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1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Ⅰ. 머리말 3. 月串鎭의 설치 Ⅱ. 三南 稅穀의 운송 4. 燕尾亭과 利涉亭 Ⅳ. 燕尾亭의 풍경 1. 忠淸道 2. 全羅道 1. 아름다운 경치 3. 慶尙道 2. 봄날의 燕尾亭 4. 세곡 운송체계의 변화 3. 바빠지는 江華府使(留守) Ⅲ. 燕尾亭의 유래 4. 북적대는 사람들 1. 교통의 요지 甲串津 Ⅴ. 맺음말 2. 漕運船의 정박 Ⅰ. 머리말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막대한 재원을 소비하였고, 그 러한 재원을 인민의 노동력을 징발하거나 토지 민호에서 현물을 징수하여 충당하였 다. 현물 재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토지에서 田稅와 大同이라는 세목으로 거두는 곡물이었다. 세곡은 漕運制度에 의해 각 지방에서 수도 서울로 운송되었는데, 조운 제도란 납세자들이 가까운 漕倉이나 水站(站倉)에 세곡을 납부하면 그곳에서 漕船이 나 站船을 이용하여 京倉으로 운반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조선의 최대 곡창지대 三南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은, 江華島와 通津 사이의 강화해협을 통해 올라오다 강화 甲串(뒤에 月串)에 들어서 있는 燕尾亭에 빠짐없이 정박하였다. 연미정에 정박한 조운선은 유일하게 戶曹에서 파견된 관리로부터 수일 동안 점검을 받은 후, 한강을 거쳐 경창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연미정은 조운제도의 운영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파견된 호조 관리, 호조 관리를 접대하고 조운 * 광주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 133 - 김 덕 진
2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선의 안전운항을 유도해야 하는 江華府 관리, 조운선을 운전하는 선원, 세곡을 이용 하여 치부를 노리려는 모리배 사이에 자못 흥미로운 풍경이 연미정에서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도 세곡 운송체계와 국방시설의 증강으로 변하 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본 연구에서는 강화해협을 통과하며 연미정에 정박한 조운 선은 어느 지역 출신이고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으며, 그것의 시대적 추이는 어떠하 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연미정의 유래와 그 변천을 국방체계의 변화와 관련하여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운선을 놓고 연미정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도 검토하겠다. 이러한 연구가 강화 향토사는 물론이고, 조운 제도의 이해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Ⅱ. 三南 稅穀의 운송 1. 忠淸道 조선시대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 세곡을 실은 선박은 강화해협 연미정을 통과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 점은 전기의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에 연미정은 下道의 貢船이 지나가다 정박하는 곳이라거나,1) 후기의 뺷大東地志뺸에 三南의 舟船이 지나 가다 정박하는 곳이 연미정이라는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2) 그러나 그 실상 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연미정의 풍경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먼저 밝혀져야 할 것 같아 번잡을 무릅쓰고 검토하려 한다. 조선전기 충청도의 조운과 관련하여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뺷世宗實錄地理志뺸에 따르면,3) 직산 慶陽浦에 운수되는 직산 평택의 租稅, 그리고 아산 貢稅串에 운수되는 공주 목천 문의 신창 아산 연기 연산 온수 은진 이산 전의 정산 진잠 천 안 청주 회덕 회인의 조세, 그리고 면천 犯斤川에 운수되는 결성 남포 당진 대 흥 덕산 면천 보령 부여 비인 서산 서천 석성 예산 임천 청양 태안 한 1)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12, 京畿, 江華都護府, 樓亭, 燕尾亭. 2) 뺷大東地志뺸 2, 京畿道, 江華府, 樓亭, 燕尾亭. 3) 뺷世宗實錄地理志뺸, 忠淸道. - 134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3 산 해미 홍산 홍주의 조세는 서해 해로를 통해서 西江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머 지 17읍(괴산, 단양, 보은, 연풍, 영동, 영춘, 옥천, 음성, 음죽, 제천, 죽산, 진천, 청 산, 청안, 청풍, 충주, 횡간)은 조세를 5개의 강창에 수납한 후 한강 수운을 통해 서울 에 납부하였다. 따라서 端宗 대 당시 충청도는 모두 조운지역이었지만, 39개(70%) 고 을은 海運, 나머지 17개(30%) 고을은 水運지역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뺷經國大典뺸에 따 르면,4) 소속 고을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아산 貢稅串倉은 충청도 전세를, 충주 可興倉은 충청도와 경상도 전세를 수납한다고 하였다. 이전의 8개 창고 가운데 漕倉 3개는 공세곶창으로, 水站 5개는 가흥창으로 통합된 것 같다. 1530년(중종 25)에 편 찬된 뺷新增東國與地勝覽뺸에 따르면, 아산 공세곶창에 세곡을 수납하는 곳은 40개 고 을이고, 충주 가흥창에는 14개 고을이 田稅를 수납하였다.5) 후기에도 충청도에는 조창 1곳과 수참 1곳이 개설되어 있었다. 1788년(정조 12)의 뺷度支志뺸와 1808년(순조 2)의 뺷萬機要覽뺸에 의하면, 조창 1곳은 1522년(중종 17)에 아산에 설치된 貢津倉으로 7읍의 전세를 부근 邊將으로 하여금 영납하게 하였다. 領 納者로 충청 전라도에 海運判官이 있었는데, 1697년(숙종 23)에 혁파하여 兩道의 都事를 겸임시켜다가, 1762년(영조 38)에 牙山縣監에게 대신하도록 하였고, 다시 변 장으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6) 그러면 해운읍 39읍 가운데 조운읍 7읍을 제외한 나머지 32읍은 어떻게 되었을 까? 1746년(영조 22)에 반포된 뺷續大典뺸에 수록된 전세 수납 현황을 보면, 태안 1읍 은 江都에 납부하여 군향에 회록하게 하며, 공진창 소속 7읍은 조운선으로 상납하 고, 가흥창 소속의 6읍은 수참선으로 운송하며, 산군 9읍은 면포로 바꾸어 납부하며, 공주 등 31읍은 임선으로 상납하도록 하였다.7) 따라서 조선후기에 충청도는 전체 54읍 가운데 태안 1읍과 공진창 소속 7읍 및 직납읍 31읍을 포함한 39읍이 해운읍 이었다. 4) 뺷經國大典뺸 戶典, 漕轉. 5) 뺷新增東國與地勝覽뺸 14.20, 忠淸道, 忠州牧.牙山郡, 倉庫. 6) 뺷度支志뺸 7, 版籍司, 漕轉, 漕倉. 뺷萬機要覽뺸 財用編 2, 漕轉. 7) 뺷續大典뺸, 戶典, 漕轉. - 135 -
4 인천학연구 7(2007.8) 자료 운송 창고 소재지 지역 연천 충주 괴산, 단양, 연풍, 영춘, 음성, 제천, 청풍, 충주 앙암충주괴산, 단양, 연풍, 영춘, 제천, 청풍, 충주수운세우음안포여흥 ( 경기 ) 보은, 옥천, 영동, 청산, 청안, 횡간 (17읍) 종추호포여흥 ( 경기 ) 음죽, 청안 실 이포 천녕 ( 경기 ) 죽산, 진천 록경양포직산직산, 평택지공주, 목천, 문의, 신창, 아산, 연기, 연산, 온수, 은진, 이리공세곶아산산, 전의, 정산, 진잠, 천안, 청주, 회덕, 회인지 경국대전 해운 (39 읍 ) 범근천 면천 수운가흥창충주 해운공세곶창아산 < 표 1> 충청도의세곡운송 결성, 남포, 당진, 대흥, 덕산, 면천, 보령, 부여, 비인, 서산, 서천, 석성, 예산, 임천, 청양, 태안, 한산, 해미, 홍산, 홍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속대전 수운 (14 읍 ) 해운 (40 읍 ) 육운 (9읍) 수운 (6읍) 해운 (39 읍 ) 가흥창 공세곶창 충주 아산 괴산, 단양, 보은, 연풍, 영동, 영춘, 음성, 제천, 진천, 청산, 청안, 청풍, 충주, 횡간 결성, 공주, 남포, 당진, 대흥, 덕산, 면천, 목천, 문의, 보령, 부여, 비인, 서산, 서천, 석성, 신창, 아산, 연기, 연산, 예산, 옥천, 온양, 은진, 이산, 임천, 전의, 정산, 직산, 진잠, 천안, 청양, 청주, 태안, 평택, 한산, 해미, 홍산, 홍주, 회덕, 회인 단양, 보은, 영동, 영춘, 옥천, 제천, 청산, 청풍, 횡간 가흥창충주괴산, 연풍, 음성, 진천, 청안, 충주 공진창아산목천, 아산, 연기, 온양, 전의, 천안, 청주 (7 읍 ) 해창 각읍 결성, 공주, 남포, 당진, 대흥, 덕산, 면천, 문의, 보령, 부여, 비인, 서산, 서천, 석성, 신창, 연산, 예산, 옥천, 은진, 이산, 임천, 정산, 직산, 진잠, 청양, 태안, 평택, 한산, 해미, 홍산, 홍주, 회덕, 회인 (32 읍 ) - 136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5 2. 全羅道 뺷세종실록지리지뺸에 의하면, 전라도에는 함열의 德成倉과 나주의 榮山倉 등 2개의 조창이 있었다. 이 가운데 덕성창의 관할 고을은 고부, 고산, 구례, 금구, 금산, 김 제, 남원, 만경, 무주, 부안, 순창, 여산, 옥구, 용담, 용안, 운봉, 익산, 임실, 임피, 장수, 전주, 정읍, 진산, 진안, 태인, 함열을 포함한 26읍이었다. 그리고 강진, 고창, 고흥, 곡성, 광양, 나주, 낙안, 남평, 능성, 담양, 동복, 무안, 무장, 무진, 보성, 순천, 영광, 영암, 옥과, 장성, 장흥, 진원, 창평, 함평, 해진, 화순, 흥덕을 포함한 27읍은 영산창에 租稅를 수납하였다.8) 전라도 전체 53읍(본읍에 잉류하는 제주도 3읍 제외) 이 조운지역으로 영산창과 덕성창 2조창에 분속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전라도 관내 54개(해진이 해남과 진도로 분리) 전 고을은 소속 조창이 조정된 채 조운지역이었다. 뺷經國大典뺸 漕轉조에 따르면, 함열 德成倉, 영광 法聖浦 倉, 나주 榮山倉 등 3조창이 개설되었다. 그 후 물길이 막힌 덕성창을 이설하여 신 설한 용안 得成倉(21읍), 영광 法聖倉(16읍), 나주 榮山倉(17읍) 등 3조창에서 54읍 의 田稅를 조운하였다.9) 그런데 나주 영산창의 수로가 험난하여 1511년(중종 6)에 영산창을 폐지하고 그 소속 고을을 법성창으로 옮기고, 용안 득성창을 신설 군산창 으로 옮기었다. 따라서 전라도는 조선전기에 전 고을이 조운지역이었지만, 수로와 포구 상태 때문에 덕성창 영산창 2조창 체제에서 덕성창 법성창 영산창 3조창 체 제로, 다시 득성창 법성창 영산창 3조창 체제로, 또 다시 군산창 법성창 2조창 체제로 조정되었다. 후기에 오면 전라도의 조운체계는 또 다시 조정을 맞게 된다. 뺷續大典뺸 漕轉조에 따르면, 함열 덕성창을 개명한 성당창, 옥구의 군산창, 영광의 법성창 3곳에 조창이 개설되어 있었다. 뺷度支志뺸와 뺷萬機要覽뺸의 漕轉조에서 3조창에 소속된 고을을 살 펴보면, 전체 53읍(진원은 임진왜란 이후 폐읍) 가운데 성당창에 8읍, 군산창에 7읍, 법성창에 12읍 등 모두 27읍뿐이었다. 나머지 26읍은 면포로 납부하는 육운읍 1읍, 賃船으로 직접 상납하는 직납 해운읍 25읍이었다.10) 관선(조운선)이든 사선(임선)이 8) 뺷世宗實錄地理志뺸, 全羅道, 漕倉. 9)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全羅道, 羅州 靈光 沃溝 龍安. 용담과 구례가 누락된 채 모두 52읍이 3조창 에 분속되어 있다. 용담의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구례는 연산군 때 역모로 폐현되었다가 중종 2년에 복현되었기 때문에 누락되었을 것 같다. 따라서 용담은 득성창, 구례는 법성창 소속으로 추정된다. 10) 뺷大典通編뺸, 戶典, 漕轉. - 137 -
6 인천학연구 7(2007.8) 든간에전라도는후기에도전기와거의동일하게전체 53읍가운데 52읍이해운읍이었다. < 표 2> 전라도의세곡운송 자료운송창고소재지지역 세종실록지리지 해운 (53 읍 ) 영산창 덕성창 나주 함열 강진, 고창, 고흥, 곡성, 광양, 나주, 낙안, 남평, 능성, 담양, 동복, 무안, 무장, 무진, 보성, 순천, 영광, 영암, 옥과, 장성, 장흥, 진원, 창평, 함평, 해진, 화순, 흥덕 (27 읍 ) 고부, 고산, 구례, 금구, 금산, 김제, 남원, 만경, 무주, 부안, 순창, 여산, 옥구, 용담, 용안, 운봉, 익산, 임실, 임피, 장수, 전주, 정읍, 진산, 진안, 태인, 함열 (26 읍 ) 경국대전 해운 (54 읍 ) 덕성창 법성포창 영산창 함열 영광 나주 동국여지승람 해운 (54 읍 ) 득성창 용안 법성창 영광 영산창 나주 고산, 금구, 금산, 김제, 남원, 만경, 무주, 여산, 옥구, 용담, 용안, 운봉, 익산, 임실, 임피, 장수, 전주, 진산, 진안, 태인, 함열 (21 읍 ) 고부, 고창, 곡성, 구례, 담양, 무장, 부안, 순창, 영광, 옥과, 장성, 정읍, 진원, 창평, 함평, 흥덕 (16 읍 ) 강진, 광산, 광양, 나주, 낙안, 남평, 능성, 동복, 무안, 보성, 순천, 영암, 장흥, 진도, 해남, 화순, 흥양 (17 읍 ) 육운 (1 읍 ) (1 읍 ) 속대전 해운 (52 읍 ) 성당창함열고산, 금산, 남원, 용담, 운봉, 익산, 진안, 함열 (8 읍 ) 군산창옥구금구, 옥구, 임실, 장수, 전주, 진안, 태인 (7 읍 ) 법성창영광 해창각읍 (25 읍 ) 고창, 곡성, 광주, 담양, 동복, 순창, 영광, 옥과, 장성, 정읍, 창평, 화순 (12 읍 ) - 138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7 3. 慶尙道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뺷慶尙道地理志뺸 총론에 도내 조세의 捧上 載船處, 漕運 水路, 陸轉程途가 소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도내에 佛巖倉(김해), 馬山倉(창원), 通洋倉(사천) 3조창이 있고, 각창에서는 부근의 조세를 조운선에 싣고 전라 충청도 연해를 경유하여 京倉에 납부하였다. 이로 볼 때 3조창 부근의 연해고을은 조세를 해로로 상납하고, 나머지 내륙고을은 육로로 상납하였을 것 같다. 해운읍과 육운읍 의 병립 현상은 太祖 대 貢賦 상정시 上道邑은 布貨로 정하여 육로로 상납하게 하 고, 沿邊邑은 米穀으로 정하여 해로로 조운하게 하였다는 1432년(세종 14) 경상감사 의 민간폐막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11) 해운읍의 숫자를 알 수 없지만, 1402년(태 종 2)에 조운선 251척을 건조하여 경상도에 111척, 전라도에 80척, 충청도에 60척을 배정하였던 것으로 보아,12) 3조창의 관할구역은 상당히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운과 해운이 상존하던 경상도의 세곡 운송 시스템은 1403년에 일어난 대형 해 난사고로 변화를 맞게 된다. 그해 5월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일기 악화로 해중에 서 침몰하여 미 1만석과 선원 1천명을 잃은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대한 대책 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국왕은 일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육운을 강력 추천 하였다.13) 드디어 1404년에 해운읍은 사라지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하여 뺷경상도지리 지뺸는 다음과 같이 계속 서술하고 있다. 즉, 해로가 위험하여 조운제도를 폐지하고 육운제도를 실시한 후 충청도 충주 慶源倉에 조세를 납부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경 원창까지 육운하는 64읍의 일정, 그리고 가까운 창고에서 강선에 싣고 낙동강 수로 로 상주 낙동진까지 올라간 후 다시 육로로 문경 조령을 넘어 경원창까지 가는 연 강 9읍의 일정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육운을 통한 경상도의 조세운송 체제는 뒤 이어 편찬된 뺷세종실록지리지뺸에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고, 뺷경국대전뺸이 반포된 뒤 에도 변함없었다.14) 그런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경상도의 세곡운송 체제는 또 다시 변화를 맞게 된 11) 12) 13) 14) 뺷世宗實錄뺸 뺷太宗實錄뺸 뺷太宗實錄뺸 고려시대에 56, 世宗 14년 4월 17일(乙巳), 3-384. 3, 太宗 2년 5월 4일(丙戌), 1-234. 5, 太宗 3년 5월 5일(辛巳), 1-264. 전국 13개의 조창 가운데 경상도에는 石頭倉과 通陽倉 2개의 조창이 있었다. 여기에 佛 巖倉 1개가 국초에 증설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불암창은 고려 말기에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성벽을 둘러친 김해 동쪽 漕轉城이라고 한다(六反田豊, 李朝初期の田稅輸送體制, 뺷朝鮮學報뺸 123, 朝鮮學會, 1987, 47쪽). - 139 -
8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다. 이와 관련하여 뺷增補文獻備考뺸 찬자는 뺷경국대전뺸이나 뺷대전속록뺸 소재 조창 외에 여산 羅巖倉, 사천 場巖倉, 양산 甘同倉, 해주 結城倉 등이 1512년(중종 7) 이 후 조창이었다고 하면서, 그것들의 설립과 폐지 사실을 상세히 얻을 수 없다고 서술 하였다.15) 당시 장암창과 감동창에서 경상도의 일부 고을 세곡을 이전과는 달리 선 박으로 상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17세기에 들어오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호조에서 가흥창, 장암 창, 감동창에 佐郞 李遯을 보내어 모은 쌀과 콩 2만 6천 9백석을, 1620년(광해군 12)에 비변사에서는 이둔을 督運御史로 삼아 조운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16) 비변 사의 이 제안은 국왕의 윤허를 받아 실행에 옮겨졌던 것 같은데, 국법에도 없는 경 상도의 外洋船運 이 광해군 대의 궁궐 역사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1628년(인조 6) 경 상감사의 보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7) 장암 감동창에서는 下道의 稅米를 운납하 였는데, 15세기 조운지역이 하도였다.18) 그렇다면 장암창과 감동창에서는 몇 개 고을의 세곡을 운송하였을까? 먼저 장암창을 살펴보자. 반계 柳馨遠(1622 1673)이 찬술한 뺷東國輿地志뺸에서는 사천 장암창에서 사천 진주 하동 남해 곤양 고성 거제 창원 등 8읍의 전세를 수봉한다고 하였으니,19) 당시 장암창 소속은 8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감동창을 살펴보자. 1637년(인조 15) 특진관 任絖은 경상도 전세를 統營 虞 候를 差使員으로 정하여 감동창에서 올려 보내고 있는데, 그 때문에 우후가 營底船 3 40척에 格軍 3 400백명을 거느리고 3 4월 風和待變 시기에 진을 떠나니 우려 된다고 걱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차사원으로 우후를 차임하지 말고 左右道 각읍 수령을 輪回定送하자는 제안을 내어, 국왕으로부터 검토하라는 말까지 들었다.20) 임 광의 제안은 실현되지 않고 이후에도 통영 우후에 의한 선운은 계속되었다. 1654년 (효종 5)에 우의정 沈之源은 통영 우후를 차사원으로 정하여 감동창에서 전세를 선 적한 후 戰船 能櫓軍을 격군으로 정하여 보내고 있다며, 이는 방비를 소홀히 한 한 심한 일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국왕은 우후를 차사원으로 정하는 것을 금하게 하 15) 16) 17) 18) 19) 20) 뺷增補文獻備考뺸 157, 財用考 4, 漕運. 뺷光海君日記뺸 152, 光海君 12년 5월 25일(壬寅), 33-318. 뺷仁祖實錄뺸 19, 仁祖 6년 9월 19일(丙子), 34-291. 뺷備邊司謄錄뺸 20, 顯宗 원년 4월 6일, 2-612. 뺷東國輿地志뺸, 慶尙道, 泗川縣, 倉庫. 뺷承政院日記뺸 61, 仁祖 15년 10월 5일. - 140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9 며, 전란 이전처럼 각읍에서 각자 賃船載送하라고 명하였다.21) 이에 대해 호조에서 는 경상도 嶺底 11읍이라면 가흥창에 육운한 후 참선에 싣고 경강으로 운납하고, 감 동창 소속 7읍이라면 감동창에 운납한 후 그곳에서 선적하여 상납하게 하자고 제의 하였다.22) 이렇게 볼 때 당시 감동창 소속은 7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천 장암창과 양산 감동창에서는 16세기 이후 이전과는 달리, 15읍의 전 세를 선박을 이용하여 납부하였다. 그런데 1677년(숙종 3)에 경상도 大同法이 시행 되면서, 경상도의 세곡 운송체제는 급변하게 된다. 대동미 결당 12두를 산군 45읍은 작목 작전 작포하여 육운하도록 하였고, 연해 22읍은 해운하도록 하였기 때문이 다.23) 이로 인해 작미읍에서는 대동미를 전세와 함께 선박으로 운납할 수밖에 없었 다. 실제 1687년(숙종 13)에 咸安大同米를 실은 선박이 靈光 땅에서 침몰된 적이 있 었다.24) 드디어 18세기에 경상도에도 조창이 개설되는데, 뺷탁지지뺸와 뺷만기요람뺸에 다음 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감사 趙曮의 장계에 의하여, 1760년(영조 36)에 창원 馬山倉에 左漕倉을 신설한 후 조운선 20척을 두어 8읍(창원, 함안, 칠원, 진해, 거 제, 웅천, 의령 동북면, 고성 동남면)의 전세 대동미를 운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진주 駕山倉에 右漕倉을 신설한 후 조운선 20척을 두어 8읍(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사천, 고성 서북면, 의령 서북면)의 전세 대동미를 운납하도록 하였다. 또한 5년 후 1765년(영조 41)에 우참찬 李益輔의 건의에 의해 밀양 三浪倉에 後漕倉을 신설한 후 조운선 15척을 두어 6읍(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의 전세 대 동미를 운납하도록 하였다. 전에 지토선을 경강선인에게 출급하여 운납하게 하였는 데, 遲滯와 臭載가 연달자 조운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경상도는 18세기 중반에 세곡의 원활한 운반을 위해 이른바 3조창 체계 를 새로이 성립하였다.25) 전체 71개 읍 가운데 28%에 해당하는 20개 읍(거제, 고 성, 곤양, 김해, 남해, 단성, 밀양, 사천, 양산, 영산, 웅천, 의령, 진주, 진해, 창녕, 창원, 칠원, 하동, 함안, 현풍)을 3조창에 분속시켜 전세와 대동미를 상납하도록 하 21) 22) 23) 24) 25) 뺷承政院日記뺸 132, 孝宗 5년 9월 18일. 뺷承政院日記뺸 143, 孝宗 7년 11월 11일. 뺷增補文獻備考뺸 153, 田賦考 13, 大同 2. 뺷承政院日記뺸 323, 肅宗 13년 6월 23일. 卞光錫, 18 19세기 경상도 남부지역의 상품유통구조, 뺷지역과 역사뺸 5, 부산경남역사연구소, 1999, 181쪽. - 141 -
10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였던 것이다. 4. 세곡 운송체계의 변화 건국 초기에 강화 해협을 통과하며 연미정에 들른 세곡선은 삼남 3도 소속의 조 운선이었지만, 곧이어 경상도는 전체가 육운읍으로 바뀌어 제외되었다. 그 결과 1개 ( 3개) 조창에서 실은 충청도의 37개 고을, 3개( 2개) 조창에서 실은 전라도의 53 개 고을을 포함한 90개 고을의 전세를 실은 조운선이 연미정에 정박하였다. 따라서 15세기에 연미정에 들른 세곡선은 지역으로는 兩湖, 선박으로는 漕運船, 세목으로는 田稅 뿐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정은 급변하게 된다. 연미정을 경유한 세곡선의 출신지를 보면, 뺷세종실록지리지뺸 기준으로 전기에는 충청도 39읍과 전라도 53읍 등 모두 92읍이었다. 그런데 뺷속대전뺸과 뺷만기요람뺸을 기준으로 후기에는 충청도 39읍, 전라도 52읍, 경상도 20읍 등 모두 111읍이었다. 이렇게 볼 때 연미정을 지나 간 세곡선 출신지가 2도에서 3도로, 92읍에서 111읍으로 증가하였다. 연미정에 들른 선박의 종류도 전과 달랐다. 그것은 16세기 이후에 무상입역을 토 대로 하는 漕運制가 붕괴되고 급가고립을 토대로 하는 賃運制가 등장하면서, 조창에 소속되지 않고 직접 상납하는 고을이 발생한데서 기인하였다. 직납읍의 등장 시기에 대해 반계 유형원은 丁酉再亂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지적하였다.26) 아마 왜란으로 조창이 파괴되어 조운이 불가능하게 되자, 임운이 그 빈자리를 메웠던 것 같다. 따 라서 조창에 속하지 않는 직납 해운읍은 사선을 임대하여 세곡을 운납하여야 하였 다. 그러한 고을에서는 지역선박인 地土船을 임대하거나, 지토선이 없으면 경강상인 들의 京江船을 이용하였고, 都監船이라는 훈련도감 선박도 동원하였다.27) 이러한 세 곡 운송법의 변화에 따라 각 연해읍에서는 임운상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했 는데, 그것이 바로 海倉이었다.28) 그러므로 조선후기에 강화 연미정에 들른 세곡선 은 관선 조운선 외에 사선 임선도 있었다. 연미정의 변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선박에 적재된 세곡은 田稅 외에 三手米, 26) 뺷磻溪隧錄뺸 3, 田制後錄 上, 漕運. 27) 崔完基, 뺷朝鮮後期船運業史硏究뺸, 一潮閣, 1989. 高東煥, 뺷朝鮮後期 서울商業發達史硏究뺸, 지식산업사, 1998, 355쪽. 28) 김덕진, 全羅道 順天 海倉의 설치와 풍경, 뺷全南史學뺸 22, 전남사학회, 2004. - 142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11 別稅, 大同米, 結作 등으로 거둔 것도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토지세로 三手米, 大同 米, 西糧米, 別收米, 結布, 結作, 砲糧米 등등이 차례로 신설되었기 때문이다.29) 三 手米는 1602년(선조 35)에 창시된 후 결당 1두 2두 2승 1두 2승씩 부과되어 용산 別營으로 운송되었다.30) 1608년(광해군 즉위)에 경기도에 처음 실시되었다가 1백여 년 만에 평안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확대된 大同米는 공물 대신 결당 12두씩 부 과되어 서울 선혜청으로 운송되었다. 西糧米는 毛糧米 唐糧米미라고도 하는데 광해 군 말기나 인조 초기에 결당 1두 5승씩 부과되다 1646년(인조 24)에 폐지되었다. 別 收米는 서량미를 폐지할 때 양서지방을 제외하여 결당 5두씩 부과한 것이다. 結布는 광해군 인조 대에 재정충당을 위해 전결에 포나 미를 임시로 부과한 것이다.31) 結 作은 균역법 실시 때에 감필로 인한 재정결손을 충당하기 위해 결당 2두씩 신설된 것으로 나중에 結錢이라 하여 모두 전납되었다. 砲糧米는 고종 대에 양요에 대비하 기 위해 신설된 것이다. 이들 토지세[田政, 結稅]는 17 19세기에 田三稅及宣惠廳收 米, 田三稅及大同米, 田三稅及大同收米, 田三稅及大同 라 하여 전삼세와 대동미 등 4개 세목이 주축을 이루었다. 바로 이 4개의 토지세가 조창에 수납되어 조운선에 의해 서울로 운송되었는데, 경상 左漕倉 소속 昌原 등 9읍의 전삼세와 대동미로 거 둔 米太 2만 1천 9백 8십석을 실은 22척의 조운선이 1척은 인천에서 침몰하고 나머 지가 서울에 도착했고, 후조창 조운선도 이어 오고 있다는 1773년(영조 49) 호조의 보고 그대로다.32) 이러한 사정은 직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직납읍의 해창을 뺷忠淸道邑誌뺸에 의하면, 貢稅捧上所 (林川), 田稅大同捧上處 (庇仁), 田三稅三局保米 所捧 (結城), 田大同兩局作米 捧上裝運所 (新昌), 稅大同 裝發所 (禮山) 등이라 하여, 전삼세와 대동미를 수합하여 발송하는 곳으로 기록하였다. 이제 조선후기에 연미정에 정박한 세곡선은 전세를 실은 충청 전라도의 조운선 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전삼세 대동미를 실은 충청 전라 경상도의 관선 사선이 었다. 이러한 세곡운송 시스템의 변화에 따라 자연 연미정의 풍경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9) 30) 31) 32) 金玉根, 뺷朝鮮王朝財政史硏究뺸 Ⅰ, 一潮閣, 1984. 金德珍, 宣祖代 戶曹의 三手米 징수와 別營 설치, 뺷國史館論叢뺸 105, 국사편찬위원회, 2004. 尹用出, 17세기 초의 結布制, 뺷釜大史學뺸 19, 부산대학교 사학회, 1995. 뺷承政院日記뺸 1338, 英祖 49년 4월 18일. - 143 -
12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Ⅲ. 燕尾亭의 유래 1. 교통의 요지 甲串津 연미정의 소재지와 관련하여, 뺷世宗實錄地理志뺸 강화부조에 甲串津은 府의 동쪽 에 있다. 나룻배가 있고, 나루머리(渡頭)에 연미정이 있다. 고 하였다. 구체적인 위 치에 대해서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강화부조에 연미정은 甲串津 위에 있다. 작은 산 이 있고, 그 아래에 바닷물이 흘러 제비 꼬리 같으므로 燕尾라 한다. 하였다. 甲串津 은 강화부의 동쪽 10리 갑곶에 개설된 나루로 通津을 마주보고 있고, 연미정은 그 갑곶진 나루터 뒤쪽의 나즈막한 봉우리 위에 건립된 정자이다. 그런데 갑곶 앞 바다 에 있는 留島에서 祖江 바닷물이 두 갈래로 갈라져 마치 제비 꼬리 모양처럼 흐르 고, 작은 봉우리 위에 있는 정자는 그 물줄기를 내려 본다고 하여 이름을 燕尾(제비 꼬리)라고 하였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漢江은 서쪽으로 흐르다 교하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류하여 통 진 북쪽에서 조강을 이룬다. 조강은 통진 유도를 만나 두 줄기로 갈라져 바다로 들 어가는데, 그것의 흐름과 관련하여 뺷世宗實錄地理志뺸 경기도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江華府 북쪽 河源渡를 거쳐 喬桐縣 북쪽 寅石 津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고, 황해도 조운이 여기를 경유하여 서울로 들어온다. 또 한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강화부 동쪽 甲串津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고, 전라도와 충청도 조운이 여기를 경유하여 서울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서울 龍山江에서 서쪽으 로 100리 내려가면 통진 유도에 이르는데, 유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甲串을 거쳐 서남해에 이르고, 서쪽으로 가면 喬桐을 거쳐 서북해에 이르는 것이 조선시대 전국 의 주요 해로였다.33) 강화의 북쪽과 동쪽 해안은 서울을 왕래하는 兩西와 三南의 선박이 경유하는 중 요한 바닷길이었다. 삼남 조운선은 어김없이 강화 동쪽 끝 갑곶을 거쳐 서울로 들어 갔다. 손돌목의 험로를 피하기 위해 덕적도 앞바다에서 교동을 거쳐 강화도 서쪽 해 로를 돌아 한강으로 들어가는 삼남 조운선도 있었다.34)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을 뿐더러, 조운선의 항로 선택권 또한 지휘감독 문제 때문에 자유롭게 용 33) 뺷增補文獻備考뺸 35, 輿地考 23, 關防 11, 海路 1. 34) 뺷正祖實錄뺸 27, 正祖 13년 5월 26일(壬午), 46-36. - 144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13 납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정한 삼남 漕運路는 강화 동쪽 해로였고, 뱃사람들은 정해 진 코스로 운항해야 하였다. 연미정은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1779년(정조 3) 지중추부사 具善復이 지적한 것처 럼, 삼남의 뱃길이 모두 강도의 연미정 앞바다에 이르러 京江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 라 양서의 왕래하는 선박들 모두 이 길을 따라 교동을 지나 연미정에 이르러 경강 으로 들어갔다.35) 연미정은 三水交衝之地 로서, 삼남 양서 서울행 선박이 모두 거 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연미정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세곡을 실은 선박이 서울로 올라가다 쉬어가던 곳이었다. 또한 연미정은 육상교통을 연결하는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618년(광 해군 10)에 검찰사 沈惇은 江都로 가는 육행은 陽川에서 출발하여 通津을 거쳐 甲 串에 이르며, 배를 타면 한강을 따라 김포 양천 통진을 지나서 燕尾亭에 이릅니 다. 강도에서 호서로 향하는 육행은 振威 水原 平澤 德山을 경유하여 수영에 이 르며, 뱃길로는 安興梁을 지나서 면천에 이릅니다. 36)고 하였다. 서울에서 양천을 거쳐 통진에 이른 후 손돌목을 건너 강화로 들어가는 나루터가 연미정이 있는 갑곶 이었다.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을 피하고자 이곳을 거쳐 강화도에 들어온 바람에 元의 군사들에 의해 갑곶이라는 지명이 불려지게 되었다.37) 원나라 군사들이 강화로 천도 하는 고종을 아와 말하기를, 우리 갑옷만 쌓아 놓아도 건널 수 있다 하여 갑곶이라 하였다 한다. 정묘호란 때에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여 연미정에 올라 군사를 지휘 하였고,38) 後金과 강화를 추진할 때에 후금 장수 劉海가 서약을 한 곳으로도 연미 정은 유명하다.39) 병자호란 때에는 淸의 군대가 연미정이 있는 갑곶을 통하여 강화 에 들어가 세자를 납치하였다.40) 육지와 강화도를 연결하는 교통요지인 연미정은 외 세가 침략해 들어올 때에 진입로 역할을 하면서 국가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연미정은 해상과 육상교통의 요지인 갑곶에 건립되어 삼남에서 서울로 들 35) 36) 37) 38) 39) 40) 뺷正祖實錄뺸 7, 正祖 3년 3월 8일(壬辰), 45-95. 뺷光海君日記뺸 130, 光海君 10년 7월 2일(戊子), 33-121.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12, 江華都護府, 樓亭, 利涉亭. 뺷仁祖實錄뺸 15, 仁祖 5년 2월 8일(乙巳), 34-170 뺷仁祖實錄뺸 15, 仁祖 5년 2월 15일(壬子), 34-175. 뺷仁祖實錄뺸 34, 仁祖 15년 1월 22일(壬戌), 34-668. - 145 -
14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어가는 조운선이나 통진과 강화를 왕래하는 행인들이 거치는 곳이었다. 2. 漕運船의 정박 세곡운송과 강화도의 관계에 대해, 李重煥(1690 1752)은 뺷擇里志뺸에서 조선시대 에 들어와서는 三南의 租稅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孫石項]을 지나서 서울에 올라 오는 까닭에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강화에) 留守官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고 하 였다. 조선의 곡창지대 삼남에서 상납하는 세곡을 실은 선박은 모두 강화 해협을통 과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사실 삼남 세곡은 국가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재원이었다. 그런데 강화해협 손돌목은 황해도의 장산곶, 충청도의 안흥량과 함께 전국적인 조 난지였다. 손돌목에 대해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한강은 通津의 서남쪽 에서 굽어져 甲串나루가 되고, 또 남쪽으로 마니산 뒤로 움푹 꺼진 곳으로 흐른다. 돌맥이 물속에 가로 뻗쳐서 문턱 같고, 복판이 조금 오목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손돌 목이고 그 남쪽은 서해 큰 바다이다. 삼남지방에서 거둔 租稅를 실은 배가 손돌목 밖에 와서는 만조되기를 기다려서 목을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미처 주선하지 못하면 문득 돌맥에 걸려서 파선하게 된다. 41)고 하였다. 따라서 강화 해협은 대표적인 험 로였기 때문에 강화 수령을 府使에서 留守로 승격시켜 바닷길 관리에 만전을 기하 도록 했다는 것이 이중환의 설명이다. 그러면 고려시대에 조운선은 강화해협을 통과하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 다. 이 점에 대한 실마리는 燕尾亭이 언제, 어떤 이유로 처음 건립되었는지를 살피 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연미정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상세히 알 수 없지만, 다 음이 참고된다. 몽고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해 있을 때인 1244년(고종 31)에, 侍郞 李宗冑가 9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여름 공부를 시켜 55명을 뽑았다 고 한다.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에 소개된 이 기사를 통해 당시에 연미정이 존재해 있 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 것만은 사실이다. 고려시대에 조운제가 실시되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연미정이 당시 존재했을 가 능성은 높아 보인다. 고려전기에 13漕倉制가 실시되면서 호서 호남 영남 해안지역 41) 뺷擇里志뺸, 八道總論, 京畿. - 146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15 에 10개의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10조창 조운선은 강화해협을 통해 수도 개경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42) 이 점은 중국 宋의 사신 徐兢의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뺷高麗圖經뺸에 의하면, 서긍이 고려에 올 때에 黑山島로부터 북쪽으로 紫燕 島(17세기에 永宗島로 개칭)에 도착한 다음에 急水門에 이르고 또 이틀만에 벽란도 에 당도하였다. 이에 대해 茶山 丁若鏞(1762 1836)은 서긍의 행로는 반드시 강화부 의 동남에서 손돌항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여 예성강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서긍이 말한 급수문은 손돌항을 가리킨다고 하였다.43) 그런데 고려시대 당시 조운선이나 상선의 경유지 여러 곳에 정자가 건립되어 있 었다. 중국 개경 해상항로의 중간 기항지였던 인천 자연도에 예전에 客館이 있었 는데 慶源亭이라 한다. 44)고 하여, 경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손님을 맞는 객관 역 할을 하였다. 조운선이 모두 모여 순풍을 기다리는 만경의 群山島에도 群山亭이라는 객관이 있었다.45) 1133년(인종 11) 당시 洪州 안흥량에 조운과 관련하여 安興亭이라 는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도 조운과 정자의 관련성을 높게 해준다.46) 따라서 당시 남쪽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은 개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甲串을 통과하였고, 갑곶에는 그러한 조운선을 통제하거나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정자가 존재하였고, 그 정자는 지형 이름을 따서 연미정이라고 명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강화해협은 고려 조선시대에 개경행이나 한양행 조운선이 지나는 뱃길이었고, 그곳에 연미정이 고려시대 때부터 있어 조운선을 감독하고 조류를 기다 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여겨진다. 3. 月串鎭의 설치 18세기 이후 자료에 의하면 연미정은 이전과는 달리 갑곶에 있지 않았다. 18세기 에 편찬된 뺷輿地圖書뺸에 연미정은 月串鎭 뒤쪽 봉우리 위에 있고, 月串鎭은 관아의 동북쪽 10리 연미정 아래에 있었다.47) 19세기 고종 대에 金正浩가 편찬한 뺷大東地 42) 고려 조운선은 개경 가까이의 東江과 西江에 도달한 후, 그곳에 있는 左倉과 右倉에 세곡을 입고시 43) 44) 45) 46) 47) 켰다(崔完基, 高麗朝의 稅穀 運送, 뺷韓國史硏究뺸 34, 한국사연구회, 1981, 47쪽). 뺷大東水經뺸 4, 瀦水.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9, 京畿, 仁川都護府, 山川, 紫燕島.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34, 全羅道, 萬頃縣, 山川, 群山島. 뺷增補文獻備考 157, 財用考 4, 漕運. 뺷輿地圖書뺸, 江華, 樓亭.鎭堡, 燕尾亭.月串鎭. - 147 -
16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志뺸에도 연미정은 月串鎭에 있으며 삼남의 선박이 지나가며 들리는 곳이었다. 19세 기에 간행된 여러 읍지에도 연미정은 한결같이 月串에 있었다. 그렇다면 연미정이 갑곶에서 월곶으로 이전한 것인가? 아니면 연미정은 그대로 있는데 그 지명이 갑곶에서 월곶으로 개명된 것인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江都保障論 이 줄기차게 제기되었다. 17세기 海防論의 대두는 강화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하였다. 그 결과 1627년(인조 5)에 강화부는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승격되고 1678년(숙종 4)에 鎭撫營 이 강화부에 개설되었고, 그와 함께 대규모 비축곡이 강화부에 조성되었다.48) 갑곶 의 운명은 이러한 방위체제의 변화와 직결되어 있다. 국초 이래 조선의 수군은 육군과 같이 主鎭-巨鎭-諸鎭 체제로 편제되었다. 경기도 수군은 주진(水使鎭)이 남양 花梁灣에 1곳, 거진(僉使鎭)은 교동 月串에 1곳, 제진 (萬戶鎭)은 남양 永宗浦, 안산 草芝梁, 인천 濟物梁, 강화 井浦, 교동 喬桐梁에 5곳 설치되어 있었다.49) 이 가운데 월곶진은 교동현 남쪽 16리에 있던 경기도 유일의 僉節制使 水軍鎭이었다.50) 그런데 남양 화량만에 있던 京畿 水營을 1629년(인조 7) 에 교동 월곶으로 移營하면서 그곳에 있던 월곶진을 없애고 화량진을 두었고, 교동 현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부사가 수사를 겸하도록 하였다.51) 그리고 1656년(효종 7) 에 월곶진을 강화 갑곶으로 移鎭하여 종전 명칭대로 월곶진이라고 하였다. 갑곳으로 옮긴 월곶진은 이진 당시 수군 첨사진이었지만, 1665년(현종 6)에 육군 첨사진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남양에 있는 영종진이 인천 자연도로 이진하면서 자연도를 영종도 로 개명하며 전처럼 영종진이라고 하였고, 안산에 있는 초지진과 인천에 있는 제물 진을 강화로 옮기며 역시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강화도 해안가에 鎭堡를 신 설하는 작업은 肅宗 대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52) 그 결과 18세기 중엽 뺷여지도서뺸 에 따르면, 강화 관내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선두보, 장 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문수진 등 13개의 진보가 들어서게 되었다. 48) 49) 50) 51) 趙樂玲, 17세기 江華島 備蓄穀의 마련과 운영, 뺷韓國史論뺸 51,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2005. 뺷經國大典뺸, 兵典, 外官職.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13, 京畿, 喬桐縣, 關防, 月串鎭. 뺷仁祖實錄뺸 20, 仁祖 7년 2월 24일(庚戌), 34-317. 뺷輿地圖書뺸, 江都府, 喬桐, 建置沿革. 52) 朴廣成, 丙子亂後의 江華島防備構築, 뺷畿甸文化硏究뺸 3, 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 1973(뺷韓國 中 世社會와 文化뺸, 민족문화사, 1991, 426 429쪽). 李敏雄, 18세기 江華島 守備體制의 强化, 뺷韓國史論뺸 34, 서울大 인문대 국사학과, 1995, 8 9쪽. - 148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17 진보의 배치만으로 해안수비에 만전을 기하기가 어려웠다. 진보 사이의 거리가 멀 어 방어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안가에 外城이나 石城을 쌓는 방안이 제 기되었지만 갯벌에 성을 쌓는 기술이 어렵다고 여기어 차선책으로 해안가 요충지에 墩臺를 축조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돈대란 강화도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선을 경계 하고 적병의 상륙을 차단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마침내 1678년(숙종 4)에 병조 판서 김석주가 강화도에 들어가 49곳의 축돈처를 물색하여 보고하였고, 그에 따라 공사를 착공하여 이듬해에 48개의 돈대를 완공하였다. 이후 돈대는 지속적으로 확충 되어 18세기 영조 초기에 53개에 이르렀다.53) 이 가운데 월곶에도 1679년(숙종 5) 에 月串墩臺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처럼 본래 나루터(津渡)였던 갑곶에 강화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17세기에 월곶 진, 월곶돈대 등의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갑곶에 군사진을 설치하는 문제는 일찍이 광해군 때에 후금 방어와 관련하여 제기된 적이 있었다.54) 1631년(인조 9) 이서의 지적처럼, 갑곶은 昇天浦와 함께 조수가 빠지면 배를 대기가 매우 어려운 천연의 요 새였다.55) 이러한 점 때문에 갑곶에 重鎭을 설치하고,56) 堡壘를 쌓아야 한다는 의견 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57) 이 문제는 드디어 효종 숙종 대에 실현되어, 갑곶에 월 곶진과 월곶돈대가 각각 신설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화의 甲串津에 교동의 月串鎭이 옮겨오면서, 갑곶은 월곶으로 이름이 바 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갑곶진처럼 월곶진은 읍성 동문 10리 밖에 있었고, 연미정을 두고 있었고, 삼남 조운선을 맞이하였다. 그렇다고 갑곶이란 지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725년(영조 1)에 강화유수 朴師益이 월곶과 갑곶 사이에 玉浦 望海 두 돈대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58) 갑곶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 세기 뺷海東地圖뺸와 19세기의 뺷大東輿地圖뺸를 보면, 갑곶은 본래 자리 아래에 있는 제물진으로 내려와 나루터로 존재하고 있다. 53) 송양섭, 17세기 江華島 방어체제의 확립과 鎭撫營의 창설, 뺷韓國史學報뺸 13, 고려사학회, 2002, 236쪽. 배성수, 肅宗初 江華島 墩臺의 축조와 그 의의, 뺷朝鮮時代史學報뺸 27, 조선시대사학회, 2003, 156 54) 55) 56) 57) 58) 쪽. 뺷光海君日記뺸 80, 光海君 6년 7월 11일(辛酉), 32-323. 뺷仁祖實錄뺸 25, 仁祖 9년 8월 23일(甲子), 34-441. 뺷仁祖實錄뺸 50, 仁祖 27년 4월 23일(辛亥), 35-350. 뺷仁祖實錄뺸 25, 仁祖 9년 8월 3일(甲辰), 34-439. 뺷英祖實錄뺸 6, 英祖 1년 6월 16일(壬午), 41-527. - 149 -
18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4. 燕尾亭과 利涉亭 갑곶에는 연미정 외에 利涉亭이라는 정자도 함께 있었다. 17세기 전반기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되는 뺷지나조선고지도뺸 강화지도 의 갑곶진 동서안쪽에 각각 연미 정과 이섭정이 각각 기재되어 있다.59)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에 따르면, 나루터 위 언 덕위에 있는 연미정과는 달리 이섭정은 나루터 연안에 있다. 후대의 뺷江華府志뺸에도 연미정은 在月串鎭上 하나, 이섭정은 在甲串津邊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60) 연미정과 이섭정의 위치가 달랐고, 그것은 기능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섭정의 기능과 관련하여 李詹이 지은 기문을 보도록 하자. 갑곶은 건널목이 좁 아서 건너기 쉽기 때문에, 부사 감사가 순찰할 때나 조정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하 도 모두 이 길을 거쳐 (강화)부로 들어가고, 기타 나그네들의 왕래도 이 길에 늘어 섰으므로 여기에 정자를 지어, 보내고 맞는 장소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 하였다.61) 이섭정은 갑곶나루의 객관 역할을 한 정자로 강화를 방문하는 관리를 맞 이하고 보내는 장소였다. 당시 경상도 곤양에서 남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露梁津에도 利涉亭이라는 동일명칭의 정자가 있었는데,62) 마찬가지 기능을 띠고 있었다. 이섭정이 사객영송의 객관 역할을 한 것은 다음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교동을 왕래하는 강화 寅火石津에 정자가 있었는데, 南益文이 지은 시에 의하면 경치가 아 름다웠다.63) 해남을 왕래하는 진도 碧波津 나루터 어귀에 碧波亭이 고려 때부터 있 어 사신을 영송하고 위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64) 고려 때에 松都의 관문인 碧瀾 渡에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관원을 배치하고 草樓(息波亭으로 개건)가 있었 다.65) 驛, 院, 津, 渡 등의 교통요지에 고려시대 때부터 정자가 있어 관리 영송처와 행인 휴식처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갑곶에는 강화부 관내 3대 津 院이 개설되어 있었다.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에 수 록된 경기도 통진으로 통하는 甲串津院, 교동으로 통하는 寅石津院, 황해도 풍덕 개성으로 통하는 昇天府津院이 그것이다. 뺷先祖 江華先生日記뺸에 보이는 甲津과 甲 59) 60) 61) 62) 63) 64) 65) 강화군, 뺷강화 옛지도뺸 6, 2003, 12쪽. 뺷江華府志뺸, 亭臺(뺷邑誌뺸 11, 亞細亞文化社, 450쪽).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12, 江華都護府, 樓亭, 利涉亭.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31, 慶尙道, 昆陽郡, 樓亭, 利涉亭.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12, 江華都護府, 山川, 寅火石津.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37, 全羅道, 珍島郡, 樓亭, 碧波亭. 뺷陽村集뺸 14, 記, 息波亭. - 150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19 院이란 바로 갑곶진과 갑곶원을 각각 줄인 것임에 분명하다. 역 진 원 도 모두 주요한 국가통치시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거나 선박 을 제공하고 인원을 배치하였을 뿐더러, 정자를 짓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 이섭정 은 甲串津의 津衙, 甲串院의 院衙 역할을 수행하는 건물이었다. 실제 강화부사 全舜 弼(1514 1581)이 1574년(선조 7)에 강화로 순력 나온 경기감사를 갑곶까지 따라와 떠나보냈고(5월 12일), 작황을 조사하러 온 敬差官을 맞이하기 위해 갑곶에 이른 적 도 있었다(8월 30일). 또 1576년(선조 9)에 경차관을 맞이하기 위해 갑곶에 왔을 뿐 만 아니라(9월 1일), 순력나온 감사를 갑곶진 변에서 배례하여 환송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10월 24일).66) 이렇게 볼 때 이섭정은 조세 감독소 역할을 한 연미정과는 달 리 진이나 원의 부속건물로 존재하였다. 그런데 이섭정도 뺷여지도서뺸에 의하면, 중간에 사라지고 만다. 아마 鎭과 墩臺 등 의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그곳이 더 이상 나루터 역할을 할 수 없어 그러했을 것 이다. 이섭정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에 월곶진의 城樓인 朝海樓가 들어섰다. 1849년 (헌종 14)에 강화유수는 관내 성루와 수문의 보수를 건의하면서, 본부 외성의 동문 으로 월곶진 연미돈 아래에 있는 조해루는 삼남 조운선이 정박하는 도회소이자 兩 京 해로의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평하였다.67) 이섭정은 사라지고 그 자 리에 조해루가 들어서 월곶돈대의 성루 역할을 하였다. Ⅳ. 燕尾亭의 풍경 1. 아름다운 경치 연미정은 강화 관내에서 으뜸이라고 할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연미정의 풍치를 묘사한 뺷輿地圖書뺸에 의하면, 정자에 오르면 앞이 훤하게 트여 있어 5월에도 덮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박한 배 돗대의 위아래로 물고기와 갈매기 가 노닐고,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강산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간혹 중국의 명승지 岳 66) 뺷先祖 江華先生日記뺸, 인천광역시, 2006. 이 자료는 全舜弼(1514 1581)이 강화부사를 역임하면서 기록한 일기이다(이성임, 해제 ). 67) 뺷江華府留營狀啓謄錄뺸, 道光 29년 2월 29일(뺷各司謄錄뺸 4, 국사편찬위원회, 1982, 151 152쪽). - 151 -
20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陽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굳이 흠을 꼽으라고 하면 모래와 물빛이 그리 맑지 않다 는 점이 지적되었다. 연미정의 아름다움은 문사들의 시에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일찍이 허백당 成俔 (1439 1504)은 老蒼한 천그루 松樹가 空闊에 임한 백척 石臺를 둘러싸고 있어 불 어오는 바람을 더욱 시원하게 한다고 읊었으며,68) 李端相(1628 1669)은 樓臺의 月 色이 滄茫하고 만리의 강이 제비 꼬리처럼 나뉘어 길게 흐르니 李白이 노닌 采石江 같다고 하였다.69) 이 외에도 많은 문사들이 연미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경치가 아름다워 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자연히 그곳에 문사들의 別墅가 들어 서게 된다. 고려말 조선초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선 택하여 농지와 자택이 인접한 곳에 별서를 건립하여 사회적 활동을 폈다. 일반적으 로 별서는 樓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성종 중종 대에 왜구와 여진 토벌 의 명장이었던 莊武公 黃衡(1459 1520)이 연미정을 자신의 별서로 삼았던 이유는 바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려 때부터 조운과 관련되어 설립되어 있던 연미정을 황형이 소유하게 된 경위에 대해, 왜적을 무찌르고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국왕 中宗이 연미정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강화군 홈페이지에 수록된 이러한 지적은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뺷江華史뺸에 는 황형이 연미정을 세웠다고 추측한 바 있으나,70) 이는 앞서 살핀 것처럼 사실과 거리가 먼 내용이다. 본래 강화 출신인 黃氏家에서 전부터 연미정 일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위직을 역임하고 군공을 세운 황형이 연미정을 자신의 별서로 삼 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16세기에 접어들어 科田法 체제가 무너질 때에 공 유지를 사유지로 점유하는 현상은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비록 황형이 연미정을 자신의 별서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1년에 수차례 오는 조운선을 막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운선이 오면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볼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사연이야 어떠하였든 간에 연미정에는 황형의 田舍가 있었고, 그는 거기에 소나무 수천그루를 심어 임진왜란 때에 긴요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71) 황형 사후 그의 후 손들은 연미정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그의 아들 黃琦와 증손자 黃致 68) 69) 70) 71) 뺷虛白堂詩集뺸 5, 詩, 與點馬差使兩員遊燕尾亭. 뺷靜觀齋先生文集뺸 1, 詩. 江華文化院, 뺷江華史뺸, 1976, 419쪽. 뺷국역 성소부부고뺸(민족문화추진회) 23, 설부, 149쪽. - 152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21 敬(1554 1627), 황치경의 손자 黃戽(1604 1656)와 외손자 鄭維城(1596 1664)이 모두 연미정에서 살았던 것으로 뺷여지도서뺸 人物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묘호 란 때에 여진 장수 일행이 연미정 근처 황치경 집에서 머물렀던 사실도 있다.72) 연 미정은 황씨가의 세거지였다. 황씨가 가운데 황형의 증손자 秋浦 黃愼(1562 1617) 과 5대손 황호는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인물이다. 그런데 17세기 강화지역에 국방시설이 증설될 때에 연미정은 그 일원으로 편입되 면서 운명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교동에 있던 월곶진이 갑곶으로 옮겨오자, 그곳 에 있던 황씨가 소유의 田土 4 5日耕이 신설 월곶진의 건물지와 관용지로 편입되 고 말았다. 그런데 移鎭을 논의하던 1655년(효종 6)에 연미정 근처에 士夫家의 전토 가 있어 그것을 매입하거나 公田(官屯田)으로 相換한 후에야 설진이 가능하다는 의 견이 개진되었고, 그 자리에서 정유성은 그 전토는 자신 외가의 世傳之物 이라고 밝 혔다.73) 그럼에도 불구하고 設鎭 당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본주인은 공연히 전 답만 잃은 꼴이 되어 반환 요청이 일게 되었다. 그 해결책과 관련하여 1661년(현종 2)에 영의정 鄭太和는 이른바 月串鎭의 官舍와 田畓은 故監司 黃致敬의 農庄이었습 니다. 그 地勢가 방어의 要衝이 될 만한 곳이었기에 月串鎭을 이곳에 옮겨 설치하 고, 그의 家舍를 이미 본진의 公廨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답이 별로 진의 공용 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도로 내주게 하고, 家垈도 해조로 하여금 혹 참작해서 값 을 쳐주든지 혹은 다른 곳의 公舍와 바꿔주든지 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하 였다. 이에 대해 국왕은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4) 이러한 건의와 명령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보 상 노력을 하였으나, 당시 황호가 적극 사양하여 중단되었다. 그 후 황호의 아들 黃 益은 아버지와는 달리 가난하고 피폐한 나머지 보상을 희망하여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숙종 대에 접어들어 강화지역 일원에 돈대를 축조하면서 연미정에도 돈대 가 들어섰는데, 바로 그 때에 과거 鎭址로 편입되었던 황씨가 토지에 대한 보상 문 제가 다시 불거지게 되었다. 새로이 墩所로 정한 2 3곳에 다른 人家와 民田이 있 는데, 그 사람들의 불만이 상당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 다. 이에 1678년(숙종 4)에 兵曹判書 金錫胄와 副司直 李元禎이 강화도를 순찰하고 72) 뺷承政院日記뺸 17, 仁祖 5년 2월 21일. 73) 뺷承政院日記뺸 136, 孝宗 6년 8월 8일. 74) 뺷備邊司謄錄뺸 21, 顯宗 2년 6월 3일, 2-689. 뺷顯宗改修實錄뺸5, 顯宗 2년 6월 3일(庚辰), 37-235. - 153 -
22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돌아와서 築墩處 49所를 작성한 서계를 봉진하면서, 경작하지 않는 堰田을 헤아려 鎭址로 편입된 황형의 遺基로 보상해준다면 거저 빼앗았다는 기롱은 없을 것이고, 돈소로 빼앗기게 될 백성들의 마음도 위무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75) 황씨가와 주 변 민인들의 편입 토지를 언전으로 함께 보상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시도 는 당시 강화도에 언전 개발 붐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76) 연미정 자리에 월곶진과 월곶돈대가 들어서면서 황형의 후손들은 하나 둘씩 연 미정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연미정도 함께 퇴락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뺷여지도서뺸 연미정 조항에는 留守府에서 돈대를 설치한 후 건물은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 정자를 갑자년(1744년, 영조 20년)에 유수 金始爀이 다시 세 웠다. 고 기록되어 있다. 1679년 월곶돈대 설치 후 사라진 연미정을 1744년에 강화 유수 김시혁이 중건했다는 것이다. 김시혁은 흙으로 쌓은 강화 外城을 헐어버리고 구은 별돌로 고쳐 쌓는 일도 펼쳤다. 김시혁이 중건한 이후 1783(정조 7)에 강화유 수 金魯鎭이 기문을 지었고, 1891년(고종 28)에 연미정은 또 다시 중수되었다. 2. 봄날의 燕尾亭 서울 용산강에서 통진 유도까지 1백리이고, 유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해로와 북쪽으로 올라가는 해로 두개로 나누어진다. 남쪽 해로는 유도에서 갑곶-손돌항-영종 도를 거쳐 경기남부와 충청도 및 전라도로 내려가는데,77) 이 해로를 통하여 삼남 세곡선이 올라온다. 삼남 조운선은 연미정에 언제 쯤 도착할까? 고려시대의 조운 규정을 뺷高麗史뺸 식 화지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州郡의 조세를 2월까지 가까운 조창에 運輸하고, 近 地는 4월까지 遠地는 5월까지 京倉에 輸納하는 것을 마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당 시 4 5월이면 개경 지근거리의 연미정에 조운선이 도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414년(태종 14)에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큰 바람에 패몰한 사건을 처리하 75) 뺷肅宗實錄뺸 7, 肅宗 4년 10월 23일(庚寅), 38-397. 76) 朴姬玉, 朝鮮 肅宗朝 江華島의 農地開拓과 그 經營問題, 뺷歷史敎育뺸 88, 역사교육연구회, 2003. 77) 강석화, 조선후기의 경기남부 해로와 大阜 靈興島, 뺷畿甸文化硏究뺸 28, 인천교육대학교 기전문화 연구소, 2000. 이철성, 조선후기 뺷輿地圖書뺸에 나타난 인천 지역의 田結稅와 漕運路 연구, 뺷인천학연구뺸 6, 인 천대 인천학연구원, 2007. - 154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23 는 과정에서 七月行船 古人所忌 혹은 七月行船 曾有敎禁 이라 하여 7월 발선은 금 지되었다.78) 뺷經國大典뺸 漕轉 조항에 따르면, 11월 1일에 조창을 열어서 익년 1월까 지 수세를 마치고, 6월까지 상납을 마치도록 하였다. 16세기 중반 법령을 모은 뺷各 司受敎뺸에서는 법성 군산 아산창 등의 전세를 3월 안에 발선하도록 하였다.79) 연 미정 도착일이 6월을 넘겨서는 아니 되었다. 발선 상납일은 이후 개정되어 뺷續大典뺸 조전 조항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즉, 충청도 황해도는 2월 20일 이전에 발선하여 3월 10일 내에 상납해야 하며, 전라도 는 3월 15일 이전에 발선하여 4월 10일 내에 상납하여야 한다. 경상도는 3월 25일 이전에 발선하여 5월 15일 내로 상납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러한 지역별 발선 상 납일은 1698년(숙종 24)에 완성된 뺷受敎輯錄뺸에도 거의 유사하게 수록되어 있다.80) 발선 상납일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기한이 지나도록 발선하지 못한 경우 당해 수령은 사령을 박탈하고 차사원 해운판관은 파직 처분한다고 하였고, 기한 전에 발 선했어도 상납기한을 넘겨 상납한 경우에는 감관 색리 사공 격군은 장 100형에 처한 후 정배한다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 조운선은 법적으로 3 5월 봄 날에 연미정에 당도해야 법으로 정한 기일 안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再運을 하더라도 충청도는 4월 30일 이전에 발선하여 5월 20일 안에 상납하고, 전라도는 5 월 10일 이전에 발선하여 6월 5일 안에 상납하도록 하였다.81) 바로 이때가 바람이 순조로운 시기로 파도가 치거나 바닷길이 어두워질 우려없이 안전운항을 할 수 있 었기 때문에 발송기일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실제는 어떠하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강화부사 全舜弼이 작성한 일기를 보면, 1574년 4월 23일에 60척이, 1576년 4월 22일에 18척이, 그리고 1577년에는 4 월 10일 무렵에 선척을 알 수 없는 조운선이 당도했다. 또 다른 사례로 西江에 도 착한 조운선을 보면, 1721년(경종 1) 4월 21일에 충청도 아산창 소속 11척이, 5월 14일에 전라도 성당창 법성창 군산창 소속 31척이, 5월 19일에 전라도 법성창 소 속 25척이, 1772년(영조 49) 4월 5일에 전라도 군산창 성당창, 경상도 우조창 소속 59척이 서강에 도착한 적이 있다.82) 또 1875년(고종 12) 3월 15일에 함열 성당창에 78) 79) 80) 81) 뺷太宗實錄뺸 28, 太宗 14년 8월 4일(甲辰), 2-29. 뺷各司受敎뺸, 戶曹受敎. 뺷受敎輯錄뺸, 戶典, 漕轉. 뺷六典條例뺸, 戶典, 戶曹, 漕轉. - 155 -
24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서 8읍의 전세 대동 기타 1만 6천석을 실은 12척의 조운선이 출발하여 4월 7일 연미정에 도착한 적도 있다.83) 비록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이상을 종합해 볼 때에 조운선은 대체로 법에서 정한 일정을 지켜 5월 안에 연미정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렇다고 발선 기일이 국초부터 100% 준수되었던 것은 아니다. 1414년(태종 14) 한 해에 전라도 조운선이 척당 4번이나 조운한 적이 있었다.84) 호남 10만석과 호서 6만석 등 16만석(전세와 대동)을 척당 1천석씩 적재한다면 1백 60척이 필요할 텐데, 경강선과 훈국선을 통틀어 120척을 넘지 못하여 재운이 불가피한 상황도 1784년(정 조 8)에 발생하였다.85) 1년 2운이나 4운을 하면 자연 발선 상납일은 지켜질 수 없 다. 충청도의 경우 선척이 부족하여 3운까지 하지 않으면 아니 되어 9 10월까지 운송한 적도 있었다.86) 실제 강화해협에서 1751년(영조 27)에 전라도 순천 전세선, 경상도 창원 상납선, 전라도 법성창 조운선 등이 致敗되었는데, 모두 6 7월에 발생 했다. 18세기에 作隊制 실시와 舟橋司 설치로 임운제가 정착되면서 발선 상납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발선 상납일을 넘기는 사례가 전보다 더 늘고 있었 다. 이는 임운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선원들의 故敗 愆期 永泊 때문에 기인하였 다.87) 19세기 말기 충청도 해안지역에서 발생한 임운선 105건, 조운선 85건 등 모 두 190건의 해난사고를 분석한 연구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사고 발생건이 7월을 최고로 7 11월에 99건으로 집중되었고, 3 5월은 고작 22건 에 불과했다.88) 조운선의 출발 지연이나 침몰은 제 때에 세곡 납입을 지체시켜 결 과적으로 국가의 재정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1817년(순조 17)에 臭載나 永 泊 등의 이유로 기한을 지나도록 선혜청에 미납된 양호 대동미 수량이 수만석이 되 었으니,89) 이러한 상태에서 원만한 재정운영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82) 뺷版籍司謄錄뺸(뺷各司謄錄뺸 81). 83) 吉田光男, 李朝末期の漕倉構造と漕運作業の一例 - 뺷漕行日錄뺸にみる一八七,五年の聖堂倉, 뺷朝鮮學 84) 85) 86) 87) 88) 報뺸 113, 조선학회, 1984. 뺷太宗實錄뺸 26, 太宗 14년 6월 2일(癸卯), 2-19. 뺷備邊司謄錄뺸 167, 正祖 8년 8월 20일, 16-467. 뺷備邊司謄錄뺸 178, 正祖 15년 1월 21일, 17-713. 뺷備邊司謄錄뺸 205, 純祖 16년 11월 20일, 20-992. 吉田光男, 一九世紀忠淸道の海難-漕運船の遭難一九0事例を通して, 뺷朝鮮學報뺸 121, 조선학회, 1986, 64 65쪽. 89) 뺷備邊司謄錄뺸 206, 純祖 17년 10월 5일, 21-50. - 156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25 없었다. 그러면 연미정에는 매년 몇척의 세곡선이 거쳐 갔을까? 조선전기에 연미정에 정 박한 선박 소속은 충청도와 전라도였다. 뺷경국대전뺸에 의하면, 전라도 조운선은 영 산창 53척, 법성포창 39척, 덕성창 63척 등 155척이었고, 배속된 漕軍은 5,960명이 었다. 여기에 충청도의 공세곶창 60척까지 합친다면,90) 2도의 200척 이상의 조운선 이 매년 연미정을 들렀을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조운선과 임운선이 연미정에 정박했다. 조운선의 경우 영조 대에 아 산 공진창 15척(조군 720명), 함열 성당창 11척(조군 528명), 영광 법성창 28척(조군 1344명), 옥구 군산창 17척(조군 816명), 창원 마산창 20척, 진주 가산창 20척, 밀양 삼랑창 15척 등 모두 126척이었다. 여기에 충청도(32읍)와 전라도(25읍)의 57직납읍 임운선까지 합치면 200척을 크게 상회하는 세곡선이 연미정에 매년 정박하였을 것 이다. 조운선은 국초부터 30척으로 1대를 편성하여 운항하도록 하였다.91) 도착 정박 및 출항은 船隊가 같아야 하며, 선대에 소속된 선박은 먼저 떠나거나 늦게 도착하여 서는 아니 되었다. 만일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사공은 그 죄를 추심한 후 태거하며 押領官은 不應爲律로 논죄하였다. 임운선도 4 5고을마다 부근 수령으로 차사원을 삼으라고 하여, 대규모이지는 않지만 조운선처럼 선단을 이루어 항해하였다. 따라서 연미정에 한 번 입항하는 선박은 최대 30척에 육박하는 대규모였다. 실제 60척이 한꺼번에 정박한 적도 있었다. 3. 바빠지는 江華府使(留守) 연미정의 3 5월은 분주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200척 가까운 삼남 조운선과 임운 선이 선단을 이뤄 연달아 올라와 정박하기 때문이다. 세곡선이 정박하면 그것을 지 휘 감독하려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승선한 다수의 선원들에 의해 선착장은 붐 비기 시작하였다. 수일간 머무를 경우 거대한 장관을 이루며 더없이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90) 崔完基, 朝鮮時代 牙山 貢津倉의 설치와 운영, 뺷典農史論뺸 7,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2001, 336쪽. 91) 뺷大典續錄뺸, 戶典, 漕轉. - 157 -
26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뺷대전속록뺸과 뺷속대전뺸에 의하면, 조운선이 통과할 때 각읍 수령은 경내 嶼草(암 초)의 위아래와 안팎에 모읍 모서초 라고 크게 쓴 장대목 표식을 세워 만조시에도 船人들이 멀리서 보고 치패당하지 않도록 하고, 水路를 잘 아는 자를 선박마다 2 3 인씩 승선시켜 수로를 지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상의 일을 태만히 한 守令 僉使 및 萬戶는 파면한다고 하였다. 관내 해역에 들어온 선박의 안전운항을 유도해야 할 책무는 경유지 守令과 鎭將에게 있었다. 또한 조운선이 관내 해역에서 불순한 일기나 암초 충돌로 패몰하게 되면, 수령은 지체없이 나가 조사하고 水浸米를 구출해야 하였다. 조운선이 파선에 이른 후 2일내 로 지방관이 직접 나가지 않고 향청의 향임을 대신 파송하거나 그 改色을 꺼려하여 수침미를 모두 구출하지 않고 포구주민들로 하여금 偸食하게 하는 경우에는 모두 구속 처벌하도록 하였다. 파선한 곳의 지방관이 파선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수로 인도선이 먼저 쫓아가 근방 邊將에게 이를 보고해야 하며, 변장은 곧 일 일이 수침미를 구출해야 하며 만일 수침미 구출을 즉시로 하지 않을 때에는 당해 변장을 구속 처형하도록 하였다. 파선한 장소가 본관에서 1일의 도정에 떨어져 있으 면 수침미 및 건열미는 본관이 독단으로 개색하고, 2일 이상의 도정이면 수침미는 지방관이 개색하고 건열미는 본관이 비납하도록 하였다. 해난사고가 발생하면 그에 대한 처리도 관내 수령과 진장의 책무였다. 그리고 이유없이 정박지에 오래 머물며 몰래 私物을 싣는 행위, 세곡을 매매하는 행위, 몰래 파선시키는 행위, 和水라 하여 세곡에 물을 붓는 행위 등 부정행위 또 한 정박지 수령이나 진장이 감독해야 할 사안이었다. 정박지에서 세곡을 빼돌리는 갖가지 부정행위가 발생하고 있었기에, 수령과 진장으로 하여금 단속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곡선이 연미정에 접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바쁘 게 움직일 사람은 江華府使였다. 폭이 좁은데다 암초가 많은 강화해협을 세곡선이 무사히 통과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런 점 때문에 치패사고가 빈번하게 발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강으로 들어가기 전 수일을 머무는 마지막 점검지였기 때문 이다. 1749년(영조 25)부터 1751년까지 江華留守를 역임한 金光世가 상부에 올린 啓 文을 모은 뺷江都啓錄뺸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92) 동 기간 동안 3건의 세곡선 침몰 사건이 연미정 앞에서 일어났다. 그 때 김광세는 침몰선에서 물 묻은 곡물을 건져내 92) 廉定燮, 18세기 중반 江華府 留守의 牧民에 관한 연구, 뺷인천학연구뺸 2-1, 2003, 101 102쪽. - 158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27 고 이를 말리거나 또는 다른 곡물로 바꾸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치패 원인을 조 사하여 船人이나 제3자가 고의로 배에 위해를 가한 것인지 여부를 가리고, 故敗의 의심이 있을 때 船人과 치패 과정을 지켜본 證人 및 치패선을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에 나간 別將이나 萬戶 등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고, 船人에게 拷訊을 가하 는 경우도 있었다. 또 강화부사는 조운선을 점검하기 위해 서울에서 연미정에 내려온 戶曹 관리를 접대해야 했다. 삼남 조운선이 연미정에 정박하고 호조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법 적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초기부터 호조 관리가 연미정에 나와 조운선을 점검한 후 한강으로 들여보냈다. 이와 관련하여 1474년(성종 5) 2월 에 호조에서, 江華의 燕尾亭 등지에는 따로 朝官을 보내어 漕船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京江까지 거느려 운반하여서, 거느리는 배들이 오래 머물러 손상되지 않도록 하소서. 93)라고 하였다. 이어 9월에 領事 曹錫文은 조운선의 패몰이 잦은 것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戶曹 判書를 역임했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三道 敬差官을 혁파하고 특별히 戶曹 郞廳을 보내어 배를 몰고 오게 하면 거의 실패할 걱정이 없 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94) 이러한 건의는 정책으로 실행되어 연미정에 戶曹郎官이 파견되었다. 정5품의 正郞 이나 정6품의 佐郞을 낭관이라 한다. 낭관은 6조의 실무책임을 맡는 직임으로 그 사무가 매우 중요하다. 호조의 경우 낭관은 모두 6원으로 전곡출납을 나누어 관장하 고 있었다.95) 호조낭관이 세곡 감독차 강화에 오면, 강화부사는 그를 접대해야 했 다. 강화부사 전순필이 남긴 日記에 의하면, 戶曹正郞 李凝과 部將 林起文이 조운선 을 척간하는 일로 1574년 4월 12일 강화 관아에 들어와 머물고 있어 전순필이 접견 하였다. 23일 조운선 3척이 올라왔다고 하니, 정랑과 부장이 연미정으로 떠났다가 26일에 관아로 돌아오니 다례를 베풀었다. 27일 정랑과 부장이 조운선을 척간하기 위해 다시 연미정으로 향하였고, 60여척에 이른 조운선을 척간한 후 서울로 향했다. 이 때 정랑은 16일간, 60척의 조운선은 5일간 연미정에 머물렀다. 1576년에는 4월 5일 관내 井浦萬戶가 조운선을 호송하는 일로 서울로 가다가 들렀기에 전순필이 다 례와 점심을 함께 했다. 4월 19일 조운선을 척간할 호조정랑 李承楊과 부장 閔鯤瑞 93) 뺷成宗實錄뺸 39, 成宗 5년 2월 22일(丁丑), 9-91. 94) 뺷成宗實錄뺸 47, 成宗 5년 9월 11일(癸亥), 9-145. 95) 戶曹啓曰 本曹郞官 專掌出納錢穀(뺷承政院日記뺸 182, 顯宗 5년 1월 11일). 戶曹啓曰 本曹郎廳六員 各有分掌(뺷承政院日記뺸 254, 肅宗 2년 6월 25일). - 159 -
28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가 객사에 도착하자 함께 다례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22일에 조운선 18척이 경내 에 도착하자 23일 이승양은 연미정을 다녀온 후, 계속 강화 읍내에 머물며 부사의 접대를 받다, 27일에 연미정으로 간 후 서울로 갔다. 이 때 정랑은 9일, 18척의 조 운선은 6일이나 연미정에 머물렀다. 1577년에는 4월 1일 조운선을 척간할 일로 정 랑 朴應立과 부장 李漢衝이 강화에 들어왔다. 박응립은 전순필의 접대를 받은 후, 8 일에 장인 일로 떠났고, 부장은 11일에야 떠났으니, 10일 가량 머문 것이다. 그런데 후기에는 조운선 감독 시스템이 변하여 호조정랑이 연미정에 나오지 않았 다. 대신 충청도 元山과 安興에서 중간점검을 받도록 하였다. 원산에서 조운선을 점 검하기 시작한 시기는, 元山島 목장의 말을 大山串에 옮기고 충청 수군 우후를 원산 에 진주하게 하여 해안을 경비하게 한 1669년(현종 10)부터 비롯된 것 같다.96) 뺷續 大典뺸에 따르면, 조운선이 元山과 安興에 이르면 元山差使員(忠淸 水使나 虞候로 차 정)과 安興鎭僉使가 검사하고, 만일 양처의 점검 증명서가 없으면 감관 색리 사 공 격군 등은 모두 장 1백형에 처한 후 원지에 정배하고 차사원은 구속 처형하며 당해 지방의 수령은 논죄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강화해협에 접근하는 세곡선에 대한 감독 책임은 전적으로 강화 부사에게 있었고, 그 임무는 안전운항을 유도하고, 치패선을 조사하고, 부정행위를 단속하고, 호조정랑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혼자 집행하는 것 은 아니었다. 강화부가 유수부로 승격된 후, 행정실무는 종4품 經歷이 관장하였는데, 치패선에 대한 조사와 보고에 대한 실무 또한 경력에게 있었다. 가령, 1860년(철종 11)에 강 화 경계를 무사히 출발한 경상 좌창 소속 조운선 15척이 통진 경계에 이른 후, 한 척이 높은 파도로 표류하여 월곶진 연미돈대 앞 암초에 좌초하고 적재곡물이 모두 물에 잠긴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강화유수는 본부 경력이 휴가를 얻 어 상경하였으니, 치패원인과 곡물수효를 경력이 돌아오는 대로 상세히 보고하겠노 라고 하였다.97) 1863년(철종 14)에 강화부 前經歷 申命翼에 대한 추고 사건이 있었 는데, 그는 鉤拯官으로서 致敗船格을 刑訊하지 않고 拯出穀을 混同改量하여 同價發 賣한 혐의를 받은 후 뺷대전통편뺸 推斷조에 따라 장 80에 처해진 적이 있었다.98) 이 96) 뺷顯宗實錄뺸 16, 顯宗 10년 2월 3일(丙寅), 36-611. 97) 江華府留營狀啓謄錄, 咸豊 10년 6월 30일(뺷各司謄錄뺸 4, 208쪽). 98) 江華府留營狀啓謄錄, 同治 2년 7월 18일(뺷各司謄錄뺸 4, 229쪽). - 160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29 로 보아 치패선의 처리는 경력 몫이었음에 분명해 보인다. 또한 조운선의 유도 점검 책임은 관내 진장에게 위임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 럼, 선조대에 강화 남쪽에 있는 정포만호가 올라오는 조운선을 호송하여 연미정에 무사히 정박시켰다. 17세기에 月串鎭이 연미정에 개설되면서, 월곶첨사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뺷속대전뺸에서는 강화의 연미정에서는 강화유수가 따로 근처의 邊將을 差使員으로 정하여 조운선 호송을 주관시키며 그 차사원의 성명은 미리 본조에 보고하도록 하였고, 조운선이 도착하면 차사원은 즉시 검사한 후 출항 시켜야 하며 만일 지체하는 폐가 있을 때는 엄중히 논죄한다고 하였다. 강화유수는 월곶첨사를 조운선 감독 차사원으로 선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의 사례가 참고된다. 1797년에 正祖가 화성에서 돌아오다가 舟橋(배다리)에 이르러 監官 金鎭郁으로 月串僉使를 삼았다. 이때 강화유수 金履翼이 월곶첨사는 漕稅船을 호송하는 都差員이니 섬의 표식을 잘 관리하고 물길을 잘 아는 현임첨사 朴宗秀를 그대로 두자고 하였다.99) 정조는 철회하고 김진욱을 禿城僉使로 임명하였다. 이제 월곶첨사는 강화해협에 접근하는 조운선의 안전운항에 만전을 기하였고, 정박한 조 운선의 승선원과 적재곡을 점검하여 點船件記 라는 문서에 작성하여 호조에 보고하 였다. 이러한 일은 경력 이하의 장교와 진보 별장에 대한 포폄 권한이 있는 강화유 수에 의에 인사고과의 대상이 되었다. 가령, 경력 이하 제 장교, 각 진보 변장 및 각 영장에 대한 1830년(순조 30) 秋冬褒貶에서 월곶첨사 張雲祚가 勤著護漕 職盡詗 律 로 上等을 받은 적이 있다.100) 강화해협은 험로이고, 마지막 점검지이기 때문에, 월곶첨사의 조운선 감독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4. 북적대는 사람들 연미정은 세곡선을 점검하러 나온 관리들뿐만 아니라, 승선원들에 의해서도 붐비 는 곳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운선에 승선하여 연미정에 정박한 후 심지어 수 일간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승선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세곡의 수합과 선적 및 발선에 대한 제1차적인 책임은 관내 守令에 있었다. 그리 고 조창 현지에서 漕船과 漕卒 및 船積을 점검하는 등 조운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은 99) 뺷正祖實錄뺸 46, 正祖 21년 2월 22일(癸巳), 47-10. 100) 江華府留營狀啓謄錄, 道光 10년 12월 초10일(뺷各司謄錄뺸 4, 122쪽). - 161 -
30 뺷인천학연구뺸 7(2007.8) 종5품의 海運判官이었다.101) 충청도와 전라도에만 파견된 해운판관은 1697년(숙종 23)에 혁파되어 양도의 都事로 하여금 각각 겸하게 하다가, 곧이어 그마저 폐지되기 에 이른다. 또한 때에 따라 漕轉敬差官이나 漕運體察使 등도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들 모두는 현지에서 감독업무를 행사할 뿐 직접 승선하여 운송업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조운선의 경우 조창별로 선단을 이뤄 항해하는데, 거기에 승선하여 운항을 총 지 휘하는 호송관을 差使員이라고 한다. 차사원은 세곡을 조창으로 수합하는 일, 수합 한 세곡을 조운선에 적재하는 일, 선단을 이뤄 운항하는 일, 그리고 세곡을 경창에 납부하는 일 등을 수행하였다.102) 그래서 차사원은 보통 押領官 領送官 領納官 領運官 등으로도 불리었지만, 전임관이 아니고 임시 차출관이다. 전기에는 水軍 萬 戶를 차출하였는데, 선박을 파손하지 않고 조운업무를 무사히 마친 만호는 포상한다 고 하였다. 후기에는 차사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충청도의 貢津倉 차사원은 邊將 중 근면하고 능력이 있는 자를 차출하도록 하다가, 1762년(영조 38)에 牙山縣 監이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라도의 聖堂倉 차사원은 群山僉使로 하여금 겸하게 하다가 1791년(정조 15)에 咸悅縣監이 맡도록 하였고, 群山倉과 法聖倉 차사원은 군 산 법성첨사로 하여금 겸하게 하였다. 또한 경상도의 馬山倉(좌조창)은 都差使員이 라 하여 昌原府使가 거두고 領運差使員이라 하여 龜山僉使가 운송하도록 하고, 駕山 倉(우조창)은 晋州牧使와 赤梁僉使를, 三浪倉(후조창)은 密陽府使와 薺浦萬戶를 각각 도차사원과 영운차사원으로 삼았다. 조운선에는 監色과 沙格도 승선해 있었다. 감색이란 각읍의 監官과 色吏를 말하는 데, 고을별 세곡 수납을 책임지우기 위해 이들을 승선하게 하였다. 조운선에 승선하 는 감관을 領船監官이나 騎船監官이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이름만 걸어놓고 실제 승선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영선감관은 반드시 捧上監 官 중에서 파송하며, 만일 다른 사람을 대신 파송하는 일이 있을 경우 虧缺의 유무 를 막론하고 守令은 파면하며 座首는 장 1백형에 처한 후 정배한다고 하였다. 1개 월 가량 왕래하는 조운선에 승선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어서 가능하면 피하려고 하 였을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전라도 求禮에서는 막대한 재원을 관리하는 民庫監官 이 부정을 저지를 경우 강등시켜 세곡선에 승선하도록 하는 벌칙을 제정하였다.103) 101) 六反田豊, 海運判官小考, 뺷年報朝鮮學뺸 1, 구주대학 조선학연구회, 1990, 63쪽. 102) 六反田豊, 李朝初期の漕運運營機構, 뺷朝鮮學報뺸 151, 조선학회, 1994, 34쪽. - 162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31 그리고 조운선을 직접 운항하는 沙工(船長)과 格軍(船卒)의 승선 인원은 법전 규정 상 척당 사공 1인과 격군 15인이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운선 선단에는 차사원, 각읍 감관과 색리, 사공과 격 군이 승선하였다. 따라서 조운선 한 척에는 20여명이, 30척 기준의 한 선단에는 6백 여명이 승선하였을 것이다. 현재 확인된 바, 16세기 선조 대에 최대 60척 최소 18척 이, 그리고 19세기 고종 대에 12척이 한꺼번에 선단을 이뤄 연미정에 정박한 적이 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여 60척인 경우 1천명 이상이, 12척인 경우 200명 이상이 승선하게 된다. 실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1875년에 8읍의 세곡을 싣고 함열 성당창을 출발하 여 연미정을 거쳐 서울로 들어간 12척의 조운선단을 검토해 보자. 함열현감 趙熙百 을 제외하고 漕屬으로 色吏 3명과 及唱 2명과 使令 5명과 通引 2명과 房子 1명과 刀子 1명, 선원으로 沙工 12명과 格軍 180명(척당 15명), 그리고 雜色軍丁領校 1명, 8읍의 吏鄕 24명(3명 불참), 引晝校吏 12명 등 240명이 3월 23일 웅포에서 출발하였 다. 이 가운데 引晝校吏 12명은 26일 금강하구 장암진에서 龍堂祭를 올린 후 돌아 가고, 나머지 228명이 끝까지 항해하였다.104) 따라서 이 경우 228명이 연미정에 정 박하여 하룻밤을 새고 갔던 것이다. 이렇게 수백명이 승선한 조운선이 연미정에 도착하면, 연미정의 풍경은 급변할 수 밖에 없다. 대체로 조운선은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정박지에 상륙하지 않고 선내에 서 숙식한 후 곧 바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연미정에 도착하면 상륙한 후 하룻밤을 묵거나 수일간을 체류하였다. 가령, 1574년 4월에 60척의 조운선이 5일간, 1576년에 4월에 18척이 6일간 연미정에 머문 적이 있다. 서울에서 나온 호조정랑의 점검 때 문에 오래 머물렀다. 朝官 파견제가 폐지된 뒤에도 조운선은 승선원을 모두 상륙시 킨 채 꼬박 꼬박 연미정에서 묵고 갔다. 1875년 4월 성당창 조운선 12척의 경우, 배가 정박하자 富平의 濩校와 月串鎭 吏房이 와서 차사원 함열현감 조희백을 뵈었 고, 조희백은 말로만 듣던 명승지 연미정을 이제야 볼 기회가 왔다고 하면서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나온 후 가마를 타고 긴 제방을 따라 월곶진으로 들어가 조해루 를 거쳐 곧바로 연미정에 올라 거침없이 시 한 수를 읊었다. 한번에 수백명이 정박하여 수일간 머물 경우 실로 장관이 연미정에서 연출될 것 103) 金德珍, 民庫의 設立과 運營, 뺷朝鮮後期 地方財政과 雜役稅뺸, 국학자료원, 1999, 200쪽. 104) 乙亥漕行錄(국한 51-나-217) - 163 -
32 인천학연구 7(2007.8) 같다. 그들이묶을숙소와먹는음식은기본적으로선박에갖춰져있지만, 긴여정의노고를풀어준다고연회를베풀경우술과여자와잡기로뒤엉켜그풍경은자못번화하였을것이다. 다산정약용의지적처럼, 공진창, 가흥창, 성당창, 법성창, 군산창, 영산창, 마산창, 가산창, 삼랑창등조창이있는도회지에優婆, 娼妓, 酒婆, 花郞, 樂工, 櫑子, 馬弔, 屠肆등 8가지잡류가성행하여노래와여색과술과고기로써倉吏와船人들을유혹하였다. 이러한일은조창뿐만아니라조운선이바람을기다리거나닻줄을고치기위해머무는보통포구에서도행해졌다. 이로인해소비가지나쳐축난것을채우기위해세곡을빼내는행위의요인이라고다산은진단하였다. 105) 따라서이러한 연회 가연미정이라고예외일수없었다. 조운미에물을타는폐단은미곡이축나는데에서나오고, 미곡이축나는폐단은대부분배에탄娼女에서연유하는데, 江華府이상의지방관으로하여금배에탄창녀와창녀를데리고있는사람을모두아내어뱃사람들과접촉하지못하게해야한다는영조대 新補受敎輯錄 기록을통해서엿볼수있다. 연미정에서세곡을빼내는부정행위는자못심해했던것으로보인다. 각고을의세선이강화도의연미정과통진의봉성에도착 정박하면, 여러날올라오지않고머물면서쌀을훔치고비용을낭비하는행위를다른곳보다배나심하게한다는 신보수교집록 의지적을통하여짐작할수있다. 이를막기위해연미정의경우강화유수가근처의변장중에서일에능숙한자를차사원으로정해서단속하게해야한다고하였다. 이내용은 승정원일기 숙종 25년윤7월 5일조에도수록되어있는데, 특별히연미정을세곡포탈이심한장소로지목하였던점은가벼이넘길수없는대목임에분명하다. Ⅴ. 맺음말 강화도甲串은서울을오가는삼남과양서선박이지나고, 강화를왕래하는사람들이거치는교통요지다. 바로여기에고려때부터연미정과이섭정이라는정자가있어, 각각조운선이정박하고나루터행인들이쉬어가는역할을하였다. 특히연미정은경치가아름다워찾는이의발길을사로잡기에충분하였다. 그런데 17세기에 105) 牧民心書, 戶典, 稅法. - 164 -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김덕진 33 갑곶에 月串鎭과 月串墩臺가 들어서면서, 갑곶은 월곶으로 개명되고, 연미정은 신설 월곶진의 부지로 편입된 후 사라졌다가 겨우 재건되었지만, 이섭정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강화해협은 고려 조선시대에 삼남에서 출발한 개경행이나 한양행 조운선이 지나 는 뱃길이면서 전국적인 조난지였다. 삼남지방은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로, 그곳에서 올라오는 세곡은 국가재정에서 중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 갑곶에 연미정을 건립 하여 조운선을 감독하고 조류를 기다리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연미정은 주변 의 많은 경화거족들에 의해 세곡 포탈과 사곡 하역이 격심한 곳으로 유명하여, 중앙 에서 파견된 관료로부터 유일하게 점검을 받는 곳이었다. 따라서 연미정은 조운제도 운영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삼남에서 출발한 세곡 운송선이 법으로 정한 일정 안에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 연 미정에 도착한 시기는 4 5월 봄날이었다. 이 기간 동안 연간 200척 이상의 조운선 이 연달아 도착하여 짧게는 하루, 길게는 엿새를 머물렀다. 이때가 되면 연미정은 붐비는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조운선 감독차 내려온 호조 낭관 일행 을 접대해야 하였지만, 이 일은 17세기 이후 중단되었다. 또 강화부사(유수)는 관내 수군 진장(정포만호 월곶첨사)을 임명하여 조운선의 안전운항을 책임지도록 하였고, 자신이 하던 치패선 수침미 조사 업무를 유수부 승격 이후 經歷으로 하여금 행하 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한 번에 적게는 12척 많게는 60척에 승선한 200 1,000명의 승선원(차사원 감색 선원)이 상륙하여 연회를 열 경우, 그날의 연미정은 세곡과 주색이 교환되는 풍경으로 급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종원고제출일 : 2007. 6. 25 원고심사일 : 2007. 7. 15 주제어 : 강화도, 연미정, 조운 - 165 -
34 인천학연구 7(2007.8) < 참고문헌 > 各司受敎江華府留營狀啓謄錄江華府志經國大典慶尙道地理志大東水經大東地志大典續錄大典通編東國輿地志萬機要覽牧民心書磻溪隧錄備邊司謄錄備邊司謄錄先祖江華先生日記世宗實錄地理志續大典受敎輯錄承政院日記新增東國輿地勝覽陽村集輿地圖書六典條例乙亥漕行錄靜觀齋先生文集朝鮮王朝實錄增補文獻備考度支志擇里志版籍司謄錄虛白堂詩集 - 166 -
三南稅穀의운송과江華燕尾亭의풍경 김덕진 35 江華文化院, 江華史, 1976. 강화군, 강화옛지도 6, 2003 崔完基, 朝鮮後期船運業史硏究, 一潮閣, 1989. 高東煥, 朝鮮後期서울商業發達史硏究, 지식산업사, 1998. 金玉根, 朝鮮王朝財政史硏究 Ⅰ, 一潮閣, 1984. 金德珍, 朝鮮後期地方財政과雜役稅, 국학자료원, 1999. 강석화, 조선후기의경기남부해로와大阜 靈興島, 畿甸文化硏究 28, 2000. 金德珍, 宣祖代戶曹의三手米징수와別營설치, 國史館論叢 105, 2004. 김덕진, 全羅道順天海倉의설치와풍경, 全南史學 22, 2004. 朴廣成, 丙子亂後의江華島防備構築, 畿甸文化硏究 3, 1973. 朴姬玉, 朝鮮肅宗朝江華島의農地開拓과그經營問題, 歷史敎育 88, 2003. 배성수, 肅宗初江華島墩臺의축조와그의의, 朝鮮時代史學報 27, 2003. 卞光錫, 18 19 세기경상도남부지역의상품유통구조, 지역과역사 5, 1999. 송양섭, 17세기江華島방어체제의확립과鎭撫營의창설, 韓國史學報 13, 2002. 廉定燮, 18세기중반江華府留守의牧民에관한연구, 인천학연구 2-1, 2003. 尹用出, 17세기초의結布制, 釜大史學 19, 1995. 李敏雄, 18세기江華島守備體制의强化, 韓國史論 34, 1995. 이철성, 조선후기 輿地圖書 에나타난인천지역의田結稅와漕運路연구, 인천학연구 6, 2007. 趙樂玲, 17세기江華島備蓄穀의마련과운영, 韓國史論 51, 2005. 崔完基, 高麗朝의稅穀運送, 韓國史硏究 34, 1981. 崔完基, 朝鮮時代牙山貢津倉의설치와운영, 典農史論 7, 2001. 吉田光男, 李朝末期の漕倉構造と漕運作業の一例, 朝鮮學報 113, 1984. 吉田光男, 一九世紀忠淸道の海難, 朝鮮學報 121, 1986. 六反田豊, 李朝初期の田稅輸送體制, 朝鮮學報 123, 1987. 六反田豊, 海運判官小考, 年報朝鮮學 1, 1990. 六反田豊, 李朝初期の漕運運營機構, 朝鮮學報 151, 1994. - 167 -
36 인천학연구 7(2007.8) <ABSTRACT> The Transportation of Samnam's Grain Paid as a Tax and The Scenery of Ganghaw's Yeonmijeong Kim, Deok-jin Yeonmijeong is pavilion that built in the Goryeo dynasty, stand in the place of Ganghaw-island which is easy to reach and a place of scenic beauty. Ship loaded grain paid as a tax enter to the Seoul from Samnam. After always she anchor's at the Yeonmijeong, wait for tide and is placed under government control. Therefore when the ship approach to Ganghaw-island, Ganghaw governor must make assurance doubly sure for traffic safety. Generally ship loaded grain paid as a tax used to arrive in springtime. Just at that moment, the Yeonmijeong is busy with the supervisor of a ship and the peoples embarked in a ship. Key-words : Ganghaw-island, Yeonmijeong, grain paid as a tax traffic - 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