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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학발달06-7/8/9장

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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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문제1급

더바이어102호 01~09


내지(교사용) 4-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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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토지매매명문을 대상으로 한 제주지역 토지매매에 관한 연구는 자료를 발 굴 소개하는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매매명문의 기재방식과 내용상의 변화를 시대별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국문요약 로 살피지 않았다. 아울러 매매에 동원되는 軳 요소에 대한 구체적 성격 규명도 이루 어지지 않았다. 이에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제주지역에서 작성된 토지매 매명문 566건을 대상으로 명문의 형식 및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검토하고, 이를 바탕 으로 제주지역 토지매매의 실체를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다. 제주지역 토지매매명문은 양식적인 면에서는 일반적으로 명문을 구성하는 형식적 인 요소들은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일부 특이점을 갖고 있다. 전답소재지 표시인 경우 천자문 순서에 따른 지번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제주도에서 5세기 말 이후 양전이 실시되지 않음으로 인해 归詚를 기록하는 양안이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 인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 제주도는 전답 소재지의 마을명과, 위치 그에 따른 들판명 혹은 들판명만을 표기하고 있다. 아울러 지번표시가 없는데서 야기되는 혼란을 막기 위해 동서남북의 사방경계 표시는 시기를 막론하고 명문에 반드시 등장하고 있다. 육지지역 매매명문에서 6세기 구체적이던 매도사유가 7세기 이후 虬髞昻藯 나 赼礣劆勠 로 정형화되는 것과 달리 제주도는 여전히 상세하게 기술되는 경향을 보 인다. 매매수단에 있어서도 제주도는 9세기 이전까지 동전이 명문상에 등장하지 않는다. 앞 시기의 매매활성화 정도를 방증해 주는 欧概踓 첨부 여부 역시 육지지역에서 는 7세기 필수적인 기재 사항이 되지만, 제주도는 7세기 74건의 문서 중 3건에 불 과할 정도로 언급되지 않은 경향을 띤다. 이는 6세기까지도 제주 지역인 경우는 토 지매매가 활성화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9세기의 두드러진 변화로는 몇몇 문건에서 전답소재 마을의 이름이 새겨진 詚渔 (嬑绛)를 날인하거나 마을의 轡瀌饲 혹은 鎭竞을 증인으로 세운 사례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穸概踓 거래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일부 몇몇 토지소유 관념이 강 한 매수자들이 확실한 공신력 확보를 위해 마을 내 권위 있는 자들을 내세워 증명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87

藏書閣 제주지역 토지매매는 상시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월에서 이듬해 3월 사이에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가장 많이 매매가 일어난 달은 월이다. 토지의 매도사유로는 邳嗵, 赼礣詐, 흉년, 鑿刅, 가난, 장례비 말 부세 마련 등이 있으며, 이 중 邳嗵이 가장 많은 매도사유를 차지한다. 매도인은 양반, 양인, 노비로 나누어지며 가장 많이 토지매도에 나서고 있는 것은 양인층이다. 노비가 상전을 대신하는 사례는 이 글에서 분석하는 매매명문 566건 중 9건에 불과하여 노비를 통한 대리매매가 제주도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던 것 으로 여겨진다. 매도자가 여성인 경우는 566건 중 7건으로 %를 차지하는데, 7 세기 이후 육지지역에서 여성매주가 등장하는 사례가 극히 적다는 연구결과에 비하 면 제주도는 여성이 매매에 참여하는 경향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매수자 역시 제주도에서는 양인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고, 매도-매수인 간 의 신분 구성 역시 양인-양인이 차지하는 사례가 가장 많아 제주도에서는 양인 간의 토지매매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토지거래 시 매물은 礫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논은 물 확보가 용이하여 논농사가 가능한 일부지역의 것이 거래되었다. 거래 규모는 대체적으로 영세하며 ~ 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매물의 취득경위는 상속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조상전래를 비롯하여 嶶钅, 瘱濈, 絑 瘱濈, 废徱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상속 외에도 매득, 경작, 상환 등을 통해 취 득되었다. 제주지역 매매명문에 등장하는 매매 수단은 크게 실물화폐인 懾欣, 縻癤, 동물과 금속화폐인 霝概, 기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거래수단은 懾欣이며, 육지 에서 토지매매 시 거래수단으로 霝概이 일반화되는 8세기 이후에도 제주지역은 懾 欣을 이용한 거래가 8 9세기까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동물은 癖 鶧가 주로 사용되었고, 盒와 眥가 사용된 예도 있다. 縻癤은 肚, 縻, 窩癚, 窩縻, 忡縻, 髗縻, 崥, 崢ꊠ 등이 사용되었다. 기타는 窩癤(髇ꉺ窩), 豞欈, 嗄崥, 歺歋 등이 쓰였다. 제주도에서 霝概의 사용은 9세기 후반에야 본격화 되었다. 이처럼 霝概 사용이 육지보다 7여년 정도 늦어지는 것은 제주도 내에서 霝概 자체가 頿鐛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霝概 유통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尯懽가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으 로 보았다. 아울러 육지에서는 동전 유통이 활성화 되면서 조세의 闌脈闊도 증가하였 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邝鶧, ꋌ癖, 각종 특산물을 현물로 징수하여 중앙에 상납하는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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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書閣 Ⅰ. 머리말 농업사회였던 조선시대에 토지는 기본적인 생산수단이자 삶의 기반이었으며, 많은 토지소유는 忇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가능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자 했고 조상이 물려주는 땅을 그대로 상속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馆岹과 邲排을 통해 그들의 전답규모를 늘려갔다. 개간에 노비노동력을 이용해 주로 양반층이 참여했다면 매득은 7세기 이후 嬚嬫 郞邲가 활성화 되면서 양반뿐만 아니라 양인, 천민을 포함한 모든 신분층이 참여하 였고,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양의 토지 매매관련 문서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제주 역시 몇 개 마을 단위로 남아있는 昱聈刨蝄를 제외하고 개개 집안별로 발굴 된 고문서 중에서는 토지매매명문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제주도 내 8개 집안과 제주대학교박물관 및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총 648 건을 소장하고 있다.) 제주지역의 토지매매명문을 활용한 연구는 987년 闌橵挓이 犦扮闇 고문서를 소 개하는 중에 토지매매명문도 함께 정리하여 발표한 사례가 있으나) 주로 黓樇霦에 의해 발굴 소개되었다. 고창석은 993년 刨概闇 黓嬣击 씨 소장 礫祎概踓에 관한 연 구를 발표한 이래 년까지 서귀포시와 蘅남제주군 및 蘅북제주군에서 발굴된 토 지매매명문을 정리 분석하였다.3) 고창석의 연구는 제주지역 토지매매에 관한 연구 가 啣甜한 상황에서 매매의 실질적 증거가 되는 토지매매명문을 蔦蝄하고 그 내용을 ) 제주도 토지매매명문의 소장처에 따른 현황을 각각 살펴보면 중문동 고재일 씨가 78건, 의귀리 김만일 씨가 5 건, 장전리 강태복 씨가 5건, 금악리 수산강 씨가 56건, 하원리 강성택 씨가 8건, 대포리 이지환 씨가 35건, 온 평리 장대성 씨가 5건, 곽지리 김씨가 73건, 제주대학교박물관 58건, 민속자연사박물관 9건이다. ) 闌橵挓, 犦扮闇 域概櫳 籊繱, 萸莀概圑 6,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87. 이 글에서 김지홍은 986년 제주 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실시한 현지학술조사 과정 중 온평리 장대성의 집에서 고문서를 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3) 黓樇霦에 의한 제주지역 토지매매에 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고창석, 欘龩掇欚 珚懙礫祎概踓의 籊繱, 萸 莀概圑 3,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93; 欘龩掇欚 珚懙鑎 嬚嬫郞邲의 忡皻, 萸莀概圑 6,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96; 欘龩掇欚 珚懙赺園嬫寚 礫祎概踓의 籊繱, 萸莀概圑 9,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98; 欘龩掇欚 珚懙嬫榴 礫祎郞邲概踓의 籊繱(Ⅰ), 萸莀概圑,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99; 欘龩掇 欚 珚懙嬫榴 礫祎郞邲概踓의 籊繱 (Ⅱ), 萸莀概圑,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이 연구성과들을 종합하여 珚懙鑎域概櫳籊繱 (刑殒, )로 집대성하였다. 이후의 연구결과로는 9刑胻 珚懙 嬫榴의 嬚嬫郞邲忡敆-애월읍 곽지리 토지문서를 중심으로 ( 萸莀概圑,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가 있다. 9

이 글은 제주지역 토지매매명문의 양식 검토를 통해 시기에 따른 변화양상을 추적 하고 지역적 특성이 명문양식에도 반영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명문기재 요소이자 토지 거래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매도-매수인, 매매 사유, 매물 및 매 물의 취득경위, 매매수단 등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수행함으로써 제주도 토지 매매의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소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실상 및 경향성도 파악해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육지 지역 토지매매와의 차이점, 제 주지역 매매명문에 반영된 제주도만의 사회경제적 요소가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생 각된다. 제주도는 고려 숙종 년(5) 고려의 군현 중 하나로 편입된 이래 줄곧 중앙 정 부의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중앙의 정 책 寵躺分에 있었다. 그러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 으로 크게는 제도권 안에 있으면서도 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여러 특이성을 보여 왔다. 따라서 제주도만이 갖는 지역적 특이성이 토지매매에도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 는 것도 이 글의 목적 중의 하나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이미 고창석이 소개한 7개 가문(刨概闇 黓嬣击瀊徱, 豞邯闇 闌 蠧峴掇彦徱, 饲礫闇 巗烫綊瀊徱, 勅悮闇 瀯恬巗瀊徱, 炮驝闇 巗昋玟瀊徱, 崢煡闇 歉 橵畠瀊徱, 铨椪闇 闌瀊徱)의 토지매매명문과 김지홍이 소개한 犦扮闇 劼堇挰瀊徱의 매매명문, 제주대학교박물관 및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매매명문 등 제주지역에서 발견된 토지매매명문 중에서 竳柖 鑿鏻 문서를 제외하고, 7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토지매매문서 566건을 고찰 대상으로 삼았다.4) 제주도는 태종 6년(46) 珚懙癢 崢魗舞 槇莤舞의 刄钌 체제가 형성된5) 이래 세기 초반까지 행정구역의 변화가 없었고, 토지매매가 제주라는 단일지역에 국한 된다는 점에서 토지매매 경향성을 파악하는데 용이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4) 6세기 문서도 3건 존재하므로 이 글에서는 분석대상에 포함시킨다. 5) 조선시대 제주지방은 5년(고려 숙종 )에 萸莀铜이 설치된 후 祇鶑従지역인 莀懙癢의 통제를 받다가 95년 (고려 충렬왕 ) 珚懙癢이 설치되고, 46년(태종 6)에 崢魗舞 槇莤舞이 신설됨으로써 刄钌체제를 형성하였다. 김동전, 欘龩樽勞 珚懙鑎의 铜舞淆鐛와 椪镈黏嘱, 珚懙鑎埭籊繱 噰嘅詚, 제주도사연구회, 99. 9

藏書閣 Ⅱ. 嬚嬫郞邲 자료의 현황 조선후기 제주지역 토지매매를 연구하는데 있어 郞邲樉概을 분석대상으로 삼는 것 은 토지관련 고문서 중에 수적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매매명문 그 자체 가 갖는 자료적 가치 때문이다. 매매명문은 郞邲 당사자 간의 합의하에 轄劵과 罁寲을 세워 직접 작성한 邜礞轄嘳 이므로 내용의 신빙성이 높다. 아울러 조선시대 토지매매명문에는 매매가격과 매매당 사자 및 중개인, 매매 조건 등을 비롯하여 현대의 매매계약서 刅에서는 볼 수 없는 매 도사유와 그 매물의 취득경위, 매매자의 신분 등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현상을 해명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매매 시 작성하는 榫概踓와 함께 그 매매물건과 관련된 이전의 蘅概踓들을 모두 邲埒劵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한 사 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6) 이러한 매매명문의 埭榔穿 장점을 염두에 두고 자료 발굴지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조선시대 제주의 행정구획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제주는 46년 珚懙 癢 崢魗舞 槇莤舞이라는 癢 舞의 刄钌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체제는 시기에 따라 刄钌의 경계 및 행정구역의 범위가 다소 변동되기도 하지만, 94년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여 년간 유지되었다. 제주 刄钌의 상황을 세종실록 嬫码躇(전라도 제주목조)를 바탕으로 주요사항을 정리해 보면 <표 >과 같다. <표 >에 따르면 수령으로 제주목에는 潞3墼의 癢卺, 대 정현과 정의현에는 각각 掙6墼의 舞竞이 파견되었다. 이외 관원으로 제주목에는 목 사의 보좌격인 嘟従과 향교의 업무를 총괄하는 楉枃, 법률을 관장하는 溝掆 및 약제 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忤觠7) 등이 파견되고 있다. 그러나 대정 정의현에는 향교 6) 歉嬣焔, 欘龩刨欚 礫祎郞邲籊繱, 집문당, 3, 4~5쪽. 7) 忤觠 은 전의감과 혜민서 소속 관리 가운데 진상 약재를 溝墼 납입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되었던 의원들을 말한 다. 전국에서 의술에 조예가 있는 자들을 취재하거나 의과에 합격하여 전의감 혜민서 등에서 활동하는 의원들 가운데 년에 두 차례(혹은 네 차례) 자체 시험을 거쳐 점수가 높은 자는 해당 관청의 絺従으로 승진시키고 그 다음 성적을 받은 자들이 忤觠 으로 지방에 보내졌다. 膎嬆崢啳 에 의하면 경기도에 인, 경상도 3인, 전라도 3인, 황해도 인, 강원도 인, 함경도 3인, 평안도 인의 심약을 두도록 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후기까지 크게 변하 지 않았다. 闌玏, 6세기 후반 劧 锐의 의료환경: 笄懑槠踓 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제64집, 대구사학회,, 3쪽. 9

埞는 대정현의 수가 더 많다. 표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주요사항 비교9)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徃募 癢卺(潞3墼) 舞竞(掙6墼) 舞竞(掙6墼) 従壜 嘟従(掙5墼), 楉枃(掙6墼), 溝掆(掙9墼), 忤觠(掙9墼) 踎怉(掙9墼) 踎怉(掙9墼) 昱埞 5,7昱, 8,34埞,357昱, 8,5埞 685昱,,73埞 鋈凼 鶧鋈(843堈), 潠鋈(,3堈) 鶧鋈(堈), 潠鋈(468堈) 鶧鋈(6堈), 潠鋈(54堈) 岹礫 礫 3,997腋, 祎 3腋 礫,7腋, 祎 85腋 礫 3,8腋 嬚巎 黓 汼 崦 懡堇 懡堇 鶧圴 3,35圴,9圴 3,35圴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의 업무를 담당하는 踎怉8)만 나타나고 있다. 昱埞楳는 昱는 제주목이 가장 많지만, 이 글과 관련하여 <표 >에서 주목할 사항은 岹礫腋楳이다. 제주목은 3,997腋, 대 정현이,7腋, 정의현은 3,8腋이다. 이 중 祎은 정의현에는 전혀 없고, 제주목에 는 3腋, 대정현은 85腋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 자료가 5세기 중반 제주지역의 토지 상황을 말해준다면 8세기 말에 발간된 珚懙钌躇 )에 기재된 刄钌의 礫腋楳를 따져보면 제주목은 3,99腋 9邛 9歚, 대정 현은,8腋 89邛 3歚, 정의현은 3,383腋 3邛 3歚이다. 논은 제주목이 5腋 3邛 9歚, 대정현이 93腋 45邛 歚, 정의현이 6腋 57邛이다. 5세기 중반에서 8세기 말 에 이르는 기간 동안 礫의 결수는 거의 변함이 없는 반면, 논은 제주목 9腋 3邛 9 歚, 대정현 8腋 45邛 歚, 정의현 6腋 57邛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8) 조선초기 유교이념의 보급과 지방민의 교육 교화를 위해 군현마다 향교가 세위지고 교관이 파견되었다. 膎嬆崢 啳 에 의하면 抗 癢 崢铸轲抗에는 掙6墼인 楉枃, 铜과 舞에는 掙9墼의 踎怉등 모두 39명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초 이후 향교교육이 점차 쇠퇴하고 楉枃 踎怉의 지위도 낮아지게 되자 7세기 이후에는 교관 을 파견하지 않게 되었다. 怴疔囄, 欘龩掇欚 锐氜籊繱, 일조각, 99, 5~53쪽. <표 >에서 踎怉의 존재는 조선초기 세종 때의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조선시대 제주도 행정구역 간의 비교를 위 해 명시한 것이며, 조선 전 시기 동안 제주도 향교에 훈도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9) 위 표는 김동전, 8 9刑胻 珚懙鑎의 銦嘁淆鐛 籊繱-崢魗舞昱聈刨蝄를 중심으로, 湻嬆崢彳氜 坕峦彳午軑概, 995, 표(3쪽)를 재인용하였다. ) 珚懙钌躇 는 78~789년에 간행된 관찬읍지이며 孅闇, 寉灛, 恬懘, 従葲, 巎瀊, 癢尯, 渎动, 胱胯, 槬礫, 瀯礫, 劵 癤, 孂縀 등의 항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钌躇 제주도편, 아세아문화사, 983). 93

藏書閣 밭농사 지역인 제주도에서 3세기가 지나는 기간 동안에도 礫의 腋楳에 거의 변함 이 없었던 것은 제주도가 鶧의 생산지로 부각되면서 중산간 지역의 대부분을 목장으 로 만들고 개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조선전기에는 말이 鹖 鶧 및 昫鶧 그리고 樉나라와의 외교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欘拲에서는 고려시대의 목장을 재정비하거나 신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제주 도의 해안지대에 산재해 있던 목장들을 정비하여 중산간 지대로 이동시키면서 이 지 대에서 행해지고 있던 농경지 개간은 금지되었다. 아울러 중산간 지대에는 평균 둘레 가 5리가 되는 従痚癢尯인 圼昻尯)(개의 癢尯 癢圻)이 형성되어 9세기 중반 제주도 부속도서의 목장 개간이 허용되고 이후 중산간 목장지 내에서도 瑦礫이 허용 되기까지 癢尯嬫 개간은 금지되었던 것이다.3)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땅에 대한 개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표 >를 통해 토지매매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활발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는 토지매매 활 성화의 직접적 증거인 매매명문의 현황을 刄钌 행정구역에 따라 시기별로 정리한 것 이며, <도 >은 <표 >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매매명문의 분포지역을 지도상에 나타낸 것이다. 표 제주도 토지매매명문의 시기별, 지역별 현황4) 구분 珚懙癢 6세기 7세기 8세기 9세기 계 饲礫闇 巗烫綊瀊徱 8 8 (%) 勅悮闇 瀯恬巗瀊 徒徱 6 4 53(9%) ) 조선초기 樉은 국내외적인 불안한 정세에 대비하기 위하여 정기적인 潭邝鶧와 挊扯鶧 외에도 심하게 掰鶧를 요 구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국내 수요보다 명에 말을 증여 또는 樎柖(우리 말과 명의 비단 포목과 교환)하는 일 에 진력하였고, 이때 교역된 말인 樎柖鶧(功樎鶧)는 제주목장이 그 주요 부분을 담당하였다. 남도영, 제주마의 용도, 珚懙鑎 癢尯埭, 한국마사회박물관,. ) 한라산 북쪽지역인 제주목에는 소장에서 6소장까지, 한라산 남쪽지역인 대정현에는 7소장과 8소장 개의 소 장이 입지하였으며, 정의현에는 9소장과 소장이 분포하였다. 이러한 목장분포의 틀은 관영목장이 폐장된 9세 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송성대 강만익, 조선시대 제주도 관영목장의 범위와 경관, 문화역사지리 5, 한국문화 역사지리학회,, 47쪽. 3) 송성대 강만익,, 위의 논문, 48쪽. 4) 장전리, 금악리, 중문동, 하원동, 대포리, 의귀리의 토지매매명문 전문은 珚懙鑎域概櫳籊繱 (고창석, 세림, ) 에 실려 있으며, 곽지리 김씨가의 문기들은 9세기 제주지방의 토지매매실태-애월읍 곽지리 토지문서를 중심으 로 (고창석, 탐라문화,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에 실려 있다. 온평리 토지매매명문은 犦扮闇域 概櫳籊繱 (闌橵挓, 萸莀概圑 6,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87)에 본문이 게재되어 있다. 이들 토지매매명 문의 원본은 현재까지 각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영인본으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94

崢魗舞 槇莤舞 铨椪闇 闌瀊徱 7 7(3%) 소 계 3 39 96 8 46(43%) 刨概闇 黓嬣击瀊徱 7 55 9 7(3%) 炮驝闇 巗昋玟瀊徱 5 6(5%) 崢煡闇 歉橵畠瀊徱 4 8 3(6%) 소 계 7 8 4 9(4%) 豞邯闇 闌蠧鞫 掇彦徱 8 3 4(7%) 犦扮闇 挰崢昋瀊徱 35 35(6%) 8 38 77(3%) 기 타 소 계 77 4(%) 계 3 74(3%) 4(4%) 65(47%) 566(%)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珚懙癢 도 제주도 토지매매명문 분포 지역5) <표 >에 따르면 제주목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는 총 46건으로 장전리, 금악리, 곽 지리 지역문서가 이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대정 정의현과는 달리 6세기부터 문서가 나오기 시작하며 7~9세기 문서도 전체 제주도 토지매매문서 중 43%로 가장 많은 수적 비중을 차지한다. 시기적으로 대정 정의현에 비해 앞선 문서가 존재하고 수적으 로도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지역에서 토지매매가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고 활발했 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볼 수 있다. 5) <도 >의 제주도 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행정구역 구분은 <대동여지도>를 참고하였다. 95

藏書閣 전형적 중산간 농촌마을인 장전리의 매매명문6)은 애월읍 장전리에 거주하는 巗烫 綊 씨 집안의 문건으로 6세기에서 9세기까지 문서가 모두 존재하여 시대의 변화에 따른 토지매매의 양상을 파악하기 용이하다. 아울러 집안내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犑昱埞(6건)와 嘁邜踓(6건)7)도 함께 존재한다. 금악리 문서는 한림읍 금 악리 瀯恬巗瀊徱의 문서8)로, 후손 중에 제주에서는 양반층에 해당하는 锐氜와 彳 寽의 踎怉9)를 지낸 瘱彋가 있어 이들 부자 때의 토지매매명문이 비교적 많이 나타 나는 특징을 보인다. 곽지리 문서는 이 문서를 선행 연구한 고창석에 의해 곽지리에 거주했던 闌瀊徱의 문서로 파악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모두 8년 이후의 문 건들이다. 대정현 관내에 속하는 중문 하원 대포리 문서들은 대부분 7~8세기에 작성된 문건들이다. 중문동 문서는 중문동 거주 黓嬣击 씨 가의 문서이며 토지매매명문과 함 께 분재기도 존재한다. 하원동 문서는 강씨 가문인 巗昋玟 씨 댁의 문서이며, 대포리 문서는 이씨가인 歉橵畠 씨 댁의 문서로써 이 두 집안에는 昱埞妩彋도 남아있다. 정의현에 속하는 문건으로는 의귀리와 온평리의 것이 있다. 의귀리 문건은 남원읍 의귀리와 태흥리 등을 중심으로 정의현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내내 제주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 위세가 높았던 경주김씨가의 매매명문이다. 이 집안 소 장 자료로는 토지명문 외에도 호구단자와 준호구, 교지 등도 남아있다.) 이들 문서는 주로 7~8세기 것이 중심이며 경주김씨 가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비해 토지문 기가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는 것은 咮厁 보존과정에서의 熃崬 탓도 있겠으나 이 집안 忇의 주요한 기반이 癖鶧사육에서 연유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6) 장전리 출토 토지매매명문에 관한 선행연구는 고창석, 998, 앞의 논문이 있다. 7) 강태복 씨 집안 분재기에 관한 연구로는 고창석, 조선후기 제주지방 분재문기의 연구 (Ⅰ) ( 탐라문화 8, 제주 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97)과 문숙자의 조선후기 제주지역의 재산상속과 嵄紻관행-嘁邜踓 분석을 중심으 로 ( 埭彳籊繱, 한국사학회, 6)가 있다. 8) 금악리 수산강씨 집안 토지매매명문 및 분재기에 관한 연구는 고창석, 조선후기 제주지방 전답매매문기의 연구 (Ⅰ) ( 탐라문화,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999)와 고창석, 7 8세기 제주지방 분재문기의 연구 ( 고문 서연구 6 7, 한국고문서학회, )가 있다. 9) 조선시대 제주의 직역에 따른 신분별 분류에 관해서는 김동전, 欘龩掇欚 珚懙鑎 半瀌의 銦嘁淆鐛와 그 枣緶 ( 嬆埭鴣軑埝 65, 嬆埭臣艽巏壜櫾, 995)가 있다. ) 고창석,, 앞의 논문. 곽지리 출토 토지매매명문인 경우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탐라기록관리소에 원본이 보 관되어 있으며, 영인되지는 않았다. ) 조성윤, 조선 후기 제주도 지배세력에 관한 연구, 제주도사연구 집, 제주도사연구회, 99. ) 경주김씨 가문의 토지매매 실태에 대해서는 뒷절에서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96

토지매매명문 외에도 昱埞妩彋, 犑昱埞, 嘁邜踓들이 존재한다. <표 >에서 기타에 해당하는 문서는 제주대학교박물관과 민속자연사박물관4)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이다. 이들 토지매매명문은 8~9세기의 문건들이며, 문서들 간의 유기적 관련성이 적은데다 본래의 소장처 파악이 쉽지 않아 거래지역을 확정하기는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온평리 문서3)는 9세기 문건들로 온평리 거주 劼堇 挰瀊徱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어렵다. 그러나 제주지역 내 토지매매의 경향을 파악하는 데는 큰 문제가 따르지 않 으므로 분석대상 자료에 포함시켰다. 이상 <표 >를 통해 살펴본 토지매매명문들은 기타에 포함된 자료를 제외하고 모 두 소장처와 거래 지역이 확실하다. 아울러 시기의 근접성으로 인해 9세기 문건이 상당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7, 8, 9세기에 걸쳐 제주 刄钌지역 문서가 비교적 고 루 분포하므로 제주지역 토지매매의 경향성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이들 명문상의 실거래가 제주지역 내에 국한된다는 점도 제주지역 토지매매 를 연구하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Ⅲ. 郞邲樉概의 양식과 기재 요소. 賣買明文의 양식 기존 토지매매명문에 관한 연구 성과에 의하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 말부터 이미 일정한 양식에 의거하여 매매명문이 기록되고 있음을 밝히 고 있다.5) 제주지역 토지매매명문의 양식 역시 일반적인 토지매매명문의 양식에서 3) 온평리 문서에 관한 발굴 및 이에 관한 연구는 김지홍, 987, 앞의 논문이 있다. 인동장씨가는 온평리에 6대째 살고 있으며 온평리 이주전에는 蘅북제주군 조선읍 조천리에 거주하였다. 4) 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지매매명문은 域概櫳髁昋 (제주대학교박물관, )에 원본 사진과 본문이 실려 있 으며, 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문서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연구 발표되지 않았다. 박물관 소장 문서들은 박물 관 자료 수집 과정에서 매매상을 통해 유상 구입한 문서들로 매매과정에서 여러 집안의 문서가 섞이고 매매 성 격상 출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5) 歉嬣焔, 3, 앞의 책, 68쪽. 이재수는 경북지방과 해남윤씨가의 토지매매명문을 중심으로 조선중기 이들 지역 의 전답매매 양상을 검토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두 지역간의 차이를 파악하였다. 97

藏書閣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제주도는 군현구조 및 부세수취, 생활풍습 면에서 육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 왔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이 매매명문에도 일부분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매매 명문 중 가장 오래된 명문을 중심으로 제주도 매매명문의 양식을 검토하고,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요소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료 > ① 蠧櫁圼劏扯凼加 潞欃劇圼刄槠 ② 巗艷礲詐樉概 埮樉概劆澰 ③ 赼礣昻藯勠 ④ 絑刅焼厁礫 ⑤ 堌埥壜 抦堃 ⑥ 肚杇坂蠸埥 ⑦ 嫖渔澰 歬嵯懣鐞礫 坒怊釪 赺堇恬 園嵯变榟礫 埅欣湆槣壜 垾抦扲 肚蒁榒啦坂 蠸埥 嫖渔澰 歬園堇恬 坒癢尯翄 赺崢殒怊釪 嫖渔埿埿嘁樉 瘭嬣礫抦 ⑧ 哴欧澰 蒁綹骿癖峴鶑 埅髗縻邮篮 嗁踃杢刅 ⑨ 堇劵詐 瀳 瀳椹郞瘭剉篞 槠掇虪刨 彋彦刨 髗軂横垶罄 曼潟概踓 塅従鎣潞瘭剉劆 ⑩ 礫制 嵯 埧坤块(懡晆忳) ⑪ 轄劵 踬瀳砖(晆灵) 轄劵 歉刑遥(晆灵) ⑫ 罁寲 概旄掲(晆灵) <자료 >은 587년 월 3일 嵯 埧坤块이 巗艷礲에게 긴요하게 쓸데가 있어 絑刅 咮厁의 밭을 판다는 내용으로 장전리 강태복 씨 소장 문건 중 하나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제주도 매매명문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문서이며, 제주도 매매명문에 들어 있는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6)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①~⑫까지 단락을 나 누었다. ①에서 ④까지의 항목은 매매연월일, 邲椱萀, 매도사유, 매물의 취득경위를 나타내 는 부분으로 육지의 매매명문과 동일한 형식이다. 6) 제주도 매매명문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양식(요소)을 바탕으로 시기적 혹은 지역적으로 사람에 따라서 그 쓰는 방법을 달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98

归詚, 嬫祥, 위치 등의 소재지를 표시했다면7) 제주도 매매명문에 있어서 천자문 순 서에 따른 지번 표시는 7세기 매매명문 건에서만 확인된다.8) 제주에서 천자문 순서의 지번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 기 위해 성종 4년(493) 6월 3일 전라도 闊礫懜忚卺 欯径搢의 보고를 살펴보겠다.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⑤의 전답소재지 표시인 경우 육지지역이 일반적으로 천자문 순서에 따라 전답의 전라도 양전 순찰사 박안성이 와서 아뢰기를, 이에 앞서 양전할 때 제주 등 세 고 을은 모두 측량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 를 아울러 측량하도록 하라 하였다.9) 위 기사를 보면 성종은 박안성의 보고를 받고 양전할 때 제주 등도 함께 측량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5일 제주 출신 噈 馆寉抗祔徃 黓埫挷이 제주지역에서 양전을 실시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刅櫳를 올리게 된다. 양전과 관련된 상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신이 絑濈를 따라 제주에서 자라나서 보주의 일을 갖추어 경험하여 압니다. 삼가 양전 및 국둔자마(嬆恪髇鶧)를 쇄출하는 것의 적당하지 못한 일을 아래에 조목으로 진술하여 우러러 성감을 번거롭게 합니다. 또 바다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짠 물결이 충격하여 사방에 흩어져 떨어지기를 비가 오는 것과 같이 하니, 벼가 타고 곡 식이 죽어서 해마다 실농하여 봄철에 곡식이 다할 때가 이르면 백성들이 굶주려서 얼굴빛이 짙게 검어서 사람 모양과 같지 아니하고 이는 오로지 토지가 척박한 소 치로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대개 9등의 邝烐으로 昋聈을 하는데 한번 성적을 한 뒤 에는 백성이 바치는 埑竃의 楳는 년의 기한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살을 깎고 뼈를 부수어 백성들이 살 수 없어서 사방으로 흩어져 가게 될 것이니, 제주목사로 하 여금 적당한지를 물어서 양전하게 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3) 7) 이재수, 3, 앞의 책, 68쪽. 8) 珚懙鑎域概櫳籊繱 54쪽(장전리 강태복씨 소장문서), 抲疔嫖扯剔懮 圼欃嘘 槠 巗榒畠噈樉概 埮樉概劆澰 赼 礣昻藯勠 搥烄塮壜 欃归礫 匈邛蒁歚. 9) 성종실록 권79, 성종 4년 6월 3일(을유). 3) 성종실록 권8, 성종 4년 8월 5일(정묘). 99

藏書閣 噈 개성유수 고태필은 제주 땅이 척박하니 양전을 통해 한번 토지의 등급을 정해 놓고 縀를 받으면 백성들이 살 수 없으므로 제주목사로 하여금 적당한지의 여부를 묻게 하고 있다. 이에 월 6일 제주목사 歉唼掙이 제주에 양전을 하지 말 것을 청하 게 되고, 昱櫴에서는 다른 历에 따라 제주에서도 양전을 실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성 종이 양전을 실지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림3)으로써 제주도에서의 양전은 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따라서 양전이 실시되지 않음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铜舞 魝闇 归詚를 단위로 각 필지의 위치 면적 소유주를 등록하는 양안이 작성3)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제주도 에서의 천자문 순서에 따른 자호표시는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신 제주에서는 瀯恬闇勠園钅烠礫壜 처럼 소재지 마을명과 위치 그에 따른 들판 명 혹은 究彋壜, 焙厁礫壜 처럼 들판명만을 표기하고 있다. ⑥은 매매 토지에 대한 면적표시로 특정작물의 소출량으로 이를 나타내고 있다. 규 모는 대부분 勓埥로 표시되고 있으나 蠸埥로 표시된 사례도 있다. 이때 면적을 구체 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단위 수단으로 窩癚, 肚, 縲, 線 등의 작물이 사용되었다. ⑦은 매매물의 사방 경계 표시로 歬 赺 坒 園의 경계가 누구의 땅과 인접하고 있 는지를 명시하고 있다. 嫖渔는 제주지역 출토 매매명문에는 시기를 막론하고 반드시 등장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礫制의 이름까지 함께 기록된다. 이것은 제주에 양안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공식적인 토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소재지가 들 판명만으로 표시되는 경우 야기되는 혼란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⑤ ⑥ ⑦이 제주 지역의 특색이 반영되어 작성되었다면, 이하 ⑧~⑫는 육지 의 매매문서와 형식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 ⑧은 매물의 가격 표시로 哴欧 이란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暓哴 라는 표현을 통해 매물가격을 懾로 환산하고 그에 상당하는 물건으로 거래하기 도 하였다. ⑨는 매물을 영구적으로 판다는 내용과 향후 분쟁이 생겼을 때 이 명문을 증거로 삼아 従에 신고하여 鎣潞하라는 표현이 나온다. 瀳瀳椹郞 는 임시적으로 판다거나 다시 돌려받을 것을 조건으로 팔아버린다는 巌瘭椹郞, 漅郞, 鑿鏻椹郞 등과 반대 3) 성종실록 권83, 성종 4년 월 6일(정묘). 3) 오인택, 7 8세기 闊礫劆浨 籊繱,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996, 6쪽.

붙음으로써 뒷날 소유권에 대한 시비가 발생했을 때 증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33) 아울러 6세기 이후 토지매매가 穸概으로만 매매하는 것이 상례가 된 상황에서 이러 한 표현은 매매명문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문건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⑩ ⑪ ⑫에는 礫制와 증인, 罁寲이 각각 신분과 함께 성명을 기록하였고, 그 밑에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되는 개념으로 파는 당사자로부터 돌려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瀳瀳이란 말이 서압을 하였다. 필집에 따라 매매명문의 대체적인 양식은 그대로 따르지만 문투나 그 순서는 일부 바뀌어 작성되기도 한다. 罁寲인 경우 邲制 자신이 藥罁寲하는 사례도 상당수 나타난다.34) 서압인 경우 남자는 대부분 晆灵을 하고 있으나 신분 표시 없이 성명만 기재하고 懡晆忳을 하기도 했으며 嵯는 懡晆忳, 妥刨인 경우 妥刈笻, 妥蓇笻을 하고 있다. 여자 가 郞制일 때는 幝인 경우를 포함하여 대부분 埮晆忳, 埮晆枇, 埮枇晆忳을 하지만 懡 晆忳을 한 예도 있으며 9세기 문건으로 수결을 한 예도 보인다.35) 그러나 坫绛을 찍 은 경우는 없다. 轄变는 6세기 문건에서는 보이지 않고 7세기 문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 전체 566건의 문서 중 35건에만 증보가 나타난다. 이상 제주지역에서 櫻域에 해당하는 매매명문을 대상으로 제주도 매매명문의 일반 적인 기재양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후의 매매명문은 앞서 살핀 매매명문의 양식 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시기에 따라 당시 제주지역의 매매관습을 반영하는 요소들이 기재되기 시작한다. 이에 樉概刅에 새롭게 보이는 내용들을 시기에 따라 검토해 보도 록 하겠다. 7세기 제주지역 매매명문의 양식은 전반적인 양상에서 앞 시기에 비해 크게 달라 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달라지거나 새로 등장하는 요소들이 나 타난다. 매매 사유인 경우 조선 초 과전법 체제하에서 전답매매금지 조치에도 불구하 고 사회적으로 매매가 관행화 되어감에 따라 44년(세종 6) 3월 전답매매가 허용36) 33) 闌橵挓, 987, 앞의 논문, 86쪽. 34) 분석대상 자료 566건 중 39건이 藥罁寲에 해당된다. 35) 서압의 형태를 통해 매주를 신분별로 구별하기는 어렵다. 한국 고문서의 서명 형식에 관해 연구한 박준호에 따르 면 착명 서압, 수촌 수장은 신분이나 남녀의 성차에 구애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용된 서명 방식이며, 수촌 수 장을 사용한 경우와 착명 서압을 사용한 경우의 가장 큰 차별성은 문서 작성자의 蓸概艐忦 여부로 보고 있다. 박준호, 한국 고문서의 서명 형식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 3쪽. 36) 세종실록 권3, 세종 6년 3월 3일(기해).

藏書閣 되고 있으나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여 허용하였으므로 매매 사유는 필수불가결한 요 소였다. 따라서 토지매매에 있어 부득이하여 토지를 매매한다는 구체적인 사유가 명시될 필요가 있었고, 이로 인해 매매명문에서 매매 사유는 반드시 갖추어야할 필수적이고 중요한 형식요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6세기의 매매명문에는 그 매매 사유가 구체적 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이던 매매 사유 기록은 과전법 체제의 붕 괴와 더불어 전답에 대한 사적소유권 의식의 성장과 함께 전답매매가 활발해지면서 樉概刅에 점차 형식화된 요소로 남게 되었고, 이러한 추세는 7세기 이후에는 더욱 정형화 되어 虬髞昻藯 나 赼礣劆勠 처럼 간략한 형식적인 문투로 기재되어졌다.) 그러나 제주도인 경우 7세기에도 매도사유가 赼礣昻藯로 명시되는 예는 당시 문 기 74건 중 건에 불과하며, 매도사유가 기재되지 않은 건을 제외한 5건은 구체 적인 사유를 적고 있다. 7세기 들어 숙종 4년(678) 조선 정부가 동전유통을 결정한 이후 토지매매에도 동전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38) 즉 토지매매 시 郞邲哴가 동전(霝概)으로 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694년, 전라도 지역에서는 697년 매매명문에서도 확인 된다.39) 그러나 이때 명문상의 霝概이 반드시 직접적인 매매수단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 다. 서울 등 도시 지역에서는 동전 사용이 활성화 되어 토지 거래에도 동전이 사용될 수 있으나, 동전유통이 활발하지 않은 농촌에서는 단순히 가치 척도로 기능하고, 실 제로는 동전 가치에 준하는 현물이 거래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9세기에도 농가 생산물의 상품화율은 ~3%로 추정되고 있으며, 아직 시장경제가 미성숙하고 동전의 공급이 풍부하지 않은 9세기 전반까지도 쌀과 무명 은 여전히 화폐로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 따라서 매매명문에서 郞邲哴로 언 ) 歉嬣焔, 3, 앞의 책, 4~7쪽. 38)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나온 고문서 해제 Ⅰ 의 <嬚嬫概踓 편을 분석한 권인혁은 따르면 숙종 4년(678) 이후 頿 鐛 焼鐕되기 시작한 화폐가 橪徒勞부터는 모든 토지거래에 있어서 이제까지의 전통적 거래수단(欣 懾 鶧 癖 潞線 聮 陻 등)을 물리치고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漅劼酦, 8刑胻의 那扞焼鐕 籊繱, 논문 집 제집, 제주대학교, 98, 3~3쪽. 39) 歉嬣焔, 3, 앞의 책, 75쪽. 4) 이헌창, 화폐와 경제생활,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두산동아, 6, 79~93쪽.

따라서는 가치 척도의 역할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7세기 육지지역 매매명문에는 郞邲哴로 霝概이 표기되고 있지만, 당시 제 주지역의 매매문기에서는 매매 사유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언급4)되고 있 을 뿐이다. 아울러 이때에도 매매가는 현물로 표시되고 있다. 제주도에서 매매명문에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급된 동전을 천편일률적으로 거래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경우에 서 郞邲哴로 霝概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869년 작성된 매매명문4)을 기점으 로 9세기 이후이다. 시간적 격차로 따져본다면 중앙정부의 동전유통 결정이 내려진 지 9년, 경상 전라지역과는 7년의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즉 육지지역에서는 동전유통 결정이 내려지고 동전이 실제 매매수단이었든 가치척 도의 수단이었든 적어도 년 안에 그 결정이 토지매매명문에 반영되었다면, 제주도 는 대략 년이 지난 뒤에야 토지매매명문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주도에서 동전유통이 그 만큼 늦어졌다는 것으로 자세한 원인규명은 다음절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7세기 경북지방 매매명문에는 전답을 매매하면서 그 매매전답의 이전 매매문기를 같이 넘겨준다는 欧概踓扲勠 와 본문기가 첨부되지 않는 경우 欧概踓澰勑礫祎扲勓 剔勈劉踬腡刈排 같은 표현이 기재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7세기 중기 이후 매매명문의 중요한 형식요소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것은 5세기에는 조선정부의 전 답매매 억제로 매매가 활성화 되지 못함에 따라 6세기 매매명문에는 이전 문기의 존재가 거의 확인되지 않지만, 7세기 특히 후반기에 들어서는 앞 시대의 전답 매매 활성화로 매매 시 매물과 관련된 欧概踓(蘅概踓)가 첨부되어 거래될 수 있었던 것이 다.43) 따라서 본문기의 첨부 여부는 앞 시기 전답매매의 활성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렇듯 타지방에서 본문기 첨부의 명시가 매매명문의 중요한 형식요소로 자리 잡 게 됨을 염두에 두고 제주도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7세기가 되면서 제주도 매매명문 에도 欧概踓 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총 74건의 7세기 문건에서 欧概踓 의 4) 중문동 고재일씨 소장 명문(68년 정월 5일자 명문, 彋灘殒务 瓸鋈勠 瓸刅啰癤刨 瑦觠垾榟剔馥崬 篞銦欧勠 邢忍礕剆劵 昻咔甜网剔勈劉 堇劵噈 潞欣垾禆剔 刅鯽馥崬觠垾榟邲排欧霝漜勠邳嗵掇 )과 장전리 강태복 씨 소장 명문(678년 9월 일자 명문, 篞瘱务 癔啰剆捴瘭嵽剉 啰癤昋咔漜 堇劵噈 觠刳啲曹邮啤邳嗵瘭硗嵽 埪 ) 매도사유 부분에 부분적으로 언급된다. 4) 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명문5. 43) 歉嬣焔, 3, 앞의 책, 75~76쪽. 3

藏書閣 표현이 등장하는 경우는 3건이며, 나머지 6건은 본문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다. 본문기가 보이는 예는 欧概踓扲勠 5건, 欧概踓勑礫扲勓 7건, 欧概踓痍崬이 건이 며, 7세기 후반기에 집중되어있다.44)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표 3 7세기 문서내의 本文記 기재상황 구 분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기재되지 않음 扲勠 勑礫扲勓 痍崬 계 장전리 7 4 7 8 금악리 중문동 7 7 의귀리 7 8 6 5 7 74 계 <표 3>을 보면 제주도는 당시 문건 74건 중 3건만이 본문기에 관해 기재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매매명문 작성 시 본문기에 대한 언급을 앞 시대 매매 활성화 정도 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결국 제주도는 6세기에도 토지 매매가 활발하게 일어 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울러 본문기와 관련된 표현 중에 8세기 제주도 매매명문에는 본문기를 첨부하 지 못하는 이유로 欧概踓澰 铸踬扲勓楀 刈排懭踬腡瘭垶剉 라는 말이 나온다. 749 년 월 8일 장전리 강태복 씨 소장 문건45)에 铸踬 라는 표현이 보이기 시작한 이 래, 9세기에는 본문기를 첨부하지 못하는 사유를 기재한 문건 건 중에 6건이 铸踬扲勓 로 나타난다.46) 장전리 문기들인 경우 9세기 본문기 미첨부 사유가 모두 铸踬扲勓 일 정도이다. 铸踬 라는 용어는 제주지역 嘁邜踓상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표현으로, 邜制가 潶 噈에 勠噈에 증여한 재산까지 합하여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되 상속대상자 모두의 몫을 하나의 문서에 기록함을 의미한다.47) 8~9세기 제주도 분재기 3건을 분석한 44) 최초의 欧概踓 에 관한 기록은 654년 3월 초5일 장전리 강태복 소장문건에 보인다. 제주도고문서연구, 5쪽. 45) 위의 책, 97쪽. 46) 본문기를 첨부하지 못하는 여타의 사유로는 勑礫扲勓 가 3건, 기타 痍崬 등의 이유가 9건이다. 47) 문숙자, 6, 앞의 논문, 8~9쪽. 4

문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749년이고 제주도 최초의 도허문기 등장이 654년49)이라 는 점에서 본다면 제주도 내에서는 7세기 중반 이후 토지가 상속의 대상이 되었고 그 상속된 토지가 8세기에 와서는 매매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铸踬라 는 표현은 매매 대상물의 취득 경위까지 실증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문숙자에 따르면 3건 모두 토지가 상속재산에 포함되는데,48) 铸踬 가 토지 매매명 9세기 들어서 두드러진 변화는 9세기 중반 이후에 전답소재지역 마을 이름이 새 겨진 詚渔(嬑绛)를 날인한 문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철종 3년(85) 제주도 애월읍 分嚛闇에서 간행된 峧彋榫徕鐕挊 5)의 토지매매에 관한 규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토지 매매는 가격을 정하고 概嘳을 만들 때, 먼저 礫制가 거주하는 焙刨의 轡瀌饲으로 鶑变를 세우고, 다음으로 해당마을의 鎭竞을 轄劵으로 삼아서 嘳怹에 巎堈과 荭暷을 갖추었다. 먼저 欧焙의 詚渔를 날인하고 다음으로 瀳归榴渔를 찍어서 문권을 만든다. 영원히 팔아버리는 概嘳은 3일이 지나면 鑿鏻를 허락하지 않는다. 각 闇에서는 매년 礫耺 책을 만들어 두고 경민장이 이를 관장한다. 본 闇의 토지를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당해 경민장과 농감이 문권을 작성하여 발급하고 즉시 이 책 에 기록한다.5) 위 鐕挊의 내용에 따르면 토지매매 문권을 작성할 때 礫制가 거주하는 마을의 경 민장을 보증인, 농감을 증인으로 삼도록 하고 있으며, 欧焙의 詚渔와 瀳归榴渔를 찍 어서 문권을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통식의 규정들이 이 글의 고찰 대상 자료 48) 문숙자, 6, 앞의 논문, 6~7쪽. 49) 654년 강응선이 邜制로 등장하는 금악리 수산강씨가의 분재기가 제주지역에 남아있는 분재기들 중에서는 가 장 년대가 올라간다. 고창석, 7 8세기 제주지방의 분재문서, 제주도고문서연구, 세림,. 5) 峧彋榫徕鐕挊 은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리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성책고문서 중 하나이다. 이 문서를 해제한 고창석은 峧彋扯을 철종 3년(85)으로 추정하고 있다. 峧彋榫徕鐕挊 의 내용을 보면, 토지의 郞邲, 啳祱, 竳柖 시의 문서 양식과 도허문 작성시의 문서양식에 대해서 적고 있다. 통식 에 따르면, 토지를 매매할 때는 본 마을 의 詚渔와 瀳归榴渔를 날인한데 반하여 전당에는 호표와 啳归嬎渔, 상환에는 호표와 竳柖饲渔를 날인하도록 규 정하였고, 도허문은 토지의 매매에 있어서와 같이 본 마을의 호표와 영자표를 날인하도록 하였다. 고창석, 分嚛 闇昻觊域概櫳, 북제주문화원, 7. 5) 고창석, 7, 위의 책, 93~94쪽, 嗜礫嬫郞邲 灵哴昋嘳剆樽 啃勠礫制焙刨轡瀌饲细鶑变 漜勠蹭闇鎭竞南轄劵 啲巎堈笻荭劉嘳怹 啃鈊欧焙詚渔 漜鈊瀳归榴渔瘭嘳(瀳郞昋嘳 鑉刄圼槠 固踬鑿鏻)埿闇濊潭 昋荩礫耺击喅 轡瀌饲 枇剆(欧闇礫嬫 欄郞邲萀 蹭饲竞昋嘳勠腡 坸錄雿劉潟喅. 5

藏書閣 에 적용된 예를 정리해 보면 <표 4>와 같다. 표 4 壬子新定通式 적용 예 구 분 해당연도 적용예 제주대학교박물관 명문 85.. 瀳归榴渔 제주대학교박물관 명문 853.. 6 瀳归榴渔 제주대학교박물관 명문 855. 8. 초8 瀳归榴渔 제주대학교박물관 명문4 856.. 瀳归榴渔 민속자연사박물관 명문59 869.. 8 3곳 瀳归榴渔 민속자연사박물관 명문6 869.. 초6 3곳 瀳归榴渔 민속자연사박물관 명문65 878. 5. 8 853 곽지리 대포리 瀳归榴渔 铨椪 焙詚渔 및 瀳归榴渔,轄劵 鎭竞 854 轄劵 鎭竞 859 铨椪 焙詚渔 및 瀳归榴渔, 轄劵 鎭竞 86 铨椪 焙詚渔 및 瀳归榴渔, 轄劵 鎭竞 865 崢煡瀳榴渔 <표 4>를 통해 보면 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문기들은 모두 礫制의 晆灵 아래 瀳归 榴渔만을 날인하고 欧焙의 詚渔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轡瀌饲을 보증인으로 삼거나 鎭竞을 추가 증인으로 세운 예도 없다. 85년 월 일 작성된 문건을 통해 瀳归榴 渔 날인의 예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자료 -> <자료 > 墳遅劇扯峧彋劇欃圼击槠炮歹詐樉概 埮樉概劆澰祱潟蝍扯囝刈排懭絑刅礬厁礫扮欣壜 徱孋坒钅蟗礫驳坂勓歬埮劵礫赺闌晈ꎈ徱孋坒崢煲 渔嘁樉萇哴欧澰穸欣垾禆犑踃杢刅掇瀳瀳椹郞横鑞 欧概踓澰铸踬刨扲勓楀刈排踬腡瘭垶剉槠掇彋彦槊 恧刨蛠欄竳瘨剆挅噂勠潟樉概塅従坙潞劆 礫制歉埧埭 埮晆朂 罁寲汼礣浦 晆灵 6

수 있으며, 853년 월 6일 명문,5) 855년 8월 초8일 명문,53) 856년 월 일54) 명문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瀳归榴渔가 날인되어 있다. 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명문 역시 轡瀌饲과 鎭竞은 나타나지 않으나, 아래 제시하 는 <자료 3>과 <자료 3->에서 보듯이 869년 월 문건인 경우 매매월일과 매매 사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자료 >와 <자료 ->을 보면 礫制의 수결 밑에 瀳归榴渔를 날인하고 있음을 알 유를 적은 사이, 매매물의 가격과 椹郞라는 문구가 적힌 사이, 말미 欧概踓 소실에 대해서 명기한 부분 등 총 세 곳에 瀳归榴渔를 찍고 있다. <자료 3> <자료 3-> 堇炶啦扯懬懮圼欃劇圼啦槠闌峉詐樉概 埮樉概劆澰臅欄礣詐楀寉礫壜 篞瘱濈邲排礫窩癚曹榒勓渔歬闌 怔躥礫赺抲旄徃礫坒闌嬣豇礫園抲扭 絺礫蒁渔嘁樉横鑞哴欧澰霝概匈 曹啤埅穸欣蒁禆犑杢掇埮劵詐瀳 瘭椹郞萇欧概扲瘭嗵腡槠掇彋 彦刨蛠欄髗軂剆挅噂曼潟 概踓坙潞劆 礫制藥罁巗旄塣 晆灵 欧概踓馥崬欥瘭嗵腡勠潟 斌掇劆 이 외 869년 월 문기 역시 邛咰량을 적은 부분, 매물의 嫖渔를 적은 부분, 매물 을 瀳瀳 방매한다는 내용을 적은 부분에 瀳归榴渔를 날인하고 있으며, 878년 문기 에는 매물의 취득경위와 嫖渔를 표시한 사이에 瀳归榴渔를 찍고 있다. 반면 곽지리 문건에서는 건은 詚渔와 瀳归榴渔 날인은 없으나 증인으로 鎭竞이 나오고 있으며, 나머지 3건에는 礫制 윗부분에 铨椪 라는 焙詚渔와 礫制의 수결 아 래 부분에 瀳归榴渔가 날인되고, 鎭竞이 증인이 되고 있다. 대포리 문건에는 詚渔와 5) 墳遅刄扯穳刌潞欃圼啨槠炮歹詐樉 埮樉概 礫制歉瀊 埮晆忳 罁寲 勶脏ꆯ 晆灵 53) 墳遅匈扯剔坪啦欃嘘啦槠炮ꎈ髭詐樉概 礫制 黓昋絺 晆灵 罁寲 锨歬疼 晆灵 54) 墳遅啨扯刔鎫圼劇欃劇圼槠炮歹詐樉概 礫制藥罁寲 闌菅嬣 晆灵 7

藏書閣 瀳归榴渔가 합해진 형태로 崢材瀳 이 날인되어있다. 위 사실들을 통틀어 본다면 85년 이후의 명문 83건 중에 鐕挊의 내용이 적용 된 것은 건에 불과하다. 따라서 鐕挊은 명문 작성 시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 토지매매 시 穸概踓 거래가 일반화된 당시 상황55)에서 일부 몇몇 토지소유 관념이 강한 매수자들이 종래의 穸概踓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확 실한 공신력 확보를 위해 마을 내에 권위 있는 자들을 내세워 증명을 받은 것으로 보 여진다. 아울러 매매 연월일과 매매물의 가격을 명시한 부분 등 매매 시 중요하게 생 각하는 부분에 瀳归榴渔를 찍음으로써 문서위조를 방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賣買明文의 기재 요소 ) 매매 시기 및 매매 사유 토지매매는 매매행위가 발생한 일자의 기록으로부터 시작하며, 명문이 증거물로써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용되는 중국연호와 월일을 기재하였다.56) 제주도 매매 명문인 경우 중국연호-년도-간지 순으로 기재된 문건은 전체 566건 중 554건 이며, 연호-년도로만 기재된 문건이 건, 간지만 나온 경우는 건이다. 매매 연월일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일년 중 매매가 이루어진 시기를 논과 밭으로 나눠 살펴보면 <표 5>, <표 6>과 같다. 표 5 논의 매매 시기 구 분 제 주 목 장전리 월 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4 9월 월 월 월 소계 3 55) 조선시대에는 전답을 매매할 경우 매매 후 縀嵌鑉噭이라 하여 매매명문과 함께 縀霝을 소속관아에 납부하고 명 의변경 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는데, 이러한 细汃절차는 점차 이중매매나 위조명문의 방지 등 권리자의 옹호기능 을 가진 것으로 변질되어 갔고, 입안절차의 비현실성으로 従荭없이 穸概으로만 매매하는 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 다. 欯緄珛, 鯎嬆烐嘱埭椲, 법문사, 974. 56) 김소은, 6세기 매매관행과 문서양식, 6세기 한국 고문서 연구, 아카넷, 4, 9쪽.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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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書閣 기 타 민속 박물관 5 9 5 8 4 5 7 제주대 박물관 7 8 5 5 3 3 3 5 4 소 계 8 5 7 9 8 8 5 6 8 5 3 65 (3) 77 (5) 68 (3) 43 (8) 8 (5) 4 (5) 35 (7) 35 (7) 8 (3) 5 (5) 49 (9) 합계 (%) 5 58 () () <표 6>은 밭을 대상으로 매매 시기를 파악한 것이다. <표 6>을 보면 밭의 매매는 연중 이루어지고 있으나 월에서 이듬해 3월 사이에 매매건수가 증가하고 있다. 특 히 월은 논의 경우에서도 확인하였지만 밭의 매매에서도 5%의 비중을 차지할 정 도로 가장 많은 매매가 발생하고 있다. 결국 <표 5> 논의 매매와 <표 6> 밭의 매매인 경우 모두 戳樽 매매가 행해지고 있 으며, 논과 밭 구별 없이 대체적으로 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매매가 비교적 집중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밭농사 지역인 제주도 농작물의 파종이 대부분 4월에 시작되고 월에 수확 한다58)는 점에서 본다면 농한기인 월에서 3월 사이에 매매가 비교적 성행했던 것 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부세의 납부 측면에서도 모든 세와 공물의 수납은 익년 6월까지 상납하 고, 전세 외의 공물은 월까지로 한다. 는 膎嬆崢啳 의 조항으로도,, 3월에 매매 가 집중된 원인을 알 수 있다. 또한 礫縀는 47년(성종 3)에 이르면 3월 일까지 납 세하도록 한 것도 월에 토지매매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배경으로 여겨진다. 이상 매매 시기에 대해서 검토해보았고, 다음으로 토지의 매매 사유를 좀 더 구체 적이고 구조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표 7>과 같다. 58) 남석진, 제주도 전통사회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 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987, 쪽. 제주도의 주작물인 보리인 경우만 월에 파종해서 이듬해 5~6월 사이에 수확하였다.

구분 赼礣詐 邳嗵 嗱扯 鑿刅 虬髞 6세기 장례비 말(鶧) 부세 기타 미기재 합 계 3 7세기 3 8 8 3 4 74 8세기 56 83 35 3 9 5 4 6 4 9세기 9 5 4 9 6 65 합계 (%) 9 (34) () 78 (4) 8 (3) 5 (3) 8 () 5 () 6 (5) 4 () 566 ()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표 7 시대별 매매 사유 <표 7>을 보면 매매 사유는 邳嗵, 赼礣詐, 嗱扯, 鑿刅, 가난, 장례비 말 부세 마련, 기타 등으로 나온다. 이 중 대출과 요용처, 흉년은 전체 매매 사유 중 85%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7~9세기 동안 주요한 매도사유였음이 확인된다. 邳嗵은 %를 차지하며 가장 많은 매도사유로 나오는데, 단순히 대출로 기재된 것과 여러 가지 사유가 병행 기재된 경우로 나누어진다. 여러 가지 사유가 병행되는 경우는 요용처, 흉년의 생계유지, 鑿刅咔脈, 堇虭鶧 마련, 妥衧綩邶 마련 등의 사유와 결합된 형태이다. 이들 사유는 대출의 직접적 원인들로 원인 해결을 위해 대출품을 빌렸다가 대출품으로 갚지 못하자 嬚嬫로 대신 唚鑿하고 있는 것이다. 대출물로는 潞 欣, ꊶ懾, 肚, 窩癚, 癖窩, 癖 鶧 등이 나오며 9세기 후반기에는 霝概이 대출품으로 등장한다.59) 제주지역에서 邳嗵에 대한 唚鑿哴로 礫祎이 활발하게 매도되었던 것은 당시 制거 래 대상인 ~榒勓埥의 소규모 전답6)이 재산 축적의 수단이기 보다는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7세기 후반 정의현감으로 부임했 던 闌葭剀가 제주도의 토지에 대해서 심히 척박하므로, 3년을 鐞南하면 곡식이 여 물지 않는 까닭에 몇 년 지력을 쉬게 한 후에 다시 이를 경작하여야 한다. 6)고 한 언 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척박하여 몇 년씩 匌萐을 해야 하는 토지를 묵혀두기 보다는 급박한 일이 생겼을 때 활용하는 것이 더 요긴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59) 온평리 문건인 경우 9세기 명문 35건 중 6건의 매도사유가 대출에 해당하며 대출품의 3건은 霝概이다. 6) 전답의 거래 규모에 대해서는 뒷절에서 상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이 글에서 고찰하는 7~9세기 동안 ~榒勓埥 규모의 전답이 주로 거래 되었다. 6) 闌葭剀, 坒鑲雿, 啦劏鋍概髁. 김성구(64~77)는 679년(숙종 5) 6월 枇募으로 있을 때 踬繁의 崢羕사건에 관련되어 정의현감으로 좌천되었다. 坒鑲雿 은 그 경위와 현감 재직 때의 일들을 숙종 5년 3월 일부터 숙종 8 년 월 6일까지 약 년 개월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藏書閣 대출 다음으로 많은 매도사유는 34%를 차지하는 赼礣詐 이다. 요용처 는 상세하 게는 赼礣昻藯 를 비롯하여 臅欄礣詐, 搠欄礣詐, 骬欄礣詐 등으로 표현되며 시대 가 내려가면서 토지매매 시 구체적인 매도사유 기술의 필요성이 덜해지면서 매도사 유에 대한 형식적인 표현으로 명문상에 기재된다. 요용처 다음의 매도사유는 4%로 나타나는 흉년 이다. 제주도는 조선왕조실록 에서 제주에 관한 기사 중 흉년으로 인한 鵌鵄과 그에 따른 진휼이 가장 많은 비중 을 차지할 정도로 흉년이 자주 들었고, 흉년이 들었다하면 피해가 가장 큰 지역에 속 하였다.6) <표 7>을 보면 8세기가 7, 9세기에 비해 흉년으로 인한 매도사유가 가장 많은 데, 그 중에서도 79년에 시작된 흉년은 795년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794년 갑인 년에는 절정에 달하였다.63) 796년 전라도 관찰사가 3년 동안 각종 곡물 5만 35 석을 수송했다고 밝힐 정도이다. 이 글에서 살펴보는 명문 중에도 이 시기 흉년으로 부득이 토지를 매도한다는 문건이 건이며, 대출의 직접적 원인이 흉년으로 나타나 는 경우도 5건이다.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은 본래 진휼을 목적으로 운영된 환곡을 분급 받게 되고, 분급 받은 환곡을 갚지 못하게 되는 경우 토지를 매도함으로써 환곡수납 비용을 마 련하게 됨에 따라 鑿刅 비납이 토지 매매 사유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환곡은 진휼을 목적으로 운영되었지만, 환곡을 이용해 지방 관아의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으 므로 제주에서도 새롭게 명목을 만들면서까지 환곡을 운영하였고 운영과정에서 昱怊 鑿崕 현상으로 환곡 부담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호당 8, 9석 혹은 6, 7석에 이르렀던 예로 환호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치 않은 상태에서 강 제로 분급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64) 이 역시 鑿刅을 갚을 다른 방법이 없는 토지소 6) 진관훈의 조선시대 제주의 啧穿晱嚤에 관한 고찰 ( 萸莀概圑, )을 통해 보면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해, 흉년 등으로 제주민을 구휼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총 67건일 정도로 제주도는 흉년이 잦았다. 63) 정조실록 권4, 정조 8년 9월 7일(신축). 64) 제주의 환곡은 영조 7년 목사 이수신이 藥咔縻과 莀闇蘑聮를 합하여 郌郂縻이라 명명하고 취모하여 진휼에 이 용한 이후, 영조 4년 목사 윤서동이 자비곡을 이용하여 騭捴을 내세워 환분취모하여 賗瀌抦縻을 만들었으며, 정조 3년 각사노비들이 내는 각사 진상물종을 대신하기 위해 목사 김영수가 자비곡을 내어 谭捴한 谭捴抦聮, 정 조 년 목사 이명준이 자비곡으로 摤抦聮 등을 설치한 예를 들 수 있다. 厖捷霝의 부조을 메우기 위해 환곡을 분급하는 방식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鐭刅翶域와 穸谚 혹은 가사노비들이 내는 각사의 진상물종을 대 신하기 위해 환곡이 창설되기도 하였다. 양진석, 8, 9세기 제주의 椱埑嘱抡와 癴掰, 萸莀概圑 4, 제주대학 교 탐라문화연구소, 8~쪽.

다음 매도사유로 虬髞과 장례비 郡縀 마련 등이 나오며, 제주도의 특이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말 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를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 말 마련은 癢彋들의 楀崬鶧, 堇虭鶧 마련이 주목적이었다. 제주도는 고려 충렬왕 이래 말의 制산출지로 개의 국영목장이 운영되었으며 扯历邝鶧 68필, 挊扯邝鶧 6필 등 매년 수백 마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유자 입장에서는 토지매도를 통한 경비를 마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리의 말을 공납해야 했다.65) 이런 상황에서 말 사육을 직접 담당하는 癢彋들은 鶧의 생산을 책임지고, 礚潶를 점검해야 할 뿐 아니라 蝄榔도 확보66)해야 했다. 아울러 사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말의 秀潶 鑵崬 稡稛등도 목자가 담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외 매도의 기타사유로 죽은 노비의 밭 처분, 鎭癖마련, 자식의 綩沘마련, 의복마 련, 기르던 개가 이웃집 말을 잡아먹은 까닭에 말 값 변상, 빌린 鎭癖 분실, 緶邲漜, 幕綩邶 마련 등이 나온다. ) 賣渡-買受人 토지의 매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매도-매수인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제주 지역 토 지매매명문에서 매도-매수인의 표시는 직역을 이름과 함께 쓰거나 매수인과의 관계 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매도-매수인의 성명만을 기재한 경우로 나누어지며, 노비인 경우 嵯 혹은 幝를 이름자와 함께 기재하고 있다. 매도인에 직역이 표시된 경우는 총 3건이다. 이 중 제주도 사회에서 양반층에 해 당하는 직역은 3건, 중인층 해당 직역은 5건, 양인층 해당 직역은 5건이 확인된 다.67) 65) 남도영,, 앞의 책, 53~533쪽. 66) 박찬식, 7,8세기 珚懙鑎 癢彋의 실태, 현지김영돈박사화갑기념 제주문화연구, 제주문화, 993, 47쪽. 67) 김동전, 995, 앞의 논문, ~쪽. 이 논문에서 김동전은 제주지역 호적중초상에 나타나는 직역을 통해 다음 과 같이 양반 중인 상민 노비로 분류하였다. 양반: 樉欃蠧昱, 噪轲鋈, 埳殗, 噪埳殗, 啷埳哐, 鐕掲铙, 怂勐铙, 堇篠刨渙抗劆, 嗵銦, 潡緌嘘蹡, 唍礚, 扷彳, 祔锐 嘠竞, 祔锐抢鶑, 鲣断, 锐邝鐭峦, 枇轫, ꍆ饲, 踎饲, 魌豺, 絛礚, 驝礚, 氜礚, 浨唍 등. 부녀자: (巎)瀊 중인: 換菅豖, 浨潡, 懜怂, 墼従, 馌虪, 昱饲, 锐堊, 踓従, 寲劆, 邝礚, 轪礚, 猝礚, 枠礚, 掀駐礚, 賸鏫礚, 南堊, 呂 堊, 嚤騭怂, 圾桛, 寉怂, 暅桛, 怂従, 鞨堊, 鞨櫳踓, 鞨踎怉, 掜痚壣従, 扮捴堖従, 鶧竞 등. 부녀자: (성)埧埭(상민호 제외) 상인: 櫳壜, 呂瞂, 怊绠, 卺募, 槒癇, 槒晆, 鞨梦, 寉凼, 囚鋈, 端鋈, 扮捴鋈, 瓸鋈, 瓚鋈, 鑵鋈, 癔啰, 叩懠鋈, 莀怂, 鸉 怂, 櫳寽端, 鋈婣端, 殗端, 恬端, 驝端, 猁端, 莟鰨, 癢彋, 菍鶧, 脔圛, 瀯頰圛, 挎圛, 篝劵, 戨圛, 喅圛, 祎猝, 觠猝 등. 부녀자: (성)埧埭, (성)嵮, (巎)刽, (巎)掲 노비: 念嵯幝, 従嵯幝, 氜嵯幝 3

藏書閣 양반층의 직역으로는 從祠怂鋈豇踎臯驝嘟従(건), 唍礚(건), 扷彳(건), 祔锐嘠竞 (건), 氜礚(3건), 埳哐(건), 抢鶑(건), 枇轫(건)가 나타난다. 육지의 양반층 구성과 달리 제주에서 枇轫 ꍆ饲 등 향교에서의 직책과 유향좌수 유향별감 풍헌 등 향청 과 관련된 직역을 양반으로 간주했던 것은 제주만의 특이한 현상으로 중앙 관료직에 진출할 기회가 적었던 제주의 상황을 반영해 준다. 제주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 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緌蹡를 통한 중앙 관료직 진출이 상당히 제약을 받았으며, 설 사 이를 극복하고 중앙에 간다하더라도 경제력 부족으로 장기간의 체류가 곤란하였 다. 조선후기 제주도와 관련된 대부분의 钌躇鱙에서 지적하고 있는 刈邯劧葲 의 제주 도 풍속도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양인은 가장 많이 매도자(484건)로 등장하는데 양인임을 명시해 주는 직역을 이 름과 함께 기재하거나 이름만을 기재한 경우 양인으로 파악하였다.68) 이때 직역이 함께 표시된 예는 櫳壜(건), 潞啰(건), 鞨梦(건) 등이다. 노비가 매도자로 나오는 경우는 총 4건으로, 이들 문건은 노비가 매주로 나온다는 점은 같지만 綼 가 붙는 경우(6건)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눠진다. 같은 노비 입장에 서 綼 의 첨부 여부는 그가 啧嵯幝인지 綼嵯幝인지를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형상의 남환박물 노비조를 보면 8세기 제주도의 공노비 수는 4,743埞69)로 파악되고 있는데, 당시 萸莀懜潲嬑 7)에 나타난 제주도 호구수가 43,45명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공노비수는 제주도 호구의 절반이 넘는 56.9%에 해당한다. 따라서 제 주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공노비들 속에서 사노비들인 경우 자신을 구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 앞에 綼 归를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다른 지역에서 공노비가 거의 사라지는 793년까지도 제주지역에는 만 5여 명의 공노비가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 인구의 절반이 넘는 공노비가 존재하 였던 것은 중앙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함이었으며, 제 주인의 입장에서는 양인으로서 많은 공물상납에 시달리는 것보다 년에 정해진 액수 위 분류는 다소 자의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의 매도-매수인 신분분류는 이 기준을 따르기로 한다. 68) 이 글에서 살피는 자료 중에 중인층에 해당하는 직역으로 壣従(건), 暅桛(건), 堊昺(건), 浨潡(건) 등의 직역 이 나오는데, 중인으로 따로 분류하지 않고 양인층에 포함시켰음을 밝혀둔다. 69) 이형상의 남환박물 노비조에 보면 공노비의 수는 従嵯 65구, 관비 49비, 啢髻埳노비 47구, 埿埳노비 3,948 구, 崢堖昺노비 6구, 향교노비 구, 서원노비 7구로 모두 4,749구로 나타난다. 7) 탐라순력도 는 7년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주도 관내를 시찰할 때 제작한 지도로, 8세기 제주도 의 사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4

으로 보인다. 더구나 유배인 및 그 후손에 대한 일정기간의 공노비화, 사소한 범죄를 행한 경우에도 공노비로 충당하는 사례가 많아 제주에는 많은 공노비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7) 공노비들은 정해진 銦邝만 납부하면 되었기 때문에 부의 축적이 가능하였고, 이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만 해당 중앙관아에 상납하면 더 이상 간섭을 받지 않는 공노비로서의 삶을 택한 것 글에서 살펴보는 토지매매명문의 嫖渔인 歬 赺 坒 園 중에 전답주로 노비가 적어도 한번 이상 포함되는 경우가 58건이나 된다.7) 이를 통해서도 공노비들의 전답소유가 일정 부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순조 원년(8) 공노비 혁파와 함 께 9세기에 들어서면 노비가 매주로 나오는 경우는 한건도 보이지 않는다. 綼嵯幝가 郞制로 나오는 경우 의귀리 명문가 주목된다. <자료 4> 崤奎唾扯鎖镄 嫖欃圼劇槠 闌崢堄詐樉概 埮樉概瘭藠剉劆澰篞銦劧刨恀劵勠刅啳癇槣曼厁堇矨嵯幝罄务刨椱邝杢刅漜勠 珚懙啠厁樽鑤鯮啂蝍穓禦剔勈劉矨嵯幝罄詐椱邝勠剉榫埈欘崐瀳腱 鳝潶凼忢瘭剉罄勠劵拵闈劆勠囝刈排懭甜彋摪甜堇礚銦楀瘭嬣 綾穸礫罄抦剔厘烐啳邇嵽堇劵詐瓓瘋欖壜肚縩 勓埥歬欖坒楀闌鑎駗礫 赺従礫園嵮午块礫埅赺潳寽壜肚杇坂勓埥歬寽坒径嵄劦礫赺嵮礚莇礫園釪罄 啤抦嫖渔嘁樉礫抦哴欧恬縶峴篮杢刅瘭鑞 瀳瀳椹郞瘭垶剉掇漜毋劵横刾髗軂瘭垶罄潟概踓啢剔礣虪塅従坙潞劆 礫制 劧 櫵埳往 嵯 蘃ꎈ(懡忳) 轄劵 螦榟(晆灵) 峦礲 罁寲 闌敱击(晆灵) <자료 4>는 6년 嵯 흥용이 김대길에게 밭을 매도하는 문서로, 郞制 蘃ꎈ은 綼 자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상전의 癇槣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으로 보아 사노비이며, 자 7) 김동전, 8세기 후반 珚懙嬫寚 啧嵯幝의 존재양태-대정현 歬寉 刨概 藥刴 勅固釪闇 昱聈刨蝄의 분석사례-, 역사민속학 4호, 7. 7) 공노비가 해방되는 9세기에는 嫖渔의 전답 소유자 중 노비로 표시되는 경우는 단 건뿐이다. 5

藏書閣 식 동생 없이 죽은 노비의 재산을 법전에 의거 주인을 대신해 처리하고 있다. 위 명문에 나오는 법전은 경국대전 으로, 경국대전 嘌啳 啧郟沘의 규정인 공천 으로서 자녀가 없이 죽은 자의 嵯幝 礫往은 그가 소속된 欧埳 欧钌에 귀속된다. 綼 郟은 그 邜礞과 함께 欧制가 처분하는 것을 허용한다. 는 조항에 따라 밭을 처분하고 있는 것이다. 7세기 후반이 되면서 육지지역에서는 상전의 癇槣를 받아서 노비가 매매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경향과 달리 제주에서는 노비가 상전을 대신해 매도자로 나 서는 예가 위의 문건을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귀리 문서 중 684년 7월 초일, 686년,73) 696년 월 3일, 697년 월 초6일, 698년 6월 일, 698년 7월 초일, 699년 월 일의 명문인 경우 매수자가 闌蘃掲往 鶑嵯 綹厁 堇 으로 나오며 73년 명문에는 闌制往 鶑嵯 眿叜 이 매수자로 나온다. 금악리 문서 중에는 75년 3월 9일에 거래된 문서의 매수자로 歉踎饲往 癢绠 嵯嘘击 이 매수 인으로 나오고 있다. 육지지역 매매 명문에서 양반 주인이 매매에 직접 나서지 않고 노비가 상전을 대신 하여 거래를 하는 경우 명문에 刅啳癇彋怉虪, 往嵯, 堇往嵯詐 등 상전을 대 신한다는 문구를 써서 대리거래자임을 분명히 한 예74)를 통해 보면, 이들 문건들은 모두 嵯가 주인을 대신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예는 이 글에서 살피는 566건의 문건 중 9건에 불과하여 제주에서는 노비를 통한 대리매매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매도자가 여성인 경우이다. 여성매도자는 명문상의 기재 된 호칭에 따라 신분을 분류하였다. 巎뒤에 瀊가 붙는 경우 양반가의 부인으로 보았 으며, 埧埭 埧堊가 붙거나 이름 앞에 虪嵮가 붙어 있는 것은 양인의 부인으로 파악 하였다. 여성매도자의 현황을 살펴보면 <표 8>과 같다. 표 8 여성 매도자 현황 구 분 양 반 양 인 합 계(%) 6세기 () 7세기 5 7() 73) 686년 명문인 경우 정확한 월, 일을 알 수 없다. 74) 歉嬣焔, 3, 앞의 책, 6쪽. 6

8 3 3(44) 9세기 8 3 3(44) 합 계(%) 8(5) 53(75) 7() <표 8>을 통해 보면 여성이 매도자로 나오는 경우는 이 글에서 살피는 566건의 문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8세기 건 중 7건으로 %를 차지한다. 시기적으로는 7세기에 비해 8 9세기에 여성 매 도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며, 양인 여성이 양반가의 부인에 비해 郞制로 나서는 경 향이 높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이후 경북 해남지역의 매매명문에서는 전반적으로 여성이 매주로 등장하 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연구결과75)와는 달리 제주도는 각 시기별로 여성 매도자 가 등장하고 있다. 그 원인 규명을 위해 우선 이형상이 남환박물 에서 지적한 제주도 의 풍속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매년 배가 패몰하여 죽는 자가 심히 많은 까닭에 남자가 귀하고 여자가 천한 것이다. 아주 잔약한 자 또한 ~3인의 처를 가지게 되고, 혹은 여인의 처를 둔 사람도 있다. 남아를 낳으면 고래의 밥이라 말하고 심히 아끼고 중 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여아를 낳은 후에야 기뻐 말하기를 이 아이가 우리를 봉양 할 것이다 하니, 정상이 또한 측은하다.76) 위 내용에 따르면 제주도는 바다에 나간 남자들이 배의 패몰로 인해 많이 죽기 때 문에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따라서 掇에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여자라는 말이 다. 이는 곧 刈嬣한 남성을 대신하여 여성이 가정경제의 운용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 며, 토지 매도에 있어서도 여성이 매주로 나서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도에서 여성이 부재한 남성을 대신하는 사례는 제주지역 호적중초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9세기 하모슬리 호적중초를 보면 남성호주에서 여성이 호주를 승계한 사 례가 8건(嶶 5, 幡, 工嵮 )이며, 여성호주(어머니)에서 남성호주로 호주가 승계되는 사례가 건(彋 5, 彦彋 3, 工, 島 ), 여성호주에서 여성호주로 승계되는 사례가 75) 歉嬣焔, 3, 앞의 책, 78쪽. 76) 이형상, 남환박물 풍속조, 嵮崕礲怌 濊扯楒蘴炍潶礕豁楀 礲邯嵮郟 藮郟萀务祗劇刄嶶 昑欄圼鴓嶶萀 礚礲噂櫫 剆鳚 刈礕攖闈 據礚嵮由掇疴櫫 横祱鴅堹 擀务數篞. 7

藏書閣 건(嶴, 타 여성)이 있다.77) 또한 제주도는 다른 지방보다 모든 생산노동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농사일 뿐 아니라 바다 일을 하는 잠녀를 비롯해 목축, 상업, 양태 수공업 등 거의 모든 생산노동에 여성들이 참여하였으며, 남성의 부족으로 군인(嵮凼)에 충당되는 사 례78)도 있었다. 이처럼 제주도에서는 생활전반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으므로 토지매매인 경우도 다른 지방에 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뒤에서 살펴 볼 邲埒萀 현황 중 여성 매수자가 양반인 경우 6명 중 9명, 양인인 경우 489명 중 53명이나 되는 예에서도 확인된다. 이외 매도자로 단체의 饲이 등장하는 사례가 있다. 곽지리 문서 중 846년 4월 嘘 7일에 작성된 명문은 매도자가 枠饲 闌啄唾, 昻勶 闌凼ꍅ이며, 枠刨에서 긴요하게 쓸 데가 있어서 밭을 매매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79) 제주도에서는 嵌를 枠이라고 불 렀는데,8) 이 문건은 특정 嵌조직을 대표하는 嵌饲과 嵌의 관련문서들을 기록 보관 하고 嵌壜간의 연락과 자금 관리를 맡은 昻勶이 매도자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상 매도자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표 9>와 같다. 표 9 각 신분별 매도자 현황 구 분 6세기 양 반 남 녀 - - 소계 - 양 인 남 녀 - 소계 노비 단체 탈락 합계 - - 3 77) 김동전, 조선후기 호적중초에 나타난 제주여성, 제주여성사Ⅰ, 제주발전연구원, 9. 78) 闌怔断, 坒淉雿 鲣癤, 協朄欧懙 寉刨礲凼劏穹 嵮凼啦穹 嵮凼萀 珚懙剆躙剚 竑礲凼礕邯 蛠鑂劆辅徃寉 噂鑳瀌徱 呠幡 穷细宗埞 縬瘭嵮凼 刄钌堇由. 김상헌은 6년 제주에 径梦掜卺로 파견되었다. 79) 鑎啄邮曹驳扯刔坃嫖欃嘘凾槠闌穹劼詐樉概 埮樉概劆澰太昌枠刨臅欄礣詐槞懭邲排礫 坒槣堇恬壜窩癚垾榒勓埥 嫖渔澰歬闌凼彘礫赺歉摍鰁礫坒卋啄槨礫園闌 唼戇礫横鑞礫抦 哴欧澰潞欣曹匈禆犑踃杢刅掇 堇埮劵詐欧概踓扲勠瀳瀳椹郞瘭垶剉 槠掇蛠欄枠刨髗軂剆挅横垶罄 曼潟概踓塅従坙潞劆 嵌枠刨 枠饲G闌啄唾OⅯఇP 昻勶G闌凼ꍅOⅯఇP 罁寲 闌藯呠(수결) 8) 김석준, 제주도 농촌의 계, 제주사회론, 한울아카데미, 995, 43~57쪽, 이 논문에 따르면 제주도 마을의 계 들은 대부분 嵌饲, 啧壜, 昻勶의 직책을 두고 있다. 계장은 계원 중 최연장자의 몫이고, 공원은 그 다음 연장자가 맡아 계의 일을 좌목에 기록할 때 서명을 함으로써 일종의 竞劆와 같은 직무를 수행한다. 소임은 좌목을 포함한 계의 관련문서들을 기록 보관하고 계원간의 연락과 계자금의 관리를 맡으며 계원들이 돌아가면서 년 또는 년 씩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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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書閣 수자는 闌蘃掲往鶑嵯綹厁堇 (7건) 闌制往鶑嵯眿叜 (건),8) 歉踎饲往癢绠嵯嘘 击8)로 개재되어 있다. 아울러 9세기에 노비 매수자가 건이라는 소수에 불과한 것 은 노비들의 열악한 처지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다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노비들 인 경우 8년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양인화 된 결과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매도인과 매수인의 신분별 구성을 정리해 보면 표 >과 같다. 표 >에 따 르면 양인간의 거래가 4건(77.%)으로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양인-양반간 3건 (5.3%), 양반-양인간 및 노비-양인간이 각각 4건(4.%)의 순으로 나온다. 계층간 매도 외에 친족간의 매도사례도 36건이 나오는데 형제간, 사촌 掙형제간, 祫巎사촌간, 삼촌-조카간, 처남-嶴崦간, 장인-사위간의 매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표 매도-매수인간 신분구성 구분 양반 -양반 양반 -양인 6세기 7세기 5 5 8세기 9세기 9 합계 (%) 8 (.4) 4 (4.) 양인 -양반 양인 -양인 양인 -노비 노비 -양반 노비 -양인 노비 -노비 미파악 3 7 3 6 9 6 74 5 68 5 3 7 3 4 8 44 3 65 3 (5.3) 4 (77.) (.9) (.) 4 (4.) (.4) 8 (3.) 566 () 합계 제주도 토지매매에 있어서 매도, 매수인, 매도-매수인의 거래를 따져 볼 때 이 글에 서 살펴보는 전시기에 수적으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양인층이다. 육지의 전 반적인 토지매매 과정에서 양반층이 邲埒萀가 되고 양인층이 郞爜劵이 되는 경향에 비추어 본다면 제주도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양인-양인 간의 매매는 嬫制嘱가 발 달하지 않고 전통적 양반층이 형성되지 않은 제주사회만의 특성을 보여주는 요소라 고 생각된다. 지주제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집적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방법은 주로 邲排 과 馆岹이었다. 개간은 합법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邜嚖이 8) 의귀리 명문8, 9, 3, 4, 6, 7, 8, 3. 8) 금악리 명문9.

나 7세기 이후 행해진 개간은 일반 관료나 嬚遥들에게 토지 집적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復徱나 従拮에는 復恪과 従恪의 확대 및 사유화의 단서를 마련해 주었다. 이 들은 집적된 甜制嬫를 경작할 대상을 모집하고 종자 농우 농구 등을 지급하여 개간 케 하고 수확을 坅嘁하였다. 따라서 개간지의 소유자와 개간을 담당하던 농민 사이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뒷받침된다면 누구나 개간을 통해 얼마든지 자기의 소유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에는 일정한 관계가 성립되었고, 그러한 관계가 곧 嬫制와 怊南劵의 관계였다. 개간한 토지는 국가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액수의 嬫縀만 납부하면 소유자 임의대로 경영 관 리하고 처분할 수 있는 綼欄嬫였다. 곧 농경지개간은 지주적 토지소유를 형성케 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83) 그러나 제주도는 지주제 형성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개간이 원활히 이루어 지지 않았다. 고려 충렬왕 때(77)부터 제주도에 설치된 목마장은 조선시대 들어 한라산 고지대를 제외한 중산간 지대를 중심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설치되었는데, 세 종 6년(434) 목장지의 경작이 금지84)됨에 따라 제주도에서 개간은 활성화되지 못 하였다. 개간을 통한 토지 집적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면 매득의 방법이 동원될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주도 토지의 척박함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 토지의 척박함은 조선왕조실록 85)을 비롯하여 제주 관련 기록86)에서 확인 되듯이 嬚搢이 메마르고, ~3년을 鐞南하면 곡식이 여물지 않을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년 錥南이 일어날 정도로 토지가 척박하였다. 따 라서 이런 비옥도가 떨어지는 토지를 매득까지 하면서 집적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83) 歉橪洈, 7刑胻 鎭嬫馆岹과 嬫制嘱의 恐馆, 鯎嬆埭籊繱 9집, 한국사연구회, 973, 88쪽. 84) 세종실록 권64, 세종 6년 6월 4일(기미), 병조에서 아뢰기를 제주는 땅이 좁고 인구는 많아, 생활이 虬蛡하 여 소와 말을 도살하여 생계의 바탕으로 삼는 자가 자못 많고, 장사치들이 왕래하면서 癖 鶧窩를 무역하여 생 할을 이어 가는 자도 또한 많사옵니다. 한라산의 恬刅과 恬分평지에서 癢鴅할 수 있는 곳은 모두 경작을 금 하고, 이 앞서 尯啢에 酲萐한 땅은 비록 목장을 파한 뒤에라도 다시 경작하지 못하게 하소서. 목장 밖에 현재에 경작하고 있는 땅도 사사로 자기가 목장을 쌓게 하고, 묵은 땅을 경작하는 것도 금하여 목양을 넓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5) 세종실록 권45, 세종 년 8월 6일(경자); 성종실록 권78, 성종 6년 윤4월 9일(기해). 86) 임제, 남명소승, 임백호집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鑈惱突炔紦 甜击療鵍嬚. 임제(549~587)는 그의 부 친 橄이 제주목사로 있었으므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577년 월 9일 제주에 들어와서 다음해 3월 3일 돌아 갔다. 이 기간 동안 일기체 기행문인 남명소승 을 작성하였다. 闌葭剀, 坒鑲雿, 啦劏鋍概髁, 欧惱嬚嬫礕稛 鐞萐劇刄扯 噂縻繒甜忡楀 埃岹榫礫 匌嚖楳扯掇櫯酲剆. ; 歉 豜絠, 坒御坕癤, 磼纤啣櫳, 嬚稛瀌邢.

藏書閣 결국 제주도는 개간지의 제한과 토지자체의 척박함으로 토지집적이 이루어지지 않 아 여타 육지지역과 같은 嬫制嘱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규모의 땅을 藥南하다가 필요한 경우 방매함으로써 토지를 재산 형성의 수단이기 보다는 앞서 이 미 언급하였지만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간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제주도는 여 러 가지 이유로 양반층의 형성이 미약하기도 하였지만 토지를 매개로한 신분제가 발 달하지 않았고, 토지의 制소유자들이 앞서 살핀 매도, 매수인, 매도-매수인 에서 확 인했듯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양인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육지지역 토지 매매가 주로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데 반 해 제주도는 양인층 위주로 토지의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매매문서도 양인문서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3) 매매물 및 매물 취득경위 제주지역에서 토지매매 시 거래된 대상을 살펴보면 이 글의 분석대상 자료 566건 중에 礫은 5건, 祎은 45건이 매매된 것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祎 또는 礫으로만 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용도에 따라 徱寵礫 午礫 岎孋礫으로, 재배작물에 따라 魌蝄礫 窩癚礫 肚縩礫으로, 비옥도에 따라 西礫으로 표시된 사례도 있다. 매매물로 礫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제주도의 토양과 관련이 있다. 제주도 토 양의 대부분은 화산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화산재와 화산사가 주요 성분인 화산회토 로 이루어져 있다. 이 화산회토는 제주도 총면적의 83%를 차지하며 자갈 함량이 매 우 높고 경토가 얕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제주도 총면적 8만,997ha 중 밭은 약 5만 ha에 이르고 있어 밭농사 지역으로 일컬어지는 반면 논은 경작지의 총면적 중 %에 해당하는,ha에 불과하다.87) 따라서 논은 하천 부근이나 샘이 솟는 지대 의 관개가 가능한 곳에 한정되어 조성되었다. 郞邲樉概에서 논이 매매물로 나온 지역인 경우 지역명을 알 수 있는 사례를 중심 으로 살펴보면 瓓瘋魝이 8건으로 가장 많이 나오며, 瀯恬闇 5건, 饲礫闇 灚瀻焙이 각각 3건, 樉欃闇 焼瀯抰闇 分繜鑏이 각각 건씩 나온다. 홍로면은 현재 서귀포시 서 홍동으로 논농사가 예부터 꾸준히 이어 내려온 지역이며 최근까지도 벼를 재배하고 87) 이기욱, 제주농촌경제의 변화, 집문당, 3, 3~4쪽.

이 용이한 지역이다.89) 들판명으로는 闌瀯懘壜, 坙驋懘壜, 维緻懘壜, 馆赼瀯壜, 祎焙壜, 騭瀯壜, 鑎懘壜, 啲紵瀯鰨壜 등이 나오는데, 명칭이 물과 관련되어 있음 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주도 내에서도 물 확보가 용이하여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의 논이 거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아진다.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있다.88) 이외 논의 소재지로 표시된 지역은 모두 懘이 가까이 있어 관개용수의 공급 다음으로 매매물의 규모를 살펴보면 <표 >와 같다. 표 시기별 매매규모 구 분 6세기 7세기 8세기 9세기 합 계 ~坂勓埥 5 8(%) ~3坂勓埥 3 4 8(%) 3~4坂勓埥 6 7(3%) 4~5坂勓埥 3 8 8 9(3%) 5~6坂勓埥 3 4 9 6(5%) 6~7坂勓埥 3 7 (%) 7~8坂勓埥 3 9 8 (4%) 8~9坂勓埥 4 6 (%) 9~坂勓埥 소 계 7(3%) 48(%) 57(%) (%) ~榒勓埥 5 34 5 99(7%) ~3榒勓埥 5 6 6 47(8%) 3~4榒勓埥 4 8 9 4(7%) 4~5榒勓埥 7 3(5%) 5~6榒勓埥 43(8%) 6~7榒勓埥 8 8 7(3%) 7~8榒勓埥 3 8 9 3(5%) 8~9榒勓埥 5 8(3%) 9~榒勓埥 5 3 (%) 소 계 34(46%) 6(56%) 74(65%) 335(58%) ~榒勓埥 7 9 8(3%) ~榒勓埥 88) 서홍동향토지박간편집위원회, 赺瓓瘋, 보광인쇄사, 996. 89) 수산리는 수산 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를 제공하고 있으며, 장전리는 수산천이 마을을 지나고 있다. 명월리는 건남천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유수암리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유수암천이 있다. 강정동에는 강정천이 흐르고 있다. 3

藏書閣 ~3榒勓埥 3 4(%) 3~4榒勓埥 3 3 7(%) 4~5榒勓埥 소 계 (3%) 4(6%) 3(5%) 3(5%) 5榒勓埥 이상 5(7%) (%) 8(3%) 5(3%) 篮勓埥 이상 (6%) 6(%) 39(7%) 미 상 4(5%) 8(4%) (5%) 5(4%) 합 3 74(%) 4(%) 65(%) 566(%) 계 <표 >에 따르면 6세기에는 5~6榒勓埥9) 사이의 거래와 ~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거래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단 건에 불과해 거래 규모의 경향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7세기에는 坂勓埥 미만의 거래가 7건(3%), ~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34건 (46%), ~5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건(3%), 5두부지 이상 석부지 미만의 거래가 5건(7%), 篮勓埥이상이 건(6%) 발생하였다. 가장 많이 거래된 것은 ~榒勓埥 의 전답이며 그 중에서도 ~榒勓埥 사이의 매물 거래가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승부지 미만의 거래도 3%를 차지하지만, 그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篮 勓埥이상의 거래가 건으로 6%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각 시기별로 篮勓埥 가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 봤을 때 가장 큰 수치이다. 8세기는 坂勓埥 미만의 거래가 48건(%), ~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6건 (56%), ~5榒勓埥 사이 거래는 4건(6%), 5榒勓埥 이상 篮勓埥 미만이 건 (%), 篮勓埥 이상이 6건(%)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 역시 ~榒勓埥 사이의 거 래가 5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34건 으로 가장 많다. 7세기와 비교해 본다면 坂勓埥 미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3%에 서 %로, 5榒勓埥 이상 篮勓埥 미만은 7%에서 %로, 篮勓埥 이상은 6%에서 %로 각각 %, 6%, 4%로 감소한 반면 ~榒勓埥 사이의 거래는 46%에서 56% 로, ~5榒勓埥 사이의 거래는 3%에서 6%로 각각 %, 3%로 증가한 양상을 보인 다. 즉 7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는 ~榒勓埥에 비해 소규모이거나 5榒勓埥 이상 9) 勓埥는 부치기 로 읽히며, 이 글에서 분석한 566건의 매매명문 중 勓埥는 53건, 蠸埥는 9건, 邛歚이 건, 崗塮 건, 미상은 4건이다. 4

9세기에는 坂勓埥 미만은 57건(%), ~榒勓埥 사이의 거래는 74건(65%), ~5榒勓埥 사이는 3건(5%), 5榒勓埥 이상 篮勓埥 미만은 8건(3%), 篮勓埥 이 상은 단 건이 거래되었다. 아울러 9세기에도 ~榒勓埥 사이의 礫祎 규모가 65% 로 가장 많이 거래 되었다. 8세기에 거래 비중이 감소했던 坂勓埥 미만의 거래가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등 규모가 큰 토지의 거래는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噈 시기 %에서 %로 %로 증가하며 5榒勓埥 이상 篮勓埥 미만의 거래도 % 에서 3%로 %로 증가하지만, ~5榒勓埥 사이의 거래는 %로 감소하고 篮勓埥 이상의 거래는 %로 현저히 감소한다. 즉 시대가 내려올수록 坂勓埥 미만과 榒勓埥 이상의 거래는 % 이내에서 증가 혹은 감소하지만, ~榒勓埥 사이의 거래는 46% 56% 65%로 9~%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榒勓埥 사이의 거래 중에서도 ~榒勓埥 사이의 거래가 전체 거래 중 7%(99건)로 가장 많이 거래되었음이 확인된다. 榒의 재배면 적을 평균 5평으로 잡는 제주의 풍속9)에 따르면 약 5평 이상 3평 이하의 영 세한 땅이 제주도에서는 주로 거래된 것이다. 이상 郞邲癤의 거래규모를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그 邲郞癤 즉 椹郞 토지의 취득경 위를 정리해 보면 <표 3>과 같다. 표 3 放賣 토지의 취득경위 구분 6세기 竳芇 邲排 竳柖 기타 藥酲礫 미기재 勱 % 勱 % 勱 % 勱 % 勱 % 勱 % 6 합 계 3 7세기 36 3 5 9 8 9 6 33 4 7 74 8세기 3 48 48 8 5 4 9 7 39 3 38 4 9세기 7 39 9 63 6 5 3 4 4 36 45 65 합 계 76 73 7 8 8 566 <표 3>을 보면 방매하는 토지의 가장 많은 취득 경로는 상속이며, 기타와 경위를 밝히지 않은 문건 98건을 제외하고는 邲排 竳柖 萐南 순으로 나온다. 상속은 8세기에 가장 집중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조상전래(35건)를 비롯하 9) 고창석,, 앞의 책, 4쪽. 5

藏書閣 여 嶶钅(39건), 瘱(6건), 濈(건), 絑瘱濈(7건), 废徱(7건), 崦(5건), 형제(건) 등으 로부터 상속된 것과 깃급(8건), 松岮沘9)(7건)로 물려받은 것으로 구분된다. 방매 토지의 취득경위에서 상속자체만을 놓고 상속이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보면 7세기 3%에서 8세기 48%로 무려 35%나 증가하지만, 9세기는 39%로 8세기 48%에 비해 9%감소됨을 알 수 있다. 반면 매득은 총 73건으로 수량 면에서는 상속보다는 작은 수치이지만, 9세기로 갈수록 수치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차지하는 비중도 늘고 있다. 7세기 9%이던 것이 8세기 8%로 9%로 증가했으며, 9세기에는 63%로 전시기에 비해 35%라는 큰 수치로 증가하고 있다. 즉 방매하는 토지의 취득원이 9세기로 갈수록 매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시대가 내려갈수록 토지매매가 활성화됨과 그 만큼 매득한 토지를 다시 방매 해야만 하는 당시 전답 소유자들의 급박한 처지도 엿볼 수 있다. 이는 9세기 주 매도사유인 邳嗵의 직접적 원인이 흉년의 생계 유지, 鑿刅 마 련, 堇虭鶧 마련, 妥衧邶 마련 등으로 나타나는 것에서도 짐작된다. 竳柖한 밭을 방매하는 경우는 건이며, 藥酲礫, 藥南礫, 藥酲萐鳚 으로 표현되 는 馆岹礫인 경우는 7건이다. 개간전이 적은 것은 한라산 중산간 지대가 9세기까지 嬆鶧를 양성하는 목장지대로 묶여 있어 경작이 엄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 인다.93) 기타로는 昋幕94)일에 별급 받은 토지가 대부분이며, 이외에 채무 대신 받은 것과 노비가 踓刅한 토지가 있다. 踓刅(懬刅) 의 본래 뜻은 (장부, 문서에) 기록하여 올린 다는 의미로 노비의 재산과 관련하여서는 의 (이름으로) 기록하여 올라 있는 또 는 의 (이름으로) 기록하여 올린 의 뜻으로 사용되어 노비의 재산을 소속 従埳나 刅啳이 차지하는 경우 사용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95) 아울러 啧郟으로서 자녀가 없 9) 松岮沘는 조상제사와 묘소관리를 위한 午嬚인 絨醅礫으로 제주도 동부지방에서 부르는 말이다. 歉樇寵, 珚懙鑎 의 劵埞와 徱槊, 영남대학교출판부, 999, 89쪽. 93) 진관훈, 제주도 화전연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 제주도사연구 제집, 3, 5~53쪽. 조선시대 제주인들은 9세기 중반까지 농토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산간 목장지대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개간 경작하였는데, 894년 공마제도가 폐지되면서 목장지의 개간이 활발해진다. 94) 제주도 별급문기에서 彋幡나 彦幡 등 여성에게 별급하는 경우 嘘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아들이나 사위 등 남성에게 별급하는 경우 昋幕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모두 혼인을 기념하여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숙자, 6, 앞의 논문, 쪽. 95) 啣璪玟, 7 8刑胻 啢嵯幝의 嬚嬫昻欄, 欘龩掇欚嵯幝銦嘁籊繱, 일조각, 989, 5쪽. 6

께 欧制가 처분하는 것을 허용한다. 는 膎嬆崢啳 嘌啳 啧郟沘의 규정에 따라 자식 없이 죽은 노비의 재산이 주로 기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가 장전리 명문8 에도 보인다.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이 죽은 자의 嵯幝 礫往은 그가 소속된 欧埳 欧钌에 귀속된다. 綼郟은 그 재산과 함 <자료 5> 抲疔垾曹蒁扯剔加 圼击欃圼剘槠 黓叜彚詐樉概 埮樉概劆澰 赼礣昻藯勠 篞昱幝剨礚懬戳礫 瓚藵壜 窩癚邮曹匈榒 勓埥礫抦剔 堇劵詐椹郞瘭鑞 哴噂潞欣 禆杢刅掇 瀳瀳踬腡 嫖渔澰 歬(공란) 嘁樉瘭嬣礫抦剔 椹郞瘭垶剉 彋彦刨 竳瘨萀欄垶罄 曼潟概踓勠 塅従鎣潞瘭剉劆 礫制 巗榒畠(晆灵) <자료 5>는 695년(숙종 ) 巗榒畠이 黓叜彚에게 자기 집 幝 剨礚이 懬戳 한 밭 을 매도한다는 매매명문이다. 위 명문의 기상 은 懬戳 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앞서 밝힌 노비기상전의 표현형식과 동일하므로 踓刅(懬刅) 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생각 된다. 이 글에서 분석하는 문건 566건 중에 기상이란 용어가 보이는 문건은 이 문 건이 유일하므로 제주지역 내에서 노비의 전답기상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4) 매매 수단 제주지역 매매명문상에 등장하는 매매 수단은 크게 실물화폐인 懾欣, 縻癤, 동물 과 금속화폐인 霝概, 기타로 나눌 수 있다.96) 대출에 대한 상환 수단으로 토지가 매매 되는 경우와 매매수단이 기재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제주지역 토지매매 시 거래 수 踓刅 과 관련하여 박노욱은 기상 을 소유권의 이전, 즉 究踓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欯齪樬, 欘龩樽勞 域概櫳 刅의 礣躙溝踉-嬚嬫 嵯幝概踓를 중심으로, 歬榴彳插 68,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99, 8쪽. 96) 앞서 언급하였지만 동전이 郞邲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매매수단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실 제 거래수단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치척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매매물의 가격을 표시한 부분에 매물가격을 환산하여 그에 상응하는 물건으로 거래한 다는 조건이 없는 한 매매가를 나타내는 화폐(실물 혹은 금속)를 매매수단으로 파악하였다. 7

藏書閣 단을 살펴보면 7세기에는 포목과 곡물이 制를 이루는 상태에서 동물도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다. 8세기에 들어서면 포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지며, 9세기 에도 포목은 주요한 매매수단이지만 이 시기에는 동전인 霝概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자세한 내용은 <표 4>를 통해 살펴보겠다. 표 4 시기별 토지매매 수단 懾欣 구 분 縻癤 勱 % 6세기 囐癤 勱 % 기타 霝概 勱 % 勱 % 勱 % 합계 7세기 9 46 5 9 9 6 8세기 7 4 3 48 3 63 5 7 67 9세기 9 5 3 6 4 7 합 계 58 48 5 7 4 <표 4>에 따르면 제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거래 수단은 懾欣(58건)이다. 육지 에서 토지매매 거래수단으로 霝概이 일반화되는 8세기에도 제주에서는 포목이 차지 하는 비중이 4%이고 9세기에는 5%로 시기가 내려갈수록 더 증가하는 양상을 보 인다. 이 때 사용된 포목은 크게 欣膺(53건)과 ꊶ懾(4건), 명주(건)로 구분되며, 欣 膺은 다시 潞欣, 穸欣, 欣膺, 脫欣, 潠欣, 膺懾, 懾97)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도 주로 쓰인 것은 潞欣(7건)이고 9세기에는 穸欣(55건)도 많이 사용되었다.98) 동물이 매매수단으로 등장하는 사례는 총 5건이며, 8세기에는 63%로 큰 비중 을 차지하다가 9세기 4%로 59%나 급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용된 동물은 癖( 97) 懾를 欣膺으로 분류한 것은 같은 시기 동일 지역 내 매매에서 ꊶ懾와 懾를 구분하였기 때문에 懾는 목면에 포함 시켰다. 98) 각 시기별 포목의 사용현황을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구 분 8 欣 膺 소계 ꊶ懾 膺 脧 합계 潞欣 欣 穸欣 欣膺 脫欣 潠欣 緤欣 膺懾 哴懾 懾 7세기 7 3 4 8세기 9 6 3 3 3 7 9세기 7 55 9 9 합 계 7 9 55 5 4 4 53 4 58

鎭癖, 癖, 鏻癖로 표기되고, 鶧는 峪髇鶧, 髇鶧, 鷰骿鶧, 鸉鶧, 鶧로 기재되어 있다. 암 수와 나이만 표시되고 癖鶧에 대한 구분이 없는 사례도 있다. 곡물이 거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총 48건으로, 곡물은 7세기 46%, 8세기 48%로 비슷한 수치를 보이다 9세기 6%로 4%로 감소되는 양상을 띤다. 이때 이용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건) 鶧(건)가 대부분이며 盒와 眥가 사용된 예도 있다. 癖는 骿癖와 髇癖, 峪髇癖, 된 곡물은 肚, 縻, 窩癚, 窩縻, 忡縻, 髗縻, 崥, 崢ꊠ 등이다. 이외 기타는 총 7건으로 窩癤인 髇ꉺ窩과 歺彋(歺歋), 豞欈, 嗄崥 등이 거래수단으 로 사용되었다. 9세기 토지매매에 있어서 현저한 변화는 郞邲哴를 동전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는 점이다. 동전인 霝概은 이 글에서 살펴본 제주지역 매매명문 중에서는 9세기 중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지역별로는 의귀리 건, 온평리 7건, 금악 리 건, 곽지리 건, 기타 9건으로 총 건의 예가 확인된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제주에서 토지매매명문에서 霝概의 등장은 육지에 비해 대략 7년 정도 늦어진다. 이는 단지 토지매매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9세기 중반에 이르 기까지 전반적으로 제주도 내에서는 동전이 매매수단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846년(헌종 ) 5월 초일 제주목사가 올린 皻奎99)에도 나온다. 곧 欧惱刈 礣霝那 勞礣懾欣 이라 하여 제주도는 霝那 곧 동전은 사용되지 않고 대신 포목이 쓰 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전이 유통되기 위해서는 동전을 수용할 수 있는 유통 경제적 기반과 동전유통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을 검토해 봄으로써 제주도에서 동전이 9세기 중엽까지도 유통되지 않은 원인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제주도 내에서의 동전 頿鐛 여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73년(숙종 39) 이후 제주도에 흉년이 계속되어 막대한 양의 곡식을 제주도에 획급하게 됨에 따라 비 축곡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79년(숙종 45) 제주의 진휼품으로 곡 식 대신 화폐를 활용하는 방식을 논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柋躺 馏鞨鑛은 제주도 99) 제주계록 은 헌종 년(846) 월 6일부터 고종 년(884) 월 6일 제주목에서 조정에 보고 했던 奎概을 비변사에서 軿雿한 책이다. 995년 서귀포시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실어 출간하였다. ) 锨劣蚘, 조선후기 功珚各의 설치와 운영-8세기 莀闇煡各 사례를 중심으로, 이대사원 8, 이대사학회, 995. 9

藏書閣 에 4, 5만냥 정도의 화폐를 주전하여 비치해 두었다가 흉년에 제주민들에게 나누어주 면, 그들이 그 돈으로 현지나 육지의 곡물을 구입하는 방식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제주에서 주전을 하게 되면 폐단이 많을 것이라는 대신들의 반대로 주전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75년(영조 )에도 진휼을 위해 제주에 곡식을 보내는 대신 화폐를 주는 방식이 논의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주전 계획 자체가 취소되면서 실행되 지 못한다. 따라서 제주에서는 동전유통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頿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동전유통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尯懽가 제주도에서 형성되었는지 살펴보 겠다. 이형상의 萸莀奎雿 3)과 8세기 말에 간행된 제주대정정의읍지,4) 이원조 의 탐라지 5)에는 9세기 중반까지도 도내에 장시가 개설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 온다. 제주도는 세기 초반 오일장이 정기화되기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시장기능이 발 달하지 않았던 것으로 현재까지 보고 있다.6) 이는 조선시대 제주사회가 자급자족 적 생산과 소비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제주특유의 물자교역 방식에서 비롯된 것 으로 여겨진다. 조선정부는 제주도에 흉년이 들 때마다 육지의 곡식을 진휼곡으로 이송해 주었으 나,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제주로의 잦은 곡물 이송이 부담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제주의 물산과 육지의 곡식 교역을 주관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従 주도의 교역인 경우 도내의 산물과 육지의 곡물을 교역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고, 따라서 상인의 활동도 도내 교역이 아닌 육지와의 교역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때 가 장 중요한 거래품목은 육지로부터 들어오는 곡물이었다. 따라서 제주의 특성상 주요 한 거래는 장시가 아닌, 외부물자가 유입되는 통로인 포구를 중심으로 제주의 생산물 중에서 상품가치가 큰 것들이 육지의 곡물과 교환이 이루어졌다. 포구는 육지에서 반 입되는 상품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제주의 산간지대와 해안지 대 상호간의 물자교환도 함께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이는 별도로 장시를 개설하는 ) 비변사등록 7책, 숙종 45년 6월 8일. ) 숙종실록 권64, 숙종 45년 월 7일(병진). 3) 탐라계록, 병와전서, 467~497쪽, 欧惱鲣菍 崢祫榷驳嬫 槞甜齕ꉸ 刏甜尯懽. 4) 珚懙崢魗槇莤钌躇, 钌躇 6 제주도편, 아세아문화사, 983, 6쪽, 尯懽 甜. 5) 萸莀插 초본, 권 풍속, 钌甜尯懽. 6) 진관훈, 상공업활동과 제주여성, 제주여성사Ⅰ, 제주발전연구원, 9, 57쪽. 3

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7) 이 과정에서 현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므 로 별도의 화폐(동전)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육지와 거래하는 민 간 교역에 있어서도 유사하게 이루어졌으리라 본다.8) 한편 제주사회 내부의 상품유통은 마을 내에서 잉여물자의 상호 교환을 통하여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것보다 포구에서 교역하는 것이 제주 내부의 수요자, 판매자뿐만 아니라 외지의 상인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부족한 물자인 경우 贎邛奁을 통해 구입되었다. 보부상은 상품 집산지에서 일용품을 구입하고 각 마을을 찾아다니며 이것을 판매하였다. 이때 의 거래 방식은 물론 현물에 입각한 물물교환 방식이었다.9) 즉 제주도는 尯懽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부와의 교역이든 내부적 거래든 간 에 현물을 중심으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제주도 자체에서 頿鐛되지 도 않는 동전을 거래 수단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7세기 말 전국적으로 동전 유통을 결정한 이래 동전의 사용 범위가 사회 전 반적으로 확대되면서 각종 조세의 闌脈闊도 급증하는 상황이었지만 제주도는 邝鶧, ꋌ癖 및 각종 특산물을 현물로 징수하여 중앙에 상납하는 것이 부세운영의 중심이었 다. 이밖에 전세, 대동세 등의 수세 역시 제주도는 현물로 징수 되었다. 전세는 결당 聮 두를 수납하고 있었고, 대동세인 경우 제주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세액과 항목 이 조금씩 달리 적용되었지만 9세기 중반 제주목인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煲歌에서 는 凼에 笙蝊 8堃, 恬歌에서는 凼에 瀯蝊 坂씩을 거두었으며, 恬為歌을 가리지 않 고 濊凼에 蟗縩 坂씩을 거두어 들였다. 군역인 경우 영조 4년(738) 이후 聮 4두 를 책정한 이래 영조 38년(76) 8두 징봉을 시작으로 헌종 4년(838) 7두 승, 이후 에도 수시 감봉되어 철종 4년(863)경에는 6두로 수봉)되었듯이 제주도는 9세기 7) 이욱, 8-9세기 중반 珚懙嬫寚 奁墼那扞膎珚 발전과 성격, 국학연구 제집, 한국국한진흥원, 8. 8) 민간차원의 교역은 진상품의 상납과 함께 교역을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진상선에 綼奁이 동승하는 경우도 많았다. 진상과 교역이 결부되어 이루어지는 것은 제주만의 특징이다. 제주와 육지와의 교역에 참여하려 면 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외지인이 제주에 들어오거나 제주에서 육지로 나가 상업을 행하고자 하는 자도 모두 공문을 받은 다음에야 가능하였다. 또한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년에 차례 정도 밖에 상선이 제주와 육지 사이를 왕래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에는 従蘴이 단 척도 없어서 진상을 하기 위해서는 상선을 동원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진상선으로 징발당하면 4, 5개월이 소요되었고, 이로 인해 교역 자체가 지체되는 경우 도 있었다. 따라서 배를 소유한 이들은 진상선이 공무역에 동원될 경우 상인들의 짐도 함께 운반하여 선가를 취득하려고 하였다. 이욱, 8, 위의 논문, 59~5쪽. 9) 진관훈, 9, 앞의 논문, 57~57쪽. ) 漅劼酦 闌歬階, 欘龩掇欚 珚懙嬫寚의 椱埑黏嘱와 半瀌의 膎珚礚然, 萸莀概圑 9,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 소, 998, 8~84쪽. 3

藏書閣 중반이 넘어가는 시기까지도 현물로 부세를 거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에서는 동전 사용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Ⅳ. 맺음말 이 글은 조선후기 제주지역의 토지매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토지매매명문을 분석하였다. 분석대상 자료는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제주지역에서 작성된 토지매매명문을 중심으로 하되, 현전하는 6세기 문건도 함께 포함시켜 총 566건의 토지매매명문을 검토하였다. 제주지역 토지매매명문인 경우 양식적인 면에서는 일반적으로 명문을 구성하는 형 식적인 요소들은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 몇 가지 특이한 점을 갖고 있다. 전답소재지 표시인 경우 천자문 순서에 따른 지번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제주도에서 5세기 말 이후 양전이 실시되지 않음으로 인해 铜舞 魝闇 归詚를 단위 로 각 필지의 위치 면적 소유주를 등록하는 양안이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 진다. 대신 제주도는 소재지 마을명과, 위치 그에 따른 들판명 혹은 들판명만을 표기 하고 있다. 아울러 지번표시가 없는데서 야기되는 혼란을 막기 위해 歬赺坒園의 사방 경계 표시는 시기를 막론하고 명문에 반드시 등장하고 있다. 육지지역 매매명문에서 6세기 구체적이던 매도사유가 7세기 이후 虬髞昻藯 나 赼礣劆勠 로 정형화되는 것과 달리 제주도는 여전히 자세하게 기술되는 경향을 보인 다. 매매수단에 있어서도 제주도는 9세기 이전까지 동전이 명문상에 등장하지 않는 다. 앞 시기의 매매활성화 정도를 방증해 주는 欧概踓 에 관한 첨부 여부 역시 육지 지역에서는 7세기 필수적인 기재 사항이 되지만 제주도는 7세기 74건의 문서 중 3건에 불과할 정도로 제주도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경향을 보인다. 이는 6세기까지 도 제주도는 토지매매가 활성화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9세기에 두드러진 변화는 몇몇 문건에서 토지매매 시 전답소재지역 마을의 이름 이 새겨진 詚渔(嬑绛)를 날인한 문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호표날인의 啳棕는 철종 3년(85) 峧彋扯에 애월읍 하가리에서 간행된 峧彋榫徕鐕挊 이다. 이 鐕挊 의 내 3

鎭竞을 증인으로 삼도록 하고 있으며, 欧焙의 詚渔와 瀳归榴渔를 찍어서 문권을 작 성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鐕挊 의 내용이 적용된 사례는 85년에서 865년 사 이에 작성된 매매문서 중 건에서 나타나는데, 瀳归榴渔만 날인된 경우 礫制의 성 명 아래 부분과 매매 시 당사자간에 중요시 여기는 부분 3곳에 날인이 되어있다. 아 조선후기 제주지역 土地賣買 연구 용에 따르면 토지매매 문권을 작성할 때 礫制가 거주하는 마을의 轡瀌饲을 보증인, 울러 焙詚渔와 瀳归榴渔가 날인 되고 鎭竞이 증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焙詚渔와 瀳归榴渔 없이 증인만 鎭竞이 되거나 마을이름과 함께 瀳归榴渔가 날인된 사례가 있다. 통식이 적용된 예는 85년 이후의 명문 83건 중 건에 불과하므로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규정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며, 당시 穸概踓 거래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일부 몇몇 토지소유 관념이 강한 邲埒萀들이 확실한 공신력 확보를 위해 마을 내 권 위 있는 자들을 내세워 증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지역 토지매매는 논과 밭 모두 월에서 이듬해 3월 사이에 활발하게 이루어 졌고 가장 많이 매매가 일어난 欃은 월이다. 이는 밭농사 지역인 제주도 농작물 대 부분의 파종이 4월에 시작되고 월에 수확하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농한기에 매매 가 집중됨을 알 수 있다. 토지의 매도사유로는 邳嗵, 요용처, 흉년, 환상, 가난, 장례비 말 부세 마련 등이 있 으며, 이 중 邳嗵이 가장 많은 매도사유로 등장하고 있다. 제주의 특색을 보여주는 사 례로 堇虭鶧 마련이 나온다. 堇虭鶧는 목자가 기르던 말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楀崬 鶧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말로 변상하게 하는 것으로 판정기준이 애매하여 従에서는 이를 珦掰하기 쉬웠고, 그로 인해 목자들은 파산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동 색마를 마련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매매하게 된 것이다. 매도인은 양반, 양인, 노비로 나누어지며 가장 많이 토지매도에 나서고 있는 것은 양인층이다. 이 글에서 분석한 매매명문 중 노비가 郞制로 등장하는 것은 46건이며, 이중 사노비의 것은 6건이다. 노비가 상전을 대신하는 사례는 이 글에서 분석하는 매 매명문 566건 중 9건에 불과하여 노비를 통한 대리매매가 제주도에서는 일반적인 현 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도자가 여성인 경우는 566건 중 7건으로 %를 차지하는데, 7세기 이후 육지지역에서 여성매주가 등장하는 사례가 극히 적다는 연 구결과에 비하면 제주도는 여성이 매매에 참여하는 경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주도의 생활여건상 바다에 나가 죽는 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재한 남성을 대신 하여 여성이 가정경제의 운용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