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目 次 특집 : 6세기삼국의한강유역지배양상 475 년~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김현숙 / 5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이도학 / 51 신라의한강유역진출과지배방식전덕재 / 99 논문 19 세기중인의초혼연령및배우자의신분 - 현탁가문과김상순가문의사례 - 김두헌 /145 서울 광포전설 의존재양상과지역성권도경 /185 부록 : 2008 세종대왕학술대회 ( 세종의삶, 그리고역사적위상) 발표요지문 219 종합토론 337 위원회소식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 대한검토 김현숙 *1) 1. 머리말 2.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논란의배경 3.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문제를둘러싼諸論 (1) (2) 백제영유설 고구려영유설 4. 한강유역領有國論議과정에서나타난문제점 5. 맺음말 1. 머리말 고구려, 백제, 신라삼국은오늘날의한강유역을차지하기위해치열하게 각축전을벌였다. 한강유역은경제적, 자연적여건과교통상의이점등으로 인해일찍부터백제의도읍이되었고, 그에따라정치적기반과문화적토 대도갖추게되었다. 삼국이국경을직접적으로맞대고영역쟁탈전을벌이 게된이후부터는더욱가치가급상승하여이지역을차지하는나라가당 대의승자가된다는공식이성립되었다. 4 세기에는백제, 5세기에는고구 * 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6 제73호 려, 6 세기후반이후는신라가한강유역의지배권을가졌는데, 그시기에 해당국의 國勢가팽창했기때문이다. 이에따라결과론적으로한강유역을 둘러싼삼국의영유권보유경쟁은치열하게전개될수밖에없었다. 특히 백제의경우건국이래 400 여년간도읍지였던이지역을보유하려는마음 이다른두나라에비해훨씬더절박하고치열할수밖에없었다. 일반적으로한강유역은 475 년고구려군의침공으로한성이함락된이후 551 년백제 신라 가야연합군이고구려군을몰아내기까지 76년간고구 려가차지하고있었던것으로보아왔다. 이를고구려영유설이라고할수 있는데, 학계에서다수설에속하므로통설이라칭해도무리가없을것같 다. 그런데이에대해비판적인입장을보이는견해가있다. 즉장수왕의 한성함락이후에도한강유역이여전히백제영역으로남아있었다고보는 것이다. 이를통설에대한異說이라칭할수있는데, 처음에는문제제기에 지나지않았지만같은견해를밝힌연구가이어지면서논지도보강되고 논의의폭도더넓어지게되었다. 내용을들여다보면정확한표현이아니 지만서술의편의상본고에서는통설에대한 異說을모두통칭하여백제 영유설이라하고개별연구의차이점에대해서는서술과정에서밝히는것 으로하겠다. 1) 1980 년대이후백제영유설에입각한글들이이어지자그에대한반론으 로서통설을유지, 보강하는연구들도점차나오게되었다. 특히최근에는 새로운고고학자료의발견과문헌사료에대한재분석을토대로한논고들 이나와통설의타당성을재확인했다. 이는한강유역영유권을둘러싼논 1) 이경우한강유역을백제가시종영유하고있었다고보는경우도있고, 일부시기만회복 했다고보는경우도있으며, 한강이남까지모두백제가보유했다고보는경우와한강이 북까지만보유하고있었다고보는경우등다양하게논의가나눠져있다. 따라서어느쪽 도정확한호칭은아니라고할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서술의편의상일단 475 년이 후백제가일시적, 부분적이든, 아니면전체적이든한강유역을영유한적이있다고보는 경우는모두백제영유설로통칭하기로하겠다.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7 의를한단계진전시켰다. 하지만그것이관련문제를둘러싼논란을종식 시킬것으로보이지는않는다. 논의가합의에이르기위해서는새로제시 된근거들에대한검토와분석이더필요할것으로보이기때문이다. 475 년부터 551 년까지한강유역의영유권이어느나라에있었으며, 그사이의 상황은어떠했는가하는논의는이제새로운방향으로전개될것으로본다. 이런점에서향후논의의진전을위해지금까지의연구동향을정리하고 과제와전망에대해짚어볼필요가있다. 본고는이를위해마련되었다. 본 고는연구성과들각각에대한개별적인분석이아니라한강유역영유권을 둘러싸고논란이되는점들만을중심으로연구동향을살펴보고자한다. 따 라서각연구의추론과정을충실히반영하기보다는사안에대한연구자의 인식을위주로정리하게될것인데, 이런방식은자칫추론과정에서미묘하 게제시되는연구자의논지를잘전달하지못하게될위험성을안고있다. 이런점들에대해서는선학제현의질정을받아추후시정할것을약속드 린다. 2. 475 년~551 년한강유역領有國논란의배경 고구려의장수왕은백제한성을공략하기위해사전에철저한준비과정 을거쳤다. 미리승려도림을백제에간첩으로보내었던것이다. 도림은일 반적인간첩들이그러하듯이백제의내부정세를파악해본국에보고하는 수준을넘어, 바둑을좋아하는개로왕의취향을파악하여개로왕의측근이 된뒤, 그로하여금도성정비와선왕무덤개축등대규모토목공사를벌 이도록사주하기까지했다. 이는결국백제의재정을고갈시키고백성들을 고역으로내몰았으며, 민심이반과정치세력간갈등을초래했다. 승려도림 은백제의내부상황이자신의의도대로조성되자고구려조정에상황을보 고했고, 그에따라장수왕은 3 만군대를동원해한성을공략했다. 고구려군
8 제73호 은오늘날의풍납토성인北城을 7일밤낮으로공략하여함락시킨후 南城 으로향했는데, 그때피난을위해궁을나온개로왕과마주쳐그를고구려 군본부가있는한강이북, 아차산으로끌고가죽였다. 고구려군이진입하기직전개로왕은문주에게신라로갈것을명했고, 이에문주가 1 만여신라구원군을이끌고한성에도달했는데, 그때한성은 이미함락되었으며, 개로왕도고구려군에의해죽임을당한뒤였다. 이에 문주가왕으로즉위한다음웅진으로수도를옮겼다. 그리고 551 년이되어 서야성왕이신라, 가야군과연합하여한수유역으로진격해고구려군을축 출했고, 그전과로얻은한강하류의 6 郡지역은백제가, 한강중상류지역 의 12 성은신라가차지했다. 그러나 2년뒤고구려와밀약을맺은신라의 배신으로백제는어렵게되찾은한수유역을신라에내주고퇴각했다. 이후 한수유역은신라의영토가되었고, 백제는이지역을끝까지되찾지못했 다. 즉한수유역의영유권은백제에서고구려로, 다시신라로넘어갔으며 이로인해비로소 唐으로의독자항로를확보한신라가대당외교에성공할 수있었고그것이주요요인가운데하나가되어삼국간경쟁에서최종승 자가될수있었다. 이상의내용이 475 년~551 년한강유역영유권에대한 일제시기이래의통설이었고지금도역시다수설에속한다. 2) 그런데이통설의성립에는 475 년에서 551 년까지시기에해당하는다음사 료들을이해하는데있어기본전제가필요했다. 大豆山城을수리하고漢北의民戶를이주시켰다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4 文周王 2 년[476] 2 월). 靺鞨이漢山城을습해깨뜨리고 3 백여호를포로로잡아돌아갔다 ( 三國史記 권 2) 임범식은이통설이일제시기에今西龍과小田省吾등의견해를이어받은것이라는점을 지적했다. 기실해당연구의내용을보면통설의기본내용과구조가일제시기에이미형 성되어있었다고볼수있을것같다. 이에대해서는임범식, 5 6 세기한강유역사재고 -식민사학의병폐와관련하여 -, 한성사학 15, 2002, 9 11 쪽참조.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9 26 百濟本紀 4 東城王 4 년[482] 9 월). 王이사냥을나갔다가漢山城에이르러軍民을위로한다음浹旬만에돌아왔다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4 東城王 5 년[483] 春 ). 날이크게가물어백성들이굶주리자서로잡아먹었고도적이많이일어났다. 臣 寮들이창고를열어진휼하기를청했으나왕이듣지않았다. 漢山人가운데고구 려로도망간자가 2 천명이나되었다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4 東城王 21년 [499] 夏 ). 高句麗의장수高老가靺鞨과공모해漢城을공격하려고橫岳아래로나아가주 둔하므로王이군사를내어싸워그를물리쳤다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4 武 寧王 7 년[507] 10 월). 왕이장수高老를시켜靺鞨과함께백제의漢城을공략하려하여橫岳아래로나 아가주둔하였는데, 백제가군사를내어싸우므로이에退軍하였다 ( 三國史記 권 19 高句麗本紀 7 文咨明王 16 년[507] 10 월). 2 월에王이漢城에가서佐平因友와達率沙烏등에게명하여漢北州郡의民 15 세이상되는사람들을징발하여雙峴城을쌓았다. 3월에漢城으로부터돌아왔다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4 武寧王 23 년[523] 2 월, 3 월). 고구려왕平成이濊와공모하여漢北의獨山城을치니왕이사신을신라에보내 어구원을청하였다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4 聖王 26 년[548] 春正月 ). 이처럼 475 년이후에도계속등장하는한성 한산 한산성관련사료들 과예성강에서한강에이르는한수이북지역전투기사들에대한합리적인 해석이있어야한다는것이었다. 이와관련하여이병도는 475 년한성함락후백제가웅진으로천도하였 으므로그후나오는한수유역이나그이북지역관련기사는모두믿을 수없다고하여기사자체를전면불신했다. 3) 이에대해이기백은 만일옛 한성의민호를옮겨살게한곳을역시한성이라고부른것이라고본다면, 3) 李丙燾, 한국사 ( 고대편 ), 진단학회, 1959, 428 440 쪽 ; 國譯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399 쪽주4 ; 三國史記譯註 ( 하), 乙酉文化社, 1983, 65쪽주28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5, 556 쪽.
10 제73호 반드시이들기록자체를신빙성이없는것으로보지않아도될것이다. 4) 라고했다. 그리고기사의전면불신보다는다른시각에서바라볼것을제 안하면서, 稷山의위례성이웅진천도이후의옮겨진漢城이었을것 이라 고했다. 5) 이것이뒤에지명이동설로칭해지게되었는데, 사실이논고에 서는漢城외의다른지명에대해서는언급하지않았다. 한성시대지명이웅진천도후웅진주변지역으로이동했다고보는시각 은今西龍이이보다앞서제시한바있었다. 今西龍은동성왕기나무령왕 기에한산성, 한성, 혹은한북지역이아직도백제영역안에있는것처럼 쓰여져있지만, 웅진시기에백제는한성을회복하지못했고, 려제간의전쟁 이충북과경기도남부방면에서이루어졌기때문에, 이는前代한성의이 름을옮긴금강북변의땅일것이며, 한수라고하는것도금강에이이름을 옮겨서文飾한것이라고추정했다. 6) 뒤에이도학이이러한웅진시기한성지명의이동설을확증했다. 그리고 지명이동한사료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동성왕과무령왕대기사에삽입 된배경에대해검토했다. 그는한성말웅진시기백제왕계를검토하는과 정에서이기사들을주목하고, 무령왕대에어느정도이루어진영토회복 사실에편승하여웅진시대지방에다한성시대지명을의식적으로대입시키 는등의과장된조작을행한것 이라고했다. 7) 그러면서 조작의배경은사 비시대왕실의 中始祖와관련된웅진시대왕실의실추된권위를만회하기 위한방안에서생성된듯하다. 고했다. 8) 한성시대의직계계승왕통과영 4) 李基白, 熊津時代百濟의貴族勢力, 百濟硏究 9, 1978, 14 쪽. 5) 李基白, 앞의논문, 1978, 15 쪽. 6) 今西龍, 百濟史硏究, 國書刊行會, 1951, 126 127 쪽. 7) 김영심은무령왕대에나오는한강이북의고구려지역침공기사에대해, 이는 백제가가 지고있었던한강유역에대한전통적인영유의식을, 중국측기록에 更爲强國 했다고표현 될정도로국권을회복한무령왕대에부회시킨것이라고도할수있다. 고했다( 김영심, 웅진사비시기百濟의領域, 古代東亞細亞와百濟, 서경, 2003, 118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11 토로의회귀라는사비시대왕실의현실적인염원을강렬하게반영한결과 물이바로지명이동으로나타났다는것이다. 이는사비시기의백제왕실이 자신들의권위를세우기위해웅진시기의사료를일정부분조작했다고보 는것으로, 웅진도읍기한수유역관련기사의조작설내지는다른시기기 사의擅入說의단초를열었다. 3.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문제를둘러싼諸論 (1) 백제영유설 앞장에서는 475 년 551 년사이한강유역영유문제관련통설이성립되 는과정에대해살펴보았다. 9) 이제통설에대한 異說이제기되고, 이후 475 년부터 551 년에한강유역을백제가계속영유했다거나, 아니면일부 시기일부지역을회복했다고보는것으로점차논의가확산되어가는과 정을살펴보고, 그때의주요논점들에대해짚어보도록하겠다. 백제가한성함락이후에도한강유역을계속보유했다고보는연구들의 경우 삼국사기 에나오는 475 년 551 년동안의한수유역관련사료를사 실로인정한다는것을기본전제로하고있다. 이른바웅진기한강유역영 유국관련기존통설에최초로異議를제기한것은梁起錫의 熊津時代의 百濟支配層硏究 10) 였다. 이글에서는 日本書紀 의 551 년한수유역회복 8) 李道學, 漢城末熊津時代百濟王系의檢討, 韓國史硏究 45, 1984, 24 25 쪽. 9) 임범식은다른학자들은 475 년 551 년간 삼국사기 백제본기의해당사료에대해본격 적인검토를하지않았다는것을이유로이병도와이도학만통설론자로들었다 ( 임범식, 앞의논문, 2002, 7쪽주3). 하지만통설이확립되는과정에서의역할과뒤에이문제를 다룬연구자들에게미친영향을고려할때이기백의 熊津時代百濟의貴族勢力 논고도 빼놓을수없다고보아함께정리했다. 10) 梁起錫, 熊津時代의百濟支配層硏究, 史學志 14, 1979.
12 제73호 기사에신뢰를두고성왕말기에백제가비로소한강유역의고토를회복한 것으로보는데대해재고를요한다고했다. 그리고백제본기의동성왕대 와무령왕대한수유역관련기사를사실로인정한가운데지명을분석한 후웅진남천당시고구려와의경계선이대략아산만에서괴산, 진천, 직산 이남이었는데반해무령왕때는백제의강역이황해도신계, 연천, 가평, 횡 성, 예천을연결하는한강유역일대까지확장되었고, 舊都漢城도확보된 듯보인다고했다. 즉백제가동성, 무령왕대에이미한강유역의상당한부 분을확보한것으로보았고, 이두왕대의국력신장이聖王때중흥정치를 이룩하는데큰바탕이되었다고지적했다. 11) 이논고는웅진기백제의지배층에대한연구이므로한강유역영유국문 제에대해본격적으로거론하지않았고, 많은지면을할애하지도않았다. 하지만이후백제본기기사를있는그대로보는입장에서의논고가이어지 게되고, 논의가더확대되면서, 웅진기한강유역백제영유설의대표적인 논문처럼되었다. 그리고그런과정에서한강유역을시종일관백제가영유 하고있었다고주장한것처럼잘못인식된측면이있었다. 하지만이논고 에서는동성왕과무령왕대에백제의국력이많이회복되어서한강유역의 상당부분을확보했다고했다. 따라서엄밀히말하면웅진기백제의한강 유역영유설이아니라, 백제의한강유역부분회복설, 혹은일시회복설이 라고할수있다. 이뒤에성주탁 차용걸이통설과다른인식을보여주었다. 웅진기북방 영토로의순행에대해살핀논고에서동성왕 5 년봄에한산성까지出獵하 여軍民을撫問한것은그전년에말갈이한산성을습파한데에대해백제 령임을다시확인키위한조처이자백제의세력회복을위한조처였다고했 다. 또무령왕 23년 2 월에한성에행차하여한산주의郡民을징발하여쌍 11) 梁起錫, 앞의논문, 1979, 22 23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13 현성을축조하고있음을보면, 이순행은한강유역에대한백제의지배권을 다지는조처로서행해진것으로생각할수있다고했다. 그리고이와관련 하여 웅진기에백제가한강유역을영유했다는것은거의부정되고있다. 그러나이문제는다시검토될여지가충분히있다고생각된다. 라고주석 을달아웅진기백제의한강유역지배설의입론가능성을열어주었다. 12) 이문제에대한논의를좀더진행시킨것은박찬규의 百濟熊津初期北 境問題 였다. 13) 이논고에서는고구려군이한성을함락한후바로물러갔 고, 그뒤문주왕이신라군을이끌고돌아와한성에서즉위했다는점에주 목했다. 그는이를근거로고구려군이돌아간뒤얼마동안여전히백제의 영향력이한강유역에서행사되었으나, 웅진으로천도한뒤다시고구려의 영향권밑으로들어갔던것으로보았다. 그리고백제본기웅진도읍기의기 사를있는그대로볼수있다는인식아래동성왕과무령왕대에이르러정 치가안정되고국력이강화되면서백제가다시한성과한강유역을회복했 던것으로보았다. 14) 그러나그렇다면 유역의 551 년에왜백제가다시한강하류 6 군을회복했다고하는지에대한설명은하지않았다. 웅진기한강유역영유문제를본격적으로다룬것은김영관의 百濟의熊 津遷都背景과漢城經營 이었다. 이논고에서는고구려군이한성을공격하 자문주가신라에구원을요청하러갔는데, 원병 1만을이끌고돌아올때까 지소요된기간이한달이채안되었다며, 이는고구려군이한성을점령한 기간이한달이안되었음을의미한다고했다. 15) 그러면서문주왕대에고구 려의남하위협에대비하기위해한강북쪽주군의민호를 移居시킨바있 고, 동성왕과무령왕대에한성이고구려와말갈의침입을받은바도있지만 12) 성주탁 차용걸, 百濟儀式考, 백제연구 12, 1981, 80 쪽. 13) 朴燦圭, 百濟熊津初期北境問題, 史學志 24, 1991. 14) 朴燦圭, 앞의논문, 1991, 52 쪽. 15) 金榮官, 百濟의熊津遷都背景과漢城經營, 忠北史學 11 12 合, 충북대사학회, 2000, 83 쪽.
14 제73호 위축되었던 國勢가점차회복되어동성왕대와무령왕대를거치면서한성시 대백제의舊疆을거의되찾았다고했다. 16) 또무령왕대에는북진정책을실시해서 舊都인한성지방을영유함은물론 이고, 황해도신계, 경기도연천, 가평, 강원도횡성, 경북예천을연결하는 선을회복했으므로, 17) 웅진시대백제의북방경계는아산만일대가아니라 한강이북이었으며황해도지역까지도진출했다고했다. 이논고에서는성 왕 7 년(529) 오곡지원에서의전쟁에서고구려안장왕에게패배함으로써비 로소백제가한강유역을빼앗기게된것으로보았다. 고구려의한성점령 설의토대가된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조의한성 6군회복기사는이때 빼앗긴지역을성왕 29 년(551) 에되찾은것을말하는것이지, 475 년장수왕 에게빼앗겼던지역을회복한것이아니라는것이다. 18) 朴賢淑도한성이함락되었지만고구려군이이지역을완전장악하여통 치한것은아니었다고보는입장이다. 씨는그근거로 삼국사기 백제본 기에의하면한산성, 한산, 한성으로표현되는한성시기의중심지가웅진시 기에도고구려나말갈의공격대상지역이되고있다는점을들었다. 이는 고구려가한성함락후이지역을완전히장악하지못했으며, 당시이지역 이백제의영향력아래있었다는것을의미한다는것이다. 이논고에서는 475 년고구려의한성함락은한성지역의완전한장악이아니라한강유역 에교두보를마련한것이라고할수있다며, 백제의웅진천도는고구려공 격에의한한성상실때문이아니라여러가지이유가복합적으로작용한 결과였다고했다. 19) 고고학적인측면에서이문제를살핀 沈光注도이설에동의하는입장을 16) 金榮官, 앞의논문, 2000, 63 91 쪽. 17) 金榮官, 앞의논문, 2000, 81 쪽. 18) 金榮官, 앞의논문, 2000, 78 82 쪽. 19) 朴賢淑, 熊津遷都와熊津城, 百濟文化 30, 2001, 120 122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15 보였다. 그는지금까지남한에서확인된고구려유적의분포와성격을살핀 후이유적들이모두소규모의보루시설들이고교통로를따라선상으로배 치되어있는것으로보아, 이는영역지배를위한것이라기보다는군사적측 면이강한것이라면서고구려가설사이지역을지배했다고하더라도그 시기는그다지길지않았을것이라고했다. 20) 지금까지살펴보았듯이 역영유문제를 2001 년까지는 5세기말부터 6세기까지의한강유 全論으로다룬연구가많이나오지않았다. 백제사의다른 부분연구를진행하면서다룰필요가있을때에만관련내용에대해간단 히짚고넘어가는것이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웅진도 읍기의한강유역관련사료에대한긍정적인인식을가진논자들이늘어나 게되면서, 이문제를全論으로다룬글들이나오게되었다. 임범식의 5 6 세기한강유역사재고 -식민사학의병폐와관련하여 - 는일제시기이래관련연구를종합적으로검토, 정리한후새로운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475 년에고구려군이한성을공략하여이를포함한서울지 역까지빼앗았지만, 신라와중국에대한대응책을도모하기위해바로철수 했으므로한강이북지역이든이남지역이든고구려가이일대를영유화한 적은전혀없었다고주장했다. 21) 그는 일본서기 흠명기기사에나오는평양은현재의서울지역을지칭 하는것이아니라 현재의평양남쪽 즉황해도중부이북지역이며, 漢城도 한강근처의백제국도가아닌재령인것으로보았다. 22) 통설에서한성이 란지명이웅진천도이후충남지역으로이동되었다고보는것과달리임 범식은근초고왕이오늘날의평양성까지밀고올라가, 국도를자신들이함 20) 심광주, 南韓地域의高句麗遺蹟, 高句麗硏究 12, 2001, 489 쪽. 21) 임범식, 5 6 세기한강유역사재고 -식민사학의병폐와관련하여 -, 한성사학 15, 2002, 30 34 쪽. 22) 임범식, 앞의논문, 2002, 30 쪽.
16 제73호 락시킨舊대방지역의황해도재령으로옮기면서도읍관련지명인한성과 한산이재령으로옮겨진것이라고주장했다. 그래서 5 6 세기고구려와백 제는재령을포함한황해도중부이남지역내지는경기도북부지역에서 국경선을유지했으며, 551 년성왕이회복한 6군지역도한강유역이아니라 근초고왕 26년이래백제가일정기간장악했었던재령을비롯한황해도지 역이라고했다. 23) 이는백제본기동성왕, 무령왕대에나오는한강유역과황해도지역에서 의고구려와백제의전쟁기사에대해근초고왕대의영역을바탕에둔사비 기백제인들의영역인식이반영되어조작된기사라고보는견해를넘어, 근 초고왕이확장했던황해도지역까지무령왕이실제로회복했다고본다는 점에서다른연구성과들과큰차이가있다. 한편비슷한시기에김병남도같은견해를밝혔다. 그도역시東城王 (479 501) 재위연간에나타나는漢山城관련기사들을근거로장수왕의 한성공함이후에도백제가수도한성을포기하지않고계속지켰던것으 로보았다. 24) 그는고구려군이한성공함이후 8천명을포로로데리고돌 아갔다는것, 통치를위한제도적장치를했다는자료가없다는것, 완전히 폐허가된북성과달리남성은위급하였으나함락당하지는않았다는것, 문 주왕이바로한성에서즉위했고그해 는것등을근거로한성이 다고주장했다. 25) 10월에야비로소웅진으로천도했다 475 년이후에도계속백제영역으로남아있었 그는동성왕때백제가다시국력을회복하여그영역을한강유역너머 23) 임범식, 앞의논문, 2002, 32 34 쪽. 24) 김병남, 百濟熊津時代의北方領域, 白山學報 64, 2002 ; 百濟東城王代의대외진 출과영역의확대, 韓國思想과文化 22, 2003, 20 22 쪽. 25) 김병남, 백제웅진천도초기의한강유역상황, 韓國思想과文化 26, 2004, 113 116 쪽. 김병남, 백제문주왕대의웅진천도배경, 역사학연구 32, 호남사학회, 2008, 39 43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17 까지확장할수있었으며, 26) 무령왕때에는최북단인황해도신계에서동 으로경기도연천과강원도김화등을연결하는한강유역일대까지포괄한 것으로보았다. 27) 또혈성( 강화) 과왕봉, 달을성현 ( 고양) 등한강유역일대 를둘러싸고백제와고구려가공방전을벌이는것을근거로, 성왕초기까지 도계속백제가이지역을점령하고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고했다. 28) 그리고 529 년안장왕에게패배함으로써고구려가한강이북지역에근접하 게되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백제가패수 ( 예성강 ) 와오곡 ( 서흥 ) 지역까 지군대를보냈다는것은백제와고구려가예성강이남 한강이북사이에 서유동적인경계선을유지하였음을뜻한다고했다. 29) 김병남도 551 년백제의성왕이되찾았던 六郡之地 를남평양 ( 재령 ) 을중 심으로한주변지역으로추측하면서, 景德王 21 년(762) 의기사에나오는 여섯성, 즉五谷 ( 황해도瑞興 ), 鵂巖 ( 鳳山 ), 漢城 ( 載寧 ), 獐塞 ( 遂安 ), 池城 ( 海州 ), 德谷 ( 谷山 ) 이바로 6 郡이었을것으로추정했다. 그리고이 6군탈환 은바로 4 세기의백제영유권을회복함을의미하는것이라고했다. 30) 이처럼 2002 년을기점으로 475 년 551 년사이한강유역의고구려영유설 에대한반론이전과달리매우적극적으로개진되기시작했다. 특히김병 남의경우 발표하고있다. 2000 년이후 31) 웅진시기백제영토문제관련논문을지속적으로 지금까지살펴왔듯이 475 년 551 년간한강유역을백제가영유했다고봄 으로써흔히백제영유설로일괄지칭되어왔지만, 개별연구들을살펴보면 26) 김병남, 앞의논문, 2002, 152 쪽 ; 앞의논문, 2003, 227 쪽. 27) 김병남, 백제무령왕때의대내외적상황과영역의변화, 韓國思想과文化 37, 2007, 201 쪽. 28) 김병남, 백제성왕대북방영역관련지명의분석, 韓國上古史學報 52, 2006, 12 16 쪽. 29) 김병남, 앞의논문, 2006, 20 21 쪽. 30) 김병남, 百濟聖王代의북방영역변화, 韓國史硏究 120, 2003, 77 78 쪽. 31) 김병남, 백제영토변천사연구, 전북대박사학위논문, 2000.
18 제73호 상호간견해차이도상당히존재한다는것을알수있다. 예컨대백제가한 강유역을영유했다고볼때에도 475 년 551 년전시기동안, 한강이북과 이남지역이모두전적으로백제영토였다고보기도했고, 한강이북지역 까지만고구려가차지했었다고보기도했다. 또고구려가이지역을지배 했었다고보는경우에도그시기가 475 년부터동성왕대이전까지였다고보 기도했고, 529 년에서 551 년까지라고보기도하는등견해차가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연구가진행되어오면서관련논의는더보강되고심화되었다. 고구려의한성함락이후에도이지역이계속백제영토였다면, 왜백제가 웅진으로천도를했는가하는의문에대해박찬규는한성이너무파괴되었 고, 또고구려와가까움을두려워하여도읍을옮겼다고하는安鼎福의 東 史綱目 第 2 下乙卯冬 10월조의견해가많은시사를준다며답으로제시 했다. 32) 박현숙도천도의직접적인요인으로한성의폐허화를들었다. 국 가를지탱하는가장기본적인시설들이전쟁터가되어불타버리고파괴된 한성에서더이상머무를수없었다는것이다. 그리고고구려의잠재적공 격을방어하기위해차령산맥과계룡산지사이를관류하는금강남안에위 치한천연적요새지로서의자연지리적이점때문에웅진으로천도했다고 보았다. 상처받은백제왕실의권위회복을또다른요인으로지적하기도 했다. 개로왕의전사로왕위에오른문주왕으로서는폐허가된한성에더 이상머물수가없었기때문에새로운도읍지에서체제정비를모색했다는 것이다. 33) 이두연구자는방어의유리함에비중을두고웅진천도의배경 을살폈다. 그와달리김영관과김병남은웅진이문주왕의정치적기반이었다는것 을중요한이유로들었다. 김영관은천도이전에이미웅진성이축조되어 32) 박찬규, 앞의논문, 1991, 52 쪽. 33) 박현숙, 앞의논문, 2001, 122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19 있었고, 離宮내지行宮의성격을갖는궁실이존재했으며, 문주왕이즉위 하기전에웅진성의지방관으로파견되었기때문에거기에세력기반이있 었다고볼수있다는점을웅진천도의중요배경으로지적했다. 34) 김병남은한강을사이에두고백제와고구려가대치하게됨에따라, 한 강바로남쪽인백제의수도 ( 한성 ) 가항시위협아래놓이게되었다는것을 먼저지적했다. 그리고한강을통해이루어지던국가교역의중심항구로서 한성의기능마저상실한상태이므로, 무역을통한국가의물적기반과외교 활동에필요한기능및조건을충분히충족시킬대체지역으로서금강일대 를주목한것으로보았다. 그런다음웅진일대가이미백제의직접통치를 받는지역이었을뿐만아니라 輔國將軍으로임명된문주에게사여된지역 으로서그의정치적기반이었다는것을웅진천도의이유로들었다. 35) 이와같이연구가진행되어오는과정에서비단한강유역영유문제뿐 아니라백제의정치세력, 웅진지역의성격등다른면에대한연구도진전 을보는성과를가져왔다. 하지만이때까지의연구에서는문헌사료에대한 자의적인취사선택이이루어졌고, 고고학자료가보여주는현상에대해전 혀눈을돌리지않거나그의미를축소해석했다는비판을면하기어렵다. 즉이연구들의경우 삼국사기 지리지한주조에보이는옛날고구려군 현이었던지역에대해크게주목하지않거나, 관심을가지더라도소략하게 다루었다. 별다른이유를제시하지도않고 삼국사기 지리지의기사와백 제본기의기사가서로상충할때에는백제본기의기사를우선취신하였다 고밝히기도했다. 36) 또한몽촌토성에서출토되는고구려유물이나아차산 일대의고구려유적 유물에대해서도전혀언급하지않거나, 주의를기울 34) 金榮官, 앞의논문, 2000, 64 75 쪽. 35) 김병남, 백제문주왕대의웅진천도배경, 역사학연구 32, 호남사학회, 2008, 43 54 쪽. 36) 金榮官, 앞의논문, 2000, 78쪽주33.
20 제73호 이더라도그것을영역지배의증거로보지않았다. 고구려의일시적인한강 유역진출을보여주는자료라고보거나, 37) 한강유역을두고고구려와백제 가계속대치국면을벌이고있었음을보여주는것 38) 이라고하여, 한강유역 고구려보루성들은단순한군사주둔지정도였을뿐영역지배의증거로볼 수없다고의미를축소했다. 그러나이때이미아차산일대의고구려유적이단기간사용한군사요새 정도가아니라는점이밝혀졌고, 39) 남성골유적과월평산성등충청도지 역에서도고구려유적이발견됨으로써 삼국사기 지리지의옛고구려군 현관련기사에도주의를기울여야한다는인식이생기게되었다. 필자의졸고인 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의관계 가이러한분위기를반 영하고있다. 이논고에서는고구려와백제, 각왕대정책의전체적인방향 성과 삼국사기 지리지의기사, 한강유역과충북일대에서확인된고구려 유적등을종합적으로검토했다. 여기에서는우선동성왕대에는한산, 한산 성관련기사가주로나오고무령왕대에는한성관련기사가주로나온다 는차이점에주목했다. 전자는범위가포괄적인지역명으로나오는데비해 후자는수도혹은도성을지칭한다는점에서차이가있으므로서로다른 지역이었을가능성이있다고본것이다. 필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웅진도읍기의관련기사들을모순없이완벽 하게설명하기는어렵다는것을인정하면서, 논란이되고있는지명기사에 만치중할것이아니라당시백제와고구려의정치적, 군사적동향을우선 적으로고려하면서정황을파악할필요가있다고지적했다. 그에따라남 37) 金榮官, 삼국쟁패기아단성의위치와영유권, 高句麗硏究 5, 1998, 123 127 쪽. 38) 박현숙, 앞의논문, 2001, 121 122 쪽. 39) 崔鍾澤, 夢村土城內高句麗遺蹟再考, 韓國史學報 12, 2002, 9 40 쪽 ; 아차산고 구려보루의역사적성격, 향토서울 64,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4a, 87 128 쪽 : 남 한지역출토고구려토기연구의몇가지문제, 白山學報 69, 2004b, 43 69 쪽 ; 南 韓地域高句麗土器의編年硏究, 先史와古代 24, 2006, 285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21 부지역으로의진출과경영에주안점을두고있는동성왕대까지는고구려가 한강유역을영유하고있었고, 즉위초부터대고구려공세를강화한무령왕 대에이르러한강유역을회복했던것으로보았다. 하지만백제가이때부터계속이일대를안정되게확보하고있지는않았 고, 아마도려제간에공방전이계속되었던것같다고했다. 한성을되찾았 음에도불구하고 還都를도모하지않았던데서그것을짐작할수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529 년 10월에있었던오곡지원에서의전쟁에서고구려가 승리함으로써한강유역을되찾았다가 551 년에백제 신라 가야연합군의 공격에의해다시상실했던것으로보았다. 40) 이글에서는그동안한강유 역영유문제에대한논의시백제측입장에서만살핀것과달리고구려의 국내외상황도고려하고, 現傳하는고고학자료와문헌사료모두를인정하 는가운데당시상황을추적해보려고했다. 이후남한학자로서는처음으로동성왕과무령왕대한강유역관련사료를 있는그대로인정하는견해를표명함으로써, 당시이지역의백제영유설이 이어지게한양기석이 475 년부터 551 년까지백제의한강유역영유문제를 본격적으로다룬글을발표했다. 이논고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뿐아 니라지리지의기사와남한지역에서확인된고구려유적관련자료들에대 해서도검토한후한강유역영유문제에대해다음과같이결론을내렸다. 즉 475 년한성함락이후고구려가이지역을지배했는데, 무령왕 7년을기 점으로한강유역에다시진출하기시작하여영역화작업에착수하여 523 년 시점에는이지역을안정적으로회복했으나, 성왕 7 년(529) 에다시상실했 다가 551 년에되찾았다는것이다. 영유권변화의기본적인과정에대해필 자와동일하게본것이다. 동성왕대기사는한산관련지명이많이나오고 무령왕대에는한성관련기사가많이나온다는점에주목하여, 무령왕대에 40) 김현숙, 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의관계, 古代東亞細亞와百濟, 서경, 2003, 153 174 쪽.
22 제73호 도성인한성을되찾았다고본점도같다. 그러나졸고에서무령왕대회복 하기는했으나고구려와백제간에공방전이끊이지않아유동적상황이었 다고본것과달리 에서차이가있다. 523 년시점에는안정적인지배를하게되었다고본점 또한일반적으로 551 년에백제가차지한 6 郡을한강하류유역이라고보 는것과달리한강유역과함께공취했다고하는평양을황해도재령지방으 로보는가운데이 6군이곧경덕왕 21 년(762) 에신라가패서지방에설치 한 6 군의땅과동일한곳이라고보았다. 그러면서이평양은근초고왕대에 영역화했던것으로서성왕이평양을 故地로인식하여한성과함께회복하 고자했던것은성왕대의영역관이반영된것으로, 성왕은근초고왕대의영 역관을회상하여漢城故土의실지회복을이루려했다고정리했다. 41) 이논문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나오는한성과한산( 성) 의용례를면 밀히검토하고, 삼국사기 지리지한주조의기사와남한지역의고구려 유적관련자료를종합적으로살폈다. 그리고무령왕대부터한성을다시 지배하게된과정과성왕대에한강유역을상실했다가다시회복하는과정 을백제정치사를고려하는가운데백제본기기사를재분석하여정리했다. 이글은한강유역백제영유설이본격적으로진행될수있도록한원제안자 가, 백제의한강유역일시회복설의입장에서해당문제를차분하게검토함 으로써현재까지의논의를어느정도정리해주었다는점에서의미가있다. 하지만 551 년백제가회복했던평양을황해도재령으로봄으로써, 42) 학계 41) 양기석, 5 6세기百濟의北界 -475 551 년百濟의漢江流域領有問題를중심으로 -, 博 物館紀要, 檀國大石宙善紀念博物館, 2005, 23 51 쪽. 42) 양기석, 앞의논문, 2005, 48 쪽. 그런데양기석은손영종의견해 ( 고구려사 1, 과학백과 사전종합출판사, 1990, 174 187 쪽) 에따라성왕이회복한 6 군의땅을평양 = 남평양, 즉 재령설으로보고, 경덕왕 21 년(762) 패서지방에설치한 6 성, 즉오곡 ( 서흥 ), 휴암 ( 봉산 ), 한성 ( 재령 ), 장세 ( 수안 ), 지성 ( 해주 ), 덕곡 ( 곡산 ) 에해당한다고했다. 하지만손영종은근 초고왕이공격했던평양은남평양, 성왕이회복한평양은오늘의서울인것으로보았다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23 에또다른논쟁거리를던져주었다. 43) 한편북한의손영종도백제가한수유역을계속보유하고있었다고보는 설을일찍제기했다. 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6세기초엽까지도한산 성, 한성( 한강이북 ) 이계속백제땅으로남아있었던것으로씌어있다는 점을지적했다. 그리고장수왕이한성함락후앞으로는백제왕이노객( 신 하) 으로서고구려에복종하여일부지역과사람을배상으로내게하는등 의담보를받아내고철수했을것이라며, 이는하나의큰실책이었다고평했 다. 백제가아직자기역량을수습하지못하고있던기회를이용하여좀더 힘을들이더라도백제를완전히통합하였어야할것인데, 그렇게하지못했 던것은백제, 신라세력을과소평가하여앞으로큰싸움없이점차적인방법 으로통일을실현할수있으리라고잘못타산한데그원인이있었다고보 았다. 44) 손영종은 475 년戰役에의해오늘의서울시지역을제외한한강이북의 대부분지역과충북서남부의일부지역들을고구려가차지했던것으로보 았다. 그리고 494~497 년간의투쟁으로중부산악지대에서도소백산줄기 이북지역을확고히차지함으로써고구려가백제수도를측면에서공격할 수있는가능성을열어주었다고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비롯한역대 지리지들에충북일대의본래고구려군현이라고되어있는고을이름들은 이시기고구려의남부계선의일단을보여주고있는것으로, 소백산줄기와 청원군-보은군이당시고구려의경계선이었다는것이다. 그런데이후 503 년에백제달솔우영이지휘하는 5천군대의수곡성진 ( 앞의책, 1990, 381 쪽). 43) 임범식은 551 년에백제가회복한한성과평양 -( 남) 평양은서울지역을지칭하는것이 아니라 현재의평양남쪽, 즉황해도중부이북지역이며, 한성은한강근처의백제국도 가아닌황해도중부이북지역내에위치한재령의한성이라고보았다 ( 임범식, 앞의논 문, 2002, 30 쪽). 44) 손영종, 앞의책, 1990, 360 쪽.
24 제73호 공을계기로백제가북쪽으로현저히진출했으나, 529 년에오곡벌전투의 패배로인해백제가전면적으로후퇴하였고, 이후고구려의급속한남진으 로충남북부와충청서부의수많은 본래의고구려군현들이 있게된것으 로보았다. 45) 6 세기전반기에오늘의개성시지역과경기도의대부분, 충남 과충북의일부를차지하게됨으로써고구려의영토는 480~490 년대보다현 저히더늘어났다는것인데, 고구려가남평양을백제의북한산 ( 북한성, 오 늘의서울) 으로옮긴것도이무렵의일이었다고했다. 그는 551 년백제가 먼저차지했다는고구려의한성은오늘의광주이고다음에차지했다는평 양은고구려의남평양으로서오늘의서울시 ( 한강이북 ) 중심지대라고보았 다. 46) 조선전사 의편찬자들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의기사를신뢰하는입장 에서성왕대까지한수유역을보유하고있었는데, 529 년오곡에서의전쟁에 서안장왕이승리한후비로소이지역을고구려가차지했다고서술했다. 삼국사기 지리지한주조등의기사에나오는서울, 경기, 충청지역의고 구려영역화문제와관련해서도역시 529 년의전쟁을계기로 단며칠사 이에아산만-금강계선까지밀고나갔다. 고설명했다. 47) 그뒤조희승은 475 년한성함락후고구려가일부무력을아차성일대 에주둔시켜놓고평양으로개선했던것으로보았다. 48)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기사를사실로인정하는입장에서 482 년고구려의지배하에있 던말갈군이백제의한산성 ( 한성- 서울일대 ) 을공격하여 300 여호의주민 들을잡아갔으며, 국왕이열흘을머물며한산일대의군민들을위로했고, 490 년에는 15살이상의북부사람들을징발하여사현과이산두성을쌓았 45) 손영종, 앞의책, 1990, 368 378 쪽. 46) 손영종, 앞의책, 1990, 380 381 쪽. 47) 사회과학원, 조선전사 3,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1999, 158 160 쪽. 48) 조희승, 백제사연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2, 169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25 다고하여백제가이지역을차지하고있었던것으로보았다. 49) 이후려라간에는한성을중심으로서로방어거점을수축보강하면서일진 일퇴를거듭했는데, 50) 5세기말 6세기중엽까지백제- 고구려간의전선이 북으로는황해도수곡성, 치양, 패수, 오곡벌로부터남으로는한성과가불 성, 원산성, 위천의북쪽쌍현성, 금현성일대에형성되었던것으로보았다. 그는 삼국사기의 5세기말 6세기중엽까지의기사는전선이교착되지않고 전선류동이심하다. 이런데로부터일부학자들속에는이와관계되는기 사를믿지않으려는경향이있다. 이런경우고장 ( 지명 ) 이움직였을경우를 생각할수있다. 한성을중심으로백제와고구려의전선이유동되었다고 보는관점에서면지명( 고장) 들이움직이지않았고, 단지고구려와백제군 이크게유동하였다고보아지는것이다. 라고하였고, 백제의수곡성, 패수, 오곡벌공격이수군에의해바다로부터이루어졌다고했다. 그런데조희승은 529 년오곡벌싸움의전역이황해도의예성강유역이 아닌, 임진강이나혹은더남쪽인오늘의한강유역이었던것으로보았다. 황해남도연안의딴이름이 五原인것에착안하여오원이본시오곡원이었 다가세월이흐름에따라오원이되었을수있다고본것이다. 그리고 529 년오곡벌싸움이후 540 년까지 11년간남쪽으로쑥남하하여아산만계선 까지밀고나갔다고했다. 또 538 년수도를옮긴다음성왕이죽고위덕왕 이즉위한복잡한틈을타서고구려가 554 년큰무력을동원하여백제의 옛수도이며북방방어의거점인웅진성을핍박하여공격했다며, 연기군전 의면고등리소재고려산성과청원군부용면문곡리소재개소문성을고구 려군의금강계선진출의증거로들었다. 51) 이후손영종은 2006 년에펴낸 조선단대사 ( 고구려사 1) 에서이전저서 49) 조희승, 앞의책, 2002, 193 쪽. 50) 조희승, 앞의책, 2002, 195 쪽. 51) 조희승, 앞의책, 2002, 197 199 쪽.
26 제73호 에서살핀내용을토대로이문제를좀더상세하게살폈는데부분적으로 달라진면이보인다. 그는고구려가 475 년수도를함락시키고 8천명의포 로를데리고철수하였지만백제로부터항복을받아들이고한강남북의일 부지역은되돌려주되광개토왕때보다더전진하여서울동부지역 ( 한강이 북) 을포함하여양주, 양근, 양평과여주, 이천의일부, 충북괴산, 진천의 일부지역을영역으로삼은것으로보았다. 52) 그리고경기도양주, 서울동 쪽중랑천, 왕숙천유역일대에있는고구려보루성들은대략 475 년이후백 제의북상을막기위해조성된것이라했다. 또한 480~490 년대에청주지방까지진출함으로써금강계선에서백제와 대치하였으며, 529 년서남방에서영역을확대하여아산만까지진출한것으 로보았다. 즉이해 10 월에고구려가오곡벌 ( 황해북도서흥) 까지침입한 백제의주력군을격파하였으며, 한편으로는백제군의퇴로를차단하고수 백리를일거에남진하여충남아산군곡교천계선, 천원, 연기북부계선까 지진출했다고하였다. 그러면서문주왕원년조에고구려군이철수했다고명기되어있는것과 523 년에백제왕이한성으로갔고한강이북주민들을동원하여쌍현성을 쌓았다고한것등으로보아 475 년전역이후한강하류지역은백제에반 환되었다며, 고구려가아산만까지나간시기는 529 년전역이후였다는이 전의설을재차강조했다. 53) 이때기존내용을보강하는자료로남한지역 에서발굴조사된고구려유적관련내용을많이참고했다. (2) 고구려영유설 2000 년이후웅진기한강유역의백제영유관련논고들이연이어발표되 52) 손영종, 조선단대사 (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6, 205 쪽. 53) 손영종, 앞의책, 2006, 209 210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27 자, 2005 년이후이에대한반론들이나오기시작했다. 먼저고구려가 475 년이후이지역에 郡을설치하고직접적으로영역지배를실시했음을논증 한노태돈의논고가나왔다. 54) 한성공략후고구려가이지역을영역화하 지않고철수했다고보거나, 혹은군사적지배만했을뿐본격적인영역지 배는하지않았다고보는시각을부정한것이다. 이때한강유역을여전히 백제가지배하고있는듯보이는사료들에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原典이되었던어떤史傳이편술될때錯簡이된부분이었는지도모르 겠다고견해를밝혔다. 55) 적극적이고의도적인사료조작이이루어진것은 아니지만, 착오에의해다른시기사료가끼어들었을지도모른다는입장을 보였던것이다. 웅진기한강유역의백제영유설에대한본격적인비판은김수태에의해 이루어졌다. 그는특히무령왕대이후한강유역을안정적으로확보하였던 백제가성왕초기다시고구려에게빼앗겼고, 551 년에이를되찾았다고하 는논의를중심으로이설의문제점을지적했다. 그는무령왕대한강유역 회복설에대해비판하면서무령왕대백제가고구려와여러번전투를벌였 지만고지를회복했다는언급은찾아볼수없으며, 백제가다시강국이되 었다고만강조되고있다는점을주목했다. 그리고황해도일대까지영역화 하고평양성을공격해고구려의고국원왕을전사시켰던근초고왕과근구수 왕에자신과아들을대비시키는것에서도알수있듯이성왕은고지회복에 대한적극적인의지를가지고있었으나무령왕에게서는그런면을발견할 수없다고했다. 56) 그러면서도무령왕대백제의진출지역을보면한강유역이우선이되는 54) 노태돈, 고구려의한성지역병탄과그지배양태, 鄕土서울 66, 서울시사편찬위원 회, 2005. 55) 노태돈, 앞의논문, 2005, 185 쪽. 56) 김수태, 백제성왕대의변경 : 한강유역을중심으로, 백제연구 44, 2006, 131 132 쪽.
28 제73호 것이아니라신계지역에서점차로남하해오는특징을보여주고있다는것 에주목하고무령왕대이후한강유역을공격할때육로보다해로를이용했 으리라는점을지적했다. 57) 하지만이는대중국교통로의확보와함께이 루어진일로서이것을지나치게확대해석할필요는없다고하면서, 설혹백 제가한강유역을영유했다고하더라도그기간은일시적인것에머물렀으 며, 그만큼안정적이지못했으며, 사비천도이후백제가신라, 가야와연합 전선을형성한뒤에야실질적으로한강을점령하게되었다고강조했다. 58) 노중국도선행연구성과, 관련문헌사료, 그리고고고학자료를포괄적으로 섭렵해 5 6 세기한강유역의상황에대해종합적으로정리함으로써통설의 타당성을재확인했다. 노중국은첫째, 한성함락후포로 8천명을붙잡아 돌아갔다고하는것은장수왕이주력군만을거느리고귀환한것이며, 둘째, 수도가가지는상징성을생각할때고구려가백제수도한성을함락한것 은한성지역을지배하기위한것으로보이며, 셋째, 도림을파견한것에서 알수있듯이고구려가매우공을들여백제를공격했으며, 넷째, 고구려의 공격은장수왕의친정으로이루어졌으며, 다섯째, 삼국사기 지리지왕봉 현과달을성에안장왕과관련된지명유래설화가남아있는것은이곳이고 구려영역이었다는것이며, 여섯째, 삼국사기 지리지에이지역이신라 영역으로되기전에고구려영역이었다고되어있으며, 일곱째, 551 년삼국 연합군이한강유역을공격했을때이곳은고구려영역이었으며, 여덟째, 중 원고구려비에의하면문자왕대에도충주지역이고구려영역이었다는것을 근거로들었다. 또우두성, 위례성, 쌍현성, 독산성, 한북, 치양성등을예로 들어지명이치설을지지했고, 남성골유적과월평산성등고고유적을고구 려영역지배의증거로들었다. 59) 그리고 後稿에서는이러한근거에홍련봉 57) 김수태, 웅진시대백제사연구의현황과과제 -연구시각을중심으로 -, 백제웅진시대 의재조명, 2005, 79 80 쪽 ; 앞의논문, 2006, 134 쪽. 58) 김수태, 앞의논문, 2006, 135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29 2 보루에서나온 庚子銘토기편 도포함하여통설의타당성을재확인했 다. 60) 그런한편 삼국사기 기사분석을통해한강영유권문제를바라본논 고도있다. 임기환은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의대외관계기사에대해면 밀한분석을가했다. 그는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의관계를보여주는기 사는신라측자료를원전으로하거나신라측자료와대교된기사와, 백제측 독자의전승자료의두계통으로나누어진다고한다. 즉동성왕과무령왕대 의한성, 한산, 한산성관련기사를비롯한려제관계를보여주는기사들은 원전계통이다른기사로서, 자료가균질적이지않다며, 이런차별적인자료 를근거로이시기전체의역사상을시기구분하거나시기별성격차이를 논하는데에는좀신중할필요가있다고지적했다. 61) 임기환은또다른논고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대외관계사료가운 데지명관련기사를중심으로이문제를다시거론했다. 즉동성왕과무령 왕대에보이는말갈관련기사에고목성, 마수책, 한산성이란지명이집중 되어있는데이는온조왕과다루왕대에도반복하여나오는지명으로서, 웅 진으로천도한이후인당시의정황상초기의말갈침입과유사한상황이 재현될가능성은거의없다고보았다. 그러면서특정시기의역사적상황 을반영하는기사들이후대에사서를편찬할때에어떤이유로분산기술 된결과로보는것이합리적이라고했다. 62) 그리고동성왕과무령왕대한 59) 노중국, 5 6 세기고구려와백제의관계, 북방사논총 11, 고구려연구재단, 2006, 22 30 쪽. 60) 노중국, 웅진도읍기한강유역의상황, 百濟歷史와文化 제3 편제4 장, 충청남도역사 문화연구원, 2008, 141 쪽. 61) 임기환, 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대외관계기사의재검토, 백제문화 37, 공주대, 2008a, 11 쪽. 62) 임기환, 삼국사기 백제본기대외관계기사의재구성시론 -지명관련기사를중심으 로-, 한국고대사연구 52, 2008b, 281 282 쪽.
30 제73호 강 예성강일대전투기사나한성관련기사역시한성시기의기사가웅진 천도이후시기로분산기술되었을가능성이높다고지적했다. 63) 이와함께 551 년백제가한강유역 6군을탈취한매우중요한사실이백 제본기에빠져있는것에서, 이는 삼국사기 편찬시참고한백제측저본자 료에이사건이포함되어있지않았음을시사하며, 백제인에의한의도적인 자료조작의결과라고보았다. 즉동성왕, 무령왕대의한성관련기사를인 정한다면여기에성왕대의한성수복기사가새삼스럽게끼어들여지가없 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리고동성왕과무령왕대에백제가한성을그대로 보유하고있는듯선대의기사를여기에분산배치한것은당대백제인의 영역의식의소산으로서, 64) 당대백제인들에의해사료조작이이루어졌으므 로선후를합리적으로맞추기위해매우중차대한사건인 551 년성왕의 6 군수복기사를누락시키지않을수없었다고했다. 임기환은고구려의한 강유역경영에대해고구려영유설의입장에서살펴본바있는데, 65) 삼국 사기 기사의원전문제를지속적으로검토해오는과정에서 66) 그러한인식 을더확고히하게된것으로보인다. 최근에는최종택이고고자료뿐아니라기존연구성과에대한전체적인 검토를거쳐이문제를정리했다. 67) 최종택은이전에도한강유역의고구려 유적과유물을통해 5 6 세기한강유역의상황에대해검토했었지만, 68) 2008 년의논문에서최근고고학적성과를반영해자신의기존견해까지포 63) 임기환, 앞의논문, 2008b, 294 쪽. 64) 임기환, 앞의논문, 2008b, 296 쪽. 65) 임기환, 고구려 신라의한강유역경영과서울, 서울학연구 18, 2002. 66) 임기환, 광개토왕비에보이는백제관련기사의검토, 한성백제사료연구, 2005 ; 고 대의강원도와삼국의역관계, 강원도와고구려, 2007. 67) 崔鍾澤, 고고자료를통해본백제웅진도읍기한강유역영유설재고, 百濟硏究 47, 2008. 68) 崔鍾澤, 고고학상으로본고구려의한강유역진출과백제, 백제연구 28, 1998.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31 함, 재정리했으므로이를중심으로그의견해를살필수있다. 그는 5 6 세 기한강유역의고고자료에대한지금까지의연구사를총정리하고, 웅진기 한강유역영유설에대한기존논의들을재검토한후백제의영유설을지지 할만한근거가없다고결론을내렸다. 즉몽촌토성과아차산일대고구려 보루성들에서출토된토기의연대분석및진천의대모산성, 청원의남성골 산성, 대전월평동유적과최근조사된용인시기흥구보정동의고구려석 실분의연대비정을통해웅진기전기간또는일시적으로라도백제가한강 유역을영유했다는주장을받아들일수가없다고했다. 또한고구려가한 성을공함한직후부터몽촌토성을거점으로하여남진을계속하는한편으 로한강유역에대한영역화를시도했으며, 500 년을기점으로그중심거점 이몽촌토성에서강북의중랑천변으로이동되었다고했다. 이논문에서는지금까지남한에서발견된고구려유적 유물에대한전 반적이고폭넓은이해를바탕으로문헌사쪽기존연구성과의논리적문제 점까지도모두지적했다. 이글은문헌사료가영성하여합리적인해석을 완벽하게해내기어려운상황에서당대인이남긴생생한물질자료를근거 로과거사를복원해낸연구이기때문에신뢰성이더욱높다고할수있다. 그런데이논문이힘을얻는가장큰배경은최근홍련봉 2보루에서발 견된이른바 경자명 토기두점이라고할수있다. 69) 그동안부족한문헌 사료와절대편년을확인하기어려운고고학자료로인해누구도확언을할 수없던부분이있었는데, 경자라는 간기명이쓰여진토기가나옴으로써 연대비정에서기준을찾았다고보기때문이다. 이전에발표한최종택의 다른논문에서도이토기의 경자 즉 520 년에비정되는경자년을 절대연 대라고 지목한것으로보아, 70) 아마도경자명토기가한강유역영유권문 69) 崔鍾澤 李秀珍 吳恩姃 趙晟允, 紅蓮峰第 2堡壘 1 次發掘調査報告書, 高麗大考古環 境硏究所, 2007. 70) 崔鍾澤, 南韓地域高句麗土器의編年硏究, 先史와古代 24, 285 쪽.
32 제73호 제를보는논자의시각을규정하는데가장결정적인작용을했던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접시위에선각된이글자에대해서는판독상의문이제 기될수있으므로이자료에근거한판단은아직유보해둘필요가있다고 본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살펴보기로하겠다. 한편북한학계의입장을보면, 리지린 강인숙의 고구려역사 에서는남 한학계의통설과인식을같이했다. 즉 475 년한성함락이후에도고구려의 백제정벌은계속되었고, 그에따라한수이남의넓은지역이고구려의판도 에포괄되었다고보았다. 삼국사기 지리지의옛고구려군현에대한비 정을통해, 고구려가한강이남의경기도지역은물론충북과충남북부지 역까지차지하고이곳에지방통치기구들을설치했다고서술했다. 고구려는 남쪽으로한강이남의넓은지역을개척하던시기에북한산성을남평양이 라불렀고, 475 년부터한강이남지역을차지하기시작했으며, 이후약 100 년사이에직산, 진천, 음성, 괴산을연결하는선까지국토를넓힌것으로 보았다. 71) 그러나앞에서살펴보았듯이 1990 년에나온손영종의 고구려사 1 이후에는 475 년이후고구려가전적으로한강유역을지배했던것으로는 보지않게되었다. 4. 한강유역領有國論議 과정에서나타난문제점 한강유역영유문제를둘러싼논의를살펴보는과정에서알수있듯이, 고구려영유설이나백제영유설, 어느쪽도 475 년 551 년경한강유역영유국 문제에대해異論이제기될수없을정도의논증을했다고는볼수없다. 백제영유설가운데이지역을고구려가전혀차지한적이없었다고보거나, 한강이북지역만차지했을뿐한강이남지역은항상백제땅이었다고보 71) 리지린 강인숙, 고구려역사, 사회과학출판사편찬 ( 서울, 논장출판사재발간 ), 1988, 92 93 쪽.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33 는경우에는두가지점에서설명과보완이필요하다. 하나는 삼국사기 지리지에나오는서울, 경기, 충청지역일대에존재했던것으로나오는고 구려군현기사를어떻게볼것인가하는것이다. 그간백제영유설에서는 이에대해별반언급이없었다. 그러나현전하는사료를구체적인비판이 나사료분석과정도거치지도않고일괄무시해버리는것은옳지않다. 동 성왕과무령왕대한강유역관련기사를불신하는것에대해사료의자의적 인취사선택임이라고비판하면서, 삼국사기 지리지의고구려군현기사에 대해정당한비판과정을거치지도않은채그실재성을부정하는것은자 체모순이라고할수있다. 이기사를인정하든, 부정하든그이유를제시 할필요가있다. 실재성을인정하는경우에는지리지에나타난내용이어 느시기의상황을반영한것인지규명해야할것이다. 이때 마홀군이란 기 와명문을비롯한고구려군현관련자료에대해서도관심을가질필요가 있다. 다른하나는임진강유역과아차산일원의군사보루성및남성골유적, 대전월평산성, 진천의대모산성등군사적성격이강한유적뿐아니라이 제기흥, 용인, 화성등지에서고구려계석실분 72) 까지확인되고있는데, 이 에대해서도설명이필요할것이다. 73) 백제영유설에속하는학자들가운데 백제가한성지역을빼앗긴적이없었다고보는논자의경우남한지역소 재고구려유적에대해거의언급하지않거나, 아니면일시적으로사용된 군사시설일뿐영역지배와는관계가없다고하는경우가많았다. 특히한 72) 이한용 윤중현, 용인보정동고구려석실묘발굴조사, 계간한국의고고학 가을호, 주류성출판사, 2007 ; 한국문화보호재단, 성남판교지구문화유적 2차발굴조사 -5차 지도위원회의자료-, 2007 ; 재단법인중원문화재연구원, 충주시클린에너지파크건 설사업부지내문화재연장발굴조사지도위원회자료, 2008. 2 및연합뉴스 2008 년 9월 10 일자기사, 고구려식석실분한강이남서또발견 기사참조. 73) 2000 년대후반남한내에서발굴조사된고구려유적에대한개괄적인정리는백종오, 남한내고구려유적유물의새로운이해, 先史와古代 28, 2008, 116 122 쪽참조.
34 제73호 강이남지역에서주거지나고분같은영역지배모습을보여주는유적이 전혀발견되지않고있다는점을고구려영유설을부정하는결정적인논거 의하나로지적해왔었다. 그러나이제관련유적지가확인되고있는만큼 그에대한합리적인해석을제시할필요가있게되었다. 그런한편고구려영유설의경우에는무령왕대에나오는한성관련기사나 한수이북지역지배를보여주는자료들을신빙할수없는구체적인근거 를제시할필요가있다. 앞에서살펴본바있듯이사실지금까지통설에서 는내려진결론에따라사료를본측면이없다고할수없기때문이다. 어 떤점에서모순이있는지, 그러면백제본기의다른기사들은신빙할수있 는지등에대한설명도필요할것이다. 단지이전왕대에나왔던말갈의침 입기사가다시출현한다는것, 이전시기기사에나왔던지명들이다시나 온다는것만으로는기사의허구성을논하기어렵다고본다. 백제의뒷시 기사람들의인식이반영되어사료가조작되었다고하는것은어찌보면 대단히편의적이고자의적인해석일수있다. 예컨대백제본기의기사를고구려본기와신라본기와대조하면서사료의 공통점과성격차이를면밀히분석해낸것은사료에대한객관적이고과학 적인분석이란점에서의미가있다. 그러나원전사료와그것을간략화하여 실은기사를구분하는기준이인명의존재여부나사료의양같은것에두 었다는점에서불안감이남는다. 74) 또동성왕대와무령왕대의한성관련 기사등은전대의사료가분산배치된것이라고본것과그이유를백제인 의영역인식이라고본것은보충설명이더필요하다고여겨진다. 무엇보다우려되는점은이논리대로라면동성왕, 무령왕대의다른기사 뿐아니라백제본기전체의기사에대한신빙성논란이제기될수도있다 는것이다. 일반적으로백제본기기사의경우초기부분만신빙성에논란 74) 2008 년 10 월에있었던고대사학회정기발표회에서임기환의발표에대해김영관이이런 점을지적했었다.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35 이있을뿐뒷시기의기사에대해서는안정적이라고보고있다. 그런데이 처럼다른시기사료가분산배치된것이라고본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사료에대한전면적인재검토가필요하다고도할수있다. 75) 백제본기무령왕조에온조왕대부터나오는말갈, 즉흔히학계에서위말 갈이라칭하고있는예족이이시기에도여전히같은이름으로비슷한지 역에서출몰한다는것에의문이제기되는것은당연하다. 이시기에는고 구려가예를편입한지오래되었기때문에일반지방민으로편제하여통치 했을터인데, 이때도종족명으로지칭하여예맥계등의다른고구려주민들 과구분하여표기하고있다는점에서의심을가질수도있다. 하지만완전 히동일한기사가그대로떼붙여진것이아니고내용상차이가있다면단 순히다른시기기사의분산배치라고치부하기보다는일단그기사가왜 존재하는지에대한분석부터하는것이그렇지않아도사료부족에시달리 는고대사학계에서의바람직한접근법이라고본다. 고고학자료의경우주변지역에대한전체적인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 않은상태이므로백제의유물 유적이아직까지발견되지않았다고하 며, 76) 그를근거로고구려가시종지배하고있었다고보는것은문제가있 다고본다. 또한최근홍련봉 2 보루에서발견된이른바 경자명 토기두점 을절대기준연대로삼고논의를전개하고있는데, 77) 이자료에대해서는 75) 통설의입장에서있는김영심도동성왕말년, 특히무령왕대에다수등장하는한성, 한 산, 한수, 수곡성, 고목성, 마수책등한강유역과그이북의지명에대해서는합리적인해 명이필요함을먼저인정했다. 그리고그에대한해명으로써백제본기에나오는백제의 침공기사는그지역에남아있는원백제주민이전략적거점에주둔해있는고구려군사 에대해저항한것일수도있다고보았다 ( 김영심, 앞의논문, 2003, 116 쪽). 이는통설의 입장에서더라도웅진기한강유역관련사료를일괄적으로조작되었다거나다른시기사 료가천입된것이라고치부하고넘어가는것이반드시바람직하지는않다는인식을가진 연구자들도있다는것을보여준다. 76) 崔鍾澤, 고고자료를통해본백제웅진도읍기한강유역영유설재고, 百濟硏究 47, 2008.
36 제73호 명문이나성격등을다른출토유물들과비교하에좀더면밀히분석할필 요가있다고본다. 경자란 명문은아차산의홍련봉 2보루에서발견된접시 에음각되어있다. 78) 그런데이중앞의글자는 庚字 로보기어려울것같 다. 異體字나古字어디에서도 庚 字가운데이와비슷한글자는찾아볼 수없기때문이다. 오히려 康 字의별체자인 字나, 虎 字의 별체자인 나 가그에더가깝게보인다. 79) 따라서지금현재 로서는접시에선각된이글자를기년명인 보해둘필요가있다고본다. 80) 庚子 로보는것은좀유 아차산일대고구려보루성에서발견된토기들에는주로인명이나관등 명등이새겨져있으며기년명이적힌토기는없다는점도고려할필요가 있을것이다. 과문한탓인지몰라도다른지역에서나온고고자료들을보 아도기와나와당에는기년명이음각되거나양각된경우가있지만, 토기에 는그런예를별로보지못했던것같다. 따라서현재로서는이것을기년명 경자로읽어 520 년으로보고, 아차산일대고구려유적과거기서발견된토 기의연대를결정하는절대기준으로삼는것은위험성이있다고본다. 이 에대해서는다른관련자료가더나타날때까지결론을유보해두는것도 좋을듯하다. 그리고백제영유설에속하든, 고구려영유설에속하든이제부터는영역지 배의실상이어떠했는지에대한검토에비중을두어야할것같다. 백제영 유설, 혹은백제일시회복설의경우지금까지는어느나라영역이었는가하 77) 崔鍾澤, 南韓地域高句麗土器의編年硏究, 先史와古代 24, 2006 ; 앞의논문, 2008. 78) 崔鍾澤 李秀珍 吳恩姃 趙晟允, 紅蓮峰第 2堡壘 1 次發掘調査報告書, 高麗大學校考 古環境硏究所, 2007, 273쪽및 274 쪽. 79) 대만교육부國語推行委員會의이체자사전사이트 http://dict.variants.moe.edu.tw. 80) 이에대해서는김현숙, 고구려의한강유역領有와지배방식, 백제연구국내학술회의 6 세기의한반도 발표요지문, 2008. 12.19 참조.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37 는점이최대의관심거리였으므로이에대한연구는미진한편이었다. 81) 고구려영유설의경우, 고구려의한강유역지배방식에대해살펴보기도했 지만보루성들과 삼국사기 지리지고구려군현기사만을근거로했기때 문에논리적근거가다소약했다. 그러나이제한강이남지역에서장기적 영역지배의증거로흔히이야기되는고분유적이확인되었으므로새로운방 향에서논의를전개할수있을것이다. 지금까지살펴보았듯이 475 년부터 551 년까지한강유역영유문제는명쾌 하게결론이나지않은채평행선을달리고있다. 이렇게의견차가갈리게 된가장큰원인은역시관련자료가많이남아있지않은데있다고할수 있다. 문헌사료든고고학자료든 100% 완벽하게남아있지않다는것이문 제의근원인것이다. 그런데관련자료가온전하게남아있지않고부분적으로만남아있는 가운데, 그자료조차모두분석대상을삼지않고선별적으로살피게되면 결국실상을복원하는데장애가더생기게될것이다. 또전체사료가온전 히남아있지않다는것이분명한사실임에도불구하고그런점을고려하 지않고어떤사료가없기때문에남아있는다른사료도믿을수없다고 하는식의접근방식이반드시옳거나더과학적이라고말할수없다. 문헌사료도그렇지만고고학자료의경우에는그런점이더강할것이 다. 전지역, 전시기의유적을모두다발굴조사하지않은상태에서현재 발견되지않은유적이라고해서 100% 없다고전제하고결론을내리는것 은매우위험한일일것이다. 이런면은백제영유설이든, 고구려영유설이든 공통적으로해당되는점일것이다. 81) 김수태는백제영유설을비판하면서 백제가한강유역을영유하고있었다고한다면전쟁 이아니라이지역에대한백제의새로운경영을찾아볼수있어야한다. 고지적했다 ( 김 수태, 앞의논문, 2005, 187 쪽). 이는매우적합한지적이라고본다.
38 제73호 5. 맺음말 475 년 551 년한강유역영유문제를둘러싼논의에대해살펴보았다. 지 금까지의연구성과들로인해해당주제뿐아니라백제사연구자체가훨씬 심화되고풍부해질수있었다. 논고각각이학계에기여한바가매우많았 음에도불구하고그런점에대해서는논외로했고, 개별연구자체의논지 와그것이안고있는문제점들에대해서도살피지않고, 논란이되는점에 대한각연구자들의견해만정리했기때문에완전한리뷰가되지못했다. 이로인해개별연구들의논지를정확하게반영하지못한점도분명있을 것이다. 이런점은추후보완토록하겠다. 연구사를정리한것이므로전체글을요약하는대신향후과제를간단히 요약하는것으로맺음말을대신하겠다. 475 년고구려장수왕이백제의漢 城을攻陷시킨후 551 년성왕이신라, 가야와의연합작전으로한강유역을 되찾기까지고구려가이지역을영유했다는것이일제시기이래의통설이 었다. 이에대해한성함락이후에도백제가이곳을영유했었다고보는논 고들이나왔다. 그러자통설의입장에선반론도나오게되었다. 특히 2000 년중후반부터는통설을뒷받침해주는고고자료들이발굴됨에따라, 고구 려가한강이남지역을전혀지배한적이없었다고하는설은존립근거가 흔들리게되었다. 뿐만아니라 520 년에비정되는 庚子銘 토기편이발굴되 면서관련논의가이제종결되는듯한느낌도든다. 하지만새로운자료의 출현에도불구하고통설그대로만볼수없는측면은여전히남아있다. 또 새로제시된자료들에대한해석도달리이루어질수있는여지가있다. 따 라서지금시점에서한강유역영유논란이종식되었다고볼수는없을것 같다. 오히려신자료에대한분석과더불어, 새로운방향에서의연구가진 행되어야할전환점에이르렀다고할수있다. 향후 5세기말에서 6세기중엽한강유역영유국관련논의들에서는다음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39 과같은점들을고려할필요가있다. 웅진기백제의한강유역영유설가운 데이지역을고구려가전혀차지한적이없었다고보거나, 한강이북지역 만차지했을뿐한강이남지역은항상백제땅이었다고보는경우에는두 가지점에서설명과보완이필요하다. 하나는 삼국사기 지리지한주조의 고구려군현기사에대한해석이필요하다. 다른하나는최근기흥, 용인, 화성등지에서확인된고구려계석실분에대한합리적인설명이필요하다. 한강이남지역에서주거지나고분같은영역지배모습을보여주는유적이 전혀발견되지않고있다는점을고구려영유설을부정하는결정적인논거 의하나로지적해왔는데, 이제관련유적지가출현했으므로이에대한검 토가필수사안으로대두되었다. 고구려영유설의경우무령왕대에나오는한성관련기사나한수이북지역 에대한지배를보여주는자료들을불신할수밖에없다면, 보다구체적인 근거를제시할필요가있다. 단지이전왕대에나왔던말갈이재출현한다 는것, 동일지명들이다시나온다는것만으로는기사의허구성을논하기 어렵다. 백제후대인들의인식이반영되어사료가조작되었다고하는것은 편의적이고자의적인해석일수있다. 그리고고고자료의경우주변지역에대한발굴조사가전체적으로이루 어지지않은상태에서백제의유물 유적이아직까지발견되지않은것을 근거로고구려가시종지배하고있었다고보는것은무리이다. 또최근홍 련봉 2 보루에서발견된이른바 경자명 토기편은글자판독상異見이있을 수있으므로, 이를절대기준연대로삼고논의를전개하는것은유보할필 요가있다. 철기나토기등의다른유물들과글자나문양이새겨진다른토 기등을비교하면서좀더면밀히판독과성격분석작업을실시할필요가 있다. 이와함께백제영유설, 고구려영유설모두향후에는영역지배의구체적 인실상이어떠했는지에대한검토를본격적으로진행해야할것으로본다.
40 제73호 흔히구체적이고장기적인영역지배의흔적이라고보고있는고분유적, 즉 고구려계석실분이한강이남지역에서속속확인되고있기때문에이제이 에대한논의도진전을볼수있게되었기때문이다. 한강유역영유문제에대한의견차이가발생하게된가장큰원인은관련 자료의부족때문이다. 하지만남아있는자료에대한선별적인취사선택 도논의를갈리게한주요요인이되었다. 전체자료가 100% 온전하게남 아있지않은현실에서는일단남아있는자료모두를대상으로하여최대 한합리적으로해석하고자하는것이오류를줄이는최선의접근방식이아 닐까싶다. 투고일 : 2008. 10.27 심사 : 2008. 11.17~12.3 게재확정일 : 2008. 12.4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41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아차산 4 보루성벽발굴조사, 2007. 국립문화재연구소, 남한의고구려유적, 2007. 김영관, 삼국쟁패기아단성의위치와영유권, 고구려연구 5, 1998. 金榮官, 百濟의熊津遷都背景과漢城經營, 忠北史學 11 12 合, 2000. 김병남, 백제영토변천사연구, 전북대박사학위논문, 2000. 김병남, 百濟熊津時代의北方領域, 白山學報 64, 2002. 김병남, 百濟聖王代의북방영역변화, 韓國史硏究 120, 2003, 77 78 쪽. 김병남, 百濟東城王代의대외진출과영역의확대, 韓國思想과文化 22, 2003. 김병남, 백제웅진천도초기의한강유역상황, 韓國思想과文化 26, 2004. 김병남, 백제성왕대북방영역관련지명의분석, 韓國上古史學報 52, 2006. 김병남, 백제무령왕때의대내외적상황과영역의변화, 韓國思想과文 化 37, 2007. 김병남, 백제문주왕대의웅진천도배경, 역사학연구 32, 호남사학회, 2008. 김수태, 웅진시대백제사연구의현황과과제 -연구시각을중심으로 -, 백제웅진시대의재조명, 2005. 김수태, 백제성왕대의변경 : 한강유역을중심으로, 백제연구 44, 2006. 김영심, 웅진 사비시기百濟의領域, 古代東亞細亞와百濟, 서경, 2003. 김태식, 三國史記地理志高句麗條의史料的檢討, 歷史學報 154,
42 제73호 1997. 김현숙, 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의관계, 古代東亞細亞와百濟, 서경, 2003. 김현숙, 고구려의한강유역領有와지배방식, 백제연구국내학술회의 6 세기의한반도 발표요지문, 2008. 12.19. 南亨宗, 百濟東城王代支配勢力의動向과王權의安定, 북악사론 3, 1993. 盧重國, 百濟王室의南遷과支配勢力의變遷, 韓國史論 4, 1978. 盧重國, 百濟武寧王代의執權力强化와經濟基盤의擴大, 百濟文化 21, 1991. 盧重國, 三國史記 의百濟地理關係記事檢討, 百濟史論文選集, 불 함문화사, 1996. 노중국, 5 6 세기고구려와백제의관계, 북방사논총 11, 고구려연구 재단, 2006. 노중국, 웅진도읍기한강유역의상황, 百濟歷史와文化 제3편제4 장,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8. 노태돈, 고구려의한성지역병탄과그지배양태, 鄕土서울 66, 서울 시사편찬위원회, 2005. 東潮 田中俊明編著,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朴眞淑, 百濟東城王代對外政策의變化, 百濟硏究 32, 2000. 朴燦圭, 百濟熊津初期北境問題, 史學志 24, 1991. 朴賢淑, 熊津遷都와熊津城, 百濟文化 30, 2001. 백종오, 남한내고구려유적유물의새로운이해, 先史와古代 28, 2008. 사회과학원, 조선전사 3,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1999. 서울대박물관, 용마산 2 보루발굴조사약보고, 2006. 3.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43 서울대박물관, 용마산 2보루 2 차발굴조사약보고, 2006. 7. 성주탁 차용걸, 百濟儀式考, 百濟硏究 12, 1981. 손영종, 고구려사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손영종, 조선단대사 ( 고구려사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6. 심광주, 남한지역의고구려유적, 고구려연구 12, 2002. 梁起錫, 熊津時代의百濟支配層硏究, 史學志 14, 1979. 양기석, 5 6 세기百濟의北界 -475 551 년百濟의漢江流域領有問題를 중심으로 -, 博物館紀要, 檀國大石宙善紀念博物館, 2005. 兪元載, 百濟加林城硏究, 百濟論叢 5, 1996. 兪元載, 熊津時代의地方統治와貴族勢力, 百濟文化 26, 1997. 李基白, 熊津時代百濟의貴族勢力, 百濟硏究 9, 1978. 李道學, 漢城末熊津時代百濟王系의檢討, 韓國史硏究 45, 1984. 李道學, 漢城末熊津時代百濟王位繼承과王權의性格, 韓國史硏究 50 51 合, 1985. 李丙燾, 한국사( 고대편), 진단학회, 1959. 李丙燾譯, 國譯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李丙燾譯, 三國史記譯註 ( 하), 乙酉文化社, 1983.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5. 이지린 강인숙, 고구려역사, 사회과학출판사편찬( 논장출판 ), 1988. 이한용 윤중현, 용인보정동고구려석실묘발굴조사, 계간한국의고 고학 가을호, 주류성출판사, 2007. 임기환, 고구려 신라의한강유역경영과서울, 서울학연구 18, 2002. 임기환, 광개토왕비에보이는백제관련기사의검토, 한성백제사료연 구, 2005. 임기환, 5 6 세기고구려의남진과영역범위, 경기도의고구려문화유 산 ( 경기문화총서 1), 경기도박물관, 2007.
44 제73호 임기환, 고대의강원도와삼국의역관계, 강원도와고구려, 2007. 임기환, 웅진시기백제와고구려대외관계기사의재검토, 백제문화 37, 공주대, 2008. 임기환, 삼국사기 백제본기대외관계기사의재구성시론 -지명관련 기사를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52, 2008. 임범식, 5 6 세기한강유역사재고 -식민사학의병폐와관련하여 -, 한성사학 15, 2002. 재단법인중원문화재연구원, 청원I.C. 부용간도로공사구간내청원부강 리남성곡유적 2 차발굴조사현장설명회자료, 2006. 재단법인중원문화재연구원, 충주시클린에너지파크건설사업부지내문화 재연장발굴조사지도위원회자료, 2008. 2. 全榮來, 完山과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創刊號, 1975. 鄭永鎬, 全義高麗山城小考, 千寬宇先生還曆紀念論叢, 1985. 鄭永鎬, 高句麗의錦江流域進出에대한小考, 汕耘史學 3, 1989. 鄭載潤, 熊津時代百濟政治史의展開와그特性, 西江大博士學位論文, 1999. 조희승, 백제사연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2. 千寬宇, 三韓의國家形成 ( 下 ), 韓國學報 3, 1976. 崔章烈, 漢江北岸高句麗堡壘의築造時期와그性格, 韓國史論 47, 2002. 崔鍾澤, 고고학상으로본고구려의한강유역진출과백제, 백제연구 28, 1998. 崔鍾澤, 高句麗土器硏究, 서울大博士學位論文, 1999. 崔鍾澤, 京畿北部地域의高句麗關防體系, 高句麗硏究 8, 고구려연구회, 1999. 崔鍾澤, 夢村土城內高句麗遺蹟再考, 韓國史學報 12, 2002.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45 최종택, 아차산고구려보루의역사적성격, 향토서울 64, 서울시사편 찬위원회, 2004. 崔鍾澤, 남한지역출토고구려토기연구의몇가지문제, 白山學報 69, 2004. 崔鍾澤, 南韓地域高句麗土器의編年硏究, 先史와古代 24, 2006. 崔鍾澤 李秀珍 吳恩姃 吳珍錫 李廷範 趙晟允, 紅蓮峰第 1堡壘 1次 發掘調査報告書, 高麗大考古環境硏究所, 2007. 崔鍾澤 李秀珍 吳恩姃 趙晟允, 紅蓮峰第 2堡壘 1 次發掘調査報告書, 高麗大考古環境硏究所, 2007. 崔鍾澤 吳珍錫 李廷範 趙晟允, 峨嵯山第 3堡壘 1 次發掘調査報告書, 高麗大考古環境硏究所, 2007. 崔鍾澤, 고고자료를통해본백제웅진도읍기한강유역영유설재고, 百 濟硏究 47, 2008. 최창빈, 신원에서고구려시기의큰도시유적발견, 력사과학 1985-4, 1985. 忠北大博物館, 淸原南城谷高句麗遺蹟, 2004. 한국문화보호재단, 성남판교지구문화유적 2차발굴조사 -5차지도위원 회의자료 -, 2007. 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漣川瓠蘆古壘 Ⅲ, 2007.
46 제73호 국문초록 475 년장수왕이漢城을攻陷시킨후 551 년성왕이한강유역을되찾기까 지고구려가이지역을 領有했다는것이일제시기이래의통설이었다. 이 에대해한성함락이후에도백제가이곳을영유했었다는연구들이나오게 되었고, 다시그에대한반론도나오게되었다. 2000 년중후반부터는통설 을뒷받침해주는고고자료들이발굴됨에따라, 한강이남지역을고구려가 지배한적이없었다고하는설은존립근거가흔들리게되었다. 뿐만아니 라홍련봉 2보루에서 520 년에비정되는 庚子銘 토기조각이발굴되면서백 제영유설은이제종점에다다른듯한느낌도든다. 하지만새로운자료의출현에도불구하고통설그대로만볼수없는측 면은여전히남아있다. 또새로제시된자료들에대한해석도달리이루어 질수있는여지가있다. 따라서한강유역영유논란은아직끝나지않았으 며, 연구사상전환점에이르렀다고할수있다. 향후한강유역영유국문제관련논의들에서는다음과같은점들을고려 할필요가있다. 웅진기한강유역백제영유설가운데이지역을고구려가 전혀차지한적이없었다고보거나, 한강이남지역은항상백제땅이었다 고보는경우에는보완설명이필요하다. 먼저, 삼국사기 지리지漢州條의 고구려군현기사에대한해석이필요하다. 그리고최근기흥, 용인, 화성 등지에서확인된고구려계석실분에대한합리적인설명이필요하다. 고구려영유설의경우에는무령왕대한강유역지배를보여주는자료들을 믿을수없다는것에대해보다구체적인근거를제시할필요가있다. 또 고고자료의경우주변지역에대한발굴조사가전체적으로이루어지지않 은상태에서백제의유물 유적이아직까지발견되지않은것을근거로고 구려가시종지배하고있었다고보는것은무리이다. 그리고이른바 경자 명 토기편은글자판독상異見이있을수있으므로, 이를절대기준연대로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47 삼고논의를전개하는것은아직유보할필요가있다. 그리고앞으로는백제영유설이나고구려영유설모두구체적인지배양상 에대한검토에더치중해야할것으로본다. 주제어 : 高句麗領有說, 百濟領有說, 長壽王, 武寧王, 聖王, 漢江流域, 삼국사기 지리지, 庚子銘土器片
48 제73호 Abstract Discussion on the Debate Concerning the Occupation of the Areas of the Han River, 475-551 Kim, Hyun-sook Sinc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t has been generally acknowledged that Koguryo occupied the areas of the Han River from 475, when King Jangsu attacked Hanseong 漢城, to 551, when King Seong recovered the region. After then, other scholars have asserted that after Koguryo attacked Hanseong, Baekje still controlled this region. Another refutation emerged to convert the argument of Baekje's control on the region. After the middle of 2000, archaeological materials supporting the prevalent idea were excavated. Therefore, the argument that Koguryo had never occupied the southern areas of the Han River came to be shaken. Moreover, the pottery fragment with the inscription of the gyeongja 庚子 was excavated at the second fortress of Hongryeon peak, which almost makes an end of Baekje's occupation theory on the region. However, despite the emergence of new data, there are still some aspects which do not let us accept the prevalent idea. Thus, this debate on who occupied the areas of the Han River has not been settled. The future discussion concerning the problem on which kingdom occupied the areas of the Han River should contemplate the following matters. As for the opinions arguing Baekje's occupation on the areas of
475년 551 년한강유역領有國論議에대한검토 49 the Han River during Ungjin period, if one suggests that Koguryo had never occupied the region, or the southern areas of the Han River had been always Baekje's territory, a complementary explanation is necessary. First, one needs to provide an interpretation of the Koguryo counties and prefectures written in the Hanju article of geography treatise in Samguk sagi. In addition, rational explanation is needed regarding the Koguryo -style stone chamber tombs confirmed in Giheung, Yongin, Hwaseong, and elsewhere. In the case of the opinion asserting Koguryo's occupation on the region, one should provide more concrete evidence because it is hard to believe the data showing Koguryo's occup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Muryeong. Also, as for archaeological data, it is unreasonable to believe that Koguryo kept control of the region because Baekje artifacts and relics have not been excavated yet. Because a complete archaeological excavation has not been carried out in the surrounding areas. And the so-called fragmentary pottery with the inscription of the gyeongja could be misread or suggest different opinions on the reading of the inscription. Thus we need to be careful about developing an argument based on the pottery inscription as a definite standard date. Whether it is the Baekje occupation theory or the Koguryo occupation theory, future studies should concentrate on determining the concrete conditions of governance of the areas. Key words : Koguryo occupation theory, Baekje occupation theory, King Jangsu, King Muryeong, King Seong, the areas of the Han River, geography treatise of Samguksagi, pottery fragment with gyeongja inscription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 그에대한認識 李道學 * 82) 1. 머리말 2. 한성함락기사의검토 3. 웅진기한강유역지배여부에대한검토 (1) 백제의한강유역지배설의검토 (2) 일시적인한강유역상실설의검토 (3) 백제의한강유역상실에대한근거 4. 한강유역상실에대한인식설정 (1) 성왕대에회복한 6 郡과그상실문제 (2) 한강유역상실에대한인식 5. 맺음말 1. 머리말 삼국이상호각축하는과정에서한번씩점유했던지역이한강유역이었 다. 당초백제가지배했던한강유역은 475 년 9 월에고구려군의强襲을받 아고구려영역이되었다. 그런데 551 년에백제와신라동맹군은한강유역 * 한국전통문화학교문화유적학과교수
52 제73호 을공격해서그하류와상류를각각分占하였다. 그러나 553 년에신라군은 기습공격으로한강유역을 完占했다. 이후한강유역은변동없이신라영 역으로자리잡았다. 이처럼한강유역은백제가오랜기간정치적거점을 설정하고팽창하게된 震源地로서의의미와더불어고구려가집요하게추 진해온남진경영의최대성과로서의의미도지녔다. 한강유역에대한최 종지배자가된신라로서는백제와고구려兩國사이에서시종苦戰을면 하기어려웠다. 그럴수록신라는한강유역을기반으로중국대륙唐과의관 계를일층강화시켰다. 결국한강유역은신라가당군을한반도로誘導하여 통일전쟁으로승화시킨기제로써의의미를지녔다. 삼국이한강유역을점유함으로써얻게된정치적위상은영역의확대라 는현상적인의미 以上을지녔다. 이와관련해고구려가백제의정치적심 장부인한강유역을점유한기간에관한논의가검증대에섰다. 종전에는 475 년부터 551 년까지의 76년간을고구려가이곳을지배한것으로이해하 였다. 그러나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일관되게게재된백제왕들의漢 城이나漢山 행차에대한적절한해답을주지못했다. 즉백제본기만본다 면백제는 475 년에한성이함락되고개로왕이捕殺되었지만여전히한성을 위시한한강유역을지배하였다. 이와관련해근자에는백제가한성일원을상실한시기를조정하여인식 하는경향이제기되었다. 백제는 529 년( 성왕 7) 에한강유역을상실했다가 551 년( 성왕 29) 에다시금회복했다는것이다. 혹은 475 년에상실한한강유 역을무령왕대에회복했지만다시금성왕대에상실했다가또회복했다는 주장도제기되었다. 고구려가한강유역을지배한시기는 20~30 년에불과하 다는것이다. 그러나이러한인식이나해석역시考證上의난맥상은물론 이고, 고구려유적의분포를비롯하여고구려행정지명의존재에대해서는 적절한반론을제기하지못했다. 더구나국가의심장부이자상징성이큰 백제수도인한성을함락시켰음에도불구하고점유하지않은채고구려군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53 이 回軍한이유를설득력있게제시하지못하였다. 고구려는한성을지배 함에따라한반도의 大動脈格인한강수계를장악하게되는동시에남진경 영에절대적으로유리한판세를얻게되는것이다. 그럼에도한성에서고 구려군이회군했다는해석은기록만으로는납득하기어려운구석이많다. 혹자는 371 년에백제가평양성전투에서고구려고국원왕을살해했음에도 그곳을점령하지않은사례와도비교한다. 그러나 371 년의전투는백제가 고구려왕을전사시켰을뿐평양성을함락해서주민을포획한것은아니었 다. 따라서兩者는서로비교대상이되지않는다. 웅진기백제가한강유역을여전히지배했다는주장에대응하는논리가 있다. 즉웅진기에보이는한성이나한산을비롯한관련지명들은기실移 置되었다는주장이다. 1) 백제가한강유역을상실했다는전제하에서제기된 이같은지명이전설은그러나 웠다. 恣意的인면이많아서설득력을얻기어려 본고에서는지금까지의관련논의를검토한후백제의한강유역지배기 간을검증하고자했다. 동시에, 이로인해背馳되었던사료가지닌역사성 을되살려보려고한다. 즉웅진기백제영역으로기재된漢城이나漢山을 비롯한한성기지명의등장배경을사비기백제왕실의전통적인영역관 념및정통성확립차원과결부지어구명하고자했다. 2. 한성함락기사의검토 고구려가백제왕성인 漢城을공격한배경에대해서는많은논의가있어 1) 웅진기의한강유역지배문제에대한학설사적인소개는양기석, 475 년위례성함락직 후고구려와백제의국경선, 한국고대사국의국경선, 2008, 서경문화사, 59~63 쪽에 잘정리되어있다. 但, 노중국의지명移置說에대한언급이전혀소개되지않은게의 아하다.
54 제73호 왔다. 그러나본고에서는이문제를詳論할여유가없는관계로요점만摘 示하고자한다. 고구려는자국을포위하려는백제와北魏, 그리고勿吉間의 연계조짐이급박하게돌아가고있음을포착하였다. 이에고구려는그러한 포위사슬의연결고리이자軸이되는백제에대한標的공격을감행해서 그러한연계를일거에와해시키고자했다. 물론고구려의한성공격은內 政문제와도결코무관한사안은아니었다. 2) 결국이러한복합적인요인이 작동하여고구려군은 475 년 9 월에한성을공격했다. 이와관련해백제가 고구려군의습격을받아수도인한성을함락당하는기사와이것을에워싼 관련사료를다음과같이인용하였다. 그럼으로써이러한사료자체에대 한분석을제기해본다. a. 9월에고구려왕거련이군사 3 만을거느리고와서왕도漢城을포위하였다. 왕 은성문을닫고능히나가싸우지못하였다. 고구려인이군사를네길로나누어挾 攻하고또바람을이용하여불을질러성문을태우니사람들이두려워하여나가서 항복하려는자도있었다. 왕은窮迫하여어찌할바를몰라數十騎를거느리고門 을나와서쪽으로달아나자고구려인이쫓아가살해하였다. 3) b. 蓋婁가이를듣고아들文周에게말하였다. 내가어리석고밝지못하여간 사한사람의말을믿고썼다가이지경에이르렀다. 백성은쇠잔하고군사는약하 니비록위태로운일이있다고하더라도누가기꺼이나를위하여힘써싸우겠는 가? 나는마땅히社稷을위하여죽겠지만네가이곳에서함께죽는것은이익이 없다. 어찌난을피하여國系를잇지않겠는가? 문주는이에木劦滿致와祖彌桀 取 [ 木劦과祖彌는모두複姓이었다. 隋書에는木 劦을두개의姓으로하였으니 어느것이옳은지모르겠다 ] 와함께남쪽으로갔다. 이에이르러고구려의對盧인齊于 再曾桀婁 古尒萬年 [ 再曾과古尒는모두복 성이었다 ] 등이군사를거느리고와서北城을공격하여 7 일만에빼앗고, 南城으로 옮겨공격하였다. 성안은위태롭고두려움에떨었다. 왕이나가도망가자고구려 2) 이에관해서는李道學, 高句麗의內紛과內戰, 고구려연구 24, 2006, 16~19 쪽참조. 3) 三國史記 권25 蓋鹵王 21 년조.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55 장수桀婁등이왕을보고는말에서내려절한다음에왕의얼굴을향하여세번 침을뱉고는그죄를헤아리고는묶어서阿且城 아래로보내어그를죽였다. 걸루 와萬年은本國人이었는데죄를짓고는고구려로도망하였었다. 4) c. 蓋鹵가재위한지 21년에고구려가來侵하여한성을포위하므로개로가籠城하 여굳게지키고문주로하여금신라에구원을청하게하였다. ( 문주는 ) 군사 1만을 얻어가지고돌아왔다. 고구려병이비록물러갔으나성은함락되고왕은돌아갔으 므로드디어즉위하였다. 5) d. 9월에왕이군사 3 만을이끌고백제에침입하여백제왕의도읍인漢城을함락 시키고백제왕扶餘慶을죽이고남녀 8 천인을사로잡아돌아왔다. 6) e. 7 월에고구려왕거련이몸소군사를이끌고백제를침략하자, 백제왕慶이그 아들文周를보내어도움을구하였다. 왕이군사를보내어이를돕자 ( 신라군이 ) 미처그곳에이르지못하여백제는이미함락되고慶도또한害를입었다. 7) f. 百濟記에이르기를蓋鹵王乙卯年겨울에狛의大軍이와서大城을七日七夜 동안공격하였다. 王城이함락되자드디어慰禮를잃었고, 國王및大后와王子 등이모두敵手에몰살당했다. 8) 위의인용기사를통해고구려가한성을함락시킨후에이곳을직접지 배했는지여부에대한검토가필요하다. c 에서 고구려병이비록물러갔으 나성은함락되고왕은돌아갔으므로 라고하였다. d 에보면 남녀 8천인 을사로잡아돌아왔다. 고했다. 얼핏보면백제본기나고구려본기모두고 구려군이한성을함락시킨후에회군한것으로판단할수있다. 그러나고 구려본기의기사는어디까지나개선을가리키는문구이지점령지에서의철 4) 三國史記 권25 蓋鹵王 21 년조. 5) 三國史記 권26 文周王즉위년조. 6) 三國史記 권18 長壽王 63 년조. 7) 三國史記 권3 慈悲王 17 년조. 8) 日本書紀 권14 雄略 20 년조.
56 제73호 수를뜻한다고볼수없다. 왜냐하면 광개토왕릉비문 에잘나와있듯이 영락 6 년에고구려군은對백제전에서압승을거둔후회군했던것이다. 즉 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 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9) 라는기사에보듯이광개토왕은男女生口 1千人과王弟와大臣 10 인을거느리고군대를돌려還都했다. 그렇다고고구려가이때점령한 백제성들을포기한것은아니었다. 영락 6년조에기재된백제 58 城의존재 는 광개토왕릉비문 수묘인연호조에낱낱이적혀있기때문이다. 그런 만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적힌장수왕의개선기사를고구려가한성 에서철수했다는근거로받아들여서는안될것같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고구려군이여세를몰아더이상의공격을포기하고 회군한것으로받아들이는견해가있다. 이와관련해단기전을운위하는 경우가많다. 광개토왕이백제왕의항복을받고는회군한사례를적용하고 있다. 백제근초고왕이평양성전투에서고구려고국원왕을전사시켰지만 영역화하지않고회군한경우도마찬가지사례에속한다고했다. 기습적인 단기전의경우보급의난점등으로인해소기의성과를거둔후에회군할 수밖에없다는것이다. 한성함락의경우도이러한선상에서생각해볼수 있다고한다. 그런데광개토왕대한성함락의경우는백제왕의항복을받 았을뿐아니라백제영역을점령한후철수한것이다. 소위 58城 700 村의 戰果가바로그것을뜻한다. 고구려고국원왕의전사는중심깊숙이침투 한백제군과의교전중의피살일뿐이다. 이것은백제의고구려영토점령 과는직접연계되지않는다. 그러나 475 년한성함락은앞에서거론한사 례와는차원이다를정도로백제가심대한타격을입었다. 일본서기 의 고려왕이크게軍兵을일으켜서백제를伐盡했다. 10) 그때사람들이모 9) 李道學, 광개토대왕의영토확장과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정치와사회, 동북아역 사재단, 2007, 167~171 쪽.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57 두말하기를 백제국은비록이미망하였다. 다시그나라를만들었다. 고했다. 11) 는기사를보면거의망했다는인식이지배했다. 그럼에도불구 하고고구려가백제를최종적으로멸망시키지않은이유나배경은무엇일 까? 이와관련된기사를찾는다면다음에보인다. g. 고려왕이크게軍兵을일으켜서백제를伐盡했다. 이에조금남겨진무리들이 모여서倉下에거처하였는데, 兵糧이이미다하고, 근심하여우는게심하였다. 이 에고려의諸將들이왕에게말하기를 " 백제의마음은非常한게있어서臣이매번 이들을볼때마다스스로의잘못을깨닫지못합니다. 다시금덩굴처럼자랄까두렵 습니다. 드디어백제를제거할것을청합니다." 고하자, 왕이말하기를 " 불가하다. 寡人이듣기에백제국이일본의官家가된유래가오래되었다. 또그왕이천황을 섬기고있음은사방의나라들이모두알고있는바이다." 라고말했다. 드디어그것 ( 백제정벌) 을그만두었다. 12) 위의인용에따르면고구려는백제를멸망시키고싶었지만 倭로인해좌 절되었다는것이다. 물론위의言辭는修飾되고과장된내용인것은분명 하다. 다만실마리로한단서를찾는다면고구려의의도대로백제정벌이 진행되지않았음을암시한다. 이는고구려가추진한백제정벌의한계를 뜻하는것이다. 즉백제왕성을함락시키고백제왕을포살했지만맹추격전 을벌일수없는현실적인제약을말해준다. 고구려가백제를멸망시키지못한현실적제약은 c와 e에보이는신라의 군사적지원을일단꼽을수있다. 아울러왜의백제지원을부정할수도 없다. 개로왕은弟인곤지를왜에파견했을정도로양국간의관계는돈독 한편이었다. 한성함락직후곤지의역할을상고하기는어렵지만웅진기 에는내신좌평으로서왕실의든든한버팀목역할을하였다. 이러한곤지의 10) 日本書紀 권14 雄略 20 년조. 11) 日本書紀 권14 雄略 21 년조. 12) 日本書紀 권14 雄略 20 년조.
58 제73호 위상은왜와연결되어있는만큼상징성이상의의미가있을것이다. 13) 요 컨대 g 기사에대한신빙성여부와는상관없이고구려가더이상의擴戰을 원하지않았음을뜻한다. 이와관련해다음의사례를상기하지않을수없 다. 400 년에고구려군 5만의대병이신라구원을명분삼아낙동강유역에 출병한적이있지만後燕의기습공격으로후방 700 여里땅을일거에상 실하였다. 14) 이사건은다른사람도아니고장수왕의 일인만큼자신의뇌리에 先王인광개토왕대의 刻印되었을것이다. 이러한사례에비추어볼때 고구려는북위로인해장기전을펼치며백제에대한추격을지속하기어려 웠을수있다. 고구려로서는後顧를염려하지않을수없었을것이다. 더욱 이 475 년고구려의한성공략이백제 -북위 -물길의포위사슬을끊는다는 전략적인목적에서단행되었다고하자. 그렇다고할때고구려로서는북위 와물길의위협을심각하게고려하지않을수없다. 이와관련해백제는 472 년에북위에사신을보내어고구려공격을부추긴적이있다. 그러나 당시고구려는북위에틈을보인바없다. 그랬기에북위는백제의請兵호 소를물리치고결과적으로고구려편을들어주었다. 그런데 475 년고구려의 백제공격은백제측의호소가일리있다는반증이될수있다. 동시에북위 는이것을빌미로껄끄러웠던고구려에대한공격명분을삼을수있었다. 이러할가능성과기미를포착한고구려는백제에대한맹추격전을일단자 제한것으로보인다. 15) 더구나장수왕의한성공략은어디까지나응징 보 13) 곤지에대해서는李道學, 50 51 合輯, 1985, 13~14 쪽참조. 漢城末 熊津時代百濟王位繼承과王權의性格, 韓國史硏究 14) 李道學, 高句麗의洛東江流域進出과新羅 伽倻經營, 國學硏究 2, 1988 ;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연구, 2006, 406 쪽. 15) 고구려군이철수한이유와관련해북위와의정치적갈등을지적한견해로는다음이참고 된다. 盧泰敦, 고구려의한성지역병탄과그지배양태, 鄕土서울 66, 서울시사편찬위원 회, 2005, 177~180 쪽.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59 복전의성격을지녔기때문이었다. 그렇다고고구려군이점령한한성일원 에서철수했다고볼수는없다. 회군은 어디까지나장수왕의개선이지고 구려군의전면철수를뜻하는문자는아니었기때문이다. 요컨대고구려는백제가북위에게고구려공격을부추긴데다가북위 -물 길과의연계조짐까지포착하였다. 결국고구려로서는백제개로왕에대한 타격전을단행했다. 이타격전은백제- 북위- 물길사이의연결고리를자 르는성과를거두었고, 한강유역은고구려남진경영의橋頭堡가되었다. 또 이것은고구려가對百濟戰의절대우위를점하는일대轉機가되었던것이 다. 3. 웅진기한강유역지배여부에대한검토 (1) 백제의한강유역지배설의검토 고구려장수왕이회군한후백제는한강유역을회복한것일까? 다만왕 성이파괴된관계로불가피하게웅진성으로천도한것일까? 또그랬다면 한강이남일대는어느때고구려영역이된것일까? 한성을함락시킨후에 고구려군이회군했다는기록을취한다고해서모든의문이해소되는게아 니었다. 다음에서보듯이 삼국사기 에는웅진기백제왕의한성이나한산 일대를비롯하여지금의황해도방면에대한영역을유지한듯한기록이 따라붙고있다. 2년(476) 봄 2 월에大豆山城을수리하고漢北의民戶를이주시켰다 ( 문주왕 2 년조 ). 4 년(482) 가을 9월에靺鞨이漢山城을습격하여깨뜨리고 300 여家를사로잡아 돌아갔다 ( 동성왕 4 년조). 17 년(495) 가을 8 월에고구려가雉壤城을포위해오자왕은사신을신라에보내
60 제73호 구원을요청하였다. 신라왕이장군德智에게명령하여군사를거느리고구원하게 하니고구려군사가물러나돌아갔다 ( 동성왕 17 년조). 21 년(499) 여름에크게가물었다. 백성이굶주려서로잡아먹고, 도적이많이일어 났다. 신하들이창고를열어賑恤하여구제할것을청하였으나왕은듣지않았다. 漢山人으로고구려로도망해들어간자가 2 천명이었다 ( 동성왕 21 년조). 2 년(502) 겨울 11 월에군사를보내고구려의변경을쳤다( 무령왕 2 년조). 3 년(503) 가을 9 월에靺鞨이馬首柵을불태우고高木城으로나아가공격하였다. 왕은군사 5 천명을보내이를쳐서물리쳤다 ( 무령왕 3 년조). 6 년(506) 봄에전염병이크게돌았다. 3월에서 5월에이르기까지비가오지않아 내와못이말랐다. 백성이굶주리자창고를열어진휼하였다. 가을 7월에말갈이 쳐들어와서高木城을깨뜨리고 600 여명을죽이거나사로잡았다 ( 무령왕 6 년조). 7 년(507) 여름 5 월에高木城의남쪽에두개의목책을세웠고, 또長嶺城을축조 하여말갈에대비하였다. 겨울 10 월에고구려장수高老가말갈과더불어漢城을 공격하고자꾀하여橫岳 를물리쳤다 ( 무령왕 7 년조). 아래에진군하여주둔하였다. 왕은군사를보내싸워이 12 년(512) 가을 9 월에고구려가加弗城을습격하여빼앗고, 군사를옮겨圓山城을 깨뜨렸는데죽이거나약탈한것이매우많았다. 왕이용맹스러운기병 3천명을거 느리고葦川의북쪽에서싸웠다. 고구려사람들은왕의군사가적은것을보고만 만히여겨陣을치지않았다. 왕은기묘한계책을내어급히쳐서이를크게격파 하였다( 무령왕 12 년조). 21 년(521) 겨울 11 월에사신을양나라에보내조공하였다. 이보다앞서 [ 백제는 ] 고 구려에게격파당하여쇠약해진지가여러해였다. 이때에이르러표를올려 여러 차례고구려를깨뜨려비로소우호를통하였으며다시강한나라가되었다. 고일 컬었다( 무령왕 21 년조). 23 년(523) 봄 2 월에왕이漢城으로행차하여좌평因友와달솔沙烏등에게명령 을내려漢北州郡의백성으로나이 15 세이상을징발하여雙峴城을쌓게하였다. 3 월에漢城으로부터돌아왔다 ( 무령왕 23 년조).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61 가을 8 월에고구려군사가浿水에이르렀다. 왕은左將志忠에게명령하여步騎 1 만명을거느리고나아가싸우게하여이를물리쳤다 ( 성왕즉위년조 ). 7 년(529) 겨울 10 월에고구려왕興安이몸소군사를거느리고쳐들어와서북쪽 변경의穴城을함락하였다. 좌평燕謨에게명령하여步騎 3만명을거느리고 五谷原에서막아싸웠으나이기지못하였는데, 죽은자가 2 천여명이었다 ( 성왕 7 년조). 18 년(540) 가을 9 월에왕은장군燕會에게명령하여고구려의牛山城을공격하게 하였으나이기지못하였다 ( 성왕 18 년조). 26 년(548) 봄정월에고구려왕平成이濊와모의하여漢北의獨山城을공격하였 다. 왕은사신을신라에보내구원을요청하였다. 신라왕은장군朱珍에게명령하 여갑옷입은군사 3 천명을거느리고떠나게하였다. 주진이밤낮으로길을가서 독산성아래에이르러고구려군사와한번싸워크게격파하였다 ( 성왕 26 년조). 위의기사대로라면백제는 475 년이후에도여전히한성을비롯한한강유 역을변함없이보전한것이된다. 그런데이러한기사를취신하는견해에 는몇가지해결해야할문제점이있다. 우선웅진기백제가한강유역을지 배했다는기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보이지만정작고구려본기에는 보이지않거나축약해서기재되었다. 이는관련기사가백제측所傳에일 방적으로의존한것임을뜻한다. 사실고구려본기의장수왕대전후한기사 는누락이극심한관계로중국에대한조공기사나백제나신라측기사를 안배하고있는형편인점을상기해야한다. 16) 이와더불어한성기에쌍현 성을쌓고또수리한기사가보이는데 17) 무령왕 23년조에서는쌍현성을쌓 았다고했다. 18) 이사실은한성기와웅진기의쌍현성이각각다른곳에소 16) 李康來, 三國史記原典論, 1996, 91 쪽에서도 공유사건에대한중복기사를검토한 결과 적어도交戰 交聘 亡入을주도한삼국간공유사건에대한자료에있어고구 려측이저본으로기능한예는극히희소하다는것을알게되었다. 고평가한바있다. 17) 三國史記 권25 아신왕 7년조및개로왕 15 년조.
62 제73호 재했음을암시해준다. 더나아가이것은웅진기백제가한강유역을지배하 지않았음을반증할수도있다. 웅진기백제가한강유역을점유했다는 삼국사기 기사를일단취신한 후검토해본다. 그렇다면당시백제와고구려의국경선이한성기와큰변 화가없었던게된다. 그런데이무렵고구려는동해안을타고내려와호명 성을점령하고미질부까지진격해왔다. 주지하듯이호명성은경북청송이 고, 미질부는흥해를가리킨다. 그렇다고할때고구려와신라의경계선은 영일만일대까지내려온것이다. 삼국사기 를보면 가을 7월에고구려와 신라가薩水原에서싸웠다. 신라가이기지못하여물러나犬牙城을지키자 고구려가이를포위하였다. 왕은군사 3천명을보내구원하여포위를풀어 주었다. 19) 고했다. 494 년에고구려와신라의전장인살수원은충청북도 괴산군청천면일대로지목하는데이견이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백제 와고구려의경계선은한성기이래로전혀변화가없었던게된다. 고구려 가백제의왕도漢城을攻陷시키고왕까지捕殺했음에도영역확대가진행되 지않았다. 혹자는고구려는영토확보에관심이없었기때문이라고하는데, 그렇다면왜그것이백제영역에만국한되었는지해명되어야만할것이다. 저명한고구려의정복군주인광개토왕의시호에 廣開土境 이라는영토 개척이자랑스럽게담겨있다. 더구나광개토왕이점령한성의숫자 64개 城은오로지백제로부터빼앗은성의숫자에국한되었다는견해가설득력 을얻고있지않은가? 이사실은고구려의백제영역진출이지닌의미가 여타지역보다달리지대했음을반증하고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고구 려의남부전선가운데동부와중부는대세에부합되지만백제와관련된서 부의경우는전혀영토진척이없다. 이는고구려영역상에서극심한左 右 불균형을뜻한다. 그럼에도논자들가운데는 495 년( 동성왕 17) 에고구려 18) 三國史記 권26 무령왕 23 년조. 19) 三國史記 권26 동성왕 16 년조.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63 군이백제의치양성을공격한전투와관련해신라의구원병이동원된사실 을언급하였다. 그런데신라의援兵이멀리남쪽을우회해서이곳까지왔 다고보기는어렵다고간주해치양성을황해도배천이아니라강원도원주 로지목했다. 20) 백제가웅진기에도여전히한강유역을지배한것으로간주 하면서도치양성위치는부정하고있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自家撞着的 인서술이아닐수없다. 더구나이때原州는백제영역이아니라고구려의 別都인平原城으로서비중이큰都會였다. 21) 따라서치양성을원주일대로 비정하는견해는따르기어렵다. 이와관련해고구려문자명왕이 7월에남 쪽으로순수하여바다에제사지내고온그다음달에백제의치양성을공 격한 22) 기사가주목된다. 치양성이배천이라면황해도일원도장악하지못 한고구려왕이바다와접한남부영역을순수한다는자체가자연스럽지않 다. 이사실은고구려의영역기사와백제의한성일원보유기사가서로 부딪치고있음을반증한다. 어느한쪽의사료가적합하지않음을뜻하는 것이다. 본고에서일관되게말하고있는백제측사료의문제점을지적하지 않을수없다. 이와더불어웅진성으로천도한지 5개월만인 476 년 2월에한북의민호들 을충청남도연기나아산등지로그소재지가비정되는대두산성을수리해 서대거이주시킨기사에대한해석이다. 23) 이것을가리켜 이는당시백제 의북쪽경계가한강이라는자연적인방어선을경계로일단남쪽으로후퇴 20) 김병남, 百濟熊津時代의北方領域, 白山學報 64, 2002, 149 쪽. 21) 李道學, 永樂 6 年廣開土王의南征과國原城, 손보기박사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98 ;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연구, 2006, 378 쪽 ; 弓裔의北原京占領과그意義, 東國史學 43, 2007, 212~213 쪽. 22) 三國史記 권19 문자명왕 4 년조. 23) 李道學, 앞의논문, 1985, 15쪽註 59에의한다면해구의반란이진압된후그餘黨이사 민된斗谷이예산군두촌면이나신양면일원인만큼, 그와근거리인아산을대두산성소 재지로지목하기는어렵다.
64 제73호 하고있던사실을말해주고있다. 24) 고했다. 즉고구려의침입을막기어 려운한강이북지역민호들을남쪽의안전지대로피난시킨것으로해석 한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上웅진기의백제와고구려의전장은한강 이북선에만그친게아니다. 그보다훨씬북쪽인예성강유역의황해도일 원에서전개되고있다. 가령동성왕 17년 무령왕 23년 성왕 7 년조가著 例가된다. 삼국사기 기사대로라면한성함락후고구려군은퇴각했고, 그후전장은예성강유역에형성되었다. 그럼에도천도한新首都경영과 관련한인적자원충당목적이아니라면, 한북의주민들을수도와무관한대 두산성으로까지 徙民시킬이유가없다. 백제가한강유역을여전히지배하 고있었다면오히려漢南의민호를漢北으로徙民시켜고구려와의전쟁으 로피폐해진호구를충원했어야마땅하다. 그러나그정반대인상황을상 정시키는기사가나온것이다. 더구나대두산성은 가을 7 월에湯井城을쌓 고大豆城의민가를나누어살게했다. 25) 는기사에보듯이충청남도溫陽 을가리키는湯井城인근에소재한城임이분명하다. 이러한지리적추세 에비추어볼때대두산성은웅진기백제의 北邊에소재했다고할때26) 지 극히자연스러운것이다. 백제가한강유역에서이주해온難民들을北邊에 배치한것이분명하다. 따라서이러한정황에비추어볼때앞의견해는설 득력이떨어진다. 오히려위의기사는한강유역방어선이무너졌음을뜻하 는결정적인사료가뜻하지않게노출된것으로보인다. 그밖에고구려가 서해상에서강한해상통제를한관계로 476 년( 문주왕 2) 3 월에劉宋에파 견한백제선박이돌아올수밖에없었다. 27) 한성기에없었던고구려군의 해상통제는고구려가한강유역을비롯한서해연안을장악했기에가능한 24) 金榮官, 百濟의熊津遷都背景과漢城經營, 忠北史學 11 12 合輯, 2000, 79~82 쪽. 25) 三國史記 권23 온조왕 36 년조. 26) 양기석, 앞의논문, 2008, 81 쪽. 27) 三國史記 권26 문주왕 2 년조.
百濟熊津期漢江流域支配問題와그에대한認識 65 일이라고보아야자연스럽다. (2) 일시적인한강유역상실설의검토 1) 529 년상실설 백제의한강유역상실을인정하되성왕대의일시적인기간으로국한시킨 견해가일찍부터제기된바있다. 28) 이러한선상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게재된고구려안장왕과한씨미녀가만난설화를근거로안장왕대 (519~530) 에야고구려가한강이북에진출했다는주장이제기되었다. 이에 덧붙여한씨미녀는고구려군과내통하였고嚮導역할을하였던것으로추 정하였다. 여기서한걸음나아가 529 년( 안장왕 11) 에고구려군이五谷原 전투에서백제군을격파한사실을주목했다. 이전투에승리함으로써고구 려는한강유역에진출할수있었다는것이다. 이러한맥락에서볼때성왕 대인 551 년에회복한 6군의땅은경기도고양일대를포함한지역이라고 했다. 29) 확실히주목할만한견해인것은분명하다. 위와같은 立論의근거인한씨미녀설화의원형은 삼국사기 지리지이 다. 즉 왕봉현 : 皆伯이라고도한다. 한씨미녀가안장왕을맞이한지역이므 로왕봉으로불렀다. 達乙省縣 : 한씨미녀가높은산마루에서봉화를올 리고안장왕을맞이한곳인고로뒷날高烽이라이름하였다. 30) 고했다. 그 런데 삼국사기 에는한씨미녀가고구려군과내통하였고嚮導역할을했다 는이야기는보이지않는다. 다만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에 해상잡 록 을인용한한씨미녀이야기가수록되었지만사료적신빙성이검증되지 28) 丁若鏞, 漢城考, 我邦疆域考. 29) 金榮官, 百濟의熊津遷都背景과漢城經營, 忠北史學 11 12 合輯, 2000, 79~82 쪽. 30) 三國史記 권37 地理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