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 - 경상도지역을중심으로 - 윤경진 1. 머리말 2. 巨濟島지역의僑郡 1) 巨濟縣 2) 松邊縣 鵝洲縣 3) 溟珍縣 3. 南海島지역의僑郡 1) 南海縣 2) 蘭浦縣 平山縣 興善縣 4. 연안지역의僑郡 : 梁州 5. 맺음말 1. 머리말 고려의지방제도는外官과邑司의행정적상하관계를바탕으로편성된主縣 - 屬縣體系를근간으로하고있었다. 이체계는외관의增置에따라점차수령중심의운영체계로전환되어나갔다. 이와함께兩界의군사적운영체계가해소되어南道와같은체계로전화되어나감으로써일원적인지방제도가자리잡게되었다. 이과정은조선초기까지이어졌다. 1) 1) 이러한추세속에고려후기의지방제도는전기이래의체계가유지되는한편에서새로운운영이모색되는복합적인양상을띠고있었다. 그런만큼이시기지방제도에대한다각적인검토가요구된다고할것이다. 이작업은고려지방제도의성격을구체화하는방안인동시에조선지방제도의역사적의미를이해하는데에도불가결한토대가된다. * 이논문은 2006 년도정부재원 ( 교육인적자원부학술연구조성사업비 ) 으로한국학술진흥재단의지원을받아연구되었음 (KRF-2006-321-A00218) 1) 尹京鎭, 2000 高麗郡縣制의構造와運營,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80 韓國文化 40 하지만이에대한연구성과는그리많지않다. 주요연구성과를살펴보면, 우선조선지방제도가성립하는前史로서고려후기의변화내용을정리한연구가있다. 2) 2) 이것은고려후기지방제도의모습을전반적으로정리하였다는점에서이분야의선구적인업적으로평가되지만, 조선지방제도를준거로앞시기를조망했다는점에서기본적인한계를가진다. 이외에鄕 部曲의변질과정에대한연구, 3) 3) 중기부터파견되기시작한監務에대한연구, 4) 4) 14세기군현구조와외관제에대한연구 5) 5) 정도가이루어졌을뿐이다. 한편아직연구자의손길이닿지않은부문도발견되는데, 그중특히주목되는것이바로僑郡이다. 교군이란특정군현이원래설치되었던지역에서벗어나다른지역에임시로설치운영되는것을말한다. 교군의이념적연원은중국고대에諸侯가자신의領地를잃고다른제후에게의탁하는데서찾을수있다. 이것이군현제하에서원용된것이바로교군이라할수있다. 교군은전란등으로군현주민이대규모로이주하게될때, 이들을관할하는행정관부까지함께이동함으로써설치된다. 6) 6) 곧주민이다른군현으로이주하였다고해서그군현의주민으로흡수되는것이아니라종전과마찬가지로군현으로유지되며행정적으로분리되어있다는것이다. 군현의구성요소가주민과관부, 영역이라할때교군은이중영역의요소가빠진형태라할수있다. 교군은원칙적으로故土를회복하면다시그곳으로돌아가도록예정되어 2) 李樹健, 1984 朝鮮初期郡縣制整備와地方統治體制,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3) 朴宗基, 1980 高麗時代鄕 部曲의變質過程, 韓國史論 6 ; 1990 高麗時代部 曲制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4) 元昌愛, 1984 高麗中 後期監務增置와地方制度의變遷, 淸溪史學 1 ; 羅恪 淳, 1988 高麗時代의監務에대한硏究, 閔丙河停年記念論叢 ; 金東洙, 1989 고려중 후기의監務파견, 全南史學 3 ; 이인재, 1990 고려중 후기지방 제개혁과감무, 外大史學 3. 5) 張東翼, 1983 高麗後期守令任命實態 : 14세기慶州 永州 安東 羅州先生 案을중심으로, 경북대학교논문집 36 ; 박종기, 1994 14세기군현구조의변동 과향촌사회, 14세기高麗의政治와社會, 민음사 ; 윤경진, 2003 고려후기 先生案자료를통해본外官制의변화, 國史館論叢 101. 6) 교군은해당치소가자신의영역범위를넘어다른군현지역으로들어간다는점 에서동일군현영역안에서치소를옮기는것과는성격을달리한다.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81 있기때문에그운영은임시적성격을띨수밖에없다. 또한교군은대개인구가격감하고생산력기반이취약해지기때문에수취부담에서도명백한한계를가진다. 정부와주민모두여건이허락하는대로원래자리로돌리려는노력을하지만, 교군상태가장기간지속되고원래의자리에복구되기도어려운경우에는폐지되어다른지역에통합될수도있다. 곧교군은복구와폐지라는두가지방향으로연혁을밟게되는것이다. 교군의대표적인예는중국南北朝시대에漢人왕조가남쪽으로이동하면서당시州縣들도함께이동하여운영된것을들수있다. 7) 7) 우리나라에서는고려후기에교군의사례를찾아볼수있는데, 주된원인은바로倭寇의침탈이었다. 원간섭기말부터급증한왜구로인해서 남해島嶼및沿岸지역의군현주민들이극심한피해를입게되었다. 이에정부에서는주민들을내륙지역으로이주시켰다. 도서와연안지역은왜구의침입에가장취약하였기때문에이들을내륙지역으로이주시킨것인데, 이로인해교군이발생하게된것이다. 8) 8) 이러한설치경위에서드러나듯이교군의존재는영역보다는주민쪽에통치의중심이놓이는전근대지방제도의기본적인특성을잘보여주고있다. 따라서이에대한검토는군현제의운영원리를이해하는데에도도움을줄수있다. 특히고려말조선초의교군은그연혁이동시기에진행되는군현제의전면적인개편과정과도맞물려있다. 이점에서교군에대한검토는이시기지방제도변화를깊이있게이해하는데중요한의미를가질수있다. 본고는이러한인식에기초하여고려말조선초에설치되어재편과정을겪 7) 중국남북조시대교군의설치에대해서는朴漢濟, 1996 東晉 南朝史와僑民 : 僑舊體制 의形成과그展開, 東洋史學硏究 53 ; 박수정, 1999 東晉시대僑州郡縣制의성립, 中央史論 12 13 합참조. 8) 이에앞서몽고의침입으로西北面지역의州鎭이海島에入保하였다가出陸하는과정에서일부僑郡이발생하였고, 전쟁후에는東北面북부지역이몽고 ( 元 ) 에몰입되면서이지역에있던州鎭들이남쪽으로이동하여역시僑郡으로운영된일이있었다. 이때의교군은관련사적이자세하기않은데다가양계라는지역적특성도개재되어있어그내용이더욱복잡한양상을띠고있다. 반면왜구로인해발생한남도지역의교군은내용이구체적이고자료가상대적으로분명한만큼이에대해먼저검토하려는것이다. 양계의교군에대해서는이어지는작업을통해차례로분석할예정이다.
182 韓國文化 40 는교군에대해검토하려는것으로, 우선경상도지역에서발생한사례를중심으로논의를진행할것이다. 이는다시거제도지역, 남해도지역, 그리고연안지역등세권역으로나누어진다. 이들지역에서교군의사례를추출하고, 9) 9) 이들이최종복구또는폐지될때까지밟게되는연혁과정을분석할것이다. 그리고이과정에서발견되는지리지연혁의오류에대해보정작업을병행할것이다. 10) 10) 한편같은시기전라도및충청도지역등에서발생한교군에대해서는후속논고로정리할것이다. 2. 巨濟島지역의僑郡 고려전기거제도에는縣令官인巨濟縣과그속현으로溟珍縣 松邊縣 鵝洲縣등모두 4개의군현이설치되어있었다. 이중명진현에는뒤에監務가설치되어행정체계가분리되었고, 나머지두군현은고려말까지거제현의속현으로유지되었다. 왜구의침입으로거제도일원도심한피해를입게되었고, 이들군현은왜구를피해내륙으로이동하였다. 먼저거제현의僑寓연혁을살펴보고, 이를바탕으로나머지군현의교우양상을정리하기로한다. 9)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邑城과樓亭등의항목에는그와관련하여작성된記文이다수수록되어있다. 이러한글은대개서두에서해당군현의연혁과관련하여특기할사항을제시하고있다. 이중도서및연안지역의군현으로서僑寓를경험한경우에는그사실을자세히제시하고있어이를통해교군의사례와구체적인연혁을확인할수있다. 경상도도서및연안지역의군현중에서지리지연혁에僑寓사실이나오는것은巨濟縣과溟珍縣, 南海縣등세군현뿐이다. 그런데문집자료를통해梁州의교우사실이확인된다. 그밖에거제현의속현인松邊縣과鵝洲縣, 남해현의속현인蘭浦縣과平山縣은신증동국여직승람의古跡항목과主縣과의행정관계등을통해교우사실을확인또는유추할수있다. 10) 교군에대한검토는조선초기연혁까지포괄하므로세종실록지리지의연혁을주된자료로활용하고필요에따라고려사지리지및新增東國輿地勝覽의연혁을參用할것이다. 또한병합된교군이분리복구되는연혁이세종실록지리지에는나타나지않는경우가있는데, 이런경우에는여타자료를통해보정하였다.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83 1) 巨濟縣 세종실록지리지에정리된거제현의고려말조선초연혁은다음과같다. 1 元宗十二年辛未 < 元至元八年 > 因倭失土僑寓居昌之加祚縣 2 本朝太宗甲午 ( 태종 14, 1414) 合于居昌號濟昌縣 3 乙未 ( 태종 15, 1415) 復析爲居昌縣 4 今上四年壬寅 ( 세종 4, 1422) 復還舊島以四品以上充知縣事 위의연혁 1을보면, 거제현이교군으로운영되기시작한것은원종 12년의일로되어있다. 또한거제현이교우하던加祚縣의연혁에도 元宗辛未移屬巨濟 라고하여같은시점을명시하고있다. 11)11) 그러나고려의연안및도서지역이왜구의침탈로피해를입게되는것은충정왕때부터시작된일이었다. 倭가固城 竹枺 巨濟를노략질하니合浦千戶崔禪와都領梁琯등이싸워격파하고 300여급을斬獲하였다. 倭寇의침탈이이때부터시작되었다. 12) 12) 거제 고성지역은대마도와최단거리에있는지역이기때문에가장먼저왜구의피해를입었다. 위에서그시점이충정왕 2년으로되어있음에비추어원종 12년에거제등이왜구로인해교우하게되었다는것은수긍하기어렵다. 그런데신증동국여지승람의加祚縣연혁에는다음과같이되어있다. 원종때거제현이三別抄의난을피해서이곳에治所를두고僑寓하였는데, 그대로거제라일컬었다. 13) 13) 곧거제현의교우는왜구때문이아니라삼별초때문이라고적고있는것 11) 高麗史地理志의巨濟縣및加祚縣연혁도동일하다. 12) 高麗史권 37 世家 37 忠定王 2 년 2 월 倭寇固城竹枺巨濟合浦千戶崔禪都領梁琯等戰破之斬獲三百餘級倭寇之侵始此 13)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居昌郡屬縣加祚縣 元宗時巨濟縣避三別抄之亂僑治于此仍稱巨濟
184 韓國文化 40 이다. 진도에들어간삼별초의영향력이남해안일대에미친것은사실이지만, 그기간이불과몇년에지나지않았다. 이런상황에서경상도쪽의도서군현이삼별초를피해內地로들어갔다고보기는어렵다. 이연혁은다른자료에서왜구때문이라고한것을가조현연혁에서만삼별초때문이라고고친결과로보아야하는데, 이는원종 12년이라는시점을의식한것이다. 곧이시기에는왜구로인한교우를상정할수없기때문에삼별초로고쳤다는것이다. 그런데삼별초를교우의원인으로볼수는없으므로그대로왜구때문이라고보아야한다. 대신거제의교우시점을고쳐서이해해야할것이다. 이것은다음기록을통해뒷받침된다. 邑城 ( 李甫欽의記 ) : 前朝말년에기강이무너지고섬오랑캐가침범하니, 거제백성이옛땅을버리고居昌경내에僑寓한지여러해가되었다. 14) 14) 위의기록에따르면거제현이교우한것은 前朝말년 으로표현되어있다. 원종 12년을두고이렇게표현했다고보기는어렵다는점에서볼때, 이는실제왜구가극성을부리던공민왕대이후로보아야할것이다. 이러한근거에서원종 12년은다른연기를잘못적은것으로판단되는데, 사실지리지의연혁에는간지의오기 오독으로인한오류가적지않게발견된다. 15) 15) 이경우도그러한관점에서몇가지가능성을생각할수있다. 우선같은간지에해당하는공양왕 3년으로비정해볼수있다. 하지만후술할자료에서나타나듯이공양왕대에들어서면왜구의피해는점차수그러드는추세였다. 따라서이시점에비로소거제현이내지로옮겼다고보기는어렵다. 그렇다면간지의일부를잘못읽었을가능성이제기된다. 이경우거제현의교우는辛丑年 ( 공민왕 10, 1361) 정도로비정해볼수있다. 16) 인접한남해현 14) 新增東國輿地勝覽권32, 巨濟縣城郭邑城李甫欽記 前朝之季紀綱陵夷島夷侵陵巨濟之民棄其舊土僑寓居昌之境者有年矣 15) 고려사지리지연기정리의문제점에대해서는尹京鎭, 1999 高麗史地理志의연혁정리방식에대한비판적검토 : 高麗初 의연기비정과관련하여, 奎章閣 22 참조. 16) 辛卯年 ( 충정왕 3, 1351) 으로볼수도있으나왜구의침탈이시작된이듬해곧바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85 이공민왕 7년에출륙하여교우하게됨을감안하면거제현의교우시점을공민왕 10년으로잡는것은무리가없다. 이와함께가조현의이속시점과통합적으로인식되었을가능성을생각할수있다. 서로다른시점의연혁을하나로통합하여인식하는것또한지리지에서자주발견되는오류의하나이다. 17) 17) 일단가조현의연혁에서이속시점으로되어있는원종 12년은 1주갑뒤인공양왕 3년으로보고이시점에거제현의교우까지통합인식되었다고볼수있다는것이다. 이경우거제현의교우는이보다앞선시점이되어야한다. 교우는다른지역에임시로있는것이다. 그런데교우지역을교군에이속, 혹은통합시킨다는것은곧영역을마련하여안정성을부여하는조치이다. 왜구로인한전란상황에서불가피하게이루어진교우에행정적재편이라는조치가바로수반되기는어렵다. 이는교우가상당시간지속되면서그에따른지방통치의난점을줄이기위한조치로이해해야한다. 이때참고되는것은공양왕대부터新定監務가파견되면서속현을이속해주거나두군현을兼官으로운영하는방식이두드러지게나타난다는점이다. 18) 18) 가조현 ( 속현 ) 을本縣에교우중이던거제현 ( 현령관 ) 에이속시킨것은속현에감무를설치하면서인접한속현을이속시킨것과같은원리를담고있다. 따라서이당시조치에교군지역도포함되었다고보는데는무리가없다. 그렇다면당초 辛未 라는연기는가조현의이속내지병합을나타내던것이었을가능성이있는데, 이는공양왕 3년에해당한다. 결국공민왕대에거제현이가조현지역에교우하게되었고, 공양왕대의군현제개편과정에서가조 로교우하게되었다고보기는어렵다. 17) 대표적인것이고려사지리지에보이는 高麗初更今名來屬 이다. 종래이연혁을하나의시점으로보고읍호변화를통해來屬의시점을추정하기도하였다. 그러나이것은연기정리방식의오류로파악된다. 곧태조 23 년으로비정되는 更今名 의시점과현종 9 년으로규정되는 來屬 의시점이자료상드러나지않을때각기 高麗初 라는막연한연기로처리된다. 이두연혁이겹친경우선후관계를판단할수없어두연혁을모두하나의 高麗初 로묶어서술하였다는것이다. 따라서이연혁은구문으로는하나의시점으로되어있지만, 내용은시점이다른두연혁으로나누어보아야한다 ( 윤경진, 1999 앞의논문 ). 18) 공양왕대의新定監務에대해서는尹京鎭, 1991 朝鮮初期郡縣體制의개편과運營體系의변화, 韓國史論 25 참조.
186 韓國文化 40 현이거제현으로이속되었다고정리할수있다. 이것을지리지에서는하나의연혁으로인식하였고, 다시연기를원종대로올려비정하는오류를범하였던것이아닌가한다. 19)19) 한편다음자료는거제현이가조현에교우할당시의영역인식을반영하고있다. 觀音窟, 津寬寺, 臺山上元寺, 巨濟見庵寺에서매년 2월 15일에행하던水陸齋를앞으로정월 15일에행하는것을定式을삼도록하라. 20) 20) 위에서언급된견암사는거창군牛頭山 ( 가야산서쪽줄기 ) 에있던사찰이며, 우두산은가조현동쪽에위치하고있었다. 그런데이사찰의소재지가 巨濟 라고표현된것은바로거제현이가조현지역에교우하고있는상황에서이지역에대한인식이거제를준거로삼고있었던데따르는결과로해석된다. 전술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가조현연혁에서 그대로거제라일컬었다 라고한부분은바로이러한사정을나타낸것이다. 당시거제현이교우하고있던가조현은본래陜州의속현으로편성되어있다가고려후기에居昌郡으로이속되었다. 고려말조선초에이르면속현은군현으로서의단위성이거의탈각되고소속군현의영역으로간주되면서점차흡수통합되고있었다. 현령관인거제현이가조현에교우하게되면서가조현은거창군이아니라사실상거제현의영역으로전환되었을것인데, 가조현연혁에서 移屬巨濟 로표현한것은이러한사정을반영한것으로해석된다. 한편연혁 2를보면, 거제현은태종 14년에居昌縣과병합하여濟昌縣이라개칭한것으로되어있다. 이조치는당시시행된군현병합책이일환으로시행된것이었다. 21) 21) 당시정부는廩祿절감을위해군현의규모가크지않은인 19) 교우시점의간지오독으로인해두연혁을하나로인식하였던것이아닌가한다. 물론간지오독을따로상정하지않더라도남해현의교우시점이공민왕대라는점에비추어거제현의교우를공민왕대의일로보는것은가능하다. 20) 太宗實錄권27, 태종 14년 2월庚戌 觀音窟津寬寺臺山上元寺巨濟見庵寺行每年二月十五日水陸齋今後行於正月十五日以爲式 21) 조선초기군현병합책의전개에대해서는李樹健, 1984 앞의논문 ; 金東洙, 1990 조선초기의군현제재편작업 : 군현병합및직촌화작업을중심으로, 全南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87 접군현을병합조치하였다. 이과정에서당시가조현에교우중이던거제현도종래가조현이속해있던거창현과병합된것이다. 그런데태종 14년의군현병합은이듬해대부분원상태로환원되면서실패로끝났다. 22) 22) 이때연혁 3에보이듯이거제현은거창현과다시분리되었고, 거제도로환원될때까지계속가조현지역에교군으로남아있게되었다. 그렇다면거제현이교우하는동안거제도지역의상황은어떠했을까? 처음왜구의노략질로주민이흩어지고고을을내륙으로옮기면서거제도지역은황폐해졌다. 조선건국후왜구의기세가잦아들면서거제도등지에인구가유입되기시작하였는데, 세종즉위당시거제도등지의상황은다음과같이설명되고있었다. 巨濟와南海두섬은왜적이다니는곳인데, 근래賊變이가라앉았습니다. 이에人民이役을피해두섬으로들어가니남해가 200여호, 거제가 360여호입니다. 만일변고라도있으면반드시노략질을당할것이니, 두섬에들어가사는것을금하지않는다면당연히守城軍을두어방비를엄중히해야할것입니다. 23) 23) 위에서세종즉위당시에이미두섬에는적지않은주민이들어가살고있었음을알수있다. 이지역은군현이설치되지않았으므로주민은역의부담을피할수있었고, 이때문에왜구의활동이뜸해지자많은인구가유입되었던것이다. 따라서정부로서도원래대로거주를금하지않을것이라면왜구방비를위한대책을마련할필요가있었다. 수성군의주둔은자연군현의복구를전망하는것이었는데, 당시건의는논의를거쳐목책을설치하는것으로귀결되었다. 하지만거제도등지에주민이늘어나고생산이이루어지면다시이를노린왜구가기승을부릴수있었으므로주민의疏開가필요하다는주장도여전히제기되고있었다. 세종 2년경상도관찰사는다음과같이건의하였다. 史學 4 참조. 22) 太宗實錄권 29, 태종 15 년 4 월癸亥 23) 世宗實錄권 1, 세종즉위년 8 월丙申 巨濟南海二島倭賊往來之地近年以來賊變寢息因此人民避役于二島南海二百餘戶巨濟三百六十餘戶萬一有變則必爲所掠若不禁二島居民則當置守城軍以嚴守禦
188 韓國文化 40 도내의巨濟 南海 昌善의세섬에개간한田地가모두 1,130여結인데, 부근각고을의人民이몰래들어가농사를짓는사람이많습니다. 만약賊變을만나면노략을당할까우려됩니다. 앞으로백성이들어가농사짓는것을금하십시오. 24) 24) 위의주장은거제도등지에다시倭變이생길것을우려한것이었는데, 上王 ( 태종 ) 은田地가많은곳에한하여木柵이나土城을만들고, 백성이무기를가지고들어가서농사를짓게하되포구에兵船을배치하여수호하도록하였다. 정부로서도이미많은주민이경작하고있던사정을무시할수없었던것이다. 다만전지가적은곳은경작을금하여수호의효율성을높이도록하였다. 한편이해 11월에는태종의명으로거제도에營田이설치되었다. 25) 25) 영전은船軍으로하여금전지를경작하도록한것인데, 이를侍衛軍으로대체하면서폐단이많아졌다. 이때문에 2년뒤인세종 4년에영전이폐지되었다. 巨濟古縣사람과전부터왕래하면서田地를경작하던沿邊州郡의백성들을모두섬안으로옮기고, 그營田은혁파하여그들에게분급하여농사짓게하고조세를면제하십시오. 26) 26) 위의조치는결국거제도에주민의입주를공식적으로허가하는것이었다. 巨濟古縣人이란곧내륙에교우하고있던거제현주민을말하는것이며, 연변주군의백성은전술한세종즉위년기록에서언급된사람들이다. 영전을혁파하여이들에게나누어준다는것은궁극적으로거제도에고을을복구하는것을의미하였다. 거제현연혁의 4에서세종 4년에 復還舊島 라고한것은바로이조치를가리킨다. 그런데이때에는종전과같이현령이설치된것이아니라 4품이상으로知縣事를임명하도록하였다. 이조치는왜변을막기위해수령에게군사적기능을겸하도록하려는것이었다. 도서군현과연안군현의주요포구에는 24) 世宗實錄권 7, 세종 2 년윤정월丙申 道內巨濟南海昌善三島墾田凡一千一百三十餘結附近各官人民多潛入耕稼如遇賊變被掠可畏乞今後禁民入耕 25) 世宗實錄권 10, 세종 2 년 11 월庚寅 26) 世宗實錄권 15, 세종 4 년 2 월壬子 巨濟古縣人民及在前往來耕田沿邊州郡之民幷令移入島內革其營田分給耕稼蠲免租稅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89 萬戶가설치되어방어기능을담당하고있었다. 거제도의주요포구에도만호가있었는데, 바로이들이도내의영전개발을담당하고있었다. 거제도外面栗浦의田土는河淸浦와加耳瑟浦에사는사람에게예전처럼경작하는것을허락하고, 玉浦 永登浦萬戶에게살펴수호하도록하십시오. 27) 27) 위의기록은세종 3년의것으로, 거제도지역이영전으로개발되고있던시점의상황을보여주고있다. 여기서군현이설치되기전주민의전토경작에대해만호가고찰수호하도록하였음을알수있다. 후술할남해도의영전개발도역시萬戶가관리를담당하고있었다. 28) 28) 이지역에군현을설치하면서만호로하여금수령을겸직하는형태로운영한것이다. 이는물론왜적방비등군사적기능이중요했기때문이었다. 만호는 4품으로서 6품인현령보다상위였기때문에그직함을현령대신知縣事라고하여구분하였다. 29) 29) 군현복설에이은후속조치로서거제에새로이주한사람 [ 新徙人 ] 에게종자와식량을營田의생산물로지급하도록하였고, 30) 30) 이듬해에는이들이경작하는전지에대해조세감면을규정하였다. 곧熟田은첫해에전부면제하고다음해에는반을거두고 3년이후에는전부를거두도록하고, 새로개간한곳은면제기간을 1년추가하도록한것이다. 31)31) 거제현이복구된후治所의이동이논의되었다. 32) 32) 복구과정에서자리잡은治所는원래의古邑지역이아니었던것으로보인다. 세종 7년병조에서는거 27) 世宗實錄권 53, 세종 3 년 7 월己丑 巨濟島外面栗浦之田聽河淸加耳瑟浦接居之人仍舊耕作令玉浦永登浦萬戶考察守護 28) 世宗實錄권 53, 세종 13 년 7 월己丑 29) 만호의상위직인同僉節制使는종 4 품이었다. 그리고僉節制使등 3 품이상이현의수령을겸할경우에는判縣事라하였다. 이제도는조선초기에변경과도서지역의방어기능을강화하기위한것이었다. 조선초기군사지휘관의수령겸직에대해서는따로검토할예정이다. 30) 世宗實錄권 16, 세종 4 년 4 월庚寅 31) 世宗實錄권 21, 세종 5 년 8 월庚戌 32) 조선초기지방제도개편에과정에서치소의이동도중요한사안이었다. 이에대해서는金東洙, 1992 조선초기郡縣治所의移設, 全南史學 6 참조.
190 韓國文化 40 제현의현재치소가좁고지대가낮아적변에대응하기어렵다고지적하고, 고읍지역으로옮길것을청하였다. 33) 33) 이어거제도를둘러보고온敬差官은沙月浦지역이읍성을설치하기에적합하다고보고하였고, 세종은이를 34) 따랐다. 34) 세종 9년거제현주민의狀啓중에는저간의치소이동이정리되어있다. 壬寅年 (1422, 세종 4) 에 ( 고을을 ) 다시세울때深浦의水月平에각浦의船軍으로목책을설치하고잠시官舍를세웠는데, 丙午年 (1426, 세종 8) 봄에다시沙等里를살펴邑을옮기고비로소성곽을쌓았습니다. 35) 35) 위의내용에서세종 4년거제현이복구될때에는水月平에임시로머물렀고, 이어세종 8년에沙等里로이동하였음을알수있다. 36) 36) 이들이위의세종 7년기록에서언급된현치소와사월포에각각해당한다. 거제현은문종초다시한번읍치를옮기게된다. 전술한거제현읍성의李甫欽記에는다음내용이보인다. 世宗께서즉위하신지 5년인壬寅年에거제백성이本土로돌아가기를원하므로성곽을쌓아백성을살게하고守護를배설하여외적을막도록명하였다 ( 중략 ) 지금우리主上殿下 ( 문종 ) 께서議政府右贊成晉陽相公鄭苯에게음양을살피고샘물을보아옛治所남쪽 10리에치소를옮겼다. 37) 37) 위의내용에서거제현이세종즉위 5년, 곧세종 4년에본도에복구되면서성곽이축조되었고, 이어문종초에다시읍치가이동하였음을알수있다. 이 33) 世宗實錄권27, 세종 7년 2월丁卯 34) 世宗實錄권30, 세종 7년 10월辛巳 35) 世宗實錄권35, 세종 9년정월壬寅 壬寅年復立之初於深浦水月平以各浦船軍設木柵暫立官舍丙午春更相沙等里移邑始築城郭 36) 세종 7년말에읍치설치지역으로결정된沙月浦가곧沙等里인것으로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거제현산천조에는沙等浦가보이는데, 이곳은치소에서북쪽 10리에있었다. 후술하듯이문종즉위년에거제현의치소를옛치소의남쪽 10리로옮겼는데, 여기서사등포가옛치소였음을알수있다. 곧沙月浦와沙等浦는동일지명의이표기인것이다. 37) 新增東國輿地勝覽권32, 巨濟縣城郭邑城李甫欽記 世宗卽位之五年壬寅巨濟之民願還本土命築城郭奠厥民居設守護以禦其侮 ( 중략 ) 今我主上殿下命議政府右贊成晉陽相公鄭苯相陰陽觀水泉乃移治於舊治之南十里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91 에대한실록의관련기사를살펴보자. 문종즉위년 10월節制使鄭苯은다음과같이보고하였다. 신이巨濟邑城을살펴보니, 둘레가 1,916척인데, 처음에법대로쌓지않아낮고좁습니다. 반드시改築한뒤에야一島의백성이入保할수있겠습니다. 신이古丁部曲을보니地勢가넓고평탄하고골짜기가깊고은밀하며, 또우물과샘이있어경작하고살만한땅이자못많습니다. 청컨대邑城을이곳에옮겨내년 10월까지축조하는것이편하겠습니다. 38) 38) 위의기록을통해문종즉위년정분의건의로거제현의읍성을古丁部曲 ( 고정리 ) 으로옮기게되었음을알수있다. 하지만거듭된읍성의이전에대해주민의반대도있었다. 읍성을고정부곡자리로옮기는것에대해거제현주민이다음과같이上言하였다. 本邑은전에섬안의水月里에木柵을설치했으나, 지난丙午年 (1426, 세종 8) 에沙等里로옮겨관청을설치하고城池를건설하는일이戊辰年 (1448, 세종 30) 에이르러끝났습니다. 이제都體察使鄭苯이살펴정한데따라또古丁里로옮기려합니다. 본읍의人吏와官奴婢가이미모두토착하여번성한데이제고을을옮기게한다면營繕에끝이없을것입니다. 바라건대옮겨설치하지말아서民生을편안하게하시고, 만약부득이하다면뭍으로나가옮겨살게하여長久함을도모하게하십시오. 39) 39) 위의상언을통해거제현의읍치가처음 ( 세종 4) 에수월리 ( 수월평 ) 에있었고, 이어세종 8년에사등리 ( 사월포 ) 로옮겼으며, 이곳의축성이세종 30년에마무리되었음을알수있다. 이로부터불과 2년만에다시읍치를이동하게되자人吏와官奴婢의부담이커지게되었던것이다. 문종과정부는이문제를논의한결과어차피성곽을개축해야하는상황 38) 文宗實錄권 4, 문종즉위년 10 월戊戌 臣審巨濟邑城周回一千九百十六尺初不依法造築低微窄狹必須改築而後一島之民可得入保臣觀古丁部曲地勢寬平洞壑深密且有井泉可耕可居之地頗多請移邑城於此將以明年十月造築爲便 39) 文宗實錄권 7, 문종원년 5 월癸卯 本邑舊在島內水月里設木柵去丙午年移于沙等里建設館舍修築城池之功至戊辰年乃訖今因都體察使鄭苯審定又欲移于古丁里本邑人吏官奴婢已皆士著阜盛今使移邑則營繕無窮願勿移設以安民生如不得已則出陸移居以圖長久
192 韓國文化 40 이므로더나은장소로옮기는것이바람직하다고결정을내리고古丁里로옮기도록하였다. 이에문종원년 11월거제현의읍성이축조되었다. 40) 신증동국여지승람거제현고적조의고정부곡항목에서 지금의치소 라고설명된것은그결과이다. 이처럼거제현은공민왕대가조현지역에교우한후세종 4년에이르러비로소本島로돌아왔다. 그러나왜구에대비해야하는문제가상존하고있었기때문에적합한곳을찾아치소를설치하는과제가남아있었다. 이로인해거듭치소를옮긴끝에문종원년에비로소일단락을보게되었다. 이러한치소이동은교우와는다르지만, 교우에따른여파로발생한문제라는점에서교우의연장선에서이해할수있다. 2) 松邊縣 鵝洲縣 거제현의교우에수반하여그속현인송변현과아주현도함께교우하였을것이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에서두군현의연혁은 두현은사람들이모두없어져지금은直村이되었다 [ 二縣人物皆亡今爲直村 ] 라고하여궁극적으로폐지된사실만을밝히고있을뿐, 교우에대해서는언급이없다. 그러나두현의폐지는고려말조선초에진행된군현제개편의결과이며, 그에앞서이들또한僑郡으로존속한시기가있었을것이다. 이는다음자료를통해확인할수있다. 鵝洲村 : 巨濟가加祚縣에僑寓할때에, 本島안의屬縣및驛院등을가조의경내에아울러교우하게하였는데, 鵝洲縣은군동쪽 10리에있고, 松邊縣은茂村驛남쪽 5리에있으며, 烏壤驛은가조현서쪽에있었다. 주민이지금도그대로일컫는다. 41) 41) 위의기록을통해거제현이교우할때그속현인아주현과송변현도함께 40) 文宗實錄권 10, 문종원년 11 월甲子 41)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居昌郡古蹟鵝洲村 巨濟寓加祚時以本島內屬縣及驛院等倂僑置于加祚之境鵝洲縣在郡東十里松邊縣在茂村驛南五里烏壤驛加祚之西居民至今仍稱云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93 가조현경내에교우하였음을알수있다. 42)42) 이들이거제현과함께가조현에서교우하게된것은행정적으로거제현에예속되어있었기때문으로해석된다. 이는후술할명진현이감무관으로서거제와다른지역에교우한것과대비된다. 아주현등은세종 4년거제현이본도로돌아갈때함께환원되어바로直村으로廢合되었을것으로생각된다. 3) 溟珍縣 세종실록지리지에서명진현의연혁은珍城縣연혁에통합되어있다. 다음은진성현연혁중에서명진현부분의고려말조선초연혁을추출한것이다. 1 元宗辛未避倭出陸僑寓晉州任內永善縣 2 本朝恭靖王元年己卯 (1399) 倂二縣 ( 江城 溟珍 ) 號珍城 위에서명진현의교우시점도원종때로되어있다. 이는거제현연혁에연동된것으로판단되는바, 역시공민왕대로조정해야할것이다. 당시조치가거제도의주민을내륙으로이주시키는것이므로거제현이교우할때명진현도함께교우하였을것이다. 다만명진현은監務가설치되어행정적으로분리되었기때문에거제현과다른장소에서교우하였다. 반면전술한바와같이속현으로남아있던송변현과아주현은거제현과같은장소에서교우하였다. 그뒤태조 3년명진현의교우처인永善縣을명진현에예속시키는조치가있었다. 43) 43) 이것은전술했듯이거제현의교후처인가조현이 移屬巨濟 로처리된것과상통하는내용이다. 명진현은감무가파견되었고영선현은진주의속현이었는데, 현실적으로두군현이한영역단위가된상태에맞추어영선현 42) 이과정에서烏壤驛도함께교우하고있음은주목되는현상이다. 驛에는驛吏, 또는驛子와같이해당役을지는부류가배속되어있었고, 이들또한일종의단위체로서구분되고있었기때문에교우과정에서도따로관리된것으로생각된다. 오양역은세종 7 년에복구되었다 ( 世宗實錄권 29, 세종 7 년 8 월癸未 ). 한편남해도의德新驛은出陸하여浣沙驛으로개명되었는데 ( 世宗實錄地理志昆南郡 ), 이역시오양역과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 43) 太祖實錄권 5, 태조 3 년 3 월丙午
194 韓國文化 40 을진주소속에서명진현소속으로바꾼것이다. 44)44) 그뒤명진현은江城郡과합쳐珍城縣으로편성되었는데, 이에대해서는기록에따라오차가있다. 위의연혁 2에서는공정왕, 곧정종원년의일로되어있다. 그런데이에대한실록기사는태조 7년의일로되어있다. 경상도溟珍縣을江城郡에병합시키고이름을珍城이라불렀다. 溟珍은예전에는巨濟땅에있었는데, 왜적으로인해사는곳을잃고晉州의남쪽변두리 [ 南鄙 ] 에出居하였다. 땅이좁고백성이적으므로 [ 地狹民小 ] 監司가청하여병합하였다. 45) 45) 여기서실록의태조 7년과세종실록지리지의공정왕원년은사실상같은연도를나타내는데, 이현상은다음과같이설명된다. 위의기사는태조 7년 12월의것으로되어있지만실제로는 9월에정종이태조의양위를받아즉위한상태였다. 곧왕기로따지자면정종즉위년인것이다. 정종은세종초에서거한후廟號를받지못하여恭靖王으로만칭해졌다. 46) 46) 이영향으로공정왕일기, 곧정종실록은즉위부터정리된것이아니라이듬해부터정리하였고, 즉위년부분은태조실록에들어가있다. 한편조선초기에국왕의왕기를언급할때에는즉위년부터계산하고있었다. 전술한거제현읍성의이보름기에는 世宗께서즉위하신지 5년인壬寅年 이라는구절이보인다. 임인년은세종실록의踰年稱元에의하면세종 4 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즉위년칭원으로인한연기오차가빈발하고있는데, 47) 47) 이는당시의왕기표시의관행과관련된것으로보인다. 44) 加祚縣의거제이속이공양왕대로판단되는것과달리永善縣의명진이속이조선태조대에와서비로소이루어진것은영선현을속현으로관할하던진주의반발과관련된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사정은후술하듯이昆明縣의분리과정에서도지적되고있다. 45) 太祖實錄권 15, 태조 7 년 12 월壬戌 以慶尙道溟珍縣倂于江城郡號曰珍城溟珍古在巨濟之地因倭失所出居晋州南鄙地狹民小監司請倂之 46) 恭靖王은숙종때가서비로소 定宗 이라는묘호를받게된다 47) 세종실록지리지에는칭원법조정이이루어지지않은사례가자주보인다. 일례로경기군현들이尙書都省에직속되는것이고려사지리지에는문종 16 년의일로되어있으나세종실록지리지에는문종 17 년으로되어있다. 이러한연기오차현상에대해서는별고에서좀더세밀하게검토할예정이다.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95 위의두요소를고려해보면태조 7년후반은당시의인식에서는공정왕이즉위한첫해, 곧원년으로인식될수있었다. 실록기사와세종실록지리지사이의연기오차는이와같이설명되며, 내용적으로동일한시점으로파악되는것이다. 한편명진현이강성군과통합되는과정에는명진현의이동이수반된것으로파악된다. 당초명진현이교우하던永善縣은진주의동남쪽 48리에있었다. 앞에인용한기록에서명진현이교우하던지역으로언급된 晉州의남쪽변두리 는바로영선현지역을가리킨다. 그리고명진현이있던곳은다음기록에보이듯이더동쪽이었다. 溟珍部曲 : 永善동쪽 15리에있다. 고려말기에巨濟縣溟珍浦사람들이여기에僑寓하였다. 本朝에서본토로돌아갔으나그대로부르고있다. 48) 48) 위에서溟珍捕는곧명진현을가리킨다. 49) 49) 명진현이있던곳은이들이본토로돌아간뒤에도명진이라는이름으로불렸던것이다. 이에대해강성군은뒤에丹溪縣과합쳐丹城으로바뀌는데, 그경계는진주의서쪽 38리지점이었다. 곧명진현과강성군사이에진주목과영선현이자리하고있었던것이다. 따라서명진현이영선현에교우한상태에서강성군과병합될수없는상황이었다. 물론越境地형태로유지되었을가능성도생각할수있다. 그러나실록기사에보이듯이 地狹民小 가병합의원인임을볼때, 명진현은영선현경내에계속교우할수없는상황이었다고판단된다. 이에교우장소를강성군쪽으로이동시킨뒤두군현을병합시킨것이다. 다음에명진현이본토로돌아가는과정은어떠했을까? 세종실록지리지에는명진현과강성군이합쳐진진성현연혁을정리하고있기때문에그뒤명진현이분리되어본토로돌아가는연혁은나타나지않는다. 대신신증동국 48)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0, 晉州牧古蹟新增溟珍部曲 在永善東十五里高麗末巨濟溟珍浦人僑居于此本朝還本土因名之 49) 도서지역에설치된군현중에는浦와연계된경우가여럿발견된다. 남해도의蘭浦縣은蘭浦, 平山縣은平山浦와연계되어있다. 도서군현의편성에대해서는별고로다룰기회를가질것이다.
196 韓國文化 40 여지승람의단성현연혁에는세종때명진현을다시거제에예속시키고, 강성군을단계현과합쳐단성현이라했다고밝히고있다. 다만그연기는명시하지않고있다. 또한同書거제현고적조의溟珍廢縣항목에정리된연혁도역시세종조에本島에예속되었다는내용만밝혀놓았다. 그런데이과정은실록기사에도보여이를통해명진현이본도로돌아가거제현에廢合되는시점과과정을구체적으로살펴볼수있다. 세종 9년거제현주민이올린狀啓의첫항목은명진현과관련된것으로서그내용은다음과같다. 巨濟縣과그任內인溟珍縣은前朝때에왜구로인하여땅을잃고육지로나왔는데, 거제현사람은居昌에寓居하고, 명진현사람은江城에우거하면서병합하여珍城이라했습니다. 壬寅年 ( 세종 4, 1422) 에거제현을復置하고거창에우거하던人吏 15명과官奴婢 30여명을돌려보냈는데, 명진사람들은아직江城에소속되어돌아오지못했습니다. 이로말미암아거제현사람은수가적어役을감당하지못하니, 명진사람을本縣으로돌려보내기를청합니다. 50) 50) 위의내용은거제현이본도에돌아와復置된후부족한인적자원을보충하기위해아직강성군과병합되어있던명진현을이속시켜달라는것이었다. 당시건의중에는거제현에자원하여들어온사람들을당분간돌려보내지말고本縣 ( 거제현 ) 에그대로놔둘것을요청한내용도있었고, 정부에서도역시도망해온관노비라하더라도거제현의읍세가회복될때까지는本邑 ( 원소속군현 ) 으로돌려보내지말도록조치하였다. 그러나이기사에서명진현에대해어떻게조치했는지는언급되어있지않다. 다만세종실록지리지의수록연혁은세종 14년을하한으로하며, 세종말년에개척된 4군 6진이추록형태로뒤에붙어있다. 이것은세종실록지리지가이때편찬된八道地理志를전재한것이기때문이다. 51) 51) 이에비추어 50) 世宗實錄권 35, 세종 9 년정월壬寅 巨濟縣及任內溟珍縣前朝之時因倭寇失土出陸巨濟縣人物寓於居昌溟珍縣人物寓於江城倂號珍城歲在壬寅復置巨濟縣還其寓居居昌人吏十五名官奴婢三十餘名溟珍人物尙屬江城而不復由是巨濟縣人物數少不堪其役請還溟珍人物于本縣 51) 4 군 6 진의개척은세종의중요한업적이기때문에각각平安道와永安道항목에附錄하였다.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97 명진현은세종 9년의건의당시에는본도로환원되지않았던것으로판단할수있다. 실제세종 14년 4월기사에도珍城이라는읍호가보인다. 52)52) 그런데세종 18 년기록에는명진현이본도로환원된상황이나타나고있다. 珍城縣은본래江城이라칭했는데, 왜구때문에땅을잃게되므로그屬縣인丹城과溟珍縣을합쳐珍城이라하였습니다. 지금명진이이미巨濟로移屬되었는데그대로진성이라부르니名實이서로어긋납니다. 청컨대단성으로개칭하십시오. 53) 53) 위의기록은세종 18년 2월吏曹에서啓한것인데, 왜구로인해교우한것은명진현이기때문에문맥은다소혼선이있다. 이조치로미루어볼때단성현이라는읍호가제정된것은세종 18년의일이된다. 다만이조치가명진현의거제이속에연동되어곧바로이루어진것은아니라는점에서볼때, 명진현의이속은이보다앞설것이다. 따라서그시점은세종 14년에서 18년사이로잡을수있다. 이상에서명진현은공민왕대왜구로인해출륙하여진주임내인영선현지역에교우하였으며, 정종즉위년에강성과합쳐진성현이되었다가세종 14년에서 18년사이에다시거제도로돌아가거제현에폐합되는과정을밟았음을확인할수있다. 3. 南海島지역의僑郡 고려전기남해도에는현령관인南海縣과그속현으로蘭浦縣 平山縣등모두 3개의군현이설치되어있었다. 이와함께인접한창선도에는고려후기에興善縣이새로설치되었다. 흥선현은행정체계상진주의속현이었으나왜구의침탈로인한교우과정은남해도의군현과같은상황인만큼, 여기서함께다루기로한다. 52) 世宗實錄권56, 세종 14년 4월甲辰 53) 世宗實錄권71, 세종 18년 2월庚子 珍城縣本稱江城因倭失土以其屬縣丹城 及溟珍縣合爲珍城今溟珍已移屬巨濟而仍號珍城名實相違請改稱丹城
198 韓國文化 40 1) 南海縣 세종실록지리지에서남해현의연혁은昆陽 ( 昆明 ) 과합쳐진昆南郡에통합정리되어있다. 곤남군연혁중남해현과관련된연혁의고려말조선초부분을추출하면다음과같다. 1 恭愍王戊戌 ( 공민왕 7, 1358) 因倭失土僑寓于晉州任內大也川部曲 2 本朝太宗甲午 ( 태종 14) 合于河東稱河南縣 3 乙未 ( 태종 15) 復置河東縣以晉州任內金陽部曲屬于南海稱海陽縣 4 丁酉 ( 태종 17) 以金陽還屬晉州復爲南海縣 5 己亥 ( 세종 1, 1419) 合于昆明 남해현은전술한거제현에비해복잡한연혁을보이고있다. 우선 1의연혁은남해현이공민왕 7년에왜구로인해땅을잃고晉州의任內인大也川部曲에僑寓하게되는상황을전하고있다. 그러나남해현의교우는자료에따라시점이조금다르게된경우가보인다. 邑城 : 그지역이倭의섬과아주가까워庚寅年 ( 충정왕 2, 1350) 부터왜구의피해를입기시작하여잡혀가거나이사가서縣의속현인平山과蘭浦는쓸쓸하게사람이없었다. 8년이지난丁酉年 ( 공민왕 6, 1357) 에는바다에서육지로나와晉陽鐥川의들판에거처하였다. 54) 54) 위의기록에따르면남해현이진주鐥川, 곧大也川部曲 55) 에우거한것이丁酉年부터로되어있다. 56) 56) 1년의오차가있는셈인데, 이것은앞서도서술한바와같이칭원법적용방식에따른결과이거나, 시행결정과실체이루어진상황의시차가반영된것으로이해된다. 54)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南海縣城郭邑城鄭以吾記 其境壤與倭島密邇自庚寅之歲始被倭寇或虜或徙縣之屬縣平山蘭浦蕭然無人越八年丁酉出海而陸就晉陽之鐥川而野處 55) 鐥川部曲은音借하여표기하던 대야 ( 大也 ) 를한자로바꾸어표기한결과이다. 이것은薩川部曲을 矢川 ( 살내 ) 으로도표기한것과같은원리이다. 56) 高麗史지리지에는공민왕 7 년으로되어있다. 그리고新增東國輿地勝覽의南海縣建置沿革에는공민왕때로만되어있고연기는명시되어있지않다.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199 남해현의연혁에서특히주목되는것은교우과정에서여러차례병합조치가이루어졌다는점이다. 우선 2에서보듯이남해현은태종 14년에河東縣과병합하여河南縣으로편성되었다. 이것은거제현에대한설명에서다룬바와같이태종 14년에시행된군현병합책의일환이었다. 당시남해현이교우하고있던대야천부곡은진주邑治에서서쪽으로 40리지점에있었다. 57) 57) 그런데진주읍치에서昆陽郡경계까지 27리이고, 河東縣경계까지 67리로되어있다. 58) 58) 곧대야천부곡은진주소속이지만실제위치는곤양과하동중간에자리한越境地였던것으로판단된다. 59) 59) 당시昆陽, 곧昆明縣은진주의속현이었고, 하동현은명종 2년에감무가설치되어있었다. 이에정부에서는외관축소의목적에맞추어하동현과남해현을통합한것이다. 그러나당시개편은이듬해에대부분원상으로복구되었다. 남해현역시하동현과분리되었는데, 3의연혁을보면이과정에서다시진주임내인金陽部曲을이속받아海陽縣으로개편되었음을알수있다. 60) 60) 金陽部曲은晉州의임내였지만, 그위치는하동현경계로넘어가있는월경지였다. 61) 61) 곧처음남해현이교우한대야천부곡과유사한위치에있었던것이다. 하동과분리한남해현을다시금양부곡과합친것은교군으로서읍세가열악하여영역과인구의보전이필요했기때문으로이해된다. 그러나이조치또한 4에보이듯이 2년만에원상으로복구되었다. 62) 62) 여기에는대야천부곡에이어금양부곡까지내어주는진주쪽의반발도있었으리라짐작된다. 63) 63) 환원조치에따라금양부곡은다시진주에환속되었고남해현 57) 新增東國輿地勝覽권30, 晉州牧古蹟大也川部曲 58) 新增東國輿地勝覽권30, 晉州牧四境 59) 越境地에대해서는李樹健, 1984 越境地考,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 朴宗基, 1982 14-15세기越境地에대한再檢討, 韓國史硏究 36 ; 金東洙, 1992 朝鮮初期郡縣體制의改編 : 主縣化및屬縣化, 任內의이속작업및越境 地의정비작업을중심으로, 許善道停年紀念論叢, 一潮閣참조. 60) 이조치는실록에서는확인되지않는다. 61) 慶尙道地理志하동군의越境處조항을보면 晉州任內金陽部曲越入於縣東白 村里 라고기재하고있다. 62) 金陽部曲은昆明縣치소에서동쪽으로 45리에있었다. 따라서곤명현보다서쪽 에교우하고있던남해현과는거리가떨어져있었고, 이때문에 2년만에복구 되는것으로판단된다.
200 韓國文化 40 도원래의이름을회복하였다. 그뒤남해현은세종원년곤명현과통합되어곤남군으로개편되었는데, 5 의연혁은이를나타낸것이다. 이때의개편은남해군자체보다는곤명현의승격으로인해유도된것이었다. 곧이때세종의胎室을곤명현에설치함에따라곤명현의官號를올려주게되었던것이다. 원간섭기이후왕의태를안치한곳은관호를올려주는것이관례였고, 이는조선초기까지이어지고있었다. 태조의태실을둔珍同縣이珍州로승격하였고, 태종의태를안치한京山府가星州牧으로승격하였다. 진주의속현이던곤명현사람들이이러한관례를내세워외관설치를청원하자세종은논의를거쳐곤명을교우중이던남해현과합쳐昆南郡으로만드는것으로결정하였다. 곤명현은규모가작았기때문에그자체만으로외관설치에는어려움이있었는데, 남해현과통합함으로써이문제를해결한것이다. 논의당시監司申商은곤명현을떼어남해현과합하는것이좋겠다는의견과함께지도를작성하여보고하였다. 이에대해세종은 형세로볼때곤명을당연히남해와합해야겠지만, 昆明을빼앗아南海에주면진주사람들이호소하고원망할것인데어찌해야하겠는가. 64) 64) 라고문의하였다. 세종의지적을통해남해현이교우하고있던지리적위치와아울러곤명현의분리에대한진주쪽의반발을읽을수있다. 특히이것은곤명현의安胎에따른승격조치였지만진주쪽에서보면자신의관할속현을분할하여남해현에이속시키는셈이었다. 세종은이러한관점에서분쟁의소지가있음을거론한것이다. 이는앞서금양부곡을이속시켰을때의반발을의식한것이아닌가한다. 이에대해元肅등은 63) 남해현이하동등과병합되는과정에서교우처를옮기는내용은보이지않는다. 거제현이교우하던가조현이거제현으로흡수통합되는것과마찬가지로대야천부곡도남해현이교우함에따라진주관할에서벗어나남해현에흡수되었을것으로생각된다. 64) 世宗實錄권 3, 세종원년 3 월辛未 以勢觀之昆明當合南海然奪昆明與南海則晋人必訴寃奈何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201 昆明이진주사람의횡포에시달려따로고을을만들려고한것이오래였고, 또진주는토지도넓고인물도많아남방고을중으뜸이니곤명의백호정도를줄인다고해서별영향이없을것입니다. 하물며지금御胎를그땅에埋安하지않았습니까? 곤명을남해에합쳐따로곤남군을만드는것이사리에합당할것입니다. 65) 65) 라고건의하였고, 세종이이를받아들임으로써남해현은세번째로병합처리되었다. 남해현이곤양과다시분리되는것은세종 19년의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남해현연혁에는분리시점을 世宗朝 로만표시하였으나昆陽郡연혁을보면세종 19년에곤남군에서남해현을분리하고곤명과금양부곡을합쳐곤양군으로한사실이보인다. 66)66) 한편남해도지역은세종즉위후거제도와함께개발상황이논의됨과아울러관리를위한조치도강구되고있었다. 곧전술한세종즉위년당시의보고에따르면역을피해남해도에유입된주민의수가 200여호가 67) 되었다. 67) 또한세종 2년의거제 남해 창선 3개도서에대한개간이공식적으로허용되었다. 68) 68) 당시조치를발판으로거제현은세종 4년에복구되었다. 그러나거제현과달리남해현은바로복구되지못하였다. 이는남해현이세종원년에어태를안치한곤명현과병합하여곤남군으로재편되었기때문이었다. 남해현을복구할경우곤명의읍세가문제가될수있었다. 그렇다고세종의태실을둔곤명을도로강등시킬수도없는일이었다. 이때문에남해현은본도의개발에도불구하고바로환원되지못한것이다. 이러한사정으로인해남해도는한동안군현복설대신에종래와같은營田방식으로개발되고있었다. 다음자료를통해이당시남해도의상황을엿볼수있다. 65) 世宗實錄권3, 세종원년 3월辛未 昆明困於晋人侵暴思別爲邑久矣且晋之爲 州土地之廣人物之多爲南州最雖減昆明百戶不是瘠矣況今御胎安於其地乎合 昆明於南海別爲昆南郡庶合事宜 66) 新增東國輿地勝覽권31, 昆陽郡建置沿革 67) 世宗實錄권1, 세종즉위년 8월丙申 68) 世宗實錄권7, 세종 2년윤정월丙申
202 韓國文化 40 1. 南海島東外面蘭浦의주민은本島內面으로옮겨살게하고, 그田土는赤梁萬戶로하여금살펴守護하게하여내왕하면서경작하게하십시오. 1. 남해도南外面加火浦 古乙浦의주민들이경작하는牛峴內面平山營田한곳의전토는平山萬戶에게수호하게하여오가면서경작하게하고, 牛峴外面바닷가의전토는백성들의起耕을금하십시오. 69) 69) 위의기록은세종 13년경상도관찰사의보고중일부로서남해도지역의개간과관리방안을건의한부분이다. 여기서거제도의경우영전운영이폐지되고군현이복구되었던반면, 남해도는영전의운영이지속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위의항목들은남해도외곽지역의개간지에대한관리를건의한것인데, 이들지역은포구와영전의명칭에서알수있듯이종래난포현과평산현이있던곳이다. 이들지역이남해도의외곽에자리하고있어주민이왜구의피해를입을가능성이높았기때문에內面에거주하면서萬戶의보호아래왕래하면서경작하도록한것이다. 그런데남해도지역에도점차주민이많아지게되자이들을관할하기위한군현의설치가다시요구되었다. 南海島는토지가기름지고성이튼튼하며주민이많은데, 관할하는곳이없어서대체에어긋남이있습니다. 또근처의郡邑과멀리떨어져있어만일倭變이라도있으면구원이미치지못할것입니다. 원컨대縣을설치하고武略이있는자를差任하여변경을튼튼히하십시오. 70) 70) 위의기록은세종 19년 6월경상도관찰사의보고에따라병조에서남해현의복구를청하는내용이다. 이건의가수용됨으로써동년 7월에남해현이복구되었다. 71) 71) 이때 武略이있는자를差任한다 라는것은거제현연혁에보 69) 世宗實錄권 53, 세종 13 년 7 월己丑 一南海島東外面蘭浦居民徙居于本島內面其田地令赤梁萬戶考察守護來往耕作一南海島南外面加火浦古乙浦居民等所耕牛峴內面平山營田一處之田令平山萬戶守護來往耕作其牛峴外面大洋邊之田禁民起耕 70) 世宗實錄권 77, 세종 19 년 6 월辛巳 南海島土地沃饒城子完固居民衆多而無所管轄有乖大體且其旁近郡邑相距遙隔儻有倭變未及救援乞置縣擇有武略者差任以實邊圍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203 이는바와같이만호가겸임하는知縣事의설치를의도한것으로보인다. 곧일반수령이아니라만호등에게수령을겸하도록하고자한것이다. 하지만신증동국여지승람의연혁에는그대로현령을설치한것으로되어있다. 이처럼남해현은왜구를피해공민왕 7년 (6년) 에출륙하여대야천부곡에교우하였다. 태종 14년군현병합때하동과합쳐河南이라하였다가이듬해분리한뒤금양부곡을이속받아海陽縣이라하였다. 태종 17년에는다시원상복구되었다가세종원년곤명에御胎를안치하면서이들을합쳐昆南郡이라하였다. 세종 4년조치에서거제현과달리남해현이복설되지못한것은안태에따라병합된상태였기때문이다. 남해현은세종 19년에이르러비로소본도로환원되어복설되었고, 곤명은금양부곡과합쳐昆陽이되었다. 2) 蘭浦縣 平山縣 興善縣 남해현의속현이었던난포현과평산현의교우여부는자료상으로확인되지않는다. 하지만거제도의송변현 아주현의사례에비추어볼때이들도일단남해현과함께이동하여교군으로운영되었을것으로생각된다. 다만이들은송변현등과비교해연혁과정에다소차이가있었다. 난포현과평산현은세종실록지리지에서 왜구로인해사람들이모두없어졌고, 단지토지만있다 [ 因倭人物俱亡但有土地耳 ] 라고되어있다. 이는거제도의송변현 아주현의연혁이 人物皆亡今爲直村 이라고되어있는것과표현에차이가있다. 거제현지역은세종실록지리지의준거시점당시거제도로환원된상태였다. 곧옛송변현 아주현소속의주민은거제현으로흡수되었고, 그영역도거제현에편입되었다. 이때문에 直村 으로편성된것을연혁에서밝힌것이다. 72) 72) 반면남해현은아직本島로환원되지않은상태였다. 그리고전술했듯이두속현이있던지역은營田형태로개간이이루어지고있었다. 특히세종 13년 71) 世宗實錄권78, 세종 19년 7월辛卯 72) 直村에대해서는李樹健, 1978 直村考 : 朝鮮前期村落構造의一斷面, 大丘史學 15 16합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에재수록 ) ; 김동수, 1990 앞의논문참조.
204 韓國文化 40 이지역에들어와살던주민을內面으로옮기고왕래하면서경작하도록조치하였다. 두군현에대해 但有土地 라고표현한것은이러한상황을반영한것이다. 한편고려사지리지를보면, 송변현과아주현의경우에는고려말연혁이보이지않으나난포현과평산현은 뒤에왜구로인해사람들이모두없어졌다 [ 後因倭寇人物俱亡 ] 라는연혁내용이나와있다. 이것은거제도의송변현과아주현은교군으로서조선초기까지유지된반면, 남해도의난포현과평산현은남해도환원에앞서이미폐지된상황을반영한것으로추정된다. 하지만관련자료가보이지않아단정하기는어렵다. 한편, 남해도에인접한창선도의興善縣도난포현등과유사한과정을밟았을것으로생각된다. 창선도는본래有疾部曲으로편성되어있었는데, 고려후기에彰善縣으로승격하여晉州에소속되었다가충선왕때왕의이름을피하여흥선현으로바뀌었다. 고려사지리지에는이역시 後因倭寇人物俱亡爲直村 이라적고있다. 이에대해세종실록지리지에는아예항목으로설정되어있지않다. 흥선현은왜구로인해남해현등이교우할때역시이주하였으며, 이과정에서바로군현이폐지된것으로생각된다. 그리고난포현등과달리고려말연혁에서 爲直村 을명시한것은이곳이진주소속으로서군현폐지와함께바로진주의직촌으로편성되었기때문이다. 반면난포현등은남해도안에이를관할할수있는군현이없었으므로 人物俱亡 만을표시한것이다. 4. 연안지역의僑郡 : 梁州 고려말왜구의피해는도서군현에가장큰피해를입혔지만, 이와함께바다에인접한연안군현도대부분그영향을받아城邑이파괴되고주민이유리하였다. 개중에는본읍을벗어나다른군현지역으로들어가교우하는경우도여럿있었을것으로생각된다. 지리지연혁에는이에해당하는경상도군현의사례는보이지않으나梁州의경우문집자료를통해교우사실과그연혁을확인할수있다.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205 1 雙碧樓 : 洪武辛酉年 ( 우왕 7, 1381) 봄에왜적이양산에침입하여불을지르니양산백성들이그땅을잃고屬縣東平에성을쌓고옮겨살았다. 항상고향을생각하는마음이있어돌아가정착하기를바라고모여든지여러해가되었다. 壬申年 ( 조선태조 1, 1392) 10월에玄風監務田侯平遠이良吏로좋은평가를받아양산으로옮겨왔다. ( 중략 ) 田侯가부임하자양산사람들이서로이르기를 우리고을이장차흥하리로다. 양산이비록제땅을잃었으나예로부터다스리기쉽다하였는데, 더욱이우리侯가한다면어찌玄風과같기만하겠는가 라고하였다. ( 중략 ) 侯가이에옛모습을회복할뜻이있어여러父老들과의논하여이樓를새로짓기로하였다. ( 중략 ) 후일과연옛모습을회복시켜서양산사람들의여망에답한다면趙公의말이징험이있는것이리라. 73) 73) 2 梁州는바닷가에자리하고있어왜적에게소모되는것이더욱심하였다. 遺民이피하여金海의마을에僑寓하는데, 겨우官號를지킨것이여러해가되었다. 戊辰年 ( 우왕 14, 1388) 에晉陽河得孚가수령이되었다. ( 중략 ) 그후河君은교체되었다. ( 중략 ) 양주역시성이완성되어백성이舊業을회복하여양주에다시떨칠기세가있으니題詠하는자중에현달한자가많은것은실로좋은일이다. 庚午年 ( 공양왕 2, 1390) 여름에沈于慶이萬夫長으로서양주의수령을겸하였고河君은조정의명을받아김해에서鹽課를감독하였다. 우연히만나말하다가그詩를城樓에걸어양주의영예로삼고자하여내가유배온곳에찾아와그일에記를청하므로위와같이적었다. 무릇양주에성을쌓는것은河君의뜻이었다. 74) 74) 우선 1의내용을통해양주는우왕 7년이후교군으로운영되었음을알수있다. 이때교우지역은관할속현인東平縣지역으로되어있으며, 그것이파악되는시점은태조원년전후로이해된다. 그런데 2에는양주가교우한곳이동평이아니라金海로되어있고, 그것이파악되는시점은우왕 14년전후로나타난다. 곧교우지역이동평과김해두곳으로나오는것이다. 이것은양주의교우지역이이동했음을반영하는것으로서그전말은다음 73) 新增東國輿地勝覽권 22, 梁山郡樓亭雙碧樓金時用記 洪武辛酉年春倭寇梁而火之梁之民失其地乃城於屬縣東平而徙之常有懷土之心以望其還定安集者有年矣越壬申年冬十月玄風監務田侯平遠以良吏最移於梁 ( 중략 ) 旣下車梁人相謂曰吾邑其將乎梁雖失所古稱易治我侯爲之豈若玄風而已哉 ( 중략 ) 侯乃有復古之志謀諸父老以新斯樓 ( 중략 ) 他日果能復古以答梁人之望則趙公之言爲有徵矣 74) 陽村集권 7, 梁州城樓詩幷序 梁爲州瀕于海倭耗尤甚遺民避地僑寓於金海之村僅守官號者數祀戊辰晉陽河君得孚爲宰 ( 중략 ) 厥後河君見代 ( 중략 ) 梁亦成城民復舊業梁有再振之勢而題詠者多至顯榮誠可嘉也庚午夏沈候于慶以萬夫長兼宰于梁河君以朝命董鹽課于金會遇而言欲以其詩揭于城之樓以爲梁榮謁予謫次請記其事故書于左若夫城梁者河君之志
206 韓國文化 40 과같이정리된다. 우선 1에보이는우왕 7년은양주가왜구의노략질을당한때로서이것이교우를시작한시점이될수는있지만, 이때반드시동평현으로이동했다는의미는아니다. 다만田平遠이부임한조선태조원년당시양주는동평현에성을쌓고교우하고있었음은분명하다. 이것은그가쌍벽루를건립할당시도마찬가지로, 인용문말미의내용에서양주가여전히본토로돌아가지못한상황을읽을수있다. 다시말해이때의양주성은교우처인동평현에위치하고있었던것이다. 한편 2의河得孚가수령이된것은우왕 14년의일이다. 찬자인權近은글을청탁받을당시이곳에유배와있었다. 그가공양왕원년 12월에김해로유배된사실이고려사세가에서확인된다. 75) 75) 따라서양주가공양왕 2년을전후하여김해에교우했던사적은그가직접확인할수있는것이므로명확하다고볼수있다. 위의두기사를연결해보면, 결국양주는처음에김해에교우하고있다가우왕 14년경부터성곽을축조하였다는것으로정리된다. 이성이축조된시점은문맥의순서를따른다면공양왕 2년이전이될것이며, 성의완성과함께양주는이곳으로이동하였다. 성이완성되어백성이舊業을회복했다고한것은이를의미한다. 2에서성이어디에축조되었는지는나와있지않다. 그런데 1에서양주는태조원년당시까지본토로돌아가지못하고동평현의성에있었다. 그렇다면 2에서하득부의발의로축조된양주성이바로 1에서말하는동평현의성이라고판단할수있다. 태조당시까지도동평현에있던양주는태종 5년동평현이양주에서東萊縣으로이속되는것으로보아늦어도태종 5년이전에는본토로돌아갔을것으로판단된다. 양주의교우가지리지연혁에서드러나지않는데는양주와교우처사이의관계가행정적으로밀접하다는점이작용한것으로생각된다. 우선동평현은양주의속현으로서그관할범위에있었다. 따라서지역주민사이에는명확한구분의식이있었을것이나정부의관점에서이들은행정적으로하나의범주로인식될수있었다. 이는속현이사실상본읍의영역으로인식되는고 75) 高麗史권 45, 恭讓王원년 12 월己亥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207 려말상황에서는더욱뚜렷했을것이다. 한편김해는원간섭기말엽양주와兼官형태로운영되었던사실이확인된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자료가참고된다. 慶源李國香군이都官正郞으로梁州郡守가되었는데청렴하고재능이있다는명성이있었다. 국가에서는諸道의수령이오랫동안교체되지않아백성에게매우해가되므로그중심한것을도태시키고가까운고을로하여금겸하여다스리게하였다. 이때문에李君이고을 ( 金海 ) 을임시로맡게되었다.`76) 76) 위의글은李穀이찬한 金海府鄕校水軒記 의일부인데, 작성시점은분명치않으나이곡의활동시기를감안할때원간섭기말엽으로잡을수있다. 여기서양주의수령이김해를겸임하고있었던사실이확인되는데, 언제까지겸임으로운영되었는지는판단하기어렵다. 하지만바로앞까지행정적으로통합된시기가있었기때문에연혁파악에서양주의김해교우를구분하지않았으리라추정된다. 다시말해양주의사례는동일군현안에서읍치가이동한것과같은현상으로인식될수있었다는것이다. 결국양주는처음에왜구를피해한때겸관으로운영되었던김해쪽에교우하다가우왕 14년에서공양왕 2년사이에속현인동평현에성을쌓고이주하였으며, 태종 5년이전에본토로돌아오고동평현은동래현으로이속되었던것으로정리할수있다. 이러한움직임은양주의기존행정체계안에서이루어진현상으로인식되어연혁에서는드러나지않은것으로생각된다. 5. 맺음말 이상에서는고려말왜구로인해다른지역으로이동한僑郡중에서우선경상도지역의사례를추출하고그연혁과정을분석하였다. 이를통해확인된내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76) 稼亭集권 2, 金海府鄕校水軒記 慶源李君國香以都官正郞出守梁州有廉能聲國家以諸道守令久不移易頗有厲民則沙汰其尤者俾所近州兼治之由是李君權守是府
208 韓國文化 40 거제도에는현령관인巨濟縣과그속현인鵝洲縣 松邊縣, 그리고監務가설치된溟珍縣등이있었다. 거제현은연혁에서원종 12년에出陸僑寓한것으로되어있으나이는연혁의오류이다. 실제거제현이왜구로인해교우하게되는것은공민왕대의일로판단된다. 거제현은고려말군현개편에서교우처인加祚縣을이속받아내륙군현으로전환되었다. 태종 14년군현병합조치에따라居昌과병합하여濟昌縣이라하였다가곧이어다시분리되었다. 그뒤거제도로들어가사는사람의수가많아지자세종 4년기존의營田을폐지하고군현을복설하였다. 이때종래영전을관리하던萬戶로하여금수령을겸하도록하여현령대신知縣事가설치되었다. 군현복설후에는치소의입지가문제가되어여러차례이동이있었다. 복설당시치소는水月里에있었으나세종 8년에沙等里 ( 沙月浦 ) 로옮겼으며, 문종즉위년에는古丁里로옮겨새로읍성을축조하였다. 거제현의속현이었던아주현과송변현은연혁상교우사실이나와있지않으나다른자료를통해거제현과같은지역에교우하였음이확인된다. 이들은행정적으로거제현에속해있었기때문에교우역시같은지역에서이루어졌다. 한편명진현도연혁상원종 12년에출륙한것으로되어있으나거제현과마찬가지로공민왕대에內地로나와교우한것으로판단된다. 다만명진현은이미감무가설치되어거제현과행정적으로분리되었기때문에그와다른지역에교우하였다. 처음진주속현인永善縣에교우하면서영선현을이속받았으나땅이좁아정종즉위년에江城으로옮기고이를합쳐珍城縣이라하였다. 그뒤세종 14년에서 18년사이에다시거제도로돌아가거제현에폐합되는과정을밟았다. 한편남해도에는현령관인南海縣과그속현인蘭浦縣과平山縣이있었으며, 인접한창선도에는고려후기에興善縣이설치되었다. 남해현은왜구를피해공민왕 7년 (6년) 에출륙하여진주의임내인大也川部曲에교우하였는데, 이부곡은곤명과하동사이에있던월경지였다. 남해현은태종 14년군현병합때하동과합쳐河南縣이라하였다가이듬해분리한뒤역시진주의임내인金陽部曲을이속받아海陽縣이라하였다. 태종 17년에는다시원상복구되었는데, 여기에는계속해서영역을내어준진주쪽의반발이작용한것으로
고려말조선초僑郡의설치와재편 209 보인다. 이어세종원년에는곤명에御胎를안치하면서남해와곤명을합쳐昆南郡이라하였다. 세종 4년의조치에서거제도의영전이폐지되고거제현이복설된것과달리남해현은복설되지못하였는데, 이는남해현이어태안치에따른곤명의승격에수반하여병합된상태였기때문이었다. 남해현은세종 19년에이르러비로소본도로환원복설되었고, 곤명은금양부곡과합쳐곤양이되었다. 한편남해현의속현이었던난포현과평산현역시남해현과함께교우하였을것으로생각되지만관련자료를찾을수없다. 난포현등의연혁은 但有土地耳 라고하여 今爲直村 이라고되어있는송변현등과차이가있는데, 이는당시거제현이복설된것과달리남해현은복설되지않아각각을파악하는기준이달랐기때문이었다. 아울러남해도에인접한창선도의흥선현역시교우하였을것으로추정된다. 한편도서군현외에연안군현도왜구의피해로교우한사례가있었다. 이는지리지연혁에서는파악되지않으나문집자료에서그사례를찾을수있는데, 경상도지역의경우梁州가이에해당한다. 양주는처음에왜구를피해한때兼官으로운영되었던金海쪽에교우하다가우왕 14년에서공양왕 2년사이에속현인東平縣에성을쌓고이주하였다. 그뒤태종 5년이전에본토로돌아오고동평현은동래현으로이속되었다. 교우처가兼官과속현이었다는특징으로인해양주의교우는기존행정체계안에서이루어진현상으로인식되었고, 이로인해지리지의연혁에는드러나지않았던것으로이해된다. ( 필자 : 경상대학교인문학부사학전공조교수 ) 주제어 : 僑郡, 巨濟島, 南海島, 梁州, 군현병합 투고일 (2007.10.30), 심사시작일 (2007.11.6), 심사종료일 (2007.11.30)
210 韓國文化 40 <Abstract> The Implementation and the Reorganization of Gyogun/ 僑郡 units in the ending days of Koryeo and the beginning of Joseon 77) Yoon, Kyeong-Jin * The term 'Gyogun( 僑郡 )' refers to a Gun or Hyeon unit which has been relocated from its original position to a new location in a temporary fashion. The existence of units like Gyogun shows us that the running of Gun/Hyeon system at the time was based more upon the residents themselves than upon regional locations of certain units. During the ending days of the Koryeo dynasty, due to the invasion of the Japanese pirates, many of the Gun/Hyeon units, inside the islands located along the Southern and Western coastlines of the peninsula and also other coastal areas, were operated as Gyogun units. In case of the Gyeongsang-do province, we can view the Gun/Hyeon units at Geoje-do and Namhae-do, and the Yangju( 梁州 ) region which was located at the coastal area. They were relocated to the inner areas of the peninsula and operated as Gyogun units. In some cases they were merged with existing Gun/Hyeon units in the vicinity of their new location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all the Gyogun units were returned to their original location, and in the process most of the Sokhyeon( 屬縣 ) units were dismantled. Key Words : Gyogun( 僑郡 ), Geoje-do( 巨濟島 ), Namhae-do( 南海島 ), Yangju( 梁州 ) Merging of Gun/Hyeon units *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Assistant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