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길논단 열린문화 1970 년대민속극부흥운동과기독교민중문화운동 채희완부산대교수 미학 1. 1970년대초대학가에선탈춤공연이한창이었다. 어설픈몸짓이나마요철굴곡이심한귀신형용의탈을쓰고관중과함께댓거리를해가며갖은풍악에몸을실리니절로신명이나는것이었다. 거침없이내뱉는욕지거리와쌍말도그러하려니와보란듯이엎어치는성적행위라든가평소엔차마못할비속한짓거리는누가뭐래도한바탕문화적전복이아닐수없었다. 타오르는횃불속에어른거리는젊은열기에다가풀길없이맺힌분노의응어리가이때를맞아한꺼번에풀려봇물터진듯쏟아놓으니가히젊은해방공간이따로없었던것이다. 그리고그것은몸속어디엔가저아득한곳에서부터울려오는 피부름 같은것이기도하였다. 잊었던고향산천에라도온듯어느덧민족적인것의품속에안겨드는듯하였 153
다. 그러나그렇게소박하고낭만적인민족주의는민족구성원의기층이자탈춤의주인인 민중 의삶에대한눈뜸으로이내이어졌다. 그리고근대화과정과독재권력아래겪고있는민중의고통스런사회적삶에대해비판의식을갖추게되면서대학가의탈춤부흥운동은대학문화운동차원을넘어민중문화운동으로나아갔다. 1970년대초전태일분신으로비롯된노동자생존권투쟁이라든가광주대단지사건등도시빈민문제, 유신철폐운동, 그리고이른바 민청학련 사건등은대학탈꾼들로하여금단순한민속극부흥운동으로머무를수없게하여, 이들의활동은결국일선정치적사회문화운동의성격을띠게되었다. 1975년 5월에는대학가의김상진열사 ( 당시서울농대 4학년생 ) 장례식이대학탈춤동아리주도로계획되어새로운시위문화가생겨나려는무렵대학탈춤은요주의대상을넘어정부당국의직접적탄압의대상이되었다. 한편그렇게되면될수록지식인사회의탈춤운동은동일방직사건등의노동운동, 노조문화패교육활동, 가톨릭농민회 나 기독교농민회 의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그리고 크리스찬아카데미 의중간집단교육등에알게모르게연관을맺게되면서새로운문화운동또는새로운민족예술운동이면서도사회운동, 정치운동의하나로자리잡게되었다. 1969년 부산대전통예술연구회 발족을필두로하여 1971년 서울대민속가면극연구회, 1973년 이화여대민속극연구회, 서강대민속문화연구회, 연세대탈춤연구회 가창립되고그이후 전대학의탈춤화 라일컬어도과장이아닐정도로대학가에선일대탈춤붐이일어견고한고답적아카데미즘을허물고기층민중문화의 굿판 을대학문화의주류로이끌어내었던것이다. 탈춤의역사로보면, 1930년대초송석하, 정인승, 손진태등이주도 154
1970년대초반이후에는 대학탈춤시대 라고할만큼탈춤역사상일대전변기를맞이하게되었다. 이들은스스로탈춤을익혀탈꾼노릇을하면서당시양풍에젖은대학문화를뒤바꾸어... 한민속극부흥운동에이어 1960년대초 ( 무형문화재복원사업과는달리 ) 조동일, 김지하, 허술, 심우성, 김세중등이탈춤, 판소리, 꼭두각시놀음, 남사당패등민중문예에대한계몽활동을벌였고, 1970년대초반이후에는 대학탈춤시대 라고할만큼탈춤역사상일대전변기를맞이하게되었다. 이들은스스로탈춤을익혀탈꾼노릇을하면서당시양풍에젖은대학문화를뒤바꾸어민족적이면서도민중적인문화양식을뿌리내리게하였던것이다. 그런가하면서울대탈춤동아리에선이른바 오 둘둘사건 이후탈춤활동이잠세화된가운데더욱정치일선의문화투쟁의성격을내비치면서동일방직이나원풍모방등의노조문화패건설에앞장서기도하였고, 이훈상, 최종덕, 최정식등이주도한서강대탈춤동아리에선경남사천군축동면가산리에 가산오광대 를복원하여대학아카데미즘을민속현장에투입시킨바있었다. 그리고박정세, 정현기, 백규서, 문창용등이주도한연세대탈춤동아리는서울의외곽지역인망원동의개척교회와어울려도시빈민문화운동을주도하였고김순진, 박미해, 박현경, 정영숙, 백귀순등이주도한이화여대탈춤동아리의출신들은 크리스챤아카데미 가이끄는중간집단교육프로그램에적극참여하였다. 그리고 1974년대학탈춤동아리출신들의한국문화연구모임 한두레 가발족하여이종구, 김민기의음악극 소리굿아구, 이애주의춤극 땅끝, 채희완의춤판 예언, 임진택의창작판소리 소리내력, 김민기의노래극 공장의불빛 등민족문예전통을이어받은새로운창 155
작활동을벌이는가하면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의현장이나노동조합문화패를비롯한각양의민중교육현장과연계하여탈춤, 풍물, 민중놀이문화, 민중굿판이지닌문화복합적인생성적에너지를확인시켜주었다. 1977년전남해남의서림에서 한두레 가벌인농민잔치는당시그곳에거주하던작가황석영과 기독교농민회, 해남 YMCA 등의합작으로풍물길놀이로장날해남일대를휘저은다음창작탈춤 진오귀세도깨비 와판소리등으로오늘날의농민축전의판을벌인대표적인사례이기도하였다. 그리고경기도부평의외곽지대에제정구, 장의균과가톨릭단체가마련한 복음자리 입주기념잔치또한도시빈민 삶의공동체 축전의대표적인사례이기도하였다. 이러한일은결국지식인계층이주도한 70년대 민중삶의문화운동 이라일컬을수있을것이다. 이러한운동의주체로서 나는과연민중인가? 라는물음은이방면활동가에게줄기차게따라붙는이중적인번민거리인가하면한편고정된계급의식에서벗어나게하는자기해방의화두거리이기도하였다. 민중삶과민중문화를통해 민중의실체 에접근하는실천적논리의탐색은특히민중신학을내세운진보적인신학자들사이에서중핵적인문제성적과제이기도하였다. 2. 탈춤을비롯한민중문화에대한지식인사회에서의열기는종교계에도번지기시작하였는데, 특히기독교계에서는더욱큰파문을불러일으켰다. 156
민중삶과민중문화를통해 민중의실체 에접근하는실천적논리의탐색은특히 민중신학 을내세운진보적인신학자들사이에서중핵적인문제성적과제이기도하였다. 1970년대초지학순주교와장일순선생이있는원주에서는가톨릭교구안에문화기획위원회가구성되어김지하시인과김헌일등이농촌계몽사업의일환으로탈춤이나풍물, 마당극에지대한관심을보이고있었다. 김지하대본의마당극 진오귀 는소농귀, 수해귀, 화폐귀등세마리의도깨비가작당하여농민을못살게구는농촌의피폐한현실과온갖재난에맞서협업을통해공동체를형성하여물리친다는내용으로구성되었는데, 리얼리즘극, 탈춤, 판소리, 풍물등의민중적표현원리가자유롭게원용되었다. 이마당극 진오귀 는 1973년서울제일중앙교회에서임진택연출, 박우섭, 한승호, 홍성원등이출연하여 청산별곡 이란이름으로공연되었고, 그이후엔도깨비장면만을뽑아농촌현장이나농민집회현장에서공연되었다. 특히정호경신부, 김상덕, 정성헌, 이병철등이주도하는 가톨릭농민회 활동에서탈춤과풍물과마당극은 살붙이 같은것이었다. 그리고서울의제일중앙교회, 새문안교회, 한빛교회, 경동교회등에서는청년문화선교활동으로교회안에서탈춤이나마당극공연이올려졌고, 경동교회에서는교회안에탈춤동아리가생겨나기도하였다. 서경석, 나상기, 나병식, 김경남등이이끄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 (KSCF) 에서도탈춤과마당극에대한관심은이내민중문화운동이나민중선교활동등의실천행위로이어졌다. 개신교내에서이러한민중문화운동은서대문근처의 기독교선교교육원 이집결지노릇을하였다. 강원룡목사의 크리스찬아카데미 의교육프로그램에서탈춤은역 157
할극 (role play) 과함께필수과목으로부각되었다. 이우재, 황한식, 한명숙, 신인령, 장상환등이주도하는노동, 농민, 여성등중간집단운동인자의교육과정에서강원룡목사의 말뚝이론 강좌는더없는열강으로듣는이로하여금스스로오늘날의말뚝이가될것임을다짐하게되는의식화과정이기도하였다. 경동교회에서는가을철마다한국의민중축전양식을본떠서추수감사예배를올리곤하였다. 1975년이화여대교정에서는서남동교수가이끄는 한국문화연구원 주최로무당굿이올려져대학사회와기독교계에충격을주었다. 당시국문학과이남덕교수가제주가되고이지산무당이주재한 오구굿 은 6 25때사별한남편 ( 역사학자김성칠서울대교수 ) 의영혼을불러모셔묵은한을씻고좋은곳으로모시는서울의 마른오구굿 이었다. 대학교정에서올린무속굿은굿을통해민족문화의뿌리를찾는현장학술활동이기도하였지만, 기독학교인이화여대교정에서올린무당굿은가난한이의원한맺힌삶의종교인무교 ( 巫敎 ) 와외래종교인기독교와의육체적대화이기도하였던것이다. 이로써한국기독교는상고대부터이어져온한국문화의원형이자민중종교의살아있는실체인무교를적대적인관계에서멀리벗어나친근한이웃종교로받아들여서로말문을트는계기를이루었다. 1976년여름이른바판문점도끼만행사건으로뒤숭숭한때에목포해양대에서는성해용, 안혁, 이혜경등젊은기독인들이모여한국교회의토착화및민중선교의방향에관한학술모임이열렸다. 거기에서허병섭목사는현재민중의삶에토대를둔민중교회를제창하였고그러기위해서는 민중사실 에대한현장자료탐구부터절실하다고주장하였다. 그는이미서울하월곡동에이철용등과함께천막교회같은동월교회를이끌면서주민들로하여금일상삶의이야기를나누는것으로예배내용을삼고있었다. 이러한민중교회운동은이문동사랑방교회등 158
기독교메시지가이땅에들어오기이전의민중삶은기독교와무관한것인가? 기독교전파이전에는하나님의역사는이땅에임하지않은것인가? 도시산업지역, 도시빈민지역에번져나가민중교회가백여곳이나생겨나기에이르렀다. 목포에서있은위의젊은기독교인집회에서도탈춤과마당춤공연이곁들여졌는데, 이는민중문화예술과기독교사이에화해의몸짓일뿐만아니라기독예배양식의민중적예배양식으로의이행을북돋우는도전적인실험형태이기도하였다. 그런가하면탈춤이나민중문화를통해바라보는한국기독교의토착화란 기독교메시지가이땅에들어오기이전의민중삶은기독교와무관한것인가? 기독교전파이전에는하나님의역사는이땅에임하지않은것인가? 라는문제를푸는데서출발한다고주장하는것이었다. 그리고그것은 지금여기에 억눌린민중삶한가운데재림하는예수의삶을그리는데서출발한다는것이었다. 이를계기로해서기독학생탈꾼들, 교회탈꾼들사이에서는예수의생애를소재로하여마당극을짜서하는공연이교회에서, 기독교행사에서자주벌어졌다. 이는연세대탈춤동아리에서 에스더 라든가 욥 등구약성서에나오는인물을중심으로성서의현대적인민중적해석을마당극의양식으로풀어놓는작업에잇닿아있는것이었다. 마당극속에품기어진예수의상은창녀와세리, 문둥병자, 우범자들과떨거지행각을벌이며그들과몸과마음을뒤섞는민중예수, 떨거지예수, 광대예수, 딴따라예수상일수밖에없었다. 이러한예수의모습은 1970년대초김지하대본의 금관의예수 에서하나의전형을얻고있었다. 창녀와무허가판자촌사람들과떨려난 159
노동자의절박한사정을고답적인교리를내세워차갑게외면하는신부의냉혈함을한마당으로해서판을연다음, 문둥이가술이취해예수상 ( 像 ) 앞에서신세타령하는것으로다음마당을펼친다. 이를듣고있는예수상이눈물을흘리면서예수장이가자신을콩크리트에가두었다고말하고자신의금관을떼어내가난한사람들과나누어가지라고한다. 문둥이가그렇게하자사장, 신부, 두목등이등장하여금관을빼앗아다시예수의머리위에올려놓는다. 예수상은또다시굴레씌워진채말문을닫고싸늘히굳게된다. 대학생마저어쩔수없는사회현실을개탄할뿐, 문둥이는마지막으로울부짖는다. 얼어붙은저하늘, 얼어붙은저하늘~ 오주여이제는어디에... 김지하노래가사에김민기곡으로잘알려진 금관의예수 는가톨릭교회를중심으로전국순회공연을하면서수많은수녀들과관중들로하여금눈물없이볼수없게하였다. 1977년홍세화, 채희완이대본을마련한 예수전 은먹고살기위해눌려사는이들이어쩔수없이저지르는율법파괴에기꺼이함께하면서이들을부추기다가마침내는십자가형을받는예수상을그려내세마당으로구성하였다. 가난한자들이모여사는우범지역인갈릴리 떨거지들의잔치 로한마당을짜고, 지식인율법학자, 권력기구인종교지도자, 식민통치자로마인, 화폐상갑부등의정치 경제 종교 학문의유착을드러내호화판파티식장인 예루살렘인들의잔치 판으로또한마당을짜고, 범법자로붙잡혀혁명적민족주의자인사반과통방끝에십자가형을스스로선택하는 골고다의길 로셋째마당을짰다. 한국교회안팎에서불어닥친이러한민중예수상은 1960년대이후제3세계권에서새롭게대두된 정치신학, 해방신학, 토착화신학, 상황신학, 혁명신학, 민중신학, 한의신학, 놀이신학 의한국전래와한국적전개과정과무관치않을터이다. 160
김지하노래가사에김민기곡으로잘알려진 금관의예수 는가톨릭교회를중심으로전국순회공연을하면서수많은수녀들과관중들로하여금눈물없이볼수없게하였다. 특히 세속도시 에이어 1973년에발간된하비콕스의 바보제 ( 김천배옮김 ) 와 1974년에소개된아라이사사구의 예수의행태 ( 서남동옮김 ) 는기독교신앙과교리에대한새로운민중적시각을제공하였을뿐만아니라기독교인마다민중예수로서살아가고그에따라민중적실천행위를할것을부추겨마지않는것이었다. 사회의최하층에깔려있는서민대중의시각으로말씀보다는행태에주목하여문헌사회학적방법으로예수이야기의전승과정을밝히고있는 예수의행태 는저자의말대로당시한국기독학생이지하에서겪는고난에대한동참의메시지가아닐수없었고, 부활신앙의전제없이예수의역사상을복원함으로써기독신앙이없는사람에게도예수를접근케하는또하나의복음서였다. 기술문명이인간을지배하고비인간화시키는현대사회에필요한것은축전행사이고, 이에서 혁명적성자 의출현을기대하게된다는 바보제 의 한국판간행에붙여 라는발문에서현영학교수는지배층의기성문화가아니라사회의밑바닥에깔린시민들의문화에서새로운종교와새로운신학의가능성을보고있는하비콕스의견해에동감을표시하면서다음과같이말한다. 바보제는우리나라의탈춤을연상시킨다. 거기에는현실에대한비판과부정이있는동시에또하나의다른질서에대한꿈이깃들어있다. 그것도단순히피비린내나는정치적혁명이아니라해학적인풍 161
자를통해서말이다. 여기에바로빠져나갈구멍이없이절망적으로보이는현실에서도살아남을수있는서민들의지혜와새로운종교적깊이와가능성이있다고보는것이다. 바보제는 기성문화의신학 이아니라 서민문화의신학 또는 새문화의신학 이라고불러도좋을것이다. 기독교의토착화, 한국적신학 또는 한국의신학 형성이논의되고있는우리의현실에서불교와유교같은소위고등종교만이아니라서민문화와그전통의핵심을이루고있는 저속한종교 즉무속종교를재평가해야할단계에이른것은아닐까. 사회에서업신여김을받고버림받은죄인들, 창녀와세리의친구가된예수그리스도에게충실하려면한국교회는서민들의생활과느낌과생각을토대로새로운신학을모색해야하겠기때문이다. 탈춤에대한해석의한시도로제출된 한국가면극의신학적해석 ( 이화논총, 1979) 이라는논문에서내비치듯이현영학교수는현실의비극을해학적으로극복하는예수상을이미위의글에서도꿰뚫어보고있다. 현영학교수의탈춤적시각을온축하고있는 비판적초월 이란표현도이에서이미싹을내보이고있는것이다. 그리고그것은 한국과아시아의정치 사회적현실에서신학을한다는것이무엇인가? 하는 한국신학 의근원적인물음에맞닿아있다. 1970년대민중문화와기독교의창조적만남에대한채희완교수의성찰적논의는다음호에 탈춤신학 으로이어질예정입니다.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