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Image of Public Office of Uirihakpa in the 16th Century - Focusing on Historical Consciousness of Cho Jeongam, Yi Yulgok and Cho J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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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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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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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교회에관한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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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정책백서목차(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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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이저작물에적용된이용허락조건을명확하게나타내어야합니다. 저작권자로부터별도의허가를받으면이러한조건들은적용되지않습니다. 저작권법에따른이용자의권리는위의내용에의하여영향을받지않습니다. 이것은이용허락규약 (Legal Code) 을이해하기쉽게요약한것입니다. Disclaimer

A Study on the Image of Public Office of Uirihakpa in the 16th Century - Focusing on Historical Consciousness of Cho Jeongam, Yi Yulgok and Cho Jungb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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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 1570) 과 (1536~1584) 花潭徐敬德 (1489 1546), 南冥曺植 (1501 1572), 河西金麟厚 (1510 1560), 土亭李之菡 (1517 1578)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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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사람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 정치의 목표를 우선 은 모두가 배부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백성을 기르는 것(養民) 에 두 고,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백성을 가르치는 것(敎 民) 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제로서 足食, 足兵, 民信 를 제 시하고 있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 는 말이 있듯이 衣食住의 해결은 모든 사람들의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따라서 정치는 무엇보다도 백 성의 衣食住를 먼저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孔子의 생각이었다. 요컨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衣 食 住가 3대 요소인 것처럼 食 兵 信을 나랏 일을 바르게 하는 3대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食 兵 信의 나랏일 중에서도 공자가 백성들의 믿음(民信)을 食 과 兵에 앞서 더 중요시 하였는데, 子貢이 政事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兵을 풍족하게 하면 백성들이 信義를 지킬 것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반 드시 부득이해서 버린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합니까? 공자께 서 말씀하셨다. 兵을 버려야 한다. 자공이 말하였다. 반드시 부득이 해 서 버린다면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버려야 하니,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이 있거니와 사람은 信이 없으면 설 수 없다. 73) 군자는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은 다음에 백성을 부린다. 신임을 얻지 못 한 채 백성을 부리면, 백성들은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73) 論語 顔淵,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 斯三者 何先 曰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 何先 曰 去食 自古 皆有 死 民無信不立. 成百曉는 信 에 대하여, 사람은 양식이 없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면할 수 없는 것이요. 信이 없으면 비록 살더라도 스스로 설 수가 없으니, 죽음이 편 안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죽을지언정 백성들에게 信을 잃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또한 차라리 나에게 信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論語集註, 전통문화연구회, 2005. p. 340. - 32 -

신임을 얻은 뒤에 충고한다. 신임을 얻지 못하고 충고하면 자기를 헐뜯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74)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孔子의 주장은 국민에게 主權이 있는 오늘날에야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공자가 생존했던 당시가 절대 군주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선각자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孟子 또한 天子나 諸侯된 자는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의 믿음을 얻 어야 함을 강조하여, 백성이 가장 소중하고, 社稷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백성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天子가 되고, 천자 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諸侯가 되며, 제후의 마음을 얻는 자는 大夫가 된 다. 75)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강조하는 백성들의 믿음은 무엇을 뜻하고 또 그러한 믿 음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공자가 말하는 믿음이란 두 가지 뜻을 갖는다. 소극적 의미의 하나는 의 심하지 않는 것 을 말한다.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지 않고, 남이 나 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먼저 깨닫는 자가 어진 것이다. 76)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 不信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不信의 반대인 信이란 의심하지 않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뜻으로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너그러우면 대중을 얻고 믿음이 있으면 백성이 의지하며, 민첩하면 공적이 있고 공정하면 기뻐한다. 77)는 것이다. 이와 같이 信이란 人任, 곧 사람들이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백성을 믿게 한다는 것은 백성이 나랏일을 의심하지 않고 신 뢰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극적으로는 백성들이 나랏일에 대해 74) 論語 子張, 子夏曰 君子信而後 勞其民 未信則以爲勵己也. 信而後 諫 未 信則以爲謗己也. 75) 孟子 盡心 下,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古 得乎丘民而爲天子 得乎天子 爲諸侯 得乎諸侯爲大夫. 76) 論語 憲問, 子曰 不逆詐 不億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 77) 論語 堯曰, 寬則得衆 信則民任焉 敏則有功 公則說. - 33 -

의심하지 않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백성들이 나랏일 때 문에 생길지 모르는 고통과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게끔 만드는 것이다.78)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말을 하되 거짓이 없어야 하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 하여 국민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국민이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 첫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공자는 제자인 宰予 의 행실에 대해 내가 처음에는 남에 대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의 行 實을 믿었는데 이제는 남에 대해서 그의 말을 듣고도 그의 행실을 살펴보 게 되었다. 나는 宰予 때문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79)라고 하여 宰予 가 말은 잘했으나 행실이 말에 미치지 못한 점을 나무랐다. 여기서 信은 말 한 대로 행동 하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信은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 다시 말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行實의 차원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德을 높이고 의혹을 분별하는 일에 대해 묻는 子張에게 孔子는 忠과 信 을 주로 하고, 義를 따르는 것이 德을 높이는 것이다. 80)라고 말했다. 여기서 信이란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信이란 어떤 행동을 하되 道理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자가 생각하는 백성들로부터의 신뢰란 백 성들이 정치와 행정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며, 때에 따라서는 나랏일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고통이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말하며, 백 성들이 그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지도자로서의 공직자는 진실성과 능 력이라는 요소를 함께 갖추어야 할 것이다. 78) 원한식, 앞의 논문, p. 152. 79) 論語 公冶長,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廳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80) 論語 顔淵, 子張 問崇德辨惑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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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靜庵의 變化와 革新의 公職者像 1. 靜庵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1) 變化와 革新의 시대 배경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처해 있는 정치적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또한 그 관계에 따라 인간의 삶이 실제로 보다 좋은 방향으로, 혹 은 나쁜 방향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든지 인간이 정치에 관계하는 방식은 그 시대의 사회 구조나 현실과 긴밀히 연 관될 수밖에 없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선 각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본 장에서는 靜庵이 생존했던 당시, 그가 처해 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에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함을 느꼈고,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개혁하고자 했 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대에서도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서면서 정책이나 제도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公職者의 의식이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가는지를 새롭게 조명해 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靜庵 당시의 국면을 정치와 사상적 측 면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81) 정치적 측면에서 조선은 역성혁명에 의해 개창된 국가였던 까닭에 왕조 의 역사적 정통성이 심각한 문제로 잠재되어 있었으며, 특히 首陽의 왕위 찬탈 행위는 道學的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결코 인정할 수 없는 패륜적 행위 였다. 또한 왕위 찬탈 과정에서의 반대파의 숙청과 이로 인한 많은 사람들 의 참화는 역사적 재평가를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왕위 찬탈 사건 과정에서 형성된 훈구세력은 수양대군의 쿠데타 성 공이후 靖難功臣으로 책봉되었고, 이들은 중앙정계를 주도하면서 강력한 훈 81) 靜庵 당시의 정치 사상적 상황은 선행 연구 자료인 이상성의 조광조 : 한국도 학의 태산북두 를 주로 참고하였다. - 36 -

구세력을 형성하고 각종 이권과 특권을 누렸다. 이렇게 형성된 훈구세력은 中宗反正에 가담한 反正功臣까지 가세하면서 특수 집단화하여 정치 현장의 근본 질서를 왜곡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누적된 공신의 숫자는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하였다.82) 이들은 자신들에게 지급된 科田과 막대한 규모의 功臣田, 그리고 수십 수백 명에 이르는 노비를 소유하고 정권의 중심에 포진하여 각종 이권을 차지하며 민생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靜庵이 조정에 나아갔을 무렵에는 극에 달할 정도였다. 중종은 反正으로 추대된 君主여서 조정에서 공신들에 의해 조종되는 유명무실한 존재와도 같았다. 중종은 등극과 동시에 공신세력에 의해 왕후 愼氏를 폐위시켜 궁궐 밖으 로 쫓아내야 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른바 3大臣 이라 불리던 朴元宗, 成希 顔, 柳順汀 등이 조회를 마치고 물러갈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禮를 표해야 했다.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은 靜庵의 생애를 전후한 약 50년 간에 걸쳐 거듭된 4대士禍 로 인해 조선 사회는 근본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있었다. 成宗代에 중앙 정계로 진출한 士林들은 燕山君代의 戊午, 甲子士禍 를 겪으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고, 조선 초기에 이룩된 유교국가의 모 양이 연산군대에 이르러 거의 망실됨으로써 이념적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 가 노출되었다. 특히 민생과 직결되는 정치 행위는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 다. 따라서 士禍는 靜庵 당대에 있어서 가장 예민한 정치적 문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三司의 활동은 위축되고, 勳舊派는 권력과 결탁하여 신진 道學派를 탄압하였으며, 신하들은 무사안일 과 保身主義에 빠져 일대 쇄신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왕조 자체의 이념적 정체성의 모순이었다. 春秋大義에 기반한 道學的 統緖를 중시하는 유학의 입장에서는 수양의 왕위 찬탈은 왕 82) 조선 초기 급증했던 功臣의 숫자는 조선이 개국하면서 책봉된 개국공신 52명을 비롯하여 수양대의 靖難功臣, 中宗代의 反正功臣까지 합하여 무려 492명에 이 른다. 이상성, 조광조 : 한국도학의 태산북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p. 114. 참조. - 37 -

조의 정체성을 무시한 부도덕한 행위였다. 수양 자신도 문제의 본질을 인식 하고 있어서 治世동안 늘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학자들을 기피하고 불교를 숭상하는 한편, 集賢殿과 經筵 등을 폐지하였으나 그런 행 위 자체가 道學的 입장에서는 더욱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의 건국이념인 性理學은 왕조의 정통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여 건국 백년이 지났지만 불교와 도교의 숭상은 여전하였다. 性理 學은 근본적으로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 립된 사상인데 왕이나 왕실에서 이를 숭앙하는 행위를 성리학자들은 방관 할 수가 없었다. 道學的 입장에서는 君主나 식자층이 불교와 도교로 기울어 지는 것은 국가 이념의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규범과 倫理綱常의 근본이 훼손되는 것으로써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조선초기부터 관습적으로 행해져 오던 불교숭상은 世祖代에는 공공연하 게 행해졌고, 이는 국가의 재정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 한 불교 보호 관행은 中宗代까지도 여세를 떨쳤다. 성리학자들은 道敎의 경우는 불교보다 비교적 문제가 덜 심각했으나 이 또한 보통의 수준을 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특히 昭格署가 가장 근 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는데, 道學的 입장에서는 祈福행위가 민간 은 물론 왕실에서도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여 더 이상 묵과할 수 없 다고 판단하였다. 이 또한 국고의 지나친 낭비를 초래하고 있었는데, 소격 서를 正道를 쇠미하게 하는 허황된 근원의 원천으로 규정하여 혁파 이외에 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83) 이상과 같이 조선이 개국하면서 1백여 년이 지났지만 정치적으로나 사상 적으로 여전히 불안한 문제들이 잠재되어 있었고, 道學的 측면에서 보았을 때 유교사상의 본질 확립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노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靜庵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와 혁신의 필 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개혁을 통해 이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가 꿈꾸 었던 세상은 堯舜과 같은 聖君의 나라요, 도덕적 정당성이 확립된 나라였다. 83) 이상성, 조광조 : 한국도학의 태산북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pp. 19 29. 참조. - 38 -

2) 道統의 정립 道學 은 예로부터 유학적 이상인, 修身을 근본으로 하는 修養論을 근간으 로 하고 있으며, 大學 의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를 本令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道學의 道統論은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堯舜으 로부터 文 武 周公까지를 실제로 道를 행해 민중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던 行道의 시절로 보고, 孔子와 孟子의 경우는 行道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 기 때문에 물러나 학문과 교육으로 후세에 가르침을 베풀어 주었던 垂敎의 경우로 파악한다.84) 朝鮮은 儒學을 기본이념으로 건국하였으며, 世宗代에는 민족의 자주성 확 보와 함께 학술과 문화적인 부분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등 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世祖와 成宗代를 거치면서 15세기에 이르기까지는 先代의 유업을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일들을 추진해 나간 선두그룹은 儒家出身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과 함께 儒敎의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鄭夢周를 始原으로 하는 學脈, 즉 義理的 가치를 기준으로 한 道學派 가 있었다. 이들은 鄭夢周 吉再 金叔滋 金宗直 金宏弼 그리고 趙光祖로 이어 지는 義理思想의 전통을 잇는 性理學派였으며, 義理的 가치를 기준으로 하 는 한국 性理學의 한 潮流인 士林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道統論의 연원을 살펴보면, 朱熹는 中庸 序文에서 儒家의 道統 이 堯, 舜, 禹를 거쳐 孔子, 曾子, 子思, 孟子, 程子로 이어지고, 그 내용은 인간의 마음이 나만을 생각하는 人心(=人欲之私)으로 흐르지 않고 우리 모 두를 생각하는 道心(=天理之心)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 마음 을 붙드는 방법은 바로 中 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道統은 聖賢이 전수할 수 있고, 道統의 전수는 곧 太極의 진수를 간직하는 방법의 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태극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드러낼 수 있는 자라야만 聖賢의 道統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 8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www.aks.ac.kr), 道學 - 39 -

는 것이다. 堯, 舜, 禹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지는 道統의 맥락도 그 틀 안에 서 가능한 것이다.85) 학생에게 스승이 중시되듯이 학자들에게서는 그 선하의 맥락을 찾는 것 을 중요시 한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진리의 흐름을 정확히 찾아 지금의 자신을 정화해 가려는 역사의식의 반영인 셈이다. 우리나라 道學派의 연원과 관련해서는 鄭夢周를 道統의 연원으로 보고 그로부터 義理派가 계승되어 왔으나, 조선에서 실질적인 道學의 창시자를 趙光祖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선행 연구된 조남욱의 견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위의 일반론적 견해에 대해 成均館 儒 生 朴謹 등이 올린 伸寃疏 를 인용하여 조선조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뚜 렷했음을 밝히고 있다. 伸寃疏 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 光祖의 학문이 바른 것은 그 전수한 것에 유례가 있습니다. 젊어서 부터 개연히 道를 구하는 뜻이 있어서 金宏弼에게 수업하였습니다. 김굉필 은 金宗直에게 배우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버지 司藝 金淑滋에게서 전 해 받았고, 숙자의 학문은 고려의 신하 吉再에게서 전해 받았습니다. 길재 의 학문은 鄭夢周의 문하에서 얻었는데, 정몽주의 학문은 실로 우리 동방 의 祖宗이 되었으니, 그 학문의 연원은 이와 같습니다.86) 이러한 내용은 한국 道學의 學脈을 鄭夢周 吉再 金叔滋 金宗直 金宏 弼 趙光祖 의 계보로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후 학 계의 정설로 일반화 되었다.87) 85) 지교헌, 황의동, 안재순 共著, 한국사상가의 새로운 발견(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아인쇄사, 1994. pp. 160 161. 참조. 86) 國譯靜庵趙先生文集, 이하 靜菴集 이라 한다. 靜庵趙先生紀念事業會刊, 卷 3, <伸冤疏>, 嗚呼 光祖之學之正 其所傳者 有自來矣 自少. 慨然有求道之志 受 業於金宏弼. 宏弼學於金宗直 宗直之學 傳於其父司藝臣叔滋 叔滋之學 傳於高麗 臣吉再. 再之學 得於鄭夢周之門 夢周之學 實爲吾東之祖 則其學問之淵源 類此. 87) 이러한 道學의 學脈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전반적으로 이견이 없는 듯하다. 國譯靜庵趙先生文集 에서는 유학의 연원을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조광조로 밝 히고 있으며( 國譯靜庵趙先生文集 靜庵趙先生紀念事業會刊, 1978, p. 70.) 이상성 또한 우리나라의 道學的 統緖를 말할 때,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 - 40 -

여기서 性理學派의 正脈을 설정하는 중대한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데,이에 대해 조남욱은 靜庵 자신이 經筵에서 金宏弼의 학덕을 칭송하면서 이미 金宗直과 그 先親 金叔滋 그리고 吉再로 연계되는 학통을 밝힌 바 있 다. 다만 그 때는 길재까지만 말하고 그 이전에 대해서는 언급함이 없었다. 그러나 후학들은 그렇게 정몽주를 길재의 학문 정맥으로 공표한 것이다. 라 고 밝히고 있다.88) 직-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를 말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성의 단행본, 조광 조,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p.82.) 또, 김홍경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高峯集, 論思錄 을 인용, 조선의 道統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제시한 사람은 奇大升이다. 기 대승은 동방의 학문이 전수된 차례를 말한다면 정몽주가 東方理學의 祖宗이 되고, 길 재는 정몽주에게서 배웠으며, 김숙자는 길재에게서 배웠고, 김종직은 김숙자에게서 배웠 고 김굉필은 김종직에게서 배웠고, 조광조는 김굉필에게서 배웠으니 스스로 原流가 있 었다 고 하여 동방의 학문 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에 의해 전해 졌음 을 밝혔다. 다만, 이 논문에서 송하경의 李栗谷의 道統論에 관한 고찰, 대동문 화연구, 24, 1990. 를 인용, 기대승 이전에는 조선의 道統에 대한 의식이 분명하게 드 러나지 않을뿐더러 설사 道統意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道統 에 해당하는지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李珥까지도 趙光祖 이전의 道統을 부정하면서 조선조 道學이 조광조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라고 밝히고 있 다.(김홍경, 조선초기 유학사상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3. p. 3. 참조.) 이는 곧 이어 후술된 각주 栗谷全書 卷28, 經筵日記 1의 내용과 유사하다. 특기할 만 한 점은, 栗谷은 <東胡問答>에서 鄭夢周에 대하여 고려 말기에 정몽주가 약간 儒者의 氣象은 있었지만 그 역시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그 행한 일을 살펴보 면 忠臣에 불과할 따름 (麗末, 鄭夢周稍有儒者氣象, 亦未能成就其學, 迹其行事, 不過爲忠 臣而已.)이라고 하였다. 88) 이는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길재와의 사제관계는 정몽주뿐만 아니 라 李穡, 權近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근과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 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성균관 유생을 비롯한 학계에서 는 권근이 아닌 정몽주를 그 정맥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내면적으 로는 儒敎의 義理精神과 그들이 드러낸 정치의식이 깊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綱常義理의 實踐躬行 문제가 麗末鮮初 학맥 설정에서 매우 중 시되어 정몽주를 길재 학통의 정맥으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학맥 설정은 선조 2년(1569)의 經筵에서 奇大升(1527 1572)의 재확 인과정을 거침으로써 완전히 일반화된다. 결국 李穡이 鄭夢周를 동방 理學의 鼻祖 로 평가한 점과 고려와 운명을 함께하면서 드러낸 春秋大義의 義理精神을 높이 여기며 바로 그 곳을 조선조 학맥의 연원으로 삼는 데에는 異論이 없었 던 것이다. 그러한 가치지향이 吉再에게로 이어지면서 왕조교체의 한계를 넘어 고려의 유학이 조선으로 이어지는 연계성이 가능했던 셈이다. 한편, 정몽주에 서 조광조에 이르는 학맥을 性理學派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자칫 그 - 41 -

栗谷 또한 道學이 靜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고려의 鄭夢周가 그 실마리를 열었으나 規矩가 정밀하지 못하고 조선의 金宏弼이 그 실마리를 이었으나 오히려 크게 나타나지 못하였다. 光祖가 道를 倡明함에 미치어 모두가 추앙하여 높이니, 오늘의 性理學이 있음을 아는 것은 光祖의 힘이다.89) 麗末鮮初부터 道學的 이념의 표출이 있었지만 조선조의 道學的 특성이 온전하게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렵고, 栗谷의 지적처럼 한국의 道學은 靜庵 에 이르러 비로소 그 특별한 내용과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靜庵은 한국 사상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道學者였다. 대개 韓國 道學의 계 통을 말할 때 열거되는 이상의 여러 道學者들이 있고, 그들 또한 학문적 특 징과 의의를 인정받아 거의 文廟에 종사됨으로써 후학들로부터 지극한 존 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靜庵의 사상적 특성과 의의, 그리고 한국 사상사에 끼친 역할이 남다르다고 보는 것은, 조선조 역사를 통하여 그의 사상과 위상이 과연 구분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靜庵은 조선조 士林의 領袖로서 한국 道學을 성립시키고, 그 기본 성격을 형성하였으며, 16세기 한국 性理學의 두 거봉인 退溪와 栗谷을 위시한 후대의 사림들에게도 지대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의 政治는 물론 思想과 學風 등에 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정치사회적으로 변화와 혁신이 논 의될 때마다 역사적 사례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계보상의 기본정신이 와해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통 설정에는 순 수철학으로서의 性理學的 관점보다는 義理中心의 가치 지향이 핵심으로 작용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중시되는 것은 성균관 문묘의 배향 기준에서 도 다르지 않다. 비록 性理學的 연찬의 업적이 탁월했다 하더라도 그 실천이 미진하거나 변절의 행태를 보인 경우에는 이른바 眞儒 로 평가될 수 없었던 것이다.(조남욱, 야은 길재의 선비정신, 퇴계학부산연구원 시민문화강좌, 25, 2011. 참조) 89) 栗谷全書, 卷28, 經筵日記 1 : 前朝 鄭夢周始發其端 規矩不精 我朝金宏弼 接其緖 而猶未大著 及趙光祖倡道學者 翕然推尊之 今之知有性理之學者 光祖之 力也. - 42 -

靜庵의 道學思想의 철학적 기반은 무엇보다 그 道論의 인간학적 특성을 들 수 있다. 그는 天에 근본하는 궁극적 존재인 道가 인간을 통해 현실 사 회에 실현된다고 파악하여 道와 인간과의 관계 구조를 체계화했고, 인간과 가치의 문제에서도 실존적 당위론적 인간 주체의 확인을 중시하였다. 또 靜 庵은 出仕 직후 至難하게 끌어온 조선 왕조의 정통성 시비 논쟁을 정리하 여 國是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으며, 정몽주를 비롯한 조선조 道學의 統緖와 正脈을 확립함으로써 한국 道學의 역사적 정체성을 수립하 였던 것이다.90) 靜庵의 道學精神이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栗谷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爲己之學의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최초의 인물은 오직 趙靜庵이 다...(중략) 그는 독실한 실천에 힘을 기울여 스스로 얻음이 매우 깊었으 며, 몸가짐은 기필코 聖人이 되고자 하였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반드시 道 를 실천하고자 하였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아 王道政治가 이루어지기 를 간절히 원하였다...(중략) 오늘날에 와서 선비들이 부모를 버리지 않 는 것을 알고, 임금을 뒤로하지 않는 것을 알며, 義를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이익에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모두 靜庵 선생 의 가르침 때문이다.91) 栗谷의 말을 통해 義理的 특성이 발휘된 靜庵의 道學思想이 後學에게 얼 마나 큰 모범이 되었으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참된 선비이자 지성인으로서의 靜庵의 정신은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그 책 무와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정치에 있어서나 학문에 있어서 정통성은 언제나 그 체제와 명 분을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요체가 되고 있다. 따라서 정통성이 훼손되거나 90) 정규훈 外, 동양사상, 전통문화연구회, 2004. pp. 241 244. 참조. 91) 栗谷全書, 卷13, 道峰書院記, 能以爲己之學名世者 亦未曾輩出 惟我靜菴 先生...(중략) 而篤行益力 自得益深 持身必欲作聖 立朝必欲行道 其所惓惓者 以格君心陳王政...(중략) 今日 後之爲士者 能知親不可遺 君不可後 義不可捨 利不可征者 皆我先生之敎也. - 43 -

비정상적 방법에 의해 그 순수성이 파괴되거나 결여되면 국가나 사회는 혼 란에 휩싸이게 되고 이에 따라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요구하게 된다. 3) 至治主義 실현 至治 란 매우 잘 다스려진 정치를 말하며, 儒家의 이상향인 堯舜三代 大 同社會 정치를 말한다. 至治 라는 용어는 書經 君陳 篇, 至治馨香 感 于神明 에서 나온 말로,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명시킨 다. 는 뜻으로 儒家의 이상사회인 堯舜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至治主義는 靜庵을 중심으로 한 士林派 유학자들이 주창한 사상으로서, 유학사상의 이념인 道를 모든 분야에서 실현하여 堯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였던 실천 유학의 한 潮流이다. 書經 에서 말하는 堯舜의 정치는, 옛날 堯임금을 살펴보건대 지극한 功이시니 공경하시며 현명하시며 생 각함이 편안하시며 진실로 공경하시며 능히 사양함이 있어 빛이 온 세상 에 미치며 하늘과 땅에까지 이르렀다. 능히 큰 德을 밝혀서 九族을 친히 하셨다. 구족이 이미 화목하거늘 백성을 고르게 밝히셨는데 백성들이 스스 로 덕을 밝히며 만방을 화합하였는데 백성들이 변하여 이에 화목하게 되 었도다.92) 위에서 堯임금의 정치는 자신의 德을 가정과 국가, 천하로 미루어 나가는 정치였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요임금의 정치는 덕을 갖춘 지도자에 의해 백성이 교화되어 그들도 스스로 덕을 밝혀, 하늘과 인간 그리고 지도 자와 백성이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禪讓한 이유도 德性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92) 書經 堯典, 曰若稽古堯帝 曰放勳 欽明文思 安安 允恭克讓 光被四表 格于 上下. 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 - 44 -

옛날 舜임금을 살펴보건대 거듭 빛나심이 堯임금의 德에 합하시니 깊고 지혜롭고 문채나고 현명하고 온화하고 공손하고 진실하고 독실하셔서 그 윽한 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지니 요임금이 지위를 이으라고 명하셨다.93) 堯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정치의 요체는 윗사람의 도덕적 자질 여부에 달려있다. 임금이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나라의 기강은 저절로 확립되는 것이며, 아랫사람 또한 윗사람의 德에 감화되어 지극히 윤 리적인 사회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아무나 이룰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堯舜과 같은 완전한 인격을 갖춘 聖人과 堯舜시대 의 백성과 같이 선한 백성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순시대와 같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먼저 德을 함양한 聖人이 된 사람이 모범이 되어, 평범한 사람들이 善을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靜庵 또한 至治의 완성은 이상적인 君主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君主는 임금이기 이전에 자연인이기 때문에 인격완성을 위해 끊임 없이 수양해야 한다고 보았다. 靜庵이 經筵이나 상소문 등을 통해 중종에게 인격 수양을 강조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君主의 王道政治 지향 여부에 따라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느냐 覇道政治가 이루어지느냐가 결 정되기 때문이다. 즉, 堯舜과 같은 聖人이 정치를 하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지만 桀紂와 같은 임금은 覇道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靜庵은 이를 燕山君의 정치를 통해 이미 경험하였던 것이다.94) 그리하여 靜庵은 燕山君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中宗이 聖人이 될 가능 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중종 또한 유학의 이상을 숭상하고 文治와 德治 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였으므로 靜庵을 두터이 신임하여 중책을 맡겼던 것이다. 靜庵은 이를 기회로 중종을 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 을 堯舜시대의 백성으로 만들어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는 기회라고 자신하 93) 書經 舜典, 曰若稽古帝舜 曰重華 協于帝 濬哲文明 溫恭允塞 玄德升聞 乃命以位. 94) 이상성, 조광조 : 한국도학의 태산북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pp. 155 156. 참조. - 45 -

였고, 구체적인 방법을 내세워 정치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95) 靜庵의 至治主義의 핵심은 임금이 도덕적 인격을 갖춘 聖君이 되기를 바 라는 마음으로 임금을 가르치는 經筵官이 되어 왕에게 道學을 숭상하고, 人 心을 바르게 하며, 聖賢을 본받고, 至治를 일으킬 것을 지성으로 권면하였 다는 점이다. 靜庵의 至治는 임금의 도덕적 인격완성의 기초위에서 王道의 실천을 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至治主義의 시발점으로 靜庵은 言路의 개방을 주장하였는데, 靜庵 은 언로의 개방여부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하여 언로 개방의 범위를 조정에 있는 신하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전체를 포함 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오늘날 민주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생각과 견해를 자유롭게 개방된 상태로 밝힐 수 있는 언론의 자유 는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당시의 전제군주제하에서 의 언로 개방에 대한 주장은 엄청난 파동을 일으켰지만 그동안 파행적인 정국이 正道를 찾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다른 개혁의 일환으로는 鄕約의 보급이었다. 鄕約을 통해 性理學의 이 념을 보급할 뿐 아니라 기존의 정치세력의 비리로 한계점에 달한 사회질서 를 바로잡기 위한 방도로 전국적으로 呂氏鄕約의 보급에 주력하였다.96) 鄕 約 은 마을 주민들 간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조직체로서 유학의 근본사상의 소산으로 化民成俗 을 통하여 유학적 정치철학의 요체인 大同思想의 실현 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鄕約의 연원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나 조선의 鄕約 은 中宗代에 靜庵에 의해 사회적 기능의 인격도야, 禮俗의 함양, 협동정신 과 공동체의식의 앙양 등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97) 향약보급의 근본적 이유는 유학을 근본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여전히 왕실의 기복을 염원하는 제사를 담당하는 기관 95) 이는 靜庵의 謁聖試策 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96) 최낙도, 조광조의 정치사상과 국정개혁에 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2001. p. 79. 97) 이상성, 앞의 책, pp. 215 216. 참조. - 46 -

인 昭格署가 남아 있었고, 이러한 행사를 위한 왕실의 지나친 비용으로 인 한 폐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고려 말기에 성행했던 道敎의 미신적 요소가 조선조에서도 철폐되지 않고 남아있었던 것이다. 道學의 본바탕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靜庵은 이단 배척의 일환으로 왕실 의 미신의 상징이었던 소격서를 폐지하였다. 또 나아가 賢良科를 두어 숨은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과 함께 부패 세력을 내쫒고 낡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으며, 庶孼制度에 대한 불합리한 부분도 제기하였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조처인 위훈삭제를 단행하였다. 당시 功이 있는 신하라고 하여 별로 하는 일도 없이 祿을 축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국가예산이 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요직을 차 지하고 있어서 국정의 운영을 저해하였다. 그러므로 靜庵은 이들의 功에 대 한 진위여부를 밝혀 거짓인 경우에는 훈작을 삭탈해야 한다고 하여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전체 공신 117명중 약 70% 에 해당하는 76명의 위훈을 삭탈하였다.98) 至治를 향한 靜庵의 이러한 급진 적 개혁은 기득권 세력인 勳舊派의 강한 반발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5년 만 에 막을 내리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靜庵은 聖人을 목표로 한 학문의 완성을 통 해 그가 궁극적으로 목표했던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 한 靜庵의 목표는 그 개인적인 삶과 사상에 있어서는 어긋나지 않았지만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사회의 꿈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좌 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靜庵의 확고한 道學精神은 후대 유학자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며 목숨까지 바치는 의병활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한국 유학 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靜庵의 性理學的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道學精神은 士林의 정신적인 표상이 되어 한국 유학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시키는 토대가 되었 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특정정파, 특정지역의 정치적 목표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 전체에 해당되는 총체적 시대정신 98) 이상성, 앞의 책, p. 114. - 47 -

이자 통치철학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 통치철학의 빈곤으로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으로 소통이 시급한 한국의 정치상황의 극복을 위해서도 자신을 헌신하며 至治를 실현하고자 했던 靜庵의 정신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2. 道學精神을 통한 자기 변화 1) 聖賢을 목표로 한 格致 誠正의 자기수양 道學은 修養論을 근간으로 사회 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王道政治의 구현 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靜庵 道學의 특징 또한 개인의 修身과정을 통해 國政 수행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大學之道 에 입각한 政治思想으로서의 王 道政治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의 修養과정으로서의 방법이 중요한데 靜庵은 格致誠正 을 修身의 요체로 제시하였다. 格致誠正 이란 大學 의 八條目으로서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을 말한다. 즉, 平天下를 위해서는 먼저 治國을 해야 하고, 治國을 위해서는 齊家를, 그 리고 齊家를 위해서는 修身을 해야 함을 말한다. 또한 修身을 하기 위해서는 正心 誠意 致知 格物의 과정을 거쳐야 하 므로 平天下의 근본이 바로 格致誠正 이라는 결론에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靜庵은 王道政治를 위해서는 君主의 格致誠正 공부가 중요함 을 강조하였다. 한 마음이 빛나고 밝게 된 연후에 君子와 小人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 니다. 군주께서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면 혹은 君子 를 小人으로 삼고, 혹은 小人을 君子로 삼을 것입니다.99) 99) 靜庵集 卷3, 參贊官時啓十四, 一心光明然後 可辨君子與小人也. 人主格致 誠正之功不至 則或以君子爲小人 或以小人爲君子矣. - 48 -

君主가 格致誠正 의 공부가 되어 있어야 君子와 小人을 구분할 수가 있 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小人이 君子를 보고 小人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復拜副提學時啓 에서도 무릇 格物 致知 誠 意 正心의 공부를 미루어서 齊家를 하고 平天下까지 하는 법 100)이라고 하 였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治國平天下의 근본은 개인적 수양이 우선하며 그 방법으로서 格致誠正 을 제시하여 善政의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靜庵은 또한 한국 道學의 거두로서 道를 통해 근본을 확립하여 聖人이 되고자 하였으며, 王道를 통한 至治主義를 실현하여 大同社會를 만들고자 하였다. 靜庵은 經傳공부를 통하여 道를 體得하였고, 체득한 진리를 굳세게 실천하여 聖人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靜庵은 학문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자가 聖賢이 되기를 기약하더라도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 하고, 君主가 堯舜의 다스림을 기약하더라도 堯舜의 정치에는 반드시 이르 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뜻을 세우고 格致와 誠正에 힘쓰면 점차적 으로 성현의 경지와 堯舜의 다스림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한갓 고 원한데에만 힘쓰고 실제에 힘쓰지 않는다면 날로 마음이 들뜨고 허황된 곳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101) 이와 같이 靜庵은 모름지기 학자라고 한다면 聖賢을 모델로 삼아,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수양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우선 어디에 목표를 두느냐 하는 立志가 으뜸임을 강조하였다. 학 문하는데 있어서는 뜻을 세우는 것이 가장 우선이며, 뜻을 세우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0) 靜庵集 卷4, 復拜副提學時啓一, 夫以格致誠正之功 推而至於齊家 至於治 平矣. 101) 靜庵集 卷3, 侍讀官時啓六, 學者以聖賢爲期 未必卽至聖賢之域 人主以唐 虞三代爲期 未必卽致唐虞三代之治 然立志如此 而用功於格致誠正 則漸至於聖 賢之域 堯舜之治矣 若徒騖高遠 而不下實功 則日趨浮虛之地而已. - 49 -

靜庵은 당시 과거를 통한 政界로의 진출에 매진하던 분위기 속에서 스스 로 중심을 세워 자기완성을 위한 공부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라는 것을 주장 하였다. 靜庵이 말하는 立志란 단순히 뜻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立志에서 중요한 것은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지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하 는데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교육이라는 것이 知的인 데만 치우치는 것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靜庵은 특히 개인의 인격완성을 통해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궁극적 인 목표를 삼았다. 따라서 聖賢을 이상적인 인간상의 목표로 제시하고, 노 력을 통해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는 栗谷의 말을 통해서 도 알 수 있다. 오직 우리 靜庵 선생께서 寒暄堂 文敬公에게서 발단하여 행실을 독실하 게 하는데 더욱 힘써 自得함이 더욱 깊었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반드시 聖 人이 되고자 하였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반드시 道를 행하려 하였다.102) 栗谷이 지적한 바와 같이 靜庵의 학문에 대한 목표는 聖賢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승인 寒暄堂에게 수학하면서 학문의 방향과 목표를 세우는 계기가 되어 한결같이 聖賢이 되는 것을 자신의 학문적 소임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과 그의 학문은 결코 벼슬이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분 명하게 밝히고 있다.103) 이와 같이 聖人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道를 밝히 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靜庵의 학문에 대한 요체이며, 또 자신이 체득한 道를 실천에 옮기는 修己治人의 道學思想을 최 종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靜庵이 聖人이 되고자 철저한 노력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주력하였으며, 마음공부야 말로 聖人의 경지에 이 르는 중심이며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靜庵의 마음공부는 진리를 자기 속에 서 찾아 聖人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102) 靜庵集 附錄 卷4, 道峯書院記, 惟我靜菴先生 發端于寒暄文敬公 而篤行 益力 自得益深 持身必欲作聖 立朝必欲行道. 103) 이상성, 앞의 책, p. 49. 참조. - 50 -

여러분들이 좋은 氣質을 타고 났으나, 학문을 하는 데에는 절대로 먼저 표준을 세우지 말고 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여 따르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그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시일을 아까워하여 마음 을 보존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혹시라도 놓치거나 지나치지 않기를 바 란다.104) 여기에서 靜庵은 목표를 사사로운 주관적 목표가 아닌 聖人의 가르침으 로 따르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임을 밝히고 있다. 하루하루를 아껴 聖人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聖人의 경지에 도달하 게 되며 진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정말 중요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어쩌면 사회가 자신을 성찰하게끔 그냥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 지만, 그동안 이런 과정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윤리적, 도덕 적 사회 제 문제로 많은 부작용을 겪으면서 사회 각 부분에서는 경쟁과 결 과우선주의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런 체제로는 인간의 본성 회복과 삶 을 치유하기는 어렵다. 500여 년 전 靜庵이 강조했던 자기수양과 聖賢이 되겠다는 자기성찰의 기회와 노력이 보편화되는 사회가 되었을 때, 그 사회 는 한층 더 성숙된 문명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2) 經傳을 통한 篤行自得 靜庵의 道學은 매우 확고한 經學的 기반위에서 형성되었으며 그의 삶과 실천에 대하여 실천 한쪽만을 지적하는 경향도 있지만 철저하게 儒敎 經傳 에서 그 원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 實踐之學 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 의 여지가 없다. 靜庵의 일생과 학문에 가장 큰 영향을 준책은 바로 小學 과 近思綠 104) 靜庵集 附錄 卷2, 語類, 賢輩 稟得好氣質 爲學切勿先立標準 沈潛聖訓 循循不已 自有到處 時日可惜 存心不懈 毋或放過. - 51 -

이었다. 특히 小學 은 金淑滋와 金宏弼이 중요시하였고, 靜庵에게 전수됨 으로써 한국 道學의 기본 經傳이 되어 조선 道學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가 되었다. 小學 은 초학자들이 灑掃應對 와 進退之節 을 배우는 기초서적이었음 에도 불구하고 道學者들에 의해 중시되었던 이유는 小學 에서 가르치는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 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애하는 방도의 도리가 곧 修 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었다. 小學 이 이와 같이 어린아이들의 입문하는 책이지만 修身 齊家 治國 平 天下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어릴 때 배우고 실천해야 그 실천이 지혜와 함께 자라나고, 그 敎化도 마음과 함께 이루어져서 앎과 행실이 하나가 되 어 환난을 미리 방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小學 이 중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어릴 때부터 유 교 윤리관을 체득하게 하기 위하여 아동의 修身書로서 장려되어, 鄕校 書 院 書堂 등 당시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는 이를 필수 교과목으로 다루 었다.105) 조선건국과 함께 道學이 유학의 중심이론이 되면서 小學 은 道 學派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靜庵이후 金安國, 李滉, 李珥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입문서로 매우 중요시하였다.106) 靜庵 또한 나이 오십이 된 양산보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을 때에도 小 學 을 주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이 책부터 시작해야 한다. 107) 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로써 靜庵의 학문이 小學 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 을 분명히 알 수 있다. 小學 이 기초 修身書임에도 불구하고, 道學者들이 중시하게 된 까닭을 朱子는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날에 小學校에서 사람을 가르치기를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1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www.aks.ac.kr), 小學 106) 이상성, 앞의 책, pp. 62 64. 참조. 107) 靜庵集 附錄 卷1, 事實, 苟志於學 宜從此始也. - 52 -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 이고 벗을 친애하는 道理로서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修身齊家治國平天 下의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반드시 어릴 때에 그것을 배우고 익히 게 한 것은 그 익힌 것이 지혜와 함께 자라며, 그 교화가 마음과 함께 이 루어져서 감당하기 어려운 근심을 없게 하려고 한 것이다.108) 小學 과 함께 靜庵의 인격완성의 기반이 된 또 하나의 經傳은 바로 近思錄 이다. 近思錄 은 朱子와 東來 呂祖謙이 周敦頤 程顥 程頤 張載 등 네 학자의 글에서 학문의 중심 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간추리고 편집하여 性理學의 핵심을 간추린 기본서라고 할 수 있다.109) 近 思 라는 말은 論語 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것에서 생각하면, 仁이 그 가운데 있다 110)라고 한 말에서 취한 것 으로 모든 일을 가까운 일상의 현실에서 찾고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내용으로 한 책이다. 우암 송시열은 靜庵集 序文에서 靜庵의 학문이 近思錄 을 위주로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靜庵 선생에 이르러서는 하늘에서 내려준 품성이 순수하게 아름답고 두 루 통해서 티가 없는데다가 일찍이 성현의 연원을 듣고 항상 생각하기를 학문이 아니면 道를 알 수 없고, 道가 아니면 정치를 할 수 없다 라고 하 였으니, 그 학문을 오직 近思錄 을 위주로 하였다.111) 실천정신을 중시하였던 靜庵은 가까운 일상 속 현실에서의 실천을 강조 하는 小學 과 近思錄 을 수양의 기본경전으로 택하여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小學 과 近思錄 을 학문의 연원으 108) 小學 小學書題, 古者 小學敎人以灑掃應對進退之節 愛親敬長隆師親友之 道 皆所以為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本 而必使其講而習之於幼穉之時 欲其習與智長 化與心成 而無扞格不勝之患也. 109) 이상성, 앞의 책, pp. 63 64. 참조. 110) 論語 子張,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111) 靜庵集 卷首, 序, 至靜庵先生 則天姿粹美 瑩澈無瑕 蚤聞聖賢之淵源 常 以爲非學無以知道 非道無以爲治 其爲學 專主於近思錄.. - 53 -

로 하여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여 聖人이 되기를 기약함으로써 堯舜시대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靜庵은 孟子가 강조한 浩然之氣 를 체득하고자 독실하게 수양을 하 였는바, 29세 때 山寺에서 孟子 浩然章 을 읽어 한 달 만에 그 참 뜻 을 터득하였다고한다.112) 학문을 통해 깨달은 道를 현실에서 몸소 실천하는 靜庵의 學行一致의 태도는 당시 뿐 만 아니라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터득한 지식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현대의 公職者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과거와 시대적, 환경적 변화에 차이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배움에 대한 자세와 실천의 문제는 변함이 없다고 본다. 현대의 公職者에게 있어 학문이 란 취업을 위한 것 외에는 사실상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이 현실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 하면 월급을 주는데 구태여 힘들여 공 부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문을 게을리 하는 의식은 公職者 가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을 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설사 공직에 입문하는 초심에는 굳게 다짐을 했다가도 세월이 흐르는 과정을 통해 서서 히 잃어버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러한 풍토는 公職者 스스로의 정신적 소 양이나 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한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져 결국은 국민으로부터 질타와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현대의 公職者에게도 인간의 心性을 敎化할 수 있는 지속적 인 經傳敎育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과거 先賢들이 중요시 했던 經傳敎育을 현대의 公職者에게도 지속, 반복하는 교육 시스템을 통해 윤리와 도덕의식 을 함양시키고 더불어 업무와 관련된 전문교육을 강화함으로써, 公職者 개 개인의 인성 함양은 물론 국민에 대한 양질의 서비스도 향상시킬 수 있는 win-win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12) 靜庵集 附錄, 卷5, 年譜, 先生嘗棲山寺 讀孟子浩然章 一月 乃得通解. - 54 -

3) 心剛을 통한 道學의 실천 前述한 바와 같이 靜庵은 학문을 통해 自得한 道를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學行一致를 몸소 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道를 한결같이 실천하기 위해 서는 끊임없는 노력 즉, 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누구나 다 똑 같은 善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다움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나 氣質 의 淸濁과 純雜에 의해 君子와 소인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 임없는 공부와 노력을 통해 하늘이 부여해준 본심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본심을 회복했다 하더라도 마음이라는 것은 活物이기 때문에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므로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정성과 노력이 뒤따라야만 어 느 한순간도 흔들림 없이 道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靜庵 역시 마음공부를 요체로 삼아 心剛 에 주력하였다. 理는 오직 미미하고 氣는 쉽게 타므로 항상 착한 사람은 적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많은 법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顔子를 바라는 이는 또한 顔子가 될 수 있다 고 하였으니, 요체는 마음을 굳세게 하는(心剛)데 있습 니다. 마음이 진실로 굳세면 善을 행하기는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113) 사람은 기품에 따라 善과 惡으로 나누어지지만 노력여하에 따라 누구나 本性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靜庵이 道學을 실천할 수 있었던 핵심 또한 道를 향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心剛 의 노력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靜庵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소신과 같은 사람도 청명한 밤 고요한 가운데 혹 志氣가 맑아질 때가 있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잘 함양하여 잃지 않는다면 옛 사람을 바랄 수 113) 靜庵集 卷4, 復拜副提學時啓 13, 理惟微而氣易乘 故善人常少 而不善人常 多 古人云希顔而顔 要在用心剛 心苟剛 爲善不難矣. - 55 -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씀이 굳세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날 다시 어지 럽고 동요되는 근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114) 靜庵은 心剛 공부를 통하여 志氣가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말을 하고, 그 志氣 가 맑아질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보존하기를 노력한다면 聖人 을 기약할 수 있지만 어느 한순간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志氣 가 外物 에 의해 흔들리는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靜庵이 말 하는 心剛 이란 사욕을 제거하고 本性을 회복하기 위한 마음공부라고 이해 할 수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였다. 君子는 이를 두려워하여 動靜에도 마음을 기르니 敬 으로서 안의 마음 을 바로잡고 義 로서 밖의 사물을 대하여 환하게 보고 들음에 떳떳함이 있다. 어두운 곳에서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 上帝가 밝게 임하고 꿋꿋하게 스스로를 지키면 神明이 엄숙해지고 함양하여 폐기하지 않는다면 순순히 따르게 된다. 개울이 맑고 흐름이 넓으면 온갖 변화를 발휘하여 밝은 해와 같이 우뚝하게 된다.115) 靜庵은 敬 으로 마음을 잡고 義 를 실천하는 내면적인 인격과 의지로 인 간다운 행위를 성실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고요한 시간에 志氣를 맑고 순수하게 함양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중요성을 말하 고 있다. 즉, 本性을 회복하여 굳게 잡고서 그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자신을 성찰하여 도덕적인 주체 를 확립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발휘하여 실현될 때 완전한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므로 敬 과 義 는 근본의 확립과 실천으로서 함께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14) 靜庵集 卷4, 復拜副提學時啓 13, 如小臣者 亦於淸夜岑寂之中 或有志氣淸 明之時矣 苟能養之不失 則古人可希 而用心不剛 故明日還有紛擾之患矣. 115) 靜庵集 卷2, 戒心箴, 君子是懼 動靜有養 敬以內持 義以外防 惺惺介然 視聽有常 祇慄室幽 上帝臨赫 凜然自守 神明肅肅 涵濡勿替 循循允修 涓涓其澄 浩浩 其流 發揮萬變 卓然曒日. - 56 -

栗谷은 靜庵의 道學思想의 역할과 영향이 매우 컸음을 밝혔는데, 道學이 란 義理를 실천하는 유학으로 生死를 결단하는 윤리적인 실천 학문으로서 투철한 死生觀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栗谷은 道學에 대해 정의하기를 무 릇 道學이란 格物致知로서 善을 밝히고, 誠意正心으로서 그 몸을 닦아, 몸 에 쌓으면 天德이 되고, 이를 정치에 베풀면 王道가 된다.116)고 하였다. 栗谷의 말처럼 道學의 내용은 天德과 王道, 즉 修己와 治人이 되는 것이 며,117) 유학의 핵심이념이기도 하다. 이처럼 道學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 시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道라는 철저한 원칙 아래에서 이루 어진다. 그리고 靜庵의 思想 또한 道가 모든 실천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靜庵 의 道學은 단순한 實踐之學이 아니라 확고한 經學의 기반위에서 형성되었다. 前述한 바와 같이 靜庵의 삶과 실천에 대하여 실천만을 지적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儒敎經傳을 기반으로 한 실천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 지가 없는데, 靜庵은 小學 과 近思綠 을 기반으로 하여 修身의 요체로 삼고 다양한 經傳을 섭렵하여 道를 깨우치고, 나아가서는 德과 禮로 다스리 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王道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즉, 나라를 다 스리는 방법은 道일 뿐이며, 道라는 것은 本性을 따르는 것이므로 나라의 모든 일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그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道를 실현하 는 王道政治를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靜庵은 道學의 실천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진 사람은 오직 義理를 알 뿐입니다. 궁함과 영달, 長壽와 夭折 등의 外物이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학문에 힘쓰고 정도에 뜻을 둘 따름이니, 어찌 궁함과 영달에 뜻을 두겠습니까?118) 116) 栗谷全書 卷15, 東湖問答, 夫道學者 格致以明乎善 誠正以修其身 蘊諸躬 則爲天德 施之政則爲王道也. 117) 황의동, 한국의 유학사상, 서광사, 1995. p. 94. 118) 靜菴集 卷4, 三拜副提學時啓三, 賢者惟知義理而已 窮達壽夭凡外物 皆不 能動其心 但力於學問志於正道而已 豈有意於窮達哉. - 57 -

靜庵은 이와 같은 신념으로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일을 도모하 고, 일을 당해서는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오직 義理와 正道에 근거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마음자세로 道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또한 靜庵은 정치에 있어서도 道를 실천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정치를 道 를 실천하는 도구로 삼았다. 마음을 보존하고 道를 펼치면, 仁을 행함에 있어서는 봄과 같이 만물을 仁으로서써 생육하고, 義를 행함에 있어서는 가을과 같이 義로써 만민을 바르게 할 것이며, 禮智도 또한 天理에 극진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仁義禮智의 道가 천하에 행하여지면 나라 다스리는 규모와 시책을 배품에 있어서 이에 더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119) 라고 하였듯이, 靜庵은 정치란 仁義禮智의 道를 실천하는 것뿐이라고 생 각했으며, 제도적 규제나 억압보다는 治者의 마음의 진실여부에 달려있다고 보아 治者의 도덕성 확립이 가장 우선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正道에 대한 믿음으로 백성을 위해 王道政治의 실현을 꿈꾸다 가 4년이라는 짧은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생을 마쳤지만, 그의 道學精神은 후학들에게 義理의 실천과 正道의 구현에 대한 사상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靜庵은 이러한 心剛의 노력을 통해 체득한 道를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였 으며, 중종에게 마음을 경계하는 箴言을 올려 임금 또한 마음을 항상 善에 머무르도록 수양을 하여 德化가 펼쳐지기를 강조하였다. 사람이 천지로부터 강하고 부드러움을 품부받아서 형체를 이루고, 健 順120)의 德을 받아서 性이 되었으니, 氣는 곧 四時이고 心은 곧 四德입니 다. 그러므로 천지 기운의 큼은 넓고 커서 두루 포용하지 않음이 없고, 사 람 마음의 신령스러움은 아득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바가 없는데, 하물며 119) 靜菴集 卷2, 謁聖試策, 存其心出其道 則爲仁而至於天之春 而仁育萬物 爲義而至於天之秋 而義正萬民 禮智亦莫不極乎天 而仁義禮智之道 立乎天下 則爲國之 規模設施 何有加於此耶. 120) 五常(仁義禮智信)을 말함. - 58 -

임금의 한마음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중략) 그러나 사람의 마음 에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신령스러움이 침체되어 사사로운 情에 구속되어 두루 통하지 못하여 천리가 어두워지고, 氣 또한 막혀서 天性과 人倫이 무너지며, 천지의 만물도 生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121) 이 글에서 靜庵은 한 개인은 물론이요, 국가의 다스림에 있어서도 마음이 가장 근본이 됨을 말하였다. 靜庵의 道學사상이 실현되기 위한 바탕 또한 마음의 근본을 바로 잡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靜庵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바른 심성을 통한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였으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실제 생활에서 터득한 道를 정치에 그대 로 적용하여 덕화를 베푸는 데 전념을 다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과정에서 勳舊派의 반대로 인하여 죽음을 맞게 되어 至治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靜庵의 道를 실현하기 위한 마음의 성실성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리고 개인적인 수양의 완성을 통해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정신에서 국가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公職者들의 개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요구하 고 있다. 3. 格君心을 통한 정치 혁신 1) 格君心의 필요성 孟子는 일찍이 오직 大人만이 君主의 옳지 않은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 다. 대개 군주가 어질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없고, 군주가 義로우면 義롭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군주가 올바르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일단 군 주를 바로 잡으면 나라 또한 안정된다. 122)고 하였다. 121) 靜庵集 卷2, 戒心箴, 人之於天地 稟剛柔以形 受健順以性 氣則四時 而心 乃四德也 故氣之大浩然無所不包 心之靈妙然無所不通 況人君一心 (중략) 然 人心有欲 所謂靈妙者沈焉 梏於情私 不能流通 天理晦冥 氣亦否屯 彝倫斁 而萬 物不遂. 122) 孟子 離婁 上, 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 君仁莫不仁 君義莫不義 君正莫不 - 59 -

한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잘 다스려지느냐 혼란스러우냐는 君主의 마음 에 달려있다. 나쁜 마음은 政事에 해를 끼치게 되고 백성의 생활이 그 만큼 황폐해 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필하는 신하의 역할은 반드시 군주의 나 쁜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니, 이는 大人의 德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靜庵은 燕山君代의 정치상황을 통해 君主의 마음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君主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였다. 정치에 있어 주체적 역할을 담 당하는 君主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靜庵의 생각은 반드시 君主가 바로 서야 堯舜의 다스림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후세의 治道가 점점 낮아져서 옛날처럼 될 수 없다 고 합니다.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지금은 禽獸가 될 것이고, 다시 사람의 이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三代의 정치를 지금 당장 회복할 수 있 으며 그 방법도 아주 쉽습니다. 먼저 君主 자신의 덕을 닦고 나서 그 방법 을 사물에 옮겨 행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저절로 감화하여 깨달을 것입니 다. 나의 덕은 닦지 않고 단지 일에만 시행을 잘한다면 무슨 이로움이 있 겠습니까? 반드시 자신의 덕을 돈독히 닦고 온갖 교화가 모두 자신의 明 德으로부터 나오게 한다면 백성들이 저절로 우러러 보고 기뻐하기를 그치 지 않을 것입니다.123) 靜庵은 반드시 君主가 德을 지닌다면 堯舜시대의 정치가 가능하기 때문 에 君主의 덕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靜庵은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는 왕이 聖人의 자질을 갖추는 것이 제도적 시행을 잘 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함을 말하고 있다. 靜庵이 34세 되던 해 가을, 中宗이 成均館 儒生을 대상으로 실시한 謁聖 正 一正君而國正矣. 123) 中宗實錄 卷31, 中宗 13年 1월, 人皆曰 後世治道漸下 不能復古 若如此言 則至今當爲禽獸 無復人理矣 三代至治卽今可復 而要至近焉 當先養己德而後 推於事則人皆感悟 不期然而然者矣 吾德不修 而但於事爲之間 雖有施措之善者 亦何益哉 須敦厚其德 使萬化皆自明德中流出 下民紫煙觀瞻欣悅 有不能已矣. - 60 -

試에 응시하였는데, 중종의 策問에서 靜庵은 당시의 임금인 中宗이 修養을 하면 聖人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믿었다. 策問의 내용은 중종 당시의 상황에서 옛날의 堯舜시대와 같은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루려면 가장 먼 저 힘써야할 급선무에 대한 방책을 기탄없이 말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중종과 함께라면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기위한 노력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靜庵은 임금의 마음과 의지에 따라 정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임 금의 마음은 정치가 행해지는 근본이니, 그 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교화가 행해질 수 없고 治道도 세울 수 없다. 124)라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세워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임금이 德治로서 國政에 임할 때 백성들 이 믿고 따르게 되어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상사회의 실현도 君主의 의지에 따라 可否가 결정된다는 것을 선결 요건으로 지적하고 있다. 靜庵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德을 행하여 근본을 바로 잡는다면 나라 의 기강과 법도는 저절로 확립된다고 보았다. 또한 道는 곧 바른 정치를 펴 나가는 근원이 되고, 心은 바른 정치를 펴는 근본이 되며, 誠은 道를 행하는 요체 가 되는 것 125)이라고 하여 道가 먼저 확립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道의 근본은 마음이며, 그 마음을 성실히 수행함으로 나라의 기강이 세워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君主의 선한 本性을 실 현하는 과정이다.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정치를 펼쳐야만 堯舜의 정치 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靜庵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聖賢의 학문을 배우고 익힐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性理大全 은 體과 用이 다 갖추어지고, 근본 되는 일과 말단에 속하 는 일이 다 갖추어져 있는 책입니다. 천문 지리 예악 법제 성명 도덕의 이 치와 역대 군신의 현명함과 현명하지 않음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 습니다. 진실로 이것에 밝으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그 이외의 다른 것 124) 靜庵集 附錄 卷6, 行狀, 君心出治之本 其本不正 則敎化無由以行 治道 無因以立. 125) 靜庵集 卷2, 謁聖試策, 且所謂本者 豈非道乃出治之由 心爲出治之本 而 誠亦行道之要也. - 61 -

에 의지할 필요가 없고, 국가의 기강도 여기에서 서게 될 것입니다.126) 靜庵은 정치의 요체가 性理大全 에 다 구비되어 있으니, 君主가 유학에 정통하여 體用과 本末을 이해하고 통달하게 되면 모든 일을 분별할 수 있 게 되어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靜庵은 이와 같이 이상 정치의 실현은 君主의 훌륭한 자질이 필수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이유로는 燕山君代의 학정에 의한 여러 가지 폐단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君主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백성 또한 君主를 믿지 못하게 된다. 君主와 백성이라는 상하의 감화와 소 통이 없이는 나라의 기강도 바로 세워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 소통정치로서의 言路 개방 靜庵의 道學思想은 개인적인 修養의 완성을 근본으로 하여 이상적 王道 政治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종 10년(1515) 謁聖試에 합격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데, 첫 보직인 典籍을 거쳐 홍문 관 감찰로 자리를 옮긴 뒤 다시 언론담당 관청인 사간원의 左正言으로 옮 기게 된다. 이때부터 비록 말단의 자리에 있었지만 靜庵은 道學으로서 정치 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至治主義에 입각한 王道政治의 실현을 시도하게 된 다. 靜庵은 王道政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심과 公論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靜庵의 言路 개방의 중요성에 대한 상소문이다. 言路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의 흥망에 가장 관계되는 것이니, 통하 면 다스려져서 평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져서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언로를 넓히기를 힘쓰셨기에 위로 公卿大夫와 모든 나라 일을 맡 126) 中宗實錄 卷31, 中宗 13年 11월, 性理大全之爲書 體用該備 本末畢具 天文 地理 禮樂法制 性命道德之理 歷代君臣賢否 靡不備具 苟明乎此 則治世之方不 待乎外 而元氣於是乎立矣. - 62 -

은 사람으로부터 아래로 시골마을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을 올리는 직책이 없으면 스스로 말을 극진 하게 할 수 없으므로 諫官을 두어 그것을 주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말 이 혹 지나치더라도 다 마음을 비워놓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은 言路 가 혹 막힐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127) 靜庵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언로개방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러 므로 임금은 言路를 개방하는 일에 힘쓰고 마음을 겸허히 하여야 모든 사 람이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언로는 국가의 흥망과 관계된 매우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言官을 설치하여 그 일을 맡겨서 임금 에게 말을 극진히 전달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각 처의 사람들에게 언로를 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諫 官을 정해둔 것이다. 그러므로 諫官은 모든 사람들의 의사를 수용하여 그들 을 대신하여 임금에게 건의할 수 있는 기구로서 항상 임금 가까이에서 발 언할 수 있는 耳目之官 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는 임금의 독단적 이고 일방적인 통치를 막고, 民意를 반영하고, 관리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 용하기 위한 것이었다.128) 그러기 위해서는 言官이 자신들의 직분을 소신껏 행하여 公論을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靜庵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臺諫의 일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大臣이 모두 논한다면 臺諫은 手 足을 놀릴 데가 없게 되며, 훗날 또한 폐단이 있게 되니 바로 잡아야만 합 니다. 무릇 公論이 대간에 있은 후에라야 국가의 다스림이 안정되는 것이 요, 또한 臺諫의 논변이 비록 일시 과격하여 중도에 벗어났다 하더라도 또 한 과실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기세가 위축되어 있는데 대신이 또 저지하고 억압한다면 국가의 공론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요 127) 中宗實錄, 卷23, 10年 11월, 言路之通塞 最關於國家 通則治安 塞則亂亡 故 人君務廣言路 上自公卿百執事 下至閭巷市井之民 俾皆得言 然無言責 則不自 得盡 故爰設諫官以主之 其所言雖或過當 而皆虛懷優容者 恐言路之或塞也. 128) 배현주,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연구, 한국교원대석사학위논문, 2010, p. 49. - 63 -

사이 신 등이 아뢴 政院의 일을 만일 經筵에서라면 서로 可否를 논할 수 있지만, 이는 큰일도 아닌데 대신이 들어와 政院은 구원하고 臺諫은 억제 한다면 대간의 기세가 이로부터 시들어질 것입니다. 129) 靜庵은 대간들의 직분인 公論을 소신껏 주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간섭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신들의 지위가 臺諫보다 높기 때문에 그 직책을 힘으로 누른다면 대간들은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靜庵은 대간들이 직책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言路를 넓히는 일에 臺諫이 앞장서야 함을 강조한 것도 국가 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것임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臺諫된 자는 국가의 일에 있어서 그 기미를 알면 마땅히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강을 붙들어 일으켜야지 단지 한 가지 일의 과실을 논변하고 한사 람의 비행을 논박하는 것으로 그 직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그 利의 근원이 시작되는 데를 생각하여 미리 도모해서 그 뒤를 善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130) 言責을 맡은 자는 한 개인의 비리나 잘못을 논박하는 지엽적인 것에 머 물러서는 안 되며,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안위를 생 각하지 말고 극진히 諫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臺諫들이 국가를 위 한 정책 수립에 적극 참여 하기보다는 개인의 비행을 들추는 데 치중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대간은 임금의 눈과 귀가 되 129) 中宗實錄 卷36, 14年 6월, 臺諫之事, 雖小小之事 大臣皆論之 則臺諫無所措 手足 而後弊亦有之 不可不救正 大抵公論在於臺諫 然後國家治安矣 且臺諫之 論 雖一時高亢過中 亦不爲失也 如有委靡之氣勢 而大臣又沮抑之 則國家公論 無所托矣 近日臣等所啓政院之事 若於經筵則相與論其可否矣 此非大事 而大臣 爲入來 救政院抑臺諫 臺諫氣勢 自此而委靡矣. 130) 中宗實錄 卷37, 14年 10월, 爲臺諫者 於國家之事 知其幾微 則當不計其身而 扶起綱紀也 固非以論一事之失 駁一人之非 爲盡其職也 須念其利源之開 而預 圖之 以善其後 可也. - 64 -

기 때문에 항상 공평하고 정직해야 한다. 靜庵의 언로개방을 위한 이러한 노력들은 새로운 정치질서 확립을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靜庵의 言路 개방을 위한 노력들을 종합해보면 임금과 大臣, 臺諫의 화합 과 소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대신과 대간 사이는 고질적인 대 립과 반목의 형세를 보여 왔기 때문에 언로를 통해 조화와 소통을 이루고 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신의 주 장과 대간의 견제가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靜庵은 이렇 게 서로 간에 화합이 잘 이루어져서 임금과 대신, 대간 사이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질 때 그가 꿈꾸었던 王道政治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 훈구세력의 축출을 통한 정치쇄신 靜庵은 燕山君의 폭정과 패륜행위에 대한 反正으로 中宗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1515)이 되던 해에 정계에 진출하였다. 중종조는 반정을 통해 형성 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무너진 정치적 기강과 질서를 새롭게 확립하여 국가 의 기강을 일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반정 이후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는 백성들의 여망과는 달리 조정에서 권력 을 장악한 반정공신들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여 정치적 분위기를 쇄신하 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몰두하고 있었다.131) 즉, 정국공신은 父子, 兄弟, 叔姪, 祖孫, 四寸 등의 친족집단과도 같은 성 격으로 구성되어져 반정 초부터 정치적 문제로 부상되어 왔다.132) 게다가 당시 정국공신들은 六曹를 장악하여 거대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에 신진 사림세력은 靜庵을 중심으로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靜庵은 賢良科 실시를 통해 훈구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현량과는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士林派가 勳舊派와의 대립 속에서 시험만으로 인재 131) 최병덕, 정암 조광조의 정치인식과 도학적 정치구상 국제정치연구 제10집, 2007. p. 122. 132) 이한조, 靜庵 趙光祖의 改革思想에 관한 考察,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 51. - 65 -

를 뽑는 과거제도를 탈피한 추천을 통해 천거된 인재를 시험을 거쳐 등용 하고자하는 제도였다. 燕山君代와 反正 초기의 쇠퇴한 士習으로 인하여 학 문과 행실이 뛰어난 국가적 인재들이 鄕里에서 벼슬길에 나오지 않는 분위 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단순한 지식이나 詞章에 능한 자를 선정하는 과거제 에서 벗어나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인재를 가리기 위한 시도였다. 그런 점 에서 현량과의 실시는 勳舊派에게는 위기감을 고조시켰으며, 중종 14년 3 월, 김우중 모반사건133) 등을 계기로 훈구세력의 계책에 회의를 느낀 중종 은 현량과 시행을 허락하게 된다. 현량과는 사실 정국공신이 중심이 된 勳舊派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조정 을 새로운 관료들이 장악하여 구시대의 모순을 탈피하고 성리학적 道의 세 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현실적 요구의 적극적인 반영이었다. 무엇보다 중종 자신이 勳舊派 일색으로 포진되어 있던 당시 조정의 권력 구조를 어떤 형 태로든지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에 조광 조 등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등용된 신진 사림들은 특히 經 筵을 통하여 국가의 중요 현안을 협의하면서 중종에게 성리학적 이념에 투 철한 聖君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당시 권력기반이 약했던 신진 사 림에게 유일한 안전보호막은 임금이었다. 즉, 임금의 마음이 흔들리면 권력 의 구조 변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至治를 이룰 수 있는 열쇠도 임금에게 달 려있다고 판단하여 임금의 강건한 자세와 의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靜庵의 과단성 있는 개혁에 대해 중종을 비롯하여 훈구 세력들의 두려움과 거부도 대단하였다. 한 예로써 昭格署 폐지를 두고 중종은 先祖도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거부감을 표하였지만 靜庵은 확고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中宗과 靜庵과의 대화이다. 祖宗朝에서 혁파하지 못한 일을 스스로 내가 잘난 체하여 고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다.134) 133) 정국공신 김우중이 賢良科 실시를 주장하던 趙光祖 일파를 제거할 모의를 하 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현량과 실시는 더욱 힘을 얻게 된다. - 66 -

祖宗때의 일이라도 한 때의 잘못된 일은 자손이 고쳐야 前代의 공렬을 더 빛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는 다만 前朝의 구습을 답습하였을 뿐이 니, 祖宗때의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前朝의 잘못을 祖宗께 돌 리는 것도 불경한 일입니다. 지금 혁파하더라도 스스로 잘난 체하여 고치 는 것이 아니니 이 분부는 평탄하고 정대한 王者다운 말씀이 아닌 듯합 니다.135) 이상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금의 우려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靜庵 의 개혁의지는 확고함을 볼 수 있다. 先代 祖宗에서 신봉하여온 舊法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불합리하다면 고치는 것이 마땅하며, 祖宗 때의 일이라는 이유나 변명은 구차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고치는 것이 祖宗을 빛 나게 한다는 적극적인 변통 논리를 펼쳤다.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이라면 개 변이나 변통할 필요성이 없겠지만, 잘못되고 폐단이 있는 것이라면 즉시 과 감하게 개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靜庵의 변통론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靜庵은 개혁의 대상이라고 판단되었을 경우에는 그 일이 완수 될 때까지 포지하지 않고 임금이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계속하여 진언 하는 등 자신에 대한 의지를 굽힐 줄을 몰랐다. 靜庵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 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反正功臣에 대한 僞勳削除였다. 그것은 뒷날 己卯士 禍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반정공신에 대한 위훈삭탈이란 당시 권력층인 훈구 세력 4분의 3의 지위를 삭제하여 그 지위를 격하시키는 일이었다. 中宗反正 당시 주도 세력은 반정 닷새 후 논공행상을 하여 무려 101명의 무더기 공신책봉을 上啓하였다. 그리 하여 中宗反正 靖國功臣을 책봉하게 되었는데, 靖國이란 나라를 다스려 편안 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1등 정국공신에 박원종 등 8명, 2등 정국공신에 심순 격 등 13인, 3등 정국공신에 심정 등 83인을 책봉하였으며 한두 명씩 더 늘 134) 中宗實錄, 卷34, 13年 8월, 祖宗朝所未革去事 自謂吾賢而改之 固不可焉. 135) 中宗實錄 卷34, 13年 8월, 祖宗時事 一時謬擧 子孫當改之 亦可以增光前烈 況此特因前朝舊習 不可曰祖宗時事也 以前朝之累而歸之於祖宗 亦是不敬 今而 革之 非自謂賢而改之 此敎恐非王者平坦正大之言. - 67 -

어나 공신은 결국 117명으로 조선개국 이래 최대의 숫자에 달했다. 그러나 中宗의 反正功臣 책봉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내재해 있었다. 우선 공신 책봉 자체가 공에 따라 상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위 훈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보상이 당대의 국가 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조 개국 이래 이미 여덟 차례에 걸쳐 거듭 공신 책봉이 있었던 터에 공신들에게 지급할 국유지와 국가재정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이러한 공신들에 대한 혜택은 당대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세습되었다. 반정공신들의 위훈 책정은 반정주도자들이 권력화 혹은 정치세력화를 통 하여 정국의 장악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깊이 내포한 것이었다. 중종 초반은 이들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임금을 무력화 시켰다.136)그렇기 때문 에 중종이 반정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節義를 강조하는 趙光祖 와 그 추종세력을 중용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집 권 초반에 부도덕한 과거를 청산하고 공신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서는 사림의 도덕론이 필요했고 그것은 현실적으로도 유용했지만, 도덕론을 앞세워 권력을 교정하려는 사림의 시도가 왕권에 치명적 손상을 가져줄 수 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반정공신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性理學 的 정치이념이라는 원칙에 구속을 받게 된 중종은 왕권 수호를 위해 또 다 시 그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己卯士禍를 불러오게 하였고, 靜庵의 정치적 실험의 좌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性理學的 이념에 따라 도덕 정치를 실현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후 영향력 있는 정치론으로 형성되어 현 실정치를 도덕적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137) 靜庵은 出仕이후 4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통해 훈구세력을 축출하여 새로 운 정치를 실현해 보고자 했다. 그러한 그의 노력도 己卯士禍를 계기로 수 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가 꿈꾸었던 王道政治의 이상은 조선말기의 의 병활동으로까지 이어져 우리의 정신사를 한 층 빛나게 하고 있다. 136) 이상성, 앞의 책, pp. 231 242 참조. 137) 최병덕, 靜庵 趙光祖의 정치인식과 道學的 정치구상 국제정치연구 제10집, 2007. pp. 112 113. 참조. - 68 -

4. 隆平과 咸與維新을 통한 泰和之域의 실현 1) 咸與維新을 통한 공동체 의식의 함양 更張 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말 중에 維新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詩 經 大雅 <文王>篇의 周雖舊邦, 其命維新 138)에서 비롯된 말로서 옛 법을 개변함으로써 새로운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 는 기호사림의 영수이며 士林派의 대표적인 개혁가인 靜庵이 咸與維新 이 란 말로서 당시의 부패한 정치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유가적인 이상정치 인 至治를 실현하려는 구호로 삼기도 하였다.139) <文王>篇은 문왕의 덕을 추모하고 찬양한 詩로서 이 말이 들어 있는 첫 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文王의 신령이 위에 계시어 아! 하늘에 나타나시었네. 周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운명을 크게 고쳐 새롭도다. 周나라는 나타내지 않아도 하느님의 명령은 불시에 내렸다네. 文王의 신령이 오르내리시어 하느님의 좌우에 계시도다.140) 이는 文王의 신령이 위에 계시어 하늘에 밝게 나타나시니 周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이 대대적으로 정치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운명 이 새로워졌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周나라가 비록 오랜 나라이나 그 138) 周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文王에 이르러 천명이 비로소 새롭게 되었다. 139) 장숙필, 율곡 경장론의 특징과 그 현대적 의의, 율곡사상연구, 제10집, 율곡학회, 2005. p. 25. 140) 詩經 大雅 <文王>, 文王在上 於昭于天 周雖舊邦, 其命維新 有周不顯 帝 命不時 文王陟降 在帝左右. - 69 -

命이 새롭다고 한 革新의 뜻이 보다 강하게 들어 있다.141) 또, 이와 같은 의미로 書經 夏書 <胤征>에서는 咸與惟新 이라고 했다. 불이 崑崙山 등성이로 타오르면 옥과 돌이 모두 타나니, 天吏가 덕을 잃 으면 사나운 불보다도 사나우니, 그 우두머리들만 섬멸하고, 위협당하여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말라. 옛날에 물들었던 더러운 습속을 모두 더불 어 오직 새롭게 개혁하리라.142) 이는 胤나라 임금이 정벌군은 천벌을 대신 집행하므로 곧 하늘의 관리이 기 때문에 비록 전시라고 하여도 밝은 이성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여 함 부로 살육전을 감행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악당의 괴수만 섬멸할 것이요 협박을 당하여 부득이 추종한 사람은 그 죄를 다스리지 말고 개과천선토록 하여 羲氏와 和氏의 나라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다.143) 즉,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개혁을 뜻하는 것으로, 압축시켜 보면 咸與維新 이란 다함께 새롭게 하자'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혁명이 아닌 자체의 발전적인 과감한 개혁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咸與維新이란 결국 모두가 더불어 힘을 합 쳐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서, 공평하게 잘사는 융평사회로 가기 위한 절차적 방법론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靜庵 역시 經筵에서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法制와 稅制등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정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의 법제는 비록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고명 하여 사리를 통찰한다면 대신들과 같이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서 덜어낼 것 은 덜어내고 보탤 것에는 더 보태서 기어코 隆平케 해 나가면서 朝宗의 법 전을 준수해 나감이 옳을 것입니다. 만일 조금 성공된 것으로 안심을 하고 141) 서정기 역주, 새시대를 위한 詩經, 살림터, 2001. p. 226. 142) 書經 夏書 <胤征>, 火炎崐岡 玉石俱焚 天吏逸德 烈于猛火 殲厥渠魁 脅 從罔治 舊染汙俗 咸與惟新. 143) 서정기, 앞의 책, p. 297. - 70 -

구차하게 우물우물 한다면 제왕들의 정치를 어찌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선 비의 습성과 백성의 풍속을 淳正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복고의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분발하여서 보람 있게 하며 咸與維新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고무시키고 진작시켜서 화목하고 활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144) 구체적으로 王政을 구현하는 절차, 즉 백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실현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君主와 신하 백성 모두가 참여하여 法制와 稅制 등을 새롭게 함으로써 咸與維新 의 隆平 을 통한 泰和之域 145)의 완성을 제 시하였던 것이다. 靜庵은 당시 中宗에게 소망하던 이상정치를 이루기 위해 서는 바로 咸與維新의 마음으로 隆平이라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이행해보 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이룩할 이 땅의 모습인 泰和 地域 을 靜庵 자신의 특징적인 표현으로서 분명하게 구체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깊은 학문과 세상을 보는 남다른 안목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개 념으로서의 현실적 실천방안을 제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46) 어느 사회에서나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새로 움을 지향해 가는 것은 그 시대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이러한 정 신은 咸與維新 이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 공직사회에서도 언제나 日新日日新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쩌면 현재의 公職者에게 가장 부족한 144) 靜菴集 卷3, 經筵陳啓 <參贊官時啓五>, 國之法制 雖不可輕改 然學問高明 洞照事理 則與大臣同心協力 可損者損之 可益者益之 期致隆平 而遵守祖宗之 成憲 可也 若安於小成 苟且因循 則帝王之治 何可致也 如欲使士習民風 歸於 淳正 而復古之治 則必奮發有爲 咸與維新 然後鼓舞振作 而煕煕皥皥矣. 145) 泰和地域 이란 말은 <謁聖試策>에서 보인다. 靜庵은 정치적 이상을 至治 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런 이유로 그 道學思想의 근본이념을 至治主義 라고 부른다. 그는 지치의 경지를 泰和地域 으로 규정하였는데, 그 것은 儒學의 이상적인 모형으로 거론되는 堯舜의 정치와 풍속이 이루어지는 사회와 같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요약하면, 복지국가적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 면서 동시에 道의 국가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지 문제는 물질적, 경제적 측면에서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고, 道의 문제는 정신적, 도덕적 측면에서 이상사회를 가리킨다. 즉 정치, 경제적으로 평등이 보장된 도덕적 大同社會를 추구한 것이다.(정규훈 외, 동양사상, 전통문화연구회, 2004. pp. 242 243. 참조) 146) 이상성, 앞의 책, p. 227. 참조. - 71 -

정신중의 하나가 바로 咸與維新의 정신일지도 모른다. 함께 하는 공동체의 식, 이를 통해 이루어 낼 수 있는 창조적 정책과 국정철학이 이 시대의 公 職者에게 필요한 중요한 덕목의 하나이다. 2) 君臣共治를 통한 견제와 균형의 사회 구현 유교사회에서의 관료는 君主와 신하가 상하 복종관계가 아니라 君主와 협동하며 君主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道와 합치하면 出仕하여 君主와 함께 세상을 경영하지만 道에 맞 지 않을 경우는 언제든지 退仕하여 處士로 돌아가 자신을 수양하며 학문에 몰두하는 삶을 이어갔다. 관료로서 관직에 수반되는 祿俸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유가에서의 관료는 이념적 측면에서 볼 때 君主의 생각을 받들어 맹목적으로 따르는 하수인으로서의 존재로 설정되지 않는다. 書經 에는 君主와 신하간의 관계가 서로 相補하는 君臣共治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湯王의 재상이었던 伊尹은 탕의 왕위를 이 은 太甲이 탕왕의 治道를 따르지 않자 太甲을 桐宮에 幽閉시켰다가 太甲이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을 보고 다시 왕위에 옹립하였다.147) 이러한 사실은 儒敎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국가에서 관료들은 君主와 이 해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道 로서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君主나 관료에게 있어서 행위의 준칙이 되는 것은 道이며, 君主라고 해서 道를 벗어난 초월자는 아닌 것으로 보았다. 君主가 道에 따 르는 정치를 하지 않을 경우, 관료들은 원칙적으로 그것을 맹종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君主나 관료는 정치사회의 실제에서 道를 구현하기 위해 서 로 相補하는 관계가 본질이었다. 정도전은 君主와 재상 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帝者의 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聖人이었다. 그래서 서로 堂陛 위 147) 書經 卷4, 太甲 上, 太甲旣立 不明 伊尹放諸桐 三年 復歸于亳 思庸 伊尹 作太甲. - 72 -

에서 화기애애하게 토론하고 의논하면서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다. 王者의 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賢人이었다. 그래서 서로 힘을 합쳐 정사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융성한 치세를 이루었다. 覇者의 시대에는 임금이 신하 만 못하였으나 신하에게 정권을 맡겨서 또한 一代의 功業을 이루었던 것 이다. 만약 君主의 자질이 중간 정도인 경우에는 훌륭한 재상을 얻으면 정 치가 잘 되고, 훌륭한 재상을 못 얻으면 정치가 어지러워진다.148) 鄭道傳의 근본적인 인식은 君主가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한 경우에는 능 력 있는 宰相이 실질적인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 장의 맥락은 靜庵과 退溪, 栗谷 등의 性理學者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 있다.149) 즉, 儒敎的 관료는 통치자가 德治를 할 수 있는 근본인 도 덕적 인격과 밝은 판단력을 구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통치자의 대리로서 백성들을 교화하면서 충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 君主와 관료는 서로 다른 異體 가 아니라 하나의 有機體 로서 기능하 는 것으로 보아 공동책임을 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관료들은 백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모범을 보여 敎化하는 것이 주요 임무의 하나인 만큼 관료자신의 일상적인 수양과 성실성이 기본 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儒敎에서는 백성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일 뿐 만 아니라 정치가 존재해야 하는 정당성을 백성을 위한 것 에다 두고 있으 며, 그것은 백성들의 물질적 생활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의 완전한 실현 148) 三峯集 卷7, 朝鮮經國典 上, <宰相年表>, 帝者之世 君臣俱聖 故相與都兪 於堂陛之上而成雍煕之化 王者之世 君臣俱賢 故相與勤勞於政事之間而致隆平 之治 霸者之世 其君不及其臣 然能任之專 故亦能成一時之功 若夫中材之主 相得其 人則治 不得其人則亂. 149) 조선 초기 국정운영 통치체계의 큰 틀은 六曹直啓制 와 議政府署事制 였다. 六曹直啓制 는 六曹에서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로서 왕권을 강화하는 측 면이 있었던 반면, 議政府署事制 는 議政府에서 3정승이 모여 六曹에서 올라 온 보고 내용의 가부를 헤아려 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후, 왕이 내용을 보고 결정하여 敎旨를 내리면 議政府에서 받아 六曹로 보내 시행하도록 한 제도이 다. 이는 왕권의 비대함을 견제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조선조의 士林 派 관료들은 대체로 六曹直啓制 보다 議政府署事制 를 선호하였다. - 73 -

을 통한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성격의 儒者 관료를 모델로 삼음으로써 儒敎를 배경으로 성립한 정치 체제 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諫諍制度, 上疏制度, 經筵制度 등을 이해할 수 있고, 公道나 옳은 일을 위해서는 일신의 영욕을 돌보지 않고 나서는 정치적 행 위들이 상례화 될 수 있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儒敎的 정치윤리는 행위주체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예를 들면, 조선조의 사림들은 鄭道傳, 權近 등의 신왕조 개창을 주도하고 동참했던 학자들을 학문적 수준에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고려조에 殉死했 던 정몽주나 신왕조의 벼슬을 거절했던 李穡, 吉再 등의 학자에 비해 사회 적 평가절하를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鄭道傳, 趙浚, 權近 등이 고려조의 文科를 거쳐 出仕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와의 공동책임을 회피했다는 즉, 節義라는 儒家的 정치윤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150) 靜庵의 경우는 政事를 베푸는 爲政者와의 관계구도를 위로는 聖君을, 아 래로는 賢相이라는 君臣共治의 이중구조를 제시하였다. 君主는 위정자를 선 택하고 政事를 위임하여 군림하는 최고통치자이고, 宰相(또는 大臣)은 君主 로부터 國事를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보좌하는 권력의 중심 세력이다. 여기 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靜庵이 말하는 君主와 宰相의 관계가 형식적 으로는 상하관계 즉, 上命下服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구조가 서로 共治와 共助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151) 靜庵은 謁聖試策 에서 국정운영을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끌어 갈 필요 성에 대해 말하기를, 만일 法度가 대강 정해지는 것과 紀綱이 대강 서게 되는 것은 일찍이 大 150) 박병련, 한국의 유교적 정치윤리, 정신문화연구 14권 4호, 1991. pp. 38 40. 참조. 151) 유교사회에 있어서 君臣共治 는 정치의 보편적 개념이었다. 다만, 이상성은 그 의 박사학위 논문,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연구 에서 靜庵의 경우는 연산군조 의 경험을 통해 君主 한사람의 독단적 행위가 정치의 질을 떨어트림은 물론,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할 수 있음을 절실히 경험한 바 있었기에 더욱 강조되 었다고 밝히고 있다.(이상성,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01. pp. 107 110. 참조) - 74 -

臣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은 것이 없사옵니다. 仁君은 일찍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道가 서게 됩니다. 仁君이란 것은 하늘과 같고 신하란 것은 四時와 같으니 하늘 이 스스로 행하고 四時의 運用이 없으면 만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仁君이 自任하고 대신의 도움이 없으면 모든 교화가 일어나지 못하옵니다. 다만 일어나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오라 하늘이 스스로 행하고 仁 君이 스스로 맡아서 한다면 하늘이 되고 仁君이 되는 道를 크게 잃게 되는 것입니다...(중략)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신을 존경해서 그 정 치를 맡기시고 그 기강을 대강 세우고 그 법도를 대강 정하셔서, 후일에 큰 근본이 서고 큰 법도가 행해질 수 있는 기반을 이루시옵소서.152) 광명정대한 治世의 대업, 즉 至治를 이루기 위해서는 聖君과 賢相이라는 두 주체의 공조가 필수적이며, 특히 君主가 독단하거나 재상이 自任하여서 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君主와 宰相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함 께 지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君主의 일과 신하의 일이 형식 적으로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至治란 바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전통 왕조시대에 있어 政 事란 君主 한사람의 일로 간주되는 것이 통상적인데, 靜庵은 政事의 담당 주체를 君主와 宰相이라는 두 축의 구조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君主의 지위와 역할을 축소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는 大臣을 政事의 중심으로 끌 어올림으로써 君主 한사람 위주로 행해져 온 독단적인 정치의 문제점을 최 소화하고 治道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앞서 燕山君의 경우를 보더라도 君主 한사람의 독단적 행위가 얼마나 정치의 질을 저하시 킬 수 있으며 백성의 삶을 불안하고 피폐하게 하는 지를 여실히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君臣共治의 국정운영 방식은 君主의 독단적인 전횡을 견제함 152) 靜菴集 卷2, 對策 <謁聖試策>, 若法度之所以粗定 紀綱之所以粗立者 未嘗 不在乎敬大臣而任其政也 君未嘗獨治 而必任大臣而後 治道立焉 君者如天 而臣 者四時也 天而自行 而無四時之運 則萬物不遂 君而自任 而無大臣之輔 則萬化 不興焉 非徒不興不遂而已 天而自行 君而自任 則大失爲天爲君之道...(중략) 伏願殿下 姑以敬大臣而任其政 粗立其紀綱 粗定其法度 以基後日大本之立 大法 之行也. - 75 -

으로써 안정되고 균형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靜庵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역사적 사례와 정치적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던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시한 대안으로서의 성격 이 강했다. 동시에 재상의 역할을 단지 임금을 보좌하는 수준에서 상향 조 정함으로써 완전한 치세를 이루고자 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靜庵은 君主가 재상이나 대신들과 서로 신뢰와 소통을 유 지할 때 치세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역사적으로 훌 륭한 정치는 한결같이 훌륭한 재상들의 보필이 있었음을 강조하여, 재능과 덕망 있는 재상을 곁에 두기를 諫하였다. 진실로 어진 재상을 얻으면 遺腹子를 위에 모시고 그 갖옷을 대하고 조 회를 하더라도 나라 형세를 태산과 같이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진 재상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재능과 덕망을 겸비해야 하는 것입니 다. 재능이란 것은 氣에서 나온 것이요, 德이란 것은 性에서 발로한 것이 어서 氣가 성하면 마음이 변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재능도 있고 덕도 있어 서 인망이 높아진 연후라야 가히 국가를 진정시키고 社稷을 안보케 할 것 이요, 어린 임금이라도 부탁할만한 것이니, 미리 이와 같은 사람을 얻어서 이들을 좌우에 두고 있다면 위태롭고 어려움을 정제하지 못한다고 어찌 근심하리이까.153) 또 成宗의 治世에 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지극했는데도 왕을 보 필하는 훌륭한 재상이 없었음을 아쉬워하기를, 成宗이 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명나라 사 신 董越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許琮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 라는 임금은 있으되 大臣은 없습니다 라고 했다 하니, 성종은 天資가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으나 그때의 대신으로 黃喜와 許稠와 같은 輔導가 153) 靜菴集 卷3, 經筵陳啓 <參贊官時啓八>, 果得賢宰相 則植遺腹 朝委裘 而 措國勢於泰山之安 所謂賢宰相者 必才德兼備 才出於氣 德出於性 氣勝則心變 須有才有德而望隆者 然後可以鎭國家 安社稷 而託六尺之孤 預得如此之人 置 諸左右 則何患危難之未濟也. - 76 -

없었으므로 옛날의 제왕의 정치를 돌이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저 나라의 정치란 것은 모름지기 대신들이 하는 것입니다.154) 라고 하였다. 고대 제왕들이 이룩하였던 善治, 즉 堯舜과 같은 王道政治를 이룩하기 위 해서는 반드시 君主 아래 훌륭한 대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大臣의 훌 륭한 보필과 諫言이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君主가 있을지라도 至治를 이룰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靜庵은 기본적으로 出治는 君主에게서 나오고, 輔導 즉 輔治는 대신이 맡 아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것은 體만 있고 用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君臣共 助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君主가 혼자서 獨治를 하지 않고 敬大臣 任其政 하는 것은 天地가 호응하여 만물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일로 보았다. 그래야만 治道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靜庵은 재상의 가장 우선적인 책무는 바른 보좌이고, 바르게 보좌하는 것 은 굳세고 간절하게 임금의 과실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君主는 爲政의 體이고, 宰相은 爲政의 用에 해당되는데, 體는 근본이고 用은 현실 적 적용이므로 出治의 근본은 君主에게서 나오되 輔治의 요령은 재상 또는 대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靜庵의 宰相政治論은 전통 왕조시대의 통치구조의 근간을 훼손하지 않으 면서 君主 일인 통치로 인한 독선과 독단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실 현함으로써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통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君主 한사람의 단견이나 실수를 예방할 수 있고, 실질적인 정책 결정은 대신들에게 위임하 여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民意를 收 斂하는데 있어서도 君主보다는 재상들이 직접적으로 관계될 수 있어서 공 론정치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정권의 안정은 물론이거니와 백성의 삶 154) 靜菴集 卷3, 經筵陳啓 <參贊官時啓三>, 成宗好善 愛士亦至矣 天使董越來 我國 將還也 謂許琮曰 爾國有君而無臣 成宗天資 大過人矣 而其時大臣 無有 如黃喜 許稠之輔導者 故不能回古昔帝王之治 大抵國事 須大臣爲之也. - 77 -

의 질도 지속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할 수 있다.155) 이러한 君臣共治의 이상적 정치방법은 栗谷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栗谷은 東胡問答 에서, 대저 큰일을 할 君主는 반드시 존경하고 믿는 신하가 있어 서로 친근함 이 父子와 같고, 서로 뜻이 맞기가 고기와 물과 같고, 서로 조화됨이 宮商 의 음률과 같고, 서로 合함이 契符와 같은 것이니 그런 뒤에라야 그가 하 는 말이 쓰여지지 아니함이 없고, 道가 행해지지 아니함이 없고, 일이 이 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는 것입니다. 堯가 舜에게, 舜이 禹와 皐陶에게, 湯이 伊尹에게, 武丁이 傅說에게, 文王이 太公에게 대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 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될 만한 것이 昭烈帝가 諸葛亮에 대한 것입니다. 후세의 君臣은 모두 여기에 미칠 수 없습니다.156) 前述한 바와 같이 世宗과 黃喜 체제 같은 이상적 君臣관계의 국정운영은 오늘의 공직사회에도 共治와 共助로서의 운영방식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外 治를 주로 하고 국무총리는 內治에 전념하는 정치형태는 이미 시도된 바이 다. 이에 견주어 본다면 각급 기관의 長은 外的 업무에 치중하고 부기관장 은 內的 업무에 전념함으로써 조직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공직사회도 堯舜三代와 같이 聖君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 시대, 世 宗 과 같은 明君과 黃喜와 같은 良相이 相遇하여 舊法에 얽매이지 않고 변 통과 변화를 꾀하여 태평성대를 만드는데 필요한 도량과 재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155) 이상성, 앞의 논문, pp. 107 110. 참조. 156) 栗谷全書 卷15, 東湖問答 論臣道, 大抵有爲之主 必有所敬信之臣 相 親如父子 相得如魚水 相調如宮商 相合如契符 然後言無不用 道無不行 事無不 成焉. 若堯之於舜 舜之於禹 臯陶 湯之於伊尹 武丁之於傅說 文王之於太公 是 也. 抑可以爲次者 昭烈之於諸葛亮 是也. 後世君臣 皆不能及焉. - 78 -

3) 상향 평등으로서의 隆平社會 추구 靜庵의 이상사회를 향한 개혁의 실천 방법과 목표는 바로 隆平과 咸與維 新을 통한 泰和地域의 성취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서의 융평은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더할 것은 더해주어서 사회 구성원 모 두가 균등하게 사는 평등사회를 향해 지속적으로 지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평등한 복지사회와 그 맥이 닿는다고 할 수 있다. 靜庵은 謁聖試策 에서 隆平과 咸與維新을 통하여 오늘날의 복지국가인 泰和地域을 꿈꾸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지극히 정성스런 마음으로 이른 새 벽부터 늦은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堯舜시대의 정치를 어떻게 하 면 이룰 수가 있을까, 堯舜시대의 풍속을 어떻게 하면 일으킬 수가 있을까 걱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도 헐벗은 사람이 있으면 그를 따뜻하게 입힐 생각을 하셨고,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도 善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를 善하게 만들 것을 생각하셔서, 우리 東方이 태평하고 화 락한 泰和之域에 오르도록 노력하신지가 어언 1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데도 紀綱이 아직 바르게 서지 못하고, 法度가 아직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 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올바르게 다스리려는 마음이 아직도 정성스러 움이 부족해서 그렇겠습니까? 이는 필시 그 근본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 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른바 근본이 되는 것이란, 道가 곧 바른 정치 를 펴 나가는 근원이 되고, 心이 바른 정치를 펴는 근본이 되며, 誠이 道 를 행하는 요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57) 靜庵이 강조한 隆平의 절차적 방법으로 제시한 덜 곳은 덜어내고 더할 곳 은 더해주는 방법의 근본정신은 周易 損卦와 益卦의 의미를 응용한 것이 157) 靜菴集 卷2, 對策 <謁聖試策>, 恭惟主上殿下 以至誠之心 夙夜不怠 唐虞 之治 何以而致也 唐虞之俗 何以而興也 民有一有不衣者 思所以溫之 一有不善 者 思所以善之 欲躋東方於泰和之域者 于今十年于茲矣 紀綱有所未立 法度有 所未定 豈聖上求治之心 未盡誠而然也 必也未得其本者歟 且所謂本者 豈非道 乃出治之由 心爲出治之本 而誠亦行道之要也. - 79 -

다. 위에서 덜어서 아래에 보태는 것이 益이고, 아래에서 덜어서 위에 더하는 것은 損이다. 그것에 기초하여 당시 특권층의 이익을 차단하고 그들에게 돌 아가던 富를 공익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하여 하층민에게 환원하여 끌어 올리는 방법이 융평이다. 이것은 당시 특권층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환수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돌린다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특권층에게 경제적 이득을 가게 하지 않는 塞利源 즉, 특권층에게 계속되는 利源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차단의 필요성을 말한다. 그럴 때 국가 경제는 여유가 생기고, 결국 백 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이 줄어들게 됨으로써 서민 경제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하나가 되는 泰和의 경지, 즉 大同社會로 나아갈 것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다.158) 靜庵이 강조한 隆平이란 하향평등이 아니라 상향평등이라는 점이 중요하 다. 대체로 평등이라 하면 높을 것을 끌어내려서 고르게 하는 하향평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하향평등은 고르게 한다는 평준화의 의미는 있지만, 수준의 하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상하 간의 차별은 해소되어 계층 간의 문제는 상당부분 완화될 수 있겠지만 구성원 간의 불화와 의욕상실로 생산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취약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靜庵이 말한 隆平 이란 상향평등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위를 끌어내려 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끌어 올려 고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159) 靜庵의 개혁정신에서 비롯된 隆平 은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면서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평균이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다. 평균은 자칫 전체적으로 낮은 성과를 보일 때는 개인은 물론 사회의 발전 을 지체시키는 경향이 있다면, 융평은 전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개 인이나 사회가 한층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靜庵이 말하는 隆平과 咸與維新을 통하여 이룩하고자 했던 泰和之域은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평등한 복지사회를 뜻하는 것으로써 오늘날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론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성장이 빠진 158) 이상성, 조광조 : 한국도학의 태산북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p. 229. 159) 이상성, 앞의 책, p. 228. 참조. - 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