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WON MUSEUM 12th Museum college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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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문화 Vol.51 NO.9(2010.9) 가을은 독서의 계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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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WON MUSEUM 12th Museum college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주제 역사속여성기간 2015. 4. 21( 화 ) ~ 6. 23( 화 ) 강의시간 화요일 14:00~17:00 강의장소 수원박물관 1층다목적실강의주제 구분일시주제 성명 담당 소속 제1강 4.2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서철원 서울대학교 제2강 4.28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김선주 중앙대학교 제3강 5.12 천추태후, 요부인가여걸인가 권순형 한국학중앙연구원 제4강 5.19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김용선 한림대학교 답사 5.26 답사추후확정 제 5 강 6.02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이화형 경희대학교 제 6 강 6.09 우리는맞수, 신사임당과허난설헌이숙인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 7 강 6.16 명성황후와을미사변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제 8 강 6.23 나혜석, 그녀에대한이해와오해이상경 kaist 대학교 * 위일정은박물관사정에따라변동될수있습니다.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목차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서철원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김선주 03. 천추태후, 요부인가여걸인가 권순형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김용선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이화형 06. 우리는맞수, 신사임당과허난설헌 이숙인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김영수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이상경 09 25 37 51 63 81 99 119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서철원 서울대학교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서철원 서울대학교 1. 문제제기 단군신화의웅녀, 고구려신화의유화, 백제건국신화의소서노, 신라건국신화의선도산성모, 대가야건국신화의정견모주등은건국시조를출산한 어머니 라는점에서주목을받아왔다. 그러나이러한관심은여성성혹은모성에대한관심에국한되는경우가많았으며, 이들이신화적존재로서신격을획득해가는과정또는신격을획득한이후의상징성등에관한논의는많지않았다. 유화가지닌곡신 ( 穀神 ) 의면모, 선도산성모와정견모주의여산신으로서의성격또한밝혀지지않았다. 여기서는고대한국의건국신화에등장하는여신의형상화과정을북방과남방으로나누어한편씩정리하고자한다. 고조선과고구려신화는북방에, 백제, 신라, 대가야는남방에속하는것으로본다. 거칠게나마정리하자면북방계통은건국시조를출산하기까지의과정이상술되어있으며, 고구려의경우건국을돕는역할까지부연되었다. 반면에남방계통은여신의본질에대한정의또는서사적기능이상대적으로축소되어있으며, 대체로 2인의자녀를출산하는것으로되어있다. 게다가이 2인의자녀가서로어떤관계를갖는지에따라여신의형상화작업또한다른방향에서이루어진다. 본고는그양상을주로고찰할것이다. 그러나이러한구분은신화의계통또는종족의차이에따른것이아니라, 고대국가가성립하는배경혹은주변정황에말미암은것으로본다. 요컨대텍스트가이루어진문맥 (context) 에따라신화의모습이구분되었으며, 이러한차이가신화의담당층성분이나계통에말미암아규정된것은아니라는것을전제한다.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11

2. 북방신화에서모계의인성과신성 1) 단군신화에서웅녀의인성단군신화는고조선의건국신화이기는하지만, 건국의과정이소상히밝혀져있지는않다. 그보다는단군의혈통이지닌신성함의근거를알리는쪽에그목적이있는것처럼보인다. 널리알려진 삼국유사 에따르면이신화의내용은다음과같은데, 여기서는일단웅녀와관련된기록과단군의건국과정관련기록만을살펴본다. ➊ 그때곰과호랑이가같은굴에서살며항상신웅 ( 神雄 ) 에게빌되 원컨대변화하여사람이되고싶습니다 하거늘, 한번은신웅이신령스러운쑥한자래와마늘 20개를주고이르기를 너희들이이것을먹고 100일동안햇빛을보지아니하면곧사람이되리라 하였다. 곰과범이받아 3 7일에곰은여자의몸이되고범은사람이되지못하였다. 웅녀는혼인할이가없으므로항상단수 ( 檀樹 ) 아래축원하기를 아이를낳고싶다 하였다. 신웅이이에잠시변하여혼인하여아들을낳아이름을단군왕검이라하였다. ➋ 왕검이요 ( 堯 ) 가즉위한지 50년째에평양성에도읍하고비로소조선이라일컫고, 또도읍을백악산아사달에옮기었는데, 그곳을또궁홀산 ( 弓忽山 ), 또는금미달 ( 今旀達 ) 이라고도하니치국하기 1천 5백년이었다. 주의호왕즉위년에기자를조선에봉하매, 단군은장당경 ( 藏唐京 ) 으로옮기었다가후에아사달에돌아와숨어서산신이되니, 나이가 1천9백8세였다한다. ( 삼국유사 기이제1 고조선왕검조선, 이병도역 ) 인용하지는않았지만 ➊이전부분에서는환웅천왕이신시에서국가를세우고신하들의도움을받아 360여가지의제도를정비하는과정이비교적소상하게밝혀져있었다. 이에비하면 ➋의단군왕검은건국과정이불투명한데다가주나라와의대외관계에따라그위치가휘둘리는등 건국의영웅 으로서의면모가그리뚜렷하지못하다. 이러한특성에주목한다면이신화의주인공 은단군이라기보다환웅인것처럼보이기도 웅녀영정 ( 김산호作 ) 한다. 그러나환웅과단군은모두 갈등 을인식하지않는다는점에서진정한주인공이라할수있을지의문이다. 환웅의건국과정에는별다른적수가없었고, 단군은이민족과의갈등요 인을산신이되는것으로회피하고있다. 후대의주몽에게서보이는갈등을통한성장은보이지않는다. 단군신화에서내 외적갈등을통해질적으로변화또는성장한인물은웅녀뿐이다. 그렇다면웅녀의이른바 통과의례 에대해서좀더적극적인의미부여가필요하지않을까? 삼국유사 와는계열이다른 제왕운기 의단군신화는단군의어머니가약을먹고사람이되어박달나무신의아들과혼인하는것으로되어있기도하다. 계열이달라지더라도 - 이계의존재였던 - 건국시조의어머니가 사람 이되기위한통과의례를반드시거쳐야했다는것이공통적이다. 그렇다면이계로부터인간에편입되는 건국시조의어머니 야말로단군신화의진정한주인공은아닐까싶다. 단군관련기록이마치후일담처럼간략하게처리된이유는이텍스트의중심이웅녀에게있었기때문이었던것으로여겨진다. 웅녀가인성을획득하는과정이단군신화에서가장중심에놓이는것이다. 그러나환웅이사라질때, 때를같이하여웅녀도사라진다. 이때문에웅녀에게궁극적으로어떤성격의신성이부여되었는지판단하기는어렵다. 적어도단군은 산신 으로일컬어지고있지만, 웅녀의성격은다소모호하다. 삼국유사 의설명처럼 곰 으로표상되는지신또는토템인지, 제왕운기 에기술되었듯천신계열의후손인지선택하기쉽지않다. 그러나여기서주목할점은어머니의본성이무엇이었건간에시조를출산하기위해서는 사람, 곧 인성 을갖춰야했다는사고이다. 삼국유사 의환웅이사람으로화했다는것은웅녀의인성에동의했다는의미이다. 게다가사람으로서인성을출산에필수불가결한요소로 판단한것은두계열에공통적인속성이기도하다. 시조단군은신성한존재이지만 웅녀의통과의례 (?) 동시에사람의아들이기도하다는인식이다. 다른건국신화의주인공들은 사람의아들 이기를거부하는듯한인상인데, 단군에게는 인성 이그자체로중대한의미가있었던것같다. 1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13

요컨대단군신화는건국시조의어머니웅녀가주인공에가까운역할을하고있는데, 이계의존재였다가통과의례를통해인성을획득하는것으로되어있다. 그러나고구려신화는전승과정을통해유화에게더큰신성을부여함으로써건국시조를신들의아들로만들고있다는차이를보인다. 2) 고구려신화에서유화의신성 성격이었을가능성에보다주목하고자한다. 본고는유화에게신성이추가되는과정은대략다음과같다고가정한다. 시비 ( 인간 ) 수신의딸종속된신격 곡신, 지모신독립된신격 고구려신화의주인공은부여또는고구려의시조로서, 이텍스트는동일계통의부족들이공유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조현설 (2003) 에따르면본래는해모수또는하백에해당하는인물은없었는데, 전승과정에서이들을시조로하는집단이고구려에포섭됨에따라텍스트가개편되면서추가되었다고도한다. 이주장에서주목할점은 1세기의 논형 에서는여종에불과했던시조의어머니가 5세기의 광개토왕릉비문 에서는 하백의딸 이라는수신계통의신성한존재로재해석되었다는것이다. 덧붙여유화가 5곡의씨앗을비둘기를통해주몽에게전해주는곡신으로서의상징성도추가된다고도한다. 그러나아래의 광개토왕릉비문 을보면곡신의성격은상당히후대에추가된것처럼보인다. 옛적시조추모왕이나라를세웠는데왕은북부여에서태어났으며, 천제의아들이었고어머니는하백의따님이었다. 알을깨고세상에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성스러운 이있었다 (5자불명 ). 길을떠나남쪽으로내려가는데, 부여의엄리대수 ( 奄利大水 ) 를거쳐가게되었다. 왕이나룻가에서 나는천제의아들이며하백의따님을어머니로한추모왕이다. 나를위하여갈대를연결하고거북이무리를짓게하여라 라고하였다. 말이끝나자마자곧갈대가연결되고거북떼가물위로떠올랐다. 그리하여강물을건너가서, 비류곡 ( 沸流谷 ) 홀본서쪽산위에성을쌓고도읍을세웠다. 왕이왕위에싫증을내니, 하늘님이황룡을보내어내려와서왕을맞이하였다. 이에왕은홀본동쪽언덕에서용의머리를디디고서서하늘로올라갔다. ( 광개토왕릉비문, 역주한국고대금석문 1, 가락국사적개발 원, 1992.) 그런데여기서곡신, 지모신으로서성격이애초부터있었던것인지는섣불리판단하기어렵다. 곡신으로서의유화는고려후기의 동명왕편 에비로소등장하며,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도뚜렷이보이지않는요소이다. 한쌍의비둘기가보리를머금고날아와서신모의사자가되었다. 주몽이이별할때에차마떨어지지못하니그어미가말하기를 너는나의생각을하지말아라 하며오곡의종자를싸서그것을보내주었다. 주몽이생이별하는절실한마음에그보리종자를잊어버렸다. 주몽이큰나무아래서쉬고있는데비둘기한쌍이있어날아와앉았다. 주몽이말하기를 마땅히이는보리종자를보낸신모의사자이다. 이에활을끌어그것을쏘아화살하나에모두명중시켰다. 목구멍을열어보리종자를얻었다. 물을뿜으니비둘기가다시소생하여날아갔다. ( 이규보, 동명왕편 ) 동명왕편 은유화를아예 신모 로지칭하고있다. 이기록이유화를곡신나아가지모신으로단정하는단서가되었으며, 그것은고구려의경제가수렵단계에서농경단계로이행하는과정의소산으로이해되기도했다. 그가능성을전면부인하는것은아니지만, 유화의신성이고구려당대에도부여되었을가능성에대해서는신중할필요가있지않을까한다. 오히려시기적으로더앞선 삼국사기 에는다음과같이유화의인간으로서의지혜가강조되어있으며, 신성의흔적이없는인간적인죽음을맞는것으로되어있다. 이자료는 5세기의고구려당대공식기록임에도불구하고해모수가등장하지않기때문에, 해모수집단의참여는상당히후대에이루어진것으로보아야한다고한다. 그렇다면해모수와마찬가지근거로곡신으로서유화의성격은후대에추가된것으로보아야한다. 그러나종래의연구에서는고구려건국지의원주민들에게수신 곡신으로서여신에관한전승이있었다는가설을세웠다. 곡신전승이선주민들에게있었을그가능성을전면부인하지는않겠지만, 모계의신성이점점강조되는방향으로고구려신화의재편성이일어나면서추가된 왕자와여러신하들이또그를모살하려하므로, 주몽의어머니가비밀히아들에게말하기를, " 나라사람이장차너를해치려하니너의재주와지략을가지고어디에간들아니되랴? 이곳에지체하다가욕을당하느니멀리가서유위 ( 有爲 ) 한일을하는것이좋겠다 " 고하였다. ( 중략 ) 14년 8월에왕모유화가동부여에서돌아가니, 금와왕이태후의예로써장사하고드디어신묘 ( 神廟 ) 를세웠다. 10월에왕이사신을부여에보내공물을바쳐그덕을갚았다.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웅녀가단군의건국과정에아무런역할을하지않고사라졌던것과는달리유화는건국을 1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15

위한직접적계기가되는발언을하고있다. 이것은단군신화에비하면진일보한요소인한편, 상당히 인간적, 현실적 인조치이기도하다. 죽어서부여에신묘가세워졌다지만신으로서숭배의대상이되었다는의미로단정하기는어려울듯하다. 그보다는제대로된묘지를갖추었다는뜻으로판단하는편이낫다. 이를테면당초유화의형상은웅녀와마찬가지로인성의측면이부각되었다는것이다. 그녀는난생또는감응에의한출산이라는초자연적현상앞에무력한일면도있었지만, 아들의명을보 유화와주몽 ( 평양동명왕릉소재 ) 전하고그재능에맞는영광을위해의연한결심을내리는강인한인성을지니기도했다. 그러나웅녀가이계의존재였다가신화속에서인성을획득하게되었던것과는대조적으로, 유화는신화의재편성과정을통해신성이더욱크게강조되었으며결국독립적인신격의지위에까지이르게되었다. 그이유는여러가지가있을수있지만, 그녀가건국의계기를인간적인지혜를통해제공했기때문이기도할것이다. 요컨대유화의경우에는인간적인지혜가신성을갖추는근거로서기여하였다. 지금까지의논의를통해북방신화에서모계가신화적질서속에서인성을갖추어가는과정과, 그인성이신화적재편을통해새로운신성으로거듭나는과정을고찰하였다. 그과정을거칠게요약하자면 여신의탄생 이라할만하다. 웅녀의사례는이계의초월적존재가인간영웅의어머니가되는과정을보여준다면, 유화의사례는비천한인간이현실을좌우하는권능을갖춘존재로상승하는여정을드러낸다고하겠다. 여기서주몽은신들의아들이었던만큼그권능이단군에비해큰것처럼묘사되고있는듯하다. 이제남방신화의사례를통해여신의활동을좀더살펴보겠다. 3. 한반도남부의성모와형제출산 1) 백제건국신화의형제갈등백제건국의출발점은앞서살펴본유화의결단을연상시키는부분이있다. 태자에게용납되지못할까두려워 남하했다는장면이그것이다. 그런점에서백제건국신화는고구려신화와유사한계기에서비롯된 이주 를포함했지만, 신성한인물또는초자연적현상이일절나타나지않기때문에신화보다는설화로취급받아왔다. 게다가비류, 온조, 구태, 도모등다양한이름으로그시조가등장하기때문에신화연구의주변이될수밖에없었다. 그러나후술하겠거니와백제건국신화는신라와대가야의성모전승과동일한인물관계항을지니고있는신화적구조의서사물임을전제하고자한다. ➊ 백제의시조온조왕은그아버지가추모니혹은주몽이라고도한다. ( 중략 ) 주몽이북부여에있을때낳은아들이와태자가되자비류와온조는태자에게용납되지못할까두려워하여마침내오간 마려등열명의신하와함께남행하였는데, 따라오는백성이많았다. 드디어북한산에이르러부아악 ( 負兒嶽 ) 에올라살만한곳을바라보았다. 비류는해변에살기를원하였으나열명의신하가간하기를, 생각건대이하남의땅은북은한수를띠고, 동은높은산을의지하였으며, 남은기름진못을바라보고, 서로는큰바다를격하였으니, 그천험지리가얻기어려운지세라, 여기에도읍을이루는것이좋겠습니다, 고하였다. 그러나비류는듣지않고그백성을나누어미추홀로가서살았다. ( 중략 ) ➋ 혹은이르기를, 시조는비류왕으로서, 아버지는우태니북부여왕해부루의서손이며, 어머니는소서노니졸본인연타발의딸이다. 소서노가처음우태에게시집가서두아들을낳았는데, 장자는비류요차자는온조였다. 우태가죽자소서노는졸본에서과부로지내었다. ( 중략 ) 이에비류가온조에게말하기를, 처음대왕이부여에서난을피하여여기로도망하여오자, 우리어머니께서재산을기울여도와방업 ( 邦業 ) 을이룩해그노고가많았다. 대왕이세상을떠나자나라는유류 ( 孺留 ) 의것이되었으니우리는한갓여기에있어혹과같아답답할뿐이다. 차라리어머니를모시고남쪽으로가서땅을택하여따로국도를세우는것만같지못하다, 하고드디어아우와함께무리를거느리고패수와대수의두강을건너미추홀에가서살았다한다. ➌ 북사 와 수서 에는모두이르기를동명의후손에구태란이가있어인망이두터웠다. 처음옛대방땅에나라를세웠는데한의요동태수공손도가딸을맞이하여아내를삼았다. 드디어동이의강국이되었다고한다. ➍ 그건국설에있어어느편이옳은지알지못하겠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시조온조왕.) 백제시조에관한전승은다소복잡해보이지만, 이들은반고구려계열로서부여와의혈연 을강조하는 비류 - 구태 전승과친고구려계열로서고구려를아버지의나라로인식한 속일 1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17

본기 계열의 온조-도모 전승으로양분할수있다. 이들의혈연적접점은형제의어머니인소서노였지만, 그녀는고구려의조력자이자배신자라는이중성을지니고있기때문에양편모두로부터환영받지못했다. 즉반고구려적성향이강해서자신들을고구려와동등한부여의후손으로보는집단에게는주몽과결혼한탓에, 친고구려적성향이커서주몽을아버지로여긴집단에게는결국주몽을두고떠난인물로서환영받지못한인물형상이소서노라는것이다. 이때문에소서노는다른신화의어머니들처럼 성모 가될수없었고, 백제는끝내시조신을외부로부터찾고자한것이다. 비류와온조의갈등은고구려와의관계를어떻게설정할것인지에대한백제의고민을상징한다. 그관계를확정짓지못한다면건국시조를확정할수도없고, 어머니를신성의근거로재해석할수도없다. 현실적고민이해결되지않은마당에신화에신비주의의색채를입히는작업도순탄하게이루어질수가없다. 따라서백제신화는신비함이없는모습으로남게되었다. 여기서백제건국신화의인물항을정리하면 어머니가형제를낳고, 그들이시조가된다 는것이다. 성모의형제출산이라할만하다. 이는뒤에살펴볼신라 대가야의건국신화와공통점이기도하다. 그러나신라의 혁거세-알영 이결연하여함께시조가되고, 뇌질주일-청예 가각각대가야와금관가야로공존할수있었던다른사례들과는달리, 백제의시조 비류-온조 는서로적개심을갖고있다. 그것은비류에게비참한후회와죽음을안겨준온조집단의경우더욱극명하게드러난다. 이러한적개심은비류와온조집단이추구했던국가관이달랐던것에기인한다. 인용문의밑줄친부분에보이듯온조집단은 안정된농경사회를지향했던반면에비류집단은과감한결단력을비류자신의목소리로내세우고있다. 훗날백 소서노영정 제가보인해양성은비류집단의성향에잘어울리는것으로보인다. 그러나백제는근본적으로다핵국가였기에, 고구려혹은신라의사례에서와같은건국신화의재편성작업은이루어지지않았다. 오히려부여계공통의시조 동명 을관념상의시조신으로섬김으로써다소느슨한추상적차원의연대감만으로만족했던것으로보인다. 이러한정황탓에백제의시조는확정될수없었다. 따라서성모의형제출산이라는화소를다른지역과공유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성모의신성은완전히탈각된모습의신화가남게된다. 요컨대백제건국신화에신성함이나초현실적요소가없게된것은고구려와의관계설 정여하에따라시조가달라질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달리말하면소서노가 여신 이될수없었기때문이었다. 이제 여신 이될수있었던신라와가야의성모들을살펴보겠다. 2) 신라건국신화의남매결연널리알려진신라건국신화는백마가낳은알에서박혁거세가태어나나정에서탄생한알영과결연했다는줄거리를지니고있다. 그런데이들을낳은선도산성모라는존재에관한기록들이있다. 이기록은박혁거세신화에비하면후대의것으로서그가치가떨어지는것으로평가받기도했지만, 오히려이를가장원초적인여신의형상으로볼여지가있다는주장또한있다. 선도산성모가혁거세와알영의공통모계임을인정할수있다면, 신라의건국또한성모의형제출산으로말미암은것이된다. 이와관련한가장오래된기록은 삼국사기 에있는데, 김부식자신의체험을통한것이다. 송의정화연간에고려에서상서이자량을송에보내어조공하였을때신부식은서기임무를띠고수행하여우신관이란곳에가서여선 ( 女仙 ) 의상을모신당을본일이있었다. 그때사신접대관학사왕보가말하기를, 이것은귀국의신이니공들이아느냐? 하고, 이어서말했다. 옛적에어느황실의여인이있어남편없이아이를임신하여남의의심을받게되자곧배를타고바다에떠서진한에이르러아들을낳았는데, 그아이는해동의첫임금이되고제녀는지선 ( 地仙 ) 이되어길이선도산에있었다하는데, 이것이그상이다. 또송나라의왕양이지은 < 동신성모 ( 東神聖母 ) 를제하는글 > 속에 임신한어진여인이나라를창시하였다. 는말이있는것을보았는데여기동신 ( 東神 ) 이곧선도산 ( 仙桃山 ) 의신성 ( 神聖 ) 임은알수있으나, 그신의아들이어느때에왕노릇을하였는지는알수없었다. (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김부식은선도산성모가외국에서숭배되는신이라는것은알았지만그아들이어느시대의왕인지는알수없다고했다. 더군다나성모의형제출산양상은잘드러나지않는대신 유화-주몽 의관계를연상시키는모자신의형상으로소개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는이전승이좀더자세한모습으로 2차례나오는데, 백제의사례와마찬가지로성모의형제출산에가까워져간다. 모자신에서형제출산으로의변모양상이지닌의미는생각해볼문제이다. 이변모가중국측의착각에의한것인지, 김부식과일연의시대적차이에따라부연된성질인지여부는판정하기어렵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서는먼저신라건국신화를소개하면서실었고, 다음으로선도산성모의기록을소개하면서거론하고있다. 1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19

➊ 설자(說者)는 이르되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탄생한 것이니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를 찬양하여 신현조 기원을 둔 것으로 이해되었던 근거는 선(仙) 을 고유의 선맥보다는 중국의 도교와 연결시키 방(娠賢肇邦) 이란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였다. 그리고 보면 계룡이 상서를 나타내고 알영(閼英)을 낳았 는 경향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는 이야기도 서술성모의 현신을 말한 것이 아닐까? (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➋ 신모(神母)는 본시 중국제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여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와 머물고 오랫동안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처음 진한에 오자 성자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 요컨대 그 원인에는 차이가 있지만, 백제와 신라의 건국신화는 여신으로서 성모의 역할이 탈락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백제는 성모 형상의 고구려에 대한 이중적 관계와 형제간의 영의 2성의 나온 바일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등의 칭이 있으니, 계(鷄)는 서쪽에 속하는 까닭이다. 갈등 탓에, 신라는 건국신으로서 자녀들이 지닌 신성함의 완성도가 높았던 탓에 성모는 무시 (이하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 인용) ( 삼국유사 권5, 감통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 받거나 잊혀졌다. ➊은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이 선도산 성모의 작용임 을 시사하는 수준인데, ➋에서는 혁거세 알영을 성모가 3) 대가야 건국신화의 형제 공존 낳았다는 직접적인 서술이 이루어졌다. 박상란(2005)이 지적했듯이 혁거세와 알영은 둘 다 같은 정도의 신성성 을 나누어 갖고 그것을 인간 세상에 구현한 이성(二聖) 으 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삼국사기 의 몇 곳에서도 그때 사람들이 2성이라 일렀다[時人謂之二聖] 고 한다. 그렇다 면 2성의 공통 기원으로서 선도산 성모의 형상이 삼국사 기 의 전거가 되었던 사료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판단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다만 그 형상이 ➊에서와 같은 추상적 수준인지, ➋에서와 같은 구체적인 요소인지 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성모상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선도산 마애삼불 선도산 마애삼불(좌측) 신라 건국신화의 선도산 성모 형상은 백제의 소서노와 앞에서는 백제의 형제 갈등과 신라의 남매 결연을 대조적으로 살펴 보았다. 이들은 각각 어 는 달리 비교적 후대에까지, 그리고 외국에도 알려질 만큼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느 한쪽을 소멸시키고자 했던 적개심과 서로 화평한 가운데 단일국가를 형성시켜나갔던 과정 시조로서 2성이 지나치게 위대했기 때문이었는지, 신라 건국신화는 성모의 활동은 사라지고 을 시사하고 있다. 이들과는 또 다르게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공존 백마의 아들과 계룡의 딸이 만나는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여기에 박 석 김 3성의 신화가 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 별개의 국가로서 공존하는 양상에 이르러 여신으로서 성모 나는 방향을 덧붙이게 된다. 그러면서 선도산 성모의 역할은 석 김씨 시조와의 연결에 비하면 의 권위는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야를 고대국가로서는 그 체제가 백제 신라에 비해 다 그다지 긴요치 않게 되었다. 소 불완전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통념을 돌이켜보면, 여신의 상징성 지속이 고대국가의 발전 말하자면 2성의 상징성이 그 자체로서 완성된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건국신 에는 기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화의 성모는 그 비중이 축소되고 마치 잊혀진 것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백제의 요컨대 백제, 신라,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성모의 형제자녀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각각 구별 경우에는 형제간의 갈등 탓에 소서노가 여신이 되지 못하고 신화의 신비성도 소멸하게 되었 되는 국가 형성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백제가 형제 갈등을 내포 지만, 신라는 남매 결연이라는 매우 원초적인 화소를 시도함으로써 부부신의 신성이 자연스 하고 있는 다핵국가, 신라가 이성(二聖) 의 연대를 통한 통일체로서의 국가관을 보여준다면 럽게 담보되고, 그 결과 성모의 역할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선도산 성모 형상이 중국에 대가야는 형제 공존의 연맹국가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인다 할 만하다. 대가야 건국신화는 최 20 제12기 수원박물관대학 01. 건국신화에 나타난 여신의 모습 21

치원의 < 석이정전 ( 釋利貞傳 )> 에수록되었다고전하는데, 정견모주라는여산신의아들들이각각대가야와금관가야의시조가되었다고한다. 최치원의 < 석이정전 > 을살펴보면, 가야산신정견모주 ( 正見母主 ) 는천신이비가 ( 夷毗訶 ) 에응감한바되어, 대가야의왕뇌질주일 ( 惱窒朱日 ) 과금관국의왕뇌질청예 ( 惱窒靑裔 ) 두사람을낳았는데, 뇌질주일은이진아시왕의별칭이고청예는수로왕의별칭이라하였다. 그러나가락국옛기록의 여섯알의전설 과더불어모두허황한것으로써믿을수없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두왕이제각기나라를다스리고있는모습을보여주고있었을가능성이크다. 기록에서는여섯알이등장하는금관가야건국신화와더불어허황된이야기로믿을수없다고했다. 이런평가는사라진이신화의구체적내용이두왕의신성과신비적요소를한껏드러내고있었기때문일것이다. 그러한성격의신화라면위인용문의설명처럼어느한쪽이몰락한상황보다는우열관계가크지않은경우에등장하는편이더적절치않을까한다. 이기록에서 이비가 라는신의이름과 뇌질 이라는성은고유어를가차한것처럼보이기도한다. 시기를확정할수야없겠지만이기록의원류가상당히오랜것임을시사한다. 그러나모계의이름은 정견 ( 正見 ) 이라하여불교식 한자식으로순화된표현을쓰고있다. 이것은가야산신에관한신앙이가야멸망이후에도꾸준히이어져오면서한자문화의영향을받은흔적이아닐까한다. 대가야건국신화의문맥, 이를테면가야제국의운명과는별도로가야산신자체가신앙의대상으로서종교적상징의역할을맡았다. 아울러 주일 과 청예 라는형제의이름역시각각붉음과푸름에해당하는한자를활용해서형제라는인식을드러냈다. 수로왕의건국신화와혼인담, < 구지가 > 등의풍부한별도전승이있었음에도불구하고, 이신화를구성한이들은실제역사혹은금관가야내부의전승과는상관없이그들을자신들의형제로생각했다는것이다. 그리고그 생각 은가야산신을 정견 으로순화시킬만큼불교와한자문화가보편화되기까지이어졌던것으로보인다. 주지하듯금관가야가멸망한이후대가야가가야연맹의맹주노릇을하게되는데, 금관가야를아우로간주한이건국신화의내용은다음과같이풀이할수있다고한다. 단정적으로말할수는없지만이건국신화의내용은바로광개토대왕남정이후가락국지배세력의일부가고령지역으로흘러들어와토착세력과결합했던역사적사실을알려주는것은아닐까? 이렇게본다면건국기년이동일하다는것도설명될수있을것이고, 가라국 [ 대가야 ] 시조와가락국 [ 금관가야 ] 시조를형제간으로설정한것도이해할수있을것이다. 물론가라국시조가형으로기록된것은이주해온집단보다는토착세력이더큰정치적영향력을가지고있었으므로가능했을것이다. ( 조원영 (2008), 가야, 그끝나지않은신화, 혜안, 174쪽, 존대어표기를고쳤음 ). 신화의내용을곧실제역사의반영으로환원시킨듯한인상이들기는하지만, 대가야건국신화가현재와같은모습을갖게된정황을설명하기에는일견유용해보인다. 그러나이신화의핵심은모계가동일한형제의 공존 에있다. 위의설명에서처럼아우의나라금관가야가몰락한이후형의나라인대가야의관점에서그것을포섭하는것이아니라, 수로왕, 허황옥부부영정수로왕, 허황옥부부 (MBC 드라마김수로 ) 지금까지살펴본한반도남부의건국신화들은성모가형제를출산한다는화소를공통적으로지니고있다. 그런데백제의경우는갈등이, 신라는결연이, 대가야는공존의양상이그근간을이루고있다. 그것은이들이서로의영역을넘나들지않는다핵국가 [ 백제 ], 통일체로서의국가 [ 신라 ], 연맹으로각기공존하는국가 [ 대가야 ] 로서각기서로다른고대국가관을지니고있었기에, 한때경쟁했던상대방의신화를포섭하는방법론의차이를지니게된것으로여겨진다. 이것은북방신화가여신의인성또는신성으로서의본질에관심을가졌던것과는구별되는특징이다. 남방신화에서는여신이현실의맥락과상황속에서활동한다기보다는형제들위에서추상적으로군림하는상징으로설정된경우가많았다. 그상징의표상은형제들사이의관계에따라백제의소서노처럼그의미가퇴색하거나, 신라의선도산성모처럼그비중이축소되는가하면, 대가야의정견모주처럼종교적상징으로서유지되기도한다. 그리고그차이는 건국시조 의형상이남북에따라달라졌던것에말미암는것으로추단한다. 북방의건국시조에게는신성함의근거가될 여신 이라는신화적표상이만들어지기까지의과정이중요했다면, 남방의시조들에게는신화적표상이만들어진이후다른종족의표상들을포섭할수있는추상적근거의마련이보다절실했다는것이다. 이에따라웅녀와유화 2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1. 건국신화에나타난여신의모습 23

에게는인성과신성의획득과정이구체적으로드러난반면, 소서노 선도산성모 정견모주는 그자식들의관계에따라신성이달라진다. 그과정을고대국가의형성과정과맞물려체계화 하는작업이요청된다. 4. 여신형상의문화사적의미 북방신화의여신은인성또는신성을획득하여건국시조의어머니가된다는공통점을보이고있다. 단군신화는이계의존재가신화적질서안에서인성을얻게되지만, 고구려신화는인간적존재가신화의재편과정을통해곡신, 지모신의형질을획득한다. 한편남방신화의여신은형제를출산하여이들이갈등, 결연, 공존하는양상에따라서로다른모습의국가관을지니고, 이에따라그성격도달라진다. 지금까지거론한차이점들은해당신화를향유해온집단의건국시조에대한관념에기인한것이다. 북방의신화들은건국시조가이민족과의투쟁을거쳐단일한신화적표상을이룩한국가를수립하기까지의과정에관심을기울인반면, 남방의신화들은국가수립과정의투쟁보다는그이후에다른종족들을포섭하여연맹체를형성해가는과정을보여주고있다. 따라서북방신화의여신은사라지거나건국시조의조력자역할을보이지만, 남방신화의여신은형제들의어머니로서추상적상징의역할이더컸다.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김선주 중앙대학교 더읽을자료박상란 (2005), 신라와가야의건국신화, 한국학술정보. 조현설 (2003), 동아시아건국신화의역사와논리, 창작과비평사. 천혜숙 (1991), 여성신화연구(1): 대모신 ( 大母神 ) 상징과그변용, 민속연구 1, 안동대민속학연구소.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김선주 중앙대학교 632년선덕여왕이신라제27대왕으로즉위하였다. 신라뿐아니라우리역사상최초의여왕이었다. 금속의발명이후가속화되기시작한여성에대한사회적차별은고대국가가성장하면서공적인영역에서의배제라는형태로나타났다. 그러다보니삼국시대이후정치무대는남성의전유물로만나타나게되었다. 사료상에서도고대의경우 80% 이상이여성은가정의테두리속에서남성에게부속된존재로, 특히남성의계보상의존재로만기록되어있다. 이러한상황에서신라만있었던여왕의존재는흥미를끌수밖에없다. 그런데신라에서여왕의즉위는선덕여왕에서만그친것은아니었다. 선덕여왕의뒤를이어제28대진덕여왕이즉위하였다. 또한진덕여왕으로부터 250여년뒤신라하대에도진성여왕이제51대왕으로즉위하였다. 고대국가로성장하는과정에서관료질서체제가정비되면서공적인질서에서여성이점차배제되어왔다는것은상식적이다. 그렇지만신라에서공적관료질서의최고정점이라고할수있는왕위에여성이즉위할수있었다는것은일률적으로만단정할수없는상징성을보여준다. 뿐만아니라여왕의존재는우리역사에서유일하게신라에만나타나고있다. 남녀성별에대한관념이한층뚜렷해진후대고려나조선시대뿐만아니라, 동시대인고구려와백제에도나타나지않는현상이다. 여왕의즉위가세번이나이루어질수있었다는것은신라에서는여성이라고하는성별이왕위에서완전히배제되지않았음을보여준다. 그렇다면신라에만여왕이존재했던이유는무엇일까? 신라에서의여왕즉위는비상적인상황에서일어났던특수한사례들로만치부해버릴수있는것일까? 아니면신라에서는여성의공적인정치활동이구조적으로가능한사회였기때문이었을까? 이를알아보기위해먼저신라에서세명의여왕이어떻게즉위하게되었는지배경을살펴보자.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27

1. 세여왕의즉위배경 선덕여왕의즉위에대해 삼국사기( 三國史記 ) 와 구당서( 舊唐書 ) 에서는진평왕에게아들이없었기때문이라고하였다. 삼국사기 에서는이에덧붙여아들이없는상황에서진평왕이사망하자국인 ( 國人 ) 들이진평왕의딸인선덕여왕을추대하였다고보충설명을하고있다. 선덕여왕의즉위는진평왕에게아들이없는상황에서국인들의추대로이루어졌다고볼수있다. 그렇지만역사상직계아들이없는상황이진평왕에게만나타났다고보기는어렵다. 또한신라에서는직계아들이어야만왕위를계승할수있었던것도아니었다. 신라에서사위의자격으로왕위를계승한사례는많았다. 탈해왕이나조분왕, 미추왕, 실성왕, 경문왕등이모두사위의자격으로왕위를계승하였다. 아들이없었다고하는진평왕에게도사위는있었다. 왕위를계승했던선덕여왕에게는음갈문왕 ( 飮葛文王 ) 이라는배필이있었다. 또한진평왕에게는천명 ( 天明 ) 이라는딸이있었는데진지왕의아들이자진평왕과는사촌이기도한용춘 ( 龍春 ) 과혼인하였다. 음갈문왕은선덕여왕의배필이라고하는계보상의기록외에는전혀행적이나타나지않아, 일찍사망했을가능성이있지만, 용춘은선덕여왕대지방을돌며위문하고, 황룡사탑조성을감독하는등여전히활약상이보이고있다. 선례에따른다면사위의자격으로 용춘 이왕위를계승할수도있었다. 물론 삼국유사( 三國遺事 ) 에서는 왕위에오를만한성골남자가단절했기때문 이라고하여 골품 의문제를들고있다. 성골남자가단절되었다 는설명을따른다면용춘은사위이긴하지만, 성골이아니기때문에왕위를계승할수없었던셈이된다. 그런데진지왕의아들로진평왕과사촌인용춘이왜성골이아닌지, 서로골품이다른데도혼인이가능했었는지등의의문이생길수있다. 이에대해 성골 은진지왕의형인동륜계가계에만한정된폐쇄적인가계관념으로진지왕계와는구분되었던것으로이해되고있다. 왕위계승자격이 성골 로차별화된동륜계에게만한정되었다면, 진지왕의아들로 성골 이아닌용춘은왕위계승자격을가질수없는것이다. 훗날용춘의아들인김춘추가태종무열왕으로즉위하지만이후왕계를 진골 이라하여앞의 성골 과구분을하고있다. 이는진지왕의아들인용춘과그의아들인김춘추는선덕여왕이나다음진덕여왕의혈통과는구별되는기준이있었음을보여준다. 또한국인들은진평왕의딸인덕만을왕으로추대하고는 성조황고 ( 聖祖皇姑 ) 의칭호를올리는데, 이는 성스러운혈통을가지여성황제 라는의미였다. 결국선덕여왕의즉위에는 골품제 라고하는신라의 폐쇄적인혈통의식이라고하는사회적배경도있었음을알수있다. 폐쇄적인골품제사회에서성골남자가없는경우에진골에서남자왕을추대하기보다같은골품의여자로그뒤를잇게하는것이사회적합의를도출하기쉬웠던것이다. 뿐만아니라선덕여왕의즉위배경에는중고기 ( 中古期 ) 왕권강화라고하는정치적상황도있었다. 중고기는법흥왕이후진덕여왕에이르기까지총여섯명의왕들이재위했다. 이시기왕들은정치적으로는관부의설치와군제개편을통하여왕권을강화하고, 사상적으로는왕즉불 ( 王卽佛 ) 사상과진종설 ( 眞種說 ) 을받아들여왕실가족을불교의석가족과일치시키고자하였다. 이러한노력이어느정도주효하여진평왕대에는왕권이강화되고, 국왕의정치적영향력이커지게되었다. 이에진평왕은딸인선덕여왕을자신의왕위계승자로삼을수있었으며, 결국 국인의추대 라는형식을빌려선덕여왕이즉위할수있었다. 이웃나라일본에서이미여왕즉위가이루어졌다고하는국제적상황도선덕여왕의즉위에영향을끼쳤을것이다. 진평왕 15년 (593년) 에일본에서도첫여성천황인스이코 ( 推古 ) 가등극하였다. 진평왕대신라와일본은교류가많았다. 일본서기( 日本書紀 ) 에는스이코여왕은즉위 6년 (597년) 11월에신라에사신을파견하였고, 이사신이돌아갈때신라에서는까치두쌍을선물로보냈다는기록이있다. 이외에도신라에서불상을비롯한불교문화를일본에전해주기도하였다. 일본을오가는사신들을통해진평왕은일본에여자천황이있다는사실을알았을것이며, 자신의딸인선덕여왕을즉위시키는데힘을싣게되었을것이다. 또한당사자인선덕여왕개인의뛰어난자질역시참고가되었으리라여겨진다. 삼국유사 에서는모란꽃그림을보고향기가없음을미리알았다는것과, 개구리울음소리를듣고백제군이매복한사실을알고섬멸하게한것, 자신이죽을날을미리알고장지를정해준일등세가지일화를전하면서선덕여왕이뛰어난예지능력을가지고있었다고하였다. 이는 성품이너그럽고어질며, 총명하고똑똑하다 는선덕여왕에대한 삼국사기 의평가와도일치하고있다. 물론개인의자질이절대적인기준으로작용할수없는신분제사회에서개인의자질이왕위계승의절대적인조건이되지는못한다. 그러나전례에없던여왕의탄생이라는특수한상황을만들면서까지선덕여왕의즉위가이루어질수있었던것에는선덕여왕개인의뛰어난자질역시중요한비중을차지하였을것이다. 선덕여왕에서시작된여왕의전례는다음 28대진덕여왕의즉위로이어졌다. 진덕여왕의아버지는진평왕의친동생국반갈문왕 ( 國飯葛文王 ) 이며어머니는월명부인 ( 月明夫人 ) 박씨이다. 선덕여왕과는부계사촌이된다. 계속된여왕의즉위는선덕여왕의즉위배경의하나였던 성골남자가없다 고하는상황의연장선상에서해석되고있다. 성골남자가없어서선덕 2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29

여왕이즉위했다고하는비상적인상황은선덕여왕사후에도여전히남겨진과제였을것이다. 여전히성골남자가없는상황에서선덕여왕의사촌으로역시성골인진덕여왕이즉위하게되었던것이다. 삼국사기 에는진덕여왕이 풍만하고아름다웠다 고하여여성으로서의풍만한아름다움과함께, 신장이 7척이고손을내리면무릎아래까지내려왔다 고하여외형적모습을특기하고있다. 이러한모습은부처의 32특관상에포함되어있는신체조건이다. 진덕여왕에대해부처와같은초인적면모를지닌골상을강조하면서 성골 인진덕여왕의왕위계승에정당성을부여하려했던것이다. 그러나진덕여왕의즉위는선덕여왕에비해순조롭지않았다. 즉위과정에서상대등이었던비담이염종등과함께반란을일으켰다. 비담은 여자임금은잘다스릴수없다 는것을반란의대의명분으로내세웠다. 비담의난에는신라귀족의대부분이관련되었다고할정도로그규모가컸다. 또한반란초기에비담측이우세하였다는점에서비담이내세운 여자임금은잘다스릴수없다 는명분은꽤설득력을얻었던것으로여겨진다. 그러나비담의난은 10여일간에걸친공방끝에김유신에의해진압되었다. 이는진덕여왕의즉위가김유신의군사력에의해뒷받침되었음을보여준다. 여성왕은잘다스릴수없다 는비담의명분이이미신라사회에서공감을얻고있었음에도불구하고, 김유신의군사력을뒷받침하여진덕여왕즉위가추진되었던이유는무엇일까? 혹자는이에대해김춘추의부재를들기도한다. 선덕여왕대에외교가로서활약을하던김춘추는선덕여왕사망당시일본에있었던것으로나타나고있다. 선덕여왕사후상대등인비담이왕위를계승할수도있었다. 상대등은비상시에왕위를계승하기도했기때문이다. 이러한상황에서비담의즉위를막고김춘추를즉위시키기위한과도기적인체제로진덕여왕을옹립하였다는것이다. 이에따른다면진덕여왕의즉위는여왕의즉위가원천적으로차단되지않은상황에서과도기적인성격으로이루어진것으로볼수있다. 여왕은잘다스릴수없다 는비담의명분이후신라의왕위계승은한동안남자왕으로만이어졌다. 특히태종무열왕이후중대 ( 中代 ) 는전제왕권이강화된시기로, 왕비의폐출이잇단시기였다. 폐출의원인으로는정치적상황이나, 아들을낳지못한다는등여러가지가있었는데, 상대 ( 上代 ) 에는전혀없던일이었다. 이는여성에대한사회적변화를보여주는것으로, 여왕의즉위에대한인식역시변화되었던것으로보인다. 그런데선덕, 진덕이후 250년이나경과된신라하대 9세기후반에진성여왕이제53대왕으로즉위하였다. 진성여왕은헌안왕의사위로왕이된신라제50대경문왕의딸로, 51대헌 강왕과 52대정강왕의여동생이다. 진성여왕의즉위는전격적으로오빠인정강왕의유언에의해서이루어졌다. 정강왕은형인헌강왕의뒤를이어왕이된지불과 2년만에갑자기세상을떠나면서진성여왕을후계자로지목하였다. 총명하고민첩한천성 과, 남성과같은골상 이그이유였다. 외모가 남성과같다 고한발언의이면에는진성여왕의즉위당시에는여성이라는조건이왕위계승에장애가되고있음을보여주는것이아닌가한다. 이에비록여성이지만외모가남성과비슷하다는것을강조하면서진성여왕의왕위계승에대해정당성을부여하려했던것으로보인다. 사실여왕에대한기피는이들의외할아버지가되는헌안왕에게서이미찾아볼수가있다. 과인은불행히도아들이없고딸만있다. 우리나라의옛일에비록선덕과진덕두여자임금이있었으나, 이는암탉이새벽을알리는것과비슷하므로본받을일이못된다. 사위응렴은비록나이는어리지만노련하고성숙한덕을가지고있다. 경들은그를왕으로세워섬기면반드시선조로부터이어온훌륭한왕업을떨어뜨리지않을것이다. 그러면과인은죽어도또한썩지않을것이다. ( 삼국사기 권11, 헌안왕 5년봄정월 ) 헌안왕은자신의딸이아닌사위인응렴에게왕위를잇게하였는데, 응렴이바로이들남매에게는아버지가되는경문왕이었다. 이와같이여왕의즉위에대한부정적인인식이확산되어있음에도불구하고정강왕이진성여왕을지목했던이유는무엇일까? 진성여왕의즉위에서도우선적으로작용한것은신라의폐쇄적인혈통의식이었다. 신라하대에이르면골품내에서도가 ( 家 ) 로분화되는변화가일어나고있다. 즉헌안왕의사위로왕위를계승했던경문왕가계에서왕위를독점하기위한비상적인상황으로여성인진성여왕이즉위할수있었던것이다. 정강왕이사망할당시경문왕의자손으로는딸인진성여왕과헌강왕의서자로나이가어린요 ( 훗날효공왕 ) 가있을뿐이었다. 그런데요는헌강왕이혼외관계에서낳은아들이었을뿐아니라아직어린나이로왕위계승이어려운상황이었다. 이러한상황에서다른가계의남성에게로왕위를넘기기보다는비록딸이지만경문왕의직계인진성여왕을후계자로지정했던것이다. 진성여왕은앞의선덕, 진덕과달리아찬을지낸 양패 를비롯한아들이있었다. 진성여왕은앞의여왕들과달리왕위를양위하는데, 양위를했던대상은자신의아들이아니라조카인헌강왕의아들이었다. 이를통해서도진성여왕의즉위가경문왕직계로왕위를계승시키고자하는혈통관념에서헌강왕의아들인효공왕의성장을기다린임시적이고과도기적인것이었음을이해할수있을것이다. 3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31

진성여왕은역사적으로신라멸망의책임자로지탄을받고있지만, 정강왕의유언내용을살펴보면진성여왕의개인적자질에대한기대역시왕위계승을지목한이유였음을알수있다. 정강왕이사망하던당시는왕위쟁탈전으로중앙정부는혼란에빠져있었으며, 특히잦은수해와가뭄등의천재지변으로민심이이반되고있던신라하대였다. 정강왕은내심삼국쟁탈의위기속에서통일의비전을제시했던선덕, 진덕과같이진성여왕이즉위하면서이러한혼란스런상황을극복해줄수있을것이라기대했었던것으로보인다. 2. 신라여성의정치 사회적위상 전근대에정치는남성의전유물이었다. 여성은가정의테두리속에서남성에게부속된존재로, 특히남성의계보상의존재로만기록되어있다. 이러한상황에서여왕의존재는흥미를끌수밖에없다. 여왕의존재는우리역사에서유일하게신라에만나타나고있다. 남녀성별에대한관념이한층뚜렷해진후대고려나조선시대뿐만아니라, 동시대인고구려와백제에도나타나지않는현상이다. 그렇다면신라에만여왕이존재했던이유는무엇일까? 골품제라하는사회적배경과, 정치적특수한상황, 개인의뛰어난자질등이갖추어져있다고하더라도, 왕위계승에서여성이아예배제되는상황이라면여왕의즉위는있을수없었을것이다. 신라에서는여왕이등장하기이전에도여성들이공적인역할을담당하고있었다. 이러한측면에서주목되는것이건국신화이다. 신라의건국설화에는시조왕인혁거세 ( 赫居世 ) 만이아니라시조비인알영 ( 閼英 ) 도중요한비중을차지하고있다. 알영은용의옆구리에서태어났다는독자적인탄생담을가지고있다. 또한혁거세가 6부를순무 ( 巡撫 ) 할때함께동행하면서농사와양잠을독려하였다. 순무는고대사회에서최고통치자가수행하는통치규범의하나로중앙정부를떠나지방제후를직접통제하기위해이루어진다. 농사와양잠을독려하였다는구체적인행위뿐아니라, 고대사회에서순무라는행위의정치적의미를생각할때, 알영은혁거세의배우자로서단순한동행이아니라혁거세와함께정치적의미를분담하면서활동하였던것으로해석해야할것이다. 신라에서는혁거세와알영이짝을이루어이성 ( 二聖 ) 으로불리워졌다. 알영이혁거세와함께건국시조로서숭상되었음을알수있다. 정치무대에서공식적으로활동하며영향력을가졌던왕비의모습이알영에게만그쳤다고 보기는어렵다. 알영이후신라의왕비이름에서는공통적인특징이나타난다. 2대인남해왕비아루 ( 阿婁 ) 를비롯하여탈해왕비아로 ( 阿老 ), 조분왕비아류 ( 阿留 ), 눌지왕비아로 ( 阿老 ) 등대부분 알 (ar) 계통이다. 이들 알 (ar) 계의이름은고유명사가아니라특별한지위와직능을가진여성들에게붙여졌던일반명사로여겨지고있다. 제2대남해왕이시조묘를만들면서여동생아로로하여금제사를담당하게하였다는기록이있다. 이를통해신라에서여사제의존재를알수있는데, 알 (ar) 계의이름을가진왕비들이이와같이제사와관련된일정한역할을담당하였던것으로이해되고있다. 알 (ar) 계통의이름을가진왕비나왕실여성들이제사와관련된일정한직능을가졌다는것은, 당시왕비는단순히왕의배우자라고하는보조적인측면에서가아니라, 독자적인정치적위상을가지고정치활동을하였던공적인존재로볼수있을것이다. 시조인혁거세와알영이짝을이루어이성 ( 二聖 ) 으로함께존숭되었듯이, 일정기간신라에서왕비가단순히왕의배우자라고하는사적 ( 私的 ) 관계로서의의미만이아니라, 종교적직능을가진공적존재로서의왕과함께짝을이루어정치적의미를가지고있었다고여겨진다. 그외에도여성들이종교와밀접한관련을가지고있는모습을보여주는자료는많다. 신라의건국신화중에는시조비가시조를낳았다고하는시조모계통의전승도있는데, 이시조모는선도산의산신으로호국신으로숭상되었다. 또한제2대남해왕비인운제부인은운제산의성모가되었다고하였으며, 박제상의부인은실성왕의딸로뒤에치술신모가되었다고하여왕실여성들이신격화되었음을알수있다. 또한김유신은고구려첩자에의해위기에빠졌을때세여신이나타나구해주었다고하였다. 여신으로표현된이들은종교적직능을가진실제인물로이해할수있다. 흔히제사를올리는사제에게그대상신이강림한다고믿어제사의대상과그제사의주제자는동일하게여겨지고있기때문이다. 공적인영역에서정치적인영향력을가지고활동하는여성의모습은노구 ( 老嫗 ) 에서도확인할수있다. 계룡에서태어난시조비인알영을발견하고양육한사람은사량리노구라고하였으며, 아진포바닷가로떠내려온탈해를데려다키운것도아진의선 ( 阿珍義先 ) 이라고하는노구였다. 또한날이군에사는파로의딸을만나러가는길에유숙하던소지왕에충언을하였던고타군의집주인역시노구로표현되고있다. 글자상으로는 늙은여자 라는뜻을가진이들노구들은국정을보익하거나비판하면서왕정에깊이관여하던여성들이었다. 종교적인상징성이중요한정치적의미를가지고있던상고기에여성들이종교와관련된직능을가지면서공적인정치활동을했던전통은, 중고기에중앙집권적관료체제가정비되는과정에서여성역시일정정도관작 ( 官爵 ) 질서에편제되기도하는모습으로나타났다. 3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33

진흥왕대세운 단양적성비 에는 5명에게포상으로관 ( 官 ) 을내렸다고하는데, 여기에여 ( 女 ), 소자 ( 小子 ) 의존재가포함되어있다. 관 ( 官 ) 을내리면서남녀성별과연령을가리지않았음을알수있다. 또한진평왕대혼인의신의를지키려했던백운 ( 白雲 ) 제후 ( 際厚 ) 금천 ( 金闡 ) 등 3인에게포상으로 3급의작 ( 爵 ) 을내렸다는기사가있다. 여기서제후는백운의약혼녀인데관작 ( 官爵 ) 의포상에여성을배제하지않았던것이다. 뿐만아니라신라에서는여성이임명된중앙관직도있었다. 진흥왕 12년에는고구려승려혜량을국통 ( 國統 ) 으로삼으면서, 그아래도유나랑 ( 都唯那娘 ), 대도유나 ( 大都唯那 ), 주통 ( 州統 ), 군통 ( 郡統 ) 등의승관을두어승니의일체규범을통할하게하였다고한다. 이가운데국통아래최고책임자로승려들을이끌었던도유나랑의담당자는여성이었다. 이는종교직책이지만중앙정부에서부여한정치관직으로여성이제도적으로관직체계에포함되었음을보여주는중요한사례라할수있다. 또한화랑의전신이었던여성원화는 효제와충신을가르쳐나라를다스리는요체로삼고자 인재를뽑아등용하고자 하는목적으로무리를모으기위해설치된제도였다. 청소년무리를이끌고조정에인물을천거하기도했던원화에서여성정치지도자의모습을쉽게찾을수있다. 조선시대당쟁이인사권이있는이조전랑의자리를둘러싸고시작되었다는점만보아도 인물천거 라는행위는수많은정치적역학관계가숨어있는중요한자리이다. 이를여성이공식적으로담당하게하였다는것은, 실제여성의정치참여가제도적으로보장되었음을보여주는사례가아닌가한다. 3. 고고자료속에보이는성별관념 문헌자료가문자로정착되는과정에서당대의관념이나편찬자의의도에따라왜곡과변형의우려가있는반면고고자료는당대의자료라는점에서보다원형적인모습을볼수있다. 이러한측면에서고고학적인측면에서신라의성별관념을살펴보자. 신라의적석목곽분은겉으로는봉토이지만내부에는나무곽을만들고그위에돌을쌓고그위에다시흙을덮은독특한구조이다. 이러한독특한구조로인해서적석목곽분은비교적도굴의피해로부터안전할수있었다. 그러므로대부분의부장유물이그대로남아있는경우가많았는데, 부장유물을통해당시성별관념을접근할수있다. 신라의적석목곽분은부장유물이다 양하고풍부하다는점에서도주목되고있는데, 적석목곽분의부장유물을살펴보면성별에따른차이가뚜렷하게나타나지않는다는것이특징이다. 대부분의다른지역의고분에서는장신구류는주로여성에게남성은무구류와마구류를주로부장하는것으로나타났다. 그런데신라에서는이와는다른양상을보이고있다. 대부분의고분에서장신구류, 마구류, 무구류가세트를이루어출토되었다. 즉신분이높은여성에게는대도를비롯하여무구류와마구류가출토된반면, 신분이낮은남성에게서는무구류가아예없고장신구류만한두점출토되었다. 즉신라에서는성별보다는오히려신분에따른차이가크게부각되고있음을알수있다. 이와같이적석목곽분에서출토유물의종류와수량에서성별에따른차이가보이지않는다는것은, 유물부장에있어서성별차이를중요시여기지않았음을보여준다. 이러한모습은금관에서더뚜렷하게보여준다. 화려함의극치를보여주고있는신라금관의경우종래에는왕관으로대입시켜남성이썼던것으로치부했다. 그런데금관이출토된고분가운데황남대총북분이나서봉총등성별추정이이루어졌던고분의주인공은모두여성이었다. 특히황남대총의경우 2개의고분이연결되어있는쌍분이었는데남분에서는남성인골이북분에서는 부인대 ( 夫人帶 ) 라는명문이새겨진허리띠가출토되어남녀가함께합장되었다는것을알수있었다. 이가운데한쪽에서는금관이출토된반면다른한쪽에서는금동관이출토되었다. 그런데종래금관이왕관으로남성이썼을것이라는선입견과달리여성이피장된북분에서금관이출토된것으로나타났다. 서봉총역시쌍분으로여성이피장된것으로추정하고있는데함께연결된다른고분에서는금관이출토되었다는보고가없었다. 이는금관이정치적최고권자자가쓴왕관일것이라는선입견과다른모습을보여준다. 그런데남녀성별에대한분화의식이일찍발달된중국의경우신석기말기유물에서이미남성은무기류, 여성은장신류들이주로부장되는등성별에따른차이를보이고있다. 6세기에조영된백제무녕왕릉에서도왕에게서는대도가출토된반면, 왕비에게서는목걸이와팔찌가출토되어, 남성은무기류, 여성은장신구류라고하는중국과같은성별에따른부장차이를보여주고있다. 또한고구려에서고분벽화의묘주부부도에서대부분남편을주인공으로, 부인은남편을향해종속된존재로그려져있어성별에따른차이를확인할수있다. 고고자료에서보여주는이러한성별관념의차이가삼국가운데왜신라에서만여왕이있었는지에대한설명이될수있지않을까한다. 신라사회에서는상고기부터여성들이종교와관련된직능을가지면서공적인정치활동을했으며, 중앙집권적관료체제가정비되는중고기에도관작질서에완전히배제되지않았다. 뿐만아니라사회적으로가계계승에서여성이라고하는성별이완전히배제되지않았다. 이러한사회분위기속에서왕위계승역시 여성 이라고무조건배제되지않았던것이다. 3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2. 왜신라에만여왕이있었을까? 35

03 천추태후, 요부인가여걸인가 권순형 한국학중앙연구원

03 천추태후, 요부인가여걸인가 권순형 한국학중앙연구원 1. 천추태후가누구인가 천추태후 ( 千秋太后 : 964~1029) 는고려제5대왕경종의비이며, 7대왕목종의어머니이다. 남편사후천추전에거했으므로천추태후라불리는데, 정식시호는헌애왕태후 ( 獻哀王太后 ) 이다. 과부로서외족인김치양 ( 金致陽 ) 과사통했고, 아들이왕위에오르자성년인아들을제치고섭정을하였다. 목종에게아들이없자태후는김치양과의사이에서낳은아들로목종의뒤를잇고자하였다. 이에왕위계승 1순위자였던조카대량원군을죽이려하였다. 그러나이에반대한신하들에의해반란이일어나목종은죽고태후는고향인황주로귀양가여생을마쳤다. 천추태후에대한그간의역사적평가는상당히부정적이었다. 아들이성년인데도섭정을했고, 김치양과간통을했으며, 또그소생자로왕통을이으려했다는점때문이었다. 이때문에역사가들은그녀를음녀, 악녀로만지목하고태후의정치적치적도전혀인정하지않았다. 그런데과연태후는 음녀 로만규정하면되는것일가? 우리가태후에주목을해야하는이유는그녀가고려시대에가장오래섭정을했고, 또가장큰정치권력을가졌던여성이었다는점이다. 전근대시대에여성이정치에참여할수있는방법은모후로서어린아들을대신한섭정뿐이다. 그러나고려시대에는왕실이일부다처 ( 一夫多妻 ) 여서섭정의기회가상대적으로적었다. 때문에고려일대를통해섭정을한왕후로는천추태후와헌종의모후인사숙태후 ( 思肅太后 ), 원간섭기충목왕의어머니였던덕녕공주 ( 德寧公主 :?~1375) 가있을뿐이다. 그러 03. 천추태후요부인가여걸인가 39

나사숙태후는헌종이재위 1년만에숙부인숙종에게왕위를물려주어, 비록그녀가 군사와행정을포함한일체정사를모두다맡아처결하였다 고해도고려정치사에미친영향은그다지컸다고할수없다. 덕녕공주는원나라공주였고역시섭정기간이 4년정도로짧다. 그러나천추태후는아들이왕위에오를때 18세로이미성년이었다는점, 그럼에도불구하고그녀가 12년간섭정을했다는점에서명실상부하게고려시대최고의정치권력을가진여성이었다하겠다. 천추태후, 그녀는과연어떤인물이었으며, 어떻게평가해야하는가? 2. 태조의손녀, 성씨를바꿔왕비가되다 천추태후의아버지는태조왕건의아들인대종 ( 戴宗 ), 어머니도태조의딸인선의왕후 ( 宣義王后 ) 이다. 태조의아들과딸이어떻게혼인을했는가? 남매간에혼인을했다는말인가? 아다시피태조왕건은부인이많았다. 역사책에기록된것만도무려 29명이니, 실제로는이보다더많았을수도있다. 대종은태조의네번째왕비인신정왕태후 ( 神靜王太后 ) 의아들이고, 선의왕후는태조의여섯번째왕비인정덕왕후 ( 貞德王后 ) 의딸이다. 즉그들은이복남매간에혼인을하였으니, 천추태후는태조의친손녀이자외손녀인셈이다. 그런데여기서흥미로운점이하나있다. 천추태후의성씨가무엇일까? 태조의손녀이니당연히왕씨일것이라생각하지만태후의성씨는 황보씨 이다. 왜황보씨인가? 천추태후처럼왕씨인여성이왕비가되면남편인왕도왕씨이기때문에, 동성간에혼인한셈이된다. 이때문에왕비의성씨를바꿔동성혼이아닌것처럼보이게하였다. 그럼왕비는아무성씨나칭하면되는가? 그렇지는않았고, 대체로어머니의성씨를취하거나, 만일어머니도왕씨라면할머니의성씨를취하였다. 천추태후의경우는어머니도태조의딸이니왕씨이다. 이때문에할머니인신정왕태후황보씨의성을취해황보씨가되었다. 그런데이처럼성씨를바꾼다는것이어떤의미가있는것일까? 단순히대외적으로동성혼이아닌것처럼보이게하는것이목적이었을까? 이는결코형식적인것만이아니었으며, 실제로당사자는바뀐성씨집단의사람으로간주되었다. 천추태후는황보씨를칭하면서황주를향리 [ 본향本鄕 ] 으로하였다. 그녀가권력을장악하고섭정을펼때, 그리고나중에소위 김치양의난 으로태후자리에서물러났을때도돌아간고향이황주였다. 이는결국고려시대의친족구조가부계중심의조선과는확연히달랐음을의미하는것이다. 고려시대에는부계와모계가거의동등한양측적친속구 조를갖고있었다. 천추태후에게는형제가다섯이있었는데, 남자형제가셋, 여동생이하나있었다. 어머니가일찍죽으니할머니가이들을키웠다. 천추태후는 16세쯤고종사촌인경종과혼인했는데, 이혼인에결정적인역할을한것은할머니였다. 당시왕실의최고어른이었던신정왕태후는외손자경종 [ 광종비대목왕후 ( 大穆王后 ) 의아들 ] 을친손녀천추태후와혼인시켰다. 혼인당시경종은그녀보다 8살연상이었고, 이미두명의왕비가있었다. 제1비는신라경순왕의딸인헌숙왕후김씨 ( 獻肅王后 ), 제2비는종친인문원대왕의딸헌의왕후유씨 ( 獻懿王后 ) 였다. 헌애왕태후는제3비였고, 이후그녀의친동생헌정왕후 ( 獻貞王后 ) 가제4비로, 다시종친인원장태자의딸대명궁부인 ( 大明宮夫人 ) 이제5비로들어왔다. 그렇다면그녀는경종의후궁이었는가? 고려시대에는조선과달리왕실이일부다처제였다. 때문에첫번째왕비만정비이고나머지는후궁이었던게아니라여러왕비들의지위가병렬적이었다. 천추태후는 980년 ( 경종 5) 아들송 ( 誦 : 뒤에목종 ) 을낳았다. 경종의 5명의왕비중유일하게아들을낳은것이다. 그러나이듬해경종이죽어그녀는 18세에과부가되었다. 왕이죽었지만겨우돌이지난아기가왕위를계승할수는없었다. 이에그녀의친오빠가제6대왕성종으로즉위했다. 신정왕태후는천추태후자매와경종의혼인처럼, 친손자성종을다시자신의외손녀인문덕왕후 ( 文德王后 ) 와혼인시켰다. 문덕왕후는경종의누이이자대목왕후의딸이다. 처음에종친인홍덕원군 ( 弘德院君 ) 과혼인했다가성종과재혼하였다. 문덕왕후가당시남편을사별한상태였는지아니면성종과의혼인을위해이혼을한것인지는잘알수없다. 어쨌든성종은광종의사위자격으로왕위를계승했다. 3. 간난신고끝에아들을후계자로만들다 왕위에오른성종은헌애왕태후와그녀의아들이왕위를위협할수도있다고생각해목종을궁중에서양육하였다. 뿐만아니라헌애왕태후의궁에출입하던외족김치양을 추문 을이유로곤장쳐서먼곳으로귀양보냈다. 이는정치적의도에서비롯된게아닌지의심된다. 통상적으로간통죄는현장에서잡은것만을범죄로인정할뿐단지소문만으로처벌을하지는않기때문이다. 성종은추문의사실여부와상관없이태후가김치양과연결돼정치적행위를하는것을사전에단절시키려는의도가강했으리라여겨진다. 또성종이상당히유학에경도 4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3. 천추태후요부인가여걸인가 41

되어있었던점을생각하면유교윤리의확립이라는점에서정절을강조한면도있었을것이다. 성종은재위기간내내유학을기본이념으로하여중앙집권을강화하고, 제반제도를정비해나갔다. 성종의정치가눈부시게펼쳐지는동안그녀는오직한가지만생각했다. 어떻게하면아들이선왕의뒤를이어보위에오를수있을까하는점이었다. 이는단순히권력욕에서비롯된것이라할수없다. 만일성종의자식이왕위를계승한다면, 그녀의아들은왕권에위협적인존재로죽임을당할수도있기때문이다. 그녀는정치판을면밀히분석하기시작했다. 당시정치집단은크게근기계의대호족출신공신계열과나주계의중소호족출신비공신계열, 경주계의비호족출신비공신계열로나뉜다. 이들모두유교적체제정비의필요성은공감하고있었으나, 체제정비의방향과추진속도면에서는차이가있었다. 경주계는대송외교의성과를토대로, 중국을모델로한화풍적 ( 華風的 ) 정치노선을하향적입장에서급진적으로추진하고자했다. 반면근기계는토풍적 ( 土風的 ) 정치노선을고수하고, 개혁의속도도온건하길바랐다. 성종초반의정치를주도한것은경주계와나주계였는데, 특히 988년 ( 성종 7) 최승로 ( 崔承老 ) 가문하수시중이되면서연등회와팔관회를폐지하고적전제 ( 籍田制 ) 를시행하는등유교적의례를강화했다. 그녀는근기계공신및호족계열들을포섭하며, 또한상대적으로소외된사원세력과밀접한관계를유지하면서힘을 키워나갔다. 그녀에게는다행스럽게도날이갈수록거란과여진이강성해지면서송의세력이약화되었다. 성종대유교정치를주도했던최승로의시무책 989년 ( 성종 8) 최승로가죽자근기계호족및공신계열의세력이강화되었다. 태후는이틈을놓치지않고, 목종의태자책봉을주장했다. 성종에게는마침아들도없었다. 990년 ( 성종 9) 성종은조카를개녕군 ( 開寧君 ) 으로책봉하고정사를돕게해후계자로공식선포하였다. 992년 ( 성종 11) 그녀의아들이왕위를계승하는데가장큰걸림돌인왕욱 ( 王郁 : 安宗 ) 이유배되었다. 그녀의친동생이면서경종의네번째왕비인헌정왕후 ( 獻貞王后 ) 와간통을했기때문이었다. 그런데간통이발각된경위가결코평범하지않다. 헌정왕후가왕욱의집에와있을때를틈타그집가인 ( 家人 ) 이불을지르고, 왕이놀라달려오자간통사실을고발했다한다. 왕후가만삭이될때까지수년내지적어도일년이상을잠잠히있다가이시점에서새삼스럽게발설했다는점이예사롭지않다. 왕욱은신라경순왕의백부인김억렴의딸신성왕태후 ( 神成王太后 ) 와태조사이에서태어난아들이다. 성종이왕위에오를때, 그역시물망에오를수있었으나황주황보씨의세력에기반해성종이즉위했다. 왕욱과헌정왕후의사랑은순 수했을까? 물론그랬을수도있지만, 정치적계산에의해이루어진것일수도있다. 그는 ( 혹은 헌정왕후는 ) 성종에게아들이없는시점에서경주계왕손인왕욱이황주황보씨의세력까지 얻는다면왕위를계승할수도있을거라판단했을수있다. 실제로왕욱의야심은 고려사 곳곳에서드러난다. 그를귀양보내면서성종은 신중하여 초조한마음을가지지말라 고당부한다. 이는그가무언가사고를칠수도있음을의미한다. 간통이발각된날헌정왕후는아이 [ 뒤에현종 ] 를낳다죽었다. 성종은보모를골라아이를기 르게했는데, 보모가의도적으로아이에게아버지라는말을가르쳤다. 아이가 아버지 소리 를내는것을들은성종은마음이약해져아이를유배지의왕욱에게보냈다. 왕욱의측근이 유모를매수했을가능성은충분하다. 유배지에서왕욱은어느날아들에게금한주머니를주 면서 내가죽거든이금을지관에게주고나를이고을성황당남녘귀룡동에매장하게하되 반드시엎어서묻게하라. 고했다. 그가풍수지리에정통했다니, 아마도그곳이왕이날수 있는길지였던모양이다. 아들이지관에게지시한대로말하자지관이 어찌그리도급하던가 라고했다는대목은그의야심을적나라하게보여준다. 묘자리쓴게효험이있었던지현종은왕 욱이죽은이듬해 ( 성종 16 년 ) 개경으로올라 온다. 조카와그녀와의일전은나중일이고, 어쨌거나태후는왕욱의귀양으로가장강 력한라이벌을물리쳤다. 993 년 ( 성종 12) 거란의 80 만대군이쳐들 어왔다. 군신회의에서혹자는항복하자고 했고, 혹자는서경이북의땅을베어주어황 주와절령을경계로삼자고했다. 성종도항 복할생각으로서경창고의쌀들을주민들 에게나눠주고남는쌀은대동강에버리라 명하였다. 서희 ( 徐熙 ) 는전쟁의승패는병력 이강하고약한데만달린것이아니며, 삼 각산 ( 三角山 ) 이북이모두고구려의옛강토 인데저들이강요한다고해서다주겠느냐, 국토를떼어적에게준다는것은만세의치 욕이라며강력히반대했다. 이지백 ( 李知白 ) 은국토를경솔히적국에할양하는것보다 현종이아버지왕욱의명복을빌기위해조성한봉선홍경사사적갈비 4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3. 천추태후요부인가여걸인가 43

는차라리선대로부터전하여오던연등, 팔관, 선랑 ( 仙郞 ) 등행사를다시금거행하고타국의색다른풍습을본받지않아국가를보전하고태평을누리는것이좋지않겠느냐고했다. 이는당시조정신료집단간의정치이념차이및급격한화풍적개혁에대한호족들의반발감을보여준다고하겠다. 서희는자신이소손녕과담판하겠다고하여, 오히려압록강내외의옛땅을획득하면서화해를성립시켰다. 이후항복론과할지론을주장했던남부출신관료들의세력은더욱약화되었다. 이제태후와아들의앞을가로막을장애물은아무것도없었다. 왕위를계승받기위한마지막수순으로천추태후는성종의딸인선정왕후유씨 ( 宣正王后劉氏 ) 를며느리로맞았다. 선정왕후는사실성종의친딸이아니다. 어머니문덕왕후가성종과재혼할때데려온전남편홍덕원군의딸이다. 어쨌든이혼인을통해과거성종이광종의사위자격으로왕위를이었듯, 목종역시성종의사위가되어왕위를물려받을채비를하였다. 997년 ( 성종 16) 성종이세상을떠나자천추태후의아들송은순조롭게왕위를계승하였다. 4. 왕권강화와관료제의정비 목종은왕위에오르자그녀를왕태후로높이고, 응천계성정덕 ( 應天啓聖靜德 ) 왕태후라는존호 ( 尊號 ) 를올렸다. 그녀는왕을제치고섭정을하였다. 목종이이미 990년 ( 성종 9) 이래왕위계승자로확정되어정사를도왔음에도불구하고이런결정을내렸다는것, 게다가섭정에대한반대를사료에서전혀찾아볼수없다는것은목종의정치적능력이신통치않았음을반증하는것이아닐까? 혹은성종의치세동안태후가이미상당한정도로정치적활동을해왔고, 현실적으로그힘을무시할수없었기때문일수도있다. 섭정을시작한태후는어떤정책을폈는가? 우선언급할것은목종대과거급제자수가상당히증가했다는점이다. 제술과의경우목종은 12년재위기간동안 7차례의과거를시행해 121명을급제시켰다. 이는유학을중시했던성종이재위 16년간 14 차례의과거를시행해 82명의급제자를낸것보다더많은숫자이다. 이처럼과거합격자수를늘린이유는태후가목종즉위에공이있거나자신의세력을정계에보다많이등용시키기위함이었을것이다. 그러나급제자의증원을단지자파세력의확대를위해서만이라고폄하할필요는없을것같다. 인재등용은정치를위한첫걸음이며특히정 치의혁신을꾀할때새로운인재등용은필수이기때문이다. 실제로목종대에는많은관청과관직이만들어진다. 상의국 ( 尙衣局 ) 상식국 ( 尙食局 ) 상사국 ( 尙舍局 ) 상약국 ( 尙藥局 ) 상승국 ( 尙乘局 ) 공조서 ( 供造署 ) 등의관청이새로설치되거나정비되었다. 이관청들은공통점을가진다. 상의국과상식국은왕의옷과음식, 상사국은왕의행차때좌석과물품준비, 상약국은왕의약, 상승국은왕의말과마차, 공조서는왕이쓰는기구와장식물을관장하는관청이었다. 즉왕의위엄을드러낼수있게왕과관련된제반관청들이정비되었던것이다. 또능을지키는일을맡은제릉서 ( 諸陵署 ), 왕실족보와관련된전중성 ( 殿中省 ), 제사와증시 ( 贈諡 ) 를담당하던태상시 ( 太常寺 ), 제물로드리는곡물을공급하던사농시 ( 司農寺 ), 여러가축을기르던전구서 ( 典廐署 ), 조회나의례를관장하는합문 ( 閤門 ), 제사와연회음식을공급하던대관서 ( 大官署 ), 음악을관장하던태악서 ( 太樂署 ), 토목공사와관련된장작감 ( 將作監 ) 등도이때정비되었다. 이역시종실을높이고, 궁궐은물론각종국가의례를정비해왕권의위엄을만방에떨치기위한조처였다하겠다. 또한기존정치기구에도관직의증설이이루어졌다. 고려정치기구의중심인중서문하성의관원이이때확충되었다. 특히참지정사를제외하고는좌우산기상시 좌우간의대부 좌우보궐 좌우습유등모두간쟁과봉박을맡은낭사 ( 郎舍 ) 였다. 이들은국왕측근에서부당한처사를간언하고논박해이를바로잡는데주요임무가있었다는점에서왕권을제약한면도있지만그보다는왕권을보좌해왕권강화에이바지한측면도크다. 뿐만아니라 5품이상고위관료자손에게음직 ( 蔭職 ) 을주는정규음서제도, 관리가족에대한봉작 ( 封爵 ) 규정도마련되었다. 그리고관료제의기반으로서전시과 ( 田柴科 ) 도개정되었다. 경종때의전시과가공복과관계, 인품을고려해호족과타협하고있음에비해개정전시과는오직관직과위계를중심으로, 실직 ( 實職 ) 위주로토지를지급해한층진전된관료제의모습을보여준다. 대외관계면에서는, 당시고려가거란의연호를쓰고책봉을받는상황이었지만송에도사신을보냈다. 그러면서고려가중국문화를본받는다는것과거란에게압박당하고있는상황임을진술하며관계를계속했다. 즉목종대고려는거란과송어느한쪽에도치우치지않고자주성을견지하였다. 강조가목종을폐위하고현종을옹립할때까지거란의침입이없었다는것은목종대의외교가성공적이었음을보여주는것이다. 그러면서도한편으로는군사제도를정비하고성을쌓아침략에대비했다. 고려군사제도의근간인 6위 ( 衛 ) 의직원을갖추고군영을만들며군인들의전시지급규정도정했다. 또친위군인 2군 ( 軍 ) 을만들고병장기를관장하는군기감 ( 軍器監 ) 을정비한것도이때이다. 태후는동아시아국제질서의변화속에서송과북방족에대하여균형있는대외정책을펴국토상실의위기를막고북방강역을확보할수있었다하겠다. 4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3. 천추태후요부인가여걸인가 45

경제적으로는화폐와포 ( 布 ) 를함께사용하여백성들의불편을없앴으며, 시장을관할하는경시서 ( 京市署 ) 를정비해물가관리에도신경썼다. 사회적으로는세금이나역을면제하는등백성의구휼에도힘을기울였다. 예컨대 1006년 ( 목종 9) 흉년이들어백성들이식량난을겪자미납된공부를면제하고곡식을꾸어주게하였다. 나중에목종이강조에의해피살되었을때 관리와평민을막론하고통분히여기지않는사람이없었다. 그러나현종은그것을모르고있다가거란이침입하여문죄를하였을때에야비로소알게되었다 는 고려사 의기사는그녀와목종이백성들에게사랑받고있었음을여실히보여준다하겠다. 이처럼태후는왕권을강화하고, 관료제를정비하고자하였는데, 강한왕권을뒷받침하는이데올로기는무엇이었을까. 태후는불교와토속신앙을중시해연등회와팔관회를부활시키고, 자신의원찰로진관사 ( 眞觀寺 ) 를, 왕의원찰로숭교사 ( 崇敎寺 ) 를지었다. 진관사에는 9층탑을건립하기도하였으며, 궁궐안에신선신앙과관련된낭원정이란정자를짓기도하였다. 태후의정치파트너이며연인이었던김치양역시자기출신지인동주 ( 洞州 : 현재황해도서흥군 ) 에성숙사 ( 星宿寺 ) 란사당을짓고, 또궁성서북모퉁이에시왕사 ( 十王寺 ) 를신축했다. 결국태후의정치방향은보수반동적인것이아니라성종을이어관료제와중앙집권을강화하는것이었다. 단지차이라면급진적인화풍적개혁을지양하고, 중립외교와국방력강화를통해보다자주성을견지하는정도였다하겠다. 5. 쿠데타와태후의몰락 태후는성종대이래의정치세력및그녀의친속들, 그리고새로입사한자들을섞어정권을구성하고정치를운영해나갔다. 정치의내용은앞장에서보았듯이충분히의미가있는것들이었다. 정치는순조롭게진행되었으며, 나라안팎으로어떤어려움도없었다. 그러나단한가지태후를근심스럽게만든게있었으니그것은바로목종의후사문제였다. 목종은즉위한지 6년이넘도록자식을두지못했으며, 심지어사료에보면그가남색을즐겼다는기사까지보인다. 목종의아들이없다면권력은다른곳으로가게될수밖에없다. 태후는김치양과대장경을베껴쓰는사업을발원했다. 1006년 ( 목종 9) 7월 대보적경 을황금글자로베껴쓴일부가전하는데, 보살계제자인고려국응천계성정덕왕태후황보씨와상서좌복야판삼사사농서현개국남김치양이마음을합쳐발원하여금자대장경을완성했다고되어있다. 대보적 경에는여신도의신앙과관련된내용이많이담겨있다. 석가모니가아난에게여성의수태과정, 태자의성장, 아기의출생등을설명한부분, 모혜동녀를내세워불교수행에남녀노소가없다는부분, 부처와여자신도가문답한부분, 여자가닦아야할도리가언급된부분, 승만부인이대승불교를설명한부분등이그것이다. 대보적경사업은응천태후가김치양의아이를수태하기와건강한출산을기원하기위해시작되었다. 출산후에는아이의순탄한성장과미래의성공을기원하기위해진행되었다. 태후와김치양이발원한대보적경변상도 1003년 ( 목종 6) 태후와김치양사이에드디어아들이태어나자, 그녀는그아들로목종의후사를잇고자했다. 태후는왕위계승 1순위자인조카대량원군 ( 大良院君, 뒤에현종 ) 을승려로만들어숭교사에있게했다가다시삼각산신혈사 ( 神穴寺 ) 로보내고는사람을시켜여러차례죽이려하였다. 하루는궁녀 ( 內人 ) 를시켜술과떡을보내면서그속에모두독약을넣었다. 궁녀가절에가서소군을만나고친히음식을먹이려고하였는데절의어떤중이갑자기소군을땅굴속에숨겨두고거짓으로 소군이산으로놀려나갔으니간곳을어찌알겠느냐? 라고속였다. 궁녀가돌아간후에그음식을뜰에버렸더니까마귀와참새들이그것을먹자즉시죽었다. 그러나이는기본적으로무리한일이었다. 비록모계나처계가부계못지않았던고려시대였다해도태조의친손아닌사람이왕위에오른예는없었다. 김치양의자식이왕위를계승하는것에반발하는관료들은차츰대량원군을중심으로결집해갔을것이다. 게다가대량원군역시왕위에대한욕심이있었을터이니정계는두그룹으로나뉠수밖에없었다. 대량원군의야욕에대해서는그가신혈사에있을때지었다는다음의시가참고된다. 4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3. 천추태후요부인가여걸인가 47

백운봉에서흘러내리는한줄기물만경창파멀고먼바다로향하누나바위밑을스며흐르는물적다고하지말라용궁에도달할날그리멀지않으리약포에도사리고앉은작고작은저뱀온몸에붉은무늬찬란히번쩍이네언제나꽃밭에만있다고말하지말라하루아침용되기란어렵지않으리니즉대량원군은항상시냇물처럼, 작은뱀처럼숨어용이되기를기대하고있었던것이다. 1009년 ( 목종 12) 대량원군파및서경도순검사 ( 西京都巡檢使 ) 강조 ( 康兆 ) 의쿠데타로목종은시해되고, 대량원군은현종으로즉위했다. 김치양일파와태후의친속들은죽거나귀양을갔다. 태후는고향인황주로내려가 21년을 현종이머물던삼각산신혈사 ( 현은평구진관사 ) 더살다가 1029년 ( 현종 20) 세상을떠났다. 목종대정치에서태후의영향은어느정도 였을까? 고려사 에서는목종에대해 왕의성품은침착하고굳세어어려서부터임금의도량이있었다. 그러나활쏘기와말타기를잘하고술을즐기며사냥을좋아하여정무에유의하지않았으며폐신 ( 嬖臣 ) 들을신임하고가까이하다가결국화를만나게된것이었다. 라고평가하고있다. 즉목종대정치는사실상태후의업적이라고보아도좋은것이다. 그리고태후는앞장에서보았듯당시고려사회가나아가야할방향대로정치를운영해나갔다. 뒤이어즉위한현종도관료제정비와중앙집권화를계속해나갔다. 그러니그녀가실각하게된것은결국정책문제가아니라후계자문제때문이었다고볼수밖에없다. 6. 천년을이어온음녀의낙인 그러나이후역사에서태후에대한평가는공정히이루어지지않았다. 그녀가 여자로서해서는안될 정치를했고, 심지어남편에게정절도지키지않았을뿐아니라간부의자식으로왕통을바꾸려고까지했기때문이었다. 태후의모든정치적업적은무시되고, 남성사가들은태후죽이기를거듭하였다. 삼봉정도전은 천추태후가음란하여김치양과간통하여아들을낳았다. 왕이시초에막지못하였다가아들과어머니가모두재앙을입었고, 사직이거의멸망할뻔하였다. 라고썼다. 조선시대에들어와서는유교적남존여비관에입각해평가가더욱부정적이된다. 안정복은천추태후의죽음을 춘정월황보씨가황주에서죽었다. 고쓰고는 황보씨가김치양과간통하고서치양의소생자로임금을삼으려고하였으니, 이는고려왕실의적부 ( 賊婦 ) 인것이다. 어찌태후호 ( 號 ) 를가질것인가? 그러므로호를버리고죽었다 ( 死 ) 고쓴것이다. 라덧붙였다. 이시각은현재까지도계속되고있다. 현대의역사가들조차태후에대해서도악녀, 음녀, 제거되어야할호족의대표자정도로만규정한다. 심지어목종대의정치적성과마저도앞뒤임금 ( 성종과현종 ) 의것으로갖다붙이는경향조차보인다. 태후를부정적으로보아야하는가? 그녀가다큰아들을제치고섭정을한것은아들의능력을믿지못해서일수도있고, 그녀스스로권력을원했기때문일수도있다. 그녀가김치양과관계해아이를낳고, 그아이로왕위를잇고자한것은사랑일수도, 욕망일수도있다. 김치양이세운절의종에 살아서도죽어서도태후와함께하겠다 는구절을넣은것을보면, 이들이서로사랑했던것같다. 당시의정절관은 신의 ( 信義 ) 개념으로부부가피차생존해있을때에한해지켜야할것이었다. 남편이죽은뒤수절이강요되지않았고, 재혼녀가왕비가될정도로재혼에대한제약도없었다. 그녀는충분히또다른남자와의사랑을꿈꿀수있었다. 게다가그녀는겨우 18세에과부가되지않았는가! 그리고아들목종이자식을보지못하는상황에서, 그녀가낳은자식이왕실의외손으로왕위를계승할생각을하는것도당시의친족구조에서는가능했기에시도한것이다. 만일조선시대처럼이것이절대로있을수없는일이었다면그녀도어디강화도벌판에서뛰어놀던왕손 ( 王孫 ) 를찾았을것이다. 그녀의시도가잘못된게아니라그녀가택한남자가왕족이아니었다는점이문제라면문제였다. 부계적인의식을가진유학자들은 김치양의자식 이왕위를계승하는것에대해반발했을것이고, 그녀의친족인황주황보씨내에서는똑같이황주황보씨외손이지만이왕이면태조의손자인헌정왕후의아들대량원군이왕이되는것을지지했을것이다. 결국태후는몰락했다. 그리고승리자들에의해, 또이후수백년간지속된남성중심의유교윤리에의해그녀의업적은철저히왜곡되었다. 그렇지만그녀는음녀도, 악녀도, 호족의이익을위해복무한구시대적인물도아니다. 그녀는아직국가의체제정비가미흡하고, 호족들의세력이여전히강하던시대에왕권을강화하고, 정치와군사제도를정비하며, 영토의보존과확대를위해노력하고, 백성을위한정치를폈던훌륭한정치가였다. 그녀는성종대의유교적관료정치를계승하였으며, 불교와토속신앙을통해왕권을강화하고고유문화를유지발전시켰다. 4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3. 천추태후요부인가여걸인가 49

새로즉위한현종은유교로국가의체제정비를계속하면서도, 연등회와팔관회를중시하는등전통적요소들도충분히고려하고있다. 이는그녀의치세가남긴유산이라하겠다. 그녀는고려일대를통해가장강력한정치권력을행사한여성정치가였으며, 우리역사에서합당한평가를받지못하는대표적인인물중의한명이라하겠다. 참고문헌 김창현, 천추태후역사그대로, 푸른역사, 2006. 구산우, 고려성종대대외관계의전개와그정치적성격, 한국사연구 78, 1992. 구산우, 고려성종대정치세력의성격과동향, 한국중세사연구 14, 한국중세사학회, 2000. 권순형, 고려목종대의헌애왕태후의섭정에대한고찰, 사학연구89, 2008. 김당택, 고려목종 12년의정변에대한일고-목종대의사경발문과관련하여, 한국학보 18, 일지사, 1980. 김대연, 고려현종의즉위와거란의침략원인, 한국중세사연구 22, 한국중세사학회, 2007. 김두향, 고려현종대정치와吏系관료, 역사학보 55, 2005. 김창현, 고려초기정국과서경, 사학연구 80, 한국사학회, 2005. 노명호, 고려초기왕실출신의 향리 세력-여초친속들의정치세력화양태, 변태섭편, 고려사의제문제, 삼영사, 1986. 이태진, 김치양란의성격-고려초서경세력의정치적추이와관련하여, 한국사연구 17, 1977. 이혜옥, 고려서경세력에대한일고찰, 한국학보 26, 일지사, 1982.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김용선 한림대학교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김용선 한림대학교 1. 머리말 묘지명 ( 墓誌銘 ) 은무덤앞의지상에세우는묘비 ( 墓碑 ) 와달리땅속에넣는것으로, 개인의이력이나가족관계등을적어무덤의주인공이누구인지알게하고, 업적이나덕행을후세에길이남기기위해만든다. 그기록은매우자세하면서도생생하기때문에한개인의전기에관한충실한자료가될뿐만아니라, 그가속한집단이나사회를이해하는데에도중요한자료가된다. 특히고려시대에는묘지명문화가크게발달하여현재 350개정도가전해지고있는데, 이중여성묘지명은 50여개이다. 문헌사료가절대적으로부족한여성사연구에서이들묘지명은고려시대의 ( 귀족-이하생략 ) 여성들의삶을모습을구체적으로살피는데매우중요한자료가된다. 오늘발표에서는묘지명에서찾아지는고려시대여성들의일반적인삶의형태를찾아보고, 다음두여성의묘지명을중심으로그들의삶을구체적으로살펴보기로한다.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53

2. 고려시대여성들의일반적인삶 2) 자녀출산 1) 결혼 이혼 재혼 ➊ 결혼 여성은최고 25세 최저 11세, 평균초혼연령은 16.3세 남성은최고 32세 최저 13세, 평균초혼연령은 20.7세 남녀모두고려후기로갈수록결혼연령이낮아짐.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에혼가를허락한다 ( 경국대전 禮典戶婚조 ) 남성연상형, 부부의나이차이는 4.1세정도, 역시고려후기로갈수록좁혀짐. 고려는기본적으로 1부1처제의가족형태로, 부부가독립가족을이룸. ➋ 이혼 여성의이혼은비교적자유로운듯. 남자와여자의혼인은경솔히합치고쉽게헤어진다 ( 고려도경 民庶조 ) 이혼형태 : 합의이혼 < 和離 >, 기처 ( 棄妻 ), 의절 ( 義絶 ) 남성위주의이혼 ➌ 재혼 재혼의실사례도다수있고, 3남 4녀를낳은뒤평양공왕현과사별한허씨 ( 許氏 ) 는충선왕과재혼하여순비 ( 順妃 ) 가되기도함. 적서 ( 嫡庶 ) 의차별도없음. 여성의재혼이비교적자유로왔음을반증. 그러나여성의이혼은남성에비해차별받았고, 재혼의비율도남성에비해높지않았다. 고려사회는기본적으로신분제사회이고, 폐쇄적인통혼권속에서계급혼이이루어졌다. 따라서결혼도개인과개인간의결합이아니라가문과가문의결합이었다. ➊ 평균자녀수 통계상으로는출산개체 1인이평균 5.1명 ( 아들 2.8명 + 딸 2.3명 ) 을출산. 그러나통계치는성비 ( 性比 ) 가 126이되어정상출산성비 106에비해왜곡되어있음. 이중에서부모보다먼저죽은자녀의평균비율은 12.6% 정도 자연출산력은 9명정도이므로, 고려시대의유ㆍ영아사망률은 43.3% 로추산함. <(9-5.1) 9=43.3%> ➋ 승려출가 아들중평균 10.1% 가출가 : 불교국가의모습 후기에는급격하게감소 : 성리학도입영향이큼. 그러나딸의출가는전무 : 고려시대여성의출가는공식적으로는금지됨. 여성은 비정상적인상태 에서출가 : 가난하여결혼할수없는경우, 남편이죽거나버림받은경우, 또는간통죄등범죄자의경우등에출가시킴. 3) 여성의경제 사회활동 ➊ 재산상속 자녀균분상속 ( 子女均分相續 ): 토지와노비를아들과딸이동등하게상속받음. ( 조선초기에중자상속 ( 衆子相續 ) 을거쳐후기에적장자 ( 嫡長子 ) 단독상속으로변화 ) 결혼후에도여성의재산권은보호되고, 재혼하거나후손이없는경우부인의재산은친정에귀속. ➋ 여성도호주 ( 戶主 ) 가됨. 오복제 ( 五服制 ) 에도상복 ( 喪服 ) 을입는외족과처족의범위가당시중국보다넓음. 음서 ( 蔭敍 ) 시행시부계친족이외에외가 < 外祖蔭 外叔父蔭 > 나처가 < 妻父蔭 > 의음서를받을수있음. 5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55

( 조선은외족과처족의음서를제한 : 부계친족위주의가부장적질서를강조 ) 양측적친속사회 ( 兩側的親屬社會 ) 3. 최루백 ( 崔婁伯 ) 처염경애 ( 廉瓊愛 ) 의삶 ➌ 윤행 ( 輪行 : 아들 딸이돌아가며제사를맡음 ) 과외손봉사 ( 外孫奉祀 ) 도가능. 법적으로수양자 ( 收養子 ) 제도가있었으나, 양자 ( 養子 ) 의실제사례는거의없음. ➍ 가사노동과가정경제를주관. 4) 사망과장례 ➊ 고려여성의평균사망나이는 64.5세. 남자도비슷. 유아사망률 43.3% 를감안하면고려시대의평균수명은 39.7세정도로추산. ➋ 장례방식 불교식장례 화장 유골임시봉안 묘지명제작과매장 고려시대묘지명문화는불교적요소, 유교적요소, 도교적요소가혼합되어있다. ➌ 매장지 부부 ( 夫婦 ) 부자 ( 父子 ), 가족 형제들이각각다른곳에묻힘 : 조선시대와달리 족분 ( 族墳 ) 은아직존재하지않았다. 매장지위치도개성주위 : 고려묘지명문화의귀족적, 중앙집권적성격을보여준다. ( 지방향리 ( 鄕吏 ) 의묘지명은만들어지지않았다 ) 1) 염경애묘지명황통 ( 皇統 ) 6년병인 ( 인종 24, 1146) 정월 28일무술일에한남 ( 漢南, 경기도수원시 ) 최루백 ( 崔婁伯 ) 1) 의처봉성현군 ( 峯城縣君 ) 염씨 ( 廉氏 ) 가마을의집에서세상을떠났다. 순천원 ( 順天院 ) 에빈소 ( 殯所 ) 를마련하였다가 2월임인일에서울북쪽박혈 ( 朴穴 ) 의서북쪽산등성이에서화장하였다. 유골을봉하여임시로서울동쪽에있는청량사 ( 淸凉寺 ) 에모셔두었다가, 3년이되는무진년 ( 의종 2, 1148) 8월 17일에인효원 ( 因孝院 ) 동북쪽에장례지내니, 아내의아버지묘소곁이다. 루백이다음과같이묘지 ( 墓誌 ) 를짓는다. 아내의이름은경애 ( 瓊愛 ) 로, 검교상서우복야대부소경 ( 檢校尙書右僕射大府少卿 ) 염덕방 ( 廉德方 ) 공의딸이고, 어머니는의령군대부인 ( 宜寧郡大夫人 ) 심씨 ( 沈氏 ) 이다. 아내는 25세에나에게시집와서여섯명의자녀를낳았다. 장남은단인 ( 端仁 ) 이고, 2남은단의 ( 端義 ) 이고, 3 남은단례 ( 端禮 ) 인데, 모두학문에뜻을두었고, 4남단지 ( 端智 ) 는출가하여중이되었다. 장녀귀강 ( 貴姜 ) 은흥위위녹사 ( 興威衛錄事 ) 최국보 ( 崔國輔 ) 에게시집갔는데최씨가죽자집에돌아와있고, 2녀순강 ( 順姜 ) 은아직어리다. 아내는사람됨이아름답고조심스럽고정숙하였다. 자못문자 ( 文字 ) 를알아대의 ( 大義 ) 에밝았고말씨와용모, 일솜씨와행동이남보다뛰어났다. 출가하기전에는부모를잘섬겼고, 시집온뒤에는아내의도리를부지런히하였으며, 어른의뜻을먼저알아하고자하는그뜻을받들었다. 돌아가신우리어머님을효성으로봉양하였고, 안팎친척의좋은일과언짢은일, 경사스러운일과불행한일에는다그마음을함께하였으니, 이로써훌륭하다고하지않는이가없었다. 내가패주 ( 貝州, 전라남도보성군 ) 와중원 ( 中原, 충청북도충주시 ) 의원으로나갔을때산을넘고물을건너는어려움을꺼리지않고함께천리길을가고, 내가군사 ( 軍事 ) 관계에종사하는동안가난하고추운규방 ( 閨房 ) 을지키면서여러차례군복을지어보내주었다. 혹은엄환 ( 閹宦, 內侍 ) 에참여하는동안에는있는것없는것을다털어서음식을만들어보내기도하였 1) 최루백묘지명 2) 수원의향리였던최루백의아버지최상저 ( 崔尙翥 ) 는최루백이 15 세때사냥을나갔다가호랑이에게해를입어죽었다. 이를들은최루백은곧호랑이를잡아원수를갚고, 아버지의무덤곁에서여묘 ( 廬墓 ) 를하였다 ( 고려사 121 孝友崔婁伯傳 ). 5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57

으니, 무릇나를좇아어려움을겪은 23년간의일들은다적을수가없다. 우리돌아가신아버지를섬기지못하여서, 수원의향리였던최루백의아버지최상저 ( 崔尙翥 ) 는최루백이 15세때사냥을나갔다가호랑이에게해를입어죽었다. 이를들은최루백은곧호랑이를잡아원수를갚고, 아버지의무덤곁에서여묘 ( 廬墓 ) 를하였다 ( 고려사 121 孝友崔婁伯傳 ). 명절이나복일 ( 伏日 ) 과납일 ( 臘日 ) 이되면매번몸소제사를드렸다. 또일찍이길쌈하여이것을모아서저고리한벌이나또는바지한벌을지어제삿날이될때마다영위 ( 靈位 ) 를모신자리를베풀고는절하고이것을바쳤으며, 곧재에나아가무리가많든적든버선을지어가서모두중들에게시주하였는데, 이것이가장잊지못할일이다. 평일에일찍이나에게말하기를 그대는독서하는분이니, 다른일에힘쓰는것이귀중하지는않습니다. 저는집안의의복이나식량을주관하는것이맡은일인데, 비록반복하여힘써서구하더라도뜻과같지않은경우가때때로있습니다. 설사불행하게도뒷날내가천한목숨을거두게되고, 그대는후한녹봉을받아모든일이뜻대로되게되더라도, 제가재주없었다고하지마시고가난을막던일은잊지말아주세요. 라고하였는데, 말을마치고는크게탄식을했다. 다음을축년 ( 인종 23, 1145) 봄에내가사직 ( 司直 ) 으로부터우정언지제고 ( 右正言知制誥 ) 로자리를옮기니, 아내는얼굴에기쁜빛을띠면서말하였다. 우리의가난이가시려나봅니다. 내가대답하여말하였다. 간관 ( 諫官 ) 은녹이나지키는자리가아니오. 아내는 문득어느날그대가궁전의섬돌에서서천자 ( 天子 ) 와더불어옳고그른것을쟁론하게된다면, 비록가시나무비녀를꽂고무명치마를입고삼태기를이고살아가게되더라도또한달게여길것입니다. 라고하였으니, 이는평범한부녀자의말같지않았다. 그해 9월에아내는병이들었는데병인년 ( 인종 24, 1146) 정월에병이위독하게되어세상을떠나니, 한 ( 恨 ) 이어떠하였겠는가. 나는병인년여름에우사간 ( 右司諫 ) 에오르고 12월에는좌사간 ( 左司諫 ) 으로옮겼다. 정묘년 ( 의종 1, 1147) 봄에시어사 ( 侍御史 ) 로옮겼다가그해겨울에는예부원외랑 ( 禮部員外郞 ) 로좌천되었다. 무진년 ( 의종 2, 1148) 봄에예부낭중 ( 禮部郎中 ) 으로옮기면서그대로청주부사 ( 淸州副使 ) 에임명되었다. 여러번벼슬이오르면서계속하여후한녹을먹게되었는데, 집안을돌아보면의식 ( 衣食 ) 은오히려아내가어렵게애써서구할때와같지못하니, 누가아내를말하여재주가없었다고하겠는가. 아내가장차목숨을거두려할때나에게유촉 ( 遺囑 ) 을하였고여러자식들에게도유명 ( 遺命 ) 을남겼는데, 그말들이모두이치에닿아들을만한것이많았다. 세상을떠날때, 대개나이가 47세이다. 명 ( 銘 ) 하여이른다. 미쁨을찾아맹세하노니그대를감히잊지못하리라. 아직함께무덤에묻히지못하는일이매우애통하도다. 아들딸들이있어나르는기러기떼와같으니 부귀가대대로창성할것이로다. * 염경애의삶 엄경애묘지석 ( 앞 ) 엄경애묘지석 ( 뒤 ) 1 25 세에결혼 ( 최루백은염경애보다年下 ) 서울의중급귀족가문출신의여인과수원의향리 ( 鄕吏 ) 출신과거급제자와의혼인 통혼권을벗어난정략결혼? 2 결혼초기가난한삶을영위 : 부인이가정경제를주관하며, 시아버지의제사도직접지냄. 3 4 남 2 녀출산 : 출가한딸은남편이죽자친정으로돌아옴. 4 47 세에사망 : 남편이묘지명을지음 ( 최루백은그뒤 59 년을더살면서재혼하여 3 남 2 녀를더낳음 ) 5 가족윤리와부부간의애정 : 부부사이에인간적인사랑과신뢰가있음. 가정의중심이종적 ( 縱的 ) 인부자 ( 父子 ) 관계가아닌, 횡적 ( 橫的 ) 인부부 ( 夫婦 ) 관계에있었음을보여준다. 5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59

4. 윤인첨 ( 尹鱗瞻 ) 처한씨부인 ( 韓氏夫人 ) 의삶 1) 한씨부인묘지명 1) 고려국 ( 高麗國 ) 의돌아가신수대사문하시중보문각대학사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 ( 守大師門下侍中寶文閣大學士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 ) 문정공 ( 文定公 ) 윤인첨 ( 尹鱗瞻 ) 의처 ( 妻 ) 대흥군부인한씨 ( 大興郡夫人韓氏 ) 묘지명 ( 墓誌銘 ) 부인의성은한씨 ( 韓氏 ) 이고, 대흥군 ( 大興郡 ) 출신이다. 아버지는중서시랑평장사 ( 中書侍郞平章事 ) 유충 ( 惟忠 ) 이고, 조부는병부시랑어서검토관 ( 兵部侍郞御書檢討官 ) 원경 ( 元卿 ) 이며, 증조는좌사낭중기거주지제고 ( 左司郎中起居注知制誥 ) 억 ( 億 ) 이다. 어머니익양군대부인김씨 ( 翼陽郡大夫人金氏 ) 는이부상서문덕전학사 ( 吏部尙書文德殿學士 ) 상우 ( 商佑 ) 의딸이다. 부인은천경 ( 天慶 ) 4년갑오년 ( 예종 9, 1114) 에태어났다. 나면서부터착하고곧아서어른들을귀찮게하지않았고, 총명하고고와서부모가가장사랑하였다. 자라자결혼할곳을골라서윤인첨 ( 尹鱗瞻 ) 에게시집갔는데, 문하시중 ( 門下侍中 ) 문숙공 ( 文肅公 ) 관 ( 瓘 ) 의손자이자정당문학 ( 政堂文學 ) 문강공 ( 文康公 ) 언이 ( 彦頤 ) 의아들이다. 시중 ( 侍中 ) 은예종 ( 睿宗 ) 때인정해년 ( 예종 2, 1107) 에원수 ( 元帥 ) 가되어동번 ( 東蕃 ) 의 9성 ( 九城 ) 을개척하여위엄을북녘오랑캐에게떨쳤다. 손자대에이르러 5년갑오 ( 명종 4, 1174) 에또한원수 ( 元帥 ) 가되어서적 ( 西賊, 趙位寵의난 ) 을평정하니, 이로써부인의 가문 ( 家門 ) 과공업 ( 功業 ) 은삼한 ( 三韓 ) 에서견줄자가없었다. 부인은 평생부모와시부모를섬기면서존경하고공손하며지성으로하고, 하늘을섬기는데의로써법칙을삼고자녀들을가르치는데사랑으로써공변되게하니, 이른바능히아낙네의도리를다한것이다. 아들여섯명을낳았는데, 장남종악 ( 宗諤 ) 은수대부주부 ( 守大府注簿 ) 이고, 차남종회 ( 宗誨 ) 는판예빈성사 ( 判禮賓省事 ) 이고, 3남종함 ( 宗諴 ) 은국자감대사성지제고 ( 國子監大司成知制誥 ) 이고, 4남종저 ( 宗詝 ) 는국자진사 ( 國子進士 ) 이며, 5남종양 ( 宗諹 ) 은형부시랑 ( 刑部侍郞 ) 인데, 막내아들은일찍죽었다. 여러형제역시모두부인보다먼저죽었다. 그러나나라의제도에세아들이과거에합격하면그어머니에게녹 ( 祿 ) 을주었는데, 부인의 3남과종악 ( 宗諤 ) 종 양 ( 宗諹 ) 이모두과거에합격하였으므로부인은종신토록국가로부터녹봉을받았다. 손자는 5명인데, 산정도감판관 ( 刪定都監判官 ) 윤공 ( 尹公 ) 이적장 ( 嫡長 ) 으로서장례일을주관하였다. 부인은병신년 ( 명종 6, 1176) 에시중 ( 侍中 ) 이돌아가신이후항상일에대비하는것을임무로삼아일찍이게으른적이한번도없었다. 대금 ( 大金 ) 대정 ( 大定 ) 29년기유년 ( 명종 19, 1189) 8월 4일에병이들어집에서돌아가셨는데, 사흘전에미리때를알고옷을갈아입고깨끗이몸을닦은뒤때가이르자평안하게돌아가셨다. 향년 76세이니, 이달 15일에불일사 ( 佛日寺 ) 서남쪽산 [ 坤山 ] 기슭에장례지냈다. 명 ( 銘 ) 하여이른다. 세가 ( 世家 ) 에서태어나벌열 ( 閥閱 ) 에서자라고배우자를골라서공족 ( 公族 ) 에시집가니부인의귀함은맞설이가없네. 집에서부모를봉양하면서는 낯빛을살피고시집가서시부모를섬길때에는아침저녁으로공손하고부지런하니부인의효는견줄이가없네. 여러아들을기르면서그보호함이 않으니부인의자애로움은봄철의연못과같네. 평생선행을좋아하고부처섬기기를돈독하게하였으니임종시에도어지럽지않고개연 ( 慨然 ) 하게돌아가셨네. 부인의행실은규 ( 圭 ) 와같고벽 ( 璧 ) 과같으니귀함과효도와자비로운행동은하나같이잃은것이없도다. 부 ( 富 ) 와수 ( 壽 ) 와슬픔과즐거움은시작이있고끝이있는것아, 뭇아들들이어느결에하나도남지않았으니아, 슬프기만하네. 1) 명종 19, 1189: 日本오오사카부오오사카시립미술관소장 6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4. 묘지명속고려여성들의삶 61

* 한씨부인의삶 1 결혼 : 친정아버지는중서시랑평장사역임, 시조부는여전을정벌한윤관, 7 남 4 녀중장남인남편윤인첨은문하시중역임 고려최고문벌귀족출신인물끼리의결혼 2 여섯아들중세아들 < 장남, 3 남, 5 남 > 이과거에급제 3 자등과자 ( 三子登科者 ) 의예우로어머니한씨부인은종신토록해마다국가로부터쌀 30 석의녹을받음 ( 고려사 권 74 선거지 2, 崇獎之典 ). 남편의세형제 < 윤인첨ㆍ윤자고ㆍ윤돈신 > 도모두과거에급제 : 당시마을에서는이들이사는집을 삼제택 ( 三第宅 ) 또는 이사택 ( 二師宅 ) 이라고부름 ( 고려사 권 96 열전尹瓘傳附尹鱗瞻傳 ). 3 4 년연상이던남편이 1176 년 67 세로사망하고, 부인은 13 년이지난 1189 년에 76 세로사망. 4 장남종악은 1170 년무인난때희생되고, 나머지네아들도모두부인보다먼저사망. 하나남았던 5 남도풍 ( 風 ) 이들어부인보다 1 년앞서갑자기 46 세로사망. 5 5 명의손자중장손이조모인부인의장례를주관 이 한씨부인묘지명 에는당대최고의문벌귀족이누렸던화려한영화만큼이나대조적으로더극심하였을모성 ( 母性 ) 의고통도담겨있다. 05 이러한점에서는점에서, 이묘지명은묘지명기록만이가지는특성을잘보여준다. 예술로신분을 5. 맺는말 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ㆍ묘지명과같은금석문의기록은 고려사 등의역사서와거의맞먹는사료적가치를지닌다. ㆍ따라서유물로서의이들자료의보존과정리는물론이고, 기본사료가되는명문 ( 銘文 ) 의정확한판독과역주가필요하다. ㆍ묘지명등금석문을적극활용하는새로운시각에서의사회사 생활사의연구가필요하다. 이화형 경희대학교 참고문헌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 참조. 김용선, 고려금석문연구-돌에새겨진사회사, 일조각, 2004.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 제5판 ),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김용선, 역주고려묘지명집성 ( 상ㆍ하 ) ( 개정중판 ),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김용선, 색인고려묘지명집성 ( 원문ㆍ역주 ) ( 개정중판 ),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김용선, 새자료고려묘지명다섯점반, 역사학보 198, 역사학회, 2008.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이화형 경희대학교 1. 인간적신뢰를소망한, 황진이 황진이, 그녀는감성적이면서도이성적, 의지적인여성이었다. 황진이의작품을보면애정을시적제재로삼아자아의확립, 나아가인간성의회복을기도하는모습이은근하면서도집요하게목격된다. 이처럼문학과삶을통해자유로움을보이는가운데인간의보편적가치를지향한다는점때문에그녀에게서특유의멋이우러나온다고하겠다. 황진이 ( 黃眞伊 ) 는세상의부러움을살정도로여성이자기생으로서당대누구못지않게자기나름의삶을구가했다. 특히그녀는 6수의시조를통해서자신의내면적고뇌와인간적감흥을자유롭게표출함으로서한국문학사적측면에서차지하는그녀의위 황진이 (KBS 드라마. 2006) 상이만만치않다. 그녀의시조에깃든우아하고아름다운정서, 강렬하고진지한메시지등은소중하게인식되고평가되어마땅하다. 천재시인백호임제는평안평사로부임하면서장단 ( 長湍 ) 에있는황진이의무덤을찾아가조상 ( 弔喪 ) 하는바람에파직되기도했다. 그러나많은연구성과에도불구하고지금까지대부분의논의들이그녀의삶의철학과문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65

학적진실을비껴가고있지않은가하는문제의심각 성이노정되기도한다. 무엇보다황진이의삶과문학 세계에대한대부분의인식과평가가지나치게연정 이나애욕쪽으로기울었다는점이다. 그의시조작품 들에대해서도단순히애정시가로규정짓고자하는 경향이지배적이라할수있다. 그녀의작품에표면화되고있는 뜻 ( 意 ) 이나 신 ( 信 ) 등의지적의지를담은시적표현은작 품해석의열쇠가될것이다. 한편, 이러한논점에서볼때, 그녀의시적주제는단순한그리움 이나애정을넘어인간적신뢰의추구라함이온당하다고할수있다. 1) 인간적한계에대한탄식 산은녯산 ( 山 ) 이로되물은녯물이아니로다 주야 ( 晝夜 ) 에흐르니녯물이이실쏘냐 인걸 ( 人傑 ) 도물과 도다가고아니오노매라 동양에서흔히욕심많은인간의속성을지적하면서순 수한물의가치를부각시키는경향을볼때황진이의발상 은참신하지않을수없다. 황진이는물을변덕스러운것 으로보고믿기어려운한계적인간을물에비유하였다. 그녀의시조는변하는것 ( 감성적 ) 과변하지않는것 ( 이성 적 ) 의대립을통해변하는것으로서의인간존재가지닌한 계와고민을문제삼았다. 초장에서산과물의등장은순 수성을연상시키면서자연스럽게인간과의비교를유발 하게된다. 그리고순수자연의논의가중장으로이어지면 서문학의근원적인제재로서의역할을강화시킨다. 또한 종장에이르러인간의존재성이집약적으로논급됨으로 서서정시의일반적체계를유감없이드러내었다. < 북한문학예술출판사가발행한장편소설 황진이 의삽화중서경덕을유혹하는황진이 > 인간은순수성을잃었고, 그러한인간에게서불변적가치를기대하기는더욱어렵게되었 다. 지족선사를파계시킨황진이의다음목표는서경덕이었다. 일찍이황진이는서경덕을사 모하여유혹도해보았으나서경덕은흔들리지않았고결국황진이는서경덕의고매한인품에무릎을꿇었다. 그러나자신의감정을내어주지않던서경덕도 마음이어린후니하는일이다어리다 라고후회했다. 작자의스승이자연인이요, 사랑하기때문에미움의대상이기도했던서경덕의죽음앞에서일어나는안타까움과공허감이간결한서술구조로상징화되었다. 어져내일이야그릴줄모로던가이시라 더면가랴마 제구태야보내고그리 정 ( 情 ) 은나도몰나 노라화자의임에대한그리움과사랑이애절하게표면화되고있다. 그러나애절한그리움이나사랑의포착보다더긴요하게이해되어야할것은화자의인간적의지와관련된문제인식이라본다. 화자는허무한현실에놓인자신의처지를철저하게분석하면서현재적자아의갈등원인을발견하게되었다. 이에현재화자가가장안타까워하고후회하는것은임이떠나지못하도록붙잡지않았다는사실이다. 임이떠남은비록그의자유로운의사에속하는것일지라도화자자신의붙들려는의지만있었어도 구태여 임이떠나지않았을것이다. 그러니까임이떠나거나머무는일이화자자신의선택이자의지에달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라할수있다. 김택영 (1850~1927) 의 숭양기구전( 崧陽耆舊傳 ) 에대략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다. 황진이나이바야흐로 15~16세때였다. 이웃에사는한서생이그녀를그리는상사병으로죽고말았다. 관이떠나황진이의문앞을지나게되자말이슬피울며나아가지않았다. 그리하여사람을시켜황진이에게사정해그녀의저고리를얻어관을덮으니그때서야말이나아갔다. 황진이가이일에크게느낀것이있었다. 이에점점기생의길에들어선것이다. 일찍이황진이는처녀의몸으로, 태어나서만나본적이없는전혀모르는이웃집사내 ( 홍윤보 ) 의시신에옷을덮어주어야했다. 황진이는여성으로서평탄할수없는자기운명을예견하고확실하게기생의길을선택했을것으로본다. 황진이처럼양민이스스로기생이되는경우는거의없는일이다. 6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67

2) 지속적인삶의가치추구 청산리 ( 靑山裏 ) 벽계수 ( 碧溪水 ) 야수이감을자랑마라일도 ( 一到 ) 창해 ( 滄海 ) 면도라오기어려오니명월 ( 明月 ) 이만공산 ( 滿空山 ) 니쉬여간들엇더리이시는근엄하기이를데없는왕족벽계수 ( 碧溪守 ) 를무너뜨리기위한의도에서창작된것으로알려지는작품이다. 이시의경우, 얼핏임을유혹하고사랑을호소하는듯도하지만이는작품을피상적으로이해하는것에지나지않는다고본다. 전체적으로 간다 또는 온다 의의미가내밀하게진술되고있다. 가고오는것은자유이자감정의소관이다. 감정의자유로움은항상후회를남기기십상이다. 그러므로행동이민첩함을과시할필요가없다. 자유분방한감정은책임있는태도를상실한공허한삶을초래하기일쑤다. 작자는결렬되고손상된인간관계의회복이얼마나어려운가를개진했 청산리벽계수주 다. 화자는한번늙어지면다시돌아오지않는젊음, 원형의상태가 훼손되면되돌리기어려운불안한삶, 성취하기힘든참된인간관계등을위해보이지않는긴장과갈등을겪고있다. 이렇듯작품이제공하는교훈적의미는심오하다. 근엄함보다더가치있는것은소박함이요, 순수와진실앞에서계략과오만은무의미하다. 황진이가삶을마감하면서남긴진술도시사하는바가크다. 자신이죽으면천금 ( 天衾 ) 으로싸지도관을사용하지도말고죽은시체를동문밖모래와물이만나는곳에버려땅강아지와개미들이자기의살을파먹게하여당시세상여자들로하여금자신으로써경계삼게하라고하였기때문이다. 금성 ( 錦城 ) 의사또가베푼잔치에많은관리들과기생들이그득했는데, 그는해진옷을입고얼굴도씻지않은채앞자리에앉아 ( 이를잡으며 ) 태연자약하게거문고를타면서부끄러워하지않았다는것도자신을부정하고파괴할만한자부와소신이있었기때문으로본다. 실로그는인간의삶에있어지속적가치라할수있는성실함과진지함이구현되기를절실히갈구했던인물이라하겠다. 겨울밤의한중간을잘라내어두었다가임이오시는짧은봄밤에이어붙이겠다는생각은우리를가슴설레게한다. 남녀의사랑이감각적으로묘사됨에도불구하고저속하게느껴지지않는것은바로시인의탈속적인생관이육화되어표출되기때문이다. 특히 기나긴밤 서리서리 구뷔구뷔 등으로이어지는지속적가치의표상은예사롭지않다. 황진이는당대의명창이었던선전관 ( 宣傳官 ) 1) 이사종 ( 李士宗 ) 을만나 6년간함께살았다. 3년동안그는이사종은물론그의일가까지먹여살렸으며, 이사종은은혜를갚기위해 3년동안황진이의생활을담당하기로약속했다. 마침내약속된 6년이지나자황진이는홀연히떠났고그리고나서는다시그리움에쌓여이시를지었다고한다. 감정의동요때문에겪어야하는회한은작자가극복해야할 최대의과제가아니었을까? 이같이일시적감정을극복하고지속적진실의구현을염원하는의지적측면이포착되기때문에그의문학에새로운접근이요구된다고하겠다. 황진이 ( 영화. 2007) 일찍이당대명사였던소세양 (1486~1562) 은여색에미혹되는자는남자가아니라고늘장담하면서친구들과약속하기를, 황진이와 30일간만동숙 ( 同宿 ) 하고하루라도더있으면사람이아니라고큰소리쳤다. 그러나막상황진이와한달이되어헤어지게되었을때, 그녀의 < 양곡소세양에게드림 ( 呈別蘇陽谷世讓 )> 시한수듣고는 나는사람이아니다. 라고탄식하며다시머물렀다고한다. 이같이판서소세양의방자했던태도도황진이의진정성과진지함앞에무색했다. 3) 인간적신뢰성구현의의지청산 ( 靑山 ) 은내 이오녹수 ( 綠水 ) 님의정 ( 情 ) 이녹수흘너간들청산이야변 ( 變 ) 손가녹수도청산을못니져우러예어가 고 동지 ( 冬至 ) ㅅ달기나긴밤을한허리를둘헤내여 춘풍 ( 春風 ) 니불아래서리서리너헛다가 어론님오신날밤이여든구뷔구뷔펴리라 작자가자신의처지와임의입장을 청산 과 녹수 에비유함이분명하다. 청산은작가가우 1) 왕의시위 ( 侍衛 ) 전령 ( 傳令 ) 사졸 ( 士卒 ) 의진퇴등을맡은일종의무직승지 ( 武職承旨 ) 의구실을한무관이다. 6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69

러러보았던지족선사라면녹수는시인자신을가리킨다고할수도있으나, 청산을시인자신으로보고녹수를지족선사로해석하는것이더바람직하다. 그런데문제는청산과녹수의성격에어떠한차이가있는가하는것이다. 작자는화자인나자신을그대로청산에비유하고, 임을단순히녹수에비유하지않았다. 나의뜻이청산이요, 임의정이녹수라한사실에주의를기울이지않을수없다. 곧뜻과정의대치가이노래를형성하는중추적요소라할수있다. 오랫동안수도에만전념해온고승을파계시키고이별한후에지은것으로알려진만큼사랑하는임에대한그리움과이별의슬픔이곡진하게착색되었다고본다. 그러나도외시할수없는점은미천한기생으로서지존의승려를무릎꿇게한데따르는승리와정복의자만심보다실망과허무가컷을것이라는사실이다. 무엇보다내심으로믿고싶었던수도자의고고함이작자에게안타까움으로돌아왔을것이요, 아울러고승을시험해보고자했던순수하지못한자신의교만한태도또한부끄러운일로생각되었을것이라본다. 작자는근원적인인간에대한탐색과더불어인간적신뢰가사라진현실에직면하여괴로워하게되었을것이다. 작자는비록기적 ( 妓籍 ) 에몸을담고있었지만성품이고결하여번잡하고화려한것을좋아하지아니했고, 관아의주석에나갈때도머리를빗는것이고작일뿐옷을갈아입지도않았으며, 방탕함을싫어하여시정 ( 市井 ) 의천한무리들이비록천금을준다해도돌아보지않았다고도한다. 분명작자는정직하고담백하게자기만의개성을가지고강인한의지대로살고자노력했을것이다. 중장에서노래하듯변하지말아야할것이변하고말았다는것은심각한문제다. 즉 30년동안면벽송경 ( 面壁誦經 ) 했다는 지족선사가일개기생의유혹에넘어가파계된것은방만한삶 황진이 ( 서울시무용단. 2012) 에기인한다. 여기서가치창출을추동하는힘이의지에있으며, 임의정을이끌어낼수있었던것도다름아닌의지의덕분임을알게된다. 강력한의지만있다면인간의현실적상황은얼마든지변화 극복할수있다는작가의깊은의도가포착된다. 마침내종장에이르러시인은자신의강력한의지의승리를선언하게되었다. 내언제무신 ( 無信 ) 여임을언 속엿관 월침 ( 月沈 ) 삼경 ( 三更 ) 에온 이전혀업 추풍 ( 秋風 ) 에지 닙소 야낸들어이 리오 중장에서알수있듯이달도없는깊은밤에시인은홀로고독에사로잡혀있다. 화자와임은철저하게단절되어있는데, 그이유는진실과믿음의결핍때문이다. 초장에나오는 무신 과 속임 의어휘야말로작가의의도나작품의실상을드러내는핵심적인것이라여겨진다. 인간의거짓과기만을증오하며신뢰와정직을지향하는시인의내면이처음부터격렬하게분출되고있는것이다. 더욱이문제가되는것은신뢰와정직의가치를인식하고구현하려는의지가임에게결여되어있다는점이다. 화자에게는상대방을사랑하고존경하는마음과함께실천하려는의지가있으나, 중장의 온 이전혀업 에서알수있듯이임은그렇지못하다. 부사어 전혀 가시사하는바, 화자가어느정도로임의진지하지못한어리석음을경멸하고있는지를쉽게느낄수있다. 전통적으로여성적화자의경우, 애정관계가원만치못할지라도임을원망하기보다는자신을탓하고스스로책임을지는태도를보이는경향임을알수있다. 그러나이시조에있어화자의경우는, 과감하게이별의원인이임에게있음을공표하고자신의결백을천명하였다. 자신의진실과믿음을저버린임은배신자일수밖에없으며, 화자는이배신의행위에대해부당함을표시하고있다. 더구나대상의경우, 작자인황진이가함부로 여길수없는스승이자덕망이높기로평판이나있는인물로서의서경덕으로알려져있다. 그렇게그가평생사모했던지고한 존재를향해서도인간적한계를지적했음을감안한다면작자에게있어, 신의와진실을문제삼는삶의고투가얼마나치열했는가새삼깨닫게된다. 작가의고유한체험이구체화되는문학에있어황진이의개성적이면서도인간적인삶은충분히영향을미쳤다고본다. 그의출중한용모, 탁월한재능, 그리고활발한성격등은주위의시선을집중시킬만했다. 수많은유혹은작자로하여금교만한모습을갖게했을것이며, 실제로그는 송도 ( 松都 ) 2) 삼절 ( 三絶 ) 이라자칭할만큼자부심이대단했다. 그러나소유한만큼소유되지않은부분에대한자각과불만도만만치않다고본다. 그것은다름아닌고통과갈등의주된원인이기도한데, 그고통과갈등은진보적이며본원적인삶의목표에도달하는통과제의적역할을하게됨으로써의미를부여받게되곤한다. 황진이는진정감성적인간적이면서도지적이며의지적인면모를보여주고간인물이라하겠다. 2) 절개를상징하는소나무가많아개성을송도 ( 松都 ) 라고하며, 때문인지개성에는과부가많다고도한다. 화담서경덕의초상 7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71

2. 자유지향의비애를보인, 이매창 1) 정신적자존 이매창, 그녀는감성적시인이었다. 자아를찾고자할수록왜곡된현실에부딪쳐탄식해야했다. 임의부재는인간사에따른아픔으로비화되었으며상황이악화될수록그녀는현실을벗어나고싶어했다. 그리고자유를추구하는마음은다시좌절로이어졌다. 전남부안 3) 군청에서세운매창 (1573~1610) 의무덤앞에는 매창은시와가무에뛰어나개성의황진이와더불어조선명기의쌍벽을이루었다 고적혀있다. 홍만종 (1643~1725) 은 근자에송도진랑과부안의계생이글솜씨로써문사들과서로겨룰만하다 고했다. 다만황진이가이성적이었다면매창은감성적시인이었다고할수있다. 그동안매창의생애나시와관련하여주목할만한연구들이있어왔다. 다만시의내용적성격과관련하여서정적자아가임을그리워하는쪽으로몰고가는점, 전통적정한 ( 情恨 ) 을자 이매창 연친화나신선사상으로승화시키고있다고보는점, 시적화자 가현실극복의강한의지를지닌것처럼논의하는점등은아쉬움또는의구심으로남는다. 그녀는자아를찾고자할수록왜곡된현실에부딪쳐탄식해야했다. 그리고상황이악화될수록그녀는현실을벗어나고싶어했다. 그러나미래가보이지않았다. 매창은죽기얼마전 가슴속에시름맺혀옷적시지않은날없네 라고술회한바있다. 기생의행적에따른인물형으로본다면그녀는사회적의기형 ( 義妓型 ) 이나인간적절부형 ( 節婦型 ) 등에속하기보다예술적풍류형 ( 風流型 ) 4) 이더적당할것이다. 다만그녀의풍류적기질은기생적운명과여성적정감에의해축소지향되었다고보는데, 그녀가지은 58수 ( 매창집 ) 의시 5) 를통해서도잘드러난다. 매창이기생이라는질곡에서벗어나위대한시인으로자리매김하게된것은그녀가지닌정신적자존심에서비롯된다. 매창은출신성분으로인해자연스럽게기생이되었으나기생이되었다고해도자신을방치하기에는너무나능력이뛰어나고성품이곧은매력있는여성이었다. 당대최고의문학가였던허균은그녀를가리켜얼굴이비록예쁘지는않지만재주와정취가있었다고말한바있다. 그토록여자관계가복잡한허균이매창이 29세되던 1601년부터그녀가죽을때까지 10년동안이나교류하면서육체적으로범하지않고그리워하며인정해준것을보면매창이얼마나지혜롭고정숙한여성이었는지를짐작할수있다. 허균은 1610년매창이죽은뒤에도 복숭아를훔쳐서인간세계로내려오더니 / 불사약을훔쳐서인간무리를두고떠 교산허균 났네 라고성품이신선같이고결했음을회고했다. 매창이허균을만난것은행운이자불행이었다고한다. 허균을통해존재가치가드러났고그를통해죽음을맞았다는것이다. 그녀는기생이되면서부터자기스스로 매창 ( 梅窓 ) 이라고호를지어불렀다. 매창이란추운겨울을이겨내고가장먼저고아한자태를뽐내는매화의이미지를띤다. 그녀는자기의시속에서도수없이매화를언급하면서자신과매화를일치시키고있다. 현실을받아들이지않음으로써오히려미래로나아가지못한면도있다. 선비한사람이그녀의소문을듣고구애하는시를지어서허튼수작을보이자매창이응답하는시를지어주었다. 그랬더니그선비는무안해하면서가버렸다고한다. 평생떠돌며밥얻어먹기를부끄럽게여기고평생치학식동가 ( 平生耻學食東家 ) 오로지달빛에젖은차가운매화만을사랑했다오. 독애한매영월사 ( 獨愛寒梅映月斜 ). 고요히살려는나의뜻을세상사람들아지못하고시인불식유한의 ( 時人不識幽閑意 ) 제멋대로손가락질하며잘못알고있어라. 지점행인왕자다 ( 指點行人枉自多 ). < 생각 ( 愁思 )> 3) 매창은유희경과만난이후다른사람 ( 임서의친구 ) 의첩 ( 당시는기생이꿈꾸는가장높은자리이다 ) 이되어 3 년동안부안을떠난적이있으나 19 세쯤다시부안으로돌아왔다. 4) 한준겸이나허균등은중국의설도에비견되는우리나라최고의여류시인으로평가했다. 5) 시조는한수밖에없다.( 매창공원에시조비가세워졌다 ) < 생각 > 두수가운데한수로서이시야말로자존심의극치라하겠다. 여기서그녀의자존 의식이주체적 정신적인것임이분명해진다. 비록떠돌이기생이지만그녀는 달빛비치는 매화 같은깨끗한삶을사랑했고, 고요히살려는 ( 幽閑意 ) 깊은뜻을지녔다. 이아름다운삶 7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73

매화 은 떠돌며밥얻어먹는 것과비교되면서더욱격조있는것으로승화된다. 평생 ( 平生 ) 이라는말이갖는일관된가치관과 독 ( 獨 ) 이라는시어가지니는주체적시각은그의삶이보여주는고결함의밀도를드러낸다. 그녀가기생된몸을얼마나한스럽게여겼는가를알수있다. 남들이 불식 ( 不識 ) 하고 잘못알고 있는데대한그녀의개탄은자존심의 발로임에틀림없다. 시인 ( 時人 ) 이나 행인 ( 行人 ) 들과달리그녀는물질이나대상과비교되는정신적주체로서의삶을강렬히추구한것이다. 다음과같은 < 스스로한탄함 ( 自恨 )> 이라는시에서는물질과대비되는정신적가치를적극적으로부각시킴으로써자신의삶을자부한다. 옛사람은금전으로사귀다가고인교금도 ( 故人交金刀 ) 금전으로깨어진이들이너무많아라. 금도다패렬 ( 金刀多敗裂 ). 돈이다떨어지는건아깝지않지만불석금도진 ( 不惜金刀盡 ) 정분까지끊어질까그게두려워라. 차공교정절 ( 且恐交情絶 ). < 스스로한탄함 ( 自恨 )> 금전 이상징하는대상이자물질적가치는그녀에게아무것도아니었다. 무엇보다인간주체가중요했기에 정분 같은인정과윤리를문제삼았다. 사물자체는가치의대상에불과하며, 가치는인간에의해결정될뿐임을시사한다. 인간을주체로파악하는그녀의예리한시각이엿보이는시이다. 타인들의몰가치적인행위를비난하는매창의태도는더욱그녀의정신우위의가치관을두드러지게하고있다. 그녀는비록여러사람을상대할수밖에없는기생이지만진정으로매창앞에나타난인물이유희경이라할수있다. 예학이밝았던군자였기에다른여자를가까이한기록이없던유희경은 1591년부안으로놀러갔다가매창을만나비로소파계했다. 순수한인품에절제가뛰어났던유희경이지만나이 30 가까이차이가나는매창을보고 오늘에사참모습을대하고보니 / 선녀가떨쳐입고내려온듯하여라 라고감탄했던것이다. 그토록그녀를사랑하던유희경이서울로돌아간뒤에아무런소식도없었으나수절했다고할만큼그에대한마음을바꾸지않았던것도그녀의자존심때문이었다. 2) 현실적좌절과자유지향욕구매창은자존심이강했기때문에오히려현실과더부딪쳤고좌절감을크게맛봐야했다. < 옛님 ( 故人 )> 이라는시를보면강렬한자존심과순수한마음에서비롯되는외로움과안타까움이짙게묻어난다. 소나무처럼늘푸르자맹서했던날송백방맹일 ( 松柏芳盟日 ) 우리의사랑은바닷속처럼깊기만했어라. 은정여해심 ( 恩情與海深 ). 강건너멀리떠난임께선소식도끊어졌으니강남청조단 ( 江南靑鳥斷 ) 밤마다아픈마음을나홀로어이할까나. 중야독상심 ( 中夜獨傷心 ). < 옛님 ( 故人 )> 이시는임진왜란이후의작품이라여겨진다. 길을가다가도매창을그리워하는시 (< 도중억계랑 ( 途中憶癸娘 )>) 를짓기까지했던유희경이지만국란중에소식을전할겨를이없었을것이다. 그런임을이해못할매창은아니었으나마음은아프다. 유희경이매창을늘그리워했던것처럼그녀는유희경을진정으로사랑했다. 송백 ( 松柏 ) 같이변함없고 심해 ( 深海 ) 처럼깊은사랑을염원했던만큼현실상황에처한그녀는자신의타오르는정염을숨김없이표현했다. < 병중 ( 病中 )> 이라는자신의심경을토로하는시에세상과의거리감, 현실에대한혐오감이잘나타난다. 봄날때문에걸린병이아니라불시상춘병 ( 不是傷春病 ) 단지임그리워생긴병이라오. 지인억옥랑 ( 只因憶玉郞 ). 티끌덮인이세상엔괴로움도많지만진환다고루 ( 塵寰多苦累 ) 외로운학이되었기에돌아갈수도없어라. 고학미귀정 ( 孤鶴未歸情 ). 잘못은없다지만헛소문도니오피부허설 ( 誤被浮虛說 ) 여러사람입들이무섭기만해라. 환위중구훤 ( 還爲衆口喧 ). 시름과한스러움날로그지없으니공장수여한 ( 空將愁與恨 ) 병난김에차라리사립문닫아걸리라. 포병엄시문 ( 抱病掩柴門 ). < 병중 ( 病中 )> 첫수에서임을원망하는시인의마음을읽을수있다. 그런데병든원인은임과만나지못하는것이나, 더욱견디기힘든것은 티끌덮인세상 이다. 둘째수에오면병의악화가 사람 7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75

들 에있음이확연해진다. 부허설 ( 浮虛說 ), 중구훤 ( 衆口喧 ) 과같이말만많은인간세계가더없이혐오스럽고괴롭다. 그녀시에서자아와상대되는인물이임으로국한되지않고 인간 으로확장됨이특색이다. 그녀의시전반에쓰이는소재가대부분우울한느낌을주는것도세계와대립하는매창의전생애가불우했기때문이다. 계절만하더라도겨울은등장하지도않는데, 세계절이모두서정적자아의슬픔을돋우는식이다. 봄에꽃이진다 라든가 봄바람에운다 등의시구가많은것도예사가아니라고본다. 세상에대한불만이커지고현실에서소외될수록그녀는더욱자유가그리웠을것이다. 잔을마음껏기울이며거문고를끼고시를읊었을것이다. 자유를형상화한그녀의시들은헤아리기어려울만큼많다. 낭만적흥취를한껏느끼게하는 < 그네 ( 鞦韆 )> 를보도록하자. 아름다운두여인선녀런가사람이런가양량가인학반선 ( 兩兩佳人學半仙 ) 푸른버들그늘밑에서다투어그네뛰네. 녹양음리경추천 ( 綠楊陰裡競鞦韆 ). 허리에찬노리개소리는구름너머까지들려서패환요향부운외 ( 佩環遙響浮雲外 ) 마치용을타고서푸른하늘에오르는듯해라. 각아승룡상벽천 ( 却訝乘龍上碧天 ). < 그네 ( 鞦韆 )> 눈보라어수선히매창을두드려서매창풍설공소소 ( 梅窓風雪共蕭蕭 ) 한과시름이이밤따라더해라. 암한유수배차소 ( 暗恨幽愁倍此宵 ) 신선세계달빛아래에다시태어난다면타세구산명월하 ( 他世緱山明月下 ) 봉황타고퉁소불며만나보리라. 봉소상방채운구 ( 鳳簫相訪彩雲衢 ) < 그리움 ( 記懷 )> 위시를보면악화되는상황과가혹한환경이오히려새로운세상을만나고싶어하는그녀의마음을부추겼음을짐작할수있다. 현실을벗어난 신선세계 ( 타세 ) 를간절히동경함과더불어매창이얼마나설움과원한에시달리고살았는지를충분히가늠케한다. 매창은죽을때무덤에가지고갈정도로거문고를좋아했다. 그녀는거문고연주와함께신선이되어하늘을날수있다고생각했을것이다. 그녀에게거문고는현실탈출의통로이자자유세계에도달코자하는자기의분신이기도하다. 또한매창은시적상상력이풍부하여그녀가읊은시가수백편이나되었다. 시는고달프게살아가는그녀에게희망을줄수있는대안이었다. 매창에게현 실을위로하고꿈을가져다주는것은시만이아니었다. 술단지속의세월은차고기울지않지만 / 속세의청춘 황진이 (KBS 드라마. 2006) 은젊은시절도잠시일세. 라고했듯이술은자신의앞날을긍정적으로바라볼수있게하는매체였다. 술세계는속세와달리편안하고자유로운곳이었다. 탁월한예술가였던매창은술 전북부안군 - 매창공원 이쯤되면그녀의마음뿐만아니라몸도신선이되어있다. 그녀를두고남들이선녀라말하기도했지만, 이미그녀는땅위에사는인간이아니라구름너머하늘에가있는신선이된것이다. 푸른창공을가르고그네뛰는여인은당연히매창이요, 그녀의시속에흔히등장하는외로운학이나난새의모습은찾아볼수없다. 하늘로비상하는장엄한용의모습이연상될뿐이다. 매창은자존심이강하고현실에안 주할수없는자유정신의소유자였다. 자존, 자유등타고난기질에시, 술, 거문고등은그녀를더욱뛰어난풍류적인물로만들었다. 3) 운명적비애가을밤그녀는다음과같이읊었다. 매화가지에걸렸던달이난간까지오도록 / 거문고로달랜다지만잠은오지를않아라 달을곁에두고탈속의여유와휴식을느낄수는있을것이나고독의정한을다풀지는못했다. 자존심과더불어자유를향한욕구가강해질수록한계를느끼지않을수없었다. 그녀의삶은되돌아보면힘들기그지없는것이었다. 아무리몸부림쳐봐도현실을떠날수없었으며, 사실자유를쟁취향유할만한강한의지도없었다. 다만깨끗하고아름답게살고싶은마음만간절할뿐이었다. 7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77

세상사람들낚시질좋아한다지만나는거문고를타네. 거세호간아조슬 ( 擧世好竿我操瑟 ) 세상길가기어려움을오늘에야비로소알겠노라. 차일방지행로난 ( 此日方知行路難 ). 발잘리고세번이나부끄러움당하고도임자만나지못해 6) 월족삼참유미우 ( 刖足三慙猶未遇 ) 아직도옥덩이를붙안고형산에서우노라. 환장박옥읍형산 ( 還將璞玉泣荊山 ). < 박명을한탄함 ( 自恨薄命 )> 세상 ( 擧世 ) 과 자아 의대립이주축을이루 면서매창의기구한운명이요약적으로제시 되고있다. 남들과달리매창은거문고나타면 서자유롭게살고자했다. 그러나그러한노력 이부질없는것임을깨닫고만다. 살기힘든자 신에게오히려세상은형벌을가하기까지한 다. 매창은 옥덩이 ( 璞玉 ) 같은자신을몰라 주는현실이너무나속상했다. 화씨옥이야기 는초나라변화 ( 卞和 ) 가여왕 ( 厲王 ) 에게왼쪽 발이잘리고무왕에게오른쪽발마저잘린후문왕앞에서울며 저는발잘린것을슬퍼하는 게아니라옥에다돌이라고이름붙여준것을슬퍼합니다. 곧은선비를거짓말쟁이라고하니, 이것이바로제가슬퍼하는까닭입니다. 라고했던고사이다. 자유와순수를지향하는그녀 의맑은정신은 낚시질 이나 돌덩이 ( 허위 ) 같은것과비교되어더욱돋보인다. 위시에서도 언급되고있는삶의어려움, 즉 행로난 ( 行路難 ) 은그녀가살아있는한따라붙는것이었다. 행로난 은끊임없이자기를괴롭히고있는인간존재의왜곡과모순의결과였다. 그리고벗겨 버릴수없는굴레속에서그녀는천가지시름만가지원한을토로할뿐이었다. 사십년가까운삶 (38 세사망 ) 을살아온뒤에지은작품 (37 세, 1609) < 병중의근심 ( 病中愁 思 )> 을보자. 이매창묘 매창의시집을발간한개암사 이시를보면그녀의진정한관심이어떤것인지한눈에들어오는것같다. 그녀는근원적으로외로울수밖에없는인간의존재문제에천착했다. 7) 인생이짧고허무한것임을한탄하면서기생으로서살아온자신의삶을 질병과고독 으로압축하고있다. 또한그녀의존재적갈등속에서간과할수없는것은 가난과추위 이다. 이를통해서그녀가정신적인가치를중시하면서인간다운삶을갈망했던모습을 엿볼수있다. 그러나무엇보다신분적한계에부딪치면서외로움과슬픔을극복할수없었던것이다. 매창사후에는나무꾼과농사꾼이그녀의무덤 8) 을돌보았고, 아전들이돈을모아시집을내주기도 ( 개암사간행 ) 했다. 부안읍에서는매창공원을조성했다. 병들어빈방에서본분지키며 공규양졸병여신 ( 空閨養拙病餘身 ) 가난과추위속에사십년일세. 장임기한사십년 ( 長任飢寒四十年 ). 인생을살아야얼마나산다고 차문인생능기허 ( 借問人生能幾許 ) 가슴속에시름맺혀옷적시지않은날없네. 흉회무일부점건 ( 胸懷無日不沾巾. < 병중의근심 ( 病中愁思 )> 6) 죄를지은사람의발을자르는형벌이다. 7) 고전문학사에서여성들은대체로사회에대한관심보다는개인에대한관심이높았다. 매창도예외일수없으며그녀는자신의존재적인문제에골몰했다. 8) 무덤주변을 매창뜸 이라불렀다. 7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5. 예술로신분을초월한여성, 황진이와이매창 79

06 우리는맞수신사임당과허난설헌 이숙인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06 우리는맞수신사임당과허난설헌 이숙인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여성역사의두거장 : 신사임당과허난설헌 신사임당은우리역사에서꾸준한관심과변함없는사랑을받은대표적인인물이다. 사임당은 5백여년전에이땅에태어나 50년남짓한삶을살다갔지만그녀를둘러싼의미의역사는오늘도계속되고있다. 세상을떠난직후부터꾸준히당대여성상의타이틀을놓치지않았던사임당. 그녀는 2009년에 5만원권화폐도안인물이됨으로써이제 여성 에국한되지않는역사의한 보편인물 이된것이다. 사임당은한국을대표하는역사인물다섯손가락안에들게된것이다. 사임당은 1504년 ( 연산 10) 10월 29일에강릉에서아버지신명화 (1476~1522) 와어머니용인이씨의다섯딸중 신사임당 둘째로태어났다. 그녀의이름은인선 ( 仁善 ) 이고호가사임당이다. 사임당 ( 師任堂 ) 이라는당호에는태임 ( 太任 ) 을본받는다는뜻이담겨있다. 태임은태교를잘하여아들을낳아유교문화권의성모 ( 聖母 ) 로일컬어진여성이다. 사임당은아버지신명화에게둘째딸인선은시집으로보내지않고곁에두고싶어했던자식이었다. 재주가뛰어나고성품이깨끗하며총명하기까지한사임당에게그부모는기대고싶었을것이다. 사임당은열아홉살나던 1522년 ( 중종 17) 에이원수 (1501~1561) 와혼인하였다. 남편이원수는여섯살때아버지를여의고형제없이홀로어머니홍씨부인슬하에서자랐다. 이원수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83

의당숙인이기와이행은좌의정및영의정등을역임한고관이었지만이원수의집안은가난했다. 이원수는혼인하고도여러해를과거준비로보냈으나결국시험에합격하지못하고나이 50이되어음서 ( 蔭敍 ) 로관직에진출하게된다. 사임당이직접생계를꾸려가야할만큼살림은매우가난했다고한다. 사임당이친정강릉에서 20년가까이지낸것은생활상의문제도있었던것같다. 이원수와신사임당부부는 4남 3녀의자녀를두었다. 율곡은그들의셋째아들이자다섯번째자식이었다. 사임당은 1551년 ( 명종 6) 5월 17일에서울에서세상을떠났는데, 향년 48세였다. 사임당이조선시대여성을대표하는역사인물이될수있었던데는, 뛰어난작품을남긴화가라는사실이무엇보다컸다. 거기에조선의대학자이자정치가인율곡 (1536~1584) 의어머니라는사실이있었다. 뛰어난작품을남긴화가이면서조선을대표하는대학자의어머니, 이두가지가사임당이야기 5백년의원천이되었다. 그런데재료가있다고해서훌륭한요리가되는것이아니듯이사임당이라는역사인물은한국의정치와문화, 사상이빚어낸하나의 작품 이라할수있다. 그이야기의역사를오늘이강의에서따라가보고자한다. 허난설헌 ( 許蘭雪軒 ) 은신사임당과 1, 2위를다투는우리역사의대표적인인물이다. 1563년 ( 명종18) 강릉에서아버지허엽 (1517~1580) 과어머니강릉김씨의 2남 1녀중의딸로태어났다. 그녀는이름이초희 ( 楚姬 ) 이고자는경번 ( 景樊 ) 이다. 홍길동전 의저자인허균 (1569~1618) 이남동생이다. 난설헌은 8세때이미시를지었으며천재적인시재 ( 詩才 ) 를발휘하여소문이났다. 재상을지낸아버지허엽은 30년간관직생활에서청렴결백하여청백리에오른인물이다. 난설헌은 1577년 ( 선조 10) 15세의 나이에김성립 (1562~1592) 과결혼하였다. 결혼생활은그다지행복하지않았다고하며아들과딸을잇달아잃는, 가족적으로는매우불운하였다. 허난설헌 작품으로는 유선시( 遊仙詩 ) 빈녀음( 貧女吟 ) 곡자( 哭子 ) 등총 142수가전하고, 규원가 ( 閨怨歌 ) 등가사 ( 歌辭 ) 작품이있다. 난설헌이 1589년 ( 선조22) 27세의나이로요절하자, 동생허균은누이의작품을모아사신으로온중국지식인들에게보여주었다. 허균과중국사신들의노력으로난설헌의시집이중국에서간행되었다. 오늘날한류처럼중국의시애호가들은난설헌의시를격찬하며애송하였다. 1711년에는분다이야지로 [ 文台屋次郞 ] 에의해일 본에서도간행, 애송되었다. 이처럼난설헌의시는중국과일본에서열광적으로소비되었다. 당시엔중국사신이조선에도착하면첫질문이 허난설헌을아시나요? 였다고한다. 하지만 천재시인허난설헌은정작조선에서는자랑스러운딸이아니었다. 그녀에대한사대부지식 인들의평가는혹독하고모욕적이기까지했다. 왜그랬을까? 사임당이레드카펫이라면난설헌은가시밭길이었다. 두여성이살아온길과사후의평가를 살펴보면공통점도있지만중요한측면에서는매우다르다는것을알수있다. 한국의역사의 두여성거장이삶과사상, 그리고그역사적의미를 맞수 라는점에서조명해보자. 2. 화가사임당 vs 시인난설헌 1) 신사임당 사임당이역사에처음등장한것은산수도를잘그린화가로서이다. 사임당의산수도를접 한당대내로라하던지성들은감탄을금치못하였다. 벼슬은대제학에이르고글씨와시문으 로중국에도그이름을날리던소세양 (1488~1562) 은사임당이그린산수도에시로서느낌을 표현했다. 제사 ( 題辭 ) 라고하는것인데, 당시사임당은 45 세였고율곡은 13 세의어린나이였 다. 소세양이쓴두편의그림시는풍경을묘사한다음그림솜씨에대한찬사로끝을맺는데, 그일부를옮겨보자. 해질녘에도인하나나무다리지나가고 소나무정자엔야승들이한가로이바둑두네. 1) 두어자비단폭에그려넘친그윽한뜻 진정알겠노라신묘한붓하늘조화뺏은것을. 2) 1) 소세양, 東陽申氏山水畵簇, 陽谷集 권 10 2) 소세양, 東陽申氏山水畵簇, 陽谷集 권 1 8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85

또관료문인의한사람으로명종대에대제학을지낸정사룡 (1491~1570) 이비슷한시기에사임당의산수도를본감상을오언절구의시로토해내었다. 한구절만소개해보자. 가느다란소로는은자의움막으로이어지고파도는밀려오다돛배에부서지네. 3) 선에출정하면서조선지식인들과의교류또한활발해졌다. 조선에참전했던명군오명제 ( 吳明濟 ) 는중국으로돌아가 조선시선 (1600) 이라는책을펴냈는데, 여기에실린신라부터조선선조때까지의시 332수중에허난설헌의시도포함되었다. 오명제는 조선시선 을편찬하게된동기를이렇게말한다. 조선전기를대표하는학자어숙권 (1480년도 ~?) 은사임당의그림솜씨를산문으로평가했다. 그는포도와산수를잘그리는신씨가당시화단에서안견다음가는화가로일컬어지고있다고했다. 또선조대에대제학및좌의정을지낸정유길 (1515~1588) 은사임당의포도그림병풍에오언절구의시를썼다. 시에는 신령이응축되어오묘한조화를빚어내니붓이빼앗아똑같이그려내었네 4) 라고하였다. 이렇게생존시혹은사후얼마되지않은 16세기중후반의사임당은 화가신씨 였을뿐이다. 아들율곡은아직역사에등장하지않았던때이다. 2) 허난설헌 신사임당의포도그림 기다렸던한양에도착하여많은문인들에대한이야기를들었다. 공관밖에서잠시거주하면서여러학자들과교분을나눈후에다시막사로돌아오겠다는나의간청이받아들여져군영을떠나허씨집에머물렀다. 허씨삼형제, 즉봉, 성, 균, 이들의문장은동해간에드높았다. 봉과균은모두장원급제했으며균은더욱영민하여한번들으면잊어버리지않았다. 조선의시수백편을외워주었으므로내가모은시들이점점많아졌다. 또그누이의시 2 백편을얻었다. 5) 허난설헌의시가 조선고시( 朝鮮古詩 ) 에서는 25수로늘어났다. 또역대중국사신중학문과예술의수준이남달리높았던인물주지번 ( 朱之蕃, 1558~1624) 은명나라황태자의탄생을반포하기위해조선에파견되었는데, 허균이편집한 난설헌시집 에서문을썼다. 그는말한다. 허난설헌의문집을보니속세를초탈하여아름답고도깨끗하며, 선녀의자질이있어우연히해방 ( 海邦 ) 조선에귀양왔으니 신선세계에서떨어진글자욱이모두주옥을이루어감상을하게한다. 어찌어리석고볼품없는우리들이한숨짓고억지로읊어서그불평한심회를묘사하여한갓아녀자의웃음과빈축을사는것따위이리오. 6) 허난설헌은유선시 ( 遊仙詩 ) 의대표적작가로남녀막론최고수준을보인것으로평가되어왔다. 유선시는신선이나선경 ( 仙境 ) 등을묘사해서시인의감정과사상을담아낸시가양식의일종이다. 난설헌의유선시는묘사가사실적이고환상적이라독자를황홀한선경의세계로몰입케하는예술성을갖추고있다고한다. 유선 ( 遊仙 ), 몽선 ( 夢仙 ), 망선 ( 望仙 ), 보허 ( 步虛 ), 선유 ( 仙遊 ) 등의제목들이보여주듯이그녀의의식세계는선계 ( 仙界 ) 를지향하는데대개는여신들로그주인공을삼고있다. 즉신선전설을제재로속세를떠난선계에서의노님을통해현실에서의갈등과질곡을극복하려고한것으로보인다. 허난설헌이죽은지 3년후에임진란이발발했다. 이에명나라군사들과문인들이대거조 주지번이본난설헌은 변방 조선이감당할수없는그릇을가진시인이다. 한편조선에와본적은없지만, 중국에유행하던조선의시를모으고편집한반지긍 ( 潘之亘, 1556~1622) 은 긍사( 亘史 ) 에서허난설헌의시 168수를수록하였다. 이것은허난설헌의인기가명대문단에퍼지고있다는증거이다. 그는 < 허난설헌편 > 의서문에서이렇게말한다. 이나라 ( 조선 ) 에이러한여인이있을수있다는것은한나라의반소와그아름다움을비교할수있으니이는역사를기록하는데있어조선의군신들도두말할것이없을것이며오히려그녀보다앞서지못함을느낄것이다. 내가이전에말했다. 허경번은단지 혜녀 만이아니라 천인 ( 天人 ) 이라할수있다. 혜녀라함은그의시문에서기 3) 정사룡, 題申氏山水圖, 湖陰雜稿 권 5 4) 정유길, 題申氏葡萄畵屛, 林塘遺稿 上 5) 吳明濟, 朝鮮詩選序 朝鮮詩選 6) 朱之蕃, 小引 蘭雪軒詩集 8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87

인하고천인이라함은그녀를조선과같이작은나라에국한시킬수없기때문이다. 혜녀는외부와문을닫고홀 로지내며수련을연마하고이미문자와의인연을끊고더이상글을쓰지않았다. 신선의경지에오르자오백대 선교주가되었다. 만력무신 (1608) 봄. 7) 허난설헌의시를애호하는중국의독자들은그녀를인간이아닌신선과동일시하기시작한 것이다. 중국문인종성 ( 鐘惺 ) 은 36 권으로된시선집을펴내면서허난설헌을이렇게소개한다. 허경번, 자는난설이며조선인이다. 8 세에 < 광한전옥루상량문 > 을지었다. 진사김성립에게시집을갔는데후에 김성립이국난에서순국하자그녀는여도사가되었다. 그형허균장원과둘째형허봉정랑이있다. 번의才名은 그형들과견준다. 주지번이조선에사신으로갔을때그문집을얻어왔다. 판각되어널리전한다. 8) 난설헌이금성립보다나중에죽었다는것이나, 여도사가되었다는것, 허균을난설헌의오 빠라고한것등그녀의인기와더불어왜곡된정보들이나돌기시작하였다. 이에대해남인 계열의한치윤 ( 韓致奫, 1765~1814) 은중국쪽정보가문제가있음을지적했다. 김성립은애 당초에국난에목숨을바친일이없으며, 허씨는 27 세때김성립보다먼저죽었다. 그러니어 찌여도사가되었을리가있겠는가. 9) 이외에명나라조세걸은 20 살에과부가되었으며재명 ( 才名 ) 이형과견준다. 내가북경에 서우연히그문집한권을얻었는데읽어보니내눈을비비고다시보게만들었다. 이역땅에 이처럼출중한여인이있음은생각밖의일이지않는가. 10) 라고했다. 허난설헌에대한이러 한상상은그녀의작품에대한찬사와맥을함께하는것이다. 다시말해중국의문인들은허 난설헌의시가당시동아시아문명권의보편적인특질을갖추고있음을인정한것이다. 7) 潘之亘, 朝鮮慧女許景樊詩集序文, 亘史. 8) 鐘惺, 名媛詩歸 9) 한치윤, 許妹氏, 海東繹史. 10) 조세걸, 古今女史 3. 율곡이이와교산허균, 그리고가족들 1) 신사임당사임당이별세한바로그해, 아들율곡은 16세의나이로어머니의말씀과행적을담은 < 선비행장 ( 先妣行狀 )> 을썼다. 나의어머니는진사신공의둘째따님이시다. 유년시절부터경전에통하고문장을지으셨다. 또바느질에능하였고, 자수실력은지극히정교하였으며, 천성또한온화하고고상하였다. 마음가짐이정결하였고태도는조용하였으며일처리는안정되고섬세하였다. 말수가적고행동은신중하였으며또겸손하시었다. 이에신공께서애지중지여기시니어머니의성품또한효성스러우셨다. 어머니가시집을가게되자진사께서는나의아버지께 내가딸이많은데다른딸은시집을가도서운하질않으나자네처만은내곁을떠나보내고싶지않네 라고하셨다. 어머니가혼인한지얼마안되어진사께서돌아가시니, 삼년상을마친뒤에서울로올라와신부의예로써시어머니홍씨할머니를뵈었다. 어머니는언행에경솔함이나함부로하는것이없었다. 하루는집안일가들이모여잔치를하는데여자들이모두모여담소를나누게되었다. 어머니께서는함께앉아있으면서도아무말이없으니할머니께서, 새아기는왜말이없느냐? 하고물으셨다. 이에어머니는공손하게고쳐앉으시고 여자로서문밖에나다니지않아본것이없어할말이없는것같습니다 라고하셨다. 그러자그자리에있던사람들이모두부끄러워하였다. 서울로돌아온뒤수진방에살았는데그때연로하신할머니께서더이상집안일을돌볼수없어어머니가주부로서집안살림을도맡아하셨다. 아버지께서는성품이활달하여작은일에얽매이지않아집안살림을돌보지않으셔서살림이넉넉지못하였다. 어머니는늘강릉을그리워하여깊은밤고요할때면눈물을흘리고, 때로는새벽까지잠을이루지못하셨다. 어머니는일찍이외할머니를그리워하는시를지으셨다. 밤마다달을보며비나니, 생전에다시뵙게해주소서 하는시인데, 그효심은하늘에서내린것이리라. 경술년여름, 아버지께서수운판관에임명되시고, 이듬해봄에삼청동셋집으로이사를하였다. 그해여름에아버지가나라물자를운반하는일로관서지방에가시게되었는데두아들이모시고갔다. 이때어머니께서는아버지가계신여관으로편지를보내셨다. 어머니께서눈물을흘리며편지를쓰셨는데그내용을아는사람은아무도없다. 그해 5월에일을마치고아버지께서배를돌려서울로향하셨는데미처집에도착하기도전에어머님께서병환이나셨다. 2~3일앓으시곤자녀들에게 아무래도일어나지못할것같구나 라고하시었다. 그날밤은여느날처럼잠자리에드셔서병환이좀나은줄알았는데 17일새벽에갑자기돌아가시니향년마흔여덟이었다. 그날나는아버지를모시고서강에도착했는데행장속에있던놋그릇이모두붉게변하여모두이상하게생각하였다. 조금있다가어머니가돌아가셨다는소식을듣게되었다. 어머니는평소에글씨나그림그리는걸매우좋 8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89

아하셨다. 일곱살때부터안견의그림을본으로삼아산수도를그렸는데, 매우정밀하였다. 특히포도를그리면 모두진짜같다고들했는데, 병풍과족자의형태로세상에많이전하고있다 낭군께선원래무심하신분, 동접들은어떤분이시기에이간질이신가? 700여자로구성된율곡의 < 나의어머니 > 는이후 5세기동안재생된사임당의중요한자료가되었다. 17세기이후사임당담론을이끈대부분의인물들은여기나온정보를가지고보태거나빼거나, 강조하거나약화시키는방식으로재구성하며자신들의목소리를냈다. 2) 허난설헌허난설헌의가족들은모두가역사에이름을남긴유명한사람들이다. 아버지허엽은조광조의신원을주장하였고, 이황과조식에게세미를지급하고제생이가서도를배우도록했다. 허엽은전처한씨와함께 1남 2녀를낳았다. 아들은허성 (1548~1612) 이고사위로는퇴계의문인으로의병장이된우성전 (1542~1593) 이있다. 허엽의전처한씨는좌의정한확의현손으로왕실과혼맥을이루던명문가의딸이었다. 나중에허성의딸이선조의 8남과혼인한것이나허균의딸이세자의후궁으로논의된것은왕실과의통혼이자연스러웠던집안의분위기때문이었을것이다. 허엽은후처강릉김씨와함께 2남 1녀를낳았다. 허봉, 허초희, 허균이그들이다. 난설헌의외조부김광철 (1487~1550) 은강릉사람으로예조참판, 안동부사, 전라도관찰사등의벼슬을지냈다. 난설헌이강릉사람이된것은사임당과마찬가지로외가가강릉이었기때문이다. 아버지허엽, 큰오빠허성 ( 許筬 ) 작은오빠허봉 ( 許葑 ) 과동생허균과 허씨 5문장 으로통했다. 난설헌에게는두분의언니가있지만 20세이상나이차이가난데다어머니가달라서인지교류가없고알려진일화도없다. 난설헌은동모 ( 同母 ) 형제허봉과허균과의관계가각별했다. 오빠허봉은난설헌의시공부에가장강한영향을준사람이다. 허봉은서인과의대립으로갑산에유배를갔다가죽음을맞는데, 그가죽은바로다음해에난설헌도죽은것이다. 허봉이친교를맺은사람으로김첨 ( 金瞻, 1542~1984) 과송응개 (?~1588) 가있는데, 이들은난설헌의시아버지가되고시외숙이된다. 한때남편김성립은친구들과함께집을얻어서밖에나가과거준비를하고있었다. 한친구가장난기가발동하여난설헌의여종이듣는데서 김성립이기생집서놀고있다 고했다. 이를전해들은난설헌은안주와술을보내면서시를한구절써서보냈다. 이를보고사람들은난설헌이시에도능하지만그기백또한호방함을알게되었다고한다. 허난설헌의동생허균 (1569~1618) 은자신의 누이가그시어머니에게인정을받지못했고, 자신의자형은인물로보나학문으로보나누이에훨씬못미친다고했다. 하지만허난설헌의남편김성립 (1562~1592) 은 28세에문과에급제하여홍문관저작을지낸인물이고, 전쟁이임박한정국을울부짖었고, 전쟁을맞아서는의병이되어싸우다가전사하였다. 허봉 (1551~1588) 은누이부부의아들이면서자신의조카인희윤을위해눈물을흘리면서비명을지었다. 피어보지도못하고꺾인아이는희윤이다. 희윤의아버지는성립인데, 나의매부이다. 희윤의할아버지는첨 ( 瞻 ) 인데, 내친구이다. 눈물을흘리며비명을짓는다. 해맑은얼굴에반짝이던눈, 만고의슬픔을이한곡 ( 哭 ) 에부친다.( 희윤묘지 ) 허균이생원시에합격하던그해 1589년에난설헌은세상을떠났다. 누이의죽음을슬퍼한허균은 훼벽사 를짓고이듬에누이의유작 210편을모아문집을엮었다. 그해 11월에는스승유성룡을찾아가서문을받았다. 난설헌집 은허균이공주목사로부임한 1608년에목판본으로간행되었고, 난설헌의대표작 광 허난설헌의묘 한전백옥루상량문 을석봉한호에게부탁해서 목판본으로만들었다. 또허균은누이의시를사신온중국문인들에게보이고자신은누이의시집을목판으로간행하였다. 오빠허봉이당대최고의이달 ( 李達 ) 을모셔와누이의시공부를돕게했다면동생허균은죽은누이의시를세상에알렸다. 허균은형조 예조판서를지냈고역적의누명을쓰고나이 50에처형되었다. 이천재시인에게중국대륙과일본열도는열광적인지지를보내지만 17세기이후의조선에서는그녀가부담스럽고곤혹스럽기만했다. 서인의정국인데다역적의죄를쓰고처형된허균의누이이기때문이다. 9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91

4. 西人의어머니 vs 東人의누이 1) 신사임당사임당은별세한지 (1551년) 반세기가지난 17세기 (1600년대) 의시작부터아들율곡과함께역사의길을걷게되었다. 율곡을종주 ( 宗主 ) 로하는서인 ( 西人 ) 은자신들의정치적정체성과학문적정통성을확보하기위해스승율곡을현창할필요가있었다. 1584년 ( 선조 17) 에율곡이별세하자그문도들을중심으로그 사업 이추진되었다. 일정한의도와목적으로율곡이서술되면서그어머니사임당에대한이야기도새로운국면을맞이했다. 17세기초에는행장 ( 行狀 ) 이나비지 ( 碑誌 ) 를통해율곡이서술되는데, 여기서나온사임당은오늘날우리가알고있는사임당의골격이되었다. 먼저율곡의대표문인김장생은 1597년 ( 선조 30) 에 2만 2천여자에이르는율곡행장을찬술하였다. 율곡과연관된사임당이야기로가장먼저나와다른글들의기준이되었던김장생의 < 율곡행장 > 을보자. 신씨는기묘명현명화의딸로타고난바탕이매우남달라예 ( 禮 ) 에익숙하고시 ( 詩 ) 에밝아서, 옛여인의규범을모르는것이없었다. 선생이태어날때, 신씨부인의꿈에용이아이를품안에안겨주었던까닭에어렸을때이름을현룡 ( 見龍 ) 이라하였다.( 율곡이선생행장 ) 율곡의문인이나그와입장을함께하는사람들을중심으로 성모 ( 聖母 ) 사임당 프로젝트가추진되었다. 여기서가장큰역할을한사람은우암송시열 (1607~1689) 이다. 송시열은그림을소재로삼아그녀를유교적부덕을구현한인물로변모시켰다. 사임당이별세한지 1백년이훨씬지난시점에서사임당의난초그림이송시열앞에나타났다. 1659년 ( 현종즉위년 ), 송시열은나이 53세때에 사임당난초그림발문 을썼다. 이에의하면그림을가능하게한정신이나혼 ( 魂 ), 즉천지의기운이응축된사임당의혼이곧율곡의존재를가능케한것이다. 다시말해송시열에게사임당의그림은율곡의존재를더욱특별하게해주는보조물이다. 송시열은사임당의산수도에글을썼다. 저신부인의어진덕이큰명현을낳으신것은저중국송나라때후 ( 侯 ) 부인이이정 ( 二程 ) 선생을낳은것에비길만합니다. 이족자는그림을전공하는화가의규모와같고한때우연히장난삼아그린그림같지는않습니다. 즉당시어버이의엄격한명령으로억지로그린그림치고는좀다른점이있지않은가생각됩니다. 송시열의 노력 으로사임당은화가보다는율곡의어머니로서의비중이더커지게되었다. 송시열은사임당의예술가적기운을율곡의잉태와연결시켰다. 18세기에는송시열의사람들, 즉서인노론계열인사들을중심으로사임당이야기가전개되었다. 이때, 이전에는듣도보도못했던사임당의작품들이출현하였다. 먼저사임당 < 초충도 7폭 > 을놓고노론핵심인사들의그림평이있었다. 1709년 ( 숙종 35) 에김진규 (1658~1716) 는 제사임당초충도후 를썼다. 그는김장생 (1548~1631) 의현손이자숙종의장인김만기 (1633~1687) 의아들이며, 송시열의핵심문인이다. 이어서 1711년 ( 숙종 37) 에는신정하 (1681~1716) 가 1713년 ( 숙종 39) 에는송상기 (1657~1723), 1715년 ( 숙종 41) 에는이순 (1661~1720) 과정호 (1648~1736) 가각각발문을썼다. 신정하는사임당의방손으로김창협의문인이며, 송상기는송규렴 (1630 1709) 의아들이자송시열의문인이다. 정호는정철 (1536~1593) 의현손으로노론의선봉에섰던사람이다. 담론의소재가된 < 초충도 7폭 > 은양양부사를지낸정필동 (1653~1718) 이소장하고있었는데, 그역시민정중 (1628~1692) 의문인으로노론계열이다. 이가운데담론의선봉장이된김진규의제사 ( 題辭 ) 는뒤따른담론의기준이되었다. 그에의하면사임당은고대성모 ( 聖母 ) 들이노래한시를형상화하기위해그림을그렸는데, 그것은곧부덕 ( 婦德 ) 을실천하는하나의방법이었다. 이제사임당은성모의대열에합류하게되었다. 일부분이지만김진규의글을직접보도록하자. 이것은고증찬성이공부인신씨의작품이다. 그손가락밑에서표현된것으로도혼연히자연을이루어사람의힘을빌어서된것은아닌것같은데, 하물며오행 ( 五行 ) 의정수를얻고또천지의기운을모아참조화를이룸에는어떠하겠는가? 과연그율곡선생을낳으심이당연하다. 11) 11) 송시열, 師任堂畵蘭跋, 宋子大全 권 146 내가일찍이옛서적들을살펴본바, 이른바여자의일이란베짜고길쌈하는데그칠뿐그림그리는따위의일은하지않았다. 그런데도부인의기예가이와같은것은어찌여자교육을등한시한것이겠는가? 진실로타고난재주가총명하여여기에까지온것이리라. 옛사람이이르되 그림과시는서로통하는것이라 하였다. 시도부인이할일은아니지만 시경 에있는 갈담( 葛覃 ) 권이( 卷耳 ) 같은것은저거룩한부인 [ 문왕의어머니태임 ] 이지은것이다. 또한그덕화를입은제후의부인들이 부이( 芣苢 ) 채번( 采蘩 ) 채빈( 采蘋 ) 같은시를지었다. 또여자가지은것으로 초충( 草蟲 ) 편이있는데, 이그림이바로그것을그려낸것이니어찌베짜고길쌈하는일외의일이라고업신여길수있겠는가? 12) 9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93

김진규는사임당의그림작업을유교적부덕과연결시킨것이다. 김진규이후대부분의인 사들은신사임당을부인의덕을갖춘여성으로접근해갔다. 그녀의그림도바로이부인의덕 을체현하는데필요한하나의도구로이식되었다. 이런방식의시들이계속나왔다. 나온후더욱거세졌다. 열조시집 은조선의여성시인 5 인을수록하면서 허매씨소전 을매 우상세하게다루었다. 여기서여성시인부분은전겸익의첩이었던시인유여시 ( 柳如是 ) 가 담당했는데, 해제에서그녀는말한다. 상상컨대, 고이앉아종이위에붓던질때, 그림을그리려고한것은아니었고, 갈담 과 권이 에서읊은것을본떠서그려내니소리없는시로구나.( 신정하 ) 2) 허난설헌허난설헌의아버지허엽은초당선생으로불리었고서경덕의문인으로삼척부사, 부제학, 경상도관찰사등의벼슬을지냈다. 1575년동인과서인의당쟁이시작될때김효원과함께동인의영수가되었는데, 이것이곧그자녀들의정치적노선을결정짓는 순간 이었다. 오빠허봉은동인의선봉이되어서인들과대립하였는데, 병조판서이이를탄핵하다가갑산으로유배되었다. 허난설헌의시아버지는김첨 ( 金瞻 ) 이고시어머니는송기수 ( 宋麒壽, 1507~1581) 의딸이다. 시누이남편인이경전 ( 李慶全, 1567~1644) 은동인의영수이산해 ( 李山海 ) 의아들이다. 난설헌의작은형부우성전역시장인허엽의당인동인으로분류되었다. 이들은모두동인 ( 東人 ) 으로율곡이이 (1536~1584) 를비조로하는서인 ( 西人 ) 과대립하였다. 더구나 1618년허균이역적의혐의를쓰고처형되자, 역적의누이난설헌의가시밭길이시작되었다. 17세기조선에서난설헌은시선 ( 詩仙 ) 도아니고천재도아닌중국시를표절한삼류시인으로전락하였다. 국내에서난설헌의시가표절이라는것을처음제기한이수광 (1563~1628) 은허난설헌은거의모든시를중국시에서베꼈거나허균이지어준것이라고했다. 신흠 (1566~1628) 은허난설헌의시중에서유선시는반이상이표절이라고하였다. 김시양 (1581~1643) 은난설헌작품에표절한것이많다고어떤사람이말했지만믿지않았다고한다. 그런데종성에귀양가서 명시고취( 明詩鼓吹 ) 를구해보고는그것이사실임을알게되었다고했다. 그리고 아, 중국사람의작품을절취하여중국사람의눈을속이고자하였으니, 이것은남의물건을훔쳐다가도로그사람에게파는것과무엇이다르겠는가. 라고했다. 난설헌의시가중국을표절했다는주장은전겸익 (1582~1664) 의 열조시집( 列朝詩集 ) 이 오명제의 조선시선 에는허난설헌이유선곡 300수를지었다고했는데, 나는그 81수를얻었다. 지금전해지는것은대부분당나라시인들의시구를본떠서지은것이다. 이어찌계림으로흘러들어간중국의시편을허매씨가옥갑 ( 玉匣 ) 속에깊숙이보관해두고서다른사람들이보지못하였을것이라고여겨원작자를숨기고서자신의작품으로만들고자한것이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문사들이기이한것을찾아다니다가한갓외방오랑캐의여자손에서나온것만보고서는놀라고찬탄하면서다시는원작자가누구인지를따져보지않아서이다. 서인의종장김장생의현손인김만중 (1637~1692) 은난설헌을둘러싼소문을사실화하고있다. 그는허균이중국사람의좋은시가운데알려지지않은것을뽑아서누이난설헌의문집에끼워넣었다고했다. 그리고말한다. 이것은우리나라사람을속이는것은될수있을지모르지만, 다시중국에들여보내었으니마치도적이남의소나말을도적질하여그마을에다가전매하는것같아서, 어리석기가그지없다. 또불행하게도 전겸익을만나서, 간사한것을적발당하고 밑바닥이온통들어나게되어사람으로하여금크게부끄럽게만드니아까운일이다.( 서포만필 ) 그런데, 명나라시선집에수록된허난설헌의작품은그녀의것이아닐가능성이제기되었다. 이것은난설헌자신이표절한것도아니고허균자신이위작한것도아닌, 난설헌의인기에영합한시집편찬자들의 작품 일수있다는것이다. 남구만 (1629~1711) 은연경에서 명원시귀 ( 名媛詩歸 ) 를얻어보게되었는데, 허난설헌의작품이라고하는것을보니편집한자가아무렇게나뒤섞어놓은것이지난설헌의것이아니었다고했다.( 약천집 ) 난설헌에대한비난은문학외적인데서도일어났다. 그녀의자 ( 字 ) 경번 ( 景樊 ) 에서 번 ( 樊 ) 이누구냐는것이다. 즉번천 ( 樊川 ) 이라는호를가진당나라시인두목 ( 杜牧 ) 이라는설이다. 여기서난설헌은남편을두고외간남자를홀로사모한것이되어 규방여성 의자격을문제삼았다. 12) 김진규, 題思任堂草虫圖後, 竹泉集 권 6 9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95

5. 聖母사임당과한류스타허난설헌 1) 신사임당노론인사들에게사임당은기리고경모해야할존재가되어갔다. 권상하 (1641~1721) 는 율곡선생은백대의스승이라내일찍저태산과북두성처럼우러러받들었는데, 이제또그어머니의작품을보니그경모되는바가과연어떻겠는가? 라고하였다. 권상하는송시열의적통으로스승이사사당할때는그임종을지켰고 3년상을치룬인물이다. 김창흡 (1653~1722) 은 그어머니였기에그아들낳아, 우리학문에그분계심이얼마나다행이던고 라고하였다. 정호는흑룡이침실로들어왔다는율곡탄생의이야기를인용하며 공자의탄생에기린이모습을보인것과서로부합하는것이겠지요? 라고하였다. 이병연 (1671 1751) 은 아버지교훈아래자라난부인, 우리동방어진인물낳으셨나니 라고하였다. 사임당은거의성인을낳은성모 ( 聖母 ) 로반열에서게되었다. 그녀의천재적인그림재능은율곡의성스런잉태와태교, 교육과연결되었다. 유성룡은난설헌이시인으로서의재주도특출하지만사회적인의식을갖추고있는것으로평가했다. 유성룡의말대로난설헌에게 시절을염려하고풍속을근심함에는종종열사의기풍이있다 면 홍길동 을써서적서문제를비판한동생허균이나시국을걱정하면서전사한남편김성립의 기풍 과도통하는면이있다. 동인에속하면서난설헌의오빠허봉과는절친한친구였던유성룡의입장이라는점을감안하더라도, 난설헌의시를직접읽고소상하게평가를하고있는점에서 떠도는 소문을자신들의문집에옮겨놓은부류와는다르다. 그리고허씨남매에대한 관심 이금기시된백여년의잠을깨고허난설헌의시세계가재조명되기시작했다. 황현 (1855~1910) 은 초당가문의세그루보배로운나무중에서제일의신선재주는경번에게돌아갔네 라고하였다. 20세기초에나온이일성 ( 一聲 ) 은난설헌의 복귀 를알리는종소리이다. 허난설헌은동인의운명과함께하면서역사의길을걸었다. 난설헌의아버지와형제들, 시아버지, 시백부, 시외조부, 시외숙등도모두동인에속한인물이다. 다시말해서인주도의정국에서는그녀가긍정적으로평가될수없었을것이다. 거기에허균이저자거리에서처형될정도로대역죄인이된마당에허균남매를객관적으로비평한다는것은더욱어려운일이다. 이렇게먼길을걸어온허난설헌, 우리역사를빛낸 원조한류스타 였던셈이다. 2) 허난설헌 서인의정국아래에서허난설헌의역사적길은가시밭길이었지만, 그녀의시세계를알아본사람들도많았다. 오빠허봉과동생허균이문장가로일컬어질때난설헌의시적재능은눈부실정도의찬사를받았다. 심수경 (1516~1599) 은 허봉과허균도시에능하여이름이났지만그여동생인허씨는더욱뛰어났다 고했다. 허봉과돈독한우의를나누었던유성룡 (1542~1607) 은그누이난설헌의시집에발문을썼다. 하루는미숙 ( 허봉 ) 의아우단보 ( 허균 ) 군이그의죽은누이가지은 난설헌고 ( 蘭雪軒藁 ) 를가지고와서보여주었다. 나는놀라서, 훌륭하도다. 부인의말이아니다. 어떻게하여허씨의집안에뛰어난재주를가진사람이이토록많단말인가. 라고하였다. 그수준은중국한나라위나라시인들보다뛰어나고그나머지는성당 ( 盛唐 ) 의것만하다. 그사물을보고정감을불러일으키며시절을염려하고풍속을근심함에는종종열사의기풍이있다. 13) 13) 유성룡, 跋蘭雪軒集 西厓集 권 4 9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6. 우리는맞수, 허난설헌과신사임당 97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러시아인세레진사바찐의하루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1. 진실과거짓사이 을미사변이란 1895년 10월 8일새벽주한일본공사미우라 ( 三浦梧樓 ) 가지휘하는폭도들이경복궁에난입하여명성황후를암살한사건으로널리알려졌다. 기존일본에서야마베 ( 山邊健太郞 ) 와박종근은일본공사미우라가사건을주모하여일본군인, 외교관, 영사관, 경찰, 대륙낭인등을동원했다는사실을최초로실증했다. 1) 하지만여전히야마베와박종근도정작을미사변당일사건의추이를상세하게연구하지못했다. 그동안한국에서는을미사변에관한기존미우라주도설을뛰어넘어일본측배후에관한새로운시야를넓혀주었다. 또한을미사변의전체적인구도및사건현장의모습등을상상할수있는가능성을제공했다. 2) 그렇지만한국학계는러시아자료에대한접근이어려웠기때문에을미사변당일활발히대응한러시아공사관의움직임을상세히파악하지못했다. 러시아에서는김려호와박벨라가을미사변의목격자세레진-사바찐 (Середин-Сабати н А.И.) 의증언과보고서등을이용하여을미사변당일의상황을조명했다. 두사람은을미사 * 이글은다음에기초하였다. 김영수, 명성황후최후의날, 2014, 말글빛냄. 1) 山邊健太郞, 日韓併合小史, 東京 : 岩波書店, 1966, 119-124 쪽 ; 朴宗根, 日淸戰爭と朝鮮, 東京 : 靑木書店, 1982, 232-247 쪽. 국내에서일본학계의연구성과소개는다음을참조. 서민교, 일본에서의명성황후시해사건에대한연구와과제, 사총, 59 호, 2004 2) 최문형, 서설, 명성황후시해사건, 1992, 6, 26 쪽 ; 강창일, 三浦梧樓公使와민비시해사건, 명성황후시해사건, 1992, 31, 67 쪽 ; 이민원, 민비시해의배경과구도, 명성황후시해사건, 1992, 70 쪽 ;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아관파천, 2002, 국학자료원, 57-65 쪽 ; 신국주, 명성황후살해에대한재평가, 명성황후시해사건과아관파천기의국제관계, 1998, 53 쪽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01

변관련러시아측사료를최초로소개했다는점에서큰의미를갖는다. 3) 하지만김려호와박 벨라는세레진 - 사바찐 ( 이하사바찐 ) 의기록을전적으로신뢰하여사료비판에근거한본격적 인자료분석을진행하지못했다. 그래서두사람은왜사바찐이건청궁자객을이끌었던오 카모토의이름을끝까지숨기려고했는가를주목하지못했다. 기존국내외학계는정작을미사변당일어느장소에서무슨사건이어떻게진행되었는가 에대한꼼꼼한연구를수행하지못했다. 현재까지도을미사변관련기초적인사실이부정확하다. 여전히을미사변의무대인건청궁 을비롯한공간및사건의구성을위한시간에관한논란이존재한다. 즉건청궁소재건물의 위치, 왕과왕비의소재, 왕비의암살과정, 일본군대와일본자객의행적, 훈련대와시위대의 활동등이다. 그배경에는첫째기존연구는을미사변의현장인경복궁내부건청궁부속건물의위치를 파악하지못했기때문에사건의현장을묘사하는데많은오류를범했다. 현장을복원하기위 해서필자는 2007 년복원된건청궁의건물을답사했다. 그리고필자는우선기존에발굴되지 않았던사바찐이작성한궁궐지도, 1907 년에작성된것으로추정되는경복궁지도 북궐도 형, 우치다 ( 內田定槌 ) 영사가외무차관하라 ( 原敬 ) 에게보낸첨부지도등을이용하여사건의 위치를규명할것이다. 둘째기존연구는을미사변과관련된회고록, 증언, 보고서등을다양하게이용했지만을미 사변을가장상세히기록한목격자사바찐의증언과보고서를본격적으로분석하지못했다. 당시사바찐은을미사변당일현장에서매시간마다사건의추이를확인했고, 새벽 5 시가넘 어서는 15 분단위로상황을파악했다. 그래서그어떤증언과보고서보다사바찐의기록은 사건에대해서상세한정보를제공한다. 따라서필자는사바찐의증언과보고서를중심으로 을미사변당일을복원할것이다. 그런데사바찐의증언과보고서를살펴보면사바찐은당일사건을둘러싼인물의이름을 구체적으로언급하지않았다. 그래서주한러시아공사베베르 (К.И. Вебер) 와즈프 ( 芝罘 ) 주 재러시아부영사찜첸꼬 (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 는사바찐에게을미사변에가담 한일본인의이름을강하게추궁했다. 그런데두사람은사바찐이더이상의정보를제공하지 않자사바찐에대한의혹을제기했다. 따라서필자는사바찐이을미사변당일자신의증언과 보고서에게무엇을은폐하려고했는가를추적할것이다. 4) 3) Ким Рехо. Гибел королевы Мин( 명성황후암살 ) Корея.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к восимидеся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профессора М. Н. Пака( 조선 ), М. 1998. СС.127-129; Пак Б.Б. Российская дипломатия и Корея( 러시아의외교와조선 ). М. 2002. СС.160-161 1) 10 월 8 일새벽 4 시 : 일본군대와훈련대의경복궁포위 새벽 4 시사바찐은시위대 ( 侍衛隊 ) 1 대대장참령 ( 參領 ) 이학균 ( 李學均 ) 의다급한소리에잠 을깼다. 평상복을입고잠을청했기때문에사바찐은바로일어났고, 옆방에있던다이와함 께이학균에게상황을물어보았다. 이학균은대략 200 명의훈련대가 4~5 명의일본교관의 지휘에따라대궐북동쪽대문인춘생문 ( 春生門 ) 을둘러쌌고, 30 명의일본군복을입은사람 을포함한대략 50~60 명일본인이북서쪽대문인추성문 ( 秋成門 ) 성벽에숨었다고알려주었다. 다이장군이성벽을살펴보기위해서함께가자고사바찐과이학균에게제안했다. 하지만 이학균은이미훈련대연대장 ( 訓鍊隊聯隊長 ) 부령 ( 副領 ) 홍계훈 ( 洪啓薰 ) 과함께춘생문을살펴 보았기때문에고종에게긴급한상황을보고해야한다며다이와헤어졌다. 그런데고종에게 보다정확한정황을보고하기위해서이학균은북쪽의작은암문 ( 暗門 ) 계무문 ( 癸武門 ) 으로 향했다. 이학균은망원경을통해서북서쪽성벽을따라움직이는약 12 명의그림자를확인하 자바로고종이거주하는장안당 ( 長安堂 ) 으로달려갔다. 이학균을뒤로하고사바찐은다이와 함께대궐의당직실로향했다. 그곳에는적어도 6~7 명의장교와 2 명의중령이반드시근무해 야했는데사바찐과다이는아무도찾을수가없었다. 사실전날사바찐은평소와같이저녁 7 시경복궁으로출근했다. 1894 년일본군대의 7.23 경복궁점령사건 이후고종은사실상일본의정치적영향을받으면서신변의불안을느 낄수밖에없었다. 이러한상황에서고종은러시아공사베베르 (К.И. Вебер), 미국공사실 (John M.B. Sill), 미국인고문관그레이트하우스 (Clarence R. Greathouse) 의조언에따라장 군다이 (W.M. Dye), 대령닌스테드 (F.J.H. Nienstead), 건축사사바찐 (А. И. Середин-Саб атин) 5) 등을일본인들의활동을감시하도록경복궁에상주시켰다. 따라서경복궁에는항상 두명의외국인이체류했고사바찐도 1894 년 9 월부터경복궁에 1 주일에 4 일씩저녁에출근 하여아침에퇴근했다. 사바찐은 1860 년우크라이나동북쪽에위치한도시뽈따바 (Полтава) 에서영락한지방귀 족의아들로태어났다. 스위스계러시아인사바찐은러시아에서항해학교를다녔으며전문분 야는조타수였다. 한국외부고문관인묄렌도르프 (Paul George von Möllendorf) 는 1883 년 1 월출장차상해에머물렀는데, 상해에거주하는많은젊은이들이한국의해관에취직할것 4) АВПРИ. Ф.150.Оп.493.Д.6.Л.121об, 129об 즈프 ( 芝罘 ) 는산동반도끝항구도시였다. 아관파천직후전신선이불통되자고종은인편을통해즈프주재러시아영사관에편지를보냈고, 러일전쟁직전고종이한국의중립화를선언한지역도바로즈프주재프랑스영사관이였다. 5)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蘇眉退, 薩巴丁, 薩巴珍, 薩巴玲 ) 10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03

을묄렌도르프에게요청했다. 그당시묄렌도르프와친분이있는상해주재오스트리아총영사하스 (Hass) 는사바찐을추천했다. 그후사바찐은한국해관의관리명단에포함되었다. 상해에머물면서건축분야까지습득한사바찐은 1883년 9월인천을통해서입국했고, 영조교사 ( 營造敎士 ) 라는직명으로한국정부와고용약정을체결했다. 인천에도착하여왕궁의도면을작성한사바찐은벽돌을생산하는방안을제시하면서불연성의이엉지붕설비안도함께내놓았다. 하지만비용문제때문에실행이어려워지자, 사바찐은인천해관에근무하게되었다. 1884년사바찐은인천해관원소속외국인관료 7명중세번째직위인 토목사 로임명되었고, 그후약 1년동안 15~16명의한국인을인솔하여부두축조공사를직접지휘했다. 1888년 5월사바찐은경복궁내부건청궁의관문각 ( 觀文閣 ) 공사의경리일체와지휘감독을맡기로한국정부와계약을체결했다. 궁궐에지은최초의서양식건물인관문각은서양문명을수용하겠다는고종의강력한의지가반영된건물이었다. 관문각은 1888년 2월공사가시작되었고, 1892년공사가완료되었다. 공사의과정에서 1891년사바찐은그를보조하는한국인현응택 ( 玄應澤 ) 과부실공사책임및공사비운영을둘러싼심각한불화에빠졌다. 사바찐은 1891년 9월사직을결심하고누수에따른공사하자의책임을가리는문제에적극적으로대처했다. 이러한상황에서고종은사바찐에대한신뢰감을표시하면서하자보수공사를명령하였고, 사바찐은 1892년 2월수리를위한보관서류를작성하고 4월에는자재와인부도모두조치하여관문각을보수했다. 관문각공사가마무리되자고종은 고생을참아가면서열심히일했으며그르침도어긋남도없었다 며 1893년 10월사바찐을한국해관에복귀시켰다. 이러한신뢰와인연때문에사바찐은 1894년청일전쟁이후고종을보호하는외국인대궐수비대로한국정부에근무할수있었다. 이날경복궁으로출근하는도중사바찐은평소에잘알고지내는한중국인을만났다. 중국인은이날밤에는절대로궁궐에출근하지말것을당부했다. 사실이중국인은이날아침에퇴근한사바찐을찾아와서오늘밤에경복궁에서불상사가발생할것이라고경고했다. 궁궐출근을만류하는중국인의설명을통해서사바찐은어떤음모가꾸며져서바로오늘밤실행될지도모르며, 한국군대인훈련대가음모의중심세력이라고직감했다. 왜냐하면 7일 0시에서 2시까지일본장교에의한교육을받은훈련대병사가궁궐앞에서훈련대의해산에반대하는시위를벌였기때문이었다. 불길한징후에도불구하고사바찐은 7시 30분경복궁에출근했다. 사바찐은대체로활달하고정력적이며감정적인성격을소유한인물이었다. 사바찐은자신의직장을잃고싶지않았기때문에자신에게닥쳐올불확실한위험을피하지않았다. 이날대궐에출근한사바찐은음모의징후를살펴보았다. 하지만궁궐은평상시처럼조용 했고날이어두워지면서궁궐의주변에는보초만남았다. 한밤중이되어서사바찐은다이와닌스테드와함께체류하는서양인숙소협길당 ( 協吉堂 ) 에들어갔다. 혹시나하는생각에서사바찐은평상복을벗지않고잠을청했다. 새벽 4시 30분사바찐과다이는당직실을뒤로하고북서쪽추성문에도착했다. 이날은달빛이매우선명했기때문에그곳의상황을어렵지않게파악할수있었다. 사바찐은추성문의넓은틈을통해서대문바로앞에최소한 50명이상의일본병사가정렬한것을볼수있었다. 일본병사는부동자세를취하면서자기들끼리조용히얘기하고있었다. 잠시후일본군대는사바찐과다이의발소리와목소리를듣고누군가자신들을엿보고있다는것을알아챘다. 곧바로일본군대는 2열로정렬하면서추성문옆쪽성벽에바짝붙었다. 사바찐과다이는더이상현장의변동을파악할수없게되자북동쪽춘생문으로향했다. 사바찐은그곳에서약 300 명정도의훈련대병사를목격할수있었다. 사바찐은한국인중한명이춘생문에다가와서대문을열어달라고외치는소리를들을수있었다. 사바찐은춘생문을둘러싼병사가훈련대의주력병력이라고판단하였고사태의심각성을인식하면서서둘러당직실로향했다. 다이와사바찐은대책마련에고심했지만방어조치를마련하기에는역부족이었다. 이날시위대 2대대장참령 ( 參領 ) 김진호 ( 金振澔 ) 는당직사령이었음에도불구하고당직실에없었고, 대부분의시위대장교와병사가흩어져버린상황이었다. 그나마일부시위대장교와병사조차도초조하고불안한상태였기때문에지휘관의명령에주의를기울이지않았다. 새벽 5시가가까워지자경복궁의춘생문, 광화문, 추성문등에서심상치않는조짐이보였다. 일본수비대, 훈련대, 일본자객은경복궁을침입할만반의준비를갖추었기때문이다. 이미새벽 4시경대포를동반한훈련대중일부는궁궐의북동쪽춘생문을둘러쌌다. 또한훈련대와일본수비대중일부는광화문앞에서정렬했다. 당시일본수비대는 1대대 3중대대략 600명, 훈련대 2대대대략 1600명, 2개조로구성된일본자객이당일사변에참여했다. 경복궁정문에서는주한일본공사관무관구스노세 ( 楠瀨幸彦 ) 중좌의지휘하에훈련대교관코이토 ( 鯉登行文 ) 대위와 3중대장마키 ( 馬來政輔 ) 대위가광화문에배치되었다. 여기에일본교관에교육받은훈련대 2대대는우범선의지휘아래대기했고, 훈련대교관이시모리 ( 石森吉猶 ) 대위와타가마츠 ( 高松鐵太郞 ) 대위는 2대대를감시했다. 경복궁후문에서는일본수비대대대장우마야하라 ( 馬屋原務本 ) 소좌의지휘하에 2중대장무라이 ( 村井右宗 ) 대위가추성문에포진했다. 훈련대 1대대는이두황대신에중대장이범래의지휘하에춘생문에대기했다. 일본수비대 1중대장후지도 ( 藤戶與三 ) 는대원군을호위했다. 서울에거류하는일본자객은 2개조로조직되었다. 1조는대장에한성신보사사장아다치 10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05

( 安達謙藏 ), 부장에현양사소속사사 ( 佐佐正之 ), 객장에자유당 ( 천우협 ) 소속타나카 ( 田中賢 道 ) 였다. 이들은저녁에한성신보사에집합하여공덕리로출발해서대원군을호위하여광화 문에돌입했다. 2 조는천우협소속시바시로오 ( 柴四朗 ) 의 萬所巴城館 에집합하고, 대장에 한성신보사주필쿠니토모 ( 國友重章 ), 부장에일본신문특파원야마다 ( 山田列聖 ) 였다. 이들은 추성문으로직행하여건청궁으로침입했다. 조희연과우범선은훈련대의동원을위해서적극적으로협조했다. 전군부대신조희연은 훈련대 1 대대의장교들을설득하여정변에참여할것을유도했고, 훈련대 1 대대병력의일부 를이범래의지휘아래춘생문에대기시키고, 나머지일부를건춘문을비롯한경복궁주변을 경계하도록지시했다. 훈련대 2 대대를지휘한우범선은대원군을호위해서광화문을통해대궐에들어왔다. 6) 이 미우범선은 1895 년 9 월 27 일일본수비대소위미야모토 ( 宮本 ) 와함께용산에서훈련대 2 대 대를지휘해서군사훈련을실시했다. 당시훈련을마친우범선은 훈련대는열흘이못되어서 해산될것같고, 훈련대장교도모두엄벌에처하게될것이므로빨리도망칠생각이다 고자 신의불우한처지를미야모토에게토로했다. 다음날 28 일우범선은훈련대교관이시모리 ( 石 森吉猶 ) 를면담한후 10 월 3 일소좌 ( 少佐 ) 우마야하라 ( 馬屋原務本 ) 와대위이시모리 ( 石森吉猶 ) 와동반해서미우라공사를방문하여정변에주도적으로가담했다. 그런데정작훈련대소속병사는정변의정확한내용을알지못했다. 대부분의훈련대병사 는대대장우범선과이두황의야간훈련명령으로 8 일새벽대궐밖으로유인되었고, 경복궁 에도착한후대궐을호위하는것으로이해했다. 하지만훈련대의대부분은일본군대의유도 에따라경복궁을진입했고, 어쩔수없이정변에가담했던것으로보인다. 그렇지만정변에 가담한훈련대장교및일본사관학교출신은정변에깊숙이개입했다. 이들은 대원군으로 하여금그아드님되시는상감께말씀하여 ( 왕비를 ) 폐비케한후에다시사약을내릴계획 도 독자적으로갖고있었다. 6) 駐韓日本公使館記錄 7 권 73 쪽, 10 월 8 일事變 ( 王妃弑害事件 ) 의犯人處分件, 1895 년 12 월 30 일小村공사 西園寺외무대신. 禹範善이출중한줄알엇다. 禹는무엇보다憺力에出衆하엿다... 그는閔妃事變때도가장先鋒에서서활약하고일을지른分量도만하엿섯다. 軍人중으로는主動者가그엇스니까 ( 삼천리제 6 권제 5 호 1934 년 5 월 1 일, 권동진 - 韓末人物의回想 ). 2) 10월 8일새벽 5시 : 추성문에서울리는한발의총성새벽 5시. 밤의적막속에추성문에서한발의총성이울렸다. 총성과함께일본수비대 3중대의 5-6명의병사가사다리를타고광화문왼쪽성벽을넘었다. 성벽위에올라간일본병사는긴밧줄을성벽안쪽에던지고내려와서광화문안쪽으로진격했다. 광화문을수비하던시위대위병은저항했지만일본수비대의위협에눌려도피했다. 총성과위협으로시위대위병을쫓아버린일본병사는광화문을활짝열었다. 그러자일본수비대 3중대는광화문을통해서경복궁에진입하면서광화문주변을장악했다. 5시 30분경대원군을비롯한일본수비대 1중대, 훈련대 2대대, 일본자객 1조, 일본사관학교출신등은광화문앞에도착했다. 일본사관학교출신인권동진은 왕비를폐위시키고민가일족과수구파일당을제거 하기위해서정변에참여했다고밝혔다. 대원군의가마가경복궁정면에도착하자광화문이열렸다. 30분후동쪽하늘에먼동이틀무렵이었지만아직사람의얼굴을제대로구별할수는없는상황이었다. 대원군은이미일본군대가접수한광화문을일본수비대, 훈련대, 그리고일본자객 30여명의호위를받으면서들어갔다. 광화문에들어설때병사들은총검을꽂고일본자객은칼을빼들었다. 동시에정변에참여한모두가 와아 하고일제히함성을지르면서돌진했다. 새벽녘살기가경복궁을온통에워쌌다. 5시 40분. 광화문을지난정변가담자는근정전앞에서 2진으로나뉘었다. 1진일본수비대와훈련대는본대를형성해서광화문에서신무문으로향하는대로로진격했다. 2진일본자객및대원군을호위하는 1소대의일본군대는근정전을바라보는오른쪽으로향원정을향해달려갔다. 5시 40-45분까지신무문으로가는대로에서 100여발의총성이울렸다. 이미새벽 3시경訓鍊隊聯隊長副領홍계훈은일본군대와훈련대가궁궐에접근했다는보고를받았다. 홍계훈은신속히궁궐의북동쪽인춘생문으로달려가훈련대에게해산을종용했지만 당신은더이상지휘관이아니며여기서명령을내릴수있는사람은오로지일본교관한명뿐이다 라는답변을들었다. 사태의심각성을인식한홍계훈은이학균에게궁궐의남쪽인광화문의상황을점검할것을지시했다. 곧이어홍계훈은궁궐수비대의보고를통해서대궐북서쪽인추성문에일본자객과일본군대가잠입했다는사실도파악했다. 사태가심각해지자홍계훈은근정전에서건청궁으로향하는대로에병력을배치하고기다렸다. 5시 40분경 1진인일본공사관무관구스노세 ( 楠瀨幸彦 ) 는일본수비대와훈련대를총지휘하며진격하던중홍계훈이지휘하는궁궐수비대의저항을받았다. 홍계훈은훈련대병사들에게 자신이아닌다른어느누구의명령에도따르지말라 고명령했다. 그러자서로총격전이벌어졌다. 10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07

걷혀가는어스름속에서궁궐수비대는상대편에일본수비대가훈련대에가담한것을확인했다. 궁궐수비대는일본수비대의가세로수적으로열세인상황을깨닫고점차사기가떨어져갔다. 일본수비대와훈련대중일부병력도사건의내막을모른상태에서갑자기전투를수행하여점차소극적인자세가되었다. 시간을끌면끌수록불리하다고판단한구스노세는소극적인병사의행동을꾸짖었다. 구스노세는자신이직접검을빼들고칼날을휘두르며상대편으로과감하게뛰어들었다. 이과정에서구스노세는홍계훈과대적했고, 홍계훈의어깨를내려침으로써상처를입혔다. 그러자훈련대 2대대지휘관인우범선은쓰러져있는홍계훈에게여러발의총격을가했다. 홍계훈이무너지자수백의궁궐수비대인시위대는총검을버리고제복을벗으면서달아났다. 이후홍계훈은그의집으로옮겨졌다. 유럽인의사가홍계훈의집에도착했지만이미그는피를너무많이흘려사망했다. 2진인일본자객은광화문을들어서서 30-40(30 間 ) 미터를달리며두번째의소문을통과할무렵광화문근처에서총성이들렸다. 일본자객은광화문부근의전투에개의치않고대궐의후방을향해돌진했는데그순간앞쪽에서도총성이났다. 2진인일본자객은근정전근처에대원군의가마를멈추게하고전방에진로가열리는것을기다렸다. 잠시후일본자객은 1소대의일본병사에게가마를지키게하고목적지를향해서돌진했다. 일본자객은왼쪽으로꺾고오른쪽으로돌아후궁을향해서치달아향원정근처에도달했다. 5시 50분경거기서소나무가우거진조그마한등성이로진출하여건청궁의외곽에도착했다. 건청궁은사방이거의 2킬로미터 (5리) 쯤되는경복궁의맨뒤끝에있다. 경복궁광화문에서건청궁까지도달하려면정문인광화문에서호수인향원정까지 4~5군데의대문을지나가야했다. 각대문마다는 2명의궁궐수비대가지키고있었다. 당시건청궁은왕이사용하는장안당과왕비가머무는곤녕합, 그리고장안당뒤에서재로관문각을지어서마치사대부가의사랑채, 안채, 서재로구성되었다. 건청궁정문을지나초양문을들어서면고종의집무실인장안당이있었다. 함광문을들어서면왕비가거주하는곤녕합과정시합이있었다. 1895년 8월건청궁에서고종을접견한뮈텔은 알현실은대단히넓으며계단이있는남쪽으로향해있었고, 북쪽으로는접견실로보이는다른방들과종이칸막이로나누어져있었다 고장안당을묘사했다. 건청궁성벽으로둘러싸인앞마당에는전각이세워져있고, 한가운데있는한채를국왕과왕비가편전으로쓰고있었다. 남향으로세워진편전은동서로길게뻗어몇개의방으로나누어져있었다. 7) 일본자객이침입한그때왕비는건청궁의맨동쪽끝에있는한국식의미닫 이를동남의양쪽으로달아놓은옥호루주변에있었다. 그로부터서쪽으로향해서도많은방이있는데, 국왕은왕비의옆방인곤령합에머물렀다. 새벽 5시첫번째총성이울리자추성문의위병도총과탄환을버리면서도망쳤다. 당시대궐에는대략 1600명의병력과 50명의장교가대궐을수비했다. 그런데사바찐은대략 300명의병사와 8명의장교만목격했다. 잠시후일본수비대 2중대는성벽에사다리를세워놓고추성문옆성벽을넘었고, 훈련대 1대대는춘생문과춘화문을넘었다. 일본수비대 2중대와훈련대 1대대는계무문 ( 癸武門 ) 으로향했고, 경복궁의북쪽을장악했다. 벽을타고넘어온군인이추성문을열어주는동안다이장군은대궐수비를위해서계무문 ( 癸武門 ) 안쪽으로남아있는시위대병력을집결시켰다. 일본수비대장우마야하라 ( 馬屋原務本 ) 는추성문을공격하기직전정변의의미를부여하고사기를진작시키기위해서부하들에게큰소리로연설했다. 그는 일본정부는한국의정치를계도하기위하여청국과싸우면서한국의독립을확고히하고동양의대국 ( 大局 ) 을보전하려고노력했다 며청일전쟁의의미를부여했다. 그는 지금왕비가한국정부의권리를전단하여한국이망하게되어서일본도보전하기어렵게되었다. 일본이보전할수없으면청국역시존립하기어렵고, 청국이사라지면동양의대세도무너진다 고주장했다. 그는한국일본중국의상호관계를설명하면서왕비의잘못으로동양의대세가흔들린다고주장했다. 그는 왕비가조선 5백년종사의죄인이며, 조선의죄인일뿐만아니라일본제국의죄인이다. 정령동양의죄인이다 며정변에참여한군인과자객에게왕비에대한증오심을끌어올렸다. 7) 小早川秀雄, 閔后暗殺記, 100 쪽, 1965 명성황후가머물렀던옥호루 10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09

3) 10월 8일새벽 5:15 : 사바찐이목격한건청궁현장새벽 5시 15분일본인, 일본병사, 훈련대는계무문을통과하여무청문 ( 武淸門 ) 에도달했다. 무청문에서고종이거주하는장안당으로들어가는필성문 ( 弼成門 ) 까지대략 50미터 (80걸음, 29 間 ) 정도였다. 다이의지휘하에필성문주변에대략 300명의시위대병력이정렬했다. 침입자들이무청문의 1~2인치너비의 5~6개틈으로시위대의머리위쪽으로한번에 30~40발을세차례발사했다. 6미터이상의위협사격을받았지만시위대병사중 1명만어깨에부상을당했다. 위협사격이개시되자사바찐은필성문안쪽에몸을숨겼고, 다이는서양인숙소로향하는쪽문에피신했다. 첫번째사격이시작되자시위대는총을한발도쏘지않고약실에서탄환을꺼내면서방전시켰다. 시위대는총과탄환을버리고군복을벗어던지며도망치기시작했다. 시위대는두방향으로나뉘었다. 한무리는다이장군을떠밀면서서양인숙소로향하는쪽문으로향했지만그쪽으로는침입자들이추격하지않았다. 다른무리는사바찐이숨었던필성문으로몰려갔다. 사바찐은관료, 시위대병사, 시종등대략 300명정도의인원에이끌려왕비의침소로통하는문까지밀려났다. 사바찐은장안당을돌아자신이직접설계하고건설했던관문각 ( 觀文閣 ) 8) 을지나왕비의침소인정시합 ( 正始閤 ) 의정면에있는담장에설치된일각문 ( 一角門 ) 9) 에자신을은폐할수있었다. 하지만침입자들이여기까지몰려오자사바찐은왕비의침소와연결되는문을포기하고뒤로밀려나면서녹원 ( 鹿苑 ) 으로향하는청휘문 ( 淸輝門 ) 옆곤령합 ( 坤寧閤 ) 동행각 ( 東行閣 ) 의문아래판자를붙잡았던것으로추정된다. 대부분의한국인들은사바찐을지나쳐청휘문을통해녹원으로도망쳤지만사바찐은곤령합동행각에서서현장을목격할수있었다. 곤령합을장악한 40명의훈련대, 1명의일본장교를포함한 5명의일본군인, 도검으로무장한 20-25명의일본자객등은곤령합에정렬했다. 이와동시에일본군인은청휘문과정시합정면에있는일각문에 2명씩배치되었다. 1소대 40명의훈련대는곤령합마당에서총을비스듬히내려놓고정렬했다. 일본자객중 4-5명은칼을뽑았고, 긴칼을차고단검을빼든일본인이현장을지휘했다. 사바찐은현장을지휘한일본인이매우고상한외모에양복을단정히차려입었다고기록했다. 그런데사바찐은자신의증언과보고서에서현장을지휘한일본인을끝까지밝히지않았다. 이에따라주한러시아공사베베르 (К.И. Вебер) 와즈프 ( 芝罘 ) 주재러시아부영사찜첸꼬 (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 도사바찐의증언에대해서불만을표시했다. 당시고종은현장에서주한전군부고문오카모토 ( 岡本柳之助 ), 오카모토의사적인통역관스즈키 ( 鈴木順見 ), 영사관경부 ( 警部 ) 와타나베 ( 渡邊鷹次郞 ) 를목격했다고증언했다. 서울주재일본일등영사 ( 一等領事 ) 우치다 ( 內田定槌 ) 는본국에보낸을미사변보고서에서오카모토 ( 岡本柳之助 ), 한성신보사주필구니토모 ( 國友重章 ), 한성신보사기자사사키 ( 佐佐正之 ), 쯔키나리 ( 月成光 ) 등이중심이되어서일본자객을지휘했다고밝혔다. 더구나미우라공사의히로시마 ( 廣島 ) 재판증언에따르면오카모토가일본자객을지휘했고일본자객의명성황후암살을조장했다고밝혔다. 그날새벽 3시에오카모토는대원군과함께공덕리를출발했다. 그날대원군은광화문으로입궐했다. 그런데오카모토는일본자객중가장먼저건청궁에도착한인물이었다. 따라서오카모토는대원군을설득한이후새벽 3시경일본자객을지휘하기위해서추성문으로출발했던것으로보인다. 새벽 4시 30분경먼저추 성문에도착한오카모토는 5시일본자객을총지휘해서건청궁으로침입했다. 명성황후죽음에관련된일본낭인들 오카모토 ( 岡本柳之助 ) 의지휘아래 20~25명의일본자객은곤령함의廳과房을거쳐옥호루 ( 玉壺樓 ), 사시향루 ( 四時香樓 ), 그리고정시합 ( 正始閤 ) 의房을샅샅이뒤지면서명성황후를찾았다. 이과정에서일본자객은궁녀들의머리채를잡고밖으로질질끌어내며왕비의소재를추궁했다. 일본자객은두자루의길고짧은도검으로무장했다. 도검중긴것인가타나 ( 刀 ) 는 90cm 정도였고, 짧은것인와키자시 ( 脇差 ) 는 59cm 정도였다. 일부일본자객은궁녀들이왕비의소재를대답하지않자약 180cm의높이인옥호루의창문너머로 10~12명의궁녀들을던져버렸다. 사바찐은약 10m(20~25 걸음 ) 정도떨어졌기때문에옥호루바닥에떨어진궁녀들의표정을살펴볼수없었지만바닥으로떨어진궁녀는아무런움직임을보이지않았다. 사바찐은순간적으로생명의위협을느꼈다. 사바찐은일본장교의보호를받는것이최선이라고판단했다. 사바찐은용기를내서곧바로일본장교에게다가가영어로말을걸었다. 영어를이해하지못하자사바찐은조금알고있는일본어로일본장교에게다시말을걸었다. 10) 8) 西洋殿 (европейский дом) 으로도불림. 9) 복수당 ( 福綏堂 ) 서행각 ( 西行閣 ) 의담장에붙어있는작은문. 10) АВПРИ. Ф.150.Оп.493.Д.6.Л.125об 11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11

현장에있던일본장교는미야모토 ( 宮本竹太郞 ) 소위였다. 미야모토는훈련대의일본교관으로훈련대 2대대장우범선과긴밀한관계를유지했다. 하지만미야모토는모르는척하면서다른곳으로이동했다. 사바찐은옆에있던일본군인에게도접근했지만사바찐의적극적인행동에대해서애써무시하는태도를느꼈다. 다급해진사바찐은지휘자인오카모토에게접근할것을결심했다. 사바찐은오카모토에게영어로아침인사를하면서접근했다. 그러자오카모토는 당신의이름과직업은무엇인가? 라고냉정한어투로물어보았고, 사바찐은이름과직업을밝혔다. 사바찐은상대방의표정을살피면서먼저자신의입장을설명할필요성을느꼈다. 서둘러사바찐은자신의의지와상관없이곤령합까지왔기때문에자신을보호해줄것을요청했다. 사바찐은최대한진지한표정으로상대방의시선을끌려고노력했다. 그러자오카모토는 당신은보호되었고, 여기에머무를것 을명령했다. 그런데오카모토가외국인을사건현장을목격하도록방치했다는것은무슨의미일까? 신변보장에안도감을찾은사바찐은오카모토에게 1~2명의군인을통해자신을보호해줄것을요청했다. 오카모토는곤령합마당에있던일본말을구사하는두명의훈련대병사를불러사바찐의옆에서있도록명령했다. 이런상태로사바찐은 15분정도곤령합마당구석에서현장을목격했다. 새벽 5시 30분 5명의일본자객은소리를지르면서곤령합의계단으로나왔다. 이들중한명은일본어로정열적인연설을하더니다시곤령합으로들어갔다. 이들은궁녀의머리채를잡고다시곤령합의계단으로뛰어나왔다. 뛰어나오는속도를멈추지못한양복을입은 2명과기모노를입은 3명의일본인은정면에서사바찐을발견했다. 그들은핏발이선눈으로놀라움에약 10초동안정지했다. 정신을차린이들은한목소리로일본말과한국말로사바찐이왜여기에있는지묻기시작했다. 순간적으로사바찐은숨을멈췄다. 어떻게대응할까를망설였다. 사바찐은일본말과한국말을모르는척하는것이유리하다고판단하자그들에게영어로말하기시작했다. 사바찐은이들중누군가영어를이해하고있다고느꼈다. 잠시후이들은사바찐을보호하고있는훈련대병사들의설명을듣고나서다시곤령합으로돌아가기시작했다. 안도의한숨을쉬고있던그순간사바찐은곤령합마당으로들어오는한한국인과눈을마주쳤다. 그는사바찐이들어온정시합 ( 正始閤 ) 의정면에있는담장에설치된일각문 ( 一角門 ) 으로들어왔다. 이한국인은사바찐을보고놀란나머지 아 하며탄성을질렀다. 그는사바찐을너무나잘알고있는인물이었다. 그한국인은대궐안에서비서를담당하는인물이었다. 그는너무놀라잠시멈칫거렸다. 그는곧바로곤령합으로들어가고있는일본자객에게접근 하며활기차게이들에게무언가를얘기하기시작했다. 사바찐은결코건축기사가아니며아마도대궐배치와명성황후를잘알고있을거라고말하는것같았다. 그의말이끝나기도무섭게 5명의일본자객이사바찐에게소리를지르면서빠르게달려왔다. 이순간사바찐은가장끔직하고위험한상황이라고판단했다. 일본자객이맹렬한기세로달려들자훈련대병사 2명은신속하게길을내주면서옆으로물러났다. 이들중한명은사바찐의옷깃을잡았고, 다른한명은사바찐의소매를잡았다. 동시에일본말과한국말로 왕비가있는곳을가리켜! 라고소리를질렀다. 사바찐은그들의말을못알아듣는것처럼행동했다. 그들의무례한태도에놀란표정까지지었다. 그런데사바찐의옷깃을잡았던한명은영어로말했다. 왕비는어디? 어디에숨었는지우리에게가리켜! 라며사바찐에게반복했다. 짧은순간사바찐은흰눈동자를굴리며호흡을가다듬었다. 생각이떠올랐다. 11) 외국인이고남자이기때문에왕비의얼굴뿐만아니라왕비의숙소를전혀알수없다 고차분하게답변했다. 사바찐의답변에도불구하고일본자객은왕비의숙소를가리킬것을강요할속셈으로곤령합으로사바찐을끌고갔다. 그때멀지않은곳에서현장지휘자오카모토가보였다. 오카모토는여기서벌어진상황에주목하면서사바찐에게다가왔다. 일본자객은공손한태도를보이며사바찐과사바찐을알아본한국인을손짓하면서일본말로오카모토에게뭐라고얘기하기시작했다. 그들의말을듣고난후오카모토는엄한목소리로사바찐에게말했다. 우리는왕비를찾지못했소. 당신은왕비가어디있는지알고있을테니, 왕비가어디에숨었는지우리에게가리키시오. 순간적으로사바찐은일본자객이자신을손짓할때가장적절한답변이무엇일까를고민했다. 사바찐은자신에게왕비의소재를묻는것의부당성을설명하는것이최선이라고생각했다. 사바찐은오카모토에게한국의관습과법에따라왕비의얼굴뿐만아니라왕비의숙소를전혀알수없다고또다시반복했다. 다행히오카모토는사바찐의변명을받아들였고, 자신의부하들에게사바찐을놓아줄것을명령했다. 그런데사바찐을알아본그한국인은끈질기게오카모토에게뭔가를설득시키려고애썼다. 그한국인은사바찐이풀려난다면사바찐을고발한자신에게닥칠혹시모르는불이익을생각했던것같다. 사바찐은곤령합의유일한서양인목격자인자신을풀어주어발생하는위험을열심히설명하는것으로보였다. 이때오카모토는한국인의의견에동의하듯이긍정의의미로고개를끄덕이더니다른곳으로움직이려고했다. 숨죽이며상황을지켜본사바찐은자신이한국인의쥐덫에걸렸다고판 11) АВПРИ. Ф.150.Оп.493.Д.6.Л.75об 11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13

단했다. 사바찐은대궐을신속히빠져나가는길이생존을위한최선의방법이라고생각했다. 사바찐은옆에있던훈련대병사가말리는것을뿌리치며재빨리오카모토에게다가갔다. 그리고사바찐은 그가자신을보호해주겠다 고말한것을상기시켰다. 당신과같은신사들은자신의말에항상책임을진다 며오카모토를추켜세웠다. 그는 끝까지친절을베풀어자신을보호해주겠다 는약속을지켜달라고오카모토에게애원했다. 사바찐은 자신이궁궐에서나가는것을호위해줄군인을붙여달라 고부탁했다. 새벽 5시 45분오카모토는훈련대군인 2명에게사바찐을곤령합에서데리고나갈것을명령했다. 사바찐을알아본한국인도오카모토의결정에불만을표시했지만사바찐과함께출발했다. 한국인은인적이드문궁궐뒤쪽인복수당 ( 福綏堂 ) 출입구로유도하면서사바찐에게앞장설것을명령했다. 앞서서걸어가던사바찐은곤령합에서장안당으로가는자유로운길이있음에도불구하고인적이드문복수당뒤쪽으로이동하는것에대해서의심을품게되었다. 더구나사바찐은한국인이훈련대병사에게몰래귓속말로속삭이는것을느꼈다. 곤령합을벗어나복수당을돌아가는과정에서사바찐은훈련대병사가자신보다조금앞에서서걸어갈것을제안했다. 훈련대병사가자신의제안을쉽게받아들이지않을것이라고예상했기때문에사바찐은다시한번완강하게주장하였고관철시켰다. 일본자객으로부터벗어나자사바찐은극단의상황에서자신을방어할수있다는용기를갖게되었다. 사바찐은아주위험한상황을벗어났지만혹시모르는위험을대비해야한다고생각했다. 그래서사바찐은불안한태도를버리고당당한모습을보여주려고노력했다. 공격적인모습을보이지않으려고의식적으로팔짱을낀채걸어갔다. 사바찐은관문각을거쳐장안당을지나면서일본군인과장교, 한국관료들을목격할수있었다. 12) 대략 8~10명의일본장교가 100~150 명정도의일본군대를지휘했다. 사바찐은한국관료가장안당에집결해있는것을보면서고종이여기에있을것이라고추측했다. 사바찐은장안당을거처 6시에대궐남문인광화문 을통과했다. 12) АВПРИ. Ф.150.Оп.493.Д.6.Л.75об 명성황후국장 2. 죽음의그림자 결국사바찐은건청궁의정황을상세하게증언했지만왕비의암살과정을목격하지못했다고보고서를작성했다. 사바찐은을미사변관련하여증언뿐만아니라보고서까지작성했다. 사바찐은을미사변직후 10월 8일러시아공사베베르에게사건에관해증언했다. 또한사바찐은즈프주재러시아부영사찜첸꼬의권유로 10월 30일을미사변의보고서를작성했고, 북경주재공사에게자신의보고서를제출할것을요청했다. 당시사바찐은서울주재독일영사를비롯하여일부외국인들이보고서를작성해달라는부탁을받았지만모두거절했다. 그런데사바찐의증언과보고서에서중요한사실을은폐한의혹이제기되었다. 우선사바찐은당일사건을둘러싼인물의이름을구체적으로언급하지않았다. 그래서주한러시아공사베베르 (К.И. Вебер) 와즈프주재러시아부영사찜첸꼬 (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 는사바찐에게을미사변에가담한일본인의이름을강하게추궁했다. 두사람은사바찐이더이상의정보를제공하지않자사바찐에대한의혹을품었다. 주한러시아공사베베르는외교단회의에서현장의유일한목격자사바찐을간접적으로노출시켰다. 이로인해사바찐은자신에게 가장참혹한 결과가닥쳐올것을직감했다. 사바찐은증언공개로자신의목숨이더욱위험하다고판단했다. 한국에거주하는일본인및일본의지원을받고있는한국관료등은을미사변현장에서사바찐이더많은사실을목격했을가능성에대해서의심했다. 이러한의심때문에사바찐은자신의암살위협에시달렸다. 실제 10월 8일저녁 1명의유럽인과 2명의한국인은사건의현장을목격한사바찐이암살될가능성이매우높다고경고했다. 왜냐하면사바찐은대질신문을통해서을미사변에관련된일본인과한국인을알아볼수있기때문이었다. 그날이후암살의위험때문에사바찐은밤에잠을잘수없었다. 또한사바찐은가족의안전을위해서저녁마다집을떠나야했다. 사바찐은 10월 9일한국내부협판유길준이자신을한국내부의고문관으로제안하자더욱불안함을느꼈다. 사바찐은고문관의제안을을미사변이후출범한내각이자신을위험한존재로인식한증거라고판단했다. 이런상황에서일본공사관은러시아공사관에書記官스기무라 ( 杉村濬 ) 를파견하여사바찐의증언을확인하겠다고제안했다. 사바찐은사건현장의내용을사건에가담한스기무라에게증언한다는사실에소름이끼쳤다. 11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15

한국정부와일본공사관이점점압박하자사바찐은러시아공사베베르에게각종조언을구했다. 그런데베베르는사바찐의증언에서구체적인가담자의성명이나오지않자그를의심하기시작했다. 베베르는오히려서기관슈떼인이있는자리에서사바찐이자신이알고있는모든것을자신에게전달하지않았다고힐책했다. 더구나사바찐은내부고문관의제안에대해서베베르에게조언을구했지만스스로결정할문제라는원칙적인답변만들었다. 그런데오카모토가왕비를살해하는상황에서사바찐을보호한이유는무엇일까? 사바찐은정력적이었지만한편으로신중한성격을동시에갖고있었다. 사바찐은삼국간섭이후 러시아공사베베르부인의자매인존타크와왕비와의친분이주한일본인및일본과연대하는한국인의분노를머리끝까지자극했다 고생각했다. 사바찐은외교적수완이전혀없는존타크와의친밀한관계가왕비에게매우위험한일이라고판단했다. 사바찐은한국에서러시아가일본을자극하는행동에대해서비판적인시각을견지했다. 이러한사바찐의중립적인태도는일본인에게사바찐에대한반감을막을수있는요인으로작용했던것으로보인다. 당시사바찐은 10년이상한국에서생활했기때문에서울과인천거주외국인과의친분관계가두터웠다. 그런배경으로을미사변전날출근할때중국인친구는사바찐의출근을저지했고, 을미사변직후유럽인친구는사바찐에게암살위험을경고했다. 한국군부고문관으로경복궁을출입한오카모토는 건축사이자궁궐감시자 라는사바찐의신분을확인한순간, 사바찐의존재를쉽게무시하기어려웠을것이다. 또한일본인이러시아인을살해한다면러시아와일본의외교적파장이발생할수도있었다. 그만큼사바찐을살해했을때미치는파장은한국뿐만아니라러시아와일본의외교관계에커다란악영향을주었을것이다. 그렇지만사바찐의중립적인태도, 외교적파장등을의식해서사바찐을보호했다고단정하기는어렵다. 당시서울거주일본인과한국인일부는사바찐이 더많은사실 을목격했을가능성에대해서의심했다. 더많은사실 이란무엇일까? 사바찐에따르면새벽 5시 45분건청궁을출발한사바찐은정동소재러시아공사관에 6시 30분도착해서베베르공사와슈테인서기관에게자신이목격한것을증언했다. 아무리느린걸음으로건청궁에서광화문까지걸어도 15분, 광화문에서정동러시아공사관까지 15분정도가소요되었다. 생명의위협을느끼던사바찐이발걸음을늦췄을가능성도희박하다. 사바찐은새벽 5시 45분이아니라 6시건청궁을출발했을가능성이높다. 5시 45분에서 6시사이는왕비가암살되었던시점이었다. 또다른사실은오카모토가사바찐의변명을너무쉽게믿었고, 유럽인사바찐을곤령합현장에방치했다는점이다. 사바찐의증언과보고서, 러시아와일본외교문서등을살펴보면사바찐이일본인에의해건청궁내부에서구금되었다는기록은존재하지않는다. 두사람사이 에어떤합의가존재했음에틀림없다. 사실사바찐이그토록감추려고했던인물은일본자객의총지휘자인오카모토였다. 사바찐은오카모토가드러나면자신과오카모토와의의혹이제기될것으로판단했던것으로보인다. 그래서사바찐은베베르의추궁과힐책에도끝까지침묵했다. 당일사바찐의행적에관한주요한기록이일부남아있다. 서울한성신보편집장고바야카와 ( 小早川秀雄 ) 는 칼날이번득이고마당안팎을자객들이우왕좌왕할때 러시아인사바찐이현장을목격했다고기록했다. 우치다 ( 內田定槌 ) 영사는 벌써해가뜬상황 에서미국인다이장군을목격했고 다이와함께왕궁안에숙직했던러시아인사바찐도역시숨어서이를방관하고있었다 고기록했다. 당시공식적인일출시간은 6시 34분이었고, 해가뜰시간은아무리빨라도 6시이전으로볼수없다. 고등재판소는사바찐의기록을인용하면서 사바찐의보고에도일렀으되, 일본사관들이전정에모이어일본자객들이모든일을완전히지을줄을이미알았다하였고, 또일렀으되, 자객이왕후를해할때에일병이전각을환위하여전문을파수했다하고, 그자객이각처에찾더니... 라고기록했다. 이기록을살펴보면사바찐은왕비가암살될시각인 5시 50분전후에현장에있었음에틀림없다. 사건의현장에서사바찐과오카모토는어떤합의를했을까? 아마도그것은사바찐의생명을구해주는대신에오카모토를비롯한일본자객의폭력과살해에관해침묵을지켜주는조건이었을것이다. 사바찐은을미사변에관한자신의보고서에서오카모토를 매우고상한외모 단정한양복차림 당신과같은신사 등으로폭도가아닌신사로묘사했다. 결국사바찐은자신의보고서에서자신의목숨을구해준오카모토의이름을끝까지언급하지않았고, 왕비를비롯한궁녀의살해를증언하지않았다. 사바찐은베베르와의불편한관계속에서더이상러시아공사관이자신을보호해줄수없다는사실을인식했다. 사바찐은자신의보고서에서과거자신에대한공사관의부당한태도를언급하면서베베르의행위를간접적으로비난했다. 사바찐은공사관으로부터자신에게적당한직장을소개할수없다는통고를받았고, 러시아공사관건축에관여한자신의인건비 7% 를공사관에게지불하지않았던사실도기록했다. 신경이더욱예민해진사바찐은이러다가암살당할지도모른다는공포감에사로잡혔다. 사바찐은을미사변조사를위한특별위원회의심리를피하고, 베베르와의불편한관계를해소하기위해서는한국을떠나는것이최선의선택이라고판단했다. 따라서사바찐은제물포에서포함까레이쯔 (Кореец) 를타고 10월 11일즈프 ( 芝罘 ) 에도착했다. 사바찐은즈프의시웨 11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7. 명성황후와을미사변 117

( シ ヴエ, 玺悦 ) 호텔에머물면서러시아부영사찜첸꼬 (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 이외에는아무도면회하지않았고, 을미사변의보고서를작성하면서호텔의방안에틀어박혔다. 사바찐은 10월 30일러시아부영사에게자신의보고서를전달하면서북경주재러시아공사까쁘니스트 (Д.А. Капнист) 의초청으로북경으로출발했다. 결국을미사변의목격자사바찐은한국인과일본인의암살위협에시달렸고, 주한러시아공사관의보호마저도받을수없었다. 주한러시아공사관은사바찐의증언을기초로일본의책임론을부각시켜한국에서외교적영향력을강화하려고노력했다. 주한일본공사관과김홍집내각은을미사변의진실을은폐하기위해서사바찐을회유하려고시도했다. 을미사변의진실을둘러싼각각의이해관계가첨예해지자사바찐은자신의중립적인태도를더이상유지할수없었다. 사바찐은한반도를둘러싼복잡한열강의외교관계에서한인간의생존방법이무엇일까를고민했던것으로보인다. 한쪽에기울어진선택이단기간에는도움이되지만장기적으로어려움을줄수있기때문이었다. 환영받지못한목격자사바찐은자신의생명과이익을지키기위해서외국으로도피하는길을선택했다. 한인간의선택과는달리한국 일본 러시아정부는러일전쟁직전까지명성황후암살의배후논쟁을끊임없이진행했다.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이상경 kaist 대학교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이상경 kaist 대학교 1. 머리말 나혜석 ( 羅蕙錫, 1896~1948) 은근대최초의여성화가일뿐만아니라빼어난단편소설과에세이를통해여성적글쓰기를실천한작가이고여성해방론자이다. 최초로유화를배운여성으로서서울에서가진개인전시회는조선최초의유화전시회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입선, 특선등을했고, 제국미술전람회에도입선하는등유화가로서이름이높았다. 미술전람회에서입상을하고몇차례의개인전시회를열었으며한때는여성미술학사를세워여성들의미술교육에도힘썼다. 여성으로서스케치여행을다니고전람회에출품하는행위자체도근대적화가의면모를보이는것이다. 또한나혜석은여성도남성과마찬가지로사람이라고하는근대적인여성의자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21

아인식을바탕으로여성이받고있는사회적억압을폭로하고, 여성도교육을통해합리적 이성과주체성을가지고제도관습의변화를이루어야한다는계몽주의의페미니즘을주장 하였고 1919 년 3.1 운동에여성들이참여하는데적극활동했다. 1927 년남편과함께구미일 주여행길에올라파리에서 1 년정도유화공부를하던중스캔들에휘말렸으며 1931 년에는 변호사인남편과이혼한뒤고루한인습에지배받는남편과사회를고발하는 이혼고백서 (1934) 를발표하여사회의주목을받았다. 이후사회의냉대에쓸쓸한생활을하면서신경쇠 약과반신불수의몸이되어서울의자혜병원무연고자병동에서홀로눈을감았다. 당시에는유별났던연애와결혼그리고이혼사건의주인공으로서사람들의입방아에오르 내린 경조부박 한신여성의전범으로비난을받았지만최근에는그런사건의주인공이될수 밖에없었던운명, 즉 자기를찾는과정 에서겪은고투와혈전은개인의실패를넘어서서신 여성이감당해야했던한시대의일그러진거울로부각되고있다. 여성은아버지나남편에게 종속된인형이아니라주체적인인간이라는것이나혜석의일생과예술활동을관통한주제 였다. 나혜석의목판화 저것이무엇인고, 신여자 2, 1920.4.> 나혜석의목판화 개척자, 개벽 1921.7. 2. 인형이되기를거부한삶 1) 개명관료의딸로서, 동경유학 나혜석은경기도수원의부유한집안에서태어났다. 아버지는한일합방전후에는용인과 시흥군수를지낸개명관료였다. 그의형제들은일찍부터신교육을받았고, 나혜석도여동생 과함께 1910 년진명여학교에입학해서 1913 년우등으로졸업했다. 졸업한뒤오빠나경석 의주선으로일본으로가서도쿄에있는사립여자미술학교에입학했다. 도쿄의조선유학생 사회에서나혜석은당시로서는희귀한존재인여성화가로서뿐만아니라여성문인으로서도 빛을발했다.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나혜석은성적이매우좋았고특히실기부문에서그러 하였다. 또한나혜석은 1914 년부터재일본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의기관지 학지광 에여자 도인간임을스스로깨달아야한다는계몽의논설을발표하기시작했다. 미술학교 2 학년을마친뒤귀향했을때, 아버지가명문가의아들과결혼할것을강요하여 학비를주지않자, 나혜석은이를모면하기위해학교를휴학하고여주에서 1 년간교사로일 하여학비를모은후다시복학했다. 문학과미술의두방면으로활동하면서나혜석은최승구, 이광수, 염상섭등지식청년들과 교유했다. 그중근대시의개척자격인최승구와사랑에빠져결혼을약속하였으나, 최승구는 이미조혼한상태였고학비문제도있어번민하다가병에걸려귀향했다. 최승구가죽기전인 1915 년말무렵, 일본에있던나혜석은최승구의형으로부터전보를받고고흥으로가서열 흘동안병구완을한뒤도쿄로돌아왔다. 나혜석이돌아온지 5 일만에사망소식을알리는 전보를받았다. 애인의죽음으로나혜석은일시발광상태에까지갔으며, 자신의공부욕심으 로애인을옆에서간호하지못해죽게만들었 다고괴로워했다. 1918 년에는도쿄여자친목회가낸 여자계 에구여성을설득하여신여성의각성된삶의 방식에동의하게만드는실천적삶을그린단 편소설 경희 를발표했다. 같은시기남성작 가의많은작품은자신의선택에의한자유연 애와부모로부터강요된조혼사이에서갈등하 는청춘남녀의연애담이주를이루고있었고 나혜석이최승구와의일을쓴수필 영원히잊어주시오, 월간매신 1934.3. 12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23

그갈등의해결은절망적인현실도피거나관념적초월이었을뿐현실의벽에진지하게대면한경우는드물었다. 이에비한다면 경희 는문제제기와갈등해결의현실성과인물묘사의생생함에서 1910년대단편소설중가장우수하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2) 결혼, 화가와작가, 그리고어머니로서 1918년 3월졸업후귀국한나혜석은김마리아, 황애시덕과함께 1919년 3 1 운동을여성층에확산시키는데적극활동하다가검거되어다섯달간옥고를치르고나왔다. 예술과생활의동반자로함께하기를꿈꾸었던최승구가죽은뒤나혜석은 1920년 4월예술을이해하지는못하지만서양화가의남편되기를기뻐하고적극적으로후원하겠다고나선김우영 ( 靑邱金雨英 ) 과결혼했다. 신혼여행길에나혜석은남편과함께자신의첫사랑인최승구의무덤을찾아가서비석을세워주었다. 으로문학운동에도힘썼다. 이시기나혜석은한시대의청년지식인이자화가, 작가로서, 그리고여성으로서자신이서있는자리를인식하고이를작품행동으로실천하고자노력하는예술가로활동을시작했다. 1921년 4월에는만삭의몸으로서울에서는처음으로첫유화개인전을개최하여장안의화제를모았다. 나혜석보다조금앞서유화를배워온남성화가들보다나혜석의활동은매우적극적이고지속적이었다. 1921년 9월만주안동현부영사로부임하는남편을따라안동현으로이주해서안정된생활을하면서나혜석은 1922년부터시작된조선미술전람회에매년출품입선하였고 1926년에는 천후궁 이특선당선되는등으로 화가나혜석의황금시대 를구가했다. 그림에대한나혜석의자신감과열정을보여주는글한대목을보겠다. 우리는벌써서양류의그림을흉내낼때가아니요, 다만서양의화구와필을사용하고서양의화포를사용하므로우리는이미그묘법이라든지용구에대한선택이있는동시에향토라든지국민성을통한개성의표현은순연한서양의풍과반드시달라야할조선특수의표현력을가지지아니하면안될것이다. ( 나혜석, 일년만에본경성의잡감, 개벽, 1924. 7.) 한집살림살이를민첩하게해놓고남은시간을이용하는것을반대할사람은없을것이외다. 나는결코가사를범연히하고그림을그려온일은없었습니다. 내몸에비단옷을입어본일이없었고 1분이라도놀아본일이없었습니다. 그러므로내게제일귀중한것이돈과시간이었습니다. (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8~9.) 이시기까지나혜석의유화는그가도쿄여자미술학교시절접한인상주의화풍의풍경화가주였다. 한편으로는여성의각성을촉구하는논설과자신의결혼생활과내면심리를솔직히드러내면서여성의자아각성과권리를주장하는글들을썼다. 특히 모( 母 ) 된감상기 (1923) 와같은글은모성애가저절로샘솟아오르는것은아니었다는자신의여성으로서의경험에근거하여모성의신화를깨뜨리는획기적인글쓰기의시도였다. 나혜석의결혼식, 1920.4.10. 정동예배당 결혼직후의나혜석부부 일본유학에서돌아와 1921년 9월만주안동현 ( 지금중국의丹東市 ) 으로이주하기전까지서울에서살았던 3년남짓의기간동안나혜석은신문과잡지에만평형식의그림과목판화를발표했다. 이들작품에는신 구여성의고달픈일상에대한연민과 3.1 운동이후본격적으로전개되기시작하는민중운동의열기가담겨있었다. 또한잡지 신여자 와 폐허 의동인 1) 이는우리나라서양화전시회로서는평양에서열린김관호의전람회에이어두번째, 서울에서는처음으로열린유화개인전이었다. 그림 70 여점이전시되었고높은값에작품들이팔렸다. 12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25

3) 구미여행과이혼 1927 년 6 월부터 1929 년 2 월의 1 년반에걸쳐나혜석은젖먹이를포함하여 3 명의아이들 을칠순의시어머니에게맡기고남편과함께유럽과미국을여행했다. 부산을출발하여철도 로시베리아를횡단하고파리에서머무르며유럽을여행한뒤대서양을건너미국을횡단하 고태평양을건너돌아오는장정이었다. 여행기간동안나혜석은각국의미술관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서양화의명작들을감상하는데힘을썼고특히남편김우영이독일과영국에 서공부하는동안자신은파리의화실에다니면서독창적인미술세계를구축해야겠다는열 망과자신감을가지게되었다. 또한각국의여성들의삶과조선여성의삶을비교하면서여성 운동에대해서도매우적극적으로생각하게되었다. 이여행은나혜석인생의절정기였으나그절정에서파탄이준비되고있었다. 1927 년파리 에서그녀는유학생인안재학, 최근우, 이종우등을만나고영친왕도만났지만, 같은해 10 월 한국유학생들이주최한환영회에서처음최린을만났 다. 천도교도령 ( 道領 ) 으로 1926 년구미여행길에나 서미국을거쳐파리에도착한최린 ( 崔麟 ) 을만나함 께파리관광을다니고예술을논하면서나혜석은예 술과일상의삶을함께할수있는새로운가능성을보 았다. 1929 년구미여행에서돌아온후김우영이실 직상태가되어경제적으로힘든상황에서나혜석은 부산동래시집에서생활하였다. 역시경제적으로궁 핍해진시삼촌가족들이한집에서살게되고과부된 시누이까지합류하면서시집살이의갈등이커졌다. 그와중에나혜석이최린에게보낸편지가알려지면 서과거파리에서의최린과의관계가새삼스럽게문 제가되었다. 그때까지관대했던남편김우영은완강 하게이혼을요구했다. 이혼하지않으면간통죄로고 소하겠다는위협을받은나혜석은결국 1930 년 10 월 이혼서류에도장을찍고네아이와모든세간을둔채 시집에서나와야했다. 이혼과함께어머니의모든친 권이박탈되고돈한푼없이쫓겨나게되는조선의가 족제도앞에나혜석은무력했고또분노를느꼈다. 1930 년무렵, 이혼직전아이들과함께한마지막사진 제 11 회선전 (1932.6) 출품작과함께 이러한불행은다른한편으로는일상의가사노동에서벗어나예술에전념할수있는기회를제공하였다. 이혼직후인 1931년제10회조선미전에 정원 이특선으로뽑히고, 같은해도쿄의제국미술원전람회에역시 정원 이입선하였다. 이에용기를얻어화가로서의생활에전념하고자했으나 1932년여름애써그린그림이불에타는사고가나고 1933년제12회조선미술전람회에낙선하는것을고비로해서나혜석은그림보다글에더많이노력을기울이고글로써더많이대중들에게주목을받게되었다. 유럽과미국을여행하면서본유명한그림들에대한자세한감상문을썼고, 각국의일상생활특히여성들의지위와생활방식에관심을기울여남성과여성의인격적관계에특별히관심을표명하면서시험결혼의합리성을논하고탁아소의필요를역설하였다. 1934년여성의일방적인희생을강요하는봉건적인습에지배받는남편과조선사회를고발하는 이혼고백장 을발표하고최린을상대로위자료청구소송을내면서사회적으로크게비난을받게되었다. 간통죄로고소당할위기에몰려나혜석에게이혼을종용했던최린은정작이혼하고나서생계가어려울지경 이된나혜석을외면했고, 이에분노한나혜석은최린을고소하기에이르렀다. 이혼후에 나혜석의최린제소사건을보도한 동아일보 1934.9.20. 오히려금욕생활을하고있는자신의경험으로부터정조란개인의선택의문제이지강요할것은아니라고정조관념의해체를주장하는글 신생활에들면서 를발표하여사회에충격을주었다. 한여성을파멸로몰아넣은김우영과최린, 그리고그들남성이멀쩡하게행세하는사회에대한항의와무반성적으로받아들여지고있는인습에대한신랄한비판은당시사회의통념을넘어서는것으로큰물의를일으켰다. 최린에게서약간의위자료를받고고소는취하했으나 1935년에연전람회에대한조선사회의반응은차가왔고, 사회의냉대속에서경제적으로궁핍하고쓸쓸한생활을하면서나혜석의심신은서서히병들어갔다. 126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27

4) 쓸쓸한죽음 1937년무렵부터해방되기직전까지나혜석은충남예산의수덕여관에몸을붙이고있었던것으로전해진다. 나혜석과함께신여성을대표한김일엽이비구니가되어수행하고있는수덕사아래의수덕여관에서거동이불편한몸으로끊임없이그림을그렸으며, 김일엽이불문에귀의하기를권했으나, 나혜석은 유명한중이두사람이나날것이싫다 며거부했다고한다 ( 김일엽, 1974 上 : 297). 이혼한나혜석에게가장큰고통은사랑하는아이들을보지못하는것이었다. 1940년 9월김우영이총독부참여관 ( 參與官 ) 으로승진하여충청남도산업부장으로서 1943년까지대전에서살았던시기에나혜석은자식이보고싶어몰래아이들이다니는학교로찾아갔지만아버지의가족들로부터어머니에대한험담을들으며자란자식들은남루한몰골로찾아온어머니를반기지않았고, 전남편김우영은경찰의힘을빌어나혜석이아이들을만나는것을막았다. 이혼한여성은재산을나누어받지도못하고자식에대해친권도전혀행사할수없게하는불합리한제도와공권력까지사적으로동원할수있는남성중심의권력은나혜석의심신을병들게했다. 신경쇠약과반신불수의몸이된나혜석은어느곳에도안착하지못했다. 심신이온전하지못한그를감당하기힘들어했던친지들은해방후서울의한양로원에나혜석을맡겼으나그는걸핏하면몰래빠져나왔다. 아이들이보고싶어서였다고한다. 여행을떠나기위해짐을쌀때면늘기운이솟아오른다고했던나혜석은어느날양로원을나선뒤종적이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서울의시립자제원무연고자병동에서홀로눈을감았다. 3. 삶과글읽기 : 오해에서이해로 1) 페미니즘선언나혜석이생각한이상적여성은합리적이성에따라행동하는열정을가진인간이다. 나혜석은최초로발표한글 이상적부인 (1914) 에서, 습관에따라세속적본분인현모양처를이상으로정할것은아니라고말했다. 나혜석이살았던시대여성들에게요구된규범은겨우 삼종지도 를벗어난 현모양처 론이었다. 여자는아버지와남편과자식을따라야한다는삼종 지도는한개체로서의여성의존재를전혀인정하지않는봉건적규범이었다. 그에비하면계몽기에주창된현모양처론은여성도국민의한사람으로서근대국민의어머니와아내로서의역할을잘할수있어야하므로여성에게도교육이필요하다는주장을담고있는점에서는근대적인것이었다. 그러나자아와개성에눈뜨기시작한여성들에게여성의역할을가정안에묶어두는현모양처론은새로운굴레가되었다. 그래서나혜석은현모양처를내세우는것은교육가들이상업적으로내세우는것에불과하며, 온양유순이란것도여자를노예로만들기위한것에지나지않는다고비판했다. 나아가 잡감-K언니에게여 ( 與 ) 함 (1917) 에서는그때까지여성에게 미덕 이라고강요되어온, 빙긋웃고, 살짝돌아서며말안하고, 생각이없는것은허구이며, 오히려비난을감수하더라도그런미덕이라하는것을거스르고나아가는것이자각한여성의임무임을힘주어강조했다. 그러므로조선여성의선각자는여자가너무설친다는욕을두려워하거나여자답게안존하다는칭찬을듣고싶어서여성이해야할사업을못해서는안된다고, 여성도사람이될것을주장했다. 탐험하는자가없으면그길은영원히못갈것이오. 우리가욕심을내지아니하면우리자손들을무엇을주어살리잔말이오? 우리가비난을받지아니하면우리의역사를무엇으로꾸미잔말이오? 다행히우리조선여자중에누구라도가치있는욕을먹는자가있다하면우리는안심이오. ( 잡감-K언니에게여 ( 與 ) 함, 학지광 1917.7.) 1918년에는도쿄여자친목회가낸 여자계 에구여성을설득하여신여성의각성된삶의방식에동의하게만드는실천적삶을그린단편소설 경희 를발표했다. 이소설에서그녀는경희라는신여성이봉건적인인습과투쟁을벌이는과정을경쾌하게묘사했다. 경희는결혼이자신의선택임을분명히하고그선택에따르는곤란도자기몫임을잘인식한다. 경희도사람이다. 그다음에는여자다. 그러면여자라는것보다먼저사람이다. (...)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보이지않는험한길을찾지않으면누구더러찾으라하리! 산정에올라서서내다보는것도사람이할것이다. ( 소설 경희 중 ) 그녀에따르면봉건적인인습은아버지로대표되는완고한남성뿐만아니라봉건적관념에깊게물든여성들속에도있다. 이소설은섣불리남성들에게비난과비판의칼날을들이대는것이아니라여성에대한여성들의적대적오해와, 의식이앞선여성이범하기쉬운관념적선진성을비판하는데힘을기울였다. 128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29

것인지그렇다면왜자기에게는그것이자연스럽게샘솟아오르지않았는지등을생각하기에이르렀다. 그래서나혜석은모성이라는것이그렇게모든여성에게태어날때부터있는것이아니라사회적으로구성되고교육되는관념이며, 자식을기르는동안에가지게되는정이라고규정하였다. 더욱아들을귀하게여기고딸을천하게여기는풍습은모성이그렇게생래적이고절대적인것일수없다는중요한증거라고보았다. 모성을절대시하고신비화하는수많은전래의언설들을여성으로서의자신의경험을근거로단호하게부정할수있었고남존여비의인습까지가차없이비판할수있었다. 그리고여성의육체를가진존재로서다른여성들에게자매애를느끼게되었다. 나혜석, 이상적부인, 학지광 1914.12. 나혜석, 경희, 여자계 1918.3. 2) 결혼과모성의신화해체신혼여행길에나혜석은자신의첫사랑이었던최승구의무덤에가서남편과함께비석을세워주는파격적인모습을보여주었으니, 이는과거의감정을정리하고새로운생활을준비하려는나혜석나름의독특한의식의소산이었다. 이과정을소설화한것이염상섭의 너희는무엇을얻었느냐 이다. 결혼후안정된생활속에서예술가로서의활동을본격적으로펼치려고할때첫딸을낳아키워야했던여성으로서나혜석은그러한어머니노릇이여성에게야기한고통을 모( 母 ) 된감상기 ( 동명 1923년 1월 ) 를통해생생히묘사하였다. 기대하지않았던임신이었고아이는예술가로서의앞길을가로막는장애물로여겨졌으며출산과정은매우고통스러웠다. 아기가태어나서도육아의부담으로편안한잠을잘수없는것이너무괴로워서임신기간중이나출산후에도자식에대해마음에서우러나오는애정을느끼지는못했다. 아이가돌이지난뒤에자신의 어머니되기 의과정과고통을되돌아본나혜석은 자식은모체의살점을떼어가는악마 라고극언하였다. 나는꼭믿는다. 내 모( 母 ) 된감상기 가일부의어머니중에공명할자가있는줄믿는다. 만일이것을부인하는어머니가있다하면불원간 ( 不遠間 ) 그의마음의눈이떠지는동시에불가피할필연적동감이있을줄믿는다. 그리고나는꼭있기를바란다. 이런경험이있어야만우리는꼭단단히살아갈길이나설줄안다. 부디있기를바란다. 아마이인식이나혜석으로하여금이후여성으로서겪은연애, 결혼, 출산, 육아, 이혼그리고 신생활 에이르는개인적인경험들을공공의담론으로만들어낸근거가되었을것이다. 아무도드러내놓고말하지못하지만단지여성으로태어났다는이유로해서겪는말하기어려운감정과고통들을앞장서서말함으로써다른여성들의입을열게하는역할을나혜석은 선구자 로서기꺼이받아들인것이다. 세인들은항용, 모친의애 ( 愛 ) 라는것은처음부터어머니된자마음속에구비하여있는것같이말하나, 나는도무지그렇게생각이들지않았다. 혹있다하면제2차부터모될때야있을수있다. 즉경험과시간을경 ( 經 ) 하여야만있는듯싶다. ( ) 솟는정 이라는것은순결성, 즉자연성이아니오, 가연성이라할수있다. 이는종종있는유모에맡겨포육게한자식에게는별로어머니의사랑이그다지솟지않는것을보면알수있다. < 나혜석, 모 ( 母 ) 된감상기, 동명 1923.1.1.~21. (4 회연재 ) 이런진솔한자기분석을바탕으로나혜석은과연무조건적인사랑이라는 모성 이가능한 130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31

3) 이혼과정조관념의해체이혼이후나혜석은두남녀의연애, 결혼, 이혼과정의보고서일뿐만아니라이혼시아내의재산분할권과자식에대한친권행사를인정하지않는제도에대한고발의의미를가진 이혼고백장 (1934년 8~9월 ) 과결혼생활을청산하고독신으로사는여성의입장에서정조와성욕, 모성문제를제기한 신생활에들면서 (1935년 2월 ) 를발표했다. 이혼고백장 이발표되었을때사람들은한가정안에서남자와여자사이에있었던일을만천하에공포한다는사실자체에서일차적으로충격을받았지만가장충격적인것은정조에대한남녀평등의주장이었다. 조선남성심사는이상하외다. 자기는정조관념이없으면서처에게나일반여성에게정조를요구하고또남의정조를빼앗으려고합니다. ( 중략 ) 이어이한미개명의부도덕이냐. 이어이한모순이냐. 상대자의불품행을논할진대자기자신이청백할것이당연한일이거늘남자는명목하에이성과놀고자도관계없다는당당한권리를가졌으니사회제도도제도려니와몰상식한태도에는웃음이나왔나이다. ( 중략 ) 아아, 남성은평시무사할때는여성이바치는애정을충분히향락하면서한번법률이라든가체면이라는형식적속박을받으면어제까지의방자하고향락하던자기몸을돌이켜오늘의군자가되어점잔을빼는비겁자요횡포자가아닌가. 우리여성은모두이러한남성을저주하고자하노라. 니라는것이다. 즉정조를지키느냐지키지않느냐하는것은어떤종류의음식을좋아하느냐좋아하지않느냐, 혹은그것을계속먹느냐먹지않느냐와같은 취향 의문제라는것이다. 그리고무엇보다여성도그런성욕과취향을가졌다는것을인정하라는것이다. 강제가아닌자유로운선택에의한것이라면그취향이특정한상태에게일관되든지, 여러대상에게로흩어지든지그것은다른사람이혹은사회가관여할문제가아니라는주장이다. 그래서그선택의자유가충분히주어진지점에서는새롭게정조를고수하고자하는움직임도있을수있지만, 조선사회는고수보다는자유로운선택을강조하여, 기존의도덕정조관념을해체하는것이우선적으로필요한사회라는주장이다. 이런주장을할수있었던것은그가이혼후혼자살면서결혼관계가요구하는책임과의무에서벗어나자신의감정을자유로이어디든지쏟을수있고, 특정인 ( 가령남편 ) 에게구속받지않고자유로이자신의성적욕망을표현하고구할수있게되었을때, 오히려더금욕적인생활을하게되는경험이바탕이되었다. 이는 이혼고백장 에서남녀가동등하게정조를지킬것을요구한데에서한걸음더나아간것이다. 남녀동등하게정조를지켜야한다고하든동등하게지키지않아도된다고하든, 사회적으로규범화된 정조관념 은억압성을가진다는것을간파하고정조란자발적으로선택할수있는취향 - 취미의문제이지규범화하여강제할것이아니라고하는나혜석의주장은기성의도덕관념을해체시키는매우선구적인발언이다. 신생활에들면서 에서나혜석은한걸음더나아가정조란누가누구에게강요할수없는 취미 라는주장을폈다. 정조는도덕도법률도아무것도아니요, 오직취미다. 밥먹고싶을때밥먹고, 떡먹고싶을때떡먹는것과같이임의용지 ( 任意用志 ) 로할것이요, 결코마음에구속을받을것이아니다.( 중략 ) 다만정조는그인격을통일하고생활을통일하는데필요하니비록한개인의마음은자유스럽게정조를취미화할수있으나우리는불행히나외에타인이있고생존을유지해가는생활이있다. ( 중략 ) 그러므로유래 ( 由來 ) 정조관념을여자에게한하여요구하여왔으나남자도일반일것같다. 왕왕우리는이정조를고수하기위하여나오는웃음을참고끓는피를누르고하고싶은말을다못한다. 이어이한모순이냐, 그러므로우리해방은정조의해방부터할것이니좀더정조가극도로문란해가지고다시정조를고수하는자가있어야한다.( 중략 ) 저파리와같이정조가문란한곳에도정조를고수하는남자여자가있다니그들은이것저것다맛보고난다음에다시뒷걸음치는것이다. 우리도이것저것다맛보아가지고고정 ( 固定 ) 해지는것이위험성이없고, 순서가아닌가한다.( 신생활에들면서 ) 여기서나혜석이주장하는것은자신의성적욕망에대한결정권은자기가가져야하며, 그것은취미와같은것이어서개인의선택에맡겨둘일이지도덕이나제도로강제할사항이아 4. 시대를선취한여성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나혜석은화가로서작가로서그리고사상가로서뚜렷하게자기세계를구축한여성이다. 그러나남편이아닌남자와연애를하고이혼했다고하는사생활에의해그의업적은가리워졌거나되려비난의대상이되었다. 우리근대사에오르내리는숱한남성인물들의그런경력은오히려그의 남성다움 으로은근히추켜세워지기까지하는것과는정반대의양상이었다. 1900년대이후 1980년대까지현모양처론은국가주의가지배하는시기내내한국여성에게강요되고여성자신에의해내면화된지배적규범이되었다. 국가가요구하는국민을길러내고내조하는계몽기의현모양처론은구조적으로민족주의와친연성을가질수밖에없다. 거기다조선은식민지였고나혜석이일본에서돌아온뒤얼마되지않아 3.1운동이일어났다. 민 132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33

족의독립이라는커다란명분은여성에게더욱현모양처되기를강조하게되었다. 가정의울타리에갇혀있던구여성에게민족주의의현모양처론은새로운사회적역할을부여하면서해방의작용을했다. 반면에자율적인간으로서의여성을지향하는일부신여성들에게민족주의의현모양처론은그러한생각의표현을억누르는억압의기제로작용했다. 나혜석이구미여행과자신의이혼경험으로부터 1930년대에여성의성적자기결정권을적극적으로주장한것은시대를너무앞서간것이었다. 당시나혜석의동료였던여성들은대부분기독교여성운동쪽에가있고서서히친일의길로접어들고있었으며그렇지않더라도사회적비난이두려워섣불리나혜석의주장이나행동에동감을표할수없는상태였다. 그렇다고이런면에서상대적으로자유로운사회주의적여성운동에나혜석이보조를맞출수도없었다. 밑바닥에서시작하기에는나혜석은 경력이너무고급 이었다. 규범에서벗어나주체성을내세운다든지성적자유를구가하는신여성에대한비난의소리를귀에못이박히도록들은나혜석의후배세대, 1930년대의여성들은자기검열을통해현모양처의외관을갖추면서내면적인반란을꿈꾸기는했어도드러내어주장하고행동에옮기지는않았다. 이런분위기에서현모양처의규범에정면으로반기를든나혜석은사회로부터더욱고립되어풍문속에묻히게되었다. 그리고관보를통해나혜석의사망이전해졌을즈음나혜석의행복과불행에얼마만큼씩원인을제공했던남자들, 김우영, 최린, 이광수는모두반민특위의법정에서있었다. 한개인은자기가태어난시대를넘어서기힘들다. 나혜석역시근대사회로변환하는길목의조선사회에여자로태어난자신의시대적운명을넘어서기위해피투성이의싸움을치렀다. 그리고패배했다. 그러나그가죽은지반세기가지나변화한한국사회는그를치욕과풍문속에서불러내어억압에맞섰던당당한선구자로세우고있다. 우리나라여성들의사회진출이활발해지고여성해방의식이대중적으로확산되면서나혜석은시대를앞서이를선취했던화가로서, 작가로서,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여성해방론자로서다양하게조명을받고있다. 참고 : 나혜석간략연보 1896년 4월 18일경기도수원에서나주나씨나기정 ( 羅基貞 ) 과수성최씨최시의 ( 崔是議 ) 의 5남매 ( 稽錫, 弘錫, 景錫, 蕙錫, 芝錫 ) 중넷째, 딸로서는둘째로태어남. 1910년수원삼일여학교졸업, 서울진명여학교진학. 1913년둘째오빠경석의권유로일본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선과보통과 1 학년 (4년과정 ) 에입학. 1914년 12월도쿄조선인유학생잡지 학지광 3호에최초의글 이상적부인 을발표. 1915년이해 1월부터아버지의결혼강요로학교로돌아가지못하고휴학함. 아버지의엉뚱한결혼권유에맞서여주공립보통학교교원으로 1년간근무하면서돈을모음. 1916년 2월최승구사망. 1918년단편소설 경희 ( 여자계 제2호, 1918년 3월 ) 발표. 4월사립여자미술학교졸업후귀향. 단편소설 회생한손녀에게 ( 여자계 제3호, 1918년 9월 ) 발표. 1919년 3월 2일서울의신마실라 ( 이화학당교사 ), 박인덕 ( 이화학당교사 ), 신준려 ( 이화학당교사 ), 황에스터 ( 黃愛施德, 황애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학생 ), 김마리아 ( 정신여학교출신동경유학생 ) 등과이화학당지하실에서비밀회합을하고 3.1운동에여학생참가계획을추진하다가 3월 8일체포됨. 5개월간옥고를치른뒤경성지방법원의 면소및방면 결정으로 8월 4일에풀려남. 1920년 4월김우영과결혼. 1921년 3월임신 9개월의무거운몸으로경성일보사내청각에서유화개인전람회를열었다. 4월첫딸김나열출산. 9월일본외무성의관리로만주안동현부영사로부임하는남편을따라만주로이주. 1922년 6월조선총독부주최의제1회조선미술전람회유채수채화분야에출품 봄, 농가 가입선. 1923년 1월 모( 母 ) 된감상기 ( 동명 1923년 1월 1-21일 ) 발표. 6월제2회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남문 이 4등, 봉황산 이입선. 1924년 6월제3회조선미전에 추의정 4등, 초하의오전 이입선. 1925년제4회조선미전에 낭랑묘 3등입상. 1926년 1월 생활개량에대한여자의부르짖음 ( 동아일보 1926년 1월 24-30일 ) 발표. 5월제5회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 天后宮 ) 이특선. 134 제 12 기수원박물관대학 08. 나혜석, 그에대한이해와오해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