待聖人 故以宋朝胡瑗 范鎭之賢 而尙未得其要領 況乎以一子光之奸邪凶慝 而 尙足與語天地之和哉 宜乎承誤踵訛 而爲我東方千百年之恥也 (중략) 余思三代經界之均 念 末世賦役之重 爲之悵然 噫 其孰能正之哉 588) 禮記, 樂記, 樂本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 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이 들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참조

209 허균의 경우에는 그 지식의 수준이 부형에 비해 한층 더 높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악기는 모두 옛 제도이다. 현금(玄琴)은 옛날 오현금(五絃琴) 을 본떠서 한 줄을 보탠 것이고, 가야금은 옛날 비파를 본떠서 열세 줄을 줄인 것 이다. 방향(方響)ㆍ요고(腰鼓) 및 대금과 묘정(廟庭)에 쓰는 편종(編鍾)ㆍ편경(編 磬)ㆍ축(柷)ㆍ어(敔)ㆍ훈(塤)ㆍ지(篪) 등의 악기는 모두 당(唐)의 제도이다. 그리고 묘악(廟樂) 중의 등가악장(登歌樂章)도 또한 당인(唐人)이 지은 것을 모방한 것이 다. 속악에 쓰는 것으로 풍입송(風入松)ㆍ서자고(瑞鷓鴣)ㆍ수룡음(水龍吟)ㆍ오운봉 서도(五雲棒瑞圖) 등이 있는데 이 악장(樂章)들 역시 송나라 도군(道君) 때에 하사 한 대성악(大晟樂)으로서 오히려 옛 풍악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중국에는 남북곡(南北曲)이 성행한 후로는 당ㆍ송 시대의 옛 풍악이 모두 사라져 남은 것이 없다. 소위, 예(禮)가 없어졌거든 야인(野人)에게서 구하라 는 것이 이것이던가!590) 허균은 우리나라의 악기와 악장은 모두 중국의 옛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서 그 본향인 중국에서는 남북곡, 즉 원(元) 명(明)의 희곡(戱曲)이 유행하면서 고대 의 음악이 모두 사라졌으나 오히려 우리나라에는 고례(古例)가 남아 있다고 하 며, 은연중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태 도는 당대의 학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서, 보통의 당대 음악에 대한 비 판이 중국 고대의 이상사회와 예악에 대한 동경으로 연결되어 중국 중심의 중화 적 사고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데 비해 허균의 경우에는 조선의 것, 조선의 문화 를 자각하고 그 가치를 주목하고 있어 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 하겠다.591) 음악에 대한 허균의 높은 식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전체 8수로 이 루어진 열악(閱樂) 이라는 제하(題下)의 시를 들 수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589) 전지영, 朝鮮時代 文人의 音樂談論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pp.54~55 590) 許筠, 앞의 책, 卷24, 說部3, 惺翁識小錄 下, 我國所用樂器俱是古制 我國所用樂器俱 是古制 玄琴 象古五絃而加一 伽倻琴 象古瑟而減十三絃 方饗腰鼓大笒及廟庭所用編鍾編磬 曁祝敔 壎篪等器 皆唐制 而廟樂登歌樂章 亦倣唐人所作 其用於俗樂者 如風入松瑞鷓鴣水 龍吟五雲捧瑞圖等章 亦宋道君時所賜大晟樂也 猶可謂古樂存也 而中國則自南北曲盛行之後 唐宋以上古樂 悉蕩然無餘 所謂禮失求諸野者也 591) 전지영, 앞의 논문, p.125 참조

210 漫調徐從大葉傳 느린 가락 서서히 대엽(大葉) 따라 전해지자 雷頭忽拍柘枝顚 뇌두(雷頭)는 갑자기 자지전(柘枝顚)을 노래하네 旋翻細樂當筵奏 세악(細樂)을 번곡(翻曲)하여 연석(筵席)을 향해 연주하니 敎合花檀木五絃 두둥 어울려라 꽃밭의 오현금(五絃琴)이 摐摐絃索亮更淸 현을 뜯는 소리 두둥둥 드높고 청초한데 側調初闌旋灸笙 측조(側調) 사라지니 생황(笙篁) 소리 흐르고 袖拂舞頭牙板促 무두(舞頭)는 소매를 떨치고 아판(牙板) 소리 촉급하니 步虛當拍第三聲 보허곡(步虛曲) 박자는 제삼성(第三聲)에 어울리네 琵琶初輥小涼州 비파 가락 맨 처음 소량주(小涼州)를 둥둥 타니 捍撥紅蠻壓臂鞲 한발(捍撥) 잡은 젊은 만랑(蠻娘)의 비의(臂衣)를 누르누나 素手轉關仍護索 하얀 손길엔 전관(轉關)에다 호색(護索)마저 곁따르며 四絃頻抹綠腰頭 사현(四絃)은 자주자주 녹요곡(綠腰曲을) 튕긴다오 592) 위의 시는 궁중 의례의 한 장면을 시로 포착한 것으로, 연회 중 전악(典樂)이 무악(舞樂)을 바칠 것을 청하자 무동(舞童)들이 화모(花帽) 금란(錦襴)에다 홍 상(紅裳)을 입고, 대(大) 소(小)로 그 짝을 나누어 절을 한 뒤에 춤을 추는 광 경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후대의 문인 이옥(李鈺)이 이 공연을 실제로 지켜본 뒤 언급하기를, 일찍이 허균의 열악 시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시 속의 광경 을 상세히 알 수는 없었는데 지금에야 분명히 알겠으니 마치 희곡[戱子]을 보고 나서 서상기(西廂記) 를 외우는 것 같았다 593)고 할 정도로 장면 장면을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 허균은 이 시에서 보허곡(步虛曲), 녹요곡(綠腰曲), 양주 곡(梁州曲) 594), 소량주(小涼州), 전관(轉關) 호색(護索), 정읍(井邑) 등 악 곡의 명칭을 정확히 분별해 기록하고 있으며, 대엽(大葉 ), 측조(側調), 세악 592) 許筠, 앞의 책, 卷2, 詩賦2, 病閑雜述, 閱樂 593) 李鈺 著,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譯, 完譯 李鈺 全集, 휴머니스트, 2009, pp ) 보허곡(步虛曲) 은 악부잡곡가사(樂府雜曲歌辭)로,중선(衆仙)의 표묘경거(縹緲輕擧)의 미(美)를 읊은 것이며, 보통 도관(道觀)에서 창(唱)하는 노래이다. 녹요곡(綠腰曲) 은 당 나라 때 유행했던 악곡의 하나이며, 양주곡(梁州曲) 은 당나라 목종 때 한지화(韓知和) 라는 사람이 지은 악곡으로 알려져 있다. 또 소량주(小涼州) 는 사조(詞調)의 명칭 중 하나이고, 전관(轉關) 호색(護索) 은 모두 악보 비파곡(琵琶曲) 의 이름이며 정읍 (井邑) 은 정읍사(井邑詞) 의 준말로 무고(舞鼓)에 맞추어 부르던 삼국 시대 속악(俗樂) 의 창사(唱詞)이다

211 (細樂)595) 등의 음악 용어를 그대로 시에 차용함으로써 악률(樂律)에 관한 자신 의 지식들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허엽 일가는 음악 뿐 아니라 미술 분야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 허균이 찬한 이흥효(李興孝)의 묘갈명 에는 허엽의 집안과 이흥효 일가와의 남다른 친 분이 잘 나타나 있다. 허균은 이 글의 서두에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로는 이 씨가(李氏家)를 꼽는다. 이씨는 4대를 내려오면서 그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순군(仲順君)이 가장 출중하다 고 소개하면서, 내 돌아가신 아버 님께서는 중순군을 환쟁이로 대접하지 않았으므로 거리낌 없이 문하에 출입하였 고 그로 인해 군의 조카 이정(李楨)과 나는 나이의 차이도 잊고 매우 친하게 지 냈다 고 술회하고 있다.596) 이흥효의 부친 이상좌(李上佐)는 사노비(私奴婢) 출신으로, 그 재주를 아낀 중 종(中宗)이 특명을 내려 양인으로 만들고 도화서(圖畵署)에 근무하게 하였다 한 다. 그는 중종의 어진(御眞)을 그리고 1546년에는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공 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받기도 하는 등 화가로서의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그 아 들인 이흥효 역시 명종의 초상화를 그리고597) 자신의 기술을 조카 이정에게 전 수하여 화가로 대성시키는 등, 당대 조선의 화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재건(劉 在建)이 찬한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 에서 이들 일가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좌(李上佐)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산수와 인물이 당시의 제일이 었다. 중종이 특별히 명령하여 도화서에 있게 하였던 바, 중종이 죽은 뒤에는 그 화상을 그렸으며 병오년에는 공신들의 화상을 그려 공적을 평가받았다. 그의 아들 숭효(崇孝)의 자는 백달(伯達)로 그림을 잘 그렸고, 다른 아들 흥효(興孝)의 자는 595) 대엽(大葉 )은 금조(琴操)의 이름인데 만대엽(慢大葉)ㆍ중대엽(中大葉)ㆍ삭대엽(數大 葉) 등으로 나뉘며, 측조(側調) 는 청조(淸調) 평조(平調)와 더불어 고악(古樂)의 삼조 (三調) 중 하나로 일명 변성(邊聲)이라고도 하며 청성(淸聲)의 상대가 되는 개념이다. 또, 세악(細樂)은 취타가 아닌 장구, 북, 피리, 저, 깡깡이 등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보통 아 주 맑고 가는 악성(樂聲)을 말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596) 許筠, 앞의 책, 卷16, 文部13, 碣, 贈工曹判書行大護軍李君墓碣銘 自國朝名善畫者 推李家 李氏擅譽四代 而仲順君最著 (중략) 吾先子待仲順不以畫師 出入門下無間 (중략) 君猶子楨 與僕忘年分驩甚 597) 魚叔權, 稗官雜記 卷2, 李上佐者 士人某之奴也 自幼工畫其山水人物 冠絶一時 中廟 特命贖之 令屬圖畫署 及中廟升遐 畫御容 嘉靖丙午 又圖功臣眞 遂參原從功臣 若上佐者 亦可謂奇遇矣 其子興孝亦善畫 以寫明宗御容 軍職 法慕金湜云云

212 중순(仲順)이라 하는데 그 또한 그림을 잘 그려서 명종의 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숭효의 아들 정(楨)은 자를 공간(公榦), 호를 나재(懶齋)라 했으며, 최간이(崔簡易) 에게 시문을 배웠고 그림도 잘 그려 중종 명종 양대의 화상을 그렸다. 정은 5세 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였는데 중의 모습을 썩 잘 그리는 것을 본 숙부 흥효가 그를 기특히 여겨 가법(家法)으로 가르치니 10세에 벌써 대성하였다. 12세가 되던 해,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를 개축하였는데 그 벽화 산수와 천왕제체(天王諸體)를 모두 이정이 그렸다.598) 이상좌가 천인의 신분임에도 타고난 재질에 힘입어 속량(贖良)을 받았던 것과 이후 도화서 화원에 등용되어 원종공신의 명예까지 얻은 사실은 그의 예술적 재 질이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나 그림 따위는 하나의 여기(餘技)에 불과하며 이를 업(業)으로 삼는 것은 비천한 자들이나 할 바라고 여겼던 당대의 양반들에게 있어 이들을 천시하지 않고 동등 하게 대우하는 경우는 아마도 흔치 않았을 것인데, 허균이 어린 시절 중순이 어 떤 사람이기에 아버님께서 저토록 후하게 대접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역시 이 같은 당대의 상황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허엽과 이흥효 간의 인연은 당대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지속되었던 바, 허균의 성소부부고 를 통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정은 이흥효의 형인 숭효의 아들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의 기록에 의하면 일찍부터 화재 (畵材)를 발휘, 10살에 이미 대성하였으며 산수 인물 및 불화(佛畵)에 핍고(逼 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99) 허균은 그의 그림에 대해 산수화는 그 기법이 안가도(安可度 : 安堅)로부터 나왔으나 더욱 노련하고 인물화는 그의 조부에게 서 전수받았으나 그 광채가 더 생동하니, 이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이라 할 수 있 다. 불화에 있어서는 더욱 신묘하고 신기하여 그 색채를 넣는 기법이 모두 묘경 (妙境)에 들어갔으며, 눈동자를 그린 것이 번쩍번쩍 빛을 내며 사람을 쏘아보니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고 언급하며 높이 평가하였다.600) 598) 李上佐 自幼工 其山水人物 冠絶一時 中廟特命圖畵署 圖寫中廟御眞 嘉靖丙午圖功臣像 錄從勳 子崇孝 字伯達 善畵 子興孝字仲順 亦善畵 寫明宗御眞 崇孝之子楨 字公榦號懶齋 從崔簡易學詩文 又善畵 寫中明兩朝御眞 禎五歲弄筆 作僧形甚善 叔興孝奇之 敎以家法 十 歲已大成 年十二時改構金剛山長安寺 其壁畵山水天王諸軀 皆其所畵 (김용준, 朝鮮時代 繪畵와 畵家들, 열화당, 2001, p.47에서 재인용) 599) 강만길, 한국인물탐사기 4, 오늘, 1997, p ) 許筠, 앞의 책, 卷13, 文部10, 題跋, 書李懶翁畫帖後 楨之山水 出安可度而穠 士女傳

213 그런데 허균과 이정이 9살의 나이차에도 불구,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게 된 데에는 두 사람의 기질 및 취향의 유사성이 큰 이유로 작용했던 듯하다. 실제로 이정에 관한 허균의 기록 내용을 살펴보면 양인(兩人)이 너무도 닮아 있다는 느 낌을 지울 수가 없다. 허균 역시 이정과의 관계에 대해 소탈하고 영특하되 행검 (行檢)이 적은 것이 서로 동조(同調)되므로, 나이고 벼슬이고 따지지 않고 서로 를 가장 깊이 사랑했다 601)거나 허균의 무리인 심우영(沈友英)ㆍ이경준(李耕俊) 과 아주 도탑게 지내어 마치 형제 같았다 602) 등의 언급을 남김으로써, 이 같은 추측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이정은 한때 출가를 생각할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603) 봉건 통치 계 급에 대해 강렬한 반항 정신을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604) 다음의 기록에서 그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其祖而彩飛動 此其長也 至於佛則尤神且奇 其設色渲染俱入妙 阿渚之點精 奕奕射人 如若 欲語 601) 許筠, 앞의 책, 卷15, 文部12, 哀辭, 李楨哀辭 僕疏雋少檢 與之同調 故忘其年位 相 愛最深 602) 許筠, 李楨哀辭 與其友沈友英李耕俊交誼甚篤如兄弟 603) 許筠, 李楨哀辭 그가 태어날 때, 한 금신 나한(金身羅漢)이 그의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너의 집 3대에 걸친 네 사람이 모두 부처를 잘 그려서 그 그린 것이 수천 구(軀)나 되니, 내가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너를 위해 아들을 주어 보답하리 라. 하였다. 그 꿈을 깨고 나서 아기를 낳으니 서광이 해를 꿰뚫었는데, 그 생김새가 꼭 닮았었다. (중략) 불교에 대해서는 경지가 매우 깊어 그 이해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 다. (중략) 그가 선(禪)을 이야기할 때에 현묘한 도리를 핵실하여 내 마음을 맑게 일깨워 주었던 것을 늘 생각하건대, 아마도 그것은 신선과 부처의 진리에서 터득한 것이었으리 라. 문득 그것을 위해 먹는 것도 폐하였으니, 아, 금신(金身)의 현몽(現夢)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런 사람이 태어났으랴? (渠生時 夢有一個金身羅漢入母抱曰 爾家三世四人 俱工繪 佛 所繪殆數千軀 吾奉佛旨 爲你子以報之 旣覺而娩 瑞光貫日 其形肖焉 (중략) 其於佛敎 深有所悟 其辨解出人意表 (중략) 每念其談禪覈玄 冷然醒我心胸 有得於丹霞佛鑑之旨 輒爲 之廢食 吁非金身之應夢 安得有斯人耶) 許筠, 卷4, 文部1, 序, 送李懶翁還枳柤山序 이나옹(李懶翁)은 젊어서 풍악산(楓岳山)에 들어가 신여상인(信如上人)을 스승으로 삼아 장차 머리를 깎으려 했는데 난리로 인해 이 루지 못하였다. 장성하여 서쪽 방면을 주유한 지 여러 해였는데 올봄 선산(仙山)으로 돌 아가 다시 그 스승을 찾을 계획이니, 비록 가사를 입지는 않았어도 불경을 모두 읽어 마음을 닦고 본성을 보존하기를 유마힐(維摩詰)ㆍ방 거사(龐居士)같이 하고자 하여 내게 찾아와 떠나려 한다고 말하였다. ( 李懶翁少入楓岳 師信如上人 將祝髮 因亂未果 及長 周 流西塞者有年 今春將返仙山 更尋其師 雖不蒙伽梨 而欲盡讀內典 修心存性 如維摩詰 龐居 士 來告余以行) 604) 김용준, 앞의 책, p

214 일찍이 세도 있는 정승이 그를 불러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흰 비단을 마련해 주고 술을 잘 대접하였다. 이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고 누워 있다가 한참 만에 일 어나 솟을대문 안으로 화물을 가득 실은 소 두 마리를 두 사람이 몰고 들어오는 모습을 한 폭 그려 놓고는 붓을 동댕이치고 가 버렸다. 그 재상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쫓기어 평양으로 도망쳤는데, 그곳의 아름다움을 못내 사랑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끝내는 거기서 죽고 말았다.605) 위의 글은 이정이 그림을 통해 고관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였고, 그로 인해 권신들의 미움을 받게 되면서 종국에는 평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앞서 허균이 언급했던 행검(行檢)이 적은 것이 서로 동조 되었다 는 발언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두 사람의 성품에 상당 부분 서로 일치하 는 점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허균이 이정의 그림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부탁했던 사실은 그 문집의 기록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이정에게 명하여 도연명 이백 소식의 초상 을 그리게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며606) 수안군수로 있던 1604년 경, 부처와 조사(祖師)의 상을 그리도록 요청한 사실도 확인된다.607)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허균의 예술적 감각과 내면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1607년 허균이 이정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이다. 큰 비단 한 묶음과 갖가지 모양의 노랗고 푸른 비단을 집의 종을 시켜 서경으로 보내네. 부디 산을 뒤에 두르고 시내를 앞에 둔 집을 그려 주시게. 온갖 꽃과 대나 무 천여 그루를 심고 가운데로는 남쪽으로 마루를 터 주게. 그 앞뜰을 넓게 만들 어 석죽(石竹)과 금선초(金線草)를 심어 놓고 괴석과 오래된 화분을 늘어놓아 주시 게. 동편의 안방에는 휘장을 걷고 도서(圖書) 천 권을 진열하여야 하네. 구리병에 605) 許筠, 李楨哀辭 嘗有權相招令畫 具絹素 厚饋以酒 楨佯醉倒 良久而起 畫一幅 作高門 二牛馱貨物而二人驅入狀 投筆去 相怒欲殺之 逃至西都 愛其佳麗不忍去 竟卒于此 606) 許筠, 앞의 책, 卷6, 文部3, 記, 四友齋記, 같은 책, 卷14, 文部11, 贊, 三先生贊 참조 607) 許筠, 앞의 책, 卷14, 文部11, 贊, 李畫佛祖讚 내가 요산(遼山)에 있을 때 석봉(石 峯)에게 부탁하기를 반야심경(般若心經) 을 구양순(歐陽詢)의 체를 모방해 금자(金字)로 다시 써 달라고 요청하여 첩(帖)을 만들었다. 뒤이어 이정에게 명하여 불상 셋, 보살상 (菩薩像) 하나, 조사상(祖師像) 둘, 거사상(居士像) 둘을 그리게 하여 뒤에 붙였다. 그리 고 드디어 절구 두 수씩을 지어 찬사(贊辭)로 덧붙이고 선문법보(禪門法寶)라 이름 하였 다. (余在遼山 乞石峯倣歐率更書 以金字寫般若心經爲帖 因命李楨繪三佛一菩薩二祖二居士 像 係之于後 遂成兩絶 余以贊辭附之 名曰禪門法寶云)

215 는 공작의 꼬리를 꽂아 놓고, 비자나무 탁자 위에는 박산(博山)향로를 놓아 주게. 서쪽 방에는 창을 내어 애첩(愛妾)이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동동주를 걸러 신선로 에 따르는 모습을 그려 주게. 나는 방 가운데 보료에 기대어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와 다른 벗은 양 옆에서 즐겁게 웃는데, 모두가 건(巾)과 비단 신을 갖춰 신고 도복(道服)을 입고 있되 허리띠는 두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야 하네. 발 밖에는 한 오리 향연이 일어야겠지. 두 마리 학은 돌의 이끼를 쪼고 산동(山童)은 비를 들 고 와서 떨어진 꽃을 쓸고 있어야 한다네. 이러면 인생의 일이 다 갖추어진 것일 세. 그림이 완성되면 태징공(台徵公 : 李壽俊)이 돌아오는 편에 부쳐 주시게. 간절 히 바라고 또 바라네.608) 위의 글은 그림 혹은 미술에 대한 허균의 기호적(嗜好的) 취향을 여실히 드 러내 주고 있다. 이 글에 묘사된 정경은 우리나라의 고(古)미술에서 흔히 느껴지 듯,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평화롭고 인간미가 있으면서 가식이 없다. 또, 따뜻하 고 겸손하고 정직하다. 원만하다는 것은 허수룩하다는 뜻이다. 이는 소박하거나 소탈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609) 또한 보통의 문인화의 경우처럼 제재 에 이념적 속성을 부여하거나 비현실적이지도 않고,610) 장면에 대한 묘사는 자 세한 반면 그림에 관해 전문적 식견을 지닌 것 같지도 않다. 당대 최고의 장서가였던 허균이 책에 대해 집착하고 그 책들을 통해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그림 역시 그의 또 다른 기호 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 서 위의 글은 그림을 통해 지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했던 허균의 내면 심리를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다. 즉, 산수화나 초상화, 불화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가 리지 않는 허균의 예술적 취향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때로는 정신적 위로를 얻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608) 許筠, 앞의 책, 卷21, 文部18, 尺牘 下, 與李懶翁, 丁未正月 大絹一簇 各様金靑等彩 竝付家奚 致之西京 須繪作背山臨溪舍 植以雜花 脩竹千竿 中開南軒 廣其前除 種石竹金線 列怪石古盆 東偏奧室卷幔 陳圖書千卷 銅甁揷雀尾 博山尊彝于棐几 西偏拓囱 家小娘糝羹 菜 手漉潼醴 注于仙爐 吾則隱囊於堂中臥看書 而汝與 在左右詼笑 俱巾絲着履 道服不 帶 一縷香煙 颺於箔外 仍以雙鶴啄石苔 山童擁帚掃花 則人生事畢矣 工訖付於台徵公之回 切望望 609) 이인범,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 시공사, 1999, p ) 문인화는 사군자화와 산수화로 나누어진다. 사군자는 대나무 매화 난초 국화로, 이들은 선비의 의리와 절개를 상징했다. 산수화 역시 조선의 산천을 그린 것은 아니었 다. 기 본 적도 없는 이상향을 화폭에 담았을 뿐이었다. <구곡도(九谷圖)>가 대표적인 예이다. 구곡은 주자가 살던 계곡이었다. (이영화, 조선시대, 조선사람들, 가람기획, 1998, p.96 참조)

216 이 밖에도 허균은 문인화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인 이징(李澄)과도 교유하였 는데, 이징에 대해 산수화ㆍ인물화를 비롯하여 모든 새ㆍ대나무ㆍ풀벌레ㆍ꽃나 무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법칙을 얻었으며, 나옹이 죽은 후 그가 곧 우리나 라의 제일가는 화가가 되었다 는 평가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또 한 이징에게 여러 가지 모양을 소첩(小帖)에 그리고 아이를 씻기는 두 여인의 그림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도록 하였는데, 이정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자세 히 보면 풍성한 살결이며 아양을 부리는 웃음이 그 요염함을 한껏 발산하여 아 리따운 자태가 너무도 핍진(逼眞)하니 역시 신묘한 작품 이라고 덧붙이고 있어, 허균이 이징에게 그림의 소재 등에 관한 조언을 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 다.611) 허균 뿐 아니라 그의 백형인 허성 역시 그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듯한데, 이 같은 사실은 허균의 다음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주 태사(朱太史 : 朱之蕃)가 오망천(吳輞川)의 솜씨를 빌려 소경(小景) 20폭(幅) 을 그렸는데 모두 명인(名人)의 시문 중 그림에 넣을 말한 것을 취하여 실었으며, 또 손수 문(文)과 부(賦)와 시(詩)를 해당되는 그림의 밑에 썼으니 참으로 좋은 일 이었다. 그 화본이 궁내(宮內)에서 나와 지금은 의창군(義昌君)의 집에 있다. 사형 (舍兄)께서 이징(李澄)의 솜씨를 빌려 그 그림을 베끼고 그의 적형(嫡兄) 이축(李 潚)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했다. 글씨는 비록 주공(朱公)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림은 더 우수하였다.612) 천고최성(千古最盛) 은 <도원도(桃源圖)> 등 모두 20폭의 그림과 시문이 실 린 서화첩으로, 이는 1606년 사신으로 내조했던 주지번이 명에서부터 소지해 온 것이며 당시 원접사(遠接使)였던 유근(柳根)이 주지번으로부터 이를 건네받아 선 조에게 입계(入啓)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13) 이렇게 궁중에 소장되었던 천고 611) 許筠, 앞의 책, 卷13, 文部10, 題跋, 題李澄畫帖後 李澄 鶴林之庶子 其父與叔俱解畫 故澄世其學而遂自名家 山水士女之外 凡翎毛竹樹草蟲花卉 皆得其法 人以爲難也 自懶翁沒 渠卽爲本國第一手也 余令澄畫各樣于小帖 終之洗兒二女 人曰不及楨 而細看則豐肌媚笑 逞其妖嬌態 咄咄咄逼眞 亦妙品也 612) 許筠, 앞의 책, 卷13, 文部10, 題跋, 題千古最盛後 朱太史倩吳輞川畫小景二十幅 皆 取古名人詩文可入於畫者以載之 又自書文與賦若詩於其下 誠好事也 其本自內 今在義昌家 舍兄倩李澄榻之 其嫡兄潚書之 書雖不及朱公 613) 유미나, 朝鮮中期 吳派畵風의 傳來 - <千古最盛> 帖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45호, 한국미술사학회, 2005, p

217 최성 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여염으로 흘러나오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선 조의 8남인 의창군 이광(李珖)이 이 화첩을 소유하게 된 것으로 보아 그가 선조 에게 직접 하사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의창군은 허성의 사위이자 허 균의 질서(姪壻)로, 위의 글에는 허성이 사위 의창군에게서 천고최성 첩(帖)을 빌린 뒤 이징을 시켜 그림을 모사(模寫)하고 다시 이징의 형인 이축(李潚)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그 부본(副本)을 만든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림에 관한 허성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밖에도 그 조 부 허한(許澣)이 특별히 매화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614)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이 나 누이 난설헌이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묵조도(墨鳥圖>와 같은 걸작을 남긴 것 등은 허엽 가풍의 특색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가인들 개 개인의 예술적 감수성과 더불어 음악이나 그림 등을 단순한 여기(餘技) 로 여기 지 않고 그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까지 더해짐으로써, 종국에는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허균은 만 권 서책 중의 좀벌레나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치고 싶다 615)는 글귀 를 남길 정도로 남다른 독서열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관심을 충족시키 기 위해 자연스럽게 명나라의 도서 시장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거나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는 그의 생애,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 다. 중국 서적을 읽고 얻은 새로운 지식과 안목은 허균을 새로운 사상적 혹은 문학적 지평으로 이끌었고, 중국 사신에게 얻은 서적과 당대 중국 문단에 대한 지식은 넓은 세계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재촉했다.616) 그런데 문제는 그 독서의 영역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데 있었다. 실제로 허균의 독서 범위는 경서와 소설, 시와 문장에서 패관잡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 역을 포괄하고 있어, 그의 박학 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 에게 있어 독서 란 단지 유가에서 말하는 도 를 체득하기 위한 것만이 아닌, 지 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하나의 행위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시름겨울 때 그것을 읽으면 즐거워지고 지루할 때 읽으면 정신이 나서 불 614) 宋寅, 頤庵遺稿 卷4, 文集2, 神道碑銘, 贈吏曹參判許公神道碑銘 諱澣 字浩夫 (중 략) 尤善畫梅竹 615) 許筠, 앞의 책, 湖墅藏書閣記 爲蠹魚萬卷中 以了殘生 616) 김풍기, 허균의 문화적 토대와 독서 경향, 강원인문논총 14집, 강원대 인문과학연 구소, 2005, p

218 경을 읽었을 뿐이지,617) 진심으로 불교를 신봉한 것도 아니었다. 허균에게는 유교의 경전도, 이단의 사상이나 예술도 다 같은 지적 탐구의 대 상일 뿐이었다. 그 경중(輕重)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모두 허균 자신의 기호적 취향에 의해 취택(取擇)되어 그의 문화적 욕구를 채우고 상처 받은 내면 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2) 許筠의 天主敎 收入說 에 관한 檢討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은 허균이 을묘(乙卯, 1615)와 병진(丙辰, 1616) 연 간에 진주 겸 사은사행(陳奏兼謝恩使行)의 부사(副使)로 명나라 수도였던 연경 (燕京)에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시로 기록한 책이다. 을병조천록 에는 총 228편, 382수의 적지 않은 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다가, 이 책이야말로 허균의 생애에 있어 거의 최후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실로 주목할 만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간 을병조천록 이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이 책이 독립되 어 단일본으로 전하지 않고 허균의 중형인 허봉의 조천기 의 하책(下冊)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인데,618) 근자에 최강현에 의해 발견되어 2004년 국립중앙도서 관이 발간한 선본 해제Ⅵ 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으며, 2005년 12월에 그 국역 본이 발행된 바 있다.619) 텍스트가 발견된 시기가 최근인 관계로 을병조천록 과 관련한 연구 성과는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먼저 오가현은 2009년의 논문에서 이 책에 수록된 사행 한시들을 분석, 그 성격과 특질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는 허균이 이 책을 통해 명 청 교체기를 맞은 이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느낀 평범한 인간으 로서의 진솔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위태로운 이국의 현실을 경계하고 염려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애국 애민 의식과 당시 국제 정세 617) 許筠, 앞의 책, 文部1, 序, 送李懶翁還枳柤山序 愁讀之而喜 倦讀之而醒 618) 許筠 著, 최강현 譯, 國譯 乙丙朝天錄, 국립중앙도서관, 2005, p.149 참조 619) 오가현, 蛟山 許筠의 使行 漢詩 硏究 - <乙丙朝天錄>을 中心으로, 울산대학교 교육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9, p.6 참조

219 에 대한 허균의 생각 및 자주적 국방 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을 덧붙였 다.620) 2010년에 나온 박현규의 논문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진주사행 시기, 허균 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당시 허균이 명나라 조정으로 부터 변무(辨誣)를 필히 관철시켜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극심한 심적 고통 을 느끼고 있었고, 평소 앓던 소갈증에 다른 증상들까지 더해져 병색이 완연한 상태였음을 지적하였다. 또 그가 연경에 머무는 동안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서정적인 자아반성의 회고시를 많이 지었으며, 많은 서책들을 열독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지식욕 역시 더욱 강해졌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621) 비록 그 양은 적지만, 을병조천록 과 관련한 그간의 논의들은 이 책이 지닌 의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미 1614년 천추사(千秋使)로 중국 에 다녀왔던 허균이 연이은 사행에 대단히 지쳐 있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허균에게 있어 기나긴 사행의 행로는 그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두 차례의 사행 직전인 1613년(광해군5), 이른바 칠서(七庶) 사건에 연루되 어 심각한 정치적 위기 상황을 맞았던 허균은 결국 이이첨(李爾瞻)과 결탁, 대북 (大北)에 투신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비록 그 같은 허균의 행보가 생명 을 보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 나름의 신념에 충실했던 그에게 있어서는 분명 편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을병조천록 에 유 독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의 시가 많은 것은 아마도 이러한 개인적 상황 에 연유한 것으로 판단되며, 여기에 병든 몸과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대한 자각 까 지 더해져 그 심리 상태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을병조천록 에 수록된 허균의 시편들은 정치적 노선의 변경 이후 급 격히 변화한 허균의 심리적 국면과 맞닿아 있으며, 허균의 말년 행적을 보여 주 는 귀한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사행의 의의는 그 같은 개인적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몇몇 자기 반성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들은 사행 본래의 목적이나 역할 이외에 새로운 것 620) 오가현, 위의 논문, p ) 박현규, <乙丙朝天錄>에 드러난 許筠의 모습과 작품 세계, 大東漢文學, 大東漢文 學會,

220 의 발견과 탐문에도 주력함으로써 이를 자기 쇄신의 기회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 다. 말하자면 당대의 연행은 지속(불변적 질서의 유지) 과 변화(새로운 것의 수 용을 통한 내적 쇄신) 의 추구라는 두 가지 상이한 요소가 공존하는, 특이한 형 태의 외교 행위 혹은 문명 교류의 행위였던 것이다.622) 본 항(項)은 을병조천록 에 나타난 이 두 번째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그간 허균 연구에 있어 논란이 되어 온 하나의 문제에 관한 단서가 포 착되는데, 다음 허균의 시가 그것이다.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읊다[偶吟] 衣繡丁秊賦壯遊 수놓은 옷을 입고 20대에 장쾌한 유람 重來不覺雪盈頭 다시 또 오게 되니 모르는 새 머리털은 희어졌네 故鄕遼隔三千里 고향은 멀리 삼천 리 밖에 있어 陳迹回思十九秋 지나간 자취 돌아 19년을 생각하네 已分此身安寵辱 이 내 몸은 안분과 총욕(총애와 모욕) 사이에 놓였으니 休將一念受歡愁 기쁨과 근심에서 한결같이 쉬고 싶네 還家作客皆吾命 집에 돌아가도 나그네인 건 나의 운명 只恃天公任去留 오직 하느님을 믿어 가고 옴을 맡기려네623) 을병조천록 의 최초 발견자이자 번역자인 최강현은 이 책의 해제 에서 위의 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전략) 7~8구는 귀국하여도 벼슬살이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그 네일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의 운명이라고 하면서, 하느님[天公]을 믿고 벼슬살이 의 나아가고 물러남 역시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자기 의지를 밝힌 것이 다. 특히 끝구의 천공(天公) 은 빌어쓰기[借字表記]로 풀이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쓰는 천주(天主=하느님) 과 똑같은 말이다. 필자는 이것을 천주교 와 같은 의미로 천주교 이전에 교산에 의하여 일컬어진 천공교(天公敎) 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교산이 집단적 기도처인 성당이나 예배소들 이 없었던 당시, 이미 광해군 2년(1610)에 교산 자신이 북경에서 가지고 들어온 기독교의 주기도문 12단을 가지고 이를 암송하는 천공교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은 622) 소재영 外, 연행 노정, 그 고난과 깨달음의 길, 박이정, 2004, p ) 許筠 著, 최강현 譯, 앞의 책, p.83, 偶吟

221 아닌지 의심하여 본다.624) 위의 논의는 그간 수없이 반복되었던 허균의 천주교 수입 논란에 대해 새로운 검토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과연 허균은 일각에서 주장하듯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실제로 많은 기독교 연구서들이 허균을 초대 신자(初代信者)로 지목하여 그 행적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625)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허균은 1614년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지도와 게(偈) 12장(章)을 얻어 와서 천주교를 믿었다는 증거가 많다. 여기 제 12장은 곧 기도문으로, 12단(端)을 가리 키고 있다. 한편 허균이 천주교를 믿고 홍길동전 을 쓴 것은 그가 서자(庶子)였기 에 설움을 받아 절에 들어가 불교도 배운 일이 있었으나 만족치 못하여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이고, 서자의 슬픔을 소설화한 것이 바로 홍길동전 인 것이다.626)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는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천주교 통사서 로 후대 기독교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저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가 외세의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국인 특히 천주교 신 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는데, 그를 위해 조선시대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근대화를 추구했던 인물들의 양상을 기술하 는 데 주력하였다.627) 이것이 바로 저자가 허균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그런데 유홍렬을 비롯한 기독사학자들이 허균과 천주교와의 관계에 대해 촉각 624) 許筠 著, 최강현 譯, 앞의 책, pp.155~ ) 허균을 최초의 신자들 중 하나로 보는 입장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에서 동일하게 발 견된다. 교회사를 편찬하면서 허균과 관련된 내용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책들을 소 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윤태, 한국 기독교사, 혜선문화사, 배본철, 한국교회사, 북토피아, 김해연, 한국 원시초대기독교사, 태양출판사, 변기영 몬시뇰, (간추린)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연구소, ) 柳洪烈, 增補 韓國天主敎會史 (上), 가톨릭출판사, 1962, p.19 위의 인용문에서 허 균을 초당의 서자 로 기록한 것은 작가가 관련 사실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아서 생긴 명 백한 오류이다. 627) 김수태,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연구 2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pp.100~101 참조

222 을 곤두세우게 된 것은 아마도 여러 문헌에 소재한 관련 기록들이 큰 이유가 되 었을 것이다. 그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으나 허균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는 설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세간에 유포되었던 듯한데,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 몽인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천축(天竺)의 서쪽에 나라가 있어 구라파(歐羅巴) 라고 하는데 구라파 란 그 지 역 말로 큰 서쪽 이라는 뜻이다. 그 나라에 한 도(道)가 있어 기례달(伎禮怛) 이라 고 하는데, 그 지역 말로는 하늘을 섬긴다 는 뜻이다. 그 도는 유교도 아니고 불교 도 아니며 선교도 아닌, 별도로 한 갈래를 세운 것이다. (중략) 이마두(利瑪竇)는 이인(異人)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 나서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를 그리고 각각 그 지역의 말로 여러 나라에 이름을 붙였다. (중략)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허균이 중국에 이르러 그 지도와 게(偈) 12장을 얻어 왔다.628) 위의 인용문에 보이는 이마두(利瑪竇) 는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로, 중 국에 카톨릭을 포교하는 데 앞장섰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 : 1552~1610)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예수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마테오 리치가 청나 라 신종(神宗)의 허가를 얻어 북경에 자리를 잡게 된 1601년경부터이며 조선에 는 1603년부터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신부들의 업적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 무렵 조선과 중국 사이의 문화 교류가 그만큼 빨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629) 1602(선조35)년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다녀 온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 憘)가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사실은630) 천 주실의(天主實義) 역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선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가 북경에서 인쇄된 것이 그 이듬해인 1603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628) 柳夢寅, 於于野談 卷2, 宗敎篇, 西敎 天竺之西有國曰歐羅巴 歐羅巴者方言大西也 其國有一道 曰伎禮怛 方言事天也 其道非儒非釋非仙 別立一端 (중략) 盖利瑪竇者異人也 徧觀天下 仍圖天下輿地 各以方言名諸國 (중략) 獨我國未及知 許筠到中國 得其地圖及偈十 二章而來 629)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 實學의 反應,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p ) 李晬光, 芝峯遺說, 卷2, 諸國部, 外國 만력(萬曆) 계묘년(癸卯年), 내가 부제학의 자리에 있을 때 중국의 서울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이광정(李光庭) 권희(權憘)가 구라 파국(歐羅巴國)의 여지도(輿地圖) 한 건 여섯 폭을 본관(本館)에 보내 왔다. 아마 경사 (京師)에서 구해 얻은 듯하다.(하략)

223 대개 학계에서는 조선에 천주실의 가 유입된 시기를 1609년에서 1611년 사이 로 보는데 이는 즉, 이 책을 소개한 장본인인 유몽인과 이수광이 이 즈음 사신 단의 일행으로 북경을 방문했기 때문이다.631)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 시기 를 좀 더 앞으로 소급시킬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천주실의 인쇄가 끝 난 1604년부터 1609년 사이에 무려 8번의 사행이 있었던 사실은 예전의 관행대 로 많은 중국의 서책들이 조선에 수입되었을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허균에게 있어 이수광의 존재는 더욱 특별해 보인다. 이 수광과 허균은 동서지간으로632) 말년까지 친분을 나눈 사실이 확인되는데,633) 이를 감안하면 이수광이 허균의 천주교 이해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천주실의 에서 드러나는 이수광의 천주교에 대한 이해 태도는 매우 소박하지만 이를 특별히 이단시하거나 칭송하지도 않는 냉정성을 보여주고 있는 데, 그런 반면 천주교와 관련된 교화황(敎化皇 : 교황)의 불혼(不婚)이나 교황을 현인(賢人) 중에서 선출하는 것, 천주교의 우의정신(友誼精神), 사사로운 재산 축적을 금지하는 습속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634) 그런데 서학에 대한 조선 유학계의 최초 대응이 지적 호기심에 의한 학문적 631) 유몽인은 1609년, 사은겸성절사(謝恩兼聖節使)로 북경을 방문했고, 이수광은 1611년, 주청사(奏請使)의 일행으로 사행을 다녀 온 바 있다. 632) 허균은 안동 김씨 김대섭(金大涉)의 둘째 딸과 혼인했는데, 김대섭의 맏사위가 바로 이수광이었다. 633) 허균의 성소부부고 에는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척독(尺牘) 두 편이 남아 있다. - 卷20, 文部17, 尺牘 上, 與李芝峯 己酉十二月(1609년) 홍양시권(洪陽詩卷)은 몇 차례 읽었는데 차마 손을 뗄 수 없었습니다. 성조(聲調)가 잘 어울리는 훌륭한 음률이었습니 다. 책머리에 한마디 말을 서술하고 싶었으나 훌륭한 책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하여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차씨(車氏)의 발문(跋文)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내가 하고 싶었 던 말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본대로 돌려 보냅니다. (洪陽詩卷 吟覽數四 不忍竟 渢渢乎大雅音也 欲敍一言其上 恐以糞汚佛首 未果矣 況車跋已盡不佞所 欲言 不覺縮手袖間也 謹完璧) - 卷20, 文部17, 尺牘 上, 與李芝峯, 庚戌四月(1610년) 내 병은 박군 지지(朴君知止)가 말하기를, 음기(陰氣)이 허(虛)하고 화(火)가 동하여 생긴 듯하다고 합니다. 몸이 있은 다음에야 관록(官祿)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의 사행길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벌은 평민 이 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다시 소(疏)를 올렸으니 제대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막지 말아 주십시오. 서강(西江)의 물을 터서 수레바퀴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살려 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生之疾 朴君知 止疑其爲陰虛火動也 有身然後方有官祿 不 作此行 不過爲民而止耳 今更陳疏 勿閡捧入 決西江之水 以活波臣 至幸) 634) 한영우,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경세원, 2006, p

224 접근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635) 이수광과 허균 등이 보기 드물 정도의 지적 탐구심을 지닌 인물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들이 대륙으로 전파된 새로운 사상적 조류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학문 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박학적 개방적 성향 역시 그 같은 추측에 힘을 실어 주는 부분이다. 아마도 이수광은 1609년의 사행 이전부터 천주교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며, 허균 역시 서책이나 이수광의 전언(傳言) 등을 통해 천주교에 관 한 일정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그 같은 태도는 조선에 서학이 전래될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무관심하거나 시종일관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허균이 1614년의 사행에서 지도와 게(偈) 12장을 가지고 왔다 는 이수광의 기록은 틀림없는 사실로 판단된다. 중요한 것은 허균이 일각에서 주 장하는 것처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것이다. 조선조의 문헌 에서도 이에 관한 논란의 흔적이 여럿 발견되는데 먼저 박지원이 유몽인의 설을 인용, 허균이야말로 조선에 사학(邪學)을 들여 온 주범이라 비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야사에 의하면 구라파(仇羅婆)란 나라에 기리단(伎利但)이란 도(道)가 있는데, 그 나라 말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12장(章)의 게(偈)가 있는데 허균이 사신 으로 중국에 갔을 적에 그 게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학이 우리 나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에서 시작된 것이니,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자동적으로 허균의 잔당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 므로, 그들이 사설(邪說)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다.636) 위의 글에서 박지원은 허균을 조선 사회 천주교도의 원조로 삼고 있는데,637) 이를 통해 허균의 천주교 도입설이 후대까지 폭넓게 유포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안정복(安鼎福)은 허균의 천학(天學) 이 그 실체에 있어 서학과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서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 638)이라고 하며, 서학과의 관련성 635) 홍원식, 실학사상과 근대성, 예문서원, 1998, p ) 朴趾源, 燕巖集, 卷2, 煙湘閣選本, 答巡使書 野乘仇羅婆之國 有道曰伎利但者 方言 事天也 有偈十二章 許筠之使中國 得其偈而來 然則邪學之東 葢自筠而倡始矣 顧今學邪之 輩 自是筠之餘黨也 其言論習尙 一串貫來 宜乎其邪說之酷好而偏惑也 637) 금장태, 조선 후기 유교와 서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

225 을 부정한 바 있다.639) 그러나 19세기 초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 箋散稿) 에서 택당 이식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변증(辨證)하였다. 이 교(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이택당(李澤堂) 식(植)의 택당집 을 통해 상고해 보면 허균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택당집 에 이런 말이 있다. 허 균이 비로소 천주교의 책을 얻어 학습하며 말하되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명한 것이고 윤기(倫紀)의 구분을 정한 것은 성인(聖人)이다. 하늘은 또 성인보다 한 등 (等)이 높으니 나는 하늘을 따르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않겠다. 하였으니, 그 조 짐이 이미 드러난 것이다. 640) 위의 인용문은 그간 많은 이들이 허균의 천주교 입문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있 어 중요한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글과 실제 이식의 원문을 대조해 보면 그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인간의 발자취야 입으로 거론할 가치도 없다 하겠지만 일찍이 듣기를 그가 남녀의 정욕은 하늘의 가르침이요, 윤기(倫紀)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그런 데 하늘이 성인보다는 한 등급 위에 있으니 나는 하늘의 가르침을 따를지언정 감 히 성인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겠다. 라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이 말을 외우면서 지론(至論)으로 여겼다 한다.641) 위 두 글의 내용은 거의 유사하나, 이식의 원문에는 어찌 보면 본 논의의 핵 심이라 할 수 있는 허균이 비로소 천주교의 책을 얻어 학습했다 는 구절이 없음 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차이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인 용자인 이규경의 의도적 윤색일까? 아니면 착오 내지는 와전에 기인한 것일까? 이능화(李能和)는 1928년의 저서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에서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638) 安鼎福, 順菴集, 雜著, 天學問答 참조 639) 이종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 p )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 釋典類, 西學, 斥邪敎辨證說 641) 李植, 澤堂集, 澤堂先生 別集 卷15, 雜著, 示兒代筆 其人事不足汚口 顧嘗聞其言曰 男女情欲天也 倫紀分別 聖人之敎也 天且高聖人一等 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 其徒誦其言 以爲至論

226 허균은 초당 허엽의 아들이라. 문학에 재주가 있었는데 천주교 책을 얻어 학습 하여 유학의 가르침과 비교를 논하기도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조선인이 서교 (西敎) 사상을 믿은 효시이다. (중략) 내가 또한 택당집 을 읽으며 이 대목을 찾 아 살펴보니 단지 허균이 선불(仙佛)의 책들을 섭렵했다는 말이 있을 뿐, 소위 천 주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 남녀 정욕 등의 말을 가지고 볼 것 같 으면 이식이 말한 선불의 책 이란 거의 그 의미가 천주교 책 을 의미한 것과 다름 이 없으니, 이규경의 말이 옳은 듯하다. 왜 그런가 하니, 선불의 책 은 본래 남녀 의 정욕을 꺼리고 천주교는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두 이씨 의 설 모두가 허균이 천주교 책을 보아 비로소 제멋대로 종욕(縱慾)하는 자가 된 것이라 한 점은 비슷하니, 그 사이에 반드시 숨겨진 진실이 있는데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천주교 책은 또한 선(善)을 권하는 말이 요, 음탕한 것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며 종정(縱情) 과 자욕(恣慾) 의 이치가 결코 없다. 두 이씨는 모두 서인에 속하고 허적(許籍)은 남인에 속하여 서로가 당적(黨 敵)인지라. 그런 까닭에 일부러 헐뜯고 폄훼하려 한 것일 뿐이다.642) 이능화는 위의 글을 통해 이식과 이규경이 당색이 다른 허적과의 관계 때문에 허균을 의도적으로 중상 모략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능화는 당시 조선 사회가 낙후된 원인을 천주교와 결부시켜 이해하려 했던 인물이었으므로,643) 허 균의 행실과 관련 지어 천주교를 이단으로 취급하려는 이들의 태도에 상당한 불 쾌감을 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와중에서도 허균이 천주 교의 책을 읽었으며 교리를 접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허균과 천주교의 관계를 긍정하는 이능화의 태도는 현재적 상황에서 허균의 입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곧, 종교계와 일반 학계를 망라하여 허균은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서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새로 642) 李能和, 朝鮮基督敎及外交史, 朝鮮基督敎彰文社, 1928, pp.23~24, 許筠者는 草堂曄 之子라 而有文學才藻 고 亦得見天主敎書 而有與儒訓比較之論 니 是則我朝鮮人信西敎 思想之嚆矢也라 (중략) 能和亦讀澤堂集 야 尋繹此條 니 但有許筠이 涉獵仙佛之書云云 而並無所謂天主敎之說이라 雖然이나 由其男女情慾等說以觀之 면 則李植所謂仙佛之書는 殆卽意味天主敎書無疑니 李圭景之言이 似是也로다 何則고 仙佛之書는 本忌男女情慾 고 而天主敎는 則許帶妻故也일서라 然而依兩李之說 則有似許筠이 因見天主敎書 야 而始乃 放情縱慾者然 니 疑其間에 必有匿實而搆虛者로다 何以故오 天主敎書는 亦勸善之言이오 而非誨淫之書也니 則決無因是而縱情恣慾之理야로다 蓋兩李者는 皆屬西人而許籍南人 야 彼此黨敵야라 故로 故意訾毁之耳로다 643) 김수태, 앞의 논문, p

227 이 정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음 조신권의 논의는 기독교계나 기독문학 전공자 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되짚어 볼 만하다. 신불(信佛)의 도가 높았다고 하지만, 그는 이단적 지식인이었으므로 어떤 한 종 교의 구속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영원한 자유인으로서의 그의 진취적 정신 은 그로 하여금 서학에 눈을 뜨게 했고, 서학을 연구하다 보니 그 중추를 이루는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단순한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만 치부한 것은 아니었다. 허균 자신의 기록이 전혀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사람들의 문헌을 참고해 보면 그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서 드러내 놓고 표 현할 수는 없었어도 그 자신은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644) 위에 인용한 조신권의 논의에는 다소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 자신도 언급한 바, 허균 자신의 기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허균을 최초의 신자로 규 정하고 그가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음이 틀림없다는 확언을 내린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또 어떤 한 종교의 구속도 받으려 하지 않았던 자유인 허 균이 그 짧은 기간 기독교와 접한 뒤 갑작스레 사상의 전향을 이뤄냈다는 설명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조신권의 견해가 허균을 최초의 천주교 신자 내지 기독교인으로 보는 일각의 입장에서 크게 지나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은 생 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세상의 모든 책을 읽었다 자부할 만큼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박학했던 허균이 새로이 전래된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 사실일 것이며, 허균이 처음으로 천주교의 책을 얻어 학습했다 는 이식의 주장 역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허균을 최초의 신자로 규정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른다. 그가 신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도 부족하기 탓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허균이 가져 온 12장의 게(偈) 가 무엇인지를 해명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 '게 가 무엇이냐의 문제는 당시 천주교 에 대한 허균의 경도(傾倒) 정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허균의 게 가 무엇인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는 대략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그 처음은 게 를 찬송가 내지 찬미가로 보는 입장이다. 김동욱은 천주가사에 관 644) 조신권, 한국문학과 기독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P

228 한 글을 통해 이런 찬가는 허균이 북경에서 게경(偈經)을 가져올 때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 하여 게가 찬미가의 일종이었음을 시사하였다.645) 반면 최필선은 1990년의 논문에서 이 게 가 가톨릭의 그레고리오 성가646)를 의미한다는 이색적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최초 전래는 17세기 중엽 허균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서양 선 교사들로부터 받아 온 게 12장 이 아닌가 한다. 일설에는 허균이 가져 온 게 12 장 이 그레고리오 성가가 아닌, 기도문 12단(端) 이라고 하지만 17세기 이마두가 지은 북경의 천주당을 중심으로 한 음악의 유전(流轉)은 그곳을 다녀와 신앙을 실 천했던 허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또 게 가 불교 용어로서 Gãtã의 역어(譯語)이며 불전(佛典)의 성가, 송덕가, 찬미가, 범패 등을 뜻하므로 찬 미가, 즉 그레고리오 성가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사료된다.647) 이 같은 최필선의 주장에 대하여 전정임은 게 가 찬미가의 일종이라는 근거 하나만으로 그것이 그레고리오 성가였으리라는 논의를 펴는 것은 다소 비약적인 측면이 있으나, 허균이 중국을 방문했을 17세기 초엽은 이미 중국에서 천주교 전례(典禮)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던 시기이므로, 그가 천주교 찬미가를 가 져 왔다면 그것이 공식적 전례 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는 견해를 밝혔다.648) 문학이나 음악 전공자들의 경우 허균이 가져 온 게 를 찬미가로 보는 견해가 많은 반면, 종교학 관련자들은 기도문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 선명한 대비를 이루 고 있다. 먼저 유홍렬은 게 12장 이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기도문, 즉 12단(端) 을 말하 는 것으로 보았는데 12단이란 성호경(聖號經) 천주경(天主經) 성모경(聖母經) 종도신경(宗徒神經) 심종경(三種經) 고죄경(告罪經) 소회죄경(小悔罪經) 645) 김동욱, 西敎 傳來後의 天主讚歌, 인문과학 23집,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70, PP.171~175 전정임, 초기 한국 천주교회 음악,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 연구소, 2001, P.91에서 재인용 646) 그레고리오성가[Gregorian chant]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단선율(單旋律) 성 가로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전례(典禮) 음악이며, 이 명칭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 위 590~604)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647) 최필선, 初期韓國 가톨릭 敎會音樂에 대한 硏究 : 경상도 내의 구전 천주가사를 중 심으로,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0, p ) 전정임, 앞의 책, p

229 영광경(榮光經) 천주십계(天主十誡) 성교법규사규(聖敎法規四規) 삼덕송(三 德頌) 봉헌경(奉獻經) 등을 가리킨다고 했다. 또한 허균이 이것을 얻었다 함은, 곧 그 기도문을 날마다 외워서 천주를 섬겼다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다.649) 하성래 역시 유몽인이 得其地圖及 天主實義而來 라 하지 않고 得其地圖及 偈十二章而來 라 한 것은 천주실의 와 게 를 명백히 구분한 것으로 보아 게 는 책이 아니라 기도문이라고 단언하였다. 또한 그가 기도문을 들여왔다는 것은 서교를 학문적으로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이를 신앙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650) 앞의 인물들처럼 강경하지는 않지만, 근래의 종교학자 금장태 역시 허균 등에 게서 서학의 입장과 유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개진한 바 있다. 이수광 허균 등 초기에 천주교 교리를 접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천주교의 핵심적 특징으로서 천주(天主) 의 존재가 일차적으로 부각되고 존중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허균이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요, 분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 다. 하늘은 성인보다 존귀하니 성인을 어길지언정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을 어길 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는데, 여기서 하늘과 성인을 구별하는 의식은 성인을 통해 하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유교적 입장과는 달리 모든 존재를 넘어서 하늘의 절대 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서학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51) 위 논의에는 기본적으로 허균이 천주교의 교리를 접했다는 저자의 확신이 바 탕을 이루고 있다. 비록 허균이 천주교를 신앙했다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펴진 않 았지만, 서학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실제로 허균은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의 사행을 통해 4천여 권의 책을 구 입하였는데,652) 이것들 중 서학이나 천주교와 관련한 서적이 끼어 있었을 가능 649) 유홍렬,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신앙생활, 카톨릭청년, 카톨릭청년사, 1955, p ) 하성래, 韓國 語文學에 끼친 天主敎의 影響, 국어국문학 74집, 국어국문학회, 1977, p.95 참조 651) 금장태, 앞의 책, p ) 許筠, 앞의 책, 閑情錄 卷首, 凡例 그러던 중 갑인(1614)ㆍ을묘(1615) 양년(兩年)에 일이 있어 북경에 두 번이나 가게 되어, 그때 집에 있는 돈으로 약 4천 권의 책을 구입 하였다

230 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된다. 또한 허균은 평소부터 대륙의 동향에 상당히 민감 했고, 1609년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으로 명인(明人)들과 접촉한 일이 있었 으므로 중국 사상계의 새로운 변화를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조 선의 인물 중 최초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이수광과 유몽인이 그의 지인(知人)이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결국 이러한 여러 사실 들은 허균이 일찍부터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중국에 이른바 서학동점(西學東漸) 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을 높여 주고 있다. 그렇게 보면 허균이 조선에 들여왔다는 게 의 존재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숱한 의혹들을 일시에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게 가 일부 종교인들의 주장처럼 천주 교의 기도문, 12단(端)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얻어 온 허균이 그 기도문 을 날마다 외워서 천주를 섬겼다 653)는 그들의 주장 역시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균의 게 가 기도문이 아닌, 찬미가나 서책 등을 가리키는 말로 판명 된다면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사들이 그 내용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관 점에서는 허균이 처음으로 천주교의 책을 얻어 학습했다 는 사실 자체가 학문적 관심 이상의 것을 내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삼교(三敎)를 비롯하여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통관(洞觀)했다 는 평을 얻을 만큼 박학했고 일변 잡학 적 성향이 두드러졌음을 감안한다면, 서학이나 천주교에 대한 관심 역시 그가 도 전해야 할 새로운 학문의 조류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필자는 위의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앞에 인용한 최강현의 논의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는 허균이 천주교 신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을병조천 록 에 소재하는 只恃天公任去留(오직 하느님을 믿어, 가고 옴을 맡기겠다) 라는 시구를 제시하였는데, 특히 위 인용문의 천공(天公) 이라는 단어가 차자표기(借 字表記)로 풀이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쓰는 천주(天主) 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천공 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천주 의 뜻만이 아닌, '천제(天帝)'나 '상제(上帝)', 조물주', 하느님 등의 의미로 혼용되 었으며, 허균의 문집에서도 그 용례가 발견됨을 볼 수 있다. 653)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상, 가톨릭출판사, 1994, p.54 참조

231 高年佚樂餉厚報 고령(高齡)에 즐거움은 선(善)의 보답을 받음이라 始識天公公賦與 비로소 하늘의 부여 공평함을 알겠네 654) 알건대, 의식(衣食)이 조금 넉넉하여 산수 사이에 유유자적하는 것은 참으로 인간 의 극락(極樂)이건만 천공(天公)이 매우 아끼는 바이기에 사람이 가장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655) 위의 인용문들에는 천공 의 의미가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 자연적인 절대자, 세칭 하느님 이나 천신(天神) 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을병조천록 에 보이는 천공 을 굳이 가톨릭에서 말하 는 천주 의 의미로 한정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더구나 최강현은 천주교 와 같은 의미로, 천주교 이전에 교산에 의하여 일컬어진 천공교(天公 敎) 가 아닐까 생각한다 는 견해를 제시하면서도 천공교 가 무엇인지 그 전거를 밝히지 않아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 밖에 동시대에 발간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656)에서 천공 이란 단어를 사용한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만일 허 균이 중국에서 천주교에 입문하였다면, 그는 천공 이 아닌 천주 라는 말을 사용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천주 가 아닌, 재래의 천공 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최 강현의 해석에 지나친 점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최강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허균과 천주교(혹은 기독교)를 관련시켜 설명한 그간의 연구들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는데, 이는 빈약한 자료에 의 지해 억지로 결론을 도출하려 했던 연구자들의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자료의 수집과 관련 기록들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허균이 서학에 관심을 갖고 천 주교 관련 서적을 읽었던 것은 분명한 듯 보이나, 신자로서 천주교를 신앙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을 학문적 종지로 표명하면서도 불교 와 도교,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섭렵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천주교 역시 종교로서가 아닌, 새로운 학문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 된다.657) 654) 許筠, 앞의 문집, 卷2, 附錄 蛟山憶記詩, 懷遠堂詩 의 일부 655) 許筠, 앞의 문집, 卷, 閑情錄 卷3, 閒適 의 일부 656) 1603년, 중국에서 발간된 천주실의 원문에는 모두 천주(天主) 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그 외의 용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232 그런 의미에서 일부 연구자들이 제기한 홍길동전 이 기독교적 유토피아를 표방한 소설 658)이라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허 균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홍길동전 이 그의 기독교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는 주장이 타당성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657) 허균은 을병조천록 의 시 病中記懷追敍平生 에서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관해 이렇 게 고백하고 있다. (전략) 多病孱軀任拙疎 병이 많고 나약한 몸 졸렬하고 용렬하여, 母兄嬌愛貸居諸 어머니 와 형님들의 사랑 속에 살아왔네, 專經學究猶慙恥 오로지 경학만 궁구함이 부끄러워, 讀 破家傳四部書 집에 있는 사부서를 모두 다 읽었다네 (중략) 金丹一粒誤平生 평생에 금단 한 알 잘못 먹어서, 妄意乘雲上玉京 망녕된 내 생각 구름 타고 옥경 갔네, 晩悟伯陽微妙 法 늦게야 노자의 미묘한 법 깨달아서, 塞吾三寶固吾精 나는야 삼보 막고 마음을 굳게 했네 / 貪讀楞伽四卷經 나는야 능가경 네 권을 탐독하여, 便敎方寸一惺惺 스스로 깨달 아 매일 마음 다스렸네, 吾家自有安心法 나는 절로 안심법을 지켜 오면서, 枉向翟曇苦乞 靈 마음 돌려 담무갈과 묵자에 영을 비네 / 三十年來老佛耽 삼십 년을 살아오며 노자 부처 빠졌었네, 說心論性摠空談 심성에 관한 논설 모두가 헛소리네, 誰知大道存方策 대 도에 방책 있음 아는 이가 누구인가?, 洙泗淵源得縱探 유학의 연원을 마음대로 찾아 봤 네 (하략) 658) 홍길동전 을 기독교 사상과 관련지어 논한 것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하성래, 韓國 語文學에 끼친 天主敎의 影響, 국어국문학 74집, 국어국문학회, 조신권, 한국문학과 기독교, 연세대학교 출판부, 황양수, 한국기독교문학의 형성 연구,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논문, 변기영 몬시뇰, (간추린)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연구소,

233 Ⅳ. 家庭 內 文藝意識의 成長과 그 變因 1. 士林 遺風의 繼承과 道學에의 指向 정치적으로 16~17세기는 사림 세력의 성장과 그들에 의한 붕당정치가 펼쳐진 시대이다. 15세기의 정치가 양반관료제로 출발했다면 16~17세기의 붕당정치는 양반관료제 위에 정파(政派)정치로서의 붕당정치를 실현시킨 것으로, 이는 전자 (前者)와는 명확히 구분된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15세기에 확립된 수취(收聚)제 도와 부역제도가 질적 변화를 일으켰고 농업의 발달을 토대로 상업 수공업의 발달이 촉진되는 등 여러 변화가 일어났는데,659) 허엽과 그 자녀들의 정치적 학문적 활동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수행되었다. 조선 전기 사회는 수조권(收租權) 제도의 약화와 소멸을 거치며 중세 봉건적 인 집권체제가 강화되었던 한편, 사적(私的) 토지 소유의 강화에 따른 지주제의 확대와 농민층 분해가 꾸준히 진전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16세기 조선 사회 는 각종 제도 법령의 폐단과 지배층의 과도한 농민 수탈로 야기된 내부 모순 으로 인해 체제적 위기 상황을 맞고 있었는데, 이는 곧 조선 왕조의 성립을 계 기로 재편된 집권적 봉건 질서가 동요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증폭되는 사회 변동과 구조적 모순으로 위기의식이 점차 심화되어 가자 체제의 동요를 무 마하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을 둘러싼 양반지배층 간의 갈등과 대 립이 초래되었고 이는 후에 정치세력 간의 격돌로 표면화되었는데, 이른바 훈구 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그것이다.660) 성종대를 전후해 중앙 정계에 등장한 사림 세력은 조선 건국 이래 권력과 부 를 독점하여 왕조의 정치를 천단(擅斷)해 온 훈구파의 지배 시대를 종식시키고, 전망적 철학을 지닌 다수의 공론에 의한 지배 및 군신(君臣)이 함께 다스리는 지배 체제를 구축하려 시도하였다.661) 이들은 점차 김종직과 같은 인물을 중심 으로 결속하여 어느 정도의 조직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성리학과 주자가례(朱子 659) 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 30, 탐구당, 2003, p.2 660) 金貞信, 16世紀 前半 勳舊 士林의 官僚制 運營論 比較, 조선시대사학보 47집, 조선시대사학회, 2008, p.8 661) 이병휴, 16세기 정국의 추이와 호남ㆍ영남의 사림, 국학연구 9집, 한국국학진흥 원, 2006, p

234 家禮) 등의 보급을 통해 여러 제도의 개혁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자파(自派) 세력의 확립을 모색하는 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동의 목표를 지니기 시작하 였다.662)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체계적 인식과 구체적 대안이 일시 에 정리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사림의 이 같은 계획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중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립될 수 있었다.663) 조광조가 개혁의 이상을 펼쳤던 중종 전반, 즉 16세기 초반은 한국사에서 조 선 전기와 중기의 전환점으로 이해될 만큼 많은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는데, 무오 년과 갑자년(의 사화에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며 개혁 의지를 불태웠던 사림들이 1515년, 삼사(三司)를 비롯한 요직에 두루 포진하게 됨으로 써 본격적인 개혁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664) 이들 소위 기묘사림들은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 정치에 반영하려는 도학정치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서 성리학과 구별되는 도학 의 특징적 함의(含意)는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성리학의 특성에서 벗어나 요순공맹(堯舜孔孟)의 도를 계 승하고 이를 현실의 삶과 사회에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신념과 사명의식, 그리고 현실 비판의 정신을 탐지하는 것이었다.665) 그 일례로서 기묘사림들에 의해 주 목된 소학 에 대한 관심은 15세기의 체제교학적(體制敎學的)인 성리학을 극복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과문(科文)에만 치우쳐 사서(四 書)를 암송하거나 기능적으로 익히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들이 직접 성리학의 수 기(修己) 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향촌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관심의 연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민(對民)교화의 방편으 로 15세기에 주목을 받았던 삼강행실도 도 일부 보급되었지만 일상생활의 윤리 로서 소학 이 더욱 주목되었던 것이다.666) 그런데 이들 사림 세력의 등장은 정치 사상계 뿐 아니라 당대의 문단에까지 그 영향을 파급시켰다. 사림들은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고 경 학의 기본 정신을 송대 신유학의 하나인 성리학에서 구하는 등 기존의 훈구파와 그 성향을 달리하였는데, 사상 및 문예의 측면에 있어 다음 세기(世紀)와의 매개 자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는 김종직을 들 수 있다. 662) 663) 664) 665) 666) 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 28, 탐구당, 2003, p.174 국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p.27 鄭玉子,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p.10 윤사순, 韓國儒學論究, 현암사, 1985, p.65 정재훈, 조선전기 유교정치사상 연구, 태학사, 2005, pp.181~

235 김종직은 성리학과 문장학을 본(本) 과 말(末) 의 관계로 보고, 육경(六經)의 학습에 기초해 이승(理勝) 한 문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정심 (正心) 을 핵심으로 하는 학문과 수양을 기반으로 하는 문예 창작을 전개하여 고 문(古文)의 정신을 구현하려 했고, 이를 그 문도들에게 전수함으로써 후기 사림 파 문학의 도학 지향을 공고히 하는 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667) 김종직 - 김굉필의 뒤를 이어 16세기 초 등장한 조광조 역시 훈구파의 사장 성향을 극력 배격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 으로서의 성리서 강독을 강조하였는 데, 문사(文事)를 경시하고 이학(理學)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당시의 후배 신 진 사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반면, 이 같은 사림 도학파의 문학관에 대하여 일부 관인(官人)들의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성현(成俔)은 김종직의 문예 의식을 융통성 없고 편협하다는 의미의 교주교슬(膠柱鼓瑟) 에 비유하면서 그 같은 경향이 시문의 다양성을 훼 손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그의 문도들에 의해 이 같은 원칙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668) 이행(李荇)과 남곤(南袞) 역시 당대의 문인들이 지나치게 성리학에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문장의 아름다움도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등,669) 일각에서는 사장의 효용과 관련한 많은 이론(異論)들이 촉발되기도 했다. 이렇듯 유교적 수양론에 입각한 김종직의 문학론은 정여창(鄭汝昌)과 최충성 (崔忠成)에 이르면 도본문말(道本文末) 이라는 보다 경화(硬化)된 논리로 전화 (轉化)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덕이 갖추어지고 경전에 달통하게 되면 시문에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훌륭한 창작을 할 수 있다고 한 정여창의 이론이 최충성 을 거쳐 더욱 강화된 모습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최충성은 문장을 문장에 이르는 문장[文章之文章] 과 도덕에 이르는 문장[道 德之文章] 으로 양분한 후, 유자는 당연히 도덕에 이르는 문장 을 지향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 같은 입장에서 보면 문학이란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경술 공 부의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며 철저히 도학적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됨을 알 수 있는데,670) 조광조 이래 사림의 정통을 자처한 많은 이들이 저술에 힘쓰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허엽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경우 언해(諺解)를 통해 667) 668) 669) 670) 이종호, 이종호, 전성기, 김풍기,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한길사, 2004, p.108 위의 책, p.92 인문학의 수사학적 탐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p.141 조선전기 문학론 연구, 태학사, 1996, p

236 훈민(訓民) 할 것을 역설한다든가 하는 데 힘썼을 뿐 문예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서경덕 역시 시와 산문 모두에서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이 치 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였을 뿐 수사(修辭)의 측면은 경시하였다. 현재 전하는 서경덕의 저술은 이치를 따지는 산문이 대부분으로, 그는 글을 지어 행세를 하거 나 성현의 말을 인용해 증거로 삼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장식적인 문구는 모두 제거한 채 오직 간결하고 명료한 말로 자득(自得)한 이치의 핵심을 전하고 자 하였다.671) 경술(經術)의 입장에서 문장을 바라보는 사림의 문학론은 서거정(徐居正)으로 대표되는 전대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서, 문예에 대 한 허엽의 태도 역시 이 같은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된다. 허엽은 다른 화담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아 오직 경학에 치중했던 인물 로만 알려져 있는데, 그가 애초부터 사장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정구 (鄭逑)가 찬한 허엽의 행장 을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인하여 나식 선생에게 그것을 질문하였으며 후에 회재 이언적 선생이 인종에게 심경부주 를 강하도록 권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구해 읽고 학문의 나아갈 바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송애 이여 선생이 역학에 밝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가 르침을 받았으며 후에 화담에서 문강(文康) 서경덕 선생을 섬겼는데, 화담 선생이 위독해지자 (허엽에게) 원리기 등 여섯 편을 구술(口述)하여 전하게 했다. (허엽) 선생은 젊었을 때에 글 짓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때부터 (글 짓는) 일을 스스 로 멀리하였게 되었다.672) 위의 인용문은 허엽이 젊은 시절, 문사(文詞)에 힘쓰다가 여러 선생들을 거치 며 수학하는 과정에서 점차 경학에 기울게 된 사실을 보여 준다. 허엽이 어떠한 이유로 글 짓는 일을 멀리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그 의 스승들 대부분이 사장보다는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치중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허엽이 출사 전, 시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자료 671)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1999, pp.401~403 참조 672) 許曄, 앞의 책, 行狀(鄭逑 撰 ) 因質之長吟 後聞晦齋李先生勸仁廟講心經附註 求而讀 之 得其門路 又聞李松厓畬邃於易學 往受業 後事徐文康于花潭 花潭疾革 口占原理氣等六 篇以遺之 先生少時 工於文詞 自是盡棄其業

237 로는 심수경(沈守慶)이 찬한 견한잡록(遣閑雜錄) 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가정(嘉靖) 경자년(更子年) 겨울,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 태휘 허엽 군 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어느 날 밤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을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했다. 그리하여 7언 근체시 (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지었으며 마침내 17일째 되던 밤에야 (이를)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 (燈月錄) 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다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 째 밤에야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 이니, 그 뜻은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환히 알아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 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한다. 고 하였다. 태휘의 시에, 重興十七首新詩 중흥사에서 읊은 17수의 시로써 老眼看來喜可知 늙은 뒤의 기쁨을 알 만하구나 泉石始經才子弄 천석(泉石)은 재자(才子)의 희롱에 경계를 두고 山林應盡寶藏奇 산림은 보물로 여겨 잘 간직하리 玉虫逐卷光猶爛 비단벌레 따라 책 읽으니 빛은 찬란하고 圓桂當中影不移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他日蘭亭堪絶唱 훗날 난정(蘭亭)에서 빼어난 노래 즐길 적에 吾人雖病欲相隨 내 비록 병들었어도 함께 하길 원하네 라고 하였다.673) 위에 언급된 가정(嘉靖) 경자년(更子年) 은 1540년(중종35)으로, 그 즈음 당 시 24세였던 허엽이 심수경 윤결 등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허엽이 그런 와중에서 시 한 구씩을 지어 시 편을 만들 것을 벗들에게 권하고 결국에는 시축(詩軸)을 만들었던 사실은, 그가 673) 沈守慶, 遣閑雜錄 嘉靖庚子冬 余與尹君潔長源許君曄太輝 讀書于三角山重興寺 一夜 太輝勸余及長源 聯句爲詩 遂成七言近軆一首 每夜如是 凡十七夜而止 每篇用燈月字 書以 爲軸 名之曰燈月錄 余題其尾曰 詩之作 每夜一篇 十七夜而止 詩亦十七而已 其辭則燈月交 輝 其意則肝肺相照 浮生聚散不常其期 他時面目猶可以寓于此云耳 太輝題詩曰 重興十七首 新詩 老眼看來喜可知 泉石始經才子弄 山林應盡寶藏奇 玉蟲逐卷光猶爛 圓桂當中影不移 他日蘭亭堪絶唱 吾人雖病欲相隨

238 평소에 문사(文詞) 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 허엽이 문사를 폐기하고 경술 연구에 전심(專心)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서경덕 이여와의 만남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던 듯하다. 허엽이 이여에게서 주 역 을 배운 것이 1539년경이고 1537년에 화담을 처음 만나 1543년 그 문하에 들 어갔음을 감안할 때, 그가 경학 연구에 급격히 경도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537~1539년을 전후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허엽은 이후 화담의 몰년(沒 年)인 1546년을 즈음해 화담으로부터 원리기 등을 구술해 전해 받았고 같은 해에 대과에 급제, 출사하였으므로 더 이상 문사 에는 힘쓰지 않게 되었던 것이 다. 허엽이 젊었을 때에는 글 짓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나 스스로 그 일을 멀리하 게 된 데에는 그의 가정적 배경 또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 서 살펴보았듯 허엽의 가문은 그 선대까지는 가세가 비교적 한미했던 것으로 보 이는데, 이렇듯 가문의 후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입지 구축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그 자신의 재능으로써 세간의 인정을 받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허엽이 문사를 폐기하고 학문에 침잠하게 된 것 역시 시재(詩 才) 하나만으로는 출사나 영달(榮達)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미약한 가문 출신인 허엽이 누대의 벌열(閥閱) 가문이었던 정국공신(靖國功臣) 한숙창 (韓叔昌)의 사위로 선택되었던 것 역시 그 같은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 다.674) 674) 허엽의 가계에 관한 기록은 허균의 성옹지소록 에 있는 선대부에 이르러 비로소 가 업이 드러나다[家業至先大夫始彰] 의 조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선대(先代)에 야당(野堂) 선생 뒤로는 두 대를 연달아 과거에 오른 분이 없다. 그 러다가 우리 고조(高祖) 때에 와서 형제분이 과거에 뽑혔으나 계씨(季氏)분은 겨우 사간 (司諫)이었고, 고조께서는 벼슬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사간의 아들 집(輯)은 벼슬 이 지사(知事)였고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다. 우리 증조(曾祖)는 과거하지 못하고 일찍 죽 었으며, 위(渭)는 지평(持平)이었고 온(溫)은 승지였다. 조부는 문장에 능했으나 일찍 돌 아가셨으며, 선대부 때에 와서야 비로소 현달하였다. 우리 삼형제가 함께 문과에 급제하 였는데, 백형(伯兄)은 육경이고 중형(仲兄)은 학사이며, 나도 당상관에 참여하였다. 또한 백형의 아들 실(實)이 문과에 올라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다른 조카들도 모두 청일(淸 逸)하고 문명(文名)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선조(先祖)께서 공덕을 쌓으셨기 때문으로, 오 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공덕이)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我先祖自野堂先生 之後 連二代無科第 至我高祖昆季擢第 季僅至司諫 而高祖未達早卒 司諫之子輯 官知事 有 文名 我曾祖不第早卒 子渭持平 溫承旨 而祖父亦能文 早卒 至先大夫始彰 不肖三兄弟俱文 科 伯兄六卿 仲兄學士 不肖亦參堂上官 而伯兄之子實 文科爲正言 諸姪皆淸卲有文 是皆祖 先積累之效 蓋愈久而愈著也)

239 허엽의 문집인 초당집 에는 고작 1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 7편이 만시(輓詩)라는 사실은 허엽이 문예의 창작에 공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입증하 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산문 역시도 스승, 지인들과 관련된 서(序) 나 발(跋), 제문 등이 대부분이어서675) 그의 문예적 취향이 대개의 사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은 허엽이 기묘사림의 유풍에 근 거, 사장을 중시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허엽은 역사적 진보성에 기여하고 민중의 이익을 담보하며, 사회정치적 비판 이론에 근거한 유학사상을 견지하는 진보적 사림파 의 일원이었다. 이들 진보적 사림파는 사회 정치 현실의 모순된 관계에 있어서 왜곡의 정확한 내용을 직시 하여, 당시 체제옹호적인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정치사상과 비교적 역사변증법적인 유물론적(唯物論的) 사상을 견지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특정 한 권력자들이 고의로 모순을 은폐하고 현실을 유지하려는 의도에 대해 직접적 인 폭로와 비판을 가함으로써, 다양한 정치철학을 수립하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676) 그런데 이들의 개혁 정신은 기묘사림 의 의식에 연원을 두고 있었으므로, 그 유풍(遺風) 역시 기묘년의 인물들과 유사한 성향을 띠는 것이 당연했다. 명종대 의 김안로(金安老)가, 조광조가 사장과 술업(述業)을 경시한 후유증으로 문예와 학술이 쇠약해졌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던 바677) 기묘사림들은 극단적 으로 문예를 경시하는 도학 제일주의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승들을 통해 기묘사림의 사상을 전수받고 그들의 유훈(遺訓)을 실천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허엽이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거문고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음률(音律)에 밝았으며 젊 은 시절 벗들과 어울려 시를 수창했던 흔적이 문헌에 보일 만큼 낭만적인 기질 이 내재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허엽이 문예 를 포기하고 오로지 이학(理 675) 초당집 에 수록된 산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序 ( 送盧寡悔序, 長吟亭遺 稿序 ) 2편, 說 ( 送李浚說 ) 1편, 記 ( 玉山書院記 ) 1편, 跋 ( 晦齋先生文集跋, 慕齋先生文集跋, 陶山記跋 ) 3편, 祭文 (一齋 李恒, 眉巖 柳希春, 晦齋 李彥 迪, 李滉) 5편, 墓碣銘 (順天都正 李琯, 南溪 許忠吉) 2편, 行狀 (松厓 李畬) 1편 이 실려 있다. 676) 권인호,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연구 : 南冥 曺植과 來庵 鄭仁弘을 중심으 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p.1990, p.5 참조 677) 이종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p

240 學) 의 탐구에만 힘을 쏟았던 것은 그 자신의 확고한 사상적 정치적 신념에 기 반한 최후의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다. 허엽의 맏아들인 허성은 여러 모로 부친과 가장 근사한 행보를 보인 인물이 다. 세 살 아래의 아우 허봉이 일찍부터 시명(詩名)을 날리며 재사(才士)로 군림 했던 데 비해 허성은 문예의 방면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시문(詩文)보다는 경학과 문장에 치중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 고 그 같은 판단은 아우 허균이 백형은 경전에 밝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다 는 언급을 남긴 것이나 반드시 예(禮)로써 배움의 근본을 삼았으며 모든 일을 육경 에 의거해 보고 바른 것을 얻으면 비록 천만인이 다투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는 등의 인물평을 보았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반면, 명인(明人) 오명제가 편찬한 조선시선 에 왕경(王京)에 당도하여 허씨 집에서 묵었는데 백중한 세 사람이 문장으로 동해를 울렸다 는 언급이 있는 것이 나 전겸익이 열조시집 을 편찬하면서 허균이 두 형과 더불어 문장으로 동해를 울렸는데 균이 더욱 민첩하였다 는 글귀를 남긴 것 등은 허성 역시 아우들과 더 불어 당대에 문명을 떨쳤던 사실을 알려 주는 또 다른 예라 할 수 있다. 허성의 문집인 악록집 에는 서(序) 와 상소, 제문, 묘갈명, 행장 외에678) 시 220수가 수록되어 있어 그 문예적 지향을 다소나마 짐작케 한다. Ⅲ장에서 언급 했듯 악록집 은 허성의 사후(死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필사(筆寫)된 것으로 보이는데, 작품의 여러 정황과 일부 시에 밝혀져 있는 창작 연도로써 시기별로 작품을 배열한 편찬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집 간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일부 작품의 순서가 뒤바뀌었거나 오탈자(誤脫字)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등 적지 않은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1583년(선조16) 과거에 급제, 출사한 후부터 임진왜란을 전후한 1590년대 초반 의 작품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전란 중에 소실되었거 나 필사 과정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679) 그런데 악록집 에 수록된 220편의 시편 중 46%가 넘는 102수가 삼각산 승 가사 시회에서 수창된 작품들이라는 점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 작품들은 678) 시를 제외한 산문의 전체 목록은 다음과 같다. 3편의 序 ( 恥齋先生文集序, 淸潭 李先生慶壽詩, 箕田圖說後語 ), 1편의 上疏 ( 時弊疏 ), 1편의 祭文(李滉), 5편의 墓 碣銘 (壽昌君, 柳希春, 韓汝弼, 鄭希登, 朴文榮), 1편의 行狀 (鄭希登), 1편의 賜祭文 (李敬中)이 수록되어 있다. 679) 拙稿, 앞의 논문(2003), p.5 참조

241 허성의 나이 28세 때인 1575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그가 출사 이전에는 시문의 창작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 내용에 있어 주위의 승경(勝景)을 읊은 것, 경치에 대한 묘사, 시우(詩友)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등 단순하고 즉흥적인 감회를 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문학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기는 어려울 듯하 다. 이 시기의 작품 몇 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밤에 앉아 현길(見吉)을 그리워하다[夜坐 懷見吉] 十里鐘聲隔漢城 십 리의 종소리 한성에서 들려오는데 滿山春雨洞雲平 온 산에 봄비 내리고 골짝의 구름 평평하네 東風無限分離恨 동풍은 끝없이 불어오는데 이별의 한 끝이 없어 何日相看說此情 어느 날 서로 만나 이 심정을 말할까 계원의 시에 차운하다[次戒元韻] 巖扉寂寂對空巒 바위 옆 사립문 적적하여 빈산을 대하고 雲外逢君一破顔 구름 밖에서 그댈 만나 한 번 크게 웃었다네 始滌十年塵土累 십 년 동안 매인 진토(塵土) 처음으로 씻으니 心經一部有眞閒 심경(心經) 한 권에 참된 한가함이 있구나 노중에서 작별하며 제군들에게 부치다[路中留別 寄諸君] 烟朝月夕好追隨 안개 낀 아침 달 밝은 저녁 서로를 따라 다녔으니 正是山中二月時 바로 산중의 이월이었다네 惆愴荒臺楊柳路 황량한 누대 버들 휘날리는 길에 暮鴉啼歇夕陽遲 저녁 까마귀는 울고 석양은 뉘엿뉘엿 위의 시들은 출사 전, 허성에게 있어 시의 창작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 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시기 허성의 시들에서는 한시의 주요 기법인 전고 (典故) 를 흔히 찾아볼 수 없는데 시를 창작함에 있어 전고수사(典故修辭) 에 힘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전에 시에 관련한 전문적 수업을 받지 않았거나

242 혹 받았다 하더라도 그에 몰입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삼각산 승가사 시회 의 일원이었던 우복룡이 이 시첩에 수록된 작품의 대다수가 운격(韻格)이 높지 않 고 지취(志趣)가 맑지 않아 그 격조가 높지 않다 680)고 인정하였던 것처럼 그의 시적 수준이 별반 높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허성의 이 같은 성향이 출사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악록집 을 통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 중 43%에 이르는 95수가 사행(使行) 중 지어진 것들로 확인되는데, 본래 사행시에는 노정의 고단함과 지 루함을 잊기 위하여 일행이 모여 시를 수창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으므로 허성 역시 그 같은 전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성이 남긴 사행시들 역시 그의 문예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는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의 하나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성의 사행시들은 그의 문예적 소양과 내적 세계를 보여 주 는 중요한 자료의 하나로서 주목할 만하다. 허성의 사행시들은 그가 동지사(冬至使)의 소임을 맡아 명나라로 향했던 47세 무렵의 것들이거나 이원익(李元翼)을 보좌해 부사의 역할을 담당했던 51세 때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란 중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그의 사행시들에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사신으로서의 엄중한 책무를 수행해야 하는 정신적 부담감 과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고달픈 여정으로 인한 착잡함이 짙게 드러난다. 배 위에서 기별하다[舟中記別] 十年征役嘆吾生 십 년 정역(征役)에 나의 삶 탄식하니 匹馬今從塞路行 지금 한 필 말로 변방으로 향하네 暮抵秋江江上宿 저물녘 가을강에 닿아 그 위에서 머무니 平蕪極日渚禽鳴 잡초 가득한 들에선 해 지자 물새 우네 위의 시 중 사행을 떠나는 허성의 심정이 가장 절실히 나타나 있는 부분은 첫 구인 十年征役嘆吾生 이다.681) 1590년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과 함께 서 680) 僧伽酬唱錄, 題(禹伏龍) 참조 681) 일반적으로 정역(征役) 은 조세(租稅)와 부역(賦役) 을 뜻하는 단어지만, 허성은 여러 시들에서 이를 사행의 노역(勞役) 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한 예로 동관(東 關)의 도중에서 읊조리다[東關途中口號] 라는 제목의 작품에서는 일 년 정역(征役)을 가을 되어 그치려 한다(一年征役秋將老) 는 구절이 발견된다

243 장관의 직을 맡아 일본에 다녀 온 이래 허성은 4년에 한 번 꼴로 중국을 오가야 했는데, 특히 1594년에는 노정의 중도에서 돌아오는 바람에 한 해 두 차례나 국 경을 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 번의 사행길이 대개 1년 가까이 되는 대역정 임을 감안한다면, 전란 중 가족을 버려 둔 채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682) 그런 반면, 사행의 경험이 허성에게 있어 일상적 삶에 매몰되어 있던 자신을 들여다 볼 기회가 되었던 것이 여러 시편들에 드러나 흥미롭다. 남강의 시에 차운하다[附南岡次韻] 東征驂早駕日生 길 떠날 말 일찌감치 멍에 하고 해는 동쪽에서 떴는데 何用臨岐嘆道窮 갈림길에 와 어찌 길이 다했음을 탄식하랴 世事紛紛雙鬂裏 분분한 세상일은 두 가닥 귀밑머리 속에 있고 陰雲漢漢亂峰中 한한한 먹구름은 어지러운 산봉우리 가운데 있네 擬聽周樂嗟嫌晩 주의 음악을 늦게서야 듣게 된 것을 슬퍼하며 雖到遼陽非我地 비록 요양에 이르렀으나 내 땅이 아니니 此生蹤迹類飄蓬 이 삶의 자취는 바람에 날리는 쑥대 같구나 시적 경험은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이다. 그리고 그러한 드러냄은 언 제나 우리 자신의 창조로 귀결된다. 그 드러냄은 저기 낯설게 있는 어떤 외부의 것을 발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발견하는 것은 드러나려고 하는 것, 즉 존재 그 자체의 창조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란 우리의 실존이 의지하고 있는,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683)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요양 땅에서 허성은 뜻밖에도 생경한 또 하나의 나 와 만나게 된다. 이것은 환경에 의해 규정지어진 이전의 나 와는 다른 실존적 자 아 의 발견이요, 새로운 창조의 경험이다. 우리를 둘러싼 외재적(外在的)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이는 대부분 인간의 존재 양상을 구현하는 일차적 요건으 로 작용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간, 인간의 의식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를 향해 서만 열려 있으며, 어떤 계기에 의해 습관적인 일상의 평정이 깨질 때가 되어서 682) 拙稿, 앞의 논문(2003), P ) Octavip Paz 著 김홍근 譯, 활과 리라, 솔, 1998, p

244 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허성은 낯선 경험들의 반복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자각이 라는 근원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허성에게 있어 사행의 경험은 이미 일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었고, 요양은 여정의 끝남이 아니라 중간 기착 지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갈림길들을 지나왔으며 앞으로도 많은 길을 지나쳐야 할 허성에게 있어 그 앞에 펼쳐진 길들 은 부유(浮游)하는 인생의 표상이자 소멸하는 인생의 축도(縮圖)로서 다가왔을 것이다. 일찍이 금 문(金門)에다 잘못 적(籍)을 통(通)하여 십 년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매었다 684) 고 고백하였던 그가 장기간의 사행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낯선 이국땅에서 이 삶의 자취는 바람에 날리는 쑥 대 같다 는 탄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685) 이상의 여러 사실들은 허성이 의도적으로 문예를 경시하고 멀리 한 것이 아님 을 분명히 보여 준다. 비록 그 수준이 높지는 않다고 해도 그는 문예 가 지닌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시를 짓고 수창하는 행위를 통해 상당한 즐거 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 시적 수준을 더 이상 높은 곳으로 끌 어올리지 못했던 것은 그의 천성과 재질이 문예 보다는 경학 과 문장 에 더 적 합했기 때문이며, 주변의 환경 또한 그 같은 선택을 조장(助長)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성이 젊은 시절, 시우(詩友)들과 삼각산 승가사에 모였던 원래 목적이 성리 대전 을 통독하기 위함이었고686) 이곳에서 휴정의 문도 계원과 함께 반야심경 을 읽었던 사실은 그의 지향이 문예 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예 에 다름 아니다. 당시 허성과 더불어 시를 수창했던 화담 문인들 대부분이 시보 다는 문장과 경학에 치중한 인물이었다는 점 역시 그 같은 추측을 뒷받침해 준 다.687) 684) 許筬, 앞의 책, 권1, 詩, 又次 金門謬通籍 금문에다 잘못 적을 통하니, 十年迷所至 십 년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매었네, 石渠困讐校 돌개천은 원수 만날까 두렵고, 宮廬 帶晝睡 궁에서는 낮에 잠이나 자네, 絲綸承往哉 사륜을 이어갈까나, 對食甘忘味 밥을 대해도 단 맛을 잊었네, 竹書有期會 대나무에 쓸 기회가 있으니, 步步驚心地 걸음걸음 마다 마음과 땅이 놀라네 685) 拙稿, 앞의 논문(2003), PP.61~62 참조 686) 許筬, 앞의 책, 附錄, 與許知事書 참조 687) 삼각산 승가사 시회 에 참여했던 인물들 중 시명(詩名)이 있었던 인물로는 유희경이 유일하며, 우복룡 홍이상 서기 심희수 등은 저술보다는 경학 연구에 전념했던 인물

245 허성은 부친 허엽의 경우처럼 의도적으로 글 짓는 일을 멀리하거나 문예적 취 향을 애써 감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기질이나 지향이 애초부터 이복아우들과 는 달랐던 탓에 그의 문예의식은 더 이상 외부로 확산되지 못하고 그저 내면으 로만 잦아들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전술한 여러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허엽 허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 유는, 그들의 사상과 내적 지향이 일가의 문풍(文風)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2. 文藝意識의 覺醒과 天才性의 發顯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小華詩評)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곡 허봉이 9살 때 금전화(金錢花) 라는 시를 지었다. 化工爐上用功多 조물주는 용광로에 많이도 애써 鑄出金錢一㨾花 똑같은 금전화 꽃을 박아 내었지만 半兩五銖徒自貴 반량의 오수전(五銖錢)은 하릴없이 저만 귀하게 여기고 不知還解濟貧家 가난한 집 도와줄 생각은 아니 한다네 아! 단산(丹山)의 새는 태어날 때부터 다섯 빛깔을 갖추고, 악와(渥渦)의 말은 망 아지 때부터 피땀을 흘린다. 이제야 문장에도 하늘이 낸 재주가 있어 배워서 도달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688) 홍만종은 허봉이 9세에 지었다고 알려진 금전화 를 인용하면서 그의 시재(詩 才)가 배워서 되는 경지가 아닌, 천부(天賦) 의 것임을 언급하였는데 이렇듯 허 봉의 남다른 재질은 여러 문헌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허균은 허봉의 연보 를 들이었다. 688) 洪萬宗 著, 안대회 譯註, 小華詩評, 국학자료원, 1995, pp.240~241 荷谷許篈九歲 賦金錢花詩曰 (중략) 噫 丹山之鳥 五色於初生 渥渦之馬汗血於作駒 始知文章自有天才 非 學力所可致也 오수전(五銖錢) 은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주조한 동전으로 여기에서 는 금전화 꽃을 비유해 사용되었다

246 찬하면서 중형이 7세에 글 짓는 법을 터득했고 10세에는 경전과 사서(史書)에 통하였으며, 시문을 짓게 되자 오래 지나지 않아 순숙(純熟)하여 일가를 이루었 다고 전하고 있다.689) 또, 하곡집 에는 금전화 외에도 그가 8세에 지었다는 쌍벽재(雙碧齋), 10세에 지었다는 바둑 두는 것을 보다[觀碁], 11세에 지었 다는 감귤을 전해 받다[傳柑]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그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허봉에 대한 세간의 평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유성룡은 내 친구 미숙(美 叔)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주를 지녔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나는 그가 남 긴 글을 보고 정말로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였다 690)고 술회하고 있고, 신흠의 아 들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본조(本朝)에서는 최경창 백광훈이 비 로소 삼당(三唐)을 제창하였고, 하곡이 일어나서 한 시대를 크게 울렸으니, 시도 (詩道)의 변천이 중국과 더불어 표리가 될 만큼 성했다 고 하며 그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691) 홍만종 역시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하곡 허봉이 가 장 뛰어난 시인이라 칭송하였고,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도 하곡을 절대(絶 代)의 시재(詩才) 라고 말했다. 내가 일찍이 하곡의 길주에서의 추회[吉城秋懷] 를 보았는데, 이 시 한 수를 읽어보면 두 분이 한 말을 믿게 된다 692)고 극찬하 였던 바, 이들을 통해 허봉이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문예의 명성 또한 크게 떨친 사실을 알 수 있다. 689) 許篈, 荷谷集, 年譜, 荷谷先生年譜 公諱篈 字美叔 生於辛亥六月二十五日 七歲 知 屬文十歲 通經史 作爲詩文 已自純熟成家 聦頴絶倫 凡看書 一讀不忘 690) 柳成龍, 西厓集 卷4, 跋, 跋蘭雪軒集 余友許美叔有曠世奇才 不幸早亡 余睹其遺文 未嘗不擊節嘆賞 691) 金世濂, 槎上錄, 題東溟槎上錄(申翊聖 撰), 本朝崔白始倡三唐荷谷起而雄鳴於一時 則詩道之變與中朝相爲表裏者爲盛 692) 洪萬宗, 앞의 책, pp.242~243, 谿谷稱東國詩人中荷谷爲最 霽湖亦言絶代詩才 余嘗見 其吉城秋懷詩 (중략) 讀此一詩 方信二人所言 홍만종이 인용한 吉城秋懷 는 허봉이 무인(戊寅)년 어사로 함경도를 순무(巡撫)할 적에 지은 것으로 전체 5수 가운데 제 5수 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金門蹤跡轉依依 홍문관 시절 기억은 사뭇 아득해져 가는 데, 落盡黃楡尙未歸 느릅나무 다 지도록 돌아가지 못하네, 塞角暗吹仙仗夢 변새의 피 리 소린 아득히 신선의 꿈속으로 불어오고, 嶺雲低濕侍臣衣 고개의 구름은 임금을 모신 신하의 옷깃에 내려와 젖네, 功名誤許麒麟畫 공을 세워 기린각(麒麟閣)에 초상 걸리길 그릇 자신하였는데, 歲月空驚熠燿飛 반딧불에 세월 흐르는 걸 알고 부질없이 놀라네, 憶得去年三署直 그리워라! 지난해 홍문관에서 숙직할 때에, 錦城銀燭夜鍾微 대궐 안 은 촉불 종소리는 밤하늘에 나직이 울리었지

247 허균은 허봉의 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기고 있다. 내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고 온 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 를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만년에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이백의 시(李白 詩) 한 부를 가지고 갔으므로,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천선(天仙) 이백(李 白)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고 단편이고 휘몰아치는 기세를 보였다. 일찍이 이익지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學士)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하였다.693) 위의 글은 허봉이 시를 수학함에 있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애초에 소동파와 황정견 등 송시(宋詩)를 배워 그에 심취하였으나 호당에 녹선된 1573년 무렵부터 학당(學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계미년(1583 년)의 유배를 계기로 당시(唐詩)에 침잠하게 된 것이다. 허균의 동서였던 이수광 또한 허 하곡은 젊어서는 소동파를 배웠는데 뒤에 당음(唐音)과 이백을 즐겨하 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전일의 버릇을 바꾸고자 하였으나 잘 되지 않는다. 고 하였다 694)고 전하여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허봉의 시적(詩的) 전환이 당대 시사(詩史)의 흐름과 밀접히 연 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부분인데, 중종 명종대를 기점으로 나타나 기 시작한 시풍(詩風)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문단에서는 이전까지 송풍(宋風) 일색이었던 시풍이 점차 당풍(唐風)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미 당대 인들 사이에서 소동파(蘇東坡)나 황정견(黃庭堅)을 숭상하던 조선 전기와는 달 리, 당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여러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695)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 데에는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였는데, 국외적 으로는 당시 산문은 반드시 선진(先秦) 양한(兩漢)을 본받고 시는 반드시 성당 (盛唐)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 는 기치를 높이 들고, 까다로운 성 률과 험벽(險僻)한 수사(修辭)를 추구한 강서시풍(江西詩風)의 구속에서 벗어날 693) 許筠, 앞의 책, 卷 26, 鶴山樵談 仲氏詩初學東坡 故典實穩熟 及選湖堂熟讀唐詩品彙 詩始淸健 晩年謫甲山 持李白詩一部 以自隨故謫還之詩 深得天仙之語 長篇短 駕氣勢 李 益之嘗曰 讀美叔學士詩 若見空中散花 694) 李晬光, 芝峯類說 卷14, 文章部7, 詩藝 許荷谷少學東坡 後喜唐音李白 自言欲變前 習而未能 695) 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 2, 돌베개, 2003, p

248 것을 주창했던 명(明) 전후칠자(前後七子)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한, 국내 적으로는 사화와 당쟁을 거치며 왕조 초기의 안정과 질서가 와해되자,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도학적인 송시보다는 진솔한 인간 감정의 표현에 힘쓴 당시가 독자 들의 정서에 더 큰 설득력을 지니게 것이696) 큰 이유로 작용하였다. 허균이 당시 조선의 시풍에 관해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 견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 김종직)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 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도 마침내는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이나 만들 따름이어서 읽으면 염증 이 날 정도이니,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697) 라고 비판 했던 것은 시단의 주된 흐름이 당시풍으로 바뀌어 가던 당대 문단의 정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같은 변화로 인해 조선의 문단은 문학의 본연성을 찾는 일에 새로이 눈 뜨 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곧, 조선 전기의 인위적이며 사회교화적인 시작(詩作) 으로부터 본원적이며 개방적인 조화의 원리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문학 영역으로 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698) 즉, 전대에 활동한 노수신 황정욱 정사룡 등이 시어의 안배, 전고(典故)의 구사, 시상(詩想)의 치밀한 조직과 같은 시의 형식미와 기골(氣骨)을 중시하는 송시풍의 시를 창작한 데 비하여, 최경창 백 광훈 이달로 대표되는 삼당파 시인들은 조선시대 한시의 흐름을 당시풍으로 바 꾸어 인간의 낭만적 감정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고 이를 통해 이후 시단의 주류를 열었던 것이다.699) 앞서 살펴보았듯 허봉은 사가독서 시절인 1573년, 명(明)나라의 고병(高棅)이 엮은 당시품휘 를 접함으로써 시적 각성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가 이듬해 저 술한 조천기 에서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나700) 명나라 사 696) 정민, 穆陵文壇과 石洲 權韠, 태학사, 1999, pp.29~30 참조 697) 許筠, 惺所覆瓿藁 卷26, 附錄1, 鶴山樵談 本朝詩學以蘇黃爲主雖景濂大儒 亦墮 其窠臼 其餘鳴于世者 率㗶其糟粕 以遂腐牌坊語 讀之可 盛唐之音 汦汦無聞 69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8, 한길사, 1994, p )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소명출판, 1999, p.16 참조 700) 그 몇 개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許篈, 朝天記, 1574년 5월 16일(己丑) 條, 평명(平明)에 운거사(雲居寺)를 떠나서 흥 의역(興義驛)으로 향하였는데 산은 높고 골짜기는 그윽하였으며 잡나무가 울창하게 가려 있고 한 물줄기가 구불구불하여 여러 차례 건너야 하였다. 두자미(杜子美)가 이른바 산 으로 올라가며 한 시냇물을 가자니 곡절을 거듭하여 여러 번 건넜다. 고 한 것이 그

249 람 왕지부에게 예물로 받은 두율초(杜律抄) 를701) 8년 동안이나 보물처럼 간직 하다 마침내 누이 난설헌에게 건넸던 사실 또한, 허봉이 이 무렵을 기점으로 당시 (唐詩)에 급격히 경도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명나라에 다녀 온 이후, 허봉이 많은 시인들과 교유한 사실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두루 확인되는데, 그들 중 허봉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손곡(蓀谷) 이 달(李達)을 들 수 있다. 허봉이 언제부터 이달과 교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홍만종의 소화시평 에 허균과 이달이 처음 만났던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고,702) 허 균 또한 1582년에 중형과 함께 이달을 만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703) 이미 그 이전 것이었다. (平明發雲居 指興義驛 山高谷邃 雜樹掩翳 一水回復而涉者十餘曲 信乎子美所謂 山行一溪水 曲折方屢渡者也) 1574년 5월 29일(임인) 條, 납량정의 옛 이름은 군자당(君子堂)이었는데, 편수(編修) 한 세능(韓世能)이 고치고 전액(篆額)을 썼으니, 대개 두시(杜詩)의 연꽃은 서늘한 바람 불 때에 맑네 荷淨納涼時 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었다. (亭舊名君子堂 韓編修世能改之而篆額 蓋取杜詩荷淨納涼時之義也) 1574년 6월 19일(壬戌) 條, 밤에는 중국사람 이총(李聰)의 누이가 이 근처 3리쯤 되는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이총이 온다는 말을 듣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내가 거처하는 옆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총과 헤어졌는데 서로 살아 있었는지 죽었는 지를 모른 지가 벌써 18년이었다고 한다. 두자미(杜子美)의 밤이 깊어 다시 촛불을 켜 고 夜闌更秉燭, 마주 앉으매 꿈과 같아라 相對如夢寐 라고 한 것이 바로 이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夜 唐人李聰妹居于近地三里許 聞聰來 持酒肉以慰 就余所寓之側談話 與聰別去 不知存沒者 今已十八年云 子美曰 夜闌更秉燭 相對如夢寐 正與此合) 1574년 9월 13일(甲申)條, 대란하(大灤河)에 이르니, 초생달이 갓나오고 원근의 연무 (煙霧)가 때때로 보이는데 영평성의 누각은 숲 사이에 은은하였으니, 번천자(樊川子)의 이른바, 연기는 찬 물에 얽혀 있고, 달은 모래 위에 얽혔다[煙籠寒水月籠沙] 고 한 것의 진짜 경지와 의미를 이제야 보게 된 것이었다. (樊川子所謂煙籠寒水月籠沙者 於今乃見其 眞境界眞意味也) 701) 許篈, 위의 책, 1574년 8월 3일(甲辰) 條, 아침에는 왕지부가 나와 조여식에게 예물 로 두율초(杜律抄) 1부와 피금(皮金) 3장을 보냈으므로 우리들은 갓모[笠帽] 두 벌과 유선(油扇) 열 자루와 붓 두 자루와 먹 두 장을 답례로 보냈다. (王之符送禮物于余與汝 式 杜律鈔一部 皮金三張 余等報之以笠帽二事 油扇十把 筆二管 墨二丁) 702) 洪萬宗, 앞의 책, 손곡 이달은 젊어서 하곡과 잘 지냈다. 하루는 손곡이 찾아 왔는데 허균 또한 와 있으면서도 손곡을 곁눈질하며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태연히 시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곡이 말하기를 시인이 이 자리에 계신데 너는 일찍이 듣지 못했느냐? 하고 시를 청하여 운을 부르니 이달이 이에 응하여 절구 하나를 지어 주었다. 그 마지 막 구에 작은 뜰에 매화가 지니 춘심(春心)은 살구꽃 가지 위로 옮겨 가네 라고 하니 허균이 낯빛을 고치고 놀라 사과하며 시우(詩友)를 맺었다. (蓀谷李達 少與荷谷相喜 一 日往訪焉 許筠適又來到 睥睨蓀谷 若無禮客 談詩自若 荷谷曰 詩人在座 聊君曾不聞知也 請爲詩之 則呼韻 達應口而賦一絶 其落句云 小苑寒梅零落盡 春心移上杏花枝 均改容驚謝 結爲詩伴) 703) 許筠, 앞의 책, 卷4, 文部1, 序, 淸溪集序 내가 아직 젊을 때인 임오년(壬午年)에

250 부터 둘 사이의 교유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허봉과 이달이 교유한 시기가 1579년을 전후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이 무렵 이달이 오랜 유랑 생활을 끝내고 한양으로 상경, 박순의 후원 아래 시작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최경창 이달 백광훈 세 사람은 백광훈이 참봉으로 지내던 정릉(靖陵)과 봉은사(奉恩寺) 일대에 자주 모여 시를 짓고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당풍(唐風)의 시를 지었으므로 문단에서 삼당시인 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704) 1578년, 28세의 허봉은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의 직을 제수 받아 변방으로 떠 나게 되는데 그가 이 시기, 임제 최경창 등과 경흥의 압호정(慶興狎胡亭)에서 만나 시를 주고받은 사실이 허균의 학산초담 을 통해 드러난다.705) 허봉의 문집인 하곡 돌아가신 형님 하곡 선생을 모시고 앉았는데, 마침 손곡(蓀谷) 이익지(李益之)가 용성 창수집(龍城唱酬集) 이라는 책 한 질을 소매 속에 넣고 와서 묻기를, 제가 연전에 남원 (南原)에 갔을 때 백창경(白彰卿 : 백광훈)ㆍ임자순(林子順 : 임제)ㆍ양사진(梁士眞 : 양 대박)과 함께 기거하였는데 이 집(集)은 바로 그때에 창화한 시들입니다. 네 사람의 작 품이 누가 높고 낮은지요? 하니 선생은 소리 내어 읊조리다가 한참 만에, 다른 시들도 모두 맑고 산뜻하나 좋게 하기에만 힘을 써 말이 좀 미끄러지니 아무래도 원전(圓轉)하 고 순숙(純熟)한 양(梁)의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손곡은 깊이 그렇다고 여겼다. (不佞往在壬午歲 尙少矣 從亡兄荷谷先生坐 適蓀谷李益之袖所謂龍城唱酬集者一帙 來質曰 達頃歲客帶方 與白彰卿,林自順,梁士眞同遊處 是集乃其時賡唱之什也 四人之作 孰 爲高爲下耶 先生吟諷久之曰 諸詩俱淸新 但務勝而詞礩 終不若梁之圓轉純熟也 蓀谷深以爲 然) 이달은 1578년 봄, 임제 백광훈 양대박 등과 더불어 남원의 광한루에서 시를 수창 했는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582년경에야 수창시들을 모아 가집(歌集)을 엮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704) 허경진, 손곡 이달의 생애, 허경진 編, 蓀谷 李達 硏究, 원주시, 2006, p.19 참조 이후 이달의 생애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이 논문을 참고해 작성했음을 밝혀 둔다. 705) 중형의 경흥압호정(慶興狎胡亭)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 보니 塞國悲寒望, 인가의 연기는 귀방과 접하였구나 人煙接鬼方,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山圍孤障外,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네 水入毁陵傍, 초가집에 해 바뀌도 록 병들었는데 白屋經年病,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靑苗半夜霜, 이곳에 오르니 너무도 서글퍼 登臨最蕭瑟,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衰鬢葉俱黃 임자순(林子順)이 크게 칭찬하며 그 운자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질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 글자의 사기(史記)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사실(史實)의 기록임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金城客館)에 옛사람이 추(秋) 자로 압운하고 판각하여 못을 박아 걸어 놓았 는데, 최고죽(崔孤竹)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 고을에서 나는데 殘角生古 縣, 깊은 강물은 어둠 속 급히도 흐르네 沈河急暝流, 어스레한 등불 아래엔 초객(楚客) 의 꿈이요 疏燈楚客夢, 한밤중엔 중선의 누각이로네 半夜仲宣樓, 찬 비 비록 개었으나 寒雨雖逢霽,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歸心更値秋 라고 했다. 중씨가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 리 길 가매 行人萬里去, 말 멈추고 차가운 물을 먹이

251 집 에도 금성의 객관에서 고죽의 시에 차운하다(金城客館 次孤竹韻) 라는 제하(題 下)의 시가 남아 있으며 고죽유고 에도 최경창의 金城板上韻 이 실려 있음과 동 시에 허봉의 차운시 또한 追次荷谷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실려 있어 북방을 순회 하던 허봉이 최경창을 만났던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당시 최경창은 관기(官妓) 홍랑(洪娘)과의 염문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 었다가706) 1577년, 대동도(大同道) 찰방(察訪)707)에 임명되어 북방에 머물러 있던 중이었는데, 이때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직을 둘러싸고 갈등을 보이다가 종 국에는 동서의 분당(分黨)에 이르게 된 즈음이었다. 최경창은 당쟁의 중심인물은 아 니었지만 당대 서인의 막후 실력자인 송익필(宋翼弼)과의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동인 과 서인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홍랑의 일은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08) 네 駐馬飮寒流, 큰 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芳草遍官道, 저녁연기 역루에서 피어 오르네 晩煙生驛樓,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旅懷渾似夢,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 구나 春事半如秋 라고 했다. 고죽이 보고, 봄 시를 가을 추(秋)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이 글귀는 옛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고 하였다. 706) 宣祖實錄 卷10, 9年(1576 丙子) 5月 2日(甲午)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적 최경창 (崔慶昌)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너 무 사랑한 나머지 불시(不時)에 데리고 와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심히 기탄없는 짓이 라 할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司憲府啓 典籍崔 慶昌 以有識文官 持身不謹 酷愛北方官婢 非時率來 偃然家畜 其無忌憚甚矣 請命罷職 答 曰 依啓) 707) 대동(大同) 은 조선시대 평안도 평양에 있던 역(驛)의 이름으로 여기서부터 의주(義 州)의 의순(義順)역까지 모두 11개의 역이 딸려 있었는데 이 역로(驛路)를 대동도(大同 道)라고 칭하였다. 또 찰방(察訪) 은 조선시대 각 도(道)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 관직(外官職)을 이르는 말이다. 708) 이에 관해서는 다음 실록 의 기록을 참고할 만하다. 宣祖修訂實錄 卷13, 12年(1579 己卯) 6月 1日(乙亥) 유성룡이 아뢰기를, 최경창은 사람됨이 검속(檢束)이 없어 국휼을 당했을 때에 창기를 첩으로 삼았으므로 당시에 대간 이 논핵했습니다. 그런데 서인들은 그와 지우(知友) 간이기 때문에 비호하여 대간들을 일시에 모두 함경도사(咸鏡都事)로 의망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분하고 억울하게 여 겼습니다. 하였다. 최경창은 재능이 있는 시인으로서 대개 낮은 관직을 전전하며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있었는데 비변사가 천거하여 종성 부사(鐘城府使)로 삼았다. 종성은 수자리를 사는 지역 이었으나 자급을 올렸다는 이유로 양사가 함께 일어나 논박하여 개정하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평소부터 최경창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릇 3개월이나 논핵했어도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종성진(鐘城鎭)에 부임하고 나서도 다른 일을 가지고 논계하여 마침내 자급이 깎이고 파직 당하였다. 최경창은 본래 당인(黨人)으로 지목된 인물이 아 니었으나 그 당시 비비변사의 당상(堂上)에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박이 특히 준절했던 것이다. (成龍曰 崔慶昌爲人無檢束 當國恤時 畜娼妓爲妾 當時臺諫論之

252 그런데 최경창의 문집인 고죽유고(孤竹遺稿) 에 그와 허봉의 관계를 시사하는 기 록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이때에 이르러 허봉이 요직(要職)에 있었는데 그 논의가 자못 편벽되었다. 그러 나 공(公)의 문재(文才)를 사랑하여 연이어 열흘이나 찾아왔다. 공은 그를 싫어하 여 단 한 번도 얼굴빛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허봉이 매우 노하여 누차 홍문관 전랑 선발에서 그를 제외시키고 마침내는 외직으로 내보냈다.709) 최경창이 전랑 선발에서 누락됨과 동시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 것은 1576년의 일인데 이 해, 허봉이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했다는 기록710)이 있 는 것으로 보아 위의 기록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이 글의 찬자(撰者)인 박세채(朴世采)가 소론(少論)의 영수로 서인의 계보를 잇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쟁이 심했던 당대의 상황에서 상대 당파에 속한 인물을 폄훼하는 일은 낯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 에서 볼 때, 허봉과 최경창이 당파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던 듯하나, 최경창이 허봉을 혐오해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주 장에는 다소의 과장이 있다고 판단된다. 허봉이 순무어사 시절, 최경창을 만나 함께 시를 수창하고 금성의 객관에 머물렀던 사실은 그들의 갈등이 사적인 관계 에서 촉발된 것이 아닌,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임제 역시 1579년 고산도(高山道)711) 찰방이 되어 북관(北關)에 나가 있었는 데, 이때 양사언 허봉 차천로와 더불어 함경도 안변(安邊)의 가학루(駕鶴樓) 에 올라 시를 수창하고 시집을 엮은 사실이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712) 이로부터 西人等以其知友而庇之 臺諫一時竝擬咸鏡都事 人心皆憤鬱矣 崔慶昌 詩人之有才者 沈滯常 調 爲大同察訪 備邊司薦爲鍾城府使 鍾城戍役之地 而臺諫以陞級故 兩司俱發 論請改正 上 素知其才 故論劾凡三朔 終不允 旣赴鎭 又據他事論啓 竟削資罷職 慶昌本非黨目中人物 而其時備局堂上 多先輩, 故論駁特峻) 709) 崔慶昌, 孤竹遺稿, 敍, 孤竹詩集後叙(朴世采 撰) 至是 許篈在要地 持論頗僻 然悅 公文才 連一旬來候 公深惡之 未嘗有假貸色 許怒甚 累泥瀛館銓郞之選 仍黜補外郡 710) 許篈, 앞의 책, 年譜(許筠 撰) 丙子 除副校理 遷司憲府持平 轉校理 711) 고산도(高山道) 는 조선시대 함경도 안변(安邊)의 고산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로 서 안변 덕원(德源)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정평(定平) 함흥으로 이어지 는 역로(驛路)를 관할하였으며, 모두 13개의 역을 경유하였다. 712) 許穆, 記言 卷45, 外家墓文遺, 林正郞墓碣文 嘗以高山道察訪 出北關 與楊使君 許

253 시작된 허봉과 임제의 교유는 평생 동안 지속된 듯하며,713) 그들의 관계 또한 상당히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제의 묘갈명 에 남아 있는 다음 허목(許穆)의 언급으로써 그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선비들은 모두 공(公)(의 행동)이 법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오직 문사 (文詞)만을 취하였는데, 찬성(贊成) 이이와 학사 허봉, 사군(使君) 양사언 등 몇 사 람만이 그 기이함을 용납해 주었다.714) 위의 인용문은 허봉과 임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당시 임제는 그 행동의 기이함으로 인해 세상에 용납되지 못했는데도 허봉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세간의 비난에서 그를 감싸 주었다는 것인데, 윗글의 찬자(撰 者)인 허목의 모친이 임제의 딸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내용을 의심할 여 지는 없다고 판단된다. 이에 더하여, 허균이 성수시화 에 임자순(林子順)은 시로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朔雪)은 변방 길 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 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715)고 전하고 있는 것은 임제에 대한 허봉과 그 형제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달은 최경창 임제와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716) 이 달과 최경창은 1577년 이전부터 서로 간의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임제 와는 훨씬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717) 學士 車太常天輅 同登駕鶴樓 有酬唱作一卷 713) 임제는 158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허봉 또한 그로부터 1년 뒤인 1588년에 금화역 인근에서 객사(客死)하였다. 714) 許穆, 앞의 책, 林正郞墓碣文 當時之士 皆視公於法度之外 其所取者 文詞而已 李贊 成珥 許學士篈 楊使君士彥數人 許其奇氣云 715) 許筠, 앞의 책, 卷25, 說部4, 惺叟詩話, 林悌有詩名 林子順有詩名 吾二兄嘗推許之 其朔雪龍荒道一章 可肩盛唐云 嘗言往一寺有僧軸 題詩曰 竊食東華舊學官 盆山雖好可盤桓 十年夢繞毗盧頂 一枕松風夜夜寒 詞甚脫洒 沒其名號 不知爲何人作也 固有遺才 而人未識 者 716) 허경진, 손곡 이달의 생애, 허경진 編, 蓀谷 李達 硏究, 원주시, 2006, p.17 참조 717) 허경진은 위의 논문에서 최경창이 1576년에 영광군수로 부임하자 1577년, 이달이 영광에 들러 상당 기간 최경창의 도움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보다 앞선 1572년에 그가 호남을 유람한 일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몇몇 연구자들 은 1572년 당시 임제가 고향 나주(羅州)에 머무르고 있던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때 이

254 또 이달은 허봉의 부친 허엽과 동년 급제자였던 강릉부사 양사언을 따라 노닐 며 시를 지었고, 양사언이 1568년 회양부사로 전임하자 그를 따라 갔다. 이달은 양사언 차식과 함께 금강산 구경을 할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과시했는데, 한때 허엽은 이달로 인해 양사언의 평판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라 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718) 허균이 이달의 사사로운 이야기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허엽과 양사언의 남다른 친분이 큰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719) 이를 고려할 때 허봉과 그 형제들이 이달의 존재를 진작부터 알았을 가 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판단된다. 또, 허봉이 훗날 자신보다 12세나 연상인 이달 과 흉금을 터놓고 교유하게 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 된다. 이렇듯 허봉은 당시(唐詩)로 노선을 바꾼 1570년대 중반 이후, 이달 임제 최경창 등의 시인들과 꾸준히 교제하면서 그 시적 세계의 확장에 골몰했는데, 천 부적인 재능에 그 같은 노력이 더해짐으로써 허봉은 결국 한 시대를 풍미하는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720) 허봉이 아우인 허균에게 늘상 시를 달과 임제가 만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18) 許筠, 앞의 책, 卷26, 附錄1, 鶴山樵談 이익지(李益之)는 젊어서 화류계에 출입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부 모도 잘 모시지 않고 부인에게도 예를 갖추지 못한다 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楊 蓬萊)가 강릉 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를 빈사(賓師)의 예로 대우하자, 그를 시샘하는 이 들이 선대부에게 무근한 말을 하니 선대부께서 편지를 보내 익지를 사절토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 구름 속에 사라 졌네[桐花夜雨落海樹春雲空]라는 시를 지은 이달을 만약 소홀하게 대접한다면 진왕(陳 王)이 응소(應劭)와 유정(劉楨)을 처음 잃어버린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그 후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익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며 떠나려 했다. 行子去留際 나그네가 길 떠나고 머무는 것은, 主人眉睫間 집주인의 얼굴빛에 달려 있 는, 今朝失黃氣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어졌으니, 舊宇憶靑山 우리 집 푸른 산이 그리 워지네, 魯國爰居饗 노나라에선 원거를 대접하였고, 南征薏苡還 남정(南征)에서 마원 은 율무를 가져 왔었네, 秋風蘇季子 가을바람 부니 떠돌이 소진은, 又出穆陵關 또 나 서노라, 목릉의 관문을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719) 허경진, 손곡 이달의 생애, p.15 참조 720)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 1814~1888)은 우리나라 시인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조선의 시인은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뒤로는 김종직(金宗直), 김시 습(金時習), 성간(成侃), 이주(李胄), 박은(朴誾), 이행(李荇), 신광한(申光漢), 정사룡(鄭 士龍), 기준(奇遵), 박상(朴祥), 임억령(林億齡), 임형수(林亨秀), 박순(朴淳), 노수신(盧 守愼), 황정욱(黃廷彧), 고경명(高敬命),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차천로(車天輅), 이안눌(李安訥), 권필(權韠), 최립(崔岦), 임제(林悌), 임전(任錪), 이춘 영(李春英), 이수광(李睟光), 허봉(許篈), 이춘원(李春元), 이식(李植), 이민구(李敏求),

255 배울 때는 먼저 당음(唐音) 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李白)의 시를 읽되, 소동파 (蘇東坡)ㆍ두목(杜牧)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 721)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나 내가 평생에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익히 읽은 탓으로 문장이 높 지 못하다. 722)고 한탄했던 일 등은 그 시적 지향이 성당(盛唐)의 풍격을 획득하 는 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시를 가리켜 당인(唐人)에 못지않다 723)는 평가를 내렸던 일이나 선조에게 작구법(作句法)은 의당 이래야 한다 724)는 칭찬을 들었던 것 역시 허봉의 시적 경지가 상당한 수 준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당대 문단을 풍미한 당시(唐詩)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악부시(樂府詩) 의 유 행을 들 수 있는데, 그 무렵의 여러 시인들 중 악부의 정신과 형식을 집중적으 로 운용한 대표적 인물로는 이백(李白) 을 꼽을 수 있다. 그의 문집 가운데 악부 시는 140여 편을 차지하며, 그 나머지도 약간의 율시와 고시(古詩)를 제외하고 는 모두 악부의 변형이라 할 만하다. 허봉의 시들 가운데에도 당대(唐代)에 유행 하던 악부시의 형식을 빌어 창작한 작품들이 발견되는데,725) 그가 갑산으로 유 배 갈 때 이백(李白)의 시집 한 부를 지니고 가 항상 읽었다는 허균의 언급을 정두경(鄭斗卿)이 있다. 721) 許筠, 앞의 책, 鶴山樵談 722) 許筠, 앞의 책, 위의 글 723) 許筠, 앞의 책, 위의 글, 나의 중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斗柄垂寒野 쓸쓸 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灘沙閣敗船 부서진 배는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이것 을 소재(蘇齋)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인(唐人)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724) 許筠, 앞의 책, 惺翁識小錄 下, 先王天藻煥發而獨賞亡兄之詩 선왕(先王 : 宣祖)은 문 장에 능하여 여러 임금 중에 뛰어났으므로 신하들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었는데 유독 나 의 망형(亡兄)의 시를 칭찬하였다. 북방에 사명을 띠고 갔다가 돌아와서 삭계(朔啓)하는 가운데 거산역(居山驛)에서 지은 시가 있었다. 끝의 연구(聯句)에 千年折戟沈沙短 천 년 전 부러진 창은 모래에 묻혀 있고, 十里平蕪過雨腥 평평한 넓은 벌엔 비가 오자 비릿 하네 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상께서 직접 비점(批點)을 쳐서 내렸다. (先王天藻煥發 高 出列聖 有非臣僚所可企及者 獨賞亡兄之詩 奉使北方回也 朔啓有居山驛詩下聯千年折戟沈 沙短 十里平蕪過雨腥 上手自批點而出 壬寅顧崔之來月沙引對 請遞余海運判官 上問曰 與 其兄某 才孰上下 蓋晩年亦未嘗忘也) 許筠, 앞의 책, 鶴山樵談 내 중형의 거산역(居山驛) 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중략) 삭계례(朔啓例)에 따라 그 시가 대궐에 들어갔는데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했으며, 오 륙구(五六句)에 이르러서는 작구법(作句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디. 725) 허봉의 후기 시에서 새하곡(塞下曲) 6수와 나홍곡(羅嗊曲) 등의 명칭으로 창작된 작품들이 발견되고 있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아쉬운 것은 허봉이 유배에서 풀려나 유랑하던 시기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시의 난숙한 경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256 생각할 때, 허봉 시에 드러나는 당풍적 요소는 이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726) 흥미로운 것은 허봉의 시에서 난설헌과 마찬가지로 선계 지향적인 성격이 발 견된다는 점이다. 다음의 시들은 그 같은 허봉 시의 특질을 잘 보여 준다. 응선사에게 주다[贈凝上人] 淸平沙彌最嗔客 청평사 사미승이 객을 심히 꾸짖듯 寒宵催打二更鍾 한밤 중 이경(二更)을 알리는 종 화급히도 치는구나 是時道人醉不起 이때에도 도인은 술에 취해 일어나지 않는데 綠蘿月照芙蓉峯 푸른 담쟁이에 걸린 달은 부용봉을 비추네 芙蓉峯下凝禪師 부용봉 아래 응선사(凝禪師)가 擧手招我騎黃鶴 손들어 황학(黃鶴)을 타라 날 부르네 一擧超忽凌三山 한 번에 삼신산을 넘어가고 再擧翺翔過五岳 두 번째엔 오악(五嶽)을 빙빙 돌며 날아가네 五岳三山咫尺間 오악 삼신의 지척에 이르니 人人喚我爲神仙 사람들이 나를 신선이라 부르네 歸來逍遙逍遙㙜 다시 돌아와 소요대(소요대)를 거니는데 正是芙蓉蘿月天 마침 담쟁이의 달이 부용봉을 비춘다네 道人欲結紫霞想 도인은 다시 신선의 꿈에 부풀었는데 禪師猶戀靑蓮宇 선사는 오히려 불사(佛舍) 연연하는구나 禪師爲訪道人來 선사가 도인을 방문하니 道人棲在三花樹 도인은 삼화수(三花樹)에 살고 있다네727) 허봉은 이 시에서 황학(黃鶴), 삼산(三山), 오악(五嶽) 등 도가의 용어를 사용하여 선계에 대한 강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10구의 사람들이 나를 신선이라 부르네(人人喚我爲神仙) 라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신을 신선으 로 치환(置換)시켜 선계를 표현하였는데 특히 5구~10구에서는 황학을 통해 삼산 과 오악을 날아다니는 정경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로 돌 아 온 이후에도 여전히 신선의 꿈에 부풀어 있다(道人欲結紫霞想) 고 고백하고 726) 오현주, 荷谷 許篈 詩 硏究,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p.26 참 조 727) 許篈, 荷谷集, 荷谷先生詩鈔, 詩, 贈凝上人

257 있어 선계에 대한 지향을 거두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728) 각(覺) 스님을 보내며[送覺上人] (전략) 蓬萊微茫白銀闕 아득한 봉래산의 백은궐(白銀闕)이여! 弱水浮天不可過 하늘에 뜬 약수(弱水)는 지나갈 수 없다네 (중략) 歸兮歸兮且安坐 돌아가세 돌아가세 또 편히 쉬어 보세 玉京群帝驂赤螭 옥경(玉京)의 뭇제왕들 붉은 용을 타고 있네 三千年遲爾來隨我 삼천 년 세월 더디니 그대 나를 따라 오게나729) 이 시에서 시인은 선계에 대한 낭만적 환상에 빠져 있으나, 시의 청자는 신선 세계로 가는 길인 약수(弱水)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길이라 하여 시인의 상 상을 깨드린다. 그러자 시인은 오히려, 불교로써 교화된 세계에 이르는 데는 삼 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므로, 자신을 따라 인간의 고통과 번뇌가 없는 선계 로 갈 것을 적극 권유하고 있다.730) 허봉이 이렇듯 신선 세계를 상상하고 동경한 데에는 당시풍으로 경도되었던 당대의 문학적 분위기 외에도 그 자신의 낭만적 성격과 기질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배 이후 계속되었던 현실의 갈등과 고뇌가 그의 선계 지향을 더욱 촉진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731) 또한 위와 같은 허봉 의 시들은 난설헌의 유선시(遊仙詩) 류(類)의 작품들과 상호 연관된 것으로서, 이는 허봉과 난설헌이 서로 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라 생각된다. 이렇듯 허봉은 타고난 시재(詩才)를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어울리며 그 시적 능력을 계발해 나갔다. 그는 한 세상에 안중(眼中)에 찬 인물이 없었 다 732)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타인의 재주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으나 일단 상대의 728) 拙稿, 악록 허성의 한시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p ) 許篈, 위의 책, 荷谷先生詩鈔, 詩, 送覺上人 730) 오현주, 앞의 논문, p ) 손회문, 荷谷 許篈의 漢詩 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2, p.57 참조 732) 許筠, 앞의 책, 卷4, 文部1, 序, 淸溪集序 荷谷 眼空一世也而亟稱之

258 재주를 인정하게 되면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함께 어울려 서로 간에 도움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허봉의 이 같은 문예적 취향은 가정 내에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재능 및 기질, 교유 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보여, 그가 아우들인 난설헌과 허균의 문학에 그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허봉은 시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문장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 는데, 허균의 다음 글에 그 대략이 드러난다. 우리 중형의 만년(晩年) 무렵 글은 유자후(柳子厚 : 柳宗元)와 너무나 똑같아서 주한정기(晝寒亭記) ㆍ 축려문(逐癘文) 등 작품은 가히 대씨당(戴氏堂) ㆍ 축 필방(逐畢方) 등의 글과 서로 엇비슷하다. 최입지(崔岦之)가 (중형의) 화기(畫記) 에 대해 이르기를 철로보지(鐵鑪步志) 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장기는 무엇보다도 비명(碑銘) 과 묘지(墓誌) 에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이를 모르고, 보 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양웅(揚雄)이 나타나 알아 줄 것이다.733) 위에 언급된 유종원(柳宗元)은 한유(韓愈)가 제창한 고문(古文) 운동을 적극적 으로 지지하고 그 운동에 가담하여 이를 주도해 나갔을 뿐 아니라, 일군의 고문 작가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고 양성하였다. 그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산문을 창작 하여, 당대 고문 운동에서 한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심 지어 사상의 깊이와 예술의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한유의 문학적 성취를 훨 씬 뛰어넘은 점도 없지 않다.734) 허균이 그런 유종원의 글과 허봉의 글을 대등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허 봉의 문장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물론 허균이 그 형을 높이기 위해 다소 과장한 점이 없지는 않겠으나 저작에 드러난 허균의 기록 행태(行態)를 감안할 때 전혀 근거가 없는 허언(虛 言)은 아니라 생각된다. 허균은 특히 허봉의 화기(畫記) 를 높이 평가한 최립의 말을 인용하면서, 허봉이 시로써 명성을 얻은 탓에 문장에는 별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허봉은 해동야언 조천기 외에도 북변기사(北邊記事), 하곡수 어(荷谷粹語), 의례산주(儀禮删註), 이산잡술(夷山雜述) 독역관견(讀易管 733) 許筠, 앞의 책, 鶴山樵談 734) 이경화 外, 중국산문간사, 계명대 출판부, 2007, p

259 見) 등 여러 저서들을 남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735)736) 허균 역시 (형님이) 평생 지었던 글이 아주 많았다 737)고 증언하고 있어, 그의 문학적 관심이 단지 시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허봉의 문예에 대한 관심은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생겨나게 된 것 일까? 앞에서도 언급했듯, 그의 부친 허엽은 문예보다 경학을 중시하였으며 세 살 위의 형 허성도 선친의 뒤를 이어 이학(理學) 을 표방한 인물이었다. 그런 반 면, 허봉은 8세에 지은 시가 문집에 실려 있을 정도로 시작(詩作)에 일찌감치 재 능을 드러낸 바 있다. 동년배인 허성 허봉 형제가 이렇듯 다른 성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필자는 두 사람이 이복(異腹)이라는 점 에 착안, 외가(外家)쪽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허성의 모친은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의 다섯째 딸로서, 한숙창 의 묘갈명 에 사위 허엽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사망한 1537년 이전 에 허엽과 혼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숙창은 20세에 음사(蔭仕)로 출사하였으며 1506년 8월, 외삼촌인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을 따라 중종반정에 동참 한 공으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에 녹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으며 29세 의 젊은 나이에 호조참의에 임명되는 등 화려한 정치적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또한, 한숙창의 증조부는 성종(成宗)의 외조부이자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수 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한확 (韓確)으로서, 이 같은 사실을 통해 허성의 외가가 누대에 걸친 공신 집안이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한씨 가문이 벌열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문예에 있어 별다 른 명성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한확의 경우에는 어려서 735)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북변기사(北邊記事) 는 허봉이 순무어사 시절, 혹은 갑 산(甲山)에 유배 되어 있던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의례산주(儀禮删註) 는 의례(儀禮) 의 내용을 뽑아 주석(註釋)한 책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산잡술(夷山雜述) 의 경우에는 이산 이 허봉의 유배지였던 갑산 의 이칭(異稱)임을 감안할 때 유배지에서 의 여러 일들과 소회(所懷)를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크며, 독역관견(讀易管見) 은 주 역 을 읽고 자신의 소견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하곡수어(荷谷粹語) 의 경우에는 내 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736) 許篈, 荷谷集, 荷谷先生年譜 所著有朝天錄 北邊記事 荷谷粹語 儀禮删註 夷山雜述 讀易管見等書 詩文因兵 燹㪚失 只有遺稿若干篇 이 중 해동야언 과 조천기 만이 현 전하며 나머지 저술들은 병화(兵禍)로 인하여 모두 산실(散失)되었다. 737) 許篈, 위의 책, 荷谷先生詩鈔補遺, 跋, 荷谷先生詩鈔補遺跋(許筠 撰) 平生論述甚富 而失於兵燹

260 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 을 익혀 모든 서체에 뛰어났으며,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書風)을 모방하 던 풍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石峯)류의 호쾌 강건한 서 풍을 창시했다 738)고 전해지는데, 허성 또한 글씨에 뛰어나다는739) 평을 들었던 것은 아마도 외가의 전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반면, 한확의 아들인 한치의(韓致義)의 졸기(卒記)에 비록 학술은 없었으나 통민(通敏)하여 기품과 재간이 있었다 740)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나 허성의 외 조부인 한숙창의 묘갈명 에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벼슬길에 나갔으므로 학업에 대하여 심오한 경지까지는 전공(專攻)하지 않았다 741)는 언급 이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이들 집안의 가정적 전통이 학문보다는 경세(經世)에 치중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허성은 어려서 모친을 잃었으나 외가와는 꾸준한 왕래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 의 현실적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은 외가쪽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 다.742) 반면 학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부친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경사(經史)를 중시하고, 문예의 방면에는 공력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엽의 후취(後娶)인 김씨 부인은 예조판서를 지낸 강릉 김씨 김광철의 딸이 다. 김광철이나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저 몇 가지 사실로서 그의 성격이나 기질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허균이 일찍이 우리 집 안에서는 내 모습이 외조모를 닮았다 했으므로 나는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하였 다 743)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 허균과 그 동복(同腹) 형제들은 여러 면에서 외탁 (外託)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이들의 외조부 김광철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명석하였고, 허균이 외조부로부터 송(宋)나라 시인 진사도 738) 淸州韓氏 濟州門中會 刊, 淸州 韓氏의 淵源과 歷史, 1984, p ) 이이화, 허균, 한길사, 1997, p ) 成宗實錄 卷33, 4年(1473 癸巳) 8月 14日(癸酉) 致義雖無學術 通敏有器幹 741) 淸州韓氏中央宗親會, 淸州韓氏 國朝人物錄 上, 2000, p.257 少好學以早筮仕 不得究 其業 742) 허성의 이러한 측면은 부친과는 선명히 대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친 직언 과 자기 소신에 충실한 행동으로 환로(宦路)에 어려움을 겪었던 허엽에 비해 허성은 원 칙을 중시하면서도 능란한 처신을 보임으로써 선조(宣祖)의 고명칠신(顧命七臣) 중 하 나가 되었고,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743) 許筠, 앞의 책, 卷7, 文部4, 記, 修證寺楊侍中夫婦畫像記 蓋筠一家 亦以筠貌爲類外 王母 故筠尤異之

261 (陳師道)의 후산시(后山詩 6권을 물려받은 일744)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문예에도 취미가 있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성옹지소록 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 역시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 각된다. 감사 권윤(權綸)은 외왕부(外王父)의 외증조(外曾祖)이다. 성종대에 20여 년이나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하여 중종대에 문학을 한 선비는 모두 그가 지도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손자 연(璉)은 기묘년(1519, 중종14) 봄, 과거에서 대악부(大樂賦) 와 어 룡무동정시(魚龍舞洞庭詩) 를 지었는데, 모두 좋았다. 뜯어서 이름을 보니 바로 공 의 손자였다. 지정(止亭 : 남곤)이 주시관(主試官)이었는데, 즉시 뽑아서 장원을 시 켰으며, 식년강(式年講)에도 두 번 응시하였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 가 있었는데,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 시험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 부 분을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에서 맹자 에 관한 문제가 모두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이는 운명이라 생각하여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745) 위에 언급된 권윤(權綸)은 김광철의 외증조로서 성균관 대사성과 예조참의, 강 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1460년, 문신월과(文臣月課)에서 시부(詩賦)로 장원 을 할 만큼 문재가 있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746) 그 손자 권연(權璉) 역시 문 장에 능하여 1519년에 사마시에 응시하였을 때 김안국이 그의 글을 보고는 금 년 장원은 반드시 자네에게 돌아갈 것이네 라고 하였는데, 과연 장원으로 뽑혀 그 명성이 장안에 울러 퍼졌다고 한다. 그는 이후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었으 나 기묘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감해 나가지 않았으며 평생을 강릉에 은거, 시문으 로 소일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747) 744) 許筠, 앞의 책, 卷18, 文部15, 紀行 上, 丙午紀行 4월 22일 금교에서 묵었다. 저녁 에 상사가 나를 불러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고시본(古詩本)을 찾았다. 보따리 속에서 마 침 외할아버지께서 주신 후산시(后山詩) 6권이 있어 드렸더니 상사는 손을 마주 모으 고 사례하였다. (二十二日 宿金郊 夕 上使招余求本國所刊古詩本 行橐適有外王父所受后山 詩六卷以進呈 則上使拱謝) 745) 許筠, 앞의 책, 惺翁識小錄 下, 權綸科場之命運 權監司綸 外王父之外曾祖也 成廟朝 長胄監者二十年 中廟時 文學之士 悉其所誘掖者 其孫璉 己卯司馬春闈 作大樂賦魚龍舞洞 庭詩 俱好 拆其名 乃公之孫 止亭爲主考 亟擢爲元 再赴式講 家有孟子落二丈 意其不必出 此 不讀而就 則兩試孟子皆出此章 以爲命也 不復赴擧 朝廷以洗馬王子師傅再召之 俱不至 746)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권윤(權綸) 項 참조

262 비록 외척(外戚)이기는 하나 권씨 집안이 강릉에 세거(世居)한 후, 그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친 가문이었으니만큼 김광철이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김광철은 1513년, 20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출사했을 만큼 영민한 인물이었는데, 이렇듯 뛰어난 그의 재질 및 가문의 기풍 등이 대를 이어 외손(外孫)들에게까지 전해짐으로써 허봉 난설헌 허균 남매와 같은 재자(才 子)들이 배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文藝的 傳統의 樹立과 深化 허봉에 의해 발현된 가정 내 문예에 대한 관심은 난설헌과 허균에 이르러 그 정점(頂點)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 남매의 남다른 우애는 이미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된 바 허봉이 그 아우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수준이었는데, 다음 허균의 글은 그 실상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열두 살 때에 엄친(嚴親)을 여의었으므로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독책(督責)을 더해주지 않았지요. 좀 더 자라서는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따라 본받고 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만 있어 육경(六經)과 제사(諸史)를 두루 읽고 그 대의(大義)는 알았으되, 몸소 실천하고 침잠하는 일은 즐기지 않았지요. 호탕한 마음과 망령된 기개로 하루에 수만 자를 외워 입가에서 글이 줄줄 나오니 사람들은 총명하고 민첩하기가 무리에서 뛰어나 다고 여겼으며, 나 역시 스스로를 자랑할 뿐 학문과 문장이란 것이 당초 기람(記 覽)이 풍부한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오. 중형이 적소(謫所)로부터 돌아와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셨으며, 뒤에 서 애(西厓) 정승에게 문장을 배우고 손곡(蓀谷)에게서 시를 배우고 나서야 바야흐로 문장의 길이란 여기에 있는 것이지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하여 차츰 입문(入門)하고자 했으나 시속에 이끌리어 세상에 나가 장원(壯元)에 뽑혔다 오. 그러나 소탈하고 검속(檢束)이 부족하다 하여 세상에서 배척 받아 마침내 문을 닫고 학업에 힘쓴 지가 지금 16년째이지요.748) 747) 디지털강릉문화대전( 권연(權璉) 項 참조 748) 許筠, 앞의 책, 卷10, 文部7, 書, 答李生書 僕十二失嚴訓 母兄憐愛 不加督責 稍長

263 허균은 위의 글에서 자신이 학문의 정도(正道)를 찾게 된 계기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위의 글을 통해 그가 젊은 시절, 보통의 문사(文士)들처럼 과거 를 준비하며 과문(科文)을 짓는 데 몰두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과문은 격률(格 律)의 형식이 까다롭고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하는 까닭에 특별한 연습과 훈련 없이는 쉽게 지을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749) 따라서 허균이 출사 이전 과문 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는 사실은 그의 문예 학습이 형식화된 변려문(騈儷文體) 팔고문(八股文)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당장의 입신을 위해 대우법 등의 기교를 익히는 데에만 힘썼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후대의 문신 이익(李瀷)이 과거 제도가 생긴 뒤부터 선비들이 헛된 과 문에만 힘써 붓을 들면 바로 사장(詞章)을 만들어 내지만 한 가지도 내세울 만 한 실효가 없다 750)고 탄식했던 것처럼 과문은 격식과 수사에만 치우쳐 문장의 근본을 소홀히 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허균은 어릴 때부터 이미 고시 (古詩) 읽기를 좋아하여 그 이해 여부는 막론하고 문득 책만 펴면 밥 먹는 것도 잊을 751) 만큼 글 읽기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의 글을 통해 그 독 서의 목적이 특별한 곳에 있지 않고 그저 시속(時俗)에 따라 과거를 염두에 두 고 행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허균이 문사로서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고 학문과 문예의 나아갈 방 향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데에는, 허봉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허균은 중형이 적소로부터 돌아와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 셨다 고 했는데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허봉을 직접 방문했던 사실은 문헌의 자료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중형이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백운산에서 글을 읽고 계 실 때 금생(琴生)이라는 사람이 가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나는 결혼 見有習科業者 從而效之 遂有速化之心 讀六經諸史略遍 已解大義 不肯體認沈潛 豪腸妄膽 一日誦數萬言 口角瀾翻 人以爲聰捷絶倫 僕亦自誇 殊不知問學及文章 初不在於記覽之富也 仲兄自謫還 始敎以古文 文從西崖相學 詩從蓀谷學 方知文章之徑在是不在彼 稍欲入門 爲 俗累所牽 出旣聯擢巍第 以疏雋少檢擯於世 遂杜門盡其業 于今十有六年 749) 정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김영사, 2006, p.61 참조 750) 李瀷, 星湖僿說 卷15, 人事門, 接對儒生 自科試興而 士學趨於虛文 操筆就章者 無 一實效之可言 751) 許筠, 앞의 책, 卷4, 文部1, 序, 古詩選序 許子髮未燥 已嗜讀古詩 毋論其解不解 而 輒展卷忘食

264 하는 일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였다. (중략) 다음해 봄에 김확(金矱)군을 데리고 백운산에 가니 군과 심액(沈詻) 군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우리 넷은 조석으로 함 께 노닐고 공부하여 서로를 바로잡으니 그 정이 친형제나 다름없어 늙을 때까지 함께 보전하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군은 병들어 8월 25일에 졸하였다.752) 1585년 6월, 유배에서 풀려난 허봉은 백운산에 들어가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 치고 있었는데 당시 허균은 혼례를 앞두고 있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였다. 이 듬해 정월이 되어서야 이들 형제의 상봉이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정황은 허봉의 시 정월회일행(正月晦日行) 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봄바람에 매화가 꽃을 피 우고 백운산의 샘맥(脈)이 요동할 무렵, 등불 비추는 자리에서 4~5인이 함께 했 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에서 허봉은 자리에 함께 한 인물들 개개인의 재능을 논평하면서 허균에 대해서는 내 아우의 재주는 옛사람들의 그것과 부합하니 비 록 15세의 아이이긴 하나 붓끝의 늠름한 위세는 서릿발도 물리칠 수 있을 정 도 753)라고 적고 있어 아우에 대한 남다른 자부와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허봉은 뛰어난 시재(詩才)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나 그는 실상 시 뿐 아니라 문장에까지 대단한 명성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허봉의 연보에도 문장이 전중(典 重)하고 온아(溫雅)했다 는 기록이 남아 있거니와 그의 문장에 대한 명성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754) 허봉이 생존하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 문단 내부에 752) 許筠, 앞의 책, 卷17, 文部14, 墓誌, 琴君彥恭墓誌銘 乙酉歲 仲兄自謫還 讀書于白 雲山 聞有琴生者往從之 余以婚娶不克同焉 (중략) 明年春 携金君矱之白雲 則君與沈君 詻已先焉 四人晨夕同遊處 相切磋規正 情比骨肉 庶幾共保歲寒 君不幸病 戊子八月二十 五日卒 753) 許篈, 荷谷集 荷谷先生詩鈔補遺, 詩, 正月晦日行 正月之晦前一日 不知今夕是何夕 余爲楚澤憔悴人 爾作秦城歸去客 身寄禪房一室淸 魂迷嶺路千山隔 人間離合兩茫然 爾騎蹇 驢余蠟屐 是時春風已放梅 白雲山中動泉脉 尊罍滃泱表同氣 燈火熒煌照分席 坐中中有四五 人 (중략) 吾弟之才符宿昔 况有十五嵗兒童 筆鋒凜凜排霜戟 (후략) 754) 허봉의 문장이 뛰어났다는 문헌의 기록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柳成龍, 雲巖雜錄, 沈義謙 허봉의 자(字)는 미숙(美叔)이며 허엽의 아들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성질이 경망하였다. 경서와 사기(史記)에 박학해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篈字美叔 曄之子也 有俊才 而性輕脫 博洽書史能文章) 許筠, 앞의 책, 惺叟詩話 실지(實之 : 李春英)가 망형(亡兄)의 을 깊이 아는 자는 허미숙(許美叔)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누가 망형을 잇겠습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신현옹(申玄翁 하니, 청량함은 미치지 못하나 농후(濃厚)함은 그를 넘어선다고 之賞亡兄之文曰 深知文章者 許美叔也 余嘗問後來孰繼吾兄耶 曰 而穠厚過之) 글을 칭찬하기를 문장 내가 묻기를 후배로서 : 申欽)이 그를 이을 만 봅니다. 라고 했다. (實 申玄翁可繼之 淸亮不逮

265 서는 진한고문(秦漢古文)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 은 기묘사림들이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책의 일환으로서 산문 창작에 있어 양한(兩漢)의 고문을 전범으로 삼고자 구상하였던 것이다. 또, 직접 적으로 진한고문파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만 매달리던 사습(士習)의 개혁 및 목은(牧隱) 이후 계속되어 온 주소체(註疏體) 어록체(語錄體) 등의 문풍 탈 피, 16세기 초 사림파의 경직된 문학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일종의 고 문 운동 이 대두되고 있던 실정이었다.755)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허봉이 선진 양한 혹은 당송(唐宋)의 고문 및 산 문의 저술에 관심을 갖고 몰두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고 판단된다. 허봉은 해 동야언 을 비롯, 이산잡술 북변기사 독역관견 하곡수어 등 다수의 저 서들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다수가 실전(失傳)되어 상세한 면모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의 저술은 38세의 짧은 생애로서나 또한 당쟁의 와중에 서 부침을 거듭했던 생활 속에서는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허봉의 저술이 유려한 문장 및 해박한 전고와 도학에 바탕을 둔 광폭(廣幅)한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문장과 학문이 당대 명류(名流)의 그 누구에게도 宣祖實錄 卷19, 18年(1585 乙酉) 5月 28日(戊戌) 의주 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를 올렸다. (중략) 허봉은 유명한 아버지의 아들로 문장의 재주가 있어 약관에 과거 에 올라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뜻대로 된 일은 많으나 일에 대한 경 험은 적으니 비록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가혹하게 탓할 수가 있겠습니까? 갑산(甲 山)은 본디 험한 곳으로 이름이 났기에 그곳에서 낳고 자란 사람이 아니면 병들지 않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전후 귀양 간 자가 살아서 돌아온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젊은 재사 (才士)가 진실로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면 성덕(聖德)에 누(累)가 됨이 어찌 많지 않겠 습니까? (許篈以名父之子 濟詞章之才 弱冠登第 歷揚淸顯 得意多而經事少 雖有過愆 豈可 深罪 甲山素號惡土 自非生長於斯者 不爲受病者小 故前後謫居者 鮮有生還 靑年才子 苟先 朝露 其爲聖德之累 不旣多乎) 尹國馨, 聞韶漫錄 허봉 미숙은 초당 선생의 둘째 아들로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열 살 전에 빛나는 재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18세 되던 무진년(1568, 선조1),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장원으로 뽑히고 22세에는 임신년 정시 (庭試)에 급제했으며, 예문관을 거쳐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었다. (중략)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한 번 보기만 하면 문득 외우며 고금의 일을 꿰뚫어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 시와 문장을 바로바로 지었으며, 비록 술을 마시고 크게 취했어도 문득 등불 을 켜 놓고 글을 읽은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許篈美叔 草堂先生之第二子也 聰敏穎達 出人等夷 十歲前才華已發 名聞藉藉 十八中戊辰增廣生員壯元 二十二登壬申庭試及第 由翰 苑發軔 長在經幄 (중략) 手不釋卷 過目輒誦 貫穿古今 靡遺絲毫 若詩若文 倚馬立就 雖飮 酒大醉 便張燈讀書 然後乃寢堂中) 755) 이성민, 秦漢古文派의 성립 배경과 秦漢古文에 대한 인식, 한국어문학연구 48輯,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7, p.203 참조

266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756) 그 일례로, 유성룡은 1587년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봉의 이산잡술 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허미숙이 서울에서 편지를 보내 와 상공에게도 보내 드립니다. 이산잡술 4권 을 동봉하였는데 유배 중 지었던 것을 이제 부쳐 온 것입니다. 경사(經史)를 빠짐 없이 관통하였고 의론도 심히 훌륭한 곳이 많으니 참으로 빼어나고 빼어난 재주라 할 만합니다. 두루 살펴보았으니 마땅히 상공에게 드리고자 합니다.757) 위의 글에는 유성룡이 허봉의 문장에 대해 참으로 빼어나고 빼어난 재주(奇 才奇才) 라 경탄했던 사실이 드러나 있다. 허봉은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 어났고 10세 이전 이미 빛나는 재주가 나타나 소문이 자자했을 758) 정도의 수재 였으므로, 여러 분야의 시사(詩詞)에 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가 아우에게 직접 고문을 가르치게 된 데에는 당대 문단의 변화 외에도 그 자신의 고문에 대 한 인식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던 듯하다. 우리 문학사에서 고문 이란 되도록 전고의 활용을 확장하면서 다양한 문체 양 상을 구현하려했던 한문 전통의 글쓰기 방식과 맥락이 닿는다. 진한 이전의 문장 에서 통사와 수사의 기준을 찾았던 당송고문(唐宋古文), 의도적으로 고대의 어휘 를 구사했던 명나라의 의고문(擬古文) 등은 지금의 문체 의식과는 달리 일관된 규범을 적용하는 가운데 이질적 요소들의 삽입을 통해 문체의 변화를 시도하고 문장을 구성하면서, 이런 기법을 일종의 경지로 평가하는 것이다.759) 형식 위주의 과문체 및 관각문학이 대세를 이루던 당대의 문풍 속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고문의 효용과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고 있었는데, 다음의 글에서 그 대략을 엿볼 수 있다. 글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과문(科文)이 가장 어렵고, 이문(吏文)이 그 다음이다. 756) 조천기 해제(윤남한 著), p ) 柳成龍, 西厓集 別集 卷3, 書, 與金士純 許美叔書自京來 故送上 渠有伊山雜述四卷 乃謫中所著 今寄來 貫穿經史 議論往往甚好 奇才奇才 待覽畢當奉呈案下 758) 尹國馨, 聞韶漫錄 許篈美叔 草堂先生之第二子也 聰敏穎達 出人等夷 十歲前才華已發 名聞藉藉 759) 임상석, <時文讀本>의 편찬 과정과 1910년대 崔南善의 출판 활동, 상허학보 25 집, 상허학회, 2009, p

267 고문(古文)은 쉽다. 그러나 고문의 지름길을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이문이나 과문 을 따로 애쓰지 않아도 그 기세가 파죽(破竹)과 같으나, 과문을 통해 들어가는 사 람은 벼슬하여 관리가 되어도 공문서 작성에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 서문이 나 기문, 혹은 비명(碑銘)의 글을 지어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몇 글자 쓰지도 않아 이미 추하고 졸렬한 형상이 다 드러나 버린다.760) 정약용은 위의 글에서 문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는 즉, 고문을 통해 문장을 익히는 것만이 학습의 정도(正道)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다. 고문에 대한 허봉의 견해 역시 이 같은 정약용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 을 것으로 생각된다. 허균이 그 매부 김성립에 대해 논하면서 경ㆍ사(經史)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문은 요점을 정확히 맞추어 논ㆍ책(論策)이 여 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761)고 비아냥댔던 것처럼 당시의 선비들 사이에서는 학문의 기본을 무시한 채 그저 과문을 짜내는 데에만 열중하는 풍조가 성행하였 는데, 허봉이 고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것 역시 그 같은 당대의 학풍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허봉이 아우 허균에게 전수하고자 했던 고문 의 요체는 무엇이었을 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의 글을 통해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중형이 말씀하시기를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韓退之)의 글을 읽어 먼 저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론 좌씨전(左氏傳) 을 읽어 간결함을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戰國策) 을 읽어 문장의 종횡무진함을 익히고, 다음에는 장자(莊子) 를 읽어 신출귀몰한 솜씨를 궁구하고, 한비(韓非) ㆍ 여람(呂覽) 으로 지류를 통하게 하고, 고공기(考工記) ㆍ 단궁(檀弓) 을 읽어 뜻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 한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를 숙독하여 거침없고 걸출한 모양새를 펼 치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唐音) 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李白)의 시를 읽되 소동파(蘇東坡)ㆍ두목(杜牧)은 그 솜씨만 따면 그뿐이다. 라고 하였 다.762) 760) 丁若鏞, 與猶堂全書 第一集詩文集 卷18, 文集, 贈言, 爲茶山諸生贈言 정민, 茶 山語錄靑賞, 푸르메, 2007, p.160에서 재인용(文有多種 而科文最難 吏文次之 古文其易 者也 然自古文蹊徑入頭者 卽吏文科文不復用功 勢如破竹 自科文入頭者 仕而爲吏 判牒皆 藉人手 有求序記碑銘者 不數字已醜拙畢露) 761) 許筠, 앞의 책, 卷24, 惺翁識小錄下, 文理不足而能製文者 世有文理不足而能製文者 余姊壻金誠立氏 令讀經史 則不能措舌 而科文極中肯綮 論策屢入高等 其製策 自篇終逆製 之 次救設弊 次逐條 次中頭臨 寫爲冒頭 幷井井不紊 斯亦不可誥者

268 위의 글은 당시 허봉이 한유(韓愈)를 중심으로 한 당송의 고문에 심취해 있던 사실을 보여 준다. 한유는 당(唐) 고문운동 의 제창자로서, 여기서의 고문운동 이란 한유가 기교가 우선시되는 변려문의 폐단을 직시하고 창작 실천을 통해 새 로운 글쓰기를 주도한 사실을 가리킨다. 고문은 독자적으로는 시문(時文), 즉 당 시에 유행하는 글의 반의어이며, 한유의 시대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유형식의 변 려문에 대한 반의어로서 무형식의 옛 글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추진했던 고 문운동 은 일차적으로는 변려문의 부정임과 동시에 산문의 형식을 타파하려는 새 로운 형태의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었다.763) 이렇듯 고문을 중시했던 허봉의 뜻을 이어 허균은 훗날 고문으로써 당세의 최 고라는 자부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그저 옛 글을 모방 답습하는 데 그치 지 않고 문장의 실용성과 의사소통 능력을 강조한 독특한 고문론 올 수립하였 다. 허균은 문사는 의사의 전달을 위주로 하여 평이하게 지어야 한다 고 생각하 여 상어(常語)의 활용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쇳덩이를 달구어 황금을 만들듯[點 鐵成金] 상어를 고상하게 만들어 써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주장하였 다.764) 또한 그 과정에서 남의 문장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표절해서는 안 된다는 762) 許筠, 앞의 책, 卷26, 附錄1, 鶴山樵談 仲氏論學文章 須要熟讀韓文 先立門戶 次讀左 氏 以致簡潔 次讀戰國策 以肆縱橫 次讀莊子 以究出沒 韓非呂覽 以暢支流 考工檀弓 釣志 氣 最要熟看太史公 以張其橫放傑出之態 爲詩則光讀唐音 次讀李白 蘇杜則取才而已 763) 김장환 外,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4, 휴머니스트, 2006, p.198 참조 764) 許筠, 앞의 책, 권12, 文部9, 說, 文說 객(客)이 허자(許子)에게 물었다. 당세에서 고문(古文)에 능하다고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를 최고로 친다. 내가 보기에는 그 글이 비록 넓고 커 한량이 없는 것 같지만 대체로 상용(常用)의 말을 사용하여 글이 붙 고 글자가 순탄하며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해득 하는 자나 해득하지 못하는 자를 막론하고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고문을 전공하는 사 람이 과연 이와 같은가? 내가 대답하였다. 그런 것이 바로 고문이다. 그대는 우하(虞 夏)의 전모(典謨)와 상(商)의 훈(訓)과 주(周)의 삼서(三誓)ㆍ무성(武成)ㆍ홍범(洪範) 등 의 글을 보라. 모두가 글로서는 극치이지만 여기 장구(章句)에 갈고리를 달고 가시를 붙여 어려운 말로써 공교롭게 꾸민 곳이 있던가? 공자가 문사(文辭)는 의사를 전달할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중략) 그러나 후세에 내려오면서 문장과 도가 두 갈래로 분리되 어 비로소 장(章)을 끌어오고 구(句)를 따내며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공교롭게 꾸미 는 일이 생겨났으니, 이는 글의 화액(禍厄)이지 극치가 아니다. 내가 비록 노둔하지만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문사는 의사의 전달을 위주로 하여 평이하 게 지어야 할 뿐이다. (중략) 내가 말하였다. 그 몇 분의 글 또한 상용어와 무엇이 다 른가? 내가 보건대 비록 간결한 듯도 하고 웅혼한 듯도 하며, 심오한 듯도 하고 분방 (奔放)한 듯도 하며 굳세고 기이한 듯도 하지만, 이는 대체로 그 당시의 상용어를 가지 고 바꾸어 고상하게 만든 것이니 참으로 쇳덩이를 달구어 황금을 만들었다고 할 만하 다. (중략) 좌씨는 스스로 좌씨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ㆍ반고는 스스로 사

269 점을 강조하여, 어렵고 교묘한 말로 공교롭게 꾸미는 일에만 주력하던 당대의 문풍에 대해 새로운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이에 더하여 당대의 일상적 언어를 아진(雅眞)하게 변화시켜 문(文)에 쓴 것이 고문이기에 지금의 우리가 현재의 일상적 언어를 아진하게 변화시켜 문장 에 쓴다면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문(文)을 고문으로 평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이는 금문(今文)이 곧 고문 이라는 생각과 궤를 같 이 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즉, 후대의 김창협(金昌協) 박지원 등에 의해 펼 쳐진 금문이 곧 고문 이라는 논리의 단초를 허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다.765) 이 같은 허균의 고문론 은 창작 활동에도 반영되어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는 데, 문학의 실용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다양한 형태의 산문들이 그것이다. 전통적 문학관을 거부하고 새로운 문학세계를 지향하고자 했던 허균의 의식은 기존의 문학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창작하는 데에까지 이어졌음에, 그가 전통 한문 양식인 기(記) 나 전(傳) 을 과감히 변용하여 새로운 문학 양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나 홍길동전 과 같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에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766) 실제로 허균의 문집에서는 선진(先秦)에서 만명(晩明)에 이르는 그의 지적 호기심 만큼이나 다양한 산문들이 발견된다. 당송문의 문체적 관심을 닮은 기서문(記序文)에서 소품문(小品文)의 기색이 역력한 척독(尺牘), 고아한 풍취를 지닌 사부(辭賦)에 이르는 다수의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허균 문학의 광범함을 짐작케 하며, 문설 또한 편장 마천ㆍ반고이고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 역시 스스로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 이니 (이들은) 서로 답습하지 않고 제각기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나는 이런 것을 배우 기를 원하며 지붕 밑에 거듭 지붕을 얹듯 남의 문장을 답습하여 표절했다는 꾸지람을 들을까 부끄럽다. (客問於許子曰 當世之稱能古文者 必以子爲巨擘 吾見之其文 雖若浩汗 無涯涘 而率用常語 文從字順 讀之則如開口見咽 毋論解不解者 輒無礙滯 業古文者果若是 乎 余曰 此其爲古也 子見虞夏之典謨 商之訓 周之三誓武成洪範 皆文之至者 亦見有鉤章棘 句 以險辭爭工者否 子曰 辭 達而已矣 (중략) 降及後世 文與道爲二 而始有鉤章棘句 以險 辭巧語 爭其工者 此文之厄也 非文之至 吾雖駑 不願爲也 故辭達爲主 以平平爲文焉耳 (중 략) 余曰 之數公之文 亦何異於常耶 以余觀之 雖若簡若渾若深若奔放若倔奇 率當世之常語 而變爲雅眞 可謂點鐵成金也 (중략) 左氏自爲左氏 莊子自爲莊子 遷 固自爲遷 固 愈 宗元 脩 軾亦自爲愈 宗元 脩 軾 不相蹈襲 各成一家 僕之所願 願學此焉 恥向人屋下架屋 蹈竊 鉤之誚也) 765) 신승훈,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기 문학이론의 다변화 양상,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04, pp.168~ ) 이문규, 許筠散文文學硏究, 삼지사, 1986, pp.31~

270 자구(篇章字句) 에 관한 한국 한문학사 최초의 논의로서 그의 산문에 대한 관심이 심중 한 주제의식은 물론 문장의 구조나 자구의 수식과 같은 형식에까지 널리 미치고 있었 음을 시사해 준다.767) 그런데 이러한 허균의 문학적 성과, 특히 산문 분야의 업적은 당대를 지배했던 문 학 담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그의 고민과 노력에 힘입은 것으로서, 그 치열했던 고뇌의 흔적을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옹께서는 평소 저의 소부(騷賦)가 완려(婉麗)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 는 감히 스스로 그렇게 믿지 못합니다. 저의 문장은 근래에 진보했는데도 옹께서는 오히려 알아주지 않으시기에 삼가 한정록서(閑情錄序) ㆍ 박씨산장(朴氏山庄) ㆍ 왕총이기(王塚二紀) ㆍ 십이론(十二論) ㆍ 이절도뢰(李節度誄) ㆍ 관묘비(關廟碑) ㆍ 남궁생전(南宮生傳) ㆍ 대힐자(對詰者) 와 북귀부(北歸賦) ㆍ 훼벽사(毁壁辭) 를 한 통으로 만들어 변생(卞生)에게 부쳐 보냅니다. 가르침을 주심이 어떻겠습니 까?768) 위의 글은 1610년 10월 허균이 이달에게 보낸 서간으로, 그는 당시 문집을 편 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승에게 작품을 보여 품평을 구하고자 했던 것 이다.769) 허균이 중형 허봉에게 고문을 배우던 1586년 무렵, 그는 형의 권유로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게 되었는데770) 이달이 평소 허균의 시에 보이는 미감(美 感)을 큰 장처(長處)로 여기고 이를 칭찬했던 사실이 윗글에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허균은 이달이 자신의 문장을 몰라주는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767) 김우정, 허균 산문의 연구 : 산문 텍스트의 확장과 문예미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 대학 16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07, p.285 참조 768) 許筠, 앞의 책, 卷21, 文部18, 尺牘 下, 與李蓀谷 翁素奬我騷賦㛡麗 不佞則不敢自信 焉 僕之文近進 而翁猶不知之 故謹寫閑情錄序 朴氏山莊 王塜二紀 十二論 李節度誄 關廟 碑 南宮生傳 對詰者曁北歸賦 毀璧辭爲一通 付卞生而去 幸敎之如何 769) 허경진 손곡 이달의 생애 허경진 外, 蓀谷 李達 硏究, 원주시, 2006, p.310 참 조 770) 허균은 이달 뿐 아니라 허봉에게서도 시를 배웠으며 스스로 자득한 것도 적지 않았는 데, 이 같은 사실은 다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許筠, 앞의 책, 卷2, 附錄 蛟山臆記 詩 나는 젊었을 적에 시를 할 줄 알아서 이손곡(李蓀谷)에게 이백(李白)을 배웠고 당 (唐) 및 한유(韓愈)ㆍ소식(蘇軾)을 중씨(仲氏)에게서 배웠었다. 그리고 난리 속에서 비로 소 두보(杜甫)를 익혀 부질없이 소기(小技)에다 공력을 허비한 지도 이미 12년이 지났 다. (余少小知爲詩 學李李於蓀谷 學唐及韓蘇於仲氏 益在干戈中始杜 老枉費工程于小技 已 関一紀)

271 있었고 결국에는 당시 평양에 체류하고 있던 이달에게 작품을 보내 그 수준을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허균이 나의 문장이 근래에 진보했다[僕之文近進] 고 언급 한 부분으로, 이 는 그 무렵 허균이 문장의 저술에 진력하여 마침내 자부할 만 한 성과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렇듯 허균의 산문에 대한 관심 은 글이란 상하(上下)의 정을 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771)고 여겼던 그의 문 학관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주목된다. 즉, 상하의 정을 더욱 잘 통하게 하 고 삶의 실상을 보다 여실히 보여 주어 목민자(牧民者)를 경각시키기 위해 산문 쪽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렸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772) 또한 허균의 이 같은 태도는 절대시재(絶代詩才) 를 지녔다는 명성의 한편으 로 산문의 창작에 주력했던 중형 허봉의 행보와 동일한 것이어서 흥미롭다. 실제 로 문장에 대한 허봉의 관심은 그 아우 허균의 산문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 이는데, 경사(經史)와 현실을 넘나든 허봉의 저술 활동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 다. 허봉은 조선시대 야사의 시원(始原)이 된 해동야언 을 편찬하였고 고금(古 今)의 경사(經史)를 관통했다 는 평을 들었던 이산잡술 과 주역 에 새로운 견 해를 더한 독역관견 등을 저술하였다. 그런 반면, 사행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체험과 견문, 당시 명나라의 실정 및 북변(北邊)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후대 사행록의 전범이 된 조천기 를 지었으며 산실된 북변기사 역시, 1578년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 재직 당시 접했던 북변의 상황과 현지 백성들의 상 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여 그가 문예의 창작에 있어 현실의 문제 또한 중시했음 을 알게 한다. 이 밖에 허균이 기 나 전 과 같은 산문 형식을 통해 불우한 처지 의 인물들을 주로 다루었던 것처럼 허봉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짓기도 했는데773) 이는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쉽게 행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행동임에 771) 許筠, 文說 옛날에는 글로써 군신 상하의 의사를 소통하고 글로써 그 도(道)를 실어 전하였던 까닭에, 명백(明白)ㆍ정대(正大)하고 순절(諄切)ㆍ정녕(丁寧)하여 듣는 이로 하 여금 분명하게 그 가리키고 뜻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글의 효용(效用)이다. (古者文以通上下之情 以載其道而傳 故明白正大 諄切丁寧 使聞者曉然知其指意 此文之用 也) 772) 이문규, 앞의 책, pp.46~47 참조 773) 許筠, 앞의 책, 鶴山樵談 임자순(林子順)은 스스로 소치(笑癡)라 하였다. 우리 중형 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和癡)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二 十四令)을 지었다. (林子順自號笑癡 仲氏嘗聚北里烟花作誌 依和癡故事 凡二十四令)

272 분명하며,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허균의 문장에 대한 관심이 상당 부분 중형 허 봉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던 것과 그의 작품들에 내재된 의식과 사상이 가학의 범주 안에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친 허엽이 비록 시문(詩文)의 창작에는 힘을 쏟지 않았지만 그 역시 문장이 출중했으며,774) 조선 초의 인물 관련 기록 및 야사를 모아 전언왕행록(前言往 行錄) 을 편찬하는 등 당대의 역사 현실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여러 자 료들을 통해 확인된다. 허엽의 전언왕행록 은 사화기, 여러 인물들의 행적과 사 건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자칫 왜곡될 수 있었던 당대사의 진실을 세상 에 드러내었고, 이를 통해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또한 이 책은 허봉의 해동야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강효석의 대동기문 과 같은 후대 야사서의 저본(底本)이 됨으로써 관찬사서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당 대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이 인정된다. 이처럼 당대(當代) 를 중시하는 허엽의 역사인식은 고스란히 그 자녀들에게로 이어지게 되는데 허봉이 부친의 뒤를 이어 해동야언 을 편찬했던 것이나, 허균 의 저작들에 보이는 우리 역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 또한 이 같은 가학적 전통에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허봉의 조천기 에 보이는 바 전(前) 현(現) 왕조의 사적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풍속 지리를 넘나드는 허균의 자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부친의 훈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허균은 최치원으로부터 천하가 우리나라의 문장을 들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뛰어난 문사들이 더욱 많이 배출되었다 775)고 자부하였고, 근세의 시인들 중 박 774) 허엽은 학행과 문장을 인정받아 1554년(명종9) 호당(湖當)에 녹선, 사가독서(賜暇讀 書)의 영예를 누렸으며, 실록 에도 그의 문장과 관련된 기록들이 엿보인다. 그 중 하 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明宗實錄 卷28, 17年(1562 壬戌) 5月 15日(戊戌) 상이 취로정(翠露亭)[후원(後苑)에 있다.]에 나아갔는데 시신(侍臣)이 입시했다.[우참찬 정유길(鄭惟吉), 예조 판서 이양(李 樑), 공조 참의 이홍남(李洪男), 예조 참의 윤의중(尹毅中), 대사간 이언충(李彦忠), 부제 학 이중경(李重慶), 대사성 허엽(許曄), 첨지 박계현(朴啓賢) 등도 들어와 참석했다. 이홍 남 이하 6인은 전에 충순당(忠順堂)에서 상이 직접 뽑은 글 잘하는 자들이다.] (上御翠 露亭[在後苑] 侍臣入侍 [右參贊鄭惟吉 禮曹判書李樑 工曹參議李洪男 禮曹參議尹毅中 大 司諫李彦忠 副提學李重慶 大司成許曄 僉知朴啓賢亦入參 洪男以下六人 蓋前日忠順堂親選 能文者] 775) 許筠, 앞의 책, 卷2, 詩部2, 病閑雜述, 余以病火動 不克燕行 竢譴巡軍 作長句贈奇獻 甫以抒懷 吾東文章天下聞 羅季始稱崔孤雲 益齋牧隱鳴麗末 降及我朝多絶群 (후략)

273 상(朴祥) 정사룡(鄭士龍) 노수신 등 몇 사람이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그 이룬 바가 이몽양(李夢陽)이나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보다 못하지 않았을 텐데 불행히 작은 나라에 태어나 그 재주를 다 채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776) 고 하여 당시 조선 문단의 수준을 명(明)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하였으며,777) 진 나라 때 불로장생을 추구한 방사(方士)들이 동해에 있다고 말한 삼신산(三神山) 은 실상 우리나라의 지리산과 금강산 묘향산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778) 등 문 화적 자부에 기반한 독특한 의론들을 수립하였다. 이렇듯 허엽 일문은 가학의 영향을 받아 당대사를 중시하고 자국 문화를 존숭 하는 한편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는데, 부친 허엽이 사 림의 영수가 되어 기묘사림의 개혁 정신을 현실 정치에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사 776) 許筠, 앞의 책, 卷5, 文部2, 序, 黃芝川詩卷序 蓋余少日及見芝川翁 其持論甚倨 談古 今文藝 少所許 而至我國詩則尤不齒論 如容齋而目爲太腴 李達而指爲模擬 其下槪可知矣 唯推朴訥齋祥 爲不可及 而湖陰蘇齋稍合作家 余聞而心駭 浩如睇河漢 不可測其深涯也 (중 략) 使數公生於海內 則其所造詣 豈在於北地濟南太倉之下 而不幸生於下國 不克充其才 又 不能名於天下後世 湮沒不傳 惜哉 777) 허균은 손곡집 서문에서도 우리나라는 문운(文運)이 아름답고 밝아 학사 대부 중 시로써 (세상을) 울린 자가 거의 수십 수백에 이르고, 모두가 저마다 영사(靈蛇)의 보주 (寶珠)를 쥐었다 여기니 (그 수가) 많기도 하고 (수준도) 성하다(恭惟我國家 文運休明 學 士大夫 以詩鳴者 殆數十百家 咸自謂人握靈蛇之寶 林然盛哉) 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자국 문예에 대한 자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 778) 許筠, 앞의 책, 卷7, 文部4, 記, 沙溪精舍記 남원(南原)은 옛 대방국(帶方國)으로 옛 날에 이르던 방장(方丈)ㆍ삼한(三韓)이었다. 진(秦)나라 시절부터 방사(方士)들은 삼신산 (三神山)이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으며 거기에 신선과 불사약이 있다 했는데, 군주치고 이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내가 일찍이 오악진형도(五嶽眞形圖) 및 동명기(洞冥記) 와 십주기(十洲記) 를 얻어 고찰해 보니 삼신산이 동해에 있다. 했으나 우리나라를 빼고는 이곳이 있을 수 없으며, 이른바 방장에 있다 는 것은 이미 대방(帶 方)에 있으니, 영주(瀛洲)ㆍ봉래(蓬萊) 역시 금강산과 묘향산 밖으로 벗어나지 않음이 분 명하다. (중략) 이른바 방장(方丈)이란 곧 세상에서 말하는 지리산이다. 그 산의 우람하 고 우뚝 솟은 모습이 영남과 호남에서 으뜸이고, 승려 중 수행이 높은 자가 여기에 모 이며 사찰과 암자 중 크고 화려한 것이 거의 수백 군데였다. 그 층층이 쌓인 돌길과 우 뚝한 정상의 풀ㆍ나무ㆍ안개ㆍ구름의 기이함과 굉장함, 풍부함이 삼산(三山) 중 제일이 니 유람하는 이들은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아찔하여 돌아가기를 잊는다. 만약 진나라나 한나라의 임금으로 하여금 이 소문을 듣게 하였다면 반드시 옷을 걷고 발을 적실 겨를 도 없이 달려 왔을 것이니, 아아! 그 얼마나 기이한가! (南原 古帶方國 而古所謂方丈三韓 者也 自秦時方士言三神山在東海中 有仙人不死藥 世主莫不甘心焉 余嘗取五嶽眞形圖及洞 冥記十洲記而考之 三山之在東海者 捨吾國則無有是處 其所云在方丈者 旣在於帶方 則瀛洲 蓬萊 亦不出於金剛 妙香之外也明矣 (중략) 夫所謂方丈 卽世所稱智異山也 山之磅礡鎭峙 雄於二南 釋子之行持者 咸萃於玆 而伽藍蘭若之巍煥者 殆數百區 其層硿絶頂草樹煙雲之奇 壯 富有甲於三山 游者目眩神奪而忘返 若使秦漢之君聞之 必褰裳濡足之不暇 吁其异哉)

274 실을 감안한다면 그 자녀들이 현실의 제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이를 개선하고자 시도했던 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허성이 기전도설후어 를 지어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나 1590 년의 사행 당시, 당론과 무관하게 홀로 전란의 발발을 예견한 일779) 등은 현실 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알게 한다. 실제로 그는 도요토 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실상을 감추어 그 전모를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 본의 인민이 대단히 번성하였다 780)고 증언하는 등 예리한 상황 판단 능력을 과 시하였는데, 이 같은 사실은 경세가로서의 허성의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음 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허성이 당대의 현 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시 한 수를 발견할 수 있다. 779) 申炅, 再造藩邦志 1, 신묘년(1591, 선조 24) 3월에 부산으로 돌아와서 그간의 사정 을 치계(馳啓)하고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 왕 이 인견하여 물으니, 황윤길은 처음과 같이 대답했으나 김성일은 신은 그런 망극한 징 조가 있음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라 하고 황윤길의 말이 인심을 동요시킴으로 옳지 않 다고 하니, 유성룡은 김성일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황윤길을 지지하고 어떤 이는 김성일을 지지함으로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 하였으며, 또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당론이 갈리어 겉과 속으로 각기 자기의 무 리를 보호하였는데 서장관 허성(許筬)만은 말하기를 왜놈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의 친구인 한준겸(韓浚謙)이 그 까닭을 물었다. 허성은 우리들이 일본 에 가서 보았는데 곳곳의 성지(城池)에는 병들고 나약한 군사들만 있었으니, 이는 평성 (平城)의 옛 지략이오. 라고 하였다. 당시 허성이 당론을 두둔하지 않는다 하여 훌륭하 다고 여겼다. (辛卯三月 還泊釜山 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 初 誠一曰 臣不見有是罔極言允吉動搖人心非宜 柳成龍主誠一之論 於是 議者或主允吉 或 主誠一 紛紜不定 亦與東西黨議 表裏各護其類 獨書狀官許筬以爲 倭必來寇 其友韓浚謙問 其故 筬曰 吾輩到彼地 處處城池 只有罷殘羸瘁之卒此平城之故智也 當時以筬不護黨議韙 之) 780) 宣祖實錄 卷35, 26年(1593 癸巳) 2月 4日(己丑) 상(上)이 이르기를 적이 군사를 증원하는 기세가 있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허의후(許儀后)의 글을 보니 일본의 지방은 66주(州)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들은 단지 6주의 사람들이라고 하였 습니다. 만약 남은 60주에 장정이 있다면 흉악 간교한 수길(秀吉)이 어찌 계속 후원하지 않겠습니까? 허의후의 말로는 66주가 중원(中原)의 1개 주만도 못하다고 하였는데, 허 성(許筬)에게 물으니 인민이 매우 번성하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上曰 賊有添兵 之勢乎 忠謙曰 觀許儀后書 則言日本之地六十六州 而來寇我國者 只六州云 若六十州有餘 丁 則秀吉兇狡有餘 豈不繼援乎 許議后言六十六州 不如中原之一州 而問諸許筬 則人民甚 繁庶云矣)

275 다시 차운하다[又次] 金門謬通籍 금문(金門)에다 잘못 적을 통하여 十年迷所至 십 년 동안 혼미한 바 되었네 石渠困讐校 돌개천은 원수 만날까 두렵고 宮廬帶晝睡 궁에서는 낮에 잠이나 자네 絲綸承往哉 임금의 명을 받들어야 하니 對食甘忘味 밥을 대해도 단 맛을 잊었네 竹書有期會 대쪽에 글씨 쓸 기회 있으나 步步驚心地 걸음걸음마다 마음이 놀라네 위의 시는 허성이 1594년의 사행 도중 쓴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당대의 정 치 현실에 대한 그의 부정적 생각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구에 보이는 금문 은 곧 대궐의 문 을 이르므로, 금문(金門)에다 잘못 적을 통했다[金門謬通 籍]는 것은 허성이 출사 이후 지난 10년에 대해 회의(懷疑)를 느끼고 있음을 고 백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사방이 정적(政 敵)으로 들끓는 조정에서 겪는 운신의 어려움과 궁에 들어와 낮잠이나 자다 가 는 무능한 관리들에 대한 비판이 크게 작용한 듯한데, 어쩌면 허성 자신도 이러 한 관료 사회의 행태가 국가적 대란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음을 뼈아프게 자각하 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781) 이 같은 허성의 현실 비판은 허봉에 이르러 좀 더 심화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허봉은 그의 저술들을 통해 현실의 제반 모순들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다음의 글을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아침에 군수(郡守) 이충원(李忠元)과 찰방(察訪) 우천기(禹天機)를 만나 본 뒤 파주(坡州)로 향하였다. 근래 20여 일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혹심하여 먼지는 하늘에 자욱하고 보리는 거의 말라 색깔이 누렇고 싹은 짤막하며, 거북이등 모양이 된 논에는 푸른 벼 싹이 바늘 같이 꼬여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옛말에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있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원망 하는 기운이 많아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어제 들으니, 예조(禮曹)에서 기우 절목 (祈雨節目)을 만든다고 하였는데 이는 더욱이 겉치레에만 그치는 것이다. 만약에 781) 拙稿(2003), 앞의 논문, p.44 참조

276 임금 노릇하는 이가 두려워하고 각성하여 상림육책(桑林六責)782) 같은 것이 있다 면, 인애(仁愛)한 하늘을 다시 돌이킬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아! 천 명을 두려워하고 궁핍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말세[叔季]에서야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치도(治道)가 날로 저하되어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때인 것이다.783) 허봉이 생존했던 16세기 조선 사회는 전대로부터 이어져 온 각종 제도 법령 의 폐단 및 지배층의 과도한 농민 수탈로 야기된 내부 모순으로 인해 체제적 위 기 상황을 맞고 있었는데,784) 허봉 또한 그 같은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 음을 위의 글로써 알 수 있다. 그는 국정이 문란하고 민생(民生)이 피폐해진 원 인을 통치 계층의 부덕(不德)으로 돌리고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현실을 심히 탄 식하고 있는데, 허봉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의 시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발현된 다. 지아비를 그리는 노래[羅嗊曲] 嫁作水軍婦 수군에게 시집을 오니 水軍能盪舟 수군은 배를 잘도 젓네 朝朝沙浦口 아침마다 포구에 나와 辛苦望潮頭 괴로이 물결 바라보네 里胥勸我農 마을 아전 내게 농사를 권하고 782)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탕왕(湯王)이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때 하늘에서 백성을 제물로 바쳐야 비가 온다는 계시를 내렸다. 탕왕은 이에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고 하며 자책(自責)의 시를 읊었는데 이것이 상림육책(桑林六責) 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政不節歟 정치가 절제 없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民失職歟 백성들이 직업을 잃고 곤궁해졌기 때문입니까?, 宮室崇歟 궁전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때문입니 까?, 女謁盛歟 베갯머리 송사가 심하여 인사가 공정하지 못한 때문입니까?, 苞名行歟 뇌물이 성행하여 법도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讒夫昌歟 참소하는 말로 인해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783) 許篈, 朝天記, 1574년 5월 12일 朝與郡守李忠元察訪禹天機相見後向坡州 近來二 十餘日不雨 旱氣太甚 埃塵漲天 來牟盡悴而色黃穗短 水田則皆作龜背形 靑秧如針然 爲風 所搖 慘不忍視 諺云 軍籍之後 必有凶年 意者多致怨氣而然歟 昨日 聞禮曹將擧祈雨節目云 此特文具之末耳 曷若君人者惕厲警動 有如桑林之六責 則仁愛之天 必有可回之理 而今則不 然 噫 畏天命而悲人窮者 安得見於叔季之世乎 宜其治道日降 而終無挽回之時也 784) 金貞信, 16세기 전반 훈구 사림의 관료제 운영론 비교, 朝鮮時代史學報 47輯, 조선시대사학회, 2008, p

277 品官勸我耕 벼슬아치는 밭을 갈라 하는데 寒籬一吠犬 쓸쓸한 울타리에서 짖던 개 還爲品官烹 돌아오니 벼슬아치가 삶아 먹었네785) 이 시는 수군의 아내가 겪는 괴로운 삶을 읊고 있는데, 관리들이 농사일을 강 요하는 한편 민간의 개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백성을 수탈하는 현실을 여성 화자 의 목소리를 빌어 고발하고 있다. 허봉의 이 같은 태도는 그가 9세 때 지은 금 전화 에서 돈 모양의 꽃을 보고는 세상 사람들이 몇 푼의 동전이 귀한 줄만 알 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할 줄 모른다고 꼬집고 있는 것786)이나 순무어사 시절 변방을 돌아보며 초가집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룻밤 서리 787)라 읊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서, 당대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비판적 시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허봉의 시 의식이 난설헌에게 영향을 주어 빈녀음(貧女吟) 788) 과 같은 작품이 나왔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난설헌은 비록 사대부가의 규중 여인 이었지만 풍유시(諷諭詩)로써 사회의 모순과 결함을 지적하는 등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데,789) 빈녀음 에 보이는 시 의식은 (소외된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들어 낸 물건을 마치 낯선 물건처럼 대하게 된다 거나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주변의 사람들, 혹은 동료)로부터 소외시킨다 고 한 마르크스(Marx, Karl Heinrich)의 인식과 합치되는 수준 높은 것으로서, 785) 許篈, 위의 책, 荷谷先生詩鈔補遺, 詩, 羅嗊曲 786) 박수천, 荷谷 許篈의 詩文學, 한국한시작가연구 7집, 한국한시학회, 2002, p ) 허균, 앞의 책, 惺叟詩話 중형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 白屋經年病 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靑苗一夜霜 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룻밤 서리 라고 읊었다.( 仲兄奉使北方 登壓胡亭作詩曰 白屋經年病 靑苗一夜霜) 788) 허난설헌의 빈녀음(貧女吟) 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절구(絶句) 시로 그 전문(全文) 은 다음과 같다. 豈是乏容色 이 얼굴 남들만 못하지 않고, 工鍼復工織 바느질 길쌈도 솜씨 있건만, 少小長寒門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란 탓으로, 良媒不相識 중매인이 발 끊 고 몰라라 하네 / 不帶寒餓色 추워도 주려도 내색치 않고, 盡日當窓織 하루종일 창가에 서 베만 짜나니, 唯有父母憐 부모님은 가엾다 생각하지만, 四隣何會識 이웃이야 그런 사 정 어이 알리요 / 夜久織未休 밤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戛戛鳴寒機 짤깍짤깍 바 디 소리 차가운 울림, 機中一匹練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 終作阿誰衣 필경엔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 手把金翦刀 가위 잡고 삭둑삭둑 옷 마를 제면, 夜寒十指直 밤은 추워 열 손가락 곱아 드는데, 爲人作嫁衣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年年 還獨宿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789) 한성금, 許蘭雪軒 漢詩의 美學, 조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p

278 마르크스가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로 소외론을 제기한 반면 그녀는 오로지 시 적 직관만으로 빈자(貧者)의 노동이 그 결과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을 자각했음 을 알 수 있다.790) 그런데 사회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조선조 규중 여인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까닭에,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체험하지 못한 난설헌이 빈녀음 과 같은 시를 쓸 수 있던 데에 는 가풍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술한 여러 사실들을 고려할 때, 당시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문예를 통해 이를 개선하고자 했던 허균의 태도는 가정의 전통 내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함이 마땅하다. 허균은 문학도 그 나름의 사회 교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 는데, 특히나 당절선산 서(唐絶選刪序) 의 기록은 그가 선심을 감발시키고 악 을 징계하는[感發懲創] 791) 것을 시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로 여겼던 사실을 알 게 한다.792) 또 그의 문학사상에서는 현실을 중시하는 사실주의적 입장 및 불합리한 사회 제도에 저항하는 비판 정신과 민중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한시를 통해 임 진왜란 중 겪은 전란의 참상을 치열하고 적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진정한 사실 주의적 경향을 획득하였으며,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작품에 반영함으로써 우리 고전문학이 중세를 거쳐 근대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 다.793) 790) 이덕일, 여인열전, 김영사, 2003, p.316 참조 791) 許筠, 앞의 책, 卷5, 文部2, 序, 唐絶選刪序 일찍이 이르기를 '시의 도는 삼백편(三 百篇)에 크게 구비되어 있다'고 했거니와 그 화하고 부드럽고 인정이 도타워 족히 선심 을 감발시키고 악을 징계할 만한 것은 국풍(國風)이 가장 훌륭하고, 아(雅)와 송(頌)은 이로(理路)에 관계되어 성정(性情)의 거리가 좀 멀어졌다. 그리고 한(漢)ㆍ위(魏) 이후로 는 시를 한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요, 또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너무도 상 세하고 세밀한 데로 잘못 빠져들었다. 이는 특히 아(雅)ㆍ송(頌)의 유(流)가 범람한 것이 니, 어찌 성정의 도에 허여할 수 있겠는가? 당나라에서 시로 이름이 있는 자가 거의 수천 명이지만, 대개는 이에서 벗어나지 않 으며, 심지어 기려와 풍화(風花)가 그 바른 기운을 손상했고, 흘러서 교화주(敎化主)의 나무람을 받게 되었다. 이 어찌 시도(詩道)의 재앙이 아니겠는가? (嘗謂詩道大備於三百 篇 而其優游敦厚足以感發懲創者 國風爲最盛 雅頌則涉於理路 去性情爲稍遠矣 漢魏以下爲 詩者 非不盛且美矣 失之於詳至宛縟 是特雅頌之流濫耳 何足與於情性之道歟 唐之以詩名者 殆數千 而大要不出於此 甚至綺麗風花 傷其正氣 流而貽敎化主之消 此豈非詩道之陽九耶) 792) 이문규, 허균 문학의 실상과 전망, 새문사, 2005, p.259 참조

279 그런데 허균의 문학을 통해 발견되는 이 같은 특징들이 그 형 허봉의 저술에 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음 허봉의 글을 보자. 루(樓)에서는 정전(井田)의 옛 구획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이는 곧 기자(箕子)가 도읍한 곳이었다. 나는 삼대(三代)의 경계(經界)가 고르던 것을 생각하며 말세에는 부역(賦役)이 무거움을 걱정하려니 슬퍼서 창연하였다. 아아! 그 누가 이를 바로잡 을 수 있으랴!794)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공물(貢物)의 액수가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할 수 없음을 근심하였는데, 지금 중국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들으니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는 온 천하가 다 그러하였다. 무릇 중화와 이적(夷狄)에는 안과 밖이 있다 하더라도 근심을 멀리 하려 하거나 은혜를 바라는 천성(天性)은 온 세상이 한결같은 것이니, 이는 어진 사람과 덕 있는 사람이 마땅히 유념해야 할 바인 것 이다.795) 위의 글들은 허봉이 조세와 부역의 과도함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현실을 말세 로 인식했던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대의 조헌(趙憲)이 백성을 괴롭히고 민생을 곤궁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진상(進上) 등의 공물 제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군역 부역 제도의 불합리성 및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것처럼,796) 허봉은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 을 당하는 현실을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허봉의 생각이 허균의 다음 시들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것 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93) 조동일, 허균 세대의 임진왜란과 한시의 변모 (김태준 外, 임진왜란과 한국문학, 민음사, 1992) 참조 김태준, 허균의 혁신사상, 한국어문학연구 33집, 한국어문학 연구학회, 1998, p.140에서 재인용 794) 許篈, 朝天記 上, 甲戌 5월 23일條 樓可以望井田舊畫 卽箕子所都處也 余思三代經 界之均 念末世賦役之重 爲之悵然 噫 其孰能正之哉 795) 許篈, 위의 책 中, 甲戌 7월 29일條 (余嘗患我國之貢額煩重 民不堪命 今聞中朝亦如 此 則愁怨之聲 擧普天下皆然矣 華夷雖有內外 其違憂懷惠之性 環四海如一 仁人君子 之所宜動念也) 796) 김인규, 重峰 趙憲 改革思想의 실학적 특성, 동양철학연구 41집, 동양철학연구회, 2005, p

280 느낀 바가 있어 부치다[寓懷] 田畝略拋荒 밭이랑 거의 다 묵어 버리고 人民半死亡 백성은 절반이 죽어 없어져 征徭仍聚斂 부세는 여전히 거둬들이고 水旱更蟲蝗 홍수 가뭄 벌레까지 덮치었구려 政豈推高第 나랏일 어찌 후배에게 미룰까마는 情還憶故鄕 내 마음 도리어 고향 그리네 空慙二千石 헛된 녹 이천 석이 부끄러워라 不逮漢循良 한나라 어진 관리 어이 미치랴797) 위의 시에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이를 위무(慰撫)해야 하는 관리로서의 고 충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즉, 잇닿은 자연 재해로 인해 농촌이 황폐해지고 인 구조차 감소하였음에도 조세와 부역의 강요는 여전한 현실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자신의 정사가 봉공수법(奉公守法) 하 던 한나라의 순리(循吏)에게 미치지 못하고 녹만 축낸다고 하여 자신의 벼슬살 이를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경을 표현하 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사를 피력한 것은 바른 정 사를 제대로 펼칠 수 없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우회적 불만의 표현으로 여 겨진다.798) 본 것을 기록하다[記見] 老妻殘日哭荒村 해 저문 날 황촌(荒村)에서 통곡하는 늙은 아낙네 蓬髮如霜兩眼昏 귀밑머리 서리 같고 두 눈까지 침침하네 夫欠債錢囚北戶 남편은 빚 못 갚아 감옥에 갇혀 있고 子從都尉向西原 아들은 도위 따라 청주로 떠났다네 家經兵火燒機軸 난리통에 집은 불타 버리고 身竄山林失布褌 이 산 저 산 피난길에 옷가지마저 잃었다네 産業蕭然生意絶 먹고 살 일 아득하여 살맛조차 안 나는데 797) 許筠, 앞의 책, 詩部1, 遼山錄, 寓懷 798) 이문규(2005), 앞의 책, p

281 官差何事又呼門 관가 아전 무슨 일로 또 문을 두드리나799) 위의 시는 허균이 임진왜란 중 피난길에 직접 목격한 사실을 읊은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전란의 와중 조세와 부역으로 인해 몇 배의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잘 드러나 있는데, 폐허가 된 마을에 혼자 남아 통곡하는 늙은 여 인은 당시의 조선 민중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의 가족 들은 감옥으로, 전쟁터로 뿔뿔이 흩어졌고 병화(兵禍)로 인해 얼마 되지 않는 가 산(家産)마저 잃었음에도 백성들에 대한 관리나 토호들의 수탈은 여전히 계속되 고 있어, 그 고통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허봉 허균 형제는 당시 조선의 인민들이 처한 비참한 삶의 실상을 문 학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상황을 야기한 주범이 조세와 부역 등 사회제도의 모순이었음을 분명히 인식하였는데, 사행 도중 관문(關門)을 지나며 만난 변방의 주민들에 대한 시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먼저 허봉은 사행과 관련한 우리나라의 제도가 지나치게 번잡하여 백성들이 큰 곤욕을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혼에는 장언용(張彦龍) 민훈(閔勳) 등이 이르러 노상에서 겪은 고생을 말하 되 걸핏하면 수삼 일씩 끼니를 거르고 더러는 풍우에 노숙하며 밤을 새웠다 하는 데, 이를 들으니 마음이 참혹하였다. 국가는 평안도에 호송재지군(護送載持軍) 1천 1백 19명을 두어서 오로지 사신의 행차를 맞이하게 보내게 한다. 일 년 중 만약 사행이 번다하면 하루도 휴식할 수 가 없으니, 그 고생은 변경을 지키는 것보다 심하였다. (중략) 경기 황해 평안도 는 참마(站馬)가 부족하므로 민간에서 뽑아 수십 리마다 간단없이 길을 달리니, 원 성이 길에 가득하다. 그런데도 주색(酒色)에 빠지고 멋대로 형장(刑杖)을 행하면서 도 그 질고(疾苦)가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비록 유식한 자라 하더라도 역시 몽연(矇然)하여 이러한 과구(窠臼)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다.800) 799) 許筠, 앞의 책 卷 2, 蛟山憶記詩, 記見 800) 許篈, 위의 책, 甲戌 10월 5일條 黃昏 張彥龍閔勳等至 備言路上之苦 不食者動經數三 日 或露坐風雨中以達夜云 聞之慘怛 國家於平安道 設護送載持軍一千一百十九名 專以迎送 使臣之行 一年中若使行繁多則不得一日休息 其苦之甚於戍邊 自義州至遼東 大約三百餘里 往來之際 水潦風雪 所不能免 例多留滯之時 粮料斷絶 人馬飢凍 都司循例散給兵粮 而軍人 徒計目前之利 貿些小帽精等物以還 故恒患乏食焉 (중략) 京畿黃海平安一路 站馬不足 調發 民間 絡繹于道 數十里不絶 怨聲盈路 而方且沈湎酒色 亂施刑杖 罔知疾苦之如何 雖有識者 亦矇然不脫此窠臼中

282 윗글에 언급된 호송재지군(護送載持軍) 은 조선시대 사신이 중국에 오갈 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수행시킨 군사들이다. 이들은 군 사적인 임무 외에 유통이 금지된 세포(細布) 인삼 등을 매매하거나 걸식을 하 는 등의 일들을 감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허봉은 이들이 왕래할 때에 장 마와 풍설(風雪)로 인하여 양식이 끊기니 인마(人馬)가 굶주리거나 얼어 죽은 예 가 많다 고 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심경이 참담하고 슬프다[慘怛] 고 기 록하고 있다. 또한 사신의 행차 때마다 민간의 말을 징발하여 원성이 자자함에도 정작 관리들은 주색에 빠지거나 형장(刑杖)으로써 백성들을 억누르는 일이 잦다 고 하여,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었다. 허균의 을병조천록 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의 시를 찾아 볼 수 있다. 행산에서 앞 시의 써서 지음[杏山用前韻] 鳴析秋嚴戊己屯 변방 진압 중앙군이 추상 같이 울리니 城譙殘角報黃昏 깨어진 성문 고각 날 저묾을 알려 주네 霜凝鐵鎧寒初重 병사들의 무쇠 갑옷 서리 엉겨 너무 춥고 風掣蝥弧凍自翻 거센 바람 언 군기를 우산 꺾듯 뒤집네 疆場未寧誰禁暴 국경이 불안하니 포악한 적 누가 막나 戌兵將老只消魂 수자리 병사 늙어지면 충혼조차 지워지네 貂裘弊盡金刀澁 군복은 다 낡고 무기조차 무뎌져서 辛苦班超望玉門 온갖 고생 겪은 반초 왕궁만 바라보리801) 동관에서 잘 때에 있었던 일을 씀[宿東關記事] 城上半夜角鳴鳴 성 위에선 밤중에도 호각소리 요란해 問聚兵將攝胡胡 장졸 모아 오랑캐를 잡으려 한다네 人農月輒搶掠 사람들은 농월인데 식량 모두 빼앗기고 耕牛耕民多被駒 밭 갈던 소와 사람 많이도 잡혀가네 所以將軍巡障璲 장군의 순행길이 막혔기 때문이니 刊木燒山備不虞 산의 나무 불을 질러 근심을 없앤다네 801) 許筠 著, 최강현 譯, 國譯 乙丙朝天錄, 국립중앙도서관, 2005, p

283 邊氓艱苦有如此 변방 백성 간고함이 이와 같으니 雖種秋禾飢欲死 비록 농사 지어본들 가을에 굶어 죽네 安得盡復三衛地 어찌 하여 삼위지를 되찾을 수 있으리 遂令虜帳稍北徙 마침내 오랑캐를 북쪽으로 가게 했네 東藩之人亦徼福 동쪽 국경 사람들 복을 구하러 無事年年渡遼水 하릴 없이 해마다 요수를 건넌다네802) 위의 시들은 허균이 을묘(乙卯, 1615)와 병진(丙辰, 1616) 연간에 중국을 오 가며 지은 시문의 일부인데, 비록 그 배경은 중국으로 되어 있으나 국경 지방 주민들의 고달픈 삶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어 눈길을 끈다. 즉 무쇠 갑옷에 서 리가 낄 정도의 추운 날씨에 수자리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고초와 오랑캐의 잦 은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관(官)의 수탈과 횡포까지 더해짐으로써, 참 을 수 없을 정도의 간고(艱苦)함에 시달리는 변방 백성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허균이 이렇듯 중국 국경 지역 주민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그들의 모습에서 당시 조선 변경 지역 백성들의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던 듯싶다. 당시 조선 변방 주민들의 생활 역시 그 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안도 지역 주민 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율곡 이이의 글을 참고할 만하 다. 도내 백성의 병폐에는 큰 것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먼 서쪽 변방에 가서 수 자리 사는 괴로움이며 둘째는 진상(進上)이 번거롭고 무거운 폐단입니다. 이른바 먼 서쪽 변방에 가서 수자리 한다 는 것이 이런 뜻입니다. 본도의 군졸이 국초(國 初)에는 연해의 각 진(鎭)에만 머물러 방비하였는데, 그 후에 서쪽으로 나누어 보 내 평안도에서 수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그리하여 부방(赴防)한 지 얼마 안 되어 전대는 텅 비어 버리고, 한 번 북풍이 일면 거북이 목같이 오므라들어서 움 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또 적은 것이라도 시키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고용해 대신하게 하느라 옷을 전당에 잡히고 말을 팔아 거의 벌거숭이가 되어 버 리며, 배가 고프고 지쳐서 병이 듦으로 사람의 형상 같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해 서 말 탄 적군을 만난다면 달음질쳐 도망조차 못 갈 형편인데, 하물며 어찌 적을 802) 위의 책, p

284 막고 방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서쪽 사람들은 이 군대를 황군(黃軍)이 라 하여 뭇 개미들이 노린내 나는 고기 한 덩이를 물어뜯듯이 하고 황군으로서 수 자리에 가는 자는 함정에 몸을 던지는 것 같다고 여깁니다. 한 번 수자리 역(役)을 겪고 난 후에는 그 집을 보전하는 자가 열 집 중 예닐곱이고 두 번 나간 뒤 패가 (敗家)하지 않는 자는 열 집 중 서넛이며, 세 번 갔는데도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열 집 중 한둘입니다.803) 허균과 동시대에 살았던 이이의 기록은 당시 변방 지역 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허균 역시 여러 차례 사행을 다니며 이 지역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도하였던 바,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앞의 시들을 낳게 한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전술했듯 허봉과 허균은 당시를 말세의 징후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백성들 의 삶을 도탄에 이르게 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사회제도의 모순과 관리들의 부패 를 지적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종내에 다스리는 자의 도리가 무엇인가 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허봉이 남긴 다음의 글귀는 여러 모로 시사해 주 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나는 또 지금의 지주(知州)는 직책을 맡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 찌 그가 정사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까? 라고 물었다. 막위충이 대답하기를 윗사람 된 이가 한번 손을 움직여도 아랫사람은 모두 이를 아는 것입니다. 하물며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어찌 이를 모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전의 지주는 술만 마시고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어사(御史)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 는데, 인하여 (사람들이) 그가 술에 취해 거꾸러지거나 비틀거리는 꼴을 흉내 내곤 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백성의 윗사람이 되는 자는 매양 백성을 어리석다 하여 그 위에 서 교만하거나 방자하게 구는데, 백성들이 지극히 어리석고 신통한 것을 알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그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는 것은 하나같이 공평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위세로 굴복시키거나 교묘한 말로 꾀일 수 없는 803) 李珥, 栗谷全書 卷 5, 疏, 陳海西民弊疏 道內民瘼 大者有二 一曰 西塞遠戍之苦 二 曰 進上煩重之弊也 所謂西塞遠戍者 本道軍卒 國初 只留防沿海各鎭 厥後 分運西戍于平安 道 (중략) 赴戍未幾 行橐已罄 朔風一起 龜縮不動 少有使令 必雇他人 典衣賣馬 宛轉赤脫 飢羸成病 不似人形 此等如遇虜騎 則走避之尙不能 況有扞禦之望乎 是故 西人目爲黃軍 如 羣蟻之嘬羶 黃軍之臨戍者 擬投身於陷穽 一經戍役 則能保其家者 十室而六七 再行而能不 敗家者 十室而三四 三行而得免死亡者 十室而一二

285 것인데도, 대개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여겨 생각지도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이 문답한 말을 종이에 써 민풍(民風)을 관찰하는 이들에게 남겨 줌으로써 두려워해야 할 바를 알게 하려고 하였다.804) 허봉은 위의 글에서 백성이 비록 어리석은 존재이기는 하나, 일의 시비(是非) 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이 공평히 지닌 것 이므로, 관리들이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거나 교묘한 말로 속이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 글을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이 민풍(民風)을 관찰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바를 알게 하려 함 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의 민풍을 관찰 하는 이들[觀民風者] 이란 목민관(牧民官) 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허봉 은 오직 오만함만을 지닌 채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관리들의 태도를 경계하고, 백성이야말로 모든 다스리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 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주장이 허균의 호민론(豪民論) 을 통해 반복 재생산되 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허균은 이 글의 서두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백성을 훨씬 더 두 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805)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앞선 허봉의 주장 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것이어서 흥미롭다 하겠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이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한데도 위에 있는 사람이 태평스럽다 여기고 두려 워할 줄 모르는 것은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고 전제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임을 명확히 알아서 전철(前轍)을 고친다면 (나라를) 그런 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 806)이라 하여, 치자(治者)의 책임과 도리 를 분명히 하였다. 804) 許篈, 위의 책, 甲戌 7월 29일條 余曰 今知州到官未久 你何以知其不會做乎 違忠曰 爲人上者一動手 下皆知之 況經月之久乎 又說前知州酗酒不事事 爲御史所劾而罷 因效其醉 倒僛俄之狀 以爲戲笑 由是而觀之 則長民者每以黎庶爲蠢蠢 而侈然以肆於其上 殊不知民雖 至愚而神 其是是非非一出於公心 有不可以威勢屈利口誘焉者也 而凡人忽不之念者何哉 余 欲書此問答之辭於一紙 以遺觀民風者 使知所懼焉 805) 許筠, 앞의 책 卷11, 文部8, 論, 豪民論 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民之可畏 有甚於 水火虎豹 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 抑獨何哉 806) 許筠, 위의 글, 有甚王氏之季 上之人恬不知畏 以我國無豪民也 不幸而如甄萱 弓裔者出 奮其白挺 則愁怨之民 安保其不往從而祈梁六合之變 可跼足須也 爲民牧者 灼知可畏之形 與更其弦轍 則猶可及已

286 지금껏 논의한 여러 사실들은 허봉 허균 형제의 문학 행위가 동일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물 역시 일정한 맥락 하에 서로 연계되어 있 음을 입증한다. 당대사 를 중시하는 허봉의 저술 태도는 상어(常語) 의 활용과 현실의 취재를 강조하는 허균의 문예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허균의 문학 에서 보이는 비판적 현실 인식 및 개혁사상, 산문에 대한 관심 역시 허봉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한 사실을 밝힐 수는 없으나, 부친 허엽과 백형 허성이 이들 가문의 학문과 문예에 기여한 공로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허엽은 자국의 역사, 특히 당대사를 중시하였고 우리 문화에 대해 상당한 자 부심을 지녔던 인물인데, 이 같은 그의 태도가 그 자녀들에게 두루 영향을 끼쳤 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허엽은 진보적 사림으로서 개혁의식을 표방하는 한편,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 박학의 풍모를 견지하였는데 이러한 성향 역시 그 자녀 들에게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허성의 경우 또한 그가 문예보다 경학에 주력하였기에, 사상적인 측면에서 아우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기술한 허성의 행적들은 그 가 사상적 유연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 고 해결하고자 했던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기전도설후어 에 나타나 는 개혁사상은 후대 남인 계통의 실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조선후기 실학 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서, 허균에게 이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807) 그 밖에 도 그가 부친의 뒤를 이어 화담 계열의 문인 및 하층민들과 두루 교유함으로 써 개방적인 가풍 형성에 일조했던 사실이 인정된다고 하겠다. 허엽 일문이 일궈낸 학문과 문예 방면의 성취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보 적인 수준이라 평가할 만하다. 다양한 사상을 담보하고 있는 허엽 일문의 행 적은 중세의 혼란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지향했던 조선 중기 지식인들의 면 모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을 통해 발견되는 사유의 개방성 및 현실에 대한 관심, 비판적 개혁적 시각,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 등은 조선후기 실학 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적 조류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실이 인정된다. 807) 허성과 허균이 비록 이복(異腹)이기는 하나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관계가 소원하지 않고 우애를 나누었던 사실이 인정되며, 1588년 세상을 떠난 허봉과 달리 허성은 1612 년까지 생존하여 정치적 위기에 처한 허균을 여러 차례 구원하는 등 상당한 영향을 미 쳤음이 확인된다

287 또한 봉건적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하층민과 교유하고 이를 스스럼없이 드 러냈던 그들의 개방적 태도는 후대 위항시사 결성의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여, 문학사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는 허난설헌 과 허균 이라는 걸출한 두 작 가의 문학이 바로 가정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허엽 일문의 독특한 가학이야말로 한 위대한 여성작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허균 을 문학사의 중요 존재로 각인시킨 일등공신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288 Ⅴ. 結論 지금까지 허엽의 학문이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사림의 도학(道學) 정신 에 근 간을 두고, 여기 다시 서경덕 김안국 등의 영향을 더해 독특한 가학(家學)을 형성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나타난 허엽의 복잡한 사승 관계는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갖고 그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16세기 조선 지 식인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허엽 학문의 주축을 이루는 기묘사림의 도학 사상은 외견상 요순삼대(堯舜三 代)에 나타난 지치(至治) 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복고적 성향을 띤 것으로 보이 기도 하나, 실상은 훈구대신의 집권과 그에 의해 파생된 제반 모순을 극복하고 유교사회의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진보적 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만하다. 반면 서경덕 조식과 같은 재야 사림들 은 사화와 당쟁을 피해 초야에 은거, 처사로서의 삶을 견지하면서도 다양한 학문 과 사상에 대한 모색을 그치지 않았는데 허엽의 학문적 성과는 이렇듯 다양했던 당대 사상계에 대한 관심과 모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친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던 허엽의 자녀들은 특히나 서경덕의 학맥, 동인 의 정치적 계보 속에서 성장하고 활동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유기론적(唯氣論的) 세계관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서경덕의 유기론은 기(氣) 를 중심에 두어 설명 함으로써, 이(理) 우선론에서 내세우는 천리(天理)에 대한 극단적 추존에서 벗 어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사상을 배제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회통적(會通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허엽과 그 자녀들이 성리학을 그 사상적 종지로 적극 천명하면서도 일면으로 주자성리학의 정론(正論) 과 어 긋나는 행보를 보인 까닭은 이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허엽의 학문은 가학을 통해 그 자녀들에게 온전히 전수되었는데, 동년배인 허 성(許筬) 허봉(許篈) 형제가 부친의 학맥과 정치적 이념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 실천에 주력한 반면 허균(許筠)의 경우에는 부친의 영향권에서 다소 멀어진 사실이 확인된다. 하지만 허균 역시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가학을 통하여 성 장한 만큼 그 행적 곳곳에서 부형(父兄)들과 유사한 궤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허엽의 여러 자녀들 중 그 부친과 가장 유사한 성향을 띠는 인물은 맏아들 허 성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이학(理學) 을 자처하였으나 실상은 화담 계열의 문인

289 들과 밀접히 교유하며 화담을 추존하는 일에 앞장섰고, 주자성리학의 원칙을 무 조건 고수하기보다는 현실 상황을 중시하는 기일원론자의 태도를 보인 것이 여 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허성의 기일원론자 적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로는 기전도설후 어(箕田圖說後語) 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기전(箕田)의 실체를 긍정함으 로써 궁극적으로는 정전제(井田制) 원리에 의한 토지 제도의 실현 가능성을 인 정하였으며, 동시에 정전의 실재나 토지 제도의 전면 개혁에는 부정적이었던 주 자의 토지론에 간접적인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또 기전에 대한 한백겸의 문제의 식이 정전제가 실재했던 제도임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정전제의 이념, 즉 경자유 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제도 개혁의 역사적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 고자 한 데 있었음을 생각할 때, 그에 동조한 허성 역시 한백겸과 마찬가지로 그 사상적 기저에 진보적 개혁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허성이 평소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과 교유한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서, 이는 그가 사행 중 만난 일본의 선승(禪僧)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함 께 시를 수창하고 그에게 조선 유학을 전했던 일과 일정 부분 서로 통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허성은 세이카를 위해 지은 시립자설(柴立子說) 을 통해 유학 의 도(道)에 입문하기 위한 방법을 강론하는 한편,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 내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그의 비판이 지극히 온건하고 일반적인 수준에 그친 것이나, 불교와 유학을 동일선상에서 논하고 은연중 불교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한 사실 등은 소위 이단(異端) 을 대하는 허성의 사상적 포용성을 입증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 은 1575년(선조8) 삼각산 승가사에서 여러 문인들이 모여 수창했던 시를 모아 놓은 필사본인데, 이 시회가 천인 출신의 시인 및 승 려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허성은 같은 화담 계열 의 문인 홍이상 우복룡 서기 등과 함께 이 시회에 참석하였으며, 침류대의 주 인 유희경과도 신분을 초월해 오랜 기간 우의(友誼)를 나누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 승가사시회 는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 의 본격적 활동 시기보다 무려 40 여 년 이상을 앞선 것으로, 그 집단 구성원의 다양성은 16세기 중반 이후 사대 부 계층을 중심으로 시작된 사상적 변모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중심에 실천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지닌 화담의 문인들이 대거 포진되 어 있다는 사실은 개방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을 지향했던 화담 학문의 특색을 보

290 여주는 예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허봉의 사상적 지향을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해동야언(海東野言) 인데, 그가 이 책을 편찬한 원래의 목적은 사림의 도통(道統)의식을 표방하기 위함이 었다. 하지만 허봉은 김종직 조광조 등 사림의 핵심 인물들 외에도 재야사림 및 방외의 인물들과 관련된 사실까지 모두 수록하는 포용성을 보였으며, 불교나 노장 등 이단적 사상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결국 해동야언 은 사림의 일원으로서 허봉의 사상적 지향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지 닌 사상의 개방성 및 자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 을 것이다. 허봉의 또 다른 저서인 조천기(朝天記) 에는 1574년의 사행 당시, 그가 명의 사대부들을 대상으로 양명학 변척 활동을 벌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간의 연 구를 통해 이 같은 변척의 배경에 동인(東人)의 영수로 활약한 허봉의 입장이 크게 작용했음이 확인되었지만 필자는 공적(公的)인 입장이 아닌, 순수한 개인적 인 의도로써 그가 변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제기하였다. 즉, 허봉이 조 선 유학의 학문적 성과를 유학의 종주(宗主)인 중국에 과시할 목적으로 사행에 자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것이다. 허봉과 그 형제들은 부친 허엽의 영향 을 받아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며 자국의 문화 수준에 대 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허봉이 사행 중 양명학 변척 활동을 통해 조선 유학의 기본 입장을 지속적으로 천명한 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난설헌은 대개의 여성들과는 달리,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경험을 통해 집단으 로서의 조선 여성 과는 구분되는 개인으로서의 내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이는 애초부터 사족(士族)의 여성 인 그녀가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 었으므로, 그녀의 남다른 재능과 주체의식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기대와 끊임없이 불화(不和)하였고 종국에는 상충하는 두 자아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허씨 일문의 개방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난 설헌의 삶을 불행으로 이끈 주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그간의 난설헌 문학 연구는 지나치게 여성성 을 강 조하는 방향으로 치우친 감이 있었다. 문학 연구에 있어 여성주의적 시각은 여 성 을 기준으로 삼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문학사를 보다 새로이 인식하는 데에 기여하지만, 지나친 여성성 의 강조는 때로 문학사의 전반에서 여성 을 분리시

291 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 문학으로의 난설헌 연구는 새로운 논의를 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난설헌의 글쓰기는 일각에서 주장하듯 남성 사회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행위라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사유(思 惟)들을 열린 시각으로 포용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녀는 소수자인 여성 이었으므로 제도적 글쓰기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 이다. 난설헌의 시 속에 주체적인 나와 타자화 된 나, 이성과 감각, 남성성과 여성성, 현실과 꿈 등 온갖 상반되는 것들이 공존하고, 당시에는 금기로 여겨 졌던 성적 담론이 표출되고 있는 것 등은 난설헌의 문학, 나아가 여성 문학이 지니는 소수자 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우리 역사상 가장 박학했던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될 만큼 남다른 독서 열을 가진 인물이었다. 실제로 허균의 독서 범위는 경서와 소설, 시와 문장 및 패관잡서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어, 그의 박학 이 어디에서 나온 것 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 독서 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마음 의 위안을 얻기 위한 의도가 강했으며, 단지 유가에서 말하는 도 를 체득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허균에게 있어서는 유교의 경전도, 이단의 사상 이나 예술도 다 같은 지적 탐구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그 경중(輕 重)의 차이에도 불구, 허균 자신의 기호적 취향에 의해 취택(取擇)되어 그의 문 화적 욕구를 채우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그간 논란이 되어 왔던 허균의 천주교 수입설을 검토한 결과, 그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보는 견해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허균이 서학에 관심을 갖고 천주교 관련 서적을 읽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보이나, 신자로서 천주교를 신앙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을 학 문적 종지로 표방하면서도 불교와 도교,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두 루 섭렵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천주교 역시 종교로서가 아닌, 새로운 학문의 일 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연구자들에 의 해 제기된, 홍길동전 이 기독교적 유토피아를 표방한 소설 이라는 주장은 재고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허균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홍 길동전 이 그의 기독교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이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허봉 허균 형제의 문학 행위가 동일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물 역시 일정한 맥락 하에 서로 연계되어 있음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입증

292 된다. 당대사 를 중시하는 허봉의 저술 태도는 상어(常語) 의 활용과 현실의 취 재를 강조하는 허균의 문예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허균의 문학에서 보이 는 비판적 현실 인식 및 개혁사상, 산문에 대한 관심 역시 허봉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비록 저술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부친 허엽과 맏아들 허성이 이들 가문의 학 문과 문예에 기여한 공로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허엽은 자국의 역사, 특히 당대사를 중시하였고 우리 문화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지녔던 인물인데, 이 같은 그의 태도가 그 자녀들에게 두루 영향을 끼쳤음은 여러 사실들로써 증 명된다. 그는 또한 진보적 사림으로서 개혁의식을 표방하는 한편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 박학의 풍모를 견지하였는데, 이러한 성향 역시 그 자녀들에게서 뚜렷 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허성의 경우 또한 그가 문예보다 경학에 주력하였기에, 사상적인 측면에서 아 우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기술한 허성의 행적들은 그가 사 상적 유연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 하고자 했던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부친의 뒤를 이어 화담 계열의 문인 및 하층민들과 두루 교유함으로써 개방적인 가풍 형성에 일조했던 사실 또한 부 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허성 허봉 난설헌 허균 남매가 부친 허엽을 통해 사상적 개방성과 문화적 자존감을 획득한 사실을 그 행적으로써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여러 차례의 사행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해외에 전파하고 미천한 신분의 인물들 과 어울리며 문화 예술의 담당층 확대에 기여한 사실은, 허엽 일문의 사상적 특질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분야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포용 절충하려는 이 들의 모습을 통해, 주자성리학 일변도로 치닫던 16세기 조선의 학계에서 성리학 의 이론 탐구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모색하는 데 전력했던 당대 지 성의 면모가 드러난다. 즉, 이들 허엽 일문이야말로 학문의 다양성과 개방성 이 라는 조선 중기 사상사의 일면을 온전히 담보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허엽 일문이 일궈낸 학문과 문예 방면의 성취 역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보 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다채로운 허엽 일문의 행적은 중세의 혼란을 넘어 새로 운 시대를 지향했던 조선 중기 지식인들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을 통해 발견되는 사유의 개방성 및 현실에 대한 관심, 비판적 개혁적 시각, 우리

293 문화에 대한 자부심 등은 조선후기 실학 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적 문화적 조류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실이 인정되며, 우리 문학사에 허균과 난설 헌이라는 걸출한 두 작가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 또한 가학의 성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허균이나 난설헌의 문학 역시 이 같은 가풍 속에서 배태(胚胎)된 것임을 생각 할 때, 그들의 문학에 관한 논의 역시 새로운 방향에서 전개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와 관련지어 허엽과 그 자녀들의 문학 세계를 더욱 심도 있게 조망하 고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은 앞으로 다룰 과제로서 남겨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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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ABSTRACT A Study on Literary Background and Activities of Heo s Five Good Writers Kwak Jeong-Rye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 Literature Graduate School of Kyung Hee University Heo`s five good writers(許氏五文章家) indicate Heo Yeop(許曄) from Heo` clan whose ancestors originated in the town, Yangcheon(陽川) and his four siblings; Heo Seong(許筬), Heo Bong(許篈), Heo Kyoon(許筠), and Heo Nanseolheon(許蘭雪軒), especially Heo Yeop had glorified the age of King Seonjo in Joseon Period with his writings. They had become widely known as literary figures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China. This research has started from the interests in group achievement of Heo Yeop`s family and the background which had the Heo`s enabled to produce such achievement, not every individual`s literary success. That is because it is so recognizable that the Heo`s family discipline or traditions had greatly affected the course of learning and literary arts of their siblings. The field of learning of Heo Yeop, father of four literary figures, was based on the spirit of moral philosophy which was strongly supported by Gimyo Sarim(己卯士林), starting with Jo Gwang-jo(趙光祖), and was developed as a unique family tradition having added new influences from Seo Gyeong-deok(徐敬德) and Kim An-guk(金安國). Those complicated master-apprentice relationships of Heo Yeop that appealed through his activities as such are noticeable in that it displays one aspect of the literati

307 who were interested in diverse thoughts and knowledge in Joseon Period in 16th century. And they also strived to resolve real-world issues through such knowledge and philosophy. Those siblings of Heo Yeop, under strong influence of their father, were able to be grown amid academic ties of Seo Gyeong-deok as well as the political pedigree of Easterner ( Dong In, 東人), and were in full activity. Behind their growth and activities, solipsistic world view had played a crucial role. Particularly, Seo Gyeong-deok explained his theory of materialistic Qi with a focus on Qi (roughly, material force, 氣). Then, this enabled him and his pupils to get rid of extreme worship toward principle of heaven ( Cheolli, 天理) which had been advocated in association with the doctrine of Li in which Li (理) is regarded as the key force that constituted the foundation of the universe. As a result, his philosophy was characterized as what is called the fundamental meaning of harmonious interpenetrating in that he had accepted such diverse thoughts in a flexible manner, not having excluded them. In the meantime, the reason for that Heo Yeop and his siblings had shown their moves which run counter to the Reasonable Argument in Chu Hsi`s Neo-Confucianism(朱子性理學), while they actively asserted their standpoint to accept Neo-Confucianism as the foundation of their thoughts can be explained in the same context. Likewise, the facts that Heo Seong, Heo Bong, Heo Kyoon, and Heo Nanseolheon were able to attain ideological openness and cultural self-esteem through their father, and can be easily confirmed on the basis of their patterns of activity. They had travelled abroad several times as an envoy and spread the cultures of Joseon Dynasty through their envoy mission. Also they made contributions to expand the population that did engage in the arts having mingled with low status people. These fact display ideological characteristics of Heo Yeop`s family so that this will back up above confirmation. Through their activities in which they had strived to embrace the learning of a variety of other fields, not having stuck to a certain study, the researcher

308 was able to confirm that literati group among the academia of Joseon Period in the 16th century which were propelled toward the study of Chu His` Neo-Confucianism one-sidedly had exerted their all possible efforts to seek diverse thoughts and philosophies without having indulged only into the quest of theory of Chu His Neo-Confucianism. Also their literary achievements had been obtained on the background of one family clan, thus, it is so unequaled without parallel in history that their achievements are truly noticeable. Although Heo Yeop and Heo Seong had not much concentrated on the cultural arts, they had influences on the spiritual aspect. In case of Heo Bong, it is recognized that he greatly affected Heo Kyoon and Heo Nanseolheon. Heo Kyoon and Heo Nanseolheon are great writers who represent the literary history of the middle of Joseon Period, and it can be said their literary works had not been accomplished only by their literary capability, but those were the results from their family discipline and traditions, and the supports of their family members. Thinking of the fact that the literary works done by Heo Kyoon and Heo Nanseolheon were the results of such a family tradition, the researcher considers that discussion and study about their literary writings should be carried out in new direction. Along this line, the works to survey of the literary world of Heo Yeop and of his siblings, and to identify it in all will be remained as the tasks which should be deal with sometime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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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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