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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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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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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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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현대 韓國史學의 발전과 과제 國史新論 에 이르러 일단 정리되었다. 우선 조선후기부터의 제국주의 문제를 제6편 열강의 침략과 근대화 라고 역사의 주객체를 동시에 개관한 점이 열강의 침략만을 부각시킨 다른 저술과 다르 고, 식민지시기부터를 제7편 현대 로 편성한 것도 역사의 종합 시각을 강조 한 것으로 이해된다. 구한말의 의병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이해하고, 계몽운동 성격의 것은 민족적 자각이기는 해도 독립운동과는 차별성을 두고 있는 것 도 주목을 끈다. 식민지시기 독립운동 전반에 대하여 개설할 수 없었던 것 은 당시의 연구수준으로 피할 수 없는 한계라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해방 후의 저술에서 식민지시기의 한국사 연구 성과를 그런대 로 수용하고 있었다. 단지 남북조시대설에 대하여는 거의 외면하였다. 식민 사학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그 문제는 아직도 연구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 다. 그 외의 문제는 그 후에 꾸준히 연구를 쌓아 오늘날에는 한국사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즉, 식민지시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룩한 한국사학이 해방 직후에 더욱 발전하여 오늘날 한국사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乙酉文化社와 正音社와 博文出版社 등의 공헌이 컸다. 그 가 운데에도 을유문화사의 韓國文化叢書, 乙酉文庫, 學風 의 간행이 한국 학 또는 한국사학을 새롭게 정리하면서 성장에 이바지하였던 것을 기억할 필 요가 있다. 1950년대 이후에는 歷史學報 와 思想界 가 공헌하였다. 그러한 연구 경향은 1961년 Ⅴ. 방법론의 정비와 과제 필자는 식민지시기의 요약한 바 있다. 한국사학에 대하여 검토한 결과를 다음 표와 같이 73) 식민지시기 한국사 연구 73) 趙東杰, 한국민족주의와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93), p.375 414 및 1940 45년의 민족사학 ( 한국학논총 17,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95), p.88.

현대 韓國史學의 발전과 과제 1. 유심론사학의 역할 변화 唯心論史學을 대표하는 이는 朴殷植 申采浩 李相龍 金敎獻 鄭寅普 등이었다. 그들 가운데 해방 후에 생존한 이는 鄭寅普뿐이었다. 정인 보는 해방 후에 朝鮮史硏究 를 간행하지만 그것은 1935. 1. 1 36. 8. 28 일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이었다. 그 외에 그는 특별한 연구논저를 남기지 않고 국학대학 사업에 열중하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감찰위원장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보니 서재를 지킬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보면 유심론사학은 새 인물의 연구물이 나오지 않는 한 적어도 講壇史學에서는 모습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기는 유심론사학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해방 전에 74) 식민지시기 독립운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었으므로 해방된 마당 에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해방 전에 문화사학을 추구하던 내 張道斌이 해방 후의 저술에서 유 심론적 경향을 나타 고 있어 주목된다. 유심론사학이나 문화사학이 모두 념 관 사학이기 때문에 서로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張道斌 은 20년대에 문화주의를 제창하고 있었고 그의 저술을 보면 문화사학의 성 완연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 단국대학이나 육군사관학교의 교재로 사용한듯한 朝鮮思想史 (1945)와 國史講義 (1947)나, 만년의 韓國의 魂 (1957)까지 그 무렵의 논저를 보면 유심론적 정신 이나 혼 이 무척 강조되 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1937년부터 고향인 평안도 중화에서 은거생활하는 가운데 겪어야 했던 일제 말기의 극단적 상황 속에서 요구된 정신 자세의 반영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6 25를 전후한 혼란기에도 역 시 그러한 정신 자세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격이 74) 趙東杰 年譜 본 鄭寅普와 白南雲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 를 통해 사연구소, 1991),.389. p

2. 문화사학의 발전과 신민족주의의 대두 文化史學은 黃義敦 張道斌 安廓 權悳奎 崔南善 등에 의 해서 개발되어(초기문화사학) 30년대에 安在鴻 文一平 崔益翰 孫晋泰 등 에 의해서 발전하였다(후기문화사학). 해방 후에는 40년대 신진학자로서 실 증사학에 머물던 洪以燮 閔泳珪 등과 金聖七 韓㳓劤 孫寶基 金哲埈 金 龍德 李基白 千寬宇 등의 신세대도 새로 가세함으로써 연구인원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런데 문화사학은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 가 운데 어느 것에 비중을 두느냐가 달랐고, 문화 자체에서도 어문, 학 예술, 종교 가운데 비중을 두는 것이 달라 역사서술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와 같이 문화사학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다원적이라고 믿고 있어서 핵심이 없거나, 있어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崔南善의 경우처럼 식민사학 에 미끄러져 들어갈 가능성도 많았다. 해방 직후에 문화사학을 대변한 통사 저술은 孫晋泰의 國史大要 와 李仁 榮의 國史要論 그리고 金聖七의 조선역사 이다. 孫晋泰와 李仁榮은 민족 의 반봉건적 동질성과 민족주의의 보편적 인식을 기초로 한, 민족사의 세계 사적 발전을 역사 서술의 중심 개념으로 삼았으므로 저술의 내용을 보면, 통시대적으로 민중 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 관계 에서 민족사의 위치를 규명하는 데 주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학을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반영한 주로 1920년대까지의 민족주의 사 학과 구별하여 신민족주의 사학이라고도 한다. 손진태 자신이 民主主義的 民族主義 곧 新民族主義의 立地 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족의 반봉 건성과 민중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분석하자니 저절로 사회경제 문 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문화사학이 경제문제를 토지제도 등 제 도의 하나로 본 것과 달리, 당연히 문화와 함께 변천하고 발전하는 현상으 로 파악한 것이다. 또 민족의 보편주의적 발전에 주목하자니 국사와 세계사 식민지시기의 75) 75) 孫晋泰, 國史大要 (1949)의 自序.

3. 유물론사학의 확산과 종식, 그리고 사회경제사학의 분리 唯物論史學은 1930년대 역사연구에서 비롯되었다. 白南雲 李北滿 李淸 源 金洸鎭 韓興洙 金台俊 등의 논저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해방 후 에는 30년대에 문화사학에 관심을 쏟았던 崔益翰이 합류하였고, 40년대초에 실증사학에 몸담고 있던 金錫亨 朴時亨 全錫淡 文錫俊(유고) 등과 해방 후 신진학자로 金思億 林建相 金一出 李辰永이 가담하였다. 또 40년대에 태평양전쟁 문제에 관하여 친일적인 글을 쓰던 朴克采 金漢周 등도 참가하 여 연구인원이 크게 증가하였다. 표 全錫淡의 朝鮮史敎程 과 朝鮮經濟史, 그리고 文錫俊의 朝鮮歷史 와 朝鮮歷史硏究 였다. 그런데 學風 1949년 5월 임시증간호 에 실린 李辰永의 글, 朝鮮社會經濟史硏 究의 새로운 進展 을 보면(53쪽) 유물론사학의 논쟁점은 1933년 白南雲의 朝鮮社會經濟史 가 출간된 후 논란이 일었던 문제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 의 공식적인 적용 여부의 문제가 컸다. 그 문제에 대하여 近代史觀硏究 (1948, 동지사)를 펴낸 李能植의 법칙적 보편적 파악과 특수적 개별적 파 악은 서로 배제할 대립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개체적 파악은 보편적 파악 위에 정립되어야 (8쪽)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0 세기는 유물사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세계사적 통합을 구성하는 것은 민족 또는 국가가 아니라 개체로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군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초민족성 초국가성을 띠고 있는 계급이 본원적이고 개성적 인 작용을 할 것이 예측 (207쪽)된다고 하였다. 예측대로 계급국가군이 지 배하는 사회로 진행되고 있느냐는 오늘날의 우리가 잘 아는 일이지만, 그러 한 유물론사학이니까 실천사학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해방 후 유물론 사학자 중 정국에 뛰어든 이가 많았다. 朴克采를 위원장으로 결성한 조선과 학자동맹의 활동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거기에서 간행한 科學戰線 과 週報 民主主義 의 목록을 보면, 거의 현실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 논 해방 후 유물론사학을 대 할 만한 통사 저술은

의 글도 사회경제 문제에 관심이 기운 듯이 보이는 것이 있으나 전체를 보 면 문화사학의 범주의 것으로 이해된다. 4. 실증사학자의 새로운 방향모색과 문헌고증학 實證史學은 1930년대 역사학의 考證學風을 말한다. 李丙燾 金庠基 宋 錫夏 都宥浩 李相佰 李瑄根 申奭鎬 李弘稙 李仁榮 柳洪烈 등이 그들 이고, 40년대에 洪以燮 閔泳珪 金錫亨 朴時亨 全錫淡 같은 신진학자의 활동도 실증사학을 넘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그들이 문화사 학 또는 유물론사학의 길을 걷게 된 이가 많았다. 金庠基도 東方文化交流 史 (1948)를 저술하며 문화사학의 길에 들어 섰다고 보아야 하고, 李丙燾도 실증사학에 머물지 않았다. 朝鮮史大觀 의 總說 첫 마디가 역사는 과학 이다 라고 선언한 것을 보면 누구보다 크게 변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시대 의 구분 을 보아도 中世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1961년에 간행한 진단학회의 韓國史 고려편을 중세편 이라고 이름한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李相佰이 學風 창 간호(1948)에 실은 科學的精神과 積極的態度 實證主義精神의 現代的 意 義 를 읽어 보면 실증사학을 실증주의사학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신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있던 사실로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외에도 李仁榮 洪以燮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 사학의 방법론을 후기문화사학보다 더 폭넓게 발전시켜 보려는 노력도 있었 다. 그리고 8 15 전에는 실증사학에 머물고 있던 都宥浩 金錫亨 朴時亨 뿐 필 류 외 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류 金容燮 포 될 류 포 킬필 걸 근거 姜晋哲 래 韓 에 해당할 이었으므로 일반사학 분 에 함시 요가 없는 것이다. 그 서 자는 그 후의 분 에서 제 시켰다(조동, 1945 50년의 한국사연구,,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995) 그리고 이 논문에서 제 기하는 것은 해방 후 특히 6 25 후의 연구 추세에 하여 유물론사학과 별도 로 사회경제사학을 분 하자는 것이다. 이 여기에 해당하고 날까지 연 장해서 보면 이 함 것이다. 오늘

현대 韓國史學의 발전과 과제 全錫淡 등은 유물론사학에 정열을 쏟았다. 그렇다면 식민지시기의 실증사 학은 거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민족박물관을 맡아보고 있던 宋錫夏와 국사관에 이어 국사편찬위원회를 맡았던 申奭鎬는 유물 유적과 사료의 조사 수집에 전념하 여 실증사학을 지키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實證 史學이라기보다는 文獻考證學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실증사학이라는 용어가 오랫 동안 사용해온 관성이 있다고 해도 식민지시기의 권력도피적 실 증사학과 해방 후 문헌고증학과는 주 객관적 사정이 다른 것이다. 81) 5. 식민사학의 극복문제 해방 후의 한국사학이 식민지시기의 민족사학을 계승하고 있었던 반면, 뿌리내리고 있었던 사실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일 도 당면했던 과제였다. 식민사학은 한국의 근대사학이 자리잡기 전인 구한 말부터 상륙하고 있었으므로 그 뿌리가 깊어서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하 루 아침에 청산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고대사에 남아 있을 日鮮同祖論,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他律性 논리, 중세와 근대사의 停滯性 논리에 근 거한 서술이 해방 후에 간행된 위의 책들의 내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朝鮮史槪說 이 주로 식민학자의 저술에 의지하고 있는 점이나 渤海를 본문 이 아닌 부록으로 처리한 점, 朝鮮史大觀 이 한4군을 시기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점, 國史大要 가 實學을 외면하면서 의병전쟁보다 계몽운동을 훨씬 더 값있게 서술한 점, 國史要論 이 국제관계를 중시하다 보니 타율성 논리 제국주의자의 식민사학이 82) 81) 이와 같이 해방 후에 새로운 역사방법론이 모색되었다고 한다면, 식민지시기의 한국사학을 으로 분 하던 것을 해 방 후에는, 으로 분 하게 된다고 하 다. 식민지시기 이 자 를 추고 해방 후 특히, 6 25 후에는 과 이 새로 자리를 은 것이다. 82), 의 과 ( 한국민족주의의 발전과 독립운 동사연구, 지식산 사, 1993),.31 90. 唯心論史學 文化史學 唯物論史學 實證史學 류 唯心論史學 文化史學 唯物論史學 社會經濟史學 文獻考證學 류 겠 實證史學 취 감 社會經濟史學 文獻考證學 잡 趙東杰 植民史學 成立過程 近代史 敍述 업 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