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사업 타당성 용역 보고서 2014년 03월 프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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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사업 타당성 용역 보고서 2014년 03월 프랜즈

3 목 차 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계획수립의 개요 p 가. 계획수립배경 및 목적 p 1) 계획수립의 배경 p 2) 계획수립의 목적 p 나. 계획수립의 범위 p 1) 공간적 범위 p 2) 시간적 범위 p 3) 내용적 범위 p 4) 계획수립의 근거 p 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지역 지역현황 특화분석 p 가. 일반현황 p 1) 위치 및 행정구역 p 2) 토지이용 및 기후환경 p 나. 자연환경현황 p 1) 생태현황 p 2) 하천현황 p 다. 생활환경 현황 p 1) 관광일반여건 p 2) 지역 관광자원 현황 p 3.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의 역사적 당위성 분석 p 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역사적 의의 p 나.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위상 p 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의 연관성 p 라. 신흥무관학교의 강원도 출신 독립운동가 현황 p 마. 해방정국과 대한민국 정부수립기의 신흥출신인 들의 역할 P

4 바. 항일정신과 평창군의 연관성(노산성 전투) p 사. 평창군 항일무장 투쟁역사 p 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저항운동 사례 연구 p 4.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 기본구상 p 1) 비젼설정 p 2) 발전목표 설정 p 1 평화 생명 올림픽 특구도시 p 2 글로벌 Resistance 고원도시 p 3 균형발전을 위한 평창남부권 개발 p 3) 기념단지 조성의 기대효과 p 1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 p 2 청소년들의 자주적 역사관 측면 p 3 역사적 가치 계승을 통한 미래세대 보존측면 p 3) 발전체계 및 공간구상 p 5.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 향후 발전방안 p

5 표 목 차 (표 1-1) 사업의 공간적 범위 p (표 1-2) 사업의 추진일정 p (표 1-3) 사업의 연도별 투자계획 p (표 1-4) 사업의 국고보조사업 내역 p (표 1-5) 사업 계획수립의 근거 p (표 2-1) 평창군 입지여건 p (표 2-2) 평창군 기상개황 p (표 2-3) 평창군 연간강수량 p (표 2-4) 평창군 일기일수 p (표 2-5) 평창군 지역별 관광장원 현황 p (표 3-1)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p

6 그림 목차 (그림 1-1) 계획 수립의 배경 p (그림 1-2) 계획 수립의 목적 p (그림 1-3) 평창군 노산성 전경 p (그림 2-1) 평창군 인구 그래프 p (그림 2-2) 평창군 토지지목별 현황 p (그림 2-3) 평창군 농가인구 그래프 p (그림 2-4) 평창군 기상개황 그래프 p (그림 3-1) 강원출신 신흥무관생도 명단 p (그림 3-2) 강원출신 신흥무관생도 명단 p (그림 3-3) 평창읍 시내 전경 p (그림 3-4) 절개산 전경 p (그림 3-5) 응암굴 실제사진 p (그림 3-6) 응암굴 전경 p (그림 3-7) 노산성 터 p (그림 3-8) 노산성 성곽 p (그림 3-9) 평창군 동학, 의병 격전지 분포도 p (그림 3-10) 독일군의 노르웨이 거점도시 침공도 p (그림 3-11)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저항운동 p (그림 3-12) 노르웨이 침공당시 참전한 소련적군 동상 p (그림 3-13) 오슬로 아케르스후수 레지스탕스 박물관 p (그림 3-14) 코리티나 담페초 산악모습 p (그림 3-15) 코리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당시모습 p (그림 3-16) 레지스탕스 그레노블 협곡 p (그림 3-17) 스탈당의 집 p (그림 3-18) 프란치프 법정 사진 p (그림 3-19) 1914년 당시 동유럽 판도 p (그림 3-20) 프란치프 기념비 p (그림 3-21) 프란치프 사진 p (그림 3-22) 쟝 물렝 사진 (그림 3-23) 알베르빌 전경 (그림 3-24)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p 78p 80p

7 (그림 3-25)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도 p (그림 3-26) 강제진용 조선인 벽글씨 p (그림 3-27) 조선인 위안소 건물 p (그림 3-28)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추도비 p (그림 3-29)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전경 p (그림 3-30)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입구 p (그림 3-31)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내부 p (그림 3-32) 프레모 레비의 저서 p (그림 3-33) 프레모 레비의 사진 p (그림 3-34) 데 파블로의 수난곡 p (그림 3-35) 프레모 레비의 저서 p (그림 3-36) 체르케스인 올림픽 반대시위 p (그림 3-37) 체르케스인 독립전쟁 p (그림 3-38) 체르케스인 군중시위 p (그림 3-39) 체르케스인 엑소더스 p (그림 4-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비젼 p (그림 4-2) 단계별 독립운동 변천사 p (그림 4-3) 가치 발전축 p (그림 4-4) 도시 발전축 p (그림 4-5)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공간배치 에상도 p (그림 5-1) 해외 유공자 예우 및 보상사례 p (그림 5-2) 국내 독립운동 기념관 우수사례 p (그림 5-3) 해외 독립운동 유공자 예우사례 p (그림 5-4) 원스탑 서비스 구현도 p

8 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계획수립의 개요 가. 계획수립배경 및 목적 1) 계획수립의 배경 (그림 1-1) 계획수립 배경 임진왜란의 역사적 격전지 평창 노산성 적극 융합 평창군의 진산 노산 : 항일투쟁의 역사적 장소 매년 노성제 개최를 통해 역사적 의미 지속 계승 역사성과 현대성이 어우러지는 민족적 공간으로 재창조 필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Host City 항일투쟁의 역사와 정신을 문화 관광 올림픽의 컨테츠화 추진으로 세계속의 대한민국 역사성 각인 올림픽의 평화와 자유의 정신에 부합하는 대한민국의 자주적 역사의식과 평화생명 정신 부각 1

9 균형발전을 위한 평창 남부권 개발 필요성 SOC 확충으로 인한 수도권 접근성 대표 증대: 1시간 이내 다양한 레포츠 시설 및 관광자원 보유 ( 수석공원 조성 85억 투자 진행 ) 역사적 유물과 자원을 활용 문화 관광 복합형 개발 평창군의 균형발전을 통한 2018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써의 역동성 표출 항일투쟁의 역사적 정신 계승 노산근린공원(노람뜰) 조성 공사 및 용역 ( 2013년까지 15억 투자 ) 군유지(50%) 및 일부 사유지 사업시행 가능 노산성 복원 항일 투쟁의 역사적, 문화적 정신 계승 항일투쟁의 역사와 민족적 자긍심 고취에 입각한 평창군민들의 선진적 문화역사 의식 함양 지역 호국유적지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병행 진행 신흥무관학교와 노산성 복원사업의 적극 융합 진행 2) 계획수립의 목적 (그림 1-2) 계획수립 목적 2

10 동계올림픽 개최 이후 올림픽 정신 구현을 위한 마케팅 필요 평화와 생명의 올림픽 정신 구현을 위한 지역적 랜드마크 형성화의 절대적 필요성 올림픽 개최 이후 지속적인 지역 이슈 메이킹을 위한 거시적 프로젝트 연계 도입의 필요성 21C 가치구현 사회를 위한 메탈리티 강화 필요 애국애족 국가관의 청소년 형성을 위한 프로그램 신설필요 - 올림픽 정신+항일투쟁정신= 선도적 애국애적 정신 함양 나. 계획수립의 범위 1) 공간적 범위 평창읍시내 노 산 노산성복원 평 창 강 주차장 바위공원 노람뜰 녹색 치유 조성지 (그림 1-3) 사업 대상지 합 계 6필 역사기념관 및 체험장 지번 지목 지적(평) 소유주 17 전 17-1 전 17-4 전 18 전 18-1 전 18-2 전 11,283m2 (3,400) 4,086m2 (1,236) 1,468m2 (444) 909m2 (275) 1,979m2 (599) 2,678m2 (810) 163m2 (49) (그림 1-3) 노산성 전경 군유지: 1 재경원: 2 개 인: 2 공시 지가 (원) 토지매입가(원) (공시지가) 감정매입 예상가 (원) 151,557, ,850,000 평창군 21, 재 정 경제원 재 정 경제원 21,200 31,121,600 88,800,000 21,200 19,270,800 55,000,000 이강원 49,200 97,366, ,700,000 평창군 21, 이강원 23,300 3,797,900 7,350,000 (표 1-1) 사업의 공간적 범위 3

11 2) 시간적 범위 2014년도 보조사업 추진일정 주요내용 1/4 2/4 3/4 4/ 익년도 비고 역사기념관 설계 역사기념관 시공 노산성곽복원 문화재지표 조사 역사기념관 및노산성곽복 원 시공 노산성곽복원 설계 (표 1-2) 사업의 추진일정 ㅇ 연도별 총투자계획 (단위:백만원) 구 분 총사업비 기투자 2014년 2015년 2016년 비고 합 계 10, ,000 3,000 4,000 0 국 비 5,000 1,500 1,500 2,000 도 비 1, 시군비 3,500 1,050 1,050 1,400 기 타 0 (표 1-3) 사업의 연도별 투자계획 추진현황 ㅇ : 사업대상지중 군유지 기확보 2필지(중리 17, 18-1) ㅇ ~12 : 사업대상지중 사유지 및 재정경제원 확보 (총 4필지) 매입예상가 330백만원 (군비) 향후 추진계획 ㅇ 2013년 하반기 - 기본계획수립 및 노산근린공원 도시계획 변경완료 - 세부실행계획 수립 및 지방재정투융자 심사완료 ㅇ 2014 상반기 : 기본 및 실시설계 ㅇ 2014 하반기 ~ 월 : 사업착공 및 준공 4

12 3) 내용적 범위 총 투자계획 및 투자실적 ㅇ 시설별 투자계획 : 총 100억원 - 기본계획수립, 세부계획수립, 도시계획 변경 억원 - 역사기념관 건축 (3층/400평) 노산성곽 복원 1식 독립군 병영체험시설 및 백서농장 조성 홍보용 앱 개발, 학술포럼 개최, 국토대장장 운동 등 홍보 국고보조사업 추진계획 보조금 교부신청 내역 ㅇ 교부신청 금액 : 3,000백만원 ㅇ 교부시기 : 1/4분기 국고보조사업 내역 (단위 : 백만원) 사 업 내 역 2014년도 예산(안) 비고 예산계상신청시 교부신청시 계 국고 지방비 민자 3,000 3,000 3,000 1,500 1,500 합 계 3,000 1,500 1,500 (표 1-4) 사업의 국고보조사업 내역 역사기념관 건축 : 3층 400평/ 5,000백만원/ 설계 및 착공 노산성곽 복원 문화재 지표조사 : 1식 400m 지방비 확보 입증서류 : 2014년도 당초예산 확보 예정 4) 계획 수립의 근거 관광자원개발사업 국고보조금 지원지침(제4조) 관련사항 5

13 관광자원개발사업의 절차적 내용적 요건 검토기준 (관광자원개발사업 국고보조금 지원지침 제4조 관련) 구 분 주 요 내 용 추진현황 및 세부내용 1.절차적 요건 가. 관련법령에 의한 인 허가 관광(단)지의 경우 지정일, 지정 면적, 조성계획 승인사항 등 나. 재정투융자 심사 심사일시 및 승인내용(조건 요지) 다. 지방비 확보 보조율 및 예산 - 국토의 이용 및 계획에 관한 법률에 의한 도시지역, 자연녹지지역내 근린공원 지역 으로 도시공원 및 녹지에 관한법률 시행규칙 상 교양시설로 건폐율 20%로 건축 가능 - 문화재보호법상 문화재 보존영향 검토 대상 구역으로 사전 검토후 추진 년도 하반기 심사에 제출 년예산 관광개발기금 국비50%, 지방비 50%(도15%, 군비35%) 확보 추진 2.내용적 요건 라. 부지확보 당해년도 사업대상 부지임 마. 미집행액(백만원) 기 교부된 보조금 대비 집행율 미집행액 표기 가. 기본계획 및 타당성 조사 주요내용 및 수립일자 등 나. 콘텐츠 조사 연구 주요내용 및 지역의 고유성과 연계, 차별적 경쟁력 강화방안 등 다. 관광수급 분석 관광객은 물론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개발이익의 지역 환원 등 지속가능한 관광개발을 위한 수급 내용 등 라. 프로그램 및 운영관리계획 체험관, 전시관, 기념관 및 각종 공원 등 주요 시설물의 프로그램 및 운영관리계획 년에 군유지 2필지(17, 18-1번지)외 재정 경제원 소유 2필(17-1~2) 및 사유지 2필지를 매입추진(군비) - 없음 월 평창 노산 노람뜰 관광지 타당성 검토 및 기본구상 용역에 리프레쉬 구역으로 노산성곽 복원 등이 반영되어 있음 년 7~8월 수립 및 타당성 조사예정 - 임진왜란 전투지인 노산성 인접 지역임 평창동계올림픽 문화 관광 콘텐츠 化 - 노람뜰 녹색치유 및 레포츠단지 조성지역과 인접해 있어 선택과 집중적인 관광개발 용이 - 평창 남부권 개발 소외감 해소와 체험 관광 지 집단조성으로 관광 트렌드 化 - 평창 노산 노람뜰 관광지 기본구상에 노람뜰 녹색치유 및 레포츠단지 조성과 인접하여 관광지 단지화 함으로 관광객 유치 용이 - 녹색치유 및 레포츠단지와 연계하여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 즐길거리와 볼거리, 역사체험 병행 운영 마. 전문가 및 지역주민 참여 사업의 타당성 및 환경, 디자인, 주변경관과의 조화 등에 대한 전문가 의견(참여 전문가 명단 포함) 및 지역주민 의견수렴 내용 (설명회 개최일자 등) 년 7~8월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조사 검토시 주민의견 수렴 및 설명회 개최 - 평창 노산 노람뜰 관광지 기본구상시 참여한 전문가 의견 수렴하고, - 기념관 시설물은 최소화 하고 병영체험, 백서 농장 체험프로그램 개발 운영 등. (표 1-5) 계획수립의 근거 6

14 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지역 지역현황 특화분석 가. 일반현황 1) 위치 및 행정구역 1 입지여건 강원도 내륙의 남부에 속하는 산악지대로 극동은 대관령면 횡계3리, 극서는 방림면 운교1리, 극남은 미탄면 마하리, 극북은 진부면 동산리 동쪽은 강릉시와 정선군,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 등 5개의 시 군과 접경을 이룸 강원도지역의 대표적인 고원산악휴양지역으로 동계 관련 스포츠시설이 구비 (오대산국립공원이 입지하고 있어 하계절 관광기능 지원) 수도권에서 연결되는 광역교통체계인 영동고속도로 및 5개 IC(면온,장평, 속사,진부,횡계)를 통해 접근 가능하여 도로교통체계는 양호 문화관광자원에 따라 테마가 있는 관광도시계획이 추진 중에 있으며, 지역별 공간기능 분담역할의 변화 예정 (표 2-1) 입지여건 2 인구 평창군의 인구는 2012년 6월 기준 총인구 43,507명으로, 강원도 총인구 1,537,750명의 2.83%를 차지- 지난 10년간 지속적인 인구감소추세로 연평균 0.68%의 감소율을 보임. 한편 평창군의 세대수는 2012년 6월 기준 19,644세대가 구성, 세대 당 인구수는 2.21명(연평균 1.6%증가) 전국, 강원도, 평창군의 연령별 인구를 20세 단위로 그 비중을 비교해 볼 때, 전국 및 강원도에 비해 인구가 보다 빠른 고령화 추세에 놓여 있음 7

15 (그림 2-1) 평창군 인구 그래프 2) 토지이용 및 기후환경 1 토지이용 지목별 토지이용: 임야 1,258.83km2(83.8%), 전 km2(8.2%), 하천 60.97km2(2.1%), 답 43.44km2(1.5%)순으로 구성 (임야의 적극적인 토지이용계획이 요망) 용도지역: 도시지역이 1.7%를 차지하고 있고, 비도시지역이 98.3%를 차지하고 있어, 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지역개발을 수행할 경우 도시지역 확대 필요 (그림 2-2)평창군 토지지목별 현황 (그림 2-3)평창군 농가인구 그래프 8

16 2 기후환경 기상개황 (표2-2) 평창군 기상개황 강수량 (표2-3) 평창군 연간 강수량 일기일수 (표2-4) 평창군 일기일수 기상개황(그래프) (그림 2-4) 평창군 기상개황 그래프 9

17 나. 자연환경 현황 1) 생태현황 1 산림자원 임상별 산림면적은 2007년 기준 총 119,914ha로 나타나고 있으며, 소유별로는 국유림 69,934ha(57.49%), 공유림 13,137ha(10.96%), 사유림 37,84ha(31.56%)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임상별 임목축척은 2010년 15,901,484m2 중 침엽수가 5,387,612m2로 가장 높은 임목축척을 나타내고 있으며, 활엽수 6,467,190m2를, 혼효림 4,046,682m2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평창군의 대표적 지하자원은 석회석으로 434,592M/T의 생산량을 보이고 있음 ( 석회석: 평창읍(359,852M/T), 미타면(29,700M/T), 방림면(45,040M/T) - 평창군청 통계연보(2011년) - 2 하천 지역내 하천은 지방 하천 16개소가 흐르고 있음 하천은 이.치수적 기능과 함께 동식물의 서식처 기능, 수질의 자정기능 및 심미적 기능과 같은 환경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인공적인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 생태계 서식처 파괴 및 하천의 건천화 등 많이 훼손된 상태임 3 지형 군의 총 면적은 1,464,16km2로 강원도 전체 면적인 16,874.6km2의 약 8.7% - 전국 군 3번째 면적: 임야84%, 농경지 9.7%, 기타 6.3% 평창군은 태백산맥의 주류를 이루고 동쪽으로 가리왕산, 서쪽으로는 태기산, 북쪽으로는 비로봉, 남쪽으로는 삼방산 등의 고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역내 대부분 취락이 평탄지형의 분지에 형성되어 있음 10

18 다. 생활환경 현황 1) 관광일반 여건 수변, 계곡형, 산악형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특히 대륙성 기후 및 높은 해발고도로 인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동계스포츠 리조트 3개소가 입지 산림 관광자원으로 오대산국립공원이 입지하여 하계 관광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기타 지역별로 다양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음 평창군의 관광지 방문객수는 8,410,624명으로 12월~2월 사이에 3,162,404명이 방문하여 37.6%가 주로 동계시즌에 방문하였으며, 하계시즌인 7월~8월 사이 방문객은 1,845,094명으로 29.1%가 방문 2) 지역별 관광자원 현황 구 분 문화관광 농촌체험 산림환경 수계관광 평창읍 미탄면 방림면 대화면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대관령면 노산성 및 현충대, 평창바위공원,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감자꽃 스튜디오, 문화예술회관 및 종합운 동장, 응암동굴, 지동봉가옥, 대하리전통가옥, 평창 향교, 천동리낚시터, 송학루, 이양정 월컴투동막골촬영지, 송어양식단지, 평창동강민물고기 생태관(백령동굴) 봉황대 태기산성, 허브나라, 덕거연극인촌, 천심대, 팔석정, 효석숲공원, 무이예술회관, 효석문학관, 물레방아, 메밀밭, 가산공원, 효석문화마당, 봉산서재, 휘닉스파크리조트 판관대,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 한국앵무새학교, 신약수, 이승복기념관, 청소년수련장 및 이승복생 가, 오토캠핑장, 로하스파크 적멸보궁, 상원사, 오대산사고, 월정사, 방아다리약수터, 평창군 공예전시관, 수항계곡관광지 대관정, 버치힐 GC, 대관령스키박물관, 용평리조트, 알펜시아리조트 산체으뜸마을 문희마을 광천마을, 백두둑 호박넝쿨마을 수림대마을 계방산마을, 황토구들마을 탑골마을 거래지마을, 병내리마을, 의야지바람마을, 수레마을 (표2-5) 평창군 지역별 관광자원 현황 한서동산, 남산산림욕장 마하생태관광지 백덕산 휴양림, 운교 관광농원 매봉산림욕장, 약물산 관광농원, 땀띠공원 해피700자연휴양림, 아트인아일랜드 캠핑장 로하스파크, 평창농장, 창녕목장, 돈화농장, 바우개 관광농원, 용평관광농원 오대산국립공원 일부, 진부야생화농장, 두타산 자연휴양림, 마평관광농원, 명상의 숲 삼림욕장 오대산국립공원, 오대산화훼단지, 한국자생식물원, 청림목장, 한일목장, 베이스캠프목장, 삼양축산대관령목장, 삼양대관령목장, 대관령양떼목장 뇌운계곡, 원당계곡, 평창강 뇌운계곡 레프팅 평창강 금당계곡 레프팅 흥정계곡, 팔석정 계곡 흥정계곡, 팔석정 계곡 수향계곡, 막동계곡, 정전계곡, 오대천 래프팅 11

19 3.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의 역사적 당위성 분석 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역사적 의의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주요 방략이었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즉각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가운데 크게 호응을 받은 것이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이었다. 일제와 즉각적으로 무력 항쟁을 벌이는 것은 그 의기는 장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독립운동 및 독립군의 기본 역량과 토대를 배양하고 강화하는데 치중해야 한다는 독립운동 방략이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비밀결사나 지하투쟁 형태로 전개될 수 있었지만,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무단통치로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국외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면 즉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이겠다는 점에서 실력양성운동이나 준비론과 크게 다르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주창자들은 일제의 침략성을 볼 때 언젠가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때 한국이 중국 또는 러시아나 미국과 함께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초기 활동은 을사조약 강제체결 직후부터 있었다.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여준 등은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자 국권과 자유를 되찾을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북간도 용정에 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1906년 10월경 용정촌에서 문을 연 서전서숙은 민족운동 기지 건설의 효시였다. 그뒤 고종으로 하여금 이상설 등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도록 활동한 이회영이 1908년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났을 때 이상설은 이회영에게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이 일본을 경계하기 때문에 전운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에 호응하여 조국 광복을 기약하자 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도 추진했다. 신민회에는 교육과 산업, 인격도야 등 실력양성을 중시하는 간부도 있었지만, 양기탁 이동녕처럼 적극 항일투쟁을 강조한 간부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기울어져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병합조약을 강제할 때 이회영 이동녕 등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를 답사하여 무관학교를 세울 장소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었다. 이상설 이승희 등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러시아와 12

20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흥개호 부근 봉밀산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학교를 세웠다.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은 만주 왕청현 라자구에 비밀 군사학교를 세웠다. 박용만등 미주 동포들도 군사학교를 세워 미래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만이 1911년에 설립된 이후 10년 동안 쉬임없이 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특히 3 1운동 직후에는 한반도 각지와 중국 각지에서 뜻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유하현 고산자에 본교를 새로 크게 지어야 했고, 통화현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워, 합니하 무관학교와 함께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관 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창립 기념강연에서도 밝힌 바대로, 서울에서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이장녕 등 여러 지사와 무관, 안동에서 이상룡 김동삼 등 혁신유림 지사, 선산에서 의병장으로 처형당한 허위의 대소가 등 쟁쟁한 인물이 많이 모였고, 망명자들이 단결이 잘 된 데다가 이석영 같은 재력가가 있었던 점, 서간도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한 데다가 평안도 등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거의 다 가난한 소작농이어서 계급 분화가 약했고, 주민들의 동질성이 강했던 점이 작용했다. 그와 함께 신흥무관학교가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을 찾으려는 망명자 결사 경학사와 서간도 일대의 주민들이 참여한 강력한 주민자치조직인 부민단, 한족회가 강력히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교장 교감 교관 교사가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무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쏟았다. 3 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46기로 현역 장교였던 지청천과 역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인 김경천 신팔균 등이 최신 병서를 가지고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신흥무관학교가 지속적으로 명성을 갖고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주로 이 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간도 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서간도에는 많은 학교가 있었다. 한 기록에는 20호 또는 몇십호만 거주해도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이나 다름없이 이주민들 자녀를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수년간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에 매진해온 신흥무관학교 관계자, 졸업생들은 벅찬 심장의 고동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해 마지 않았던 중일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혈전 준비에 모든 것을 13

21 바쳤던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과 졸업생들은 독립을 향한 찌를듯한 강렬한 의기를 소화, 조절 하기 위해, 제2군영으로 백두산 서쪽 쏘베차에 백서농장을 세웠다. 백서농장은 신흥무관학교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동삼을 장주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참여한 백서농장은 4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인적 미답의 메마른 고원에서 필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지극히 힘들고 고된 훈련을 했다. 이들중 채찬( 白 狂 雲 ) 등 상당수가 3 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통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다렸던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 의 형태로 터졌다. 만주에서건 상해 등 중국관내에서건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은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고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에 힘을 쏟았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에 독립운동전선은 더욱 투지를 다져나갔다. 1941년 일제가 무모하게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즉각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민족혁명당 등 좌파를 받아들여 광복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넓혔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무기력했던 1910년대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하던 1910년대 독립운동의 간고함과 만주에서 펼쳐졌던 근대적 민족의식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는가를 간단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 하면 만주나 상해가 떠오를 정도로 독립운동은 국내 지하투쟁이나 비밀결사 활동을 제외한다면 주로 국외(해외)에서 전개되었다. 인도나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 있었던 것을 볼 때 우리의 독립운동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인도에서 간디나 네루의 민족(독립)운동을 용인했지만, 일제는 한국의 독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탄압하기만 했다. 뿐만아니라,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없었다. 그 점은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3 1운동이건 6 10만세운동이건 광주학생 운동이건 모두다 불법이었다. 아리랑 의 주인공으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산(본명 장지락)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은 3,4개의 국가를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선혈을 뿌리고 있다고 토로했지만, 독립운동은 만주, 산해관 안쪽의 중국, 연해주와 시베리아, 국내, 일본, 미주 14

22 등지에서 각각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간난신고가 컸고,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언제 어떠한 위해를 받을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인도 등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과 크게 다르다.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한국인은 독립군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서 1930년대까지 독립군이 있었던 지역은 아주 드물다. 지금까지 한국인이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일별했지만,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기 중에서도 가장 암담했던 시기가 3 1운동 이전의 암흑기로 불리는 1910년대였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자행했던 국내와 거의 절연되어 있었고 어떤 외부적 지원도 받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3 1운동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독립운동과 달리 1910년대에는 주목 할 만한 독립운동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1910년대에 한시도 쉬지 않고 무관 양성에 진력했던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에 있다. 근대적 민족의식도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에 대해 몹시 경계를 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확대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몇 종류의 애국가나 독립신문 등 언론의 논조를 볼 때 1900년 이전에도 근대적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 약하지만 있었다. 그렇지만 민족 이라는 용어가 슈미드의 연구에 따르면 1900년 이후에 등장했고, 특히 1907년을 전후해서부터 계몽운동과 관련해 많이 사용 되는 것을 보면 근대적 민족의식은 이 시기부터 신지식층 또는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식이나 민족주의는 대한매일신보와 단재 신채호에 의해 열렬히 고취되었다. 신채호는 한국인이 항상 애국 국가 민족 이란 말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독사신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을 지었고, 그것을 여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판도 만들었다. 그는 아( 我 ) 가 확립되지 못한 채 모방을 일삼는 외국 유학생, 세계주의자, 동양평 화론자, 문화론자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렇지만 민족의식은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해 현저히 위축되었다. 일제는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조차 해산시킬 정도로 결사를 극도로 제한했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다. 3 1운동 이전 한반도는 칠흑같은 암흑의 반동시기였다. 독립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었고, 민족의식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 15

23 않았다. 지사들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3 1운동 이전 1910년대에 민족의식 또는 민족정신이나 동포애, 애국심은 서간도와 북간도, 연해주에서 맥을 이어갔다. 1910년대에 만주지방은 근대적인 민족의식이 크게 위축되었던 국내와는 다르게 망명자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지만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북간도의 경우 서전서숙의 영향을 받은 명동학교 광성학교 창동학교 북일학교 등에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을 펼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어주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거처하는 곳 어디에서건 민족지사들로부터 민족정신을 배웠지만, 특히 학교 생활은 민족의식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침 조례시간에 애국가 제창이 끝나면 여준 교장이 양쪽 눈에 망국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훈화를 하였고, 혹한에도 교사들은 홑옷에 초모를 쓰고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군사교육시간은 군사시설이나 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도 정신교육을 많이 했다. 신채호는 애국심을 심어주는데 역사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신흥무관학교 역사교재로 사용된 대동역사 를 저술한 이상룡은 역사는 국가의 체통을 보존하고 국민의 정신을 격려하는 학문이라고 역설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나라도 없어지고 민족도 죽은 암담한 상황에서 독립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라를 다시 찾을 사상을 떨치게 하려면 민족의식을 제대로 갖게 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교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이뇨 를 부르며 민족적 사명감을 불태웠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학생들만 부른 것이 아니라 서간도 주민들도 아이들도 즐겨불렀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가, 용진가 와 같은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민족정신을 길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은 1.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 世 事 )를 잊었노라. 4.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5.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는 선열의 시범 다섯가지를 소리 높이 외치며 조국과 겨레에 대해 신명( 身 命 )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서간도에는 애국열, 동포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또 하나의 유력한 무기가 있었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관학교와 분교, 지교, 부민단-한족회에서 견인차이자 중추신경과 같은 활약을 하게 된 데는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편 미디어로서 신흥학우보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간된 신흥학우보는 서간도 주민들의 교육잡지로서 16

24 주민들과 신흥무관학교, 부민단-한족회 등의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했다. 서간도를 비롯해 만주에서는 민족적 상징도 발전시켰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는 우리 우리 배달나라 라는 말이 나오지만, 단군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존재였다. 신흥학우단의 선열의 시범 에 나오는 조국 이라는 용어는 근대적 국가 관념을 갖게 했다. 백두산은 만주에 사는 한국인에게 의미가 큰 상징이었다. 1914년 충천하는 투지를 조절 하기 위해 제2군영으로 세워진 군영의 이름이 백두산 서쪽이라는 뜻을 가진 백서농장 인 것도 상징적이다. 8월 29일 국치일에는 학생이건 어린아이건 노인네건 부녀자건 모두다 신흥무관학교에 모였다. 그들은 경술년 추팔월 29일은 / 조국의 운명이 다 한 날이니 / 가슴을 치고 통곡하여라 / 자유의 새 운( 運 )이 온다 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동포애를 다졌다.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도 신흥무관학교 운동장이 꽉 차게 모여 화려강산동( 東 )반도는 / 우리본국이요 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부르며 기념행사를 크게 가졌다. 신흥무관학교 학생이나 신흥학우단원, 망명자와 서간도 이주민들이 항상 민족의식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불현듯 절망 이라는 병이 엄습하곤 했다. 만리이역에서 절망이라는 요괴와 끝없이 싸움을 벌이는 것은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망명자 사회에는 쓸쓸함과 허전함, 끝없는 불안함, 애처러움과 서글픔이 고향에 대한 상념과 함께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근대사나 민족운동사, 독립운동사, 독립군전쟁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전서숙 창설 정신을 더욱 발전시켰고, 신흥 의 앞머리 글자인 신 은 신민회를 상징하는 뜻을 가지고 있듯 신민회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구체화된 것이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결의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대한제국 무관학교와 의병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점 에서도 민족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아관파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나라를 새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광무제(고종)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광무제는 특히 국방력의 중요성을 체험으로 뼈저리게 인식해 군제 개혁에 국력을 기울였던 바, 시위대 친위대를 연대 병력으로, 지방 주둔 진위대를 진위대대로 개편함과 동시에 1898년에는 제대로 된 무관학교를 통해 17

25 장교들을 육성시키고자 했다. 이때부터 일본이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이전인 1904년까지의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었던 이세영은 대한제국 장교였고, 교관이었던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양성환은 대한제국무관학교 졸업생이었다. 3 1운동 이후 가담한 신팔균은 1903년에 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속성과와 본과를 둔 것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이어받은 것이지만, 대한제국무관학교 교과목이었던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馬 學 ) 외국어 중 마학 등 당시 여건상 도저히 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는 신흥무관학교 무관 교육과정에 넣은 것도 신흥무관학교가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주지하는 대로, 의병의 항일전쟁은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될 때 대거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전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07년 8월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의병장 430명 중 군인 출신 의병장이 홍범도 연기우 민긍호 김규식 등 87명에 이른다. 이중 장교 출신이 18명인데, 영관급 장교 3명을 제외한 위관급 장교 15명이 무관학교 출신 장교로 생각할 수 있고, 하사관 또는 병졸 출신의 의병장들은 군대에서 위관급 장교의 통솔하에 있었으므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이 의병들의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나 교관, 생도들은 3 1운동 이후 독립군 활동,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1운동 후 신흥무관학교와 직접 관련 있는 군대로는 의용대와 교성대가 있다. 3 1운동 직후 부민단을 확대해 조직한 한족회와 쌍둥이단체로 탄생한 것이 군정부였다. 군정부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것을 옹호하였고, 명칭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서로군정서 산하에 있었던 독립군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많이 가담한 의용대이다. 의용대는 국내로 들어가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는 등 주로 유격활동을 벌였는데, 나중에 서로군정서 등이 통합하여 통의부를 조직할 때 그 기간병력이 되었다. 교성대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들로 구성되었는데, 교관 지청천이 이끌었고, 병력은 약 4백명 정도였다. 일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제거하기 위해 첫 번째 중요 조치로 중 일 합동수색대 를 1920년 5월에 서간도로 출동시키자 교성대는 백두산 아래 안도현으로 이동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생도들의 독립군 활동은 청산리전쟁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에 전세계 독립전쟁사에서 청산리전쟁과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찾아보기 힘든데, 일반적으로 18

26 청산리전쟁은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신흥무관학교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1919년 8월 이후 대한군정서가 만들어질 때, 대한군정서는 많은 것을 신흥무관학교쪽이나 서로군정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을 참모장으로 초빙했고,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 오상세 박영희 백종열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재를 공급받아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그뒤 신흥무관학교 교관, 졸업생들은 일선부대의 핵심직책을 맡아 청산리전쟁에서 싸웠 다. 이장녕이 참모장, 박영희가 사령부 부관 및 연성소 학도단장을, 이범석이 연성대장을 맡은 외에도 김훈 백종열 강화린 오상세 이운강이 종군장교와 소대장, 학도단 제2학도대 제3구대장과 제1중대장서리, 제4중대장, 소대장서리 등을 맡아 일본군과 싸웠고, 생도인 최해 신형섭 등 적지 않은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 청산리전쟁에서 일역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지청천이 이끈 교성대는 청산리전쟁의 또 한 명의 주역인 홍범도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 뒤 홍범도부대 약 6백명은 지청천의 교성대와 통합해서 활동하다가(총사령 홍범도,부사령 지청천), 밀산 부근에서 서일을 총재,김좌진 홍범도 조성환을 부총재로 해서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을 때,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지청천, 중대장 김창환 김경천 광선 등 군 지휘관 직책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나 졸업생이 맡았다. 독립군에서 신흥무관학교 생도와 관련자들이 활동한 사실은 이루 다 매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서로군정서 통군부 통의부 정의부 및 참의부 외에도,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고려혁명군 등 여러 독립군 단체에서활약했다. 특히 1940년 9월 17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군으로 광복군이 조직되었을 때, 지청천이 총사령관, 이범석이 참모장과 제2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학규가 제3지대장을 맡은 것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생도였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국방장관)이었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원으로 구성된 광복군 제1지대를 통할 지휘했다. 또한 1920년대에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義 伯 또는 단장 김원봉) 단원들도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에서 13명이 의열단을 결성했을 때, 김원봉 이종암 등 8명이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는데, 이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급진파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 활동, 혁명사업, 교육사업에 헌신하여 남북만주, 중국 관내, 19

27 시베리아 등지에 그들의 족적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자취는 1919년 2월경에 발표된 대한독립 선언서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김동삼 여준 이동녕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허혁 등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들이 8명이나 된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뀔 때 초대 국무령으로 모셔졌다. 이회영은 헤이그밀사사건에도 관여했지만, 3 1운동 직전 고종 망명을 기획했고, 아나키스트운동의 원로로 폭탄투척에 의한 철저항일과 상부상조에 의한 인류사회 건설에 매진했다. 이동녕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을 때 초대 의장이었고, 그뒤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국무령, 주석, 국무위원을 역임하면서 사거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시영 또한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재무총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임시정부의 증인이다. 김동삼은 1923년에 독립운동의 대방침을 정하고 독립운동 기구를 개편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으며(부의장 안창호, 윤해), 통의부 중앙집행위원장, 정의부 참모장,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촉진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윤기섭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었다. 님 웨일즈의 7 4아리랑 7 4의 주인공 김산으로 유명해진 장지락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로 혁명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은 해방 후에도 활동이 많았다. 이중 정부에 참여한 인물들만 꼽아보자.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으로, 독립운동가답게 이승만대통령의 독주를 비판하였고, 국민방위군사건이 일어나자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 윤기섭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을 지냈고(의장 김규식), 2대 국회의원이었다. 지(이)청천은 초대 무임소장관과 제헌 국회의원, 2대 국회의원이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었고, 자유당 창당 시 부당수였다. 신흥무관학교 초기 졸업생인 변영태는 1950년대에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민족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20

28 나.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위상 일제침탈기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제와 중국, 소련, 미국 등과 전쟁을 하게 될 때 대일전쟁( 對 日 戰 爭 )을 전개한다는 것이 독립전쟁론 이다. 이러한 독립운동 방략에 따라 추진된 사업이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독립운동기지는 이주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북만주를 비롯하여 연해주 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계획되었다. 이들 지역에 한인 교민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청년들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워 근대적 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기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간도지역이라 할 수 있다. 서간도지역에서는 유하현을 중심으로 교민 자치단체인 경학사-부민단-한족회가 결성되었고, 나아가 무장훈련 기관으로 신흥강습소-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설립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는1 설립 이후 1920년까지 통화현 합니하, 유하현 고산자 등을 옮겨 다니며 10여 년 동안 모두 3천 5백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의 독립운동 방략을 가장 온전하게 수행했으며, 가장 많은 성과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1. 신민회의 결성 1905년 을사늑약 이 강제 체결된 이후 한국민족은 이에 저항하는 국권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국권회복운동은 의병과 구국계몽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승패를 초월하여 일제에게 즉각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패전까지도 각오한 결사항쟁이었다. 반면 구국계몽운동은 장기간의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구국계몽운동의 기본전략은 먼저 국민을 애국주의와 신지식으로 교육, 계몽하고 청소년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간부로 양성하여 민족내부의 실력을 준비하고 양성하는 것이다. 또 한국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본제국주의가 더욱 팽창하여 중국, 러시아, 미국 등과 장차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이들과 함께 對 日 戰 爭 을 감행하여 우리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방략이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제가 패망하는 그 시기까지도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부대를 편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단체가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양기탁과 21

29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1907년 4월 창립되었다. 신민회를 창립한 세력들은 1) 대한매일신보 를 중심으로 한 집단, 의외로 이시영의 만주시기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못하다. 그의 평전조차도 박창화의 省 齋 小 傳 (1951년 간행), 이은우의 臨 時 政 府 와 李 始 榮 (범우사, 1997) 정도이다. 저술로는 중국인 황염배의 글을 반박한 박황염배지한국관( 駁 黃 7 炎 培 之 韓 史 觀 ) 정도만이 전해지고 있다. 상동교회와 그 부설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한 집단, 무관출신 집단, 평안도 일대의 상인 실업인 집단,미주에서 활동하던 공립협회 집단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집단의 인사들은 과거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로 서로 잘 알고 있던 사이였다. 처음 신민회의 창립을 준비한 것은 안창호와 미주의 공립협회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1907년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리버사이드에 모여 대한신민회취지서 와 대한신민회통용장정 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결사의 최종적 목적에 따라 이 단체는 한국 내에서 조직해야 한다는데 합의하고 안창호를 국내로 파견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고, 2개월여 후인 4월 20일경 마침내 신민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신민회의 창립회원은 각 단체의 대표자들로 결성되었는데 양기탁, 이동휘,전덕기,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명이 극비리에 회합하여 비밀결사로서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최초의 조직은 총감독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 전덕기, 그리고 조직부장 격인 집행원을 안창호가 담당하였다.13 신민회의 회원은 창립과 더불어 급속히 증가하여 400여 명에 달하였으며, 년경에는 800명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구국계몽운동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신민회의 비밀회원으로 가입했기 때문에 신민회는 창립되자마자 한말 구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는 가장 강력한 비밀결사가 되었다. 2.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신민회의 무장투쟁노선은 독립운동기지 건설로 실현되었다. 신민회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현대적 정규군과 같은 독립군을 창건하려고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 주요인물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동녕, 이회영, 이준, 김병헌, 김구, 김진호, 이용태 등이다. 상동파 및 상동청년학원의 실체는 기독교 단체임에는 틀림없으나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인사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한편 이때 중등교육과정을 수학하던 상동청년학원의 원장은 전덕기 목사, 학감은 이회영이 맡았다. 22

30 주요인물은 이동휘, 이갑, 유동열, 노백린, 조성환, 김희선 등이다. 주요인물은 이승훈, 안태국 등이다. 주요인물로 안창호, 이강, 정재관, 임준기, 김성무, 신달원 등이 있다. 신민회 창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또한 신민회 창립이 미주의 공립협회나 안창호 개인의 발의에 의해 창립되었다기 보다 국내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던 이상설 계열이나 상동교회파 인사들과의 결속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운동의 퇴조기에 들어가기 시작한 1909년 봄이다.16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독립군기지를 만들어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업이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가기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격살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이 일제의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인 1910년 2월 석방되었다. 신민회는 이렇게 국내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첫째 독립전쟁전략 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였고, 둘째 국외에 독립운동기지 와 그 핵심체로서 무관학교 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셋째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었던 간부들은 원칙적으로 국외에 망명하여 이 사업을 담당하기로 하고, 넷째 국내에 남는 간부들과 회원들은 이 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종래의 구국계몽운동을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우선 국외로 망명할 인사로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동휘, 이회영,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최석하 등을 선정하고, 이 사업을 국외에 널리 확대하기 위하여 각 지역을 분담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안창호와 이갑은 구미지역, 이동녕은 노령 연해주지역, 이동휘는 북간도, 이회영과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지역을 맡았다.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한 신민회 간부들 가운데 우선 안창호를 비롯하여 이갑, 유동열, 신채호, 김희선, 이종호, 김지간, 정영도 등이 1910년 4월 북경 등지로 망명하였고, 뒤이어 이동녕 등은 만주 노령일대를 답사하기 위해 출국하였다. 망명 간부들은 중국 청도에 모여 청도회의를 열고 만주 또는 노령지역에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건설하는 안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1910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조국이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국내에 남아있던 신민회 간부들은 일부 간부들의 망명 결정에 따라 처음에는 망명 간부들이 국외의 독립운동기지건설 사업을 담당하고 국내의 간부와 회원은 이들을 지원하면서 국내 사업을 계속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1910년 5월 기관지 역할을 하던 23

31 대한매일신보 가 일제측에 넘어가고, 국내에서의 운신이 어렵게 되자 나머지 간부들도 집단적으로 만주 서간도 지방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수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일제의 의병운동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더 이상 무장활동이 불가능하다는 한계점에 다다르게 된다. 먼저 1910년 9월 초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이관직 등이 백지장수로 가장하고 남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19 이들이 그해 11월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기지 선정을끝내고 돌아온 후 집단망명 계획은 급진전되었다. 1910년 12월 중순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제3차 신민회 간부회의에 양기탁을 비롯하여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구, 이동녕, 김도희 등이 참석하여 다음과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첫째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전국을 통치하니, 신민회에서도 서울에 비밀리에 都 督 府 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릴 것, 둘째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할 것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를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 셋째 이를 준비하기 위해 이동녕을 먼저 만주에 파송하여 토지 매수, 가옥 건축과 기타 일반을 위임할 것, 넷째 신민회 각도 대표를 선정하여 15일 이내에 황해도에서 김구가 15만원, 평남의 안태국이 15만원, 평북 이승훈이 15만원, 강원의 주진수가 10만원, 서울의 양기탁이 20만원을 모집하여 이동녕의 뒤를 이어 파송하기로 의결하였다.그러나 일제는 안명근사건 이 일어나자 1911년 1월 신민회 중앙 간부와 황해도 지회 회원들을 검거하고, 9월에는 105인사건 을 조작하여 신민회 국내 회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함으로서 이 계획은 중도에서 큰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다. 한편 신민회의 창립에 앞서 일찍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모색했던 인사들로 이상설을 중심으로한 이회영 형제, 이동녕, 여준, 장유순, 이관직 등이 있었다.21 이상설은 일찍이 1904년 6월 일본인이 요구하는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1905년 을사늑약 이 체결된 후에는 자택에 은거하면서 비밀리에 이회영, 이동녕, 유완무, 장유순, 이시영 등과 의논하여 국외망명과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계획하였다 년 4월 이상설은 이동녕을 동반하고 비밀리에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그곳에서 황달영, 정순만, 김우용, 홍창섭 등과 회집하여 함께 북간도지역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연길 용정촌에 들어가 서전서숙을 열었다. 서전서숙에서는 이상설이 숙장이 되었고 이동녕과 정순만이 학교의 운영을 맡았다. 교원의 월급부터 교재와 학생들의 일체 경비는 이상 설이 전부 부담했다. 24

32 황무지개척권이란 노일전쟁 이후 한국을 장차 그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한국을 식량공급지로 확립하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정부에서는 한국의 황무지를 일본인 개인의 명의로 경작, 목축 등의 개척권 및 경영권을 이양받은 이후 대규모로 이주시킨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를 경영케 하려고 하였다. 이상설은 반대 상소를 올려 황무지개척권을 일본에 넘기면 국민경제와 국가재정을 파탄에 몰아넣어 민족이 멸망하게까지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이상설은 서울을 떠날 때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저동에 있던 집을 팔았으며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에 모두 쏟았던 것이다. 서전서숙은 북간도 신교육의 요람 구실을 하였다. 교과목으로 역사, 지리는 물론 수학, 국제공법, 헌법등의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전서숙이 중점을 둔 과목은 무엇보다 반일민족교육이었기에 실제로는 독립군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서전서숙은 이듬해(1907) 9~10월경에 문을 닫게 된다. 그 해 4월 3일 경 이상설이 헤이그특사의 使 行 으로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후 서전서숙은 재정난과 통감부 간도출장소의 감시와 방해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서전서숙이 이처럼 1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었으나 항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서전서숙의 교육이 일반적인 신교육기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라는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후일 유하현 추가가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냈던 것도 이러한 서전서숙의 교육방향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설이 신민회의 창설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명확치 않다. 다만 이상설은 헤이그특사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고 1908년 2월 미국에 건너가서 활동한 적이 있다. 이때 미국에 1년간 머물면서 재미교포를 결속시켜 한인사회 통합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적극적인 조국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진작시킨 일이 있다. 그 방안은 근대산업을 진흥시키고, 국민교육에 힘써 신지식을 교육토록 하면서 민족의 군대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1909년 2월 미주에서 국민회를 결성한 후 이상설은 정재관을 대동하고 극동에서 독립운동사업을 추진하라는 중책을 맡고 미국을 떠났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한인지도자를 규합하여 새로운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였다.28 원동임야주식회사는 이러한 사정하에 만들어진 회사였다. 북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토지를 구입하고 한인을 집단 25

33 이주시켜 장차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것이었다. 그 첫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흥개호 주변의 밀산시 봉밀산 일대이다. 이상설은 성주출신의 유학자 이승희와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승희는 1909년 12월부터 이민단( 移 民 團 )과 함께 봉밀산 아래 독립운동기지로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이상설은 한흥동 뿐만 아니라 흥개호 주변 여러 곳에 이와 같은 한인들의 터전을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연해주 일대와 서북간도 각지를 한인들이 개척하여 정착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이상설의 한흥동 건설에 호응하여 국내에 있는 신민회에서도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곧 독립운동의 당면과제라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설이 신민회와 어떻게 밀접한 연계를 가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상설은 신민회 간부급 인물들과 오래전부터 절친한 동지였고, 신민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서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운동가들과 구국항일운동을 함께 벌였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구국활동을 통해 당시 관직에 있던 이상설, 민영환, 이시영 등이 후원내지 조정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미주에서 활동할 때도 신민회 결성과 관련된 인사들과 꾸준히 관계를 갖고 민족군대의 양성에 대해 함께 논의했던 것을 볼 수 있어 이상설이 어떠한 형태로든 신민회의 무장투쟁노선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깊은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3. 이시영 일가의 집단망명 1) 이시영의 환로( 宦 路 ) 이시영의 본관은 경주로 이조판서 이유승과 동래 정씨 사이의 다섯 째 아들이 된다.33 모친 또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따님이니 가히 명문가의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세칭 삼한갑족( 三 韓 甲 族 )이라고 할 만한 집안이었다. 마침 상신록 에는 이시영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의 환로가 요약되어 있는데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885년(고종 22) 사마시( 司 馬 試 )라는 초시에 합격했다. 이듬해 가주서( 假 注 書 )가 되고, 형조좌랑 홍문관 교리 승정원 부승지 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거쳤다. 1891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기념으로 치르던 과거인 증광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94년에는 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 內 7 醫 院 )과 상의원( 尙 7 衣 院 )의 부제조를 겸했고, 다시 참의 26

34 내무부사( 參 議 內 務 府 事 )와 궁내부 수석 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총리대신이며 장인이던 김홍집이 친로파에 의하여 살해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 뒤로는 중형인 이회영 이상설 등과 근대 학문 탐구에 몰두했다. 선생이 은거생활을 하고 있던 중 1905년(광무9) 외부 교섭국장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다시 사직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서북지역의 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년 중추원 칙임의관을 역임했다. 1908년 한성재판소장과 법부 민사국장을 거쳐 고등법원 판사를 맡기도 했다.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이시영은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명문가의 자제로서 순탄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외부 교섭국장으로 있던 이시영이 이토 히로부미가 획책한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의정부 참찬으로 있던 이상설과 함께 온 몸으로 막아섰으나 이를 지킬 수는 없었다. 이상설은 전 우의정 조병세를 소두( 疏 頭 )로 조약파기를 주장하는 연명 상소를 올렸고 조병세의 자결 후에는 민영환을 소두로 반대 상소를 올렸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이상설도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상소 같은 전통적 방식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으므로 이들은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설은 1906년 음력 4월 18일 양부 이용우의 제사를 지낸 후 이동녕과 함께 인천에서 비밀리에 출국했다. 이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 연길현 용정촌에 거처를 정하고 학교를 열었다. 바로 서전서숙이다. 서전서숙을 통한 인재양성은 망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이들의 새로운 운동방식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 역시 서전서숙과 같은 뜻에서 설립된 것이라 하겠다. 이시영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안창호의 연설에 영향을 받아 신교육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 집단 망명 신민회가 주도하여 시행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먼저 이시영 일가에서는 이시영 이회영 형제가 주도가 되어 집단망명이 계획되었다. 이를 위해 건영 석영 철영 호영 등 형제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회영은 우리 집안이 교목세신( 喬 木 世 臣 )으로서 대의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왜적 밑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27

35 도모할 수 없지 않는냐고 형제들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6형제가 모두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고, 1910년 12월 30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은 서간도시종기 에서 국경을 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여덟 시에 떠나서 오후 아홉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 씨 매부 이선구 씨가 마중 나와 준비된 처소로 간다. 이렇게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한 이시영 일가는 안동에서 며칠을 보내고 1911년 정월 9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횡도촌으로 떠났다. 영하 20~30도 아래로 떨어지는 추위 속 새벽 4시부터 북으로, 북으로 달려 횡도촌에 일시 머물다가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하였다. 삼원보는 현재 삼원포라고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후 삼원보 일대에는 국내로부터 망명한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삼원보를 중심으로 추가가 위당구 삼도구 사도구 대우구 대화사 남산 마록구 등지에 5리 혹은 10리, 20~30리 거리를 두고 여장을 풀고 나서 심산벽곡인 황무지를 빌어 개척사업에 주력하였다. 이시영 형제들의 뒤를 이어 집단망명을 택한 인물들이 안동지역의 혁신유림이었던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이다. 이상룡 역시 1910년 끝내 일제가 나라를 강탈하자 만주로 망명해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국내에서 일제 정책에 항의하거나 대한협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룡의 망명계획에 대해 그의 손부인 허은 여사는 구술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에서 의미심장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시영 씨 댁은 이참판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씨와 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국외 연락과 황제와의 밀통을 위해 관에 계속 있도록 동지들이 권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필자주) 등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이상룡의 망명이 이시영 형제 및 이동녕 등과 사전 계획된 것이었다는 증언이다. 서울의 28

36 이시영 일가와 안동의 이상룡 일가가 협의 끝에 계획적으로 집단망명을 했다는 것이다. 허은 여사 또한 1908년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이었던 왕산 허위의 집안 손녀이다. 친가와 시가가 모두 유명한 독립운동 가문인 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이다. 안동지역에서 만주로 망명을 결심한 인물은 이상룡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처남인 김대락도 마찬가지였다. 이상룡과 김대락은 망명에 동의하고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이시영 형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망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밀리에 논밭을 팔았다. 김대락의 경우 망명할 당시 나이가 이미 6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전토를 방매한 뒤 5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었다. 심지어는 만삭의 임부였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하고 망명의 길에 오른 것이다. 김대락 가족이 한 발 먼저 떠난 후 이상룡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난 것은 1911년 1월 5일이었다. 이시영 일가처럼 가족이 모두 떠나는 집단망명이었다. 1910년 국치 전후 지사들의 망명은 강렬한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뚜렷한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이었다. 이와 같은 선발 망명집단의 뒤를 이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국내 각지로부터 민족지사들의 망명은 계속되었다. 4. 신흥무관학교 1)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활동 신민회 간부와 회원들의 독립운동기지건설 방략에 따라 1910년 12월 하순부터 1911년 초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만주를 향해 떠났다. 서울에서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하여 안동지방의 혁신유림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과 주진수의 가족 등이 일단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횡도천을 경유, 유하현 삼원포로 집결했다. 이들은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이주민들과 함께 추가가를 중심으로 신한촌을 건설하였다. 1911년 4월 봄 교민 자치단체인 경학사 를 조직하고, 사관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 를 창설하였다.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처음부터 무관학교라고 하지 않고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토착민들의 의혹과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간도에 창건한 최초의 국외 독립운동기지가 되었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47 교감 김달, 학감 윤기섭, 교관 김창환, 이장녕, 이관직, 교사에 이갑수, 장도순, 이규룡 등이 취임하였다. 신흥강습소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국내에서 신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한 인물들이 많다.48 교관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29

37 따라서 신흥강습소에서 실시한 무관 교육 또한 육군무관학교의 체제를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1회 졸업생으로 김련, 변영태, 이규룡, 이극, 성주식, 강일수, 김석 등 40여 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11년 서간도 지역에 풍토병이 만연하고 가뭄과 이른 서리 등의 천재가 겹치면서 경학사는 해체되었다. 신흥강습소의 유지도 어려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신흥강습소를 떠나고 김창환, 윤기섭 등이 남아 학교 유지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1912년에는 여준, 이탁 등을 중심으로 신흥학교유지회가 조직되면서 어느 정도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경학사가 해체된 후에는 한인자치 기구로 공리회,51 부민회 등이 조직되었다. 부민회가 유하현 삼원포 합니하로 옮겨가자 신흥강습소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합니하는 외지고 험준한 지역에 있어 비밀리에 무관 양성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1913년 5월 新 校 舍 낙성식을 가지고 학교 명칭도 신흥중학으로 부르며 사실상 무관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합니하 신흥학교의 초대 교장에는 서전서숙과 오산학교 교사를 역임한 여준이 추대되었고, 교감에는 보성학교 출신으로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윤기섭, 학감에는 신흥강습소 출신의 이광조, 교사에는 이규봉, 서웅 그리고 중국어 담당의 關 華 國 등이 있었다. 군사교관으로는 무관학교 출신의 김창환을 비롯하여 신흥강습소 출신의 성준용, 이극 등이 있었다. 그리고 생도대장은 김창환, 생도반장은 원병상이 맡았다. 이후 교장은 홍주의병에 참여하고 육군무관학교를 수료한 이세영이 맡았으며, 교감은 이상룡, 재무감독에 이동녕 등이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신흥학교의 학제는 본과 이외에 속성과를 두어 장교(6개월)와 하사관(3개월)을 훈련시켰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은 강력한 항일전을 전개할 무장 독립군단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교민자치 기구인 부민단은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었고 신흥학교는 신흥무관학교가 되었다. 한족회는 軍 政 府 O의 역할을 담당하는 서로군정서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은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총장 이탁, 내무사장 곽문, 법무사장 김형식, 군사사장 양규열,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이 선임되었다. 3 1만세운동에 참가했던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내에서 탈출해 오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확장 이전하였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이청천과 김경천 등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왔다. 30

38 신흥무관학교는 고산자에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화현 합니하, 칠도구, 쾌대모자 등지에는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두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고등군사반의 교장에는 이세영, 부교장에는 양규열, 학감에는 윤기섭, 훈련감에는 김창환, 교성대장에는 지청천, 교관에는 오광선, 신팔균, 이범석, 김광서, 성준용, 원병상, 박장섭, 김성로, 계용보, 의무감 안사영 등이 활동하였다. 합니하의 초등군사반 교장은 이장녕, 학도대장은 성준용, 교관에 박두희, 오광선, 홍종락, 이범석, 홍종린 등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봄 창설되어 1920년 8월 일제의 공격으로 폐교할 때까지 약 3천5백 명의 졸업생을 길러 냈으며, 이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혁혁한 전과를 남겼다. 일제는 3 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을 토벌 하여야만 국내에서의 그들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중국 당국에 압력을 가하여 독립군에 대한 합동수사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5월부터 서간도지방에는 중일합동 수색대 라는 토벌대가 조직되어 대규모 검거행위를 시작하였다. 이때 신흥무관학교 내부에서도 일련의 사태가 일어났다. 즉 마적의 습격과 생도 납치를 비롯하여 윤치국 사건에 이은 일제의 만주독립군 토벌 등으로 신흥무관학교는 명목상 1920년 8월 폐교가 되었다. 일제의 토벌 로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 참모장 김동삼, 교성대장 이청천은 우리의 무장력을 보전하기 위해 피전책을 결정하였고 년 8월 대산림지대인 안도현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청천이 이끈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 400여 명은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과 신흥무관학교 교관인 김창환 오광선 손무영 김승빈 등과 함께 유하현을 출발하여 안도현으로 이동했다.56 무장이 없는 도수부대였던 교성대는 이곳에서 홍범도 부대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청산리대첩에도 참가하였다. 교성대는 이후에 북행하는 홍범도 부대, 김좌진 부대를 따라 밀산으로 들어갔다.노령으로 이동하던 각 부대가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 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군단의 요직을 맡았다. 한편 지청천의 인솔하에 북만으로 이동한 서로군정서의 일부 병력과는 달리 신흥무관학교 출신 신광재, 백광운 등의 인솔하에 남만지역으로 이동한 서로군정서의 나머지 병력은 진영을 정비하여 관전, 집안, 통화, 임강현 등지를 중심으로 무장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경신참변 이후 각지에서 준동하는 친일배와 일제 주구를 처단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31

39 2) 신흥학우단과 백서농장 이보다 앞서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이 결성되었다. 신흥학우단은 1913년 5월 6일 합니하 신흥강습소에서 창단되었다. 신흥학우단에서는 기관지인 신흥학우보 를 간행했다. 주필 겸 편집부장에는 신흥강습소 1회 졸업생인 강일수가 맡았고,그 외에 신흥학교 졸업생인 이동화, 장정근 등이 기 자로 활동했다. 신흥학우보 는 군사, 시사, 문예 등 다양한 기사를 실어 단원들에게 혁명이념의 선전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또한 신흥학우단에서는 농촌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교육을 담당하였다. 신흥학교 졸업생들은 독립군에 편성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지방에 파견되어 2년간 의무적으로 교편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재만한인 사회는 교사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지방 소학교에서는 신흥학교 졸업생을 교사로 선호하여 요청이 쇄도하였다. 졸업생들은 서간도 지역 뿐 아니라 장백, 화룡, 연길, 왕청, 훈춘 등 북간도 지역에 있는 학교에도 파견되었다. 신흥학교 졸업생들은 지방 소학교에 배치되어 학교운영과 지역계몽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간에는 아동교육을 실시하고 야간에는 지방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일단 유사시 병력 보충에 대비하였다. 한편 자치단체인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은 1914년 통화현 제8구 쏘배차( 小 北 岔 ) 심산유곡에 백서농장( 白 西 農 庄 ) 을 건설하였다. 신흥학교 졸업생 가운데 1회에서 4회가 주축이 되었고, 각분 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을 합하여 모두 385명이 모였다. 백서농장은 실제로는 독립군 군영( 軍 營 )이지만 내외의 이목을 고려해 농장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백서농장이라는 군영이 만들어진 것은 신흥학교 졸업생들의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해소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신흥학교 졸업생들은 무관교육을 마친 후 독립을 위해 즉각 싸울 것을 원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중 일전쟁 혹은 미 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을 구축하고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려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쏘배차 험산 유곡에 막사를 구축하고 1914년 가을부터 벌목을 시작하여 스스로 밭갈고 나무짐을 지는 간난고초를 겪으면서 1915년 초에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일대 군영을 형성했다. 백서농장은 장주에 김동삼, 훈독 양규열, 총무 김정제, 의무감 김환, 경리 김자순 등 부민단 계열 인 교직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었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었으며,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 등과 신흥강습소의 제1회 졸업생인 김석,강일수, 이근호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32

40 교사들이 지도부를 담당하였다. 그 외 농감 채찬, 교관 허식 김영윤 김동식 강보형, 교도대장 이근호, 1중대장 안상목, 2중대장 박상훈, 3중대장 김경달, 규율대장 신용관 등은 모두 신흥학교 졸업생으로 편성되었다. 5. 신흥무관학교와 이시영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박창화가 쓴 성재소전 에 보면 신흥학교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4244년(서기 1911년-필자주) 43세 신해년 봄에 선생(이시영-필자주)이 산보를 나섰다가 촌락 한 모퉁이에 허술한 건물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옥수수를 저장하였던 빈 창고였다. 이 창고를 빌어가지고 아동들을 교육하기 시작하며, 장정들은 훈련을 시키는데 이것이 곧 신흥무관학교의 창설이었다. 신흥학교 생도였던 원병상은 수기인 신흥무관학교 에서 초기에 이 지방 토착민들은 신흥강습소가 왜인의 앞잡이라는 의혹으로 배척이 심하여 그들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사( 校 舍 )를 구할 수 없어 토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거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처음 신흥학교 수업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한 것이며 학교의 창설에 이시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1913년 5월 신흥강습소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합니하로 옮기고 학교 명칭을 신흥중학 으로 개칭하였다. 이 때 이시영이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19년 유하현 고산자의 하동 대두자에 교사를 확장 신축하고 이해 5월 3일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 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도 이시영이 초대학장, 이천민이 교장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이보다 앞서 이회영과 이상룡의 동생인 이계동은 망명자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등을 위해 1911년 음력 7월 초 동삼성 총독을 만나러 심양에 갔다.그러나 동삼성 총독 조이풍과는 면접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서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는 이시영의 부친 이유승과 친교가 깊었고 이시영 형제들과도 世 交 가 있었다. 이회영의 협조 부탁에 원세개는 비서인 호명신을 딸려 보내 동삼성 총독을 만나게 했다. 원세개의 편지를 받아본 동삼성 총독은 이회영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부하 조세웅으로 하여금 이회영 일행을 동행하게 하여 회인 유하 통화 현장( 縣 長 )을 만나 원세개의 지시에 따르게 하였다. 호명신은 이동녕 이회영과 함께 합니하 강가를 돌아보고 그곳에 장차 학교를 세울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1913년 3월경 신흥무관학교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던 33

41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에게 국내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수원에 거주하는 맹보순으로부터 일본형사가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장유순 등을 체포하러 만주로 떠났으니 피신하라는 정보였다. 이들은 즉시 의논 끝에 행선지를 정했다. 이동녕은 이상설이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회영은 국내로, 이시영은 봉천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후 이 회영은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 활동하였고 이시영은 북경과 상해방면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동녕 이시영 등이 노령 봉천으로 떠난 후에는 윤기섭 김창환 등이 주민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하여 근근이 신흥학교를 유지했다. 신흥학교의 학생들은 수업료 등 학비를 내지 않았다. 학교 유지비와 학생들의 식사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하거나 마을 유지들이 부담했다. 학생들 가운데 집이 멀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여러 애국 유지들이 돌아가면서 숙식을 돌보아 주었다. 주로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집에서 많은 학생을 돌보았다. 이시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봉천으로, 북경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어려운 집안 살림은 아녀자들의 차지였다. 이시영의 부인 박씨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친동기간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가장( 家 長 )이 없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당시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의 회상을 살펴보자. 나는 모친과 다섯째 숙모 박씨(시영 숙부의 부인)하고 틈만 있으면 봄여름에 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어 동절준비를 하였다. 다섯째 숙모는 모친과 각별히 친근하고 숙부 시영께서 상해 북경에 가신 후로는 자연 모친과 한 집에서 살게 되니 더욱 친근하여 형제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무슨 전염병인지 몰라도 모친과 숙모가 다 같이 앓다가 모친은 고생 끝에 (병이) 낫고, 숙모는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다. 망국대부( 亡 國 大 夫 )의 부인이 남편을 따라 이국땅에서 독립을 위하여 고생하는 남 편과 무관학생, 그리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감당 못할 고생을 하다가 이국땅에서 원귀( 寃 鬼 )가 되고 말았으니 그 원통함이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 이시영의 부인 박씨는 큰 아들 이규봉의 정신병과 손자녀들의 죽음으로 큰 상심을 한데다가 전염병인 홍역에 걸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916년 음력 3월 사거하였다. 이규봉은 이시영의 큰 아들인데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하다가 신병으로 여러 달을 앓았다.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은 조석으로 수수밥만 먹다가 전염병이 돌 때 중병에 걸려 남매가 모두 사망하면서 후손이 끊어졌다. 후에 이규봉은 정신병에 걸려 만주에서는 치료할 수 없게 되자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국내로 들어갔다. 1910년 12월 하순부터 1911년 초에 걸쳐 이시영 6형제를 비롯한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 등과 안동지방의 혁신유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주진수의 가족 등이 一 團 이 되어 유하현 34

42 삼원포에 집결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1911년 봄 교민들의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관양성 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창설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 신흥무관학교 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여 년 동안 3,500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했으며 이들이 우리나라 독립 무장투쟁의 根 幹 이 되었다.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한 사실이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시영 이회영 형제를 비롯한 일가가 신흥무관학교에 직 간접적으로 깊이 개입했던 정황은 곳곳에 나타난다. 삼한갑족의 후손으로 높은 벼슬 버리고 6형제가 뜻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초기 밑거름은 이시영 형제들의 지도력과 재정적인 지원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동녕 여준 장유순 이장녕 이관직 등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한 인사들은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함께 신학문을 익혔거나 오랫동안 교분을 쌓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시영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동안이나 해방 후의 행적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이시영 선생이나 이동녕 선생한테는 지방 파벌 소릴 못 들었어요. 큰 그릇이죠. 민족정신이 뛰어났죠 참으로 깨끗했죠 라고 회고하고 있다. 또한 임시정부의 사료편찬소에서 일을 도왔던 우승규도 그의 회고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분이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이었다 먼저는 박은식 선생, 다음엔 이동녕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훈도를 받고서 내 구국정신과 항일의식이 자랐다. 그러기에 이 세 분을 일생 잊지 못하는 은사로 받드는 나다. 87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생을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하며 구국의 길을 걸은 이시영 선생의 행적은 아직도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독립투쟁의 행적 못지않게 앞으로 역사가로서 또한 교육자로서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의 연관성 省 齋 李 始 榮 (1869~1953)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주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45년 11월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 후에는 초대 부통령으로 35

43 정부수립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시영의 이러한 활동은 그를 모시던 인물이 간략하게 전기를 정리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 후 이시영의 활동을 다룬 연구가 있었고, 이시영이 1934년에 쓴 5 7 感 時 漫 語 5 7를 주제로 삼아 그의 민족의식을 분석한 박사학위논문이 발표되었다. 근래에는 이시영이 펼친 35년간의 독립운동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여 활동한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평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성과로 이시영의 삶과 활동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간과 위상을 고려한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시영 이재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서 수행한 활동과 역할을 일반적인 임시정부의 시기 구분에 따라 상해, 이동, 중경시기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상해시기 :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의 기틀 마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3 1운동의 직접적인 산물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3 1운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朝 鮮 이 獨 立 國 이며 朝 鮮 民 族 이 自 由 民 임을 세계만방에 선포 하였음으로 이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3 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사들이 중국 上 海 로 모였는데,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최고 기관을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이시영은 3 1운동이 일어났을 때 北 京 에 있었다. 마침 국내에서 활동하던 형 이회영이 북경에 도착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전하고 향후 운동 방침을 논의하였다. 이시영은 하나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효과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이회영은 어떤 인물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은 한 인물을 신격화 우상화하여 결국은 내분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방법으로는 부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두 형제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지만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지도자들이상해에 모여 3 1운동 이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으므로 이시영도 여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시영이 상해로 가게 된 데는 현순의 안내가 있었다. 현순은 국내에서 3 1운동을 준비하던 과정에동참했다가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대표들의 뜻에 따라 상해로 파견된 인물로 상해 프랑스 조계에 독립임시사무실을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3월 초 현순은 북경으로 떠나 3 1운동 선전활동을 전개하다가 3월 하순에 상해로 돌아왔는데, 이때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함께 했다. 이시영을 비롯하여 북경과 노령 등지에서 온 36

44 이동녕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조영진 조소앙 등 30여명이 3월 하순 경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후일에 다수의 정부가 생길까 염려되어 논의를 중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의 역사는 활동한 지역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한다. 1919년부터 1932년까지를 상해시기, 1932년 윤봉길의거로 상해를 떠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시수도인 重 慶 에 정착하는 1940년까지를 이동시기, 그리고 1940년부터 1945 년까지를 중경시기 라고 한다. 1919년 4월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수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4월 초 독립임시사무소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논의를 거쳐 임시의회 를 열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4월 1일 밤 회의를 열고 정부 수립 절차를 진행하였다. 이시영도 이 회의에 참여하였는데, 이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 29명이었다.10 4월 10일 회의에서는 우선 회의의 명칭을 臨 時 議 政 院 이라고 정했다. 이날 성립한 임시의정원은 한국사에서 최초로 결성된 의회 조직체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입법기관으로 임시의정원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4월 11일 아침 10시까지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결정했다. 우선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 으로 하였다. 10년 전에 일제에게 빼앗긴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 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民 國 이 탄생한 것이다. 민국이라는 국호의 제정은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이루었음을 뜻한다. 다음으로 정부 조직 구성과 정부 내각 구성원을 선출하였다. 국무총리 이승만을 수반으로 삼으면서 내무 외무 재무 교통 군무 법무의 6부를 두었는데, 이시영은 이 회의에서 법무총장에 뽑혔다. 법무총장 후보로 이시영 남형우 조소앙이 천거되었는데, 투표 결과 이시영이 당선된 것이다. 1908년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한 이시영의 경력을 고려한 것 으로 보인다. 이어 총장을 보좌하기 위한 차장 선출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무총리 : 이승만 내무총장 : 안창호, 차장 : 신익희 외무총장 : 김규식, 차장 : 현순 교통총장 : 문창범, 차장 : 선우혁 37

45 재무총장 : 최재형, 차장 : 이춘숙 군무총장 : 이동휘, 차장 : 조성환 법무총장 : 이시영, 차장 : 남형우 그러나 각부의 대표인 총장 가운데 법무총장 이시영만 상해에 있었고, 나머지 인사들은 미주와 노령 등지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법무총장 이시영 한 사람과 젊은 차장들이 실제 업무를 처리하는데 무리가 따랐다. 그리하여 4월 22일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차장제를 위원제로 바꾸었다. 위원제는 국무원과 6개부에 각각 위원을 두는 집단운영체제로 위원수는 모두 49명이었다. 이시영이 총장인 법무부는 민사 형사 및 감옥에 관한 사무 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임시정부의 특성상 법무부가 처리해야 할 업무의 양이 많지 않았지만, 초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데 총장으로서 이시영 이 받은 책임감은 막중하였을 것이다. 이시영은 법무총장을 맡다가 임시정부가 출범한지 한 달도 못된 5월 10일 사직하였다.14 사직 이유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지만, 일제 정보 보고에 의하면 3 1운동 이후 상해에 온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인사들이 기호지방 출신인 이시영과 이동녕의 지도를 따르지 않고 안창호의 상해 부임을 재촉하였다고 한다.15 미국에서 활동하던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이었다. 이시영은 출신 지역에 따른 내분으로 정부 운영이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안창호가 부임하기 전 상해를 떠난것으로 보인다.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임시정부는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민족을 대표하여 국내외 3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정부가 그것이었다. 세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모두 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구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통합을 위한 기득권 포기와 희생이 필요했다.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은 노령과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사이에서 일어났고, 통합에 따른 절차와 작업은 상해의 임시의정원에서 이루어졌다. 통합 정부는 한성정부의 제도와 각원을 그대로 따르되, 다만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 라는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제6회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9월 6일 통과되었다.16 이어 9월 8일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고 9월 11일 통합정부의 조직을 아래와 같이 공포하였다. 대 통 령 : 이승만 38

46 국무총리 : 이동휘 내무총장 : 이동녕, 외무총장 : 박용만,군무총장 : 노백린 재무총장 : 이시영, 법무총장 : 신규식,학무총장 : 김규식 교통총장 : 문창범, 노동국총판 : 안창호 세 정부의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통합정부 는 곧바로 출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지 않았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상해에 왔지만 취임을 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국총판 안창호 외에 각부 총장들도 상해를 떠나 있어 취임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시영도 이때 이동녕과 함께 북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통합정부가 출범하는 데는 두 달이 걸렸다. 통합정부의 출범이 지연되자, 안창호는 신익희를 항주로 보내 신규식을 청해 오고, 북경으로는 현순을 파견하여 이동녕과 이시영을 모셔 오게 하였다. 각부 총장들이 상해로 집결하면서, 국무총리가 취임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1월 3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하여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국총판 안창호가 참여한 가운데 취임식을 거행하였다.18 이로써 9월 11일 수립이 선포된 지 50여일만인 11월 3일에야 통합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통합정부의 출범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만 9년 만에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노령 상해 국내의 세 곳에서 각각의 기반을 갖고 수립된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을 이루면서,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총 결집한 것이기도 하였다. 통합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취임한 이시영은 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수행을 위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기 전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재정 수입은 개인의 의연금에 의존하는 부정기적인 애국금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징수하는 인구세였다. 이와는 별도로 미국에서 이승만이 공채를 발행하고 있었다. 통합 정부가 수립된 뒤 재정의 근본 재원으로 독립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국채통칙, 독립공채발행조례, 임시공채관리국관제 등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면서 미주 재정을 관장하고 있던 이승만과 마찰이 생겼다. 임시정부는 재무총장이 공채 발행을 주관할 것이며, 주미재무관을 설치하여 재정을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이승만에게 공채발행을 중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채발행을 폐지하기 곤란하다고 하면서 임시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미주 에서 거두어들인 자금은 임시정부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상해 임시정부와 미주의 이승만 모두에게 쉽사리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미주의 재정 관할권 문제는 39

47 재무총장 이시영이 나서 해결하였다. 이시영은 이동녕과 함께 각원들은 설득하여 1920년 3월 공채 발행을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 위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19 하지만 미주 재정권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면서 임시정부의 미주에 대한 재정 의존도는 높아갔고, 미주에서 자금 송금을 줄이면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침체에 빠졌다.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하던 聯 通 制 와 交 通 局 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인물과 자금이 끊어지고, 미주 동포들의 지원도 구미위원부가 장악하면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시영은 국무회의에서 재정형편의 어려움을 호소하였지만,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공채 판 돈 좀 보내라 고 하면서 면박을 주었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정치적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미주 재정권을 이승만이 독점하면서 갈등은 깊어졌다. 정부의 재정을 책임진 이시영이 중간에서 겪었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승만이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시영은 대통령이 임지에 부임하면서 임시정부가 정상화되고, 독립운동이 진전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상해에서 집무하는 동안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국무회의에서 의견 충돌로 국무총리 이동휘가 1921년 1월 24일 사임하였다. 이시영은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습하기 위해 안창호를 찾아가 국무총리를 맡아줄 것을 권했다. 이에 안창호는 평소에 기호 출신 인사들이 지방열의 화신 으로 자신을 폄하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과 정부안에서 개혁이 더 이상 불가함을 들어 총리 권유를 거절하고,노동국 총판직도 사임하였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도 상해에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외교상의 긴급과 재정상의 절박 을 이유로 법무총장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이시영은 이동녕과 함께 신규식을 도와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이승만은 상해를 떠나면서 자신은 태평양회의에 노력을 집중할 것이며, 신규식이 임시정부를 맡아 이를 적극 지원하라고 주문하였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의 주도하에 영국 프랑스 이태리 일본 등이 참가하여 해군군비축소와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질 전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정국에서 이시영은 내무총장 이동녕과 함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을 도와 태평양회의 준비에 진력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은 채 1922년 2월 6일 막을 내렸다.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그 파장도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외교 실패의 책임을 40

48 지고 신규식 국무총리 대리가 사직한데 이어, 군무총장 노백린을 제외한 모든 각원이 사직하였다. 이시영도 책임을 지고 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24 이로써 임시정부는 1922년 3월 이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로 주춤하였던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다시 추진되었고,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이 임시의정원에서 제기되면서 임시정부는 더욱 침체되었다. 한동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던 임시정부는 1922년 8월에 노백린을 국무총리로 하고 각부 총장을 선임하였다. 하지만 재무총장 이시영과 외무총장 조소앙 외에는 아무도 취임하지 않았다. 태평양회의 개최로 주춤했던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당시 독립운동계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각 지역과 단체 대표들이 집결하여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모임이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한 세력은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개조파 창조파 정 부유지파로 나뉘었다. 개조파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것이고,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시영은 3 1운동의 결과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인 임시정부를 폐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6월까지 계속되었지만, 임시정부 존폐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동안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임시정부는 재정이 어려워 정부 청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청사 임대료 체납으로 집주인으로부터 퇴거를 당하여 1923년 8월 이시영의 집 방 1칸을 빌려 사용하였다. 재무총장이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내어줄 정도로 정부 살림이 궁핍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인데도 이승만은 해를 넘긴 1924년 3월 29일 이시영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유지 방침을 지시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상해에 더 믿는 이도 없고 또 구하지도 아니하며, 다만 이시영 김구 조소앙 노백린으로 시국 정돈 될 때까지 함께 지켜오자는 것뿐 이라고 하면서,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추천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이동녕내각 이성립 되었다. 이동녕내각에서도 이시영은 재무총장을 맡았다.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의 지원이 없으면 정부 청사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파 로 비난받은 인물의 자금까지 끌어 쓰려다 이동녕내각이 물러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閔 ル 廷 植 사건 으로 상당한 자금을 가지고 민정식이 상해로 오자 임시정부에서 보호하였다가 그의 자금을 사용하려 했는데, 1924년 12월 10일 프랑스영사관의 협조를 얻은 일제 경찰에게 민정식이 연행되고 만 것이다. 41

49 이 사실이 알려지자 상해 한인사회에서 비난의 여론이 빗발쳤고, 국무총리 이동녕은 12월 11일 사직하였고 재무총장 이시영도 책임을 지고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이동녕이 사직 의사를 표명한 그날로 임시의정원은 박은식을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출했다. 박은식은 1924년 12월 1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하여 대통령대리직을 수락하고, 이어 12월 16일에는 내무총장 이유필, 외무 겸 재무총장 이규홍, 군무 겸 교통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오영선, 학무총장 조상섭, 노동국총판 김갑의 새 내각 인준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동의를 얻었다. 이튿날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기호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이동녕내각이 사퇴하고 박은식내 각이 출범하면서 이승만을 탄핵하는 일이 본격화되었다. 대통령이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 있으면서 임시정부를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탄핵을 추진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승만탄핵안 은 1925년 3월23일 제13회 임시의정원에서 탄핵이 면직으로 바뀌어 통과되었다. 이시영은 이승만이 면직되고 이틀 뒤인 1925년 3월 25일 이승만에게 편지를 썼다. 이승만이 면직에 이르게 된 것을 임시정부 수립 이래 처음 있는 정변 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에 대한 답신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탄핵에 이른 것은 이동녕의 책임이고, 자신을 탄핵한 임시의정원을 해산하고 내각을 새로 조직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나, 인심의 추이를 살펴 단행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승만의 편지에는 본인의 책임이나 실정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이시영은 5년을 넘게 재무총장으로 대통령을 옹호하고 임시정부를 유지해왔지만 이승만이 면직되고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상해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시영은 1925년 2월 25일자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해에 기거하기도 이제는 극히 어려우니 장차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허물을 뉘우치며 자취를 감추고 숨어 살 계획 이라고 거취를 밝혔다. 이시영이 상해를 떠난 후 1929년 말까지 중국 관내에서 유일당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지만, 이 시기이시영의 움직임은 자료상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시영은 1930년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유일당운동이 결렬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인사들이 결집하여 조직한 독립운동 정당이었다.새롭게 시작된 유일당운동은 좌우 세력으로 양분된 독립운동진영을 하나로 통일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펼쳐 나가자는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일당운동은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1929년 말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좌익 진영에서 1929년 10월 留 滬 韓 國 獨 立 運 動 者 同 盟 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자, 우익 42

50 진영 인사들도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것이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상해 프랑스 조계 馬 浪 路 普 慶 里 제4호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성되었다. 이시영은 28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39 이승만 면직 이후 임시정부를 떠나 있던 이시영이 한국독립당 창당을 계기로 독립운동전선에 복귀하면서 정당 설립을 주도한 이동녕과 안창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3. 이동시기 : 한국국민당 창당과 임시정부의 유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과 그 가족들은 홍구공원 의거 이후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8년을 넘게 중국 관내 곳곳을 전전해야 하는 고난의 세월을 경험해야 했다. 이 기간에 이시영은 새로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국무위원에 다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윤봉길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抗 州 로 급하게 옮겨 갔다. 이시영은 한국독립당 이사를 맡아 1933년까지 활동하였지만, 주요 간부들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각지로 흩어져 당의 운영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여기에 1932년부터 다시 일어난 좌우합작운동의 결과로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한국독립당은 해체되고 임시정부는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던 임시정부 국무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이시영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과 임시정부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무엇보다 임시정부를 이끌어갈 국무위원을 새로 뽑는 일이 시급했다. 1935년 11월 2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보선을 실시하여 이시영을 비롯하여 김구, 이동녕, 조완구, 조성환 5명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했다. 기존의 송병조 차리석과 함께 국무위원은 모두 7명으로 짜여졌다. 11월 13일 신임국무위원 취임식이 있었다. 이어 국무회의를 열어 주석을 호선한 결과 이동녕이 선출되었고, 내무장에 조완구, 외무장에 김구, 군무장에 조성환, 법무장에 이시영을 각각 선임했다. 송병조와 차리석은 각각재무장과 비서장으로 유임되었다. 임시정부를 재정비한 이들은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옹호할 수 있는 정당 조직에도 착수하였다. 1935년 11월 창당한 韓 國 國 民 黨 ケ이 그것이다. 한국국민당은 김구를 이사장으로 하고, 이동녕 송병조 조완구 차리석 김붕준 안공근 엄항섭 등 7명의 이사를 두었다. 이시영은 조성환 양우조와 함께 감사를 맡았다.43 국무위원 전원이 간부에 포진하여 임시정부의 기초 정당 결성이라는 조직 목적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43

51 한국국민당의 이념과 독립운동 방략은 창립선언과 당의 당강에 잘 드러나 있다. 한국국민당은 창립선언 에서, 한 줌의 땅도 되찾지 못하고 쇠사슬의 유린에 울부짖는 동포들의 울음 소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에도 중요한 성분을 갖고 있다. 즉 사상의 차이, 견해의 부동, 조직의 무능이 상당한 원인 요소이고 기본적인 정의 도덕의 散 亂 현대적 종횡술책의 亂 用 이 최대의 요소인 것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창당 후 한국국민당은 韓 民, 韓 靑, 戰 線, 戰 鼓 등의 기관지 간행을 통해, 순수한 민족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의 혁명적 이론 고취, 무장독립운동론, 한 중 연합 항일전선의결성 등을 주장하였다.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 창당되어,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될 때까지, 중국 관내지역 우파 민족주의세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동시기 임시정부의 법무장과 한국국민당 감사로 활동하던 이시영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선출되어 정부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시영은 이미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후 법무총장과 통합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을 맡으며 의정 활동에는 손을 떼었다. 이시영이 다시 의원에 선출된 제29회 임시의정원은 1936년 11월 10일 嘉 興 의 임시처소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는 새로 선출된 의원의 자격 심사가 통과되기 전까지는 의장 송병조 외에 조완구 양묵 차리석 김붕준 등 5명의 의원으로 회의가 열렸다. 자격심사 결과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를 떠나 있던 김구를 비롯하여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민병길, 안공근, 안경근, 왕중량, 이동녕 등 9명의 의원이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동시기 임시의정원은 10명도 되지 않는 의원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한국국민당 결성 이후 새로운 인원이 참여하면서 의정 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임시의정원은 이후 한국국민당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부와 정당, 의회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던 이시영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長 沙 를 거쳐 廣 州, 柳 州, 綦 5 江 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 대가족 100여 명과 고난의 피난길을 걸어야 했다. 1939년 4월 綦 5 江 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는 1년 반 동안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은 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중경]을 창당하고, 정부의 세력 기반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우선 정부의 조직과 세력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한국독립당[재건]과 이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 인사들을 임시정부에 참여 시키기로 하였다. 1939년 10월 23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44

52 국무위원수를 임시약헌에 규정된 최대 인원인 11명으로 확대하기로 의결했는데, 그것은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인사들도 국무위원에 포함 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선거 결과 지금까지 국무위원이었던 한국국민당의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김구, 송병조, 조완구, 차리석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이청천과 유동열, 한국독립당의 홍진과 조소앙을 추가로 선출하였다.48 이틀 뒤인 10월 25일에는 국무회의에서 주석의 임기를 3개월로 정하고, 기존의 내무 외무 군무 법무 재무의 5개 부서 외에 전시체제를 대비하여 참모부를 증설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행정부서의 책임자는 국무위원 중에서 호선하였는데 이시영은 계속하여 법무장을 맡았다. 정부의 조직을 확대한 뒤 미루어 두었던 정당 통합도 추진하였다. 1940년 3월 24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재건] 조선혁명당 3당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3당 통합을 위한 제2차 대표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당명을 韓 國 獨 立 黨 으로 결정하고, 당의 당강 당책 당헌을 비롯하여 사업안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다. 3당은 5월 8일 공동명의로 기존의 3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3 1운동의 正 脈 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당 으로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는 내용의 73당 해체선언 5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창립대회를 열어 7한국독립당 창립선언 7을 발표하고 3당의 통일체로 신당인 한국독립당의 창당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51 당의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 김구가 선임되었고 이시영은 송병조 등 4인과 함께 중앙감찰위원에 뽑혔다.52 독립운동계의 원로로 당의 사업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3당 통합 전 한국국민당에서 감사로 활동한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4. 중경시기 : 좌우연합정부 구성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시 수도인 重 慶 에 정착하여 정부로서의 위상을 회복해 나갔다. 중경시기 이시영은 정부의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에 힘을 쏟았다. 통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이시영을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종전의 집단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헌법을 개정하는 문제는 임시의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임시의정원은 10월 8일 임시약헌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이튿날 새 임시약헌에 따라 정부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정부의 주석과 국무위원은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0월 9일 의정원 회의에서 김구를 행정수반인 주석으로 선출하여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어 국무위원을 선거하기 위한 투표를 실시하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차리석 조성환 박찬익 6인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하였다.53 그리고 45

53 행정부서의 책임자를 결정하였는데,54 이시영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시영은 상해시기 재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재정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중경시기 임시정부의 재정은 주로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되는 자금으로 운영되었지만, 갈수록 그 규모가 증가되는 상황에서 전시체제에 맞는 재원조달과 지출 업무는 어려운 일이었다.55 이러한 상황에서 칠순이 넘은 이시영이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을 맡은 것은 김구가 그만큼 이시영에 대해 거는 신뢰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경시기 임시정부가 거둔 대표적인 성과의 하나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중국 관내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들이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조직과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 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정부로 참여한 것이다. 이시영은 정부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의 자격으로 통일운동을 지도하였다. 임시정부는 1942년 4월 20일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우선 좌익 진영의 무장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합편하는 군사통일 방안을 마련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56 군사통일에 이어 좌익 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정치 통일도 이루어졌다. 1942년 10월에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의 좌익 진영 인사 16명을 새로 선출하여 통일의회 를 구성한 것이다.57 지금까지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기초 세력이자 여당 역할을 하고 있던 한국독립당 단독으로 구성 운영되었다. 통일의 회 가 구성되면서 임시의정원이 다당체제로 바뀌었고, 의회 내에 여당과 야당이 생겨나 임시정부의 정책을 놓고 격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시영은 이처럼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함에 따라 정부 조직을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11월 1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시영 등 12명의 의원이 제출한 국무위원 4인을 늘이는 안이 가결되었다. 정부 부서도 현재의 5부외에 학무, 교통, 선전, 생계의 4부를 증설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김규식은 선전부장에, 장건상은 학무부장에, 유동열은 교통부장에, 황학수는 생계부장에 선임되었다. 통일의회가 구성되고 임시정부의 조직을 확대하였지만 여야간 상호 대립과 불협화음도 나타났다. 야당측 의원들은 임시의정원에서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고, 한국독립당은 좌익진영에 의한 임시정부 장악이나 기득권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3년에는 권총도난사건 ( 김구암살음모사건 )과 공금횡령사건 등의 46

54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국무위원들이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권총도난사건 은 1943년 4월 임시정부 경위대에서 권총을 도난당했는데, 이 총으로 김구를 비롯하여 이시영 조완구 박찬익 조성환 등 한국독립당 인사들을 암살하려 고 하였다는 것이다. 공금횡령사건 은 중국 정부에서 지급되는 1943년 6월분 지원금을 나누어주지 않고 임시정부의 누군가가 횡령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사건으로 임시정부는 일시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1943년 8월 31일 김구 주석과 이시영을 비롯한 국무위원 7인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61 공금횡령사건 은 나중에 중국 측의 착오로 늦게 지불된 것이 확인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재정을 책임진 재무부장 이시영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국무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서 임시정부의 긴급한 경비지출이 중단되어 동포들의 생활 문제도 어렵게 되자, 여기저기서 사직을 철회하라는 요구가 쇄도했다. 이시영은 주석 김구와 함께 9월 21일 직무에 복귀하여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가 수습되었다. 임시정부의 운영이 정상화되면서 여당인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이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된 모습으로 독립운동의 방향과 목표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다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1944년 4월에 열린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1940년 10월에 제정 공포되었던 대한민국임시약헌 을 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기구와 조직이 새롭게 구성 되었는데, 주석 이외에 야당 몫으로 부주석을 신설하였으며, 국무위원도 14인으로 증원하는 등 예전보다 크게 확대되었다.63 새롭게 구성된 정부의 주석은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선임되었고, 신설된 부주석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국무위원 14명도 여야가 8대6으로 배분하였으며, 7개의 행정부서 중 군무부와 문화부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맡았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좌우익 세력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실질적인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이시영은 좌우연합정부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행정부서를 담당하지 않는 무임소 국무위원이었다. 이시영의 연령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륜을 고려하여 취해진 결과로 보인다. 이시영은 실제 업무를 집행하는 행정부서의 장에서 물러났지만, 국무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정부의 정책과 활동에 대한 사항을 논의하고 의결했다. 임시정부의 큰어른 으로 광복 후 환국할 때까지 통일 단결된 좌우연합정부를 유지 운영하는데 함께 한 것이다. 이시영은 51세인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77세인 1945년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지도적인 인물이다. 35년의 독립운동 기간 중 3분의 2가 넘는 기간을 임시정부 유지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이시영은 상해시기,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47

55 1919년 4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 날 구성된 내각 구성원 중 법무총장에 선임된 이시영만 상해에 있었다. 수립 초기 임시정부가 정상적으로 자리 잡는 데 남다른 공헌을 한 것이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가 출범하면서 이시영은 재무총장을 맡아 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수행을 위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주의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 사이에 공채 발행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는데, 재무총장으로 이를 조정하는데 앞장섰다. 이시영은 5년을 넘게 재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를 유지해 왔지만, 1925년 이승만이 면직되고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시영이 임시정부와 다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였다. 한국독립당은 유일당운동이 결렬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인사들이 결성한 독립운동정당이다. 이동시기, 이시영은 새로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국무위원에 다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한국독립당이 해체되고,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던 국무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사직하여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지켜갈 수 있는 정당 조직에 착수하여 1935년 11월 김구와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국무위원으로 법무장을 맡아 이동시기 임시정부가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강을 세워 나갔다. 중경시기, 이시영은 임시정부 재무부장과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에 힘을 쏟았다. 1942년 7월 좌익진영의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고, 그해 10월에 열린 임시의정원에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통일의회 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부의 지도체제를 개편하였는데, 이를 통해 정부의 조직에도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이시영은 이때 재무부장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광복 후 환국할 때까지 통일 단결된 모습으로 좌우연합정 부를 유지 운영하는 데 함께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이시영은 주로 법무와 재무를 담당하였다. 임시정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큰어른 의 역할을 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27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시영과 같은 원로들이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주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48

56 라. 신흥무관학교의 강원도 출신 대표 독립운동가 1 박용만 의사 1881년 철원읍 중리서 출생 안창호 이승만과 더불어 미주 독립운동 이끈 3대 민족지도자 日 美 서 대학 다닌 국제적 엘리트, 언론 군사 정치학 전문지식 갖춰 무장투쟁만이 최선이라 판단 재학 중 해외서 독립군 양성 매진 한인 최초 국외군사학교 열어 임시정부 탄생에도 중추적 역할 신채호 신숙과 `군사통일회의' 결성 이승만과 옥중서 만나 형제의 연 그들의 운명적 관계도 시작 외교노선과 무장투쟁노선 갈등 이승만 탄핵에 나서며 대립 극에 달해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 내 일생에서 가장 큰 정적은 우성 이해명이 쏜 흉탄에 피살당해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어 출생지도 표석 하나 없이 잡초 무성 더 늦기 전에 신원 회복 위해 나설 때 그 첫걸음은 철원군민과 도민의 몫 우성( 又 醒 ) 박용만( 朴 容 萬 )은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론자다. 그는 1921년 4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과 중국과 연해주의 독립무장단체들을 연합해 `군사 통일회의'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 國 內 進 攻 作 戰 )까지 계획했었다. 그가 무장독립투쟁론을 주 창한 이유는 당시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 제국주의 잔학성을 실질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 무장투쟁론자로만 알려져 있는 박용만은 일본 게이오의숙과 미국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 국제적 엘리트였다. 그는 정치사상은 물론 국어(국문), 언론, 군 사,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선각자였다. 박용만은 준비론 안창호( 安 昌 浩 ), 외교론 이승만( 李 承 晩 )과 더불어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 던 3대 민족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그를 거의 알지 못한다. 이에는 그만한 배경적 이유가 있다.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승만과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임시정부노선 문제로 민족의 지도 자 김구( 金 九 )와도 대립했던 인물이었기에 박용만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이 승만이 4 19의거로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정적은 우성( 又 醒 )이었다 고 비서에게 고백했다 한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박용만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 작업이 진척됨은 만시지탄( 晩 時 之 歎 )이나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81년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鐵 原 邑 ) 중리( 中 里 )에서 출생한 박용만은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파 인사인 숙부 박희병( 朴 羲 秉 )의 주선으로 1895년 일본 게이오 의숙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박영효 등 개화파들과 교류하며 활빈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로 인해 1901년 3월 귀국 시 체포돼 한성감옥에 1차 수감된다. 1904년 주한 일본공사의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한성감옥에 2차 투옥되고 옥중에서 이승만과 만나 형제의 연을 49

57 맺게 되며 그들의 운명적 관계도 시작됐다. 1905년 출옥한 박용만은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숙부 박희병과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Denver) 로 가게 된다. 이 때 이승만이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 원고를 미국으로 반출했고 이승만의 외아들 봉수를 미국 동부까지 데려갔다. 그가 해외 망명길을 택한 것은 한일의정서와 러일전쟁 으로 이미 한반도가 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상황이었고 미국에 밝은 숙부 박희병의 영향이 컸다. 박용만은 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며 ROTC 과 정을 이수한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전국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국제정세 흐름에 밝았던 박용 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 해외에서 독립군 양성에 매진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 네브래스카 주 커니에 있는 한인농장 내에 한인 최초의 국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게 된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 여름방학 때 입소해 평균 8주간 군사훈 련을 받았고, 오전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군사훈련을 받는 둔전병제( 屯 田 兵 制 )로 운영됐 다. 둔전병제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해야하는 독립군에게는 가장 시의적 절한 체제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일본 측의 항의로 1914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 세계를 주도하던 미국 땅에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가 최초로 세워진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는 단순히 전투병만 배출하는 군사학교가 아니라 서방 선진교육 을 통해 국제정세에 밝고 신지식을 갖춘 구국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한인소년병 학교는 이후 각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에 영향을 줄 정도로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했다. 후 일 `신흥무관학교( 新 興 武 官 學 校 )'에서 소년병학교의 교육편제가 차용되었고, 박용만이 저술한 ` 군인수지'와 `국민개병설'이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의 무장독립투쟁 집념은 1914년 하와이로 옮 겨 `대조선국민군단' 창설로 이어져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되나, 1915년 여름 일본의 항의와 파인애플 농장 재정악화로 폐쇄된다. 독립투쟁노선 차이로 인한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도 국민군단 와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박용만과 이승만의 숙명적인 관계에 관한 일화는 많다.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은 박용만이 1908년 여름 덴버에서 소집한 애국동지대표회 및 1912년 한인소년병학교 제1회 졸업식 등에 불원천리( 不 遠 千 里 ) 참석하여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박용만은 1913년 이승만을 5,000명 한인 동포가 사는 하와이로 초청한다. 그러나 독립투쟁 방안에 있어 근본적인 노선 차이로 두 사람 의 협력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외교독립노선의 이승만은 무장투쟁노선을 고집했던 박용만의 막대한 경비가 드는 대조선국민군단 계획에 찬성할 수 없었다. 1918년 1월 이승만이 법정에서 박용만을 한국인 군단을 설립하고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파괴할 음모를 가진 자 라고 증언하면서 두 사람은 정적( 政 敵 ) 관계로 변모한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 수반인 이승만을 탄핵 하는데 박용만이 나서면서 갈등과 대립은 극에 달한다. 무장투쟁론을 강하게 주창했던 박용만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했다. 1911년 신한 민보를 통해 주장한 `무형국가론'은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의 기반이 되었다. 이 조직은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50

58 그는 임시정부를 원래 국가의 성립은 백성과 토지로 기초를 삼고 법률과 정치로 집을 만드는 것이나 시방 우리는 백성은 있고 토지는 없어 불가불 남의 토지 위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고로 무형의 국가 라고 지칭하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8년 전 이미 망명정부의 필요성 을 제기했던 것이다. 1917년 박용만이 기초한 `대동단결의 선언'과 1919년 `대한독립선언'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19년 9월 박용만은 대한민국 통합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추대되지만 응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항일투쟁이 그에겐 더 중요했던 것이다. 1921년 4월 박용만은 북경에서 이승만 임시정부 노선 에 반대하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이 드러나자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군사통일회의에선 상해임정과 임시의정원 불승 인안을 통보한다. 이후 박용만은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7월 1~15일)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27년 4월에는 호놀룰루 팔라마지방에 우성학교를 설립하 고 직접 국어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들 국어교육에도 이바지했다.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중국 북경에서 이해명이 쏜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그가 피살당한 이유로는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총독 밀회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독립운동계 에 일파만파로 퍼진 조선총독 밀회설로 박용만은 독립운동사에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그동 안 역사에서 외면 시 되었다. 일제가 당시 박용만에 대해 작성한 300건이 넘는 기밀문서 어디 를 뒤져봐도 그가 스파이라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보문서에는 오히려 박용만을 `배 일선인( 排 日 鮮 人 )의 영수', `불령선인'으로 표현하는 등 요주의 인물로 여겼고, 밀정( 密 偵 )들이 끊임없이 감시했다. 한편 해당문서에는 박용만과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간책도 언급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 할 수 있는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붉은 군대에 의해 조선독립군 1,000여명이 참혹하게 괴멸되는 자유시참변( 自 由 市 慘 變 )을 목도( 目 睹 )한 박용 만이 러시아 공산주의의 남하 즉 적화( 赤 化 )를 막기 위하여 한 중 일 3국의 협력을 모색하고 일 시적으로 일본세력을 이용하고자 조선총독을 만나려는 거대하고도 담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 라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적 대립관계를 이용해 독립군의 무장을 강화 하고 궁극적으로 일본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계획을 일제는 역으로 독립운동계 를 분열시키는 이간책으로 활용하였고 결국 그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의 죽음은 격동기 시대적 상황에 따른 비극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비명에 간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한지 70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고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미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3대 민족지도자로 꼽는 박용만 의 출생지에는 현재 표석 하나 없이 잡초만이 무성하다.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관련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동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역사학자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박용만 관련 연구는 가일층 진일보했다. 평생 조국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박용만은 우 리나라 최고의 항일무장투쟁론자였다. 그동안 우리는 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살아왔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완전한 신원( 伸 寃 ) 회복을 위하여 모두가 나서야 한다. 그 첫걸음은 철원군민과 강원도민의 몫이다. 51

59 2 윤기섭의사 윤기섭은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마산동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경기 도 장단( 長 湍 )이다. 본관은 해평( 海 平 )으로서 대대로 과거급제자들을 배출한 조선 말기 명문가 집안의 출신이었다. 그는 백사공( 白 沙 公 ) 윤훤( 尹 喧 )의 12세손인 한말의 유학자 윤기영( 尹 耆 榮 ) 과 합천 이씨 사이의 2남 3녀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윤기섭의 자는 중규( 仲 珪 )이고, 호는 규운이다. 규운은 낮게 가는 구름 이라는 뜻으로 겸손 의 의미를 지닌다. 서간도와 중국 본토에서 활동할 때는 이름 대신 규운이라는 호도 많이 사용 하였다. 이는 그의 인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한반도는 안으로는 봉건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던 혼란기였으며 밖으로는 일본 및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 한 개항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고리로 편입되고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조선은 더 이상 세계사의 조류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국제사회에 강제로 편입된 만큼 조선에 부여된 지위도 예속적 종속적인 것이었다. 조국의 위급한 상황은 민족의 각 성원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를 부여하였다. 우선,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제약을 받게 된 조선의 자주권을 회복하여야 했다. 더 나아가서는 근대화를 이룩하여 세계무대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대해 각 사회집단 은 다양하고 상이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 辛 巳 斥 邪 運 動 ), 1884년의 갑신정변( 甲 申 政 變 ), 1894년의 동학 농민전쟁( 東 學 農 民 戰 爭 ) 등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련의 반봉건 반침략 민족운동이 전개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윤기섭의 부친 윤기영은 한말 유학자로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 다. 특히 그는 서화( 書 畵 )에 능하였는데, 그의 서화를 받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묵객( 墨 客 )들로 윤기섭의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풍 덕분으로 윤기섭은 어린 시절부터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 私 塾 )에서 한학( 漢 學 )을 수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조실부모한 그는 10세 되던 해에 강원도 철원( 鐵 原 )의 부호이며 문장가였던 박초양( 朴 楚 陽 )에 의탁하면서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윤기섭은 성장하면서 동학농민전쟁을 비롯한 갑오경장( 甲 午 更 張 ), 대한제국 수립, 러일전쟁 을사늑약( 乙 巳 勒 約 ) 군대해산 등 풍전등화와 같은 한국근대사의 파동을 지켜보았고 그때부터 남다른 애국심을 길렀다. 그는 또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오직 후세에 대한 교육뿐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념은 오산학교부터 시작되는 그의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가적 생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민족사학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52

60 철원의 박초양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한 윤기섭은 보성중학교( 普 成 中 學 校 )에 제1회로 입학하여 남달리 명석했던 그는 보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가 한말의 명운이 다해가던 1909 년이었다. 보성중학교는 1906년 8월 이용익( 李 容 翊 )이 설립한 명문 사립학교였다. 이용익은 대 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관장하고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민족의식이 깊은 인물이었다. 윤기 섭의 초기 민족의식은 이곳 보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배양되기 시작하였다. 보성학교 재학 중 윤기섭은 자신의 은사였던 박초양의 장녀 반남 박씨(1885년생)와 결혼하였 다. 결혼 후 1909년 장남 윤경로( 尹 慶 老 )가 태어났다. 하지만 윤기섭이 보성학교에 재학 중이었 고,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평북 정주( 定 州 )의 오산학교( 五 山 學 校 ) 교사로 부임하였기 때문에 실 제로 가족들과 함께 한 것은 장남이 태어났을 때 철원의 처갓집에서 잠깐 있었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 윤기섭은 그 후로도 줄곧 가족들과 떨어진 채 오산학교와 신민회에서 활동하다가 중 국으로 망명하였다. 1909년 보성학교를 졸업한 윤기섭은 교육사업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평 북 정주의 명문 사립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오산학교는 안창호( 安 昌 鎬 )의 연설을 듣 고 감동한 이승훈( 李 昇 薰 )이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가던 애국계몽운동( 愛 國 啓 蒙 運 動 )의 일환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이승훈은 1907년 12월 2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의 경의재 또는 승천재라 불리던 옛 건물을 수리하여 김도태 이윤영 등 일곱 명의 학생으로 오산학교를 개교 하였다. 오산학교는 안창호가 신민회 외곽단체로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 大 成 學 校 )와 마찬가 지로 민족운동의 인재양성과 국민교육의 교사 양성을 교육목표로 하는 대표적인 민족사학이었 다. 초대 교장으로 정주의 유림 대표인 백이행을 모셨지만, 실제 학교 운영은 이승훈이 맡아서 했 다. 교사로는 여준( 呂 準 )과 서진순( 徐 進 淳 )이 있었다. 특히 여준은 후일 윤기섭이 서간도 신흥무 관학교에서 활동할 때 교장으로 재직했던 인사로 서간도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오산학교에서 는 수신 역사 지리 산수 법제 경제 체조 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에서 생활했다. 학생수는 80명 정도였는데, 매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민족의 식을 고취하는 훈화를 듣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1908년 학생들이 모여들자 성적을 기준으로 하여 갑 을 병의 3개 반을 편성했다. 윤기섭이 오산학교에 부임한 것은 오산학교가 개교 직후 막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있던 초창기였다. 그는 1909년 5월부터 1911년 5월까지 2년간 오산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애국 계몽서적을 교재로 활용하여 신학문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진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야학당( 夜 學 堂 )도 개설하여 청말 애국사상가인 양계초( 梁 啓 超 )의 음빙실자유기( 飮 氷 室 自 由 記 ) 를 비롯하여 애국부인전( 愛 國 婦 人 傳 ) 월남망국사( 越 南 亡 國 史 ) 등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책 들을 후학들에게 널리 가르쳤다. 이승훈은 학교에 교회를 두고 기독교 정신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교회를 활용하여 일제의 탄 압을 피해보려는 일종의 방패막이였다. 윤기섭이 소본 성경 한 권을 들고 서간도로 망명하였 다는 독립신문 의 기사 내용을 볼 때, 이미 오산학교 시절 기독교를 신앙으로 수용하였던 것 53

61 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1년 2월 안명근사건 과 뒤이어 터진 105인사건 으로 이승훈 등이 구속되어 옥고 를 치르면서 오산학교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오산학교의 재정난과 일제 탄압은 윤기섭의 망명을 서두르게 하였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교육자로 지낸 2년 동안의 경험은 이후에 신흥무 관학교 및 인성학교에서 교육구국운동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상의 내용 같이 수 많은 강원출신 신흥무관학교 독립투사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암흑기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공적과 헌신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확인된 명단은 전체 신흥무관학교 출신 3,500명 가운데 300여명의 기록만 확인 된 사항이며 이후 지속적인 연구 결과로 보다 많은 강원출신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확인하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그 외의 강원출신 신흥무관학교 명단 (그림 3-1) 강원출신 신흥무관생도 명단 (그림 3-2) 강원출신 신흥무관생도 명단 마. 해방정국과 대한민국 정부수립기의 신흥출신인들의 역할 성재( 省 齋 ) 이시영( 李 始 榮, 1869~1953) 선생은 망명 36년 만인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일행과 함께 1진으로 귀국하였다. 42세의 중년기에 망명하여 77세의 노령이 되어 환국한 것이다. 당시 그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신분이었으나 미국이 54

62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선장군 이 되지 못한 채 쓸쓸하게 환국하였다. 성재의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그리고 이승만 정권기에 겪은 영욕은 따지고 보면 임시정부가 부인되면서 비롯되었다. 형제들과 함께 망명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법무총장으로 참여한 이래 일제 패망시까지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지켜온 그에게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일 뿐 아니라 생애의 모든 자산이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저런 사유로 임시정부를 떠날 때도 그는 법무총장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 한국독립당 감사 재무부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시종일관하여 임시정부를 지켰다. 월남 이상재는 성재 일가의 서간도 이주와 신흥무관학교 설립 그리고 독립운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평한 바 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망명한 충의의사가 비백비천( 非 百 非 千 )이지만, 형제가족 40여 인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거국( 去 國 )한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는 일이다. 그 의거를 두고 볼 때 진실로 6인의 절의는 백세청풍( 百 世 淸 風 )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의 모범이 되리라 믿는다 성재의 형제들은 정통 성리학 체제의 조선왕조에 출사하면서도 한말에 이르러 신학문과 자유사상, 특히 양명학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지나친 형식론과 명분론에 따른 공리공론의 성리학을 배격하고 격물치지( 格 物 致 知 )의 실학과 양명학으로 국난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재의 심성 바탕에는 성리학적 의리론( 義 理 論 )도 깊숙이 깔려 있었다.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한 데서도 나타난다. 임시정부가 미국에 의해 부인되고 여운형의 전국동맹도 인정받지 못한 해방공간은 백화제방의 혼란상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이 유일하게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가운데 해방정국은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 이승만 중심의 미주세력, 여운형 중심의 건준세력, 박헌영 중심의 좌익세력,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 세력이 혼거한 상태였다. 정치적으로는 반탁과 찬탁, 이념적으로는 우익과 좌익, 외교상으로는 친미와 친소로 갈리거나 대립상이었다. 성재는 환국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경교장에서 환국 후 처음으로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에도 참석하고, 임정요원 환영 국민대회 등에도 참여하면서 새나라를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방책을 구상하였다. 1945년 9월 16일 송진우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한 보수우익 세력이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면서 이승만 김구와 더불어 이시영을 영수로 추대했으나 그는 이들의 과거 행적을 55

63 이유로 취임을 거부하였다.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6년 1월 28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 년 내로 공통한 말과 글과 풍토와 주권과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의를 길러온 우리 끼리로서 형상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임 을 선포한 이 강령은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차리석이 차례로 연서하였다. 성재는 1946년 3월 5일 하지 중장이 워싱턴에서 반탁, 단정수립 반대 등 임시정부측의 움직임에 강경 성명을 발표하자, 김구 조완구 유림 등과 브라운 소장을 만나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다. 임정과 결별, 단정수립에 참여 성재는 이에 앞서 1946년 2월 8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통합하면서 이 단체의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최고정무위원에는 임정요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과 한민당의 백남훈, 신한민족당의 권동진, 국민당의 안재홍, 인민당의 여운형, 무소속의 오세창, 기독교계의 함태영, 천주교의 장면, 불교의 김법린 등 각 정치세력을 두루 안배한 28명이 선임되었다. 비상국민회의 선전정보부장 엄항섭은 최고정무위원회는 과도정권 수립의 산파역을 임무로 하여 임시정부는 과도정권이 수립되기 전에는 해체되지 않는다 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비상국민회의최고정무위원회는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2월 14일 미군정의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변모되어 이승만을 의장, 김구 김규식을 부의장으로 하는 민주의원 으로 바뀌었다. 4월 10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의회 제1회 전국도부군지부장회의가 지부장 88명, 초청객 5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서울 YMCA에서 이틀간에 열렸다. 미 소 공위, 식량대책, 지방조직강화문제 등을 토의하고, 이승만과 김구를 총재로, 이시영을 회장으로 하는 부서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 단체가 분열을 거듭하면서 성재는 여기서 손을 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정부 요인 가운데에도 주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아 고소 사건이 일어나는 등 불미스런 사태가 벌어지자, 선생은 도의적 견지에서 위원장의 임무를 인책 고사하였다. 성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7년 9월 2일 일체의 공직을 떠난데 이어 26일에는 임시정부국무위원과 국무회의 의원을 사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9월 1일에 열렸던 비상국민회의 제43차회의 결의가 비법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탈퇴한 것이다. 국민회의는 9월 1일부터 창덕궁 인정전에서 제43차 임시대회를 열고 미국 제안의 절대지지와 남한단독정부 노선의 반대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승만은 이날 회의에 참석치 않고 대신 보통선거법에 56

64 의한 총선거의 단행을 요망하는 서한을 보냈다. 성재가 비상국민의회는 몰라도 임시정부 국무위원까지 사퇴한 것을 충격적이었다. 사퇴 성명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기미년 3천만 민족의 혈박( 血 搏 )에서 탄생되었다. 해방 후 정부 책임자들은 국제의 무리 압박으로 부득이 사인( 私 人 ) 자격이라는 수치스런 걸음으로 귀국하여 떳떳치 못한 형태도 불무하였으나 지켜온 법통 정신만은 그다지 손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회( 今 會 )에 소위 43차 의회의 자의추진은 경거망단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차에 대하여 호법에 소( 訴 )할 수도 없고 은인묵과할 수도 없다. 이에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국의( 國 議 -의정원의원) 의원을 다 탈피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직무에 불충실한 천오( 舛 誤 )를 일반 동포 앞에 사과할 뿐이다. 본래 국가독립은 멸사적, 헌신적이 아니면 달성키 어려우니, 정신 단결하여 대의정로( 大 義 正 路 )로 매진하기를 빌뿐이다. 성재가 임시정부측과 결별하게 된 과정을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사퇴의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43차 의회의 자의 추진 이었다. 임시정부 주석의 경력을 가진 김구는 1947년 2월 14~17일에 우익 단체를 통합 단일화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새로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의회는 좌익은 물론 이승만 측으로부터도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김구는 9월에 이승만과의 합류를 시도하였다. 이시영은 김구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위원장을 맡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깨는 결과가 불 보듯 하면서 우익세력 결집으로서는 이중적인 것이고 명분을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재와 김구는 이 시점에서 갈라서게 되었다. 성재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 후 정국은 급속히 변하고있었다. 미국측은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여 그 감시하에 1948년 3월 말까지 자유선거를 실시, 국회 및 정부수립 후 미 소 양군이 철수한다 는 결의안을 처리하였다. 소련측은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위반하는 것이며, 한국문제는 미 소 양군이 철수한 후 조선인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면서 이를 반대하였다. 당시 유엔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던 관계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독립,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 을 가결하였다. 이에 따라 캐나다, 인도 등 8개국으로 구성된 위원단이 입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련측이 38도선 57

65 이북지역의 입국을 거부하자 유엔은 다시 소총회를 열어 가능한 지역안의 총선거 를 가결함으로써 분단 정권 수립이 가시화되었다. 이승만은 이에 앞서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처음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 적으로 주장하고,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에 건너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촉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1946년 5월 1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휴회로 들어가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일부 우익세력의 단독정부 수립계획이 본격화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여운형 김규식 등 은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여기에는 두 사람 외에 좌우, 중도파 인사들과 임시정부 계열의 최동오 김붕준이 참여하고 신탁통치, 토지개혁, 친일파처리 문제 등에서 좌우합작 7원칙 에 합의했으나, 한민당의 토지무상분배 반대와 합작위원회 자체의 반대, 좌익측의 반대 노선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점차 정체 상태에서 빠지고, 미국의 정책이 좌우합작 지지에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바뀌면서 이 운동은 종료되고 말았다. 단독정부수립 문제가 제기되고 유엔한국감시위원단이 내한하는 등 정세가 급변하면서 성재는 고민을 많이 하였을 것 같다. 김구와 김규식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정부는 안 된다는 주장 아래 남북협상을 주창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와 4김회담 에 참석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성재는 6월 10일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갔다. 그는 김구에게 남북, 좌우 관계는 미온적으로 종결점이 나올 수 없는 것인데, 남북협상 같은 것은 되풀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더는 추진하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계속하다가는 허물이 모두 당신에게 돌아오고 말 것이라고 간절하게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성재는 시국에 대한 견해 차이로 김구와 결별하고, 단독정부 수립노선에 합류하였다. 김구와 결별했다기보다 그의 노선에서 벗어났다고 할 것이다. 그는 뒷날 김구 암살에 가장 분개하고, 시신 앞에서 통곡하였다. 초대 부통령, 이승만과 대치 김구 김규식 등 통일정부수립 세력과 중도파가 불참한 가운데 1948년 5 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이어 7월 20일 초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에서 시행되는 간접선거였다. 부통령에 입후보한 이시영은 재석 197명 중 133표를 얻었다. 단독정부수립을 거부해온 김구가 62표, 이구수 1표, 무효 1표였다. 제헌국회는 노선 성향에 관계없이 독립운동가 출신의 성재를 부통령으로 뽑았다.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공식 수립되기에 앞서 7월 24일 중앙청광장에서 초대 정 부통령취임식이 거행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58

66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정진하자 는 등 추상적인 언사로 시종할뿐 민생, 통일, 외국군 철수, 친일파 척결, 국가비전 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이에 비해 부통령 성재는 취임사에서 양분된 국토의 통일, 쇠퇴한 산업기관과 퇴폐한 문화시설의 재건, 문란한 민족정기의 갱생을 신생국가의 당면목표 6로 제시하였다. 성재는 시종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취임사의 끝을 맺지 못했다. 부통령에 취임한 성재의 심경과 처신을 정확히 가늠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국제정세로 보아 통일정부 수립이 쉽지 않아 우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때를 기다려 통일을 이룩한다는 입장이었을 터이다. 그러자니 긴 세월 풍찬노숙을 함께 해온 김구 등이 추진한 명분과의 결별도 차마 의리상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은 물론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르게 된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도 무한책임감을 느꼈을 터이다. 취임식장에서 나타난 성재의 취임사와 낙루가 이것을 말해준다. 이승만의 아집과 독선 독주 때문에 성재의 부통령직 수행은 쉽지가 않았다. 부통령은 엄연한 헌법기관인데도 이승만은 의도적으로 부통령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켰다. 성재가 연상인데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정책과 인사에서 쓴소리 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성재는 부통령 재직중 국무회의 같은 데서 가끔 이승만과 언쟁을 벌였다. 6 25전쟁 이전 어느 날 국무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총무처장 전규홍( 全 奎 弘 )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날 회의가 끝나자 이 부통령은 대통령 쪽으로 몸을 돌리고 우남 하고 대통령을 불렀다. 대통령도 부통령을 쳐다보며 왜 그러시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통령은 매우 근엄한 어조로 꾸짖듯이 대통령에게 말했다. 우남! 밖에서 말이 많아, 정부에 대해서 말이 많아. 국민들이 말이야, 불평이 많아! 그러자 대통령도 화난 목소리로 쏘아댔다. 그럼 정부가 하는 일은 나쁜 일만 있고 좋은 건 하나도 없답디까 그런 말 하시지 말고 명함이나 작작 보내시오! 6 25한국전쟁을 맞아 정부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한 성재는 8월 10일 국민에게 자숙과 협력할 것을 요청하는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서 를 발표하였다. 이 초비상 시국하에 당면한 우리 국민으로서 만일 저 하나만 살겠다는 야욕으로 국가 민족에 해독을 주는 자가 있다면 단연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가 있고서야 향락도 영예도 있는 것이다 고 역설하였다. 미증유의 국난기에 피난 정부와 군일부의 부패 향락풍조를 경고한 것이다. 성재는 1953년 10월 13일 정부의 환도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여 발표한 성명에서는 수도 시민과 함께하지 못하고 피난했다가 돌아온 처신을 사과하였다. 이승만이 수도사수 라는 거짓 방송으로 서울 시민을 속이고, 환도 후에는 오히려 부역혐의 로 서울 시민들을 탄압한 데 대한 59

67 반발이었다. 정부 요직의 한 사람으로서 공비가 침범하였을 적에 운명을 수도와 함께 못 하였으며 위경( 危 境 )에 빠진 국민에게 고별조차 못하고 떠나간 노구가 오늘 수복된 수도에 돌아오니 죄송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욱이 내 눈으로 비인도적 도배들에게 무참하게도 학살당한 수많은 애국동포의 무덤과 또 몹시 회진된시가의 노두( 路 頭 )에 헤매는 이재민들을 보게 되고, 내 귀로 가지가지 뼈저린 국민 수난의 실담을 듣게 되매, 가슴 속에 치미는 애통을 무엇으로 능히 형언하랴. (중략) 바라건데, 현명한 동포 여러분은 항상 자각적으로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이 중대한 시국의 역사적 과업수행에 공동노력하시라. 이번 각 전선에 전몰한 국군과 유엔군 장병의 영령과 의로운 소신에 장렬 희생된 모든 애국 동포들의 영혼 앞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이다. 피난수도 부산에서 전란을 겪은 성재는 틈만 나면 육군병원과 피난민 수용소를 방문하여 부상 국군과 피난민을 위로하고 민정시찰을 통해 어려운 국민의 생활을 현장에서 보살폈다. 1951년 4월 민정시찰을 다녀와서 신문 기자와 나눈 소회의 일단이다. 기자 : 상이군인을 보시고 느낀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성재 : 금반 여행중 상병병( 傷 病 兵 )들을 위문하고 감루( 感 淚 7)를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병상에서도 기백이 늠름( 凜 凜 )하며, 완쾌만 되면 다시 일선에 나가서 사신보국( 捨 身 報 國 ) 하겠다는 용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토공멸적( 討 共 滅 敵 )한다는 열의에 감격하였다. 후방에 있는 군인들도 모름지기 전선( 前 線 ) 장병들을 본따서 충성되고 강직한 군인 정신으로써 조국에 보답함이 있어야 될 것이다. 나는 전쟁에 있어 일선과 후방이 꼭 같은 정신을 가지고 연결됨으로써 만이 승리가 있다고 믿는다. 기자: 제2국민병 처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성재: 각지에 산재한 제2국민병 수용소의 무성의한 처우에 대하여 한심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장래 이나라를 걸머지고 나아갈 유위( 有 爲 )한 청년들을 일조( 一 朝 ) 나라에서 부른 이상에 부른 값이 있고 보람이 있게 대우해야 되겠거든, 그 무슨 처사들인가. 그런데다가 국민방위대 자체 내에서 불미한 독직사건( 瀆 5 職 事 件 )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일이다. 성재는 6 25 동족상잔에 남다른 아픔을 느꼈다. 일찍이 신라는 당나라 병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비록 삼한을 통합한 공적은 있으나 동족간에 창 칼을 나눈지라 강역은 축소되었다. 또 나아가 역사 속에 피를 흘리는 누( 累 )를 끼치게 되었다. 라고 비판했던 60

68 역사인식의 차원이었다. 성재는 독립운동 시절이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여 6 25전란기 이승만 측근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이승만의 독선, 독주, 정권연장을 위해 저지른 횡포를 비판하는 일관된 역사관은 저서 감시만어 에서 황염배의 책자를 비판할 때 쓰인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다( 誣 史 辨 正 ) 는 정신 그대로였다. 그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독립운동을 하고,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지만, 특히 부통령 재임시에는 이승만의 견제로 제대로 역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통령 자리 내던지다 전쟁 중에 이승만(정부)의 행태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보호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제2국민병에게 해당하는 만 17~40세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환자가 발생했다. 이들이 부정처분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료 24억 원, 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 국회는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되고, 사건을 일으킨 김윤환 등 4명은 처형되었다. 국회조사단이 구성되어 국민방위군사건의 조사에 나서자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고 이기붕을 임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으나 이승만과 정부의 행태, 군부의 부패 문제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6 25전쟁을 전후하여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전국(남한) 도처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경찰, 특무대,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해 빨갱이, 통비분자 로 몰려 자행되고, 미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 있어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보도연맹은 1949년 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고 조직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군 경 서북청년단 등이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예비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군 경과 우익 단체들은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 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 전역에서 61

69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해안지방에서는 배에 실어 돌을 매달아 수장한 경우도 많았다. 6 25한국전쟁 기간에 남한 국민들은 북한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도 많았으나 군 경과 우익단체 미군에 의해 희생된 경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일차적인 책임은 현지 관련자들이지만,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정부는 북한군에 밀려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했다가 1950년 8월 18일 부산으로 옮겼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략으로 선조가 국토의 최북단 의주로 피난한 이래 358년 만에 이번에는 이승만이 최남단 부산까지 피난한 것이다. 임진전쟁 때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6 25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선조는 한때 명나라로 망명을 준비하고, 이승만은 수도를 제주도나 일본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피난지 부산에 내려온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의 권력욕과 자신에 대한 견제, 끝없이 이어지는 동족상잔과 거창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은폐조작 등을 지켜보면서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내고 사임서를 피난국회에 제출하였다. 성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일찍이 삼한갑족의 기득권을 포기했던 그로서는 부통령 감투 따위에는 크게 연연할 대상이 아니었다. 몇 차례 대통령을 만나 국정개혁을 제시했으나 이승만의 태도는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5월 9일 부통령 사임서를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제출하고, 국민에게 진정을 밝히는 국민에게 고함 을 공표하였다. 부통령 사임서와 국민에게 고하는 글은 시점이나, 당시 정국에 미친 영향 그리고 문안내용에 있어서 파장이 만만치 않고 국민의 충격도 적지 않았다. 성재의 사임서는 5월 11일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반려하기로 의결하였으나, 성재는 13일 다시 사임서를 제출하여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만류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정부가 싫다고 떠나는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 고 오히려 퇴임을 반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홀대와 냉대를 당하면서도 전시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인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사건, 거창민간인 대량학살사건, 괴벽보사건 등 이승만의 측근에서 저질러진, 전시정부 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과 이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정부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당시 한 신문이 논평한 3대사건 의 실상이다. 62

70 국방부와 국회와를 이간시키는 것과 같은 벽보사건, 허다한 부락민이 살해 당했다는 거창사건, 제2국민병의 훈련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금액이 부정유용되었다는 국민방위군사건, 이상 3대사건은 그 어느 하나라도 국민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으며 진상을 국민 앞에 명백히 하여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정부나 국방부를 믿고 총력을 경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중대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일정형의 반대의견이란 국가의 대외적인 체면을 위하여 불명예스러운 사건은 엄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수한 외국 정보기관은 이미 이러한 사건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대외적인 체면 운운은 허울 좋은 이유에 불과하고 그 실은 국민의 눈을 가리자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성재의 부통령 사퇴는 정부의 온갖 실정과 비리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이승만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었다. 이와 관련 한 신문은 사설에서, 부통령을 무위( 無 爲 )케 만든 이승만의 독주 독선을 완곡하게나마 지적한다. 이 부통령은 그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그 사정을 국민에게 고함 과 국회의장에게 보낸 공한에서 피력하였거니와 우리 정치가 민의에 부합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대통령을 옳게 보좌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대통령을 옳게 보좌하지 못한 탓이라고 솔직히 표명 하는 동시에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하게 만들었다 고 한데 대에 그 요점이 있는 것 같다. 오늘 우리 정치가 부통령이 걱정하는 것처럼 위태한 것이라면 그 원인은 이시영씨의 무능 보다도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케 만든 모든 환 경 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시영씨의 견해대로 이 환경이 무위케 만드는 그러한 환경이라면 어느 누구를 앉혀 놓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니 이시영씨가 그의 무위무능 을 탄한 것은 염사로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이 환경은 개조하지 않는 한 우리 정치의 개선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동시에 이 환경을 어떻게 개선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제2대 대통령후보에 나서, 참패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여러가지로 구상을 거듭하였다. 원래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다. 그래서 짜낸 것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라 해도 전시하에서는 간선제로 바꾸는 것이 도리일 터인데 이승만은 거꾸로였다. 국가의 안위나 정치의 일반 상식보다 자신의 위상을 우선시하였다.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유당을 발족했다.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연맹 등의 대표들이 모여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63

71 분열되었다.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을 앞두고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악명 높은 자유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은 향후 10여년 동안 집권당으로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신당조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내가 그간 수차 말한 바이지마는 정당조직이 아직 이른 것 같다고 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사색편당의 역사와 그 습관성이 있어서 정당이라는 것을 그런 성질 대로 구성이 된다면 우리 민국에 대단한 위험을 주게 되는 고로 편당주의를 타파하기 전에는 정당을 조직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인 것인데 그동안 내가 일민주의라는 주장으로 3,4 조건을 발표하였을 때 가장 평범해서 사람마다 우부우부( 愚 夫 愚 夫 )라도 다알아보며 깨달을 수 있을 것을 표준삼아 파당과 분열을 초월하고 재래의 폐단되었던 반상과 빈부와 남녀와 지방 등의 구별로 통일에 방해되는 습관을 타파하고 한 민족 한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어 가져야 우리 민국과 국민의 자유 독립을 보유 발전하고 부강해 나갈 수 있다는 이치를 표시한 것인데 일민주의가 민간에서 다소 전파되어 우리 의도를 알만치 되었으므로 이것을 토대로 삼아 정당한 정당을 세워서 만세 복리의 전도를 발전시키는 데 협력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국적으로 대동단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 바이다. 이승만이 1951년 11월에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952년 1월 28일 국회의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국당 등 야권은 여세를 몰아 1952년 4월 국회의원 123명이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은 5월 14일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꺼내 맞불을 놓았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 측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지지 관제데모, 가두시위, 국회 앞 성토대회, 민의 외면한 국회의원 소환요구 연판장 등 광적인 이승만 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같은 관제데모와 경찰의 방관 방조 등으로 국회와 사회의 반 이승만 정서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은 국회에 개헌정족수인 3분의 2보다 1표가 더 많은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 분위기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기울게 되자 이승만은 강압적인 수법으로 나왔다. 64

72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국회부의장 장택상을 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이갑성 윤치영 등을 자파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친일가문 출신으로 미군정청의 수도청장, 초대외무장관 등을 지낸 장택상과 그가 이끌고 있는 신라회 소속 21명을 대통령직선 개헌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리는 한편, 당시 발생한 서민호의원 사건을 빌미로 정국혼란상을 조장하는데 앞장섰다. 합법인 방법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월 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측근 원용덕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개헌 공작에 동원했다. 적과 대치 중인 전방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는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등청하는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영 김창숙 김성수 장면 등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부산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이 시기에 성재는 재야 원로들과 앞장서서 헌정수호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 25기념식상에서 김시현 유시태 등의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반 이승만 전선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발췌개헌안이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힌,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형식을 취한 내용이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 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명, 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성재가 1952년 이른바 발췌개헌으로 정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면서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되는 제2대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보다 민주국민당(민국당)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민국당은 한민당이 세간의 친일정당이라는 이미지의 쇄신과 이승만 독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익희의 대한국민당과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세력 등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창당되었다. 민국당에서는 누구도 대통령 후보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헌병대로 끌어가고, 멋대로 헌법을 바꿔버리는 전시체제에서 감히 이승만에게 도전해봐야 승산이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이 혁신정치를 65

73 표방하여 대선후보에 나섰다. 보수야당을 자처하는 민국당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자칫 제1야당의 지위를 혁신계에 넘겨주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민국당 수뇌부는 국민의 신망이 높은 성재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한 것이다. 김창숙 이동화 김성수 신익희 장면 등 민국당과 재야 인사 8명이 성재를 추대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공동성명을 냈다. 해방 후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이재( 利 財 )에 눈을 돌리거나 파벌에 끼지 않았다. 권모술수나 기회주의, 시세 편승 따위와는 벽을 쌓아서 항상 외로움 속에서도 대도를 당당하게 걸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연유로 하여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보수야당의 대통령후보에 추대되었으나, 이승만 류의 마키아벨리와 대결하기에는 너무 맑은 품성의 선비 정치인이었다. 그는 산림파( 山 林 派 )의 맥을 이은 강직한 지사형의 선비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현대적 인권사상과 행정리더십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는가 사려된다. 한말 국민계몽운동, 항일 독립운동, 대한민국 정부수립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일관되게 활동한 흔지 않는 경력의 소유자인 성재는 한국근현대사의 정맥( 正 脈 )이고 정통( 正 統 )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라 할 수 있다. 바. 항일정신과 평창군의 연관성 (노산성 전투) (그림3-3) 평창읍 시내전경 (그림3-4) 절개산 전경 평창군 노산성 전투 간략사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을 당하였으며, 평창군은 그 해 8월 7일에 왜군의 주력부대인 제4번대 모리길성이라는 모리요시나리가 이끄는 왜적이 침투하여, 8월 11일에 5,000여명의 왜적과 100 명도 안되는 민군이 정규군인 왜적의 조총이나 병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에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인 응암굴을 택하여 장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나 패함 66

74 -8월7일에 왜적의 선봉대가 입군하고, -8월8일에는 왜적이 계속 입군하였으며, -8월9일에는 왜적으로부터 항복권유문서가 도달 되었으나 사신의 목을 쳐서 항복을 거부하고 권두문군수는 항전의 결의를 다지는 제사를 노산성에서 지냄 -8월9일에는 응암리의 잣밭골 백전산 전투에서 우리의 민군이 매복을하여 적을 살상하고 나수 천은 왜군의 조총을 노획한 공으로 군관 진급을 하였습니다. -8월9일 삼방산 아래에서도 매복조의 교전이 있었으나 * 매복장 김춘영은 퇴각하고 * 왜적끼리는 서로 복병인줄 오인하여 상 호교전을 함으로 사상자 다수발생 -8월10일에 왜적은 평창 진입을 완료하고, 민군과 민간인들이 은거한 음암굴이 왜적에게 발각 되었으나 저녁이 어두워 일단 철수 -8월11일에는 치열한 교전으로 민군은 사살되고 권두문과 그 아들 주는 포로가 되고 강소사는 절벽에서 투신하여 절개를 지킴. 권두문공은 한 번 죽고 사는 것은 사람마다 있는 법, 죽기를 당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우 리의 소원이 아니다. 라며, 닭과 개의 피를 먼저 찍어 바르면서 천백 사람이 한 마음이 되고 서야 왜적을 막아 낼 것이라 하고 군민이 다 언약을 다짐하였다. 그 후 노산성의 양지 편에 단을 모으고, 장순 등 26명의 장수의 전쟁고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방울을 흔들며 사수천 남쪽에서 훈련을 하면서 군기를 누설하거나, 군 표식을 잃거나, 주장의 명령을 어긴 자는 목을 베이고, 적에게 항복하는 자는 그 가정을 몰수하는 것이니 이것 이 군법의 엄함이다. 각자 깃발이나, 호각, 방울 같은 것을 두는 것은 군령을 지휘하는데 쓰는 것이다. 하면서 각오와 마음다짐을 훈시 하였다 도총 4개 부대 여단장으로 봉사 지사함( 智 士 涵 )에게 군사를 위임하고, 선두사령 제1대장에 우응민( 禹 應 民 )으로, 김성경( 金 成 慶 )으로 왼편 부대 제1대장, 우윤선( 禹 胤 善 )으로 우부 대장, 최 업( 崔 業 )과 김춘영( 金 춘영)으로 후부 대장, 손수천( 孫 壽 千 ), 손수업( 孫 守 業 ), 이득춘( 李 得 春 ), 박취영( 朴 取 影 ), 김성모( 金 聲 模 ), 이 신( 李 信 ), 이 붕( 李 鵬 )으로 각 부대 지휘관( 軍 伍 長 )으로 삼고, 이응수( 李 應 壽 ), 이난수( 李 蘭 秀 ), 이순희( 李 順 希 )로 척후로 삼고, 관노 관속 30여 명을 군대의 사이에 끼우고, 이인서( 李 仁 恕 ), 지대명( 智 大 明 )을 謀 士 로 전략을 세우고, 지대성( 智 大 成 ), 지대충( 智 大 忠 ), 라수천( 羅 壽 千 ), 라사언( 羅 士 彦 )으로 양식 운반책으 67

75 로, 지대용( 智 大 用 ), 이경조( 李 敬 祖 ), 이개충( 李 蓋 忠 )으로 군무의 연락을 맞게 하여 부서별 책임을 결정하 였다.(55명) 호구어록 중에서 (그림 3-5) 응암굴 (그림 3-6) 응암굴 전경사진 평창군 노산성 지형 및 크기 임진왜란 때는 군수 권두문( 權 斗 文 )이 지사함( 智 士 涵 ) 우응민( 禹 應 民 ) 이인노( 李 仁 怒 )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왜군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1.3m 전후이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이어서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 하고 축조되었다. 서벽은 길이가 약 115m 정도인데, 그 중 잘 보존된 부분은 길이 8.2m 높이 5.3m 규모이다. 주로 편마암을 사용하였고 면석( 面 石 )은 품자 형태로 쌓았으며 돌로 뒷채움을 하였다. 남벽과 동벽은 길이가 각각 334m 122m인데, 대부분 붕괴되었다. 성 안에는 정상 부근 에 우물터 1곳이 남아 있는데 규모는 동서 7.7m 남북 8.5m이고 깊이는 약 2m이다. (그림 3-7) 노산성 터 (그림 3-8) 노산성 성곽 68

76 (그림 3-9) 평창군 동학, 의병 격전지 분포도 사. 평창군의 항일무장투쟁 역사 1) 평창군 일원 동학운동사 1894년 여름과 가을사이에 원주, 영월, 평창, 정선에 접소가 설치되었고, 가을(양력으로 8월 중순 경)에 있었던 소위 청산대회(옥천군 청산면)에서 북접교도와 남접교도가 동학운동에 합칠 것을 결의하였는데 원주방면에서 2백 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평창군이 동학난에 참여한 것은 이때 동학 혁명군의 기포를 지령 받고 2차 기포농민군이 행동을 할 때이다.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크게 두 세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9월 초 충청도의 제천, 청주의 농민군과 강원도의 영월, 평창, 정선 등 세 고을의 연 합농민군이며 강릉을 목표로 하여 각 고을을 석권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접전 없이 석권할 수 있었다. 이 때가 9월 1~2일경, 청풍의 대접주 성두환( 成 斗 煥 )이 참여한 청주, 제천의 동학도와 영월, 평창,정선 등지의 동학도가 평창에 집결하였는데 그 수는 수 천 명이었으며 그 진로는 대화에서 모로치를 넘어 진부를 휩쓸면서 관이 소유하고 있는 馬 匹 과 총검을 쟁취, 재무장을 해 가면서 9월 3일 대관령을 넘어 구산역에서 묵었다. 동학 지도자는 강릉 출신인 진사 박재호 ( 朴 在 浩 ), 평창의 이치택( 李 致 澤 ), 정선의 지왈길( 池 曰 吉 ) 등이었다. 당시 강릉에는 부사가 공석 중이었다. 1984년 9월4일 사시 경에 강릉읍에 들어오는데 강원 농민군은 강릉대도호부를 점령하고 관아 동문에 삼정( 三 政 )의 폐단을 뜯어 고치고 보국안민을 이룩한다. 는 격문을 붙이고 전답문서를 69

77 탈취하고 민간의 송사를 처결하면서 선교장을 습격한다는 선언을 한다. 그때 강릉에 들어왔던 동학농민군과의 교전의 중심인물로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당시의 선교장 주인으로 난중에 강릉부사로 임명이 되었던 이회원( 李 會 源 ) 부 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방( 庚 方 )의 주인이던 최윤정( 崔 允 鼎 ) 도사( 都 事 )이다. 이 두 사람은 당시 강릉의 재산가였을 뿐만 아니라 소작인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실력자였다. 농민군이 관아를 점거하자 선교장과 경방은 서로 사람을 보내 동학군을 축출할 계략을 세우고, 쌀 100말과 돈300민( 緡 )을 관아로 보내 동학농민군을 안심시킨 후 비가 몹시 오는 한밤중을 이용해 읍민을 모아 관아의 동학군을 습격하였다. 이때 동학군은 대략 20~30여명이 죽고, 무기를 버리고 대관령을 넘어 도주하였으며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정부에서 이회원에게 부사 및 관동소모관( 關 東 召 募 官 )을 겸임케 하였다. 이때 강릉부사로 임명된 이 부사는 기록에는 전승지( 前 承 旨 )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지금의 선 교장 주인의 고조가 된다. 경방 최윤정 도사도 기록에 여러 번 나오며 최 도사는 지금의 경방 주인의 고조가 된다. 9월7일 강원농민군은 강릉대도호부에서 민보군 습격으로 패퇴하여 평창으로 이동하며 그 후, 10월 22일경 강릉 관아에서 이진석을 중군장으로 하여 다시 평창과 정선의 농민군을 공격하게 된다. 봉평에서도 9월 말경 내면 근처에 거주하는 윤태열, 정해창, 정운심, 조원중 등이 기포를 하였 으며 진부면 안영달( 安 永 達 ), 김성칠( 金 成 七 ) 등도 거기에 가담하였다. 김상연( 金 商 淵 )은 진부면 두일촌에 살았는데, 어느 날 밤에 잡혀가서 4부자( 父 子 )가 함께 구덩이 안에서 죽었다. 지난날 잠시 강릉읍에서 중군을 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10월26일에 봉평 창촌에서 봉평포수대장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과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벌린 적이 있다. 이 날 강위서가 윤태열 등 7명을 사로잡아 진영 앞에 포박하여 데리고 와서 심문을 한 뒤에 바로 목을 베거나 총살하였다. 10월 27일경 원주 중군( 中 軍 )과 소모관 정준시( 鄭 俊 時 ) 등이 일본군과 함께 대화에 도착하였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동비토론 인용: 1894년 11월 3일 겸관에 첩보하는 글 [ 甲 午 十 一 月 初 三 日 牒 兼 ] 정선과 평창에 정탐( 偵 探 )을 따로 파견했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정선읍에 모인 비도는 3,000 여 명이고, 평창의 후평( 後 坪 )에 모인 비도는 1,000여 명으로 기세가 대단하여 근심이 적지 않 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장차 본 관아로 향하려 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읍을 방어하 는데 날로 고심하여 군정을 각처의 요충지에 보내어 순찰하며 엄중히 지키게 하였고, 영서의 진부( 珍 富 ) 등의 지역은 중군 이진석으로 하여금 포군( 砲 軍 )을 이끌고 가서 민정( 民 丁 )과 함께 내면의 비도를 박멸한 뒤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대화( 大 和 )는 본면의 포수와 민정을 70

78 징발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먼저 첩보합니다. 11월 5일 원주의 중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해 농민군 수천여 명이 평창의 후평에서 접전을 벌렸다. 접주 이문보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평창 쪽의 농민군은 정선을 거쳐 삼 척 쪽으로 후퇴하였다. * 동비토론 인용: 평창읍에서 10일에 순중군 겸 도토사가 보낸 글 순영 중군 겸 도토사( 巡 中 軍 兼 都 討 使 )가 상고하는 일이다. 순영문( 巡 營 門 )의 분부를 받들어 직접 포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동도를 토벌한 연유는 이미 관문을 보내어 알렸다. 이 달 5일에 평창 후평 등지에서 동학 10,000여 명과 싸움을 하여 비도 10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연이어 접 주 이문보( 李 文 甫 ) 등 5명을 잡아서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으며 정선 등지로 추격하여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 각처로 흩어진 10,000여 명은 쫓기는 대로 흩어졌다가 모이니 훗날의 걱정이 없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군대가 만약 정선을 나가면 강릉의 요충지에 방략을 많이 마 련하여 엄중히 지키고, 수상한 자가 경내를 지나가면 보이는 대로 체포하여 소홀히 해서 나중 에 후환이 되지 않도록 하라. 다른 하나는 차기석을 중심으로 홍천군 일대에서 활동한 중부내륙 세력이었다. 차기석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군은 10월 1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동창( 東 倉 )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10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보수 지배세력은 농민군에 대해 적극 반격을 가했다. 홍천과 가까이 있는 경기도 지평의 감역 맹영재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의 농민군을 향해 진격해 왔다. 이에 맞 서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 부대와 장야평(장평)에서 전투를 벌였다. 서석으로 후퇴한 농민 군은 풍암리 구릉 위에 진을 쳤다. 다음날 10월 22일 서석에 집결한 농민군은 횡성현감 유동근이 이끌고 온 관군과 맹영재가 이 끌고 온 민보군에 맞서 800여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11월 9일부터 14일에 걸쳐 내면 창촌, 원당, 청도, 약수포에서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마 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농민군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요새로 삼아 오대산, 계방산 기슭의 산하 를 피로 물들이며 치열하게 유격전을 펼쳤다. 강릉의 민보군은 원당에서 농민군을 공격하여, 관동 대접주 차기석의 농민군은 양쪽에서 협공 을 당해 차기석은 사로잡히고 11월 22일 강릉 교장에서 효수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호남에서 봉기했던 동학이 강원도 평창, 홍천에서 투쟁의 종언( 終 焉 )을 고하였 다. 흰 눈이 온 산하와 농민군이 흘린 핏자국을 하얗게 뒤덮던 음력 11월 중하순 무렵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원도 지방이 동학의 종언지가 되다 보니 분탕의 피해가 많았다. 다음해 1895년은 1860년대에 시발하였던 동학이 거의 말기가 되는 시기이다. 71

79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에 의해서 대부분 그 지도자인 동학의 접주 성찰 등이 체포되어 효수 되자 이내 해산되었다. 1895년 4월 23일 전봉준은 김덕명 성두환 최영남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 를 마치는데, 동학군 포두 성두환은 평창출신 강원도 반동학군 김충근의 고발에 의해 체포되었 다.(갑오군공록) 미탄면지에는 미탄면 출신인 황사복과 우병주( 禹 秉 柱 )가 평창의 농민군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 다. 삼남에서 시작한 동학의 종언지가 강원도라면 강원도의 종언지는 평창과 홍천이다. 홍천은 1977년 11월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 마루에 동학혁명위령탑을 세우고 해마다 음력 10월 24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며, 늦었지만 평창군도 봉평이나 후평에 위령탑 하나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 평창군 일원 항일무쟁 투쟁사 구한말 의병 봉기는 크게 1894~1896년의 1차 봉기와 1905~1910년의 2차 봉기로 나눌 수 있 다. 제1차 봉기는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된 시기에 일어났다. 제 2차 봉기는 을사의병, 정미의병이라고 불리는데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다. 처음 의병항쟁은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를 일본인들이 시해한 사건)과 단발령에 대한 항거 에서 시작되었다. 각지의 의병들은 친일적인 지방 수령을 숙청하고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그러 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국왕의 해산 권고 조칙으로 9개월 정도 후에는 활동이 종식된다. 평창군의 동학농민군은 1986년부터 항일 의병활동과 3.1 만세운동으로 연결되는 중추세력이 되었으며, 1975년 대화총람의 내용과 수집한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한다. 1896년(고종 32) 강릉에서는 1월 30일 민용호를 대장으로 평창 영월 정선 지방의 포수로 구성된 의병이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영동9군창의소( 嶺 東 九 郡 倡 義 所 )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석을 처단하 면서 기세를 높였다. 평창의병 : 1896년 유인석의 팔도창의군 가담하여 동년 3월27일 평창군수 엄문환을 처형한다. 유인석 부대가 평창을 통과하던 실황은 원용정( 元 容 正 )의 의암 유선생 서행대략에 수록된 기록 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기유( 己 酉 ) 15일 평창으로 나가니 정언조가 쫓아왔다. 72

80 경술( 庚 戌 )16일 정선부로 옮겼고 경오 8월 대진( 大 陣 )을 봉평에 주둔. 이때 적도에 준 타격을 보면 8월 17일 평창, 방림, 대화에서 군대와 경찰관의 공동 토벌에 의하여 적11명을 넘어뜨렸 고 노획품도 약간 있었다. 또한 동년 8월 29일 정선군, 평창군에서 적도 4명을 넘어뜨렸고 약 간의 노획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유인석의 팔도창의군은 관군과 일군의 공격에 패전하여 정선, 영월, 평창, 홍천, 남천 (화천), 양구,회양 등지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북상하여 평안도를 거쳐 만주로 들어간다. 1905년 을사조약 때 원용팔이 거사하며 평창의병장은 이진룡이었다. 1905년 9월 29일 대한매일신보에 영월 정선 평창에 의병 수백 명이며 포군으로 방비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김덕선( 金 德 先, 1886~미상): 평창 사람이다. 강원도 평창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김덕선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경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8월 남흥서( 南 興 西 )등 동료 의병 5명과 함께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大 和 面 ) 신리( 新 里 ) 큰 길에서 우편업무를 담당하던 일본군 평창수비대 소속 적병을 처 단하고 총기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2년 3월 22일 경성공소원 ( 京 城 控 訴 院 )에서 징역 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황성신문 1907년 8월 14일자에 '주천 의병 100명과 평창 의병 300명이 평창군 우편 취급소를 기습해 일본인 2명과 제천부 1명을 사살하고 전신시설을 파괴하였는데 이는 윤기영(원주의 의 병장) 부대로 판단된다.'는 보도내용으로 보아 김덕선이 윤기영 소속으로 함께 행동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07년 丁 未 7 條 約 이 체결되자 의병 40여명이 진부 서남쪽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기록이 있다. 1907년 음력 10월(양력11월 23일)에는 고종 퇴위에 반대한 의병이 봉기하여 하대화( 下 大 和 )와 하일리에서 운집한 뒤 상대화로 진격하였으나, 남산으로 쫓겨 가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평창 의병 40여 명이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같은 해 천도교도들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실패하였다. 1907년 4월 4일 천주교도인 최상달( 崔 相 達 )은 최영규의 삼밭에서 태극기 수백 개와 독립선언문 을 석유 초롱에 넣어 묻어둔 후 박병수( 朴 炳 洙 )와 규합하여 서울과 평창의 의병활동을 알리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의논하였으나 하일리에서 탄로가 나는 바람에 체포되어 대화주재소를 거쳐 평창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때 연행된 사람들은 최상달, 이인영, 송상봉, 전홍지, 유구묵, 김희주 등이었는데 최상달은 불로 고환을 지지고, 뾰족한 대가지로 손톱 안을 찌르는 등 모진 고문으로 固 心 을 縱 通 받았으나 끝내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므로 총살 시켰으니 당시 면민들 은 애통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밖에 사람들은 옥고를 겪었음을 판결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황순팔( 黃 順 八 )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9년 5월 동지들을 규합, 소규모의 의진 73

81 을 편성한 후 이성덕( 李 聖 德 )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평창군 미탄면( 美 灘 面 )의 면장 박성현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고 5월 20일에도 평창 군 대화면( 大 和 面 ) 면장 김연량에게서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6월에는 일본군 수비대의 밀정인 심춘백을 처단 응징하였으며 평창군과 정선군( 旌 善 郡 )의 경계인 성마령( 星 摩 嶺 )에서 헌병 군조 판본구남( 坂 本 龜 楠 ) 일행을 기습 공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적을 받고 1910년 3월 체포되어 5월 21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6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교수형이 확정됨으로써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의 저항역사 사례모음 대 회 개최년도 개최국 개최지 년 프랑스 사모니 년 스위스 장크트모리츠 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년 스위스 장크트모리츠 년 노르웨이 오슬로 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년 미국 스쿼벨리 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년 프랑스 그르노블 년 일본 삿포르 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년 유고 사라예보 년 캐나다 캘거리 년 프랑스 알베르빌 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년 일본 나가노 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년 이탈리아 토리노 년 캐나다 벤쿠버 년 러시아 소치 (표 3-1)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74

82 1). 프랑스 사모니 (1924년 제 1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주요 거점 지역으로 많은 전투와 희생자들을 양산했었던 저항역사의 고장이다. 2). 노르웨이 오슬로 (1952년 제 6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던 노르웨이에 대해서 철광장원 탈취를 위해 전격적으로 침공에 들어갔다. 이후 노르웨이 전역은 특히 오슬로, 릴레함메르 등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레지스탕스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림 3-10) 독일군의 노르웨이 거점도시 침공도 (그림 3-11)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저항운동 (그림 3-12) 노르웨이 침공당시 참전한 소련적군 동상 (그림 3-13) 오슬로 아케르스후스 레지스탕스 박물관 75

83 3). 이탈리아 코리티나 담페초 (1956년 제 7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이탈리아 코리티나 담페초는 뭇솔리니 정권 당시 파시스트 저항 운동 중 5,000여명의 레지스탕스가 사망함 (그림 3-14) 코리티나 담페초 산악모습 (그림 3-15) 동계올림픽 당시 모습 4). 프랑스 그레노블 (1968년 제 10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프랑스 그레노블의 경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최대 격전지역으로 수 많은 레지스탕스들의 산악전쟁이 이뤄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실리콘밸리라 칭해 질 만큼 최첨단 산업으로 각광 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레노블의 경우, 그레노블 퇴역자 박물관 등 전쟁과 레지스탕스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박물관 형태로 추모하고 있다. (그림 3-16) 레지스탕스 그레노블 협곡 (그림 3-17) 스탈당의 집 76

84 5). 유고 사라예보 (1984년 제14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유고 독립운동가 프린치프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식민지였던 보 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를 순시하던 중 부인과 함께 암살당했다. 황태자 부부에게 총을 쏜 이는 보스니아 출신의 젊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블리로 프린치프였다. 그는 오스트 리아를 몰아내고 이웃 세르비아와 함께 보스니아를 남슬라브 국가의 일부로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거사 는 민족주의를 자양분 삼아 팽창하던 제국주의 식민지 다툼의 위태 로운 균형을 깬 티핑 포인트 였다. 오스트리아는 암살 배후에 세르비아 군부가 있다고 지목하고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했다.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트리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러 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며 독일에 대항해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러 시아와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가 전쟁에 뛰어들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계기로 벨기에와 동맹 을 맺었던 영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발칸에 한정된 국지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은 세계 대전으로 확대됐고 4년 만에 2000만명의 희생자를 남긴 채 끝났다. 유고인들에게 프린치프는 아픔의 역사요, 저항의 역사요, 독립의 역사이다. (그림 3-18) 프린치프 법정 사진 (그림 3-19) 1914년 당시 동유럽 판도 (그림 3-20)프린치프 기념비 (그림 3-21) 프린치프 사진 77

85 6). 프랑스 알베르빌 (1992년 제16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부이자 국내, 외 레지스탕스를 규합하여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라는 드골의 명령을 받고 프랑스로 잠입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을 정비하다가 독일 게스타포의 체포로 구금, 고문당하고 독일로 이송 중 사망함. 지금도 알베르빌 지역은 알베르빌 부지사를 지내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아버지로 칭송 받고 있는 쟝 물랑에 대한 지속적인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3-22) 쟝 물렝 사진 (그림 3-23) 알베르빌 전경 쟝 물렝(알베르빌 부지사 겸 프랑스 대표적 레지스탕스) 1899년, 베지에 출신인 물랭은 아버지가 역사교수이자 좌익계열 고문이었습니다. 1917년, 18세 인 물랭은 몽펠리에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하며, 1918년, 1차 대전 말에 징집되나 전쟁의 종결 로 활약할 기회를 잃었다. 종전 후 1922년에 공무원이 되었고, 1925년에 몽펠리에현의 사무국장이 되며 그해에 알베르빌 의 부지사로 승진하는데, 당시 그의 지사 경력의 나이인 26세는 최연소였습니다. 이시기에 결혼도 하지만 2년 후 첫 아내와 뜻이 맞지 않아 이혼하였다. 이후 1930년에서 1933년까지 Chateaulin의 부지사를 하며 정치 풍자 잡지인 Le rire에다가 풍 자화 투고하였고 1933년에 또농의 부지사가 된다. 그리고 1933년부터 달라디에가 이끄는 인민 전선 좌익 내각에 행정부에서 일하게됩니다. 이때 항공부 장관인 피에르 꼬 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피에르 꼬는 좌익이면서 평화주의자였고 스페인 내전이 터졌을 때 인민전선 공화당파 에게 전투기를 몰래 밀수해준 자였는데 그로부터 물랭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후에도 그를 따라 전투기 밀수를 돕는다. 1934년이 되자 중앙 관청에서 나와 1936년까지 숨의 사무국장이 되었고, 1937년, 38세로 프랑 스 최연소 지사가 되어 로데즈를 관할합니다. 1년 후에는 외르에루아르의 샤르트르 지역 지사 가 됩니다. 허나 그의 조국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2차 대전이 터졌고, 물랭은 군에 입대하고 싶었으나 샤르트르 지방의 인구 피난 문제에 직면하여 입대하지 못하였습니다. 1940년, 프랑스는 독일에게 휴전하 78

86 고 패배했다. 독일이 프랑스로 밀려 온 후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프랑스를 침공하던 독일은 생-조르주-쉬르-외르 지역을 포격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죽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사건을 가리기 위해 프랑스 세네갈 외인부대의 짓이라고 조작된 문서를 만들어 증인 서명을 위해 물랭을 찾으나 물랭은 사실을 알고있기에 거절하였고, 결국 체포됩니다. 체포된 물랭은 게슈타포로 넘겨저 고문을 받습니다. 고문이 괴로웠던 물랭은 독방에서 유리를 깨고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합니다. 대신 치료를 받았고 회복 후 형무소에서 석방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스카프로 자신의 목을 가리는 습관을 가지며 다시 지사가 되나 1940년, 비시 정부가 전국 지사들에게 전한 명령인 좌익적 시장과 군수 등의 퇴출 명이 내려졌고, 이것을 거절한 물랭은 자리에서 해고됩니다. 해고된 물랭은 론강 부근인 프랑스 남부 Saint-Andiol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사하여 조용히 저항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몇몇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만나 협력을 결성하며, 도중에 누군가의 밀고로 공산주의자 로 비시정부에 고소되나 입당 증거가 없어 고소가 취하됩니다. 1941년, 스페인을 지나 포르투 갈로 간 후 배를 타고 런던으로 향한 물랭은 자유프랑스의 드골을 만나게 됩니다. 물랭을 만난 드골은 그의 현명함과 대담함에 감탄하며, 제시한 레지스탕스 관련 의견을 본 후 레지스탕스 비밀 조직 창설임무를 할당한 후 1942년, 낙하산으로 프랑스 알필 산맥에 낙하하여 귀국합니 다. 귀국한 물랭은 즉각 리옹에 본부를 둔 후 코드명 "Rex" 아래 대표적 저항지도자들을 만나며 프랑스 남부의 대표적 레지스탕스들인 "Combat", "Liberation", "Francs-Tireur", "Front National", "Comite d'action Socialiste"의 의견 차이를 좁히고, 서로간의 화합과 재정적 지원을 목표로 조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대표 지하 신문 콩바의 지도자 알베르 카뮈와 조르주 비 도의 도움을 받아 재정 협력을 얻습니다. 1943년 다시 런던을 방문한 물랭은 드골로부터 해방의 십자가 훈장을 받으며 그가 만든 비밀 기관의 대표로 지명합니다. 바로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Conseil National de la Resistance-CNR)가 확립된 것입니다. 바로 돌아온 물랭은 첫 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하며, 성공 적 화합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된 물랭의 임무가 파멸되고 맙니다. 1943년, 론강 부군의 Caluire-et-Cuired에서 두 번째 회의를 개최하던 중 게슈타포가 첩보를 파 악하고 처들어 왔으며, 몇몇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물랭은 체포됩니다. 체포된 물랭은 리옹에 서 심문 받았고, 그를 심문한 자는 바로 명 높은 리옹의 백정인 게슈타포 심문관 클라우스 바 비였습니다. 리옹에서 심문받던 물랭은 파리로 이송되었고, 철저하게 고문 받습니다. 그러나 물 랭은 아무 것도 누설치 않았고 오히려 알려주려고 써주는 척하며 풍자화를 그려 바비와 그의 부하들을 조롱했습니다. 결국 물랭은 독일의 베를린으로 이송되는 기차를 타고 갑니다. 그때 메스 지방을 지나던 기차 안에서 물랭은 지나친 고문의 고통으로 44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후에 1964년, 판테옹에 안치되었다 하나 실제로 그의 시신은 없다. 79

87 7). 일본 나가노 (1998년 제18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마쓰시로 대본영: 2차 세계대전 중 패배를 직감한 일본 군부가 연합군 측에 마지막 타격을 주기위해 군사시설을 만든 곳을 칭하고 있다. 대본영이란 천황 직속 군대의 최고통수기관을 말하는데, 당시 나가노현에 천황이 은거 할 공간과 정부관청, 방송국 등 천황제 통치기관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는 계획을 수립 하여 공정율 80%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이 공사는 지역 주민들에게조차 철저히 감추고 비밀리에 발파작업을 진행했으며, 바둑판을 연상케 하는 지하터널은 총연장 6km의 규모로 더욱 중요한 부분은 이 공사를 위해 조선인 강제노역 7천명이 동원되었으며 일본인 노동자 3천명 포함 하루 1만명이 공사에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착취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여성 위안소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아직도 위안소 건물과 자리가 남아 있어 기념 사료관과 추도비 설치를 위해 지역 일본인들이 힘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림 3-24) 마쓰시로 대본영 (그림 3-25)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도 (그림 3-26) 강제진용 조선인 벽글씨 (그림 3-27) 조선인 위안소 건물- 사료관 마쯔시로 대본영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쯔시로조( 長 野 縣 長 野 市 松 代 町 )에 있는 3개의 산을 중심으로 선광사( 善 光 寺 ) 주변일체에 분산해서 지어진 지하군사 시설이 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제2차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봄, 육군은 본토결전(전 국민의 힘을 투입 해서 일본 본토에서 전쟁을 하며 연합군에 일격을 함으로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80

88 끝내려고 한 작전)의 거점으로 대본영, 천황일족, 정부, NHK 등 나라의 주요기관을 동경에서 나가노로 옮기는 계획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전의 지휘중추를 지키 기 위한 은신처로 마쯔시로 대본영이 계획되었습니다. 연합군에서 국체호지(천황중심의 국가체 제를 지킬 것)만은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공사기간은 1944년 11월부터 패전까지 약9개월, 종전 때는 80%정도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지 하호의 길은 마쯔시로에 있는 5.9km의 조산지하호를 비롯하며 2.6km, 1.9km 등 다양하다. 공사에 동원된 한반도에서의 노동자 지하호 공사가 전성기였던 1945년 4월경에는 일본인/한국인 전체로 약1만 명이 공사에 투입됐 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국인은 6,500명 정도(정확한 숫자는 아직 불명확함)였다고 합니다. 그 들은 일본 각지의 공사현장에서 옮겨진 한국인 노동자나 일본으로 강제연행된 사람들입니다. 일본사람에 관해서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지하호 근처에 사는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키며 작업 에는 군대를 비롯하며 지역 인근에서 단기적으로 동원된 성인남성, 학생, 아동 등 3,000명이 종사했다. 지하호 공사는 초반에는 하루 3교대였으며 그 후 2교대의 12시간 노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눈 이 많고 추운 나가노현의 습지대에 세워진 허술한 숙소 중에는 삼각 숙사라는 지붕이 땅까지 이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의류나 신발은 지급받기가 힘들고 식사는 양도 적고 영양이 부족했 다. 엄격한 감시 하에서 도망을 시도하면 본보기로 형벌이 가해졌다. 지하호를 파는 작업은 다이너마이트로 바위산을 파게 해 그 바위나 돌을 광차 등을 이용해서 인해전술로 끌어냈습니다. 그것을 상공에서 안 보이도록 나무나 잎으로 덮었습니다. 다이너마 이트 폭파 등의 위험한 작업에는 한국인을 시켰습니다. 한국인 희생자는 공사로 인한 사고와 질병, 영양실조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40명이라는 추정으로부터 명까지 다양합니다. 그런 한국인 노동자중에는 전쟁 후에도 마쯔시로에 남아서 사신 고 최소암씨(경남출신)와 같이 많은 증언을 남겨 사실을 전하신 분도 계셨다. 보존운동 경위 공사는 많은 희생을 낳아 전체의 80%를 완성한 단계에서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맞이했으며 마쯔시로는 환영의 대본영 이 되었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지하호는 사람들 기억으로부터 잊 혀져 있었다. 그러나 1985년, 그 지방의 시노노이아사히 고등학교 학생들이 지하호를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 의 귀중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유적으로 보존하자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수학여 행으로 간 오키나와에서 동굴을 본 것을 계기로 고향의 역사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발발한 오키나와전의 주요임무는 본토결전의 준비, 즉 마쯔시로 대본영이 완성되기 전까지 방어 태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81

89 그 후 그 활동은 큰 시민운동이 되어 1999년엔 지하호의 일부 500m가 나가노시에 의해 일반 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작년에는 12만2천명이 찾아와 그 중에 2만5천명이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회원은 현재 600명이며 작년에는 한국어판 팸플릿도 만들어졌습니 다. 한 자원봉사자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 특히 아무 죄도 책임도 없는 사람들 의 생명과 행복을 앗아가는 전쟁의 본질을 지하호건설의 경위와 실태에서 깊이 배우고 평화의 귀중함을 호소해 나가고 싶다. 고 말하고 있다. 동계올림픽 도시인 나가노의 아름다움과 빼어난 풍경 속에서 이런 어두운 역사의 질곡과 조선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에 다시한번 깊은 분노를 느끼면서도 일본인들의 자국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단호한 대처와 이를 통해 올바른 역사관을 청소년들에 게 전파하는 노력은 우리 또한, 깊게 고민하고 성찰해 봐야 하는 내용이다. (그림 3-28) 마쓰시로 대본영 추도비 (그림 3-29) 마쓰시로 대본영 전경 (그림 3-30)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 입구 (그림 3-31)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 내부) 82

90 8). 이탈리아 토리노 (2006년 20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프리모 레비(토리노)/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 반 파시즘 운동가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 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 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프리모 레비( )는 움베르토 에코, 이탈로 칼비노와 함께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 가이자 화학자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반( 反 ) 파시즘 운동에 참여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당했다. 레비는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것은 주변 상황이 운 좋게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 다. 독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간수들의 명령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의 체험을 적은 것이 현대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것이 인간인가'이다. 레비의 문학적 성향을 다른 측면에서 잘 보여주는 책이 '주기율표'다. 화학자로서 수소, 아연, 철, 칼륨, 수은 등 주기율표상의 원소에서 각각 연상되는 이야기 21편을 단편으로 엮은 이 책은 회고록과 명상록의 성격을 띠지만 어떤 부분은 허구의 내용이어서 자전적 소설집으로 불 리기도 한다. 이들 두 권이 레비 사후 2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돌베개 출판사에서 번역돼 나왔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레비가 빨치산 부대에서 활동하다 파시스트 군대에 체포돼 임시 수용소로 이송되던 1943년 12월부터 러시아군에 의해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1945년 1월까지 일들을 적었다. 이미 수용소 시절부터 이 책을 구상했다는 레비는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 선 어조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1976년 레비는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라는 독자의 물음에 의미 있는 답변을 했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 다.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레비는 파시즘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 83

91 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원래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게, 좀 더 존경받을 수 있게, 그리고 파시즘으로 초래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주기율표'는 좀 더 포괄적으로 레비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를 키우고 있던 화학과 물리학이 우리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뿐만 아니라 그와 내가 찾고 있었던 파 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고 있었다"며 과학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그에게 이들 학문은 분명하고 경계가 뚜렷하며 단계마다 검증이 가능하고 라디오와 신문처럼 거짓말과 공허함이 뒤얽힌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는 드물게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레비는 1987년토 리노의 저택에서 자살했다 (그림 3-32) 프레모 레비의 저서 (그림 3-33) 프레모 레비의 사진 20대에 반( 反 )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 아남은 유태인 학자 프리모 레비는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 사람들은 아직도 프레모 레비에 대한 추모와 사랑을 간직하고 지속적인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루이스 데 파블로(클래식 작곡가)는 프레모 레비의 시에 작사를 하고 파시스트에 저항하다 총에 맞아 숨진 에스파냐의 작곡가 안토니아 호세에 대한 추모곡으로 수난곡(2005년) 을 발표하기도 했다. 84

92 (그림 3-34) 데 파블로의 수난곡 (그림 3-35) 프레모 레비의 저서 9). 러시아 소치 (2014년 제22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1 체르케스인들에 대한 인종청소 (소치의 비극적 역사) 체르케스는 흑해 북동해안에 있는 작은 독립국가였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로지 인종 적인 증오심 때문에 러시아군들이 체르케스인들을 오스만 제국으로 추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60만명의 사람들이 학살, 기근과 같은 요소로 희생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들의 터전을 잃었다. 1864년에는 전체 인구에서 4분의 3이 절멸되었으며, 체르케스인들은 현대 역사속에서 나라 없는 첫 번째 민족이 되었다. -월터 리치몬드, 옥시덴탈 대학교 역사학 겸임 조교수 (체르케이스인 제노사이드) 중에서-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은 영제국이 바다를 건너 성장했던 것과 똑같이 육지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남쪽으로 체르케스, 그루지아, 에리반,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프카스 산맥으로 동쪽으로 카스피 해에서 실크 로드를 따라 보하라, 사마르칸트, 타슈켄트를 거쳐 파미르 산맥의 코칸트와 안디잔까지 범위가 미쳤다. 러시아는 이제 서쪽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1863년에 폴란드의 재봉기를 진압한 후 러시아는 동화정책을 더욱 강화했는데, 이 정책은 발트 지역의 독일인과 핀란드인들에게도 적용됐다. 1864년에는 카프카스 민족들이 예속됐다. 체르케스족(흑해 연안에 거주하며 아디게 이-체르케스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80% 이상이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소치, 아마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었겠지만, 지금은 거의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얼마전 진행되었던 동계올림픽을 통해서 올림픽 개최도시이며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내는 도시로, 막대한 러시아 예산을 들여서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에 부합하는 엄청난 인프라를 구축해놨던 도시이기에 모두가 이 부분만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85

93 그러나, 체르케스인들의 비극적 역사를 알고 보면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는 저항과 분노의 강렬한 에너지를 확인 할 수 있다. 1800년대 러시아 제국에게는 이 시기가 팽창의 시기로 통하는데, 강력한 절대 군주인 표트르 대제에 의해 새로운 러시아가 건설이 되고 그 기반이 닦인 뒤, 러시아는 대외 팽창으로 나아갔다. 러시아는 영국이 해상을 지배하며 해가지지 않는 나라인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것과 같이, 넓은 아시아 대륙을 평정하길 원했다. 따라서, 그들은 급격한 팽창을 이루며 동쪽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실크 로드를 따라 보하라, 사마르칸트, 타슈켄트를 거쳐 파미르 산맥의 코칸트와 인디잔, 그리고 남쪽으로는 체르케스와 그루지아, 에리반,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프카스 산맥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3세기부터 북서 캅카스 산맥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체르케스인들은 러시아의 확장정책에 속에서 이주를 시작한 러시아인들과 서서히 충돌하게 된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동맹관계를 파기하고 오스만제국을 지지하였고 크림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그들은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는데 이에 러시아제국은 이지역을 침공하여 자신들의 지역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러시아제국은 이 지역을 침략하여 무려 1,000년이나 살아오던 체르케스인들의 터전을 무참히 짓밟았고, 1864년에는 급기야 그 지역에 살던 모든 체르케스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최소 60만에서 최대 150만에 달하는 체르케스인들이 인종청소를 당하 고 굷어 죽었고, 이는 당시 체르케스인들 전체 인구의 4분의 3에 달하는 숫자였다. 현재 강제 추방을 당해 뿔뿔이 흩어진 체르케스인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체르케스인들은 총 7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세계 각지에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으며, 러시아에 남아 현재 살고 있는 체르케스 민족은 8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체르케스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무자 비한 행태를 보인 러시아가 인종청소 를 감행한 1862년에서 정확히 150년 뒤인 2014년에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소치를 완벽한 자신들의 지역으로 선전하기 위해 이곳에서 올림픽을 하는 것을 보며 끊임없이 시위를 하고 반대해왔다. 특히나 소치 올림픽에서 알파인 스키장이 위치한 크라스나야 폴리아나는 체르케스의 마지막 전사들이 실제 러시아제국의 차르에게 무릎을 꿇었던 장소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러시아의 소치에서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올림픽 경기장 건설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학살당한 체크케스인들의 유골이 끊임없이 발굴되었다. 체르케스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이 수모를 첫 번째 근대 집단학살 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은 이 소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을 자신의 조상들의 무덤 위에서 개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86

94 러시아는 이런 체르케스인들의 반발에 올림픽 개최에 대한 부담으로 체르케스 소수민족의 지도자인 아스케르 소흐트를 동계올림픽 직전에 방해가 될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하 였으며, 계속적인 정치적, 민족적 탄압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 10월, 북미와 유럽, 중동 등 많은 국가의 체르케스 단체는 각국의 대통령에게 이 대량 학살이 인종청소 였음을 승인해달라는 요청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고, 2010년 3월 20일, 체르케스 대량학살과 관련해 그루지아는 수도 트리빌시에서 수용했고, 그루지아는 공식적으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2011년 5월 20일, 그리지아의 수도 트리빌시에서 개회된 의회는 찬성 95표 반대 0표 로 19세기에 러시아인들이 체르케스인들에게 자행한 대량학살이 인종청소 였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모스크바도 역시 이 학살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현재 이 학살은 최소 60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최대치로 하면 100만명에서 150만명까지 올라간다. 러시아에 의해, 소치 동계올림픽에 의해 묻힌 체르케스인들이 겪은 뼈아픈 역사는 지속적인 기념사업과 학살자 신원파악, 유골 수습사업 등 산재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 이다. (그림 3-36) 체르케스인 올림픽 반대시위 (그림 3-37) 체르케스인 독립전쟁 (그림 3-38) 체르케스인 군중시위 (그림 3-39) 체르케스인의 엑소더스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써의 화려한 이면속에 인종청소와 분리독립운동, 저항과 분노의 역사적 고찰을 진행하고 있는 개최도시 소치는 이후 보다 더 강력한 비극적 역사를 청산하려 는 체르케스인들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87

95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의 저항역사를 통해 본 시사점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의 공동적인 유구한 저항역사 산악지역의 특수성을 살린 레지스탕스들의 평화, 생명 투쟁사 약소민족의 저항을 통한 평화, 생명, 독립정신 구현 후손들의 끊임없는 저항역사에 대한 추모, 계승, 보존 (레지스탕스 기념관 등) 올림픽의 평화 정신과 부합하는 20세기~21세기 역사적 소명 임진왜란의 노산성 전투, 최후의 동학 격전지, 찬란한 의병활동, 강원도 출신 40여명의 신흥무관학교 무관생들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 쌓여 있는 평창군은 세계 동계올림피 개최도시 저항역사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다. 모든 개최도시가 저항역사에 대한 추모, 계승, 보존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평창군이 지켜내야 할 과제이다. 88

96 4.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 기본구상 1) 비젼설정 1 세부내용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가 대회를 위한 하드웨어 구축과 S.O.C 확립에 만반의 준비를 기하였고 또한, 참여선수와 관광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관광, 문화 인프라 활성화에도 많은 공을 들였던 사례를 비쳐 볼 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평화.생명을 추구하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는 정신적 만족을 제고 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적 구성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2018평창동계올림픽 준비 단계는 주로 하드웨어적인 부분과 관광.문화를 기반하는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에 많은 예산을 투여하고 실행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지금부터라도 역사적,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고 자랑스러운 평창과 대한민국의 저항역사를 추모, 계승, 기념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추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림 4-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비젼 89

97 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의 발전목표 설정 1 평화 생명 올림픽 특구 도시 (장기적인 로드맵) 올림픽 Host 도시의 품격에 맞는 평화와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올림픽 특구 도시로 장기적 로드맵 구축 역대 올림픽 개최도시 저항역사 계승, 추모에 부합하는 평창군 아이덴터티 구축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사업과 연계) 세계 유일의 남북 분단국가이며 전국 유일하게 남북 강원도의 중심지적인 올림픽 개최도시 평창의 역할론 확대 재생산 필요 2 글로벌 Resistance 고원도시 (중장기적인 로드맵) 역대 개최도시의 저항역사를 계승 발전시키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올림픽 Host 도시 평창에 기인하는 글로벌 Resistance 고원도시로 전세계적 홍보와 평화도시 선포 병행 필요 평창군민의 자긍심을 끌어 낼 수 있는 역사적 토대 구축과 이를 통한 하나된 평창군민 정신 발현을 위한 공간적, 시간적 토대로 적극 활용 Happy 700 쾌적한 고원도시 평창과 글로벌 Resistance를 연계한 세계적 올림픽 개최도시 평창으로 중장기적 발전 방향성 설정 3 균형발전을 위한 평창 남부권 개발 (단기적인 로드맵) 평창군의 균형발전을 통한 2018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써의 역동성 표출 평창 남부권의 다양한 레포츠 시설 및 관광자원 구축과 역사적 유물과 자원을 활용한 문화 관광 복합형 권역개발 사업으로써 적극 추진 의지 평창 북부권역에 집중된 올림픽 관련시설 산업에 대한 남부지역 형평성 고려 및 남부권역 주민의 경제적 사회적 확산성 고려 90

98 3)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의 기대효과 1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 역사 체험 기념단지 조성을 통한 체류형 관광 프로그램 개발 운영 및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을 따른 지역 경기 활성화 도모 효석문학마을, 월정사, 노동리 아트밸리 등의 문화관광지와 연계한 평창문화관광 네트워크 구축 및 내,외국인 맞춤 프로그램 개발 외국인 특히 중국인, 동남아인의 경우 일본제국주의 피해에 대한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는 성향을 고려한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관광 패키지 상품 개발을 통해 적극적인 마케팅을 전개해야 함 2 청소년들의 자주적 역사관 측면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정통성 복원을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항일무장 독립투쟁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21C를 주도해 나가는 창의적 국가관 확립에 토대 마련 선조들의 자랑스런 항일독립투쟁사를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을 통해 반추해 봄으로써 자주적이고 역동적인 대한민국 역사관 확립에 기여 3 역사적 가치 계승을 통한 미래세대 보존측면 51년 독립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사라져 가는 독립투쟁사의 시대적 재해석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 보존 책무 (그림 4-2) 단계별 독립운동 변천사 91

99 4)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발전체계 및 공간구상 1 가치발전축 구상 2 도시발전축 구상 (그림 4-3) 가치발전축 (그림 4-4) 도시발전축 92

100 3 단지 공간배치 구상 (그림 4-5)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공간배치 예상도 5.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 향후 발전방안 1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보상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필요 적극적인 법률 개정 운동을 통한 유공자 예우 및 보상에 대한 현실적 기반을 마련하고, 청소년들에게 호국장소 견학 및 체험을 의무화 추진 사례) 이스라엘, 프랑스의 경우 법제화 되어 의무화 추진하고 있음 (그림 5-1) 해외 유공자 예우 및 보상사례 93

101 2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김포 독립기념관 국내사례 벤치마킹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경우 서울특별시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청소년 체험 프로그램 강화와 역사캠프, 해설자 투어, 청소년 봉사활동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내고 있음 김포시 독립기념관의 경우 지자체 차원의 독립기념관 운영의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와 역사적 고증과 보존에 대한 지역 커뮤니티 확립의 우수사례로 볼 수 있음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독립과 항일과 관련된 프로그램 및 공간에 대한 지역특성을 고려한 특성화 추진을 통해 각 공간마다 의미성 부여 작업 필요 단순 체험과 캠프 형태를 지양하고 가족단위, 학교단위, 수학여행 필수코스에 부합하는 세분화 작업이 병행 되어야 함 (그림 5-2) 국내 독립운동 기념관 우수사례 94

102 3 외국의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보존, 계승에 대한 국외 사례 벤치마킹 외국의 경우 독립과 해방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 국가유공자에 대한 공원, 기념관, 도시네이밍, 공항네이밍 등 다양한 선양사업과 보존사업에 지속적인 국가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실정임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보훈처나 국방부, 현충원, 안전행정부 등 소관부서간의 업무적 단절성과 지속성이 떨어지는 비효율적인 행정시스템 정비가 필요 우리나라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김구 선생님의 경우 효창공원이란 묘역단지 형태가 아닌 공원형태에 모셔져 있는 한심한 실태에 놓여 있음 (안중근의사, 유관순의사의 경우 유골도 수습하지 못한 상황임)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가 조성되면 5.18 망월동 묘역처럼 전국에 산개되어 집중관리를 받지 못하거나 해외에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애국지사들의 묘역 성역화 작업을 필수적으로 진행 하야여 함 평화와 생명을 나타내는 동계올림픽 도시 평창에 독립유공자와 항일유공자를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도로명 작업을 진행 해야 함 ( 권두문 도로/ 이시영 도로/ 이상룡 도로/ 김좌진 도로/ 지청천 도로 ) (그림 5-3) 해외 독립운동 유공자 예우 사례 95

103 4 전국 독립운동 관련 시설 원스탑 서비스 선도적 구축 스마트 시대에 부합하는 SNS를 활용한 전국 독립운동 관련 시설 원스탑 서비스 구축 방안 모색 스마트폰 단말기를 통한 다국어 음성 설명, 위치기반 서비스, 다양한 체험공간(U-체험도우미, 사이버 전시관, 3D가상 체험공간 등) 등의 다양한 소프트웨어 병행 구축 필요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저항역사 정보에 대한 교류체계 구축 및 관련 인물, 관련 지역, 관련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 소프트웨어 개발 필요 특성화 된 각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프로그램과 지역적 인물, 역사적 배경, 관련 D/B에 대한 접근성 확보 및 모든 사항에 대한 원스탑 예약, 프로그램 일정 변경, 연계 P/B상품 구매, 결재 등 복합적 다기능 시스템 개발 및 구축에 대한 총괄적 컨트롤 타워로써의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운영조직 구축 필요 (그림 5-4) 전국 독립운동 관련 공간 원스탑 서비스 구현도 96

104 관련 문헌 목록 신용하,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윤병석, 독립군사 지식산업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아카데미 상동교회, 상동교회일백년사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원병상, 신흥무관학교, 독립운동사자료집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집문당 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서간도시종기, 인물연구소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 연구, 일조각 이관직, 우당이회영실기, 을유문화사 독립동지회 편, 한국독립사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편, 석주유고 하 (서사록), 경인문화사 윤병석,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Ⅰ-만주 러시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김병기, 신흥무관학교와 만주독립군, 史 學 志 제43집, 단국사학회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제삼기획 박창화, 省 齋 小 傳 이은우, 임시정부와 이시영, 범우사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시종기, 정음사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이규창, 운명의 여진 感 時 漫 語, 일조각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창화, 성재 이시영 소전, 을유문화사 이정규,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 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 임시의정원Ⅰ, 국사편찬위원회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반기(1919~1932)의 재정제도와 운영,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 (상), 국가보훈처 97

105 조철행, 국민대표회 전후 민족운동 최고기관 조직론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한국독립당에 관해서는 조범래, 한국독립당 연구 1930~1945, 선인 김정주, 조선통치사료 한시준, 중국 관내 독립운동과 신문 잡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한시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탐구당 김삼웅, <해방후 양민학살사>, 가람기획 시사연구소 편, <광복30년사>, 127~128쪽, 세문사 광복선열 고필동임면수선생약사. 1963년 2월 25일 許 英 伯 삼일학원 65년사 이은숙의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시종기, 정음사 박환, 시베리아의 항일운동가 김경천,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국학자료원 註 統 監 府 來 案 ( 奎 章 閣 所 藏 ) 第 1 卷 年 韓 國 獨 立 運 動 史 資 料 ( 國 史 編 纂 委 員 會 ) 第 17 輯 面 동비토론 호구일록( 虎 口 日 錄 ) 98

106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사업 타당성 연구용역 보고서 사 업 총 괄 책 임 자 책 임 연 구 위 원 공 동 연 구 위 원 안 경 철 박 제 우 김 근 태 발 행 처 : 프 랜 즈 주 소 : 강 원 도 춘 천 시 석 사 동 번 지 2층 전 화 : 팩 스 : 발 행 인 : 대 표 안 경 철 99

107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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