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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강 1910 년대한국병탄 - 한국근현대사모순과파행의근원 한철호 ( 동국대역사교육과교수 ) 올해는한국근현대사에서최대의치욕인한국병탄 100년을비롯해서봉오동 청산리전투,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한국전쟁, 4.19혁명, 전태일분신사건, 광주민주화운동, 한러수교, 남북정상회담등은중요한역사적사건이일어났던뜻깊은해이다. 1876년개항이후국내에서는근대적국민국가를수립함과동시에자주독립을유지하기위해다양한운동이전개되었지만, 외세의간섭및침탈과국내의개혁조건미숙과세력들간의갈등으로좌절되고말았다. 그결과우리는일본의식민지로전락하는치욕을겪었다. 일제의한국강점은우리스스로근대적인국민국가를수립할기회를박탈하였고, 오랜기간동안우리에게이루말할수없는고통을안겨주었다. 더군다나그후유증역시매우커서해방과동시에민족과국토의분단을맞이하면서동족상잔의비극도벌어졌고, 민주주의와산업화를달성하는과정에서적지않은시련을당하기도하였다. 또한일본군성노예 독도영유권 강제징용및징병 재일교포문제등오늘날까지한 일양국간에빚어지는갈등도일제의한국병탄에서기인것이다. 한마디로일제의한국병탄은파란만장했던 20세기한국근현대사의모순이배태되고파행적으로전개된가장결정적이고도근본적인원인이라고할수있다. 우리가일본에게강점된이유는무엇보다일본의무력침략에있다. 일본의제국주의적침략행위는어떠한이유나명분으로라도결코합리화될수없고비판받아야마땅하다. 그렇다고나라를빼앗긴책임을일본의탓만으로돌리는데급급해서우리의내적반성을소홀히하는것역시바람직한태도라고할수없다. 따라서과연대한제국의최고통수권자고종을비롯한집권세력이급변하는국내외정세에능동적으로대처하였는가를냉철하게되짚어볼필요가있다. 그래야비로소 100년전의국치는단순히과거의치욕스러운사건이아니라현재와미래의발전을위한소중한밑거름이될수있기때문이다. 그러나고종혹은대한제국의성격을부정적으로평가한다고해서일제침략의논리나식민지근대화론을수용하는것도아니며, 이를긍정적으로평가한다고해서우리의자주성이나내재적발전론을옹호하는것도아니다. 일본의무력으로강점하지않았을경우대한제국이순조롭게근대적개혁을성공적으로추진했을것이라는논리, 또고종혹은대한제국의총체적부실과위기관리능력의부족을강조한나머지일본의침략적본질을도외시하는논리는모두그야말로단순하고도무의미한비역사적인사고이기때문이다. 따라서본강론에서는먼저일본이어떻게우리나라를강점하였는가, 이에대응해서고종을비롯한집권세력이개혁추진과국권수호라는대내외적과제를해결하기위해얼마 7
나주체적 합리적으로대응했는가를분석해보고자한다. 다음으로일제의한국병탄이지니 는의의는무엇인가를살펴보고, 마지막으로병탄후미주지역에서국치일을맞이하여어 떠한행사를거행하고무엇을기억하고주장하려했는가를알아볼것이다. 1. 한국병탄의원인 일제는서구열강의침략으로식민지화의위기가가중되는상황속에서이웃나라를침략하는길로나아갔다. 자국의독립을보존하기위해주권선을지키는것만으로충분치않다는판단아래반드시이익선에해당하는한국을차지해야한다는정략을실천에옮겼던것이다. 일제는군비를확장하는데전력을기울여청일전쟁과러일전쟁을일으켰으며,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등열강과조약을맺은뒤우리의외교권 사법권 군사권을강탈하고고종마저퇴위시켰다. 그과정에서한국민의거센저항과반발에부딪히자일제는군대를동원하거나각종악법을만들어강력하게탄압하였다. 특히 1909년 9월부터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 을펼쳐한국내반일무장세력을완전히진압하는등만반의준비를갖춘다음마침내한국을강점하기에이르렀다. 이러한일본의제국주의적침략행위는어떠한이유나명분으로라도결코합리화될수없고비판받아야마땅하다. 그러나나라를빼앗긴책임을일본의탓으로돌리거나이완용을비롯한매국노들에게전가하는데급급한나머지우리의내적반성을소홀히하는것도바람직한태도가아니다. 대한제국의최고통수권자고종을비롯한위정자들이개항이후급변하는국제정세에능동적으로대처하여자주독립을이룩함과동시에국민국가를이룩하지못한채무능과부패로말미암아 國恥 를당한잘못도철저하게되짚어보아야하기때문이다. 우선고종등집권세력은일본을비롯한열강의외압에신속하게대처하기위해황제에게모든권력이집중된강력한전제정치를추진하였다. 이를위해고종은근황세력을적극등용함과동시에의정부와중추원등의기능을무력화하고궁내부 내장원등을중심으로통치기구를이원화하여파행적으로운영하였다. 이는당시의상황을고려한정치형태일수있지만, 황제권을강화하는데치중하는바람에민의의수렴과동의를거쳐국민을통합 결집시킬수있는정치제도를개혁하는데실패하였다. 민권을탄압함으로써국민의지지기반을상실함과동시에근황을제외한정부대신및관료를소외시킴으로써황제의정치기반마저축소시키는등순기능보다는역기능을초래한측면이더많았다. 집권세력은근대적개혁과상공업을보호 육성할의도로궁내부 내장원을중심으로황실재정을확대하는데주력함으로써부분적으로나마열강의이권침탈을막고광무개혁을단행하는물적기반을마련하는성과를거두기도하였다. 하지만황실재정의확대로정부재정의축소를초래할수밖에없었고, 관료의급료도제대로지불하지못하자내장원에서돈을빌려쓰는희귀한현상까지벌어졌다. 또한효율적으로재정을관리하지못한탓에은행 공장의설립및광산개발 철도부설등식산흥업정책도계획적 체계적으로추진되지못 8
함으로써실효를거둘수가없었다. 집권세력은총예산의 40% 정도를군비로충당할정도로군사력을증강하는데힘쓴결과, 각종근대식무기와군함을보유하고시위대 친위대 진위대 무관학교를설치하였으며황제직속으로원수부를두어군사조직을총괄하는등어느정도군사체제를정비해나갔다. 그러나국권수호의근간인징병제를통한상비군설치는시안만마련된채재정부족뿐만아니라신분질서의혼란과파괴를두려워한집권세력의반대와기피로이뤄지지못하였다. 그나마 1904년이후러 일양국의외압이겹치면서군대는자주국방을도모하기보다국내치안유지및민란에대처할수있을조직으로전락하고말았다. 한편집권세력은열강의간섭이상대적으로약화된상황에서세력균형을이용해서중립외교를펼치는등독립을보존 유지하려고노력하였다. 그러나자위력이뒷받침되지않은중립외교혹은선언은고종을비롯한집권세력의착각이자공염불에지나지않았다. 더군다나외교력의부재혹은해외주재공사관의파행적운영으로국제정세를올바로파악하지도못했기때문에일제의한국침략을묵인 허용한구미열강에중재와원조를요청하고을사늑약의무효를호소하는정책을펼쳤다. 이러한집권세력의외교정책은반일적 자주적인것으로평가되는경향도있지만, 모두실패로귀결되었다. 결국일제의한국강점은일본의무력침략에근원이있지만, 대한제국의최고통수권자였던고종을비롯한집권세력의총체적부실과위기관리능력의부족에서기인한점도간과할수없다. 황제권과황실의강화 유지에치중한나머지국권과민권확대를통한국민통합과부국강병을추진하지못했던집권세력의失政은일제가한국을강점하고이를정당화하는빌미를제공했기때문이다. 2. 한국병탄의역사적의미와영향 지금으로부터꼭 100년전인 1910년 8월 22일, 서울안팎의요지에약 2,600여명의무장한일본군과헌병들이배치되었다. 이러한살벌한상황아래창덕궁흥복헌에서는대한제국의마지막어전회의가열렸다. 총리대신이완용은사전에데라우치통감이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 을체결하는데필요한 전권위임장 을내밀었고, 순종은나라를빼앗기는중대한사안임에도별다른저항도하지못한채위임장에서명하였다. 위임장을받아든이완용은통감관저로가서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을맺었다. 그러나일제는한국을강탈한뒤한국민의거센반발을두려워했기때문에이사실을곧바로발표하지않았다. 원래조약공포일은 8월 26일로예정되었으나그다음날이순종의황제즉위일이란점을고려해그뒤로미루어졌다. 일제의철저한언론통제와감시속에 8월 29일순종은한국의통치권을일본에게넘겨준다는내용의칙유문을발표함으로써대한제국은역사속으로사라짐과동시에일제의식민지로전락하고말았다. 하지만비준대신조약을공포하고 병합 을알린순종의칙유문에는전권위원위임의 9
칙서에사용된 大韓國璽 가아니라행정결재에만사용되는 勅命之寶 어새가찍혀있을뿐이며, 모든법령에들어가는황제의친필서명이빠져있었다. 일제는합의와합법을가장해조약의형식을갖추려고애썼지만, 결과적으로비준서에해당하는 병합 공포칙유문에조약상필수요건에결격사유가생기고말았다. 한마디로, 한국병합조약 은불법이나합법을따지기전에그자체가성립되지않은셈이다. 아울러일제는조약의명칭을정하는데도고심에고심을거듭하였다. 倂呑 은한국을강점했다는침략적성격이너무드러나서차마사용할수없었고, 두나라가형식적이나마동등하게합친다는의미의 합방 도스스로격에맞지않는다고판단하였기때문이다. 그래서일제는별로사용하지않던 병합 이란문자를새롭게고안해냈다. 병합 은한국이아주 廢滅 되어서일제영토의일부가되었다는뜻을명확하게하되, 그어조가너무과격하지않는점을고려한용어였다. 이처럼일제는한국을완전하고도영구히강점한진실을은폐하되그의미를분명히하기위해그야말로간교하게 ' 병합 ' 이란용어를새로고안해냈던것이다. 일제의한국강점은우리민족에게이루말할수없는고통을안겨주었을뿐아니라근대국가를수립할기회를빼앗아갔다. 그럼에도일본의노예로사느니차라리자유민으로싸우다죽겠다는비장한각오로일본제국주의침략에맞섰던이름없는의병들의정신은일제강점기에도면면하게이어졌다. 아울러 1917년대동단결선언에서도나타나듯이, 독립운동가들은국민이국가의주인이라는의식을확립해나갔다. 주권을이민족에게넘겨줄수없다는전제아래일제의 합병 이무효임을명백히밝히고, 경술국치일을황제가주권을포기하여주권이우리동포전체에게귀속된 국민주권선언의날 로규정했던것이다. 그런데국내동포들은주권을행사하기어려운상황에처해있으므로해외독립운동자가주권행사를위임받아임시정부를만들어야할권한과책임이있다는논리였다. 이러한흐름속에서거족적으로일어났던 3.1독립운동은우리스스로가국가의주인임을대내외에천명한역사적의의를지닌다. 곧이어대한 제국 이부활되지않고대한 민국 임시정부가수립된것은역사의당연한귀결이라고할수있다. 따라서일제강점기독립운동은단순히일제를몰아내고국권을되찾는데머무르지않고국민주권을확립함으로써근대적국민국가를수립하는토대를마련해주었으며, 야만적인무력침략에굴복하지않고자유와평화를향해줄기차게투쟁한세계사적의미도지니고있다. 해방후우리가통일된국가를형성하지못한채분단된근원역시일본의한국병탄에서기인한다. 미국의원폭투하와소련참전, 관동군의예상치못한총붕괴로말미암아소련군이신속하게한국쪽으로진격하자미국은한국영토의일부라도확보하기위해급히 38도선을책정하여소련에제안하였다. 스탈린이이안을받아들임으로써한국은미소양국에의해분할점령되고말았다. 그결과유럽의패전국독일과달리일본은분할점령을모면하게되었지만, 그대신한국해방과동시에분단시대가시작되었다. 일본군의무장해제라는종전처리를위한잠정적인라인이그후반세기이상분단의경계선으로고정화되어버렸던것이다. 이처럼일본의식민지배에이어한국인에게고난의근원이라고할수있는 38도선획정과그이후의분단상황은역사적으로는일본에한국병탄과식민지지배 10
의직접적인산물이었다. 분단으로말미암아한국현대사역시파행성을면치못했다. 3. 한국병탄에대한기억과변용 : 미주지역을중심으로 미주한인들은 1903년하와이에첫발을내디딘후 1945년광복이될때까지국권을되찾기위한독립투쟁을활발하게펼쳤다. 특히장인환 전명운의사의친일외교고문스티븐스를처단한뒤, 각운동단체의통합이이뤄져 1909년국민회가결성되었으며, 그다음해한인들의최고독립운동단체인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 가설립되기에이르렀다. 대한인국민회는미주한인의생명과재산을보호하는역할을담당하면서샌프란시스코에중앙총회와북미지방총회, 만주 시베리아 멕시코등지에도지방총회와지방회를설치하는등국내외독립운동을주도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매년 8월 29일을전후해서 우리한국이전무후무한큰국치를당하여원수에게합병을당한날인고로우리해외한인은그날의치욕당한것을잊지않고자하는분섬으로그날을기념 하였다. 1) 중앙총회명의로각지역의지방총회와지방회에 장래국권을광복키위함에이날을기념하여적개심을고려함이가하 다는취지로기념식을행하라는공문을보냈던것이다. 2) 기념식은주로회관이나교회에서열렸는데, 그절차는대체로개회취지, 창가 [ 동해물과백두산이 ], 기도, 선고서및연설, 그리고창가, 폐회등으로진행되었다. 우선 1913년 8월 29일상항 ( 샌프란시스코 ) 회관에서열린북미지방총회의국치기념식을살펴보면, 총회장이대위가예복을정제하고수석에올라개회취지를설명하였고, 강영소가기도를행한후회중이모두懇志한정성으로머리를숙이고묵묵히구함이있었으며, 참석자들이무궁화노래를불렀고, 황사선이 한국의무용적역사 라는제목으로우리민족의대외항쟁사를강연하였다. 그뒤총회장이한국을조상하는조례를선포하였는데, 아울러 눈물을뿌려조상을하여라대한의운명이떠났도다 로시작해서 죽지만마라죽지만마라애국정신이죽지만마라반도장수를이끌고와서왜구를모두구륙하리라 로끝나는국치의슬픔과독립의의지를담은노래가울려퍼졌다. 이어윤지한은 합병의대치욕 이란제목으로일본이강력하게한국을합병하던전말을연설하였고, 여학생박영숙이반도강산을노래하여무용의정신을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황사용이 한국의장래낙관 이란문제로대한의국혼을부르는연설을함으로써기념식은막을내렸다. 3) 1914년에한인감리교회에서개최된북미지방총회의국치일기념식에서도지방회장문양목의개회취지, 창가 동해물과 합창, 중앙총회장대판황사용의기도, 북미지방총회장이대 1) 2) 신 3) 11
위의선고서 ( 기념의이유 ), 음률, 지방총회총무강영소의연설 ( 합병의원인 ), 음률, 송덕용의연설 ( 한국민족의현상 ), 창가, 신한민보주필백일규의연설 ( 한국의장래 ), 창가, 다과 [ 폐회 ] 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 4) 그가운데이대위는 세상에기념해야잊지못할날이허다하지만현시우리민족의제일기념해야잊지못할날은 8월 29일곧이날 이라고운을뗀뒤, 슬픈날을기념하는것은장래의쾌락을얻고자함이라고강조하였다. 망한나라는前鑑을거울로삼아국민이회과천선하는데또다시회복할수가있다면서 오늘국치를당한날을참마음으로기념해야잊지않으면후일에국권을다시회복하고태극기를높이날릴날이있을줄믿노라 고끝맺었다. 5) 이처럼국치일은일본의한국강점을비판하고국권회복을다짐하는좋은계기가되었 다. 그러나과연독립을쟁취할준비를제대로하고있는가에대한반성이일기시작하였 다. 1915 년에홍언은해가거듭되는데도독립전쟁의소식이아득하고일제의식민체제가 더욱공고지고있으므로 10 년이나 20 년뒤에도해마다국치를기념치않을지단언하기어 렵다고한탄하였다. 독립전쟁의귀중한말이점점몽상이되어가는이판국에오호라금일 한인의독립전쟁은사회교제상에행사거리가되었도다 는것이다. 따라서그는독립전쟁 이국권회복의최후의일이므로국치일에 만일천고의대치욕을참으로분개할지경이면 우리의준비함이없는것을슬퍼함이가하도다 고각성을촉구하면서, 준비가없이공연 히떠드는것은필경어리석은사람이오, 준비를하지않고모래위에성을쌓는것은대한 민족의죄인 이라고단정하였다. 6) 1916 년상항지방회의기념식에서원수를잊지말고준비를부지런히하자는데연설의 초점에맞춰졌다. 백성빈은 7 년차종이된우리 란제목의연설에서종생활이아픈줄 알기야알지만은종의굴레를벗으려고힘쓰지않는것은모르는것과같다고주장하였다. 이어윤혁은 어떻게국치를씻을고 라는제목으로 국치를씻으려면가장쉬운준비가있 나니일인으로더불어일천지하에같이서지않기로작정하라 고강조한뒤, 원수를구제 하는마음을기르고사업을부지런히하여차차실력을준비해서정신과힘이모두건전 하면반드시국치를씻을날이있을것이라고강조하였다. 7) 같은날열린로스엔젤레스기 념식에서도중앙총회장안창호는세가지애통, 즉우수애통은실의 낙망함으로잔멸에있 는자요, 둘째감개애통은비장 처절함으로비관에있는자요, 셋째분격애통은용감굴기 함으로활동에있는자라고정의내린뒤, 분격애통은활동으로써가치가있으므로무엇이 든지민족을위해힘대로자각한대로활동하라고연설하였다. 8) 이러한논조는그이후의국치일에도이어졌다. 1917 년기념식에서황사선은한국의참 상을그려내어적개심을불러일으켰고,( 국치제八년 ) 백일규는국민의무를가르쳐분투의 앞길을열어주었다 ( 어떻게하여야국치를씻을까? ). 9) 다뉴바지방회의기념식연설제목은 4) 5) 신 6) 신 7) 신 8) 신 9) 신 12
우리국혼존망에대하여 ( 이대위 ), 우리민족의할일 ( 안창호 ) 였고, 10) 리버사이드지방회는 국치를씻을준비 였다. 11) 콜로라도피아블로기념식에서는참가자중한사람이 우리가누구나정싱은물론간절하지만이를말로만늘어놓는것은효험이없으니오늘하루에번돈을모아서장래국가사업에보태여쓰게하자 고연설하자애국저금이그자리에서거두어졌다. 12) 멕시코의프론테라지방회기념식에서도참가자들이비분격앙함으로써실력준비를통론하는가운데먼저의무실천을결심하였다고한다. 13) 한편 1918년국치일을맞이해서신한민보사는동포들의애국심을배양하기위해논문을공모하였다. 그주제는 우리민족이왜이런치욕을당한이유 나라없이는경쟁시대에생존을감당치못할일 어찌하면이치욕을씻을방책 등으로하되각각자유에맡겼다. 14) 이는대저국가흥망은민족성패에관계가있고, 민족성패는隣族강약의관계가있다고판단했기때문이다. 따라서 때와날로건국방책을연구하고애국사상을깊이하여오는기회를잃지말 자는의도였다. 15) 이에호응해서센타바바라에거주하는전학봉은우리가치욕당하는이유로써 우리족속이각기개인주의로저만살겠다는이기욕 을꼽은다음, 임금은매관매직이나궁궐을건륙하기나무삼역부를쓸때에는상당한공전이없이백성을몰아강제로시켰으며갑신년유신이나갑오년독립당을역적으로몰아죽임도자기의왕위를보전하고자함이오백성을위함이아니었으며, 정부대관들도임금께아첨하고벼슬만꾀하고외국의세력을빌어제동족을살육하고저만살려는계획을하였고, 백성들도농상공의산업을발달시킬생각은없고고식지계만숭상하며세력가들의등을대고유의유식키를원하였 다고조목조목비판하였다. 또한그는인도자들이뜻을같이하고힘을어울려오직하나인국민회를잘유지할방침을강구함이우리의마땅히할일이며, 기회되는대로원동이나내지와연락해서동성상응하는날에야우리의수치되는날이변하여독립을공포하는날이될것이라고역설하였다. 16) 3.1운동이벌어지기직전인 1918년로스엔젤레스지방회의국치기념식에서안창호는살아가면서여러가지희락이있을지라도나라 자유가없으면기쁨이없을것이라고연설하였다. 대개나라없는자는따라서자유가없소. 자유가없으면그사람은죽은사람과같 다는것이다. 이어그는 희망이아니면다시기쁨의방법이없다 고전제한뒤, 독립할수없을지도모른다는 나약한의심 을깨트리고희망을갖자고주장하였다. 무궁한희망을품은우리는고상한품격을가졌으니진취할길로나아가자면서그는한가지일에마음도같이하고힘도같이하는것, 즉동심협력할것을강조하였다. 17) 10) 11) 신 12) 신 13) 신 14) 신 15) 신 16) 신 13
한편 3.1운동이후국치일에는 3.1운동의정신을이어받아과업을완수하자거나대한민국임시정부를적극후원하자는논조가많다. 1920년에신한민보는 3월 1일은팔월이십구일을삭치든날이나삼월일일에시작한일이아직완성치못하였도다 면서 부끄러움을기억함이자랑거리를기억하는이만치나도덕상가치가있다 고전제한뒤, 오늘내뒤에있는동포들은그대로가만히있지도아니할터이오또한그리노라니까많은사람이잡혀섬오랑캐의잔혹한대우를받을일 을기억하자는기사를게재하였라. 18) 1920년쿠바의맛단사쓰지방회에서도 우리의일을우리가더욱힘써서 3.1정신을한번더다시굳게가지자 는뜻의연설이있었고, 19) 1935년에는왜적이한국을 합병 한후정신사상우리문화를압박하며물질상으로우리민족을착취함에그잔인하며각박함에극도에달하였지만, 우리전민족으로삼일운동이웅변으로증명함과민족의식을갖게하였으며구태의사상인사대주의와유교숭배에서벗어나게하였고물질상으론우리민중의착취하기위해현대의생산기구 ( 철도, 항만, 공장등 ) 를시설하지않을수없었기때문에, 장래의우리새국가를건설할주관적조건인일반민중의민족정신과혁명사상을필연적으로발달시켰으며객관적조건인현대의경제조직을구비하게하였으니이것이우리민족의치욕시대의역사적의미라고역설하였다 20) 1936년에는해마다돌아오는이날을당할때에우리는하루동안의구차한노예의생명을돌아보지않고능히국가와민족의영원한복리를위하여희생할결심을굳게작정하며, 빈부귀천과유식무식을물론하고다만시간의문제이오그최후의운명은반드시같을것을밝히어알고국내국외를통하여민족적대동단결을성취하기로맹세하고, 민족적대동단결의이상이각사람의마음가운데확실히인식되며재미한인사회에서는이대지상의걸음으로재미사회통일의실현을완성하기를촉구하였다. 신한민보사의주필신두식은국치일에수치를면하기위해민족적대동단결을실현하자고연설하였다. 21) 주목할만한사실은국치를과연 기념 할수있는가라는문제가제기되었다는점이다. 그는좋은일에 弔喪 오라거나상을당해그장사 잔치 오라는말을듣지못했다는비유를통해국치일을 기념! 하는것은큰망발이라고주장하였다. 즉, 나의선조나부모에게원수를지은것을잊어버리지않는데는기념이란말을쓰지않듯이, 원수왜적에게국권을강탈당한국치일을기념한다는그문법을쓰는것 은무지의소치라는것이다. 따라서그는국치라하면그앞에다른글자나말이없어도무방하다고전제한뒤, 만일국치일의모임에대해무슨회라고이름을붙이려면금년은지나갔으므로내년에라도국치일에각지방마다모이는그회석에서명칭을결정해서총회로보고하고총회에서이를결정하자고제안하였다. 국기 기념 용어문제는사소한듯하나망발인줄알면서그대로인용하는것도비애요, 잘못된점을알면서도교정하지않은채후세까지유전하겠다는것은도리가 17) 신 18) 신 19) 신 20) 신 21) 신 신 14
아니라는주장이었다. 22) 이후에도여전히국치기념일이란용어가사용된점으로미루어그 의의견은제대로받아들여지지않았음을알수있지만, 용어를정확하게사용하자는그의 주장은시사해주는바가적지않다. 1937 년중일전쟁의발발이후국치일은일본의패망을전망하고적극적으로독립을쟁 취하는데전념할것, 특히임시정부를후원할것을다짐하는계기가되었다. 이해국치 일에미주와하와이대한인국민회는하와이동지회, 중국관내한국독립당과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등과함께공동으로국치기념선언을발표하였다. 이선언에는 중일전쟁이전 면전으로치닫고있는지금이야말로조국광복의절호의기회이다. 천재일우의기회를맞이 하여모든한국민족이하나가되어즉각중국의항일전쟁에동참하기를바란다. 지금이야 말로각자가최대의능력을발휘하여우방의항전에협조할때이다 라고강조한데이어, 공동의적을타도하기로맹서하고우리영토를회복함이한을품은우리순국선열의유일 한血祭를추모하고나라를회복하는유일한첩경이다. 이는총탄의비속에있는국내외 동포들이기념해야할망국의최대의의이니, 원컨대우리동포여각기죽음힘을쏟아협 력해나가자 고공동으로국치기념선언을발표하였던것이다. 23) 1938 년신한민보는국치일을맞이해서 과거를청산하고새출발을도모 하자고역설하 는기사를게재하였다. 경술국치당시우리나라가문약에빠지고쇄국주의를고수하여구 미의과학문명을적극받아들이지못한반면일본은일찍구미의제도를모방하여강력한 군사력을갖추었기때문에치욕을면치못하였다. 하지만오늘날일본은전쟁으로이미몰 락의내림길에접어들어그결과에관계없이그국력이반드시제 3 4 등국으로떨어질것이 다. 이처럼원수일본은약해져서우리가한번건드리기만하면반드시꺼꾸러질것임에도, 우리는진정한민족통일을성취하여완전한혁명당을조직치못하였고, 중국전선에우리 청년의왕성하게출동하지못하며, 지도자들의투쟁은당당한주의와주장이아니라아직 개인감정과인신공격에벗어나지못하고, 식자들도운동의의미부진에대해과학적해석 보다기분적비난에머무는한심한현실에처해있다. 따라서국치일을당하여과거의모 든잘못을청산하고새출발을도모해야한다는것이다. 24) 또오클랜드기념식에서홍언은 국치의가장큰원인은전민족이게으른탓이오, 그 같이게으르게된것은정치가부패하기때문이오. 정치가부패한것은근천년간모화주 의로숭문천무한까닭이니오늘날우리는자력개생을도모하는광복운동에재능, 물질, 생명즉차기의가진바전부를바치기로결심하자 고역설하였다. 25) 로스엔젤레스지방회 의국치기념식에서중앙상무부총무최진하도현하비상시국을당하여재미동포는비상 한활동을전개하되재미사회의역량에맞추어원동방면의통일운동의촉성과재미사회 의여론인원동에대표파견을속히실현할것을역설하였다. 26) 멕시코부엘도 칼데나스지 22) 신 23) 24) 신 25) 신 26) 신 15
방회에서도 왜놈의망할때가멀지아니하였다. 이같이비상한시기에임시정부를후원하여왜놈을박멸하고조국을광복함에노력하자! 거나 우리는매양이날을당하여기념이나하는것으로전례를삼지말고적으나많으나물질로우리독립운동을돕자 는연설이주류를이루었다. 27) 이처럼중일전쟁의확산으로독립의가능성이고조되자 1939년신한민보는조국광복과민족정신을위해 민족적정신에근거한사상통일 과 정성단결로돌아가는엄밀한조직 의필요성을강조하였다. 28) 이는곧임시정부에대한적극적인후원으로연결되었다. 1940년에도신한민보는한국문제는단순한한국문제뿐아니라실상동아시아문제중의초점이되는것이므로망국이후에물론자체의진작을꾀하는동시동양안위의기둥이되는중국사정에유의하였고, 아울러중국을위하여더노력하다가 중왜대전 이전개된이후임시정부가늘중국정부와환난을같이하였던만큼, 중국의최후승리가가까운이때에임시정부가한국독립광복군을조직하여중국과연합전선을형성한것이국치를씻는큰계획이라고역설하였다. 29) 실제로그후국치일에는임시정부와광복군을후원하는것이가장급무이므로부담금을빨리모아보내자는결의가이루어졌다. 다같이재매한족연합위원회 7대원축하에집중하여광복군을후원하여왜적을박멸하자! 그리하면넉넉히 30년국치를씻을수있고이것이 8월 29일에다같이생각할일이다 는것이다. 30) 1942년국치일에는재미동포들이로스엔젤레스시정청에국기를달기도하였다. 오늘우리가이곳에서이기를다는것은이기를앞세우고전쟁에참가하여이전쟁을익히고이기를영원히날리기위함이니이것이선현의깨치신뜻이오우리민족의생사영욕을결정하는최후전쟁이올시다. 영혼이여이기폭에임하사늘우리와같이하시고우리로하여금다만국가광복과민족생존을위하여명예심과의견을회생케하소소 라고선현을묵상하면서광복을염원하였던것이다. 이광경을신한민보는 기달았다! 기달았다! 왜적이떼어내린우리의국기를우리가다시달았다. 대치욕에떨어진국기를다시달아광영을나타내었다 고감격스럽게묘사하였다. 31) 그다음해국치일을맞이해서신한민보는지난해로스엔젤레스시정청에달은국기사진을게재하면서다음과같이벅찬감격을표현하였다. 작년에우리는이날을 희망의날 로삼았다. 우리는한정없는희망을가지고미국인의동정을얻어이날에로스엔젤레스시정청에태극기를높이달았다. 우리의가슴은희망에차서터지도록즐거웠으며발걸음은가벼워행렬은기쁨에서뛰었다. 우리는만세를불렀다. 목이터지도록불렀다. 우리는머리를들었고가슴을폈다. 우리는오직앞을볼뿐이었다. 미래를약속할뿐이었다. 동무야! 이날은 희망의날 이다. 8월 29일을 희망의날 로하자! 희망을놓치지말라! 희망에서살자! 이날이 희망의날 임을기억하 27) 신 28) 신 29) 신 30) 신 31) 신 16
라! 동무야! 이처럼국치일을독립에대한 희망의날 로부를만큼일본의패망이차츰현실로다가오자 1943년국치일에재미한족연합위원회집행위원장김호는 이날을기념하는것이오늘이마지막날이되기를바란다. 그러나현세계에는우리와같은경우에있는사람이많은것을생각하라. 오직우리가이날에결심할것은우리가이미작정한것을실행하기로하는것이다 고기념식의의의에대해언급하였다. 심지어류일한은 우리의목적은한국을회복하는데있으며따라어떻게회복할것이문제인동시에어떠한형식으로회복될것인가? 를오늘날재고할것이라면서 오직우리의할것은우리가능히조국의자유를위하여할수있는것을다할뿐이다 고조선해방운동에성력을다하자고역설하였다. 32) 독립을염두에두고국권회복의방법과형식을거론하는수준까지나아갔던것이다. 마침내기다리던해방과독립이되자 1945년 8월 19일대한민국국민회는중앙집행위원장김호와중앙상무부총무김병연의명의로다음과같은 국치개념폐지선언 을발표하였다. 본회는이에국치기념을폐지를선언합니다. 우리의원수일본은 8월 14일연합국을향하여항복을애걸하였고한국이이로부터자유독립의장애를덜어버리고완전한신국가를건설할시기를가졌고능력과지위를가졌으므로국치기념을폐지합니다. 국치기념의본의는국가광복의준비를위하여치욕을잊지말자는것이오, 해외한인의국치기념은본회로부터비롯하였습니다. 거금 ( 距今 ) 34년전 1910년에일본이한국을강제합병할때를당하여해외한인은오직국민회단결하에합병을반대하였고 8월 29일일본의한국합병이공식발표될때로부터본회는미, 하, 묵, 큐재류한인을단결하여국기를보존하고배일사상과애국정신을고취하여광복운동을촉진하며매양이날을당하여국치를기념하였음이무룻 34년에비장강개한역사를드리웠고이번세계대전에들어와서우리는가장오랜항일의자격을가지고연합국에참가하여분투를같이한결과오늘일본이연합국을향하여무조건항복하는동시일본은우리한국에도항복한자가되었고이로말미암아우리는국치를씻었으므로드디어국치기념을폐지하고국가건설의길로나갑니다. 과거 34년간본회의국치기념은선열의정충호기를본받고동포의애국열성을힘입었으므로오늘국치기념을폐지하는때를당하여삼가선열의정신에경의를드리고널리동포에게고하여국가건설에노력을더하기를바랍니다. 33) 32) 신 33) 신 17
1910 년대흥사단에서는 1909.2 구국운동비밀결사조직신민회 (1907) 산하에청년학우회조직 청년학우회는한국학생운동의효시이며, 흥사단의전신 1913.5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흥사단창립 5월 13일,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 8도대표를창립위원으로하여흥사단을창립. 8도대표는홍언 ( 경기도 ), 염만석 ( 강원도 ), 조병옥 ( 충청도 ), 정원도 ( 전라도 ), 송종익 ( 경상도 ), 강영소 ( 평안도 ), 김종림 ( 함경도 ), 민찬호 ( 황해도 ) 1914.12 제 1 차흥사단대회개최 1920. 중국상해에흥사단원동위원부조직및단소설치도산이중국상해에있는대한민국임시정부각원으로취임한후, 그지방청년학생중에서단우를규합하여흥사단원동지방임시위원부를조직하고그곳에단소를설치 도산선생이직접기초한흥사단약법초안 제 4 차흥사단대회기념 (1917 년 ) 앞줄오른쪽에서세번째가도산선생 18
제 2 강 1920 년대봉오동 청산리전투 신주백 ( 연세대 HK 연구교수 ) 1. 머리말 1920년에있었던봉오동 청산리전투는 독립전쟁의시발 이었다. 그래서 3 1운동이후국외의대표적인 혁명운동 의하나로기억되고있었던것이다. 민족주의운동계열만이아니라사회주의운동계열에서도그의의를무시하지않았다. 조선사회운동약사코스 에는청산리전투에관해아래와같이기록되어있다. 1920년 (1) 간도훈춘폭동 (10월) 1. (3 1운동에이어-인용자 ) 제2차반제국주의투쟁 2. 대한군정서외 10여혁명적민족주의단체결성 3. 독립군편성 (1,000명) 군사과학적훈련및근대적무기배분 4. 총지휘홍범도, 부사령김좌진 5. 훈춘일본제국주의기관폭파및시가점령 6. 일본제국주의의간도출병 7. 독립군의 同志討의軍略 일본대부대및대타격을주다 8. 일본제국주의부르조아지 소탕 을선전하다 9. 일본제국주의학살을자행하다. 34) 중국공산당에서도청산리전투의의미를잊지않았다. 청산리전투가있은지 19 년이지난 1939 년 救亡日報 35) 에보도된기사를보면 조선민족해방운동 30 년사 에서청산리전투가 어떤의미를갖는지알수있다. 전민족이궐기한대규모시위운동 (3 1운동-인용자) 은즉각격렬한폭력적직접행동으로성격이변화되었다. 그러나일본군의무자비한탄압으로수많은사람들이총칼에희생되는참담한대가를치러야했다. 그러나일본군의무자비한탄압에도불구하고운동은수그러들기는커녕날이갈수록더욱확대되고강화되었다. 전국각지에서일본군과관원에대한무장테러사건과시설에대한폭파사건이줄을 19
이어적들의간담을서늘케하였다. 독립을위한혁명운동은국내에서만펼쳐진것이아니었다. 2백만조선민족이이주해살고있던동삼성에서도직접적인군사행동이활발히전개되었다. 이들은일면군관학교를세워혁명군사인재를양성하고, 다른한편으로는독립군을조직하여수시로국경방면의일본군경비대를습격하였다. 당시조선혁명군이펼친군사행동가운데가장유명한사건이 청산리전투 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조선혁명군근거지를파괴하기위해수만명의정규군을동원하여동북각지에서대대적인소탕작전을벌였다. 이과정에서일본군은무고한농민들을도살하고부녀자를간음하는가하면조선인마을을잿더미로만들어버리는등비인간적인만행을서슴지않았다. 그잔인무도함은도저히눈뜨고볼수없을정도였다. 이무렵연길 ( 延吉 ) 의청산리에서조선독립군에포위된일본군 1개연대가전멸당하니이것이유명한 청산리전투 이다. 36) 중국인들에게조차 3 1운동이후조선의대표적인해외 혁명운동 의하나로기억되고있었던것이다. 그렇다면 1945년이후우리는청산리전투를어떻게기억해왔을까? 발표문에서해명하고자하는점이바로이것이다. 주지하듯이과거의사실을단순히집합한것을기억이라고말하지않는다. 기억은개별적인사실들이모이고쌓여온것만을가리키지않는다. 여러기억은현재와의끊임없는연계속에서생성 변화 소멸의과정을거친다. 그래서기억을유기체와같다고말하고, 과거의일이지만현재시제라고도말한다. 국가의기억만이아니라개인, 집단의기억도마찬가지다. 특히근대의국민국가는교육과징병을통해국민만들기를시도해왔다. 그중에서교육은언어의통일과더불어기억의통일적재창조를달성하는중요한매개이자수단이었다. 이를가장압축한것이역사교과서이다. 역사교과서는단순히개인의기억을종합한것이아니라그와별도의국가의기억인것이다. 발표문은국민적집합기억을가장잘드러내는기재인역사교과서의서술을중심으로시기를나누어고찰해보겠다. 우선, 제2장에서해방직후의기억을정리해보겠다. 그리고제3장에서국정교과서제도가실시되는제3차교육과정이전까지의기억을정리해보고, 이어제4장에서국정교과서로발행된 국사 교과서에서기술이어떻게바뀌었는가를정리하겠다. 마지막으로제5장에서는제7차교육과정의검정교과서인 한국근 현대사 교과서에나오는내용을살펴보겠다. 그런데역사교과서에기술된봉오동 청산리전투에관한기술은당시의사회상내지는연구현황을반영한다. 그래서이전과서술의변화가있으면어떻게, 그리고왜라는의문을갖고추적하면서그것이내포하는의미도함께정리하겠다. 이렇게하면별도의연구사를정리하지않더라도선행연구에관한연구사정리와더불어회고록에관한사료비판도가능할것이다. 2. 해방직후배제되며한쪽기억으로표상화된청산리전투 20
해방직후봉오동전투에관해직접언급한글은없다. 또한청산리전투의두주역인김좌진과홍범도는아주대조된존재였다. 김좌진은추모하는사람이있는반면, 홍범도는그의언행을추억하는사람이없었다. 홍범도라는존재는 1920년대중반을지나면국내언론에조차제대로보도되지않았다. 그것은그가민족운동전선에서활동하지않았을뿐만아니라소련공산당당원으로노령지역에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김좌진은이러저러한분쟁을야기한경우도많았지만아무튼 1930년까지도만주에서계속활동하다화요파사회주의자에게암살당하였다. 그런김좌진을아나키스트가모여만든자유사회건설자연맹, 조선농촌자치연맹중앙연합회민우회에서추도회를주최하여그를기억한것이다. 즉 1945년 12월 22일서울의수성정의태고사에열린 23혁명동지추도회 의추도대상자가운데한사람으로김좌진의이름이올라있었다. 이듬해 9월에는 청산리전투를비롯하야倭적과무력항쟁에혁혁한훈공을세운백야김좌진선생을추도하기위하야부내명치정 1정목大韓民靑안에임시사무소를두고추도회준비위원회 가발족되었다. 이처럼 1929년 7월에결성된한족총연합회때의인연이김좌진을기억하도록하였다. 왜냐하면한족총연합회는신민부내의군정파세력과아나키즘세력이결합하여만든단체였기때문이다. 또한청산리전투가그의행적의대표적인공적임을알수있다. 해방직후의복잡한상황, 그리고새롭게시도해야할사안들이무척많은상황에서도김좌진의공적과더불어그를기억하려는사람들이있어기억을재생산하는일이가능했던것이다. 김좌진에관한기억이더욱확고부동하게된것은이범석의회고록때문이었다. 이범석은 1947년에 한국의분노 : 청산리혈전실기 라는책을출판하였다. 37) 원래이책은 1941 년중국의서안에서 광복총서제1 권으로출판되었는데, 해방후번역된것이다. 38) 이범석은회고록에서 두晝夜동안이나혈전한후에청산리의혈전은종결 되었다고하면서북로군정서군이치른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마록구전투에관해기술하고있다. 홍범도의부대에관한언급은전혀없는것이다. 그러면서청산리전투의성과를아래와같이기술하고있다. 이번싸움의통계를보면적의총동원수가두사단또연도에있는경관이 5만여명. 우리편은비전투원까지합하여약 2천8백여인. 한국독립군한사람이평균황군 20명과싸운셈이다. 적의사상관병은 3천3백여인 ( 加納연대장도전사 ), 우리편은전사가 60여인, 사상자가 90여인, 실종자가 2백여인 ( 실종자의대부분은본대로돌아갔다 ). 한국독립군의한사람의목숨과황군스무사람의목숨과바꾼세음이다. 이것은세계전사상에稀有한戰果이다. 그리고동북지방이라는끊은삼림속과끝없는山嶺속에서만얻을수있는戰果이다. 39) 김좌진조차잘부각되지않는이범석의회고록이통할수있었던것은해방이전에청 21
산리전투에관한기억이지휘자보다는전투자체에관한언급이더부각되었기때문일것이다. 더구나홍범도연합부대의활동에관한언급이완전히배제된상태로복원될수있었던이유가운데하나는, 청산리전투직후작성된일련의문헌들, 곧대한민국임시정부군무부에서작성한자료, 북로군정서에서임시정부에보고한전투보고서, 전투에참가한북로군정서군소속의김훈의회고록과도깊은연관이있었을것이다. 상황에관한보고가거의일방적인측면이있었기때문이다. 더구나이범석은 1948년대한민국이수립된이후초대국무총리겸국방부장관이었고, 이후에도주중대사 (1950), 자유당의부당수와내무부장관 (1952) 등을엮임하는등권력의핵심에있었다. 살아있는정치권력을무시하며다른주장을제기할수는없었을것이다. 북로군정서중심의기억의집합화는해방직후발행된민족운동사에관한책에의해서도뒷받침되는측면이있었다. 예를들어강흥수는 청산리대첩 에관해아래와같이기술하였다. 청산리의大捷 1920년 8월서백리아에출병하였던 1사단여의일본군은歸途북만에있는우리독립군을根滅하기위하여왕청화룡현지방으로군대를돌리고장작림에게공동토벌을청하였다. 그리하여중국측은철퇴를강요하므로할수없이사령관김좌진여단장이범석은부하 5백여명을데리고안도현을향하여떠났다. 10월 18일일군 3대대가무산에서래습한다는소식을듣고청산리要隘에據하여삼림중에매복하였다. 과연대대의적이습래하므로아군은돌연猛射를가하여적에즉사 4백50명부상 60여명의손해를주어격퇴하였다. 우리는중과부적이라山谷間으로빠져 2도구에향하였다. 그런데失路하여수십리를우회하였던바적은이것을알고먼저 2도구에가서 2대로분하여좌우로수색을개시하였다. 그리하여양대가서로만날때는독립군인중알고서로교전하여제손으로저이를쏘아사자 180명상자 70여명을내었다. 대개아군의衣帽가일병과相似한때문이다. 22일적은또 1연대 1대대를가지고 2도구로침입하였는데먼저척후대 50명을전멸시켰다. 적은밀집부대를가지고 3차나돌격하여왔으나아군의맹렬한반격에사상자수백명을내고퇴각하였다. 사령관김좌진은적이北山을선점할까하여 1대를솔하고먼저올라갔다. 적이뒤딸아오므로다시사격을가하여 250여명을사상하니其餘는도주하였다. 아군은가만히빠져나와 30리외의馬鹿溝에와서휴식하였다. 이것을모르는적군은증원병을가지고와서全山을포위하고남북으로불을놓고기다렸으나아군이보이지않으므로양방복병이서로수색하다가만나서또서로교전하게되어 2백여명의사자를내었다. 이전에아군의鹵獲品이속사포 5문기총 30정탄환 5천발마 20필刀 20 柄망원경 5 腕시계 20 지도 6 戎사령부조사에의하면적의사상이 1천6백여명이었다. 적이그사자의머리를斬하여 16차에실어가는것을목격하였다. 그러나아군은기적적으로경상자 5인밖에없은것은찰말천우신조라할것이다. 40) 22
3. 1960 년대, 국민적기억화작업의부분적시도 해방되고, 우리의손으로교육정책을집행할때도청산리전투에관한기억은국민적기억으로공유화하는과정을거치지않았다. 청산리전투에관한교과서서술이처음나온것은제2차교육과정때사용된한종의검정교과서에서였다. 1966년교육출판사에서발행한역사교과서의 제4장 은 (3) 식민지조선의해방운동 에서소항목으로 일본의무단정치, 가난을만드는정책, 3 1운동, 3 1운동이후의식민지정치, 계속된항일투쟁, 민족문화의말살 로구성되었다. 청산리전투에관해서는지배정책전반을서술하고 3 1운동과그이후의민족운동을언급한가운데, 계속된항일투쟁 이란소항목에서 1929년( 원문대로- 인용자 ) 김좌진 ( 김좌진 ) 장군이거느린독립군은만주의청산리 ( 청산리 ) 싸움에서일본군을크게무찔렀으며 라고언급되었다. 41) 당시까지한국사를기술한교과서에서임시정부정통론에관한내용가운데크게부족했던부분가운데하나가만주지역항일운동을언급하지않은경우가많았다는점을염두에둔다면주목할기술임에는분명하다. 제2차교육과정이 애국애족정신을함양 하고, 민족문화를계승발전시킨다 는측면을특별히강조했던점과관련이깊을것이다. 42) 하지만교육출판사의중학교역사교과서의청산리전투에관한기술은지극히예외적인사례에불과하였다. 제2차교육과정때발행된중고교역사교과서가운데유일한사례였기때문이다. 1968년개정된제2차교육과정에따라발행된고등학교검정교과서들에서도청산리전투에관한기술은없다. 그런데당시고등학교역사교과서는실업계의경우국정제였다. 검정제는인문계고교만을대상으로한것이었다. 실업계고교생을대상으로한역사교과서인 국사 에서는청산리전투에관해위에서언급한교과서와비교할수없을정도로상세히기술되었다. 즉 2. 민족의독립투쟁 이란단원에서다섯번째소항목으로 해외의무장독립군의활동 을배치한가운데청산리전투에관해아래와같이언급하고있었다. (3 1운동이후-인용자 ) 초기에는이청천의서로군정서군, 김좌진의북로군정서군, 독립단, 국민회등의활약이컸고, 1930년경에는정의부, 신민부, 임시정부계통일참의부의활동이컸다. 이들독립군이얻은최초의성과는 1919년홍범도부대가국경선각지에서거둔승리였으며, 가장빛나는전과는 1920년김좌진장군이이끈북로군정서군부대가, 지린의청산리에서불과 2500명의소수부대로일본군 5만을 4일간의격전끝에격멸시킨청산리대첩이었다. 독립군에패전한일본군은그분풀이로, 만주에거주하는우리동포들을무자비한학살과방화로써보복하는죄악을저질렀다. 43) 사실관계에서여전히정립되지않은내용이많지만, 홍범도를언급한사실자체가이채 23
롭다. 사실 3 1운동이후두만강과압록강을넘나들며가장활발히일본군및일본경찰과싸운독립군이홍범도부대였다. 봉오동전투는그과정에서일어난싸움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청산리대첩 곧, 청산리전투는여전히북로군정서군이단독지휘한싸움으로기술되었다. 4. 1970~90 년대, 국민적기억으로의표준화시도 1) 북로군정서를중심으로한서술의일시적안착 유신정권은국사과목을사회과에서분리시켜국사과라는독립교과로편성하면서 국사 를국정으로전환하는제3차교육과정을시행하였다. 유신정권이역사교과서를국정화한이유는, 1. 민족적가치관확립을위한일관성있는교육실시, 2. 주체적발전적사관의객관화, 3. 풍부한사료를활용한교과서편찬, 4. 교과서가격의저렴화 였다. 특히, 첫번째이유와관련해국어및도덕과함께국사과목을 가치관교육의중핵 과목으로간주하였다. 44) 그래서제3차교육과정에서는첫번째학습목표가 우리민족의발전과정을주체적인입장에서파악시키고, 민족사의정통성에대한인식을깊게하며, 문화민족의후예로서의자랑을깊이하게한다 였다. 45) 유신정권이 ' 국적있는교육 ' 을내세우며민족사적정통성, 그리고주체적민족의식과민족문화를내세운것이다. 더구나북한과의치열한우월경쟁이전개되고있는시점이었다는점이다. 남북관계사에서가장치열한외교전이벌어지고, 역사적정통성을중심으로한사상경쟁이벌어졌던때가 1970년대중반경이었다. 유신정권으로서는북한의주체사상과김일성중심의항일무장투쟁에대비할만한역사적유산으로서봉오동 청산리전투를아무리강조해도부족함이없는사실이었던것이다. 이에따라 1975년에처음발행된중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6. 국내외에서독립투쟁 이란단원에서 (3) 독립군의봉오동전투 (4) 청산리전투 가언급되어있다. 홍범도가지휘한봉오동전투에관해서는아래와같이기술되었다. 우리무장독립군의활동이활발해지자, 일본은만주에군대를파겨나여독립군을공격하였다. 만주싼툰쯔부근에서홍범도부대와일본군사이에첫전투가벌어졌는데, 독립군이승리하였다. 참패를당한일본군이다시군대를증파하여봉오동을공격했으나, 이를미리알게된독립군은중간에서그들을공격하여큰피해를입혔다. 거듭참패를당한일본군은 2개사단병력으로독립군을공격하기시작하였다. 46) 24
이어청산리전투에관해서는아래와같이기술되었다. 일본군이공격해온다는정보를미리안김좌진은, 유도작전을써서이를대패시켰으며, 그뒤에도계속해서일본군을크게무찔렀다. 이와같은크고작은여러번의전투를통하여일본군수천명을사살하는전과를올렸으며, 그중에도김좌진, 이범석의청산리대첩은독립운동사상찬란한빛을남긴큰전투였다. 47) 국정의 국사 교과서서술에서는청산리전투가김좌진이계획한싸움이었다고명시하였으며, 이전과달리북로군정서가부각되기보다김좌진과이범석이란인물이부각되었다. 청산리전투와관련하여이범석이처음으로교과서에등장한것이다. 그런데국정교과서의이러한서술은이전과같은논조를기본적으로유지하고있었다는점에서새삼스러울것이없다고치부해버릴수도있다. 하지만청산리전투를둘러싼새로운이해가가능할수있는여건이 1970년을전후하여조성되기시작했다면그렇게쉽게상대할수없을것이다. 지금한국의국회도서관에는미군이압수한일본육해군성 MF문서가많이있다. 그것은 1970년국회도서관장이워싱턴의국회도서관에서입수한것으로만주지역에서의일본제국주의세력의동향을상세히알수있는자료이다. 더불어당시만주지역여기저기에설치되어있던일본외무성의영사관들에서올린정보보고서에아주많이포함되어있다. 그가운데민족운동세력의동향을이해할수있는정보분량도상당하기때문에오늘날에서만주지역민족운동사를연구하려면이 MF문서를참조할수밖에없다. 이들정보보고서가운데는청산리전투에관해그동안이범석이아성처럼주장했던내용들을근본적으로흔들수있는내용도있었다. 그래서이범석은여기에적극대응한다. 그것이바로 1971년에발행한 우둥불 이다. 우선이범석은국회도서관장이입수한일본육해군성 MF문서에대해아래와같이비난하였다. 그러나식자를빈축케하는일들이광복이후무수히나온것을볼때, 죽기전에내증언이더자세히필요한것으로느꼈다. 그래서현재미국워싱턴박물관에보관되어있고, 우리국회도서관에도복사 보관되어있다는청산리싸움에관한기록이역사적사실과어긋난다는것을밝혀두는것이나의책임이라고생각해서몇마디부언하는바이다. 48) 그러면서이범석은 1920년 10월 8일북로군정서에서일본군에대응한연합작전을위해 4개의독립단체가집합하여회의결과김좌진이총지휘, 홍범도최명록이부사령관, 이범석이전투사령관으로역할이확정되었다는새로운내용을언급하였다. 그런데 10월 9일밤홍범도와최명록이이끄는부대등이아무연락도없이모두떠나가고한민단 1개중대만 25
남았다는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안사실이지만부서와임무배당에불만이있었다는것이다. 내가생각하기로는불만도있었겠지만 5만이넘는적의대병력의기세에압도당해전의 ( 戰意 ) 를상실한게확실하다 고하여홍범도와최명록을비겁하고권력욕이사로잡힌사람처럼묘사하였다. 49) 이어이러한자신의주장을더욱확실히하고자아래와같은내용을명기하였다. 분명히밝힐것을다음세가지로간추릴수있다. 첫째는홍범도장군이청산리싸움에참여하려다그만두고단독으로행동하다가타격을받았다. 둘째는흔히사료에나오는지청천장군과청산리싸움운운은거리가멀다. 그는청산리싸움에가담한일이없다. 셋째로일인이사진으로담은무기는홍범도부대가집단적으로뺏긴무기이다. 또한격전속에서군정서군대가운데도전사자와실종자가있었으니군정서의무기도낱개로일군손에들어갔다고는생각된다. 군정군대는조직이무너져집단적으로일인에게포로가되거나무기를뺏긴일은없다. 50) 이범석은 우둥불 에서 한국의분노 에서기록한싸움의결과에관해그대로기술하였다. 요컨대제 3 차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내용은이범석의주장을그대로따랐던것이다. 2) 기억의재조정 - 홍범도의복권 그런데마지막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는제 3 차교육과정때와달리기술되어있다. (4) 항일독립전쟁 의다섯번째소항목으로 봉오동 청산리전투 라는주제아래내용이기 술되었다. 1920년대에들어와만주와연해주에는수많은독립군부대가활동하고있었다. 51) 이들은일본군경과전투를전개하면서군자금모금, 밀정처단, 친일파숙청등의활동을벌였다. 이가운데가장눈부신전과를올린것은홍범도가이끈대한독립군이거둔봉오동전투와김좌진이이끈북로군정서군등이거둔청산리대첩이었다. 대한독립군은최진동의군무도독부군, 안무의국민회독립군과연합하여, 봉오동을기습해온일본군 1개대대병력을포위, 공격하여대승리를거두었다. 이것이봉오동전투였다 (1920). 일본군은독립군에게뜻밖에참패를당하자, 한반도에주둔하고있던부대와관동지방에주둔중인부대및시베리아출병중인부대를동원하여세방향에서독립군을포위, 공격하여왔다. ( 상단에독립신문에실린봉오동전투기사게재-인용자 ) 이에북로군정서군, 대한독립군, 국민회독립군등여러독립군의연합부대는일본군대부대를맞아 6일간 10여차례의전투에서일본군을대파하는빛나는전과를올렸다. 52) 이것이청산리대첩이었다 (1920). 26
큰타격을받은일제는, 간도참변 ( 경신참변 ) 을일으켰다. 53) 홍범도가주도한봉오동전투가청산리전투와함께분명히자리잡았음을확인할수있다. 또한홍범도 최진동의대한독립군과안무의국민회독립군을청산리전투에참가하였음을기술되었다. 전투기간도이범석이회고한이틀이아니라 6일이었음을명시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청산리전투의주역은김좌진과북로군정군이었다는관점은이때까지도바뀌지않았던것이다. 그것은 무장독립군의대일항전 이란지도에서 대한독립군 ( 봉오동전투 ) 과함께 북로군정서군 ( 청산리대첩 ) 이라고하여마치분배하는듯지도그리기에서확인할수있다. 이러한변화는어느날갑자기찾아온것이아니었다. 일본측정보보고서를적극이용하기시작하면서 1980년대들어새로운연구성과가나온결과였다. 1984년신용하는청산리전투대신 청산리독립전쟁 이란명칭을사용하면서 1920년 10월 21일아침부터 10월 26일새벽까지 6일간이도구와삼도구일대에서김좌진부대와홍범도부대의독립군과, 포위망을친일본군東支隊사이에벌어진연속된대소전투들이모두포함된것이다 고규정하였다. 54) 그러면서각전투들을하나씩사실적으로재정리한후, 일본군 1,200명과독립군 130명이전사했다고보았다. 1980년대후반중국이개혁개방을지속하는가운데노태우정부에서도북방정책을추진하면서그동안닫혀있던소련및중국과의민간교류가이루어지기시작하였다. 이때소련과중국에서홍범도에관한자료와저서등도많이들어왔다. 그런데두국가에서유입된자료는서로의상충되는부분도많고, 연변에서발행된 실록홍범도장군 이란저서가이범석의주장과비슷한논지를전개하였는데, 월간 사회와사상 에도일부가연재되었다. 이에대해소설가송우혜는학술적으로종합적인검토가필요하다고문제를제기하면서 홍범도부대는봉오동전투에서는물론이고청산리전투에서도대활약을했었다 고주장하였다. 55) 이어그녀는이범석의 우둥불 때문에청산리전투에관한왜곡이매우심하다며주요내용을조목조목비판하였다. 56) 결국 1990년대들어우리학계에서는홍범도연합부대가청산리전투에참가하였음을인정하는견해가정착되었다. 문제는김좌진의북로군정서군과홍범도의연합부대의전투양상에관한사실이제대로정리되지못했다는점이다. 57) 5. 21 세기, 새로운사실과균형잡혀가는전투과정 27
1) 우둥불 의최종적인부정 청산리전투에관한논점가운데이때까지해명되지못한기초적인사실을들자면, 무장투쟁의두주체사이의관계, 독립군이백두산으로이동하는과정의진실, 그리고전투의피해등이라고말할수있을것이다. 이와관련하여 2000년에발표된청산리전투 80주년을기념하여 청산리전쟁에관한종합연구 를한중공동으로실시하여새로운사실도밝혀내고과제도제시하였다. 이에따르면청산리전투는홍범도와김좌진이이끄는부대가일본군과격전을벌여승리한싸움이지만, 두부대가의식적으로공동작전을벌인적은없으며, 홍범도부대가 6일간의전투전반을주도한싸움이었다. 58) 이런관점에서보면 10여차례의크고작은전투의경과를재조정할필요가있게된다. 또한두부대가백두산일대로이동한것은일본군의공격을피해역량을보존하기위해서였다. 그런데두부대가따로따로행동한배경에는독립군의역량을보존하고이후무장활동을효과적으로전개하기위해동만주지역독립군부대의완전한통합이필요하다는판단이깔려있었다. 국민회를중심으로동만주지역독립군의통합운동이벌어지는과정에서홍범도의대한독립군을중심으로여러부대들이연합하였다. 우리는흔히이를홍범도연합부대라고말한다. 하지만끝까지통합을거부한북로군정군으로인해동만주지역조선인무장부대의전체적인통합은달성할수없었다. 59) 이들이공동작전을하지않은이유가운데하나가여기에있었다. 이는청산리전투의양상을재구성하는데반드시고려해두어야할기본전제임을시사한다. 반면에한중공동연구에서는사망자수를제대로해명하지못하였다. 또한오늘날까지우리가말하는청산리전투지역을서부전선이라말하고, 반대로훈춘왕청등지의지역을동부전선이라규정하며, 동부전선에서의독립군과일본군의충돌을청산리전투의한부분으로포함시켜정리할필요가있다는문제제기도있었다. 60) 하지만이에대해서는지금까지논의된적이없다. 2) 연구결과의반영이지체된속에서의작은진전 한중공동연구에도불구하고제7차교육과정에의해제작된 한국근 현대사 교과서에서는여전히이전교과서의수준을벗어나지못한경우도있지만, 금성출판사의교과서처럼진전된서술을하는경우도있다. 3. 1920년대만주지역독립군의활동 이란소단원의세번째항목이 독립전쟁최대의승리, 청산리전투 라는주제로기술된아래와같은내용을통해이를확인해보자. 그러나일본군의토벌계획을미리탐지한독립군부대는 1920 년 9 월경부터화룡 28
현과안도현일대로근거지를이동하기시작하였다. 김좌진부대는계속일본군의동태를파악하면서자제하였으나결국추적을따돌릴수없다고판단하여일본군과싸우기로결정하였다. 청산리전투는이러한과정에서발생하였다. 김좌진의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대한독립군을비롯한독립군연합부대는청산리일대의삼림지대에서 6일동안 10여차례의크고작은전투끝에일본군을크게격파하였다. 우리측발표에따르면, 독립군은이전투에서일본군을 1,200여명이나사살한데비해, 피해는전사 60명, 부상 90명에지나지않는큰승리를거두었다. 청산리전투의승리로독립군은일제의공격을저지하고주력을보존할수있었다. 61) 백두산일대로의이동과정에대한설명에서시사받을수있듯이, 독립군은청산리에서적을기다린것이아니었다. 그리도두부대가일본군과싸웠다. 선행연구의성과를반영한결과라고말할수있겠다. 또한사상자에관한통계는독립신문에보도된북로군정서의보고문에기초한것이겠지만, 연구에의해확인되지않은통계이다. 학계의연구수준을반영한서술표현이눈에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여전히김좌진의북로군정서군을중심으로청산리전투를재구성하고있다고볼수있다. 이는백두산으로의이동과정에대한설명, 탐구활동 에제시된전투및이동경로에표기된사실, 그리고전투가끝난후찍었다는북로군정서군과김좌진의단체사진에서각각그러한인식을확인할수있다. 6. 맺음말 이상으로청산리전투에관한현대한국사회의기억이어떻게바뀌어왔는지를중고교 역사교과서를축으로연구현황을검토하면서고찰하였다. * 청산리전투에관한기억의표준은이범석의 한국의분노 에의해만들어졌고, 우둥 불 에의해확대재생산되었다. * 청산리전투에관한이범석의회고는 1960 년대중반경부터중고교역사교과서에반영 되기시작하다, 제 3 차교육과정때실시된국정교과서제도를계기로더욱전면적으로반 영되면서국민적기억의표준화가이루어지것처럼보였다. * 그러나 1980 년대들어일본측정보문서를분석하고, 중국및소련측과교류의물꼬가 트이면서들어오는새로운정보에기초하여이범석의회고는점차부정되어갔다. * 21 세기들어연구에의해이범석의주장은완전히부정되었다. 홍범도의연합부대를 29
중심으로청산리전투의전체적인과정이재구성될수있는기초도마련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여전히북로군정서군과김좌진을중심으로하는기존의서술경향이강하게 남아있다. 30
1920 년대흥사단에서는 1920. 중국상해에흥사단원동위원부조직및단소설치도산이중국상해에있는대한민국임시정부각원으로취임한후, 그지방청년학생중에서단우를규합하여흥사단원동지방임시위원부를조직하고그곳에단소를설치 1921. 본부임원진의 3부제개편본부임원진의 3부제 ( 의사부, 이사부, 심사부 ) 로개편하여송종익, 한승곤, 최윤호, 곽림대, 김성권, 이암, 한장호, 종동엽등이본부를국내로옮기기까지이사부장을역임 ( 초대이사부장송종익 ) 1922. 서울에수양동맹회창립 목적과이념이흥사단과같으나당시일제의감시를피하기위하여별개단체 로조직됨 1923. 평양에동우구락부창립 동우구락부는구대성학교및청년학우회출신들의단합으로흥사단과목적을 같이함 1925. 수양동우회창립수양동맹회와동우구락부가수양동우회로통합평양과서울을중심으로흥사단운동의국내활동을전개. 1929년동우회로개칭 1926. 잡지 동광 창간 (1933 년까지 40 호발행 ) 1927.4 흥사단산악회출범 서울시노량진사육신묘에서 첫등반 동광 창간호 (1926 년 ) 에실린도산선생의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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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 1930 년대한국독립당 - 정당정치의기원 김희곤 ( 안동대교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 1. 머리말 나라를잃은직후부터나라밖에서많은독립운동단체가조직되었다. 특히만주와중국관내에서그러했다. 같은이념을가진인물들이하나의틀을만들어각각의단체에모였고, 그이념에따라상황에알맞은활동방향을찾아나갔다. 그단체들이상황전개에따라성격을달리하게되는데, 가장대표적인변화가바로 정당 조직체로발전했다는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주변에서도그랬다. 건국초기에는철혈단 의용단 의열단 대한애국부인회등 60여개의단체들이만들어졌다. 정부의직할단체도있고, 주변을맴돌며활동하던것도있었다. 그단체들이 1930년대에들면서점차정당이라는형태로바뀌면서결합하고, 또그를중심으로임시정부를운영하거나독립운동을펼치게되었다. 정당정치를꿈꾸는이야기는이미계몽운동단계에서나타났다. 서울은말할것도없고, 1909년안동에서이상룡이이미정당정치를외치면서청년들에게민주공화정을강연할정도였다. 62) 따라서대한제국으로망한뒤, 다시세울나라는민주공화정이었고, 몇년지나 1917년에발표된 대동단결선언 에그러한방향성이정리되었다. 1910년나라를잃은뒤, 당의이름을가진독립운동단체가속속나타난것도이러한배경위에서이루어진것이다. 1915년 3월申圭植ㆍ朴殷植ㆍ柳東說ㆍ李相卨등이상해에서만든新韓革命黨, 1917년신규식이상해에서조직한朝鮮社會黨, 63) 또 1918년 6월李東輝ㆍ朴鎭淳ㆍ朴愛등이하바로프스크에서조직한韓人社會黨, 64) 그리고 1918년에상해에서呂運亨ㆍ韓鎭敎ㆍ趙東祜등이나서서조직한新韓靑年黨등이그것이다. 이처럼당이라는이름을가진조직들이나타난뒤, 3ㆍ1독립선언직후에상해에서 정부수립론 과 정당조직론 이깊게논의되었다. 그자리에서결론으로정리하여성립시킨것이바로대한민국이라는국가와, 임시정부라는정부조직, 그리고임시의정원이라는의회조직이었다. 정부수립론은정부가있어야민심이집중되며망국이후 10년동안이산된민심을잡는방법으로정부를수립함이옳다는논리였다. 반면에정당조직론은주권 영토 인민이없거나부족한형편이니정당설립이옳다는것이다. 대한민국건국과임시정부수립은정부수립론이다수를이룬데서비롯했다. 그뒤에도곳곳에서당이름을가진조직이여럿나타났다. 統一黨 (1919.4, 상해 ), 한인사 33
회당 (1920.3, 블라디보스토크 ), 勞動黨 (1920.10), 勞動社會改進黨 (1920. 12, 캘리포니아 ), 고려공산당 (1921.1, 상해 ), 한족노동당 (1924, 길림 ), 조선공산당 (1925.4, 서울 ), 고려혁명당 (1926.4, 길림 ), 歸一黨 (1926.9, 寧古塔 ) 등이그것이다. 65) 그러나이들을정당정치의기원으로보기에는어려움이있다. 왜냐하면이조직들이하나의독립운동조직임은분명하지만, 국가나정부를운영하는체제를갖고있지않았기때문이다. 다만상해의고려공산당이짧은기간에임시정부운영에참가했지만, 온전한정당정치의틀을갖추지는못하였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나타난唯一黨건설운동은역시정당으로독립운동을이끌고국가도운영하자는, 以黨治國을추구하는것이었다. 최종결실을거두지는못했지만, 1926 년부터 1929년까지나라안팎독립운동계가모두참가한큰운동이었다. 그러다가마침내대한민국임시정부를운영하는조직체로서정당이나타난것이바로 1930년 1월결성된한국독립당이다. 한국독립당은독립운동사연구자들이일찍부터다룬주제였다. 하지만이것을정당정치나정당조직이라는성격자체에초점을맞춘것은 1980년대에들어선뒤의일이다. 특히 1980년대말, 민주화운동이거세던그무렵, 한국독립당연구는커다란성과를올렸고, 이를주제로삼은박사학위논문도두편이나나왔다. 66) 연구과제로먼저이것이정당정치에등장하는일반적인개념의정당이될수있는지의문이제기되었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정당 이란개념설정이등장했고, 이것이점차독립운동사학계에뿌리내렸다. 67) 그리고독립운동선상에나타난정당조직은허벌 (R. Heberle) 이주장한 혁명적정당 이란개념에속한다는주장도나왔다. 68) 이들연구를통해한국독립당이국가와정부라는틀속에움직인근대정당의출발점이라는데의견을모았다. 1930년대에임시정부를중심으로독립운동사에등장한정당조직들은다른독립운동단체들과성격상차이를갖고있었다. 첫째하나는대립적인정당의존재를부인한것이아니라는점이다. 유일정당을추구한시절도있지만, 전반적으로보면경쟁상대를두는복수정당체제를갖추어갔다. 그과정에서독립운동의효율적인전개를위해끊임없이통합을추구하여이합집산을거듭했다. 둘째차이는 독립운동단체가독립운동만을목표로하는데비해, 독립운동정당은독립운동외에도앞으로수립될국가에대한강령을마련하고있다는사실이다 69) 근대시민사회의정당정치를실험하고체득하는과정이거기에담겨있었다. 34
2. 한국독립당의결성과구성 1919 년 4 월 11 일대한민국이건국되었다. 국토를회복할때까지이국가를운영해나갈 조직으로 임시정부 와 임시의정원 이조직되었다. 이는한국역사에서최초로건국된근대 시민국가요, 민주공화정부였다. 국토를회복하면 1 년안에임시의정원을해산하고 국회 를 소집한다고제헌헌법에명시했다. 그러니임시정부와임시의정원이대한민국정부와국회 의뿌리인셈이다. 정부와의회로국가를운영하되, 국토를회복할때까지는독립운동에 전념한다는뜻이여기에담겼다. 그러다가정당조직에대한필요성이대두하였다. 좌우합작을통해한개정당을만들고, 이것이국가를운영하게만들자는주장이그핵심이다. 1926 년부터 1929 년까지중국지역에 서펼쳐진한국독립운동계의유일당운동이바로그것이다. 대독립당북경촉성회를출발점으 로하여상해 광동 무한 남경등에서유일당촉성회가결성되었고, 1927 년 11 월에는이들관 내지역유일당촉성회대표들이상해에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를결성함으로써 한발자국진전시켰다. 임시정부가민족대당이완성되면최고의권한을모두거기에넘긴 다는내용이든개헌안을통과시키고, 국무위원전원이유일당운동에참여하는파격적인 자세를취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결실을맺지못했다. 1929 년에들어분열의기미를보 였다. 그러다가 1929 년 10 월 26 일좌파세력은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서떨어져나가면서 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결성하고서, 중국공산당과연대투쟁을벌이거나그범주안으로 들어가기시작했다. 이로말미암아좌우합작운동은일단중단되고말았다. 이에임시정부핵심인물들은새로운조직을준비해나갔다. 독자적인정당체결성에나 선것이다. 새로운조직체는민족주의세력을결집시키면서임시정부의기능을강화시키는 것이어야했다. 아울러유일당운동으로표출된요구에걸맞게정당의성격을지닌조직체 를결성하는것이과제였다. 이러한필요에따라 1930 년에들면서우파세력은임시정부의 여당구실을맡을독립운동정당을조직하려계획했다. 그결정체가바로 1930 년 1 월 25 일 에결성된한국독립당이다. 70) 좌파세력이유일당운동을좌절시키면서유호한국독립운동자 동맹을결성하자, 우익진영에서대응하고나선것이바로한국독립당건설이었다. 이는정 당조직이었다. 정당은국가를운영하는정부에상응하는조직이었다. 이제정당이정부와 의회를꾸려나가는주체가된것이다. 한국독립당을결성해낸주역은국무위원회주석이동녕을비롯한임시정부의핵심세력 과안창호였다. 임시정부중심인물들은정부의기능을강화시키고, 이를바탕으로민족운 동을활성화시키려는의도를가지고있었다. 이와달리임시정부를해체하여, 대한민국을 운영하면서민족운동을수행해나갈최고기관을새로수립하겠다는것이안창호의의도였 다. 즉임시정부가기대에부응하지못할뿐아니라, 해외동포사회의민족사상발달을저 해하는경향마저있으므로, 이를해체하고시대에맞는민족운동의중심기관을설립하여 35
민족운동의발흥을기대하자는것이안창호의논리였다. 그러나임시정부를어렵게지켜온이동녕을비롯한핵심인물들은 과거 10여년이란역사를가진정부를해산할수없으며, 설령새로운기관을설립한다고하더라도반드시이보다유리하다고는할수없다 고반론을내걸어, 71) 안창호와다른의견을내놓았다. 그러다가이들은견해차이를조금씩좁혀나갔다. 그열매가바로한국독립당결성이었다. 따라서한국독립당은유일당운동이결렬되면서민족주의세력이임시정부를강화하고이를중심으로독립운동의주도권을장악하고자조직한것이라고정리할수있다. 72) 한국독립당은 1930년을전후하여결성된여러정당과는다소그성격을달리했다. 한국독립당은대한민국임시정부의唯一與黨역할을맡은정당이다. 야당이없는, 오직여당하나만존재하는혁명정당이다. 정부청사에서출범한사실이이를말해준다. 73) 따라서대한민국을운영하는주체가정부와의회인데, 사실상정부와의회를지휘하는위치에한국독립당이들어선것이다. 안창호가이를 대독립당 이라거나 한국독립운동을위한최고기관 이라고표현한이유도여기에있다. 74) 한국독립당은대한민국헌법인 임시약헌 을근거로삼아결성된정당이다. 1927년 4월 11일자로공포된제3차개헌, 곧 대한민국임시약헌 에 黨 에대한규정이담겨있다. 제1 장제2조에 대한민국의최고권력은임시의정원에있음 이라고천명한뒤, 단서로 광복운동자의대단결인黨이완성된때에는국가의최고권력이이당에있음 이라고명기했다. 특히제1조에서 대한민국은민주공화국이라국권은인민에게있음 이라고첫머리에밝히면서, 단서로 광복완성전에는국권이광복운동자전체에있음 이라고덧붙였다. 75) 그렇다면광복이전에는광복운동자가국권을가지고, 그들이대동단결하여 당 을완성시키면, 대한민국의최고권력은바로그 黨 이가진다는말이된다. 비록좌파세력을모두아우르지못했지만, 좌파세력은다른조직을만들어떠난정황이다. 그런데이미헌법조차개정하여대당조직을향해나갔던임시정부로서는정당결성이야말로당연히걸어가야할길이었다. 더구나중국국민당이나중국공산당은이들에게선구적체제로인식되었던터였다. 또한국독립당은정부를중심으로정착된모습을갖추었다. 그이유는정부와의관계와성숙성및정강 정책의완성때문이다. 한국독립당은以黨治國체제를갖춘소위 중국국민당정부 처럼 한국독립당정부 를구성하게되었다. 1930년에조직되어 1932년 5월항주로옮겨간이당은 1940년重慶에서조직된같은이름의한국독립당과성격상큰차이를보였다. 중경시절한국독립당은경쟁상대인야당을둔상태의與黨이었기때문이다. 당의중심인물은모두임시정부의주요직책을갖고있었다. 1927년 8월에조직된국무위원은이동녕 ( 국무회의주석겸법무장 ) 김구 ( 내무장 ) 吳永善 ( 외무장 ) 김철 ( 군무장 ) 金甲 ( 재무장 ) 등이었고 1930년 6월에오영선의사직으로趙素昻이외무장으로선출되었다. 그리 36
고같은해 11월 8일임시의정원회의에서임기 (3년) 만료로국무위원을개선하였는데, 그때선출된국무위원은이동녕 ( 법무장 주석 ) 김구 ( 재무장 ) 趙琬九 ( 내무장 ) 조소앙 ( 외무장 ) 김철 ( 군무장 ) 등이었다. 이밖에주요직은군사위원회위원장尹琦燮, 외교위원회와경제위원회위원장에안창호, 임시의장에이동녕, 부의장에車利錫이었다. 76) 그렇다면 1930년상해에서결성된한국독립당의끝은어디인가? 조소앙이조선민족혁명당결성에참가하기위해한국독립당을해산하던 1935년 7월이그하한선이다. 그런데한국독립당을해산하고떠난세력이두달만에다시조선민족혁명당을뛰쳐나와한국독립당을재건하는일이벌어졌다. 이를한국독립당재건파, 혹은재건한국독립당이라부르게된다. 하지만이미이들은정부운영의주도권을잃어버린뒤였다. 임시정부고수파 혹은 임시정부사수파 를자처하던이동녕 김구 차리석등은철저하게정부를붙들고있었다. 이들이 11월한국국민당을세워우파정당의선두에나섰다. 그러면서정부와의회를움직이는역할을손에거머쥐었다. 한국독립당이가지던역할과기능이한국국민당으로넘어갔다. 그러면서한국국민당은한국독립당재건파라거나, 다시 1937년 4월에조선민족혁명당을뛰쳐나와독립한이청천의조선혁명당과같은야당을거느린집권여당이되었다. 3. 한국독립당의이념과투쟁방략 한국독립당은그이전에전혀볼수없던성숙된정강ㆍ정책을마련했다. 한국독립당의정강ㆍ정책을입안한자는조소앙이었고, 따라서그의삼균주의가당이념의기본구조가되고, 정부의운영기조가되었다. 이내용의골격은결국민주독립국가의수립과균등제도의실현을목표로한다는것이었다. 당의와당강은우파진영이추구하던정치이념과독립운동노선을담아냈다. 그전문은다음과같다. 黨意우리는오천년독립자주하야오든국가를異族日本에게빼앗기고지금정치의유린과경제의파멸과문화의말살아래서死滅에직면하야민족적으로자존을득하기불능하고세계적으로共榮을圖키末由한지라. 이에本黨은혁명적수단으로써원수일본의모든침탈세력을박멸하야국토와주권을완전광복하고정치경제교육의균등을기초로한신민주국을건설하여내로는국민각개의균등생활을확보하며외로는族與族國與國의평등을실현하고나아가世界一家의진로로향함. 黨綱 ( 基本綱領 ) 一. 대중에대하여 ( 국민의 ) 혁명의식을환기하고민족적혁명역량 ( 총역량 ) 을총집중할것. 一. 엄밀한조직하에민족적반항과무력적파괴를적극적으로진행할것. 一. 세계피압박민족의혁명단체와연락을취할것. 37
一. 普選制를실시하여국민참정권을평등하게하고, 기본권리를보장할것. 一. 토지와대생산기관을공유 ( 국유 ) 하여국민의생활권을평등하게할것. 一. 생활상의기본지식과필요기능을수득修得하기위해충분한의무교육을公費로써실시하여국민의修學權을평등하게할것. 一. 민족자결과국제평등을실현할것. 一. 세계일가의조성에노력할것. 77) 당의의주요내용은몇가지부분으로나누어살펴볼필요가있다. 우선맨앞에 혁명적수단으로일본의침탈세력을박멸하여국토와주권을완전광복 한다고밝혔다. 여기에서말하는 혁명적수단 은곧한인애국단을중심으로펼쳐진의열투쟁을가리키고, 나아가독립전쟁까지포함하는것이라여겨진다. 그렇게투쟁하여국토와주권을완전히광복시키는것이목표였다. 둘째, 국내에들어가세울나라는新民主國인데, 그것은정치 경제 교육의균등이그바탕을이루는체제라는점을명시했다. 1919년에처음으로민주국을건설했지만, 그것이독립운동을펼쳐나갈국가요정부였기때문에정상적인틀을제대로갖추지못한한계를가졌다. 그러나 10년을넘긴시점에서이제국내로들어간다면균등사회를일구어내겠다는것이한국독립당이세운목표였다. 그것이바로 신민주국 이란말로표현되었다. 셋째, 나라밖으로국제사회에대해서도균등사회를목표로삼았다. 族與族ㆍ國與國 의평등을이루어 世界一家 로나간다는말이그것이다. 나라를찾아되세우되, 안팎으로평등사회를달성한다는것이당의의핵심인것이다. 여기에는닫힌민족주의가아니라열린민족주의를가늠하는뜻이담겼다. 당강은모두 8개항목으로구성되었다. 첫째와둘째항목은대중에게혁명의식을고취시키고역량을모두모아, 민족적반항과무력적파괴를진행한다는것이다. 이것은당의에서말한혁명적수단을뜻한다. 다음으로세계피압박민족의혁명단체와연락한다고표현한부분은독립운동의세계적연대를말한다. 보선제실시와국민참정권, 기본권리보장을표현한것과토지와대생산기관의국유및국민생활권균등, 그리고의무교육과수학권평등은바로정치 경제 교육, 곧세개분야에서균등한생활을지향한다는의미를담았다. 마지막으로민족자결과국제평등, 그리고세계일가조성이라는부분에서는민족과민족, 국가와국가사이의평등을추구한다는뜻을나타냈다. 전체적으로보아한국독립당의당강과당의는두가지축으로정리된다. 아래위로는사람과사람 ( 人與人 ), 민족과민족 ( 族與族 ), 국가와국가 ( 國與國 ) 의균등을, 옆으로는정치ㆍ경제ㆍ교육등세가지분야에서균등사회를추구하는이원적틀을갖춘것이다. 한국독립당의이념은세가지특성으로정리해볼수있다. 첫째, 한국독립당은민족주의ㆍ민주주의의성격을가진정당이다. 이것은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붕괴된후, 민족주의세력이나서서이당을결성했다는사실에서우선입증된다. 이는政綱속에도잘나타 38
나있는데, 보통선거제와국민기본권의평등조항등이다. 그리고復國후에건립할국가의국체와정체에대하여민주공화국과민주입헌제를각각주장했다. 78) 그런데여기에서나타나는민주주의란곧민족주의의정치적기본원리이다. 따라서이당의민족주의적특성을보여주는것으로볼수있다. 왜냐하면한국민족주의는정치적ㆍ경제적으로함께추구되었고, 이가운데민주주의는민족주의의기본원리였기때문이다. 79) 한국독립당의이념이가진두번째특성은대일투쟁방법으로민중적항일투쟁과무력적파괴의두가지를제시하고있다는사실이다. 이러한내용은한국독립당의다음과같은정책에서찾아볼수있다. 1. 국내민족에대하여혁명의식을환기하고혁명역량을집중한다. 2. 엄밀한조직하에서민족적반항과무력적파괴를적극진행한다. 3. 세계피압박민족의혁명운동단체와함께協進을도모한다. 80) 이는결국민족의혁명역량집중과조직화로민족적투쟁과무력적파괴를전개하고나아가세계피압박민족과협력을도모한다는것이다. 또한이러한사실은조소앙의글에서한국독립당의대일투쟁방식으로두가지를내세웠다. 하나는민중적반일운동이요, 다른하나는무력적파괴가그것이다. 81) 사실여기에보이는 민중적반항 이나 무력적파괴 만으로일제에대항하여독립을성취한다는것은불가능한일이었다. 그렇다고해서일제에독립전쟁을일으켜독립을쟁취한다는것은더욱불가능한일이었다. 왜냐하면독립전쟁준비방략을채택하여 10년동안전쟁비용을만든다거나군대를양성하는데힘을쏟은한국노병회의노력이열매를맺을수없었기때문이다. 따라서의열투쟁이라는방략이다시떠올랐고, 이를채택한것이바로한국노병회를바탕으로조직된병인의용대였다. 또이방략을다시이어나간것이한인애국단과상해한인청년당의활동으로이어졌던것이다. 이러한사실로미루어볼때, 당시의처지는임시정부를중심으로대규모군사작전을수행할시기가아니었다. 따라서당시의상황아래에서택할수있는최선의방략은요인암살이나적기관의파괴와같은의열투쟁방략이었다. 한국독립당이념의세번째특성은토지와대규모생산기관을국유로한다는사회주의적성격이었다. 이러한경향에대하여몇가지견해가있어왔다. 첫째, 러시아혁명이후파급된사회주의물결이나孫文의삼민주의의영향으로파악하는견해가하나이다. 82) 둘째, 제도와정책면에서서유럽의사회주의의계보에속하기는하지만, 기존의이념들과다른새로운유형의정치이데올로기로서, 혁명성 민족성 평화지향성을내포했다는견해도있다. 셋째, 이것을강령적사고에만머물뿐, 구체적인국정운영의경륜에서우러난정치적 39
이념이아니라고이해하면서, 오히려독립운동의세력집산과정에서정치적상징조작의성 격을가진강령상의사회민주주의적補色에지나지않는다는지적도있다. 83) 넷째, 일제의 누적된식민지경제정책아래에서대량수탈된토지를비롯한대생산기관을되찾는방법 으로서토지나대생산기관의국유를주장한것이라고파악한경우도있다. 84) 다섯째, 공산 주의적입장보다는한국역사에그근거를가진것이었으며, 영국노동당의사회주의와연 결성을갖는것으로파악한견해도있다. 85) 이러한견해를하나로엮어보면, 한국독립당의일부사회주의적인특성은크게대내외 적인두가지요인에뿌리를두고있다고정리된다. 먼저안으로는한국사의흐름과일제 강점이라는시대상황의특수성및정강상의보색이며, 밖으로는러시아혁명에따른사회 주의, 영국노동당의개량적사회주의혹은삼민주의등의영향으로요약,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에보이는조소앙을비롯한한국독립당, 나아가임시정부구성원이이해한사회주의적 인성향은 1920 년대후반기에일어난유일당운동을통해익숙해지거나영향을받은것이 고, 또한세계경제공황 (1929) 을지켜보면서굳어진것이었다. 여기에서눈길을끌만한사실 은사회주의적인내용을강령에포함한일이이념적인분화와갈등이생긴이후, 이념적인 접근이처음으로이루어졌다는사실이다. 이것은민족주의세력이사회주의이념을상당히 수용하였다는점일뿐만아니라, 임시정부가그러했다는점을의미하기도한다. 한국독립당은임시정부와구분되는것이아니라하나의덩어리였다. 그렇기때문에한국 독립당의당의와당강, 정책은사실상임시정부의그것이었다. 따라서한국독립당의이념 을따져보면, 그것이곧임시정부의길이자이념이었다. 한국독립당의이념을통해본임 시정부의그것은결국, 정치적으로자유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사회민주주의를지향했음 을알수있다. 앞에서본것처럼, 한국독립당은투쟁방략으로민중적반항과무력적파괴를제시했다. 이것은만주의한국독립당과조선혁명당처럼군사조직을갖추지못한상황에서요인암살 이나적기관의파괴와같은소규모의, 그러면서도효과있는투쟁을전개할수밖에없었 던데에기인하였다. 그러므로 1930 년대초한국독립당의항일투쟁활동은이러한무력적 파괴 요인암살등이주된흐름이었고, 당시의상황으로서는최선의방법이었다. 86) 한인애국 단의투쟁이이를대변한다. 일제침략최고책임자와침략기구를족집게처럼찾아서타격 하는특공작전을펼쳤다. 일본왕이나조선총독, 관동군사령관을처단하러나선것이그 하나요, 상해에주둔하던이즈모전함을공격하거나, 홍커우공원에서열린일본군승전기념 식장에폭탄을던진윤봉길의거도그러했다. 앞서동양척식주식회사를공격한나석주의 투쟁도마찬가지다. 이러한의열투쟁은결코테러가아니다. 의열투쟁은무차별적이거나 40
부도덕한공격도아니다. 일반대중을공격대상으로삼은것이아니다. 오직침략책임자와기구를공격한것이다. 한인애국단이펼친투쟁은곧일본군의침략에맞선 반침략전 으로평가할수있다. 이것이바로한국독립당의강령에바탕을둔것이고, 임시정부국무원들의동의로김구에게전권이주어진작전이기도했다. 4. 다양한정당의출현과발전 1930년한국독립당결성을전후하여의열단도정당으로변신하였고, 신한독립당이자리잡았다. 남경에서신익희가나서서만든한국혁명당이만주에서내려온이청천과손잡고신한독립당을만든것이다. 한편윤봉길의거이후상해를탈출한임시정부는항주로자리를옮겨전열을가다듬었다. 김구가일제추적을따돌리는동안임시정부를움직이던한국독립당에손을대기힘들었다. 바로그시기, 유일당운동중단이후멈추어섰던독립운동세력의통일운동이다시추진되었다. 그결실이 1935년 7월결성된조선민족혁명당이다. 여기에한국독립당이참가했다. 이말은한국독립당이임시정부의유일여당임에도불구하고, 임시정부자체를부인하는조선민족혁명당에참가했다는것이고, 더구나스스로해산해버렸다는것을뜻한다. 조소앙이그앞장을섰다. 짧은순간이지만임시정부의여당이없어진셈이다. 이를만회하는움직임이급박하게나타났다. 김구가긴급하게한국국민당을조직하여임시정부의유일여당구실을해내기시작한것이다. 한편또하나의변화가나타났다. 조선민족혁명당에합류한지두달만에조소앙이한국독립당출신세력들을이끌고뛰쳐나왔다. 그리고서한국독립당재건파를구성했다. 뒤를이어이청천이뛰쳐나와조선혁명당을결성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이거대좌파정당연합에성공했다가, 오래지않아이탈세력이나오면서약화되고, 끝내김원봉단일세력으로축소된셈이다. 물론더강경한좌파세력이존재하기는했지만, 사실상우파세력들이모두떠남에따라좌우합작을뜻하던조선민족혁명당은더이상아니었다. 따라서김구중심의한국국민당과김원봉의민족혁명당이라는좌우로나뉜양대정당시기를맞았다. 양대정당은 1937년중일전쟁을맞으면서강력한연합체를만들어갔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 광복진선 ) 와조선민족전선연맹 ( 민족전선 ) 이바로그것이다. 이들두거대연합체는다시통합노력에들어갔고, 1939년에 7당 5당통일회의를거치면서한순간진선협회를구성하기도했지만, 일단완전한결실을맺지못했다. 그렇게되자, 우파만의통합체인 ( 중경 ) 한국독립당이 1940년에결성되어임시정부의여당이되었다. 당 ( 한국독립당 ) 정 ( 임시정부 ) 군 ( 한국광복군 ) 의완성된체제를갖춘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과양대정당체제가다시형성되었지만, 제2차세계대전이터져상황이급박해지고중국국민당정부가통합을요구함에따라그동안임시정부를부인하던조선민족혁명당이 1942년에임시정부에합류하였다. 1944년홍진과최동오가나서서중간세력을표방하며신한민주당을조직하였다. 이로써한국독립당이라는여당과이에맞선제1 야당민족혁명당, 그리고중간색채를띈제 41
2 야당신한민주당으로구성되는다당체제를갖추었다. 5. 역사적의미와현재적가치 독립운동정당은오늘의정당과다르다. 하지만한국의근대정당의출발점은독립운동정당이란데큰이의가없다. 대한민국을건국하고, 이를운영하는조직이정부와의회였다. 다만국토를회복할때까지임시정부와임시의정원이그역할을맡았다. 국토를회복하면대한민국정부가되고, 대한민국국회가되는것이다. 임시헌장제10조에 국토를회복하면 1개년내에국회를소집함 이라고명시한것이그를말해준다. 여기에정당조직이등장했다. 독립운동을펼쳐나가던단체들이점차정당조직으로발전하였다. 대한민국이라는국가를움직여나가면서독립운동을추진할새로운조직이나타난것이다. 국토를회복할때까지 임시정부 요, 임시의정원 이대한민국을운영하듯이, 정당도사실상 임시 적인성격을가졌다. 그것이바로일반정당과달리 독립운동 을주목적으로삼는것이었다. 독립을이룰때까지가장주된활동목표가바로민족독립이었기때문이다. 강령에독립운동방략이들어있는이유가바로거기에있었다. 그렇다고해서한국독립당이내세운정강 정책이일반정당과크게다르지는않았다. 한국독립당이내건강령은앞에서본것처럼두가지로요약된다. 정치적으로는자유민주주의요, 경제적으로는사회민주주의다. 이러한틀은독립운동시기만이아니라, 광복이후세울정부의틀을말해주는것이다. 이강령은좌우대치가아니라좌우합작을이끌어내는이념적인광장을제공했다. 유일당운동이중단되고, 우파세력만이한국독립당을만들었지만, 늘좌파세력을끌어안을수있는이론적인공간, 공동의광장을마련해둔셈이다. 삼균주의에바탕을둔이강령은그뒤로 1940년대까지독립운동정당의대표적인이념으로자리잡았다. 광복이후많은정당이만들어졌다. 남북한모두헤아릴수없이많은정당들이만들어지고, 이합집산을거듭했다. 오늘까지태어나고사라진정당을모두열거할수도없을지경이다. 그런데이들정당이독립운동정당의수준에서많이발전했을까? 그랬으면좋겠지만, 실제로들여다보면그렇지않은것같다. 1930년에등장한정당으로부터따진다면정당의역사는무려 80년이다. 그세월동안정당의수준은다른분야와마찬가지로크게성장해야했다. 또최고목표와가치관이바뀌었다면, 거기에알맞은정당체제를갖추어야한다. 하지만쉽게그렇다고말하기는어렵다. 1930년에탄생한정당의정강ㆍ정책은지금정당의그것보다못한게없어보인다. 자유민주주의와사회민주주의의절충은요즘보다더우수하다는느낌마저줄정도이다. 또의회를운영해나가는절차도그러하다. 다당제구도를유지하면서의회에서토의를거듭하여결론을이끌어냈다. 여당은야당이들어올공간을비워두고기다렸으며, 들어간야당은여당의기득권을인정하였다. 멱살잡이를거듭하는요즘정당과는비교할수없을만큼역사 42
의식과품위가돋보였다. 서로가서로의존재를인정하고, 상대가설자리를헤아려주었다. 그런점으로보면, 80년한국정당사는발전보다는퇴보했다고평가하는편이옳아보인다. 이런후퇴의요인은독점과독재에서찾을수있다. 광복이후남북분단과장기독재정권의등장은상대를인정하지않는폐단을가져왔다. 독점체제의장기화는온갖탈법과불법을저질렀다. 지금까지정권이저지른불법행위는대부분이승만정권시절에시작된것이다. 오직집권을위한개헌추진, 반대세력구금, 사사오입같은, 말도되지않는짓거리가거듭되었다. 그러니토론과논의, 타협과협상의광장이란존재할수없었다. 거듭되는충돌은도의를잃은정치문화를낳았다. 끝내나아니면남이라는절대적인편가르기가되풀이되었다. 정치인들이끌고온편가르기는마침내국민대중모두를그틀속에빠트리는잘못을저질렀다. 사안의본질을따지지도않고, 미리편을갈라다투는오늘의현상은바로거기에서나온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임시의정원에서정당들이충돌하고타협하고, 협상하던그러한교훈을제대로잇지못하고, 그저권력독점과독선에만빠져있지않는지돌아봐야한다. 6. 맺음말 한국근대정당의기원으로한국독립당을살펴보았다. 한국역사에서최초로성립한민주주의국가가대한민국이고, 이를운영하던조직이임시정부와임시의정원이다. 독립운동으로근대국가를만들어낸것이다. 다만국토를회복할때까지 임시 로정부와의회를두었다. 여기에정당이등장한것은 1930년이다. 상해에서결성된한국독립당이그것이다. 임시정부와임시의정원과마찬가지로, 정당도민족독립을최고목표로삼았고, 따라서강령에도독립운동과그방략을담았다. 그래서 독립운동정당 이라는개념으로이해해왔다. 오늘날의정당과다른점은바로그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은한국사에서최초로정당정치를실험하였다. 정당으로국가를운영하자는 이당치국 체제를갖추어간것이다. 한국정당정치의뿌리가거기에있다. 아쉽다면, 해방이후등장한정당들이독립운동정당을제대로계승하지못했다는점이다. 국가와정부, 의회마저제대로잇는데충실하지못했으니, 다른것이야따져무엇하랴. 형편이그러니, 독립운동정당과광복이후정당과의연결성, 성과의계승여부조차따지는연구가별로없는형편이다. 이는바로해방이후등장한정당들이독립운동시절에등장한정당을제대로계승하지못한사실을말해주는것이기도하다. 한국독립당은오늘의한국정당과성격이비슷하지만, 다른점도있다. 독립운동정당이란점이다르다. 하지만구성이나운영에서는오늘의정당과거의같다. 정강 정책이나운영과정은오늘보다조금도뒤지지않고, 오히려더뛰어난면도많다. 특히난장판에가 43
까운오늘의정당정치에비하면참으로성숙하고의젓한면모를보였다. 독립운동가들의집단이므로, 지사적 인풍모와의리가바탕을이루었으니, 특히더그랬을수도있다. 하지만그들에게는역사적소명감이있었다. 요즘정당과비교하면바로이점이가장크게다른점이다. 현재한국정당정치는다양성보다, 국민현혹에, 강령보다는권력장악에만욕심을두고있다고혹평해도크게지나치지않을것같다. 정도가무너지고도덕성도낮다. 권위주의를청산한다면서권위마저없앴다. 천박한언어와문화가뒤덮고있다. 하루하루전투와전투로이어지고있다. 한국근대정당 80년, 이제새로운정당정치문화를세워야할때다. 44
1930 년대흥사단에서는 1930. 한국독립당결성 1월 25일다수의흥사단원들이참여한가운데이동녕, 김두봉, 조완구, 조소앙, 이시영, 김구등과한국독립당결성, 당강령에대공주의반영. 12월흥사단우를중심으로생산 신용의합작운동인동인호조사 ( 同人互助社 ) 창립계획안발표. 1932. 흥사단원동대회개최 1월 18~19일상해에서좌우통합을강조한제18차흥사단원동대회개최 동우회사건으로수감된도산 1935. 흥사단임시원동위원부에서흥사단원동지방위원회로개칭. 1937. 동우회사건 도산안창호선생과동우회회원 70 여명을포함 181 명이투옥되고, 동우회가 강제해산됨. 1938. 3 창립자도산안창호서거동우회사건에앞서일본관헌에게체포되어대전감옥에서옥고를겪고출감하였던도산선생이이사건때에다시검거되어병보석중 1938년 3월 10일서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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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1940 년대한국광복군 - 독립전쟁전략을실현한무장부대 한시준 ( 단국대역사학과교수 ) 1. 머리말 한민족의독립운동에는상대가있었다. 상대는일본제국주의였다. 당시일제는대륙을향해세력팽창을추진하던강대국이었다. 강대국일제를상대로빼앗긴국토와주권을되찾기위한투쟁을벌어야했던것이독립운동이었다. 객관적상황으로보면, 한민족의독자적인힘만으로일제를패망시키고독립을쟁취한다는것은거의불가능한일이아닐수없었다. 강한적을상대로한독립운동에는전략이있었다. 독립운동전략은한마디로 독립전쟁론 이었다고할수있다. 독립전쟁론 이란민족의군대인독립군을양성하였다가일제가중국 미국 소련등과전쟁을하게될때, 이들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하여독립을쟁취한다는것이었다. 이는국내외독립운동자들이합의를이루어결정한것은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의방향을모색하는과정에서공감대를형성하고있었다. 이러한독립운동전략을가장충실하게실현한대표적인사례가한국광복군이아닌가한다. 한국광복군에대해서는그동안일일이열거할수없을정도로많은연구가이루어졌고, 광복군의창설배경과과정, 부대편제및조직, 활동등에대해소상하게밝혀져있다. 이글은이러한선행연구성과를기초로하여, 광복군이 독립전쟁론 이란독립운동전략을가장충실하게실현한대표적사례임을드러내려는데목적이있다. 이를위해독립운동전략과임시정부의군사정책, 임시정부가광복군을창설하고대일선전포고를발표한일, 광복군이연합군과공동작전을실행한역사적사실등을살펴보고자한다. 그리고해방후광복군이독립국가의군대를건설하기위해벌인건군활동과대한민국국군과의관계에대해서도언급하려고한다. 2. 독립운동전략과임시정부의군사정책 1) 독립운동전략 47
독립운동전략은구국운동과정에서마련되었다. 구국운동은일제의침략을막아내기위한노력이었고, 의병항쟁과애국계몽운동의형태로전개되고있었다. 그러나일제의침략을막아내지못하고나라를빼앗기게되었을때, 구국운동을주도하던신민회계열의인사들이향후독립운동의방법을모색하였다. 그방법은국외에독립운동기지를건설하고, 독립전쟁을전개한다는것이었다. 서간도에단체적이주를기도하고조선본토에서상당資力있는다수인민을同地에이주시켜토지를구매하고촌락을만들어新領土로삼고, 새로이다수의교육있는청년들을모집하여동지로보내어民團을일으키고, 학교및교회를배설하고, 나아가무관학교를설립하고文武雙全敎育을실시하여기회를타서독립전쟁을일으켜舊韓國의국권을회복하고자하였다. 87) 이는 梁起鐸사건 의판결문에있는내용이다. 신민회계열인사들은일제의대규모토벌작전으로의병항쟁이퇴조기에들자간부회의를열고, 새로운독립운동의방법을모색하였다. 이때모색한독립운동방법이서간도에독립운동기지를건설하여독립군을양성하고, 기회를타서일제와독립전쟁을전개하여국권을회복한다는것이었다. 이것이독립운동전략이었다. 독립운동의전략을이렇게결정한데는향후국제정세에대한전망과기대도작용하였다. 한반도를침략한일제는이에멈추지않고계속해서세력팽창을추진할것이라고전망한것이다. 일제가세력팽창을추진하게되면, 일제와중국간에전쟁이일어날것이고, 더나아가미국 소련과도전쟁이일어날것으로보았다. 기회를타서 란것은일제와중국 미국 소련사이에전쟁이일어나는상황을의미한것이었다. 독립운동의전략은일제의침략을막아내려고했던구국운동의경험, 그리고향후국제정세변화에대한전망을기초로모색되었다고하겠다. 모색된독립운동의전략을한마디로 독립전쟁론 이라고한다. 그내용은국외에독립운동기지를건설하고독립군을양성하였다가, 일제가중국 미국 소련등과전쟁을하게될때, 이들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하여독립을쟁취한다는것으로요약할수있다. 독립전쟁론 은이후독립운동의핵심전략이되었다. 독립운동세력들이국내외각지에서분산적으로활동하고, 또이념적차이도있었지만, 대체로 독립전쟁론 을주요한방략으로삼고있었다. 만주 연해주 중국대륙 미주등어느지역에서든지, 그리고시간적으로도 1910년대부터 1940년대에이르기까지대체로독립운동은독립군을양성하는것으로추진된것이그것을말해준다. 서간도에독립운동기지를건설하고독립군을양성한것이독립운동전략을실현한대표적사례이다. 1910년을전후하여신민회계열의인사인李會榮일가를비롯하여, 안동지역의李相龍 金大洛등이서간도로이주하여柳河縣삼원포에독립운동기지를건설하였다. 48
이들은그곳에서경학사 부민단 한족회로이어지는단체를조직하는한편, 新興武官學校를설립하여독립군을양성하는사업을추진하였다. 독립운동기지를마련하고독립군을양성하는사업은독립운동이전개되던어느지역에서든지이루어졌다. 북간도에서는大甸學校 士官硏成所등을설립하여독립군을양성하였고, 이를기초로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등수많은독립군부대들이결성되어활동하였다. 만주지역뿐만아니라, 심지어는미주지역에서도독립군을양성하는사업이추진되었다. 朴容萬이 1914년하와이에이주해있는노동자들을중심으로군사훈련을실시하고大朝鮮國民軍團을편성한것이다. 88) 시간적으로도 1910년대부터 1940년대에이르기까지독립군을양성하는사업이지속적으로이루어졌다. 서간도와북간도지역에서는 1910년대부터수많은학교들이설립되어독립군을양성하였으며, 중국대륙에서도雲南講武堂 貴州講武堂 黃埔軍官學校등중국의각종군관학교에서한인청년들이군사훈련을받았다. 그리고金元鳳이南京에서朝鮮革命幹部學校를, 金九가洛陽軍官學校에한인특별반을설립하여, 직접독립군을양성하기도하였다. 독립군을양성하는사업은독립운동전략의일환이었고, 만주 연해주 하와이 중국대륙등곳곳에서이루어졌다. 그리고양성한독립군을기초로수많은독립군부대를편성하여활동하였다. 이들은독자적으로압록강과두만강을건너국내진입작전을추진하는한편, 일제가만주를침략하자중국의反滿抗日軍과함께, 중일전쟁이일어나자중국국민당과중국공산당의군대와함께, 또태평양전쟁이발발하자미국의첩보기구인 OSS를비롯하여영국군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하였다. 이렇듯한국독립운동은 독립전쟁론 이란전략에의해추진되었다. 2) 임시정부의군사정책 1919년 3월 1일독립국임을선언한후, 한달여만인 4월 11일중국상해에서대한민국임시정부가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독립국 임을상징하는한민족의대표기구로수립되었지만, 동시에한민족의독립운동을지휘하고통할할임무도있었다. 임시정부는수립직후 4 차례에걸친시정방침을통해독립운동의방향을밝힌바있다. 여기에는내정 외교 군사 교육 재정 문화등이다양하게언급되어있지만, 그중에서도핵심적인것은군사활동에관한것이었다. 임시정부는수립직후부터군사활동에대한계획을수립하였다. 군사활동에대한임시정부의기본방향은크게세부분으로마련되었다. 1919년 12월 18일자로발표된 大韓民國臨時軍制 大韓民國陸軍臨時軍區制 陸軍武官學校條例 가그것이다. 89) 이는임시정부가군대를편성한다는기본원칙하에군대의편제와조직, 병력의모집과군사간부양성등의계획을마련한것이었다. 49
이계획안에의하면, 임시정부는軍團규모의군대를편성한다는목표를갖고있었다. 군단의병력은대략 1만 3천명에서 3만명수준이었다. 당시독립운동전선에서항일전수행에필요한최소한의인원은대체로 1만명정도로잡고있었던것으로보면, 임시정부가목표로한군단규모의병력은항일전을수행할수있는최소단위였다고하겠다. 임시정부는항일전을수행할수있는군대를편성하여, 독립전쟁을전개한다는데활동목표를설정한것이다. 또이계획에는병력을모집하는구체적방법도마련되어있다. 임시군구제 는그것을규정한것으로, 만주와노령지역을서간도군구 ( 하얼빈이남과길림성일대봉청성전부 ), 북간도군구 ( 연길현일대 ), 강동군구 ( 노령일대 ) 의 3개군구로나누어, 각군구지역에거주하는한인들을軍籍에편입시킨다고하였다. 당시만주와노령지역에는많은한인들이거주하고있었다. 이들중 20세이상 50세이하의한인장정들을대상으로병력을모집한다는계획이었다. 또한육군무관학교를설립하여군사간부양성도추진하였다. 육군무관학교조례 는이에대한계획이었다. 이계획에의해 1919년말군무부산하에육군무관학교를설립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초급장교를양성하기위한사관학교였다. 군무부차장이교장을,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출신들이교관을맡았고, 훈련은 6개월과정이었다. 1920년 5월과 12월에제 1회제2회졸업생을배출하였고, 제3기생교육을실시하다가중단되었다. 이와더불어임시정부에서는비행사를양성하여비행대를편성하려고하였다. 1920년 2 월미국캘리포니아윌로우스에비행사양성소를설립한것이다. 비행사양성소는당시군무부장盧伯麟이캘리포니아에서대규모쌀농사로성공한미주교포金鐘麟의재정적후원과대한인국민회의협조를받아설립하였고, 한인청년들을비행사로양성하는사업을추진하였다. 90) 이러한임시정부의군사정책은독립군과그간부들을양성하여군대를편성하고, 일본과독립전쟁을전개한다는내용이핵심을이루고있다. 이로보면임시정부는독립운동전략에기초하고, 또이를실행하기위한군사정책을수립한것이라할수있다. 민족의대표기구이면서동시에독립운동을지휘통할해나갈최고기구인임시정부가독립운동전선에서형성된독립운동전략에의한군사정책을수립하고, 이를중심으로독립운동을전개하고자한것이었다. 임시정부는독립운동전략을실행하기위한군사정책을수립하였지만, 이는실행에옮겨지지못하였다. 여기에는여러가지이유가있었지만, 무엇보다도임시정부가수립초기부터대통령이승만에대한탄핵문제를둘러싸고파란을겪으면서많은인사들이임시정부를떠난것이주된이유였다. 사람들이떠나면서임시정부의조직을유지운영하기조차어려운상황이이어졌고, 재정적으로도어려움을겪게되었다. 사람과재정이뒷받침되지못하는상황이이어지면서, 계획을실행할수없었던것이다. 그렇지만이러한계획은임시정부의기본적인군사정책으로유지되었고, 그것이 1940년 50
한국광복군창설로귀결되었다. 임시정부주석金九는 1940년 9월 15일광복군의창설을대내외에공포하는 한국광복군선언문 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대한민국원년에정부가공포한군사조직법에의거하여 라하여, 91) 광복군은바로 1919년 12월에수립한임시정부의군사정책에의해창설되는것임을천명한것이다. 3. 광복군창설과대일선전포고 1) 임시정부의광복군창설 임시정부가수립초기에계획한군사정책은 1940년四川省重慶에서실행에옮겨졌다. 임시정부는 1932년윤봉길의사의홍구공원의거이후근거지였던상해를떠나야했다. 이후杭州 鎭江 長沙 廣州 柳州 綦江등 8년여동안중국대륙여러곳으로옮겨다니다가 1940년 9월중경에정착하였다. 당시중경은중국국민당정부가임시수도로정하고있던곳이었다. 이곳에정착하면서임시정부는비교적안정을되찾았고, 계획하였던군사정책을실행에옮겼다. 임시정부의군대로한국광복군을창설한것이다. 임시정부가중경에정착하면서가장먼저추진한것이광복군창설이었다. 그동안인적 재정적어려움, 그리고중국대륙여러곳으로옮겨다녀야했던관계로실행하지못하고있던군사정책을비교적전란으로부터안전한지역인중경에정착하면서실행하고자한것이다. 중경에정착한임시정부는정부의조직과체제를확대강화하는한편, 광복군을창설하기로하였다. 광복군을창설하는작업은크게세방향으로추진되었다. 하나는병력을모집하는일이었다. 당시중경이란곳에는한인들의그림자조차찾아볼수없었다. 군대를창설하기어려운여건이었지만, 1910년대이래만주에서독립군을조직하여대일항전을전개하였던李靑天 李範奭 金學奎등과같은독립군주요간부들이임시정부에참여하고있었다. 그리고 1910년대이후많은한인청년들이중국의각종군관학교를졸업하고중국군에복무하고있었고, 일본군점령지역에많은한인들이이주해있기도했다. 이들을대상으로병력을모집하여군대를창설한다는계획하에, 광복군창설을추진하였다. 둘째는재정을마련하는일이었다. 재정은주로미국과하와이교포들을대상으로마련해나갔다. 임시정부는미주국민회에공문을보내광복군창설에필요한재정적지원을요청하였다. 이에미주지역교포들은자신들이경제적후원을담당해야한다며적극적으로모금활동을전개하였다. 셋째는중국정부를상대로광복군창설에대한교섭을추진하였다. 중국영토내에서군대를편성하려면중국당국의승인과양해가있어야했다. 중국과의교섭은광복군의편성이중국의항일전에유익하다는논리로전개되었고, 광복군창설계획서를중국최고영수인 51
蔣介石에게제출하였다. 장개석은광복군이중국군과함께대일항전을전개한다는전제하에이를승인하였다. 92) 임시정부는이러한준비를거쳐광복군을창설하였다. 광복군의창설은병력이확보되지못한상황에서, 우선총사령부를성립하는것으로이루어졌다. 1940년 9월 17일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거행하여광복군을창설한것이다. 광복군은만주에서독립군을조직하여항일무장투쟁을주도하였던이청천 이범석 김학규등을비롯한독립군간부들과중국의각종군관학교를졸업한군사간부들을중심으로창설되었다. 광복군은창설이후중국관내에서활동하던무장세력을흡수하는한편, 일본군점령지역에있는한인청년들을모집하여부대와병력의규모를확대해나갔다. 광복군창설직후서안을중심으로활동하고있던무정부주의계열의韓國靑年戰地工作隊, 조선혁명당의무장조직이었던朝鮮義勇隊가광복군으로편입하였다. 그리고일본군점령지역에공작대원들을파견하여그곳에있는한인청년들을모집하였고, 또일본군으로끌려나온학병들이탈출하여참여해오기도하였다. 병력이증가하면서광복군은군사조직과부대편제를갖추었다. 지휘부인총사령부, 그리고그산하에단위부대로 3개지대를편제하였다. 총사령부는임시정부가있던중경에있었다. 그리고제1지대는중경, 제2지대는섬서성서안, 제3지대는안휘성부양에본부를두고, 중국대륙각지에서활동하였다. 2) 임시정부의대일선전포고 광복군이창설되어활동을시작한후미일간에태평양전쟁이일어났다. 1941년 12월 8일일제가미국의해군기지인하와이의진주만을기습공격한것이다. 일본의선제공격을받은미국은즉각일본과의전쟁에돌입하였다. 이로써일본과미국사이에전쟁이일어난것이다. 중일전쟁에이은미일간의전쟁은독립운동자들이기대하고예견한일이었다. 독립운동자들이예견한대로일제는세력팽창을계속하였다. 1910년한반도를차지한일제는 1931년에는만주지역을, 1937년에는중국대륙을침략하였다. 일제의세력팽창은여기서멈추지않았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월남 싱가포르등동남아시아일대로, 그리고중동에서독일과만나겠다며버마와인도지역까지침략을확대하였다. 인도를침략하면서영국과도전쟁이일어났다. 이로써일제는중국 영국 미국과전쟁을벌이게되었다. 광복군에서는미 일간에전쟁이발발할것을내다보고있었다. 광복군서안총사령부에서총사령대리를맡고있던黃學秀는 1941년 6월미국의해군과공군의군사력및그것이태평양연안에배치된상황을각종통계자료를통해분석하고, 미 일간에충돌을피할수없다고하였다. 93) 6개월전에이미미 일간에전쟁이발발할것을예견한것이다. 임시정부는미 일간에전쟁이발발하자, 즉각일본에대해선전포고를발표하였다. 일제가진주만을기습공격한지이틀후인 12월 10일임시정부주석김구와외무부장조소앙 52
명의로다음과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선전성명서 를발표한것이다. 우리는 3천만한인과정부를대표하여삼가중국영국미국캐나다네덜란드오스트리아및기타여러나라가일본에대해전쟁을선포한것이일본을擊敗시키고동아시아를재건하는가장유효한수단이되므로이를축하하면서다음과같이성명한다. 1. 한국의전체인민은현재이미반침략전선에참가해오고있으며, 이제하나의전투단위로서축심국에전쟁을선언한다. 2. 1910년합방조약과일체의불평등조약이무효이며, 아울러반침략국가가한국에서합리적으로얻은기득권익이존중될것임을거듭선포한다. 3. 한국과중국및서태평양에서왜구를완전히구축하기위하여최후의승리를거둘때까지혈전한다. 4. 일본세력아래조성된長春과남경정권을절대로승인하지않는다. 5. 루즈벨트처칠선언의각항이한국독립을실현하는데적용되기를견결히주장하며, 특히민주진영의최후승리를미리축원한다. 한국은이미반침략전선에참가하여활동하고있지만, 미일간의전쟁발발을계기로임시정부는중국 영국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등일본에전쟁을선포한국가들과함께하나의전투단위로서일본과전쟁에돌입한다는것을거듭선언한것이다. 일본과의전쟁은한국과중국및서태평양에서왜구를완전히몰아낼때까지, 그리고일본이완전히패망할때까지혈전을전개한다고하였다. 임시정부가대일선전포고를발표한것은일본과전쟁에돌입한다는것을대내외에천명한것임과동시에, 한국도일본과전쟁을벌이는하나의국가로서연합국의일원임을천명한것이기도했다. 나의전투단위로서축심국에전쟁을선언한다 는이바로그것이었다. 한국은대일선전포고를발표하기이전부터일본과전쟁을벌이고있었다. 만주지역에서수많은독립군부대들이결성되어봉오동 청산리전투를비롯하여, 1930년대에도중국의각종반만항일군과연합하여일본군과치열한전투를전개하였던것이다. 이미반침략전선에참가해오고있다 는것은이러한사실을강조한것이다. 이에이어정식으로대일선전포고를발표하고, 연합군과함께직접대일전쟁을수행하였다. 4. 광복군의연합군과공동작전 1) 인도버어마전선에서영국군과대일전쟁 독립운동전략은연합군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하고, 전후연합국의일원이되는것에 목표가있었다. 미 일간에태평양전쟁이발발하였을때, 임시정부가즉각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한것도이때문이었다. 이미오래전부터일본군과전쟁을전개해오고있지만, 태평 53
양전쟁의발발을계기로한국도연합군들과함께일본군과전쟁을수행한다는사실을국제사회에알려전후에연합국의일원으로인정받고자한의도였다. 대일선전포고를발표한후, 임시정부의국군인광복군은연합군과함께대일전쟁을벌였다. 인도버마전선에서영국군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한것이그하나다. 1942년봄말레이시아와싱가포르를점령한일본군은독일군과중동에서만나겠다며버마와인도를침공하기시작하였다. 이에인도에주둔하고있던영국군이자신의식민지를지키기위해저항하면서, 일본군과영국군사이에전쟁을벌이게되었다. 이러한인도버마전선에서광복군이영국군과함께대일전쟁을전개한것이다. 광복군이영국군과함께공동작전을전개한것은영국군의요청에의한것이었다. 영국군은일본군과전쟁을수행하면서일본어를구사할수있는인원이필요했다. 밀림지대에서벌어지는전쟁에무엇보다도필요한것은적에대한정보였다. 이에영국군은영어와일본어를구사할수있는인원이필요해졌고, 그것을광복군측에요구한것이다. 광복군측에서도연합국인영국군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함으로써, 전후연합국의일원이될수있는계기로여기고, 이를받아들였다. 광복군은대원들중에서영어와일본어를구사할수있는인원을선발하여, 印緬戰區工作隊란이름으로인도에파견하였다. 선발된인원은韓志成 文應國등모두 9명이었다. 94) 이들은 1943년 8월영국군총사령부가있는인도캘커타에도착하였다. 그리고그해 12월까지영국군으로부터일정한교육을받은후, 영국군에배속되었다. 이후광복군대원들은영국군과함께공동작전으로대일전쟁을수행하였다. 광복군대원들은 1944년초부터임팔전선에투입되어일본군과전투를벌였다. 임팔은일본군이점령하고있던버마와접경지역으로, 아라칸산맥이길게뻗어있는열대밀림의험준한산악지대였다. 일본군이임팔을공격해오면서, 임팔을중심으로영국군과일본군이치열한대접전을벌이고있었다. 광복군대원들은최전선에배치되어일본군을향한대적방송, 적문서번역, 전단제작및산포, 포로심문등을담당하였다. 광복군대원들의활동은일종의심리전으로, 영국군이수행할수없는역할이었다. 그리고이들의활동은일본군에게커다란타격을주었다. 일본군들이심리적으로동요하게되고, 탈출자들이생겨나기시작한것이다. 일본군통역으로활동하고있던한인청년들이탈출하기시작한것이그러한예이다. 또 3월말에다무과딜공로에공작을나아가서제가적에게방송한결과적이백기를흔들며나왔습니다. 이것이인도에처음있는현상이라고합니다 라는것이 95) 이들의활동성과를말해준다. 뿐만아니라적정보의분석과적의무선전신을통해일본군의동태와작전계획을사전에알아냄으로써, 영국군이대일작전을수행하는데결정적도움을주었고, 일본군에포위된영국군 1개사단을구해내기도하였다. 1944년 5월영국군제17사단이버마반격작전을개시하여만달레이로남하하던중일본군의선제공격을받고포위된일이있었다. 밀림속에서포위된상태로영국군이악전고투하고있을때, 문응국등이무선통신을통해일본군 54
의움직임을정확하게파악하였고, 이에의해영국군이일본군의포위망을벗어나게되었다. 96) 광복군이영국군 1개사단을구해낸셈이다. 영국군은광복군대원들이이러한활동을높이평가하였다. 특히만달레이에서일본군의포위망을벗어난영국군사단장은직접광복군대원들을찾아와감사의뜻을전하였다고한다. 그리고중국의대표적신문인 大公報 는 영국군이포위당했을때口舌之功으로적을격퇴하였고, 敵情에대한정확한판단으로영국군의칭송을받았다 며, 97) 광복군의활동을보도하기도하였다. 광복군대원들은임팔전투에참여한이래띠마플 티딤 비센플등인도버마지역에전개된일본군과의전투에참여하여대일전을수행하였다. 광복군의대일전은버마를완전히탈환하는 1945년 7월까지계속되었다. 임팔지역에서일본군을격퇴한영국군은버마로퇴각한일본군에대해총반격작전을개시하였다. 일본군을버마에서완전히몰아내기위한버마탈환작전은영국군과인도군을비롯하여중국군과미군이동원된대규모작전이었다. 이작전에광복군이참전하여 1945년 5월수도랑군을탈환하고, 7월일본군을완전히격퇴할때까지일본군과전투를벌였다. 2) 미국 OSS 와국내진입작전추진 영국군에이어중국에서활동하고있던미국의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와합작하여국내진입작전을추진하였다. OSS 와의합작은양측의이해관계가맞물 려이루어졌다. 광복군측에서는독립운동전략에의해연합군과함께대일전쟁을전개한다 는계획을갖고있었다. 그리고전략상한반도를중시하고있던 OSS 측에서는한반도에대 한첩보활동에광복군을활용하려고하였다. 이러한이해관계를가진광복군과 OSS 측의실무자들사이에합작이논의되었다. 논의는 1945 년초부터이루어졌다. 그방법은광복군대원들에게 OSS 특수훈련을실시하고, 훈련받 은대원들을국내로진입시켜적후방공작을전개한다는것이었다. 이러한논의는 OSS 측에 의해 독수리작전 (The Eagle Project) 이란이름으로입안되었다. 독수리작전 은양측에서승인을얻어실행되었다. 중국에주둔하고있던 OSS 측에서는 1945 년 2 월워싱턴극동정보처에이를보고하였고, 내부적인절차를거쳐 3 월 13 일자로광 복군기지에서훈련을실시하도록승인하였다. 그리고 4 월 3 일임시정부주석김구의최종 적인승인을받았다. OSS 측의실무책임자인싸전트대위가제 2 지대장李範奭제 3 지대장金 學奎등과함께임시정부청사로주석김구와광복군총사령李靑天을방문하였다. 이자 리에서김구주석은양측실무자들사이에서추진된독수리작전을승인한것이다. 98) 이로써광복군과미국 OSS 사이에 독수리작전 을매개로한군사합작이이루어졌다. 그리 고광복군대원들에대한 OSS 훈련이실시되었다. OSS 훈련은미국측에서담당하였고, 1945 년 5 월부터훈련에들어갔다. 훈련은두곳에서실시되었다. 광복군제 2 지대대원들은서 55
안에서, 제3지대대원들은안휘성立煌에서훈련을받았다. 훈련은비밀첩보활동을위한특수훈련이었고, 과정은 3개월이었다. 제1기생의훈련이 1945년 8월 4일완료되었다. 임시정부와 OSS는훈련을마친대원들을국내로진입시키고자하였다. 훈련이완료되었다는보고를받은임시정부주석김구는총사령이청천등 19명을대동하고서안으로갔다. 미국측과 OSS훈련을받은광복군대원들을국내로진입시키는문제를협의하기위해서였다. 회의는 8월 7일제2지대본부에서열렸다. 한국측에서는주석김구를비롯하여광복군총사령이청천 제2지대장이범석등이, 미국측에서는 OSS총책임자도노반 (William B. Donovan) 소장과홀리웰대령 훈련책임자싸전트대위등이참석하였다. 회의는국내진입작전에관한문제였다. OSS훈련을마친광복군대원들을국내에진입시켜적후방공작을전개한다는것이었고, 이를위한모든준비는 OSS측에서담당하기로합의를보았다. 이자리에서도노반소장은 금일금시로부터아메리카합중국과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적일본에항거하는비밀공작이시작된다 고하여, 99) 한미간에공동작전이실행된다는것을선언하였다. 이로써광복군대원들이 OSS와함께국내로진입하여적후방공작을전개하는국내진입작전이실행되게되었다. 그러나국내진입작전은실행직전에좌절되고말았다. 8월 10일저녁에일본이포츠담선언에서요구한무조건투항을받아들였다는소식이전해진것이다. 100) 8월 10일저녁 8시중경의라디오방송과신문들이일제의항복소식을전하였고, OSS와국내진입작전회의를마친김구도서안시내에서일제가항복한다는소식을들었다. 일제의항복소식이전해지면서, 광복군을국내에진입시킨다는작전은실행되지못하였다. 5. 해방후광복군의건군추진 1) 중국에서확군활동 일제가패망한후, 광복군은建軍을추진하였다. 건군은해방을맞아수립될독립국가의군대를편성하려고한것이었다. 광복군의조직과세력을확대하고자한擴軍活動이건군을위한준비작업의하나였다. 확군활동은중국각지에있는한인청년들을광복군으로흡수편입시켜광복군의조직과세력을확대한다는것이었고, 국내에들어가이를근간으로삼아국군을건군하려고한것이다. 확군에대한방침은일제패망직후결정되었다. 1945년 8월 17일제3지대장김학규가김구주석과이청천총사령관에게확군에대한제의를하였다. 확군은중국에있는한인교포들을무사히귀국시키는문제와더불어임시정부가추진할활동방향으로설정되었다. 임 56
시정부는 9월 3일주석명의로당면정책을발표하면서, 일본군으로끌려나온한적군인들과중국지역에나와있는한인청년들을광복군으로편입한다는방침을결정하였다. 101) 임시정부는중국측에확군문제를교섭하였다. 1945년 8월 24일주석김구는장개석에게비망록을제출하면서, 일본군항복접수때한적사병은특별히우대하여줄것과이들을무기와함께광복군에편성하여임시정부의基幹隊伍를편성하도록할것 을요청한것이다. 102) 중국이일본군을항복접수할때그안에있는한인청년들을그들이가지고있는무기와함께광복군에편입하게해달라는요구였다. 장개석은김구의이러한요구를수락하였다. 이를계기로중국대륙각지에서광복군의확군활동이시작되었다. 확군활동은총사령이청천이책임을맡았다. 이청천은중국의주요도시에광복군간부들을파견하였다. 그리고이들로하여금일본군에있는한적사병을비롯하여, 중국각지에이주해있던한인청년들을접수하여광복군에편입시키도록하였다. 이에따라 1945년 8월말부터중국각지에광복군들이파견되었고, 이들은각지역에서한인청년들을받아들였다. 그결과 10월말에이르면漢口 南京 杭州 上海 北京 廣東등중국의주요도시에잠편지대가설치되었다. 이들잠편지대는그곳에있는일본군소속의한적장병들을비롯하여, 중국에이주해있던한인청년들을광복군으로편입시키편성된것이었다. 중국에서확군활동을전개하는한편, 국내에서도건군을준비하고있었다. 국내에서의건군사업은吳光鮮을통해이루어졌다. 오광선은만주에서독립군으로활동하였던인물이다. 이청천총사령관은그에게광복군소장계급과함께국내에광복군국내지구사령부를설치하라는임무를부여하였다. 오광선은동대문밖숭인동에광복군국내지구사령부를설치하였고, 이를중심으로건군을추진하였다. 103) 광복군국내지대는중국각지역에설치된잠편지대와같은성격이었다고할수있다. 국내에서청년들을모집하여광복군으로편성하려는것이었다. 임시정부가환국하였을무렵광복군국내지대는상당한청년들을모집하여훈련을실시하였고, 일정한조직체제도갖추었다. 이들은김구가환국하자일본 38식장총으로무장하고경교장을경비하였다고한다. 104) 국내지대설치와더불어광복군직속으로대한무관학교도설립하였다. 조선일보 1945 년 12월 15일자에 광복군직속대한무관학교창립준비위원회 라는이름하에 요즈음남북각지에서중견인들이구름같이모여들고있다 고하면서, 이학교에대한기금으로벌써 15만원이자진기부되었다는내용이있다. 이어 12월 26일자에는 25일부터 28일까지제1회입학시험을휘문중학강당에서시행한다는사실을보도하기도하였다. 이이상더자세한내용이알려져있지않지만, 광복군이국내에대한무관학교설립을추진하였던것같다. 해방후임시정부가중국과국내에서건군을위한준비를추진한것은광복군은근간으 57
로국군을창설하고자한것이었다. 그러나건군준비는순조롭게진행되지못하였다. 여기에는여러가지복합된요인들이얽혀있지만, 제2차세계대전종결에따라급변하는국제정세와국내의혼란한정세등이주요한요인이되었다. 결국광복군은 1946년 5월 16일총사령이청천명의로발표한 복원선언 을통해사실상해산되었고, 1946년 6월초국내로귀국하였다. 2) 국군과의관계 광복군을비롯하여해방후국군을창설하기위한다양한노력들이전개되었고, 국내에서는수많은군사단체들이조직되었다. 일본 만주 중국등지에서활동하던사람들이귀국하고, 이들중군사경험 ( 일본군, 만주국군, 중국군등 ) 을가지고있던인물들이각종군사단체를조직한것이다. 군사단체는별다른주체세력이없는가운데연고관계를중심으로조직되었고, 1945년 11월미군정청에등록된것만도 30여개에달했다. 미군정은이러한사설군사단체들의활동을금지시켰다. 그리고미군정주도하에건군을추진하였다. 1945년 11월국방사령부를설치하고, 다음해 1월조선국방경비대를발족한것이그시작이었다. 이러한미군정의건군작업은미소공동위원회가개최되면서, 소련측으로부터항의를받게되었다. 이에미군정은 국방 이란이름을없애고, 그명칭을통위부와조선경비대로바꿨다. 미군정이건군을추진하면서중요하게여긴것이있었다. 건군의정신적기반을어디에두어야할것인지, 또어떠한인물을중심으로할것인지하는문제였다. 당시한국인들의군사경력은다양했다. 독립군을비롯하여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에서활동한인물들이있었다. 그러나일본군대좌출신李應俊이 어제까지도일본군고급장교신분이었다. 그러한사람으로조국이해방되었다고해서세상표면에나서서날뛴다는것은양심이허락하지않는일이었다 라고한것처럼, 105) 일본군에서활동한인물을건군의중심에둘수없었다. 그것이민족적정서였다. 미군정에서도이러한한국인의민족적정서를인식하고있었다. 미군정이건군을추진하면서광복군을기용하고자한것이그것이다. 이를위해버나드 (Lyle W. Bernard) 대령이상해로가서광복군총사령이청천을면담하고돌아왔다. 그리고통위부장에임시정부참모총장인柳東說장군을, 그리고조선경비대사령관에광복군제2지대장출신宋虎聲장군을각각임명하였다. 미군정에서통위부는국방부, 조선경비대는군대와같은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정부가수립된후, 미군정이행사하던군사권이대한민국정부에이양되었다. 군사권의이양은 8월 31일통위부장유동열이국방부장관이범석에게넘기는것으로이루어졌다. 그리고 9월 1일조선경비대가대한민국의국군이되었다. 임시정부참모총장유동열을거쳐광복군참모장출신의국방부장관이범석에게군사권이넘겨진것이다. 그리고대한민국초대국방부장관이범석은광복군의핵심인물이었다. 이범석은중국의 58
운남강무당을졸업하고청산리전투에참여하였던인물로, 광복군을창설하여참모장과제2 지대장을역임하였던광복군출신이었다. 이범석이국방부장관에임명되고국군이창설되면서, 광복군출신들도대거국군에입대하거나육군사관학교에입학하였다. 뿐만아니라광복군간부들이육군사관학교교장을연이어맡았다. 제6대부터제9대까지崔德新 金弘壹 李俊植 安椿生이교장을역임한것이다. 대한민국국군은광복군의주도로추진된건군에의해창설된것은아니었다. 그렇다고해서국군창설에있어광복군의존재와역할을도외시할수없다. 미군정하에통위부와조선경비대의책임자는광복군출신이었고, 통위부장유동열은군사권을이범석에게이양하였다. 광복군의손에의해미군정의군사권이광복군출신에게넘겨진것이다. 그리고대한민국정부가수립된후광복군출신들이적극국군에참여하여창군의일원으로역할하였다. 현재대한민국국군이그것을명확하게인식하지못하고있지만, 국군을창설하는정신적연원도광복군에있었다. 6. 맺음말 한국의독립운동은세력팽창을추진하던강대국일본제국주의를상대로하였다. 객관적상황으로보면, 한민족의독자적인힘만으로이러한일제를패망시키고독립을쟁취한다는것은거의불가능한일이었다. 강한적을상대로독립운동을전개하면서, 전략이있었다. 독립운동전략은한마디로 독립전쟁론 이었다. 독립전쟁론 이란민족의군대인독립군을양성하였다가일제가중국 미국 소련등과전쟁을하게될때, 이들과함께대일전쟁을전개하여독립을쟁취한다는것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이러한독립운동전략을가장충실하게실현한대표적인존재가한국광복군이다. 광복군은 1940년 9월임시정부의국군으로창설되었지만, 임시정부는수립초인 1919년 12월에독립운동전략에의한군사정책을수립하였다. 그러나인적재정적어려움을겪게되면서이를실행하지못하고있다가, 중경에정착한후이를실행에옮겼다. 그것이광복군창설이었다. 광복군은만주에서독립군을조직하여일본군과치열한항일무장투쟁을전개하였던만주독립군출신들, 그리고중국의각종군관학교를졸업한한인청년들을중심으로조직되었다. 이후중국에이주해있던한인청년들을모집하고, 또일본군으로끌려나온학병들이일본군을탈출하여참여해오면서병력이크게증강되었다. 광복군을창설한임시정부는미 일간에태평양전쟁이발발하자, 즉각대일선전포고를발표하였다. 그리고광복군은일제와전쟁을벌이고있던중국군, 영국군, 미국의전략첩보기구인 OSS 등과연합하여대일전쟁에참전하였다. 중국군과는 1931년일제가만주를침략하면서부터, 영국군과는 1943년광복군대원들을파견하여인도버마전선에서함께일본군과전쟁을수행하였다. 그리고미국의전략첩보기구인 OSS와는광복군대원들에게 OSS특 59
수훈련을실시하고이들을국내에진입시켜적후방공작을전개한다는 독수리작전 (Eagle Project) 을매개로군사합작을맺고국내진입작전을추진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은 독립전쟁론 이란전략하에전개되었다. 민족의군대를양성하고, 이를동원하여일제와싸우는연합국들과함께대일전쟁을수행하여독립을쟁취한다는것이었다. 이러한독립운동전략을가장충실하게실현한대표적인존재가광복군이다. 광복군은실제로중국 영국 미국등연합국의군대와함께대일전쟁을수행하였다. 그러나연합국들이戰後자국의이해관계에의해광복군이자신들과함께싸웠다는것을인정하지않았을뿐이다. 60
부록 1) 대동단결선언 61
부록 2) 국회개원식 - 개회사 62
부록 3) 제헌헌법이수록된관보제 1 호 63
부록 4)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64
부록 5) 대한민국임시헌법 강제병탄 100 년, 한국근현대사의흐름과기억을읽는다
1940 년대흥사단에서는 1945.12 흥사단국내위원부발족해방후미주와중국방면의단우들이귀국하여협의한결과 1945년 12월 27 일서울의조선신학교에서국내위원부를발족하고 12명의위원을선정. 이듬해인 1946년 1월 2일에부서별임원을선정하고본격적인재건활동시작. 1946. 6 비정치단체선언 흥사단이정치단체가아님을천명하는성명서발표. 1946. 9 제 1 차국내대회개최 9 월 28 일서울중앙청년회관에서제 1 차국내대회를개최하고, 행동강령, 훈련요강등을발표. 1947.10 약법개정제2차국내대회에서약법수정안이통과. 목적조문의 민족전도대업의기초준비 를 민족전도번영의기초수립 으로변경하고, 공약 5개항목과실무에있어서 인격, 단결, 공민생활 의 3대수련을명시. 1948 8 흥사단본부국내이전및미주위원부개설. 원동위원부해체 8 월 15 일흥사단본부를국내로이전하고미주본부를미주위원부로개칭. 1949 대성빌딩매입및주식회사대성문화사창립 단보 발행 흥사단제 2 차국내대회 (1947 년 ) 66
제 5 강 1950 년대교과서속의한국전쟁 장영민 ( 상지대교수 ) 들어가며 전쟁의경험과기억, 그리고인식은초 중등교육, 특히교과서를통해서미래세대의기본적인역사지식과의식을형성한다. 따라서 20세기우리역사에서가장큰비극인한국전쟁을각종교과서가어떻게담고있는지이해하는일은대단히중요하다. 대체로보자면, 제7차교육과정에따른한국근 현대사과목이설치되고교과서가발간되기이전에나온교과서의전쟁에관한내용은냉전적인역사관이지배하고있다. 전쟁이끝난지 60년이지났고, 남북관계를비롯한한반도정세가크게변하였다. 많은연구와논쟁이진행되었고, 그에따라서전쟁의평가와해석도다양해졌다. 교과서도역시변하기는하였어도, 상대적으로변화의폭이매우좁다. 교육의보수성을감안한다고하여도, 시대적흐름을제대로반영하지못하고있다. 한반도평화와민족통일을위해서바람직하지못한수구성이라고할수있다. 우선교육의내용과방법을기본적으로정한교육과정에설정된교육목표와그것이실제로교과서에얼마만큼수용되었는지를간단하게살펴본다. 그리고한국전쟁과관련해서교과서가담고있는전쟁을보는기본관점과서술된주요주제가당시어떤배경에서나오고, 무슨의미를지니고있는지에분석의초점을맞춘다. 1953년부터지금까지발간된초 중 고등학교각과목교과서와보조교과서약 50책을연구대상으로삼았다. 특히 1950 년대에나온교과서는한국전쟁에대한경험과기억의원형이기때문에더욱주목하였다. 1. 교육과정의전쟁관련교육목표와교과서의수용 1) 고등학교및사범학교제 1 차교육과정 (1955.10) (1) 일반사회일반사회교육목적으로민주주의생활원리의이해등 8개항이제시되었으나, 이는일반목표에불과하며, 실질적으로가장중요하다고강조된특수목표는반공이었다. 민주, 공산진영이필사적으로투쟁하고있는이냉전시기에는반공사상을철저히하며국제정 67
세를파악하여국민의취할태도를분명히하는것. 이라고교육과정은스스로내세운일 반적이며보편적인교육목표를하위의것으로돌려버렸다. (2) 국사국사과지도요령은 항시현재의위치와실천의계기에서국사를이해하게한다. 고하였고, 지도목표에서는 대한민국의건립과국제관계를이해시킨다., 내용에서는 대한민국의성립과우리의사명 을가르친다고되어있다. 그러나해방이후현대사부분은다른교과목의교과서에비하여훨씬소략하다. 이병도가저술한 국사 의제11단원 민족의해방과대한민국의수립 의분량은겨우 3쪽에지나지않으며, 역사교육연구회의 국사 도마찬가지다. 이와같은현대사의경시는이후국사교과서편찬과역사연구에적지않은영향을미쳤다고할수있다. 그런데역사교육연구회가집필한중등국사는고등학교국사교과서보다는해방과전쟁을훨씬자세하게다루었고분량도많이할애하였다. 2) 고등학교제 2 차교육과정 (1963.2) 제2차교육과정의 7개항목일반목표가운데 2개항목에반공정신과의식이강조되었다. 일반사회, 국민윤리, 국사교과목이포함된사회과목표에도 반공신념을확고하게한다., 조국의자주통일발전에이바지하게한다. 가들어있다. 제1차교육과정이교육원리에입각한추상적인교육목표를제시한것과는달리제2차교육과정은현실적인교육목표로반공과통일을포함시켰다는점이주목된다. 특히반공 도덕교육이형식적추상적지식에치우쳤다고보고실천적교육에주력하여야한다고강조한교육목표가주목된다. 제2차교육과정의반공교육강화는다른교과과정에비하여현저히두드러진것이다. 반공 도덕교육의중심은일반사회와국민윤리라고규정하였으나, 한국전쟁에관한역사적사실은국사를제외한다른교과목교과서에서는지극히빈약하다. (1) 일반사회첫번째지도목표로 반공의식이투철한자주적인격을기른다. 가제시되었고, 지도내용에는공산주의의비판이포함되었다. 고등학교교육과정해설 은개정된교육과정에서는 특히 공산주의에대한민주주의의우월성을이념상으로나생활실천면의지도를통해서확고한신념을길러주는것이중요하다고해설하였다. 그러나분단과전쟁에관한직접적인서술내용은교과서에는거의없다. (2) 국민윤리제1차교육과정에서도덕이중심이었던교과목을제2차교육과정은국민윤리로통합하였다. 교육과정해설은공산주의를비판하고, 6 25사변중의실담 ( 實談 ) 을들려주는것이효과적이라고권유하였으나, 지도내용에는관련사항이제시되지않았다. 국민윤리교과서내용역시제1차교육과정의도덕교과서와크게다르지않다. 68
(3) 국사국사의마지막지도목표에도 반공사상을강화하여세계평화건설에이바지하게한다. 가있다. 이원순의 국사 는 7쪽에걸쳐서민족의해방과 6 25 직후에이르는역사를서술하였고, 이상옥과차문섭이집필한 국사 역시 6쪽을할애하였다. 제1차교육과정에따른국사교과서보다훨씬분량도많고서술도상세하다. 분단과전쟁을국사교과목이다루어야할중요한주제가되었다. 제2차교육과정에의한국사교과서는집필과체제등에서훨씬정제되었다. 그러나 250쪽이넘는전체분량에비하면, 해방이후분단과전쟁에관련된역사서술은빈약함을여전히면치못한다. 그리고문교부가펴낸 교사용국사지도서 에는아예현대부분이들어가지않았다. 3) 고등학교제 3 차교육과정 (1974. 12) 교육과정의일반목표가추상화되어제시되었으므로이전교육과정의목표와단순비교하기는어렵지만, 국가발전 과 민주적가치의강조 라는목표아래국토방위에대한책임감과투철한반공민주신념을가르친다는조항이들어가있다. 그러나국사를제외한다른교과목의교과서에서는전쟁에관한사실이엉성하기그지없다. 제3차교육과정은국사교육강화정책에따라서국사를필수과목으로지정하였다. 이른바국책과목이된국사의목표는 민족중흥 에집중되었으나, 분단과전쟁에직접적으로관련되지는않았다. 인문계고등학교의국사교과서에도해방이후상황과전쟁에관한내용은각각 3.5쪽과 1.5쪽에지나지않았다. 이는국사가현대사를경시하는경향을단적으로보여주는것이다. 그렇지만 국사 가국정으로서유일한교과서라는점에서그이전검인정교과서보다권위가높은것처럼보인다. 다시말해서정사나정전이라는인상이강하다. 한편실업계고등학교 국사 는오히려인문계보다해방이후서술내용이 2쪽가량더많다. 아마도집필자가달랐기때문이라고생각된다. 4) 고등학교제 4 차교육과정 (1981.12) 9개로제시된교육목표가운데 우리의민족문화를창조적으로계승하며, 국가발전에참여하고, 국가수호와평화통일의의지를가지게한다. 가맨마지막에제시되었다. 교육목표에평화통일이들어갔다는점은대단한변화라고할수있으나, 국민윤리교과서는여전히굳건한반공태세를요구하였다. 한국전쟁관련내용이들어있는교과서는 국사 가유일하다고할수있다. 국사교과서가상과하로나누어지고그에따라서분량이늘어났으나, 해방이후현대사부분 4쪽, 전쟁 ( 그것도북한정권의수립등을포함 ) 부분 5쪽에지나지않았다. 이전교과서와의차이는학도의용군의참전사실과사진이새로들어가고, 사상자가 100만명에서 150만명으로늘었다는것, 전후복구와한미상호방위협정체결에불과하였다. 현대사에서한국전쟁이차지하는비중을고려한다면, 지나치게경시하는편찬이라고할수있다. 69
5) 고등학교제 5 차교육과정 (1988.3) 제5차교육과정은정치적변화를그대로반영하듯이, 교육과정총론에제시된교육목표가운데반공이나전쟁과연관된것은없다. 굳이찾자면, 교육과정운영지침에국민정신교육과통일안보교육활동을전개하도록한다는것이다. 국사의교육목표도동일한양상을보인다. 교육내용에 광복이후의현대사를민주정치의발전, 경제적근대화의달성, 민족문화의창달, 국제사회로의진출등을중심으로파악하게하고, 대한민국의민족사적정통성과민족통일의과제를인식하게한다. 가제시되었을뿐이다. 분단과전쟁을다룬 국사 ( 한국교육개발원, 1990) 의분량은제4차교육과정과비슷하였고, 전쟁을서술한분량은 1쪽에지나지않았다. 또한북한정권에관한사실도좀더객관적으로서술되었다. 6) 고등학교제 6 차교육과정 (1992.10) 제6차교육과정의교육목표에서도반공은찾아볼수없다. 독립된필수교과목에서사회과의한교과로변경된국사의교육목표도동일하다. 그러나해방이후에서전쟁까지이르는시기의국사교과서내용은크게달라졌다. 한국교육개발원이 1996년에발간한 국사 의 현대사회의발전 이라는단원에서해당시기서술분량이 8쪽과 7쪽으로늘어났다. 특히한국전쟁의발발에서휴전에이르는전쟁과정을 3.5쪽에걸쳐서술하였다. 분량만으로본다면, 1950년대의교과서를방불케한다. 반면에제1공화국은이전것과비슷하게 1쪽도채되지않는다. 이와같은변화와불균형은보수적인사와언론이교과서편찬을이념으로잣대로비판함으로써일어났던이른바 현대사파동 의여파로보인다.( 정재정, 국사교과서의현대사분야논쟁점, 현대사연구 7호, 1995). 7) 고등학교제 7 차교육과정 (1997.12) 제7차교육과정은고등학교교육목표중하나로 국가공동체의형성과발전을위해노력하며, 세계시민으로서의의식과태도를가진다. 를내세웠으나, 국가공동체의구성원보다는 학생의적성과소질에맞는진로개척능력과세계시민으로서의자질을함양 하는것이상위의목표이다. 국가와민족중심에서벗어나개인과세계시민으로서의성장을중시하였다고할수있다. 제7차교육과정에서는한국근 현대사가사회과의선택과목으로처음설치되었다. 그렇기때문에이전의교과서에실린현대사내용과는양적으로질적으로비교가되지않는다. 이에못지않은변화는국정이아니라검인정교과서로모두 6개출판사에서교과서를발행한다는점이다. 따라서학생들은 2000년대에이르러비로소 50년전의사건을상세하게배울수있는기회를맞게되었고, 대립과투쟁의현대사를미래지향적이며객관적인관점에서배울수있는가능성이높아진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반공과국민윤리를강조해온도덕과시민윤리과목의목표가여전히 애국애족의자세를지니고, 국토와민족분단의 70
현실및남북한의통일정책과통일과제를파악, 국가발전및통일국가형성을위하여시민으로서지녀야할국가관, 안보관및민족공동체의식의중요성을올바르게인식하여실천 등인것과는크게다르다. 물론한국근 현대사교과서가교육목표를실현하기에는부족하였다고하여도, 이런전향적인변화는대단히소중하다. 2. 전쟁의성격 1) 북한의침략전쟁 ( 남침 ) 1950년 6월 25일인민군의전면적공격, 남침사실은전쟁의원인과책임등거의모든것을설명하며합리화한다. 초기의열세에서외국군의개입, 살상과만행, 고통과비극, 휴전반대, 군비강화에이르기까지북한공산주의의남침으로일어났고, 우리는희생자라고역설한다. 왜전쟁이일어났는지전쟁의원인을사실적학문적으로살펴본다거나, 희생과파괴의책임을따질필요조차없는것같다. 실제적지않은교과서는전쟁의원인을서술하지도않았다. 비록남한이취하는대응이무리하거나잘못된것이라고할지라도, 북한이일으킨전쟁때문이니감수하는것이불가피하다. 남침은북한의원죄이며, 그렇기때문에우리는언제어느경우에도정당성과우월성을갖는다. 지금처럼해방직후에도공산주의자는민족을분열시키고국토를양단한주범이며, 앞으로도민족을기만하고다시침략을해올것이므로절대화해란없으며경계를해야한다고높은불신의벽을쌓았다. 1950년대교과서는남침을강행한북한은전혀신뢰할수없으므로, 민족화해와평화통일은불가능하며, 오로지무력통일만이해결책이라고보았다. 또한남침은침략의원흉인북한뿐아니라소련과공산주의전체에대한적개심과증오심의원천이다. 그리하여남한은공산침략을막아내는자유진영의최일선이라는위치를자랑스럽게받아들이며분단체제속에갇히게되었다. 2) 소련공산제국주의의침략전쟁 한국전쟁이일어나자마자, 북한보다는소련이그원흉으로지목되었다. 전쟁이전부터북한정권은소련이세운괴뢰정권으로보았기때문에, 북한은전쟁의하수인, 앞잡이에불과하다는시각은자연스러운것이었다. 소련이북한을점령하여공산당정권을세웠고, 군비를지원하여전쟁을일으키도록하였다. 이런점에서한국전쟁은소련의침략전쟁이라고도할수있고, 교과서도북한정권보다는소련의침략과책임을더강하게성토하였다. 미국은전쟁초기에는소련의책임을직접언급하는것조차삼갔지만, 결국에는소련을침략의지원과지시를강력히비난하였다. 그럼으로써한국전쟁은미국에는소련공산주의의침략을막기위한전쟁이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한걸음더나아가대구에서 소련의한 71
국침략을물리치는한소전쟁 ( 韓蘇戰爭 ) 이라고규정하는연설을하였다. 이런발언은한국전쟁을소련의침략전쟁, 전세계적인자유진영과공산진영의전쟁으로부각시킴으로써미국과유엔의개입을정당화하려는의도에서나온것으로이해된다. 새로운윤리 ( 고등학교용, 김기석, 수문각, 1954년 ) 는이승만의말을원용해서 六 二五의괴뢰군의침공은기실괴뢰군의침공이아니고크레므린의침공인것이니한국전쟁은한국의남북전쟁이아니고실상한소전쟁 이라고서술하였고, 심지어 한국의독립전쟁 이라고까지해석하였다. 한국전쟁의교전상대를한국과소련으로한정하고, 전쟁의성격을내전이아닌외적의침략전쟁으로해석하는것은또다른의미를지녔다. 전쟁의주범이자상대를우리민족이아니라외족으로설정함으로써, 모든민족구성원은일치단결하여외적의침략에맞서서싸워야한다는전쟁의명분과동원의당위성을최대한도로강조할수있었다. 또한외적인소련공산주의자는물론이며그의사주를받은북한괴뢰에대한강한증오심과불타는전의를갖는것이지극히당연한민족의의무이자책임이된다. 이로써남한의민족주의는북한의공산주의보다숭고하며정당한지위를차지하게된다. 이와같은민족주의의이념적우월성을근거로민족내부의공산주의자는침략자외족의하수인으로낙착되며, 민족구성원의자격을상실하고타도의대상이된다. 그리고 공산제국주의 는냉전이개시되면서미국이소련의대외정책을비난하고저지하려는선전적목적에서만든신조어이다. 제2차세계대전이후식민지에서해방된지역은냉전시대에들어서다수가미국과소련의각축장이되거나그런위험에처하였다. 본래제국주의의침략과지배를당하였으므로민족주의가고조된상태인데다가다시외부적위협에노출되었으므로, 외세를두려워하고거부하는의식이강할수밖에없었다. 이런민족주의정서를자극하여공산주의의확산을막고, 미국을독점자본의제국주의라고비난하는공산주의의선전에맞서기위해서, 미국은소련을공산제국주의, 적색제국주의라고비방하였다. 이와같은선전적개념과용어가교과서에적용된사례가적지않다. 3) 민주주의와공산주의의이념전쟁 한국전쟁을보는또다른중요한관점은민주주의와공산주의의전쟁이다. 미국이소련과의대립과냉전을민주주의대공산주의, 민주주의대전체주의, 민주주의대공산제국주의의싸움이라는이분법적논리로단순화시킨구호가연상된다. 전쟁의본질을민주주의대공산주의라는추상적인이념의대립구도로파악하는것은여러문제를안고있다. 한국전쟁은분명히이념전쟁으로서의성격을가지고있지만, 정치권력 토지 외세 친일파등현실적인사안이원인이되고, 그것을둘러싸고벌어진갈등과대립의결과로일어났다. 그렇기때문에이념과사상의전쟁으로편향되게접근하는것은전쟁의원인과본질을객관적이며사실적으로파악하거나, 타당한해석을가로막는장애가된다. 더구나엄혹한냉전의시대에는이런흑백논리가지배하는사회에서는전쟁연구는물론이며비판이나대안의모색도허용되기어려웠다. 또한전쟁이전의이념적대립도연장하고강화하는효과를거둘수있었다. 공산주의는본래나쁘고무섭다는말은전쟁으로확실히증명되었고, 72
이에따라서반공은누구나추구해야할이념이자가치이며, 생활양식이되어야하였다. 특히이런관점이도의 도덕 국민윤리교과서에서한층두드러지게나타나며, 교과서의상당분량을공산주의사상의분석과비판에할애하고있다. 또한반공교육의핵심도이와같은이데올로기비판에있다고할수있다. 전쟁의본질을이념전쟁으로인식함으로써, 한국전쟁은전세계적인민주주의와공산주의의대립적상황에서발생한냉전의또다른양상인열전으로확장된다. 그렇기때문에우리가반공의최전선에서공산군과싸우는것은당연하며, 승리를거두는것이자유세계의일원으로서책임이라는인식까지도달한다. 1957년에발간되어 60년대까지널리사용된중학교사회과의 국제생활 ( 유진오, 일조각 ) 은 세계정치의각도로부터본다면, 6 25사변은자유진영을위하여도리어요행 이라고한다. 전쟁으로자유진영을각성시켰으며, 세계의자유국가들, 특히평화를원하는마음이누구보다도강한미국인민들에게공산주의자들과의평화적공존이불가능하다는것을똑똑하게가르쳐주었다고한다. 또한아시아의중요성을온세계사람들에게똑똑히인식시켰다. 구미사람들사이에는유럽제일주의가있어서공산주의침략에대해서유럽부터방위하고보자는사상이농후하였는데, 이런편견을일소해버렸다. 아시아가공산화되면유럽도미국도유지될수없다는것은세계자유제국의일치한자각이라고한다. 한국전쟁과반공투쟁을통해서한반도와아시아가역사적사명을수행하고있다는인상을주는서술이다. 4) 내전이아닌국제전 우리민족은역사적으로평화를사랑하며외족의침략에서국토를지켜왔다는사실을지적하고, 전쟁은 결코우리민족의내란이아니라, 민주주의와공산주의의의싸움 ( 우리나라의발달 -사회생활-, 6학년 2학기, 문교부 1952년, 1955년도에도그대로사용.) 이라고서술한것은주목된다. 거의대다수교과서가이처럼내전을부인하였고, 그렇지않은것은소수에불과하다. 한반도에서같은민족사이에벌어진전쟁을내전이라고부르지않을뿐아니라, 오히려그성격을거부하고비판한다는사실은중요한의미를지닌다. 우선민족을강조하였다는것은전쟁의주범이소련공산제국주의라는점을한층부각하는효과를얻으며, 또한그앞잡이인김일성공산정권을민족에서분리한다는뜻을담고있다. 다시말해서평화를애호하며외국을침략해본일이없는우리민족이전쟁을하게된것은공산주의의침략때문이다. 또한내전을부인하는것은남한의전쟁책임을인식하거나인정하겠다는의사가배제된성격규정이라고할수있다. 이와같은전쟁의성격과당사자에관한인식은당시미국이의도하고제시한전쟁의성격에대한규정과일정한연관이있다. 왜냐하면미국은전쟁개입을정당화할명분이필요하였기때문에전쟁의성격으로서내전을부정하였고, 대신에민주주의와공산주의의전쟁으로재규정하였다. 반면에북한과소련등공산주의국가는내전을주장하며미국의개입을침략으로비난하였다. 남한은한국전쟁의국제성, 즉민주진영과공산진영의싸움이라는미국의논리를그대로수용하였다. 그렇기때문에교과서서술은 우리는어디까지 73
나여러민주우방과친선을더욱두텁게하여, 집단방위를굳게 하는것으로이어진다. 왜냐하면유엔군이참전하는공식적명분은침략을격퇴하여평화와민주주의를지키기위한집단행동, 집단안보의전쟁이기때문이었다. 결국한국전쟁은두진영이충돌한국제전이며, 남한은북한공산군의침략에서자유와민주주의를수호하는역할과사명을지녔다는의미이다. 그렇기때문에전쟁에관련한사실적인기술이소련과그하수인인북한의 5년에걸친전쟁준비와 6월 25일새벽의남침에치중하였고, 그보다훨씬길게 유엔군의활약 에서유엔군의참전과전황을서술하였다. 이로써전쟁은우리의것으로우리가해결하여야할책임과부담을져야한다는의식이자리잡을수없게되었고, 유엔이주역이되었다. 교과서에서이런인식이약화되고, 남북이전쟁의당사자로서명확히서술된것은 1960 년대이후이다. 제2차교육과정에따른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침략의주체를 공산군 으로지칭하였으나, 문맥상소련군의비호를받은북한의공산주의자들이다. 또한제3차교육과정기인 1977년에나온실업계고등학교 국사 에서는 6 25사변은, 침략외세와결합된민족분열세력의대한민국정통성에대한도전이었다. 로규정되었다. 여기에서눈에띠는것은 대한민국정통성 이란용어로당시남북한의체제경쟁을반영하고있다고생각된다. 이어서 1978년출간된인문계고등학교 국사 는 북한의공산군은소련과중공의후원아래일제히남침을개시 하였다고명기하였다. 3. 주요내용 1) 북한의전쟁준비와남한의평화애호 거의모든교과서는전쟁이일어나기전에북한은소련의지원을받으면서전쟁준비를하였으나, 남한은거의무방비상태였다고서술하였다. 우리는오직거룩한건국의이념아래재건에매진할뿐으로, 무비를튼튼히할겨를이없었다. ( 중학도의, 3, 문교부, 1958 년 ) 북한이용의주도하게군비를증강해서남침을감행하였다는사실을강조하려는이런설명은매우순진하다는느낌이든다. 우리는평화를사랑하고동포를아꼈다. 그래서우리의힘이약한탓이라고얕보고무력침공 하였다는서술도역시그러하다. 물론당시군비강화는북한이대규모로하였던것은사실이지만, 남한역시미국의군사원조로받았고, 빠르게국방력을강화하고있다는것을빠뜨리면안된다. 또한전쟁직전에는 38도선에서크고작은군사적충돌사건도무시할수없다. 그렇기때문에 송악산의육탄10용사 도초등학교교과서에실렸다. 2) 유엔의부각과숨은미국 한반도에서전쟁이발발하였다는보고를받은미국트루먼대통령은즉각군사적지원 74
을결정하였고, 이어서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행동을취하도록요청하라고지시하였다. 이로써유엔은한국전쟁에깊게관여하게되었다. 1950년가을미군당국자가전쟁수행의 99% 를미군이감당하고있다고할만큼미군의역할은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거의모든교과서에서는미국과미군을그실질적비중에걸맞게다루지않고있다. 물론미국과미군이절대적역할을하고있다는사실을전제하지않은것은아니나, 글로서는매우빈약하게표현되었다. 이는교과서집필자들이지식이부족하거나의도적으로축소하려는의도를가졌기때문이라고는생각되지않는다. 미국은미군의참전을유엔의결의에따른것으로공표하고, 유엔군사령부를창설하여미군을유엔군휘하에편입시켰다. 그리고유엔결의를통해서회원국에군대를파견하도록하였다. 이런군사적측면만이아니라유엔기구로언커크 (UNCURK: 유엔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 를창설하여한국의평화회복과경제재건을담당하도록하였다. 이처럼막중한역할을하였지만, 미국은한국전쟁과관련해서자국보다는유엔을내세웠다. 이런미국의정책은미국의전쟁개입에대한비판을빗겨가고, 자국이주도하는집단안보체제를유엔을중심축으로구축하려는의도에서나왔다. 다시말해서유엔을앞세워공산주의에대항하는전선에각국의동참을이끌어내려고하였다. 이와같은미국의유엔정책과선전활동으로교과서에는미국보다유엔이훨씬부각되어있다. 전쟁중에는 유 엔의학습- A Study of The United Nation ( 공통, 문교부, 1953) 이라는보조교과서까지발행되었다. 유엔에대한신뢰는때로는과신으로까지보인다. 우리민족의소원은국제연합가입과국토의통일 ( 중학도의 3, 문교부, 1958년 ), 우리들의소원은빨리통일을달성하여, 국제연합의회원국으로서활약하는것 ( 사회생활, 6학년 1학기, 문교부, 1957) 이라고까지서술되었다. 비단예로든교과서뿐아니라도덕과사회교과목의거의모든교과서는미국보다유엔에더큰관심을보이며, 유엔은언제나옳다는인상을준다. 이런결과미국의참전이유와유엔의성격에대한객관적인서술이부재한다고생각된다. 이렇게과신하다보니유엔의유엔군파견결의를한미상호방위조약과혼동하여해석하기도하였다 ( 정치 경제, 실업계고등학교, 문교부, 대한교과서 1972). 유엔군의결성과파견을결정한유엔결의는 공산주의의무력침략 이아니라 무력침략 을격퇴하기위함이었다. 영국은미군이심리전전단에자국이공산주의침략에대항하여군대를파견하였다고쓴것에대해서서면으로항의하며참전의이유는 공산주의침략 이아닌 무력침략 이라고정정을요구하였다. 3) 휴전반대 1990년대에나온교과서까지거의대부분빠뜨리지않고기술할만큼중요한사항은휴전반대였다. 1951년서울재수복이후공산군이국군의진격에쫓겨달아나자, 소련이꾀를낸것이휴전제의라는것이다. 휴전을한뒤에다시무력을기른다음에침략을하자는술책이라고단정하였다. 또한휴전반대와북진통일운동의전개에도불구하고휴전이이루어졌다고안타까운마음을표현하였다. 1958년에나온초등학교 6학년 사회생활 의첫단원첫소단원의제목은 휴전반대 였다. 이처럼여러교과서에서휴전반대를강조하 75
여서술한까닭은여러가지이다. 공산주의에대한적개심이극심한상태로유지되었고, 당시전세가군사적으로통일을이룰수있는기회라고판단하였고, 한반도의군사적대치상황을전쟁수준으로연장하려고하였고, 특히 1950년대의교과서는휴전을강력히반대하며반공포로를석방한이승만대통령의정치적자산을강화하려던의도가있었기때문으로생각된다. 결국북한공산주의와계속해서싸우겠다는의지가정치적배경에서강하게표출된것이다. 4) 차단된제 3 의길 유진오가집필한 국제생활 은시토 (SEATO) 가입을거부한인도와버마등아시아와이집트등아랍국가를 소위중립노선 을걷고있는 일종의제3세력 으로규정하고, 두세계로대립되어있는현하의세계정세에있어서, 이지역의각국은지금가장위험한처지에놓여있는것 이라고단정하였다. 이런인식은미국과소련의냉전질서속에스스로구속시키고, 남북한의정치적대립과군사적대치를항상적인것으로인정하며민족의화해와한반도의평화를거부하는냉전의사고이다. 특히 1955년반둥회의의의의를 전부터유럽제국의압제를받아오던아시아및아프리카의여러나라가모여한번기세를올려보려한것에지나지않는다. 고저평가한것은식민지에서독립한지 10년에불과한나라의 국제생활 교과서내용으로보기힘들다. 이와같은제3세계로서의자주적의식과중립화의추구를포기하고거부하고, 제1세계로자진해서들어가려고한것도결국냉전적세계질서에대한성찰이부족하고, 자신감이결여된데에서나왔다고생각된다. 또한내부적으로도극단적인냉전과반공의식을강요하며, 새로운모색을위험시하며차단하고있다. 좌와우의중간은있을수가없다, 좌익에게이용만당할뿐이므로잘못하면이적행위이다, 우리에게는자유냐, 노예냐두가지길이있을뿐 이라고강압하였다 ( 고등도덕 Ⅱ, 1959년 ). 이와같은투철한반공의식은학교교육이보편적으로추구하던최고의교육목표이므로특별한내용도아니다. 고등학교보조교과서인 승공통일의길 은 4 19 이후제기되었던남북협상과서신교환, 그리고중립화안을전면적으로부정하며, 주도세력을강력히비판하였다. 5) 전쟁의성화 ( 聖化 ) 와종교적해석 한국전쟁에큰의의를부여하다보니때로는너무지나쳐교과서내용으로는부적절한사례도있다. 전쟁을인간사회에벌어지는투쟁이라고이성적으로인식할수도있지만, 전쟁은악과선의투쟁이라는종교적의미로해석한사람들도적지않았다고생각된다. 새로운윤리 의필자는 낡은대서양시대로부터새로운태평양시대로옮아오는전쟁, 낡은시대로부터새로운시대에옮아올때자세히는얼마나심한역사적진통이여기에따르는것일까., 한민족의고난은이같은역사적진통이면서한민족에대한시련벌및교훈의뜻을아울러가진다., 서울이태평양시대의예루살렘이되고한민족이새로운역사의주 76
체가될시대가돌아왔다. 고썼다. 이글의요지는한국전쟁은천년왕국으로가는과정이자, 선이악을물리치는징벌이며, 여기서구원을받을자는한민족이라는말이다. 전쟁후에성행하였던기독교계통의신종교도이런의식을밑바탕으로하였던것으로미루어필자만의의식세계에서나온것은아니다. 정의와자유를위하여, 국토를통일하기위하여, 자유를잃고노예의상태에서신음하는북한동포들을구출하고, 아세아로부터나아가서는전세계로부터침락주의적공산도배를몰아내기위하여싸웠다 ( 중학교사회생활과, 국제생활, 이의철 신기석 조동필, 교학도서주식회사, 1956), 국제연합의 성스러운목적 -자유민주주의의실현, 정의와평화 ( 고등도덕 Ⅱ ( 가 ), 문교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59년 ) 등의표현도종교적색채를띠었다고볼수있다. 이와같은전쟁의성화는선과악이라는시각에서전쟁을극단적으로인식하고, 의미를과잉부여하고, 과도하게자기합리화를한결과라고생각한다. 6) 전쟁의교훈 모든교과서는전쟁을통해서얻을수있는교훈은공산주의에대한부정과경계라고한다. 그렇기때문에전쟁의원인과참상에대한서술이부재하거나피상적인것에비해서공산주의의만행은분량이나심도가훨씬과다하다. 즉전쟁을반공의자료로만인식한결과이다. 승공통일의길 은반공에대한정신무장의가장큰원동력은전쟁의경험인데, 이것이잊혀지고, 경험하지못한청소년층이증가하므로, 이것을공산괴뢰가놓치지않을것이라고크게우려하였다. 따라서반공태세와교육을강화해야한다고한다. 그러나전쟁의재발방지가군사력의강화와멸공통일의강조에만있는것은아니다. 전쟁의참상과비극에초점이맞춰져야진정한교훈을얻을수있으며, 궁극적인교훈은평화가되어야한다. 설사현실적으로전쟁재발을막는군사력의강화를강조한다고하여도, 그를넘어서는교훈은공존, 화해, 평화, 통일이어야한다. 어떤교과서는통일을강조하지만, 그것은상대의존재를인정하지않는일방적인주장일경우가많다. 한민족은본래하나며, 통일없이는독립이없다고역설하는교과서도공산주의자들이자유로운선거를반대하고있으므로 남은길은무력으로써북진통일을단행하는것밖에없다. 고단언하고있다 ( 유진오, 국제생활 ). 맺음말 지금까지한국전쟁을다룬교과서가공통으로지닌가장큰문제점은흑백논리와편향된가치관에있다. 그만큼전쟁이남긴상처가깊고, 고통이컸다는의미이다. 그렇지만이미가버린냉전을아쉬워할수록전쟁의비극은사라지지않을것이다. 지난시절교과서는지나치게 정치적 이었지만, 이제부터라도학문적연구를바탕으로하고교육적목적만으로 77
편찬되어야한다. 전쟁이종식된지반세기가넘는동안엄청나게변해버린세계에맞춰서전쟁을보는우리관점도크게바꾸어야한다. 남침과공산주의를비난하며, 반공이라는전쟁의교훈만을외치지말고, 민족의화해와한반도의평화를말해야할때이다. 그것이곧억압되고왜곡된전쟁의경험과기억이주는고통에서우리자신이벗어나는길이다. 그리고감정에호소하는, 다시말해서전쟁을일으킨공산주의자에게전적으로책임을전가하고, 그들에대한증오심을불러일으키는서술이가져올부작용도심각하다고생각한다. 그리고충분히가르쳐야지올바르게배운다. 교과서에실린전쟁에관한역사적사실이너무소략하기때문에, 전쟁에대한이해가부족하며반성적인사고가부족하다고생각한다. 교과서에서술된사실이부정확한경우가보인다. 타성에젖은집필이만들어낸왜곡이라고할수있다. 무엇보다전쟁의객관적인원인조차도제대로서술하지못하는상태에서하루빨리벗어나야한다. 원인이없는결과는없으며, 전쟁의과정과의미를정확하게파악하기위해서도정확한원인을알아야한다. 한국전쟁에관한교과서내용은전쟁에관한우리의기억과현실이며, 후손의역사의식과그들의미래를결정할원천이다. 그러므로교과서는정확하고진실해야하며, 과거의구속에서벗어나앞날의희망을말해야한다. 참고문헌 : 초 중등 고등학교각과목교과서 ( 국립중앙도서관장서, 한국교육개발원의도서실및사 이버교과서박물관 www.textlib.net 장서 ), 제 1~7 차교육과정, 교사용지도서. 78
1950 년대흥사단에서는 1949. 대성빌딩매입및주식회사대성문화사창립. 단보 발행. 1950 6 25 한국전쟁의피해 많은동지가피납, 피살되고본부의문서, 비품과도서등이손실 1951. 부산임시수도에임시본부설치 부산임시수도에임시본부를설치하고단수습에노력하며 1953 년 5 월창립 40 주년기념식을거행 1953. 9 본부를서울로옮김 1954. 3 공함 발행 정부로부터 단보 의발행금지처분을받고, 편지적성격을띤부정기적소 식지의형식을갖춘 공함 으로바꾸어발행 (1964 년 2 월, 28 호로종간 ) 1954. 4 금요개척자강좌개강 4월 9일부터매주금요일에강좌를개최하여국민교양강좌및특별강연회를주최하여 1998년 5월에 1,414회를돌파하고, 이후로는금요토론회로개편운영 1954. 9 잡지 새벽 창간 동광 의후신으로 새벽 잡지를창간하여 45호를발행 민주시민교육의장이되었던금요개척자강좌 1961. 5 5.16 군사쿠데타로인하여군사정권이수립되자다른단체들과마찬가지로 일시활동정지를당함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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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1960 년대 4 월혁명 - 포기할수없는가치, 민주주의 이창언 ( 고려대한국사회연구소 ) 1. 머리말 1950년대이승만정권은극단적반공주의를앞세워민주주의를파괴하고독재를계속하였다. 이에따라한국사회의모순은심해지고민심은이승만정권에등을돌렸다. 이승만정권에대한민심이반은이미 1956년제3대정 부통령선거에서드러났다. 1960년봄, 이승만정권의부정과부패에항거한시민-학생들의저항은 1950년대의사회구조와그변동과정에서축적된모순의폭발로서대사회투쟁의시작을의미한다. 4월혁명은한국민주주의운동의이념적프레임을재구성하는전환적계기였으며행위양식의차원에서볼때, 자율적참여와연대에기초한지도부가없는운동의효시라고할수있다. 그러나지금까지 4월혁명은깊이있는연구가진행되지못했다. 그이유는 1961 년 5 16 군사쿠데타로 4월혁명의정신이전면적으로부정 왜곡되었기때문이다. 나아가 4월혁명의일부주도세력은 1960년봄의저항을개인의정치적출세의도구로활용, 기념비적역사로전락시켰다. 여기에더해민주화이행과공고화이후전통적사회운동의전반적약화로말미암아연구대상에대한매력이반감되었고연구여건과의지도약화되었다. 그럼에도, 4월혁명을소홀히다룰수없는이유는 4월혁명이야말로한국민주주의운동의원형이자새로운모델개발에많은상상력을제공하기때문이다. 또한, 4월혁명의정신은 50년이지난지금도여전히살아숨쉬며한국의민주주의를질적으로심화시키는동인이기때문이다. 이는 4월혁명에서만들어진민주주의에대한신념이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생활속에점차뿌리를내려감으로써가능했던것이라할수있다. 4월혁명의역사적기억을죽은과거로서가아니라미래를이끄는새로운동력으로부활시켜야하는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 따라서이글은 4월혁명 50주년을맞아 4월혁명의배경, 전개과정, 4월혁명을둘러싼연구동향과논쟁을살펴본다. 그리고반세기간우리의삶에어떤형태로기억되고망각되었는지를시대별로고찰하고자한다. 4월혁명에대한권력의욕망과역사와기억의변용과정을성찰하면서우리시대민주주의재구축 ( 재구성 ) 을위한몇가지의견을제시한다. 이러한작업을수행하기위해다양한선행연구와문헌을검토했다. 특히 4월혁명의역사와기억의변용과정을추적하기위해교과서 ( 고등학교 ) 와대통령연설문을활용했다. 4월혁명에대한권력의기본인식과대중의기억을특정한방향으로장악하려는권력욕망이가장잘드러나있는것이국사교과서와대통령연설문이기때문이다. 대통령연설문은 81
주어진정치적상황에대처하는의도된정치적의사와동기가내포되어있다. 따라서대통령연설문을통해 4월혁명에대한정의 성격규정, 4 19를어떤형태의정치적목표와연계하여제시하고있는지를포함하여해당정권시기의주요지배담론의양상과특징을확인하고자했다. 분석대상인교과서는 2차교육과정에서 6차교육과정까지출간된국사교과서를사용했다. 사회의민주화및다원화와함께다양한교과서의필요성이대두하여사회교과서에서도검정제도가도입되었던사정과관련이있다. 따라서대통령연설문은박정희정권에서노무현정권시기발표된 4월혁명기념사로한정했다. 2. 4 월혁명의발생배경 1) 구조적요인 이승만을중심으로한대한민국정부수립과정은자주독립국건설및민족경제의수립이라는민중의열망과는거리가먼분단국가의형성과종속적경제의단초를형성하는과정이었다. 이승만과토착지주세력을중심으로한보수우익세력의집권이내포하는친일세력의상존과대미의존성향은 1950년대에들어서도이러한민족적상황을개선하지않았다. 오히려, 한국전쟁을거치면서부터냉전시대의외적모순이극대화되고또한민족의내적모순도반공논리와함께심화되었다 ( 윤순갑, 2000: 58). 이승만은어용조직을발족케하여각계민중을통제관리하였는데, 농민은농업협동조합과대한농총, 대한농민회등을통하여, 그리고노동자에대해서는대한노총을통해통제해들어갔다. 그러나경제악화와절대빈곤의심화로인해이승만정권에대한민중의불만은누적되었다. 미국의원조경제는극심한식량난과전후복구에도움을주었지만, 한국의경제구조를크게왜곡시켰다. 미국의원조물자는주로식료품, 농업용품, 피복, 의료용품등소비재가대부분이었다. 1953년제조업전체에서소비재부문이 74.4%, 생산재부분이 18.3% 에지나지않아산업재건에는도움이되지못했다. 미국이 1956년 PLO 480호 ( 농산물수출원조법 ) 에따라실시한잉여농산물의원조는가격경쟁력에서절대열세인국산밀과목화재배지를사라지게하는등한국농업을피폐하게만들었다 ( 송찬섭외, 2007: 450). 1950년대한국경제는 1957년을정점으로빠르게침체하면서불황에빠져들었다. 1957년미국은국제수지가급격히나빠지자무상원조액을줄이고, 대신이를유상차관으로바꿨다. 미국의원조가줄어들면서한국경제는큰타격을받았다. 국민총생산 (GNP) 성장률도 1957년에 8.1% 성장한뒤에계속떨어져 1960년에는 2.5% 성장에그쳤다. 1958년부터삼백공업의가동률도정체되거나줄었는데, 특히제당 26.1%, 제분 23.3%, 방직 49.2% 씩공장가동률이크게떨어졌다. 불경기, 실업, 고물가속에서농민, 노동자, 도시빈민들은끼니마저잇기어려운생활을했다. 많은농민은무거운조세부담, 지가상환부담그리고쌀등급을낮게 82
매기는데서오는부담을떠안아마침내고리대를쓸수밖에없는부채농이되었다. 이러한가운데영세소농들은농지를팔고다시소작농이되거나고향을떠나도시로모여들었다. 도시로모여든농민들을기다리는것은더나은도시노동자의생활이아니었다. 노동자의평균임금은 2만 153환인데, 가구당생계비는 4만 509환으로임금은생활비의기껏해야반밖에되지않았다. 이승만과자유당의독재연장과정에서이처럼민중의생활은점점암담해졌다. 전쟁으로머뭇거렸던민중의투쟁은 1950년대후반부에다시활기차게일어났다. 이승만과자유당에대한저항은출발부터민중과타협을전제하지않는이승만정권의후진적권력구조와폭력적속성으로부터기인한다고볼수있다. 협의민주주의를통한정당성확보를시도하지않았던이승만정권은사적소유물로전락한경찰등물리력과억압에의존할수밖에없었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선거때마다논란이되었던부정선거시비등, 1950년대내내계속되었던파행적정치형태는이승만정권의권력구조적속성으로볼때당연하였고, 이승만의취약성을반증하는사건들이었다 ( 이수인, 1990; 정용욱재인용, 1998: 233). 일례로진보당당수조봉암에대한사법살해는당시젊은이들에게큰충격을주었으며일부지식인과대학생들에게는한국의자유민주주의에대해깊은회의감을심어주었다. 이승만의노쇠화, 즉, 신체적정신적건강악화로인한그의카리스마의약화와 1957년이후외치를제외한내치에서이기붕등에게권력을넘겨주는과정에서발생한권력내부의변동과균열도심화되어갔다. 자유당은 1957년 3월전당대회를개최하여부, 차장중심의당조직을당무위원이운영하는당무회중심체제로개편한다. 이기붕을정점으로소수의원내인사중심으로이루어진이당무회는노쇠한이승만을대신하여점차권한을확대해나가면서보안법파동, 연계자금방출사건, 3 15 부정선거등자유당말기의실정을주도했다. 그결과 1958년 5월 2일에치러진제4대민의원선거에서자유당은총 233석중 126석을차지하여과반수를넘겼으나, 진보당이불법화된후대안정당으로등장한민주당도기존의석의두배이상인 79석을얻어자유당을위협하게되었다. 특히, 1950년대교육기회의확대와학생수증가는 4월혁명에서선도적역할을할수있었던객관적인조건을형성하였다. 1950년대교육인구는급속히팽창하였다. 해방되면서억눌렸던교육열이폭발하였고, 사회적으로도필요한재건인력을통해확보해야했기때문에미군정기에다른어느분야못지않게교육열기는높아졌다. 6 25 이후전후인플레이션및산업시설의파괴로인한경제적악조건속에서도초 중등교육을비롯한고등교육의취학률은대단히높았다. 이는식민지적신분체제가새로운형태의신분제도로전환되어가는과정에서교육이합법적신분증명으로작용하게되었던객관적인조건이낳은결과로볼수있다. 여기에자유당정부가미국식자유방임주의교육정책을고수함으로써사학난립및교육적부조리가방기된채교육팽창이이루어졌던것이다 ( 강순원, 1990: 61-62). 대학붐으로학기초마다등록금납부기간에는총통화량의 1/4 혹은 1/5이학교로들어간다는개탄의소리가들릴정도였다 ( 오천석, 1964 : 511). 한편, 특정학교에집중되기는했지만미국의교육원조는기술원조, 즉한국교육자및학생의미국파견과미국교육자의한국파견에주력하였고, 이를통한미 83
국식교육제도와미국식가치관 ( 자유민주주의 ) 을이식시키는역할을수행하였다. 교육인구는증가하는데비하여이에상응하는직업구조를창출하지못하면서, 1950년대의한국사회는교육받은사람들의사회적이동성에대한기대수준을실현가능할정도로상승시켜치명적인정치적반작용을불러일으킬소지를상당히내포하고있었다. 2) 저항행동참여요인 : 대학생을중심으로 사회운동은구조적모순만으로그발생을설명하기어렵다. 정치 경제적구조의불안정이자동으로급진적이념과운동을발흥시키는정치적기회를제공하는것은아니기때문이다. 오히려객관적기회에대한주관적해석과정으로서문화적도전이선행된이후급진적사회운동이발생하는때도많다. 다시말해오랫동안잠재해있던특정집단의불만과사회적불의에대한해석의틀이재구성되는문화적결별이일어났을때발생하는것이라고말할수있다. 이승만정권의직접적몰락과 4월혁명의도화선으로알려진 3.15 부정선거에서자행된부정의양상이나정도가그이전선거보다심했다고단정하기도쉽지않다. 권력내부의변동과균열도대중의저항과몰락의원인일수있지만, 이것만으로설명될수없다. 객관적조건은사회운동발생의필요조건일수있지만, 충분조건일수는없기때문이다. 따라서 4월혁명의직접적인배경을설명하기위해서는운동참여와해석틀변화의중범위적이고미시적인요인을살펴보지않을수없다. 여기서는 4월혁명초기중대한역할을수행했던대학생들의운동참여과정을통해권위주의국가에서대학생이운동의주도적역할을수행할수있었던이유를설명하고자한다. 특히, 무계급적비생산주체로서의상대적자율성을갖는학생들의운동참여와학생대중의지지에대한관심을개인행위자나집단으로좁혀본다면, 인지적해방이대인간네트워크와같은요소들에영향을받는다는사실에주목하지않을수없다. 여기서는학생들이 4월혁명에주도적인역할을할수있었던요인들을중범위적차원에서검토해보도록하겠다. 사회의구조적긴장이심각했던 1950년대에도학생들은직접저항하지못했다. 한국전쟁은미약하나마남아있던혁신적인학생운동세력을완전히제거하고, 친미적우익반공주의학생세력만을남겨놓았다. 더구나 49년창설된학도호국단체제는주체적인학생운동세력의발생을저해하였다. 이러한상태에서의전쟁경험은, 학생들로하여금전쟁을세계사적차원에서인식하는것이아니라다만실존적차원에서인식하게하였으며전후의허무의식과오도된계층상승욕구는학생운동을완전히침체시켜 50년대후반까지는객관적역사조건의성숙만을기다려야했다. 4월혁명이본격화되자상황은달라졌다. 4월혁명은초기에중 고등학생에서차츰대학생으로그중심이이동된다. 4 18 이전중고등학생이선두에서게된이유는그들이지금의중고등학생보다비교적성숙했다는평가도있지만, 더욱엄밀히말한다면부문운동과선진적인사회운동그룹이미약했다는것을반증한다. 4 18 이전, 대학사회의집단적움직임이미약하였고개별적참여수준이었던사정에는대학생들의민주민권의식이부족했기때문만은아니었다. 당시 3 15부정선거를전후한시기, 중 고등학교는대학과달리이미개학을한상태였고, 학생자치조직이다 84
거 이승만정권의독재와경제파탄 근대와민주주의에대한기대와성취의갭 : 상대적박탈감 민족민주주의 : 반독재 통일운동 시구조적 식민잔재의미청산, 전쟁경험 기회구조 : 교육기회, 자유주의가치의부분적확대 / 이승만에대한미국의부정적태도 정서적 감정적공감대 전쟁에대한공포와평화통일에대한낮은차원의열망 도덕감정 : 지식인의부채의식과책임의식확산 촉발요인부정선거 인지문화적 상대적으로자율적인대학문화 인식적정의 항일운동의전통 자유 정의 진리 개강 조직전략적 상대적으로자율적인조직체계 능동적관계의망 고등학교, 대학교학생자치기구 진보적이념서클 < 그림 1> 4 월혁명의배경 ( 대학생참여의배경적요인 ) 출처 : 이창언 (2010) 른부분에비해잘조직되어있었다. 따라서가장먼저움직일수있었던집단은중 고등학생이었다. 학원의자유, 학생들의정치도구화반대로시작한 2 28 대구항쟁과마산항쟁에서중 고등학생들은선두에섰다. 항쟁참여에는김주열이라는동년배의죽음이주는동질감도크게영향을미쳤다. 이후, 3월방학을마치고개강한대학에서도 3 15부정선거를규탄하기위해움직이기시작한다. 50년대전반에걸쳐침체하였던학생운동이그나마 4 19로표출될수있었던것은 대학생 과 대학 이라는집단과공간이갖는특성, 즉상대적자율성으로부터기인한다. 대학은국가권력의지배력이가장미약하게미치는공간이자무계급적비생산주체로서공론의영역에가장쉽게접근할수있었던집단이었다. 당시냉전반공주의의부정적효과로서일상적정치언어의채색화인 이념적불러내기 (ideological 85
interpellation) 는정치사회적인차원에서공론장을축소했다 ( 최장집, 2003: 65). 반면에상대적으로자율적인공간으로존재했던대학이라는공간은정권의부정부패와부정선거를비롯한사회쟁점과관련된공론 (public discourse) 의과정을통해저항의진지를구축할수있었으며사회운동의중심으로성장할수있었던것이다. 그들이받은서구적자유민주주의에대한교육과이승만독재라는현실과의괴리감, 광범위한실업상태로취업기회의부족에기인하는좌절, 타부문보다상대적인자율성과조직성에그원인이있다. 4 19의구체적전개과정에서대학생은 3 15 마산이전까지의비행동화단계를거쳐 4 18을계기로전면에등장하게된다. 4월혁명에서대학생의주도적역할은권위주의국가의억압과폭력이시민사회를압도하는현실과사회운동의주기가본격적으로상승하는국면으로인식되는과정에서이루어졌다. 1950-60년대안보국가와종속적자본주의모순이심화하는한편, 높은교육열과교육기회확장은저항의자원을확대했고, 저항적규범과문화확산에유리한기회구조를제공하였던것이다. 상대적으로가난하기때문에가정환경이넉넉지않은학생이나지방출신 106) 학생들의소외감과상대적박탈감, 가난한부모와형제의기대, 희생에대한죄의식, 대학에대한기대와성취사이의부조화로인한좌절감, 부조리한사회현실같은고민은주로비공식적으로형성된네트워크를통해해소될수있었다. 학교와가정의울타리를넘어직접적으로정치적인모임에참여하여활동할기회가높아진다는것은의식과행위에커다란변화를가져오게된다. 대학생들은선후배간면접적상호작용과대학내외의다양한연결망을통해이승만정권의만행과불의 (injustice) 에대한도덕적분노로시작하여, 책임소재에대한진단 (diagnostic) 을통해지식인의사회적책무감과우리라는 집합적정체성 을형성해나갈수있었던것이다. 집합적정체성과행동성을고취하는데있어대학언론의역할도무시할수없다. 정론과언론매체가별로없던시절이처럼사회비판과행동을강조한대학신문의인기는대단히높았다. 대학언론기자나편집에참여했던학생들도대부분의식이높고인품이좋았던사람들이었다. 이들은대학언론이사실성있는정보, 비판적지식의제공과공유, 지식인으로서의책임과자긍심, 대학공동체의성원으로서가져야할일체감, 현실참여의고취등의기능을수행할수있도록많은노력을전개하였다. 정치적균열의구조와접합된 1960년대대학생의정치적정체성은대학언론이라는공론의장을통해민족과민주주의의가치가확산된다. 이처럼권위주의적인억압적체제하에서상대적으로 자유로운공간 (free space) 이었던대학은원하던원하지않던간에급진담론의 문화적실험실 이될가능성이컸다. 상대적으로자유로운공간은사회구조의 블랙홀 과같은것이라고할수있는데, 당시대학은일종의피난처이자 문화적자율성의영역 이었다. 구조적억압과사회구조가불안정한결과로 자유로운공간 에서의 문화적도전 이진행됨으로써, 사회운동이발생할수있는 문화적기회 와궁극적으로는 정치적기회 가점차로확대될수있었다. 한편, 민중운동과제도정 86
치의허약함은학생들로하여금불만스러운상황을타개할강력한대행자로서역할을자연스럽게받아들이게하였다. 지식인에대한관대한전통과문화도학생집단의사회적발언을강화하는요인으로작용한다. 그결과다른사회운동조직 (SMO) 에서민족-민중-계급이라는틀이표면화되기이전에학생운동은공론의과정을통해가장먼저사회운동의선두에설수있게되었다. 문화적기회를정치적기회즉, 사회적저항의조직화된운동으로변모해나갔던전환의조건은대학내다양한토착조직을연결하는네트워크의힘이라할수있다. 4월혁명전후과정에서다른계급, 계층과달리 인지적동원 과 행위동원 에더욱유리한조건을제공한것은상대적으로자율적인공간에서의능동적관계의망을형성할수있었기때문이다. 3. 4 월혁명을바라보는학계의시각과쟁점 1) 쟁점 ( 정의, 주체, 시기, 이념 ) (1) 4 19에대한용어정의사회과학은개념정의로부터시작한다고한다. 그런점에서볼때 4 19에어떤명칭을부여할것인가라는기본적인문제는연구자에게매우중요하면서도쉽지않은작업이아닐수없다. 1960년 4월혁명은논자에따라 4월혁명, 4 19 ( 학생 ) 의거, 4월민중항쟁등다양한명칭으로불리고있다. 여기에는자신들의쿠데타를합리화하기위해 4 19를의거로규정한 5 16 군사쿠테타주역들의호칭을논외로하더라도, 4 19의명칭과성격문제는여전히학계의논쟁거리이다. 의거라는정의는박정희정권만사용한것은아니다. 과도정부나민주당시기의보수적인사들은표면적으로 혁명 이라고규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의거 로간주하였고또그렇게되기를원했다. 그런데보수정치세력의이러한성격규정역시운동이더욱진전되어철저한정치 사회적개혁으로나아가는데대해두려움을느끼는이들의계급적이해가반영된것이다 ( 김동춘, 1990). 개신교의김재준도 4 19 혁명을국민운동을위한민주혼의폭발로보았다. 물론김재준이 4 19를의거로본것은 4 19의역사적의미를평가절하하기위함은아니었다. 4 19가복수심이나정권의탈취를목적으로일어난것이아니라시민-학생들의자기희생적인의로운정신에서일어났다고보았다. 그가 4 19를의거로부른이유는그것이정치운동이아닌윤리운동으로보았기때문일것이다 ( 김재성, 2005: 125). 4 19는어디까지나의거, 즉의로운, 또는의를위한거사였다. 그것이혁명에유사한결과를가져온것은미리부터설계된청사진에의하여성취시킨것이아니라, 한놀라운상급이었다. 그것은혁명이라기보다는하나의국민운동의유형이었다 ( 김재준전집 5: 98-100; 김재성, 2005: 125 재인용 ). 87
의거 ( 義擧 ) 는 정의를위하여일으키는의로운일 이라는의미로결코나쁜뜻은아니다. 그러나이개념은 4월혁명의총체적측면과역사적의의를담기에는일정한한계가있다. 의거에는일회적이며즉자적이고비체계적이라는의미를내포하고있기때문이다. 의거는우연하지않은계기라하더라도분명한인과관계적계기가있지않은상황에의해서한번그렇게우연하게일어난사건이라는의미가강조된다. 그리고그것이실현하려는목표가치가즉자적이고두서가없다는의미가강조된다 ( 김태일, 2000: 146). 1950년대한국사회의구조와변동을살펴본다면 4월혁명은강력한지도자가없는저항이었다. 그러나 4월혁명은우연히발생한사건이아니었다. 이것은한국현대사의모순들이큰소용돌이를이루면서만들어낸역사적분수령에서나타난것이며, 필연성은아니더라도명백한인과과정을가지고있었던것이다. 또한, 4월혁명에대해혁명이냐항쟁이냐를둘러싼논쟁도있다. 혁명과민중항쟁사이의경계선은주로 운동의주체 주도세력 과 4월혁명의역사적성격 을어떻게보느냐에달린것으로보인다. 그러나일반적으로혁명은사회구조의총체적전환을수반하는정치변혁을지칭하기때문에 4월혁명에관한혁명으로서의의의에대해서는다른시각들이있다. 그이유는 4월혁명은근본적인사회적경제적변화, 정치체제와정치지배층성격의혁신과변화를가져오지도않았고, 혁명을목적의식적으로혁명을이끄는주도세력이존재하지않았기때문이다. 실제로 1961년 4 19 1주년을맞이하여진보적청년단체인민족민주청년동맹중앙맹부의성명서 107) 에는이러한시각이잘드러나있다. 진정한혁명은앞으로계속추구해야할과제라는측면에서당시진보적인사들은 항쟁 이라는용어를사용할것을주장한다. 그럼에도, 4월혁명은우리현대사에서정권을붕괴시킨유일한정치저항이었을뿐아니라 4월혁명이후연속적사회변혁의과제를결부시킬때미완의혁명이라는평가에서알있듯이혁명적가치를갖는거대한시민저항이었다는점을부인하기어렵다 ( 조대엽, 2010: 133). 김동춘 (1990: 329) 도 의거라는도덕주의적이고윤리적인표현이 4 19의과학적설명을위해불필요한것은분명하지만, 혁명임을주장하는입론도반드시올바르지않다. 라며 중요한것은혁명이냐혁명이아니냐가아니라무엇을지향하는혁명이며어떠한과제를안고있는혁명이냐하는것 이라고강조한다. (2) 4 월혁명을바라보는몇개의시각 지금까지논의를바탕으로 4 19 를바라보는시각을정리하면크게 4 가지로정리할수 있다. 각각의시각과성격규정은단순히 4 19 의역사적평가라는학술적차원이아니라 88
각각이대변하는사회집단의역사 사회발전지향성과밀접한관련이있다. 시각정신주체시기성격과제 근대화론적시각 민족주의적시각 민족주의적시각 민족 민중항쟁적시각 변혁운동론적시각 반독재민주화와자유민주주의수호 민주항쟁과민족통일운동 반독재민주주의와반외세민족통일운동 종속적자본주의모순에대한저항 학생과시민 2.28~4.26 시민혁명 시민과학생주도, 전민족 민중 ( 민족 ) 과학생주도 학생과민중 2.28~5 16 직전 이승만정권의구조적위기 ~ 5 16 직전 미완의혁명 민완의민족 민중항쟁 미완의민중혁명, 학생에의한대리혁명 자유민주주의완성 근대민족국가완성 자주 민주 통일 종속적자본주의의종식 < 표 1> 4 월혁명을바라보는시각들 김동춘 (1990) 의논의를재구성함. 근대화론적시각은반독재민주화와자유민주주의의수호를 4 19의기본정신으로본다. 이입장은 4월혁명을특정한시기 (2 28에서 4 26까지 ) 에국한하는등 4 19와한국사회의변화발전을단절적으로본다. 이시각은 1970년대들어서과도한경제성장정책이가져온사회적모순이심화함에따라점차후퇴하기시작하였다. 따라서 대외의존적경제성장정책이가져올수밖에없었던민주화의저지, 민중의소외, 민족통일에의무관심등을한국사회가세계자본주의에종속적으로편입된데서오는필연적인현상임을인정하는연구방법론이점차지식인들의주목을받기시작하였다 ( 김동춘, 1990). 4 19는반독재민주화를넘어민족주의적열망을고양시킨계기가되었다. 4 19를 미완의혁명 으로서근대민족국가의완성을과제를남긴운동으로보는민족주의적시각은 1960-70년대다수의지식인과학생들의인식이었다고할수있다. 따라서 70-80년대에도민족항쟁적시각이존재했지만, 주류적시각은아니었다. 대체로지식인과학생들은반독재민주회복운동으로서자유민주주의를지향하였고, 사물과모순에대한과학적인식을결여하였지만반외세민족주의적경향을보였다. 형이상학적관념이갖는낭만적성격과소박한민주적열정의운동으로서체제내적성격을갖고있었다. 그러나 1980년광주항쟁이후민족 민족항쟁적시각과변혁론적시각은대단히빠르게확산해갔다. 80년대는마르크스주의를포함한급진주의적세력과그들이담지하는담론들이부활한시기였다. 두개의시각은민중NL( 민족해방 ) 적인식과 PD( 민중민주적 ) 인식으로크게나뉠수도있다. 변혁론적인식이노동자계급중심성을강조한다면민족 민중항쟁적시각은반제통일전선론과밀접한관련이있다. 대립되어보이는두개의인식은 4월혁명을한국민주화운동의연속선상에서바라보고있다. 4 19를부정선거에서이승만하야에이르는일련의학생 시민봉기에한정하지않고, 이승만정권의구조적위기에서 5 16 에의해 4월혁명의정신이좌절되고, 왜곡되기까지의일련의학생 민중운동을분석의대 89
상으로삼고있다. 이것은 4 19에대한인식의범위를시간적으로나공간적으로크게확대한것이다 ( 정용욱, 1998: 230). 두개의시각은혁명적사상과이념, 지도부의부재를 4 월혁명의실패요인으로서술하고있다는점에서도공통점이있다. 민족주의적시각은민족 ( 민중 ) 항쟁적시각으로어느정도수렴되기도한다. 현재는변혁론적시각과민족 ( 민중 ) 항쟁적시각의대립이존재한다. 물론양자는근대화론적시각에대해서함께비판적인견해를밝히고있다. 변혁론적시각과민족 ( 민중 ) 항쟁적시각은 4월의거 (4 19 의거, 4월학생의거 ) 론에대해서 4 19를 단순히부정선거에항의하는 순수한 학생들의도덕적, 윤리적문제제기로폄하시킨다 고비판한다. 4 19 혁명론에대해서는 이승만정권타도라는정변적사건만으로혁명이이미완수되었음을주장하고, 자신이혁명의계승자임을강조하려는것. 4 19 혁명론은계급론적관점에서는물론이고민족사적관점에서도인정될수없는관념적허구이며오히려 4 19의진정한혁명적성격을훼손하는것에불과하다 ( 황건, 2006) 고비판한다. (3) 4 월혁명의이념, 시기구분에따른주체 항쟁적시각과변혁론적시각은아래의인용문과같이혁명을단속적일회적인 사건 이 아닌하나의연속적계기적인 과정 으로봐야함을강조한다. 1960년 4월19일에, 또는 4월한달동안에일어났던, 길게잡아야 1960년한해에걸쳐전개되었던, 역사적으로단절된일회적사건으로본다면 4 19는그어떤혁명적변화를가져오지도못했으며, 더구나 1년후 5 16 쿠데타에의해좌절되었기때문에기껏해야 실패한혁명 이라고밖에규정할수없다 ( 황건, 2006). 단지이승만독재정권의퇴진에있었던것은아니다. 중요한점은 4월혁명이 60년으로부터현재까지 30여년간에깊어갈수밖에없는모순을예단해주었다는데있다. 그것은자본과군부파쇼와미국이정치적으로정책적으로반공이데올로기로, 군사적으로고도의억압구조를창출해가는것과동시에, 민주민중세력의객관적주체적역량을쌓아나가야하는것, 양면의역사가진행될것임을알려주었다는점이다 ( 김진균, 1989). 거대한혁명의사건을어느한날로못박아부르려하고또그렇게부르는데는어떤특정한목적이숨어있을수있다. 4월혁명을일회적사건으로규정하는것은망각과배제를수반하기때문이다. 그것은 4월혁명당시분출했던노동자등기층민중의참여와분출했던급진적지향과이념을배제하고망각한다. 1960년봄혁명을주창하는박영신 (2000: 193) 은다음과같이말한다. 4 19 라는이름은시간과공간의두축에서넓게퍼져있는혁명의모습을부자연 스럽게일부러좁혀놓고있다. 이이름은 2 월하순부터일어났다고해야할저항의 90
불꽃도잘라냈었고, 여러크고작은지역에서튀어나온저항의외침을잘라내었으며, 광범위한시민의참여와희생도잘라내었다. 그러므로이이름을달게한데는거대한혁명의사건을한날로축소하는데일정한이해관계를가지고있는특정한세력이있을것이다. ( 중략 ) 4월혁명은초기부터후반까지학생세력에의해주도되었던것은사실이나온전히학생, 그리고당시미형성된시민 ( 사회 ) 을 4월혁명의주체로규정되는것은온당치않다. 4월혁명의희생자의직업분포와 4월혁명을최소한 60년봄에서 61년봄까지의흐름을통해읽어본다면이점을더쉽게인정할수있다. 직업희생자 % 국민학생 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회사원및학원하층노동자무직자미상 19 36 22 10 61 33 5 10.2 19.4 11.8 5.4 32.8 17.7 2.7 계 186 100.0 < 표 2> 4 월혁명희생자 4월혁명에대한시기구분은논자에따라차이가있지만 1980년대이후에는 2.28에서이승만하야에이르는 1단계, 허정이후과도내각의성립에서 7.29 총선에이르는 2단계, 민주당집권이후 5.15까지통일논의가활성화되고민중운동이급속히성장한 3단계로나누어분석하는방식이널리받아들여지고있다 ( 정용욱, 1998: 230). 여기에더해이승만하야에이르는반독재민주화운동수준의전기와 4 26 이승만하야로부터 7 29총선에서의혁명주도세력의패배로이어지는중기, 그리고 7 29총선부터 5 16 군사쿠데타로미완의혁명으로종결되는후기로세분화할수있다 ( 고성국, 2001: 171). 여기서중기는반독재민주화운동을근간으로하여민족자주화와통일운동등이다양한형태로전개되고, 각부분의조직정비가이루어지면서 7 29 총선으로힘을결집하여갔던시기로정리될수있으며, 후기는 2 8 한미경협반대투쟁과 2대악법반대투쟁, 통일운동이비교적뚜렷한이념적지향과체계화된조직적실천을수행하였던시기로구분할수있다. 당시진보적정치세력은 7.29 총선을계기로혁명과정에참여하여후반에는학생세력과함께주도했다. 오히려민주당세력은혁명초기단계에는적극적으로참여하였으나, 중도에집권한상태에서이탈되더니후반에는도리어운동에서배제되어개혁의대상이되고말았다. 노동세력은초기에는독자적으로생존권투쟁을전개하다가후반에 2대악법반대운동이라는제도개선투쟁에조직적으로참여하게되었다. 노동대중의 4월혁명에서의위상과비중의문제는상대적으로두드러진것이아니었다. 그러나혁명의진전과더불어노동대중은가장주체적이고적극적인주도세력의한부분으로부상되었으며, 이에상응하는대중적정치실천을수행하였다 ( 정기영, 1990: 134-135). 노동운동중가장정치성이높고또한정치실천의수준이높았던교원노조의이념지향을검토 91
하면, 그것이대체로민주주의및민족자주통일에대한선언적수준의초보적정치지향을보여주고있었다는평가가가능하다 ( 고성국, 2001). 도시빈민은조직적인형태는아니더라도개별적인차원에서상당히적극적으로참여했고, 후반에는조직적인참여도하였다. 농민세력은능동적이고주체적인참여는없었으나 양민학살진상규명 과총선에대한농민저항등다른형태로그들의요구를표출시켰던것이다 ( 정기영, 1990: 134-135). 1960년초한국사회는격렬한정치투쟁이전개되었다. 세계자본주의질서로의편입과냉전체제의구조화의과정이진행되는 1950년대선거는시민사회가구축된사회가갖는의미를훨씬넘어서는것이었다. 사실상선거는대중이자신의정치적입장을표출할수있는유일한정치투쟁의장이었기때문이다. 4월혁명은이승만정권의하야라는정치적결과외에도운동적차원에서한국전쟁이후단절된민족민주주의프레임으로재전환하는계기가되었다. 물론전국의많은대학에서현실에안주하거나변화된상황에적응을모색한부류도생겼다는점을부정할순없다. 그러나 4 18과 4월혁명을통해형성된복합적조직의장과공론장을통해급진적민주주의적논의의등장과재해석이시도되고단절된진보적운동전통의복원이시도된다. 이후학생들은통일운동과 2 8경협반대, 2대악법반대투쟁에적극적으로나섰으며 5 16 군사정변이후 4 월혁명정신을한차원발전시켜 6 3항쟁을선도해나갔다. 50년중반이후재등장한이념서클은 4 19 당시에는영향력이그리크지않았지만 4월혁명의결과로공론장이확장되는과정, 그리고민족통일등과거에금기시되었던이슈들이등장하면서영향력을확대해나간다. 5 16 군사정변이후 61년말까지민통련과관계를맺은진보적인학생운동그룹은탄압을받아운동일선에서일시잠복했다가 5 16의성격과학생운동의진로를둘러싼논의가촉발된다. 4월혁명이후운동내부의이념적분화양상도나타난다. 대체로진보적인성향을갖고있던학생들은 5 16을반공독재쿠데타로서성격을규정하였고학생운동은군사정권과대항할수밖에없다는결론을내린다. 4월혁명이후이념서클은학생운동과민주화운동의프레임변화에지대한역할을수행했다. 전대협과한총련등총학생회의전국적인연합이활성화되기이전까지이념서클은한국학생운동의이념과가치를생산 보급 확산하는한편, 운동인자발굴과훈련, 조직화의저수지역할을수행했기때문이다. 진행한학습은은밀하고획일적이며폐쇄적인성격이었던것은사실이다. 이념의수용은학생들의때묻지않은순수함에서기인하였다. 당시운동문화는학생들이의식화학습에참여함으로써출세욕과엘리트의식을버리고이타적인삶을최우선적으로여기는가치관을형성하는것이었다. 민중의고통은개인문제가아닌사회구조적모순에기인하므로사회구조를변혁시키지않고서는민중해방이불가능하다는인식을공유하게된다 ( 이창언 2008: 185-187). 92
단계 주요사건 운동의이념 이슈 성격 범위 주요행위자 항쟁의촉발 2 28 대구시위 1 2 차마산항쟁 자유민주주의 학원자주화프레임 반 ( 反 ) 부정부패시위, 이승만하야촉구시위 지방 중 고등학생 학생회 1단계 2단계 3단계항쟁의확대와격화불철저한미완의민주개혁혁명 4.18 고대행동 자유민주주의 정권퇴진프레임 서울, 전국화의계기마련 학생자치조직 한국전쟁이후단절된학생운동의명맥회복과정 4 19~4.26 학원민주화, 국민계몽운동 허정과도내각성립 ~ 7 2 9 총선 60. 9 ~ 6 1. 5 16 5 16 군사쿠데타 ~ -> 민족민주주의 민족 통일프레임 2 8 한미경협반대투쟁, 2 대악법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 전국화 대학생과진보정치세력, 민중 학생자치조직 -> 이념서클 (87 년이전까지 ) 민통련등 운동의분화와급진민족주의적논의등장 < 표 3> 4 월혁명의전개과정과시기별특징 출처 : 이창언 (2010) 2) 4 월혁명에대한연구동향 4월혁명은정치사적의의가큰만큼학술적연구관심또한클수밖에없었다. 거시-역사적으로는일제하의항일민족해방운동과해방후분단체제에서의통일운동을잇는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의연속선에서해석하는연구 ( 강만길, 1983) 에서부터 4월혁명의실제적전개과정이나참여자의특성등을분석하는현장중심의미시적분석 ( 김성태, 1983) 에이르기까지인문학과사회과학의여러분야에서학술적성과가누적되었던것이다 ( 조대엽, 2010: 134). 4월혁명 을다룬수많은학술적연구들은그성격에따라크게세가지갈래로구분할수있다. 첫째, 4월혁명의운동사적접근이다 ( 김성환, 1984; 박형신, 1986; 김광식, 1988; 김동춘, 1988, 1991; 박현채, 1988; 이철국, 1988; 사월혁명연구소, 1990, 1993; 이종오, 1991; 서중석, 1991). 이들연구는 4월혁명이발생하게된사회구조적배경과다양한운동세력들의동학에초점을두었다. 둘째, 4월혁명의정치사적접근이다 ( 한승주, 1983; 고성국, 1991; 김일영, 1991; 최장집, 1996; 이재봉, 1996; 김수진, 1996; 박명림, 1996; 김영명, 1999; 문병주, 2005). 4월혁명의정치사적성격을분석한이들연구는 4월혁명직후의급격한정치변동에집중했다. 셋째, 4월혁명의역사적의의와실천적함의를재조명하는논의이다 ( 백낙청, 1980; 강만길외, 1983; 강정구, 1998). 이러한논의들은 미완의 4월혁명으로부터부여받은민족사적과제들을현재적맥락에서어떻게풀어갈것인가에무게를두어, 4월혁명의정신을실천적으로계승해야할필요성을강조해왔다 ( 홍성태, 2010: 156-157). 93
그러나최근사회운동분석이활발하게시도되었던사회학분야의학술풍토에서본다면 4 월혁명에대한사회운동론적분석은크게제한되어있다 ( 조대엽, 2010: 134). 4월혁명의발생원인이나전개과정중특정부분과현상을부분적으로설명하려는방편으로서구의이론을비판없이적용하거나, 서술에서목적의식이과도하게나타나기도한다. 한편, 4월혁명의참여과정은개인과집단의정체성형성을복잡한관계의구성적결과물이자객관적구조나자원, 제도로만환원할수없는문화적현상임에도이를간과해온측면이크다. 나아가연구자들이민주화이행과공고화과정에서나타난민중운동의침체와새롭게등장한시민사회의활성화란상황에주동적으로결합하면서 4월혁명에연구에대한의지와여건도약화되었다. 2010년 4월혁명 40주년을맞이하여다양한학술심포지엄이개최되었다. 그럼에도, 4월혁명에대한연구수준이한차원높아졌다고보기는어렵다. 4월혁명연구가학문적 실천적역할을수행하기위해서는단순한서술이아니라사회현상의존재양식, 또는생성경로를인과관계로설명할수있어야한다. 4월혁명의구조와행위동학에대한구체적인분석과설명력을확보하기위해서는다차원적 ( 거시-중범위-미시적 ) 접근이요구된다. 일반적으로거대한사회변동과이를추동하는집합행동은개인과집단의정체성형성을복잡한관계의구성적결과물이자객관적구조나자원, 제도로만환원할수없는문화적현상이다. 따라서집합행동에참여한사람들의개인적 사회적의미파악, 주관적의식의심층적이해에최대한접근해야한다. 그리고연구자가특정한가치를견지하는것을부정할수는없지만, 과도한정치적편향성과목적성을제어하기위한연구자의자기성찰과거리두기도필요하다 ( 이창언, 2009: 31-33). 4. 4 월혁명의기억과변용 : 국가의욕망과혁명정신 민주주의의왜곡 4월혁명은하나의역사적사건에머무르지않고정치적상징으로서이해되어왔다. 50년간 4월혁명을둘러싼기억투쟁즉, 공공기억나아가공식역사로승인받기위한투쟁은지금도계속되고있다. 이는기억과역사가하나가아닌복수의형태로존재하며다양한변화가능성을내재하고있다는사실을보여준다. 기억은망각을전제하고현재적인관점에서재구성되기도한다. 50년에걸쳐국가는 4월혁명에대한사회적망각혹은조직화된망각을강요하기위한이데올로기적작업을시도해왔다. 그것은특정한기억의구축과유지를위해특정한부분을부재케하거나침묵하게끔하고철저히타자화하는역사적과정이었다 ( 이창언, 2009: 53). 국가에의한 4월혁명에대한기억과망각의시도는항상현재적시점에서출발하여과거를재구성하고미래에대한비전을제시하였다. 필요에따라서은폐되었던과거가공론화되고, 실질적이든형식적이든사회적기억으로부상하는기회와공간을열어주는 역사적포획 을시도하기도한다. 94
여기에서는 4월혁명에대한기억과망각 ( 금단과배제와선택적포섭 ) 의장치와담론, 그리고이를통해국가가무엇을욕망했는지를역사적흐름을따라살펴보겠다. 정치적상징으로서의 4월혁명은헌법이 4 19혁명을대한민국의자유민주주의이념의정신적기반으로서규정한이후명목상으로는국가수준의상징체계로자리잡았다. 4 19 혁명이국가의공식적인기념일로규정된것은 1973년이지만, 사건발생다음해인 1961년부터서울시주최로기념행사를치러왔다 ( 현종기, 2010: 7). 그러나 5 16쿠데타가일어나면서상황은크게달라졌다. 모든정당, 사회단체가해산되면서기념사업추진단체도해산되었다. 이렇게되자직접피해자집단인 4월혁명유족회 ( 이하유족회 ) 가 4월공원( 묘지 ) 추진위원회 를구성하고, 당시대통령윤보선과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박정희에게 4 19혁명기념사업의추진을요청하였다. 군사정변후처음맞는 4 19기념일에가시적행동을보여줄필요를느낀 5 16 군사정권은재건국민운동본부산하에 4월학생혁명기념비건립위원회 를조직하여추진토록하였다. 이렇게 4 19기념사업이국가주도로추진되면서사회단체는물론유족회조차도기념사업과정에서배제되었다 ( 정호기, 2002). 오랜시간이흘러김영삼정부가 1994년대통령령에의해 4 19의명칭을기존의의거에서혁명으로변경하고수유리 4월묘지를국립묘지로성역화함으로써기존의형식적인위상에서벗어나실질적인국가상징체계를획득하게된다. 1) 4 월혁명과기억의터 프랑스의역사학자피에를노라는동상과같은기념비를 기억의터 라고칭했다. 기억연구의선구자인프랑스의사회학자모리스알브박스는기념비와같은것들을기억의형상, 기억의표식이라고불렀다 ( 김기봉, 2006). 기억이자칫망각의먹이가되는일이없도록하기위해서는그기억을잡아줄지지물이필요한데, 그대표적인것이공간 ( 항쟁지 ), 시간 (2.28, 3.8, 3.15, 4 19), 상징물 ( 기념비, 동상등 ) 이다. 국가는기억의장치로서선양시설, 기념행사, 인물의발굴과표상, 보훈관련법과제도를통해 4월혁명의역사적의미와희생에대해기리고국민으로하여금국가에대한희생정신과애국심함양의상징물로써활용한다. 기억의장치들 선양시설 사례 기념비 ( 탑과동상 ), 기념관, 자료관건립, 묘지설치와성역화 기념행사 기념식, 문화행사, 학술행사 인물발굴과포상 4월혁명희생자및공로자에대한훈포장, 4월혁명관련단체관리지원. 법과제도 기념일제정, 국가보훈제도에관한주요법률 < 표4> 4월혁명과기억의장치 먼저, 선양시설물은 4월혁명참가자들의희생을상징화하여국가에대한희생정신을일깨우는것을목적으로한다. 국가의존속과발전은역사적인이슈가되는사건들에대한기념일의지정과지원을통하여국가정체성및존속의의미를되새기도록하는상징역할을한다. 95
4월혁명인물발굴과포상은 4월혁명에참여민주주의에공헌한유공자의희생과공헌을국가가잊지않는다는것을국민에게인식시키는상징역할을한다. 1977년부터국가보훈처가행정자치부 ( 구총무처 ) 로부터독립유공자포상업무를인수한이래 2008년 2월 29일현재 4 19혁명희생자와공로자에대한훈포상이이루어졌으며그들의명단과공훈록이작성되었다. 김영삼정부의임기말기인 1997년 4월 25일 국립 4 19 묘지령 을대통령령제15360호로제정, 서울과마산에국립 4 19 묘지를설치하고성역화하였다. 4월혁명기념사업의역사에서가장뚜렷하게나타나는현상은 기념탑 의건립이었다. 2 28기념탑 ( 대구, 1962) 과 4 19희생자위령탑 ( 부산, 1961) 이시민의성금으로세워진데반해, 3 15의거탑 (1962) 과 4 19기념탑 ( 서울, 1963) 은국가차원에서건립되었다. 이시기박정희에의해추진된 4월혁명의기념사업은쿠데타를통한국가권력의장악을정당화하는동시에채식지않은혁명의열기에정치적화상을입지않기위한일종의포섭전략에지나지않았다 ( 홍성태, 2010). 4월혁명기념사업을통한역사적포획이이루어진일도있다. 김영삼정부가정권의정통성확보와안정화를위해국가독점적방식으로기념사업을수행하면서 4월혁명의저항성은극도로하락하였다. 저항공동체는물론이고, 주요 4월혁명관련대학에서조차기념행사를개최하는일이드물어졌다. 기억투쟁을주도했던세력들이 4 19혁명에대한국가주도의재평가와기념사업과정에서입지를상실하고제각각분리되어버린것이다 ( 정호기, 2002). 그러나 4월혁명유공자에대한법적제도적지원은다른국가유공자지원보다상대적으로미비하였다. 2) 교과서와연설문에드러난국가의욕망 : 4 월혁명과민주주의의왜곡 4 19의자유민주주의정신은비록정도의차이는있을지몰라도역대정권의정통성과이념적정당성을주장하는정치적상징으로활용되었다. 지배는동의에서이루어지는것처럼폭력적인강제보다는이성에기초한대중의동의를내면화하는방식을선호한다. 학교등사회적으로공인된기구들에의해공급되는정보를통해특정한가치와편견에내면화된무의식은사회지배와통제의효과적인토대가될수있다흔히지배집단이교육을통해그들의이데올로기를관철하는방식은크게네가지차원즉, 교사에대한통제, 학생들에대한통제, 교육기관에대한통제, 교육내용 ( 교과서 ) 에의한통제로나누어볼수있다. 특히학교교육의매개수단인 교과서 는그사회의구조와특징에의해선택되고강조된지식의최종구성물이라고할수있다. 한국사회에서 4월혁명과 5 16에대한용어선택은개인과집단의이념적성향을분류하는데지표가되기도한다. 그것은이미정치적태도를포함하고있다. 4 19와 5 16은상호보완될성질이아닌대립적인역사적사건이자정치적상징이다. 따라서 4월혁명과 5 16의명칭과의미부여는 80년광주민중항쟁이발발하기전까지기억투쟁의최전선에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정권시기에 4 19와 5 16의용어는각각의거와혁명으로거의고정화되어있었다. 96
4 19 용어 4 19 의거 5 16 용어 5 16 혁명 /5 월혁명 4 19 학생의거 4 월의거 4 월의거 4 19 의거 5 월혁명 5 월혁명 5 16 군사혁명 담론반공 안보개발 안보개발 안보 교육과정 2 차 3 차 4 차 5 차 정권기 1 차군부권위주의 2 차군부권위주의 민선군부권위주의 4 19 용어 4 19혁명 5 16 용어 5 16군사정변 담론 민주개혁 세계화 / 민주개혁 성장발전 민족화해 / 민주개혁 복지 성장 교육과정 6차 7차 2007, 2009 개정교육과정 정권기 김영삼정권김대중정권노무현정권민주화이행과공고화시기 < 그림2> 시기별 4 19/5 16용어 3) 1 차군부권위주의시대 (1) 교과서 1972년박정희는유신을준비하면서 1972년 3월 24일대구실내체육관에서한국최대규모의교육자대회를개최한다. 이날박정희는 국적없는교육을국적있는교육으로, 우리국가의현실에알맞은교육을위하여주체적민족사관을정립할것을역설한다. 중 고등학교국사교과서가국정교과서로바뀌었으며국적있는교육은유신이끝날때까지장학사들의입에서반복되었다. 박정희는직선제폐지, 삼권분립위배, 긴급조치등민주주의의후퇴로이해되는유신체제를한국적민주주의로위장시키고국사있는국사교육으로정당화시키려했다 ( 신은제, 2006: 117-118). 아래내용은 1972년도고등학교국사교과서이다. 시대의변화상에따라수정판이나오지만, 박정희정권의기본적인시각이잘드러나있다. 서술된내용과서술체계를간단히요약하면공산주의는침략자이자파괴자따라서민족적위기의원인 위기 2 이승만정권경제복구와혼란수습이라는민족사적과제방기, 부정과불의만연 위기 2 3 4 19는학생들의순진한정의의발로민족의불운을극복하고참된민주주의운동 위기극복시도 4 무능력한제2공화국등장과용공세력의혼란조성 위기극복이아닌혼란과중- 위기 3 5 5 16은조국과민족을수호하고민족을구출을위한구국적행동 진정한위기극복 이었다고결론을맺는다. 4 19와민주수호 라는제목과달리 4 19는대단히간단히서술되어있고 5 16을수식하는도구로비교적비중이작게다뤄지고있음을알수있다. 97
우리는 6.25사변을통하여공산주의자들의온갖만행과허위선전을몸소체험하였다. 그리고자유와민주주의의고귀함을다시한번깨달은동시에, 국토분단으로야기된민족의비극을뼈아프게느꼈다. 1950년대있어서우리는너무도할일이많았다. 6.25 사변으로파괴된경제를복구하고, 정치적, 사회적혼란을수습해야하는등수많은과업을안고있었다. 그러나민주주의를이땅에굳게뿌리박는일은여의하지않아 ( 중략 ) 마침내정의에불타는학생들을주축으로하여, 4 19의거가일어났다. 4 19의거는학생들의순진한정의감의발로이며, 부정과불의에항거하는민족정기의표현이었다. 즉, 4 19의거는민족의불행한운명을극복하고참된민주주의를이땅에심기위해일어난민주운동이었다. 그러나 4 19 의거후수립된제2공화국은정치적, 사회적혼란과경제적파탄을수습하지못하였다. 극도로문란해진사회질서를바로잡는치안유지도할수없을정도여서, 이혼란을틈타서용공세력이대두하고심지어일부분별없는학생들이공산주의자들의선전과선동에넘어가판문점에서소위남북협상을하자고주장하는위험한사태까지일어나게되었다. 당시의사회적혼란과용공적인풍조는실로조국을공산침략자에게내맡기자는것과다름이없는것이었다. 유구한역사를통하여이민족의침입에맞서조국과민족을수호하고국난을슬기롭게극복한전통을이어받은우리국민들은, 오늘의국난을어떠한형태로든지극복하지않으면안되겠다는것을뼈저리게느끼게되었다. 이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의침략으로부터조국을수호하고민족을구출해야겠다는신념을가지고일어난것이 5 16혁명이었다. 74년도고등학교국사교과서 (V. 현대사회, 2 민족중흥의새전기 (1) 민주주의성장 ) 에서는 4 19에대한서술이 1972년교과서보다더짧게서술되어있다. 4월혁명에대한전개과정과거의없고정권교체과정만건조하게서술되어있다. 오히려휴전의성립, 한미동맹의강화와파괴된산업시설의부흥에힘썼다는내용이더많이서술되어있다. ( 전략 ) 민심을등진자유당은마침내는 1960년선거에서이승만박사와이기붕을정 부통령에당선시켜정권을연장하려고부정선거를감행하였다. 그러나독재와부정선거에분노한학생들의 4월학생의거로말미암아자유당정권은무너지고이승만박사는물러나게되었다. 79년고등학교국사교과서 (V. 현대사회 ) 에는 (1) 민주주의성장파트에 4월의거 (296쪽), 5월혁명 (297-298쪽), (2) 대한민국의발전파트에경제성장 (298쪽), 새마을운동 (299쪽) 순으로구성되어있다. 여기서도 4 19는 1쪽분량에불과하다. 수유리소재 4월의거기념탑사진 108) 을실어혁명의역동성은거세되었지만, 5월혁명항목에는혁명공약 6개조를전제하 98
여친절히혁명의당위성을제공하고있다. 박정희정권기시기발간된모든국사교과서는 5 16의정당성을설파하기위해민주당정권의무능상태를강조하고있다. 그이유는박정희는 4월혁명을통해등장한합법적정부를불법적인쿠데타로무력화시켰기때문에정통성을가질수없었다. 따라서처음부터자신들의행위를정당화시키기위해엄청난정치적상징과언술을동원했다. 교과서에서는민주당정권의무능과무정부상태를과장하는한편국가재건최고회의의역할과업적을과도하게치하하고있다. 아래는 1974년고등학교교과서이다. ( 전략 ) 불구하고집권초부터신 구파의파쟁을일으켜국민의성원과기대를어겼다. 그리고국민가운데분별없는자유를주장하여가지각색의자기주장을요구하는데모사태가벌어졌고, 심지어데모대가국회의사당을점령하기까지에이르렀다. 민주당정부는이와같이사회질서를유지할능력을상실하고말았다. 이리하여박정희장군을중심으로하여일어난혁명군은대한민국을공산주의자들의침략위협으로부터구출하고국민을부정부패와불안에서해방시켜올바른민주주의국가를건설하기위하여 1961년 5월 16일혁명을감행하여정권을장악하였다. 혁명군은곧국가재건최고회의를구성하여국민에게 6개조의혁명공약을발표하여그이념과당면과제를분명히하였다. 국가통치권을행사하는국가재건최고회의는의욕적이고도참신한설계로국정을과감하게개혁하였다. 우선반공태세를정비하고사회기풍을쇄신하였다. 폭력배일소, 밀수품단절, 부정선거원흉과부정축재자의처단, 농어촌고리채정리등사회모순을과감하게제거하고, 자립경제의터전을마련하기위하여경제개발 5개년계획을추진하는등 ( 하략 ) 박정희정권은군정시기는물론유신독재전과정에서반공과경제발전을앞세웠다. 그리고여기에민족주의를교묘히결합하였다. 반공과건설을통한민족의재생에적임자로스스로를포장하였던것이다. 교과서의 5 16에대한서술에서는민족의절박한운명을해결하는길은반공체제를강화하고자주경제에총력을기울이는것임을강조하고있다. 적 ( 공산주의 ) 으로부터자유 ( 남한 ) 를지키고통일을완수하는길은공산주의에앞서는것이고 ( 건설 ) 이를위해총화단결 ( 박정희지지 ) 을해야한다는것이다. 5 16혁명으로적 ( 북과용공세력 ) 의야욕은분쇄됐고, 근대화는성공적으로진전되고있다는것이다. 5 16은다시유신으로계승되었으며 10월유신을통해민족의지상과업인평화통일과근대화과업, 그리고번영을이룩해야한다고결론을짓고있다. 아래는 1972년국사교과서이다. 우리는공산주의자들의침략으로부터국가와민족을구출하기위해일어난 5 16혁명은우리에게새로운희망을안겨주었다. 혁명정부는국민앞에내세운혁명공약을통하여반공체제를재정비, 강화하고, 자유우방과의공고한유대밑에서모든부조리를일소하고자주경제에총력을경주하여강력한국력을배양하고, 나아가서민족의숙원인통일을이룩하자는것을목표로제시하였다. 혁명공약에서밝힌반공체제의재정비는국난에처해있는조국을공산주의의침략으로부터구출하기위한것이었다. 그래서공산주의의침략을분쇄하고민족의염원인통일을이룩하기위하여, 우선적으로근대화를이룩하는데총력을다하고통일에대비하는우리스스로의주체적역량의배양에힘 99
을썼다. 공산주의자를굴복시킬수있는길은, 정치, 경제, 사회의모든면에서그들을능가하는우리들자신의힘을배양하는길밖에없는것이다. 그리하여국토통일을위해서는우선자립경제의터전을닦아야하므로,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을세워힘차게매진하였다. 한편, 5 16혁명으로한때날뛰던용공분자와북한공산집단의침략야욕은여지없이분쇄되었으며, 우리국민의반공정신과통일에대한신념은한층강화되었다. 그리하여우리국민의절실한요망은제3공화국의탄생으로결실되었으며, 그동안우리는 3차에걸친경제개발 5개년계획을성공적으로매듭짓고, 다시제4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을시작하여, 이미닦아진공업분야의눈부신터전위에농촌근대화에박차를가하고있다. 지금전국방방곡곡에울려퍼지고있는 새마을운동 은우리농촌을근대화하기위한원동력이될근면 자주 협동을통한정신적각성이며분발일뿐만아니라, 올바른국민윤리의정립과경제개발촉진운동으로서농 공병진의희망에찬이나라의번영을약속해주고있다. 그리고우리를싸고도는국제정세에능동적으로대처하고민족이염원하는평화통일을이룩하기위해 10월유신을활발하게펴나가고있다. 우리의 10월유신은자유민주주의를이땅에뿌리박고, 우리민족의지상과업인평화통일과근대화과업, 그리고번영을이룩하기위한것이다. 따라서우리에게부과된작업을위해일면건설, 일면자주국방의태세를굳건히하여총력안보를위해매진하고, 번영을향해힘차게전진하여야하겠다. 4 19의서술에서는반공주의와민족주의를접합하고자했다면 5 16에대한서술은반공에더하여발전주의를보다강조하는한편이를민족주의와접합시키고있다. 물론두개의서술에서공통으로보이는것은 적과우리 라는담론과위기와기회 ( 극복 ) 의이분법적담론을활용한다는것이다. 1979년교과서 (298-299쪽) 에는 5월혁명에대한설명에이어곧바로 (2) 대한민국의발전부분이이어진다. 이파트에는군사혁명이 3공화국으로이어지는과정과 3공화국이경제발전을정력적으로추진하였고수출액이증가했음을그래프로제시하고있다. 한편, 한일문제의타결과제3세계각국과의교류확대, 자유민주주의의수호자로서베트남파병을제3공화국의치적으로소개하고있다. 새마을운동 (229쪽) 파트에서는 5 16 이후정부주도하에 3차에걸친경제개발계획이성공했음을홍보한다. 특히경제성장면에서북한을월등히능가했음을치적으로소개한다. 국민교육헌장제정, 새마을운동이갖는의미를서술하고있다. 경제성장 : ( 전략 ) 제3공화국은경제발전에역점을두어, 3차에걸친경제개발 5개년계획을성공적으로완수함으로써, 후진성을극복한경제자립의터전위에세워놓았고, 다시 1977년부터는제4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을추진하고있다. 한편, 국제정세의변화에대처하여 ( 중략 ) 한 일문제를타결하여우호수교관계를수립하였으며, 동남아시아와아프리카의여러나라와수교하였고, 국제협력을아끼지않았다. 새마을운동 : 5월혁명이후정부주도하에 3차에걸쳐이루어진경제개발계획의성공은북한을월등히능가하는경제성장을이룩하였을뿐만아니라, 경제적중흥의세전기를마련하였다. 정부는농촌근대화와민족중흥을이룩할새로운국민의식을고취하기위해, 1968년에는국민교육헌장을제정하였고, 1970년부터는새마을운동을일으켰다. 그리하여농촌의생활을개선하고, 소득증대를꾀하였으며, 이를통하여농촌의근대적자 100
주의식을정립시키면서 ( 하략 ) 박정희가절박한민족적과제로집권내내강조한것은조국근대화곧경제발전이었다. 이러한배경에는당시국민의가난으로부터의해방이라는열망, 경제의상대적우위에기반을둔북한의통일논의, 경제적자립을요구하던미국의대한정책이라는정치적상황이있었다 ( 전재호, 1998: 95, 100). 박정희는국민의이러한열망을이용하여 4월혁명을교묘하게또다른위기의산물로포장하여 5 16의정당성을설파하려고하였다. 박정희는민족주의담론에반공주의와발전주의를절묘하게결합시켰다. 특히반공과개발독재는경제발전의불가피한요소로서중심적가치로자리잡게된다. 그리고경제발전을위해억누르는통제형식과비민주적인비상한수단이용인되고절박한민족의생존을위한경제발전이란담론은개인의자유, 정치적평등과같은가치들이쉽게배제되고억압될수있음을보여준다 ( 이수인, 2003: 1219). (2) 대통령연설문 1962년박정희는 3.1운동이나광주학생운동의정신계승을계승한이나라젊은이의순결한죽음으로써민주주의를수호하였다고치하한다. 1963년에도박정희는 4 19를 민주사상불멸의금자탑 이라고치하했지만 우리는언제있을지모를남북한의통일선거에대비하기위해튼튼한자유민주주의적민족세력은총단합하여범국민적지도세력으로집결해야할것 을강조한다. 박정희시대에는 5 16 혁명을 4 19의거의연장으로설명하면서군사정부의태생적한계를합리화하는데 4월혁명을활용하였다. 특히 우리는어떤의의깊은지난일을기념할때마다그것이오늘의현실에어떠한의미와교훈을주는가를깊이인식하지않으면안될것 이라며기념사가군사정권의정당성을선전하는도구로사용됨을보여준다. 역대대통령가운데 4월혁명과관련가장많은연설문을남긴박정희의기념사가갖는첫번째특징은군사정권의정당성을홍보한다는것이며둘째, 기념사를현실정치와연결해적극적으로활용한다는점이다. 1 4월혁명정신은기능의분할과한계 : 참여민주주의제한 4 19 5주년기념식기념사에서박정희는 6.3항쟁을근대화의여건인 안정과질서에반하는불안과무질서와혼란 으로규정한다. 그는이어서 불행 (6.3항쟁) 은한번으로족한것이며, 두번다시일어나는어리석은난동의연출 이라며, 여기에관련되는사람이나나라의장래를위해서돌이킬수없는비극의단초가될것은분명 하다고하였다. 일국대통령의발언으로는믿기지않을정도로 6.3시위를비난하고있다. 박정희는소위국가의기능적운영을위한역할분담론을통해서학생들의현실참여와민주화운동참여를원천적으로봉쇄하고자했다. 4주년기념사에서는 학원에서학연 ( 學硏 ) 에전념하는본연의자세 를강조함과동시에 학원의자유를보장할것 이라고했지만이말은 6 3항쟁이후거짓임이드러났다. 4월혁명기념연설문에서드러난담론중하나가 101
정치는정치인이학생은배움의길 이라는이분법적도식이었다. 그는 민주사회의기초를이루는것은기능의분할 ( 分割 ) 과한계가명백하다는데있다 며 학생들이사사건건정치인의역할을대행하겠다는끈덕진집념이없어지지않는한이땅에서민주주의를기대할수없을것 이라고잘라말하고있다. 모든국민은각자가맡은분야에서, 자기의임무를생산적으로실천하는데온갖노 력을기울여나가야할것입니다. 4 19 의진정한의의도여기에있고, 이념이나정신도 여기에서찾아야할것입니다. (4 19 7 주년박정희대통령기념사 ) 기능의분할과한계 가곧 4 19 정신으로둔갑한다. 박정희는대통령연설문을통해 역할분담론 을 4 월혁명정신으로정의하여참여민주주의제한을정당화하려고하였다. 2 무능한야당론, 대안정치세력부재론 : 협의민주주의부정 박정희는 6 주년기념사에서노골적으로야당무능론과대안정치부재론을들고나왔다. 4 19가정치담당자가아닌청년학생들의순수한애국심에의해추진되었고, 또그결과 4,19의정신과이념을계승할만한정치세력을가지지못하고있다는사실은필연적으로우리에게또하나의커다란시련을안겨주고있는것입니다. 이념적인정치담당세력의공백상태는 4 19의숭고한정신을가장한또하나의다른낡은세력을등장시킬수밖에없었던것이며, 정권을넘겨받은이들소신없는정치인들에의해서는모처럼싹터나온새로운힘과밝은가능성도여지없이짓밟히고말았던것입니다. 청년학도들의순수한염원은낡은정치인들의무정견한소행때문에허물어져버렸고, 서정의쇄신은커녕이권의권력쟁탈과화신이되어버린자들의추잡한난투때문에병들어버렸고, 법과질서는극도로문란해져내일을예측할수없는누안의위기에허덕여야했던, 그것이바로 4 19에이은이나라, 이사회의모습이었다는것은누구도부인치못할비극이었던것입니다. 5 16 은무능한야당에의해 파멸직전에처한조국의위기를구제하고, 민족중흥의기 틀을마련코자한혁명의필연성과역사적사명 이었고 5 16 혁명은 4 19 의거의연장 선 이라고스스로치하하고있다. 3 민족의참다운모습 : 저항이아닌협조와창조와건설박정희는 6주년기념사에서국민에게 4 19가구질서의종말을의미해야함은물론이나, 새역사건설의출발점으로이해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모든국민이일심동체가되어, 바야흐로본격적궤도에올라서고있는조국의근대화작업을하루속히성취하기위해서적극적으로참여하고, 힘을합쳐분발해나아가는생산적이고건설적인자세에서 4 19 의거의올바른정신을찾아야할것 을당부한다. 박정희의이러한언설은 4월혁명과역사에대한심대한왜곡이자국민동원을위한선동임에도일정한동의를형성한다. 최소한국민들이근대화에대한기대와성취사이의모순이심하되기전까지는말이다. 박정희는 50년대반공체제의한계인테러와네거티브 102
(Negative) 한반공주의에개발을접합하며포섭과포지티브 (Positive) 한전략을구사함으로써강력한모습을구축하기시작한다. 이로써실질적인반공으로서의경제발전이추진되고민주주의와산업화라는두개의욕구에대응해산업화에대한민중적욕구를전취해나간다. 이과정에서 4월혁명에서제기된민주화의이슈들은폐기함으로써반공-자유민주주의와개발의결합방식은조기퇴출당하고반공-개발만이추진되게되었다 ( 김혜진, 2003: 47). 4) 군부권위주의시대 (2 차 ), 민선군부권위주의시대 (1) 교과서전두환 노태우정권기에도 4,19와 5 16에대한정부당국자의인식은크게변한게없다. 그이유는이들은박정희의정치적양자이자 12.12 군사쿠데타와광주학살의주범이라는태생적한계로부터시작된다고할수있다. 1982년도고등학교국사교과서 ( 하 ) 는 (2장 " 민주주의발전의새전기 " 는 ' 개요 ', ' 연구과제 ', '(1) 민주주의성장 ' '(2) 대한민국의발전 ) 는개요와연구과제만추가되었을뿐, 박정희정권말기와크게다르지않다. 개요를살펴보면서두가 6 25남침으로시작되며, 4월의거와 5월혁명을거치면서위기를극복하여 3공화국이성립되었다는점, 3공화국이반공체제를굳히는한편고도성장을이루었다는점, 농촌근대화와국민의정신혁명을진작시키기위해새마을운동을전개했다는점까지구성이거의유사하다. 다만, 차이가있다면 10월유신을단행하여 4공화국이성립되었으나정치체제를둘러싼정치 사회적불안이있었다." 고추가서술한다는점이다. 이는박정희정권에대한부정이아닌새로운정권 (5공화국) 탄생의정당성을부여하기위한언술로보인다. 개요의마지막대목은전두환정권의의도를잘드러내고있다. 그러나이러한문제를 ( 정치체제를둘러싼정치 사회적불안 ) 잘극복하고제 5 공화 국이출범하여정의사회구현과민주복지국가를지향하면서새로운시대로의발전을하 게되었다 전두환정권시기에는교과서에는 4 월혁명에대한의의와항쟁의전개과정은전혀언급 하지않고정권의교체과정에대해서만일간지의사건보도처럼기술하고있다. ( 전략 ) 국민전체의이익보다일당의정권욕망을채우기위하여민주주의의기본원 칙마저함부로어기는처사와독재와부정부패, 부정선거에분노한국민들은 4 월의거 를일으켰다. 이로인하여자유당정권은무너졌다 (1982 년도 ). 5 16에대한교과서서술은박정희정권기와유사하게 민주당정부가사회질서를유지할정치력을발휘하지못하고있었으며, 이러한국내혼란은호시탐탐남침을노리는북한공산주의자에게오판의기회를주는중대시국을초래하기에이르렀다, 이에 박정희등군인들이, 사태의심각성에비추어국가를위기로부터구하고국민을부정부패와불안 103
으로부터해방시켜민주국가를건설하자는기치아래 5 월혁명을일으켰다 라고서술한 다. 따라서전두환노태우정권은박정희정권과유사한시각에서 4 19 와 5 16 을인식하 고있음을알수있다. (2) 대통령연설문전두환 노태우, 두대통령은공식적으로 4월혁명기념식연설을하지않았다. 따라서대통령연설문이없는관계로여기서는별도로언급하지않겠다. 다만 4월혁명에대한교과서분석에서확인되듯이박정희정권와인식론적차이는크지않으리라본다. 일례로 4 19혁명 20주년을맞은전국에서기념식과추모제등갖기지행사가개최되어부정과독재에항거, 피로써민주의승리를이룩했던그날이뜻을되새겼으나정부가주관하는기념식에는부총리가기념사를하는등 4 19를애써외면하였다. 전두환, 노태우정권시기 4 19는정부와시민사회의긴장과갈등이증폭되는시기였기도했다. 5) 민주주의이행과공고화시대 민주주의이행, 즉권위주의에서민주주의로의변화과정은여러국면을포함하는복합적과정이다. 이과정은권위주의정권의퇴진을위한투쟁이최고조로이르고, 그를통해권위주의정권이붕괴하는국면과권위주의정권의민주적개혁을위한과정이진행되는시기임과동시에권위주의가약화된그자리에시장의영향력이확대 강화되는과정을포함한다. 민주주의이행과정은일정하게국가에의한사회의식민화를벗어날수있는조건을형성하는것이었다면곧이어등장한신자유주의의막강한영향력앞에시장에의한식민화가진행된다. 민선군부정권을거쳐 1차민선민간정권인김영삼정권은두가지상반된역사적흐름, 즉한편으로는 3당합당으로상징되는역사반동적보수의흐름과다른한편으로는아래로부터의민중저항의물결속에서솟아오르는민주화투쟁이흐름이맞물려지면서탄생한정권이라는데있다고할수있다 ( 조희연 조현연 박상병, 2001: 323) 결과적으로세계없는세계화 ( 국제경쟁력우선주의, 세계화추진 ), 노동없는민주주의 ( 노동법파동 ), 민족화해없는반북대결 ( 한총련사태 ) 정책으로귀결되었지만, 문민정부초창기에는개혁의움직임도거셌다. 특히전 노구속과역사바로세우기작업과연동되어 4월혁명과 5 16에대한재조명은많은환호를받았다. 김영삼정권기에는 4월혁명을한국민주화운동의시발이며위대한국민의승리로평가하면서기념일의명칭을의거에서혁명 (4월혁명) 으로변경하고 4 월묘지성역화와국립묘지로승격시켰다. 이와동시에 4 19정신은넓은의미로생각하면바로개혁정신이라면서개혁을심화하고확대하는것이 4 19정신을올바로계승하는것이라고밝혔다. 그럼으로써문민정부가헌법에명시된 4 19혁명의자유민주공화국의이념적기반을역사바로잡기차원에서바로세우고, 나아가 4 19세대가집권의주도세력으로서군사정권을종식하고개혁을주도하는정당성의근거로활용하였다 ( 한종기, 2010: 8). 1993 104
년 4월 19일 4 19 의거 33주년을맞아, 김영삼대통령은현직대통령으로서는처음으로수유리 4 19 묘지를참배하고, 이전신축한유영봉안소에분양, 참배한뒤수행한수석비서관들과조찬을함께하기도하였다. 이러한변화를반영하듯김영삼정권시기교과서 ( 공통사회 ) 의내용은이전과는다른시각에서 4 19와 5 16을서술하고있다. 3. 민주주의의시련과발전의 개요 는다음과같다. 6.25 전쟁후이승만정부의장기집권획책은정치적으로는독재를가져왔고사회적으로는부정 부패를조성시켰다. 그러나국민들의자유와민주주의에대한열망은 4 19 혁명으로이어졌으며, 그결로이승만정부가무너지게되었다. 이를계기로민주당의장면내각이성립되었으나, 안정을이룩하기도전에 5 16 군사정변이일어나군정이실시되었다. 군정에이어서성립된박정희정부는경제성장과국력신장을위하여적극노력하였다, 이에따라경제는급속하게성장할수있었고, 산업화와도시화가이루어져사회모습도크게변하였다. 그러나유신체제의성립으로박정희정부는민주헌정체제에서이탈했고, 이에대한국민들의저항과민주화요구가강하게나타나게되었다. 유신체제에서비롯된권위주의적통치체제는결국 6월민주항쟁으로무너져갔다. 교과서에서 4 19 는다음과같이성격이규정되고민주발전에이바지한공로가인정된다. 4 19 혁명은학생과시민들이중심이되어독재정권을무너뜨린민주혁명으로서우 리민족의민주역량을전세계에보여주었다. 이를계기로우리나라의민주주의는새롭 게발전할수있었다. 그리고지금까지와달리 5 16은초유의헌정중단사태이자군사정변으로정의된다. 민주당정권의위기관리능력의한계보다는일부군부세력의권력야욕에초점이맞춰진평가와서술이라할수있다. 나아가유신체제의권위주의적통제에대한비판과한국민주화의분수령이었던 6월민주항쟁에대한긍정적인역사적인평가라할수있다. 박정희를중심으로한일부군부세력이사회적인무질서와혼란을구실로군사정변을일으켜정권을잡게되었다. 4 19혁명이후출범하였던장면내각은자유민주주의의실현을위해노력하였으나, 5 16군사정변으로 9개월의단명으로끝나게되었다. 군사정변을일으킨군부는즉각헌정을중단시켰으며, 군부세력이중심이되어국가재건최고회의를구성하고군정을실시하였다. 군사정부는혁명공약에서반공을국시로천명하고경제재건과사회안정을내걸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제정하여구정치인들의정치활동을전면적으로금지시켰다. 그러나김영삼정권시기의교과서 (1996) 에는몇가지치명적인한계도발견된다. 장면정 권등장이후민주당내의심각한정치적갈등과새정부에대한국민지지도의하락을 언급한것은옳은지적이다. 그러나국가위기의원인을국민의자유에대한열망의분출 105
로돌리고있는대목이나, 박정희의국가주도경제성장전략을아무런성찰없이긍정하는 태도에서김영삼정권의한계를보지않을수없다. 이는국가의이익을위해서라면개인 의자유는제한될수있다는시각을은연중에드러내고있는것이라할수있다. 뿐만아니라, 사회적으로는자유만을주장하면서자제할줄모르는일부국민들의과 도한욕구분출로시위가계속되었으며, 사회의무질서와혼란이지속되었다. 이로인하 여장면내각은정치력을발휘하는데어려움을겪었다. 김영삼정권은박정희를비판하고그와투쟁을전개했지만, 성장과발전주의로부터자유로웠던것은아니었다. 연구과제중 3. 6.25 전쟁이후북한은어떠한모습으로바뀌어갔는가?, 4. 우리민족의통일은어떠한토대위에서성취되어야하는가? 라는질문은분명히냉전반공주의가가진사회적영향력의경향적약화를보여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세계화논리의무비판적인수용속에서이루어진성장제일주의가현재우리사회가지향해야할궁극적인목표라는것을암시하고있다. 김영삼정권이후 4 19와 5 16에대한인식과교과서의서술변화는다른민선민간정권하에서도이어졌다. 그러나 4 19라는민주주의상징물을진전된경제적자유화담론과접합하여효율성, 경쟁력, 성장, 경제적합리성등을앞세운신자유주의세계화정책에정치적으로활용하였다. 김대중은 4 19 기념사에서 4 19 혁명을독재정권의불의와부정부패에맞서민주주의와정의를수호하고, 새로운국정개혁의방향을제시한우리현대사의자랑스러운업적 (1999.4.17) 이라고말하고있다. 문제는 4 19가새로운국정개혁을보조하는수식어로전락한다는데있다. 김대중이말하는 새로운국정운영 이란, 금융 기업 노사등 4대개혁을추진 성공하는것을의미한다. 김대중의 4 19 연설문은 4월혁명의의의를간단히언급한후, 국정의목표와추진성과를설명하는동시에국민에게고통과희생을감내할것을촉구하고있다. 그것은본인이민주화운동당시의발언, 그리고대통령취임사에서의발언에대한자기부정이라할수있다. 이러한연설은많은이들에게과거권위주의적산업화에의해구축된사회적지배관계의정상화를위한지배집단의희생을통한사회적통합의길을모색하지않겠다는것아니냐는의구심을주기충분했다. 4월혁명은단순한혈기나정열때문이아니라냉철한지성과자각에서우러나온헌신과희생의혁명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큰어려움에처해있는오늘날우리의 4월혁명은더없이귀중한교훈을던져주고있습니다. 자기희생을무릅쓰고행동하는국민이있는한그나라의희망이있다는사실을깨닫게됩니다. 우리는그동안국민의단합된힘을바탕으로, 그결과외환위기를극복하고금융 기업 공공 노사등 4대개혁을추진, 많은성과를거두었습니다 (4 19혁명제39년기념국가조찬기도회축하메시지, 1999.4.17). 지금우리는인류역사상유례가없는대변혁기에놓여있습니다. 지식정보화혁명이라 는거대한물결이우리생활을완전히바꾸어놓았습니다. 그리고세계는경제적국경이 없어지고무한경쟁을벌여야하는시대가되었습니다. 이모두가 20 세기와는전혀다른 106
생각과각오를갖지않으면국민의행복도, 나라의미래도있을수없다는것을말해주는것입니다. 새로운변화의물결에제대로대응하지못한다면우리민족은또다기비참한후진국의역사를되풀이할수밖에없습니다. 국민여러분저는이러한 5대과업즉민주주의, 경제개혁, 생산적복지, 국민화합, 냉전종식등의 5대과업을해낼수있습니다 (2 28 민주의거제40주년기념식연설, 2000.2.28). 위의 4월혁명연설문은김대중정권의국정의기본목표이자헤게모니프로젝트의목적으로야심차게설정한민주주의와시장경제의병행발전, 또는민주적시장경제의정당성을설파하고있다. 요지는세계화흐름 ( 노동시장의유연화, 탈규제화, 민영화 ) 에맞지않으면우리민족은공멸이라는위기의식을불어넣고있다. 이러한점에서노무현대통령도크게다르지않았다. 우리를둘러싼경제환경도어렵습니다. 선진국들은끝없이새로운영역을개척하며앞서나가고있습니다. 후발국들은빠른속도로우리를추격해오고있습니다. 새로운성장동력과발전전략이필요한시점입니다. 이러한안팎의도전을극복하고선진국으로진입할것인가의여부는바로, 오늘을사는우리에게달려있습니다. 위기는곧기회입니다. 오늘의이위기를슬기롭게극복할때, 우리앞에는새로운기호와가능성이펼쳐질것입니다. 다가올동북아시대의중심국가로세계앞에당당히서게될것입니다 (3.15 민주의거제43주년기념메시지 2003.3.15). 민주주의이행의시대에들어와반공주의적자유민주주의지배담론의사회적영향력이쇠락하는가운데, 자유민주주의담론이국가적차원에서명실상부한지위를차지하기시작한것은사실이다. 그러나이과정은이중적의미를지닌다. 그것은냉전반공주의에포획된비정상적인자유민주주의에서형식적민주주의를보장하는 - 자본주의국가의한민주적지배형태를의미하는 - 정상적인자유민주주의로의변화과정을의미한다. 그러나한편으로는민주주의에대항하는자유주의의제로섬적공세속에서시장자유주의로고정화된자유주의적민주주의의지배화과정을의미하기도한다 ( 조현연, 2003: 357). 한국사회의지배이데올로기가반공주의담론을기본으로하면서 1960년대이후근대화담론으로변형되었으며, 이것이세계화담론으로변형되고있는것이다. 4월혁명은반공 안보, 성장과개발, 민주화, 남북화해, 시장지상주의등한국사회변화에따라당대의지배이데올로기와다양하게접합되어활용되어왔다. 이후어떠한담론과 4월정신이접합될것인지는알수없다. 다만, 이를제어하는길은 4월혁명정신이무엇인지, 현재어떤민주주의로거듭날지에대한구체성을띤제시와사회적합의를이끌어내는것이필요하다고본다. 5. 민주주의와 4 월혁명 : 망각을강요하는상징적질서를넘어더많이소통하기 107
1) 4 월혁명의역사적의의 4월혁명은공권력의횡포에대한민권의승리를의미하는것으로서주권재민 ( 主權在民 ) 의민주주의원리를그대로입증하였다. 국민의지지와신망을받지못하는정권은결코존립할수없음을보여주었다. 4월혁명은민주이념은그후의정권담당세력의무능과경제 사회적기반의취약성 ( 脆弱性 ) 으로미완 ( 未完 ) 의상태로좌절되었다는점에서한국국민에게또하나의귀중한각성과교훈을안겨준계기가되었다. 4월혁명은우리에게현실의부조리를없앨수있는이상의추구와그추구를위한직접행동의의미를일깨워주었다. 그러나일부에서는 4월혁명이변혁적사상과이념으로무장한지도부와변혁적전략과전망의부재로실패한혁명으로평가하기도한다. 이런시각은보편적해방-국가권력을누가쟁취하고명령하는가의문제로귀결되는계급-국가정향적변혁-에기초하고있다. 목적론적역사관과역사에대한현재주의적시각 109) 에기초한위의이러한주장은사회변화과정에서개인의자발적참여와관계맺기를통한사회와개인성찰성의증대가갖는의미를이해하지못한다. 혁명을권력의문제로만단순화하고단속적일회적인 사건 으로보려는단기적시각에기초한다면 4월혁명의진정한의미를이해할수없다. 4월혁명은 5 16 쿠데타로일시좌절되었지만장기간의군사독재를거치면서도한일협정반대운동, 유신철폐운동, 부마시민항쟁, 광주민중항쟁, 6월대투쟁으로, 그리고현재의자주민주통일운동으로면면히이어져왔다. 최근에는사람보다는성장과이윤을추구하는신자유주의에맞서진정한자유와정의진리를위한시민사회의자각된주체의저항도계속되고있다. 국가의변화만으로사회가변한다는것은일종의조급한투기심리에불과하다. 시민사회의성숙과재구조화없이는사회변화도불가능하다는것을인식해야하는이유가여기에있다. 4월혁명은비폭력직접행동으로서정권을획득하기위한전쟁, 새로운정권의창출로정의되는혁명이아닌존엄을위한투쟁, 새로운삶의공간을통해정의되는혁명으로정의되어야한다. 4월혁명에참여한많은이들은시대정신에부응하는자기의식과목표치를가지고있었으며한국사회와대중의준비정도에대한정리된생각이있었다. 폭력과이데올로기적금압으로급진적사회운동의전통이단절된당시한국의주객관적인조건을고려할때, 4월혁명의초기단계에서반독재민주화수준의슬로건과대중행동방식을채택한것은어느정도불가피한대응이었음을부정해서는안된다. 문제는그수준에서멈추는가아니면한차원도약하기위해행동하는가의문제가중요하다. 우리의역사는미완의 4월혁명을저지, 억압하려는세력에맞서민주주의를확장하기위해오랜기간노력해왔다. 4월혁명은정치체제의변혁에는실패했지만구조와개인의역전된관계의도전을통해상징적질서와강요된망각에맞서소통과연대의관계를재설정하는계기를조성했다는점에서그의의가결코작다고할수없다. 108
운동의범위와주체의측면에서볼때지방에서산발적으로일어나던저항운동을전국적차원으로확산되었으며 4 19 이후에는노동자민중의성장과자주통일운동으로운동을한단계성장시켰던것이다. 이슈와관점을정치적민주화에국한하지않고일상의민주화 ( 신생활운동등 ), 생산자민주주의 ( 노동자 빈민의생존권투쟁, 교원노조건설운동등 ), 반외세민주화로 ( 남북학생회담등 ), 나아가반국적 ( 半國的 ) 관점에서전국적 ( 全國的 ) 관점으로발전시켰다 ( 이창언 2010: 34-37). 2) 계승방향 : 관계성의확장과경계의탈피 관계성 ' 은대상과맺는관계의깊이와정도를의미한다. 4월혁명은민주적계승에무엇보다도중요한것은법적-제도적인관계외에사회를구성하는공간적이고물리적인특성과함께계급 지역의정체성의문화적요소를인정하고구성원들간의신뢰를회복하고확장해나가야한다. 4월혁명은지방과서울, 고등학생과대학생, 배운자와못배운자를구분하지않고연합함으로써승리할수있었다. 나아가반국적관점을넘어전국적관점을견지하면남북협상을시도하였다. 이제 4월혁명의정신은경계를넘는연대로계승되어야한다. 일국적관점을넘어지구적관점을견지하면서지구적사안 ( 아래로부터의세계화 ) 을지역에서행동하고실천해야한다. 아래로부터의세계화는단순히자본-노동간의싸움뿐만이아니라국가간의관계를융합함으로써비국민적, 다중적정체성을확장하는과정이기도하다. 다문화에대한노출과경험을통해다양한타자 ( 소수자, 자연 ) 를실제적으로인지함으로써 차이들의공존 을모색할수있는근거를제공하는세계화인것이다. 아래로부터의세계화는확대재생산메커니즘을통한산업화적발전, 반환경적, 반생명적가치체계에대한거부이자, 민족, 국가를넘어서공동체가생산해내는사회적주체로써의 나 아닌조금더근원적이고개성적인 나 로재탄생하는과정이기도하다. 물론무원칙한연합이관계성을구축하고강화하는것은아니다. 관계성은수평적네트워크 (network) 와파트너십 (partnership) 에기초하여야한다. 정보, 자원, 책임과성찰의공유가전제되는그런관계성이야말로경계를넘는소통의가능성을확보할수있다. 관계성의또다른확장은대의민주주의경계를넘어서야한다는것이다. 제도정치는정당의이해관계에따라정략적으로행동하기때문에국민의대표성을담보하는데한계가있다. 더구나현대사회에서는기술이발달함에따라전문기술관료가의사결정을독점하고국민을통제할수있는인공세계를구축하려고한다. 따라서국가권력이강화되고, 권력이집중되며, 명령과제재혹은지역이권배분을통한방식으로사회문제를해결하게된다. 이러한대의민주주의의실시로인하여민주주의는프랑스혁명이후제기된급진성을상실하였다. 따라서자유민주주의를어떻게급진화시켜서민주주의의기본이념을충실하게발현하도록하느냐가중요하다. 개인의주체성과전문성이증대된상황에서, 현대인이원하는창조적삶을충족시키고정체성의정치실현을위해서는민주주의를급진적으로재편하는것이필요하다. 즉형식적민주주의에서실질적민주주의로확장해야한다. 관계의확장은절차적민주주의에한계지웠던민주주의틀을보다확장하는것에서출발하는것 109
이다. 일반적으로보수정치세력은정치적민주주의를단순히직선제와같은엘리트간의공정한경쟁을보장하는것으로이해하는슘페터부류의최소주의적입장을광범위하게유포한다. 그러나민주주의는자유권에대비되는사회권의문제로서사회민주주의, 생산의주체지만생산현장에서민주주의와시민권이철저히배제된노동자들의의사결정권을보장하는생산자민주주의, 다양한일상적삶의제도화되고비제도화된관계의자기결정권과책임성, 성찰성을보장하는일상의민주주의등민주주의는대단히광범위하다. 4월혁명이단순히정치적민주주의로귀착되지않았다는사실은많은연구를통해확인된바있다. 민주주의의틀과내용의확장은 4월혁명계승에중요한과제라할수있다. 또한, 민주화담론을넘어서서소수성과공존하는시도, 즉관계의학장이필요하다. 민주화담론은정치적인것 (the political) 을제도적질서로국한시켜서새로운주류담론의헤게모니적지위를전유하고소수자를배제하는이론적산물이었다. 운동조직, 특히민중운동에서학습과토론은이미사라진지오래되었고, 운동조직에서차이와반 ( 反 ) 정치, 비국가적실천강조는분열의전조이자도전으로간주되었다. 한국의운동문화는국가권력에대항하는상징정치의과정에서민족주의 ( 내지국가주의 ) 와공모를통해소수성의정치를제약하고억압하였다. 그러나이공모과정에서역설적으로운동조직관료들의 침묵의카르텔 ( 조현연, 2000) 은강고해져갔고운동사회의주요결정은비공모적연대에의해이루어지고있는것또한사실이다 ( 이창언, 2009:30). 4월혁명당시분출된민주주의는참여민주주의, 다원민주주의, 담론민주주의의기초를제공한다. 따라서이러한민주주의를강화하여진, 시민참여의강화, 다원적가치보존, 정치적인것 (the political) 의확장, 공론장의활성화, 시민성개발등민주주의의기본이념을강화해나가야할것이다. 그렇다면타인의에너지를침해하거나타인의존재를상하지않으면서자신의자유를확대할수있는새길을내줄수있을것같다. 나와타인이상생할수있는여력, 장을끊임없이창출할수있을것이라는것이다. 4월혁명이추구한가치는나를비롯하여많은사람이행복한사회였기때문이다. 6. 맺음말 4월혁명 50주년, 여전히기억과기념을둘러싼대립과갈등은현재진행형이다. 4월혁명정신을계승하여민주, 자주, 통일로나아가야할마당에신자유주의세계화광풍을맞이하고있다. 4월항쟁당시민중을억압하던자들은오늘날토호권력과결탁한보수권력, 자본의권력으로환생해시민을억압하고, 시민은 자본의권력 앞에맨몸뚱이로초라하게마주서있다. 아는만큼느끼고실천한다는말이있다. 최근생명보다는이윤, 민주주의보다는효율이강조되는것은망각이기억을압도한예를잘보여준다. 타자를죽이고자기가살아남는자기파괴를요청하는생산양식, 정체성, 권력향유등과같이존재를망각시키는온갖힘들에서벗어나기위해서는더많이기억하고더많이소통해야한다. 110
포스터모던역사학자키스젠키스 (1991) 는 역사란항상누군가를향해웃음짓도록조율된담론 이라며 각각의입장은사회구성내의권력관계를반영한다 고말한다. 따라서 언어적구성물로서지식과권력의작용메커니즘을분석해야한다 고힘주어말한다. 역사라는것은완벽한과거의재현은아니며, 그서술의목적에따라선택적으로재구성되기도하고배제되기도한다는측면에서볼때일정부분타당한말이다. 그러나과거는단지흔적만남아있을뿐이며증거란항상역사가의담론적산물이라고할수는없다. 역사 ( 歷史 ) 가권력의힘과어용지식인의언술에의해교묘히왜곡되고윤색될지언정 역사적사실 의존재가부정될수없다. 물론다양한기억의존재와경합은그자체로의미가있다. 그러나여전히과거의 진실 을억압하고망각을강요하는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 와내외적억압이존재하는상황에서진실을기억하고기념하며현재의삶과미래의잣대로삼는것은무엇보다도중요하다. 무한경쟁을강요하는이각박하고우울한시대, 4월혁명은우리를보다긍정적으로유지 발전 변모시키기위해서여전히기억할것들이어떤것들인지, 망각한것들이무엇인지, 새로이기억해야할것들이무엇인지를되묻는우리시대의거울이다. 111
1960 년대흥사단에서는 1961. 5 5.16 으로인한단활동의일시정지 5.16 군사쿠데타로인하여군사정권이수립되자다른단체들과마찬가지로일시활동정지를당함. 1963. 7 흥사단활동재개 5.16 군사쿠데타로일시중단되었던단활동을재개. 1963. 8 아카데미발족흥사단운동의새로운전개로서동년 8 월 25 일서울에서청년아카데미창립을시작으로 8 월 31 일대학생서울아카데미, 9 월 14 일고등학생서울아카데미를각각창립. 이후전국적으로아카데미운동을펼침. 1963.10 서울및부산분회창립최초의지방조직으로서울과부산에분회가발족되고이후인천, 대전, 대구, 광주등주요도시에분회를창립. 1963.11 제 11 차국내대회및창립 50 주년기념식거행 반세기의횃불, 민족의길잡이 라는표어를걸고 11 월 9 일부터 3 일간창립 50 주년기념식과제 11 차국내대회를거행. 1964. 4 기관지월간 기러기 창간 2010 년 10 월현재통권 494 호발행. 1964. 6 전국각지방에분회설립및학생아카데미운동확산대구, 광주, 대전, 인천, 진주, 춘천, 전주, 제주등지에분회가설립되고, 분회가있는지역을비롯하여청주, 공주, 오산, 강릉, 군산, 이리, 부안, 장흥, 해남, 여수, 마산, 진해, 원주, 울산, 평택등지에학생아카데미운동시작. 112
제 7 강 1970 년대전태일분신사건 - 고도성장속에서사람의존엄성을생각하다 임송자 ( 성균관대사학과연구교수 ) 1. 출생, 어린시절 출생 - 1948. 8. 26. 대구 - 아버지전상수 : 피복제조업계통봉제노동자 - 어머니이소선 - 형제 : 전태삼, 전순옥, 전순덕 어린시절 - 1954년여름서울로가족상경.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입학 - 가족들대구로귀향. 1963년 5월, 청옥고등공민학교입학. - 1964년 2월, 어머니식모살이. - 서울로상경. 신문장사. 구두닦이. 여름이면아이스케이크장사, 비오는날은우산장사, 때로는손수레뒤밀이. 2. 평화시장에서의노동생활 미싱보조 - 1964년봄. 평화시장시다. - 1965년가을, 삼일사미싱보조월급은 1500원. 하루하숙비가 120원 (14시간노동에일당 50원 ) - 노동지옥1 : 밀폐된닭장속에갇혀서, 끊임없이재봉틀의소음속에서하루종일햇빛한번보지못하고아침 8시부터밤 11시까지노동.... 영양실조, 기관지염, 안질, 빈 113
혈, 신경통, 위장병 - 노동지옥 2. 평화시장의인간조건 : 보통아침 8 시반출근에밤 11 시퇴근으로하루 평균 14-15 시간. 일거리가밀릴때에는물론야간작업을하는일도허다하며... 억울한생각 - 1966년가을, 통일사미싱사. - 처음일을시작할때 1매당얼마를준다고확고한결정을하지아니하고대목일이끝난다음에야 1매당얼마를지불하는것을주인이재단사와적당히타협해서주는것이다. 언제나이모양이기때문에일이바빠직공들이매수를많이올려도겨우평균월급보다조금나은월급을받을뿐이다. 나는이런계통에서미싱사로서는처음당하는일이었지만너무억울했다. 아무리열심히밤잠못자고많은양의바지를만들어야, 피땀흘린대가를못찾았기때문이다. 나는재단사가나쁘다고생각하고나도어서빨리재단사가되어서공임타협을할때에는약한직공들편에서서정당한타협을하리라고결심했다. - 한미사재단보조 1966년추석 (66. 9. 29) 대목일이끝나고. 1967 년 1 월末 ~ 바보회조직 3. 바보회조직, 번민과결단 바보회조직 - ' 근로기준법 ' -> 그의운명을좌우한중대사건중의하나. 근로시간 1일 8시간, 1주일 48시간. 단, 당사자의합의에의해 1주일에 60시간을한도로함 (42조), 1주일에 1회이상의유급휴일 (45조), 유해위험작업에관한규정 (43조), 여공에대한월 1일의유급생리휴가 (59조), 여자와 18세미만근로자에관한야간작업금지규정 (56조) - 1969년 6월말경바보회 - 바보회의활동지침에대한토의. (1) 근로기준법준수투쟁 (2) 점차바보회를노동조합으로발전. (3) 근로자들의노동실태조사. (4) 근로기준법을준수하는모범업체설립 - 바보회가창립된지얼마후근로기준법해설서구입. 114
- 바보회가창립되고얼마지나지않아태일은또다시일하던직장에서해고당함. - 1969년 8~9월바보회가해체됨. - 앙케이트사건. 설문지를모두모아서결과를분석, 집계 -> 시청근로감독관실을찾아감. -> 노동청진정. - 1969년겨울교차로에서저는언제나좌회전입니다. 세상에서우회전의우선권이있다는법칙속에서, 우회전의부러운우선권을바라보며, 알파와오메가.(1969년 12월낙서에서 ) 과거가불우했다고지금과거를원망한다면그불우했던과거는영원히너의영역의사생아가되는것이아닌가?(1969년 12월 31일일기에서 ) 전태일이노동문제해결을위해택하려던네가지방법 - 첫째는, 온정주의적방법 - 둘째는, 진정주의적방법. - 셋째는, 시범업체설립하는방법 - 넷째는, 필사적으로항의투쟁. 적극투쟁주의 번민과결단 - 1970년 4월말경. 삼각산교회신축공사. - 결단 -> 나는돌아가야한다 : 1970년 8월 9일의일기이결단을두고얼마나오랜시간을망설이고괴로워했던가? 지금이시각완전에가까운결단을내렸다. 나는돌아가야한다. 꼭돌아가야한다. 불쌍한내형제의곁으로, 내마음의고향으로, 내이상의전부인평화시장의어린동심곁으로. 생을두고맹세한내가, 그많은시간과공상속에서, 내가돌보지않으면아니될나약한생명체들. 나를버리고, 나를죽이고가마. 조금만참고견디어라. 너희들의곁을떠나지않기위하여나약한나를다바치마. 너희들은내마음의고향이로다. 115
4. 투쟁과운명 투쟁 - 1970년 9월왕성사재단사. - 서울시청, 노동청등에진정서. 신문기자들을만나거나방송국을찾아감. - 1970년 9월 16일 삼동친목회 ' 결성. - 1970.10.6. 노동청장앞으로 평화시장피복제품상종업원근로개선진정서 ' 를제출. - 평화시장기사특보 ' : 1970년 10월 7일시내각석간신문에평화시장의참상에관한보도가실림. 경향신문사회면톱기사로 골방서하루 16시간노동 ' 이라는표제와 소녀등 2만여명혹사 ', 거의직업병 노동청뒤늦게고발키로 ', 근로조건영점 평화시장피복공장 ' 이라는부제로실림. - 시위. 10월 20일로계획 -> 10 20데모를일단보류 -> 10월 24일오후 1시에데모를감행하기로결의 -> "11월 7일까지는선처해주겠다. 그때까지만참고기다려보라 " 고약속 -> 11월 7일. 약속은아무것도지켜지지않았음. - 근로기준법화형식 ' 을하자고제의. 거사일자는 11월 13일. 시각은오후 1시. 구호는 " 우리는기계가아니다!", "1주일에한번만이라도햇빛을!", " 하루 16시간노동이웬말이냐?" 등. - 내죽음을헛되어말라 : 1970년 11월 13일. 낮 1시거사. 분신 " 근로기준법을준수하라!" " 우리는기계가아니다! 일요일은쉬게하라!" " 노동자들을혹사하지말라!" 약 10분후에전태일이내려왔다. 그는아무말없이김개남의옷소매를끌어당기며눈짓을하여그를사람이좀덜다니는옆골목으로끌고갔다.... 김개남에게성냥불을켜서자신의몸에갖다대어달라고부탁했다. 그전날저녁에김개남은전태일이내일 누구한사람죽는것처럼쇼를한판벌여서저놈들정신을번쩍들게하자 고하는말을들은일이있었다. 설마 하는생각에그는성냥불을켜서전태일의옷에갖다대었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엮음, 어느청년노동자의삶과죽음 -전태일평전, 돌베개, 1983) 약 10분후에전태일이근로기준법책을가슴에품고내려왔다. 전태일이몇발자국을내딛었을까? 갑자기전태일의옷위로불길이확치솟았다. 불길은순식간에전 116
태일의전신을휩쌌다. ( 조영래, 전태일평전, 2001년 2차개정판 ). 운명 - " 이세상의어두운곳에서버림받은목숨들, 불쌍한근로자들을위해죽어가는나에게반드시하나님의은총이있을것입니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조금도슬퍼마세요." - " 어머니, 내가못다이룬일어머니가꼭이루어주십시오 " - "... 자네들, 우리가하려던일, 내가죽고나서라도꼭이루어주게. 아무리어렵더라도, 절대로포기해서는안되네. 쉽다면누군들안하겠나? 어려울때어려운일하는것이진짜사람일세. 내말분명히듣고잊지말게. 내죽음을헛되이말라!" - 밤 10시운명 사상적으로커다란변화가일어난시기 근로기준법을알게되고바보회를결성한시기 업주로부터의해고와바보회해체로인한번민의시기 삼각산신축공사장에서결의를다지고다시평화시장으로돌아온시기 분신사건의파장 지식인, 청년학생, 종교인 -> 노동자가처한현실에대한관심 신민당 -> 정치문제화 한국노총 노동자들 -> 한국노총의어용노동운동비판, 극단적인투쟁 이후운동에미친영향 청계피복노조 - 70.11.20 전국연합노조청계피복지부 ( 가칭결성준비위원회 ) - 11.27 전국연합노조청계피복지부결성대회 - 1970년대민주노조운동의상징 - 75년 12월근로시간단축과다락철거요구농성투쟁 -> 투쟁의성과. 하루 16시간 지옥의노동 은전태일이죽은지 5년후에야비로소 3시간단축. - 체불임금투쟁, 임금인상투쟁, 노동조합결성등을지원하는투쟁. - 노동교실운영. 117
- 1977.7 노동교실강제폐쇄조치단행 -> 9 9투쟁. 결사투쟁을전개. 신승철 (21, 재단보조 ) 박해창 (20, 재단보조 ) 의할복기도, 민종덕의투신, 전순옥 (27) 임미경 (19, 미싱보조 ) 의투신기도. - 1981년 1월행정명령에의해강제해산. 민중의발견과학생운동의질적변화 - 학생운동세력 : 노동문제에대한관심. - 70년 11월근로조건개선운동 - 겨울방학. 노동실태조사작업 - 1972.10.14 전국학생연맹총대회선언문 : 민중주체 인식을확인. - 1974년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중 민족 민주선언. 노동자 서민대중의생존권문제를전면에부각시킴. - 노동현장투신 118
추모비 (1988.11.13 전태일분신 17 주기에추모비건립 ) 세월이흐를수록더욱생생하게되살아나는죽음이있어여기한덩이돌을일으켜세우나니아! 아! 전태일우리민중의고난의운명속에피로아로새겨진불멸의이름이여 (...) 저스물두해의아픈삶을결단하여가진자들의야만과횡포앞에온몸으로부딪쳐간그의피어린발자취가있었기에오늘이땅에노예의굴레를벗어던지고사람답게사는자주민주평화의새세상을쟁취하려는일천만노동자와사천만민중의우렁찬해방의함성이있나니지나가는길손이여, 이말없는주검앞에눈물을뿌리지말라. 다만기억하고또다짐하라. 불길속에휩싸이며그가남긴마지막한마디 내죽음을헛되이말라! 하던그피맺힌울부짖음을. 119
1970 년대흥사단에서는 1969. 8 사단법인흥사단등록 8 월 19 일문교부 ( 현교육과학기술부 ) 장관의승인을받아사단법인을설립한 후아카데미운동에주력 1977. 9 서울종로구동숭동에새회관완공, 이전 1949년부터본부로사용하던을지로 ( 명동 ) 의대성빌딩을처분하고, 9월 24일유서깊은옛서울대문리대자리인동숭동 1의 28에대지 307평, 연건평 360 평규모로회관을완공하고이전 1979.12 대전지부 충의회관 준공 대전시동구가양동에지상 3 층, 연건평 68 평의회관을준공 1982.11 금요개척자강좌 1000 회돌파기념전국순회강연실시 금요개척자강좌 1000 회돌파를기념하여 한민족의비전을제시한다 는 대주제아래전국순회강연 ( 대전, 광주, 춘천, 청주, 부산, 진주, 전주, 서울 ) 을실시 60, 70 년대아카데미학습활동 120
제 8 강 1980 년대 5 18 광주민중항쟁 - 그원인과전개과정 김영택 ( 국민대국사학과강사 ) 1. 광주민중항쟁의배경 110) 1) 신군부의전권찬탈음모 광주민중항쟁의 111) 배경은박정희독재정권이남긴두가지유산에서비롯된다. 하나는자신을지켜줄친위대적최측근으로비호하면서정치군인으로육성했던하나회회원들이그의피살후정권을찬탈하고자저지른국가폭력남용을들수있고다른하나는이들이정권탈취를획책하는과정에서대부인박정희대통령이저지른지역차별정책피해지역주민을희생양으로삼은데서찾을수있다. 1979년 10월 27일새벽 4시 10분 10 26정변에따른비상계엄령선포와동시에박정희대통령피살사건을전담할합동수사본부가계엄사령부에설치되고그본부장에전두환보안사령관이임명되었다. 박대통령최측근 3인방중유일하게건재하고있던전두환보안사령관이맡게된그합동수사본부장에게는박대통령피살사건과관련된수사상필요하다면누구든지소환해조사할수있는막강한권한이부여되었다. 박정희대통령과차지철경호실장의피살, 그리고대통령살해범이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라는사실은중요하다. 이는절대적권력을행사하던대통령및그경호실장과중앙정보부장이피살되었거나무력화됨에따라사실상비상대권을떠맡게된정승화육군참모총장겸계엄사령관이아무런군사적 정치적기반이없는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을제치고실질적인국가통치권역의중심에서게되었음을의미하기때문이다. 이같은상황에서정승화계엄사령관휘하에대통령살해사건수사를전담할합동수사본부가설치되고그본부장에전두환보안사령관이임명된것이다. 전두환보안사령관은 5 16쿠데타다음날인 1961년 5월 17일당시쿠데타지도자박정희장군을육군본부로찾아가첫인연을맺은후 1979년 3월보안사령관에임명되어차지철 김재규와함께박대통령의친위대적최측근 3인방의한사람으로다가설때까지 18 년동안철저하게독재자박정희의비호를받으며군내사조직하나회를이끌고전형적정치군인으로성장한사람이다. 더욱이그는 10 26정변당시수도권주변의실전부대지휘 121
관들은물론대통령경호실 수경사 특전사 보안사및육군본부요직을두루차지하고있던하나회정치군인들을동원해필요하다면언제든지정권장악에도전할수있는유일한위치에있었다. 112) 이같은위상의전두환보안사령관겸합동수사본부장은정치적 군사적기반이취약한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대신비상계엄권을갖게된정승화육군참모총장겸계엄사령관이군부의실권자로서실질적국가통치권의중심권역에서게되었다는사실에주목했다. 특히전두환합수부장으로서는이미보안사정보망을통해정승화계엄사령관이박정희살해범김재규와함께그의차를타고육군본부로함께왔다는사실을인지하고있었다. 이같은상황은정치군인으로서의궁극적목표인정권에의야심을달성할수있는절호의기회로여길수있음을의미했다. 그는정승화계엄사령관의이같은의혹을원용해유신헌법을개정하여종전의민주주의체제로환원하려는군원로들의의향을 113) 둔화시키는 114) 한편후임대통령은유신헌법에따라선출되어야한다고주장함으로써유신체제를존속하는쪽으로가닥을잡아나갔다. 115) 유신헌법개정등국민들이열망하는민주주의체제로환원시킬의사가전연없는전두환으로서는유신체제를해체하려는군수뇌부의기선을제압하는데일단성공한것이다. 더욱이전두환보안사령관은박대통령생전이던 1979년여름을지연습때보안사법무관박준광소령을시켜어떤비상사태로인해계엄령이선포됐을경우계엄사령관직속하에설치되는합수부가중앙정보부 보안사 검찰 경찰 헌병 군검찰등국가의모든정보 수사기관을조정 통제 감독케하는 충무계획 1,200 에근거한 비상사태하의계획서 를작성해두었었다. 116) 이것이야말로정권담당을목표로하는정치군인으로서의전두환이언젠가는박정희대통령에게닥쳐올유고를염두에두고그정권을승계할야심찬요령과방안을미리짜놓은 정권장악계획서 라고할수있다. 117) 그리고기다리던바로그언젠가시기인 10 26이다가오자 계획서 대로즉각실행에착수한것이다. 전두환은본래중앙정보부에있던이조정 통제 감독권한을 10 26정변에따라설치된합동수사본부로이관시켜자신이행사하기로결정하고 27일오전 8시 30분윤일균중앙정보부해외담당차장, 전재덕국내담당차장, 오탁근검찰총장, 손달용치안본부장, 김진기헌병감을합수부로불러회의를주재하면서계엄령하의각기관은합수부의통제를받아야한다는업무지침을통보하는한편모든정보보고서는하루두번씩합수부에제출하되다른기관에제출할경우사전허가를받아야한다며청와대와계엄사령부로의직접제출을견제하고나섰다. 이는통치권자인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은물론직속상관이자실질적비상대권자인정승화계엄사령관을무력화시키는공작임과동시에정권찬탈을위한조직상의조치였음이분명했다. 118) 그동안박정희대통령만을유일한위계상의상위로여기고있던전두환에의해 친위대는위계질서에입각한조직적권위를무시할수있다 는관념상 122
의조치가현실화되어버린것, 사실상정권장악을위한본격적인공작이착수된것이다. 119) 바꿔말하면전두환보안사령관이합수부장에임명된것은아무런군사적 정치적기반을 갖추지못한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이나대통령을살해한김재규를방조한혐의에서자유 롭지못한정승화계엄사령관의권위를비웃으며하루아침에대한민국최고실권자의자리 를넘보는위상으로비약했음을의미했다. 이때문에외신은전두환이계엄사령부합동수 사본부장에임명되었다는소식과함께통치권공백상태인 한국의실권자로등장했다 고보 도했다. 120) 군수뇌부의민주주의환원합의를 121) 와해시키는데성공한전두환은 1979 년 11 월 24 일 명동 YWCA 회관에서열린 통대에의한유신대통령선출반대국민대회 관련인사 140 여명을 연행, 유신은살아있다 며혹독한고문을가함으로써 122) 국민들의민주화열망을깔아뭉개 고유신헌법에의한정권승계의지를분명하게표출한다음하나회정치군인들을일사불란 하게동원하여본격적정권찬탈과정의첫단계인 12 12 반란을성공시켜군권은물론통 치권까지좌지우지했다. 더욱이그는반란당일까지직속상관이던정승화계엄사령관에게 혹독한고문을가해정권찬탈의지를다시한번분명히했다. 123) 12 12 반란에서출발한다단계쿠데타의최종목표는전두환이 대통령 이되는것, 그것은 1980 년 3 월 24 일전두환을왕 (King- 대통령 ) 으로만들겠다는 K- 공작에서공공연하게드러났 다. 이어부총리급으로의위상제고및막대한정보예산확보와광범한정보를독점하기 위한중앙정보부장겸임을거쳐사실상쿠데타로간주되는 5 17 조치를단행하여당시까지 허용되었던정치권의유신헌법개정작업을완전히차단하는정치활동금지조치를단행함으 로써유신헌법에의해대통령이되겠다는결심을더욱노골화했다. 124) 이와동시에 10 26 정변이후학생들의평화적시위가벌어지고있는광주에민주화를 열망하는국민들을 빨갱이 로몰아적개심을북돋는 충정작전훈련 을혹독하게시킨공수 부대를투입해살육적인 체포작전 을펼치게함으로써그동안박정희의지역차별정책에 불만이누적되어있는광주시민들로하여금반발성 소요 를일으키도록유도한후이를 북괴에의한폭동 으로몰아여기에 2 만여명의대규모병력을투입한 상무충정작전 ( 폭동 진압작전 ) 을펼쳐 국가안보상의폭동 을진압했다며혁명위원회 ( 국보위 ) 를출범시킨다음 수해시찰 등실질적인국가통치권을행사하는수법을원용해최규하로하여금유명무실 화된대통령직을스스로물러나게했다. 125) 이에앞서신군부는시위진압에투입할공수부대에대한 강경한응징조치, 바꿔말하면 살육적 체포작전 을전제로하는 소요진압준비태세 를점검하는과정에서 광주사람들이 얼마나미운지모를정도 로혹독한충정작전훈련을실시해서 126) 이들을투입해잔인하고 123
무자비한 체포작전 을펼치도록하면반드시광주시민들이저항하고반발할것으로예상했다. 전두환은이같은 강경한응징조치 를전제로공수부대를투입해살육적 체포작전 을펼쳐 폭동 을유도한다음평화적수습방안을모색하는윤흥정전남북계엄분소장을경질하고후임으로임명한소준열계엄분소장에게 절대로우리애들 ( 공수부대 ) 의사기를죽이지말라 는메모를보내더욱 강도높은체포작전 을펼치게하여광주시민들로하여금더욱분노하는 폭도 가되도록하라고시달했다. 127) 이와동시에전두환은공수부대와해병대, 그리고제20사단을전국각지에재배치하기로결정하고미국측에도미리동의를구해놓았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7일사이에완료했다. 광주에투입될제7공수여단도 17일이동명령을받고주둔지를출발, 다음날현지에도착했다. 해병대나제20사단병력의이동은작전지휘권을가지고있는한미연합사의사전동의가필요했지만작전지휘권밖에있는공수부대의이동에는사전승인이필요없는데도자신들의살육적인 체포작전 의부작용 (?) 에대한양해를사전에받아놓음으로써만약의사후에대비했다. 이에덩달아주한미국대사관은 미국정부가신군부의대국민강경책을반대하지않기로했음을통고했다 고국무부에보고했다. 미국이광주학살의공범내지개입했다는의혹은이때문에제기되었다. 128) 2) 박정희의지역주의와김대중억압 5 16쿠데타로인한 3년간의군정을끝내고이른바민정이양에따른최초의대통령선거가 1963년 10월 15일실시되었다. 이때민주공화당후보박정희는출신고향인영남 ( 경남 경북 부산 ) 이외호남 ( 전남 전북 ) 에서윤보선보다 35만표를더얻어 15만표차로이길수있었다. 그는서울에서윤보선에게절반이상참패했고경기 강원 충북 충남에서도크게패했기때문에영남지방이외호남지방의압도적인지지가없었다면승리할수없었다. 129) 그런데도박정희는대통령에취임하기가바쁘게인사및경제시책에서철저한호남차별정책을펼치고나왔다. 정부인사의대표적차별사례로는군부의장성진급과공직인사에서찾을수있다. 대구를포함한경북 1개도출신장성수는 2개도인호남 ( 전남 북 ) 출신장성인원의 10배가넘었다. 그리고한국군부최대요직인육군참모총장의경우박정희정권이래 20명중영남출신이아닌사람은 2, 3명에불과했지만, 그중에서도호남출신은단한명도없었다. 단지공군참모총장중 2명, 해병대사령관중 1명만이호남출신이었을뿐이다. 정부의 4대권력요직중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 국세청장에도호남출신이한명도없었고, 치안본부장에겨우 1명이임명되었으나그것도 10개월단명으로끝났다. 정치및행정 124
엘리트관료 ( 장관 차관, 처장, 청장 ) 들도총 432 명중호남출신은 13.2%(57 명 ) 로영남출신 30.1%(130 명 ) 의절반에도미치지못했다. 130) 제 5 공화국때는더욱심해총 156 명의고위관 료중영남출신 43.6%(67 명 ), 호남출신 9.6%(15 명 ) 로무려 4 대 1 이상의격차를보였다. 1988 년 5 월현재서울시청서기관급이상공무원 299 명중영남출신이 50% 에가까운반 면, 호남출신은 10% 에도미치지못했다. 정부투자기관 26 개의임원도영남출신이 35.4% 로 1 위였고, 호남출신은 7.8% 로최하위였다. 131) 다만정책적차원과직접적인연관성이적은 법원의판사직이상만이영남출신 20.6%(18 명 ), 호남출신 23%(20 명 ) 로나타났을뿐이다. 132) 이같이우대받는영남출신들은박정희통치기간내내정치 군사 경제 사회 관료등모든 분야에서지배적엘리트계층을이룰수있었다. 이러한과정에서이들과경쟁적관계에있 는호남출신들이소외되는것은당연한귀결이었다. 지역편중현상은생존과직결되는경제시책에서더욱두드러지게나타났다. 특히박정희 집권초기부터공업지대및산업단지조성이영남에집중되고고속도로건설이나도로포장 도영남에편중되었다. 대일청구권자금을통한사회간접투자나항만시설, 철도 통신사업 국고보조금배정등각분야에서영남우대와호남소외현상이두드러졌다. 이같은편향적 인정책집행은공업단지조성이나투자우선순위등기본적인여건을객관적으로감안하더 라도지나쳤다. 5 공으로접어들던 1981 년호남에근로자 500 명이상되는공장은 36 개로 영남 159 개의 22% 였다. 그나마호남의공장들은일신방적등일제강점기에세워졌거나근 로자숫자만 500 명이상일뿐실제경제적효율에서는영세성을면치못한경우가대부분 이었다. 당시광주시민 1 인당연간소득은 1978 년당시전국평균 61 만 9,037 원의 74.5% 인 46 만 1,451 원에불과했다. 또한같은해광주근로자월평균임금은전국 7 만 4,121 원의절 반도안되는 3 만 5,073 원 (47.3%) 이었다. 133) 입지조건상호남을우수한농업지대로발전시키겠다는박정희의경제시책에서도차별받 고푸대접받았다. 예를들면민정초기 4 년동안박정희정부가시행한관개사업으로추진 한수리조합이영남에는 72 개소, 호남에는 3 분의 1 도안되는 23 개소에불과했다. 67 68 년 이태동안은계속된극심한가뭄으로농민들이크게낙담하던시기였는데도정부는양수기 를공급하면서한해상황에따른합당한배정이아니라여기에도지역차별을적용해영남 6, 호남 1 의비율로배정했다. 134) 호남차별에대한반발정서를뒤늦게인식한박정희는 1967 년대통령선거직전장 차관 에호남출신이한명도없다는불만을받아들여 3 개부처차관을호남출신으로교체했고호 남푸대접의상징이던호남선단선철도복선화를공약했다. 그러나이공약도착공 11 년만 인 78 년 3 월 30 일, 대전 ~ 이리 ( 익산 ) 88 km만준공되고나머지이리 ( 익산 )~ 송정리 ( 광주 ) 97 km 는그로부터 7 년후, 박정희사후 6 년만인 85 년에야완공되었다. 135) 무려 18 년의세월이걸 린것이다. 그나마호남선출발점인목포까지의복선화는 37 년후인 2004 년 12 월에야완료 125
됐다. 또한호남고속도로노선은당연히국도제1호인서울 전주 광주 목포여야했다. 그런데도박정희는당초엉뚱하게도서울 전주 순천으로계획했다가전남, 특히광주출신인사들의항의가빗발치자현재의서울 전주 광주 순천으로잡고목포는아예빼버렸다. 지정학적요건이나경제성을완전히무시해버린것이다. 136) 남해안고속도로역시목포에서출발하여해남 강진 보성 순천을거쳐진주 마산 부산으로이어져야국토의균형발전을위해서도당연한것이었다. 그러나호남고속도로에서목포를제외하듯여기서도제외시켜남해안고속도로의기점은순천이되는기형적형태가되고말았다. 이때문에곡창지대이자청정해역의수산물보고인전남남부지방의풍부한물산운송은물론지역발전에심대한타격을입고있다. 현재이지역을통과하는목포 순천간제18, 제2, 제77호국도는이제야겨우확장 포장되었다. 목포는김대중출신지역이어서감정적으로배제했다는오해에서벗어날수없는차별정책이었다. 이런경제적차별정책의결과는호남출신영세민비율이전국최고인 12. 6%(81년 ) 와 16. 6%(90년 ) 로전국평균 6. 9%(81년 ) 와 7. 7%(90년 ) 의두배를넘는데서도잘나타나고있다. 특히 74년의호남영세민비율은다른지역과비슷했으나 81년과 90년의최근으로다가올수록격차가더욱심하게벌어지고있다. 137) 특히공업시설은물론농업생산성향상에서도차별받는호남사람들은가난한농촌을떠나는이농현상이홍수처럼벌어졌다. 1940년대의영남인구와엇비슷했던호남인구는박정희지역차별정책이펼쳐지기시작한 1960년대이후감소추세를나타내더니 2000년대들어영남인구의 40% 이하로격감하고말았다. 138) 이같이박정희의지역주의는국토공간을균형발전아닌서울과부산으로양극화시키면서영 호남의인구격차를더욱심화시켜호남의황폐화를조장해버렸다. 그함몰현상은현재운행중인고속철도 (KTX) 운행상황에서도잘나타나있다. 호남선은하루왕복 38회, 경부선은 4배에가까운 150회다. 이렇게운행회수가 4배나많은경부선이용률은순석, 역석관계없이평일 76.6%, 주말 83.3%, 평균 79.95% 다. 이에비해호남선은평일 41.1%, 주말 58.1%, 평균 49.6% 로평일 주말관계없이절반은텅텅비어있다. 139) 지역차별정책 30년후의결과가이렇게극명하게드러나고있는것이다. 이같은상황은두가지로설명할수있다. 하나는앞에서언급한인구격감현상처럼가난을피해일자리찾아고향을떠나는극심한이농형상으로절대인구가감소했다는것이고다른하나는비싼고속열차를타기에는너무나가난하기때문이다. 그동안영남사람들의소득수준이호 126
남사람들에비해그만큼높아졌음을의미했다. 이러한인구의함몰과격증, 빈부의격차현상은바로박정희의지역차별정책이낳은 최악의결과 라할수있다. 여기에호남사람들을더욱화 ( 火 ) 나게만든것은김대중에대한탄압이었다. 그조짐은 67년 6월 8일실시된총선거에서부터나타났다. 박정희는야당의신예정치인김대중이장차자신을위협하는도전자로압박해올것을이때부터예견했음인지국회의원에당선되지못하도록총력을기울였다. 박정희는총선기간중두번이나김대중선거구목포를방문하여현지에서소국무회의를여는등낙선시키고자관권과금권을총동원하는총력전을펼쳤다. 그러나박정희의총력전은다행스럽게도실패했다. 특히김대중은 1971년대통령선거에서야당인신민당후보였을뿐만아니라이후영남집권세력에도전하는가장강력한정치지도자로서남 북평화통일및 4대국안보론을제창하는진보적성향의대중정치가로성장해있었다. 김대중은해방직후여운형의건국준비위원회에한때가입한적이있다. 나중에건준이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준비위원회로변질됐지만처음부터공산주의자들만의조직은아니었다. 그런데도실제공산당조직에서암약한전력이있는박정희는오히려건준을공산주의기구로왜곡하고여기에가입한적이있던김대중의 4대국안보론등진보정책을들어좌익또는공산주의동조자로몰았다. 한국의대통령들이자신의집권에장애가되는정적들을모두 빨갱이 로몰았던사실과맥락을같이했다. 이승만은반민특위를강력하게추진하는반대파의원들을좌익세력으로매도했는가하면농림부장관으로기용했던조봉암이대통령후보로서자신의강력한라이벌로성장하자결국간첩혐의를씌워 사법살인 했고 4 19당시학생들의시위를 북괴의사주에의한난동 으로공격했었다. 박정희역시이범주에서크게벗어나지않아김대중을 빨갱이 로몰아붙이는데주저하지않았다. 박정희는 71년대통령선거를치른후자신에대한가장위협적인정적으로인식한나머지국회의원선거유세를다니는김대중을교통사고로위장해살해하려했고 140) 해외에서유신체제를강도높게비판하는김대중을 1973년 8월 8일일본도쿄에서불법으로납치해살해하려다여의치않자국내로끌어와자택에연금시켜일체의정치활동을못하게했다. 심지어박정희는 1974년 2월, 김대중으로부터요청받은위중한부친의병문안은물론장례식에참석해야하는 인륜의도 까지가로막았다. 141) 또한 1976년 3월 1일 박정희퇴진 과 긴급조치폐지 등을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다른 17명과함께체포돼긴급조치 9호위반혐의로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선고받고청주 진주교도소에서복역중이던김대중은면회까지제한받는데항의, 단식투쟁에들어가자박정희는서울대병원으로이송했다가 1978년 12월형집행정지로가석방한후자택에연금하는등구속과연금을반복했다. 3) 10 26 정변후광주의민주회복운동 127
박정희의유신독재체제는우리현대사에서기나긴암흑의터널이었다. 이암흑에서벗어나려는민주회복운동은비단호남지방에서뿐만아니라전국적으로치열했다. 이때문에 10 26정변이발생하자국민들은당연히 18년동안지속되어국민들에게온갖고통과억압을가해온유신철권통치가막을내리고정상적민주주의체제로환원될것으로여기고있었다. 유신의수혜자로서박정희에의해임명된군수뇌들도유신체제는당연히폐지되어야한다는데의견을같이하고있었다. 11월 10일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이유신헌법에따라새대통령을뽑겠다는정치일정을발표하자윤보선등일부재야인사들과청년운동권에서는유신체제를지속시키려는책략으로간주하고즉각반발했다. 이들은 11월 24일서울 YWCA에서 통대에의한유신대통령선출반대국민대회 를열었다. 이에자극받은광주에서도나흘후광주YWCA회관에서광주기독교연합회를비롯한 6개종교및민주단체공동주최로 통대에의한대통령선거분쇄시민대회 를열었다. 대회후벌어진가두시위에는 3만 7,000여명의인원이대거참가해서울 YWCA집회이상의의미가부여되었다. 행인들도박수를보내며시위대열을격려했다. 또한 30일전남대생 2,000여명은이틀전광주 YWCA대회요구사항을반복해부르짖으며시위를벌였다. 광주YWCA대회와전남대학생들의잇따른시위운동은 10 26정변이후열렸던수많은광주지역민주회복운동의결정판이기도했지만그연장선상에서 1980년 5월적극적으로전개되는학생민주화운동에접목되었다. 1980년 5월 14 15 16일사흘동안전남대학생들을비롯한광주시내대학생 3만여명은날마다도청광장에모여박관현전남대총학생회장주도아래민주성회를열고계엄령해제, 정치일정단축, 유신헌법개정등을요구하는구호를외쳤다. 학생들은질서정연한집회와횃불시위를벌이며학생자체만의순수성을유지하는데노력했다. 전남대교수들은 4 19이후처음으로학생시위대열에앞장서서이끌었다. 박관현총학생회장은시위가끝날때마다 정부의특단조치가내려지면다음날모여시위하자 는약속을공개적으로되풀이했다. 그리고이공개적인약속은이틀후신군부의광주학살에연계되었다. 2, 광주민중항쟁의원인과전개과정 1) 공수부대의살육적체포작전과 피의일요일 1980년 5월 18일아침 TV뉴스를통해 5 17소식을접한전남대학생들은 특단의조치 가내려졌음을직감하고즉시학교로향했다. 그러나교문에는 휴교령이내려졌다 는공고문과함께공수부대원들이학생들의출입을통제하고있었다. 교문앞에모인학생들중에는도서관에들어가공부하려는사람도있었지만, 엊그제 3일간있었던시위때마다 정부의특단조치가내려지면다음날시위하자 던박관현총학생회장의공개약속을이행하려는학생들이대부분이었다. 정문을지키고있던 11명의공수부대원을지휘하던소령계급의장교 128
가핸드마이크를들고 휴교조치로들어갈수없으니돌아가라 고큰소리로외쳤다. 학생들이불응하자장교는공격명령을내렸다. 사병들은학생들에게달려들어머리, 어깨, 가슴, 뒤통수를진압봉과개머리판으로두들겨패고군화발질을해댔다. 142) 점점늘어난학생들은길가에있는돌멩이를던져대항했다. 그러나강도높게훈련받은공수부대원의상대가될수는없었다. 학생회간부등특정한리더가없는학생들은어찌해야할지몰라허둥대다 여기만있지말고도청광장으로나가자 는어느학생의외침에따라시내로향했다. 그동안 400여명으로늘어난학생들은가까운광주역광장에서전열을정비한다음시내중심가를향해출발해, 오전 11시쯤금남로 3가가톨릭회관앞에도착했다 143). 1,000여명으로불어난학생들은가톨릭회관앞에서연좌시위를벌이는한편, 도청광장으로의진출을시도했다. 그러나며칠전과는달리경찰의저지는완강하다못해필사적이었다. 이를당해내지못한학생들은충장로를비롯한시내여기저기로흩어져산발적인시위를벌이며 계엄령해제하라 김대중석방하라 고외쳐댔다. 시민들은그때까지발표가없어알지못하던김대중체포소식에깊은관심을나타냈다. 144) 학생시위대는경찰의강력한진압에밀려여러갈래로분산되는이합집산을거듭하면서시위는점차수그러들었다. 그런가운데오후 3시 40분, 유동 3거리와충장로입구에각각 1개중대가량의공수부대원들이나타났다. 145) 이날오후 2시 30분헬기를타고전남대와조선대숙영지로찾아와 경찰이수세에몰려있으니오후 4시부터제35대대는충장로, 제 33대대는금남로 5가쪽에서시위대를해산시키라 는정웅제31사단장의명령을받고출동한병력이었다. 146) 유동 3거리에나타난공수부대원들은도보로 450m가량떨어진누문동 62번지와북동 180번지사이하얗게칠해진횡단보도까지진출해도열했다. 147) 오후 4시정각, 148) 1/2톤급초록색차량스피커에서 시민여러분집으로돌아가십시오 라는단한마디선무방송이흘러나온지채 1분도안되는순간이었다. 거리에나와있는사람전원체포하라 시위진압명령도, 시위대해산명령도아니었다. 시위를진압하러온계엄군이라면 시위 129
를진압하라 든지, 시위대를해산하라 든지, 해산하지않는시위대원을체포하라 든지하는 명령이떨어져야했다. 그러나 시위 라는단어는단한마디도나오지않은채무조건 거 리에나와있는사람모두체포하라 는명령이떨어진것이다. 어떠한주의사항조차없이 내려진명령을받은공수부대원들은이미예정되어있는것처럼착검한 M16 소총을등에 메거나손에든채눈앞에있는시민들에게달려들어진압봉과소총개머리판을휘둘러댔 다. 149) 공수부대가유동 3 거리쪽에서다가오자시위하던학생대부분은잽싸게빠져나가 고, 겨우 7, 8 명만이남아두어마디구호를외쳐대고있을뿐, 나머지는대부분구경하는 시민들이었다. 여기에공수부대원들이살인적인공격을감행하고나선것이다. 상대는학생뿐만아니라눈에띄는사람이면남녀가리지않았다. 그리고피투성이가되 거나의식을잃으면무조건끌어다앞에있는군용차량위로던지다시피마구실었다. 체 포하라 는작전명령의수행이었다. 150) 붙잡히지않으려는시민들은급한대로점포나사무 실은물론골목집으로달아나숨기에바빴다. 151) 같은시각, 11 대의군용차량이도착해수많은군인들을쏟아냈다. 이들도체포작전에나 서서달아나는시민들을쫓아가진압봉이나개머리판을휘둘렀다. 대위, 중위급장교들과 상사, 중사급하사관들은몽둥이나네모진각목, 심지어장작개비를들고체포작전을더 욱강도높게펼치라고소리높여다그쳤다. 횡단보도바로옆북동 182 번지건물 2 층, 동아일보광주지사에 2 명의공수부대원이착 검한 M16 소총을앞으로겨누어잡고들어와옆방에숨어있는 3 명의젊은이들을두들겨실 신하자끌고나갔다. 이들은다시들어와업무에종사중인정은철 (22) 의뒷덜미를낚아채 쓰러뜨려실신시킨후두발을하나씩붙잡고끌고나갔다. 그들은또다시들어와배달 학생박준하 ( 광주공고 1 년 ) 를진압봉으로때리고짓밟은다음끌고가다계단에서실신하 자그대로놔두고가버렸다. 바로그때지나가던택시가공수부대원들에게붙잡혔다. 한눈에보아도시위와아무런 관련이없는신혼부부가분명한젊은남녀가끌려나와진압봉과군홧발세례를받았다. 신랑은 아이쿠, 눈이야 하고외마디소리를지르며땅바닥으로뒹굴었고, 예쁜치마저고 리가갈기갈기찢겨진신부는자신의몰골은돌아보지않은채신랑을붙잡고엉엉울며 사람살리라고울부짖었다. 또한 11 대의군용트럭대열맨뒤호로가벗겨진차량위에는 피투성이가된 22, 3 세가량의여성이마구찢겨진베이지색옷자락사이로젖가슴이드러 나고아랫도리는거의벗겨져넋을잃은채본능적으로치부를가리기위해두다리를꼬 고있었다. 이를본공수부대원들은 물건좋다 며희희낙락했다. 이때이여성에게가운 을던져주려던바로옆서석병원사무장이붙잡혀역시진압봉과군홧발공격을받았다. 이건물저건물에서 나쁜놈들 하는야유소리가터져나오자한공수부대원이그간호 사가운을여성에게던져주며 꺼져 라고소리질렀다. 152) 130
공수부대원들은이곳에서 150m쯤떨어져있는광주일고교실에들이닥쳐고등학교정규과정수업을받고있던방송통신고학생들을마구두들겨팬후끌고갔다. 같은학교운동장에서열린조선대의과대학동문체육대회장에도공수부대원들이달려들어아수라장을만들었다. 선배들의체육대회를거들던의과대학 4학년이민오 (26) 는공격해오는공수부대원들을피해교장관사로피했으나곧붙잡혀무수히구타당한뒤끌려갔다. 다음날 (19일) 밤상무대영창에서다시두들겨맞은후유증으로췌장및비장파열과복막염을일으켜사경을헤매다육군통합병원에서대수술을받고서야간신히살아났다. 153) 공수부대원이북동우체국옆마지막골목집으로뛰어들어집에있던할머니에게 금방도망온학생이어디있느냐 고묻고, 모른다고대답하자할머니를진압봉으로실신시킨다음방안을뒤져학생을끌고갔다. 또한버스터미널뒷골목으로달아나던고등학생이붙잡혀살려달라고애원하는모습을자기집대문에서지켜보던 60대노인이 놔주라 고타이르다가진압봉을얻어맞고피를토하며쓰러졌다. 학생은실신한채끌려갔다. 154) 네살때뇌막염치료약물을잘못복용한탓으로벙어리에귀머거리가된김경철 (28) 은 155) 이날오후금남로 3가지하상가공사장부근에서공수부대원들에게붙잡혀수없이두들겨맞고짓밟히면서도장애자증명을보이며애원했으나소용이없었다. 거짓으로장애자흉내를낸다고계속두들겨패던공수부대원들은그가실신하자그대로놔두고가버렸다. 이를보다못한시민들이소형트럭에실어적십자병원으로옮겼으나다음날새벽 3시쯤숨졌다. 156) 행인들은물론이건물저건물안에있던수많은사람들은이런광경들을지켜보고있었으나살기등등한공수부대원들의만행에아연실색할뿐감히무서워만류하거나억제하지못했다. 157) 바로횡단보도앞에정차해있던두대의트럭에는체포된피투성이사람들이가득실려있었으나그후그들이어디로끌려갔는지는아무도몰랐다. 158) 계엄사는과격시위로인해우발적으로 과잉진압 이펼쳐졌다고주장했다. 1980년 5월 18일오후 4시정각, 광주의 피의일요일 은이렇게시작되었다. 2) 광주시민들의분노와지도자없는항거 다음날인 19일오전 9시가조금지나자학생과시민들이골목길을통해금남로 3가가톨릭회관앞으로모여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000명으로불어난시민들을향해돌격자세로진압봉을휘둘렀다. 그런데도시민들은자꾸모여들었다. 대학생들보다소상인이나자유업젊은이들이더많았고, 거기에허름한부녀자나중년남자들, 심지어 10대의중국집배달소년이나 60대의노인들도보였다. 삽시간에 5,000여명으로불어난시위군중은공수부대에대항하고자금남로지하상가공사장에서각목과쇠파이프등을뜯어내어무기로 131
삼았다. 그런데도공수부대원들은전날보다더욱무섭게개머리판과진압봉을휘두르고심 지어대검으로내리쳤다. 이들은아침에서울에서내려온제 11 공수여단병력이었다. 159) 전날오후 3 시 30 분, 이들이주둔하고있던서울동국대로찾아간정호용특전사령관으 로부터 광주에투입된제 7 여단애들이고전하고있고, 유언비어까지나돌아어려운형편 이니출동하라 는명령을받고, 이날아침광주에도착하자마자투입된병력이었다. 160) 그 러나 18 일오후 3 시 30 분은공수부대가유동 3 거리와충장로입구에도착하기직전이어서 시위진압은커녕체포작전이개시되지않아 우리애들이밀리 기는커녕유언비어조차나돌 지않은상황이었다. 공수부대의살육적체포작전은이에반발하는선량한시민들을자꾸 성난민중 으로변 모시켰다. 그렇다고학생과시민들로이루어진순수한민중들이공수부대원들의살인적인 폭력을당해낼수있는것은아니었다. 이때마침금남로에서 40 대로보이는부부가붙잡혔다. 이부부는얼마나두들겨맞았 는지피가줄줄흐르는머리를감싼채끌려가고있었다. 161) 또금남로 3 가미도장여관 ( 폐 업 ) 입구에서김영대 (32) 등종업원 4 명과 40 대투숙객 2 명이공수부대원으로부터역시개머 리판과진압봉으로두들겨맞고군화발질을당한후옷을벗긴팬티바람으로끌려갔다. 162) 또한금남로 1 가 YWCA 건물옆길에서무등고시학원쪽으로걸어가던 40 대와 20 대의모녀 가공수부대원으로부터진압봉세례를받았다. 마침학원에서나오던학생들이이광경을 보고야유를퍼붓자, 공수부대원들은학원으로들어가학생들을짓밟은후 10 여명을끌고 갔다. 금남로에서살육적인 체포작전 을벌이던공수부대원들은자신들의만행이시민들의눈 에띄는것을의식했음인지마이크를통해모든빌딩과주택들을향해 문을닫아라 커튼 을쳐라 내려다보지말라 고소리쳤다. 심지어얼룩무늬군복에별하나가붙여진베레모 를쓴장군이지휘봉을들고금남로 2 가와 3 가사이양편건물을올려다보며 내다보지말 라 쏘아버리겠다 고위협했다. 163) 공수부대가점심식사를하러잠시물러가자기다렸다는듯이수많은사람들이쏟아져 나왔다. 공수부대대신경찰이최루탄을쏘며진압에나섰으나, 시민들은돌멩이와화염병 으로맞섰다. 164) 금남로 3 가에서경찰과대치하던시민들은가톨릭회관차고에있던기독 교방송국 (CBS) 취재차량을끌어내시동을건채시트에기름을붓고불을붙여경찰저지선 을향해발진시켰다. 어제오늘의참담한광경에벙어리가된언론에대한분노가폭발했 다. 또한제일교회증축공사장에서굴리고온드럼통에불을붙여역시경찰쪽으로굴렸 다. 드럼통은굉음과함께폭발하며까만연기를하늘높이뿜어냈다. 132
19일오후 4시 30분, 계림동파출소와광주고사이도로를지나던공수부대장갑차한대가 사람의벽 에가로막히면서보도난간에부딪혀멈춰서자, 부녀자들까지끼어있는시민들이우르르몰려들어장갑차양쪽감시경을돌로깨어버렸다. 안에있던장교등 9명이밖으로나오려다시민들이 저놈들죽여라 고외치자 2명은달아나고 7명은다시안으로들어갔다. 시민들은근처페인트가게에서구해온석유통을장갑차밑에뿌리고불을붙였으나발화되지않았다. 다시짚더미를가져다불을질렀으나점화되지않았다. 이번에는불붙은짚더미를들고올라가덮개를열고그안에집어넣으려했다. 위기를느낀안에서갑자기덮개를열고하늘을향해발포했다. 그래도흩어지지않자이번에는바로시민을향해정면으로발사했다. 조선대부고 3학년김영찬 (19) 이손과대퇴부에 3발을맞고쓰러졌다. 165) 다행히인근에있던공중보건의정은택에의해급히병원으로옮겨졌다. 166) 장갑차는그틈을타쏜살같이달아났다. 광주사태 최초의발포였다. 18일과 19일이틀동안사망자는농아장애자김경철과 19일오후희생된김안부 (34) 등두명이지만, 연행되어간사람은수없이많았다. 그런데도가족들에게통보조차해주지않아집집마다가족의행방을찾느라아우성이었다. 167) 연행된사람들은주로조선대와전남대체육관, 상무대영창에구금된채말할수없는혹독한고문을받았으며, 무참하게살해된사람도상당수있었음이밝혀졌다. 168) 3일째인 20일오전, 금남로한복판에서는 30명이넘는젊은남녀가 4열로줄지어팬티와브래지어만걸친알몸으로기합받는희한한 체포작전 이벌어지고있었다. 줄앞에는각기벗은옷과신발, 핸드백과휴대품이놓여있었다. 거의가 20대젊은사람들, 두어명쯤 30대도있었고, 10여명의여성들도있었다. 공수부대병사들이몽둥이를들고빙둘러서있는가운데, 하사관으로보이는한군인이줄가운데서서 엎드려뻗쳐, 다섯번굴러, 쭈그리고앉아, 한발로서, 옆으로누워 등을외치며갖가지동작을강요했다. 만약구령에조금이라도따라하지않거나느리게할경우몽둥이와회초리가여지없이날아들었다. 몽둥이를맞고피를흘리는사람도있었고, 어느젊은이등에는회초리로갈겨진벌건줄이쭉쭉그어져있었다. 특히젊은여성들이팬티와브래지어바람으로금남로큰길한복판에서봉변당하는광경은가관이었다. 169) 이광경은많은사람들에의해목격되었다. 특히가톨릭회관 6층에있는천주교광주대교구청에서이영수 조철현신부를비롯한사제와신도들이내려다보았다. 조철현신부는 내가비록성직자지만옆에총이있었다면쏴버리고싶은심정 이었다고술회하기도했다. 170) 133
더욱이계엄사는 20일오후 3시, 광주사태초반에사용하던것보다길이가더길고두툼한진압봉 2,313개를광주로공수하여공수부대원 (7공수 420개, 3공수 710개, 11공수 638개, 전교사 545개 ) 들에게나눠줬다. 171) 이는신군부가광주사태를원만하게수습하려는것보다는더욱가중시키려는의도였음을말해준다. 이러한사실은 21일광주사태를평화적으로수습하려던윤흥정전남북계엄분소장을경질하고, 다음날 (22일) 후임으로임명된소준열소장에게 우리애들사기죽이지말고더욱강력하게밀어붙이라 는내용의메모를보낸전두환보안사령관의의중이나 172) 21일 왜 1개대대의탱크와무장헬기를동원하지않느냐 는황영시육군참모차장의질책에도그대로드러나있었다. 173) 오후가되면서도청광장부근으로모여든시민들은금방 2, 3만여명으로늘어났다. 시민들은드럼통을굴리면서군경저지선으로접근하거나화염병과돌멩이를던지기도하고쇠파이프 각목 쇠갈퀴등을휘두르기도했다. 신군부가주장한대로시민들은민중의또다른형태인 폭도 로변해버린것이다. 하지만이렇게방대하게사흘째벌어지고있는범시민적항쟁인데도앞장서규모있게이끄는지도자가한사람도없었다. 분노의공감대가이루어져모여든시민들, 이들앞에나와구호를외치며이끄는사람도있었으나그선동자는그때일뿐, 계속해서주동자나선동자노릇을하는것은아니었다. 174) 계엄사는 북괴의조종을받은폭동 이라고폄훼하면서오히려있지도않은유언비어유포를내세웠는가하면남파간첩을왜곡발표하거나교도소습격사건을조작해발표했다. 175) 134
3) 운전기사들의봉기와민중항쟁으로의확산 19일공수부대원들은학생들을실어나르고부상당한시민들을병원으로옮겨주는시내버스와택시를세우고손님뿐만아니라운전기사까지마구두들겨팼다. 이에억울한택시기사들사이에서 가만히당하고만있을수없다 는분노가솟구쳤다. 20일아침신안동어느해장국집에서만난 5, 6명의택시기사들은 일할맛이나지않는다 한번대항해보자 는말들을무심코나누었다. 그러다가오늘당장오후 2시이후에일어나기로다짐하고, 집결장소는주차하기좋고공수부대눈에띄지않는무등경기장으로정했다. 오후 4시무렵부터택시는물론버스와트럭 200여대가모여들었다. 오후 5시 30분, 운전기사들은헤드라이트를일제히켜고도청광장을향해힘차게시동을걸었다. 이는특정지도자도없이결속력이강한운전기사들끼리공수부대의만행에대한울분의공감대가이루어진결과였다. 이들이궐기한것은학생과시민들이민주화를외치다다치고죽는데동조했다기보다는자신들이당한억울함과분통에사로잡혀일어난것이다. 헤드라이트를켠 200여대의차량행렬이무등경기장을떠나금남로 5가를거쳐 1가까지진출한것은오후 7시쯤이었다. 길거리로쏟아져나온수만명의시민들은차량시위대와함께전진하면서, 이기자, 이겨야한다 고외치며환호했다. 시민들은 이제우리도해볼수있다 는자신감이생기는고무된모습들이었다. 시위대는도청광장과전일빌딩사이의공수부대저지선을돌파하기위해대형버스 4대를맨앞에세우고전진했다. 화물차와택시들이뒤를이었다. 시민들은그뒤를따르며구호를외쳤다. 시위대열을저지하려는공수부대와경찰은선두차량의유리창을부수고최루탄을던졌다. 오후 7시 45분, 공수부대는전일빌딩앞에장갑차로바리케이드를쳤다. 선두의대형버스나성난민중들이장갑차로가로막은저지선을뚫기에는역부족이었다. 시위대와공수부대는 20여m의간격을두고대치했다. 공수부대뒤쪽에있던경찰은최루탄을쏟아냈고시위대원들은이를흠뻑뒤집어썼다. 그런데도대형버스와화물차를앞세운시위대는공수부대를향해한발자국씩다가들며육박전을벌였다. 수십대의차량사이에는머리가깨지거나피투성이부상자들이쓰러져아우성이었다. 부상당한운전기사를부둥켜안은안내양차림의 10대소녀는 구급차를보내달라 며울부짖었다. 176) 차량시위대와수많은시민들은공수부대의극력저지로도청광장으로들어가는것이불가능해지자금남로길목을포기하고경찰이지키고있는노동청길을택했다. 길폭이넓 135
어차량으로밀어붙일수있다고본것이다. 경찰은최루탄을쏘아대면서갑자기몰려오는 차량시위대를필사적으로저지하고나섰다. 10 여대의버스를앞세운수많은시위대원들이 갖가지구호를외치며저지선을무너뜨리려고안간힘을쓰고있는노동청길목은훨훨타 오르는건물과차량의불길로대낮같았다. 밤 9 시를조금넘어시위대차량들이총공세를 펼쳤다. 바로이때시동이걸린시위대버스한대가경찰저지선으로돌진했다. 최루탄가스 에놀란운전기사가운전대를놓아버린것이다. 저지선상에있던함평경찰서소속강정웅 (39) 박기웅 (40) 이세웅 (31) 정충길 (40) 등 4 명의경찰관이깔려숨지고 5 명이중경상을입었 다. 4 구의시신이먼저도청현관으로운반되고, 나중에 5 명의부상자들이도착했다. 부상자 를급히병원으로이송해야할모든길이꽉막혔으나경찰측에서스피커를통해호소하 자시위대원들은순순히비껴주었다. 이날운전기사들의궐기는광주시민들의항거를 민중항쟁 으로승화시키는결정적계기 가되었다. 여기에혜성처럼등장한전옥주 ( 전춘심 ) 는소형화물차에매달은스피커를통해 절절한목소리로모든시민들을흥분시켜시가를온통들끓게했다. 177) 밤 9 시 50 분쯤궁 동쪽문화방송 (MBC) 건물에서갑자기새빨간불기둥이솟아올랐다. 시위군중들은저녁 7 시뉴스에계엄사의거짓투성이발표문을보도한데분노한끝에 MBC 사옥을불태워버린 것이다. 이날오후전남북계엄분소는 5 18 사태이후처음으로담화문형식의보도문을내 고한승철등 167 명을석방했다고발표했는데시민들은이들을범법자로규정한데분개한 것이다. 또한새벽녘이되었을때 3,000 여명의시민들이광주역건너에있는광주방송 (KBS) 건물에 전두환꼭두각시방송국 이라며화염병을던져불태웠다. 178) 자정이넘었는데도시민들의수는점점늘어나노동청쪽에 2 만여명이다시모여들어 경찰저지선을밀어붙이고있었다. 전옥주는마이크를통해 도와주세요. 경찰관아저씨, 아 저씨들은우리편입니다 며울부짖었다. 전옥주는시위대열을광주세무서앞으로이끌면서 세무서를불질러버리자. 세금걷어국민잡는공수부대키웠으니세무서도나쁜 들이다 고외쳤다. 시민들은몰려가먼저단층목조건물인광주세무서별관에화염병을던졌다. 본관은다음날낮불타게된다. 계엄사는 19 일과 20 일아침이미추가로투입한제 11 공수여단, 제 3 공수여단이외서울에 주둔하고있던보병제 20 사단을광주에또다시투입했다. 차출된 3 개연대및사단직할부 대병력 4,946 명 ( 장교 279/ 사병 4,667 명 ) 은각각열차편으로 21 일아침송정리역에도착해 전교사에배속되었다. 아침 8 시쯤도착한제 20 사단제 61 연대는광주교대로이동중돌고개 근방에바리게이트를치고도로를차단하고있던수백명의시위대원들에게저지당해상 무대로되돌아갔고, 고속도로를타고광주에도착한제 20 사단지휘부지프차량 14 대는광 주공업단지입구를가로막고있던 50 여명의시위대원들에게모두탈취당했다. 시위대원 들은탈취한지프차를타고광주공업단지에있는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몰려가버스 지 프 장갑차 가스차등 260 여대의각종차량을끌고나왔다. 179) 21 일아침 6 시 30 분쯤밤을새워시위를벌이던시민들은대형태극기에덮여진 2 구의시 136
체를손수레에태우고가톨릭회관앞에서공수부대와맞섰다. 사망자가없다는발표에대한항의의뜻이었다. 어느때보다이른아침인데도금남로 3가일대에는많은사람들이모여들었고, 시간이갈수록늘어나오전 9시쯤에는 5만여명으로불어났다. 청바지와빨간점퍼에머리를길게늘어뜨린전옥주가구호를외치며시위대열을주도했다. 그때뒤에서누군가가 계엄군측과협상합시다 라는주장을펴고나왔다. 그러자 옳소 하는외침과동시에 무작정이렇게밀고나갈것이아니라당국이사과를한후우리의명예를회복시켜준다면타협하는것이좋지않겠느냐 는의견도제시되었다. 군의사과와시민의명예회복 이기본적타협조건이었다. 전날밤새밀어붙이며함성을지르던들뜬흥분과는 180도달라진자세로서차분하게가라앉은분위기였다. 즉석에서협상대표로뽑힌전옥주 김범태 ( 조선대법과 1년 ) 김상호 ( 전남대상대 2년 ) 외 1명 ( 신원불명 ) 등 4명이여러의견을종합했다. (1) 유혈사태에대한도지사사과, (2) 연행된시민 학생즉각석방하되여의치않으면소재라도알려줄것, (3) 공수부대는오늘 (21일) 정오까지시내에서철수할것, (4) 전남북계엄분소장과의협상을주선해줄것등 4개항으로요약된협상안을가지고공수부대대열을통과해도청으로들어가장형태전남도지사를만났다. 장형태는 (1) 항은얼마든지받아들이되, (2) 항과 (3) 항은자신이결정할소관이아니지만적극건의하겠고, (4) 항은반드시성사되도록주선하겠다고약속했다. 180) 장형태는합의된사항을시위대열앞에서직0접발표해달라는협상단의요구를받아들여도청현관에나와마이크가준비되기를기다리고있었다. 181) 그러나그는웬일인지시민들앞에끝내나오지않았다. 182) 이에실망한시민들은공수부대를향해자꾸다가갔다. 공수부대대열은관광호텔앞까지밀렸다. 시민들과공수부대원사이는 5m 정도로가깝게좁혀졌다. 오전 10시 10분쯤상무관앞의공수부대원들에게실탄이지급되었다. 실탄은이미전날인 20일밤에지급된바있으나공개적으로지급된것은처음이었다. 183) 실탄을받은 3 개소대가량의병력이맨앞쪽으로나와시위대와맞섰다. 137
4) 공수부대의발포와시민들의무장투쟁 21일정오가지나고오후 1시가되어갈무렵도청광장은어쩐지어수선하면서도긴장감이감돌았다. 일촉즉발의분위기였다. 공수부대원들은시위대에밀려도청광장안으로물러나있었다. 12시 58분, 갑자기광성여객회사소속관광버스 2대가쏜살같이시위대열을통과해공수부대가장악하고있는도청광장한가운데로진입해분수대를돌고있었다. 공수부대는즉각발포했다. 공수부대측은자위권차원에서발포했다고주장했다. 184) 동시에다른쪽에서도총소리가들려왔다. 185) 2대의버스중한대는다시시위대열쪽으로돌아오고다른한대는분수대옆에멈췄다. 운전기사가총탄에맞은것이다. 또다시숨돌릴틈없는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회사에서끌고나온앞이뾰쪽한해병대용장갑차한대가질주해들어갔다. 186) 관광버스진입때물러났다가즉각다시나와있던공수부대대열이흐트러지면서황급히피했지만미처물러나지못한두명의사병이치었다. 권상운상병은즉사하고, 다른한명은중상을입었다. 관광버스와장갑차의기습은대치상황을급전직하로몰았다. 공개적발포로이어진것이다. 187) 곧이어오후 1시정각, 도청옥상에설치되어있는스피커를통해가사없는애국가가장중하게울려퍼졌다. 동시에수백발의총성이일제히울렸다. 애국가에맞춘발포명령임이었다. 188) 19일이후산발적인총성은있었지만이렇게많은총소리가한꺼번에울린것은처음이었다. 이때의발포는사전경고성공포인듯모두가공중으로발사되었다. 이총성은진압봉 개머리판 군홧발 대검을이용한물리적폭력에의한 살육 을현대적무기인총탄을동원한본격적 살육 으로전환했음을의미했다. 21일오후 3시이전의발포사례는다음표와같다. 138
<21 일오후 3 시이전의발포사례 > 시간내용 19 일 16 시 30 분 20 일 20 시 30 분 20 일 22 시 30 분 20 일 23 시 20 일 24 시 21 일 12 시 21 일 12 시 58 분 계림동, 제11여단제63대대소속장갑차 ( 장교 1명, 사병 9명 ) 가이동중시민들에포위된채방화위협을받자 M16으로발포, 김영찬총상시위대가불을붙인드럼통을굴리며돌진해오자광주역을수비중이던제3공수여단제16대대가발포광주역과광주시청앞에서시위대와대치하고있던제3공수여단제11 12 15대대병력이 M60기관총 권총 M16소총으로위협사격도청앞에서 10만여명의시위대와대치중이던제3공수여단제11대대병력이 M16소총으로위협발사광주역앞에서시위차량과대치중이던제3공수여단제12 15대대소속장교들이발포, 김재화 김만두 김재수 이북일등 4명이숨지고최영철등 20여명이부상광주역부근신안동굴다리에서제3공수여단제13대대장교들이시위대에발포했고같은시간광주역에서제3공수여단병력이발포도청광장으로기습진입한관광버스 2대에제11공수여단병력이발포, 운전기사 1명즉사 21 일 12 시 59 분도청광장으로기습해오는시위대장갑차에제 11 공수여단병력이발포 도청광장에서제7, 제11공수여단병력이애국가에맞춰 M60기관총과 21일 13시정각 M16소총으로일제히공중에발포금남로 3가도로상에서구호외치는시위대에제11공수여단병력이정 21일 13시 10~30분조준하여일제히발포함으로써많은사상자발생 21일 13시전남대정문주변에서제3공수여단병력이시위대에발포, 최미애외 1 30분~15시명 ( 성명미상 ) 이사망하고 5명이부상 출처 : 재향군인회, 1997, 291~292 쪽 ; 김영진, 1989, 222~230 쪽 ; 정상용 유시민외, 1990, 217~235 쪽 ; 서울지검및국방부검찰부발표문 ; 서울고법항소심판결문 ; 필자가취재한것등을종합한것임. 발포가시작되자시민들은다소동요의빛을보이는듯했다. 그러나오후 1시 10분쯤 1,000여명이금남로 3가양쪽보도에다시모여들었다. 공수부대도장갑차한대씩을금남로와노동청쪽으로각각돌려놓았고 10여명의저격수들이금남로쪽큰길을향해 앉아쏴 자세를취한채오가는시민들을예의주시하고있었다. 이때금남로 3가큰길양쪽인도에서대형태극기를흔들며갖가지구호를외쳐대던젊은이들이숙연하게애국가를부르기시작했다. 몇사람이다시구호를외치는가운데 5, 6명의젊은이들이큰길복판으로뛰쳐나갔다. 도청광장으로부터 300여m 떨어진금남로한복판에서태극기를흔들며 전두환물러가라 계엄령해제하라 는구호를외쳐댔다. 동시에 따당 따당 요란한총성이울렸다. 태극기를흔들며구호를외쳐대던 5, 6명이그대로쓰러졌다. 머리와가슴과다리에서붉은피가쏟아졌다. 사격자세를취하고있던공수부대쪽에서공개적으로가한정조준발사였다. 몇명이뛰어나가시체와부상자들을들어냈다. 또다른 5, 6명이역시태극기를들고나가흔들면서구호를외쳤다. 또다시사격이가해지고맥없이쓰러졌다. 그러면또다시들어내고다시태극기를흔들며구호를외치고, 또쓰러졌다. 비극의시위는대여섯번계속되었다. 구호만을외치며순수하고평화적으로시위를벌이는시민들에 139
게정조준한총탄이퍼부어지는비극적상황은주위에서만류하는웅성거림이있고나서야중단되었다. 189) 반복되던젊은이들의시위가끝날무렵갑자기시위대의해병대용장갑차한대가또다시공수부대원들이점거하고있는도청광장으로질주해들어갔다. 머리에흰띠를두르고장갑차위에서태극기를흔들던그젊은이는윗도리를완전히벗어버린채였다. 즉각적인공수부대의총격을받은그의머리가푹고꾸라졌다. 또한이장갑차를향해일제히가해진총격으로충장로입구도심빌딩 5층에살고있던황호정 (62) 이총탄을맞고숨졌다. 190) 오후 2시 35분, 공수부대원들은분수대에서가까운금남로쪽에민간인소형트럭과버스로바리게이트를치고 3,000여명으로늘어난시민들을지켜보고있었다. 시민들은공수부대의발포때문에 300~400m 정도거리를두고웅성거리는상태였다. 도청별관과수협전남지부, 도심빌딩을비롯한인근건물옥상에는얼룩무늬군인들이사격자세를취하고있었다. 이들은충장로와학동쪽입구를비롯한도청주변을오가는행인들에게무조건발포했다. 도청인근에있는점포나주택들은모두문을닫아야했다. 그때까지남아있던도청직원들도실내로들어가야했고, 곧도청을떠나야할상황이되어갔다. 군의공식발포는곧상대방에대한무차별사살을의미했다. 타협을배제한채무조건총탄으로굴복시키려는의도였다. 군의요구대로무조건순응하든가, 아니면죽어도좋으니끝까지저항하든가의두갈래갈림길에선가운데, 적극적민중 으로탈바꿈한광주시민들은후자를택했다. 191) 한국전쟁이후일찍이겪어보지못한공수부대의만행이극도에달해있었기때문에광주시민들은모두한덩어리가되어항쟁에참여하게되었으며, 시민들은우리가했던일들에대해자랑스러워하고있다 는어느여교사의표현처럼후자의선택은필연적이었다. 192) 학생과젊은이들은오후 1시를기해공식적인발포가시작되자무기를확보하기위해각방면으로흩어져나갔다. 이제총이아니면공수부대에대항할수없다고판단한것이다. 공수부대의발포가본격화되는오후 1시부터 1시간남짓머뭇거리던시위대원들은 이에는이 라는강경대응의상징인무기의필요성을절감하고수십대의차량들을몰고시외로빠져나갔다. 우선광주에서가까운화순과나주지역예비군무기고에집중했다. 광주시내예비군무기들은이미대피시킨상태였다. 시위대원들이가장먼저시도한것은화순탄광의다이너마이트확보였다. 공수부대가주둔하고있는도청을폭파시켜버리기에아주좋은무기라고여겼다. 10여대의차량을타고화순탄광으로달려간시위대원들은광부들의도움을받아 60여개의다이너마이트와카빈소총 64정을입수했다. 돌아오면서화순경찰서무기고에서카빈과 M1 소총 200여정, 수류탄 230여개, 실탄 1만 4,000여발, 동복 능주지 140
서에서카빈및 M1 소총 1,300 여정과실탄 2 만 2,000 여발을확보했다. 또한광주시소태 동에있는석탄공사화약고를기습하여 TNT 3 만 7,000 여개와뇌관을손에넣었다. 나주방 면으로달려간시위군중들은나주경찰서본서와금천 다시 영산지서, 영강동 금성동 중앙 동파출소에서카빈 1,200 여정, M1 255 정, 권총 25 정, 공기총 151 정과탄약 6 만 7,000 여발 을탈취해오후 4 시전후에돌아왔다. 193) 또다른젊은이들은장성 영광 담양 보성 무안 영암 함평은물론멀리강진 해남 완도 곡성 구례까지쫓아가무기와탄약을탈취해광주 로돌아와다른젊은이들에게나누어주었다. 그리고그곳에 광주의살육 을전하면서항 쟁의당위성을역설했다. 무기확보를위해사방으로흩어져간이들은 5 18 민중항쟁 의도 내확산에결정적역할을했다. 그가운데서도나주 목포 함평 무안 해남 강진등몇몇곳 의시위와항쟁을더욱격렬하게전개시키는동기가되었다. 194) 특히목포는김대중의출 신지역이어서광주살육에직접적인자극을받아어느지역보다극심하게시위를벌였다. 21 일오전 10 시 45 분쯤 5 대의화물자동차를타고광주를빠져나간 200 여명은오후 1 시 목포에도착했다. 이들이목포입구에서부터스피커를통해광주에서있었던일들을상세히 전하자웅성거리기시작했다. 오후 4 시, 목포역광장에는오창환목포대학학장등대학교 수 변호사 목사등 2 만여명의시민들이모였다. 무기를들면폭도가된다. 절대로들지 말고평화적으로시위를하자 는유지들의호소를듣고난후, 광주에서온시위대원들로 부터살육소식을직접전해들었다. 지난 3 일동안광주에서벌어진상황에대해전화와 소문으로만들었던시민들은광주시위대원들로부터직접그상황을듣게되자분노하다 못해울부짖었다. 시민들은김대중고향답게가장먼저 김대중석방 을외쳤으며, 계속해 서 계엄령철폐 전두환퇴진 등의구호를소리높이외쳤다. 시민들의시위가점점격렬 해지자관공서와상가는문을닫았고경찰은수수방관했다. 치안은공백상태가되어버렸다. 밤 10 시가넘도록시위를벌인목포시민들은다음날에도그다음날에도계속한끝에계 엄군이광주시내에진입한 27 일을넘어 28 일까지이어졌다. 해남 화순 나주 강진 무안 함 평등도내몇몇군청소재지에서도일제히시위가벌어졌다. 항쟁으로발전한광주사태는 도내각지역으로확산되었다. 함평과무안에서는경찰이시위에참여하기도했고, 해남에 서는지역유지들이민주인사석방 독재자추방 광주사태희생자보상 계엄해제등을 내걸고시위를벌이기도했다. 이제총을든시민들은맨손으로시위를하고항의하는보통사람의 민중 이아니라무 장한시민, 이른바 시민군 이라는새로운양태의무장세력으로전환되었다. 195) 그러나제 2 차세계대전의유물로서명중률이형편없는 M1 과카빈소총으로무장한시민군이강도높 은훈련과고성능무기로무장한공수부대원의적수가될수는없었다. 카빈과 M1 소총은 세계어느분쟁지역에서도사용되지않는고물무기였다. 이러한무기로밖에무장할수없 는 시민군 이되어다시광주로돌아온시위대원들은미쳐전열조차갖추지못한채공수 141
부대의무차별총격을맞았다. 196) 시가전이라기보다는저격수들의발포에대한대응발사에불과했다. 197) 더욱이이들은훈련한번제대로받지않은 오합지졸 이었다. 비록군에복무했던예비군들이주도했으나총을한번도만져보지못한 10대의중고교생이나새파란 20대들이대부분이었다. 계엄군이철수한직후인오후 5시 30분쯤도청옆길에서 10대소년 3명이카빈소총 3정을들고함부로노리쇠를당기며행인들에게총쏘는법을가르쳐달라고애원하고있었다. 이렇게총을휴대한시민군은무질서하고위험했다. 교전이나시가전은엇비슷한전열을갖추고전투를벌이거나게릴라식무력저항을말한다. 그러나공수부대원들의만행에분노한시민들이거리로나와저항했던것처럼이소년들을비롯한젊은이들도삶과죽음을의식하지못하고무작정뛰어든무모한공격이요도전이었다. 도저히승리할가능성이없다고판단되는상황에서분출한분노와오기였다. 198) 오후 4시 43분, 전남대병원 12층옥상에서젊은사람 3, 4명이무엇인가열심히손놀림하고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발포를우려한듯몸을움츠리고한참동안부산하게움직이던이들사이로 2대의기관총총신이드러났다. 도청과그인근옥상의공수부대원을겨냥한가설일터이다. 시민군이명중률이형편없는 M1이나카빈소총으로무장한것과는달리자동화기를갖추고공수부대를본격적으로겨냥하게되었다는사실은총격전이나시가전을전제로하는게릴라로변신했음을의미했다. 다행스러운것은이곳에기관총이설치된후공수부대가금방철수한탓도있었지만, 이들은시민들의피해를우려했음인지기관총탄을한발도발사하지않았다. 도청의공수부대는한때이곳의기관총을제거하기위한특공대를편성하기도했지만곧바로철수하면서포기했다. 199) 21일오후 5시 25분, 도청직원들은공수부대의발포영역이되어있는정문을피해뒷담을넘어철수했다. 도청에있던제7공수여단제35대대와제11공수여단 3개대대병력은이에앞선오후 5시쯤도청주변건물옥상의저격수들을내려오게한후오후 5시 30분장갑차를앞세운도보행군으로노동청 전남공고앞을거쳐조선대캠퍼스로철수했다. 이들은시위대의공격에대비하여공포탄을발사하면서철수했고, 다른병력들도도보와차량을이용하여시외곽으로빠져나갔다. 또한차량부대는장갑차를선두로지원동제2수원지부근으로철수했다가다음날주남마을에서다른부대와합류했다. 주남마을로이동하는길목 142
인전남대병원과남광주역전시장 숭의실업고등학교부근을거쳐목적지로향하던일부병력은무장시위대로부터불의의기습을받아 3대의군용차량이전복되는바람에장교 1명과사병 1명이숨지고 6명이부상했다. 공수부대는장갑차를동원해학동과지원동일대의길양쪽주택가에기관총과 M16소총을난사해안방까지총알이날아들도록보복했다. 200) 제3공수여단은이날오후 4시 30분제15대대를선두로전남대를출발, 오후 5시 20분광주교도소에도착해제31사단병력과교대했다. 이날시내에서철수한공수부대를비롯한 47개대대 2만 317명의계엄군은 201) 송정리방면의화정동, 화순방면의지원동, 목포방면의대동고등학교앞, 여수 순천방면의문화동, 제31 사단방면의오치동, 장성방면의동운동길과, 교도소일대등 7개외곽지점을거점삼아, 광주를외부로부터완전히고립시키는봉쇄작전에들어갔다. 이같이공수부대를비롯한계엄군의광주시내에서의철수는무장시위대의공격에위협받아서가아니라 27일결행할 상무충정작전 이른바 폭동진압작전 을위해계획적으로병력을시외곽으로빼냈다는사실이다. 202) 이로써도청건물은텅빈상태가되었다. 시위대원들은공수부대가완전히철수한줄도모르고있다가오후 8시쯤에야알아차리고도청으로들어갔다. 5) 시민공동체의자치활동과수습대책위원회 카빈, M1 등낡고빈약한소총으로무장한 시민군, 허름한옷차림에가무잡잡한얼굴들 이지만투지가당당한 시민군 은 22 일아침텅빈도청으로들어갔다. 비록오합지졸이지 광주 에동원된계엄군 부대 대대 인원 ( 장교 / 사병 ) 비고 ( 장교 / 사병 ) 3공수여단 265/1212 특전사 7공수여단 92/780 10개대대 (504/2901) 11공수여단 147/909 60연대 87/1563 20사단 61연대 85/1535 62연대 86/1449 9개대대 (279/4667) 사단직할 21/120 31사단 55/1367 보병학교 1923/864 전교사 포병학교 1165/1700 기갑학교 357/1775 28개대대 (3944/8022) 화학학교 75/293 직할대 365/2063 계 47개대대 4727/15,590 47개대대 출처 : 국방부과거사위, 2007, 93 124 쪽. 143
만 시민군 이라는새로운용어를창출하면서광주민중항쟁의상징으로떠오른이들이 광주 를지키고질서를바로잡는시민공동체자치시대의지렛대로등장한것이다. 이같은시민군을맨처음이끈사람은어느특정한지도자, 학생회간부나재야인사가아니라엉뚱하게도청소년티를벗어나지못한 20세의김원갑이었다. 그는 21일새벽부터하루종일아시아자동차회사에서탈취해온 8톤트럭을타고화정동 사직공원 서방 유동등시외곽을돌며 비상계엄해제하라 김대중석방하라 고목청껏외치던단순한시위대원이었다. 그러던그는이날공수부대가모두철수했음을확인한밤 8시쯤도청으로들어가밤을새우고, 다음날아침광주공원에있는시민회관으로달려가이곳에서웅성거리던무장시위대원 500여명에게 이럴것이아니라대열을정비해야한다 고역설한끝에이에동의하는대부분의무장시위대를이끌고아침일찍도청으로들어갔다. 김원갑은몇몇젊은이들과함께도청에들어온무장시위대를 시민군 이라고명칭을붙이는한편조직화를서둘렀다. 맨먼저이들과함께시위대원들이탈취해온차량 78대에일련번호를매겨장부에적고구체적인임무를부여했다. 또한그는시민군을인솔하고시내요소요소에바리게이트를치는한편 40여명의시민군에차량 5대씩을묶어 1개조로편성해계엄군의 7개외곽지점에대응하는화정동 ( 송정리방면 ) 백운동( 목포방면 ) 동운동( 장성방면및고속도로진입로 ) 지원동( 화순방면 ) 문화동( 여수 순천방면 ) 오치동(31사단방면) 및광주교도소인근에배치하고남은 200여명은도청정문과후문및그주변경계에임하도록정비해항쟁체제를갖춰사실상시민군의리더가되었다. 그러나그는이날오후구성된학생수습위원회요구를받아들여시민군지휘권을김창길위원장에게넘긴다음시민군본부가있는광주공원과항쟁본부인도청을오가며측면으로지원하는임무를맡았다. 203) 22일아침부터금남로와도청광장에는수많은시민들이모여들었다. 그렇게도진입하려고애썼던도청광장에마음대로들어갈수있게된시민들은분수대를중심으로옹기종기모여앉아항쟁본부가된도청쪽에서어떤발표가있기를기다리는모습들이었다. 낮 12시정각, 도청옥상의깃봉에검은리본을단태극기가반기로게양되고애국가가울려퍼졌다. 공수부대의만행으로숨진영령들을추념하기위해서였다. 도청광장과주변도로에앉거나서있던시민들은엄숙하게일어나도청옥상태극기를향해왼쪽가슴에손을얹고애국가를따라불렀다. 바로이때젊은이들이화물자동차에매단스피커를통해 병원에피와의약품이바닥나중상자들이치료를받지못해생명이위독하다 며헌혈을호소하고나섰다. 그러자너도나도몰려들었다. 화물자동차는헌혈희망자를가득태우고전남대병원으로돌아갔다. 곧이어적십자병원의또다른헌혈차가도청광장에정차하자팔을걷어붙이고헌혈하겠다는사람이줄을이었다. 황금동술집여종업원들을비롯한많은헌혈자들이병원으로직접찾아오기도했다. 광주시내각병원은부상자들로초만원이었다. 20일까지는진압봉으로두들겨맞은사람, 군홧발로짓밟힌사람, 개머리판으로짓이겨진사람, 대검에찔렸거나배어진사람등타 144
박상이나자상환자가많았다. 그러다가 21일발포가시작된후에는총상환자들로가득찼다. 전남대병원 적십자병원 기독병원을비롯한시내각종합병원은물론작은개인병원에도 살육작전 피해환자들이줄을이었다. 204) 이때 4톤급화물차에 30대, 40대부녀자들이가득타고도청으로들어왔다. 부녀자들은밥통과바구니, 큰물통에밥과반찬, 국등식사를마련해왔다. 밥뿐만아니라떡이나빵 우유 음료수도있었다. 뿐만아니라솥 냄비 그릇 석유곤로 쌀 김치 된장 고추장도들고왔다. 아무리여자라고젊은사람들고생을보고만있을수있당가요 라며밥을직접지어주겠다는것이다. 음식점들의휴업으로식사문제에고심하고있던항쟁본부로서는반갑기그지없는일이었다. 이에앞서아침 8시 10분쯤정시채부지사를비롯한 6명의도청간부와일부직원들이출근했다. 205) 정시채부지사는이미도청서무과바로옆사무실에나와있던이종기 이기홍 조철현 최한영 윤영규 신용순 장휴동등각계인사들과함께오전내내 광주사태 해법을놓고진지하게논의했다. 이들은점심직후까지계엄사에요구할협상조건들을숙의하는한편, 학생들이나시민들로부터신뢰받을수있는인사 15명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를구성했다. 위원장에는윤공희대주교와최한영옹이추대되었으나고령을이유로사양함에따라이종기변호사가맡았다. 수습위원들은우선 1) 사태수습을위한군투입금지, 2) 연행자전원석방, 3) 군의과잉진압인정, 4) 사후보복금지, 5) 상호책임면제, 6) 사망자보상, 7) 이상요구사항이관철되면무장해제등정부당국에요구할 7개항을채택했다. 이들은이협상안을가지고상무대에있는전남북계엄분소를방문했다. 그러나 8명의시민수습위원회대표들을맞은소준열계엄분소장은의외로냉랭했다. 그는계엄사령부와협의해야한다며협상자체를수용하지않았다. 수습위원회는당국과의대화를통해평화적수습을모색하려했지만계엄분소가이를냉혹하게거부해버린것이다. 206) 자신들의공격적 체포작전 에반발한시민들의분노를 북괴에의한폭동 으로몰아붙인끝에일방적으로진압한후, 이를명분으로삼아야할신군부로서는아예처음부터협상자체를받아들일수없는입장이었다. 무조건밀어붙이는작전을펼쳐 폭동 을진압하고자하는그들의의도를광주시민들이알아차린것은한참뒤였다. 207) 시민수습위원들이협상을거부당하고돌아온것은 4시간만인오후 5시를넘어서였다. 이종기위원장이분수대위에올라계엄분소관계자들을만났으나아무것도합의된것이없다고보고했다. 시민들은술렁거리며분노했다. 그리고 굴욕적협상결사반대 를외치고나섰다. 시민수습위협상대표들이상무대에서돌아오지않고있던오후 4시무렵, 전남대농과대학 3학년김창길은도청광장에모여있는시민들에게 이번사태는대학생들이저지른사 145
안이기때문에우리들이수습하겠다 고천명한끝에김창길등전남대학생 5명, 김종배등조선대학생 5명이위원이되고, 전남대송기숙 명노근교수를고문으로추대해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구성했다. 살인적 체포작전 으로빚어진 광주살육 을수습하기위해광주자체의합의로이루어진시민수습위원회와학생수습위원회가출범한것이다. 그러나두수습위는시민들의필사적 극한적저항의당위성이어떤근거와이치를안고그토록엄청난사태로발전했는가에대한핵심을제대로파악하지못한듯했다. 광주시민들이왜분노했는가, 지도자도배후조직도없이어떻게폭발했는가의본질을전연꿰뚫어보지못했다. 더욱이계엄사가당초의도한대로 폭도 들을상대하지않겠다는입장을고수하고있어수습위의행동반경은겨우어정쩡한미완의총기회수에그쳐야했다. 두수습위는온건한타협과강력한투쟁이맞서는갑론을박끝에몇차례개편되지만, 결국별다른임무를수행하지못한채일부소신있는젊은이들만최후의길목에서결사항전을선택하게된다. 208) 1 계엄군이철수한후시골로나가려는사람, 학교다니는자식들의안위가궁금해들어오려는사람들이줄을이었다. 그러나계엄군은차량으로의통과는물론도보내왕까지차단하고무차별총격을가했다. 심지어소형트럭을몰고가족과함께광주를빠져고향진도로내려가겠다고애원하는김성수일가족을되돌아가게한후뒤에서총격을가해한가정을파멸시키는폐륜도서슴없었다. 209) 2 이런줄도모르는시위대원 18명은 23일시민군본부에등록된제103호미니버스를타고화순으로달렸다. 버스가지원동주남마을앞을통과할무렵이곳을봉쇄하고있던공수부대원들로부터집중사격을받았다. 이중 15명은마을앞현장과차안에서숨지고, 여고생 1명과남자 2명이붙잡혔다. 그러나중상을입은채수길과양민석등남자 2명은주남마을뒷산에주둔중인 11공수여단본부상황실로끌려간후사살되고, 210) 여학생인홍금숙만살아남았다. 211) 24일오후제11공수여단병력은 56대의트럭에분승하고장갑차의선도를받으며광주비행장으로이동하던중광주시진월동원제부락저수지옆길을통과하면서멱을감고있던 10여명의어린이들에게발포했다. 어린이들은허둥대며제방쪽으로헤엄쳐가몸을숨겼으나, 미처피하지못한방광범 (13) 은여수로에서머리에총탄을맞고숨졌다. 이들은바로이웃인진제마을앞으로계속전진하다가이번에는마을뒷동산에서놀고있던서너명의어린이들을향해또다시발포했다. 어린이들은허겁지겁달아났으나벗겨진고무신한짝을뒤돌아줍던전재수 (10) 가재차발사한총탄을아래배에맞고그자리에서숨졌다. 212) 이부대는다시효덕초등학교앞을지나광주경상대학 ( 현광주대학교 ) 입구를거쳐효천 해 146
역 500m 전방에이르는광주~목포간국도를전진할무렵, 마을양쪽에매복해목포방면길목을지키고있던보병학교교도대병력으로부터집중사격을받았다. 무장시위대로오인한보병학교병력이행렬선두의장갑차 (APC) 와후속차량 3대에 90mm 무반동총공격을가했다. 공수부대병력도즉각반격에나섰다. 한참동안총격전을벌이던보병학교병력은자신들의오인을뒤늦게알고슬그머니빠져나갔다. 이오인총격사건으로장교 1명등 9 명이희생되고 33명이중경상을입었다. 난데없이공수부대원들은인근마을김금순 (57) 집을덮쳐그아들권근립 (27) 과옆방에세들어사는임병철 (25) 김승후(19) 등세명의젊은이를끌고가즉결처분, 엉뚱한시민들에게보복했다. 213) 광주시내에서엄청난살육과항쟁이벌어지고있는데도, 계엄사에의해 광주 에대한보도를철저히통제받고있던국내언론들은침묵일관이었다. 214) 광주사태가발발하자국내각언론사는많은취재진을보냈지만, 사흘째인 20일까지도 광주 에관련된한줄의기사도내보낼수가없었다. 이때문에전남북계엄분소의거짓 보도문 을방송한문화방송과 KBS방송국이 20일밤분노한시민들에의해불태워졌고, 지방지는 21일부터발행을자진중단해야했다. 일부국내신문이나방송기자들은항쟁본부인도청출입조차자유롭지못했고길거리에서취재하다봉변당하는일도비일비재했다. 215) 항쟁주체측이나학생들은이에대응하는자체유인물, 즉소식지를발간하기시작했다. 최초의유인물은광주살육이시작된다음날인 19일새벽 광주시민민주투쟁회 와 조선대민주투쟁회 가발행한 호소문 과 민주시민들이여 라는두가지였다. 3일째되던 20일새벽가랑비가내리는가운데시내일원에뿌려진 민족의영혼은통곡한다 라는유인물은전남대학생들에의해밤새제작되어어둠과비오는틈을타서집집마다살포되었다. 이러한유인물은광주항쟁 10일동안 50여가지가등장하게된다. 216) 가장대표적인것은 투사회보 였다. 16절갱지양면에프린트된 투사회보 제1호는공수부대철수전날인 20일아침배포되었고, 민주투사들이여! 더욱힘을내자! 승리의날은오고야만다! 로시작되는제2 호는철수후인 22일아침에배포되었다. 이회보에는 21일상황이상세히적혀있어 광주살육 소식에굶주려있던시민들에게눈과귀의역할을톡톡히했다. 투사회보 는 8호까지발행되고, 9호와 10호는 민주시민회보 로이름이바뀌어발행됐지만 10호는 27일상무충정작전을펼치던계엄군에게압수되었다. 버 147
자유롭지못한언론의보도는필연적으로풍문과소문이라는유언비어를나돌게했다. 항쟁이틀째인 19일금남로를중심으로거리에나와있는시민들에게 공수부대원에게환각제를먹였다 독한술을먹였다 경상도군인이전라도씨를말리러왔다 는풍문이파다하게나돌았던것도그중하나였다. 공수부대원가운데경상도출신들의억양강한말씨로인해 일부러경상도출신만뽑아보냈다 는오해를낳게한것이다. 이때문에항쟁초기경상도사람에대한지역감정이고조되어경남번호판을단 2대의트럭이시위군중들에의해불타고금남로 5가의금성사대리점이기습당한연유도여기에있었다. 이러한지역감정적오해를해소하기위한학생들의계몽활동이즉각발동되면서더이상악화되지는않았다. 학생들은지역감정을원천적으로차단하기위해 21일에도금남로시위대열을향해또다시호소하기도했다. 계엄군이철수한 22일가톨릭회관옆시멘트담벼락에 너와나는한형제, 칼부림이웬말이냐. 지방색이웬말이냐 라고쓰인표어가붙어있었던것도그러한노력의일환이었다. 누런갱지에쓰여진표어는이곳만이아닌시내곳곳에서발견되었다. 지역감정적풍문이나유언비어는시민들을더욱당혹시키기에충분했지만항쟁주체측에서수시로스피커를통해자제하도록당부하면서더이상악화되지않았다. 뒤늦었지만광주항쟁에대한보도는닷새후석간이던 동아일보 가물꼬를텄다. 광주사태보도를전면통제하는데대한항의의뜻으로 19일부터사설없는신문을나흘째발행하던 동아일보 는 22일오전 1면과사회면전체를 광주 기사로꽉메운지면을검열반에내밀었다가삭제와다시쓰기가반복된끝에세번째만에통과되었다. 예정보다무려 4 시간이나지연된오후 5시가되어서야 광주사태닷새째 라는제목의광주기사로가득채워진 동아일보 가발행되었다. 소문으로만듣던 광주 의소식을처음접한서울시민들은놀라움을금치못했다. 가판 40여만부가순식간에팔려나갔다. 신문은밤을새워전국으로수송되었다. 광주에도다음날인 23일오전 광주사태엿새째 라는제목으로바뀌어도착했으나계엄군의외곽봉쇄로시내에들어오지못하다가오후 2시쯤에야간신히 10여부만항쟁본부가있는도청안으로들어왔다. 항쟁본부에서는도청옥상의스피커를통해 동아일보 보도내용을시민들에게알렸다. 그러나시민들은불만이대단했다. 그들의요구나발발의당위성보다계엄사의주장이더많이실려있었기때문이다. 많은 진실 이검열과정에서삭제되어버려어쩔수없는노릇이었지만시민들은자신들의참된항쟁이왜곡되어보도된데대해심한불쾌감을느꼈다. 다만 동아일보 가미흡한대로 광주사태 를보도하자, 다른신문들도뒤를따랐다. 이후언론들은그런대로 광주 에관해보도할수있었다. 광주사태가 8일째로접어들고있던 25일오후 6시최규하대통령이폭우를무릅쓰고주영복국방부장관등관계장관과이희성계엄사령관등군지휘관들을대동하고경비행기로상무대에도착, 소준열전남북계엄분소장과장형태전남도지사로부터광주사태의상황과수습방안에관한보고를받았다. 그러나광주사태당사자인시민들은물론수습위원들마저만나지않고돌아가밤 9시 KBS뉴스를통해일방적인계엄사의주장만을되풀이한 광주시민에게고하는특별담화문 을발표했다. 217) 최대통령은이담화문에서 아무쪼록냉 148
정과이성을되찾아주기바란다 고호소했다. 그렇지만이담화문에는사건의핵심, 광주사태의원인과근본적인치유방안에대한제시가전연없어오히려시민들을실망시키고말았다. 국가통치권자로서원인진단은물론, 국민들을위로하고안심시키려는의지가전연나타나있지않았다. 그는비행기로잠시내려와광주사태를저지른군부측관계자들만만나고돌아가미리작성된담화문을녹음하여발표했다. 최규하대통령은당초시내에들어가수습위당사자들을만나려했지만군부측의극력반대로뜻을이루지못했다. 수습위원을포함한항쟁당사자들을 폭도 로규정한신군부입장에서는그들과대화한다는것자체가 폭도 가아님을국민들에게알리는결과가되는데다최대통령의시내진입은 광주사태 의진실이공개되는것을의미하기때문에극력만류하지않을수없었을터이다. 담화문방송을지켜본시민수습위원들은실망한나머지도청에서흥분된토론을벌인후, 1) 금번사태는정부과오임을인정할것. 2) 사죄하고용서를청할것. 3) 모든피해는국가가보상할것. 4) 여하한보복도있을수없다는것을밝힐것등 4개항을담은 최규하대통령각하께드리는호소문 을만장일치로채택하고, 수습위원 25명전원이서명했다. 여기에는최규하대통령으로하여금정부의과오를인정한다음, 광주사태를수습하도록종용하는의미가담겨있었다. 이호소문에서수습위원들은 지금이라도늦지않습니다. 진실속에서만이불신이제거되며, 민족적화해와참된국민총화가이루어질것입니다 고호소했다. 218) 이에앞선 23일오후도청광장에서제1차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열린데이어 24, 25일에도계속열렸다. 항쟁주체들은언제끝날지모르는항쟁을효과적으로벌이기위해서는시민상호간의공감대와동의가필요하다고보았다. 그러기위해서는항쟁주체측의분명한입장정리가있어야했고, 투쟁의성격이확립되어야했다. 운동의열기가식지않고지속되려면궐기대회를통해시민들의의식을다지는절차도필요했다. 시간이갈수록학생수습위나시민수습위의평화적타협론에회의적이었던일부강경파학생및운동권재야청년들은발언의수위를높여 명예로운투쟁 을강조하고나섰다. 이들은투항을의미하는무기의무조건반납과평화적협상론을배제해야한다는시민들의합의된의견을도출하려애썼다. 이러한강경분위기는시간이흐를수록더욱가속되었다. 학생수습위회의가매일밤늦게까지거듭되었으나무기반납문제를놓고격론만되풀이되었다. 회의를주재하던김창길위원장은 만약무기를반납하지않으면광주시내는피바다가된다. 그러니무기를반납해야한다 고역설했고, 김종배부위원장은 무기반납은시민의피를팔아먹는행위 라고반격했다. 결국 이엄청난사태를이대로수습한다는것은불가능하다 는강경론에힘이실려 흘린피의대가를받을때까지투쟁하자 는쪽으로급선회했다. 강경파들은무기반납을주장하는김창길대신이에반대하는부위원장김종배 ( 조선대 3년 ) 를새로운위원장으로선출하는한편, 김화성 박남선 황금선등기성인을포함시킨범청년시민기구로개편하고명칭도수습보다투쟁에무게를둔 학생시민투쟁위원회 로바꿨다. 타협의여지를완전히배제하고최후의결전을향해가파르게치달았다. 219) 149
막바지에이르러강도사건등치안상의문제가잇따라발생하자시민들의불안감은더해갔다. 처음에는 2,500여정이넘는총기가아무런통제없이나돌고있는상황인데도강도사건이겨우 5건밖에없었다는사실에고무되기도했고, 무려 700여개소의금융점포에보유되고있던 1,500억원의현금이고스란히보존되고, 수많은금은방들이건재했다는사실에모든시민들은흐뭇해했다. 특히계엄군의시외곽봉쇄로생활필수품반입이순조롭지않아어려움을겪고있던시민들은쌀 반찬 연탄등을서로서로나누어먹고쓰는아름다운모습을보여주었다. 더욱이평화적수습을모색하던온건파학생대표들은 TNT 등을지켜달라고김성용신부등시민수습위원들에게호소하는지혜를발휘하기도했다. 성직자들은자신의교회청년신도 10여명을불러 TNT가저장돼있는도청별관지하실로보냈다. 그러나이미항쟁본부를장악한강경파젊은이들쪽에서는계엄군이끝내진공해올경우최후까지항쟁하겠다는다짐과함께이 TNT와다이너마이트를폭파하겠다는위협을통해 상무충정작전, 220) 이른바 폭동진압작전 을늦춰보려는계획을한때검토하기도했다. 그러나이들은 폭도라는말을듣지않기위해 TNT와다이너마이트를이용하지않기로했다 며한발물러섰다. 6) 계엄군의 폭동진압작전 과항쟁의종결 폭동진압명분을찾던신군부에의해짜여진결전의날을기다리던계엄군은 27일새벽상무충정작전을서두르고나섰다. 도청에있던윤상원등학생시민투쟁위강경파들은 최후결전만은재고해야한다 는온건파학생또는시민수습위원들의권유를뿌리친채최후항전을다짐하고나섰다. 그러면서도고등학생등 10대소년들과여성들에게는귀가를강력하게종용했다. 이에따라 YWCA에있던일부 10대들이나여학생들에대한안전조치는어느정도취할수있었다. 그러나도청안에있던고교생들은아무도이를귀담아듣지않아애를태웠다. 시외곽을포위하고있던계엄군은새벽 0시 1분, 진압작전을개시하고도청을향해일제히옥죄어왔다. 계엄군이서방동 농성동 지원동을비롯한광주시내로들어온것은새벽 3시였다. 이날상무충정작전에는 6,000여명의병력이투입되었다. 마치적국과의전투를치르는것처럼담대하고치밀한대규모작전이었다. 무기라야쓸모없는카빈과 M1소총으로무장한 157명의오합지졸들을향해투입된엄청난병력은최신무기의총탄을마구쏘아댔다. 21 150
농성동쪽에서총소리가간헐적으로들려오던새벽 2시 20분, 지산동을거쳐산수동쪽으로나가는차량스피커에서 시민여러분, 지금계엄군이쳐들어오고있습니다 우리는끝까지광주를사수할것입니다 시민여러분우리를잊지말아주십시오 라는가냘픈여성의목소리가애절하게울려왔다. 221) 제3공수여단제11대대제1지구대특공조는 27일새벽 1시, 행동을개시하여새벽 4시도청후문쪽콘크리트담을넘었다. 그순간도청본관옥상과각층및후문에설치된기관총, 그리고도청앞전일빌딩옥상, 상무관, 경찰국건물옥상에있는시민군으로부터공격을받았다. 그러나후문을차단하고본관 2층을기습하여무기고에이어 5시 21분도청본관을장악하는데성공했다. 2명이부상당했지만끝까지저항하던윤상원등시민군 13명을사살하고 100여명을체포했다. 제7공수여단제33대대제8지구대및 9지구대 6개중대병력으로편성된특공조는새벽 1 시시민군본부인광주공원을장악하는과정에서 15명가량의시민군으로부터기습을받아 1명이희생되고 3명이부상당했다. 특공조는즉각반격, 시민군 1명을사살하고, 새벽 5시 6분광주공원을점거했다. 광주공원에는무장시민군이대부분도청으로이동한후여서큰충돌없이쉽게장악할수있었다. 제11공수여단제61대대제4중대병력으로편성된특공조는새벽 3시 30분도청뒤를돌아새벽 4시 46분제1목표인전일빌딩과관광호텔을큰저항없이점거했다. 이어아침 6 시 20분가벼운총격전끝에 YWCA 건물을장악했다. 제20사단제61연대병력은광주서구를제외한전지역에서새벽 2시부터새벽 5시 10분까지도청을탈환하는공수부대특공조를지원하는역할을수행했다. 이병력이광주고등학교와계림초등학교를통과할무렵시민군과의교전이벌어져계엄군과시민군각 1명씩이희생되고시민군 15명이체포되었다. 222) 이상의상무충정작전에투입된실제계엄군의병력은광주사태에동원된 2만 317명중일부인 6,168명이었으며이가운데공수부대원은 317명이었다. 223) 특히이날도청을비롯한 4개주요목표지점점령은공수부대원 317명의특공조가담당했다. 공수부대특공조는제20사단병력으로위장하기위해모두공수부대의전통적얼룩무늬복장을벗고일반군인들의평범한녹색군복으로갈아입었다. 제20사단병력등다른보병부대병력은지원또는경계임무를맡았을뿐작전자체에참여하지는않았다. 그들은공수부대특공조를지원하거나, 점령한지역이나건물을인계받는형식으로이작전에임하였다. 7) 신군부의범죄혐의조작과보복적극단처벌 1980 년 5 월 27 일아침 7 시 30 분, 도청앞마당에서는스피커를통해군가가울려퍼졌다. 151
도청을비롯한시가전역을장악한계엄군이울리는승리의노래였다. 곧이어장갑차와탱 크를앞세우고헤드라이트를켠 20 여대의트럭위에집총한군인들을가득태우고시가 를누비며시위를벌였다. 이로써 5 월 18 일시작된 광주사태 는열흘만에막을내렸다. 항쟁이끝난이틀후도청앞상무관에안치되어있던 129 구의시체가짐짝처럼덤프트 럭에실려망월동으로옮겨졌다. 아무도지켜보지않는가운데희생자들의 장례 는마치 진짜 폭도들 의시체처럼숨조차제대로쉴수없는공포와불안속에서치러졌다. 다른 곳에서발견된시신은바로망월동으로옮겨졌다. 5 월 31 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의전모 를발표했다. 계엄사는이발표문을통해민간 인 144 명, 군인 22 명, 경찰 4 명등 170 명이숨지고, 민간인 127 명, 군인 109 명, 경찰 144 명 등 380 명이부상했으며, 총 1,740 명을연행했다고밝혔다. 224) 이가운데정동년등 175 명을 101 일이지난 9 월 5 일내란음모및포고령위반으로계엄보통군법회의에구속기소하고위 계룡등 174 명을기소유예로석방했다. 이에따라훈방또는석방된사람은모두 1,565 명 이었다. 이들가운데 527 명은 5 월 27 일상무충정작전및그후연행된사람들이고, 1,213 명 은 5 월 18 일부터 26 일까지연행된사람들이다. 여기에는마구잡이로연행되었다가민심수 습차원에서수시로방면된사람은포함되어있지않다. 또한그후에도광주항쟁과관련 되어연행된경우가많아연행자수는들쭉날쭉바뀌어정확하지않다. 예를들면보안사 기록은 5 월 18 일부터 6 월 27 일까지모두 2,699 명을검거해서 2,144 명을훈방한것으로되 어있고전남합동수사단기록은 2,522 명을검거해서 1,906 명을훈방하고 616 명을송치한것 으로되어있다. 225) 광주민중항쟁으로구속 기소된 175 명에대한선고공판이 10 월 25 일상무대보통군법회 의법정에서열렸다. 1 부와 2 부로진행된보통군법회의재판부는정동년 ( 전남대복학생 ) 김 종배 ( 학생시민투쟁위원장 ) 박남선 ( 투쟁위상황실장 ) 배용주 ( 광주고속운전기사 ) 박노정 ( 복음 인쇄소 ) 등 5 명에게사형을선고했다. 이들에대한최종심은 1981 년 3 월 31 일열렸다. 대법 원은상고를기각, 고등군법회의에서내란죄와살인죄를적용, 정동년 배용주 박노정에게 선고된사형을확정했다. 당초 1 심에서사형이선고된김종배와박남선은고등군법회의에 서무기가선고됐다. 또한홍남순 ( 변호사 ) 정상용 ( 투쟁위외무부위원장 ) 허규정 ( 투쟁위홍보 부장 ) 윤석루 ( 투쟁위기동타격대장 ) 를비롯한 7 명에게무기징역이선고되었다. 이밖에김상 윤 ( 전남대복학생 ) 김성용 ( 천주교신부 ) 명노근 ( 전남대교수 ) 김운기 ( 조선대복학생 ) 이재호 양희승 전춘심 ( 전옥주 ) 김영철 윤강옥 정해직 양강섭등 11 명에게징역 20 년에서 10 년까지, 그리고나머지 152 명에게는 10 년에서 5 년의실형이나집행유예가선고되었다. 사실상신군부는혹독한고문을가해이들의범죄혐의를일방적으로조작해기소하고 군사재판과정에서법정최고형으로선고함으로써아무죄가없는광주시민들로하여금이 중적고통을당하게했다. 사형선고를받은정동년의경우광주항쟁에참여한죄 (?) 를저지 152
를기회조차없었다. 그이전에체포되었을뿐만아니라조작된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도무관했다. 계엄사는유신체제를반대하는민주화운동에투신했을뿐인정동년을 5 17쿠데타와동시에연행하여혹독한고문을가해조작한혐의조서에강제로서명케하고사형을선고했다. 광주항쟁관련자들에대한대법원최종판결전날인 1981년 3월 30일윤공희대주교는남동성당에서열린월요미사강론을통해, 광주사태와관련되어구속되어있는모든사람들은아무죄도없으며어떠한처벌을받아서도아니된다 고역설했다. 계엄사는 1980년 10월 30일군법회의선고에대한관할권자의확인과정을통해 88명을형집행정지로석방하고, 김창길등 16명에게는감형조치했다. 신군부는 1980년 10월과 12 월, 81년 4월, 그리고 82년 12월 24일까지 2년 7개월만에 4차에걸쳐광주사태관련자전원을석방함으로써사실상모두무죄임을인정했다. 3 광주민중항쟁의역사, 기억의변용과명예회복 엊그제같았던 5 18민중항쟁이벌써 30주년이되었다. 우여곡절을겪은끝에 1995년들끓었던국민여론이수용돼 5 18특별법이제정되고, 국민들은물론온지구인들이지켜보는가운데진실을밝혀내고관련자들의잘잘못을분별하는역사정리작업을마무리한바있다. 그러나정권찬탈을위해당초부터 시위진압 이아닌 체포작전-살육작전 을펼치도록계획하고명령한사람은물론발포명령자도가려내지못한채얼버무린과거사정리로끝나버렸다. 피해자들에대한명예회복정도가다행이라면다행이라할수있다. 아무죄도없는선량한광주시민을희생양으로삼은광주살육을통해정권찬탈에성공한전두환은광주시민들에대한일말의미안함이나양심의가책도받지않는듯극단적인거부반응을나타냈다. 광주항쟁또는광주사태에대해말만꺼내도잡아갈만큼철저하게탄압했다. 하물며 5 18희생자추모제나유족들의모임은더욱억압했다. 5공정권은제1회추도식은아예치르지못하도록극력저지했다. 광주민중항쟁에대한역사속의기억변화는이러한억압속에서 3단계로나누어진다. 첫째, 온갖탄압속에기념행사는커녕추도식마저제대로치를수없을만큼암울했던시기, 진상규명을요구하는목소리가높아지는사연많은시기이자암흑의시기였다. 더욱이꽁꽁얼어붙은 5 18진상을밝혀내기위한운동이전국적으로맹렬하게벌어지면서민주화운동 민중운동 반미운동이병행되던시기였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다. 둘째, 온갖탄압에도굴하지않은투쟁과정을거친유족이나관련인사들은 6월항쟁이승리로끝난후들어선 6공에의해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 으로수용되자비로소한숨돌리며추도식및기념행사등다양한프로그램을추진할수있었다. 언젠가공개적절차를거쳐국가기념행사로격상되어야한다는전제가깔림에따라유족및관련단체들이공공연한추도식이나기념행사로벌이는과도시기였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다. 셋째, 요식적이지만 5 18청문회등진상규명작업의마무리단계에서 민주화운동 으로공 153
식인정되는한편 5 18 특별법이제정되어광주살육을자행한원흉들을처벌하는작업이 진행되고아울러 5 월 18 일이국가기념일로지정되어국가원수가직접참여해기념사를하 게되는국가기념행사로격상된시기를말한다. 1996 년부터현재까지다. 1) 폭도 의누명을쓴암흑시기 광주살육의피를딛고들어선전두환정권은처음부터폭력과억압정치를펼치면서참담했던 5 18을역사속으로묻어가도록유연하게대처하지않았다. 그가할수있었던것은 북괴의조종에의한폭동 으로조작해몰아붙이던광주사태관련자 175명을재판결과에관계없이 2년반만에모두풀어주는것이었다. 광주사태는곧 북괴조종의폭동 이아니라자신들이정권을찬탈하기위해계획적으로저질렀음을스스로인정하는것이었다. 그러면서도그는자신이저지른광주살육의진상규명이나화해를위한어떤제스처도취하지않았다. 오히려억울한피해자들의자구노력에대해잔혹한탄압으로일관하면서그흔적조차지워버리려광분했다. 광주항쟁이끝난이틀후인 1980년 5월 29일눈부릅뜨고죽은시체를험상궂은덤프트럭에짐짝처럼실려울음소리조차내지못하는서슬퍼런억압속에남편과자식을망월동에묻은유족들은삼우제날인 31일삼삼오오모여들었다. 120명이었다. 전통적상례절차인삼우제를지내며오열한이들은 5공정권의강압에공동으로대응하려면유족들만이라도한데뭉쳐야한다는인식을절실하게느꼈다. 이렇게해서 5 18의거유족회 가발족되고회장에박찬봉이선출되었다. 그러나 5공은유족회자체를용인하지않으며와해시키려수단과방법을가리지않았다. 특히유족회활동과구호는 5 18희생자수나진상규명운동과직결되어있어그모임자체를철저하게분쇄하지않으면안되었다. 이때문에유족회간판조차걸곳이없었다. 그런데도유족회원들은 1주년이다가오기전에간판을걸고추도식을준비하기로다짐했다. 광주항쟁이막을내리고계엄군이시외곽으로빠져나간 31밤과 6월 1일새벽사이에광주시광산동전남매일신문사 ( 통폐합 ) 앞길과지산동법원앞길에세워진수십개의모든전봇대에는 살인마전두환 이라는구호가매직펜으로즐비하게쓰여있어장관을이루었다. 심지어어느신문사소속지프차뒷바퀴에도쓰여있었다. 그로부터 90일이지난 8월 30일밤금남로에세워진 전두환대통령각하취임경축 아치에역시 살인마전두환 때려죽이자전두환 이라는구호가페인트로칠해있어그날밤부터사복경찰이보초를서야했다. 또한 5월 30일오전 11시광주문화방송옆길에서얼룩무늬복장으로고향화순으로휴가온공수부대원한명이젊은시민 3명으로부터구타당했고열흘후에도같은일이벌어졌다. 자기네들이정권을잡기위해저질러놓고도사과한마디는커녕마치시민들이폭도가되어소요를일으킨것처럼몰아붙이는전두환정권의처사에대한심한분노의한 ( 恨 ) 과가슴앓이가분출되고있었다. 이같은한과가슴앓이는향후끊임없이분출되지만그것은광주시민들의몫만이아니었다. 5월 30일서울연지동기독교회관에서서강대생김의기 (21) 는광주학살을규탄하는 154
한편국민들의각성을촉구하는 동포들에게드리는글 을뿌리고 6층아래로투신했다. 또한열흘후인 6월 9일서울신촌 4거리에서보충역제대를 1주일앞둔김종태 (23) 도광주학살을규탄하는유인물수백장을뿌린후온몸에휘발유를쏟아분신했다. 이후광주학살을규탄하는젊은열사들이줄을잇게되는안타까운단초를이루었다. 또한이해 12월 9일눈발이흩날리는밤 9시 50분광주시황금동광주미문화원지붕에불이붙었다. 폭력적정치군인들과결탁한미국에경고하는신호탄이었다. 여기에이어 5 18이막을내린지 20개월이지난 1982년 3월 18일오후 2시부산대청동에위치한부산미문화원건물이훨훨타올랐다. 광주살육을자행하고들어선전두환정권을지지하는미국에대한강력한경고였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그후도피해온주동자들을보호했다가자수시킨천주교측과심한마찰을빚었다. 당초주동자를자수시킨도덕성을감안해선처하겠다는약속을깨고전국의천주교회를상대로대대적인수사와사제들을연행 구속하는사태로이어졌다. 또한 1985년 5월 23일낮 12시 5분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대학생 85명은서울을지로 1가에있는서울미문화원을점거하고광주살육을방조한미국의사과를강력히요구했다. 학생들은건물에방화하거나파괴하지않고신사적으로점거만한채미국측의사과를요구했지만끝내받아내지못하고나흘후자진퇴거하여경찰서로향했다. 대규모미문화원공격사건은이로써일단끝나지만미문화원이나미국기관에대한자잘한기습사건은이후계속되어광주살육에따른젊은이들의대미의식을드러냈다. 제1주기를앞둔유족들은 1981년 5월 10일유족회장박찬봉사무실에다간판을걸고현판식을가지려했다. 그러나행정관서, 정보기관, 경찰등관계당국이총동원되어방해공작을펼쳤다. 유족들의각오와결의도대단했지만당국은상부로부터어떤절대적명령과지시를받고있음을직감할수있을정도로극단적이었다. 현판식은커녕간판도걸지못했다. 그런가운데 1주기추도식만은반드시치르기로했지만당국의방해공작또한집요했다. 1 주기가다가오는날추도식준비에들어갔던회장단이슬그머니꽁무니를빼는것이었다. 당국이온갖회유와협박으로추도식자체를방해함과동시에유족회회장직사퇴를강요하고있었다. 몇몇유족들은그럴수가있느냐고허탈해하면서아무런준비없이망월동묘지에모여들었다. 망월동묘역출입을철저하게차단하는경찰눈을속이며 제사도못지내게하는놈들 이라는분노와울분을터뜨린유족들은억척같이묘역으로다가들었다. 열성적인일부시민들도참석했지만극소수였다. 추도식 ( 제사 ) 절차도전연진행하지못한채통곡만을쏟아내고있을때정수만회원이갑자기추도사를읽어내려갔다. 화원들은어리둥절했다. 그는방해공작을예상하고미리준비한추도사를읽은것이다. 거기에는 5 18의진상규명요구는물론전두환정권의도덕성을신랄하게규탄하는내용이들어있었다. 경찰은정수만을연행해반공법과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혐의로구속하고 10개월동안복역케했다. 50여명의회원들은정수만연행에항의하는가두시위를벌이다가전원연행되었다. 유족회는그후해마다닥쳐오는 5 18이될때마다어떠한억압과방해공작에도불구하고추도식을거행했지만첫번째인이때의제1주기추도식을치르지못한한을두고두고씹어야했다. 155
같은날인 18일천주교광주대교구는남동성당에서 1,000여명의신도들과함께윤공희대주교집전으로추도미사를봉헌한후수녀 1명을포함한 35명의사제들이가톨릭센터로옮겨 광주항쟁 1주기를맞는우리의주장 을발표하고진상규명과구속자석방을요구한후단식에들어갔다. 천주교사제들이어둡고무거운시국의침묵을깨고사실상진상규명운동에불을붙이고나선것이다. 가톨릭센터밖으로는 진상은규명되어야한다 는구호를쓴현수막을내걸었다. 단식은 1주일동안계속되었다. 신도들이접근하려했으나밖에서는경찰이제지했고안에서는사제들이마다했다. 이에앞선 3월 30일광주남동성당에서열린월요미사에서윤공희대주교는 광주사태와관련해서어떤사람이라도처형된다면용납할수없는일 이라고질타하고 광주사태로구속되어있는사람들은아무도죄인이아니다 고역설했다. 5월 9일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는 광주사태 1주기를맞는우리의주장 을발표하고진상규명과구속자석방을요구했다. 또한 5월 10일서울명동성당에서봉헌된제1주기합동추모미사를집전한윤공희대주교는다시한번진상규명은물론구속자전원을석방하라고요구했다. 그는광주학살이한창진행되고있던 1년전의 5월 26일최규하대통령에게보낸서신을통해공수부대의살육작전을 천인공노할만행 이라고규정했었다. 광주살육 1주기추도식과기념행사는이밖에도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성신여대등서울주요대학들도학교별로열었다. 또한기독청년협의회는기독교회관에분향소를설치하려다경찰에게각종기물과제수 ( 祭需 ) 를빼앗겨좌절되었다. 1982년 5월 18일 2주기행사를치러야할유족 30여명은경찰의철저한망월동묘역봉쇄망을뚫고참석, 첫해의추도식을치르지못한한을되새기며추도식을강행했다. 이에앞서유족회는사업상방해를많이받고있던박찬봉회장대신사업체도없고유족활동에열성적인여성을추대하기로하고 82년 1월송영도를회장으로선출했다. 그러나그녀에게도온갖방해와협박과회유가뒤따랐다. 송영도회장역시임무를제대로수행할수가없게되자 82년 11월회장을전계량으로바꿨다. 전계량회장에게도광주천복개공사등회유와갖가지협박이뒤따랐음은물론이다. 제3주기가다가오는 1983년 4월전남도도지사관사주변에서 5 18진상규명과유족회탄압중지를요구하는시위를벌이려던유족회원 40여명이경찰에연행되었다. 뿐만아니라전두환정권은 전남지역개발협의회 라는어용단체를만들어유족회와해공작의전위기구로내세웠다. 이단체는 3주년이되는 1983년 5월 18일무등경기장에서 전남도민단합대회 를열었다. 유족들을비롯한 300여명의관련자들이망월동묘지에서 3주기추도식을갖고오열을쏟아내고있던그시각, 전두환정권하수인들은유족회와해와망월동묘역해체를목적으로하는관련기관결단식을갖고있었다. 이단체는생활이어려운유족부터 1,000 만원씩의생계보조비를지급하겠다고제의했다. 유족회는생계가어려운회원들을위해받아들이기로하고가장을잃은미망인부터받도록했다. 문제는처음 4명에게지급된후 4 기의묘소가이장되어버린것이다. 묘지이장비도 50만원이따로지급되었다. 생활이어려운유족들에게묘지이장을전제로 1,000만원씩지급하고묘지를분산시켜유족회와묘지를 156
해체시키려는공작이었다. 전계량회장이밤을새워감시하는일까지벌어졌다. 83년 9월남동성당월요기도회에서유족회와천주교측은 이장을전제로하는위로금지급은즉각중단하고무조건지급하라 는성명을발표했다. 그러자위로금지급이중단되었다. 위로금을받고자했던영세회원들의원성이자자했다. 결국그해 11월 1,000만원지급이재개되고다음해 11월까지모두수령했다. 원수같은돈이지만어쩔수없었다. 그동안에도묘지이장공작은계속되었다. 126기에서 26기가이장하고 100기만남았다. 더욱이이장해간사람, 유족회불참조건을수용한회원 20여명이별도로유족회를구성, 2개로양립되었다. 유족회는이같이묘지와 1,000만원문제말고도 5 18진상규명이나사망자수문제를놓고수많은투쟁과역경을겪어야했다. 심지어 1985년 4월에는 5 18유족탄압대책위원회 까지구성할정도였다. 226) 1984년 5월 18일 3,000여명의유족과관련단체회원및시민학생들이개인자격으로대거망월동묘역에몰려들어 4주기추도식을거행했다. 경찰의제지와억압은점차형식화되어버렸다. 그동안경찰의온갖억압에도불구하고시민들은아랑곳하지않고망월동추도식참석에더욱적극적이었다. 이날도추도식에참석한수많은시민들은시내로진출하여시위를벌이다 80여명이연행되기도했다. 특히전두환이광주에오는날은유족회회원들은물론부상자동지회, 구속자가족회임원및회원들까지모두연금상태에들어가곤욕을치러야했다. 수십명의경찰이집주위를차단, 출입을통제하고어떤때는차에태워외부로격리시키기도했다. 81년구속자가족들이광주에온전두환차량을가로막고격렬하게벌인시위등잇따른강경투쟁에따른후속조치였다. 이러한고난속에서도 5 18추도행사는해마다치르게되지만기회있을때마다진상규명을외치는시위도벌였다. 1986년 10월서울종로기독교회관에서유족 40여명이진상규명을외치며농성을벌인후중앙청앞에서시위를벌이다모두연행되었고 87년 7주기때는김희순회원이전두환정권규탄시위를벌이다연행돼 22일동안구금되었다. 1985년 5주년을맞으면서그동안금기시되었던추도식행사가점차확대되고노골화되어갔다. 공식적인 5 18기념행사준비위원회를결성하고대규모추모제및기념행사를강행하고나선것이다. 이해 2월 9일김대중의귀국과 2 12총선에서의신민당돌풍에자극받은 5 18기념행사는그정점에달했다. 3월에출범한전남대총학생회가조직적으로참여하면서더욱활기를띄었다. 망월동추도식에는 500여명이참석했고도청앞기념행사는그연속이었다. 비가내리는가운데금남로를비롯한광주도심은온통추도와축제의열기로가득했다. 5만여경찰을동원한전두환정권의억압에구애받지않고참여한시민들의열성속에진행된기념행사는그동안제대로열지못했던아쉬움을말끔히달래려는듯대성황이었다. 모든상가는철시했고시민들은 5 18당시처럼거리로몰려나왔다. 일부시민들과대학생들은가두시위를벌이다가경찰과충돌하기도했다. 특히함세웅신부는이날남동성당에서봉행된 5 18항쟁제5주기추도미사강론을통해 157
5 18항쟁의숭고함을외치고전두환정권의불법성을강력히질타했다. 1986년 5월 18일치러진제6주기행사는전두환정권의억압도아무소용이없었다. 3월 1일 5 18광주의거부상자및유족에대한탄압에항쟁하는농성에들어가면서 라는공동성명서와 5 18광주의거청년동지회창립선언문 발표등으로 5월투쟁은다른때보다일찍시작되었다. 5월 18일의추도식은경찰의길목봉쇄에도불구하고 1,000여명이망월동에몰려든가운데 1부와 2부로진행되었다. 1부는유족회주최로추도식이거행되었고 2부는 5월행사추진위원회 주관으로추모제가따로열렸다. 이틀앞선 16일천주교측은 2,000 여명의신도와시민들이모인남동성당에서추모미사를봉행하면서전두환정권을향해 5 18진상규명을요구하는강경한결의문을발표했다. 1987년제7주기당시, 경찰은그동안느슨해진것과는달리추도식장으로가는회원들을가로막고플래카드는물론꽃바구니까지빼앗았다. 이같은일은해마다되풀이되어마음놓고추도식한번제대로치러보지못했었다. 이럴때면유족들은망월동에서자식과남편의혼을위로하는 임을위한행진곡 을목청높여부르며한을달랬다. 사랑도명예도이름도남김없이한평생나가자던뜨거운맹세세월은흘러가도산천은간다. 깨어나서외치는끝없는함성앞서서가나니산자여따르라앞서서가나니산자여따르라 그러나 1987년 5월행사는 6월항쟁을예고라도하는듯이미격앙되어경찰의강경자세도아무런소용이없었다. 1월 14일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발생, 전두환정권을규탄하는그파장이 5 18기념행사장으로직결되었다. 더욱이 4월 21일부터 29일까지광주가톨릭센터에서 5 18진상규명과직선제개헌을요구하는광주대교구소속사제들의단식기도파장이전국천주교회로확산되어전두환정권은물론정치권을강타했다. 이때전국의모든천주교회에서는광주항쟁비디오가상영되고자료집, 사진첩전시회가열려시청각적인 5 18현장이재현되었다. 망월동묘역에서도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5 18관련사진및묘비탁본이전시된후다음날인 18일유족회및전남지역 21개민주화운동단체공동주최로추도식이열렸다. 여기에는시민학생등 5,000여명이참석, 광주항쟁이후최대성황을이루었다. 이날서울에서는김영삼통일민주당총재와김대중민추협공동의장의추도사와성명이발표되었고, 명동성당에서열린 5 18추모미사를집전한김수환추기경은 광주의아픔은민족의한 이라는강론을통해 광주사태는참혹한악몽 전두환정권은마음을비우고모두를사죄하라 고강도높게비판했다. 더욱이불교계가광주원각사에서열기로한제7주기추모법회가경찰의난입으로아수라장이되자 27일 4,000여명의승려및신도들이노상법회를연후거리행진을벌이는한편승려들은따로항의단식에들어갔다. 158
2) 민주화운동 으로규정한과도시기 5 18진상규명을요구하는운동이민주화운동으로승화되고있는가운데전두환정권의도덕성이적나라하게드러난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고문은폐조작사건으로확대되어고조된그격랑은 6월항쟁으로이어졌다. 전두환의후계자로지명된노태우는 6 29선언을발표, 국민들에게손을들어야했다. 이에따라직선제로치러진 12월 18일대통령선거에서당선된노태우는다음해 2월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구성하고그때까지금기시되어왔던 5 18광주문제를긍정적으로수용하고나섰다. 이에따라민화위는 5 18을 민주화운동 으로규정하면서 227) 어떤형태로든청산하겠다는방침을제시했다. 이에따라국회는민화위가규정한대로 5 18을 민주화운동 으로확인한데이어 11월 18일부터 5 18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청문회를열었다. 그동안불법과탄압의대상으로만여겨졌던광주항쟁은합법과긍정의대상으로역전, 국가적 민주화운동 으로공식화된것이다. 이에따라그해열린제8주기추도식과기념행사는경찰과의충돌없이순탄하게거행된첫해가되었다. 특히제8주기는 5 18단체뿐만아니라광주 전남의모든단체들이총망라되어 5월민중항쟁계승과진상규명을위한범국민주세력공동투쟁위원회 가결성되어모든행사일정을총괄했다. 더욱이 1989년 2월 24일 5 18청문회가종료되면서 5 18은대한민국국민들이그토록소망했던민주화를달성한성역으로확실하게인식되었다. 이에따라제9주기부터는공공연한기념행사로거행되었다. 이때부터 17일의전야제를시작으로 5 18기념행사의막이오르고 27일부활제를마지막으로종료되는 5월기념행사의향후모델로자리잡았다. 이런형태의기념행사는결국 5 18특별법이제정되고전두환등가해자들에대한처벌이기정사실화되고국가기념일로제정되는 1997년까지계속되었다. 이에앞선 1993년 2월 14일, 5 18단체들이가해자고소고발 특검제도입 명예회복등 15개항에합의하는강경자세를취하고나선가운데 3월 17일김영삼대통령이유족들의거부로 5 18묘역참배가좌절되는곤욕을치른 2개월뒤의 5월 13일이른바 5 13특별담화문을발표했다. 여기에는 5 18평가를역사에맡긴다 며현실적진상규명과관련자처벌을빗겨가겠다는의중이내포되어있었다. 1994년 5월 13일 5 18피해자 322명과시민 3만명이전두환 노태우 정호용등 35명을내란혐의로검찰에고소했다. 그러나검찰은다음해 7월 18일, 5 18고소고발사건수사결과를발표하면서 성공한쿠데타는처벌할수없다 며 공소권없음 결정과동시에불기소처분했다고덧붙였다. 이는 5 18평가를역사에맡긴다 는 5 13특별담화문에내재된김영삼의의중을반영한것이었다. 이에반발한광주시민 3,000여명이 1995년 7월 19일서울명동성당에서 광주진상규명 을외치며농성을벌였고 7월 31일에는고려대학교교수 131명이 5 18특별법제정 과 관련자처벌 을촉구하는성명서를발표한데이어각계의촉구성명서가잇따라발표되었다. 때마침 10월 19일박계동전국회의원이노태우비자금사건을폭로하자검찰은기다렸다는듯 11월 16일노태우전대통령을수뢰혐의로구속했다. 이에 159
자극받은김영삼대통령은 11월 24일 5 18특별법제정 을천명하게되고 11월 30일검찰은 12 12와 5 18특별수사본부를발족시킴과동시에재수사에착수했다. 검찰은 12월 3일전두환전대통령을반란혐의로구속하고국회는 1995년 12월 21일 5 18특별법및헌정파괴범공소시효특별법을제정, 광주학살원흉들의처벌을기정사실화함으로써광주항쟁의명예회복은분명해졌다. 3) 국가기념일 로명예회복된공식행사시기 1996년 2월 16일헌법재판소는피고인들이위헌을제청한 5 18특별법에대해합헌결정을내림에따라검찰은 2월 28일 12 12, 5 18사건과관련, 전두환등 16명을기소한후 8 월 5일전두환에사형, 노태우에무기징역을구형했다. 곧이어서울지법은 8월 26일 12 12, 5 18사건에대한선고공판을열고전두환에사형, 노태우에 22년 6월형을선고한데이어서울고법은그해 12월 16일항소심을열고전두환무기징역, 노태우징역 17년을선고했다. 다음해인 1997년 4월 17일대법원은전두환무기징역, 노태우징역 17년의 2심형량을확정했다. 정부는 5월 9일 5월 18일 을국가기념일로공포했다. 5월 18일 이폭동을일으킨 반란의날 에서대한민국을민주화시킨 민주주의날 로드디어광명을보게된것이다. 바꿔말하면 5 18의명예와위상은 폭동 에서 민주화운동 으로격변함과동시에국가경축일로승화되어온국민이다함께경축하는날이된것이다. 그리고 5월 13일 5 18묘역이완공되자제17주년기념식은광주광역시주관행사에서대한민국정부가주관하는국가기념행사로격상되어처음으로거행되고국무총리가정부를대표해공식참석했다. 그리고그해 12월 22일김영삼대통령은전두환 노태우등을사면 복권시켜석방하는화해제스처를취했다. 그러나 5 18가해당사자들의한마디사과나양심적고해없는정략적 반역사적역사정리가되고말았다. 2000년 5월 18일제20주기기념식에는국가예산 5억원이지원되고국가원수로는처음으로김대중대통령이참석했다. 이때부터해마다열리는 5 18기념식에는김대중 노무현 이명박대통령등역대국가원수가직접참석하는관례가성립되었다또한 2002년 1월 26일 5 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제정되는한편그해 9월 11 일국립5 18묘역관리소가설치되고 2006년 1월 30일국립5 18민주묘지로공식명칭이개정되어오늘에이르고있다. 그러나의미깊은 2010년의제30주기기념식에이명박대통령이전년까지의국가원수참석관례를깨고불참하고대신정운찬국무총리를참석시킴으로써이대통령의광주민중항쟁에대한폄훼의지가표출되었다. 그징후는 2010년 3월부터나타났다. 정부는 5 18기념행사주제곡인 임을위한행진곡 을대체할다른곡을공모하고나선것이다. 160
5 18 특별법제정및명예회복과정 1993. 2. 14 광주 5 18 단체들, 가해자고소고발 특검제도입 명예회복등 15 개항합의 3. 17 김영삼대통령, 유족들의거부로 5 18 묘역참배좌절 5. 13 김영삼대통령, 5 18 평가후세에맡긴다 는특별담화문발표 7. 19 정승화등 22 명,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등 38 명을 12 12 반란혐의로검찰에고소. 1994. 5. 13 5 18 피해자 322 명과시민 3 만명,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등 35 명을내란혐의고소. 10. 29 검찰, 12 12 사건에대해 기소유예 결정과수사결과발표문. 1995. 7. 18 검찰, 5 18 사건에대해 성공한쿠데타처벌할수없다 며 공소권없음 결정, 불기소처분. 7. 19 광주시민 3,000 여명, 명동성당에서 광주진상규명 외치며시위. 7. 31 고력대학교교수 131 명, 5 18 특별법제정과관련자처벌촉구성명. 10. 19 박계동전의원, 노태우전대통령비자금폭로. 11. 16 검찰, 노태우전대통령을수뢰혐의로구속. 11. 24 김영삼대통령, 5 18 특별법제정천명. 11. 30 검찰, 12 12, 5 18 특별수사본부발족과동시에재수사착수 12. 3 검찰, 전두환전대통령을반란혐의로구속. 12. 21 5 18 특별법제정공포 ; 헌정파괴범공소시효특별법제정. 1996. 2. 16 헌법재판소, 5 18 특별법합헌결정. 2. 28 검찰, 12 12, 5 18 사건관련자전두환등 16 명기소. 8. 5 검찰, 12 12, 5 18 사건과관련, 전두환에사형, 노태우에무기징역구형. 8. 26 서울지법, 12 12, 5 18 사건 1 심선고, 전두환사형, 노태우징역 22 년 6 월. 12. 16 서울고법, 12 12, 5 18 사건항소심선고, 전두환무기징역, 노태우징역 17 년 12. 23 전두환 노태우상고포기, 검찰상고. 1997. 4. 17 대법원상고심. 전두환무기징역, 노태우징역 17 년선고. 5. 9 정부, 5 18 을국가기념일로공포 5. 13 5 18 묘지완공 5. 18 제 17 주년기념식, 국가행사로격상된국가보훈처주관행사로처음열리다 12. 22 전두환 노태우등에사면 복권및석방. 2000. 5. 18 김대중대통령, 제20주기 5 18 기념식참석 2002, 1. 26 5 18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제정 7. 27 5 18 묘지, 국립묘지로승격 9. 11 국립 5 18 묘지관리소설치 2006. 1. 30 국립 5 18 민주묘지로개칭 2010. 5. 18 이명박대통령, 제 30 주년 5 18 기념식불참. 정부, 임을위한행진곡제창불용 결국유족들의반발로중단되긴했으나그이유도밝히지않는이명박정부는공식가요로수용하지않은채제30주년기념식장에서의제창을끝내용인하지않았다. 유족들은이에반발하여정부가주관하는공식기념식을거부하고망월동구묘역에서별도의추모제를거행한다음국무총리가대통령기념사를대독하는공식행사장에난입, 항의하는소동이벌어진후경찰에강제연행되는사태가벌어졌다. 다시암흑시기로되돌아가는듯했다. 광주민중항쟁은아직도생존차원의투쟁이었던현장상황이사실대로인식되는것을거 161
부당한채무고한생명을희생시킨일말의양심의가책도느끼지않는가해자와이들에 동조하는부류들에의해조작된 북괴의조종에의한폭동 으로폄훼되는것은우리역사 의아이러니가아닐수없다. 4, 광주민중항쟁의성격과의의 1) 광주민중항쟁의성격 광주항쟁은초기인 18 19일의살인적인 과잉진압-체포작전 과정에서그성격을쉽게찾을수있다. 이틀동안수도없이저질러진 천인공노할만행 이광주시민들을격앙시키는결정적계기가되었고, 이를불씨로삼은운전기사들이궐기하면서시민들의도전적응전으로발전한끝에 20일밤터진 광주의함성 에탄력을받아 민중항쟁 으로승화되었기때문이다. 여기에 과잉진압 이라는이름아래저질러진 체포작전-살육작전 에항거한광주항쟁초기의가장두드러진특징은바로무조직 무지도자상태였다. 처음에는난데없는공수부대의만행에대항하기위해전개된상황이어서어떤조직을갖출수가없었다. 전남대나조선대학생회조직, 재야민주세력은전날밤대부분체포되었거나도피한상태였기때문에저항세력을조직화할수있는시간이없었고인적구성또한불가능해조직은물론아무런지도자도등장할수없었다. 더욱이신군부는자신들이저지른살육만행에반발하여일어난광주시민들에대해 북괴의조종을받은폭동 을일으켰다고몰아세웠지만결국그들은 21일시내에서공수부대를철수시킴으로써 북괴에의한폭동 이아니라는사실을스스로인정했다. 당시계엄사는계엄군을철수시키더라도무장한시민군의광주가적화되어 ' 북괴의해방구 ' 가되지않을것이라는사실을분명하게인식하고계엄군을철수시켰었다. 이때문에 광주사태 의성격은한마디로 순수한시민의항쟁 이라는의미의 민중항쟁 임이분명하다. 광주항쟁 ' 은 10 26정변으로붕궤된유신체제라는절대적권력기반을그대로차지하려는하나회정치군인들, 이른바신군부가국민들의민주화열망을깔아뭉개고폭력적다단계쿠데타를통해정권을찬탈하는과정에서 폭동진압 명분쌓기용으로벌인살인적 체포작전 에대한시민들의 죽기아니면살기 식항거였다. 환언하면광주항쟁은 10일이라는극히짧은기간동안공수부대의무자비한 체포작전 내지 살육작전 에분노한선량한시민들이배후조직이나지도자도없이 성난민중 으로돌변하여격렬하게저항한생존투쟁의현장이었다. 또한시민들이학생들의시위에동조한다거나민주회복이라는거창한동기에앞서, 당장자신과가족의안위를위해무자비한만행을저지르는공수부대원을향해돌을던지고악을썼던격렬한항쟁이었다. 이때문에겨우 10일간격렬하게벌어진항쟁현장을몇달또는몇년이라는장기간에걸쳐느슨하게펼쳐져변화되어가는것을의미하는 화 (tize) 라는접미어가붙는 민주화 162
(Democratize) 라는개념이나성격으로규정하는것은온당치않다. 만약 광주항쟁 이몇달또는몇년에걸쳐느슨하고차분하게진행된투쟁이었다면 민주화 라는성격이타당할수있다. 그러나 격렬한저항 의의미가담겨져있는 10일이라는극히짧은기간의광주항쟁 에는어울릴수가없다. 여기에 민주화운동 이라는성격이나개념이수많은피를흘린 격렬한 10일간의광주항쟁 에온당하지않은이유가있다. 외국의학자들이나매스컴은지금도한국정부가공식적으로채택하고있는 민주화운동 (Democratize Movement) 이라는개념이나성격을전연수용하지않고 투쟁 과 피 를의미하는 Uprising' 'Rebellion' 'Crisis' 'Events' 'Bloodbath' 'Bloodletting' 'Massacre' 'Tragedy' 등의단어를사용해광주항쟁의성격을자기들나름대로규정하고있다. 특히 민주화운동 보다는강하고 민중항쟁 보다는약한의미를담고있는 Resistance 라는단어조차 광주항쟁 에한해서는사용하지않고 6월항쟁 (The June Resistance) 에서만원용하고있다는점에유의해야한다. 이는살인적국가폭력에대한국제적성격으로규정하고있음을의미한다. 2) 광주민중항쟁의의의 광주항쟁은길게는 50년, 짧게는 15년이라는세월동안힘겹게펼쳐져오던민주화운동을매듭짓게한원심력으로작용했다는점, 성공한쿠데타를단죄하는기폭제가되어그동안난무했던국가폭력을종식시키게했다는점이광주민중항쟁의역사적의의이자영향이라고평가할수있다. 2, 3백년소요됐던서구와는달리반세기라는극히짧은기간에민주주의와경제도약의기적을성취했다는국제사회의경탄은여기에서연유한다. 한국전쟁이후가장 격동적 사건으로여겨지는광주민중항쟁은 30년세월이흐르는동안많은변화를몰고왔다. 그중에서도폭력적군사독재의악몽에서벗어나진정한민주정권을탄생시킴으로써끝내민주회복을이룩했다는점이가장큰변화이자성과라할수있다. 광주항쟁은 민주주의는피를먹고자란다 는영국의격언이대한민국에서도그대로적용돼열매맺게한살아있는역사현장이되었다. 이때문에광주항쟁은 4 19 및 6월항쟁과더불어 1960년부터 87년까지부단하게벌어진평화적정권교체의소망을달성하려는민주회복운동과정에서가장큰이정표로자리매김되어있다. 그러나반민주적독재정권에능동적으로도전해승리한 4 19 및 6월항쟁과는달리광주항쟁은국가공권력의폭력적도발에대한수동적저항으로출발해민주회복운동과정상의항쟁으로승화시키는데까지는성공했으나끝내패배했다는데서그의미가달랐다. 그렇지만광주항쟁의패배와좌절은결코그대로끝나지않았다는데더욱큰의미가부여되어있다. 광주민중항쟁진상규명운동과정에서촉발한독재정권타도투쟁은새로운민중운동으로승화된나머지간단없이용해된변혁운동으로발전, 1972년이후 15년간지속되던유신및폭력정권의종식을불러온 6월항쟁의승리를이끌어낸원동력으로작용했다는점에서현대사적의의를지니고있다. 163
1980 년대흥사단에서는 1982.11 금요개척자강좌 1000회돌파기념전국순회강연실시금요개척자강좌 1000회돌파를기념하여 한민족의비전을제시한다 는주제아래전국순회강연 ( 대전, 광주, 춘천, 청주, 부산, 진주, 전주, 서울 ) 1983. 5 창립 70주년기념대회개최 5월 14일서울남산숭의음악당에서창립 70주년기념대회를개최 1983. 6 흥사단출판부를등록 6월 10일흥사단출판부등록을하고출판사업을시작하였고, 이후 도산안창호, 안도산전서 외 30여종의도서를발간 1986. 1 흥사단운동 70년사 발간 1983년 1월에흥사단운동 70년사편찬위원회를구성하고 1986년 1월 흥사단운동 70년사 를발간 1986.12 도산회관증축 1984년 4월 21일 도산회관건립추진위원회 가발족되어현재의동숭동회관부지에지하 1층, 지상5층으로중축하여현재에이름. 1986년 4월 19일에기공식을하였고동년 12월 5일에공사를마침 1987. 5 창립74 주년기념식및정기등산 700회기념등반 1989. 6 부설도산아카데미연구원개원도산선생의애국애족정신을실천 보급하고, 민주시민의식함양과사회발전을위한정책연구를위해개원 흥사단전국아카데미간부수련대회 (1984 년 ) 164
제 9 강 1990 년대북방외교와한러수교 - 러시아와한국의과거와현재그리고미래 김종헌 ( 동국대대외교류연구원연구교수 ) 1. 서론 1990년 9월 30일뉴욕의유엔본부에서한국과소연방양국의외무장관 228) 사이에수교에관한공동성명서에서명을했다. 한국과소연방양국의관계는 1970년대중반으로거슬러올라간다. 냉전의시기이후동서양진영에데탕트시기 (Age of D'etente) 가찾아오면서한국은간접무역같은방법으로소련과의관계를허용하고있었다. 1983년 9월 1일의 KAL기피격사건 이발생하면서양국관계의발전에제동이걸렸다. 그러나전반적인세계사의흐름속에서한소양국관계역시자연스럽게호전되고있었다. 특히 1988년의올림픽은양국관계의진전에결정적계기가되었다. 이후 1989년 4월 3일한국에소연방상공회의소서울사무소, 그리고동년 7월에대한무역진흥공사 (KOTRA) 모스크바사무소가각각개설되었다. 1989년 11월 17일양국은영사처설치에합의하여양국간의실질적인공식관계가복원되었다. 이후 1990년 6월의한소수교정상회담이있었으며, 9월 30일에양국의외교관계가수립되었다. 당시한소수교는당시의국제적흐름과양국의이해관계가일치한결과였다. 즉거시적으로탈냉전의세계추세속에서, 미시적으로노태우정부의 북방외교 와미하일세르게예비치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의개혁정책, 즉뻬레스뜨로이까 (Перестройка) 등이서로맞물린결과였다. 그러나한국에게소련 ( 나중의러시아 ) 은가깝고도먼나라였다. 이것은수교이후에도동일하게적용되었다. 소비에트와의수교당시한국은그들에대해많은것을알고있는것같았지만, 사실은그지식들이모두추상적관념에서완전히벗어나지못한것들이었다. 우리에게가장중요한러시아의대외정책, 특히대극동정책이나대한정책에대한분석도기초적이론수준에머물렀다. 러시아의대한정책에대한무지는한국의대러정책에서도그대로드러났다. 따라서우리는미국일변도의외교정책속에서, 그리고경제적매력을지닌중국과급속하게가까워지면서, 어느새한국외교에서러시아라는요소는점차자리를잃어가고있었다. 과연러시아는우리에게어떤의미를지니고있는가? 우리에게북방외교는무슨의미를 165
지니고있는것인가? 우리의북방외교는어떤방향으로나아가야하는가? 이런질문에대한답은 러시아는한국을어떻게보고있는가? 라는질문에대한답변의모색에서시작할수있을것이다. 그리고이질문에대한답은우리의역사속에서비슷하게나마그려낼수있을것으로보인다. 러시아외교의본질은열강의틈바구니속에서살아가고있는우리에게는매우중요한요소이다. 강대국간의외교정책은서로상호작용을일으키며, 국제정세를형성한다. 그리고이국제정세는그에속한각국가가지켜야하는정치적환경이다. 즉열강에의해만들어진국제정세는그내부에속한국가들의행위를구속하게된다. 따라서우리는현실을직시해야만우리나라의생존능력을확보할수있게된다. 지금이자리에서북방외교를언급하는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 2. 근대한국사의큰사건뒤에는항상러시아가있었다. 러시아의이그나찌예프는아편전쟁에서중국과영국을중재해준대가로 1860년이른바러청북경조약을체결할수있었다. 이조약으로한국은러시아와접경하게되었다. 이후한국근대사에서는러시아가상당히중요한변수로등장했다. 수많은사건들중에서러시아가차지한사건에는일정한공통점이보인다. 그것이무엇인지를시기에따른사건별로살펴보자. 1) 약한러시아의대한정책 - 한러밀약사건과아관파천을통해서본다 (1) 한러밀약사건한러밀약사건은 1884년 7월 7일 ( 음력윤 5월 15일 ) 한러수호통상조약이체결된이후, 한국과러시아가연관된사건중가장첫번째에해당된다. 당시한국주재러시아대리공사겸총영사는베베르 229) 였다. 그가부임할당시부터러시아의대한정책은 조선의독립유지 와 한반도에서의현상유지 였다. 이것은곧한국이일본또는서구열강중일국의압도적영향력하에복속되는것을막아야한다는뜻이었다. 그런의미에서발생한사건중의하나가한러밀약사건이다. 한러밀약사건은조선의참의통리아문사무 ( 參議統理衙門事務 ) 직을맡고있던묄렌도르프 230) 가 1884년 8월과 9월북경주차러시아육군무관슈네우르 (Шнеур) 육군대령과태평양분함대장크로운 (Александр Егорович Кроун, 1823-1900) 해군소장을각각차례로방문하면서시작되었다. 231) 당시극동의러시아는한국문제에개입할수있는상황이아니었다. 청 Карл Ивано вич Вебер 166
의중국에비해군사적, 경제적모든면에서러시아는절대약세였다. 또한러시아대외정책의주된관심은동방문제에있었다. 따라서극동은부차적관심에머물렀다. 즉러시아에게는한국문제에적극관여할의사도여력도없었다. 따라서러시아정부는묄렌도르프의제안이진실인가의여부를확인할필요가있었다. 이런목적에서 1884년 12월 28일슈페이예르가한국에파견되었다. 그는러시아의공식특사가아닌, 개인의자격으로조선에파견되었으며, 그의파견목적은러시아에조선의현재정세에관한풍부한자료를제공하는것과밀약설의근원을확인하는것이었다. 232) 이외에도민비를접견한슈페이예르는한국의중국의간섭으로부터벗어나길원하고있다는사실을확인하게된다. 이로써자신의임무를완수한슈페이예르는일본으로귀국했다. 이후 1885년 2월고종이김용환과권동수를자신의밀사로삼아러시아에파견했다. 이들은남우수리국경위원베녜프스키 233) 에게고종의밀서를전달했으며, 다시이밀서는코르프남작 234) 에의해페테르부르크에전달되었다. 1885년 3월도쿄를방문한묄렌도르프는다비도프에게조선국왕의명의로보호관계설정에관한문제를재차제기하면서, 러시아가해밀턴항을점령하라고권고하는한편, 러시아군사교관단초빙에관한문제가언급된서한을묄렌도르프자신이직접독일어로작성하여다비도프에게전달했다. 235) 이때영국에의한 거문도점령사건 이발생했다. 236) 슈페이예르가두번째로한국을방문할때에는밀약설에따른 러시아교관단 의파견문제와 거문도점령사건 과관련하여열강대표들의행동을예의주시하는것이었다. 이번에도그는개인적인자격으로파견되었다. 그러나그는묄렌도르프의간청에못이여프랑스어로러시아군사교관단의조직안을작성해주었다. 이것이유포되면서, 러시아의대한침략기도로사건이과장되었다. (2) 아관파천사실아관파천은청일전쟁이후에발생한일련의사건들의결과였다. 따라서그사건하나만으로는설명이불가능하다. 러시아가주도한 1895년 4월 23일의삼국간섭으로동년 5월 10일일본정부는요동환부 БеневскийАркадий Семенович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рф Чукотка Камчатка Сахалин Успенский Л Нарочницкий 167
에관한조칙을발표한다. 바로이사건이후부터고조오가민왕후그리고베베르는공조체제를구축하여이른바인아거일책 ( 引俄拒日策 ) 을수립했다. 이인아거일책이정확히언제수립되었는지는정확히밝혀지지않았다. 그러나앞뒤정황을살펴보면대체로 1895년 5월과 6월사이에베베르와민왕후사이에어느정도합의가형성되었으며, 6월말경이면그것이구체화된것으로보인다. 전승국이면서도전리품을제대로챙기지못했던일본에게는당시의불리한상황을역전시킬강력한사건이필요했다. 그것이바로 1895년 10월 8일에발생한을미사변이었다. 이에고종은 1896년 2월 11일러시아공사관으로파천했다. 을미사변이후계속된일본의위협으로부터벗어나기위한극단의조치였다. 고종의아관파천이후러시아는한국에서막강한영향력을행사했다. 러시아는한국에알렉세예프 (Алексеев) 가재정고문으로파견되었으며, 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에서의삼림채벌권이브리네르 (Бринер) 에게허여되었다. 또한군사교관단을파견하여한국신식군대의훈련을담당했다. 재정, 군사, 경제등모든분야에서러시아가독점적지위를차지한것으로보인다. 당시러시아는조선을자국의영향력하에두려했던것으로보인다. 실제로러시아정계의실세였던재무대신비떼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의회고록에기술된내용을보아도조선을포기할의사가없었던것같다. 237) 그러나러시아는이이상의행보를보여주지않았다. 즉한국의요청대로군대를파견하지도않았으며, 막대한차관을제공하여한국의재정권을확실하게장악하지도않았다. 이권에서는철도이권에가장관심을보였으나, 가장중요한경의철도부설권을프랑스에제공했다. 결국러시아의외무대신이무라비요프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Муравьев) 로바뀌면서러시아는한국으로부터후퇴하는모습을보였다. 이두사건을통해서우리는당시러시아대외정책의공통점을찾을수있다. 수교이후부터아관파천이종결되는시점까지극동에서의러시아는강대국의면모를보여주지못했다. 군사력이부족했으며, 극동의경제력과농업생산력역시대규모군사력을유지할수있는수준이아니었다. 청일전쟁이후삼국간섭과같은러시아의외교적승리는러시아가강했기때문이아니라, 일본이완전히탈진된상태였기에가능했었던것이다. 밀약사건이나아관파천을보면서알수있듯이, 약한러시아는외국세력, 특히러시아에적대적인외국세력이한국에서정착하지못하도록막는데있었다. 밀약설당시에는중국세력의견제가주목표였으며, 청일전쟁이후에는일본세력의약화에대한정책의목표를두었다. 즉전쟁을불사하겠다는적극성은없다. 그러나한반도에서외국세력이강화되지못하도록외교적조치를취하면서, 러시아의영향력이강화되게만들어야한다는것이기본원칙이었다. 이밀약사건을 2차에걸쳐발생하는데, 고종은퇴위의위기를겪게된다. 2) 강한러시아의대한정책 - 한반도분할논의를통해서본다. Витте С Ю Воспоминания т М 168
러시아가극동에서강력한세력으로부상한것은 1900년의의화단사건이후부터였다. 발칸과근동을통해서외해로진출하려는시도가실패하면서, 러시아는극동으로자신의눈을돌렸다. 그런러시아에게호재로작용한것이바로의화단사건이었다. 의화단사건을계기로만주를점령한러시아는일본과의군사적충돌을미연에방지하기위하여사전에조치를취할필요가있었다. 바로이때한국의고종은법부및외부고문이었던프랑스인로랑크레마지 (Laurent Cremazy, 金雅始 ) 의조언에따라한국을벨기에나스위스같은중립국가로선포하고자했다. 238) 러시아는이런한국의의도를놓치지않고이용했다. 즉일본과협의하여한국을중립화시키자는것이었다. 239) 러시아는한반도의중립화가과연일본과의관계에서적절한것인지를극동에파견된각국공사에게문의했다. 이에중국, 일본, 한국등지에주재중이던러시아공사들은자신의의견을개진했는데, 이중가장중요한의미를갖는것은한국주재러시아공사파블로프의견해였다. 즉파블로프는한국의중립화논의가만주의중립화논의로이어질수있음을지적했다. 즉일본내의여론에떠밀린일본정부를영국과미국이지지할경우, 한국중립화에대한대가로서만주의완벽한환부를요구할수도있다는것이었다. 파블로프의보고서를접수한이후, 러시아정부는더이상한반도중립화라는단어를사용하지않았다. 대신그들은한반도내중립지대설정이라는것으로방향을선회했다. 즉러시아는더이상한국의중립화에중점을두지않고, 어느선에서한국을분할하여 중립지대 를설정할것인가의문제에관심을두게된다. 또한 한반도중립화 라는용어가사라지면서한반도문제에관한러시아와일본간의논의는한국의의지와는무관하게진행되었다는점이다. 물론러시아정부의최고통치권담당자들이한반도의중립화를모두꾸로빠뜨낀식으로이해했는지, 아니면중립국이나다른어떤형태로이해했는지를밝힐수있는정확한자료는존재하지않는다. 다만그동안의담판이고종의요구에따라러시아가한국의 중립화 를실현하기위해노력했던것이었다면, 이후부터는러시아가러시아만의목적을위해회담을진행하게된다. 따라서러일협약이라는틀속에서 중립지대 (Нейтарльн ая зона) 라는개념이새로이등장하며, 그런의미에서이회담을러일전쟁발발직전까지진행된다. 이당시러시아의극동지역군사력은아직미약한상태였다. 러일전쟁발발전까지러시아가극동에서보유하고있었던군사력은병력 98,000명에대포 272문그리고대포 48문을보유한경비대원 24,000명이었다. 240) 군사력이일본을능가하지못했다. 따라서이시기의러시아는시베리아횡단철도가완공될때까지시간을벌어야했는데, 한반도분할논의가그수단이되었다. 169
이시기의특징은군사적충돌을원하지는않았지만, 불가능한것으로생각하지도않았다는것이다. 그것은다만시기상의문제라고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한국문제에대한러시아의태도도달라진다. 과거에는한국에서타열강의세력이강화되는것을막는다는것에외교의목적이있었다. 그러나이시기에들어오면, 한반도는 머지않은장래에러시아의영토가되어야할지역 으로바뀌게된다. 그이유도 지리적조건이나사건의자연스런전개과정속에서조만간에러시아제국의일부가될것 이라고했다. 과거흔히얘기되던이른바 한만교환안 이라는것은학자들의해석에따른것이었을뿐, 러시아의정치권에서는한국을절대포기하지않았음을알수있다. 그러나이런러시아의의도는치밀하게전쟁을계획한일본에의해실현되지못했다. 그리고러시아의패전은곧일본의한국병탄으로이어졌다. 3) 초강대국소련의대한정책 - 민족의비극 제2차세계대전이후소연방은한국을상대로이전과는전혀새로운차원에서의정책을추진했으며, 그결과는현대사에서우리민족의가장비극이었다. 우리는 6 25를어떻게이해해야할것인가? 민족간의단순한내전이었는가? 국제정치의희생양이었었는가? 가장강력한소련의대한정책의결과는우리민족에게가장비극이었다. 3. 러시아대한정책의불변요소 제정러시아이후소연방을거쳐러시아연방에이르는동안러시아의대외정책에서한 국이차지하는지위에는많은변화가있었다. 소비에트시절북한은가장중요한동맹국 중하나였다. 그러나현러시아연방대외정책의우선순위에서아시아지역은 CIS 회원국과 유럽 북미에이어세번째를차지하고있다. 그나마아시아에서러시아대외정책의우선적 고려대상은중국과인도이다. 그다음이일본과의영토분쟁해결이다. 한반도는중동지역 의다음에야그대상에오른다. 241) 한반도가러시아연방의대외정책에서차지하는비중은높지않아보인다. 그러나한국 은러시아와접경한국가이다. 따라서러시아의입장에서한국은변함없는가치를지니고 있다. 러시아극동외교의전통을보면, 러시아는접경국내에서타열강의영향력, 특히러 시아에적대적인국가의영향력이강화되는것을막으려했다. 또한한반도의 39 도선까지 는러시아의영향력하에있어야한다고보고있다. 242) 러시아대한정책의이런명제는지 170
금도변함없이유지되고있는것같아보인다. 2001 년김정일은시베리아횡단철도를따라러시아의도시몇곳을들르며, 모스크바를 방문한적이있었다. 당시북한과러시아사이에서제기되었던가장중요한현안중의하 나가바로 TSR 과 TKR 의연결이었다. 북한은철도의노후화를들어난색을표명했는데, 러 시아가매우적극적으로철도노선개선에대한자본투자의의지를피력했다. 단조건은 TSR 과연결되는북한의철도를러시아식광궤로재부설해야한다는것이었다. 243) 이것을 단순히생각하면그이면의정치적의도가보이지않는다. 우선궤폭을광궤로주장하는것에문제가있다. 궤폭은단순한철도기술상의문제가 아니다. 궤폭을달리하는것은타국의군사력이나경제력이자국으로직접침투하는것을 막기위한조치이다. 러일전쟁당시일본이수많은쿨리를동원하여남만지선의광궤를협 궤로재부설한것도군사적으로위와동일한의미에서해석될수있다. 러시아가광궤를 주장하고그것이실현될경우, 러시아의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영향력이원산까지내려오 게된다. 이렇게되면러시아는제정시기에도중요시여겼던 39 도선까지를자국의영향력 하에둘수있게된다. 러시아자본투자의문제를보자. 러시아가자신의자본을투자하여북한의철도를재부 설할경우, 북한은조약에명기되어질기간동안철도주권을상실하게된다. 이것은단순 한철도의문제가아닐수도있다. 현대의세계가전쟁과같은무력으로써영토를확장하 는시대는지났다는것에모두가공감하고있다. 이점에대해서는러시아도공감하고있 을것같다. 따라서자신의영향력을확대하기위해군사력이아닌, 다른방법에의존할 것이다. 과거의예를살펴보자. 1902 년서울을방문한서울주재초대러시아공사베베르는 1903 년한국에체류하는상태에서 1898 년이전과이후의한국에관한기록 을작성했다. 244) 그 는 20 세기초에이미상인을 무사 로정의했다. 즉무역은총성없는전쟁이었으며, 경제 적정복은전쟁보다용이하면서도, 효과는더강한점령의방법이었다. 이런경제적침투 의첨병이바로철도와전신선이었다. 베베르는경부선을예로들면서, 경부선의따라일 본인의주거가조약상의권리로인정되어있으나, 조약에는역의수를규정하지않은만큼, 일본은철도노선을따라조선내지에상주할수있게되었으며, 결국경부선을따르는지 역이모두일본의영향력하에들어가게된다는점을지적했다. 이런베베르의지적은현재에도적용할경우, 철도재부설에대한러시아의투자의지 는철도를이용하여군사적으로중요한가치를지니고있는원산까지를자국의영향력하 에두겠다는의미가되며, 정치적으로보면그곳까지는외국세력의유입을허락할수없다 Вебер К И Записка о Корее до го года и после в кн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е Выпуск второй Москва 171
는의미가된다. 통일에대비해야하는우리로서는러시아의제안을다시한번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 245) 4. 한국의북방정책 러시아가 19세기말 20세기초근대한국의면전에서대외적으로표명했던대한정책은선린우호라는단어로형용되었다. 한반도에대한여타열강의영향력강화를억제함으로써한국의영토적통일성및독립과자주를지지하는현상유지정책을지지했기때문에선린우호라는표현이가능하다는게러시아식논리였다. 그러나실제역사를살펴보면이웃국가와선린우호의관계를유지한경우는거의없는것같다. 원래외교란자신의목적을달성하기위해상대방에게일정한영향력을행사하거나설득하여상대국이자신의의지에따르도록만드는것이다. 또한한국가가대외적으로무엇을시작하려면항상이웃한국가부터그대상이된다. 러시아의경우한국이적대세력하에들어가게될위험이존재할때, 한국문제에보다적극적으로개입했다. 이것은근본적으로한국이러시아의접경국가라는요인에따른것이다. 또한당시한국이한나라의정상적인외교정책의대상이될수없을정도로약소국이었기때문이기도하다. 근대사에서한국은중국과일본이라는두강대국의경쟁적침탈대상이었다. 그리고그사이에서러시아는양국의영향력으로부터한국의영토적완전성을지키려했다. 한국은러시아자신이팽창해야할공간이었기때문이다. 현대한국에게있어서중국과일본은근대처럼잠재적위협요소로분류될수있다. 우리민족에게가장중요한정치적과제가통일이다. 그럼일본과중국은통일한국에어떤반응을보일것인가? 자신의주변에강대국이등장하기를원하는나라는없다는간단한진리를생각해보면, 긍정적인반응을기대하기는힘들다. 중국이라는나라의현재적성격을규정하면, 사회주의를표방한일당독재국가이다. 한편일본은동해를자신의내해로삼고자한다. 이것은에너지자급자족을목표로삼고있는일본의입장에서독도가지니고있는천연자원 ( 가스하이드레이트 ) 에따른것이다. 한편러시아는어떠한가? 러시아가우리의영원한우방이될수는없다. 그러나러시아는중국과일본의세력이강력해지는것도원하지않고있다. 러시아의입장에서위협적인잠재적적국은중국과일본이다. 이런역학구도는근대이후바뀌지않고있다. 그런측면에서러시아는한국의파트너가될수도있다. 일부에서는유사시에중국이북한을점령할것을우려하고있다. 이것은가능성이매우적은시나리오다. 그러나그것이가능하다고가정할경우, 러시아는그런중국의의도에 172
반대할수있는국가중하나이다. 이렇게보면러시아는우리의가장이상적인파트너로보인다. 그러나그전제조건이있다. 바로우리의국력이다. 우리가국력을갖추지못한상태라면, 러시아는한반도를노리는또다른하나의국가에불과하다. 5. 결론 우리의북방외교가국가의장래를생각하는만큼, 충분한사전준비를거쳐실행된정책은아니다. 새로이권좌에오른대통령마다러시아와의외교를중요시하면서도항상자원외교의틀을넘지못했다. 그러나수많은양해각서와의정서를체결했음에도실제로이행된것은없다. 노태우전대통령당시수교가이루어졌으나, 러시아도그리고한국도서로다른목적을지니고있었으며, 그목적간의간격또한매우넓었다. 러시아는우리에게계속적으로경제적지원을바랐을뿐이며, 우리는그런러시아가부담스러울따름이었다. 결국전러시아대통령옐친은김대중대통령의방러당시한국의대통령이 왜인지러시아에따뜻한감정을지니고있다 는식으로평가했다. 양국간의관계가시간의흐름에따라서소원해지고있음을보여주는대목이다. 러시아의대한정책은푸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이집권하면서많은변화를보이기시작했다. 강력한러시아를추구하던푸틴은대통령재임기간동안남북한등거리외교를유지하며, 한반도내에서자국의이익을보호하려했다. 이런러시아의대한정책은제정시기의대한정책과상당히유사한모습을보이고있다. 공통점은제정러시아가유럽의강국이었다는점이며, 현재의러시아연방은과거소비에트시절의강대국을지향하고있다는점이다. 이런모습은러시아와한국의선린우호관계수립에부정적요소로비쳐진다. 현재극동에서의국제정세를고려하면, 위와같은러시아의대한정책을우리의입장에맞게이용할수있는측면도보인다. 그리고미 중 일 3국간의힘의관계나극동에서러시아의입장등이단기간내에변할것으로보이지는않는다. 서로의이해관계를적절히조절하면서대외적상황에대처한다면, 한국은러시아를상대적으로유리한파트너로만들수도있다. 국제사회에서는영원한적도, 영원한동지도없다고한다. 일국의이해관계는언제나변하기때문이다. 한국과러시아또한마찬가지이다. 양국의상호이해관계역시상황에따라변한다. 각상황에따른러시아의대한정책은어떻게변할것인가? 우리가과거에대한역사적성찰을게을리해서는안되는이유가바로여기에존재한다. 173
1990 년대흥사단에서는 1990.12 제 1 차흥사단발전 5 개년계획수립 (1991~1995) 1991. 7 제 1 회통일꾼수련대회개최서울북한산초등학교에서 통일을준비하는젊은이 라는주제로, 전국아카데미회원 140 여명이참가한가운데제 1 회통일꾼수련대회를개최하고, 이후매년계속하여 2000 년 7 월에 10 년차목표를달성 1991.12 공명선거실천민운동협의회 ( 약칭공선협 ) 결성참여 (1998 2004 사무처운영 ) 1992. 6 제 1 회청소년통일백일장개최 6 월 22 일, 청소년을대상으로분단사적지탐방활동과함께통일을주제로한백일장을통일촌내군내초등학교에서 650 여명이참가한가운데실시하고, 이후매년 1 회개최 1993. 5 창립 80 주년기념대회개최 ( 주제 : 나부터주인정신, 더불어바른사회 ) 5 월 15 일서강대학교강당에서창립 80 주년기념대회및리셉션을개최 1994. 3 흥사단아카데미총동문회 ' 발족 1993 년아카데미창립 30 주년기념사업의하나로단위아카데미동문조직을전국차원으로묶어총동문회를결성 1996. 1 재단법인도산청소년재단설립청소년수련활동및문화활동지원을목적으로설립 1997. 3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 ( 흥민통 ) 설립통일정책의연구와교육, 실행사업등을통해범국민적인통일운동을전개하기위한목적으로설립 1997. 3 흥사단문화사업단설립다국적문화시대에우리문화를바탕으로능동적인대처방안을제시하고, 열린문화운동을통한새로운청소년문화사업을수행 1999. 8 지역교류 화합한마당축제개최 갈등을넘어화해와통일로 라는주제로충남독립기념관캠프장에서개최 제 6 회청소년통일백일장 (1997 년 ) 174
제 10 강 2000 년대남북정상회담 - 21 세기한반도의미래 이규태 ( 아세아역사문화연구소소장 ) 1. 들어가는말 2000년 6월역사적인남북정상회담의개최와 6.15 남북공동선언 으로반세기가넘는민족의대립과갈등이종식되고화해와협력, 평화와통일의시대가개막되었다. 그러나이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이발표된지벌써 10년이지났음에도불구하고, 그동안한반도를둘러싼국내외정세는남북관계를여전히답보상태로발목을잡고있다. 그주요원인은부시정권이후미국에의해진행되고있는소위테러와의전쟁이라는논리로그것이동북아지역에서는 북한핵문제 로둔갑되어한반도를옥죄고있기때문이다. 그렇다면미국이전개하고있는테러와의전쟁이란논리의핵심은무엇일까. 물론직접적으로는 9.11 사태를그근거로삼고있지만, 보다넓게는 20세기의미소냉전이란세계체제의붕괴와함께 21세기의새로운국제질서의모색이란차원에서찾아야한다. 이과정에서미국은중동지역에서의지속적인에너지확보라는전술적목표와명실상부한세계최강의패권국가로서의지위확보라는전략적목표를실현하려하고있다. 그런데미국은중국을미국의세계패권에유일하게도전할수있는잠재세력으로인식하고있다. 동북아지역은인구, 생산력, 시장면에서도미국의세계패권확보를위해전략적으로매우중요하다. 중국에대한견제와동북아지역에서의통제권확보를위한유용한수단이바로북한핵문제인것이다. 북한핵문제로한반도에긴장을조성하여일본을확실히제압하고나아가경제성장에몰두하고있는중국을견제함으로써동북아지역에서의정치, 경제, 군사적측면에서통제권을확보하겠다는것이미국의논리이다. 이러한국제정세의변화와함께 6.15 남북공동선언 이좌초될위기에처한또하나의주요원인은김대중-노무현정권에이은이명박정권의출현이다. 이명박정권의대외정책은한미동맹의공고화라는미명하에미국의일방주의적정책을추종하면서김대중-노무현정권이추진했던대북정책을형해화시키는것이었다. 그내용은이명박정권이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 이란말속에상징적으로표현되어있다. 본고에서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가지는역사적의미를고찰하면서 21세기한반도가나아가야할방향성에대해생각해보고자한다. 175
2. 6.15 남북공동선언 의역사적맥락 현재한반도를둘러싼국내외정세는매우복잡하게전개되고있다. 마치 100년전일제에의해나라를빼앗겼던그때의상황과그논리구조가매우유사하다. 조선의전통적인지배체제는임진왜란과병자호란을거치면서근본에서부터동요하기시작했다. 양란을통해생산기반은황폐화되었고이를복구하는과정에서필연적으로생산력의증대가이루어졌다. 생산력의증대는상업과수공업의발전을촉진시키면서신분질서의붕괴등기존의공동체사회를해체시켜나갔다. 이러한변화는결과적으로봉건왕조의제약을극복하고서민경제를활성화시키는계기를마련했으며이것은곧근대사회를향한대장정의출발이었다. 조선후기에나타난이러한변화속에서선진적지식층과민중들은기존의가치를수정내지부정하려고시도했으며, 이과정에서현실문제의극복과해결에도움을주지못하는사장적 ( 詞章的 ) 학문과사변적성리학을배격하고사회경제적문제의해결을모색하는실학이태동했다. 조선시대에서가장안정적시기였다고말해지는영정조기는탕평책에의해실학사상가들이대거권력구조속으로진입하여자신들의생각을정책으로펼칠수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들어와 수구세력 들은세도정치를구사하면서 19세기의세계사적상황변화에는대응하지못하고자신들의개인적이익과당리당략에만전념하여온갖부정과부패를저질렀다. 또한그들은이를극복해보려는세력에대해서는가혹한탄압으로대응했다. 그결과국가의힘은약화되었고조선과비슷한위치에있었던일본에의해개국을당하고급기야는망국이라는통한의역사를경험해야했다. 일제강점기절대다수의민중들이목숨을건민족해방투쟁을전개하는상황속에서도 수구세력 들은개인적영달을추구하며일제에협력했으며, 1945년광복이되자그들은자신들의과오를반성하기는커녕 38도선에의한미소분할점령상태를이용하여반공과분단을주장하면서기득권유지에만전념했다. 그들세력은이승만정권의비호하에서온갖부정과부패를저지르다 4.19 혁명으로좌절되는듯했으나, 5.16 군사쿠데타를통해다시부활하게되었고, 오늘날많은논쟁이일어나고있는한일협정을졸속으로체결하여경제발전이라는미명하에반공과분단을보다확실히고착화시키면서자신들의기득권유지를위해무소불위의독재권력을행사했다. 남쪽의일부 수구세력 들은냉전체제가붕괴되고한반도주변정세가급변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아직도민족의이익을외면한채당리당략적관점에서자신들의기득권만을고집하며반민족적반역사적주장과행동을계속하고있는것이현실이다. 그러나역사에면면히흐르는독립운동의정신, 그리고분단상황에서도통일과민주사회의건설이라는민중들의절절한소망은마침내민주화의길을개척하면서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을가져오게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은민족의화해와협력, 평화통일의필요성을선언한것으로서이것은통일시대의개막을의미하는것이기도했다. 176
3. 기존의남북합의의교훈 민족분단의문제를해결하기위한 6.15 남북공동선언 과같은합의는과거세차례있었다. 첫째는 1945년 12월남북을점령한미소에의해체결된 모스크바합의 이며, 둘째는 1948년 4월에있었던소위 4김회담공동성명서, 셋째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다. 모스크바합의 는 1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수립, 2 미소공동위원회구성과조선의민주적제정당및사회단체와협의, 3 미소공동위원회와조선임시정부가협의하여최대 5 년이내의신탁통치실시, 4 2주이내미소양군대표자회의개최, 라는내용이었다. 이것은철저히미국과소련이주도한것으로서자국중심적인정책의결과였다. 한마디로요약하면현재남북을점령하고있는실제적인권력인미국과소련이미소공동위원회를먼저구성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주도하여조선인정치세력과 협의 해서조선의통일정부를수립한다음, 미소공동위원회와수립된조선정부와협의해서최대 5년이내의신탁통치실시한다는절차를밝히고, 이를위해우선 2주이내에미소양군대표자회의를개최한다는내용이었다. 여기에조선의입장이반영될여지는거의없었다. 긴세월억압으로부터해방된조선인들이원하는것은무엇인가, 어떤성격의국가를만들것인가, 정부구성은어떻게하며, 그구체적정책은어떤것인가등나라의주인이되어야할조선인의입장을반영할장치가결여되어있었던철저히 외세주도형 의합의였다. 일부학자들은당시상황을고려하면분단을막기위해서는받아들였어야했다고주장하기도하지만, 이후전개과정을보면결국미국과소련스스로가자국의이익을위해 모스크바합의 를폐기하고자신들에게유리한분단정권을수립한사실에서도알수있듯이, 민족통일전선을통한민족의대표세력이제외된상태에서는그어떠한선택도우리민족의이익을반영하지는못한다는것을가르쳐주고있다. 아무튼 모스크바합의 는비록그것이 외세주도형 의합의였다고는하지만, 모든정치세력이민족통일전선을통해우리민족의이익을반영할수있는여지를모색했어야만했고, 따라서 모스크바합의 에대한판단과대응은국민들의의견을조율하면서지극히신중히대처했어야만했다. 그런데신탁통치라는말에민족적감정을억누르지못하고김구를중심으로한임정세력은즉시반탁운동에돌입했고, 인공세력은 모스크바합의 절대지지를표명함으로써 모스크바합의 를둘러싼민족내부의대립은격화되었다. 신탁통치정국이전개되는과정에서기묘한언론조작이이루어졌다. 즉조선공산당박헌영이외신기자와의인터뷰에서조선은 5-10년정도소련단독의신탁통치를받고그후소연방에가입하고싶다고밝혔다는것이다. 당사자들의부인에도불구하고사태는확산되었고, 이런정황속에서친일민족반역세력은반탁운동에참가하면서반탁운동을반공 반소운동으로전환시켜나갔다. 친일민족반역세력은 반탁-반공-반소( 친미 ) 운동을통해항일독립애국세력을 찬탁-친공-친소 ( 반미 ) 로규정하고, 자신들이야말로공산주의소련으로부터나라를구하는 구국-애국- 우익 세력이며, 따라서 찬탁-친공-친소( 반미 ) 운동세력은 매국-반역-좌익 세력이기때문에말살해야한다고주장했다. 그결과민족반역자가애국자로둔갑하는어처구니없는상 177
황이전개되었고, 이논리가바로오늘날까지한국사회를지배하고있는분단이데올로기의핵심내용인것이다. 역사적으로우익과좌익은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방법론적차이를가질뿐양측모두가애국세력이었다. 해방후우리민중이요구했던것은친일민족반역자만을제외하고이념을초월한모든애국세력이대동단결하여일제가남겨놓은모순을개혁하고통일국가를건설하는것이었다. 이를위해서는민족통일전선을통한대동단결이절대요구되었지만, 모스크바합의 에대한잘못된대응으로신탁통치정국이전개되고, 오히려민족내부의분열과친일민족반역자들의온존이라는치명적결과를초래했던것이다. 분단이거의확정적이었던 1948년남북협상에이어발표된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등 4김회담공동성명서 에서는 1 미소양군철수, 2 양군철수후통일에반대되는어떠한무질서의발생도허용하지않을것, 3 전국총선에의한통일국가수립, 4 남한의단선단정반대등을주장했지만, 본격화된세계사적냉전구조속에서외세와결탁한남북의분단세력들의독자적인분단정권수립에의해허공의메아리가되었다. 246) 여운형과김구의암살은이러한분단이데올로기의파괴적이며상징적인표상이었다. 권력을장악한이승만은반공 멸공을기치로 북진통일 을주장했으며, 북한정권역시남한을제국주의로부터의미해방지역으로간주해무력으로 조국해방 을달성하고자했다. 남북분단정권의이러한지향성은결국한국전쟁으로이어졌고, 그결과는민족에씻을수없는상처만을남기고분단은더욱고착화되었던것이다. 이런상황속에서국제정세의변화에의해 1972년극비리에추진되었던 7.4 남북공동성명 은남북의분단정권이국내정치체제의공고화를위한수단으로활용됨으로써해프닝으로끝나버렸다. 그럼에도불구하고 7.4 남북공동성명 은중요한통일원칙을합의함으로써이후통일문제에대한남북협상의틀을제시했다는점에서그역사적의의는매우크다고할수있다. 7.4 남북공동성명 에서합의된원칙은, 1 통일은외세에의존하거나외세의간섭을받음이없이자주적으로해결해야한다 ( 자주 ), 2 통일은서로상대방을반대하는무력행사에의거하지않고평화적방법으로실현해야한다 ( 평화 ), 3 사상과이념 제도의차이를초월하여우선하나의민족으로서민족적대단결을도모해야한다 ( 민족대단결 ) 는 3 대원칙이었다. 이외에 7.4 남북공동성명 에는그로부터약 40년이지난오늘날에도여전히의미심장한내용을담고있다. 예를들면 쌍방은남북사이의긴장상태를완화하고신뢰의분위기를조성하기위하여서로상대방을중상비방하지않으며크고작은것을막론하고무장도발을하지않으며불의의군사적충돌사건을방지하기위한적극적인조치를취하기로합의 한점이나, 쌍방은끊어졌던민족적연계를회복하며서로의이해를증진시키고자주적평화통일을촉진하기위하여남북사이에다방면적인제반교류를실시하기로합의 했다는점등이다. 이런내용은여전히오늘날까지도남북관계에있어지켜져야할내용이다. 247) 178
4. 6.15 남북공동선언 의특징 2000 년 6 월세계가주목하는가운데당시김대중대통령과김정일국방위원장은역사적 인남북정상회담에이어 6.15 남북공동선언 에서명했다. 합의된내용은다음과같다. 6.15 남북공동선언문 전문 조국의평화적통일을염원하는온겨레의숭고한뜻에따라대한민국김대중대통령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정일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평양에서역사적인상봉을하였으며정상회담을가졌다. 남북정상들은분단역사상처음으로열린이번상봉과회담이서로이해를증진시키고남북관계를발전시키며평화통일을실현하는데중대한의의를가진다고평가하고다음과같이선언한다. 1. 남과북은나라의통일문제를그주인인우리민족끼리서로힘을합쳐자주적으로해결해나가기로하였다. 2. 남과북은나라의통일을위한남측의연합제안과북측의낮은단계의연방제안이서로공통성이있다고인정하고앞으로이방향에서통일을지향시켜나가기로하였다. 3. 남과북은올해 8.15에즈음하여흩어진가족, 친척방문단을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문제를해결하는등인도적문제를조속히풀어나가기로하였다. 4. 남과북은경제협력을통하여민족경제를균형적으로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등제반분야의협력과교류를활성화하여서로의신뢰를다져나가기로하였다. 5. 남과북은이상과같은합의사항을조속히실천에옮기기위하여빠른시일안에당국사이의대화를개최하기로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김정일국방위원장이서울을방문하도록정중히초청하였으며, 김정일국방위원장은앞으로적절한시기에서울을방문하기로하였다. 2000 년 6 월 15 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179
6.15 남북공동선언 은이전에이루어진남북합의와비교해보았을때그배경과형식에서몇가지특징이있다. 우선남북의최고권력자가직접회담하고합의했다는것이다. 이것은비밀리에 대리인 들이갑작스럽게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 과는그과정과형식에서근본적으로다르다. 남북의최고권력자가직접만나합의했다는의미에서향후남북관계를규정하는기초가된다는역사적의미가있다.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 은 햇볕정책 으로불려지는김대중정부의일관된대북포용정책이북한지도부의신뢰를획득한결과였다는것이다. 반세기이상지속된대립과경쟁의남북관계를평화와상생의남북관계로궤도수정을해보자는남북정상의합의이기도했다. 그러나내용으로들어가면현실은그리간단하지않다. 따라서구체적내용에서는첨예한대립적상황에있는남북관계라는현실적조건을고려하여우선실현가능한것부터실천해보자는것에무게를두고있었다. 또한국제적냉전체제의해체이후국제적고립상태에서벗어나북한식개혁개방정책을모색하고있는북한지도부의현실적요구가반영되었다. 합의내용을전체적으로보면, 7.4 남북공동성명 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이란통일 3대원칙을기반으로하면서남북이산가족문제와현실적으로필요한남북사회경제문화교류등을강조한내용이었다. 즉과거의남북합의가외세주도형 ( 外勢主導形 ) 또는정치과도형 ( 政治過度形 ) 이었다고한다면, 6.15 남북공동선언 은경제문화중심형 ( 經濟文化中心形 ) 으로, 정치적문제보다경제적교류나인도적측면에상당한비중을두고있음을알수있다. 다만제2항은그동안남북합의에서언급되지않았던내용으로서 6.15 남북공동선언 의핵심이며그바탕이되는부분이다. 남측의연합제안과북측의낮은단계의연방제안이서로공통성이있다고인정 이라는부분은남북통일론에관한획기적진전이며현실적으로도실현가능한중대한내용라고말하지않을수없다. 김대중대통령은이미 1970년대부터통일문제에대한깊은연구를해왔고, 통일의원칙으로서 자주-평화-민주 라는 3대원칙을주장해왔다. 그리고 남북연합제 라는 3단계통일방안을제시했다. 3단계통일방안은 통일의시작은빨리하되, 진행은천천히한다 는원칙에입각해서점진적이고단계적인통일과정을추진한다는것으로, 제1단계는남북공화국연합 ( 남북연합 ) 단계이다. 이단계는 2개의남북한독립정부가현재의상태에서각기다른체제를그대로유지한채국가연합을형성하는단계이다 (1국가연합-2체제-2독립정부). 따라서남북한의주권과모든기존의권한은남북이각기그대로보유하지만, 실질적인통일의단계인제2단계 ( 연방제 ) 로진입하기위해서는남북협력기구를제도화하여통일의과정을관리한다는것이다. 248) 남북연합의기간은약 10년정도를예상하고있으며이기간은남북의화해와협력을통해서평화와번영을추구하는가운데민족의동질성을회복해나가는기간으로설정되었다. 제2단계는연방제단계이다. 이단계는 1연방정부-1체제-2지역자치정부 로구성된다. 하나의체제아래외교, 국방그리고주요내정은중앙정부가담당하고, 그밖의내정은 2개 180
의지역자치정부가담당한다는것이다. 또한통일헌법의토대아래연방대통령을선출하고연방의회를구성한다는것이다. 따라서이단계는오늘날의미국과흡사한것으로서실질적인통일의단계하고할수있다. 이것은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 와근본적으로다른내용이다. 제3단계는단일정부가통치하는완전통일의단계이다. 이단계에서는 1민족-1국가-1체제-1정부 의체제가실현된다. 완전통일단계는중앙집권적인단일정부형태를의미한다. 여기에서북한당국이주장하는 고려민주연방제 를검토해보자. 고려민주연방제 는 1국가-2체제-2정부 의단계를통일의단계로설정하고있다. 즉남북의군사와외교를통일적으로대표하는형태로즉시에단일화하자고북한당국은주장하고있으나이는비현실적이다. 이런비현실성때문에북한당국도 6.15 남북공동선언 이전에이미남북연합단계부터실현할용의가있음을직간접적으로표현하고있었다. 이상과같은배경속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의제2항이성립되었다고말할수있다. 이를표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남북연합제 ( 남 ) 고려민주연방제 ( 북 ) 제 1 단계 ( 남북연합 ) 2 국가 -2 체제 -2 독립정부 (1 국가연합지향 ) 현재 2 국가 -2 체제 -2 독립정부 제 2 단계 ( 연방제 ) 제 3 단계 ( 완전통일 ) 1 국가 -1 체제 -2 독립정부통일단계 1 국가 -2 체제 -2 독립정부 1 국가 -1 체제 -1 독립정부 즉 남측의연합제안과북측의낮은단계의연방제안이서로공통성이있다고인정 한다는의미는고려민주연방제의통일단계를남북연합제의제1단계와제2단계의중간단계로상정하여남쪽이주장하는제1단계에서의설정을받아들인다는것을의미한다. 이것을종합해보면다음과같다. 현재 제1단계 ( 남북연합 ) 낮은단계연방제제2단계 ( 연방제 ) 제3단계 ( 완전통일 ) 통합통일방안 2 국가 -2 체제 -2 독립정부 2 국가 -2 체제 -2 독립정부 (1 국가연합지향 ) 1 국가 -2 체제 -2 독립정부 비고 제 1 단계 제 2-1 단계북한의통일단계 1 국가 -1 체제 -2 독립정부실질적통일단계 1 국가 -1 체제 -1 독립정부 181
표를보아도알수있듯이, 6.15 남북공동선언 의제2항의의미는남쪽의남북연합제의제1단계 (1국가연합지향 ) 의내용을북쪽이수용하여신뢰와교류를통해일단낮은단계의연방제를거쳐실질적인통일단계인제2단계로나아갈수있다는것을남북정상이합의한것이라고해석할수있다. 그렇다면결국중요한단계는제1단계인남북연합단계인데, 남북연합은말그대로두국가간의연합이다. 이념과체제를달리하는두국가간의협력관계를제도화한다는것이다. 반세기이상이념과체제를달리해온남북이하루아침에평화통일을이룩한다는것은현실적으로불가능하다. 결국단계적이고점진적으로이룩해나갈수밖에없다. 남북이서로인정하고존중해가는가운데, 전쟁방지조치를취하고민족경제의통일적이고균형적인발전을이룩하는한편, 민족동질성을회복해가는등어려운과제들을하나씩풀어나가야한다. 이러한어려운일들은남북이긴밀한협력구조를유지하며함께노력할때에해결해나갈수있다. 또한남북연합은분단상황을평화적으로관리하는한편민족통일과정을효율적으로관리하기위하여제도화하는남북의협력기구라는성격을갖는다. 그것은남북간의평화공존이며평화교류를통해평화통일을지향하는협력기구이다. 따라서남북연합은통일의한형태라기보다는남북이협력하여통일을준비하는단계를의미한다. 정치적통일에앞서남북이서로오가고, 돕고나누는 사실상의통일상황 을구현하는단계라고말할수있다. 남북이합의하는 남북연합헌장 에따라남북통합과정을관리하게될협력기구인남북연합은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남북정상회의 아래대의기구적성격을갖는 남북연합회의 와집행기구적성격의 남북각료회의 를둔다. 정기적으로회동하는 남북정상회의 에서는남북관계를통일지향적으로발전시키기위한주요현안문제에대한정치적결정을내린다. 남북연합회의 는남북의정상이추천한동수대표로구성하며, 이회의에서는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이라는 3대행동강령을구현하기위해협의하며모든의결은만장일치제로이루어진다. 여기에서이루어진결의는 남북정상회의 에건의된다. 남북정상회의 는이를최종결정하여 남북각료회의 에회부하여실천하게한다. 그리고 남북각료회의 는 남북정상회의 에서회부된안건을정책화하고집행하게된다. 남북연합의후기단계에서 남북연합회의 는통일헌법의제정과이에부수한법률을제정할수도있다. 5. 남북연합의과제 남북연합을통해달성해야할핵심적인과업을몇가지로요약하면다음과같다. 1) 남북의화해협력을통해정치적신뢰를구축하는것이다. 상호체제의인정과존중, 그리고상호비방과중상의금지는물론일체의파괴행동이나내정간섭과같은행위를하지않음으로써남북의상호신뢰를구축해나가는정치적노력을경주해야한다. 2) 군비통제를통해남북한의축소지향적군사력균형을달성하고평화공존의기틀을다 182
지는것이다. 한반도의평화공존을위해군사적신뢰를구축하는한편군비감축을통해군사력균형을이룩하는등튼튼한평화체제를마련하는구체적인방안들이실현되어야한다. 3) 민족경제공동체를건설함으로써민족경제의통일적이며균형적발전과민족복리증진을위해노력하는것이다. 북한의개방과경제개혁을지원하기위해다양한형태의경제교류협력이활성화되어야한다. 이러한교류는어디까지나남북간의대등한상호존중의원칙에서진행되어야한다. 4) 민족적일체감을조성하기위해남북간에사회적, 문화적교류협력을활성화하는것이다. 우리민족은분단반세기를제외하고는수천년동안민족적일체감을유지해왔다. 따라서민족의전통을계승하면서남북의이질감을해소하기위한활발한남북교류협력이매우중요하다. 5) 통일에대비하여남북이반통일적인법규를정비하는한편, 남북이공동으로적용할수있는법규를새로제정하여시행하는것이다. 진정한평화통일의길은남북한스스로가통일에대비하여법률적제도적으로미비한점을하나하나보완해나가야한다. 6) 평화통일에유리한국제환경을조성하는것이다. 통일은우리민족스스로의자주적인역량으로추진해가지만, 이를더욱촉진시키고바람직한통일환경을조성하기위해서는반드시국제적협력이필요하다. 남북은세계의 4대강국에둘러싸여있기때문에평화통일에유리한국제환경을조성하기위하여주변강대국들과통일외교를강화하는것이매우중요하다. 6. 평화통일의방향성 엄밀히말해서 6.15 남북공동선언 은새로운시대를여는초석을마련했다는것에불과하다. 남북간합의는자그마한사건에도깨지기쉬운유리그릇과도같다. 한반도는아직도휴전상태에있으며언제라도국내외적분쟁에말려들위험성이높은지역이다. 또한민족의분단을근거로기득권을유지해온세력도엄연히존재하고있다. 따라서우리들에게는민족의화해와통일의분위기를소중히발전시켜나가는노력과지혜가요구된다. 우선남북간에위기를관리할수있는상설적대화채널체제를구축해야한다. 그리고주변강대국의협조를얻기위한거국적외교력이절대적으로필요하다. 문제해결의당사자는물론남북이되어야하나, 분단의원인을제공하고정전체제를유지해온또다른주체인주변강대국과의유기적협력이필수적인것이한반도의개관적현실인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을통한한반도의상황변화에가장민감할수밖에없는나라는미국이다. 미국은한반도문제를주도적으로이끌어온핵심세력인데다한반도에대한그들의관심및이해관계가다른나라에비할바가아니다. 특히북한의핵문제와주한미군문제등은미국의국지적인외교현안이아닌바로세계전략차원의문제들인것이다. 중국은 183
현재세계최고의경제성장국가이며과거제국주의세력에의해침탈당한치욕의역사를복원하려는 중화민족주의 가발흥하고있다. 그단적인예가바로역사왜곡이다. 또한일본이나러시아역시호시탐탐 과거의영광 을되찾으려고여러방면에서끊임없이시도하고있다. 즉우리민족은과거역사와같이현재도주변강대국들사이에끼어민족의이익이유린당하고있는상황에놓여있는것이다. 독일은 1970년동서독정상회담이후통일까지는 20년이란긴세월이걸렸다. 통일이달성된것은정상회담을통한긴장완화와더불어운명을스스로결정하고분단을극복하려는동서독주민들의의지와독일통일을현실로받아들이는국제적여건의변화및인접국의태도변화가결정적요소였다는것을주목할필요가있다. 우리들이민족의화해와협력, 그리고평화공존을바탕으로민족통일이라는과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 6.15 남북공동선언 의내용과그정신을존중하고현실속에서가능한일들을실천해나가야한다. 정부는열정을가지고북한과의관계개선에초점을맞추면서민간차원의교류협력에대한지원을아끼지말아야하며, 정치권은초당적입장에서남북화해의분위기를성숙시키는노력을해야한다. 이제우리들은보수와진보를초월해민족화합을위한조직적운동을전개해나가야한다. 지금가장시급한것은평화협정을통해남북평화공존체제를구축하여민관차원의경제적, 사회적, 문화적교류를활성화시키는것이다. 냉전시대의논리는이제통용되지않는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등한반도주변국들은현재자국의이익을위해백병전을치르고있다. 마치 19세기말상황과유사하다. 불행한고통의역사는반복되어서는안된다. 민족의통일을실천해가는과정에서우리들은생명과평화의한반도질서를구축해야한다. 언제까지우리민족은남과북으로분열되어민족역량을소모해야한단말인가. 그러나아직도한국사회는진보와보수, 좌파와우파등의이념논쟁의수렁에서헤어나오지못하고있다. 이런의미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의내용과정신은냉혹한국제현실속에서우리민족이실천해가야하는좌표를제시하고있다고하겠다. 시장의논리와민족공동체논리를변증법적으로종합하여남북이경제적공영을모색함으로써평화통일의길을열어나가야한다. 자주적인남북교류사업특히개성공단사업의중요성이바로여기에있다. 7. 나가는말 2004년 10월제주도에서해외에서활동하고있는동포기업인들의네트워크인 세계한상 ( 韓商 ) 대회 ( 제3차 ) 가열렸다. 이대회에참가하기에앞서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OKTA) 소속기업인들이 21일부터 25일까지평양을방문하여북한대외무역위원회와공동주최로무역상담회를열었다. 북한당국은이들을위해평양에서중국심양까지고려항공전세기를보내주고, 정부고위층이직접나와해외동포들이투자할경우개성공단에근무하게될북한노동자의최 184
저임금을월 80달러선에서 30유로 ( 약 37달러 ) 선으로대폭낮추겠다고발표했다. 뿐만아니라각종세제혜택과전기 물사용료할인, 나아가경제특구뿐아니라여타지역에서도단독기업과은행설립을허용하고광산개발권까지줄수있다고설명했다. 최저임금 30유로는중국 57달러를비롯해인도 55달러, 필리핀 98달러등동남아시아국가들보다낮고개성공단과금강산관광특구의최저임금인 50달러보다도낮은수준이다. 이러한해외동포경제인에대한파격적인투자특혜의의미를우리들은주의깊게생각해보아야한다. 나진 선봉지역과신의주개방정책의실패로어려움을겪고있었던북한당국이군사적요충지대인개성지역을과감히개방했다는사실에서도북한당국의개방정책의지를엿볼수있지만, 해외동포들에대한파격적조치는기존의조심스런개방정책행보에서벗어나보다적극적인대외경제협력활성화를본격적으로추구하고있음을말해준다. 북한은 2002년 7 1경제관리개선조치를통해시장경제의특성을도입하는등내부경제시스템의변화를시도했지만, 외부자금을조달하지못해어려움을겪어온것도사실이다. 이번해외동포경제인에대한파격적인특혜는개성공단을통한남북교류가 외적 조건에의해어려움을겪게되자이를전세계해외동포를포함한민족전체의자주적협력을통해돌파하려는북한당국의강한의지의표현이며, 이것은한반도의평화와통일을생각할때매우의미심장한사건으로해석되어야할것이다. 특히은행설립과광물채굴허용등은과거에는상상도못할파격적인조치인데, 이것은 이번설명회를앞두고동포들에게어떤특혜를주고우대할것인가에대해검토하라는국가의지시가있어대책을취한것 이라는북한당국최고위층의설명에서도잘드러나며, 동시에 해외조선인무역인들에대한선물 이라고표현하는등극진하게예우했다는참가자들의전언에서도확인된다. 이런기회를이용하여우리민족은서로협력하면서북한의개방정책을돕고한반도의평화와통일의상황을적극적으로만들어가야한다. 이를위해서는먼저한반도정세변화를사실적이며실사구시적으로정확히인식하고, 분단시대의이데올로기적발상에서벗어나통일시대를위한역사인식을가져야한다. 평화통일은대화와협상을통해서만가능하며, 대화와협상을위해서는먼저상대를인정해야한다. 상대를인정하지않고대화와협상은있을수없다. 이것은서로의모순을인정한다는것이아니다. 분단이라는민족적모순을해결하기위한출발선상에서의문제인것이다. 서로의모순은분단모순을해결해가는과정에서극복해가야한다. 따라서우리들은우선 6.15 남북공동선언 의정신과그내용을존중하고현실속에서가능한일들을실천해나가야한다. 남북간군사적신뢰를중심으로평화공존체제를구축해야하며경제적, 사회적, 문화적교류를획기적으로확대해야한다. 또한정부는주변강대국들의협조를얻어내기위한거국적외교를펼쳐나가야하며, 정치권은초당적입장에서남북화해의분위기를조성하는데노력해야한다. 여기에는보수와진보의구별은있을수없다. 19세기의쓰라린민족적경험을반복해서는안된다. 생명과평화 의논리로 21세기민족의역사를우리들스스로개척해가야한다. 문제해결을위해우리들에게주어진시간은어쩌면우리들이생각하고있는시간보다훨씬짧을수도있다는사실을염두에둘필요가있다. 미국과중국의대립을축으로한 185
신냉전체제 가확립되기전에남북문제가획기적으로개선되고기정사실화되어있어야한다. 미국과중국의대립이본격화된다면, 역사적으로나현실적으로북한은중국측에, 한국은미국측에설수밖에없는상황이전개될것이고, 이로인해우리민족은또다시외세의논리속에서참담한상황적굴레속에매몰될수도있다. 이제우리민족은민족통일전선의구축을통한조국의해방이라는독립정신의역사적유산과과제를계승해 생명과평화의논리 로 21세기에는남북통일과더불어동북아평화의주체가되어야한다. 186
2000 년대흥사단에서는 2001. 3 흥사단본부산하중앙수련원개원예비단우교육훈련및아카데미지도자양성과단우동맹수련강화를위하여조직을갖추고새롭게개원 운영 2001. 5 흥사단투명사회운동본부설립반부패투명사회건설을위한법 제도개혁및생활개혁, 민주시민교육등시민운동을전개하기위한목적으로설립 2002.10 흥사단교육운동본부설립건전한청소년육성과바른교육을위한정책개발과사회여론의환기및교육실천사업을추진함을목적으로설립 2003. 5 창립 90 주년기념행사및 흥사단비전 2013 선포도산공원에새로운도산동상의제막식과아울러학술대회를열고, 이어세종문화회관에서창립 90 주년행사를갖고 흥사단비전 2013 을선포 2005. 7 독립유공자후손돕기운동선포광복 60 주년을맞아조국과민족의독립을위해헌신한독립유공자의후손들을후원하기위한운동을선포. 이후 2007 년 7 월운동본부를설립하여장학금지급, 수련회개최, 제도개선방안연구등의활동을전개 2007. 4 북한나무심기운동단체인 겨레의숲 창립북한산림복구, 식량 식수 에너지난극복, 남북간협력사업모범사례창출을위해창립 2008.10 미래사회리더스쿨운영대학생을대상으로올바른가치관과역사의식, 국가와사회의발전에이바지청년인재를양성하고자실시. 2010 년현재 6 개지부에서운영 2009. 5 흥사단창립 100 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발족창립이후 100 년간의활동을객관적으로평가하고, 향후 100 년활동의비전을수립하기위해발족. 4 개의분과위원회 ( 기획위원회, 비전위원회, 100 년사위원회, 사업위원회 ) 를구성하여활동 새로운인재양성프로젝트인 흥사단미래사회리더스쿨 (2009 년 )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