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로스쿨 유치 활발 인물 포커스 겨자씨 사랑의집 대표 유이상 동문 Special 동문 CEO특강/유비쿼터스 시대, 잘놀줄아는 사람이 미래시대 성공자 될 것 모교소식 www.kmua.or.kr 법학 디자인 도서관 새 모습 선보여 세계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잇단 개가
Opinion KOOKMIN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특별기획 CoverStory ƒu06 ƒu03 ƒu08 ƒu12 북악초대석 ƒu14 동문회 소식 ƒu20 ƒu21 ƒu16 ƒu24 ƒu42 ƒu22 ƒu28 동문기고 민주화 투사에서 시민운동가로 돌아온 이태복 동문 동문논단 지부소식 시론/장영달 총동문회장 화보/북악캠퍼스의 가을 동문 CEO 릴레이 특강/이신안 유비쿼터스시대, 잘 놀 줄 알아야 미래 성공자 사회복지법인 겨자씨 사랑의 집 대표 유이상 동문 작지만 소중한 관심, 나눔의 시작입니다 총동문회 초청 해공지도자과정 2기생들 만찬 국회의원 장영달 후원회 총회 재취업, 자신만의 강점을 무기로/곽용근 고종황제의 마지막 특사, 이준의 삶과 구국운동/이계형 미국 방문기/신기택 짝퉁 간판의 파고/황명선 국민라이온스/북악경제인포럼/경기남부지역모임 사금회/방우회 북악단상 동문 동정 ƒu32 산과 나 /이철주 ƒu34 박맹우/이철주/김진수/강희복/변귀영/박노산/서찬교 윤건영/이환우/이효리/장석주/윤상규/김석진/김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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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민주화 투사에서 시민운동가로 돌아온 이태복 동문 국민과직결된 5대운동 으로새로운시민운동전개 1970년 모교 법학과에 입학한 후에는 국민대 아카데 미 조직을 만들어 대학생 아카데미 활동과 함께 고등 학생 아카데미 지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71년에는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와 함께 교련지지 여론을 조작한 총학생회 사퇴요구 교내시위를 조직했 는데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으로 제적당해 강제 입영됐으며, 군복무를 마친 뒤 용산시장의 지게꾼을 거쳐 전국 각지의 노동현장에서 현장경험을 했다. 이태복 동문은 학생운동과 강제입영, 복학 후 강제 연행과 귀향조치, 노동현장 활동 등을 겪으면서 반독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신 유명한 이 말은 이태복(법 70학번)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좌우명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태복 재민주화운동 전체를 아우르는 이론적 토대가 취약함 을 절실히 느껴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77년 광민사라 는 사회과학 출판사를 설립했다. 동문은 노동운동과 재야운동의 대부로 한평생을 보냈다. 하지만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영국노동운동사 노동의 최근 이태복 동문은 민주화투사라는 겉옷을 벗고 시민운동가로 역사 등 광민사에서 출간한 20여 권의 양서는 돌아와 새로운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서민들의 삶을 좀먹고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로 불릴 있는 기름값 카드수수료 휴대폰비 약값 은행금리 등을 5대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거품으로 규정해 대국민운동을 벌이고 있는 5대운동본부 의상 토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임대표를 맡아 눈 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이 1970년대 말에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하고 태복 동문은 마지막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에도 전국민주학생연맹과 함께 노동자와 학생이 연계한 노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5대운동 전도사로서 바쁜 일정을 소화 학연대 전술을 운동권에 전파했다. 유신독재가 국민 하고 있다. 적 저항에 부닥쳐 무너지고, 과도기를 틈타 등장한 전 두환 정권의 최대 표적이 된 이태복 동문은 1981년 강 이태복 동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제 연행돼 남영동 고문실로 끌려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고교시절부터 흥사단 아카데미 강제 연행된 이태복 동문은 고문경관 이근안으로부 에서 활동하며 흥사단 창립자인 도산 선생의 가르침(무 터 두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후 계엄법 국가보안 실 역행 충의 용감)을 본받아 실천해 오고 있다. 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선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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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북악캠퍼스의 가을 캠퍼스 전경 개교 60주년 기념 음악회 8 ::
KOOKMIN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북악가족한마당 면학의 길 용두리 개교 60주년 기념 불꽃축제 외국인 유학생 수업 모습 북악체전 www.kmua.or.kr 9
Focus 모교 이성환 법과대학장이 밝히는 국민대학교 로스쿨 : : 2007년 7월 3일 로스쿨법 국회 통과 전 국민인의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이 필요합니다 2009년 3월에 법학전문대학 원(로스쿨)이 문을 연다. 2013 이성환 법과대 학장 막심하기 때문에 각 대학은 로스쿨 유치에 사활을 걸고 뛰고 있는 것이다. 년께는 사법시험이 폐지돼 로 학부와 분리된 3년제 법학전문대학원인 로스쿨을 유 스쿨을 통해야만 법조인이 배 치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소 전임교원을 20명 이상 확 출될 예정이다. 보해야 하고, 특히 법조계 경력 5년 이상 교원이 20%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이상 포함돼야 한다. 또 교원 1인당 학생 수는 15명 이 5 31 교육개혁안 발표 때 처 하여야 하고, 법학도서관과 모의법정 설치 등의 기준을 음 논의된 후 12년을 끌어온 로스쿨법 이 국회를 통 충족해야 한다. 과하면서 각 대학 법과대학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시 로스쿨 숫자나 학생정원 등 세부사항은 9월 말 결정 작됐다. 로스쿨을 준비해 온 대학 모두에 로스쿨이 설 된다. 1차 관문인 셈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우 치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대학은 로 리 학교도 그 동안 법과대 교원 확보에 나서고, 법학도 스쿨 설치 여부에 따라 대학 순위가 뒤바뀐다 며사 서관과 모의법정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활을 걸고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마지막 작업에 한창이다. 현재 로스쿨 유치에 뛰어든 대학은 40여 개로 권역 총동문회 김재복(행정 67학번) 사무총장이 본교 법 별로 서울이 가장 치열한 상황이다. 모교를 비롯해 건 과대학 이성환 학장을 만나 로스쿨 도입 배경 및 준비 국대 경희대 고려대 단국대 동국대 서강대 서 상황 등에 대해 들어봤다. 울대 서울시립대 성균관대 성신여대 숭실대 연 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국외대 한양대 홍익대 기존 법과대학과 로스쿨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등이 필사적으로 유치작전에 나서고 있으며, 지방에서 기존의 법과대학은 학사학위 과정에 설치되는 반면 는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동아대 영남대 조선 로스쿨은 전문대학원으로 석사학위 과정에 설치된다 대 등이 뛰고 있다. 는 점에서 교육 수준상 차이를 보입니다. 기존 법과대 이들 40개 대학이 지금까지 로스쿨 유치를 위해 투 학이 법학 일반의 지식을 교육해 특정한 교육목표를 자한 돈은 2020억원이며, 1700억원이 추가로 투자될 설정하지 않는 반면 로스쿨은 법률전문가의 양성, 특 예정이다. 로스쿨 유치에 실패하면 감수해야 할 손해가 히 변호사를 배출하는 전문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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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동문 기고 : : 곽용근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사회복지학 전공) 동문 자신만의 강점 무기 삼아 재취업 길 열어야 이제 평생직장이란 말은 남의 말뿐인 시대. 등 떠밀려 직장을 나왔지만 재취업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힘든 시기를 터닝 포인트로 삼아 재취업에 성공한 곽용근(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사회복지학 전공) 동문의 재취업기를 통해 희망을 엿본다. 고실업 시대에,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자영업을 접고 40세에 사회복지 더욱이 오십을 목 법인이 운영하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취직을 했고, 전에 두고 있는 사회사업과 관련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면서 사회복 내가 재취업에 성 지 분야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공한 기쁨은 이루 2003년 행정대학원 사회복지 전공 38기로 입학해 말 할 수 없이 컸 2005년 2월 졸업하고 그해 실시된 사회복지사 1급시험 다. 삶의 여정에 에 합격해 꿈을 이루는 듯 했다. 서 여러 번 모습 그러나 인생은 호사다마라 했던가. 집안에 우환이 생 을 바꾸었고, 전 기면서 직장을 나와야 했고 2년간 가정경제 파탄과 실 문성이 담보된 업이라는 삶의 고단함을 맛보게 되었다. 22개월 동안 career의 축적이 커튼달기, 인터넷 쇼핑몰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나름 없는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던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대로 잡 서치를 하고 이력서를 냈다. 하지만 오십이 다 3월 1일 국민체육진흥공단(재) 국민체력센터 경륜경 된 나이에 경력이 한 곳에 집약되는 부분이 없다보니 정 심리상담클리닉 경기북부(일산)지점 상담팀장으로 나를 눈여겨보는 기업은 없었다. 발령받아 사행성 게임에 몰입해 자칫 삶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게임 몰입자 의 발생 예방과 재활을 돕는 혼자만의 실업 고통, 전문가의 도움 필요해 전문상담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혹자는 이 실업 기간을 인생의 절대 황금시대 라고 뚜렷한 커리어 없어 재취업 안돼 위로했다. 그러나 실업을 일관되게 지배하는 것은 고통 이다. 돈과 사람과 사회와의 분리에서 오는 외로움이 30세에 대위로 전역한 뒤 춘천에서 커피 대리점 5 다. 생각의 과대 노동자, 이상과 현실과의 경계에서 시 년, 대형식당 운영 등 10여 년 간 자영업을 해왔지만 간에 애착하고 시간을 두려워한다. 가장으로서 딸과 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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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KMIN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고종 황제가 이준에게 건네 준 신임장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빈덴호프 궁전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국민교육회와 한북흥학회를 이끌 의 이위종 등을 특사로 지목했다. 이준이 특사로 지목 었다. 이 때 그는 평리원 검사에 임명되어 다시 공직에 될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정의감과 뛰어난 법률 지식 나갔다. 검사시절 그는 정의에 따른 검찰권을 행사하여 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이들 특사의 임무는 대한제국의 호법신(護法神) 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07년 2월 고종 황제의 특사령을 받아 정의를 세계에 알리는 것으로, 1907년 헤이그 사행 은 그것의 실천이었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기산도 등을 석방시키 1907년 4월 20일자로 고종 황제로무터 밀서를 받아 려 했다. 그런데 친일파들이 이를 적극 저지하자 그들 쥔 이준은 4월 22일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을 기소하며 맞섰으나, 오히려 자신이 재판에 회부되면 4월 26일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준은 북간 서 결국 검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도에 있던 이상설에게 급전으로 도착 사실을 알렸고, 5 그런데 당시 대한제국은 황제가 있었으나 이름뿐이 월 21일 이상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었고, 일제와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이때 제 9300km가 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보름 동안 달려 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소식은 구국을 위한 실낱같은 6월 4일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희망으로 다가왔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그곳에서 전 주러공사관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을 고발하여 대한제국의 상실된 국권을 찾고자 한 것이다. 만나 평화회의장에 가지고 갈 장서 와 성명서 를프 이를 위해 특사를 파견해야 했는데, 고종 황제는 고심 랑스어로 번역하는 한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끝에 국내의 이준과 함께 간도에 있던 이상설, 러시아 만나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여 그로부터 특사활동 www.kmua.or.kr 25
Message 동문 기고 : :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좌측부터) 을 돕겠다는 언약을 받기도 했다. 이준 특사 일행이 묵었던 융 호텔(좌)과 이준열사기념관(우)으로 바뀐 현재 모습 을 끊기에 이르렀고, 결국 7월 14일 이역만리 타국에서 6월 25일, 평화회의가 개최된 지 10여 일이 지나 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준의 순국은 나흘 뒤 국내 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곧바로 평화회의장으로 달려 에 할복자살 했다는 사실로 전해졌고, 당시 계몽단체 갔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각국 대표들로부터 냉대 에 충격을 던져주어 계몽운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를 받아 결국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특사들은 성명서 와 일인불법행위 라는 소책자를 평 는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취 화회의 의장과 일본을 제외한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하 시키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뒤 일제는 이를 는 한편, 영국 기자 스테드의 도움을 받아 평화회의 문제삼아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뒤, 정미조약을 체결하 보 에 장서 전문을 게재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가속화시켜 알렸다. 나갔다. 이러한 특사들의 활동은 각국 기자들의 마음을 움직 이준은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임시로 묻혔다가, 2 였고, 그 결과 국제협회에 초청될 수 있었다. 이때 이위 개월 뒤 이상설 이위종에 의해 뉴브다이컨으로 옮겨 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 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 졌다. 해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의결 되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나라가 망해 곧바로 들어오지 못하다가, 1963년 10월 순국한 지 55년 만에 반쪽이 된 고국으로 하지만, 특사들은 일제를 비롯한 서구 강대국들의 홀 돌아와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이준 등 대로 여전히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참담함을 겪 특사들이 머물렀던 융 호텔은 헤이그 이준열사 기념 어야만 했다. 급기야 이준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음식 관 으로 바뀌어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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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모교 소식 : : 대동제, 거침없이 일주일을 흔들다 래 버티기, 자장면 빨리 먹기, 사이다 빨리 먹기 등 의 참여행사가 이어졌다. 폐막식에서는 불꽃놀이를 비롯한 각종 동아리 공연이 열렸다. 초대가수 혜령, The Voice, 윤도현 밴드(YB), 채연 등의 뜨거운 무 대를 마지막으로 축제는 막을 내렸다. 축제기간 내내 교내 상설거리에는 각종음식 가판대 와 수공예제품 판매, 물풍선 던지기 등 각 단과대 학 생들의 수익사업이 열려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39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젊음 그 하나에 맞췄다. 총학생회장 이준희(언론 4)군은 민주광장을 꽉 메우 거침없이 대동제 가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열 고도 모자랐던 학생들의 열정적인 반응에서 보람을 느꼈 렸다. 다 고 전했다. 축제 첫날에는 영화제와 100 vs 100 미팅이 열 렸다. 복지관 지하 1층 영화관에서 열린 영화제 골 드 클래스 는 그놈 목소리 를 선착순 140명에게 무료로 상영했다. 많은 학생의 이목을 끌었던 100 vs 100 미팅에서는 다양한 학과 학년의 학생들이 총 9팀으로 나뉘어 꼬리잡기, 단체 줄넘기와 커플 댄스에 참여했다. 우승팀에게는 30만원의 커플지원 금이, 최강커플에게는 패밀리 레스토랑 상품권이 주어졌다. 둘째 날에는 커플 최강전과 스타리그를 비롯한 많 은 행사가, 셋째 날에는 모교 응원단 용두리가 주최한 제22회 북악 응원 넋두리 가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31일에 열린 폐막식 전야제는 초대가수 홍경민을 비롯한 연예인과 숭실대 서울시립대 댄스팀이 무 대에 올라 축제 열기를 고조시켰다. 마지막 날에는 과사랑 경연대회, 얼음 위에서 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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