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거스르는한국형슬로 TV 프로그램이것은정지화면이아닙니다 공일오비의뮤지션장호일이 < 불타는청춘 >(SBS) 에새멤버로들어왔다. 그래서두근대며목적지에도착했는데, 제작진만있을뿐출연자는하나도없다. 그는어쩔줄몰라하며묻는다. 이제뭘해요? 제작진이대답한다. 하고싶은대로하시면됩니다. 종일뭐해요? 집에서하던대로하시면 돼요. 그러면온종일누워있어도되나요? 이때화면아래로실없는웃음을 터뜨릴만한자막이나온다. 극자유방임주의예능. 뜻하지않았겠지만, 그자막은요즘방송의트렌드를정확히짚어냈다. 이명석문화평론가 < 조용한식사 >( 출처 : O'live 홈페이지 ) 슬로 TV 의출현 < 마이리틀텔레비전 >(MBC) 에서이경규는개들과함께방바닥에서빈둥거리는 눕방 으로 1위를했다. < 삼시세끼 >(tvn) 는리얼리티예능인데도별다른게임이나자극이없다. 그냥시골이나어촌에서하루세끼밥해먹는것만으로사람들의시선을붙잡고있다. < 나는자연인이다 >(MBN) 는산속에서혼자살아가는사람들의느긋한모습을보여주면서때로동시간대지상파드라마의시청률을넘어서기도한다. < 조용한식사 >(O'live) 는무위의극단을보여준다. 출연자는카메라앞에앉아대사도내레이션도자막도없이처음부터끝까지먹기만한다. KBS에서 < 얀의홈 > 이라는제목으로방영된다큐멘터리 하늘에서본지구 시리즈는비행기에서바라보는풍경만을차분하게보여준다. 우리는왜이런느리고게으른, 아무것도안하는방송에매혹되는걸까? 2009년, 노르웨이의공영방송 NRK는베르겐부터오슬로까지 520km 구간을달리는기차에카메라를장착했다. 그리고 7시간 40분동안기차주변경관을아무런설명없이그대로방영했다. 그저지루할것만같은, 불면증환자를위한치료법같은이방송은뜻밖의반응을불러일으켰다. 노르웨이전체인구 500만명중 120만명이이 슬로 TV 를시청한것이다. 이후 NRK는연어낚시와조류관찰같은느긋한야외생활은물론, 12시간씩뜨개질하고장작불때는모습까지방영했다. 특히노르웨이해안선을거슬러올라가는유람선후티그루텐편 2016. 10+11 VOL. 08 34
CONTENTS REVIEW 은 134시간, 다시 말해 닷새 반이나 걸리는 긴 방송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국민 절반 이상이 시 청한 프로그램이 됐다. 슬로 TV의 잔잔한 반향은 핀란드와 영국 등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영국 방송 BBC4는 2시간짜리 운하 여행과 3시간짜리 미술품 소개 프로그램을, 미국 케이블 방송 그 룹 LMNO는 캘리포니아의 풍광을 12시간 동안 생방송하는 여행 프로그램 <슬로 로드 라이브> 를 내보냈다. <워싱턴포스트>는 슬로 TV의 인기를 보도하며 말한다. 바쁜 일상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해독제 역할을 한다. <SBS 스페셜>의 인터뷰에 응한 노르웨이 슬로 TV 제작진은 말한다. 계속 해서 화면을 내보내면 시청자는 각기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편집자나 성우도 무엇을 보고 있는 지 말해주지 않죠. 시청자 스스로 찾아내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과연 한국에서도 이런 방송이 가능할까? 해외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과 각 나라의 TV 문화에 대 해 이야기하다 보면 거의 비슷한 말을 한다. 한국 TV가 제일 속도가 빠르고 자극적이고 재미있다 는 것이다. 물론 언어나 문화적 취향 때문에 한국인 시청자가 한국식 프로그램을 훨씬 재미있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뉴스와 교양, 다큐멘터리 등의 덤덤한 프로그램이 많은 외국 TV에 비해 노르웨이 슬로 TV 제작진은 한국 TV가 매우 역동적인 것은 사실이다. 특히 케이블과 종편이 연달아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자 말한다. 계속해서 화면을 극적인 리얼리티 쇼의 장치가 모든 프로그램에 스며든 상황에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채널이 돌아 내보내면 시청자는 각기 다른 가는 걸 막을 수 없다. 것을 보게 됩니다. 편집자나 <SBS 스페셜>은 노르웨이의 슬로 TV를 한국 방송인들에게 보여주었다. 대부분 금세 지겨 성우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 움을 토로했다. 경이로운 시청률을 전하자 개그맨 조세호는 말했다. 채널이 저거 하나밖에 없는 말해주지 않죠. 시청자 스스로 건 아니죠? 찾아내는 겁니다. 이런 상식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걸까? 뜻밖에 한국에서도 느리고 게으르고 아무것도 안 하 다큐멘터리 <하늘에서 본 지구>의 한 장면 노르웨이 NRK가 방영한 기차 여행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6. 10+11 VOL. 08 35
는프로그램들이생겨나고있다. 유럽과미국의슬로 TV와조금다르긴하다. 그러나시간과의무의강박을벗어나고자하는면에서는분명무언가공통점이있다. 대표적인전환점은나영석 PD가연출한 < 삼시세끼 > 라고할수있다. 나영석은원조 <1박 2일 >(KBS), 그리고 tvn에서만든 < 꽃보다청춘 > < 신서유기 > 등으로리얼리티예능의트렌드를이끌어온인물이다. 그가정상의궤도에올려놓은 <1박 2일 > 은낯선장소에서하룻밤을함께보낸다는콘셉트다. 형식적으로는여유로운휴식이될수도있지만, 제작진은끊임없이출연자들을괴롭힌다. 밥한끼먹는것도, 교통수단을이용하는것도, 게스트를만나는것도, 결과에따라천당과지옥을오가는복불복게임을통해이루어진다. 이런방식이 10 여년동안예능전반을지배했다. 처음에 < 삼시세끼 > 는 먹방 과 쿡방, 그리고 <1박 2일 > 류의탈도시생활을엮은프로그램일거라고예상됐다. 그러나이서진을메인으로기용한것이뜻밖의승부수였다. 그는차가운도시의귀공자 < 삼시세끼 - 고창편 >( 출처 : tvn 홈페이지 ) 같은이미지에, 요리나집안일은아주귀찮아할것같은캐릭터다. 그런인물을무작정시골에풀어놓고관찰한다. 하루세끼해먹는것외에는별다른미션도없다. 사실세끼해먹고설거지만하기에도하루가벅차다. 그럼에도빡빡한도시의삶과는다른형태의생활이주는해방감이있다. 이어차승원이등장해어촌과시골에서의삶을물흐르듯이보여주며시청자들의호응을얻었다. 그동안농어촌예능에출연한연예인들은그삶을유토피아처럼찬양하기일쑤였다. 하지만 < 삼시세끼 > 는그런강박을부정한다. 이서진은유기농이싫다고하고차승원은조미료를예찬한다. 사실리얼리티의자극이한고비를넘길때, < 힐링캠프 >(SBS) 나 토크콘서트 형태의프로그램들이등장했다. 분명경쟁에지친사람들에게마음의휴식을주는방송이기는했지만, 교훈이나성공의비결을얻으려는강박을버리지는못했다. 함께쉬는게아니라 쉼 이라는걸배우는형태였다. 출연자들은몸은쉬어도머리는바쁘게움직여야했다. 반대로 < 삼시세끼 > 는몸은바쁘게움직이지만, 이상하게마음이편해지는느낌을주었다. 모닥불이타닥타닥타오르는걸바라보는잠깐의여유가아주긴시간으로느껴지기도했다. 게을러도괜찮아 다른 TV들은여전히바빴다. 특히 < 마이리틀텔레비전 > 에서는연예인들이인터넷생방송으로팬들과직접소통하기시작했다. 접속자의숫자로순위를가르기에출연자들은쉴새없이떠들며자극을주어야했다. 잠시라도 노잼 소리를들으면철저하게소외됐다. 박명수는 웃음사망꾼 이라는불명예스러운별명을얻고쫓겨나기도했다. 그런데여기에서이경규가뜻밖의태도로대성공을거두었다. 강아지들하고누워서방송을 2016. 10+11 VOL. 08 36
< 어서옵 SHOW>( 출처 : KBS 홈페이지 ) 하고, 한가하게낚시터에가서잉어를낚고, 난데없이말타는걸배운다. 눕방 이라는말처럼모든걸내려놓은방송이뜻밖에큰호응을얻었다. < 마이리틀텔레비전 > 에서이경규가승승장구한이유는무엇일까? 그가내놓는아이템이모두신선하고흥미로운것이었을까? 그보다는 도대체이걸왜하지 싶은포기의태도, 그리고툭하면힘들다고늘어지는모습이공감을얻었다고본다. 요즘여러중년남성연예인이이와비슷한태도로캐릭터를구축하고있다. 김흥국은토크쇼중간에꾸벅꾸벅졸더니, 자신은 조기퇴근패스 가있는유일한방송인이라며녹화중간에집에간다. 국가대표축구와농구선수출신인안정환과서장훈은부상이나피로를핑계로웬만하면몸을안쓰려고한다. < 무한도전 > 의박명수도 아이고아부지! 소리를들으며나이많다고놀림당하면서도게으르게빠져나가기일쑤다. < 어서옵SHOW>(KBS) 는김종국과노홍철처럼뭘해도열정이과도한 MC들사이에이서진처럼매사의욕없는캐릭터를넣어둔다. 일상의강박에지친시청자들에게는 마치내모습같은 저들의태도가주는은근한해방감이있는것이다. < 조용한식사 > 는 개입하지않는카메라, 게으른 TV 라는전략을좀더밀고나간다. 배우김뢰하는바닷가에서혼자전어를구워먹는다. 배우오광록은철길에서묵묵히백숙을먹는다. 음식을맛깔나게요리하는주방도나오지않고, 요리의맛을호들갑스럽게설명하는미사여구도없다. 처음부터끝까지먹는장면만나온다. 한국형 슬로먹방 TV 인것이다. 느리게, 조용하게, 편안하게 우리는지난십수년간게임, 자막, 내레이션처럼자극과개입이넘쳐나는방송을보아왔다. 예능만이아니다. 교양과토론프로그램, 뉴스에도툭하면자막이등장해, 제작진의의도나출연자의속마음을설명한다. 때로는시청자를대신해 야, 이바보야! 같은말을전해주기도한다. 이것은혼자 TV를보더라도여럿이수다떨며함께보고있다는감각을만들어낸다. 하지만시청자는이를시끄러운소란이나과도한간섭으로받아들일수도있다. 이제방송채널곳곳에서이를거역하는조용한반란이일어나고있는것이다. KBS는공영방송답게꾸준히느리고조용한프로그램들을방영해왔다. 항공사진작가얀아르튀스베르트랑의작업인 하늘에서본지구 시리즈가대표적이다. <REAL TIME 영감의순간 > (EBS) 은유명인의마음깊은곳을탐구하려는시도다. 색다른앵글을통해마치그사람의마음속 2016. 10+11 VOL. 08 37
으로들어가는듯한체험을주고자한다. < 아라뱃길을가다 >( 경인방송 ) 는본격적으로한국형슬로 TV를시도한다. 유람선을타고김포터미널에서출발해수향팔경등아라뱃길을항해하는풍경을무편집실시간으로 1시간동안생중계했다. 느리고간섭없는방송의유행에는기술적진보가은근히기여하고있다. 초고화질의영상, 뛰어난모니터, 원음재현기술등의환경은거실에앉아서도자연에들어와있는듯한체험을하게한다. 화면이작고화질이흐릿하면저게무엇인지부가적으로설명해야하는경우가많다. 그러나이제는조용히보는것자체의재미를즐길수있다. 슬로 TV, 게으른예능이사랑받는이유는무엇일까? 자극과목적이가득한일상에서벗어나고싶은바람때문이다. 아무것도하지않는편안함을, TV를볼때만이라도느끼고싶은것이다. 한때 TV는시끄러운소음으로가득한오락의대명사였다. 하지만이제는스마트폰과인터넷, 사람들과의관계로부터벗어나자연속으로걸어들어가는방법의하나가되고있다. 2016. 10+11 VOL. 08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