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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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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中 後期 書院 發達에 관한 硏究 現 慶尙南道地方을 中心으로 姜 祥 澤* Ⅰ. 머 리 말 Ⅱ. 書院의 建立背景과 過程 Ⅲ. 書院의 院任 組織과 性格 1. 學緣 中心의 書院 2. 地域士林 中心의 書院 3. 門中 後孫 中心의 書院 Ⅳ. 맺 음 말 Ⅰ. 머 리 말 朝鮮時代에 있어 書院이 갖는 의미는 크다. 이 때문에 서원은 조선 중 후기의 향촌사 회의 구조와 변화 등을 통해 조선시대의 사회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의 하나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1) 조선시대의 書院은 16세기 중엽 이후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급속히 늘어났으며, 특 히 京在所 제도가 혁파되고 留鄕所와 鄕校에 훈척세력들의 참여와 시행이 있자 사족들 의 향촌사회에서의 지위확보와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변화가 일어나면서 서원은 명실상 부한 鄕村 士林의 중심기구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후 서원은 조선사회에 있어 정치 경 제 교육 사회적 측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 중 후기 사회를 실질적으로 담당 하고 이끌어 나간 鄕村組織이었다. * 韓國海洋大學校 敎養學部 副敎授. 1) 서원을 연구한 기존의 논문은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 서원연구에 대한 글들을 연구사적으로 검토 한 논고는 다음과 같은 것이있다. 李秉烋, 書院과 朋黨 ( 韓國史硏究入門, 韓國史硏究會 編, 1981). 高錫珪, 朝鮮의 書院 祠宇에 대한 硏究의 추이와 그 성격 ( 外大史學 創刊號, 1987). 李海濬, 조선후기 書院硏究와 鄕村社會史 ( 韓國史論 21, 국사편찬위원회, 1991).

- 208 - 國史館論叢 第59輯 조선시대의 서원은 설립 시기, 지역 및 당색, 중앙이나 지방에서 각 서원들이 가지는 영향력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며, 여러 유형의 서원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 서도 지역향인이나 문중 또는, 당파적 성향에 따라 다양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 한 서원의 면모를 밝히는 것이 바로 서원의 성격, 나아가 조선시대의 사회 성격을 밝히 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필자는 나름대로 慶尙南道 지방의 각 서원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는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 발표해 왔었다.2) 지금까지 경상남도 지역의 서원은 영남지역이라는 포괄적 지역구 분에 의해 연구되어져 왔었다.3) 嶺南地域은 조선시대에는 慶尙右道, 慶尙左道로 나누어 져 있었다.4) 이렇게 慶尙右道, 左道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지리적 요인에 기인하겠으나, 문화적인 면에서 南冥 曹植과 退溪 李滉의 학문적 위치와 歷史性에 일치하고 있다.5) 慶尙右道(慶尙南道)는 現在 19個郡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서원의 분포는 嶠南誌 (日 帝時期)에 의하면 123個가 기록되어 있다. 123個의 서원은 現 慶尙南道의 14個郡을 중심 으로 문헌상에 실재하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18개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추출한 자료 이지만, 이 서원의 숫자는 관찬사료에만 나타나는 서원과 읍지( 교남지 ) 등에 나타난 서원의 총괄적인 숫자이다. 본고에서는 관찬사료에 나타난6) 서원 중 영남지역에 분포되 어 있는 193개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의 서원 44개를 통하여 서원이 가지고 있는 특성 에 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읍지에만 나타나고 관찬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62개의 서원 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서원의 실태를 파악하려 시도하였지만 경상남도의 서원은 大院君 때 書院 훼철과 6.25戰亂을 거치면서 보존되고 있었던 資料는 거의 없어졌으며 현존하는 서원건물도 일제시 복원했거나 근래에 복원하였던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비교적 읍지 기 록에 나타나는 서원은 문중중심의 서원으로서 숙종 이후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지면관계로 몇개의 서원에 한정하여 서원의 성 격을 파악해 보려 하였다. 慶尙南道 지역의 서원이 가지는 역할은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의 교육기관, 鄕 村지배조직으로서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과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실질적인 기능을 다 2) 姜祥澤, 朝鮮後期 蔚山地域의 書院에 관한 考察 ( 釜山史學 21, 1991)., 朝鮮後期 嶺南地方 書院의 經濟的 基盤 ( 釜大史學 16, 1992)., 朝鮮後期 嶺南地方 書院의 身分變化 ( 釜大史學 17, 1993). 3) 대표적인 연구는 李樹煥, 朝鮮時代 書院의 人的構成과 經濟的基盤 (영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0)을 들 수 있다. 4) 李樹建, 嶺南士林派의 形成 (嶺南大出版部, 1979). 太宗 8년(1408)에 慶尙道를 慶尙左 右道로 나 눈 적이 있다. 5) 現 慶尙南道 지역(경상우도)은 원래 東人 세력 중에서 退溪門人이 南人이 될 때 南冥학연을 잇는 北人계열의 淵源地이다. 6) 官撰史料라 함은 爼豆錄 列邑院宇事蹟 東國院宇錄 增補文獻備考 書院謄錄 典考大方 書院誌叢書 등이 있다.

- 209 - 하려 하였으며, 봉건사회 해체기의 변화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고 에서 다룰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慶尙南道 地域 서원의 建立 背景을 통하여 현 경상남도 지역의 서원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파악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건립배경은 東 西人과 南人, 北人 등의 당색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 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慶尙南道의 서원을 賜額, 門中, 鄕人書院으로 각 서원이 시 대적 변화에 따라 당색과 어떻게 관련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려 한다. 서원건립의 시창기 (명종 선조)로부터 남설기(숙종)를 거치는 동안 慶尙南道 서원의 수는 서원의 建立過程 에서 본다면 경상북도를 제외한 他 地域에 비해 그렇게 적은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 선후기 鄕論을 집결하고 中央政治權과 연결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지배해 갈 수 있었던 서원은 德川書院, 蘫溪書院 정도였으며 이들 大賢서원도 仁祖反正 後 自救策으로 黨色의 變換을 통하여 서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현서원의 변화를 통해 소규모 서원의 실상을 밝히는 것은 전체 서원의 면모를 규명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찰하고자 하는 현 慶尙南道 지역의 서원이 南冥 학연을 중심으로 하는 北人 계 서원으로서 그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이다. 남명학연을 기반으로 하여 활동되어졌던 地域士林들이 光海君 즉위에 따라 정통성을 지지한 공으로 중용되었던 정인홍, 이산해, 이이첨 등의 북인정권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 으며 또한 仁祖反正 후 북인계정권의 공론을 뒷받침했던 서원들의 변화양상을 함께 파 악해 보려는 것이다. 이는 鄭仁弘을 추종하던 慶尙南道 일원의 사림들은 비분하여 과거 에 응시하지 않아 冠冕이 중단되면서 정계진출의 기회가 배제된 후 鄕村에서의 활동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상남도 일원의 서원 들이 북인계라는 당색에 의해 서원의 조직과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는가 라는 문제도 고찰되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書院의 組織문제이다. 여기서는 서원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실질적인 주체인 院任구조를 통해 서원의 변화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서원의 실질적 운영의 주관자는 원임이었고, 원임은 향촌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서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과 연 黨色에 따라서만 書院의 組織이 편성되었는지를 밝힘으로써 경상남도 서원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書院의 建立과정과 원임구조를 통해 朝鮮後期의 鄕權推移나 中央 權力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慶尙右道(慶尙南道)의 서원도 타지역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兩班 상호간의 결속을 위한 장소, 혹은 兩班身分 維持 手段으로서 士林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기구로서 서원이 확대되고 발전해 갔다. 이를 실증하기 위해서는 서원 院任組織에 대한 광범위한 資料의 발굴과 수집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慶尙南道地域 서원의 現況을 보면 타 지역과 같이 書院, 祠宇의 建立이 병행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서원이 士子의 藏修處,

- 210 - 國史館論叢 第59輯 講學所의 성격을 우선한다면 祠宇의 機能은 祀賢과 風化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 러나 書院이나 祠宇가 鄕村士林들에 의해 사사로이 建立되고 士林들의 강학과 공론 수 렴의 集結地 성격을 가짐에 따라 院, 祠의 성격이 모호해져 갔고 점차로 祠宇에서 書院 으로 변모해 갔다. 朝鮮後期 社會構造와 관련하여 書院의 內部 組織, 즉 院任, 院生 등에 관한 연구가 진 행되어 왔다.7) 서원의 내부 組織은 조선후기의 黨派 분립, 향촌사회에서의 서원의 役割 등과 관련되어 중시되었으며, 결국엔 서원의 人的 構成에 대한 硏究가 書院의 실체를 규 명할 수 있는 중요한 問題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書院의 內 部組織은 朋黨政治의 展開와 함께 地域, 黨色에 따라 조직과 운영의 과정에 차이가 난다 고 이해하였으며, 나아가 이를 院任의 資格, 院生의 性格 등과 관련지어서 당색에 의해 서원의 경영이 이루어진다고 이해하였다. 일반적으로 配享人物의 黨色과 관련하여 南人系, 西人系, 北人系로 大別하여 서원의 성격을 규정짓고 서원의 院任組織도 配享人物의 黨色에 따라 朋黨的 性格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嶺南 南人系, 慶尙右道 北人系라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원임조직이 일원 화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같은 地域內에서도 院任組織의 형태가 다르며 또 黨色과 무관한 서원일 경우도 그 원임조직의 형태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配享 人物이 당색을 가진 경우라 해도 서원의 원임구조가 嶺南 南人系 院長 有司, 西人系 院長 掌議 有司 체제로 고정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中央政治權의 변화에 따 라 院任構造가 다양하게 변모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전혀 원임구조의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Ⅱ. 書院의 建立背景과 過程 조선시대 慶尙道로 지칭되어 지던 嶺南은 고려후기 내지 조선전기까지도 경상도로 공 식 호칭되었으며, 17세기 이후부터는 慶尙道와 함께 嶺南이라는 地域名이 일반화 되었 다. 오늘날의 慶尙南道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영남지역에 포함되어 世宗實錄地理志 에 4개의 界首官區域에 編制되어 있었던 지역이다. 본고에서 주로 調査된 地域은 주로 陝川, 咸陽, 居昌, 宜寧, 威安, 昌寧, 梁山, 蔚山, 密 陽 등이다. 이 지역은 현재 행정구역상 慶尙南道 지역에 編制되어져 있다. 이 地域이 가 7) 鄭萬祚, 17 18世紀 書院 祠宇에 대한 試論 ( 韓國史論 2, 서울대 국사학과, 1975). 全用宇, 朝鮮朝 院 祠에 대한 一考察 ( 湖西史學 13, 1985). 鄭勝謨, 書院 飼宇 및 鄕校組織과 地域社會體系 ( 泰東古典硏究 5 6, 1990). 李樹煥, 朝鮮時代 書院의 人的構成과 經濟的基盤 등의 硏究가 있다.

- 211 - 지는 특성은 조선 太宗朝 이래 慶尙左 右道로 구분되었을 때8) 蔚山, 梁山, 東萊, 彥陽, 昌 寧, 機張, 密陽 등이 慶尙左道(경상북도)에 編制되어 있었던 지역이다.9) 따라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서원에 관해서는 嶺南地域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안에서 연구가 있어 왔다. 그러 나 南冥 학연을 바탕으로 한 지역 사림들의 활동근거지였으며 일반적으로 北人 지역이라 지칭되어 지던 慶尙南道 일원의 서원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書院硏究에서 활용되어 지는 官撰史料에10) 나타나는 書院 現況에서 中宗 憲宗朝까지의 書院建立 추세는 京畿가 46개, 忠淸이 64개, 全羅 81개, 慶尙道 193개로 나타나고 있다.11) 여기서는 慶尙道 地域에 建立된 193개의 서원 중 現 慶尙南道 地域만을 대상으로 19 個 郡에 산재해 있는 44개 서원을 官撰史料를 중심으로 건립 실태를 살펴보면 아래 표 와 같다. 표 1 官撰史料에 나타나는 慶尙南道의 書院 地域 書院名 建立年代 賜額年代 配享人物(職役) 晋州 德川書院 宣祖丙子 光海己酉 曹植(贈領議政) (1576) (1609) 崔永慶(贈大司憲) 大覺書院 光海庚戌 河沆(參奉) (1610) 孫天佑(參奉) 河應圖(縣監) 河受一(正郞) 金大鳴(郡守) 柳宗智(參奉) 李瀞(牧使) 宗川書院 肅宗丙辰 河演(領議政) (1676) 河搢(司諫) 臨川書院 肅宗壬午 李俊民(兵曹判書) (1702) 成汝信(進土) 備考 晋州, 南冥門人 密陽, 南冥門人 晋州, 南冥門人禮山縣監 晋州, 南冥門人 蔚州, 南冥豊基郡守 文化, 己丑獄에연루 南冥討倭有功 晋州, 世宗朝活動 晋州, 南冥門人 南冥門人 昌寧, 南冥門人 8) 李樹健, 嶺南士林派의 形成 (1979). 9) 韓國地名辭典 (景仁文化社, 1977). 10) 官撰史料라 함은 爼豆錄 (奎章閣 No. 1134) 李萬運 編, 正祖朝 編纂. 列邑院宇事蹟 (民昌文化社, 1991) 編者未詳 正祖以後 編纂. 東國院宇錄 (奎章閣, 4648) 編者未詳. 增補文獻備考 (明文堂, 1959). 書院謄錄 (民昌文化社, 1991). 典考大方 (大東印刷, 1924). 書院訪叢書 (民族文化社, 1987) 등이 書院硏究에 活用되고 있다. 11) 鄭萬神, 17 18 世紀의 書院 祠宇에 대한 試論 p.263.

- 212 - 昌原 密陽 金海 蔚山 咸陽 國史館論叢 第59輯 河憕(進土) 韓夢參(師傅) 新塘書院 肅宗庚寅 肅宗戊戌 趙之瑞(贈都承旨) (1710) (1718) 鼎岡書院 甲戌 鄭溫(大司憲) (1694) 姜淑卿(執義) 河潤(翰林持平) 陳克敬(參奉) 河天樹(參奉) 仁溪書院 肅宗庚寅 崔濯(贈右副承旨) (1710) 檜原書院 仁祖甲戌 鄭逐(贈領議政) (1634) 許穆(右議政) 禮林書院 明宗丁卯 顯宗庚戌 金宗直(贈領議政) (1567) (1670) 朴漢柱(都承旨) 申季誠(參奉) 三江書院 明宗癸亥 閔九齡, 閱九韶 (1563) 閨九淵 外 新山書院 宣祖丙子(1576) 光海己酉 曺植(贈領議政) 肅宗戊午(1678) (1609) 申季誠(參奉) 鷗江書院 肅宗壬辰(1712) 肅宗甲戌 鄭夢周(高麗侍中) (1694) 李彥迪(贈領議政) 盤龜書院 明宗壬子 鄭夢周(高麗侍中) (1552) 李彥迪(贈領議政) 鄭逑(領議政) 藍溪書院 宣祖辛巳 明宗丙寅 鄭汝昌(贈領議政) (1581) (1566) 姜翼(參奉) 顯宗庚戌 鄭蘊(贈領議政) 唐州書院 (1670) 顯宗庚子 盧縝(吏曹判書) 肅宗辛巳 (1660) 柏淵書院 (1701) 崔致遠(內史侍郞) 金宗直(贈領議政) 道谷書院 趙承肅(夫餘縣監) 鄭復周(判典農寺) 肅宗辛巳(1701) 盧士豫 盧友明(吏曹判書) 龜川書院 朴孟智(執義) 晋州, 南冥門人 西原, 南冥門人 甲子士禍때慘死 (1504, 燕山 10) 晋州, 高麗朝 晋州, 南冥門人 晋州, 南冥門人 南冥門人 晋州, 南冥門人 全州, 仁祖時府使 退溪門人 退溪門人 密陽, 甲子士禍 被禍 金宗直門人 河東, 戊午士禍 晋州, 南冥門人 鄭逑門人 豊川, 南冥門人 盧叔仝 증손 高麗末 縣監 高麗朝 判典農寺 豊川 豊川, 鄭汝昌門人 己卯士禍연루 金宗直門人

- 213 宣祖癸未 (1583) 表沿沫(吏曹參判) 梁權(敦寧) 姜漢(縣監) 梁喜(吏曹判書) 安義 龍門書院 肅宗癸未 顯宗壬寅 鄭汝昌(贈領議政) (1703) (1662) 林薰(判決事) 光海庚申 林藝(參奉) (1620) 鄭蘊(贈領議政) 星川書院 肅宗壬辰 宋浚吉(贈領議政) (1712) 宋明欽(贈領議政) 昌寧 冠山書院 肅宗乙亥 肅宗辛卯 鄭逑(贈領議政) (1695) (1711) 勿溪書院 成松國(高麗侍中) 肅宗丙戌 外 14名 燕巖書院 (1706) 李承彥(漢城參軍) 光海丁巳 成安義(吏曹判書) (1617) 李長坤(右贊成) 咸安 西山書院 肅宗癸巳 金時習(吏曹判書) 顯宗壬子 (1713) 外 5名 德巖書院 (1672) 趙純(高麗中軍左) 仁祖辛卯 趙宗道(贈都承旨) (1651) 朴漢柱(吏曹判書) 道林書院 宣祖丙午 鄭逑(領議政) (1606) 漆原 德淵書院 宣祖丁亥 肅宗丙辰 周世鵬(贈禮曹判書) (1587) (1676) 山淸 西溪書院 肅宗甲子 光海丁巳 吳健(典輪) (1684) (1617) 陜川 伊淵書院 孝宗癸巳 顯宗庚子 金宏弼(贈領議政) (1653) (1660) 鄭汝昌(贈領議政) 新川書院 顯宗甲辰 河演(領議政) (1664) 河友明(知中樞) 華巖書院 肅宗庚辰 英祖丁未 朴紹(贈領議政) (1700) (1727) 龍淵書院 明宗甲子 朴絪(參奉) (1564) 文東道(參奉) 明谷書院 裵一長(參奉) 肅宗壬申 知禮縣監 栗谷門人 退溪門人 成氏 門中書院 金宏弼門人 生六臣으로 6명전체 贈吏曹判書 高麗末 中軍左 南冥門人 金宗直門人 退溪門人 南冥門人 趙光祖門人

- 214 - 國史館論叢 第59輯 草溪 淸溪書院 (1692) 松原書院 三嘉 龍巖書院 梁山 松潭書院 固城 柳林書院 葛川書院 宣祖癸卯 (1603) 肅宗丙子 (1696) 肅宗乙丑 (1685) 肅宗壬辰 (1712) 孝宗丙申 (1656) 顯宗辛丑 (1661) 李希顏(軍資判官) 李大期(刑曹正郞) 全致遠(察方) 安遇(縣監) 盧漢輔(縣監) 安克家(縣監) 安世益 盧筆(知平) 盧克誠(直長) 光海己酉 曺植(贈領議政) (1609) 白受會(戶曹參議) 三嘉縣監 金宗直門人 贈戶曹參議 沈光世(贈吏曹參判) 李癌(高麗侍中) 漁得江(大司憲) 宜寧 德谷書院 顯宗庚子 李滉(贈領議政) (1660) 居昌 道山書院 顯宗甲辰 顯宗壬寅 金宏弼(贈領議政) (1664) (1662) 李彥迪(附領議政) 肅宗甲戌 鄭汝昌(贈領議政) (1694) 鄭蘊(贈領議政) 浣溪書院 肅宗丁亥 肅宗庚申 金湜(贈領議政) (1707) (1680) 龍源書院 文緯(縣監) 屛巖書院 南冥門人 南冥門人 安陰縣監 卞季良(領中福) 卞壁(生員) 李現의 門中建立 淸風, 己卯士禍 연루, 居昌도망 自殺 高靈縣監 密陽, 太宗朝人 (비고란의 地域名은 本貫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성립 배경은 여말 정계로부터 물러나 在野勢力으로 향촌에서 교육 활동을 하던 중소 地主層들이 士林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淵源을 찾는다.12) 朝鮮時 代의 士林은 일반적으로 상층 지배세력인 사대부 중심의 양반층으로 유학에 전념하는 士의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士林에 의해 주도되는 조선사회는 정치적으로 朋黨政治를 12) 鄭勝謨, 書院 飼宇 및 鄕校祖織과 地域 社會體系 上( 泰東古典硏究 5).

- 215 - 형성하게 되며 私弟와 姻戚, 地緣關係 등 利害關係를 같이 하는 집단의 형성으로 士林 자체의 분열을 가져왔다. 朋黨政治는 각 당파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집권을 위한 투쟁방법으로 일반 士林의 광 범한 지지를 필요로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각 派黨은 자파의 先師나, 학문적 정치적 人 物을 高揚하고 이를 中外에 알리는 일로서 서원의 건립이 일어난다.13) 또한 17 18세기는 士林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회였기 때문에 상급지배 신분으로서의 양반은 사회특권층으로서 그 地位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鄕村秩序를 양반위주 로 편제하려 하였고14)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지배신분으로서 지위와 기반을 다져왔다. 이렇게 볼 때 서원은 향촌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敎學體制의 확립과 鄕村 士林에게 朱子學的 정치이념과 학문을 수련케 하는 장수처로서 시작하여 점차 각 당파간의 이해 관계와 결합하면서 확대 발전해 왔다. 위 표 1 에 나타나는 현 慶尙南道 행정구역내에 있는 44개 서원에 관하여 건립집 단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學緣을 중심으로 하여 문인, 후학 등에 의해서 건립되는 서원이다. 이러한 유형의 서원들은 타도에서와 같이 스승을 존중하고 스승의 지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학문적 계통을 분명히 하려 했다는 점과 학문적 계통을 후학에게 전승한다는 점 에서 서원을 건립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서원은 배향인물이 생전에 우거했던 곳이나 또는 서재, 강당을 지어 후학을 교육했던 곳에 서원이 건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다. 대표적 서원은 晋州의 德川書院(曹植, 崔永慶), 咸陽의 蘫溪書院(鄭汝昌, 鄭蘊), 金海 의 新山書院(曺植, 申季誠), 三嘉의 龍巖書院(曹植) 등이다. 둘째, 鄕人 集團에 의해 建立된 서원의 유형이다. 향인이라는 계층의 설정은 다소 문제점은 있지만15) 향촌의 양반세력을 말하며 配享人 物과 인적 학적 관계가 없는 지방세력을 말함이다. 이러한 유형의 서원은 晋州의 臨川서 원(李俊民, 成汝信, 河憕, 韓夢參外), 咸陽의 道谷서원(趙承肅, 鄭復周, 盧士豫, 盧友明外), 安義의 龍門서원(鄭汝昌, 林薰, 林藝, 鄭蘊) 등이 있다. 셋째, 門中 後孫에 의해 建立된 서원의 경우이다. 이는 단순히 양반신분층들이 향촌내에서 존경받는 신분계층을 형성 유지하기 위해 후 손 또는 族人에 의해 건립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지역 양반계층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특색을 지닌다. 이는 주로 肅宗 이후 哲宗代에 걸쳐 건립되는 邑誌에만 나타나는 서원이 주류를 이루 13) 鄭萬祚, 朝鮮 書院의 成立過程 ( 韓國史論 8, 1980) p.228. 14) 鄕村秩序確立을 위해서는 社倉制, 留鄕所復立運動, 鄕約普及運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15) 鄭萬祚, 앞의 논문(1980) p.250. 後孫이나 門人들도 지방의 兩班 세력으로 鄕人이라 통칭될 수 있지만 일단 配享者와 학연관계가 없는 在地 세력을 말한다고 하였다.

- 216 - 國史館論叢 第59輯 는데 관찬사료에 나타나는 晋州의 宗川서원, 昌寧의 勿溪서원, 陜川의 新川서원 등이다. 邑誌에 나타나는 서원으로 대표적인 것은 昌寧의 光山서원, 宜寧의 泰巖서원 등이다. 이와 같은 유형들의 서원에서 먼저 고찰되어져야 할 것은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에 의 해 慶尙南道 地域의 서원을 北人系 서원으로만 통칭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北人이라 는 朋黨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朝鮮後期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 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을 고찰해야 한다. 관찬사료에 나타나는 44개의 서원을 時期별로 구분하여 지역서원이 가지고 있는 역사 성을 통해 그 실상을 확인하는 것과 제향자의 學緣別 분포, 職役 분포를 분석하는 일이 다. 또한 사액서원의 성격과 배향 인물에 관한 고찰을 통하여 慶尙南道 지역 서원의 성 격과 건립 배경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먼저 시기별로 서원 건립 현황을 파악하여 慶尙南道 지역의 역사성을 분석해 보면 다 음과 같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관찬사료를 통한 書院 연구자들은 서원의 建立 現況을 始創期(中宗 明 宗), 發展 1기(宣祖 孝宗), 發展 2기(顯宗 肅宗), 衰退期(肅宗 40년 英祖 17년)로 구분 하여 서원의 발전과정을 살피고 있다.16) 경상남도의 역사성을 통해서 보면 위와 같은 시기별 구분의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음 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관찬사료에 나타나는 서원은 明宗 肅宗代에 걸쳐 서 원이 건립되고 있으며 嶺南地域 전체의 서원수가 193개일 때 慶尙南道는 44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慶尙南道 지역의 서원건립 현황을 시기별로 구분할 경우 제 1기 始創期(明宗 宣祖), 제 2기 北人執權期(光海君), 제 3기 西 南人執權期(仁祖 顯 宗), 제 4기 西南人換局期(肅宗)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시기 구분은 전국적으로 명종대까지 완만했던 서원 건립 추세가 선조대 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현종대를 거쳐 肅宗 39년에 최고조에 이르고 肅宗 40년부터 영 조 17년 이후 서원건립이 감소하고 있는 타지역서원의 건립형태와 같은 입장에서 파악 할 수 없다는데 있다. 즉 타지역에서 發展期에 속하는 인조 현종대가 경상남도 지역에 서는 衰退期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서원의 건립과 운영과정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먼저 제 1기 (明宗 宣祖)를 보면 비교적 서원의 건립 자체가 國家의 補助나 支援 아 래 있었다. 祭享者도 性理學 중심의 道學的 연원을 갖춘 사람으로 선택되고 있다.17) 시 대적 배경으로 볼 때 朋黨의 출현기인 선조 초기까지는 慶尙南道는 영남지역이라는 포 괄적 지역개념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서원의 건립 목적은 人才養育을 통한 敎化이며 그 16) 이와 같이 서원 건립시기를 구분한 경우는 丁淳睦, 韓國書院 敎育制度 硏究 (嶺南大出版部, 1979) p.25와 全用宇, 朝鮮朝 院 祠에 대한 一考察 (1985) p.8에도 나타난다. 17) 書院謄錄 권6, 景宗 4년 4월 28일조, (前略)列邑書院之設 故問學道德師表百代 則祭享書院 行 誼節烈 矜式一鄕 則建立飼廟.

- 217 - 기능은 土子의 藏修 講學과 祀賢의 부차적 기능을 갖추었다.18) 이 시기의 嶺南 地域은 鄭夢周 吉再 金淑滋 金宗直으로 연결되는 성리학적 연원에 따라서 鄭汝昌, 李彥迪, 李滉, 曺植에 이르는 학문적인 기틀이 자리잡을 수 있는 시기였다.19) 아래의 표를 통해서 보면20) 明宗代에 건립되는 경상도의 서원수는 8개 중 慶尙南道에 는 4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始創期의 서원건립은 을사사화 후 명종대에 들어오면서 사림세력의 질적 수적인 발전의 결과로 보이며 서원은 점차 그들 세력기반의 구심점 역 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曺植 學緣을 바탕으로한 지역사림들의 활동에 의해 明宗代에 는 4개의 서원, 즉 蘫溪서원(咸陽), 禮林서원(密陽), 三江서원(밀양), 淸溪서원(草溪)이 건 립되었다. 이 시기에 제향자도 성리학 중심의 도학적 연원을 갖춘 사람, 즉 金宗直 鄭汝 昌 등의 도학적 인물이 제향되면서 지역사림들의 藏修處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갔을 것 이며 향촌통제의 중심기구로서 정착해 갔다. 표 2-1 年代別 全國 書院建立 分布 1(明宗 宣祖) 地域 京畿 忠淸 全羅 慶尙 江原 黃海 咸鏡 平安 總計 年代 明宗 (1546 1567) 1 1 1 8 1 1 2 1 16 宣祖 1 3 64 (1568 1608) 6 7 13 27 7 慶尙 慶尙 南道 北道 4 4 7 20 宣祖代에 들어오면 사림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보 게 되는데 전국적으로 64개의 서원이 건립되며 영남지역은 27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 다. 이 시기는 李滉, 李珥, 曺植 등에 의한 성리학의 발전과 그 後學들에 의한 朋黨政治 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宣祖代에는 혁신파 심의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림들과 이에 비판적인 退溪, 曹植 문인들이 다수를 이룬 후진 사류들 사이의 심한 대립적 갈등 으로 東人 西人의 朋黨政治가 발생하는 시기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21) 이와 같이 붕당정치가 시작되는 宣祖代에는 德川서원(晋州), 新山서원(金海), 唐州서원(咸陽), 龍門 서원(安義), 西溪서원(山淸), 伊淵서원(陜川), 龍巖서원(三嘉)이 건립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曹植의 사후 晋州의 德川서원을 중심으로 金海(新山서원), 三嘉 (龍巖서원)에 曺植이 祭享됨으로써 조식의 후학을 기반으로 한 남명학파의 정립과 慶尙 18) 孝宗實錄 권19, 孝宗 8년 7월 己酉條, 夫自三代以後 敎學廢弛 縱有國學 縣校之設 從有其名 未見共實 又以仰隷 公家而事體多妨 講習不便 故窮鄕志之士不免. 19) 丁淳睦, 앞의 책 p.28. 20) 이 표는 增補文獻備考 를 중심으로 典故大方, 書院謄錄, 列邑院宇事蹟, 爼豆錄 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21) 全用宇, 앞의 논문 p.5.

- 218 - 國史館論叢 第59輯 南道 일원에 鄕士林들의 새로운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慶尙南道는 宣 祖代 東 西人의 분류로 朋黨政治가 시작되는 시기에 東人에 속해 있으면서도 남명학연을 바탕으로 한 士林들의 활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2기는 宣祖 22년 10월 鄭汝立의 謀反事件을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될 때 모반사건의 연루자들이 다수가 南冥계열이며 退溪계열은 그 모반사건을 사실로 인정 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退溪계열은 南人으로 갈라져 나오니 학문적 사상적 입장의 차이는 더 이상 합류될 수 없었고, 南冥계열은 北人으로 분류되어 그 당시 붕당구조는 退溪, 栗 谷, 南冥의 3계열 학파의 정치적 분립을 가져왔다.22) 現 慶尙南道 지역은 東人 중에서 退 溪門人이 南人으로 남을 때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北人계열의 淵源地이다. 북인의 학연은 南冥系가 중심이 되었지만 학연상의 기반은 退溪, 栗谷에 비해 약한 상태였다.23) 北人은 宣祖 25년 壬辰倭亂을 통해 정치권을 장악하면서 광해군 즉위와 함께 李山海, 李爾瞻, 鄭仁弘을 중심으로 하여 정권이 전횡되어 진다. 다시 말하면 제 2기는 北人집권 기이며, 이 시기에 서원건립 실태를 통해서 북인이라 통칭되어 지던 慶尙南道의 지역사 림들의 실태를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2 年代別 全國 書院建立 分布 2(光海君) 年代 京畿 忠淸 全羅 慶尙 江原 黃海 咸鏡 平安 總計 慶南 慶北 地域 光海君 32 3 11 (1609 1622) 2 7 5 14 2 1 1 제 2기는 北人執權期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전국적으로 32개의 서원이 건립되는데 그 중 慶尙道는 14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이 시기는 北人 一黨의 전횡기임에도 불구하 고 北人地域이라 통칭되는 慶尙南道는 晋州의 大覺서원, 昌寧의 冠山서원, 咸安의 德巖 서원만이 건립되고 있었다. 晋州 大覺서원의 경우 7명의 남명문도들을 동시에 배향하고 있다. 이는 德川서원을 중 심으로 진주권의 남명학연을 기반으로 한 사림들이 서원을 건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의 德巖서원도 남명문인인 趙宗道와 고려말의 중군좌 趙純을 배향함으로써 문중 서 원의 성격을 나타내지만 김종직 문인인 朴漢柱를 배향하여 지역 사림들의 활동과 연계 되어지고 있었다. 창녕의 관산서원은 정구의 강학지소로서 지역 서림들이 추존하는 뜻에 서 건립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失勢한 南人地域인 慶尙北道는 11개의 서원이 건립되면서 地域士林들이 22) 李泰鎭, 앞의 논문 p.131. 23) 李泰鎭, 위의 논문 p.139.

- 219 - 서원을 중심으로 公論을 집결해 가고 있었다. 이는 光海君朝의 執權北人이 가지고 있는 학연상의 기반이 약함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를 실증해 주는 晦退辨斥 24) 사건을 통해 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 3기는 北人政權이 반대세력의 政變 가능성의 명분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殺弟廢 母 사건으로 오랜 失勢 속에 있으면서도 학연상 두터운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南人과 西人에 의해 주도된 仁祖反正으로 北人政權의 몰락과 정인홍 추종의 慶尙南道 地域士林 들이 철저히 정계에서 배제되는25) 시기로서 실제 慶尙南道 지역에서의 서원건립 현황은 衰退期에 해당된다. 표 2-3 年代 地域 仁祖 (1623 1649) 孝宗 (1650 1659) 顯宗 (1660 1674) 年代別 全國的 書院建立 分布 3(仁祖 孝宗 顯宗) 京畿 忠淸 全羅 慶尙 江原 黃海 咸鏡 平安 總計 慶南 慶北 2 5 6 13 2 5 1 5 10 2 6 8 8 18 1 3 2 5 1 30 2 11 1 27 2 8 5 52 5 14 제 3기에 해당하는 仁祖 孝宗 顯宗代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 갈등이 禮訟論爭에 의 해서만 아니라 학문적 연원의 차이를 통해 실제 지역 서원이 중앙정계와 연계되어 활동 되어지는 시기였다.26) 즉 재지사림들의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을 위한 私學으로서 개별적 으로 발전하던 서원은 대체로 孝宗代 명분과 학통의식을 중시하던 山林 세력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중앙정계와 재지사림이 연결되는 접점으로써 그 기능이 확대 되고 수적인 증가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 시기였다.27) 이러한 시기에 경상남도 지역에서 건립되는 서원의 양상은 李滉을 제향하는 宜寧지역 의 德谷서원과 陜川지역의 趙光祖 문인이었던 박소를 제향한 華巖서원과 같은 실례를 볼 수 있다. 이는 인조반정후 慶尙南道 지역 사림들이 위축된 상태에서 南人세력이나, 西人세력이 경상남도 지역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인조대에는 전국적으로 30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으며 영남 24) 晦退辨斥 사건은 鄭仁弘이 北人계 학연인 南冥의 學問的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3년에 걸쳐 행한 것으로 鄭仁弘이 유적에서 삭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25) 星湖僿說 9, 人事文 朋黨條, 其徒悲歎慷慨不復應擧陜川等數郡冠更絶 이라 하였지만 鄭仁弘 門生들은 科擧의 不應試보다 中央政界의 강력한 統制 아래서 사실 政界進出이 封鎖된 상태였다. 26) 李銀順, 朝鮮後期 黨爭史硏究 (一潮閣, 1988). 27) 鄭萬祚, 朝鮮書院의 政治 社會的 役割 ( 韓國史學 10, 1988) p.97.

- 220 - 國史館論叢 第59輯 지역은 13개의 서원이 건립되어 전체서원의 43%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경상 남도에서 건립되는 서원은 鄭逑, 許穆을 배향한 昌原의 槍原서원과, 周世鵬을 제향한 漆 原의 德淵서원 2개 뿐이었다. 이들 서원도 배향자의 성격이 남인계열이거나 당색과 관계가 없는 주세붕을 제향하고 있어 인조반정 후 북인계열의 당색을 가진 사림들의 활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孝 宗, 顯宗代에는 西 南人의 정치적 대립이 극대화됨에 따라 사림세력이 정치적 우위를 확 보하기 위해 상호 대립과 견제가 한층 가열되는 시기였다. 즉 顯宗代에 나타난 두 차례 의 禮訟문제는 정치적 대립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어 西 南人의 대립적 양상은 顯宗 일 대에 52개 서원의 건립을 가져오게 하여 肅宗代에 서원의 남설이 일어나게 할 전조를 보이고 있다. 인조반정이래 정권을 주도할 수 있었던 南人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한 작업 으로 그들의 토대를 이룰 지방의 유생, 특히 嶺南유생의 상소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면 서28) 서원의 확대와 사액이 증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서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던 현종대에 영남지역에 건립된 18개 서원 중 경상남도는 5개의 서원만이 건립되고 있는데 鄭逑를 제향한 咸安의 道林서원, 金湜을 제향한 居昌의 浣溪서원, 朴絪 文東道를 제향한 陜川의 龍淵서원, 崔致遠 金宗直을 제향 한 咸陽의 柏淵서원이다. 이 시기의 제향인물은 경상남도의 지역적 성격이나 당색적 성 격을 벗어난 최치원, 金湜과 같은 인물이었으며, 鄭逑 등도 있다. 이 시기의 제향인물 중 鄭逑는 在京 南人의 학적 연원을 이루는 인물로 孝宗 顯宗代에 걸쳐 경상남북도 및 전국적으로 제향되고 있다. 특히 척신 김석주의 선조인 金湜은 을묘 사화 후 거창에서 자살한 인물인데, 현종 5년에 서원이 건립되고 肅宗 6년에 영남 유생이 사액을 청하였으나 예조에서 첩설이라 반대하였는데 肅宗 특명으로 사액된 서원이다.29) 이렇게 볼 때 仁祖 顯宗代의 경상남도 지역의 서원 실태는 北人이라는 당색을 통하 여 서원의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남명 학연을 중 심으로 한 지역 사림들은 당색을 표방하지 않으면서 지역 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참여하 여 향촌에서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제 4기 肅 宗代에 들어서면 더욱 명백해진다. 일반적으로 肅宗代는 서원의 남설기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肅宗 1기 肅宗 2기 肅宗 3기 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28) 顯宗實錄 권12, 7년 3월 癸卯條. 顯宗 7년 3월 경상도 유학 柳世哲을 비롯한 유생 1,000여 명의 상소로 나타난 영남유생의 예론이 송시열의 예론을 집중공략 南人說이 승리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29) 肅宗實錄 권9, 6년 정월 戊申條.

표 2-4 年代 地域 肅宗1(1-17) 1675 1691 南人 西人 肅宗2(18-39) 1692 1713 老論 小論 肅宗3(40-46) 1714 1720 老論 - 221 - 年代別 全國的 書院建立 分布 4(肅宗) 京畿 忠淸 全羅 慶尙 江原 黃海 咸鏡 平安 總計 慶南 慶北 12 4 1 14 2 2 8 20 23 59 2 3 6 4 5 2 2 37 4 10 5 122 17 42 15 肅宗 1기(I675 1691)는 南人 執權期로부터 西人 집권기로 옮겨가는 시기이다. 따라 서 전국의 서원 건립수가 37개로서 西人 지역이라 통칭되는 京畿지역에 12개, 南人 지역 이라 통칭되는 慶尙北道에 10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이는 이 時期가 西人, 南人의 朋黨政治期로 地域 士林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中央政界에서 朋黨간의 명분론 적 시비의 여론을 제기하는 지지 기반으로 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30) 이와 같은 실례는 肅宗 15년 사사당했던 송시열을 肅宗 20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 하면서 송시열이 전국의 원사에 일제히 제향되는데 肅宗 21년 한 해만 12개소에 봉안되 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31) 서 남인 대립기인 肅宗 1, 2기에는 집권당이 바뀌면 자파인물에 대한 제향이 크게 늘 어나면서 남인계는 경상도에 한해 서원이 건립되고 있으나, 서인은 京畿 全羅 忠淸 黃海 함경 江原 등지에 골고루 분포되어 서원이 건립되고 있는 특색을 지닌다.32) 이 시기에 慶尙南道는 晋州의 宗川서원(河演, 河搢), 蔚山의 鷗江서원(鄭夢周, 李彥迪), 陜川의 新川서원(河演, 河友明), 固城의 柳林서원(沈光世)이 건립되고 있었다. 慶尙南道는 제 3기(仁祖 孝宗) 쇠퇴기에 들어선 후, 家門위주의 門中서원이나 당색과 관계없는 인 물의 配享을 통해 항촌지배의 수단으로 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 이는 진주의 종천서원 의 경우 세종대 인물인 영의정 河演을 제향하였다가 同王 35년 하연의 종 6세손인 河搢 을 배향하는33) 후손, 동족에 의해서 서원이 건립되고 있는 경우이다. 이는 합천의 新川 서원과 고성의 柳林서원이 같은 성격이다. 30) 이와 같이 地域 書院을 중심으로 한 士林들간의 대립 양상은 많은 기록으로 나타난다. 列邑院 宇事蹟 忠淸道 권2, 新港書院 講堂記가 대표적이다. 金東洙, 16 17世紀 湖南 士林의 存在形態에 관한 一考察 ( 歷史學硏究 Ⅶ호, 1977). 31) 金用宇, 앞의 논문 p.7 32) 薛錫圭, 肅宗朝 院宇動向과 朋黨의 社會的 基盤 ( 國史館論叢 34, 1993). 33) 增補文獻備考 권2, 學校考 10, 各道 祠院條.

- 222 - 國史館論叢 第59輯 그러나 울산의 鷗江서원은 남인집권기에 서원이 건립되고 또 경상좌도에 속해 있었다 고 해서 남인계 서원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34) 鷗江서원의 건립과 賜額과정을 통 해서 볼 때 당색과 관계없이 향촌에서 지배세력을 새롭게 구축하려 했던 지역 鄕校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의 발의에 의해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肅宗 2기(1692 1713)는 전국적으로 122개의 서원이 건립되는 서원 남설기이다. 肅宗 20년(1694)에 일어난 甲戌換局은 집권 남인의 실각과 서인의 집권 계기를 가져오게 하였 다. 따라서 서인은 公論을 앞세워 그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와 상대 세력을 척결하려는 명분을 두고서 나타난 강경 온건의 대립은 老論, 小論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 시기는 권력의 捷路로서 외척관계에 집착도가 강하게 나타남에 따라 戚臣의 비중 이 높아져 정파는 閥閱性을 강하게 나타내면서 一黨 전제의 추세가 확대되고 있었다. 따 라서 肅宗대의 서원남설은 사림정치의 파탄이 가져온 결과로 파악되기도 한다.35) 즉 정치체제가 벌열을 중심으로 일당 또는 一族 중심으로 되어가는 것은 정치 참여 계층의 폭이 줄어들어 일부 집권양반과 토호양반을 낳는 반면, 많은 몰락 양반의 발생은 당연한 시대적 현상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서원의 濫設현상은 집권세력으로부터 제외된 일부 黨派가 自黨 先師의 학연을 계승하고 그의 도덕적 지위를 고양하기 위해 서원의 건립을 통해 黨人간의 결속과 당세의 부식을 확대한다는 입장에서 서원의 남설이 일어 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서원의 남설이 확산되고 있을 때 이미 정치적으로 몰락해갔던 당파들을 중 심으로 활약했던 지역 사림들이나 後孫, 同族, 또는 鄕人들이 학문적, 도덕적 연원을 무 시한 상태에서 家廟的 성격을 가진 서원을 건립하고 있었으며, 또한 신분제 문란으로 확 대된 양반층이 지역사회에서 자기 권위의 근거를 얻기 위해 서원을 남설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례는 족당의 사사로운 명예를 위해 서원이 남설되고 있다는 慶尙監司 林潭 의 서원 폐단 상소에서 살필 수 있고,36) 또 양반신분의 유지와 가문의 보존을 위해 혈족 관계에 의한 동족간의 상호보조를 위해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37) 특 히 문인들에 의해 원사를 건립하여 국가의 보장없이 자체의 힘에 의한 사적인 보장을 도모하는 경우도 있었다.38) 이렇게 서원의 남설이 확대되고 있는 이면에는 중앙 집권당파가 자파의 정치적 입장 34) 李樹煥, 앞의 학위논문과 薛錫圭, 앞의 논문을 참조. 35) 李泰鎭, 앞의 논문 p.153 참조. 36) 仁祖實錄 권45, 仁祖 22년 8월 己未條, 萬曆以後 廟宇之作 歲益浸盛 比邑相望 其流之弊 至於 論不公 或官貴則祀之 或族大則祀之 競事俎豆 以相誇珝因之以 私立名譽 批謁隨之 士不師古 世道日 懷 尊聚尙德之義. 37) 列邑院宇事蹟 제6, 慶尙道 靈山 德峯서원 李道孜 行狀, 先生之於門外門親情義篤至 皆類此嘗 曰 親戚之所以異於衆人者 以其有思茂也 親愛之間 喜不慶 憂不弔 則是途人也. 38) 列邑院宇事蹟 제5, 慶尙道 永川 立巖書院 院記, 宣朝二十九年丙申 先生愛永川立巖泉石之勝 契家來寓 癸未一鄕儒士會議 立巖是先生杖履之所 不可無書院 乃倣白鹿洞故事 建廟於先生舊 宅.

- 223 - 을 강화하기 위해 서원의 건립을 비호하는 경우가 있어 서원에 대한 疊設 禁止令에 관 한 조치가 있어도 서원의 건립은 크게 확대되어 남설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39) 이 시기에 慶尙南道는 17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는데 그 서원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먼저 남명학연의 지역 사림들에 의해 건립되는 서원은 진주의 臨 川서원과 鼎岡서원, 창녕의 燕巖서원이며, 老論의 자과 지방 거점으로서 함양의 龜川서원, 안의의 星川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그외 12개 서원은 門中, 後孫이나 지역 鄕人에 의해 건립되고 있었다. 肅宗 제 3기(1714 1720)는 서원남설기를 지나 전국적으로 15개의 서원 이 건립되는 정착기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肅宗 21년 서원첩설과 관련하여 새로 운 서원건립이 있을 때 지방관과 감사를 논죄한다는 서원건립 억제책이 받아들여졌고40) 肅宗 39년에 발효된 원우 통제책이 서원의 첩설을 엄격히 통제한41) 결과로 해석된다. 이 시기에 들면 官撰사료상 慶尙南道 지역에서의 서원 건립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남인 지역인 慶尙北道에서 5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는 英祖 代에 들어 더욱 엄격한 통제정책으로 전국적으로 22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을 때 慶尙 道는 9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경상도 지역에서 南人, 北人의 당색이 표출될 수 없는 시기로서 노론의 거점확대 노력과 관련된 서원 외에 대개의 서원은 당 색과 관련없는 문중, 향인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 즉 肅宗(40 년) 3기 英祖 17년까지는 지방 士族들의 동족의식 강화와 문중 중심이나 향인들에 의한 家廟 중심의 서원건립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은 正祖 哲宗 사이 勢道政治期에 들어서면 더욱 확대되어 향촌지배를 위한 도구로서 발전 해 갔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慶尙南道는 제 1기 제 4기를 통해 南冥학연을 중심으로한 북인계라는 당색을 가지고 南人, 西人系처럼 地域 士林들의 공론을 집결하여 중앙정계와 연계하고 있는 서원의 경영은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南冥학연의 지역사림 중 북인 이라 지칭되는 학자군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慶尙南道의 서원은 비교적 당색과의 연결은 적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몇가지 사실의 分析을 통하여도 확인할 수 있다. 39) 書院謄錄 권5, 丁酉(肅宗 43) 11월 初 3일條, 況論議分岐之後 各尊所尊競立書院 一邑之 中幾 至十餘處 此實當今 痼弊也. 40) 肅宗實錄 권28, 21년 6월 壬辰條. 41) 肅宗實錄 권54, 39년 7월 丙寅, 上諭承旨曰 書院疊設之弊久矣請額之疏紛云 此無一切之法故也 自今雖從祀備賢 如有疊設書院嚴加禁斷 勿許請額事 永爲定式施行.

- 224 - 國史館論叢 第59輯 표 3 慶尙南道 所在書院의 祭享者 學緣別分布42) 學緣別分布 金宗直學緣 曺植學緣 李滉學緣 李栗谷學緣 祭享者數 27 28 9 1 學緣과 無關 新羅 高麗 朝鮮初期 其他 祭享者數 1 6 20 22 總計 合 65 49 114 먼저 표 1 에 나타난 祭享人物의 學緣 分布를 통하여 慶尙南道 地域書院이 朋黨構 造와 어느 정도 관련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考察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위 표 3 은 표 1 에서 제시된 44개 서원에 祭享된 總 114名을 대상으로 하여 學緣別로 區分해 보았다. 제 1기(明宗 宣祖)에 해당하는 시기의 慶尙南道지역에서 건립 되는 서원은 文學道德師表百代 의 道學的 淵源을 중심으로 한 人物들이 祭享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시기별로 분석된 앞의 자료에 의하면 명종 선조대에는 사림들의 藏修處나 講學 所의 성격으로 건립된 경우이며, 또한 타 당색적 인물의 배향은 인조반정 후 경상남도 지역의 사림들의 활동 형태로 파악될 수 있다. 먼저 점필재 學緣의 鄭汝昌(蘫溪書院, 龍門書院, 伊淵書院, 道山書院), 金宏弼(伊淵書 院, 道山書院), 李彥迪(鷗江書院, 盤龜書院, 道山書院), 申季誠(新山書院, 禮林書院), 金宗 直(禮林書院, 柏淵書院) 외 朴漢柱, 閔九齡, 表沿沫, 李長坤 등의 門人學者들이 배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3) 이는 慶尙南道 전체 祭享者의 24%를 차지하는 數이며 제향자의 대다수가 家鄕, 寓居, 卜居와 관련되어 있는 지역에 서원이 건립되고 그 서원을 중심으로 地域士林들의 활동 이 이루어졌음을 파악할 수 있다. 南冥學緣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書院에 제향된 제향자의 수가 28명으로 他學緣보다 수적으로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전체 祭享者數의 24%에 불과하다는 것은 慶尙 南道가 가지고 있는 北人이라는 당색의 성격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南冥學緣의 제향자 28명 중 晋州地域이 18명으로서 64%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은 晋州圈外의 慶尙南道는 朋黨政治圈과의 관련이 미약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인 조반정 후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림들의 활동이 위축된 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이며, 북인이라는 당색 중심의 서원건립이 감소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다음 退溪 學緣은 인조반정 후 경상남도 지역의 서원 건립 제 3기(仁祖 顯宗)에 남인 42) 이 表는 典考大方, 書院誌叢書, 增補文獻備考, 書院謄錄 에 근거한 것이며 重複 祭享者도 包含된 것임. 43) 承政院日記 권432, 肅宗 33년 丙戌 9월 10일 乙丑條, 至於道學表著 蔚爲士林之宗仰 則建爲 書院.

- 225 - 학파의 서원확산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경우로 파악되는데 南冥學緣과도 관련되어 있는 鄭逑(贈領議政)를 중심으로 한 門人들이 地域士林들에 의해 제향되고 있었다. 특히 의령 지역의 덕곡서원에서는 이황을 제향하고 있었다. 鄭逑는 慶尙南道의 4개 書院(槍原書院, 盤龜書院, 道林書院, 冠山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며 退溪, 鄭逑學緣의 許穆(檜原書院)도 제 향되고 있으며, 鄭蘊도 3개의 서원(龍門書院, 蘫溪書院, 道山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또한 安義地域의 星川書院에서는 栗谷學緣인 宋浚吉도 제향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慶尙南道는 일반적으로 朋黨政治와 관련지워질 수 있는 南冥, 退溪, 栗 谷 文人들이 제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祭享者를 통하여 시대적인 변화와 관련한 붕당정치의 형태속에서 서원의 건립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시기적으로 仁祖 顯宗代에 걸쳐 경상남도 지역은 남명학연을 가진 북인계열의 학 자가 있어도 크게 활동하지 못했던 경우로 파악되며 표면적으로 당색의 표방없이 향촌 지역에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표 4 地域 晋州 南冥學緣 祭享者들의 職役分布44) 書院名 南冥門徒 職役 曹植 贈領議政 德川書院 崔永慶 贈大司憲 河坑 參奉 孫天佑 參奉 河應圖 縣監 大覺書院 河受一 正郞 金大鳴 郡守 柳宗智 參奉 李瀞 牧使 宗川書院 河搢 司諫 李俊民 兵曹判書 成汝信 進士 臨川書院 河憕 進士 韓夢參 師傅 李濟臣 進士 鼎岡書院 姜淑卿 執義 44) 이 표는 典故大方, 德川及門諸賢集, 慶尙南道輿地集成 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 226 - 國史館論叢 第59輯 咸陽 安義 咸安 山淸 陜川 灆溪書院 龍門書院 德巖書院 西溪書院 新川書院 草溪 淸溪書院 河潤 翰林持平 河天樹 姜翼 林薰 林藝 趙宗道 吳健 河友明 李希顏 李大期 全致遠 翰林持平 參奉 參奉 參奉 判決事 參奉 贈都承旨 典輪 知中樞 軍資判官 刑曹正郞 察方 南冥門徒들의 활동 중심지인 德川書院과 灆溪書院을 중심으로 한 地域士林들의 활동 과 晋州地域에 나타난 서원의 祭享人物이 가진 職役을 통해 黨色과 관련하여 고찰해 보 면 표 4 와 같다. 위 표 4 에서 나타난 職役 分布는 追贈職役과 參奉, 進士가 13名으로서 실제 정치 권에서 활동하지 않고 學問에만 전념했던 文人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鄭汝立 모반사 건과 연루되어 참화를 당했던 崔永慶 및 南冥門徒들의 경우를 본다면 朋黨政治와 관련 지어 생각할 수 있으나 위 표에서 나타난 南冥門徒들의 官界진출 現況은 退溪, 栗谷 門 徒들에 비해 대단히 미약함을 확인할 수 있다. 4명 정도의 地方官과 兵曹判書, 司諫, 正 言, 刑曹正郞 정도로서 北人이라는 黨派를 형성하고 地方鄕論을 모아 정치권과 연결하였 다 해도 政治圈을 움직일 수 있는 書院組織이 형성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소수의 南冥學緣을 가진 士林들의 정계진출과 光海君朝의 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士林 들의 활동이 慶尙南道를 北人系列의 集團으로 이해되게 했다고 생각되어진다. 光海君日記 에 仁弘之黨在湖南者 將爲曺植立書院於康津 以爲聚會凶徒之所(下略) 라45) 하여 曺植書院의 건립과 관련하여 凶徒의 集會所라고 나타난 기록과는 달리 오히 려 8道에 걸쳐 宋時烈을 配享한 院 祠가 44개로 나타나며, 李滉은 29개(16개 賜額)이며 李栗谷은 25개(14개 賜額)로 나타나고 있음은46) 慶尙南道 지역이 黨派的 기반이나 학적 기반이 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慶尙南道 지역의 士林들은 學緣을 바탕으 로 서원건립을 이루지만 政治權과의 연결은 鄭仁弘 이후 士林 자체의 結集과 鄕村敎化 45) 光海君日記 권17, 光海君 9년 7월 甲戌條. 46) 丁淳睦, 앞의 책 p.33.

- 227 - 및 鄕村支配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다음은 官撰史料에 나타나는 賜額書院과 配享人物의 職役分布를 통해 慶尙南道 서원 의 성격을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5-1 은 慶尙南道 지역에 있어 賜額을 받은 서원의 配享人物에 대한 職役분포이 다. 우선 시기별로 配享人物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표 5-1 地域 晋州郡 密陽郡 金海郡 蔚山郡 咸陽郡 安義郡 昌寧府 陜川郡 宜寧郡 咸安郡 慶尙南道 地域 賜額書院의 配享人物 職役 分布 書院名 賜額年代 配享人物 光海己酉 曺植 德川書院 (1609) 崔永慶 肅宗戊戌 新塘書院 趙之瑞 (1718) 金宗直 顯宗庚戌 禮林書院 朴漢柱 (1670) 申季誠 光海己酉 曺植 新山書院 (1609) 申季誠 肅宗甲戌 鄭夢周 鷗江書院 (1694) 李彥迪 姜翼 明宗丙寅 灆溪書院 鄭薀 (1566) 鄭汝昌 顯宗庚子 唐州書院 盧縝 (1660) 鄭汝昌 顯宗壬寅 林薰 龍門書院 (1662) 林藝 鄭薀 肅宗辛卯 冠山書院 鄭逑 (1711) 顯宗庚子 金宏弼 伊淵書院 (1660) 鄭汝昌 英祖丁未 華巖書院 朴紹 (1727) 顯宗庚子 德谷書院 李滉 (1660) 西山書院 肅宗癸巳 金時習 職役 贈領議政 贈大司憲 贈都承旨 贈領議政 贈都承旨 參奉 贈領議政 參奉 高麗侍中 贈領議政 參奉 贈領議政 贈領議政 吏曹判書 贈領議政 判決事 參奉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吏曹判書

- 228 - 國史館論叢 第59輯 (1713) 漆原郡 山淸郡 三嘉郡 居昌郡 德淵書院 西溪書院 龍巖書院 肅宗丙辰 (1676) 光海丁巳 (1617) 光海己酉 (1609) 道山書院 顯宗壬寅 (1662) 浣溪書院 肅宗庚申 (1680) 표 5-2 明宗 光海君 1546 1609 1567 1622 1 4 成聃壽 南孝溫 趙旅 元炅 周世鵬 襄世績 吳健 曺植 金宏弼 鄭汝昌 李彥迪 鄭薀 金湜 賜額書院의 年代別 分布 仁祖 孝宗 顯宗 肅宗 1623 1650 1660 1675 1649 1659 1674 1720 6 6 贈吏曹判書 贈吏曹判書 贈吏曹判書 贈吏曹判書 贈禮曹判書 軍威縣監 贈典輪 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贈領議政 英祖 1725 1776 1 總計 18 표 5-2 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光海君朝에 4개의 서원이 賜額되고 있는데 이는 北人집권기에 들어 南冥을 제향한 3개의 서원과 남명문인이었던 吳健을 제향한 서 원이 사액을 받고 있다. 이 시기는 北人이라는 당색적 성격을 가진 지역사림들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慶尙南道 지역의 서원은 光海君代를 지나 顯宗 肅宗 (1660 1720)代에 걸쳐 대다수의 서원이 사액을 받고 있다. 이 時期는 南人 집권기에서 西人 집권기에 걸쳐 있는 시기로서 인조반정 후 경상남도 지역사림의 활동이 위축된 상태에서 南人系로 분류된 鄭逑, 李滉 그리고 당색을 가지지 않은 金宗直, 鄭汝昌, 金宏弼, 周世鵬, 生六臣 등을 배향한 서원이 사액을 받고 있다. 당색과 관련없는 인물들을 제향하여 사액을 받고 있는 경우는 경상남도 지역 사림들 이 당색을 표방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지역활동을 원활히 하게 하는 경우와 南人系의 公 論을 위해 사액을 받고 있는 경우로 파악된다. 당색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麗末鮮初의 土姓士族으로 성장한 金宗直, 鄭汝昌, 朴漢柱 등으로 토착적 가문이었다. 또한 嶺南地域 을 本貫으로 하지 않는 타도 출신의 士族이 緣故地(妻鄕, 外鄕, 農場)를 따라 來住한 金

- 229 - 宏弼, 李彥迪, 鄭逑 등의 家門이있다.47) 이들은 향촌에서 교육활동을 통하여 學緣的 基盤 을 형성하게 되며 향촌내의 後學 또는 정계로 진출한 後學들과 鄕人들의 추앙을 받음으 로써 서원이 건립되었다. 사액서원을 통해서 보면 제향인물의 중요성은 상징적인 것만이 아니라 제향인물의 비 중에 따라 後孫이나 門人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쉽게 賜額을 받을 수도 있었다. 慶尙南道 地域에서의 賜額書院은 그 당시 제향인물이 갖추어야 했던 道學의 淵源인 學問의 宗師, 人倫追師表 등의 제조건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이는 그 職役을 통 해서 보면 알 수 있는데 領議政이 19名, 大司憲 1名, 都承旨 2名, 吏曹判書 6名, 禮曹判 書 1名, 副敎理 1名, 吏曹左郞 1名, 縣監 1名, 參奉 4名, 判決事 1名으로 나타난다(領議政, 參奉은 重複된 경우도 포함). 이들 제향자 38名의 職役이 가지는 특색은 대부분이 追贈된 職役이라는 점이며 參奉職 도 정부에서 在野學者 영입을 위해 주어졌던 품계로서 일차부임하였다가 사직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대다수의 職役이 死後에 追贈된 최고위 관직명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慶尙南道 地域의 賜額書院의 배향 인물들은 얼마동안 정계에 진출하였거나 또는 전혀 관 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地域士林들의 師表가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으로 볼 때 경상남도 지역 전체에 걸쳐 사림들의 활동은 활발하였지만 타지 역보다 정치권으로부터 일찍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사액서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공론을 모아 鄕村支配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慶尙南道 地域을 남 명 계통의 학자들이 北人이라는 당색에 따라 활동되어졌던 지역이라고 단정하여 서원의 성격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慶尙南道 地域은 高麗시대부터 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장상, 공경, 덕행있는 선비, 절의를 지킨 사람들의 인재 창고로 불리워지고 있다. 문묘종사 4현 중 金宗直, 鄭汝昌과 鄭逑, 曺植, 鄭仁弘 등의 유학자를 배출한 지역으로 학문적 연원이 깊어 많은 유학자나 유생들, 향촌사림들이 多在했던 지역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지역에서의 서원건립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嶺南地方이라는 포괄적 地 域 개념에서 연구되어져 왔기 때문에 儒生들이나 地域士林들의 활동에 대해 별도로 언 급할 기회가 없었다. 경상남도의 각 지역사림들은 在鄕 地主群으로서 향촌을 중심으로 강력한 사회적 기반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失勢한 세력이 執權勢力과 대립자로서 公論을 집 결할 수 있는 政治集團의 중심지로서 서원이 多在하였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그러 나 경상남도 지역은 學問的 淵源과 유학자 및 사림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하여도 일반 적으로 朋黨政治와 관련하여 서원의 건립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관찬사료에서 나타난 서원의 수가 44개이며 邑誌에 기록된 서원의 수가 62개로서 鄕祠宇를 제외한 서 47) 李樹健, 앞의 책 p.142.

- 230 - 國史館論叢 第59輯 원 수가 총 106개로서 경상북도를 제외한 타지역에 비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18개의 서원이 賜額을 받고 있는 실상을 보아 경상남도 지역의 서원은 학문적 연원이 깊은 곳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慶尙南道 地域에서의 書院建立 現況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정리해 보면 이 지 역의 서원이 붕당정치와 관련하여 서원의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가 있다. 첫째, 鄭汝立사건 후 北人으로 분류되어 黨色과 관련된 서원이다. 이 경우는 타 지역에 비해 수적으로 3 4 개 서원에 불과하며, 晋州의 德川서원, 咸陽의 灆溪서원, 金 海의 新山서원, 陜川 三嘉의 龍巖서원 정도로서 後學, 文人들에 의해 學問의 系譜가 이 어져 왔다. 둘째, 仁祖反正과 戊申亂 후 老論階層에 의해 叛逆鄕이라 지칭되기 전후 제향인물과 일정한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 사림들에 의해 서원건립이 추진되었고 서원을 중심으로 향론을 모아 향촌지배와 연결시키고 있었다. 셋째, 鄕人이라 불리워지는 지방 양반들과 문중 후손에 의해 건립되는 서원의 경우이 다. 이들 서원은 문중후손과 지방 향사림들이 향촌내에서 그들간의 紐帶와 서민에 대한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기구로서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가 있다. Ⅲ. 書院의 院任 組織과 性格 慶尙南道 書院의 경우 晋州圈을 중심으로 南冥門徒의 활동 거점이 되고 있었던 德川, 灆溪書院이 北人系 書院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역시 仁祖反正 후 中央權力의 변환에 따 라 중앙과의 긴밀한 유대를 모색하게 되면서 書院의 內部組織이나 人的 構成에 큰 변화 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어느 特定地域의 書院이 가지는 院任構造가 일정한 형태를 유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선 자료가 파악된 慶倚道(現 慶尙南道) 일원의 書院들이 가지는 院任 組織을 총괄적으 로 표 6 으로 나타내어 원임조직이 地域的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표 6 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配享人物의 성격에 따라 書院의 성격이 南人系, 北 人系, 西人系로 분류될 수 있지만 書院의 院任組織은 配享人物이 가진 黨色과 반드시 일 치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書院의 院任組織은 嶺南 南人系와 北人系는 院長 有司 체제로, 西人系는 院長 掌議 有司 체제로 구성된다고 알려져 있다.48) 慶尙北道 地域의 書院과 全羅道地 48) 이와 같은 書院의 院任組織이 黨色에 따라 劃一的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에 대해 全用宇, 華陽

- 231 - 域의 書院을 통하여 그 원임조직을 대별해 보면 기존의 연구에서는 배향인물의 성격에 따라 南人系書院과 西人系書院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들 서원의 初期 院任組織은 남인계 서원으로 분류된 慶北地域의 紹修書院이 院長 院貳 라 나타나고 伊山, 陶山, 川谷, 屛山 書院은 上有司 下有司 체제로 나타난다. 우선 嶺南 南人系의 대표적 서원으로 분류된 紹修書院은 白雲洞書院 院規에 나타난 別擇業文信者一人 爲院長 又擇一人爲院貳 其主 院事 라는49) 기록을 통해서 서원의 조직이 院長, 院貳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 께 全羅道 羅州地域 西人系 書院인 月井書院은 院任組織이 院長(1) 院貳(2) 章甫有司(6) 의 형태였다.50) 嶺南 南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書院들도 일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院長 有司 체제로 변화해 나갔을 것이지만, 이는 원임 조직에 있어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全羅道 지역만큼 그렇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표 6 地名 書院名 咸陽 蘫溪書院 草溪 淸溪書院 密陽 禮林書院 山淸 德川書院 漆原 德淵書院 河東 宗川書院 梁山 松潭書院 蔚山 鷗江書院 昌寧 勿溪書院 彥陽 盤龜書院 蔚山 鵄山書院 宜寧 泰巖書院 昌寧 光山書院 宜寧 宜陽書院 現 慶尙南道 地域 書院의 院任組織(書院 建立年代順) 建立年代 資料名 院任組織의 形態 明宗 1552 經任案(上 下) 院長, 有司 院貳, 京有司 明宗 1564 院任案 院長(1人), 有司(2人) 明宗 1567 書院誌 鄕院長(1人), 都有司, 掌議 宣祖 1576 院任錄(1, 2卷) 院長(1人), 有司(2人) 孝宗 1651 都有司案, 院錄 院長 1人, 都有司 1人 掌議 1人 肅宗 1677 尋院錄 院長 1人, 有司 1人 肅宗 1696 書院誌, 松潭實記 院長 1人, 搢紳有司 1人, 章甫有司 1人 肅宗 1678 院任錄, 考往錄 院長 1人, 有司 1人 典穀 1人 肅宗 1712 院長案, 院任案 院長 1人, 有司 2人 肅宗 1712 盤龜書院 復原碑文 複寫本 院長 1人, 有司 1人, 典穀有司 1人 英祖 1745 執事錄, 儒生案 院長 1人, 有司 1人 正祖 1789 尋院錄 院長 1人, 有司 1人 正祖 1795 任案錄 1, 2卷 院長 1人, 有司 2人 哲宗 1861 學稼亭 契案 院長 1人, 掌議 1人, 有司 1人 실제로 全羅道 德陽書院 院誌에 院貳는 道內 士大夫 중에서 賢明한 자로 選定된 다 51) 라고 나타나 있으며, 역시 전라도 羅州地域의 南人系 대표 서원인 眉泉書院도 書院과 萬東廟에 대한 一考察 ( 湖西史學 18, 1990)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49) 列邑院宇事蹟 에 나타나는 白雲洞書院 院規를 참조. 50) 이에 대해서는 鄭勝謨, 書院 祠宇 및 鄕校組織과 地域社會體系 (1990) p.23 참조. 51) 德陽院誌 1937年 刊行, 節目 참조(國立中央圖書館所藏).

- 232 - 國史館論叢 第59輯 1714년 이후 院長, 院貳, 都有司로 院任組織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52) 그런데 院貳는 院長의 副望에 오른 자로 하여 院長을 補佐하고 유고시에는 원장을 代理토록 규 정하고 있다.53) 이러한 院貳制의 채택은 全羅道地域의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筆巖書院 이나54) 泰仁의 武城書院 등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院任構造는 시대적 변환에 따라 서원이 가지는 특색이나 地域的, 政治的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하게 변화한다고 보 아야겠다. 따라서 紹修書院의 院任構造나 이산, 도산, 천곡, 병산서원의 원임구조도 시대적 변천 에 따라 院長制의 채택과 아울러 有司制로 정착해 갔을 것이다. 같은 南人系列의 書院으 로 분류된 全羅道 地域의 眉泉書院도 院長 院貳 有司 제로 院任構造가 구성되어 있음 을 볼 수 있다. 또 全羅道의 대표적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筆巖書院은 院長 院貳 掌議 有司 체제로 院貳制가 나타나고 있으며 全羅道의 月井書院도 院長 院貳 제가 채 택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院任構造는 배향인물의 성격에 따라 구성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全羅道 지역의 月井書院, 景賢書院은 대표적인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서원이며 院任構 造는 院長 院貳 有司 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南人系 書院으로 분류되어 있으면서도 老論系 人事(院長:兵曹參判 심단, 院威 : 刑曹參議 홍종하)가 원임을 맡고 있었던 眉泉 書院의 경우 院任構造가 南人系 書院이 가진 院長 有司 체제의 원임구조가 아님을 확 인할 수 있다. 특히 蔡濟恭이 약 20년간 院長을 맡고 있었던 시기에는 院任組織이 다양 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5) 이처럼 書院의 院任構造는 시대적 상황에 따 라 변화하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이러한 현상은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華陽書院이나 道峰書院의56) 경우 副院長 제도 가 있음을 통해 그 변화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부원장제의 성격이 院貳나 掌議가 가지는 기능을 함께 한다 해도 院任構造는 書院의 특색이나 지역적 성격에 따라 구성된 것이다. 한편 書院의 組織과 鄕校의 조직을57) 비교하여 살펴보면, 鄕校는 行政體系로서 管轄 地域이 미리 정해져 있는 조직이었다면 書院은 官僚組織에 의한 制約이 없음을 특색으로 하기 때문에 체제의 構成이나 運營을 書院 자체, 즉 配享人物의 성격이나 書院 건립의 主 體가 가지는 성격, 또는 시대적 현상에 따라 自律的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52) 1714년후 院任組織(1778 1799)은 蔡濟恭이 院長을 지낸 이후 안정된다. 53) 丁淳睦, 韓國書院敎育制度硏究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9). 54) 筆巖書院誌 권1, 舊院規 참조. 55) 蔡濟恭 院長時(1778 1799)는 院長 1, 院貳 2, 搢紳掌議 14, 章甫有司 2, 嶺南道有司 1, 道內搢紳 1 의 形態로 院任構造가 이루어지고 있다. 56) 華陽誌 권5, 書院事實 및 道峰書院 院任案 참조. 57) 姜大敏, 朝鮮後期 嶺南地方의 鄕校硏究 (釜山大 博士學位論文) 참조. 鄕校의 校任組織은 草溪 : 都有司(1), 掌議(2), 講長(2), 有司(1), 密陽 : 都有司(1), 掌議(2), 齊有司 (2), 山淸 : 掌議(2), 齊任(2), 蔚山 : 齊長(1), 掌議(2), 有司(1), 昌寧 : 都有司(1), 掌議(1)로 나타난다.

- 233 - 이와 같은 입장에서 표 6 에 나타나는 慶尙南道 書院의 院任組織을 살펴보면 대체 로 院長 有司 제로 구성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 일원의 서원이 가지는 성격은 일반적으로 北人이라는 黨色을 가진 서원으로서 院任構造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蘫溪書院과 德川書院이 건립과 운영과정에서 南冥門徒들의 활동과 連繁되어 北人系列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 외의 書院은 당색과 무관한 상태에서 書院의 일반적인 조직의 형태 인 院長 有司 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현 경상남도 일원의 서원이 가지고 있는 院任組織의 특징은 黨色에 따라 규격화된 院長 有司 체제로만 되 어 있는 것이 아니라, 書院 자체의 운영을 위해 書院의 실정에 맡게 원임구조가 마련되 며 그 형태가 院長 有司제로 나타난다고 보아야겠다. 1. 學緣 中心의 書院 德川書院은 蘫溪書院과 함께 조선시대 慶尙右道의 代表的인 北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書院으로 院任組織은 院長 有司 체제였다.58) 특히 주목되는 점은 蘫溪, 德川書院 院規 가 伊山書院 院規를59)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 伊山書院 院規는 退溪가 書院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지금의 慶北 永州에 있는 伊山書院(宣祖 癸酉 ; 1573)의 院規로서 院任組織에 관한 것은 院有司 以近居廉幹品官二人差定 又擇儒士 議事 理有行義 衆所推服者一人 爲上有司 皆二年相遞 60)라는 부분이며, 이는 書院의 有司와 上 有司 선출과 上有司의 任期를 규정한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 德川書院이나 灆溪書院은 初期부터 上有司, 下有司制의 院任組織이 아니 라 院長 有司 체제로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모하고 있었다. 德川書院(宣祖 丙子 ; 1576 建立, 光海君 己酉 ; 1609 賜額)은 南冥 曺植을 봉사키 위해 南冥門徒와 鄕士林에 의해 건립된 서원이다. 덕천서원의 경우 宣祖 年間의 院任案은 유실되고 없으며, 다만 英祖 年間부터 哲宗代까지의 院任案61) 2卷이 덕천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德川書院誌 에 나타난 院任組織을 보면 서원의 建立過程에서 활동하였던 남명문도들이62) 初期의 院 長으로 河覺濟, 陳克敬, 李瀞 등이 부임하고 있으며 有司로서는 鄭大淳, 孫均, 柳慶一, 河 公孝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덕천서원의 院任 형태는 院長 有司 체제로 정립되어 나타난다고 보아 58) 德川書院誌 院任錄 권 1 2 참조. 59) 退溪全書 上, 伊山書院記 참조. 60) 伊山書院記 院規참조. 61) 德川書院 院任案 1, 2권(德川書院 所藏). 62) 德川書院誌 慶尙南道輿地集成 晋陽誌 권2를 참조.

- 234 - 國史館論叢 第59輯 야겠으며, 院長은 一鄕之長 의 성격을 가진 生員, 進士, 幼學 등의 鄕內人士로 임명되고 있는데 이는 지역사림들이 書院 경영의 주체가 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南冥學派의 總本山으로서 향촌 사회에 있어서의 公論의 조정과 수렴 등이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덕천서원이 지방 儒林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 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宣祖 22년 (1589)에 발생한 己丑獄으로 南冥문도의 대표적 인물인 崔永慶의 連 累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결국에는 이 때문에 南冥문도와 退溪문도가 이해관계를 달리하 게 되어 南人과 北人으로 당색까지 달리하게 되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63) 그 후 光海朝 때는 鄭仁弘을 주축으로 한 南冥문도들이 慶尙右道의 德川書院, 蘫溪書院을 중심으로 北人政權의 주장을 옹호하는 輿論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였다.64) 仁祖反正 후 鄭仁弘의 몰락은 덕천서원이 가지는 晋州圈을 중심으로 한 鄕村社會의 主導權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했으며, 특히 戊申亂 후 老論政權의 등장은 南冥 追從 鄕士 林 만으로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없어 老論 세력과의 연결을 시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德川書院 院任案의 변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65) 그러나 德川書院의 院任 조직이 가지는 특색은 타 세력과의 연결을 모색해 가는 과정 에서도 院任組織의 형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점은 같은 晋州 圈의 鄕村秩序를 주도하였던 蘫溪書院이 西人系, 南人系, 老論系 세력과 연결을 모색할 때마다 院任構造의 변모를 가져왔음과 비교하여 보면 특이하다고 하겠다. 한편 嶺南 南人系의 대표적 書院인 全羅道 羅州地域에 있는 眉泉書院의 경우 蔡濟恭 이 원장직을 맡은 20년간(1778 1799) 서원의 조직 규모가 확대 개편되어 院長 1인, 院 貳 2인, 搢紳掌議 14인, 章甫有司 2인, 嶺南都有司 1인, 別有司 1인, 道內搢紳 3인, 本道 齋長 1인, 掌議 2인, 色長 1인, 養儒齋有司 2인으로 구성되고66)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德川書院은 蔡濟恭이 判書에서 領議政을 거치는 17년간(I784 1801) 원장직을 역임하지만 원임조직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이는 德川書院 院任案 에서 볼 수 있듯이 英祖 哲宗 년간에 대부분의 院長이 중앙에 거주하면서 원 장직을 담당했을 뿐 실제 書院의 運營과 鄕村社會 질서의 主導權은 鄕士林에 의해서 이 63) 李泰鎭, 앞의 논문 p.138. 鄭汝立의 謀反사건은 南冥門徒들과 鄭汝立의 親分관계를 中心으로 崔永慶이 연루되면서 退溪門徒 들이 南人으로 독립하여 南人, 北人으로 分派되어진다. 64) 德川書院誌. 德川書院이 南冥을 祭享한다고 해도 書院을 中心으로 한 士林 全體가 北人政權을 擁護한 것은 아 니다. 이는 仁祖反正 後 李大期, 權濤, 姜大遂, 河搢 등은 鄭仁弘과 무관한 이탈세력이다. 65) 德川書院院任案. 德川書院은 宣祖代에서 仁祖代에 걸치는 院任案은 없고 英祖 年間부터 哲宗代에 걸치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 기록을 보면 英祖 以後 老論系列과 남인계열의 中央高位官僚(李之億, 洪名漢, 李萬 育, 蔡濟恭, 韓致應 등)들이 院長職을 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66) 眉泉書院誌 乾坤, 先生案 참조. 鄭勝謨, 앞의 논문 p.162 참조.

- 235 - 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67) 또 德川書院의 有司는 晋州人과 丹城人의 범주를 벗어난 일이 없고 평균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遞任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잘 알 수가 있다. 德川書院 院任案 에 나타나는 居京院長 李之億(判書), 洪名漢(判書), 蔡濟恭(領議 政), 李益運(判書), 韓致應(判書), 洪時濟(參判), 洪命周(參到) 등은 모두 친남인계 老論 時 派에 속하고 있다.68) 이렇게 볼 때 南冥을 제향한 德川書院은 仁祖反正 이전 院任의 구 성은 在地的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一鄕大夫로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仁祖反正 후 德川書院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南冥門徒들이 몰락해 가는 과정 에서 地域士林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독자적인 書院 經營에 어려움을 가져온 것은 慶尙 右道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알려진 灆溪書院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덕천서원이 宣祖朝로부터 仁祖朝까지의 院任組織인 院任案이 유실되고 없는 것으로 보아 仁祖反正 후 덕천서원이 가지는 어려움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영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居京院長들이 덕천서원 경영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는 서원의 自求策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겠다. 居京院長들은 주로 親南人系에 속하는69) 中央官 僚로서 재임기간도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書院이 가지는 終身 任期制였으며 書院의 실제적 운영은 地域士林들이 담당한 有司體制로서 운영되고 있음은 居京院長을 통한 書 院의 自求策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蘫溪書院은 明宗 7년(1552)에 本郡 儒學들의 建議로 건립이 추진되어 明宗 16년(1561) 에 완성되었으며, 鄭汝昌을70) 追享하는 書院이다. 이 書院의 初代院長은 書院 創設에 주 도적 역할을 한 本郡 儒學인 進士 姜翼이 추대되었다. 蘫溪書院의 院任組織은 초기에는 德川書院과 같이 院長 有司 체제로 院長 1인, 有司 1인, 典穀有司 2인의 형태를 갖추 고 있었다. 그 후 仁祖反正 이전까지(明宗 22 光海 3)도 원장은 一鄕之長 의 원칙에 따 라 南冥, 鄭仁弘의 門人이었던 鄕內人士 姜翼, 鄭摯, 盧士豫, 盧士尙, 河應圖 등이 院長이 되었다.71) 그런데 蘫溪書院의 院任組織은 德川書院과 學緣이나 地緣을 거의 같이 하면서도 시대 적 상황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음이 특색이다. 이는 德川書院의 追享人物과 蘫溪 書院의 追享人物이 가지는 성격이 다를지 모르지만 書院 建立 및 運營 등이 南冥문도에 의해 주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己丑獄이나 仁祖反正을 거치면서 書院의 존립을 위한 67) 德川書院 院任案 (德川書院 所藏) 참조. 68) 德川書院 院任案 을 참조. 李樹煥은 앞의 논문에서 英祖 이후의 居京院長들을 親南人系로 분류하고 있다. 69) 德川書院의 경우 南人系에 속했던 鄭逑, 張顯光, 許穆 등이 南冥門徒들과 깊은 관계에 있었으므로 居京院長들의 性格이 親南人系로 나타난다. 70) 鄭汝昌의 本貫은 河東이며 金宗直 門人으로 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사망, 領議政으로 追贈되었다. 71) 蘫溪書院 經任案 (明宗 16 高宗 22) 全 8권 참조.

- 236 - 國史館論叢 第59輯 자구책으로 중앙정치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즉 이러한 변환기에 접하면 서도 德川書院은 원임조직의 변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蘫溪書院의 院任組織은 표 7 蘫溪書院 經任案에 나타난 院任組織의 變化 1 年代 院長(職役) 有 司 典穀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明宗16 姜翼 盧士豫 梁弘澤 (1561) (進士) 林希秀 宣祖17 盧士豫 禹致續 許寶 (1584) (幼學) 河悌 2 年代 院長(職役) 院貳 典穀有司 宣祖22 河孟寶 趙安性 林澤民 (1) 院戴 己丑 8월 20 有司制 대신 院貳制 (1589) (幼學) 柳夢龍 趙安性이 初代 院貳 3 年代 院長(職役) 都有司 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仁祖5 朴崇圭 梁道濟 3人 (2) 有司 典穀有司制 光海君 3년후의 기록과 (1627) (生員) 肅宗 2년 후의 記錄無 4 年代 院長(職役) 都有司 齊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英祖20 李縡 梁廷輔 5人 (3) 院長에 처음으로 中央 高級官僚 赴任 有 (1744) (判書) 司制가 齊有司로 5 年代 山長(職役) 都有司 別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正祖23 宋換箕 鄭鎭望 1人 (4) 己未秋享에 院長 職名이 山長으로 나타 (1799) (師傳) 남. 齊有司 체제가 別有司로 6 年代 院長(職役) 京有司 鄕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純祖20 南公撤 李晦淵 2人 (5) 山長 院長으로 京有司와 鄕有司 制로, (1800) (判書) 京有司 李晦淵(郡守) 7 年代 山長 京有司 都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純祖32 南公撤 一有司 二有司 (6) 純祖 庚辰年에 山長 京有司 都有司 一 (1832) (領相) 有司 二有司制로 8 年代 山長(職役) 京有司 都有司 院任組職의 變化 憲宗 9년부터 都有司 職役이 郡守로 나타 憲宗9 趙寅永 李晦淵 姜尋文 (7) 남. 一有司, 二有司, 有司는 幼學, 進士로 나 (1843) (領議政) 타남. 9 年代 山長(職役) 京有司 都有司 院任組織의 變化 (8) 哲宗 丙辰秋享부터 高宗 乙酉年까지 金奭 哲宗7 金奭均 均이 山長으로 부임한 후 11명의 군수가 山 (1856) (郡守) 長이 됨.

- 237 - 중앙정계의 변화와 함께 西人系, 老論系, 嶺南 南人系 書院의72) 院任 조직을 시대순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蘫溪書院의 院任組織은 書院 자체에서 보관하고 있는 經任案을73) 통해 표 7 과 같 이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표 7 에 나타난 蘫溪書院이 가지는 院任組織의 변화는 宣祖 39년까지는 鄕內인사 (進士, 幼學)를 중심으로 서원의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원장이 現職과 연결되면 遞任되는 것이 원칙이었다.74) 위 표 7 의 (2)에서 宣祖 22년(1589) 河孟寶(幼學)가 院長으로 취임하면서 有司가 院貳로 바뀌었으며, 忠義衛였던 趙安性이 5년간 그 職을 수행하면서부터는 院任構造는 院貳 典穀有司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 院貳制度는 일반적으로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된 書院의 院任組織으로 나타나고 있다. 顯宗 9년(1669)에 朴淳, 鄭澈 등 畿湖學派 5位를 배 향하였던 全羅道 나주 地域의 月井書院은75) 初代 院長으로 宋時烈, 宋浚吉과 肅宗의 장 인이었던 閔維重(1630 1687)이 이어갔으며, 院貳는 南九萬이 추대되고 있다. 또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될 수 있는 全羅道의 대표적 老論系 書院인 筆巖書院과76) 考 巖書院도77) 院長 院貳 제도를 두고 있다. 蘫溪書院의 경우 宣祖 17년(1584)까지는 本 郡 鄕士林에 의해서 서원의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院任組織의 변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宣祖 22년(1589) 己丑獄이 일어나자 南冥門徒들이 대거 연루되 어 고충을 겪는 시기에 들어서자 蘫溪書院은 서원의 경영과 對外的 問題에 능동적인 대 처를 위해 서원의 內部組織 중 有司制를 院貳制로 대체하고 있다. 위 표 7 의 (3)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仁祖 5년 肅宗 2년(1627 1676)에는 院任組 織이 有司 典穀有司 체제에서 都有司 有司 체제로 변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는 南冥학연의 鄭仁弘을 중심으로 했던 北人政權이 몰락하는 仁祖反正 후에 나타난 현 상이다. 남계서원은 德川書院과는 달리 仁祖 5년(1627)부터 英祖 16년(1740)까지 一鄕之 長 의 원장제를 고수하지 않고 本郡 郡守가 8명이나 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副護軍과 縣 監도 院長으로 나타나고 있다.78) 이러한 현상은 蘫溪書院이 光海朝까지79) 유지되었던 독 72) 蘫溪書院 經任案 참조. 仁祖反正 후 院任組織의 형태가 居京院長 赴任時마다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살펴 보면 시대에 따라 院任組織은 西人系 書院이라 분류된 書院들과 같은 조직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 는데 이는 西人系 院長의 부임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겠다. 73) 蘫溪書院 經任案 (明宗 16 高宗 22) 全 8권 참조. 74) 蘫溪書院 經任案 經任案序 참조. 竹軒鄭君以病將遞 豫爲代鄕之長老 姜翼除昭格署參奉遞任 盧裸除司圃署別坐遞任 盧士訓除順凌 參奉遞 라 하여 初期書院의 院長은 現職일 경우 遞任하고 있다. 75) 盤桓先生遺集 권3, 月井書院事實. 鄭勝謨, 앞의 논문 p.161 참조. 76) 筆巖書院誌 권1, 舊院規 참조. 77) 考巖書院誌 권3(國立中央圖書館 所藏) 참조. 78) 蘫溪書院 經任案

- 238 - 國史館論叢 第59輯 립적이고 독자적인 鄕士林들의 自治機構로서의 역할과 書院 經營의 문제가 상당히 위축 된 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표 7 의 (4)에 나타나듯이 英祖 20년부터 원장으로 西人系(老論) 중앙 고급관료가 부임하고 있음을 본다면, 肅宗 때의 기록이 없다 해도 이때에는 아마 南人系의 정치권과 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모는 經任案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데 英祖 20년(1744) 李縡 (判書)가 원장으로 부임하여 都有司 齋有司 체제로 변환되고 있고, 英祖 23년(1747) 兪 拓基(判府使), 英祖 46년(1770) 金致仁(領議政), 正祖 19년(1795) 李敏輔(判書), 正祖 23년 (I799) 宋煥箕(師傳), 純祖 8년(1808) 南公撤(判書), 憲宗 7년(1841) 趙寅永(領議政) 등의 老論系 중앙고관들이 院長(山長)職을 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仁祖反正 후 鄭仁弘을 주축으로 했던 慶倚右道의 士林들은 정계진출이 용이하지 않았으며, 특히 戊申亂 후의 老論 政權下에서는 더욱 더 서원의 존립기반 마저 도 위태로운 실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타세력과의 연결을 시도한 것은 필연 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는 중앙정계에서 士林의 公論이 존중되고, 그에 따라 정치가 좌 우되게 됨에 老小 各派가 自派에게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지방세력을 서로 자파에 포섭하려는 노력이 급증하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朴文守와 趙賢明 같은 小論系 인물들이 嶺南監司로 파견됨을 기화로 在鄕의 書 院을 禮訪, 交遊를 트고80) 상호 연결을 도모하였다는 사실은 각 지역 書院의 원장 중복 재임과 연결해서 설명될 수 있다. 한 예로 老論系 書院인 筆巖書院의81) 院長으로 柳拓基 (1752 1768)가82) 재임하였으며, 考巖書院에도83) 1747년 兪拓基가 院長으로 있었으며, 慶 尙道 尙州의 興巖書院에도84) 兪拓基가 원장으로 재임하였다는 사실과, 또 宋煥箕도 1793 년 慶尙道의 興巖書院과 全羅道 順天의 謙川書院에서85) 1798 1805년 사이에 원장으로 재임하였음은 仁祖反正 후 英祖 憲宗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사실 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蘫溪書院이 老論系列과 연결되면서 院任構造도 西人系로 분류된 書院 형태 仁祖 5년부터 英祖 16년까지 沈轍(郡守), 河世元(縣監), 金堂(郡守), 李鼎華(郡守), 鄭重基(郡守), 洪 禹傳(郡守), 李洙(郡守), 洪禹采(郡守), 李誠齋(郡守)가 院長으로 부임하고 있다. 79) 蘫溪書院 經任案 은 光海君 3년후의 기록과 肅宗 2년 이후의 기록이 없다. 80) 鄭萬祚, 英祖 14年의 安東 金尙憲書院 建立是非 ( 韓國學硏究 1輯) p.5. 81) 筆巖書院誌 권1, 舊院規 참조. 82) 兪拓基의 本貫은 杞溪, 1714년(肅宗 40) 增廣文科登載, 辛壬士禍 後 小論의 彈劾을 받고 東萊府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英祖 1)에 老論이 집권하자 정계로 복귀하여 吏曹參議, 大司諫 역임, 1739년 에 右議政이 되었고 1758년에 領議政에 오른 대표적 老論 대신이다. 83) 考巖書院誌 권3(國立中央圖書館 所藏) 참조. 84) 興巖書院 事實錄 (國立中央圖書館 所藏) 참조. 85) 謙川書院 執綱案 참조. 鄭勝謨, 앞의 논문 上, p.181 참조.

- 239 - 로 변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표 7 의 (5)에서 宋煥箕(1728 1807)가86) 1799년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山長으로 院長名이 바뀌어졌으며, 표 7 의 (6)에서 南公撤(1760 1840)이87) 원장으로 재임할 당시 純祖 20년(1820)에 京有司와 鄕有司制가 생겨나고, 京有司로 李晦淵(郡守)이 부임하고 있음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이는 19세기로 들어오면 서 기존의 서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鄕村儒林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나 鄕村自治的 성 격이 감소됨에 따라 居京院長 체제 아래서 중앙 및 지방과의 긴밀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보아진다. 이와 같은 현상은 老論系 書院에서는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全羅道 泰仁의 武城 書院, 井邑의 考巖書院, 京畿道 陽州의 石室書院, 魯岡書院88) 등이 모두 京有司制를 채택 하고 있음을 통해 쉽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표 7 의 (7)에는 純祖 32년(1832), 山長 南公撤부터 院任構造가 山長 京有司 都 有司 一有司 二有司制 로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는 鄕有司가 都有司로 전환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표 7 의 (8)에서는 憲宗 9년(1843)에 領議政 趙寅永이 山長으로 부임하면서 都 有司의 職役이 郡守로 나타나며 一有司, 二有司는 幼學, 進士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山 長이 居京하고 있으며 京有司가 현직으로 중앙과의 연결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 원의 실질적 운영을 할 수 있는 職任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都有司는 院中의 大小事를 監檢하는 직책이라는89) 것으로도 이러한 점은 이해가 된다. 憲宗 9년 후반부터 都有司의 직책이 郡守로 나타난다는 것은 地方官僚에 의해 서원의 실질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표 7 의 (9)에서 哲宗 7년(1856)에서 高宗 22년까지 都有司 金奭均(郡守)이 山長으 로 취임하면서부터 11명의 郡守가 山長이 되고 있음도 표 7 의 (7)의 내용이 가지는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또한 高宗 8년 (1871)부터의 현상은 大院君의 書院毁撤과 관련 하여 각 지역의 書院 院長(山長)은 地方官이 겸임하도록 규정되었던 현상과 그 궤를 같 이 하고 있다.90) 이렇게 볼 때 灆溪書院의 院任組織과 德川書院의 院任組織은 學緣, 地緣을 함께 하지 만, 같은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그 변화의 형태에서는 유사점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겠 다. 이는 두 서원의 출입인사들의 성격과 관련하여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86) 宋煥箕는 1728년(英祖 4)에서 1807년(純祖 7)까지 살았으며 本貫은 은진이다. 宋時烈의 5代孫으로 1779년(正祖 3)에 經筵官, 1795년(正祖 19)에 吏曹參議, 1796년(正祖 20)에 禮曹判書를 역임했다. 87) 南公撤은 1760년(英祖 36)에서 1840년(憲宗 6)까지 살았으며 本貫은 宜寧이다. 그는 1784년(正祖 8) 任實縣監, 1817년 右議政, 1821년 左議政, 1823년 領議政을 역임하였다. 88) 李樹煥, 앞의 학위논문 pp.81 89 참조. 89) 鄭淳睦, 앞의 책 p.189 참조. 90) 金世潤, 大院君의 書院毁撤에 관한 一考察 (西江大 碩士學位論文, 1980).

- 240 - 國史館論叢 第59輯 德川書院은 南冥과 崔永慶을 배향하는 서원으로서 인조반정 이후에 나타나는 시대적 변화를 灆溪書院과 함께 하고, 또 居京의 親南人系 老論人事가 院長職을 역임해 나갔음 에도 院任組織의 구조는 시종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灆溪書院의 경우 院任組織의 형태 는 거의 西人系 書院의 변화와 유사하게 변모해 갔음을 볼 수가 있다. 이는 灆溪書院의 조직과 경영이 지역 사족들간의 이해관계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 권력과 당파성에 좌우 되었음을 보여주는 양상이라 하겠다. 2. 地域士林 中心의 書院 淸溪書院은91) 明宗 19년(I564)에 李希顏을 主壁으로 하여 李大期, 全致遠을 배향한 서 원이다. 淸溪書院의 배향인물인 黃江 李希顏(1504 1559)의 本貫은 陜川 草溪이며, 1554 년(明宗 9)에 高靈縣監을 지냈다.92) 李希顏은 與南冥曺植松溪申季誠 爲道義交 라는93) 기록을 통해 볼 때 南冥과 동시대 에 같이 활동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配享人物인 李大期(1550 1628)의 碑文에 年 十六文理大通 就學於崔守愚堂 乃出入南冥曺先生之門 盖先生與黃江道義交也 라는94) 기록 을 통해서는 李大期와 黃江, 그리고 南冥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全致遠(1519 1589)도 같은 책의 受業於黃江李希顏 希顏歎曰 己知道矣 嘗到寒岡鄭逑 南冥曺植示曰 此人將不在吾弟子之列矣 라는95) 기록은 全致遠과 李希顏의 관계와 그가 南冥 문도로서 활동하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李大期와 全致遠은 임란 때 의병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합천 李氏는 고려초기부터 族勢가 강성하여 이후 在京勢力과 在地士族으로 분화되어 나갔다.96) 특히 이 지역은 일찍부터 金宗直이 善山, 密陽, 咸陽 등지를 왕래하였고, 金宏 弼은 冶爐縣에 久居하면서 鄭汝昌, 金馹孫 등과 자주 陜川地方을 드나들어 많은 士林들 이 배출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보면 己卯, 戊午士禍를 거치면서 士林들의 희생이 커지는 시기에 退溪 李滉, 南冥의 학문이 뿌리를 내렸으며 사림의 수도 증대되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축적과 사림의 확대는 中宗 말년부터 나타나는 先賢 奉祀를 91) 淸溪書院은 조선시대에는 草溪縣에 소재하였다. 현재의 行政區域으로 陜川郡 栗谷面에 속한다. 92) 慶尙南道輿地集成 草溪郡邑誌 참조. 93) 위의 책 草溪郡邑誌 李朝人物條 참조. 94) 위의 책 草溪郡邑誌 碑板條 참조. 95) 위의 책 本朝 人物考 참조. 96) 李樹健, 앞의 책 p.108 참조.

- 241 - 위주로 한 書院의 발달과 함께 대체로 學緣으로 맺어지는 성리학 체계 내에서 淸溪書院 도 각 門中(특히 南冥門徒)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내용은 淸溪書院의 院任 조직에 관한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자료는 孝宗 4년(1653)에 작성된 院任案 1册이다.97) 이 院任案을 보면 원임구조는 院長 有司 체 제로 구성되었으며 거주지가 陜川인 姜翼文(司諫 ; 1568?)이 처음 원장으로 나타난다.98) 姜翼文의 院長 재임은 職役을 가진 시기를 고려한다면 光海君 초반이 된다. 그렇다면 淸溪書院의 원임안은 明宗 19년부터 宣祖까지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셈이다. 특히 姜翼文은 南冥系의 鄭仁弘이 집권하고 있던 光海君朝에 일어난 癸丑獄事때 사임하였음 은 남명문도를 배향하는 淸溪書院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실이다. 즉 淸溪書院은 配享人物의 성격과 관련하여 본다면 南冥 문도들에 의해 서원의 건립 이 주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서원의 운영은 院任案에 나타난 원장들의 성격을 통 해서 볼 때 남명문도들에 의해 서원의 경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 정치권의 변 화와 무관할 수 있었던 在地士族層인 道儒林, 鄕儒林에 의해 운영이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職役이 표기된 院長을 중심으로 院任案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8 年代 院長 光海君1 姜翼文 (1609) 曺珽立 光海君9 金峻立 (1617) 金是榮 曺以章 郭壽龜 李玄齡 權繼亨 淸溪書院 院任案(職役이 표기된 院長) 職役 居住地 特記事項 司諫 陜川 牧使 陜川 進士 郡守 星州 院長(1人), 有司(2人)이 고정화 된다. 左郞 玄風 縣令 星州 進士 丹城 權院長後, 職役없는 院長(鄕儒林) 94名 97) 淸溪書院 院任案 (黃江亭 李氏門中 所栽) 참조. 98) 慶尙南道輿地集成 陜川郡邑誌 참조. 姜翼文은 1609년(光海君 1)에 禮曹左郞, 正言, 獻納을 역임하다가, 癸丑獄事(1614) 때 辭職하였으 며 1618년에 귀양갔으나, 1631년(仁祖 9)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사직하고 고향에서 말년을 보냈다 고 한다.

- 242 仁祖 7 兪彥堉 李重協 趙徵鑑 李勉大 金善永 鄭琠 朴慶九 金奎燦 金相稷 李原神 成大進 國史館論叢 第59輯 郡守 郡守 郡守 郡守 郡守 郡守 前正言 前郡守 前司書 判書 前承旨 京 京 京 京 京 善山 高靈 玄風 高靈 1846年 兵曹參議로서 勿溪書院長 星州 1857年 勿溪書院 院長시 職役은 參判 昌寧 1840年 承旨로서 勿溪書院 院長 역임 우선 표 8 에서 보면 姜翼文부터 權繼亨까지의 院長 재임 연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대체로 姜翼文이 宣祖 39년(1605)에 文科及第하여 光海君 1년(1609)에 관직으로 나아가 있던 시기에 院長職을 재임했고, 曺珽立도 光海君 4년(l612)에 관직에 나아갔고, 金峻立이 進士가 된 것도 光海君朝라 본다면99) 光海君 년간에 現職官僚들이 원장직을 재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蘫溪書院이나 德川書院과 같이 배향인물의 성격이나 붕당정치와 관련되어 나타 난 결과로 보기 힘들다. 대신 이는 慶南 일원의 서원이 가지는 일반적 성격으로서 16세 기까지 봉사자의 後孫이 원장에 임명되는 것을 피하고 鄕中 인사나 道內 인사로 임명된 경우를 생각한다면, 광해군 때에 나타난 司諫, 牧使, 左郞, 縣令 등 현직관료의 院長 재 임은 鄕村社會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中央 또는 地方官과의 연결이 필수적이었다 는 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위 표 8 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星州 중심의 玄風, 善山, 高靈, 昌寧 居 住의 有力士族이 원장으로 부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草溪地域 在地士族들의 中央政 界 진출이 미약하여 道儒勸出 또는 勸請의 형식을 통해서 나타난 현상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權繼亨 院長後 在地士族들에 의해 院長職이 계승되었는데 그 재임 평균 임 기가 一期享祀로 줄어들어 약 80여 명의 院長이 교체되었다는 점이다.100) 99) 淸溪書院 院任案 참조. 100) 慶尙南道輿地集成 草溪郡 人物篇 참조. 한편 人物篇에도 鄕院長의 이름이 나오나 모두 官職이 없다.

- 243 - 仁祖朝에 들어서면 現職 郡守가 5명이나 지속적으로 원장직을 역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01) 이는 一鄕大夫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中央集權的 官僚制 사 회에 있어 官職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草溪縣 의 儒林들이 중앙정계에 고급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점을 고려한다면 人脈, 學脈, 地緣을 통해 중앙 또는 지방관과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德淵書院은 愼齋 周世鵬을 獨享하는 서원으로 宣祖 辛卯年(1591)에 지역 士林들의 發 議로 桐材書院을 창건하였다가 宣祖 壬辰年(1592)에 兵亂으로 灰塵되고 顯宗 庚子年 (l660)에 漆原面 南皐에 重建하여 南皐書院이라 하였다.102) 肅宗 丙辰年(1676)에 德淵으 로 賜額을 받아 高宗 戊辰年(1868)에 훼철될 때까지 德淵書院으로 漆原 鄕士林들의 활동 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서원 훼철 후 辛亥年(1911)에 德淵서당을 세워 지금 현재까지 東萊鄭氏 門中과 周氏宗門에서 관리하고 있다. 奉享者 周世鵬은 基先尙州人 自高曾之也 徒居江右之陜川 至先府君 又徒漆原 遂僞漆 原人 이라103) 한 바와 같이 漆原人으로서 中央政界로 진출하여 조선조 書院의 시효를 열 게 하였던 분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원래 漆原縣의 土姓은 金, 尹, 丁氏였지만 조선조에 일부는 在京官人이 되고 일부는 地域士林으로 남았을 뿐이다.104) 그러나 칠원에 來住한 士族은 尙州周氏, 安東權氏, 昌原 黃氏, 金海裵氏 등이 있어 그 一門들이 영남의 士林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德淵別 祠라고 불려지는 鄕賢祠의 건립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105) 이 鄕賢祠는 肅宗 戊寅 年(1698)에 德淵書院 앞에 건립하여 盆城裵氏 靜谷, 尙州周氏 龜峯, 星州裵氏 栗里, 昌原 黃氏 獨梧, 尙州周氏 守口 5先生을 배향하여 漆原 來姓들의 鄕村 在地勢力의 기반을 구 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로서는 德淵書院에 보관 중인 慕賢契案 이다.106) 이 契案의 序文에서 五先生祠宇 辛未撤院之後 鞠僞蕪草者二十有人異 戊戌之冬 五先君創議重建 全鄕士林齋誠同力 設契鳩財名 曰慕賢契 107) 라고 밝히고 있듯이 鄕賢祠 훼철 후 漆原 鄕村 在地士族들의 재결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다음 표 9 에서 재지사족들의 움직임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101) 年代計算은 郡守가 부임해 온 연도와 離任한 연도를 가지고 계산한 것임. 102) 漆原殿祠誌 德淵書院所藏. 德淵書院은 周世鵬 獨享으로 나타난다. 103) 慶尙南道輿地集成 漆原縣邑誌 碑板條 참조. 104) 李樹健, 앞의 책 p.138 참조. 105) 漆原殿祠誌 鄕賢祠 建立背景 참조. 106) 이 慕賢契案은 修正本과 함께 2부가 보관되어 있는데 肅宗 이후부터의 기록을 함께 修正 整理한 것으로 연대 추정은 191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107) 慕賢契案 序文(德淵書院 所藏).

- 244 - 國史館論叢 第59輯 표 9 德淵書堂 慕賢契案 戊戌 尙州周 昌原黃 金海裵 光州安 玄風郭 長水李 密城朴 기타 總計 107 78 56 37 15 18 13 69 393 위 契案의108) 연대는 德淵書院 폐쇄 후 高宗 戊辰年(1868)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 다면 高宗 2년(1898)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契案에 의하면 漆原의 土姓인 尹氏 는 2명으로 나타나는 반면 來姓인 周, 黃, 裵氏가 契案 전체수의 61%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漆原 鄕村의 公論을 주도한 것은 來姓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德淵書院 院任組織을 살펴보면 肅宗 17년(1691) 肅宗 43년(1717)에 걸 쳐 작성된 都有司案에109) 나타난 院任 조직은 堂長, 校任, 院任, 都有司, 掌議로 나타나고 있다. 德淵書院의 都有司案에 나타난 院任組織은 都有司의 薦望制度와 관련된 것으로 생 각된다. 원래 薦望은 후보자 셋 가운데 하나를 추천하는 三望制度110)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德淵書院의 都有司案은 漆原縣의 儒林公論과 관련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데 堂 長, 校任이 참여하고 있다. 書院의 主機能을 원활히 하기 위해 보조기능으로서 출발한 堂會의 역할은 鄕村社會에서의 그 권위와 영향력이 대단히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慕 賢契案에서 보여주듯이 漆原縣의 儒林公論은 德淵書院을 거점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 음을 대변해 준다. 따라서 당연히 堂長은111) 書院의 원장이112) 맡게 될 것이며 교임은 지역향교의 임원 일 것이며 院任은 德淵書院의 公事員 또는 祭長 등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堂會 (儒會)는 書院 운영문제의 전반에 관한 議決을 위시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한 在 野儒士들의 輿論을 환기하고 結集하며 公式化하는 거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德淵書院의 都有司가 가지는 역할도 매우 클 것이라 생각된다.113) 108) 慕賢契案 (德淵書院 所藏). 德淵書院 건립과 관련한 姓氏는 來姓인 周氏, 黃氏, 裵氏 順으로 나타난다. 109) 德淵書院 都有司案 (德淵書院 所藏). 院任錄은 없고 都有司案이 있는데 이 都有司案을 통하여 院任構造를 파악할 수 있다. 110) 丁淳睦, 韓國書院敎育制度硏究 p.129 堂會考 참조. 德淵書院 都有司案에 나타난 薦望制度의 형태는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都有司를 選任하 고 있다. 111) 원래 堂長은 院務를 맡는 事務長格인 職位이나 여기서 堂長은 堂會의 長을 나타내는 의미 로 받아 들여진다(丁淳睦, 앞의 책 참조). 112) 李東歡, 韓國文敎風俗史 ( 韓國文化史大系, 高麗大 民族文化 硏究所) p.197 참조. 113) 德淵書院都有司案. 都有司는 院中 大小事를 監檢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 245 - 이 都有司案을 보면 肅宗 17년(1691) 肅宗 43년(1717)까지는 都有司만 薦望되고 있으 며 1703, 1705, 1716, 1717년은 掌議가 추천되고 있다. 都有司의 책임은 院中 大小事를 監檢하고 掌議는 院大小事를 評議한다면 실제 서원의 운영을 주관하는 職任이라고 생각 된다. 漆原 鄕士林들의 公論과 관련하여 都有司案에 薦擧된 都有司 및 掌議의 명단을 통계 해 보면 다음과 같다.114) 표 10 漆原 德淵書院 都有司案(薦된 都有司와 掌議) 姓氏 周 黃 裵 郭 李 尹 安 姜 朴 成 趙 기타 總計 都有司 15 15 14 8 2 4 9 2 2 2 3 2 78 掌議 3 2 1 1 7 이렇게 볼 때 漆原縣의 儒林들은 德淵書院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周, 黃, 裵氏 등의 來姓에 의해 鄕權이 주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都有司案의 기록이 肅宗代의 것만 남아 있어 중앙정치권에서 파생되는 朋黨政治와 직접적인 관련을 지울 수 없으나 漆原殿祠誌 의 鄕校에 관한 기록을 보면 金宏弼, 趙光祖, 李栗谷, 金長生, 金集, 宋浚吉, 金麟厚, 成渾, 宋時烈 등의 西人系 人士들을 종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仁祖反正 후 漆原縣 儒林들의 동향을 추정할 수 있다. 3. 門中 後孫 中心의 書院 勿溪書院은 肅宗 38년(1712) 成松國(高麗 侍中)을 追享하기 위해 昌寧郡 大也面 旺山 에 世德祠를 建立하였다가 英祖 5년(1729)에 勿溪書院으로 개칭되었다.115) 勿溪書院은 鄕村儒林들이 主體가 되어 건립한 鄕, 道의 書院과는 달리 門中이 주체가 되어 건립한 대표적인 門中書院이며, 타 문중書院이 지역사림이 주체가 되는 경우와 달리 서원의 건 립과 경영이 成氏門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朋黨政治가 114) 德淵書院都有司案 에는 都有司와 掌儀는 3명을 薦하여 選任하고 있다. 115) 成侍中孝行錄 (成氏門中所藏). 先生墓下 創建祠宇之議 出自庚寅而事力 不建仍循至今矣 崇禎後壬辰 建祠於麥山之北 勿溪 之上 己酉冬 尊享先生以彰其孝.

- 246 - 國史館論叢 第59輯 절정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상황에서 건립된 서원들의 대부분이 그 조직과 경영에 地域 士族들 간의 이해관계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권의 黨派性에 의해 院任組織 및 서원의 경 영형태가 좌우되고 있던 실정과는 다른 면모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서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양상과 달리 勿溪書院은 조직 결성이 자유롭고 人的 交換이 成氏門中에 한정되어 있어 院任組織도 院長 有司 체제를 갖춘 英祖 5년(1729)부터 高宗 5년(1868)까지에 걸쳐 中央政治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院任組織 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勿溪書院의 성격을 이해할 수가 있다. 昌寧의 土姓은 張, 成, 曺, 河, 表氏이며, 이들 토성들은 고려후기부터 吏族 또는 士族 으로 나타나며 成氏와 趙氏는 15世紀에 鉅族으로 발전하였다.116) 특히 成氏는 昌寧 戶長 成仁輔를 始祖로 하며 이후 路上, 路下派로117) 나누어져 거대한 씨족을 형성하였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 士族으로 발전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成仁輔의 子 成松國(高麗侍 中)의 孝性을 기리기 위하여 成換, 成龜世, 成萬齡 등이 중심이 되어 世德祠를 창건하였 다가118) 그 후 勿溪書院으로 改稱했으며, 이때 主壁 成松國 외 7선생을 배향하여 춘추로 祭享하다가 勿溪書院 院規에 따라 15선생이 享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勿溪書院이 창건되는 肅宗 英祖년간은 書院, 祠字외 남설에 대한 폐해가 지적되는119) 시기였지만, 勿溪書院은 문중 書院이 가질 수 있는 특색으로 중앙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것 으로 생각된다. 勿溪書院에 配享된 인물들의 활동 상황을 파악해 보면, 동일한 後孫관계라 해도 黨色 과 무관하거나 또는 黨色을 달리하여 나타나기도 함을 볼 수가 있다. 成運(報恩), 成悌 元(公州)은 曺植, 徐敬德과 교류하여 北人系列의 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成守琮(坡州) 父子와, 成守琛(坡州), 成渾(坡州) 등은 趙光祖의 학통을 이어 기호지방의 사림파로 활 동하면서 西人系列의 당색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配享人物이 가지는 뚜렷한 黨色 이라 해도 기본적으로는 후손들에 의한 門中書院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肅宗 英祖 년간에 있어 서원의 존립과 관계된 다양한 변화에도 큰 충격없이 서원의 경영이 지속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勿溪書院이 소장하고 있는 院長案, 院任案을120) 통해 院任조직을 분 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院長案은 京院長과 鄕院長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는 데 京院長으로는 趙泰億(左相, 1675 1758), 趙文命(1680 1732), 沈壽賢(領相, 1663 116) 李樹健, 嶺南 士林派의 形成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p.48 참조. 117) 昌寧成氏八百年史 (昌寧成氏門中所藏) 참조. 118) 世德祠 營建 敦事錄 (勿溪書院 所藏). 成氏門中 147명이 世德祠 건립에 참여하고 他姓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敦事錄의 記錄에 의하면 祠宇 건립을 위한 開基有司 庫舍有司 등의 院職名이 보인다. 119) 肅宗實錄 권51, 肅宗 38년 정월 壬辰 乙丑條. 120) 勿溪書院 院長案 에는 院長案 2책, 院任案 1책이 있다(勿溪書院所藏).

- 247-1736), 李宗城(領相, 1692 1759), 尹東度(領相, 1707 1738), 李殷(領相, 1722 1781) 등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京院長의 추대는 이 시기에 鄕村士林들의 身分的 階層構造를 확고히 한다 던지 정치상황의 변동에 따른 士林들의 聯合, 協同 및 書院의 발전을 위한 이해관계에 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본다. 더욱이 그것은 書院建立時期(肅宗 英祖)에 걸쳐 나타난 京院長들이 모두 成氏의 後孫, 外孫, 또는 同族과의 緣故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121) 이러한 사실은 趙文命(左相)이 勿溪書院 四大字親筆揭楯 院規二十條 院記一度製述 이라122) 하여 院規 20條, 院記一度를 만든 것도 서원의 규격을 갖추어가는 과정과 연결 해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沈壽賢(領相) 院長時는 院長吾旣以龜勉 以當朝名士中二員 請出京有司可也 一依 指敎郞 請校理李周鎭左郞金尙中 竝視院事 123)라 하여 京有司制를 두어 서원의 일을 원활 히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교리 이주진, 좌랑 김상중이 서원의 일을 병행하여 본다 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京有司制는 남계서원이나 전라도 지역의 흥암서원, 필암 서원 등에서 조직화되고 있는 京有司와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본다. 그것은 원장의 업무 를 校理나 左郞을 통해 執行한다는 의미일 뿐 정치적 변화에 대응한다던지 또는 중앙정 계와의 연결을 위해 京有司制를 별도로 설치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겠다. 이렇게 볼 때 勿溪書院은 門中의 先祖 가운데 高官 名臣이나 名儒, 忠臣, 烈士를 가지 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自己家門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누리며, 충분히 향촌사 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혈연 집단으로서의 상호결속을 통해 향촌사회 내에 서 私的 保障을 받고 있었다. 특히 京院長들의 활동시기는 景宗 英祖 년간이었다. 이 시기는 老小論의 갈등이 심화 되고 있는 때로서 붕당정치의 기간으로 볼 수 있다. 勿溪書院의 원임록에서는 鄕院長 1 인, 有司 2인으로 院任이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西人系 書院으로 분류 된 서원의 院長 임기가 終身職으로 나타난다면 勿溪書院의 院長 임기는 1년 미만에 머 물고 있으며, 有司는 1년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124) 院任錄(景宗 1; 1721 高宗 5; 1868)을 분석해 보면, 京院長은 英祖 48년(1772)까지 7 121) 勿溪書院 院長案. 趙泰億(左相) 按本道時院中多士以斯文望請掌院敎 辛丑(1721) 二月十六日 省墓後라고 기재 되어 있는데 趙泰億은 外裔孫으로 기록되어 있다. 122) 勿溪書院 院長案 참조. 123) 勿溪書院 院長案. 京院長으로서 京有司制의 실시를 권장하고 있다. 124) 勿溪書院 院任案. 辛酉年(純祖 1; 1801)에 9명의 院長이 交替되고 있고, 壬戌年(純祖 2; 1802)에 5명의 院長이 교체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