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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磻溪 柳馨遠의 地方制度 改革論 硏究 吳 永 敎* Ⅰ. 序 論 Ⅱ. 17世紀 地方制度 改革論의 推移 Ⅲ. 磻溪 柳馨遠의 鄕政論 1. 鄕政論의 理念과 郡縣制에 대한 理解 2. 閭里頃의 設定과 鄕里制 改革論 3. 在地勢力에 對한 對策 Ⅳ. 結 論 Ⅰ. 序 論 사회제도로서 지방제도는 郡縣의 組織, 守令制, 地方財政 등 정치 재정 영역상의 제부 문을 포괄한다.1) 이 가운데 조선시기 政論家들이 지방제도를 정비하려 할 때 郡縣制 및 守令制를 첫번째 대상으로 삼았다. 兩亂 이후 17세기 朝鮮社會는 생산력 발전에 대응되 어 향촌의 제조직이 분화 발전되었고 특히 面里制가 점차 확립되어 그 단위성이 제고됨 과 동시에 실질적인 행정, 생산의 장으로 편성되는 추세였다. 이에 따라 17세기에는 정 부 차원에서 자연촌의 성장으로 인해 변동된 촌락구조와 그 질서를 용인하여 새롭게 편 제한 面里制와 그 하부조직으로서 五家統制를 정비하고 있었다.2) * 延世大學校 史學科 敎授. 1) 朝鮮後期 地方制度는 公的 社會制度로서 郡縣制 面里制 五家統制를 들 수 있고 私的 社會組織으로 서 郡縣單位의 鄕會(議決機構), 鄕約 洞契(執行機構)를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우선 郡縣단위의 職任 機構로서 행정실무자인 吏屬들이 편제된 作廳, 物理力인 軍官이 편제되는 將廳, 재지지구로서 守令의 통치를 보좌하는 鄕所의 鄕廳이 있었다. 그리고 예하 面里制 운영직임인 面任(都尹 面尹 風 憲), 里任(洞任)과 五家統制의 統首, 최하 생산단위의 직임인 戶首를 들 수 있다( 牧民大方 吏典 之屬 6條). 한편 선출구조와 기능에 따라 吏卒과 任掌으로 구별된다. 任掌은 在地出身者 가운데에 서 선발되며 上級職任인 鄕所부터 面里任 그리고 統首 戶首가 포함된다( 政要 三 7條). 이들의 선출은 士大夫 鄕品, 中 庶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으로 대응된다. 특히 任掌은 民과 官 사이 에 항상 막힘이 없게 하는 직임으로 강조되며 古法制의 鄕任과 中國 역대 행정촌의 鄕官制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2) 대체로 壬亂 직후 혼란한 사회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17세기에 수립되는 새로운 鄕村支配體制, 社 會制度에는 하부구조의 변동 정도와 國家支配에 대한 在地勢力의 대응정도 그리고 國家權力과 在 地勢力 상호간의 조화와 타협 여부가 입체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따라서 17세기 地方制度의 확 립과정을 추색하는 것은 朝鮮後期 鄕村體制의 원형과 차후 권력구조의 변동을 밝히는데 유효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2 - 160 國史館論叢 第57輯 당시 政論家들 역시 兩亂과 기저적인 사회발전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변화에 적극 대 응하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3) 본고에서는 南人系列의 在野學者인 磻溪 柳馨遠이 제시한 國家 全體系에 걸친 再造方 略을 고찰하는 가운데 특히 地方制度의 정비, 鄕政論의 논리를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 다. 柳馨遠의 개혁안은 土地制度의 근본적인 개혁, 小農經營의 확립을 바탕으로 財政體 系 國防 學校制 貢擧制(官僚制) 등의 정비가 핵심 사안이다.4) 따라서 柳馨遠의 對鄕村政 策, 鄕政論은 이상의 정치제도 개혁론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일정공간을 法制的으로 조직화하고 在地勢力 基層民을 편제시킨 公的 社會制度를 주된 고구의 대상 으로 삼았다. 柳馨遠은 제반 통치 부세수취의 1차적 수행대상이 향촌이라는 사실을 감안 하여 단지 외형적이고 제도적인 정비만이 아닌 人的 支配까지 염두에 둔 방안을 모색하 였다. 무엇보다 柳馨遠의 鄕政論은 변화하는 향촌사정을 적극 수용하려 한 방안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보겠다. 본고에서는 먼저 17세기 鄕村現實과 地方制度 改革論의 흐름 을 살펴보고 柳馨遠의 鄕政論에 대해 조직의 정비로서 閭里頃 鄕里制 改革論, 재지세력 의 대책인 鄕約制 鄕官制 改革論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타당성 여부를 여타 改革論과 비교하고자 한다. Ⅱ. 17世紀 地方制度 改革論의 推移 17세기 조선은 극심한 전쟁의 폐해를 치유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朝鮮 社會가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점에서 전쟁으로 인한 農耕地의 荒廢化, 人口의 流離 減少 라는 人的 物的 土臺의 상실이 더욱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생산체계 및 農業勞動力의 시급한 회복과 복귀를 위해 다각도의 구체적인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戶口 와 田結의 확보란 民의 생존조건의 회복과 국가재정체계의 확립이라는 民利 國計의 목표 를 동시에 이루어낼 수 있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우선 生產力 復元對策으로서 陳田 新田開墾, 대대적인 減税 免税措置가 시행되었고 농업노동력이자 賦税담지자인 良民確保 를 위해 戶籍作成 號牌(紙牌) 軍籍事業 奴婢推刷 및 奴婢從良法 등이 시행되었다. 또한 3) 拙稿, 17 世紀 地方制度 改革論의 展開 ( 東方學志 合, 1993). 4) 磻溪 柳馨遠의 國家再造論에 관련된 연구로는 다음의 논고들이 참조된다. 千寬宇, 磻溪 柳馨遠 硏究 ( 歷史學報 2 3, ). 鄭求福, 磻溪 柳馨遠의 社會 經濟思想 ( 歷史學報 45, 1970). 金容燮, 朝鮮後期 土地改革論과 儒者 ( 延世論叢 21, 1985). 金武鎭, 磻溪 柳馨遠의 郡縣制論 ( 韓國史硏究 49, 1985). 金駿錫, 柳馨遠의 變法觀과 實理論 ( 東方學志 75, 1992)., 柳馨遠의 政治 國防體制 改革論 ( 東方學志 합, 1993).

3 - 161 부세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量田事業, 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어 별도의 국 가재정의 확보방안으로 屯田의 확대, 納粟策의 추진, 기저의 유통경제의 발달에 조응한 對商工業政策 및 貨幣鑄造事業 등이 이루어졌다. 이상 제반 사회 경제 재정정책은 17세기 전기간을 통해 집중적으로 제기되는 가운데 정부는 당시 국가적 현안과 향촌사정 그리고 政權擔當層의 입장 등을 감안하여 국가정 책으로 수렴 확정하였다. 그런데 앞에 열거한 諸政策이 시행되는 場은 향촌사회이며 施惠의 당사자는 農民들이 었다. 그러므로 生產 租税收取 統治의 기반인 향촌사회의 제도적 정비가 수반되어야만 이상의 정책도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향촌의 기저적인 변화에 대응하고 國家再造를 위한 法制의 완성으로서 지방제도의 정비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한편 17세기 체제붕괴의 위기의식 속에 등장한 國家再造 방략의 내용은 政論家들의 現實認識과 黨色에 따라 뚜렷하게 대비되는 면을 볼 수 있다. 특히 그 연장선상으로 民 과 鄕村에 대한 法制的 整備 改革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鄕政論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드러났다. 鄕村政策 地方制度 改革案에 관해 가장 활발한 논의가 전개된 顯宗末 肅宗初 의 시기를 중심으로 볼 때 첫번째의 흐름은 대체로 집권층의 반열에 있었던 西人(老論) 계열로서 金錫胄를 비롯한 金壽恒 金壽興 등의 견해를 들 수 있다. 두번째의 흐름은 이 들과 일정하게 대응되는 위치에 있었던 白湖 尹鑴와 그에 동조했던 南人政權의 政論家 및 南人의 黨色을 지닌 在野學者 磻溪 柳馨遠 등의 견해이다. 본래 儒家는 周代 封建制度의 시인 위에 성립된 학설이고 전통적인 宗法制的 문화의 정신을 토대로 형성된 사상이다. 따라서 古制의 회복과 그 질서로서 전통적인 도덕과 禮 的 질서에 學理的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유교정신의 도덕적 구현을 모색하는 儒者는 古法에의 지향을 통해 時務論의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며 논리전개의 시발 점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전자인 西人 老論계열의 政論家들 역사 封建制 古法制에 대한 일정한 이해와 원론적인 동의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古法制의 遺意를 계승한 제반 法制의 개혁에 대해서는 극히 소극적인 입장을 지녔다. 이들의 鄕政論은 민과 향촌에 대 한 지배라는 지방제도 본래의 영역이 아닌 賦税制度 개선책과 관련하여 언급되었다. 즉 농민의 流離 逃散을 방지하여 징세대상자를 확보, 파악하는 방안으로 五家作統制 號牌法 鄕約制를 이용하려 했다. 이는 현존하는 地主佃戶制를 인정하고 민에 대한 統制와 사회 기강의 유지를 우선하는 制民 의 차원에서 鄕政문제에 접근하였던 朱子의 鄕村策 및 尤 庵 宋時烈의 시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5) 5) 金駿錫, 朝鮮後期 國家再造論의 擡頭와 그 展開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p.327. 友枝龍太郞, 朱子の治民策 南宋村落の階層分裂と國家權力の問題 ( 東洋學 17, 1958).

4 - 162 國史館論叢 第57輯 이들의 鄕政論은 부세문제 해결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적극적 개혁론자 들이 주장하는 五家統制 紙牌法 鄕里制의 시행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표출하였다. 반대의 논리로서 당시 향촌사회의 실상과 민심동요를 내세웠으며 특히 孟子 권7 離 婁章의 得民心論 을 통해 人心의 得失이야말로 國家興亡의 판단근거 라고 규정하고 오 늘날의 국가의 잘못은 백성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채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오히려 수고롭게 하는 데 있다 고 주장하였다. 이의 연장으로 부지런히 덕있는 행 정을 닦아 백성과 함께 휴식하며 두어 해 동안 믿음성 있는 혜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이 안정되게 해야 한다 라는 民의 休息論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른바 得民心論 은 新法 시행에 앞서 민에 대한 국가의 信義 구축을 강조한 것으로 綱常論에 입각한 사상적인 접근 방안이 되겠다. 대표적인 政論家인 息庵 金錫胄는 號牌法의 시행을 반대하면서 여타 소극론자의 견해 처럼 天心에의 順從을 내세워 민을 노력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새롭고 구체적인 제도의 강제는 보류할 것을 주장하고 그 대신 租税減免 등 경제적 시 혜 조치의 필요성만 강조하였다. 이후 庚申換局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尹鑴에 의해 주도 된 南人政權의 개혁론을 배제하고 戶布論으로 귀결되는 對鄕政論을 전개하였다. 그는 租 税減免이야말로 제일 첫째가는 救民活民之擧 라고 하여6) 조세의 등급조정 등의 방법과 운영 과정상의 합리화 및 국가경비의 절약 등을 강조하였다. 金錫胄는 戶布의 실시를 반 대하는 사대부에 대해 身布가 아닌 戶稅임을 강조하여 무마하고 이를 통해 증액 확보된 재정을 활용하여 軍制運營의 변통과 군병력 유지를 도모하려 했다.7) 당대의 尹鑴가 紙 牌法, 五家統制, 戶布制를 실시하여 地方制度, 軍制 및 公私賤制度의 변통이라는 포괄적 인 役制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데 비해 金錫胄는 충실한 軍制유지와 국가의 재정확보라 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西人의 黨色을 지닌 文谷 金壽恒은 肅宗 元年 당시 최대 현안인 良役弊端의 시정과 北伐論에 관련된 兵車制度 軍制整備를 논할 때 民心의 疲弊함을 내세워 新法의 시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하였다.8) 南人정권에 가담한 金壽恒은 尹鑴계열의 紙牌制 五家統制 등 개혁안의 시행에 소극적인 입장을 내세웠고 그 대안으로써 租税減免措置와 국가기관 의 財政節用을 강조하였다.9) 그는 民生의 困苦함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고 거 꾸로 매어달린 듯한 急務로서 身役偏重에 대한 大變通이 필요하다. 民의 疾苦를 알고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은 古今에 없는 일로써 軍兵의 徵布 특히 兒弱 逃故의 類 는 諸道에 蕩減을 命하고 별도 조치를 강구해서 軍民의 위급함을 구해야 한다 고 주장 6) 息庵集 권11, 請蹲節經費劄 庚戌 6월 校理時. 7) 息庵集 권11, 議行戶布議. 8) 肅宗實錄 권3, 肅宗 원년 4月 己酉(38책, p.267). 9) 肅宗實錄 권15, 肅宗 10년 7월 丁卯(38책, p.693).

5 하였다.10) 물론 이상의 賦税制度의 變通論 역시 백성들에 대한 무제한의 수탈을 제한하는데 일 정한 작용을 할 수 있으며 객관적으로 백성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어디까지나 장구한 집권세력의 이해를 도모하려는 입장에 불과하다. 집권 西人 老論계열은 토지제와 신분제 개혁을 통한 봉건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염두에 두지 않 은 채 현상적인 수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정과 부세제도의 부분적 변통을 도모하였 고 이같은 소극적인 정치사회적 견해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사실을 보게 된다. 退憂堂 金壽興은 특히 養民論 과 順人心 의 논리를 내세워 앞선 南人政權하의 五家統 紙牌制를 배제하고자 했으며 같은 西人인 金錫胄 金壽恒이 강력히 추진했던 戶布法에 대 해서도 실시불가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견해는 養兵에 앞서 養民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조정에서 반포하는 令이 민들의 信義를 회복하고 또한 樂生之心 을 지닐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11) 특히 제도를 개혁할 때 시기상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했고 오히려 舊制 度를 준수하여 사안에 따라 정비하는 것이 보다 나은 방안이라고 했다. 즉 民의 信義 회 복을 전제로 한 소극적 현상유지론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정치사회적 견해는 관념 적인 것으로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면 모든 일이 바로 잡힌다고 여기고 있었고 향촌문제 의 치유에 있어서도 綱維의 확립이라는 사상적인 방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政論家들의 민과 향촌현실에 대한 인식의 상이함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점차 그 명분과 방법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 다. 무엇보다 新法에 상응하는 적절한 수준의 대체개혁안을 제시하지 못하였으며 논리의 연장으로 新法을 시행하여 문제가 야기되느니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하다 라고 하는 지 극히 소극적인 현상유지론의 단계까지 나아가게 된다.12) 반면 후자의 계열은 封建制 古法制의 厚意에 충실하게 기초하여 향촌사회의 法制的 整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같은 향촌제도의 완성여부에 따라 조선왕조의 민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체제가 완성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13) 10) 文谷集) 권13, 疏劄. 그런데 같은 계열 내에서조차 반대의견이 강력히 제기되자 국왕 肅宗은 민의 소동을 염려하여 節目을 講定하되 즉각 전국적인 실시를 유보하는 선에서 戶布法 논의를 마무리하려 했다 ( 肅宗實錄 권13, 肅宗 8年 2月 甲申, 38책, p.581). 11) 退憂堂集 권6, 疏劄 陳所懐劄. 12) 특히 庚申換局 이후 등장한 西人政權은 南人政權하에 시행된 五家統 紙牌制와 같은 지방제도 개 혁론을 민심의 동요라는 명분하에 적극 배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紙牌制는 淸과의 관계가 정리 되고 民情把握, 軍丁差發 및 決訟의 근거자료로서 거듭 存置되고 점차 戶籍制度의 보완 기구로 서 기능하게 된다. 西人집권층에서도 肅宗 7년의 논의를 통해 그 효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반대 자로 분류되던 金錫胄 金壽恒은 물론 國王 肅宗 또한 계속적인 存置를 명하고 있으며 右議政 李 尙眞은 별도의 事目을 제정하여 面里制를 활용하고 面任들에게 주지시켜 시행하자는 적극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增補文獻備考 권162, 戶口考 2). 13) 白湖 尹鑴는 先王의 정치는 鄕遂에서 시작되어 朝廷에 이르고 천하에 미쳤는데 秦의 商鞅이 옛 고제를 변화시키고 聖賢의 學을 멸함에 따라 소략하고 간단한 政治로 전변되었고 그 근간이 되

6 - 164 國史館論叢 第57輯 한편 이들은 法制改革을 둘러싸고 당시 執權層 및 政論家 내부에서 다양한 견해가 도 출되자 改革의 成敗는 강력한 君主權의 확립과 결단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하였다.14) 구체적으로 尹鑴는 良役弊의 시정과 良役確保라는 국가적 현안과도 관련하여 五家統 紙 牌法의 시행을 주장하였고 소농민에 대한 항상적인 생산기반(恒産)과 일정 거처의 확보 가 그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15) 특히 어떠한 良法美制라도 制度의 강제만이 두드러질 때 酷法으로 기능한다고 지적하고 국가에 의한 物的 給付 經濟的 施惠와 소농민에 대한 재 생산 보장조치를 동시에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16) 柳馨遠의 경우 그의 전체제적인 변 법개혁론과도 관련하여 생산수단인 土地의 給付를 전제로 생산단위와 사회조직의 결합 을 기초로 하는 鄕政論(鄕里制 閭里頃)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鄕政論은 농민에 대한 恒產 恒業의 배려가 전제된 養民 차원의 논리였다. 이에 따라 鄕政論의 내용은 在地空間 과 鄕村民을 面里制(鄕里制) 五家統制로서 조직화하고 이를 운영하는 직임이자 재지세 력의 포섭대책으로 鄕正 面尹의 기능활성화에 주력하였다. 이같은 입장에 서면 향촌과 민에 대한 국가의 공적 지배력이 확고해지며 국왕으로부터 최하민에 이르는 집권체제의 확립이 예견될 수 있다. 肅宗초기 南人政權하에서 尹鑴를 중심으로 구상 실시되었던 鄕政論은 구조, 사상적 연 원, 기능적인 측면에서 17세기 조선왕조가 추진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방안이었으며 차 후 對民 對鄕村정책의 기조를 형성하였다. 이상 17세기 國家再造論의 일환으로 제기된 鄕政論은 활발한 논의를 거쳐 적극적인 시행이 모색되었다. 庚申換局 己巳換局 甲戌獄事 등 정국변화를 거치는 동안 執權 黨色 의 이해 관계에 의해 부분적으로 부침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面里制 五家統制로 표징되는 公的 社會制度의 정비, 戶籍制度 보완장치로서의 號牌制의 정립, 그리고 鄕約組織의 전국적 기구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병행된 재지세력에 대한 견제 등 집권층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해 民과 鄕村을 위요한 포괄적인 통치체제의 정비가 이 루어진다. 이제는 民과 鄕村에 대한 지배가 守令制 郡縣制 영역보다 그 하부기구인 面里 制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다.17) 는 鄕政이 먼저 붕괴되었다 라고 했고( 白湖全書 권27, 雜著 漫筆 上, p.1114), 磻溪 柳馨遠 역 시 鄕黨의 制度를 이룬 후에야 生養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고 敎化와 法令을 행할 수 있으며 風俗을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록 聖王이라도 그 政治와 敎化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라고 전제하였다( 磻溪隨錄 권3, 田制後錄 上, p.52). 14) 白湖全書 권11, 疏劄 5월 19일 p ) 위의 책 권8, 疏劄 辭大司憲兼陳所懷疏 6월 20일, p ) 위의 책 권7, 疏劄 陳所懷劄 丙辰 1월 29일, p ) 拙稿, 朝鮮後期 鄕村支配政策의 轉換 17世紀 國家再造와 關聯하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2).

7 Ⅲ. 磻溪 柳馨遠의 鄕政論 鄕政論의 理念과 郡縣制에 대한 理解 壬亂 이후 國家再造의 방략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全部面에 걸쳐 제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前期體制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구상하는 儒者들이 나타났다. 南人 黨色을 지닌 磻溪 柳馨遠은 일찍이 鄕里에 은거하여 兩亂 이후 농민과 향촌사회의 실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자신의 개혁론을 개진한 在野學者였다.18) 柳馨遠은 磻溪隨錄 의 田制 敎選之制와 補遺 의 郡縣制條를 통해 일정 공간을 법제적으로 조직하고 생산의 담당자인 기층민을 편제시킨 향촌제도의 개혁안을 제기하 였다. 그는 統治의 客體와 對象이 되는 生産者 農民과 鄕村社會에 대한 法制的 整備가 중요하며, 이같은 향촌제도의 완성 여부에 따라 조선왕조의 민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체 제(民의 生養, 敎化, 法令 및 風俗을 다스림)가 완성될 수 있다고 전제하였다.19) 柳馨遠은 古制 先王之道 聖王之制는 모두 天理를 구현하는 것이지만 시세의 전변으로 인해 古制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20) 그러나 道理와 天理는 고금동서에 불구하고 공통되므로 古道만을 실행할 수 있다고 했다.21) 그는 先王의 古制인 周代 封建 制의 이념을 도입하고 이에 입각하여 실질적인 향촌내 조직체계와 諸職任을 임명하고자 했다. 그는 封建 즉 設官分土 야말로 天下를 經理하는 大綱大器 라 규정하고22) 백성으로 하여금 恒產을 누리고 各得其所 하게 하는 古法制上의 표상이 封建制라고 규정하고 있 다.23) 柳馨遠은 封建으로 상징되는 古法의 이념을 현실에 대한 개혁방향의 준거로 삼았 18) 柳馨遠은 封建 地主制를 해체시키고 民產을 균등히 하는 한편 신분세습제를 부정하여 小農經濟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國家再造論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柳馨遠의 身分制 改革論은 奴婢制의 혁파를 역설하면서도 君主制나 兩班制의 혁파를 주장하지 않는, 즉 봉건적 신분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또한 周의 井田制와 唐의 均田制를 절충하여 전국의 토지를 公田으로 국유화하고 농민에게 재분배함으로써 民產을 균등히 하려는 土地改革論 역시 신분에 따른 차등적 분배, 즉 신분제를 전제한 위에서의 均田的 土地分給制라는 점에서 완전한 均田制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처럼 柳馨遠의 개혁론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封建的 身分制 와 土地制度의 전면적 부정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鄭求福, 앞의 논문 pp.56 57). 그러나 대다수 정부지배층의 개량적인 國家再造論과는 커다란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柳馨遠의 鄕政論의 성격 역시 17세기 朝鮮社會에 대한 그의 全再造方略 특히 토지문제와 신분제에 대한 이해와 연관시켜 그 차별성을 추출했을 때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19) 磻溪隨錄 권3, 田制後錄 上, p ) 위의 책 권26, 續篇 下 奴隸條, 盖後世事異封建 任官制祿 縱不能一如古制 亦必久任而後治效可責. 鄭求福, 앞의 논문 pp.4 5 참조. 21) 磻溪隨錄 권26, 續篇 下 奴隸條, p.507, 夫趨利避害 萬古天下之同情 豈有今異於古 東方異於中 國之理哉. 22) 위의 책 권17, 職官攷說 上, p.17.

8 - 166 國史館論叢 第57輯 다. 즉 자신의 개혁안의 관철을 위한 방법상의 도입단계를 넘어서서 내용 자체를 흡수하 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개혁의 당위성은 利慾 私心에 대비된 義理 公心의 발로에 근 거한 것임을 설파하고 개혁의 추진은 君主의 결단력에 달려있음을 강조했다.24) 柳馨遠은 鄕村의 政制를 기본적으로 腹心이 되는 京師에 대응하여 四方을 藩屛으로 설정하고 諸侯가 天子의 藩屛을 다스리듯, 조선의 경우 監司가 藩屛을 감당하도록 했다. 藩屛을 강고하게 하는 것이 곧 국가를 반석의 기세위에 올려 놓는 것이라 하여 周代 封 建制의 굳건한 藩屛이 외침을 막고 宗室을 보호할 수 있다 라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추종 하고 있다.25) 굳건한 藩屛의 완성을 위해 첫째, 행정구역의 정비로서 郡縣의 併省을 도 모하였다. 柳馨遠은 中國의 宋 元代 史書에서도 지적된 사실로서, 조선의 경우 地小邑多 현상으로 인한 小邑의 난립이 심각함을 말하였다. 대체로 郡縣의 규모는 100里에 해당되 는데 우리의 경우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해 결국 백성에게 많은 폐해를 끼친다고 했다. 그 는 고을의 나눔에 있어 길고 짧음이 절도를 잃고, 四方의 경계 끝이 10里 안에 잇대어 있어 정치를 펴고 부역을 부과함에 어려움이 많고 편리하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이로 인 해 下級郡縣의 경우 그 폐해가 두드러져 제대로 成養되지 않고 농민들이 기탁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으므로 民生이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田結 人口의 多寡 등 정확한 23) 위와 같음. 金駿錫, 앞의 논문(1991) p ) 柳馨遠은 大同法의 시행을 반대하는 朝廷의 관리들을 빗대어 백성에게서 취하기를 일정한 제도 가 있게 하자는 것은 원하지 않고 다만 그 정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은 정신이 혼미하거나 학식 이 없거나 한 자가 아니면 그 불의하여 나라를 저버림이 심함이로다 또는 그 뜻이 나라와 生 民을 위함에 있는 것인가 私利를 도모하여 제 욕심대로 부림을 위함에 있는 것인가 라는 논리로 서 개혁의 당위성을 논하고 있다. 아울러 孟子가 井田의 제도를 논하여 말하기를 諸侯는 자기 를 害함을 싫어하며 그 문헌을 모두 없애버렸다 하고 사나운 임금과 더러운 아전은 반드시 그 經界를 어지럽게 한다 하니 여기에서 義理와 利慾, 公心과 私心의 나뉨이 서로 반대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磻溪隨錄 권3, 田制後錄上 經費, p.69). 차후 星湖 李瀷은 磻 溪의 연구는 근본에까지 미쳐 일제히 개혁함을 王政의 시작으로 보고 있어 뜻은 진실로 크나 실 행할 수 없음이 많다 ( 星湖僿說 권11, 人事門 變法條). 또한 토지개혁에 대해 王政은 모두 授田에 귀착된다. 누가 그런 줄 모르겠느냐만은 다만 행치 못하는 것은 富人의 田을 갑자기 빼 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평가를 가하고 있으나( 星湖先生文集 권25, 論田制), 柳馨遠은 이미 行法之初에는 富人은 괴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일시 微權에 달린 이 요 聖王의 割制는 天下를 위하여 꾀함이지 一己를 위하여 꾀함이 아니다 라고 하였으며 ( 磻 溪隨錄 권2, 田制 下, p.46), 옛 것에서 변화시키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임시 간편하고 구차하 게 하려는 것은 모두 정치를 아는 자가 아니다 라고 하여 ( 磻溪隨錄 권10, 敎運之制 下) 모 든 개혁은 군주의 결단력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25) 이는 李珥의 서울은 곧 腹心이요 四方은 곧 울타리니 울타리가 完固한 뒤에야 腹心이 믿는 바가 있어 편안한 것인데 지금 四方 고을은 쇠잔하여 헤어지지 않음이 없고 ( 磻溪隨錄 권13, 任 官之制, p.263)라는 논리를 계승한 것이다. 그 밖에 李珥가 통치기구의 재편을 위해 비대화된 통 치기구를 축소하고자 하는 冗官革罷論, 對民支配의 일선을 담당하는 지방관을 보다 중시하자는 外任重視論, 책임행정의 구현을 위해 관직의 재임기간을 충분히 해야 한다는 官職久任論 을 주 장했는데 그 이념을 柳馨遠이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李先敏, 李珥의 更張論 韓國史論 18, 1988, pp ).

9 - 167 邑勢民情의 기초없이 각종 조세가 부과됨으로 인해 擔税者 農民들의 부담이 과중되고 심지어 流離할 수밖에 없는 현상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결국 쇠잔한 縣은 합치고 줄 여야 한다고 하여 이를 위해 經國大典 상의 330여 개의 郡縣數를 3분의 1정도로 감 축하려 했다. 그는 균등한 土地分給과 공평한 徭役 부과에 입각한 郡縣의 통합을 통해 民力에 여유가 생긴다고 하였다. 또한 郡縣의 통합 이후 규모의 확대로 인해 戶口와 田 結이 증대될 것이며, 동시에 시행되는 토지제도개혁을 통해 민의 재생산토대가 확보된다 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권력에 의한 지방지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방안이 되는 것이 다. 郡縣통합의 기준은 반드시 山川의 形勢와 田野 人民과 守備상의 關防 城池, 交通상의 道路, 軍事상의 要害 등의 요소를 참작하되 土地의 開墾 여부를 논하지 아니하고 大府 都護府(4萬頃), 府(3萬頃), 郡(2萬頃), 縣(1萬頃)의 규모를 설정하고자 했다.26) 둘째는 藩屛의 諸侯에 해당하는 監司가 오랫동안 임직을 수행하여 제반 鄕村事의 緩 急을 休養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의 연장으로 守令에 의한 향촌사회 主宰權의 정립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監司 守令의 久任論을 통해 정치에 있어서 人心 즉 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완벽한 제도 시행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柳馨遠은 옛적 封建제도 는 天子의 京畿의 千里 안에 6鄕 6遂가 있고 鄕遂에 각각 大夫를 두며 京畿 밖에는 나 라를 封하는데 公侯는 田이 百里, 伯은 70里, 子男은 50里이니 이른바 爵을 차례함은 다 섯이요 땅을 나눔은 셋이다, 鄕遂의 大夫와 公侯伯子男은 후세의 州縣 守令이 그 직임 이다 라고 하여27) 封建制 하에서의 지방통치의 논리를 조선의 郡縣制 개혁론에서 관철 시키고자 했다. 또한 柳馨遠은 君子는 爲民이 우선이요 다스리는 데에서 獨理는 불가능 하다. 따라서 分土 設宰 總治의 誠은 이러한 의미를 얻으면 스스로 알 수 있게 된다 라 고 하였다.28) 다시 말해 17세기 조선의 監司 守令은 민의 지배에서 封建制의 본질적인 논리와 그 의미(土地分給, 宗法制度, 禮)를 잘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柳馨遠은 李珥의 주장 중 監司를 잘 가리어 그 임을 오래 맡겨서 정치가 一道에 나타나고 백성의 信服하는 바가 되게 되면 평시에는 백성을 편하게 기를 수 있고 긴급한 때에는 外害를 막을 수 있다 라는 監司久任制를 적극 수용하여 이를 강조하고 있다.29) 다음으로 守令制의 개선 방안이다. 우선 任期를 법정화하여 官人의 직무상 권한을 보 장하고 그에 따른 일정 책임을 수행하게 했다. 守令의 경우 임기 9년, 觀察使 都事의 경 우 임기 6년을 정하도록 했다.30) 이는 종래 빈번한 관직 교체에 따른 폐해 즉 職事는 익 26) 磻溪隨錄 권15, 職官之制 上 外官職, p.313 補遺 권1, 郡縣制, pp.7 10 金武鎭, 앞 의 논문 p ) 磻溪隨錄 권18, 職官攷說 下 外官職, p ) 위의 책 補遺 郡縣制條, p ) 위의 책 권13, 任官之制, p ) 위의 책 任官之制, p.261.

10 - 168 國史館論叢 第57輯 힐 겨를이 없고 無事遷職의 요행만 바라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다. 따라서 柳馨遠은 충 분한 기간동안 정책수행을 통해 지방사회를 일정하게 장악하게 하고 실적을 책임지우게 되면 그 능력의 여부가 드러나며 각기 분발 격려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守令을 거치지 않는 자는 堂上官(正3品)職에 陞遷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31) 柳 馨遠은 朝廷은 정치를 내는 근본이요 州郡은 정치를 이어 받아서 행하는 소임이니 우 리나라는 外任을 가볍게 여김이 더욱 심하고 라고 하여32) 外職 기피 풍조를 비판하였 고 향촌사회에서 농민에 대한 진정한 장악이야말로 守令制의 요체임을 강조하였다.33) 아 울러 州縣에는 中國의 역대관제를 모방하여 새롭게 長官과 貳官의 2長을 두고자 했다. 즉 우리의 郡邑에는 다만 한 사람의 官長을 두고 매양 한 번 사고가 있으면 곧 이웃 고을의 守令으로 하여금 임시로 겸임하게 하여 公事와 私事에 소란스럽다 라는 지적과 함께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었다.34) 그리고 守令의 통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監務 官, 營將 등을 폐지하여 그 권한을 守令에게 이관시키고자 했다. 2. 閭里頃의 設定과 鄕里制 改革論 柳馨遠의 鄕政論이 지닌 커다란 특징은 전통적인 守令制와 郡縣對策에 머무르지 않고 하부구조인 鄕里와 생산자 民을 위요한 각종 제도와 직임을 설정, 정비하고자 한 점이 다. 柳馨遠이 구상하는 지방제도는 단순한 戶口數에 따른 인위적인 등급 결정에 머무르 지 않고 생산수단인 토지의 지급과 이를 담당할 생산주체로서의 家戶를 일정 수 배치하 는 방안이었다. 그의 향촌제도 조직안은 2가지 계열로 제시되었다. 집단 취락지로서 閭里頃의 설정과 기존 面里制의 정비를 전제로 한 鄕里制의 시행을 들 수 있다. 전자는 田制 上篇에 서 후자는 田制後錄 上篇 및 補遺 郡縣制條에서 각각 언급되었다. 柳馨遠은 제 도적인 측면에서 鮮初 이래 발달을 거듭해 온 자연촌을 주목하고 이를 새롭게 面里制로 편제시켜 鄕里制라 명하였다. 그리고 예하기구로서 최하 부세수취와 생산단위로서 기능 하는 五家統制를 결합시키고자 했다. 柳馨遠은 鄕里를 획정하는 기준으로 일정한 戶數와 생산단위인 土地의 分給을 전제로 하였다. 바로 鄕里制는 생산단위와 사회조직을 결부시 킨 國家의 公的 社會制度였으며, 이는 토지제와 신분제의 개혁을 강조했던 그의 國家再 造論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柳馨遠의 궁극적인 지향은 토지분급을 전제로 생 31) 위와 같음. 32) 위의 책 p ) 위의 책 p.269, 輕郡守縣令 是輕民也 民輕則 天下國家輕矣. 34) 柳馨遠은 蘇綽의 官司를 줄이고 二長을 두니 정치의 原體를 안다고 한다 는 견해에 적극 동의하 였다(위의 책 권15, 職官之制 上, p.313).

11 - 169 산에 참여할 小農民층을 직접적인 구성원으로 묶은 집단취락지로서 閭里頃의 설정에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柳馨遠은 田制 上篇을 통해 그의 핵심적인 개혁안인 토지분급제의 전면적인 실시 를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생산을 도모할 집단거주지의 설정, 즉 閭里頃을 설정하려 했다. 閭里頃은 20家 단위로 1頃을 定置한 것으로 생산단위를 최하 公的 社會制度에 결부 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仁祖 孝宗년간에 정부차원에서 시행된 號牌法 五家統制가 기본적 인 생산수단의 지급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은 채 행정편의만을 염두에 둔 제도의 강제 라는 측면이 두드러졌고, 민에게는 軍籍 강화의 일환이나 軍役단속을 위한 酷法으로 인식 되고 있었다.35) 이에 비해 閭里頃은 토지분급(井田制의 실시)를 전제하였던 周代 鄕遂制 의 厚意에 부합한 것이었다. 특히 20家 내의 隣保關係와 相互扶助의 원칙이 주목되는 사 안이다. 柳馨遠은 거주지로서 閭里頃 城邑頃 및 大路沿邊의 站店頃을 두어 경작지인 田野 頃과 구분하였다. 이 중 향촌조직과 밀접한 閭里頃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柳馨遠은 취락구성의 필요성에 대해 사람은 반드시 모여 산 연후에야 서로 살 리고 서로 기르며 풍속을 같이하여 敎化를 이룰 수 있다. 후세에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 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것이 많으며 우리 나라가 더욱 심하다. 비록 능히 일제히 잘 정리할 수 없으나 반드시 事宜를 참작하여 제도를 세워 점점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라 하고 文中子(隨의 王通)의 말을 인용하여, 땅을 井田으로 나누어주지 않고 사람 이 閭里를 지어 살지 않으면 비록 舜이나 禹같은 聖人이라도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없 다 고 하여 封建制의 遺意를 강조하였다. 아울러 閭里頃으로 정리되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 鄕里의 家居는 본시 마땅히 그 처소 를 일정하게 두어야 하는데 지금에 당연한 事理를 잃고 그 苟且함에 放任하는 까닭이다 라고 하여 새로운 田制를 수행해 나갈 주체집단의 거주지 설정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頃의 구조에 대해, ① 1頃은 民戶 20家 단위로 편성하되 이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16家에 1頃을 더 두어 후일에 편성되는 家戶를 수용하게 한다. ② 民家가 적고 서로 떨어져 있는 산간 마을(자연촌)의 경우 8家 이상에 半頃을 허락 하고 나머지 50畝는 그대로 餘頃으로 한다. 지형상 1頃을 이루지 못한 경우는 50畝 10 家처럼 그 비율을 정한다. ③ 비록 여러 頃에 이르더라도 그 지형이 서로 연접할 수 있는 곳이면 사이를 떼지 않도록 한다. 35) 仁祖實錄 권28, 仁祖 11년 11월 丙寅 및 孝宗實錄 권21, 孝宗 10년 2월 甲戌.

12 - 170 國史館論叢 第57輯 ④ 閭里頃내 집터 외에 空地가 있으면 居住人들이 우선 고루 나누어 사용하고 후일에 편성되는 자를 기다린다. ⑤ 頃의 구분에 있어 平地는 川字 모양의 세줄기의 길을 만들되 넓이는 5步 정도로 한다. 평탄하지 못한 경우 지형에 따르되 巷道(마을길)는 16畝정도로 하고 원래 큰길이 있으면 이를 경계로 頃을 만든다. ⑥ 民의 집터는 채소밭을 포함하여 3畝를 단위로 하나 士大夫의 경우 品階에 따라 2, 3 家 혹은 7, 8家에 준하여 채소밭 또한 넉넉히 지급하되 2품의 경우 4畝에 달하게 한다36) 라고 하였다. 그런데 閭里頃의 시행은 대대적인 田制改革과 맞물려 있었다. 즉 지급해야 할 토지와 受田人의 지역적 조정을 목표로 인구가 많은 狹鄕에서 토지가 넓고 사람이 드문 寬鄕으로 옮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히 본 거주지에서 5백里 밖으로 옮길 경우 税 와 兵役을 5년간 면제하고 1천里일 경우 8년간의 賦役면제를 규정하였다.37) 이같은 인구 분산은 토지지급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려는 것이며 이를 통해 향촌의 균형적 편제가 가능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상의 원리가 閭里頃에도 반영되어 다음과 같은 徙民策이 단행되었다. ① 頃을 주무하는 職任으로 中人 이상의 監官을 두는데 頃의 설정시 洞里人들과 형편 을 公衆會議하여 결정한다. 만약 민들이 각자 자기 거처 지역으로 頃을 설치하려 할 때 에는 人家의 많은 쪽을 따른다. ② 閭里頃에 모여 살지 않는 자는 사는 집터(所居家基)가 모두 受田한 頃내에 들어 있으므로 별도로 토지를 타지 못한다. 만약 타인의 頃내에 집을 짓고 있으면 자기의 受 田 속에서 그 畝地와 맞추어 사사로이 타협하여 서로 바꾼다. ③ 차후 형편상 閭里頃의 이동을 원하는 경우 여러 사람의 신고를 들어 官에서 형편 을 잘 살핀 연후에 그 이동을 허락한다. 만일 이해가 상충되면 규모가 큰 쪽의 입장을 따른다. ④ 여러 사람의 신고를 듣고 심의하여 정하되 별도의 洞里를 만들거나 부득이한 경우 가 아니면 기존의 閭里에 붙여 주고 空閑地가 아니면 그 頃을 경작하는 田夫로 하여금 다른 토지를 다시 타게 한다.38) 36) 기존 신분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토지분급에서 차별성을 두는 柳馨遠의 입장이 나타난다. 37) 磻溪隨錄 권1, 田制 上, pp ) 위에서 언급한 3항이 기본적인 편성원칙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柳馨遠는 徙民을 전제로 하지만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방안, 즉 기존 취락지의 존재를 인정하며 시행원칙으로, ① 현재의 촌락을 본위로 하여 해 당 마을의 衆人들과 상의한다. ② 事理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상의하고 官에 신고하여 추후에 바꾸는 법규가 있다. ③ 閭里頃의 설정으로 인한 철수와 대대적인 혼란에 대해 비록 頃을 정하여 두더라도 모여살지 않는 자는 본인의 의사에 맡기되 원래 강제로 모아서 철수하여 옮기게 하는 일은 없다. 다만 閭

13 한편 인구가 감소하면 頃의 수를 줄이고 절반이 넘으면 그 頃을 감하여 田野頃으로 전환되도록 했다. 즉 1頃이 10家에 차지 못하면 半頃을 감하고 半頃이 5家에 차지 못하 면 모두 감한다. 이에 따라 餘田 50畝 이상인 경우 양분하여 처리하고 50畝 이하인 경우 하나로써 처리한다. 가령 餘田이 80畝이면 8家인데 이에 차지 못하면 양분한 40畝를 각 각 閭里頃과 田野頃으로 삼는다. 이때 4家에 차지 못하면 나머지 40畝를 모두 田野頃으 로 삼는다. 餘田 50畝 이하 40畝의 餘田인 경우 4家에 차지 못하면 곧바로 田野頃으로 삼는다. 이러한 餘田의 취락구성이라면 그 가구수로 보아 집단 거주의 뜻을 상실한 것이 므로 곧바로 田野頃처리를 강구하였던 것이다.39) 또한 人戶가 철거하여 비게 되는 경우 혹은 사람이 적은 곳은 田野頃으로 전환시키고 한 사람의 受田地로 만들도록 조치하게 했다.40) 이러한 閭里頃의 조세부담에 대해,41) ① 토지등급을 불문하고 1년에 베 3필을 낸다. 삼베 생산지는 삼베로써 代納이 가능하 며 명주 한필의 경우 베 두필로 간주된다. ② 頃내에 사는 家戶는 畝로서 계산하고 합하여 낸다. 만일 그 안의 頃이 1필을 이루 지 못하는 경우 모두 부근에 있는 家戶를 합하여 納付케 하며 베와 명주는 몇 升 尺까 지 낸다. ③ 흉년시 한 필을 감하고 대흉년시 두 필을 감한다. ④ 이미 受田으로 인해 병역을 내고 있으므로 그 頃에는 保布를 면제한다. 만일 京兵 이 있는 경우 그 토지는 모두 保布를 내게하여 京兵의 지급료를 삼게 한다. ⑤ 閭里頃을 이루지 못한 경우 우선 7等田의 예에 따라 田摠 속에 포함시킨 후 쌀이 里에 사는 것이 順理하고 이익에 부합되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대개 지금 흩어져 사는 것은 백 성의 죄가 아니며 토지가 이미 개인의 사유가 되고 있어 事勢가 그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하여 현 실을 인정하고 있다. ④ 閭里頃의 설정으로 인한 폐단으로 16家 1頃 의 원칙을 악용하여 일부 백성들의 과도한 토지 점유 경향, 즉 閭里의 家戶는 적어지고 頃이 넘치는 문제에 대해 사람의 거주지는 각각 그 농토 의 가까운 데로 가는 것인데 농토를 멀리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사람의 本情이 아 니다. 閭里의 빈터는 비록 그 마을 사람에게는 이익이 될 지언정 옮겨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鄕내의 토지 頃數와 民戶의 數, 閭里頃 數는官司에서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백성들 이 공모한다 하더라도 官에서 알아차리고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磻溪隨錄 권1, 田制 上, p.19). 39) 金武鎭, 앞의 논문 p ) 이같은 餘田의 처리는 하나의 지침이며 대개는 閭里頃으로 처리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閭 里頃이 없어지고 田野頃이 되는 것은 오로지 커다란 兵亂 뒤에 백성의 元數가 줄어진 때에 있을 수 있는 일이오 평시이면 절대로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磻溪隨錄 권1, 田制 上, p.19). 41) 柳馨遠의 개혁안 가운데 (公私)경비는 일체 經常한 税로써 하고 다른 賦税가 없다 라고 한 논리 가 참조된다( 磻溪隨錄 권1, 田制 上, p.31 및 권3, 田制後錄 上, p.59).

14 - 172 國史館論叢 第57輯 나 콩으로 써 세를 받고 그 성취함을 기다려 법대로 행하도록 한다. ⑥ 城邑頃의 경우 조세와 병역을 면제하되 다만 2畝半에 人夫 1인을 내어 1년에 하루 씩 賦役하고 서울은 半減한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柳馨遠의 閭里頃은 토지분급을 전제로 20 家내의 隣保關係와 相 互扶助의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한 집단취락지의 설정 방안이었다. 즉 閭里頃은 강력한 토지개혁과 궤를 같이하며 封建制 井田論의 遺意에 부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柳馨遠 스스로 지적하듯 당시의 사세로 보아 실현 가능성이 적었고 그의 개혁안의 최종 적인 지향점을 제시한 것이었다.42) 柳馨遠의 鄕里制 개혁안은 조직과 이념의 측면에서 周代 封建制 및 역대 중국 조선의 행정촌을 따르고 있으나 실제 시행되는 地形의 便宜와 人口의 稠密을 더불어 참작하려 했다. 우선 先王의 제도를 따른다는 점에서 戶數에 의한 통치조직의 정비의 측면이 크게 강조되었다.43) 이에 따라 各邑에 5家 1統의 五家統制를 근간으로 하고 10統 정도의 戶口 를 里로 규정하였다. 柳馨遠은 鄕里制의 예하조직이자 戶數에 따른 조직단위인 五家統制 를 통해 실질적으로 민을 관속하려 했으며 여기에 朱子의 社倉事目 에서 나타나는 隣保機能을 접목시키려 했다.44) 이때 10統을 채우고 남은 家戶는 기계적으로 連村에 分 42) 柳馨遠 스스로도 현실을 전제로 그 시행을 강권하지 않았다. 우선 토지가 이미 개인의 사유가 되어 민이 흩어져 살게 됨을 事勢로써 파악된다 라고 하였고 특히 田籍式의 작성에서 기존 토지 제도를 인정한 위에 만일 閭里頃이 있다면 이라는 표현으로 후퇴하고 있다. 가령 田籍은 戶曹 에서 인찰한 양식대로 하되 天字 第一頃은 方田이니 몇 等이오 길이 백步 넓이 백步이다. 만일 閭里頃이면 第1頃 方田 길이 백步 넓이 백步 境界는 무슨 閭里라고 쓴다. 第2頃 直田이 몇畝 몇 等, 第3頃 餘田은 몇畝 몇等을 기록한 후 毎鄕(面) 文簿의 말단에 통계를 내어 쓰기를 이상 몇頃 몇畝라 하고 그 안에 閭里頃이 몇頃 몇畝이오. 만일 各城邑이 있는 面이면 별도로 城邑頃을 위 에 列記한다 ( 磻溪隨錄 권1, 田制 上, pp.23 24)라는 기재방식을 볼 수 있다. 43) 鄕遂制의 경우 郊內 鄕은 5家 比 閭 族 黨 州 鄕, 郊外 遂는 5家 隣 里 鄼 鄙 縣 遂 이상 12,500 家의 戶數를 설정하였다( 磻溪隨錄 권7, 田制後錄 攷說 上 鄕黨條, p.128). 한편 漢末魏初 徐幹의 中論를 예로 들어 나라의 다스림과 和平은 事功의 일어남에 있고 모든 事功의 일어남은 使役의 고름에 있고 使役의 고름은 백성의 수를 周知함에 있는데 백성의 수를 周知함 은 나라를 위하는 근본이다 라 하였고(위의 책 戶口條, p.230), 先王이 六鄕六遂의 법을 제정한 것은 첫째, 百姓의 維持와 綱目을 삼고자, 둘째, 그 隣比로 하여금 서로 보호하게 한 것임을 강 조하였다. 아울러 사람의 수는 모든 政事의 출발점으로(위의 책, p.131) 정치에서 백성의 수를 주 지함은 반드시 필요한 사안이라 했다. 44) 柳馨遠은 朱子의 社倉事目 가운데 10人씩 결성하여 한 保를 만들고 서로서로 보증하여 만일 도망자가 있으면 同保의 사람이 공동으로 책임지고 그 民戶들이 본시 서로 약속하고 공로나 범 죄를 서로 보증하는 것은 또한 그 稠密함을 알 수가 있으니 어찌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헝클어져 서 기강이 없음과 같으리오 라고 하여 隣保組織을 소개하고 있다. 즉 保 社首 隊長 직임의 존재 와 운영상황이 수록된 保簿를 향관에게 보고하는 체계 및 그 민호들이 서로 약속하고 공로와 범 죄를 서로 보증하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磻溪隨錄 권3, 田制後錄 上 鄕里, p.52).

15 - 173 屬하는 것을 반대하고 5戶가 찰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里의 家戶배치도 이에 따르 도록 했는데 대체로 10里를 鄕(外坊) 坊(서울)으로 명명하고 최하부의 행정단위로 삼도 록 하였다.45) 그런데 柳馨遠은 空間과 人戶를 기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고 보고 반드시 人戶의 稠密과 地勢의 便宜를 참작할 것을 주장하였다. 가령 外方의 경 우 천지가 생긴 지 이미 오래이다. 지금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은 자연히 지형이 便宜한 곳이다. 그 살 수 없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취락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라 하 고46) 일시적 人口存亡은 時政에 관계되므로 分鄕, 定界의 限에 참작되지 않게 해야 한 다 라고 하여,47) 地宜와 人口稠密을 참작한 鄕 坊의 설립을 역설한다.48) 그는 鄕里條에서, 鄕은 마땅히 경지 500頃으로 1鄕을 삼으며 토지의 起耕과 廢耕이 정상치 않으니 마땅 히 原籍대로 좇아서 700頃으로 표준을 삼고 반드시 人戶의 稠密을 헤아려서 드물면 늘 이고 많으면 줄이는데 그 한도는 600頃과 900頃을 넘지 않되 城邑所在地나 工商이 많이 모이는 곳은 헤아려서 줄이고, 땅이 모두 한해 건너 묵히는 곳은 헤아려서 늘인다. 또 마땅히 지형의 適宜함을 참착하여 1鄕으로 삼는다 라고 하였다.49) 또한, 家의 計定은 田耕을 본으로 삼은 연후에 할 것인데 四方의 地勢와 居民은 같지 않다 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 여기에서 人戶의 稠曠을 살핀다는 것은 옛부터 稠衆之地는 田 45) 柳馨遠은 鄕의 명칭이 面, 里, 村으로 불리는데 黄海, 平安道는 坊, 咸鏡道는 社라 하며 漢城府는 국초부터 坊이라 명명했음을 밝히고 그 적절한 명칭은 상호 의논하도록 하였다(위의 책, 補 遺 郡縣制條, p.536). 46) 위의 책 권1, 田制 上, p ) 위의 책 補遺 郡縣制條, p ) 이같은 향촌조직을 염두에 두고 향촌내 選士의 貢擧에 있어서도 選士(150명), 式年文科(33명), 生 員 進士(각 100명)를 州 郡 縣에 分定할 때 差等을 두도록 했다. 柳馨遠은 州縣을 설치하는 것 이 이미 적당하게 되어 있고 州郡縣도 본래 田丁이 많고 적은 차등에 따라 정한 것이다. 선비를 뽑아올리는 인원의 수는 한결같이 戶口의 多寡에 따른 것이다 라고 하였다(위의 책 권10, 敎選 之制 下 貢擧事目, pp ). 49) 坊의 경우 대략 500家가 살고 있는 땅으로 정하는데 대체로 지형을 참작하여 편의하게 정하도록 한다. 상고하여 보건대 옛적에는 鄕鄙를 비록 家戶의 수로써 정하였으나 본래 땅은 각각 그 자 연스러운 分界가 있어 人戶의 多寡로써 구역을 넓히고 줄이지 아니한다. 論語 에 이른바 達 巷黨 같은 것이 또한 그 땅의 分界로써 이름을 정한 것이다. 外方의 鄕도 또한 이와 같으니 사 전에 말한 아무 郡 아무 縣 사람 이라는 것으로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위의 책 권3, 田制後錄 上, p.52).

16 - 174 國史館論叢 第57輯 또한 반드시 良沃多墾하며 曠稀之處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500家를 넘지 않게 하는 것이 적절한 人口와 田土라고 여겨진다. 일시적 인구증감은 時政에 관계되며 分鄕 定界의 限에 참작되어서는 안된다. 지형을 참작한다는 것은 山隔 河界가 다른 지역 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太過不及이 되지 않도록 한다 라고 하였다.50) 이상에서 柳馨遠은 500 家 700 頃 규모의 鄕(坊)을 생산과 통치단위로써 규정하며 이를 재차 50統 10里의 행정체계로 편제하려 했다. 한편 鄕里制에는 다음과 같은 직임이 설정되어 있었다. 柳馨遠이 통치의 근간으로 삼 은 행정단위인 鄕에는 鄕正(坊正) 里正 統長을 각 통치단위의 직임자로 임명하였다. 이 가운데 統長 里長은 良民으로 나이가 長成하고 謹愼正直한 者를 선택하고 保布를 면 제해 주고자 했다. 특히 統長과 里正은 떠돌아 다니는 流民이나 逃亡者에 대해 鄕正에게 보고할 의무를 지니며 1戶를 숨겼을 때 罰布 2匹을 責徵당하였다.51) 柳馨遠은 鄕里制의 핵심직임으로 鄕正을 두었는데 公事 및 各里에 대한 檢擧를 시행 하고 農事와 養蠶 등 농사에 관계된 일체를 주관하였다. 특히 토지분급제의 운영과 관련 하여 첫째, 거짓 土地 授受者의 처벌을 담당하였는데 守令 里正과 함께 토지 授受를 검 찰하고 문제 발견시 즉시 官에 알려 조치케 하였다.52) 둘째, 陳田의 보고 임무이다. 경작 하지 않고 묵은 全陳田은 모두 田夫의 신고를 들어서 鄕正이 친히 심사하되 8월 15일전 에 守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53) 셋째, 流離民의 통제업무이다. 즉 里中의 流離民에 대해 里長 統長의 보고를 官에 알려 조치하는 일을 맡도록 했다.54) 鄕正의 자격은 鄕內 內外舍免番生으로서 淸平正直者 혹은 有蔭有親之類 이며 守令이 향촌내 衆議를 택하여 觀察使에 보고하고 帖을 수여함으로써 임용하도록 했다. 만약 學 生의 신분으로 鄕正에 선발되면 學中에라도 公務로 往來해야 하므로 式年에 昇貢시키고 外舍生 鄕正인 경우 未入籍者라도 해당지역 鄕約 群會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祿 俸은 常祿이 원칙이었으며 祿制 에 따르면 7천명의 鄕正을 상정하여 毎員에 10斛씩 7천개所 7만斛이 책정되어 있었다.55) 또한 人的자원의 지원으로서 별도의 伺侯 6인을 정하여 公的인 일이 생길 때마다 윤 번으로 使令에 임하도록 하되 邑內의 面은 4인의 伺侯를 배치하도록 했다. 각 鄕에는 鄕 의 左右를 나누어 勸農의 任으로서 良民 가운데 선출되는 穡夫 2인을 두어 税納에 관한 50) 위의 책 補遺 郡縣制條, p ) 위의 책 권3, 田制後錄 上, p ) 위의 책 권1, 田制 上, p ) 위의 책 p ) 위의 책 권3, 田制後錄 上, p ) 鄕正 1인당 4孟朔에 2斛 5斗씩 지급했고 文報紙價米로서 5斗를 지급하게 했다(위의 책 권19, 祿 制, p ).

17 - 175 傳諭 期限 督納의 일을 맡게 하고 그 保布를 면제하도록 했다. 한편 인구가 적은 西北 지역에는 2개 鄕에 正을 설치하여 良戶의 번성을 기약하게 했다.56) 다음으로 郡縣 官司의 개입을 막기 위해 鄕正과 穡夫에 대해 초기 부임시와 歲首禮拜 및 所令 禀遣 외에는 별도로 官府에 호출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아울러 鄕正 (穡夫) 里正 統長의 조직체계가 확립되면 기존 都將이 혁파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鄕正 이 제반 民政을 통괄하고 里正이 盜賊의 譏察과 檢察의 일을 맡으며 대규모의 賊 挑發 시 官令并捕가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柳馨遠이 鄕里의 직임자인 鄕正 선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考說 에 근거했다. 우선 宋代 蘇軾의 견해에 따라 최하 統夫 正長은 治民의 기초가 되며 이러 한 향촌통치조직의 기초가 안정될 때 비로소 朝廷은 안정된다고 하여 直州郡의 官이 아 닌 鄕族 閭里 正長의 직임은 반드시 一鄕의 선발을 거쳐 審擇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 고 古人의 정치의 要諦를 아는 자는 반드시 親民의 직임을 중히 여겼으며 민과 더불어 가장 친한 자는 正長이다 라는 明代 邱濬의 견해를 소개했다.57) 이처럼 柳馨遠은 역대 중국 행정촌의 운영사례에서 그 전거를 안출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牧民官(守令)이 아 닌 순수 향촌의 직임으로써 鄕正의 기능과 선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柳馨遠은 鄕里制의 成敗가 鄕正의 선출에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위해 반드시 鄕 內 士類가 임용되어야 함을 말하였다. 그는 鄕正의 職任을 內舍免番生으로 택하면 育士 之道를 손상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의에 대한 自答으로 아직까지 俗見을 벗어나지 못한 것 이라고 하여, 治民의 官을 輕易하면 鄕黨의 任 역시 천시한다. 그러므로 夫가 그 자리에 서야 한다. 임금이 신하를 세우는 근본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다스림을 내는 근원은 비록 56) 서울의 坊에는 坊正 1人을 두는데 坊내에 살고 있는 內外舍生의 학교에서 일정 番에 따라 수학하 는 의무가 끝난 學生免番生과 有蔭 有親 중에서 淸百公平하며 正直한 자를 가려서 맡기고 公事 가 있으면 各里를 檢察하여 사무를 집행하되 일정한 봉급이 있고 수행하는 伺侯 4人을 정하여 주도록 했다(위의 책 권3, 田制後錄 上, p.12). 57) 鄕正의 전형으로 後魏 三長, 隋 文帝시의 鄕正, 唐의 鄕正을 비정하고 있다. 後魏의 三長은 隣長 (5家, 1夫의 부역면제) 里長(5隣, 2夫의 부역면제) 黨長(5里, 3夫의 부역면제)을 일컫는데 3년동 안 과오가 없으면 한 등급을 올려 쓰도록 했다. 柳馨遠은 三長을 세우면 세가 떳떳한 표준이 있고 부역이 恒定한 分數가 있고 蔭附에 숨겨있는 호가 나올 것이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멈춰 질 것이니 무엇 때문에 잘 되지 못하리오 라는 攷說을 인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隋 文帝시 保正 (5家) 閭正(5保) 族正(4閭)과 畿外의 里正 黨正의 역할을 소개하고 蘇威의 건의에 따라 500家 의 鄕正 을 두어 民間의 訟事를 다스리도록 했던 예를 들고 있다. 唐代의 사례로는 里正(100家), 鄕正(500家)을 두어 호구검사 및 농사짓기와 뽕나무 심기를 권하고 잘못된 일을 檢察하며 각종 賦役을 督促했던 일을 예로 들고 있다. 아울러 邑居의 경우 坊을 삼고 1 인의 坊正을 두어 坊門 의 開閉와 奸惡함을 督察케 했는데 이들의 세와 부역을 면제시켰으며 田野의 경우 村을 삼고 1 인의 村正을 두고 100家가 차면 1인을 더 두었던 예를 들었다(위의 책 권3, 田制後錄 攷說 上, p.129).

18 - 176 國史館論叢 第57輯 天子로부터 비롯되나 다스림을 펴는 切務는 實로 鄕政에 있다. 이는 天子가 鄕正과 더 불어 다스리는 것인 바 어찌 가벼이 여기리오 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鄕正의 직임을 다스림에 있어서 天子의 外延으로 여기고 있었다.58) 또한 柳馨遠은 壬亂 이후 점차 鄕正을 賤任視하는 풍조가 전개되어 士類들이 필사적 으로 謀避하였고 그 대신 下類不齒之人 이 충원되어 백성을 해치고 갖가지 부정행위가 야기되며 官家 또한 처벌만을 행하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는 17세기 향촌사회의 커다 란 문제점으로 등장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柳馨遠은 우선 周代 500家의 長이 上士였고 漢代 鄕三老가 秩이 있으며 그 아래 亭長 또한 賢才였음을 들어 연원을 볼 때 鄕正의 직임이 천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와 더불어 구체적인 해결책으로써 우선 士秩의 위치를 인정하고 士를 대우하여 昇貢 祿俸의 특전과 伺侯를 붙여 주어 鄕內 士族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 士類가 災傷驗報 등의 업무수행시 관으로부터 받는 刑杖에 대해서도 守令이 親審한 후 분명히 鄕正의 잘못이 드러나면 죄있는 자가 처벌 받는 것은 당연하다 고 전제하고 이렇게 되면 政敎가 행해지고 民生이 均等해지며 德이 쉽게 백성에게 전달되어 무리가 각각 나눔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더구나 鄕正은 녹봉을 받고 사령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儒士가 이에 취임하면 무단히 坐食 役民하는 弊習이 사 라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결국 公私가 각각 그 분수를 얻고 萬事가 바른 길에 돌아가 게 하는 방안이라 하였다.59) 이상 柳馨遠은 전통적인 守令制와 郡縣對策에 머무르지 않고 生產의 場이자 統治의 客體인 鄕村과 民을 위요한 面里制(鄕里制)에 보다 주목한 政論家였다. 그는 周代 封建 制의 이념을 전제로 한 王室 藩屛의 확립과 公的 社會制度로서 鄕里制 五家統制라는 조 직의 정비와 포괄적인 재지세력에 대한 포섭책으로 직임자의 선발과 기능강화를 강조하 였다. 500家 700頃 규모로 획정한 鄕里制 내의 직임으로 鄕正 里正 統長을 계열화하여 특히 士類의 鄕正 임명을 강조하고 常祿 伺侯를 덧붙여서 公的인 地位를 담보해 주고자 하였다. 柳馨遠의 지방제도 개혁안의 핵심은 생산단위와 사회조직을 결부시켜 국가의 공 적사회제도로서 확립시키고자 했던 鄕里制였으며,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 불합리한 名分 論 身分制의 타파를 강조했던 그의 國家再造論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60) 58) 위의 책 補遺 郡縣制條, p ) 柳馨遠은 이같은 개혁은 田制가 바르고 奴婢制의 改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였다. 이는 그의 개혁론의 입론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위의 책 p.537). 60) 柳馨遠은 종래 朱子學의 理氣 人性論에 대응된 변법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로서 實理論을 수립하 였다. 또한 古法 古制를 道體 天理에 근거한 王道政治 封建制度의 소산으로 규정하고, 이에 의거 하여 後世法인 經國大典 的 질서의 전면적 개편을 도모하였다. 변법을 통해 지향하는 새 社 會는 治人者인 君主와 士族(새로운 貢擧士族)이 정치운영의 주체가 되어 均田 均賦를 실현하고 四民으로 하여금 恒產이 보증되는 위에서 各得其分 하도록 이끌어가는 사회였다(金駿錫, 앞의 논

19 - 177 柳馨遠은 당시의 사회발전과 自然村의 성장을 염두에 두어 통치단위 부세수취단위로 서 面里(鄕里)의 단위성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토지분급제와 적절한 생산단위로서 향촌조 직을 재구성하는 방안을 강구했던 것이다. 그는 통치기반이 面(鄕)단위로 새롭게 확장되 는 경향 속에 鄕단위로 설정된 田籍 및 戶籍制의 제 조항을 대체로 수용하려 했다. 즉 田籍式과 戶籍式의 제정과정에서 만약 閭里頃이 존재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통해 閭里頃 을 일부 언급하였을 뿐 굳이 閭里頃의 강제적인 실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면 柳馨遠의 鄕里制는 17세기 지방제도 개혁안의 흐름을 잘 드러낸 것이며 또한 비교적 실 행 가능한 방안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在地勢力에 對한 對策 조선전기 이래 국가권력과 재지세력은 民과 鄕村社會의 지배를 위요한 끊임없는 갈등 관계를 노정하였다. 즉 국가의 지방지배력의 확산과 재지세력의 자치적 대응의 모습이 적극 표출되었다. 양란 이후 향촌조직의 완전한 정비를 위해서 재지세력의 장악 협조여 부가 관건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이는 집권체제의 확립을 도모했던 정부의 입장에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쏟았던 부문이기도 했다. 본절에서는 柳馨遠이 재지세력에의 대책으로 제시한 鄕約制 및 鄕官制 개혁론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柳馨遠은 공적제도로서 鄕里制 五家統制를 설정하여 政令(務)을 관장시키려 하는 한 편 별도의 敎化업무를 위해 私的 社會組織인 鄕約機構를 주목하고 있다. 국가의 목적하 에 편제된 鄕里制 五家統制에 비해 향촌민의 내적 자율의식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전통 적인 향약기구의 활용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또한 재지사족의 향촌 운영의 참여를 유도 하기 위한 보조기구로서 향약의 조직 직임을 활성화하려 했다. 柳馨遠은 집권적 질서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향촌사회의 원활한 운영은 통치조직내 재지세력을 포섭하는 것이 관건임을 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鄕里制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보조기구로서 鄕 約 契와 같은 사회조직과 기존재지기구인 鄕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만일 옛법을 設行하고자 한다면 守令이 먼저 鄕官을 잘 가리고 鄕約으로 더불어 서로 表裏가 된 연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61) 柳馨遠은 春秋 公羊傳 何休의 說을 인용하여62) 古法에서 里內의 高德者를 선발하 여 父老라 하고 그 辨護剛健者를 里正이라 하여 民을 다스리는 데 分任者가 있었음을 문, 1992, pp ). 61) 磻溪隨錄 권3, 田制後錄 上 鄕里, p ) 春秋 公羊傳 권16, 宜公.

20 - 178 國史館論叢 第57輯 예로 들고, 옛법에도 역시 일을 나누어 맡은 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敎化를 펴는 것은 곧 人心을 바로 잡는 근본이요 모든 政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고 하여 政 令과 별도로 敎化를 위한 업무수행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63) 柳馨遠은, 朱子增損呂氏鄕約 은 본래 士類를 위한 私相約束이다. 만약 국가로부터 敎條를 申 明하고 州里의 士庶를 통해 興行시키려면 그 사이 節目의 변통이 없을 수 없다. 이 때 문에 근세 儒先으로서 敎化에 뜻을 둔 자들이 대개 增損이 있었고 詳略이 각각 다르다. 지금 재차 周禮의 鄕三物鄕八刑의 意를 취하고 退溪 栗谷의 約條를 참조하여 조목을 정 한다64) 라 하여 자신이 纂한 鄕約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 柳馨遠은 향촌민에 대한 敎化를 담당할 鄕約機構의 운영직임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 다. 우선 郡縣 단위로 都約正(1人) 副約正(2人) 直月(1人)을 두며 鄕마다 約正과 直月 각 각 1人, 里마다 里正과 庶民신분인 色掌을 두고 鄕官(座首)은 예에 따라 約正을 겸임시 켜 兼約正이라 부르도록 했다. 한편 서울의 경우 外方의 鄕과 대비시켜 坊契조직을 들고 직임자로서 約正에 대비되는 尊位의 존재를 언급했다. 이 가운데 都約正은 고을 여러 사 람의 의논에 따라 나이가 많고 德行이 높은 사람 1人을 추천하되 卿이나 大夫 士를 물론 하고 德望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 신임받는 자를 정하도록 했다. 都約正과 副約正 및 各 約正은 父母의 喪이나 疾病, 人望不合者와 같은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장기적으로 연임 하고 중간에 교체하지 않도록 하였다. 柳馨遠은 이들 직임의 중요성에 대해 敎化가 지 극히 소중한 임무이므로 옛적에 鄕大夫의 벼슬은 大司徒와 같게 여기고 鄕老는 오히려 大司徒보다도 높아서 안으로는 임금과 함께 道를 의논하고 밖으로 六鄕에 대해 설교하 는 일에도 참여했다 고 하였고, 옛사람이 德을 존중히 여기고 敎化를 이르는 데 있어서 오로지 형식과 제도에 의해 서로 구애받지 않았다 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문제는 鄕의 約正과 里의 里正의 존재였다. 이들은 鄕約機構의 직임이고 敎化만을 담 당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鄕里制의 鄕正 里正과는 기능과 선출에서 상호 혼재되는 측면 이 존재했다. 먼저 約正의 주요 기능은 해마다 四孟朔의 초열흘날 都籍에 있는 자를 대 상으로 約의 법을 강습하는 것과 민간 내부의 訴訟 爭鬧의 처리, 農牛屠殺者 처벌 등 風 敎의 담당, 杖 30대 이하의 第一次的 處罰權 행사를 들 수 있다. 다음으로 里正은 庶民 중 年長者로서 마음이 굳으며 행동을 삼가는 者를 뽑되 鄕村民에 대한 勸獎 曉喩 糾彈 檢察하는 일을 담당케 했다. 그런데 柳馨遠은 이 같은 일을 鄕里制의 鄕正 里正이 겸임 할 수 있다면 별도로 선출할 필요는 없다고 규정하였다.65) 만약 公的 社會制度인 面里制 63) 磻溪隨錄 권9, 敎選之制 上 鄕約事目, pp ) 위와 같음.

21 - 179 (鄕里制)의 里正이 政令 뿐 아니라 敎化업무를 담당한다면 人選의 어려움도 줄이며 보다 효율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같은 업무의 추가부담이 문제되는 것은 항상적으로 존치되 는 面里機構의 직임과 다소 의제적인 鄕約機構 직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柳馨遠은 鄕里制의 핵심직임으로써 鄕正을 강조하고 그 선발과 기능의 중요성을 거듭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鄕(面) 단위의 鄕約機構 직임으로써 별도의 約正을 설정하 고 있다. 柳馨遠은 이같은 分任制에 대해 첫째로 鄕正이 비록 精選된 인물이나 관청의 大小公事가 모두 미치기 때문에 별도로 約正을 두어서 敎化의 업무를 맡게 한다는 것이 다. 둘째로는 鄕正과 달리 約正의 직임에는 大夫 長老를 물론하고 德이 높고 人望이 있 는 선비를 임용할 수 있다고 했다. 柳馨遠은 鄕約을 행하는 것은 오직 옳은 사람을 얻 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일 어진사람이 이 자리에 취임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또 취 임하는 자가 혹 人望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 가리기를 德으로 하지 않고 대우하 기를 禮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즉 추천하고 사람가리기를 지극히 하고 우대하기를 예의로 해야할 것이며 또 約正이 된 자로 마땅히 먼저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남의 모 범이 되어 鄕里를 거느려야 한다 고 말하였다. 즉 約正의 자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郡縣 統治에 一助할 수 있는 人士를 기다리고자 하였다. 셋째, 柳馨遠은 옛적 族師(4閭 1族) 와 黨正(5族 1黨)이 敎育과 賦役의 일을 겸하고 또 군사를 거느리는 將帥의 일까지도 겸 한데 비해 지금에는 將官과 鄕正으로 나누고 재차 鄕正을 두는 까닭 에 대해 다음과 같 이 自答하였다. 즉 옛적에 黨正의 직임은 비록 鄕과 州에 붙어 있으나 이들은 모두 主 治하는 관리인 까닭에 능히 그 임무를 전적으로 행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郡과 縣의 地 境안은 오로지 守令이 다스리는 구역이 되었고 또 그 밖에는 나누어 맡도록 되었기 때 문 이라 하였다. 그러나 鄕正에게 約正의 일을 맡길 수 있다면 이를 겸임하는 것도 또 한 人望에 의해 할 것이니 그 일을 主務하는 자가 마땅히 자세히 살펴서 할 일 임을 지 적하였다.66) 즉 里正과 마찬가지 로 公的 社會制度의 직임인 鄕正에게 敎化의 업무 또한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鄕正이 鄕約機構와는 달리 항상적인 직임이라는 현실적인 사정에 기인한 것이며, 柳馨遠이 향촌제도의 핵심을 鄕里制에 두고 있던 점에서 볼 때 당연한 주장이기도 하다.67) 한편 민간에서 다툼이나 소송이 있는 경우 約正으로 하여금 시비를 가리고 조정 내 65) 위의 책 補遺 郡縣制條, p.537 및 권9, 敎選之制 上 鄕約事目, p ) 學校안에서 講約할 때 都籍에 있는 사람은 모두 모으되 現時의 임원으로 있는 鄕正 校師는 비록 鄕籍에 들지 않았더라도 참여하도록 할 것을 명시하였다. 즉 鄕正은 庶民이라도 참여가 허용됨 을 보여주는 것이다(위의 책 권9, 敎選之制 上 鄕約事目, p.165). 67) 鄕約기구의 임기는 대체로 장기간의 연임이 보장되나 鄕內 直月의 경우에만 1周年으로 되어 있 다. 都約正 副約正 約正의 임기는 보장된데 비해 鄕里制의 鄕正은 수령에 의한 임명 내지 일정 임기가 규정되어 있다. 또한 鄕約의 里正은 임기가 보장된데 비해 鄕里制의 里正은 임기가 1년 인 점이 상호 비교된다.

22 - 180 國史館論叢 第57輯 지 벌을 주게 하고 約中에서 결단할 수 없는 일은 官에 알려 결단토록 한다 라고 하여 鄕約이 1차적 자치기구이기는 하나 결국 官治가 필요함을 지적하였으며 아울러 柳馨遠 의 官治의지를 보여주고 있다.68) 이와 관련하여 柳馨遠이 敎化와 政令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고 업무 또한 분류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별도로 柳馨遠은 서울안의 各坊에 契가 있고 大夫나 士를 물론하고 尊位 직임을 맡아 제도를 닦아 정하기를 한결같이 鄕約과 같이 한다고 하였다. 이의 연장으로 村里의 契를 주목하고 그 里마다 契를 合設하여 班常을 가리지 말고 洞契를 설치하되 임원으로 上契長 下契長, 上有事 下有事를 두도록 하였다. 이때 兩班과 庶民을 모두 동일한 籍에 넣도록 하되 종류를 나누어서 기재하도록 했다.69) 鄕約의 구체적 실행은 하부기구인 契 를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말하였다. 柳馨遠은 이같은 다양한 향촌조직의 전개에 대 해 옛적 鄕遂에 다른 제도가 없었으나 지금 중국은 京府에도 約正이 있어 外方의 와 규정을 동일하게 한다 고 언급하였다.70) 이상 柳馨遠은 郡縣단위 鄕約기구의 직임으로 都約正 副約正을 두고 鄕마다 約正을 두어 卿 大夫 士같은 재지세력의 임용을 규정했고, 副約正은 鄕官(鄕所)의 겸직으로 규정 하였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鄕約기구의 約正 里正업무를 鄕里制의 鄕正 里正에게 부과시 킬 것을 주장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해 재지세력과 향촌 제기구를 장악하 려는 의도를 보여 주었다. (1) 17世紀 鄕官制의 運營 事審官制의 조선적 변형으로 여겨지는 京在所 留鄕所 제도는 이 시기 國家權力 對 在地勢力의 상호관계와 재지세력 내부의 갈등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중 留鄕所(조 선 후기의 鄕所)는 중앙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재지세력이 조직한 기구였다. 조선전기 유 향소는 두 차례에 걸쳐 置廢가 반복되었는데 그 기준은 중앙집권적 체제의 구현이라는 국가의 이해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뿌리깊게 저변에 실재하는 재지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서 鄕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중앙집권의 수단으로만 적극 활용된 京在所보다 韓 末까지 극심한 位相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존재했던 鄕所의 향촌 통치구조상의 위치는 자못 중요하다. 鄕所야말로 중앙정부의 지배에 대응한 지방자치력의 상징이자 두 세력간 이해관계의 절충기구였다. 그런데 鄕所는 재지세력의 결집체로서 분명한 자기운동성을 지닌 기구였다. 이는 선출 68) 위의 책 p.167, 約中에서 官司에 보고할 일이 있으면 兼約正인 座首에게 通文하여 그 글로써 官 에 告하고 座首가 없으면 別監이 告한다. 반면 官司의 鄕約에 대한 諭示는 公文으로 행한다 라는 조항을 볼 수 있다(위의 책 p.166). 69) 위의 책 권3, 田制後錄 上, p ) 위의 책, 鄕里條.

23 - 181 구조나 직임의 규정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진다. 즉 鄕所는 鄕會 鄕約機構와의 내적 관련 하에 재지세력이 자치적 성향을 과시하면서 그 이해를 대변하는 機構였으며, 政令 敎化 로 상징되듯 행정 통치기능과 윤리의식의 제고라는 기능을 통해 민에 대한 총체적인 지 배를 수행하였다. 향촌지배체제의 직임 가운데 鄕所는 吏卒과 달리 任掌으로 분류되었 다. 任掌이란 위로는 鄕所로부터 아래로는 戶首 統首에 이르는 직임자를 일컬으며 향촌 내에서 차출되는 존재이자 準公的 職任이었다. 官에서는 鄕所 이하 任掌의 가장 주요한 기능으로서 民과 官 사이를 洞然貫澈하여 중간에 막힘이 없도록 하는 것을 들었다.71) 정부는 壬亂 직후 기존 재지기구인 鄕所에 대해 행정적 업무를 포함한 각종 직책을 부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장기화된 전쟁으로 인해 전반적인 국가의 통치체제가 붕괴 되었고 郡縣內 守令 吏胥의 官司體制가 곧바로 복원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16 세기 이래의 촌락구조의 변동을 반영하고 국가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面里制가 아직 본격적인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鄕所는 조선전기 이래 존재했던 조직이므로 새로운 제도시행을 강제하는 데 따른 혼란이 없었고 재지기구로서 자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향촌과 민에 대한 지배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즉 정 부는 壬亂 직후 향촌장악력을 지니고 있는 鄕所를 활용하여 民에 대한 통치와 재지세력 의 참여를 견인해 냈으며 갖가지 통치업무를 수행하였다.72) 그러나 이같은 鄕所는 외적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지위가 점차 격하되었다. 그 계기는 壬亂으로부터 초래되었다. 첫째, 국가적 목표에 따라 대대적인 향촌통제책이 강화된 사실이다. 당시 시행된 營將制, 書院濫設 금지조처 등은 土地와 民을 私的으로 지배하는 재지사족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이었다. 먼저 仁祖 5년에 창설된 營將制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壬亂 중에 조직된 束伍軍의 훈련과 지휘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營 將은 良役확보라는 현안과 관련하여 재지세력들이 隱匿한 閑丁의 捜括, 奴婢推刷사업에 간여하며 심지어 이에 反하는 행위에 대해 처벌, 진압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바로 營 將制는 束伍軍 속에 私賤을 편입시킨 사실과 더불어 재지세력의 私的 人身的 지배를 통 제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다.73) 17세기 당시 정권에의 참여가 배제된 士林출신 유학자들은 근거지를 중심으로 대거 71) 政要 三 7條( 朝鮮民政資料, 以文社). 72) 17세기 鄕所의 구조와 기능을 살피는 데에는 다음의 논고가 참조된다. 金龍德, 鄕廳硏究 (韓國硏究院, 1979). 管野修一, 李朝後期の鄕所について 郡縣制的國家支配と地方支配層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981)., 李朝後期における鄕所の軍事力掌握について 反亂の事例を中心に ( 人文論叢 9, 1981). 73) 營將에 관해서는 車文燮, 朝鮮時代軍制研究 (檀國大出版部, 1973) 및 徐台源, 朝鮮後期 營將 의 性格에 關한 硏究 兩亂후의 國家再造와 關聯하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0) 참조.

24 - 182 國史館論叢 第57輯 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때 재지사족들 역시 국가의 향촌지배정책에 맞서 面任 鄕任에의 취임을 거부하고 書院과 鄕校를 중심으로 별도의 세력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문제는 書 院이 관장하는 土地와 奴婢의 규모가 커지며 점차 鄕權을 둘러싸고 守令權과 대응되는 사실에 있었다. 書院에 일단 귀속된 土地는 대개 免税특권을 누렸고 기진된 奴婢 또한 免役된 존재가 많았다. 결국 국가입장에서 볼 때 書院의 濫設은 租税源, 國役負擔者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특히 肅宗년간에 300여 개에 이르는 書院이 濫設된 사실과 관련하여 同 40년 書院濫設禁止節目 을 통해 이를 제한하고자 했다.74) 이와 함께 정부는 기존 재지기구의 하나인 鄕所의 기능행사를 제한하려 했다. 정부는 壬亂 직 후 통치 체계가 붕괴된 상황에서 최소한의 국가운영에 필요한 각종 부세수취와 행정업 무를 鄕所에게 일임하여 위기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향촌내 실질적인 鄕所의 위상이나 권력행사에 상응되는 公的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정부가 향촌내 鄕所의 현실적 위상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鄕所의 분권성과 자치성향에 대해 중앙집권의 입장 에서 견제하는 모습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 지위를 축소시켜 공권력의 장악하에 두려고 했다. 둘째, 宣祖 36년(1603) 京在所가 혁파됨에 따라 중앙과의 관련성이 약화되고 京官에의 편입을 지향했던 재지세력의 관심이 저하되었다. 이는 京在所 留鄕所가 지방통치조직상 지녔던 位相이 소멸된 것을 의미하며 두 기구의 동시적 존재를 필요로 했던 제반 여건 또한 변질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셋째, 향촌사회의 분화 발전과 이에 대응한 公的 社會制度로서 面里制 五家統制가 정 비된 사실이다. 정부는 財政確保와 良役制 개혁을 위해 良役事目 과 五家統事目 里定節目 良役變通節目 을 반포했는데 이의 구체적인 시행기구로서 面里制를 내 세우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面里制를 시행하여 국가의 행정적 목표와 재지질서의 용인 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목표를 달성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面里任 등 직임자들의 활 동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收取와 統治의 단위가 面단위로 고정되면서 面里任들이 각종 실무를 담당하며 郡縣단위의 기구인 鄕所는 鄕廳업무의 관장이라는 부차적 기능만 을 수행하였다. 넷째, 재지세력의 분화와 관련되었다. 壬亂 이후 生產體系의 붕괴, 鄕案 鄕社堂의 소 실, 鄕員의 死亡 流散 등으로 인해 기존 향촌 지배질서 자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鄕所를 중심으로 또는 鄕會를 곧바로 복원시켜 재지세력의 결집을 모색한 곳 이 있으나 끝내 戰前의 질서를 회복하지 못한 곳도 속출하였다.75) 더구나 전쟁 이후 公 74) 閔丙河, 朝鮮後期 書院政策考 ( 成大論文集 15, 1972). 李泰鎭, 士林과 書院 (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78) p ) 金仁杰, 朝鮮後期 鄕案의 性格變化와 在地士族 ( 金哲埈博士還甲紀念史學論叢, 1983) pp

25 - 183 的 普遍的 支配 외에 私的이고 個別的인 支配를 거부하는 民들의 반발과 民에 대한 직접 지배를 목표로 국가차원에서 실시되는 향촌정책이 강화되면서 재지세력의 향촌지배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鄕所와 밀접한 연계를 지녔던 鄕會 鄕約기구의 향촌장 악력이 점차 약화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鄕族들이 정치기반의 확보를 목표로 하여 鄕所와 下級 鄕任職에 꾸준히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전개되었 던 본격적인 鄕戰수준은 아니었으나 점차 鄕所직임에의 진입을 둘러싼 儒鄕 간에 갈등 이 거듭되었다. 재지사족들은 기존의 향촌지배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書院 鄕校를 통 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모색하거나 鄕約 洞契와 같은 舊來 機構를 확대 보완하여 기득 권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처럼 17세기 재지세력은 정부의 집권적 의지, 향촌지배 정책의 강화라는 사실과 자체분화라는 내외적인 요인에 맞서 기존수준의 鄕權 享有를 위한 攻防을 전개하였다. 한편 17 18세기에 國家再造를 염두에 둔 政論家들이 鄕政論의 하나로써 鄕所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座首 別監의 명칭을 바꾸고 官職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는 궁극적 으로 집권관료제하에 재지유력사족을 편제시키는 포섭방안이자 能力主義에 입각한 人才 선발 방법이었다. 이들은 鄕所에 대한 개혁론의 근거로서 역대 中國 행정촌의 鄕官과 조 선전기의 土官制 등을 제시하였다. 가령 漢代 功曹와 魏의 中正 및 平安 黃海道 五營將 의 中軍, 威吉道 平安道의 土官制 등이 재지세력의 임용근거와 운영사례로서 지적된 것 이다. 특히 중국의 鄕官職이 재지세력에 의해 구성되어 郡縣의 지방관을 보좌하는 吏胥 와 예하 향촌직임을 규찰 감독하고, 재지의 人才들을 京官으로 천거하는 기능 및 스스로 公的 관직체계에 편제된 사실에서 조선의 鄕所가 획득해야 할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특히 鄕所의 기능은 역대 중국의 鄕官에 비견되었다. 재지세력에서 선출된 鄕官인 漢 의 功曹 椽 과 魏의 中正 의 관직이 예시되었다.76) 바로 郡단위에 소속된 功曹 中正은 76) 備邊司謄錄 139책, 英租 36년 10월 27일(13책, p.474). 李東波 역시 紀綱과 官政의 得失이 전 적으로 鄕任의 賢否에 달려 있다고 하여 鄕任名色을 漢의 功曹와 魏의 中正 직임과 동일시하고 자 했다( 晚覺齋先生文集 권3, 鄕約節目). 조선후기 政論家들이 鄕所의 원형으로 지적하는 漢 의 功曹는 자치제적 성향을 보여주는 鄕官의 하나였다. 漢代의 지방제도를 보면 군현 아래 鄕亭 이 있고 여기에는 鄕官으로서 교화를 맡았던 鄕三老, 조세징수관계의 嗇夫, 치안관인 遊徼을 두 었고 亭에는 亭長이 있었다. 이들에 의해 비교적 주민자치에 의한 지배를 이루려 하였다. 郡에는 守 尉가 있고 屬官으로 太守를 보좌하는 丞 功曹 督郵가 있었다. 屬官의 임명은 太守가 하고 대 체로 당해 지역의 출신자를 임용하였다. 이 중 功曹는 재지세력 가운데 임용되어 屬官과 예하 鄕官의 任免賞罰을 담당하는 직임이었다(宫崎市定, 科擧, 秋田屋, 1946, pp.4 18). 한편 魏文 帝 曺丕는 지방의 郡에 中正을 두고 지역내 관리지망자의 才德을 조사하고 鄕間의 評判에 의해 9品으로 분류한 후 그 채점한 鄕品을 중앙정부에 추천하도록 했다. 본래 이 九品官人法은 지방 유력자와 중앙정부를 결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인재를 인연에 좌우하지 않고 지역사회 鄕論 을 참작한다는 漢代 이래 鄕擧里選 의 遺制를 지녔다. 이때의 실무자가 中正이었고 지을 중앙에 결합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研究, 1956 : 荒木敏一, 官吏任用 法 科擧里選 九品官人法 科擧 歷史敎育 13-6, 1965 참조).

26 - 184 國史館論叢 第57輯 재지사족으로 선출되며 각각 鄕官 내지 鄕論을 대표하는 직임으로써 그 역할을 수행하 였다. 중국과 조선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으나 郡의 屬官과 鄕政의 鄕官에 대해 監視 任免 賞罰을 가하고 재지세력의 중앙관직으로의 추천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조선후 기 鄕所의 역할과 유사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 政論家들은 鄕所制度 개혁론의 전거 를 중국의 역대 사례에서 찾고 또한 조선전기의 土官制와 兩西지방 五軍營의 中軍에서 品階부여의 사례를 들어 공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7세기 鄕所의 성격에 관해서 一鄕領袖 朝家의 留官 鄕宰所 라는 것과 官家의 亞 官 官家의 耳目之任 이라는 호칭이 나타난다. 주로 전자는 재지세력의 자치기능을 주목 하고 封建 領主의 小農民支配를 상정하는 듯한 표현과 국가공권력에 의해 보증되는 집 권적 관료체제하의 지방지배자의 표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국가의 관직체계 와는 상관없이 準公的 기구로서 守令의 지방통치를 보좌하는 행정적 보조기능을 강조하 고 있다. 이같은 표현은 鄕所의 지위가 격하된 후대에 이르면서 官任視 내지 賤任視 되는 호칭으로 전변된다.77) 17세기를 경과하면서 鄕所의 지위가 점차 약화되고 기능이 축소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당시 政論家들은 鄕政論의 하나로써 鄕所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아직 까지 鄕所의 自治的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던 17세기에는 재지세력을 포섭하여 향촌통치 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으로 제기되었다.78) 여기에서는 17세기 향촌통치체제와 鄕所의 개 혁안에 관한 柳馨遠의 주장을 살펴보겠다. (2) 磻溪 柳馨遠의 鄕官制 改革論 柳馨遠은 鄕里制와 鄕約기구를 지방통치의 兩輪으로 구상하면서 조선전기 이래 지방 기구였던 鄕官(鄕所)의 존재를 주목하였다. 柳馨遠 역시 鄕官이 鄕正을 비롯한 面里機構 직임자를 관장함과 동시에 鄕約機構내 兼約正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 다. 즉 政令과 敎化의 양면을 담당하고 있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실제로 鄕官은 예하 面 里任의 人選과 업무감독을 수행하며 鄕約正 이하의 郷約機構와 守令과의 업무연결을 맡 77) 鄕所는 재지세력에 의해 결성되어 국가의 집권화의지와 지방자치력의 양측면의 拮抗관계를 동시 에 체현하였던 기구였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실질적 지방통치를 위해 재지세력의 결집력의 분산과 그들의 협조가 필요했고 재지세력 역시 구체적인 조직을 통해 통치에의 간여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이해관계의 절충으로 인해 鄕所는 韓末에 이르기까지 제도적인 존속이 가능했다. 따라서 鄕所에 관한 비유가 다양한 만큼이나 그 位相이 나 性格도 전국적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茶山 丁若鏞이 주목한 安東의 예에서 보듯 재지 세력의 위치가 확고한 곳은 19세기초까지 鄕所의 지위가 전변되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牧民心 書 吏典 用人條). 아울러 재지사족들의 吏胥 鄕任에 대한 전통적인 멸시 표현이 혼재되어 있음 도 참작해야 될 사항이다. 78) 그러나 18세기에는 향촌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안이자 자의적인 守令權의 전횡을 견제시 키는 방안으로 鄕所의 位相을 제고시키고자 했다. 개혁안의 공통적인 사항은 鄕所를 말단 관직 이나마 중앙관제에 편입시켜 그 권위와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는 鄕所의 자율권 인정 의 측면이 아니라 집권관료제 하에 재지세력을 포섭시키고자 하는 대책의 일환이었다.

27 - 185 고 있을 뿐 아니라 17세기 초반까지는 재지세력을 표징하는 직임으로써 기능하였다. 柳馨遠은 우선 만일 옛법을 設行하고자 하면 守令이 반드시 먼저 鄕官을 잘 가리고 또 鄕約으로 더불어 서로 表裏가 된 연후에야 잘될 수 있다 라고 하여 鄕官 직임의 중 요성을 강조하고 鄕約을 통치의 보조기구로서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79) 그는 鄕官직임 의 역사적 준거를 예시하며 機能 및 人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선 鄕官의 전형으로 옛적 封建制下 鄕遂制의 직임인 族師와 黨正을 들고, 이들이 敎育 賦役징수의 일까지도 겸하였으며 각각 上士와 下大夫의 벼슬이었고 모두 어진 德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한 사실을 적시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郡과 縣이 천하에 널리고 그 벼슬이 封建制의 公侯에 비기지 못하기 때문에 鄕을 다스리는 鄕官의 벼슬 지위는 더욱 낮고 대우하는 예도 가볍게 되었다는 것이다. 柳馨遠의 견해에 따르면 鄕官(座首 鄕所)은 封建制의 遺意 를 지니며 公侯(族師 黨正)에 비유되는 존재이나 事勢가 달라져 郡縣制下에서 守令이 主 治之官이 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통치의 분담직임으로 전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治 郡 治民에 있어서 어질고 덕망 높은 士大夫가 임용되어 守令과 共治하지 않으면 올바른 敎化와 政事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80) 柳馨遠은 鄕官(鄕所)의 선출 기능과 그 개선방안에 대해 언급하였다. 즉 各邑 鄕官은 公廉하고 學識이 있는 자 가운데 다수의 추천을 받은 1인을 座首로, 그 다음은 別監으로 임명하되 守令이 監司에게 薦報하고 監司가 差牒을 제수하도록 했다. 鄕所의 定員에서 座首는 1인이나 別監의 경우 大府와 都護府 4인, 府 3인, 郡 2인, 縣 1인을 원칙으로 하 였다. 또한 柳馨遠은 구체적으로 漢代 功曹의 직임을 조선의 鄕所에 비유하였고 守令과 더불어 大小 官事를 총찰하며 輔佐하는 직임이라 하였다.81) 그러나 17세기 당시의 鄕所 의 상황에 대해 재지기구인 鄕約이 점차 약해지고 座首의 직임에 염치없는 무리들이 취 임하면서 守令이 그들을 吏隸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驅使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야기 된다고 진단하였다. 柳馨遠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째 座首에게 官品을 부여하도록 했다. 그는 國制에서 조선초기 土官을 鄕官과 유사한 직임으로 상정하였다.82) 당시 土官職品階로서 79) 磻溪隨錄 권3, 田制後錄 上 鄕里, p ) 위의 책 권9, 敎選之制 上 鄕約事目, p ) 위의 책 補遺 郡縣制條. 82) 朝鮮初期 平安道 咸吉道 濟州의 土官制는 재지의 지배구조를 행정조직화한 것으로 知印 六房 主 事 鎭撫 令史 등의 下僚를 감독하여 지방행정 군사업무를 수행하는 실무자로서의 측면과 良民層 을 수여대상으로 하여 品階(散職)에 의한 지역적 신분질서체계로서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측면을 지닌 土官制는 중앙정부의 官僚機構 品階體系와 일정한 대응관계를 지니고 있고 해당지역 에 대한 일종의 우대책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土官職을 지님으로 인해 오히려 본격적인 중 앙의 권력기구 체계로부터는 배제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본질적으로 土官制는 설치지역에 대한 차별화정책의 표현이었다. 중앙집권화의 진전과 북방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됨에 따라 土官制는 15세기 말에 거의 정치적 군사적 사명을 끝내고 지배기구로서는 鄕吏에게 신분질서체계로서는

28 - 186 國史館論叢 第57輯 東班은 正5品 通議郞都務에서 從9品 試仕郞攝仕까지, 西班은 正5品 健忠隊尉勵直에서 從 9品 彈力徒尉副勵勇까지의 관품이 있음을 감안하였다.83) 아울러 기존 座首체계는 官名을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座首는 從9品의 典正으로 하고 別監은 典檢으로 정하여 임명하게 했다. 그러나 만약 원래 品階가 있는 자는 본래의 品階에 따르도록 하되 選士 營學生 및 內舍生免番者는 典正의 品階를 받을 수 있게 하여 前衡官 7品 이하라도 역시 제수할 수 있게 했다.84) 조선전기 土官職의 경우 前告身은 한 사람이 모두 받되 上京하여 考準 후 除授했으나 新告身은 모두 下送한 후 觀察使(東班)와 節都使(西班)가 대상자를 호출하여 직접 傳給 하였 다.85) 柳馨遠은 이러한 土官職의 예와 같이 監司가 吏曹 無祿官例에 따라 鄕官에게 牒授하게 하였다. 그런데 전국 각지에 걸쳐 鄕官의 除改에 대한 啓聞이 집중적으로 시행 되면 일이 번거롭고 불편하므로 중지하도록 했다. 그 대신 國法에서 이미 6품 이하는 敎 旨를 받들 監司에 의해 品階의 除授가 가능하며 兼官 守令과 監司가 啓聞없이 差定되었 던 전거를 들어 시행하게 했다. 즉 柳馨遠은 漢代의 亭長 三老와 조선의 土官制의 事例 처럼 鄕官을 조선왕조의 직임체계 속에 편제시킴에 의해 그 위상을 제고하려 했다. 둘째, 柳馨遠은 적절한 인물의 擇任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座首의 자격은 前職 7品 官 以下者, 選士, 營學生 및 內舍生免番者로 하되 本邑에 적절한 인물이 없으면 隣界邑 의 인물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같은 隣邑者를 許通하는 것은 널리 인재를 얻는 방법일 뿐 아니라 座首 임명대상자 스스로 그 직임을 천대하지 않을 것이며 아울러 豪强의 폐 단도 사라져 有益無弊가 된다는 것이다. 단 隣邑출신이 아닌 경우 선발을 금하며 鄕官은 반드시 해당 지역의 風俗 및 公私事勢를 잘 아는 자로 선발하되 권속을 거느리고 부임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다음으로 守令이 邑內 公論에 따라 추대받은 자를 재차 상세히 살펴 추천장을 監司에게 보내고 監司가 替罷與否를 결정하여 牒授하도록 했다. 이때 추 천장에는 해당 후보의 行能實跡을 상세히 적어 士狀의 형태로 監司에게 보고하면 監司 는 이를 베껴서 官案 중에 보관하도록 했다. 임명 이후 추천내용과 달리 행동에 문제가 있거나 重罪를 범한 자는 啓聞한 후 擧主와 함께 처벌하고 반면 賢才를 추천한 자는 薦 法에 따라 시상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柳馨遠은 鄕官의 선발을 위해 여러 段階의 신 중한 절차가 필요함을 강조하여 직임의 중요성을 재차 언급했다. 셋째, 柳馨遠은 鄕官의 임기보장과 우대조건의 확립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사항으로 국가의 그것에 의해 전변되었다(吉田光男, 十五世紀朝鮮の土官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pp : 李載襲, 朝鮮後期의 土官에 대하여 震檀學報 합, 1966). 83) 續大典 권1, 吏典 土官. 84) 磻溪隨錄 권1, 田制 上, p.18. 典正의 名은 明代 宮正司내 宫闕의 糾察戒令 謫罰之事 을 맡은 正7品의 官職에서 나타난다( 明史 권74, 志 第50職官3, p.1821). 85) 續大典 권1, 吏典 土官.

29 - 187 제기하였다. 座首는 常祿이 있었다. 즉 座首에 대해 4孟朔에 4石 5斗를, 別監의 경우 3石 을 각각 집에 지급하도록 했다. 鄕所가 근무하는 때의 支供하는 쌀은 별도로 그 廳에 지 출되었다.86) 또한 鄕廳所定 吏隸外 추가로 伺侯 6인을 붙여주도록 했다. 伺侯는 邑內 民으로 充定 되는데 윤번에 따라 매 2인씩 待令케 했다. 또한 漢代 亭長 三老가 해마다 爵級을 부여받 고 조선의 土官도 30朔마다 昇級하는 규정이 존재함을 들어87) 鄕官 역시 임기가 차면 昇 級시키는 규정을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座首의 仕滿은 6周年이며 이후 陞遷하도록 했는데 別監은 임기가 없으며 座首에 오른 이후에야 비로소 임기를 계산하도록 했다. 座首의 경 우 守令이 仕滿을 監司에게 보고하면 監司가 考講하고 재차 移文하여 吏曹에서 考講케 했다. 才能을 가늠해서 正7品 이하 從8品 이상 內外官에 除授하되 만약 특이한 재능을 지 닌 자는 곧바로 5, 6 品官으로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前銜官인 경우 원래 品階에 따라 서용하도록 했다. 柳馨遠은 鄕官을 外官과 京官을 순연시키는 직임으로 확정하여 조선왕 조의 官僚機構 品階體系에 편제시키고자 했다. 이를 통해 향촌통치에 있어서 鄕官의 위치 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貢擧에 의한 인재선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넷째로 柳馨遠은 鄕官의 品階에 상응하는 예우를 통해 현상적인 士族들의 회피를 해 결하려 했다. 그는 당시의 문제로써 鄕所를 제대로 擇人하지 않고 대우하기를 지극히 賤 視하므로 약간이나마 廉恥를 아는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직임을 거부하고 庸鄙無識不齒 士類者 만이 취임하는 사실을 들었다. 이로 인해 守令이 그들을 상접하지 않고 약간의 문제만 발생해도 笞辱을 가하며 是非를 불문하고 刑을 내리며 권위를 세우려 한다는 것 이다. 이는 결국 직책을 맡은 佐治之人(鄕官)을 分憂케 하며 진심으로 國事에 책임을 다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柳馨遠은 사대부를 택하여 官品을 정하기를 漢代 辟召와 같이 할 것을 당부하였다. 즉 守令이 威暴을 가하거나 擅用치 말고 鄕所가 진실로 죄가 있으면 守令이 禁治하고 大小를 물론하고 官에서 해당 律로써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고, 待하기를 禮로써 하고 罪가 있으면 赦해주지 않는 것은 본래 서로 어그러짐 이 아니다 고 말하였다.88) 이는 예로 대하되 공평한 施罰이 병행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 86) 廳費의 경우 大府, 都護府 : 米 45斛, 黃豆 15斛, 紙地 鏞陳(20斛 상당) 府 : 米 36斛, 黃豆 12斛, 紙地 鏞陳(16斛 상당) 郡 : 米 27斛, 黃豆 9斛, 紙地 鏞陳(12斛 상당) 縣 : 米 18斛, 黄豆 6斛, 紙地 鏞陳( 8斛 상당) ( 磻溪隨錄 권19, 祿制 鄕所廳, p.372). 87) 世宗實錄 권84, 世宗 21년 3월 癸酉(4책, p.198). 88) 이러한 사안은 18세기 鄕所의 위상을 주목한 星湖 李瀷도 지적하였다. 즉 죄는 반드시 監司에게 신고하여 판결을 기다리되 大罪는 竄逐하고 小罪는 贖錢하도록 함으로써 경솔하게 고을에서 매 질하지 말 것을 말하였고( 星湖僿說 권10, 人事門 郡邑辟召), 또는 문제를 야기한 자에 대해 守令이 自意로 처결하지 말고 반드시 京司에 보고하여 일반 관원과 같이 治罪하면 국가에서 선 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잘못이 없고 선비된 자 또한 스스로 맡은 직무에 힘쓸것임을 강조하였다

30 - 188 國史館論叢 第57輯 이다. 아울러 監司가 관례에 따라 講試를 시행하거나 혹은 公事로써 혹은 1년 1차례씩 만나서 民事를 물어보는 자리를 통해 鄕官의 人品을 兼察하도록 했다.89) 앞서 살펴본 鄕里制와 鄕正이 국가적 목적하에 위로부터 강제된 제도정비 및 직임자 였다고 볼 때 민과의 결합이나 향촌장악력에서는 한계가 노출된다. 따라서 柳馨遠은 기 존 鄕所(鄕官)제도를 활성화하고 중앙관직으로 薦選시키는 조건을 통해 재지세력을 적극 참여시키고 전통적인 鄕約機構 鄕會를 활성화시켜 향촌 통치질서와 내적 윤리의식을 함 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柳馨遠은 이같은 재지기구의 자율성이란 궁극적으로는 공적 통 치권내에 포섭되는 것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재지기구를 집권체제의 정비, 鄕 里制의 확립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입장을 표방한 것이다. Ⅳ. 結 論 兩亂 이후 집권체제의 확립을 도모했던 정부는 對民 對鄕村政策을 거듭 시행하여 지 방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다. 南人黨色의 磻溪 柳馨遠 역시 國家再造論의 연장선상으로 鄕 政論을 주장하였다. 柳馨遠은 萬物各得其所 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90) 私心과 利慾을 바탕으로 한 法制를 정비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古先王의 法制를 天理를 구현하고 公心 과 義理를 기반으로 한 제도로 규정하고 그 실현방안을 적극 모색하였다. 그는 향촌사회 에 대한 법제적인 정비(鄕黨制度의 완성) 여부에 따라 조선왕조의 民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체제(民의 生養, 政治와 敎化)가 완성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91) 柳馨遠 당시 정부에 서 논의되는 지방제도 개혁론은 郡縣의 併合論과 守令制 改革論이라는 전통적인 정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외형적인 郡縣단위의 조직 정비란 生產 統治 租税收取 의 기본 단위가 되는 향촌사회와 민에 대한 실질적 지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 다. 柳馨遠은 자연촌의 성장을 주목하여 面里(鄕里)의 단위성을 강조하였고 아울러 이같 은 향촌사회를 국가의 집권적 체제 하에 관장함이 중요하다고 했다. 柳馨遠은 田制 上에서 자신이 제기한 土地制度 改革論과 토지분급제를 바탕으로 생산단위와 적절한 家戶數와의 일치를 통해 古法制의 향촌사회를 재현시키려 했다. 먼저 耕作과 居住형태에 따라 閭里頃 田野頃 城邑頃을 두려 했는데 이 가운데 閭里頃은 1頃 20家를 단위로 한 새로운 田制의 수행주체들의 거주지로 설정된 것이다. 이같은 집단거 ( 蕾憂錄 選擧私議). 89) 柳馨遠의 정치제 개혁론의 핵심인 貢擧制와 관련된 사안으로 천거의 대상에 州縣의 鄕官을 포함 시켜 시험하여 올려쓰는 자로 삼고 있다(위의 책 권10, 敎選之制 下 貢擧事目, p.187). 90) 위의 책 권26, 績篇 下 書隨錄後, p ) 위의 책 권3, 田制後錄 上, p.52.

31 - 189 주지의 조성을 위해 徙民策의 시행을 규정했고 中人신분의 監官을 두어 관련 제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柳馨遠의 閭里頃 設定論은 단지 향촌제도 개혁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 며 보다 근본적인 田制改革을 달성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써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柳馨遠 자신도 지적했듯이 閭里頃은 근본적인 사회변혁이 수반되지 않는 한 현 실적인 시행이 불가능한 제도였으며 그의 향촌사회 개혁론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柳馨遠은 田制後錄 上과 補遺 郡縣制條를 통해 鄕里制의 시행을 주장하 였다. 이는 16세기 이래 자연촌의 성장을 주목하고 그 바탕위에 성립된 面里制의 존재를 적극 수용한 방안이다. 柳馨遠은 수취의 근거로서 호구수에 따라 統 里 鄕을 설정하였 고 1鄕=500家를 배치하였다. 이는 조직과 운영방식에서 中國 역대 행정촌을 모방한 것이 나 토지분급을 전제로 한 제도라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柳馨遠에 따르면 1鄕 은 거주지와 경작지를 합하여 500頃((1家=1頃) 규모가 되지만 실제로 河川 道路를 포함 하여 700頃 규모가 적절하다고 했다. 閭里頃이 철저한 田制改革과 徙民策을 동반한 방안 인 데 비해 鄕里制는 현실적인 향촌상황에 기초한 비교적 실현이 가능한 방안으로 제기 된 것이었다. 이처럼 柳馨遠은 17세기 당시 자연촌의 성장을 반영한 새로운 面里編制의 흐름을 중 시하고 이를 鄕里制라 명명한 후 그 조직체계와 운영직임을 설정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守令 예하에 吏胥의 作廳과 鄕官(鄕所)이 존재하고 鄕里制가 최하 五家統制를 아우르게 하며 운영직임으로 鄕官 아래 鄕正 里正 統首를 두어 공적 통치조직으로 설정하는 것이 었다. 柳馨遠은 國家 對 民의 직접적인 대응관계의 설정을 鄕政論의 기본틀로 삼았다. 따라서 鄕里制의 담당자인 鄕正에 대해 그 위상의 제고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 해 항상적인 祿捧과 伺侯라는 物的 人的 지원을 시행하고 守令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해 그 기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즉 기존 面任과 같이 단순히 守令制의 예하 직임이 아닌 행정 자치적 권한이 보다 강화된 존재로 규정했다. 아울러 古法制와 역대 中國 行 政村의 士大夫 임용사례를 제시하여 재지세력의 鄕正職任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 고자 했다. 그런데 17세기에 있어 국가의 향촌정책이 강화됨에 비례해서 위기의식을 느낀 재지세 력들은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차별화시키고 국가권력 守令에 의한 향 촌장악에 나름대로 대응하려 했다. 이에 따라 재지 유력사족들은 面里기구의 성격을 守 令에의 종속화 성향으로 규정하고 그 직임에의 참여를 대체로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 이 거듭될수록 面里制 운영의 활성화 및 극도로 선별된 面任을 통해 획득하고자 한 소 기의 목표는 쉽게 달성될 수 없었다. 柳馨遠은 이에 대해 鄕里制와 함께 재지세력의 전통적 자치기구인 鄕約을 내세워 향

32 - 190 國史館論叢 第57輯 촌통치조직의 정비를 주장했고 관장 직임인 鄕正 約正의 역할을 강조했다. 즉 향촌지배 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公私기구 직임의 활성화를 통해 재지사대부의 참여를 유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面里기구내 재지 유력사족의 참여거부가 만연되었고 鄕約기구 를 통한 조규의 강제적인 집행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쉽게 달성하기 어려웠다. 柳馨遠은 鄕正 約正과는 별도로 조선전기 이래 전통적 지방기구인 郡縣단위의 鄕所를 주목하였다. 특히 座首 別監을 從9品의 典正과 典檢으로 임명하여 새롭게 관직체계 속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이는 鄕所의 공적 지위를 회복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守令權과 재지 세력 사이의 이해 조정 역할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柳馨遠은 자신의 國家再造論의 방 향과도 관련하여 鄕所(鄕官)을 集權的 官僚制 하의 지방지배자로서 위치시키고자 했다. 이는 鄕所의 지위격하라든가 儒 鄕 분기가 본격화되지 않은 17세기 향촌사정을 반영한 견해였다. 이상 柳馨遠의 鄕政論은 국가의 향촌지배 정책의 강화, 기저의 생산력 발전에 기인한 자연촌의 성장이라는 향촌상황을 직시한 논리였다. 무엇보다 토지분급을 전제로 한 향촌 제도의 단위 확정과 이를 기반으로 한 貢擧制 學校制 및 軍事制度의 개혁을 강조한 사실 이 나타난다. 이같은 토지분급을 전제로 한 본격적인 향촌제도 개혁안은 井田制를 기반 으로 했던 古代 封建制의 遺意에 가장 적합한 방안이 되는 것이다. 차후 南人政權 하의 鄕政論이 17세기 당시 토지제도 신분제 개혁이 없는 상황하에서 전개된 최고 수준의 개 혁안이었다면 柳馨遠의 주장은 이보다 진일보한 變法的 改革論이었고 이는 그의 독특한 현실인식에 근거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全體制的인 柳馨遠의 개혁안은 즉시 國政에 정책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차후 18 19세기 향촌문제를 운위한 政論家들의 개혁 방향을 제시한 논거의 하나가 되었다.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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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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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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