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_59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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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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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朝鮮中期 鄕村支配組織에 관한 硏究 鄕規 洞契를 中心으로 朴 京 夏* 1) 序論 Ⅰ. 在地士族의 鄕村支配와 鄕規 1. 在地士族의 形成과 鄕規의 作成背景 2. 壬亂後 鄕規 鄕案의 復舊와 그 運用 Ⅱ. 鄕規의 性格變化와 士族支配秩序의 動搖 1. 鄕規 鄕案을 둘러싼 儒鄕分岐 2. 中央의 鄕村統治 强化와 士族의 鄕村支配力 弱化 Ⅲ. 在地士族의 村落支配와 洞契 1. 鄕村疲弊와 上下合契 2. 在地士族의 村落支配 再確立 結論 序論 16, 17세기에 在地士族이 군현단위에서 鄕權을 장악하고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유지 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기반은 鄕規와 洞契였다. 16세기 재지사족은 그들의 결집체인 鄕會에서 그들의 이해에 따라 만든 鄕規를 향촌 운영규약으로 하고, 留鄕所를 통해 鄕吏들을 통제하고 군현단위로 부과하는 부세를 농민 에게 부과하는 과정에 간여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治鄕之人 으로서 의 위치를 지켰다. 임란을 겪으면서 재지사족의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그들의 기반이었던 유향소와 향안 이 소실된 상황이니 鄕射堂 鄕案의 重修, 鄕約 洞契의 실시 등으로 사족중심의 향촌지배 질서를 임란 후에도 꾸준히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1) 1)* 中央大學校 講師. 1) 金仁杰,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 한국사론 19, 서울대 국사학과, 1988).
2 國史館論叢 第59輯 김인걸은 임란후 향안이 중수되는 현상을 16세기에 이어 17세기에도 어느 정도 사족 지배체제가 유지된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김용덕은 향촌사회가 壬亂을 전후하여 그 성격 이 변한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鄕中公論 에 의해 제정된 鄕規를 기본원리로 한 운 영체제는 京在所 革罷이래 유향소의 기능 변질, 즉 유향소가 수령의 보좌기관화 되었고, 또한 1675년(肅宗 1)의 五家統事目 의 반포 이후, 常賤의 役이었던 面任을 지배계층 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임명하려 하여 사족의 謀避현상이 가속화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후 등장하는 鄕族 의 등장과 儒鄕分岐 현상을 주목하였다.2) 洞契에 있어서도 17세기의 洞契는 임란전 주로 사족의 家門奴婢 통제의 성격에서 上 下合契 형태의 동계가 등장하여 하층민들을 통제하려는 방향으로 확대하여 나간다.3) 이 러한 현상을 사족들의 하민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어 군현단위의 지배에서 동단위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는 견해4)와 임란의 戰禍로 인한 피해로 사족의 대민 지배력이 위축되 어 동단위로 영향력이 축소된 것으로 파악하는 상반된 입장이 있다.5) 즉 조선시기를 임 란을 전후로 나누는 입장과 전 중 후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들의 향규 동계에 대한 상 반된 견해는 조선시기의 시대구분과 관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두 입장을 16, 17세기의 향규 동계를 비교 분석하여 조선시기의 사회 성격을 규정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Ⅰ. 在地士族의 鄕村支配와 鄕規 1.在地士族의 形成과 鄕規의 作成背景 조선초기부터 향촌통치의 방식은 재지사족과 향촌사회의 성장추세, 왕권의 강약과 집 권체제의 해이 및 動舊派와 士林派와의 영향력의 상관관계에 따라 움직여 왔다. 훈척과 관직에 일차적인 세력기반을 두고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중앙의 훈척세 력들은 郡縣制와 京在所 留鄕所 및 面里制 등을 통하여 관권 주도형의 향촌통치체계를 유지하려는 데 반하여 향촌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둔 사림은 중앙정부와 관권의 지나친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향촌사회의 獨自性과 自律性을 지향하고자 하였다.6) 2) 金龍德, 鄕規硏究 ( 韓國史硏究 54, 한국사연구회, 1986). 3) 朴京夏, 倭亂直後 鄕約에 대한 연구 ( 중앙사론 4, 1987). 4) 鄭勝謨, 朝鮮時代 鄕村社會의 變貌와 農民組織 ( 歷史民俗學 1, 1991). 5) 鄭震英, 16,1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 성격 ( 역사와 현실 3, 역사연구회, 1990). 6) 李樹健, 朝鮮前期 地方統治와 鄕村社會 ( 大丘史學 37, 大丘史學會, 1987) 참조.
3 선초 관권 우위의 중앙정부의 향촌통치에 반발한 在地士族과 中央政府와의 갈등은 鮮 初의 京在所 設置, 留鄕所의 革罷와 復立, 社倉制 실시, 申明色 置廢, 鄕約普及運動 등을 통하여 표출되었다. 재지세력의 자치기구인 유향소는 1406년(太宗 6)에 혁파되었으나, 이 는 중앙세력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재지세력의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 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官 주도적인 申明色이 시행된 지 몇 년만에(太宗 15 17) 혁 파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7) 世宗末에 건의되어 文宗 世祖代에 실시되었던 社倉制8) 역시 재지중소지주였던 사림 세력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社倉은 본래 鄕約과 더불어 朱子의 鄕村自治論의 2대 기간을 이루는 것으로 향민의 飢餓를 막고 향촌공동체를 안정시키려는 지주제적 입장에 서 나온 것으로 관 주도적 향촌지배를 구상하던 官學派들과는 다른 입장의 것이었다.9) 成宗代에 사림파는 유향소를 周制의 鄕射禮 鄕飮酒禮를 주관하는 기구로서 복립하여 鄕村敎化 鄕村秩序를 확립할 것을 주장하여 1488년(成宗 19)에 비로소 복립되었다.10) 그 러나 복립된 유향소는 사림파의 세력이 강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도리어 훈구세력 들이 京在所를 장악하여 유향소 座首를 擇定함으로써 유향소가 훈구세력들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11) 成宗代에 사림세력이 유향소를 통하여 시행하고자 했던 鄕射禮 鄕飮酒禮의 보급 노력 은 中宗代에 오면 향약으로써 유향소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하였다.12) 1517년(中宗 12)의 趙光祖 등에 의한 呂氏鄕約普及運動은 勳舊派에 의해 장악된 京在所 留鄕所를 존속시킨 채, 己卯士禍(1519년)로 사림파가 실각하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13) 이같이 사림파들은 정책적인 면에서 선초부터 중앙의 훈구세력과 갈등관계를 가져 왔으나 이를 바탕으로 16세기 중 후반에 들어서면서 향촌사회내에서 꾸준히 재지적 향촌지배질서를 강화해 나 아가고 있었다. 훈구파는 개국 이래 조정의 공신 대신 등으로, 이들의 무궤도하고 과도한 수탈은 왕권 과 체제의 안정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土豪들의 鄕曲武斷 행위는 基層民들을 농 토로부터 유리시키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民田을 겸병한다든지 賦役에 응하지 않으며, 수령조차 輕蔑劫制 하여 그 횡포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14) 이들은 훈구 파가 擇差한 留鄕所 品官들이며 또한 이들과 밀착된 吏族 이었다. 이에 따른 대책으로 7)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上 下( 震檀學報 34 35, ) 참조. 8) 吳後一, 朝鮮初期 社倉에 대한 一考察 社倉論과 運用方案을 中心으로 ( 又仁金龍德博士停 年紀念史學論叢 ), 1988) 참조. 9) 李海濬, 朝鮮前期 鄕村自治制 ( 國史館論叢 9, 國史編纂委員會, 1989) pp ) 成宗實錄 권216, 成宗 19년(1488) 5월 乙亥條. 11) 李泰鎭, 앞의 논문(1973) 참조. 12) 中宗實錄 권31, 中宗 12년(1517) 12일 戊午條. 13) 李泰鎭,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 16세기의 경제변동과 관련하여 ( 한국문화 4,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3). 14) 明宗實錄 권4, 明宗 원년(1546) 12월 壬辰條.
4 國史館論叢 第59輯 등장한 것이 民本的 道德政治를 표방한 사림파의 중앙정계의 등용이었다. 이리하여 훈구 파는 宣祖 초년에는 거의 제거되고 유향소는 이제 朱子學徒이자 中小地主的 基盤을 가 진 在地士族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향촌사회 지배의 일익을 담당해 온 吏族들을 鄕權 에서 배제해 나아가고자 하였다.15) 15세기부터 등장한 士林派는 高麗의 郡縣鄕吏 吏族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여말선초 의 사회적 변동과 이에 따른 신분의 재편성 과정에서 士族과 吏族으로 나누어졌다. 이들 은 같은 土姓에서 일부는 軍功 添設 散職 등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品官化되고 관인자원 이 15세기 후반부터 크게 증가하자 吏族의 士族化의 길이 봉쇄되었다. 16세기 이후부터 는 양반과 중인층의 확연한 구분에 따라 이제는 같은 土姓이면서 鄕吏와 士族과는 별개 의 신분으로 보아 천시하였다.16)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자행해 오던 훈구계열과 이들의 하수인인 吏族이 士林에 의해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잃어 갔다. 동시에 在地士族은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 운영원리로서의 鄕規를 제정하여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鄕規는 鄕案에 오른 鄕員들 간의 약속으로 留鄕所의 조직 즉 座首의 선임, 그 소관업 무, 鄕案入錄節次, 鄕先生(鄕憲) 및 그 庶務인 鄕有司의 업무와 戶長 吏房 등의 選任에 관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17) 향규에 대한 용어는 鄕立約條 (禮安) 一鄕約束 (海州) 鄕約 (安東, 鄭士誠) 約束條目 (南原) 立議 (咸安) 鄕社堂約束 (海南) 鄕憲 (長城) 鄕案規式 (咸興) 등 다양하게 불리어져 왔다. 이들 규약은 명칭은 어떻든 간에 呂氏鄕約 류와 는 시행목적 시행 주체 시행대상 주영향시기 등에 따라 확연히 그 성격이 구분되므로 鄕 規 18)라는 용어로 규정하였다. 15) 金龍德, 金圻鄕約硏究 (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16) 李樹健, 영남사림파와 형성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79) pp ) 金龍德, 鄕規硏究 ( 韓國史硏究 54, 韓國史硏究會, 1986) p.29. 김용덕은 향약과 향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구분 전성시기 중점 시행목적 내용 기본안책 변천 鄕規 前期 鄕族 鄕權 留鄕所關係 鄕案 儒鄕分岐後 消滅 鄕約 後期 基層民 敎化 生活規範 善惡籍 儒鄕分岐後 存續 18) 향규의 용례가 보이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李大期( ), 1608년 작성, 鄕規完議 ( 雲壑集 국중 46 가 1327) 鄕規完議. 李民寏( ), 題鄕規後 ( 紫巖集 권3, 국중 46 가 1891) 所著鄕規七綱三十五目. 宋廷書( ), 修鄕案序 ( 竹溪集 ) 永爲鄕規. 金涌( ), 雲川洞中立約序 ( 雲川集 ) 定爲鄕規若千條. 李馥(17 世紀人), 三水郡鄕案序 ( 陽溪集 ) 不守鄕規. 김용덕은 鄕規硏究 ( 韓國史硏究 54, 1986)에서 향규사용 용례를 위 다섯사례만 들고 있으
5 鄕規가 留鄕所 運營 및 鄕案入錄節次 등에 관한 것이라면 鄕案은 一鄕의 顯族들이 모 여 一鄕의 輿論을 형성하는 구심체로서의 鄕會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명단을 말한다. 향 안은 재지사족 가운데 본인의 內 外 및 妻族에 하자가 없는 門閥顯族이어야만 入錄될 수 있었다. 이들을 鄕內人 또는 주로 鄕員이라 하였으며 이 향안에 오른 향원이어야만 留鄕 所의 鄕任이 될 수 있었다. 이 鄕規 鄕案은 표 1 에서 나타나듯이 재지사족이 향촌지배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시기인 16세기 중 후반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표 1 에서 보여 주듯이 영 호남을 중심으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표 1 16세기 鄕規 鄕案作成事例 鄕規(鄕案) 立案者 作成時期 豊沛鄕座目 1469 光州鄕案序 朴祥 1516 靈光鄕案(舊案) 1522 嘉靖鄕案 1530 淸道鄕規 朴鸞 1541 密陽鄕案 1544 禮安鄕立約條 李滉 1556 咸州鄕案 1569 海州一鄕約束 李珥 1578 鄕約 鄭士誠 1581 鄕規舊條 姜崙 1588 萬曆鄕案 1589 鳳山鄕案 1591 咸興萬曆乙未鄕憲 1595 新寧鄕案 1597 地域 咸興 光州 靈光 安東 淸道 密陽 安東 咸安 海州 安東 安東 安東 鳳山 咸興 永川 收錄文集 備考(所藏處) 鄕憲 奎 909 訥齋集 서울대 古 靈光鄕校 安東鄕孫 事蹟錄 淸道文獻集 5 國立 한57-가 936 退溪集 규 3970 國立 古 栗谷集 규 3011 芝軒集 국중 46 가-23 永惠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嶺南鄕約資料集成 서울대 古 정신문화연구원 계명대중앙도서관 다음에서는 16세기 중 후반기에 있어서 鄕規 鄕案 작성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麗末 빈번한 왜구의 창궐과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이어서 新 나 다음과 같이 더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때, 鄕規 용례가 당시에는 보편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朴壽春( ), 1603년 작성, 鄕規序 ( 菊潭集 권2). 1666년 작성, 鍾城鄕規 ( 鍾城誌 권1). 1588년 작성, 鄕規舊條 ( 永嘉誌 권5). 1708년 작성, 求禮鄕規約束條目 ( 鳳城誌 上).
6 國史館論叢 第59輯 王朝 개창이라는 정치적 변혁에 따라 향촌사회의 인구이동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世宗代 를 기준으로 世宗實錄地理志 를 통한 姓氏移動을 파악한 것을 보면 來 續性에 있어서 全羅道는 250군데, 慶尙道는 115군데로 다른 道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것을 볼 수 있 다.19) 이는 당시 향촌이 불안정한 것임을 입증하며 더욱이 慶尙 全羅道가 더욱 심하였음 을 알려주는 것이다. 향촌의 新來人으로서 來 續性은 土姓의 입장에서는 異質分子로 보게 되어 兩者 사이 에는 土着人과 新來人이라는 대립상태에서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續 姓은 鄕吏로서 곧 유력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土姓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존재였다.20) 신왕조 개창 이후 鄕吏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들 續姓들은 慶尙道와 全羅道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각 향촌에서 토성의 在地品官들과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土姓品官들은 향촌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들의 제어에 적지 않게 부심하여야 했으며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鄕案이 작성되었으리라고 본다.21) 鄕案의 入錄은 비록 같은 門閥顯族이라도 다른 지역일 경우에는 인정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향규로 1581년(宣祖 9) 安東에서 鄭士誠이 마련한 鄕約 을 들 수 있다.22) 他官人으로 장가들어 온 자나 본부인으로 타관에 장가든 자는 顯族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鄕案入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중 혹 타관인으로써(타관에서) 이 미 鄕任에 행한 것을 기준으로 하고자 하나 他官鄕參을 또한 가히 의논할 것이 없지 않 으니 이것을 기준하면 또한 미안할 것 같다.23) 이와 같은 지역적 폐쇄성은 17세기 말 南原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곧 1700년 庚辰 鄕案 을 작성할 때 三鄕 즉 父 母(外) 妻鄕에 입록되어 있으면 심사없이 直書하나 二鄕 이하는 圈點이라는 심사를 거쳐 입록하였다.24) 19) 李泰銀,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 한국사회사연구, 1986) p ) 李泰鎭, 위의 논문(1986) p ) 金鎭逸, 朝鮮後期 鄕案에 대한 一考察 ( 韓國史學 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pp ) 鄭士誠( ), 1581년 작성, 鄕約 ( 芝軒集, 국중 46 가 23). 23) 鄭士誠, 위의 책. 24) 南原鄕校 所藏 古文書들은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朝鮮社會史資料 1, 南原 : ).
7 표 2 鄕籍 庚辰二鄕圈點25) 本府籍 本府籍 本府籍 本府籍 本府籍 本府籍 本府籍 本府籍 計 3鄕 2鄕 1鄕 1鄕 1鄕 無鄕 無鄕 無鄕 被圈點 他官籍 他官籍 他官籍 他官籍 他官籍 他官籍 他官籍 者 1鄕 1鄕 1鄕 無鄕 2鄕 1鄕 無鄕 入錄者 脫落者 二鄕圈點이란 3鄕 이하 즉 2鄕 1鄕 無鄕者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표 2 에서 알 수 있듯이 他官鄕에 오른 1鄕 2鄕은 인정을 못받고 있다. 18세기 초 중반은 일반적으로 鄕案이 罷置되는 경향인데 이 庚辰籍은 南原에서 1721년에 추록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작성한 마지막 鄕案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엄한 지역적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의문이 들지만 향안은 원칙적으로 本府籍만이 향안가입으로 인정받았던 듯하다. 흔히 중앙의 고관을 지낸 자라 하더라도 향안 입록의 어려움을 들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禮泉의 鄭琢과 潭陽의 宋純을 든다. 鄭琢은 중앙에서 判書를 지낸 바 있으나 寒 門 이라는 이유로 예천의 鄕員들에게 연회를 베푼 연후에야 鄕案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 다.26) 그러나 鄭琢이 바로 향안에 입록될 수 없었던 것은 실상은 신분상에 문제가 있어 서가 아니라, 他官人으로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정탁은 1589년(宣祖 23)에 安東 鄕案인 鄕錄 에 올라 있었으나,27) 말년에 아들이 사는 예천으로 이사를 하여28) 他官 人으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宋純의 경우도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외가가 南原이기 때 문이었다.29) 鄕規 鄕案의 작성배경으로 身分的 地域的 排他性 이외에 향안에서 吏族의 排除를 들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土族은 고려 鄕吏의 후손으로 吏族과 같은 土姓에서 유래된 것이나 1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사족과 더불어 향안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 한 사실은 1530년(中宗 25) 安東에서 작성된 嘉靖鄕案 에 鄕孫이 참여하고 있었던 데 서 알 수 있다.30) 같은 지역인 安東의 鄕約 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5) 위의 자료, 1721년(景宗 1) 작성. 26) 增補文獻備考 권235, 職官考 ) 鄭震英, 朝鮮前期 安東府 在地士族의 鄕村支配 ( 대구사학 27, 1985) pp.23 24의 주 64) 참조. 28) 鄭琢( ), 年譜 ( 藥圃集 ). 29) 許箱全集 (成大 大東文化硏究院) p ) 花山古例 士夫則有鄕案 而視三參 鄕吏則有壇案 而別三等 鄕案 壇案同時竝設 而四鄕所着銜於壇案 末端 三公兄着銜於鄕案末端 相爲管轄. 鄕案完議 雖是名門巨族 一有欠缺於三參 則毋得擧論 若鄕吏之曾孫及女壻外孫 竝勿拘許錄 ( 安東 鄕孫事蹟 安東鄕孫事蹟錄, 국립중앙도서관 古 朝 57 ァ420).
8 國史館論叢 第59輯 一. 庶孼은 중국에서는 無禁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구분이 심히 嚴하다. 비록 許通洗 濯이라도 반드시 淸族(鄕參顯閥)과 四 五世 結婚한 후에 參案을 허락한다. 一. 內 外가 無咎하나 자신에 흠이 있는 자는 대단한 것(亂倫 敗常之事)이 아니면 許 參케 하나 付標(如離行損徒之類)한다. 一. 亂倫敗常을 범한 죄인의 자손은 蓋愆(操行卓爾之類)과 洗濯(科名淸顯之類)이 아니 고 代가 멀면 不許 一. 향리 連派者는 반드시 四 五世를 淸族과 결혼한 후에 參案을 허락케 한다. 直派(如 三丁居官之類)는 洗濯 후에 역시 四 五世를 淸族과 결혼한 후에 參案을 허락케 한다. 一. 원래 兩班은 지금의 所見에 근거해서 鄕吏와 비교하면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름이 비록 兩班이라 하더라도 貧賤한 가운데 혹 軍士나 百姓家와 결혼했으면 혹 醜雜滓賤의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러한 사람 또한 반드시 淸族과 四 五世 결혼한 후에(參案을) 허락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類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고 있는 자는 여기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衆議를 널리 물어서 可否를 수합한다.31) 향안에 오르려면 4 5세를 향안에 오른 顯閥과 결혼한 후에야 가능하고 庶孼鄕吏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고, 설사 士族이라도 軍士와 良民과 결혼했으면 향안에서 배제되었 던 것이다. 이같이 在地士族은 鄕吏들을 鄕案에서 배제하여 사족중심의 향촌지배를 이루어 나갔 다. 이러한 사정은 安東에만 국한된 특수한 것이 아니었다. 16세기에 작성된 禮安 海州 咸安 등지의 여러 鄕規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32) 이런 점으로 미루어 지역에 따라 차이 가 있으나 16세기 중 후반에는 鄕吏 세력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향촌에서는 鄕規 鄕案을 통하여 土姓이 아닌 新來士族과 鄕吏들의 鄕權 참여를 배제 하는 동시에 재지사족들의 하층민에 대한 武斷行爲를 견제하는 등 자율적 규제속에서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治鄕之人 으로서의 위치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16세기에 야기되는 사회문제로는 토호들의 불법적인 농민수탈과 그로 인한 民의 유 망 이었고 이것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31) 鄭士誠, 鄕約 ( 芝軒集 ). 32) 이와 관련된 史料는 다음과 같다. 元惡鄕吏 人吏民間作弊者 隨見聞摘發 告官依律科罪 ( 禮安鄕立約條 ). 元惡鄕吏 用事書員作弊民間 發於公論者 鄕中僉議 高官抵罪 ( 咸州鄕案 ). 鄕所專掌糾檢吏民風俗 若有鄕吏書員輩官屬 汎濫用事 作弊民間及凌辱品官者 則告官治罪 ( 海州 一鄕約束 ). 吏族을 배제해 가는 과정은 朴焞의 논문( 朝鮮中期 士族의 鄕村支配權確立 조선후기 향약 연 구, 民音社, 1990)이 참고가 된다.
9 - 183 토호들의 頑悍함은 八道가 모두 그러한데 三南에서 더욱 심하다. 수령은 왕조의 외관 인데 그들은 수령을 輕蔑劫制 하고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리면 중상배척하니 유약한 자 는 감히 이들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비법을 묵인하여 一邑의 실권이 모두 品官의 손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民田을 겸병하고 양민을 함부로 차지하고 환곡을 갚지 않으며 부 역에 응하지 않고 園場을 침점하고 川澤의 利를 오로지 하며 그 횡포강악함이 夷狄보다 심하니 이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나라는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33) 위 기사에서 土豪 品官은 京在所를 장악하고 향촌의 대지주로서의 훈구계 및 그들의 하수인인 吏族으로 보이지만, 在地士族 역시 이러한 土豪로 규정되는 데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재지사족의 田民 증식은 여러 형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田畓의 경우에는 주로 가난 稅金 還上 長利 등의 이유에서 放賣되는 토지의 買得이었는데, 이것은 高利貸的인 수탈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奴婢의 경우에는 대체로 出產에 의한 자연적인 증가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단순한 奴婢간의 相婚에서가 아니라 奴婢와 良民과의 交婚에서 오는 결과였다. 이 시기 노비와 良民간의 交婚率은 60%에 이르고 있었다.34) 이같은 在地士族의 田民增殖策에 의하여 田地의 集積과 良人의 奴婢化가 급격히 진행 됨으로써 과거의 中小地主가 大地主 또는 地方土豪로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추세 는 결국 自營農民의 몰락과 농촌의 피폐를 초래하였다. 향촌의 피폐는 비단 봉건정부의 가혹한 수탈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재지사족의 田民 증식에서도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지사족의 田民 증식은 하층민으로부터의 저항 뿐만 아니라 중앙권력과의 마찰 을 야기시키는 것이었다.35) 이러한 재지사족의 재산증식은 중앙정부의 입장으로서는 良民과 民田의 침탈로 비춰 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鄕曲武斷 武斷土豪 로 규정되었던 것이다.36) 동시에 士族의 침탈로 인한 民의 流亡37)은 土地와 民의 勞動力을 기반으로 하는 재지 사족의 경제적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바로 退溪의 禮安鄕立約條 는 이러한 심각 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서 제시되었으며 그것은 사족의 자기통제를 통한 교화의 솔선을 내세운 것이었다. 33) 明宗實錄 권4, 明宗 원년 12월 壬辰條. 34) 李樹健, 嶺南士林派의 形成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9) 참조. 35) 鄭震英, 16世紀 鄕村問題와 在地士族의 대응 禮安鄕約 을 중심으로 ( 民族文化論叢 7,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6) pp ) 明宗實錄 권9, 明宗 4년(1549) 9월 戊午條. 明宗實錄 권22, 明宗 12년(1557) 5월 己未條. 37) 本縣壞地偏小 民殘十室 不成模樣 只緣流離 匠店止接山谷 耕懇荒地 居土民三分之一盡屬於官家 官 家修理柴炭新舊從馬賓客下人供饋一應使喚之事 皆用匠人 官家賴以扶持土民舒其徭役 其來已久 而丁 卯年間 品官及土民 有侵占者 其時留鄕任憑 別監具幹 進白于退溪先生 議定禁斷規約 (琴蘭秀 : ), 土民侵占匠人人田地禁斷規約 惶齋集 권2).
10 國史館論叢 第59輯 그 가운데 약조의 恃强凌弱侵奪起爭者 受官差任憑公作私者 등은 사족의 하민에 대한 직접적 침탈을 막고자 한 것이다. 또 鄕長凌辱者 不顧廉恥汚毁士風者 不服鄕論反懷仇 怨者 등의 사족의 품위를 훼손하는 자에 대한 자기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多接人戶不 服官役者 不謹租賦圖免徭役者 는 사족의 무단행위를 규제하고자 한 것이다.38) 이 약조는 사족의 鄕論 不一致로 退溪 생전에는 시행되지 못했으나 임란 이후 嶺南의 鄕規에 底本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하여 16세기 향촌사회의 문제를 재지사족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곧 사족의 하층민에 대한 무단행위를 막고 사족 간의 자기규제를 통해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 고자 하는 노력은 비단 영남에서 뿐만 아니라 海州에서 栗谷이 제정한 海州一鄕約 束 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39)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鄕規는 선초부터 麗末의 鄕吏層이 鮮初 土姓士族과 土姓吏族 으로 구분되어 가면서 地域的 身分的 排他性을 띠게 되었고, 16세기 초 중반 중앙의 勳 舊勢力과 이들과 결탁된 吏族勢力을 鄕權에서 제거하고, 在地士族의 下層民에 대한 武斷 行爲를 규제하여 治鄕之人 으로서의 위치를 지켜 사족중심의 향촌지배를 이루고자 하 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동시에 이것은 사족의 향촌운영 원리로 작용하였다. 2. 壬亂後 鄕規 鄕案의 復舊와 그 運用 壬亂을 겪으면서 在地士族은 鄕村의 荒廢化로 田土 奴婢 등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 고 鄕規 鄕案 등의 소실로 재지사족의 지배적 위치가 혼들리게 되었다. 따라서 재지사족 은 먼저 난후 향촌피폐의 복구와 함께 사족의 지배 기반인 鄕規 鄕案 鄕射堂 등의 重修 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嶺南의 경우, 전쟁 중의 의병활동에 따른 자기성장을 바탕으로 향안 등의 중수로 향촌질서를 회복하여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咸 安의 향안복구에 관한 다음의 기록은 그와 같은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隆慶 壬申(宣祖 6, 1572)에 (鄕案을) 크게 새롭게 하였는데 그 일을 주관한 자는 座首 趙庭彥과 別監 趙城이었다. 매년 春秋에 크게 講席을 마련하여 少長이 모두 모였는데 38) 李滉( ), 鄕立約條序 ( 陶山全書 권3). 1589년 禮安鄕立約條 를 제정한 退溪도 그의 聘丈 許瓚이 의령 지방에서 토호로 몰려 사망한 바가 있다(李滉, 進士許公墓碣銘序 退溪全書 권46). 39) 營私圖利侵小民山僧者 留鄕所及監官憑公營私者 牧糴時私受賄賂害及生民 貢賦徭役公債拒不備納 者 (李珥 : , 海州一鄕約束 栗谷全集 권16) 등의 여러 조목들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퇴계의 禮安鄕立約條 와 율곡의 海州一鄕約束 이 呂氏鄕約과는 다른 성격의 것. 즉 鄕規 임은 田化爲雄 田川孝三 金龍德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밝혀졌다.
11 - 185 爵位로써가 아니라 나이에 따라 階序를 삼았다. 禮儀가 갖추어지고 衣冠이 정숙하였으 니 모두 呂氏鄕約을 따라 그리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壬辰의 變에 案과 譜가 모두 없어 져 200년 간의 先祖 名位遺跡이 하루 아침에 떨어졌으니 통탄스럽다. 丙申年間(宣祖 30, 1596)에 四五 鄕老가 서로 말하기를 鄕案이 없어져 文獻을 징험할 길이 없으니, 우리 몇 사람이 만약 하루 아침에 죽으면 年少子弟가 어떻게 先世의 諱가 무엇이며 爵 이 무엇인가를 알겠는가. 또 어떻게 先代의 系出 派分을 알며 吾州의 人物의 盛함과 衣 冠의 아름다움을 알겠는가. 重修의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 고 하였다. 國朝 이래 案의 전해 내려옴이 무릇 몇 해인데 한번 불행하게 중간에 불에 타고, 두번 불행히 또 壬辰에 없어졌다. 全盛時에 古事를 환히 아는 자가 없지 않았을 때에도 重錄할 때 (宣 祖 6, 1572) 遺亡의 患이 없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偏邦人物이 百에 한 둘도 남지 않았은 즉 소위 古事에 환한 자를 어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우리 二三諸公이 古今에 통하여 다시 기록하니, 丙申(宣祖 30)으로부터 지금까지 8년 사 이에 만들어지려 하다가 말고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다시 罷置된 상태로 있었다. 이제 근근히 이루어지니 이 案이 重修된 것은 우연이 아닌 성싶다. 불행 중 또한 다행한 일 이다.40) 壬亂 후 살아 남은 士族이 留鄕所를 중심으로 어렵게 鄕案을 復舊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향안이 복구되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南原(1603년) 永川(1602년) 昌 原(1608년) 密陽(1601년) 咸陽(宣祖末) 新寧(1597년) 居昌(1617년) 昌寧(1600년) 등지에서 는 17세기 초반에 鄕案을 작성하고 있었다.41) 그러나 기존 향안을 바탕으로 소수의 인원 만 追錄하거나 전혀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여 新鄕案 을 작성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상당한 기간 향안이 작성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鄕規는 향안입록 심사기준, 유향소관계 규정, 향원의 행동규범 등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鄕會에서 衆論에 따라 작성하였다. 鄕案入錄은 사족이면 누구나 다 입록되는 것 이 아니라 사족 중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므로 향안은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기 도 하였다. 따라서 향안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는 鄕會나 사족의 최고 지배기구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 운영에 있어서는 지역적인 차이가 있지만, 향회는 官權과 일 정한 거리를 가지고 사족의 自治權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향회의 집행기 구라 할 留鄕所를 통하여 吏民에게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留鄕所는 在地士族의 鄕村支配機構로서 향촌사회의 운영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40) 咸州鄕案序 ( 咸州鄕案, 1603년 : 宣祖 37 작성). 41) 김인걸은 향안작성 시기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우고 있다. 첫번째 시기는 壬亂後에서부터 仁祖反 正까지, 두번째 시기는 仁祖反正 이후 肅宗 3 40 년대 즉 18세기초까지, 세번째 시기는 18세기초 入錄者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그때를 전후해서 향안 入錄이 종식되거나 향안이 罷置되는 시기가 그것이다(金仁杰, 조선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 地士族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참조).
12 國史館論叢 第59輯 었지만, 그것은 향회를 통한 鄕中公論 에 의해 직접적으로 규제를 받고 있었다. 곧 座首 를 비롯한 鄕任의 택정과 鄕所業務에 대한 감독 등은 鄕會를 통해, 그리고 향회에서 형 성된 鄕中公論을 바탕으로 향촌지배가 이루워졌다. 鄕會는 단일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그 구조와 성격은 각 지역의 사 정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예컨대 향촌운영에 있어 留鄕所가 주축이 되는 경우와 유향소 외에 따로 鄕會라는 상부기구를 갖추는 경우가 그것이다. 金仁杰은 전자의 유형 이 주로 嶺南에서, 그리고 유향소 외에 主論之員 으로서 鄕老 鄕長 鄕有司를 두는 후 자의 유형은 湖南에서의 운영구조로 파악하였다.42) 그러나 安東의 경우에도 留鄕所의 座 首가 湖南에서의 鄕會의 鄕憲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1602년(宣祖 36) 安東의 金圻가 찬한 鄕約 에 보면 향약의 都約正 밑의 副約正에 유향소 좌수를 겸임케 하여 鄕約所가 鄕會대신 유향소의 상부기구로서 작용하였던 것 같다.43) 嶺南의 경우도 향안작성시 명칭이야 어떻든 鄕會의 기능을 하는 조직이 비상설 기구로서 존재하였을 것이다. 보통 鄕會는 매년 春秋 두 차례에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정기집회인 春秋講信 외에 鄕中大事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향회가 열릴 수 있었다.44) 향회의 모임은 留鄕所에 서 주관하여 모임을 알리는 回文의 반포나, 遮日 鋪陳器皿 등의 집기도 유향소에서 마련 하였다.45) 春秋講信과 慶賀를 제외한 公事會集時에는 鄕員 전원이 반드시 참석하여야만 하였다. 有故者는 單子를 제출하도록 하였고, 單子를 제출하지 않은 無故不參者 와 托故 不參者 에게는 처벌을 가하였다. 鄕會는 士族의 最高支配機構로서 기능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鄕所의 지배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留鄕所와 鄕案의 운영에 있어서 유향소의 임원을 차출하거나 향 안의 입록자를 선정할 때는 반드시 향회를 열어 그 가부를 결정하였다. 鄕任은 향안에 등재된 자만이 差任될 수 있었다. 鄕會는 이같이 鄕所에 대한 人事權을 장악하여 소관업 무에 대한 감독을 하였고,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座首 이하를 향회에서 改遞施罰할 수 있었다.46) 향회는 향소에 대한 인사권의 장악 뿐만 아니라 戶長 吏房 등 향리를 差定하 는 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47) 南原에서는 吏房에 鄕所의 都通引을 차출하는 것이 향회 의 관례였던 것 같다.48) 향회는 이러한 향리에 대한 인사권 장악을 바탕으로 향리들의 42) 金仁杰, 朝鮮後期 鄕村社會變動에 관한 硏究 18 19세기 鄕權 담당층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1) pp ) 金析, 鄕約 北厓集, 1602년 : 宣祖 36 작성). 이 향약은 이후 嶺南地方 鄕約의 저본을 이루 었으나 당시에는 실시되지 못한 것 같다. 44) 永嘉誌 권5, 新定十條 嚴會議. 45) 李珥, 海州一鄕約束. 46) 鄕任之員 或有所失 或有作弊者 則主論之員 隨聞見出文 告于城主 改遞施罰之際 若非大段負犯 則 只付標 不削名事 ( 龍城誌 권3, 鄕射堂條 約束條目 ). 47) 鄕吏中選擇淸謹吏 置簿勸善 上戶長吏房 必以淸謹者 備望差定 若有他岐圖得者 勿許行公事 (李珥, 海州一鄕約束 患難相恤條).
13 作弊行爲를 鄕會의 公論을 통해 治罪할 수 있었다.49) 그러나 수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鄕員이 잘못이 없는데 벌을 받게 되었을 때나,50) 향리 의 죄가 重한 데 수령이 座首의 주장을 불신하는 경우는 一鄕의 鄕員을 총동원하여 官 庭에서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을 집단적으로 하기도 하였다.51) 일반적으로 鄕中公論을 바 탕으로 한 鄕會의 一鄕支配가 守令權과는 구별되는 自治性을 가지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官權의 우위를 인정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던 바 公事聚會 是非官政者 에 대한 규제52)나 관권에 대한 保身之道 53)의 표현 등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鄕規에서는 事涉官府有關鄕風者 와 妄作威勢擾官行私者 는 極罰을, 舊官餞 亭無故不參者 와 公私聚會是非官儀者 는 中罰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告官依律科罪 항 목을 별도로 두었다. 이는 수령권의 우위를 인정한 위에서 관권의 일정한 보호와 협조를 통해 향촌지배를 실현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다. 鄕員 상호간에는 家族 鄕黨 구성원간의 유교적인 윤리규범의 제시와 규제, 不顧廉恥 汚毁土風者 身爲執綱交結下吏者 등 향원 자신들의 품위와 風敎에 관한 문제를 자치적 으로 규제함으로써 하층민을 교화시키고자 하였고, 동시에 향원들의 자기규제를 통한 솔 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人吏民間作弊者 와 같이 鄕吏의 民間作弊, 品官에 대한 抗禮, 書員의 作弊 등 吏胥輩에 대한 규제를 하고, 多接人戶不服官役者 不謹租賦圖免徭役者 등을 규제함으로써 賦稅 賦役에 있어 官에 협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庶人凌蔑士族者 에 대하여서는 鄕會에서 告官治罪토록 하여 庶孽 및 中庶 下層民에 대한 신분적 규제를 가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侍强凌弱侵奪起爭者 受官差任憑公作私者 등과 같이 하 층민에 대한 무단행위를 규제하는 조목을 통하여 하층민의 보호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 것은 사족이 一鄕의 治鄕之人 으로서 하층민에 대한 지나친 수탈이 결국 향촌사회의 안정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자제를 규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在地士族은 士族의 鄕村支配 運營原理로서의 鄕規를 작성하고 이것을 準據 로 하여 留鄕所 鄕會를 운영하고, 하층민을 통제하는 동시에 鄕員間의 自己規制를 통하 여 鄕村社會를 安定시키고 士族中心의 鄕村支配秩序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48) 以都通引 差出新官吏房之議 曾以完定 則此乃鄕中舊法也 今又齋會 筆之於書 以爲不易之定論 此後 如有不遵完議之吏 則別樣科罪後 永廢前程事 ( 龍城誌 권3, 鄕射堂條 癸酉完議 ). 49) 盧敬任, 鄕中完議 下吏 ( 敬菴先生文集 ). 50) 鄕員而非罪 將受刑戮者 僉議立庭 呈單子救解之 (李珥, 海州鄕約束 栗谷全書 권16). 51) 위의 책. 52) 權行可, 1605년(宣祖 39) 작성, 十條鄕規 禁非違條( 嶺南鄕約資料集成 ) pp ) 一論官員善惡時失 最非守分保身之道 吾契中切宜戒之 犯此者論罰 (鄭四震, 愚巷洞契約文 守 庵集 권2).
14 國史館論叢 第59輯 Ⅱ. 鄕規의 性格變化와 士族支配秩序의 動搖 1. 鄕規 鄕案을 둘러싼 儒鄕分岐 17세기 초 중반 在地士族은 鄕規와 鄕案을 復舊하고 그들의 지배기구인 鄕會 留鄕所를 통하여 기층민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在地士族 門中 黨色 등에 따른 갈등과 새로이 성장 해 오는 新鄕들에 의해 대립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儒鄕分岐 로 표현할 수 있다. 儒 鄕에서 儒 는 鄕校나 書院을 所據處로 하는 儒林을, 鄕 은 鄕所(鄕廳)을 소거처로 하는 鄕族을 의미한다. 儒와 鄕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크게 다 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儒 는 중앙의 관직을 역임한 儒 와 향교 서원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사족인 儒林 그리고 기존의 향안에 오른 舊鄕 등으로 볼 수 있다. 鄕族 은 士族 과 신분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으나 鄕任을 계속 맡음으로써 사족과는 구별되어 나갔던 鄕任層과 이른바 常漢 으로서 부를 축적하여 새로 향품에 참여하는 富民層이었던 新 鄕, 그리고 자신들은 사족이라 자부하였지만 중앙관계와 단절됨으로써 鄕族 으로 포함 되고 있던 鄕班 등이 그것이다.54) 儒鄕分岐의 성격은 時期와 地域에 따라 重層的으로 다양하게 나타나 획일화시켜 설명 하기는 어려우나, 鄕規 鄕案의 성격변화과정과 사족지배질서의 동요를 유향분기를 통하 여 살펴보고자 한다. 향안의 重修는 임란 직후부터 이루어지나 그것은 향촌내부의 사족 간의 분란으로 인하여 쉽지는 않았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南原을 들 수 있다. 1639년(仁祖 17) 南原의 李尙馨은 約束條 目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고을은 본디 南方의 雄府로 칭해지고, 文獻이 盛하고 風俗이 純化됨은 한 道에서 으뜸이다. 亂을 겪고 난 후에 京在所가 폐지되어 士大夫가 鄕權을 잡는 것을 천히 여겨 꺼리게 되니 모든 論議가 可否를 정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무식하고 염치를 모르는 무리들이 방자히 행동하고 鄕籍을 출세하는 사사로운 쪽지로 삼고, 鄕任이 집안을 일으 키는 돈방석으로 알아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이 극에 달하였다. 鄕籍이 다시 불태워지 고 鄕任에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없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風俗의 壞亂이 날로 극에 달해 폐단이 갖가지 생겨나도 구할 약을 쓸 수 없었다. 右尹 崔先生 (崔衍 : , 朔寧人, 漢城右尹)께서 新舊籍을 혁파한 것도 역시 부득이 한데서 나온 것이다. 道內의 全州 羅州 靈光 등 3大邑도 지금까지 모두 戰場이 되고 논의가 54) 金仁杰, 조선후기 향촌사회 변동연구 (서울대 博士學位論文, 1991) p.153.
15 - 189 괴리되어 鄕籍이 罷廢되었다55) 라 하여 京在所가 革罷된 후 鄕案에 오를 자격이 없는 자들이 향안에 올라 鄕任을 맡아 온갖 폐단을 일삼는 것을 비난하여 鄕案重修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5년 후 인 1644년(仁祖 22) 甲申立議 에서는 다른 세력에 의해 李尙馨의 約束條目 이 부 정되고 있다. 소위 鄕有司를 둔 것은 비록 奇大升과 朴淳 兩賢이 구상한 것에 따른 것이라고 하나, 생각건대 그 兩賢은 우리 고을의 先賢이 아니다. 우리 고을의 일에 하필 我鄕諸先賢의 遺俗을 버리고 멀리 他鄕의 兩賢을 따르겠는가. 癸亥籍(1623)이 自罷되고 己卯籍 (1639)이 自聚自錄되었은 즉, 당시 奇 朴의 고을에 또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 겠다. 그러한 즉 弊를 혁파하여 風氣를 떨치고자 생각한 것은 소위 (또 다른) 弊로서 弊를 救濟하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다. 爭鬪를 더욱 증가시킬 뿐이다. (중략) 대저 舊憲 을 따르고 更張을 좋게 여기지 않는 것이 鄕父老의 뜻이다. 鄕權을 천단하고자 奇 朴의 이름을 빈 것은 鄕有司의 뜻이었다. 그들에게 조금 이라도 거슬리는 점이 있으면, 문득 그들은 죄를 얽어 白首聯名하니, 이에 損削이 낭자하게 되고 以少凌長之風이 극에 달하 게 되었다.56) 곧 李尙馨이 만든 鄕規를 南原의 遺俗을 버리고 光州의 例로써 기준을 삼은 것에 대 한 불만을 제기하며, 도리어 李尙馨 등의 세력의 폐단을 공격하고 있다. 이는 土姓士族 과 新來土族간의 鄕權을 둘러싼 마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李尙馨은 16세기 중반 妻家를 좇아 南原으로 入鄕한 孝寧大君의 증손인 李聃孫(1490?)의 후손이며, 李尙馨이 約束條目 에서 언급한 崔衍 역시 15세기 말에 妻家 晋州 河氏를 좇아 서울에서 이거한 崔恒의 손자 崔秀雄( )의 후손이다.57) 이들은 중 앙에서 요직을 역임하여 주로 향촌보다는 서울에 있었다. 그러다가 李尙馨이 말년에 병 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南原에 내려와 鄕規를 지었는데58) 그 내용을 남원의 예를 따르지 않고 중앙의 권직을 역임한 朴淳과 奇大升이 구상한 光州의 예를 따랐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즉 이것은 조선전기에 入鄕한 入鄕士族과 麗代 이래의 土姓士族간의 갈등으로 土姓士族에 비해 入鄕士族이 前朝官으로 신분적 위치가 우위였다. 그래서 토성 사족에 의한 甲申立議 에서는 約束條目 보다 地域的 排他性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甲申立議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5) 李尙馨( ), 1639년 撰, 約束條目完議 ( 龍城誌 권3). 56) 龍城鄕案立議 ( 龍城鄕案, 1644년 작성). 57) 宋俊浩, 남원지방을 예로 하여 본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구조와 성격 ( 朝鮮社會史硏究, 一 潮閣, 1987) pp ) 李尙馨, 年譜 ( 天默齋集 ).
16 國史館論叢 第59輯 一. 향안입록에 있어서 三鄕과 二鄕은 直書하고 外三寸이 입적치 않았으면 二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一. 만약 二鄕 미만이라도 문벌이 분명하면 圈點한다. 一. 鄕老 중 2명을 掌議로, 鄕員 중 4명을 有司로 삼고 임기는 1년으로 鄕會時 교체한 다. 一. 유사 및 향로 중 50세 이상인 향원이 1인씩 추천하여 천거하고 향소 및 창감은 1 년마다 교체하고 연임할 수 없다. 一. 外倉監官의 차출은 향원으로 한다. 一. 향회는 50세 이상의 향원과 향임을 거친 자로 구성하고 대회 때에는 노소 관계없 이 참여한다.59) 이와 같이 甲申立議 는 南原 자체의 鄕規를 주장하고 光州의 例에 따라 제정한 鄕 有司의 독단을 방지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첫째, 主論之員 중에서도 鄕有司를 없애고 掌 議 有司를 두었고, 권한을 제한하여 鄕員의 참여를 보장하였다. 둘째, 鄕案入錄基準에서 衆所公知의 士族은 直書한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三鄕과 二鄕은 直書하며 外三寸이 鄕案 에 없으면 2향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즉 門閥士族이라도 자격미달이면 圈點한 다는 것이다. 셋째, 鄕任의 薦擧에 50세 이상의 향원이 참여한다는 것 등이었다.60) 이같이 外三寸이 南原鄕案에 들지 않았으면 인정을 못받거나 顯族이라도 자격미달 이면 圈點對象이라는 것은 중앙에서 이주한 士族을 겨냥한 地域的 排他性을 보여주는 것이다. 約束條目 이 제정 시행된 지 불과 5년만에 제정된 甲申立議 는 이같이 현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후 사족의 최고 지배기구인 鄕會의 鄕憲을 湖寧 崔氏 全州 李氏들이 주도적 으로 맡게 되고, 향안에도 壬亂 前後에 入鄕한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南原의 顯 族으로 崔 盧 李 安을 들고 있으나,61) 이는 조선후기의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남원의 사 례는 중앙의 관직을 역임한 儒 와 향촌의 鄕班 간의 갈등관계이나 이는 사족지배 질서 의 동요를 보여주기보다는 이러한 갈등을 거치면서 사족중심의 지배질서를 확립해가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黨爭의 여파로 향촌사회내에서 사족간의 향론이 분열되었 다. 密陽의 경우는 17세기 말에 鄕案이 罷置되고 또 중앙의 黨爭의 영향으로 鄕論이 심 하게 분열되고 있었다. 鄕案은 1673년(顯宗 14)의 癸丑變告 로 사족 내부의 갈등이 심 59) 甲申立議 ( 龍城誌, 1644년 작성). 60) 金鶴逸, 17세기 龍城鄕案 의 入錄基準 및 절차에 대하여 (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 硏究會, 民音社, 1990) pp ) 김현영, 조선후기 남원의 사회구조 ( 역사와 현실 2, 한국역사연구회, 1989) 참조.
17 하게 일어나 입록자에 대한 撤案으로 파치되기에 이르렀으며, 1694년(肅宗 20) 甲戌換 局 이후 南人이 실각함으로써 南人이 대부분인 이곳의 사족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南人 실세 후 향안중수를 통한 사족규합의 시도가 한 차례 있기는 하였으나 老論系 士族의 반대로 포기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며, 1728년(英祖 4) 戊申亂 이후로는 더욱 남인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在地士族들의 郡縣 단위의 鄕權 확보는 거의 불가능한 상 황에 이르고 있었다.62) 1738년(英祖 14) 安東에서의 金尙憲書院 건립시비도 겉으로는 士 族과 鄕族과의 대립으로 비치나 실상은 嶺南南人의 대표적 근거지인 安東에 西人인 金 尙憲을 제향하는 서원건립을 내세워 老論勢力이 그 지역 新鄕을 이용하여 南人系 安東 士族에 대한 공격을 가한 것이다.63) 이같은 당쟁의 영향은 鄕任 校任의 잦은 交替를 가져왔다. 比安의 1599년(宣祖 33)부 터 1832년(純祖 32)까지의 座首 別監의 재임기간을 보면 임기 1년으로 규정되어 있음에 도 불구하고 座首 別監들의 재임기간은 극히 짧은 것으로 나타난다. 座首의 경우, 전체 152명 중 1년 이상을 지낸 사람은 72명(47%), 1년 미만은 80명(53%)이고, 別監의 경우는 전체 321명 중 1년 이상이 불과 68명(21%), 1년 미만이 무려 253명(79%)으로 1년 이상 은 좌수보다 절대적인 열세로 나타난다.64) 19세기에 들면 安東에서조차 좌수의 임기가 반년을 넘지 못하였으니,65) 다른 곳에서는 더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향청과 향회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며 상대적으로 수령 권의 신장을 가져왔다. 黨爭의 여파에 따른 士族간의 분열과 함께, 17세기 후반 이후 새 로이 성장해 오는 新鄕 과의 갈등은 사족지배구조를 기저에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守令은 부세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鄕任層의 참여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향 임층은 관권을 대표하는 수령과 面民 간의 매개역할을 수행하면서 부세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향임층이 부세행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들의 기구인 鄕廳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원활한 부세제도의 운영을 위해서는 향청이 행정체 계에 편입되어야 했고, 이에 따라 기존의 사족들은 행정업무를 기피하여 향청에는 新鄕 이란 새로운 계층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신향의 대두는 이러한 요인 외에도 정부의 수취 체계에 긴박되어 있던 民들의 避役意志와 중앙정치의 문란으로 빚어진 수령권의 강화현 상에 따른 수령의 賣鄕賣任의 관행이 맞물려 빚어진 결과였다.66) 또한 조선후기 지방재정의 부족현상은 재정마련책이란 명분으로 수령의 賣鄕賣任에 좋은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재정난은 중앙 뿐만 아니라 지방도 마찬가지였는데, 62) 崔虎, 朝鮮後期 密陽의 士族과 鄕約 (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p ) 정만조, 영조 14년의 안동김상헌서원건립시비 ( 한국학연구 1, 1982) pp ) 申正熙, 朝鮮時代 鄕約硏究 (嶺南大 博士學位論文, 1991) p ) 安東執綱錄 (國史編纂委員會所藏). 66) 鄕約節目 ( 嶺南鄕約資料集成,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8 國史館論叢 第59輯 중앙정부가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大同米의 상납율을 높이자 지방관청재정의 주요부분 을 차지하던 留置分이 감소되어 지방재정은 한층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방관청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고,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鄕 案을 파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매향매임은 지방재정 마련책으로 이용되어, 그 禮錢은 향청을 비롯한 각 관청의 소요경비로 쓰였다. 매향매임을 통해 신향이 등장하면서 향청 은 이제 수령에 대한 견제기관이 아니라 그의 지배를 받는 하부기구로 전락되었다.67) 士族의 기반이었던 留鄕所가 중앙의 향촌통치책의 강화 과정에서 守令의 행정기구화 한 鄕廳으로 변질되자 사족들은 수령의 하부기구화된 향청의 鄕任을 한사코 맡지 않으 려 하였다.68) 이 과정에서 이 자리는 鄕外人 및 庶孼들이 차지하여 향임의 중요한 기능 인 부세조정을 맡아 전횡하게 되었다. 일부 武斷土豪로 규정된 토착 양반계층도 향임층 과의 결탁을 통해 그들의 이익을 취하고 있었으나,69) 在地士族은 賦稅權에서 점차 소외 되어 갔다. 이와 함께 鄕案入錄을 둘러싸고 守令의 비호하에 성장해 오는 新鄕과의 마찰이 야기 되었다. 丹陽에서는 1658년(孝宗 9)의 4월과 8월 향안을 改修할 때, 일관성을 잃어 자격 미달자 또는 家系不明者가 입록하는 혼란상을 보여 입록을 둘러싼 士族 내부의 대립이 이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699년(肅宗 25)의 향안에서는 기존 참여인을 중심으로 한 정비 추진의 노력도 있었지만, 1701년(肅宗 27)의 두차례의 追案에서 기존 향안과 관 계없는 非鄕參人들이 30 40%를 차지하게 되고 급기야 丹城鄕案은 이후 곧 파치상태에 놓이게 되었다.70) 南原도 1603년(宣祖 37)부터 1721년(景宗 1)까지의 11차의 향안 작성에 서 1655년, 1679년 1700년에는 2鄕으로 直書하고 1鄕으로 薦擧入錄하는 등 鄕規의 기준 이 완화되는 추세였다.71) 潭陽은 儒 鄕이 나누어지지 않은 고장으로 士族들의 결속이 대단히 강하여 적어도 17 세기 경에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鄕案은 1710년(肅宗 36)을 마지막으로 작성되고 있으며 입록 기준도 본래는 3鄕만 直書하고 2鄕은 반드시 심사를 거치며 單鄕 은 거론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면 2鄕도 심사없이 허용하도록 하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潭陽은 在地士族의 결속이 상대적으로 강한 감을 많이 주고 있으 나 1666년, 1677년, 1710년의 鄕籍修正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72) 이러한 경향은 湖南 뿐만 아니었다. 17세기 중엽 湖西의 燕岐에서 鄕規( 一鄕立法 ) 67) 정은경, 朝鮮後期 身分構造變動에 관한 일연구 (서울대 碩士學位論文, 1982). 68) 金龍德, 韓國制度史硏究 (一潮閣, 1983) 참조. 69) 一 所謂各面豪鄕輩 符同倉監 觀望官奇不納還者 這這指名成報狀 捉上以爲嚴治督是齊 ( 還政畵一 榜 公移占錄 ; 韓國地方史資料叢書 報牒篇 7, p.186). 70) 崔虎, 丹城鄕案에 대한 一考察 ( 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8) p ) 金鎬逸, 17세기 龍城鄕案 의 入錄基準 및 절차에 대하여 (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 硏究會, 民音社, 1990) p ) 全炯澤, 17세기 潭陽의 鄕會와 鄕所 ( 韓國史硏究 64, 1989) p.173.
19 를 다시 講定하는데 양자 사이에 어떠한 구분을 특별히 포함하고 있지 않았지만 儒鄕 이 합석하여 鄕規를 제정하고 있었고,73) 嶺南 尙州의 경우 一邑鄕案이 17세기 초에 작성 될 당시에는 儒鄕의 구분이 보이질 않았으나 18세기에 들어오면 儒 品 의 구분이 보이 고 있다.74) 海西 遂安에서도 18세기 중엽에 一邑儒鄕同錄 한 鄕案이 重修되고 있었다.75) 鄕規 鄕案의 성격변화에서 뿐만 아니라 鄕校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丙子亂이 지나고 仁祖 22년에 제정된 校生考講事目 에는 額內 額外校生 모두 考講하고 落講하 면 罰布 대신 武學에 降定하고, 3년 뒤에 武學試才하여 才落하면 영구히 軍保에 속하게 하는 이전보다 엄격한 내용이 규정되었고,76) 실제 落講校生을 武學에 降定하고 軍役에 충당하는 조치가 顯宗代까지 실행되었다.77) 신분에 구애 없이 額內外 校生을 모두 考講 한 것은 결과적으로 양반들의 額內校生 회피를 초래하였다. 대신 양반들은 靑襟錄78)을 별도로 작성하고 儒生이라 호칭하였다. 유생의 증가는 肅宗 중엽 이후 18세기까지 각 향 교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이는 당시 鄕案入錄者의 급격한 증가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향안입록자의 증가는 兩班人口의 자연증가로 이해되기보다는 이 당시 戶 布 丁布 口錢論 등 양반에게 軍役을 부과하려는 良役變通 논의와 관련된다 하겠다.79) 곧 양반들은 군역을 모면할 대책을 모색하여 양반임을 임증해 주는 鄕案에 入錄하였기 때 문이다. 靑襟錄에 오르는 靑襟儒生의 人員增加도 양반임을 나타내려는 의도의 소산이었다고 하겠고, 결국 兩班士族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입안되는 儒生의 증가는 靑襟錄 작성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청금록의 성격변화 가, 궁극적으로 폐기를 가져온 것은 靑襟儒生의 入案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儒生增 加와 병행하여 청금록의 입안을 놓고 士族들간의 대립이 있었고 또한 이전에 청금록에 제외되었던 鄕族과 서얼들이 청금록에 오르려고 士族들과 대립했기 때문이었다.80) 鄕族 庶孼들이 黨色에 따른 士族의 대립, 守令權의 강화 등 향촌지배구조의 변동속에 서 士族들과 鄕案 鄕任 賦稅權 등의 鄕權을 놓고 儒鄕分岐라는 대립을 벌여 나갔다. 이 73) 一鄕立法, 1652년 (孝宗 3) 작성 (燕岐鄕校 所藏本). 74) 鄭經世, 尙州鄕案序 ( 愚伏集 권15, 1617년 : 光海10 작성) 및 商山錄 (乾), 1746년 (英 祖 22) 작성. 75) 宋德相(? 1783), 遂安郡鄕案重修序 ( 果菴先生文集 ). 76) 校生考講謄錄, 順治 元年(仁祖 22 : 1644) 정월 29일(규 12895). 77) 위의 책, 順治 15년(孝宗9 : 1658) 4월 30일, 7월 20일. 78) 鄕校에는 鄕班 자제 뿐만 아니라 平民 자제들도 출입하였다. 兩班 자제는 향교의 건물 중 東齋에 출입하였고, 平民 자제는 西齋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仁祖代에는 校生에게 考講을 하여 落講者를 充軍하는 법이 시행되자, 兩班 자제들은 額內校生 입학을 회피하고 平民 자제와 구분을 하기 위 하여 儒生으로 호칭하였고, 平民 자제는 校生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그리고 명단도 평민 자제들의 校生案과 구분하여 靑襟錄 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작성하였다. 79) 金仁杰, 조선후기 鄕案의 性格變化와 在地士族 (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pp ) 尹熙勉, 朝鮮後期 鄕校硏究 (一潮閣, 1990) pp
20 國史館論叢 第59輯 는 鄕案과 靑襟錄의 파치 등을 몰고 오면서 士族들은 鄕村에서의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 었으니 그것은 鄕村社會의 커다란 변화였고, 또한 기존의 士族中心의 지배체제의 동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 中央의 鄕村統治 强化와 士族의 鄕村支配力 弱化 壬亂 후 향촌지배구조에 첫 변화를 준 중앙의 향촌대책으로는 1603년(宣祖 37)京在所 의 革罷이다. 중앙의 勳舊勢力들은 京在所를 매개로 재지사족들을 견제하였으나, 수 많 은 폐단을 야기하여 壬亂前부터 이미 폐지의 주장이 논의되고 있었다.81) 그러다가 壬亂 을 겪으면서 在京 勳舊勢力의 京在所와 官權을 매개로 한 外方田民의 지배체제는 와해 되고 戰亂 중 노비의 도망과 사망은 동시에 그들이 관리하고 경작했던 토지마저 상실하 게 되었다. 壬亂 후 京在所는 향리를 침학하는 剩司82)로 민폐만 크다는 備邊司의 지적으 로 혁파되었다.83) 留鄕所 座首의 任命權을 가졌던 京在所의 혁파로 座首의 임명권을 守令이 갖게 되자 수령은 鄕會의 추천을 받아 鄕任을 임명하게 되었다. 곧 京在所 혁파 직후 鄕任 임명권 이 수령에게 간 것은 아니고 鄕會에서 公論으로 제정된 鄕規에 따라 선임하였으나 일련 의 수령권의 강화로 그 권한이 서서히 수령에게 넘어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면서 留鄕所 座首는 守令의 官權을 견제하는 역할이 아니라 수령을 보좌하는 지위로 격하되 어 명칭조차 鄕廳 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수령의 貳衙 로 별칭될 정도였다. 鄕廳의 변화를 가속시킨 것으로는 1654년(孝宗 5)에 제정된 營將事目 을 들 수 있 다. 營將事目 에는 鄕廳과 관련된 조목이 있는데 그것은 軍務에 대한 鄕廳의 責任賦 與 규정이다. 즉 軍務에 대해 중요한 잘못이 있는 수령은 營將이 직접 國王에게 啓聞하 고, 가벼운 잘못은 수령을 보좌하는 座首 色吏를 杖 80 이하에 한해 직접 처분하게 하였 다. 또 束伍軍 軍器의 정비는 座首와 兵房의 소관으로 규정하며, 해당 座首의 용모를 적 은 기록을 兵使 營將에게 보내 代役을 내어 기피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春秋의 軍事訓練, 有事時의 군대동원에 座首가 군사를 직접 지휘하도록 하였다.84) 이처럼 종래에는 없었던 軍務를 맡기고 또 처벌까지도 감수하게 되자 士族들은 鄕任을 한사코 회피하려고 했다. 尹善道가 呈全羅方白書 에서, 81) 成宗實錄 권173, 成宗 15년(1484) 12월 庚午條. 82) 光海君日記 (鼎足山本) 권49, 光海君 5년(1612) 정월 己未條. 83) 宣祖實錄 권158, 宣祖 37년(1603) 정월 甲申條. 84) 備邊司謄錄 권17, 孝宗 5년(1654) 3월 16일. 營將事目 의 영향에 대해서는 田川孝三, 李朝の鄕規について (二) ( 朝鮮學報, 1975)와 金龍德, 韓國制度史硏究 (1983)가 참고된다
21 - 195 오늘날 鄕中에서 鄕任을 擇薦하려 하거나, 守令이 擇用하려 해도 뜻처럼 되지 않는 바 는 일이 古規와 다르기 때문이다. 軍務를 鄕所에 책임지우고 軍器를 鄕所에 責任지우고, 束伍軍을 鄕所에 責任지우고, 陸地에서의 軍隊訓練에 반드시 鄕所를 수행하게 하며, 조 금만 뜻이 같지 않으면 잡아들여 곤장을 무겁게 가한다. 바다에서의 軍事訓練에도 역시 鄕所를 수행케 하여 조금만 뜻이 같지 않으면 잡아다가 곤장을 무겁게 가한다. 때문 에 죽고 사는 것을 잊은 채 이익만을 쫓고자 하는 자들만이 이 鄕任을 참을 뿐 청렴결 백하고 올바른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한사코 회피하고 있다. 참된 鄕所를 맡을 사 람은 다시 어디에서 얻을 수 있으랴. 부득이 비열하고 추잡하거나 재물을 쫓는 자들로 鄕所를 채우고 있다85) 라는 기사나 營將事目 頒布 후의 향촌사정을 잘 알 수 있다. 營將事目 은 군사적 목적에서 孝宗代의 北伐政策의 對備過程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실상은 대 향촌통치책의 일환으로서의 목적이 보다 강하였다. 즉 營將事目 은 座首 대우를 정책적으로 鄕吏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벌 가문에서는 鄕廳을 기피하였다. 그러자 그 자리를 한미한 가문이나 종래의 기준으로 볼 때 鄕員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실리를 위 하여 차지하고 그 자리는 세습되어 鄕任을 담당하는 鄕族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 여 舊鄕과 鄕權을 둘러싼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營將事目 의 영향을 孝宗代에 국한시켜 파악하여 그 영향을 과소하게 보기도 하 나86) 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顯宗 5년 12월에 舒川의 僧人들이 官令을 거역하고 대항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守令이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자 營將이 추가로 파견되어 變 亂을 수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87) 상당수의 승려가 봉건정부의 부세수탈에 불만을 품 고 避役한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僧役의 강화는 그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변란으로 연결 될 소지가 충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실제로 千房寺의 승려들이 일으킨 난에서도 참가자 가 많고 무장까지 하였기 때문에 韓山郡守의 힘만으로는 부족하였고, 堂上武官인 營將을 파견하여 주변 郡兵들까지 이끌고 간 뒤에야 비로소 진압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營將이 官命을 거역하면서 대항한 승려들의 作變을 진압하였다는 점은 營將制가 중앙정부나 지방 관아의 명령이 民에게 효율적으로 침투할 수 있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 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88) 또 1671년(顯宗 12) 凶年時 明火賊과 결탁한 民衆 變亂에서도 營將이 앞장서 營將의 근무지를 이동시키면서 土豪들을 감시하고 도적을 체 포하는 임무까지도 營將이 담당을 하는 등 討捕와 관련된 임무를 공식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89) 또한 1728년(英祖 4) 戊申亂 의 진압에서도 三南地方에 파견된 營將은 土豪들 85) 尹善道, 呈全南方伯書 ( 孤山遺稿 권4). 86) 金仁杰,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 韓國史論 19, 1988). 87) 顯宗改修實錄 권12, 顯宗 5년(1664) 12월 庚午條. 88) 서태원, 조선후기 영장제의 성격에 관한 연구 (연세대 碩士學位論文, 1991) pp ) 顯宗實錄 권20, 顯宗 12년(1671) 11월 己未條.
22 國史館論叢 第59輯 이 적극 가담한 鄭希亮의 叛軍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피한 반란군의 주도층을 체포 함으로써 체제를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90) 營將의 討捕기능이 강조되었다고 해서 지방육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束 伍軍의 훈련이나 營將巡歷 등이 아주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淸과의 전쟁 가능성 이 사라지자, 전쟁을 대비하여 군병의 훈련을 강화하는 측면보다는 국내치안의 확보 등 체제를 안정시키는 측면이 보다 중시되면서 營將制는 향촌에서의 각종 변란을 진압하고 土豪들을 감시하며 도적을 잡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營將制는 鄕村統治策 의 일환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중앙정부는 壬亂을 계기로 향촌이 황폐화되고 그 이후 다시 촌락의 재편성이 진행되 면서 허물어진 촌락운영질서를 面里制의 체계화와 강화에 의해 다시 확립하고자 하였다. 면리제의 강화는 지금까지 留鄕所의 지휘와 감독을 받던 面里任이 守令의 직접 지배를 뜻하는 것이었다.91) 본래 전기부터 面里任인 勸農官 里正은 지방의 유력자들이 맡았다. 그러나 守令의 면리기구에 대한 직접 지배는 士族의 입장에서는 면리임이 수령의 하수 인인 미천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 직능도 부담이 무거운 일반 평민의 직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免役의 특권이 있는 사족은 구태여 수령의 하수인격인 面里 任을 기피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양반의 面里任에 대해 謀避 현상이 일반화되자 중앙정부에서는 五家統事 目 을 반포하여 面里任을 모피하는 사족에 대하여 처벌을 하는 조항을 삽입하고,92) 양 반의 권위를 인정하는 별도의 직임인 都尹 副尹을 두고 수령의 침탈을 막고자 하였으 나93) 별 효과가 없었다. 1711년(肅宗 37) 良役變通節目 에 포함된 里定法의 시행94)도 향촌지배질서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里定法은 양역부과의 기능의 일부를 村落에 맡겨 사족층의 통제 하에 자율적으로 조정 운영토록 한 것이나, 軍役의 里定, 還穀의 共同納 등 부세행정의 실무를 面里任과 鄕吏에게 맡기고 士族은 敎化의 일만을 전담시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95) 그러나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사족이 鄕權運用 즉 賦稅權에서의 배제를 뜻하는 것으로 사족지배구조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같이 在地士族의 향촌지배질서의 변화는 새로이 성장하는 新鄕層 96)의 도전과 아울 90) 英祖實錄 권16, 英祖 4년(1728) 3월 丁丑條. 91) 金俊亨, 朝鮮後期 面里制의 性格 (서울대 碩士學位論文, 1982). 92) 備邊司謄錄 제31책, 肅宗 원년(1675) 9월 26일. 93) 위의 책 제35책, 肅宗 5년(1679) 9월 26일. 94) 위의 책 제63책, 肅宗 37년(1711) 12월 25일. 95) 金俊亨, 18세기 里定法의 展開 村落의 기능강화와 관련하여 ( 震檀學報 58, 震檀學會, 1984) 참조. 96) 鄕族은 賣鄕을 통하여 새롭게 鄕任에 오르거나 納贖하여 品階를 얻은 富民출신들이 많았고 이러 한 상황은 시대가 내려 올수록 더하였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들 富民層이 士族보다 우위였다. 예컨대 尙州지방의 量案에 나타난 자료를 보면, 中人層 신분변동자의 평균 토지소유가 81부 7속
23 러 國家의 對鄕村政策이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는 종래의 향촌정책에서 小農民에 대한 직접지배의 형태로의 전환이 그 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在地士族은 一鄕 에서의 鄕權 장악보다는, 同族的 基盤을 바탕으로 한 書院 祠宇 洞契에 관심을 갖게 되 었고, 18세기 이후 書院 祠宇의 남설은 사족지배질서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었다. Ⅲ. 在地士族의 村落支配와 洞契 1. 鄕村疲弊와 上下合契 朝鮮前期의 鄕約의 實施는 全國的인 傾向은 아니었으며,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익보호 의 형태를 띤 鄕規나 族契 등을 통하여 生活하였고, 이와 아울러 민간에서의 常賤民들은 古來로부터의 香徒 契 등으로 불리는 隣保組織 등을 통하여 相互扶助 相互糾檢하는 生活 을 영위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生活이 壬亂을 分水嶺으로 하여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 였다. 즉 壬亂 後의 鄕約에서는 양반들의 上契 와 常賤들로 構成되는 下契 가 나타나며, 前期의 監司나 守令들의 주도로 施行되던 鄕約보다는 주로 官職에서 물러나 鄕村에 寓 居하고 있던 退官者나 벼슬을 하지 않고 鄕村에 世居하고 있던 士族들에 의해 주도하는 上下合契 형태의 洞契들이 출현하였다.97) 이와 같이 兩班 常賤이 함께 參與하는 上下合 契 形態의 鄕約이 壬亂 직후 도처에서 출현되는 사실은 鄕村社會秩序의 變化를 意味한 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前期의 鄕約들과는 달리 17세기 초 중반 上下合契가 나타나게 되 는 時代的 背景과 사족중심의 촌락지배를 살펴보고자 한다. 壬亂을 통하여 朝鮮王朝는 정치 사회 경제 각 방면에 걸쳐 많은 變化를 겪게 되었다. 특히 戰禍로 말미암아 鄕村이 황폐화되자 鄕村民들은 그들의 生活基盤마저 무너지게 되 어 삶을 영위하기 조차 어려운 狀況이었다. 壬亂이 발발한 이듬해에 三道都體察使로 軍務를 總括하였던 柳成龍의 記錄에 따르면, 中央 地方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또 軍糧을 운반하는데 피곤하여 늙은이와 어 으로 鄕案入錄者의 평균 소유토지 51부 5속이나, 兩班層 전체의 58부 4속보다 훨씬 높은 평균치 임을 알 수 있다(崔虎, 朝鮮時代 嶺南士族의 鄕村支配硏究, 중앙대박사학위 논문, 1992 p. 164). 97) 朴京夏, 倭亂直後의 鄕約에 대한 硏究 (중앙대 碩士學位論文, 1984) 참조.
24 國史館論叢 第59輯 린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져 죽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었으며 게다가 거듭되는 전 염병으로 인하여 거의 다 죽어 없어졌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이 서로 잡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98) 라 하여 父子 夫婦 간에 相食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격전지였던 곳은 2, 3里나 10里 에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하는 처참한 형편이었다.99) 그러나 이러한 狀況은 쟁장의 피폐에서 뿐만 아니라, 壬亂初부터 繼續된 흉년으로 인 한 飢饉과 1593년(宣祖 26)初부터 크게 번진 전염병으로 嶺南의 경우 聞慶부터 密陽에 이르기까지 수 백리가 텅빈 狀態였다.100) 또한 陣中의 軍卒도 태반이 전염병에 걸려 사 망함으로써 戰爭을 수행하기 조차 어려웠다.101) 이렇듯 기근이 심해지자 極한 狀況에 놓 인 百姓들의 일부는 流賊이 되어 官舍나 邑內의 大家를 습격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데까 지 이르렀다.102) 左贊成으로 宣祖를 義州까지 扈從하면서 전란의 慘禍를 두루 살펴볼 수 있었던 鄭琢 의 詩句는 이러한 전쟁통의 民衆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왜놈들 전쟁 일으켜 朝鮮의 災殃 쌓였으니 백성들은 焚蕩에 괴로워하고 田野는 오랫동안 荒廢했네. 차마 億萬人을 내몰아 뜻밖의 칼에 상하게는 못하리라. 시체는 구렁텅이 쌓였고 모가지는 갈림길에 걸렸네 남은 백성들은 놀란 새처럼 흩어지며 糟糠으로도 배고픔 면할 수 없네 시끄럽게 먹을 것 기다리며 분주히 군사행렬 따르네. 軍糧만 겨우 自給인데 남은 軍糧 어찌 있으랴 늙은이들, 어린이들 어지럽게 軍營 옆에 쓰러졌네 밤낮으로 수십명이, 머리를 맞대고 죽어 가누나 순찰 후 한마디 소식에 눈물만이 옷깃을 적시네 급히 상여꾼 불러 여우나 토끼 무덤처럼 묻지 말라 했네 슬프다! 쇠잔한 목숨들, 온갖 계교는 간장 갖추는 것 다시 쌀을 구걸하여 죽(粥)으로 처참히 살아 간다네 98) 柳成龍( ), 十月(1593) 車駕還都 十二日天使行人使憲來 ( 懲毖錄 ). 99) 正月 初三日 今日亂離之餘 各於民居稀闊 或數里而一家 或十里一於隱 團聚收合爲一哨 (柳成龍, 軍門謄錄 懲毖錄 권15, 丙申 : 1596년). 100) 且嶺南則凶饉厲疫 人民死亡殆盡 自聞慶以下 直至密陽數百里間人火因斷絶 已成空虛之地 雖 欲有爲 其勢未由 (柳成龍, 辰巳錄 懲毖錄 ). 101) 疫大熾 一陣軍卒 太半傳染 死亡相繼 加之以粮儲乏匱 飢餓塡連 飢餓之極病則必死 ( 陣倭情 狀 壬辰狀草, 萬曆 21년 8월 10일 啓本). 102) (刑曹判書李德馨馳啓) 自南原過谷城入順天 人家一空 官舍乃邑內大家 則士民盡爲焚蕩 所見 極爲慘酷 ( 宣祖實錄 권41, 宣祖 26년 8월 甲申條).
25 - 199 겨우 잠깐의 죽음은 면했으나 사사로운 은혜 어찌 항상 있으랴 이 목숨 다하도록 차마 보고 듣지 못할레라. 103) 이와 같이 난리통에 온 백성들은 飢饉으로 자기 목숨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壬亂이 끝나고 10년 뒤 戶曹判書 黃愼이 全國의 田結數를 調査한 바에 따르면 피해가 가장 심한 慶尙道의 경우는 壬亂 前의 43萬結에서 7萬結로 격감하였다. 또한 전란의 직 접적인 피해를 적게 입었던 全羅道의 전결이 1/4 로 격감된 것은 오히려 戰禍를 덜 받아 피난민이 全羅道로 유입되었고, 다른 道보다는 비교적 온전하다는 이유로 募兵과 軍糧의 독촉으로 混亂狀態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는 田結數가 대략 亂前의 1/3로 줄어 들어, 壬亂 前 전라도 한 道만의 田結數를 겨우 웃도는 정도였다.104) 壬亂이 끝나고 10년 뒤에도 이처럼 耕作地가 荒廢化되어 있다는 사실은 鄕村社會의 복구가 1 2년의 歲月로 이루어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촌의 피폐는 壬亂中의 적의 焚蕩에서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凶年으로 인한 飢 饉과 이와 함께 나타나는 傳染病의 流行 등으로 많은 死傷者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耕 作地는 耕作勞動力의 부족으로 더욱 荒廢化될 수밖에 없었다. 壬亂後 大邱의 實態를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辰巳( ) 以來 고향에 돌아와 보니 人 物이 消盡하고 한 고을에 살아있는 사 람이 수십명이 채 되지 않으며 族親 중에 財力이 있다 하여도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겠는가. 만약, 疎遠함을 親密하게 하고 里閭를 합쳐 한 洞으로 하 여 서로 돕지 않는다면 괴롭고 쓸쓸하여 살아서는 누구와 더불어 노래하며 죽음에 어느 누가 哭하리요.105) 이렇듯 많은 人命 財產의 손실 속에서 서로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자생적으로 여러 마을을 한 洞으로 合村하여 서로 돕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외 咸安 의 사례에서도 人力 부족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106) 그리하여 大邱에서 뿐만 아니라 蔚 珍107) 晋州108) 義城109) 등지에서도 이웃 마을과 合村하여 鄕約을 實施하였다. 특히 진주 103) 鄭琢, 憫饑古風 ( 藥圃先生文集 권1). 104) 洪鳳漢 編, 田賦考 8( 增補文獻備考 권148, 1611년 : 光海 4). 105) 徐思遠, 河東里社契序 ( 樂齋集 권6). 徐思遠( )은 鄭逑에게 師事했고, 張顯光과 相從談論하였으며, 벼슬을 극구 사양하 고 講學에 힘썼다. 그리고 達城에 世居하였으므로 壬亂後 鄕村社會의 실상을 比較的 잘 볼 수 있는 입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106) 叢談條 ( 咸州誌 ). 107) 萬磨 辛丑我大人 禀大海 諸從大父與洞中諸老相議 合沙正爲一里 扶持顧助之義 益修而無忽 (黃中允 : ), 正明里社立議 東溟集 권5, 1601년 작성). 108) 琴山之與代村合一者 兵火之餘 人烟肅禁 十室九空 故幷二爲一也 月牙一曲 境界相連 猶藤之
26 國史館論叢 第59輯 의 경우는 壬亂 前 112個里에서 壬亂 後 53個里로 통폐합되었다.110) 이러한 狀況이 되자 荒廢化된 村落을 재건하기 위해서 上下貴賤을 莫論하고 合力하여 야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아래의 기록이 참조된다. 公私에 賤과 함께 하는 것이 名分이 비록 다르나 父母의 같은 품 안에서 함께 나왔으 니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 형제인데 하물며 같은 洞 같은 面에서 함께 사는데 있어서 리요. 貴賤을 楚越(怨讐)보듯이 하면서 어찌 憂樂을 함께 나누리오. 이에 감히 不計貴 賤 하여 合作一契 하고 死生吉凶 에 또한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하니 이것이 會集의 날 에 特別히 모이는 까닭이다.111) 위의 기사는 共同體的 유대가 허물어지고 禮儀를 다스릴 여가조차 없는 狀況에서 常 賤을 회유하여 鄕村復舊에 함께 參與시킬 必要性에서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同胞倂生 임을 명분으로 不計貴賤 하고 양반들의 上契와 상천들 간의 下契를 合作一契 하여 生死 吉凶에 함께 相助할 것을 强調하고 있다. 이는 戰亂으로 인한 많은 人命損失로 말미암아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農業을 本으 로 삼는 共同生活 속에서 나올 수 있는 自然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上下合 契하는 狀況은 戰亂의 피해에서 뿐만 아니라 共同의 努力으로 克服하여 나가야 할 큰 凶年이 들었을 때에도 强調되었다. 壬辰年間에 里中父老가 兩班과 常賤으로 名分은 다르나 같은 天命의 性品을 받았으니 불가불 함께 지극한 善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上下契를 합쳐 하나로 하였다. 不幸히 여러 長老가 서로 잇따라 죽고 庚申(1660, 1661)에 큰 凶年을 만나 下 契의 流離로 死亡者가 10에 7, 8이다.112) 위의 기록은 壬亂 直後 上下合契의 沙村里約 이 施行되었으나 歲月이 흘러감에 따 라 여러 長老들이 죽고 또한 庚申年 凶年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흩어져 죽는 狀況에서 다시 合力하여 里約을 重修하자는 내용이다. 17세기는 임진왜란을 극복하자마자 또 다시 丁卯 丙子 호란의 양란이 발발하여 人災 뿐만 아니라 흉년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자연재해에 내내 시달려야 했고, 당시에 어느 한 해에도 자연재해로 인하여 기민이 발생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1671년(顯宗 12)에는 間於齊禁 故又合爲一 易摠名之日琴山 (成汝信 編, 琴山洞約序 晋陽誌 各里條, 1616 년 : 光海君9). 109) 南夢賫( ), 沙村里約重修序 ( 伊溪集 권4, 1680년 : 肅宗6). 110) 李海濬, 17世紀初 晋州地方 里坊再編과 士族 ( (奎章閣 6, 서울大, 1982). 111) 徐思遠, 앞의 책. 112) 南夢賫, 沙村里約重修序 ( 伊溪集 권4, 肅宗 6년 작성).
27 경중 사망자가 250여 인에 각도 사망자는 15,830여 인이었다.113) 1699년(肅宗 25)의 호 구조사에서는 6년 전 호구조사에 비해 무려 1,416,274명이 감소되었다.114) 이에 대한 대 책으로는 癘祭를 지내주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느 왕을 막론하고 癘祭가 疫疾救療施策 가운데의 중요한 것의 하나였다. 이것은 法典에 올라 있는 公的인 行事였고 中央과 각 고을에는 반드시 癘祭壇이 마련되어 이것이 形式上 癘鬼를 섬기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백성의 마음을 의식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身體的인 病 苦를 덜어 주는 것이 醫療的 施策이었다면 이것은 그들의 精神的인 苦惱를 덜어 주는 것이었다.115) 전염병과 함께 1664년(顯宗 5)부터 牛疫이 발생하여 다음해에는 慶尙 全羅에서만 무려 8,000여 두가 斃死하였다. 당시 소 한 마리는 아홉 사람의 노동력에 맞먹는 것으로서,116) 연 이은 牛疫으로 농사를 제때 짓지 못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서 上下合力의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며 동계가 출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어느 한 시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여 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1758년(英祖 34) 宋明欽은 번잡한 내용의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간략한 鄕約節目 을 만들었다. ① 孝順父母 ④ 停水放火 ② 恭敬長上 ⑤ 覺察盜賊 ③ 和睦隣族 ⑥ 禁止鬪爭117) 위 조목의 孝順父母 恭敬長上 和睦隣族'은 유교적 예속에서, 停水放火 는 농촌의 共同作의 생활에서, 覺察盜賊 禁止鬪爭 은 당시의 문란한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러한 條目들은 凶荒과 전염병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고단하고 쇠잔하여 어디 의지할 곳 없는 여건 속에서 상호부조 상호규검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었 던 형편에서 나왔던 것이다. 113) 顯宗實錄 권19, 顯宗 12년(1671) 8월 辛亥條. 114) 肅宗實錄 권33, 肅宗 25년 11월 丙子條. 115) 卞廷煥, 朝鮮時代 疾病에 관련된 疾病觀과 疾病施策에 관한 硏究 (서울대 보건대학원 博 士學位論文, 1984) p 癘祭는 물론 癘鬼를 섬기는 일이다. 그러나 실은 豊年祭 豊魚祭 祈雨祭 등과 같이 傳統社會 에서 있어 왔던 하나의 敬天儀式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을 政府가 주관함으로써 민 간의 巫俗과 구분하였고, 백성들이 疾病에 시달릴 때 정부의 謹愼하는 태도와 더불어 이를 베풀음으로써 民心을 위안하는 하나의 救療策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임금이 내린 祭文을 가지고 고을마다 일정한 곳에 祭壇을 마련하고 제사를 올려왔다. 이에 비해 佛事인 水陸齋는 民間信仰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疫救療施策의 하나로 종종 행해 왔는데, 정 부에서는 어디까지나 절박한 때에 백성들이 원하는 民俗을 구태여 금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었지 결코 적극적인 勸奬事는 아니었다. 116) 顯宗改修實錄 권23, 顯宗 11년 8월 己亥條. 117) 宋明欽( ), 鄕約節目 ( 櫟泉集 권13, 1758년 : 英祖34 작성).
28 國史館論叢 第59輯 壬亂 直後 上下合契의 傾向은 奉化 醴泉 安東 任實 慈仁 陜川 達城 寧海 등지로 피해를 많이 입었던 嶺南의 경우는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壬亂 直後 上下合契가 일률적으로 이루어졌던 것만은 아니다. 1600년(宣祖 34) 戰禍를 비교적 덜 입었고 鄕權이 유지될 수 있었던 江陵府의 連谷縣에서는 이미 壬亂 前에 李珥가 海州의 一鄕土族을 대상으로 실시한 바 있는 海州一鄕約束 을 거의 增 損하지 않은 채 留鄕所를 중심으로 시행하고 있었다.118) 또한 上下合契하는 정도의 變化는 아니지만 양반 父老들 간의 相互糾檢 相互扶助하던 모임인 洛社契 119)도 壬亂 直後인 1599년(宣祖 33) 少長들도 參與하는 洛社合 契 120)로 바뀌었다. 그리고 壬亂 前부터 大姓인 張氏族契 121)에서도 1601년(宣祖 35) 族契를 重修하여 원래는 同姓契였으나 異姓도 받아드리는 變化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壬亂 直後 連谷에서와 같이 壬亂 前의 鄕約들을 계속 유지 하는 경우도 있었고, 壬亂 前에 비해 완화되고 있으나 洛社合契 와 張氏族契 들처 럼 兩班들 간에 相扶相助하는 모임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壬亂 直後 戰亂 및 연이은 흉 년 전염병 유행 등으로 인한 막대한 人命財產의 損失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 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서로 삶을 부지하기 위해 이웃마을들과 合契하여 相互扶助하였 으며 疲弊된 鄕村社會를 복구하기 위한 必要性에서 不計貴賤 하고 常賤들을 회유하고 兩班 常賤 모두가 合力하여 참여하는 上下契가 17세기에 출현하는 경향이었다. 2. 在地士族의 村落支配 再確立 16세기 이래 在地士族은 同族的인 차원에서의 洞契를 만들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것이 退溪가 1548년(明宗 3) 禮安의 溫溪洞에서 만든 溫溪洞規 이다. 이는 眞城 李氏간의 吉凶事시 부조하는 형태의 族契였다. 그 후 1560년(明宗 15)에는 洞令 을 제정하여 가문노비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하고 있다. 이는 농장이라 할 만큼 많은 토지를 소 유하고 있던 재지사족이 그들의 농토를 경작할 노동력의 부족에서 오는 당시 상황을 보 여주는 것이다. 16세기 李滉 家의 토지 노비 소유정도를 살펴보면 土溪에 豪大한 家舍 3 채(代田이 각 斗落)와 그 주변에 약 10여 채(順孫 龍代代田이 각각 2 4斗落임을 감안함)의 奴家가 자리잡고, 그곳과 떨어진 지역에 또 다른 家舍 奴家를 비롯한 藏幕이 118) 想約抄文一件連谷 ( 鄕約文, 1600년 : 宣祖 34 10월). 위 자료는 留鄕所를 중심으로 한 鄕約의 운용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鄕約의 職任과 身分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都約正(前縣監) 崔雲遇 副約正(同知) 權協 副約正(座首) 金 景鎭 都有司(進士) 金自漢 都有司(別監)? 縣約長(奉事) 崔雲榮 縣有司(幼學) 朴廷爀. 119) 宋亮( ), 洛社契條約序 ( 愚谷集, 1566년 : 明宗 21 작성). 120) 鄭經世( ), 洛社合契序 ( 愚伏集 권15, 1599년 : 宣祖 33 작성). 121) 張顯光( ), 族契重修序 ( 於軒先生文集 권7, 1601년 : 宣祖 35 작성).
29 배치되어 있으며, 전답 137필지(代田제외) 1,521 斗落이 33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典型的 인 재지사족의 농장형태를 띠고 있었다. 禮安과는 규모는 달리하지만 구조면에서 동일한 농장을 李滉 家는 榮川 宜寧 奉化 豊山에도 소유하고 있었다.122) 다음의 기사가 士族의 奴婢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듣건대 노비들이 모두 태만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음이 지나치게 심한 데까지 이른 듯하니 그 중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매를 때려 경계시키는 것이 좋겠다. 다만 糞田할 農具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보리 파종이 반드시 어려울 것 같다.123) 노비의 태업은 생산성의 저하를 초래하였을 것이며, 주인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노 동강도를 높이고 감시를 한층 더 강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의 강제는 노비의 도망 을 초래하고 있었다. 溫溪洞規 에서 노비에 대한 無統難治 124)라는 표현은 위와 같은 상황을 나타낸 것 이다. 또 洞令에서 노비의 本主 뿐만 아니라 他主에 대한 무례 불손행위에 대해 笞 50으 로 엄하게 다스리고 있었다.125) 상하간의 엄격한 신분질서의 확립과 하층민 통제의 필요 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壬亂 直後, 常賤에 대한 양반의 유화된 태도변화를 처음 보이고 있는 것으로 1598년(宣祖 32) 琴蘭秀가 입약한 洞中約條小識 이 있다. 즉, 變亂 이후 人心이 날로 淆薄하여 刑杖과 笞罪를 권징할 수가 없으므로 夫捕洞에서 蘭 秀가 별도로 입약한 약조를 가지고 인정으로 그들을(常賤) 인도하라 下人賤隷가 名分이 비록 다르나 같은 天命의 性을 받았으니 어찌 鄙夷하다고 해서 함께 至善의 땅으로 돌 아가지 않으리오126) 라 하여 이제는 下人賤隷라 하더라도 더 이상 형장과 태죄로 다스리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전란을 겪은 후의 처참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예의를 다스릴 여유조차 없는 경 122) 김건태, 조선후기 안동지방 농장에 대한 일고찰 (성균관대 碩士學位論文, 1991) 참조. 123) 李滉, 外篇 奇子寯( 陶山全書 권4). 124) 洞令 設立本意段 洞中居人 皆家門奴婢 以漸至無統難治 不得已循舊規 立此若 干條 皆就其 重者而爲例 其有事係各條 而情可恕者 臨時命議 審其故誤 而適當論決爲乎矣 (李滉, 洞 令 溫溪洞規, 1548년 : 明宗 3 작성). 125) 一. 本主他主無禮不遜者 笞 五十 一. 父母不順者 上同 一. 兄弟相鬪者 笞 五十加三 一. 群飮醉亂者 川防伐木者 田上流沙者 笞 五十(위의 책) 126) 琴蘭秀( ), 洞中約條小識 ( 惺齋集 권2, 1598년 : 宣祖 32 작성).
30 國史館論叢 第59輯 황에서 常賤들을 회유하여 上下協力하여야만 살아 나갈 수 있었던 배경하에서 나온 것 이라 하겠다. 그러나 壬亂 후 양반들이 상천을 회유시켜 합력하고자 한다고 해서 양반간 차별을 완 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611년 (光海 3) 儒生 朴姻은 陜川邑인 三里人들과 협의하여 三里鄕約 을 立議하였다.127) 이것은 古來로부터 상호부조 상호규검하는 고유한 契의 성격을 바탕으로 하고, 그위에 儒敎的 禮俗에 의한 呂氏鄕約 과 退溪의 禮安鄕立約 條 를 참조하여 부분적으로 時宜에 맞추고 있으며, 이 역시 임란 전 어지러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婚姻相扶條에 따르면, 양반은 양반끼리 상민은 상민끼리 신분별 로 상조하는 점128)과 分任治事條에서 신분을 士夫 平人 庶孼 庶民 僕隷로 五等하여 나누 는 등129) 양반의 구별을 엄격히 하는 점은 앞서의 향약들과 비교된다. 이 三里鄕約 을 통해서 볼 때 壬亂 후 향약들의 上下合契가 전란의 피폐속에서 上 下合力의 필요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향촌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 을 때는 임란 후 이루어진 上下合契의 형태 속에서 상하 예속, 상하간의 守分을 강조하 는 향약들이 나타날 수 있는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7세기 중엽 李元禎이 慶尙道 星州 上枝洞의 동계 결성에 대해 언급한 다음의 기록은 동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李元禎의 序文을 보기로 하자. 上枝村에 우리 李氏가 世居해 온 곳이다. 간혹 李氏가 아니면서 거주하는 자가 있으나 李氏의 族親이 아닌 자는 없다. 鄕約案이 仁祖 戊寅(仁祖 16, 1638)에 이루어졌는데 그 때 내 선친께서 그 序文을 쓰신 바가 있었다. 그로부터 수 십년내에 門運이 불행하여 喪難이 이어져서, 案中의 長老들이 연이어 돌아가시매 德業의 권면함이나 過失을 규제 함 또한 따라서 廢하고 말았다. 지금 上下人民으로 現居하는 자를 보면 상당수가 元案 에 기재되지 않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統屬總制之威가 없으면 分離乘隔之憂가 있을 것이다. 里洞에 善俗厚風이 없어지고 換散壞敗를 수습할 수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더불 어 상의해서 이에 鄕約 외에 따로 洞契를 만들어 申明約誓하고 列書姓名한다. 대략 呂 氏의 節目을 따르고 舊案의 規例를 참작하였다.130) 당시 변동하고 있던 사회 조건 속에서 洞契가 在地士族에 의한 새로운 鄕村社會 統制 127) 朴姻( ), 三里鄕約立議 ( 无閔堂集, 1611년 : 光海 4 작성). 이 향약은 幼生 朴姻이 陜川의 治邑인 三里人들과 人心不古於燹之後 化民無暇 於詰戒之 日 한 것을 한탄하여 立約하였다. 다음에서 그 綱目만을 소개하면, ① 德業相勸 ② 婚姻相 助 ③ 患難相恤 ④ 死喪相救 ⑤ 禁養松木 ⑥ 過惡糾罰 ⑦ 分任治事 ⑧ 春秋講信 등이다. 128) 凡迎婦女 其里人 稚鷄中 各一首相助 士夫則士夫中 相助 平人以下則其閭中相助事 (朴姻, 위 의 책). 129) 三里人物 皆書簿册 士夫爲一類(分東西) 平人爲一類 庶孼爲一類 庶民爲一類 僕隷爲一類事 (朴姻, 위의 책). 130) 李元植( ), 上枝洞契案序 ( 歸巖先生文集 권6).
31 策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641년(仁祖 19) 忠淸道 木川縣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에서, 全洞民을 동계에 편입시키고 거부하는 자는 黜洞 한다는 罰目을 두고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131) 壬亂 후의 上下合契는 壬亂 前 상천민들 간의 상호부조하던 鄕徒契 村契들을 사족중 심의 동계의 하계로 끌어들인 것으로 지역 전주민의 가입이 의무적이었던 데 특징이 있 다. 이것은 기존의 사족중심의 촌락지배 운영원리를 基底로 하면서 여기에 上下洞民을 결속시켜 士族的 신분질서의 재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結論 지금까지 16, 17세기 鄕規 洞契의 성격변화과정을 검토하였다. 다음에서 내용을 요약 하여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16세기 재지사족은 그들의 결집체인 鄕會에서 그들의 이해에 따라 만든 鄕規를 향촌 운영규약으로 하고, 留鄕所를 통해 鄕吏들을 통제하고 군현단위로 부과하는 부세를 농민 에게 부과하는 과정에 간여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治鄕之人 으로서 의 위치를 지켰다. 임란을 겪으면서 재지사족의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그들의 기반이었던 유향소와 향안 이 소실된 상황이나 鄕射堂 鄕案의 重修, 鄕約 洞契의 실시 등으로 사족 중심의 향촌지 배질서를 임란 후에도 꾸준히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鄕中公論 에 의해 제 정된 鄕規를 기본원리로 한 운영체제는 京在所 革罷이래 유향소의 기능 변질, 즉 유향소 가 수령의 보좌기관화되었다. 또한 1675년(肅宗 1)의 五家統事目 의 반포 이후, 常賤 의 役이었던 面任을 지배계층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임명하려 하여 사족의 謀避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사족들이 향임을 기피하게 되자 이 자리를 鄕外人인 寒微한 家門 출신자들이나 서얼 들이 차지하여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나 鄕族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향안입록을 둘러싼 新舊세력간의 儒鄕分岐로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에는 향안에의 입록자가 급증하거나 향안의 罷置가 일반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족의 이해를 반영하는 향규는 유명무실해지게 되었고 이는 사족의 향권상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상 재지사족의 일향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敎化와 賦稅 운영이었다. 敎化라는 명분론적인 지배를 보완하면서 농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부세운영에 일 131) 黃宗海( ), 洞規凡例四十六條 ( 朽淺先生文集, 忠淸道 木川縣, 1641년 : 仁 祖 19 작성).
32 國史館論叢 第59輯 정한 참여였다. 그러나 1712년(肅宗 38) 良役變通節目 의 里定法의 시행으로 부세부 과에서 사족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고, 면리제운영의 실무에 신흥세력이 참여함으로써 재지사족은 점차 부세운영에서 소외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향촌에서는 黨色에 다른 사족의 분열, 新鄕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등 장 즉 儒鄕分岐로 인해 사족의 향촌지배는 동요되고 여기에 수령의 향촌통치의 강화로 사족의 영향력의 약화는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一鄕에서의 사족의 지배력의 약화로 사족은 그들의 同族的 經濟的 기반인 촌락에서의 동계 결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계는 조선전기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양반만을 구성 원으로 하고 吉凶시 扶助하는 성격의 것이나, 난후의 동계는 전기 양반들의 洞契 즉 上 契와 常賤들간의 자치조직인 鄕徒와 같은 下契를 합친 동계였다. 洞契는 壬亂 直後 戰亂 으로 인한 피해 등으로 막대한 人命 財產의 損失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기 어려운 형편 속에서 疲弊된 鄕村社會를 복구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不計貴賤 하고 常賤 들을 懷柔하여 兩班 常賤 모두가 合力하여 참여하는 上下合契 형태의 동계였다. 그러나 난후 양반들이 常賤을 회유시켜 합력하고자 한다고 해서 班常간 차별을 완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를 통하여 사족은 기층의 민중조직을 포용 흡수하여 사족적 신분질서를 재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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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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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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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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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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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Midas 2011 06 브라질은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 개최, 고속철도 건설, 2007년 발견된 대형 심해유전 개발에 대비한 사회간접자본 확충 움직임이 활발하다. 리오데자네이로에 건설 중인 월드컵 경기장. EPA_ 연합뉴스 수요 파급효과가 큰 SOC 시설 확충 움직임이 활발해 우 입 쿼터 할당 등의 수입 규제 강화에도 적극적이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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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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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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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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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2012. 04 Vol. 98 Cover Story April 2012 _ Vol. 98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www.yonhapmidas.co.kr Contents... 14 16 20 24 28 32 Hot News 36 Cover Story 46 50 54 56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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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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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역사와 체험의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국립경찰박물관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박물관은 역사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환영 환송의 장 등 다섯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어 경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찰의 업무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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