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3 4호기건설및핵폐기장설치반대운동 (1991. 6~1994. 3) 1. 울진원자력발전소건설및핵폐기장설치반대투쟁위원회 조직과 3 4호기반대운동 생존권대책위 에서는표면적으로핵발전소를반대하면서도주민회의를통하여주민보상을전제로한핵발전소후속기건설을수용한다는입장을취했으며, 그가능성이보이자시위계획을중단하였다. 그러나 1991년 6월 6일, 울진군에 2030년까지 17기의원전이건설될것이라는보도가있 자 1) 주민들의반핵운동이다시불붙기시 작하였다. 군민들은 1 2호기가들어설때에는앉아서당했지만, 이제더이상물러서지않겠다 는결의를밝히고, 각읍 면에서원전추가건설을반대하는공청회를개최하였다. 2) 이러한군민들의의사를바탕으로울진청년회의소 ( 회장주광진 ) 와후포청년회의소에서는원전의추가건설을반대하는운동을전개하기로결의하였다. 6월 29일에는원자력발전소추가건설지역으로거론되고있던근남면의근남청년회 < 사진 3-11>1991년울진군반핵운동 ( 울진버스터미널 ) ( 가칭 ) 주최로근남농협회의실에서주민 40여명이참여한가운데 산포리원전건설계획반대결의대회 가열렸다. 이런움직임에힘입어 6월말후포와울진청년회의소가중심이되어울진군의각사회단체에울진원자력발전소추가건설및핵폐기장설치반대운동을공동으로전개하자는내용으로공문을보냈다. 후포에서는 7월 2일? 후포청년회의소? 가중심이되어다른사회단체들과함께주비위원회가결성되었고, 울진에서는 7월 18일울진청년회의소를중심으로주비위원회가결성되었다. 이처럼후포면과울진읍에서결성된두주비위원회를바탕으로 7월 24일울진군의사회단체 80여개가참여한? 울진원자력발전소건설및핵폐기장설치반대투쟁위원회?( 이하? 반투위? 로줄임 ) 가결성되었다. 후포와울진의청년회의소회장이각각남부와북부지역투쟁위원장겸공동위원장을맡았다.? 반투위? 는현안인원자력발전소의추가건설반대뿐만아니라핵폐기물처분장의설치도적극적으로반대한다는의지를표명하였다. 이러한과정을거쳐원전추가건설과핵폐기물처분장건설을반대하는운동은범군민의운동으로발전하게되었다. 또한 7월 23일에는울진군의회가원전추가건설을반대하는결의안을채택하였다. 3)? 반투위? 는 8월 17일에원전반대범군민궐기대회를울진과후포에서동시에갖기로결의하였다. 궐기대회를두지역에서갖기로한것은지역간의거리가멀어많은주민들의이동에어려움이있었기때문이었다.? 반투위? 는가두방송및전단배포를통해군민궐기대회를울진군지역주민에게널리홍보하였다. 마침 8월 17일이장날이었던북부지역은울진군청앞광장에서울진청년회의소를비롯한 30여개의사회단체회원등약 3,000여명이참가한가운데, 오전 10시경부터궐기대회가열렸다. 궐기대회가진행되면서주민들의참여
는더욱늘어나 5,000 여명에이르렀다. 대회에서주민들은 울진지역에원전이무더기로 들어서 82 km에이르는동해안관광지가파괴되고, 어획량이줄어들어어민들의생계를위협 하고있다 고주장하고, 4) 다음과같은 5 개항을결의하였다. 1 우리울진지역에건설할원자력발전소건설계획을즉각취소하라. 2 이미건설이시작되고있는울진 3?4호기공사를즉각중지하라. 3 북면원자력 1?2호기에대한피해보상을확대하고피해사례를공개하라. 4 원자력발전소의안전성을믿을수없으며, 고장원인과사례를공개하고만약의사고시군민대피요령을홍보하라. 5 우리울진에는원자력발전소의추가건설과핵폐기물처분장의건설을허용할수없으며, 만약이를강행할때는어떤대상과도어떤폭력과도어떤권모술수와도군민 1인이남을때까지결사적으로투쟁할것을천명한다. 이날주민들이시위에서내건플랜카드나구호는, 안전하다홍보마라, 사고나면폐허된다, 원자력발전소못막으면울진군민다죽는다, 원전후보지즉각철회하라, 한전은어민피해보상하라, 살인광선죽음의재, 핵폐기장결사반대, 안돼안돼절대안돼 3?4 호기절대안돼, 원전은죽음이다, 조상무덤파헤치고핵쓰레기묻을텐가, 울진관광자원핵단지가웬말인가, 돈과권력에아부하는유지들은각성하라, 군민위해일한다더니원자력발전소가웬말이냐 등이었다. 궐기대회를마친뒤주민들은원전의추가건설을반대하는구호를외치며가두시위에들어갔다. 주민들은 7번국도를점거하고시위를하였다. 오후 1시경에차량위에서시위를주도하던북부지역위원장주광진이경찰의발포한최루탄으로차위에서떨어져긴급후송되자, 주민들이흥분하여경찰에게투석하는등시위가격렬하게전개되었다. 주민들은최루탄발사명령자의즉각사과및경찰병력의철수를요구하였고, 경찰쪽에서이를받아들여시위는겨우진정되었다. 시위대가시내로들어오면서일부주민들은경찰서와지역국회의원 ( 김중권 ) 집에투석하기도하였으며, 군청문을부수고군청에들어가농성을벌였다. 이날시위는다시군청앞광장으로돌아와마무리집회를가지고해산하였다. 5) 한편남부지역에서도같은날 (8월 11일 ) 오전 10시, 후포및온정, 평해, 기성면의주민들을중심으로? 울진원자력발전소건설및핵폐기장건설결사반대범군민궐기남부지역대회? 가후포의여객선터미널에서열렸다. 주민약 3,000여명이참가하였으며, 주민들은대회에서군민들이총단결하여원자력발전소추가건설계획을전면중지시키자는결의를다지며, 울진읍에서의궐기대회와같은결의문을채택하였다. 이어대회에참가한주민들은 50 여개의만장과피켓을들고 근조 ( 謹弔 ) 울진 이라고쓰여진상여를앞세우고가두행진에들어갔다. 정오쯤에는경찰의저지선을뚫고국도로진출하였다. 다시경찰과대치하던중경찰이최루탄을발사하며주민들을해산시키고자하였다. 이에주민들이격분하여돌과화염병을던지며시위가격화되어 7번국도가 6시간정도차량운행이중단되었다. 오후 6시경에울진에서빠져나온경찰의지원병력이재투입되면서주민들은해산하였다. 그러나일부주민들의산발적인시위가밤 11시 30분경까지계속될만큼이날의시위는격렬하였다. 6) 이날시위를계기로다소소원하였던? 반핵청년협의회? 와의관계도긴밀해졌다. 시위경험이없었던? 반투위? 관계자로서는재야운동의경험이있는울진군농민회나진보적인청년,
학생의협조가필요하였던것이다. 유인물의제작이나시위방법의기획등에서이들청년학생들의적극적인도움을받을수있었다. 8월 17일울진과후포에서있었던시위로주민 30여명이연행되었다. 이에 22일연행자의가족을비롯한주민 200여명이경찰서앞에서 구속자석방 과 원전반대운동탄압중지 를요구하며시위를전개하였다. 그결과주광진위원장등 4명을제외한주민들이석방되었다. 7) 이후울진? 후포청년회의소회원들은 8월 17일집회로인하여구속된후포지역주민 2명에대한석방청원가두서명활동을벌였다. 이와같이원자력발전소의건설을반대하는대규모투쟁과함께? 반투위? 대표단이상경하여원전건설관계자들에게주민들의의사를전달하였다. 9월 12일? 반투위? 대표단은동력자원부장관을면담하였다. 대표단이주민들의원전추가건설을반대하는입장을전하자, 동력자원부장관은울진군에는기존의울진원자력발전소 2기를포함하여총 6기의원자력발전소를설치할계획이며, 3?4호기는 1992년 5월에착공할예정이고산포리와직산리 2곳의예정지도국가전력수급계획에따라건설될것이라고밝혔다. 울진군민이기존원전 2 기로서도국가계획에협조했다고주장하자, 동자부장관은국가전력수급계획상어쩔수없으며, 울진군민의협조가불가피하다는말만되풀이하였다. 이에? 반투위? 는 9월 19일투쟁위원 100여명이모여총회를갖고앞으로의운동방향및운동방법에대한논의를가졌다. 이날총회에서주민들은동력자원부장관의발언으로볼때, 울진군에원자력발전소를추가로건설할것이확실하다고판단하고, 추가건설의저지를위해동원할수있는모든방법을강구하기로하였다. 주민들은매스컴을통한반대홍보, 군민총궐기집회, 학생들의등교거부등모두 8가지의투쟁방안을마련하였다. 9월 28 일에는각지역의? 반투위? 관계자 50여명이지역국회의원을비롯하여군? 도의회의원들과함께원전추가건설반대에관한간담회를가졌으나뚜렷한결론을내리지못하고, 다만책임있는정부당국자와의토론회를주선하기로하고끝을맺었다. 10월 7일에는울진의민중당지구당에서창당 1주년기념행사로개최한? 울진원전건설반대및강연회? 가있었다. 민중당정책위원장의 반핵과오늘의정치현실 이란주제로강연이이루어졌다. 강연회가끝난뒤강연회에참석했던주민 200여명은평화적인가두시위를벌이기도하였다. 10월 25일에는? 반투위? 임시회의가열려각읍? 면투쟁위원 30여명이참석한가운데, 지난 10월 11일도? 군의원 13명이동자부장관과가졌던면담의경과보고를갖고향후대책을논의하였다. 한편 1991년 11월 5일서울에서는? 전국원자력발전소핵폐기장반대대책위원회? 가결성되었고, 여기에서? 반투위? 대표로참석한? 반투위? 부위원장이이전국조직의 4인공동의장중동해권의장으로선출되었다. 1991년 11월 7일에다시? 반투위? 총회가열려향후운동의투쟁방향에대한논의가있었다. 이때일부에서울진원전 3?4호기건설은국가전력의필요성과국제간건설계약이종료된점, 그리고최근불법집단농성자에대한강경대응이라는정부방침을이유로 3?4 호기는인정하고, 5?6호기와산포리와직산리에건설될후속기는막자는주장이나왔다. 이와는달리 3?4호기부터적극대응해야 5?6호기및산포리, 직산리의후속기도막을수있으며, 그대안도받아낼수있다는주장도제기되어첨예한의견대립이있었다. 결국도? 군의회의원들이중심이되어제기한 3?4호기인정주장은설득력을잃고 3?4호기건설반대
운동을계속전개하는쪽으로결론이났다. 그러나범군민적이고장기적인운동으로추진하기위한합법적인투쟁방향조차제시하지못하는등운영의난맥상을보였으며, 남부지역위원들은거의참석하지않았다. 울진청년회의소와후포청년회의소의회장선거를통하여선임된신임회장이반핵운동에적극적으로나서지않았고, 군의회나도의원들도적극적으로가담하지않았다. 하지만? 반투위? 는총회결의에따라 11월 22일의군민궐기대회를대비하여깃발등을제작하고, 이를울진읍내와근남, 원남지역도로변건물에게양하였다. 하지만이원전반대깃발은환경미관을이유로행정당국이수거해버렸다. 11월 22일에는? 반투위? 에서개최한울진군원전건설반대 2차궐기대회가있었다. 주민 500여명이참가한가운데, 원전건설반대경과보고를겸한이날의궐기대회는옥외집회를계획하였으나집회허가가나지않아옥내행사로개최되었다. 대회를마친뒤주민들은현수막과피켓을들고실내체육관까지평화적인시가행진을끝으로자진해산하였다. 8) 11월 30일에는그동안과학기술처에서핵폐기물처분장의건설후보지선정작업과관련하여서울대에의뢰한 방사성폐기물처분장부지선정및지역지원에관한연구 의연구결과를발표하려던계획이연구발표회장 ( 서울프레스센터 ) 에몰려든후보지역의주민 60여명의저지로무산되었다. 9) 특히울진에서는이연구결과에서울진지역이제1후보지로대두될가능성이높은것으로인식하여강한거부감을가졌다. 이어 12월 4일에도과학기술처에서울진읍사무소회의실에서군민에대한원전관련설명회를가지려고계획하였으나,? 반투위? 가 12월 3일? 반투위? 의회의에서 4일군민에대한설명회를실력으로저지하려하자무기연기되었다. 1) 동아일보 1991년 6월 6일. 2)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21일. 3)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21일. 4)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18일. 5) 매일신문 1991년 8월 19, 20일 ;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20일. 6) 매일신문 1991년 8월 19, 20일. 7)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23일. 8) 중앙일보 1991년 11월 22일 ; 매일신문 1991년 11월 23일. 9) 중앙일보 1991년 12월 2일.
2. 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 8월 17일집회이후약간의소강상태를보이고있던반핵운동은다시그해 12월 28일핵폐기물처분장후보지발표로다시불붙기시작되었다. 원자력연구소부설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발표한전국의핵폐기물처분장후보지 6개가운데기성면이그하나로들어갔던것이다. 1) 따라서울진지역주민들의원자력발전소및핵폐기물처분장건설반대운동은새로운국면으로접어들었다. 핵폐기물처분장의설치를반대하는주민들의시위는발표가있은다음날인 12월 29일부터해를넘긴 1992년 1월까지연일계속되었다. 12월 29일주민 1,500여명은오후 1시부터군민회관앞에모여집회를가지고, 가두시위를벌였다. 그러나시위도중월변교에서경찰과충돌하여시위는강제해산되었으며, 주민들은천주교울진교회에서철야농성에들어갔다. 2) 30일에는다시 1,000여명의주민들이궐기대회를마치고 자손만대다죽이는핵폐기장결사반대 를외치며격렬한가두시위를전개하였다. 시위도중주민들의투석으로군청, 파출소의유리창이파손되었으며, 주민 28명이연행되었다. 3) 그리고이날밤 9시경에정전이되자, 일부주민들이한전울진변전소에화염병을던져사무실이전소되기도했다. 4) 밤 11 시에는천주교울진교회에경찰이진입하여농성중인주민들을강제해산시키고, 주민 24명을또연행해갔다. 5) 31일부터는? 반투위? 위원 3명이삭발농성을시작하였으며, 시장의부녀자들까지시위에가담하였다. 주민들은 29일과 30일의반대시위과정에서경찰의시위진압으로여러사람들이부상을당하는사태가발생하자, 핵폐기장건설계획의전면백지화와핵폐기물처분장건설의추진당국인과학기술처장관의퇴진을주장하는한편, 폭력진압의책임을물어내무부장관의퇴진과울진경찰서장의즉각파면구속을요구하였다. 해가바뀐 1992년첫날에도주민들의시위는계속되었다. 낮 12시 20분부터가두행진이있었으며, 오후 3시에다시주민 1,200여명이참가한 2차시위가있었다. 1월 2일에도오후 12시와 2시에 1,000여명의주민들이참가한두차례의가두시위가전개되었다. 6) 또한천주교안동교구사제단이경찰이성당에진입하여주민들을연행한것에대해항의하고책임자처벌을요구하는성명서를발표하였다. 7) 이어 1월 3일에도주민 600여명이참가한시위가계속되었으며, 울진군의회의원들은김진현과학기술처장관을면담하기위해상경하기도하였다. 8) 1월 4일에도주민 1,300여명이참가한가운데천주교울진교회에서집회를가지고가두행진에들어갔다. 주민들은상여와만장을앞세우고 폭력경찰물러가라, 핵폐기물처리장설치를반대한다 등을외치며울진시장, 목화예식장등시가지를돌며가두시위를벌였다. 또한기성면에서도시장공터에서궐기대회를가진뒤가두로진출하여시위를벌이다척산리농협앞에서연좌농성을벌이며경찰과대치했다. 주민들은 죽음을몰고오는핵쓰레기장설치결사반대 등의현수막과피켓등을들고 핵싫어요 라는머리띠를두른채북과꽹과리를치며가두시위를벌였다. 9) 역시다음날에도계속해서울진읍에서상여를앞세운채 2,300여명의주민이가두시위를벌였으며, 오후 4시경에초등학교앞에서화형식을가졌다. 이처럼울진에서핵폐기물처분장설치를반대하는시위가격렬하게전개되자, 과학기술처장관은주민들의동의가없다면
울진에핵폐기물처분장을설치하지않겠다고밝혔다. 10) 그러나 5일? 반투위? 는과학기술처장관의말을믿을수없으며, 이는군민들의투쟁열기를희석시키려는술책이라고주장하고, 계속적인투쟁을할것이라고밝혔다. 11) 1월 6일에는군의회에서과학기술처장관을면담한내용을보고하는성명서를발표하자,? 반투위? 는이를반박하는성명서를발표하였다. 군의원들은과학기술처장관을면담한결과, 과학기술처로부터핵폐기물처분장의후보지선정기준은 1 핵폐기물처분장을건설하려는지역의주민동의와지역개발자금을지원한다는합의가있어야하며, 2 원자력발전소가건설되어있지않는지역등이라고밝히고, 울진군은유치하려는주민들의요청이없기때문에대상지가아니라는답변을들었다고밝혔다. 그러나? 반투위? 는울진지역이핵폐기물처분장의후보지가아니라면울진지역주민들의반대운동이있기전에울진지역이후보지가아니라는점을밝혀야했음에도불구하고정부의입장표명이없었으며, 더구나주민들의반대운동이전개되고있는현재에도언급이없는것은모순된다고정부측의견해를반박하였다. 심지어군의원들이원자력발전소및핵폐기물처분장건설반대운동에소극적이고, 심지어방해만했다는사실을지적하며, 군의원의주장을일축하였다. 이어오후에는비가오는가운데천주교울진교회앞에서주민 500여명이참가한가운데규탄대회를갖고, 과학기술처장관은퇴진하라 는구호를외치며가두시위를벌였다. 12) 1월 7일에는천주교울진교회에서? 공해추방운동연합? 의장의초청강연을들은뒤안동대풍물패를앞세우고울진군청, 울진시장등을돌며, 핵폐기장결사반대, 과학기술처장관의퇴진 등을외치며시위를전개하였다. 13) 이와는달리 1월 7일후포지역에서는핵폐기물처분장건설반대운동을 30일까지조건부로연기한다는성명을발표하였다. 후포면에서도 8일궐기대회가예정되어있었으나, 이를앞두고후포면지역협의회의회의에서후포면청년회는대회의강행을주장한반면, 지역유지들은군의회의성명서를신뢰하고모든행동에심사숙고할필요가있다며궐기대회의취소를주장하였다. 결국치열한논쟁끝에일단 1월 30일까지핵폐기장반대궐기대회를유보하기로결정하였던것이다. 이에후포지역주민들은주민들의여론을무시하는처사라며반발하기도하였다. 울진지역에서는 1월 8일에도주민 500여명이참가한두차례의가두시위가계속이어졌다. 9일에는주민 1,500여명이죽변면사무소앞에서집회를가지고, 죽변수협에서죽변종고까지약 3km가두시위를벌인뒤해산하였다. 14) 이후? 반투위? 는운동을울진전지역으로확산시키기위하여각지역을번갈아가며집회를개최하였다. 1월 10일근남면에서주민 1,000여명이참가한시위가전개되었으며, 15) 11일에는원남면에서 700여명이참가한시위가있었다. 이어 1월 12일에는북면에서주민 400여명이참가한가운데집회를가진뒤울진원자력발전소까지평화적인시위를, 1월 13일에는기성면에서 3시간동안사동국도삼거리에서건설중인사동항까지가두행진을벌였다. 1월 16에는주민 1,000여명이울진군민회관앞에서방사성폐기물처리장설치반대를요구하며시위하였다. 주민들은집회를마치고울진교앞까지행진을벌인뒤국회의원의화형식을가지고자진해산했다. 16) 1월 22일에도죽변면사무소광장에서반대궐기대회가열렸다. 이때까지주민들이가진반대시위는총 21회에달하였다. 1월 25일에는주민 500여명이참가한가운데, 제22차군민궐기대회가있었다. 이날대
회는원전추가건설및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시위와관련하여사전구속영장이신청된? 반투위? 위원장 ( 주광진 ) 과부위원장 2명 ( 오계동, 임원식 ) 이 1991년 12월 29일이후그동안천주교울진교회에서해오던농성을끝내고경찰에자진출두하기에앞서마지막으로주도한것이었다. 17)? 반투위? 위원장및부위원장등 3명이경찰에자진출두하여구속된이후 1월 27일부터이들의석방운동을전개하였다. 그리고 30일까지주민들의서명을받아검찰에청원할계획으로추진되었다. 1월 28일에는? 반투위? 관계자와주민 300여명이대구지검영덕지원정문앞에서시위와관련된구속자의석방을요구하며시위를벌였다. 한편, 울진군의회는 1992년 1월 20일에동력자원부와과학기술처장관에게보내는서면질의서와대군민호소문을채택하였다. 그리고 1월 4일에과학기술처장관이울진군은핵폐기물처분장의대상이아니라는발언을군민들이믿지않고있다는점을의식하여, 다음과같은건의사항을전달하였다. 1 울진군관내에는핵폐기장이설치되지않는다는내용을공식보도해줄것 2 위 1항이어려우면정부에서발표하는선정기준 3항이외, 이미원전가동지구에는설치하지않는다는내용을언론에보도해줄것. 3 위 1?2항의실행이불가능할시는공문으로대상지가아니라는내용을본의회에회시해줄것 2월 8일에는울진원전및핵폐기장설치반대제23차군민궐기대회가주민 600여명이참가한가운데열렸다. 이날대회에는 1991년 11월 22일의집회이후군의회의원들이처음으로다시참석하여? 반투위? 와의공동투쟁을선언하고, 공동결의문을발표하였다. 1 우리울진지역에건설할 3?4호기공사를즉각중지하고, 추가발전소건설계획을전면철회하라. 2 울진을핵폐기물처분장후보지에서즉각철회하라. 3 경찰은강경진압과무차별연행에대해사과하고, 정부관련책임자는사퇴하라. 4 동력자원부, 과학기술처장관은구태의연한사업시행방침으로울진을혼란에빠뜨린책임을지고즉각사퇴하라. 5 생존권을보장받기위해이운동을하다구속된 8명의구속자는아무죄가없다. 6 우리울진에는이미원전 1?2호기만으로도위험을안고있다. 추가원전건설과핵폐기물처분장후보지를강행한다면울진군민의죽음을무릅쓴항쟁을받을것이며, 우리군민은어떤경우라도이의지를굽히지않고결사적으로투쟁할것을천명한다. 주민들은집회를마친후군민회관을출발하여평화적인가두시위를벌인뒤자진해산하였다. 이어구속된주민가운데 4명이 2월 12일과 17일에석방되자, 주민들은이들을환영하는시가행진을행하였다. 그리고 22일에는주민 500여명이참여한가운데, 석방자들의환영대회를겸하여제24차원전및핵폐기장설치반대군민대회가열렸다. 한편 3월 24일의제14대국회의원선거국면에돌입하자,? 반투위? 는구속자석방을위한서명운동은계속해서추진하되, 선거에영향을줄수있는궐기대회등의각종집회를자제
하기로하였다. 그리고그동안의반핵활동을평가받고제도권에서반핵운동을전개하기위해구속중인? 반투위? 위원장의옥중출마를검토하였으나무산되었다. 그대신? 반투위? 는그동안주민들의운동에소극적또는대립적인태도를보였던현직여당국회의원 ( 김중권 ) 후보자에대한낙선운동을암묵적으로전개하였다. 18) 당시지역의분위기는지역현안인원전의추가건설문제와핵폐기물처분장의설치반대운동에어느후보가지역주민의뜻을대변하였고또대변할수있을것인가라는측면에서결정되리라고관측되었다. 실제로선거유세장에서도대부분의입후보자들이특별한정견이나정책대결을내세우기보다는핵폐기물처분장을둘러싼자신들의입장이나반대의지를표명하는것이대부분이었다. 결국 3 월 24일에있었던국회의원선거의결과는 3선의경력이있는현역국회의원이큰표차이로낙선하고말았다. 한편 3월 9일에구속된주민중 1명이가석방되고, 30일에는 2명이집행유예로석방됨으로써구속된사람은모두풀려나와 3월 31일에환영대회를갖고, 앞으로원전추가건설및핵폐기장설치계획이백지화될때까지평화적인시위를계속하기로결의하였다. 이후? 반투위? 는 4월 11일에집행유예로석방된위원장과부위원장을보호하기위해집행부로서의활동을잠정중단하도록하고위원장대행과 5명의부위원장단체제로개편하였다. 이어 4월 28일에는울진군청앞광장에서울진원전 3?4호기및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와아울러소련체르노빌참사 6주년추도식을겸한전국집회를가졌다. 주민 300여명과전국각지역의반핵및환경운동단체가참여하였다. 이날집회에서? 반투위? 전위원장은원전건설과관련하여군민의뜻을확인하기위해군민투표를실시하자고당국에제안하기도하였다. 또? 전국원자력발전소? 핵폐기장대책위? 는 2030년까지 50기의원자력발전소를건설한다는정책은재검토되어야한다고주장하며범국민공청회를개최할것을정부에촉구하였다. 이날집회는오후에공해추방을위한극단? 현장? 의마당극 공해공화국 의공연으로이어졌다. 그러나주민들의원전추가건설의반대운동에도불구하고울진 3?4호기의건설은주민들과의어떠한협의없이예정대로진행되어 5월 27일울진 3?4호기의기공식을가졌다. 울진 3?4호기는 3만 5천평의부지에각각 1백만kW급의가압경수형원자로를세우는것이었다. 19) 이날기공식에한전은경로잔치를명목으로지역주민들의참석을요망하였으나,? 반투위? 는기공식불참운동을전개하였다.? 반투위? 는기공식당일주민 300여명과함께발전소정문과후문에서노인들을태운버스 20여대를되돌려보내고울진 3?4호기건설을반대하는시위를벌였다. 3?4호기철회등의구호가적힌상여를매고원자력전시관까지행진한뒤원전정문앞에서상여화형식을갖고자진해산하였다. 20) 1992년 5월 27일의집회를끝으로해서주민들의반핵운동은 1994년 4월기성면에서핵폐기물처분장의유치신청을낼때까지소강상태에들어갔다. 왜냐하면 5월 27일, 그동안쟁점이되었던 3?4호기의건설이시작됨에따라울진지역의반핵운동은쟁점과목표를상실하였기때문이다. 이후에도? 반투위? 는위원장을교체하면서유지되었으나대중집회는개최하지않았다. 다만? 반투위? 전위원장주광진은 6월초브라질의리우데자네이루에서열린유엔환경개발회의에한국민간단체대표단의일원으로참가하여울진의반핵운동에대해발표하였다. 6월에는일본의반핵단체회원 5명이울진을방문하여방사성측정기로? 반투위? 와함께원전내의폐기물보관소의방사능을측정하려고하였으나, 원전측의거부로이루어
지지못했다. 1992년 6월이후,? 반투위? 의활동이미미한반면군의회의활동은활발하게진행되었다. 군의회는 8월 14일과 12월 9일 2차례에걸쳐 3?4호기건설경위를밝히기위한자료를관련기관에요구했다. 12월 24일군의회는? 원전문제에따른지역내요구사항처리를위한의정활동중간보고? 를가졌다. 보고에나선부의장은원자력발전소의지역내집단화를반대할것을재확인하고앞으로의의정활동방향을 1 원전관련지역내각종요구사항에대한대 ( 對 ) 정부활동의중추적역할을의회가담당, 2 원전관련지역지원제도의실질수준향상도모, 3 원전관련모든사항의적법절차확인, 4 대정부활동의지속적인추진등으로설정했다. 그리고지역내원전관련단체및조직과공조체제를확립하겠다고밝혔다. 21) 이러한활동으로 1993년 2월 16일에? 반투위? 의제2대위원장으로현직군의원황대운이선출되면서군의회가일시적으로? 반투위? 를주도하게되었다. < 표 3-4> 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운동 일자 주관조직 장 소 참가인원 집회및요구사항, 기타 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군민 1991. 12. 29 울진원전 반투위 군민회관 앞광장 약 800~ 1,500 대회 핵폐기물처분장후보지지정철 회요구, 주민 28명연행 12. 30 울진읍내 500~1,500 반투위임원삭발, 12. 31 울진읍내 1992. 핵폐기장, 핵발전소건설저지 천주교회앞 1,200 1. 1 범군민총궐기대회 1. 2 울진읍내 1,000 1. 3 울진읍내 600 울진읍내, 기성 1,700~ 1. 4 면 2,200 1. 5 울진읍내 1. 6 천주교회앞 300~800 1. 7 울진읍내 1. 8 울진읍내 1. 9 죽변면주민죽변면사무소 1,200 핵폐기물처리장설치반대 1. 10 근남면주민성류굴입구 800 1. 11 원남면주민매화장터 700 1. 12 북면주민북면시장 400 일자 주관조직 장 소 참가인원 집회및요구사항, 기타 1. 13 기성면주민사동국도 핵폐기물처리장설치반대 1. 14 평해읍주민평해읍 1. 16 반투위 울진군청앞
1. 22 죽변면주민죽변면사무소 제22차군민궐기대회, 반투위위 1. 25 반투위천주교회앞 원장, 부위원장경찰에자진출두 1. 28 영덕지원앞 300 구속자석방요구 2. 8 군민회관앞 600 23 차군민궐기대회, 2. 22 군민회관 500 구속자석방환영대회, 3. 31 구속자석방환영대회, 4. 26 군청앞 300 원전핵폐기장설치반대 5. 27 북면원전앞 300 `3?4호기건설반대양종희? 박재묵, 앞의글, 135~136쪽참조. 1) 핵폐기물처분장의후보지는강원도고성과양양, 경북울진과영일, 전남의장흥, 충남의안면도였다. 한겨레신문 1991 년 12 월 28 일. 2) 중앙일보 1991 년 12 월 30 일 ; 한겨레신문 1991 년 12 월 31 일. 3) 매일신문 1991 년 12 월 30 일. 4) 정전의윈인에대해한전측은일부농성자들이변전소에화염병을던져사무실이전소되고, 배전판에불 이붙어진화과정에서송출기능이정지되었기때문이라고밝혀, 주민들의주장과는상반되었다. 한겨 레신문 1992 년 1 월 1 일. 5) 한겨레신문 ; 중앙일보 1991 년 12 월 31 일. 6) 매일신문 1992 년 1 월 3 일. 7) 천주교안동교구는연행자석방과부상주민치료, 성당난입에따른책임추궁, 경찰의가혹행위및과잉 진압의책임추궁, 울진주민의정당한싸움에동참할것등의성명서를발표하였다. 그리고공개질의서를 통해경찰의성당진입과연행주민에대한수사과정에서폭행, 고문등에따른책임자처벌을주장하였다. 한겨레신문 1991 년 1 월 4 일. 8) 한겨레신문 1992 년 1 월 4 일. 9)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1992 년 1 월 5 일. 10) 매일신문 1992 년 1 월 6 일 ; 한겨레신문 1991 년 1 월 7 일. 11) 한겨레신문 1992 년 1 월 7 일. 12) 매일신문 ; 한겨레신문 1992 년 1 월 7 일. 13) 한겨레신문 1992 년 1 월 8 일. 14) 중앙일보 ; 한겨레신문 1992 년 1 월 9 일. 15) 한겨레신문 1992 년 1 월 11 일. 16) 중앙일보 1992 년 1 월 17 일. 17) 매일신문 1992 년 1 월 27 일. 18) 1월 28일북면, 죽변등지에서열린국회의원의귀향보고대회에서는핵폐기물처분장건설반대운동과관련해, 이운동이순수한지역살리기운동이아니라불순한정치세력에의해좌우되고있으며, 시위대가동참하지않는주민들에대해강제적으로협박, 투석등의행패를부려울진을무법천지로만들었다고반투위의활동을비난하였다. 19) 중앙일보 1992년 5월 27일. 울진 3호기는 1998년 9월 11일준공식을가지고본격가동에들어갔다. 20) 매일신문 1992 년 5 월 28 일. 21) 울진신문 1992 년 12 월 25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