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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 이 인 숙* I. 머리말 II. 죽석화와 1900년대 대구 화단 사군자화 전통 III. 1900~40년대: 죽석화의 도입과 정착 IV. 1950~70년대: 죽석화의 계승과 분화 V. 1980~90년대: 죽석화의 지속과 복합 VI. 맺음말 국문초록 1900년대는 유화와 조각 등 미술 이 이식되고 주류적 흐름으로 전개되면 서 기존의 서화 는 그 문화적 기반과 함께 퇴락한 시기이다. 그러나 大邱에 서는 수채화, 양화 등과 함께 서예, 사군자화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근현대기 사군자화는 문명사적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자 를 지향하는 주체의 내 면을 투사함으로서 전통 의 쪽에 있던 계층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완충의 역 할을 수행하였다고 생각한다. 근현대기 대구 화단의 사군자화는 당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문화 지체라는 관점보다 이러한 현상이 표상 하는 내재된 의 미성, 사회적 유용성, 지역적 특수성이 한국미술사의 전체상 속에서 해석되 고 자리매김 되어야할 문제이다. * 대구대학교 강사 / 전자우편 de4e@daum.net 277

제22호 (2012) 대나무에 바위를 함께 그린 竹石畫가 지속적으로 그려진 것은 1900년대 대구 화단 묵죽의 한 특징이다. 그 시작은 시서화 삼절의 서화가인 石齋 徐 丙五(1862~1936)이다. 서병오는 상해에서 교유한 蒲華(1830~1911)를 배워 石上雙竿形 과 竹石竝置形 죽석화를 그렸다. 석상쌍간형은 화면의 한 쪽 邊 에 돌출한 바위 위로 두 개의 죽간이 솟아있는 특이한 도상으로 米芾 (1051~1107)이 기록한 蘇軾(1037~1101)의 묵죽법이 포화에 의해 구현된 도상으로 파악된다. 서병오는 포화에게 석상쌍간형 죽석화를 직접 선물 받아 대구로 가지고 왔고, 이 도상은 서병오를 비롯해 김진만, 배효원, 서상하 등 에 의해 1900~40년대에 대구 화단에 정착되었다. 근대기에 유행한 석상쌍간형과 죽석병치형 죽석화는 1950~70년대에 서병 오의 제자인 竹儂 徐東均(1902~1978), 서동균의 제자인 千石 朴根述 (1937~1993)과 野丁 徐根燮(1946~) 등 대구 사군자화 2, 3세대 작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른 변화를 보여 서병오풍이 거의 답습되었던 앞 시기와 달랐다. 그런데 1980년대는 근대기 죽석화 도상이 다 시 나타나는 복고적 경향을 보였고, 반면 1990년대는 대나무와 돌의 포치와 어울림을 풍죽으로 결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1990년대 대구 화단 죽석화 는 그 畵意인 竹友石 의 정신을 풍죽 형식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하 였다. 죽석화는 1900년대 대구 묵죽의 주요 도상으로 전개되었고 공모전 상위 입상작으로 선호되었다. 그 배경에는 사군자화의 전통 회화로서의 성격, 대 나무와 바위가 상징하는 군자 정신, 이 둘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竹友石 의 畵意를 애호한 대구사람들의 정서가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 다. 1900년대 대구 화단 죽석화는 대구의 지역적 특성과 밀접한 미술이다. 주제어 -------------------------------------------------------------------------------대구(大邱), 1900년대, 20세기, 사군자화(四君子畫), 묵죽화(墨竹畫), 죽석화(竹石 畫), 문인화(文人畵), 서병오(徐丙五), 포화(蒲華) 278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I. 머리말 1900년대는 조선왕조를 이은 대한제국기, 일본의 지배와 겹치는 근대기, 해방과 분단,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 근대와 현대를 포 함하는 격변기이다. 신구의 문물과 동서의 문화, 中西의 예술이 충돌하면서 동양적인 것, 전통적인 것은 서구적인 것, 새로운 것으로 거의 전면적으로 교체되었다. 근대기에 유화와 조각 등 미술 이 이식되고 서구적 장르 개념이 전파됨에 따라 서화 는 서예와 회화로 분리 되었고, 사군자화는 공모전 등을 통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서예와 공존하게 되었다. 사군자화는 일제 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 으로 약칭함)와 조선서도전람회, 해방 후 대 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 으로 약칭함)와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관설 공모 전을 통해 명맥이 보존되고 저변이 유지되었으나 제도권 교육이나 미술 시 장에 자리 잡지 못하였다. 조선 말기 김정희ㆍ이하응ㆍ민영익 등 유명 지식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난 죽에 寓意하여 개성적이고 예술성 높은 사군자화로 형상화하였고, 근대기에도 이를 이어 사군자화가 전국적으로 성행했다. 근현대기 사군자화는 서양 문물 의 유입과 확산이라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자 를 지향하는 주체의 내면을 투사함으로서 전통 의 쪽에 있던 계층의 정체성을 지속시키고 표상하는 완충의 역할을 수행한 사회적 유용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대구에서는 근현대기를 통해 군자적 인격을 상징하는 전통 미술인 사군자 화가 꾸준히 지속되었다. 대구의 사군자화는 작가 층과 수용자 층을 비롯하여 대구 사람들의 군자 정신과 전통 선호 의식을 반영한다. 근현대기 대구 사군 자화는 과거의 관습과 기억에 집착하여 당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문화 지체 현상이라는 관점보다 한국미술사의 전체상 속에서 그 의미와 역할, 독특한 성 격이 해석되고 자리매김 되어야할 문제이다. 대구의 근대 사군자화는 시서화 삼절의 문인화가인 石齋 徐丙五 (1862~1936)로부터 시작하였다. 서병오는 묵죽으로 가장 유명하며 그 중에 279

제22호 (2012) 서도 대나무와 바위를 함께 그린 竹石畵는 그의 묵죽을 대표하는 특징적 도 상이다. 죽석화는 서병오 이후 5세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지며 대구 고유의 특징을 이룬다. 대부분의 사군자화나 묵죽화 연구에서 죽석화를 별도로 나누 지 않는다. 그러나 대구는 죽석화가 지역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점이 뚜렷하 므로 이를 구분하였다. 본고는 1900년대 대구 화단 죽석화를 주요 작가들의 작품과 공모전 입상 작을 통해 통시적으로 살펴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간 근현대미술 사에서 사군자화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욱이 지방 화단은 도 록이나 기록물 등 관련 자료가 영세하며, 작가 층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못하고, 작품의 유존 상황도 미흡하여 연구의 시선이 더욱 미치지 못하였다. 이 연구는 1900년대 대구 죽석화 의 전개 양상을 밝힘으로서 한국미술사에 서 근현대기 사군자화와 대구 묵죽화를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II. 죽석화와 1900년대 대구 화단 사군자화 전통 대나무에 바위가 함께 그려져도 대부분 묵죽, 죽 으로 통칭하나 구분할 때는 石竹 또는 竹石 이라고 하였다. 본고는 죽석화를 성립시킨 청의 板橋 鄭燮(1693~1765)을 따라 죽석화 를 사용하였다.1) 정섭은 조선에서도 명성 이 높아 조선 사신이 직접 그를 찾아가 글씨를 구한 사실이 있고, 정섭 묵죽 화에 대한 존숭은 김정희, 조희룡, 허련, 이하응, 김응원, 윤용구 등으로부터 근현대기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2) 서병오 또한 정섭을 언급 하거나 그의 제화시를 차용한 것이 9회 이상 보인다.3) 1) 鄭燮, 鄭板橋集 (香港: 中華書局香港分局, 1975), p.171ㆍp.175ㆍp.178. 2) 이인숙, 판교 정섭의 회화세계와 우리나라 서화계에 끼친 영향 (영남대학교 대학 원 미학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6), pp.82-110. 3) 석재 시서화집 상하, (석재시서화집간행위원회 편, 서울: 이화문화출판사, 199 8), 도판5ㆍ도판15ㆍ도판39ㆍ도판79ㆍ도판95ㆍ도판208ㆍ도판312ㆍ도판330ㆍ도 280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죽석화는 정섭에 의해 묵죽의 한 양식으로 뚜렷하게 되었으나 그 연원은 蘇軾(1036~1101)의 枯木竹石 으로 올라간다. 정섭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옛적에 소식이 고목죽석을 그렸는데, 고목과 돌만 있고 대나무가 없다면 어두워서 色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대를 그리고 돌을 그리지만 고목은 그 리지 않는다. 뜻이 대나무를 그리 는데 있으므로 대나무를 위주로 하고 돌 로서 보완한다. 지금 돌이 도리어 대나무보다 크고 대나무보다 많은 것 또한 격식 밖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의 법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방식에도 집착 하지 않았으니 살아있게[活] 하는데 있을 뿐이다.4) 정섭은 자신의 회화관에 따라 소식의 고목죽석 에서 고목은 빼고 돌은 적 극 활용하여 죽석화 의 사군자화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정립하여 묵죽의 표 현 영역을 확장하였다. 정섭은 대나무와 바위, 畵題를 긴밀하게 구성하여 화 면 조형성이 풍부한 죽석화의 많은 선례를 남겼고 죽석화는 이후 묵죽화가 들에게 애호되었다.5) 서병오는 정섭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화풍은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또 서병오를 비롯한 1900년대 대구 사군자화는 조선시대 묵죽 전통과 무관 하며 동시대 서울 화단의 영향도 일부 나타날 뿐이다.6) 대구 화단의 죽석화 와 직접 연관되는 것은 청말 해상파 화가인 蒲華(1830~1911)이다. 서병오는 판338 등. 4) 揚州畫派書畫全集 鄭燮 (天津: 天津人民美術出版社, 1998), 도판49의 화제 昔 東坡居士 作枯木竹石 使有枯木石而無竹 則黯然無色矣 余作竹作石 固無取於枯木也 意在畫竹 則竹爲主 以石輔之 今石反大於竹 多於竹 又出於格外也 不泥古法 不執己 見 有在活而已矣 ; 鄭燮, 앞의 책, p.227. 5) 정섭 사군자화의 화면 조형성에 대해서는 이인숙, 鄭板橋 회화에 있어서 제화시 문의 화면 구성 요소적 특질 ( 서학논집 6, 대구서학회, 2001, pp.135-165) 참 조. 6) 조선시대 묵죽화에 대해서는 백인산, 조선의 묵죽 (대원사, 2007) 참조. 근대기 서울의 묵죽화에 대해서는 김소연, 한국 근대 난죽화의 양식 및 계보 분류 연구 ( 한국근대미술사학 11,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3, pp.7-38) 참조. 281

제22호 (2012) 두 차례에 걸쳐 장기간 중국을 여행하였는데 상해에서 閔泳翊(1860~1914), 포 화 등과 교유하였다.7) 서병오가 특히 포화 화풍을 수용한 것은 포화의 병을 낫게 해준 각별한 인연으로 작품을 선물 받은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 다.8) 포화의 묵죽은 백년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아 蒲竹 으 로 불렸고,9) 포화는 대나무와 바위를 다양하게 조합한 많은 죽석화를 남겼 다.10) 대구에서 서화로 이름난 인물이 나타난 것은 평양이나 호남 등에 비해 늦 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八下 徐錫止(1826~1906), 石樵 鄭顔復 (1833?~?), 秋帆 徐丙建(1850~?) 등이 출현하였다.11)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서병오를 중심으로 서화계가 활발하였다. 서병오는 1921년 서화 협회 정회원이었으며,12) 1922년 첫 회부터 조선미전 심사에 여러 차례 참 7) 서병오의 중국 여행은 1898 1902년경과 1908 1909년경 두 차례이다. 민영익 을 비롯한 서병오의 교유관계는 김지영, 석재 서병오(1862~1936)의 서화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협동과정 석사학위 논문, 2010, pp.21-25) 참조. 8) 서병오는 포화에게 有斐君子 石齋先生 法家正 蒲華 라고 화제를 쓴 <죽석화>(도 1)와 竊聞草木多仙藥 知向江湖拜散人 라고 쓴 서예 대련을 선물 받았다. 대련의 협서에 石齋先生朝鮮名進士也 遊歷之滬瀆 欣然把吾 投鷄林蔘療豫疾 蓋精醫道者 暇日以詩書畫見惠 多才多藝 信有根本 今將威海之行 書此爲贈 藉作鴻爪 己酉秋中 作英蒲華 라고 하였다( 석재 시서화집 하, 도판361). 9) 文韻, 蒲華生平簡介 ( 蒲集, 杭州: 浙江人民美術出版社, 1985, 페이지 없음), 畫初學同里周存伯(閒) 繼而上法 白陽靑藤子久仲圭 而心醉東坡 他畫花卉 也 畫山水 尤擅畫竹 他的墨竹 百年間無人可與倫比 欣賞他的墨竹的 稱譽他爲蒲竹 10) 포화의 대표적 작품집은 蒲集 (杭州: 浙江人民美術出版社, 1985)으로 125점의 서화와 4편의 평문이 실려 있으며 蒲華畵集 (杭州: 浙江人民美術出版社, 199 4), 蒲華 (上海: 上海畵報出版社, 2001) 등이 있다. 포화의 서화에 대해서는 李 萬才, 유미경 역, 해상화파 (미술문화, 2005), pp.259-276 ; 陳克濤, 海上畫 派 (上海: 上海文化出版社, 2008), p.34 ; 王子林 編著, 海上畫派與 海派四傑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9), pp.101-106 참조. 11) 이인숙, 20세기 대구문인화파(大邱文人畵派) 의 형성과 변천 연구 ( 영남학 1 8,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pp.469-473. 12) 서병오는 1921년 간행된 書畫ㅏ會會報 정회원 명단에 서상하와 함께 등재되 어 있어 당시 대구 서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홍원기, 서화 협회 연구(1918-1936), 논문집 31, 대구교육대학교, 1996, pp.197-219). 282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여하였고,13) 서병오의 石齋竹 은 조선미전 사군자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14) 서병오의 석재풍 묵죽은 해강풍 일주풍 과 함께 근대기 묵죽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꼽힌다.15) 서병오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과 시서화를 익혔고, 10대에 흥선대원군 李昰應(1820~1898)에게 재능이 알려져 총애를 받는 등 서울과 국내외의 여 러 유명 인사들과 교유하였다.16) 서병오는 시서화 뿐만 아니라 거문고, 바 둑, 장기, 의술, 약재 등에도 능하여 八能 으로 불렸고,17) 자본가이자 지역 유지로서 애국계몽운동과 회사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지식인으로서 여러 서 적을 출판 편집하는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18) 시서화를 다 잘했던 타고난 재능, 한중일의 저명인사들과 교유한 유명세, 풍류를 마음껏 즐긴 호기로움 등 서병오의 인물상 자체는 이후 대구 서화계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였다.19) 13) 서병오는 제1회 조선미전 제1부 동양화(사군자 포함) 심사원이었다( 동아일보 1922.4.16). 매일신보 는 제7회 조선미전의 조선인 심사원 소개에서 서병오를 조선 서화계에 새로운 방법론의 다각적인 제시로 시사한 바가 크며 온오한 미 술대가인 동시에 고상한 인격자이며, 사계 인사로서 그를 경모하는 사람이 많 다 고 하였다( 매일신보 1928.4.5). 14)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 (서울: 시공사, 2009), p.33. 15) 김소연, 앞의 논문, pp.24-35. 16) 서병오의 생애와 교유관계에 대해서는 신대식의 기록이 있다(신대식 편저, 석 재 서병오, 서울: 정문출판사, 1977). 박근술이 처음으로 논문을 썼으며( 석재 의 생애 연구, 논문집 13, 한양여자전문대학교, 1990), 김정숙이 보완 하였 고( 석재 서병오의 서예에 대한 연구,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1, pp.3-29), 김지영은 중국 여행의 연대를 고증하고 교유한 인물을 추가하였다(앞의 논문, pp.5-30). 17) 박근술은 詩ㆍ書ㆍ畫를 비롯 琴ㆍ棋ㆍ碁와 醫ㆍ藥 등에 능하여 八能居士 의 칭 송 을 들었다고 하였다(박근술, 석재의 생애 연구, p.112). 박근술의 이 언급 에서 棋 는 博 을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8) 서병오는 그의 재능과 다채로운 삶만큼이나 근대기 대구의 예술과 문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서병오의 다양한 인물상과 대구인으로서의 의미를 살펴 보았다(이인숙, 대구인, 석재 서병오(1862~1936년, 75세), 근대예술의 재발 견, 대구: 학진출판사, 2012, pp.32-49). 19) 이인숙, 석재 서병오(1862~1936)의 시서화와 대구의 문인화 上ㆍ下( 월간 墨 家 69ㆍ70, 묵가, 2011, pp.58-65ㆍpp.78-85) 참조. 283

제22호 (2012) 1922년 서병오는 지역의 서화가, 애호가들과 함께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창 립하여 지역 서화계의 구심점을 형성하였다.20) 무엇보다 여기에서 肯石 金 鎭萬(1878~1933), 雲岡 裵孝源(1898~1942), 竹儂 徐東均(1902~1978) 등 2세대 작가들이 배출됨으로서 서병오의 화맥이 이어져 이후 대구 전통 화단 은 사군자화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21) 이들은 서병오의 예술정신과 화풍을 계승하여 대구 사군자화 고유의 특징을 뚜렷하게 형성시켰다.22) 이들 중 서동균은 1950년대부터 후진을 양성하여 대구 서화의 저변을 크 게 넓혔고 많은 사군자화가를 배출하였다. 서동균에게 배운 3세대 작가들 중 千石 朴根述(1937~1993)은 20대부터 국전에 입상하며 1976년 국무총리상 을 수상하는 등 대구 사군자화의 위상을 높였고, 서동균의 아들인 野丁 徐根 燮(1946~) 또한 일찍이 국전에 입상하는 등 부친의 화업을 계승하였다. 현 재 대구 화단에는 박근술의 千江醉墨會와 서근섭이 계승한 부친의 書畵塾인 영남서화원에서 배운 4세대 작가들과 다시 이들에게 배운 5세대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1900년대 대구 사군자화는 서병오 서동균 박근술ㆍ서근섭 과 이후 4세대, 5세대로 이어진 사승을 중심축으로 전개되었다. 20) 이인숙, 석재 서병오(1862~1936)와 교남시서화연구회 의 재인식 ( 민족문화논 총 4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pp.345-379 참조. 21) 서병오는 71세 때인 1932년 교남시서화연구회 기금 마련을 위한 개인전을 개 최 하였는데 그 안내장인 石齋先生 揮毫 書畫 頒布會 趣意書 ( 석재 시서화집 하, 참고자료)는 서병오의 얼굴 사진, 서예와 회화 각 1점, 개최 취지를 설명한 글로 구성되었다. 이 글에서 서병오가 10년 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배효원ㆍ서동균ㆍ김진만 등의 대가 를 배출하였다고 하여 이 셋을 대표적 제자 로 들었다. 22) 이나나는 문인화의 연원과 근대 영남 문인화 형성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대 학원 미술디자인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0)에서 문인화의 연원과 서병오, 서동 균, 김진만을 중심으로 근대 영남 문인화 형성을 연구하였다. 284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III. 1900~40년대: 죽석화의 도입과 정착 1. 서병오의 죽석병치형과 석상쌍간형 죽석화 서병오의 석재 시서화집 에 실린 묵죽은 총 67점으로 대나무만 그린 것 은 28점, 죽석화는 39점으로 죽석화가 더 많다. 필자는 서병오의 죽석화에 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두 가지 도상을 竹石倂置形 과 石上雙竿形 으로 이 름 하였다.23) 죽석병치형은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죽석화이다. 그 특 징을 서병오의 (도6)에서 살펴보면 ①하단부 가운데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 ②대나무를 앞쪽에 바위를 뒤쪽에 둔 전후 포치, ③대나무는 크고 바위는 작 은 대소 비례 등이다. 반면 석상쌍간형은 한 쪽 변에서 돌출한 바위 위로[石上] 두 개의 죽간 [雙竿]이 있는 흔치 않은 도상이다. 서병오의 1929년 68세 때 작품인 (도5) 에서 보면 ①한쪽 변 중심의 구도, ②대각선 방향으로 돌출한 뾰족한 바위 하나, ③바위 위로 솟은 두 개의 죽간, ④마디를 나누지 않고 一筆로 뻗어 올린 죽간 묘사, ⑤상부 절단식 대나무 표현, ⑥바위 주변의 垂梢式 죽엽 등 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위가 강한 존재감을 갖고 표현되어 있음이 주목된 다. 석상쌍간형 죽석화는 서병오 생전에 작성된 석재선생 휘호 서화 반포회 취의서 에 유일하게 실려 있는 그림으로서 그 자신이 인정한 대표적 묵죽화 도상임을 알 수 있다.24) 한국에서 석상쌍간형 죽석화는 서병오 이전의 작례 를 찾기 어려운 유형으로서 서병오가 상해에서 그린 작품도 전하고 있다.25) 23) 서병오의 석재 시서화집 에 실린 묵죽화는 총 67점으로 대나무만 그린 묵죽은 28점, 죽석은 39점으로 죽석화가 더 많다. 죽석화는 석상쌍간형 14점, 석상쌍간 형과 유사한 죽석화가 12점이며 죽석병치형은 13점이어서 석상쌍간형을 선호하 였다고 여겨진다. 도록에 실린 작품만으로 정확한 선호를 알 수는 없겠지만 대 체적인 경향은 알 수 있을 것이다. 24) 주21) 참조. 25) 석재 시서화집 상, 도판80의 화제에 石齋徐薰 寫于申江旅舍 라고 하여 상해 에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285

제22호 (2012) 서병오로 인해 이후 대구에서 죽석화가 유행하였다고 판단된다. 죽석화가 주류를 이루고 바위의 강한 존재감과 대나무와 바위의 어울림이 주된 畵意 가 됨에 따라 대구 화단에서는 竹林이나 細竹, 大竹, 죽순 등 대나무의 다양 한 양태나 風竹, 煙竹, 雪竹, 雨竹, 月竹 등 환경적 요소들과 어울린 표현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근대기 서울의 묵죽은 海岡 金圭鎭(1868~1933)의 <수죽도>(도3)에서 보 이는 大竹이나 一洲 金振宇(1883~1950)의 선명하고 깔끔한 <묵죽>(도4) 등 이 주류이다. 근대기와 그 이후의 묵죽화는 (도3)(도4)에서 보이듯 시각적 표현 효과와 미려한 의장성에 치중하게 되는 점이 많다. 그러나 대구의 묵죽 은 전통적인 의미 상징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竹友石, 虛心友石, 竹 君石友 등 대구 죽석화의 화제가 알려주듯 대나무와 바위라는 표현 대상이 갖는 군자 의 의미성과 이 둘이 서로 벗하는 죽우석 의 畵意 표현이 근현대 기 대구 죽석화 의 주제이다. 2. 서병오의 蒲華 죽석화 수용과 도상의 의미 서병오의 석상쌍간형 죽석화는 그의 독창은 아니며 포화의 <죽석도>(도1) 을 수용한 것이다. 서병오는 이 작품을 1909년 상해에서 당시 80세의 노대 가인 포화에게 직접 그려 받았고 임종할 때까지 소장하였다.26) (도1)은 서병 오에게 항상 참조할 수 있는 표본적 작품이자 문화적 자본으로서 그의 작품 세계와 작가적 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교남시서화 연구회 작가들을 비롯하여 서병오와 교유했던 대구와 전국의 서화계 인사들 에게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도1)을 臨畵에 방불하게 수용한 작품을 여 러 점 남기면서도 화제에서 포화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그림이 잘 알려 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묵죽에서는 포화를 배웠음을 밝힌 작품이 여 럿 있다.27) 26) 박근술, 석재의 생애 연구, p.111. 286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포화의 (도1)은 이전의 중국 죽석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도상이다. 불쑥 튀어나온 기괴한 바위 하나, 그 위로 솟은 두 줄기 대나무, 마디를 나누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一筆로 그린 죽간 등이 특히 그러하다. 이 특이한 도 상은 米芾(1051~1107)이 기록으로 남긴 소식의 畫竹法에 대한 묘사를 참조 할 때 이해된다. 소식은 묵죽을 땅에서부터 한 번에 곧게 뻗어 올려 꼭대기까지 그렸다. 내 가 왜 마디를 따라 나누어 그리지 않는가 물으니 대나무가 생길 때 언제 마 디를 따라 생기는가? 라고 하였다. 소식이 枯木을 그렸는데 줄기와 가지 는 규룡처럼 굴곡져서 끝이 없고, 바위는 주름[皴]이 강하여 기기괴괴하기 가 끝이 없어 마치 그의 흉중이 울창한 것과 같다. 내가 호남종사로 황주를 지날 때 처음 공을 뵈었는데 술에 취하여 자네는 이 종이를 벽에 붙이게. 하였다. 觀音紙였다. 곧 일어나 대나무 두 줄기, 고목 한 그루, 괴석 하나를 그려 나에게 주었다.28) 이 글을 보면 소식 묵죽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를 따라 죽간을 나누지 않 고 땅에서부터 한 번에 곧게 뻗어 올려 꼭대기까지 그리는 것이다. 바위는 주름[皴]이 강하여 기기괴괴 하며, 대나무 두 줄기 와 괴석 하나 고목 한 그루 를 그리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미불이 묘사한 소식의 화죽법은 석상 27) <죽석도>(도6)의 화제에 余曾游申江 見蒲華老畵師 筆法古雅 頗有文氣 石齋爲 之一臨 라고 하였다. ; 개인 소장의 <죽>(지본수묵, 132 33 ) 화제에 此從蒲 華老人意 石翁 이라고 하였다. ; 석재 서병오 서화전 2012 (대구문화예술회관, 2012.8.14~19)에 출품된 <묵죽도>(지본수묵, 127 32, 개인소장) 화제에 蒲 華老人善用此法 石齋 라고 하였다. 28) 米芾, 畫史, 百部叢書集成, 萍一嚴 輯選, 臺北 藝文印書館, 발행년 미상, pp. 20-21. 蘇軾子瞻作墨竹 從地一直起至頂 余問何不逐節分 曰竹生時何嘗逐節生 運思淸拔 出於文同與可 自謂與文拈一瓣香 以墨深爲面 淡爲背 自與可始也 作成林竹甚精 子 瞻作枯木 枝幹虯屈無端 石皴硬亦怪怪奇奇無端 如其胸中盤鬱也 吾自湖南從事過黃 州 初見公 酒酣曰 君貼此紙壁上 觀音紙也 即起作兩枝竹 一枯樹 一怪石見與 後晉 卿借去不還 287

제22호 (2012) 쌍간형 죽석화의 주요 특징인 ②③④와 부합한다. 포화는 소식을 매우 존숭 하여,29) 소식의 화죽법을 朱竹, 고목죽석 으로 재현하기도 하였고 소식과 文同(1018~1079)을 <文蘇餘韻>첩으로 기리기도 하였다.30) 포화의 석상쌍 간형 죽석화인 (도1)은 미불의 기록에 따라 소식의 묵죽을 재구성한 도상이 라고 생각한다. 포화는 이 그림 이외에도 많은 석상쌍간형 죽석화를 남겼고, 이와 유사한 죽석화도 많이 남겼으며, 죽간을 일필로 그린 예도 많다.31) 미불이 소식 화죽법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한 一筆竹竿法 은 죽간을 마 디에 따라 나누어 그리는 일반적인 방식과 매우 다르다. (도7)(도8)(도10) 등 에서 볼 수 있듯이 (도5)의 석상쌍간형을 따르면서도 일필죽간법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특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조사 한 바 대구 묵죽에 서 일필죽간법은 서병오의 일부 작품과 서동균의 76세 때 <죽석도>(도12)를 비롯한 70대 작품, 박근술과 서근섭의 묵죽에서 약간 보이지만 이외의 작가 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웠다.32) 대구 묵죽화의 1, 2, 3세대 중심 작가인 서병 오, 서동균, 박근술, 서근섭의 묵죽에서 일필죽간법이 보이는 것은 흥미롭다. 포화의 석상쌍간형 죽석화는 소식의 화죽법을 구현한 도상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석상쌍간형 도상이나 일필죽간법을 따른 서병오를 비롯한 대구 작가 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따랐는지 또는 단순히 포화나 서병오 작풍(作風)에 대한 수용에서 나타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식의 묵죽법을 미불의 기록에 따라 구현한 포화의 석상쌍간형 죽석화가 서병오를 통해 대 29) 주9) 참조. 30) 蒲集, 도판35 <朱竹黑石>, 도판38 <古木竹石>, 도판23~28 <文蘇餘韻>첩. 31) 포화의 석상쌍간형 죽석화와 기타 죽석화는 매우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고, 일필죽간법을 적용한 묵죽을 蒲華畵集 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도판4ㆍ도판13 ㆍ도판14ㆍ도판15ㆍ도판17ㆍ도판18ㆍ도판19ㆍ도판20ㆍ도판23ㆍ도판24ㆍ도판 35ㆍ도판44. 32) 죽농 서동균 서화집 상, 도판123ㆍ도판221ㆍ도판223ㆍ도판227ㆍ도판229ㆍ 도판230ㆍ도판232 ; 박근술의 제자인 金時亨(1956~)이 소장한 박근술의 <湘妃 餘夢>(지본수묵, 28.5 131.5 )에 일필 죽간이 그려져 있다. ; 필자가 소장한 서근섭의 1975년 작 <묵죽도>(지본수묵, 146 33 )는 일필로 죽간을 그리고 농묵으로 마디를 표시하였다. 288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구에 도입되었고, 그의 주변 작가들에 의해 정착되어 근대기 대구 묵죽의 특 징을 이루었으며, 이후 현대기까지 잔영이 이어져 대구 묵죽의 특징이 된 사 실은 분명하다. 포화 뿐 만 아니라 1900년대 대구 묵죽화가들도 소식을 존숭하였다. 서병 오는 평생 이황과 소식을 존경하였다고 하며, 소식의 赤壁船遊로부터 14번 째 되는 임술년을 맞아 이를 재현하였고, 묵죽에 대한 소식의 언급을 인용하 였다.33) 서근섭의 1984년작 <고목죽석도>(도16) 또한 소식에 대한 존경이 나타난 작품이다. 서병오의 (도5)를 포화의 (도1)과 비교해 보면 왼쪽 아래 모서리가 아닌 변에서 바위가 돌출된 점, 바위의 형태가 뾰족하고 간략해져 M 자형으로 표 현된 점, 죽간이 더욱 굵고 단순해진 점 등의 차이가 있다. 서병오의 요약적 표현에 의해 석상쌍간형의 특징적 요소들이 훨씬 부각되었다. 죽간은 一筆의 특성이 더욱 강조되었고, 바위는 위태롭게 돌출되고 간략하게 묘사됨으로서 과장된 운동감으로 인해 괴석으로서의 존재감이 훨씬 강해졌다. 포화를 수용 한 서병오로 인해 근현대기 대구 지역의 묵죽은 죽석화가 주류적 흐름을 이 루었다. 화풍 또한 포화를 수용한 서병오의 영향으로 인해 활달한 서예적 필 치와 습윤한 발묵법 위주여서 형태의 명료성 보다 분방한 표현성이 중시되 었다. 33) 서병오는 평생 이황과 소식을 존경하였다고 한다(박근술, 석재의 생애 연구, p.111). 서병오는 1922년 임술년 지인들과 소식의 적벽선유를 모방한 행사를 하였음을 화제로 남겼고( 석재 시서화집 상, 도판65, 東坡游赤壁十四廻壬戌 避暑於夏山兄楸屋 飮啄起居 各自隨意 依然如有所得 要余揮毫 山光石氣 無非有助 俾爲日後鴻爪 石齋倂題 ), 배효원에게 써준 서예 작품에 歲東坡游赤壁十四周 壬戌夏仲 로 쓰기도 하였다( 석재 시서화집 하, 도판331). 또 소식이 자신과 문동의 묵죽을 이소 와 좌전 에 비유하였다는 화제를 쓰기도 하였다( 석재 시 서화집 상, 도판35, 坡翁嘗與文與可論畫竹 君奇似左傳 僕幽似離騷 此意不可與 不知者道耳 石翁倂題 ). 289

제22호 (2012) 3. 석상쌍간형 죽석화의 정착: 김진만ㆍ배효원ㆍ서상하 서병오가 수용한 포화의 석상쌍간형 죽석화는 김진만, 배효원의 여러 작품 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1940년대 敬齋 徐相廈(1864~1949)의 작품이 확인 된다. 서동균도 일찍이 서병오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주요 활동 시기가 1950~70년대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김진만은 서병오와 함께 중국을 여행하는 등 가장 가까이 지내며 많은 영 향을 받았다.34) 김진만은 서병오가 상해에서 포화의 (도1)을 선물 받은 여행 에 동행하였고, 서병오의 집에 항상 드나들었다고 하므로 석상쌍간형 죽석화 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35) 김진만의 (도8)과 (도9)는 석상쌍간형을 따랐 지만 약간 차이가 있다.36) (도8)은 죽간의 수와 방향, 죽엽의 배치, 바위의 모양 등이 서병오의 (도5)와 다르다. 화제를 의도적으로 죽간과 죽엽 사이사 이에 적어 넣은 점, 서명과 낙관의 위치를 바위 안에 둔 점, 화면의 1/4 정 도에 이르는 하단 부분을 모두 여백으로 처리한 점 등은 김진만이 화면의 공간성에 특히 유의하였음을 보여준다. 김진만의 (도9)는 좌우가 바뀌었으나 바위 아래에서부터 죽간이 그려진 것을 제외하면 (도5)와 같다. 대나무는 난초와 달라 바위에서 자랄 수 없음 에도 마치 바위 위에 착생한 듯 그려진 (도5)에 비해 (도9)는 대나무를 바위 34) 金鎭萬(1876~1933)은 글씨도 잘 써서 <동화사사적비>(1931년)를 남겼고 사군 자, 화훼, 어해, 기명절지, 괴석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1980년 유작전이 개 최 되었고 긍석 김진만 서화집 (맥향화랑, 1980)이 간행되었다. 김진만은 대구 권총강도 사건 으로 8년여를 복역하였고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 이 추서된 독 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이다. 35) 신대식 편저, 앞의 책, p.53, 당시 석재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석재선생의 수제자로서 문기 넘치는 탁월한 서화가이었다. 석재선 생보다 십 여 년 연하였고 석재선생 댁에는 매일같이 왕래하였으며 선생의 애호 를 많이 받았다. 36) 김진만의 <죽석도>(도8)의 화제는 寫竹如書法 不可强求形似 只要神韻自在 로, 서병오의 寫意花卉 亦與美術不同 貴在神韻 不在形似 ( 석재 시서화집 상, 도 판47)와 유사하다. 290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아래부터 그려 넣어 자연스럽다. 포화의 (도1)은 바위가 모서리에 있어서 죽 간의 아래 부분이 바위에 가려진데 비해, 서병오의 (도5)는 바위를 옆에서 돌출시킴으로서 대나무가 마치 바위 위에서 자란 듯 보이게 되었다. 김진만 의 (도9)는 바위를 변에서 돌출시킨 서병오를 따르면서도 죽간을 바위 아래 지면에서부터 그림으로서 (도5)에서 대나무가 바위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시각적 모순을 해결한 변형 석상쌍간형 으로 그려졌다. 김진만은 서병오의 석상쌍간형에 변화를 준 (도8)(도9) 등의 유형을 통해 석상쌍간형을 대구화단에 정착시켰다. 이후 (도7)(도10)(도18)(도21) 등은 서병오의 (도5)보다 김진만의 (도8)과 연관되며, (도11)(도15)(도21) 등에서 도 김진만의 (도9)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김진만은 서병오의 석상쌍간 형을 수용하면서 화면의 공간 조형성에 변화를 주었고, 바위와 대나무의 관 계를 합리적으로 재설정한 변형 석상쌍간형으로 이후 대구 화단의 죽석화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37) 배효원의 (도7)은 1925년 제4회 조선미전 3등상 작품이다.38) 석상쌍간형 을 따르면서 대각선 방향의 죽간, 풍성하고 곡선적인 죽엽, 길쭉한 네모형 바위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김진만의 (도8)과 비교해 보면 삐쳐낸 죽간과 곡선적인 죽엽의 흐름으로 역동감을 주면서 공간을 훨씬 집중적으로 간결하 게 처리했음을 볼 수 있다. 배효원의 1928년 제7회 조선미전 입선작 또한 이와 유사한 석상쌍간형 죽석화이다.39) 배효원은 조선미전에 첫 회부터 빠 37) 긍석 김진만 서화집 에 실린 묵죽화는 총 38점으로 대나무만 그린 묵죽은 27 점이며 죽석화는 11점이다. 죽석화 중 석상쌍간형은 3점, 석상쌍간형에 가까운 죽석화는 2점이며 죽석병치형은 6점이다. 38) 裵孝源(1898 1942)은 일찍이 서병오의 문하에 입문하여 25세 때인 1922년 교남시서화연구회의 제1회 전람회에 출품하였고 서예와 사군자를 다 잘 하였으 나 45세로 일찍 사망하였고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 제3회(1924년)부터 제9 회까지 조선미전 書와 사군자 부문에서 매년 입상하였다. 3회에 <난>이 4등상 <해서>가 입선, 4회에 <石竹>이 3등 <난><해서>가 입선, 5회에 <석란><풍죽> 이 입선, 6회에 <층란><석란>이 입선, 7회에 <석죽><석란>이 입선, 8회에 <석 란><풍우죽>이 입선, 9회에 <난><우후죽>이 입선했다(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전19권, 경인문화사, 1982(영인본), 참조). 291

제22호 (2012) 짐없이 응모하여 두각을 드러낸 대구 작가로 주목되었다.40) 서상하의 (도10)은 사선의 죽간으로 화면을 분할한 점, 바위 안에 七八翁 敬齋 로 서명하고 낙관한 점 등 김진만의 (도8)과 연관된다.41) 서상하는 1922년 5월 대구 賴慶館에서 열린 교남시서화연구회의 첫 전람회에 아들인 兌堂 徐柄柱(1884~1956)와 함께 출품하였다.42) 서병주도 묵죽화를 잘 그려 교남시서화연구회가 창립할 때 강사를 맡았고,43) 1923년 대구미전에 대 [竹] 를 출품하였으나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아 죽석화는 찾기 어려웠다.44) 이 밖에도 서예를 주로 했던 서병오의 제자인 西洲 李容準(1916~?)의 <죽 석도>(지본수묵, 128.5 31.5, 개인소장)도 석상쌍간형 죽석화이다. 서병오 가 활동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대구에서 많은 죽석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여 겨지지만 1940~50년대의 혼란기를 거치며 많은 작품이 보존되기란 어려웠 을 것이다. IV. 1950~70년대: 죽석화의 계승과 분화 1. 서동균 서동균은 대구의 2세대 사군자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서병오는 그를 직접 발탁하여 竹農 으로 호를 지어주었고, 작고할 때 당시 35세의 젊은 서동균 에게 자신의 명정을 쓰게 하여 후계자로 인정하였다.45) 자기 세계를 다 펼 39) 조선미술전람회도록 7, p.152, <石竹>. 40) 동아일보 1928.5.14, 조선미전에 입선된 대구인사 41) 徐相夏(1864~1949)는 서병오와 교남시서화연구회에서 활동한 대구 문인화 1세 대 인물로 서예와 문인화 뿐 만 아니라 전각도 하였다. 서병오와 함께 서화협회 회원이었다. 42) 동아일보 1922.5.20. 43) 동아일보 1922.1.27, 서화연구회 조직 44) 동아일보 1923.11.7. 292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치지 못한 김진만과 배효원에 비해 서동균은 만년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서병오의 예술정신과 화풍은 서동균을 통해 후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46) 서동균은 그림과 글씨를 다 잘하였고 묵죽에 있어서도 대죽과 連幅屛 형 식의 竹林 등 다양한 양식과 화풍을 구사하였다.47) 기년은 없지만 1950년 대 작으로 추정되는 서동균의 (도11)은 변형 석상쌍간형인 김진만의 (도9)를 따른 것이다. 화제에 蒲華老人 善用此法 이라고 한 것은 이 도상이 포화의 (도1)과 직접 연관된다는 사실을 서동균이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 12)는 76세 때인 1977년 작으로 죽석을 병치하면서 부감시의 시점을 적용 하였고 바위의 앞과 뒤에 모두 대나무를 배치한 특이한 구도이다. 죽간은 담 묵으로 단 번에 그어 올려, 포화와 서병오가 구사했던 일필죽간법이 서동균 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동균은 다양한 양식의 묵죽을 구사하였 으나 대구 화단 죽석화의 원류를 잘 알고 있어 김진만의 변형 석상쌍간형을 계승한 작품을 남겼고, 만년의 죽석화에서 일필죽간법을 구사하였다. 서동균은 40대 무렵 경북여자고등학교, 신명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0년대에 영남서화원, 1960년대에 계산서화원 등에서 후진을 양 성하였다.48) 대구 사군자화 3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서동균의 제자인 박근 45) 매일신문 1974.8.18,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 回顧錄(8) 46) 徐東均(1902~1978)은 서예와 산수, 사군자, 기명절지 등을 잘 그렸다. 평생을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73세 때 자신의 생애 기록을 남겼다( 매일신문 1974. 8.10~9.3. 書畫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 ). 74세 때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 다. 47) 죽농서동균서화집 에 실린 묵죽화는 총 51점으로 대나무만 그린 묵죽은 30점 이며 죽석화는 21점이다. 묵죽 30점 중 대죽이 12점, 보통의 묵죽은 18점이다. 죽석화 21점 중 석상쌍간형은 1점, 석상쌍간형과 유사한 죽석화가 6점이며 죽 석병치형은 14점이다. 서동균이 수용한 대죽과 죽림 연폭병 등 새로운 묵죽 화 풍은 서근섭과 긍농 임기순(肯農 任機淳, 1912~1994) 등 일부에만 수용되었다. 48) 서동균의 회고에 의하면 영남서화원을 열 수 있게 된 것은 경북도지사 신현돈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이 위촉한 병풍을 보낸 후 서동균이 창작에 전념하도록 배려 하라는 이대통령의 지시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매일신문 1974.8.27, 書畫 六十年 竹儂徐東均回顧錄(15) ). 申鉉燉(1903~1965)이 제3대 경상북도 도지사 293

제22호 (2012) 술과 서근섭이다. 2. 박근술과 서근섭 박근술과 서근섭은 1970년대 이후로도 활동하지만 대구 사군자화 주요 작가로서의 입지가 1970년대에 이미 뚜렷하고 죽석화는 이 시기에 주력하였 으므로 1980년대 작을 포함하여 이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박근술은 1960 년대 초부터, 서근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여러 차례 입상한 국전 작가 로 서 개인적 역량도 크지만 후세대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다. 1980~90년 대 대구 문인화 작가들은 대부분 이들에게 배웠다. 1950~70년대 대구 전통 회화는 수묵 사군자화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사군 자에서 비파, 연꽃, 목련, 모란, 포도, 조롱박, 나팔꽃 등 문인화 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채색 사용이 늘어나며, 紙本水墨 이외의 매체 실험이 나타나는 등 변화가 점차 두드러진다. 박근술은 서동균을 이어 대구 전통화단을 사군자화 중심으로 이끈 핵심적 인물이다.49) 서동균을 계승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한 묵란과 묵죽으로 1961년 20대 때부터 국전에 입상하며 대구 사군자화의 위상을 높였다. 박근 술은 뚜렷한 작가 정신, 후세대 작가 배출, 서병오에 대한 연구 논문 등을 통해 대구 사군자화의 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근술은 서동균의 만년 양식을 수용한 죽석병치형을 주로 남겼으나 죽석화를 많이 그리지는 로 재임한 기간은 1951~1955년 이므로 이 시기에 영남서화원이 개원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서동균의 대한민국문화훈장 서훈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에는 56 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영남서화원을 지도 경영, 많은 후진을 양성 했다. 고 하였다( 경향신문 1975.10.21). 49) 朴根述(1937~1993)은 대륜고등학교와 경북대 지리학과를 나와 대구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1979년 서울로 옮겨 한양여자전문대학교 관광과 교수를 지냈다. 20세 무렵 대학 재학 때 서동균의 문하에 입문하여 1961년 25세 때 제 10회 국전에 <건란>으로 입선하며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1976년 국무 총리상을 포함해 1981년까지 총 16회 입선하였다. 김정희, 민영익, 임희지의 묵 란화에 대한 논문을 비롯하여 서병오에 대한 3편 등 총 6편의 논문을 남겼다. 294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않았다. (도13)은 죽석병치형으로 서병오의 (도6), 서동균의 (도12)와 연관되 며, 1987년 작인 (도14) 또한 죽석병치형이다. 바위를 중심부가 아닌 한 쪽 변에 배치한 점은 일반적인 죽석병치형과 달라 주목되는데 서동균의 (도12) 에서도 이런 경향을 볼 수 있다. 바위 표현에 윤곽선과 태점 뿐 만 아니라 선염을 아울러 구사하여 입체감을 표현한 점, 죽엽의 짙고 옅은 농담의 차이 를 뚜렷하게 하여 원근의 공간감을 나타낸 점 등은 새롭게 나타난 표현이다. (도14)는 한글로 화제를 쓴 점도 주목된다. 서근섭은 부친 서동균을 배운 대죽과 연폭병 죽림 등을 비롯해 다양한 양 식의 묵죽을 섭렵하였는데 죽석화는 1970~80년대에 주로 그렸다. <竹友 石>(도15)은 1974년 29세 때의 국전 입선작이다. 왼쪽 변에서 돌출한 바위 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4개의 상부 절단식 죽간이 화면의 중심부 쪽으로 그려져 있다. 김진만의 (도9)와 이를 따른 서동균의 (도11)과 같은 변형 석 상쌍간형 도상이지만 죽간이 2개에서 4개로 늘어난 점, 바위의 비중이 약화 된 점, 화면의 가운데 쪽으로 중심이 이동된 점 등의 변화가 있다. 1970년 대의 변형 석상쌍간형 죽석화임이 주목된다. 한편 서근섭의 <고목죽석도>(도16)는 화제에 仿東坡先生古木竹 이라고 하여, 묵죽의 회화적 이념과 문인 그림의 상징적 인물인 소식에 대한 존숭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 서화계에 존속하였음을 보여준다. (도16)은 석 상쌍간형 죽석화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쌍간 대신 고목을 그린 것으로 소식에 대한 존숭과 고목죽석 이라는 죽석화의 원형 을 환기시킨다. 서병오의 도상과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앞 시기와 달리 1950~70년대는 서울이나 중국 사군자화의 영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서울과 중국의 다양한 묵죽 양식을 섭렵하였던 서동균은 만년에 서병오풍으로 회귀 하여 자신의 개성적인 묵죽화풍을 이루었고, 이는 박근술과 서근섭에 의해 계승되면서 다양하게 분화하였다. 서동균, 박근술, 서근섭 등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구축하면서도 근대기 대구 죽석화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각자 의 개성에 따라 소화하여 이후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295

제22호 (2012) V. 1980~90년대: 죽석화의 지속과 복합 1. 1980년대 대구 화단의 죽석화 대구에서는 1957년 대구 경북 서화가들의 해동서화가협회가 발족되었고 1960년대는 봉강서도회, 요산서예원, 계산서화원, 상록서예원 등의 서화숙을 통해 서화의 저변이 넓어져 1970년대는 서숙전과 개인전도 많이 열렸으며 국전에 입상한 국전 작가 도 10여 명을 헤아리는 등 작가 층이 두터워진 다.50) 1974년에는 경상북도미술전람회가, 1981년에는 대구직할시미술전람 회가 시작되는 등 지역의 서화계가 활발하였다. 1980~90년대는 박근술, 서 근섭과 더불어 영남서화원 출신과 박근술의 제자 계열로 대별되는 4세대 작 가들이 활동한다.51) 1980년대는 영남서화원 출신이, 1990년대는 박근술의 제자 계열 작가들 이 주로 활동하였다. 영남서화원 출신으로는 素山 金大煥(1921~2006), 如谷 申昌鎬(1942~), 學丁 鄭成根(1948~), 阿堂 李國姬(1946~) 등이 있다. 박근 술은 靑吾 蔡熙圭(1934~), 雨亭 李昌文(1942~), 鶴泉 金時亨(1956~), 石鏡 李元東(1959~), 竹耕 田景逸(1961~) 등을 배출했다. 박근술의 제자 모임인 천강취묵회는 1979년 창립전을 가졌고, 영남서화원전은 1981년부터 개최되 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로 나누어 이전 시기의 죽석병치형, 석상쌍간형 도상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石竹>(도17)은 裵萬植의 1981년 제1회 대구직할시미술전람회 서예 특선 작이다. 바위가 화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죽석병치형이지만 바위가 대나무보 50) 류재학, 20세기 대구 서예의 회고와 전망 ( 대구미술 창간호, 한국미술협회 대구광역시지부, 1999), pp.57-63. 51) 영남서화원은 서동균이 70세 때인 1971년 祝 嶺南書畫院發展之禧 竹儂七十叟 로 축필한 난죽 대련으로 보아 이때부터 아들 서근섭이 새로 개원하여 주재한 것으로 이해된다( 죽농서동균서화집 상, 도판113과 도판114). 서근섭은 1991 년부터는 계명대학교 서예과에 재직하며 가르쳤다. 296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다 앞쪽에 위치한 점, 한쪽 변에서 죽간이 뻗어 나온 점, 죽간이 바위 위쪽 으로 집중 배치된 점 등은 석상쌍간형의 요소가 보이는 점이다. <묵죽>(도19)은 이창문의 1983년 제2회 영남서예인연합전 출품작으 죽석 병치형 도상이지만 바위와 대나무가 화면 중심부가 아닌 모서리에 배치되고 있어 석상쌍간형의 邊角 구도에 가깝게 되었다. 하부보다 상부가 훨씬 커서 위태롭게 보이는 바위의 형태, 단 붓질의 윤곽선, 짙은 태점으로 간략하게 묘사한 석법은 서병오의 (도5)이래 대구 화단에서 성행한 대표적인 바위 표 현법이다. <묵죽>(도20)은 김대환의 1984년 영남서화원전 출품작으로 앞쪽에 굵은 쌍간의 대나무를 수직으로 올리고 뒤쪽에 바위를 배치하였다. 서병오의 (도 6), 서동균의 (도12), 박근술의 (도13) 등과 같은 맥락의 죽석병치형으로 서 동균의 70세 전후 죽석화와 연관된다. (도17)(도19)(도20)에서 보면 화면의 가운데에 靜的으로 죽석을 배치하였던 서병오의 (도6)에서 바위가 점차 중심 부에서 밀려나면서 변각에서 돌출되는 듯 운동감이 부여된 것을 볼 수 있다. 바위의 이러한 운동감은 더욱 진전되어 1990년대에는 (도25)(도27)(도28)(도 29) 등에서 보이듯이 역동적 형태로 나타난다. <묵죽>(도18)은 정성근의 1983년 제3회 대구직할시미술대전 서예 특선작 이다. 한쪽 변에서 돌출된 바위를 중심으로 대나무를 배치하는 석상쌍간형 구도이나 굵은 쌍간의 수직 죽간 대신 사선 방향으로 가는 죽간을 배치하였 고 바위 앞쪽으로 수초식 죽엽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1920년대 서병오 의 석상쌍간형 죽석화를 따른 1980년대 작품이다. 바위는 서병오의 (도5)에 서 보이는 M'자형과 유사한 山 자 형으로서 존재감이 강하다. <묵죽>(도21)은 이국희의 1989년 제9회 대구미술대전 서예 특선작이다. 죽간의 수가 늘어나고 바위와 대나무에 운동감이 부여되었지만 김진만의 변 형 석상쌍간형인 (도9)와 직접 연관된다. 같은 맥락에 있는 서동균의 (도11) 과 이를 계승한 서근섭의 (도15) 등과 연관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 1980년대 죽석화는 그 예술적 성취 여부를 떠나 석 297

제22호 (2012) 상쌍간형, 죽석병치형, 변형 석상쌍간형 등 근대기 죽석화 도상이 대구 전통 화단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1990년대 대구 화단의 죽석화 1990년대에도 죽석화는 여전히 선호되지만 이전 시기들과 달리 석상쌍간 형, 죽석병치형, 변형 석상쌍간형 등의 도상이 그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스 승의 작품이나 體本이외의 시각자료가 풍부해져 사군자화를 배우는 방식이 다양해진 점과 작가층의 성격이 바뀐 점이 원인이 될 것이다. 1990년대는 1950년대 이후 출생하여 문인화를 전공으로 택한 젊은 전업 작가들이 다수 활동한다. 이 장에서 언급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기존의 서화숙에서 배우는 한 편 미술대학이나 대학의 서예 동아리를 거쳤다. 이들은 대구 화단의 죽석화 전통을 흡수하면서 대나무와 바위의 어울림을 새롭고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신창호의 <묵죽>(도22)은 縱軸 화면의 가운데를 횡단하는 濃淡大小의 두 죽간이 중심부에 있고, 오른쪽 상단에 석상쌍간형 죽석이 있으며, 화면의 하 단은 모두 비워두었다. 묵죽을 위주로 하면서 죽석의 도상을 복합하여 이중 성을 띠는 점, 죽석을 파격적으로 상단 꼭대기에 배치한 점, 하단부 전체를 여백으로 처리한 점 등이 특징이다. 상단 모서리로 밀려났지만 1990년대에도 석상쌍간형 도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바위의 배치가 화면 의 하단이라는 상투적 위치를 벗어난 것은 (도24)(도26)(도27) 등에서도 보이 는 1990년대 죽석화의 한 특징이다. 千谷 文永三(1951~)의 <묵죽>(도23)은 (도6)(도12)(도17)(도19)(도20)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죽석병치형 도상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감시의 시점을 적용하여 바위와 대나무에 입체적 공간감을 부여한 것과 태점으로 지면을 표시하여 땅의 실재감을 준 것은 서동균의 (도12)와 직접 연관된다. (도22)(도23)은 1900년대에도 석상쌍간형과 죽석병치형 도 상이 대구 묵죽 화단에서 잊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98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이원동의 <구름 일어>(도24)는 오른쪽 상단에 역삼각형 바위가 있고 왼쪽 하단 모서리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뻗어 올라간 대나무가 화면 중앙에서 바 위와 만나는 구도이다. 대구 죽석화의 畵意인 대나무와 바위의 죽우석 의 동 반적 관계를 새로운 도상으로 보여준다. 바위 위쪽을 상부 절단식으로 대폭 잘라내고 아래로 쏟아질 듯 배치한 점, 굵은 붓질의 선염과 갈필을 넓게 사 용한 몰골법(沒骨法)으로 윤곽선 없이 바위를 묘사한 점도 특징적이다.52) 김시형의 <묵죽>(도26)은 바위가 화면 한 가운데 허공에 우뚝 서있고, 그 주위를 죽간과 죽엽이 상하좌우에서 에워싸고 있다. 바위를 종축 화면의 정 중앙에 배치함으로서 죽석병치형을 새롭게 해석한 구도이다. 그러나 죽간이 화면 중심부 지면이 아니라 한 쪽 변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뻗어 나온 점, 바 위 주위에 죽엽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점 등은 석상쌍간형의 특징이 복합된 것이다. 전경일의 <묵죽>(도27)은 화면 중앙에 굴곡이 심한 두 개의 길쭉한 바위 가 있고 그 뒤로 곧은 죽간이 솟아 있으며 바위 사이에 담묵의 세죽을 두었 다. 바위가 두 개로 그려진 점과 오른쪽 변에서 중심부로 이동된 점을 제외 하면 (도9)의 변형 석상쌍간형 도상과 기본적 특징이 같다. 바위가 대나무보 다 앞에 있는 점, 바위가 돌출된 듯 운동감 있게 그려진 점, 바위 위로 상부 절단식 죽간이 배치된 점, 죽엽이 바위 주위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점 등 석 상쌍간형의 특징이 복합되어 있다. 竹岡 金振奎(1962~)의 <석죽>(도25) 또한 죽석병치형이지만 석상쌍간형 의 특징이 복합되어 있다. 한쪽 변 중심의 구도, 사선 방향으로 전개된 상부 절단식 죽간, 바위 주변에 집중 배치된 죽엽 등은 석상쌍간형의 특징이다. 풍죽으로 표현하여 죽엽에 강한 활기를 주면서 바위에도 이와 어울리는 역 동감을 주어 죽우석 의 화의를 바람을 매개로 하여 표현하였다. 바람이라는 요소를 적극 활용함으로서 과장된 운동감으로 표현된 바위의 기세는 죽석병 52) 이 죽석화의 제목을 <구름 일어>라고 한 것과 바위를 마치 구름처럼 표현한 것 은 돌(石)의 별칭을 雲根 이라고 한데서 착상하여 돌과 구름을 유비적으로 표현 한 것으로 생각된다. 299

제22호 (2012) 치형 도상임에도 석상쌍간형에서 나타났던 바위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守中 李鍾勳(1962~)의 <묵죽>(도28)은 대구 화단 죽석화의 두 가지 도상 이 모호하게 복합되어 있다. 죽석병치형인 것 같지만 돌출한 바위의 지면과 의 관계, 대나무와 바위의 전후 관계를 자세히 보면 변형 석상쌍간형에 가깝 다. (도25)와 마찬가지로 풍죽 형식을 취함으로서 바람으로 운동감을 주어 대나무와 바위의 기세를 표현하였다. 1990년대에 풍죽이 애호되었음은 (도 24)(도25)(도26)(도27)(도28)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다. 1990년대 죽석화는 바위의 특이한 포치와 과장된 형태가 특징이다. 바위 는 상투적이지 않은 위치에 배치되었고, 강한 기세를 가진 형태로 나타난다. 풍죽으로 표현함으로서 바람에 쏠리는 죽엽의 동세와 호응하듯 바위의 역동 적 존재감이 강조되었고, 죽엽과 바위가 바람을 매개로 서로 어울려 죽우석 의 화의가 생동감 있게 나타났다. 1990년대 죽석화에서 나타난 바위의 강한 기세는 근대기 석상쌍간형 죽석화에서 돌출된 바위가 가졌던 존재감과 서로 통한다. 석상쌍간형은 1990년대에 보이지 않지만 이 도상이 갖는 바위의 존 재감과 죽우석의 화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대구 죽석화의 중요한 표현 의욕 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는 석상쌍간형, 죽석병치형, 변형 석상쌍간형 등 근대기 죽석화 의 전통이 지속되었고, 1990년대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에 의해 晴竹 위주 였던 이전의 죽석화에 風竹이 도입되어 바위의 강한 존재감이 나타나고 竹 友石 의 화의가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1980~90년대 대구의 서예ㆍ문인화부문 공모전에서 상위 입상작으로 죽석 화가 많이 선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본고에서 살펴 본 바 근대기부터 죽석 화가 애호되면서 묵죽을 대표하는 도상으로서의 전통이 지역화단에 고착되 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죽석화 도상이 2000년대의 대구 사 군자화 5세대 작가에서 나타난 것을 2006년 제15회 매일서예대전 대상작인 平剛 林奉奎(1974~)의 <묵죽>(도29)에서 볼 수 있다.53) 그러나 1990년대 53) 임봉규는 박근술의 제자인 이원동에게 배운 대구 사군자화 5세대 작가이다. 300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이후 대구 화단에서 죽석화를 포함한 사군자화는 공모전 이외의 작품 활동에 서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하였고, 사군자화에 전력하는 작가는 드물게 되었다. VI. 맺음말 본고는 1900년대 대구 화단 묵죽화의 특징적 양식을 이루었음에도 그 사 실이 규명되지 않았던 죽석화를 대상으로 하여 주요 도상을 죽석병치형, 석상쌍간형 으로 분류하였고 그 전개 과정을 밝혔다. 죽석화의 전개 과정을 대구 화단에 처음 도입되고 정착된 1900~40년대, 2, 3세대 작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분화된 1950~70년대, 4세대 작가들에 의해 지속되고 복합된 양상 으로 나타난 1980~90년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대나무에 바위를 함께 그린 죽석화가 대구 화단 묵죽의 특징을 이루게 된 것은 시서화 삼절의 서화가인 서병오로부터 시작한다. 서병오는 상해에서 교 유한 포화의 죽석화를 직접 선물 받아 대구로 가지고 왔고, 포화의 영향을 받아 석상쌍간형과 죽석병치형 죽석화를 다수 그렸다. 석상쌍간형 죽석화는 돌출한 바위 위로 두 개의 죽간이 솟아있는 특이한 도상으로 미불이 기록한 소식의 묵죽법이 포화에 의해 구현 된 것으로 파악된다. 죽석화는 서병오와 김진만, 배효원, 서상하 등에 의해 근대기 대구 묵죽의 특징을 이루면서 대 구 화단에 정착된다. 김진만은 죽간이 마치 바위 위에 착생한 듯 보이는 석 상쌍간형의 시각적 모순을 바위 아래부터 죽간을 묘사한 변형 석상쌍간형 으로 나타내 이후의 죽석화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근대기에 유행한 죽석화는 1950~70년대에 서병오의 제자인 서동균, 서동 균의 제자인 박근술과 서근섭 등 대구 사군자화 2, 3세대 작가들에 의해 계 승되었다. 이들의 개성에 따라 죽석화가 다양하게 분화된 것은 서병오의 도 상이 거의 답습되었던 앞 시기와 다른 점이다. 1980~90년대에도 죽석화는 지속되었다. 1980년대는 근대기 죽석화 도상이 다시 나타나는 복고적 경향 301

제22호 (2012) 을 보인 반면 1990년대는 대나무와 돌의 포치와 어울림을 풍죽 형식을 통해 새롭게 표현한 죽석화가 출현한다. 1990년대 대구 화단의 죽석화는 근대기 석상쌍간형과 죽석병치형이 복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며, 죽석화의 정 신인 竹友石 의 畵意가 풍죽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다. 죽석화는 1900년대 대구 화단 묵죽의 주요 도상으로 전개되었고, 지역의 공모전 상위 입상작으로 선호되었다. 직접적 이유는 서병오의 畫脈이 현재 활동하는 4, 5세대 작가에게까지 직접 사승을 통해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배경에는 사군자화가 갖는 전통 회화로서의 성격과 대나무와 바위가 상 징하는 군자 정신, 이 둘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죽우석 의 화의를 애호한 대구사람들의 정서가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1900년대 대 구 죽석화 는 대구의 지역적 특성과 밀접한 미술이다. [도 판] (도판 설명은 작가, 제목, 연대, 재료, 크기, 소장처 순서이며 생략된 항목은 미상임) 이 논문은 2012년 10월 31일(수)에 투고 완료되어 2012년 11월 15일(목)부터 11월 30일(금)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2년 12월 5일(수)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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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1900 년대대구화단竹石畫연구 ( 이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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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호 (2012) Abstract Study on the bamboo and stone painting in Daegu in the 1900s Lee, In-suk Painting the Four Gracious Plants(Sagunja) became a widespread area in the late of Chosun and Modern period. While western 'art' occupied the general trend instead of the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書畵)', the Four Gracious Plants painting was prevalent consistently in Daegu. In this study, bamboo-stone paintings among the China-ink paintings that depicts bamboos(墨竹 畵) out of the Four Gracious Plants were particularly preferred, and focused on the fact that it formed a regional characteristics. The Four Gracious Plants painting in Daegu starts from Seok-jae Seo Byeong-o(石齋 徐丙五, 1862~1936), who worked on the poems,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Seo Byeong-o kept company with Puhua(蒲華, 1830~1911) during his trip to China and absorbed his style of painting, broad-minded it and formed 'Seok-jae bamboo(石齋竹)' style which was full of warmth. Seo Byeong-o enjoyed painting bamboo-stone paintings(竹石畫), and his paintings can largely be divided into two, 'Double-pole-shaped stone(石上雙竿形)' and 'Bamboo-stone concatenation shape(竹石竝置 形)'. The unfolded aspects of how these two kinds of paintings had 308

1900년대 대구 화단 竹石畫 연구(이인숙) an effect on each other from 1920 till 1990 were searched through the works of bamboo-stone painters in Daegu. 'Double-pole-shaped stone(石上雙竿形)' is a unique painting style which appears in the bamboo-stone paintings of Puhua, and it is understood as an implementation of Su Shi's(蘇軾, 1037~1101) bamboo painting style that is recorded by Mi Fu(米芾, 1051~1107). Seo Byeong-o brought the Double-pole-shaped bamboo-stone painting to Daegu, which he received as a present directly from Puhua, and this painting style took root by the painters such as Seo Byeong-o, Kim Jin-man, Bae Hyo-won, Seo Sang-ha in Daegu. Since then, from 1950s till 1970s these two bamboo-stone painting styles were passed down to Seo Dong-gyun, Park Geun-sul, Seo Geun-seop. In 1980s, the bamboo-stone paintings were painted in various ways by the painters who were members of Yeong-nam-Seo-hwawon(嶺南書畵院), led by Seo Geon-seop after Seo Dong-gyun. In 1990s, by the painters from Cheon-gang-chi-mook-hoi(千江醉墨會), mainly led by Park Geun-sul, various bamboo-stone paintings were appeared, in which the bamboo and the stone were interpreted in a drastic and fresh way. In 1900s, for almost 100 years, bamboo-stone paintings were painted as a representing painting style among the Four Gracious Plants paintings in Daegu. The Four Gracious Plants painting in Daegu were chronicled from Seo Byeong-o, Seo Dong-gyun, Park Geun-sul to Seo Geun-seop, the painting impulse was kept and it is passed down to the fourth and fifth generation who are active 309

제22호 (2012) in the present. The bamboo-stone paintings in Daegu is significant from the point of views that it prefers the tradition with the direct effect of the chronicle and it forms a background of regional sentiment aspiring the bamboo friends of stone(竹友石) out of the gracious plants(gunja 君子). Key words: Daegu, 1900s, 20th Century, the Four Gracious Plants painting, bamboo painting, bamboo-stone painting, Seo Byeong-o, Puhua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