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The homogeneity of construction techniques within Silla and Balhae that analyzed by the excavation reports 이병건 * 目次 Ⅰ. 머리말 Ⅱ. 신라와발해의상호관계 Ⅲ. 건축기술동질성관련기존연구결과 Ⅳ.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건축기술동질성분석 Ⅴ. 맺음말 < 국문초록 > 본연구는지금까지취해왔던접근방식이특정주변국가 ( 민족 ) 와의관계에만몰입되어발해건축의정체성을올바로설정하지못할수있음을밝히고자했다. 이에공식적인왕래가별로없었던신라와의건축방면동질성을주제로몇가지단서들을제시하였다. 글은우선발해와신라의대외관계를고찰해보았고, 이어발해와신라의건축기술동질성을밝힌기존연구성과를정리하고이에대한평가를했으며, 마지막으로새롭게발견한양국간동질성이있을것으로판단되는건축요소로돌못과합각선을제시하였다. 첫째, 발해상경성제2궁전지에서돌못을사용한것을근거로이와동질적으로볼수있는증거를신라땅경주에서찾아냈다. 남산신성중창터축대, 감은사지남문밖축대, 불국사대웅전영역축대, 월정교문루밑축대, 일정교문루터에서도돌못이사용되었음을확인하였다. 다만돌못을발해는수직으로사용한반면, 신라는수평으로사용한것이다른점이었다. 둘째, 발해상경성제2궁전지본채옆서액문지바닥퇴박석모서리판석과훈춘팔련성제1호건물지바닥지대석에서모서리를날렵하게보이기위해사용했던합각선을사용한것을근거로이와동질적으로볼수있는증거를마찬가지로경주에서찾아냈다. 창림사지건물터바닥귀틀석, 사천왕사단석지방형주춧돌, 불국사청운 백운교난간모서리갑석에서도합각선이사용되었음을확인하였다. 발해를바라보는입장은당시그주변국이었던당과그리고발해를탄생시킨고구려와의상관성에만몰입되어국경을맞대고있었던신라와의동질성은무시된오류를범하였다. 지금부터라도이에대한새로운접근이진행되어야할것이다. 주제어 : 신라, 발해, 돌못, 합각선, 동질성 * 동원대학교실내건축과교수 :bglee@tw.ac.kr 이논문은 2015 년정부 ( 교육부 ) 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기초연구사업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2015R1D1A1A09060214>
180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Ⅰ. 머리말 중국은夫餘, 高句麗, 渤海, 遼, 金을비롯한만주지역역사를중국사에편입하기위해 東北工程 을진행한바있다. 또한한국고대사와관련된그지역의 文化主體 를보는시각이우리와는뚜렷하게차이가있다. 발해의건축문화도같은맥락에서상호이해되고있다. 중국은이미 13년전인 2004년集安과桓仁지역고구려유적을자신들의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하였다. 최근에는경제발전에힘입어발해도성과그주변유적에막대한인적, 물적자원을투입하여정비 관리중에있다. 이가운데黑龍江省寧安市上京城, 吉林省和龍市西古城, 吉林省琿春市八連城은발굴과정비가끝난상태이다. 근래에관련발굴보고서가모두출판되었다. 1) 그이후각도성유적은부분적인후속발굴이지금까지계속되고있다. 활용측면에서대대적인개발사업도진행되고있다. 2) 고구려유적은북한과중국이동시에세계유산으로등재하여공동의문화유산이되었다. 하지만발해유적이중국단독으로등재된다면, 발해는중국의역사와문화가될우려가농후하다. 이에대한철저한준비와대응이필요한시점이다. 渤海建築硏究태도는특정주변국가나민족과어떠한관련이있는지에초점이맞추어져있었다. 즉, 중원지역은당과의관계, 한반도지역은고구려와의관계이다. 발해는국가가성립된후唐과日本과는활발한교류를이루어나갔지만, 남쪽으로국경을맞대고있던統一新羅와는몇차례의공식적인왕래가있을뿐이렇다할외교관계는이루지못하였다. 이러한발해의공식적인국제관계에몰입되어대부분의기존연구는당이나고구려와의문화적교류나繼承關係에만역점을두어왔다. 물론발해는당시동북아시아의맹주였던당의都城制度를비롯한선진상층의건축문화를적극적으로수용하였다. 반면살림집과같은기층건축문화는당시그지역의토착세력이었던고구려와말갈의주거문화를그대로따랐다. 연구자도이와같은기존입장과시각에서당과고구려와의건축적관련성에역점을두고 1)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延邊朝鮮族自治州文化局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和龍市博物館編著, 西古城 -2000 2005 年度渤海國中京顯德府故址田野考古報告 -, 文物出版社, 2007;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編著, 渤海上京城 -1998 2007 年度考古發掘報告書 -, 文物出版社, 2009;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 琿春市文物管理所編著, 八連城 -2004 2009 年度渤海國東京故址田野考古報告 -, 文物出版社, 2014. 2) 화룡서고성의경우 2017 년 4 월부터 2020 년 10 월까지총 4.3 억원 ( 元, 위엔 ) 을투자하여 國家考古遺址公園 을조성하고있다. 규모는개발면적 2,310,000 m2, 건축면적 22,000 m2이며, 대상지역은화룡서고성과용두산고분군이다.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81 연구를진행해왔다. 그러던중최근발해도성이었던서고성, 상경성, 팔련성유적에서보아왔던건축기법과기술들이신라땅경주에서도눈에띰으로써신선한충격을받게되었다. 당시대립적인관계를유지하고공식적인관계가수립되지않았더라도건축기술은주변지역과여러방면에서자의든타의든교류하게되어있음을입증하는것이었다. 21세기남과북이대치관계로교류가희박한것같지만, 실제로는그끈이지금도이어져있다. 발해상경성내궁전건물기단부밖바닥퇴박석에는돌못 ( 중국명 : 散水釘 ) 이란건축부재가사용되었다. 이는추운겨울凍害로바닥臺石 ( 板石 ) 이솟아오르는현상을막기위해땅속깊이못을박아놓는건축기술의한방편이었을것이다. 이러한기법은경주남산창고터 ( 中倉址 ) 축대, 감포감은사지중문밖축대, 불국사본전紫霞門밑축대, 월성월정교문루밑축대, 일정교문루밑축대등에서도발견된다. 발해와신라에동질적건축기술이상호존재했었음을대변해주는사례라하겠다. 또한경주지역석탑에서세련미를더하기위해석탑옥개, 탑신, 기단모서리에사용되었던합각선 ( 合角線 추녀마루새김 ) 이상경성궁성바닥돌 ( 중국명 : 散水石 ) 과제1절터주춧돌에서보이고있다. 또한불국사자하문아래청운 백운교난간에서보였던隅棟이훈춘팔련성궁전터에도쓰였음을확인하였다. 이렇듯문화는자의든타의든자생적요소를바탕으로내재적발전을해나가는것이다. 동시에외래적요소의유입과내재적요소의유출을거듭하는가운데문화적변화와발전을이루어나가는것이다. 발해는여기에서머물지않고그후대의요와금나라에도도성을비롯한많은건축기술을전승시켜주었음이점차밝혀지고있다. 이에본연구에서는아직까지불과몇건에불과한발해와신라의건축기술방면동질성을다루고있지만, 앞으로좀더많은상호교류의단서들을찾아나감으로써발해건축의진정한정체성을설정해나가는마중물이되고자하는것이다. 글의전개순서는첫째, 신라와발해의상호관계를살펴보았다. 둘째, 신라와발해의건축방면동질성과관련된기존연구결과를정리해보았다. 발해와한반도지역의관계이니만큼북한에서수행된연구결과가대부분이다. 셋째, 발표자가발해와신라지역에서찾은상호동질적인건축기술요소들을제시하였다. 마지막맺음말에서는이를통해지금까지발해건축연구에있어새로운방향설정이필요함을제안하였다.
182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Ⅱ. 신라와발해의상호관계 발해가건국된즈음초기에는신라에도사신을파견하였음이崔致遠기록에전하고있다. 3) 大祚榮이신라의벼슬인大阿飡을제수받았던것이다. 당시신라가나당전쟁의앙금으로당과의국교가단절상태에있었다는점에서충분한가능성이있다. 고구려유민과말갈족이주축을이룬발해로서는당과함께고구려를멸망시켰던신라의동향을주시하지않을수없었다. 마찬가지로신라도나당전쟁이후평안했던북방에새롭게등장한 발해 라는세력을간과할수없었을것이다. 그러나신라입장에서발해의세력이한반도지역으로의南下와발해를견제해야하는당입장이부합하여발해와신라관계는나빠지게된다. 일본을내세워신라를견제한일, 발해가登州를공격한이듬해인 733년당과의협공작전으로발해를공격한일, 734년다시단독으로발해를공격하려고시도한일등등. 일련의양국관계로신라는결국 735년당이패강 ( 대동강 ) 이남영유권을인정하게끔하였다. 발해와신라의국경선이결정된셈이다. 이렇듯발해 당 신라는각각의이해에따라서로견제해나가는관계였음을알수있다. 羅唐聯合 에의해백제와고구려를멸망시키고삼국을통일했다고자부하는신라와고구려유민이말갈족을규합하여고구려를계승했다고자부하는발해는기본적으로대립적인요소를내포하고있었다. 양국간잠재적인대립의식은발해의세력남하로점차드러나기시작하였다. 급기야당의요청으로신라가발해를공격함으로써전면화되었다. 이에따라신라는발해를점차이질적인존재로인식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이러한인식은물론신라지배층인진골귀족들에국한한다. 건축을비롯한전반적인문화와경제적교류는충분히가능했을것이다. 이후양국간교류에도불구하고진골귀족들의발해에대한배타적인인식은발해멸망이후한국사가한반도에국한되어전개됨에따라한국중세사회에그대로계승되었다. 유득공의 南北國時代論 으로대표되는발해사에대한새로운인식이중세사회의해체기에야등장할수밖에없었던이유도여기에있었다. 4) 3) 東文選, 卷 33 表箋 謝不許北國居上表 4) 동북아역사재단편, 발해의역사와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07, 143 148 쪽내용을요약 정리하였다.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83 Ⅲ. 건축기술동질성관련기존연구결과 Ⅲ-1. 한국고대건축사부문에서남북한의시대구분견해차 한국건축에대한시대구분방법은크게 A 우리나라역대왕조를기준으로한구분방법과 B 고대 중세 근대로나누는三分法的구분방법으로나눌수있다. 5) 두방법은나름대 로장점과단점을가지고있다. 그러나어떠한시대구분방법을채용하든남한과북한의고 구려및발해건축에대한입장은큰차이를보이고있다. 남한에서는다음과같은견해이다. 삼국시기인고구려, 백제, 신라는상호교류를통하여 독자적인건축기술을정착시키게되었다. 백제와신라가고구려척도를사용한흔적이있다. 백제의장인아비지가황룡사구층목탑건립에참여한사실이있다. 이러한사실로삼국이교 류하였음을알수있다 6) 고하여건축기술적교류는동등한관계에서이루어졌다는입장이 다. 반면북한에서는남한의일반적인시대구분개념인 통일신라시대 를부정하고 7) 발해및 후기신라시대 라하여고구려 발해를중심으로하는시대구분방법을채택하고있다. 8) 즉, 고구려 발해 고려로이어지는한국역사의무게중심을북쪽으로맞추려는의도를취하고 있다. 북한에서는고구려및발해와관련된많은고고조사보고서와단행본이출판되었는데, 주장은일관되게남북분단후지금까지 北國重心論 에방점이찍혀있다. 삼국시대인세나라의관계를알수있는관련글들이몇개있다. 리정남의논문 삼국시 기수도형식에관한연구 를보면, 9) 먼저고구려, 백제, 신라의수도형식을유적현황과발전 과정에대한내용을먼저기술하였다. 마지막결론부에서는고구려가 위두나라도성에어 떠한영향을끼쳤는지 로글을맺고있다. 북한에서나온대부분의건축관련글들은위와같 은동일한전개순서를따르고있다. 이렇듯북한에서는북국인고구려의영향과중요성을 부각하고있다. 즉, 한반도남측보다는고구려를비롯한북측영향력을훨씬더중요하게생 각하고있음을알수있다. 다음으로북한의발해건축관련텍스트라고할수있는장상렬의글 발해건축의력사적위 5) 김동욱, 한국건축의역사, 技文堂, 1997, 11 15 쪽. 6) 대한건축학회, 한국건축통사, 기문당, 2014, 174 쪽. 7) 최근에출판된위의 한국건축통사 는삼국시대를 전기고대 로통일신라시대를 후기고대 - 남북국시대 로설정하여점차건축역사학계도변화되고있음을알수있다. 그러나아직까지는공론화되지못했다. 8)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조선전사 5 중세편발해및후기신라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9) 리정남, 삼국시기수도형식에관한연구, 고고학연구론문집 19, 사회과학출판사, 2011.
184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치 를살펴보겠다. 10) 글은두개의편과부록으로구성되어있는데제1편에서는발해건축유산에대한자료들을분류체계화하고공통점을찾으면서당시에크게발달한발해건축의모습을입증하려하였다. 제2편에서는당시주변다른나라건축과의대비를통해앞에서살펴본공통점들이발해건축의특성이된다는것을밝히고, 그역사적위치와관련한발해건축의몇가지특성을규정하였다. 그리고발해건축을고구려, 통일신라및고려건축과대비함으로써발해건축이우리나라민족건축유산에서차지하는역사적위치를밝혀발해가고구려를계승한나라임을논증하였다. 글의결론은건축방면에서발해는고구려를계승하였고, 이를고려에전승했다는것이다. 이러한맥락전개는모든건축관련단행본과논문들에서지금까지그대로이어져오고있다. 이렇듯북한은발해와고구려와의상관관계에만치우쳐있고, 백제 신라와의관계는등한시하고있음을알수있다. Ⅲ-2. 기존연구결과 본논문의주제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을다룬기존연구결과는발해와한반도 지역관계이니만큼북한의연구결과가대부분이다. 대표적인연구자가장상렬이다. 제시한 상호간의공통점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11) 1발해와통일신라는城市 ( 도시 ) 를계획하는원칙이동일했다. 통일신라도읍이었던경주를조사한자료에따르면, 里坊 을바둑판모양으로조직하였으며, 리방들사이에는큰것과작은것이하나씩건너엇바뀌어놓였고, 큰길을사이에두고 4개씩단위를이루어 田 모양으로묶여있었다. 당시동양의도시들은바둑판모양으로리방을조직하였으나, 이렇게 4개씩을단위로묶은것은드물었다. 이는우리나라에서독특하게이루어진것으로서고구려평양성, 발해상경용천부등에서도볼수있으며, 이원칙은이후시기다른나라에도전해졌다. 2통일신라에서는발해와마찬가지로돌을많이썼고잘다루어건축물을튼튼하게하였다. 신라왕궁이었던경주월성성벽은돌과흙을섞어쌓은것이고, 그주변에있는명활산성, 선도산성, 남산신성 12) 등도모두돌로쌓은것이다. 10) 장상렬, 발해건축의력사적위치, 고고민속론문집 3, 사회과학출판사, 1971. 11) 본절의내용은다음부분을축약정리하였다. 장상렬, 발해건축의력사적위치, 고고민속론문집 3, 사회과학출판사, 1971, 162 164 쪽. 12) 본문에는 남산성 이라하였으나남산에는 南山土城 과 南山新城 의두곳이있다. 돌을주로사용하여쌓은것은남산신성이다. 따라서 남산신성 이라정정명명한다.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85 3무덤을쌓는방법도공통점을가지고있다. 통일신라의돌칸흙무덤과돌곽무덤은고구려나발해의돌칸흙무덤과구조상같은계열의것이고, 돌곽흙무덤도돌을기본으로썼다는점에서공통성이있다. 4발해와통일신라는돌로쌓은지하구조물축조에도공통적인수법을썼다. 당시돌로우물을쌓는풍습을발해에서보았는데이러한돌우물이경주를비롯한신라여러유적에서도확인된다. 이가운데우물마감테두리를팔각으로한것이발해상경성제2궁전터옆팔보유리정을그대로연상케한다. 발해돌우물은땅속에병모양의역학적인곡선을지어견고성을높인데특색이있다. 신라에서도첨성대와같이돌로역학적곡선을지은구조물을쌓았다. 통일신라에서는이러한기술에기초하여석굴암과같은커다란지하구조물까지만들게되었다. 다른나라에서는석굴을만들때바위를뚫거나자연동굴을이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그와다르게주로돌로구조물을쌓고그위에흙을덮는형식을취하였다. 이것은고도의역학적지식이요구되는석굴천장과같은구조물을다룰수있는기술적토대와경험이있어야만가능하다. 이것은신라와발해가기술발전수준에서도대등하였으며, 서로교류하고있었음을알려주는것이다. 5통일신라에서는집을지을때돌을많이썼는데그솜씨가발해와통하는점이많았다. 경주성동리전랑지나 13) 감은사지를보면주춧돌에기둥밑받치개 ( 주좌 ) 를둥글게새기고, 거기에벽선까지나타냈으며, 그밑에는주추자리돌 ( 적심 ) 을깔았는데이것은발해것과다를바없다. 뿐만아니라신라도성 14) 바닥돌겉면을두층으로하고, 모서리것은 모양으로다듬은것이나, 밑에놓인돌에홈이나구멍을내어그윗돌이밀려나지않게한수법에이르기까지발해와비슷하다. 6발해의상경돌등과 15) 신라의석탑특히불국사다보탑과는많은공통점을가지고있다. 상경돌등과불국사다보탑은모두동시대인 8세기중엽에만들어졌다. 전반적인균형을잘맞추면서동시에지붕요소들과곡선까지도섬세하게표현하였다. 받침대 ( 기단 ) 는모두두층으로하였는데, 이는석탑에서목탑모습이점차사라져가는과정을보여주는것이다. 다보탑에는팔각형요소들이많고거기에원형, 삼각형, 사각형등이결합되었다. 다보탑에서도하층기단한변너비가구도의기준크기 ( 기본모듈 ) 를이루고있다. 다보탑은바닥돌 ( 하층 13) 본문에는 경주석동리건축지 로서술되어있으나, 경주성동리전랑지 로명명된곳을지칭하는것같다. 14) 본문에는 토성 이라되어있는데문맥상 도성 인듯하다. 15) 발해상경성제 2 절터였던지금의興隆寺대웅전앞에있는석등이다.
186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기단 ) 의한쪽길이를한변으로하는정팔각형을그리면바닥돌 ( 하층기단 ) 부터그대응변까지거리가탑높이가되며, 지붕돌높이는바닥돌 ( 하층기단 ) 의한쪽길이를한변으로하는정사각형을그리면바닥돌 ( 하층기단 ) 부터그대응변까지거리가지붕돌이시작되는높이가되며, 이곳에서위로정삼각형을작도했을때그꼭짓점위치가지붕돌높이와맞먹는다. 그위는상륜부이다. 다보탑에서는위로올라가며요소들의크기를차츰줄여일정한체감을나타냈으며, 1층부분에서기둥으로둘러싼부분과그윗부분을적절이대조시켰다. 이상의모든것들이발해석등과매우유사하다. 7원과다각형을원활하게배합하여구조물을완성한예는석굴암에서도찾아볼수있다. 석굴암각요소들의생김새, 크기, 그들사이의거리는圖形들을유기적으로결합하여이루어놓은걸작이라할수있다. 8통일신라는발해와동일한크기의자 ( 척도 ) 를썼다. 553년에건축된황룡사는고구려와같은크기의자 ( 尺 ) 로지은것이다. 백제사람들이고구려자를받아쓴사실을고려한다면신라에서도고구려자를그대로썼을것이다. 황룡사는경주도시계획일원에소속되어몇개의리방을차지하며서있었다. 따라서경주도시계획에활용된자도고구려척도를기초로이루어졌음을알수있다. 이 자 는그대로통일신라로넘어가 682년에준공된감은사건설에도쓰였다. 9발해와통일신라는건축부재에서도공통점이많다. 발해에서독특하게발전한곱새기와가신라에서도나타나는것은주목할만한일이다. 또한경주천군리사지나기림사에서나온치미 16) 를보면몸체와깃그리고치레생김새가발해것과매우비슷하다. 10신라벽돌은방형벽돌, 장방형벽돌이주이며, 무늬는대부분연꽃무늬와넝쿨무늬로되어있다. 벽돌은전체적으로보아발해것과비슷하다. 이가운데서도방사형으로뻗친연꽃무늬를중앙에두고네모서리에넝쿨무늬를새긴벽돌은발해것과같은것이다. 통일신라에서는장방형벽돌을활용하여물도랑을만들었다. 그런데그수법또한발해와별로다를바없다. 이상장상렬이제시한발해와신라의건축방면공통점을보면都市計劃 (1), 石材의活用度 (2), 무덤築造方法 (3), 地上과地下의石造構造物造形技術과藝術性 (4 5 6 7), 同一한尺度 (8), 同類의建築部材 (9 10) 로분류할수있다. 쉽게수긍이가는부분도있지만, 건축기술의보편성을양지역만의특수성으로인식한아쉬움이남는다. 또한각사항별로명확 16) 본문에는 지림절터 로서술되어있으나경주기림사 ( 祇林寺 ) 에서출토된화강암재치미로판단된다.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87 하게입증할수있는근거자료를제시하지못한것도있다. 연구자가판단하는향후과제는첫째, 이미제시된공통성증거들이과연眞正性을가질수있는것들인지를하나하나밝혀나가야하며, 부족한사항에대한입증자료를찾아내어보완하거나다시규명해나가는작업이다. 둘째, 기존연구결과는 1970년대까지의발굴성과를기초로하고있다. 따라서그이후연구나발굴결과를토대로同質性을밝힐수있는새로운자료들이있는지를추적해나가는작업이다. 경주를비롯한신라유적은대한민국고고학분야역량강화로근래괄목할만한발굴성과가도출되었다. 발해유적도중국의경제발전에힘입어서고성, 상경성, 팔련성등많은유적이발굴되었고보고서도출간되었다. 따라서중국의발해건축관련보고서를深層分析대상으로삼아야한다. 80년대이후북한의발굴성과또한간과해서는안될것이다. 다음장에서는이러한일련의새로운동질적인요소를발굴보고서를통해탐구해보겠다. Ⅳ.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건축기술동질성분석 Ⅳ-1. 돌못 ( 심석 쐐깃돌 쐐기석 ) 흑룡강성영안시발해진에있는발해상경성은외성, 황성, 궁성으로이루어진三重城이다. 발해의역사 229년가운데 150여년을도읍으로했던만큼당시의건축기술이잘반영되어있었을것이다. 도성뒤편에자리한궁성내중궁에는정문인五鳳樓를통과하면제1궁전부터제5궁전까지회랑을갖춘 5개궁전건물이한줄로배열되어있었다. 궁전은높은기단위에조영되어있었다. 기단은상경성주변에서쉽게구할수있었던현무암으로마감되었다. 기단밖바닥은건물처마에서떨어지는빗물피해를막기위해바닥에판석 ( 板石 퇴박석 ) 이나벽돌 ( 塼 ) 을깔았는데, 중국발굴보고서에는이를 산수 ( 散水 ) 라하였다. 여기에散水가밖으로밀리거나위로솟아오르지못하도록그사이사이에수직으로 돌 ( 石 ) 이나 전 ( 塼 ) 을박아놓았는데이를 산수정 ( 散水釘 ) 이라하였다. 17) 散水와散水釘재료는돌 ( 현무암 ) 이대부분이지만, 제3궁전경우는벽돌로이를대신했다. 각건물에따라쓰인재료가달랐음을알수있다. 17) 散水 에대한적당한이름이없어중국명칭을그대로쓰고자한다.
188 高句麗渤海硏究 第58輯 (2017. 7) 散水 재료로 돌을 사용한 제2궁전터의 산수 조영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단 네 벽 아래 바닥에는 散水가 있는데, 그 높이는 土襯石과 대체로 같다. 토친석은 기단 마감 면석을 받쳐주는 역할로 판석 중 일부분만 밖으로 노출된다. 시설된 산수는 두 유형으 로 나눌 수 있다. 각 부분에 대한 명칭은 <그림 1>이 참고가 된다. ①제1유형:북벽 아래, 즉 궁전 뒤 중앙에 있는 踏道 서쪽에 있으며, 네 부분[⑴ ⑵ ⑶ ⑷]으 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마감벽(包壁) 아래에 있는 土襯石에 인접한 부분에 너비 0.3m의 현 무암으로 만든 ⑴판석(板石)을 평평하게 깔고, 그 바깥쪽에 너비 0.12m의 현무암으로 만든 ⑵산수아자(散水牙子)를 묻었다. 산수아자와 서로 맞물리는 부분에 현무암으로 만든 ⑶산수 정(散水釘)을 박아 고정시켰다. 산수정은 옆에서 보면 직각 사다리형태이다. 안쪽 면(건물 을 향하고 있는 방향)은 평평하고, 위에서 보면 반원형으로 생겼다. 산수정 바깥쪽으로는 너 비 0.2m의 현무암으로 만든 장방형 ⑷판석을 끼워 넣었다. 안쪽 면은 곡선 형태로 양쪽 모서 리를 잘라내어 散水釘 머리가 드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산수 너비는 판석+산수아자+ 판석=0.3+0.12+0.2=0.62m이고, 여기에 산수와 연결되어 있는 토친석 중 바깥쪽으로 드러난 부분 너비가 0.1m이므로 기단 포벽에서부터 0.72m가 전체 산수 너비가 되는 셈이다. <그림 1> 상경성 궁성 제2궁전 북벽 바닥에 깔린 제1유형 散水시설(2016년 4월 촬영)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89 2제2유형 : 제2궁전터散水가운데가장일반적인유형이다. 본채건물동 남 서쪽과궁전뒤중앙에있는답도동쪽부분에서모두이유형을확인할수있다. 제2유형은세부분 [⑴ ⑵ ⑶] 으로이루어져있다. 기단土襯石에인접한부분에너비 0.3m의현무암으로만든 ⑴판석 ( 板石 ) 을평평하게깔고, 그바깥쪽에너비 0.12m의현무암으로만든 ⑵산수아자 ( 散水牙子 ) 를묻었다. 산수아자와서로맞물리는부분에현무암으로만든 ⑶산수정 ( 散水釘 ) 을박아고정시켰다. 散水釘의머리는첫번째유형산수정보다크며, 무늬가있는것도있다. 이러한유형의산수너비는판석 + 산수아자 =0.3+0.12=0.42m이고, 여기에산수와연결되어있는토친석중바깥쪽으로드러난부분너비가 0.1m이므로기단포벽에서부터 0.52m가전체산수너비가되는셈이다. 제2유형산수는제1유형에서산수아자와산수정바깥쪽의장방형판석 ( 제1유형의 ⑷판석 ) 이없는경우이다. 비록제1유형처럼반듯한판석은보이지않으나, 궁전남동쪽에있는踏道동쪽의산수에서는확인된다. 광장에깐黃沙아래에서산수아자의바깥쪽을발견하였는데, 다듬지않은현무암판석을끼워넣었다. 크기가일정하지않으며, 자연상태그대로깔았다. 그너비는약 0.2m이다. 따라서두가지유형의산수는구조적으로서로같지만다듬은방식에차이점이있다. 아마제1유형산수는전체가밖으로드러난것이고, 제2유형산수는앞부분이가려졌기때문으로생각된다. 또한판석 ⑷의가공된상태로봐서두유형은 < 그림 2> 상경성제 2 궁전터출토바닥散水돌못 ( 자료 :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編著, 渤海上京城, 文物出版社, 2009, 218 쪽圖一五九 )
190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조영시기가달랐던것으로보인다. 18) 산수석을바닥에깔면서돌과돌사이가뜨는것을방지하기위해돌못을사용한것이다. 빗물로느슨해진땅바닥을잡고있기위한목적도있지만, 추운겨울동해 ( 凍害 ) 로바닥이치솟아오르는피해를줄이기위해서일것이다. 산수판석보다깊게박아놓을수있을만큼길다. 연구자가조사한바에의하면, 동북아시아도성가운데이렇듯돌못을사용한예는아직까지확인하지못했다. 1930년대 ( 일본발굴 ) 와 1960년대 ( 북한 중국발굴 ) 발굴보고서에는돌못에대한언급이없다. 19) 제2궁전터경우 1990년대중국이발굴하기전에는가장많이파괴되었던건물이었기때문일것이다. 상경성뿐아니라팔련성에서도돌못이사용된예가있다. 팔련성에서는돌못과벽돌못이동시에출토되었는데, 대부분산수아자밖에서바닥대석을고정하는역할을하였던것으로보인다. 돌못은제2호건물지主殿동서양측계단및제1호와제2호건물지사이의회랑계단터에서발견되었다. 20) 한편신라경주지역에도南山新城中倉址, 불국사대웅전영역축대, 月精橋양쪽남 북누각밑축대, 日精橋축대 ( 지금의경주박물관천변축대 ), 감은사지중문앞축대, 석굴암본존불위궁륭지붕등여러곳에서돌못이사용된경우를찾을수있다. 경주南山新城中倉址에는여러개의주춧돌과함께건물기단및축대일부가남아있다. 노출된축대면석중간중간에수평으로 2.1~2.2m(7.0~7.3 尺 ) 간격으로두툼한머리를가진돌못이박혀있다. 쐐기역할을하는석재이다. 돌못크기는가로 세로 두께가 0.69 0.72 0.36m(2.3 2.4 1.2 尺 ) 이다. 길이는약 1.5m 내외이다. 물론발해상경성제2궁전터에서보이는돌못 ( 散水釘 ) 과는성격이약간다르다. 상경성돌못은凍害로인한바닥들뜸이나건물기단이밖으로밀려나지않도록수직으로박은경우이지만, 남산신성중창지돌못은土壓으로축대가붕괴되는것을방지하기위해수평으로끼워넣은것이고길이도훨씬길다. 그러나못을사용하여밀림, 들뜸을방지하는효과는동일하다고볼수있다. 18)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編著, 渤海上京城 -1998 2007 年度考古發掘報告書 -, 文物出版社, 2009, 29 30 쪽. 19) 原田淑人, 東方考古學叢刊甲種第五冊 東京城 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 東亞考古學會, 1939;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동북지방의유적발굴보고 (1963~1965)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20)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 琿春市文物管理所編著, 八連城 -2004 2009 年度渤海國東京故址田野考古報告 -, 文物出版社, 2014, 132, 306 쪽.
발굴보고서로 탐구해 본 신라와 발해의 건축기술 동질성(이병건) 191 <그림 3> 경주 남산신성 창고지 중창터 축대에 끼워있는 돌못 (자료 열화당 편집부, 경주남산의 불적 (영인본), 열화당, 1994, 圖版第一一) <그림 4> 경주 남산신성 中倉址 축대 돌못(2015년 4월 촬영) 경주 불국사 본전이 있는 극락전 구역 安養門 前面 가구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축대와 대웅 전 구역 紫霞門 前面 가구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축대에도 많은 돌못이 사용되었다. 돌못은 감잡이 역할을 하여 석재를 쌓는 중간 중간에 머리를 돌출시켰다. 목조의 보뺄목과 같은 구
192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 그림 5> 경주불국사본전구역아래가구식축대 (2015 년 5 월촬영 ) 조적인기능을가질뿐아니라, 외관에변화를가져오며, 간명하고장중한감을준다. 21) 고평 가되고있다. 남산신성이토사붕괴에중점을둔반면, 불국사축대돌못은가구식기단틀을 견고히하는동시에의장적효과를더한경우라하겠다. 돌못은감은사지중문밖축대에도사용되었다. 감은사는경상북도양북면이견대와대왕 암이있는동해바다에이르기직전산기슭에있다. 높은축대위에거대한삼층석탑이금당 앞좌우에서있으며, 그앞은동남으로대종천이흐른다. 금당터는비교적잘보존되어있 다. 특이한것은높은지대임에도주춧돌밑에지하공간을구성하였다. 장대석을마루식으로 덮은후, 그위에주춧돌과대석을놓아건물을조영하였다. 중문에진입하기위해서는높은 축대로난계단을올라가야한다. 평지가람과는달리미절개부분은산지의경사면이그대로 남아있기때문에항상산사태의위험성이도사리고있다. 이를보완하기위한방법으로절 개면에석축을쌓아경내부지를보호하고자했다. 가람四面모두에축대를쌓았는데동편 과남편석축은경내부지의유실방지를위해설치했던것으로판단된다. 22) 또한이지역이 바다와가까워침습우려로매우견고한축대가필요했던것으로도보인다. 여기에서도굵은 21) 윤장섭, 한국의건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210 211 쪽. 22)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1997, 138 쪽.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93 < 그림 6> 감은사지중문앞축대 (2016 년 3 월촬영 ) < 그림 7> 감은사지축대돌못실측도 (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 139 쪽 ) 머리를가진돌못을축대중간중간에끼워넣어토압에견디도록하였다. 불국사와마찬가지로중문을오르기전가람전체의의장적효과도의도된것으로판단된다. 축대는바른층쌓기로하여현재 8단에 2.53m 높이로남아있다. 원래는남아있는석축보다 1~2단이더높았던것으로보인다. 4단까지쌓고 5단과 8단에는머리에턱을만든돌못 ( 심석 ) 을 1.1~1.3m 간격으로배치하였다. 돌못은아랫단과윗단이서로엇갈려물리도록전면에 6개, 측면에 4개를배치하여장대석이돌못머리에걸려빠져나가지않도록견고하게
194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 그림 8> 월정교지출토돌못실측표 ( 단위 : mm )( 월정교, 125 쪽 ) 쌓았다. 돌못은 25 45cm의직사각형머리를가진길이 150cm크기로머리끝에서 10~15cm들어와서 10cm의턱을만들고, 뒤초리는다듬지않은상태로두었다. 23) 경주월성을드나들었던月精橋남과북橋臺밑축대에도돌못사용증거가명확하게드러나있다. 이곳돌못도남산신성, 불국사, 감은사지것과거의동일하다. 남과북측橋臺좌우날개벽석축에사용된석재로한단의턱을두어만든머리부분과긴꼬리부분으로되어있다. 이석재를높게쌓은축대에드문드문끼워넣어토압에의한석축붕괴를방지하려는이상적인조영방법으로보인다. 24) 月精橋뿐아니라경주박물관쪽에있는日精橋에도돌못이사용되었음이현유적에서확인되었다. 일정교돌못과같이가로가약간긴장방형마구리가석축면에서 18cm가량돌출되어있어구조적인동시에의장적인면도고려된것으로보고있다. 25) 이렇듯남산신성, 감은사지, 불국사, 월정교지, 일정교지등경주여러지역에서돌못이쓰였음을확인할수있었다. 단, 경주지역에사용된돌못은발해상경성경우처럼수직으로박은것이아니라, 수평으로끼워넣어빗물에의한토압으로축대가무너져내리는것을방지하였다. 또한축대를가구식으로구성하여틀을튼튼하게구축함과동시에밋밋한축대면에 23)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1997, 139 쪽. 24) 慶州古蹟發掘調査團, 月精橋 發掘調査報告書, 文化財硏究所, 1988, 124 쪽. 25) 三成建築士事務所, 月精橋址發掘調査및復元設計報告書, 慶州市, 1986.12, 113 114 쪽.
발굴보고서로 탐구해 본 신라와 발해의 건축기술 동질성(이병건) 195 <그림 9> 日精橋 동측 교대 쪽 석축 입단면도( 月精橋址, 134쪽) <그림 10> 日精橋 동측 교대 쪽 석축(2016년 3월 촬영) 변화를 주는 의장적인 효과를 동시에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발해와 신라는 돌못(散水釘) 을 사용한 건축기술 측면에서 同質性을 가지고 있지만, 못을 사용하는 방향이 수직이냐 수평 이냐가 달랐다.
196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Ⅳ-2. 합각선 우동 ( 合角線 隅棟 ) 합각선 이라함은석탑의옥개석 ( 지붕돌 ) 상면에서지붕과지붕이맞닿는선으로 우동 ( 隅棟 ) 이라고도한다. 26) 그런데이합각선이옥개석에만존재하는것이아니라석탑기단부지대석과갑석, 심지어탑신괴임대에도새겨져있는탑들이있다. 또한탑이아니라건물에서도바닥대석모서리나계단난간모서리甲石 ( 처마석 ) 부분에서도보인다. 합각선은돌을많이활용한한반도지역건축기술가운데하나임을확인할수있다. < 그림 11> 옥개석세부명칭도와이거사지삼층석탑일층옥개석 ( 경주남산傳염불사지 ) 제Ⅲ장 ( 건축기술동질성관련기존연구결과 ) 에서도언급된바와같이당시신라는돌다루는데있어매우세련된기술이내재되어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경주남산에남아있는석탑, 불상, 건물터의건축부재등지에서이를실견할수있다. 석조기술가운데방형의석탑조영에서기단이나옥개석을만들때사각형모서리를 90 직각이아닌예각으로처리하고, 두께를위치에따라달리하여모서리부분을좀더날렵하게보이고자했다. 여기에서끝나지않고모서리에 45 로선을새겨넣어정돈되어보이게造型美를보태었다. 이것도합각선 우동이라할수있다. 발해상경성에서합각선을확인한곳은궁성내제2궁전터구역이다. 제2궁전본채좌우로전방제1궁전과연결되는회랑이있는데, 그회랑양모서리에동 서액문 ( 東 西掖門 ) 이있다. 양액문가운데서액문은제2궁전기단서쪽에있다. 액문기단의동서길이 ( 散水가있는부분까지 ) 는 7.4m, 남북길이는 12.5m이며, 높이는 0.45m이다. 네벽을둘러싼돌은발견되지않았다. 액문주변에는散水가깔려있는데, 그주변에는돌못 ( 散水釘 ) 이박혀있다. 돌못안쪽으로는너비 0.12~0.15m에달하는散水牙子가깔려있는데, 돌못이두산수아자사이, 26) 박경식, 한국의석탑, 학연문화사, 2008, 522 쪽.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197 < 그림 12> 상경성제 2 궁전서액문평면도 ( 자료 : 上京城, 40 쪽 ) 즉이음매에자리했다. 산수아자안쪽으로는너비 0.3m에달하는바닥대석 ( 板石 ) 이깔려있다. 남쪽변의산수는파괴되었지만북쪽변의산수는보존상태가좋다. 27) 북쪽변산수석양모서리는정교하고아름답게조각되어있다. 모서리에놓이는귀틀석 ( 모서리용 ㄱ 형태의散水牙子 ) 안쪽바닥판석에합각선이표현되어있다. 오른편것은단순하게 45 합각선만새겨넣었다. 왼편것은선을밖으로가며점차턱을높게두어입체적으로보이게하였다. 합각선이그어진부분은도드라지게하였고, 그주변은낮은형태를이루어배수에도움이되게하였다. 본채가아닌액문에이러한고급의합각선을표현했다. 분 27)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編著, 渤海上京城 -1998 2007 年度考古發掘報告書 -, 文物出版社, 2009, 39 쪽.
198 高句麗渤海硏究 第58輯 (2017. 7) <그림 13> 상경성 제2궁전 서액문 발굴사진(북 남) (자료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 趙虹光 編著, 渤海上京城存眞, 科學出版社, 2014, 39쪽. <그림 14> 서액문 서편모서리 발굴정리후(왼쪽)와 복원후(오른쪽사진) 명 다른 중요건물에도 같은 건축기술이 베풀어져 있었을 것이다. 길림성 훈춘(琿春)에는 몇 년 동안 발해의 도읍 역할을 했던 팔련성 유적이 있다. 발굴보고 서에 따르면 제1호건물지 기단 모서리 부분에도 합각선이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합각선은 제1호건물지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 기단 면석 밑 地臺石에 표현되어 있다.28) 28)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 琿春市文物管理所 編著, 八連城 -2004 2009年 度渤海國東京故址田野考古報告-, 文物出版社, 2014, 圖版 一0 一一.
발굴보고서로 탐구해 본 신라와 발해의 건축기술 동질성(이병건) 199 상경성에서 본 합각선과도 다르게 크고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어 모서리를 강조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제1호건물지 모서리에서 이러한 합각선이 드러났다는 것은 합각선 표현이 발해에서는 격식 있고 고급 건물에 행해졌던 발해의 건축기술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림 15> 팔련성 제1호건물지 기단부( 八連城, 圖版 一一) <그림 16> 팔련성 제1호건물지 기단부 모서리 합각선(2014년 11 촬영)
200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두발해도성유적에서찾아낸합각선에대하여이와유사한모습이신라땅경주에서도보여흥미롭다. 연구자가찾은건물지에표현되어있는유적은경주남산창림사지건물터, 사천왕사단석터, 황룡사지옆건물기단부, 불국사대웅전영역청운교와백운교위와계단참아치교상부난간甲石 ( 처마석 ) 등에서이다. 우선昌林寺것에대해살펴보겠다. 창림사는 三國遺事 기록에의하면, 朴赫居世와閼英왕비가태어난후이곳에궁궐을지어 13년간살았다는기록이있다. 사찰이건립되기전어느시기에궁궐이 昌林寺 란절로변경되었는지는알수없다. 신라역사가운데매우이른시기부터건물이조영된곳이었음은틀림없는사실이다. 절전체지형은상 중 하모두 3단으로나누어진다. 제일서쪽인하단은남북 60m, 동서 26m 규모로추정된다. 현재목없이남쪽을향한雙龜趺와서쪽을향한장대석 3기, 주위에는주춧돌이여기저기흩어져있다. 중단은남북 52m, 동서 30m 규모로주춧돌과장대석이있다. 상단은복원된삼층석탑이있는곳이다. 이삼층석탑은 2015년 3월보물로지정되었다. 29) < 그림 17> 경주창림사지발굴현장의바닥대석합각선 (2015 년 3 월촬영 ) 29) 2014 년 7 월 30 일, 2015 년 3 월 9 일문화재청보도자료참조.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201 합각선이확인된곳은下段구역으로中段과의경계부근이다. 건물기단모서리에깔려있던장대석인데 45 로사선이그어져있어정제된완결미를표현해주고있다. 상경성제2궁전서액문모서리대석과다른점은합각선밖으로돌이잘려져있는것이아니라그위의마감면석이놓이는부분이턱을지어표현되어있다는것이다. 아무튼합각선의표현방법과형태는매우유사하다. 다음四天王寺는경상북도경주시낭산남동쪽에있는통일신라시대절터이다. 주변에경주선덕여왕릉 ( 사적제182호 ), 능지탑, 보문리사지, 전황복사지, 전신문왕릉등이있고 7번국도를사이에두고경주망덕사지 ( 사적제7호 ) 가있다. 현재사역에는동서방향으로주춧돌을남긴사방 3칸의탑지가있다. 그북쪽에주춧돌이남아있는金堂址가있어雙塔式가람배치였음을알수있다. 금당지북쪽에동서방향으로사방 3칸규모의작은건물기단이있다. 불교의식공간인일명壇席址로추정되고있다. 금당후방에동단석지와서단석지가동서로대칭하여배치되어있다. 각각 4방 3칸의방형주춧돌 ( 사방약 80cm ) 이높이약 60cm정도의토대위에다소교란되어있었다. 두지역에각각 12개의주춧돌이토대둘레에 자형태로배치되었다. 주춧돌상면중앙에는각기직경약 20cm의원형쐐기구멍이있다. 그주변에는약 50cm내외크기의이중주좌선 ( 돌기선 ) < 그림 18> 사천왕사동단석지방형주춧돌전경 (2017 년 2 월촬영 )
202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 그림 19> 경주사천왕사지서단석지평면 단면도 ( 자료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四天王寺 Ⅱ 回廊內廊발굴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4, 122 쪽. 이정방형으로쇠시리되어있다. 이는다시주좌네모서리부분에서경사각을이루면서방 형주춧돌네귀퉁이로연결됨으로써일종의합각선 ( 우동 ) 형태를나타내고있다. 그러니까 중앙의원형구멍주변정방형부분이높고, 그바깥으로는완만한경사를이루는합각선이 표현된특수한형태이다. 30) 한편팔련성제 1 호건물지바닥지대석에서처럼뚜렷하게합각선이보이는예를경주신라 유적에서도찾아볼수있다. 불국사대웅전영역청운 백운교위자하문밖난간甲石 ( 처마 석 ) 과청운교와백운교사이아치교상부난간甲石 ( 처마석 ) 이대표적이다. 白雲橋上段좌 우는각기세개의檐遮石위에긴板石形甲石을올려놓았다. 이러한경우는다보탑난간, 석굴암前室神將石上段에서도보이는통일신라시대의특이한의장기법가운데하나로알 30) 張忠植, 新羅四天王寺址壇席의考察, 佛敎學報 第 39 輯, 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院, 2002, 13 쪽.
발굴보고서로 탐구해 본 신라와 발해의 건축기술 동질성(이병건) 203 <그림 20> 불국사 청운 백운교 정면(2015년 5월 촬영) <그림 21> 불국사 대웅전 紫霞門 밖 난간 甲石(처마석)(2013년 12월 촬영)
204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려지고있다. 31) 또한대웅전영역中門인紫霞門에서그아래로계단을바라다보면계단참에해당되는난간모서리甲石을팔련성과같이뾰족하게모서리를입체화시켜다리자체를날렵하게보이려는효과를극대화했던것으로보인다. 이상에서와같이신라와발해는기존에연구된동질적인요소이외에여러부분에서공통점이찾아지고있다. 최근까지의발굴과연구성과에힘입어앞으로많은것들이찾아질것을기대해본다. Ⅴ. 맺음말 본글은지금까지취해왔던발해건축연구관점이특정주변국가 ( 민족 ) 와의관계에만몰입되어올바른정체성설정에한계가있음을밝히고, 이에공식적인왕래가별로없었던신라와의건축방면동질성을주제로몇가지단서들을제시하였다. 전개순서는우선발해와신라의대외관계를고찰해보았고, 이어발해와신라의건축기술동질성관련기존연구성과를정리하고이에대한평가를해보았다. 마지막으로연구자가생각하는양국간동질성이있을것으로판단되는건축요소를새롭게제시해보았다. 기존에연구성과에서제시된양지역간공통점은동일한리방제채택, 건축재료로석재를많이사용, 무덤구조의동질성, 돌축조기술과표현기법, 돌을활용한입체조형기법, 동일한척도 ( 尺 ) 사용, 건축부재의동질성등여러가지가제안되었다. 신라와발해의건축방면공통점을보면쉽게이해되어수긍이가는부분도있다. 그러나대부분건축기술적보편성을양국사이특수성으로인식한아쉬움이있다. 또한제시된것들을명확하게입증할수있는자료를제공하지못한한계가있음도알수있었다. 이에연구자는 돌못 과 합각선 을두지역사이동질적인건축요소로새롭게제시하였다. 첫째, 발해상경성제2궁전터에서돌못 ( 散水釘 ) 을사용한것을근거로이와동질적으로볼수있는증거를신라땅경주에서찾아냈다. 남산신성중창터축대, 감은사지남문밖축대, 불국사대웅전영역축대, 월정교문루밑축대, 일정교문루터등지에서도돌못이사용되었음을확인하였다. 다만, 발해는돌못을수직으로사용한반면신라는수평으로사용한것이 31) 三成建築士事務所, 月精橋址發掘調査및復元設計報告書, 慶州市, 1986.12, 140 쪽.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205 다른점이었다. 둘째, 발해상경성제2궁전서액문지바닥산수석 ( 퇴박석 ) 모서리板石과훈춘팔련성제1 호건물지바닥지대석에서모서리를날렵하게보이기위해사용했던합각선 ( 우동 ) 을사용한것을근거로이와동질적으로볼수있는증거를마찬가지로경주에서찾아냈다. 창림사지건물터바닥귀틀석, 사천왕사단석지방형주춧돌, 불국사청운 백운교난간모서리甲石 ( 처마석 ) 등지에서도합각선이사용되었음을확인하였다. 지금까지발해를바라보는입장은당시그주변국이었던당과그리고발해를탄생시킨고구려와의상관성에만몰입되어국경을맞대고있었던신라와의동질성은무시된오류를범하였다. 지금부터라도이러한선입견에서벗어나북국발해와남국신라사이의동등한문화비교가이루어져야할것이다. 더나아가그이후시대인고려뿐아니라요 ( 거란 ) 와금 ( 여진 ) 의건축까지도상호비교되어야진정한발해건축정체성설정에도움이될것이다. 논문투고일 : 2017. 05. 31. 심사완료일 : 2017. 07. 07. 게재확정일 : 2017. 07. 07.
206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 < 참고문헌 > 三成建築士事務所, 月精橋址發掘調査및復元設計報告書, 慶州市, 1986.12.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慶州市,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1997.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四天王寺 Ⅱ 回廊內廊발굴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4.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吉林大学边疆考古研究中心 珲春市文物管理所, 八连城, 文物出版社, 2014. 김동욱, 한국건축의역사, 技文堂, 1997. 대한건축학회, 한국건축통사, 기문당, 2014. 동북아역사재단편, 발해의역사와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07. 리정남, 삼국시기수도형식에관한연구, 고고학연구론문집19, 사회과학출판사, 2011. 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佛國寺復元工事報告書, 慶州市, 1976. 文化財硏究所 慶州古蹟發掘調査團, 月精橋發掘調査報告書, 文化財硏究所, 1988. 박경식, 한국의석탑, 학연문화사, 2008.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조선전사5 중세편발해및후기신라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열화당편집부, 경주남산의불적 ( 영인본 ), 열화당, 1994. 原田淑人, 東方考古學叢刊甲種第五冊 東京城 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 東亞考古學會, 1939. 윤장섭, 한국의건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장상렬, 발해건축의력사적위치, 고고민속론문집3, 사회과학출판사, 1971. 張忠植, 新羅四天王寺址壇席의考察, 佛敎學報 第 39 輯, 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院, 2002, 1.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동북지방의유적발굴보고 (1963~1965)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編著, 渤海上京城, 文物出版社, 2009. 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趙虹光編著, 渤海上京城存眞, 科學出版社, 2014.
발굴보고서로탐구해본신라와발해의건축기술동질성 ( 이병건 ) 207 <Abstract> The homogeneity of construction techniques within Silla and Balhae that analyzed by the excavation reports LEE Byeong-gun(Tongwon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aims to find out what was the homogeneity of construction techniques within Silla and Balhae in relation to architectural point of view. This study was progressed as the following. First, how was the interrelationship of Silla and Balhae each other at the political point. Second, what was the study results about architectural homogeneity. Until now most of results are due to North Korean. Third, It was proposed the new homogeneity facts between Silla and Balhae s architectural technique. The new ones are stone stud( 돌못, 石釘 ), grable line( 합각선, 合角線 ) Through the study, it was found out there are many common architectural point between Silla abd Balhae as well as special cultural ones as seen in many of its cultural relics. we should study interchange relation between Silla and Balhae now. The right way of studying the Balhae architecture is to understand culture and characteristics of relics objectively from the Balhae s point of view. The East Asian states tend to interpret their histories from self-centered perspectives. In conclusion, we need to consider history as shared heritage rather than a property of individual states. Keywords: Silla, Balhae, stone stud, grable line, homogeneity
208 高句麗渤海硏究第 58 輯 (201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