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인천역사 는인천의역사와문화에관심을갖는많은사람들에게보다쉽게접근할수있도록하기위해 1 년에 1 회씩발간하는 Re-View 誌형식의학술잡지이다. 2004 년 1 호 < 인천역사의재조명 >, 2005 년 2 호 < 인천문학의재조명 >, 2006 년 3 호 < 인천경제의재조명 >, 2007 년 4 호 < 인천민속의재발견 >, 2008 년 5 호 < 인천근대건축의재발견 >, 2009 년 6 호 < 인천지명의재발견 >, 2010 년 7 호 < 인천지리의재발견 > 에이어 2011 년 8 호 < 인천향토사의재조명 > 이라는주제로기존에많이알려진사실이외에도간과해버린과제들을발굴하고새로운의미를부여하여관심의폭을넓히고자간행하였다. 따라서기존의연구실적을종합 정리하여방향과문제점등을제시하고그해법을찾아보고자한것이다. 아울러지역학으로서인천사의비중과기존의인천연구에대한학계에서의인지도및인용도를측정하며, 선구지임에도불구하고수도권역사의종속적매체로기능하는근원도밝히고자하였다. 이렇게기존의연구업적에대한문제점을제기해봄으로써왜그런문제가발생하였는지, 현재의연구방법에는어떠한문제가있는지, 기존인천연구에추가되어야하고관심의초점을맞추어야할부분이무엇인지찾을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인천의역사와문화에대한연구열의증대와광범한자료수집이이루어지기위해서는어떤방법이필요하고현단계에서의우리의과제는무엇인지그에대한대안을살펴보는계기가될것이다. 2011. 12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목 차 선사시대의인천 3 ( 박성우, 인하대학교박물관선임연구원 )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29 ( 이희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학예연구사 )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61 ( 안홍민, 인하대학교한국학과박사과정 )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93 ( 이영태, 인하대동아시아한국학연구교수 )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15 ( 문상범, 제물포고등학교교사 )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41 ( 김현석, 인하대학교박물관학예연구사 )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61 ( 황은수, 인하대학교한국학과박사과정 )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89 ( 유창호, 인하대학교한국학과박사과정 )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 인천개항장을중심으로 - 219 ( 김상열,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유물보존과장 )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81 ( 김용하, 인천발전연구원선임연구위원 )
1. 선사시대의인천 1. 구석기시대 2. 신석기시대 3. 청동기시대 4. 철기시대 5. 인천지역선사문화의성격 박성우 ( 인하대학교박물관연구원 )
선사시대의인천 인천지역은 1) 천혜의식량자원의보고인바다와갯벌이드넓게펼쳐져있어선사시대부터사람들의활발한활동이이루어졌고, 그결과인천지역곳곳에수많은문화유적이남아있다. 그러나체계적인학술적인조사가이루어지기이전에많은유적이훼손되었고, 발견된다고하더라도파괴된상태로드러나는경우가많아자세한내용을파악하기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이후인천지역에서급속하게이루어진개발사업에따라문화재발굴도본격화되면서인천지역의역사를새로이재조명해볼수있는학술적자료들을축적할수있었다. 특히그동안인천지역선사시대문화에대해서는상대적으로알려진바가적었으나최근신석기, 청동기시대유적들이발굴되면서그성격을파악해볼수있는계기를마련하였다. 이글에서는 2000년대이후발굴조사된유적을중심으로구석기시대에서철기시대의인천의모습을살펴보도록하겠다. 1. 구석기시대 그동안인천지역에서는영종도삼목도II 유적에서구석기시대고토양층과석영제석핵과긁개가수습되었으며 2), 강화도하점 1) 본고에서지칭하는인천지역은강화도및도서지역을포함한행정구역상의인천지역을의미한다. 2) 서울대학교인문학연구소, 인천국제공항문화유적 2 차발굴용역최종보고서, 1998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영종도송산선사유적, 1996 1. 선사시대의인천 5
면장정리에서찍개가, 오상리에서는석영제몸돌석기가발견되었고 3), 인천문학동에서구석기시대고토양층과찍개가수습되는등 4) 뗀석기가심심치않게채집되었다. 이로인해인천지역에서도구석기문화가존재했었음을확인할수있었지만실제구석기시대유적이확인된적은없었다. 그러다가지난 2002~2006년에걸쳐실시한인천원당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내 3 4구역발굴조사에서인천지역최초로구석기유적이확인되었다. 5) 또한 2003~2004년인천불로동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내 6) 에대한발굴조사에서도구석기문화층이확인되었으며몸돌, 주먹도끼, 새기개등의석기들이수습되었다. 이가운데원당동유적의연대는약 1만 5천년전으로추정되고있어적어도구석기시대후기에는인천에서인간의활동이이루어지기시작했음이밝혀졌다. 이밖에당하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내 7) 에서도구석기지층인 4기갱신세퇴적층이확인되었고석기가지표에서수습되어구석기시대의유적이추가로확인될가능성이높다고하겠다. 그러나이러한성과에도불구하고지금까지인천지역에서확인된구석기시대유적과유물의수가상대적으로적어문화적성격을이해하는데는한계가있다. 앞으로보다많은자료의축적이이루어진다면주변지역과의문화적연관성을확인할수있을것이다. 3) 이선근, 강화도학술조사보고서 5, 동국대강화도학술조사단, 1977 선문대발굴조사단, 강화내가면오상리고인돌무덤발굴조사현장설명회자료. 2000 4) 인하대학교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인천문학동선사유적,2000 5)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인천원당동유적 (II), 2008. 6)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인천불로동유적, 2007. 7) 인하대학교박물관, 인천당하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내시굴조사보고서, 2005. 6 인천역사 (8 호 )
2.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로상징되는한반도신석기시대는주로강가나바닷가를중심으로어로, 사냥, 채집생활이이루어진시기였다. 앞에서도언급한바와같이인천은중요한식량자원인해산물을손쉽게얻을수있는바다와 100여개이상의섬, 그리고갯벌이펼쳐져있어신석기인들에게는더할나위없는장소였다. 그결과인천은한반도에서신석기시대유적이가장많은곳중하나가되었다. 인천의신석기시대유적은영종도와연평도등도서지역에서주로확인되고있으며. 유적의종류는대부분패총과유물산포지이나최근에는주거지 ( 마을 ) 가확인되고있다. 유적의상당수는해안가에위치하고있어당시신석기인들의해양활동과밀접한관련이있음을추측해볼수있다. 1) 패총인천지역의패총유적은주로도서지역을중심으로발견되고있다. 인천지역패총가운데최초로조사가이루어진곳은시도패총인데분포범위가커서일제강점기부터그존재가확인된곳이다. 1957년국립박물관에서실시한시굴조사를시작으로 3 차례에걸쳐조사가이루어졌는데, 1970년발굴조사에서화덕자리 3기가발견되었다. 발굴결과패총은신석기시대부터삼국시대까지오랜기간동안형성된것으로확인되었다. 다음으로백령도말등패총이 1981년조사가이루어졌다. 당시조사에서집자리나화덕자리등은확인되지않았지만다량의빗살무늬토기편과함께찍개와같은석기류가출토되었다. 2000년대이후연평도와영종도를중심으로패총수개소가 1. 선사시대의인천 7
조사되었다. 연평도에서는대연평도패총, 까치산패총, 당도패총, 모이도패총등이대표적인데이가운데까치산패총과모이도패총이발굴조사되어유적의내용이확인되었다. 대연평도까치산패총에서는 8) 토기와석기, 골각기등이출토되었는데패총내부에서야외화덕자리가발견되기도하였으며동물뼈가출토되는것으로보아수렵이이루어졌던것으로보인다. 모이도패총은 9) 어망추를비롯한석기와함께사슴뿔등이발견되었는데패총을조성했던사람들이어로와수렵을같이했었던것으로추측된다. 이패총에서집자리와야외화덕자리 8기가조사되었는데패각등을채취하기위해이곳에서사람들이머물렀던흔적으로파악된다. 영종도의경우을왕동패총과덕교동패총이조사되었다. 을왕동패총은지난 2004년중앙문화재연구원에의해조사되었는데동일지역에서신석기시대주거지 4기도함께확인되어인천연안일대에신석기시대사람들이거주했음을입증할수있게되었다. 덕교동패총은 2000년한양대학교박물관의조사에의해확인된유적으로빗살무늬토기편이수습되는데이패총인근에서도유물산포지가확인되어주변에주거지가존재했을개연성이있을것으로추정된다. 이외에무의도에서 3개소의신석기시대패총이조사되는등영종도일대에많은패총이분포하고있음이확인되었다. 10) 이밖에옹진군신도, 자월도, 선재도, 덕적도, 굴업도, 영흥도등의도서지역에서곳곳에신석기시대패총이분포하고있다. 11) 8) 국립문화재연구소, 대연평도까치산패총, 2005. 9) 국립문화재연구소, 연평모이도패총, 2003. 10) 인하대학교박물관, 문화유적분포지도 : 인천광역시남구 남동구 동구 중구 연수구, 2005. 11) 인하대학교박물관, 문화유적분포지도 : 인천광역시계양구 부평구 서구 옹진군, 2006. 8 인천역사 (8 호 )
2) 주거유적신석기시대주거지는지속적인이동생활에서탈피해일정한지역에거주하기시작했음을보여주는자료로신석기시대생활상을이해하는데중요한의미가있다. 이시대주거지는평면형태가원형, 방형, 장방형등이주류를이루며, 주거지내에는대부분무시설식수혈노지가위치한다. 원형의주거지는외부와내부가모두원형을나타내는주거지와, 외부는원형으로굴착하고내부는방형으로생활공간을조성한것도있다. 주거지들중다수를차지하는것은평면형태가방형인것으로돌출형출입시설과 4주식의기둥을배치한것이일반적이다. 이들주거지는사람들이임시로거주했던지역이아닌상당한규모의마을을이루고살았던것으로, 인천지역에서사람들이상당기간동안일정한지역에서거주했음을의미한다. 주거지에서는빗살무늬토기편, 합인석부, 갈돌, 석촉, 어망추, 굴지구등다양한유물이수습되었다. 인천지역의대표적인신석기시대주거유적들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1) 영종도운서동유적 12) 영종도운서동유적은 2007-2008년에걸쳐인천경제자유구역부지에대해중앙문화재연구원이발굴조사하였다. 집자리 50여기와노지등이확인되었는데지금까지인천서해안일대에서 12) 중앙문화재연구원, 인천경제자유구역영종지구영종하늘도시내 (1 구역 ) 유적발굴조사약보고서, 2009.1. 한강문화재연구원, 인천경제자유구역영종지구 ( 영종지역 ) 문화재발굴조사 3 차지도위원회 : 22.23 지점, 2008.10. 중앙문화재연구원, 인천경제자유구역영종지구영종하늘도시내 (3 구역 ) 유적문화재발굴조사약보고서, 2009.6. 1. 선사시대의인천 9
발견된최대규모의주거유적이다. 유적은 I, II, III, IV등네개의지점으로나뉘어져있는데이가운데운서동 I-1지점에서는신석기시대주거지 8기, 패총 1기, 야외노지 5기, 수혈유구등이확인되었으며 I-2지점에서는신석기시대주거지 58기와야외노지 7기, 수혈유구등이조사되었다. 운서동 III지점에서도신석기시대주거지 2기와야외노지 2기가확인되었다. (2) 영종도중산동유적 13) 영종도중산동유적은 2007-2008년인천시경제자유구역및택지개발사업지구에대해한강문화재연구원이발굴조사한유적이다. 신석기시대유적이위치한곳은해발 20m내외의낮은구릉지대인데신석기시대주거지 35기, 수혈유구 421기, 야외노지 26기등이확인되었으며백제시대주거지 1기, 조선시대분묘 32기등도함께조사되었다. 주거지는원형 13기, 방형 22기가확인되어방형이다소높은빈도수를보이고있다. 주거지의형태는노지를중심으로 4주식의주혈배치를보이는형식과벽면을따라일정한간격으로주혈이배치된형식이있다. (3) 영종도운북동유적 14) 영종도운북동유적은운북복합레저단지조성사업부지에대 13) 한강문화재연구원, 인천경제자유구역영종지구 ( 영종지역 ) 문화재발굴조사 3 차지도위원회 : 22.23 지점, 2008.10. 14) 한강문화재연구원, 운북복합레저단지조성사업예정부지내문화유적발굴조사 1 차지도위원회, 2008.12. 한강문화재연구원, 운북복합레저단지조성사업예정부지내문화유적발굴조사 4 차지도위원회, 2009.12. 10 인천역사 (8 호 )
한구제발굴의일환으로 2008-2010년한강문화재연구원에의해발굴조사된유적이다. 조사결과, 운북동유적에서는신석기시대주거지, 수혈, 원삼국시대주거지, 고려시대주거지, 조선시대주거지, 분묘등다량의유구들이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주거지및수혈에서는빗살무늬토기편, 석부등이출토되었다. (4) 인천을왕동유적 15) 인천을왕동유적은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의뢰에의해북측유수지에서을왕리해수욕장으로이어지는도로부지에대해중앙문화재연구원이 2004년발굴조사한유적이다. 조사결과신석기시대패총을비롯하여주거지 4기, 수혈유구 2기등총 17기의유구가확인되었다. 을왕동유적은해발 50m 내외의구릉사면에위치하며주거지의평면형태는원형과장방형이다. 주거지내부에는돌을사용한위석식노지가확인되었으며다량의빗살무늬토기편들이수습되었다. AMS와고지자기연대측정결과대략 B.C. 3000 전후하여형성된것으로판단된다. (5) 인천동양동유적 16) 인천시계양구동양동신석기유적은 2003년인하대학교박물관의지표조사에서처음확인되어같은해 7월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의해발굴조사된유적이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주거지 1기가파괴된상태로확인되었다. 주거지는대부분삭평된상태로일부만이확인되었으며잔존크기 33cm 34cm로빗살무늬토기편과석부가수습되었다. 15) 중앙문화재연구원, 인천을왕동유적, 발굴조사보고제 85 책, 2006. 16)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인천동양동유적, 2007. 1. 선사시대의인천 11
3. 청동기시대 인천지역의청동기시대유적은지석묘와주거지로크게구분된다. 이가운데지석묘는최근주거지가조사되기이전에인천의청동기문화를이해할수있는유일한자료였다. 인천의지석묘는강화도의경우고려산을중심으로다수의지석묘들이존재한다. 인천내륙지역에서는학익동, 주안동, 문학동등문학산주변지역과계양산북쪽에자리한서구대곡동과검단지역에집중분포하고있다. 주거유적은아직조사된예가많지않아자세히알수는없지만서구원당과남구문학산, 영종도등인천전역에걸쳐확인되고있다. 1) 지석묘청동기시대지석묘유적들중강화도지역에는약 160여기정도의지석묘 17) 가군집을이루며분포하고있다. 이중삼거리지석묘군에서탁자식지석묘 5기와주거지 1기가조사되었으며각형토기와, 유경식석검, 환상석기가출토된바있다 18), 오상리지석묘군에서는북방식지석묘 10기가발굴조사되었고각형토기와유경식석촉이출토되었다. 19) 강화도지역의지석묘는유적의분포경향이나지석묘주변주거지에서출토된유물을검토해볼때대동강유역의각형토기문화권과관련이있을것으로파악되기도한다. 20) 17) 현재강화지역의지석묘는 157 기가분포하는것으로알려져있다. ( 대한불교조계종문화유산발굴조사단 인천광역시, 2002, 강화의문화유적 ) 18) 金載元 尹武炳, 1967, 三巨里遺蹟 韓國支石墓硏究. 19) 鮮文大學校考古硏究所 江華郡, 2002, 江華鰲上里支石墓 : 發掘및復元報告書. 20) 강동석, 2007, 인천연안의지석묘문화, 인천연안의고고학, 서울경기고고학회. 12 인천역사 (8 호 )
강화도이외의인천내륙지역에서도서구대곡동과남구문학산일대를중심으로지석묘가다수분포하고있다. 문학산일대의지석묘는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등 12기정도가분포하고있었던것으로알려져있다 21). 그렇지만현재학익동지석묘 2기와주안동지석묘 1기, 문학동지석묘 1 기등 4기만그존재가확인되며 22) 그나마원위치에있는경우는하나도없다. 문학산일대지석묘의형태나입지등에대해서는자세히알려진바없으나대체로북방식 ( 탁자식 ) 이우세하며, 주로문학산북쪽에펼쳐진낮은구릉위에자리하고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이지역에서확인된지석묘는산발적으로분포하는것으로보이지만모두일정거리에분포하고있어하나의군으로분류할수있는것으로파악된다. 23) 인천지역에서가장밀집도가높은지석묘군은대곡동지석묘군이다. 대곡동지석묘군은인천광역시와김포시경계에위치한가현산일대에분포한다. 고인돌군은가현산일대의주봉과능선으로둘러쌓인아늑한골짜기안에자리잡고있으며북동쪽평야로연결되고있다. 대곡동지석묘군은그동안여러차례조사를통해알려진바있는데 1977년당시문화공보부에서발간된 문화유적총람 24) 에소개된바있어그존재는널리알려지게되었다. 이후, 21) 윤용구 강동석, 앞의글. 22) 문학산일대의지석묘에대해서는다음자료에서단편적으로소개되고있다. 金元龍, 韓國史前遺蹟遺物地名表, 서울大學校考古人類學叢刊第三冊, 1953. 李慶成, 仁川의先史遺蹟遺物調査槪要, 梨大史苑 第 1 輯, 1959. 仁川市, 仁川鄕土史資料,1956. 罔田貢, 仁川近郊の史蹟と史話 朝鮮硏究,1929. 23) 문학산일대의지석묘가운데학익동지석묘 3 기는일제강점기발굴조사가이루어졌고, 1998 년인천구치소부지에있던지석묘 1 기가발굴조사된바있다. 일제강점기의조사에서석부와갈돌, 토기편등이출토되었으며주안동과학익동지석묘주변에서도석촉편이수습되었다고전한다. 24)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1977 1. 선사시대의인천 13
사진 1. 인천대곡동 A 군지석묘 1 호 1990년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간행한 연보 ( 年報 ) 2에대곡동유적에대한소개가사진밑분포약도를곁들여실려있다. 25) 당시에는본유적의 E군에대한조사만이이 루어졌으며, 모두 9기로보고하고있다. 1992년발간된 김포군지 ( 金浦郡誌 ) 에는대곡동유적이대곡리지석묘 A군과 B군으로나누어소개된바있고. 26) 1999년발간된 김포시의역사와문화유적 27) 에서는대곡리가인천광역시로편입되어떨어져나감에따라대곡동보고서의 E군과 B군에대한조사는생략하고 A군을매산리지석묘3 으로소개한바있다. 이어 2002년에경기도박물관이발간한 도서해안지역종합학술조사 Ⅲ 에대곡동유적의일부가소개되는데, 28) A군, B 군, C군이각각대곡동지석묘유적Ⅲ, 대곡동지석묘유적Ⅱ, 대곡동지석묘유적Ⅰ로각각명명하였다. 대곡동유적은다시 2004년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발간한 인천북부종합학술조사 ( 仁川北部綜合學術調査 ) 보고서에서 29) 지금까지의조사를총정리하여 A, B, C, D, E의 5개군으로나 25) 任孝宰, 京畿道金浦半島의考古學調査硏究 年報 2,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1-16 쪽. 26) 編纂委員會, 金浦郡誌, 1992, 1303~1308 쪽. 27) 한양대학교박물관, 김포시의역사와문화유적, 1999, 290~292 쪽. 28) 京畿道博物館, 도서해안지역종합학술조사, 2002, 71~84 쪽. 29) 인천광역시립박물관, 仁川北部綜合學術調査, 2004, 57~68 쪽. 14 인천역사 (8 호 )
누어개별지석묘의크기, 형식, 재질, 장축방향, 석재형태등을사진과함께정리하여제시하고있다. 이후 2005년인하대학교박물관이대곡동지석묘군에대한정밀조사결과 70여기정도의고인돌이확인되었다. 지석묘의형식은탁자식과개석식이혼재하고있으며여전히능선에매몰된채일부만드러나있을뿐전모를알수없는경우가다수이다. 덮개돌의형태는몇가지다른형태들이있는데말각장방형과부정형이대부분이다. 이와같이다양한형태의덮개돌이보이는것은주변에서흔히구할수있는판석을사용한결과로가장자리를손질한일부경우를제외하고는자연상태의판석을그대로가져다쓴것으로보인다. 대곡동지석묘군에서확인된유물로는주상편인석부, 무문토기동체부편, 반월형석도등이있다. 30) 이밖에서구원당동에서도북방식지석묘 1기가확인된바있는데지석묘바로옆에서주거지가위치하고있어흥미로운자료를제공하고있다 31). 2) 주거유적지석묘와더불어청동기시대의생활상을살펴볼수있는주거지및생활유적등이발굴조사를통해속속드러나고있다. 인천지역청동기시대주거지들중대표적인유적들은다음과같다. (1) 동양동유적 32) 동양동유적은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2003~2004 년발굴조사 30) 인하대학교박물관, 대곡동지석묘 : 인천대곡동지석묘정밀지표조사보고서, 2005. 31) 인하대학교박물관, 인천원당동유적 : 원당 ~ 불로지구간도로개설공사구간내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2009. 32) 韓國文化財保護財團, 仁川東陽洞遺蹟, 2007. 1. 선사시대의인천 15
하여확인된유적이다. 유적은해발 15~17m의나지막한구릉성대지에위치하며북서쪽으로는서부간선수로가지나고있다. 조사결과청동기시대주거지 3기가확인되었다. 1호주거지는세장방형으로규모는길이 1170cm, 너비 630cm, 깊이 45cm이며, 장축방향은남-북 (N-11 -W) 향에가깝다. 주거지는적색점토층을수직에가깝게굴광한뒤벽체를점토로보강하였으며바닥면은 5-10cm 가량점토를깔고다져서상면을고르게정지하였다. 내부조사에서다량의소토와탄화재가발견되는것으로보아 1호주거지는화재에의해폐기되었을가능성이있다. 출토유물은다량의이중구연토기, 석촉, 석부, 찰절석기, 석창, 등이수습되었다. 이와함께다량의탄화된도토리와곡물들이확인되었으나주거지내부에서갈돌이나노지가확인되지않았다. 2호주거지는비교적소형으로규모는길이 410cm, 너비 384cm, 깊이 30cm, 장축방향은남-북 (N-12 -E) 향에가깝다. 출토유물은 1호주거지와유사한이중구연토기, 숫돌 ( 지석 ), 석제품, 기타석편들이다량출토되었다. 주거지의규모나토기의출토량에비해석기제작에관련된유물들이다량출토된점으로보아석기제작관련공방지일가능성이많다. 16 인천역사 (8 호 )
< 지도 1> 인천지역의청동기시대주거지및지석묘분포 순번 유적명 지석묘 1 불로동유적 A 대곡동지석묘군 2 검단동유적 B 원당동지석묘 3 원당동유적 ( 인하대학교박물관 ) C 주안동지석묘 4 원당동유적 D 학익동지석묘 5 동양동유적 E 문학동지석묘 6 문학동유적 범례. 인천지역청동기시대주거지및지석묘분포 1. 선사시대의인천 17
3호주거지는인공림을조성하면서상당부분파괴되었고나머지부분도이미심하게삭평이이루어져명확한유구의형태는확인할수없다. 유물의출토범위, 잔존주혈, 목탄범위등을통해잔존유구면을추정해볼때대체적으로 2호주거지와같은평면방형이었던것으로추정된다. (2) 불로동유적 33) 불로동유적은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2003년발굴조사하여확인된유적이다. 불로동유적은황화산에서남서쪽으로해발 20m 내외의구릉북사면에위치한다. 주거지의북쪽부분은대부분유실된상태이며나머지부분역시후대교란되어잔존부분은얼마남지않았다. 출토유물은주거지바닥면상부퇴적층에서무문토기편들과마제석촉이수습되었다. (3) 원당동 4구역유적 34) 원당동 4구역은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2002~2005년발굴조사하여확인된유적이다. 원당동 4구역은모두세곳 ( 가, 나, 라 ) 의발굴지점이있는데 가 지점은조사지역의가장남쪽에위치한해발 30m 내외의낮은구릉부에해당된다. 가 지점에서는청동기시대주거지 19기와수혈유구 3기가확인되었다. 이들중 7기의주거지와 2기의수혈유구에서무문토기, 반월형석도, 석촉, 석제방추차등청동기시대유물들이수습되었다. 나 지점은조사지역의가장서쪽에위치하며, 남동쪽구릉의말단부에해당된다. 유적은해발 30m정도의구릉에위치하며구릉의서쪽 33) 韓國文化財保護財團, 學術調査報告第 193 冊 仁川不老洞遺蹟, 2007. 34) 韓國文化財保護財團, 學術調査報告第 201 冊 仁川元堂洞遺蹟, 2008. 18 인천역사 (8 호 )
과남쪽사면은이미삭평된상태였다. 나 지점에서는주거지 7 기와수혈유구 3기가확인되었으며이들유구에서무문토기, 석촉, 석창, 반월형석도등이수습되었다. 라 지점은조사지역구릉남사면하단에단독으로위치하는장방형수혈주거지이다. 라 지점에서는주거지 5기가확인되었으며무문토기, 마제석기등이출토되었다. (4) 원당동유적 35) 원당동유적은인하대학교박물관이 2003년실시한지표조사에서고인돌 1기가확인됨에따라인접능선에대한발굴조사과정에서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모두 3차에걸쳐서실시되었으며조사결과청동기시대세장방형주거지 1기가확인되었다. 원당동주거지는인천광역시서구불로동만수산 ( 해발 114.6m) 서쪽능선의끝부분에위치하며자연삭평으로인하여훼손이심한편이다. 잔존크기는길이 1,160cm, 너비 400cm, 깊이 15cm로장단비가 2.9:1의세장방형이며면적은 46.4m2인대형에속한다. 주거지바닥은특별한시설없이자연풍화암반을굴착하여조성하였다. 내부시설로는굴광형노지 4기와기둥구멍 8기, 저장공 1기가확인되었다. 노지는주거지의중앙에일렬로설치되었으며노지의크기는지름 62-65cm, 깊이 6-8cm크기의원형이다. 노지의내부에서는소량의목탄들이확인되었으며수습된유물은없다. 노지 1~3 주변에서는마제석촉과방추차, 숫돌등의유물이출토되었으며, 노지 4의주변에서는갈돌, 반월형석도가수습되었다. 35) 인하대학교박물관, 인천원당동유적 ; 원당 - 불로지구간도로개설공사구간내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2009 1. 선사시대의인천 19
(5) 검단동유적 36) 검단동 2지구유적은문화재보호재단이 2002~2003년발굴조사하여확인된유적으로 2기의청동기시대주거지가확인되었다. 1호주거지는조사지역남서쪽해발고도 34m 구릉사면하단부에위치한다. 주거지의장축방향은등고선방향과일치하며동- 서 (N-75 -W) 방향에가깝고주거지의잔존규모는 556 167 20cm 정도이다. 주거지내에서무문토기편, 마제석촉 3점, 지석 1점, 용도미상석재 1점이출토되었다. 사진 2. 인천문학동주거지발굴완료후전경 2호주거지는 1호주거지남동쪽 3m지점에위치하며주거지의상부와남벽일부는대부분삭평되어정확한규모는알수없 36) 韓國文化財保護財團 仁荷大學校博物館, 仁川黔丹土地區劃整理事業地區文化遺蹟調査報告書, 2003. 20 인천역사 (8 호 )
다. 주거지내부에서는원형노지 1개소가확인되었고무문토기편, 지석, 용도미상석기등이수습되었다. (6) 문학동유적 37) 문학동유적은인하대학교박물관과기전문화재연구원이 2000 년공동으로발굴조사한인천문학동선사유적 38) 과지형상으로연결되는유적이다. 문학동유적은인하대학교박물관이 2007년 7월에시굴조사를실시한결과청동기시대주거지 2기가확인되었고 2008년 4월부터발굴조사를실시하여청동기시대주거지 5기가추가로확인되었다. 7호주거지를제외하고는대부분양호한상태로발굴되었으며주거지의형태는세장방형, 장방형, 방형등다양하다. 주거지들은비교적밀집하여위치하고있는데중첩되지않고일정한간격을유지하고있으며마제석촉, 반월형석도, 석창, 숫돌, 석부, 무문토기등다량의유물들이수습되었다. (7) 영종도중산동유적 39) 인천영종지구증산동유적은인천경제자유구역영종지구개발사업부지에대한구제발굴의일환으로중앙문화재연구원이 2007~2009년발굴조사하여확인된유적이다. 증산동유적에서는청동기시대주거지 34기, 시대미상야외노지 10기, 조선시대주거지 10기, 조선시대토광묘 38기, 수혈및기타유구 26기가확인되었다. 이들주거지에서는석촉, 석도, 석검, 석착, 환상석 37) 인하대학교박물관, 문학경기장절토잔여지내문화유적발굴조사약보고서, 2008. 38) 인하대학교박물관, 인천문학동선사유적, 2000. 39) 중앙문화재연구원, 인천경제자유구역영종지구영종하늘도시내 (3 구역 ) 유적문화재발굴조사약보고서, 2009.6. 1. 선사시대의인천 21
부등의석기류와홍도, 발형토기등다량의토기들이수습되었다. 유물상의특색은공렬토기및구순각목의빈도수가낮고, 상대적으로늦은시기에해당하는유물인유구석부와일단병식석검이출토된것으로보아유적의시기가다소후대일가능성이있다. 이외에청동기시대유적으로건평리대화촌선사유적, 도장리선사유적, 동막리유적 40) 등에서무문토기편이수습된바있다. 4. 철기시대 41) 인천지역에서철기시대유적이확인된예는다른시대유적에비해극히적다. 가장대표적인것이인천운남동유적 ( 운남동패총 ) 으로최근영종하늘도시부지에대한구제발굴의일환으로 2008-2009년한국고고환경연구소에의해발굴조사되었다. 42) 조사결과운남동유적에서는원삼국 ~ 백제시대패총, 주거지, 수혈유구, 옹관묘, 토광묘등다량의유구가확인되었는데이들중철기시대주거지 6기가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타날문토기, 대옹, 시루, 경질무문토기등다양한종류의토기들이확인되었다. 한편운남동유적에서는패총이 6 개소확인되었는데이가운 40) 장명수, 1987, 江華東幕里빗살문土器의遺蹟과遺物 古文化 第 30 輯, 韓國大學博物館協會. 41) 철기문화와관련하여현재학계에서는초기철기시대혹은원삼국시대라는용어를사용하고있는데그시기와적용범위에일치된의견을도출하지못하고있다. 본고에서는초기철기시대와원삼국시대를구별하지않고이를모두포함하는의미에서철기시대란용어를사용하였다. 또한선사시대의범위를어디까지로설정할것인가에대한논란도있으나본고에서는기원을전후한철기시대까지를선사시대의범주에포함하여다루었다. 42) 인천대학교인천학연구원, 영종도의고고학, 인천학학술대회발표문요지, 2010. 22 인천역사 (8 호 )
데 A지구패총내에서는 2개체분의인골이수습되어형질인류학적연구에귀중한자료가될것으로판단된다. 또한패총에서출토된철경동촉과오수전등은낙랑과관련된유물로서인천연안지역과낙랑과의교류관계를이해하는데유용할것으로판단된다. 5. 인천지역선사문화의성격 지금까지인천지역에분포하고있는선사시대유적을살펴보았다. 선사유적가운데구석기시대와철기시대의경우아직발굴된유적이많지않아인천지역만의독특한성격을파악하기위해서는보다많은자료의축적이필요한상황하다. 신석기시대와청동기시대또한아직조사성과가충분치않아자세한내용을살펴보기는어렵다. 다만지금까지조사된자료를토대로몇가지특징을살펴봄으로서인천지역선사문화의성격을추론해보고자한다. 신석기시대인천은그동안패총위주로, 유적이발견되는것을근거로, 내륙으로부터먹거리채취를위해계절적으로잠시머물다가이동했던곳으로여겨져왔다. 그러나최근영종도운서동및중산동유적과같이대규모신석기시대취락이조사됨에따라인천지역이더이상신석기인들이임시로머물렀던지역이아님이확인되었다. 물론소규모도서등은일시적인방문이이루어졌겠지만영종도와같은대규모섬에서는오랜기간동안정착해생활했던취락이형성되었고이취락을거점으로주변의소규모도서나해안지역에식량등을채집할목적으로왕래를했을것이다. 아직정보고서들이출간되지않아정확한내용을파악하는데는한계가있으나주거지의구조등이인접 1. 선사시대의인천 23
한경기내륙지역과유사한양상을나타내고있어앞으로의연구결과가주목된다. 한편현재까지자료로볼때인천지역신석기유적의연대는대략 B.C 3,500~3,000 이후의늦은시기로여겨지고있다. 인천을왕동유적과연평도까치산패총에대한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가대략 B.C. 3000년경으로나오고있는데종래의토기를통한연대측정결과등과종합했을때인천지역에서신석기문화가적어도기원전 3,000년경에는활발하게전개되고있었음을확인할수있다. 인천지역청동기시대문화에관해서는발굴조사가된주거유적을중심으로인접한경기지역의청동기유적과비교를통해살펴보도록하겠다. 우선인천지역청동기시대주거지는인접한경기도일대의청동기시대주거지와비교했을때기본적인구조나유물의조합등에서는큰차이점이관찰되지않는다. 지금까지조사된바에의하면인천지역에서는세장방형과방형, 장방형, 원형등다양한형태의주거지들이발견되는데, 이가운데세장방형의대형주거지들의비율이상대적으로높은것으로여겨진다. 장축의길이가 10m 내외의, 장축과단축의비율이 2:1 이상인주거지들은소위역삼동유형에속하는것으로원당동유적, 문학동유적, 동양동유적등에서그예가확인된다. 인천지역에서확인된세장방형의대형주거지는 B.C. 1300~1000년사이에축조된것으로보고되고있다. 한편대형의세장방형주거지외에방형, 장방형의중 소형주거지도발견되지만청동기시대중기로비정되는송국리유형은확인되지않는다. 이처럼송국리형주거지는그출토예가드문반면에, 역삼동유형의세장방형주거지와장방형주거지가주를이루는것으로보아인천지역의청동기문화가상대적으로내륙지역보다이른시기에형성된것으 24 인천역사 (8 호 )
로추정된다. 다음으로출토유물의현황을살펴보면유물조합의양상은경기도출토주거지들과비슷하지만유물별출토빈도수에서약간의차이점이관찰된다. 아래표6은각지역별주거지에서출토된유물의비율을정리한것으로, 토기와어망추의출토비율에서인천지역이다른지역과다른모습을보이고있음을알수있다. 지역 유물 공렬토기 (%) 토기 무문토기 (%) 어망추 (%) 석촉 (%) 반월형석도 (%) 방추차 (%) 인천지역 (25) 2/25 (8) 18/25 (72) 0/25 (0) 11/25 (44) 6/25 (24) 4/25 (16) 김포지역 (20) 2/20 (10) 14/20 (70) 0/20 (0) 6/20 (30) 2/20 (10) 2/20 (10) 경기북부 (8) 6/8 (75) 6/8 (75) 1/8 (13) 7/8 (88) 3/8 (38) 0/8 (0) 경기중부 (30) 20/30 (67) 27/30 (90) 20/30 (67) 19/30 (63) 7/30 (23) 9/30 (30) 경기남부 (20) 8/20 (40) 16/20 (80) 1/20 (5) 6/20 (30) 6/20 (30) 1/20 (5) 표 1. 지역별유물출토현황 43) 우선, 토기의경우공렬토기와무문토기의출토비율이다른지역에비해인천지역이공렬토기의출토비율이매우낮다는것이다. 김포지역도인천과비슷한비율을보이고있는데인천. 김포지역에서는공렬토기 ( 구순각목공렬토기포함 ) 의출토빈도수와무문토기의빈도수사이의편차가상대적으로높은반면경기도지역에서는공렬토기의빈도수와무문토기의빈도수의차가상대적으로낮다. 특히경기북부지역은조사된주거지수가적기는하지만공렬토기와무문토기가같이공반하고있으며중부지역에서도두토기사이의빈도수차이가높지않아거의공반하는양상을나타낸다. 이는학계에서일반적으로논의 43) 박성우, 2009, 인천지역청동기시대주거지의현황과성격, 사림 34 호, 수선사학회 1. 선사시대의인천 25
되고있는토기전파루트와도관련이있는것이다. 압록강중부와두만강등에서는공렬토기와구순각목토기등이발견되는반면서북의대동강유역은공렬토기의출토예가드물고팽이형이나이중구연토기가주로발견된다. 즉, 한반도중부루트는공렬토기가서부해안루트는무문토기가주로발견된다는현상과부합하는것으로판단된다. 44) 한편어망추는인천지역주거지에서는발견된예가없으며김포지역에서도어망추가출토되지않았다. 경기도중부지역에서는상대적으로아주높은빈도수를나타내고있으며 45) 경기북부와남부에서도각기한개씩만이출토되어낮은빈도수를나타내고있다. 인천과김포지역의경우발굴된주거지의숫자가적어서출현빈도수가낮을수도있겠고토제어망추가존재했을경우소멸되었을확률도크지만지금까지한점도출토되지않았다는점은고고학적으로의미가있을가능성이높다. 일반적으로인천지역은해안가에인접한지역으로어로활동이생계경제에서차지하는비율이높을것이라는선입견이존재하고있지만청동기시대주거지에서는어로활동의흔적을전혀찾아볼수없는점에서주목할만하다. 이는우리가일반적으로생각했던바와달리인천지역이청동기시대로접어들면서이미농경위주의생활양식이주된생활수단으로자리잡았을가능성을보여주는것이라생각된다. 다른한편으로는인천지역에뚜렷하게하천이발달해있지않기때문에청동기시대인천지역에서어로가생계경제에서차지하는비율이크지않았을 44)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강의, ( 한국고고학회 2007), 74-105 쪽 45) 기전문화재연구원, 하남덕풍리수리골유적, 2005 세종대학교박물관, 하남덕풍골유적, 2006 세종대학교박물관, 하남덕풍골유적 II, 2007 서울대학교박물관, 미사리 ; 1-4 권 1994. 26 인천역사 (8 호 )
가능성도생각해볼수있다. 46) 이외에도뚜렷하지는않지만인천지역의청동기시대주거지는경기도지역에비해어망추와같은어로도구는물론농경도구라할수있는반월형석도, 전쟁 수렵도구라할수있는석촉등유물들이비율상에서미묘한차이가나타난다. 아직까지인천지역에서출토된유물의종류와양이많지않기때문에고고학적으로의미를논하기는어렵지만지역별로유물의형식학적, 기술적차이가크지않은점을고려할때지역별인구밀도, 식량획득방식등자연환경에따른사회구조적차이에서기인한가능성이더클것이다. 한편, 인천지역의청동기시대주거지들은지리적 환경적입지조건에뚜렷한정형성을나타내고있다. 지금까지인천지역에서확인된청동기시대주거지유적들은하천이나강에인접한해발고도가 100m 이하의낮은구릉지대에서로인접하여위치하고있다. 유적간의거리는평균 5-6km 정도이며다소멀리떨어진유적들도 10km 내외에위치하고있다. 보다많은유적들이발굴되어야정확한데이터를산출할수있겠으나이들주거지 ( 마을 ) 간의거리는수렵 채집인들의하루에이동하면서활동할수있는거리이다. 또한이들주거지 ( 마을 ) 는강이나, 하천, 저수지등과인접한곳에위치하고있어소위담수지 (catchment) 범위안에속하는거리에위치하고있다. 47) 즉, 인천지역에서확인된주거지들은인접한유적간의거리가이동및교류가가능한거리이며서해안일대에서확인된청동기시대유적과유물의유사성은이들주민간의빈번한접촉과교류를반영하고있는것으로여겨진다. 46) 현재인천지역에는포천, 공촌천등크고작은하천들이있지만이하천들은대부분후대에매립과정에서갯고랑이하천으로변한경우다. 인천지역은본래자연지형상하천이발달하기어려운곳이다. 47) Renfrew, Colin and Paul Bahn, 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 Fourth Edition. (Thames & Hudson 2004,) pp.264-265 1. 선사시대의인천 27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1. 인천에사람이처음살기시작할때 2. 신석기문화의보고, 인천 3. 고인돌왕국, 인천 4. 백제와인천 5. 또하나의고려 ( 高麗 ) 수도, 강화 6. 인후지지강화 이희인 ( 인천시립박물관학예사 )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1. 인천에사람이처음살기시작할때 지난 90년대후반부터전국적인개발열풍속에인천에도각종대규모개발사업이이루어졌다. 특히인천에서도상대적으로개발이덜이루어졌던서구검단지역에는대규모토지구획정리사업이진행이되었다. 그때만해도검단을포함한서구오류, 원당, 불로동지역은논밭과임야, 소규모공장들이혼재되어있는도시의외곽지대였는데다행히도 (?) 개발사업의과정에서그동안알려지지않았던인천의역사적흔적들이점차드러나기시작했다. 1) 이가운데지금은아파트와공원이들어서흔적도찾을수없지만원당동과불로동에서인천지역최초의구석기시대유적이발견되었다. 불과십수년전만해도인천의역사를이야기할때는보통 선사시대부터 라는말로시작하곤했다. 선사시대는인류의모습이문자로기록되기이전의시대를말한다. 인류가지구상에등장한것은대략 350만년전인데 2), 문자가발명된것은지금으로부터불과 5,000여년전으로선사시대의시간적범위 1) 우리나라문화재보호법에의하면일정면적이상의형질을변경하는공사가이루어질경우문화재지표조사를의무적으로실시하게되어있다. 이지표조사에서유적이확인될경우발굴조사를실시하게되어있는데최근의많은인천의유적들이이러한절차를거쳐발굴이이루어졌다. 특히 2000 년대에들어서서구검단, 원당, 불로, 오류등토지구획정리지역과영종도신도시개발과정에서많은유적들이조사되었다. 2) 인류가언제부터지구상에등장해왔는지에대해서는정확한시점을파악하기어렵다. 다만새로운자료가등장할때마다그시기는점차올라가고있다.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31
는얼추잡아 350만년으로쉽게느낌이오지않는시간이다. 이처럼선사시대부터인천에사람이살기시작하였다고한다는것은무척이나막연한표현임을알수있다. 이렇게된데에는인천에서선사시대흔적이발견된예가많지않을뿐더러그내용이자세하게알려진바가없었기때문이었다. 그런데원당동과불로동에서구석기시대유적이발견됨에따라그때까지가능성으로만언급되어왔던인천역사의시작을눈으로직접확인할수있게되었다. 발굴결과에의하면구석기시대늦은시기, 좀더구체적으로지금으로부터대략 1만 5천년전에는인천에서인간의활동이이루어지기시작했다. 3) 여기서잠시독자의이해를돕기위해선사와구석기시대에관한개념을살펴보도록하겠다. 선사시대의경우앞에서잠시언급하바와같이문자가없는시대를말하는데, 도구의변화나, 사회경제적내용을기준으로세분된다. 우리나라의경우도구의재질의변화를기준으로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나뉘어진다. 이가운데구석기시대는돌을깨뜨려도구로사용한시기로한반도에서는 70만년전부터시작되어약 1만년전까지지속되었던것으로알려져있다. 1960년대부터한반도에서구석기시대유적이발견되기시작했는데인천이자리한한반도중부지역에는전곡리유적을비롯해임진강과한탄강을중심으로다양한구석기유적이발견되고있다. 구석기인들은여러곳을옮겨다니며채집과고기잡이 사냥으로생활하였다. 뗀석기는처음에주먹도끼와같이상대적으로형태가단순하고큰석기가이용되었으나제작기술이발달함에따라점차크기가작아지면서정교해지고쓰임새별로형태도다양해졌다. 3) 실제이보다더이른시기의유적이발견될가능성은얼마든지있다. 32 인천역사 (8 호 )
다시본론으로돌아와서유적을살펴보면우선원당동유적은인천에서발견된최초의구석기시대유적으로의미가있다. 이곳은인천검단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대한지표조사에서유적의존재가확인되었고, 2003년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4) 유적은해발 30m 가량의얕은구릉의경사면에위치하는데이곳에서주로석영을이용해만든몸돌, 여러면석기, 긁개, 격지와규암재질의찍개등이출토되었다. 그런데이유적이인천최초의구석기시대유적이기는하지만유적자체가당시사람들의행위를그대로반영하는모습을보여주지는않는다. 좀더구체적으로이야기하자면이유적에서석기가발견된층위는 5) 과거그대로의모습이아니라후대에변화가되었다는것으로원당동유적은구석기시대당시의모습이아니라이일대에있던석기들이지질변화과정에서다시쌓였다는것이다. 따라서현재유적의내용을가지고구석기시대인천의모습을그대로이해할수없는한계가있다. 그렇지만이유적이발견되기전까지지표에서이따금씩발견되는석기를보고구석기시대인천의모습을상상해보던데에서벗어나 6) 그실체를처음확인할수있게되었다는데큰의의가있다고하겠다. 불로동유적은원당동유적에이어인천에서 2번째로확인된구석기시대유적으로원당동유적에서동쪽으로 5km 가량떨어져있다. 원당동유적과마찬가지로인천검단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내에포함되어있었으며 2003년발굴조사가이루어졌 4)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8, 인천원당동유적 (Ⅱ) 5) 층위 ( 層位 ) 는흙이쌓여진순서를말한다. 즉아래에쌓인흙은위의것보다보다과거의것임으로층위구분을통해유적의시간적순서를파악할수있다. 6) 지표에서석기가채집되는것만으로그곳을구석기유적이라고하지않는것은토양이지질침식을거치면서석기가유실되어본래의위치에서벗어난곳에서발견될수있기때문이다.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33
사진 1. 불로동유적출토뗀석기 다. 7) 유적이위치한곳은해발 20m 가량의얕은구릉의남쪽사면인데호우로인해석기가지표면에노출되면서유적의존 7)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7, 인천불로동유적 34 인천역사 (8 호 )
재가밝혀졌다. 이곳에서석영과규암으로만든찍개, 긁개, 새기개, 몸돌등총 26점의석기가출토되었다. 이유적은범위가작고, 지형이상당수훼손되어보다자세한내용을알수는없지만향후관련유적과의비교를통해인천지역구석기문화를이해하는데중요한역할을할것으로기대된다. 이처럼인천지역의구석기시대는유적의수가적을뿐만아니라관련자료가충분하지않아현재로서는자세한문화적양상을파악하기어렵다. 하지만최근문학산에서도뗀석기가수습되었고영종과강화등지에서도꾸준히석기가발견되고있어유적이추가로발견될가능성이높으며, 그에따라앞으로의연구전망은밝다고하겠다. 2. 신석기문화의보고, 인천 지금은찾기어려워졌지만 20~30년전만해도인천의섬이나해안곳곳을다니다보면하얀조개와굴껍질이켜켜이쌓여있는모습을쉽게발견할수있었다. 보통은누군가먹다버린조개껍질을모은것으로만알았고, 닭사료나시멘트도로를만드는재료로쓰기위해무심히파내어가거나, 혹은여러개발과정에서파괴되어점차자취를감추어갔다. 하지만이조개무지 ( 貝塚 ) 가운데상당수는단순한쓰레기더미가아니라신석기시대사람들의생활흔적을그대로간직하고있는중요한문화유산이다. 신석기시대는지금으로부터약 1만년전, 지구환경이오늘날과비슷한모습으로변화하는과정속에발전한문화로농경과가축사육을통한생산경제의시작과토기의등장을주요한특징으로한다. 한반도에서신석기문화가시작된것은기원전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35
6,000년전경이며, 청동기가등장하는기원전 1,500여년경까지지속된것으로알려져있다. 우리나라의신석기문화는빗살무늬토기로대표되며강가나바닷가에움집을짓고모여살면서어로, 사냥, 채집생활을하였다. 신석기시대움집은먹거리를따라지속적으로이동하던종전의생활방식에서탈피해사람들이일정한지역에한시적혹은장기간거주를했음을보여준다. 하지만우리나라의신석기시대에는아직까지본격적으로농경이이루어졌다는증거는확실하지않고대체로바다나하천가를중심으로어로와수렵, 채집으로생계를유지했다고보는것이일반적이다. 인천은이처럼어로와사냥, 채집생활을주로하는한반도의신석기인들이거주하기에최상의조건을갖추고있다. 수심이얕은바다와 100여개가넘는섬, 섬주변과연안에발달한갯벌은중요한식량자원인해산물을손쉽게얻을수있는천혜의장소였다. 이러한인천의자연환경은신석기인들에게적절한생활근거지를제공할수있었고, 그결과우리나라신석기문화의보고 ( 寶庫 ) 를이루게되었다. 현재인천지역신석기시대유적의수가정확하게파악된적은없지만대략지금까지확인된것만도 100여개소가넘으며특히영종도 ( 삼목도와용유도포함 ) 와무의도를중심으로많은유적이분포한다. 인천에서신석기시대유적에대한조사는 1970년대백령도말등패총과북도면시도패총에대한발굴을시작으로 90년대공항건설로인해영종도에대한조사가이루어지기시작하면서점차증가하였다. 하지만이때까지만해도산발적인조사로인천지역의신석기문화를이해하기위한자료가매우부족한실정이었다. 신석기시대유적은보통조개무지와화덕자리 ( 爐址 ), 집자리 ( 住居址 ) 등이있는데 2000년대초반까지만해도인천에서발견 36 인천역사 (8 호 )
되는신석기시대유적은조개무지와야외화덕자리뿐이었다. 당시의실제생활모습을가장잘보여주는집자리가거의없어인천지역의신석기문화를이해하는데한계가있었다. 조개무지와화덕자리도중요한가치를지니고있지만장기적으로사람들이거주했다기보다는일시적으로머물렀음을보여주는증거라할수있다. 따라서예전에는신석기시대인천지역에는오랫동안사람들이머물며생활했던것이아니라내륙에서해안가로이동하면서잠시머물렀던장소로보는것이일반적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중반이후삼목도유적을비롯해대규모집자리유적이발견되면서새로운양상이드러나고있다. 여기에서는지금까지인천에서발굴된조개무지와집자리, 화덕자리등을살펴봄으로서신석기시대인천의생활모습을이해해보도록하겠다. 패총은조개류를채집하여먹고버린것이쌓여서형성된유적으로그속에는조개껍질뿐만아니라각종유물과유기물등이들어있어당시자연환경과생활모습을연구하는데중요한자료로이용되고있다. 패총발굴은주로연평도와영흥도에서이루어졌는데그가운데연평도패총이규모와내용면에서주목할만하다. 대연평도까치산패총은 8) 대연평도남서쪽에자리한패총이다. 출토된유물은토기와석기, 골각기등인데이중토기가대부분을차지한다. 토기의기형은크게심발형토기와발형토기등이며바닥은뾰족바닥과편평한바닥이공존하고있다. 까치산패총에서는가오리뼈가일부나오는것을제외하고어류뼈가없으며야외화덕자리에서사슴과새뼈가출토되는것으로보아이패총을형성했던사람들은주로패류의채취와수렵을 8)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대연평도까치산패총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37
통해생계를유지했던것으로추정되고있다. 사진 2. 연평모이도패총 연평모이도패총은 9) 대연평도의부속도서인모이도에위치한다. 이패총에서출토된토기는뾰족바닥의심발형토기나호형토기등이있는데토기의문양은바로인접한까치산패총과구성이달라두유적이서로다른집단에의해조성되었을가능성이있는것으로파악되고있다. 이밖에어망추를비롯한석기가다수출토되었다. 이밖에소량의사슴뿔과함께석촉이발견되었는데아마도이패총을조성한사람들이어로와수렵을병행했었을것으로추측된다. 한편패총안에서집자리 2기와야외화덕자리 8기가조사되었다. 집자리는패각층을파서만 9)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연평모이도패총 38 인천역사 (8 호 )
들었는데바닥에는점토를얇게깔아놓았고바닥중앙에는가장자리를깬돌을돌려만든화덕자리를설치해놓았다. 이집자리는가장자리에벽석이존재하고정연한형태의화덕자리로미루어보아임시적인거주를위한것이라기보다는상당기간패각채취를위한근거지로사용했던것으로추정되고있다. 다음으로집자리는당시사람들의생활모습을직접적으로살펴볼수있는유적으로중요한의미를지니고있다. 모이도패총과같이패총내에서도발견되지만보통해안가구릉지대에서주로확인된다. 집자리는몇기가모여있는것에서부터 50여기가달하는대규모마을도있다. 지금까지인천에서발견된집자리의상당수는영종도에밀집되어있는데이는영종도가식수나자원이풍부해정착취락이자리잡기좋은조건을가지고있었기때문일것으로추정되고있다. 아마도신석기인들은영종도를거점으로해안가나주변의소규모도서에일시적으로왕래하면서식량과기타자원을획득했던것으로보인다. 10) 영종도는들유적 11) 은인천도서지역에서는최초로주거지가확인된유적으로그동안서해도서지역에서늦은시기까지정착취락을형성하지못했다는의심을해결한유적이다. 바닷가에인접해있는해발 45~50m의낮은구릉사면에자리하며집자리 1기, 적석유구 2기, 회장형 ( 回字形 ) 방형구 ( 方形溝 ) 1기, 구덩이유구 9기가조사되었다. 집자리는평면형태가방형이며한변의길이가 4m 가량이다. 집자리의네귀퉁이에는기둥구멍이설치되어있다. 한편구릉사면에원형의적석유구를중심으로 回 자형의도랑이둘려있는유구가발견되었는데신석기시대유구로서는최초로확인된것이다. 이유구는그형태 10) 김장석 양성혁, 2001, 신석기시대편년과패총이용전략에대한새로운이해, 고고학보 45 호 11) 서울대학교박물관, 2009, 인천삼목도 Ⅲ 유적발굴조사보고서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39
로보아제의 ( 祭儀 ) 와관계된시설로추정되고있어신석기시대연구에귀중한자료가되고있다. 한편삼목도동쪽해안에솟아있는해발 121m의구릉의말단부에서집자리 17기, 구덩이유구 1기, 야외화덕자리 3기가조사되었다. 집자리내부에는구덩이로된화덕자리를갖추고있고, 네귀퉁이에는기둥구멍이설치되어있다. 출토유물로는토기류이외에돌화살촉갈돌등이발견되었는데그물추와같은어로도구는발견되지않은점이특징적이다. 삼목도 Ⅲ유적으로명명된이유적은서해도서지역에서확인된최초의본격적인대규모정착취락이다. 사진 3. 삼목도 Ⅲ 유적 4 호주거지 사진 4. 삼목도출토빗살무늬토기 을왕동유적 12) 은조개무지 1개소와집자리 6기, 구덩이유구 2 기가조사되었다. 집자리의형태는방형, 장방형, 원형등으로다양하다. 집자리안에는화덕자리가위치하고다수의기둥구멍이확인되었다. 집자리의구조적인특징이내륙지역신석기시대주거지와유사한것으로보아내륙에서확산되었을것으로여겨지고있다. 이유적은집자리는많지는않지만상당기간거주를위한소규모취락유적으로평가되고있다. 12) 중앙문화재연구원, 2006, 인천을왕동유적 40 인천역사 (8 호 )
운서동유적은 13) 백운산의남서쪽에자리한해발 30~50m의낮은구릉지대에자리잡고있는데약 50여기의집자리를비롯해구덩이, 야외화덕자리가확인되었다. 이유적은중부서해안지역에서지금껏발견된신석기시대취락유주거지들가운데최대규모다. 출토유물로는토기편을비롯해갈판, 갈돌, 간돌돌칼, 숫돌, 그물추, 간돌화살촉등다양한석기류들이있다. 이밖에도중산동과운북동일원에서도집자리들이조사되고있어영종도전역에걸쳐신석기시대취락이형성되어있었음을알수있다. 한편화덕자리는조개무지와함께최근까지가장많이발견된유적이다. 주로영종도일대에서발굴되었는데송산유적이나삼목도유적, 용유도의남북동유적등이있다. 이유적들은집자리유적과는달리식량획득이나다른목적을위해한시적으로작업을하기위한것으로보여진다. 송산유적 14) 은영종도남쪽해안의모래언덕에서발견된유적으로 90년대중반까지영종도지역의신석기문화를대표했었다. 발굴결과불을지펴음식을조리하기위한야외화덕자리 21 개가조사되었다. 화덕은자갈과깬돌을원형또는타원형으로깔아만들었으며, 이곳에서빗살무늬토기를비롯하여갈돌, 숫돌, 가락바퀴, 화살촉등다양한유물이출토되었다. 화덕주변에서집자리가발견되지않은것으로보아일시적으로조개류등의음식물을조리 가공하였던장소로추측된다. 용유도남북동유적 15) 은용유도북쪽해안가에서조사된유적으로 82기의야외화덕자리가확인되었는데서해안최대규모의야외화덕자리유적으로평가받는다. 남북동유적의화덕자리는 13) 한강문화재연구원, 2008, 인천운서동신석기시대유적현장설명회자료 14)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1996, 영종도송산선사유적 15) 서울대학교박물관, 2006, 용유도남북동 을왕동 Ⅰ 유적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41
대부분작은석재를원형또는타원형으로모아쌓은형태로, 아무런시설이없는경우도있다. 주변에서소량의유물만출토되고있는것으로보아장기간거주보다는일시적으로이용이이루어졌던것으로보인다. 3. 고인돌왕국, 인천 일반인들에게선사시대유적가운데알고있는것을물어본다면아마도많은사람들이고인돌을꼽을것이다. 선사시대유적은대부분땅속에묻혀있기때문에이분야의전공자가아닌이상그모습을실제로접할기회는거의없기때문이며땅위에크고작은돌들이우뚝서있는고인돌의모습도사람들의시선과호기심을끌기에충분하다. 고인돌은잘알려진바와같이청동기시대무덤이다. 청동기시대는중국이나근동지역에서는문자기록이등장하고오늘날도시와국가의기초가만들어졌던것으로알려져있는시기이다. 청동기시대는구리에주석, 납등을섞어만든청동을도구로사용했으며신석기시대에시작된농경이본격적으로이루어지시작하면서, 정착생활이보편화된다. 그에따라집자리의규모도커지고, 해안가나강가에서내륙의구릉지대로생활무대가옮겨지게된다. 이처럼농경이본격화되면서생산력이증대되고이를바탕으로당시사회는점진적혹은급속한변화가이루어졌다. 사회구조의변화는고인돌과돌관무덤 ( 石棺墓 ), 독무덤 ( 甕棺墓 ) 과같은본격적인무덤을등장시키는등물질자료에서도많은변화를유발시켰다. 이와같은당시의생산력증대와물질적 사회적변화는정치체가형성과같은새로운변화의바탕이되었던것으로이해되고있다. 42 인천역사 (8 호 )
인천지역곳곳에청동기시대사람들의흔적이남아있는데이중대표적인것이바로고인돌이다. 인천의고인돌은강화도와서구대곡동을중심으로약 250여기가분포하고있는데한반도의고인돌최대밀집지역인전남지역에비할바는아니지만한반도중부지역에서는가장높은밀집도를보이고있다. 고인돌은지상에큰덮개돌이드러나있고그밑에고임돌 ( 支石 ), 무덤방이위치하는구조를가지고있다. 고인돌이라는명칭은덮개돌아래에돌을괴는형태에서비롯된것으로지석묘 ( 支石墓 ) 라고도한다. 고인돌은대부분무덤으로사용되었지만일부는집단의의식을행하는제단이나기념물로사용된것도있는것으로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는전국적으로약 4만여기가확인되어세계적으로가장많은고인돌이분포하는지역이다. 한국의고인돌은형태적특징으로크게탁자식, 기반식 ( 基盤式 ), 개석식 ( 蓋石式 ) 등으로구분된다. 탁자식은판돌로짜맞춘무덤방을지상에축조하고그위에돌을얹어놓은형태로북방식이라고도불리운다. 기반식은무덤방을지하에만들고그주위에고임돌을 4매에서 8매정도를놓고그위에덮개를씌우는형태로남방식이라고도하며, 개석식은고임돌없이지하에만든무덤방위에덮개돌을덮은형태를말한다. 고인돌에는간돌칼, 돌화살촉, 청동기, 토기류등이출토된다. 고인돌을축조하는것은운반과채석과정에서많게는수백명이필요한어려운작업으로, 당시로서는대규모토목사업에해당한다. 따라서고인돌축조가이루어졌다는것은많은수의인원을동원할정도의집단이존재를알려주는것이라는견해가많다. 인천에서가장고인돌이많이분포하는곳은강화도다. 지금까지조사된바에의하면강화도에는약 160여기의고인돌이분포한다. 강화고인돌의구조는탁자식과개석식이대부분이며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43
그중탁자식의비율이높다. 강화고인돌의대부분은고려산과별립산을중심으로삼거리, 고천리, 부근리, 망월리, 오상리, 교산리등강화북부지역에밀집되어있다. 이처럼강화도북부를중심으로대규모고인돌군이분포하는것은청동기시대강화도에일정규모의세력집단이형성되었던것을보여주는증거라고여겨지고있다. 강화고인돌을이야기할때빠질수없는것이부근리고인돌이다. 이고인돌은전형적인탁자식이며남한지역에서최대규모를자랑한다. 덮개돌은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이며무게가 52톤이넘는다. 덮개돌을받치고있는고임돌도길이 5m 너비 1.5m이고무게도왼쪽고임돌의경우 13톤에달한다. 이와같이부근리고인돌은거대한크기와무게가주변의고인돌과현저하게비교되고있어강화도에서고인돌을축조하였던집단을통합한유력자의무덤인동시에공동체의정체성확립을위한기념물의역할도하였을것으로이해되고있다. 사진 5. 영종도운서동유적 주거지 사진 6. 강화부근리고인돌 강화를제외한인천내륙과도서지역의고인돌은그숫자나밀집도가강화도에비해높지않았기때문에별다른주목을받 44 인천역사 (8 호 )
지못했다. 그러나서구대곡동고인돌군을비롯해내륙지역에도강화도와비교할만한고인돌문화가형성되어있었다. 인천내륙의고인돌은서구대곡동가현산과문학산일대를중심으로분포한다. 그중서구대곡동고인돌군은지금까지조사결과 70여기가확인되어내륙지역에서는가장많은고인돌이밀집하고있다. 문학산일대의고인돌은도시화의진행으로지금은그흔적을찾을수는없지만학익동에 7~8기, 주안동 3기, 문학동에 1기등모두 12기의고인돌이분포하고있던것으로알려져있다. 이중학익동고인돌 2기가현재인천시립박물관에이전 복원되어있다. 이밖에무리를이루지는않지만영종도와백아도에서각 1기, 덕적도에는 3기의고인돌이분포하고있어도서지역을포함한인천전역에고인돌이분포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밖에인천에는고인돌과함께청동기시대인천의모습을알수있게해주는유적들이속속발견되고있다. 서구원당동과계양구동양동에서수십기의집자리가발굴되었고문학동에서도도랑 ( 溝 ) 유구와집자리가조사되었다. 이밖에강화하점면과영종도중산동일대에서도청동기시대집자리조사됨에따라인천전역에걸쳐청동기문화가전개되었음을알수있다. 이러한청동기시대의활발한역사적활동은미추홀로대표되는인천지역의새로운역사전개에밑바탕이되었던것으로여겨진다. 4. 백제와인천 인천은백제의건국과관련하여미추홀 ( 味鄒忽 ) 라는이름으로역사상에인천이처음등장한다. 한반도는기원전 3~2세기무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45
렵중국으로부터철기문화가한반도에유입되면서삼한을중심으로하는정치체가형성되기시작했다. 인천지역은삼한중마한 ( 馬韓 ) 의영역에해당하는지역이다. 이설이제기되고있지만인천은기원전 18년주몽의아들로전하는비류비류 ( 沸流 ) 가내려와정착한미추홀로인식되어왔다. 하지만그동안미추홀의존재를구체적으로뒷받침할만한유적과유물은없다고할수있다. 미추홀에관한문제를차치하고서라도근래까지인천지역에서백제와관련된흔적도찾아보기어려운것이사실이다. 다행히도최근인천전역에이루어진여러도시개발사업의과정에서백제의흔적 16) 도점차확인되고있지만아직인천의백제문화를구체적으로살펴보기에는부족함이있다. 따라서지금으로서는최근조사된유적을통해서백제시대인천의모습을상상해보는정도에만족할수밖에없다. 지금까지인천에서조사된백제관련유적은무덤과패총, 가마, 움집등으로다양하다. 지난 2003년인천계양구동양동에서는인천지역에서는최초로백제무덤이발굴되었다. 이곳은동양택지개발사업지구에속해있는데현재는택지조성이완료되고아파트가들어서있다. 동양동유적은 17) 계양산동쪽말단부에해당하는해발 15~17m의낮은구릉성대지에위치하는데이곳에서청동기시대집자리와함께백제 ( 원삼국 ) 시대주구묘 (( 周溝墓 ) 1기와토광묘 ( 움무덤 ) 4기가발견되었다. 주구묘는구덩이로된토광묘 ( 움무덤 ) 둘레에방형또는 ㄷ 등일정한형태의도랑 ( 周溝 ) 을설치한무덤의형태를말하는데주로충청해안과내륙, 전라도연안지역에서많이확인된다. 주 16) 여기서는백제유적은본격적인국가단계체로성립된정치체로서의백제뿐만아니라초기백제의성립과성장과관련된마한의유적을포함한다. 17)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9, 인천동양동유적 46 인천역사 (8 호 )
구묘는백제의중심지인한강유역의움무덤에는도랑이없기때문에마한과관련된것으로이해되고있다. 주구의기능은물을담거나봉토를조성하기위해흙을채취하기위해설치되었다는등여러견해가있다. 주구묘가사용된시기는아직분명하지않은데기원이전부터출현되었을가능성이높은것으로알려져있으며지역에따라차이가있지만기원후 3~4세기경까지조성된것으로파악되고있다. 동양동유적주구묘의규모는남북 16.2m, 동서 10.4m이며주구의최대깊이는 0.6m다. 주구의평면형태는 ㅁ 자형으로추정되는데그안에서매장주체부는확인되지않았다. 이는매장주체부가지하가아닌지상에설치되었기때문인것으로판단된다. 주구안에서는적갈색연질발과소량의연질토기편이수습되었는데제의와관련이있는것으로추정된다. 토광묘는길이 220~290cm, 폭 104~114cm로, 평면형태가말각장방형이며묘광과목관사이에는보강토로충진되어있다. 각무덤에서는타날문단경호, 철도자 ( 刀子 ) 등이출토되었으며이가운데토광묘 1기는인천시립박물관에이전복원되어있다. 사진 7. 동양동유적주구묘 사진 8. 불로동유적토기소성유구 한편동양동유적에이어최근인천서구연희동에서주구묘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47
13기가새롭게조사되었고 18) 영종도운서동에서도 3기가조사됨에따라 19) 생각보다인천지역에광범위하게주구묘가분포했음을알수있다. 이가운데연희동에서발견된유적은 2014년아시안게임주경기장건설부지에대한발굴조사에서존재가확인되었다. 아직최종조사결과가나오지는않아자세한내용은알수없지만무덤들은대략기원후 2~3세기경에조성된것으로파악되고있다. 이유적들은그동안인천지역에서는확인되지않았던초기백제시대에해당하는유적들로인천지역백제문화의실체와문화상을살펴보는데중요한자료가될것으로보인다. 서구불로동에서는백제시대대옹 ( 大甕 ) 을구웠던것으로추정되는가마와수혈유구 ( 竪穴遺構 ) 가조사되었다. 20) 조사결과총 14기의유구가확인되었는데이중백제시대유적은소성유구 1기, 수혈유구 11기이다. 가마로추정되는유구는길이 5m, 너비 2m의평면형태가배모양 ( 舟形 ) 이다. 유구는풍화암반층을굴토해조성하였는데상면의지붕시설은현재모두깎여흔적이없는상태다. 조사과정에서삼국시대토기편과기와편이출토되었지만바닥면에서는대형옹편들이출토되어대옹을소성했던가마였던것으로판단된다. 이와같은백제시대토기생산유적은그동안인천연안지역에서는조사예가거의없었던것이어서주목된다. 수혈유구는모두 11기가조사되었으며평면장방형과원형으로구분된다. 장방형수혈은모두 5기이며수혈의규모는가로세로가각각 3m 이상이며내부에서는다량의삼국시대토기편 18) 서경문화재연구원, 2010, 2014 년인천아시아경기대회주경기장건립부지내유적발굴조사 3 차지도위원회자료집 19) 중앙문화재연구원, 2009, 인천운서동유적 20)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7, 인천불로동동유적 48 인천역사 (8 호 )
과목탄및소결흔적이노출된다. 원형수혈은모두 6기로지름 1m 내외의소형이다. 내부에서는장방형수혈과마찬가지로삼국시대토기편과목탄, 소결흔이확인되는데장방형수혈에비해토기편이상대적으로소량출토되는차이를보인다. 이외에도서지역에서는강화교동대룡리와서구장금도에서수혈유구와패총이조사되었다. 이가운데대룡리유적 21) 은강화교동도의남쪽해안가에위치하고있는데. 과거에는바닷물이드나들었던갯벌위에형성된유적으로패각밀집지역 2개소와화덕자리 11기, 수혈 15기가조사되었다. 패각밀집지역은갯벌에형성된갯고랑내에조개와굴껍질이유기되어퇴적되어있는형태로내부에서토기, 골각기등다양한유물이출토되었으나교란이심하게일어나층위별로유물의선후관계가확인되지않는다. 아마도유적이위치한곳이해수의영향을받는갯벌인까닭에유적이형성되는과정과, 형성이후에바닷물의영향으로상당부분교란이일어난결과로여겨지고있다. 노지와수혈유구는형태가대부분일정한정형성을띠고있지는않으며정확한성격도파악되지않는다. 노지의경우장기간불의영향을받은흔적은확인되지않아재와목탄이깔려나오는정도로해안가에일시적으로불을피워해산물을조리했던흔적일것으로추정된다. 이유적이조성된시기는출토유물로보아그범위가넓은데대략 2~3세기경중심시기에해당하는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처럼도서지역은인천지역에서아직발굴조사는이루어지지않았지만토기산포지등백제관련유적의밀집도가가장높은곳으로바다를배경으로하는인천의지리적특성과관련해향후체계적인조사가이루어지기를기대한다. 21)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0, 강화교동대룡리유적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49
사진 9. 장금도패총토층상태 사진 10. 대룡리유적출토투각무늬토기 5. 또하나의고려 ( 高麗 ) 수도, 강화 잘알려져있는바와같이강화는대몽항쟁기에 39년간고려왕조의임시수도로자리했던곳이다. 역사적으로외부의침략으로피난이아닌, 수도를옮기는것은그예를찾아보기어렵기렵기때문에강화가갖는의미가적지않다. 아울러고려문화의중심인개성을직접방문하기어려운상황에서고려의중앙문화를가장잘이해할수있는지역으로서중요성을갖고있다. 그러나정작강화에서고려의흔적을찾기는쉽지않다. 있다고하더라도상다수가구전으로전해져오는경우가많아실질적으로당시의모습을살펴볼수있는경우는많지않다. 지금의고려궁지에대한수차례의발굴조사에서고려궁궐과관련된자료가확인되지않고있고대몽항쟁의상징이었던팔만대장경을조판한장소로알려진선원사지도위치에대한논란이끊이지않고있는것이대표적인예라할것이다. 하지만불행중다행으로최근 10여년동안희미하게남아있던강화에서의고려의흔적이여러발굴조사를통해점차모 50 인천역사 (8 호 )
습을드러내고있다. 그가운데가장대표적인것은고려왕릉으로대표되는당시의무덤들이다. 고려의왕릉은대부분개성주위에위치해있는데남한에서는유일하게강화에서만볼수있다. 이밖에강화에는대략 20여개소이상의고려시대무덤떼가분포한고있는데 22) 관련유적이많지않은강도시대강화의모습을이해하는데중요한자료가되고있다. 강화도의왕릉은석릉 ( 碩陵 ) 홍릉 ( 洪陵 ) 가릉 ( 嘉陵 ) 곤릉 ( 坤陵 ) 등모두 4기이다. 지난 2001년과 2006년홍릉을제외한 3기에대한발굴조사가이루어져그실체가밝혀졌다. 23) 고려 21대희종 (1169~1237) 의능인석릉은진강산남쪽사면에자리하고있으며지난 2001년남한지역에있는고려왕릉가운데최초로발굴되었다. 희종은신종의맏아들로최충헌의힘을입어집권했으나 1211년내시왕준명등이최충헌을제거하려다실패후강화도와영종도로유배되었다. 이후최우가정권을장악한후복위음모설에휘말려 1215년교동으로유배되었고다시무인정권과화해를추진했으나 1227년다시복위음모에휘말려강화와교동으로유배되었다가 1237년영종도에서승하한뒤석릉에장사지내었다. 석릉은동서 20.5m, 남북 31m의장방형묘역을조성하고, 석단을이용 5단으로구획한뒤가장위에봉분이자리하고있다. 시신이안치되는지하석실은가로 3.3, 세로 2.2m의규모로, 남쪽벽을제외한 3벽은깬돌을이용해쌓았다. 입구인남벽은바닥에문지방석과양쪽에기둥돌을세운뒤판석으로마감하였다. 바닥은별다른시설을하지않고자연바닥을그대로사용하였으며바닥중앙에장대석으로외곽을돌린뒤그안에흙 2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江華의高麗古墳 지표조사보고서. 23)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강화석릉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강화고려왕릉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51
을채워넣어관대를설치하였다. 석실은이미도굴된상태였으나접시, 잔, 대접등의청자와목관에사용되었던관정, 금박편, 그리고구슬, 동전등이출토되었다. 석릉에이어지난 2006년에곤릉과가릉이차례로조사되었다. 이가운데곤릉은고려 22대강종의비인원덕태후 ( 元德太后 ) 유씨의능으로진강산동쪽기슭에자리하고있다. 원덕태후는고종 26년 (1239) 승하한후이곳에안장되었다. 사진 11. 곤릉무덤방 사진 12. 능내리석실분출토구슬 능의구조와시설은석릉과큰차이가없고오히려석릉에비해일반적인고려왕릉의축조방식에더충실하다. 곤릉의가장큰특징은묘역최하단에정자각으로추정되는건물터가있다는점인데정자각은고려시대왕릉의기본적인구성요소이지만강화도에서는곤릉에서만확인되었다. 이건물터는 2개로구성되는데하나는동서 10m, 남북 5m의장방형이며 ( 정전 ) 다른하나는이건물지의중심부에동서 12m, 남북 10m의다른건물지 ( 배전 ) 가덧대인모습이다. 정전은정면 3칸의규모이며측면의규모는파악되지않는다. 정전내부는초석주변을중심으로전돌을깔았다. 석실은석릉의그것과비교했을때전체적인구조는같지만세부형태에서약간의차이가있다. 입구의석재문 52 인천역사 (8 호 )
안쪽으로목재를이용해만든별도의문을설치했던것으로추정되며바닥에는전돌을깔았다. 한편벽면에는전반적으로회칠을했던것으로보이나대부분탈락이된상태였다. 석실은이미도굴된상태였으나개원통보를비롯한동전과목관에사용되었을것으로추정되는금동장식품과철정등이출토되었고, 외부에서자기와기와류등이다수수습되었다. 가릉은고려원종의비인순경태후 ( 順敬太后 ) 김씨의능으로진강산서쪽기슭에위치한다. 순경태후의정확한사망연대는알려져있지않은데, 충렬왕을출생한후사망했으며 1244년가릉에안장된것으로추정되고있다. 사망당시태자비신분이었는데원종 3년에정순왕후, 충렬왕즉위후순경태후로추존되었다. 가릉은일반적인고려왕릉과달리석실이지상에설치되어있는점이특징이다. 석실주변으로동서 9m, 남북 8m 크기의방형의형태로깬돌을쌓아올려지상에위치한석실을보강하였는데이위로흙을덮어인공적인언덕을형성하였을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밖에석실자체의형태와구조는석릉이나곤릉과다르지않다. 이와같은가릉의지상식석실은무덤이입지한지형적특성에서비롯된것으로추정된다. 즉, 석릉과곤릉은능선의경사면을따라단을형성하고최상단에석실을축조하였는데이와같은묘역구조는석실을묘역의가장높은곳에설치하고경사면을최대로이용하도록석단을설치함으로서자연스럽게왕릉으로서위엄을보일수있는효과를낼수있다. 그런데가릉이입지한곳은완만하게평지를이루는곳이기때문에석릉과같이인위적으로단을형성하고석실을안치하기어려운곳이다. 따라서석실을지상에설치한뒤주변에적석기단을구성하고그위를흙으로덮어규모를크게함으로서지형적인약점을보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53
완하는동시에왕릉으로서위엄을내고자했던것으로여겨진다. 가릉석실벽면에는회칠을한것으로조사되었는데붉은색벽화일부가확인되기는하였으나벽화의내용은파악되지않았다. 이밖에석실은최소 2차례이상도굴되었던것으로밝혀졌으나청자와동전 86점과은제경첩과나비장식, 구슬, 철정, 장식품등이출토되었다. 한편가릉에서북동쪽으로 70m 떨어져있는능내리석실묘도 2006년발굴조사되었는데 24) 조사결과누가묻혔는지는알수없지만묘역과석실의규모가크고전형적인고려왕릉의축조방식을따르고있어피장자의신분이매우높았음을추정할수있다. 능내리석실분에서는동전과구슬, 관대장식용으로추정되는금속장식품과철정이출토되었다. 이가운데봉황문과당초문을타출한은제도금장식들이출토되어주목된다. 한편가릉의석실괴임돌로사용된기와가능내리석실묘묘역에있는건물지에서출토된기와와동일한시기를보이고있기때문에능내리석실묘가가릉보다앞서축조되었을것으로여겨지고있다. 아울러능의규모와형태, 부장품을고려할때이석실묘의피장자가가릉보다신분이높았을가능성이있을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밖에왕릉이외에최근고려시대강화도를이해할수있는중요한자료로고려시대중성 ( 中城 ) 에대한발굴조사이루어져주목된다. 25) 중성은강화천도기도읍에쌓은 3중성가운데하나로알려져있는성곽인데지금의강화읍을중심으로그외 24) 國立文化財硏究所, 2007, 앞의책 25) 인하대학교박물관, 2009, 강화군창리 ~ 신정간도로확 포장공사구간내강화중성유적발굴조사약보고서 중원문화재연구원, 2009, 인화 ~ 강화도로건설공사구간내 J 구간문화재발굴조사 1 차지도위원회자료집 54 인천역사 (8 호 )
곽을원형으로둘러싸고있다. 발굴결과성벽은하단부에기초석렬을쌓은뒤그사이를판축으로중심토루를쌓아올리고그위에외피를덮는구조로되어있다. 자세한내용은아직최종조사결과가나오지않아알수는없는상태로중성은고려시대강화와관련된매우중요한유적이기때문에향후심도있는조사와연구가이루어진다면당시의모습을이해하는데많은도움이될것으로기대된다. 6. 인후지지강화 인천은조선의수도인한양으로이어지는뱃길과관문에해당되어중요시되었던곳이다. 특히강화도는왜란과호란을겪으면서유사시외적이침입으로부터왕실과조정이피난하여위기를극복할수있는보장처 ( 保障處 ) 로서인식되면서왕실의행궁 ( 行宮 ) 과외규장각 ( 外奎章閣 ) 등국가주요시설이들어서고내륙으로부터강화를방어하기위한외성, 돈대등다양한군사시설의건설되었다. 최근강화행궁과외규장각, 조해루터 ( 朝海樓 )), 진해루터 ( 鎭海樓 ), 계룡돈대, 강화산성남장대등이발굴조사가이루어져그동안문헌으로만알수있었던조선시대강화의모습이조금씩우리눈앞에드러나기시작했다. 조선왕실의보장처로강화가가지는위상은강화행궁으로상징된다고할수있다. 강화행궁은 1631년처음설치되었다가 1637년병자호란당시화재가난것을 1651년복구를했다. 정조 5년 (1781) 에는강화행궁안에왕실의도서를보관하는규장외각을창건하였다. 강화행궁은현재고려궁터로비정되어있는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55
곳에위치한곳에자리하는데강화부궁궐도를통해대략적인모습을살펴볼수밖에없었다. 1995년부터이곳에대해서수차례발굴조사가이루어졌는데 26) 그결과강화행궁과규장외각터가확인되었다. 사진 13. 강화행궁터발굴조사후전경 사진 14. 조해루터전경 조해루와진해루는모두강화외성에설치된관문으로강화국방유적정비사업의일환으로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조해루와함께월곶진터에대한조사도같이이루어지면서강화에설치되었던진 보의모습이처음확인되었다. 27) 강화외성 ( 外城 ) 은내륙으로부터강화를방어하기위해염하를따라설치되었다. 외성의축조는숙종 17년 (1691) 부터본격적으로시작되었고, 이후에도지속적으로성벽에대한증축과보수가이루어졌다. 당시외성은강화도동쪽염하변의옥포에서부터초지까지약 17km에걸쳐토성으로축조되었고, 숙종 44년 (1718) 월곶돈에서휴암돈까지구간이연장되었다. 이후영조 18년 (1742) 강화유수김시혁 ( 金始爀 ) 의건의에따라전성 ( 磚城 ) 으 26) 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09, 도로건설공사구간내 J 구간문화재발굴조사 1 차지도위원회자료집 한림대학교박물관, 2003, 강화조선궁전지 ( 외규장각지 ) 27) 진과보는군사적행정단위로서첨사 ( 종 3 품 ) 나만호 ( 종 4 품 ) 이파견된곳이진 ( 鎭 ) 이며, 별장 ( 종 9 품 ) 이파견한곳은보 ( 堡 ) 이다. 56 인천역사 (8 호 )
로개축되었는데이때쌓은전성의곳곳이무너지자영조 29년 (1753) 에다시석축으로개축하였다. 외성의전구간에는 6개의문루가설치되었는데월곶진의조해루, 진해사 ( 鎭海寺 ) 의복파루 ( 伏波樓 ), 제물진의진해루, 용진진의참경루 ( 斬鯨樓 ), 광성보의안해루 ( 按海樓 ), 덕진진의공조루 ( 控潮樓 ) 등이었다. 이가운데월곶진과조해루터에대한발굴결과그동안고지도에서나와있는조해루의기초가확인되었고진터내부에건물지도조사되었다. 조해루는기단을포함한석축의대부분이파괴된상태로문루의내, 외벽의일부만남아있다. 문루의북쪽에는경사지에축대를쌓고 2개의건물지가위치하고있는데현재기단일부와적심시설만남아있다. 이밖에문루와문루북쪽의월곶돈대사이에서외성의흔적이확인되었다. 월곶돈대에인접해서 2개의크기가석렬이지나가는데시기차이를두고다시축조되었던것으로파악되고있다. 외성석렬은폭이 90~120cm 이며가공된화강암석재를이용해축조하였고내부에작은깬돌을채워넣었다. 28) 한편강화도의군사시설가운데가장대표적인것으로돈대를들수있다. 돈대는외적의움직임이나침입을관찰하여경보하거나침입하는적의공격을방어하기위해해안가또는산지등전망이좋은곳에설치하는군사시설물이다. 중국의요동지방에서기원한것으로알려져있으며우리나라에는숙종때강화도에본격적으로축조되었다. 당시축조된돈대는 48개인데, 이후영조때까지 5개의돈대를추가로설치하였고, 19세기중엽염하 ( 鹽河 ) 의방비를강화를위하여광성보내에용두돈대를축조함으로서강화도에총 54개의돈대가축조되게되었다. 강화도의돈대는해안을따라축조되었는데내륙으로부터의 2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강화월곶진지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57
적의침입을방어하는데중점을두었기때문에육지와마주한강화동쪽과북쪽해안에집중적으로설치되었다. 각돈대는대부분원형또는방형의형태로이루어져있지만반월형이나타원형의돈대도있다. 돈대의하층에는 3~4기의포좌를두고위층에는치첩을쌓아사격을할수있도록하였다. 돈대의내부에는병사들이머무를건물이설치되어있었으나현재는흔적이남아있지않다. 돈대가운데화도돈대, 초루돈대, 계룡돈대등 3개의돈대에대한발굴조사가이루어져구조와형태가확인되었다. 29) 이중계룡돈대는인천광역시기념물제22호로지정되어있는데축조년대를정확히알려주는명문이기록되어있어귀중한자료가되고있다. 사진 15. 강화외성 ( 월곶돈대주변 ) 사진 16. 계룡돈대내부움집터 계룡돈대는간척지평야의끝에위치한얕은구릉위에위치한다. 이돈대는형태가전체적으로는방형이지만북서쪽끝이좁은형태이다. 돈대의규모는북서 ~ 남동쪽이 33m, 북동 ~ 남서가 22m가량이며높이는 2~4m 내외이다. 돈대의벽체하단부의면석에는 강희십팔년사월일경상도군위어영 ( 康熙十八年四月日慶 29) 한울문화재연구원, 2010, 강화국방유적계룡돈대 58 인천역사 (8 호 )
尙道軍威御營 ) 이라는명문이새겨져있는데강희 18년은 1679 년으로돈대를설치한년대를명확히알려주고있다. 발굴을통해돈대벽체의축조구조가확인되었는데경사가급한동벽의경우벽체하단부에수단의석재를쌓아성벽을보강한보축이발견되었다. 아울러돈대내부에움집이발견되었는데그동안돈대가운데규모가작은경우는돈사를세우지않고움막을지었던것으로추정하였는데실제로발굴조사에서확인되었다. 한편강화북쪽의초루돈대에서는그동안알려지지않았던명문이새롭게확인되었는데 30) 문서쪽벽면에서 강희오십구년사월일 전별장최 형비장교련관장준영전사과금 ( 康熙五十九年四月日 前別將崔 螢婢將敎鍊官張俊英前司果金 ) 이라고돈대관련자관련자직책과이름이새겨져있어계룡돈대의명문과함께돈대축조과정을이해하는데좋은자료가되고있다. 이밖에현재강화읍을둘러싸고있는강화산성에대한조사도이루어졌는데최근남산정상에설치되었던남장대와남산봉수대가발굴되었다. 강화산성 ( 사적제132호 ) 은강화도행정의중심지인오늘날의강화읍관청리와신문리일대를방어하는성으로강화천도기에처음축조되었다고알려져있으나아직까지당시흔적이전혀확인되고있지는않다. 병자호란때성곽이파괴된것을 1677년강화유수허질 ( 許秩 ) 이대대적인개축을하였고 1711년성곽을확장하면서강화남산을포함하였고지금의모습에이르게되었다. 남장대는전쟁또는군사훈련시에성내의군사들을지휘하기위해대장이자리하는누대 ( 樓臺 ) 로강화북산에는북장대가 30)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강화의국방유적 2. 발굴유적으로보는인천 59
있었던것으로알려져있다. 남장대는고지도에서그위치와규모를짐작해왔는데최근발굴조사가이루어졌고 31) 그결과를토대로복원되었다. 남장대터에대한조사결과, 이곳에서건물지 2개소와용도미상유구 1가발견되었다. 건물지유구는자연암반위에단을이루어조성되었는데현재까지는 4단까지확인되고있다. 1단과 2 단은자연암반위에암갈색사질토층과그위에명황색사질토층을다진흔적이확인되었고, 단경계에는잡석열이노출되었다. 3단은장대석을이용하여기단을조성하였고장대석내부바닥에는전돌이깔려노출되었는데전돌사이에회를발라시설하였다. 3단에는건물이있었던것으로판단되는데 ㅁ 자형평면으로정면에서볼때가운데 1칸은방형초석을사용하였고, 좌우측면에붙은칸은팔각형초석을사용하여가운데 1칸을중심으로회랑식으로돌아가는형태로확인된다. 초석간거리는방형초석을사용한가운데칸이 2.78m, 회랑식으로돌아가는팔각형초석을사용한칸이 1.5m 정도이다. 4단은 3단전돌바닥위에전돌로쌓았는데현재까지는상부가교란되어 2단정도쌓은흔적이확인되었다. 한편추가조사지역동측끝에위치한산불감시탑주변에서장방형형태로석재와전돌을세워돌린흔적이조사되었는데봉수대의흔적으로판단되고있다. 31) 한울문화재연구원, 2009, 강화산성남장대지발굴조사지도위원회결과보고서 60 인천역사 (8 호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1. 들어가며 2. 강화목장의입지조건 3. 조선시대강화목장의설치와변화 4. 나오며 안홍민 ( 인하대대학원한국학과박사과정 )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1. 들어가며 전통시대의마정 ( 馬政 ) 은국방, 운송, 교통등에있어매우중요한부분을차지하였다. 좋은말을생산하는것은국가의안위와직결되는것이었다. 조선시대의경우에도전국각지에목장을운영하며양마 ( 良馬 ) 를생산하기위해노력하였다. 조선시대전국의여러목장중에서도강화목장은도읍한성인근에위치한, 양마를생산하는목장으로이름이높았고때때로최고의목장지였던제주목장과도비교되는수준이었다. 이처럼국가적으로중요하였던강화목장 ( 江華牧場 ) 의역사는강화지역의향토사연구에서빼놓을수없는중요한부분이라할수있다. 그러나지금까지강화의역사에대해우리는주로고려시대의항몽 ( 抗蒙 ) 천도지로서의역할이나조선시대관방시설, 19세기서양세력과의충돌등을중심으로생각해왔다. 반면전통시대마정의중요성과강화도의목장으로서의우수성등을생각해볼때강화목장이강화의향토사에서차지하는비중이적지않음에도강화목장에대한탐구는부족한실정이다. 1) 그러므로향토사의이해에있어새로운공간의확보라는측면에서볼때강화목장의역사를고구 ( 考究 ) 해보는것은의미있는작업이라생각된다. 이러한차원에서이글에서는조선시대강화목장의전반적인변화상에대하여살펴보고자한다. 먼저강화도에는어떠한이유로목장이들어서게되었으며, 그목장의변화는어떠했는 1)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1996 에서강화목장의치폐및관리, 운영등에대한전반적인내용을다루었다.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63
지알아볼것이다. 그리고변화과정에관련하여강화목장의활용방안을두고중앙조정에서의논의, 논쟁은어떤내용이었는지중점적으로알아볼것이다. 이를통해중앙에서바라본강화라는고장은어떠한곳이었는가를생각하는데에시사점을찾을수있을것이라생각된다. 이글이강화목장에대한향토사적이해를높이는데에작은도움이나마될수있기를바란다. 2. 강화목장의입지조건 우리나라의전통시대많은수의목장은주로도서지역에설치되었다. 물론내륙에설치된목장도있었지만목장이주로설치되었던곳은도서지역또는육지에서바다로튀어나온형태의곶 ( 串 ) 이었다. 목장을섬이나곶에설치한것은지리적인이점때문이었다. 섬은사방이바다로둘러싸여있으므로키우던말이나소가다른곳으로도망치기힘들고또외부에서맹수나도적이침범해올가능성도낮았다. 또한섬에목장을설치할경우목양하는말이나소가내륙의농경지를침범하는경우를줄일수있었다. 곶의경우도곶으로들어가는길목만잘관리하면섬과같은이점을누릴수있었다. 강화도역시섬으로서기본적으로목장이될수있는위와같은조건을갖추고있었다. 하지만단순히섬이라는측면만으로강화목장의이점을설명할수는없다. 그뿐만아니라강화도가다른곳에비해목장으로서활용될수있는우수한조건들이있었다. 그리하여강화도는전통시대당시최고의목장지로일컬어졌던제주도와도종종비교되면서, 우수한목장입지조건을갖춘곳으로평가되었다. 조선시대의강화도는목장지로서어떤이점을가지고있었을까? 2) 64 인천역사 (8 호 )
우선강화도는물과풀이풍부한고장으로말이서식하기에적합한환경을가지고있었다. 말의생존에가장기본적으로필요한것은말이섭취할수있는충분한물과풀이었다. 이러한기본적조건이갖추어진뒤에야목장으로활용될수있는것이었다. 강화는현재도전국에서가장우수한농토를보유한지역으로손꼽히고있을정도로기름진토양을자랑한다. 조선시대에도강화는물이풍부하고땅이기름져말먹이로쓸수있는풀들이많이자라나는곳으로인식되었다. 이미조선초기태종 ( 太宗 ) 이직접기름진토양과풍부히자라나는풀들로인해강화를목장으로서의우수한입지조건을갖춘곳으로평가하였다. 3) 또한세종 ( 世宗 ) 때강화도를시찰하고돌아온판부사 ( 判府事 ) 최윤덕 ( 崔潤德 ) 은강화도가물과풀이풍부하여마목장으로활용하기에좋다고임금에게보고했고, 세종또한이러한보고를기초로하여강화목장을파하라는경기감사의주장을거부하였다. 둘째로강화도는섬이었지만육지와매우가까이위치하였고이는목장지로서의이점으로인식되었다. 말은단순히목장에서키우는것으로끝나는것이아니었다. 말은육지로수송하여왕실이나관청, 각역로, 또는외국 ( 중국 ) 으로공급해야했다. 목장을섬에설치하면마필의도망이나맹수의공격에서안전할수는있었지만문제가되는것은바로외부로의수송이었다. 우리나라에서전통적으로가장우수한목장은제주도목장으로인식되었다. 제주도는이미고려시대몽골의간섭기부터목장으로활용되어온곳이었다. 그러나제주도는육지로부터너무멀 2) 이하강화도의목장입지상의이점은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마사박물관, 1996, 420 쪽에서언급한것에일부본필자의설명을추가한것이다. 3) 태종실록 권 29, 태종 15 년 1 월 21 일 ( 경신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65
리떨어져있어말을외부로수송하기에어렵다는단점이있었고, 조선초기당시제주도의이러한문제점을보완할수있는곳으로강화가언급된바가있었다. 다음은태종 15년임금이강화도의목장지로서의이점에대해언급한실록기사이다. 만약강화의땅으로온전히목장을만들수있다면제주보다못하지않을줄로나는안다. 제주는중국에서자주지칭 ( 指稱 ) 하지만, 그러나또바닷길이험하여오고가며사람이많이물에빠져죽으니, 갑자기급한일이생겨도이용하게되지못하면, 어찌제주만바라고염려하지않을수있겠는가? 4) 이와같이강화도는육지와거리가가까워제주에비해풍랑등을극복하고마필을수송하기에유리했던것이다. 셋째로강화도는한성부와상당히가까운거리에위치해있다는이점이있었다. 목장운영은국방, 교통, 외교등에있어서중요한기반이되는국가의사업이었다. 그러므로조선의중앙정부는각목장에감목관 ( 監牧官 ) 을파견하여목장에대한총책임을지도록하였으며감목관의밑에군두 ( 群頭 )-군부( 群副 )- 목자 ( 牧子 ) 로이어지는관리체계를조직하여목장의운영과관리에만전을기하려하였다. 그러나중앙정부는지방에만목장의관리감독을맡겨둘수는없었다. 중앙의사복시 ( 司僕寺 ) 등의마정담당관리들이왕래하며목장을살피기도하였고, 점마별감 ( 點馬別監 ) 이라는이름으로말의관리상태를점검하는관리가파견되기도하였다. 이러한점을통해볼때관리를파견하기에용이한곳에목장을설치한다면국가의관리감독이원활해질수있음을알수있다. 강화도는한성에서한강수로를이용해서쉽게접근할수있었고육로로도하루정도면닿을 4) 위와같음. 66 인천역사 (8 호 )
수있는가까운거리에있었으므로중앙의벼슬아치가관리감독하기에편리하면서도대규모의목장이들어서기에좋은환경을갖추고있었으므로목장으로서는최적의입지조건을가진곳으로인식될수있었다. 세종때의예조판서신상도강화도의목장으로서의적합성에대해논하면서강화가도읍으로부터멀지않아사복시의관리들이드나들기에편하다는점을지적하였다. 물론강화도의입지조건에대하여그이점만이언급된것은아니었다. 물과목초의경우오히려그조건이좋은것은아니라는지적도있었으며 5) 기후가비교적따뜻한제주에비하여강화도는겨울추위가심하므로제주와는달리겨울을대비하여마른풀을비축할필요성이있다는점도조정의논의에서제기되었다. 6) 하지만이러한지적도강화도가목장에적당하지않다는주장을위한것은아니었으며, 강화도는조선시대에제주도의목장기능을보완할수있는수준의우수한목장으로인식되었다. 그러나이러한입지조건이강화도목장의안정적인운영이나국가의전폭적인지원을보장한것은아니었다. 오히려강화목장의입지조건이나섬의지리적위치로인해강화목장은이후계속확대와축소 ( 폐지 ) 의논쟁사이에놓이게된다. 3. 조선시대강화목장의설치와변화 1) 강화목장의변화추이 강화도에언제처음목장이설치되었는지그시기에대해서 5) 세종실록 권 55, 세종 14 년 3 월 19 일 ( 무인 ). 6) 세종실록 권 30, 세종 7 년 11 월 8 일 ( 계묘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67
는정확히알수없다. 그러나태조이성계의팔준마 ( 八駿馬 ) 중하나이며지리산에서왜구토벌시에탔다는사자황 ( 獅子黃 ) 의산지가바로진강목장이었던것으로보아 7) 이미고려말기에목장이설치되었던것으로생각된다. 또한소화 ( 昭和 ) 7년 (1932) 에발행된강화의읍지인 ( 속수증보 ) 강도지 의목장조에따르면고려말에고려의 10목장중하나였던강음장 ( 江陰場 ) 8) 을폐하고강화도에부속되어있는매도 ( 煤島 ) 9) 로목장을이전한것으로나타나있다. 10) 이것들은단편적인기록이기는하지만이미고려말기부터강화목장은우수한마필을생산하던곳으로이름이알려지지않았나생각된다. 조선시대들어사료상강화목장이처음언급되는것은태종조로태종 5년 (1405) 매도목장에침입한호랑이를강화부사이정간 ( 李貞幹 ) 이포획하여상을준일이바로그것이다. 11) 그리고 8년이지난 1413년강화도길상산 ( 吉祥山 ) 에말 100여마리를방목하기시작하였으며, 12) 2년후에는강화에새목장이건설되었다. 13) 즉태종때부터강화도의목장이비로소본격적으로확대운영되기시작하는시기가아닌가생각된다. 매도장을비롯하여진강 ( 鎭江 ), 길상, 북일 ( 北一 ), 신도 ( 信島 ) 등 5곳의목장은이미태종대에운영되고있었으며, 14) 1417년에는모두 7) 숙종실록 권 46, 숙종 34 년 4 월 8 일 ( 경술 ) ( 속수증보 ) 강도지 목장조의기록에는태조의팔준마중하나는 매도장 의품종이라고하여, 위의기록과는차이를보인다 ( 이형상의 강도지 와는다른책으로, 이하구분을위해 속수증보 라는표현을제목앞에붙였다.). 8) 황해도강음현에위치했던목장 9) 매음도 ( 煤音島 ) 라고도불렸으며현재의석모도이다. 10) ( 속수증보 ) 강도지, 목장 11) 태종실록 권 9, 태종 5 년 5 월 2 일 ( 병신 ) 12) 태종실록 권 26, 태종 13 년 8 월 23 일 ( 기사 ) 13) 1413 년 ( 태종 13) 에길상산목장을건설한뒤추가로목장들을건설하여완성한것을이르는것이라생각된다. 68 인천역사 (8 호 )
1,200여마리의말을사육하고있었다. 세종대이후사료를살펴보면, 정확하지는않으나강화에설치된목장의상황이어떻게변화했는지의추이의대강을살필수있다. 세종대에는목장의확대와경작에관련한논의가계속된것으로보이지만특별히혁파된목장은없는것으로보인다. 1423 년 ( 세종 5) 에는경기우도소속으로임진 ( 臨津 ) 의무지곶 ( 無知串 ) 과강화의진강산 ( 鎭江山 ) 북일곶 ( 北一串 ) 길상산 매도 주문도 ( 注文島 ) 신도에서목양하는말이모두 1,642필이었다. 15) 세종실록 지리지강화도호부조에보이는강화도의목장은다음과같다. 진강산과길상산에연하여쌓은목장 : 둘레 41리, 말 1,500마리 매도목장 : 섬둘레 60리, 말 327마리 장봉도목장 : 섬길이 40리 너비 5리, 우목장 ( 牛牧場 ) ( 통진현관할 ) 신도목장 : 섬둘레 30리, 말 36마리 위기록을통해보면 15세기중반당시강화도의각목장에서키우는마필수를합치면 1,800마리가넘었다. 또세종대에는새로이주질문도 ( 주문도 ) 에소를키우는우목장이설치되었는데 16) 세종실록 지리지상에는기록되어있지않지만세종대이후의기록에도주문도목장이계속등장하는것으로보아지리지편찬당시에목장이혁파되지는않았던것으로보인다. 14) 태종실록 권 33, 태종 17 년 6 월 4 일 ( 무자 ) 15) 세종실록 권 20, 세종 5 년 5 월 21 일 ( 경자 ) 16) 세종실록 권 51, 세종 13 년 3 월 28 일 ( 임진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69
이어 1530년 ( 중종 25) 에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조를살펴보면목장이설치되어있던곳은길상산, 매도, 주문도, 보음도 ( 甫音島, 현재의볼음도 ), 미법도 ( 彌法島 ), 장봉도 ( 長峰島 ), 신도이며북일목장의경우존재한것같으나기록되어있지않다. 임진과병자의양란을거치고조선후기로접어들면서점차목장의운영이쇠퇴하여가는양상을보인다. 1696년 ( 숙종 22) 이형상 ( 李衡祥 ) 이강화도의역사와지리, 문물등에대해기록한 강도지( 江島志 ) 를살펴보면강화도본섬에는진강 ( 길상 ) 북일목장이있었고, 부속도서에는매도, 신도, 금음북도 ( 今音北島 ), 장봉도, 주문도, 미법도에목장이설치되었다. 또같은책의해도 ( 海島 ) 조를보면보음도 ( 甫音島, 현재의볼음도 ) 와말도 ( 末島 ) 17) 에서는양 ( 羊 ) 을키우고있었다. 이러한목장조에기록되지않은목장들은사실상거의폐목장이거나양을키워중요성이떨어지는곳이아니었나생각된다. 강도지 목장조에기록된곳중금음북도 18) 를제외하고마소를키우던목장 6곳의상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북일장 : 말 273 마리, 소 7 마리 매도 : 말 321 말리, 소 19 마리 17) 현재는 말도 ( 唜島 ) 라고표기한다. 18) 금음북도의경우 강도지 목장조에목장지로기재만되어있고사육두수등별도의설명은없다. 금음북도는이형상의 강도지 해도조에 지금의석우 ( 席隅 ) 이며매도 ( 煤島 ) 안에있다 라고하였다. 석우는현재석모도의일부이므로이내용을따르자면금음북도는석모도를구성하는지역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금음북도를현재의강화군에딸린서검도 ( 西檢島 ) 로보는견해가있다 ( 인천의지명유래, 인천광역시, 1998, 802 쪽 ). 그러므로 강도지 에전하는금음북도의목장위치가현재어느곳에해당하는지는앞으로더고찰할필요가있다. 한편이형상의 강도지 해도조에는금음북도와는별개의섬으로서검도가따로기록되어있다. 70 인천역사 (8 호 )
신도 : 말 49마리, 소 1마리 진강장 : 말 227마리, 소 11마리 장봉도 : 말 64마리 주문도 : 말 162마리, 소 9마리 미법도 : 말은없고전지 ( 田地 ) 만있다. 강도지 에기록된말과소의마릿수를모두합치면말이 1,096마리, 소가 47마리였다. 19) 앞서세종대의마필수에비해그수가크게줄어들었음을알수있다. 즉점차목장의운영이쇠퇴하고있음이나타난다. 영조 ( 英祖 ) 대 (1757~1765년) 에편찬된 여지도서( 輿地圖書 ) 에는강화부의목장으로진강장, 북일장, 시도장 ( 矢島場 ), 매음도장이기록되어있으며, 진강장에 147마리, 북일장에 9마리, 시도장에 77마리, 매음도장에 248마리의말이사육되고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20) 한편같은책방리 ( 坊里 ) 조의부 ( 附 ) 에는매음도 석모로도 ( 席毛老島 ) 21) 주문도 장봉도 신도 에서말을놓아기르며, 말도 ( 唜島 ) 볼음도 소검도 ( 小檢島 ) 22) 에서는양등 [ 羊羔 ] 을키웠다. 앞서이형상의 강도지 와마찬가지로목장조에기록되지않은목장들은양등중요성이덜한동물을사육하거나목장이많이쇠락하여기록의필요성이떨어진곳이아니었나추측된다. 여지도서 에기록된강화도의목장에서키우던말의마릿수를합하면 481마리로숙종대에비해서크게줄어 19) 강도지 목장조에는강화도목장의마필수의합을 1,032 마리라고하였는데, 이는장봉도의마필수 (64 마리 ) 를계산하지않아서생긴착오로보인다. 20) 여지도서 강도부지, 목장. 21) 현재의석모도로간척을통해송가도, 매음도등과하나의섬이되었다. 22) 현재의동검도를말한다 ( 인천의지명유래, 인천광역시, 1998, 581 쪽참조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71
들었음을알수있다. 정조 ( 正祖 ) 대에는사복시에서강화의목장이 두세탄환만한작은섬에지나지않고 한섬에서는기르는말이 4,50여필에불과하다고할정도로목장이크게쇠퇴하였다. 그리고고종대에접어들어 1864년 ( 고종 1) 김정호 ( 金正浩 ) 가편찬한 대동지지 ( 大東地志 ) 에는강화에신도장 ( 信島場 ) 거도장 ( 居島場, 현재의시도 ) 동검도장 ( 東檢島場 ) 등세목장만이남아있는것으로나타나있다. 그렇다면강화도본섬및그부속도서에설치되었던목장은전부몇곳이나되었을까? ( 속수증보 ) 강도지 의목장조에따르면강화에설치되었던목장은모두 12곳이확인되는데매음장 ( 煤音場 ), 진강장 ( 鎭江場 ), 길상장 ( 吉祥場 ), 북일장 ( 北一場 ), 볼음도장 [ 甫乙音島場 ], 미법도장 ( 彌法島場 ), 주문도장 ( 注文島場 ), 장봉도장 ( 長峰島場 ), 신도장 ( 信島場 ), 시도장 ( 矢島場 ), 말도장 ( 末島場 ), 동검도장 ( 東檢島場 ) 등 12곳의목장이존재했음이보인다. 한편이형상이찬술한 강도지 의목장조에는금음북도 ( 今音北島 ) 에도목장이설치되어있었음이기록되어있다. 그런데또한 강도지 에는강화본섬의경우길상, 인정 ( 仁政 ). 불은 ( 佛恩 ), 하도 ( 下道 ) 등 4면에목장이있었고그중인정과불은의목장이폐지되었으며길상의목장은진강장, 하도의목장은북일장으로불리고있음이보인다. 원래의길상목장과진강목장은이미조선초기부터지리적인접성으로인해합쳐야한다는논의가있었고실제통합되어운영되기도하였다. 1456년 ( 세조 2) 경기우도점마별감 ( 京畿右道點馬別監 ) 조청로 ( 趙淸老 ) 는강화의진강, 길상, 중장 ( 中場 ) 등세목장을합쳐운영할것을제안하였다. 23) 이사실을통해보면강화본섬에진강과길 23) 세조실록 권 3, 세조 2 년 2 월 10 일 ( 기유 ). 72 인천역사 (8 호 )
상, 북일이외에중장이라는목장이있었음을알수있다. 그리고중장은진강, 길상목장과인접해있음도알수있다. 그러므로그지리적위치를고려해보면가장북쪽인인정면에위치했던목장이진강목장이고불은면에위치했던목장이중장이아니었을까생각된다. 24) 그리고길상목장과진강목장이통합된뒤시간이지나고목장이길상면에위치하게되었지만계속하여진강목장이라고통칭했던것이다. 또이외에도김정호의 대동지지 에는모도 ( 茅島 ) 에목장이있었다가폐지되었다고기록되어있으며,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 에는강화의폐목장으로보음도와함께송가도 ( 松家島 ) 가기록되어있다. 25) 그러므로사료에나타난목장수를합하면강화본섬및그부속도서에설치되었던목장은최소한 16곳정도되었던것으로생각된다. 이내용을정리하면 < 표1> 과같다. 26) < 표1> 조선시대강화도와부속도서에소재했던목장 현재의행정구역 소재목장 강화본도 진강, 중장, 길상, 북일 강화군 석모도매도, 석모로도 ( 송가도 ) 기타도서지역볼음도, 미법도, 동검도, 주문도, 말도 미상 금음북도 ( 석모도또는서검도 ) 옹진군 시도, 신도, 장봉도, 모도 24) 중장이라는목장명은위의 세조실록 기사에유일하게등장한다. 북쪽으로는인정, 남쪽으로는길상을두고그사이에목장이위치했으므로 중장 ( 中場 ) 이라하지않았을까추측되며조선초기에잠시설치되었다가사라진것으로보인다. 25) 증보문헌비고 권 125, 병고 17, 부록폐목장. 앞서언급한 여지도서 강도부지방리조의부 ( 附 ) 제도 ( 諸島 ) 에소개된석모로도와숙종대의간척사업으로인해이어졌으므로송가도와석모로도의목장은같은목장이라고생각된다. 26) 목장이설치되었던곳중장봉도, 신도, 시도, 모도는현재의행정구역으로옹진군에속해있다. 또한매도와금음북도, 송가도는조선시대매립을통하여한섬이되어현재는석모도라불린다.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73
한편조선시대강화에존재했던목장의분포 ( 위치 ) 를대강추정하여오늘날의강화및주변지역지도에표시해보면 < 그림 1> 과같을것이라생각된다. < 그림 1> 현재의지도로본강화목장의분포 27) 27) 필자가여러사료에나타난강화도각목장의소재지및강화지역의고지도와현재의지도를통해단순히그대강의소재지만추정, 표시해본것으로정확한위치는아니다 ( 강도지 에기재된금음북도목장의경우그위치가현재의석모도와서검도중어느곳인지정확하지아니하여표시하지않았다 ). 목장의정확한위치나규모의파악을위해서는사료에대한더욱정밀한검증과목장지에대한심도있는발굴조사가필요할것이다. 74 인천역사 (8 호 )
2) 진강과길상목장의변화진강목장과길상목장은강화의여러목장들중에서도가장중심이되는양마의생산지라할수있다. 이두목장은지리적으로인접해있어조선초기에통합운영하여야한다는논의가일어났고통합이후명칭이혼용되면서그변화상의이해에있어다소혼란스러운측면이있다. 진강목장과길상목장의통합이처음논의된것은 1427년 ( 세종 9) 이다. 당시성달생, 고득종등의건의를세종이받아들여양목장의담을합쳐쌓게하였다. 1454년 ( 단종 2)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상에는진강산과길상산의목장이서로이어져축장 ( 鎭江山 吉祥山, 相連築場 ) 28) 되었다고내용이전한다. 그런데 1456년 ( 세조 2) 2월에경기우도점마별감조청로는세조에게진강, 중장, 길상의세목장을합쳐하나로운영할것을건의한다. 그렇다면 세종실록 지리지상의이어져축장되었다는설명은양목장이단순히붙어있다는것이지완전히통합운영되었음을말하는것은아니라고생각된다. 한편 1456년 ( 세조 2) 양목장의통합이이루어진뒤사료상에등장하는길상목장은모두진강목장이라고보아야한다는의견이있다. 29) 그러나통합이이루어진뒤양목장이계속합쳐진상태로유지되었는지는의문이다. 광해군 ( 光海君 ) 때의다음기록을보도록하자. 사복시가아뢰기를, 비변사가, 지난번경기감사심열 ( 沈悅 ) 의장계가사리에맞다고하여, 진강목장의절반을잘라담장을둘러쌓아백성들에게농사를지어먹도록허락하고, 그곳에치고있던말들을길상과북일 28) 세종실록 권 148( 지리지 ), 강화도호부목장. 29) 신편강화사 상 ( 역사와전통 ),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2003, 382 쪽.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75
의두목장에옮겨방목시키는일에대해본사복시의제조들이회동하여처결해주라는일을재가받아공문을보내왔었습니다.( 중략 ) 진강목장의형편은물과초지 ( 草地 ) 가매우좋아예로부터말들이잘번성하는지역으로일컬어졌고빼어난기량과잘달리는말들이또한많이생산되었는데, 길상은바로그뒤쪽에있는데도꽉막아서로통하지못하게한것은그만한뜻이있어서일것입니다. 지금만일진강목장의절반만가로질러경작지로만들고만다면농사를지어얻어지는수익이그리많지않을것이고, 만일진강의말모두를길상으로옮겨방목시킨다면새로옮겨간말들과그전의말들이뒤섞여살아야하므로, 반드시공간이비좁아수용키어려운걱정이생길것입니다. 그리고북일에있어서는마니산밑외진곳에있고물과초지도좋지못해전부터말이잘번식되지않았는데, 이는누구나다아는일입니다. 그러니결코다른목장의말을옮겨다방목시켜모두손상되게할수는없습니다. 30) 위사료를통해알수있듯이 1608년 ( 광해군즉위년 ) 에진강목장을둘로나누어백성들로하여금농사를짓게하고그곳에서키우던말들을길상과북일목장으로옮겨방목시키자는조정의논의가있었다. 그리고사복시의진언을보면진강과길상목장은서로차단되어있었다. 즉양목장은분리된상태였던것이다. 또길상목장도비어있던상태가아니라계속키우던말들이있었다. 이러한점들을고려한다면 1456년이후에두목장이진강목장으로통합되고그명칭으로진강과길상이혼용되었다는주장은문제가있는것이라생각된다. 광해군대이후지리지에는진강목장이라는이름만이주로보이는것으로볼때진강과길상목장의통합 ( 또는하나의목장을폐지하고나머지로우마를이동 ) 이이루어진것으로생각된다. 주로사용되는명칭이진강목장이므로단순히생각하면진 30) 광해군일기 권 10, 광해군즉위년 11 월 9 일 ( 임진 ). 76 인천역사 (8 호 )
강산쪽에목장이위치했다고볼수있다. 그러나사료를통해볼때목장의소재지는길상면의길상산기슭이었다. 17세기후반의기록인이형상의 강도지 에는강화본섬에위치한목장이 2곳인데각기하도 ( 下道 ) 와길상에위치해있다고하였다. 그리고그중길상에위치한목장을 진강장 이라부른다고기록되어있다. 즉진강과길상목장이통합되고그명칭은진강목장이라하였지만위치는길상면이었고그러한상태가목장이완전히혁파될때까지계속이어졌다고생각된다. 한편광해군대이후진강목장을경작지로전환해야한다는주장이일어났다. 그리하여숙종대까지진강목장을포함한강화도내목장의치폐와경작지전환을둘러싸고계속된논쟁이펼쳐졌다. 인조 ( 仁祖 ) 대에는처음에진강목장을경작지로활용하였다가다시사복시의청으로경작을금지하였다. 이후강화목장을국가위급시피난처로삼아야한다는의견이대두되면서경작지전환의요청이이어졌고 1649년 ( 인조 26) 강화유수조계원의청을인조가받아들여강화목장을폐지하도록했다. 31) 숙종대에이르러서는 1708년강화유수박권의요청으로진강목장의폐지가이루어졌지만, 목장의땅이주민이아닌서울사람들이차지하는폐단이일어났고이에대해 1712년에왕이었던숙종이문제를제기하면서목장을다시사복시에소속시켜야한다고하였다. 당시에바로다시목장으로의환원이이루어졌는지는불분명하다. 여지도서 강화도호부목장조에따르면 1719년 ( 숙종 45) 에강화유수심택현 ( 沈宅賢 ) 이우수한말의종자가있다고하여다시진강목장을설치했다는기록이전한다. 그러므로 1719년에이르러서목장이복구된것이아닌가생각된다. 그러나복구된진강목장의규모는이전에비해크게줄 31) 실록상에 강화목장 이라고되어있는데, 이는강화본섬의진강과북일목장모두를가리킨것이라생각된다.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77
어들었다. 32) 이후정조대에진강목장이이미폐지되었다는기록이나오는것으로보아 18세기후반에는폐지된것이아닌가생각된다. 3) 강화목장활용관련논쟁 목축인가경작인가?- 1 조선전기강화목장이변화하는과정에서가장주목되는것은목축론 ( 또는목장유지론 ) 과경작론 ( 또는목장혁파론 ) 의대립이라고할수있다. 강화목장은국가의가장우수한목장이었던제주목장과도비교될만큼목장으로서의이점을가지고있던곳이었다. 그러나제주도와는달리목장의확대 ( 유지 ) 또는축소 ( 폐지 ) 라는정책방향을놓고국왕과신료간에조선시대계속된논쟁이펼쳐졌다. 이는강화도라는섬이그자연환경적, 지리적특징으로인해조선시대에전반에걸쳐어떻게양면적으로인식되었는지를분명하게보여주는사례라할수있다. 강화에목장이설치되고말의사육이시작되면서강화목장은그입지조건의이점으로인해목장확대의주장이제기된다. 그러나강화도가가진목장입지조건의이점은새로운논쟁을불러일으키게되었다. 강화도에물과풀이풍부하다는것은목장으로서도유리한것이었지만농경지로서의가치도높다는것을의미하였다. 또한강화도가도읍과가까운곳에위치한비교적넓은섬이라는것은국방, 군사의측면에서중요한가치를가질수있다는것을의미하였다. 국방이라는측면에서는마정도중요한것이었지만수도한성이위급시피난처로이용해야하는강화도에백성을충분히정착시켜야하는일도매우중요한것 32) 여지도서 강도부지, 목장조에는 사면이모두민전 ( 民田 ) 이되어목장은한모퉁이에불과하다. 고설명되어있다. 78 인천역사 (8 호 )
이었다. 결국이러한부분들은강화도를목장으로활용할것인가주민의안집을위한경지로활용할것인가하는논쟁을불러일으키게되었다. 강화도목장관련논쟁의중심은농경과목마 ( 牧馬 ) 중국가의우선순위에두어야할것은무엇인가에대한입장의논쟁이었다. 1427년 ( 세종 9) 8월 26일조정에서세종과조정대신들간에벌어진논의는민생과마정사이에서어느것이중요한것인가하는논쟁의대표적사례라할수있다. 경기감사가강화 ( 江華 ) 의목장을쌓는군사의수효와기일에대하여아뢰니, 임금이말하기를, 전일에판부사최윤덕 ( 崔閏德 ) 이친히살펴보고와서계하기를, 강화에는물과풀이많고좋으므로그곳에사는백성을다른고을로이사시키고, 말먹이는장소로삼는것이진실로만세 ( 萬世 ) 의무궁한이익이될것입니다. 하였으며, 후에판서성달생 ( 成達生 ) 도또한친히살펴보고와서계하기를, 물과풀은사실상좋으나전지 ( 田地 ) 도역시심히비옥하니, 신의생각으로는거주하는백성을다이사시킬필요는없을것이오며, 더구나빈땅이아주많으니비록말만여필을먹이더라도여유가있을것입니다. 하였다. 내가전에윤덕의말을듣고백성을이사시킬계획을정하고백성들도또한옮길뜻을정하여금년의곡식을거둔후에옮기기를원하였는데, 후에달생 ( 達生 ) 의말로의논이또하나생겼는데, 정부와육조에서모두달생의말을옳게여기었다. 지금목장을쌓는군사의수효가 1 천 7 백명에이르게된다니, 농사시기를잃은경기지방에서어찌이를감내할수있겠는가. 쌓아서견고하지못하면해마다무너지게될것이니여기에또큰폐단이발생하지않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일을계획하매변경함이너무많으므로이일의의논도또한이러니저러니하여정하지못하고있다. 사람을귀하게여기고가축을천하게여겨야된다고말하면나도또한경중 ( 輕重 ) 의구분이있어야된다고생각하는데, 하물며말에관한행정 ( 行政 ) 은심히중대하여국가의안위 ( 安危 ) 가여기에달려있으니, 3 백호 ( 戶 ) 의이사만중하게여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79
기고군국 ( 軍國 ) 에서힘입는만세의이익은가볍게여길수있겠는가. 백성은비록옮기더라도전지와가옥만급여한다면어찌그처소를잃는데이르겠는가. 추수 ( 秋收 ) 를기다려백성을옮기고말을방목하는것이어떠하겠는가. 얼음이얼기전에일을마치고자하여백성을독려하여성을쌓게되면그것이견고하지않을것은필연적이니장차어찌하면되겠는가. 하였다. 33) 위사료에따르면강화의백성을이주시키고목장으로써야한다는최윤덕의보고, 그리고경작지가비옥하므로백성을다이사시킬필요는없다는성달생의보고사이에서조정에서는논란이있었고, 결국의정부와육조대신들이성달생의의견을좇았다. 하지만세종은이일을언급하면서사람이귀하고가축이천한것이라는논리만으로는마정을설명할수없음을역설하였다. 마성을쌓기위해군사 1,700명을동원하고백성 300호를이주시키는것은단순히보면사람보다말을귀하게여기는행동처럼보일지는모르나마정은국가의안위와관련이있는사항이라는점을강조하며그에서얻을수있는군국 ( 軍國 ) 의이익을생각하여야한다고하였다. 즉세종의입장에서는강화목장의확대를애민 ( 愛民 ), 휼민 ( 恤民 ) 이라는논리로공격하는것은목장문제의한면에만치중한편협한생각이었던것이다. 이에대한대신들의반론은다음과같았다. 우의정맹사성 ( 孟思誠 ) 과이조판서허조 ( 許稠 ) 등이아뢰기를, 만약방목하는말은많은데목장이협착하다면백성을옮기는것이옳겠습니다. 그러나지금거주하는백성을옮기지않더라도목장이넓어서만마리의말을방목하여도여유가있을것인데, 더욱이강화는바다입구의요해지 ( 要害地 ) 이므로가령왜구가있다면모두이곳을지나게되니거주하는백성을다옮기는것은분명히옳지못한일입니다. 석성 ( 石城 ) 을굳게쌓아서말을방목하 33) 세종실록 권 37, 세종 9 년 8 월 26 일 ( 신사 ). 80 인천역사 (8 호 )
여번식시키고그전과같이밭을경작시켜백성들을번성하게한다면거의두가지가다될것입니다. 백성들은비록이미이사시킨이유를알고있지마는, 성을쌓지않고말을만필이나방목한다면그수확하지않은벼와이미타작한곡식도거개밟히고먹히니, 백성들이그해를입게될것인데하물며만세 ( 萬世 ) 의이익을세우고자하면서하루아침에마치겠습니까. 얼음이얼기까지를기한하여천천히견고하게쌓아서금년에마치지못하면내년봄까지기다리고, 내년봄에도마치지못하면또내년가을까지기다리는것이실로편리하고이익이될것이오니, 마땅히조관 ( 朝官 ) 을맡겨보내어다시성을쌓는데넓게하고좁게할것과높게하고낮게할것을살피게함이옳을것입니다. 하니, 이에호군 ( 護軍 ) 곽정 ( 郭貞 ) 을보내어살피게하였다. 34) 위사료에따르면맹사성, 허조등조정대신들은강화목장이넓으므로백성을이주시킬필요가없다고주장하였다. 특히세종이마정을국가의안위차원에서설명한것과마찬가지로대신들도강화는요해지이므로왜구등의침입에대비하기위해서라도백성들이거주해야한다는국방차원에서의당위성을주장하였다. 마정과백성의거주는모두국방이라는측면에서중요한것이었으므로쉽게결론이나기힘든문제였다. 1432년 ( 세종 14) 세종은다시백성을이주시키고말을방목하려는계획을세우고대신을보내어강화도를살피게하였다. 35) 그때파견되어강화도를시찰했던인물은최윤덕과신상이었는데, 그들은강화도지역을조사한후강화목장은겨울에사육이어려운곳으로확대할필요가없다는의견을세종에게올렸다. 이때에이르러세종은신상에게강화도가경작지로서유리하고방목에는온당치않다는생각을피력하였고, 이는세종의강화도목장활용에대한입장이그간의논쟁을통해달라졌음을 34) 위와같음 35) 세종실록 권 55, 세종 14 년 3 월 17 일 ( 병자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81
보여주는것이었다. 결국태종과세종이추진했던강화도목장의확대정책은어떤뚜렷한성과를내지못하고지리한논쟁만을거듭하다뚜렷한결론을내지못하고흐지부지마무리되고만것으로보인다. 세종대후반이후오히려강화목장중두곳을파하고백성의거주지를넓히자는주장이제기되는등강화목장에대한경작지전환의요구가강해진다. 강화도의목장확대를의욕적, 지속적으로추진했던세종또한강화도가목장보다는경작지로적당하다는생각의변화를보여주기도하였다. 그리하여강화목장 4곳의토지 370결을백성들에게주어경작하게한것도전반적인집권층의분위기변화를보여주는것으로생각된다. 36) 당시의이러한논쟁과정책변화는조선시대마정과농경사이에있어서국가적으로얼마나큰고민이있었는가를보여주는대목이다. 조선은건국직후전조고려에서문란해진국가의틀을바로잡고새로운국가체제를정립하기위해서많은노력을기울였다. 마정도그러한국가정책의일환이었을것이다. 역로망의정비, 야인이나왜구로부터의변경과해안의수비, 중국과의화친관계등은건국초기의조선왕조가안정적으로국가체제를안착시키는데에모두중요한것이었고그를위해서는마정을건실하게운영할필요가있었다. 그러나충분한농경지의확보도마정못지않게중요한것이었다. 국가체제의안착에있어서마정도중요하였지만안정적인식량공급을통해백성을안집할수있게하는것도그에못지않게중요한문제였다. 또한강화는해안의요해처로서백성들이번성하며사는것이해안방어에도유리하였다. 더욱이사람보다말이우선일수없다는도덕적당위성의문제는경작론자 ( 혁파론자 ) 들에게서계속하여제기될수있는것이었다. 36) 세종실록 권 112, 세종 28 년 4 월 1 일 ( 무술 ). 82 인천역사 (8 호 )
2 조선후기임진과병자의양란이마무리된후국가적으로목장의경영은크게위축될수밖에없었다. 조선전기에백성의경작과안집이라는명분으로인해강화목장의확대는크게이루어지지못했다. 더욱이양란이후에는민생의안정이무엇보다중요하였으므로목장경영은국가정책에서후순위로밀릴수밖에없는상황이되었고, 목장은축소, 폐지되는상황에이르게되었다. 또한병자호란을전후하여강화도의보장지로서의중요성이높아지고강화도에백성의정착, 경작을지원해야한다는의견이늘어나면서강화목장은혁파되어야한다는주장까지나오게된다. 인조의경우처음에는진강목장에서경작을허락하였다가다시경작을금지하였고이러한일관되지못한조치는사람들로하여금 나라가짐승은귀하게여기고사람은천하게여긴다. 는말까지나오게하였다. 37) 이후에도피난처로서강화도에경작지를확대해야한다는주장이제기되었지만인조는계속거부하였다. 인조의태도가달라진것은병자호란을겪고난이후였다. 당시치욕적인전쟁의참화를겪으면서강화도를보장지로서강화해야한다는생각이강해진것으로생각된다. 그리하여강화의병비 ( 兵備 ) 를강화하면서목장에관한문제도자연스레논의되었다. 1649년 3월인조는강화유수조계원을인견한자리에서다음과같은대화를나누었다. 상이이르기를, 강화군사는 2 천여명이라고들었는데지금은얼마나되는가? 하니, ( 조계원이 ) 대답하기를, 신이아직군부 ( 軍簿 ) 를보지못하여확실히알지못하나지금도 37) 인조실록 권 9, 인조 3 년 4 월 3 일 ( 경진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83
2 천여명일것입니다. 다만늙고어린자가태반이고액수도많이모자랄것인데, 막난리를겪고나서주민이드물기때문에빠진수를충정하기는어려운형세입니다. 강화는땅이좁은데목장은매우크니, 목장의말을옮기고백성이갈아먹게하면민호 ( 民戶 ) 가점점많아져서군액 ( 軍額 ) 을채울수있을것입니다. 하였다. 상이이르기를, 마장 ( 馬場 ) 을경작하도록허용하면육지의백성들중옮겨갈자가과연많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인정이제고장에안주하여옮겨가기를싫어한다하나, 기름진땅을경작하게하고부역이많지않으면어찌기꺼이거주하려하지않겠습니까. 경작하게한뒤에본부 ( 本府 ) 에서세를거두게한다면좋겠으나, 사복시가곤란하게여기면본시 ( 本寺 ) 에서세를거두더라도백성이많이만들어오면뽑아서군사로삼을수있을것이니, 다행스런일입니다. 하니, 상이이르기를, 묘당을시켜의논하여처치하게하라. 하였다. 비국이아뢰기를, 목장을그만두고경작하도록허용해서민정 ( 民丁 ) 을모집하여들이는것은참으로오늘날의급선무입니다. 사복시에서설치한둔전 ( 屯田 ) 중에서묵어있는곳으로경작할만한곳의결부 ( 結負 )2267) 가얼마나되는지본부에서살펴품처하게하소서. 하니, 상이따랐다. 38) 다음달인조는다시조계원을인견한자리에서목장의폐지를결정하였다. 인조의논리는다음과같았다. 목장을폐지하자는의논은선조 ( 先朝 ) 에서도있었으나, 세가지안될일이있으므로수행하지못하였다하는데, 그첫째는마정 ( 馬政 ) 을중히여기는것이고둘째는토민 ( 土民 ) 이옮겨들어가는것이고셋째는사대부가멋대로차지하는것이었다. 이번유수는 38) 인조실록 권 50, 인조 27 년 3 월 11 일 ( 경오 ). 84 인천역사 (8 호 )
반드시마음을다하고힘을다하여위임한뜻을저버리지않을것이니, 목장을폐지하고목장의말은다른섬으로옮겨두라. 39) 그간마정의중시, 토민의이주, 사대부의점유등세가지이유로인해목장을폐지하지못했지만, 유수조계원이라는인물을믿을수있는만큼목장을폐지하겠다는것이다. 이는유수개인에대한신뢰임과동시에강화도의방어기지, 요새로서의중요성이선대에서목장을폐지하지못했던이유를상쇄할수있음을보여준다. 인조의뒤를이어즉위한효종 ( 孝宗 ) 도처음에는유수조계원의청에따라강화목장의말을다른곳으로옮기고주민들이경작하도록하였지만 40) 이후다시강화도에목장을복구시키고강화도의목장화정책을추진해나갔고이는현종대에도이어진다. 효종의경우어떤이유로목장의복구에의지를보였을까. 효종은목장복구에반대하는신하들의비판에대해다음과같이답하였다. 강화에목장을설치한것은예전부터있었던것으로, 태조께서타시던여덟마리말중의한마리도강화에서나온것이다. 그러니결단코이목장을폐할수없다. 유수들이대부분법을준행하지않아당초의본뜻을크게잃고있어서이미몹시놀라운데, 이로인하여완전히폐한다면조종조에서목장을설치한의의를크게잃는것인바, 몹시애석하다. 번거롭게논하지말라. 41) 효종은신하들에게대해반론을펼치면서태조의팔준마중하나가강화에서나온것이라고하였다. 물론그것이목장복구 39) 인조실록 권 50, 인조 27 년 4 월 23 일 ( 신해 ). 40) 효종실록 권 5, 효종원년 8 월 14 일 ( 갑오 ). 41) 효종실록 권 20, 효종 9 년 11 월 5 일 ( 무술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85
의직접적인이유가될수는없는것이고, 그만큼강화도가좋은말을생산할수있는곳이라는생각을가지고있었다고보아야할것이다. 효종이농경보다좋은말에관심을가진것은자신이의지를가지고있던북벌정책과도연관이있지않나생각된다. 청과의일전을위해서는좋은말의확보가필요했을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시간이갈수록강화도의목장폐지론은더욱거세게일어났다. 숙종 ( 肅宗 ) 대에들어서강화의민생과행정을책임지는유수직 ( 留守職 ) 을맡은인물들이연이어강화목장의폐지를요청한다. 도덕적인당위성에서목장보다중요한것은백성들이경작하여먹고살수있는토지의확보였기때문이다. 강화도의주민들이현실적으로느끼기에도목장은자신들에게큰도움을주지못하는존재였다. 사람보다짐승이우선이될수없다는논리는너무나당연한만큼힘이있는논리였다. 현종대에이미서필원 ( 徐必遠 ) 이목장의혁파를강력하게주장한이후숙종대에들어서이선 ( 李選 ) 조사석 ( 趙師錫 ) 이민서 ( 李敏敍 ) 박권 ( 朴權 ) 조태로 ( 趙泰老 ) 등이목장의축소또는혁파를주장하였다. 42) 물론유수들이강화주민의입장만을철저히반영했을지는의문이나이처럼목장의축소나혁파를지속적으로주장한것으로보면목장으로인한강화주민의피해는적지않았던것으로생각된다. 1708년 ( 숙종 34) 10월강화유수박권이진강목장의혁파를요청하자조정에서는북일목장을폐하는것으로대신하였다. 그러나이어 12월에다시숙종을만난박권이진강목장의혁파를 42) 현종실록 권 11, 현종 6 년 9 월 28 일 ( 신해 ) ; 숙종실록 권 11, 숙종 7 년 5 월 21 일 ( 계유 ) ; 숙종실록 권 14, 숙종 9 년 1 월 23 일 ( 을축 ) ; 숙종실록 권 14, 숙종 9 년 8 월 3 일 ( 임인 ) ; 숙종실록 권 46, 숙종 34 년 10 월 8 일 ( 경술 ) ; 숙종실록 권 52, 숙종 38 년 12 월 6 일 ( 을묘 ). 86 인천역사 (8 호 )
재차요청하자결국진강목장도혁파되고백성들에게경작을허락하였다. 다음은박권이숙종에게진강목장의폐지를요청한진언이다. 진강의목장은오랫동안섬사람들의해가되었습니다. 곁에가까운전지 ( 田地 ) 가늘유린을당하는데, 곡식이여물때에는마을사람들이말을몰아내기위하여밤마다떠들고있으며, 거주하는백성이울타리가없으므로수확하여도덮고저장하지못한것은한번말떼가지나가면죄다없어지고남은것이없으니, 백성이원망하고괴로워하는것은이미말할수가없었습니다. 또그목장을복설 ( 復設 ) 한지가벌써 50 년이되었는데도한필의양마 ( 良馬 ) 를생산하여어가 ( 御駕 ) 에대비했다는것을듣지못했습니다. 지금만약백성에게경작을허락한다면수년이되지않아서여러백호 [ 累百 ] 의백성을얻어병졸과식량이풍족할수가있을것입니다. 선조 ( 先朝 ) 의유의 ( 遺意 ) 를사람이누군들알지못하겠습니까마는, 다만고금 ( 古今 ) 이형세가다르므로이해 ( 利害 ) 가명백합니다. 원하건대전하께서는다시순문 ( 詢問 ) 하시어서처치 ( 處置 ) 하소서. 43) 박권의진언에의하면강화목장에서키우던말들이경작지에끼치는피해가매우컸다. 더욱이좋은말을제대로생산하지도못했던모양이다. 즉당시상황에서목장은강화의주민들에게큰부담과고통만을안겨주는존재였다. 사람들에게피해를끼치면서좋은말도생산하지못한다면그목장의존재이유는당연히사라지는것이다. 즉국가의목장운영에많은문제가있었던것이다. 이러한상황에서경작론은힘을얻을수밖에없었다. 이를통해보면강화목장에대한경작론이그도덕적인면에서는물론이고토지이용의효율적인면에서도나은것으로보 43) 숙종실록 권 46, 숙종 34 년 12 월 3 일 ( 을사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87
인다. 그리하여박권의진언으로인해숙종대진강목장의경작지로의전환이이루어진다. 그러나경작지로의전환에도문제가없었던것은아니다. 강화도는그토지의비옥함으로인해세력자들이서로다투어점유하려고했던곳이었다. 44) 그리하여이미광해군때에는강화목장의개간을허용하면이후에세력가들이이를점유하여이익을독점할것이라는우려가사복시로부터제기되기도하였다. 45) 사복시는마정을담당하는기관으로목장을지키기위해자신들에게유리한논리를펼치려는면도있었겠지만그러한우려는숙종대에현실로나타난다. 임금 ( 숙종 ) 이말하기를, 강화의진강목장은박권이유수로있을때목장을혁파하여백성이경작하도록허락해줄것을청하였는데, 서울에살며아무관계도없는사람이함부로차지한경우가많고고장백성은끼이지못하였으니, 이는참으로개탄스런일이다. 이목장은본디좋은말을생산하였으니, 태조조 ( 太祖朝 ) 에팔준마 ( 八駿馬 ) 중에한준마가곧이곳의종자였던것이다. 이미목마 ( 牧馬 ) 의이익을잃고또능히백성을이롭게하지도못하여일거에두가지를잃었으니, 진강목장은전대로태복시 ( 太僕寺 - 사복시 ) 에소속시킴이옳다. 하였다. 46) 영의정이유 ( 李濡 ) 가임금에게아뢰기를, 강화의북일목장은유수의장청 ( 狀請 ) 으로인하여혁파했는데, 이번에나누어가진사람은장교 ( 將校 ) 및사대부 ( 士大夫 ) 와품관 ( 品官 ) 이대부분이고, 바깥의백성을모집하여모은것은몇사람에지나지않습니다. 또거둔세 ( 稅 ) 는강화부의수용 ( 需用 ) 을보충하고있으니더욱조정에서특별히혁파한본의가아닙니다. 44) 중종실록 권 94, 중종 36 년 1 월 17 일 ( 갑진 ). 45) 광해군일기 권 10, 광해군즉위년, 11 월 9 일 ( 임진 ). 46) 숙종실록 권 51, 숙종 38 년 5 월 13 일 ( 을미 ). 88 인천역사 (8 호 )
하였다. 47) 위의진강과북일목장에관련된두가지사례에서알수있듯이경작지로전환된강화의목장지는서울의권세와지위가있는집안에서차지했고, 강화도의주민이나외부에서모집한일반민은적은수였다. 결국백성의안집과요해지로서의방어강화를내세우며시행했던목장의혁파가정작백성들에게큰도움이되지못하고, 외부인의배를불리는데에만이용되었다. 목장을폐지한본의가사라져버린것이다. 그러나강화도에대한보장지로서의관심은계속높아져군주들도목장을축소하는데에거부감이점차줄어들었다. 말은강화이외에제주도등다른곳에서충분히키울수있었지만지리적위치상강화도를대신할수있는보장지는없었기때문에강화도의목장으로서의중요성은점차감소될수밖에없었다. 결국목장의축소, 폐지론은계속힘을얻게되었고강화목장은역사의뒤안길로사라지게되었던것이다. 그런데과연실제강화도의사람들에게목장은어떤존재였을까? 우리가그당시사람들의마음을정확히들여다볼수는없지만강화주민의입장에서목장이란결코달가운존재는아니었을것이다. 목장인근의주민들에게말은경작물에피해를입힐수도있었고말을관리하는데에백성들에게책임이있었으므로그에대한부담이적지않았을것이다. 또목장의확대나복구로인해생활의터전을포기하고이주해야하는것은너무나큰고통이었을것이다. 마정은국가적으로분명중요한사업이었지만목장은강화도의사람들에게환영받는존재는아니었다고생각된다. 목장의거듭된폐지와복구도그곳에서사던사람들에게큰 47) 숙종실록 권52, 숙종 38년 12월 16일 ( 을축 ).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89
고통과부담을주었을것이다. 목장을혁파하여경작지로활용하여살던중다시목장을복구하여이주해야만하는사례가많았다고생각된다. 물론국가의이주민에대한지원책도일부있기는했지만자신이힘써가꾼경작지를포기하고, 다시다른곳에정착하여살아야한다는것은결코쉬운일이아니었을것이다. 4. 나오며 지금까지조선시대강화목장의입지조건과변천과정, 그리고목장의활용과관련된논쟁에대해살펴보았다. 강화목장은처음만들어진이후계속된변화를겪어왔다. 때로는목장의확대가논의되기도하였고, 조선후기에들어서는목장의혁파가주장되기도하였다. 이와관련하여이글에서는각주장이지닌논리와근거를살펴보았다. 그것들을살펴본결과모두표면적으로는국가의안위와백성의삶을걱정하는것에기반하고있었다. 그러나강화목장의운영은치열한논의가운데에서오히려일관성을갖지못한채치폐의결정이이루어졌고농경지로의전환에도권세가, 외부인이차지하는문제점이있었다. 결국모두강화에살던백성에게는힘겨웠던과정이었다고생각된다. 끝으로한마디덧붙이고자한다. 필자는글의서두에서강화목장이강화의역사에서적지않은비중을차지하였음을지적하였다. 그러므로앞으로강화목장에대한조사와연구는더활발하게전개될필요가있다. 그런데여기서우리가생각해보아야할점이있다. 강화도에살았던사람들의삶이그것이다. 강화목장의역사를복원하면서목장과함께삶을영위해야했던그들에게목장은어떤존재였는지우리는생각해보아야한다. 강 90 인천역사 (8 호 )
화목장역사의복원은단순히목장의역사를구성하는데에그쳐서는안된다. 목장과함께한강화도사람들의삶과애환을복원해야하는것이다. 그리고그것은진정한향토사의복원작업이될수있을것이다. 3. 조선시대강화목장, 그변화와논쟁의역사 91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 지방현실과지방민의삶 2. 지방민의무속현장 3. < 속인주요 > 에나타난지방의역사와유적 4. < 속인주요 > 에나타난풍류 5. < 속인주요 > 에나타난지방민에대한애정 6. < 인주요 > 와 < 속인주요 > 의거리 이영태 ( 인하대동아시아한국학연구교수 )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죽지사 ( 竹枝詞 ) 는특정지역의민간풍속을소재로한악부시 ( 樂府詩 ) 로그연원은중국에서출발한다. 당 ( 唐 ) 의유우석 ( 劉禹錫 ) 이죽지사를짓게된배경을설명하면서 굴원이아홉노래를지었는데 나역시죽지아홉편을지어노래잘하는이에게부르게하고뒤에덧붙였으니후대에파투 ( 巴渝 ) 의노래를듣는사람들은변풍이어디로부터왔는지알게될것이다. 1) 라했듯이굴원의구가 ( 九歌 ) 를본떠구편 ( 九篇 ) 을지은데서죽지사가비롯된것이다. 파투는양자강상류지역으로중국변방에해당하기에죽지사가특정지역의민간풍속을노래한다는규범을마련할수있었다. 예컨대형태로칠언절구연작형이고작가로는중앙에서배제된불우한지식인이었고소재로는중앙이아닌지방을재발견하거나재인식하는것을취했던것이다. 이러한죽지사는송대 ( 宋代 ) 에이르러크게발전하였는데당대 ( 唐代 ) 의죽지사가주로남녀간의사랑을주제로한것에비해이때의죽지사는역사적사실및인물에초점을맞추는경향이두드러져영사시 ( 詠史詩 ) 로서의성격을띠었다. 송원 ( 宋元 ) 이후에는단편에서장편으로대형화되면서그내용도지역의풍물이나민속, 산천, 생업현장, 풍토적특성을대상으로하였다. 그래서해당지역의읍지 ( 邑誌 ) 나지방지 ( 地方誌 ) 같은성격을띠기에이르렀다. 2) 이른바죽지사는표면적으로칠언절구의형식을띄고있으나 풍토를주로읊은시 3) 라는점에서절구와구별 1) 劉禹錫, 竹枝詞引, 昔屈原 乃爲作九歌 故余亦作竹枝詞九篇俾善歌者颺之附末後之聆巴渝知變風之自焉. 2) 죽지사의전반적성격에대해서는이제희, 한국죽지사연구, 인하대석사논문, 2001, 참조.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95
되며지역성이강한것이특징이다. 한국최초의죽지사는조선전기김맹성 ( 金孟性 ; 1374-1449) 의 < 가천죽지곡 ( 伽川竹枝曲 )> 이지만대다수의작품은조선후기에창작된것들이다. 많은죽지사가출현하게된것은시대와무관하지않을터, 즉조선후기지식인들의세계인식의변화가주된요인이다. 오랫동안중심에자리잡고있던중화적세계관이해체되자중앙집권적질서에균열이일어나고그것이지방으로의시선을돌리는계기가되었던것이다. 시선의전환은지방의현실을소재로삼아그것을구체화시키는단계로진전되기에이르렀다. 흔히조선후기죽지사의경우, 이전의한시양식에서담고있지않았던소재를다루거나대상을파격적으로인식하고있는것도이런것과무관하지않다. 한국죽지사의경우도중국의것과큰차이가없다. 조선전기에는남녀간의연정을애절한분위기로노래했지만조선후기에이르러낭만적성향의죽지사는사라지고지방성이강화된현실주의적성향의작품이주류를이루었다. 예컨대지방의현실과지방민의삶을다루면서지방민에대한통치자로서의교화적시선과인간적연민과동정을드러내고지방의역사와유적을다루면서지방에대한새로운발견을진술하고있다. 이러한죽지사의특성에 < 인주요 ( 仁州謠 )> 와 < 속인주요 ( 續仁州謠 )> 도해당한다. 이를지은이규상 ( 李奎象 ; 1727-1799) 은자 ( 字 ) 는상지 ( 像之 ) 호 ( 號 ) 는일몽 ( 一夢 ) 유유재 ( 悠悠齋 ) 이며본관은한산 ( 韓山 ) 이다. 인천부사를지낸이사질 ( 李思質 ) 과안동권씨의 5남 2녀중장남으로태어났다. 그의집안은목은 ( 牧隱 ) 이색 ( 李穡 ) 이래로문장과학식으로이름이높았다. 이규상은조선후기의학자로 18세기문화예술과인물사와관련하여 병 3) 王士禎, 師友詩傳續錄, 淸詩話, 上海古籍出版社, 155 면. 竹枝 詠風土瑣細詼諧皆可入大抵以風趣爲主與絶句逈別. 96 인천역사 (8 호 )
세재언록 ( 幷世才彦錄 ) 을저술하였다. 180여명에달하는영조 정조때의빼어난인물들, 유학자 문인 서예가 화가 기술자 역관 귀화인 여류문인등사회계층을망라하고있어조선후기의사회분화와발전과정도엿볼수있다. 그는그의아버지가인천부사로있었던시기, 1765년인천일대를유람하고시를지었는데인천을소재로하는 < 인주요 > 9편과 < 속인주요 > 9편도합 18편은지방의현실과지방민의삶, 여성과남성의복식, 상인들의분주함, 갯벌에서의어로작업, 염전의모습, 용유도풍경, 무속의현장, 손돌의무덤, 관아의풍류, 지방의역사와유적, 지방민에대한애정등이그것으로인천의죽지사라지칭할만한것들이다. 1. 지방현실과지방민의삶 1.1. < 인주요 > 의경우 仁州風俗似窮鄕不識靑雲有玉堂女戴草囊男氈笠日生忙出蛤魚場 인주풍속은궁벽한시골과유사해청운과옥당을알지못하네여자들은초랑을머리에이고남자들은전립을쓰고해가뜨면바삐조개와물고기잡으러가네 (< 인주요 > 1연 ) 작자는인천에대한전반적인상을 < 인주요 > 1연에그리고있다. 인천은단어그대로 궁벽한시골 ( 窮鄕 ) 로그곳에살고있는사람들은높은벼슬과무관한자들이다. 4) 여자는풀로만 4) 청운 ( 靑雲 ) 은높은벼슬을지칭하고옥당 ( 玉堂 ) 은홍문관부제학 ( 副提學 ) 이하교리 ( 校理 ) ㆍ부교리 ( 副校理 ) ㆍ수찬 ( 修撰 ) ㆍ부수찬 ( 副修撰 ) 등의호칭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97
든주머니 ( 草囊 ) 를머리에이고남자는전립을쓰고각각조개를캐거나물고기를잡으러바삐나간다고한다. 남녀에따른어로의방법을표현한셈인데, 다음의시에서확인할수있다. 編箔排椽截海橫重重圈作內中城潮來潮去須臾後螺蟹魚蝦戢戢盈 발엮어말장에늘어놓아횡행의바다끊으니겹겹이어살안에는내중성이되었네바닷물오고간잠깐사이에소라, 게, 물고기, 새우가모두가득하네 (< 인주요 > 3연 ) 拿得鯔魚一尺全瞥然飜手索頭懸忙從別浦潛身出或恐看於箭主前 숭어잡아보니한자나돼별안간손을날려머리찾아매다네빠르게별포를따라잠긴몸드러나니혹시어살 [ 魚箭 ] 주인이볼까두려워하네 (< 인주요 > 4연 ) 童蛤淺埋大蛤深絡締巢穴杳難尋浦娘競把尖鉤鐵細掘融泥似捻針 어린대합얕게묻혀있고큰대합은깊게있되낙지있는구멍묘연해찾기어려워라포구의아낙들다투어쇠갈퀴잡고촘촘히진흙탕을파니바늘로찍은것같네 (< 인주요 > 5연 ) 3-4연은 어살 이나 魚梁 혹은 魚箭 의어로활동을소재로한시이다. 싸리, 참대, 나뭇가지따위로발을엮어 [ 編箔 ] 날개모양으로둘러치거나꽂아나무울타리를치면어살은견고한중성이되기마련이다. 바닷물오고간사이에소라, 게, 물고기, 새우가통발에가득하니주인은그것을그냥건지기만해 이다. 98 인천역사 (8 호 )
도된다. 다음의시도어살이소재이되전자의구경꾼입장과다르게숭어의입장이반영돼있기도하다. 3-4행의 별포를따라잠긴몸드러나다 ( 從別浦潛身出 ) 에서 별포 는 특별한포구 로어살 [ 魚箭 ] 을지칭하기에 드러나다 의주체는숭어이다. 그에따라 두려워하네 ( 恐 ) 의주체또한어살에갇힌채물이빠진후에주인의눈에띌까두려워하는숭어이다. 물이빠짐에따라드러나는숭어의모습에서숭어의눈의크기를생각하면 혹시어살 [ 魚箭 ] 주인이볼까두려워하네 ( 或恐看於箭主前 ) 라는표현을이해할수있다. 5연은갯가에서대합을캐는과정을소재로한다. 풀로만든주머니 ( 草囊 ) 를머리에이고집을나섰다는 1연의진술보다어로상황이다소구체적이다. 여자들이쇠갈퀴로갯벌을긁으며채취하니바늘로찍어놓은모양으로자국만남았다거나낙지라는녀석은잡기쉽지않아 묘연해찾기어렵다 는데에서이를확인할수있다. 물론 1연에나타나듯여자들은수확물을풀로만든주머니 ( 草囊 ) 에넣어머리에이고이동할것이다. 여자들의어로현장을직접관찰한상태에서표현할만한것이다. 3-5연을지방민에대한작가의관찰로만국한해서는안된다. 그들이생업으로생계를꾸려가는모습을구체적으로묘사한것의이면에는그들에대한동정과여민이자리잡고있다. 소라, 게, 물고기, 새우가모두가득하네 별안간손을날려머리찾아매다네 촘촘히진흙탕을파니바늘로찍은것같네 와같은표현은모두고된노동을전제로하기때문이다. 蜂窠燕壘闢鹽廚鹽釜鹽成白雪鋪寄水生涯君莫笑五行民食一般需 벌집과제비집인양소금부엌늘어있고소금솥의소금은흰눈처럼퍼져있네물가에기댄인생그대는비웃지마소모든백성들이일반구해먹는것이라네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99
(< 인주요 > 8 연 ) 인천은어로활동이외에도소금과관련된공간이었다. 바닷물을끓여소금을생산하는곳이바닷가에모여있었다. 이른바소금부엌 [ 鹽廚 ] 이그것인데위에표현된대로 벌집과제비집 ( 蜂窠燕壘 ) 을방불케했을정도였다. 하지만소금만드는사람 [ 鹽夫 ] 이하찮게취급받았던것에대해작자는 물에기댄인생 ( 寄水生涯 ) 이지만 모든백성들이일반구해먹는 ( 五行民食一般需 ) 거라며그들에대해 비웃지마 ( 君莫笑 ) 라한다. 그들이소금을만드는고단한과정을직접보니그들에대해차마비웃어서는안된다는것이다. 그들을단순히바라보는데그치지않고그들에대하여동정과연민을마음한켠에두고있었다고판단할수있는한시이다. 1.2. < 속인주요 > 의경우 節近瑞端彭蟹生繩囊俄頃拾來盈老婆戴入都門內穿盡坊坊唱買聲 단양절이가까워지자게가나타나고잠깐만에주워와다래끼채울수있네노파가머리에이고마을안으로들어오자마을마다물건파는소리울리네 (< 속인주요 > 1연 ) 채취물과운반도구, 매매과정을소재로하고있다. 갯가에서채취한것은 팽게 [ 彭蟹 ] 이고그것을담아서운반한것은다래끼 [ 繩囊 ] 이다. 다래끼는한시에서표현된대로줄을엮어서만든주머니이다. 다래끼는칡껍질을가늘게엮어그물의모양으로만드는데, 바닷가지방민들의삶을온전히반영하고있는도구이다. 그안을가득채웠으니그들의기쁨도대단했을터, 물 100 인천역사 (8 호 )
론물건파는목소리를들을수없지만채취물이다래끼에가득했으니만큼어조 ( 語調 ) 는익히짐작할수있다. 그런데단양절즈음에나타나는게는우리가흔히아는꽃게 [ 串蟹 ] 는아닌듯하다. 잠깐주워도다래끼가찰 정도라면꽃게이기보다강물과바닷물이만나는곳에서식하는 방게 일가능성이크다. 방게 를 팽게 즉한자의음과훈을이용해 彭蟹 로표기했을터이다. 꽃게는조류에따라이동하기에어살에갇히기도하지만갯가에서잠깐주웠다 ( 俄頃拾 ) 는점에서그렇다. 물론그것을운반하고판매한자가노파였다는점도꽃게의어로작업과거리가있다. 2. 지방민의무속현장 2.1. < 인주요 > 의경우 孫石墳前潮打垠精靈竟作海中仙船人到此齊虔告不盡風波禍福人 손돌의무덤앞에물결벼랑에부딪히고정령은마침내바다의신선이되었네뱃사람들이곳에이르러정성껏고사지내지만바람과파도그치지않아화와복을주네 (< 인주요 > 8연 ) 작자는손돌의무덤이있는곳까지답사를했다. 손돌목 은물살이거친곳으로서울마포등지를가야할때반드시거쳐야하는물목이었다. 서울을향하는배의모습은 < 인주요 > 7연의 수많은조운선한번에지나가네 ( 漕船千百一時過 ) 와 배맞이하는관리북던지듯재빠르네 ( 津吏迎舠似擲梭 ) 도특정한물때를만나그곳을통과하려는것과관련돼있다. 뱃사람들은격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01
한풍랑과거센바람을억울하게죽은손돌과결부시켜이해했기에안전한항해를위해 정성껏고사를지냈 ( 齊虔告 ) 다. 그럼에도불구하고바람과파도가그치지않았기에그곳을무사하게지나간사람은복을받은사람이었고사고를당한사람은불행한사람이었던것이다. 하지만 바람과파도그치지않아화와복을주네 ( 不盡風波禍福人 ) 는 손돌목 에대한작자의생각으로다른해석이필요하다. 먼저음력 10월 20일을전후해서부는바람과추위를 손돌뱅이추위 나 손사공얼어죽은날 등으로부르는게전국적으로분포한다는점을감안해야한다. 엄청시리춥는기라. 고래가지고인자제일춥으모우리가전해오는말이, 인자시월초하릿날이면은인자, 걸음강손사공빠져죽은날이다 5) 로진술하는데에서 걸음강 은한자표기 岐江 으로 물살이험한곳 즉洛東江과南江의합수지역을지칭한다. 물살이험한합수지역에빠져죽은자가손사공인것도우연이아니다. 좁은물목 의물살은소용돌이치기에사망사고가빈번했을터, 망자의원한을급한물살이나강한추위와결부시켰을것이다. 그래서배운항의안전과온화한기후를바라는마음이결집된게손돌설화와손돌사당이었던것이다. 무엇보다 < 용비어천가 ( 龍飛御天歌 )> 에 손돌 이란지명에 窄梁 으로한자가부기돼있어 좁은물목 의의미임을알수있다. 사정이이러할때, 禍福人 에서 人 이원인을가리키는 因 이라면사람에게복이나화를주는것은정성껏지내는고사 ( 齊虔告 ) 가아니라 바람과파도그치지않 ( 不盡風波 ) 는 좁은물목 이었다는점을작자가지적하고있는것이다. 5) 구비문학대계 경남의령지정면. 102 인천역사 (8 호 )
2.2. < 속인주요 > 의경우 漁戶鹽村好鬼神蒸豚飯稻祭新春暗窺魍魎憐多少坐占經營判富貧 어부들염부들귀신을좋아하여돼지를찌고쌀밥을해서새봄에제사지내네몰래도깨비를엿보는모습다소불쌍하기도경영을점유하여부귀를판단하게나 (< 속인주요 > 5연 ) 殘祠掩映鶴山巓靈妾神官繡幔聯沼海漁人祈厚福春來先薦尺魚全 허물어진사당이문학산꼭대기어렴풋이가리고영첩과신관의비단장막이어져있네갯가의어부는두터운복을빌려고봄이오면큰생선놓고신굿하네 (< 속인주요 > 6연 ) 海俗秋來競賽神繁鮮懸布拜巫人不知乃祖荒原臥香火蕭條度幾春 바닷가풍속에가을이오면다투어굿을하고여러생선놓고베를매달고무당에게절을하네조상들거친들판에누운거알지못하고제사쓸쓸한지몇봄이지났는가 (< 속인주요 > 7연 ) 5연-7연에나타나듯바닷가사람들은생업이바다와밀접한만큼초월적존재에대한치우침이다른지역에비해높았다. 귀신을좋아해서 ( 好鬼神 ) 돼지를찌고쌀밥 ( 蒸豚飯稻 ) 을해제사를지냈다. 6연의 신관의비단장막이어져있 ( 神官繡幔聯 ) 는 허물어진사당이문학산꼭대기어렴풋이가리 ( 殘祠掩映鶴山巓 ) 는것을통해보건대신굿을하는공간이문학산기슭의해안가였던것같다. 어부들에게 두터운복 ( 厚福 ) 은다름아닌풍어 ( 風魚 ) 였을것이다. 그런데이러한신굿은가을에더욱극성스러웠는지 가을이오면다투어굿을한 ( 秋來競賽神 ) 다고한다. 그에따라자기의조상에게제사를지낸지몇년이지났는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03
지모를정도라고지적까지하고있다. 하지만작자는무속에대해단순히지적하는데머물지않고그들의간절한소망에대해간접적이나마공감하고있다. 6) 돼지와쌀, 그리고여러생선을제물로바치고있는것은풍어와관련됐기에그들을이해하면서도한켠으로 부귀를판단하는일 은 경영을점유하 는곧 자신의일을열심히하는것 이지귀신을섬기는게아니라고지적하는것이다. 이는손돌무덤에서 정성껏고사를지네 ( 齊虔告 ) 는거에대해합리적으로 不盡風波禍福人 으로이해했던거와동일하다. 3. < 속인주요 > 에나타난지방의역사와유적 凌虛臺下白沙長點著紅芳摠海棠更有防風莖葉秀縈紆螺甲浪淘傍 능허대아래백사장길게뻗어있고점점나타난붉은꽃은모두해당화다시바람을막으니가지와잎사귀빼어나고빙돌아얽힌소라껍질물결곁에있네 (< 속인주요 > 2연 ) 大洋西出杳無邊直與靑齊一路連古昔唐家蘇摠管驅來此海萬兵船 큰바다서쪽으로가니아득히경계가없고곧바로산동 ( 山東 ) 과한길로연결돼네옛날당나라소정방총관이이바다에수많은병선이끌고왔네 (< 속인주요 > 4연 ) 2 연은능허대를소재로하고있다. 백사장 해당화 소라 6) 문학산기슭의무속현장은 태평시대에늙은병사는봉화살펴보고 / 궁벽한곳에사는사람들은나무에제사지내네 ( 槎川詩抄 文鶴山, 時平老卒看烽燧地僻居人祭樹林.) 에서도확인할수있다. 104 인천역사 (8 호 )
껍질로연계됐듯시선이원경에서점차근경으로바뀐다. 해당화를온전히관찰하려고손으로바람을막거나소라껍질의무늬를언급하고있는것으로보아작자가대상을구체적으로관찰하고있는모습을연상할수있다. 물론작자는능허대에직접올라가기도했는데, 대 ( 臺 ) 는겨우 10여장의산으로바닷가포구에높이솟아있어마치인두자루같다. 사면이바위를이고있고위에소나무와진달래등의잡목이자란다. 내려다보면바로큰바다 7) 라며그곳의특징을기록에남기기도했다. 白浪驅來地不分 흰파도달려오니땅이분명치않고 山人初見却疑雲 산사람이처음보니구름같네 雄豪氣勢誰能敵 웅장한기세를누가맞설까 萬物中間水爲君 만물중에물이으뜸이네 8) 능허대위에서바라본파도의위세를간명하게한시로나타낸경우다. 작자는밀려오는파도를처음목격해서인지자신을산사람 ( 山人 ) 으로, 포말을이뤄밀려오는파도를구름이라했다. 이어그기세를맞설게없다며 만물중에물이으뜸 이라했다. 바다에대한작자의이러한감동은 인두자루같은 능허대의위치와무관하지않았을것이다. 능허대가언제어떤규모로지어졌는지알수없지만인천에만있는고유한건축물이아니라풍광을관찰하기좋은곳의건축물에견인된용어인듯하다. 소식 ( 蘇軾 ) 이능허대시 ( 凌虛臺詩 ) 를남기거나승려무외 ( 無畏 ) 가상주근처에누각을지어능허대라한게그예이다. 9) 능허대는백제가중국동진과통교 7) 일몽고 권 19, 臺僅十餘丈山而高崒於海浦如熨斗柄四面戴石上生松鵑雜樹俯視直抵大洋. 8) 같은곳. 9) 동문선 68 권, 庵居日月記, 釋無畏.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05
를시작한근초고왕 27년부터옹진으로도읍을옮긴개로왕 21 년 (475년) 까지사신들이중국을왕래할때출발했던나루터가있던곳이다. 인천부사 (1933) 에따르면 현송도해안의한지점이라고생각되지만아무런유적이없어서확언할수없 다고하지만작자가능허대를소재로한시를지었을당시에는풍광이여전히아름다운곳이었다. 4연에서하늘과바다의경계가없어지는서쪽바다끝에산동반도가위치한다고지적한다. 이어그곳은당나라수군이주둔했던공간으로나당연합군을결성하여수군을이끌고온당나라장수소정방이있을만한곳이다. 지금은막막한바다이지만과거에는수많은병선으로뒤덮혀있는모습을가정해낸것이다. 능허대에서서쪽바다를바라보며과거를재구하고있는작자의모습을떠올릴수있는한시이다. 4. < 속인주요 > 에나타난풍류 花郞艶服抱稽琴巫女雲鬢亞畵簪堂上歌酬堂下樂暗中相授是何心 화랭이고운옷차려입고계금을뜯고무당은풍성한머리털에그림비녀꽂았네마루위에서노래부르고마루아래에서즐거워하며어둠속에서어떤마음서로주는가 (< 속인주요 > 8연 ) 8연에등장하는화랭이와무당은관아의통제를받는자들이다. 계금을뜯는화랭이와그림비녀꽂은무당이등장하고참석한자들이마루의위와아래에위치하고있는것으로보아지방민들의풍류가아니라관아의풍류이다. 그것도낮이아니라밤에열렸기에 어둠속에서어떤마음서로주는가 ( 暗中相授是 106 인천역사 (8 호 )
何心 ) 라며작자에게그런모습이곱게보이지않았던것같다. 혹은암중 ( 暗中 ) 을 은연중 으로이해해도서로주는것 ( 相授 ) 은긍정적으로보일수없었다. 이는조선후기죽지사에서기생들이등장하는경우대체로그들의삶과애환이직간접적으로나타나기때문에그렇다. 10) 5. < 속인주요 > 에나타난지방민에대한애정 民瘠知緣士夫多遊衣遊食一生過縱然義理須君輩得失相參其柰何 백성이가난한거아는선비많지만유의유식하며일생을보내지그러나의리가그대들에게만있나함께어울려득실을따지면어찌하겠는가 (< 속인주요 > 9연 ) 작자가지방의현실을그리면서지방민을바라보는태도와관점이자연스럽게나타나는경우가있는데, 위의 < 속인주요 > 9연이대표적인경우이다. 그는남녀별어로생활과소금만드는과정과염부 ( 鹽夫 ) 에대한연민, 그들의무속현장, 지방의역사와유적, 관아의풍류등을밀도있게그려내기도했다. 지방민의고단한삶의실상을파악한작자는그들의고된노동과가난이야말로세상의어떤의나리를논하더라도누구에게뒤지지않을거라고지적하는것이다. 물론고단한삶을사는지방 10) 누가벼슬아치서방얻기바랄까 / 얼굴이름알려져야좋을거없네 / 작년에언니가의녀로뽑혀울면서어머니이별하고서울로갔네 ( 신국빈, < 응천교방죽지사 > 7 연, 官人誰願作書房知面知名也不祥前年阿姉選醫女啼別孃孃上洛陽 ), 와 꽃떨기들신분좋다고말하지만 / 공문에서의삼일은일년과같네 ( 장지완, < 평양죽지사 > 19 연, 縱道花叢身分好公門三日一年如 ) 등에서발견할수있다.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07
민과대비되는선비들은입으로는이와리를논하지만실상은유의유식하며인생을보내는자들이기에지방민에대한작자의애정을엿볼수있다. 즉치열하게살아가는지방민들이야말로선비들보다의 ( 義 ) 와리 ( 理 ) 를지닐수있다며그들에게경계의말을던진셈이다. 이는염부에대해 물에기댄인생 ( 寄水生涯 ) 이지만 모든백성들이일반구해먹는 ( 五行民食一般需 ) 거라며그들에대해 비웃지마 ( 君莫笑 ) 라는데에서이미예견된것이었다. 6. < 인주요 > 와 < 속인주요 > 의거리 < 인주요 > 9편과 < 속인주요 > 9편처럼연작시의형태를띠는것들은일반적으로무작위배열이아니라작자의일관된편집의도에따라각편들이위치한다. < 속인주요 > 는 속 이란어사가붙은만큼 < 인주요 > 의후속에해당한다. 이러한면은 < 인주요 > 와 < 속인주요 > 에서함께드러난절기 단오 를통해확인할수있다. 端陽過後一旬垂政是鰣魚上浦時馬賈船商來又去繁華粧點碧波涯 단오지나열흘정도지나면바로준치가포구로올라올때마고와선상이오고가네화려하게단장했네푸른바닷가 (< 인주요 2 연 >) 節近瑞端彭蟹生繩囊俄頃拾來盈老婆戴入都門內穿盡坊坊唱買聲 단양절이가까워지자게가나타나고잠깐만에주워와다래끼채울수있네노파가머리에이고마을안으로들어오자마을마다물건파는소리울리네 (< 속인주요 1연 >) 108 인천역사 (8 호 )
전자에서는단오이후준치가잡힐때면마고와선상이깃발나부끼며오고가기때문에바닷가가화려하게단장했다고지적한다. 후자는단오즈음에나타나는게와그것을주워마을로돌아와팔고있는상황이다. 양자가모두단오라는절기를계기로일어난일을그리고있지만전자는원경 ( 遠景 ) 에서시각 ( 視覺 ) 에의존하고있는반면에후자는근경 ( 近景 ) 에서관찰한내용이면서동시에청각 ( 聽覺 ) 도겹쳐있기에더욱생동감을느낄수있다. 이러한차이는작자가인천에와서머문시기와관련이있을터, 전자는인천에온지얼마지나지않은상태이고후자는시간이흐른뒤이기에속편에해당하는 < 속인주요 > 에편재된것이다. < 인주요 > 가인천의인상 (1개), 단오 (1개), 어로활동 (3개), 소금생산 (1개), 조운선 (1개), 손돌무덤 (1개), 용유도 (1개) 로구성되어있는반면에 < 속인주요 > 는단오 (1개), 능허대 (3개), 무속 (3 개 ), 관아풍류 (1개), 지방민애정 (1개) 인게그것이다. 전자의 < 인주요 > 에서소재로삼은것들은인천관아를중심으로할때좁게는인근바닷가이고넓게는용유도및김포에위치하고있다. 후자의 < 속인주요 > 는가장먼곳이능허대일정도로관아인근에있는것들이소재이다. 이러한차이는낯선곳에왔을때, 그곳이다른곳과변별되는대상에관심을두는원경에기댔다가이후시간의흐름에따라근경으로이동했다고설명할수있다. 무엇보다인천이다른곳과변별되는것은 < 인주요 > 에나타난대로어로활동 (3개), 소금생산 (1개), 조운선 (1개), 손돌무덤 (1개), 용유도 (1개) 이었으며이후 < 속인주요 > 에서는관아주변의능허대 (3개), 무속 (3개), 관아풍류 (1개), 지방민애정 (1개) 에관심을둘수있었던것이다. 특히 < 인주요 > 의소재들이작자에게는호기심과그에따른관찰이었다면 < 속인주요 > 는지적호기심을넘어서지방민들의고단한삶의실상을파악하고그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09
것을극복하고자하는그들의방식을이해하는계기이기도했다. 예컨대 < 인주요 > 에는전혀나타나지않은소재무속과지방민에대한애정이 < 속인주요 > 에서각각 3개와 1개이기에그렇다. 이는 < 인주요 > 에서는방문자로서의시선이었지만 < 속인주요 > 에서는지방민들의삶의본질에공감하는시선까지갖추고있었다고판단할수있다. 11) * 부록으로 < 인주요 > 와 < 속인주요 > 를전재한다. < 仁州謠 > 仁州風俗似窮鄕不識靑雲有玉堂女戴草囊男氈笠日生忙出蛤魚場 인주풍속은외딴시골과유사해청운과옥당을알지못하네여자들은초랑을이고남자들은전립을쓰고해가뜨면바삐조개와물고기잡으러가네 端陽過後一旬垂政是鰣魚上浦時馬賈船商來又去繁華粧點碧波涯 단오지나열흘정도지나면바로준치가포구로올라올때마고와선상이오고가네화려하게단장했네푸른바닷가 編箔排椽截海橫重重圈作內中城潮來潮去須臾後螺蟹魚蝦戢戢盈 발엮어말장에늘어놓아횡행의바다끊으니겹겹이어살안에는내중성이되었네바닷물오고간잠깐사이에소라, 게, 물고기, 새우가모두가득하네 11) 물론작자의이러한성향은그가자신의고향으로돌아가서이문 ( 異聞 ) 을만나기록하는습관과무관하지않다. 공은고향에서오래도록기거하며시서화죽으로일을삼고이문을만나면문득기록하여저술이더욱넘쳤다.( 硏經齋全集 권 49 世好錄, 李奎象, 公鄕居旣久以詩書花竹爲事遇異聞輒錄之著述益富 ) 110 인천역사 (8 호 )
拿得鯔魚一尺全瞥然飜手索頭懸忙從別浦潛身出或恐看於箭主前 숭어잡아올리니한자나돼별안간손을날려머리찾아매달고빠르게별포를따라잠긴몸드러나니혹시어살 [ 魚箭 ] 주인이볼까두려워하네 童蛤淺埋大蛤深絡締巢穴杳難尋浦娘競把尖鉤鐵細掘融泥似捻針 어린대합얕게묻혀있고큰대합은깊게있되낙지있는구멍묘연해찾기어려워라포구의아낙들다투어쇠갈퀴잡고촘촘히진흙탕을파니바늘로찍은것같네 蜂窠燕壘闢鹽廚鹽釜鹽成白雪鋪寄水生涯君莫笑五行民食一般需 벌집과제비집인양소금부엌늘어있고소금솥의소금은흰눈처럼퍼져있네물에기댄인생그대는비웃지마소모든백성들이일반구해먹는것이라네 四月風和平海波漕船千百一時過大砲聲放紅旗颭津吏迎舠似擲梭 사월바람은조화롭고파도는잔잔하고수많은조운선한번에지나가네대포소리퍼지니붉은깃발일렁이고배맞이하는관리북던지듯재빠르네 孫石墳前潮打垠精靈竟作海中仙船人到此齊虔告不盡風波禍福人 손돌무덤앞에물결벼랑에부딪히고정령은마침내바다의신선이되었네뱃사람들이곳에이르러정성껏고사지네지만바람과파도그치지않아화와복을주네 龍流島上産龍駒蒼白毛中聳骨癯牧子來尋空見跡雲騰雷掣海山紆 용유도의산품이준마이건만푸르고하얀털사이에솟은뼈여위였네목동이찾아오지만헛되이자취만보고구름이오르고우레가쳐서바다와산을감쌌네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11
< 續仁州謠 > 節近瑞端彭蟹生繩囊俄頃拾來盈老婆戴入都門內穿盡坊坊唱買聲 단양절이가까워지자게가나타나고잠깐만에주워와다래끼채울수있네노파가머리에이고마을안으로들어오자마을마다물건파는소리울리네 凌虛臺下白沙長點著紅芳摠海棠更有防風莖葉秀縈紆螺甲浪淘傍 능허대아래백사장길게뻗어있고점점나타난붉은꽃은모두해당화다시바람을막으니가지와잎사귀빼어나고빙돌아얽힌소라껍질물결곁에있네 蛤中往往得眞珠瑞暈祥光妙相俱赤豆伴來還貯殼傍生他粒等生雛 조개속에가끔진주가있고상서로운기운과빛을묘하게갖추었네붉은팥짝하여와서다시껍질을쌓고곁에다른알갱이생겨새끼낳은것같네 大洋西出杳無邊直與靑齊一路連古昔唐家蘇摠管驅來此海萬兵船 큰바다서쪽으로가니아득히경계가없고곧바로산동 ( 山東 ) 과한길로연결되네옛날당나라소정방총관이이바다에수많은병선이끌고왔네 漁戶鹽村好鬼神蒸豚飯稻祭新春暗窺魍魎憐多少坐占經營判富貧 어부들염부들귀신을좋아하여돼지를찌고쌀밥을해서새봄에제사지내네몰래도깨비를엿보는모습다소불쌍하기도경영을점유하여부귀를판단하게나 殘祠掩映鶴山巓靈妾神官繡幔聯沼海漁人祈厚福春來先薦尺魚全 허물어진사당이문학산꼭대기어렴풋이가리고영첩과신관의비단장막이어져있네갯가의어부는두터운복을빌려고봄이오면큰생선놓고신굿하네 112 인천역사 (8 호 )
海俗秋來競賽神繁鮮懸布拜巫人不知乃祖荒原臥香火蕭條度幾春 바닷가풍속에가을이오면다투어굿을하고여러생선놓고베를매달고무당에게절을하네조상들거친들판에누운거알지못하고제사가쓸쓸한지몇봄이지났는가 花郞艶服抱稽琴巫女雲鬢亞畵簪堂上歌酬堂下樂暗中相授是何心 화랭이고운옷차려입고계금을뜯고무당은풍성한머리털에그림비녀꽂았네당상에서노래부르고당하에서즐거워하며어둠속에서어떤마음서로주는가 民瘠知緣士夫多遊衣遊食一生過縱然義理須君輩得失相參其柰何 백성이가난한거아는선비많지만유의유식하며일생을보내지그러나의리가그대들에게만있나함께어울려득실을따지면어찌하리오 4. 죽지사 ( 竹枝詞 ) 에나타난인천풍경 113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 들어가며 2. 영흥도버드니의당고사와당계좌목 3. 서운동산제와산제행사기 4. 목상동의산신제와산신제경비부 5. 검암동의산제와산제기록 6. 나가며 문상범 ( 제물포고등학교교사 )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 들어가며 우리나라대부분의농어촌지역마을에서는마을공동체의유지라는사회적의미와의례 ( 儀禮 ) 의종교적의미가담겨있는마을공동제의인동제 ( 洞祭 ) 1) 를거행하였다. 마을수호신을신당 ( 神堂 ) 에모셔놓고정기적으로기원하며마을의질서와조직을유지하고집단의구성원모두가잡귀와재앙에서벗어나안녕과풍요가유지되도록기원하였다. 인천지역은급속한환경의변화로근래까지마을공동제의를지내는마을들을찾기가어렵다고생각하고있지만그래도예상과는달리많은마을에서제의를지낸흔적을찾을수있으며, 일부마을에서는지금도제의를지내고있어마을공동제의인동제에대한다양한자료를확인할수있다. 특히옹진군영흥도버드니마을, 계양구서운동과목상동, 서구검암동등의마을에서는동제와관련된기록문서가보관되어있어각마을이어떻게동제를준비하고치렀는지를살필수있으며, 이와는별도로동제거행당시의사회상일부를엿볼수있어그의미를더하고있다. 여기에서는동제문서를보관하고있는영흥도버드니마을, 계양구서운동과목상동, 서구검암동의동제문서의기록양상 1) 마을공동제의의명칭은다양하다. 인천지역에서는 당제, 당고사, 도당제, 도당굿, 당굿, 당산제 등의당제계명칭과 산제, 산신제, 산고사, 산치성 등의산신제계의명칭이혼용되고있다이글에서는특정제의명을사용하기보다는공동제의의보편적인명칭이라할수있는 동제 를마을공동제의의일반적인명칭으로사용하였다.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17
과실제로동제를어떻게준비하고치렀는지를살펴보고, 또한동제기록을통해당시의사회상일부를확인하고자한다. 영흥도의버드니마을에는동제의여러가지규칙을제정하고이를지키기로한당계좌목 ( 堂契座目 ) 이라는문서가있다. 이좌목은마을주민모두가정성을다하여동제 ( 당고사 ) 를지낼수있도록역할을하였다. 그리고이좌목은당고사뿐만아니라마을사람들의잘못을바로잡는일에큰구실을해왔던것으로일상생활에도큰영향을끼쳤다. 또한, 당고사를위해성금이나성미 ( 誠米 ) 를낸사람과액수나양을적은물목도따로기록하여보관하고있다. 계양구의서운동과목상동에는주로제사비용과제수물목에관한것으로제의비용을어떻게마련하고사용했는지를기록한문서가있다. 제의때마다각기다른기록자가편리한대로간단히적었으며, 중간에기록되지않은해도있다. 서구검암동에는산신제에대한제의절차, 축문, 제수단자기 ( 祭需單子記 ), 음복물목 ( 飮福物目 ) 등을기록한문서가보관되어있다. 이러한기록들은각마을에서어떻게제의를치렀으며, 어떤모습으로변천됐는지를자세히살필기회를제공하고있다. 그뿐만아니라주민의참여정도, 제물의종류와마련방법, 제물구매가격의변화, 심지어는우리나라화폐변천상황까지알려주고있다. 2. 영흥도버드니마을의당고사와당계좌목 영흥도에서는내동, 업벌, 버드니, 소장골의네마을에서동제를지내왔으나, 계속이어진곳은버드니한곳뿐이며나머지마을에서는 20여년전에끊어지고말았다. 118 인천역사 (8 호 )
이섬의신앙은모두농사에관련된것으로, 어업을위한신앙은이들에비해매우약한편이다. 영흥도의어업신앙이뚜렷하지않은것은다른섬에서처럼고기를잡기보다바지락이나굴을거두어서젓을담가육지로가져가서파는채취업이더성행했기때문으로여겨진다. 버드니마을의제의명칭은당고사이고, 고사는마을앞산 [ 新鴨山 ] 에서지내며당집을따로짓거나신체를모시지는않았다. 매해섣달그믐에제의를지냈고, 부정이발생하면초사흗날로연기되었다. 섣달보름날마을사람들이다모인 대동기 ( 계 ) 에서부정이없는주민중에서제주인공원 1명과, 공원을도울소염 ( 소임 ) 2명을뽑았다. 그러나그믐이되기전에이들가운데상을당하거나불행을만나는등의부정한일이생기면다시뽑아야했다. 보통이들을다시뽑는번거로움을피하고자스무날선출하는방식을택하였다. 제삿날까지닷새를줄이면다시뽑는확률도그만큼낮아지기때문이다. 제관이지켜야할금기는특별히없었고, 날마다산기슭의내에가목욕하고, 부정한집 ( 초상집등 ) 의출입을금하는정도였다. 제사에적극적으로참여하는집은이마을 60여호가운데절반도되지않는 20~30여호정도이다. 참여가구가저조한것은부정한집은참여할수없는데, 이보다는교회에나가는집이늘어나이들이참여하지않는까닭이컸다. 제의비용은대동곗날자발적으로얼마씩내고, 각집에서쌀한되 ( 형편에따라더내는집도있다 ) 씩을거둔다. 제수는매해조금씩다르기는하지만보통닭과북어각한마리에사과와배 3개씩, 대추와밤 1홉씩, 다시마한묶음, 산자한접시, 소지종이한묶음, 초한갑을마련하였다. 예전에는꿩을몰아잡아서바쳤으나꿩이줄고잡기도어렵기때문에꿩대신닭의모양이되었다.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19
제의는공원과소염이하루전날공원집에서작은단지에미리마련해놓은조라를가지고제사터에가서묻어놓고, 이튿날새벽고사터로가서놋새옹 ( 메짓는솥으로공원이보관한다 ) 에메 ( 밥 ) 를짓는다. 날씨가궂거나바람이세게불때에는큰애를먹게마련이지만, 마을의노인들이조라의익은정도와메가지어진상태에따라신령님이제사를얼마나흡족하게받았는지를가리므로갖은정성을다기울였다. 메를지어솥째올린후, 절을하고축원소지를하는것으로제를마치며, 아침에노인들을모셔다당고사지낸과정을보고하고음식을대접했다. 요즘은각자자기집에서차례지내는것으로대신한다. 다른곳과달리이마을의젊은이는당고사에대해매우긍정적인생각을하고있으며해마다가을이되면고사터로올라가는길의양쪽의잡풀을베는등의일까지도스스로나서서한다. 이에대해한청년은 당고사를지내면서마을전체가하나가되어한해를보내게된다면그얼마나좋은일이냐? 라며옹호론을펴기까지하였다. 버드니에서이처럼당고사를정성껏바쳐온데에는여러가지규칙을제정하고이를지키기로한당계좌목 ( 堂契座目 ) 이큰도움이되었다. 그내용은대략다음과같다. 정미 ( 丁未 ) 년 12 월 15 일내평 ( 奈坪 ) 2) 당계좌목책 ( 座目冊 ) 입의 ( 立義 ) 망월봉 ( 望月峰 ), 양로봉 ( 養老峰 ), 노적봉 ( 露積峰 ), 국사봉 ( 國思峰 ) 2) 이마을의옛이름이다. 120 인천역사 (8 호 )
들사이에우뚝솟은영당봉 ( 靈堂峰 ) 이내평마을의복을빌어주기때문이다. 국초이후로산기슭에거주하는주민은해마다섣달그믐에정성껏고사를올렸으며이러한행사는근래에까지이어져왔다. 무자 ( 戊子 ) 12월일내평당계좌목책정미 ( 丁未 ) 12월내평당계좌목 절목 ( 節目 ) 1. 공회일 ( 公會日 ) 은매년시월그믐날로정한다. 2. 고사날은해마다섣달그믐날로정한다. 3. 고사인 ( 告事人, 공원 ) 은공회일에두사람을뽑았다가 12월 20일이지나서가장깨끗한이를정해서 ( 고사를 ) 맡도록한다. 4. 고사에이유없이불참하는사람은벌금 30전을물리며, 이돈은공회의경비에보탠다. ( 한줄미상 ) 귀신을섬기는도가과연어디에있는가? 이것은다름이아니라우리마을사람들이점점거칠고무례해져서정성이나오는데를알지못하기때문이다. 다행히, 두셋, 뜻있는사람이있어, 조상때부터내려오던규범이해이해진것을민망히여긴나머지외람되지만, 다시당계를모으기로하였다. 온마을사람들에게전부터해온자취를따라이르니다좋다고하였다. 상벌 ( 上罰 ) 은매 50대중벌 ( 中罰 ) 은매 30대하벌 ( 下罰 ) 은매 20대큰상 ( 上賞 ) 은 5전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21
가운데상 ( 中賞 ) 은 3전작은상 ( 下賞 ) 은 2전 이뒤부터는해마다당고사를위해성금이나성미 ( 誠米 ) 를낸사람과액수나양을적은물목이이어진다. 이글에서는 1979년의것과 1995년의내용을뽑아살펴보기로한다. 1979년은이에참가한호수는 23호이며성금액수는 21,700원이다. 2,000원을한집에서냈으며, 일곱집에서 1,000원씩을내고열두집에서 500원을내었다. 1995년에는 26호가참여하여세집이늘어났고, 모금된제비총액은 420,000원이었다. 이해도역시가정형편에따라제비를제공했는데, 30,000원을 4집에서냈고, 열집에서 10,000원씩내었다. 나머지집에서 5,000 원씩을내고, 기타기부금이들어왔다. 두해를비교해보니 1979년에비해 1995년에는각가정에서부담하는비용이많이늘어났다. 이는그만큼물가가오르고화폐가치가떨어진탓이다. 이밖에현금외에성미도닷말이들어왔다. 한말은시루떡을찌는데, 나머지는주식대 ( 酒食代 ) 로사용되었다. 1995년의제수로는닭과북어각한마리에사과와배 3개씩, 대추와밤 1 홉씩, 다시마한묶음, 산자한접시소지종이한묶음, 초한갑을마련하였다. 고사비용으로모두 80,000원을사용하고대동계 ( 公下代 ) 에 150,000원을지출하였다. 이들항목가운데공원 ( 公員, 고사때제주구실을하는이 ) 한명과소염 ( 所任, 제주를돕는이 ) 두명에게 75,000원을들여내의를사주었다는대목은매우주목된다. 이것은추운겨울철에찬물로목욕해가며고사를지내야하는이들에대한감사의표시이지만, 고사를이끌어가는일이 힘들고번거롭다 라는인식이점점퍼져서이일을맡은이에게 성의표시 를하는것이마땅하다는인식에까지이른것으로보이기때문이다. 따라서이마을의당고사도 122 인천역사 (8 호 )
점차 연례행사 로굳어져가는사실을알수있다. 이러한가운데고사비용적립금이 660,000원이나되는것은이마을사람들의 정성 이절대옅지않음을나타내는반증이라하겠다. 3. 서운동산제와산제행사기 계양구서운동에서는산제 ( 山祭 ) 가 1989년까지행해졌다. 그동안마을의중요한연중행사였던산제에대한관심이시들해질수밖에없었던이유는이일대도다른지역처럼지역개발의물결속에서자연스럽게마을이변화를겪었기때문이다. 이곳에는산제를치르며이에관한중요한자료라할수있는 동운정산제행사기 ( 東雲町山祭行祀紀 ) 3) 라는기록을남겨놓아그동안이마을에서진행되어온동제의실상을확인할수있다. 이행사기는 1945년부터 1989년 (1979년부터 1988년까지는기록되지않았다 ) 까지의산제에대한기록물로수입부에해당하는 백미수납기 ( 白米收納記 ) 와지출부에해당하는 제물기 ( 祭物記 ) 두부분으로나뉘어있다. 수납기에는산제에사용될비용을어떻게마련했는지를기록했고, 제물기에는제수물목및기타비용의사용에대해기록했다. 연도별로수입과지출을따로작성하고앞부분이나뒷부분에당주와제관의이름을적어놓았다. 이행사기는서운동지역의산제가어떤모습으로변천됐는지를자세히살필수있다. 우선제사비용의마련방법, 제의 3) 東雲町은서운동의일제시대의동명이다.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23
에참여하는주민의범위와참여방법을알수있다. 행사기에의하면이곳에서는제사비용마련을위해매년전세대에걸쳐한되의쌀이나그에해당하는돈을걷는것을원칙으로했다. 쌀이나돈을걷는책임은각반의반장에있었고대체로반별로한두세대를제외하고는모든세대가참여했음을알수있다. 또걷은쌀의사용용도와처리방법을따로기록하고있으며, 남은쌀의처리과정에서당시의쌀값시세가어떠했는지를알수있다. 아래 < 표 1> 은산제행사기에서쌀과현금의수입총액과제사비용의지출총액만을따로뽑아작성한것이다. 걷은쌀중에서떡쌀 [ 餠米 ], 술쌀 [ 酒米 ], 밥쌀 [ 湯飯米 ], 치성미 ( 致誠米 ) 등직접현물로사용할것은남기고나머지는팔아서현금화하였다. 매년걷힌쌀의양은비슷했지만, 총수입액은당시쌀값시세에따라많은차이를보인다. 1950년대초반에는쌀값이급등하였기때문에제비수입이전해보다많이늘어난것을볼수있다. 이때부터치성미로사용되는쌀의양이감소하기도한다. 그외에도남고모자라는비용을어떻게처리했는지를알수있다. 제의다음날에당주와제관, 반장등이모여제의비용을결산한다. 모자라는경우보다는딱맞거나남는경우가더많았다. 들어온액수에맞추어제물을샀기때문이다. 사용하고남은돈은동회의의특별회계에편입시키거나동회의의접대행사비등으로사용하기도하였다. 1966년에는남은돈 300원을동회의결의에따라수고한반장들의연초대 ( 담뱃값 ) 로지출하였다. 비용이부족할때는동회비에서충당하였다. 한편, 제수물품의가격변동을통해우리나라가계물가변동수준을확인할수있으며, 연도마다사용된화폐단위를통해우리나라의화폐개혁의변화추이도살필수있다. 1945년에는화폐단위가 냥 이사용되지만 4) 이듬해부터는 원 으로바뀐다. 124 인천역사 (8 호 )
6.25가끝난 1953년에는 환 으로바뀌었다가 1962년부터다시원으로바뀌었다. 광복이후에정치경제적으로많은일을겪으며 3번의화폐개혁이이루어졌고주민의생활에도많은영향을미친것을알수있다. 내용년도 백미 ( 되 ) < 표 1> 서운동산제비용수입및지출내역 수입 현금총액치성미 ( 되 ) 지출 제물구입 잔액비고 1945 124 224 냥 545.5 냥 51 593 냥 -47.5 냥화폐단위 : 냥으로기재 1946 137-5750 원 62 3,490 0 화폐단위 : 원잔액은교제비로지출 1947 144 208 8,856 63 7,715 1,141 1948 146 230 9,590 61 9,590 0 1949 150-14,952 61 14,950 2 1950 152 3,000 67,000 52 58,450 8,550 1951 114 61,600 201,500 50 221,000-19,500 1952 145 14,000 718,000 35 568,000 15,000 1953 127 840 환 4,840 55 7,045-2,205 화폐단위 : 환 1954 127 200 환 - - - - 여타기록누락 1955 154-17,680 24 16,630-1,050 1956 122 600 19,360 45 14,680 4,490 1957 149 500 30,500 17 21,130 9,370 1958 153-26,200 32 25,280 920 1959 149 200 25,160 30 25,140 20 1960 153.5 1,290 35,670 29 27,920 7,750 1961 151-33,700 환 32 29,510 환 4,190 환 1962 140 40 원 4,200 원 21 3,201 원 1,019 원화폐단위 : 원 1963 129.5 50 5,380 21 4,939 441 1964 129.5 115 5,665 25 4,824 841 1965 199.5 70 5,355 25 5,359-4 4) 해방당시에도화폐단위가 원 ( 圓 ) 이었지만, 화폐사용에익숙하지않았던이마을주민들은예전처럼화폐단위를큰의미를두지않고 냥 이라고기록한것같다.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25
내용년도 백미 ( 되 ) 수입 현금총액치성미 ( 되 ) 지출 제물구입 잔액비고 1966 111.5 630 6,324 25 6,024 300 잔액은연초대로지급 1967 117 480 6,567 25 7,222 345 1968 114 1,050 9,780 25 9,190 590 1969 108.5 1,040 10,940 22 10,185 765 1970 93.5 3,800 12,440 22 12,375 65 1971 109 710 14,268 22 13,560 708 1972 83 4,800 17,200 22 17,490-290 1973 98 3,760 17,880 22 16,125 1,755 잔액은연료, 떡공임으로지급 1974 91 6,070 27,570 22 22,565 5,005 1975 116 8,210 44,240 26 32,820 11,420 1976 115 15,000 61,000 13 36,680 24,320 1977 108 17,400 52,750 28 41,140 11,610 1978 114 69,200 120,820 28 81,450 39,370 1979~1988 : 기록되지않음 1989 72.5 224,000 336,000-182,000 154,000 * 자료 : 서운동의산제행사기의내용을토대로작성 ( 총액은수입백미중치성미를빼고현금화한금액과현금수입액을합한금액이고, 치성미는술, 떡탕밥, 치성등을위해사용된쌀의양이다.) < 표 2> 는산제기의지출부에해당하는제물기 ( 祭物記 ) 내용을정리한것이다. 이를통해제물의종류, 수량, 구입가격의변천추이를살필수있다. 기본적인제수물목은소머리, 북어, 두부, 밤, 대추, 사과, 배, 감, 산자, 김, 떡, 술, 국수, 참기름, 소고기, 창호지, 고사지, 삼베 ( 모시 ), 양초등이다. 기본적인제물의종류와수량등은큰변화가없으나, 구매가격은당시의물가추이에따라변동이있음을알수있다. 제의가지속되며제수물목이나지출내용에서빠지는물목이나타나기도하고새로추가되는물목도등장한다. 김 [ 海帶 ] 은 1970년이후에는사지않은것으로되어있다. 찹쌀, 팥, 녹두등의곡식은 1950년대초반까지는사지않았으나중반에들어 126 인천역사 (8 호 )
서는필요한만큼씩구매한것으로나타나고있다. 이는 1950년대중반에들어서다른농사보다벼농사에치중하여이들을걷기가어려웠기때문이라여겨진다. 담배와당주행하 ( 堂主行下 ) 는초기기록에는지출된것으로되어있으나, 6.25 이후에는이들에대한지출이나타나지않는다. 초기에는수고하는이들을위하여약간의수고비를주었으나 6.25 이후에는제의를위해애쓰는것이당연하다고생각하였기때문인가한다. 앞의영흥도버드니마을과차이가보이는대목이다. 제의후주민의음복을위해샀던국수는 1968년이후의기록에서는등장하지않는다. 제비마련을위해주민에게걷은쌀의수입량도이때부터감소추세를보이고있는데, 이는음복의방법이변하고있으며, 주민의참여가점차줄어들고있는것이아닌가한다. 경제개발계획의성과가이지역에까지미쳐도시화가진전되고주민의이주와산업의변화가추진된결과이다. 이상과같이서운동 산제행사기 는산제비용마련방법이나, 제수물목등기본적인사항뿐만이아니라, 우리나라의물가변동등경제적인면도함께살필수있는매우귀중한자료라할수있겠다.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27
< 표 2> 서운동제수물목내역 제물 연도 1945 1946 1947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牛頭 ( 소머리 ) 1 首 200냥 1650원 4000원 5000원 8000원 25000원 141000원 160000원 4240환 正肉 ( 소고기 ) 1 斤 14 90 200 340 400 1,500 5,000 10,000 128 窓戶紙 枚 - 2 2 2 2 2 2 2 2 가격 - 16 50 120 100 400 1,000 2,000 25 白紙 ( 사고지 ) 1 卷 15 60 120 250 400 700 3,500 6,000 60 生苧布 ( 베 ) 1 尺 10 40 90 200 140 500 2,000 3,500 120 北魚 尾 - 10 10 10 3 10 10 10 10 가격 11 70 150 170 200 1,300 6,500 10,000 280 眞油 ( 참기름 ) 2 合 25 80 240 300 300 1,500 3,000 9,000 150 豆腐 모 4되 5 5 4 4 4 6 6 가격 - 15 300 60 120 400 2,000 6,000 60 生栗 ( 밤 ) 1 合 10 10 30 50 200 1,000 1,900 15 紅棗 ( 대추 ) 1 合 - 45 100 70 300 1,500 2,500 80 生梨 ( 배 ) 4개 10 15 냥전 21 100 100 1,400 2,000 12,000 80 林樆 ( 사과 ) 개 6 21 120 120 800 1,200 5,000 40 散子 1 匣 - 10 50 100 250 1,500 1,900 12 강정 1 匣 650 기 1 匣 1 1 1 1 1 1 1 1 洋燭 ( 양초 ) 가격 12 50 900 900 1,200 3,000 4,500 50 록 海帶 ( 김 ) 個 - 2 2 2 2 2 2 2 없가격 6 20 200 200 400 1,400 4,000 100 음 紅柿 ( 감 ) 個 5 4 4 4 5 5 5 6 가격 10 23 100 100 500 1,000 1,000 60 煙草 ( 담배 ) 1봉 30 50 100 50 100 1,000 3,000 30 貫 2 1.5 2 2 2 2.5-2.5 麵子 ( 국수 ) 가격 140 291 500 1,100 1400 10,000 17,500-575 燃料 가격 100 500 600 1000 3,000 5,000 18,700 620 찹쌀 升 2 가격 12 升 2 赤豆 ( 팥 ) 가격 12 酒米 ( 술쌀 ) 수량 20 20 20 20 20 20 20 60 20 술가격 234,000 餠米수량 27 27 27 20 25 20 20 10 20 湯飯米수량 5 5 5 5 5 5 5 5 致誠米升 1 1 1 1 1 1 1 1 堂主飯升 3 5 5 5 5 堂主行下비용 10 200 300 500 1250 20,000 200 양념류가격 3,000 기타저분200 500 4,000 30 128 인천역사 (8 호 )
제물 연도 1955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牛頭 ( 소머리 ) 1 首 5500환 7000환 6800환 800환 6850환 10,100환 1150원 1250원 1300원 12,100환正肉 ( 소고기 ) 1 斤 400 500 600 600 700 800 100 120 130 枚 3 3 6 10 5 3 7 5 6 8 窓戶紙가격 100 120 240 400 200 120 380 20 32 56 白紙 ( 사고지 ) 1 卷 150 150 150 150 70 100 15 10 10 生苧布 ( 베 ) 1 尺 200 230 150 200 180 200 200 당주제공 45 50 尾 10 10 10 10 10 10 10 5 10 10 北魚가격 850 900 1300 650 1600 1000 1300 75 150 150 眞油 ( 참기름 ) 2 合 500 400 500 600 700 600 500 70 100 150 豆腐 모 5 6 6 12 10 10 10 10 10 6 가격 150 300 360 600 600 650 700 60 60 102 生栗 ( 밤 ) 1 合 60 50 70 70 100 80 100 10 15 30 紅棗 ( 대추 ) 1 合 100 100 200 300 250 300 200 25 60 40 生梨 ( 배 ) 4개 120 160 160 200 120 200 240 20 32 100 林樆 ( 사과 ) 개 100 100 100 120 100 160 160 15 24 20 散子 1 匣 50 100 100 100 80 80 80 6 10 8 강정 1 匣 100 100 100 100 100 100 10 20 13 洋燭 ( 양초 ) 海帶 ( 김 ) 1 匣 1 2 2 2 2 2 2 2 3 2 가격 100 330 260 200 280 220 240 20 70 60 個 2 2 2 3 3 2 2 2 2 2 가격 80 100 140 300 750 400 200 10 30 10 個 5 5 4 5 5 5 5 건시 10 紅柿 ( 감 ) 가격 100 100 100 100 250 200 15 70 40 煙草 ( 담배 ) 1봉 30 - 貫 - 2 1 2.5 麵子 ( 국수 ) 가격 - 900 800 100 325 燃料가격 - - 200 120 500 200 20 122 700 찹쌀 赤豆 ( 팥 ) 綠豆 升 4 4 4 5 5 5 2 가격 1,000 1,000 8,800 200 140 升 2 5 5 5 5 5 5 5 4 가격 600 1,500 1,300 1,750 1,750 2,000 190 300 340 5 升가격 320 320 200 30 40 40 小麥紛 1 升가격 50 50 70 7 10 14 酒米 ( 술쌀 ) 수량 60 20 44 51 53 53 50 50 60 50 술 가격 6,000 6,800 7,680 9,010 9,000 9,500 850 1,500 1,400 餠米 수량 20 16 16 20 20 20 22 20 20 24 湯飯米 수량 - 5 6 5 5 致誠米 수량 - 1 1 1 1 1 1 1 1 1 堂主飯 升 4 5 4 3 4 양념류 가격 200 150 220 100 39 213 106 기타 50 50 저분50 80 140 50 10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29
제물 연도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牛頭 ( 소머리 ) 1 首 1900원 2300원 3000원 4500원 4000원 5300원 6900원 8000원 正肉 ( 소고기 ) 1 斤 160 200 260 400 400 500 600 700 枚 8 8 8 9 5 5 5 窓戶紙가격 40 80 80 90 50 75 140 白紙 ( 사고지 ) 1 卷 20 20 20 10 10 50 60 生苧布 ( 베 ) 1 尺 60 80 80 100 30 100 北魚 尾, 5 5 5 5 5 5 5 5 가격 120 150 250 250 350 450 600 350 眞油 ( 참기름 ) 2 合 110 160 180 200 180 250 300 500 豆腐 모 6 6 가격 120 120 90 140 250 240 300 250 生栗 ( 밤 ) 1 合 30 40 40 35 40 65 100 100 紅棗 ( 대추 ) 1 合 40 80 80 60 80 100 150 100 生梨 ( 배 ) 4개 100 40 40 100 100 100 200 100 林樆 ( 사과 ) 개 20 40 40 90 50 60 130 100 散子 1 匣 8 10 10 20 10 80 100 100 강정 1 匣 10 35 35 20 40 80 150 50 洋燭 ( 양초 ) 1 匣 3 3 3 3 3 3 가격 90 165 150 120 120 270 120 海帶 ( 김 ) 個 1 1 1 1 1 1 가격 10 30 30 20 10 100 紅柿 ( 감 ) 個 10 7 7 7 7 7 가격 40 30 30 140 120 140 130 100 煙草 ( 담배 ) 1봉 麵子 ( 국수 ) 貫 1 1 1 가격 130 140 燃料 가격 100 200 290 300 찹쌀 升 2 2 2 2 가격 300 300 400 赤豆 ( 팥 ) 升 5 4 4 4 5 3 3 4.5 가격 350 360 360 530 560 920 540 1260 綠豆 升 5 5 5 5 5 5 5 가격 60 60 90 100 125 200 250 小麥紛 升 1 1 1 2 2 2 2 가격 10 20 20 30 30 50 60 60 酒米 ( 술쌀 ) 수량 4 40 40 40 40 술 가격 1490 1080 1120 1630 2050 1800 1800 2000 餠米 수량 25 25 25 25 22 22 22 20 양념류 가격 146 135 115 145 340 30 220 240 기타 채소135 130 인천역사 (8 호 )
제물 연도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牛頭 ( 소머리 ) 1 首 8500 원 13000 원 13000 원 15000 원 20000 원 30500 원 正肉 ( 소고기 ) 1 斤 700 820 1000 1400 2000 2400 窓戶紙 枚 3 1권 3 3 가격 60 120 150 400 690 120 白紙 ( 사고지 ) 1 卷 75 100 150 100 150 150 生苧布 ( 베 ) 1 尺 100 100 150 200 400 650 尾, 5 5 5 5 4 北魚가격 400 500 400 650 1000 1000 眞油 ( 참기름 ) 2 合 500 200 100 100 豆腐 모세판 가격 600 1700 780 1150 480 900 生栗 ( 밤 ) 1 合 210 150 100 200 500 紅棗 ( 대추 ) 1 合 100 150 250 300 300 600 生梨 ( 배 ) 4개 100 200 300 500 300 4500 林樆 ( 사과 ) 개 100 150 250 배값에 포함 250 400 散子 1 匣 60 20 120 100 100 100 강정 1 匣 50 80 120 150 150 200 洋燭 ( 양초 ) 海帶 ( 김 ) 1 匣 1 가격 90 170 180 110 150 250 個 가격 個 5 5 5 紅柿 ( 감 ) 가격 100 175 200 250 350 350 煙草 ( 담배 ) 1봉 貫 麵子 ( 국수 ) 가격 燃料가격 1000 1000 3000 1400 찹쌀 赤豆 ( 팥 ) 升 2 2 가격 500 1000 380 升 4 3 3 가격 1000 1200 2400 2400 2250 4390 綠豆 升 10 10 가격 150 270 650 300 800 640 小麥紛 가격 80 350 酒米 ( 술쌀 ) 升 20 30 20 20 40 술 가격 1100 3300 1400 2400 4800 餠米 升 20 20 26 13 28 25 양념류 가격 480 820 5020 1790 2470 12480 기타 1979 ~88 79 ~ 88 산제기 기록안됨 1989 제물구입기록안됨 * 자료 : 서운동산제행사기를토대로작성함.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31
4. 목상동의산신제와산신제경비부 목상동은계양산을등지고북향으로자리를잡은전형적인농촌마을이다. 한해걸러씩 10월초순에산신제 ( 산고사 ) 를드린다. 계양산신인토지신에게마을의큰우물바로위에있는평평한터에서고사를지낸다. 당집을따로짓거나신체를모시지는않는다. 제의는주로 10월초하루에지내며초사흘을넘기지않도록한다. 제의를위해사흘전쯤대동회를소집하여안당주와선 ( 바깥 ) 당주를뽑는다. 당주는피부정이없고깨끗하며생기복덕한사람중에서선정한다. 당주가되면매일찬물로목욕을하여몸을정갈히해야하고, 목욕하는모습이남의눈에띄지말아야하므로남보다일찍일어나야한다. 당주집주위에는황토를뿌려부정을막는다. 금줄은치지않았다. 제의비용은주민에게추렴하여마련한다. 떡과밥을짓기위해쌀을걷고, 돈도따로걷는다. 상가 ( 喪家 ) 는제외하며, 비용을내지못하는가정이있으면주위에서대신부담하기도하였다. 제의준비는따로마련해둔문서인 산신제절차 를따른다. 어려움없이제의를차질없이잘진행되도록준비해것으로, 여기에는 제의날짜와제의시간, 안당주와선당주의역할, 제물준비방법 등을적어놓았다. 132 인천역사 (8 호 )
< 표 3> 목상동산신제절차 < 山神祭節次 ( 山致誠 )> 1. 목상동산신제는 2 년마다실시한다. 1. 음력 10 월초순을기준으로행한다. 1. 안당주, 선당주두가정을선정한다. 가. 안당주는떡을찌고그이튿날저녁에백설기를쪄서자시 ( 오후 11 시, 새벽 1 시이내 ) 에행한다. 이것이 3 일치성이다. 나. 선당주는쇠머리구입과제물및모든행사준비를한다. 쇠머리를삶고국거리와과접등의의무가있다. 단, 복잡하고바쁜관계로동민은여럿이도와야한다. 제물은보관하고있는문서에나와있는대로준비한다. 조라는당일아침당주집에서손수버무려단지에담아산제터에묻었다가사용한다. 조라단지구덩이에는짚주저리를만들어세워놓는다. 술이어느정도괴기는하나맛은밋밋하다고한다. 참고로 1992년도제의때의제수물목은다음과같다. <1992년제수물목과구입가격 > 연시-5개, 밤-1홉, 대추-1홉 : 1,500원양초-특대 2갑 : 600원창호지, 양지-각 5매씩 10매 : 1,400원북어-3마리 : 5,400원국거리소내장-5근 : 15,000원소머리-60근, 한우고기 : 180,000원떡시루-10되, 찹쌀-3되, 팥-3되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33
< 표 4> 목상동산신제제물문서 < 祭物 > 1. 제물은반드시숫소머리로한다. 자연그대로삶아서운두얕은그릇 ( 오봉 ) 에밭쳐놓는다. 1. 떡, 시루떡十升이상으로한다. 十升기준으로찹쌀 2.5 升, 팥 2.5 升 1. 과일연시 5 個, 밤 1 合, 대추 1 合, 북어 3 마리 1. 기타양초특대 2 개, 창호지, 양지각 5 매 제의당일아침에당주는마을의큰우물을퍼내고깨끗이청소하고촛불을켜놓는다. 이촛불은제사가끝날때까지끄지않는다. 근래에는화재예방과불편함으로전기를끌어전등불을켜놓았다. 밤 9시가넘으면청년들이산제터로제물을운반하여제물을진설하고제의를지낸다. 산제터에서의제의가마무리되면두당주의집에서떡, 고기, 술로음복하고남은음식은집집이나누어준다. 다음날새벽에두당주는목욕재계하고작은시루에떡을쪄우물로가지고가마지막정성을들인다. 떡은두당주가다먹고내려온다. 이마을에도산제를전후하여제사비용을마련하고제물을사들이고작성한 산신제경비부 라는문서와제의준비와진행을위해따로마련한 산신제절차와제수물목, 축문 을보관하고있다. 어려움없이제의를잘진행하도록준비한것으로, 여기에는 제의날짜와제의시간, 안당주와선당주의역할, 제물준비방법 등을적어놓았다. 산신제경비부는 1961년부터작성되었고중간에몇해의기 134 인천역사 (8 호 )
록이빠져있다. 마을사정으로제의를치르지못한까닭이다. 이기록은체계적인것은아니지만, 제의의결산을위해작성한의미있는내용이다. 눈에띄는내용은제수물목의비용을예상하여, 주민에게걷어야할쌀의양과돈액수를결정하여걷었다. 1984년부터는돈으로만걷었으나가정에따라서는곡식을내기도하였다. 매해걷은돈의액수가증가하고있는데, 1990 년대이후에는급격한상승폭을보이고있다. 이는마을이개발되며들어선목장이나농원, 음식점등에서찬조금을냈기때문이다. 1994년제의는사업주들의찬조금으로대부분비용을마련했고주민은정성껏쌀 1되정도씩만냈다. < 표 5> 에서와같이제비는가정마다똑같이일정량의곡식과쌀을걷는것을원칙으로했으나, 가정형편에따라더내거나덜내기도하였다. 각가정에서납부한내용을보면 1960년대에는제의참여가정마다곡식 ( 쌀, 찹쌀, 팥 ) 반되와일정액의현금을내었다. 1970년대에들어서는곡식이한되로늘었다. 1984년이후에는곡식을따로걷지않고현금으로만걷었다. 제비추렴책임자는호주이름을따로적어놓고제비납부여부를확인하며걷었다. 당주 2인은제비납부에서제외되었다. 제의에참여하는가정의수는큰변동은없으나, 1970~80년대에는예전보다줄어드나 1990년대들어서는도리어더많은가구가참여하였다. 제물은따로작성된 제수물목 의내용대로준비하는데, 그해의물가수준을고려하여각제물의예상가격을산정하여제의비용을산출하였다.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35
< 표 5> 목상동산신제비용마련및제비납부내역 년도 호당갹출내용 곡식 현금 참여 ( 되 ) ( 원 ) 호수 백미 ( 되 ) 납부내용 찹쌀팥 ( 되 ) ( 되 ) 계 현금 ( 원 ) 1961 0.5 500환 33 1963 0.5 50 31 11 4 3 18 1,990 1967 0.5 150 33 12.5 4 3 19.5 4,950 1969 0.5 230 31 11 4 4 19 7,350 1974 1 300 27 17 2 3 22 8,150 1976 1 1,000 25 16 2 3 21 21,900 1980 1 500 32 24 2 3 27 16,000 1982 1 1,500 27 21 4 3 28 40,500 1984 5,000 22 3 3 6 65,000 1986 2,000 28 2 2 44,000 1990 3,000 37 18 5 6 29 288,000 1994 34 13 3 26 540,000 비고 5. 검암동의산제와산제기록 검암동에서는옛날부터도당굿을해왔으나일제의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굿을할수없게되며산제로대신하였다. 이곳에서는산제의 산제절차, 제수단자기 ( 祭需單子記 ), 음복물목 ( 飮福物目 ), 축문 등의문서가보관되어있어이곳의동제내용을알수있다. 당나무는 350여년된상수리나무로, 강화가는길가의마을이한눈에내려다보이는언덕에있다. 이나무는 1982년에인천시보호수로지정되었다. 나무아래에는가로 136cm, 세로 84cm, 높이 48cm 크기의상석이설치되어있다. 이곳에서는 350~400여년전부터제의를드리기시작했으며, 제의날은음력 9월그믐쯤에마을회의를하여결정하여 10월초순에거행하는것을원칙으로하고, 중순을넘기지않았다. 136 인천역사 (8 호 )
중순이지나면부정이들수있기때문이다. 서둘러미리날을잡으면부정이생길우려가있어최대한그믐가까이에회의하여정했다. 부정한일이발생하면뒤로물리는데, 보통출산은 3일, 초상은 7일뒤로물리는것을원칙으로했다. 제의는도당굿을할때와마찬가지로비용관계로한해걸러서거행하였다. 이곳에서는집례와대축을겸하는초헌관, 아헌관, 종헌관등 3명의제관과이들을도울집사 3명을동네회의에서선정하였다. 제관들은연장자이면서생기복덕한사람중에서선정하나, 제의가늦은밤에이루어지기때문에너무연세가높은사람보다는환갑을막넘은이중에서선정하였다. 집사는각자연마을에서젊은이중에서 1명씩을선정하여제관을도와제가원만히치러질수있도록하였다. 언제부터인가각통장이이일을맡아보았다. 제관과집사로선정되면항상몸을깨끗하게유지하고, 비린것을먹지않으며상가에도가지않으며, 집대문양옆에황토를뿌리고왼새끼로금줄을쳐잡귀의범접을막았다. 제의를위해각가정에서한되분량의쌀을추렴하였다. 과거에는밤새불을피우기위해나무한단씩을걷기도하였다. 쌀, 나무등을걷는일은 3명의집사 ( 통장 ) 가맡아보았다. 보통절반가량의집 (120~130여호 ) 에서참여하나, 기독교인이증가하며쌀을내지않는가정이늘어났다. 산제를맡은측에서도기독교인들에게는일체의비용을걷지않았다. 물론부정한집의것도걷지않았다. 제물은제수단자기에나와있는대로마련을하고음복을위해따로물목을정해준비를하였다. 제주는보통 3일조라를쓰나, 시간적인여유가없을때는당일조라를쓰기도하였다. 조라는초헌관이손수빚어단지에담아당나무밑에파묻어두고행사날에꺼내썼다. 조라단지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37
를묻은자리에는짚으로주저리를만들어세워놓았다. < 표 6> 검암동제수단자기와제수물목 < 祭需單子記 > < 飮福物目 > 1. 祭酒一甁 2. 牛頭一頭 3. 餠 ( 시루떡 ) 器大三器 4. 大棗二合 5. 生栗二合 6. 梨배, 柿감 7. 食果類 ( 산자 ) 8. 洋燭大二匣 9. 大祝紙窓戶紙一卷, 白紙一卷, 洋紙五枚 10. 木香, 木炭약간 11. 脯 ( 미너포 ) 一尾, 肉膾 ( 소고기 ) 一斤 12. 苧一尺 13. 雪糖一斤 1. 濁酒三斗 2. 소내장拾斤 3. 선지五斤 4. 大根 ( 무 ) 배추약간 5. 木箸 6. 豆腐 제물이준비되면밤 10시정도에준비된제물을지고당으로올라 < 그림 > 과같이진설하고향교의제의순서를본뜬절차에따라제의를드렸다. 보통 11시에시작하여 12시경에끝났다. 제의에직접참여하는사람이대체로 50여명이넘었으나, 시간이가며당에오르는사람이줄어들었다. 기독교인이늘고, 주민의소득증가와바쁜생활때문이었다. 제사가끝나면술, 고기, 떡, 밥등을당에서음복하고남는것은나눠가져갔다. 138 인천역사 (8 호 )
< 그림 > 검암동산제상차림 山靈神位 시루餠떡 匙箸 저갈 盞盤 잔 三盤 잔 盞盤 잔 餠 시루떡 청 稻쌀黍기장 脯 미너포 草幣 폐 牛頭 우두 醢육혜 柿감梨배 食果 조과 栗 밤 食果 조과棗대추 6. 나가며 인천지역은개항과더불어일찍이공업화, 도시화가진행되며정체성을확인하기어려운도시로여겨졌고, 마을의정체성과밀접한관련이있는마을공동제의인동제를지내는마을들을찾기가쉬운일이아니라고생각했다. 하지만예상과는달리상당히많은마을에서동제를지냈고, 몇몇마을에서는이를통해마을의공동체의식과정체성을함양시켜나가고있으며, 어떤마을에서는사라졌던제의를부활하여주민의결속력을다지고있다. 한편, 옹진군영흥도의버드니마을, 계양구의서운동과목상동, 서구검암동등의마을에서는동제와관련한기록을보관하고있다. 각마을에서동제를어떻게준비하고진행했으며, 제의비용을누구에게얼마를걷어어떤물목을샀는지를자세히기록해놓아제의의전반적인상황을살필수있으며, 이와는 5. 동제기록문서로본인천의동제현장 139
별도로동제거행당시의사회상일부를엿볼수있어그의미를더하고있다. 영흥도의버드니마을에는당고사의여러가지규칙을제정하고이를지키기로한당계좌목 ( 堂契座目 ) 이라는문서와당고사를위해성금이나성미 ( 誠米 ) 를낸사람과액수나양을적은물목도따로기록하여보관하고있다. 계양구의서운동과목상동에서는주로제사비용과제수물목에관한기록을보관하고있으며, 서구검암동에서는산신제에대한제의절차, 축문, 제수단자기 ( 祭需單子記 ), 음복물목 ( 飮福物目 ) 등을기록한문서가보관되어있다. 특히영흥도버드니의좌목을통해서우리는전승되어오던동제가한때끊겼다가, 마을유지들의발의에따라다시이어지게되었고또이의영속을위해좌목까지제정한사실을알수있다. 그리고이의중요한이유가 마을이피폐해지고젊은이들의행동이무례해진데 에있었던점에주목하지않을수없다. 옛어른들은당시마을의결속력이해이해지고젊은이들이제멋대로놀아나는것은, 마을주민들이마음을하나로합쳐서 귀신을받드는일 을그만두었기때문이라고본것이다. 그리고이좌목이당고사뿐만아니라마을사람들의잘못을바로잡는일에큰구실을해왔던점도기억할필요가있다. 좌목은곧일상생활에대한행동규범이기도하였던것이다. 특히돈내기윷놀이를벌이면 집을헐고마을에서쫓아낸다. 는대목을보면이규범이얼마나엄중한것이었던가를알려주는보기이기도하다. 앞으로좀더자세한조사가이루어진다면더많은마을의동제기록자료를확인할수있을것이고, 이를통해마을공동제의와우리전통문화의올바른이해가가능하고, 또한공동체의식이고양되어주민들간에도보다친밀한관계가회복될것으로기대된다. 140 인천역사 (8 호 )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 인천항, 근대와제국의기착지 2. 충돌과수용 3. 인천항과근대기선과의만남 김현석 ( 인하대학교박물관학예연구사 )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 인천항, 근대와제국의기착지 마쓰시마키요시 ( 松島淸 ) 는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인천부윤을지낸이다. 1933년 8월부윤직에서물러나전매국전주지국장으로자리를옮길때마쓰시마는때맞춰 인천부사 ( 仁川府史 ) 를간행하고 서 ( 序 ) 라는제하에인천개항 50주년의의미를되새김하는글을남겨놓았다. 두쪽에걸친글에는책을편찬하는과정에대한짤막한언급도덧붙여있으나 80여년이지난지금, 인천부사 를들춰보는연구자들의눈길을붙잡는대목은아래의짧은석줄짜리문장이다. 개항당시는아무런부락도없는하나의해변에불과했던곳이이제조선내제 5 의대도시로인구 7 만을헤아리는데이르고조선내제 2 의대무역항으로무역연액 1 억 3 천만원에달하는성황을보이며조선중부에서가장주요한일대해항이됐다. 1) 변변한마을하나없던해변이번성하는무역항으로바뀌었다는일본인부윤의자부심은오히려일본의오만함을증명하는회고문으로언급되면서 인천부사 의침략주의적성격을규정짓는근거가돼왔다. 마쓰시마의입장에서는억울한점이없는것도아니다. 미개한 지역에 개화한 일본이진출해문명과진보의세례를퍼붓고드디어는무에서유를창조했다는서술은당시일본의역사편찬사업에서흔히보이는일종의습관화된문투이기때문이다. 1) 仁川府廳編, 仁川府史, 仁川府, 1933, 序.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43
가령 1935년군산부청에서발간한 군산부사 ( 群山府史 ) 의서문은군산개항이후의변화를이렇게표현했다. 당시의군산은모든것이거칠고쓸쓸한가난한어촌에불과했고, 인구는내지인이겨우 70 여명, 조선인이 5 백여명이었으며무역액도 1 만 2 천원을헤아릴뿐이었다. 그러나이후해를거듭하며진보 발전의한길을달려왔고, 특히최근에이르러서는부 ( 府 ) 의행정구역확장에따라인구가약 4 만명에달하며 2) 위의두서술을비교해보면, 당시일본인들은자신들이침략의대상으로삼았던조선내식민도시들에대해서대개두가지점에초점을맞추어그간의성과를자평하고있음을알수있다. 하나는가난했던한촌이조선에서손꼽는대도시이자무역항으로 발전 하였다는것이고, 다른하나는인구가급격히 증가 했다는사실이다. 또한이러한서술뒤에는으레 발전 을가능하게했던해륙연락시설이나도시기반시설의정비등일본인들의투자와노고가강조돼있기마련이다. 그리고이와같은업적은앞서조선에진출한일본인선각자들에의해이룰수있었기때문에이들의족적을남겨놓아야한다는이유에서 부사 ( 府史 ) 류의편찬이필요하다고보았다. 특히그중에서도인구의증가는일본이이미오래전부터추진해왔던척식사업의결과를확인하는일이기도하였다. 본토의농민등을해외적지에이식 ( 移植 ) 해농토등을경영하도록하는이민사업은본국의경제나정무상의문제에그치는것이아니라국방상으로도중요한정책으로간주되었고 식민 ( 植民 ) 의대상지역은조선뿐만아니라 제국의남문 인대만을비롯해화태 ( 樺太 ), 관동주 ( 關東州 ), 북해도등여러지역에고루걸 2) 群山府廳編, 群山府史, 群山府, 1935, 序. 144 인천역사 (8 호 )
쳐있었다. 3) 따라서이들지역에대한역사서술역시앞서살펴본 인천부사 나 군산부사 의경우와크게다르지않다. 예를들어, 내부식민지화과정을거쳐제국의북방방어선상에서중요한지위가부여된북해도에대해서는아래와같이일본의치적을강조하는역사서술이이루어진바있다. 이후성상 ( 星霜 ) 50 년, 삼현일국 ( 三縣一國 ) 의분치를거쳐도청시대에이르고제도의경혁 ( 更革 ) 이나문물의추이 ( 推移 ) 등변화가매우급했으며, 점차시운에따라제반사업이끊임없이진전해과거벽원 ( 僻遠 ) 의땅은이제야인구 2 백 8 만을웃돌고생산량 3 억 2 천만원에달하여척지신민, 식산흥업, 그리고도로교통등치적으로내세울만한것이매우많다. 따라서어찌보면 인천부사 등의편찬은단순한역사정리작업이기보다는명치유신이후일본이주력했던해외경영의성과를점검하는과정이었으며, 이는일본민족의성패와관련된문제로도인식됐던사안이었다. 그렇다면조선의경우, 일본은어떠한방식으로개척과경영에주력해야할도시들을선별해변화시켜나갔을까. 이를분석하기위해서는제조건들을복합적으로살펴보며고민해야겠지만거칠게나마큰틀에서언급해보자면첫째는항구이고둘째는철도였다. 이둘은따로떨어져작용하는것이아니라긴밀한연계를이루면서일본인이이주해식민도시로 개척 하는데기반으로작용하였다. 그중심이됐던도시들은항구를낀개항장이나철도연선주변에위치한곳이대부분이었다. 개항장이었던인천, 부산, 목포, 군산, 진남포등이나낙동강수역의중심도시인대구등이여기에해당한다. 4) 3) 内閣拓殖局, 殖民地移民概況, 拓殖局, 1910. 4) 佐藤政次郎, 韓半島の新日本 ( 一名 韓国起業案内 ), 1904.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45
철도가식민화과정의첨병역할을하면서침략과수탈의성격을갖는다는점은이미여러연구자들에의해밝혀졌다. 철도와역사 ( 驛舍 ) 의건설이도시의확장을초래하면서새로운도시공간을창출하고이점에서철도가갖는식민성과근대성의이중적성격도주목받았다. 5) 항구의경우도마찬가지다. 부산항의경우, 항만공사의추진과함께외형적성장을거듭해갔으나일본이항행권과통상권을장악해가는등해운전반을강점하면서한국해운의자생력은방해받을수밖에없었다. 결국경부선의출발지로서철도연선의산업발전과더불어흥망을함께했던부산항은한반도의대일본관문이자일본의대륙침략의관문역할을하는기생적성장을해나갈수밖에없었다. 6) 또한, 1899년에개항한군산항은전통적으로우리나라최대의미곡생산지로서국가적인유통의중심지역할을맡아왔던곳이었다. 개항후일본은자국으로의미곡수출과전북지역상공업품의관리 통제를목적으로군산을개발해도시의발달과인구의집중이가속화되었다. 그러나이러한개발은군산을일제의필요에맞춘식민지수탈지역으로전락시켰으며식민지모국의필요에따라 공간구성및도시의성장이계획적으로이루어진전형적인식민지도시 라는성격을갖게하였다. 7) 개항후의인천역시이들도시들과크게다르지않은수순을밟아갔다. 더구나인천은지리적으로서울과인접해있으면서이른시기부터서해안통상무역의중심지로주목을받아왔기때문에일본인들로부터조선제일의개항장으로손꼽힐만큼관심이집중된지역이었다. 8) 그만큼항구로서인천의변화 5) 전성현, 일제시기동래선건설과근대식민도시부산의형성, 지방사와지방문화 제 12 권제 2 호, 역사문화학회, 2009. 6) 부산지방해운항만청, 부산항사, 부산지방해운항만청, 1991. 7) 김영정외, 근대항구도시군산의형성과변화 ( 공간, 경제, 문화 ), 한울, 2006. 8) 佐藤政次郎, 韓半島の新日本 ( 一名 韓国起業案内 ), 1904, 33 쪽. 146 인천역사 (8 호 )
는빨랐다. 1894 년무렵제물포앞바다에정박중인선박들을묘사한스케치화. 왼쪽에보이는배가미국순양함발티모어 (Baltimore) 호다. 출처 : The Morning Call 1894. 10. 4 여기서잠시개항이후일제강점기까지인천항의변화상을항만시설을중심으로하여잠시일별해보도록하겠다. 9) 우선, 1883년개항직후제물포에설정된조계앞해안을중심으로석축과잔교가설치되기시작했다. 이들시설물의축조공사는외국인기사인러시아인사바틴 (A. I. Schredin Sabatin) 과베코프스키 (N. S. Bekofsky), 영국인챔버스등이주도해진행시켰으며이로써간단한형태의항만시설이갖추어지기시작했다. 이어 1899년에는일본조계가확장됨에따라일본조계앞해안을매립하는공사를완료하여해면방향으로 57m, 해안선을따라 258m의공유수면이매립됐는데인천에서시작된공유수면매립의시초로기록된다. 본격적인항만시설공사는 1906년부터시작됐다. 러일전쟁을전후해물동량이급증하자이를감당할시설의확충이필요했 9) 인천대학교인천학연구원, 인천항사, 인천항만공사, 2008, 224~227 303~ 327 쪽.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47
기때문이다. 이후공사는 1945년까지총 5차에걸쳐계속이어졌다. 제1차공사 (1906~1911) 때는내항준설과함께영국영사관언덕에서인천정차장부근에이르는해안이매립됐고호안석축등이축조됐다. 그러나이때는교역량에맞추기위한긴급공사의성격을갖고있어서아직은일시적인시설마련에그칠수밖에없었다. 제2차공사 (1911~1918) 가추진되면서비로소축항공사에착수하여 1911년 6월 11일축항기공식을갖고 1918년 10월 17일공사를 1차로완료했다. 2차공사는갑문식선거축조공사를주요사업으로하였다. 이로써인천항에는갑문을가진제1선거가완공돼간만의차에상관없이배들이수시로입출항할수있는시설을갖추게됐다. 제3차공사 (1917~1923) 는축항공사로인해내항에토사가쌓이자이를방지하기위한사업에비중을두고 2차공사의준공이전인 1917년부터시작됐다. 우선인천정차장앞면과월미도를잇는돌제를쌓고, 육지에서사도를거쳐외항쪽으로뻗어가는순도제를축조해내항쪽으로토사가유입되지못하도록하였다. 제4차공사 (1929~ 1932) 는수출입화물량의증가에따라선거를확장하려는목적으로착수된사업으로 1930년 6월 3일 인천해륙연락설비확장공사기공식 을거행하면서 10) 잔교등의추가축조와매립등이추진됐다. 그러나확장공사로도계속증가하는화물량을처리하기어렵게되자제5차공사 (1935~1945) 를착수하면서제2선거축항공사에돌입했는데제2차세계대전의발발로완공은보지못했다. 5차공사기간중에는북항개발사업이함께진행되어경인공업지대와연결되는공업항으로조성해갔으나역시전쟁으로인해완성은보지못했다. 10) 중외일보 1930 년 5 월 29 일자. 148 인천역사 (8 호 )
항만시설의축조는교역을목적으로한다. 조선은개항장이라는특수한제도를운영하고있었기때문에여기서의교역이란외국과의교역뿐만아니라개항장과미개항장과의교역까지포함한다. 당초개항초기에는외국인들이간행이정 ( 間行里程 ) 의규정에따라제한된지역에서만여행이가능했으나점차호조 ( 護照 ) 의발급이확대되면서사실상여행지역의제한은유명무실해졌다. 이로써당초개항장으로집결된상품만을거래하던외국상인들은개항장이외의지역으로진출해내륙이나미개항포구에서상품을거래하는것이가능해진다. 특히일본은자체적으로고용한조선선박뿐만아니라일본국적의선박까지동원해곡물등을대량으로모아들이는행태를보이게되는데이때일본이주로사용했던선박이기선이었다. 기선은조선선박들에비해보다많은화물을적재할수있을뿐만아니라항해중에맞닥뜨릴수있는위험요소들로부터도상대적으로자유로울수있었기때문이다. 11) 그후조선에대한일본의정치적영향력이강화되고조선이식민지로전락해감에따라항만시설은조선총독부의직영아래들어가버렸고항구는곧식민지수탈과대륙진출을목적으로하는일본제국의전진기지가되었다. 12) 항구는이제이국적인배들이드나드는낭만적인삶의한풍경에만머물지않게됐다. 식민지와식민본국을연결하는교착점으로서식민모국으로부터연장된새로운기착지였고, 그것은식민지를경험한제3세계국가들이공통으로겪게되는현상이었다. 그러나항구는또한경제적번성을구가하면서근대건축물로대표되는항구도시와의 11) 하원호, 개화기원산항의한일간교역과그성격, 동양학 38,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2005. 12) 최재수, 우리나라근대항만의발전, 해양한국 2006 년 3 월호, 한국해사문제연구소, 2006.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49
관계속에성장해가는공간이기도했다. 새로운경관과낯선문화, 특수한제도들의혼합속에서사람들은새로운일상을경험하기시작한다. 13) 항구가갖고있는이러한복합적성격은항구를연결해주는기선의운영을통해가능한일이었다. 철도가속도를중심에놓고시간의문제를해결해갔다면근대기선은공간자체를연결해주는또하나의수단이었다. 그런점에서볼때개항후기선의등장과운영과정에서나타난충돌과수용의모습은인천이경험한또다른근대의모습이라고할수있다. 2. 충돌과수용 기선은증기력을이용해엔진을추진해서바다를운항하는배다. 증기기관이발명된후선박에증기기관을적용시키려는시도는계속이어져왔으나이를상업적으로성공시킨이는미국인로버트풀턴 (Robert Fulton) 이었다. 풀턴은 1807년 8월 11 일노스리버 (North River) 호를제작해미국허드슨강에서시운전에성공했다. 당시뉴욕과알바니사이 240km를왕복운항하는데편도 30여시간이걸렸고 9월부터는상업적운항을시작할수있었다. 14) 이듬해인 1808년노스리버호는클레르몽 (Clermont) 호로이름을고쳐불렀는데풀턴이증기선을처음발명한것은아니지만클레르몽호는최초의증기선으로불릴만큼증기선시대의시작을알린배로기록됐다. 15) 13) 최낙민, 동방의巴黎, 근대해항도시상해의도시이미지 - 프랑스조계를중심으로 -, 역사와경계 75, 부산경남사학회, 2010. 14) 송성수, 상업용증기선의개발, 로버트풀턴, 기계저널 48 권 10 호, 대한기계학회, 2008. 150 인천역사 (8 호 )
클레르몽호는그림에서볼수있는바와같이선체외곽에바퀴를달아추진력을얻는외륜선 ( 外輪船 ) 이었다. 초기증기선의형태인외륜선은 1819년최초로대서양횡단에성공한증기선서배너 (Savannah) 호의예처럼아직범선의모습을버리지못해서돛과증기의힘을번갈아이용하는불완전한기선의모습을보이고있었다. 이후외륜기선은스크류프로펠러를설치한스크류기선으로바뀌어가고, 선박건조기술의발달로선박의재질도목선에서철선 ( 鐵船 ) 으로, 다시강선 ( 鋼船 ) 으로변해감에따라온전히증기력만으로운항하는강철선박의시대로접어들게되었다. 16) 로버트풀턴이 1807년허드슨강에서운항에성공한클레르몽호의스케치화 출처 : New-York Tribune 1910. 6. 5 스크류프로펠러를설치한최초의철선인그레이트브리튼 (Great Britain) 호가제작된때가 1843년이니조선후기부터서해연안에나타나이양선 ( 異樣船 ), 혹은이국선 ( 異國船 ) 이라는 15) The Washington times 1919. 6. 29. 16) 배병태, 개항기기선해운에관한계약의법적고찰, 저스티스 11-1, 한국법학원, 1973, 125 쪽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51
이름으로불린서양의선박들은대개가범선들이었다. 조선연안에최초로등장해주목을끈서양선박은영국군함프로비덴스 (Provience) 호로 1797년동해에나타나부산용암포에기항한바있다. 17) 외국배가연해에접근하면해당지역의지방관이통사 ( 通使 ) 와함께문정관 ( 問情官 ) 으로배를방문해문답을나눈후그결과를수사 ( 水司 ), 병사 ( 兵司 ), 감사 ( 監司 ) 등을거쳐중앙정부에보고하게돼있었는데 18) 이때경기도관찰사이형원과삼도통제사윤득규가중앙정부에올린첩보내용을보면, 프로비덴스호역시돛을단범선이었음을알수있다. 다만구조와규모면에서조선선박과차이를보인점이당시사람들의눈길을끌었다. 배의길이는 18 파 ( 把 ) 이고, 너비는 7 파이며좌우아래에삼목 ( 杉木 ) 판대기를대고모두동철 ( 銅鐵 ) 조각을깔아튼튼하고정밀하게하였으므로물방울하나스며들지않는다고하였습니다. 우리나라사람을대하여손으로대마도근처를가리키면서입으로바람을내고있는데, 이는순풍을기다리는뜻인듯하다고하였습니다. 19) 조선의한선들에비해큰선체를자랑할뿐만아니라항상대포를달고있던이양선들은위협적일수밖에없었다. 더구나두차례에걸쳐발생한신미 병인양요나기타물리적인충돌을겪은조선사람들은서양선박은곧무력을보유한군함이라는인식을갖게되었다. 또한 19세기중반이후나타나기시작한기선들은선박의외곽에바퀴를단외륜선들이대부분이어서 17) 김재승, 구한말근대기선에대한인식고, 한국해운학회지 4-7, 한국해운학회, 190 쪽. 18) ( 좌담회 ) 朝鮮侵略의觸手米英의異樣船, 朝光 8 권 3 호, 조선일보출판부, 1942. 19) 정조실록, 정조 21 년 9 월 6 일임신. 152 인천역사 (8 호 )
증기력자체를경험하지못한조선의입장에서는선박의외양자체가외경의대상이될수밖에없었다. 군사적인용도의선박으로만이해하던기선에대한인식은 1876년부산에개항장이설치되면서바뀌어가기시작한다. 이때일본으로부터교역을목적으로입항한기선들은기선의성격을군함에서상선으로이해시키는전환점을이루게하였다. 20) 그러나앞서살펴본바대로조선의연안해운은외국기선, 특히일본국적의기선들에의해서서히잠식해들어가기시작했고조선정부는이에대한대처방안을마련해가기시작했다. 당초조선정부가기선에관심을갖고이를적극적으로도입하려는이유는조운에있었다. 조운 ( 漕運 ) 은조선시대까지국가가토지에과세한세곡을수로를이용해운반하는일로조전 ( 漕轉 ) 이라고도했다. 지역별로운송하는교통로에차이가있어서경기도와강원도지역은한강을이용한수운 ( 水運 ) 을이용하도록했고, 곡창지대인삼남지방은해운 ( 海運 ) 을이용해운송토록하였다. 조운을위해서는조창 ( 漕倉 ) 을두었는데조창은해당지역에서수납된세곡을보관해두었다가서울의경창 ( 京倉 ) 으로운반하기위한시설로주로해안이나강안에설치하는것이일반적이었다. 이때지방의조창에보관돼있던조곡을경창으로옮기는데이용하는배를조운선 ( 漕運船 ), 혹은조선 ( 漕船 ) 이라고한다. 21) 조선초기에는각조창에소속된일정한수의조운선들이조운업무를전담했으나, 조선후기로들어서면서세곡량의증가등으로인해조운선이부족해지자지토선이나경강사선같은선박들이조곡운송에투입되기도했다. 그중경강사선은한강 20) 김재승, 구한말근대기선에대한인식고, 한국해운학회지 4-7, 한국해운학회, 198 201 쪽. 21) 이원철, 조선시대의조운용어에관한소고, 한국해운학회지 30, 한국해운학회, 2000, 284 287 쪽.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53
일대의경강상인들이소유하던선박으로관선이부족할경우정부에서임선 ( 賃船 ) 하여사용하는예가많았는데이들의비중이커지면서해운에서차지하는역할역시높아졌고외국기선들과의충돌도잦아졌다. 22) 조선정부는개항이후조운을개선하기위해외국기선들을끌어들여조선연안에투입하기시작했다. 최초로들어온근대기선은영국이화양행 ( 怡和洋行 ) 소속의남승호 ( 南陞號 ) 였다. 그러나묄렌도르프가이화양행과계약을체결해운항하기시작한남승호는 1년만에철수하였고, 이어상해초상국소속기선이 1883년 11월에들어왔으나역시이듬해 7월운항을중단했다. 이들선박들이계속활동을하지못했던이유는운송량이부족해손익이맞지않는다는이유에서였다. 조선정부는 1885년독일계상사인세창양행으로하여금기선을용선해운항하도록하여세창양행이기선희화호 ( 希化號 ) 를빌려운영하였으나역시이익을얻지못했다. 정부는이에대한보전책으로미곡적재량을보증하는조치를취하기도했으나실효를거두지는못했다. 23) 3. 인천항과근대기선과의만남 조선정부는외국기선을유치해조운에이용하려던계획이실패로돌아가자직접기선을구입해운영하기로결정하고 1886년일본우선회사로부터중고기선인시마환 ( 志摩丸 ) 을구 22) 김옥근, 조선시대조운제연구, 경제학연구 29, 한국경제학회, 1981, 10 12 쪽. 23) 배병태, 개항기기선해운에관한계약의법적고찰, 저스티스 11-1, 한국법학원, 1973, 130 131 쪽. 154 인천역사 (8 호 )
입, 해룡호로이름을바꾸고항로에투입했다. 해룡호는 1886년 6월 28일인천항에입항하면서최초로조선국적을가진기선이됐다. 해룡호를시발로이후조선정부가구입하거나용선해온선박들이인천항으로들어와정박하면서인천항은기선들의집합처가되었다. 이는이들기선들대부분이당초세곡운송에취항시킬목적으로들여왔기때문인데당시기선운영을담당했던전운서역시본래세곡운송을전담해오던기구였다. 해룡호는 236톤가량의이범 ( 二帆 ) 기선으로인천항에입항즉시주로경상도지역의세곡등을인천항까지운송하는역할을맡았다. 그후미개항장에서일본선박들의밀무역이성행하자해룡호를세관순시선으로용도를변경하여해안을순찰하도록하였는데 1892년에는일본에서선체를개수하여인천과부산간을왕래하며순시하는역할을담당하였다. 전운국이해룡호에이어독일로부터구입한기선인조양호와광제호역시대개는미개항장으로부터수집한세곡을인천항까지운반하는일을맡았다. 조양호가인천항에처음도착해인수된때는 1887년 8월, 광제호가홍콩으로부터들어온때는 1888년 7월이었다. 24) 전운국은기선을구입할뿐만아니라외국기선을용선해운영하기도했는데일본국적의선박들인오사카상선회사 ( 大阪商船會社 ) 와일본우선회사 ( 日本郵船會社 ) 기선들이주로이용됐다. 오사카상선회사는 1884년일본관서지방, 특히오사카를중심으로하여코베 ( 神戶 ), 나가사키 ( 長崎 ), 모지 ( 門司 ) 등지에서영업하던선주 ( 船主 ) 들이백여척의기선을통합, 운영하며창립한기선회사다. 그러나회사설립에참여하지않은해운업체들의수도상당해서이들과경쟁을하며힘겹게관서지방을중심 24) 손태현, 구한말의관영기선해운에관한연구, 동아논총 7, 동아대학교, 1970, 231 236 쪽.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55
으로영업을해나가던오사카상선회사는청일전쟁이일어나자정부에선박 30여척을군용으로제공하며사업을확장, 조선을비롯해대만, 청등으로항로를확장하며사세를성장시켜갔다. 25) 한편, 일본우선회사는 1885년 9월설립된해운회사다. 일본의명치정부는해상수송의중요성을일찍이간파하고해운사업을전담할조직을필요로하여 1870년카이소회사 ( 廻漕會社 ) 를설립해정기항로를운영하도록한바있고, 이어일본제국우편증기회사를만들어뒤를잇게했으나성공을보지는못했다. 당시일본의해운사업은미츠비시상회 ( 三菱商會 ) 가장악하고있었기때문인데일본정부는 1882년공동운수회사 ( 共同運輸會社 ) 를설립해미츠비시상회의해운권에맞서게하였고, 결국 1885 년 9월 29일미츠비시상회와공동운수회사가합병해일본우선주식회사를설립케되었다. 26) 전운국이초기에구입한해룡호, 조양호, 광제호는모두세창양행의차관을도입해매입한기선들이다. 조선정부는전운국이차관문제로기선운영에곤란을겪자 1892년이를대체할새로운관영기업으로이운사 ( 利運社 ) 를창설하고전운국이담당하고있던해운업무를전담시켰는데이로써이운사는근대기선을소유한우리나라최초의해운기업으로등장하게되었다. 조선정부는이운사의창설과함께보유하고있던기선인해룡호, 창룡호, 현익호를넘겨주어이운사는기선 3척을보유하며운영을시작하였다. 이후외국으로부터새로기선을구입하거나새로건조하여소유기선의수를늘려갔는데가장규모가컸던기선은세창양행으로부터구입한 1,000톤급기선이운호 ( 利運號 ) 였으며, 소형기선으로는일본으로부터구입, 또는새로 25) 野村德七商店調査部編, 大阪商船, 野村德七商店調査部, 1911, 1 5 쪽. 26) 南波禮言商店調査部編, 我が國策に相應する前途有望の日本郵船, 南波禮言商店, 1926, 17 19 쪽. 156 인천역사 (8 호 )
건조한경운호 ( 慶雲號 ), 경리호 ( 慶利號 ), 경제호 ( 慶濟號 ), 전운호 ( 轉運號 ) 등의선박이있었다. 이외에도한강을왕래해인천 서울간취항을목적으로상하이에서새로건조한한양호 ( 漢陽號 ) 가있었다. 27) 이운사가소유했던기선들역시주로세곡운송에투입됐다. 당시인천항은이운사의기선들이각지에서운송해온세곡들의집합처가되어이를다시한강을통해서울로운반하는중간기착지역할을맡았다. 이를구체적으로살펴보면, 경상도는마산포와진주, 전라도의좌수영과고금도 목포, 충청도의법성포 웅포 군산, 평양 황해도의보산 철도등지에서세곡을적재해인천항에도착하면인천항에서는세곡을다시전운환과경운호등에옮겨싣고한강을거쳐용산의군감아문, 양화진의별영신창, 부평의석곶등지로운반해갔다. 이때평안도방면으로는창룡호가취항하였고부산방면으로는현익호가배선되었으며최대적재량을보인인천 군산간항로에는한양호가투입되었다. 한양호는본래한강을왕래할목적으로건조됐으나후에이운사는이배를인천 군산간항로에변경, 취항시켰다. 28) 이운사는다수의기선을보유하고있었음에도불구하고운영상의미숙과재정적어려움으로인해이익을얻지못하자 1894 년이운사를활성화시키기위해인천항상인들을경영에참여시키기도하였다. 즉, 인천항상인들은이운사의사옥과창고, 해룡호 현익호 창룡호등기선의운영권일체를위임받아기선운항등에참여하였다. 29) 27) 손태현, 구한말의관영기선해운에관한연구, 동아논총 7, 동아대학교, 1970, 264 266 쪽. 28) 손태현, 利運社論攷, 경제학연구 19-1, 한국경제학회, 1971, 14 17 쪽. 29) 나애자, 개항기 (1876 1904) 해운정책과관영해운업, 이대사원 28, 이화여자대학교사학회, 1995, 250 251 쪽.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57
그러나이러한자구책에도불구하고이운사는결국 1895년위탁계약을통해일본우선회사에보유선박들을넘기는한편, 선박운항권과인사권까지일본우선회사가장악함으로써조선정부의기선운영은사실상계속이어지지못했고, 1896년아관파천후정부가일본우선회사와의계약을파기하긴했으나기선의필요성을더이상인식하지못하고현익호와창룡호만관용선으로남긴채해룡호와이운호를매각시켜버렸다. 30) 조선정부의해운사업과는별도로민간에서도기선을보유한해운회사가설립되고있었는데그중규모가가장컸던선사는대한협동우선회사였다. 정부는이미 1882년부터민간이기선을구입할수있도록허가하는조치를내린바있었는데이에따라 1886년최초의민영해운회사인대흥상회가설립된이래 1888년삼호상회, 1890년의신회사등이잇달아인천에서개업하며기선을운항하기시작했다. 31) 대한협동우선회사는정치국이이윤용과함께설립하여실질적인경영을맡았던회사로본사를인천에두고있었다. 정치국은애관극장의전신인협률사를세운인물이기도한데, 앞서부산에거주하면서 1899년협동기선회사를설립한이력을갖고있다. 32) 대한협동우선회사는정부가소유하고있던현익호와창룡호를불하받는한편조주부호 ( 潮州鳧號 ) 를인수해한성호 ( 漢城號 ) 로이름을바꿔항로에취항시켰으며일본으로부터일신호 ( 日新號 ) 와순신호 ( 順新號 ) 를구입하기도하는등성장을거듭해갔다. 33) 30) 노정호, 근대한일항로에관한연구, 부경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7, 34 39 쪽. 31) 인천대학교인천학연구원, 인천항사, 인천항만공사, 2008, 212~213 쪽. 32) 황성신문 1899 년 2 월 18 일자. 33) 김재승, 근대조선해관과선박, 근대한선과조선도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8, 175 176 쪽. 158 인천역사 (8 호 )
제물포는개항이전부터한강과삼남지방및황해방면의해로를연결하는중간지대에위치해있었다. 즉한강으로부터유도 ( 留島 ) 까지이어진수로는북쪽으로교동수로를거쳐황해도장산곶으로빠져나갔고, 남쪽으로는팔미도앞바다를지나충청도안흥량을거쳐삼남지방과연결됐다. 이와같은수로는조운로의성격을갖고있어서제물포는조운로상의기착지역할을맡고있었다. 34) 개항초기인천항의역할도크게다르지는않았다. 조선정부가기선을구입해운영하려던목적은 1차적으로는세곡의효율적인운송에있었고각지에서적재된세곡은인천항에집결된후다시한강을거슬러올라가서울로납부되는경로를거쳤다. 이과정에서인천항은정부가처음으로보유하기시작한근대기선들의집합처가되었으며여타외국기선들이드나드는교역의중심지이기도하였다. 기선들의출입과함께항만시설역시큰변화를겪는한편기선이몰고온새로운문물은조선의전통과어우러져도시의외양과도시민의삶을변화시키는기폭제가되었다. 여전히인천항은그때의잔영위에서있다. 34) 이철성, 조선후기 여지도서 에나타난인천지역의전결세와조운로연구, 인천학연구 6, 인천대학교인천학연구원, 2007, 276 280 쪽. 6. 인천항에깃든근대기선의잔영 159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 들어가며 2. 개항장과기선정기항로의시대 3. 부산 원산 인천의정기항로개설과열강의각축 4. 개항장의증설과일본의해운망독점 황은수 ( 인하대학교한국학과박사과정 )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 들어가며 21세기초두한반도의 동북아시아허브화 가대두된이래각지자체들은해당지역을동북아의물류 금융 경제중심지로발돋움시키고자부단한노력을펼치고있다. 특히, 허브화의기반이되는공항 항만시설의정비와연계를통해보다많은물동량을확보하고자하는한 중 일삼국의경쟁이 1) 치열하다. 그중심축에인천지역이자리하고있기에흡사제2의개항기를맞이한것같은인상과함께우리의시선을다시 19세기후반생존경쟁이치열하던개항기의인천으로이끈다. 1883년인천의개항은반타율적과정으로이루어졌고, 수도서울의관문혹은외항이나조선최대의상품수요지라는지정학적조건에따라불가피한선택이었다는것은주지의사실이다. 하지만이는어디까지나출발선상에서의문제이다. 개항이후인천은서울의보조적역할에안주하지않고, 부산과더불어국내상품유통망의거점이자동북아시아개항장네트워크의중심축으로상당한진전을보였기때문이다. 여기서는 1876~1910년, 개항장네트워크의선행조건이되는개항장사이의기선정기항로를인천을중심으로살펴볼것이다. 기초적인검토로서국내외인적 물적교류와직결된기선정기항로의개설과정을추적하고, 시기별 개항장별입출항선 1) 한국일보, 2009. 10. 14, 동북아허브공항으로 한 중 일삼국지. 이외에도국내외항만들간의경쟁역시치열하고, 정부의육성지원정책또한다양하게이루어지고있다.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63
박의통계비교를통해당시동아시아해운네트워크내인천의특성과위상을가늠해보고자한다. 나아가이러한작업이다소부진했던동아시아개항장비교연구에활력을제공할뿐만아니라현재의문제에서도역사적맥락에서의시사점이되기를기대해본다. 2. 개항장과기선정기항로의시대 개항장 ( 開港場 ) 은제국주의열강의동아시아진출의교두보이자세계자본주의물결을최일선에서감내하고극복해나가던상호착종 ( 錯綜 ) 의공간이다. 비록타율적인불평등조약에따라개항장이설정되었지만, 일정부분동아시아의전통과지역적특성을반영하고있다. 즉, 청국광동 ( 廣東 ) 의광주13행 ( 廣州十三行 ), 일본나가사키 ( 長崎 ) 데지마 ( 出島 ) 의네덜란드상관 ( 商館 ) 당인야시키 ( 唐人屋敷 ), 부산초량의왜관 ( 倭館 ) 등은개항이전부터청국 일본 조선이외국인에게제한된무역과거주를허락한호시장 ( 互市場 ) 으로개항장제도의 하부구조인조계 ( 租界 )[ 거류지 ] 도동일 기원이다. 2) 위의선례들은동아시아왕조들의호혜적 ( 互惠的 ) 교류형태로중국중심의조공 책봉관계를기반으로하고있었다. 그런데 19세기에접어들어이러한소통방법은선진기술을바탕으로하는서구의적극적인 2) 奧平武彦, 1937, 朝鮮の條約港と居留地, 朝鮮社會法制史硏究, 岩波書店, 5~6 쪽. 1842 년청조와영국사이에체결된 南京條約, 1856 년일본과네덜란드사이에체결된 日蘭和親條約, 1876 년조선과일본사이에체결된 朝日修好條規 는동아시아 3 국의개항 [ 일본의경우, 1854 년 美日和親條約 ] 을알리는동시에모두구래의교류관계및지역등을확대 개편한다는내용을담고있다. 164 인천역사 (8 호 )
공세앞에한층복잡한형태로탈바꿈하기시작했다. 동아시아지역내에서기존의 조공체제 가계속작동하는가운데서구의국제질서에입각한 조약체제 가병존하게된것이다. 3) 요컨대조공관계의유산이동아시아를하나의유기적광역권 ( 廣域圈 ) 으로묶을수있는토대를제공해주었고, 조약관계에따라개항장이라는특수한공간이동아시아주요정치 경제 군사의중심지로확대되어국경을초월한교류가활성화되기시작하였다. 청국 (1842) 일본 (1854) 조선 (1876) 은통상조약체결과함께구래의무역제도를폐지하고, 조약체결국인민에게거주 통상을허용하는새로운통상제도를받아들이는데, 이를조약항 ( 條約港 ) 제도 [Treaty Port System] 라고한다. 4) 여기서가장중요한것은외국인에게부여된거주와통상의권리인데, 개항장의설정목적자체가외국과의통상에있기때문이다. 먼저통상권은자유롭게무역할수있는권리로해관 ( 海關 ) 을통하면누구라도직접대외수출입무역에종사가가능하다. 그리고거주권은개항장의일정한범위내에외국인전용의토지를구획하여그들이거주할수있는 가옥매입및임차, 토지영조 ( 永租 ), 사원 병원 묘지조성등 권리를부여한것이다. 5) 이구역을조계혹은거류지라고하는데, 일반적으로그곳의행정권및사법권은해당영사나자치조직에위임되어있어토착사회와갈등의소지를낳거나외교적마찰의발단이되었다. 이와같이개항장제도는구래의호시장을기원으로여기에 3) 浜下武志, 1997, 朝貢と條約, 朝貢システムと近代アジア, 岩波書店, 142~143 쪽. 4) 조약항 은 Treaty port 의번역어로 Open port, 즉 개항장 과동의어이다. 그러나목포 진남포등과같이자발적으로진행된칙령개항은외국사신에게공문을조회 ( 照會 ) 시켜동의를구하는형식으로조약을체결하지않고개항장설정이가능하다. 또한, 개항장에는영사 ( 領事 ) 가주재하기때문에 Consul port 라고부른경우도있다. 5) 奧平武彦, 1937, 앞의논문, 10~12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65
서구의국제법이더해지면서동아시아에특수한제도를낳았고, 청국을시작으로일본을거쳐조선에도전파 확대되었다. 더욱이조약의균점이라는측면에서서구의각국가들뿐만아니라청국 일본도주변국에본인들의통상 거주지역을설정해나갔고, 그결과조선의개항장에는다양한조계가출현하였다. < 도표 -1> 조선의각개항 개시장설정일시및조계의형태 구분 부산 ( 釜山 ) 원산 ( 元山 ) 인천 ( 仁川 ) 한성 ( 漢城 ) 용산 ( 龍山 ) 의주 ( 義州 ) 회령 ( 會寧 ) 경흥 ( 慶興 ) 목포 ( 木浦 ) 개항 개시일시 1876. 10. 1 [ 일본 ] 1883. [ 기타조약국 ] 1880. 5. 1 [ 일본 ] 1883. [ 기타조약국 ] 1883. 1. 1 [ 일본 ] 1883. 5. [ 기타조약국 ] 1882. 9. [ 청국 ] 1884. 4. [ 기타조약국 ] 1884. 10. 1882. 9. [ 청국 ] 1904. 3. 1882. 9. [ 청국 ] 1888. 8. [ 러시아 ] 설정근거조계종류조계설정조약 朝日修好條規 朝日修好條規 元山津開港豫約 일본전관조계청국전관조계 釜山港租界條約 일본전관조계청국전관조계 朝日修好條規 일본전관조계청국전관조계 朝美修好通商條約 각국조계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朝英修好通商條約 잡거지 양화진대신용산개시왕복문서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외부대신선언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朝露陸路通商章程 잡거지 1897. 10. 1 외부대신照會각국조계 진남포 ( 鎭南浦 ) 1897. 10. 1 외부대신照會각국조계 군산 ( 群山 ) 1899. 5. 1 외부대신照會각국조계 元山津租界協定書 仁川港日本租界條約 仁川口華商地界章程 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 1906 년의주를대신하여신의주개항 鎭南浦及木浦各國租界章程 鎭南浦及木浦各國租界章程 群山馬山城津各國租界章程 166 인천역사 (8 호 )
구분 마산 ( 馬山 ) 성진 ( 城津 ) 평양 ( 平壤 ) 개항 개시일시 1899. 5. 1 외부대신照會 설정근거조계종류조계설정조약 각국조계일본전관조계 1899. 5. 1 외부대신照會각국조계 1899. 11. 13 외부대신및외국사신照會, 개시선언잡거지 용암포 ( 龍巖浦 ) 1904. 3. 23 외부대신照會와선언 청진 ( 淸津 ) 1908. 1 함경북도부녕군청진개방에관한건 群山馬山城津各國租界章程 馬山浦日本專管租界協定書 群山馬山城津各國租界章程 청진토지관리에관한협정서 출전 : 奧平武彦, 1937, 앞의논문, 16~18 ; 이현종, 1975, 韓國開港場硏究, 일조각, 133~135 참조. 6) 19세기중엽부터급속도로진행된교통 통신수단의기술혁신과 1869년수에즈운하의개통, 미국대륙횡단철도의완전한개통등에의해세계교통망은질적 양적인변혁기를맞이했다. 또한, 1860년대세계일주루트에서일본의요코하마가유럽-아시아간항로의최종점및태평양횡단항로의동아시아측중요기점으로동아시아최대의무역항이었던홍콩 상해와정기항로로연결되면서동아시아해운네트워크의골격이형성되었다. 7) 6) 조차지 ( 租借地 ) 인절영도 월미도는거주 통상보다는조차국의특수목적으로활용된지역이기때문에본표에서제외하기로한다. 7) 당시동아시아에진출했던구미정기선회사 ( 定期船會社 ) 중에동아시아역내해운시장을독점하고있었던회사는영국의 P&O 汽船 (Peninsular Oriental Steam Navigation Co.) 회사였는데, 1860 년대에들어와기선의항행능력향상을배경으로영국의 British-India Steam Navigation Company 와프랑스의帝國郵船 (Compagnie des Services Maritimes des Messageries Imperiale), 미국의太平洋郵船 (Pacific Mail Steam Ship Company) 등과각축을벌이게되었다. 이들구미해운자본은상해, 홍콩, 요코하마에기선회사의지점을개설하고, 항로경영에관한주요기능및시설을집중시켰다 ( 小風秀雅, 1995, 帝國主義下の日本海運 - 國際競爭と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67
1860년대까지해상수송의주력은범선 ( 帆船 ) 이었지만, 이후점차기선으로대체되기시작한다. 범선은비정기적으로운항했고, 화물을만재 ( 滿載 ) 하기까지출항하지않을때가많아출항및도착기일도부정확했으며기술혁신으로기선의성능이범선에비해월등히앞서기시작했기때문이다. 또한, 기선 ( 汽船 ) 을운용하는정기항로 ( 定期航路 ) 의개설은서구열강의동아시아진출과청 일양국의조선진출을운수 ( 運輸 ) 통신 ( 通信 ) 면에서뒷받침하였다. 정기해운은그신속성과정기성으로동양- 서양간, 본국과타국간의정보전달을보다긴밀화시켜 외교, 식민지경영, 육해군의활동, 무역의확대 등제국주의적진출을지탱시키는역할을했다. 8) 기선의도입및보급, 정기항로망의정비로인한기선해운시장의확대는유럽-아시아간항로뿐만아니라동아시아해역내에서도현저하게나타났다. 즉, 동아시아근해를주요시장으로하는구미해운이확대된것과함께청 일양국의경우정부보조아래민족자본을형성하여동북아시아해운시장에있어일정한지위를확보한것이다. 9) 또한비록시기적으로뒤떨어졌지만, 1883년부터조선정부도해운업을육성하기위해담당기구를개편하면서여러정책을추진하고, 해운기업도설립 운영하게된다. 10) 동아시아 3국의개항이후새롭게형성된해운망은국가의 對外自立, 山川出版社, 11~26 쪽 ). 8) 황은수, 2010, 개항기한중일정기해운망과조선상인의활동, 역사와현실 75, 한국역사연구회, 202 쪽. 1860 년대 기술혁신 ( 鐵製기선의보급, 2 단팽창기관, 스크루프로펠러 ), 우편정기항로의증대 ( 最新市況및해운정보 ), 정기항로망의정비 ( 수송기회의증가와투기적상거래의감소 ) 등과함께기선을운용한정기해운망의형성은서구열강의동아시아진출을지탱하고, 가속화시켰다. 9) 小風秀雅, 1995, 앞의책, 57 쪽. 10) 나애자, 1998, 韓國近代海運業史硏究, 국학자료원, 59~114 쪽. 168 인천역사 (8 호 )
경계를넘어각지역을긴밀하게결속시켜주었는데, 그공간의중요기점에는인적 물적교류의창구인개항장이자리했다. 개항장은외국인의거주 통상이허용된공간일뿐만아니라조선각지의내국인이모여들어상거래를영위하고동아시아각지의개항장으로넘나들수있는출입구로도작용했다. 11) 따라서동아시아각지에는개항장이조성되었고, 기선정기항로는각개항장사이를유기적으로연결해주고있었다. 바로개항장체제와함께기선정기항로의시대가찾아온것이다. 3. 부산 원산 인천의정기항로개설과열강의각축 1876년 2월조선은일본과체결한 수호조규 에따라전통적으로대일교역창구였던부산의초량 ( 草梁 ) 왜관 ( 倭館 ) 을근대조약에의거한개항장으로설정하였다. 동년 10월 31일초량에일본의관리관청이설치되며부산의개항을알렸고, 11월부터미쓰비시 ( 三菱 ) 기선회사가일본정부의명령항로 ( 命令航路 ) 중의하나인 長崎 - 五島 - 對馬島 - 釜山 의우편선로를매월정기운항했다. 12) 이것이개항직후조 일기선정기항로의효시였는데, 기선의적재량및운항횟수가적었기때문에일본전통선박인화선 ( 和船 ) 을통해비정기적으로부산항을왕래하는것이일반적인경향이었다. 이와같은양상은다음 < 도표-2> 에자세히나타난다. 11) 황은수, 2010, 앞의논문, 202~203 쪽. 12) 安秉珆, 1977, 李朝時代の海運業, 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 龍溪書舍, 126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69
< 도표 -2> 1876~1881 년부산항단일개항시기의일본선박입항척수추이 700 600 500 644 495 400 300 200 100 0 318 236 232 118 135 42 1 6 13 30 39 51 1 0 0 11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범선기선화선 출전 : 러시아대장성, 國譯韓國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역, 1984, 538쪽 ). 단, 1876년수치는安秉珆의 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 (1977, 127쪽 ) 에서참조. 앞의 < 도표-2> 과같이화선의입항수가최절정이던 1879년과 2년후인 1881년의입항수를비교해보면, 서양형기선및범선의입항수는 4배이상증가한반면화선의입항수는 3분의 1로감소한것을알수있다. 이는개항초창기, 지리적인접성과정기기선해운의비정착화로인해화선을이용한일본모험상인들의 13) 내왕이많았기때문이다. 한동안이들은정해진시간에구애받지않고수시로부산항을내왕하다가, 정기기선운항의장점과운항횟수의증가, 운임비의절하, 화물량의증가, 정부의유도등으로점차정기기선해운을이용했을것으로짐 13) 안병태는개항초기이주일본인의직업구성및일본영사관기록을통해적어도청일전쟁전까지의이들은 폭리를겨냥하고, 일확천금을꿈꾸며, 사기로혹은취객을유혹하는직업과다름없는 상법을가지고도항한 실업자, 불량배, 모험상인 부류라고말하고있다. 이중에서 모험상인 은海難등의위험을무릅쓰고渡航한상인들을가리키는의미도포함되어있을것이다 ( 안병태, 1982, 한국근대경제와일본제국주의, 백산서당, 262~264 쪽 ). 170 인천역사 (8 호 )
작된다. 부산에이어원산은 1879년개항이예정되었고, 1880년 5월 20일에이르러미쓰비시회사의추진주환 ( 秋津洲丸 ) 을타고원산에도착한일본영사관관원및상인들이 5월 23일영사관을개관하면서개항을공식선포하였다. 14) 일본의미쓰비시회사는 1880년 3월에정기우편선을기존의나가사키-부산에서원산까지연장하였고, 그해가을원산에지사 ( 支社 ) 를설치하며기반을마련한다. 1881년 2월에는 神戶 - 釜山 - 元山 - 海蔘威 항로를신설하여월 1회운항하게되는데, 1884년까지미쓰비시회사의기선만이원산을정기적으로내왕했다. 그런데원산은부산의경우와는전혀다른양상이나타난다. 먼저해로의위험성으로전통선박의항해에무리가따랐기때문에다음의 < 도표-3> 과같이 1882~1884년사이에원산을찾은화선은 1척에불과하다. 또, 매월 1회운항하는미쓰비시의기선외에서양형범선역시연평균 8척을넘기지못한것은아직원산에서일본으로수출할상품을개발하지못했기때문으로여겨진다. < 도표 -3> 1882~1884 년 3 항체제성립기의외국선박입항척수및톤수추이 부산 원산 구분 1882 1883 1884 평균척톤척톤척톤척톤 기선 33 1,279 63 12,598 51 19,832 49 11,236 서양형범선 130 9,398 112 8,545 64 4,764 102 7,569 화선 81 7,247 151 15,280 192 12,887 141 11,805 외국기선 1 28 22,282 15 22,282 기선 12 5,246 13 5,697 11 5,346 12 5,430 서양형범선 5 436 7 640 11 990 8 689 화선 1 308 1 308 비고 1882 년외국기선은유람선 ( 周遊船 ) 14) 高尾新右衛門編, 1916, 元山發展史, 啓文社, 7~11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71
인천 구분 기선 서양형범선 화선 외국상선 1882 1883 1884 평균척톤척톤척톤척톤 비고 12 23 3,837 2,399 20 13 11,248 1,068 16 18 7,543 1884년외국 1,734 상선톤수는상반기 (1~6 6 652 27 3,047 17 1,850 월 ) 수치만기재 9 16 8,141 13 계 262 23,914 396 49,648 433 89,605 364 54,389 출전 : 日本外務省記錄局, 1886, 通商彙編, 해당분기 년도의개별보고서참조. 15) 한편, 일본의인천개항요구에대한조선조야 ( 朝野 ) 의반대가절정이던 1881년 5월미쓰비시는인천으로향하는우편선로를개설하여년 2회배선했으나운항횟수가너무적었다. 또한, 공적으로일본군함이매달 2회왕복하고있었으나민간인들의편승이어려웠다. 16) 그래서개항장선포직전인 1882년 10월일본정부및기선회사는새로운항로개설을논의했으나항해보조금문제로인해곧실행되지못하였다. 그런가운데영국계이화양행 ( 怡和洋行 ) 은인천개항직후인 1883년 8월 상해-부산-인천-나가사키 간의정기항로를개설하였다. 매달 2회운항하면서화객을운송하고조선정부로부터세곡수송특권까지얻게되자일본에경각심을불러일으켰다. 이에일본은종래부산까지운항하던우편선을 1883년 9월부터인천까지연장하였다. 돌연인천은 청국-조선-일본 을잇는국제기선정기항로의중요 15) 본자료는재조 ( 在朝 ) 일본영사관에서생산했기때문에일본선박위주로작성되었다. 때문에여타외국선박에대한정보가소략하고, 조선선박은완전히제외되었다. 그리고외국군함 ( 軍艦 ) 은조약에서개항장입출항자유와통관절차생략이명문화되었고, 상업활동을수행하는게아니므로본수치에서제외하였다. 이하해관이나영사관자료에서도대부분군함관련수치는기재하고있지않다. 16) 仁川府廳, 1933, 仁川府史, 仁川府, 764 쪽 172 인천역사 (8 호 )
기착지가되었고, 개항 1년여만에부산적재량의약 50% 에해당하는선박들이내왕하기시작한것이다. 이어서청국의윤선초상국 ( 輪船招商局 ) 이 1883년 11월부터상해-인천간에기선부유호 ( 富有號 ) 를월 1회운항시키지만, 청불전쟁과적자등의이유로 1884년 1월이후운항을중단한다. 독일계의세창양행 ( 世昌洋行 ) 도인천거류화상 ( 華商 ) 및독일상인의자금지원과세곡수송특권을받아 1885년 3월부터상해-인천간에기선희화선 ( 希化船 ) 을운항하지만, 무역부진등의이유로동년 9월에운항을중단했다. 17) 그사이일본정부는막대한지원을아끼지않았고, 자국기선회사들의경쟁을종식시키기위해통합을유도하여일본우선회사가설립되었다. 18) 이회사는 1885년 10월인천지점을설치하고일본상인의건의에따라기존의조선항로를재편했으며, 1886년 3월에는 나가사키-인천-연태 [ 芝罘 ]-천진 간의항로를증설하였다. 19) 조선의개항장을기점으로하는동아시아정기항로에서일본의독주가계속되고있는가운데청국은조선에대한종주권강화정책을진행하며, 다시상해-인천항로를개설하였다. 이항로는인천에진출해있던많은화상 ( 華商 ) 들의청원을받은원세개 ( 袁世凱 ) 의요청으로 1888년 3월부터윤선초상국의광제호 ( 廣濟號 ) 가 20일에 1회씩 상해-연태-( 歸路營口경유 )- 仁川 노 17) 나애자, 1998, 앞의책, 47~5 쪽. 18) 당시일본해운업계에서는三菱會社와公同運輸會社가서로운임인하경쟁을벌여모두경영난에빠져있었으나, 일본정부의유도로 1885 년 9 월두회사가통합하여 日本郵船株式會社 가설립된다. 일본우선회사의창립당일일본정부는명령서를내려제 7 조 정부는그회사의株金全額에대해개업일부터 15 년간그이익금이年八步에달하지않을때에 매년 88 萬円 의보조금을지급하기로한다. 보조금지급조건으로 요코하마 - 고베 - 시모노세키 - 나가사키 - 상해, 나가사키 - 부산 - 원산 - 블라디보스토크, 나가사키 - 고토 - 쓰시마 - 부산 - 인천 의근해 3 개항로와연안 11 개항로를지정받는다 ( 日本郵船株式會社五十年史, 1935, 49~82 쪽 ). 19) 나애자, 1998, 앞의책, 116~117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73
선을운항하였다. 이때부터조선항로의화객 ( 貨客 ) 을독점하고자하는양국기선회사의경쟁이본격화되었다. 그러자일본우선회사는 1889년천진선 ( 天津線 ) 을증편하여연태-인천간의운임을낮추고, 집하력 ( 集荷力 ) 을강화시키기위해노력한다. 20) 다음 < 도표-4> 를보면, 새로운인천항로가개설되고증편되는 1888년부터일본 청국선박의입항비율이획기적으로변하는것을알수있다. < 도표 -4> 1885~1896 년인천항입항각국선박의톤수추이 출전 : British Diplomatic and Consular Reports on Trade and Finance, Corea, 1886~1897. 21) 20) 小風秀雅, 1995, 앞의책, 1995, 233~235 쪽. 21) 위에열거한국가들은인천에기항하는기선정기항로를직접개설한국가들이다. 이외에도러시아 노르웨이 미국 이탈리아등의선박들이종종입항했으나, 그수치가미미하기때문에기타로묶었다. 174 인천역사 (8 호 )
한편, 1888년 6월러시아의기선회사가조선정부에정식으로기선운항을신청하자 22) 부산및원산항로에서도일본해운의독점은위기를맞이한다. 그래서우선회사는 1889년 4월 上海 - 煙臺 - 仁川 - 釜山 - 元山 - 海蔘威 간의항로를신설하여기선비후환 ( 肥候丸 ) 으로 4주에 1회정기운항시켰다. 23) 더욱이 1892년부터일본의오사카상선주식회사 ( 大阪商船株式會社 ) 가고베와부산간에월 3회의정기운항을시작했고, 1893년부터는 2주에 1회씩고베-시모노세키- 부산-인천항로에기선을취항하기시작하면서일본내기선회사들의경쟁도나타났다. 24) < 도표 -5> 1885~1896 년개항장별입항선박의톤수비교 구분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조선 96 112 236 708 1,162 7,217 5,139 9,811 6,400 (%) 0% 0% 0.1% 0.1% 0.2% 0.5% 0% 1% 3.8% 3% 5% 2.5% 부산일본 41,333 78,830 85,464 94,358 111,278 154,761 169,051 171,300 168,305 136,028 90,570 227,680 (%) 95% 99% 100% 99% 99% 99% 94% 92% 90% 78% 46% 89% 전체 43,713 79,336 85,560 94,857 112,707 156,760 180,375 185,402 187,919 173,288 195,104 254,828 원산 인천 합계 조선 85 514 3,930 3,314 6,232 5,412 (%) 0% 0% 0% 0% 0% 0.1% 0% 0.7% 5.6% 4.7% 7% 5.8% 일본 17,779 37,541 42,433 41,808 53,139 51,617 50,839 58,117 55,840 44,629 18,043 68,881 (%) 86% 98% 100% 100% 99% 99% 85% 82% 80% 63% 20% 73% 전체 20,626 38,437 42,433 41,808 53,913 51,702 59,929 71,158 70,038 71,115 88,576 93,774 조선 1,583 4,520 4,705 2,086 5,715 7,148 7,104 30,319 27,828 24,576 13,947 (%) 0% 3.6% 8.5% 4.2% 2.7% 5.4% 6.1% 5.3% 23.4% 23% 20.1% 9.3% 일본 9,445 36,973 44,440 40,456 56,387 77,623 91,774 96,206 80,079 63,894 59,149 128,423 (%) 64% 84% 83% 68% 73% 74% 78% 72% 62% 53% 48% 85% 전체 14,674 44,128 53,304 112,680 77,590 105,385 117,036 133,937 129,550 120,898 122,470 150,558 조선 1,583 4,616 4,817 2,322 6,508 7,148 8,780 41,466 36,281 40,619 25,759 (%) 0% 1% 2.5% 1.9% 1% 2.1% 2% 2.2% 10.7% 9.9% 10% 5.2% 일본 68,557 153,344 172,337 176,622 220,804 284,001 311,664 325,623 304,224 244,551 167,762 424,984 (%) 87% 95% 95% 71% 90% 90% 87% 83% 79% 67% 41% 85% 전체 79,013 161,901 181,297 249,345 244,210 313,847 357,340 390,497 387,507 365,301 406,150 499,160 출전 : British Diplomatic and Consular Reports on Trade and Finance, Corea, 1886~1897. 22) 러시아의세베레브 (Shevelev) 기선회사는 1888 년 6 월 17 일, 15 년기한으로체결한계약에따라 海蔘威 - 元山 - 釜山 - 長崎 - 煙臺 - 上海 항로를개설하기로한다. 이후 1891 년 5 월부터기선블라디미르 (Vladimir) 를월 1 회정기운항시켰다. 1895 년외국기선을용선하여월 2 회정기운항하다가, 1900 년조선항로를東中國鐵道會社에양도하게된다 ( 러시아대장성, 앞의책, 581~583 쪽 ). 23) 나애자, 1998, 앞의책, 126~127 쪽. 24) 러시아대장성, 앞의책, 1984, 580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75
앞의 < 도표-5> 와같이 1885년부터청일전쟁직전인 1893년까지 25) 조선의개항장에서일본선박의비중은압도적이지만, 유달리인천의일본선박입항비율은평균 70% 정도로부산 원산에비해상대적으로낮은점유율을보이고있다. 이는청국및구미해운의지속적인 상해-인천 항로의개설에기인한것이나보다본질적인요인은인천의지정학적인조건과무역구조에서찾을수있다. 26) 또한, 인천에서는다른개항장과달리조선인해운업의발전이현저하게나타난다. 특히, 1893년이운사 ( 利運社 ) 의설립과 27) 함께인천의조선선박점유율은급증하여 23% 의점유율을보인다. 다음인용문은인천주재영국영사관이 1894년본국에보고한내용으로 1893년당시조선선박및이운사의활약에대한많은정보를담고있다. 올해최대의특징은조선의국기를게양한기선과범선들이확연히증가했다는것이다. 조선국기가처음으로등장한 1886 년첫해그 [3 항에입항한선박 ] 수는기선 7 척, 범선 3 척이었다.( 중략 ) 지난해 [1893 년 ] 조선선박들은 141 척의기선과 149 척의범선으로늘어났고총 41,466 톤의곡물을가져왔는데이는거의 500% 의증가를말한다.( 중략 ) 범선들의증가는오로지제물포에서만이루어졌으나, 증기선은 3 항에서모두증가한것이다. 조선은서양식선 25) 1894~1895 년일본선박의점유율이급감하는것은각기선회사의선박들이일본군대에징용되었기때문이다. 그자리를대신해구미계선박들이잠시고용되어운항하였다. 26) 황은수, 2010, 앞의논문, 209~210 쪽. 27) 利運社는민씨정권세력가인閔永駿과전운국鄭秉夏, 인천경찰관禹慶善등의발의에의해청국에서도입한 20 만냥의차관으로 1893 년 1 월에창립되었다. 청국의管督商販기업인招商局을모방한정부직영의관기업으로서설립되었고세미운송을목적으로하되화물과여객수송의기능을동시에수행하여본격적인해운기업이되었다. 이운사는기선 5 척 [ 蒼龍號 (476t), 顯益號 (505t), 利運號 (796t), 慶濟號 (130t), 漢陽號 (100t)] 으로세곡수송및개항장 비개항장간에정기적혹은비정기적으로왕래하며화객운송업에종사했다. 176 인천역사 (8 호 )
박건조장비를지니지못했으므로이러한선박들의증가는모두외국에서구입한것이다. 제물포에조선선박이이렇게증가한이유는이미언급했던이운사때문이다. 이회사는 1892 년말일본우선회사에의해잠시통제당하던조선정부의선박들을양도하여만들어진회사다. 지난해까지이배들은주로세금으로거둔미곡을군대에운송하는일을전담하였으나, 지금은승객들과화물도운송한다. 28) 결국인천은지리적으로수도인한성의출입구이면서청국개항장과가장인접한위치에있어조선및인근지역에세력을확장하고자했던일본, 청국및구미열강이직접맞닥뜨리는결전의무대가되었다. 그래서다양한조계가병립했고, 실제하나의전장 ( 戰場 ) 이되기도했다. 그럼에도이러한환경은조선의다른개항장과달리조선인의근대적경제활동에유리한조건을제공해주었다. 29) < 도표 -6> 1888~1897 년인천항출입각국인의연도별추이 30) ( 단위 : 명 ) ( 입항 ) ( 출항 ) 28) Great Britain Foreign Office, British Diplomatic and Consular Reports on Trade and Finance, Corea, 1894, 7 쪽. 29) 개항기기선정기해운망을이용하여국내외개항장을넘나들은조선상인의보다자세한활동에대해서는앞의황은수 (2010) 논문참조. 30) 藥師寺知朧 小川雄三, 新撰仁川事情 ( 김석희역, 2007, 59 쪽 ) 의수치를토대로그래프작성.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77
위의 < 도표-6> 은 1888년부터 1897년까지 10년동안인천항을출입한사람들의국적비율이다. 매년 200~300명안팎으로출입하는서양인외에조선 청국 일본인은꾸준히증가하는양상이다. 특히, 청일전쟁의여파로잠시일본인의출입이급격히늘어났고, 이후 1896년부터는조선인의출입이일본인을초월하기에이른다. 요컨대근대의변화에발맞춰점차많은조선인들이다음 < 그림-1> 의해운망을이용해국내외개항장을넘나들고있었던것이다. < 그림 -1> 1883~1896 년조선의국내외정기항로 출전 : 大阪商船株式會社 (1916) ; 大阪商船株式會社五十年史 (1934) ; 日本郵船株式會社五十年史 (1935) ; 小風秀雅, 앞의책, 245~252 쪽 ; 나애자, 앞의책, 287 쪽. 31) 178 인천역사 (8 호 )
4. 개항장의증설과일본의해운망독점 청일전쟁이후조선과일본사이의무역구조는일본내공산품의증가에따라종래청국상해의영국산면직물을취급하던중계무역에서직접무역으로전환되었다. 일본은고베 오사카지역에서생산한면제품등을주력으로조선에유입시켰고, 이에반해조선에서는 쌀, 콩, 우피 등이일본으로반출되었다. 일본의조선식민지화을대변하는이른바 미면교환체제 ( 米綿交換體制 ) 로무역구조가재편된것이다. 따라서조선에는곡물생산지인근에추가로개항장이설정되었고, 기선해운망도크게재편되기에이르렀다. 1895년일본우선회사는조선에차관을제공한다는조건으로이운사소유기선 3척을위탁관리하여조선의연안해운권을장악하였다. 그리고 1896년 홍콩-상해-인천-나가사키-부산-원산- 블라디보스토크 항로를신설하였고, 기존에조선의개항장을거쳐청국의천진 ( 天津 ) 과우장 ( 牛莊 ) 으로향하던기선은 1898년부터목포에도기항하였다. 또, 1900년에는고베-진남포간에도기선을운항하였고, 1901년부터는블라디보스토크에서원산으로향하는중간에 1899년개항한성진에도기항하였다. 한편, 오사카상선회사는 1896년에 고베-시모노세키- 부산-인천-오사카 간의항로를재개하여매달 2회씩운항하였고, 1897년에는그해개항한목포에도기항하였다. 이밖에오사카와인천간에는비 31) 본그림의정기해운망을보완하는측면에서다음의표를참고하면좋을것이다. < 표 > 인천항과동북아시아각개항장간거리 ( 단위 : 海里 ) 煙臺 280 營口 323 釜山 437 長崎 460 下關 500 天津 525 神戶 620 元山 741 上海 750 海蔘威 1,048 출전 : 靑山好惠, 정혜중역, 2004, 譯註仁川事情, 인천시역사자료관, 69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79
정기적으로왕복하는임시선이정기선의 2배나배정되었다. 1900년 8월오사카상선회사는군산에대리점을설치하여매달 2회비정기적으로기선백천환 ( 白川丸 ) 을운항해군산과일본을연결하는직통항로를최초로개설함으로써군산의대외무역발전에큰영향을미쳤다. 또한, 이회사는 1900년오사카-진남포항로를신설하고, 1901년 오사카-고베-시모노세키-부산-마산-목포-군산-인천 항로가신설되는등조선에추가로개설된개항장에도순식간항로를개설하여조선의해운권을거의장악하고무역확대를꾀하였다. 32) 이와같은일본의해운권장악과정에대항해청국상인의견제와러시아해운업의적극적인진출이있었고, 물론조선인기선회사들의도전도지속되었다. 1896년상해의청국상인들이일본우선회사의독점에반발하여동맹을맺고독일기선을차입하여수입품을싣고인천에들어왔고, 영국기선도청국상인을위해임시왕복하였으나, 곧중단되었다. 1896년 10월부터러시아의세베레브회사는상해- 블라디보스토크의운항을재개하였는데, 1900년 2월기선운항에관한모든권리와의무를동청철도기선회사 ( 東淸鐵道汽船會社 ) 에양도하였다. 동청은 1901년 블라디보스토크-나가사키-인천- 여순-상해 항로에기선을 1척배정하여매달 1회왕복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원산-부산-나가사키-인천-여순-연태-천진-상해 항로에도기선 1척을배정하여 1개월반에 1회운항하며항로의확장을꾀하였다. 이항로는주로청국상인이수입품수송에이용하였을뿐, 조선항로및무역에있어일본의기선회사와경쟁이되지않았다. 33) 더욱이인천등개항장에거점을둔일본인운송업자들은연 32) 나애자, 앞의책, 135~138 쪽. 33) 나애자, 앞의책, 133~135 쪽. 180 인천역사 (8 호 )
안해운에종사하면서해운권을침식해들어갔다. 그중대표적인것인인천거류일본상인호리 ( 堀久太郞 ) 가설립한호리상회 [ 堀力回漕店 ] 였다. 34) 호리상회는 1892년인천-용산간의항운업을시작으로 인천-목포, 인천-평양, 북관 ( 北關 ), 진남포- 평양 등의항로를개설해, 군산 목포 제주도 진남포 만경대 북관지역을두루회항하였으며, 국제항로도운용하였다. 또, 개항장간의항로뿐만아니라비개항장을불법적으로항행하여조선연안해운권을유린하였고, 막대한수익을얻어갔다. 이러한상황에서조선정부의지원을받아, 이윤용 ( 李允用 ) 정치국 ( 丁致國 ) 등은일본인이장악하고있던항해권을회복한다는목적으로 1900년 6월대한협동우선회사 ( 大韓協同郵船會社 ) 를설립하여우편물과화객운송업에종사하였다. 35) 기선 5척을국제및국내항로에각각배정했으나대체로인천을중심으로 만경대-진남포 와 군산-목포-제주도-부산-원산-북관지방 등을경유하며서해 남해 동해연변을모두항행하였다. 어느정도궤도에오르자호리상회및우선 상선회사와경쟁을시도하였으나역부족이었고, 러일전쟁발발과함께모든운항이단절되고만다. 36) 청일전쟁이후진남포 목포 (1897), 군산 마산 성진 (1899) 등이추가로개항하면서, 개항장사이의항로가확대되며인적 물적교류가한층활발하게진행되었다. 그러나개항장간혹은비개항지와개항장간의연안무역에종사하던조선인의상업은크게위축되어갔다. 일본인들은기선항로의이점을이용하여추가개항장뿐만아니라내륙의상품생산지에까지직 34) 그와아들인호리리키다로의대해서는 譯註仁川開港 25 年史 ( 정지호 이선이역, 인천시역사자료관, 2004) 의인물편과 仁川府史 ( 仁川府, 1933) 의 堀商會の豪華的活躍 (794~799 쪽 ) 참조. 35) 황성신문, 1900. 6. 13, 協同郵船會社. 36) 나애자, 앞의책, 239~245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81
접들어가상권을확대했기때문이다. 다음의 < 도표-7> 과같이진남포 군산등은개항초기조선선박의입항비율이일본선박을초월하지만, 이내일본의기선항로확대에따라일본선박의입항비율에압도당한다. 결국부산 원산 인천의국제기선해운망을바탕으로조선의대외무역을장악한일본은추가개항장과비개항지까지손을뻗쳐연안무역까지잠식해들어간것이다. < 도표 -7> 1897~1907 개항장별입항선박의톤수비교 부 산 원 산 인 천 진남포 목 포 구분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조선 7,408 14,182 12,901 9,236 19,007 32,941 20,193 39,192 61,658 18,934 (%) 3% 6% 4.5% 3.2% 5.6% 8.0% 4% 8% 8.2% 2% 일본 (%) 242,838 223,304 258,971 270,314 313,833 355,305 460,209 277,199 536,744 877,348 91% 90% 90% 94% 92% 87% 86% 60% 71% 85% 전체 267,667 247,945 286,215 287,577 342,176 410,161 534,161 462,670 754,070 1,038,064 조선 10,057 17,395 15,293 9,736 15,642 22,247 14,868 37,149 33,967 (%) 9% 15% 12% 9% 13% 14% 0% 35.3% 35.5% 12.3% 일본 (%) 78,214 83,948 96,243 91,492 86,068 114,993 137,794 23,407 53,359 204,991 68% 70% 75% 81% 72% 72% 64% 56% 51% 74% 전체 114,597 119,616 127,732 112,804 118,916 160,311 214,799 42,137 104,516 276,518 조선 32,042 24,069 23,223 27,999 31,415 38,908 34,102 56,373 40,111 5,761 10,584 (%) 16% 12.9% 11.6% 13.7% 13.2% 12.7% 8.3% 12.1% 6.9% 1% 1.5% 일본 134,613 123,907 150,032 156,201 182,374 198,995 295,764 212,131 374,437 512,044 556,131 (%) 67% 66% 75% 77% 76% 65% 72% 46% 64% 80% 79% 전체 200,667 186,359 200,148 204,028 238,892 305,395 409,609 464,720 583,658 640,483 701,853 조선 6,920 21,856 14,560 19,744 21,146 33,795 45,580 50,768 24,982 5,225 (%) 80% 61% 22.0% 41.7% 39.0% 44.8% 39% 29% 9.7% 2% 일본 (%) 1,522 13,155 35,313 24,630 28,881 36,612 60,650 69,458 168,417 191,728 18% 37% 53% 52% 53% 49% 52% 40% 66% 82% 전체 8,654 35,628 66,254 47,391 54,250 75,393 116,055 174,451 256,841 233,808 조선 3,024 12,591 11,869 11,324 12,978 20,848 14,430 21,147 11,547 4,276 (%) 35% 18% 10% 9% 9% 12% 6% 13.4% 5.8% 1.8% 일본 5,717 57,831 108,050 119,670 125,088 148,094 226,097 124,217 160,398 200,110 (%) 65% 82% 90% 91% 91% 88% 94% 79% 80% 84% 전체 8,741 70,422 119,919 130,994 138,066 168,946 240,527 157,694 199,320 239,126 182 인천역사 (8 호 )
군산 마산포 성진 합계 구분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조선 (%) 일본 (%) 9,205 17,614 13,722 14,144 9,689 4,705 13,658 2,457 77.0% 62.5% 35.3% 37.9% 16.9% 8.6% 29.3% 2% 2,708 10,539 25,149 23,115 47,509 47,545 32,249 87,914 23% 37% 65% 62% 83% 87% 69% 81% 전체 11,950 28,168 38,894 37,276 57,198 54,901 46,639 108,856 조선 (%) 일본 (%) 2,675 952 23 878 19 19 27 808 47.1% 8.9% 0.1% 2.9% 0% 0% 0.1% 2% 3,004 9,318 21,233 29,698 26,788 29,141 32,420 46,598 53% 87% 99.9% 97% 99.8% 99.9% 99.9% 98% 전체 5,679 10,665 21,256 30,576 26,832 29,160 32,447 47,431 조선 (%) 일본 (%) 8,378 8,686 8,295 14,298 12,832 2,682 9,580 30,867 52% 42% 25% 27% 9% 39.8% 41.4% 16.9% 7,629 12,082 24,564 31,504 110,890 1,338 11,307 148,395 48% 58% 75% 59% 76% 20% 49% 81% 전체 16,007 20,768 32,859 53,385 146,824 6,740 23,133 182,887 조선 59,451 90,093 98,104 105,291 122,228 178,059 136,845 189,754 198,712 102,295 (%) 9.9% 13.7% 11.8% 12.5% 12.4% 14.3% 7.8% 13.6% 9.9% 3.7% 일본 462,904 502,145 661,950 694,246 807,190 938,316 1,365,701 784,436 1,369,331 2,269,128 (%) 77% 76% 79% 82% 82% 76% 78% 56% 68% 82% 전체 600,326 659,970 833,904 842,395 985,309 1,241,443 1,746,005 1,392,473 2,000,624 2,767,173 2,943,184 출전 : British Diplomatic and Consular Reports on Trade and Finance, Corea, 1898~1908. 37) 아울러뒤늦게나마민족자본을형성하고자노력하고있던조선의민간해운업은러일전쟁을계기로거의소멸하게된다. 개항장증설시기역시인천은지정학적조건에따라외국기선의왕래가계속되었고, 대현협동우선회사등의민간해운기업이인천을중심으로활약했기때문에일본해운업의독점이다른개항장에비해어려운지역이었다. 그러나다음의 < 도표-8> 과 37) 개항장별입출항선박의정보는여러자료에산재되어있고, 수치또한제각각이다. 때문에가장정확도가높다고판단되는 영국사관보고 를바탕으로작성하였다. 1907 년의경우인천과전체수치만이기재되어있어그정보만을기재했고, 1908~1910 년은조선전체의합계수치만이기재되어있어비교가불가하므로생략하였다.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83
같이러일전쟁직후조선선박의입항비율은급격히감소한다. < 도표 -8> 1897~1907 년인천항입항각국선박의톤수추이 출전 : British Diplomatic and Consular Reports on Trade and Finance, Corea, 1897~1908. 38) 또한, 러일전쟁의승리로조선을보호국화한일본은조선에압력을행사하여 1905년 8월 13일 韓國沿海및內河의航行에관한協定書 를 39) 체결함으로써일본선박은조선의개항장뿐만 38) 위의대표적비교대상국가들외에도기타에는청국 영국 독일 미국 노르웨이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덴마크등의선박들이포함되어있다. 특히, 러일전쟁발발을기점으로영국 독일 노르웨이 미국국적의선박들이입항이상당히많아지는데, 대부분기존항로를유지하기위해고용되었거나군수품을조달했던것으로생각된다. 39) 국회도서관입법조사국, 1965, 舊韓末條約彙纂 上, 192~195 쪽. 184 인천역사 (8 호 )
아니라그어느곳이라도자유롭게항행할수있는권리를획득하기에이른다. 때문에그나마유지되고있던소규모의민간해운업도일본의자본과기선운항에타격을입고, 조선의해운및강운업은대부분일본이독점하게된다. < 그림 -2> 1897~1910 년조선의국내외정기항로 출전 : 大阪商船株式會社 (1916) ; 大阪商船株式會社五十年史 (1934) ; 日本郵船株式會社五十年史 (1935) ; 小風秀雅, 앞의책, 245~252 쪽 ; 나애자, 앞의책, 287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85
이후일본은조선을대륙침략의발판으로삼는데, 위의 < 그림-2> 를보면조선의각개항장은물론청국대륙의개항장도일본과긴밀하게연결된것을분명히알수있다. 특히, 일본은러일전쟁의승리로얻은조차지 ( 租借地 ) 대련 ( 大連 ) 여순 ( 旅順 ) 지역에 1905년식민행정기관인관동도둑부 ( 關東都督府 ) 를설치하며, 본격적으로개발하기시작한다. 이때일본과대련을직통으로연결하는항로를개설하는한편, 대련및북청 ( 北淸 ) 지역으로향하는대부분의항로가인천을경유하게한다. 이는일본이인천을서해연안개항장의거점이자대륙진출의보급항으로삼은것으로다음 < 도표-9> 와같이 9개의정기항로가운용되고있었다. < 도표 -9> 1911 년일본기점인천항관계정기항로 종별항로명기항지횟수경영자 체신성명령 오사카-인천 부산, 목포, 군산 년52회오사카상선회사 체신성명령 오사카-안동 인천, 진남포 년18회오사카상선회사 나가사키현나가사키-대련명령 부산, 목포, 인천, 진남포, 인천, 군산, 목포, 부산월4회오사카상선회사 自營 대련-인천 부산, 마산, 목포, 군산 월8 회 오사카상선회사 自營 ( 준정기 ) 대련-인천 부산, 목포, 군산 월8 회 尼尼崎汽船部 自營대련 - 인천부산, 목포, 군산월 2 회 自營 당진 - 대련 부산, 목포, 군산, 인천 ( 왕복, 직항 ) 월 2 회 오사카거류일본인 合資會社辰馬本家回漕部 체신성명령 요코하마- 北淸 인천 년16 회일본우선회사 체신성명령 고베-조선- 北淸 부산, 인천 년13 회일본우선회사 출전 : 仁川府, 1933, 仁川府史, 772~773 쪽. 강제병합직후조선총독부는통치강화와전시수송력화보를목적으로해운사업의통일을위해 1912년 3월에조선우선주식회사 ( 朝鮮郵船株式會社 ) 를설립하여조선의국내외항로는식민 186 인천역사 (8 호 )
지수탈체제를보완하는구조로재편되기에이른다. 40) 그리고 1914년총독부는통치체계를단일화하기위해거류지및거류민단을철폐하고, 행정구역을개편하여 개항장 이라는명칭은조선에서사라지게된다. 이와같이일본이동북아시아기선해운망을장악함으로써, 결국정기항로의개설과기선의운용은조선의식민지화와대륙침략의발판으로악용되었던것이다. < 부록 > 19 세기후반일본의화선, 서양형범선, 기선예시 *19 세기후반일본의대형화선 ( 和船 ), 2000 석 ( 石 ) 의적재량, 서양기술이일부도입. * 조선에드나들던화선은보통 500 석내외의규모이다. *19 세기후반일본의서양형범선, 322 톤. *1860 년대해상운송의주력이었으나, 점차기선으로대체. 조선의경우, 1890 년대후반전체입출항선박의 10% 정도에불과했다. * 기선, 쓰루가마루 ( 敦賀丸 ). * 철재질, 922 톤, 영국건조. * 일본우선주식회사소속으로 1901 년까지조선항로에서운용. *1888~1889 년 청국 - 조선 ( 인천 - 부산 )- 일본 항로를정기운항 : 仁川港警察所商船憑票摘奸成冊 40) 小風秀雅, 앞의책, 246~250 쪽. 7. 개항장인천의기선해운네트워크 187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 머리말 2. 개항기인천의제염업상황 3. 근대제염업의시작, 주안천일염전 4. 鹽의仁川 과진화하는소금 5. 맺음말 유창호 ( 인하대학교대학원한국학과박사과정 )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 머리말 인천짠물 이란말이있다. 어느시기부터생긴말인지, 무슨이유로생긴말인지정확히알수는없지만외지인들이인천사람들의기질을나타내는말로현재까지흔하게사용되고있다. 짠-물 이라함은바닷물이나소금물의고유한특성을표현하는말이지만이외에바닷가나부둣가사람들의거친삶을비하하는말로쓰이기도한다. 농경생활이아닌어염 ( 魚鹽 ) 을생업으로하는사람들에대한문화적인멸시의뜻이담겨져있다고하겠다. 국어사전역시 짜다 라는말에는소금고유의맛을표현하는것외에 인색하다 라는부정적의미가있음을밝히고있다. 1) 그러면왜인천이삼면이바다인우리나라에서인색함을표현하는 짠물 의대명사가되었을까? 작년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특별전주제인 짠물에대한해명 전 ( 展 ) 은이러한인천의부정적이미지를역으로드러내오늘날인천의번영은소금처럼짜게 ( 근면하고검소하게 ) 살아온인천사람들이있었기에이루어졌음을시민들에게알려주었다. 그러면서도인천이 짠물 의대명사가된원인이인천에수많은염전 ( 鹽田 ) 이있었기때문이라고결론을내리었다. 지금은그흔적조차찾기힘들지만과거인천은우리나라최초의천일염전이건설된곳으로주안, 남동, 소래, 영종, 검단 1) 짜다 라는말이 인색하다 라는뜻을품고있음을국어사전에서처음밝힌것은 1984 년민중서관발행의 국어사전 부터이다.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91
등각해안마다수많은염전들이있었다. 뿐만아니라한때남북한통틀어서전국소금생산량의 1/3을차지하였고, 그유통에있어서도 1970년대까지전국소비량의 1/2이집산되어판매되었던곳이다. 따라서 짠물 염전 소금 은자연스럽게인천의이미지로고착되기에충분하였다고본다. 문제는 짠물 이왜 인색하다 라는부정적의미로변하였느냐다. 언어는그시대와지역의역사와문화를반영한다. 우리와는역사와문화가상이한프랑스에서 짜다 라는말의의미는 터무니없이비싸다 라는뜻을가지고있다. 2) 프랑스혁명의발단이되는가혹한염세 ( 鹽稅 ) 가암거래와억압이라는악순환을거치며언의의의미를변질시킨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짜다 는말이 인색하다 라는의미를지니게된원인은확실치는않다. 인천짠물 이라고하지만 1760년경에발간된 여지도서 는인천의풍속을 고기잡이와소금굽기에유리해서농사짓기를게을리하는까닭으로가난하고곤궁한자는많고부유하고풍요로운자는적다. 또한땅이척박하여자주흉년이들어해마다어려움에빠지는사람이많으니아껴쓰는풍속이이어져왔다. 3) 라고하여오히려인천사람의검소함을드러내고있다. 인천에염간 ( 鹽干 ), 염한 ( 鹽漢 ), 염쟁이등으로천대받던염부 ( 鹽夫 ) 들이많았다하더라도전통시대의소금은 소금한섬이백미 ( 白米 ) 한섬과같다 는말이있었듯이귀중한물품이었고왕실을비롯한권력계층의주요재원 ( 財源 ) 이었다. 근대적천일염전이만들어진이후에도인천에서소금거래와염전경영으로막대한부를축적한자본가들이나타나기도하였다. 즉, 과거우리나라에서소금은가난과인색함의상징이아닌부와풍요의상징이었던것이다. 추정해보건대 인천짠 2) 피에르라즐로, 소금의문화사, 가람기획, 2001, 43~44 쪽. 3) 輿地圖書, 인천도호부풍속조. 192 인천역사 (8 호 )
물 이인색함의의미로변질된경위는인천염전의몰락에서생겨난말일수있다. 다음의신문기사는이를대변해준다. 일제시대중국에서巖鹽을수입할때만해도인천항에는중국정크선이들어차있었고, 소금밀수가심해일확천금을잡았다하면소금장사였다. 자유당때까지만해도소금을관염전에서몰래빼다팔아먹어인천의요정가인龍洞일대에서소금장사라고하면기생에게는최고의대우를받아왔다고한업자는말하고있다. 그러나소금이민영화된이후한때는이윤이박해소금업자들이돈을안쓴다고짜다는말이나오고인천사람을두고부르는별명이되고도있다. 4) 위의기사를통해제염업이민영화된 1960년대이후에야 인천짠물 이란말이생겨났음을알수있다. 인천짠물 의유래가그리오래되지않았음을나타내고있는하나의증거일것이다. 본고는한때인천의상징이었던염전의변화과정을통해염전이인천지역사회에미친영향이무엇이었는가를살펴보겠다. 현재인천에서는옹진군, 강화군관할의일부도서지역을제외하고거의모든염전들이사라졌지만, 인천의염전은근대화의씨앗으로작용한곳이다. 수천년간이어온전통자염법을천일염전으로바꾸면서생산방식의근대화를이루어내었고, 철도를이용한유통과전문중개인의등장은판매방식의일대변화를일으켰다. 뿐만아니라재재염, 가공염, 공업염등소금의다양한개량화는인천을화학공업의시발지로만들어낸밑거름이되었다. 이에근대천일염전의축조과정부터생산과유통의변화, 그리고소금을이용한화학공업의시작까지그변화과정을살펴보면서인천염전이지역사회및우리나라염업사 ( 鹽業史 ) 4) 商圈戰國時代 (15), 경향신문, 1976 년 12 월 14 일 2 면.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93
에끼친영향을정리해보도록하겠다. 2. 개항기인천의제염업상황 근대적천일염전이만들어지기이전우리나라의전통소금생산방식을흔히자염 ( 煮鹽 ) 이라고부른다. 전오염 ( 煎熬鹽 ), 화염 ( 火鹽 ), 육염 ( 陸鹽 ) 등으로부르기도하는이방식은바닷물을직접끌어들여오랫동안끓인후소금을결정시키는직자식 ( 直煮式 ) 에서부터인위적인제방을쌓고갯벌을이용하여염판을조성한염전식 ( 鹽田式 ) 으로그생산방식을발전시켰다. 5) 그러나동해, 남해, 서해각기갯벌과조수간만의차이가있는우리나라자연조건상동해안과남해안일부에서는조선후기까지직자식제염법이계속유지되기도하였고, 조석차이가큰서해안에서는제방이없는무제염전 ( 無堤鹽田 ) 으로생산방식을이어나갔다. 6) 연안에넓은간석지를끼고있는인천지역역시전통시대부터우리나라의대표적인자염생산지였다. 조석차는 6.43m에달하기때문에무제염전으로자염을생산했을것으로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 에의하면인천에는자연도, 삼목도, 용유도, 사탄도등에염소 ( 鹽所 ) 가 6곳있었으며, 이곳에서제염작업에참여하는수군 ( 水軍 ) 목자 ( 牧子 ) 염부 ( 鹽夫 ) 가약 90여호에달하였다고한다. 또한 19세기까지 인천부읍지 를비롯한각 5) 권영국, 14 세기榷鹽制의성립과운용, 한국사론 13, 서울대학교국사학과, 1985, 32~33 쪽. 우리나라자염의생산방식에대해서는김일기, 전오염제조법에관한연구, 문화역사지리 3, 1991 ; 김준 소금과국가그리고어민, 도서문화 20, 2002 ; 국립민속박물관, 소금꽃이핀다, 2011 참조. 6) 유승훈, 우리나라제염법과소금민속, 민속원, 2008, 27 쪽. 194 인천역사 (8 호 )
종지리지자료에소금을인천의대표적특산물로기록하고있고, 18세기에쓰여진 영종방영도지 에는영종도일대의인구가 850호에 3,038명으로기록되어있어 세종실록지리지 시기에비해거의 10배가까이증가하였음을알수있다. 염부 ( 鹽釜 ) 도 31좌 ( 坐 ) 에달하였다고한다. 7) 그러나조선후기소금수요의급증속에서인천의제염업이차지하는비중은그다지크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아래의 < 표 1> 은대한제국탁지부에서 1908년발간한 한국염업조사보고서 에나오는인천지역의자염생산조사결과이다. 영종도를비롯한도서지방의자염생산현황은누락되어있지만주안천일염전이만들어지기직전, 부평과주안, 남촌등지의연안에서생산되는자염의현황을자세히기록하고있다. 이조사에따르면부평과인천에서생산되는자염은총 6,266,766근 ( 약 3,760t) 으로당시추정되는전국총생산량 2억 5천만근 ( 약 15만 t) 8) 의 2.5% 에지나지않는다. 인천의주요자염생산지인영종도의생산량을고려한다고하여도전국적인자염생산량에서인천이차지하는비중은미비하였던것으로보인다. 조선후기한강을통해서울로공급되는소금은전국적인명성을지닌남양염과당진, 서산, 태안염이대부분이었다. 9) 7)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역주인천도서지역의지지자료, 2010. 8) 이근우역, 한국수산지 I-2, 새미, 2011, 139~140 쪽. 9) 이영학, 개항기제염업에대한연구, 한국문화 12, 서울대학교, 1991, 545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95
< 표 1> 1907년인천지역자염생산현황 ( 전거 : 한국염업조사보고서 ) 지명 부수 ( 釜數 ) 염전면적 ( 단위 : 町步 ) 생산고 ( 단위 : 斤 ) 부평군모월곶면 44 21 町 719 步 2,011,260 부평군석곶면 23 6 町 9115 步 664,226 인천군주안면 10 2 町 5228 步 347,700 인천군서면 4 2 町 3317 步 232,560 인천군부내면 5 3 町 2028 步 318,240 인천군남촌면 24 19 町 717 步 1,970,620 인천군조동면 9 6 町 9320 步 660,960 인천군신현면 2 5 町 825 步 61,200 합계 121 74 町 1269 步 6,266,766 인천에서의제염업변화는개항과더불어일어났다. 1883년개항이후일본, 청국, 대만의소금이수입되면서인천의자염은이들수입염과경쟁체제로들어선것이다. 1908년통감부농수산국에서발간한 한국수산지 에의하면당시소금의전국소비량은 3억 5천만근 (21만t) 으로추정되었는데국내생산량이 2억 5천만근 (15만t) 이었음으로나머지 1억근 (6만t) 의소금은수입염으로대치해야만하는형편이었다. 10) 개항으로통상개방이되면서 1885년부산항을통해일본염 912,600근이처음으로수입되었다. 11) 비록우리나라의자염과유사한생산방식이지만석탄을연료로써서생산비를낮추었고, 염부 ( 鹽釜 ) 를철제로바꾸는등개량화된전오염이었다. 따라서조선의자염과는 1석당 40~50전낮은가격으로판매되었다. 수입초기낮은품질로소비자에게반감을사기도했으나꾸준히판로를확장하여 1897년에는 2천 8백만근 (16,667t) 까지수입되었다. 12) 그러나 1898년이후인천항을통해청국염이본격적 10) 이근우역, 한국수산지 I-2, 새미, 2011, 152 쪽. 11) 러시아대장성, 한국지, 1900.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74~575 쪽 ) 12) 이영학, 앞의논문, 554~558 쪽. 196 인천역사 (8 호 )
으로수입되자일본염은급격히쇠퇴하게된다. 조선염이나일본염과달리청국염은천일제염 ( 天日製鹽 ) 이어서가격경쟁의우위를초기부터확실히잡을수있었다. 구체적으로 1백근당생산비가조선자염은 1원 30전, 도매가격이 1원 83전, 소매가격이 2원 52전인데반해청국염은도매가격이평균 1원, 소매가격이 1원 40전정도에불과하였다. 13) 또생산지가대부분산동 ( 山東 ), 청도 ( 靑島 ), 관동주 ( 關東州 ) 14) 여서인천으로들어오는운반비가일본염보다저렴하였다. 러일전쟁이후수입염의주도권을완전장악한청국염은 1908~1909년그수입량이 5천만근 (3만t) 에이르러전체수입량의 70% 를점유하게되었다. 15) 청국염의수입급증으로국내의전통제염업자들은커다란타격을받는다. 특히산동반도와지리적으로가까운평안도, 황해도, 경기도제염업자들의피해는더욱컸으며, 경상도와함경도등지로판로를구축한일본염수입업자들에게도적지않은타격을입혔다. 따라서일본은 1904년부터청국염과같은천일염인대만염을수입하기시작한다. 1895년대만을식민지화한일본은 한국대만염업합자회사 를통해대만염을조선에수출하였는데 1906년까지급속한성장을이루었다. 그러나생산원가는청국염과비슷하다고하여도높은운반비로인해곧바로쇠퇴하고만다. 16) 다음의표는 1910년도조선염과각수입염의생산및수입, 그리고소비상황을보여주고있다. 13) 탁지부임시재원조사국, 韓國鹽務槪況, 1910. 14) 관동주 ( 關東州 ) 는중국랴오둥반도남쪽에위치한일본의조차지로 1895 년부터 1945 년까지존속하였다. 15) 이영학, 앞의논문, 562 쪽. 16) 유승훈, 우리나라제염법과소금민속, 민속원, 2008, 197~198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97
< 표 2> 1910년조선내염생산과소비량 ( 단위 1,000 斤 ) 구분 생산량 수입량 소비량 조선염 200,000-200,000 중국염 - 77,100 77,100 일본염 - 13,200 13,200 대만염 - 9,700 9,700 계 200,000 100,000 300,000 ( 자료 : 田中正敬, 統監府の鹽業政策について, 一橋論叢 115 券 2 号, 1996) < 그림 1> 일본의전오염제조모형 ( 東京 Tobacco and Salt Museum) < 그림 2> 대만의천일염전모형 ( 臺灣鹽博物館 ) 개항이후수입염의급증으로국내제염업자들이몰락하게되자대한제국정부로서도이에대한대응책을마련하여만하였다. 특히수입염의새로운제염방식은큰자극이되었다. 1899년탁지부 ( 度支部 ) 는농상공부로하여금인천에염전 20정 ( 町 ) 규모의제염시험장을세우도록하였는데, 연료를석탄으로쓰고철부 ( 鐵釜 ) 와신식기계를도입하는등생산력향상에노력하였다. 17) 그리고 1900년말첫성과품인자염 100석을방매 17) 유승훈, 20 세기초인천지역의소금생산, 인천학연구 3, 인천대학교인천학연구원, 2004. 198 인천역사 (8 호 )
하게된다. 18) 그러나이러한대한제국정부의노력에도불구하고인천의자염식제염시험장은이후별다른성과를올리지못한다. 인천에서는오히려수입천일염을재가공하는재제염 ( 再製鹽 ) 이크게성공하고, 일제의주도하에근대적천일제염이라는새로운제염법이도입되었다. 3. 근대제염업의시작, 주안천일염전 일제가근대적천일제염에주목한이유는우선값싼청국염과경쟁할수있는대안이천일염밖에없다는사실을인지했기때문이다. 아울러조선에서천일염생산을늘림으로써조선의안정적식염공급에이바지하고, 더나가발흥하는일본내화학공업의원료로서의천일염을확보한다는목적까지가지고있었다. 19) 1906년전국적으로광범위하고세밀한염업조사를마친일제통감부는염세규정 ( 鹽稅規程 ) 을제정하여전통적인제염업을관리, 통제하기시작한다. 아울러대장성 ( 大藏省 ) 의오쿠겐죠 ( 奧建藏 ) 기사 ( 技師 ) 를초빙하여천일제염의가능성을조사토록하였는데, 그의조사와자문에근거하여경기도부천군주안면십정리 ( 현인천시부평구십정동서울제강인근 ) 에최초의천일제염 18) 皇城新聞 1900. 12. 19. 仁川製塲技手卞國璇氏가上月度䀋二百石을放賣 야銀貨二百四十元을農部에納 얏더라. 19) 1918 년조선총독부전매과장히라이 ( 平井三男 ) 는조선에서천일염을시행한이유로첫째, 청국염과의경쟁을위해오직천일염만이그대안이고, 둘째, 부족한조선내식염을천일염으로대치할수있으며, 셋째, 화학공업에필요한원료로서의천일염을얻을수있다는점을밝혔다 ( 매일신보 1918. 6. 28~7. 2, 총 4 회연재된조선총독부전매과장히라이의談 ).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199
시험장이세워진다. 주안이천일제염시험장으로선택된이유는넓은간석지를가진인천이전통적으로내려온자염 ( 煮鹽 ) 의주요생산지였고, 경인선개통으로소비시장인서울로의신속한운송이가능해진점, 또항구를통해일본으로의천일염이송이유리한점등이고려되어진것으로보인다. 20) 1907년 2월 21일주안면간석지에염업시험장을개설한다는표식이세워지고, 21) 2월 27일이일대의민유지 ( 民有地 ) 가옥을매수하기위해탁지부참서관김교헌 ( 金敎憲 ) 과주사변지상 ( 卞志庠 ) 이파송되었다. 22) 이후 5월 11일주안면십정리와동래 ( 東萊 ) 석남면 ( 石南面 ) 용호리 ( 龍湖里 ) 에일본식전오염시험장을우선개시하였고, 23) 8월주안면십정리에 1정보 (3,000평) 면적의천일제염시험장이완공되었다. 그리고 9월 23일서대문역에서특별열차편으로재정고문메가다수타로 ( 目賀田種太郞 ), 총리대신이완용 ( 李完用 ), 내부대신임선준 ( 任善準 ), 탁지부대신고영희 ( 高永喜 ), 농상대신송병준 ( 宋秉畯 ) 등이와서완공된주안천일제염시험장을시찰하였다. 24) 염업시험장관제( 鹽業試驗場官制 ) 에의하면주안천일제염시험장은농상공부대신 ( 農商工部大臣 ) 의관리에속하였으며, 소관업무는 염업의개량 발전에연관되는조사와시험의사무 였다. 직원으로는장장 ( 場長 ) 외에기사 ( 技師 ) 3명, 기수 ( 技手 ) 15명, 서기 ( 書記 ) 10명을두었다. 25) 이시험장은 1년간운영되다가 1909년 2월에폐지되었다. 20) 황은수, 주안염전의축조배경과과정, 남동구 20 년사 상, 인천광역시남동구, 2010, 419 쪽. 21) 皇城新聞 1907. 2. 11. 製鹽立標 22) 皇城新聞 1907. 2. 27. 製鹽定界派員 23) 皇城新聞 1907. 5. 11. 製鹽將始 24) 皇城新聞 1907. 9. 22. 製鹽視察 25) 鹽業試驗場官制 ( 勅令제 11 호, 융희 3 년 2 월 18 일 ) 200 인천역사 (8 호 )
< 그림 3> 1910 년경주안천일제염전축조지및부근지도 26) < 그림 4> 주안천일제염시험장 < 그림 5> 1920 년대주안염전 26) 臨時財源調査局, 韓國鹽務槪況, 度支部, 1910.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01
< 그림 6> 주안천일염전시험장터표지석 < 그림 7> 주안천일염전시험장터전경 천일염은태양과바다, 그리고바람이만들어내는소금이다. 그제염방법을살펴보면, 우선염전은저수지, 증발지, 결정지로구분되는데, 바닷물을어떻게흘러보내는가에따라유하식 ( 流下式 ) 과급상식 ( 汲上式 ) 으로나뉜다. 주안의천일염전은함수 ( 鹹水 ) 가자연스럽게아래로흘러가는유하식이아니라인위적인힘을통해함수를결정지로올려보내는급상식으로만들어졌 < 그림 8> 염전구조도 ( 전거 : 仁川敎育會, 仁川鄕土誌, 1932, 134 쪽 ) 202 인천역사 (8 호 )
다. 이것은불순물이사라지고염도가높아질수있도록소금의결정을도와주는동시에채염작업을손쉽게하기위해서이다. 27) 제조방법은대조시 ( 大潮時 ) 해수를수문을통하여저수지로들어오게하고, 적당량을증발지로보내단계적으로함수의농도를높인후, 함수의농도비중합계가 20~25도에이르면결정지로보내 25도의포화함수에서결정염을채취하는순서로이루어진다. 결정지에서채취된소금을창고에보관하여수분을빼면식염 ( 食鹽 ) 이완성되는것이다. 제염기간은최초부터약 10일이소요되며폭염기에는그시간을더욱단축할수있다. 당시천일제염은일본에서도시도되지못한사업이었다. 따라서염전축조에는많은중국인기술자와인부들을동원하였고, 28) 제염방식이나제염기구모두는대만식을사용하였다. 29) 제염성적은의외로성공적이어서생산비및생산량, 그리고품질면에서청국염이나대만염에뒤지지않는소금을생산하였다. 30) 이에고무받은통감부당국은 1908년주안천일제염시험장을 20정보의염전으로확장하는계획을세워공사에들어갔다. 이계획은 1919년까지총 8구역, 212정보의대염전으로확장하는것으로바뀌어, 주안간석지를사이에두고상변 ( 上邊 ) 에는 1 2 3 5 7 구역, 하변 ( 下邊 ) 에는 4 6 8 구역을조성하였다. 그리고이곳을총괄관리하는조선전매국주안출장소 ( 朱安出張所 ) 의청사도주안역뒤에설치하였다. 주안염전의각구역별축조시기와면적은다음의 < 표 3> 과같다. 27) 유승훈, 인천연안의염업, 인천연안의어업과염업,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1, 99 쪽. 28) 주강현외, 군자와소래염전의천일염, 시흥시사 6, 경기도시흥시, 2007, 286~288 쪽. 29) 石橋雅威, 朝鮮の鹽業, 友邦協會, 1983, 79 쪽. 30) 추교찬, 소금생산과남동 소래염전, 남동구 20 년사 상, 인천광역시남동구, 2010, 478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03
< 표 3> 주안천일염전의면적및축조연대 구분 면적 ( 町步 ) 축조연대 제1 구역 1.1 1907년 8월 제2 구역 6.6 1909년 6월 제3 구역 9.0 1910년 5월 제4 구역 14.5 1910년 5월 주안 제 5 구역 57.3 1911 년 7 월 제6 구역 32.4 1919년 3월 제7 구역 46.9 1919년 3월 제8 구역 44.6 1919년 3월 소계 212.4 주안염전의성공으로일제는 1934년까지총 4기로구분하여서해안의천일염전을대규모로축조한다는계획을세웠다. 이것은천일염전을관영화하여천일염판매에따른수익을조선총독부로귀속시키고, 조선에서소비되는소금의완전자급자족시킨다는계획이다. 실제로일제는평안북도북단에서전라남도남단에이르는서해안일대에관영염전예정보유지 10,000정보를구획하여민간인의농지개척을금지시키는등의조치가있었으나, 중일전쟁과태평양전쟁으로 1945년해방때까지실제조성된염전은 < 표 4> 에나타난 7,087정보에머무르고말았다. 31) 31) 김준 소금과국가그리고어민, 도서문화 20, 2002, 133~134 쪽. 204 인천역사 (8 호 )
< 표 4> 1945년이전일제의염전조성현황 구분 염전명 염전면적 ( 町步 ) 준공연도 염전소재지 주 안 212 1907~1919 인천시주안동 소 래 549 1935~1937 인천시논현동 남한 남동 300 1921 인천시논현동군자 603 1925 경기도시흥시 연 백 1,268 1942 경기도연백군 소 계 2,932 광양만 775 1914 평안남도용강군 덕 동 223 1921 평안남도용강군 북한 귀성 1,535 1922 평안남도용강군남시 483 1922 평안북도용천군 청 천 1,139 1922 평안북도용천군 소 계 5,427 합계 7,087 ( 자료 : 상공부, 염백서, 1964) < 표 4> 에보이는것과같이일제가조성한관영천일염전은인천과경기도, 평안남북도등모두서해안중부이북에치우쳐있다. 이들지역에천일염전이집중된이유로는표면적으로넓은간석지, 적은강우량, 해륙교통의편리, 풍부한노동자원등을들고있다. 32) 그러나조선시대전통자염생산의중심지로 1910년대까지전국자염생산의 50% 이상을차지한전라도, 충청도해안에는천일염전이조성되지않았다. 이는일제가우선적으로천일염전을조성한지역이전통자염생산이활발한지역이아니라청국염수입및밀매가극심하였던지역을우선으로하였기때문이다. 아울러종관철도의건설로철도를통한수송에유리한지역이먼저고려되어졌음을알수있다. 천일염전은보통 6~7년이지나숙전 ( 熟田 ) 이된이후에안정 32) 吉田敬市, 朝鮮水産開發史, 朝水會, 404~405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05
적인생산량을얻을수있다. 1919년에모든염전이완공된주안염전은 1926년부터 1만t을전후로한생산을할수있었다. 1920년대남동과군자염전이완공된후인천지역은점차안정된생산량을보유하게되면서우리나라전체소금생산고의약 30% 이상을차지하는위치에오른다. 이는남한보다약 2배이상의염전면적을지닌북한지역의천일염생산고에는미치지못하지만남한내에서는독보적인위치였다고할수있었다. 33) < 표 5> 1931~1932년천일염전면적및생산액 ( 면적단위 : 町步, 생산액단위 : 1,000 斤 ) 염전별 염전면적 1931년생산액 1932년생산액 주 안 212 18,303 29,190 주안 남 동 300 34,400 53,829 출장소 군 자 603 51,436 89,018 계 1,115 104,179 172,037 광량만 700 82,814 109,351 광량만 덕 동 223 26,395 33,819 출장소 귀 성 149 12,791 18,407 계 1,142 122,000 161,640 남시출장소남시 217 17,691 22,065 합계 2,474 243,870 355,742 민간전오염 - 54,545 69,037 총계 - 298,415 424,779 ( 자료 : 石谷寅三, 鹽の仁川, 朝鮮之水産 105, 朝鮮水産會, 1934. 2, 14쪽 ) 위 < 표-5> 는 1931~1932년조선에서의각염전별소금생산총액을나타내고있다. 제염은당해년의기상에따라그생산량이크게좌우되지만염전의확장으로 3억 (18만t)~4억근 (24만t) 에달하는생산고를올렸다. 1910년대라면충분히자급자족할 33) 유승훈, 인천연안의염업, 인천연안의어업과염업,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1, 103 쪽. 206 인천역사 (8 호 )
수있는생산액이지만 1930년대에이르러서는화학공업의발달로소금의수요가더욱급등하여당시에는소금수요량이약 5 억근 (30만t) 이상으로늘어났다. 따라서이당시에도여전히수입염은필요하게되었다. 그리고표에서도보이듯이민간에서생산되는자염 ( 전오염 ) 은소금전체생산량의 20% 에도미치지못하게되었다. 정부의관리를받지못하는전통자염업은점차로쇠퇴해져서 1970년대에이르러서는완전히자취를감추게되었다. 그림 9 주안관할염전도 ( 전거 : 仁川敎育會, 仁川鄕土誌,1932, 133 쪽 ) 위의지도는 1930년대인천지역의염전분포상황을보여주고있다. 북쪽의주안염전을비롯하여남쪽으로남동염전, 군자염전이조성되어있고, 아직건립되지않은소래염전이염전예정지로표시되어있다. 그런데특이한점은원도 ( 猿島, 일명낙섬 )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07
지역에조선염업주식회사 ( 朝鮮鹽業株式會社 ) 염전 40정보가보이고있다는것이다. 조선염업주식회사는전매국에속하지않은민간기업으로 1927년 3월에일본오사카에서창립되어동년 4 월인천부장의리 ( 현인천시남구용현동일대 ) 간사지에염전과공장을설립하였다. 식염외에도천일염의부산물인고즙 ( 苦汁 ; 염화마그네슘 ) 의이용을목적으로하였으며, 생산방법은천일염과전오염방식을결합한방식이어서순도가높은개량염을대량으로생산해내었다. 연간생산량은 200~300만근에달하였다고한다. 34) 4. 鹽의仁川 과진화하는소금 근대적천일염전이만들어진이후인천은국내소금생산의중심지가되었다. 또한항만과철도를모두갖춘인천의인프라는인천을조선뿐아니라동아시아전체의소금판매와유통의핵을담당하는중심지로거듭나게하였다. 이는비록일제의안정적인식민지경영을위한외적인성장이었지만중국 조선 일본을연결하는 소금루트 에서인천이그중심지로설수있는계기를만들어주었다. 사실일제에의해천일염전이우리나라서해안에대규모로조성된것은식민지 수탈 의측면보다 수혜 의측면이더높았다고볼수도있다. 일제강점기동안우리나라의소금생산은생산량의급속한증가에도불구하고끝내자급화를이루지못하여서일본으로반출되는양은그리크지않았기때문이다. 그러나일제당국은병합전부터조선에서의염업발전가능성을 34) 仁川府史 下, 1933, 1118 쪽. 208 인천역사 (8 호 )
이미파악하여천일염전을식민지경영의재정적기반으로삼았고, 대륙침략이후로는중국과조선의소금을수송하여일본에서의소금부족분을보충하는데인천을그거점으로적극활용하였다. 이처럼일제가식민지내에서소금생산증가에주력한이유는식민지경영을위한국가재원확충이라는측면도있지만 20세기화학공업의발달로소금수요가크게늘어난까닭도있었다. 화학공업은 19세기초전류에의해소금물이분해되어염소와소다를얻을수있다는사실이알려진후거의 100여년이지나서야산업화에성공하였다. 35) 따라서 20세기초부터구미열강들은이러한화학공업의원료인소금의확보를위해경쟁적으로증산에노력하였고, 후발산업국가인일본도이러한경쟁에뛰어들지않을수없었다. 그러나갯벌이발달하지않은지리적특성으로일본에서는천일염전의조성이적합하지않았기때문에대만, 관동주, 조선과같은식민지에서그부족분의상당량을채워야만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급증하는소금수요는여전히따라가기힘들었다. 1930년에이르러서도일본본토와대만, 조선, 관동주등식민지전체에서생산되는소금은 118만t에머물러, 그수요량 (148만t) 에 30만t이부족하였다. 이부족분은여전히중국, 인도, 이집트, 스페인등지로부터수입에의존해야하였다. 36) 따라서식민지국가내에서의소금증산과마찬가지로중요한것이수입염의안정적인공급이었는데, 인천은여기서도훌륭한기능을발휘하는곳이었다. 주요수입염인산동염과청도염이인천을통해가공되고, 유통되어진것이다. 35) 1807 년영국의화학자험프리데이비에의해소듐 ( 나트륨 ) 과포타슘 ( 칼륨 ) 의분리가성공하였고, 이를산업화에적용한것은 19 세기말에들어서이다 ( 피에르라즐로, 소금의문화사, 가람기획, 2001, 187~189 쪽 ). 36) 石谷寅三, 鹽の仁川, 朝鮮之水産 105, 朝鮮水産會, 1934. 2, 12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09
일제강점기인천은일본인들로부터 鹽の仁川 이라는칭호를받았다. 인천이천일염의시발지인동시에재재염, 가공염, 정제염, 공업염등제조방법에있어서다양한시도가뒤따랐으며, 특히철도를통해전국적인유통망을확보함으로써 인천소금 을브랜드화시킨것이다. 다음으로는천일염전조성으로인해변화된인천의사회 경제 문화적제양상을살펴보도록하겠다. 1) 제조방식의진화 소금은그제조방식의차이에의해크게자염과천일염, 그리고천일염을재가공한가공염으로나눌수있다. 1970년대초에는해수를직접이온교환막을통해여과시켜불순물을제거한기계염 ( 흔히정제염이라함 ) 이일본에서처음개발되기도하였다. 1907년주안염전에서처음으로생산된천일염은염화나트륨성분이높아짠맛이강하였음으로오랫동안자염에익숙해진조선인들의입맛에는맞지않았다. 특히염전의지반을갯벌그대로이용하였기때문에소금색깔이검게보여그거부감이더하였다. 37) 따라서자염의품질과비슷하게재차가공시켜만든재제염이생산되었는데, 그생산방식은값싼수입천일염을들여와해수에용해시키고, 그것을다시전오 ( 煎熬 ) 시키는방식이었다. 38) 1904년부산남포동에서처음으로시작하여전국으로퍼졌으나, 가장크게발흥한지역은인천이었다. 중국산동성과관동주등과가까워수입이용이하였을뿐더러서울이라는거대소비시장을배후로한인천의지리적요인이그이유였다. 39) 인천 37) 유승훈, 인천연안의염업, 인천연안의어업과염업,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1, 101 쪽. 38) 朝鮮總督府, 朝鮮專賣史 3, 1936, 470 쪽. 210 인천역사 (8 호 )
의재제염은자염에비해 25~30전이저렴하고품질도좋아서판로가크게확장되어서 인천재제염 이란명칭까지얻었다. 40) 1910년대초반부터재제염은자염을능가하는생산량을갖추고, 41) 1920년대까지호황을누리다가 1930년대부터수입염가격의등귀로쇠퇴하고말았다. 재제염은소금의품질을인위적으로변화시킨첫번째가공염으로서의의의가있다. 이후재제염은다양한가공염을탄생시키는산파역할을하였는데이역시인천이그본산지가되었다. 이전까지수입에의존하였던식탁염이 1922년주안에식탁염공장이설립되면서그생산에나섰고, 1934년에는진공식 ( 眞空式 ) 제염설비가들어와더욱다양한가공염이생산되었다. 42) 천일염의제조에서는식염뿐아니라염화소다, 염산, 염화마그네슘과같은다양한부산물을얻는다. 특히고즙 ( 苦汁, 흔히간수로불림 ) 에서추출되는염화마그네슘은각종의약품과제철, 제빙용등공업용원료일뿐더러독가스를생산하는군수공업의원료였다. 1937년오사카의다케다 ( 武田 ) 제약회사가 1,800 만원의설립자금을들여주안에고즙공장을설립한것을시작으로 43) 광량만에는일본고즙공업회사 ( 日本苦汁工業會社 ) 가, 소래에는조선염업회사 ( 朝鮮鹽業會社 ) 가진출하여염화마그네슘을일본으로이출하였다. 이후 1940년대전시체제기에들어서서중국으로부터의원료수급이어려워지자남동, 군자염전과평안북도남시염전에까지고즙공장이설립되었다. 44) 39) 유승훈, 우리나라제염법과소금민속, 민속원, 2008, 202~203 쪽. 40) 매일신보, 1913. 7. 5. 仁川의製鹽業 41) 田中正敬, 近代朝鮮における鹽業需給と鹽業政策, 一橋大學博士學位論文, 2001, 86 쪽. 42) 朝鮮總督府, 朝鮮專賣史 3, 1936, 333 쪽. 43) 매일신보, 1937. 3. 20. 주안과광량만에간수뽑는대공장, 대판의대재벌에서진출결정 44) 매일신보, 1943. 10. 9. 간수공장을증설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11
2) 유통및판매방식의변화인천이소금유통의중심지로변화하는데에는항만과철도의건립이절대적이다. 먼저인천항을통한소금유통을살펴보면, 인천항은전매국산하의관염 ( 官鹽 ) 과산동, 청도, 관동주등중국으로부터들어오는수입염의집산지로그화물량은인천항수이출 ( 輸移出 ) 화물의 1/4인 15만t(1932년통계 ) 에달하였다. 특히 1930년부터수입염에대한관세를철폐하고, 수입염에대해전매국이직접관리함으로써밀무역이크게줄어들어 1930년대초인천을통해들어오는수입염은총 7만t에달하게되었다. 매년 5~7월소금생산의최성기 ( 最盛期 ) 가되면산동과청도등지로부터소금을싣고오는정크선만 40~50척에이르렀다고한다. 45) 이들수입염은인천의재제염공장에서가공되어지거나곧바로열차에실려전국으로유통되었다. 전매국주안출장소관할의남동, 군자염전의천일염도수인선이완공되는 1937년이전까지는모두바다를통해인천항에집산되었다. 뿐만아니라충청남도, 황해도등각도연안에서생산되는자염도해로를통해인천으로수송되었는데, 이는쌀의유통과관련이있어서이다. 즉, 인천항을통해수이출 ( 輸移出 ) 되는현미 정미 백미가 24만 7천t(1932년통계 ) 에이를정도로인천은쌀의집산지로명성이높았기때문에충청남도, 황해도를비롯한각도연안의자염업자들은인천에서소금을판매하고쌀을구입함으로써수송비를절약할수있었다. 45) 石谷寅三, 鹽の仁川, 朝鮮之水産 105, 朝鮮水産會, 1934. 2, 19 쪽. 212 인천역사 (8 호 )
< 그림 10> 소금하역 ( 조선전매사 ) 그림 11 소금운반 ( 조선전매사 ) 이처럼인천항에집산되는막대한소금은다시해로를통해전국으로판매되기도하지만대부분의소금은철도를통해육로로판매되었다. 한해에철도로수송되는소금의양은 10만t 을넘었고, 화차로계산하면 30t 화차가약 3,400차 ( 車 ) 이상이소요된것이다. 인천염 은전매국인천출장소관할인경기도 충청북도일원, 충청남도 8개군, 전라북도 2개군, 경상북도 8 개군, 강원도 10개군, 황해도 3개군등중부지방총 3부 ( 府 ) 65군 ( 郡 ) 에서지정된위탁판매인을통해판매되었다. 46) 위탁판매인제도는 1911년총독부가소금의생산과유통에서발생하는위험부담을회피하기위한수단으로만든제도이다. 천일염의생산은오로지전매국에서담당하지만그운반, 보관, 판매는선정된위탁판매인에게만독점적으로부여한것이다. 47) 1918년부터총독부가직영하는특약판매인제도로바뀌어일본인과친일적조선인등 54명을선정하였다. 1930년 염수이입관리 가시행되면서부터는수입염판매상도특약판매인으로흡수되어총 122명으로확대되었으며, 1936년인천지역의판매인은 23명으로그가운데 6명은식탁염과정제염만을 46) 朝鮮總督府, 朝鮮專賣史 3, 1936, 467 쪽. 47) 추교찬, 소금생산과남동 소래염전, 남동구 20 년사 상, 인천광역시남동구, 2010, 497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13
판매하였다고한다. 48) 3) 노동환경의변화전매국주안출장소가관할하는주안, 남동, 군자, 소래염전의노동체계는정규직과임시직으로구분된다. 먼저정규직인주안출장소직원구성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49) 출장소장 ( 出張所長 ) : 기사 ( 技師 ) 1인 서무주임 ( 庶務主任 ) : 1인회계계 1인, 물품계 2인, 영선계 1인, 염회송계 2인, 문서계 1인 - 순시 1인, 급사 1인, 소사 1인 사업주임 ( 事業主任 ) : 1인토목계 1인, 기상계 1인, 분석시험계 1인, 기장계 1인, 조사계 1인, 염전감독 2인, 진공공장계 5인 - 염전담당원 12인, 여공 3인 남동파출소장 ( 南洞派出所長 ) : 기수 ( 技手 ) 1인염전감독 3인, 사무원 1인 - 염전담당원 23인, 순시 1인, 소사 2인 군자출장소장 ( 君子出張所長 ) : 기수 ( 技手 ) 1인염전감독 4인, 사무원 2인 - 염전담당원 31인, 순시 1인, 소사 2인 1921년담배전매령실시로만들어진전매국주안출장소는 1925년부터관염판매도함께취급하다가 1927년 12월부터는전적으로관염만을취급하는관서가되었다. 주안염전을직할염 48) 朝鮮總督府, 朝鮮專賣史 3, 1936, 403~418 쪽. 49) 仁川敎育會, 仁川鄕土誌,1932, 137~138 쪽. 214 인천역사 (8 호 )
전으로하고, 남동, 군자, 소래염전을파출소로관리하였으며, 1930년이후로는수출과수입염관리까지그임무를확대하였다. 한편정규직인출장소직원외에각염전별로수천명이나되는대다수의염부들은매년새롭게계약해야하는임시직이었다. 따라서그고용상태는매우불안정하였고, 소금생산이불가능한 12~2월까지 3개월간은실직상태로있어야만했다. 염전축조나개축등은주로중국인계절노동자를이용하였지만염부는우선적으로지역민을고용하였다. 때때로특별한기술이필요치않은일에는태풍과홍수로피해입은이재민들을한시고용하기도하였고, 50) 실업자와부랑아들의구제책으로염부고용을선전하기도하였다. 51) 일제강점기인천은염업발전에힘입어제염업외에부수적으로뒤따르는새로운산업이흥성하게되었다. 대표적인것이운반업과가마니제조업이다. 전술한바와같이인천항을통해집산되는 15만t의관염과수입염들은월미도해안에쌓여지게된다. 특히된장, 간장을담그는봄철 3~4월과김장철인가을 10~11월에는소금수요량이급등하여소금창고에만저장하는것이불가능해져공터에그대로야적을하여소금산을만든다 ( 그림 11 참조 ). 400만근에서 2,000만근에달하는소금산이인천해안곳곳을둘러싼광경은세인들의관심을받아한때세관, 갑문식선거와함께 인천의 3대명물 로지칭되기도하였다. 52) 소금성수기를맞이하여이들소금산을무너뜨리고, 저울에달고, 줄을묶어포장하고, 화물차에옮겨싣는데에는수백명의인부들이동원되었다. 이러한운반업은주로청부제 ( 請負制 ) 를사용하였고, 전매국에서는현장감독원을파견하여감독하는정도였다. 50) 조선일보 1937. 5. 5. 염전확장으로인부대량모집 51) 조선일보 1927. 1. 30. 주안염전발전책 52) 石谷寅三, 鹽の仁川, 朝鮮之水産 105, 朝鮮水産會, 1934. 2, 20 쪽.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15
운반업과함께인천제염업으로의외의발전을이룬산업이가마니 ( 叭 ) 제조업이다. 종래전통자염은쌀섬과동일하게포장되어판매되었고, 천일염과재제염은일본식가마니에포장되어판매되었다. 일본에서수입되는가마니의비용이클뿐더러종래쌀섬에익숙한조선인소비자들이일본식가마니를선호하지않자인천제염소의조창외무철 ( 朝倉外茂鐵 ) 이조선의짚으로포장용가마니를만들어대성공을이루었다. 이후강화와부천등인천인근에서가마니조합이만들어지고, 농민들의부업으로만든가마니는전량전매국주안출장소로납입되었다. 53) 4) 염전제 ( 鹽田祭 ) 와염부위안회 ( 鹽夫慰安會 ) 인천의천일염전들은수십명의일본인전매국직원과수천명의조선인염부들이함께작업하며살아가는공간이었다. 주안염전을예로들면일본인직원은주안역북쪽낮은구릉지대에사무소와관사를마련하였고, 조선인염부들은염전동북쪽의하십정리에거주지를만들어거주적인공간을구별시키었다. 그러나염전일은워낙휴일도없이힘든노동을필요로하였기에소금생산이끝마무리되는 10월에는염전제를열어염부들을위로하는행사를가지었다. 염전제는 10월 5일주안염전을시작으로, 10월 6일에는남동염전에서, 그리고 10월 8일에는군자염전에서거행되었다. 그행사로는전야제, 신사참배, 시상식, 체육대회, 영화회등이있었다. 54) 가장먼저개최되는주안염전제는 1920년부터시작되었다. 염전제전날인 10월 4일저녁부터전야제가벌어지는데, 이때에 53) 仁川府史 下, 1933, 1135 쪽. 54) 염전제에대해서는近藤壽太郞, 大正 14 年の朱安, 南洞, 君子鹽田の鹽田祭及び慰安會について ( 전매국주안출장소관계자료, 국가기록원 CTA0002798) 를참조하였음. 216 인천역사 (8 호 )
는일본신주 ( 神主 ) 와무사, 중국인등으로변장을한무리들이행렬을짓고전매국출장소부터십정리의조선인마을까지행진한다. 변장행렬뒤에는조선인풍물패들이뒤를이었다. 이튿날새벽에열리는제례는천조대신 ( 天照大神 ) 과염조대신 ( 鹽竈大神 ) 을합사한주안신사 ( 朱安神社, 현재주안동용화사자리 ) 에서이루어지는데인천신사에서파견된사사 ( 社司 ) 가집전하였다. 신사제례이후오전 10시부터는전매국테니스코트를중심으로염부들의운동회가벌어지고, 오후에는출장소장의인사말과삼품권추첨, 그리고게이샤들을동원한연회가이루어진후끝을맺었다. 이튿날벌어지는남동염전제와 10월 8일거행되는군자염전제에도신사제례와운동회, 식후연회가마련되었다. 주안염전제와같은전야제행사는없지만각기마련된남동신사와군자신사에서제례를마친후소학교운동장등에서운동회를열었다. 1930년대이후로는염전제를마친후저녁에영화 ( 映畵 ) 를상영하는시간을갖기도하였다. 55) 5. 맺음말 지금까지개항기부터일제강점기까지인천지역에서의제염업의변화와이로인한사회, 경제, 문화적변화양상을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염업사연구는정책변화와같은제도사적인접근과전통자염업에대한민속적고찰, 염부들에대한구술사정리등에한정되어있어서 1907년주안천일염전의건립으로야기된다양한사회 경제적변화와문화적변용양태를면밀히검토하고있지못하였다. 특히근대천일염전의시발지인인 55) 매일신보 1938. 10. 7. 朱安專賣局映畵會 8. 소금이만들어낸근대의표상과仁川의염전 217
천에대한장소적중요성에도불구하고이를뒷받침하는연구가나오질못한점은큰아쉬움이남는다. 1900년대한제국정부가재래자염법의개량을시도한곳도인천이고, 최초의천일염전이만들어진곳도인천이며, 이후다양한개량염이시도된곳도인천이다. 그러나 1960년대이후소금과잉생산과가격폭락으로 인천소금 은그종말을고하게된다. 그대표적인염전들도 조국근대화 와 공업화 의이름아래모두사라져서, 1972년주안염전은완전매립된후수출산업단지가되었고, 남동, 군자, 소래염전도 1980년대이후공업단지나주거용지로탈바꿈하였다. 그러나근대적천일염전의축조로인천에서일어난많은변화는잊지말아야할것이다. 전통적자염과수입염, 그리고근대적천일염이상호작용하며일으킨변화는개항도시인천의상징적사건들이다. 그리고일본인들이경영하고, 중국인노동자들이축조하고, 조선인들이임노동자로생산에참여한인천의염전은그역사적사실만으로도동아시아에서의문화혼용이어떻게작용하고결과지었는가를알아내는단서가될수있을것이다. 본고에서다루지못한해방이후인천에서의제염업변화과정과사회적변화양태등은필자의연구능력부족과지면상의한계등을이유로다음의연구과제로넘기고자한다. 그리고일제강점기자료들에나오는통계상의불일치등은좀더세밀한연구로수정하도록하겠다. 아울러인천염전과화학공업의관계는자료적접근이어려운점이있지만반드시해결되어야할과제라고생각된다. 현재최초의천일염전시험장은그장소적중요성에도불구하고거대한폐공장옆에외로운표지석하나만세워져있다. 이를극복하고인천의정체성을확립하기위해서도 인천소금 의역사는계속연구되어질가치가있을것이다. 218 인천역사 (8 호 )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 인천개항장을중심으로 - 1. 머리말 2. 인천개항장의역사문화적환경 3. 추진계획검토 4. 근대건축문화재활용사례 5.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 결론을대신하여 김상열 (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유물보존과장 )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 인천개항장을중심으로 - 1. 머리말 海不讓水. 1) 史記 李斯列傳에서기인한고사성어로인천의한원로가인천의정체성을설명하는표현이다. 문호를개방한 1883년이래개화의도시 국제도시 근대화의산업도시로기능하였고, 이제통일을준비하는평화의도시로서역할하고있는인천의근현대사를살펴보면적합한표현이아닌가한다. 인천이갖고있는정체성은한국근현대사의역사성이라할수있다. 특히개항장이조성되고한세기에걸쳐인천의중심으로역할하였던중구지역에는유 무형의자산이산재해있다. 대표적인유형자산이바로근대건축문화재 2) 이며, 이들은역사적사건과어우러져끊임없이스토리텔링의소재를제공하고있다. 도시재생의측면에서주목받기시작하였던근대건축문화재에대한관심은대중에게도지지를얻으며보존과활용에대한논의가활발하다. 근래에는건축문화재에국한하지않고지역개념으로발전하여근대역사환경이라는용어를사용하기도한다. 인천광역시도 2005년 월미관광특구마스터플랜 을수립하고근대건축문화재에대한보존과활용을시도하고있다. 이계획에 1) 史記 권 87 李斯列傳제 27 에나오는 太山不讓土壤故能成其大河海不擇細流故能就其深 에서기인함. 2) 근대건축물과관련해서는최근근대문화유산, 근대산업유산, 근대유산, 근대역사환경등의용어로불리고있으나본고에서는편리를위하여근대건축문화재로한정하여사용하고자한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21
따라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 인천아트플랫트폼, 인천개항박물관이개관하였고, 자장면박물관이건립중에있다. 이러한노력의결과로 2010년 2월에는인사동 대학로 헤이리에이어중구일원이개항장문화지구로지정되었다. 현재인천에서진행되고있는근대건축문화재의보존과활용에는용도가대부분전시관성격에국한되어있고, 주민참여가박약하여관주도형태로진행되는등한계가있다. 따라서본고에서는주민참여의방법과활용방안의다양성에대하여살펴보고자한다. 2. 인천개항장의역사문화적환경 1) 도시사적환경 전통시대인천의역사는인천도호부관아가있었던현문학 관교동일원을중심으로전개되었으며, 당시중구지역은빈한한포구에지나지않았다. 그러나 1883년인천항개항과함께邑治가서쪽으로이동하여鷹峰山에仁川監理署가설치되면서중구지역은激動의場으로변모하였다. 외국과의통상조약을통해租界가설정되었고, 외국인거주지를중심으로한도시계획은개항장일원을근대도시로성장하게하였다. 외국인의진출이급증하면서서구선진문물이가장먼저유입되어적용되었고, 급변하는국제정세속에서치열한외교전이전개되었다. 인천개항장은우리나라근대화의효시가되었고국제도시로서면모를갖추게되었다. 222 인천역사 (8 호 )
(1) 租界의設定인천은 1876년체결된조일수호조규에의해개항장으로지정되었다. 이에한반도에서의일본의지위를견제하기위하여淸은미국등의구미열강들과의수호통상조약을주선하였으며, 1882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체결하였다. 조선과조약을체결한열강들은인천에진출한자국민의보호를위하여조계를설정하기시작하였다. 조계는개항장일정지역에외국인전용거주지역을획정하여그곳의지방행정권을그들외국인에게위임한것이다. 부산의草梁倭館과같은商館은조계와는성격이다른것이었다. 외국인전용거주지라는점에서같은개념이라할수있으나상관의경우외국인과내국인을막론하고자유로운왕래나상행위가불가능했던데비해조계지에서는외국인은자유로운왕래가보장되었고내국인에대한제한도그리심한편은아니었다고할수있다. 토지취득방식에따라조계설정국이일괄계약하여자국민에게분할하는專管租界 (Concession) 와외국인이직접토지소유자와협의하여임대하는居留地 (Settlement) 로구분된다. 인천에설정된조계는모두거류지방식이었다. 또조계를관할하는국가의수에따라한나라가독점적으로조계지를확보하여운영하는一國專管租界와여러나라가특정한지역을공유하는各國共同租界로나눌수있다. 조계의행정권은조계설정국정부나조계거류민대표에의하여행사되었다. 일본조계와청국조계는영사에의해행정권이수행되었는데일본조계는처음에는영사행정이실시되다가점차자치행정이실시되었고각국공동조계는조계지를설정한각국의대표가모여서만든자치기구를통해조계행정권을수행하였다. 조계에서는사법권도보장되어조계내외를막론하고설정국인의범죄행위는그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23
들본국의법률에따라, 그들영사에의해처리되는영사재판이행해졌다. 조계는강력한행정권과함께영사재판이행해지던치외법권적특수권익지구로서마치나라안의나라또는일국내의소국처럼되었던것이다. 일본조계는지금의관동1 2 가와북성동 1 3가일대 7,000평에자리하였는데, 영사관을세우고도로와택지를조성하면서일본인이계속늘어나개항당시 348명에불과했던일본거류민이 1890년에는 4,300여명에이르렀다. 인구가늘어나자일본은 1898년현해안동일대를매립하여 4,000여평을늘리기도했고, 각국공동조계나주변한국인거주지까지진출하였다. 청국은 1884년 4월이되어서야조계를세운다. 청국조계는처음에현선린동일대 5,000여평을설정하였고, 그후 3차례확장하여현재한국의유일한차이나타운으로명맥을잇고있다. 청국조계에는同順泰, 仁合東등巨商들의점포 여관 잡화상 주택들이즐비하였고, 특히공화춘 중화루 동흥루등의청요리집들은전국적으로유명하였다. 상권이번성해지자늘어나는청국인을감당하지못해동인천역근처까지조계를확장하기도하였으나, 1937년중일전쟁이후로는그세력이크게약해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일본과청국을포함하여 1884년 10월송학동 1 3가, 북성동 1 3가일부, 송월동 2 3가일대 142,000평에공동으로각국공동조계를만들었다. 이들은紳董公司 (Municipal Council) 라는공동관리기구를만들어각국공동조계내의모든문제를협의하고결정해나갔는데, 이는서로간의힘을견제하려는의도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 신동공사는조계내의도로개설에서가로등설치에이르기까지모든결정권을행사했으며, 특히건물을지을때자재로는벽돌, 석재, 철재를꼭써야하고, 이를어기면벌금을내도록 224 인천역사 (8 호 )
엄격히규제했다. 이에따라각국의공관건물이나호텔등서양식건물이중구지역곳곳에화려하게들어서게되었다. (2) 最初의近代計劃都市각국의조계가설정된응봉산일원은외국인의진출이급증하면서외국인거주지와한국인시가지로도시공간이구분되었고, 조계는우리나라최초로근대적인도시계획에의해조성되었다. 1883년 9월 30일체결된朝鮮國仁川口租界約書에의해조성된일본조계는영사관을중심으로좌우 2블록이대칭으로되어있으며, 영사관부지를제외한 10개가구, 67개획지로구획하여, 토지를상ㆍ중ㆍ하 3등급으로구분하였다. 가구의규모는 120m 26m(780평 ) 이고, 획지의규모는 20m 26m(130평 ), 10m 26m(65평 ) 두종류이다. 특이한것은도로에면한길이보다안길이가 2배이상깊은획지형상으로이는일본전통적인획지분할수법을도입한것이다. 도로계획은영사관부지에서남북도로를 12m로하고, 동서도로를 8m로하고있다. 도로율은 22% 로되어있다. 토지관리와운영에대해서는하수구를제외한택지는경쟁입찰로대여하고, 등급에따라토지세를달리부과했다. 토지소유자는조선정부로부터토지권리증서를교부받아영구임대하였다. 조계지내도로, 가로등과같은공공시설의보수와설치는택지원가및분양가의일부와토지세일부를적립보관하여충당하였다. 일본조계를전체적으로보면가구및획지계획은긴쪽을해안과수평으로배치하여전체적인입면이바다를향해격자식배치를하였고, 가구한변의길이는 120m 로구분하였다. 1884년 4월체결된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의해조성된청국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25
조계는구릉지로가구배치는부정형으로구성되어있었지만, 8m와 12m의도로는인접일본조계지와연결되도록배열하고있다. 조성된토지는상ㆍ중ㆍ하 3등급지로구분하였고, 상등지는해관및해안에근접된토지이고, 하등지에청국영사관을배치시켰다. 토지등급에따라토지세를달리하였으며, 경쟁입찰에의해낙찰된토지는영구임대하였다. 조계지내도로, 교량, 부두등의공사비와유지보수는토지원가의 4분의 1과경쟁입찰원가의초과분 4분의 1을기금으로비축하여충당하였다. 1884년 10월체결된仁川濟物浦各局租界章程에의해조성된각국공동조계는국제성을띤도시계획이이루어졌다. 가구및획지계획을보면토지를 AㆍBㆍ CㆍD 4등급으로구분하고, 총 79획지의대부분 CㆍD등급의토지가주종을이루고있다. 획지당규모는 A지구 688m2, B지구 1,797m2, C지구 1,008m2, D지구 2,175m2로되어있다. 택지조성은 A지구는조선정부가담당하고, BㆍCㆍ D지구는임대한자가자비로정리하도록하였다. 건축자재에대한규제와건축비의하한선을규정하고있는데, A지구의가옥은벽체가반드시벽돌, 석재, 또는철재를사용해야하고, 지붕은철판이나벽돌혹은기와를덮고목조가옥은불허했다. B지구의가옥도지붕은반드시기와로해야하고벽은석회나시멘트또는벽돌을사용하도록했다. 해안방파제와부두의건조및수리그리고조계내의가로축조는모두조선정부가시행하고, 소요되는비용은조계적립금으로충당했다. 공동조계내토지는조선인에게는소유권을불허하고, 조선과조약을체결한국가의사람만매수ㆍ소유또는권리증을교부하였다. 1888년제작된大朝鮮仁川濟物浦各國租界地圖에의하면서구식공원, 사교클럽, 외국인공동묘지등이나타나는데, 이는신동공사의기금으로공원의식재, 가로등설치등공공시설을갖추어나갔다. 226 인천역사 (8 호 )
그림 1.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 대한제국을강제병합한일본제국주의는 1914년조계폐지와함께개항장을중심으로인천에대한대대적인도시정비에나서게되는데, 이때건폐율 건축선 건물재료및부대시설 방화시설 방화지구 미관지구 준공업지구등의건축규제를도입하고있다. 3) 또한인천항의물동량이증가되고미곡이인천에집적되면서선박의출입이가능한갑문식도크를설치한축항공사가이루어졌다. 개항이후물동량증가와근대도시가형성되는과정에서인천에는도시시설을갖추게된다. 3) 김대익, 지구단위계획을통한역사경관관리방안연구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8, 44 쪽.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27
< 표 -1> 개항장일원의주요도시시설 4) 구분주요도시시설 교통 운수시설경인철도 (1899) 도시공간시설 유통 공급시설 학교 공공청사 공공문화시설금융 업무시설 각국공원 (1888) 일본공원 (1890) 월미도유원지 (1923) 송도유원지 (1940) 송현배수지 (1906) 인천전기 (1906) 인천-한성- 의주간 전신선 가설 (1885)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 (1885) 인천공립보통학교 (1907) 인천여학교 (1908) 영화보통학교 (1893) 관립인천외국어학교 (1895) 인천박문보통학교 (1890) 일본영사관 (1883) 청국영사관 (1884) 영국영사관 (1884) 러시아영사관 (1902) 신동공사 (1884) 인천감리서 (1883) 해관 (1883) 관측소 (1905) 문화시설외국인구락부 (1891) 대불호텔 (1888) 표관 (1909) 제일은행인천지점 (1883) 대한천일은행인천지점 (1899) 제 18 은행인천지점 (1890) 제 58 은행인천지점 (1892) 인천우체국 (1895) 인천전환국 (1892) 미두취인소 (1894) 종교시설 내리교회 (1888) 답동성당 (1893) 성공회성당 (1890) 여선교사합숙소 (1894) 기타 성누가병원 (1890) 공립병원 (1888)_ 공설운동장 (1920) 보건위생시설외국인공동묘지 (1888) 외국계상사세창양행 (1884) 타운센트양행 (1884) 홈링거상회 (1896) 2) 근대건축문화재현황인천개항장이내포하고있는것은한국근대사의역사성이다. 인천의근현대사를대표할수있는유형적자산은근대건축문화재일것이다. 조계의설정과함께응봉산을중심으로개항장에거주하던외국인을위한洋館이라불리는서양식 일식 중국식건축물이조성되었고역사적사실과연관되어인천근대사의역사성을담고있다. 근대건축문화재들은인천상륙작전 4) 인천광역시, 1883-2001 인천의도시계획 2004, 14 쪽표주요도시시설전재. 228 인천역사 (8 호 )
으로인하여대부분소실되었고, 보존에대한인식없었던도시개발에따라사라지고있다. 중구지역근대건축문화재분포는다음과같다. 5) 그림 2. 근대건축문화재위치도 < 표 -2> 중구지역근대건축문화재지정현황 지정현황명칭유형번호사적 287 답동성당 주요내용 ( 소재지 / 건립연도 / 지정일자 ) 답동 3-1 / 1897 년 / 1981 년 9 월 25 일 인천최초의천주교회로, 인천근대교육및보육사업시행 연면적 4,909 m2, 지상 2 층지하 1 층석재및철근콘크리트조 5) 인천중구지역근대건축물현황은부록에게재하였으며, 2004 년간행된 근대문화유산목록화조사보고서 와 2005 년조사된 문화유적분포지도 - 인천광역시남구 남동구 동구 중구 연수구 를기초로작성하였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29
지정현황유형번호 7 명칭 구 ) 인천일본제은행지점 주요내용 ( 소재지 / 건립연도 / 지정일자 ) 중앙동 1 가 9 / 1899 년 / 1982 년 3 월 2 일 한반도금괴와사금매입업무대행및일본영사관금고역할 중앙에반원형의돔을설치한좌우대칭석조르네상스식건축물 8 인천우체국 항동 6 가 1 / 1923 년 / 1982 년 3 월 2 일 일본인의우편사무를취급하기위한우체국 - 석재와콘크리트를주재료로모퉁이를돌출시킨르네상스식건축물 유형문화재 17 구 ) 제물포구락부 19 구 ) 인천일본 58 은행지점 49 홍예문 송학동 1 가 7 / 1901 년 / 1993 년 7 월 6 일 각국공동조계내외국인들의사교클럽 창위에페디먼트장식을한경사지를이용한 2 층건축물 중앙동 2 가 19-1 / 1892 년추정 / 1993 년 7 월 6 일 주화수출과일본의신주화수입업무담당 벽돌조회벽마감, 발코니, 도머창, 맨사드지붕등프랑스풍 2 층건축물 송학동 2 가 20 / 1908 년 / 2002 년 12 월 23 일 조계지를확장한일본이자국거주민의이동동선을확보하기위한건립 무지개모양의화강암을이용한석조구조와적벽돌로된아치모양의돌문 50 구 ) 인천일본 18 은행지점 중앙동 2 가 24-1 / 1890 년 / 2002 년 12 월 23 일 면직물중개무역으로부를축적한일본상인들의은행 벽돌조회벽마감과목조트러스위일식기와모임지붕형태의단층건축물 51 인천내동성공회성당 내동 3 / 1956 년 / 2002 년 12 월 23 일 고요한신부에의해 1890 년건립되었으나한국전쟁당시소실 H 형강을사용하고화강암으로마감한중세풍의석조건축물 기념물 51 조계지경계계단 선린동 58-1 / 1884 년 / 2002 년 12 월 23 일 청국조계와일본조계의경계에조성된만국공원과연결되는계단 현재계단좌우에중국식 일본식석등과공자상을조형물로설치 230 인천역사 (8 호 )
지정현황명칭유형번호 246 공화춘 주요내용 ( 소재지 / 건립연도 / 지정일자 ) 선린동 38-1 2 / 1905 년 / 2006 년 4 월 14 일 - 인천최초의중화요리집으로자장면의발상지로알려짐 - 2 층중정형중국식건축물로조적조벽체와목조트러스지붕등이특징 등록문화재 247 구 ) 인천부청사 248 구 ) 일본우선주식회사인천지점 관동 1 가 9-1 / 1933 년 / 2006 년 4 월 14 일 - 인천부의행정을위해 2 층으로신축하였다가 1964 년 3 층으로증축 모더니즘양식의수평의긴띠창, 커튼월기법의유리창이특징 해안동 1 가 9 / 일제강점기 / 2006 년 4 월 14 일 일본과한반도의물류운송을담당하기위해 1888 년설립 의양풍포치형태의페디먼트주출입구중심의좌우대칭형태의건축물 427 제물포고등학교강당 전동 26 / 1935 년추정 / 2008 년 10 월 27 일 인천중학교의강당으로건립되어현재제물포고등학교강당으로활용 내부기둥이없고맨사드지붕의지하 1 층지상 1 층의벽돌조건축물 현존하는근대건축문화재중에는국가지정문화재가 1기, 시지정문화재가 8기, 등록문화재가 4기등 13기이다. 2003년중구청이수립한 개항기근대건축물밀집지역지구단위계획 을근거로할때추천및기존보전대상건축물은총 52개소이다. 인천부청사 구 ) 일본우선주식회사인천지점 공화춘은등록문화재로, 조계지경계계단은시기념물로기지정되었으므로보전대상건축물은 48개소이다. 인천광역시는인해무역 청국여사관의회청 해안동성당교육관등 3개소는시지정문화재로, 동양크리닝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백일청주택 ( 舊 ) 일본제1 은행부속창고 조선일보중부지국 경인리스 ( 선광문화재단 ) 아침바다 ( 설계사무소 ) 중앙철물 가빈 ( 황진이단란주점 ) 해안동창고1 삼우인쇄소 대한통운창고 고려농산김치 우정일식 항동창고 선린동주택1 화교중산학교 현대크리닝 대창반점 풍미반점 진재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31
근주택 장세춘주택등 22개소는등록문화재로지정하고자추천문화재로구분하였다. 그외에도창대건강원 관동주택 24시즉석김밥 SC제일은행 무한장어 ( 갯마을 ) SK텔레콤( 구조양문구 ) 바다라노래타운 ( 구로우션 ) 장성영양탕 해안동창고2 해안동창고3 태양상선주식회사 태양상선창고 인천지방경찰청 선린동주택2 화교기독교회 홍화순주택 다미정 김병욱주택 조순영주택 김장환주택등 20개소를예비보전대상건축물로선정하였다. 이외에도인천광역시는선진천막사 김용하주택 김찬수주택 창고 ( 주 ) 경화 하나로통상 한국스카우트 백희정주택 Si 설록차 김시형주택 한상원주택 주택1 주택 2 등 14개소를신규보전대상건축물로선정하여보전계획을수립하고있다. 6) 그러나건축물의노후화와화재등으로인하여많은문화재가소실되었다. 2003년이전까지청국영사관 러시아영사관 영국영사관 관동공사 대한천일은행인천지점 식산은행 대불호텔 공립병원 성누가병원 홈링거상회 세창양행 세창양행사택 헨켈저택 오례당저택 모스저택 송학동주택 동양연초주식회사 타운센트양행 이운사등 19개소에이르는근대건축물들이전쟁, 화재, 안전진단결과등으로멸실되었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항동창고 김병욱주택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백일청주택 화교기독교회 선린동주택2 인천지방경찰청등 7개소가소실되어근대건축문화재의소실속도가매우빠르게진행되고있다. 6) 인천광역시중구청, 인천개항장문화지구타당성조사및기본계획수립, 2009. 32~33 쪽. 232 인천역사 (8 호 )
3. 추진계획검토 월미관광특구마스터플랜 ( 이하마스터플랜 ) 은 2005년 2월수립된국내외관광환경의변화에대응하여준비한인천광역시의관광정책의핵 (nucleus) 이다. 인천광역시는대한민국관문도시로서의역할을요구받고있고, 동북아비즈니스중심도시의공간적대상, 내국인관광시장의팽창이요구되는수도권최대의항구도시등관광도시로서의성장잠재력을갖추고있다. 월미도는 특구 라는제도적여건이갖추어진곳이며, 중구구도심은개항장으로서의다양한근대역사문화자원, 수변관광자원, 전통시장의식음자원등다양한관광자원을갖고있는지역으로 2013년까지이두지역을통합적으로관광시스템화하는것이마스터플랜이다. 7) 마스터플랜의단위사업으로박물관건립이계획되어있다. 월미역사관건립, 선박박물관건립, 등대박물관건립, 조수원리체험관설치, 근대건축물활용전시박물관확충사업등이마스터플랜에포함되어있다. 특히개항장의역사적정체성을활용하여개항장역사문화의거리조성, 골목전시관, 역사안내해설표지판확충, 근대역사문화탐방로사업등은구도심에조성되는박물관과함께시너지효과를얻게될것이다. 8) 또한마스터플랜에는근대건축문화재의보존과활용방안이포함되어있다. 1) 근대건축물활용전시관건립계획 중구개항장은 1883 년이후각국의조계가설정되면서다양 7) 인천광역시, 월미관광특구마스터플랜, 2005, 3~7 쪽. 8) 인천광역시, 위의책, 2005, 66-95 쪽.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33
한문화가공존하였으며, 서구문물의유입의길목으로한국근대화의본산으로서최초의철도, 최초의서구식공원등한국최초의역사가시작되는장소이다. 또한일제강점기를거치면서일본색이강한근대화가가속화되면서근대적인도시기능과식민도시의모순이심화되었으며, 광복후매립 항만개발 산업시설개발등산업화의주무대로기능하면서 100여년간의문화가동시에공존하는공간이다. 특히개항과근대화과정의소산인근대문화유산이아직도산재하고있는곳이기도하다. 이사업은이러한근대문화유산을리노베이션하여전시시설로활용함과동시에근대건축문화재의보존을병행하고나아가관광자원으로활용하고자계획된것이다. 이사업에는仁川驛舍를중심박물관 (Core Museum) 으로하여총 11개의근대건축문화재가사업대상이된다. 이를정리하면다음과같다. 전시박물관확충사업은기실시되고있는사업계획을포함하고있기때문에조성대상일부는테마박물관건립사업과중복되고있다. 자장면박물관은테마박물관건립사업으로추진하고있고, 화폐박물관은테마박물관건립사업내최초사박물관으로전시주제가바뀌었다. 또한 18은행건물을이용한건축사박물관은중구개항장근대건축박물관으로조성되었고, 제물포구락부의다목적문화공간조성은사업이완료되어문화시설로운영되고있다. 이단위사업은마스터플랜의각단위사업인미술문화공간조성, 역사문화의거리조성, 근대역사탐방로사업과연계될경우더욱더큰시너지효과를갖게될것이다. 234 인천역사 (8 호 )
< 표 -3> 근대건축물활용전시박물관일람 9) 대상건물박물관명전시내용비고 인천역사 공화춘 근대역사박물관 자장면박물관 개항기이후부터해방전까지근대역사를종합적으로조망할수있는근대역사박물관조성 자장면등개항기이후인천에서유행했던음식을테마로한근대음식박물관조성 2012 년개관예정 창고건물 창고건물 근대생활사박물관 시간 명품박물관 근대이후생활의변천을테마로하여당시일반인들의의식주생활의주요부분을테마로하여재현 근대적인시간관념의탄생등을전시형태로표현하는시간박물관조성및인천관광명품판매시설운영 근대건축물영화박물관 근대식극장을복원하고과거한국영화, 동아시아권영화상시상영및영화관련자료전시 조선일보 근대문학관 구도심과인천을테마로한근대문학작품소개및문인들의육필원고 초상 배경가로의모형등전시 제일은행 화폐박물관 18 은행건축사박물관 근대적인은행업무방식으로은행을운영하면서화폐박물관을겸하도록조성 인천개항박물관전환 2010년개관 근대건축구도심근대건축물들의축소모형으로복원전시관과인천도시발달과정의변천과정을조망할전환수있도록조성 2006년개관 58 은행근대인물사박물관 인천에서활동하였던근대인물들의활약상을스토리텔링형식으로전시 제물포구락부 인천역사자료관 다목적문화공간 자료실 연구관리동 공원과워크숍, 전시등이이루어질수있는 2008년다목적문화공간으로조성하고방문자센터개관로활용 구도심권의박물관의관리, 운영을위한공간및근대사자료실로활용 9) 인천광역시, 앞의책, 2005, 74 쪽참조.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35
236 인천역사 (8 호 ) 그림 3. 근대건축물활용전시박물관확충사업위치도
(1)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중앙동 2가 24-1번지에소재한구 ) 일본18은행인천지점을 2005년보수공사를거쳐 2006년 9월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 ( 이하근대건축전시관 ) 으로재생하였다. 일본제18은행은일본나가사키에서활동하던상인들이중심이되어 1877년 9월제18 국립은행으로설립한은행이다. 1890년 10월일본제18은행최초의해외지점을인천에개설하였다. 약 47년간금융업무를보다가 1936년인천, 서울, 부산지점등 9개지점을조선식산은행으로양도하였다. 1954년에는상공은행과신탁은행의합병으로발족한한국흥업은행인천지점으로사용되었으며카페, 중고가구도매상으로사용되었다. 기단을석조로처리한뒤벽돌을쌓고그위에돌을붙여전체적으로석조건물로느끼게한건물이다. 지붕형식은모임지붕으로골조는왕대공트러스로구성하였고기와는일본식으로마감하였다. 출입구는상부와좌우축을석조장식으로마감한절충주의양식건물이다. 근대건축전시관은상설전시를 5개 Zone으로구성하여이지역답사를시도하는관광객에게개항장의근대문화유산에대한기초정보를제공하는근대문화유산트레일 (Modern Heritage Trail) 의포스트로역할하고있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37
그림 4.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내부투시도 (2) 인천개항박물관중앙동 1가 9-2번지에소재한구 ) 일본제일은행인천지점을 2008년부터보수공사를진행하여 2010년 10월에인천개항박물관으로개관하였다. 구 ) 일본제일은행은제1국립은행으로일본의국립은행조례에따라 1873년 8월 1일설립된최초의민간은행이다. 1878년 6월은동화 10만원을대부받아부산에지점을개설하였으며, 1880년원산, 1882년인천, 1887년서울에출장소를개설하였다. 1888년 9월인천출장소가인천지점으로승격되었고, 같은해 10월에는서울에인천지점서울출장소를개설하였다. 1909년한국은행이창립되면서한국은행인천지점, 1911년한국은행이조선은행으로변칭됨에따라조선은행인천지점으로변경되었다. 광복후에한국은행인천지점으로개편되었다가다른곳으로이전한 238 인천역사 (8 호 )
후, 조달청인천사무소청사, 법원등기소, 인천문화발전연구원, 중구청별관등으로사용되었다. 이건물은 211.6m2 (64) 평의石造單層建物로, 1897년착공하여 1899년완공되었다. 일본인니이노미다카마사 ( 新家孝正 ) 가설계하였으며, 모래 자갈 석회를제외한석재 시멘트 목재등일체의자재를일본에서반입하여사용하였다. 당시일본건축은목조에의한疑洋風이주를이루었으나, 조적의르네상스양식이나일본식기와이음의수법을가미한절충주의양식이유행하였다. 당시제일은행건물은순수한서구양식의석조건축물로수준높은건축물이라할수있다. 이건물이들어서기전에는서양식목조 2층건물에서은행업무를보았다. 출입구는약간돌출시켜현관을두고출입문상부에반원아치를틀었다. 그위에르네상스풍의작은돔을올렸다. 외벽은화강암으로다듬어쌓고처마부분에는동그란구멍이뚫린석조패러핏난간을올렸으며, 지붕돔의좌우에는도머창을두었고지붕상부는크레스팅장식을달았다. 지붕의마감재는당초일본식기와였으나, 현재는함석으로교체되었다. 은행의전체적인배치는본관, 금고동, 부속동, 창고동, 사택으로구성되었다. 본관은가로 16.5m, 세로 12.8m로비교적넓은편이며, 지붕의하중을지지하기위해네개의기둥을세웠다. 외관은단층건물이지만천장높이가 6.97m인중2층건물로전체높이는 9.3m이다. 1층바닥에서 4m 높이에벽을따라난간을설치하였다. 개항장은매우경이로운도시였다. 외국인의모습과그들의주거와생활환경이생소하였고, 그들이가져온舶來品이신기한것이었다. 근현대시기인천개항장에는우리나라최초이자인천최고가되는사실들이즐비하였다. 10) 산업혁명에따른서구의근대문물, 근대행정기관, 도시시설, 신교통수단, 신종교, 신교육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39
등당시인천은서구로부터유입된신문물들이역사적사건과함께어우러져인천의근대사를구성하였다. 이에우리나라최초가되는역사적사실과연관된근대유물을수집하고이를전시하기위해한국최초사박물관을기획하였으나, 개관전인천개항박물관으로관명이변경되었다. 전시내용은우리나라최초의등대인팔미도등대의축소모형을비롯하여광제호, 우편 통신제도, 근대교육제도, 신종교, 경인철도, 인천전환국등으로우리민족의삶의형태를바꾸었던우리나라최초에해당되는것이다. 그림 5. 인천개항박물관전시평면도 10) 우리나라최초와인천최고의사실들은 2005 년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역사문화연구실에서간행한 근대문화로읽는한국최초인천최고 에자세히정리되었다. 240 인천역사 (8 호 )
(3) 자장면박물관추억의식문화중에자장면을빼놓을수없을것이다. 이자장면의발상지로알려진곳이선린동 38-1 2에소재한共和春이다. 등록문화재제246호로지정된공화춘은 1905년에건립된것으로전하나건물관리대장에는 1948년으로되어있다. 중국山東省출신인于希光은 20세기초인천에이주하여산동성상인들의同鄕會館인山東會館을설립하였는데, 청국에서이주한상인들에게숙식을제공하는客棧의성격을띠고있었다. 산동회관은 1913년은공화춘으로이름을바꾸어산동요리를가리키는魯菜를위주로하는中式餐館으로운영하게되었다. 명칭을바꾼것은 1912년孫文이청조를전복시키고민주공화국인中華民國을세웠는데, 이를경축하기위해 共和國的春天到了 의의미를부여한것이다. 공화춘의영업이번창함에따라우희광은화교의지도자인僑領을역임하기도하였다. 1949년우희광이작고하자경영권을이어받은아들于鴻章은한국전쟁으로중단된영업을위해옆건물을인수하여두건물을연결시키고내부공간을개조하여대규모연회장과여러개의별실을만들고중국풍실내장식을하였다. 인천시청이구월동으로이전하고영업이줄어들자 1983년문을닫았다. 11) 화강암석축에위에벽돌을쌓아올린 2층벽돌조건물이다. 정면과우측벽면은타일로, 좌측벽면은모탈로마감했다. 1층에는 2개의출입구와 4개의창문이설치되었고, 2층에는 8개의창문이있다. 지붕은슬레이트로마감하였다. 1층출입구와창호위에는결원안치를틀었으며, 2층창문위에는평아치를틀었다. 전체적인평면은 目 자형으로전 후면에 一 자형의건물이있고그사이공간을 4개의건물이연결하고있는데, 각연결 11) 문화재청, 인천선린동공화춘기록화조사보고서 2007. 69~73 쪽.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41
건축물사이에는중정이구성되어있다. 상업용도건물에중정형의공간구성을취하는등건물구성은당시청국조계지의건축특성을잘보여는것이다. 공화춘은자장면을상용화한최초의중국요리전문점으로전해지면서생활사 향토사 건축사적가치가인정되어 2006년등록문화재로지정되었고, 중구청은중국화교의음식문화의이해와체험을중심의자장면박물관으로재생을기획하고있다. 현재문화재보수공사와전시실시설계가완료되어전시시공을거쳐 2012년상반기개관을목표로하고있다. 1층은 1960년대의공화춘주방을재현하고, 2층은인천개항기 ( 개항장쿨리와자장면 ), 1930년대 ( 일제강점기의공화춘 ), 1970대중국집 ( 졸업식과자장면 ), 2000년대현재의자장면문화등 4시기로구분하여당시의생활상을자장면을통해재현하는것으로기획되었다. 다음은실시설계상의전시투시도이다. 242 인천역사 (8 호 )
그림 6. 자장면박물관 1 층전시투시도 ( 안 ) 그림 7. 자장면박물관 2 층전시투시도 ( 안 )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43
2) 각국공원창조적복원사업각국공원은우리나라최초의서구식공원이라는역사적인의의를가진곳이다. 지난 120여년간만국공원, 서공원, 자유공원으로명칭바뀌면서개항과근대화의역사를상징하는장소로인식되어왔다. 인천의행정중심이동천해감에따라일반근린공원으로제한되어역사성과상징성이잘나타나지않고있어개항장일원의멸실근대건축물을현자유공원내에집적 복원하고건물특성을반영하는전시관 박물관으로활용하여개항장의정체성을규명하고자계획된것이각국공원창조적복원사업이다. 계획은멸실된건축문화재중에서당시위치에존스턴별장과세창양행사택을복원하고, 원소재지에복원이어려운러시아 영국 일본 청국영사관, 인천호텔, 표관등을자유공원범위안에집적하여복원하는것이다. 복원건축물은해당국의체험요소를강화하여각국의홍보전시관또는해당국음식을판매하는식음시설로활용하고, 중앙광장을이용하여다양한축제프로그램의정례화등을활용사례로밝히고있다. 244 인천역사 (8 호 )
< 표-4> 주요복원대상검토건물및활용용도 12) 건 물 건 립 멸 실 활 용 용 도 대불호텔 1885년이전 1979년 호텔박물관, 호텔문화체험관 러시아영사관 1903년 1974년 러시아상징전시박물관 세창양행사택 1884년 1950년 독일상징전시박물관 영국영사관 1884년 1950년 영국상징전시박물관 인천관측소 1904년 19530년대 근대기상박물관 인천세관 1906년이전 1950년 세관재현 일본영사관 1883년 1932년 일본상징전시박물관 존스턴별장 1905년 1950년 종합전시공간 청국영사관 1884년 1950년 중국상징전시박물관 표관 1909년 1950년 방문객편의시설, 광장지원시설 그림 8. 각국공원창조적복원사업전시조감도 12) < 표 -4> 는인천광역시, 앞의책, 2005, 76 쪽에서전재하였으며, 그림 8 은인천발전연구원, 각국공원창조적복원사업기본구상및시설배치계획연구 2004. 98 쪽그림을전재하였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45
그러나제국주의관련건축물복원에대한시민단체의부정적시각, 대상건축물선정에대한진정성, 건축물복원에필요한자료의부족, 과도한사업예산등많은비판이제기되었고이에사업의타당성조사를통해복원대상건축물을존스턴별장, 세창양행사택, 영국영사관, 알렌별장, 러시아영사관등 5개소로축소하여선정하였다. < 표 -5> 복원대상건축물현황 13) 건축물규모건립연도멸실연도선정사유 존스턴별장지상 4층, 1,871m2세창양행사택지상 1층, 572.4m2영국영사관지상 1층, 540.5m2 지상 2층, 알렌별장 202.2m2러시아영사관지상 2층, 990.0m2 1905 년 1950 년 1884 년 1950 년 1884 년 1950 년 893 년 1956 년 원위치, 당시랜드마크로공원의상징적위치 원위치, 인천최초양관, 존스턴별장과균형유지 규모의적합성, 개항당시해관의주도적역할 규모의적합성, 주한미국공사소유별장 1903 년 1974 년규모의적합성, 러일전쟁, 제물포해전 타당성조사용역수행기관의적정성은논외로하더라도복원대상건축물의선정기준, 사업의추진가능성등에대한여러문제가제기되었다. 첫번째는계획에서경관을중시하면서선정기준을규모의적정성에두었다는점이다. 복원에있어진정성이중요하다. 정확한설계도없이외관사진을중심으로복원하는만큼장소성이확보되어야하는데, 존스턴별장과세창양행사택 2개소만이원위치에복원이된다. 개항장과정체성을같이하는영국영사관 러시아영사관은다른용도의건축물이차지하고있어이전복원이가능하다할수있으나, 알렌별장의경우 13) 인천학연구원, 각국공원 ( 현자유공원 ) 창조적복원사업타당성검토, 인천대학교, 2005, 90~94. 246 인천역사 (8 호 )
개항장의정체성에일치할수없다고판단된다. 또한장소성이확보된 2개소도사업시행이불투명한요소가있다. 존스턴별장은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세창양행사택은맥아더동상의철거가선행되어야하는데가능성은높지않아보인다. 3) 인천아트플랫폼인천아트플랫폼 ( 이하플랫폼 ) 은해안동일원의근대건축물군을폭 15m, 길이 120m의대규모미술공간으로변경하는구도심재생사업의일환으로추진되었다. 사업범위안에있는근대건축문화재는일본우선주식회사인천지점, 해안동창고1, 해안동창고2, 장성영양탕, 대한통운창고1, 대한통운창고2, 삼우인쇄소등 7개소이다. < 표-6> 미술문화공간조성지내근대건축물현황 14) 건축물 위치 건축년도 구조 면적 일본우선주식회사인천지점 해안동 1가 8 1933년 조적 / 연와조 379.63m2 해안동창고1 해안동 1가 8 1933년 연와조 / 기와 175.2m2 해안동창고1 해안동 1가 4-1 1944년 연와조 / 기와 59.5m2 장성영양탕 해안동 3-2 1943년 목조 / 기와 267.7m2 해안동창고1 해안동 1가 10-4 1948년 연와조 / 아연조 542m2 해안동창고1 해안동 1가 10-1 1948년 연와조 / 기와 542m2 삼우인쇄소 해안동 1가 2-2 1942년 연와조 / 기와 181.6m2 아트플랫폼은해안동 1가 10-1번지일원 32필지 8,453m2를연면적 5,605.35m2의지하 1층~지상4층건물 13개동을건립하는것이다. 이사업은당초초기 Festival Town이름으로창고지 14) 인천발전연구원, 인천구도심의문화적재생과미술공간의효율적운영방안, 2004.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47
역을명칭을지역홍보관 (Festival 홍보관 ) 특산물전시및판매 비어홀 카페빌리지 ( 테마카페 ) 먹거리마을 고전음악감상실 전통극공연장등으로구성하여 Beer Festival Summer Festival 벼룩시장 ( 중고품매매 ) 등의이벤트를계획하는지역경제활성화의목적이상당부분을차지하였다. 내부공간의넓은창고의특성을살려소극장 기념관 비어홀 음식점등의용도를도입한것이었다. 그러나근래에시설위주의하드웨어식문화공간에서시민과도시가상생과소통을꿈꾸는창작공간 (Art Space) 으로개념이바뀌고있는추세에발맞추어요코하마의뱅크아트 (Bank Art 1929) 나김해의클레이아크미술관과같이창작스튜디오를중심으로한문화교류가가능한동아시아문화허브의거점으로기본방향이바뀌었다. 따라서주요공간구성은창작공간 전시공간 다목적공간 교육공간 커뮤니티공간 사무공간으로나누어진다. < 표 -7> 아트플랫폼공간구성 15) 동명용도주요시설비고 A동 교육관 교실1 2 3, 라운지, 수유실, 안내데스크경비실, 사무실, 관장실 2층 B동 전시장 전시실, 수장고 2층 C동 공연장 공연장, 다목적실, 대기실 단층 D동 아카이브 자료실1~3, 관리사무실 단층 E-1동 스튜디오 스튜디오1~3, 미디어랩 1~2, 공동작업실 단층 E-2동 스튜디오 스튜디오4~12, 창고, 세탁실 3층 E-3동 스튜디오 스튜디오13~20, 휴게실 3층 F동 게스트하우스 게스트하우스 1~9, 세탁실, 게스트라운지 4층 G동 아트 & 디자인스튜디오 아트 & 디자인스튜디오 단층 H동 커뮤니티관 작가지원실 ( 라운지, 회의실, 사무실 ), 프로젝트룸 2층 15) 인천아트플랫폼홈페이지 http://www.inartplatform.kr/artplatform/facility.php 시설소개. 248 인천역사 (8 호 )
그림 9. 인천아트플랫폼위치도 아트플랫폼은공모를통해입주작가를선정하여국제문화교류가가능한국제레지던스프로그램을시행한다. 또한공방입주작가의창작작업지원도겸해연계교육프로그램및지역사회와의연계프로그램을개발할예정이다. 이외에도전시공간을활용하여지역작가와입주작가, 시민들이자율적참여를유발하여예술창작및유통, 교류활성화도시도한다. 공연장을활용하여디지털예술, 영화및영상, 공연예술등의발표의장으로활용한다. 아카이브와커뮤니티공간은입주작가및시민들에게편의를제공함은물론문화에대한상생과소통의공간으로활용될예정이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49
< 표 -8> 개항장일대문화시설현황 명칭주요내용비고 인천아트플랫폼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 제물포구락부 자장면박물관 한중문화관 중국어마을문화체험관 인주미술관 해명단청박물관 쉬필라움 대지면적 8,450 m2로근대건축물인창고를리모델링하여지역문화예술인들을위한창작활동의거점공간으로조성 개항당시의근대건축물을영상자료와모형등과개항장일대의전경을재현한축소모형을통해관람객의개항장기초정보제공 한국최초, 인천최고와관련된근대문화유산을실물중심의전시를통해인천역사의근대성과상징성을관람객에게제공 개항당시의외교클럽이라는명성에걸맞게중구의대표적문화카페로조성하여각종전시, 문화페스티벌등을개최활용 국내현존하는청요릿집중가장오래된舊 ) 공화춘건물을리모델링, 화교문화, 자장면의탄생역사와체험기회를관람객에게제공 연면적 2,889 m2 (B1/5F) 규모로중국문물전시실, 중국문화체험코너, 도서열람실등다양한문화체험을통해중국문화의이해제고 구 ) 북성동사무소를리모델링한지상 2 층규모의시설로주말을이용하여경극, 마작, 중국어등다양한중국문화프로그램운영 홍예문인근주거지역에조성된시설로서미술관과카페가복합된테마형시설 민간이운영하는박물관으로내방객을위한단청, 조각, 단소, 전통자수등우리나라의전통문화체험프로그램도입운영 청일조계지경계계단상단좌측에민간운영의소규모의갤러리로작업실과전시공간을병행하여지역예술인초대전시회개최 근대건축물군활용 구 ) 일본 18 은행인천지점활용 구 ) 일본제 1 은행인천지점활용 제물포구락부활용 공화춘활용 2005 년 4 월개관 2009 년개관 2008 년 8 월개관 이상의인천에서추진되고있는근대건축문화재의활용은한계가있다. 첫번째로는대부분전시공간으로재생되고있어용도적인면에서한계를갖고있다. 개항장일대의문화시설을살펴보면전시관성격을가진시설이대부분을차지한다. 개항장 250 인천역사 (8 호 )
에소재한근대건축문화재는자체로도역사성을내포하고있지만, 역사적사실과어우러져보다큰의미를갖게된다. 일본은행이갖는역사적정체성은금융사또는경제수탈임에도불구하고은행건물 2동은정체성과관련이없는주제의전시관으로재생되었다. 따라서근대건축문화재가갖고있는역사적사실을탐구하여문화재의정체성을규명하고그에맞는다양한용도를계획해야한다. 또하나의문제점은극히일부분을제외하고모두官主圖形사업이라는것이다. 관주도형사업은신속성과일관성을찾을수있으나다양성에제약을받을밖에없고, 장기적으로커다란재정부담을가질수있다. 현재사업의추진이근대건축문화재를매입하여전시공간으로활용하다보니, 건물에거주하던지역민이다른지역으로이탈하게된다. 이는구도심의공동화에도영향을미칠수있다. 건축물의정체성과함께근대건축문화재의연혁을밝혀주민들이거주와생업을유도한다면지역민의이탈을방지하고내방객들의체험공간으로활용할수도있을것이다. 4. 근대건축문화재활용사례 1) 고베시리진칸가이 ( 異人館街 ) 리진칸가이는일본고베시기타노죠야마모토도오리지구에위치하고있으며, 약 32ha의면적에총 29동의서양건축물, 7동의일식건축물을전통적인건조물로지정하고전시관으로조성하여공중에개방하고있다. 이중국가중요문화재 2동, 국가등록유형문화재 2동, 전통적건조물 11동등총 15동의지정문화재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51
가재생 이전 보전을통해전시관으로기능하고있다. 기타노지역은명치 20년대외국인이이주하여주택지로발전한도시로인천시중구의정체성과유사한지역으로도시경관형성지역으로지정되었으며, 그안에다시전통적건조물보존지구, 경관형성도로, 경관형성소로, 경관형성광장, 전통적건조물이중층적으로지정되어있어구도심재생의지침을제공하고있다. 그림 9. 일본고베리진칸가이위치도 이지역은명치시대부터대정시대까지건축된당시외국인건축가의설계에의한다양한서양건축물이보존되고있으며, 일본인들은이를리진칸이라부르고있다. 리진칸은저택의현상을그대로보존하고, 그당시시대상을보여주기위해장식품, 소품, 생활용품을그대로재현하고있어, 당시의건축스타일과구조, 장식, 활용도연구에귀중한자료를제공하고있다. 저택의현상을공개하는것뿐만아니라일부건축물들은리노베 252 인천역사 (8 호 )
이션을통해건물이갖는정체성을반영한전시관, 박물관, 상점, 레스토랑, 강습소등으로활용하고있다. 여기서주목할것은주민활동이다. 리진칸가이는고베여자단기대학으로사용하던구 ) 핫삼주택의보전을건축학자들로부터요청받은고베시가소유자와교섭하여기부형식으로보존하게된것을시작으로출발하였다. 이후개발업자들의개발계획에주민들이 기타노일대를지키는회 ( 北野界わいを守る會 ) 를결성하여활동하였고 北野 山本地區傳統的建造物群保存調査會 를구성하여상세한현지조사를실시하여전통적건조물군보존지구로선정되었다. 또한현재까지도 키타노 야마모토지구를지키고키우는회 ( 北野 山本地區をまもり そだてる會 ) 를주축으로주민활동이지속적으로전개되고있다. 법제와계획의수립은고베시에서담당하지만근대건축문화재의보존과활용은주민들의자발적인참여로유지되고있다. 리진칸가이의대표적건축물과주요내용은다음과같다. < 표 -9> 일본고베리진칸가이건축일람표 건물명건물의연혁및활용사진 가자미도리관 모에기노야카타 1909 년에건축된독일인무역상 G. 토마스의저택 그당시생활상 ( 가구, 페치카등 ) 을재현 첨탑가자미도리는마귀를쫓는부적으로이인관의상징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3-10-3 입장료 :300 엔 국가중요문화재로지정 1903 년에건축된미국총영사헌터샤프의저택 그당시생활상 ( 가구, 페치카, 아이방등 ) 을재현 개방형베란다와아라베스크풍문양의계단이특징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3-10-11 입장료 :300 엔 국가중요문화재로지정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53
건물명건물의연혁및활용사진 우로코의집 1905 년외국인전용고급임대주택으로건축 외벽에물고기비늘과비슷한천연슬레이트마감 이인관중가장먼저공개된저택으로미술관으로활용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20-4 입장료 :1,000 엔 국가등록유형문화재 기타노이야기관 1907 년에건축된 M.J 세어의저택으로건축 1 층은카페로사용하고, 2 층은기타노역사를소개하는전시실로활용 국가등록유형문화재로지정 혼케네덜란드관 수에케저택 명치시대에네덜란드무역상에리온의저택으로건축 당시생활상을재현하고거실에서차도마실수있음 미니어쳐풍차가정원에설치되어있음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16-17 입장료 :500 엔 전통적건조물 1896 년에건축된고딕풍의외국인저택 그당시생활상 ( 가구, 도자기, 거실등 ) 을재현 녹색지붕과흰벽이정원과조화를이룸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3-5-17 입장료 :500 엔 전통적건조물 라인관 1915 년에건축된저택 당시생활상 ( 가구, 페치카등 ) 을재현전시 미늘창, 돌출창등명치시대이진칸양식을그대로보여줌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10-24 입장료 : 무료 전통적건조물 254 인천역사 (8 호 )
건물명건물의연혁및활용사진 구서순저택 영국관 옛파나마영사관 벤의집 요칸나가야 1892년건축된시리아무역상색슨씨의저택 그당시생활상 ( 가구, 페치카, 아이방등 ) 을재현 건물안에결혼식장이있으며, 2층에는드레스대여촬영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16-1 입장료 :500엔 전통적건조물 1907년에건축된저택 바로크와빅토리아시대의가구와일상용품을전시 입구에런던택시를배치하였고, 영국경찰관의망토를무료대여하여기념촬영할수있음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3-16 입장료 :700엔, 전통적건조물 명치후기에건축된파나마영사의저택 영사집무실이보존되어있으며, 마야 안데스문명의토기와토우를전시하고있음 백색과녹색의대비가특징인건물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10-7 입장료 :500 엔, 전통적건조물 1902 년에건축된영국인수렵가벤앨리슨의저택 벤이사냥한동물들을박제하여전시하고있음 3m 크기의흰곰과말코손바닥사슴의박제가유명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3-21 입장료 :500 엔 전통적건조물 1894 년거류지에건축된연립주택을이인관으로이축한것 2 채가좌우대칭을하고있는독특한양식 루이뷔통트렁크, 샤갈, 유리공예등프랑스미술품전시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3-18 입장료 :500 엔 전통적건조물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55
건물명건물의연혁및활용사진 향기집네덜란드관 1918 년건축된네덜란드총영사벌힌저택 앤티크가구와집기를전시 꽃의나라네덜란드산향료이용, 자신만의향수제작체험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3-16 입장료 :700 엔 전통적건조물 아메리칸하우스 테디베어뮤지엄 야마테 8 번관 옛중국영사관 1929 년대에건축된미국무역상함웨이의저택 1920 년대미국의중류가정을재현 특히금주법시대의미국을엿볼수있음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3-10-1 입장료 :500 엔 전통적건조물 1910 년대 ( 대정연간 ) 에지어진샤라프웃딘의저택 현재테디베어박물관으로개조하여활용 국내외아티스트의곰인형과앤티크테디베어전시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3-10-11 입장료 :600 엔 명치후기에탑모양의집 3개를연결한것처럼건축된저택 로댕, 부르델, 베르나르의유명미술작품을전시 튜더풍 3층탑과, 입구아치의스테인드글라스, 베이윈도가특징인건축물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7 입장료 :500엔 명치시대에건축된저택 일본유학파인왕조명이난징에친일정부를수립하였을때, 중국영사관으로사용 송명청대의도자기, 현대수묵화등중국미술품전시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18-2 입장료 :500엔 256 인천역사 (8 호 )
건물명건물의연혁및활용사진 덴마크관 대사관후원으로지어진덴마크문화관 안데르센 ( 세재복원 ) 의일생과바이킹의생활양식전시 1 층에바이킹선 1/2 축소복제전시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015-12 입장료 :500 엔 이탈리아관 빈오스트리아집 대정후기의건축물을플라톤장식미술관으로리노베이션 밀레와코로의회화전시 18~19 세기의유럽의가구와집기등을전시 1 층파니오에서가벼운식사가능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1-6-15 입장료 :700 엔 대사관후원으로잘츠부르크에있는모차르트의집재현 오스트리아국립왕실공문서관의벽화재현 모차르트의포르테피아노복제품등전시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5-18 입장료 :500 엔 고베기타노미술관 1898 년기타노도리에연접해건축된목조건물 효고현출신일러스트레이터영전맹의작품전시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9-6 입장료 :500 엔 기타노외국인구락부 라이온하우스라불리던건물에개항당시사교장을재현 빅토리아시대의가구와집기등을전시 땔나무로불을지피던주방등을체험 위치 : 고베시중앙구북야정 2-18-2 입장료 :500 엔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57
건물명건물의연혁및활용사진 옛영국인저택 1902 년에건축된영국인무역상의저택으로영국인이설계 북야노에있었던것으로고베시가기증받아이축보존함 현재상락원안에이축되었음 이축된국가지정중요문화재 옛헌터주택 1907 년에건축된이인관 옛헌터씨의주택으로기타노에있었던이인관 현재고베시립왕자동물원으로이축하였음 이축된국가지정중요문화재 2) 요코하마아까렌가와야마테공원 1859년일본에서최초로개항장이설치된요코하마는인천과유사한역사적 지정학적배경을갖고있다. 요코하마역시근대적항만시설, 도크, 수도, 하수도, 가로등, 공원, 철교, 철도, 전화, 가스등, 극장등 일본최초 라는수식어가붙은일본근대도시의실험장이었다. 요코하마는 1950년대후반부터도심부강화사업 가나자와해안매립사업, 도호쿠뉴타운건설사업, 고속도로망건설사업, 지하철도건설사업, 베이브릿지건설사업등 6대프로젝트를통해동경의위성도시에서일본제2도시를넘보는국제항만도시가되었다. 특히도심부강화사업은근대문화유산이산재한간나이지구 ( 關內地區 ) 를중심으로개항기역사를복원이주목적이었다. 16) 요코하마의근대건축물의활용은보존과용도의변경을동시에진행하고있다. 미쯔비시공업의이전과함께제1도크는도크의용도를그대로살려 니혼마루 ( 日本丸 ) 라는 16) 강동진, 빨간벽돌창고와노란전차, 비온후, 2006, 94~105 쪽. 258 인천역사 (8 호 )
범선을정박시켜전시관으로활용하고, 제2도크는용도를변경하여식당가 휴게공간 비어홀등으로활용하는것이단적인예라할수있다. 미나토미라이21지역에서볼수있는대표적인근대건축문화재의활용사례는아까렌가소코 ( 赤レンガ倉庫 ) 이다. 일본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신미나토구에있는이창고는 1911년 (2창고) 과 1913년 (1창고) 에건축된벽돌조적조건물로당시일본의건설기술을집대성한것이다. 크기는지상 3층으로길이 148m, 폭 22m이며, 건축면적은 1창고 5,479m2벽돌, 2창고 10,755m2이다. 아까렌가는 1945년이후미군의항만사령부로사용되었고그후 1989년까지세관창고로사용되었으나방치되면서 1991년요코하마시가매입하였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구조보강공사와지붕개수공사를, 1996년부터 1999년까지외벽개수공사를, 2002 년까지내부개수공사를하여현재의아까렌가소코를오픈하였다. 17) 적벽돌창고를보존하고활용하는프로젝트에서가장중요한점은, 근대건축문화재로서이건물이가진역사성과소재감등건물자체의특징을살린형태로재생하여활용하는것이었다. 활용방법으로형식적이고정적인내용에그치는것이아니라, 동적인활동의장으로써사용되어지도록건축의재생을우선적으로고려하여 항구의번성과문화의창조 를메인테마로하였다. 그구체적인대안으로 1동을홀 극장 이벤트공간을갖춘다목적문화시설로하였고, 다른동은맥주홀 재즈라이브하우스 음식 물품판매소를갖춘상업시설로하였다. 1창고는문화시설을중심으로시민의문화활동을지원하고, 극장 재즈 서점등을통하여요코하마의정체성을정보화하고, 국제적인 17) ( 사 ) 한국건축역사학회, 근대문화유산보존과활용사례, 문화재청, 2006, 207~209 쪽.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59
전시회 영화제등을개최한다. 2창고는식문화를중심으로한상업시설로의류 가방 장신구 인형등을판매하는 100여개의상점이들어서있다. 문화시설과상업시설이함께위치하여다양한이벤트와전시회를통해방문객의재방문을유도하여첫해에 1,000만명이방문하였으며, 현재도요코하마의명소로명성을떨치고있다. 그림 10. 아까렌가소코전경 그림 11. 아까렌가소코내부 아까렌까소코가위치한항구주변의근대건축문화재대부분은리노베이션을통해기념관, 박물관등의전시용도로활용되고있는반면, 야마테지역의西洋館은원형그대로보존하여건축물과가구등당시의생활상을보여주는전시관으로활용되고있다. 야미테서양관은 요코하마시녹색협회 ( 橫濱市綠の協會 ) 에의해위탁관리되고있다. 녹색협회는 1976년 7월요코하마공원협회로발족하여 1984년 요코하마녹색마을조성기금 의설치로지금의명으로변경하였다. 시민, 기업, 각종단체의기부로이루어진요코하마녹색마을조성기금의이자수익으로 요코하마꽃과녹색의봄박람회 ( よこはま花と緑のスプリングフェア ) 등의보급계발사업과녹화장려사업, 녹색거리조성사업등의도시녹화사업을지원하고있다. 특히 2011년부터 11년째진행되고있는 꽃과그릇의하모니 전시는꽃꽂이와테이블코디네이터에의해서양관을아름답게치장하여관람객들에게즐거움을주는 260 인천역사 (8 호 )
목적으로시작되었다. 현재까지 꽃 이나 색상, 기념일, 일본의그릇, 세계의나라 등매년다양한주제로진행되고있다. 매년 야마테서양관축제 6월 ( 山手西洋館フェスタJUNE) 이름으로열리는 2011년전시는 요코하마 Style-마음에울리는풍요로운시간 이라는주제로 6월 4일부터 12일까지외교관의집을비롯한야마테서양관에서개최되었다. 그림 12. 외교관의집과 꽃과그릇의하모니 전시오브제와포스터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61
3) 버지니아윌리암스버그윌리암스버그역사민속촌 (Colonial Williamsburg) 은 18세기초식민정부의수도였던버지니아주에위치하여제임스타운 (Jamestown), 요크타운 (Yorktown) 과함께식민지시대역사적인트라이앵글의관광벨트를형성하고있다. 윌리암스버그는영국식민지시대 18세기의마을을복원한것이다. 20세기초마을교회목사였던윌리암굿윈 (William Goodwin) 이식민지시대의건물을보존하고복원하려는아이디어를창안하였고, 이프로젝트에관심을갖은록펠러 (John D. Rockefeller) 2세가 1926년 6,200만달러 ( 약 816억원 ) 를투입하여역사민속촌을건립하였다. 윌리암스버그의중요부분인약 52만m2의대지에 18세기마을을복원하였고, 복원된마을의보존을위하여주변 1,200만m2를더사들였다. 복원과정에서 700채의근대건축물을철거하거나이전시켰고, 노후된건물 83채는원형복원시켰다. 기초만남은 413채는고증에의하여식민지시대의원형으로복원시켰다. 식민지정부청사와총독궁은대중을위한전시관으로이용하고그내부를 18세기양식으로단장하였으며, 역사민속촌전지역을 18 세기식으로조경하였다. 18) 윌리암스버그역사민속촌의사례에서중요한것은관리운영주체와콘텐츠이다. 윌리암스버그의관리운영은시정부와독립된 Colonial Willamsburg Foundation이담당하고있다이기금은문화정신을기반으로기업경영마인드를가지고문화유산보존과자연환경보존, 관광수익사업을연계한시너지효과를최대화하고있다. 다른하나는문화관광콘텐츠이다. 윌리암스버그의중심은 Duke of Gloucester Street이다. 이거리는 18세기식 18) 김홍남, 박물관밖의박물관 : 미국윌리암스버그역사민속촌사례 21 세기국립민속박물관의발전방향과과제, 국립민속박물관, 2001, 71~ 74 쪽. 262 인천역사 (8 호 )
민지시대생활상을원형대로재현하고있으며관람객들이그시대생활을체험할수있도록프로그램을운영한다. 미국독립운동모의, 의회장면, 전쟁장면을원래의장소에서재현하여역사성을직접체험할수있게한다. 또공예공방 책인쇄제본소등의상가, 가정집과정원을토대로당시의생업과생활상을체험하도록하였으며, 역사민속촌내에근무하는모든사람들뿐만아니라체험프로그램에참여하는방문객들에게도시대복장을하도록하여역사의현장에있다는분위기를만들고있다. 이외에도식민지시대의정치 경제 역사 고고 미술사등다양한주제의책들을출판하여홍보하고, 주변문화시설과연계프로그램을실시하고있다. 그림 13. 윌리암스버그역사민속촌전경과체험프로그램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63
5.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 결론을대신하여 인천개항장이가지는정체성은한국근현대사의역사성이다. 역사성의유형자산이바로근대건축문화재이다. 근대건축문화재는역사적사건과연결되어부단한스토리텔링의소재를품게된다. 어떤사건에연결하느냐에따라다양성을내포하고있는것이다. 우리탕 ( 吳禮堂 ) 주택을예로들어보자. 우리탕은청국출신의통역관으로보빙사절단에동행하였고, 스페인에서아밀리아 (Amalia Amador C. Woo) 와결혼하여인천세관에서근무하다가외국인묘지묻혔다. 그렇다면우리탕주택은미국유학사, 개화파, 갑신정변, 스페인물품, 인천세관, 묄렌도르프, 외국인묘지등의이야기의소재가될수있는것이다. 따라서근대건축문화재의활용은다양성에기초하여야한다. 최근중구청은개항장의역사문화환경을보존하고활용하기위하여개항장일원을문화지구로지정하고자한다. 문화지구지정과관련하여근대건축문화재활용의방향성을함께고민하는것으로결론을대신하고자한다. 첫번째는개항장에산재하고있는근대건축문화재에대한세밀한조사와홍보이다. 문화지구지정과관련하여 2009년중구청이실시한설문조사결과에따르면근대건축문화재보전여부에대하여 보전해야함 이 76명, 보전할필요없음 이 16명, 잘모르겠음 이 13명순으로나타났다. 그러나문화지구지정을찬성하는이유에대해서는 지역경제활성화 36명, 지역이미지홍보 14명, 생활환경개선 10명, 근대건축물보전 9명순으로답변하였다. 19) 설문참여자들은근대건축문화재에대한역사성의보전보다는활용에보다큰관심을갖고있다는것이다. 19) 인천광역시중구청, 앞의책, 2009, 70~80 쪽. 264 인천역사 (8 호 )
따라서근대건축문화재의세밀한조사를통해그역사성규명과보전의중요성을홍보하여야할것이다. 그림 14. 우리탕 ( 吳禮堂 ) 주택전경 위에서예로든일본고베시리진칸가이조성을위하여지역주민들은 1975년 北野 山本地區歷史的建造物群保存調査會 를결성하여근대건축물의보존에필요한기초자료를얻기위하여상세한현지조사를실시하였다. 그내용은 1건축년대 양식에의한분류 특징 그분포상황조사, 2도로에연한塀 垣 石積 門등의형식분류와그분포상황조사, 3사진측량을응용한마을입면도작성, 4 略測에의한평면도및단면도작성, 5 조사지구내의 150동의사진촬영및조서의작성, 6건물의용도 階數현황도작성등이다. 20) 이를통해전통적건조물군지구로선정될수있었고이를홍보자료로활용하여주민들에게리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65
진칸가이의중요성을알리고보전운동에참여케하였다. 이처럼문화지구대상지에소재하고있는근대건축문화재에대한정밀한조사가선행되어야할것이다. 두번째는근대건축문화재를보다다양한용도로의활용하는것이다. 상술한바와같이현재인천에서의근대건축문화재는대부분은전시용도로재생되고있는실정이다. 최근설문에서지역거주민의경우평균 20년정도거주하였고, 건물을자가소유의분포가 71% 로높게나타나고있다. 근대건축문화재보전에찬성하는주민들이희망하는정책은 건물리모델링 35.2%, 세제지원 31%, 융자지원 26.8% 순으로나타나고있다. 즉, 건물을매도하여다른용도로활용되는것보다자가소유의건물을활용하는것을선호한다고할수있다. 타당성조사에서문화시설의예로권장하는시설은다음과같다. < 표 -10> 개항장문화지구의권장업종및시설의분류 21) 문화예술진흥법의문화및영업시설 예술단체활동관련업종 종류공연시설전시시설도서시설지역문화복지시설 문화시설 문화보급 전수시설 그밖의문화시설 영업시설 연극, 무용, 음악등공연단체 내용공연장, 영화상영관, 야외음악당등박물관, 미술관, 화랑, 조각공원도서관, 문고문화의집, 복지회관, 문화체육센터, 청소년호라동시설 지방문화원, 국악원, 전수회관 위외의시설로서문화예술활동에지속적으로이용되는시설중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정하여관보에고시하는시설민속공예품점, 골동품점, 필방, 표구점, 도자기점 연극, 무용및음악단체, 기타공연단체 20) 神戶市敎育委員會, 異人館のある町並み北野 山本, 2000, 28~29 쪽. 21) 인천광역시중구청, 인천개항장문화지구관리계획, 2011, 186 쪽 < 표 Ⅱ-2-16> 전재. 266 인천역사 (8 호 )
장인수공예업종 집객편의점 종류공방양장점양복점한복점악기판매점양조업기념품점사진관전통찻집커피전문점음식점 내용목공예, 금속공예등제작또는판매업종수작업기반여성용정장제작수작업기반남성용정장제작한복, 전통민속복, 개량한복등제조피아노, 현악기, 국악기등제작기반판매업종전통주제조기반판매업종근대역사문화자원배경기념품판매기념사진촬영및인화전통차판매원두를이용한커피판매세계음식문화거리조성에기여하는음식점 < 표 -11> 인천개항장문화지구권장업종 22) 구분명칭 전시시설 (12 개소 ) 장인 수공예업종 (7 개소 ) 문화콘텐츠관련업종 (1 개소 ) 커피전문점및전통찻집 (13 개소 ) 기념품점 (13 개소 ) 한중문화관, 중국어마을문화체험관, 화교박물관, 자장면박물관, 쉬필라움, 인천아트플랫폼,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 혜명단청박물관, 제물포구락부, 인천근대박물관, 역사자료관 황태자양복점, 맥양복점, 제왕양복점, 명성라사, 하얀고니, 이기자, 스쿨 ( 주 ) 중구구립여성합창단 중앙동커피집, 시리우스, 안단테, 포그시티, 풍경이좋은섬, 파랑돌, 풍선넝쿨, 홍예문커피집, 더프레즌트, 히스토리, 카페니아, 프렌치빌, 다락 원담골동품점, 환우무역, 동순동, 송산유통, 동화상사, 천하장안, 홍복, 동방수입백화점, 운학림, 호유상무, 지흥유통, 상호없음 2 개소 22) 인천광역시중구청, 위의책, 2011, 187 쪽 < 표 Ⅱ-2-17> 전재.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67
< 표 -12> 인천광역시지정무형문화재현황 구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번호 문화재명보유자기능인정일자 47 궁시장박상준화살제작 '78.02.23 61 은율탈춤 82- 나서해안풍어제 ( 배연신굿및대동굿 ) 김춘신민남순 김금화최음전안승삼 헛목, 상좌, 의상제작 굿전반악사소리 '78.02.23 '87.01.05 '85.02.01 '85.02.01 '87.07.01 90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이선비 굿전반 '92.07.01 103 완초장 이상재 초고공예 '96.05.01 109 화각장 이재만 쇠뿔공예 '96.12.31 1 삼현육각 이영만김석숭 연주연주 '85.10.23 '06.01.13 2 단소장김환중단소제작 '90.11.09 3 인천근해갯가노래뱃노래 차영녀송의신김병기전원관조두영 갯가노래시선뱃노래시선뱃노래어선뱃노래어선뱃노래 '88.12.24 '88.12.24 '92.05.15 '94.11.04 '94.11.04 인천광역시지정무형문화재 4 정악대금 ( 대풍류. 대금 ) 5 주대소리 김정식진철호 소인식박선구 연주연주 받는소리메기는소리 '89.12.28 '03.11.10 '92.05.15 '92.05.15 6 대금장 김정식 대금제작 '89.12.28 7-가 남창가곡 도상구 남창 '95.11.14 7-나 여창가곡 김명순 여창 '06.10.30 8 강화외포리곶창굿 정정애 굿전반 '97.10.27 9 대금장 ( 일반 ) 이정대 일반대금제작 '02.02.04 10- 가범패와작법무 ( 작법무 ) 김종형 ( 능화 ) 바라춤 '02.02.04 10-나 범패와작법무 ( 나비춤 ) 박치훈 ( 일초 ) 나비춤 '02.02.04 11 규방다례 이귀례 규방다례 '02.12.23 12 강화용두레질노래 최성원황인범 용두레질노래상쇠 '03.10.27 13 자수장김계순자수장 '03.10.27 14 단청장정성길단청장 '04.04.06 268 인천역사 (8 호 )
구분 지정번호 문화재명보유자기능인정일자 15 인천수륙재박치훈인천수륙재 '04.04.06 16 인천근해도서지방상여소리 박상주 상여소리 '06.01.23 17 완초장 한명자 초고공예 '08.12.15 18 서곶들노래 이순배 농악 '08.12.15 19 갑비고차농악 전내익 임명선 농악 '08.12.15 20 휘모리잡가 김국진 경기좌창 '08.12.15 21 경기12잡가 이순희 경기민요 '09.03.30 22 목조각장 이방호 목조각 '09.03.30 또한, < 표-11> 과같이현재용도를고려하여권장하고있는업종은전시시설, 장인 수공예업종, 커피전문점및전통찻집, 기념품점인쇄출판등으로 46개소를예로들고있다. 이에덧붙여근대건축문화재의일부를인천광역시지정무형문화재의전수관으로활용하는것을고려해볼만하다. 개항장에건축된일식건축물은대부분주상복합의 2층목조건물이므로 2층은공방으로 1층은전시및체험교육공간으로활용할수있기때문이다. 인천광역시에지정된무형문화재는국가중요무형문화재 6 종, 시지정무형문화재 24종등모두 30종으로이중기능장을중심으로개항장에유치할수있는무형문화재전수관은대체로 13종이다. 궁시장 ( 중요무형문화재 47호 ), 완초장 ( 동 103호 ), 화각장 ( 동 109호 ) 등국가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를비롯하여삼현육각 단소장 정악대금 대금장 가곡 ( 남창 ) 가곡 ( 여창 ) 대금장 ( 일반 ) 자수장 완초장 목조각장등의시지정무형문화재기 예능보유자가그예가될것이다. 문화지구내권장업종의유도는상당한시간이소요될것이다. 무형문화재의전수관을유치한다면제작과정에대한교육을통해지역문화복지시설, 완성품에대한전시를통한전시시설, 완성품판매를통한기념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69
품점등복합적인기능이가능하며, 이를통해문화지구활성화를꾀함으로써권장업종의유치를유도할수있을것이다. 세번째는근대건축문화재소유자에대한지원체계의확립이다. 설문조사에따르면, 문화지구지정에반대하는이유는각종규제강화, 부동산가치하락, 주차불편가중, 재산권행사제약등을들고있다. 또한문화지구지정에필요사항으로건물리모델링, 세제지원, 융자지원을비롯하여지역주민편의시설확충과주차공간확보및부정주차단속등을꼽고있다. 근대건축문화재의보전에는일정부분의규제가필요하며, 지역거주민의불이익과직결되는문제이다. 이로인해자가소유자들의문화지구지정에부정적인입장을표명하고있다. 따라서지역거주민을위한지원체계가필요하다. 일본의경우, 경관형성건축물, 전통적건조물, 역사건조물등을대상으로세제지원, 수리및복구비용지원, 취득자금이자보존등다양한인센티브를부여하고있다. 다음은일본의하코다테시와오타루시의역사및전통건조물에대한지원대상및기준이다. 270 인천역사 (8 호 )
< 표 -13> 일본역사및전통건조물지원대상및기준 23) 구분대상 경관형성지정건축물 / 전통적건조물 지원금융자금 지원율한도액융자율한도액 외관수리경비 80% 이내 160 만엔 방한개수사업경비 80% 이내 160 만엔 취득자금이자보존 융자액 3 천만엔한도로계산한이자액 유지관리비보조 - 연간 7 만엔 하코다테시 전통적전조물군보존지구 조세지원 재정지원 건물고정자산세, 도시계획세 - 토지 관리 수리 전통적건조물및그외건축물부지고정자산세 50% 이내 방재설비 필요 경비 50% 이내 외관수리 필요 경비 80% 이내 이외수경요구경비 2/3 이내 - 150 만엔 600 만엔 500 만엔 - - 환경복구복구요구경비 2/3 이내물건 200 만엔 오타루시 지정역사건조물 등록역사건조물 경관형성활동 건조물 공작물 건조물 공작물 외관보존경비 ( 지하기반, 구조내력상주 600만엔 3000 만엔 요부분보강등 ) 단열및방수공사등의경비 200만엔 이율연 2.2% 500만엔 건축물과일체화된공작물외관보전경비 100 만엔 300만엔 외관보존경비 ( 지하기반, 구조내력상주 300만엔 3000 만엔 요부분보강등 ) 이율 단열및방수공사등의경비 100만엔 연 2.2% 500만엔 건축물과일체화된공작물외관보전경비 50만엔 300만엔 경관마을 15 도시경관형성활동경비만들기협의회 만엔 (5 년내 ) - - 23) 인천광역시중구청, 위의책, 2009, 178 쪽 < 표 7-15> 전재.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71
따라서문화지구지정과관련하여지역민에대한지역문화교육의기회제공, 생활문화여건의개선, 권장시설및권장업종변경에따른컨설팅지원, 세제및융자지원등다양한인센티브를발굴하여조례로지정하여야할것이다. 끝으로지역주민의참여를유도하기위한에코뮤지엄 (eco-museum) 의개념을도입해볼만하다. 근대문화유산에대한개념이개별건축문화재에서근대역사환경이라는지역개념으로진화한것과같이박물관의개념도바뀌고있다. 박물관은전통적으로유물의수집과보존, 조사와연구, 전시와교육의기능을수행하여왔던비영리단체이다. 이러한기능은앞으로도지속될것이다. 그러나점차대중은진열장안의유물보다현장에보존되어있는유물이나유적에관심과흥미를갖기시작하였고, 이에박물관전통적기능의한계를극복하기위해문화유산, 지역, 그리고지역민의역할을강조한에코뮤지엄의개념이탄생하였다. 이개념은 1960년대후반프랑스에서 지방문화의재확인 이라는자연공원의문화시책에서출발한것으로, 에콜로지 (Ecology, 생태또는환경 ) 와박물관 (museum) 을합성하여창안된명칭이다. 이후세계로확산되어프랑스에서는 삶을비추는거울과같은박물관, 일본에서는 지역총화박물관, 생활 환경박물관, 캐나다 호주등지에서는 살아있는박물관 등으로불리고있다. 에코뮤지엄은지역민의참여가중요하다. 관공서와지역민이공동으로고안해서설립 운영하는기구이기때문이다. 지역민들은그틀속에서자신의이미지를발견하고방문객들에게그지역을이해시키는것이다. 그구조는기반이되는지역 (Territory), 에코뮤지엄의중심이되는중심박물관 (Core museum), 그리고지역에존재하는다양한유산을배우는기능을갖고있는복수의독립적인위성박물관 (Satellite museum, 촉수또는안테나라 272 인천역사 (8 호 )
고도한다 ) 으로이루어진다. 위성박물관에부속하여꾸며져있는지역의자원과유산을발견하는발견의길 (Discovery trail) 등으로구성된다. 위성박물관들은일정한網을구성하게되는데이망에걸친지역에존재하는다양한유산을이해하고, 공부하는분관적기능을수행하게된다. 에코뮤지엄의관리운영은행정과주민의협력에기초하여조직되는관리 운영위원회, 연구자들로구성되는학술위원회, 위성의소유자라할수있는이용자위원회등 3대위원회가담당한다. 에코뮤지엄의구조와활동의 3요소인박물관 (Museum) 은수집 보존 조사 연구 전시 교육등의전통적인박물관활동을하고, 유산 (Heritage) 은현장성과장소성을살려현지에보전하며, 참여 (Participation) 는지역주민이스스로참여하여운영과향수의주체가되어생산자 ( 공급자 ) 와동시에소비자 ( 수요자 ) 로기능하는것이다. 3요소가균형을이루어야성공할수있기때문에지역민참여가필수적인것이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73
[ 부록 ] 중구지역근대건축물현황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1 답동성당답동 3-1 1897 현존 2 인천우체국항동 6 가 1 3 제 1 은행인천지점 4 58 은행인천지점 5 제물포구락부 6 청국영사관회의청 중앙동 1 가 9 1923 현존 1897 현존 연면적 4,909 m2, 지상 2 층지하 1 층 석재및철근콘크리트조 인천최초의천주교회 연면적 6,408 m2. 지상 2 층 석재및철근콘크리트조 인천근대우편제도의상징 건축면적 211 m2. 지상 1 층 르네상스풍의석조 개항기금융기관, 현관공서 사적 287 호 시유형문화재 시유형문화재 연면적 4,909m2. 지상 2층중앙동 2가 19-1 1892 현존시유형 르네상스약식의조적조문화재 개항기금융기관, 현중구요식업협회 송학동 1 가 1 7 인천부청사관동 1 가 9-1 8 새마을운동중앙회 1901 현존 선린동 8 1910 현존 관동 2 가 3-1 1932 현존 9 인천세관항동 7 가 1959 멸실 10 성공회성당중구내동 3 11 18 은행인천지점 12 제일은행중앙동 4 가 4-2 13 화교중산학교 연면적 446.9 m2, 지상 1 층지하 1 층 연와조 개항기외국인사교클럽 연면적 72.72 m2, 지상 1 층 목조, 연와조 개항기청국영사관의회의청건물 연면적m2, 지상 3 층 철근콘크리트조 일제강점기관공서, 당초 2 층 1941 2004 연면적m2, 지상 2층 조적조아연판지붕이후 일제강점기동사무소건물 1956 현존 연면적m2, 지상 2 층 철근콘크리트조 일제강점기세관, 인천해관자리 연면적m2, 지상 2 층 석조 인천최초의성공회성당 연면적 224.79m2, 지상 1층중앙동 2가 24-1 1939 현존 연와조 개항기금융기관, 박물관조성계획 1970 현존 선린동 8 1934 현존 연면적 1,963.11 m2, 지상 2 층 PC 조평지붕 1970 년대건립된금융기관 연면적m2, 지상 2 층 연와조 청국조계지내청국인교육기관 시유형문화재 원자리에신축 시유형문화재 당초청국영사관터 274 인천역사 (8 호 )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14 인해무역중앙동 연면적 403.30m2, 지상 2층 1897 1가 9-2 추정현존 조적조및석조 일본조계내주상복합건물 15 대흥공사해안동 1 가 9 16 삼우인쇄소해안동 1 가 2-2 17 조선일보중부지국 18 태영선무주식회사 19 공화춘 20 선린동주택 1 중앙동 2 가 2 해안동 2 가 5 선린동 380-1 선린동 1-5 21 해안천주교선린동회교육관 25-2 22 현대크리닝선린동 29-5 23 대창반점선린동 29-3 24 풍미반점선린동 32-6 25 선린동주택 2 26 중앙철물상사 선린동 25-1 중앙동 3 가 3-1 1933 현존 1942 현존 1965 현존 1950 현존 1948 현존 1939 현존 1939 현존 1925 현존 1942 현존 1925 현존 연면적 40.331 평, 지상 1 층 조적연와조 일제강점기에건립된사무용건물 연면적 54.94 평, 지상 2 층 연와조 일제강점기매립지에건립된사무공간 연면적 294.62 m2, 지상 2 층 연와조 1960 년대건축된사무공간 건축면적 98.29 평, 지상 2 층 연와조슬레이트 1950 년대건립된해운업무건물 연면적 429.74 m2, 지상 2 층 연와조 국내최초의중화음식점 연면적m2, 지상 2 층 조적조 청국조계내중국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 96 평, 지상 2 층 조적조 청국조계지내청국인주택 연면적m2, 지상 2 층 조적조슬레이트지붕 청국조계지내중국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 25.7 평, 지상 2 층 연와조 청국조계지내중화음식점 연면적m2, 지상 2 층 조적조 청관조계지내중화음식점 1947 2004 연면적m2, 지상 2층 조적조이후 청국조계지내중국인주거공간 1932 현존 연면적 227.87 m2, 지상 2 층 목조 일제강점기의일본인주상복합건물 근대문학박물관조성계획 자장면박물관조성진행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75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27 창대건강원관동 1 가 17 28 우정일식항동 5 가 1-1 29 장세춘씨댁송학동 3 가 5-5 30 다미정 31 홍화순씨주택 송학동 2 가 6-1 송학동 2 가 5-1 32 동양크리닝관동 2 가 1-7 33 관동주택관동 2 가 1-5 34 24 시즉석김밥 관동 3 가 6-5 35 조양문구중앙동 4 가 2-25 36 갯마을 37 진재근씨주택 38 백일청씨주택 39 김병욱씨주택 중앙동 4 가 7-3 송학동 2 가 7-1 관동 2 가 3-5 1933 현존 1934 현존 1936 현존 1936 현존 1937 현존 1939 현존 1939 현존 1940 현존 1940 현존 1940 현존 1941 현존 연면적 192.72 m2, 지상 2 층 목조기와 일제강점기일본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 330.63 m2, 지상 2 층 목조기와 일제강점기일본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m2, 지상 2 층 목조 일제강점기전형적인일본인주택 연면적 45.29 평, 지상 2 층 목조연와조 일제강점기전형적인일본인주택 연면적m2, 지상 2 층 목조 일제강점기일본인주택 연면적 33.81 평, 지상 2 층 목조맨사드형지붕 1930 년대일본인주상복합건물 건축면적m2, 지상 2 층 목조청색시멘트기와 1930 년대전형적인일본인주택 연면적 85.95 m2, 지상 2 층 목조, 일식기와 1940 년대전형적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m2, 지상 2 층 목조일식기와 1940 년대일본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 115.74 m2, 지상 2 층 목조, 일식기와 일제강점기일본인주상복합건물 연면적 63.2 평, 지상 2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전형적인일본인주택 1941 2004 연면적 29평, 지상 2층 조적조일식기와이후 일제강점기전형적인일본인주택 송학동 3 가 1-12 1941 2004 이후 연면적 20 평, 지상 2 층 목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일본인주택 276 인천역사 (8 호 )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40 조순영씨주택 41 로우션 42 김장환씨주택 연면적 22평. 지상 2층송학동 목조트러스일식기와 1941 현존 3가 5-36 일제강점기일본인 2층형주거전용건물 중앙동 4 가 8 43 장성영양탕해안동 1 가 3-2 44 황진이단란주점 45 제 1 은행부속건물 46 해안동창고 1 47 해안동창고 2 48 해안동창고 3 1942 현존 연면적 109.76 평, 지상 3 층 목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일본인상가건물 연면적 30평. 지상 2층송학동 3가 7-10 1942 현존 목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일본인주상복합건물 중앙동 4 가 2-8 중앙동 1 가 9-2 해안동 1 가 8 해안동 2 가 6-2 해안동 2 가 6-2 49 설계사무소중앙동 2 가 3-2 50 해안동창고 4 51 대한통운창고 1 52 대한통운창고 2 해안동 1 가 4-1 1943 현존 1957 현존 1899 현존 1933 현존 1941 현존 1941 현존 1942 현존 1944 현존 연면적m2. 지상 2 층 목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 2 층점포형주택 연면적 51.09 평. 지상 2 층 조적조 1950 년대건축된일본식건물 연면적 412.06 m2. 지상 2 층 석조, 조적조 일제강점기제 1 은행의부속건물 연면적 476.04 m2. 지상 1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건립된창고건물 연면적 330.58 m2. 지상 1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건립된창고건물 연면적 194.94 m2, 지상 2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건립된창고건물 지상 2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건립된 2 층형창고 연면적 59.5 m2. 지상 1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건립된창고건물 연면적 542.14m2. 지상 1층해안동 1가 10-1 1948 현존 조적조일식기와 광복후건립된창고건물 연면적 512.40m2. 지상 1층해안동 1가 10-4 1948 현존 조적조일식기와 광복후건립된창고건물 인천개항박물관수장고, 연구실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77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53 태영선문주식회사창고 54 고려농산김치 해안동 2 가 5 해안동 2 가 7 55 항동창고항동 5 가 1-2 56 홍예문 57 청일조계지진입계단 58 중앙동골목 59 화교학교진입계단 60 구 ) 시장공관진입계단 송학동 2 가 20 1954 현존 1934 현존 1962 현존 1908 현존 선린동 1884 현존 중앙동 1 가 1883 현존 연면적 625.56 m2. 지상 1 층 조적조일식기와 1950 년대건립된 2 층형창고건물 연면적 446.28 m2. 지상 1 층 조적조일식기와 일제강점기건립된창고건물로추정 연면적 21 평지상 1 층 조적조일식기와 1960 년대건립된창고건물 대지면적 6,060 m2 높이 17m, 폭 10m 개화기건립된아치형터널 일본조계와청국조계의경계에세운각국공원진입계단 현재청일을상징하는석등조성 1883 년조계지계획시부터존재 아래쪽으로만원형이남아있음 조계지도시계획을엿보는자료 화교중산학교건립시설치된계단 화강석다듬으로엇쌓기한석조선린동 8 1934 현존계단 청국계단구조의원형이남아있음. 송학동 1 가 2-2 일본인별장의조경으로설치한 1930 년대현존계단 일본정원구조를엿볼수있음 화강암엇쌓기방식으로축조 지상 1층조적조 61 청국영사관선린동 8 1884 1950 1884년업무개시, 청일전쟁으로추정중단 1894년업무재개, 한국전쟁중파괴 62 러시아영사관 선린동 56-1 63 영국영사관항동 1 가 3 64 신동공사송학동 3 가 3 1902 1976 지상 2 층색벽돌조 1902 년 ( 추정 ) 서울에서이전 1912 년체신국출장소로사용 연면적 163평. 지상 1층 1897 1950 조적조기와지붕 단층붉은벽돌, 정원, 발코니가인상 지상 2층조적조 1884 미상 각국공동조계행정관청건물 1922년공회당으로신축 278 인천역사 (8 호 )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65 대한천일은중앙동행인천지점 3가 4 66 식산은행해안동 4 가 1-1 67 대불호텔선린동 12 68 공립병원송학동 2 가 12 1899 미상 1919 2001 1888 1979 1888 미상 지상 2 층. 석조 한국금융기관으로처음출발한은행 1920 년항동으로이전 지상 2 층. 석조 일제강점기수탈의상징건물 2001 년까지한국산업은행으로사용 지상 3 층. 조적조 국내최초의서구식호텔 국내외근대인물의숙식장소 대지면적 5,752 m2. 지상 2 층 일본인을위한인천최초의병원 1936 년신흥동으로이전하면서소실 69 성누가병원내동 3 1890 1950 인천최초의서구식병원 1902년러시아영사관으로임시사용추정 지상 2층. 팔각형지붕, 2층발코니 70 홈링거상회송학동 1 가 9 71 세창양행중앙동 3 가 4 72 세창양행사택 송학동 1 가 1 1896 1961 연면적 338.88 m2. 지상 2 층 개항기인천에진출한영국계상사 러일전쟁까지러청은행으로사용 1884 1950 도로변에세워진단층기와집 개항기인천에진출한독일계상사추정 독일계철강제품수입판매 1884 1950 73 인천감리서내동 83 1883 1927 173 평, 지상 2 층조적조 독일계세창양행의직원숙사 부립도서관, 인천박물관으로사용 문학동인천도호부청사가이전 개항장의행정과관세업무취급 김창수 ( 김구 ) 4 년간수감 (2 회 ) 74 인천전환국전동 1 서울에서경선전환국이이전함 1892 1926 근대압인식화폐주조하던관청 1900년용산으로전환국이전 4,033m2, 지상 2층 75 일본영사관관동 1가 1883 1932 1906년이사청으로개편 9 1910년인천부청으로확대 76 동양연초 연면적 196.35m2. 지상 2층선린동 1899 미상 국내최초의담배회사회사 58 1903년폐쇄, 화교학교기숙사사용 77 응신청, 모군청 내동 167 미상미상 한국식단층건물 한국인부두노동자공급알선기관 경기청과영남청을합하여설치 9. 근대건축문화재활용방안에대하여 279
연번명칭소재지건립멸실건축규모비고 78 카후에금파 79 표관 신생동 신포동 18-8 지상 3층양식건물 카후에는파리의카페의일본식미상미상표현 1920년대대표적인일본식카페 1909 1950 80 이하영별장답동 2-3 1902 1968 81 오례당주택송학동 2 가 16 82 알렌별장숭의동 107 83 존스턴별장북성동 3 가 2 84 헨켈저택송학동 1 가 2 85 데쉴러저택송학동 2 가 12 86 모오스주택 송학동 2 가 18-15 87 슈바움저택송월동 3 가 9 88 타운젠트양행 송학동 3 가 7 1909 1968 1893 1957 1905 미상 1895 미상 1902 미상 1896 미상 일본인을위한상설영화관 표관, 동방극장, 애관극장이대표 후에키네마극장, 후에외한은행 구한국법부대신이하영의별장 후에일본인공동묘지로교환함 현, 밀알성그리스도교회터 연면적 405 평지상 2 층지하 1 층 붉은벽돌조적조 중국외교관출신오례당의저택 주한미국공사알렌의 2 층별장 후에계명학원으로사용 1956 년인천전도관이건축됨 연면적 453 평, 지상 4 층석조 영국인존스턴의별장, 후에인천각 당시인천의랜드마크 세창양행직원위이르스의주거지 지상 2 층조적조 외관이소박한단층벽돌주택 운산금광직원데쉴러의주거지 단층양관으로넓은일본식정원 1957 년인성여자중학교신축 연면적 23 평. 지상 2 층벽돌조 경인선부설권을딴모오스의주거지 광복후동아일보지사장곽상훈거주 건축면적 95.48평지상 1층조적조 1933 현존 세창양행사원슈바움의저택 천주교피정의집으로사용 개항기인천에진출한미국계상사 1885 미상 기선운행, 광산화약제조공장건설 미국스탠다드석유독점판매 280 인천역사 (8 호 )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1. 서론 2. 인천경제자유구역지정 3. 서해안갯벌현황과공유수면매립 4. 단계별매립공사 5. 송도지구매립공사추진효과 김용하 ( 인천발전연구원선임연구위원 )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1. 서론 2003년 8월이후인천경제자유구역의개발로인천의지도가눈에띄게바뀌어가고있다. 영종, 청라, 송도 3개지구가삼각축을형성하여개발되고있는경제자유구역의면적은 169.48km2 (2011.3.29) 이다. 이것은인천시면적의 16.5% 에해당되며, 서울여의도면적의 58배나큰땅이다. 이땅의 73% 가매립지로인천앞바다갯벌을메워새로운도시를만드는사업이다. 인천도시역사에서보면개항이후 100년만에가장큰해양토목사업이며, 국가경쟁력실현이라는기치하에정부가보증하는중요한사업으로전국적인하이라이트를받았다. 이렇게시작한지 8년만에온통갯벌이었던바다위로격자형아스팔트도로와가로수사이로자동차가달리고, 고층아파트단지와주상복합빌딩, 학교가들어서새로운거주인구도 5만명이나된다. 말그대로천지개벽 ( 天地開闢 ) 되었고상전벽해 ( 桑田碧海 ) 라해도틀린말이아니다. 아직경제자유구역의개발은진행되고있지만이렇게되기까지는인간의지혜와기술력, 막대한재원이투입되었기때문이다. 이러한대규모사업을구상하고, 계획하고, 수립하여집행하는과정에서참여하는많은기술자는물론공무원의책임과역할이컸다. 여기서경제자유구역개발사업을전반적으로평가하기에는아직이르기때문에현재단계에서인천시가시행자로개발하고있는송도지구를중심으로어떤구상과계획하에많은갯벌을희생시키면서바다를매립하고, 새로운토지를만들게되었는지그과정을더듬어살펴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83
보고자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해면을매립하여추진하는대규모장기적인개발사업특성상 공유수면관리및매립에관한법 의적용을받아시행해야하며 도시계획법 에의해사업을추진해야한다. 본고에서는공유수면매립으로새로운토지가만들어지는과정을정리하고, 매립된나대지에대한토지이용계획과개발에대해서는후속연구로진행하고자한다. 2. 인천경제자유구역지정 1) 경제자유구역으로지정되기까지 2002년 4월에정부 ( 재정경제부 ) 는 동북아비즈니스중심국가실현방안 을발표하였다. 한국을동북아물류중심지로만들자는구상이표면화한것이다. 2001년 8월하와이의동북아경제포럼한국위원회 ( 남덕우전국무총리 ) 에서동북아물류중심지에관한논의에서시작되어공론화되었다. 수출만으로는성장에한계가있고중국이무섭게쫓아오는만큼물류거점을만들고외국기업을끌어들이는것이우리의유일한생존전략으로수도권서부 3개지역 ( 송도신도시, 영종도, 김포매립지 ) 을경제자유구역으로지정해우선개발하기로했다. 경제자유구역으로지정되기까지당시인천광역시기획관리실장이었던박연수의활동이컸다. 2) 지금의경제자유구역현재인천경제자유구역은 2003년 8월 11일국내에서는처음지정되었다. 경제자유구역은송도, 영종, 청라 3개지구로분리되어삼각형축을형성하고있다. 각각지정면적은 53.3km2, 98.4km2, 284 인천역사 (8 호 )
17.8km2로총면적은 169.5km2 (5,127만평) 이다. 지정당시 209.38km2였으나영종지구계획미수립지와순수국제공항면적을합쳐 39.9km2가해제되어면적이축소되었다. 지구별개발방향은송도지구가국제비즈니스, 첨단산업으로, 영종지구가관광 레저, 항공산업으로, 청라지구는국제금융, 테마파크로되어있다. 총계획인구는 640천명으로 237천세대가거주하게된다. 개발계획사업기간은 2003-2020년까지이다. < 표-1> 인천경제자유구역개발개요 (2011.8현재 ) 구 분 송도지구 영종지구 청라지구 사업규모 53.3 km2 98.4 km2 17.8 km2 계획인구 252 천명 (93,600 세대 ) 298천명 (109,800 세대 ) 90천명 (33,200 세대 ) 사업기간 2003-2020 2003-2020 2003-2012 사업비 10조 4,253억원 4조6,719억원 6조3,528억원 개발방향 국제비지니스, IT BT R&D, 외국학교및병원 산업 물류단지, 관세자유지역, 관광 레저테마파크 국제금융, 관광 레저테마파크 사업시행자 인천시, ( 재 ) 송도테크노파크, NSIC, ( 유 ) 송도랜드마크시티, 국토해양부, 인천항만공사송도국제화복합단지개발 ( 주 ), 송도글로벌캠퍼스 ( 주 ) 인천시, LH 공사, 인천도시개발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리포인천개발 ( 주 ) 인천시, LH 공사, 한국농어촌공사 자료 : http://www.ifez.go.kr 인천경제자유구역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85
< 그림 -1> 인천경제자유구역위치 < 그림 -2> 송도지구개발계획 (2011.6) 3) 송도지구개발현황송도지구 53.3km2 (1,612만평) 는동춘동앞바다갯벌을전면매립하여새로운땅으로공급하게된다. 전체 11개의공구로나누어단계별로매립공사가시행되었는데 4공구가제일먼저착공 (1994.7) 하였다. 공구별매립과개발사업방향에따라기반시설을완료하고각종시설들을유치하여가고있다. 개발 ( 매립 ) 면적에차이가나는것은 11공구계획면적이당초 10.5km2였으나매립승인을받은면적 7.16km2와아암공원은 3.88km2은매립하지않은기존수변면적으로제외되어있다. 송도지구는전면적으로해면을매립하여추진하는대규모장기적인사업특성상공사시기가다르고 공유수면관리및매립에관한법 의적용을받아시행해야하며 도시계획법 에의해사업을추진해야한다. 공유수면매립으로새로운토지가만들어지면그토지를어떤용도로이용할것인가는도시계획으로결정해야한다. 286 인천역사 (8 호 )
< 표 -2> 송도지구공구별개발사업과주요유치시설현황 공구 개발사업명 개발 ( 매립 ) 면적 11개 46.14km2 4 시가지조성사업 1.30 주요시설 풍림아파트등, 해양경찰청, 상업시설, 학교, 해돋이공원등 송도테크노파크, ( 주 ) 코텍, 교보데이터센터, ( 주 ) 2,4 지식정보산업단지 2.40 휴니드 테크놀러지스, 파이박스 ( 주 ), 웰카운트 아파트 4 바이오단지 1.32 인천대, 셀트리온, ( 주 ) 아이센스, ( 주 ) 케이디 Corp. 1 어민생활대책단지 0.31 주상복합 경제청사 (I-tower), 포스코건설사옥과 사원아파트, 1,3 국제업무단지 5.77 송도국제학교, 송도컨벤시아, 쉐라톤호텔, 동북아트레이드빌딩 (NEATT), 캐널스트리트, 잭니클라우스골프장, 초고층아파트, 센트럴파크등 7 송도국제화복합단지 1.42 연세대, 주상복합, 아파트, 학교등 5,7 첨단산업클러스터 4.19 사이언스빌리지, 포스코R&D센터, 글로벌캠퍼스 6,8 송도랜드마크시티 5.83 151층인천타워착공, 아트센터, 골프장 9 아암물류단지 3.89 아암 2 물류단지, 국제여객부두와터미널 10 신항물류단지 12.55 신항건설계획반영, 호안축조중 11 첨단산업클러스터 7.16 공유수면매립반영 자료 : http://www.ifez.go.kr 인천경제자유구역 3. 서해안갯벌현황과공유수면매립 1) 서해안갯벌에대한개발압력 80년대전국토개발붐속에서건설부산하국책연구기관인국토개발연구원에서발행한 간척자원실태분석및활용방안 (1982.12) 을보면우리나라서남해안에는토지개발의공급원으로서해안간사지가약4,000km2에이르고있으나간척사업이장기적이고사업효율성이낮다는이유로자원의이용도는불과 13% 정도로그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87
개발이매우부진한상태라고지적하고있다. 여기에서국토공간의최대활용이라는관점에서간척자원의개발가능성을검토하였는데인천지역의매립계획구상을보면김포지구 ( 현재청라경제자유구역 ) 는동아건설에서약 38km2를매립공사중으로간척농지로계속활용하는것으로하고, 남동염전을공단으로개발하는문제는수도권공업재배치계획등에의해유보되어있는실정으로인천남항의건설과관련되어항만관련용지 (36.9km2) 로계획하고있다. 최근에인천만조력발전소건설에대한논란이지역이슈가된바있는데이당시에도동일한위치에개발을검토한것을알수있고, 경제성이없어개발하지않는것으로결론짓고있다. < 그림 -3> 인천지구 ( 인천남항과인천만조력 ) 매립계획구상자료 : 간척자원실태분석및활용방안 (1982.12) p.144 288 인천역사 (8 호 )
< 그림 -4> 70 년대지형도 2) 공유수면매립 1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제도송도신도시사업은전적으로공유수면을매립하는사업으로 공유수면관리및매립에관한법 ( 종전의공유수면매립법과공유수면관리법통합 ) 의적용을받아야한다. 1986년 12월 공유수면매립법 을개정했을때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수립을의무화하였다. 공유수면매립은기본계획에적합한범위내에서면허를받을수있고, 매립사업은도시계획구역안의공유수면, 지정항만구역의경우공영개발을원칙으로하였다. 이법에따라제 1차 (1991-2001), 제2차 (2001-2011)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이수립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89
되었는데, 2차에걸쳐 LNG기지 5개지구 3.799km2, 송도지구 48.935km2가반영되었다. 송도지구는 1990년매립승인이래 20년이지난현재까지인천시가공영개발로총괄시행자가되어추진해왔기때문에민간매립사업에따른개발이익이외부로유출되는것을막았고, 행정행위의일관성과강력한집행력으로계속사업이가능했다. 2 송도지구매립착수송도신도시사업을위해최초로공유수면 17.7km2에대해매립승인을받은것은 1990년 11월 12일 ( 서울지방국토관리청총괄 01402-6928) 이다. 사업시행은인천시장이직접공영개발방식으로하도록조건이부여되었기때문에인천시주도하에각종절차이행및매립공사가진행되었다. 1991년 5월부터 1994년 7월까지환경, 교통, 인구등영향평가심의 ( 협의 ) 와수도권심의를완료했다. 1994년 8월 3일공유수면매립실시계획인가 ( 서울지방국토관리청관리 58163-985) 를받았고, 동년 7월 4공구부터매립공사를시작했다. 이어 1996년 11월에는 1, 2공구매립공사를착공했다. < 그림 -5>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반영지구 290 인천역사 (8 호 )
< 표 -3>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에서반영된규모 면적 ( 천m2 ) 매립목적시행자비고 1990 년대 2000 년대 소계 19,223 LNGⅠ 1,060 LNG 인수기지한국가스공사 LNGⅡ 100 LNG 인수기지 ( 주 )GS 칼텍스 LNGⅢ 659 LNG인수기지한국가스공사 LNGⅣ 990 LNG인수기지한국가스공사, 대림산업서해Ⅰ (*1)4,074 경제자유구역경제자유구역 송도 (*2)13,500 경제자유구역경제자유구역 소계 33,511 제3준설토투기장 2,626 경제자유구역 국토해양부 (*3) 서해Ⅱ 4,100 경제자유구역 인천시 LNGⅤ 990 LNG 인수기지한국화약 송도 8 공구 3,719 경제자유구역인천시 송도 11 공구 7,156 경제자유구역인천시 제 1 차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 (1991-2001) (*1) 제 9 차변경 ( 97.1.31) 때당초면적 18,512 천m2조정 (*2) 제 9 차변경 ( 97.1.31) 때신규반영, 송도 1~6 공구 제 2 차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 (2001-2011) (*3) 송도 7 공구 송도10공구 12,550 항만시설국토해양부제3차전국항만기본계획수정계획남항남측부두 2,370 항만시설인천항만공사국제여객터미널 4. 단계별매립공사 1) 제 1 단계매립계획 1 4 공구 1 단계 (17.7 km2 ) 는 6 공구로나누어매립하였는데, 가장먼저 4 공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91
구가 1994년 7월착공했다. 최초공사인 4공구공사입찰에는토건공사면허와준설공사면허를겸하고있는현대산업개발과한진종합건설이 50% 의지분으로컨소시업을구성하여참여하였다. 1994년 6월 24일조달청입찰결과현대산업개발과한진건설이시공자로선정되었다. 예정가 1,064억7,400만원의 94.66% 인 1,008억원에수주했다. 4공구공사는송도앞바다 3.3km2 (100만평) 을매립해택지로조성하는공사로 9.2km의호안공사와 3,300만m3의토석매립공사가포함되었다. 현대산업개발은연인원 58,000명, 연간 31,000대의장비를투입했다. 1996년 11월18일현재 8.6km의호안축조가이루어져매립등을포함한공정률은 23% 를나타내고있다. 조수간만의차가심한공사현장을고려하여조수간만의차이가발생하지않는정조시간에대량으로사석을투입하여물막이를완성하는점축점고식물막이공법을적용했다. 2만마력 1척, 1 만2천마력준설선 2척과 36,000마력준설선1척등모두 4척의준설선을투입하여매달 130만m3의사토를채취해평균 8m높이로 4공구를다졌다. 그위에양질의사토로 20cm높이로쌓아올렸다. 사석 1,350천m3, 준설매립 31,098천m3로엄청난양이투입되어마침내 1999년 3월 4공구매립공사를완료했다. 2 1,2공구 1,2공구공사는 7.7km의호안을축조하고 2.52km2 (76만평) 을매립하는것으로 1996년 10월현대산업개발이 40% 지분으로주관사를맡고대우건설등 5개건설사가회원사로참여했다. 1996년 11월착공하여 1995년 5월준공했다. 1998년송도1공구공유수면매립공사를추가로수주했다. 3.64km2 (110만평) 의부지조성공사로준설매립공과오탁방지막공이포함됐다. 현대산업 292 인천역사 (8 호 )
개발이 43% 지분으로주관사를맡고대우건설을비롯한 4개건설사가회원사로참여했다. 총사업비는 734억원으로, 호안축조 7.646km, 사석 797천m3, 준설매립 12,434천m3이다. 매립공사는 1998년말까지끝내고, 복토작업을거쳐 1999년 3월완공하였다. 4공구호안축조와연결되어있는 1, 2공구도같이완공될계획이다. 현대산업개발의준설선 현대호(12,000마력) 에바다모래와개펄흙을퍼올려방조제안쪽과연결된직경 68cm관을통해매립현장으로운반된다. 준설선 4척으로송도신도시 1공구매립현장으로보내는모래와개펄흙은월 140만m3에달하고, 육지에서이어지는방조제건설공사에는수백대의대형트럭들이남구문학종합경기장건설현장암반발파과정에서나오는돌을쉴새없이실어다쏟아부었다. 방조제밑에깔린작은돌위에는파도의침식을막기위한크고넓적한피복석이사용되었다 ( 동아일보, 1996.11.18). 3 5,7공구 5,7공구 6.51km2 (198만평) 는매립면허및실시계획인가신청과공사발주를동시에추진하기로했다. 5공구는매립을위한환경영향평가를받았으나 2002년 12월환경영향평가용역을시작한 7공구는그동안법적보호조류의대체서식지조성방안등으로인한협의보완으로사업추진이지연되어왔다. 송도신도시 5,7 공구공유수면호안축조및준설매립은 2004년 12월21일조달청입찰에서현대건설 ( 주 ) 컨소시엄이공사예정금액 62.7% 인 1,907 억원에수주했다. 2004년 12월착공하여호안축조 8,932m, 준설토 41,884천m3, 산토와사석 2,228m3를매립하여 2007년 12월준공하였다.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93
4 3공구 3공구호안 2,940m 축조공사는 2001년 1월성지건설외 2개사가 284억원을투입하여착공하고, 2003년 10월준공하였다. 매립공사는 2002년 12월대림산업 ( 주 ) 외 4개사가참여하여 2.55km2 (77만평) 에준설토 24,505천m3, 산토 509천m3를시용하여매립하여 2005년8월에준공하였다. 매립공사비는 863억원이투입되었다. 매립이진행중인 1,3공구와아암도갯벌등에서검은머리갈매기와검은머리물떼새, 황조롱이, 저어새등 30여종의조류 3000~8000마리가도래한사실이확인되었다. 경제자유구역청은공사차량소음과진동, 사람의빈번한출입등으로번식에큰지장을받고있는것으로분석하고, 1,3공구번식지주변에출입제한표지판을설치하는등일반인과사진작가, 야생조류탐사자들의출입을엄격히제한할방침으로보호대책을마련하기도했다 ( 서울신문 2005.11.26). 2) 제 2 단계매립계획 1 9공구가. 제3 준설토투기장남항남측공유수면으로제3준설투기장 ( 기타시설용지 ) 이다. 제 2차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에 2001년 7월 6일반영되었다. 면적은 2,626천m2였다. 송도신도시기본계획상에는 B지구로 1999년매립지활용을위해 인천국제유통단지 개발을검토했었다. 2006년 12월해양수산부 ( 현국토해양부 ) 가인천항일대항만배후단지를지정하면서전체 2.63km2의부지가운데 1.42km2는토지이용계획을세우고, 나머지 1.21km2는항만관련부지로지정 고시했다. 294 인천역사 (8 호 )
해양수산부는당초제3 준설토투기장매립을승인하지않을방침이었으나불허할경우건설예정인인천대교의송도신도시구간공사가불가능해교량건설자체가무산되고한 화란국제물류단지조성도할수없게된다는인천시의승인요청을수용했다. 국토해양부가인천항개발과정에서발생하는준설토를처리하기위해조성하는곳으로 2002년12월호안축조 (6,765m) 와가설도로를 533억 8,900만원을투입하여 2005년 9월완료했다. 2010 년말까지인천항입출항로준설작업과인천남외항 (10공구) 개발사업에서발생하는준설토 1,510만m3를매립하여 2.626km2규모의새로운땅이만들어졌다. 이지역은 2008년 1월초인천경제자유구역송도지구 9공구로흡수되어개발계획을수립했다. 나. 국제여객부두제3준설투기장 ( 아암물류2단지 ) 전면해상에건립될예정인통합인천국제여객터미널용지이다. 2009년 12월28일국제여객부두외곽시설공사착공했다. 국제여객부두를파도로부터보호하기위한외곽시설인방파제호안을 2.6km축조하는공사로총공사비는 469억원을투입하여 2012년 8월까지공사를완료할예정이다. 항만청이호안을축조하고, 인천항만공사 (IPA) 는매립공사를시행하기로했다. 2 6, 8공구 6,8공구총면적은 6.34km2 (192만평) 이다. 2006년 10월매립을시작하여 2011년 10월완공할예정이었으나 2012년 6월로연기했다. 1구역 2.81km2는매립을완료하여현재아트센터와 151층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95
인천타워건설부지로건축공사중이며, 나머지 3.53km2는준설토와외부사토를반입하여매립중이다. 6,8공구매립공사는 ( 주 ) 한진중공업이수주했다. 2006년6월조달청계약에의하면추정공사비 2,273억원에한진중공업이 1,302 억원으로최저낙찰가로선정되었다. 이공사는공유수면 7,942m 호안을축조하고, 준설토 32,952천m3를매립하여새로운토지를만든다. 3 11 공구 가. 11-1 11공구는제2차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에서반영 (2009.3.26고시 ) 되었다. 11공구매립면적은기본계획당시 10.55km2로 2개로분할 (11-1 4.83km2, 11-2 5.72km2 ) 하여시행하도록했다. 그러나조류서식지와관련한생태계보존등을이유로매립에대해서환경단체, 전문가의강력한반대로승인된면적은 7.16km2 (2009.10) 이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은최종 6.92km2를매립승인 (2010.10.31) 하고나머지 3.24km2는습지보호구역으로지정하여매립하지않기로했다. 11공구는송도지구전체매립계획중마지막남은공구로갯벌보존과철새서식지보호를위해일부존치하고, 3공구로분할시행할계획이다. 11-1 공구매립면적은 4.32km2로 2011년 8월11 일착공했다. 매립토는준설토 3,302만m3와유용토 248만m3를사용해서 2014년 8월완공예정이다. 매립공사는 ( 주 ) 대우건설컨소시움 ( 한화건설, 지역업체 ) 이예정가격대비 61.96% 인 2,554 억원에수주했다. 296 인천역사 (8 호 )
3) 제 3 단계매립계획 1 10공구 10공구는국토해양부 (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와인천항만공사 (IPA) 가매립시행자로, 부두용지와항만관련용지를조성하기위한매립공사이다. 1994년 전국항만기본계획 이수립되면서인천항은동계획에준하여인천항광역개발계획을수립 (1995) 한바있다. 송도신항은 2001년 12월제2차전국무역항기본계획으로고시된항만법에의한항만이다. 당초사업명칭은 인천남외항건설사업 으로송도신도시개발과함께송도지구서 남측해상 14.02km2 ( 부두용지 5.09, 항만배후단지 8.93) 에접안능력전체 34석, 호안 14,307m, 하역능력 86백만톤규모의송도신항개발계획을수립하였다. 2007년 7월신항만촉진법에의한 인천신항 으로고시되었다. 인천신항진입도로및호안축조공사 (1공구) 는 2007년 12월현대건설컨소시움 ( 현대산업개발, GS건설, SK건설, 한양 ) 이수주하여착수했다. 2010년 12월완공할예정이다. 2 11-2공구, 11-3공구 11공구에서분할된 11-2공구 (2013-2015) 와 11-3공구 (2016-2018) 는 3단계매립계획이다. 11-2공구매립면적은 1.53km2로유용토 883만m3, 11-3공구매립면적은 1.07km2로유용토 997만m3를매립토로사용할계획이다.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97
송도지구매립계획구역 LNG Ⅰ,Ⅱ 2, 4 공구 1, 3 공구및 LNG Ⅲ 5, 7 공구, 9 공구및 LNG Ⅳ 6, 8 공구 9 공구여객부두, 10 공구, 11-1 공구 11-2, 11-3 공구, 10 공구신항, LNG Ⅴ < 그림 -6> 송도지구단계별매립 (1994-2020) 298 인천역사 (8 호 )
4) 송도인천 LNG 생산기지 송도국제도시앞해상에는 LNG생산기지가있다. 제1차, 제2 차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에서 5개지구 3.799km2 (115만평) 가반영되었다. LNGⅠ(1,061천m2 ) 와 LNGⅡ(100천m2 ) 는한국가스공사인천LNG생산기지로 1992년 7월매립을시작으로호안축조와진입로를 1993년까지완공하기로했다. 매립에사용될토석은문학산자락에위치한문학운동장예정지로부터공급하기로했으나, 토석채취로인한발파진동으로인근주민들의집단반발로 1993년 8월이후진입로공사가일시지연되기도했다. 1단계인수기지공사는 1997년 9월 29일준공되었다. 총사업비는 7,517억원이투입되었으며설계와감리는대우엔지니어링, 호안과진입도로축조공사는주식회사한양, 항만공사와준설 매립공사는주식회사대우, 저장탱크와본설비공사는대림산업주식회사가맡았다. 1990년 10월건설기본계획이확정되고 1991년 12월환경영향평가를완료했다. 해양생태계의변화를우려하는인천과시흥시시민들의반대와사업지인근은신도시로매립될지역으로가스폭발등의안전사고발생시피해가예상된다고환경처의지적에도불구하고 LNG인수기지부지조성을위한매립이허가되었다. LNGⅣ (991천m2) 는한국가스공사인천LNG생산기지서측에인접한부지로 1994년 7월대림산업이 LNG복합발전소용지로매립했다. 매립부지중 19만m2를시민휴식공간으로인천시에기부채납했다. LNGⅢ (659천m2) 는한국가스공사인천LNG생산기지동측에인접한부지로 LG-Caltex가스 ( 주 ) 에서수도권 LPG공급용 LPG 지하저장설비및출하설비를건설하기위해매립하였다. 매립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299
부지중인천시는종합스포츠공간 (98,879m2) 과생활폐기물처리시설 (280,959m2) 을설치했다. LNGⅢ (990천m2) 는발전용지로매립계획중이다. 2011년 8월현재한국가스공사인천LNG생산기지는지상식 10기 (10만kl), 지중식 10기 (20만kl) 등 20기의저장탱크시설이있다. 국내 LNG 공급의 40% 를담당하고, 총288만kl의저장탱크용량은단일기지로는세계최대규모이다.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에서반영된 LNG 5개지구는당초남구동춘동지선에서 8km떨어진해상을매립하여만든토지로위험시설물집합지로이용되고있다. 5. 송도지구매립공사추진효과 인천경제자유구역송도지구매립사업방식은인천광역시가총괄사업시행자 ( 공영개발사업단, 도시개발본부, 종합개발사업기획단, 인천경제자유구역청 ) 로써 1994년 7월착공한이후 17년동안변경없이 25.43km2를매립완료했다. 이것은인천경제자유구역송도지구매립계획면적의 50.7% 에해당된다. 매립공사는조달청입찰에의해국내대형종합건설회사가수주하였다. 매립한흙은준설토, 사석과산토등을포함하여총222,191천m3에달하는엄청난양으로 15톤덤프트럭 2,158만대가쏟아부은량이다. 단순계산으로평균 1개월에 15톤덤프트럭 105,784대분의흙을부어넣은셈이다. 매립공사비로총1조1,836원이투입되었으며, 매립조성원가는 3.3m2당대략 153,800원으로아주저렴한비용으로대규모새로운땅를만들었다. 그리고인천경제자유구역송도지구와시흥시 300 인천역사 (8 호 )
시화호방조제사이에 1992년부터매립하여만드는발전용지 3.799km2가계획되어있고, 이중 1.37km2는한국가스공사의해상기지 ( 인천LNG생산기지 ) 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송도지구를조성하기위한매립공사가처음시작된 1994년도인천직할시의행정구역면적은 339.4km2, 인구 2,144,350명이었다. 당시남구동춘동송도유원지앞갯벌을매립하려고결정한면적은총57.2km2로, 그넓이는기존행정구역면적의 6분의 1 크기이고, 계획인구는 49만명으로인천직할시인구의 23% 에해당되는실로엄청난규모의장밋빛개발계획이었다. 17년전갯벌과물바다에그린그림이이제경제자유구역개발용지로사용될토지로써서서히그모습을드러내고있다. < 그림 -5> 송도지구공구별위치 10. 인천지도를바꾸는송도매립지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