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사업 타당성 용역 보고서 2014년 03월 프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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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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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사업 타당성 용역 보고서 2014년 03월 프랜즈
3 목 차 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계획수립의 개요 p 가. 계획수립배경 및 목적 p 1) 계획수립의 배경 p 2) 계획수립의 목적 p 나. 계획수립의 범위 p 1) 공간적 범위 p 2) 시간적 범위 p 3) 내용적 범위 p 4) 계획수립의 근거 p 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지역 지역현황 특화분석 p 가. 일반현황 p 1) 위치 및 행정구역 p 2) 토지이용 및 기후환경 p 나. 자연환경현황 p 1) 생태현황 p 2) 하천현황 p 다. 생활환경 현황 p 1) 관광일반여건 p 2) 지역 관광자원 현황 p 3.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의 역사적 당위성 분석 p 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역사적 의의 p 나.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위상 p 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의 연관성 p 라. 신흥무관학교의 강원도 출신 독립운동가 현황 p 마. 해방정국과 대한민국 정부수립기의 신흥출신인 들의 역할 P
4 바. 항일정신과 평창군의 연관성(노산성 전투) p 사. 평창군 항일무장 투쟁역사 p 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저항운동 사례 연구 p 4.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 기본구상 p 1) 비젼설정 p 2) 발전목표 설정 p 1 평화 생명 올림픽 특구도시 p 2 글로벌 Resistance 고원도시 p 3 균형발전을 위한 평창남부권 개발 p 3) 기념단지 조성의 기대효과 p 1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 p 2 청소년들의 자주적 역사관 측면 p 3 역사적 가치 계승을 통한 미래세대 보존측면 p 3) 발전체계 및 공간구상 p 5.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 향후 발전방안 p
5 표 목 차 (표 1-1) 사업의 공간적 범위 p (표 1-2) 사업의 추진일정 p (표 1-3) 사업의 연도별 투자계획 p (표 1-4) 사업의 국고보조사업 내역 p (표 1-5) 사업 계획수립의 근거 p (표 2-1) 평창군 입지여건 p (표 2-2) 평창군 기상개황 p (표 2-3) 평창군 연간강수량 p (표 2-4) 평창군 일기일수 p (표 2-5) 평창군 지역별 관광장원 현황 p (표 3-1)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p
6 그림 목차 (그림 1-1) 계획 수립의 배경 p (그림 1-2) 계획 수립의 목적 p (그림 1-3) 평창군 노산성 전경 p (그림 2-1) 평창군 인구 그래프 p (그림 2-2) 평창군 토지지목별 현황 p (그림 2-3) 평창군 농가인구 그래프 p (그림 2-4) 평창군 기상개황 그래프 p (그림 3-1) 강원출신 신흥무관생도 명단 p (그림 3-2) 강원출신 신흥무관생도 명단 p (그림 3-3) 평창읍 시내 전경 p (그림 3-4) 절개산 전경 p (그림 3-5) 응암굴 실제사진 p (그림 3-6) 응암굴 전경 p (그림 3-7) 노산성 터 p (그림 3-8) 노산성 성곽 p (그림 3-9) 평창군 동학, 의병 격전지 분포도 p (그림 3-10) 독일군의 노르웨이 거점도시 침공도 p (그림 3-11)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저항운동 p (그림 3-12) 노르웨이 침공당시 참전한 소련적군 동상 p (그림 3-13) 오슬로 아케르스후수 레지스탕스 박물관 p (그림 3-14) 코리티나 담페초 산악모습 p (그림 3-15) 코리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당시모습 p (그림 3-16) 레지스탕스 그레노블 협곡 p (그림 3-17) 스탈당의 집 p (그림 3-18) 프란치프 법정 사진 p (그림 3-19) 1914년 당시 동유럽 판도 p (그림 3-20) 프란치프 기념비 p (그림 3-21) 프란치프 사진 p (그림 3-22) 쟝 물렝 사진 (그림 3-23) 알베르빌 전경 (그림 3-24)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p 78p 80p
7 (그림 3-25)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도 p (그림 3-26) 강제진용 조선인 벽글씨 p (그림 3-27) 조선인 위안소 건물 p (그림 3-28)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추도비 p (그림 3-29)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전경 p (그림 3-30)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입구 p (그림 3-31)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널내부 p (그림 3-32) 프레모 레비의 저서 p (그림 3-33) 프레모 레비의 사진 p (그림 3-34) 데 파블로의 수난곡 p (그림 3-35) 프레모 레비의 저서 p (그림 3-36) 체르케스인 올림픽 반대시위 p (그림 3-37) 체르케스인 독립전쟁 p (그림 3-38) 체르케스인 군중시위 p (그림 3-39) 체르케스인 엑소더스 p (그림 4-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비젼 p (그림 4-2) 단계별 독립운동 변천사 p (그림 4-3) 가치 발전축 p (그림 4-4) 도시 발전축 p (그림 4-5)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공간배치 에상도 p (그림 5-1) 해외 유공자 예우 및 보상사례 p (그림 5-2) 국내 독립운동 기념관 우수사례 p (그림 5-3) 해외 독립운동 유공자 예우사례 p (그림 5-4) 원스탑 서비스 구현도 p
8 1.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계획수립의 개요 가. 계획수립배경 및 목적 1) 계획수립의 배경 (그림 1-1) 계획수립 배경 임진왜란의 역사적 격전지 평창 노산성 적극 융합 평창군의 진산 노산 : 항일투쟁의 역사적 장소 매년 노성제 개최를 통해 역사적 의미 지속 계승 역사성과 현대성이 어우러지는 민족적 공간으로 재창조 필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Host City 항일투쟁의 역사와 정신을 문화 관광 올림픽의 컨테츠화 추진으로 세계속의 대한민국 역사성 각인 올림픽의 평화와 자유의 정신에 부합하는 대한민국의 자주적 역사의식과 평화생명 정신 부각 1
9 균형발전을 위한 평창 남부권 개발 필요성 SOC 확충으로 인한 수도권 접근성 대표 증대: 1시간 이내 다양한 레포츠 시설 및 관광자원 보유 ( 수석공원 조성 85억 투자 진행 ) 역사적 유물과 자원을 활용 문화 관광 복합형 개발 평창군의 균형발전을 통한 2018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써의 역동성 표출 항일투쟁의 역사적 정신 계승 노산근린공원(노람뜰) 조성 공사 및 용역 ( 2013년까지 15억 투자 ) 군유지(50%) 및 일부 사유지 사업시행 가능 노산성 복원 항일 투쟁의 역사적, 문화적 정신 계승 항일투쟁의 역사와 민족적 자긍심 고취에 입각한 평창군민들의 선진적 문화역사 의식 함양 지역 호국유적지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병행 진행 신흥무관학교와 노산성 복원사업의 적극 융합 진행 2) 계획수립의 목적 (그림 1-2) 계획수립 목적 2
10 동계올림픽 개최 이후 올림픽 정신 구현을 위한 마케팅 필요 평화와 생명의 올림픽 정신 구현을 위한 지역적 랜드마크 형성화의 절대적 필요성 올림픽 개최 이후 지속적인 지역 이슈 메이킹을 위한 거시적 프로젝트 연계 도입의 필요성 21C 가치구현 사회를 위한 메탈리티 강화 필요 애국애족 국가관의 청소년 형성을 위한 프로그램 신설필요 - 올림픽 정신+항일투쟁정신= 선도적 애국애적 정신 함양 나. 계획수립의 범위 1) 공간적 범위 평창읍시내 노 산 노산성복원 평 창 강 주차장 바위공원 노람뜰 녹색 치유 조성지 (그림 1-3) 사업 대상지 합 계 6필 역사기념관 및 체험장 지번 지목 지적(평) 소유주 17 전 17-1 전 17-4 전 18 전 18-1 전 18-2 전 11,283m2 (3,400) 4,086m2 (1,236) 1,468m2 (444) 909m2 (275) 1,979m2 (599) 2,678m2 (810) 163m2 (49) (그림 1-3) 노산성 전경 군유지: 1 재경원: 2 개 인: 2 공시 지가 (원) 토지매입가(원) (공시지가) 감정매입 예상가 (원) 151,557, ,850,000 평창군 21, 재 정 경제원 재 정 경제원 21,200 31,121,600 88,800,000 21,200 19,270,800 55,000,000 이강원 49,200 97,366, ,700,000 평창군 21, 이강원 23,300 3,797,900 7,350,000 (표 1-1) 사업의 공간적 범위 3
11 2) 시간적 범위 2014년도 보조사업 추진일정 주요내용 1/4 2/4 3/4 4/ 익년도 비고 역사기념관 설계 역사기념관 시공 노산성곽복원 문화재지표 조사 역사기념관 및노산성곽복 원 시공 노산성곽복원 설계 (표 1-2) 사업의 추진일정 ㅇ 연도별 총투자계획 (단위:백만원) 구 분 총사업비 기투자 2014년 2015년 2016년 비고 합 계 10, ,000 3,000 4,000 0 국 비 5,000 1,500 1,500 2,000 도 비 1, 시군비 3,500 1,050 1,050 1,400 기 타 0 (표 1-3) 사업의 연도별 투자계획 추진현황 ㅇ : 사업대상지중 군유지 기확보 2필지(중리 17, 18-1) ㅇ ~12 : 사업대상지중 사유지 및 재정경제원 확보 (총 4필지) 매입예상가 330백만원 (군비) 향후 추진계획 ㅇ 2013년 하반기 - 기본계획수립 및 노산근린공원 도시계획 변경완료 - 세부실행계획 수립 및 지방재정투융자 심사완료 ㅇ 2014 상반기 : 기본 및 실시설계 ㅇ 2014 하반기 ~ 월 : 사업착공 및 준공 4
12 3) 내용적 범위 총 투자계획 및 투자실적 ㅇ 시설별 투자계획 : 총 100억원 - 기본계획수립, 세부계획수립, 도시계획 변경 억원 - 역사기념관 건축 (3층/400평) 노산성곽 복원 1식 독립군 병영체험시설 및 백서농장 조성 홍보용 앱 개발, 학술포럼 개최, 국토대장장 운동 등 홍보 국고보조사업 추진계획 보조금 교부신청 내역 ㅇ 교부신청 금액 : 3,000백만원 ㅇ 교부시기 : 1/4분기 국고보조사업 내역 (단위 : 백만원) 사 업 내 역 2014년도 예산(안) 비고 예산계상신청시 교부신청시 계 국고 지방비 민자 3,000 3,000 3,000 1,500 1,500 합 계 3,000 1,500 1,500 (표 1-4) 사업의 국고보조사업 내역 역사기념관 건축 : 3층 400평/ 5,000백만원/ 설계 및 착공 노산성곽 복원 문화재 지표조사 : 1식 400m 지방비 확보 입증서류 : 2014년도 당초예산 확보 예정 4) 계획 수립의 근거 관광자원개발사업 국고보조금 지원지침(제4조) 관련사항 5
13 관광자원개발사업의 절차적 내용적 요건 검토기준 (관광자원개발사업 국고보조금 지원지침 제4조 관련) 구 분 주 요 내 용 추진현황 및 세부내용 1.절차적 요건 가. 관련법령에 의한 인 허가 관광(단)지의 경우 지정일, 지정 면적, 조성계획 승인사항 등 나. 재정투융자 심사 심사일시 및 승인내용(조건 요지) 다. 지방비 확보 보조율 및 예산 - 국토의 이용 및 계획에 관한 법률에 의한 도시지역, 자연녹지지역내 근린공원 지역 으로 도시공원 및 녹지에 관한법률 시행규칙 상 교양시설로 건폐율 20%로 건축 가능 - 문화재보호법상 문화재 보존영향 검토 대상 구역으로 사전 검토후 추진 년도 하반기 심사에 제출 년예산 관광개발기금 국비50%, 지방비 50%(도15%, 군비35%) 확보 추진 2.내용적 요건 라. 부지확보 당해년도 사업대상 부지임 마. 미집행액(백만원) 기 교부된 보조금 대비 집행율 미집행액 표기 가. 기본계획 및 타당성 조사 주요내용 및 수립일자 등 나. 콘텐츠 조사 연구 주요내용 및 지역의 고유성과 연계, 차별적 경쟁력 강화방안 등 다. 관광수급 분석 관광객은 물론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개발이익의 지역 환원 등 지속가능한 관광개발을 위한 수급 내용 등 라. 프로그램 및 운영관리계획 체험관, 전시관, 기념관 및 각종 공원 등 주요 시설물의 프로그램 및 운영관리계획 년에 군유지 2필지(17, 18-1번지)외 재정 경제원 소유 2필(17-1~2) 및 사유지 2필지를 매입추진(군비) - 없음 월 평창 노산 노람뜰 관광지 타당성 검토 및 기본구상 용역에 리프레쉬 구역으로 노산성곽 복원 등이 반영되어 있음 년 7~8월 수립 및 타당성 조사예정 - 임진왜란 전투지인 노산성 인접 지역임 평창동계올림픽 문화 관광 콘텐츠 化 - 노람뜰 녹색치유 및 레포츠단지 조성지역과 인접해 있어 선택과 집중적인 관광개발 용이 - 평창 남부권 개발 소외감 해소와 체험 관광 지 집단조성으로 관광 트렌드 化 - 평창 노산 노람뜰 관광지 기본구상에 노람뜰 녹색치유 및 레포츠단지 조성과 인접하여 관광지 단지화 함으로 관광객 유치 용이 - 녹색치유 및 레포츠단지와 연계하여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 즐길거리와 볼거리, 역사체험 병행 운영 마. 전문가 및 지역주민 참여 사업의 타당성 및 환경, 디자인, 주변경관과의 조화 등에 대한 전문가 의견(참여 전문가 명단 포함) 및 지역주민 의견수렴 내용 (설명회 개최일자 등) 년 7~8월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조사 검토시 주민의견 수렴 및 설명회 개최 - 평창 노산 노람뜰 관광지 기본구상시 참여한 전문가 의견 수렴하고, - 기념관 시설물은 최소화 하고 병영체험, 백서 농장 체험프로그램 개발 운영 등. (표 1-5) 계획수립의 근거 6
14 2.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지역 지역현황 특화분석 가. 일반현황 1) 위치 및 행정구역 1 입지여건 강원도 내륙의 남부에 속하는 산악지대로 극동은 대관령면 횡계3리, 극서는 방림면 운교1리, 극남은 미탄면 마하리, 극북은 진부면 동산리 동쪽은 강릉시와 정선군,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 등 5개의 시 군과 접경을 이룸 강원도지역의 대표적인 고원산악휴양지역으로 동계 관련 스포츠시설이 구비 (오대산국립공원이 입지하고 있어 하계절 관광기능 지원) 수도권에서 연결되는 광역교통체계인 영동고속도로 및 5개 IC(면온,장평, 속사,진부,횡계)를 통해 접근 가능하여 도로교통체계는 양호 문화관광자원에 따라 테마가 있는 관광도시계획이 추진 중에 있으며, 지역별 공간기능 분담역할의 변화 예정 (표 2-1) 입지여건 2 인구 평창군의 인구는 2012년 6월 기준 총인구 43,507명으로, 강원도 총인구 1,537,750명의 2.83%를 차지- 지난 10년간 지속적인 인구감소추세로 연평균 0.68%의 감소율을 보임. 한편 평창군의 세대수는 2012년 6월 기준 19,644세대가 구성, 세대 당 인구수는 2.21명(연평균 1.6%증가) 전국, 강원도, 평창군의 연령별 인구를 20세 단위로 그 비중을 비교해 볼 때, 전국 및 강원도에 비해 인구가 보다 빠른 고령화 추세에 놓여 있음 7
15 (그림 2-1) 평창군 인구 그래프 2) 토지이용 및 기후환경 1 토지이용 지목별 토지이용: 임야 1,258.83km2(83.8%), 전 km2(8.2%), 하천 60.97km2(2.1%), 답 43.44km2(1.5%)순으로 구성 (임야의 적극적인 토지이용계획이 요망) 용도지역: 도시지역이 1.7%를 차지하고 있고, 비도시지역이 98.3%를 차지하고 있어, 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지역개발을 수행할 경우 도시지역 확대 필요 (그림 2-2)평창군 토지지목별 현황 (그림 2-3)평창군 농가인구 그래프 8
16 2 기후환경 기상개황 (표2-2) 평창군 기상개황 강수량 (표2-3) 평창군 연간 강수량 일기일수 (표2-4) 평창군 일기일수 기상개황(그래프) (그림 2-4) 평창군 기상개황 그래프 9
17 나. 자연환경 현황 1) 생태현황 1 산림자원 임상별 산림면적은 2007년 기준 총 119,914ha로 나타나고 있으며, 소유별로는 국유림 69,934ha(57.49%), 공유림 13,137ha(10.96%), 사유림 37,84ha(31.56%)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임상별 임목축척은 2010년 15,901,484m2 중 침엽수가 5,387,612m2로 가장 높은 임목축척을 나타내고 있으며, 활엽수 6,467,190m2를, 혼효림 4,046,682m2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평창군의 대표적 지하자원은 석회석으로 434,592M/T의 생산량을 보이고 있음 ( 석회석: 평창읍(359,852M/T), 미타면(29,700M/T), 방림면(45,040M/T) - 평창군청 통계연보(2011년) - 2 하천 지역내 하천은 지방 하천 16개소가 흐르고 있음 하천은 이.치수적 기능과 함께 동식물의 서식처 기능, 수질의 자정기능 및 심미적 기능과 같은 환경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인공적인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 생태계 서식처 파괴 및 하천의 건천화 등 많이 훼손된 상태임 3 지형 군의 총 면적은 1,464,16km2로 강원도 전체 면적인 16,874.6km2의 약 8.7% - 전국 군 3번째 면적: 임야84%, 농경지 9.7%, 기타 6.3% 평창군은 태백산맥의 주류를 이루고 동쪽으로 가리왕산, 서쪽으로는 태기산, 북쪽으로는 비로봉, 남쪽으로는 삼방산 등의 고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역내 대부분 취락이 평탄지형의 분지에 형성되어 있음 10
18 다. 생활환경 현황 1) 관광일반 여건 수변, 계곡형, 산악형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특히 대륙성 기후 및 높은 해발고도로 인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동계스포츠 리조트 3개소가 입지 산림 관광자원으로 오대산국립공원이 입지하여 하계 관광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기타 지역별로 다양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음 평창군의 관광지 방문객수는 8,410,624명으로 12월~2월 사이에 3,162,404명이 방문하여 37.6%가 주로 동계시즌에 방문하였으며, 하계시즌인 7월~8월 사이 방문객은 1,845,094명으로 29.1%가 방문 2) 지역별 관광자원 현황 구 분 문화관광 농촌체험 산림환경 수계관광 평창읍 미탄면 방림면 대화면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대관령면 노산성 및 현충대, 평창바위공원,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감자꽃 스튜디오, 문화예술회관 및 종합운 동장, 응암동굴, 지동봉가옥, 대하리전통가옥, 평창 향교, 천동리낚시터, 송학루, 이양정 월컴투동막골촬영지, 송어양식단지, 평창동강민물고기 생태관(백령동굴) 봉황대 태기산성, 허브나라, 덕거연극인촌, 천심대, 팔석정, 효석숲공원, 무이예술회관, 효석문학관, 물레방아, 메밀밭, 가산공원, 효석문화마당, 봉산서재, 휘닉스파크리조트 판관대,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 한국앵무새학교, 신약수, 이승복기념관, 청소년수련장 및 이승복생 가, 오토캠핑장, 로하스파크 적멸보궁, 상원사, 오대산사고, 월정사, 방아다리약수터, 평창군 공예전시관, 수항계곡관광지 대관정, 버치힐 GC, 대관령스키박물관, 용평리조트, 알펜시아리조트 산체으뜸마을 문희마을 광천마을, 백두둑 호박넝쿨마을 수림대마을 계방산마을, 황토구들마을 탑골마을 거래지마을, 병내리마을, 의야지바람마을, 수레마을 (표2-5) 평창군 지역별 관광자원 현황 한서동산, 남산산림욕장 마하생태관광지 백덕산 휴양림, 운교 관광농원 매봉산림욕장, 약물산 관광농원, 땀띠공원 해피700자연휴양림, 아트인아일랜드 캠핑장 로하스파크, 평창농장, 창녕목장, 돈화농장, 바우개 관광농원, 용평관광농원 오대산국립공원 일부, 진부야생화농장, 두타산 자연휴양림, 마평관광농원, 명상의 숲 삼림욕장 오대산국립공원, 오대산화훼단지, 한국자생식물원, 청림목장, 한일목장, 베이스캠프목장, 삼양축산대관령목장, 삼양대관령목장, 대관령양떼목장 뇌운계곡, 원당계곡, 평창강 뇌운계곡 레프팅 평창강 금당계곡 레프팅 흥정계곡, 팔석정 계곡 흥정계곡, 팔석정 계곡 수향계곡, 막동계곡, 정전계곡, 오대천 래프팅 11
19 3. 신흥무관학교 기념단지 조성의 역사적 당위성 분석 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역사적 의의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주요 방략이었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즉각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가운데 크게 호응을 받은 것이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이었다. 일제와 즉각적으로 무력 항쟁을 벌이는 것은 그 의기는 장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독립운동 및 독립군의 기본 역량과 토대를 배양하고 강화하는데 치중해야 한다는 독립운동 방략이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비밀결사나 지하투쟁 형태로 전개될 수 있었지만,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무단통치로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국외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면 즉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이겠다는 점에서 실력양성운동이나 준비론과 크게 다르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주창자들은 일제의 침략성을 볼 때 언젠가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때 한국이 중국 또는 러시아나 미국과 함께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초기 활동은 을사조약 강제체결 직후부터 있었다.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여준 등은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자 국권과 자유를 되찾을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북간도 용정에 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1906년 10월경 용정촌에서 문을 연 서전서숙은 민족운동 기지 건설의 효시였다. 그뒤 고종으로 하여금 이상설 등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도록 활동한 이회영이 1908년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났을 때 이상설은 이회영에게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이 일본을 경계하기 때문에 전운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에 호응하여 조국 광복을 기약하자 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도 추진했다. 신민회에는 교육과 산업, 인격도야 등 실력양성을 중시하는 간부도 있었지만, 양기탁 이동녕처럼 적극 항일투쟁을 강조한 간부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기울어져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병합조약을 강제할 때 이회영 이동녕 등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를 답사하여 무관학교를 세울 장소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었다. 이상설 이승희 등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러시아와 12
20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흥개호 부근 봉밀산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학교를 세웠다.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은 만주 왕청현 라자구에 비밀 군사학교를 세웠다. 박용만등 미주 동포들도 군사학교를 세워 미래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만이 1911년에 설립된 이후 10년 동안 쉬임없이 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특히 3 1운동 직후에는 한반도 각지와 중국 각지에서 뜻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유하현 고산자에 본교를 새로 크게 지어야 했고, 통화현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워, 합니하 무관학교와 함께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관 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창립 기념강연에서도 밝힌 바대로, 서울에서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이장녕 등 여러 지사와 무관, 안동에서 이상룡 김동삼 등 혁신유림 지사, 선산에서 의병장으로 처형당한 허위의 대소가 등 쟁쟁한 인물이 많이 모였고, 망명자들이 단결이 잘 된 데다가 이석영 같은 재력가가 있었던 점, 서간도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한 데다가 평안도 등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거의 다 가난한 소작농이어서 계급 분화가 약했고, 주민들의 동질성이 강했던 점이 작용했다. 그와 함께 신흥무관학교가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을 찾으려는 망명자 결사 경학사와 서간도 일대의 주민들이 참여한 강력한 주민자치조직인 부민단, 한족회가 강력히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교장 교감 교관 교사가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무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쏟았다. 3 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46기로 현역 장교였던 지청천과 역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인 김경천 신팔균 등이 최신 병서를 가지고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신흥무관학교가 지속적으로 명성을 갖고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주로 이 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간도 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서간도에는 많은 학교가 있었다. 한 기록에는 20호 또는 몇십호만 거주해도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이나 다름없이 이주민들 자녀를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수년간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에 매진해온 신흥무관학교 관계자, 졸업생들은 벅찬 심장의 고동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해 마지 않았던 중일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혈전 준비에 모든 것을 13
21 바쳤던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과 졸업생들은 독립을 향한 찌를듯한 강렬한 의기를 소화, 조절 하기 위해, 제2군영으로 백두산 서쪽 쏘베차에 백서농장을 세웠다. 백서농장은 신흥무관학교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동삼을 장주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참여한 백서농장은 4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인적 미답의 메마른 고원에서 필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지극히 힘들고 고된 훈련을 했다. 이들중 채찬( 白 狂 雲 ) 등 상당수가 3 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통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다렸던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 의 형태로 터졌다. 만주에서건 상해 등 중국관내에서건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은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고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에 힘을 쏟았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에 독립운동전선은 더욱 투지를 다져나갔다. 1941년 일제가 무모하게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즉각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민족혁명당 등 좌파를 받아들여 광복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넓혔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무기력했던 1910년대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하던 1910년대 독립운동의 간고함과 만주에서 펼쳐졌던 근대적 민족의식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는가를 간단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 하면 만주나 상해가 떠오를 정도로 독립운동은 국내 지하투쟁이나 비밀결사 활동을 제외한다면 주로 국외(해외)에서 전개되었다. 인도나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 있었던 것을 볼 때 우리의 독립운동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인도에서 간디나 네루의 민족(독립)운동을 용인했지만, 일제는 한국의 독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탄압하기만 했다. 뿐만아니라,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없었다. 그 점은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3 1운동이건 6 10만세운동이건 광주학생 운동이건 모두다 불법이었다. 아리랑 의 주인공으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산(본명 장지락)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은 3,4개의 국가를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선혈을 뿌리고 있다고 토로했지만, 독립운동은 만주, 산해관 안쪽의 중국, 연해주와 시베리아, 국내, 일본, 미주 14
22 등지에서 각각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간난신고가 컸고,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언제 어떠한 위해를 받을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인도 등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과 크게 다르다.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한국인은 독립군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서 1930년대까지 독립군이 있었던 지역은 아주 드물다. 지금까지 한국인이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일별했지만,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기 중에서도 가장 암담했던 시기가 3 1운동 이전의 암흑기로 불리는 1910년대였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자행했던 국내와 거의 절연되어 있었고 어떤 외부적 지원도 받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3 1운동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독립운동과 달리 1910년대에는 주목 할 만한 독립운동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1910년대에 한시도 쉬지 않고 무관 양성에 진력했던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에 있다. 근대적 민족의식도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에 대해 몹시 경계를 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확대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몇 종류의 애국가나 독립신문 등 언론의 논조를 볼 때 1900년 이전에도 근대적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 약하지만 있었다. 그렇지만 민족 이라는 용어가 슈미드의 연구에 따르면 1900년 이후에 등장했고, 특히 1907년을 전후해서부터 계몽운동과 관련해 많이 사용 되는 것을 보면 근대적 민족의식은 이 시기부터 신지식층 또는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식이나 민족주의는 대한매일신보와 단재 신채호에 의해 열렬히 고취되었다. 신채호는 한국인이 항상 애국 국가 민족 이란 말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독사신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을 지었고, 그것을 여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판도 만들었다. 그는 아( 我 ) 가 확립되지 못한 채 모방을 일삼는 외국 유학생, 세계주의자, 동양평 화론자, 문화론자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렇지만 민족의식은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해 현저히 위축되었다. 일제는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조차 해산시킬 정도로 결사를 극도로 제한했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다. 3 1운동 이전 한반도는 칠흑같은 암흑의 반동시기였다. 독립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었고, 민족의식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 15
23 않았다. 지사들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3 1운동 이전 1910년대에 민족의식 또는 민족정신이나 동포애, 애국심은 서간도와 북간도, 연해주에서 맥을 이어갔다. 1910년대에 만주지방은 근대적인 민족의식이 크게 위축되었던 국내와는 다르게 망명자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지만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북간도의 경우 서전서숙의 영향을 받은 명동학교 광성학교 창동학교 북일학교 등에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을 펼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어주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거처하는 곳 어디에서건 민족지사들로부터 민족정신을 배웠지만, 특히 학교 생활은 민족의식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침 조례시간에 애국가 제창이 끝나면 여준 교장이 양쪽 눈에 망국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훈화를 하였고, 혹한에도 교사들은 홑옷에 초모를 쓰고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군사교육시간은 군사시설이나 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도 정신교육을 많이 했다. 신채호는 애국심을 심어주는데 역사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신흥무관학교 역사교재로 사용된 대동역사 를 저술한 이상룡은 역사는 국가의 체통을 보존하고 국민의 정신을 격려하는 학문이라고 역설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나라도 없어지고 민족도 죽은 암담한 상황에서 독립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라를 다시 찾을 사상을 떨치게 하려면 민족의식을 제대로 갖게 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교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이뇨 를 부르며 민족적 사명감을 불태웠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학생들만 부른 것이 아니라 서간도 주민들도 아이들도 즐겨불렀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가, 용진가 와 같은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민족정신을 길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은 1.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 世 事 )를 잊었노라. 4.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5.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는 선열의 시범 다섯가지를 소리 높이 외치며 조국과 겨레에 대해 신명( 身 命 )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서간도에는 애국열, 동포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또 하나의 유력한 무기가 있었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관학교와 분교, 지교, 부민단-한족회에서 견인차이자 중추신경과 같은 활약을 하게 된 데는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편 미디어로서 신흥학우보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간된 신흥학우보는 서간도 주민들의 교육잡지로서 16
24 주민들과 신흥무관학교, 부민단-한족회 등의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했다. 서간도를 비롯해 만주에서는 민족적 상징도 발전시켰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는 우리 우리 배달나라 라는 말이 나오지만, 단군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존재였다. 신흥학우단의 선열의 시범 에 나오는 조국 이라는 용어는 근대적 국가 관념을 갖게 했다. 백두산은 만주에 사는 한국인에게 의미가 큰 상징이었다. 1914년 충천하는 투지를 조절 하기 위해 제2군영으로 세워진 군영의 이름이 백두산 서쪽이라는 뜻을 가진 백서농장 인 것도 상징적이다. 8월 29일 국치일에는 학생이건 어린아이건 노인네건 부녀자건 모두다 신흥무관학교에 모였다. 그들은 경술년 추팔월 29일은 / 조국의 운명이 다 한 날이니 / 가슴을 치고 통곡하여라 / 자유의 새 운( 運 )이 온다 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동포애를 다졌다.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도 신흥무관학교 운동장이 꽉 차게 모여 화려강산동( 東 )반도는 / 우리본국이요 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부르며 기념행사를 크게 가졌다. 신흥무관학교 학생이나 신흥학우단원, 망명자와 서간도 이주민들이 항상 민족의식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불현듯 절망 이라는 병이 엄습하곤 했다. 만리이역에서 절망이라는 요괴와 끝없이 싸움을 벌이는 것은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망명자 사회에는 쓸쓸함과 허전함, 끝없는 불안함, 애처러움과 서글픔이 고향에 대한 상념과 함께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근대사나 민족운동사, 독립운동사, 독립군전쟁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전서숙 창설 정신을 더욱 발전시켰고, 신흥 의 앞머리 글자인 신 은 신민회를 상징하는 뜻을 가지고 있듯 신민회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구체화된 것이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결의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대한제국 무관학교와 의병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점 에서도 민족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아관파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나라를 새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광무제(고종)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광무제는 특히 국방력의 중요성을 체험으로 뼈저리게 인식해 군제 개혁에 국력을 기울였던 바, 시위대 친위대를 연대 병력으로, 지방 주둔 진위대를 진위대대로 개편함과 동시에 1898년에는 제대로 된 무관학교를 통해 17
25 장교들을 육성시키고자 했다. 이때부터 일본이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이전인 1904년까지의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었던 이세영은 대한제국 장교였고, 교관이었던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양성환은 대한제국무관학교 졸업생이었다. 3 1운동 이후 가담한 신팔균은 1903년에 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속성과와 본과를 둔 것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이어받은 것이지만, 대한제국무관학교 교과목이었던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馬 學 ) 외국어 중 마학 등 당시 여건상 도저히 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는 신흥무관학교 무관 교육과정에 넣은 것도 신흥무관학교가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주지하는 대로, 의병의 항일전쟁은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될 때 대거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전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07년 8월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의병장 430명 중 군인 출신 의병장이 홍범도 연기우 민긍호 김규식 등 87명에 이른다. 이중 장교 출신이 18명인데, 영관급 장교 3명을 제외한 위관급 장교 15명이 무관학교 출신 장교로 생각할 수 있고, 하사관 또는 병졸 출신의 의병장들은 군대에서 위관급 장교의 통솔하에 있었으므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이 의병들의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나 교관, 생도들은 3 1운동 이후 독립군 활동,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1운동 후 신흥무관학교와 직접 관련 있는 군대로는 의용대와 교성대가 있다. 3 1운동 직후 부민단을 확대해 조직한 한족회와 쌍둥이단체로 탄생한 것이 군정부였다. 군정부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것을 옹호하였고, 명칭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서로군정서 산하에 있었던 독립군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많이 가담한 의용대이다. 의용대는 국내로 들어가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는 등 주로 유격활동을 벌였는데, 나중에 서로군정서 등이 통합하여 통의부를 조직할 때 그 기간병력이 되었다. 교성대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들로 구성되었는데, 교관 지청천이 이끌었고, 병력은 약 4백명 정도였다. 일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제거하기 위해 첫 번째 중요 조치로 중 일 합동수색대 를 1920년 5월에 서간도로 출동시키자 교성대는 백두산 아래 안도현으로 이동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생도들의 독립군 활동은 청산리전쟁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에 전세계 독립전쟁사에서 청산리전쟁과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찾아보기 힘든데, 일반적으로 18
26 청산리전쟁은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신흥무관학교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1919년 8월 이후 대한군정서가 만들어질 때, 대한군정서는 많은 것을 신흥무관학교쪽이나 서로군정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을 참모장으로 초빙했고,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 오상세 박영희 백종열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재를 공급받아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그뒤 신흥무관학교 교관, 졸업생들은 일선부대의 핵심직책을 맡아 청산리전쟁에서 싸웠 다. 이장녕이 참모장, 박영희가 사령부 부관 및 연성소 학도단장을, 이범석이 연성대장을 맡은 외에도 김훈 백종열 강화린 오상세 이운강이 종군장교와 소대장, 학도단 제2학도대 제3구대장과 제1중대장서리, 제4중대장, 소대장서리 등을 맡아 일본군과 싸웠고, 생도인 최해 신형섭 등 적지 않은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 청산리전쟁에서 일역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지청천이 이끈 교성대는 청산리전쟁의 또 한 명의 주역인 홍범도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 뒤 홍범도부대 약 6백명은 지청천의 교성대와 통합해서 활동하다가(총사령 홍범도,부사령 지청천), 밀산 부근에서 서일을 총재,김좌진 홍범도 조성환을 부총재로 해서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을 때,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지청천, 중대장 김창환 김경천 광선 등 군 지휘관 직책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나 졸업생이 맡았다. 독립군에서 신흥무관학교 생도와 관련자들이 활동한 사실은 이루 다 매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서로군정서 통군부 통의부 정의부 및 참의부 외에도,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고려혁명군 등 여러 독립군 단체에서활약했다. 특히 1940년 9월 17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군으로 광복군이 조직되었을 때, 지청천이 총사령관, 이범석이 참모장과 제2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학규가 제3지대장을 맡은 것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생도였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국방장관)이었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원으로 구성된 광복군 제1지대를 통할 지휘했다. 또한 1920년대에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義 伯 또는 단장 김원봉) 단원들도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에서 13명이 의열단을 결성했을 때, 김원봉 이종암 등 8명이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는데, 이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급진파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 활동, 혁명사업, 교육사업에 헌신하여 남북만주, 중국 관내, 19
27 시베리아 등지에 그들의 족적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자취는 1919년 2월경에 발표된 대한독립 선언서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김동삼 여준 이동녕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허혁 등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들이 8명이나 된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뀔 때 초대 국무령으로 모셔졌다. 이회영은 헤이그밀사사건에도 관여했지만, 3 1운동 직전 고종 망명을 기획했고, 아나키스트운동의 원로로 폭탄투척에 의한 철저항일과 상부상조에 의한 인류사회 건설에 매진했다. 이동녕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을 때 초대 의장이었고, 그뒤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국무령, 주석, 국무위원을 역임하면서 사거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시영 또한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재무총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임시정부의 증인이다. 김동삼은 1923년에 독립운동의 대방침을 정하고 독립운동 기구를 개편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으며(부의장 안창호, 윤해), 통의부 중앙집행위원장, 정의부 참모장,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촉진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윤기섭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었다. 님 웨일즈의 7 4아리랑 7 4의 주인공 김산으로 유명해진 장지락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로 혁명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은 해방 후에도 활동이 많았다. 이중 정부에 참여한 인물들만 꼽아보자.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으로, 독립운동가답게 이승만대통령의 독주를 비판하였고, 국민방위군사건이 일어나자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 윤기섭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을 지냈고(의장 김규식), 2대 국회의원이었다. 지(이)청천은 초대 무임소장관과 제헌 국회의원, 2대 국회의원이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었고, 자유당 창당 시 부당수였다. 신흥무관학교 초기 졸업생인 변영태는 1950년대에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민족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20
28 나.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위상 일제침탈기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제와 중국, 소련, 미국 등과 전쟁을 하게 될 때 대일전쟁( 對 日 戰 爭 )을 전개한다는 것이 독립전쟁론 이다. 이러한 독립운동 방략에 따라 추진된 사업이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독립운동기지는 이주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북만주를 비롯하여 연해주 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계획되었다. 이들 지역에 한인 교민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청년들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워 근대적 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기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간도지역이라 할 수 있다. 서간도지역에서는 유하현을 중심으로 교민 자치단체인 경학사-부민단-한족회가 결성되었고, 나아가 무장훈련 기관으로 신흥강습소-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설립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는1 설립 이후 1920년까지 통화현 합니하, 유하현 고산자 등을 옮겨 다니며 10여 년 동안 모두 3천 5백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의 독립운동 방략을 가장 온전하게 수행했으며, 가장 많은 성과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1. 신민회의 결성 1905년 을사늑약 이 강제 체결된 이후 한국민족은 이에 저항하는 국권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국권회복운동은 의병과 구국계몽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승패를 초월하여 일제에게 즉각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패전까지도 각오한 결사항쟁이었다. 반면 구국계몽운동은 장기간의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구국계몽운동의 기본전략은 먼저 국민을 애국주의와 신지식으로 교육, 계몽하고 청소년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간부로 양성하여 민족내부의 실력을 준비하고 양성하는 것이다. 또 한국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본제국주의가 더욱 팽창하여 중국, 러시아, 미국 등과 장차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이들과 함께 對 日 戰 爭 을 감행하여 우리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방략이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제가 패망하는 그 시기까지도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부대를 편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단체가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양기탁과 21
29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1907년 4월 창립되었다. 신민회를 창립한 세력들은 1) 대한매일신보 를 중심으로 한 집단, 의외로 이시영의 만주시기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못하다. 그의 평전조차도 박창화의 省 齋 小 傳 (1951년 간행), 이은우의 臨 時 政 府 와 李 始 榮 (범우사, 1997) 정도이다. 저술로는 중국인 황염배의 글을 반박한 박황염배지한국관( 駁 黃 7 炎 培 之 韓 史 觀 ) 정도만이 전해지고 있다. 상동교회와 그 부설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한 집단, 무관출신 집단, 평안도 일대의 상인 실업인 집단,미주에서 활동하던 공립협회 집단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집단의 인사들은 과거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로 서로 잘 알고 있던 사이였다. 처음 신민회의 창립을 준비한 것은 안창호와 미주의 공립협회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1907년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리버사이드에 모여 대한신민회취지서 와 대한신민회통용장정 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결사의 최종적 목적에 따라 이 단체는 한국 내에서 조직해야 한다는데 합의하고 안창호를 국내로 파견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고, 2개월여 후인 4월 20일경 마침내 신민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신민회의 창립회원은 각 단체의 대표자들로 결성되었는데 양기탁, 이동휘,전덕기,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명이 극비리에 회합하여 비밀결사로서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최초의 조직은 총감독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 전덕기, 그리고 조직부장 격인 집행원을 안창호가 담당하였다.13 신민회의 회원은 창립과 더불어 급속히 증가하여 400여 명에 달하였으며, 년경에는 800명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구국계몽운동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신민회의 비밀회원으로 가입했기 때문에 신민회는 창립되자마자 한말 구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는 가장 강력한 비밀결사가 되었다. 2.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신민회의 무장투쟁노선은 독립운동기지 건설로 실현되었다. 신민회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현대적 정규군과 같은 독립군을 창건하려고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 주요인물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동녕, 이회영, 이준, 김병헌, 김구, 김진호, 이용태 등이다. 상동파 및 상동청년학원의 실체는 기독교 단체임에는 틀림없으나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인사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한편 이때 중등교육과정을 수학하던 상동청년학원의 원장은 전덕기 목사, 학감은 이회영이 맡았다. 22
30 주요인물은 이동휘, 이갑, 유동열, 노백린, 조성환, 김희선 등이다. 주요인물은 이승훈, 안태국 등이다. 주요인물로 안창호, 이강, 정재관, 임준기, 김성무, 신달원 등이 있다. 신민회 창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또한 신민회 창립이 미주의 공립협회나 안창호 개인의 발의에 의해 창립되었다기 보다 국내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던 이상설 계열이나 상동교회파 인사들과의 결속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운동의 퇴조기에 들어가기 시작한 1909년 봄이다.16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독립군기지를 만들어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업이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가기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격살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이 일제의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인 1910년 2월 석방되었다. 신민회는 이렇게 국내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첫째 독립전쟁전략 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였고, 둘째 국외에 독립운동기지 와 그 핵심체로서 무관학교 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셋째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었던 간부들은 원칙적으로 국외에 망명하여 이 사업을 담당하기로 하고, 넷째 국내에 남는 간부들과 회원들은 이 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종래의 구국계몽운동을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우선 국외로 망명할 인사로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동휘, 이회영,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최석하 등을 선정하고, 이 사업을 국외에 널리 확대하기 위하여 각 지역을 분담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안창호와 이갑은 구미지역, 이동녕은 노령 연해주지역, 이동휘는 북간도, 이회영과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지역을 맡았다.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한 신민회 간부들 가운데 우선 안창호를 비롯하여 이갑, 유동열, 신채호, 김희선, 이종호, 김지간, 정영도 등이 1910년 4월 북경 등지로 망명하였고, 뒤이어 이동녕 등은 만주 노령일대를 답사하기 위해 출국하였다. 망명 간부들은 중국 청도에 모여 청도회의를 열고 만주 또는 노령지역에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건설하는 안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1910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조국이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국내에 남아있던 신민회 간부들은 일부 간부들의 망명 결정에 따라 처음에는 망명 간부들이 국외의 독립운동기지건설 사업을 담당하고 국내의 간부와 회원은 이들을 지원하면서 국내 사업을 계속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1910년 5월 기관지 역할을 하던 23
31 대한매일신보 가 일제측에 넘어가고, 국내에서의 운신이 어렵게 되자 나머지 간부들도 집단적으로 만주 서간도 지방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수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일제의 의병운동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더 이상 무장활동이 불가능하다는 한계점에 다다르게 된다. 먼저 1910년 9월 초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이관직 등이 백지장수로 가장하고 남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19 이들이 그해 11월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기지 선정을끝내고 돌아온 후 집단망명 계획은 급진전되었다. 1910년 12월 중순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제3차 신민회 간부회의에 양기탁을 비롯하여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구, 이동녕, 김도희 등이 참석하여 다음과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첫째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전국을 통치하니, 신민회에서도 서울에 비밀리에 都 督 府 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릴 것, 둘째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할 것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를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 셋째 이를 준비하기 위해 이동녕을 먼저 만주에 파송하여 토지 매수, 가옥 건축과 기타 일반을 위임할 것, 넷째 신민회 각도 대표를 선정하여 15일 이내에 황해도에서 김구가 15만원, 평남의 안태국이 15만원, 평북 이승훈이 15만원, 강원의 주진수가 10만원, 서울의 양기탁이 20만원을 모집하여 이동녕의 뒤를 이어 파송하기로 의결하였다.그러나 일제는 안명근사건 이 일어나자 1911년 1월 신민회 중앙 간부와 황해도 지회 회원들을 검거하고, 9월에는 105인사건 을 조작하여 신민회 국내 회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함으로서 이 계획은 중도에서 큰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다. 한편 신민회의 창립에 앞서 일찍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모색했던 인사들로 이상설을 중심으로한 이회영 형제, 이동녕, 여준, 장유순, 이관직 등이 있었다.21 이상설은 일찍이 1904년 6월 일본인이 요구하는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1905년 을사늑약 이 체결된 후에는 자택에 은거하면서 비밀리에 이회영, 이동녕, 유완무, 장유순, 이시영 등과 의논하여 국외망명과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계획하였다 년 4월 이상설은 이동녕을 동반하고 비밀리에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그곳에서 황달영, 정순만, 김우용, 홍창섭 등과 회집하여 함께 북간도지역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연길 용정촌에 들어가 서전서숙을 열었다. 서전서숙에서는 이상설이 숙장이 되었고 이동녕과 정순만이 학교의 운영을 맡았다. 교원의 월급부터 교재와 학생들의 일체 경비는 이상 설이 전부 부담했다. 24
32 황무지개척권이란 노일전쟁 이후 한국을 장차 그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한국을 식량공급지로 확립하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정부에서는 한국의 황무지를 일본인 개인의 명의로 경작, 목축 등의 개척권 및 경영권을 이양받은 이후 대규모로 이주시킨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를 경영케 하려고 하였다. 이상설은 반대 상소를 올려 황무지개척권을 일본에 넘기면 국민경제와 국가재정을 파탄에 몰아넣어 민족이 멸망하게까지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이상설은 서울을 떠날 때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저동에 있던 집을 팔았으며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에 모두 쏟았던 것이다. 서전서숙은 북간도 신교육의 요람 구실을 하였다. 교과목으로 역사, 지리는 물론 수학, 국제공법, 헌법등의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전서숙이 중점을 둔 과목은 무엇보다 반일민족교육이었기에 실제로는 독립군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서전서숙은 이듬해(1907) 9~10월경에 문을 닫게 된다. 그 해 4월 3일 경 이상설이 헤이그특사의 使 行 으로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후 서전서숙은 재정난과 통감부 간도출장소의 감시와 방해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서전서숙이 이처럼 1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었으나 항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서전서숙의 교육이 일반적인 신교육기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라는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후일 유하현 추가가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냈던 것도 이러한 서전서숙의 교육방향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설이 신민회의 창설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명확치 않다. 다만 이상설은 헤이그특사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고 1908년 2월 미국에 건너가서 활동한 적이 있다. 이때 미국에 1년간 머물면서 재미교포를 결속시켜 한인사회 통합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적극적인 조국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진작시킨 일이 있다. 그 방안은 근대산업을 진흥시키고, 국민교육에 힘써 신지식을 교육토록 하면서 민족의 군대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1909년 2월 미주에서 국민회를 결성한 후 이상설은 정재관을 대동하고 극동에서 독립운동사업을 추진하라는 중책을 맡고 미국을 떠났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한인지도자를 규합하여 새로운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였다.28 원동임야주식회사는 이러한 사정하에 만들어진 회사였다. 북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토지를 구입하고 한인을 집단 25
33 이주시켜 장차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것이었다. 그 첫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흥개호 주변의 밀산시 봉밀산 일대이다. 이상설은 성주출신의 유학자 이승희와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승희는 1909년 12월부터 이민단( 移 民 團 )과 함께 봉밀산 아래 독립운동기지로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이상설은 한흥동 뿐만 아니라 흥개호 주변 여러 곳에 이와 같은 한인들의 터전을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연해주 일대와 서북간도 각지를 한인들이 개척하여 정착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이상설의 한흥동 건설에 호응하여 국내에 있는 신민회에서도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곧 독립운동의 당면과제라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설이 신민회와 어떻게 밀접한 연계를 가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상설은 신민회 간부급 인물들과 오래전부터 절친한 동지였고, 신민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서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운동가들과 구국항일운동을 함께 벌였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구국활동을 통해 당시 관직에 있던 이상설, 민영환, 이시영 등이 후원내지 조정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미주에서 활동할 때도 신민회 결성과 관련된 인사들과 꾸준히 관계를 갖고 민족군대의 양성에 대해 함께 논의했던 것을 볼 수 있어 이상설이 어떠한 형태로든 신민회의 무장투쟁노선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깊은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3. 이시영 일가의 집단망명 1) 이시영의 환로( 宦 路 ) 이시영의 본관은 경주로 이조판서 이유승과 동래 정씨 사이의 다섯 째 아들이 된다.33 모친 또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따님이니 가히 명문가의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세칭 삼한갑족( 三 韓 甲 族 )이라고 할 만한 집안이었다. 마침 상신록 에는 이시영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의 환로가 요약되어 있는데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885년(고종 22) 사마시( 司 馬 試 )라는 초시에 합격했다. 이듬해 가주서( 假 注 書 )가 되고, 형조좌랑 홍문관 교리 승정원 부승지 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거쳤다. 1891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기념으로 치르던 과거인 증광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94년에는 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 內 7 醫 院 )과 상의원( 尙 7 衣 院 )의 부제조를 겸했고, 다시 참의 26
34 내무부사( 參 議 內 務 府 事 )와 궁내부 수석 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총리대신이며 장인이던 김홍집이 친로파에 의하여 살해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 뒤로는 중형인 이회영 이상설 등과 근대 학문 탐구에 몰두했다. 선생이 은거생활을 하고 있던 중 1905년(광무9) 외부 교섭국장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다시 사직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서북지역의 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년 중추원 칙임의관을 역임했다. 1908년 한성재판소장과 법부 민사국장을 거쳐 고등법원 판사를 맡기도 했다.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이시영은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명문가의 자제로서 순탄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외부 교섭국장으로 있던 이시영이 이토 히로부미가 획책한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의정부 참찬으로 있던 이상설과 함께 온 몸으로 막아섰으나 이를 지킬 수는 없었다. 이상설은 전 우의정 조병세를 소두( 疏 頭 )로 조약파기를 주장하는 연명 상소를 올렸고 조병세의 자결 후에는 민영환을 소두로 반대 상소를 올렸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이상설도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상소 같은 전통적 방식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으므로 이들은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설은 1906년 음력 4월 18일 양부 이용우의 제사를 지낸 후 이동녕과 함께 인천에서 비밀리에 출국했다. 이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 연길현 용정촌에 거처를 정하고 학교를 열었다. 바로 서전서숙이다. 서전서숙을 통한 인재양성은 망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이들의 새로운 운동방식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 역시 서전서숙과 같은 뜻에서 설립된 것이라 하겠다. 이시영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안창호의 연설에 영향을 받아 신교육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 집단 망명 신민회가 주도하여 시행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먼저 이시영 일가에서는 이시영 이회영 형제가 주도가 되어 집단망명이 계획되었다. 이를 위해 건영 석영 철영 호영 등 형제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회영은 우리 집안이 교목세신( 喬 木 世 臣 )으로서 대의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왜적 밑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27
35 도모할 수 없지 않는냐고 형제들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6형제가 모두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고, 1910년 12월 30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은 서간도시종기 에서 국경을 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여덟 시에 떠나서 오후 아홉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 씨 매부 이선구 씨가 마중 나와 준비된 처소로 간다. 이렇게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한 이시영 일가는 안동에서 며칠을 보내고 1911년 정월 9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횡도촌으로 떠났다. 영하 20~30도 아래로 떨어지는 추위 속 새벽 4시부터 북으로, 북으로 달려 횡도촌에 일시 머물다가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하였다. 삼원보는 현재 삼원포라고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후 삼원보 일대에는 국내로부터 망명한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삼원보를 중심으로 추가가 위당구 삼도구 사도구 대우구 대화사 남산 마록구 등지에 5리 혹은 10리, 20~30리 거리를 두고 여장을 풀고 나서 심산벽곡인 황무지를 빌어 개척사업에 주력하였다. 이시영 형제들의 뒤를 이어 집단망명을 택한 인물들이 안동지역의 혁신유림이었던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이다. 이상룡 역시 1910년 끝내 일제가 나라를 강탈하자 만주로 망명해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국내에서 일제 정책에 항의하거나 대한협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룡의 망명계획에 대해 그의 손부인 허은 여사는 구술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에서 의미심장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시영 씨 댁은 이참판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씨와 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국외 연락과 황제와의 밀통을 위해 관에 계속 있도록 동지들이 권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필자주) 등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이상룡의 망명이 이시영 형제 및 이동녕 등과 사전 계획된 것이었다는 증언이다. 서울의 28
36 이시영 일가와 안동의 이상룡 일가가 협의 끝에 계획적으로 집단망명을 했다는 것이다. 허은 여사 또한 1908년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이었던 왕산 허위의 집안 손녀이다. 친가와 시가가 모두 유명한 독립운동 가문인 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이다. 안동지역에서 만주로 망명을 결심한 인물은 이상룡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처남인 김대락도 마찬가지였다. 이상룡과 김대락은 망명에 동의하고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이시영 형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망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밀리에 논밭을 팔았다. 김대락의 경우 망명할 당시 나이가 이미 6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전토를 방매한 뒤 5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었다. 심지어는 만삭의 임부였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하고 망명의 길에 오른 것이다. 김대락 가족이 한 발 먼저 떠난 후 이상룡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난 것은 1911년 1월 5일이었다. 이시영 일가처럼 가족이 모두 떠나는 집단망명이었다. 1910년 국치 전후 지사들의 망명은 강렬한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뚜렷한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이었다. 이와 같은 선발 망명집단의 뒤를 이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국내 각지로부터 민족지사들의 망명은 계속되었다. 4. 신흥무관학교 1)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활동 신민회 간부와 회원들의 독립운동기지건설 방략에 따라 1910년 12월 하순부터 1911년 초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만주를 향해 떠났다. 서울에서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하여 안동지방의 혁신유림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과 주진수의 가족 등이 일단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횡도천을 경유, 유하현 삼원포로 집결했다. 이들은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이주민들과 함께 추가가를 중심으로 신한촌을 건설하였다. 1911년 4월 봄 교민 자치단체인 경학사 를 조직하고, 사관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 를 창설하였다.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처음부터 무관학교라고 하지 않고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토착민들의 의혹과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간도에 창건한 최초의 국외 독립운동기지가 되었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47 교감 김달, 학감 윤기섭, 교관 김창환, 이장녕, 이관직, 교사에 이갑수, 장도순, 이규룡 등이 취임하였다. 신흥강습소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국내에서 신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한 인물들이 많다.48 교관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29
37 따라서 신흥강습소에서 실시한 무관 교육 또한 육군무관학교의 체제를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1회 졸업생으로 김련, 변영태, 이규룡, 이극, 성주식, 강일수, 김석 등 40여 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11년 서간도 지역에 풍토병이 만연하고 가뭄과 이른 서리 등의 천재가 겹치면서 경학사는 해체되었다. 신흥강습소의 유지도 어려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신흥강습소를 떠나고 김창환, 윤기섭 등이 남아 학교 유지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1912년에는 여준, 이탁 등을 중심으로 신흥학교유지회가 조직되면서 어느 정도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경학사가 해체된 후에는 한인자치 기구로 공리회,51 부민회 등이 조직되었다. 부민회가 유하현 삼원포 합니하로 옮겨가자 신흥강습소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합니하는 외지고 험준한 지역에 있어 비밀리에 무관 양성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1913년 5월 新 校 舍 낙성식을 가지고 학교 명칭도 신흥중학으로 부르며 사실상 무관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합니하 신흥학교의 초대 교장에는 서전서숙과 오산학교 교사를 역임한 여준이 추대되었고, 교감에는 보성학교 출신으로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윤기섭, 학감에는 신흥강습소 출신의 이광조, 교사에는 이규봉, 서웅 그리고 중국어 담당의 關 華 國 등이 있었다. 군사교관으로는 무관학교 출신의 김창환을 비롯하여 신흥강습소 출신의 성준용, 이극 등이 있었다. 그리고 생도대장은 김창환, 생도반장은 원병상이 맡았다. 이후 교장은 홍주의병에 참여하고 육군무관학교를 수료한 이세영이 맡았으며, 교감은 이상룡, 재무감독에 이동녕 등이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신흥학교의 학제는 본과 이외에 속성과를 두어 장교(6개월)와 하사관(3개월)을 훈련시켰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은 강력한 항일전을 전개할 무장 독립군단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교민자치 기구인 부민단은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었고 신흥학교는 신흥무관학교가 되었다. 한족회는 軍 政 府 O의 역할을 담당하는 서로군정서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은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총장 이탁, 내무사장 곽문, 법무사장 김형식, 군사사장 양규열,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이 선임되었다. 3 1만세운동에 참가했던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내에서 탈출해 오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확장 이전하였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이청천과 김경천 등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왔다. 30
38 신흥무관학교는 고산자에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화현 합니하, 칠도구, 쾌대모자 등지에는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두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고등군사반의 교장에는 이세영, 부교장에는 양규열, 학감에는 윤기섭, 훈련감에는 김창환, 교성대장에는 지청천, 교관에는 오광선, 신팔균, 이범석, 김광서, 성준용, 원병상, 박장섭, 김성로, 계용보, 의무감 안사영 등이 활동하였다. 합니하의 초등군사반 교장은 이장녕, 학도대장은 성준용, 교관에 박두희, 오광선, 홍종락, 이범석, 홍종린 등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봄 창설되어 1920년 8월 일제의 공격으로 폐교할 때까지 약 3천5백 명의 졸업생을 길러 냈으며, 이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혁혁한 전과를 남겼다. 일제는 3 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을 토벌 하여야만 국내에서의 그들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중국 당국에 압력을 가하여 독립군에 대한 합동수사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5월부터 서간도지방에는 중일합동 수색대 라는 토벌대가 조직되어 대규모 검거행위를 시작하였다. 이때 신흥무관학교 내부에서도 일련의 사태가 일어났다. 즉 마적의 습격과 생도 납치를 비롯하여 윤치국 사건에 이은 일제의 만주독립군 토벌 등으로 신흥무관학교는 명목상 1920년 8월 폐교가 되었다. 일제의 토벌 로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 참모장 김동삼, 교성대장 이청천은 우리의 무장력을 보전하기 위해 피전책을 결정하였고 년 8월 대산림지대인 안도현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청천이 이끈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 400여 명은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과 신흥무관학교 교관인 김창환 오광선 손무영 김승빈 등과 함께 유하현을 출발하여 안도현으로 이동했다.56 무장이 없는 도수부대였던 교성대는 이곳에서 홍범도 부대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청산리대첩에도 참가하였다. 교성대는 이후에 북행하는 홍범도 부대, 김좌진 부대를 따라 밀산으로 들어갔다.노령으로 이동하던 각 부대가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 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군단의 요직을 맡았다. 한편 지청천의 인솔하에 북만으로 이동한 서로군정서의 일부 병력과는 달리 신흥무관학교 출신 신광재, 백광운 등의 인솔하에 남만지역으로 이동한 서로군정서의 나머지 병력은 진영을 정비하여 관전, 집안, 통화, 임강현 등지를 중심으로 무장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경신참변 이후 각지에서 준동하는 친일배와 일제 주구를 처단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31
39 2) 신흥학우단과 백서농장 이보다 앞서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이 결성되었다. 신흥학우단은 1913년 5월 6일 합니하 신흥강습소에서 창단되었다. 신흥학우단에서는 기관지인 신흥학우보 를 간행했다. 주필 겸 편집부장에는 신흥강습소 1회 졸업생인 강일수가 맡았고,그 외에 신흥학교 졸업생인 이동화, 장정근 등이 기 자로 활동했다. 신흥학우보 는 군사, 시사, 문예 등 다양한 기사를 실어 단원들에게 혁명이념의 선전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또한 신흥학우단에서는 농촌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교육을 담당하였다. 신흥학교 졸업생들은 독립군에 편성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지방에 파견되어 2년간 의무적으로 교편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재만한인 사회는 교사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지방 소학교에서는 신흥학교 졸업생을 교사로 선호하여 요청이 쇄도하였다. 졸업생들은 서간도 지역 뿐 아니라 장백, 화룡, 연길, 왕청, 훈춘 등 북간도 지역에 있는 학교에도 파견되었다. 신흥학교 졸업생들은 지방 소학교에 배치되어 학교운영과 지역계몽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간에는 아동교육을 실시하고 야간에는 지방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일단 유사시 병력 보충에 대비하였다. 한편 자치단체인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은 1914년 통화현 제8구 쏘배차( 小 北 岔 ) 심산유곡에 백서농장( 白 西 農 庄 ) 을 건설하였다. 신흥학교 졸업생 가운데 1회에서 4회가 주축이 되었고, 각분 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을 합하여 모두 385명이 모였다. 백서농장은 실제로는 독립군 군영( 軍 營 )이지만 내외의 이목을 고려해 농장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백서농장이라는 군영이 만들어진 것은 신흥학교 졸업생들의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해소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신흥학교 졸업생들은 무관교육을 마친 후 독립을 위해 즉각 싸울 것을 원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중 일전쟁 혹은 미 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을 구축하고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려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쏘배차 험산 유곡에 막사를 구축하고 1914년 가을부터 벌목을 시작하여 스스로 밭갈고 나무짐을 지는 간난고초를 겪으면서 1915년 초에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일대 군영을 형성했다. 백서농장은 장주에 김동삼, 훈독 양규열, 총무 김정제, 의무감 김환, 경리 김자순 등 부민단 계열 인 교직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었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었으며,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 등과 신흥강습소의 제1회 졸업생인 김석,강일수, 이근호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32
40 교사들이 지도부를 담당하였다. 그 외 농감 채찬, 교관 허식 김영윤 김동식 강보형, 교도대장 이근호, 1중대장 안상목, 2중대장 박상훈, 3중대장 김경달, 규율대장 신용관 등은 모두 신흥학교 졸업생으로 편성되었다. 5. 신흥무관학교와 이시영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박창화가 쓴 성재소전 에 보면 신흥학교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4244년(서기 1911년-필자주) 43세 신해년 봄에 선생(이시영-필자주)이 산보를 나섰다가 촌락 한 모퉁이에 허술한 건물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옥수수를 저장하였던 빈 창고였다. 이 창고를 빌어가지고 아동들을 교육하기 시작하며, 장정들은 훈련을 시키는데 이것이 곧 신흥무관학교의 창설이었다. 신흥학교 생도였던 원병상은 수기인 신흥무관학교 에서 초기에 이 지방 토착민들은 신흥강습소가 왜인의 앞잡이라는 의혹으로 배척이 심하여 그들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사( 校 舍 )를 구할 수 없어 토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거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처음 신흥학교 수업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한 것이며 학교의 창설에 이시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1913년 5월 신흥강습소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합니하로 옮기고 학교 명칭을 신흥중학 으로 개칭하였다. 이 때 이시영이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19년 유하현 고산자의 하동 대두자에 교사를 확장 신축하고 이해 5월 3일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 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도 이시영이 초대학장, 이천민이 교장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이보다 앞서 이회영과 이상룡의 동생인 이계동은 망명자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등을 위해 1911년 음력 7월 초 동삼성 총독을 만나러 심양에 갔다.그러나 동삼성 총독 조이풍과는 면접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서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는 이시영의 부친 이유승과 친교가 깊었고 이시영 형제들과도 世 交 가 있었다. 이회영의 협조 부탁에 원세개는 비서인 호명신을 딸려 보내 동삼성 총독을 만나게 했다. 원세개의 편지를 받아본 동삼성 총독은 이회영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부하 조세웅으로 하여금 이회영 일행을 동행하게 하여 회인 유하 통화 현장( 縣 長 )을 만나 원세개의 지시에 따르게 하였다. 호명신은 이동녕 이회영과 함께 합니하 강가를 돌아보고 그곳에 장차 학교를 세울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1913년 3월경 신흥무관학교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던 33
41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에게 국내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수원에 거주하는 맹보순으로부터 일본형사가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장유순 등을 체포하러 만주로 떠났으니 피신하라는 정보였다. 이들은 즉시 의논 끝에 행선지를 정했다. 이동녕은 이상설이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회영은 국내로, 이시영은 봉천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후 이 회영은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 활동하였고 이시영은 북경과 상해방면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동녕 이시영 등이 노령 봉천으로 떠난 후에는 윤기섭 김창환 등이 주민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하여 근근이 신흥학교를 유지했다. 신흥학교의 학생들은 수업료 등 학비를 내지 않았다. 학교 유지비와 학생들의 식사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하거나 마을 유지들이 부담했다. 학생들 가운데 집이 멀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여러 애국 유지들이 돌아가면서 숙식을 돌보아 주었다. 주로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집에서 많은 학생을 돌보았다. 이시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봉천으로, 북경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어려운 집안 살림은 아녀자들의 차지였다. 이시영의 부인 박씨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친동기간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가장( 家 長 )이 없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당시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의 회상을 살펴보자. 나는 모친과 다섯째 숙모 박씨(시영 숙부의 부인)하고 틈만 있으면 봄여름에 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어 동절준비를 하였다. 다섯째 숙모는 모친과 각별히 친근하고 숙부 시영께서 상해 북경에 가신 후로는 자연 모친과 한 집에서 살게 되니 더욱 친근하여 형제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무슨 전염병인지 몰라도 모친과 숙모가 다 같이 앓다가 모친은 고생 끝에 (병이) 낫고, 숙모는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다. 망국대부( 亡 國 大 夫 )의 부인이 남편을 따라 이국땅에서 독립을 위하여 고생하는 남 편과 무관학생, 그리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감당 못할 고생을 하다가 이국땅에서 원귀( 寃 鬼 )가 되고 말았으니 그 원통함이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 이시영의 부인 박씨는 큰 아들 이규봉의 정신병과 손자녀들의 죽음으로 큰 상심을 한데다가 전염병인 홍역에 걸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916년 음력 3월 사거하였다. 이규봉은 이시영의 큰 아들인데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하다가 신병으로 여러 달을 앓았다.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은 조석으로 수수밥만 먹다가 전염병이 돌 때 중병에 걸려 남매가 모두 사망하면서 후손이 끊어졌다. 후에 이규봉은 정신병에 걸려 만주에서는 치료할 수 없게 되자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국내로 들어갔다. 1910년 12월 하순부터 1911년 초에 걸쳐 이시영 6형제를 비롯한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 등과 안동지방의 혁신유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주진수의 가족 등이 一 團 이 되어 유하현 34
42 삼원포에 집결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1911년 봄 교민들의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관양성 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창설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 신흥무관학교 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여 년 동안 3,500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했으며 이들이 우리나라 독립 무장투쟁의 根 幹 이 되었다.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한 사실이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시영 이회영 형제를 비롯한 일가가 신흥무관학교에 직 간접적으로 깊이 개입했던 정황은 곳곳에 나타난다. 삼한갑족의 후손으로 높은 벼슬 버리고 6형제가 뜻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초기 밑거름은 이시영 형제들의 지도력과 재정적인 지원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동녕 여준 장유순 이장녕 이관직 등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한 인사들은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함께 신학문을 익혔거나 오랫동안 교분을 쌓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시영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동안이나 해방 후의 행적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이시영 선생이나 이동녕 선생한테는 지방 파벌 소릴 못 들었어요. 큰 그릇이죠. 민족정신이 뛰어났죠 참으로 깨끗했죠 라고 회고하고 있다. 또한 임시정부의 사료편찬소에서 일을 도왔던 우승규도 그의 회고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분이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이었다 먼저는 박은식 선생, 다음엔 이동녕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훈도를 받고서 내 구국정신과 항일의식이 자랐다. 그러기에 이 세 분을 일생 잊지 못하는 은사로 받드는 나다. 87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생을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하며 구국의 길을 걸은 이시영 선생의 행적은 아직도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독립투쟁의 행적 못지않게 앞으로 역사가로서 또한 교육자로서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의 연관성 省 齋 李 始 榮 (1869~1953)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주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45년 11월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 후에는 초대 부통령으로 35
43 정부수립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시영의 이러한 활동은 그를 모시던 인물이 간략하게 전기를 정리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 후 이시영의 활동을 다룬 연구가 있었고, 이시영이 1934년에 쓴 5 7 感 時 漫 語 5 7를 주제로 삼아 그의 민족의식을 분석한 박사학위논문이 발표되었다. 근래에는 이시영이 펼친 35년간의 독립운동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여 활동한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평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성과로 이시영의 삶과 활동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간과 위상을 고려한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시영 이재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서 수행한 활동과 역할을 일반적인 임시정부의 시기 구분에 따라 상해, 이동, 중경시기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상해시기 :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의 기틀 마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3 1운동의 직접적인 산물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3 1운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朝 鮮 이 獨 立 國 이며 朝 鮮 民 族 이 自 由 民 임을 세계만방에 선포 하였음으로 이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3 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사들이 중국 上 海 로 모였는데,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최고 기관을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이시영은 3 1운동이 일어났을 때 北 京 에 있었다. 마침 국내에서 활동하던 형 이회영이 북경에 도착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전하고 향후 운동 방침을 논의하였다. 이시영은 하나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효과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이회영은 어떤 인물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은 한 인물을 신격화 우상화하여 결국은 내분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방법으로는 부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두 형제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지만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지도자들이상해에 모여 3 1운동 이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으므로 이시영도 여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시영이 상해로 가게 된 데는 현순의 안내가 있었다. 현순은 국내에서 3 1운동을 준비하던 과정에동참했다가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대표들의 뜻에 따라 상해로 파견된 인물로 상해 프랑스 조계에 독립임시사무실을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3월 초 현순은 북경으로 떠나 3 1운동 선전활동을 전개하다가 3월 하순에 상해로 돌아왔는데, 이때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함께 했다. 이시영을 비롯하여 북경과 노령 등지에서 온 36
44 이동녕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조영진 조소앙 등 30여명이 3월 하순 경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후일에 다수의 정부가 생길까 염려되어 논의를 중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의 역사는 활동한 지역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한다. 1919년부터 1932년까지를 상해시기, 1932년 윤봉길의거로 상해를 떠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시수도인 重 慶 에 정착하는 1940년까지를 이동시기, 그리고 1940년부터 1945 년까지를 중경시기 라고 한다. 1919년 4월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수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4월 초 독립임시사무소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논의를 거쳐 임시의회 를 열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4월 1일 밤 회의를 열고 정부 수립 절차를 진행하였다. 이시영도 이 회의에 참여하였는데, 이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 29명이었다.10 4월 10일 회의에서는 우선 회의의 명칭을 臨 時 議 政 院 이라고 정했다. 이날 성립한 임시의정원은 한국사에서 최초로 결성된 의회 조직체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입법기관으로 임시의정원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4월 11일 아침 10시까지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결정했다. 우선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 으로 하였다. 10년 전에 일제에게 빼앗긴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 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民 國 이 탄생한 것이다. 민국이라는 국호의 제정은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이루었음을 뜻한다. 다음으로 정부 조직 구성과 정부 내각 구성원을 선출하였다. 국무총리 이승만을 수반으로 삼으면서 내무 외무 재무 교통 군무 법무의 6부를 두었는데, 이시영은 이 회의에서 법무총장에 뽑혔다. 법무총장 후보로 이시영 남형우 조소앙이 천거되었는데, 투표 결과 이시영이 당선된 것이다. 1908년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한 이시영의 경력을 고려한 것 으로 보인다. 이어 총장을 보좌하기 위한 차장 선출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무총리 : 이승만 내무총장 : 안창호, 차장 : 신익희 외무총장 : 김규식, 차장 : 현순 교통총장 : 문창범, 차장 : 선우혁 37
45 재무총장 : 최재형, 차장 : 이춘숙 군무총장 : 이동휘, 차장 : 조성환 법무총장 : 이시영, 차장 : 남형우 그러나 각부의 대표인 총장 가운데 법무총장 이시영만 상해에 있었고, 나머지 인사들은 미주와 노령 등지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법무총장 이시영 한 사람과 젊은 차장들이 실제 업무를 처리하는데 무리가 따랐다. 그리하여 4월 22일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차장제를 위원제로 바꾸었다. 위원제는 국무원과 6개부에 각각 위원을 두는 집단운영체제로 위원수는 모두 49명이었다. 이시영이 총장인 법무부는 민사 형사 및 감옥에 관한 사무 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임시정부의 특성상 법무부가 처리해야 할 업무의 양이 많지 않았지만, 초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데 총장으로서 이시영 이 받은 책임감은 막중하였을 것이다. 이시영은 법무총장을 맡다가 임시정부가 출범한지 한 달도 못된 5월 10일 사직하였다.14 사직 이유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지만, 일제 정보 보고에 의하면 3 1운동 이후 상해에 온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인사들이 기호지방 출신인 이시영과 이동녕의 지도를 따르지 않고 안창호의 상해 부임을 재촉하였다고 한다.15 미국에서 활동하던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이었다. 이시영은 출신 지역에 따른 내분으로 정부 운영이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안창호가 부임하기 전 상해를 떠난것으로 보인다.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임시정부는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민족을 대표하여 국내외 3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정부가 그것이었다. 세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모두 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구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통합을 위한 기득권 포기와 희생이 필요했다.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은 노령과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사이에서 일어났고, 통합에 따른 절차와 작업은 상해의 임시의정원에서 이루어졌다. 통합 정부는 한성정부의 제도와 각원을 그대로 따르되, 다만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 라는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제6회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9월 6일 통과되었다.16 이어 9월 8일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고 9월 11일 통합정부의 조직을 아래와 같이 공포하였다. 대 통 령 : 이승만 38
46 국무총리 : 이동휘 내무총장 : 이동녕, 외무총장 : 박용만,군무총장 : 노백린 재무총장 : 이시영, 법무총장 : 신규식,학무총장 : 김규식 교통총장 : 문창범, 노동국총판 : 안창호 세 정부의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통합정부 는 곧바로 출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지 않았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상해에 왔지만 취임을 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국총판 안창호 외에 각부 총장들도 상해를 떠나 있어 취임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시영도 이때 이동녕과 함께 북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통합정부가 출범하는 데는 두 달이 걸렸다. 통합정부의 출범이 지연되자, 안창호는 신익희를 항주로 보내 신규식을 청해 오고, 북경으로는 현순을 파견하여 이동녕과 이시영을 모셔 오게 하였다. 각부 총장들이 상해로 집결하면서, 국무총리가 취임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1월 3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하여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국총판 안창호가 참여한 가운데 취임식을 거행하였다.18 이로써 9월 11일 수립이 선포된 지 50여일만인 11월 3일에야 통합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통합정부의 출범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만 9년 만에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노령 상해 국내의 세 곳에서 각각의 기반을 갖고 수립된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을 이루면서,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총 결집한 것이기도 하였다. 통합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취임한 이시영은 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수행을 위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기 전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재정 수입은 개인의 의연금에 의존하는 부정기적인 애국금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징수하는 인구세였다. 이와는 별도로 미국에서 이승만이 공채를 발행하고 있었다. 통합 정부가 수립된 뒤 재정의 근본 재원으로 독립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국채통칙, 독립공채발행조례, 임시공채관리국관제 등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면서 미주 재정을 관장하고 있던 이승만과 마찰이 생겼다. 임시정부는 재무총장이 공채 발행을 주관할 것이며, 주미재무관을 설치하여 재정을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이승만에게 공채발행을 중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채발행을 폐지하기 곤란하다고 하면서 임시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미주 에서 거두어들인 자금은 임시정부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상해 임시정부와 미주의 이승만 모두에게 쉽사리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미주의 재정 관할권 문제는 39
47 재무총장 이시영이 나서 해결하였다. 이시영은 이동녕과 함께 각원들은 설득하여 1920년 3월 공채 발행을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 위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19 하지만 미주 재정권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면서 임시정부의 미주에 대한 재정 의존도는 높아갔고, 미주에서 자금 송금을 줄이면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침체에 빠졌다.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하던 聯 通 制 와 交 通 局 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인물과 자금이 끊어지고, 미주 동포들의 지원도 구미위원부가 장악하면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시영은 국무회의에서 재정형편의 어려움을 호소하였지만,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공채 판 돈 좀 보내라 고 하면서 면박을 주었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정치적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미주 재정권을 이승만이 독점하면서 갈등은 깊어졌다. 정부의 재정을 책임진 이시영이 중간에서 겪었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승만이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시영은 대통령이 임지에 부임하면서 임시정부가 정상화되고, 독립운동이 진전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상해에서 집무하는 동안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국무회의에서 의견 충돌로 국무총리 이동휘가 1921년 1월 24일 사임하였다. 이시영은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습하기 위해 안창호를 찾아가 국무총리를 맡아줄 것을 권했다. 이에 안창호는 평소에 기호 출신 인사들이 지방열의 화신 으로 자신을 폄하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과 정부안에서 개혁이 더 이상 불가함을 들어 총리 권유를 거절하고,노동국 총판직도 사임하였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도 상해에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외교상의 긴급과 재정상의 절박 을 이유로 법무총장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이시영은 이동녕과 함께 신규식을 도와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이승만은 상해를 떠나면서 자신은 태평양회의에 노력을 집중할 것이며, 신규식이 임시정부를 맡아 이를 적극 지원하라고 주문하였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의 주도하에 영국 프랑스 이태리 일본 등이 참가하여 해군군비축소와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질 전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정국에서 이시영은 내무총장 이동녕과 함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을 도와 태평양회의 준비에 진력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은 채 1922년 2월 6일 막을 내렸다.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그 파장도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외교 실패의 책임을 40
48 지고 신규식 국무총리 대리가 사직한데 이어, 군무총장 노백린을 제외한 모든 각원이 사직하였다. 이시영도 책임을 지고 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24 이로써 임시정부는 1922년 3월 이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로 주춤하였던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다시 추진되었고,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이 임시의정원에서 제기되면서 임시정부는 더욱 침체되었다. 한동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던 임시정부는 1922년 8월에 노백린을 국무총리로 하고 각부 총장을 선임하였다. 하지만 재무총장 이시영과 외무총장 조소앙 외에는 아무도 취임하지 않았다. 태평양회의 개최로 주춤했던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당시 독립운동계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각 지역과 단체 대표들이 집결하여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모임이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한 세력은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개조파 창조파 정 부유지파로 나뉘었다. 개조파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것이고,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시영은 3 1운동의 결과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인 임시정부를 폐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6월까지 계속되었지만, 임시정부 존폐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동안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임시정부는 재정이 어려워 정부 청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청사 임대료 체납으로 집주인으로부터 퇴거를 당하여 1923년 8월 이시영의 집 방 1칸을 빌려 사용하였다. 재무총장이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내어줄 정도로 정부 살림이 궁핍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인데도 이승만은 해를 넘긴 1924년 3월 29일 이시영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유지 방침을 지시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상해에 더 믿는 이도 없고 또 구하지도 아니하며, 다만 이시영 김구 조소앙 노백린으로 시국 정돈 될 때까지 함께 지켜오자는 것뿐 이라고 하면서,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추천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이동녕내각 이성립 되었다. 이동녕내각에서도 이시영은 재무총장을 맡았다.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의 지원이 없으면 정부 청사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파 로 비난받은 인물의 자금까지 끌어 쓰려다 이동녕내각이 물러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閔 ル 廷 植 사건 으로 상당한 자금을 가지고 민정식이 상해로 오자 임시정부에서 보호하였다가 그의 자금을 사용하려 했는데, 1924년 12월 10일 프랑스영사관의 협조를 얻은 일제 경찰에게 민정식이 연행되고 만 것이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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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및 대도시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 고교를 설립하여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겠습니다.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등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고교를 설립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기숙사비는 학생의 가정형편을 반영한 맞춤형 장학금으로 지원하여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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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More information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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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산업훈장 포장 국무총리표창 삼성토탈주식회사 09 SK하이닉스(주) 93 (주)이건창호 15 한국전자통신연구원 100 현대중공업(주) 20 KT 106 두산중공업 주식회사 24 (사)전국주부교실 대구지사부 111 한국전력공사 30 (주)부-스타 36 [단체] (주)터보맥스 115 [단체] 강원도청 119 [단체] 현대오일뱅크(주) 124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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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역사와 체험의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국립경찰박물관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박물관은 역사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환영 환송의 장 등 다섯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어 경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찰의 업무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찰의
More information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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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통권2호 2 CONTENTS Korea Oceanographic & Hydrographic Association 2010. 7 2010년 한마음 워크숍 개최 원장님께서 손수 명찰을 달아주시면서 직원들과 더욱 친숙하게~~ 워크숍 시작! 친근하고 정감있는 말씀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격려하여 주시는 원장님... 제12차 SNPWG 회의에 참석 _ 전자항해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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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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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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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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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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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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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 송재룡 / 편집장 : 박혜영 / 편집부장 : 송영은 경희대학교 대학원보사 1986년 2월 3일 창간 02447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전화(02)961-0139 팩스(02)966-0902 2016. 09. 01(목요일) vol. 216 www.khugnews.co.kr The Graduate School News 인터뷰 안창모 경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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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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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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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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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 527 528 529 530 531 532 332 333 332 사갑 제례 음식준비 334 335 333 진설 334 사갑제례 335 음복 8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제사에 참여했던 가족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고인의 부인은 제사에 참여한 이 들에게 제사 음식과 반찬거리(깻잎 등)를 골고루 싸 주었고 마을에 거주하는, 제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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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S tory 사진으로 보는 서울의 사회복지 1950년대 아동복지시설 연합 체육대회 (창경원) 3 1950년 삼성농아원 초창기 구화교육 (이진주 선생) 1928년 용정부녀자합동급식소 (명진보육원 전신) 1920년대 초기 태화유치원 교육 1930년대 무산아동운동장 (태화여자관 전경) 1936년 경성양로원 (1927년 설립, 1954년 현재의 청운양로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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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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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읽는 우리 과학 교사용 지도서 자연 6-1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Ⅱ) STS 프로그램이 중학생 과학에 관련된 태도에 미치는 효과 관찰 분류 측정훈련이 초등학생의 과학 탐구 능력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 국민학교 아동의 과학 탐구능력과 태도 향상을 위한 실 험자료의 적용 과학사 신론 중 고등학생의 과학에 대한 태도 연구 과학사를 이용한 수업이 중학생의 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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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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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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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활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전도한 인원수를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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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요 약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 동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정책은 기존의 정책 방향과 내용을 유지 변화시키면서 정책을 계승 완료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 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과 조직,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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