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예술담론계간지 2013 여름
목차 contents 002 특집을 준비하며 004 대구오페라하우스, 그 출발점에 대한 기억 006 대구오페라하우스 10년간의 기록 014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년 여정 고찰 020 창작오페라의 가능성과 대중화 방안 연구 028 해외 오페라축제의 사례 연구 050 미술_이경희 李景熙 화백 058 사진_최계복의 영선못의 봄 066 음악_우리 음악과 퓨전, 어떻게 할 것인가 076 연극_ 벚꽃동산 이 아니고 벚나무 동산 을 선택하다 088 무용_대구시립무용단 달구벌 블루스 - 사랑했지만 096 대중문화_노래의 길을 하늘로 낸 김광석, 그의 길을 묻다 104 인터뷰_골목 & 자유를 만나다 116 삼덕동 거버넌스형 마을 만들기 그 8년의 기록 시_시가 있는 풍경 - 박소유 144 칼럼_대구에서 사람 만나는 여행을 시작하다 - 박성익 146 칼럼_손태룡의 음악상자 -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음악회장 154 신간_대구 예술인의 신간 2권 162 문화공감 128 문화이슈 대구오페라하우스 대구, 지금 여기_거리예술의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 사람들 044 비평 & 리뷰 034 대구 오페라의 발전 방향 대구예술의 힘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년 소고 기획특집 대구오페라하우스 개관 10주년 캐리커처 에세이_작곡가 현제명
2 작곡가, 성악가 현제명 1902 ~ 1960 캐리커처에세이대구예술인을찾아서글 _ 엄정행성악가캐리커처 _ 권기철화가 우리가곡은기독교와더불어찬송가와함께서양음악 곡사에길이남을만한작곡가들이있지만그들가운데서도 이움트는역사적기점이되었다. 현제명玄濟明. 1902~1960 선생은잊어서는안될인물이다. 그간숱한작곡가들에의해우리가곡이작곡되어우리민족역사와더불어당당하게이어져왔다. 한국가곡사가바로우리민족역사라할만큼역경과고난속에서도우리가곡은우리정서생활과벗으로서우리생활속에스며들어지금까지애창되어왔다. 작곡가이자성악가테너이기도한현석玄石현제명선생은대구에서태어나계성학교를거쳐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입학, 선교사들에의한음악교육에감화를받고음악을시작하여피아노ㆍ바이올린을배우며합창단에들어가테너로서각광을받았다. 1923년졸업후전주신흥학교 新興學校에서교편을잡다가도미渡美, 1928 년시카고음악학 우리의찬란한문화와역사속에서꽃을피운우리가 교에서석사학위를받고연희전문학교음악부주임이되어
3 음악연주회ㆍ남녀중학음악콩쿠르대회ㆍ하기夏期음악 강습회등을열어음악보급에힘썼다. 작곡가현제명 현제명선생의가곡은거의가밝고명랑하고경쾌하다. 그의초기작품에는독창적인색깔을정리하려는듯많은고심의흔적이뚜렷하다. 반주의흐름이순수하고깔끔하게예술성을지향하는작품이라고볼때더욱더알차고빈틈이없다고볼수있다. 필자를비롯해많은성악가들이애창한가곡 고향생 각 은미국유학시절고향의향수를그리며즉흥적으로작 시, 작곡한작품이다. 또한우리들이너무나사랑하고애창한영원불멸의가곡 산들바람 은필자도 CD 제작을했지만너무나벅찬감동을주는가곡이다. 반주와선율을보면눈물어린알페지오반주의흐름, 애수에젖은듯흐르는멜로디, 우리가곡의백미라고할수있다. 뛰어난천재지만, 친일 행적으로많은비판을받기도했다. 1937년 5월조선총독부학무국이주도한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회원으로가입하였는데여기에는일본과조선의문예인 30여명이활동하였다. 그해 6월에발생한독립계몽운동단체인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체포되었다가이를계기로친일단체인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가입한것은참으로안타까운일이다. 필자는올해 2013년윤동주시인의예술상을수상했다. 한평생노래와함께해온성악가이지만가슴이뭉클할정도로감동적인일이었다. 가곡은이처럼가슴을울리는노랫말과함께우리정서를잘어루만지는멜로디로오랫동안사랑을받아온장르다. 후학을위해경성음악전문학교를창설하고교육에심혈을기울여준현제명선생과같은분이계셨기에가능한일이었다. 현제명선생의가곡을부르면항상그시대의아픔과사랑이뭉클하게가슴을채워온다. 필자가 고향생각 을즐겨부르는이유이기도하다.
4 기획특집 대구오페라하우스 개관 10주년 개관 10주년을 맞은 대구오페라하우스 그 출발점에 대한 기억 _ 김완준 계명대 성악과 교수, 계명아트센터 관장 대구오페라하우스 10년간의 기록 _ 김아미 대구오페라하우스 공연기획 담당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 10년 여정 고찰 공연 작품들을 중심으로 _ 진규영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창작오페라의 가능성과 대중화 방안 연구 _ 진영민 경북대학교 음악학과 교수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 10년 소고 _ 윤성도 계명대 의대 석좌 교수, 오페라 칼럼리스트 대구 오페라의 발전 방향 _ 배선주 대구보건대학 인당아트홀 관장, 전 수성아트피아 관장 해외 오페라축제의 사례 연구 _ 김성빈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조직위 집행위원장
5 특집을준비하며 이태현 대구문화재단사무처장 600년이라는길지않은역사를가진오페라는관객의눈높이에영합하기보다도도하게그품위를유지해왔다. 오페라는인간의지성과감성이녹아있는최고의예술로서높은음악적소양과안목을요구하며그러한이유로때로는사치스러워보이기도한다. 성과를만들었다. 올해는발전적인조직운영의새로운대안인오페라재단설립을목전에두고있다. 타도시와의경쟁구도가가시화되는현실에서과연대구가 오페라도시 로서의면모를유지할수있을까하는우려가있는데이는대구예술인들의열정으로풀어가야하는과제일것이다. 10년전인 2003년 8월대구오페라하우스가개관하였다. 당시언론에서는 대구를오페라메카로만들자, 국제오페라축제를열어대구의문화적역량을과시하고대구의위상을높이자 는논조의보도들이줄을이었다. 그러한보도들은오페라하우스가문화예술도시로도약하는디딤돌이되기를바라는시민들과음악인들의바람이담긴것이었다. 이제오페라의대중화를고민할때이고수준높은작품으로오페라의격을유지하는것이더욱중요한때이다. 오페라는고매하고전통성을바탕으로청중을압도하는품격이매력이다. 청중의수준을높여야오페라는성공한다. 품격있는도시대구 의이미지를오페라에담아창작오페라의생산도시로의브랜드가치를추구할때이다. 지금까지우리나라는서울을제외하면오페라를활성화시키기위한여건을갖춘도시가그리많지않았다. 반면대구는일찍부터오페라단의활동이왕성했고매년성악전공자가많이배출되었으며다양한장르의예술인층이많다는장점이있었다. 오페라하우스개관에이은국제오페라축제의시작은이에기반을둔것이었다. 오페라조직위와오페라하우스는그동안많은 대문은 2013년여름호특집으로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주년 을담았다. 예술의가치는만들어지는것이다. 시간이필요하고인내가필요하다. 우리의창작오페라가전세계오페라무대에서대구브랜드로각광받을때까지창작자들의고충에격려와힘을줄수있는성숙한환경을만들어가야한다. 오페라가시민들에게즐거움이되는날을기대하며먼미래를설계하는새로운중장기발전계획이필요할때다.
6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개관 10 주년을맞은대구오페라하우스 그출발점에대한기억 김완준 계명대성악과교수, 계명아트센터관장 근자에도시의브랜드가치에대한논의가있을때마다그도시의문화예술수준을함께이야기하는것이상례로되어있다. 판단의기준은여러가지이다. 어떤예술인이배출되었고, 예술단체의활동이어느정도로활발하며, 예술교육기관의규모가어떠한지, 수준높은공연장이나전시시설이있는지, 시민의예술향유활동은월평균몇회나되는지. 필자는문화예술수준을고려한우리도시의브랜드가치를따질때,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전과개관후로확연히구분할수있다는입장이다. 2003년 8월,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에즈음한기억이 10 년이되도록전혀퇴색하지않은중에, 전문오페라극장의유무가우리도시와, 우리지역민에게어떤의미가있는지되짚어보고자한다. 대구오페라의역사와배경 일제강점기부터한국서양음악이싹트고뿌리내린곳이우리대구이다. 박태준, 현제명, 하대응, 김진균등그이름만으로한국음악의역사가되는지역출신의걸출한작곡가들이이시기에왕성한창작활동을하였다. 또한 6.25전쟁을기점으로우리지역은한국문화예술의중심으로성장하였다. 1952년효성여자대학교, 1959년계명대학교, 1969년영남대학교의순으로음악과가신설되면서전문적인음악교육을받은음악인들이배출되기시작하였고음악인구의밀도가높아지면서음악예술경쟁력이강해지는요인이되었다. 1960년 ~80년대는대구음악이질적으로, 또한양적으로확연히성장하였으며, 특히다양한
7 대구시립오페라단이제작한오페라는지역의수준을뛰어넘는작품이라는평가를받았고대구가오페라의중심도시로성장하는기반이되었다... 오페라작품들이제작되고공연되었다. 이시기에는민간오페라단도점차늘어나 1990년대에는대구오페라단, 계명오페라단, 영남오페라단등한국에서도손꼽히는민간오페라단의활동이눈부시게이어졌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의창단과활동 1991년필자가대구음악협회장을맡아지역음악의발전방향을모색하던중음악공연예술의집대성이라불리는오페라를중심으로새로운발전방향을제시하게되었다. 오페라는음악뿐아니라미술, 건축, 디자인, 연극, 의상디자인등예술의각분야가하나로결집된, 문자그대로종합예술이므로관련되는각분야의문화예술계인사들을만나시립오페라단창단의타당성을설명하고, 각당사자의의견을수렴하였다. 1년여동안설득하고준비한결과로 1992년마침내전국최초의시립오페라단이탄생하였다. 당시만해도오페라는민간오페라단의주도로제작되는것이일반적이었다. 또한문화예술활동에대한공공기금의조성과지원이미비하던시기이기 도하였으므로, 지방의민간오페라단이제작한오페라의경우대개영세성을벗어나기어려운수준이었다. 그러나시립오페라단의출범으로안정적인예산집행이가능해졌으며, 공연물의제작에있어절대적으로필요한사전기획을할수있었고, 또한조직의전문성을꾀할수있었으므로전문가로구성된제작진을확보하고효율적인오페라제작에역량을집중할수있었다. 이러한결과로대구시립오페라단이제작한오페라는지역의수준을뛰어넘는작품이라는평가를받았고대구가오페라의중심도시로성장하는기반이되었다. 삼성과대구오페라하우스대구에서출발하여세계적인기업으로성장한삼성그룹이당시문희갑대구광역시장의지역문화발전정책지원요청에동의하여박물관혹은도서관을기부하기로한바있었다. 그러나전국대도시어디에나있었던박물관과도서관은대구를대표하는문화예술랜드마크역할을하기에는부족한부분이있다는의견이대두되었다. 한편, 우리대구는전국최고의음악교육도시로서인정받고있었으나제대
8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대구오페라하우스외관 대구의새로운랜드마크로부상한오페라하우스의개관으로공단지역이문화예술지역으로획기적인이미지변화를이루었다.. 로된전문공연장이없어지역음악인들의아쉬움이컸던시점이었다. 또한시립오페라단의활발한활동의결과로명실상부한오페라도시로부쩍성장하던중이었으므로대구에단일공연장으로는전국유일의오페라전용극장인오페라하우스를건립하는것이여러가지면에서효과적이라고문희갑전시장이판단하게되었다. 이에문희갑시장과필자는삼성그룹관계자들을설득하기시작하였고, 마침내지역최초의오페라전용공연장이대구에들어서게된것이다. 북구칠성동의제일모직부지를활용하기로결정한후애초에 1,000석으로예정되어있던건립규모를향후활용도를고려하여 1,500석으로늘렸으나당시의사정상연면적의추가확보가불가하여로비및부대공간의면적이줄어든것은지금까지도아쉬운부분이다. 대구오페라하우스의개관 8년간의준비끝에 2003년 8월 7일개관한대구오페라하우스는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축하공연을겸하여개관기념공연으로창작오페라 목화 를제작, 성공적으로무대에올렸다. 매회관객
그출발점에대한기억 9 2003 목화 들이객석을가득메웠고, 오페라하우스라는새로운공연장에대한기대를여지없이드러냈다. 초대관장이라는중책을맡게된필자로서는실로어깨가무겁기만하였다. 대구오페라하우스주변은오랜기간동안공단부지로활용되었기에문화적으로낙후된지역이었으며생활환경이썩좋지못하였다. 그러나대구의새로운랜드마크로부상한오페라하우스의개관으로말미암아공단지역에서문화예술지역으로의획기적인이미지변화가이루어졌다. 필자가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전부터지속적으로주장해온계획이있었는데, 바로대구오페라하우스를중심으로한공연예술중심클러스터구축과주변환경개선사업이었다. 내용을간단히전하면, 현재대구오페라하우스의야외주차장으로사용되고있는주차장부지에오페라세트제작소와보관소, 전문콘서트홀을건립하여다양한형태의공연예술작품을한곳에서제작, 공연할수있는문화예술중심지역으로성장시키고이를통해주변환경개선을도모한다는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긴시간에걸친설득과홍보에도불구하고여러가지이유로현실화되지못해무척아쉽다. 대구오페라하우스조직개관초기대구오페라하우스는공연예술전문가가없는행정조직이었다. 다른공연장과달리종합공연인오페라를주기적으로제작해야하는것이오페라하우스이므로, 무엇보다오페라제작이가능한전문가가절대적으로필요한조직이라하겠다. 단일공연장으로서는전국최초, 유일의오페라전문공연장이었던대구오페라하우스에오페라제작경험과능력이있는공무원이있을리가없었다. 해외오페라하우스의경우를예로들면, 행정책임자인관장과기획, 제작책임자인예술총감독체제로행정과예술이양분화되어있다. 그리고기획, 홍보, 마케팅등오페라기획전문인력과성악가,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등공연전문인력, 무대세트제작자, 의상제작자, 분장사등제작전문인력이모두한지붕아래에있는시스템이일반적이다. 이러한전문인력들을기초로했을때, 하나의조직이제대로된오페라제작시스템을보유할수있고, 나아가제대로된제작시스템에서훌륭한작품이나오기마련이다. 필자는대구오페라하우스초대관장으로부임후수많은고민과노력을하였으나인력과예산의
10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2004 년제 2 회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는이탈리아의로마극장과러시아의무소르그스키오페라단이참여하여국제오페라축제의모습을갖출수있었다.. 부족으로오페라제작시스템구축에어려움이많았다. 장고끝에필자가 1992년부터예술감독으로재직했던대구시립오페라단의시스템을활용하고자하였으나행정조직간의융합이생각처럼쉽게되지않아이마저도여의치않았다. 오페라를위한전용공연장이만들어졌으니대구시립오페라단의대구오페라하우스이전이당연한수순이었으나이런저런이해관계가얽혀풀어나가기힘든상황이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조직위원회의출범 오페라작품을무대에올리기위해서는기획, 제작, 공연, 정산에이르기까지오페라장르전반에대해이해하고있는전문인력이상당히많이필요하다. 초기대구오페라하우스의인력구조를봤을때, 행정과인사관리, 건물관리등하드웨어의운영과관리에필요한인력만확보되어있었으므로자체적으로오페라를만들어낼수있는시스템이전무한상태였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의시스템을통합하여운영하는방법도여의치않은상황에서생각해낸방법이전문조직의구성을통한오페라의제작과오페라축제의운영이었다.
그출발점에대한기억 11 대구오페라하우스 그리하여문화계, 재계, 정계, 학계, 언론계인사들의의견을수렴하여대구국제오페라축제조직위원회를구성하였으며발기인대회를거쳐출범하였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조직위원회산하사무국이오페라의기획, 홍보, 마케팅기능을수행할수있도록전문인력을확보함으로써비로소대구오페라하우스의오페라제작기능이활성화되는계기를마련할수있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시작과발전자칫하면오페라를제작, 공연하지못하는오페라전용공연장이될수있는상황에서마지막방법으로선택한것이오페라축제의개최였다. 국 공립오페라단의책임자들을만나취지를전달하고설득한끝에필요한도움을이끌어낼수있었다. 당시세종문화회관김신환사장, 국립오페라단의정은숙단장, 서울시오페라단신경욱단장이뜻을모아어려운상황에서도축제에참여할뜻을밝혀주었고, 우리나라의오페라를대표하는양대단체의참여로대구오페라축제를기획할수있었다. 2003년 10월 6일제1회대구오페라축제를개막하여국립오페라단의 사랑의묘약, 영남오페라단의 나비부인, 대구시립오페라단의 토스카, 서울시오페라단의 심청 을공연함으로써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초석을다졌다. 600년이상의역사를자랑하는오페라는유럽의문화예술이다. 세계인의사랑을받는오페라는여러나라의문화와예술적특성에따라분화되고특화되었다. 우리손으로만든, 우리의오페라가세계로진출할수있는발판을마련하고동시에오랜역사를자랑하는뛰어난오페라를우리나라에소개함으로써우리오페라의경쟁력을높이고자마침내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시작하였다. 오페라는많은인력과예산, 시간이투자되어야하는대형공연물이므로외국작품의참여를유도하고국제규모에맞는축제를만들기위해극복해야할문제점이상당히많았다. 언제나가장큰걸림돌은부족한예산문제이다. 또한우리의 1년을주기로움직이는행정시스템으로인해외국오페라를초청하는것이불가능하다시피하였다. 그러나필자는대구시립오페라단예술감독으로있을때부터오랜시간교류해왔던해외공연단체들에게취지를설명
12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무슨일이든두해, 세해만에큰성과를거둘수는없다. 세계최고수준의오케스트라며오페라단, 그리고공연장은훌륭한지도자와장기적인안목의운영활동, 전체구성원의신뢰와노력이함께했을때에만이루어질수있는것임을알수있다.. 하고설득을거듭하였다. 그결과, 2004년제2회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는이탈리아의로마극장과러시아의무소르그스키오페라단이참여하여국제오페라축제의모습을갖출수있었다. 이후대구를대표하는문화상품, 한국최고의오페라축제, 세계인이주목하는오페라페스티벌을목표로최선을다하여한발한발앞으로나아갔다. 반갑지않은손님처럼어김없이찾아오는여러가지걸림돌들 - 예산부족, 작품제작시스템과엇박자인행정시스템, 인력부족 - 을넘어가기위해서는발품을팔고, 시간을들이고공을들여설득하는방법밖에없었다. 이탈리아, 독일을비롯한서유럽과동유럽여러나라의공연장관계자들을만나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알리고축제참가, 공동제작등협력방안을논의하였다. 이러한노력의결실로이탈리아의살레르노국립극장과독일의칼스루에국립극장과자매결연을맺게되어교류협력이현실화되었고관계가더욱발전하여지금까지좋은결과를만들어내고있어더없이기쁘게생각한다.
그출발점에대한기억 13 대구오페라하우스외관 대구오페라하우스의 10년, 그리고새로운출발점오페라는클래식음악장르중가장규모가크다. 관련되는수많은전문가들이자기의분야에서최선을다해야한작품을무대에올릴수있다. 이렇듯오페라는제작하기어렵고그만큼접하기도쉽지않다. 한작품을만들더라도최선을다해제대로만들겠다는장인정신이좋은오페라를만드는밑거름이다. 잘만들어진좋은오페라가주는뜨거운감동이곧 600년동안한결같이사랑을받아온이유라고하겠다. 무슨일이든두해, 세해만에큰성과를거둘수는없다. 베를린필하모닉과 35년을함께한카라얀, 1986년부터 19년동안라스칼라극장의음악감독을역임하였던리카르도무티, 1971년부터지금까지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을지켜온제임스레바인을떠올리면, 세계최고수준의오케스트라며오페라단, 그리고공연장은훌륭한지도자와장기적인안목의운영활동, 전체구성원의신뢰와노력이함께했을때에만이루어질수있는것임을알수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와대구국제오페라축제역시이와같은토대위에서아름답게성장할수있기를기대한다.
14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대구오페라하우스 1 0 년 간 의 기 록 김아미 대구오페라하우스공연기획담당 건립개요대구오페라하우스는 1996년 6월제일모직이대구사업장을구미로이전할당시, 삼성그룹의발원지이기도한이곳제일모직터에시민을위한문화공간건립을결정하면서만들어지게되었다. 2000년 11월첫삽을뜨고, 이후총 440여억원의예산을출연해 2 년 9개월만에완공된대구오페라하우스는단일공연장으로는국내최초의오페라전문극장이면서기업메세나활동의모법적인사례로기록되고있다. 1997. 5. 22 : 오페라하우스건립계획발표제일모직 2000. 11. 17 : 대구오페라하우스건립공사착공 2003. 6. 10 : 대구오페라하우스운영직제의회승인및공포 2003. 7. 2 1 : 대구오페라하우스운영조례공포 2003. 8. 5 : 대구오페라하우스준공 2003. 8. 7 : 개관및개관공연 2003. 9. 29 : 기부채납제일모직 대구시 2004. 12. 30 : 대구오페라하우스운영조례개정
15 대구오페라하우스 건축개요 시설개요 대구오페라하우스는총 2,620 평의부지에지하 2 층, 지상 4 층으로지어진건물로유려한곡선미의 그랜드피아노를형상화했다. 내부가훤히들여다보 이도록경쾌한유리재질로외관을처리하여공연장 에대한시민들의거리감을대폭줄임과동시에외 적아름다움을배가시켰다. 위치 : 대구광역시북구호암로 15칠성동 2가 115-5 대지면적 : 8,659.42 m2 2,619.47 평 규모 : 지하 2층, 지상 4층건물높이 : 34.1m 건축면적 : 4,705.96 m2 1,423.55 평 연면적 : 17,189.28 m2 5,199.76 평 건패율 : 54.35% 용적율 : 104.54% 사업비 : 440억원부지130, 건축310 공사기간 : 2000. 11 ~ 2003. 7 구조 : 철근콘크리트구조, 철골트러스구조 외장마감 : 알루미늄패널, 외단열시스템, 커튼월, C-76 컬러강판 층별시설 층별용도면적 지하 2 층 지하 1 층 지상 1 층 지상 2 층 지상 3 층 지상 4 층 계 객석 층별 1 층 주차장, 무대기계실, 기계실 분장실, 연습실, 관혁악단실, 무대계원실, 휴게실주차장, 전기실, 발전기실, 공조실 무대, 객석, 로비, 카페, 분장실, 조정실, 하역장, 방재실, 창고 객석홀, 판매시설, 사무실, 영사실, 오페라단실 객석홀, 연습실, 공조실, 방송실 객석홀, 공조실, 음향기기실 객석수 2,964.20 m2 (896.67 평 ) 5,172.82 m2 (1,564.78 평 ) 4,240.14 m2 (1,282.64 평 ) 1,757.78 m2 (531.78 평 ) 1,686.61 m2 (510.20 평 ) 1,367.73 m2 (413.74 평 ) 17,189.28 m2 (5,199.76 평 ) 789 ( 오케스트라피트가변석 83 포함 ) 2 층 216 3 층 212 4 층 291 계 1,508
16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좌석배치도무대에서본객석 무대 구분 음향시설 넓이 주무대 373.55 m2 (113 평 ) 측면무대 2 개 340.5 m2 2 개 (206 평 ) 후면무대 433.05 m2 (131 평 ) 계 1,485 m2 (450 평 ) 시스템 오디오시스템 (62 종, 316 개 ) 종류 오디오믹서 (56CH/40CH), 멀티및입력박스 (96CH), 스피커 (52 개 30 kw ), 엠프 (31 대 ), 무선마이크 (2 종 24 대 ), 유선마이크 (20 종 90 개 ), 디지털이펙트 (6 대 ), 녹음및재생용데크 (6 종 11 대 ) 등 비디오시스템 (30 종 50 개 ) LCD 프로젝트 (3 대 ), 자막기 (1 대 ), 비디오카메라 (4 대 ), TV 모니터 (30 대 ), 비디오데크 (3 대 ), 콘드롤러 (1 대 ) 등
대구오페라하우스 10 년간의기록 17 국내의풍부한인적 물적자원을기반으로양질의공연을제작, 기획하고있으며 연중수준높은공연으로시민들의문화향유권충족을위해노력하고있다.. 조명시설 조명 종류 하는등연중수준높은공연으로시민들의문화향 유권충족을위해노력하고있다. 콘솔 (4대) 라이트 (811대) 효과기외 (37대) 공연 콘솔 (450CH 2 대 ), 무빙콘솔 (1 대 ), 콘솔 (1536 CH 1 대 ) 롱핀라이트 (3 대 ), 스폿라이트 (2 종 284 대 ), 파라이트 (2 종 228 대 ), 엘립소이달라이트 (5 종 250 대 ), 소프트라이트 (30 대 ), 무빙라이트 (16 대 ) 등 파니 (2 대 ), 블랙라이트 (20 대 ), 드라이아이스 (4 대 ), 연기효과기 (2 대 ), 안개효과기 (2 대 ), 스트로버 (6 대 ), 밀러볼 (1 대 ) 등 2003년개관첫해에 30건 47회공연, 관람인원 58,519명을시작으로매년성장을거듭하여지금까 지 (2012년현재 ) 총 472건, 1,262회의공연이개최 되었고 1,185,516명의관람객이다녀갔다. 연도별공연실적 공연실적 연도 관람객수 건수 회수 2003 30 47 58,519 대구오페라하우스는 2003년 8월 7일창작오페라 목화 로개관한이후, 오페라, 발레, 뮤지컬등극예술중심의특성화된공연으로전문극장으로서의차별화를추구해왔다. 국내의풍부한인적. 물적자원을기반으로양질의공연을제작, 기획하고있으며국내외우수극장및유명축제와의교류를통한오페라활성화를위해첫해부터매년가을, 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개최 2004 67 117 111,191 2005 50 142 146,141 2006 51 151 139,220 2007 43 194 201,042 2008 49 156 129,830 2009 42 123 105,931 2010 45 141 130,532 2011 41 95 84,315 2012 54 95 78,795 계 472 1,262 1,185,516
18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장르별공연실적 연도 공연장르 ( 단위 : 건 ) 오페라음악회무용뮤지컬기타 계 2003 6 15 6 1 2 30 2004 13 30 10 3 11 67 2005 12 29 6 3 0 50 2006 13 26 2 9 1 51 2007 12 18 2 11 0 43 2008 19 12 7 9 2 49 2009 21 8 5 7 1 42 2010 16 15 4 10 0 45 2011 17 12 4 7 1 41 2012 19 19 8 7 1 54 계 148 184 54 67 19 472 백분율 31.4 39.0 11.4 14.2 4.0 100
대구오페라하우스 10 년간의기록 19 기획공연실적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연도 공연장르 ( 단위 : 건 ) 오페라음악회무용 계 연도공연건수관람객수 2003 4 153,923 2003 - - - - 2004 4 6 2 12 2005 6 23 2 31 2006 6 8 2 16 2007 5 14 0 19 2008 14 3 1 18 2009 12 2 1 15 2010 9 1 0 10 2011 11 2 0 13 2012 10 2 1 13 2004 6 20,152 2005 7 14,225 2006 11 17,650 2007 13 21,649 2008 12 23,148 2009 10 20,514 2010 14 25,334 2011 16 33,670 2012 18 32,583 계 111 362,848 계 77 61 9 147 백분율 52.4 41.5 6.1 100
20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년여정고찰 - 공연작품들을중심으로 - 진규영 영남대학교음악대학작곡과교수 2003년, 서울을제외한지방으로서는최초로대구시에오페라전용극장인대구오페라하우스가개관했다. 이와때를같이하여시작된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매년쉬지않고개최하여 2012년의행사로 10 회에이르고있다. 대부분의문화행사들이그러하듯이대구국제오페라축제역시행사가시작되고끝날때마다부족한지원금으로어려움을겪고있다는소문이들리곤했지만, 먼저기획된행사가축소되거나, 다른형태의행사로변경됨이없이꾸준하게유지되어왔다는점에서우선놀라움을금치못한다. 이제는문화도시대구의위상을높여주는공연으로자리매김하면서고급문화를지향하는오페라축제임에도시민들의사랑을듬뿍받는행사로정착하고있다. 이행사를정리하는어떤평론가의글에서는 10년간의누적관중이 35만을넘었다고기록하고있으며, 행사가거듭될수록외국인관중도늘어가고있다는반가운소식을전하고있다. 뿐만아니라공연들의좌석점유율이 84% 라는기록을보면서이제는한단계더나아가이행사를대구시의대표적인행사로고정하고좀더전문적인방향으로상품화에박차를가하면어떨까하는기대감도가져보게된다. 10년역사를가진이대구오페라축제를바라보면서지금까지쉬지않고책임성있게이끌어온여러손길들에게먼저찬사를보내면서, 앞으로의더큰발전을위한과제가무엇인가를생각해야할때라고생각한다. 그중에서도나는그동안공연되었던오페라작품들과공연단체들을중심으로살펴보면서미래를향한이축제의전망을살펴보려한다.
21 2004, ' 프린스이고르 2003, 국립오페라단 사랑의묘약 먼저, 공연되었던주요작품들을연도별로되짚어본다. 2003 년 10 월에개최되었던제 1 회행사에는개막 작품으로국립오페라단이 사랑의묘약 도니제티작곡을 공연했으며, 영남오페라단은 나비부인 푸치니작곡을 대구시립오페라단은 토스카 푸치니작곡를, 서울시립 오페라단은 심청 김동진작곡을공연했다. 2004 년 10 월에개최된제 2 회행사에는해외오 페라단으로는처음으로이탈리아로마오페라단이 초청되어 피가로의결혼 모짜르트작곡을공연했으며, 러시아무소르그스키극장이 프린스이고르 보로딘작 곡을, 국립오페라단이 아이다 베르디작곡를, 구미오페 라단이 토스카 푸치니작곡를, 디오오페라단이창작오 페라 무영탑 이승선작곡을공연했다. 2005 년 9 월에개최된제 3 회행사에는해외합작 오페라공연이기획되었는데, 이탈리아살레르노시 립극장과대구오페라하우스합작으로 리골레토 베 르디작곡가공연되었으며, 체코프라하국립극장이 돈 지오반니 모짜르트작곡, 국립오페라단이 카르멘 비제작 곡을, 대구시립오페라단이 마르타 프리드리히폰플로토작 곡를공연했다. 또한소극장오페라로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 모짜르트작곡, 버섯피자 베레브작곡가공연 되었으며, 국립민속국악원이 춘향전 현제명작곡을 공연했다. 2006 년 8 월부터개최된제 4 회행사에는국채보 상운동 100 주년기념으로위촉작곡된 불의혼 진영 민작곡을공연했으며, 국립오페라단이 투란도트 푸치 니작곡를, 독일칼스루에오페라단과는합작으로 박 쥐 요한스트라우스작곡를, 루마니아부쿠레슈타국립오페 라극장이 일트로바토레 베르디작곡을공연했고, 소극 장오페라로 비밀결혼 치마로자작곡 길 이승선작곡, 내 사랑리타 도니제티작곡, 브루스키노씨 로시니작곡가공 연되었으며, 국립민속국악원이 신판놀음 김선작곡 을공연했다. 2007 년 9~10 월개최된제 5 회행사에는한국이 탈리아일본 3개국합작으로 나비부인 푸치니작곡, 이 탈리아루카극장과일본동경오페라프로덕션을공연했으며, 대구 시립오페라단이 카발레리아루스티카나 마스카니작곡, 불가리아소피아국립오페라극장이 오텔로 베르디작 곡, 국립오페라단이 라트라비아타 베르디작곡를공연 했고, 소극장오페라로 극장지배인 모짜르트작곡, 봄 봄 이건용작곡, 결혼 공석준작곡, 그두가지이야기 파시 티에리작곡를공연했다. 제 2 회에위촉했던창작오페 라 무영탑 이승선작곡이재연되었으며, <Tradition of
22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그동안조직위원장이네번이나바뀌었고, 집행위원장도네번이나바뀌었다. 그러한데도, 제1회부터 10회에이르기까지행사의진행방향은일정하다는데또한번놀라움을금할수없다.. Asia> 라는제목으로한국영남판소리보존회, 중국상해경극 원, 몽골데기의전통음악이연주되었다. 2008 년 10~11 월개최된제 6 회행사에는한국 과이탈리아합작으로 토스카 푸치니작곡를공연했으 며, 대구시립오페라단이 람메르무어의루치아 도니 제티작곡를, 국립오페라단이서울과독일에서공연한 바있는창작오페라 천생연분 임준희작곡를, 뉴서울오 페라단이 춘향전 현제명작곡를, 영남오페라단이 신데 렐라 로시니작곡를공연했다. 해외초청으로는독일다 름슈타트극장이 아폴로와히아친투스, 첫째계명의 의무 모짜르트작곡를공연했다. 2005, 마르타 2009 년 9~10 월개최된제 7 회행사에는한국 3 개도시의오페라단이합작으로대전, 대구, 고양 사랑의 묘약 도니제티작곡을공연했으며, 해외초청팀으로는 독일의칼스루에오페라단이 마탄의사수 베버작곡를 공연했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이 투란도트 푸치니작곡 를, 포항오페라단이창작오페라 원이엄마 조성룡작곡 를, 로얄오페라단이 카르멘 비제작곡을공연했다. 2010 년 9~10 월개최된제 8 회행사에는해외초 청으로러시아미하엘로프스키국립극장이 예브게 니오네긴 차이코프스키작곡을, 독일칼스루에국립극장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여정고찰 23 2005, 돈지오반니 2013, 돈지오반니 이 한여름밤의꿈 멘델스죤작곡을, 아시아합작 -대만, 말레이시아, 일본, 중국, 필리핀, 한국-으로는 세빌리아의이발사 로시니작곡를공연했으며, 대구시립오페라단이 파우스트 구노작곡를, 서울시오페라단이 안드레아세니에 지오르다노작곡를, 영남오페라단이 윈저의명랑한아낙네들 니콜라이작곡을, 대구오페라단이 피가로의결혼 모짜르트작곡을, 로얄오페라단이창작오페라 심산김창숙 이호준작곡을, 비바오페라단이 오텔로 베르디작곡를공연했다. 2011년 9~10월개최된제9회행사에는대구의 3개팀 -축제조직위, 계명오페라단, 대구시립오페라단- 이합작하여 아이다 베르디작곡를공연했으며, 러시아와의합작으로 돈파스콸레 도니제티작곡를, 터키앙카라국립극장과의합작으로 후궁으로부터의도피 모짜르트작곡를, 국립오페라단이 가면무도회 베르디작곡를, 해외초청 으로는독일칼스루에국립극장이 나비부인 푸치니작 곡을공연했다. 국립오페라단은창작오페라 도시연가 박지운대본작곡를공연했으며, 그외에도특별공연으로어린이 부니부니, 고헌예찬 김봉호작곡, 디도와에네아스 퍼셀작곡, 헨젤과그레텔 훔퍼딩크작곡을공연했다.
24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국제적인합작으로이루어진오페라무대를대구국제오페라축제만의특징으로정착해도된다는것이나의생각이다.. 2012년 10~11월제10회행사에는대구시립오페라단이대구출신작곡가박태준의이야기가중심이되는창작오페라 청라언덕 김성재작곡을공연했으며, 해외초청으로폴란드브로츠와프국립오페라극장이 나부코 베르디작곡를, 독일칼스루에국립극장과의합작으로는 방황하는네델란드인 바그너작곡을, 아시아합작으로 돈지오반니 모짜르트작곡를, 프랑스와의합작으로 카르멘 비제작곡를, 터키아스펜도스국제오페라와발레페스티벌과의합작으로 라트라비아타 베르디작곡를공연했다. 그외에아미치오페라단의 아시스와갈라테아 헨델작곡오스트리아쇤브룬궁정마리오네트극장의인형극으로 모짜르트와마술피리 모짜르트작곡를공연했다. 2008, 리골렛토 짧지도길지도않은 10년의역사를지내오면서, 대구오페라하우스를중심으로한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사실그동안많은변화를겪어왔을것으로여겨진다. 당장, 축제의조직만보아도알수있다. 그동안조직위원장이네번이나바뀌었고, 실질적으로이행사를지휘하는집행위원장도네번이나바뀌었다. 그러한데도, 제1회부터 10회에이르기까지행사의진행방향은일정하다는데또한번놀라움을금할수없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여정고찰 25 2006, 투란도트 2006, 불의혼 앞서제시한 10년간축제행사들에서공연된오페라작품들을정리하여살펴보면서이축제를이끌고있는실질적인운영자들의기획방향을살펴본다. 첫째, 이오페라축제는처음부터본격적인국제화를꿈꾸고있었다. 제2회행사에는이탈리아와러시아로부터오페라단을초청하여무대를꾸미지만제3회부터는본격적으로합작형태로국제적인오페라무대를만들게된다. 제3회 2005년의경우, 먼저오페라의종주국인이탈리아와의합작으로무대를만들고, 2006년에는독일과의합작으로무대를꾸미게된다. 2007년에이르면한국, 이탈리아일본 3개국의합작으로한단계더확대된기획무대를선보인다. 2008년에는다시이탈리아와합작무대를만들어본후, 2009년에는한국내 3개도시오페라단들의합작무대로선보인다. 2010년에는아시아의 5개국 -대만, 말레이시아, 일본, 중국, 한국- 의합작무대를만들어본후, 2011년에는잠시대구시의 3개오페라단체의합작오페라로숨을돌린다. 그리고, 2012년에는독일과의합작으로처음으로독일오페라를공연하기에이른다. 그동안합작으로오페라무대를만드는동안가장대중적인오페라들인이탈리아오페라들로프로그램이제한될수밖에없었던것에대 한반성으로여겨진다. 이와같이꾸준하게국제적인합작으로이루어진오페라무대를선택하게된것은경제적으로어려움을겪는동안자구책으로인한것이었을수도있다. 그러나다른면으로보면이방법은다른오페라축제에서는보기어려운대구국제오페라축제만의특징으로정착해도된다는것이나의생각이다. 대부분의오페라작품들이유럽을중심한것들이라는것을인식할때, 그들과같이한무대에서는것이그들이가지는장점을빠른시간내에파악할수있을것이라는생각에서다. 유럽의유수한오페라축제와어깨를견줄수있으려면이방법이가장좋을것이기때문이다. 단지, 짧은시간내에대화도어려운출연자들끼리모여무대를만드는동안국제라는거창한무대의기대감에비해질적인수준이떨어질수있다는우려감은없앨수있어야한다. 그점은앞으로도기획자의입장에서더욱주의하면서준비해야할것으로생각된다. 둘째, 이오페라축제는실질적으로국제적인무대의중심이되려하고있다는점이다. 2004년에는이탈리아와러시아오페라단을초청했으며, 2005년에는체코, 2006년에는독일과루마니아, 2007년에
26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소극장오페라무대 는앞으로도계속되기를기대한다. 누구나인정할수있는좋은작품이갑자기만들어진다는것은쉬운일이아니기때문이다.. 는불가리아, 2010년에는아시아 5개국과의교류무대를만들었으며, 2012년에이르면폴란드의오페라단을초청하게된다. 그동안아시아를제외하고라도 8여개국의오페라단체들이이축제에서공연했고필요에따라서는합작형태의오페라공연도계속적으로가능하리라추측된다. 오페라종주국들의높은수준으로된무대들만선호해온과거와는달리, 나라마다의다양한국제무대들과작품들을소개하는대구의오페라축제야말로진정한국제무대로정착될수있을것이라고믿어의심치않는다. 앞으로더욱더다양한나라들의오페라단체들이참가할수있게되기를기대해본다. 2009, 사랑의묘약 셋째, 이오페라축제는한국적인무대를포함하려고노력하고있다는점이다. 그중에서도대구의역사에남을만한한국형오페라를만들고자노력하고있음이분명하다. 오페라원년인 2003년에는김동진작곡의 심청 을무대에올렸으며, 2004년에는이승선작곡의 무영탑 을공연했다. 2006년에는역시이승선작곡의 길, 2008년에는임준희작곡의 천생연분 을공연했다. 2009년에는안동의감동실화인조성룡작곡의 원이엄마, 2010년에는이호준작곡의 심산김창숙, 2011년에는박지운작곡의 도시연가, 그리고 2012년에는작곡가박태준의일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여정고찰 27 2012, 아하! 오페라 피가로의결혼 2010, 원이엄마 대기인김성재작곡의 청라언덕 을공연했다. 이외에한국전통음악이나민속음악무대까지포함한다면적어도매년한작품정도의한국작품을공연한셈이다. 그런데도베르디나푸치니의작품처럼계속적으로공연하고싶은만족할만한작품이아직도발굴되고있지는않은듯하다. 작곡가의한사람인나로서도이문제에관해서는명쾌한해답을내리기가쉽지않다. 오페라가작곡가한사람의작품이아니라대본에서부터연출에이르기까지, 무대의구석구석에세워진세세한장치들에이르기까지한마음으로이루어질수있어야작품이성공할수있다는어떤연출가의말을상기하는것으로지나치고싶다. 단지앞으로도어떤방법을강구해내더라도좋은우리의작품으로세계에소개할수있을때가오기를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메인무대는아니지만제3회때부터시도했던 소극장오페라무대 는앞으로도계속되기를기대한다. 바로크시대의오페라등도매니아층을확보하기위해서라도계속연주되면좋지않을까싶다. 앞서서설명을멈춘창작오페라의발굴도어쩌면소극장무대로부터출발하는것이더좋을듯싶다. 사실, 대학생활부터지금에이르기까지 40여 년간작곡에만매달려온나의경우, 작은편성의작품들은위촉이많은편이고연주도많이되고있어서확신있는작품을자주쓰고있지만큰편성, 예를들어관현악편성의작품들은작곡할기회가그리많지않아서갑자기위촉이있을때는준비하는동안심적인부담이배가된다. 연주가들도많은연습이필요한것처럼작곡가들도작곡실습이많아야된다고생각해보면충분히이해될일이다. 하물며오페라의경우는무대, 연출, 연기등음악외적인경험도많아야되니누구나인정할수있는좋은작품이갑자기만들어진다는것은쉬운일이아니다. 소극장오페라작품부터시작하면서점진적으로좋은작품을기대하는것이좋지않을까? 지금까지열심히달려온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더욱아름다운결실을맺기위해서라도앞으로도힘을낼수있기를기대한다. 경제적으로어려운가운데에서도잘진행되어온이축제를도울수있는확실한지원책이있기를기대한다. 인내하면서실질적으로이음악제를책임지고이끌어온여러분들에게다시한번진심으로감사드린다.
28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창작오페라의가능성과대중화방안연구 진영민 경북대학교음악학과교수 Ⅰ 서론한국에서창작오페라는일반적으로우리에게어떻게받아들여지고있는가? 창작오페라 는 창작 과 오페라 라는두가지개념이겹쳐져있는단어이지만일반인 1 에게는낯설게느껴질것같다는생각을해본다. 이러한문제는오늘날창작오페라가풀어야하는과제라고생각하며이를풀기위해서는대중성과가능성연속성의의미에초점을두고논의해야한다고생각한다. 한국창작오페라의역사를살펴볼때많은창작오페라들이지금까지작곡되었지만과연우리의가슴에남아있는오페라가몇편이될까하고스스로반문해본다. 이러한생각을하게된이유에는여러가지가있지만보편타당성이라는화두에서살펴보면한국사람이작곡, 연출, 제작한우리의색채가묻어있는오페라를늘서양오페라의관점에서생각하고판단해온관념의틀때문에생겨온문제를이제는우리의정서적관념에맞게인식을개선해야한다고생각한다. 새로운틀의시작점은음악이가지는기본개념중시간예술이면서재현예술이라는단순한논리의출발이전제되어야하며특히종합예술로서의오페라의기능적측면등을감안하여논의되고정리되어야한다고생각한다. 이에필자는세가지의큰전제하에서창작오페라의가능성과대중화방안을풀어보고자한다.
29 많은창작오페라들이지금까지작곡되었지만과연우리의가슴에남아있는오페라가몇편이될까하고스스로반문해본다.. Ⅱ 본론 1. 우리 라는순수하고아름다운단어 우리 는무엇인가? 우리 2 란자기와함께자기와 관련되는여러사람을다같이가리킬때사용되는 단어이다. 필자는음악이든다른장르의예술이든 간에우리의손을거치면우리것이된다는아주소 박하고단순한생각을한번해보았다. 이부분에서 우리 라는단어는우리의이야기라는사실을귀착하 1 일반인은대중이라는말과흔히통용되고같은의미로서도사용되고있다. 하지만이글에서필자는음악의기본적개념과원리를이해하고오페라에관심이있거나관람한경험이있는보편적인사람을지칭한다. 2 http://dic.daum.net/word/ ( 검색일 :2013.6.19) 3 스토리텔링은 스토리 (story) + 텔링 (telling) 의합성어로서말그대로 이야기하다 라는의미를지닌다. 즉상대방에게알리고자하는바를재미있고생생한이야기로설득력있게전달하는행위이다. 여오페라구성에서제일중요한부분인소재와극에대해살펴보려한다. 우선기존의창작오페라들의소재를살펴보면역사속인물이나사건등을중심으로하였다. 그리고내용적인측면보다는행사적인측면이강하게작용되어관객들에게보여주기위주의창작오페라들이작곡되다보니오페라의가장중요한측면인극적인요소가결여될수밖에없는환경이되었기때문에대중화라는측면에서여러가지잃는부분이있다고생각한다. 그렇다면영국왕실의사랑이야기와셰익스피어의비극이과거에서부터오늘날까지우리에게대중화되고사랑받는이유는무엇때문일까? 그것은과거와현재를떠나서대중들이하고싶어하는이야기와공감할수있는이야기가그글속에스며있기때문이다. 우리는그것보다도더소중한우리의것이있지않는가? 시대를거슬러올라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신화, 전설, 민담등이실린문헌들을살펴보면셰익스피어의비극보다도더욱더진한감동을줄수있는부분이존재하고있다. 따라서우리가이것을스토리텔링화 3 한다면우리의정서에맞는창작오페라가만들어질것이라고생각한다. 이러한창작오페라를만들기위해서는우선우리의것을재료화하여형상화하는작업
30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오페라는초연을통하여얻어진여러가지정보등을통하여오랫동안수정보완작업을하여얻어진결과물이다.. 4 (1854~1928) 은체코의작곡가로브르노필하모니협회의지휘자를지내고브르노오르간학교를세워교장을맡았다. 민족적소재를근대적음악어법으로처리하여오페라 예누파, 타라스불바 등의작품을남겼다. 을우선시해야한다고본다. 체코에는야나첵 4 이라는작곡가가있다. 그가작곡한오페라가유럽각지에서연주되고호평을받았다. 필자도그의오페라를보고두가지측면에서감동을받았다. 첫째는기존대부분의오페라가사가이태리어로작곡된것에비해야나첵의오페라는자국어인체코어로오페라를작곡한것과둘째는기존의오페라에서큰비중을차지하는아리아를찾기힘든것이었다. 그런데왜이렇게기존의오페라와는다른점이있음에도불구하고호평을받고대중성을얻고있느냐이다. 작곡가인필자도창작오페라를볼때어느순간부터기존의오페라의틀에서살펴보고있다는것을느꼈다. 필자가다시생각해보니음악이라는보편타당성의관점에서살펴보면그의오페라는감동을주기에충분하다고생각하며, 한국에서도이와같은관념의변화가새로운음악의출현의가능성의문을열어줄수있다고생각한다. 가까운인접예술인뮤지컬을살펴보면뮤지컬은오페라에근원을두고있지만드라마적인요소뿐만이아니라그외로우리의일상이야기나내마음속에간직한이야기등과같은다양한소재를빠르게극을전개하는데있어서오페라와차이점을보인다. 따라서뮤지컬은창작오페라보다는대중들의공감대를형성하는점에있어성공하고있다. 우리는대중의힘으로인해여러장르의굳
창작오페라의가능성과대중화방안연구 31 2011, 국립오페라단창작지원작 도시연가 게잠긴빗장을열어버린것을보아왔다. 따라서대중의가치관의뿌리들이꽃을피우고시대의문화를이끌어온것을본다면대중의의식을간과해서는안된다고본다. 2. 한국에서새롭게작곡된오페라는영원히창작오페라인가? 1) 적절한예산의분배창작오페라의재현가능성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오늘날우리에게알려져있는기존의오페라들은오랫동안수정해온것임을알수있다. 오페라는초연을통하여얻어진여러가지정보등을통하여오랫동안수정보완작업을하여얻어진결과물이다. 오페라가가지는종합예술로서의부분과아울러음악의본질이가지는창작과재현이라는특수성을비추어볼때반드시반복을통한수정작업이이루어져야만한다고생각한다. 그런데한국의현실은어떠한가? 첫번째부분은모든것을형상화할수있는예산의부분이다. 반복을통한수정작업을하여보다 나은작품으로바뀔수있기위해서는제도적인여건이마련되어야하는데그러기위해서는예산의확보와작품을구성하는데있어서의충분한시간적여유가반드시필요하다고본다. 오페라제작자가좋은아이디어와적극적인자세를가지고창작오페라를시도한다하더라도예산을만들기위한과정이쉽지가않기때문에지원금에많이의존할수밖에없는것이현실이다. 대다수의창작오페라는일회성에그치고마는데적어도재공연할수있는기회를제공한다면한번의공연후시도된많은노력들이그다음해에다시공연될수있다는기대감과아울러보완하고수정할수있는시간적여유가있기때문에자생력과함께질좋은작품이나올것이라고생각한다. 예를들면국악창작품에대한지원은아낌없이이루어지고있다. 국악과양악이라는속성상서로다른두가지를단순한수치로비교할수는없지만한가지만은분명한것을알수있다. 우리것 이라는것과 창작 이라는것이일치하다는부분이다. 이러한측면에서창작오페라는무엇이다른가? 우리말로우리사람이우리오케스트라로연주하지않는가? 개념의차이가있을뿐이지결과론적의미로는같은것이아닌가? 그러므로지원금에대한인식태도의변화를위해우리모두합심해야할것이다.
32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2009, 사랑의묘약 무대체험장면 2) 대중의흥미를유발시킬다양한방법의시도 한국의대부분창작오페라는대편성의오페라를지향하고있는데소편성의오페라도그가치가충분히있다고생각한다. 큰편성이가지지못하는소편성만의경제적이고시간적인장점외에도다양한부분의장점들이존재하고있어대편성오페라보다재공연의부분에있어서훨씬수월하게이루어질수있다. 그러므로다양한장르의소편성오페라를장려해야한다고생각한다. 다음으로는시대의흐름에따르는다양한방법 론의적용문제이다. 이것은과학의발달과함께그 5 2.28민주운동기념창작뮤페라 꺼지지않는횃불 ( 작곡에박경아, 대본이기철, 연출정철원 ) 은 2012년 12월 21일에초연되었다. 대구에서일어난한국최초의학생운동이후에 4.19 혁명으로전파된것을소재로하였다. 다양한테크놀로지의방법론을적용한실험적인뮤페라였다. 6 작곡가 + 연주자 + 비평가 + 대중 = 역사음악은이와같은산술방식으로본다면서양음악의역사를볼때오늘날우리에게감동을주는살아있는음악들이여기에부합함을알수있듯이모든것이서로공존하여이루어져왔음을알수있다. 7 오페라 < 청라언덕 > 은작곡에김성재, 대본에최현묵, 연출에정갑균이맡았으며제10회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개막작으로 2012년 10월 12일에초연되었다. 우리나라서양음악의선구자이자대구를빛낸작곡가박태준의삶과음악, 사랑이야기를소재로하였다. 에따르는부수적인요소들의다양한결합을시도함으로써역동적으로표현되는다양한볼거리와새로운음향의제공을통해대중들의흥미를충분히유발할수있다고생각한다. 그예로뮤페라 꺼지지않는횃불 5 을들수있다. 꺼지지않는횃불 은뮤지컬의요소와정통오페라의요소가결합된뮤페라로써오늘날의기술적가능성과예술의융합을보여준새로운시도였기때문에이또한대중화를형성할수있는하나의방법이될수있다고본다.
창작오페라의가능성과대중화방안연구 33 우리는서양음악사의틀로혹은기존의오페라가가지는개념의틀로오늘날의우리의창작오페라를보고있지는않는가?. 3. 유전자는세월을따른다. 오페라역사에서알려진베르디에대해서이야기해보자. 서양음악사를보면베르디이전에수많은작곡가들이존재해왔다. 서양음악사와비교할수없는한국의서양음악사를보자. 먼저, 우리는서양음악사의틀로혹은기존의오페라가가지는개념의틀로오늘날우리의창작오페라를보고있지는않는가라고묻고싶다. 필자가대학을다닐무렵에오페라공연에대해생각해보니지금과비교할수없고창작오페라는거의전무할정도였다. 지금 2013 년은어떠한가? 서양음악처럼우리도우리의역사를쓰고있지않는가? 세월이모든것을변화시키고앞으로도우리가생각하고원하는것으로바뀌어가고있다고본다. 여러가지제도적인것과우리모두의역량이전제되어야하지만앞으로우리의것이우리뿐만이아니라모두에게공감을가지게될것이라고본다. 서양음악의역사는누구개인의것이아닌저들모두의공동체에서이루어져왔다 6. 수많은음악들이나오고들어가는반복속에서형태와내용적인것들이확립되어왔고그중에서가장큰힘이된것은기다림과관심에서이루어져왔다고본다. 대구의국제오페라축제가적은예산에도매년새로운것을보여주며한국오페라사에새로운역사를쓰고 있다. 올해도성공을거두리라확신한다. 작년 2012 년창작오페라 < 청라언덕 > 7 이초연되어많은호평을받았고새로운가능성을보여주었으며올해 2013년또다시재공연하는것에대해서굉장히반갑고이러한모습들이한국창작오페라에새로운길잡이가되기를기대하며보다나은성공작이되길기대바란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매해가지나면서한국의대표적인축제로자리매김하였고주위에많은영향을주고있다. 이제창작오페라에대한것에도눈을돌려서우리것에대한새로운역사를쓰는하나의디딤돌이되리라고확신한다. Ⅲ 결론지금까지의창작오페라의가능성과대중화방안에대해종합해보면우리것에대한깊은인식의틀로부터시작되어제도적지원의문제, 그리고수정보완의필요성, 시대가요구하는다양한방법론의결합의문제등을다루었는데오늘날의다양한문화적생산물에발맞추어젊은인재들이많이배출되고있고여기에많은기회를줄수있는환경을조성한다면한국오페라가세계속의오페라로부상할수있는미래가오리라고본다.
34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년소고小考 윤성도 계명대의대석좌교수오페라칼럼리스트 들어가며대구에서최초의오페라는 1951년키네마한일극장에서공연된현제명의 춘향전 이었다. 한국오페라역사는 1948년 1월 16일이인선이제작한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 가춘희로번역되어최초로공연되면서시작되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2003 년 10 월 6 일에시작되었으며제 1 회공 연작품은국립오페라단의도니제티곡 사랑의묘약 이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대구광역시, 대구오페라하우스가공동주최하고대구국제오페라축제조직위원회주관으로 2012년현재 10회를맞이한국제적규모의오페라축제로발전하였다. 이는 2003년 8월에 1500석규모의대구오페라하우스가개관하였기에가능한일이었다. 그러나거슬러올라가면정규적인음악교육이있기전인일제강점기시절부터대구는성악의도시였으며, 현제명, 박태준같은음악인을배출한음악교육의도시이다. 6.25 전쟁동안수많은예술인들이대구에피난와서머무는동안그들의영향을받아더욱문화의도시로자리매김하게되었다. 오페라의역사를알면그나라의, 그도시의문화를평가할수있는기록이될수있다. 지난 10 년동안오페라축제의집행부가몇번바뀌었지만대구오 페라를아끼고묵묵히발전시켜온대구시의행정력, 음악인들과음악
35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은성공적이었는데그과정에는어려운여건속에서도오직오페라를위해발품을판음악전문기획인들이있었다.. 단체들의노력과시민들의호응이서로상승작용하여오늘에이르게된것이다. 그결과오페라가대구문화예술을앞장서서이끌어간다고볼수있다. 최근에대구시의회문화복지부의결단으로대구오페라재단설립을목전에두고있는전환기에서대구오페라의지난 10년을되돌아보고다가올 10년을내다보는시점에서무언가남겨야할말들이있다. 관, 시민회관, 아양아트센터, 서구문화회관, 남구대덕문화전당, 북구문화예술회관, 봉산문화회관, 수성아트피아, 어린이회관, 우봉아트홀등의유수한공연장이있다는것이장점이다. 그러나어려운여건속에서도오직오페라를위해발품을판음악전문기획인들이있었음을기억해야한다. 결과 10년간 111회의오페라공연과청중연인원 36만3천명좌석점유율 84% 을동원할수있었다. 을까? 1.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은성공적이었 2. 대구오페라계의영향력 오페라공연횟수, 청중동원, 창작오페라공연, 해외오페라단합작, 해외공연및축제교류, 지역성악인의해외진출등자료만통해보면지난 10년은성공적이었으며많이발전해왔다고자부할수있다. 성공의요인으로대구의풍부하고우수한성악인들, 합창단, 무용단, 오케스트라, 유수한음악대학, 민간오페라단, 오페라애호가등을생각해본다. 또한대구오페라하우스외에도대구문화예술회 대구지역에는음악공연관련대학들이많기때문에자연적으로학교선후배간의음악그룹이형성되어서로봐주기를하는분위기가강한듯하다. 특히대구에서는누구누구하면알만한특정인사에힘이많이실려이곳을통과하지않고는무대에서기힘들다는얘기가있다. 이러한잡음을없애려면엄격한오디션을통하여객관적인평가를하여야할것이다. 오페라공연을기획, 제작하는데가장큰어려움이예산확보에있다면출연하는성악가들은캐
36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좋은오페라를만들기위해서밥그릇문제나패거리문제에리더가휘둘려서는안될것이며독립적으로외부의간섭을막을수있어야한다.. 스팅문제를가장큰어려움으로여기고있다. 특히엄격한오디션을통하지않고인맥, 학맥으로, 또는로비를통하여캐스팅되었다는후일담이간간히들린다. 특정인맥에줄대지못하면무대에서기힘들다는푸념도나온다. 그결과공연장에가보면음악전공인들의모습은잘보이지않는다. 캐스팅의후유증일수도있다. 또한음악인들끼리의눈에보이지않는경쟁의표현일수도있다. 애써무관심해지려하는듯하다. 캐스팅된다해도과도하게배당된좌석티켓을소화해야하는부담으로연습에정성을쏟기힘들고출연후인사치례를하는것도여간힘든일이아니다. 이점은출연진들의자존심을건드린다. 오케스트라와무용단도전속이아니므로반짝연습으로무대에나서기때문에전력을다할수없는실정이다. 제한된무대기회때문에많은성악가들이박탈감을갖고있으며심지어성악을포기하고식당업등다른일에종사하기도하는안타까운경우도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소고 37 2012, 아하! 오페라 잔니스키키 3. 오페라공연비평의부재 4. 향후오페라재단이해야할일들 지난 10년간공연된오페라는주로이태리, 독일, 프랑스, 한국창작곡과러시아, 오스트리아등의작품들가운데주로귀에익은유명한아리아가있는작품들이공연되었다. 향후더다양한레퍼토리개발이필요할것으로보인다. 예를들면벨리니와도니제티등의초기작품과무쏠그스키, 차이콥스키의오페라등이다. 지역언론에서는공연일정등을소개하고있지만, 본격적인공연리뷰등의비평은거의전무하였다. 앞으로는좋은비평을기대하며비평이비평으로끝나지않고새로운활력소를제공하게되어야할것이다. 또한, 비평가그룹이형성되어야할것이다. 또한음악인들은상대방의공연을비평하길꺼려한다. 비평을잘하기도힘들고나쁘게하고나면뒷수습이힘들기때문에애써비평하려하지않는듯하다. 그러므로음악비평은비전문가애호가들의몫이되고있다. 향후출범되는대구오페라재단임원구성은성악전공자보다오페라에대해총괄적인지식을가진오페라를사랑하는비음악인들이많이참여하여야할것으로보인다. 왜냐하면, 좋은오페라를만들기위해서밥그릇문제나패거리문제에리더가휘둘려서는안될것이며독립적이며외부의간섭을막을수있어야하기때문이다. 전공자는기술적인, 예술적인자문을통해서얼마든지좋은오페라만들기에참여할수있다. 오페라제작경비는편당 6~9억정도소요되는점을감안하면재단에서시급히해결해야하는것이예산확보이다. 지금까지는오페라한편의제작비용을쪼개고아껴여러편을만드는무리한제작을해왔음을알아야한다. 오페라가끝나면전문가들이현장, 기획, 관리, 관객서비스등을평가하게해효과적인오페라제작을할수있게해야한다. 오페라제작에필요한의상, 소도구등을취급하
38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일시적분위기조성도중요하지만축제기간에다른문화사업을같이펼쳐볼거리, 먹을거리등과조화를이루어본다면어떨까한다.. 는업자들이영세하여공연분위기에맞지않는경우를많이보아왔다. 고증을충분히할수있는제도적배려도해야할것이다. 5. 대구오페라계의향후 10년전망은? 현재의구도에안주하면서울지역이나, 향후들어서게될부산오페라하우스시대를극복하기힘들것이다. 10년뒤를전망한다면현재초 중 고교과과정에음악수업시간을많이배당해야할것이며음악대학내에서도이미뮤지컬운동이강하게오페라계를압박해오고있음을간과해서는안된다. 현재유럽, 러시아등지에서역량있는젊은성악도들이수천명이상활동하고있다. 이들이없으면오페라를할수없을지경이라한다. 이들이국내에들어와활동할수있도록무대기회를주어야할것이다. 의료계에서불고있는의료관광붐처럼중국, 동남아에서도관광객들에게대구오페라를즐길수있는관광상품을개발할필요가있다. 얼마전계명아트센터에서공연된한뮤지컬을보러일본의여학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소고 39 생들이몰려온일도있었음을알리고싶다. 10년간오페라축제를해오면서홍보가많이된부분도있다. 그러나일시적분위기조성도중요하지만축제기간기타다른문화사업을같이펼쳐볼거리, 먹을거리등과조화를이루어본다면어떨까한다. 관객수입에만의존하기보다지속적인후원자를많이확보해야한다. 세계적인오페라극장도후원으로운영된다. 기획 공연전문가를많이키워야한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일회성이아닌대구를대표할수있는문화정책으로거듭나야하고시민들도적극적으로참여해야국제화가가능하다. 국가적정책유도, 해외유명극장과 MOU 체결, 중앙정부예산지원등에적극적인자세를가져야한다. 6. 창작오페라작곡이전에해야할일들 오페라작곡에앞서필수적으로해야할일은좋은소재의스토리개발과대본을만드는작업이다. 베르디같은위대한작곡가는일일이대본을손질하고맛깔스럽게다듬었다. 푸치니가중국소재로투란도트를작곡하였고, 일본소재로나비부인을작곡
40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했다. 우리나라도좋은소재가많이있는데세계적인작곡가의작곡이없어아쉽다. 그러므로국내소재이지만꼭국내작곡자에게만의뢰할것이아니라외국유명작곡자에게도작곡의뢰를할수있어야한다. 대사한마디한마디가고급스럽고함축성이있어서음악선율과함께대사를곱씹는맛도오페라를즐기는데중요한요소이다. 오페라공연포스터에서작곡자이름과대본가리브레티스트의이름이동등하게올려지는이유가거기에있다. 기존창작곡가운데도수정이필요한부분은지속적으로수정해서보다더완성도를높여야할것이다. 세계적으로유명한오페라도여러번수정을통해오늘에이르고있다. 2012, 제야의음악회 7. 오페라의대중화는가능할까? 오페라는귀족취향의고급예술이라하지만출발부터다분히대중적인요소를함께하고있다. 오페라이전에민중극, 판소리, 마당극이있었다. 시민들의문화수준이높아질수록대중화의길은앞당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소고 41 기존창작곡가운데도수정이필요한부분은지속적으로수정해서보다더완성도를높여야할것이다. 세계적으로유명한오페라도여러번수정을통해오늘에이르고있다.. 겨질것이다. 대중화에앞서오페라감상예절에대한계몽이필요하다. 오페라감상시가장장해가되는것은원어오페라대사를이해하기힘들기때문인데, 최근에는자막영상을보내주므로많이해소되었다. 오페라공연시자녀들을데리고오는모습이과거보다많아지는것은오페라대중화에밝은전망을갖게한다. 아는만큼보이는것이오페라이기때문에공연에앞서애호가스스로공부를해야한다. 대중적으로입장권을구입해관람할수있는음악회는오페라가처음이었음을기억해야할것이다. 어떤오페라를볼것인가, 오페라를보기전어떤책을보고디스크음악감상을미리해본다거나, 극장예절로서박수는언제치는가, 브라보브라비는언제외치는가, 오페라공연뒤에공연팸플릿을모은다거나, 공연소감을스스로한번기록해본다거나, 동호인들끼리토론회를갖는것도좋을것이다. 이를통해오페라줄거리, 등장인물, 오페라의구성요소대본, 아 리아, 레치타티보, 서곡, 간주곡, 합창, 중창, 발레, 무대장치의상, 음역등 을공부해야한다. 공연중휴대폰소리, 스마트폰불빛, 음료수반 입등은자제해야하며, 공연시간을지켜공연중이리저리자리를움직이지않아야한다. 그러나오페라용쌍안경오페라글라스를준비하면연기자의모습을자세히볼수있어좋다. 원래쌍안경은오페라가수를보기보다귀빈석에누가왔나, 귀부인들이어떤옷을입었나에더관심이있었다고한다. 8. 오페라한류는시작되었나? 아이돌, 한식, 한국드라마등이한류붐을일으키고있는가운데오페라역시그렇게못하라는법이없다. 이미터키, 폴란드등에순수국내제작오페라를수출하고있음을기억하자. 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통하여대구오페라가국제적으로알려지고있는것은사실이나아직국내에서도대구오페라가만족스러울정도로알려진것은아니다. 대구지역에서도일부오페라애호가를제외하면오페라축제에대한열기가그렇게뜨겁지는않다. 지난 10년간오페라축제가끝나고나면어떤부분그들만의잔치가아니었나자문할때가있다.
42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하루속히진행중인오페라재단조례가만들어지고오페라재단이구성되어음악인과행정기관들이한마음이되어움직여야할것이다. 예산확보와오페라제작의독립성을지켜외부간섭을최소화해야한다.. 요약하루속히진행중인오페라재단조례가만들어지고오페라재단이구성되어음악인과행정기관들이한마음이되어움직여야할것이다. 예산확보와오페라제작의독립성을지켜외부간섭을최소화해야한다. 전공자들은피나는노력으로계속정진하여기량연마에힘써야할것이다. 오페라가종합예술인까닭으로오페라가발전하면부수적으로따르는무대미술, 의상, 조명, 무용, 합창, 오케스트라가활성화될것이다. 관광객들이대구를방문할때오페라하우스를투어코스에넣어야할것이다. 해외홍보를잘하여오페라한류를만들어가야할것이다. 해외에서공부한훌륭한성악도들을잘키워가야할것이며오페라축제가신인들의등용문이될수있으면좋겠다. 또한, 오페라축제가그들만의오페라축제로끝나지않아야할것이다. 대구는역사적으로음악공연대학, 민간오페 라단이많고상대적으로클래식음악애호가가다른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0 년소고 43 2009, 제야의음악회 도시에비해많은편이지만인구 250만의규모로국제오페라축제를지속적으로유치하는데는한계가있을것이다. 앞에서지적한것처럼국제오페라축제가축제다워질려면국내의타도시애호가들을유치하고, 외국인관람객을많이유치할홍보전략이매우중요하다. 이제오페라재단이구성되면현재부족한인사, 시설관리부서의인원부터확충해야한다. 일부민간오페라단체는활발하게활동하나또한소수에서는활동이기대에못미치고있는것도현실정이다. 이러한점도재평가되어야할것이다. 일부공연장의음향이좋지못하여마이크를써가면서오페라를공연하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육성을듣고싶어하는데마이크음향이나올땐서글픈생각이든다. 지혜를배워야한다. 대구의대표적오페라단인 시립, 대구, 계명, 영남및로얄오페라단의건승을 빈다. 아무리좋은오페라가제작되어도관람객들의반응이없거나, 무례한행동으로분위기를흐리면피땀흘린작품이빛을못보게된다. 로씨니의세빌리아의이발사초연공연시무대위에쥐가한마리나타나공연에실패했다는일화가기억난다. 출연진못지않게관객들도공부하고예절을지켜야한다. 오페라극장로비에기침방지, 알사탕을놓아 두는등의세심한배려를하는외국오페라극장의
44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대구오페라의발전방향 배선주 대구보건대학인당아트홀관장전수성아트피아관장 앞으로대구가범아시아를아우르는오페라의메카로거듭나기위해서는다양한분야의예술인들이머리를맞대고힘을모아야할것이다. 라스칼라극장,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등유럽과미국의오페라와어깨를나란히할수있을정도의우수한오페라제작역량을갖추어야할뿐만아니라아시아오페라축제의중심지로서시장을개척하고, 유럽진출비전을제시하는등한국오페라의세계화를향해계속해서전진해야한다. 이에대구의오페라가한단계높이도약하기위한발전방안을제시해보기로한다. 첫째, 동아시아오페라의허브역할을구축할필요가있다. 과거에는이탈리아를중심으로하는유럽이오페라의중심지였으나현재는유럽오페라의노화현상이오고있다고보는독일학자들도있다. 한국을포함한아시아권유학생이급증한것은어제오늘일이아니고이제는 한국성악가가없으면오페라를할수없다. 는독일오페라제작자들의말들도쉽게들을수있다. 대구는오페라의노화가오기전유럽에서공부하고돌아온또는아직활동중인훌륭한성악가들과그들을통해배출되고있는젊은성악가들과같은인적자원이풍부하며오페라에관한체계적이고안정적인시스템을구축하고있다. 아울러지금까지국내외수준높은문화인프라를활용하여세계각국의다양한오페라를선보임으로써아시아공연문화의허브역할을담당하고있으며, 오페라의종주국인유럽의세계적인극장에진출하는등국제적위상이크게높아지고있다. 특히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2010년부터매년중국, 독일, 터키, 폴란드등세계적인극장과축제에
45 2009, 제야음악회 초대받고있으며, 계속해서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등으로해외진출을이어갈계획이다. 오케스트라가있으며한국의많은음악인들이그곳 에서활동하고있다. 또한대구에는 30년의역사를자랑하는 대구성악콩쿨 이있다. 이를바탕으로세계적인성악가들의등용문인 동아시아국제성악콩쿨 을유치하고다양한나라의성악인들에게국제오페라축제무대에함께참여할수있는기회를줌으로서 대구국제오페라축제 를세계성악인들의등용문으로인식시키고오페라도시대구를세계인의마음속에각인시켜동아시아오페라중심지, 동아시아오페라허브역할을구축할필요가있다. 둘째, 오페라전문오케스트라및합창단이반드시필요하다. 독일오페라합창단은구성원의 3분의 1이솔리스트로활동하던기성성악가들인까닭에합창단의기량이매우뛰어나며그에맞는합당한대우도해준다. 덕분에전세계성악가들이일하고싶어하는최고의나라도독일이다. 당연히대구출신의많은성악가들이독일에서일을하고있다. 이들이한국에오면가장안타까워하는일이오페라전문합창단과오케스트라가없다는것이다. 하드웨어극장와소프트웨어성악가는모두갖추어져있는데훌륭한인적자원소프트웨어을국내에서는활용하지못하고외국에서만활동한다는것이매우안타까운일이라하겠다. 전세계적으로가장많은오페라합창단과오케스트라가있는나라는독일이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이끝나고폐허가되어버린지역에가장먼저극장을건설했다. 무너진산업을일으키기보다국민들의정서를먼저생각한것이다. 덕분에독일을여행해본사람들은곧알겠지만중소도시부터대도시에이르기까지도시중심에는어디나오페라극장들이자리잡고있다. 그곳에는모두오페라합창단과 셋째, 오페라아카데미를통해오페라가수의역량을강화하고무대제작예술인을양성할필요가있다. 이전 10년간대한민국의많은음악인들은유럽과미국으로유학을떠나선진음악을익히고타국또는우리나라에서화려한무대를선보이는것을이상으로삼았었다. 하지만대한민국 1등이세계 1등인지금의시점에서는훌륭한자질을갖춘우리나라
46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창작오페라지원을활성화하되다작지원보다는주도면밀한검토를통해작품을선정하고장기적이고집중적인지원으로동아시아오페라의중심도시이미지를확고히굳혀나가야할것이다.. 학생들이무작정유학을떠나기보다이땅에서세계상위음악인으로자라나그들이마음껏활동하고꿈을펼칠수있는장을마련해주어야한다. 각국의음악마니아들이우리나라로몰려올수있게만들어야하는것이다. 이처럼양질의음악교육을받은음악인들의가치를더높이기위해서는학교교육과는다른무대교육을할수있는아카데미가꼭필요하다. 아울러세계수준의공연을완성하기위해서는예술가뿐아니라다양한엔지니어들도필요하다. 무대, 조명, 음향등다양한방면의엔지니어들을교육할수있는아카데미또한필요하다. 대구오페라발전을위해꼭필요한오페라아카데미는마에스트로정명훈선생이일을했던이탈리아로마산타체칠리아아카데미나밀라노라스칼라극장의아카데미와같이예술인들이항상공연을준비하고, 언제든지양질의다양한무대를선보일수있는살아숨쉬는아카데미로만들어져야할것이다. 넷째, 창작오페라의다작지원보다는주도면밀한 검토끝에장기적이고집중적인지원이필요하다. 오페라의발전을위해가장중요하고시급한사
대구오페라의발전방향 47 2007, 정명훈과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 항은어떻게보면창작오페라지원이라고할수있다. 현재세계적으로유명한오페라작품은이탈리아, 독일, 프랑스등유럽을중심으로한다른나라의작품이대부분이기에작품내용을우리나라사람들이온전히이해하고감동을느끼기에는어려움이있다. 그런면에서우리의정서와혼을담은높은수준의창작오페라의필요성은두말할나위가없다. 하지만작은예산을여러작품에나누어주기식으로지원하다보니창작오페라작품은일회성공연으로그치는경우가많고한국의오페라작품이라고내세울수있을만큼대중들의머릿속에각인된작품은없는상황이다. 오페라의종주국이탈리아의유명한오페라작곡가인베르디나푸치니도초연에서는실패한오페라가많이있었다. 하지만재차수정보완과정을거쳐 100년이넘는시간동안대중의사랑을받는불후의명작들을남기게되었다. 따라서창작오페라지원을활성화하되다작지원보다는주도면밀한검토를통해작품을선정하고장기적이고집중적인지원으로대구를알리고대한민국최고가세계최고임을또한번각인시킬수있는창작오페라작품을만들어동아시아오페라의중심도시이미지를확고히굳혀나가야할것이다.
48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문화도시대구를이세상어디에도없는문화선진도시로만들어주기에가장적합한장르가오페라이기도하다.. 다섯째, 대중에게좀더다가가는오페라도시대구로거듭나야한다. 대구오페라의발전을위해또필요한것은다른도시에는없는오페라하우스를가진도시대구만의특징을만드는일이다. 그특징을만들기위해서는대구시민들에게보다가깝게다가가는오페라하우스의자구적노력이필요하다. 아직도대구시민들중에는오페라하우스가있는지조차모르고국제오페라축제, 국제뮤지컬축제가대구에서이루어지고있는지모르는시민들이많다. 이런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단순한홍보만으로되는것이아니라다양한경로를통해시민들이양질의문화를향유할수있는여건을마련해야한다. 이탈리아베네치아뱃사공들은성악가뺨치게노래들을잘한다고알려져있다. 그래서다들베네치아에가면곤돌라를타보고싶어한다. 다른도시와다르게대구시민들은누구나오페라아리아하나씩은흥얼거리고, 동대구역, 대구역, 병원, 쇼핑몰어디에서나오페라아리아가흘러나온다면, 혹은매일이힘들다면축제기간에만이라도이런일이이루어진다면국제스타싸이를보러왔던세계인들이대구를그리고오페라하우스를그냥지나치지않을
대구오페라의발전방향 49 것이다. 현재리모델링중인시민회관심포니홀과 연계하여세계오페라거장을초대하여언론의주목 과시민의관심을유발하고, 시민들의참여프로그램 인프린지공연예, 나도성악가, 오페라스타, 의상또는분장체험, 오 페라포토존등확대, 공연장에서만의오페라공연에서 city wide 로야외오페라를연중실시하는등대중에 게다가가는노력이필요할것이다. 오페라는종합예술이다. 이말은오페라가지 역모든예술의집약체라는말이다. 대내적, 대외적 으로지역문화의역량을한번에보여주기에이처 럼적합한장르는없다. 문화도시대구를이세상어 디에도없는문화선진도시로만들어주기에가장 적합한장르가오페라이기도하다. 대구에는 30 년 의역사를자랑하는성악콩쿨이있으며, 시립오페 라단, 시립예술단, 오페라하우스등오페라하기에 너무나좋은조건을다갖추고있다. 허나이런요소 들을하나로모아주는역할을할수있는곳이없다. 오페라는종합예술이기에단순히수준높은음 악을만들었다고해서최고의오페라가탄생되지않 는다. 대구에오페라하우스가있다고, 좋은창작 오페라한편이만들어졌다고대구오페라가저절 로발전하는것은아니다. 우리지역의모든예술가 들이내집처럼드나들며창작의열을올릴수있는문화공간이조성되고예술가들이제대로인정받고대우를받는문화풍토가조성된다면대구는말그대로대중들에게사랑받고국제시장에인정을받는오페라도시로거듭날수있다. 앞에서살펴본것과같은전문오케스트라, 실력을갖춘합창단, 오페라아카데미를통해배출되는양질의음악인들과무대, 조명, 음향엔지니어예술가들, 이들을뒷받침해줄수있는담큰기획자등인적물적자원이갖추어지고다양한분야사람들의노력이합쳐지며이들의창작활동이장기적인실험무대를거쳐발전할때양질의오페라나아가세계최고의오페라가탄생하는것이다. 지금까지대구의오페라가무無에서유有를창조해온것처럼예술인들의하나로결집된열정과애정어린관심, 관계기관의적극적인지원, 그리고오페라를사랑하는시민들의참여가어우러져함께비전을이루어간다면오페라는시간이지날수록더욱아름다운빛을발하는값진진주가될수있을것이다. 그런의미에서바로지금대구오페라는청운만리靑雲萬里의꿈을품고뛰어야할시점에있다.
50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해외오페라축제의사례연구 김성빈 대구국제오페라축제조직위집행위원장 오페라축제 10년, 대구문화계의상전벽해桑田碧海열번의행사를거쳐오면서,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한국의대표적인음악축제로자리잡았다. 2004년문화체육관광부전통 공연예술부문국고지원사업평가에서최우수 A 등급을차지한것을시작으로 2005, 2008, 2009년음악분야 3위, 2006년음악분야 1위및전체 3위, 2011년음악분야 1위를차지했고특히 2010년최우수 A 등급과전체 3 위, 2012년최우수 A 등급을기록하는등그성장세가가파르다. 2003년당시국내 4개단체의메인공연만을선보였던축제는 2012 년까지총 19개국 117개단체의 113개공연을무대에올리며외적규모에서큰발전을기록했다. 10년간평균 84% 의좌석점유율을기록했고 356,070명의관객을무대에서만난것이다. 국내외의수준높은문화인프라를활용해세계각국의다양한오페라와발레, 인형극, 창극등을선보이며축제내적인부분을보완해온것은물론이다. 오페라축제는유명오페라뿐아니라국내에서쉽게만나볼수없었던작품들을아시아최초로모차르트, 아폴로와히아친투스, 혹은국내최초로바그너, 방황하는네덜란드인 원어초연무대에올려전문성과대중성을동시에확보했다는호평을받았다. 보다많은이들이종합예술의최고봉인오페라를만날수있도록숨가쁘게달려온지난 10년, 이와같은성과들을기반으로내실을다지는데집중해온축제는오페라본고장인유럽으로부터잇단러브콜을받는등국제적으로도비약적인발전을보이고있다. 이미지역의경계를넘은오페라축제는한국오페라의세계화라는원대한꿈을향해새로운 10년의문을열고, 한국오페라가나아가야할방향을보여
51 생활속의오페라 를위해달려온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대구를명실상부한 오페라의도시 로발전시키는데중심역할을하고있다.. 주고자한다. 에설수있는기회가힘든상황에서거둔값진성과 였다. 유럽으로흐르는오페라한류韓流지역의클래식시장이전무하던 2003년당시, 지역음악인들의열정과지자체의관심어린지원속에시작된오페라축제. 이제는중국을시작으로터키, 오페라종주국이라할수있는유럽의이탈리아, 독일, 폴란드에까지진출하며해외로오페라를역수출하기에이르렀다. 동아시아의작은도시였던대구가아시아오페라의메카로비약적인성장을이룩한것이다. 축제에있어 2009년은한국음악인들을해외로수출해해외교류의시작을알린해였다. 독일칼스루에국립극장주역오디션에서소프라노이재은씨와바리톤제상철씨가우수한평가를받고유럽무대로진출하는쾌거를거둔것이다. 또한그해축제에서협력연출로활약했던표현진씨도독일과이탈리아에서조연출로스카우트됐다. 성악가를비롯해음악인들이국내오디션을통해유럽행티켓을거머쥐는경우가거의전무하고, 해외유학중에도극장 2010년은중국의항주극원에서 라트라비아타 2010.10.21~22 를공연, 오페라해외수출의첫포문을열었던해였다. 이는항공료, 숙박료, 체재비등의경비를제공받으며해외로진출한매우이례적인사례로더욱화제를모았다. 또한같은해아시아인근 6개국의제작진과성악가들로팀을구성해 세빌리아의이발사 2010.10.15~16 를제작, 성공적으로공연했다. 2011년에는독일칼스루에국립극장의제안으로공연에관한일체의비용을제공받으며당당히유럽무대에섰다. 오페라 나비부인 2011.4.30/5.4 은칼스루에국립극장역사상처음으로편성된아시아단체의정기공연프로그램으로, 국내외언론의큰주목을받았으며세계인들에게한국오페라의강렬한존재감과그우수성을각인시켰다. 특히수준높은성악적역량은물론유럽성악가들이흉내낼수없을만큼섬세한연기와동작을선보여 가장완벽한오페라나비부인 이란극찬을받기도했다. 2012년에는세계적인페스티벌로손꼽히는터키아스펜도스국제오페라 & 발레페스티벌의초청
52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2011, 나비부인, 독일 지난 5월폴란드브로츠와프국립오페라극장에서선보인 카르멘 2013.5.12은전석조기매진과리플릿품귀현상을기록했으며공연이성료된후폴란드제3의도시포즈난으로부터공연요청을받는등한국성악의우수성을널리알렸다.. 으로 라트라비아타 2012.6.30 를공연, 세계유수오페 라단과무대에서는영광을누렸다. 야외원형극장 에서이루어졌던본공연은그해의축제가시작된 이후가장많은관객을동원했으며, 세계에서모인 오페라애호가들의뜨거운찬사와더불어터키내 10 개이상의언론에대서특필되었다. 또한터키현 지순회공연에국내최초로공연제작분야의상, 무대, 연출를수출하는초유의성과를이룩하기도했다. 또 한축제중폴란드브로츠와프국립극장장의심사아 래진행된폴란드진출오디션을통해소프라노이 정아와김성혜두사람을발탁, 2014 년이후폴란드 브로츠와프오페라의시즌공연무대에세우기로해 우수한역량을가진국내성악가들에게세계무대로 나아갈기회를열어주었다. 올해는오페라의본고장이탈리아의살레르노 베르디극장과공연교류협약을맺어국제적축제의 위상을공고히했다. 또한높은권위를누리는국 제행사인 < 페루치오탈리아비니국제성악콩쿠르 > 2013.4.9~16, 의심사에참여해 2014 년콩쿠르에도재 청을받았으며 < 자친토프란델리국제콩쿠르 > 의심 사에도초청받아축제외적으로새로운분야에서도 해외진출을개척했다는평가를받았다. 이어지난 5 월폴란드브로츠와프국립오페라극장에서선보인
해외오페라축제의사례연구 53 Carmen Korea 2012, 라트라비아타, 터키 카르멘 2013.5.12 은전석조기매진과리플릿품귀현상을기록했으며공연이성료된후폴란드제3의도시포즈난으로부터공연요청을받는등한국성악의우수성을널리알렸다. 최근미국뉴욕의오페라단과 2014년공연교류협상을진행해오페라 카르멘 을선보이기로확정한축제는같은해터키이스탄불에서도 리골레토 로관객들을만날예정이다. 이어 2015년 4월에는대구에서제작한의상과무대, 연출을그대로이탈리아현지로옮겨가오페라 나비부인 으로다시한번 완벽한나비부인 을선보인다. 이번이탈리아공연을통해 8만유로에달하는공연료까지정식으로지급받을예정이다. 이는한국오페라의해외진출역사상처음으로이룩하는큰성과로,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공연이단순특별행사가아닌정식초청공연으로서그수준을인정받고있음을보여준다. 이어 6월에는독일로가대형오페라 투란도트 를현지인들에게선보인다. 여기에그치지않고 2016년폴란드의포즈난, 향후슬로바키아까지해외공연이예정되어있다. 해외유명축제와의비교축제가비록가파른속도로질적, 양적발전을거듭해왔지만, 세계인의발길을끌어당기는국제적오페라축제로거듭나기위해서는해결해야할숙제들이많다. 남녀노소를불문한전세계사람들을매혹시키고, 세계예술가들에게는꿈의무대로불리는타축제들을예시로살펴보고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나아가야할발전방향을제시해보고자한다. 1.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페스티벌 1877~1910년사이에 8회에걸쳐개최된모차르트축제를근간으로하고있는잘츠부르크페스티벌은바이로이트음악제와더불어가장유명한유럽의축제중하나다. 1920년발족이후매년 7~9월중 40일정도의일정으로열리는이축제를직접관람하기위해전세계의오페라애호가들이오스트리아로향하며, 유럽지역에서의오페라역사와국가간의접근성등을고려하더라도매년축제를위해입국하는관람객의수는셀수없을정도로많다. 7월 19일시작되는 2013년축제에는메인오페라의수가 16개, 관련콘서트와행사는 30여개에이르며이에따른경제적인파급효과와고용유발효과는어
54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아시스와갈라테아마술피리모스크바앙상블 마어마하다. 사업비는 2006년기준으로 600억원이넘으며매년증가추세에있다. 수도권에서오페라한편을제작하는데투입되는비용으로한달간공연되는수편의오페라와특별공연들을준비하는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현실과극명하게대비되는부분이다. 열악한제작환경속에서축제를준비해온조직위는비용대비효율을최대화시키기위해운영및기획력향상에집중했고, 세계적명성의출연진과지휘자를초청하는대신지역의우수한인적자원들을활용하는등오페라자체제작수준과자생력을끌어올렸다. 세계적으로인정받기시작한축제의오페라자체제작및해외합작시스템을보다체계화하고, 여기에제도적인지원이뒤따른다면국내관객은물론해외관객유치에도큰도움이될것이다. 2. 스코틀랜드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1947년, 제2차세계대전의상처가채아물지않았던때전쟁의상처를치유하고희망을불어넣기위해마련되었던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은영화, 미술, 거리공연, 재즈, 파이프공연단, 도서및건축물전시회등다채로운공연이즐비해많은사랑을받고있다. 축제기간동안에는세계각국의예술인들이몰려와최고수준의오페라와연극들, 클래식음악, 발레작
해외오페라축제의사례연구 55 정식으로초청되지않은팀들이길거리에서자신들의공연을펼친데서시작한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 의흥행은, 이행사가 스스로만들고자발적으로참여하는진정한축제의장 으로거듭났음을보여주는좋은예이다.. 품등을공연하고있으며미리표를구하지않으면관람이불가능할정도의인기를얻고있다. 인구가대구시의 20% 밖에되지않는에든버러가축제하나만으로그이름을전세계에알리고, 기네스북에오를정도의규모로발전했으며매년대구시인구의다섯배나되는관광객을끌어들일수있었던데는축제예산의절반가량을홍보비로지출하는등브랜드화를위한노력을지속했기때문이었다. 또한정식으로초청되지않은팀들이길거리에서자신들의공연을펼친데서시작한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 의흥행은, 이행사가 스스로만들고자발적으로참여하는진정한축제의장 으로거듭났음을보여주는좋은예이다. 3. 프랑스아비뇽페스티벌프랑스남부의아비뇽에서매년여름열리는연극제인아비뇽페스티벌은 1947년연출가이자배우인장빌라르가소규모지방예술제를개최하며시작한것으로, 오늘날에는광장, 거리, 수도원등거리곳곳에서비극, 프랑스광대극, 모던댄스, 발레등다양한장르의연극과공연을펼친다. 이축제는상업성을띄는어떤오락도준비하지않고순수연극만으로그명성을끌어올렸다는점에서배울점이많다. 수많은창작연극을무대에올리는등인기에영합하지않 은행보로새로운연출가, 배우, 감독을발굴하는장이되기도한다. 공식초청작과비공식선정작을나누되, 시간과장소만확보하면누구나축제에참여할수있는개방적인축제구조역시수많은참가자와관객들을부르는비결이다. 새로운출발을앞둔대구의오페라위축제들이적어도 50년에서 80년이라는긴역사를가지고있다는점과해당예술분야가오랜시간동안사랑받아왔다는점에서대구국제오페라축제와절대적인비교를하기에는무리가따른다. 한국오페라가 100년도채되지않는짧은역사를가지고있기에, 완전한대중문화인영화나뮤지컬과같은범국민적흥행을이끌어내기에는어려운측면이많다. 그러나지금보다더발전적인방향으로나아가기위해할수있는일은충분히많다. 숨겨진자원은무한하지만정리되지않았던대구오페라의토양. 척박한땅의돌과잡초들을뽑아내고새로운싹을틔워낸지금, 이싹을대구의문화계를받칠거목으로키워내기위해중요한것은비옥한거
56 기획특집 _ 대구오페라하우스개관 10 주년 이모든사안을해결하는데가장중요한것은안정적재원의확보이다. 충분한지원이약속되지않은상황에서는모든논의가허황된공론에불과하기때문이다. 세계적인명성의 A 급오페라단을초청하고합작하기위해서필요한것역시재정적인지원이다.. 키즈클래식콘서트오페라체험백스테이지투어오페라존 름을주고최적의환경을조성해주는일이다. 전문적인인력을바탕으로한조직의자율성과창의성으로축제본연의모습인공공성을극대화하기위해서는안정적지원예산의확보와더불어기업의후원을끌어내는경영노하우가더해져튼튼한뿌리역할을해야할것이다. 단숨에 1층에서 3층으로간격을뛰어넘을수는없다. 한번에한걸음씩, 비록갈길이멀지만그동안대구오페라의발전에걸림돌로작용했던오페라관련기구들의분산이대구오페라하우스재단법인조례안심의의결로통합되려는이때, 지금까지의발전보다더욱바람직한위대한앞날이펼쳐질수있을것이라기대한다.
대구예술의힘 미술 _ 이경희李景熙화백 사진 _ 최계복의영선못의봄
58 대구예술의힘 이경희李景熙화백 박민영 대구문화예술회관학예연구사
59 이경희선생 2012 년작품방어진앞에서 이경희선생은일제강점기 1925년출생하여, 1937년칠곡의약목공립보통학교를졸업하였고, 1939년부터 1944년까지일본에서상업학교를다녔다. 그는 1945년 2차대전이끝을향해가던즈음에징집되어훈련을받기위해귀국하였고, 다행히도군사훈련도중에해방을맞이하였다. 암울한시대적환경에서도유년기의그에게서미술에대한재능을발견한것은그의부모님이었다. 교육에열의를보인집안의분위기도있었지만, 작가가보통학교시절에보였던미술솜씨를소중하게간직하고, 재능을키우고훈련하게 포항의부두 1949 watercolor on paper 76X106cm 된것은부모의관심과후원덕택이었다. 해방직후교육자가부족하였던시절에교원을양성하였던중등교원양성소를통해이경희선생은미술교육자의길로들어섰다. 1946년경상북도중등교원양성소미술과소장-이효상, 경북여자고등학교장에는서동균, 주경, 김창락, 손동진, 박인채, 장정복선생등당대지역에서활동한쟁쟁한서화가와양화가들이교수로포진해있었다. 그는교원양성소에서얻은지식뿐아니라일본유학중얻은다양한시각경험과타고난재능을바탕으로스스로의역량을키워나갔다. 또한그는항상새로운예술세계를접하고배우는데노력을아끼지않았다. 1979년파리 Academie Grande Chaumiere 에서의인체크로키연수나 1981년뉴욕의 Art Students League 에서수채화, 드로잉을연수하는등그는당대의선진문화를적극적으로찾았다. 이러한노력은단지배움에만그치는것이아니라자신의활동영역을확장하고, 독자적으로스스로를단련시키는과정이었다. 그리고이런적극적이고, 열정적인모습은그의삶에서어렵지않게찾아볼수있다. 이경희선생의능력을처음인정받은계기는국전이었다. 그의성과는매우큰주목을받을만큼뚜렷했는데, 1949년해방이후처음열린국전에서그는두점을출품하여 포항의부두 가특선에 실외 가입선을수상하였다. 그는당시류경채, 한중근, 최광진과함께특선 4인에이름을올렸고, 이것은그의이름을미술계에뚜렸이각인시켰다. 더구나심사위원가운데한명이었던이인성의심사평은다음세대작가의등장을알렸다. 수채水彩중에는특선特選을받을만한작품이다. 너무산잡한필치筆致의달필達筆을보이고있으나수채水彩다운작품作品에는틀림이없다. 론수채論水彩는유화油畵와기법技法이다른만큼먼
60 대구예술의힘 동촌과수원 1966 watercolor on paper 76X106cm 저즉흥적卽興的감수성感受性에서붓끝이유동流動되는만큼먼저계획적計劃的완성完成이필요必要하다는것을잊어서는아니된다. 앞날을위하여한층자연自然사실寫實의탐구성探求性을갖추어필치筆致의정리整理에서속필速筆을삼가기바란다. 1 국전심사위원이었던이인성의충고와호평은대구의대표화가이자수채화로이름을떨친이인성의뒤를잇는화가로서이경희를떠올리기에충분하였다. 국전을통해화단에등단한그는 1981년까지국전에빠짐없이출품하여국전이낳은대표적인작가가운데하나로꼽히고, 국전출품작가운데 20년이상수채화작품을출품하면서한국미술계의대표수채화가로자리매김하였다. 수채화가이경희, 화가이경희 근대화과정에서전통서화書畵와서양식회화는분별되는양식이었으나, 화畵라는관점에서서화와양화洋畵는다른재료와방법의표현이지그림의근본취지에서다르다고할수는없다. 그리고양화가운데서수채화는어쩌면근대기의한국인들에게전통과양화를이어주는좋은재료였을것같다. 물로표현한다는재료의성질에서도수묵화와의유사성이있지만, 대상을그대로옮기기보다필치에작가의정조를옮기고, 여백을통해사색의공간을제공한다는점에서수채화가근대한국인의정서적공감을쉽게이끌어낼수있지않았을까생각해본다. 혹자는매체의기술적용이성때문에양화에입문하기위한수단으로수채화를가볍게보기도하지만, 대구근대화단에서수채화는중요한독자적장르로한영역을차지한다. 이인성, 서동진, 박명조등대구의주요근대화가들이수채화에서기법의다양성을보여주었고개성있는작품세계를형성하였다. 특히이인성은다수의수채화수작을남겨, 수채화가로서명성을떨치기도했다.
이경희李景熙화백 61 1 이인성 ( 李仁星 ), 第一回大韓民國美術展제 1 회대한민국미술전국전 ( 國展 ) 작품 ( 作品 ) 평 ( 枰 ), 영남일보 ( 嶺南日報 ),1949. 2 李慶成 ( 이경성 ), 李景熙( 이경희 ) 作 ( 작 ) 淞島( 송도 ) (40호) 水彩畵 ( 수채화 ) 의전통살린作品 ( 작품 ) -다양성의統一 ( 통일 ) 보인線 ( 선 ) 의교향악-, 독서신문 1973. 7. 22. 3 李慶成 ( 이경성 ), 우시장, 독서신문 1973. 11. 18. 이러한수채화의전통을이은대구와작가이경희에대해이경성선생은다음과같이지적하였다. 한국수채화의전통은이상하게도대구를중심으로이어져왔다. 수채화에서날카로운지성의빛을보여준이인성, 그리고굳건한구조적인뒷받침을보여준손일봉, 거기에다이전통을누구보다도잘살린이경희등모두가영남출신의화가들이다. 2 또한이경성선생은이전세대와구분되는그의수채화작가로서의면모를다음과같이설명했다. 이경희의수채작품이과거의선배들의작품과다른것은곧그의특징이되겠는데그것은대담한수법과의욕적인정신자세라고말할수있다. 그가표현하고자하는대상을충분히눈여겨본다음그의마음속에서형성된어느조형의바탕을거칠것없는속도로표출시키는감각과손의작업이곧그의작품의원동력이되는것이다. 3 실경에서최초의영감을얻지만이경희선생의작품은훨씬더감각적인조형을보여준다. 생략과과장, 때로는이질적인요소의편집까지과감한구성과다채로운변화를작품에실현하면서, 그의수채화는하나의독자적인형식으로다져졌다. 이처럼이경희선생은수채화로명성을얻었고, 작가로서입지를굳혔다고할수있다. 하지만단지그를수채화가로이르기에는그의예술적성과를너무단순하게볼수있다는점에서경계해야할것이다. 화가이경희는새로운도전과시도를두려워하지않았다. 이는단순히그가유화로매체를확장하고, 도자기화등다양한시도를했다는측면만을말하는것이아니다. 그의작품은수채화나유채화의매체의특성을극적으로부각시키도하지만, 다른한편에서는유화작품에서수채화의면모를, 그리고수채화에서는흔히볼수없는유화와같은묵직한무게감을담아내기도한다. 그가즐겨그린 우시장 시리즈에는이러한같은매체의다른표현, 다른매체의유사한모습까지도담고있다. 게다가수묵화의형식으로도수채화를사용하는등재료가줄수있는감각의범위를확장하고, 때로는그재료의특성을극대화하는등자신만의일가를이루었다고할것이다. 또하나, 예술가로서그를매우높이살만한점은자신의경험과예술적감성이발현되는때면언제
62 대구예술의힘 우시장 1973 watercolor on paper 76 106cm 우시장 1973 watercolor on paper 130.3X162.1cm
이경희李景熙화백 63 어느곳이든가리지않고그순간의감성을놓치지않고기록하였던열정적인태도에있다. 삼천여권을훌쩍넘는드로잉북은그가매순간의예술적감성을얼마나소중하게여기는지를보여주며, 끊임없는열정과노력을증명하는것이다. 그는이러한자산을축적하며자신의세계를구축하여왔고, 매순간의감성들은작품을통해풍부한조화를형성해나갔다. 자유롭고활달한만능예술인 그는개성과주관이강하여다른이들과충돌하는일도종종있었지만, 유머있고사교적인성격으로활발한사회성을동시에가지고있었다. 그는대구지역에머무르지않고많은국내외미술계인사들과교류하였고, 대외활동에적극적이어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중반까지여러차례해외전을개최하는등자신의활동범위와외연을넓혀갔다. 또한그의작품은도쿄, 뉴욕, LA의한국문화원에서초대를받는등공식적인대외활동도활발하였다. 특히 1964년일본교육시찰단을시작으로유럽, 미국, 대만, 인도등 30 여개국을여행하면서얻은시각경험은그의색채와감성을동시대어느작가보다도풍부하게만들었고, 그의작품세계를과감하고생동감있게구성하는데큰역할을하였다. 세계여행을계기로제작된작품에서는여행지에서의느낀감각을담아내고있으며, 이러한경험은그의근원적인미감을폭넓게확장시키는데기여했다. 그의활달하고자유로운기질은당시로는파격적인형식의작품과전시회를기획한것에서도알수있다. 1968년구룡포에서는바다전시를기획하여해변의정취를담은작품을선보이기도하였고, 다방에서의전시, 스키전등전시에도나름의주제와색깔을부여하였다. 또한전시중시연과같은이벤트로대중들과적극적으로소통하려하였다. 그리고개인전의프로그램을입장료로한다거나입장객들로부터입장권을판매하는등당시로서는파격적인전시형식과소통방식으로자신의소신과자신감을피력했다.
64 대구예술의힘 오페라투란도트 1989 oil on canvas 73X90.4cm 또한작품에등장하는풍부한감성의근원에는활달한체육인으로서의기질과재능을가진그의일면이자리한다. 그가수영, 스케이트, 스키, 롤러스케이트등의체육분야에서펼친활동은작가의사회적인외연을넓히기도했지만, 작품에서는그러한활동을즐기는순간의감각이표출되어있다. 작가는운동을하는동안의속도감이나바람이나물, 얼음, 눈과같은것에서느낄수있는촉각등물리적감각까지작품에표현하려하였다. 또한연주회, 오페라, 무용등다양한공연문화를탐닉하면서도이러한자극들을회화적표현으로전환하려하여, 일상의모든감각과감성을화면에담고자하였다. 이처럼이경희선생은젊은나이에대구미술계에화려하게등장하여, 이후활달하고광범위한활동으로많은이들의주목을받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의화력은 1993년부터 20년간거의단절되다시피하였다. 1957년 1회개인전을시작으로 1985년까지만 40여회의개인전을열정도로열정적이었던그는 1985년창작 40년기념전을개최하였다. 그리고 1990년과 1991년의개인전을끝으로오랜동안의공백기를가졌다. 개인사이지만한작가로서극복하기힘들었던아들의죽음과믿었던이의배신은스스로가정한원칙에서는한치의양보도없었던작가에게더큰충격이었을것이다. 그래서인지올해지난 3월 26일부터 4월 7일까지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열린작가의작품세계를회고하는전시에는 20여년간그의작품을그리워했던사람들의발길이줄을이었다. 20년의공백에도불구하고여전히두터운애호가를가지고있을만큼이경희선생의작품은시대를뛰어넘는감각과매력을가지고있으며, 이런매력은이제야선생의작품을접하는다음세대들에게도신선한충격이었다. 이경희선생은해방이후세대로한국화단에서스스로독창적인수채화세계를개척하고, 외연을넓혀온작가라할수있다. 그리고그의예술적성과가운데서도수채화는이인성이후세대가운데대구미술의특징을가장잘보여주는작가로지목될만큼특출한면모를보여주었다. 그의많은작품에는해방이후대구와그주변의풍경이나삶의모습이아름답게그려지기도하고, 전세계의풍광이펼쳐지기도한다. 그는대상이지닌아름다움을자신의언어로탐독해내었을뿐아니라일상을지배하는사소한감성들도반짝이는예술로빛을보게하였다. 그리고이러한예술적성취는그의빛나는재능뿐아니라, 아름다
이경희李景熙화백 65 움을찾는성실과열정을바탕으로한그의예술태도와삶을바탕으로하고있어, 지역예술계에여전히 큰울림으로남아있다. 아직도예술로소통할꿈과목표를가지고오래간만에돌아온노작가의식지않은 열정이다시한번피어나기를기대해본다. 지중해 1979 oil on canvas 130.3X162.1cm
66 대구예술의힘 최계복의 영선못의봄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소장
67 최계복 사진이라면대구의최계복, 회령의정도선 최계복선생의사진을설명하는데재미있는말이있다. 사진하면대구의최계복이고회령의정도선이 라는말이다. 1930,40 년대의사진공모전시대를염두에둔말일것이다. 아마이말은 떴다봐라안창남, 내려다봐라엄복동에서비롯되었을까, 항공기대회에서장안의주목을끈비행사안창남, 자전거경주에 영선못의봄 ( 최초작품 ), 대구, 1933 서우승한엄복동을두고유행되었던말일까, 그리고이유행어는 30년대까지이어져사단의최계복, 정도선을지칭한것은아닐까. 당시는일제시대라, 우리나라사람들이일본인들을이기기만해도이러한유행어로격려를아끼지않았으니까. 최계복의사진이얼마나감동을주었으면, 우리나라사람들사이에서나사진계를향해서도대구의최계복, 회령의정도선이라고했을까, 이말이유행했던것은당시대사진문화에근원했을것으로생각된다. 1920년대나 30년대의사진발표는표현의시대가아니라공모전의시대였다. 사진의우열은공모전으로판별되었으며, 모든사진은개인전, 전시위주의제도가아니었다. 모든사람들이다같은주제아래, 같은조건으로출품하고선발하는방식이었다. 이당시대의대표적인사진공모전은조선일보사가주최하던납량사진공모전과경성일보사에서주최하던전조선사진연맹전이었다. 그외에큰영향의사진행사는아니었지만일본에서하는사진공모전등이있었다. 선생은국내외의공모전에열성을보였으며, 대부분의사진활동은사진공모전에출품하기위한것이었다. 당시의사진활동이그랬던것처럼선생도여기에주목해국내의대표적인사진공모전에주옥같은사진들을발표해입상, 입선을했던것이다. 외국이라야일본이겠지만, 일본의오리엔탈사진공모전, 일본사진신보 의월례사진공모전, 오사카 아사히신문 남선판의사진공모전등에도출품했으며, 대구지방의사진공모전등에서도그명성을날렸다.
68 대구예술의힘 영선못 선생은주로이공모전를중심으로출품했는데, 출품했던시기는불과 20~30 년정도, 이기간이 대구의최계복이란명성이회자되던활동기간이랄까, 이기간에수많은, 주옥같은사진들이입상입선 되었다. 선생이 1933년에처음으로촬영한사진을 영선못의봄 과 항구의표정 등이라고하지만. 1936년에입선한 춘풍봄바람 을들어야할것같다. 1936년 4월입선한 춘풍 은 영선못의봄, 항구의풍경 등과같은시작품이아니라, 공식적으로입선되고출품했기때문이다. 그리고그가지향했고, 그를유명하게만든공모전입상입선에서얻은유명세의그시작이었기때문이다. 물론 영선못의봄 등과같은작품들은대구주변의피사체를사진기에담기시작했지만, 그의사진의특징은바로대구를피사체로한것이었고, 춘풍 도대구에서촬영된것이고당시의사진조류를찾게된첫작품이기때문이다. 물론처음에는경주의피사체들을사진화했다. 초기의선생의사진은신라고도인경주의피사체를재발견하게되었다. 천년고도인경주의여러유적들을메시지로우리에게그무엇인가를전달해주려고했다. 그가가시화한피사체는분황사, 석굴암, 안압지, 남산의석불등이다. 아름다운하늘과촌로와여인들을등장시켜시각적이고예술적인방식으로경주의목소리를전하려고도했다. 천년고도의모습을사진화한이작품은 경성일보京城日報 현상사진공모전에서 1등을차지했다. 당시의상금은 50원, 문화재를피사체로촬영해출품한사진작품이 1등을차지한것도처음이었다. 그러나다시대구와대구부근지방의피사체를찾게되고, 대구의피사체에주목하게된다. 아름다운우리강산을촬영한사진들 최계복선생이산악사진을하게된것은백두산원정에나서면서부터였다. 그때에촬영한사진들을
최계복의 영선못의봄 69 여인들, 1938 해녀, 1938 볼수있다는것도즐거운일이다. 특히백두산원정은울릉도, 독도. 제주도, 강원도오대산등으로이어 지고선생의사진세계를넓혀준요인이되었다. 이러한산악활동에참가하게된것은, 사진활동을산악활 동에접목하게되면서부터였고, 그산악활동과사진활동이접목된것은백두산등정에참가하면서부터였다. 백두산에는 1942 년에첫등장한다. 이때의백두산등정을가능하게했던산악회와의인연은해방된 후에도이어져조선산악회현한국산악회에참가하게된다. 대구지부결성을보게되고대구의산악인주병 진, 김동사, 양인식등과함께참가한다. 1946 년 10 월이었다. 울릉도독도탐사는조선산악회의큰행사이자경북대구지부결성후처음치르게된큰행사였다. 이때도최계복은보도사진반원으로이행사에참가하게된다. 그가찹가해촬영한사진등을서울의동화 백화점현신세계백화점에서공개전시도했다. 대형사진 281 점과도표표본등 650 점을전시한큰행사였다. 당시의보도사진반원들이현장에서생생하게촬영한사진들은 6.25 전쟁으로소실되거나방기되어거 의찾아볼수없게되었다. 다행스럽게도선생이촬영한몇점의사진이남아있어당시의독도모습을다 시볼수있게되었다. 그덕에그때의독도모습이무엇이고지금은어떻게변했는가를알수있게되었다. 1930 년대의선생의사진활동, 대구사진 대구의최계복이란이름이회자되던절정기는 1930년대후반기였다. 1937년 ~1939년이때는 조선일보 가주최한납량사진공모전에연 2회나 1등을했다. 1938년납량사진공모전에서 여름교외 라는사진이 1 등을차지했으며, 그이듬해 1939년에는 여름언덕 이라는사진으로역시 1등을차지했다. 매년 3백여점이라는응모작품과 20점정도를입상, 입선작으로선정하는이공모전에서연이어 1등을차지한다는것도
70 대구예술의힘 채빙 ( 금호강 ), 1940
최계복의 영선못의봄 71 1 朝鮮日報 1938 년 7 월 2 寫眞文化 誠實한테크니샨 제 12 호 1958 년 11 월 1 일발행 대단힌일이지만, 이행사가 4 회밖에계속되지않았다는것을감안한다면그의실상을충분히알고도남 을것이다. 선생이 1 등을했던당시 조선일보 에보도된심사평은이렇게되어있다. 금번응모작은작년에비하여질적으로나양적으로나장족의진보를보였는데특히응모작전 체를통털어보아일반적으로수준이높은것은기쁜일이었습니다. 매해드리는말이나이번도 사과따는여인들, 연대미상 무엇보다심사의기준으로 창의적작품創意的作品 에두어서입선을결정하였습니다. 결국걸작이란남의것을딴것이아니라자기독특한에스프리를발휘하는데서부터창조되기때문입니다. 그리고입상은일인일상一人一賞주의로하여입상작품의버라이티를받았습니다. 끝으로과제가 구름과물 인만큼두가지를합친작품으로모집하였는데이뜻이응모자에게철저지못한탓인지구름과물을따로따로떼어서취급한분이상당히많았으므로이러한작품도고려하였습니다. 1 이와다르게최계복의작품만열거한 사진문화 寫眞文化지의평은이렇게되어있다. 1958 년도에발행 된잡지였다. 주로이때 1 등한 여름교외, 여름언덕 으로작품의기술적인측면, 표현양식의문제, 작화 문제등을주로다룬내용이다. 이두작품은기술적인면사진촬영의직시성및인화와표현방법등총체적인것에서는완성의영역에들어선것들이었으며, 이와같이사진기술분야를줄달음친것은수년전화가가되겠다고일본으로건너간그때의정신과그후한국에서도사진을발달시켜야겠다는의지가기술로서의완성을이룬것이다. 2 여름교외 와 여름언덕 에대한설명은촬영장소가대구대명동과내당동이라는것, 대구에서대 구의소재를촬영했다는데의미가크다. 오늘날의입장에서보면썩신선하다고는말할수없을것이다. 뭉개구름이나흰옷을입은부녀자들이구름과어울린것처럼보이고구름속의한부분으로생각되기도
72 대구예술의힘 화원나루터, 연대미상 하고구름을향해걸어가는것과같은신비감을주는그런작품이지만오늘의관점과는다르다. 여름언덕 은언덕에있는재실을찍은것일까아니면정자나유산각일까? 그뒤로피어오르는뭉개구름, 측면에는시골할아버지가언덕위로올라가는장면도보이면서한줄기소낙비라도쏟아질것같다. 긴박감을주는그런화면으로나타낸사진이다. 두작품은대구의실상이고, 전라도에가서, 경기도에가서촬영한사진이아니다. 대구의피사체, 대구의향토를촬영한것이다. 대구에살면서대구를사진화할수없는것은대구를모르기때문이다. 자기가사는곳, 자기의향토를피사체로하지못함은자기가사는고장을모른다는것일것이다. 그런점에서선생은 1930년대후반에벌써이러한문제를파악하고있었던것은아닐지. 8.15 이후의사진활동 1945년 8월, 해방을맞는선생의사진에도전환기를맞고, 전환기가찾아온다. 그런변화는여러곳에서나타난다. 서울로의상경이라든지 6년후에미국으로이민을떠나게된것은더큰변화였다. 해방후의대구최계복사진기점은대구사진관과대구산악회의간판을내걸고사진관이나사진기점산악회는다시한국사진예술학원이되고, 그의나이도 44세무렵이된다. 사진학원얘기가나왔으니까, 한마디더하면, 이사진학원은하국사진사에서 6.25전쟁와중에설립된사진학원이었다. 전쟁중이라개강때와다르게시간이지나면서그열기는점차식어갔다. 당시의교사로서울의박필호, 대구의강영호, 이윤강, 김원영, 서동진, 백낙종박병수등이열심히가르쳤지만사진학원은잘안되었던것같다. 어쩌면이러한것들이우리나라사진의실체였을것이다. 그리고사진을취미로하는사람들이주를이루고있는데도문제가있으며사진과학문은별개로생각해서일까.
최계복의 영선못의봄 73 대구사진관 이러한어려운여건에도그는또다른사진을만들게된다. 영화의스틸사진이라고, 여기에참가하는일들이있게된다. 우리나라최초의스틸사진, 영화의기록사진일수도있고광고용으로찍게되었는지도모른다. 어쩌면춘향전을감독했던이규환감독과의인연이었을까, 당시이감독은춘향전을촬영한다고해서이곳을촬영장소로하고스탭들을데리고대구에왔을것이다. 이때선생도후배사진하는사람들과촬영을하다가기회를만나게되었을까. 당시의신문에는최계복이스틸사진을담당했다고되어있다. 선생의사진역정 선생이사진가가된것은일본경도京都에건너가면서였다고한다. 대구교남학교현재의대륜학교다닐적에는미술을하려고했다는얘기도있으나사진을하게되었다고한다. 그리고 17세때선생이일본에건너간것은순전히그림을하기위해서라고한다. 그러나일본화가밑에서사숙을하다가민족감정때문에그만두었다고한다. 그리고다시들어간곳이경도京都의영납사진기점永納寫眞機店, 이곳에서 7년동안공부를했다고한다. 선생은처음사용한카메라는앙고카메라였다. 앙고는독일의괴르츠사의간판사진기로렌즈는 F.8 을부착했다. 이사진기는일반사진가들보다사진기자들이선호하는기종이었다. 1920년대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신문사기자들이창간당시부터사용해왔던기종이었다. 그런사진기를일본에서구입해사용하는것은매우어려운일로생각되었다. 추측컨대독일제앙고카메라는일본쿄토에서구입한것이었으며, 대구지방에서처음사용한기종 이었을것이다. 건판으로촬영했던앙고카메라는우리나라에서얼마나더사용되었지는자세히알수없 으나, 선생이그후사용했던롤라이플렉스와무슨인연이있을까궁금한대목이다.
74 대구예술의힘 독도, 1947 사진을위하여 이글은 사진문화 寫眞文化에서발췌한글이다. 선생의사진과관련이있을것같아여기에옮겨적는다. 우리나라에서사진과함께괴로워하고사진을가지고싸우고사진에서기쁨을느끼어사진에서살아온사람을찾는다면그수는극히적을것으로안다. 그러나씨는이굴레속에서살아온사람의하나로언제나사진과생활을연결시켜오는데에사진가로서의씨의훌륭함이존재했다. 말하자면씨는사진을가지고애국할줄알며사진을가지고생활할수있는정신면의생활까지도유일의위인이었다. 일찍이작화면의모든기능을마스터한씨의작품은우리나라사단에서특수한위치에놓여있었고 서정적이면서도리알하며휴머니티를풍기는화조는일본사단의원로목촌이병위木村伊兵衛에흡사한점 이있다. 과거우리나라사단이밟아온길 - 빛과렌즈의작란에서씨도한동안벗어날수없었음은부득이한일이었고그후선진국가로부터흘러온신사조는씨의사진작화면에약간의켓숀마크를점찍었으며그후 6.25동란으로인한전지戰地의종군은씨의사진자체에정착을가져왔다할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현재의씨는기술면이약간더우세하기는하겠지만어쨌든표기술표현과사상내용이어느정도평행하고있음을본다. 지금으로부터 20주년전에경성일보사 ( 京城日報社 ) 에서열린현상에서 첨성대 로서 1등당선한것과일본부사富士콘테스트에서 여름강변 이 1등과 3등을차지한것과대구의현상모집에서 1, 2, 3등을다획득한그당시의작품에비한다면현재의작품은인간의비애와환희를표현코자한선상을걸어가고있음을엿본다.
최계복의 영선못의봄 75 3 寫眞文化 誠實한테크니샨 제 12 호, 1958 년 11 월 1 일발행 그후로 1등에당선하여수여받은컵과화병이 20여개, 2등이하로입선하여수여받은메달이 60 여개 - 이렇게놓고보면 80여회에걸쳐수상된씨는사진인의결합에도많은노력을하였으며대구사우회大邱寫友會를조직하여회장에당선된것을필두로경북사진가연맹慶北寫眞家聯盟, 대구사진사회大邱寫眞師會, 한국사진작가단韓國寫眞作家團등많은화장과단장의요직에있는씨는 작가란항상자신의주관만을생각해서는안된다 고말하여이로서부터오는폐단을지적하며 선배가지기의주관만가지고후배를지도하려는일은좋지못한일이다 라고후배양성의문제에언급하여 사진인은모름지기기술면을무시해서는안되며내용이충실할수록화면자체도무게를갖추어야만한다 고말한다. 이상과같이사진작가최계복崔季福씨는작화와후배양성의두가지길에비상한노력을하고있 는사람의하나로사진에서살고사진에서죽을각오와근지가완성되어있는위인이라할수있을것이다. 3
76 비평 & 리뷰 _ 음악 MUSIC REVIEW 우리음악과퓨전, 어떻게할것인가 언제부터인가예술과문화에있어서아주흔하게자주접하게되는말이퓨전 Fusion 혹은크로스오버 Cross-Over 라는말이다. 이말은서로다른영역을넘어그경계를허물고융합하여새로운그무엇을만들어내는여러가지시도들과그결과를일컫는아주역동적이고변화무쌍한말이다. 디지털기술의비약적인발전을바 탕으로정보와지식의범람과공유의시대를사는우리에게이제미래에대한모색은새로운영역의창조와발견, 혹은개 이상만 작곡가 음악평론가 척보다는이미축적해놓은다양한분야 의지식과정보, 그리고정서와영감에이 르기까지경계없는교환과중첩과융합 을통하여, 즉퓨전혹은크로스오버에의해다양하게이뤄지고있다. 이러한시도들은이제예술과문화뿐만아니라학문을비롯하여사회전반에걸쳐보편적현상이되어가고있다. 국악에서의퓨전현상은더욱두드러진다. 여러가지이유가있겠지만아마도국악의현재화즉, 전통에머물지않고현재의삶과정서가반영된새로운국악의시도와관련된것으로보인다. 이미보편적인용어가되어버려서어쩔수없이사용하지만국악이라는용어를사용하는것은마음을참불편하게한다. 이는우리전통음악이어느새주
77 류에서밀려나있음을나타내고, 또한우리의정서와풍토속에서내림으로우리네삶이반영되어형성되어온우리음악이불과한세기정도의굴곡진역사를겪어오면서이젠더이상우리의삶과정서를대변하지못하고있다는사실을반증하고있기때문이다. 이런관점에서새로운국악, 즉국악의현재화는매우중요하다. 따라서이러한움직임의주류를이루는퓨전국악에대해진지한점검이필요한시점이다. 현재연행되고있는퓨전국악을살펴보면아직많은혼란과난맥상을보이고있다. 대부분의시도란것이서양음악의조성음악양식을단순히수용모방하는단계에머물러있다. 우리전통음악을구성하는본질적인특성이나원리에대한천착이없이서양음악, 그중에서도가요형식의조성음악정도의기법과구조를모방하여이것에 5음계와장단 과국악기를대입하는정도의형식적인결합의단계에머물고있다. 이러한시도의대부분은퓨전이라기보다는전형적인서양양식의음악을연주함에있어서우리국악기가차용되는정도의수준에머물고있다. 비록창작음악이라할지라도그양식이이미서양음악의정형화된양식을그대로모방수용한것이어서전혀새롭다할것이없는음악들이대부분이다. 따라서서양음악과국악의융합이아니라국악에있어서서양음악양식의일방적수용에머물고있다. 그러니우리국악의본질적특성이나정서적발현은기대할 수없고그저좀특이한악기를차용하여억양과음색적인새로움을조금가미한서양음악이되고만다. 매우안타까운일이다. 더욱이서양의예술음악보다는상업음악의형식을빌어오는경우가대부분이어서예술적감흥과성취보다는감각적유희와오락을제공하는정도에머물고있다. 무엇을어떻게겹치고섞을것인가? 어떠한묶음이바람직한가? 퓨전에있어서자주물어야할중요한질문이다. 국악에있어서의퓨전, 무엇을무엇과어떻게할것인가. 이
78 비평 & 리뷰 _ 음악 MUSIC REVIEW 물음이바로이글의주제이기도하다. 이를논의하기전에우선어떤시도들이있었는가를먼저살펴보아야하겠다. 국악과서양음악과의융합은순수음악에서먼저시도되었다. 70년대무렵부터작곡계에한국전통음악의요소들을소재로한작품들이유행처럼많이발표되었는데, 한동안이것이나름큰조류를형성하고있었고현재도이런경향은부분적으로나마이어지고있다. 작품들의면면을보면매우다양한시도들이있었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그리큰성과로평가할만한것은선뜻눈에띄이지않는다. 우리음악의본질에대한깊은이해나경험이없이서양음악양식에준거한단순하고단정적인시각으로국악을바라보고, 그러한시각에서보았을때서양음악에없거나서양음악과달라보이는요소를국악의특성내지는본질적인요소로인식하고차용하였기때문에, 결국서양음악에장식적인정도의이국적음색과억양이가미된음악에머물수밖에없다고하겠다. 이런관점에서서양음악의외연을아주조금넓혔다고는할수있겠지만퓨전에의해새로운예술적가치나가능성을발현하는것까지는전혀미치지못한것으로보인다. 다음은프리재즈 Free Jazz 와의융합이다. 불세출의타악 연주가고김대환에서시작하여김덕수, 안숙선등의국악 명인들과서양의프리재즈연주가들이함께어우러진몇몇
우리음악과퓨전, 어떻게할것인가 79 작업이눈에띈다. 본디드럼주자였던고김대환은우리전통의무악과시나위장단을기반으로여러가지변용과실험을하였고형식을완전히파괴하고완전즉흥으로자유롭게연주하는프리재즈의작업을통해우리음악이가지고있는즉흥성과정신성을무한확장하여새로운지평을열었다. 이후김덕수와안숙선의좀더원형에가까운시나위풍의국악과서양재즈연주가들과의작업들도매우흥미롭다. 팝음악과의융합이가장흔하게접하는퓨전이라하겠다. 본디일렉기타리스트이자가요작곡가겸가수로활동을하던김수철은국악에심취하여천착하게되었고, 일렉기타산조를발표하면서본격적인퓨전국악의장을열었다. 한국적정서를바당으로영화음악과무용음악등의많은작품을발표하여각광을받았다. 특히 1988년서울올림픽개막식음악을담당하면서퓨전국악의작곡가로독보적인명성을얻었다. 김수철이후대학의국악과에서작곡을전공한아주많은작곡가들이배출되면서팝음악의다양한장르에걸쳐국악과의융합이시도되었고, 그결과가장보편적인퓨전국악의형태가되었다. 음악적양식을분석해보면팝음악의기본구조인비트가강한타악리듬과 3화음체계를기반으로한베이스를기초로구조를세우고그위에표층을이루는주선율과코드로색채감과공간감을표현하는구조를가지고있다. 다음은뉴에이지음악과의퓨전이다. 어쩌면가장대중적으로널리알려지고인기를얻은형태가바로이것이다. 뉴에이지피아니스트양방언의음악들이대표적인예이다. 영화음악이나드라마음악으로많이사용되면서대중적인기를얻었다. 음악적인구조는팝음악과크게다르지않다. 다만추구하는바가자연주의적지향을가지고있어서주로기악음악이주류를이루고, 악곡구성형식이자유롭고긴편이다. 전면에국악기들을내세워인상적인주선율을담당하게하여국악적색채를강조한음악들이다. 하지만전형적인뉴에이지음악의정신과기법을사용하고있다. 결국표피는국악의색채로포장되어있지만그내용은국악적인요소를찾기어렵고뉴에이지양식에충실한음악이되었다. 마지막으로자유로운모색의음악들이다. 피리연주자이자작곡가인원일을중심으로젊은국악연주자들로구성되어활동하고있는 바람곶 이나 푸리 의음악들이주목할만하다. 이들은서양음악의순수음악과팝음악뿐만아니라제3세계의음악들까지아우르며다양한퓨전을시도하고있다. 이들의특징은음악감독과작곡을담당하고연주까지함께하는원일을비롯하여모든단원들이모두다국악을전공한특출한연주자들이라는점이다. 따라서국악의특성을충분히체득하고있고이를바탕으로현대정서를반영한창의적인음악들을다양하게시도하고있다. 이러한시
80 비평 & 리뷰 _ 음악 MUSIC REVIEW 도들이나름충분한예술적성취를이루고있다. 하지만아직 3화음체계에의한기능적화성법의틀을벗어버리지못한점이매우아쉽다. 그럼에도앞에서살펴본여러시도들중에서가장바람직한것으로평가된다. 현재다양한장르에걸쳐다양한형태로연행되고있는퓨전국악을다섯갈래로나눠살펴보았다. 프리재즈 Free Jazz와의퓨전혹은시나위와재즈의퓨전, 그리고자유로운모색을통하여현대음악과제3세계음악을아우르는창의적퓨전등에서새로운음악으로서의퓨전국악의큰가능성을찾을수있었다. 하지만아직도서양음악적발상과양식과그기법이주류를이루고있고, 국악은그저악기의형식적인결합정도에머물거나단편적인악리적요소, 즉 5 음계와박자개념의장단기본형을기계적으로차용하는정도에불과하여진정한의미의퓨전이라기보다는이미정형화된기존의서양음악들의양식에국악적인요소가장식정도의의미로차용된기존장르의범주를크게벗어나지못하고있다. 서양음악에서는흔히 음악은수학이다 란말을한다. 음계와화음을보면이말이어떤말인지금방이해가된다. 즉음계의구성이나화음의결합은모두음이가지는진동수의비례관계에의해결정된다. 따라서서양음악의기본구조는바로음들의수학적물리적비례에의한건축적형
우리음악과퓨전, 어떻게할것인가 81 식의결합으로이루어진다. 즉서양음악의본질은음과음들의구조적결합에의한형식미에있다. 따라서음하나하나는건축을위한벽돌처럼일정하게규격화되어야한다. 그래야일정한비례와간격을가지는음계가만들어지고또진동수의비례에따라화음도쌓을수있다. 이런이유로서양음악은정확한음고와그유지가매우중요하다. 서양음악의모든양식은물론악기들도다정확한음고를내고그것을안정적으로유지하기위한방향으로개량되고발전을해왔다. 또한서양음악의역사는바로음악표현수단의확장과정이다. 서양음악의효시라할수있는중세시대에서부터르네상스시대까지즉, 그레고리안성가로대표되는단선율음악에서대위법적인다성음악에이르기까지음악의주된표현수단은선율이었다. 바로크시대는조성과화음의시대이다. 3화음을기반으로하는화성법이바로크시대에정비, 확립되었으며, 현재가장보편적인음악구성의수단으로사용되는기능적화성법즉코드진행의뿌리가되었다. 고전시대는음악의형식과악기음색의시대이다. 음악에있어서균형잡힌완벽한비례의건축적아름다움에대한관심이높은시기였다. 따라서이시기를통해소나타형식 을비롯, 여러가지음악형식들이정비가되었다. 또한악기음색이음악표현의중요한수단으로인식되어가장이상적인악기조합이다양하게시도되었고그결과여러가지정규편성의악기구성이정비되었다. 이렇게형식과악기편성의정비에의해관현악의형식이완성되었다. 낭만시대는음악양식으로는고전과크게다르지않지만고전시기에추구했던완벽한균형을벗어나음과악기의조합에의한색채적표현에집중한시기이다. 따라서주관적인상을표현하기위한색채적화성법과과장된음악형식이나악기편성이특징을이룬다. 근대와현대음악양식에이르기까지는매우다양한분화와역동적인양식의진화가있었지만형식파괴음악의해방, 그리고음악속에서공간감의재발견으로요약된다. 조성과형식은모두파괴되고무조음악이나타났으며화성도무한확장되어 3화음체계를완전히벗어나게된다. 또한음악에내재하는네개의공간, 즉시간과음고와셈여림과음색의공간을음악표현의주요수단으로재인식하고집중하는시기이다. 이에따라음색과텍스추어의극단적인대비셈여림의비연속적인변화와뜬금없는점묘적표현등이주로나타나게된다. 이렇듯서양음악은음의수리적체계를바탕으로그비
82 비평 & 리뷰 _ 음악 MUSIC REVIEW 례관계를조합하여음계와선율과화성과형식을이루고그것을더욱분화, 확장하는방식으로변화해왔다. 서양문화에서가지는음악에대한가장본질적인인식은바로음과음의건축적조합으로만들어지는그얼개가바로음악이라는것이다. 따라서모든음들은서로의비례를이루고지키기위해정확한음고와그것의일정한유지가전제되어야한다. 이에비해우리음악은사뭇다르다. 무릇모든음은사람의마음으로부터나온다凡音之起由人心生也 라는 예기 악기편에나오는말처럼동양에서인식하는음은단순한파동에의한물리적현상이아니라마음의움직임으로인식하는것이다. 따라서음자체가사람의마음에서시작되므로그하나의음속에이미인간내면의모든정서와사유가담겨있다고인식한다. 음은단순한재료가아니라이미완전한음악을내포하고있는것이다. 이러한인식은우리음악속에아주명징하게나타난다. 우리의전통악기들은그모양과음역과소리내기방식이다다르지만모두공통적인특징을가지고있다. 우선현악기를살펴보자. 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등을보면줄을받치고있는안족이나괘가무척높다. 특히해금이나거문고같은경우현길이의변화에따라음고를연주하는것이아니라현의장력을변화시켜서음고를연주한다. 이러
우리음악과퓨전, 어떻게할것인가 83 한구조는정확한음고와그것의안정적유지에매우불리한형태이다. 이런이유로서양의악기들은줄과지판의사이가매우좁다. 운지에따른현의장력변화와그에따른오차적음정의변화를최소화하기위해서다. 지판과줄의간격이넓을수 록, 안족이나괘의높이가높을수록현의장력변화폭은그만큼넓어지고, 따라서정확한음고를내기에어렵고또한그음고를안정적으로평탄하게유지하기가매우어렵다. 서양적시각에서보면매우불량한구조인것이다. 이는관악기에서도마찬가지이다. 아주오래전대금을배운적이있다. 선생님께특별히부탁을하여좋은대금을구입하였다. 오랜기다림끝에악기를받아불어보니평균율에익숙한내귀에몇개의음정이낮거나높은것이었다. 그래서악기가잘못된것이아닌지선생님께말씀을드리니 숙이거나제껴야지 하시는거였다. 대금의경우악기를바깥쪽으로제끼면음정이올라가고안쪽으로숙이면음정이내려간다. 또한숨의세기에따라서도음정이변화한다. 피리도마찬가지로입술에서를깊이물거나빼거나에따라폭넓게음고가오르내린다. 우리악기의이러한특징은바로음에마음을담기위한구조이다. 벽돌처럼일정한규격으로고착되어있는음에마음을담을수는없는노릇이다. 음은미묘한마음의움 직임에따라춤을추듯유동적이어야한다. 이를위해음은일정한음고와음색에매이지않고자유롭게움직여야하고, 이런표현을위해우리악기는음의유동성을최대한잘살릴수있도록만들어져온것이다. 우리음악엔결여가많다고한다. 서양음악의시각에서보면그렇다는말이다. 그런시각에서보면우선화음이없다. 우리음악엔본디 3화음을기반으로한화음체계가없다. 하지만화음이란게뭔가. 바로소리와소리, 즉음들의조화아닌가. 음의조화라는것이꼭음고의결합이어야하는가. 그건아닐것이다. 음과음의조화는음고의진동수비례에의한울림만이아니라음색과그시김새와셈여림과공간감과호흡의조화까지확장이되어야할것이다. 일정한음고에매여있지않은음들은그진동수가폭넓게변화하고있으므로일정한음정의비례를유지한다는것이의미가없다. 따라서우리음악엔그런음고의비례에의한 3화음체계은애초에필요하지않은, 오히려음악의이상을발현하는데방해가되는요소일뿐이다. 우리음악엔화음이없는것이아니라서양음악과다른보다섬세하고깊은화
84 비평 & 리뷰 _ 음악 MUSIC REVIEW 음, 즉더욱확장되고섬세한조화가있는것이다. 우리음악엔박비트, Beat 의단순한주기에의해형성되는 2박 3박 4박의정량적박자가없다. 대신긴호흡의장단이있다. 우리장단에익숙하지않은사람은그시종을알수가없어서매우모호하고난해한음악으로느끼기쉽다. 우리음악에서합주는내재된긴호흡을서로교감하는것에서부터시작한다. 박자를헤아려기계적인맞춤을꾀하는것이아니라내면의정서에숨겨진호흡을서로느끼고몰입하여그것을교감하며즉흥으로장단을치고합주를한다. 그렇게서로매이지않으며하나의조화를이루어내는것이다. 우리음악엔박자가없는것이아니라단순주기의정량적박자로부터해방된긴호흡의장단이있다. 우리음악엔서양의장, 단음계처럼전체를아우르는정비된음계가없다. 정악은 5음계, 판소리는 3음계를사용한다는것이정설처럼통용되고있으나실제로는이에대한많은반론들이있다. 살펴보면정악의음계는고려말조선초기에는 5음계의체계를보이지만중기후리로이어지면서한개의음이탈락하여 4음계화했다는논문이있고, 판소리역시 3음계가아니라 4음계혹은 5음계로보아야한다는논문들이있다. 이런현상은서양음악에서는도무지상상조차할수없는특징들이다. 그이유는무엇때문인가. 아마
우리음악과퓨전, 어떻게할것인가 85 도음의유동성때문에생기는혼란이라유추할수있다. 다시말해서머뭄없이폭넓게유동하고있는음을음계구성음으로묶어둘것인가아니면시김새로간주하여하나의음고로고정하지않고풀어둘것인가의문제인것이다. 구조에엄격한서양음악은그구조를유지하기위해서는음의체계가절대적으로중요하고확실한지배력을갇는다. 하지만우리음악은구조가아니라음자체가이미음악의본질을담고있기때문에구조로부터그만큼자유롭다. 따라서우리음악에서는음의체계는중요하지않고그지배력또한매우헐겁다. 우리음악엔형식이없다. 서양음악엔조화로운대칭구조의형식을매우중요한요소로여긴다. 그래서리듬, 멜로디, 화성, 형식, 음색을음악의 5요소라한다. 따라서서양음악에선이러한형식이온전하게보여질때음악의아름다움이발현된다. 서양음악에서는연주자가임의로악곡의길이를줄인다거나늘이는일은상상도할수없는일이다. 형식미를온전히재현하고느끼기위해악장의중간에박수를치는것도허용되지않는다. 하지만우리음악엔이런형식이없다. 산조의경우를예로살펴보자. 연주현장에서느끼는분위기와교감에따라연주자는길이를더늘이기도하고줄이기도한다. 또한중간중간에서로의마음을확인하며신명이나면청중이나연주자나구분없이목청껏추임새를넣기도하고박수를치거나춤을추기도한다. 음은 이미그안에음악적모든요소들이함축되어담겨있고, 이렇게음하나하나가이미음악의완성을담고있기때문에그건축적음의구조는무의미해진다. 따라서연주의시작과끝을따지지않고, 연주의시작과동시에정서적완전교감에이르게되고, 바로몰아의경지를서로나누는것이다. 진정한카타르시스를함께누리는것이다. 이제정리를하여보자. 서양음악은정확한음고와그비례관계에기반하여구성된음의구조물을음악으로인식하고있다. 음의완벽한구조를추구하는방향으로이론과악기와창작들이진화하여현재의양식이형성이되었다. 이에비해우리음악은서양과달리모든음은마음으로부터시작되는것으로인식한다. 음은음악을구성하기위한하나의부속품이아니라마음의움직임으로부터시작되어내면의정서나사유를함축적으로담고있는부분이자전체이다. 그러므로음의생명력있는유동성이매우중요하다. 만약음고를어느한주파수에고정하고그것을안정적으로유지하게되면우리음악의본질은죽어버린다. 우리음악에서음들은한곳에머물지않고끊임없이아주섬세하고폭넓게마음의움직임에따라유동한다. 이것이바로농현이고시김새다. 이런이유로우리의악기들은음을유동시키기에좋은구조로진화해왔다. 가야금과아쟁의안족과거문고의괘가매우높고, 해금의현과대의간격이매우넓은이유이다.
86 비평 & 리뷰 _ 음악 MUSIC REVIEW 우리음악에화음이없는이유도같은맥락에서설명할수있다. 깊은내면이실린해방된음들의조화가우리음악의화성즉하모니 Harmony 이다. 우리음악에 3화음체계가없는것은결여가아니라해방이다. 장단은맥이아니라호흡이다. 주변의공기를충분히느끼고마시고멈추고뱉는것이다. 맥처럼일정하게쉼없이기계적으로뛰는것이아니라가늘게천천히혹은가끔급하게깊이마시고멈추고안도하듯토하는것이다. 내고달고맺고풀고의추상적인틀이있지만그것이무엇인지는주관적인직관과연관이되어있어설명하기힘들다. 그런직관과즉흥에의한교감과합일이몰아의경지, 즉카타르시스에이르게한다. 건축적구조의음악형식은논리와지적인과정을요구한다. 물론그숨겨진구조를깨달아가는즐거움도충분히가치있고좋다. 하지만가끔직관을방해하고또한기억하고논리적재구성을하여야한다는정서적강박을느끼게하기도한다. 우리음악은첫소리가전체를통째로아우르는음악이다. 따라서음악형식에매이거나지적인능력에의존할필요가없다. 기억하거나유추의과정도필요없다. 염화시중의미소로깨달음을공유하듯이통시적으로교감하고몰입에이르게한다.
우리음악과퓨전, 어떻게할것인가 87 그럼이제어떻게 퓨전 할것인가. 그답은참간단하다. 우리음악의본질적특성을충분히고려해서다치지않게융합할일이다. 서양음악은기능적으로매우훌륭하다. 화성법같은악곡의진행기법이나악기의편성등이매우합리적으로조화와균형있게잘정비되어있다. 따라서이러한것을받아들이는것자체는결코나쁘지않다하겠다. 하지만그렇다하여서양음악양식을그대로도입하여그 틀속에우리악기를억지로끼워넣기식으로는곤란하다. 더욱이런상황에서우리악기를서양악기대용으로취급하거나서양악기의기능을흉내내도록강요하는것은더더욱큰문제라하겠다. 서두에서살펴보았듯이이제껏의퓨전음악들은나름다양한시도들을해왔고, 그중재즈와시나위, 그리고자유로움모색등의예에서의미있는결과를찾아볼수있었지만, 아직도이모든시도들은한결같이음악어법과양식에있어서확고하게서양음악을바탕에두고있다. 그틀속에우리악기와음악적요소들을부분적으로대입하는형식을취하고있다. 따라서서로의본질을다치지않고두양식이내용적으로융합하여새로운예술적가능성을들어내기엔분명한한계가있다. 아직진정한퓨전이라할만한양식은보이지않는다. 이제새로운모색이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서로 의본질을잘이해하고서로다른두가지양식의내용적융합을시도하여야하겠다. 서양음악에준거한우리의막연한동경과무조건적인추종, 그리고좋은음악에대한잘못이식된고정관념을벗는것부터시작하여야할것이다. 그런다음제일먼저우리의음악이상이무엇이고우리의삶과문화의바탕이되는정서가무엇인가를깊이성찰하고이를바탕으로서양음악을포함한다른문화권의음악들을받아들일일이다. 그렇게하여야서로의본질이살아있고그내용적인융합에의해획기적인새로운가치와가능성이열린다. 예술은다양성이생명이다. 어떤의미로든지획일과종속은예술에있어서죽음과같고, 가장경계해야할일이다. 해방을담고있는우리음악을바탕으로서양음악을포함기타타문화권의다양한음악들과융합하여형식과내용을모두아우르는새로운음악세계가활짝열리길기대한다.
88 비평 & 리뷰 _ 연극 PLAY REVIEW 안톤체홉의 벚꽃동산 이우리나라최초로공연된것은 1930년 12월이화여자고등학교강당에서였다. 당시이작품의연출을맡은이가바로대구출신한국최초의연출가인홍해성洪海星, 1894-1957이다. 홍해성은일본유학중 1921년김우진, 조명희등과함께극예술협회를조직하여방학기간동안부산을시발로하여함흥까지약 40여일간의순회공연을하여우리나라신극역사에 벚꽃동산 이아니고 벚나무동산 을선택하다 - 대구시립극단의 벚나무동산 을보고 - 최현묵 수성아트피아관장 본격적인첫이정표를세웠다. 그리고이당시김우진의희곡 김영일의사 를연출한경험을바탕으로대학의전공도예술학으로바꾸었을뿐아니라, 일본근대극의선구자인오사나이가오루小山肉薰의제자가되어그가세운일본근대극의요람이라할수있는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입단하여한국인최초의배우가된다. 그 가바로 1930 년귀국하여연출한두번째 작품이바로 벚꽃동산 이며, 또최초로흥행에성공하여당 시지식인사회에이름을알리게작품이기도하다. 현대사실주의희곡의대표적작가인안톤체홉의마지막작품이며, 최고의작품인 벚꽃동산 공연은여러가지측면에서그의미가자못깊다. 대구시립극단이 1998년 12월에이만택의 무지개 로창단한지 15년이흐르는동안, 비교적민간극단이공연하기어려운정통연극을공연하는
89 전통을이어나갔다는점, 섣부른각색보다는원작의내용을충실히살려내기위하여노력했다는점, 배우들모두가사실주의연기를충실히살려내기위하여사전에스타니슬라브스키연기법을다시공부하는등의새로운각오로임했다는점, 이외에도예술감독이자연출자인이국희는안톤체홉의 벚꽃동산 을자신만의작품, 나아가대구시립극단만의작품을만들기위해다양한방법으로연구하고의견을 수렴하는등의노력을기울였다는점이그렇다. 그런노력중대표적인것이기존 벚꽃동산 으로번역되던작품의제목을 벚나무동산 으로바꾼것이될것이다. 러시아어로 Вишнёвый сад, 영어로는 Cherry Orchard, 즉버찌밭혹은버찌과수원정도로직역될수있다. 벚꽃혹은벚나무, 어떤제목으로번역해도큰무리가없다. 문제는작품의제목이주는느낌이작품의분위기와메시지에아주큰영향을미치게되는데, 이번대구시립극단은기존의 벚꽃동산 대신에 벚나무동산 이라는제목을선택했다. 올바른번역과해석을위한것이라하기에는작품이미지에미치는영향이많다. 일단 벚꽃동산 이라고하면, 벚꽃 이주는이미지로인하여봄날에화려하게피었다가일시에사라지고마는, 즉일회적이고덧없는삶의회한과같은느낌을주게된다. 그 러나 벚나무 로하자면, 벚꽃 이주는그런일회성보다는일년사계절우뚝서있는나무, 그자체를느끼게된다. 그리하여 벚꽃동산 이라고하면, 몰락해가는라넵스까야귀족가문의삶, 그구성원들하나하나의어리석을정도의비현실적선택과환상에대한연민의감정이강하게솟구친다. 그런반면, 벚나무동산 이라고하면, 몰락해가는오늘의라넵스까야가족보다는가문의모습, 즉오랫동안이곳을지키고가꾸어온세월에대한느낌이강하게다가선다. 그리하여현재라넵스까야가족들의현재모습보다는결국모든것이팔려나가고결국도끼질에잘려나가는벚나무동산의운명, 즉시대변화로인한가문의몰락이라는비극성에더강한느낌을받게된다. 결국작품은라넵스까야가문사람들하나하나에초점을맞추느냐, 그가문에초점을맞추느냐로귀착하게된다. 그러나안톤체홉은자신의작품 벚꽃동산/ 벚나무동
90 비평 & 리뷰 _ 연극 PLAY REVIEW 산 을희극작품이라고말했고, 연출가스타니슬라브스키가오히려 드라마, 즉비극작품으로만든것에대하여대단히화를내었음을환기해볼필요가있다. 극의흐름이나상황으로보아, 희극이될수없는작품을안톤체홉은 희극 이라고굳이규정했으며, 또자신의가장친한친구이자동지인제작자단체코와연출가스타니슬라브스키에게왜화를냈을까? 그는자신의죽음을예감하는마지막순간 8개월에걸쳐쓴이작품이희극이라는데에는분명히그만한이유와논리가있다. 벚나무동산 에서극작가체호프가강조하고자했던것은결코드라마가아니었다. 어쩌면그것은어릿광대들이소란스럽게한바탕놀아버리는새털처럼가볍고희화적인 광대놀음 일지도모른다, 각자나름의사연을안고살아가지만, 그렇다고지나치게무겁거나진지하지않은인간들이한데모여서끓이는부대찌개나섞어찌개일지모른다. 어차피생이란것은근본적으로통속적이고우울하며허접하고빈곤한그무엇아니겠는가? 김규종, 벚나무동산 프로그램. p. 19 이번공연의번역자인김규종교수의언급대로안톤체 홉은라넵스까야가문의몰락보다는그과정중에보이는
벚꽃동산 이아니고 벚나무동산 을선택하다 91 인물들의 광대놀음 을통하여인간군상들의희극적모습을보여주고자하였다. 여기서희극적모습은전통적인희극관, 즉아리스토텔레스가이야기한, 비천한인물들의우스꽝스런짓거리가아니다. 평범한인물이나고귀한인물이나모두에게해당되며, 그들이하고있는행위가비록진지하다해도, 결론적으로비현실적이고비이성적인, 그래서야기되는 슬픈헛웃음 같은것이이작품도처에깔려있다. 그러나이번대구시립극단은그와같은희극적요소보다는스타니슬라브스키가선택했던드라마로서 벚나무동산 을선택했다. 이미제목에서그런의도가들어났기도했지만, 배우들의연기스타일, 육중하고무거운구도의무대디자인등에서그렇다. 배우들은정확한발음과호흡을바탕으로각자의캐릭터를뚜렷하게설정하여표현하였다. 그리고그캐릭터표현은 광대놀음 보다는 드라마 의연기자모습이었다. 대표적인장면이 3막에서라넵스까야와뜨로피모프와의대화장면이다. 사실이장면은그렇게진지하고슬프며, 격한감정이오가는장면이아니다. 라넵스까야는형편이되지도않으면서도돈을빌려파티를개최하고, 경매결과를기다리고있다. 그러나이미그결과가그다지좋지않을것이라는것을알고있으며, 어차피이곳을떠나다시파리로돌아가야한다는사실을알고있다. 그점은파리에서온전보를보이
92 비평 & 리뷰 _ 연극 PLAY REVIEW 며, 자기가버리고온애인을사랑하며, 돌아가서돌봐야한다는것에서드러난다. 그러나그마음을감추고이런저런이야기를늘어놓는다. 그대상이꼭뜨로피모프일필요도없다. 그리고뜨로피모프역시지금라넵스까야가늘어놓은대사에대하여그다지진지하게듣지않으며, 또그녀를동정하거나이해하고자하지않는다. 오히려그녀를타박하고조롱한다. 뜨로피모프의관심은그럴듯한말로아냐를유혹하는것이며, 그런자기를방해하는바랴를멀리떼어놓을궁리만한다. 그러나이장면에서라넵스까야역의백은숙과드로피모프역의김재권은초지일관그리스비극의주인공들처럼연기한다. 백은숙은격정적으로자신의비극적감정을토로하고, 김재관은그녀를충고하고힐난한다. 그들은마치대립하고있는듯보인다. 서로의가치관이출돌하는듯보인다. 그래서라넵스까야가대사중갑자기뜨로피모프를향해 턱수염이우습게생겼다 다고하는말이뜸금없고, 또뜨로피모프가대사를마치고퇴장하다가계단에서굴러떨어진것이무엇을의미하는지알수없게만든다. 이와같은해석과연기는로빠힌의연기에서도드러난다. 로빠힌은누구인가? 과거라넵스가야가문의농노후손이다. 그는자기말대로이집의부엌에조차출입할수없는존재였다. 그러나그는사회변동기에적절한수완을발휘하
벚꽃동산 이아니고 벚나무동산 을선택하다 93 여돈을많이번상인이다. 그리고단순히수완만좋은것이아니라, 새벽 4시부터밤늦게까지일하는사람이기도하다. 단순히상인이라고돈만밝히고, 돈없는상대를괄시하는자린고비형인물이아니다. 그는진심으로자신의과거영주인라넵스까야가문을위하여충고하고조언한다. 거의시간이날때마다영지를지킬수있는대책을이야기하지만, 들어 주지않는다. 그런그의행동에는라넵스까야부인에대한 호감으로부터시작한다. 1 막이시작하자마자그가하는대 사를보자. 장가갈때까진나을거예요. 라고말씀하시더군. 라녭스까야아주머니가외국에서 5년이나사셨으니 지금쯤얼마나변하셨을까. 참좋은분인데. 부드럽고, 뭐랄까. 담백하고. 기억나. 내가열다섯살때, 돌아가신아버지가이따만한주먹으로내코를때리는바람에코피를흘린적이있었지. 그때아버지하고난어떻게돼선지여기정원으로오게됐어. 아버지는한잔들이킨후였구. 그러자아주머니가지금도똑똑히기억하지만그땐정말젊고날씬하셨어. 나를세면대있는곳으로데리고가더니, 그래, 이방이야, 이 꼬마들방 이었어. 그러고는 농사꾼도련님, 울지마세요. 그런감정을증명하는장면은 4막에서라넵스까야가로빠힌에게바랴에게청혼하라고권하자, 그는이렇게대답한다. 솔직히저자신도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지자꾸이상하게꼬여버렸어요. 시간이있다면, 저는지금당장이라도준비가되어있어요. 당장결정을지어버릴수있지만아주머니가안계시면, 아무래도청혼을할수없을것같아요. 진한글씨부분이중요하다. 무엇을의미하는가? 로빠힌이가지고있는벚꽃동산에대한감정은바로어린시절을자신을따뜻하게감쌌던라넵스까야부인에대한기억이다. 그러기에그는라넵스까야부인이파리에서돌아오자마자영지를계속보유할수있는현실적인대책을제시하고, 또돌려받을수없다는것을알면서도돈을빌려주는것이다. 그는결코 예전주인들이아직벚나무동산에
94 비평 & 리뷰 _ 연극 PLAY REVIEW 머무르고있는그시각에도서둘러벚나무에도끼질을해대는행악질을감행하는 < 벚나무동산 > 프로그램. p. 19 인물이아니다. 그는오히려도끼질을멈추라고지시한인물이다. 물론도 끼질의시작이어떻게시작되었는지작품에는명확하게드러나있지않다. 그렇다면로빠힌의연기는어때야하는가? 그는적어도막돼먹은상인의모습이라든가, 자신의충고를진지하게듣지못하는라넵스까야부인에게화를낸다거나신경질을내서는안된다. 또한그저형식적이어도안된다. 그는진심으로그들을아끼고, 존중하며, 또영지가보존됨으로써라넵스까야부인을포함하여그가족들과함께있고싶어해야한다. 그렇게될경우, 그는바랴에게청혼도할수있다. 그러나라넵스까야부인이없다면영지도바랴도아무의미가없는것이다. 그런점에서 1막에서처음으로로빠힌이라넵스까야부인과만나서하는대사장면이중요하다. 로빠힌은들뜬마음으로라넵스카야부인을기다리다가그녀일행이들어오자, 그들을따라다닌다. 그러다가거의떠나갈즈음, 힘들게말을꺼낸다. 이제그만가봐야겠습니다. 유감스럽게도새벽네시에하르꼬프로떠나야합니다. 당신을보고싶었죠. 얘기도하고.
벚꽃동산 이아니고 벚나무동산 을선택하다 95 여전히아름다우십니다... ( 중략 )... 우리가예프선생님께서는절비천한 놈이니, 구두쇠니하지만, 전조금도그런것엔신경안씁니다. 그저아주머니만절믿어주신다면좋아요. 그아름다운감동적인눈이전처럼만저를보아만주신다면그뿐입니다. 저흰대대로여기의농노였습니다. 하지만아주머닌나에게그렇게신경을써주셨으니어찌잊겠습니까, 당신을가족같이사랑합니다. 아니, 그이상으로... 진한글씨, 필자 무엇을의미하는가? 로빠힌의라넵스까야에대한감정 이잘드러나있지않은가? 그럼에도불구하고이번공연 에서로빠힌역의천정락은일반상인들이시장에서상거 래하듯형식적으로대사를던진다. 그러면라넵스까야는그 냥건성으로웃어넘기며, 딴소리를지껄인다. 그저의미없 는대사의연속이다. 감정과내면의흐름이없이주어진대 사와동작을반복한다. 그가결국마지막에 5 만루블을빌 려주겠다고하는장면역시그렇다. 5 만루불은이작품에 서영지전체가 9 만루블에경매되었다는것을감안하였을 때, 굉장히많은금액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그제안을하 는로빠힌도건성으로말하고, 듣는사람들도건성으로듣 는다. 5만루블의무게가전해지지않는다. 아니, 로빠힌의마음이무대에서표현되지않은것이다. 결론적으로이번대구시립극단의 벚나무동산 은기존 벚꽃동산 의인간심리의미묘한감정의흐름보다는비극으로가는과정으로서인물들만있었다. 벚꽃처럼아름답지만어느순간사라지는덧없는인간사를씁쓸한미소로바라보는것이아니라, 벚나무처럼버티다가한순간에잘려나가는어리석은인간들의운명을보여주려고했다. 그러나그런선택은안톤체홉의입장에서는바람직하지않았다. 어쩌면스타니슬라브스키가 110년전초연때선택했던방법이었을지는모르겠다. 그러나그때나지금이나그러한선택은안톤체홉의마지막 8개월, 죽음으로매달린마지막작품에대한진지한태도는아니라고생각한다.
96 비평 & 리뷰 _ 무용 DANCE REVIEW 대구시립무용단 달구벌블루스 - 사랑했지만 김예림 무용평론가 대구시립무용단제 63회정기공연 달구벌블루스 가박현옥예술감독의안무로 5월 28일 ~ 29일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공연되었다. 사랑했지만 이라는부제를달고있는 달구벌블루스 는대구출생포크뮤지션故김광석의음악을현대춤으로해석한작품으로, 대중가수의음악을사용한것이대구시립무용단에게이례적인일이라고할수있지만춤의내용을보면무용단의정체성 을잘유지하고있는작품이다. 달구벌블루스 는 달구벌 이라는옛지명에서볼수있듯 대구 를배경으로하고있다. 대구의밤과아침, 낮, 오후와저녁이라는시간의흐름을통해반복되는일상속삭막함과무기력함을표현한이번작품은제목에서말해주듯 블루스 라는리듬으로과거를상기시키며현대도시인 들이느끼는고독과상실감을그려냈다. 시간별로 반월당의불빛, 도시의아침, 킬힐을신은여자들, 지루한오후의판타지, 사랑이던가?, 그날의블루스를추면서 등 6개의장으로구성된 달구벌블루스 는각장마다故김광석의곡을새롭게편곡하여대구시립교향악단과국악단의라이브연주로생생함을더했고대구시립합창단의출연으로이색적볼거리를만들어냈다.
97 음악을맡은작곡가박영랑은우리귀에익숙한 거리에서 를클래식하게, 먼지가되어 를펑키스타일로편곡하는등대중가요가현대춤과만나이질적충돌을일으키지않도록다각적시도를했다. 그밖에 두바퀴로가는자동차, 사랑했지만 등김광석의대표곡들을사용하며원곡의익숙함과새로운편곡의균형을맞추었다. 음악이큰비중을차지하는작품이지만시각적요소또한이작품의중요한요소였음을빼놓을수없다. 청산별곡 에서무대세트이상의수준높은미술작품을보여주는등박현옥예술감독의많은작품에무대를담당했던김종석은이번무대를한층가볍고경쾌하게해석해냈다. 다양한크기의철제프레임으로딱딱한도시의풍경을표현했는데, 이철제프레임들은무용수에의해이동되어겹쳐지기도, 기울어지기도하며다양한그림을만들어내는조형물이되기도했다. 고정된배경이아니라무용수신체와함께춤의일부로작용한것이다. 일상복과운동화, 하이힐, 우산등의상과소품사용에있어서도현대인의일상과김광석의노랫말등에통일성을부여하고자한의도가엿보였다. 춤은어떠했을까? 많은요소들이대중성에초점이맞 춰져있는가운데춤이순수성을잃지않은점은이번작품 의완성도를높이는큰이유가되었다. 자칫대중성이라는
98 비평 & 리뷰 _ 무용 DANCE REVIEW 코드를지나치게인식하다보면춤이변질되기쉽기때문이다. 현대춤이갖는상징성과은유, 고난도테크닉을통한미적가치를포기하지않은춤안무는김광석의음악으로관객을초대한후현대춤의깊이를자연스럽게경험할수있게한현명한선택이었다. 특히주역을맡은김홍영과박정은의듀엣은 달구벌블루스 의백미로꼽을만큼수려한것이었다. 사랑에빠진연인의모습을춤춘두사람은무용수로서좋은신체조건과테크닉의안정감, 세련된무대매너등으로작품전체의수준을끌어올리는역할을해냈다. 최근두사람을비롯한 6-7명의신입단원선발은대구시립무용단의춤수준을눈에띄게향상시켰으며, 이는박현옥감독이예술가로서의몫외에무용수양성에공을들이는교육자의역할또한중시하고있다는것을보여주는것이다. 지난 3년간나타난단원들의기량향상은국내국공립단체가운데정단원을두고있는유일한현대무용단체로서보여주어야할모범적모습이아닌가생각된다. 여성무용수들이높은힐을신고등장한낮의풍경 킬힐을신은여자들 도인상적장면으로꼽을수있다. 도시의낮을표현하며킬힐의여성들이등장하지만바쁜일상이나빠른템포의춤을보여줄것이라는예상은통속적발상에불과한것이었다. 아름다운여성들은그아름다움을
대구시립무용단 달구벌블루스 - 사랑했지만 99 유지하기위한킬힐속지친삶과회의, 사랑을느린템포로표현했다. 거리에서 를어쿠스틱버전으로편곡한음악은도시여성들의나른한오후를장식했고, 킬힐을신고벗거나손에들고춤추는무용수들은화려한하이힐의서글픈이중성과함께섹시한여성미를드러내기도했다. 그밖에도인상적인장면들이많았지만이작품의의도가가장극명하게드러난것은 사랑했지만 을관객과함께부르는마지막장면 블루스를추면서... 였다. 이장면에서관객들은객석곳곳에놓인우산을펼쳐들고합창단과함께큰소리로 사랑했지만 을부르며무대를가득채운출연자들과함께작품의일부가되었다. 이날의합창은좁은노래방안에서기계음에맞춰부르는노래와는비교할수없는카타르시스를느끼게해준것이며아마관객들은현대춤을통한특별한예술경험을오래도록잊지못할것이다. 달구벌블루스 에서현란한도시의불빛, 비틀거리며질주하는자동차, 그리고무엇인가를죽이려는듯날을세운킬힐을신은여자들의발걸음으로표현한삶의무게는무겁고가파르게보인다. 하지만, 지루한삶의틀에갇힌채항상정신적인자유로움을갈망하는도시인들의모습과그들이꿈꾸는자유를유려한춤과유희로풀어내며관객들에 게 희망 이라는이미지를여운으로남겼다. 안무자박현옥은 순수예술이라는틀을확장하고현대무용의다양성을표현하기위해서 이번작품을만들었으며 이러한음악적장치를통해중 장년층에게는과거에대한향수를, 청년층에게는지나간시대에대한진한매력을선
100 비평 & 리뷰 _ 무용 DANCE REVIEW 물해남녀노소모두가공감할수있는무대를만들것 이라고안무의도를설명했다. 그간장편의문학이나고전, 철학적주제를다루면서도대중의공감대를고려한요소들을빼놓지않았던박현옥감독의작품성향이고수되고있음을느끼게해주는대목이다. 이에덧붙여 지루하고의미없는일상속에서우리는소박하지만아름다운꿈과기억에서사라진오래전의몽롱한향수를불러일으킬수있다. 그것은아주희미한환상일지라도따스한사랑의기운으로일깨우면서희망을전해주는것들이라는스토리를춤으로풀어내고싶었다. 고한다. 대작으로구분되는작품을만들기위해냉철한판단력과추진력을발휘하면서도사람냄새나는따듯한감성을잃지않는안무자임이드러나는대목이다. 1982년자신의무용단을창단한박현옥감독은문학, 설화, 고전음악등다양한소재를현대춤으로풀어왔으며, 대구시립무용단취임후 바하가만난아리랑, 시인이상화의마돈나, 청산별곡 등파격과실험보다는현대춤의정통성을지키며탐미적이고문학적인작품들을안무해왔다. 대중적코드보다현대춤의순수성에무게를실은작품이많았기에안무뿐아니라직접대본을쓰기도한이번 달구벌블루스 가더욱이례적이고새롭게다가오는것같다. 박현옥감독이왜이런선택을했는지그의춤역사를살펴보면조금이나마유추할수있을것같다. 오르한파묵의 내이름은빨강 처럼문학작품을재해석한작품도많았
대구시립무용단 달구벌블루스 - 사랑했지만 101 지만 재즈와굿거리로푸는춤-로미오와줄리엣, 바하가만난아리랑 등음악을소재로한작품들도여럿있었고, 꽃본듯이날좀보소, 바하가만난아리랑 등에서대중성을염두한결말을만들어낸것을보면오늘의 달구벌블루스 가갑자기파격을선택한것이아님을알수있다는것이다. 한가지변화라면현대춤으로풀어낼수있는다양한소재들을깊이있게파들어가던박현옥감독이젊은날의치열함을벗고한층여유로운안무를보여주었다는점이다. 이제삶과예술모두많은사람들과공감할수있는단계에이른것이아닐까? 이는피카소가스페인내전을다룬대형화 게르니카 같은작품을그리던시기를벗어나한층노련한경지에이르러서자녀들을위해비둘기황소등대중성짙은그림을그린것이나, 앙리마티스가자신의작품색을완성한후단순한색종이오리기에전념한것처럼많은예술가들이난이도높은예술세계를경험한후군더더기를버리고많은대중과공감하고자하는것과다르지않다. 어렵고복잡한것, 모호함속에의도를감춘것이수준높은예술이라는생각은이미많은예술가들이던져버린것이다. 쉽게설명할수없다면당신은그걸충분히잘안다고할수없다. 고말한아인슈타인의말처럼춤을충분히잘알고있는무용가라면쉽게풀어낼수있는것이다. 물론좋은무용수와공연여건이확보되었을때그깨달음은빛을발할수있고, 기량이향상된대구시립무용단과우수한스텝들이만난이번공
102 비평 & 리뷰 _ 무용 DANCE REVIEW 연이그좋은예를보여준것이다. 쉬운것 은 수준이낮은것 과그의미가같지않다. 음악에 easy listening music 듣기편한음악 으로구분되는장르가있는데대중음악도, 아동용음악도아닌수준높은연주곡들이많다. 시대가지나도그아름다움과편안함으로꾸준히많은매체에서사용하는음악이다. 현대무용작품도이런관점에서지속적으로공연되는레퍼토리가있다면보다많은관객이춤무대를찾게할수있을것이다. 그런측면에서이번 달구벌블루스 를 easy feeling dance 쉽게느낄수있는춤 라고부를수있지않을까? 쉽고편하게느낄수 있는춤, 그것은시립무용단이지역관객들에게줄수있는 선물일것이다. 이번 달구벌블루스 공연을이야기하면서쉽고편한춤, 대중성높은춤등의언급이많았지만이것못지않게중요한것이수준높은예술성이다. 이두가지의균형을맞추는것은현재안무가들의과제이자, 춤무대를찾는관객의감상포인트일것이다. 이상적인춤공연을위해 대중성은예술성에반하는것 이라여기는무용가나 현대무용은어려울것 이라는고정관념을갖는관객모두한발씩양보한다면좋은결과를얻을수있을것이다. 달구벌블루스 에서춤과관객이한걸음씩내딛어거리를좁힌것처럼말이다. 문학가이자평론가였던오스카와일드가한말중 예술은
대구시립무용단 달구벌블루스 - 사랑했지만 103 결코대중적인것이되려고해서는안된다. 대중이예술적인존재가되려고해야한다. 는말이떠오른다. 아직은가야할길이멀지만적어도이번 달구벌블루스 무대를찾은관객들은펼쳐든우산아래서잠깐이나마예술적존재가되었을것이라확신한다. 그여운이오래도록그들을춤무대로이끌기를바라면서매공연발전의모습을보여주는대구시립무용단과박현옥예술감독에게박수를보낸다.
104 비평 & 리뷰 _ 대중문화 PUBLIC CULTURE REVIEW 노래의길을하늘로낸김광석, 그의길을묻다 - 영원한가객김광석가상인터뷰 - 권미강 어쿠스틱뮤지컬 바람이불어오는곳 홍보프로듀서 노래가끝나면늘하는말이있다. 그의트레이드마크 같은, 행복하세요. 그의얼굴도행복해보였다. 웃으면눈 가와입가로주름이가득한영락없는하회탈이다. 그얼굴 을보고누군들행복하지않을수있을까. 그런모습으로늘 우리곁에있을줄알았다. 그가즐겨찾던홍대나대학로 그리고인사동의골목길어디, 잘보이지않는간판이바람 에흔들리는허름한카페같은곳에가면 분명있을줄알았다. 그리고며칠쯤, 김 광석라이브콘서트 이런글자가박힌포 스터가그카페골목에두어장쯤붙어 있을줄알았다. 노래로세상사람들과오랫동안만나 고싶어했고우수에젖은목소리로 너 무아픈사랑은사랑이아니었음을 을불 러슬픔을끊임없이밀어넣어줬지만이내 일어나 로희망한줌던져주던사람이었으니말이다. 1996 년 1 월 6 일새벽 4 시 30 분쯤그는돌연자신의길 을이승에서하늘로틀어버렸다. 한마디말도, 변명거리글 한장도남기지않고. 이유도영문도모르고그를떠나보낸 사람들은말그대로남겨진사람이가져야하는멍한기분 에휩싸였다. 그와특별한인연이있던사람도, 그와개인적 인대면은없지만그의노래만은누구보다도좋아했던사람
105 김광석사진임종진사진작가 도, 라디오에서가끔흘러나오던그의노래를듣던사람도 그의부고는참낯설고견디기힘든소식이었다. 그렇게세월이흘렀다. 그를기억하고사랑하는사람들이모여매년추모제도지내고추모콘서트도열었다. 또그렇게세월은흘렀고그의부재는이제일상이됐다. 하지만그의노래는여전히불리고있다. 누구나가고싶을때가고, 듣고싶을때듣는, 그의노래는주인없는카페에서듣는노래가됐다. 김광석, 다시부르기콘서트 는지금까지 진행되고있고그의노래를담아낸뮤지컬도만들어졌다. 그의노래는더영원해졌고그는노래의영원한주인이됐다. 영원한가객 ( 歌客 ) 김광석. 하늘소극장에서여전히라이브콘서트를하고있는그를만났다. 그리고그가노래의길을하늘로낸이유를들어보기로했다. 강 쭈볏쭈볏안녕하세요. 석 나를보고그냥웃는다. 하회탈같은웃음 강 바짝다가가서잘지내시죠 ^^. 석 쑥스럽다는듯 씩 웃는다. 김광석, 그를대면하다그가불렀던 흐린가을하늘에편지를써 처럼흐린가을하늘이아닌눈부신연둣빛하늘. 하늘소극장은그언저리에있었다. 구름으로된문을열고들어가니무대중앙에서하모니카를불고있는그가있었다. 기타는그와한몸처럼적당히그의배에닿아있었다. 그의웃음은여전히촌티났다. 그촌스러움이참좋다. 사람냄새나는촌스러움. 그가세련됐다면그의노래가그리가슴에와닿았을까하는생각을문득해본다. 시간이별로없다. 그는공연을해야하고나는다시일상으로돌아가야했으니인터뷰는서둘러진행했다. 그동안궁금했던것을두서없이물어보기로했다.
106 비평 & 리뷰 _ 대중문화 PUBLIC CULTURE REVIEW 강 왜떠나셨어요? 첫질문이너무도발적이었나? 석 1995 년 8 월즈음인가요? 공연이중반을넘어섰고 다들축하해줬지요. 열심히했다고, 특종이라고악 의없는칭찬들을해주고, 하지만내마음속에일 고있는허전함은무엇때문인가? 나를치열하게 해준것은무엇이었나? 후회도보람도아닌그저 살아있음에움직인 그움직임이불쌍하고무료 했어요. 사람들이, 울고웃고박수치는그사람이, 사람들이무료했어요, 즐겁지않는이유를모른체 난여전히즐겁지않았지요. 가라앉는것인가? 무 섭구나 이런생각이들었어요. 그리고 5 개월만 에이곳으로왔지요. 아직도모르겠어요. 그런데 편안해요. 아무생각없이내가부르고싶은노래 만부르면되니까요. 예의그하회탈웃음이다 강 처음부터너무센질문이어서죄송해요ㅠ. 너무아쉬워 서요. 고향이대구라고해서참반가웠어요. 대구에는 김광석벽화길도있는거아시죠? 많은사람들이벽화길에 와요. 거기에가면항상김광석씨의노래가흘러나오죠. 석 제이름이붙은길이있다니참좋네요. 후후. 음, 대구중구대봉동에서정확히 1964 년 1 월 22 일태 어났어요. 3 남 2 녀중막내예요. 아버지가자유당
노래의길을하늘로낸김광석, 그의길을묻다 107 김광석벽화길 정권시절에교원노조사태로교단을떠나고 68년도에서울창신동으로이사왔어요. 그러다대구에계신할머니가쓰러지셔서다시대구로내려갔지요. 동덕국민학교로전학갔는데한 2년정도다닌거같애요. 그러다가 6학년되던해서울로다시이사와서졸업은창신국민학교에서했지요. 대구에서의기억이나네요. 토끼도기르고야구도하고그랬는데..., 앞이빨이나온토끼가어찌나귀엽던지.. 후후후. 대봉동참그립군요. 강 음, 본인이음악에소질이있다는것을언제부터알게됐나요? 석 소질이있다기보다는노래부르는것을좋아했어요. 경희중학교시절현악반에들어간게음악과의첫만남이지요. 그때부터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등다양한악기를배우고악보보는법도익혔어요. 79 년대광고등학교시절에는합창단활동도했지요. 82년에명지대경영학과에입학해서 1학년때대학연합동아리인 연합메아리 에들어갔어요. 그때한친구에게 젊은예수 라는운동권가요집을선물받았는데그안에있던 못생긴얼굴 을부르다가그만남자답지못하게울어버렸어요. 진짜촌스럽죠. 임종진사진작가김광석사진
108 비평 & 리뷰 _ 대중문화 PUBLIC CULTURE REVIEW 강 그게매력아닌가요? 후후. 그럼본격적으로가수의길을걷게된때는언제였나요? 석 84년에김민기형의 개똥이 음반에참여했고이때만난사람들과 노래를찾는사람들 1집 을만들었어요. 그런데 85년 1월군에입대했는데큰형님이군에서돌아가셨어요. 그로인해 6개월만에제대하고복학했는데뭘할까고민하다가 못생긴얼굴 과같은노래를부르고사는것도괜찮겠다싶어서노래의길로접어들었지요. 87년 10월에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열린노찾사의첫정기공연에참여했는데 녹두꽃 이란노래를불렀어요. 그때관객들이내노래를듣고열광했어요. 그리고는단숨에노찾사간판가수로떠올랐는데난잘모르겠어요. 후후그때부터각종집회에단골로초대됐지요. 강 노찾사에서인기를얻었지만대중들로부터많은사랑을받았는데대중가수로서의길은언제부터걸었나요? 석 대학 1학년때교회성가대활동을했는데거기서 사랑의썰물 을부른임지훈형을만났어요. 그때부터음악적으로참가깝게지냈죠. 사랑의썰물 은동물원멤버이자 거리에서, 그날들, 흐린가을하늘에편지를써, 기다려줘, 변해가네 등그
노래의길을하늘로낸김광석, 그의길을묻다 109 김광석벽화길 야말로김광석이라는가수를있게한김창기가만든곡인데지훈형은이곡하나로엄청난인기를누렸죠. 아무튼이런인연들이모여자연스럽게대중가수의길을걷게됐어요. 그러니까그때가 87년여름이었던걸로기억되네요. 노래를좋아하는친구들과모여서별생각없이녹음한것을, 산울림 의김창완씨가듣고음반을내자고해서낸음반이 88년에낸 동물원 1집 이었지요. 그때우리들은 이걸사는사람은이상한사람일거다 라며농담을했었는데 거리에서 와 변해가네 가빅히트를쳤지요. 멤버들다어리둥절했었죠. 우리들의노래가사람들에게희망을준다고생각하니가슴이벅찼죠. 상업주의에오염되지않은밝은이미지를구축하고천편일률적인사랑타령에서벗어나지못하던주류대중음악의작은대안이라는평가를받았구요. 동물원멤버로서참많은공연을다녔지요. 그러다슬슬나만의음악을찾고싶었어요. 그래서동물원에서나와 89년, 기다려줘, 너에게 를담은 1집을내놨어요. 계몽문화센터에서첫개인콘서트를시작했는데, 조금힘들었지만정말열심히음악활동을했었죠. 강 총몇개의앨범을냈나요? 석 89년 1집을시작으로 91년 사랑했지만 이담긴 2 집을내고, 92년 나의노래 가담긴 3집을내면서이제는정말노래의삶을살겠다고마음먹었죠. 93 년 3월에는동물원노래와민중가요에서내스스로가베스트라고생각하는 거리에서, 이등병의편지, 광야에서, 그루터기 등을모아서 다시부르기 1집 을냈어요. 반응이괜찮았어요. 작품성이나상업성둘다만족시켰다고들했지요. 그리고 93년 7월에는 10년간의노래생활을정리하고되돌아보기위해한달간대학로학전소극장에서콘서트를가졌어요. 이때상당히많은분들이콘서트장을찾았는데관객들과눈을마주보면서부르는노래가너무즐거웠어요. 94년에는 서른즈음에, 일어나 가담긴 4집음반을냈는데이때부터 김광석 이라는가수로서좀더명확해진노래의길을보여줬다는평가를받았고요. 95년에는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등 1970년포크 1세대로부터이어져
110 비평 & 리뷰 _ 대중문화 PUBLIC CULTURE REVIEW 오는흐름과계보를하나의음반으로정리하기위해 다시부르기 2집 을냈는데그야말로 한국모던포크의대표곡모음집 이라고할만하죠. 이음반에는한대수의 바람과나, 이정선의 그녀가처음울던날, 양병집의 두바퀴로가는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 등모던포크뿐아니라백창우의 내사람이여, 한동헌의 나의노래, 김창기의 잊혀지는것,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속의친구 등상당한노래가수록됐고요. 류근의시에내가곡을붙인 너무아픈사랑은사랑이아니었음을 이실려있어요. 강 다시부르기 음반때문인지지금의팬들은그노래들이모두김광석씨의노래로알고있어요. 석 저로서는참고마운일이죠. 사실그음반들이성공을거두면서콘서트도성공하고대중적으로인기도얻으면서경제적으로큰도움이됐고, 홍대앞에제건물도얻게됐죠. 후후. 음반이성공하게된것은당시세션의정수를보여줬던조동익밴드가맡았기때문이라고생각해요. 편곡을맡은조동익씨는원곡의맛을해치지않으면서도 김광석이라는가수 의버전으로곡들을재탄생시켰죠. 사실리메이크노래는원곡을능가하기는힘든데진정한편곡의진수를
노래의길을하늘로낸김광석, 그의길을묻다 111 서울앵콜공연포스터 대구초연포스터 보여줬지요. 강 저도 다시부르기 2집 에실린곡을다좋아해요. 뭐랄까요? 노래와삶, 기쁨과슬픔, 자유와외로움이진득하게녹아들었다고나할까요? 슬픈데힐링이되고기쁘기에더없이기쁜그런느낌이요. 눈 에서는눈물이흐르는데뭔가마음은평온해지면서입가에미소를짓게되는그런느낌이요. 애구 감정이복받치네요. 후후. 근데이런기분느끼는거, 저만이아닐걸요? 석 그렇다면다행이네요. 제노래가마음을치유해준다니요. 사실 다시부르기 음반들은저에겐특별해요. 그전까지 김광석 하면 기다려줘, 사랑했지만 뭐이런노래를부른가수정도로알고있었고대학가에서주로사랑받아온가수였죠. 그런데이음반이나오면서서서히대중적인인기를얻기시작했다고봐야죠. 아까도말해지만 다시부르기 1집 을내고는대학로학전소극장에서한달간공연했는데제노래뿐아니라제가평소에좋아했던노래들을불렀죠. 주위에서는그노래들을음반으로내보면어떻겠냐고했고이렇게세상에나오게된거죠. 그리고대학로에서 1천회소극장콘서트라는기록도남겼고요. 이때가저로서는진정한 가객歌客 으로살 았던때가아닌가생각돼요. 강 반함과존경이교차되는눈빛으로김광석을바라보며한음악평론가는이음반에대해이렇게평하더군요. 김광석의놀라운힘은남의노래를자신의노래로체화하는완벽한소화력이다. 이등병의편지 부터 광야에서 까지모든노래들을마치원래김광석이만들고불렀던것같은착각을부른다. 이렇게요. 석 아, 김작가라는음악평론가가한말이군요. 후후그친구는저에게늘고민하고사색하는사람이었다고회고하더군요. 그의회고처럼전오랜무명의세월과노래로벌였던투쟁의시간들을지나왔어요. 이러한시간들이저에겐나름대로의철학이되고감정에체화돼목소리로녹아들었다고하는데정확하게본거같아요. 그게제노래의힘이됐다고저도생각하구요. 힘겹게지내온과거는그냥흘러가는게아니잖아요. 그런시절을지내왔기에비로소진정으
112 비평 & 리뷰 _ 대중문화 PUBLIC CULTURE REVIEW 로내고자했던목소리를가질수있었던거같아요. 그러니뭐든너무빨리이루려하지마세요. 후후. 삶이란어찌보면시종일관기다림이잖아요. 기다리다보면만나게되는거잖아요. 강 아, 인생의화두같은말씀이시군요. 저, 오빠라고부를게요. 저보다나이가많으시니오빠라고해도되죠? 히. 웃으며고개를끄덕여주는그. 이제그는오빠다후후. 광석오빠가이곳하늘소극장으로노래의길을정한지 17년됐어요. 그런데다시대학로에서 김광석붐 이일고있어요. 그것도뮤지컬로요. 故김광석이부른명곡으로만든최초의어쿠스틱뮤지컬 이라는 바람이불어오는곳 이소극장에서공연되고있구요. 유명한배우들이출연하는대형뮤지컬인 그날들 이공연되고있어요. 올연말에는또다른뮤지컬도만들어진다고해요. 이런거보면광석오빠가우리에게 영원한가객 임에틀림없어요. 그쵸? 석 아, 참부끄럽고고맙네요. 음, 전내노래가 나자신과다른사람들에게이야기하고싶어하는것을말하는일종의전달매체이길바래요. 내가살아가면서생각했던것을노래로말함으로써위안도받고또자신의삶을돌아보는거, 뮤지컬도이것만은놓치지않고만들어졌으면좋겠어요.
노래의길을하늘로낸김광석, 그의길을묻다 113 강 시간이많이됐네요. 아쉽지만마지막으로하나만더 여쭐게요. 김광석에겐음악이란, 노래란무엇인가요? 석 좀전에얘기한대로나의노래는대화이고소통이에요. 이야기라고할수있지요. 사랑하는이야기, 아파하는이야기, 그리워하는이야기. 평범한사람들이살아가면서겪고느끼는이런저런일상의이야기를노래로담아내는거죠. 또음악을통해내가항상꿈꾸는것은변화에대한갈망이죠. 팬들과도항상새롭게만나고싶고노래에서도매일매일새로움이묻어나길바래요. 강 진짜마지막으로우문인줄알겠지만..., 앞으로의계획이있다면요? 불러주고요. 아, 듣고싶은노래있으면언제든지하늘을쳐다보고외쳐주세요. 그럼불러줄게요. 단제노래는이제가슴으로도들어주세요. 바람이불어오는곳, 그곳에서제노래가들릴거예요. 그와의인터뷰는끝났지만난그와끊임없이대화를나눴다. 마지막질문은마지막을모르고이어졌다. 그의노래처럼말이다. 그의말이오랫동안가슴을적신다. 석 이곳에서계획이라니요. 후후. 내가예전에마흔살이되면오토바이하나사서세계일주하고싶다고그랬어요. 머리빡빡깎고금물막들여가지고가죽바지입고, 그게그렇게해보고싶었죠. 충무로가서오토바이구경도하고앉아보기도했어요. 멋질거같았어요. 근데그걸못해봤네요. 음 여기서한번해볼까요? 하하하, 이렇게하늘소극장에서노래부르는게좋아요. 가끔아랫동네내려다보면서어떤노래를좋아하나하면서그노래듣고싶다하면노래 나의노래는나의힘이고나의삶이죠. 그노래가일상을살아가는사람들에게자그마한울림으로다가가길바랄뿐입니다. 이글은김광석씨가생전에한언론과의인터뷰와콘서트장에서한얘기들을간추려놓은자료, 각종언론보도, 평론등을토대로만들어진가상인터뷰임을밝혀둡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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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사람들 인터뷰 _ 골목 & 자유를만나다 -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그 8 년의기록 머머리섬축제김정희 o ple
116 사람들 _ 인터뷰 Alley & freedom 골목 & 자유를만나다 Governance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 그 8 년의기록 village 김정희머머리섬축제담당자인터뷰 이춘호 영남일보기자 PROLOGUE FOR THE STREET 그시절엔 폼나는골목 이잘나갔지. 이젠아냐. 재밌는골목 이잘나간다. 폼은 수직지향적 이고재미는 수평지향적. 그렇다면재밌는골목은지금 알칼리성혁명 을시작한셈이다. 그러니오히려폼잡던광장은더외로워지고있다. 지금은시민의세상. 국민의세상에서한발더진화한것이다. 시민은스스로 폼 을풀기시작했다. 재미를추구하기시작한것이다. 재밌는골목을띄우려면몇가지마케팅전략이필요하다. 스토리텔링마케팅 Storytelling marketing 과 원소스멀티유즈브랜드마케팅 Onesourcemultiuse brand marketing 이다. 골목갖고새로운관광마케팅을하는것이다. 그골목도이젠 사회적기업 이될수있다. 그래서전국지자체가그기법을활용해서평소에는평
117 범하고밋밋하게보였던랜드마크를명물로반죽하고 있다. 대구시중구삼덕동도이젠단순한주택가가아니다. 전국적벤치마킹모델이된랜드마크형관광상품이되었다. 이동네만큼피를세련되게수혈받은곳도드물것이다. 예전에는지역의민초들은감히똑바로쳐다보기힘든정도로기세등등했다. 일제강점기엔한국인이얼씬거릴수없던일본인거리. 광복이후에는시장, 도지사, 교육감등의관사가몰려있었다. 물론 80년대까지만해도 부자동네 로각인됐다. 하지만도심공동화현상으로인해슬럼화의길을걸었다. 햇살푸짐한골목에서그림자골목으로기울었다. 아무도관심을가져주지않았다. 하지만지난해자랑스런대구시민상을받은권상구 < 사 > 시간과공간연구소이사등이삼덕동을 택리지 적으로해석해나갔다. 이동네가어떻게경상도의대표적 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 메카가될 수있는지를알기위해선일단삼덕동에대한인문지리학적정보를챙겨둘 필요가있다. 삼덕동은조선시대에밀양박씨가정착하여마을을이루었다. 그때는 외곶外 삼덕동머머리축제 串 이라불렀으나 1914년부터 삼덕동 으로불리기시작한다. 삼덕동은 1가, 2가, 3 가로구분돼있다. 1, 2가는중심상업지역번화가이고 3가는주거지다. 삼덕동 3가는 1930년대일본인들이많이거주하던지역이었다. 일본인들은북성로바깥쪽과동성로동쪽편으로많이모여살았다. 한일합방이되고삼덕동, 동인동, 봉덕동, 건들바
118 사람들 _ 인터뷰 Samdukdong Governance village 위쪽으로일본상인들과공무원들이모여살게된다. 삼덕동에는그당시공이지역은런던도심의한가무원들의관사로쓰였던건물이많이남아있다. 답사팀이답사한결과 30여운데에자리잡아많은사람들이활동하채의관사건물과일본식개인집이발견됐다. 대부분 100평을기준으로해는거리다. 하지만현재사회적기업에의서지은집들이라풍채가있고복원을해도오래쓸수있는가치있는집해발달한도시로잘알려져있다. 들이었다. 일본인들이살았던집에는꼭향나무와뽕나무, 월계수등이심어져있다. 1970년대까지는대구최고의부촌이었으나지금은세입과거이지역은공장밀집구역이었다. 하 자와노년층이많은동네다. 이곳에도어김없이재개발광풍이몰아치면서마을의위기가왔다. 1996년 7월대구시가이지역을재개발예정지역으로고시하면서마을은재개발에찬성하는주민과반대하는주민, 관망하는주민들로갈렸다. 이러한상황에서재개발을막고주민들을화합시키기 지만노동력중심이었던 2차산업의소멸과함께쇠퇴되어지역경제가위축된다. 이에따라지역공동체도활기를잃는다. 이를활성화시키기위해투자자들은화려한호텔과높은빌딩을이마을에세우려고하였다. 하지만, 주민들은급격한개발로인한부작용을염려했다. 이에 코인스트리트액션그룹 Coin Street Action Group 을결성하여이를반대한다. 주민들은이지역을지키기위해많은활동을하였고, 그에 위해고민해낸축제가바로머머리섬축제다. 따라코인스트리트액션그룹을모태로한 코인스트리트커뮤니티빌더스 Coin Street Community Builders 라는사회적기업이기금을모아마을을지키기위해해당지역을매입하게된다. 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코인스트리트빌더스는창립이래로활발한활동을해오고있삼덕동3가마을만들기프로젝트의원류는런다. 이사회적기업에참여하기위한조건은 해당지역에거주하는던의사우스뱅크지역에위치하고있는 코인주민이어야한다 는것이다. 즉, 지역주민들로만이루어진단체인것스트리트. 이다. CSCB가추진하고있는주요사업은새로운주택협동조합을설립, 생활의편의를도모하기위해상점, 갤러리, 식당카페, 바 Bar 조성사
골목 & 자유를만나다 -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그 8 년의기록 119 업을진행, 휴식을위한공원과템즈강변을걸을수있도록하는보행로조 성사업, 건강을지키기위한스포츠시설설립, 문화생활이가능하도록주 요페스티벌과이벤트를조직, 어린이복지와가족생활을지원하는서비스 와교육인프라구축, 앞서언급한사업들이진행될수있도록하는보조 프로그램으로구분된다. 이렇듯, 자본이중심이되는것이아닌주민들 의자발적인공동체의식이중심이되어황폐했던코인스트리트를다 시살린좋은마을만들기사례라고볼수있다. 번져나간다. 그해김경민당시대구YMCA 사무총장직무대리이처음으로중구삼덕동 자신의주택담장을허물면서민간으로도 확산됐다. 지금까지대구에서허물린담은 모두 709 개소, 총길이 28.37km 2012 년말기준, 덕분에생긴조경면적은 35 만 5 천 112 재곱미터. 일본에까지이사실이알려진다. 대구시의담장허물기운동사례는 2001년오사카대학원논문에인용되기도했다. 서울 부산 삼덕동담장허물기현장속으로인천등전국의지자체와시민단체등 1천여곳에서벤치마킹해갔으며 <2004 대한민국지역혁신박람회 > 삼덕동은 1999년부터신수가훤해지기시작한다. 에서우수사례로선정됐다. 법문사가출판한 2003년도담장허물기운동이전국에서는처음으로이동네에서고등학교교과서에실려최근교육인적자원부의검정을부터시작된것이다. 산성형동네가알칼리형동네로변통과했다. 교과서에는 한마음한뜻 - 바람직한의사결정 모한것이다. 물론산파역이있다. 김경민, 김정희, 조성이라는제목으로 3페이지에걸쳐담장허물기운동의추진진, 이삼두마차가 삼덕동발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 배경과사례등이사진과함께자세히소개돼있다. 의개국공신이다. 삼덕동으로이사와첫아이와둘째아이를낳은김경민. 그는대구시는 1996년서구청과경북대병원을시삼덕동마을만들기의산증인이다. 그는대구사람은아니지만 96 작으로담장허물기운동을펼쳐나갔다. 처음에년에이사와 98년에담장을허물기시작했다. 삼덕동의담장허물는구청등몇몇공공기관의참여에그쳤다. 그기 1호집이바로그가살던집이었다. 러나 99년부터민 관협의체인 대구사랑시민운동회의 가주도하면서이운동은들불처럼그는삼덕동의공동체성을주목한다. 대구는한국전쟁당시에도다
120 사람들 _ 인터뷰 Samdukdong Governance village 른도시에비해큰피해를입지않았다. 그래서근대흔적이고스란히남아있기심을갖고참여했다가이젠 삼덕동고, 대구토박이가많이살고있기때문에나름대로마을안에는사람들끼리전도사 가돼버렸다. 처음에는마을담벼공동체성이존재한다고생각했다. 락에벽화를그리기운동을일으킨다. 일제강점기때지어진일본식다다미건축물그는주민과더밀착적인삶을원했다. 담장을허문것은그의말처을개조해동네갤러리도열었다. 삼덕동의럼그런마을주민들과가까워지기위해서였다. 담장허물기에동참한벽화는통영시의명물동네로알려진동피랑삼덕동주민들은담장허물기외에도자신들의마을이보다살고싶의벽화만큼이나주민들의적극적인참여로진은곳으로변화하기위해서필요한것들을고민하기시작했다. 그리행됐다. 그림을그린것도있지만대부분이생활고그런고민이있으면삼덕동의사랑방인 삼덕동마을만들기센폐기물을재활용한것들로만들었다. 마을만들기터 에모여주민회의를열었다. 김사무총장이살던담장허물기센터벽화에는병뚜껑 8천여개가들어갔다. 동네 1호집이 삼덕동마을만들기센터 사무실로바뀐다. 여기는담장아이들과어른들이병뚜껑을일일이주워와디자인허물기를통해가까워진마을사람들이지나가다들르는사랑해서벽화를만들었다. 방이자마을에무슨일있을때회의를하기위해모이는소통의공간이다. 3인방은일단무채색동네를유채색으로만들려고노력했다. 보기좋은동네가되어야살지좋은동네로발전할유심히살펴본사람은알겠지만삼덕동주민들의재수있다고믿은것이다. 우중충한거리를파릇하게다림질했활용품거래공간인녹색가게벽면은온통병뚜껑이다. 다. 시각적으로평화로운기운이들도록한것이다. 그래야동병뚜껑을모으기시작했을때동네어디서든병뚜껑민들도신이날것이다. 그런시각적변화가없이처음부터마을발견하기어려웠다. 그렇게공동체관계를형성을주민들모아놓고아무리계몽운동을펼쳐도언발에오줌누기한삼덕동마을사람들은살고싶은마을만들기에효과밖에없을거라고분석했다. 관심을갖기시작한다. 계획대로일이진행됐다. 벽화운동에관심이많았던미술학도였던하지만순항하던삼덕동마을만들기도 2006년삼덕동이재개김정희도삼덕동골목만들기프로젝트에호발예정구역으로고시되면서홍역을앓는다. 10년남짓한마을만들기
골목 & 자유를만나다 -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그 8 년의기록 121 의성과가단한번의재개발사업으로사라질위기에처한것이다. 당시마을작소 도생긴다. 이는삼덕동과인접한주민은찬성과반대, 그리고방관세갈래로나뉘었다. 이듬해국토해양부의대구시최대번화가인동성로에자전거테 살고싶은마을만들기사업 에공모한다고했을때찬성측에서는재개발마거리를낳았다. 이밖에도삼덕동주민들사업해야하는데무슨일을꾸미는거냐고거칠게항의하는등난리가은버스를개조해이동도서관을만들었다. 났었다. 하지만이인프라만으로는뭔가부족했다. 일은다시가다듬어졌다. 문화신경망 이필요했다. 그렇게해서삼덕동인풀잎같은공간이연이어피어난다. 형축제가탄생한것이다. 가출청소년쉼터도짠한공간이다. 동네에님비즘을이겨낸유일한쉼터다. 보통마을안에가출쉼터가들어오기힘들지만 97 년부터꾸준히노력한결과자리를잡았다. 집을그대로쉼터로쓰는곳이다. 설거지정도만하면한달정도안전하게보호받 < 삼덕동인형마임축제 > 머머리섬으로으며쉴수있다. 1997년청소년평화마을개소이후 98년대대미를장식구광역시청소년쉼터로지정. 가출청소년이나상담이필요한친구들에게상담과교육프로그램지원한다. 전국에강원도춘천에인형축제가있다면삼덕동에도인형축서가출한아이들에게편안한사랑방 으로알려져있다. 제가있다. < 삼덕동인형마임축제 > 는일명 머머리섬 으로도지난해곽병원근처로이전을했다. 불린다. 8년역사를갖고있지만아는사람은잘알지만아직매년어린이날를전후로축제가열린다는걸잘모르는지역민삼덕초등학교교장관사로쓰이던일본집도 99 도적잖다. 년도에개조해교육청으로부터위탁운영권을건네받은동네미술관, 빛살미술관으로변한다. 97년머머리섬의유래에대해궁금해하는이들도있다. 부터시작한동네꼬마들을대상으로한 < 꾸러김포군의최북단보구곳리에가보면강가운데 유도섬留島 이라기환경미술대회 > 가여기서열린다. 이어자전는큰섬이하나앉아있다. 그옛이름이 머머리섬 이다. 전설에의하거를테마로한사회적기업인 자전거희망제면, 그옛날섬하나가홍수에떠밀려임진강을따라떠내려오다가여
122 사람들 _ 인터뷰 Samdukdong Puppet & Mime Festival 기에자리를잡고앉았다는것이다. 세상의큰흐름에밀려가까스로삶의자 리를지키는곳 을이르는말로쓰이기도한다. 이대목에서김정희가등장한다. 그녀는 98년무렵그동네에자기작업실을갖고있었다. 갓대구가톨릭대시각디자인과를졸업하고 사고칠거리 를찾고있었다. 일단동네를문화 예술적으로재탄생시켜주고싶었다. 일단아이들을위한그림대회를기획한다. 학부모를만나설득해 20여명의아이들그림을전시했다. 당시근처에는삼덕 동인 동덕초등이포진해있었다. 그림은축제사무실격인현재삼덕동지역아동센터마당에서열렸다. 처음부터축제형식은아니었다. 마을인형극으로워밍업을한다. 1회인형극은 98년 12월23일마당극형식으로열렸는데지역의극단인형엄마, 반달인형극회회장박민량등이가세해반응은폭발적이었다. 두번공연을했다. 그녀와아이는한맘이된다. 홍보도필요가없었다. 입소문이면충분했다. 마임이스트조성진도가세를한다. 인형축제가성공하려면아이가주인공이되고그아이가자기인형극을가져야된다고믿는다. 동네아이들을축으로한인형극단 초록별아이들 이그렇게해서태어난다. 연출은조성진, 그녀는애들불러오고간식도챙겨주고, 아이의뒤치다꺼리
골목 & 자유를만나다 -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그 8 년의기록 123 삼덕동인형마임축제 를도맡는다. 노력한덕분에 2006년제1회삼덕동인형마임축제가팡파르. 국제대회로점프업한인형축제 주민들은마을에산다는것에자부심을느낀다. 첫해에 2천여명, 나중에는 5천여명으로늘어났다. 대성공이었다. 동네전체로세트로만들려고하니부실한대목이눈에들어왔다. 화장실이아주부족했다. 첫해에는마구남의집화장실로직행하는이들도생겼다. 화장실대란이일어난다. 주민이자기화장실을개방한다. 동네애들이화장실간판도직접만든다. ' 함께함 ' 이소중해서어르신과 ' 품앗이밥상 ' 을차린다. 역시항상운영비가문제였다. 정부의지원금르받기위해문화체육관광부산하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공모신청을했다. 채택이된다. 2천만원이생겼다. 일본, 중국등인형극에능한국제팀을모셔온다. 동민들도놀란다. 자기골목에유명외국인형극단이온다는소식에모두들뜨기시작한다. 메인무대는삼덕초등학교후문뒤뜰. 또한옛대구교육감관사에들어선마고재, 주민자치센터도거점이된다. 3일간아이들은마냥행복했다. 거무튀튀한골목에 행복한햇살 이스며든다. 메인행사는놀이동산특장차같은프레이드차량에아이들을태우고골목을도는건데아이와학부모등 320여명이참석한다. 인형도동네에서직접만든다. 4회때부터주민들이주도 4회부터주민들이명실상부주인공이된다. 기획자들이원하던바이다. 축제를평가하는눈이생긴것이다. 살사댄스팀을보곤 저런팀은우리동네하고는안맞는다 고지적했다. 지난해와같은작품을갖고온극단도꼬집었다. 애들도눈이높아진다. 초반에는인형들이투박해도보는자체가신기했다. 그러나지금은정말섬세한인형이라야반응을한다. 쌍방향축제라서항상아이가인형제작에참여한다. 단원아이는무대에서기까지모두 10번정도연습을한다. 이젠핀마이크도사용한다.
124 사람들 _ 인터뷰 Samdukdong Puppet & Mime Festival 인형축제는멋진콘텐츠였다. 지역방송가도어린이날현장중계를해줬똥쌌어, 마임씨어터빈탕노리가 이다. 주민들은일상적이고소비적인데서문화적으로변해갔다. 도끼가네도끼냐 가오른다. 아름인형극단의 도와줘요빨래할머니, 청소년음악 2010년에서는생텍쥐페리의별탄생 110주년기념행사를했다. 주민그룹 1 플러스 1 의작은콘서트, 송다민의모두어린왕자를간접경험토록했다. 2011년에는 삽사리는달을짖고 라스토리텔링마술 꽃과나비그리고기억. 는주제로대구경북대삽살개보존회의도움을받아서마을에서실제개를주인공으로퍼레이드를벌였다. 이밖에아트바이크도굴렸다. 페이스페인팅은지역아동센터마당에서열린다. 대구교대 2012년즈음엔동네에아파트가생긴다. 새로운거주공간의등미술영재원 6학년봉사동아리 리틀다빈치 도참장이었다. 이를고민해봐야했다. 그래서그해주제는 헌집새집여한다. 미술관맞은편에서는인형포장마차, 미술관두꺼비집 으로정하고집과마을과아파트와의관계에대한이마당에서는도예체험, 미술관뒤에서는반려동물과야기를만들었다. 함께하는사진전시회, 마고재에서는 종이꽃밭만들기 를올렸다. 올해주제는 백구야놀자. 애완동물 1천만시대가개막됐다. 올해부터애완동물등록제가실시된다. 애완동물에대한새로운인식과관계모색에집중한다. 올해는지난 7년과달리공모사업 EPILOGUE 에낙방돼급전이필요했다. 긴급회의가열린다. 보다 못한주민센터가주도적으로도와줘행복마을공모사업에채택돼 400만원을확보할수있었다. 이젠자원봉사시스템이잘돼있어 60여명이돕는다. 올해공연의얼개를한번엿보자. 초록별아이들의개막공연 누가내머리에 삼덕동축제. 이게동시다발적으로 발광發光 을하고있다. 일종의시너지효과다. 수성교근처김광석벽화거리가있는방천시장입주예술가에게도푸릇한에너지원이되고있다. 또한중구의근대골목투어와도맞물리고있다. 신천축제와도얽히고있다. 지역발축제가거의상위하달, 관주도행사인데삼덕동축제는작고디테일하고일상적인것
골목 & 자유를만나다 -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그 8 년의기록 125 으로축제포인트를잡았다. 폼을잡지않았다. VIP도섬기지않았다. 누구의축제가아니라 모두의축제 인탓이다. 그래서감동이었지만그감동을언론플레이형식으로 자가증식 하지않았다. 그래서태풍의눈처럼고요하고냉정해질수있었다. 삼덕동축제가왠지훗날 대구판에든버러축제 의신기원이될것같은예감! 마임이스트조성진, 축제를진단하다 조성진 이사내는버려진돌멩이같은삼덕동을보석으로닦고있다. 그는이축제를어떻게분석할까. 그의속내를들어봤다. 삼덕동인형마임축제. 지난십년간이마을공간에서틈틈이시도했던마을문화만들기노력의종합판이라고볼수있겠다. 마을잔치, 지신밟기, 꾸러기환경그림대회등의행사를하면서여러가지문화예술형식의소통을지켜보면서인형극이야말로가장이마을주민에게적절한형식이라는것을발견한것이라고봐야한다. 삼덕동마을만들기활동가들이견지해온이러한 문화인큐베이팅 cultural incubating 의노력. 이후 해오는것. 그역할을흔쾌히동의해준극단인형엄마엄정애대표와지역인형극단인반달인형극회의참여는결정적인추진력가운데하나였다. 여기에다른인형극축제와의차별화를위해마임이덧붙여지고, 삼덕동이라는장소성 Site-specificity을중시하는형태의축제가탄생한것이다. 한국사회에서마을축제洞祭와예술축제의결합이어떤건지를보여줬다. 이축제는집마당이나골목, 주민자치센터등이무대가된다. 에다른마을축제가만들어지는과정에서도반 이축제에서볼수있는공연들이모두가정확하게 장소특성적공연 드시참고해야할것이다. 나의역할은먼저 Site Specific Theatre 과그성격이일치하지는않지만적어도 장소특성 예술감독역할을맡아줄인형전문가를초빙 적축제 Site Specific Festival 라고는말할수있을것같다. 이는단지형식
126 사람들 _ 인터뷰 Samdukdong Puppet & Mime Festival 의실험이나차별화라는의도를넘어서마을의공간에새로운의미를부여한다는적지않은의미를담고있다. 한편나의욕심은이러한비정형의공간을즐기며자신의작업에반영하는예술가그룹이이축제를통해발견되거나성장하기를바라는마음이있었다. 그러나그욕심이과도한것이었음을나중에알게됐다. 한국사회의예술과생활영역사이의관계는참여와통섭이라는선진적단계에들어섰다기보다는문화의민주화나문화복지를이야기하는정도에머물러있다는사실을인정할수밖에없었다. 이축제는인형마임축제이기이전에삼덕동축제즉전통적인동제의회복이라는맥락에서보아야하기때문이다. 기본적으로삼덕동인형마임축제는주민이즐기는축제다. 따라서작품이나극단의선택역시철저히주민의관점을우선적으로고려한다. 부대시설이나먹거리코너의운영, 공연자들의숙식에이르기까지주민의편익을먼저생각한다. 그런이유로홍보나마케팅에들이는에너지도최소화한다. 알아서들오시라는거다. 공동주최자인대구YMCA나공간문화센터의행사기획능력은재정자립도를만드는주된힘이다. 예산확보가어려워지면여건에맞게규모를줄여서하면된다. 보여주는행사가아니기때문이다. 우리에게도과제가있다. 예술을통한 현대적인동제 를만드는것이목표. 궁극적으로는주민들이자신이사는곳을긍정하고사랑하는것이다. 만약에재개발
골목 & 자유를만나다 - 삼덕동거버넌스형마을만들기그 8 년의기록 127 Kim Jung Hee 삼덕동인형마임축제김정희 이되더라도그재개발의내용이주민의욕구와상상력을담는방향으로가게되기를바라는것이다. 주민의참여는퍼레이드, 조직위, 자원봉사, 화장실제공, 먹거리판매등으로조금씩자연스럽게늘어났다. 주민과의관계가축제의물리적토대라면축제의테마로서의공연예술은최종적으로사람을움직이는힘이며예술가들이야말로인화성물질이다. 예술가, 기획자, 주민간의공감대형성이축제의최대승부처인것같다. 김정희인터뷰 - 지난 8년인형축제를뒤돌아본다면. 우리마을에는생활과함께일도있고문화도있어야한다. 마을은가족들이모여사는곳이지만거기에는신문이나우유를배달하는사람과상점이나식당, 미용실 처럼생활을돕는이들도있다. 경로당과주민자치센터도있다. 그리고작은공원과미술관이나박물관같은문화공간과함께마을축제가있으면더좋다. 인형축제는삼덕동이문화가있는마을이되기를바라고있다. 삼덕동에서의 인형극과마임 은 15여년에걸쳐주민과함께여러가지프로그램들을진행하면서자리잡게된마을축제를위한장르다. 축제적인요소를많이지니고있으면서특히어린이가즐거워할수있는예술이다. - 이프로젝트를통해아이와주민이어떻게변했는가. 축제를보며자랐고이제대학생이되어축제를준비하고있는정인이에게물어보았더니, 예전에는어마어마한축제라고생각했는데커서보니꼭그렇지는않네요ㅎ ~ 제가축제준비를하고있다는것도신기해요 라고말한다. 어르신들은 이번에도하는것맞제? 손주들오라고하면되제? 라고반응을하신다. 어르신들은다른곳에살고있는손자손녀들을어린이날삼덕동으로부르신다. 꾸준히동네안에크든작든축제가있어온덕분에그문화적혜택을누렸던아이들이지금은축제프로그램안에자발적으로참여하고있다. 어르신을비롯한엄마, 아빠에게는마을축제가최고의어린이날선물이되었다.
128 대구, 지금여기 street art
129 문화이슈쫓기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배두호다원예술매개공간 우리 디렉터 요즘길거리에커다란기타가방을등에매고다니는청소년들이나버스정류장근처나동성로의약속장소곳곳에서호기있게노래를부르고있는젊은이들이부쩍늘어난것같다. 흡사 70~80년대통기타열풍이다시분것인가하는착각마저든다. 흔히 버스킹 busking 이라는단어로친숙한거리예술은 2009년슈퍼스타K와같은오디션프로그램이시작된이후부터거리라는공간이효과적인활동장이라는인식이퍼지게되면서정체되어있는대중공간에자신의작품을적극적으로선보이기위한새로운예술표현방식이다.
130 대구, 지금여기 일반적으로거리예술 street art 은야외전시, 거리퍼포먼스, 해프닝, 낙서, 벽화등개방된공간에서펼치는미술적의미가강하다.. 거리예술의시대 현대사회는아마추어와프로페셔널의개념이허물어지고비전문공연자의지위가강화되고있다고해석된다. 거리공연은 도시의공공장소에서대중을즐겁게하거나관객감상비를받을목적으로실연되는아마추어소규모공연행위 1 로정의할수있다. 즉, 광장, 공원, 지하철, 상가거리등공공장소에서비정기적, 간헐적으로특별한무대나장비가없이자유롭게자발적으로이루어지는공연행위인것이다. 하지만거리라는단어가가지는다양한의미만큼이나거리예술이가지는의미와맥락들은실로무궁무진할것인데, 넓은의미에서거리예술은 거리에서펼쳐질수있는모든예술활동 이라는광의적인해석이가능하겠지만, 일반적으로거리예술 street art 은야외전시, 거리퍼포먼스, 해프닝, 낙서, 벽화등개방된공간에서펼치는미술적의미가강한반면, 지역과나라마다틀린지라프랑스, 스페인, 독일에서는거리예술이라함은축제, 거리극, 야외공연등의의미로읽혀지는것이일반적이다. 거리공연예술을큰틀안에서야외공연 Outdoor Theate 와거리공연 Street performance 로나누어해석하는것이지배적이지만, 현재까지프랑스, 영국, 스페인을중심으로거리공연예술에대한연구가진행중에있긴하지만, 개념적기준이다소모호하다. 거칠게요약하자면거리예술은거리공연예술뿐만아니라축제와같은복합장르적예술창작 Multi disciplinary Arts 등전통적인장르중심의창작활동에서탈피한탈장르적, 실험적예술창작이며진정한공공예술 New genre public art 이라는해석이지배적이다.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131 거리예술대부분의작품은대중공간이라불리는누구나쉽게참가할수있고접근할수있는열린공간에서진행된다. 때로는사람들이많이모이는도시의유명한약속장소나광장이될수도있을것이고, 때로는사람들이쉽게찾지않는도심구석의한모퉁이가될수도있다. 결론적으로는 기존에비관습적인도심의대중공간에서관객들과의상호작용을하는예술장르 로설명될터인데, 이는근대물질문명과도시화에대한비판적저항의돌파구로서기능하며, 이는근래의흐름인즉, 일상공간의예술공간화 라는대의를품고있는것이다. 거리예술이란? 유럽사회에서중세교회가극劇을이단으로선언하고극장건설을금지하자거리로뛰쳐나온것이거리극이듯이생활적인예술의형태인거리예술은이후종글뢰르, 민스트럴이라는전문공연계층을만들고, 자기들끼리조합까지만들정도로삶과생활에천착한예술행위였다. 시작되었다는기록이후, 거리예술은서커스, 퍼레이드, 마술, 조형예술, 설치, 설화구연, 영상, 인형극, 광대놀음등다양한예술활동과교류하면서거리예술이라는명칭으로총괄되는동시에일종의문화현상으로자리잡게되었고, 오늘날프랑스를비롯한세계각국에서는거리예술이인접장르들을포용하면서그사회적, 정치적의미망을확장하고심화해왔다. 우리나라거리예술의시초는과거가무잡희를하던우리나라놀이패들의활동으로거슬러올라가는데, 장시를중심으로활동한사당패, 광대패, 꼭두패의유랑집단들은거리를무대로소리와재주를팔아서생계를유지했는데이들은조선후기민중오락을주도하였다. 특히연극적요소가풍부한탈놀이는집마당, 산비탈경사진곳에관중석을마련하거나장터에서연희되어졌으며대사혹은대화대신에여러사람들을대상으로한연극적언어인 재담 을사용하여세상을풍자하였다. 서구의발전과정과비슷한것이이들의후원을주로상인들이맡았다는것인데, 가면극을통해시장의사람들을모으고교역을활발하게하기위한목적이었다. 런던의코벤트가든에서최초로정식거리공연이
132 대구, 지금여기 거리예술의형태와특징 거리공연예술의형태는특성상구별하기가어렵지만, 대체로다음과같다. 일인악단 One-man band, 만담가, 길거리성탄축가 caroling, 희극또는어릿광대 Crown, 마임 Mime, 거리화가 scatch 등이있으며, 이외에도음악연주 Busking, 즉흥곡, 무용, 곡예, 저글링, 마술, 성가대, 거리극, 점, 꼭두각시등이있으며근래는싸이버버스킹 2 이나스트릿아트그래피티를포함한등시대를반영한예술로성장하고있다. 거리공연예술장르의분류는크게의미가있지않다. 이를테면일인악단이즉흥곡, 희극, 거리극의형식을띈다든지즉흥적으로변화와변용이가능하기때문이다. 거리예술의특징은다음과같이압축된다. 첫번째, 거리예술은즉흥창작이다. 거리공연을진행하는이들은모두연출가인동시에배우이고때로는대회참가를위한소품이나세트를제작하는일을직접담당하기도한다. 거리예술을위한표현방법은시대의변화와사회적관심, 유행에따라끊임없이변화하고창조하며, 사회의발전속도와조화를이루고있다. 두번째, 거리예술은개방적이고대중들과함께하는예술이다. 쉽게말해 문화예술의장을찾지못하는사람들에게장벽을없애고눈높이를낮추어적극적으로다가서려는시도 라고해석할수있지않을까? 미셀시모노는 거리예술은미완성의작품 이라는견해를나타내었다. 1 주로아마추어예술인에의해진행되는거리예술공연은세련된표현력과예술적전달성이약하고공연의대가를목적으로하기때문에순수예술행위로보지않는일반의시각도있다. 하지만거리예술의감상비수령은예술작업을지속하기위해필요하고정당한행위로서공연가자신의선택의문제로보아야할것이다. 최근의거리예술은금전수령이외에도다양한자기목적성을가지고이루어지고있으며전문가의수준있는작품역시도거리라는공간을빌어자주실연된다. 2 Cyber Busking : 자기작품을인터넷에올리고다운받는사람에게기부금을받는공연형태, 영국의 ABOVE, GRL, 게릴라걸즈등일련의그레피티혹은아티스트집단은자신들의작품을거리와광고판에서펼쳐내고이를싸이버버스킹을통해알려냄 ( 혹은모금함 ) 으로서지역의문제혹은사회문제를이슈화시키는등새로운예술의포맷을제시하고있다.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133 도시는 360 도가공연장이다 라고주장하는이탈리아의 피노시모넬리 Pino Simonelli 말과같이 거리예술가들은도시를적극적으로공연장으로활용하여창작활동에이용하고있다. 거리예술이작품자체만이아니라관객이일정부분참여된상태에서만완성될가능성을가지고있는만큼거리예술에서의관객은단순히관람자나관객, 보행자로서의의미뿐만아니라공연의한부분을수용하는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다. 이와같은의도는대중성을확대시킴으로서공연장의공간과폭을확대시키고새로운공연장소의개발과함께다양한작품을창작하려는예술의본질적인물음과일맥상통하고있다. 이러한움직임은공연활동의중심이되어오던실내공연과같은고정화, 관습화된기존의공연형식과관객들의수동적인역할에서벗어나새로운형태의적극적이면서능동적인관객들의역할을수용할수있는힘이된다. 세번째, 거리예술은장소는구애받지않는다. 수많은현대인들의삶의터전이되고있는도시 urban 는필연적으로여러형태의다양한대중공간이존재한다. 거리예술은대부분도시의대중공간을중심으로유연성이확보된공공장소에서펼쳐진다. 따라서도시의경관이나조경, 독특한분위기는거리예술창작자들에게아주중요한요소로작용하고있다. 도시는 360도가공연장이다 라고주장하는이탈리아의 피노시모넬리 Pino Simonelli 말과같이도시 의건축물과구조물들의조경은거리예술에등장하는대부분의작품에중요한부분으로작용하고있고, 거리예술가들은도시를적극적으로공연장으로활용하여창작활동에이용하고있다. 마지막으로거리예술은강한축제성향을가진다. 거리예술은개방된장소에서밖으로드러내기쉬운예술장르의속성과함께, 대부분실내공간이아닌야외공간을표현의주무대로삼는다는점에서다른문화예술행사보다축제적성향이매우강하다. 또한기존의감상위주의공연행사와비교하여볼때, 대중의폭넓은참여에따라자유롭게표현하고체험하며분위기에편승하여함께즐기고노는현장체험중심의축제성향이매우잘반영되고있다. 개인의성장에따른거리예술의시대로의돌입현대에이르러다양한매체의발달과더불어인터넷의등장으로인해개인이접근할수있는정보의양이폭발적으로많아짐에따라아마추어가점차전문화되어가는현상이벌어졌다. 90년대 PC통신이일반화되어다양한동호회가생겨나고이러한동
134 대구, 지금여기 현대가도시경쟁시대로돌입하면서 문화관광산업의특수를위해거리공연과축제에대한투자를늘리고있는형편이다.. 호회를통해직접문화생산에참여하려는움직임이만들어진것이다. 3 인터넷신조어인 마니아 Mania, 광인 는이같은아마추어의전문화현상을압축적으로나타내는단어이다. 하지만 2000년이후 마니아 들은자신들의동호회를조금씩 아카이브 화하고곧마니아에서 매이븐 Maven, 장인 으로성장했다. 이로써기존의프로페셔널 / 아마추어로나뉘는이분법적인전승자페러다임은전복되었고, 개인이문화의생산과수요의단계까지영향을미침에따라이러한아마추어와프로페셔널의 비경계화 는현재도가속화되고있다. 또한 SNS와스마트폰등정보통신플랫폼의발달로인해클릭하나로전세계에서벌어지는일들을실시간경험하고커뮤니케이션할수있는이른바 시공간압축 time-space compression 현상으로인해일상적인공간경험과공간인식이크게변화하고, 물리적인 거리 개념의공간보다는구체적인삶의숨결과정체성이묻어나는 ' 장소 ' 에대한관심이부각되고있다. 오늘과같은초연결시대 hyper connected에개인혹은대중이성장함에따라이들이가진미학적인성취도나소통을진입장벽이높은기존의공연장이나방송매체에서할수없는것인만큼거리라는활동장은이들에게 또다른개인과소통하는장 으로읽히기시작했던것이다. 대중예술, 도시예술 urban art 그리고도시문화, 거리예술, 이모든어휘는미학과도시의관계에서때로는관련이없어보이기도하지만연관성을가질수밖에없는다양한현실을포함한다. 당연히용어의사용이혼재되고있어이들에대한최소한의설명이필요할것이다. 특히거리예술의다양한실천들과변화는기존의제도권영역을넘 3 대표적인예가흑인음악동호회 ( 댄스, 랩을포함한 ) 인데전문적인정보수집및공유, 토론을넘어서직접음악을만들고유통하는단계까지발전한다. 현재흑인음악과관련해활동하는뮤지션중대다수가전문교육을받지않았으며, 흑인음악과관련한동호회와연계되어있다.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135 어선예술의문제에대한대중들과의관계를포함한다. 또한이들이문제를제기하는장소는대부분거리 street 와같은도시공간이다. 근래도시경쟁시대로돌입함에따라문화예술에대한관심이증대되고세계의여러도시의문화예술를이용한도시마케팅의성공사례가늘어감에따라각도시는물론, 국가차원에서도문화선진국으로들어서기위한정책적시도가꾸준히증가하고있다. 우리나라는문화예술에대한대중의관심과인프라구축을위하여 찾아가는문화예술 등의의제적프로그램과함께정부나지방자치단체가문화예술의보존과발전가치가있는 21개지역의거리를 문화의거리 로지정하여운영하고있으며, 이는현재까지도실행단계에와있다. 하지만거리에서전개될수있는예술의영역이란실로한정되어있기에그에특화된방법적인문제에대한고민은여전히숙제로남아있다. 의특수를위해거리공연과축제에대한투자를늘리고있는형편이다. 주요문화선진도시의경우거리예술의발전을돕기위해관련법규를완화하고, 감상비수령을허가해주고있는데, 가까운도쿄의헤븐아티스트는도청에서공개오디션진행, 라이선스발급등모든운영을도맡아할정도로열의를보이고있으며, 일본의두터운인디 indie 밴드들의또다른등용문역할을하고있다. 캐나다에서는캘거리도시거리예술위원회가설립되어버스크스톱 buskstop 이라는일종의거리예술가를위한공간을제공하여체계화된운영을하고있다. 하지만우리가놓치지말아야할중요한점은바로유럽을비롯한문화선진국에서는이러한지자체의정책적 / 재정적인도움없이수많은대학과민간단위에서실험적인예술인들이자체적인거리공연활동을통해그특유의포맷으로실험을하는사회적 / 문화적분위기를형성하고있다는점이다. 거리예술의다양한사례와지역거리예술의성장현대가도시경쟁시대로돌입하면서산업생산력이쇠퇴한도시의새로운전략으로서문화도시모델이새로운대안으로떠오르게되면서문화관광산업 거리공연이발달한국외사례의경우크게두가지형태로거리공연이정착됨을알수있다. 첫째는홀츠민덴국제거리극축제, 샬롱국제거리극축제와같이일정기간동안우수공연들을초청하여거리공연과예술을실연하는축제의형태이며, 다른하나는런던의코벤트가든이나캘거리의버스크스
136 대구, 지금여기 톱, 도쿄의헤븐아티스트와같은도시의거리공연자육성지원책으로서아마추어및전문거리예술가들이연중내내버스킹등의거리공연을실연하는형태이다. 그런데후자의경우, 1980~90년대에는부정적인것으로인식되었다. 거리예술의한형태인그래피티는도시미관을해치는것이었고버스커 Busker 및스쿼터 Squater 들은도시범죄와연관이있다고간주되었다. 그러나현재는각종조례와규약을의욕적으로제안하고조율하여상생적모델을만들게되면서도시브랜드마케팅의성공적사례로서긍정적인평가를받고있다. 우리나라의경우거리공연은공원등지와유원지에서간헐적으로이루어져왔을뿐이다. 서울문화재단의청계천아티스트와대학로등지에서 B-boy, 댄스, 랩, 힙합공연등을정기적으로하고있는대학로공연연합 ADSP, 그리고철도지하철예술원의레일아트등이체계적으로운영되는경우이고, 홍대앞마로니에거리, 대학로앞문화거리등에서자생적인거리공연밴드들과퍼포먼스가있어왔다. 2009년부터 M.net에서방영되고있는 슈퍼스타 K 프로그램과더불어일련의오디션프로그램으로인해거리공연에대한의욕과반응을상승시키고있으며, 현재홍대주변에서거리공연을하는이들이열에한명꼴일정도로쉽게큰호응을얻고있다. 또한 2000년도이후지방자치단위를중심으로수많은축제들중거리극에특화된축제들은다양한볼거리와함께진정한프린지축제를즐길수있다는점에서그효과를인정받고좋은평가를받고있다. 이를테면, 과천한마당, 성주민족극한마당같은전통거리연희와마당극 / 연극중심의축제들이있는가하면, 안산거리극축제는광덕로 25시광장에서해외거리극단을초빙하고극단과거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137 2009 년삼덕 3 길에서진행된 골목부기 축제의경우 다양한실험을시도하여지역거리예술의새로운포맷을제시했다고평가받는다. 리극들을프린지무대에적절히배치하여광주의대표거리축제로자리를잡았다. 또한서울의하이서울페스티벌의경우 ASA Fringe 와 스트리트캠퍼스 같은프린지공연은거리공연을축제의영역으로잘버무린형태이다. 대구지역의경우에는마이머 mimer, 댄서, 퍼포먼서, 마술등거리에서활동하는다양한예술인들의연합체인 도란도우 가 2000년에출범을하고, 이후 거리문화시민연대 라는시민조직과함께마임, 댄스, 힙합거리공연, 기획공연을상시적으로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동성로등도심에서공연을했으며, 후에지역최초의거리공연제인 < 대구거리공연축제 > 로발전시키며대구거리공연의새로운포맷을제시했다. 이와더불어 2001년에는지역최초의대안예술시장인 깨비예술시장 은청소년아케이드그룹인 우주인 과함께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한달에한번장터프로그램과함께정기적인거리공연을해왔다. 1999년부터대구YMCA의청소년문화프로그램으로시작된 대구춤판 은대구교대역, 두류공원등지에서산발적으로행해오던청소년들의세대적놀이문화인 스트릿댄스 street dance 를지속적으로지원하기시작했고, 이후에는자신들만의공연장을만들정도로성장을하여 2011년현재 최장수거리공연활동으로평가받고있다. 이와함께대구 YMCA는자전거를이용한 아트바이크예술단 을사회적기업으로출범시켜지역의거리퍼포먼스와퍼레이드등을통해모바일퍼포먼스 / 거리극의새로운포맷을제시하기도했었다. 더욱이 2007 년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대구지회와대구YMCA 는풍물패와국악을비보이에접목시켜이종장르간의결합을시도한모바일퍼포먼스난장인 신길놀이 를탄생시켰으며, 당시 크로스오버 열풍을대변하기라도하듯지역에서훌륭한퓨젼거리공연포맷을제시했다고평가받는다. 2008년거리문화시민연대의연대체로출범했던 인디053 은지역의인디뮤지션들의커뮤니티라는점에서지역문화판에시사했던바가크며, 이들은정기적인거리공연은물론, 2003년거리문화축제에서처음기획된 프리스타일 을 2009년이후로거리문화시민연대로부터이어받아기획해오며거리공연축제의명맥을유지해나가고있다. 레일아트 는지하철과철도역사에서공연단을섭외하여산발적으로공연하는사단법인체로대구의경우반야월역의상시공연장과동대구역, 대구역의청사앞, 2006년동대구역청사가개편되면서공연활동을하고있지만, 서울, 부산, 경기지역에비해그리활발하지않은상태이며, 지역예술인들의동의와호응을얻고있지못하는형편이다. 한
138 대구, 지금여기 거리공연이라는태제를견인하기위해서는인력에대한직접지원프로그램중심이아닌지원정책설계및인프라지원중심의시각이필요하다.. 국음악협회대구광역시지회와한국국악협회대구광역시지회등한국예술총연합의광역지회단위가수년간진행해오고있는 멜로디가흐르는도시 사업은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2.28공원등도심녹지에서 런치타임 콘서트를운영해오고있으나시민접점에서더욱많은고민이필요하다. 이와더불어대구중구청에서진행한 로드아트 사업은 2009년완공된동성로야외무대대백앞야외무대추진사업과맞물리면서시너지를내었으며. 2009년삼덕3길에서진행된 골목부기 축제의경우젊은예술인들과상인클럽, 커피샵, 식당들이규합하여, 버스킹, 예술가토크쇼, 예술마켓, 해프닝, 거리설치 / 거리미술등다양한실험을시도하여지역거리예술의새로운포맷을제시했다고평가받는다. 지역의거리예술과다원예술지원전략그리고, 자립 서구혹은문화선진도시에서거리공연은특수한상황이아닌도시안의 문화 이지만, 아직까지한국의정서상자발적기부금문화및공연관람문화문화향수형태를포함한는원숙한단계에미치지못하였기때문에한시적활동으로그치는경우가많다. 물론안산, 춘천, 과천등거리극을축제에이용한도시들이존재하지만, 거리공연이라는태제를견인하기위해서는인력에대한직접지원프로그램중심이아닌지원정책설계및인프라지원중심의시각이필요하다. 즉, 거리예술의지원을위해서는거리에대한인프라혹은시설및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139 제도지원은가능하겠지만, 직접지원을하기에는그 영역이워낙방대하기때문에결론적으로는거리예 술은다원예술 / 실험예술이라는큰틀안에서지원 이되도록해야하며, 이는곧지역다원예술지원의 지원정책설정이라는숙제를남긴다. 지역문화영역은전문인과취미동호회영역이 혼재되어있다고평가된다. 수도권에비해훨씬그 경계가가깝거나엷게형성되어있음은단점이아니 며오히려민간부문의예술생태계를복원하기유리 한상황으로볼수있다. 쉽게말해지역예술발전에 있어서일종의인큐베이팅과정이있다면거리공연 은지역예술인 / 예술단체들에게길들이기과정이될 수있을것이다. 문화공간이넘쳐남에도지역의예술장르는고른 발전을하지못하고있는상황이다. 이를테면얼마 전개관한북성로의 대구예술발전소 가그러한경우 이다. 지역에서는최초로 장르 또는 단체, 혹은목 적설계가아닌과제중심의실험공간이관주도로만 들어진것이다. 기존의예술시장에서변두리에위 치하던청년, 인디, 다원예술그룹들이구심점을찾 은듯했다. 하지만 2009 년한국문화관광연구원과 함께고민되었던대구예술발전소당시는문화예술창작발전소 를관통하는단어는 1) 예술형식의실험, 2) 가치의다양성, 3) 개방성과소통, 4) 삶과밀착된, 5) 젊은, 6) 탈제도, 7) 독립성, 8) 대중성반엘리트성, 9) 상대적대안적 임에도불구하고개관당시의시도들과방향설정은그러했는가라는물음표를던져본다. 다원예술전반에있어가이드라인없이지역문예활동가나전문가와소통하여맥락을짚어내기보다는타지역전문가를데려와단기간에진행하는방식인탓이다. 위쪽지방이야어떻게되었든우리대구는지금부터첫단추를잘꾀어야할것이다. 다원예술분야는그거대한몸집과에너지에도불구하고국내몇몇예술축제와정부기금을제외하고는안정적인지원과유통채널을확보하고있지못하며, 이를지지하는활동장이나온전히평가해줄평론가를거의확보하고있지못한상황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다원예술소위원회를만든이래, 집중적이고효과적인간접지원운영체계를만들고있지만지역에서그러한지원을기대하기는힘든현실이다. 하지만이제는동시대에대한동시대예술의보다명확한기록이시작되고있는시점이며, 피해갈수없이전세계적인상황이되어가고있음을직시해야한다. 다원예술, 거리예술, 인디를관통하
140 대구, 지금여기 는이른바 DIY생태계 4 는실로거대하고다이나믹하여수많은문화적층위와복잡한질서를지닌다. 하지만지점과실체가모호한이영역에대해공부를하지않고기존의지원프레임으로지원하면자칫지원안한것만못하게되어이때까지나름대로자생해오던생태계는고사할가능성을내포하고있다. 5 기존의문예조직과달리재기발랄한이 천덕꾸러기 들은서류도만들지못하고규합도안되며, 문화재단이뭔지, 지원정책이뭔지잘모른다. 물론지역문화예술인들에대한지원포맷자체에대한대구문화재단의다양한지원방식의간소화와다각도적인접근은긍정적인평가를받을수있을테지만, 다원예술판의구성원들에게지원정책은넘을수없는격차를가지고있음은분명해보인다. 다원그룹지원을위해몇몇기획자나그룹들과단층적대화로통해지원정책이논의되어서도안되 고, 지역예술인들또한이를묵시해서도안될일이다. 단시간에북성로와동성로가서울홍대앞처럼될수있다는판타지와그렇게되지못할것에대한또다른 패잔병프레임 은이제시시할뿐이다. 현재한국사회에는청년들을대상으로한다양한시도와정책들이부쩍많아지고있으며, 대구지자체도청년예술인, 다원예술인자에대해많은정책들을준비하고있는듯하다. 청년예술, 나아가다양한실험이이루어질수있는거리예술이라는훌륭한활동장 6 이온전히지역에서뿌리를내리려면다양한주체만큼이나다양한지원방식이고민되어야한다. 냉철한해석아카이브과함께민간과관을아우르는대화체계라운드테이블가먼저견고히만들어져야할것이다. 예술대학을졸업한청년 4 DIY(DO IT YOURSELF) 는 1950년대전쟁이후어려워진영국경제에절약운동의일환으로시작된후적극적인소비형태의한가지로파생된문화로이는 70년대이후음악, 패션, 잡지, 문학등대중문화전반에영향을끼치고있다. 현재는라이프스타일의한형태로자리잡아도시농업, 디자인, 소규모인터넷네트워크 ( 인공위성 ), 영화, 화학등전방위적으로자리잡고있다. 5 실례로지역청년예술의주요한현상 (15년이넘었으니단체라기보다는현상으로해석 ) 으로평가되는 대구춤판 은대구문예진흥기금다원예술분야지원대상에서누락되었다. 6 여기에서필자는거리예술은큰틀에서 장르적인해석이불가능한다양한예술이거리에서풀어지는형태 라는의미로이용했다.
거리예술의시대를맞이하는우리들의자세 141 이제부터는그들의이야기를들어보자. 간혹재미난시도들이생겨나새로운돌파구가될지도모른다. 들이기존의시장에진입하지못하고생업전선으로, 서울로이탈하는것을얼마나더봐야하는가. 이제부터는그들의이야기를들어보자. 간혹재미난시도들이생겨나새로운돌파구가될지도모른다. 타지역사례도들어보자. 물론전문가들의이야기도듣고, 사례에대한연구도필요할것이다. 전략과방법의설정은그다음이다. 에대한아카이브와함께진지한대화가선행되어야할것이며, 그들에게맥락과판이존재해왔다는것자체에대한그들나름의존중감이생기도록정성을다한다면자생적인다원예술발전과함께진정한거리예술이지역에서창생할수있을것이다. 아마서울올라간사람들도대구로다시내려올지도모를일이다. 한국문예판은자체적맥락을갖지못하고스타일과경향의수입에의존한결과, 소통대상과행위에진정성을발견하기힘든상태에있다고요약되는상황이다. 무턱대고공간이나지원정책만들어놓고해보라고치면 사이즈미스 나서입지도못하는옷을주는꼴이된다. 수많은지역젊은이들이거리에서혹은대학에서실험적인예술을시도하며, 실패와극복을반복하다좌절하곤서울로짐을싼다. 새로운도전에대해평가가인색한한국사회더나아가 보수도시대구 라는곳에서지역의젊은이들이지역에서 돈도안되는 이같은활동을온전히해나가길바란다면새로운도전이자리잡을수있도록다방면의노력이필요할것이다. 지면에서다풀지는못했지만, 필자가겪어온인디판만 20년이다. 원대했던가치, 가슴뛰는이야기들, 재미난에피소드들을지금세대들은모르고있다. 이제부터라도이들
142 化문화공감 시가있는풍경 - 박소유칼럼 젊은예술인의칼럼칼럼 손태룡의음악상자 - 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음악회장대구예술인의신간 01 03
143 02 02 共感 03 04
144 서정시읽는도시 - 대구 서정시세편을외우자 박소유
145 사진 박소유시인 자줏빛紫 이빛을보면불안하다몸아픈곳을짚어내는빛이며깊게스며들어뼛속까지아린자주감자고혓바닥까지늘어진자목련꽃잎이며피터지게싸우고난수탉의볏이다구구절절, 피멍든생들은처음부터그런빛그런몸을지녔으니더아플것없겠다쉽게말하지마라세상이온통자줏빛이다누구는상처를꽃으로읽지만나는벌써꽃이상처로보인다 박소유 1988 부산일보신춘문예 1990 현대시학등단시집 어두워서좋은지금 2011 대구의작가상수상
146 문화공감 _ 칼럼 02 젊은예술인의칼럼대구에서사람만나는여행을시작하다박성익아울러사람도서관 대구와의인연대구에서의시작! 사실대구라서왔다기보단그냥대학따라왔다는표현이맞을듯합니다. 고등학생시절우연히손에꼽히는임학과라는학과를알게되었고찾고또찾아서알게된곳이바로한대학의 임학과 였고그렇게해서대구에 서의생활이시작되었습니다. 대학을다니는내내대구라는타이틀과는그리가깝게지내진못했던것같습니다. 늘기숙사-대학교-대학가의반복이었지거기서벗어나는시간은거의없었습니다. 어쩌다집에간다고 937버스타고동대구역가는수준이었으니말이지요. 그렇게군대를포함하면 7년이라는시간을보냈지만대구의인구가몇명인지? 대구의어느곳에어떤것이있는지? 잘알지도못했습니다. 오히려대구에대해서잘알려했다기보단늘떠날고민만했지요. 대구는재미가없지, 취업할데가없지 라는문구는 20대사이에서흔한이야기였습니다. 저또한그중에한사람이되어서나도졸업과동시에취업이든대학원이든이답답한도시를떠나야겠다는생각만했던것같습니다.
147 대학을다닐때에도틈만나면여행을다녔습니다. 물론대구를제외하고말이지요. 수업이없는금요일을활용해서열심히전국으로여행을다니고군전역후에도편도티켓끊어다인도로여행을가서반년은살았고다시복학하고나서도교환학생으로유럽으로떠나 8개월동안체류하는등여행은정말원없이다녔었습니다. 주로저의여행컨셉은사람을만나러가는것이었습니다. 유명한유적이나유물도시를보러떠나는것이아니라현지인들과친구가되고한마을에오래머물며단골집을만들고다시또현지인의추천을받아아무도모르는어느산골마을로의여행을떠난다거나여러의미를가지고설립된공동체를방문하는등언제나여행의중심엔사람이있었습니다. 경주계림숲을함께걸으며대화를나누었던철학과교수님, 울진시골마을한어르신의마을이야기, 광주에서들었던한노부부의생생한역사적사건의증언, 인도작은시골마을꼬마친구들과의마을여행, 오랫동안전통을지켜가던인도시골마을의민간의사, 과거잃어버린첫째아들을위해산티아고순례길에오른네덜란드의할아버지, 리투아니아정치외교학을공부하던녹색당출신독일인친구, 히말라야를넘어인도에서독립운동을하던티벳친구등등수없이많은사람들을길위에서만나며보낸시간도벌써 10년이훌쩍이나넘었습니다.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렇게전국으로세계로떠돌았었는데정작내가살았던고향, 그리고대학을보냈던도시의모습을제대로알고있는건하나도없구나! 라는생각이들더군요. 태극기를, 그리고한국요리를대접하고한국의문화를설명할순있어도내가사는지역을설명할수있는지식은아무것도없었습니다. 더불어짧았지만대구올레팀에서일하며대구에대한다양한서적을접하면서더많은지식과정보를접하면서부끄러움과호기심으로대구에대한관심이조금씩생겨나기시작한때였습니다. 시기적절하게도한대학선배의조언으로여러분야의또래친구들이모여서시작하게된것이 우리토피아 라는모임이었습니다. 각나름의분야에서활동하는친구들이모여서각자가생각하고고민했던것들을풀어냄과동시에서로에게서포트가되어주자 라는취지에서시작하게된모임이지요. 얼마되지않아모임이와해되어버렸지만당시제가준비하던프로젝트는사람도서관이었습니다. 그모임이와해된것은아쉬웠지만꼭하고싶었던프로젝트였기에홀로시작했던것이 2010년겨울이었습니다. 졸업학기가되어서한참진로를고민할때오히려묘한
148 문화공감 _ 칼럼 사람도서관과의인연 사실사람도서관도깊은인연이있는프로그램입니다. 유럽에서의교환학생생활이끝나고떠났던스페인산티아고순례길. 35일간 900킬로미터의여정을마치고찾았던곳이 떼제공동체 였습니다. 두곳모두기독교와깊은관련이있는곳이었지만종교도없던제인생엔아주큰의미가있는곳입니다. 특히나떼제공동체에서는늘묵상과노래로하루를보냈기에산티아고에서느끼고삶을되돌아보던것을정리하기에는안성맞춤인곳이었지요. 다시한달가까운시간을공동체에서보내면서그간느끼고만나고경험한것을하나하나정리를함과동시에내가한국에돌아갔을때무엇을할것인지에대한설계를했었지요. 사실지금진행하고있는대부분의프로젝트는그때영감을받았거나구상한아이디어에서비롯된것이대부분인것같습니다. 그렇게홀로사색과고민을즐길때공동체에함께체류하던한누님이저에게책을건네주셨지요. 그때받은책이바로 나는런던에서사람책을읽는다 라는책이었습니다. 바로영국런던에서진행되던사람도서관에대한이야기였습니다. 원재는 living library 라는명으로현재유럽뿐만아니라북미까지널리퍼지고있는프로그램이었지요. 내용은바로이런것이었습니다. 우리사회속의오해와편견을줄이기위해서한사람이직접책이되어자신이살아온삶의이야기를둘러앉은사람들에게
대구에서사람만나는여행을시작하다 149 들려주고대화를나누는식으로진행이되는프로그램이었지요. 책을보는데정말너무나재미있어서하루가안되어다읽어버린뒤 이거다!! 라는생각이들더군요. 앞서제가언급한저의여행에는늘사람이있었고그사람들을통해제삶에어마어마한변화가있었으니 사람도서관이라는프로그램이라면더많은사람들과나의경험을공유할수있지않을까? 라는생각에이르게되었지요. 그렇게한국에돌아오자마자제가지금까지전국으로그리고대구안에서떠돌며만났던모든사람들에게사람도서관이라는것을제안해주었고그렇게해서 2011년 4월 1일만우절날본격적으로사람도서관이진행되었습니다. 처음엔정말소박한마음으로질러본것이고하나의취미로시작을했었습니다. 어쩌다마음내킬때프로그램을열어본것도한일년이조금안되었을까요? 더많은사람들이프로그램에호응을해주었고입소문이퍼지고추가진행에대한요청도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사회적기업이라는영역을알게됨과동시에참가자그룹안에한분께서교육지원청에저희프로그램을제안해주시게되었고이제는일반인뿐만아니라학교청소년친구들에게사람도서관을통해다양한경험한사람들을직접만나게해주고대화나눌수있는장을열수있게되었지요. 그게작년봄부터시작되었으니올해로청소년들을만나는작업도 2년째를맞이하고있습니다. 지금에이르기까지이제겨우 2년조금넘는상황. 지역에서활동하신선배들에비하면굉장히짧은시간이지만, 저에겐참길고도긴시간이었습니다. 단순히사람도서관사업하나만고민하는것뿐만아니라더다양한화두를고민삼기시작한나날이었습니다. 사업이되는순간고려해야할것들은더많아지는등생각보다조건이호락호락하지않더군요. 주변분들은 이왕하는것서울에서시작하는게어떻겠냐? 라고하며지역에서이러한활동을하는것은정말이지쉽지않다는이야길참많이도했습니다. 하지만되돌아보면서울에서야이미이러한활동이많이이루어지고있고더불어서사람도서관을선택한이유도사업적성공을위해서라기보다는이지역에정말필요하다는인식이있었기때문이지요. 학교에서청소년친구들을만나고사람도서관을통해다양한사람들을만나는과정을지켜보면서거기에대한확신은점점더강해져만갔습니다. 많은사람들이알고있듯이최근대구에서중고등학교를중심으로학교폭력및자살에대한문제들이많이제기되면서청소년문제는더큰이슈가되었습니다. 학교의입장은좀더단호했던것같습니다. 문제들이생길수록오히려기존의사회와격리되어간다라는느낌을받았었지요. 그것에비해제가지금까지만났던청소년들은오히려더활발하게사회와의관계가필요하다는생각이들었습니다. 바로학교폭력또는자살시도자친구들의
150 문화공감 _ 칼럼 공통점이바로관계의결여였으니깐말이지요. 자신의기쁨, 슬픔을함께나눌사람이주위에별로없다는것이흔한사실 이었습니다. 더불어자신의삶의이야기를전하던 사람책 들로부터의큰배움도있었습니다. 처음에는누구나남들에게들려줄만한가치있는이야기가있다는발상으로사업을시작했었는데규모가백명가까이되자이분들에게도공통점을발견하게되었지요. 바로자신의인생에서한번쯤은스스로선택하고실행을해본경험있는사람들이라는사실을알게된것이지요. 사람책즉자신의인생이야기를주체적으로하려는사람이그리많을까? 라는주변의높은우려가있었지만생각보다대구지역안에서너무나다양한활동을하고자신만의분명한뜻과비전을가진사람, 자신의능력을재능기부하고자하는사람등등보수적이다답답하다는타이틀과는다르게사람도서관을통해서멋진사람을더많이만날수있었던시간이기도했습니다.
대구에서사람만나는여행을시작하다 151 다시사람을만나는여행을시작하다그렇게지금까지여행에서사람들을만나며살아왔다면이제는사람도서관이라는타이틀로더많은사람들을만나기시작하게되었습니다. 지역의문화와맛집과나라와동네의역사가아니라한개인의인생이야기를듣기시작하게된것이지요. 더불어서종종타지역에서도활동하는제또래친구들과만나서이야기할수있는기회도많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많은자극이있었던부분이과거교육, 문화, 예술을한다고하면언제나서울에가서무언가를하고자했었는데이제는청년들이떠나간다는지역인천, 춘천, 광주, 대전. 창원, 부산등에서우리지역의컨텐츠를발굴개발하고생태계를만들어가자라는친구들이정말많다는것을생생히느끼는요즘입니다. 대구에서제가진행하는컨텐츠만고민하는것이아니라전국친구들을만나는과정에서 내가하는역할이지역에미치는영향이무엇이며어떠한것이필요한것인가? 를고민하는기회가되기도했었습니다. 당시타지역에서강의나발제를하게되면꼭하는질문이있었는데바로 대구 하면어떤것이떠오르냐라는질문이었습니다. 대부분 덥다, 보수적이다, 고담시티다 라는답변이대부분이지요. 하지만제가지금까지대구에서지내면서느낀것은그러한것도일부몇몇특정인을통한이미지 인것이지 250만이넘는모든사람이보수적이라고말할순없지않을까요? 대구든어느지역에가든세계어느곳을가더라도자기만의가치관을가지고활동하는사람들이너무나많다는사실이었습니다. 앞에서청소년들이사회다른기관또는그룹과너무나관계가없다는이야길했었는데사실청소년뿐만아니라사회속에서도단절은너무나강하게다가왔습니다. 작은변화의시작한번은학교에서사람도서관을진행할때지역에서활동하는또래인디밴드를초청한적이있었습니다. 프로그램내용은 1부에서는자신이살아온인생이야길들려주고 2부에서는본인이왜인디밴드를시작하게되었는지그리고활동을하면서어떤사연이있었고그사연과인연있는곡은어떤것이있었는지를함께토크쇼를진행함과동시에공연을선보인적이있었습니다. 큰음향장비가있었던것도, 화려한연출이있었던것도아니지만참가한친구들이정말좋아해주더군요. 아이돌에열광하던친구들이폰으로녹화해서인터넷에올리고싸인을받고호응을해주는등기대이상의반응이나왔습니다. 준비했던저로서는조금의아스러웠던날이
152 기도했습니다. 그러한비슷한경험들이몇번더쌓이게되자알게된것이바로무대위의누군가와객석의누군가와의교감이었습니다. 무대에서자신의단련된모습만보여주는것이아니라내가이자리에서기까지의과정을이야기하는것에진정성있는전달력이있었고청중들이다양한반응과즉각적인피드백을주었기에가능한상황이지않았을까하는결론이내려졌습니다. 사람도서관뿐만아니라최근작지만다양한기획을할기회가많아졌는데요, 그럴때마다항상기준으로두고있는것이어떻게하면제공자와수용자와의접촉면적이넓은연출을할수있을까, 즉어떻게하면좀더많은교감이이루어지는기획을할수있을까하는것이주요화두가되었습니다. 그래서얼마전 TV에서 안녕! 오케스트라 라는프로그램이방영된적이있었는데이걸본뒤다시일을벌이게되었는데요. 이프로그램은다문화가정친구들에게비올리스트용재오닐을중심으로클래식음악을오랜시간동안교육을해준뒤함께공연을진행하고과정의이야기를담은다큐였습니다. 지역에서도단순히보여주기식공연이아니라지역의젊은뮤지션들이지역의청소년들을만나고관계를형성하고반년이나일년이지난시점에서함께연습한것을선보일수있다면얼마나좋을까하는생각에여기저기문을두드리고있는요즘입니다.
대구에서사람만나는여행을시작하다 153 아울러의꿈지역에서활동을하다보면부정적으로변하기가참쉬운것같습니다. 여러가지조건들이열악하다는말은수시로듣지요. 하지만이부분도타지역또래친구들과교류를하면서정말몇몇군데를제외하고는다비슷하다는상황을알게되면서이러한것들이슬프지만흔한상황이라는생각이들었고다시대구에서멋진사람들을끊임없이만나면서새로운가능성또한발견하게되었습니다. 사실아울러는운영하는첫번째정신도 find possibility 라고세워두었기에안되는것백날붙잡아두는것이아니라제가발견했던가능성으로밀어붙이자는것입니다. 제가가진자본인맥으로는서울에버금가는뛰어난무대를절대만들수없다는것을잘알고있습니다. 하지만제가가장재미있어하고전달하고싶은것은한사람을진정성있게전달하고자하는것이저의사람도서관기획의운영바탕이되었습니다. 짧게스쳐가는남이라도깊이있게한사람과교감한다는것이중요하다는것을알게되었으니말이지요. 을해주셨습니다. 벼하나도 100번이넘는사람의손길을거쳐야여물수있는데하물며한사람이자라는덴오죽하겠습니까? 한대안학교선생님께서우리학교는교사수가학생수의 10배라는반농담반진담의말씀을떠올립니다. 아울러즉제가활동하고자하는영역에서는교육보다는관계에방점이찍혀있습니다. 우리가잃어버리고망각하던관계를회복하고찾아가는과정인것이지요. 대부분의사람들은교육받기보단사랑과존중받기를원하는존재라는자각과함께 훈련되어지는것 이아닌삶속의관계에서배우는것이좀더찐하게마음에남는것같습니다. 변화의실마리를제공해주는것도좋지만스스로변화할수있는관계의장을만들어나가는것이아울러의그리고제활동의핵심방향이되었습니다. 오늘도대구에서 linker라는직함으로사람을만납니다. 그리고또누군가에게그사람들을이어주는하루입니다. 요즘은교육파트관련해서정기적으로학부형모임을운영하고있습니다. 그때이런질문을던졌었는데요. 나의자녀문제에대해함께이야기나눌수있는사람이몇명이나되나요? 라는질문에청중들은기껏해봐야한두명이라는답
154 문화공감 _ 칼럼 03 손태룡의음악상자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음악회장손태룡음악이론가 대구지역의서양음악유입은기독교의전래와함께 한다. 초창기음악활동에사용되었던서양악기는피아노 를비롯하여관악기였다. 1900 년 3 월 26~28 일에처음으로 유입된피아노는대구지역제 5 대선교사사이드보탐 Richard Henry Sidebotham, 1874~1908, 사보담및에피Effie Alden Bryce, 1876~1942 부부의소유였다. 1899 년 11 월 23 일대구에도착한 사보담부부는 1 년간대구에서선교활동을하였다. 이렇게 1 권태호에관한자세한내용은손태룡, 권태호, 독일예술가곡의파종자, 한국서양음악가연구 ( 서울 : 보고사, 2011), 217~82쪽참조. 2 김문보에관한자세한내용은손태룡, 김문보, 한국인최초의바리톤, 한국서양음악가연구, 55~90 쪽참조. 3 대구지역의구체적인극장에대한내용은김석배, 일제강점기대구의극장연구, 국어교육연구, 제49집, 393~422 쪽과 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극장, 향토문화 ( 대구 : 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 2013), 제27집, 3~40쪽참조. 4 협률사 ( 協律社 ) 의설립목적은두가지설이있다. 하나는최남선, 조선상식문답속편 ( 서울 : 동명사, 1947), 344~45쪽에서언급한내용으로, 고종황제어극 40주년경축식장 이라는것과, 다른하나는 大韓每日申報, 1906년 3월 8일자내용에나오는군악대와관계한장봉환 ( 張鳳煥 ) 이고종황제에게건의하여군악대경비충당을목적으로설립하였다는주장이그것이다. 魯棟銀, 近代韓國音樂의展開, 韓國思想史大系 (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제6권, 484쪽각주 105) 에서재인용. 아울러우리나라초창기무대공간에대한본고의내용은魯棟銀, 近代韓國音樂의展開, 韓國思想史大系, 483~84쪽참고. 선교사아내의피아노가대구로유입된이후, 1908년계산성당에서운영한해성학교에서의신호나팔대와 1912년계산성당청장년들의모임으로명도회악대가결성되어기악활동이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음악회를연다는것은매우어려웠는데, 독창회로는 1928년 7월 14일에있은권태호權泰浩, 1903~1972독창회가대구지역에서는처음이된다. 1 당시일본고등음악학교에재학중이던권태호는대구제일소학교강당옛중앙초등학교자리에있었던일본인남자학교에서독창회를가졌던것이다. 그런데, 이미김문보金文輔, 1900년생는 2년전 1926년 8월 30일에대구제일소학교강당에서아내요시사와나오코吉澤直子, 1905년생와함께 2인음악회를개최한바있다. 2 이음악회는대구최초의 2인독창회, 또는조인트리사이틀이라고한다. 5 조선시대국가의제사및시호 ( 諡號 ) 를의론하여정하는일을관장하기위해설치되었던관서를말함.
155 20세기초반일제강점기가시작되는시기는서양음악이우리나라에유입되는초창기이므로대외적으로음악회가열리는일은드물었다. 때문에음악공연을할전문적공간의필요성을느끼지못했을뿐만아니라재정적으로어려웠으므로엄두도내지못하던때이다. 그래서여러장르의무대공연을할수있는다목적인공간에서음악회가이루어졌다. 그곳이바로연극및활동사진을보여주는극장이다. 3 일제강점기대구에서는여러극장이세워졌으나음악회는대구극장과만경관萬鏡館에서열렸으며, 또한대구제일소학교강당과대구공회당에서도수준높은음악회가개최되었다. 공연장의역사적흐름우리나라최초의국립극장은정부가재정충당을목적으로 1902년에설립한협률사協律社 4 5 이다. 봉상시奉常寺내에설치하여궁내부宮內府의협률사協律司가관장하였기때문에협률사協律社라하였다. 이후 1908년에협률사가원각사圓覺社로바뀌어져극장장이었던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그해 11월 15일부터며칠동안 < 은세계 > 銀世界로개관기념공연을가졌으나 1909년에사실상문을닫게되었다. 한편 1907 년 2월협률사의자리에는군인회관격인관인구락부官人俱樂 部가들어섰으나그이듬해인 1908년에남대문고문본부분실顧問本部分室의양옥을수리하여옮겨갔다.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군대해산과동시에국립극장격으로이인직이그의어용자御用者로서운영전반을맡게되었고, 그이름은건축모양을본따서원각사로불리게되었다. 우리나라최초로세워진극장은 1899년서울아현동에설립된아현무동연희장阿峴舞童演戱場이다. 19세기말부터는도시를중심으로무대공간의등장과새로운음악예술의탄생이요구되었다. 이러한시대적흐름에의해사설극장으로실내무대형연희장이바로아현무동연희장인것이다. 1900 년에는용산무동연희장龍山舞童演戱場을비롯하여관립극장인협률사가 1902년여름에설립되었다. 당시일본인들이서울교동에연희장을설치하고매일밤무대를꾸려나갔는가하면, 서울에거주하는중국청나라상인들이 1904년에청요관을설치하여연희하고있었다. 1907년에는연흥사演興社를비롯하여광무대光武臺와단성사團成社를비롯한장안사長安社, 음악사音樂社, 단흥사團興社등서울의여러곳에극장이생겨났다.
156 문화공감 _ 칼럼 이처럼실내공간이생긴것은 1899년부터시작된변사辯士를대동한일본의활동사진영화이전국순회공연을하면서부터각도시에극장이필요했기때문이다. 6 대중적인기를끌면서시작된일본인극장에서는주로일본전통극과신파극등을공연했으며, 중국청국인들의극장에서는연희와경극京劇이유행하고있었다. 상설극장이이시기에생겼다는것은대중을기반으로한무대공연형식이기존과달라졌음을의미한다. 따라서판소리를비롯한기존의우리나라음악예술이새롭게변화되지않으면안되는상황에서협률사를중심으로한음악예술인들이판소리를창극화하였던것이다. 창극단, 가극단, 악극단이많이생겨활동사진과함께전국순회공연을함으로써지방에서도실내공간이절실히필요하게되었다. 6 李萬烈, 韓國史年表 ( 서울 : 역민사, 1985), 175 쪽. 7 대구최초의극장을이필동, 대구연극사 ( 대구 : 중문출판사, 1995), 52쪽에서는대구좌 ( 大邱座 ) 로밝히고있다. 그러나본인이연구한결과로는니시키좌 ( 錦座 ), 곧금좌이다. 이명칭은당시중구태평로일대를금좌로불렀는데, 이도로명을이용한것임. 8 김석배, 일제강점기대구의극장연구, 국어교육연구 ( 서울 : 국어교육학회, 2011), 제49집, 399쪽각주 28) 과 400쪽각주 37~39) 참조. 9 대구지역공연장은김석배, 일제강점기대구의극장연구, 국어교육연구, 제49집, 393~422쪽과 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극장, 향토문화 ( 대구 : 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 2013), 제27집, 3~40쪽참조. 대구에서도이러한시대적흐름에의해일본인이최초로실내무대공간을마련하게된다. 대구최초의극장은 1907년 3월에세워진니시키좌錦座이다. 7 니시키좌는일본인나까무라中村熹一가세웠는데, 이로인하여대구에서도무대공연을할수있는공간이마련되었던것이다. 니시키좌에서는처음에주로일본인들을위한노래와춤등이공연됐으나, 이후여러가지문화활동을하는공간으로바뀌었다가문을닫았다. 1917년에는전당포영업자들의모임인
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음악회장 157 마찌마와리 ( 영화선전악대, 1930 년대 ) 일심회一心會와니시키좌주인나까무라, 조선인배씨裵氏등이조선인을위한극장으로대구좌大邱座를신설하게되었다. 이후대구좌가바로대구극장이된다. 이미 1911년에는현중구대안동에활동사진관으로대구구락부가건립되었고, 1910년대중반에중구향촌동 51번지에칠성관七星舘이있었다. 8 이후칠성관은대영관大榮舘으로상호가바뀌었고, 1929년벽두부터는대경관大鏡舘이되 에일본인이어부인석御婦人席이라고써붙여두었는데, 이것이중국사람들의웃음거리가되기도했다고한다. 그까닭은일본말에는어御자가존경을뜻하는높임말이지만, 한문으로풀이하면 부인을자기마음대로하는자리 라는뜻이되기때문이다. 흥행선전은마찌마와리町廻라고하는큰깃발을앞세우고악대가요란한소리를내면서거리를누비며흥행했으며, 영화를상영할때에는남녀배우가인력거를타고선전행렬을뒤따라다녔다고한다. 었던것이다. 또한 1933 년 8 월 12 일에대경관은호락관好樂 舘으로새롭게개관하여, 1938년대구키네마구락부가개관하자문을닫았다고한다. 이와비슷한시기에대구에는한국인이만든만경관萬鏡館과일본인이만든영락관榮樂館과신흥관新興館이생겼다. 영락관은나중에자유극장自由劇場으로이름이바뀌었으며, 신흥관은송죽영화극장松竹映畵劇場및송죽극장으로이름이각각바뀌었다. 당시극장의입장료는 5~10전이었고, 객석은모두다다미가깔려있었다. 의자는아래층중앙에나무로된긴의자가있었고, 좌석은남자석과여자석으로구분되어있었다. 겨울철이면방석과화롯불을따로돈을받고빌려줬는데, 방석의비용은 5전이었으며, 화롯불의비용은 10전이었다. 한편남자와여자의좌석으로구분된객석의부인석 일제강점기이러한극장은무대공간으로서의역할을하여대구의문화예술향상에기여하였다. 전문적인음악공연장이없던시기에이들극장과공회당및학교강당이음악회장으로유용하게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음악회가열렸던대구극장 9 은 2011년에폐업되었고, 만경관은새롭게현대적건물을지어영화관으로서의명맥을현재까지이어오고있다. 그리고의미있는음악회가개최된대구제일소학교강당은해방이후학교자체가없어졌다. 대구시민들을대상으로대규모적모임장소로이용된대구공회당은 1975년에대구시민회관으로새롭게건축됨으로써사라졌다.
158 문화공감 _ 칼럼 대구극장 (1930 년대 ) 대구극장 대구극장은대구좌大邱座란이름으로 1917년현중구화전동 4번지현주차장에서연극전용극장으로개관하였다.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서울용산에있었던앵좌櫻座를매입하여대구로옮겨그해 10월말경에준공한것으로보고있다. 대구극장에서는가끔음악회도열렸다. 대표적음악활동으로는 1930년 10월 13일에추계예기연예회秋季藝妓演藝會, 1931 년 6월 29일에유학가는바이올린연주가홍난파송별음악회, 그해 12월 2일에명창김초향독창회, 1932년 1월 26~29 10 손태룡, 韓國音樂論筌 ( 대구 ː 영남대학교출판부, 2002), 603-606 쪽. 11 대구新택리지 ( 대구 ː 거리문화시민연대, 2007), 517 쪽. 12 한편남룡강정 ( 南龍岡町 ) 길건너편에는한국인학교로남욱정 ( 南旭町 ) 소학교가위치하였다. 이학교는여자보통학교로대구여자보통학교인데,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에서미나미아사히마치 ( 남욱정소학교 ) 로변경됐다가해방후서부국민학교, 곧서부초등학교가되었다. 일제강점기남자학교는대구보통학교로지금의대구초등학교이며, 대구수창보통학교는남녀공학이었다. 허귀진, 초대대구시장딸로, 민족운동가의며느리로살아온 90년인생사 ( 대구 : 도심재생문화재단, 2012), 35~36쪽. 일 3일간조선정악회의조선음악대연주회, 1935년 10월 24~26일 3일간조선성악연구회의남선순회공연, 1939년 6 월 23~25일 3일간명창이동백은퇴기념으로지방순회공연이있었다. 13 朝鮮總督府官報, 第 1582 號 (1932 년 4 월 18 일자 ), 3 面. 14 손태룡, 음악이란무엇인가 ( 대구 ː 영남대학교출판부, 2006), 342 쪽및 朝鮮民報, 1939 년 3 월 29 일자. 15 손태룡, 권태호, 독일예술가곡의파종자, 한국서양음악가연구 ( 서울 ː 보고사, 2011), 217~82 쪽.
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음악회장 159 대구제일소학교강당에서의현제명독창회 (1929 년 9 월 7 일 ) 대구제일소학교강당에서의권태호독창회 (1928 년 7 월 14 일 ) 대구제일소학교강당친일내각이소학교령칙령제145호을 1895년 7월 19일에제정공포하여전국에소학교현초등학교설립이가능해졌다. 10 대구에서는 1905년 10월 1일대구아사히공립심상소학교大邱旭公立尋常小學校가일본인자녀를위해일본인들에의해설립되었다. 이학교는당시대구에서일본인들이세운최초의소학교이다. 1907년부터는대구최초의유치원인대구유치원도함께운영되었다. 11 대구제일소학교, 대구제일심상소학교, 대구심상소학교, 대구공립제일소학교, 대구공립제일심상소학교, 대구제일심상고등소학교, 대구아사히마찌旭町제일소학교, 욱정旭町보통학교 12 등으로불리기도하였다. 대구제일소학교는일본인을위해설립된초등교육기관이며, 대구공립심상소학교는 1932년 4월 1일부로조선총독부경상북도고시제17호 1932년 3월 31일에의해, 관제개혁과함께대구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개명된 13 바있다. 1905년 10월일본자녀의교육을위하여슬부익길膝付益吉이주도하여일본인을위한학교를설립했는데, 그해 12월부터현북성로의한민가民家를빌린가교사에서일본거류민자녀 38 명으로수업이시작되었다. 14 이후현 2 28기념중앙청소년 공원중구공평동 15번지, 구중앙초등학교위치자리로학교를옮겼는데, 1923년에학교건물을새롭게지었다. 교사건축이후강당을세웠을것으로짐작된다. 그이유는 1926년부터이곳에서음악회나연합회행사가개최된내용이확인되기때문이다. 한국인최초의바리톤김문보와아내요시사와나오코의부부독창회가 1926년 8월 30일이곳에서열렸다. 또한 1928년 6월 10일대구곡물상조합곡우 회大邱穀物商組合穀雨會의현미상조합연합회玄米商組合聯合會제 1회대회가이곳에서개최되었다. 또한대구최초의권태호독창회가 1928년 7월 14일에열렸으며, 15 코리아째즈밴드음악회가그해 8월 15일에각각개최된바있다. 이렇듯 1920 년대이곳에서음악회나연합회가열렸던것이다. 만경관만경관은 1922년 8월에착수하여이듬해 1923년 3월 7 일현중구종로 1가 29번지에서수용인원 800명의활동사진관영화관으로개관하였다. 이미 1922년 6월조선인 14명과
160 문화공감 _ 칼럼 만경관내부 (1927 년 4 월 30 일 ) 일본인 1명이합자하여화재로소실된조선관터에이오극장二五劇場을짓기로계획했다가, 극장명을만경관으로변경하고 45,000원의주식을모집하여 3층벽돌로건축하였던것이다. 개관기념으로서울의한남권번漢南券番기생 30명이출연하여대성황을이루었다. 만경관에서의음악활동으로는이미 1923년 3월 5일에한남권번의공연이있었고, 또 1925 년 1 월 7 일에대구예기조합대구기생조합연주와 1926 년 9 월 26~28 일 3 일간추기특별대연주회, 1927 년 4 월 30 일에 만경관에서의 동아일보 신사옥낙성기념음악회 (1927 년 4 월 30 일 ) 동아일보신사옥낙성기념음악회 < 사진 4-1> 과 < 사진 4-2> 참조가각각열린바있다. 1927년 5월 18일새벽에만경관이화재로소실되었다. 그러나그해 6월 11일부터현향촌동의대영관을빌려만경관이란극장명으로영업하였다. 불이난만경관은 1928년 6월에유지들이뜻을모아대구에서유일한조선인전용극장으로 건축을시작하였다. 그해 12월말에수용인원 1,000명의신축건물이준공되어, 이듬해 1929년 1월 1일부터재개관하였다. 당시다양한문화행사가이곳에서열렸다. 특히음악회로는 1929년 4월 15~17일 3일간달성권번의경북조해구제자선연주대회, 1931년 11월 28~30일 3일간달성권번의만주동포구제연예공연, 1932년 6월 18일에미국유학가는 16 啓聖八十年史 ( 대구 : 계성중고등학교, 1989), 160~61쪽. 아울러박태준에대한자세한내용은손태룡, 박태준, 한국합창운동의선구자, 한국서양음악가연구, 91~150쪽참조. 기념으로박태준송별음악회가각각열렸다.
일제강점기대구지역의음악회장 161 대구공회당에서의계성학교합창공연 (1943 년 11 월 15 일 ) 대구공회당 (1931 년준공 ) 대구공회당대구방송국공개홀은당시 KBS대구방송국이대구종합운동장옆북구고성동사옥에서현재대구시민회관자리에있었던대구공회당건물로옮김에따라대구공회당홀을 KBS대구방송국의호출부호인 HLKG를따서 K.G홀이라불렀다. 당시이곳에서많은예술행사가이루어졌다. 1929년당시대구공회당을짓는것이대구시민은물론대구부당국에서도숙원사업의하나였다. 대구는서울 평양 부산에이은전국 4대도시의하나이며, 교육과문화의도시로자부하는대구에공회당이없다는것은수치스런일이라는것이다. 이에대구부당국은결심하여대구공회당을지었던것이다. 대구부예산과유지들의기부금등 15만 5천원을들여 2년만인 1931년에준공된대구공회당은 830평에연건평 1,075평으로건물높이약 19m 63 尺나되는당시로서는거대한건물이었다. 수용인원은대집회실이 2천명, 소집회실이 180명, 대식당이 150명, 일반식당이 53명이었고, 정면의 4 층과 5층은호텔로쓰고, 2층뒤쪽은상공회의소에빌려주었었다. 일제강점기에는주로대집회실에서음악활동이이 루어졌다. 이건물에는대구방송국을위시하여예총경북지회, 경상북도공보관, 미술전시장이들어있었고, 지하에는문화싸롱이라는다방이있어당시대구의문화예술인들이사랑방같이드나들던곳이었다. 당시대구공회당에서의음악공연으로는 1932년 9월 16 일에박경희독창회, 1933년 7월 8일에최리차트독주회가각각열렸다. 또한 1934년 9월 7일에는수해재민구제를위한현제명玄濟明, 1903~1960독창회가열렸고, 1935년 2월 5일에는조선가극대회가있었다. 1935년 2월 18~19일양일간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초향金楚香, 1900~1983, 현계란, 최금란, 이봉희등이출연한조선노래대회가동아일보사대구지국후원으로개최된바있다. 그리고 1936년 10월 15일계성학교개교30주년기념음악회가열렸는데, 이음악회에당시평양숭실전문학교에재직하고있던박태준朴泰俊, 1900~1986 이독창을한바있다. 16 1939년 10월 24~26일 3일간전국의일류명창대회가열리기도하였다.
162 문화공감 _ 신간 04 대구예술인의 신간 흐드러지다 박이화지음 천년의시작펴냄 125 쪽 9,000 원 간밤 / 그거친비바람에도 / 꽃들은아무일없었다는듯 / 도리어화사하다 / 아직때 가안되어서란다 / 수분受粉이안된꽃은 / 젖먹은힘을다해 / 그러니까죽을힘을다 해 / 악착같이가지를붙들고놓아주지않는단다 / 그러나으스러질듯나를껴안고있 던그대팔이 / 잠들면서맥없이풀어지듯 / 때가되면저난만한꽃잎도시나브로가지 를떠난단다 / 아무도먹을수없는눈꺼풀스르르내려앉는그천만근의힘으로 / 때가 되어떠나는일그러하듯 / 때가되어꽃피는힘그또한 / 누가말릴수있을까?/ 때가 되어 / 그대앞에만판흐드러진 / 내마흔봄날도분명그러했을터 박이화 흐드러지다2 1998년문예지 ' 현대시학 ' 을통해문단에나온지은이의두번째시집이다. 시작시인선이형권기획위원은박이화의시에대해, 때로는노골적인, 때로는은은한, 때로는야성적인, 때로는고상한, 때로는부드러운, 때로는과격한, 때로는차분한, 때로는달뜬언어의다양한체위를드러낸다 고소개했다. 에로티시즘은생명의진원지이다. 내마흔봄날 쯤되면젊은시절남사스러워했을노골적인생각도뱉어내게된다. 에로틱혹은에로티시즘은그어떤고상함보다도역동적이고생명력있는것임을알게되기때문이다. 봄과여자와고양이, 복사꽃모텔, 뽕브라이야기, 피차짐승아닌꽃없 고, 다시, 미혹, 선데이서울, 나비야! 청산갈래?, 뜻밖의애인, 덫 등육욕 과해탈의경계를넘나드는에로티즘을표현해내고있다.
163 시와반시기획시인선 이하석 문인수 문무학등 9 명지음 시와반시펴냄 각권 4,500 원 문학지 시와반시 가창간 20주년을기념해발행한기획시인선집. 손바닥크기로한손에잡히는포켓용시집이다. 이번기획시인선의시인들은시단경력 20년이상의중견및원로시인들이다. 문무학대구예총회장을비롯해문인수 이하석 권운지 김성춘 서종택 강현국 박정남 정숙시인등 9명이다. 싶다, 서종택시인의 납작바위, 강현국시인의 초록발자국, 박정남시인의 옷고름, 정숙시인의 돛대도아니달고, 권운지시인의 그가오기전에날이저물었네 등이있다. 시로쓰는자서전 이란부제처럼, 시인들은각자살아온길을대변할만한자신의시 33편을직접가려뽑고, 그배경이될만한 20장의사진과함께담았다. 여기에 시인의말 과소상한자술연보를곁들였다. 문무학시조시인은 ㄱ 이라는제목으로한평생호미로 밑줄을그으며 사셨던어머니를떠올리며, 호미로그은밑줄 이라는시를싣고있다. 문인수시인은 밤깊어더낯선객지 ( 사진 ) 에 하관 이란제목의시를실었고, 이외이하석시인의 환한밤, 김성춘시인의 나는가끔빨간입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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