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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時代 織造手工業과 織物生産의 實態 조 효 숙* Ⅰ. 序 論 Ⅱ. 織造手工業의 발달 1. 織造手工業의 성격 2. 織造官署의 종류 및 체제 Ⅲ. 織物生產의 實態 1. 對外交易을 통한 직물생산의 실태 2. 文獻에 나타난 직물생산의 실태 Ⅳ. 織物의 種類 및 製織法 1. 絹織物 2. 麻織物 3. 毛織物 4. 綿織物 Ⅴ. 結 論 Ⅰ. 序 論 고려시대에는 上代社會의 전통을 계승하여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진전이 있었 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공예분야, 특히 청자 동경 나전칠기 불화 및 불상 등의 수준 높은 공예품들을 통하여 고려인들의 문화적 욕구와 발전된 수공업의 양상을 입증하였음은 주 지의 사실이다. 元 世祖도 고려는 조그만 나라이나 匠工의 기술이 모두 漢人보다 뛰어나 다1)며 고려의 수공업에서 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수공업 분야의 발달 중에 직조수공업분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고려의 직조수공업은 전 시대의 훌륭한 제직 및 염색기술이 계승되었고 여기에 주변국가와의 활발한 직물교역이 자극제가 되어 더욱 발달된 양상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는 조선시대 이전의 실물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 문에 조선말기 이후 전승공예직물로 근근이 이어 내려온 모시 베 명주와 같은 단순한 평 직물 이외에는 조선시대 이전에 실제로 어떠한 직물이 생산되었고 사용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고학이나 미술사 수공업사 분야에서 토기 도자기 나전칠기 동경 불화 및 불상에 관하여 이미 많은 연구 업적이 이루어졌음에 도 불구하고 직물공예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복식사 분야에서도 * 경원대학교 의상학과 조교수. 1) 元史 列傳 趙良弼傳.

- 30 國史館論叢 第55輯 古代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복식의 형태 연구에 중점을 두었을 뿐 그 복식을 구성 하는 직물에 관하여는 문헌과 유물을 연관시킨 실증적 연구는 부족하였다. 그러던 중 근 래에 고려시대 직물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부족했던 직물 연구에 활력이 생기어 문헌과 유물분석을 병행한 연구들이 시작되었고 그 성과 또한 적지 않았다.2) 본 논문은 그러한 연구 중의 한 부분으로 고려시대 직물발달에 관한 고찰을 위하여 먼저 織造手工業의 성격과 織造官署의 종류 및 체제를 정리함으로써 당시의 직물 생산 능력을 설명하고 특히 봉건지배체제 하에서 직물발달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한 官 中 心의 직물생산 정도를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각종 문헌에 나타난 당시 직물생산의 실태 를 조사하였다. 먼저 고려 전시기를 통하여 인접국들의 직물교류상황을 특히 고려에서 수출하였던 직물들을 조사하여 시대별 특징을 고찰하였고 다음으로 養蠶 製絲 染色 製織 의 각 공정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함으로써 직물생산의 실태를 설명하였다. 끝으로 이러 한 자료들을 고려시대의 유물과 연관하여 고려시대에 생산되었던 직물의 종류 및 그 제 직방법을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두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유물의 명칭을 설정하고 명칭에 따른 제직방법을 규명함에 있어서 현존하는 고려시대 직물과 문헌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예로 부터 고려 직물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다수의 유물이 현존하고 있는 중국 宋 元 의 직물 발굴보고서를 참고로 하였다.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고려시대에 유물로 발견된 직물들이 모두 고려에서 생산된 것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 중에서는 소량이라도 중국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 기재된 직물명칭에 따른 직물조직 확대사진은 문양의 조형적 특성에 견주어 高麗產이라는 확신이 가능한 것3)들을 현미경 10배 확대사진을 찍어 조직법을 제시하였다. 앞으로 연구할 과제는 남아 있는 모든 유물들을 과학적인 방법과 문양의 조형적 분석 을 병행하여 生產地를 하나씩 밝혀 냄으로써 고려시대의 직조 수공업 및 직물 생산실태 에 관하여 좀더 심도있는 고찰을 하고자 한다. 2) 민길자, 한국 전통 문직물의 조직에 대한 고찰 Ⅰ( 교육논총 10, 국민대, 1990) pp.97 122. 조효숙, 고려시대 견직물과 그 제직에 관한 연구 ( 복식 15, 한국복식학회, 1990) pp.95 106. 3) 조효숙, 고려시대 견직물의 실증적 연구 ( 복식 20, 1993) pp.105 124.

Ⅱ. 織造手工業의 발달 - 31-1. 織造手工業의 성격 고려시대의 직조수공업은 중앙과 지방에 직물 생산을 담당하는 官署를 두어 전문장인 에 의해 이루어지는 官營手工業, 사원이나 일반 民戶에서 專業的 혹은 가내수공업적으로 생산되는 民間手工業, 그리고 천인들에 의해 구성된 특수 수공업 단위의 所手工業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수공업장에서는 絹織業과 麻織業이 발달되었고 毛織物과 綿織物 도 극히 부분적으로 생산되었다. 관영수공업장에서는 관청에 전적으로 속해있는 職役層 匠人이나 番次에 의해 役의 의 무를 하는 賦役層 장인에 의해 지배층의 수요와 대외교역의 수출품으로 사용되었던 錦 綾 羅와 같은 고급견직물과 罽와 같은 모직물을 주로 생산하였다.4) 민간수공업장에서는 僧妻 尼婢 등의 사원에 소속된 수공업자들이나 농민들의 가내수 공업에 의해 자체수요를 목적으로 麻 紵 綿紬와 같은 소박한 직물생산이 근간을 이루었 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곳에서도 국가에 바치는 貢物用 고급직물이나 자기경영의 상품 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忠烈王 2년에는 女僧이 元成公主에게 헌납한 白紵布 가 섬세하기가 매미 날개 같고 花紋까지 있었으므로 그 직조기술이 놀라워 공주는 그 女婢를 자기에게 보내게 하였으며5) 朝鮮佛敎通史 에 의하면 花紋紵布 직조에 관하여 漢江 荳毛浦에 있는 암자의 尼婢가 직조기술이 우수하여 極細綿布 등의 직조로 생업을 삼고 있다6)는 것이니 이러한 내용들은 사원내에 예속된 직조수공업자가 있었으며 이들 에 의한 사원의 독립적 직조업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농민들의 가내수공 업에 대한 직물의 수취는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졌는데7) 고려시대 역시 州縣의 民戶에 植 麻 養蠶을 권유하여 그들에 의해 생산된 絹絲 麻絲 雪綿子 綿紬 麻布 등을 공물 형식으 로 수취하였다. 이러한 점은 농민들이 가내수공업의 방법으로 직물생산을 하였던 민간수 공업에서의 실태를 보여 주고 있다. 所수공업장으로는 絲所 紬所가 있었으며8) 대부분 천인계층의 전업적 수공업자들에 의 해 관영수공업장에서 필요로 하는 명주나 비단실과 같은 원료들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4) 관영수공업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5) 高麗史 권89, 列傳 后妃2 忠烈王條. 6)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下, 花紋紵布 尼婢織成. 7) 홍희유, 조선중세 수공업사 연구 (지양사, 1988) p.13. 백제에서는 베와 비단 명주실 쌀을, 고구려에서는 소유정도와 빈부차이에 따라 비단 베 곡식이 税 부과대상으로 되었다. 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7, 驪州牧條.

- 32 國史館論叢 第55輯 소수공업자는 부과된 貢物量을 납부한 후에는 자기경영이 가능한 독립수공업자와 같았 으며 천인일 망정 생산 조직상에서는 전 시대와 같은 노예는 아니었다.9) 고려시대의 직조수공업의 특징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전 시 기에 비하여 전업적 수공업의 요소가 증가하였으며 상품생산이 상당한 정도로 확대 발 전하였음을 들 수 있다.10) 고려시대에는 전문성을 갖춘 수공업기술자를 工匠이라는 명칭 으로 법제화하였다. 당시에 工匠의 구성을 3가지로 들 수 있으니 즉, 농촌의 半農半工業 혹은 가내공업에서 점차 전문적 수공업자로 분리 성장된 자와 종전 통일신라시대에 다양 한 신분층의 양인 수공업자나 천인으로서 관영공업에 예속되어 있던 자가 인격적으로 해방되면서 賃用勞動에 종사할 수 있게 된 자, 그리고 異民族으로 投化人 등이 있다.11) 국가에서는 전국에 있는 공장을 파악하기 위하여 工匠案 이라 불리우는 별도의 籍을 작성하여 등록하도록 하였다. 이들 공장은 왕경과 지방으로, 그리고 지방은 각 출신 지 역별로 공장안에 등록하도록 하였는데 그들 공장안에는 중앙관청에 소속된 직역수공업 자는 물론 각 도에 있는 非官屬 장인들과 사원에서 직물생산에 종사하는 승려 및 승처, 所에 속한 천민 계층의 장인들까지도 포함되었다.12) 이처럼 그들 지위를 일률적으로 법 제화한 공장들에 의해 고려시대 직물생산은 보다 더 효율적으로 전업적 수공업의 요소 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민간수공업에서도 직물생산은 자급자족 이외에도 많은 부분이 상품생산을 전 제로 하였다. 현종 3년(1012)에는 諸道에 있는 錦綺雜織甲坊의 匠手들, 즉 직조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들이 개인의 이득을 위하여 농사일(本)을 버리고 수공업(末)을 쫓으며 농사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匠手를 抽減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지시한 점13)으로 미루어 직조장인들이 개인 영리를 위하여 상품생산을 하였을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충렬왕 때에도 재상들이 말하기를 경상도 按廉使가 諸道에 20升 황마포의 貢納을 명하였는데 이것은 전문적인 女工에게도 가장 어려운 작업이므로 村婦에게는 불가능하며 필연코 諸京에 가서 구할 것인즉 그 값이 귀하고 사기가 어렵다고14) 하였다. 이러한 내 용에서 농민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細麻布를 수탈하였음은 물론 동경 서경 등의 큰 도 9)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문화사대계 Ⅱ 下 (고려대학교, 1965) p.1033. 10) 홍희유, 앞의 책 pp.83 84. 홍희유는 고려시대 전반적인 수공업의 특징을 위와 같이 들고 있는데 직조수공업에서도 동일한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11) 문화사대계 Ⅱ 下, p.1024. 12) 서성호, 고려전기 지배체제와 工匠 ( 韓國史論 27, 서울대, 1992) pp.91 93, 96所의 匠人은 공장안에 등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洪承基, 고려시대의 공장 진단학보 40, 1975) 도 있으나 고려집권체제에서 모든 지역의 공장들을 관찰하려는 점과 관련하여 서성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13) 高麗史 권79, 食貨2 農商, 顯宗 3년 3월. 14) 위의 책 권123, 列傳36, 주인원條.

- 33 시에서는 기술이 뛰어난 전업적 수공업자들에 의해 생산된 고급직물들이 상품으로 거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기 역시 직물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예는 빈번하였으니 恭讓 王 때 중랑장 房士良은 상인들이 누에는 치지 않고 노력 없이 비단옷만 입는다고 염려하 며 경제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상인들이 매매하는 紗 羅 綾 緞 綃 무명 베 등을 모두 관청의 도장을 맡아 그 중량과 길이에 따라 빠짐없이 税를 거두어들여 몰래 매매하는 자 에게 벌을 주도록 상소하였다.15) 물론 거래되는 직물들 중에는 중국에서의 수입품도 있 을 수 있겠지만 고려 자체에서 수공업자들에 의해 생산된 것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이들의 활발한 상품생산을 뒷받침하는 시대적 배경으로는 국제무역을 들 수 있다. 수천명에 달하는 宋商이 입국하였고, 그 밖에도 金 遼 元 일본 등과도 公的무역 이 외에 私무역 密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16) 그러한 대외교역에서 직물은 가장 중요한 품목이 되었는데 그 한 예로는 麗末鮮初로부터 漢語學習書로 사용되었던 老乞大 에 서 찾아볼 수 있다.17) 老乞大 에는 고려말기 文物制度, 특히 밀무역이나 사무역의 모 습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고려의 상인은 細麻布 毛施布 馬 人參 등을 중국에 팔아 고급견 직물이나 의복 사치품들을 구입하였다. 이 기록에는 고려에서 직조된 견직물을 판매한 기록은 없으나18) 細麻布 毛施布와 같은 麻섬유류는 자급자족이나 공물용 이외에도 수출 상품을 목적으로 민간수공업 분야에서 활발히 생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織造官署의 종류 및 체제 삼국시대부터 봉건지배계급에 의하여 일찍부터 조직운영 되어 오던 관영수공업은 고 려집권체제에 이르러 그 제도가 정비되고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이미 신라에서는 직물생산을 관장하기 위하여 內省안에 기능에 따라 세분화된 직조수 공업장을 두었다. 麻典에서는 苧布 麻布를 짰고 朝霞房에서는 朝霞紬나 朝霞錦을, 綺典에는 무늬있는 비 단 綺를, 錦典에서는 이중조직의 무늬 비단 錦을, 毛典에서는 罽 氈 등의 모직물을 짰고 15) 위의 책 권79, 志33 食貨2 市估, 恭譲王 3년. 16) 김신, 한국무역사 (도서출판 석정, 1991) p.96, 113. 17) 老乞大 朴通事 諺解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73) pp.23 25, 235. 노걸대 는 정확한 편자와 간행년대는 아직 미확인되었지만 고려가 元의 지배를 받을 때부터 漢語學習書로 사용되어 졌으며 문장내용이 당시 무역에 관한 회화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교역품 의 내용 가격 여행방법 등을 고찰하였을 때 사실에 근거하여 쓰여졌으므로 고려말기 사회상을 말 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18) 元은 고려보다 견직물이 더 발달했기 때문에 고려 견을 중국에서 私賣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만 국내에서는 국내산 견직물도 외국산과 함께 거래되었을 것이다.

- 34 國史館論叢 第55輯 그 밖에 각종 염색 및 직물손질을 위하여 染宮 攅染典 紅典 蘇芳典 漂典이 있었다. 각각의 官署에는 母를 두어 직물생산을 담당하였는데 母의 신분적 지위는 확실하지 않으나 관청에 예속된 고급 기능공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밑에 배속된 일반수공업자들에 게 기술지도와 그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19) 內省에 소속된 수공업장 중에는 朝霞房에 23명의 母를 두어 가장 많은 수공업자가 있었으니 이는 조하주 조하금 등과 같은 신라 특산직물의 생산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수차례에 걸쳐 唐에 수출한 기록에서도 다시 한번 입증된다고 하겠다. 통일신라에도 수공업은 역시 국가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중요시 되었으니 국가는 例作 府를 설치하여 진덕왕때 설치된 工匠府 및 여타 중앙정치기구와 함께 六典조직을 이루 었는데 이는 국가가 전체 중앙 정치 운영과 더불어 수공업을 보다 집권적 관료적으로 지 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20) 그러나 이 시기에 직물생산에 관한 관영수공업의 자료 는 경덕왕(742 764)代에 麻典은 織紡局으로, 綺典은 別錦房으로, 錦典은 織錦房이 되었 다가 다시 원래 이름으로 복구하였다는 기록 뿐이다. 고려집권체제에 이르러 관영수공업은 그 제도가 정비되고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고 려시대 관영수공업의 관리 체계상 최고의 담당 기관은 工曹(工部)였다. 공조의 기능은 산 림 수리 등의 관리와 관영수공업자들인 장인들을 장악통제하는 것이며 尙書虞部를 두어 장인들과 건축에 관한 일들을 맡겼다. 그들은 담당하는 분야에 따라 다시 세분되었는데 중앙관청에서 직물생산과 관계되는 기관을 살펴보면 御衣를 만들거나 이에 필요한 직물 을 제작하는 尙衣局이 있으며, 특별한 직물제조는 掖庭局에서 관장하며 그외의 직물은 雜 織署에서 관장하였고 직물의 염색은 都染署에서 하였다. 이들 관청에는 判事 監 卿 小監 小卿 奉卿 令 承 注部 등 관리를 배치하여 행정적으로 지휘하는 체계가 세워져 있었으며 실무적인 행정사무는 아전 출신의 監作 監使 史 書令史 書史 記官 등을 배치하여 담당하 게 하였다. 이들 관리 밑에는 관영수공업자들이 편제되어 각종 직물 생산에 종사하였는데 높은 기술을 가진 상층 工匠에게는 指諭 指諭承旨 指諭承旨同正 行首校尉 行首大匠 行首 副正 등의 南班 胥吏職이나 남반 同正職을 주어 위계를 부여하고 別賜를 지급하였다. 이러한 별사를 받는 상층 工匠은 국가의 職役層 수공업자로서 그 예하에는 일정 기간 동안 관영 수공업장에 동원되어 공역을 바치는 賦役層 工匠이 많이 있었다. 부역층 공장 은 직역층과는 달리 일정기간을 관영수공업에 나아가고 일정 기간은 자신의 사적 수공 업 활동을 영위하는 일종의 番次制 형태로 수행하였다.21) 중앙 직조관서의 종류 및 체제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 홍희유, 앞의 책 p.32. 20) 서성호, 앞의 논문 p.68. 21) 서성호, 앞의 논문 pp.101 102.

- 35 尙衣局은 御衣를 제조 공급하는 곳으로 그 조직은 正六品의 奉御 1인, 正七品의 直長 1인을 두었으며 리속으로 書令史 4인, 記官2인, 注衣 1인이 있었다. 尙衣局의 설치 연대 는 현존 史料들이 미비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穆宗代 이미 奉御나 直 長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穆宗 혹은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文 宗代에 가서 완비된 조직 체제를 갖추었다. 그 후 忠宣王때 掌服署로 고쳐 奉御를 令으 로 고치고 直長을 그대로 두었다. 恭愍王 5년에 다시 尙衣局으로 고치고 令을 奉御로 고 쳤으나 11년에는 다시 掌服署로 고치고 또 奉御를 令으로 하였다가 18년에 尙衣局으로 21년에 掌服署로 고치는 등 恭愍王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에 걸친 명칭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恭愍王3년에 工曹에 병합시켰으며22) 이는 조선왕조때 工曹에 소속된 尙衣院으 로 이어진다. 尙衣局에 속하는 직역층 장인은 繡匠 幞頭匠 靴匠 帶匠 靸鞋匠 笏袋大匠 등이 있었으 며 그 工匠들은 기술 수준에 따라 殿直同正 指諭承旨 行首校尉 行首副尉 등으로 계급이 나뉘어지고23) 이들 밑에 배속된 부역층 장인들을 기술지도, 감독하여 궁중용 직물 및 의 복 제조에 종사하였다고 하겠다. 雜織署는 특수 織物의 생산을 담당하는 곳으로 文宗 때에 관제를 正八品의 令 2인, 正 九品의 承 2인으로 정하였으며 리속은 史 4인, 記官 2인을 두었다. 다시 그 아래는 罽匠, 繡匠의 장인이 소속되었는데 罽匠 중에 指諭承旨同正 1인, 行首校尉 2인이 있고 繡匠 중 에는 行首校尉 1인을 두었다. 忠烈王 34년에 都染署와 雜職署를 합하여 織染局이라 하였 으나 그 후 충선왕은 직조 및 염색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알자감 내시백 내 알자 장원정직을 각각 2명씩 내어 그 일을 맡아 보게 하고 忠宣王 2년에 다시 원래대로 雜職署와 都染署로 분리하였고, 令과 丞을 다시 두었다.24) 掖庭局은 궁정에서의 특수 임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주로 고급 직물의 생산을 담당하 였다. 건국 초기에는 掖庭院으로 부르다가 成宗 14년에 掖庭局으로 고쳤다. 文宗 때는 正六品의 內謁者監 1, 正七品의 內侍伯 1, 內謁者는 從八品으로 하였다. 또 리속은 監作 1, 書令史, 記官, 給使를 각각 3명씩으로 하였다. 掖庭局에 소속된 장인은 錦匠 羅匠 綾匠 이 있으며 錦匠에는 指諭承旨 行首大匠 각 1인, 羅匠에는 行首校尉 1인, 綾匠에는 行首副 尉 1인을 두었다. 그 후 충렬왕 34년에는 掖庭局을 內謁司로 고쳤고, 같이 담당 관리들 의 직위를 3등급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忠宣王 원년에는 內謁司를 폐지하고 다시 掖 庭局으로 고쳤으며 2년에는 잠시동안 巷庭局으로 하였다가 다시 掖庭局이라 하고 文宗 때와 같은 수준의 관리를 배치하였다.25) 22)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23) 위의 책 권80, 志34 食貨 祿俸. 24) 주22), 23) 참조.

- 36 國史館論叢 第55輯 이처럼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직물생산을 담당하는 官署의 명칭과 직제는 약간씩 변 화되었다. 文宗때에 관제 개편에 관하여 세밀한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각각 의 조직 관서에 소속된 관직 및 관등급을 비교해 보면 표1 과 같다. 御衣를 만들고 錦 羅 綾 등 특수직물의 생산을 관할하는 尙衣局과 掖庭局에는 正六品의 관리를 수장으 로 하였으며 罽, 繡를 제직하는 雜織署와 염색을 맡는 都染署는 正八品의 관리를 수장으 로 하였으니 尙衣局 掖庭局이 都染署 雜織署보다 규모가 큰 관서로 인정된다. 그러나 충 렬왕 이후에는 元制의 영향과 자주정신의 대립으로 인하여 계속하여 局을 署로, 署를 局 으로 바꾸기도 하는 등 職制의 변화가 계속되었으나 실제로 직물 생산활동에는 별로 영 향을 주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표 1 高麗時代 織造官署 官職 및 官等級(文宗代를 기준으로 함) 官署名 官職및官等級 正六品 從六品 正七品 從七品 正八品 從八品 正九品 從九品 衙前 尚衣局 奉御 1 直長 1 都染署 令1 丞2 雜織署 令2 丞2 掖庭局 內謁者監 1 掌冶署 內侍伯 1 匠人 帶 匠 書令史 4 靴靸鞋匠匠 記官 2 笏袋大匠 注衣 1 幞頭匠 花 匠 史4 記官 2 史4 繡 匠 記官 2 罽 匠 監 作1 錦 匠 書令史 3 羅 匠 記 官3 綾 匠 給 使3 金箔匠 이상과 같은 고려시대의 官制는 高麗史 百官志의 서두에 의하면 唐의 관제를 기초 로 하여 성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唐制에서 직물생산과 관계되는 관서의 종류 및 체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唐制에서 少府監 밑에 織染署를 두었으며 여기에 織枉作坊 10, 組綬作坊 5, 紬綫作坊 4, 25) 주22), 23) 참조.

- 37 練染作坊 6으로 도합 25개의 作坊을 두어 직물생산을 관장하였다. 織染署의 최고 관리자 는 正8品에 속하는 令이며 그 아래 丞 監作 典事 掌固를 두어 직물생산을 관리하였다.26) 內侍省이 관할하는 掖庭局은 궁궐 내에 女工을 관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官蠶활동과 絲織생산을 하도록 하였다. 從7品에 속하는 令이 최고 관리자이며 그 아래에 丞 宮敎博 士 監作 令史 計史 書令史를 두어 직물생산을 관리하였다. 掖庭局에는 150명의 綾匠人이 있어 생산 규모가 매우 컸다. 內作司 역시 직물생산 官署로 綾坊 染坊 毯坊을 두고 각각 의 坊에 使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27) 殿中省이 관할하는 尙衣局은 御衣를 관장하는 곳으로 從5品의 奉御가 책임을 맡고 그 아래에 直長 書令史 書吏 注衣 掌固를 두어 관리하였다. 이상의 唐制에서 알 수 있듯이 唐의 織染署 掖局 尙衣局은 고려의 雜織署 都染署 掖庭局 尙衣局과 비교할 때 관리자의 구성 인원수에서 唐이 많았을 뿐 관장 사무는 물론 조직면에서 유사하였다.28) 지방 직조관서로는 兩京과 여러 州에 織錦坊을 두었다. 西京인 長安은 물론 東都인 洛 陽에도 織錦坊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益州 등의 여러 곳에 관영수공업장이 있고 匠人이 있어 貢納用 직물을 생산하였다. 중앙 및 지방 수공장에는 많은 匠人이 있는 데 최고 기 술자인 巧로, 공개적으로 모집한 明資匠 和雇匠, 일정기간 役을 바치는 番匠이 있었다. 중앙 및 지방 各州의 匠人들에 대해서는 이름을 등록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匠人名籍에 의해 관리하였다.29) 끝으로 唐에서 직물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織造戶인데 관영수공업과 민영수공 업 사이에 위치하는 특별수공업장이다. 貢綾戶 織綾戶 織錦戶 綾羅戶 細繭戶 등이 있는데 府縣의 지도 관리 아래 직물생산이 진행되었다. 戶의 분포지역을 보면 거의 견직물을 貢 納하는 지방과 일치하여 官用 직물을 생산하는 데 그 담당업무가 있다고 하겠다. 이들 戶의 匠人도 匠人名籍에 등록되어 관리하였다.30) 이상 唐制를 고찰한 결과 고려의 직조관서는 표 2 에서와 같이 통일신라에서 고려 로 왕조가 바뀌면서 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시대와 비교하면 前시대의 세분화되고 평면적으로 이루어졌던 여 러 직조관서를 통합하고 수직으로 위계질서를 세워 체계화하였다. 예를 들면 漂典 染宮 紅典 蘇芳典 攢染典 등 염색 관련기관은 都染署로 통합되고, 錦典 綺典 麻典 朝霞房 등 직조관련 기관은 雜織署 掖庭局으로 통합되어 중앙 관리체계를 효율적으로 하였다. 이러 한 체제는 唐의 織染署와 掖庭局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앙직조관제 영향으로 볼 수 있으 26) 唐六典 권20, 少府監. 27) 趙豊, 唐代絲綢 絲綢之路 (陜西省 : 三秦出版社, 1992) pp.46 50. 28) 新唐書 권47, 志47 百官志3, 殿中省條. 29) 주 27) 참조. 唐의 匠人名籍은 고려의 工匠案과 같다고 생각된다. 30) 趙豊, 앞의 책 pp.51 56.

- 38 - 國史館論叢 第55輯 표 2 唐 統一新羅 高麗의 織造官署 비교 며 지방에서도 唐의 織錦坊과 織造戶 등과 유사한 錦坊 綺坊 雜織坊 및 絲所 紬所의 특 수 단위를 설치하여 직물생산을 관장하였고 이들 모든 수공업장인들을 唐의 匠人名籍과 같은 工匠案에 등록시켜 관리한 점 등에서 唐制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들 수공업장에 소속된 관리들의 祿俸과 別賜를 조사하여 고려시대 직물생 산에 종사하는 관리 및 장인들의 대우 정도를 조사하여 보자. 文宗때는 관리들의 祿俸制度를 정비하였고 모든 衙門工匠別賜를 새로이 제정하여 300 일 이상 복무한 자들에게 일종의 祿俸과 같은 別賜를 지급하였다. 尙衣局의 奉御는 쌀 86섬 10말, 直長은 46섬 10말, 掖庭局의 內侍怕은 33섬 5말, 都染署 雜織署의 令은 20섬, 承은 10섬의 쌀을 祿俸으로 받았으며 그 밖에 織造匠들의 別賜는 표 3 과 같다. 正九 品 관리의 承과 동일한 수준인 쌀 10섬을 받는 장인은 繡匠의 指諭와 幞頭匠의 殿直同 正이며 쌀 8섬을 받는 장인은 幞頭匠의 指諭承旨이며 쌀 7섬은 罽匠의 指諭承旨同正, 行 首校尉, 錦匠의 指諭承指이다. 쌀 6섬은 靴匠의 行首校尉, 帶匠의 行首校尉 指諭承指, 繡 匠의 行首校尉, 羅匠의 行首校尉 등이다. 벼 15섬은 錦匠 중에 行首大匠이며 벼 12섬은 幞頭匠 중에 行首副尉, 벼 10섬은 綾匠의 行首副正 등이다.31) 이상의 祿俸과 別賜의 비교에 의하면 御衣를 만들고 錦 羅 綾의 견직물 제직을 관할하 는 尙衣局과 掖庭局의 祿俸이 많고 직급이 높은 관리가 배치되며 罽 繡를 제직하고 염색 31) 주23) 참조.

- 39 을 관할하는 雜織署와 都染署에는 비교적 낮은 직급의 관리를 두었다. 그러나 같은 부서 에 소속된 장인의 경우에는 錦, 罽를 짜는 장인이 綾, 羅를 짜는 장인보다 높은 別賜를 받았다. 따라서 錦, 罽를 짜는데 더 많은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 3 製織匠人의 別賜表(300일 이상 근무한 자에 한함) 지방관서에서의 직물생산에 관하여는 관련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아직 그 실상이 분명 치 않다. 그러나 지방관서에서는 중앙에서와 같이 별사를 지급하는 직역층 공장을 두지 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文宗의 녹봉과 별사의 규정에 지방 諸道의 工匠들에게 녹봉이나 별사가 지급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諸道의 錦綺雜織甲坊의 匠手를 抽減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교지를 내렸던 기록은 여러 道에 錦 綺 綾 羅 등의 고급직물류를 생 산하기 위한 관서 및 여기에 소속된 장인의 존재를 확실시한다. 그런데 이들 장인의 직 물생산 방식을 추도함에 있어서 금방 기방 잡직방 갑방 등의 장인이 부화한 습관에 빠져 기본인 농업을 버리고 직조수공업만을 쫓는다는 문맥에서 미루어 짐작하면 장인들은 부 역층 공장으로 지방관서에서 일정기간 부역을 부담하며 그 밖의 시간에는 개인의 이익 을 위한 私的 수공업이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공업자들이 本(농 업)을 버리고 末(수공업)을 따랐을 것이다. 또한 충렬왕 5년(1279)에는 왕명으로 晋州에서 綾 羅를 생산하여 중앙에 貢納하였는데 綾 羅의 품질이 거칠어 晋州牧 수령을 파직하였다. 그런데 능라가 거칠은 이유는 진주수 령이 백성으로부터 징수하는 綾羅絲價의 양이 과중하여 그것을 감하였기 때문이었다.32) 만일 民戶로부터 능라를 직접 수취하였다면 백성으로부터 綾羅絲價를 거두었다고 쓰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晋州牧에서는 원사 구입비를 백성으로부터 거두어 관사에서 32) 高麗忠節要 권20, 충렬왕 5년 6월.

- 40 國史館論叢 第55輯 능라를 직접 제직하여 중앙에 공납하였다고 유추된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에는 綾 羅 紬 麻布 등 각종 포목류를 戒林 福州 京山 淸州 등지에 서 중앙에 수차례 바친 기록이 있는데 綾 羅는 평직의 紬 紵 麻와 달리 직조법이 어렵기 때문에 일반 민호의 가내수공업에 의한 공물로 보기에는 제직상의 어려움이 따른다. 그 러므로 이러한 직물들은 전문적인 匠人에 의해 지방수공업장에서 제직되었을 것으로 인 정된다.33) 이들은 外工匠으로 볼 수 있으며 계림 복주 진주 경산 등의 직물을 공납하는 큰 도시에 錦綺坊 雜織坊과 같은 직조관서가 설치되어 이곳에서 일정 기간씩 工役을 바 쳤을 것으로 생각된다.34) 끝으로 지방직조관서와 관련하여 西京에 綾羅店이 있었는데 西京內의 寶曹에 속하였 고 여기에는 副史를 두어 權務官祿으로 쌀 16섬 5말을 지급하였다.35) 능라점은 명칭에서 와 같이 각 도의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능라와 같은 고급직물을 관리하며 아울러 귀족관 리층에 판매하는 관영상점으로 볼 수 있다.36) Ⅲ. 織物生產의 實態 1. 對外交易을 통한 직물생산의 실태 고려시대에는 宋과 선진문화 수입에 주목적을 두고 친선관계를 맺어 교역이 활발했음 은 물론 그 밖에 遼 金 元과도 정치 사회적인 이유로 활발한 교류를 맺어 조공 진상과 그에 상응하는 賜與의 형식으로 물자를 교환함으로써 일종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朝貢 賜與의 물품은 그 나라의 특산품을 보내는 것이며 이 중에는 직물류가 매우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전반에 걸친 대외교역관계를 검토하여 당시의 직물 생산실 태를 고찰하고자 한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왕이 교체될 때에는 중국 황제의 동의를 얻어 책봉의 절차를 밟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태조는 後唐에, 혜종은 後 33) 일반적으로 직물류는 일반 민호의 가내수공업에 의한 공물로 보는 경향이 많다(서성호, 앞의 논문 p.120). 34) 唐에서도 직물을 貢納하는 지방명칭과 직조관서가 설치된 지방명칭이 일치되었다. 35) 주 23) 참조. 36) 홍희유는 당시에 서적점에서 관리들을 대상으로 도서의 출판과 판매를 하다가 1392년 인쇄 수공업 장으로 되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능라점에서 직물생산도 하였을 것으로 본다(홍희유, 앞의 책 p.94).

- 41 - 晋에, 광종은 後周에 사신과 함께 특산품을 보냈다. 册府元龜 에 의하면 고려왕 왕건이 後唐의 明宗 天成 4년(929)에 사신 53인을 보내 錦 罽 白苧 白氎을 조공하였으며 後周의 世宗 顯德 6년(959)에는 고려 光宗이 織成衣襖 를 朝貢하였다37)고 한다. 또한 高麗史 에는 惠宗 2년(945) 2차례에 걸쳐 後晋에 보낸 方物의 物目이 기록되었는데 직물류만은 다음과 같다.38) 1차로는 붉은 바탕에 금은실과 오색실로 日 月 龍 鳳을 織成한 上衣(襖)用 段 2벌, 역 시 붉은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龍을 織成한 보료(床褥), 붉은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花 鳥를 직성한 罽錦 捍袴 4벌, 붉은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龍 魚를 직성한 罽 화살 전대 4 개, 붉은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雲 龍을 직성한 화살통 4개, 罽錦으로 만든 칼집 수십개 이외에 白苧布 100필, 白氎布 200필, 細中麻布 300필을 보냈다. 2차로는 붉은 바탕에 금 은 오색실로 花 鳥를 직성한 罽錦 捍袴 2벌과 倚背 2벌, 붉은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수 놓은 罽錦 칼집, 붉은 색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花鳥紋을 직성한 罽錦의 裙腰 6벌, 白氎 布 100필, 細中麻布 100필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직물들에 대하여 晋의 황제가 평하기를 고려의 직물은 貝錦으로 무늬와 색이 아름답기가 중국의 橦華布보다 우월하며 織紋은 화려하고 紵布와 麻布는 눈과 같이 희다고 격찬하였다. 여기서 직물의 종류를 구분하면 罽 罽錦 織成段과 같은 모직물이 주종목이었으며 白氎 布의 면직물, 白苧布 細麻布의 마직물류도 있었다. 직물에 무늬를 넣는 기법은 금은 오색 실로 織成( 도 7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직물들은 액정국 잡직서에 소속된 罽匠 錦匠 등에 의해 생산되었다고 생각한다. 宋과의 교역은 고려 光宗부터 시작하였으며 顯宗때에 이르러 宋商의 왕래가 빈번하여 졌다. 그후 契丹의 남침으로 약40년간 宋과의 국교가 중단되었지만 상인의 내왕은 여전 하였고 文宗때 다시 정식 국교가 열리어 많은 양의 직물교역도 있었다. 顕宗 3年부터 忠 烈王 4년에 이르기까지, 즉 11세기부터 13세기 말까지 약 260年 동안에 고려에 왕래한 宋商의 총인원수를 계산하더라도 최소한 5,000여 명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하며 그 횟수도 약 120여 회에 달하였다고 한다.39) 양 국가의 문물교류 형태는 외교적 형식을 통한 公的무역과 商民에 의해 상업을 목적 37) 册府元龜 권972, 外臣府 朝貢五. 고려에서 조공한 기록은 수 십차례가 있으나 위에 설명한 2회의 경우에만 朝貢한 物目이 적혀 있 으며 그 이외에는 대부분 方物을 바쳤다고 되어 있다. 예를 들면 後晋 天福 3년에도 고려 국왕 王 建의 사신 92인이 조공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윗 글의 53인이 朝貢으로 바친 物目보다 규모가 더 컸을 것이다. 38) 高麗忠 권2, 惠宗 2년. 39) 金新, 앞의 책 p.96.

- 42 國史館論叢 第55輯 으로 합법적으로 하는 민간교역, 그 밖에 민간의 밀무역이 있었다. 公的무역에서 고려는 成宗 1년(982)에 金全奉을 宋에 보내어 金銀線罽錦으로 된 의복 (袍)과 요(褥)을 보냈으며40) 顯宗 15年 契人과의 관계가 미묘해지자 고려에서는 尹徵古를 宋에 보내어 通交如舊하기를 원하며 金線織成龍鳳鞍幞 繡龍鳳鞍幞 各 2벌, 말 22필을 보 냈다.41) 특히 文宗때에는 高麗時代 중 가장 많은 양의 직물교역이 있었는데 文宗 25년에 는 사신 金悌를 보내어 국왕의 예물을 전달하였다. 당시 고려에서 보낸 직물류는 다음과 같다. 御衣二領 黃罽衫一領 鎖金紅羅裌複 紅罽便服一領 鎖金紅羅裌複 全紅梅花羅裌帕外幕 紅 羅繡裌複封 全紅梅花羅裌帕外幕 紅羅繡裌複封 全紅梅花羅裌帕外幕 各副盛罽勒帛二條 罽 裌袋子二枚 鎖金紅梅花羅裌 複全共用紅梅花羅裌帕外幕 共重四十兩 紅梅花羅裌複封 全紅 梅花羅裌帕外幕 紅罽倚背六隻 紅梅花羅裌複 紅梅花羅裌複 紅罽褥六隻 紅梅花羅裌複 黃罽 褥四隻生中布二千匹 生平布二千匹.42) 또한 文宗 34년에는 宋에서 보낸 물품에 대한 回謝品으로 御衣二領 金腰帶二條 色羅一 百匹 色綾一百匹 生羅三百匹 生綾三百匹 幞頭紗四十枚 帽子紗二十枚 罽屛一合 紅罽倚背一 十隻 紅罽褥二隻 生中布二千匹을 보냈으며 그 외에 文宗 6년에 宋에서 온 사신에게도 각 각 絲段 衣帶 白銀을 주었다.43) 宋에서도 그 답례로 직물류를 보냈으니 그 물목은 다음과 같다. 雜色川錦一百匹 列仙細五匹 天下樂暈文五匹 雜花晕文五匹 合羅雲鴈細五匹 盤毬雲鴈細一 十匹 攢鴈雲池細一十匹 蔟四金鵰大一十匹 翠毛獅子大一十匹 寶昭大二十匹 色花羅一百匹 明黄一十匹 藍黄一十匹 淺粉紅一十匹 深粉紅一十匹 杏黃一十匹 梔黃一十匹 淺色一十匹 梅 紅一十匹 紫一十匹 雲碧一十匹 色大綾一百匹 明黃一十匹 藍黄二十匹 淺粉紅一十匹 深粉紅 一十匹 杏黃一十匹 梔黄一十匹 淺色二十匹 梅紅二十匹 紫一十匹 雲碧一十匹 色小綾二百匹 明黄二十匹 藍黃二十匹 淺粉紅二十匹 深粉紅二十匹 杏黃二十匹 梔黃二十匹 淺色二十匹 梅 紅二十匹 紫二十匹 雲碧二十匹 色花紗五百匹 明黃五十匹 藍黃五十匹 淺粉紅五十匹 深粉紅 五十匹 杏黃五十匹 梔黃五十匹 淺色五十匹 梅紅五十匹 紫五十匹 雲碧五十匹 白綃二千匹.44) 文宗代에 宋과 직물교역 물목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고려중기의 직물 발달 상황을 설명한다고 하겠다. 이는 일종의 公的 무역으로 예물을 교환함에 있어서 중국과 대등한 40) 宋史 권487, 列傳 246 外國三, 高麗. 41) 高麗史 권10, 顯宗 15년. 42) 위의 책 권9, 文宗 26년. 43) 위의 책 권9, 文宗 34 6년. 44) 위의 책 권9, 文宗 34년.

- 43 - 정도로 직물교류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 宋에 보낸 직물류는 羅 綾 罽 紗 布류이다. 그 중 羅는 色羅 100필, 生羅 300 필로 수 천 필의 布類에 비하면 적지만 견직물 중에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중 국에서 보낸 羅 100필에 비교하여도 4배의 분량이 된다. 그 밖에도 의복 보료 요대 금합 등의 예물들을 각각 붉은색 금박 찍힌 羅, 혹은 붉은색 매화무늬 羅로 만든 보자기로 싸 서 보냈으니 이는 당시에 羅를 짜는 기술이 발달되었음을 충분히 시사하는 바이며 고려 후기 元에 보낸 견직물에도 紫羅가 중요 품목이 되었음은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綾에 있어서도 고려에서 色綾 100匹, 生綾 300匹을 보냈음에 반하여 중국에서는 200匹을 보냈다. 紗類는 宋에서 色花紗를 500匹씩 보냈음에 반해서 고려에서는 帽子紗 20매, 幞 頭紗 40매로 冠帽用으로 특별히 생산된 紗만을 보냈을 뿐이다. 罽는 宋에서는 보내지 않 았으나 고려는 黃罽衫, 紅罽便服 이외에 방석 병풍 보료 휘장도 罽로 만들어 보냈다. 布 도 역시 고려 특산물로 고려에서만 보냈다. 반면 錦 綃는 宋에서 각각 100필, 2,000필씩 을 보냈음에 비해 고려는 보내지 않았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고려에서는 羅 綾 罽 布 의 제직기술은 훌륭하여 예물로 보냈으나 錦 紗 綃는 중국에 비하여 그다지 많이 생산되 지 않았던 직물류로 생각된다. 이러한 公的 무역 이외에도 5,000여 명의 宋商이 입국하여 토산물을 매매하기도 하였 고 때로는 밀무역으로 거래하기도 하였다. 고려와 거란과는 200년 간 상호 교섭을 가졌다. 최초의 교섭은 高麗史 에 의하면 太祖 5년(922) 거란에서 낙타 말 氈을 보냈다고 한다.45) 즉 고려초기부터 고려는 국방 안 전의 대가로, 거란은 對宋 관계에 있어 외환을 끊고 고려를 통한 무역의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서로 수십차례 遣使來貢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두나라 사이의 잦은 교류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교역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유목 민족으로서의 거란은 進貢 이나 開市貿易 등 여러 가지 방법의 교역을 요구했고 나아가서 압록강 연안에 호시장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에서는 모두 거절하고 의례적인 예물을 교환하는 데 그 치고 말았다.46) 그러나 200여 년의 거란과의 잦은 공식적인 교섭 중에 왕래하는 사신들 의 私事로운 상행위가 성행하였으며 이러한 밀무역은 도저히 방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심 화되어 국가도 거의 방치하고 있는 상태였다.47) 그러면 거란과의 교역에서는 어떠한 物品들이 교역되었던 것일까? 契丹國志 에 양 국 간에 거래되던 官貿易品의 大凡을 적고 있는데 고려에서의 貢進物條 중에는 金紗羅 45) 위의 책 권1, 太祖 5년. 46) 金在滿, 契丹絲考 ( 歷史敎育 6, 1962) p.153. 47) 金在滿, 契丹絲考 下( 歷史敎育 8, 1964) pp.124 153.

- 44 國史館論叢 第55輯 50兩(?) 紫花綿紬 100疋 白綿紬 500疋 細布 1,000疋 粗布 5,000疋 로 많은 양의 紗 羅 紬 의 견직물과 布類가 있으며 横進物件으로는 織成五彩御衣 不定數라고 하여 5색으로 화 려하게 織成한 의복도 수 차례 보냈다고 한다.48) 또한 契丹에서의 毎次 回謝物件 중에 직물류는 錦 綺 羅 綾 200疋, 衣著絹 1,000疋이 있고, 契丹賜奉使物件 중에는 錦 綺 30疋, 色絹 100疋, 絹 20疋, 衣 2襲이 있으며, 下節 從人에게 사여한 물목에는 絹 30疋, 衣 2襲, 紫綾大衫 1領이 있다.49) 이상은 거란측의 기록이며 高麗史節要, 高麗史 등의 우리측 문헌에 의하면 고 려에서 거란에 보낸 물목은 靖宗 2년(1036) 金元冲의 遣使時에 幞頭紗 苧布 貢平布 등이 있다. 또한 거란에서 온 물목은 太祖 5년(922)에 말 낙타와 함께 氈을 보냈고,50) 또한 獻 宗 원년 거란 사신 高遂가 올 때에도 사사로이 綾 羅 彩段을 가지고 왔으며 왕이 친히 引見하고 酒食과 衣類를 하사하였다고 한다.51) 文宗 19년(1065)에는 거란의 영안군 절도 사 耶律寧과 익주내 관찰사 丁文通을 遣使하여 구류면 구장복 및 의대류와 匹段을 보냈 으며52) 睿宗 10年(1115)에는 耶律義와 孫良謨을 보내 匹段 등 여러 土產物을 보냈다.53) 양국의 기록에 의하면 遣使來貢時에는 항상 의복, 실, 각종 피륙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것은 거란과의 수많은 사신 왕래 중에 극히 일부분 만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며 문헌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교역된 직물의 양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金朝 建立이전부터 女眞族과 교류를 가졌다. 고려 定宗 3년(948)부터 磨宗 12 년(1117)에 이르기까지 170년간 교류를 가져 왔으며 그후 金朝의 건립 후 睿宗 13년 (1118) 부터 高宗 6년(1219)까지 116년간 교류를 하였으니 모두 286년간의 오랜 세월동 안 교류가 계속되었다. 고려와 女眞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최초의 기록은 靖宗 3년(1037) 東女眞의 使臣 蘇無 蓋 등이 말 700필과 方物을 바쳤으므로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들 말을 3등급으로 나 누어 값을 치렀는데 1등 말은 銀注子와 錦 絹 각 1필을, 2등말은 銀鉢과 錦 絹 각 1필을, 3등말은 錦 絹 각 1필을 주었으니 하사품으로 내린 견직물의 양은 도합 錦 700필, 絹 700필이 되었다.54) 여진은 이를 시초로 하여 金朝가 세워지기 전까지 女眞 東蕃 鐵利國 東黑水 黑水靺鞨 女眞靺鞨 金 등의 部族 이름으로 431회나 고려에 조공을 하였으니55) 1 48) 契丹國志 권21, 外國貢進禮物條. 49) 金在滿, 앞의 논문(1964) p.123. 50) 주 45) 참조. 51) 高麗史節要) 권6, 獻宗 원년. 52) 高麗史 권8, 文宗 19년 53) 위의 책 권13, 睿宗 10년. 54) 위의 책 권1, 靖宗 3년.

- 45 - 년에 평균 2 3회씩 조공을 한 셈이다. 이처럼 여진의 각 부족은 잦은 교역을 통하여 馬匹과 鐵甲 蕃米 弓矢 船舶 水瀬皮 靑 鼠皮 駱駝 黄毛 등을 진언하였고56) 고려에서는 靖宗 3年의 예와 같이 錦 絹을 비롯한 고 려 특산물을 下賜하였을 것이다. 睿宗 10년 金이 건국되고 난 후에는 女眞때와 같이 저 쪽에서만 일 방적으로 교역을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고려측에서도 사신이 파견되어 일종의 使行 무역이 실시되었다.57) 사신의 교류는 해마다 양국의 王의 생일이나 명절을 축하함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수를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明宗 13년(1183)의 한 기록에 의하면 매년 金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상품교역의 이익을 노려 국내 토산품 을 많이 가져가므로 그것을 수송하는 데 많은 폐단이 생긴다 하여 그 폐단을 없애기 위 하여 사신이 휴대할 수 있는 물품의 양을 제한하고 그것을 어긴 사람은 파면시킬 것을 정하였으나 사신 일행의 요청에 의해 그들의 휴대품의 양이 다시 옛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58) 따라서 金國 건국후 고려와는 수많은 사신왕래에 따라 公的 혹은 私的 무역이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59) 불행히도 사신들이 휴대한 물품의 종류는 별로 기 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몇 차례 기록이 남아 있는 예를 보면 仁宗 4년 7년에 고 려에서 토산품인 은기명 의복 피륙 등을 보냈으며 金에서도 仁宗 6년 20년, 明宗 2년, 神 宗 2년과 康宗 2년에 각각 고려왕의 책봉시에 예물을 보냈으니 그 중에는 匹段이 항상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金으로부터의 수입품 중에 특이한 것은 契丹絲이다. 契丹絲의 수 입은 高麗時代에 수차례 거론되었는데 明宗 15년(1185)에는 王이 李知明을 친히 내전으 로 불러 지시하기를 서북면 방위의 최전초지였던 龍州에 당시의 교역에 있어서 화폐 가 치를 지녔던 紵布를 저장하는 창고를 두고 그 창고에서 紵布를 내어 丹絲와 교역하여 바치기를 命하였으며 그에 李知明은 契丹絲 500束을 왕에게 바쳤으니60) 왕이 직접 밀무 역을 지시할 정도로 丹絲는 고려 왕실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金在滿은 고려왕실 에서 이토록 어렵게 구하는 丹絲는 필히 고려 국내에서 생산되거나 중국에서 손쉽게 입 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金이나 거란지역의 특산물일 것이므로 絹絲類가 아니고 毛絲 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61) 그렇다면 고려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에 걸쳐 중국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金銀線으로 織成한 罽 罽錦을 제직하는 데 필요한 毛絲이 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는 앞으로 더 연구할 문제이다. 이상의 기록들은 몇차례 例에 55) 金胃顯, 遼金史硏究 (俗豊出版社, 1986) p.134. 56) 姜萬吉, 商業과 對外貿易 (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編, 탐구당, 1981) p.209. 57) 위의 책 p.211. 58)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13년. 59) 姜萬吉, 앞의 책(국사편찬위원회 編) p.212. 60) 高麗史 권19, 明宗 15년. 61) 金在滿, 앞의 논문 pp.160 161.

- 46 國史館論叢 第55輯 불과하지만 두나라는 잦은 사신 왕래가 있었고 그들의 교역품에는 피륙이 항상 있기 때 문에 金과 교역된 직물의 양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高麗와 元과의 무역은 주로 元이 주도하는 官貿易이 행하여졌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 았다. 官貿易이라고는 하지만 元은 이른바 조공관계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고려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을 뿐 공급받는 물자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宋代와 같은 교역 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宋代와는 달리 元은 조공관계에 의하여 노략에 가까운 형식으로 高麗의 물자를 획득 할 수 있었기 때문에 公認된 민간무역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부분적인 밀무역은 있었다고 본다.62) 高麗에서 元에 보낸 직물 중에는 白紵布 細麻布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견직물은 마직 물 보다는 적으나 여러 차례에 걸쳐 조공을 강요당하였다. 특히 高宗 연간에는 사신을 보내 眞紫羅를 1만필, 細紬 2천필의 막대한 양의 絹織物을 요구하기도 하였다.63) 고려에서 元에 보낸 織物 내역은 다음과 같다. 高宗 18년(1231)에 紗羅錦繡衣 16벌, 紫紗襖子 2벌, 緩紗襦衣 紬布襦衣 2천벌의 의복류 와 細苧布 33필을 보내기도 하였고 동왕 19년에는 羅 絹 綾 紬를 각각 10필씩 보낸 기록 도 있으며 白苧布 麻布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양을 보내었다. 그 외에도 高宗 40년에 는 몽고의 황제와 관리, 永寧公妃主, 妃母에게 선물로 주는 金銀布帛이 한량없이 많았으 므로 국가의 재물창고가 고갈되었다고 한다.64) 元宗때에는 眞紫羅 5필 3필을 각각3년 5 년 두차례에 걸쳐 보냈으며 4年에는 絹 100필 백저포 300필을 보냈다.65) 忠烈王때에는 20년(1294)에 紫羅 9필 細苧 86필을, 21년(1295)에는 紵布 100필을, 22년(1296)에 紫羅 14 필 백저포 100필을66) 보냈다. 특히 충렬왕부터는 고려의 紵布를 元에서 요구하였고 그 중에서도 무늬가 있는 紋紵布는 그들이 매우 선호하는 고려의 특산물이었다. 따라서 충 렬왕 9년(1283)에 織紋紵布를 처음으로 元에 보낸 이후67) 忠肅王 때에는 7차례나 보냈으 며, 恭愍王 때에 元이 멸망하기 전까지 수차례에 걸쳐 元 황제의 요구에 따라 紋紵布를 보냈던 것이다.68) 그 밖에도 東國通監 에 의하면 布 50,000필 白苧布 4,300 黑麻布 62) 金新, 앞의 책 p.113. 63) 高麗史 권23, 高宗 18년. 64) 위의 책 권23, 高宗 18 19년. 위의 책 권79, 志33, 高宗 40년. 65) 위의 책 권25, 元宗 3 4 5년. 66) 위의 책 권31, 忠烈王 20 22년. 67) 高麗史節要 권20, 충렬왕 10년 10월. 68) 공민왕 3년에 紋苧布를 貢物에서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다음 해에는 공납에서 면제를 받았다.

- 47 24,100 白麻官布 21,300필이 北元에 貢物로 보내졌다고 하니69) 실제로 공무역이나 밀무 역을 통하여 원에 수출된 마직물은 그 수량이 막대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마직물 수 출에 의해 毛施布는 당시 고려의 名產으로 중국사회에 널리 선호되었던 직물이 되었다. 그리하여 元曲의 하나로 현전하는 漁樵記에서도 毛施布가 노래로 불리워질 정도로 중국 사회에서 유행되었던 것이다.70) 반면에 元에서 고려에 보낸 직물 내역은 다음과 같다. 高宗 19년에 몽고의 河西元師가 金線 2필을 보냈으며71) 元宗 3년(1262)에는 西錦 3필, 間金熟綾 6필72), 5년 9년에도 西錦 1필씩 보냈으며 12년(1271)에는 絹 12,350필을 가지고와 經絡司에서 사용할 農牛를 샀고 15년(1274)에는 官絹 1,640필을 보내어 남편없는 부녀 140명을 징발하였는데 한 여자에 게 絹 12필씩을 주었다. 또한 15년에 絹 33,154필을 가지고와 군량을 사들였다.73) 이처럼 元宗 때에는 元에서 온 직물의 양은 많았으나 주로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絹이며 文 宗때 宋과 교역하던 유형의 고급품목은 아니었다. 忠烈王은 元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공주와 결혼하여 양국간에는 혼인관계가 이루 어져 宮人 官人 學者 貴族 商人의 왕래가 빈번하여 졌으며 몽골풍습과 함께 각종 몽골산 생활용품들이 고려사회에 유입되었다. 따라서 한동안 중단되었던 중국 고급직물의 유입 이 다시 활발해졌다. 忠烈王 4년(1278) 元 皇后가 공주에게 塔子袍를, 왕과 공주에게 衣 服 일습을 주었으며 왕의 신하인 宰臣으로부터 四品에 이르기까지 金塔子를, 나머지에게 注絲를 주었다.6년(1280)에는 張獻을 통해 絹 20,000필을 보내어 쌀을 사서 군량에 충당 하게 하였다. 15년에는 元 皇帝가 公主에게 金袍를 보냈다. 20년(1294)에는 탐라 다루하 치(耽羅達魯花赤)에게 織金衣 두벌을 주었으며 동왕 22년(1296)에는 황제가 忠烈王에게 織金段 4필 紅絹 4필 線綾 5필 紅絹 5필 金段 2필 紬 2필을 주었고 왕을 따라간 신하에 게 金段 18필 繡段 10필 綾素段 578필 絹 486필을 주었으며 부인과 환관들에게는 綾絹 각각 27필을, 하인들에게는 木棉 絹을 각각 411필씩 주었다. 23년(1297)에는 태후가 왕에 게 金段衣를, 3품 이상의 신하들 20명에게도 각각 金段衣를 주었으며 또한 金段 100필과 綾素 800필을 주었다. 26년(1300)에는 황제가 왕에게 金段 表裏 각각 336필을 주었으며 몇 달후 신하가 匹段 30필 絹 300필을 가지고와 藏經을 전경하게 하였다. 34년(1308)에 는 元에서 세자를 瀋陽王으로 봉하고 왕을 우대하여 진귀한 보물과 絹織物을 준 것을 이루 계산할 수 없다고 하였다.74) 69) 東國通監 권52. 70) 민영규, 장곡사 고려철불 복장유물 ( 인문과학 연세대, 1966) p.241. 71) 高麗史節要 권16, 高宗 22년. 72) 元史 권208, 列傳95 外國一, 高麗. 73) 高麗史 권26, 元宗 5 9년 및 권27, 元宗 12년 15년. 74) 高麗史 권28, 忠烈王 4년 및 권29, 忠烈王 6년 및 권30, 忠烈王 15년 및 권31, 忠烈王

- 48 國史館論叢 第55輯 忠烈王 이후 다시 견직물의 공식적 유입은 줄어 들었다. 忠惠王 3년(1342) 元에서 段 子 100필을 보냈으며75) 恭愍王 16년(1367) 元의 사신 高大悲가 皇帝의 명으로 왕에게 綵 帛과 錦絹 550필을 보내 왔으며 재추들에게도 등급에 따라 賜하였고76) 그 후에도 수 차례에 걸쳐 왕에게 의복을 보내왔다. 恭愍王 18년으로 元과의 교류는 끝나고 같은 해 4월엔 明 皇帝가 使臣을 파견하여 紗 羅 段 합계 40필을 보냈으며77) 恭愍王 19년에는 다시 明으로부터 錦繡絨緞 10필 金 緞 色緞 線羅 紗 각 4필을 받았다.78) 신우 13년(1387) 2월에는 고려 馬를 수출하는 대가 로 綿布와 段子를 수입하였다. 元代에는 宋代에 비하여 公的 무역이나 官認 민간 무역은 활발하지 않았지만 밀무역에 의해 직물의 교류는 여전히 이루어졌다. 老乞大 에서도 고려말기 중국과의 밀무역 상 황을 알 수 있는데 고려 상인은 인삼 모시포 황포 말 등을 중국에 가져다 팔고 직물들을 사서 고려에 파는 것이 매우 일반화 되었다. 老乞大 에 의하면 고려 상인은 중국 北京 에서 小絹 한필에 三錢 씩, 綾 한필에 二兩씩 주고 사서 鴉靑과 小紅色으로 염색하였는 데, 絹을 한필 염색하는 데에 二錢 들고, 綾을 한필 염색하는 데에 아청색은 三錢, 소홍색 은 二錢 든다고 한다. 이것을 고려 王京에와서 팔 때는 물물교환 형식으로 絹 한필은 고 려의 細麻布 두필을 받고 팔며, 綾 한필에는 鴉靑色布 6필 또는 小紅色布 5필을 받고 판 다고 한다.79) 또한 고려에서 가지고 간 人參 毛施布 黃布를 중국에 팔 때는 上等毛施布는 한필에 一兩, 低等毛施布는 한필에 六錢이며 上等黄布는 한필에 九錢, 低等黃布는 한필에 五錢에 판다고 한다.80) 따라서 당시의 밀매되는 직물가격은 고려의 布類 보다는 중국제 의 絹 綾 緞이 비싸며, 그 중에서도 緞이 제일 비싸고, 다음은 綾이며, 絹이 제일 싸지만 같은 종류의 직물에서도 생산지와 염색의 종류에 따라서 가격의 차이를 두었다. 이상으로 對元 직물 수출은 고려초기부터 중기에 이루어진 五代와 宋과의 무역에 비 하여 罽 罽錦 白氎布와 같이 신라로부터 이어 내려온 古代 직물류는 사라졌고 견직물 종 류도 줄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高宗때까지는 직물 종류가 비교적 다양했으나 말기로 갈수록 더욱 축소되어 견직물 중 고려말기의 대표적 수출품은 紫羅정도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수출직물의 단순화는 몽고침입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사치품인 고급 직물 생산이 축소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단지 羅는 元에서 선호되었던 비단으로 元 20 22 23 26년. 75) 위의 책 권36, 忠惠王 3년. 76) 위의 책 권41, 恭愍王 16년. 77) 위의 책 권41, 恭愍王 18년. 78) 위의 책 권42, 恭愍王 19년. 79) 老乞大 朴通事 諺解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73) pp.23 25. 80) 위의 책 pp.233 235.

- 49 史 에도 元代 百官의 公服인 質孫은 冬服用이 9種 있으며 夏服用이 14種 있는데 夏服 用 質孫의 衣料로 高麗鴉靑雲袖羅를 기록하였다.81) 이것은 고려에서 보낸 鸦靑色 雲袖羅 로 풀이된다. 다시 말하면 元代 公服用 質孫을 만들기 위하여 고려의 羅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측 문헌에 나타난 직물교류 이외에도 상당한 물량의 羅 가 元에 수출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고려의 對元 수출품은 견직물보다는 白紵布나 細麻布와 같 은 직물류였고, 특히 매미날개와 같이 얇고 정교한 무늬가 있는 紋紵布는 元에서 요구하 는 중요한 조공품으로 그 수준은 매우 높았다. 고려의 건국 초기에는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종대에 이르러 교역이 시작되었다. 교역관계가 기록상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文宗 10년(1056) 縢原朝臣 30여 명이 金州에 왔던 때부터라 하겠다. 동왕 27년 倭商 松永 등 42인이 건너와 刀鏡匣硯箱 櫛 書案 畵屛 香爐 水銀 등을 바치고자 청하였고82) 그후에도 文宗때에는 빈번하게 수 십 명의 왜상들이 海藻를 비롯한 토산물을 바쳤다. 이처럼 文宗代에는 일본측과의 교역이 가장 빈번하였으며 그 후에 다소 빈도가 떨어지 기는 하였지만 고려말 왜구의 침략기까지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宣宗 1년(1084) 日本風筑 前州商客 信通 등이 水銀 250근을 바쳤으며 동왕 2년 3월에 대마도 句當官이 使者를 보 내어 공물을 바치고 동왕 4년에 倭商 32인이 건너와 토산물을 바쳤으며 동년 7월 대마도 元平 등 40인이 건너와 眞珠 水銀 寶劍 牛馬를, 동왕 6년에도 宰府商客이 건너와 水銀 眞 珠 寶劍을 바쳤다.83) 그뒤 睿宗 11(1116)년에도 柑子를 진공하였고84) 毅宗 원년에도 日本 都網 등 21인이 건너와 토산물을 바쳤다.85) 이처럼 일본과는 進奉船에 의한 교역이 이루 어졌는데 일본상인들이 적극적으로 고려와 進奉船貿易을 존속시켜 주도록 노력한 것은 고려의 하사품에 대한 실리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진헌품에 대하여 고려의 하사품 으로는 人参 紅花 大藏經 經典 米糓 藥材 綿, 그 밖에 大綾 中綾 등의 견직물을 보냈다.86) 이상으로 고려시대 직물교역 상황을 고찰하였다. 고려에서 수출한 직물류는 罽 罽錦 織成錦 綵段 綾 羅 綿紬 絹 白氎布 白紵布 紋紵布 細麻布 黑麻布 黄麻布 生中布 生平布 등 이다. 81) 元史 권78, 志28 輿服. 82) 高麗史 권9, 文宗 27년. 83) 위의 책 권10, 宣宗 1 2 4 6년. 84) 위의 책 권12, 睿宗 11년. 85) 위의 책 권17, 毅宗 원년. 86) 金新, 앞의 책 p.119.

- 50 國史館論叢 第55輯 이것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고려초기 五代와의 교역에서는 罽 罽錦과 같은 모직물 과 白氎布의 면직물을 수출한 것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직물류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졌던 옛 직물인데 고려초에서 중기까지 특산물로 생산되었다. 그 당시 白氎布는 위그루의 특산물로서 중국 五代기간 중에 매우 많은 수량이 위그루로부터 조공되어 졌 다.87)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위그루와 많은 교역이 있었으므로88) 그들로부터 원료를 구입하여 섬세한 직물을 잘 짜는 우리의 제직술로 白氎布를 직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 다. 罽 또한 西域으로부터 신라시대에 전파된 모직물인데89) 고려중기까지 우리나라에서 도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罽의 원료가 되는 毛絲는 고려에서 목축한 羊으로부터 취 득하였거나 그 밖에 女眞 契丹으로부터 수입된 黃毛 丹絲를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90) 고려중기에 宋 遼 金과는 罽 白氎布 이외에도 金箔을 찍은 羅, 무늬있는 羅, 色綾 綵段 錦 綿紬 絹 등의 고급 직물류가 다양하게 수출되어 직물생산의 발달된 양상을 보여주었 다. 고려말기 元과의 무역에서는 주로 紋紵布 白紵布 細麻布와 같은 마직물류가 주요 수 출품이며 약간의 羅 綿紬도 수출되었다. 그러나 罽 錦 白氎布와 같은 삼국시대부터 전통 을 이어온 직물류는 그 자취를 잃게 되었다. 고려왕조 동안 중국과 대등한 규모의 직물교 역은 文宗(1046 1082) 때로 생각되는 데 현종 때부터 이때까지 80여 년 동안은 평화가 계속되었고 문물이 발전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직조수공업 역시 매우 활기를 띠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 이후 국가경제는 날로 어려워져 사치 품목인 견 직물 생산은 점차 쇠퇴되었고 元의 지배하에서 그들이 선호하였던 麻織物類만이 조공품 으로 다량 수출되었으며 섬세한 紋紵布는 고려말기의 대표적인 수출직물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紫色 羅는 고려의 특산물로 비록 소량이지만 元 황제에게 예물로 보내졌고91) 元 의 백관공복 중 質孫이 高麗의 鴉靑色 雲袖羅가 衣料로 사용되었을 정도였으니 말기까지 도 비록 직물의 다양성은 덜하지만 羅와 같은 絹織物生產은 계속된다고 하겠다. 2. 文獻에 나타난 직물생산의 실태 87) 册府元龜 권972, 外臣 朝貢5, 위그루. 1회에 수 백필 내지는 수 천필씩 여러 차례 조공하였다. 88) 이희수, 한 이슬람교류사 (문덕사, 1991). 89) 무함마드 깐수, 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국, 1992) p.255. 90) 肅宗 때 女眞으로부터 黃毛 10,000條를 구입하였고( 高麗史 권12, 肅宗 8년 7월), 明宗때 金으 로부터 丹絲 500束을 구입하였다(위의 책 권19, 明宗 15년). 또한 宣宗 때 遼로부터 羊 2,000頭(위 의 책 권10, 宣宗 5년)를 毅宗 때 金에서 羊 2,000頭를 구입하고(위의 책, 권18, 毅宗 8년) 金人으 로 하여금 목축을 하도록 하였다(위의 책 권101, 列傳 14). 91) 海東繹史 에 의하면 고려는 염색을 잘하였는데, 특히 붉은 색과 자주색이 더욱 묘하여 모란만 큼 큰 芝草뿌리에서 즙을 짜 비단을 선명하게 염색하였다고 한다( 海東繹史 권26, 物產志). 이 러한 紫色의 羅를 중국에서 매우 선호하였다.

- 51 본 장에서는 고려시대 직물 생산이 어떠한 정도까지 이루어졌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 로 입증하기 위하여 직물교역 이외의 문헌자료를 조사하여 養蠶 製絲 染色 製織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高麗 太祖는 왕으로 된 첫 시기부터 조세를 3년간 면제하며 農桑을 장려하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成宗 16년(997)에 왕이 각 도 州縣들에게 명령하여 해마다 뽕나무 묘종을 심게하되 丁戶는 20그루씩 白丁은 15그루씩 밭머리에 심어서 養蠶에 힘쓰도록 하였다.92) 그 후 德宗, 文宗 肅宗 仁宗을 비롯하여 恭愍王에 이르기까지 고려 역대 왕들은 농업과 함께 養蠶을 衣食의 기본으로 삼아 매우 장려하였다. 특히 恭愍王때에는 중앙과 지방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우게 하되, 각각 인구 수에 따 라 심는 비율을 정하기도 하였다.93) 養蠶과 함께 製絲도 하였는데 太祖 원년 泰封主가 驛에 소속된 戶에 비단실(絲)을 3束 씩 부과하니 이는 너무 과중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길쌈하는 일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사 례가 생기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조세의 부과를 常例대로 하라고 명하였다.94) 靖宗 7년 (1041)에는 州, 府의 稅貢은 1년에 쌀 300섬, 金 10량, 絲綿 40근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토산물을 내도록 하며 이를 받지 않는 자는 관직에서 파면 시키도록 하였다.95) 明宗 15 년(1185)에는 서북면 병마사 世裕가 貢物로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 일컫고 백성들의 蠶絲 를 거두어 제 집으로 운반하였다가 귀양보내졌으며96) 高宗 37년(1250)에도 眞絲와 雪綿 子를 공납받았다97)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양잠을 장려하고 백성으로부터 비단실을 거두어 들였지만 이것만으로 는 견섬유 제직에 필요한 수량이 부족하였으니 海東繹史 에 고려에서는 絲蠶이 적어 서 羅 1匹 값이 銀 10량 정도로 비싸서 많은 사람들이 麻紵布로 된 의복을 입는다고 한 점98)으로 미루어 보아도 蠶絲量은 충분치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부족한 실의 보충 을 위하여 宋의 상인으로부터 상당량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高麗時代에는 養蠶 製絲와 함께 染色도 이루어졌다. 新羅時代에 이미 染色을 위하여 染宮 紅典 蘇芳典 攢染典을 두어 색상별로 염색하였다.99) 高麗때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더 체계적으로 염색이 이루어졌으니 중앙 부서에 供造署와 都染署를 설치하고 염색을 관할하였다.100) 또한 德宗 3년(1034)에는 왕이 검약 절용함은 민생을 풍족하게 하는 길 92) 高麗史 권79, 志33 食貨2 成宗. 93) 위의 책 권79, 志33 食貨2 恭愍王. 94) 위의 책 권1, 太祖 1년. 95) 위의 책 권78, 志32 食貨1 田制 租稅, 靖宗 7년. 96) 위의 책 권20, 明宗 15년. 97) 高麗史節要 권16, 高宗 37년. 98) 海東釋史 권26, 物產志, 紵布 所引. 99) 三國史記 雜志, 職官 下.

- 52 國史館論叢 第55輯 인 즉 尙衣局에서 御衣를 염색하는 紅芝草를 1년간 사용할 것만을 두고 그 외는 취하지 말라101)고 하였으니 尙衣局에서도 왕의 의복을 제작하기 위한 별도의 염색이 이루어졌 음을 알 수 있다. 東文選 에는 靑 黃 朱 綠으로 실을 물들여 錦 綺 纈을 짰다고 하였 으며102) 高麗圖經 에 고려의 습속은 지금 纈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며 바탕은 본래 紋羅이고 빛깔은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볼만하다고 하였으 니 당시에 靑 黃 朱 綠의 浸染은 물론 纈染도 정교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海東釋史 에는 고려는 염색을 잘 하였는데 특히 붉은색과 자주색이 더욱 묘하며 이 는 목단 뿌리 만큼 굵은 芝草 뿌리를 사용하여 그것의 즙을 짜서 비단을 염색하여 매우 선명하다103)고 기록되어 芝草를 이용하여 훌륭한 紫色을 염색하였음이 인정된다. 그 밖 에 사라센 유구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 서역 등지에서 많은 양의 蘇木을 수입하여104) 붉은색 계통으로 염색하였고 황색을 내는 데 산뽕나무와 치자를, 갈색은 地黄을 썼다고 하며105) 紅色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紅花로 염색하였다.106) 비록 많지는 않으나 이러한 부분적인 고려 염색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면 高麗時代에는 자초 홍화 소목 치자 산뽕나 무 지황 쪽풀 주사 등의 염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색의 직물로 염색하였음이 인정된다. 養蠶 製絲 染色과 더불어 製織 실태는 다음과 같은 문헌 기록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첫째, 仁宗 9년에 궁궐을 重修하기 위하여 庶人은 羅衣를 못입게 하며 궁궐 내외에서 錦繡工作하는 것을 10년간 정지시켰는데107) 이는 궁궐 내외에서 錦繡의 製織이 이루어 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둘째, 東文選 中의 崔滋의 글 三都賦 에는, 鷄林(慶州) 永嘉(安東)엔 뽕나무가 우거졌네. 봄 철 누에 칠제 한 집에 만발이요 여름 이라 실 자으면 한 손엔 백 타래 씩. 뽑을 제 엉킨 실을 다듬어 짜내니 철꺽철꺽 저 북 소리 벼락인가 우뢰런가. 羅 綃 綾 縑 縛 縠 불면 날듯, 연기인가 안개인가 희디 흰빛 눈 인가 서리인가. 靑 黄 朱 綠으로 물들여 錦 綺 繡 纈을 만들어 公卿과 士女들이 입어 끌 제, 바스락 바스락 떨치면 번쩍하네. 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고장. 보물이 가득찼네108) 100)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101) 高麗史節耍 권4, 德宗 3년. 102) 민족문화추진위원회 編, 국역 동문선 Ⅰ(1976) pp.59 61. 崔 滋, 東文選 권2, 賦, 3都賦. 103) 海東釋史 권26, 物產志, 布帛類 紫染條. 104) 高麗史 권6, 靖宗 6년 및 권45, 恭讓王 2년 및 권46, 恭讓王 3년 및 권50, 辛禑 5년. 105) 위의 책 권72, 志26 輿服. 106)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8년 8월. 107) 高麗史 권16, 仁宗 9년. 108) 주102) 참조.

- 53 라고 하여 지금의 경주와 안동을 중심으로 羅 綃 綾 縑 縛 縠 등과 같은 연기와 안개처 럼 얇고 고운 흰색의 견직물류와 錦 綺 繡 纈 등과 같은 先染 및 纈染을 한 다양한 견직 물류가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宋 使臣 徐兢은 高麗圖經 에서 고려는 극히 아름다운 紋羅 花綾 緊絲 錦 罽 등을 기교있게 직조하는데 그동안 北虜의 투항자들 중에 工技가 많았으므로 더욱 奇巧 하고 염색도 그 전보다 나았다109)고 하였다. 紋羅 花綾 錦 罽와 같은 직물들은 고도의 기 술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외국인의 눈에, 그것도 직물이 발달한 宋 사신의 눈에 고려의 직물이 아름답고 기교있다고 느꼈을 때에는 당시 고려의 제직술이 훌륭하였다고 주장하 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지방에서 공납한 貢物을 통하여 당시 지방의 직물 생산실태를 알 수 있다. 忠烈 王 때에는 福州 京山에서 帛 紬를, 晋州에서 綾 羅를 생산하여 중앙에 공급하였는데 공물 로 보낸 綾 羅가 거칠어 진주 수령을 파직하기도 하였다.110) 忠宣王 3년에는 權㫜이 東 京留守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綾 羅를 줄여 1년의 수납으로 3년치의 貢物로 삼 았으며111) 恭愍王때에는 鷄林 福州 京山府에서 悳泉庫에 貢納하던 綾 羅 絹 紬 布를 廣興 倉에 납부하여 百官의 녹봉으로 충당하였다.112) 또한 恭讓王때에는 임금께 드리는 옷감 을 賣買하여 供進하였더니 한 필값이 어떤 때는 倍가 되어 謀利輩들이 많은 이익을 보 는 지라 姜淮伯이 글을 올려 奴隸들에게 綾 絹 직조법을 익히어 內用으로 사용하도록 하 였다.113) 이와 같이 수 차례에 걸친 지방으로부터의 직물 공납의 실례를 통하여 각 지방 에서도 綾 羅 絹 紬 黄麻布 白苧布의 직물 생산이 이루어졌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황마포 백저포의 경우에는 20升으로 매우 섬세하게도 제직되었다. 高宗 40년 (1253)에는 경상도 按察副使가 州縣으로부터 20升 白苧布를 거두어 백성들이 白銀 1斤으 로도 布 1필을 구할 수 없었다114)고 하며 충렬왕 때 재상이 말씀 올리기를, 지금 諸道로 하여금 20升 黄麻布를 공납하게 하였는데 20升 황마포는 紡績 女工에게 도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 村婦는 도저히 이처럼 가늘게 짤 수 없으므로 諸京에 가서 구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이 오르고 사기가 어려워서 백성이 견디지 못 할 것이다115) 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에 의하면 20升 布는 지방의 가내수공업으로는 어렵지만 開 109) 高麗圖經 권23, 土產條. 110) 高麓史 권28, 忠烈王 5년. 111) 高麗史節要 권23, 忠宣王 3년. 112) 高麗史 권80, 志34 食貨3, 祿俸. 113) 大東野乘 권20, 海東雜錄2, 姜淮伯. 114) 高麗史 권24, 고종 40년 12월. 115) 위의 책 권123, 열전36 간신1, 주인원조.

- 54 國史館論叢 第55輯 京 東京 西京 등의 諸京에서는 전문장인에 의해 생산되었고 비싼 값에 매매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尙衣局 雜織署 掖庭局 都染署와 같은 직물생산과 관계되는 관청의 설치와 계속되는 직제정비, 각종 직물을 제직하는 장인들에 대한 別賜 지급 규정, 외국과의 수 많은 교역관계에서 나타난 직물의 수출 물목 등도 고려에서 紬나 布와 같은 단순한 평 직물만이 아니고 다양한 종류의 직물이 제직되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인데 앞에서 이미 고찰하였으므로 본 장에서는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養蠶 製絲 染色 製織의 전 공정이 이루어졌으며 수준 높은 직물류 가 생산되었음이 인정된다. 그러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中國으로부터의 織物 수입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품은 좋은 것이 적고 粗惡한 것이 많아 文彩之物은 모두 土產 이 아닌데 庶人들은 外產인 文彩紗縠을 입지 못하게 하고 다만 국산인 紬 絹을 쓰게 하기 바란다.116) 이제 귀천한 것이 없이 異土의 物目을 다투어 무역하여, 길에는 帝王의 의복을 입은 奴가 많고 거리에는 后紀의 장식을 한 婢가 널렸다. 원컨대 이제부터 士庶 工商 賤隸는 일체 紗羅綾段의의복과 金銀珠玉의 장식을 금하여 사치하는 풍속을 엄하게 하소서117) 등의 사치금지 기록들이나 중국 견직물들을 무역하였던 사례들과 같이 우리 직물 생산, 특히 고급 견직물 생산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의 자료도 있다. 이들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고려에서는 일부 고급기술을 가진 匠人들에 의해 극히 섬세하고 수준높은 직물들 이 생산되였지만 이는 왕실 귀족용으로 편중되었고 일반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수량이 중국산에 의존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특히 고려후기로 내려가면서 중 국산 직물은 더욱 많이 유입되어 국내산 직물발전을 저해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 때 도염서와 잡직서를 합쳐서 織染局으로 고쳤다가 직조와 염색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알자감 내시백 내알자 장원정직을 각각 2명씩 내어 그 일을 맡도록 하고 다음 해 직염국을 다시 나누어 도염서를 분리시키고 正8品의 令과 正5品의 承을 다시 두었으며 액정국의 경우에도 內謁司로 고치어 정3품의 伯2명, 종3품의 令2명을 비롯하여 고위직 관리를 중용하였던 점118) 등은 고려말까지도 중앙관서에서 鷄 錦 綾 羅 의 고급직물이 계속 생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지방에서도 綾 羅 116) 위의 책 권85, 志39 형법2 禁令, 성종 원년. 117) 위의 책 권85, 志39 형법2 禁令, 신우 3년 3월. 118) 앞의 주25) 참조.

- 55 - 絹 紬의 견직물과20升 紵布와 麻布, 紋紵布 등 상당한 수준의 직물이 생산되었다. Ⅳ. 織物의 種類 및 製織法 고려시대 생산된 직물의 종류는 크게 견직물 마직물 모직물 면직물류가 있다. 본 장에서는 각각의 섬유별로 문헌에 나타난 직물의 명칭을 세분화하였고 유물 분석 을 기초로 하여 제직법을 고찰하였다. 1. 絹 織 物 평조직으로 제직된 견직물 명칭은 絹 紬 綃 帛 縑 縠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비교적 일반화 된것은 絹 紬 綃이다. 絹은 요즈음 모든 絹纖維의 총칭으로 불리워진다. 그러나 직물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약간 변화를 갖는 데 高麗時代의 絹은 일반 絹纖維의 총칭이라기 보다는 平織으로 짠 특정한 絹織物을 지칭하는 것으로 良質의 누에고치에서 뽑아 광택이 좋고 굵기가 일정 한 蠶絲로 짠 上品의 平織物이다. 高麗史 에는 예종10년 祿俸의 折計法을 고쳐 정하 였는데 그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이 大綾으로 1필에 쌀 4石의 가치이며, 大紋羅 1필은 쌀 2石 5斗인데 비하여 大絹 1필은 쌀 1石 7斗, 中絹 1필은 쌀 1石, 小絹은 쌀 7斗로서 絹은 綾이나 羅에 비하여 가치가 떨어지는 직물이었다. 그러나 綿紬는 쌀 6斗정도이므로 綿紬보다는 가치가 높은 직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119) 또한 老乞大 에도 고려상인이 중국에서 小絹 한 필에 三錢, 綾 한 필에 二兩을 주고 샀다고 하며 이것들을 고려에 와 서 팔 때는 絹 한 필은 細麻布 두필을 받고 팔며, 綾 한 필은 鴉靑色布 여섯 필을 받고 판다고 하였으니120) 絹과 綾의 현저한 가격차이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같은 기록 들을 통하여 高麗時代의 絹은 일반적 견섬유의 총칭이 아닌 특정한 직물임이 입증된다. 絹의 명칭은 紅 靑 白絹과 같이 각종 색상에 따른 명칭이거나 大絹 中絹 小絹 등과 같이 직물의 나비에 따른 명칭이 있다. 그 당시에는 중국에서도 絹은 紬보다도 고급의 平織으 로 된 絹織物이었다.121) 119) 高麗史 권80, 志34 食貨3 祿俸, 睿宗 10년. 120) 老乞大 朴通事 諺解 pp.23 25. 121) 조효숙, 앞의 논문(1993) p.110.

- 56 國史館論叢 第55輯 그러면 絹과 비교되는 紬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의 紬는 중앙의 官營工匠에서 생산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이 농민들의 가내수공업 에 의하여 제직되었거나 지방에 따라서 紬所를 두어 생산 공납하였다. 예로부터 紬의 종류는 細紬 朝霞紬 魚牙紬 등과 같이 비교적 좋은 품질의 특산물도 있 지 만 문헌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綿紬이다. 綿紬에 관해서는 高麗時代는 물론 통 일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도 많이 나오는데 주로 6頭品 이하의 袴 襪 등에 사용되거나 평인 여자들의 의복에 사용되었다. 綿紬란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먼저 綿에 대하여 살피면 三韓時代부터 우리나라는 양 잠을 하여 綿布나 縑布를 짰다. 渤海國志 에 綿布即紬也 라 하였으니 목화재배 이전 의 綿布란 목화에서 나온 木綿이 아니고 견섬유를 말하는 것이다.122) 고대 중국에서도 누에고치를 물에 담가 손으로 풀어 만든 것 중 정제한 것을 綿 또는 眞綿이라 하였 다.123) 布目順郞은 일본 正倉院 西寶庫 南倉에 소장된 白綾褥綿 이라고 墨書된 5 6세기 의 요를 조사하였는데 白綾을 거죽으로 하고 속은 한장의 麻布를 둘로 접어 양면에 솜 (綿)을 두었다. 이 솜(綿)을 분석한 결과 누에고치에서 나온 솜이며 이러한 솜은 일반적 으로 고치 부스러기를 많이 이용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누에고치(家繭)를 찢어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24) 中國의 古書 齊民要術 에는 그와 같이 좋은 누에고치 에서 만든 실을 精綿이라고 말하였다.125) 요즈음에도 繭綿이라는 용어는 누에가 고치를 만들 때 고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뜯어 모은 견섬유 부스러기를 말하며 부잠 고치 견 부스러기 등을 원료로 하여 紡績한 絹紡絲의 원료가 되고 있다.126)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高麗時代에 제직된 綿紬란 野蠶 玉蠶 副蠶 등에서 뽑아 굵기가 일정하지 못하고 광택이 저하된 絹紡絲로 거칠게 제직한 평직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렇기 때문에 당시의 紬는 예종 10년 祿俸折計法의 내용처럼 絹보다 낮은 가치로 인정되 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朝霞紬 魚牙紬의 특산물은 齊民要術 의 내용처럼 좋은 누에고 치에서 짠 紬도 있으므로 좋은 품질의 紬였다고 생각된다. 紬의 조직유형은 絹과 동일하 게 도 1-1 과 같다. 綃는 역시 平織의 직물이지만 絹이나 紬와는 달리 꼬임이 큰 生絲로 제직하여 보다 까슬까슬한 평직물이다. 綃 중에는 經綃라 하여 매우 가늘고 꼬임이 강한 실로 밀도가 성글게 짠 평조직의 직물이 있는 데 얇고 반투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三國史記 의 延烏郎 細烏女의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이미 綃를 제직하였고 高麗時代의 문헌 122) 김육불, 渤海國志長篇 食貨考. 123) 權兌遠, 韓國社會 風俗史 硏究 (景仁文化社, 1980) p.89. 124) 布目順郞, 絹と布の考古學 (雄山閣, 1988) p.48. 125) 齊民要術. 126) 韓國纖維工學會 產業聯合會 編, 纖維辭典 (문선 인쇄사, 1982) p.21.

- 57 東文選 에도 永嘉 鷄林에서 綃를 짰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高麗時代에도 綃가 생산되 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高麗圖經 貴婦條에 여자들이 紋綾으로 만든 바지에 안감으 로 生綃를 받쳐 입었다고 하며 高麗史 東國通鑑 에도 白綃 紅綃를 의복이나 하사 품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다수 있다. 고려시대 絹 紬 綃의 유물은 봉서리 탑에 납입된 것을 비롯하여 불복장물에서도 다수 발견되었으며 특히 고려불화의 바탕 천은 주로 絹과 紬로서 당시에 1m가 넘는 광폭의 紬 絹도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02년 阿彌陀佛腹藏物 저고리에 綃脊衫 이라 墨書 되어 있으므로 그 저고리를 기준으로 하여 고려시대 일반적인 綃의 모습을 알 수 있으 며 그 밖에 매우 가늘고 꼬임이 많은 경위사를 사용하여 밀도를 성글게 제직한 마치 안 개 낀 것처럼 아련하고 반 투명하게 보이는 도 1-2 조직의 輕綃 조각도 있다.127) 일반적으로 羅와 紗는 얇고 반투명하며 가벼운 搦組織의 직물로 분류한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羅는 高麗 全時期를 통하여 대표적인 직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衣料 儀物 등은 물론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빈번하였으며128) 이러한 羅의 생산을 증명하는 기록 들을 이미 앞 장에서 조사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羅의 사용은 시대가 올라가 삼국시대부터 白羅 紫羅 絳羅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日本書紀 에 의하면 일본의 仲哀天皇 때에는 이미 신라에서 일본에 羅 를 보낸 기록이 있으며 飛鳥時代부터 白鳥時代까지, 즉 A.D. 4세기부터 A.D. 8세기까지 일본에서 사용된 羅의 대부분은 신라에서 보냈다고 한다.129) 또한 통일신라에서도 羅는 흥덕왕 복식금제에 罽羅 錦羅 野草羅 繐羅 越羅 乘天羅 布紡羅 등의 각종 羅織物의 금제 가 이루어질 정도로 매우 유행되었다.130) 고려 이전의 유물은 평양 석암리 205호분 王肝墓에서 羅가 출토되었으며131) 佛國寺 釋迦塔에서 나온 직물 중에도 수 점의 綾과 羅조각이 발굴되었다.132) 釋迦塔 腹藏物의 羅 조각 중에 한 점만을 본인이 직접 조사할 수 있었는데 紫色의 무늬없는 四經紋羅이 며 도 2-3 과 조직이 동일하였다. 127) 조효숙, 앞의 논문(1993) pp.112 113. 128) 조효숙, 앞의 논문 pp.35 52. 129) 민길자 외 4인, 韓國民俗 綜合報告書 (문화재 관리국) p.37, 주41) 재인용. 靑木保外, 增補服装大百科事典 下 (東京 : 文化出版局, 1990) p.486. 130) 三國史記 권33, 雜志2. 131) 林巴奈夫 編著, 漢代の文物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76) pp.42 43. 필자는 낙랑시대 漢의 직물로 보지만 평양에서 발굴된 점으로 보아 國內產일 가능성도 높으며 이는 앞으로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132) 佛國寺 釋迦塔 舍利莊嚴 修理報告書 (岡繩光堂, 1989) 國立中央博物館編, 佛舍利莊嚴 (1991) p.35.

- 58 國史館論叢 第55輯 고려시대 유물 중에는 羅가 매우 많아서 문헌에 기록된 羅의 유행을 입증하고 있다. 현존하는 羅의 유물은 1302년 阿彌陀佛腹藏物에 가장 많고 1346년 文殊寺 金剛如來坐 像腹藏物, 1346년 長谷寺 鐵造藥師佛腹藏物, 공민왕의 유물로 전해지는 安東 太師廟 소 장 직물 등이 있다. 고려의 羅는 2 3 4개의 교차된 二經絞羅 三經絞羅 四經絞羅의 종류가 있다. 도 2-1 은 靑綠色蝴蝶紋羅인데 二經絞羅조직으로 제직되었다. 바탕은 2올의 경사 를 1조로 하여 위사 1올을 저구에 위입시킬 때 1조의 경사를 교차시켰으며 무늬 부분은 교차되었던 2올의 경사를 다시 풀어 나란히 하여 위사와 평직이나 능직으로 제직하였다. 도 2-2 는 靑綠色唐草紋羅이며 三經絞羅조직으로 제직되어 있다. 二經絞羅와 같은 방법으로 제직되었으나 단지 2올의 경사를 1조로 하는 대신 3올의 경사를 1조로 하여 더 복잡하다. 그러나 도 2-1, 2-2 에서 교차된 2올 혹은 3올의 경사는 마치 한가닥의 직선으로 내려온 경사처럼 보이기 때문에 각 조의 경사군 사이에는 方形의 구멍이 생겨 직물의 외형은 모두 투명하고 얇아,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도 2-3 은 紫色素羅인데 四經絞羅조직으로 제직되어 있다. 4개의 경사가 한조가 되어 다시 옆에 있는 다른 조의 경사와 연속적으로 교차되어 그물모양과 같이 직조되었 다. 그러므로 전자의 직물들보다 덜 투명하고 마치 니트직물처럼 탄력이 있다. 高麗圖 經 에 기록된 왕의 紫羅公服을 비롯한 당시 百官服과 元에 조공품으로 수 차례 보냈던 紫羅는 바로 도 2-3 과 같은 종류의 직물로 생각된다. 도 2-4 는 도 2-1 과 같이 二經絞羅의 조직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바탕에는 은 은히 깔린 地紋 이외에 별도의 上紋을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부분에만 작은 북을 사 용하여 金絲 혹은 다른 색상의 繪緯絲를 위입하여 일종의 二重織과 같은 효과로 무늬가 제직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직물류, 즉 2종류의 色絲로 上紋한 직물은 통일신라시대의 흥덕왕 복식금제에 기록된 錦羅의 일종으로 볼 수 있으며, 金絲로 上紋해 제직한 직물은 고려 顯宗 12년 경주 高倦寺에 있는 金羅袈裟를 內殿에 두게 하였다는 기록의 金羅로 볼 수 있다. 여기서 羅와 유사한 紗에 관하여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紗의 제직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는데 원래 古代에는 밀도가 매우 성글어 方形의 구멍이 있는 평직물을 紗라고 일컬었다.133) 그러나 중국의 宋代에 도 2-1, 2-2 와 같이 인접한 2 3올의 경사가 교차된 二經絞 羅 三經絞羅가 새롭게 제직되었고 이들은 외관상으로 밀도가 성근 평직의 平紗(方目紗) 133) 조효숙, 앞의 논문 pp.62 63. 중국에서는 漢 唐 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고 유물과 문헌을 연결한 많은 연구 결과에서 紗 가 平織이었음이 보고되었다.

- 59 와 같기 때문에 때로는 暗花紗 亮地紗 實地紗와 같이 紗로도 호칭되었으며 때로는 單紗 羅와 같이 羅로도 불리어졌다. 따라서 도 2-1, 2-2 의 직물은 평직은 아니지만 고려 시대부터 花紋紗로 혼돈되어 호칭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花紋紗를 짰다는 기록은 없으며 高麗圖經 에 고려인은 紋羅를 잘 짰다는 점, 고려시 대에 衣料로 쓰였던 견직물에 紗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羅를 사용하였다는 점, 그 밖에 왕의 下賜 祿俸 賻助 別貢 등으로 쓰인 견직물도 주로 錦 綾 羅 絹 紬 등이며 紗는 찾아 볼 수 없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까지 紗는 幞頭紗와 같이 平織의 직물만 을 소량 생산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도 2-1, 2-2 와 같은 조직의 직물은 羅類로 호 칭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도 宋代 유물을 분류함에 있어서 이러한 조직을 대 부분 羅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평직의 紗는 점차 사라지고 2개의 경사가 교차된 搦組織의 絞紗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므로 도 2-1 과 같은 조직 의 직물은 조선시대부터는 일반적으로 花紋紗로 호칭되었다. 綾은 이미 統一新羅 興德王 服飾禁制에 內衣 袴 襪 坐子 수레 장식 등에 널리 사용되 었다.134) 高麗時代 이전의 유물로는 경주 98호 고분에서 15종의 섬유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 은제함 위의 섬유가 纈染된 小紋綾으로 추정되며 金制銙帶의 서남쪽에도 치밀한 綾 직물이 출토되었다.135) 또한 155호 고분의 중앙안욕과 남쪽 안장을 둘러싼 섬유질도 綾 이며 안장 중앙부 섬유질은 2色綾이다.136) 또한 불국사 석가탑에도 10여 점의 직물조각 이 나왔는데 그 중에 다색 자색의 綾이 여러 점 있었다.137) 高麗時代에는 衣料 뿐 아니라 벽 침구 방석 등의 실내장식으로도 사용되었으며 綾의 생산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이미 앞장에서 조사된 바 있다. 이처럼 綾은 이미 삼국시대부 터 高麗時代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활발히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綺 또한 통일신라때에는 綺典을 두어 생산할 정도로 중요한 絹織物이었으며 高麗時代 에는 色絲로 綺를 짜서 貴人士女들의 의복을 만들었고 수차례에 걸쳐 王이 綺를 下賜하 거나 또는 王에게 進上하기도 하며 의복이나 교역품에도 사용되었다.138) 고려시대 綾의 유물은 羅와 함께 다량 발견되었는데 1302년 阿彌陀佛腹藏物, 1346년 文殊寺 金銅如來坐像腹藏物, 1346년 長谷寺 鐵造藥師佛腹藏物, 安東 太師廟 소장물 등이 있다. 綺의 유물은 별로 많지 않으며 1302년 阿彌陀佛腹藏物에 2점이 남아 있다. 綺는 134) 三國忠記 권33, 雜志2 色服條. 135)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編, 慶州 皇南洞 제98호 古墳(南墳)略報告 (1976) p.24. 136) 김상용,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76) pp.239 245. 137) 주132) 참조. 138) 주128) 참조.

- 60 國史館論叢 第55輯 이미 고려 이전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오히려 고려시대에는 綾보다는 덜 보편적이었으며 조선시대로 넘어 가면서 紋紬의 출현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綺는 점차 쇠퇴하여 옛 직물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綺의 組織은 平織 바탕에 綾織이나 불규칙한 경위사의 浮沈에 의해 무늬가 제직된, 絞 보다 초기에 발달한 紋織物로 도 3-1 의 暗綠色 菱花紋綺가 이에 속한다. 綾은 綾織 바탕에 綾織이나 불규칙한 경위사의 浮沈으로 무늬가 제직된 제직물이다. 고려 유물 중의 綾은 조직에 따라 4 type으로 세분된다. 도 3-2 는 綠色草花紋綾으로 綾地同向綾紋의 조직으로 되었는데 3/1經四枚綾織 바 탕에 무늬는 1/3緯四枚綾織으로 제직되었으며 바탕과 무늬의 능선방향이 같다. 도 3-3 은 素色唐草紋綾으로 綾地異向綾紋의 조직으로 되었는데 도 3-2 와 같 이 四枚 綾織이지만 바탕과 무늬의 능선의 방향이 반대이다. 도 3-2, 3-3 의 제직법 에 의한 직물은 모두 밀도가 높아 지질이 치밀하고 섬세한 문양표현이 가능하였다. 도 3-4 는 靑色唐草菱花紋綾으로 綾地浮紋綾조직이다. 바탕은 3/1 經四枚綾織으로 (혹은 1/4 경 5매 능직) 제직되었으며 무늬는 일정한 규칙없이 위사 방향으로 길게 띄운 제직법이다. 이러한 종류의 직물은 일반적으로 밀도가 성글고 부드러우며 광택이 있다. 도 3-5 는 二色雲鶴紋綾인데 능직과 평직을 혼합한 변형 능직이다. 바탕은 3/1, 1/1, 1/1, 3/1의 순서로, 무늬는 1/2, 1/3, 1/4의 순서로 변화를 주었으며, 이때 바탕과 무 늬의 능선 방향은 같다. 유물 중 2점의 직물만이 이 방식으로 제직되었는데 경위사의 색 상을 달리하여 문양이 입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적이다. 錦과 織金은 모두 무늬를 표현하기 위하여 별도의 경사나 위사를 사용하여 제직한 二 重織物로 각종 色絲를 사용하여 무늬를 만든 錦과 金絲 銀絲를 사용하여 무늬를 만든 織 金으로 분류된다. 高麗時代 錦에 관해서는 앞 장에서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실제로 제직되고 사용되었 으며 高麗 以前에도 高句麗에서는 五色錦, 雲布錦을 제직하였고139) 新羅에서도 錦典을 두어 각종 錦을 제직하였으며140) 魚牙錦, 朝霞錦을 唐에 보냈고141) 霞錦을 일본에 보냈 다.142) 興德王 服飾 및 車騎禁制에는 각종 의복과 수레의 장식에 錦의 사용을 금지하였 을 정도로 錦이 널리 쓰였다.143) 백제에서도 王服으로 靑錦袴를 입었다 하며144) 더욱 백 139) 翰苑 東夷部, 高句麗條. 140) 三國史記 권33, 雜志 職官. 141) 위의 책 권11, 新羅本紀, 景文王 9년. 142) 日本書紀 권39, 天武天皇 10년. 143) 三國史記 권33, 雜志2 色服條 車騎條.

- 61 제인 安定那가 일본에 건너가 韓錦을 제직하여 일본 錦部의 始祖가 되었다고145)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上代社會부터 활발히 錦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古代 錦의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못함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 三國의 밀접한 영향을 받 은 일본에 우리 古代의 錦의 유물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三國時代 내지는 統一新羅時代의 직물임이 확인된 것은 1점 밖에 없다. 일본 정창원 山 水八卦背入面鐘의 뚜껑에 바른 寶祥花紋錦으로서 高麗錦 이라 묵서되어 있다.146) 그러나 그 밖에도 정창원에 소장된 吳女背子 의 錦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 다.147) 또한 백제의 安定那가 일본에 건너가 제직한 錦을 일본에서는 韓錦이라고 하는 데 佐佐木信三郎은 天華滿墜의 花鳥文錦을 韓錦이라고 하며 백제인이 제직한 錦의 실상 을 설명하였다.148) 織金직물은 고려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점은 화려한 金線으로 그려진 高麗 佛畵 金銅佛像 金銀字寫經 金銀線入絲香垸 등의 당시 공예품들과 일맥상통한 귀족적 경 향이라 하겠다. 織金은 고려 말부터 金線으로 호칭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金絲에 의해 수자직으로 제직된 金線緞으로 전통이 이어지는데 고려시대 만큼 유행되지는 않았 다. 이제까지 발견된 고려시대의 錦(혹은 織金)의 유물은 12세기로 추정되는 鳳棲里 塔 에 납입되어 있는 유물과 1302년 阿彌陀佛腹蔵物, 1346년 文殊寺 金銅如來坐像腹藏物, 1346년 長谷寺 鐵造藥師佛腹藏物 등과 같이 불상에 납입된 직물이 있는 데 그 중에 色 絲로 무늬를 넣은 錦은 4점 정도이며 나머지는 金銀絲로 무늬를 짠 織金직물이다. 도 4-1 은 五色唐花紋錦으로 12세기의 유물인데 일본 정창원의 高麗錦 과 같은 古 代의 錦조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의 唐代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전형적인 緯錦의 제직법이다. 도 4-2 는 柳綠色梅竹紋錦으로 14세기 유물인데 바탕은 변화수자직이며 무늬 부분 만 紋緯絲를 덧걸어 1/5의 緯 6枚綾으로 제직되었다. 시대가 빠른 도 4-1 에 비해 古 代의 錦 제직상의 특성에서 벗어나서 단순화되었다. 도 4-3 는 粉紅色鳥紋織銀으로 바탕조직은 地經絲와 地緯絲에 의해 평직으로 되었 으며 무늬 부분에만 별도의 紋緯絲(銀絲)를 덧걸어 地經絲와 紋緯絲에 의해 1/5 緯 6枚 絞織으로 제직되었다. 144) 위의 책 권24, 百濟本紀. 145) 日本書紀 권14, 雄略天皇 7년. 146) 曹圭和, 正倉院의 高麗錦 ( 大韓家政學會志 4권 1호, 대한가정학회, 1976) p.129. 147) 朱星姬, 日本 正倉院의 吳女背子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3. 148) 민길자 외 4인, 앞의 책 p.46, 주53) 재인용. 佐佐本信三郞, 新修神護寺 經帙錦綾和見 (1958) p.36.

- 62 國史館論叢 第55輯 도 4-4 는 朱黄色飛鳥紋織銀으로 바탕조직은 2/1의 經三枚綾織으로 제직되었고 무 늬부문은 별도의 紋緯絲(銀絲)를 덧걸어 地經絲와 紋緯絲에 의해 1/3, 1/4, 1/5의 綾織이 나 五枚繻子織으로 제직된 직물이다. 도4-5 는 柳綠色小花紋織金으로 경위사 모두 이중으로 제직하였다. 경사는 바탕을 이루는 地經絲 위에 別經絲를 地經絲 두 올 건너 한 올씩 덧걸었으며, 위사는 地緯絲와 함께 紋緯絲를 덧걸어 이중으로 하였다. 2. 麻 織 物 麻布에 관한 우리 나라의 제일 오래된 기록은 挹樓 濊에서 麻布를 짰다149)는 기록이 지만 신석기시대에 길쌈에 사용했던 방추차가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출토된 점으로 미 루어 보아 삼베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서 眞骨大等과 眞骨女가 麻布 28升을 사용하도록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고려 이전부터 28升 이상의 고운 삼베도 짜여졌음을 알 수 있 다. 이와 같이 정교한 제직술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어 20升 이상의 麻布를 생산하기도 하였으며 5升布는 전국에 걸쳐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어 衣料와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 었다. 고려시대 마포의 명칭은 黑麻布 黄麻布 二十升布 廣布 平布 中布 生平布 中平布 貢 平布 五綜布 五升布 등으로 불리워졌다. 고려시대 이전의 유물은 경주 황남동 98호 고분 유물 중 銙帶의 심지가 麻類이고 155 호 고분 유물 중 8조각의 麻布가 있다. 고려의 유물은 1302년 아미타불복장물 중 8升 마 포를 비롯하여 10여 점이 있으나 대부분 5 8升의 거친 것이다.150) 조직은 모두 도 5 와 같이 평조직으로 되었다. 모시(紵)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 통일신라 경문왕때 30升 紵衫段을 唐에 貢物로 보낸 것으로 이미 고려 이전부터 섬세한 모시의 생산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紵布의 제직기술이 뛰어나 20升의 곱고 흰 白紵袍와 무늬있는 紋紵布까 지 생산되었으며 衣料는 물론 대외 수출품으로 큰 몫을 하였다. 당시 紵布의 호칭은 紵 布 紋紵布 花紋紵布 細紵布 二十升白紵布 毛施布 黄紵布 紅紵布 등으로 불리워졌다. 149)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條. 150) 김미자 조효숙, 1302년 아미타불복장직물의 분석 ( 1302년 아미타불복장직물의 조사연구, 온양민속박물관, 1991) p.106, 114.

- 63 고려시대 이전의 유물로는 불국사 3층석탑에 납입된 다라니경과 香木을 싼 紵布가 있 다.151)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麻布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佛腹藏品인데 12升 白紵布로 된 반소매 袍를 비롯하여 20여 점이 남아 있다.152) 그러나 불행히도 고려의 아름다운 紋紵布는 아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도 6 과 같이 평직의 紵布만이 남아 있다.153) 3. 毛 織 物 우리나라는 일찍이 夫餘에서 罽를 衣料로 하였으니154) 麻 絹織物과 함께 모직물의 역 사도 매우 오래되었다. 삼국시대에도 罽 氈 氍毹 毾㲪 毬 (毛*叟)의 모직물을 衣料와 깔 개(카펫)로 사용하였으며 신라에서는 花氈155)을, 백제에서는 毾㲪을 일본에 보냈고156), 통일신라 때에는 毬毹를 唐에 보내는 등157), 모직물로 된 카펫류는 주요한 수출품목이었 다. 고려시대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罽錦 혹은 罽를 後晋 後唐과 宋에 조공하는 등 당시 의 고급 수출품으로 그 자리를 굳혔고, 이 외에도 罽와 氈은 衣料 褥 倚背 御輩 등에 사 용되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일본 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의 花氈이 있다. 이 氈은 毛섬 유의 축융성을 이용하여 열 수분 압력을 가하여 수축시킨 不織布이다.158) 罽는 氈보다 고급의 모직물인데 양질의 毛絲로 제직하였다. 고려시대 罽의 제직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後晋에 朝貢한 紅地金銀五色線織成龍魚罽라든가 紅地金銀五色線織 成花鳥罽錦의 직물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金銀絲와 여러 色의 毛絲에 의해 織成된 일종 의 錦과 같은 직물로 생각된다. 織成은 도 7 과 같이 평직으로 바탕을 제직하고 별도 의 작은 북에 다른 색의 실을 감아 무늬를 표현한 일종의 이중직물이다.159) 따라서 고려시대에 생산되었던 金銀五色線織成罽錦 金銀五色線織成罽錦과 같은 직물 들은 도 7 의 조직법으로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後晋에 보낸 조공품 중에 金銀 五色線織成日月龍鳳襖段의 직물은 위의 조직과는 달리 수자직의 바탕에 무늬가 직성되 151) 과학기술처, 문화재의 과학적 보존에 관한 연구 (1972) p.40. 152) 김미자 조효숙, 앞의 논문 p.107, 114. 153) 紋紵絲는 아마도 평직과 익조직에 의해 무늬가 표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유물이 없어 확실 한 설명을 할 수 없다. 154) 三國志 魏書, 東夷傳 夫餘條. 155) 布目順郞, 앞의 책 pp.167 168. 156)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15년 12월. 157) 三國遺事 권3, 萬佛山條. 158) 布目順郞, 앞의 책 pp.167 168. 159) 趙豊, 絲綢藝術史 (北京 : 浙江美術學院出版社, 1992) p.70. 唐代에 織成 직물이 많이 사용되었고 현존하는 유물로 남아 있으며 이를 근거로 한 중국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織成의 조직은 도 7 과 같다고 한다.

- 64 國史館論叢 第55輯 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 서북지방의 위그루인은 이미 涇段 豊段 褐毛段과 같은 모직물 段을 생산하였는데160) 서역과 많은 교류를 가졌던 신라시대부터 우리는 그들의 영향으로 서역, 특히 위그루인들이 즐겨 생산하였던 罽 毛段 白氎布와 같은 직물류를 생 산하였다고 생각된다. 4. 綿織物 고려시대 생산되었던 면직물로는 白氎布와 木棉이 있다. 白氎布는 목면의 옛 명칭으로 草綿을 원료로 한 직물이다.161) 우리나라에서 白氎布를 생산한 가장 오랜 기록은 翰苑 에 又造白疊布 이라는 기록이다. 그 후 신라에서는 40升의 섬세한 白氎布를 唐에 보냈으며162) 고려시대에도 중기까지 白氎布를 대외 교역 품으로 사용하였다. 그때까지는 원료가 되는 목화를 재배하지 못하였으나 원료를 수입하 여 섬세한 직물을 잘 짜는 고려의 기술에 의해 밀도가 치밀한 평조직의 백첩포를 생산 하여 수출하였다고 생각된다.163) 우리나라에 면종자는 공민왕 13년(1364) 문익점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그 후 그의 장인 鄭天益과의 협력으로 재배에 성공하였고 胡僧 弘願의 도움으로 직조술을 익히어 婢女로 하여금 一匹을 짜도록 하여 무명의 생산이 시작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시작된 무명의 생산은 고려 말까지도 목화가 처음으로 생산되었던 경상도 지 방을 중심으로 농촌의 가내수공업에 의해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단계로 생각된다. 당 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으므로 국가로부터 어떠한 무명 생산에 대한 권장정책의 시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우 13년(1387)에 明과 교역에서 고려의 말을 수출하는 대가 로 木棉과 段子를 수입하였다.164) 이때는 면종자도 도입된 지 20여년이 경과한 시기였으 나 목면은 수출품이 아니고 비단과 같이 明으로부터의 수입품이었다. 더욱이 공양왕 3년 (1391)에는 中郞將 房士郞이 올린 時務十一條 中 第二條165)에 의하면 我朝只用土宜 紬 160) 吳淑生 田自秉, 中國染織忠 (臺灣 : 南天書局, 1988) pp.206 207. 沈從文, 앞의 책(1981) p.356. 161) 민길자, 면직물 제직년대에 관한 연구 ( 교육논총 3, 국민대 교육연구소, 1983). 162)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는 40升 백첩포를 짰는데 당시의 직물은 길이 7步 나비 2尺을 1필로 삼았으니( 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 경문왕 9년 7월), 직물폭 2尺은 대략48.24 정도로 생각 되며 이것을 현재의 전통 직물이나 조선시대의 직물로 환산하면 28升 정도가 되니 그 섬세한 정 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163) 罽와 같은 毛織物도 일부는 遼 金에서 毛絲를 수입하여 충당하였다. 이처럼 木棉의 원료도 서역 등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64) 高麗史 권133, 列傳49, 신우 4년. 165) 高麗史節要 권35, 공양왕 3년 3월.

- 65 紵 麻布 라 하여 무명은 아직 紬 紵 麻처럼 우리 토산물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Ⅴ. 結 論 고려시대 직조수공업은 官營手工業 民間手工業 所手工業으로 구분되었다. 관영수공업에서는 중앙관서에 掖庭局 雜職署 都染署를 두었고 각각의 부서에 罽匠 錦 匠 綾匠 羅匠을 두어 錦 綾 羅와 같은 고급 견직물을 주로 생산하였고 罽와 같은 모직물 의 생산도 가능하였다. 또한 중앙 조직관서에는 正六品에서 從九品에 이르는 관리가 배 치되어 행정적으로 지휘하는 체계가 세워졌으며 실무적인 행정사무는 아전 출신이 담당 하였다. 실질적인 직물생산 작업은 別賜를 받는 職役層工匠과 일정기간 役을 제공하는 賦役層工匠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방관서로는 諸道에 錦坊 綺坊 雜織坊 甲坊의 소규모 작업장을 두고 賦役層工匠들에 의해 錦 綺 綾 羅의 직물생산이 이루어졌다. 민간수공업에서는 농촌의 가내수공업에 의한 紵布 麻布의 麻織物 생산이 근간을 이루 었으나 그 외에도 관영수공업장에서 일정한 役을 바친 전문수공업자들도 그 이외의 시 간에는 私匠으로 활동하여 자기경리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에는 사원 의 규모가 방대하여 사원내에 전문적인 織造匠人을 두어 자급용 직물 이외에 貢物이나 商品을 위한 직물생산도 이루어졌다. 그 밖에 絲所 紬所의 所手工業匠에서도 천인 신분 의 전문장인이 있어 국가에서 부과된 공물량을 생산하였다. 고려시대 생산된 직물은 초기 중기 말기에 따라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초기까지 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직물종류들이 그대로 이어졌으니 中央官署에서는 罽 錦 羅 綾 白氎布와 같이 古代의 직물들이 계속 생산되었고 특히 罽 白氎布와 같이 서역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도 생산되었다. 地方官署에서도 錦綺雜織坊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錦이나 綺와 같은 古代의 직물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고려중기에는 옛직물의 연장 위에 고려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즉 綾 羅의 견직물이 많이 발전되었으며 톡히 銷金紋 羅 金羅와 같이 金箔이나 金銀絲를 사용한 얇고 화려한 羅를 생산하여 화려했던 직물문 화를 잘 말해주고 있다. 고려말기에는 元의 지배로 어려워진 정치 경제 하에서 사치스러운 古風의 錦 罽와 같 은 絹織物과 毛織物의 생산은 점차 소멸되었고 견직물 중에는 綾 羅 紬 정도가 대표적 산물이었다. 紵布와 麻布의 마직물은 고려 전 시기를 통하여 발달하였지만 특히 말기에 錦 罽와 같은 외국의 황제에게 바쳤던 최고급 직물의 자리까지도 대부분이 마직물로 대

- 66 國史館論叢 第55輯 치되었고 따라서 마직물은 더욱 고급화 되었으니 그 예가 花紋紵布인 것이다. 또한 고려 말기는 織物史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이루어졌으니 공민왕 13년(1364) 문익점에 의한 면종자 도입이다. 그러나 木棉의 생산은 木花의 施培地인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가내 수공업에 의해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 단계로 생각되며 아직까지 조선시대와 같이 일반 서민의 대중적 衣料로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려 말기까지도 중앙 製織기관이 존재하였고 그 생산활동의 강화를 위하여 職制를 개편하는 노력을 기울였던 점으로 보아 일부 특수층을 위한 織金 錦 綾 羅의 직 물들은 여전히 생산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려말기 사원의 경제적 규모가 막대하였으 므로 사원 내부에서도 특수장인들에 의해 최상의 고급직물들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있 다. 현존하는 불복장 직물들 중에 많은 부분이 중앙제직기관이나 사원 내부의 특수 장인 에 의해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고려시대 여러 형태의 직조수공업장에서 생산되었던 직물의 명칭을 열거하면 絹 紬 綃 帛 縑 縠 紗 羅 綾 織金 錦 白紵布 紋紵布 細紵布 黄麻布 黑麻布 細麻布 罽 罽錦 氈 白氎布 綿布 등이 있다. 문헌에 기록된 각종 직물의 명칭과 유물분석결과를 연관시킨 제직상의 특징은 표 4 로 정리되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