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37 - 로 이러한 성격은 제석신앙이 일반민들에게 쉽게 파고 들 수 있는 대중성을 지니게 하였 을 것이다. 수명을 늘리고 싶으면 천제석과 관음보살을 모셔야 한다는 內侍使令 榮儀의 말을 듣고 의종은 제석과 관음상을 많이 그리게 하여 각지 사찰로 나누어 보내는 불사 를 전국적으로 가졌는데 사람들이 이를 祝聖法會라 불렀다 한다.76) 제석에게 수명 연장을 기원하고 있는 사례는 이미 인종대 원응국사 學一의 비문 내용 에서도 찾아진다.77) 학일이 입적하려 할 때 그날이 忌日임을 걱정하는 문인들의 이야기 를 듣고 睒子經 중에 있는 一切妙菩薩의 本生談78)에 의해 수명연장을 제석천에게 청하 리라 하고 彌勒上品을 염송한 결과 그 날을 피해 입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인집권 기 활약한 靜覺國師 志謙의 비명에서도 지겸이 어머니가 죽자 제석에게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되었다면 자식인 나의 수명으로 대신해 달라고 빌었는데 어머니가 다시 살아났 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79) 이러한 일화들은 제석이 고려사회에서 인간의 수명을 좌 우하는 절대적인 신으로 신앙되고 있음을 뒷받침해 준다.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제석신 앙이 일반민에까지 퍼져 대중들도 제석상 앞에서 법회를 열고 제석에게 장수를 빌게 되 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석신앙의 전거는 섬자경 이었다. 그런데 원응국사 학일이 임종시 제석에게 수명연장을 기원하면서 제석경 이 아닌 彌勒上品을 염송한 사실은 제 석을 미륵의 화신으로 설하고 있는 섬자경 을 근거로 하여 미륵신앙을 제석신앙에 포섭 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미륵상품은 彌勒上生經 으로 추측되는데 미륵상생경 은 十善을 닦으면서 장차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의 제자가 되기를 발원하면 임종시 미 76) 고려사 권123, 열전36, 榮儀. 77) 圓應國師碑 ( 한국금석전문 중세 상) p.659. 78) 佛說菩薩睒子經 에 따르면 無數劫 전에 만행을 닦는 一切妙라는 보살이 있었다. 그때 迦夷 國이라는 나라에 한 장자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부부 모두가 앞을 보지 못하 는 소경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기를 원하던 참이 었다. 바로 그때 一切妙菩薩이 원을 세우고 죽어서 소경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 이름이 睒이었다. 지극히 효성스럽고 인자했던 섬은 열살 되던 해 재산을 모두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 어 주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수도하자고 부모를 졸랐다. 부모는 아들의 뜻을 좇아 산중으로 가 살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맛있는 과일을 따다가 봉양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도 를 하며 지냈다. 어느 날 섬이 사슴가죽 옷을 입고 시냇가에서 병에 물을 담으려는 순간 사냥 을 나왔던 가이국 국왕이 사슴인 줄 알고 섬을 쏘았다. 화살이 가슴에 적중하여 죽어가면서 그는 이것은 나의 宿世의 業이므로 원망하지 않으며 죽은 후 소경인 부모를 보살펴 줄 것을 왕에게 부탁하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부모는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울면서 어쩔줄 몰랐 다. 어머니는 화살이 꽂힌 가슴을 입으로 빨면서 독기가 내게 와서 이 늙은 어미가 대신 죽고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하늘에게 간절히 빌었다. 이때 제석천왕이 神藥을 가지고 내려와 섬의 입 에 넣었더니 곧 화살이 스르르 뽑히고 섬이 되살아 났다. 이에 소경 부모는 너무 놀라고 기뻐 서 두 눈을 동시에 뜨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盲父가 지금 나의 부왕인 閱頭檀이시고, 盲母는 나의 어머니 藦耶夫人이며 가이국왕은 阿難이고, 제석천왕은 미륵보살의 화현이었다고 본생담을 설하셨다( 불설보살섬자경, 신수장경 권3, pp.436 438). 79) 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 동국이상국전집 제35권, 비명 묘지).
- 238 - 國史館論叢 第78輯 륵보살이 빛을 밝히고 맞이하러 오며, 미륵의 자비와 공덕이 무량하므로 참회 발원하거나 명호를 부르면 죄업이 소멸되어 도솔왕생은 못할지라도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兜 率往生 사상이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제석신앙에 있어서 장수를 기원하는 측면이 아무리 현세기복적 성격을 지닌다 하여도 도솔왕생사상과 관련하여 그 배경에 불교 교리의 실천 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려후기 무속화된 제석신앙 과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榮儀는 제석과 관음불화를 전국 사찰에 봉안하고 祝聖法會를 열었을 뿐 아니라 安和寺에 제석 관음 수보리의 소상을 만들어 놓고80) 보살들의 이름을 주야로 부르게 하는 連聲法席을 개최하고서 자신도 정성을 다하는 듯 밤새도록 예배하니 의종이때때로 와보고 특별히 표창했다고 한다.81) 이러한 사실들은 의종대에 제석과 관음이 불화로 또 는 소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석불화는 현재의 高麗佛畵圖錄에 단 한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제석이 神將圖나 變相圖에 구성원으로 그려진 것은 있어 도 관음도나 지장도처럼 단독으로 그려져 전해오는 불화는 한점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고려불화로 전해지는 두 점의 摩利支天圖 가 있다.82) 마리지천은 항상 하늘의 해를 앞서 가며 자재한 통력이 있는 밀교의 天神이다. 이를 염하면 일체의 재액을 소멸시 켜 준다고 하며 무사의 수호신으로 전하는데 摩利支天菩薩多羅尼經 이 그 전거가 된다. 특히 일본에서 무사의 수호신으로 중시되었다.83) 마리지천의 모습은 마리지경 에 의하 면 天女과 같은 모습으로 寶冠 瓔珞으로 장식하고 왼팔을 구부려서 젖가슴 위로 올려서 주먹을 쥐어 卍字형 부채를 들고, 오른손은 팔을 쭉 펴 다섯손가락을 나란히 하여 아래로 향한다. 부채는 卍字형으로 네 귀퉁이 안에 각각 해 모양이 하나씩 그려져 있으며 부채 위에는 해를 상징하는 불꽃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84) 한편 大摩里支菩薩經 에는 얼굴이 셋이며 팔이 여섯 개 또는 여덟 개의 모양으로 설명되어 있다.85) 이 경에 의하여 圖像抄 에는 3가지의 마리지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3가지 모두 고려불화의 마리지천 80) 徐兢의 宣和奉使高麗圖經 제17권 祠宇의 靖國安和寺를 보면 안화사 神護門 동쪽 별채에 제 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81) 고려사 권123, 열전36, 榮儀. 82) 京都 妙心寺 聖澤院에 있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마리지천도와 東京 靜嘉堂文庫 美術館 소 장의 마리지천도가 그것이다. 靜嘉堂文庫 美術館의 마리지천도는 성택원의 그림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83) ひろさちや 편저, 불교とインドの神 (세계성전간행협회, 1984) pp.130 131. 84) 佛說摩利支天經 一卷( 고려대장경 제12권) pp.1,184 1,185. 85) 望月佛敎大事典 5, 마리지천 조에 大摩里支菩薩經 제1에 의거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 다.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39 - 도와는 차이가 많았다. 이 도상들과 비교하여 보면 성택원의 마리지천도는 첫째, 천녀상 이라기 보다는 관음보살도나 지장보살도처럼 좌상이며 둘째, 들고 있는 부채도 卍字형이 아니며 특히 해를 상징하는 부채 위의 불꽃이 없다. 셋째, 오른손바닥이 위를 향하여 부 채의 끝부분을 받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神衆畵 중의 하나인 帝釋天圖 에 그려진 제석의 모습이 부채 대신 연꽃을 들고 있는 점 말고는 성택원 마리지천도와 너무나 흡사하다.86) 즉 持物에서만 차 이를 보일 뿐이다. 변상도같은 고려불화 속에서 보이는 제석은 합장을 하고 있거나 지물 로 금강저를 들고 있다.87) 금강저는 번개를 상징하는 제석의 가장 중요한 무기로 제석의 지물로서 흔히 그려진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밀교가 유입되기 전에는 금강저 뿐 아니라 부채도 제석의 지물로 그려졌으므로88) 제석의 지물을 금강저로만 한정할 수는 없을 것이 다. 고려불화와 조선불화의 계기적인 연속성을 고려한다면 조선시대 제석천도의 제석과 모습이 거의 일치하므로 성택원 마리지천도는 제석천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89) 일본은 제석이 불교 호법신 12신장 중 하나로만 모셔질 뿐으로90) 제석을 단독으로 신앙하는 우 리나라와는 다르다. 그래서 제석불화를 일본인들이 가져 갔을 때 우리나라와는 달리 밀교 가 주요 종파를 이루고 마리지천신앙이 성행하던 일본 불교계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모 습에서 마리지천으로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마리지천으로 신앙되어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도 그 불화가 마리지천도였다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은 재고되어야 문제이다. 또한 성택원 마리지천도의 제작시기는 14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는데 마리지천 도량은 고종 4년(1217) 이후로는 개설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91) 따라서 시기적으로도 마 리지천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려불화는 몽고 침입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 이전 제작된 것들은 유실되어 전승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 관음도나 지장도 등은 다시 제작되어 다 수 전해지고 있는데 반하여 제석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다음에 다룰 고려후기 제석신 앙의 무속화 현상과 관련되어 제석신앙이 불교신앙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줄어 86) 홍윤식, 불화 (대원사, 1989) p.105. 87) 위의 책, pp.118 119. 88) ひろさちや 편저, 앞의 책, pp.152 153. 89) 고려 불화 摩利支天圖의 미술사적인 해석에 있어서 University of Lond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 재직하고 계신 박영숙 교수님의 조언에 힘입은 바 크다. 지면을 빌 어 박 교수님께 감사를 표한다. 90) 일본에서는 왜 제석신앙이 성행하지 않았는가는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 다. 91) 마리지천도량은 고려사 에 의하면 문종대부터 고종대까지 아홉 차례 妙通寺에서만 설행되어 특정 사찰과 관련된 밀교의례로 추측되는데, 역병을 물리치거나 거란군사를 물리칠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밖에 마리지천신앙에 대한 기록은 과문한 탓인지 아직 찾을 수 없다.
- 240 - 國史館論叢 第78輯 들어 제석도가 활발히 조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일본에서 전해 오는 마리지천 도 두 점은 고려전기에 제석신앙이 성행할 당시의 세련된 모습을 그대로 전해 주면서 조선불화와도 계기적으로 연결되는 고려후기 제석도로 보는 것이, 미술사적으로나 시기적 으로나 타당할 것이다. Ⅱ. 고려후기 제석신앙의 변화 1. 무인집권기 호국적 제석신앙 1) 외제석원의 변화 무인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한 후 정국은 무인들의 정권쟁탈권으로 심 히 불안하였다. 중앙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지방에서는 반란이 꼬리를 이었다. 이러한 정 치적 변화 속에서 제석신앙은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를 고려사 기록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외제석원을 살펴 보면 명종은 의종 11년(1157) 이후 끊어졌던 외제석원으로의 행 차를 3년(1173)에 재개하여 18년(1188)까지 거의 매년 행차하였다. 1년 1회가 상례였던 듯하나 2회 행차했던 해도 두 번 있었다. 의종 11년 무렵은 앞장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연 기와 기복을 위해 이궁이 많이 건설되고 여러 절로 끊임없이 행차를 하기 시작한 시기이 다. 이떄부터 외제석원으로의 행차가 중단되었다가 명종대 다시 재개된 것이다. 이는 상 대적으로 약화되었던 외제석원의 위상이 회복된 것이라 생각된다. 거행된 행사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의종대와 마찬가지로 나한재를 설했다는 기록이 2차례 있어 외제석 원의 호국적인 기능이 여전히 중시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외제석원의 행차기록 은 신종, 희종대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고종대에도 강화로 천도하기 전인 17년(1230)까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강화도 천도 이후 외제석원에 관한 기록은 고종 44년(1257) 4월 외제석원으로의 행차 기사가 유일하다. 고종 19년(1232) 강화도 천도 이후 수도이주공사가 어느정도 진척되고 개경에 있던 주 요 사찰들이 강화에 다시 세워져 사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1년부터이다.92) 이후 고려사 에서 다시금 奉恩寺, 法王寺, 現聖寺, 王輪寺, 興國寺, 妙通寺, 禪源寺, 乾聖寺, 92) 개인의 저택을 봉은사로 삼아 연등회가 치러졌다고 하는데 봉은사는 태조의 원당으로 가장 중시되는 사원이었다.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41 - 福靈寺, 外院, 九曜堂, 昌福寺에 관한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崔禹의 원찰로 강화에서 창건된 선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경의 것을 옮겨 온 것이었다. 그 가운데 외원은 고종 37년(1250) 4월 외원과 구요당에 행차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고종 43년(1256)까지 해마다 구요당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외원은 고종 9년(1222) 4월 기사에 이미 언급된 바 있으므로 역시 개경으로부터 옮긴 사찰이었다. 그런데 관련 기록 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이 있었다. 외제석원과 외원이 같은 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같은 해에 외제석원도 행차하고 외원도 행차한 기록은 없었다. 외원 이 처음 등장한 고종 9년에는 외제석원으로 행차한 기록이 없으며, 고종 10년부터 고종 17년까지는 외제석원 행차 기사만이 보이는데 행차 시기는 대체로 3 4월이나 10 11월 이었다. 강화천도 후 한동안 외제석원이나 외원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고종 37년 4월 외원과 구요당에 행차하였다는 기사로 재등장하기 시작하여 43년 5월까지 거의 4월 과 10월 2차례 행차하고 있는데 행차 시기가 봄 가을로 이전의 외제석원 행차 시기와 거 의 일치하고 있다. 또한 명종 5년(1175)에 외제석원을 구요당과 같이 행차했던 전례가 있다. 고종 44년(1257) 4월에는 외제석원이 다시 나타나는데 그 해 외원으로의 행차 기 록은 없다. 원종대에는 다시 외원만이 기록에 보이며 충렬왕과 충선왕대에도 외원 관계 기사만 나타난다. 이후 다시 충목왕대 외제석원에 행차한 기록이 두 차례 보이는데 역시 이때는 외원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사찰전서 에는 외제석원과 외원을 다른 절로 분류해 놓았으나 이 둘을 같은 사찰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검토한 고려사 의 외제석원과 외원 관계 기사를 정리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4> 연 대 명종 3년(1173) 5년(1175) 7년(1177) 9년(1179) 10년(1180) 11년(1181) 13년(1183) 14년(1184) 16년(1186) 17년(1187) 18년(1188) 외제석원 외원 관계기사(명종 원종) 기사내용 정월 幸 외제석원 設 나한재 5월 幸 외제석원 구요당 8월 幸 외제석원 設 나한재 4월 5월 11월 幸 외제석원 5월 2월 11월 4월 12월 3월 10월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43 - 분모를 가진다. 따라서 외제석원과 구요당의 관련은 유추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고종 14년(1227) 10월 외제석원 행차시 대신들에게 전쟁에 승리하도록 天皇堂에 醮齋를 드리 라고 명한 사실은94) 외제석원과 도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최초의 기사로 주목된다. 이러한 현상은 역으로 외제석원의 성격에 있어서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제 외제석 원은 다른 사찰들과 비교하여 위상에서도 기능에서도 하등의 차이가 없게 되었다. 제석이 사라진 외원이란 명칭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제석도량 제석재의 성행 전대와 마찬가지로 명종대도 즉위 초에 제석도량이 개설되었다. 먼저 무인집권기의 제 석도량 개설 기록을 정리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5> 연 대 명종 3년(1173) 정월 6년(1176) 2월 5월 7년(1177) 2월 8년(1178) 정월 11년(1181) 2월 신종 6년(1203) 정월 고종 3년(1216) 정월 3월 10년(1223) 정월 38년(1251) 정월 천제석도량 관계기사(명종 원종) 기사내용 명인전에서 제석도량 개설 賢聖寺(구명 現聖寺)에서 제석재 친설 내전에서 제석도량 개설 명인전에서 제석도량 개설 수문전에서 제석도량 친설 처음 건성사로 행차하여 제석재를 행함 수문전에서 제석도량 개설 本闕에서 천제석도량 친설 무인정변후 정치운영 방식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정점으로한 기존의 정치 체제는 여전히 유지되었다.명종과 집권세력은 타협하면서 나름대로의 기반을 확보하려 하 였는데, 우선의 현안은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약점을 무마할 수 있는 집권의 정당 화였고 이에 중요한 변수는 금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정통성을 인정받는 일이었다. 의종 퇴위를 문제로 삼아 왕위 양여에 동의를 하지 않던 금나라가 마침내 2년(1172) 5월 책명 사신을 보냄으로써 명종 즉위는 정당화되었고, 3년 정월의 제석도량은 이러한 배경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명종 초기는 전국적으로 반란이 연이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불안한 정국 때문인지 명종은 절에 자주 행차를 하고 각종 도량도 빈번히 개설하였다. 또한 제석도량도 다른 왕 때보다 많이 개설되었다. 이전까지는 재위 94)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14년 10월.
- 244 - 國史館論叢 第78輯 24년동안 3차례 개설된 의종대가 가장 많은 경우였다. 이에 비하여 명종대는 11년(1181) 까지 5차례나 개설되었는데 이것은 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제석도량이 개설되던 전례 에 미루어 당시의 혼란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명종 6년 5월 현성사에서 왕이 친히 제석재를 올렸는데95) 이는 그 해 정월 발생한 망이 망소이의 난의 조속한 타결을 제석 에게 기원하는 재였을 것이다. 현성사가 고종 4년 4월과 12월 거란족의 침입을 막기위한 문두루도량이 개설되는 호국적 성격이 강한 밀교계 사찰이었던 점은 그 곳에서 개설된 제석재의 성격을 더욱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다.96) 최충헌에 의한 명종의 퇴위와 신종의 즉위는 최충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성립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종은 木偶人 과 같았다는 史臣의 평과 같이 재위기간 내 내 최충헌의 조종을 받았고 왕위 존속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한다. 신종 5년(1202) 慶州賊의 반란 이후 일반민의 항쟁도 강력한 진압으로 소강 상태에 들어가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시기가 이어져 최충헌은 자신의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제석도량 이 신종대는 6년에 이르러 비로소 개설되고 희종대와 강종대에는 개설조차 되지 않은 사 실은 최씨정권 하에서의 국왕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고종대에 접어들면서 안정되었던 정국이 다시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데 그 원인 은 거란의 침입이었다. 금의 세력이 약화되고 몽고족이 부상함에 따라 고려 송 금이 균 형을 이루는 삼국정립의 판도가 깨지면서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들이 세력을 다시 일으켜 마침내 고종 3년(1216) 8월 강동 6주 지역을 침입하였다.97) 침입이 있기 전 해 부터 북계 지역에서는 병란으로 말미암아 양식이 고갈된 금나라 사람들이 의주와 정주 지역으로 몰려와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98) 고종 3년 정월에 수문전에서 제석도량이 개설되었는데 이는 즉위 초 개설되는 제석도 량의 전통을 부활함과 동시에 위와 같이 대외적으로 고조되는 위기 속에서 안정을 기원 하는 왕실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 3월에는 처음 乾聖寺로 행차하여 제석재를 올렸다. 이것은 고려사 에 나타나는 건성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이후 건성사는 공민 왕대까지 역대 왕들이 수시로 행차하는 주요 사찰로 등장하고 있다. 건성사에는 제석전이 있었는데99) 바로 이곳에서 제석상을 모시고 제석재를 열었을 것이며 왕들의 乾聖寺 행차 95) 왕이 10월에 현성사에서 친히 올렸다는 재도 역시 제석재로 추측된다( 고려사 권19, 세가 19, 명종 6년 10월). 96)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4년 4월, 12월. 97)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3년 8월. 98)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3년 7월. 99) 이규보, 乾聖寺帝釋殿主謙師所居樓架蒲桃遮陽賦賦多矣 師請予次韻 ( 동국이상국집 제12권, 古律詩).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45 - 에 주요한 목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석과 그 권속들의 호법신으로서의 기능은 제석신앙으로 하여금 호국적 성격을 자연스럽게 지니게 하였고, 이러한 제석신앙의 측면 은 거란과 몽고이 침입해 오는 고종대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런데 당시 행해진 제석재와 제석도량의 모습과 성격을 추적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남 아 있는데 바로 동국이상국집 에 수록된 同前攘丹兵天帝齋疏 100)와 又丹兵祈禳帝釋道 場文 101)이 그것이다. 고려사 에 나타난 제석도량과 제석재는 거란족이 침입하기 전인 정월과 3월에 개설된 것이어서, 거란족이 침입한 8월 이후의 것으로 생각되는102) 위의 제석재소와 제석도량문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러나 同前, 又 라는 말이 붙어 있 는 것으로 미루어 이전부터 이러한 제석도량과 제석재가 베풀어지고 있음이 추측되므로 이전의 정월과 3월의 제석도량과 제석재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유사한 양식의 글이 발원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제석도량문 과 제석재소 의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정리를 하면 아래와 같다. 제석도량문 제석께서는 악마를 항복시키는 힘이 있어 완악한 되놈들을 물리침은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이 애절한 절규를 소리높이 외쳐 호소합니다.(생략) 저희들은 三司의 신하로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데 우리 六天의 주인 이외에 누구에게 이 딱한 심정을 아뢰겠습니까? 이에 신령님의 음덕을 입고자 법회를 베풀어 화상을 우러러 성스러운 명호를 부르고 불경을 펼쳐 신비로운 글을 읽노니 7일동안의 정성드린 공이 신령한 거울에 감응되어 저 수많은 되놈의 무리들이 우리의 포로가 되어지이다 (생략) 엎드려 원하건대 큰 신통으로 새로운 힘을 더하사 여러 고을이 힘을 합해 되놈들의 비린내를 쓸어 버리고 지친 백성들이 어깨를 쉬고 나라 안이 모두 안정을 이루도록 하여 주소서. 제석재소 제석왕께서는 上界에서 六天을 통솔하시니 나쁜 자에게 화를 주고 착한 자에게 복을 주심이 틀림없으시겠지만 우리나라는 부처님을 공경하고 승려에게 귀의하는 것이 유래가 있으므로 위급한 사정을 하소연한다면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을 더욱 기울이지 100) 위의 책, 同前攘丹兵天帝釋齋疏 제41권, 釋道疏. 101) 위의 책, 又丹兵祈禳天帝釋道場文 제41권, 釋道疏. 102) 완악한 되놈들이 생물을 잔인하게 해친 일이 오늘보다 더한 적이 없습니다( 제석도량문 ). 이렇게 흉악한 자들이라면 잠시도 목숨이 보전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해가 지 나도 관군에 저항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제석재소 ).
- 246 國史館論叢 第78輯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략) 허물을 고치기를 꺼리지 않고 진실로 마음의 반성을 부지런히 하면 재앙을 면할 길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윽하신 신의 도움에 힘입어야 하겠으므로 이에 문무관리가 월급을 거두어서 조석의 재를 준비하여 화상을 우러러 호소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신위의 도움으로 사기의 앙양이 더하사 왕의 군사들이 땅을 진동하는 빠른 우뢰처럼 가는 곳마다 떨쳐 되놈무리가 강물에 던져지는 횃불처럼 저절로 종식되어지이다. 위의 내용을 통하여 당시 제석에 대한 고려인의 인식을 알 수 있다. 고려인들은 제석 이 上界 六天의 주인으로서 악마를 항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나쁜 자에게 화를 주 고 착한 자에게 복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신통을 부려 전투력을 향상시켜서 전쟁에 이길 수 있게 하여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앞에 엎드려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였던 것 이다. 그러므로 삼사의 관리들이 주최자가 되어 7일동안 제석상 앞에서 불경을 읽는 제 석도량을 열거나, 문무관리들이 주최자가 되어 조석으로 제석을 공양하는 제석재를 행하 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읽혀진 경전은 佛說帝釋所聞經 103)으로 추측된다. 제석경이 세간에 유포되어 있음은 神品四賢의 金生을 神筆이라 칭하는 연유를 전하는 동국이상국 집 에 수록된 설화로도 확인된다. 어느 날 김생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제석경 을 써달 라고 청하므로 다 쓰고 나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자신은 제석의 사자인데 글씨를 받 아 오라는 명을 받고 왔다고 한 후 사라졌다 한다.104) 제석의 권위로써 김생이 신필임을 보증하는 설화 구성법은 진평왕이 제석천의 사자로부터 옥대를 전해 받아 왕권의 절대성 을 상징한 삼국유사 天賜玉帶 조의 설화구성법과 유사하다. 김생이 활동하던 신라 성 덕왕 때인 8세기 초엽부터 제석경이 유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규보가 활동하 던 12세기 말에는 제석경이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자료들이 비록 왕실이 아닌 관리들이 주체가 된 제석도량과 제석재에 관한 것이 나 내전에서 개최된 제석도량도 주최자가 국왕일 뿐 형식이나 내용은 이와 유사했을 것 이다. 大藏刻板君臣祈告文 105) 속의 국왕 瞮은 태자 공 후 백 재추 문무백관 등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끝없는 허공계, 시방의 한량없는 제불보살과 천제석을 수반으로 하는 三十三天의 일체 護法靈官에게 기고합니다 라는 내용은 국왕이 주최한 도량이 베풀어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동시에 허공계 제불보살 천제석을 수반으로 한 호법 103) 佛說帝釋所聞經 은 제석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장아함경 제10권 제2분 釋提桓因問 經 과 중아함경 대품 제18 釋聞經 의 이역본이다( 한글대장경 1, 아함부1, p.678). 아함 경에는 제석과 그 권속들에 관한 내용이 많이 전하는데 그 내용이 각각 별개의 경전으로 유포 되어 존재한다. 佛說帝釋所聞經 도 그러한 경전 중 하나이다. 104) 이규보, 東國諸賢書體評書 ( 동국이상국후집 제11권 贊 書 記 雜議 問答). 105) 大藏刻板君臣祈告文 ( 동국이상국집 제25권 雜著).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47 - 영관의 세 단계로 구성된 고려인들의 세계관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고종 4년 12월 선경전에서 개설된 四天王道場106)과 4년 5월에 왕륜사에서 베풀어진 神衆法席107) 은 제석의 권속인 사천왕과 八部神衆이 독립되어 신앙되고 있던 사실도 보여 준다. 그 후 내전에서 제석도량이 개최된 것은 몽고가 압박을 가하여 오기 시작한 10년 정월과 강화 도 천도 이후인 38년 정월 두 번 뿐이나 왕실과 관리들은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난 에 처했을 때 제석이 모셔진 사찰에서 제석도량과 제석재를 열었을 것이다. 건성사로 왕 이 자주 행차한 것도 그 곳에서 제석재가 올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08)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무인집권기 제석도량에서는 전기의 국왕을 위한 지배이데올로 기의 기능은 약화되고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목적을 뚜렷이 하면서 호국적인 성격이 강조되어졌던 것이다. 2. 元 간섭기 이후 제석신앙의 쇠퇴 1) 내제석원의 변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고 출륙환도가 준비되면서 무인정권은 종식되고 원종대에 이르 러 국왕권이 회복되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환도 후 황폐해진 개경을 재정비하 기 위하여 태조대 수도 건설 때처럼 궁궐이 신축되고 사찰도 수리되기 시작하였다. 원종 14년 개경의 사찰 중흥을 위하여 寺院造成別監이 설치되었고109) 충렬왕 원년에는 堤上 宮을 철거하고 5大寺를 깨끗이 손질하였다.110) 이렇게 사찰들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법회 들도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간섭기의 법회는 정국의 변화에 따라 이전과는 성격 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통계적으로 보아도 전대에 비하여 횟수가 감소했을 뿐 만 아니라 그 개설도량의 종류도 대폭 줄어들었다.111) 그리고 항몽을 위한 호국적 성격 의 불교행사는 사라지고 오랜 병란 후의 피폐해진 민심을 위무하고 재앙이 다시는 오지 않기를 비는 소재도량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112) 이러한 상황에서 제석신앙도 변화 106)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4년 12월. 107)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4년 5월 및 이규보, 王輪寺神衆法席齋疏 ( 동국이상국집 제 41권 釋道疏). 108) 고종 3년 3월 처음 제석재를 행한 이후 건성사에 왕이 행차한 기록은 공민왕 2년 2월까지 도합 45회이다. 109) 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14년 2월. 110) 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 원년 8월. 111) 김형우, 앞의 논문, pp.69 72. 112) 원간섭기 원종 11년(1270) 충정왕 3년(1351)간 설행된 불교행사의 횟수는 178회인데 飯 僧행사를 제외하고는 消災道場이 35회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두번째가 藏經道場 으로 10회 개설되었다.
- 248 - 國史館論叢 第78輯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왕실에서는 제석도량을 중지하였으며 제석이란 명칭이 들어간 사 찰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 제석신앙의 성격 가운데 왕권 신성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세워진 내제석원은 제석신 앙의 변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내제석원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에서 의종 원년(1147) 내제석원에서 사람에게 벼락을 쳤다113)는 기사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고종15년 內願堂 괴화나무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내원당 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114) 내원당은 낱말 뜻 그대로 궁궐내 願堂으로 궁내 사찰의 기 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아마도 왕실의 권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내제석원이 무인정 변 이후 유명무실해져 궁궐내 원당의 역할 정도로 그 위상이 떨어져 내원당으로도 일컬 어진 듯하다. 아울러 내제석원과 함께 궐내 있었던 法雲寺에 대한 기사도 고종 16년 (1229) 이후에는 보이지 않으나 내원당은 원종 10년(1269) 12월에 이르러 재등장한다. 이제 유명무실해진 내제석원과 법운사는 강화 천도 후 사라지고 환도 후 이들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계승한 내원당이 궁궐 안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고려사 에는 내 원당뿐 아니라 內院 內佛堂도 등장하고 있다. 內院에서는 충목왕 즉위년(1344) 10월 영 보도량이 개설되었는데 앞서 충숙왕 5년(1318) 10월 내원당에서 영보도량이 열렸던 사실 로부터 내원은 내원당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유추된다. 또한 공민왕 5년 내불당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면서 공민왕대는 내원당과 내불당 기사가 공존하는데, 內願堂과 內佛堂은 명칭은 달라도 內院으로 포괄하여 말할 수 있는 동일한 장소이며 내원당의 佛殿이 내불 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내원당, 즉 다시 말해서 내불당이 내제석원과 계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사실 이 확인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 천사옥대 조에는 신라 진평왕이 내제석 궁을 세웠는데 이를 天柱寺라고도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115) 내제석궁은 월성의 서북쪽 안압지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116) 안압지 일대는 궁궐터로서 동궁전과 그 부속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치로 보아서 내제석궁의 內 는 궐내를 뜻하는 것 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동경잡기 佛宇 천주사 조에서는 삼국유사 射琴匣 조에 나오는 炤智王대 內殿 焚修僧117)을 천주사 즉 내제석궁의 승려라고 설명하면서, 이 곳은 바로 신라 왕의 內佛堂으로 지금의 帝釋院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부처를 치성하던 곳으 로 소지왕 이전부터 설치되어 있던 내전이 진평왕대에 와서 제석신앙이 왕권강화의 이데 113) 고려사 권53, 지7, 오행1, 의종 원년. 114) 고려사 권53, 지7, 오행1, 고종 15년. 115) 삼국유사 권1, 기이2 天賜玉帶. 116) 東京雜記 권2, 佛宇, 天柱寺. 117) 삼국유사 권1, 기이2, 射琴匣.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49 - 올로기로 이용되어지면서 내제석궁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궐내 내불당으로서의 위치를 확 고히 하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또한 조선초 成三問에 의해 옛날 신라, 고려에 모두 內佛 堂이 있었는데 후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처음부터 삼가하지 못 하였기 때문이니 내불당을 철거해야 한다 는 상소문이 올려지기도 하였다.118) 상소문의 내용은 신라 때부터 궁궐내 사찰이 존재하며 그것이 내불당으로 통칭되고 있음을 알려주 고 있다. 신라시대 최초의 내불당으로 내제석궁 일명 천주사가 창건되었고, 이것이 고려 시대 내제석원으로 계승되었으나 제석신앙이 변화하면서 내제석원도 단지 궐내 사찰을 의미하는 내원당 즉 내불당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내원당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고려 말까지의 고려사 내원당 관계 기록을 정리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의 표를 보면 공민왕은 내불당에서 보우를 반승하고 있는데 이는 왕의 부름을 받 고 올라온 고승들의 임시 주석처였던 이전의 내제석원 기능과 유사하다. 충숙왕은 내원당 에서 詩會를 열기도 하였고 6년(1319) 9월에는 처소를 내원당으로 옮겼는데 고려 초 定 宗이 죽기 전에 내제석원으로 처소를 옮겼던 기록과 상통한다. 이는 왕실과 내원당이 긴 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내며 공민왕이 헌부에서 취조 중인 내원당 승려를 석방시 킨 일은 이곳이 여전히 국왕의 강력한 후원 하에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표 6> 내원당 관계 기사(고종 창왕) 연 대 기사내용 고종 15년(1228) 7월 內願堂 괴화나무에 벼락이 침 원종 10년(1269) 12월 내원당에서 設 관정도량 충숙왕 원년(1314) 3월 幸 내원당 板上詩를 次韻하고 尹碩과 戒松과 대소 文臣, 生徒, 僧侶들에게 명하여 화답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5년(1318) 10월 내원당에서 親設 영보도량 6년(1319) 9월 왕이 내원당으로 처소를 옮겼는데 이때부터 자주 사원으로 처소를 옮김 충목왕 즉위년(1344) 10월 幸 내원 設 영보도량 공민왕 4년(1355) 6월 禪近은 내원당 승려로 선비의 아내와 간통하여 헌부의 취 조를 받고 있었는데 왕이 석방함. 5년(1356) 2월 왕이 내불당에서 普愚에게 飯僧 (열전 金子粹 조) 공민왕이 태조 9世像 조상 및 내불당 법석, 演福寺 文殊 會, 講經, 반승을 함 창왕 (열전 崔瑩 조)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과 내원당 승려 玄麟 등을 신문케 함 118) 단종실록 권10, 2년 1월 신유, 左司諫成三問等上疏曰 新羅高麗 皆有內佛堂 致有後世口 不可道之事 以其不謹於初也.
- 250 - 國史館論叢 第78輯 내원당은 내제석원과는 달리 灌頂道場과 靈寶道場이라는 구체적인 개설 행사를 추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법운사와 연결되어지는 측면이다. 관정도량은 灌頂經과 그 다라니 를 외우며 재난이 없어지기를 비는 의식이다. 홍윤식은 원종이 즉위식을 가진 후 바로 뒤 이어 관정하고 보살계를 받은 사실을 주목하고 관정도량이 불교에 귀의하는 신앙을 표시 하는 한편, 재위기간동안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전법수계의 뜻과 대관식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119) 이러한 주장이 일반화되려면 관계 자료의 보다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원종이 즉위 직후 내전에서 관정도량을 개설하고 그 후 폐위 5개월만에 복 위한 다음 다시 내원당에서 관정도량을 개설한 것은 주목되는 일이다. 영보도량에 대해서는 최근 불교의례로 인식되던 종래의 학설에 대해 도교의례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120) 그러나 영보도량의 성격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본고에서는 생략 하기로 하고, 이규보가 쓴 도교기관인 복원궁과 신격전에서 설행된 영보도량겸초례의 제문인 福源宮行天變祈禳靈寶道場兼設醮禮文 121)으로 영보도량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보도량겸설초례문 (생략) 그러나 하늘을 섬기고 백성을 거느림에 부족함이 많아서 天文에 재앙이 나타나게 되어 火星의 궤도가 太微垣의 上將을 침범하여 天庭으로 들어가고 (생략) 더구나 水神이 위력을 떨쳐 우뢰소리가 매우 심하여 마치 上帝께서 아주 먼 곳에 계시지만 깨우쳐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은 마음이 불안하여 기도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道觀에 의탁하여 도량을 열고 氣를 닦는 무리를 두루 영접하여 정성을 다하여 우러러 공중에 배회하시는 행차를 기다리면서 믿음의 제물을 올리나이다 (생략) 위의 내용에서 영보도량은 星變의 이상으로 암시되는 재액을 소멸하기 위해 道觀에서 개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성변의 재액은 대체로 반란사건을 의미하 는 경우로 해석되기도 하는데122) 충숙왕 5년(1318) 10월 영보도량이 개설되기 전 6월에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평정한 사건이 있기도 하였다.123) 영보도량이 도교의례라 할 지라도 내원당에서 영보도량이 개설된 사실은 외제석원과 구요당의 관련처럼 天의 관념 119) 홍윤식, 불교행사의 성행 (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p.182. 120) 양은용, 도교사상 (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pp.287 289. 121) 이규보, 福源宮行天變祈禳靈寶道場兼設醮禮文 ( 동국이상국집 39권, 醮疏) 및 같은 권에 수록된 神格殿行天變祈禳靈寶道場兼醮禮文 도 내용이 유사하다. 122) 강성원, 원종대의 권력구조와 정국의 변화 ( 역사와 현실, 역사비평사, 1995) p.99. 123) 고려사 권34, 세가34, 충숙왕 5년 6월.
- 252 - 國史館論叢 第78輯 위의 표에서 충목왕대는 외원 기사가 보이지 않고 다시 외제석원이 나타난다. 이를 통 해서도 충목왕대까지 사찰명으로 외제석원과 외원이 혼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편 우왕 원년과 2년에 外院寺에서 소재도량을 설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소재도량 이 개설되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는 이전의 외원 관련 기사들과 연결되므로 외원은 이제 외원사로 불리우고 있는 듯하다. 즉 외제석원이 고려후기 제석이라는 용어가 생략되어 외 원으로도 불리다가 우왕대에 이르러 외원사로 명칭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원 사는 명칭만이 이어졌을 뿐 제석신앙을 표방하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이전의 외제석원과는 성격에서나 위상에서나 전혀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외제석원에서 제석이 란 말이 사라지는 사실은 외제석원 스스로 제석신앙과 멀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외제석원이 가지는 제석신앙의 호국적인 기능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외원으로도 불리우던 외제석원은 사라지는 것이다. 원간섭기 이후 제석신앙의 호국적인 성격은 쇠퇴하고 제석은 불교의 호법신으로서 범 천과 나란히 부처를 호위하는 신중으로만 불화 속에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불화 가운 데 제석과 범천은 통상 나란히 모셔지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신중화 중 제석을 중심으로 하는 제석탱화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호법신이지만 범천을 중심으로 한 범천탱화는 없다 는 것을 고려한다면 고려시대 중시되었던 제석신앙의 성격이 조선시대 제석탱화를 단독 불화로 성립시켰다고 생각된다. 제석도량 역시 제석신앙의 쇠퇴를 반영하듯 원간섭기에는 한차례도 열리지 않았으며 이후 공양왕 3년(1391) 정월 報平廳에서 유일하게 한번 개설되었다. 우왕과 창왕이 이성 계일파에게 처형된 후 추대된 공양왕은 명목상의 왕일 뿐 정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 고 있었다. 공양왕은 즉위 직후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승려를 궁중으로 불러서 네시 간마다 경을 읽게 하였고125) 檜巖寺에 머물 때 왕비와 세자와 함께 밤새도록 부처에게 절하였다 한다.126) 이는 공양왕이 얼마나 자신의 위치를 불안해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 작케 하는 사례들이다. 그가 사대부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演福寺의 중창을 고집 한 이유는 연복사의 탑전을 다시 짓고 못 3개와 우물 9개소를 다시 파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할 것이라는 승려 法猊의 권고 때문이기도 하였지만127) 쇠퇴하여 가는 고려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안간힘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고종 38년 (1251) 이후 실로 140년만에 공양왕은 다시 천제석도량을 개설한 것이 아닐까? 물론 당 시 빈번히 침략해 오던 왜구를 의식하여 개설된 단순한 호국도량일 수도 있겠지만 지배 125)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2년 9월. 126)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3년 2월. 127)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2년 정월.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53 - 이데올로기로서의 제석신앙이 고려 왕실에 의해 최후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양왕 3년 정월의 제석도량이 태조대부터 추적해 온 고려 왕실과 관련된 제석신앙의 마지막 모습이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왕실과 관련된 제석신앙의 흔적은 태종대까지 추적되어 진다. 태종 원년 정월 건성사에서 제석예참을 베풀었으며,128) 3년(1403) 12월 임금의 장수를 빌기 위해 건성사에서 제석재를 올렸다.129) 여기의 건성사는 제석전이 있어 왕이 행차하 여 제석재를 베풀곤 하던 개경에 있었던 바로 그 건성사이다. 조선 왕실도 건국 초에는 고려 왕실에서 제석재를 올렸던 사찰에서 변함없이 제석재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초 기 제석신앙은 장수를 기원하는 기복의 차원에 한정된다. 국왕의 권위를 신성화하거나 호 국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등 다양한 성격을 지녔던 제석신앙의 쇠퇴는 고려후기 제석신 앙의 무속화와 맞물려지면서 이제 제석신앙은 불교 내에서 기복적인 성격으로 존재하거 나 혹은 무속화되어지는 이원적인 흐름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기복적 성격으로 단순화된 제석신앙은 조선시대 불교가 억압받는 상황하에서 더욱 무속과의 결합이 촉진되어 불교 의 제석신앙이 도리어 무속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기에 이르게 된다. 3) 제석신앙의 무속화 고려사 에서 巫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현종 12년(1021) 5월에 南省의 마당에 土龍 을 만들어 놓고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다는 기사이다.130) 그러나 巫는 우리 역사와 분 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연원을 지닌다. 불교는 처음 전파될 때부터 巫와 밀 접한 관계가 있었다. 삼국유사 阿道基羅 조를 보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재래 토속신앙의 형태인 무와 대결하여 이를 제압하고 정착해가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131) 원시시대부터 기층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巫는 불교전래 이후 기능의 많은 부 분을 불교에게 넘겨주었다. 재앙을 막아 달라고 빈다거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빈다거나 비를 오게 해달라고 빈다거나 하는 것은 巫의 주요한 기능인데 고려시대 불교도량도 마 찬가지의 목적으로 끊임없이 개설되고 있다. 도리어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이러한 기능들 128) 태종실록 권1, 원년 정월 丁卯, 設帝釋禮懺于乾聖寺 水陸齋于津關寺 129) 태종실록 권6, 3년 12월 乙亥, 設帝釋齋於乾聖寺乞命也 130)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2년 5월, 造土龍於南省庭中集巫覡禱雨 131) 고구려인 阿道가 어머니 高道寧의 가르침을 받아 미추왕 2년(263)에 신라로 와 지금의 嚴藏 寺가 있는 서쪽에 살면서 대궐로 들어가 불교 전하기를 청하였는데 세상에서 일찍이 보지 못 했던 것이라 하여 꺼리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어서 毛祿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그런데 미 추왕 3년 成國公主가 병이 들어 무당과 의원이 치료를 해도 효험이 없어 칙명으로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는데 아도가 급히 대궐로 가 치료하여 병이 나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 원을 물으니 그는 다만 天鏡林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 국가의 복을 빌 뿐이라고 하 였다 한다( 삼국유사 권3, 興法3, 阿道基羅).
- 254 - 國史館論叢 第78輯 을 주도해 나갔고 巫는 주변적인 것이 되었으며 經學을 교양으로 갖춘 지식인들이 등장 하기 시작하는 무인집권기부터 惑世誣民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비하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이규보가 쓴 老巫篇 132)에 잘 나타나 있다. 이규보(1168 1241)는 최 충헌 부자의 발탁으로 관로에 나아가 최씨정권이 붕괴되기 17년 전인 고종 28년(1241)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문인으로 활약한 무인집권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노무 편 을 쓰는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쪽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어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모이는데 늘 음란한 노래와 이상한 말들이 들린다. 매우 불쾌하였으나 몰아낼 만한 이유가 없던 차에 마침 나라로부터 무당들로 하여금 서울에 인접하지 못하게 멀리 옮겨가도록 명이 내렸다. 나는 이웃의 음란하고 요괴한 것이 없어진 것이 기쁠 뿐 아니라 서울 안에서 이런 무리들이 아주 없어지게 되어 세상이 질박하고 백성들이 순진해져 장차 태고의 풍속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며 이런 뜻에서 시를 지어 치하하는 바이다. 그런데 巫覡을 배척하자는 논의는 이전부터 있어 왔다. 인종 9년(1131) 8월 근래 巫 風이 성행하여 쓸데없는 제사가 늘어나니 해당관리에게 명하여 무당들을 모두 멀리 내쫒 으라 고 하는 조서가 내려졌다. 이에 무당들이 겁이 나서 권력있는 귀족에게 뇌물을 먹이 자, 그 귀족이 귀신이란 형체가 없는지라 그 허실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무당들을 일 체 금지시키는 것은 타당치 않다 고 아뢰어 왕이 금법을 늦추었다고 한다.133) 이처럼 무 격은 천업의 일종으로 여겨졌으며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입장에서 무격배척과 무교금압 이 계속 논란되었다.134) 노무편 은 또한 당시 무속의 면모를 생동감있게 전해주고 있기도 하다. 천제석을 자 칭한 무녀 가 등장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관련 부분을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나무를 얽어 다섯자 남짓한 감실을 만들어 입버릇삼아 스스로 제석천이라 말하지만 제석천왕은 본래 六天 위에 있거늘 어찌 네 집에 들어가 한 구석에 처할 것이며, 온 벽에다 붉고 푸른 귀신형상을 그리고 132) 이규보, 老巫篇 ( 동국이상국집 권2 古律詩). 133) 고려사 권16, 세가16, 인종 9년 8월, 丙子 日官奏近來巫風大行淫祀日盛 請令有司遠黜群巫 詔可 巫患之斂財物貿銀甁百餘賂權貴 權貴奏曰鬼神無形其虛實恐 不可知一切禁之未便 王然之 弛 其禁. 134) 徐永大, 풍수 도참사상 및 민속종교 (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pp.189 192.
고려시대 帝釋信仰의 양상과 그 변화 - 255 - 七元九曜로 표액했지만 星官이란 본래 먼 하늘에 있거늘 어찌 너를 따라 네 벽에 붙어 있겠는가135) 위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무녀가 나무로 얽어 만든 다섯자 남짓한 신당의 벽에 제석신 칠원 구요를 그린 巫神圖를 봉안하고 스스로를 제석천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제석천이라 했다는 것은 이 무녀가 굿을 할 때 제석신이 강신하는 降神巫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12세기에는 이미 제석이 민속종교인 무속의 신격으로 자리잡았 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규보는 불교의 제석신앙과 무격이 내세우는 제석을 엄격 히 구분하고 무당이 제석을 자칭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제석신앙이 민간에 확산되어 제석에게 장수를 비는 기복 적인 제석신앙이 유행되게 이르렀고 이것은 무속과의 강한 연결고리가 되었을 것이다. 고 려후기 무당이 제석천을 자칭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던 듯하며 이러한 사례들을 공민왕대 찾아볼 수 있다. 공민왕대 좌정승까지 지낸 柳濯은 어떤 무당이 천제석을 자칭하고 요망 한 말로 군중을 미혹했다고 하여 杖刑에 처하였다고 하며,136) 공민왕대 어떤 요망한 무 당이 提州에서 와서 자칭 천제석이라 하면서 사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니 원근에서 앞을 다투어 그를 떠받들었으며 가는 곳마다 재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 무당이 天 壽寺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서울로 들어가면 풍년이 들고 전쟁이 멈추어서 나라가 태 평할 것이다. 만일 임금이 나와서 나를 맞지 않으면 그만 하늘로 올라 가 버릴 것이다 라 하니 개경 사람들이 모두 미혹하여 모여들기를 장터와 같았는데 典理判書를 지낸 李云 牧이 기병과 어사대의 관속을 거느리고 가서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거리에 옥을 만들어 가둔 후에 곤장을 쳐서 내쳤다 한다.137) 위의 내용에서 제석을 자칭하는 무격들이 광범한 계층으로부터 대중적 지지를 열광적 으로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깊었을 것이다. 안으 로는 권문세가가 발호하고 밖으로는 외적이 침입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위기가 고조되 어 그 결과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헤어날 길이 없었다. 따라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는 방법이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무속에 대한 광적인 신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가운데 135) 동국이상국집 권2, 古律詩 老巫篇, 緣木爲龕僅五尺 信口自道天帝釋 釋王本在六天上 肯入汝 屋處荒僻 丹靑滿壁畵神像 七元九曜以標額 星官本在九霄中 安能從汝居汝壁. 136) 고려사 권111, 열전24, 柳濯, 有巫自稱天帝釋妖言惑衆杖之. 137) 고려사 권114, 열전27, 李承老, 有妖巫自提川來 自稱天帝釋妄言人禍福 遠近奉之猶恐不及 所至貸財山積 至天壽寺 日吾入京 年豊兵息國家大平 若上不出迎我必昇天 都人皆惑歸之如市 云 牧率騎卒與臺吏執巫 斷其髮因街衢獄杖而逐之.
- 256 - 國史館論叢 第78輯 제석신앙의 무속화가 가속화되어 갔으며 후기에 이르러 불교의 천신인 제석이 도리어 불 교와 유리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불교 도입시 제석은 신라사회에서 고대적 천신관념 무속의 至高 天神 개념과 상통하는 을 매개로 하여 쉽게 수용되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역으로 고려후기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제석신앙의 역할이 축소되고 쇠 퇴하여 갈 때 고대적 천신관념을 여전히 기복의 기능으로 이용하면서 민간신앙으로서의 역할을 활발히 담당하고 있었던 무속에 의해 불교의 제석이 무속의 지고한 천신으로 적 극적으로 포섭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사대부가 등장하면서 고려후기 배불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조선의 억불정 책으로 이어지면서 제석신앙의 현세기복적 측면은 불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무속화하여 무당 굿거리의 한부분인 帝釋巨里로 정착된다.138) 제석거리는 檀君을 무당의 기원으로 하여 단군인 三神帝釋을 모시는 굿거리로 제석신의 근본을 이야기하는 제석본풀이 가 구 연되는 부분이다.139) 조선시대 무속의 제석신은 자녀의 출산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졌다. 조선시대 제석신앙 역시 그 성격이 고려시대 제석신앙과 계기적으로 연구되 어져야 할 앞으로의 과제이다. 맺음말 이상으로 고려시대 제석신앙을 시기적으로는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고 다시 후기는 무 인집권기와 원 간섭기 이후로 나누어서 內帝釋院과 外帝釋院, 帝釋道場과 帝釋齋 관련 자 료를 중심으로 그 존재 모습과 성격을 추적하여 보았다. 고려왕실은 태조 2년 궁궐 안에 내제석원을 창건하고 7년에 궁궐 밖에 외제석원을 창 건하였다. 이 사찰들은 왕권 신성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제석신앙의 성격과 밀접 히 관련되어 왕실에 의해 중시되었다. 그러나 수행하는 역할에서는 차이가 있어 궐내에 위치한 내제석원은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예불을 조석으로 올리고 내전에서 거행 되는 불사들의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국왕의 부름을 받고 개성으로 올라온 고승들의 임시 주석처의 기능을 하였다. 내제석원은 왕권이 약화되는 무인집권기에 이르면 기록에서 사 라진다. 그런데 이후 등장하는 內願堂과 內佛堂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내제석원을 내원당 으로 직접 연결시키기는 무리이지만 기능이 계승되고 있는 점에서 둘 사이의 계기성을 138) 趙興胤, 天神에 대하여 ( 동방학지 77 7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139) 巫黨來歷 서울대학교 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